러시아의 수도 생활

 

 

이고르 코르닐레비치 스몰리치

 

 

목차:


초록

편집자 주

서문

서론

1. 일반적인 고찰

2. 문헌 고찰

제1장. 기원

1. 동방 정교회 수도 생활의 역사에 대한 간략한 개관

2. 키예프 루스에서 최초의 수도원 등장

제2장. 키예프 루스에서의 수도 생활의 첫 전성기

1. 페체르스크 수도원과 성 테오도시우스

2. 12세기와 13세기의 수도 생활

3. 수도자의 종교·문화 활동

제3장. 성 세르기이 라도네즈키와 그의 학파

1. 북동부 루스에서 기독교 금욕주의가 번성하게 된 역사적 전제

2. 14세기와 15세기의 금욕주의 양상

3. 성 세르기이 라도네즈키와 그의 수도원

4. 세르기우스의 금욕주의 ‘학파’와 14~15세기의 다른 수도자들

제4장. 요세프 볼로츠키와 닐 소르스키. 두 금욕주의 경향 간의 논쟁

1. 성 요셉 볼로츠키 수도원장 및 그의 교회·정치적 견해

2. 스승 니일 소르스키 장로와 그의 금욕적 견해

3. ‘요셉파’와 ‘비소유파’ 간의 논쟁

제5장. 16세기 모스크바의 교회·정치 사상계

1. 모스크바 군주들의 정치적 통치 하에 러시아 영토의 통합과 러시아 교회

2. 15세기 후반과 16세기 초 모스크바의 교회·정치적 사상

3. 수도사 필로페이와 그의 메시아적 사상

4. 마카리 대주교와 16세기 러시아 성인전

5. 러시아 성인들의 공덕 찬양

제6장. 16~17세기 논쟁 저작과 법률에서 드러난 수도원의 토지 소유권 문제

1. ‘수도사 공작’ 바시안과 그의 논쟁적 저작들

2. 수도원의 토지 소유에 반대하는 다른 저작들

3. 수도원의 영지 소유권을 옹호하는 저작들

4. 16세기 수도원 토지 소유를 제한하기 위한 정부의 조치

5. 17세기 1648년 이전에 취해진 조치들

6. 1648년 법전

7. 대궁청과 수도원청

제7장. 16~17세기 수도원 식민화의 주요 방향

1. 식민지화의 국가·정치적 조건

2. 수도원 식민지화의 6대 주요 지역

3. 모스크바 중심부의 수도원 식민화

4. 북부 지역의 수도원 정착

5. 서부 지역의 수도원 정착

6. 포니조비예 지역의 수도원 정착

7. 시베리아의 수도원 개척

8. 남부 지역의 수도원 식민지화

9. 정착의 전반적인 양상

제8장. 16~17세기의 수도원 소유지와 수도원 경제

1. 수도원 영지 역사의 자료가 되는 법적 문서들

2. 오프리치나와 16세기의 농업 위기

3. 수도원 경제 운영의 구체적인 사례

4. 16세기와 17세기 포니조비예 지역에서 수도원 토지 소유의 확대: 수도원의 식민지화 활동 사례

5. 수도원 경제의 전반적인 양상

6. 수도원 토지 소유의 국가적·법적 기반

7. 수도원 농민

8. 수도원 영지와 농노제의 출현

9. “수도원 하인”과 “수도원 자식들”

10. 수도원 무역

11. 수도원 소유지의 관리와 국가에 대한 수도원의 의무

12. 수도원 소유지에 대한 관할권

제9장. 16~17세기 수도원 생활의 구조

1. 고대 루스의 수도원 규약사: 기원부터 16세기까지

2. 16세기와 17세기의 수도원 규약

3. 수도원 생활의 내부 구조

4. 수계 의식과 신입 수도자들의 영적 지도

5. 예배용 수도원 규율과 수도사들의 일상생활

6. 수도 생활의 현황

7. 영적 사안에 대한 수도원의 관할권

8. 주교단

9. 16세기와 17세기의 수도 생활

10. 수도사들의 선교 활동

11. 수도원의 사회·자선 활동

제10장. 16~17세기 수도 생활과 교회 문헌

1. 옹호적·논쟁적 저작들. 이구멘 요시프 볼로츠키

2. 장로 아르테미. 그의 금욕적·신비주의적 및 변증론적 저술

3. 지노비 오텐스키와 그의 저술

4. 대주교 다니일

5. 성자 전기 및 역사 저작

6. 수도사 예르몰라이-에라즈모의 저술

7. 17세기의 문학

제11장. 서구의 영향과 성찬식 거행 방식에 대한 신학적 논쟁

1. 17세기에 서구적 영향의 유입

2. 수도사 예프티미우스와 총대주교 요아킴: 모스크바 보수주의의 대표자들

3. 서구적 영향의 매개체로서의 시메온 폴로츠키와 실베스트르 메드베데프

4. 성찬의 변형 시기에 대한 논쟁

제12장. 분열과 수도 생활

1. 분열의 종교적·심리적 원인

2. 니콘 총대주교 이전의 서적 개정

3. 총대주교 니콘

4. 니콘 총대주교 시대의 경전 개정

5. 니콘의 조치에 대한 수도계의 반대

6. 솔로베츠키 수도원의 반란

제13장. 세속화의 시대 (1701–1764)

1. 표트르 대제와 수도계에 대한 그의 태도

2. 수도원, 수도원 소유지 및 수도자들에 대한 정부의 조치

3. 1764년의 세속화

제14장. 1764년 세속화부터 20세기 초까지의 수도 생활

1. 수도 생활의 외부적 역사

2. 수도원 생활의 내부 체제

3. 19세기 수도자 수의 증가

4. 19세기의 여성 수도원

5. 주교단과 ‘학식 있는 수도자’

제15장. 18~19세기의 스타르체스트보와 금욕주의

1. 스타르체스트의 기원과 그 본질

2. 고대 루스의 장로 제도

3. 스타레츠 파이시이 벨리치코프스키와 그의 ‘학교’

4. 수도 생활의 부흥을 목표로 한 가브리엘 페트로프 대주교의 활동

5. 사로프 은둔원과 세라핌 스승

6. 옵티나 수도원과 그곳의 장로들

7. 다른 스타르체스트보의 중심지들

8. 성 티혼 자돈스키

9. 수도 생활의 몇 가지 사례

결론

 


 

초록

『러시아 수도생활』은 저명한 교회 역사학자 I. K. 스몰리치가 집필한, 러시아 수도생활의 태동기부터 19세기까지를 아우르는 독창적이고 포괄적인 저서이다. 스몰리치는 15년 동안 러시아 교회 역사 관련 자료를 연구했다. 연구 과정에서 그는 러시아 수도원주의 역사라는 주제가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렇게 해서 그의 저서 『러시아 수도원주의』가 탄생했다. 스몰리치는 러시아 수도원주의의 역사를 러시아 국가 형성의 역사와 러시아 교회의 전반적인 역사와 밀접한 연관 속에서 조명했다. 스몰리치는 러시아 수도원주의 역사의 전환점으로 요시프파가 비재산파를 이긴 승리를 꼽는데, 이는 그의 견해에 따르면 세속화로 이어졌고, 나아가 러시아 수도원주의의 완전한 타락으로 이어졌다고 본다. 러시아 수도생활은 19세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부흥하기 시작했다. 즉, 스몰리치는 러시아 교회의 역사를 매우 비정형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 고대 루스의 후기 시대는 정교회의 쇠퇴기였으며, 시노달 시대는 부흥과 전성기였다.

 

편집자 주

본 책은 1994~1997년에 출간된 다권본 『러시아 교회의 역사』의 부록입니다. 스파소-프레오브라젠스키 발라암 스타우로피기알 수도원 출판부(1996년 11월부터는 러시아 정교회(모스크바 총대주교청) 교회·과학 센터 ‘정교회 백과사전’)에서 출간했다. 이 백과사전에는 뛰어난 러시아 교회 역사학자 이고르 코르닐레비치 스몰리치의 두 저작인 『러시아 수도생활. 988–1917』과 『장로들의 생애와 가르침』이 수록되어 있으며, 이 두 저작은 하나의 교회 역사적 현상인 러시아 수도원 생활의 다양한 측면을 다루고 있다. 수십 년에 걸쳐 러시아 교회사를 연구해 온 이. 코. 스몰리치는 러시아 정교회의 창립 시기부터 시노달 시대 말기까지의 운명을 다룬 방대한 총서를 집필하고자 했다. 그러나 18~19세기 교회사에 관한 본격적인 저작이 전무한 상황에서, 이. K. 스몰리치는 “더 이른 시기의 역사에 앞서” 시노달 시대의 교회사[1] 를 먼저 다루기로 결정했으며, 시간이 지나면 러시아에서 기독교가 정착되던 시대와 모스크바 대주교 및 총대주교 시대에 대해 다룰 수 있기를 희망했다. 러시아 정교회의 천년사에 관한 대작을 준비하려는 바로 이 목적에, 러시아 수도원주의 역사에 대한 특별 연구도 기여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연구자의 사망으로 인해 이러한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2] .

1952년에 수도원사 관련 저서를 출간하면서, I. K. 스몰리치는 이 책의 “준비적 성격”, 세부 사항에서 어느 정도 미완성된 점(주의 깊은 독자라면, 특히 연구가 서술된 시기의 끝으로 갈수록 이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러시아 수도원주의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드러난 주요 특징”에 집중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방대하지만 전혀 체계화되지 않은 역사 자료[3] 를 대상으로 15년 동안 이어온 긴 연구 작업 끝에, 저자는 루시의 수도원 생활사를 독립된 연구 주제로 분리해 내면서, 이를 러시아의 일반 역사와 러시아 교회 전반의 역사와 밀접한 연관 속에서 그 발전 과정을 추적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수도자들은 세상과 생생하고 거의 끊이지 않는 교류를 맺고 있었다. 비록 각 시대에 따라 세상이 수도 생활에 미치는 영향의 강도는 달랐지만, 수도원 생활에서 나타나는 이러저러한 부정적인 현상들은 언제나 러시아 역사의 정치적 사건들과 연관되어 있었다. 루시에서 국가와 교회 간의 상호 관계는 항상 지대한 중요성을 지녔으며, 이러한 상호 관계는 끊임없이, 어떤 식으로든 수도 생활과 수도자들의 세계관에 반영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러시아 수도원사의 시대 구분을, 세속사나 교회사 모두에서 이미 전통이 된 키예프 루스, 모스크바 루스,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대라는 구분에서 출발하지 않고, 수도원 내부의 발전 과정에서 전환점이 되는 순간들을 도출해 낸다. 따라서 모스크바 루스의 수도원 제도를 정립한 ‘루스 땅의 이구멘’인 성 세르기이 라도네즈키는 스몰리치의 저서에서 키예프-페체르스카 라브라의 창시자이자 루스 수도원주의의 기틀을 마련한 성 안토니우스와 성 테오도시우스의 직계 영적 후계자로 제시된다: “이는 수도 생활의 내적·외적 역사 모두에서 시기별로 나눌 수 없는 하나의 통합된 시대이며, 이 시대의 시작과 전성기는 하나의 전체로 융합되어 있는데, 우리는 이를 러시아 수도 생활 역사상의 제1기라고 명명했다.”

저자는 러시아 수도원 역사에서 전환점이 된 사건으로, 한편으로는 성 요셉 볼로츠키와 ‘요셉파’ 세력, 다른 한편으로는 성 닐 소르스키와 그의 추종자들인 ‘자볼즈키 장로들’ 간의 논쟁을 꼽는다. 1503년 공의회에서 승리의 결실을 맺은 ‘요시플리안’파의 수도 제도 개념은 수도원에 광대한 영지를 보유하고, 적극적인 경제 활동을 펼치며, 세상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 것을 전제로 했는데, 저자에 따르면, 3세기 동안 수도 생활의 ‘심각한 세속화’를 초래했으며, 이는 ‘수도원 생활에 특히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점은, 성 요셉 볼로츠키가 수도원 체제에 미친 영향에 대한 이처럼 극단적인 평가가 상당 부분 저자 자신의 수도 생활 목적과 과제에 대한 인식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이다. 즉, 그가 오로지 금욕적 이상에만 초점을 맞추는 태도는 수도원의 사회·계몽 활동을 의도적으로 폄하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리고 여기서 저자는 종종 스스로와 모순되는 입장을 보는데, 정직한 역사가로서 이교도 지역 개척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수도원들은 선교 활동의 주된 부담을 떠안았다. 부유한 토지 소유가 없었다면 수도원들은 이교도 민족을 계몽하고, 루스의 정교회 문화를 보존하는 등의 사명을 수행할 수 없었을 것이 분명하다.

러시아 교회사의 시노달 시기, 즉 보통 역사적 ‘공백기’로 여겨지는 시기를 두고, 역사가가 제기한 “수도 생활의 건전화를 향한 열망”에 대한 견해는 매우 비전통적으로 들린다. I. K. 스몰리치는 이러한 건전화를 ‘스타르체’ 운동과 연관 짓는데, 저자는 그 기원을 고대 러시아 수도원 제도에서 찾는다.

러시아 스타르체스트바라는 주제는 같은 저자가 역사 에세이 형식으로 집필한 별도의 저서 『스타르체들의 삶과 가르침』에서 다루고 있다. 저자는 이 운동의 가장 중요한 인물들을 통해 스타르체스트바의 내적 본질, 그 기원과 역사적 운명에 대한 상세한 분석을 펼치는데, 여기에는 성 파이지이 벨리치코프스키, 세라핌 사로프스키, 암브로시우스 옵틴스키와 같은 유명한 장로들뿐만 아니라, 러시아에서 장로 제도의 창시자이자 후원자였던 가브리엘(페트로프) 대주교와 필라레트(암피테아트로프) 대주교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다. 1936년에 집필된 『장로들의 생애와 가르침』이라는 책은, 저자가 나중에 쓴 수도 생활사에 관한 저서를 훌륭하게 보완해 준다.

안타깝게도 이 두 연구는 독일어로 번역된 버전으로만 우리에게 전해졌기 때문에, 편집부는 어쩔 수 없이 독자에게 역번역을 제공하게 되었으며, 이는 당연히 본문의 문체적 특성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또한 이 책은 제2차 세계대전 중과 직후에 집필되었음을 기억해야 하는데, 저자 스스로 인정했듯이 당시 많은 예비 기록과 참고문헌 발췌본을 분실하여 사실을 종종 기억에 의존해 재구성해야 했으며, 그의 놀라운 기억력에 대해서는 지금도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저서 『러시아 수도생활』은 블라디슬라프 치핀 신부가 다음 판본을 바탕으로 번역하였다: Russisches Mönchtum: Entstehung, Entwicklung und Wesen. 988–1917. Würzburg, 1953. 러시아 출처의 인용문은 번역가와 부분적으로 편집부에 의해 검증되었다.

『장로들의 생애와 가르침』은 야로슬라블 및 로스토프 대주교(† 1989년 3월 25일) 요한(벤들란드) 대주교가 번역한 것으로, 그는 베를린에서 주교로 재직하던 시절 이. K. 스몰리치[4] 와 친분이 있었다. 편집부는 단지 문체를 다듬고, 가능한 한 인용문을 대조해 보았을 뿐입니다. 다만, 인용된 정보의 정확성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저자에게 있습니다.

I. K. 스몰리치의 출판된 저서[5] :

• 위대한 은자 닐 소르스키 // 《길》(Путь). 1929. 19. 57–69쪽.

• 1596년 교회 연합 // 『RSHD 회보』. 1930. 5호.

• 이반 바실리예비치 키레예프스키 // 『길』. 1932. 33호.

• 복자 아우구스티누스 // 러시아 정교회 역사학회 회보. 1933. 1112.

• 1906년 공의회 전 회의 // 『길』. 1933. 38. 65–75쪽.

• 정교회를 다룬 새로운 독일 문학에서 // 『길』. 1938. 56.

• 농민 해방 100주년을 맞이하여 // 러시아 정교회 역사학회 회보. 1961. 60.

• 아폰산(정교회 생활에 참여한 지 1000주년을 맞이하여) // 『RSHD 회보』. 1963. 70–71.

• 아르히만드리트 마카리 글루하레프 – 알타이 지역의 계몽가 // 『RSHD 회보』. 1967. 85.

• 이반 바실리예비 키레예프스키: 생애와 세계관. 1806–1856. 러시아 슬라보필 운동사에 대한 고찰 // 슬라브 문화 및 역사 연감. 신판. 1933. 9. 390–427, 463–492쪽 (박사 학위 논문 일부, 전문: 브레슬라우, 1934).

• 최근 연구에서 바라본 서구주의자와 슬라보필 // ZSP. 1933. 10. 195–209쪽; 1934. 11. 439–449쪽.

• 동방 교회의 기도 // 푸트. 1935. 49; 1936–1937. 52.

• 『장로들의 삶과 가르침』. 빈, 1936. 제2판. 쾰른; 올텐, 1952; 프랑스어판: 《성스러운 러시아의 수도사들》(Moines de la Sainte Russie). 투르; 파리, 1967; 러시아어판: 《장로들의 삶과 가르침》 // 《BT》. 31. 모스크바, 1992; 제2판. 모스크바, 1997 (출간 예정).

• 러시아 수도원 제도에 관한 연구. 1: 러시아 장로 전통의 발전 과정 // 키리오스. 1937. 2. 95–112쪽; 2: 15세기와 16세기 수도원 소유권 문제에 관하여 // 키리오스. 1939–1940. 4. 29–38쪽.

• 「복음주의 가톨릭 교회(Eglise catholique évangélique)」의 러시아 총대주교좌 교회로의 귀속 // Kyrios. 1937. 2. 158–160쪽.

• 예카테리나 2세의 종교적 견해와 러시아 교회 // JGO. 1938. 3. 568–579쪽.

• 고대 러시아 수도원 생활 (11–16세기): 창시자와 인물들. 뷔르츠부르크, 1940 (동방 기독교. 11).

• 러시아 교회사의 시기 구분 문제에 관하여 // Kyrios. 1940–1941. 5. 66–81쪽.

• 러시아 신앙과 민속 종교성에서 성모 마리아 숭배 // Kyrios. 1940–1941. 5. 194–213쪽.

• 15세기와 16세기 러시아의 동방 정책사에 관하여 // JGO. 1941. 6. 55–84쪽.

• 동방 교회의 자선 활동사에 관하여, 특히 러시아 교회를 중심으로 // 교회의 디아코니아 사역. 슈투트가르트, 1952 (이반 페레스베토프라는 필명으로).

• 러시아 수도생활: 기원, 발전 및 본질. 988–1917. 뷔르츠부르크, 1953 (『동방 기독교』 신판 1011); 러시아어판: 『러시아 수도생활』. 모스크바, 1997 (출간 예정).

• 1939–1952년 동유럽 및 남동유럽 역사에 관한 독일어 문헌 목록 // 『동유럽 역사 연구』. 1954. 1. 251–316쪽 (W. Philipp 및 F. Valjavec와 공동 집필).

• 18세기부터 20세기까지 러시아 황제의 러시아 정교회에 대한 입장 // 동유럽사 연구. 1955. 2. 139–164쪽.

• 테오판 프로코포비치의 안나 이오안노브나 황후 독재 통치에 대한 감사 기도 // ZSP. 1956. 25. 212–224쪽.

• 러시아 신앙 생활에 있어 『필로칼리아』의 의의. 서문: (니코데무스 [하기오리타]) 『소필로칼리아: 동방 교회의 수도사들에 의한 기도에 관한 가르침』, 마티아스 디츠 선집 및 번역. 아인지델른; 취리히; 쾰른, 1956.

• 1939–1952년 동유럽 및 남동유럽 역사에 관한 소련-러시아 문헌 목록 // 동유럽 역사 연구. 1956. 3. 99–281쪽 (M. 베르나트와 공동 집필).

• 러시아 교회와 동방 정교회 간의 관계사에 관하여: 예루살렘의 러시아 교회 선교단 (1847–1914) // 동방 연구. 1956. 5. 33–51, 89–136쪽.

• 러시아 교회와 동방 정교회 간의 관계사에 관하여: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와의 관계에서 본 표트르 시대 러시아의 교회와 정부 (1700–1914) // 동방 연구. 1958. 7. 1–47쪽.

• 아토스 산과 러시아 // 아토스 산의 천년사, 963–1963. 연구 및 논문집. 셰베토뉴, 1963. 1. 279–318쪽.

• 『러시아 교회의 역사 1700–1917』. 라이덴, 1964. 1 (동유럽 역사 연구. 제9권). 비스바덴, 1991. 2 (동유럽 역사 연구. 제45권); 러시아어판: 『러시아 교회의 역사. 1700–1917』. 모스크바, 1996–1997. 2권.

• 1906년 공의회 준비 위원회: 1917–1918년 모스크바 전국 공의회의 전사에 관하여 // 동방의 교회. 1964. 7. 53–93쪽; 러시아어판: 스몰리치 이. K. 『러시아 교회의 역사. 1700–1917』. 모스크바, 1997. 2. 부록.

• 러시아 정교회의 교회법 // 『교리와 삶을 통한 러시아 정교회』. 제2판. 비텐-루르, 1966. 139–166쪽.

• 1917년 3월부터 10월까지 혁명 시기 러시아 교회와 1917년부터 1918년까지의 국가평의회 (러시아의 국가와 교회 관계사에 관하여) // Ostrichliche Studien. 1965. 14. 3–34쪽; 러시아어판: 스몰리치 I. K. 『러시아 교회의 역사. 1700–1917』. 모스크바, 1997. 2. 부록.

• I. S. 악사코프와 의견 및 양심의 자유 문제 // 마르가레테 볼트너의 70세 생일을 기념하여. 하이델베르크, 1967. 262–269쪽.

• I. K. 스몰리치는 또한 다음 저서에 수록된 개별 논문의 저자이기도 하다: 『역사 및 현재 속의 종교』(Die Religion in Geschichte und Gegenwart). 제3판. 튀빙겐, 1957–1965 (논문: 키예프, 로라, 솔로브키 수도원, 스타우로페기온, 트로이체-세르게이 수도원, 발람 수도원, 성수 축성); Lexikon für Theologie und Kirche. 2판. 프라이부르크 임 브라이스, 1957–1965 (논문: 알렉산더 네브스키, 러시아의 알렉산더 1세, 스타레츠).

• I. K. 스몰리치는 또한 『Kyrios』, 『ZSP』에 서평을 기고했다.

 

서문

본 저작은 러시아 교회 역사 전반과 특히 러시아 수도원 역사에 대한 15년간의 연구 결과물로, 그 기원에서 1917년까지의 러시아 수도원 생활사를 집필하기 위한 준비 자료로 기획되었다. 우리는 이 책을 단지 이 역사의 가장 중요한 순간들을 제시하고, 그 형성 과정에서 드러난 러시아 수도 생활의 주요 특징들을 규명하려는 시도로만 보고 있다. 본 연구는 거의 전적으로 이미 출판된 자료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비록 일부 장, 특히 18세기 이전 시기를 다루는 장들에서 매우 방대한 역사적 자료를 활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러시아 수도생활사』라고 명명하는 데는 주저했다. 수도원 역사 중 가장 최근 시기인 18세기와 19세기에 관한 자료, 특히 개별 수도원의 역사에 관한 자료는 대부분 아직 출판되지 않았으며, 많은 자료는 아마도 이미 소실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모든 측면이 이 책에서 동일한 정도로 상세하게 다루어지지는 않았으며, 수도원 형성의 개별 단계를 묘사하는 데 있어의 철저함은 우리가 입수할 수 있었던 자료의 양에 따라 결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전형적인 부분을 찾아내고, 가장 대표적인 역사적 인물들을 부각시키는 데 성공했기를 희망한다.

첫 네 장은 제 저서 『고대 러시아 수도원 생활』을 약간 축약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 제6, 7, 8, 13장에서는 1941년, 당시 우리에게 더 많은 자료와 문헌이 있었을 때 수도원 소유지에 관한 책 집필을 위해 작성했던 원고를 일부 축약하고 수정하여 재수록하였다. 나머지 장들은 1947~1948년에 이전에 수집하여 현재 우리 손에 있는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안타깝게도 모든 원천 자료를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며, 종종 특정 문제에 대해서는 역사 문헌만을 사용해야만 했는데, 이는 매번 해당 각주에서 명시되어 있다.

슬라브 연구소와 구 동유럽 역사 및 지역학 세미나(둘 다 베를린 소재)의 지도부께서 저에게 풍부한 소장 자료를 이용할 수 있는 기회를 아낌없이 제공해 주신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또한 개인 서재에 있는 책들을 제게 빌려주신 지인들에게도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이고르 스몰리치, 1952년 12월

 

서론

 

1. 일반적인 고찰

수도 생활은 기독교의 금욕적 가르침이 처음부터 새로 개종한 러시아인들의 영혼에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에 러시아 정교회에서 널리 퍼지게 되었다. 수도 생활이 러시아에서 매우 빠르게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된 또 다른 이유는, 수도원이 그 중심지가 되어 백성들에게 교육과 문화를 전달했기 때문이다. 순전히 교회적인 사명을 수행하는 것 외에도, 수도원들은 국가의 민족·정치적 및 문화적 삶에 관여하게 되었다. 수도 생활의 대표자들은 세상과 생생하고 거의 끊이지 않는 교류를 이어갔다. 이는 수도원 생활 방식의 내부 발전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지나가지 않았다. 비록 각 시대에 따라 세상이 수도 생활에 미치는 영향의 강도는 달랐지만, 수도원 생활에서 나타나는 이러저러한 부정적인 현상들은 언제나 러시아 역사의 정치적 사건들과 연관되어 있었다. 루시에서 국가와 교회 간의 상호 관계는 항상 지대한 중요성을 지녔으며, 이러한 관계는 끊임없이 어떤 식으로든 수도 생활과 수도자들의 세계관에 반영되어, 종종 수도 공동체의 영적 힘을 수도 생활의 이상에 부합하지 않는 운동에 휘말리게 하곤 했다.

러시아 수도 생활의 역사를 개괄하여 그 내적 특징과 외적 발전을 규명하거나, 이 역사를 개별 시기로 구분하고자 한다면 이 모든 점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수도 생활사의 전환점은 15세기와 16세기의 경계에 있었으며, 이때 수도자 사회 내부에서 수도 생활이 교회적·기독교적 금욕주의 제도로서 갖는 의미, 목적, 향후 발전에 대한 해답을 구하고, 그 발전의 토대를 마련해야 할 절실한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 문제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관점은 수십 년에 걸쳐 격렬한 논쟁과 투쟁을 불러일으켰으며, 이는 그 지도자의 이름을 따서 ‘요시플리안파’라고 불리는 세력의 승리로 이어졌다. 성 요셉 볼로츠키의 이름을 따 ‘요세프파’라고 불리는 세력의 승리로 이어졌으며, 이는 루시에서 수도원 체제와 수도 생활의 향후 정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전환이 일어난 정확한 시점을 1503년의 공의회로 지목할 수도 있으나, 논쟁과 투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은 이 공의회 이후였다.

1503년 이전의 시기는 수도 생활의 내적·외적 역사 모두에서 하나의 통합된 시대이며, 이를 여러 시기로 나눌 수 없다. 이 시대의 시작과 전성기는 하나의 전체로 융합되어 있으며, 우리는 이를 러시아 수도 생활사의 제1기라고 명명했다.

1503년 이후 수도 생활은 제2시기로 접어들며, 이 기간 동안 강한 세속화를 겪게 된다. 이는 한편으로는 요시프파의 승리로 인해 수도원들이 이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루스의 국가·정치 생활에 참여하게 되었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수도원의 부가 증대됨에 따라 수도원들이 국가의 경제 체제에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당국이 수도원 소유지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규모 확대는 수도원의 생활에 특히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세 번째이자 마지막 시기의 분기점은 18세기 초, 즉 표트르 대제의 개혁 시대이다. 이 개혁들은 수도 생활의 변화나 개선을 목표로 한 것은 아니었으나, 시노드 시대에는 수도 생활이 교회 생활에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고, 한때 매우 두드러졌던 지위를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성시노드에 구현된 교회 권력은 18세기 이전까지 존재했던 수도 생활과의 긴밀한 유대를 상실했다. 더 나아가, 시노드는 수도원 생활의 문제들에 대해 전반적으로 진지하게 다루지 않았다. 이 시기에도 수도 생활의 건전화를 위한 노력이 나타났다면, 그것은 수도계 내부에서 나온 건전한 세력, 주로 18세기와 19세기의 러시아 장로들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장로들의 영향력은 지난 두 세기 동안 수도계 발전의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보이며, 진정한 수도 생활의 부흥에 결정적인 의미를 지녔다.

본 고고에서는 의도적으로 남부 러시아 수도 생활의 역사, 즉 키예프 대교구 소속 수도원과 17세기와 18세기에 러시아 국가의 일부가 된 서부 지역 수도원들의 역사를 생략했다. 이 수도원들과 그곳의 수도자들은 별도의 연구가 필요한 그들만의 특별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18세기 말, 더 정확히 말해 19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러시아 전역의 수도원 생활 방식이 통일되기 시작했다.

아폰 산의 러시아 수도 생활 역사 또한 러시아 수도 생활의 전반적인 역사에서 특별한 장을 이루는데, 이는 그 내부적·외부적 발전이 루스 지역과는 다른 조건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 주제에 관한 자료들은 입수하기가 너무나 어려워서, 우리는 아폰 산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개요조차 포기해야만 했다.

우리는 여기서 끊임없이 자료에 근거하여 수도 생활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들을 제시하고 특징을 설명하고자 노력했으며, “역사의 첫 번째 법칙은 어떤 형태로도 거짓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며, 그 다음은 어떤 경우에도 진실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며, 편견의 그림자나 악의의 그림자도 용납하지 않는 것”이라는 점을 명심했다. (키케로. 『연설가론』 2. 15쪽)이라는 점을 명심하며, 수도원 생활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들을 제시하고 특징을 규명하고자 노력했다.

 

2. 문헌 고찰

러시아 수도원사의 역사를 연구하다 보면 처음부터 두 가지 사실이 드러난다. 첫째, 자료가 부족할 뿐만 아니라 시대별로 자료의 분포가 매우 불균형하다는 점이고, 둘째, 문서가 여러 자료집과 개별 간행물에 흩어져 있다는 점이다. 러시아 수도원사를 연구하려는 사람은 누구나 이 두 가지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특정 주제에 따라 특별히 선별된 자료 모음집이 거의 없다. 교회 역사 문헌은 비교적 방대한 분량을 자랑함에도 불구하고, 각 시대와 과정에 대한 조명은 고르지 못하다. 18세기 초 이전의 시대에 대해서는 주로 전문적인 교회 역사 문헌이 아니라, 예를 들어 국가·정치 및 경제사나 고대 러시아 문학사에 관한 저작들을 활용해야 했다.

우리가 활용한 주요 자료들을 열거해 보겠다. 첫 번째로 꼽히는 것은 ‘러시아 연대기 전집’(ПСРЛ)으로, 이 책의 편찬은 주로 수도사들의 업적이었다. 가장 중요한 국가 법령과 최고 교회 행정, 교구 행정 업무, 수도원 규율에 관한 공식 문서들은 거의 전적으로 러시아 정치사 관련 문서 모음집(ААЭ, АИ, ДАИ, АМГ, СГГД, СГКЭ 등[])에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연대기와 문서는 17세기 말까지만 자료를 제공하며, 그중 연대기는 16세기 중반까지, 문서와 기록은 14세기부터 시작된다. 모스크바 시대에 관한 다양한 자료는 ‘러시아 역사 도서관’(RIB)에 소장되어 있으며, 이곳에서는 별도의 권으로 러시아 교회사에 특화된 문서와 기타 역사적 자료가 수집되어 있다. ‘고대 러시아 비블리오피카’(DRV)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자료집(1773–1775, 제2판 증보판 1788–1791)로 알려진 자료집은 신뢰도가 다소 떨어집니다. 이곳에 수록된 모든 문서와 저작이 학술적 문서 간행 시 통상적으로 행해지는 검증과 대조를 거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자료집은 원본 필사본이 이후 소실된 문서들이 포함되어 있어 큰 가치를 지닙니다. 수도원 역사에 관한 많은 중요한 문서와 연구 결과가 『러시아 역사 및 고고학 학회 논문집』(『논문집』)에 게재되었으며, 그중에는 「혼합」 부문에 실린 것들도 포함된다. 참고서로는 K. 베스트주예프-류민의 오래된 저서 『고대부터 1825년까지의 러시아 역사에 관한 자료와 문헌』(K. Bestuzhev-Ryumin, “Источники и литература по русской истории от древности до 1825 г.”)이 유용하며, 이 책은 그의 『러시아 역사』(Митава, 1877)의 서론으로 출판되었다. 보충 자료로는 S. F. 플라토노프의 『러시아 역사 강의』에 수록된 “서론”을 추천할 수 있다. 교회사 분야에서는 N. N. 글루보코프스키의 저서 『역사적 발전과 현대적 상황을 본 러시아 역사학』(1928)이 큰 가치를 지닌다. 또한 에밀리우스 헤르만의 『De fontibus juris ecclesiastici Russorum. Commentarius historico-canonicus』(1936) ["러시아 교회법의 원천에 관하여. 역사·교법학적 해설"]은 러시아 교회법뿐만 아니라 러시아 교회의 일반 역사에 있어서도 없어서는 안 될 참고서입니다. 저자는 가장 중요한 자료집과 문서, 그리고 관련 학술 문헌 목록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특정 문서, 법전 및 기타 교회법 자료의 발생 역사에 대한 상세한 해설을 제공하고 이에 대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헤르만의 연구는 그 자체로 가장 귀중한 참고서이자 러시아 교회의 교회법 역사에 대한 간략한 강좌를 동시에 제공한다.

18세기를 다루는 자료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러시아 제국 법률 전집』(PSZ, 2 PSZ 및 3 PSZ)으로, 여기에는 러시아 정교회와 관련된 러시아 황제들의 칙령이 거의 모두 수록되어 있다. 첫 세 권에는 17세기에 관한 자료가 수록되어 있는데, 예를 들어 제1권에는 ‘1649년 법전’이 실려 있다. 표트르 대제의 ‘영적 규정’은 제6권, 제3718호에 수록되어 있다. PSZ는 1649년부터 1825년까지의 시기를 다룬다. (45권), 제2판 PSZ는 1825년부터 1881년까지의 시기(55권), 제3판 PSZ는 1881년 3월부터 1913년까지의 시기(33권)를 다룬다. ‘러시아 제국 법전’의 형태로 러시아 법이 성문화된 후에도 (15권, 1832년, 1842년 및 1857년 간행; 교회 역사에서는 특히 제1권 제1부 §40–43 및 제1113권, 제14권이 중요함)과 1906년 『법전』이 발간된 후에도 황제의 칙령은 입법적 효력을 유지했다. 또한 『정교회 신앙 담당 부처의 결정 및 지시 전집』(ПСПиР)과 『지극히 거룩하신 통치 시노드의 문서 및 사건 목록』(ОДДС)을 언급해야 한다(참조: Herman, 87쪽). 이 두 모음집은 모두 수도 생활과 수도원의 역사에 관한 방대한 자료를 담고 있다. ОДДС에는 성스러운 시노드의 결의안과 지시문에서 발췌한 상세한 내용이 자주 수록되어 있다.

19세기에 대해서는 수도 생활의 대외사(통계 자료, 일부 수도원의 설립 연도, 성스러운 시노드의 지시 등)에 관한 자료가 주로 수록된 또 하나의 방대한 문헌 모음집을 꼽을 수 있는데, 바로 「성스러운 시노드 수석 검사의 가장 충성스러운 보고서」 (보고서) 1836–1914년.

『러시아 교계사』(IRI) (6권 7책, 모스크바, 1807–1815) 에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데, 이 책은 주로 유제니(볼코비티노프, † 1837) 대주교가 집필했으나, 종종 본문의 일부만을 집필한 암브로시우스(오르나츠키, † 1827) 주교의 작품으로 오인되기도 한다. 수도원사의 관점에서 볼 때 특히 제2권과 제3–6권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 저작은 오류가 없지는 않으므로, 그 자료를 활용할 때는 이를 고려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러시아 교회의 일반 역사와 수도 생활사 모두에 관한 가장 중요한 자료집들이다. 다른 자료들과 관련 문헌에 대한 인용은 각주에 명시되어 있다.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자료에 대한 상세한 개요는 없다. 앞으로 그러한 개요를 작성할 수 있기를 희망하며, 이는 연구자들과 학생들에게 유용할 것이다.

또한 러시아 수도원사 관련 문헌에 대해 몇 가지 더 언급하고자 한다. 그 양이 비교적 많음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볼 때 전문가의 요구를 충족시키지는 못한다. 이 문헌들은 시대별로 매우 불균형하게 분포되어 있으며, 학술적 가치 면에서도 균일하지 않다. 특히 소위 ‘역사’와 수도원에 대한 ‘설명서’에 해당되는 경우인데, 이 장르의 저작만 해도 약 100편 정도가 알려져 있다.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서술은 일반 대중을 위한 경건한 읽을거리로 작성되었기 때문에, 그 안에 언급된 연대와 기타 정보는 항상 재검증해야 한다. 이는 예를 들어 볼고그 수도원들에 대한 서술에 해당한다(참조: IRI. 3). 그중 가장 권위 있는 저작들은 본 서지 목록에 수록하였다. 순수히 학술적 가치를 지닌 저작으로는 N. 니콜스키, A. 도브로클론스키, 대수도원장 도시페이(일부), A. V. 고르스키, 세레브리안스키의 저술이 있다. 특히 언급할 가치가 있는 것은 3권으로 구성된 즈베린스키의 저작으로, 이는 수도원 식민화 역사를 연구하는 역사학자에게 있어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자료이다.

수도원 소유지의 역사에 대해서는 러시아의 사회·경제사에 관한 저작들, 예를 들어 로즈코프, 고티에, 디아코노프 등의 저서뿐만 아니라, 1859년과 1861년에 출간되어 오늘날까지도 그 가치를 잃지 않은 V. 밀류틴의 저작도 활용할 수 있다. 수도원 소유지 역사에 관한 많은 자료는 ‘피츠코비’와 ‘페레피스니’ 장부에서 얻을 수 있다.

수도원의 생활사와 특정 시대의 수도사들에게 특징적인 사상에 관해서는, 교회사가들이 아닌 문학사학자들이 더 많이 다루고 있는데, 여기서는 포르피르예프(키예프 시기 관련), 페투호프, 스페란스키의 고대 러시아 문학 일반사에 관한 저술들을 의미한다. 전문 단행본들은 참고문헌과 각주에서 해당 부분에 인용되어 있다. 참고서적으로는 지금까지도 미트로폴리타 예브게니(볼호비티노프)와 대주교 필라레트(구밀레프스키)의 저서, 그리고 앞서 언급한 N. 글루보코프스키의 책이 사용되고 있으나, 후자의 경우 원전 연구서라기보다는 학술 연구에 가깝다. 수도원 식민화와 교구 경계에 관한 지도 제작 분야에서는, 비록 이러한 문제들이 매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사실상 아무런 연구도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포크로프스키의 저서에서 몇 가지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19세기, 특히 그 후반기에 대한 역사 서술은 매우 단편적이다.

참고 자료(인물 및 주제별 기사)로서 미완성된 『정교회 백과사전』(ПБЭ)은 일정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나, 그 안의 기사들은 학술적 측면에서 수준이 균일하지 않다. 또한 『러시아 인물 사전』(RBS)도 언급할 필요가 있는데, 예를 들어 18세기와 19세기를 연구할 때 풍부한 참고문헌 목록과 내용 면에서 매우 귀중하다. 이 사전은 알파벳 순서로 편찬되지 않았으며, 일부 글자(‘М’ 등)는 완전히 누락되었거나 부분적으로만 수록되어 있다. 이 서적을 인용할 때는 해당 권에 수록된 첫 번째와 마지막 이름, 그리고 해당 페이지를 명시해야 한다.

여기서 언급한 모든 내용은 단지 간략한 자료학 및 서지학적 개요에 불과하며, 이는 한편으로는 독자에게 도움을 주기 위함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특정 주제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참고문헌 및 학술 문헌 목록에는 당연히 가장 중요한 간행물들만 수록되어 있으며, 전문 문헌을 인용한 추가 정보는 각주에 기재되어 있다.

 

 

제1장. 기원

 

1. 동방 정교회 수도 생활의 역사에 대한 간략한 개관

고대 러시아의 기독교는 그리스 정교입니다. 이 기독교는 비잔티움에서 러시아로 전파되었으며, 이를 받아들인 러시아는 동방 교회의 종교·문화적 세계에 편입되었습니다. 러시아의 교회 생활은 동방 교회의 영적 문화, 특히 비잔티움 양식의 발전과 밀접한 연관 속에서 형성되었습니다.

동슬라브족의 국가 형성 과정은 6~9세기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키예프 국가의 건국으로 마무리되었다. 이 시대에 슬라브족은 북부 흑해 연안 지역, 크림, 콘스탄티노플과 경제적 유대를 유지했다. 흑해 연안 지역 전체는 이미 1세기부터 기독교 전도의 무대가 되었다. 4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크림 반도의 그리스계 주교들에 대한 최초의 역사적 기록이 있다. 그곳에서 기독교 전도는 매우 성공적으로 확산되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교구 수가 다섯 개로 늘어났다. 크림 반도의 주교들은 크림 반도, 북부 타우리아, 아조프해 북부 및 남동부 연안의 그리스계 기독교인들뿐만 아니라, 광활한 대초원 지대의 유목 부족들[6] 까지 돌보았다.

비잔틴 교회의 기독교 전도는 동슬라브인들에게까지 미쳤다. 현재 기독교가 블라디미르 대공의 개종(988/89년) 훨씬 이전에 키예프 공국으로 전파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완전히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입증되었다[7] .

신설된 교구로서 러시아 지방 교회는 모교회인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청으로부터 교리, 규율, 그리고 교칙을 받았다. 그 예배 언어는 성 슬라브어, 즉 슬라브인의 사도인 성 키릴로스와 메포디우스의 위대한 업적의 결실이었으며, 비잔티움 교회가 이미 한 세기 동안 슬라브인들 사이에서 설교하는 데 사용해 온 언어였다.

당시 수도 생활은 동방 교회의 삶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루스에 등장한 수도 생활은 백성들로부터 매우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으며, 전국으로 빠르게 확산되어 교회 업무는 물론 고대 루스 생활의 여러 다른 영역, 국가 체제 및 문화에까지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그 원인은 동방 수도 생활의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특히 우리가 지금 알고 있듯이 수도 생활이 러시아가 공식적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이기 전부터 이미 러시아에 유입되어 오랫동안 진정한 기독교적 경건의 본보기가 되어 왔다는 점에 있다.

러시아가 기독교로 개종하던 시기인 10세기 전야에, 동방 교회의 수도 생활은 이미 완성된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여기서는 그 형성 과정에 대해 매우 간략하고 개략적인 개요만을 제시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8] .

수도 생활은 그 태동기부터 특별한 금욕주의로 특징지어졌다. 고대 이집트의 수많은 은둔자들 중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별인 성 안토니우스(† 356), 성 마카리우스(† 390), 성 파코미우스(† 348)를 통해, 파코미우스는 ‘이집트 키노비아의 수장’으로 자리매김했다. 파코미우스를 중심으로 모인 수도자들은 최초의 기독교 수도원을 세웠는데, 이는 318년 또는 320년에 테베 근처 타베나에서 설립되었다. 이 수도원의 규율은 공동체 생활의 금욕주의를 위한 기초가 되었다. 수도 공동체의 정립과 발전, 그리고 그 본질과 주요 특징을 정확히 규명하는 데 있어 성 바실리오 대주교(† 379)의 공헌이 특히 컸다. 카파도키아의 수도 공동체를 위해 저술된 그의 금욕주의 저작들은 키노비아에 대한 신학적·목회적 근거를 담고 있다[9] .

키노비아의 창시자인 일라리온 가즈스키(† 371)와 카리톤 대성자(† 350)가 활동했던 팔레스타인의 수도원들은 일종의 공동 생활 수도원으로 변모하여 ‘라브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유프티미오스 대성인(† 473), 테오도시오스 키노비아르크(† 529), 그리고 특히 성 사바 († 532)는 수도원 규약인 『성 사바의 티피콘』을 집필했는데, 이 규약은 이후 동방 교회의 전례 생활에서 지극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은 팔레스타인에서 특유의 지역적 특징을 지닌 수도원 공동체의 창시자들이었다. 키릴 스키포폴스키가 이 수행자들에 대해 쓴 성자전 — 고대 기독교 문학의 보석이라 할 수 있는 이 작품 — 은 우리에게 가장 오래된 수도원의 일상생활을 알려준다. 5세기에는 시리아와 시나이 반도에서 수도 생활이 이미 번성하고 있었다. 위대한 시리아인 에프라임과 이삭, 요한 사다리수자, 시메온 기둥수자의 모습은 그곳에서 수도자들의 세속 포기[10] 가 도달한 비범한 경지를 보여준다.

4~6세기 동안 동방 수도생활은 교회 생활에서 지극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그 교회·사회적 및 국가·정치적 중요성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565)의 『코덱스』를 살펴보면 더 잘 이해할 수 있는데, 이 법전에서는 수도원에 관한 새로운 조항들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11] . 8~9세기에 들어 수도 생활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수도 생활은 정통 신앙 생활의 가장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교회의 교리를 수호하기 위해, 적어도 그들에 대항하여 반대 세력이 되거나, 나아가 교회 계층과 황제의 권력에 맞서 싸울 힘을 얻게 되었다. 교회의 운명을 좌우한 성상 숭배를 둘러싼 투쟁에서, 바로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불굴의 기개를 지닌 수도계가 정통 신앙의 깃발을 높이 들고 성상 숭배의 승리를 이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승리는 교회 내에서 수도원의 위상을 한층 더 높이고 공고히 했다. 이 영광스러운 투쟁에서 수도계는 모든 시대를 통틀어 동방 수도 생활 역사의 중심에 영원히 남을 위대한 지도자를 얻었다. 그 사람은 테오도르 스투디트(† 826)였다. 위대한 스투디트의 중요성은 성상 숭배를 위한 투쟁에서의 역할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수도 생활 조직 자체를 구축한 주요 인물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스투디우스 규칙’으로 알려진 수도원 규칙의 창시자였으나, 안타깝게도 그 원본은 교회 역사학계에서 소실되었다. 성 바실리오와 마찬가지로, 유명한 스투디오스 수도원의 원장인 그는 키노이아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그의 규율에는 수세기에 걸친 수도 생활의 경험이 반영되어 있다[12] .

성상파괴운동이 패배한 후(그 첫 번째 단계는 726년부터 780년까지, 두 번째 단계는 802년부터 842년까지 지속되었다), 수도 생활은 역사상 가장 찬란한 시기를 맞이했다. 수도원의 수가 늘어났고, 수도사들의 영향력은 너무나 강해져 동시대인들은 비잔티움을 ‘수도사들의 왕국’이라 불렀으며, 그 시대를 ‘수도 생활의 전성기’라고 칭했다[13] .

러시아 수도원주의와 그들이 교회 생활 속에서 자신만의 특별한 위치를 확보하는 데 있어, 비잔티움 수도원주의의 전성기는 지극히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성상파괴운동의 여파와 이를 극복하는 데 수도사들이 수행한 역할은, 루스 세례 시기에 여전히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따라서 우리가 러시아 경건주의의 역사를 되돌아볼 때, 고대 러시아인의 종교적 의식 속에서 성화상과 ‘천사와 동등한 지위’를 가진 수도사들이 받았던 그 위대한 숭배에 놀라지 말아야 한다. 고대 러시아 수도원주의의 형성 역사에서는 성상파괴 운동 시대의 사건들과의 연관성을 엿볼 수 있는데, 이는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이며 영적인 연관성이다.

이미 첫 번째 성상파괴 운동이 일어났을 때, 많은 정교회 신자들은 타우리아와 크림으로 피난했다. 성 스테판 노비(† 767), 성상 숭배의 열렬한 옹호자는 흑해 북부 해안, 즉 지키아 교구 방향을 수도사 난민들을 위한 안전한 피난처로 지목했다. 그의 행적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비잔티움은 마치 모든 수도자들이 포로로 끌려간 것처럼 고아가 되어 버렸다. 어떤 이들은 에우크시노스 폰투스를 따라 떠났고, 어떤 이들은 키프로스 섬으로, 또 다른 이들은 옛 로마로 갔다”[14] . 크림 산맥에 수없이 많은 동굴들은 이 난민들을 위한 최초의 수도원이었을지도 모른다. 크림 반도의 이교도들을 계몽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수그데이(수로즈) 대주교 성 스테파노(† 약 750년)의 행적에서, 당시 이곳에 성상 숭배를 옹호하는 이들이 많았다는 새로운 증거를 발견할 수 있다; 비잔티움에서 피난 온 수도사들이 남부 루스([15] )로 성화 숭배의 열성을 전해 온 것일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반도에 도착한 후 수도사들은 매우 빠르게 정착하여 그 수가 늘어났다. 이를 입증하는 것으로는 크림 반도의 필라레트 주교에게 보낸 성 테오도르 스투디토스의 서신이 있는데, 여기에는 반도에 도착한 수도사들의 설교 활동에 대해 칭찬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16] .

우리에게 중요한 또 다른 사실은, 사람들이 거주하며 수도원과 유사한 동굴들이 크림 반도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도나 강 상류(도나 강의 지류인 티하야 소스나 강 근처, 코로토야카와 오스트로고즈크 도시 인근)에서 발견된 8~9세기 고고학적 유물들은 기독교 카타콤바, 즉 동굴들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으며,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이 동굴들은 수도원의 유적에 다름 아니다[17] . 수도사들이 북동쪽으로 정착지를 확장하는 데 성공했다면, 북서쪽 방향으로도 유사한 확장이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당연하다. 특히 비잔티움에서 온 수도사들은 적극적이고 전투적인 기독교의 전파자였으며, 이 지역들은 복음 전파에 특히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는데, 동슬라브 주민들로부터 어떠한 저항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북서쪽으로 확산된 기독교 전도는 키예프에까지 이르렀다. 이미 10세기 후반, 스비아토슬라프 공(† 972) 치세에 국가와 민족이 국가·정치적 조직의 형태를 갖추게 되자, 기독교는 공작의 궁정에까지 스며들었다. 키예프 공의 어머니인 올가 공작부인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세례를 받았다(약 957년)[18] .

안타깝게도 키예프 국가에서 수도사들의 이주 활동을 설명할 만한 자료는 우리에게 없다. 이 땅에서 기독교가 시작된 초기 단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는 큰 공백이 있다. 알려진 바는 루스의 세례 이전에도 키예프에 기독교인들이 거주했으며, 그들에게 성 일리아 교회라는 자체 성당이 있었다는 점뿐이다. 이는 944~945년 키예프와 비잔티움 간의 조약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기독교인들 중에는 의심할 여지 없이 경건하고 엄격한 금욕적 삶을 살았던 수행자들이 있었을 것이다. 983년에 살해된 비슬라브계 출신인 키예프의 첫 순교자들인 바리야그인들이 떠오른다. 그러나 수도원 건물이나 그와 유사한 것을 암시하는 외적인 흔적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19] .

지금까지 언급한 모든 내용은 러시아 수도 생활의 전사에 해당하며, 이를 엄밀한 연결 고리를 통해 역사 그 자체와 명확히 연결 짓기는 어렵다.

 

2. 키예프 루스에서 최초의 수도원 등장

가장 오래된 러시아 사료에서 루시의 수도사와 수도원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블라디미르 대공의 세례 이후 시대로만 거슬러 올라가며, 이들의 출현은 야로슬라프 대공(1019–1054)의 통치 시기로 추정된다. 그의 동시대인인 일라리온(1051년부터 키예프 대주교)은 블라디미르 공의 추모를 위해 쓴 유명한 찬사문인 1037년과 1043년 사이에 키예프 대공의 궁정 사제로 재직하던 시절[20] 에 낭독한 유명한 찬사문인 『법과 은총에 관한 말씀』에서, 이미 블라디미르 시대에 키예프에 “산 위에 수도원이 세워졌고, 수도사들이 나타났다”[21] 고 말했다. 이러한 모순은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일라리온이 언급한 수도원들이 엄밀한 의미의 수도원이 아니라, 단순히 기독교인들이 교회 근처의 개별 오두막에서 엄격한 금욕 생활을 하며 예배를 위해 모였을 뿐, 아직 수도원 규율을 갖추지 않았고 수도 서원을 하지 않았으며 정식 수계도 받지 않았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22] , 또는, 또 다른 가능성은, 매우 강한 친그리스 성향을 띤 ‘1039년 연감’을 포함하고 있는 연대기의 편찬자들이, 키예프 루스에 대주교 테오펨프토스 (1037)이 도착하기 전까지 키예프 루스에서 기독교가 확산된 성과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다[23] .

같은 1037년에 고대 러시아 연대기 저자는 엄숙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에 기독교 신앙이 번성하고 확산되기 시작하였으며, 수도사들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수도원들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야로슬라프는 교회 규율을 사랑하였고, 사제들을 지극히 아끼며, 수도사들을 풍성하게 했다」[24] . 이어 연대기 저자는 야로슬라프가 성 게오르기(게오르기예프스키) 수도원과 성 이리나(이리닌스키 여성 수도원)라는 두 수도원을 설립했다고 전하는데, 이는 키예프 최초의 정식 수도원이었다. 그러나 이 수도원들은 소위 ‘기증자 수도원’, 또는 더 정확히 말해 ‘공작 수도원’이었는데, 그 기증자가 공작이었기 때문이다. 비잔티움에서는 이러한 수도원들이 흔한 현상이었으나, 주류를 이루지는 않았다[25] . 이 수도원들의 후기 역사를 보면, 고대 러시아 공작들이 수도원에 대한 후원자적 권리를 행사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새로운 원장 임명 시에 이러한 점이 두드러졌는데, 즉 비잔티움에서 특징적이었던 후원자와 그가 설립한 수도원 간의 관계가 정확히 재현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수도원들은 대개 기증자의 수호성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며(야로슬라프의 세례명은 게오르기였고, 이리나는 그의 아내의 수호성인의 이름이었다); 이 수도원들은 이후 가문 수도원이 되어, 기부자들로부터 금전 및 기타 기증을 받았으며, 가문의 묘소로 기능했다. 몽골 침입 이전 시대, 즉 13세기 중반 이전에 설립된 거의 모든 수도원은 바로 공작 가문, 즉 기부자 소유의 수도원이었다.

유명한 키예프의 동굴 수도원인 페체르스키 수도원은 완전히 다른 기원을 가지고 있었다. 이 수도원은 평민 출신 개인들의 순수한 금욕적 열망에서 비롯되었으며, 기부자들의 귀족적 신분이나 수도원 자체의 부가 아니라, 수도원 거주자들의 금욕적 업적을 통해 동시대인들에게 얻은 사랑으로 명성을 얻었는데, 그들의 온 생애는 연대기 저자가 기록한 대로 “절제와 큰 고행,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드리는 기도” 속에서 흘러갔습니다.

페체르스키 수도원은 매우 빠르게 전국적인 중요성을 얻었고, 후대에도 민중의 영적·종교적 삶에 대한 그 중요성과 영향력을 유지했으나, 그 설립 역사에는 여전히 불분명한 점이 많다. 다양한 학술적 연구를 바탕으로 이 역사를 다음과 같이 재구성할 수 있다[26] .

동굴 수도원의 설립에 대해 연대기 저자는 1051년 항목에서, 베레스토베(키예프 남서쪽에 위치한, 야로슬라프의 영지에 속했던 마을)에 있는 교회의 사제를 대주교좌에 추대했다는 이야기와 관련하여 서술하고 있다. 그의 이름은 일라리온이었으며,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선한 사람으로, 학식이 풍부하고 금식하는 이”였다. 공작이 보통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던 베레스토바의 생활은 공작의 친위대가 함께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소란스럽고 시끌벅적했다. 따라서 영적 수행을 갈망하던 사제는 세상의 소란에서 벗어나 기도할 수 있는 한적한 장소를 찾아야만 했다. 키예프 남쪽, 드네프르 강 오른쪽 강변의 숲이 우거진 언덕에서 그는 작은 동굴을 파냈고, 그곳이 바로 그의 금욕적인 기도의 장소가 되었다. 야로슬라프는 이 경건한 장로를 당시 공석이었던 대주교좌에 임명하고, 주교들에게 그를 성직 서품하도록 명했다. 그는 러시아 출신의 첫 번째 대주교였다[27] . 일라리온의 새로운 사명은 그의 모든 시간을 빼앗아 갔고, 이제 그는 가끔씩만 자신의 동굴에 들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일라리온에게 제자가 나타났다.

그는 안토니라는 이름으로 페체르스크 수도원의 창시자로 알려진 은둔자였다.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여전히 불분명한 점이 많으며, 그에 대한 기록은 단편적이다. 11세기 70년대나 80년대에 쓰인 그의 행적 기록 (1088년 이전), A. A. 샤흐마토프가 밝힌 바와 같이 13세기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으나, 3세기 후에는 소실되고 말았다[28] . 체르니히프 인근 류베차 출신인 이 안토니는 수행에 대한 강한 열망을 품고 있었으며, 그는 키예프로 와서 일라리온의 동굴에서 잠시 머문 뒤 남쪽으로 향했다. 그의 행적 기록에 나와 있듯이 아토스 산에 있었는지, 아니면 M. 프리셀코프가 주장하듯이 불가리아에 있었는지(후자가 우리에게는 더 그럴듯해 보인다)는 완전히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이 문제는 페체르스크 수도원의 역사에서 부차적인 의미만을 지닐 뿐이다. 왜냐하면 수도원의 영적·종교적 창시자이자 수도사들의 금욕적 지도자로서 전면에 서 있는 인물은 안토니가 아니라 성 테오도시우스 수도원장인 때문이다. 안토니는 자신의 삶으로 빛나는 모범을 보이지만, 지도자나 교사로의 소명은 없는 수행자들 중 한 명이다. 성 테오도시우스의 행적과 페체르스키 파테리크에서 알 수 있듯이, 안토니는 뒤에서 조용히 지내는 것을 선호했으며 새로운 수도원의 운영은 다른 수도사들에게 맡겼다. 오직 키예프에서 일어난 매우 복잡한 교회·정치적 사건들과 관련하여 집필된 안토니우스의 행적만이 수도원 설립에 대한 성산의 축복을 우리에게 전해 주는데, 이는 아마도 러시아 사회의 금욕적 열망에서 성장한 페체르스크 수도원 에 ‘비잔틴’ 기독교의 인장을 부여하고, 성 아폰 산과 연결지으며 그 설립을 비잔틴의 주도로 제시하려는 의도였을지도 모릅니다. 전기에 따르면, 안토니는 귀환 후 키예프 수도원(이는 성 게오르기 수도원일 수밖에 없다)의 생활 방식에 만족하지 못해 다시 은둔의 길로 들어섰는데, 바로 일라리온의 동굴[29] 로 향했다. 안토니우스의 경건함은 신자들로부터 지대한 존경을 받았으며, 야로슬라프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이지슬라프 공작조차 그에게 축복을 받으러 찾아올 정도였다.

안토니는 오랫동안 홀로 지내지 않았다. 이미 1054년과 1058년 사이에 한 사제가 그에게 찾아왔는데, 그는 페체르스크 파테리크에서 ‘위대한 니콘’(또는 ‘니콘 대성자’)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이 니콘이 과연 누구였는지에 대한 질문은 흥미롭고 중요하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M. 프리셀코프의 견해에 동의하는데, 위대한 니콘은 다름 아닌 1054년 또는 1055년에 콘스탄티노플의 요구로 주교좌에서 물러나 그리스인 에프레мом 대체된 대주교 일라리온이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일라리온은 당연히 사제 직분을 유지했으며, 대스키마를 입은 사제로 등장한다. 스키마를 받을 때 그는 관례에 따라 일라리온이라는 이름을 니콘으로 바꾸었다. 이제 성장해 가는 수도원에서 그의 활동은 특별한 규모를 띠게 된다. 사제로서 그는 안토니우스의 뜻에 따라 수련자들을 출가시켰으며, 나중에 보게 되겠지만, 그는 자신의 수도원이 추구하는 전국적 봉사의 이념을 구현해 냈다. 그 후 그는 페체르스크 수도원을 떠났다가 잠시 자리를 비운 뒤 다시 돌아와 원장직을 맡았고, 길고도 사건으로 가득 찬 삶을 살다 세상을 떠났다. 니콘은 11세기 민족·문화적 사건들의 정중앙에 서 있는데, 이는 모든 사건이 어떤 식으로든 페체르스크 수도원과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리스의 교회 계층 구조뿐만 아니라 키예프 공작들이 교회 생활에 개입하는 것에도 반대했던, 고대 러시아의 민족적 성향을 지닌 수도원 공동체를 대표했다[30] .

위대한 니콘의 이름과 페체르스크 수도원의 민족·문화적 전성기가 연관되어 있다면, 성 테오도시우스의 인격에서는 이미 진정한 영적 스승이자 러시아 수도 생활의 시조로 볼 수 있다. 테오도시우스의 역할은 안토니우스의 역사적 역할과는 비교할 수 없다. 11세기 80년대에 페체르스크 수도원의 수도사 네스토르가, 바로 그곳에서 위대한 니콘이 수도 생활을 하던 시기에 쓴 그의 행적 기록은, 기독교적 경건의 이상을 삶으로 구현한 금욕자로서의 테오도시우스를 우리에게 그려 보여준다. 네스토르는 동방 교회의 수많은 성인전 저작들을 잘 알고 있었으며, 이는 테오도시우스에 대한 그의 서술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수 있으나, 전기의 페이지에서 드러나는 테오도시우스의 모습은 너무나 온전하고 생생하며, 소박하고 자연스러워서 네스토르의 서술을 단순히 성자전적 모범을 모방한 것으로만 볼 수는 없다. 테오도시우스는 1058년 또는 그보다 조금 더 이른 시기에 안토니우스에게 찾아왔다. 엄격한 영적 수행 덕분에 테오도시우스는 수도원 형제들 사이에서 두드러진 위치를 차지했다. 불과 4년 만에 그가 원장(1062)으로 선출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 기간 동안 수도사들의 수가 크게 늘어, 안토니우스와 바르라암(이 수도원의 초대 원장)은 동굴을 확장하기로 결정했다. 수도사들의 수는 계속 증가했고, 안토니우스는 키예프의 공작 이지슬라프에게 교회 건축을 위해 동굴 위의 땅을 수도원에 하사해 달라고 요청했다. 수도사들은 요청한 대로 땅을 받고, 목조 교회와 수도실을 지은 뒤 건물 주위에 나무 울타리를 둘러쌌다. 테오도시우스의 행적 기록에서는 이러한 사건들이 1062년에 일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 기록을 집필한 네스토르는 지상 수도원 건물의 건축을 테오도시우스의 원장 재임 시작과 연결 짓고 있다. 더 정확한 견해는 테오도시우스의 원장 재임 시기에 이 건축 공사의 완공만이 해당된다고 보는 것이다[31] . 테오도시우스가 원장으로 재임한 초기 기간 동안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스투디온 수도원의 공동체 규율을 도입한 것이었다. 테오도시우스의 행적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수도사들이 수도 서원을 가장 엄격하게 이행하도록 노력했다. 테오도시우스의 업적은 키예프-페체르스키 수도원의 영적 토대를 마련했으며, 이 수도원을 2세기 동안 모범적인 고대 러시아 수도원으로 만들었다[32] .

페체르스키 수도원이 전성기를 맞이하는 동시에 키예프와 다른 도시들에도 새로운 수도원들이 생겨났다. 『파테리크』에 수록된, 페체르스카 수도원 수도사들의 지도자인 안토니우스와 니콘, 그리고 이지슬라프 공작 간의 불화 이야기(공작의 친위대원이었던 바르라암과 예프레ムの 수도자 서원 문제로 인한 것)를 통해, 우리는 키예프에 이미 그 당시 성 미나 수도원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수도원이 어떻게, 언제 설립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어쩌면 키예프에 그런 수도원이 아예 없었을 수도 있고, 단순히 비잔틴이나 불가리아의 성 미나 수도원에서 온 불가리아인 수도사가 그곳에 살았을 뿐일 수도 있다. 그는 니콘과 함께 키예프를 떠난 인물이다[33] . 니콘은 공작의 분노를 피하기 위해 도시를 떠나 남동쪽으로 향했다. 그는 아조프해 연안에 도착하여, 야로슬라프 공의 손자인 글레브 로스티슬라비치 공이 통치하던(1064년까지) 트무타라카니라는 도시에 머물렀다. 비잔틴인들에게 타마타르하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트무타라카니에서, 니콘은 1061년과 1067년 사이에 성모 마리아를 기리는 수도원을 설립하고 1068년까지 그곳에 머물렀다가, 키예프의 페체르스키 수도원으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그는 1077/78년부터 1088년까지 이미 원장으로서 수도 생활을 이어갔다[34] .

디미트리예프스키 수도원은 1061/62년 키예프의 공작 이지슬라프에 의해 설립되었다. 이지슬라프는 수도원 운영을 위해 페체르스키 수도원의 원장을 초빙했다. 키예프를 둘러싼 투쟁에서 이지슬라프의 경쟁자였던 공작 브세볼로드 역시 미하일롭스키 비두비츠키 수도원을 설립했으며, 1070년에는 그곳에 석조 교회를 지으라고 명령했다. 2년 후 키예프에는 두 개의 수도원이 더 생겨났다. 스파스키 베레스토프스키 수도원은 아마도 훗날 노브고로드 주교(1078–1096)가 된 게르만에 의해 설립된 것으로 보이며, 문헌에서는 이 수도원을 종종 ‘게르마니치’라고 부른다. 또 다른 클로프스키 블라헤르ンス키 수도원은 ‘스테파니치’라고도 불렸으며, 페체르스키 수도원의 원장(1074–1077/78)이자 블라디미르-볼린스키 주교(1090–1094)였던 스테판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키예프가 타타르족에 의해 파괴될 때까지 존속했다[35] .

이처럼 이 수십 년간은 수도원 건축이 활발히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11세기부터 13세기 중반까지 많은 다른 수도원들도 생겨났다. 골루빈스키는 키예프 한 곳에만 최대 17개의 수도원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36] .

11세기에는 키예프 외곽에도 수도원이 건립되었다. 앞서 트무타라카니에 있는 수도원에 대해 이미 언급한 바 있다. 페레야슬라블(1072–1074), 체르니히우(1074), 수즈달(1096)[37] 에도 수도원이 등장했다. 특히 노브고로드에는 수도원이 많이 건립되었는데, 12~13세기에는 이곳에도 최대 17개의 수도원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곳은 안토니예프 수도원(1117)과 성 바르라암 후틴스키가 설립한 후틴스키 수도원(1192)이었다. 일반적으로 이 수도원들은 공작 소유이거나 기부자가 후원하는 수도원이었다. 각 공작은 자신의 수도에 수도원을 갖기를 원했기 때문에, 모든 공국 수도에는 남녀 수도원이 건립되었다. 그중 일부의 후원자는 주교들이었다. 13세기 중반까지 루시 전역의 도시나 그 주변 지역에는 총 70개에 달하는 수도원이 있었다[38] .

지리적으로 수도원들은 고대 루스의 주요 무역로와 수로에 위치해 있었으며, 드네프르 강을 따라 있는 도시들, 키예프와 그 주변, 노브고로드와 스몰렌스크에 자리 잡고 있었다. 12세기 중반부터는 로스토프-수즈달 지방, 즉 블라디미르-나-클랴즈마와 수즈달에 수도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세기 후반 무렵에는 자볼지야 지역의 수도원 정착이 시작되었는데, 이곳에서는 주로 작은 스키트와 작은 은둔처가 지어졌다. 이 정착은 로스토보-수즈달 지방에서 온 이주민들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이들은 점차 볼로그다 방향으로 진출해 갔다. 볼로그다 시 자체는 성 게라심(† 1178)이 성 삼위일체를 기리기 위해 설립한 수도원 근처에 형성된 정착지였다. 이후 수도원 정착 활동은 북동쪽, 유그 강이 수호나 강으로 합류하는 지점[39] 을 향해 진행되었다.

볼가 강 북쪽, 이른바 ‘자볼지예’ 지역으로 향한 수도원 정착의 첫걸음은 이후 13세기 후반과 14세기에 이르러 거대한 운동으로 발전하여, 볼가 강에서 백해(포모르)와 우랄 산맥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스키타와 은둔처를 곳곳에 세웠다.

 

 

제2장. 키예프 루스에서의 수도 생활의 첫 전성기

 

1. 페체르스크 수도원과 성 테오도시우스

성 테오도시우스는 이미 동시대인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았는데, 그는 참으로 “루시의 공동생활의 시조”였기 때문이다. 그의 행적과 페체르스크 수도원의 『파테리크』는 이 뛰어난 인물의 활동과 제자들에게 미친 영향을 알려주는 주요 자료들이다. 이 『파테릭』은 11~12세기 고대 러시아 수도원 생활, 특히 그 당시 수도원의 내적 삶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를 돕는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내용 면에서 페체르스크 파테릭은 수도원이 설립된 시점부터 12세기 말 또는 13세기 초까지 페체르스크 수도원과 그 수도자들의 위업을 기록한 성자전이다. 성 테오도시우스의 전기는 더욱 중요하다. 이 전기의 저자는 네스토르라는 이름의 페체르스크 수도원 수도사였으며, 그는 11세기 80년대 후반, 대 니콘이 수도원 원장직을 맡고 있을 때 이 전기를 집필했는데, 즉 성 이구멘이 서거한 지 약 15년 후였으므로, 생전에 그를 알았던 수도사들 중 많은 이들이 아직 살아 있었다. 바로 이 때문에 이 전기에는 전설적인 요소가 전혀 없다. 네스토르의 저작은 비잔틴 성인전 문학의 일부 양식에서 영향을 받은 흔적이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사실적으로 쓰여졌으며 저자의 개성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당시 테오도시우스의 모습은 작가에게 여전히 생생하고 거의 현존하는 인물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네스토르가 비잔틴 성인전을 참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무엇보다도 성 사바 수도원장 전기를 참고했음에도, 이 모습은 비잔틴 성인들의 전형적인 성자전적 특징을 띠지 않고, 오히려 초기 기독교 수도사 이상과는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러시아 수행자의 특유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테오도시우스에게서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자신의 영혼을 연마하고, 모든 외적인 것에서 벗어나 세속적인 삶을 천상의 삶으로 바꾸려는 열정적인 열망뿐만 아니라, 세상에 영향을 미치려는 그의 열망이기도 하다. 이러한 전형적인 민족적 특성은 성 바르라암 후틴스키(† 1192)와 성 아브라아미 스몰렌스키(† 1220)의 전기에서도 드러난다.

수도원과 외부 세계 간의 종교적·사회적, 문화적 유대 관계 덕분에 L. K. 게츠가 페체르스키 수도원을 “몽골 침략 이전 루스의 문화적 중심지”라고 칭하게 했으며, 그에게 수도원이 “세상 밖의 종교적 삶과 금욕만을 알고, 수도사의 자신의 영혼 구원을 주된 사명으로 삼았던 초기 수도 생활의 이상”에서 벗어났다고 말할 근거를 제공했다[40] . 그러나 이 주장을 당시의 모든 수도 생활에 일반화할 수는 없다. 페체르스키 파테리크에는 두 가지 서로 다른 금욕적 이상이 공존한다. 성 테오도시우스나 성 니콜라이 스비아토시 옆에서 우리는 가장 정교한 금욕과 세속적 염려로부터의 완전한 단절에 몰두했던 수행자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으며; 그들은 요한 모스코스(† 620)의 『명언집』과 『리모나리』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우리 기억 속에 떠올리게 한다.

두 가지 유형의 수행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당시 수도 생활이 형성기를 겪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정교한 금욕적 수행에 몰두하지 않았던 수행자들은, 『파테리크』의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종종 경건함의 길에서 비틀거리며 미혹에 빠지곤 했으나, 바로 성 테오도시우스가 러시아 고유의 은수 전통의 수장이자 지도자가 되었으며, 후대에 이르러서는 고대 러시아 수도사의 모습에서 그의 경건함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테오도시우스는 안토니우스의 동굴에 들어왔을 때 아직 청년이었지만, 수도 생활에 대한 그의 성향을 반기지 않던 어머니로부터 수도자 서원을 받을 수 있도록 허락을 얻기 위해 이미 긴 투쟁을 견뎌내야 했다. 안토니우스는 세속을 떠난 이 도피자를 받아들였고(약 1058년), 젊은 수련자는 한 겸손과 인내, 그리고 영적인 태도로 곧 이 은둔자 장로의 사랑을 얻었으며, 장로는 대 니콘에게 그를 출가시키라고 지시했다. 젊은 수도사는 곧 수도원 형제들의 사랑도 얻게 되었고; 대공의 뜻에 따라 이구멘 바르라암이 새로 설립된 성 디미트리 수도원의 원장으로 전임된 후, 테오도시우스는 수도원에 머문 지 5년 만에 이구멘으로 선출되었고, 안토니우스의 축복을 받아 이 무거운 직무를 맡게 되었다.

테오도시우스가 수도원장으로 취임하기 전까지 페체르스키 수도원이 어떤 규율을 따랐는지는 불분명하다. 페체르스키 수도원이 그 이전에 설립된 다른 키예프 수도원들과 마찬가지로, 설립 초기에는 ‘대성당의 규약’, 즉 성 소피아 대성당과 다른 콘스탄티노플 교회들의 예배 규약[41] 을 바탕으로 생활을 영위했다는 점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많다. 그러나 이 티피콘은 예배 규칙만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수도원 생활을 조직하는 데는 별로 적합하지 않았다. 아마도 새로운 원장(나스티니)은 성 테오도르 스투디토스의 수도원 규약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 규약에 대한 최초의, 아마도 불완전하고 완전히 만족스럽지는 않은 정보는 테오도시우스가 키예프 대주교 게오르기우스의 측근인 그리스인 수도사 미하일로부터 얻었을 것이다. 테오도시우스는 그를 통해 콘스탄티노플의 한 수도원에 규약의 완전한 사본이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의 행적에 따르면, 성 테오도시우스는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수도사 에프레모스(그는 한때 페체르스크 수도원에서 수계를 받았으나, 지금은 그리스의 한 수도원에서 피신 중이었다)에게 스투디트 규칙 사본을 받아오도록 한 수도사를 보냈다. 그러나 테오도시우스는 성 테오도르가 직접 필사한, 그의 수도원에서 생활의 지침으로 삼았던 그 사본이 아니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알렉시오스(1025–1043)가 후대에 편집한 사본을 받게 되었다. 정확하고 완전한 스투디우스 수도원 규율 목록은 현존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 위대한 스투디우스 수도사가 세상을 떠난 직후 스투디우스 수도원에서 작성된 그 규율의 요약본뿐이다. 이 규율은 알렉시오 총대주교의 개정본의 기초가 되었으나, 그의 개정본은 수도원 생활의 모든 상황을 규정하는 상세한 수도원 규율이 아니다. 여기에는 알렉시오 자신이 제시한 몇 가지 예배 지침과, 금식 및 수도 생활 전반에 관한 가장 일반적인 규칙들만 포함되어 있다[42] .

그러나 테오도시우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규칙의 근간인 엄격한 공동생활 원칙을 준수하는 것이었으며, 그는 수장 재임 기간 내내 이를 실천에 옮겼다. 그는 스스로 끊임없이 수련하며 — “in manibus opus, in ore psalmus”(손에는 일, 입에는 찬송) — 자신의 보살핌을 맡은 수도자들에게도 똑같이 요구했다. 단순하면서도 그 단순함 속에서 깊은 감동을 주는 네스토르의 생생한 이야기는 우리에게 테오도시우스의 다방면에 걸친 목회적 은사와 공동 생활 원칙을 철저히 준수하려는 그의 열렬한 열망을 보여준다. 그는 시리아의 수도자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정교하거나 지나치게 가혹한 금욕을 장려하지 않았는데, 그러한 금욕이 수도원 공동체의 공통된 토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 루스에서 수도 생활이 첫걸음을 내딛고 있었으며, 시간이 지나 진정한 기독교 경건의 본보기가 되고 세상의 이상이 되기 위해 아직 길고 험난한 길을 걸어야 했던 시기에는 더욱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물론 이것이 성 테오도시우스가 고행의 최고 단계를 거부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는 오직 그 단계들만이 영적 체험과 영적 지도력을 부여하며, 수도원장에게 있어 형제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위해 필요한 힘의 유일한 원천이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자신도 부지런히 수행에 매진했으나, 겸손함으로 인해 자신의 위업이 형제들, 나아가 동시대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오직 젊은 시절에만 그는 쇠사슬을 차고 있었다. 기도, 겸손, 금식이 그의 삶을 채우고 있다. 그는 수도원장으로서의 직분을 지극한 겸손으로 수행하며, 그의 초라한 옷차림은 수도원 형제들과 이 세상의 권력자들에게 가난이 그리스도인을 아름답게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항상 금식 중이며, 마른 빵과 드물게 기름 없이 먹는 채소가 그의 전부이지만, 그의 얼굴은 언제나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밤에 자신의 금욕적 수행을 실천한다; 하루 종일 일을 하는 데 전념한다; 그는 수도자들을 돌보지만, 지나친 엄격함 없이 그들을 이끈다; 말보다는 자신의 모범으로 그들을 가르치며, 비유를 통해 훈계한다; 잘못을 저지른 자들에게는 사랑과 온화한 엄격함으로 훈계한다. 성 테오도시우스의 기적들—그의 예언의 은사—는 그의 전기에 그의 금욕적 미덕의 결과로 묘사되어 있다. 이 기적들은 대부분 수도사들과 수도원 담장 너머의 세상과의 관계와 관련이 있었는데, 이는 한편으로는 수도원 생활에 있어 평신도들의 자선이 갖는 중요성을 강조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평신도들이 수도 생활의 기독교적 미덕에 대한 존경심을 굳건히 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이 전기는 성 테오도시우스가 이웃을 섬긴 여러 사례를 보여주므로, 그를 세상을 향한 사회-기독교적 봉사의 선구자로 볼 수 있다. 수도사 네스토르는 그를 과부, 고아, 가난한 이들의 수호자로 칭한다. 그의 위업은 우리에게 팔레스타인의 수도 생활을 상기시켜 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테오도시우스의 영향력은 키예프 공작 궁정에까지 미쳤으며, 그곳에서 그는 통찰력 있는 조언 덕분에 큰 존경을 받았다. 이는 공작 스비아토슬라프와의 논쟁에서 분명히 드러났는데, 그는 이 논쟁에서 승리했다. 제멋대로였던 공작은 미래의 성인이 될 인물의 영적 권위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테오도시우스는 수도원 형제들 사이에서도 설교했으며, 그의 가르침은 수도 생활의 기본 원칙을 다루었지만, 특정 금욕적 수행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은 포함하지 않았다[43] .

테오도시우스가 수도원의 일상생활에서 겪는 다양한 상황에 대해 내린 견해는, 그가 남긴 수도사들을 위한 다섯 편의 교훈에 담겨 있으며, 이 글들이 성인의 저작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44] . 테오도시우스는 목회적 교육 체계의 기초로 완성을 향한 열렬한 열망을 삼았다. 그는 당대 수도 생활의 주된 목적을 겸손과 인내, 기도와 형제들에 대한 사랑에서 찾았다. 그러나 그는 수도자들에게 지나치게 힘든 외적인 금욕적 수행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성 이구멘에게는 첫 세대 수도사들에게 단번에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할 수 없다는 점이 분명했다. 이러한 가르침들은 기독교적 금욕주의 세계관이 얼마나 느리고 점진적으로 정착되었는지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요구 사항을 지나치게 강화하는 것이 수도원 생활에 해를 끼칠 뿐이라는 사실도 증명한다. 고대 러시아 수도 생활의 발전에 있어, 테오도시우스의 금욕적 요구가 실질적인 목회적 과제와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었다는 점은 지극히 중요했다. 왜냐하면 오직 그렇게 해야만 수도원 공동체가 일정한 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테오도시우스 시대의 페체르스크 수도원 수도사들은 하루를 기도와 수공예로 보냈다. 테오도시우스의 행적에서 알 수 있듯이, 수도원에서는 매일 아침 기도, 시간 기도, 그리고 성찬식이 거행되었다. 예배 사이의 틈새 시간에는 수도사들이 수공예에 전념했다. 그들은 짚신과 모자를 엮어 나중에 마을에서 팔았고, 그 수익금으로 수도원을 위한 곡식을 구입했다. 이 곡식은 수도사들이 직접 빻아 빵을 구웠다. 봄과 여름에는 수도원 형제들이 수도원 텃밭에서 일했다. 식사는 소박하고 검소했다. 평일에는 주로 빵과 물로 식사를 해결했고, 규율에 따라 금식을 풀 수 있는 토요일과 일요일에만 수도사들을 위해 죽이나 오트밀 수프가 끓여졌다. 하지만 종종 수도사들에게는 죽도, 심지어 빵조차 없었습니다. 모두 함께 식당에서 식사를 했으며, 테오도시우스는 마른 빵을 제외하고는 어떤 음식도 자신의 방으로 가져가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습니다. 특히 사순절과 성주간[45] 에는 더욱 엄격하게 금식했습니다.

테오도시우스 공동체의 정신은 『페체르스키 파테리크』에 수록된 니콜라 스비아토샤의 이야기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니콜라 스비아토샤는 대공 야로슬라프의 증손자인 체르니히우의 공작 스비아토슬라프 다비도비치이다. 1106년에 그는 페체르스키 수도원의 수도사 대열에 합류했다. 『파테릭』은 그의 금욕적인 생애를 특히 엄숙한 어조로 전하고 있다. 겸손으로 가득 찬 니콜라 스비아토샤는 평범한 수련자가 수행하는 수도원 일을 꺼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3년 동안 부엌에서 일하며 예배를 드리기 위해 성당으로 나갈 때만 그곳을 떠났고, 그 후 3년 동안은 수도원 문지기로 일했으며, 그 다음에는 식당에서 다른 수도사들을 섬겼다. 오랜 세월의 노동을 통한 순종을 마친 후에야 비로소 그는 수도원장의 축복을 받아 자신만의 작은 방을 지었다. 동시대인들은 스비아토샤가 그 방에서 결코 빈둥거리지 않았다고 전한다. 그의 손에는 항상 무언가 할 일이 있었고, 그는 특히 거친 실로 직접 수도사 예복을 짰다. 예수 기도(“주 예수 그리스도여,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죄인인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는 그의 입에서 떠나지 않았는데, 러시아 성인전에서는 니콜라이 스비아토샤가 끊임없는 예수 기도의 첫 실천자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36년 동안 수도원에서 수행하며 114243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형인 이지슬라프 다비도비치 공은 니콜라 스비아토시의 겉옷을 몸에 두르자 심각한 병에서 치유되었다. 페체르스키 수도원에 입회할 때 니콜라는 자신의 모든 공작 재산을 거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46] .

성 테오도시우스의 행적은 수도원과 키예프에서 그에게 얼마나 큰 존경이 쏟아졌는지를 보여주는 수많은 사례를 우리에게 전해준다. 기독교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에서 그는 위대함과 보잘것없음,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를 가리지 않았다. 그러한 상황에서 사회적 정의와 사람들의 내적 단결을 지향하는 정신은 사회의 기독교화에 기여했다. 특히, 정의를 짓밟고 자신의 형인 대공 이지슬라프를 키예프에서 추방한 스비아토슬라프와의 힘들고 긴 갈등 속에서 드러난 수도원장(이구멘)의 기독교적 불굴의 의지는 사회에 매우 설득력 있게 작용했을 것이다. 페체르스키 수도원과 그 수도사들은 제멋대로인 대공의 미움을 받게 되었고, 대니콘은 두 번째로 수도원을 떠나 몇 년 동안 자신이 이전에 설립한 수도원인 트무타라칸으로 떠났다. 오직 테오도시만 두려움을 보이지 않고 대공에게 그의 잘못을 설득했다.

 

2. 12세기와 13세기의 수도 생활

1058년 또는 그보다 조금 더 이른 시기에 테오도시우스는 페체르스키 수도원에 들어왔고, 1062년에 원장직에 선출되었으며, 12년 후인 1074년 5월 3일에 세상을 떠났다. 이 기간 동안 안토니우스의 동굴에서 피신하던 소수의 수행자 무리는 수많은 수도사 공동체로 성장했고, 수도원에는 수도실과 대성당이 세워졌다. 수도원이 물질적, 종교적·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성 이구메노의 노고 덕분이었다. 당시 페체르스크 수도원이 가졌던 위대한 영적 중요성은 12세기 말에 주교 시몬(과거 이 수도원의 수도사이자 『페체르스크 파테리크』의 공동 저자)이 수도사 폴리카르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가장 잘 알 수 있다: “나, 죄 많은 주교 시몬과, 내가 직접 세운 이 대성당, 블라디미르의 아름다운 성당들, 그리고 다른 수지달리야의 성당들을 누가 모르겠는가? 얼마나 많은 도시와 마을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그 땅 전역에서 십일조를 거둬들이고 있네. 이 모든 것을 우리 교회가 다스리고 있네. 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싶지만, 지금 나를 붙잡고 있는 영적인 일이 얼마나 큰지 알라. 주님께 기도하노니, 통치에 필요한 좋은 때를 내게 주시기를. 그리고 주님께서 그 비밀을 아시겠지만, 진실로 말하건대, 이 모든 영광과 명예를 곧 흙탕물처럼 여길 것입니다. 만일 제가 페체르스크 수도원 문 앞에서 삐걱거리는 문짝이나 쓰레기 더미로 여겨져 사람들에게 짓밟히거나, 혹은 그 라브라의 위엄 있는 문 앞에서 가난한 이들 중 한 사람이 되어 구걸하는 자가 된다면, – 그 편이 이 세상의 일시적인 영광보다 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머니 댁에서 보내는 하루는 천 년보다 더 귀하며, 나는 죄 많은 마을에서 사는 것보다 그곳에 머무는 것을 더 원하노라.” 페체르스크 수도원의 성 이구멘은 자신의 동료 수도사들과 동시대인들뿐만 아니라, 고대 러시아 수도원 전체를 위한 신앙의 귀감이 되었다. 그의 모습을 통해 고대 러시아의 금욕적 경건함은 민족적 표현과 수도 생활의 이상적인 기준을 찾게 되었다. 일정 기간의 공백을 거친 후 고대 러시아 수도 생활이 가장 전성기를 누릴 때, 금욕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있어 그것은 성 테오도시우스와 내적 유대를 유지했다. 북부 루스의 많은 수행자들에게는 페체르스크 수도원 초기 수십 년간의 정신이 살아 있었다.

엄격한 키노이아의 수준에 도달한 형제들을 그 자리에 머물게 하려 했던 테오도시우스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수도자 양육 체계는 변화를 겪기 시작했다. 페체르스크 수도원은 다른 도시 수도원들과 마찬가지로 세상과 지나치게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관계의 결과로 수도원 내 생활이 점차 세속화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수도 생활이 이러한 세속화에 대항하여 금욕을 강화하는 일련의 사례들을 보여주었는데, 이러한 수행의 강화는 개별적인 경우에서 미혹에 빠지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페체르스키 수도원에게 있어 통치하는 키예프 공작과의 관계는 지대한 중요성을 지녔으며, 이 수도원은 다른 수도원들과 마찬가지로 공작의 호의와 불만을 고려해야만 했다. 위대한 권위를 지닌 테오도시우스 자신은 공작의 제멋대로인 행위에 맞설 수 있었으나, 그 이후 모든 원장들이 그런 높은 수준을 유지해내지는 못했다. 이러한 모든 상황은 수도원의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쳤으며, 후대에 이르러 페체르스크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테오도시우스 시대와는 다른 모습으로 비춰진다. 우리 마음의 눈앞에는 은둔자와 엄격한 금식자, 순교자와 설교자, 예지자와 기적 행자 등 다양한 인물들이 스쳐 지나간다. 동시에 『파테리크』는 우리에게 금욕적 일탈의 사례들, 즉 기독교 생활의 기본 요건에 부 하는 행동의 사례들을 보여준다. 테오도시우스 시대 공동체의 초석이었던 예전의 일체감은 이제 무너져 내리고 있다.

그리고 역사가의 시선은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포착한다. 수도원 생활의 내부 질서가 바뀌자마자, 그것은 곧바로 이전과는 다른 영적 원천에서 영감을 얻기 시작한다. 테오도시우스 수도원의 정신은 팔레스타인의 금욕주의와 비교될 수 있다. 테오도시우스가 형제들에게 가르침을 전할 때 유프티미우스와 사바의 이름을 언급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성 사바 수도원이나 테오도시우스 대성인의 키노비아에서 살았던 이 성부들과 그 주변 인물들의 생활 방식은 공동 생활, 특히 공동 식사와 기도의 도입에 기여했다. 이러한 수도원적 이상은 테오도시우스에게 스투디우스 규율과도 연결되어 있었는데, 이 규율 역시 공동 생활 규칙의 엄격한 준수를 요구했다. 스투디우스 규율과 성 사바의 규율, 이 두 규율은 모두 위대한 카파도키아의 성 요한 크리소스톰([47] )의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11세기와 12세기 수도원 수도사들에게 특징적이었던 과도한 금욕적 수행 『파테리크』에 묘사된 바와 같이, 이미 시리아의 수행자들 또는 일부 이집트 수도사들을 연상시키며, 또한 11세기의 스베티고라시 수도사들을 떠올리게 하는데, 이들은 성 아파나시우스 스베티고라시우스가 도입한 키노이아에 저항했고, 자신의 판단에 따라 구원을 얻으려는 열망 속에서 때로는 미혹에 빠지기도 했다. 『파테리크』에 언급된, 지나치게 가혹한 금욕적 수행에 몰두했던 은수자들 역시 자신의 이성에 따라 행동했다. 오직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이 길은 구원으로 이끄는 좁은 길이 되었으나, 경험이 부족한 자들, 특히 공동체 생활을 경험하지 못한 이들에게는 절망과 망설임, 유혹의 길이었다[48] .

그 시대 수도원 제도의 내적 붕괴에 대해서는 몽골 침공 이전 루스의 가장 독특한 인물 중 한 명인 스몰렌스크의 아브라아미우스의 행적이 말해 주고 있다. 12세기 스몰렌스크는 짧은 기간 동안 문화적 부흥을 누리며 키예프와 경쟁하기도 했다. 1146년 직후 스몰렌스크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아브라아미는 당시로서는 매우 훌륭한 교육을 받았으며, 그리스어를 알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는 스몰렌스크 인근의 한 수도원에서 수도자가 되었는데, 그곳에서 수도원에 소장된 요한 크로이소스투스, 바실리우스 대제, 에프렘 시리누스의 저서와 성 테오도시우스 페체르스키의 행적을 연구함으로써 그의 금욕적 성향은 더욱 강화되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곳에서 20년 또는 30년을 보내며 엄격한 절제를 실천하고 기도와, 어쩌면 신비적 관상에 시간을 바쳤다. 아브라아미우스의 제자이자 그의 행적을 기록한 수도사 에프렘은, 일라리온, 사바 수도원장, 유프티미오스와 같은 위대한 팔레스타인 수행자들이 그에게 본보기가 되었다고 전한다. 이 기록은 아브라아미우스의 생애에 대한 다른 세부 사항들과 마찬가지로, 그를 팔레스타인 전통의 신봉자로 간주할 수 있게 하며, 이 점에서 그는 성 테오도시우스와 비교될 수 있다. 당시 스몰렌스크 주교였던 이그나티우스는 이 수행자를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었고, 그를 사제 수도사로 서품했다. 이는 1197년 이후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어 에프레임은 아브라암이 매일 성찬식을 집전했으며, 그 후 항상 설교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의 말에는 힘과 생동감이 넘쳐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왔다. 아브라아미의 인기는 수도원 원장 및 수도사들의 시기심과 악의를 불러일으켰고, 그로 인해 아브라아미는 박해를 받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스몰렌스크의 성 십자가 수도원으로 옮겨가 그곳에서 설교와 목회 사역을 계속했다. 아브라아미는 설교에서 주로 최후의 심판에 대해 말했는데, 그가 그린 두 점의 성화도 이 주제를 다루고 있다. 아마도 이 시기에 그가 쓴 『천상의 힘에 관한 말씀』이 작성되었을 텐데, 이는 고대 러시아 학문적 문헌의 흥미로운 사례이다. 그는 여기서 큰 설득력과 상당한 웅변으로 신자들의 구원, 회개, 그리고 다가오는 세상의 종말에 대해 논한다. 이와 함께 아브라아미는 고대 러시아의 종말론적 가르침을 열렬히 옹호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아브라아미는 새로운 곳에서도 시기하는 자들과 적대자들을 만나게 되었고, 이들은 주교 앞에서 그를 이단 혐의와 이단 서적(‘비둘기’ 또는 ‘깊은’ 책)을 읽었다는 혐의로 고발했다. 스몰렌스크 공작의 대표도 참여한 재판에서 그 고발이 중상모략임이 밝혀졌으나, 중상모략자들이 일으킨 소동을 진정시키기 위해 주교는 아브라아미를 그가 한때 수도자의 길을 시작했던 수도원으로 보내며, 그에게 성찬식을 집전하거나 방문객을 맞이하고 가르치는 것을 금지했다. 행전에는 이 부당한 처사로 인해 스몰렌스크에 하나님의 징벌, 즉 극심한 폭염과 가뭄이 닥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교가 무고한 이에게 가해진 금지령 을 철회한 후, 아브라아미아의 기도에 힘입어 비가 내렸고, 스몰렌스크 땅은 재앙에서 구원받았다. 그때 주교는 성모 마리아를 기리기 위해 수도원을 설립하고, 아브라아미를 그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했다. 이 수도원 역시 곧 신자들의 순례지가 되어, 사람들은 무리 지어 그곳으로 몰려들었다. 아브라아미가 고작 17개월 동안 머물렀던 자신의 수도원을, 그는 엄격한 금욕의 길로 이끌었다. 수도사 에프렘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온전히 영혼을 가다듬고 최후의 심판을 묵상하는 데 전념했다. 금욕적이고 신비로운 수행에 몰두하던 아브라아미우스는 1219년 또는 1220년에 세상을 떠났다.[49]

아브라아미우스의 생애는 그가 세상을 떠난 직후(약 1237년) 그의 제자인 수도사 에프레무스에 의해 집필되었으며, 11세기의 성 테오도시우스 전기가 그 시대에 대한 귀중한 자료인 것과 마찬가지로 12세기에 대한 귀중한 자료이다. 아브라아미우스를 둘러싼 영적 환경은 우리가 페체르스키 파테리크에서 접했던 몇 가지 특징을 되풀이하고 있다. 물론, 고대 러시아의 몽골 침입 이전 수도 생활이 이미 그 당시 쇠퇴기에 접어들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원인이 당시 루스에는 아직 새로운 것이었던 수도 생활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국가·정치적 및 교회 생활의 여건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수도 생활의 내적 성숙과 힘은 다년간의 끊임없는 영적 수련에 기반을 두고 있으나, 고대 러시아의 수도사들은 아직 그러한 수련 과정을 거치지 못했다. 테오도시우스의 시대는 너무 짧았으며, 그의 영향력은 수도원 수도사들 중 한두 세대에만 이어졌다; 러시아 수도 생활은 아직 수도 생활의 모든 금욕적 경험을 흡수하지 못했고, 공동 생활의 기초를 체득하지 못했다. 성부들의 금욕적 저작들은 이 과정이 얼마나 더디게 진행되는지, 영적 수행의 단절이 어떤 해를 끼칠 수 있는지, 그리고 수도원이 얼마나 쉽게 세속화에 빠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달성된 높은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수도 생활은 확립된 금욕적 전통뿐만 아니라, 그 전통을 살아 숨 쉬게 하는 전달자들도 필요로 한다. 이들은 서구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정교회 장로들이 그러하듯, 그 전통의 정신으로 새로운 세대의 수도자들을 양성하고, 자신들을 이어갈 새로운 영적 지도자들을 키워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는데, 이는 성 테오도시우스가 아무리 개인적인 영성과 경건함을 지녔다 해도, 몽골 침공 이전의 수도원 공동체 전체를 위해서든, 특히 페체르스크 수도원을 위해서든, 금욕적 세계관을 전수하는 ‘학교’를 세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대의 수도 생활에서는 ‘황금률’—즉, 엄격한 공동 생활, 키노비아, 수도자의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학교—를 찾아볼 수 없다. 그 대신 지나친 고행이나 수도원 생활의 세속화가 나타났을 뿐이다.

성 테오도시우스는 자신의 생애를 통해 수도 생활의 고귀함과 기독교 사회에 있어 그 필요성을 보여주었으며, 새로 개종한 백성들에게 금욕적 용기의 본보기가 되었다. 동시에 그는 러시아 수도 생활이라기보다는 새로운 러시아 기독교 전반의 화신에 가까웠다.

12세기 수도 생활의 내적 분열은, 아마도 고대 러시아 금욕주의의 가장 훌륭한 산물 중 하나였으나, 안타깝게도 그 창시자는 아니었던 한 주교의 저서들에서도 드러난다. 내가 말하는 것은 키릴, 투로프 주교, 즉 ‘러시아의 황금입’으로, 높은 시적 고양감으로 가득 찬 설교 덕분에 그렇게 불리게 된 인물이다. 그는 1130년에 태어나 1182년 직후에 세상을 떠났다. 수도자 생활의 초기에 투로프의 보리소글레브 수도원의 수도사로서, 그는 엄격한 생활과 금욕적 실천으로 두각을 나타냈으며, 그 중 일부는 기둥 수행까지 포함되었다. 당대 기준으로 그는 교양 있는 수도사였다. 나중에(1162년) 키릴은 투로프의 주교로 선출되었다. 그의 다른 저작들 중에서도 수도 생활에 대해 논한 세 편의 서신이 전해지고 있다. 비록 특정 인물들에게 보내진 이 서신들이 앞서 언급된 테오도시우스의 가르침과는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지만(신학적인 측면에서 더 높은 수준에 있으며 주제에 대한 원칙적인 논의를 담고 있음), 이 서신들을 통해서도 그 당시 수도 생활의 실태를 가늠해 볼 수 있다. 특히 페체르스크 수도원의 원장 바실리에게 보낸 서신(1182)은 수도원 생활의 개별적인 특징을 매우 잘 조명해 준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이 서신을 통해 당시 대스키마의 의미에 대한 인식이 아직 완전히 명확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아브라아미우스의 행적에서 우리는 스타르체스트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성인의 모든 행적, 무엇보다도 흑의 수도사 에프레모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그에게 영적 지도를 구하던 다른 신자들과의 관계에서도 드러난다. 이는 수도원 벽 밖에서 이루어진 스타르체스트의 사례로, 우리에게 18세기의 스타르체들을 떠올리게 한다. 키릴의 저서 『검은 수도복 계급에 관한 이야기』는 그 역시 장로 제도를 금욕적이고 수도원적인 관습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50] .

안타깝게도 11~12세기 수도원의 일상생활을 묘사한 자료는 우리에게 거의 없다. 테오도시우스의 《행적》은 그 시대의 수도원 생활을 상상할 수 있는 어느 정도의 근거를 제공하지만, 주로, 아니 전적으로 페체르스크 수도원 내의 모습에 국한되어 있다. 보다 후대의 시대나 다른 수도원에 대한 우리의 정보는 매우 단편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아브라아미우스의 생애 기록도 이 점에서 그다지 내용이 풍부하지 않은데, 이는 저자가 아브라아미우스 본인의 생애 사건들에 대한 서술에만 국한했기 때문이다.

수도원 운영에 관해서는 우리에게 상당히 신뢰할 만한 자료가 있다. 일반적으로 원장(이구멘)은 수도사들 스스로가 선출했다. 이후 새로 선출된 이구멘은 주교나 대주교로부터 그 직위를 승인받았다. 그러나 공작들이 설립한 수도원, 즉 공작에게 더 크게 의존하던 ‘기증자 수도원’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이러한 수도원에서는 원장의 선출과 해임이 전적으로 기증자인 공작의 손에 달려 있었다. 주교들이 설립한 수도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공작은 주교에게 임명을 위해 자신의 후보자를 추천했다. 주교 측에서 거절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비록 페체르스크 수도원에서 원장 선출은 원칙적으로 수도자 공동체의 특권으로 남아 있었지만, 『파테리크』에서는 이러한 선출이 종종 외부 세력의 영향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증거를 발견할 수 있다. 게다가 『파테리크』는 수도사들이 항상 원장에게 만족하지는 않았으며, 종종 그의 해임을 요구했음을 증언한다. 테오도시우스가 임종 시 수도사들에게 수도사 야코프를 새 원장으로 선출할 것을 제안했을 때, 수도사들은 야코프가 다른 수도원에서 페체르스크 수도원으로 온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의 조언을 따르기를 원치 않았다. 그러자 테오도시우스는 자신의 후계자로 또 다른 후보인 스테파노스를 지명했다. 수도사들은 그를 수도원장으로 선출하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스테파노스(1074년부터 1078년까지 수도원장을 역임)는 수도사들의 불만으로 인해 해임되었고, 수도원을 떠나야만 했다. 그의 후임으로는 수도사들이 선출한 니콘 대주교(1078–1088)가 되었다. 선거 자체가 때때로 마찰 없이 진행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1182년 사제 바실리우스를 수도원장으로 선출한 사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수도원 원장직에 본당 사제들이 임명될 수 있었다는 또 다른 예로는 1112년 프로호르의 선출이 있다. 물론 두 경우 모두 본당 사제들은 원장으로 임명되기 전에 수도 서원을 했다[51] .

수도원 운영은 수도원장에게 집중되었으나, 만약 수도원이 기부자 소유였다면 수도원장은 자신의 처분에 있어 기부자의 의사를 고려해야 했다. 수장이 엄격한 금욕주의자이자 잘 정립된 수도원 규율을 옹호하는 사람이었다면, 그의 임무는 특히 어려웠는데, 이는 그가 수도원 규율을 엄격히 준수하는 것과 공작의 의지 사이에서 절충점을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수도원에 대한 공작의 권력은 수도원의 세속화를 조장했으며, 이는 수도원이 그 권력에 물질적으로 의존하는 형태로도 드러났다. 공작의 기부금은 수도원들의 주요 생계 수단이었다. 게다가 개인, 주교, 부유한 상인 및 기타 기부자들로부터의 헌금까지 더해졌다…[52]

그러나 수도원의 물질적 풍요는 그들이 사회적 사명을 수행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성 테오도시우스의 행적과 『페체르스크 수도원 수도사록』에서는 페체르스크 수도원에서 번성했던 자선 활동의 많은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가장 부유한 수도원이었던 페체르스크 수도원은 11~12세기의 다른 수도원들보다 훨씬 더 대규모로 자선 활동을 펼칠 수 있었다. 수도원은 내부 선교에 있어서도 큰 의미를 지녔다. 어쩌면 이는 부자연스럽게 보일지 모르지만, 수도원 벽 밖에서 수도사가 수행하는 활동은 수도원 생활에 필연적으로 해를 끼칠 수밖에 없었다. 고대 루스에서는 수도사들만이 신자들의 고해성사를 들을 수 있었다. 영적 지도자는 영적 생활의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일들에 대한 조언자이기도 했다. 이는 수도계에 사회 관계에 대한 상당히 큰 영향력을 보장해 주었지만, 동시에 수도 생활을 이러한 관계 속으로 끌어들여 때로는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고대 루스에서는 유언이 대개 영적 지도자와 상의하고 그의 입회 하에 작성되었으며, 때로는 문해력이 있는 영적 지도자가 자신의 영적 자녀의 최후의 유언을 직접 기록하기도 했고, 이를 통해 유언자의 의지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수도원의 원장이나 다른 권위 있는 수도사가 공작이나 부유한 사람들의 영적 지도자가 되어 자신의 지위를 수도원의 이익을 위해 활용할 수 있었다면, 그것이 수도원에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는지는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어두운 면과 더불어, 당시 사회에 미친 성직자들의 지대한 긍정적 영향도 있었다. 앞서 언급한 스몰렌스크의 아브라아미의 사례는 종교적 소양이 뛰어난 고해 신부가 신자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많은 자료들[53] 에서도 언급하고 있다.

 

3. 수도자의 종교·문화 활동

수도계의 내적 분열을 초래한 또 다른 요인은, 그들에게 민족적·문화적 계몽이라는 거대한 과제가 부과되었다는 점이었다.

어느 정도는 종교적·도덕적 성향을 띠고 있는 고대 러시아 문헌은 모두 수도원 환경에서 탄생했다. 모든 저작이 완전히 독창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고대 러시아의 수도사 작가들은 대체로 반드시 새로운 것을 창조해야 한다는 열망이 별로 없었다. 그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교회계의 교육 수준이 부족했기 때문이었고, 부분적으로는 책 전반, 특히 종교적 저작물에 대한 숭고한 존경심 때문이었는데, 이는 그 안에 신성한 진리가 담겨 있어 인간의 손으로 감히 그 어떤 것도 덧붙일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 러시아 수도사들은 창작의 흔적이 짙게 배어 있는 작품을 적지 않게 남겼다.

여기서는 고대 러시아 문헌 전체를 훑어볼 수는 없다. 다만 이 문헌을 창조하는 데 있어 고대 러시아 수도사의 특별한 역할을 강조하고, 그 중 두 가지 장르인 고대 러시아 설교와 연대기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전자는 수도원의 종교적·도덕적 사명을, 후자는 민족적·문화적 사명을 증언한다.

아마도 11~13세기의 설교는 역사적·문학적 관점에서 볼 때 완전히 독창적인 것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 당시에는 설교의 내용과, 그 안에 표현된 기독교적 세계관이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이 더 중요했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본 설교는 인간 본성의 연약함을 이야기하고, 미신과 죄를 규탄하며, 구원의 길을 제시한다. 종말론적 사상은 루시에서 기독교가 시작된 초기부터 러시아인의 종교적 세계관을 관통하는 붉은 실과 같다. 설교자로는 이미 테오도시우스 페체르스키와 아브라함 스몰렌스키가 언급된 바 있다. 성 아브라아미우스의 『천상의 힘에 관한 말씀』은 특별한 종말론적 색채를 띠고 있다. 수도 생활의 기본 원리를 수도자들에게 설교했던 테오도시우스와 마찬가지로, 노브고로드의 주교 루카 지디야타(† 1059)는 자신의 신도들에게 기독교적 삶의 기초에 충실할 것을 요구했다. 투로프의 주교 키릴은 다른 방식으로 설교했으며, 그로부터 아홉 편의 설교문이 전해져 내려왔다. 그는 동시대인들보다 더 높은 수준의 문화와 교양을 갖추고 있었다. 그가 전례 연도의 축일을 맞아 전한 설교들(그중 가장 뛰어난 것은 그리스도의 승천 축일에 전한 설교이다)은 신학적으로 심오하여 신자들에게는 완전히 이해되지 않았을 수도 있으나, 성경과 성부들에 대한 그의 탄탄한 지식, 그리고 당시로서는 비범한 학식을 잘 보여준다. 이 설교들은 문학적 측면에서도 매우 뛰어나며, 은유와 비유를 담고 있어 키릴을 비잔틴 교회 문화[54] 의 인물로 특징짓는다.

이 문화의 또 다른 대표자는 키예프 대주교 클리멘트(1147–1154, † 1164)였다. 그는 스몰렌스크가 문화적 전성기를 누리던 시기에 그곳에서 태어났다. 그는 러시아인이었으며, 키예프 대주교로 대공에 의해 선출되었으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좌는 항상 대주교좌에 그리스인이 앉기를 원했기 때문에 이 직분을 오래 유지하지는 못했다. 클리멘트는 교양 있는 인물로, 신학뿐만 아니라 고전 철학에 대한 지식도 갖추고 있었으며, 연대기 작가로부터 ‘철학자’[55] 라는 별명을 얻은 유일한 고대 러시아 주교이다. 그는 주로 장로 토마에게 보낸 서신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키릴 투로프스키와 클리멘트는 모두 12세기 수도계에 속한 인물들로, 이 시기는 비잔틴의 학문이 이미 두 세기 동안 러시아 교회계에 영향을 미쳐 왔던 시대였으며, 이러한 영향은 결코 헛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또 한 명의 선구자가 있었는데, 새로 개종한 백성들 사이에서 빛나는 설교자로, 깊은 신앙과 말솜씨, 그리고 뚜렷한 민족 의식을 겸비한 인물이었습니다. 바로 키예프 대주교 일라리온이었습니다.

일라리온이 처음에는 베레스토베의 궁전 교회에서 사제로 재직했음을(아마도 수도사 신분이었을 것으로 추정됨) 전해 주는 고대 연대기 저자는,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그를 “선한 사람, 학식 있는 사람, 금식하는 사람”이라고 칭하지만, 그의 출신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아마도 불가리아인과 그리스인 등 비러시아인 집단과의 지속적인 교류를 통해 일라리온은 기독교 신학 교육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속에서 일라리온은 단순히 학식 있는 기독교인으로만 비치지 않는다. 그는 금욕에 강한 성향을 지닌 기독교인이었으며, 어쩌면 최초의 러시아 수도사였을지도 모른다. 일라리온의 생애에 대한 정보가 불완전한 것은 러시아 수도 생활의 기원에 관한 자료 전반에 공백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어디서 수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는 기도하고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는 조용한 장소를 마련하기 위해 드네프르 강변에 작은 동굴을 파냈다; 1037~1039년경에 사제 서품을 받았을 것으로 보이며, 이후 1051년에는 대공 야로슬라프의 뜻과 백성의 동의에 따라 키예프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아직 사제로 섬기던 시절인 1039년경, 그는 정확히 알려진 바 없는 이유로 설교를 했다. ‘율법과 은혜에 관한 설교’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이 설교는 웅변 예술의 진정한 걸작으로, 러시아 교회 역사에 대해 매우 회의적인 입장을 취하며 평가에 신중한 E. E. 골루빈스키조차 이를 인정하고 있다.

이 ‘설교’는 아마도 교회 설교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 내용이 당시 일반 신도들이 이해하기에는 너무 높은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일라리온은 교회 축일[56] 을 맞아 대공 야로슬라프, 대주교 및 궁정 인사들 앞에서 이 설교를 했을 가능성이 있다.

‘말씀’의 서두에서 일라리온은 구약(‘율법’)을 신약(‘은총’)과 비교하며, 구약성경은 단지 신약성경을 위한 준비일 뿐입니다. 『말씀』의 두 번째 부분에서 그는 블라디미르 대공에 대해 언급하며, 그가 백성들에게 그리스도의 신앙의 빛을 전한 점을 칭송합니다. 『말씀』의 세 번째 부분은 새로 개종한 러시아 땅 전체를 대표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일라리온은 자신의 저서에서, 신의 섭리에 의해 이끄는 세계 역사 속에서 역사적 과정의 중심에 서 있는 민족들이 교체된다는 역사철학적 사상을 주장한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스라엘과 그 역사는 준비의 시기, 곧 율법의 시대였으며, 이를 이어오는 것은 은혜의 시대, 기독교의 시대, 진리와 인류 구원의 시대이다. 블라디미르 대공은 자신의 위업을 통해 러시아 백성을 ‘은혜의 왕국’으로 인도했다는 점에서 칭찬받을 만하다. 일라리온은 블라디미르가 회심하게 만든 그 마음가짐의 중요성을 특히 강조한다.

『말씀』의 두 번째 부분은 이라리온의 민족적·애국적 의식이 드러나 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중요하다. 블라디미르는 그리스 선교사들의 설교 결과로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이 아니라( ), 그리스 친화적인 코르순 전설[57] 이 주장하는 바와 달리, 영혼의 내적 필요와 새로운 신앙의 진실성에 대한 확신에서 비롯되었다.

일라리오나의 민족적·애국적 견해와 블라디미르의 개종에 관한 친그리스 전설에 대한 그의 민족적·교회적 반대 입장은, 고대 러시아 수도원 공동체 전체, 특히 페체르스크 수도원 수도사들의 민족적·문화적 견해를 대변하는 사상이었으며, 러시아 수도자들에 의해 열렬히 고수되었다. 이러한 견해는 러시아 교회의 루시화라는 사상이 뿌리내리는 데 기여했으며, 그 결과 러시아 교회 내에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정책에 반대하는 세력이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일련의 역사적 사건들이 발생했다. 일라리온의 민족적 정서는 아마도 1051년, 야로슬라프가 비잔티움과의 관계가 특히 악화되었을 때, 러시아 주교 공의회에 일라리온을 성직 서품하도록 명하고, 테오펨프트의 사망으로 공석이 된 키예프 대주교좌에 그를 등극시킨 데 있어 결정적인 요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이 시점부터 대주교 일라리오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는 그 자리에 오래 머물지 못했는데, 야로슬라프가 다시 콘스탄티노플과의 화해를 모색하기 시작하자 일라리온은 직위를 내려놓아야 했다(1054–1055).

일라리오ンの 이후 삶은 페체르스크 수도원의 역사와 당시의 수도 생활, 특히 고대 루시의 영적 중심지가 된 이 수도원의 민족·문화적 활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우리는 일라리온의 이후 운명을 페체르스크 수도원과 연관 짓는데, 이는 테오도시우스의 행적에 등장하는 ‘위대한 니콘(또는 니콘 대성인)’과 대주교 일라리온이 동일한 인물이라는 프리셀코프의 가설을 지지하기 때문이다[58] .

일라리온-니콘과 같은 뛰어난 인물을 고대 루스 수도원사의 역사에서 제외할 수는 없으며, 고대 루스의 민족적 자의식 문제를 규명할 때 그는 주목의 중심에 서야 한다. 민족·문화적 창조 활동은 수도원 공동체의 영적 역량의 상당 부분을 소모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순수한 금욕적 수행, 특히 페체르스크 수도원 수도자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당시 키예프 루스에게 무엇이 더 중요했는지는 알 수 없다. 민족적 러시아 자의식의 형성인가, 아니면 국가적·사회적 여건의 세속화 영향으로 인해 성장이 저해되었던 두세 세대의 수도사 양성이었는가. 후대의 역사는 오히려 전자를 뒷받침하는 듯하다.

대주교좌에서 파면된 후 – 이는 1051년 이후, 1055년 직전에 일어났으며, 이때 연대기 저자는 이미 그리스인 에프레모를 대주교로 언급하고 있다 – 일라리온은 옛 일라리온 동굴에 거주하던 안토니우스에게 찾아갔고; 그때부터 일라리온은 성 테오도시우스의 행적과 페체르스키 파테리크[59] 에 등장하는 ‘니콘 대성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름의 변경은 대스키마(대수계)를 받은 것과 관련이 있다. 니콘은 곧바로 페체르스키 수도원의 생활에서 특별한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안토니우스는 사제 서품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니콘이 수련자들을 받아들이고 수계를 주었다. 대공의 두 측근을 출가시킨 일로 인해 니콘은 대공의 분노를 사게 되었고, 한동안 수도원을 떠나야만 했다. 그는 아조프해 연안의 툼타라칸(그리스어로 타마타르하)으로 떠나, 그곳에서 성모 마리아를 기리는 수도원을 설립했다(1061년과 1067년 사이); 그는 이곳에 오래 머물지 않았고, 1068년에는 이미 페체르스크 수도원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1068–1074년 동안 니콘은 수도사들의 영적 돌봄에 있어 테오도시우스의 주요 보좌자였다. 테오도시우스의 후임자였던 스테판이 수도원장의 직책을 잠시 맡았으나 수도사들의 불만으로 인해 수도원을 떠나야만 했던 후, 니콘은 1077–78년에 수도원장으로 선출되어 1088년 사망할 때까지 수도원을 이끌었다. 그의 10년 재임 기간은 수도원 형성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대 중 하나를 이룬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석조 교회 건축이 계속되었으며, 초청된 그리스 화가들이 이 교회를 벽화, 조각, 모자이크로 장식했다[60] .

그러나 가장 중요한 업적은 고대 러시아 연대기의 창설이었는데, 이는 진정한 기독교적이며 러시아 민족적 정신이 깃든 작품이었다. 이 시점부터 고대 러시아 수도원은 연대기 편찬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러시아 연대기 작가의 모습은 수도사의 직분과 뗄 수 없게 되었다. 그 결과, 연대기에 담긴 세계관은 기독교적이고 금욕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61] . 비극 『보리스 고두노프』에서 A. 푸슈킨은 수도사 피멘의 모습을 통해 고대 러시아 연대기 저자를 아름다운 예술적 형식으로,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묘사했다: 피멘(등불 앞에서 글을 쓰며):

또 하나, 마지막 이야기 –

이제 나의 연대기도 끝났으니,

하나님께서 유언하신 의무를 다했으니

나, 죄인에게 맡기신 의무를 다했다. 주님께서 오랜 세월 동안

주님께서 나를 증인으로 세우시고

서적의 기술을 익히게 하셨으니;

언젠가 근면한 수도사가

내 성실하고 이름 없는 이 노고를 발견하리니,

나처럼 자신의 등불을 밝힐 것이며—

그리고 종이에서 쌓인 세월의 먼지를 털어내며,

진실한 이야기를 다시 필사할 것이며,

그리하여 정통 기독교의 후손들이

고향 땅의 지난 운명을 알게 하리라,

위대한 왕들을 기리며

그들의 수고와 영광, 선행을 기리며 –

그리고 죄와 어두운 행적에 대해서는,

구세주께 겸손히 간구하네[62] .

니콘 시대에 연대기 모음집의 편찬이 시작되었다. 키예프 대주교좌의 그리스인들 사이에서 집필된 이른바 ‘1039년 모음집’은 수정되고 보완되었다[63] . 그렇게 해서 주로 니콘이 집필한 ‘1073년 모음집’이 탄생했다. 이 연대기의 후속작은 ‘1095년 연대기’였으며, 이 연대기의 편찬에는 ‘연대기 작가’라고 불린 수도사 네스토르가 주된 역할을 담당했다; 이 ‘1095년 연보’는 ‘최초의 러시아 연대기’ 또는 ‘최초의 키예프 연대기’로, 1116년 고대 러시아 연대기의 기초가 된다. 그리고 1116년 연대기(『시대의 이야기』. – 역자 주)는 잘 알려진 라브렌티예프 연대기(1377년)와 이파티예프 연대기(15세기)는 물론, 그 밖의 모든 러시아 연대기의 기초를 이룬다.

네스토르의 사례를 통해 니콘이 러시아 민족적 세계관을 형성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의 결과가 특히 잘 드러난다. 이데올로기적으로 네스토르는 니콘의 충실한 제자였다. 그는 스테판 이구멘 재임 시절, 즉 1074년과 1077년 사이에 페체르스키 수도원에 들어왔으나, 그의 문학적 활동은 주로 11세기 80~90년대에 집중되어 있다. 네스토르는 또한 두 편의 성인전(聖人傳)을 집필했는데, 바로 『성 테오도시우스의 생애』(페체르스키 파테리크의 일부)와 『성 보리스와 글레브 공작의 생애』이다. 『보리스와 글레브의 생애』는 네스토르의 첫 번째 성인전으로, 11세기 80년대 초반, 즉 이미 니콘 시대에 등장했다. 이 작가의 종교적·정치적 세계관은 뚜렷한 민족적 특징을 띠고 있으므로, 여기에서 니콘의 영향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전기는 블라디미르 공의 차남인 두 형제, 보리스와 글레브 공이 장남 인 스비아토폴크의 명령에 따라 살해된 사건을 서술하고 있다. 스비아토폴크의 이 만행은 동시대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갓 탄생한 러시아 교회는 살해된 이들을 순교자로 숭배하기 시작했다. 보리스와 글레브의 행적은 특히 백성들에게 사랑받는 읽을거리였다. 네스토르는 살해당한 공작들의 기독교적 미덕을 찬양하고, 또한 자신의 민족적·러시아적 교리를 제시하기 위해 이를 저술했다. 그 교리의 근간에는 루스의 통일성과 공작 가문의 세습권에 대한 사상이 놓여 있다. 이 사상은 네스토르의 『테오도시우스 행적록』(성 테오도시우스와 공작 스비아토폴크 간의 분쟁 이야기)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네스토르는 이 사상의 열렬한 지지자였으며, 이 사상은 이후 모스크바 대주교들의 활동에서 매우 독특한 특징을 띠게 되었다[64] .

이 사상이 페체르스크 수도원의 수도자들뿐만 아니라 수도계 전반에서 강력한 지지를 받았음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러시아의 공작 볼로디미르를 기리며』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성자 전기이다. 『기억과 찬사』의 저자 이름은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12세기 전반에 집필되었다는 점만은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 익명의 저자는 ‘코르순 전설’의 친그리스적 관점을 거부하며, 그의 교회·정치적 세계관은 순수하게 러시아 민족적 성격을 띠고 있다[65] .

페체르스크 수도사들의 문학사적·성인전적 저작들은 고대 루스의 민족적 자의식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12세기의 다른 문헌 유산들, 예를 들어 『다닐 수도원장의 성지 순례』와 『이고르 군대에 관한 이야기』는 민족적 자의식이 민중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렸음을 보여준다. 형성되어 가던 러시아 국가의 민족적 자의식을 형성하는 과제가 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대 러시아 수도원 공동체에 의해 해결되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국가적·민족정치적 관점에서 볼 때, 이는 물론 수도원의 위대한 공로였으나, 순수하게 교회적·기독교적 금욕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엄격하게 준수되는 수도원 공동체 생활 속에서 오로지 영적 수행에만 전념해야 했던 초기 세대 수도사들의 영적 성장에 있어 위험 요소가 될 수 있었다.

교회와 수도계는 다양한 활동으로 인해 발생하는 세속화의 위험을 피하고자 했다. 그리고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그들은 이를 성공적으로 해냈으나, 이는 교회 당국이 취한 조치의 결과가 아니라, 수도 생활 자체가 러시아 민족의 금욕적 기풍에 기반을 두어 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수행자들을 내세우고 스스로 새로운 힘을 얻었기 때문이다.

 

 

제3장. 성 세르기이 라도네즈키와 그의 학파

 

1. 북동부 루스에서 기독교 금욕주의가 번성하게 된 역사적 전제

수도생활이 고대 러시아 생활에 갖는 중요성은 이미 동시대인들에 의해 인정되었다. 그 시대 러시아인의 세계관에서 수도 생활의 이상은 가장 중요한 위치 중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주장이 11세기와 12세기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무조건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14세기나 15세기에 대해서는 그 타당성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이상은 러시아인의 세계관에 영향을 미쳐 금욕적인 색채를 더해주었으며, 수도원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결정지었다. 수도원은 ‘성스러운 장소’, ‘천사들의 집’이며, 수도사들은 세속의 세계와 천상의 세계를 연결해 주며, 천사들이 수도사들 앞에서 빛나듯이 수도사들도 평신도들 앞에서 빛난다. 수도원과 ‘천사와 동등한 수도자 계급’은 죄 많은 감각적인 지상에서 천국으로 이끄는 사다리의 중간 단계들이다. 이미 이곳에서, 즉 자신의 덧없는 육신을 이겨내는 고행 속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영혼의 구원이라는 사상은 그 시대 종교성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었다. 신자들은 인간의 삶을 악마의 유혹이 도사리는 무대로 여겼으며, 그들과의 승리를 거둘 수 있는 투쟁은 오직 수도원 담장 안에서만 벌일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루시에서 기독교가 시작된 첫 두 세기 동안 이러한 견해와 정서는 민중의 의식 속에 느리고 점진적으로 자리 잡았으나, 14세기에는 완전히 민중의 의식을 지배하게 되었기에, 이 시대를 고대 루시의 금욕주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다. 수도원사의 역사에서 13세기는 과도기였다. 수도 생활의 형태는 아직 러시아의 여건에 부합하는 명확한 모습을 갖추지 못했다. 수도 생활은 아직 키노비아(공동 생활)와 이디오리트마(독립 생활) 사이에서 선택을 하지 못한 상태였으며, ‘사막’, 스키트에서의 생활, 은둔 생활은 러시아 피바이다의 북쪽 하늘에 아직 떠오르지 않은 별자리와 같았다. 도시나 그 근교에 위치한 수도원들은 여전히 구원을 찾는 이들에게 피난처로 남아 있었으며, 때때로 수행자들만이 어둡고 울창한 숲속으로 떠나기를 감히 시도할 뿐이었다. 이는 금욕적인 성찰과, 어쩌면 내면의 의심이 짙었던 시대였으나, 결코 금욕적 이상을 포기한 시대는 아니었다.

이 무렵 루스의 국가 생활에서는 두 가지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는 어떤 의미에서 수도 생활의 역사에 상당히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를 불확실한 상태에서 벗어나게 했다.

첫 번째 사건은 내정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야로슬라프의 위대하고 통일된 키예프 국가는 12세기에 그의 아들들의 후손들[66] 간의 분쟁으로 인해 정치적 붕괴를 겪었다. 이 나라는 더 이상 전 루스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 각자의 지역적 이익만을 챙기던 분봉 공국들로 분열되었다. 키예프의 정치적 위상은 야로슬라프[]의 손자인 용감하고 활기찬 안드레이 보고륨스키 공(† 1174)이 북부의 험준한 숲, 수즈달 지방에 새로운 국가·정치 체제의 토대를 마련한 이후 특히 크게 떨어졌다. 이 땅은 새로운 국가적·사회적 세력이 모이는 곳이 되었으며, 이는 결국 모스크바 왕국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키예프 루스가 분봉 공국들로 분열되면서 공작들의 수도 도시 수가 늘어났고, 그 결과 새로운 교구가 만들어지고 새로운 도시 수도원이 설립되었는데, 이는 각 공작과 주교가 자신의 거처를 아름답게 꾸미고자 했기 때문이다. 영토적으로 이 과정은 주로 북동쪽 방향, 오카 강과 상류 볼가 강 일대에서 전개되었으며, 동시에 남부와 남동부(리아잔 지방)에서 북동부(특히 14세기)로 러시아 인구의 대규모 이주가 이루어졌다[67] .

이러한 과정은 부분적으로 대외 정치적 사건들의 영향 하에 이루어졌는데, 이러한 사건들이 바로 러시아 순례 운동 역사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요인을 구성한다. 키예프 국가의 정치적 붕괴는 남동쪽에서 남부 러시아 대초원으로 침투해 오던 유목민들의 세력이 강화된 결과이기도 했다. 10세기와 11세기에는 페체네그족이 그 주역이었으며, 이들을 격파하는 데 키예프 공작들과 국가는 막대한 힘과 피를 쏟아부어야 했다. 11세기 중반, 흑해 북안에는 유목민인 투르크족 쿠만족이 등장했는데, 러시아인들은 그들을 폴로베츠라고 불렀다. 『이고르 군대의 노래』에는 도시와 마을을 불태우고 황폐화시킨 이 잔혹하고 야만적인 민족과의 수세기에 걸친 투쟁이 시적인 형태로 반영되어 있다. 덧붙여, 수십 년간 이어진 이 투쟁은 고대 러시아인의 세계관 형성에 영향을 미쳤는데, 동시대인들은 기독교적 관점에서 이 정치적·경제적 재앙을 “우리의 죄”에 대한 신의 징벌로 보았기 때문이다[68] .

그러나 이 대초원 민족들이 불러일으킨 공포는, 다가올 몽골족, 즉 당시 사람들이 타타르라고 부르던 민족의 침입을 예고하는 전조에 불과했다. 그들은 ‘신의 채찍’으로서 러시아 땅에 찾아왔는데, 당시 사람들은 그렇게 판단했다. “그해 여름,” 1224년 항목에서 연대기 저자는 이렇게 기록한다. “우리의 죄로 인해 이방인들이 나타났는데, 그들이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지, 어떤 언어를 쓰는지, 어느 부족에 속하는지, 어떤 신앙을 가졌는지 아무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69] . 고대 루스는 유럽을 지켜주는 방패가 되어야 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으나, 그 대가로 200년 넘게 지속된 타타르의 속박을 치러야 했다. 적에 대한 저항과 순교적인 죽음들을 통해, 평범한 농민부터 공작에 이르기까지 온 루스는 정치적 자유를 향한 열망을 증명했다.

바티의 루스 정복 원정은 1237년에 시작되었다. 2~3년 만에 재앙과 공포가 루스 전역에 휩쓸었다. 1240년 12월 6일, 바티야의 군대의 공격을 받아 키예프가 함락되었다. 티트마르 메르체부르크스키조차 그 아름다움과 규모에 감탄을 금치 못했던 이 부유한 도시는 폐허와 재더미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수많은 도시들이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동시대인들에게 이 사건은 단순히 국가적·정치적, 경제적 재앙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이는 인간의 정신적 균형과 세계관에 가해진 끔찍한 타격이었다. 세상 삶은 확실성과 안정성을 잃었고, 사회적 여건은 힘들고 짓누르는 것이 되었다. 수즈달 지방과 북부 루스의 초기 정착민들은 숲에서 자신들의 밭을 마련하기 위해 자연과 끈질기게 싸워야 했으나, 이제 그들이 큰 고생 끝에 일구어 낸 농경지는 새로운 타격 아래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타타르의 속박이라는 첫 10년 동안의 끔찍한 재앙이 뒤로 남고, 북동부 루스와 그 공작들이 황금군단과의 관계에서 어느 정도 지지를 확보하게 되자, 나라에는 다시 정치적·경제적 통합의 과정이 시작되었다.

이는 삶을 꾸려갈 믿음직한 터전을 찾고자 했던 인구의 새로운 재편 시대였으며, 볼가강과 오키강의 상류를 새로운 국가 중심지로 선택하고 그곳에서 활발한 경제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한 러시아 민족의 정치적 통합 시대였다[70] .

정치적·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국가는 민중의 모든 힘을 결집해야 했다.

14세기 초, 러시아의 삶은 생계 문제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사람들은 크고 작은 타타르 군단의 공격을 끊임없이 경계하며 살아야 했다. 재산을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 은신처를 마련해야 했고, 농민들은 보호를 찾아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도시들은 너무나 불안해졌고, 타타르족에 의해 많은 수가 파괴되었던 도시의 수도원들조차 더 이상 믿을 만한 피난처가 되지 못했는데, 이는 수도원들조차 항상은 아니더라도 종종 일상생활의 근심과 고충에 휘말렸기 때문이다. 금욕적인 삶을 추구하는 사람은 그곳에서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없었다. 수도사들은 금욕적 수행을 위한 새로운 평온한 장소를 찾았고, 이로써 ‘수도원 식민화’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과정이 시작되었다. 이 과정은 수많은 ‘푸스티니’[71] 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2. 14세기와 15세기의 금욕주의 양상

14세기와 15세기는 러시아 수도생활의 역사에서 수도 생활이 특정한, 특징적인, 러시아 고유의 양상을 띠게 된 시기이다. 이 시대의 수많은 수행자들의 전기를 살펴보면, 전혀 다른 운명을 가진 사람들이 똑같은 일관된 공통된 특징을 보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그 시대의 고대 러시아 수도원 설립자에 대한 전형적인 초상을 그려낼 수 있다.

보통 그는 부유한 가정, 특히 관료(보야르)나 상인 가문 출신이며, 드물게는 농민 출신이다[72] . 이는 미래의 수도자에게 어릴 때부터 읽고 쓰는 법을 배울 기회를 제공했다. 거의 모든 성자 전기가 전하는 바와 같이, 그는 어린 시절에 아이들의 놀이를 피했는데, 바로 여기서 정교회 성자 전기 문학의 유명한 전통이 비롯된다. 신학 서적과 성자 전기를 읽고, 교회에 다니는 것—이것이 그의 영적 교육의 시작이었으며, 이는 그에게 은둔과 수도자 생활에 대한 억누를 수 없는 열망을 일깨워 주었다. 부모가 아들의 수도자적 성향을 항상 찬성하는 것은 아니었는데, 특히 그가 외동아들인 경우에는 더욱 그러했다. 왜냐하면 그는 장차 영지의 주인이 되어 가문에 영지를 물려주기 위해 관직에 진출해야 했거나, 상인 가문 출신이라면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짧거나 긴 내적·외적 갈등 끝에 그는 결국 부모의 집을 떠나, 그곳의 혹독한 생활을 묘사한 이야기들을 통해 알고 있던 그리 멀지 않은 어느 수도원으로 몰래 들어간다. 수도원에서 그의 수행의 여정이 시작된다. 그는 인내와 겸손으로 가장 힘들고 더러운 일을 수행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형제들보다 먼저 교회에 도착하고 저녁 및 밤 예배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키곤 한다. 수련 기간은 몇 년간 이어졌다. 그 후, 원장의 축복을 받은 그는 자신의 금욕적 수행을 계속할 수 있는 새로운 은둔처를 찾기 위해 수도원을 떠났다. 그 당시 북동부 루스는 울창하고 뚫을 수 없는 밀림, 즉 ‘숲의 사막’으로 뒤덮여 있었는데, 이곳은 은둔자를 허영과 소란스러운 세상으로부터 보호해 주었고, 그가 고독과 영적 집중 속에 머물 수 있도록 최상의 도움을 주었다.

고대 러시아의 많은 수행자들은 수도원에서 사전 수련 기간을 거치지 않고 힘든 은둔 생활을 시작하곤 했다(예를 들어, 세르기이 라도네즈키와 그의 형제 스테판, 아마도 사바 비셰르스키도 그러했을 것이다). 수행자는 초가 오두막(예를 들어, 세르기이와 스테판, 게라심 볼딘스키, 키릴 노보예제르스키 등)이나 나무 구멍(예를 들어, 파벨 오브노르스키)에서 살며, 마른 낙엽이나 이끼 위에서 잠을 자고; 그가 채집한 숲속의 열매와 뿌리, 혹은 드물게 지나가는 행인들이 나뭇가지에 매달아 둔, 그가 직접 엮은 바구니에 넣어주는 마른 빵(예를 들어, 게라심 볼딘스키, 테오도르 로스토프스키, 세르기 라도네즈스키의 경우)이 그의 모든 식량을 구성한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그는 기도와 시편 노래에 많은 시간을 바친다. 낡은 옷은 긴 북러시아 겨울의 추위를 막아주지 못하며, 오랫동안 기도하며 서 있으면 그는 추위에 몸을 떨고, 여름에는 더위와 답답함에 시달리며, 무수한 곤충들이 기도하는 이의 손과 얼굴을 괴롭힌다. 금식과 기도, 추위와 더위를 견디는 삶은 그를 기진맥진하게 만들고, 몸과 얼굴을 핼쑥하게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키릴 벨로제르스키나 알렉산드르 스비르스키와 같은 고대 러시아 성인의 성화는 단순화된 양식이 아니라, 수행자의 실제 모습을 충실히 재현한 것이다.

그러나 은둔자가 고독 속에 머무는 시간은 길지 않다. 산 꼭대기에 서 있는 등불은 숨을 수 없기 때문이다(마태복음 5:14). 때로는 두 은둔자, 예를 들어 파벨 오브노르스키와 세르기이 누롬스키처럼, 서로 만나 힘든 은둔 생활 속에서 서로를 지탱하기 위해 둘이서 함께 지내기로 결정하기도 한다. 혹은 엄격한 은둔자에 대한 소문이 인근 도시와 마을에 퍼져, 어느 날 세속의 유혹으로부터 은둔과 구원을 찾는 또 다른 신앙인이 그에게 찾아오기도 한다. 새로 들어온 수도사는 나무를 엮어 오두막을 짓고, 이제 두 사람은 함께 금식과 기도에 전념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은신처는 점차 확장되어 수도원이 된다. 수도자들은 나무로 된 성당을 짓고, 모두가 새로운 수도 공동체의 원장이라고 여기는 수도원 설립자는 지역 주교를 찾아가거나, 때로는 모스크바의 대주교에게 직접 가서 새로 설립된 수도원에 대한 축복과 성당 봉헌을 청한다. 만약 수도원 설립자가 스스로 충분한 학식을 갖추고 있다면, 주교는 그를 사제로 서품하고(그때까지 아직 출가하지 않았다면) 출가 의식을 거행해 준다. 이제 그는 스스로 예배와 성사를 집전하게 되지만, 종종 수행자는 겸손함으로 인해 서품을 거절하고 여전히 성직 서품 없이 단지 수도원의 원장으로서만 남기도 한다; 이때 주교는 자신이 지명한 수도사 한 명을 새로운 수도원으로 파견하고, 그에게 필요한 예배 서적과 안티민스를 제공하며, 수도원 형제들에게 주는 축복의 표시로 구세주와 성모 마리아의 성화를 그에게 전달한다.

이렇게 해서 새로운 수도원들이 생겨나는데, 종종 셀 수 없이 많은 강과 호수의 가파른 기슭에 자리 잡으며, 그곳에서 북부 루시의 매혹적이고 온화한 아름다움이 눈앞에 펼쳐진다… 은빛 물결은 울창한 전나무와 소나무 숲과 어우러지며, 그 숲의 거친 느낌은 자작나무 줄기의 하얀 빛으로 부드러워진다. 이곳에 몇 시간이고 서서 이 경이로운 풍경을 바라볼 수 있다. 이른 가을, 지는 해의 광선 속에서 자작나무의 하얀 줄기와 황금빛 잎사귀가 붉은빛을 띤 침엽수들의 배경 위에서 빛나고, 침엽수들은 짙은 녹색 옷을 입은 채 조용하고 가만히 서서 마치 무언가에 깊이 생각에 잠긴 듯하다… 색깔은 짙어지지만 공기는 여전히 맑고 투명하다. 종소리는 갑자기 울려 퍼지는 것이 아니라, 멀리서 서서히 들려오다가 다시 저 멀리 사라진다. 수도사들이 저녁 기도 시간에 모여든다…

이런 수도원은 목조 교회 주변에 서 있는 몇 채의 목조 거처로 이루어져 있으며, 교회 옆에는 조금 더 큰 건물이 있는데, 이곳이 수도원의 식당이다. 모든 것이 목재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다. 방들 사이에는 수도사들에게 가장 필수적인 식량을 공급하는 텃밭이 있다. 대개 수도원이 지어지는 장소는 수도사들이 직접 뚫고 들어갈 수 없는 숲을 개간하여 마련한다.

처음에 새로 세워진 수도원은 개별 거주 규율에 따라 생활한다. 각 수도사는 자신만의 거처를 짓고, 텃밭을 가꾸며, 옷과 식량을 스스로 마련하고, 바구니를 엮거나 다른 수공예에 종사한 뒤, 자신이 만든 물건으로 농민들에게서 밀을 얻어 온다. 그는 자신의 방에서 홀로 지내며, 자신의 이해에 따라 그곳에서 기도하고 시편을 노래한다. 수도사들은 예배 때만 함께 모인다. 그들의 수장은 대개 수도원의 설립자이다. 어떤 의미에서 북러시아의 개별 거주 방식은 팔레스타인의 성 사바 수도원의 생활 체제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점차 많은 수도원이 공동생활 방식으로 전환된다. 공동생활 규율 하에서는 수도자 중 누구도 개인 재산을 소유할 수 없으며[73] , 그들은 수도원을 위해 일하고, 수도원은 그들에게 음식과 옷을 제공한다. 텃밭이나 작은 밭에서 수확한 모든 것은 수도원 저장고로 들어간다. 수도사들은 자신의 방에서 식사를 하거나 식량을 보관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수도사들은 식당에 모여, 공동 기도와 원장님의 축복 후에 모든 수도사가 똑같은 음식을 받는다. 수도원의 직무는 원장에게서 배정되며, 그의 허가나 축복 없이는 어떤 수도사도 어떤 일도 시작하거나 행하지 않는다.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수도사들은 연로한 수도사들에게 복종하며, 모든 면에서 그들의 뜻을 따릅니다. 종종 연로한 수도사와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수도사 간의 관계는 장로들의 지도 형태를 띠기도 한다. 때로는 수도원에서 특정 직책을 맡고 있는 연로한 수도사들은 수도원 공의회, 즉 장로 공의회를 구성하며, 이 공의회는 원장님과 함께 수도원을 운영한다.

고대 러시아 수도원 생활에서 원장의 개인적인 영적 소양이 큰 역할을 했다. 바로 여기에 고대 러시아 수도 생활과 서양의 중세 수도 생활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서양에서는 수도 생활의 번영이 조직의 견고함에 달려 있었는데, 이 조직은 처음부터 수도회 형제들의 금욕적 삶을 세부적으로 규정하여 특정 방향으로 이끌어 갔다. 반면 고대 러시아에서는 수도원 생활의 체계가 수도원 설립자와 수도원장이라는 개인의 인격에 의해 결정되었다. 특히 고대 러시아 금욕주의의 가장 뛰어난 대표자들이 설립한 수도원들이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는데, 그들의 유언은 설립자들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오랫동안 지켜졌다. 제자들은 언제나 스승들의 영적 기조를 보존하고자 했으며, 나중에 그들 스스로가 새로운 수도원의 설립자가 되면, 자신의 종교적 모교가 지닌 금욕적 전통의 정신에 따라 수도원을 꾸몄다. 여기서 특히 강조해야 할 점은, 고대 러시아 수도사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전통의 영적 내용이나 그 장점, 혹은 교회의 인정이 아니라, 오히려 수도원 설립자의 인격과 영적 모습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종종 금욕의 객관적인 내용은 금욕 수행자 본인의 인격과 그의 위업 앞에 밀려 뒷전으로 물러나곤 했다. 고대 러시아 종교성의 가장 큰 특징은 시스템 자체가 아니라, 그 시스템을 실천하는 이들의 영적 모범이 주된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고대 러시아인은 자신의 기독교 세계 속에서 항상 이러한 본보기와 형상들—종교 체계(교리와 신앙)에 생명을 불어넣고 그를 참된 종교적 삶으로 이끄는 성화와 성인들—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이 형상들은 모든 사람에게 찬양받는 성스러운 수행자들의 본보기를 따라 그러한 삶으로 나아가는 길이 열려 있음을 말해 준다.

우리가 고대 러시아의 수도 생활을 살펴볼 때 이 모든 점을 고려해야 하는데, 그 역사에서 수도자라는 형상이 수도 생활 그 자체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지녔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는 특히 고대 러시아 공동 생활의 역사에서 뚜렷하게 드러났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미 키예프 시대에는 공동 생활의 존재가 키노비야( )가 수도원 생활의 가장 완벽한 금욕적 체계로 공식 인정받은 사실보다는 성 테오도시우스의 영향력에 더 크게 좌우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수도원 설립자의 모습이 후세들의 기억 속에서 점차 희미해짐에 따라, 그가 정립한 수도원 생활 체계도 그 영향을 받아 왜곡을 겪게 되었다. 반면, 공동생활의 부흥은 14세기에 교회 당국의 어떤 지시나 개혁과도 관련이 없었고, 오히려 이 부흥의 주역이 된 몇몇 뛰어난 수행자들의 영향과 관련이 있었다. 이러한 전환은 서서히 이루어졌으며 모든 곳에서 균일하게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이는 수도 생활의 내부에서 자라나 전적으로 확산되고, 백성들 사이에서 금욕적 기풍을 강화하는 데 기여하며 그들에게 자신만의 색채를 입혔을 법한 ‘아래로부터의 개혁’도 아니었다. 키노비아의 부흥은 그 부활을 주도한 인물의 주도권을 원칙적으로 인정한 결과로 일어난 것도 아니었으며, 이는 단순히 그가 걸어온 영적 성장 과정의 한 단계에 불과했다. 공동 생활의 부활을 주도한 인물이 키노비아 도입의 필요성을 자신의 수도원만을 위한 것으로 인식했는지, 아니면 모든 수도원을 위한 것으로 인식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위대한 목표를 세우고 그 실현을 열성적으로 추구하는 개혁가의 역할은 겸손한 고대 러시아의 수행자에게는 별로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동료 수도사들과 제자들이 수도 생활에 대한 그의 태도를 이어갈 것이라는 희망은 그 겸손함과 모순되지 않았다.

따라서 금욕주의와 수도 생활의 부흥이 평범한 고대 러시아 수도사의 업적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과장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유명한 러시아 수도원인 트로이체-세르기예프 라브라의 창시자, 성 세르기이 라도네즈키를 가리킨다.

 

3. 성 세르기이 라도네즈키와 그의 수도원

성 세르기우스는 공동 생활을 재개할 때 성 테오도시우스와 거의 같은 방식을 따랐습니다. 유일한 차이점은, 성 테오도시우스가 이미 다른 사람인 성 안토니우스에 의해 설립된 수도원에 들어와 그곳에 자신의 영성적 흔적을 남겼다는 점입니다. 반면 성 세르기우스는 처음부터 개별 거주를 원칙으로 한 수도원의 창시자였다. 공동 생활로의 전환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작은 은둔처가 큰 수도원으로 성장해 가는 동안, 창시자가 수도자들에게 미치는 영적 영향력도 함께 강화되었다. 성 세르기이 라도네즈키의 행적은 그의 동시대인 에피파니우스에 의해 기록되었는데, 그는 성인의 수도원에서 수도사로 지내며 약 15년 동안 성인과 영적 교제를 나누었다[74] . 이 행적 기록은 특히 1392년 항목에 포함된 고대 러시아 연대기의 요약본으로서 막대한 가치를 지니는데, 이는 저자의 다소 과장된 문체에도 불구하고 사건들을 객관적이고 냉철하게 조명하고 있으며, 성서 작가 파코미우스가 후대에 재구성한 전기에 특징적인 도덕적 설교가 과도하게 담겨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에피파니우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성 세르기우스의 순수한 금욕적 성격적 특징이었다. 당대의 정치적 사건과 관련된 세르기우스의 활동은 그에게 있어 뒷전으로 밀려나는 반면, 파코미우스는 오히려 바로 그 점을 무엇보다도 강조한다. 에피파니우스는 기독교적 경건함 덕분에 성스러움의 경지에 오른 한 사람의 삶을 우리에게 전하는 반면, 파코미우스는 성스러움의 보편적인 본보기가 되어야 할 성인의 정형화된 이미지를 창조하며, 따라서 그는 전기에 사후 기적에 대한 묘사를 덧붙이고, 모든 면에서 세르기우스 라도네즈스키의 삶을 기독교적 수행의 모범으로 제시하고자 노력한다.

성인은 부유한 가정, 즉 로스토프 공국의 관료 귀족 가문 출신으로, 1314년 5월 3일 로스토프에서 멀지 않은 아버지의 영지에서 태어났으며, 세례를 받을 때 바르톨로메오라는 이름을 받았다. 행전에는 아이를 기다리던 그의 어머니가 일요일에 성찬 예식을 드리러 교회에 갔던 이야기가 전해진다. 복음서 봉독 전에 태아는 갑자기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울음을 터뜨렸고, 그 울음소리는 케루빔 찬송이 불릴 때와 사제가 “거룩하신 분께”라고 외치기 직전에 다시 반복되었다. 불안해진 어머니는 아이가 태어나면 그를 하느님께 바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태어난 후 아기는 비범한 행동을 보였다. 금식일에는 물론, 어머니가 고기를 먹었을 때도 젖을 거부했다. 바르톨로메오가 일곱 살이 되었을 때, 부모는 그를 교회 부속 학교로 보냈다. 그의 형 스테판은 읽고 쓰는 법을 금세 익혔지만, 어린 바르톨로메오에게는 그 지혜가 잘 따라주지 않아 선생님들에게 벌을 받기도 하고 다른 학생들에게 조롱당하기도 했다. 어느 날 바르톨로메오가 말을 데리러 들판으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그는 한 노승과 마주쳤는데, 노승은 소년의 슬픈 표정을 보고 왜 슬퍼하는지 물었다. 울면서 소년은 읽기를 잘하지 못한다고 털어놓으며 노인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노인은 바르톨로메오와 함께 그의 부모가 있는 집으로 가서, 부모님 앞에서 시편을 읽어 보라고 소년에게 지시했다. 모두의 놀라움 속에 바르톨로메오는 유창하고 훌륭하게 읽어냈다. 그날부터 바르톨로메오는 학업에 매우 뛰어난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다. 미래의 경건함의 등불이 될 이 소년의 시절에 얽힌 이 기적 같은 이야기는 성자 전기를 쓰는 이에게 세르기우스의 모습에서 인간성, 인내, 겸손이라는 주요 특징들을 부각시킬 기회를 준다. 바로 이러한 특징들이 이후 성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게 될 것이다. 그의 어린 시절은 다른 많은 아이들의 어린 시절과 마찬가지로, 아이들만의 걱정과 고통,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어린 시절의 걱정들 속에는 이미 그의 수행자적 여정의 시작이 깃들어 있었다.

과장된 종교성이 아닌, 소박하고 평범한 기독교적 삶이야말로 러시아의 민족적 경건함이 자라나고 꽃피는 토대이다. 오늘날의 수행자들, 즉 성 세라핌 사로프스키(† 1833)나 장로 레오니드 옵틴스키(† 1841)를 떠올려 보자면, 그러면 우리는 즉시 이 기초를 보게 될 것이다. 물론 러시아 수행자들의 모습에서 도덕주의적이고 수사적인 전설적 과장을 걷어낸다면, 이 기초는 언제나 진실이다. 비록 그러한 과장들이 종종 많은 기독교적 진리를 담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왜냐하면 기독교 수행자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 진정으로 인간적인 삶이라는 점이기 때문이다. 영혼을 파멸시키는 것은 큰 죄가 아니라, 눈에 띄지 않게 그러나 매 순간 수행자의 영혼을, 그리고 모든 기독교인의 영혼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상적인 유혹들이다. 우리는 고대 러시아 금욕주의의 이러한 특징을 즉시 알아차릴 수 있으며, 성 테오도시우스 페체르스키의 행적에서 이미 이를 발견할 수 있다. 비록 각 수행자는 뚜렷한 개성을 지니고 있지만 말이다.

1328년 직후, 작은 로스토프 공국이 성장하던 모스크바 대공국과 재통합되었을 때, 바르톨로메오의 아버지는 모스크바 지방의 마을인 라도네즈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영지를 받았습니다. 바르톨로메오는 이곳에서 청년 시절을 보냈다. 그는 영지에서의 일과 미래에 대한 생각과 고민 사이에서 삶을 나눴다. 그의 두 형제, 맏형 스테판과 막내 피터는 이미 결혼한 상태였고, 세 사람 모두 대공을 모실 때가 되었다. 당시 영지는 봉사로 인해 모스크바 대공에게 하사받은 것이었기에, 즉 영지 소유주는 대공을 모셔야 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르톨로메오는 이미 오래전부터 다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수도원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여러 번 간청했다. 부모는 반대하지 않았으나, 미혼인 아들이 자신들이 죽을 때까지 곁에 머물기만을 바랐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가족의 사정이 바뀌었다. 형님의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스테판은 근처에 있는 수도원으로 떠났다. 부모님은 이미 노년에 접어들어, 고대 루스의 종교적 신념에 따라 남은 생을 수도원의 고독 속에서 보내기로 결심했다. 이제 바르톨로메이는 소망하던 삶의 길로 들어설 자유가 생겼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막내 동생에게 물려주었고(후대에 파호미우스가 교훈을 주기 위해 수정한 전기에 따르면,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형이 있는 수도원으로 찾아가 곧 그를 설득하여 수도원을 떠나 울창한 숲속에서 고된 은둔 생활을 시작하게 했다.

수도원 담장 바로 너머에는 짙은 소나무 숲이 어두운 벽처럼 우거져 있었기에, 형제들은 그리 멀리 갈 필요가 없었다. 숲 속으로 10킬로미터 조금 넘게 들어가자, 작은 언덕 위 개울가에서 그들은 아름다운 숲속 빈터를 발견했다. 처음에는 초가 오두막에서 지내다가, 나중에는 나무로 된 수도실과 성 삼위일체를 기리는 작은 성당을 지었다. 축복과 성당 봉헌 허가를 받기 위해 그들은 모스크바의 대주교를 찾아갔고, 그곳에서 예배에 필요한 모든 것을 받은 뒤 돌아왔다. 성당 봉헌식 후 사제는 형제들을 떠났지만, 이제 그들은 수지 냄새가 나는 새 성당에서 기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사제 서품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성찬식을 집전할 수는 없었다. 금식과 기도 속에서, 세상과 동떨어진 숲속에서, 오후가 지나자마자 어스름이 내리고 겨울이 끝없이 이어지는 듯한 그곳에서 보낸 그들의 은둔 생활은 결코 쉽지 않았다. 맏형 스테판은 그처럼 혹독한 수행 생활을 오래 견디지 못하고 모스크바의 한 수도원으로 옮겨갔다.

바르톨로메오는 홀로, 완전한 고독 속에 남게 되었는데, 이것이 그의 수행 여정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다.

그로부터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 미트로판이라는 이름의 늙은 수도사가 지내고 있었는데, 그는 종종 은둔자의 초대를 받아 전례를 집전하고 그에게 성체를 나누어 주곤 했다. 어느 날 바르톨로메이는 그 수도사에게 자신을 수도자로 입회시켜 달라고 청했다. 입회식에서 그는 세르기라는 이름을 받았다. 미트로판의 축복에 따라 새로 입회한 수도사는 완전한 고독 속에 머물며, 울창한 숲의 은둔 속에서 고대 수행자들의 본을 따라 유혹과 싸우고 이를 이겨내는 삶을 살게 되었다. 수행자가 유혹을 이기거나, 유혹에 굴복하여 넘어지곤 했던 이 결정적인 초기 은둔 생활의 몇 해는, 훗날 러시아 수도 생활의 등불이 될 그에게 가장 힘들면서도 동시에 영적으로 가장 풍요로운 시기였다. 어려웠던 것은 금욕적 수행 그 자체뿐만이 아니었다. 선택한 길과 자신의 능력에 대한 의심, 사탄과 자신의 인간적 본성에서 오는 유혹, 갈증과 굶주림, 영혼을 가다듬고 지속적인 기도에 대한 미숙함 등이 있었다. 숲속의 고독 또한 힘들었다. 여름철 생활 조건은 물론 더 수월했지만, 겨울에는 끝없이 펼쳐진 소나무 숲과 땅을 뒤덮은 단조로운 눈 덮인 풍경, 낮에는 죽은 듯한 고요함, 긴 밤에는 휘몰아치는 눈보라의 울부짖음, – 이 모든 것이 시편 읽기를 방해하고, 기도에 마음을 모으지 못하게 하며, 두려움과 버림받고 방치된 느낌, 자신의 연약함과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얼마 후, – 세르기우스의 행적을 기록한 수도사 에피파니우스가 썼듯이 – 즉, 그가 사막에서 홀로 지내며 명상한 기간이 한두 해였는지, 그보다 더 길었는지, 아니면 더 짧았는지는 알 수 없으니,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이 사막 수도자의 수고가 실제로 얼마나 큰지 아시며, 그분만이 경험이 없는 자를 도우시고 그를 경험 많은 자로 만드십니다…

그러나 빽빽한 숲의 험준함도 사람들에게 참된 하나님의 전사를 숨길 수는 없다. 그에 대한 명성은 세상에 퍼져 나가고, 그의 모습은 세속적인 삶에 절망한 사람들을 끌어당기고 부른다. 어느 날, 구도자들이 세르기우스를 찾아와 주님을 위하여, 그리고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그와 함께 수행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처음에는 매우 마지못해 하다가, 나중에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세르기우스는 영적 삶에서 자신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초보 수도자들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점차 그 주위에 형제들이 모여들었고, 이들은 그의 수도적 이상을 지키는 수호자가 되어 그의 위업에 대한 명성을 루스의 가장 외진 구석구석까지 전파했다. 세르기우스 자신에게 형제들이 찾아온 것은 새로운 영적 여정의 시작이었으며, 그의 고독한 작은 은둔처에 있어서는 세상과의 교류가 재개된 것이 역사적인 의미를 지녔는데, 이는 바로 그로 인해 러시아 민족의 종교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영향으로 그의 나무 오두막과 조그만 교회는 루스의 가장 위대한 수도원인 트로이체-세르기예프 라브라로 변모했으며, 그 황금 돔들은 숲 위로 솟아올라 사람들을 이곳, 성지가 된 라브라로 불러모은다.

이 새로운 수도원의 초기 모습을 그려보려 한다면, 수도원이 대체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이해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세르기우스의 작은 목조 교회는 숲속의 빈터에 서 있었는데, 이곳은 새로 온 수도사들에 의해 확장되었다. 그 주변에는 수도사들의 거처인 아주 작은 목조 오두막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이는 짐승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어두운 숲속이 그들에게 있어서는 이미 잊어야 할 세상임을 수도자들에게 상기시키기 위함이기도 했다. 오두막들 사이의 땅은 숲으로부터 큰 고생을 겪으며 개척해 낸 것으로, 수도사들의 생계를 위한 텃밭으로 쓰였다. 수도원이 자리 잡던 초창기 몇 해는 고된 고난과 결핍으로 가득 찬 시기였다. 당시 아직 평범한 수도사에 불과했던 세르기우스는 12명을 넘지 않는 이 작은 공동체를 이끌었다. 수도원 일을 수행하고 기도하는 데 있어 그는 본보기가 되었으며, 수도원 형제들을 대할 때는 언제나 소박하고 사랑이 넘치며 온유했다. 세월이 흐르자 세르기우스는 수도원의 공동 이익을 위해 제대로 임명된 원장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겸손함으로 인해 그는 스스로 이 직분을 맡고 싶어 하지 않았다. 수녀들의 끈질긴 간청 끝에 세르게이는 마침내 그들의 바람을 들어주기로 결심했다. 사제 수도사로 서품받고 원장으로 임명된 후—이는 대략 1344년 무렵이었다—세르게이는 동료들의 눈에 비친 도덕적 권위 외에도 정통적인 권위를 얻게 되었다.

젊은 원장(당시 세르기우스는 30세였다) 앞에는 엄격한 공동체 생활을 도입한다는 위대하고 중요한 목표가 놓여 있었지만, 그는 이 목표를 실현하는 데 점진적으로 접근했다. 새로운 높은 성직에 올랐음에도 그는 형제들에 대한 태도를 변함없이 유지했으며, 언제나 모든 면에서 그들에게 수도자의 미덕을 구현하는 존재였다. 한편 수도원의 명성은 점점 높아져 갔다. 스몰렌스크 출신의 시몬이라는 이름의 아키만드리트는 젊은 수도원장의 위업을 듣고, 자신의 수도원을 떠나 세르기우에게 와서 그의 수도원에서 구원을 얻고자 했다. 그가 가져온 자금 덕분에 성 삼위일체를 기리는 큰 성당 건축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수도자 수는 늘어났지만, 수련생들은 엄격한 원장으로부터 수도사 서품을 받기 전에 비교적 긴 수련 기간을 거쳐야 했다.

수도원은 여전히 개별 거주 규율을 따르고 있었다. 수도사들 사이에는 공동 식사가 없었으며, 공동 생활의 원칙은 오직 전례적으로, 즉 공동 기도에서만 드러났다. 게다가 세르기우스는 수도원의 수도사들을 위한 영적 지도자였는데, 이는 당연히 수도사들의 영적 성장에 큰 역할을 했다. 이러한 면에서 세르기우스의 활동은 성 테오도시우스 페체르스키의 활동을 연상시켰다. 세르기우스의 행적을 통해 우리는 수도사들이 밤낮으로 원장의 끊임없는 보살핌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수도원의 가난과 궁핍함 때문에 자신의 금욕적 요구 사항을 이행하도록 하는 것은 세르기우스에게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원장인 그는 수도사들이 수도원 담장 밖에서 자선을 받는 것을 단호히 금지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전기는 가장 극심한 궁핍의 시기와 세르기예프 수도원 역사상 첫 번째 기적을 연결 짓고 있다. 수도원 정문 앞에 갓 구운 빵과 생선을 실은 마차가 갑자기 멈춰 섰는데, 마부 말에 따르면 이는 알려지지 않은 은인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고 한다. 성 요셉 볼로콜람스키(† 1515)는 세르기예프 수도원이 궁핍하던 시절, 예배용 서적이 자작나무 껍질에 기록되었다고 기록했는데, 그중 일부는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있다. 수장직을 맡은 지 10년 또는 11년이 지난 후, 즉 1354년경에야 세르기우스는 공동 생활 규율을 도입했으나, 이는 일부 수도사들의 반대에 부딪혀 그들이 곧 수도원을 떠나는 결과를 낳았다. 이 사실은 당시 수도 생활에 있어 수도원 생활의 기초인 ‘키노비아’가 얼마나 낯선 것이었는지를 가장 잘 보여준다. 그러나 가장 힘든 궁핍의 시절은 이미 지나갔고, 세르기우스는 이제 공동 생활에 필요한 건물들을 지을 기회를 얻게 되었다. 식당, 수도원 주방 및 기타 생활 시설들이 지어졌다. 수도사들 중에서 상시 봉사를 담당할 수도사들이 선발되었다. 수도사들의 수는 늘어났고, 공작과 대공을 포함한 경건한 사람들의 헌물이 세르기예프 수도원으로 쏟아져 들어왔으며, 이 수도원은 해가 갈수록 러시아 민족의 종교 생활에서 더욱 두드러진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부는 수도원 수도자들의 영적 삶에 있어 위험 요소가 되기도 했다. 세르기우스의 활동은 점점 더 큰 규모로 확장되었으며, 그의 전기는 그가 목자의 은사와 동시에 금욕적인 엄격함을 바탕으로 수도원을 어떻게 운영했는지에 대한 여러 사례를 보여준다. 수도원은 더 이상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여 있지 않았고, 수도원 성벽 근처에는 농민 마을들이 생겨났으며, 수도원은 세속적인 일에 휘말리게 되었다. 수도원은 동산과 부동산을 소유하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많은 수도사들이 수도원 성벽 밖에서 다양한 종류의 봉사를 수행해야만 했다. 이제 이곳은 영적 수행의 장소일 뿐만 아니라, 인접한 토지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경제 기관으로 변모해 갔다.

트로이체-세르게이예프 수도원의 역사는 고대 러시아 수도원 식민화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2~3십 년 만에 숲속의 작은 은둔처였던 곳에 건물이 들어선 주거 공간이 형성되었다. 14세기와 15세기의 다른 수도원들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수도원의 창시자나 고독을 추구하던 수도사는 울창한 숲으로 들어가, 이를 통해 후속 식민지화의 길을 닦았다. 볼고그와 벨로제르스크 지역, 그리고 더 나아가 백해에 이르기까지 새로 설립된 작은 은둔처들은 고대 러시아 식민지화의 이정표가 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V. 클류체프스키가 말하듯이, “고대 러시아의 식민지화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첫째, 숲속의 은둔 수도원은 그 자체로, 좁은 목재나 석조 담장 안에 자리 잡은 채, 비록 세속의 농민 마을과는 달랐지만 농업 정착지를 이루고 있었다. 수도사들은 농민들처럼 숲을 개간하고, 텃밭을 가꾸며, 밭을 갈고, 풀을 베었다. 그러나 수도원의 영향력은 울타리 밖에서 살던 주민들에게까지 미쳤다. 우리는 곧 은둔 수도원 주변에 세속적인 농민 마을들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보게 될 것이며, 이 마을들은 수도사 형제단과 함께 수도원 교회로 향하는 하나의 교구를 이루었다… 이후 수도원은 사라졌지만, 수도원 교회를 중심으로 한 농민 교구는 남아 있었다… 이처럼 은둔 수도원의 움직임은 미래의 농촌 교구들의 움직임과 같았으며, 이들 교구는 대부분 해당 지역에서 최초로 형성된 것이었다. 둘째, 수도사들이 가는 곳이면 농민들도 그곳으로 향했다. 그들 모두에게 주어진 길은 하나였는데, 바로 북부와 북동부의 자유로운 황야로, 그곳에서 농민은 드넓은 땅에서 농사를 짓고 야생림을 개간해 경작지를 만들 수 있었으며, 수도사는 침묵의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75] .

초기의 작은 은둔처가 다시 세상과 접촉하게 된 거대한 수도원으로 변모한 것, 이것이 바로 많은 러시아 수도원의 운명이었다. 이러한 변화가 긍정적인 결과(더 폭넓은 사회·기독교적 봉사의 기회)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결과(수도원 생활의 세속화)도 가져왔음은 분명하다. 세르기우스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수도원에서도 이러한 결과들이 나타났지만, 그가 원장직을 맡았던 시절에는 수도원 생활의 기초인 수도사 공동체를 엄격히 지켜냈다. 이는 수도사들이 그의 비범한 영적 은사를 인정해 주었고, 그의 굳건한 신앙과 강인한 인격 덕분이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그는 수도 형제들이 선출한 수도원장이라기보다는, 성스러움의 문턱에 서 있는 사람에 가까웠다. 그의 행적을 기록한 수도사 에피파니우스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는데, 그의 이야기는 냉철함과 꾸밈없는 소박함으로 신뢰를 불러일으킨다. – 세르기우스는 수도원 운영과 관련된 수많은 업무를 수행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영적 삶을 갈고닦았으며, 내적 수행을 통해 영혼 정화의 단계에서 영적 깨달음의 단계로 올라섰고, 이미 그 당시 신비주의자였으며 영성의 최고 단계인 하느님을 관조하고 그분과 하나 되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이처럼 단순하고 때로는 마치 유아처럼 순수한 에피파니우스의 서술을 통해 세르기이는 우리 앞에 최초의 러시아 신비주의자로 나타나는데, 이는 고대 러시아 성자 전기에 그 어디에서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이다.

어느 날, 이사아키와 마카리라는 두 형제는 밝은 천사들이 성자 곁에 서서 그와 함께 신성한 전례를 집전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 환상에 대해 공포에 질린 형제들이 묻자, 세르기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자신이 이런 비지상적인 은총을 받은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고 말했으나, 자신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 일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금지했다. 또 다른 때에는 그의 시종 수도사 미하이가 성 베드로와 요한 사도들이 동반한 성모 마리아의 기적적인 현현을 목격했다. 이 환상에 대해 세르기우스는 직접 마카리우스와 이사아키우스 형제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세 번째 기적은 수도사 시몬이 목격했다. 전례 중에 성체를 영하기 직전, 제단 전체가 빛으로 가득 찼고, 불의 광선이 위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담긴 성작으로 내려왔다. 그 후 성 세르게이는 성체를 영했다. 놀라워하는 시몬의 질문에 수도원장은 이것이 성령의 은총이었다고 대답했다…

그토록 높은 영적 경지에 이른 수행자가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행적은 기적과 예언, 병자들의 치유, 성인의 예지력에 대해 전해준다. 성 이구멘은 대공 디미트리에게 타타르족과의 전쟁(1380년)을 위한 축복을 내렸고, 쿠리코보 평원(도나 강 상류)에서의 승리를 예언했다. 세르기우스와 고대 루스의 가장 위대한 선교사인 페름의 주교 스테판이 서로 수 킬로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절을 하며 서로를 맞이했던 이야기는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이러한 일화들은 대부분 성인의 생애 말년에 일어났습니다.

그는 1392년 9월 25일, 향년 78세로, 수도원에서 58년간의 수행 생활을 마친 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삶은 겸손과 소박함, 수고와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성 세르기우스의 위대한 친구이자 숭배자였던 모스크바 대주교 알렉시우스(† 1378)는 성 이구멘에게 자신의 후임으로 주교좌를 이어받으라고 청했으나, 세르기우스는 은둔자의 누더기 옷을 호화로운 주교의 예복으로 바꾸기를 원치 않았다. 성 세르기이 라도네즈키는 러시아의 수행자들과 성인들 중에서도 그의 겸손과 소박함으로 인해 특별한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러나 역사는 그를 고대 러시아 수도 생활의 주된 정립자이자, 러시아 수행 전통의 번영에 기여한 금욕주의 학파의 창시자로도 평가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학파 내부에서, 혹은 그 영향 아래에서 수많은 기독교 수행자들이 성장했기 때문이다.

 

4. 세르기우스의 금욕주의 ‘학파’와 14~15세기의 다른 수도자들

성 세르기이 라도네즈키 – 러시아 수도 생활의 진정한 창시자이다. 그의 영향력은 러시아 수도원에서 공동 생활의 부흥을 이끌어냈을 뿐만 아니라, 14세기와 15세기 수도 생활이라는 거대한 나무의 기초이자 뿌리가 되었다. 이 나무의 거의 모든 가지가 세르기이 수도원의 정신에서 영양분을 얻고 있다.

또한 공동 생활 규율을 따르는 여덟 개의 수도원[76] 도 그에게 설립을 빚지고 있다. 14세기와 15세기에 수도 생활의 위대한 창시자들이었던 여덟 명의 수도원 설립자들은 모두 성 세르기우스의 제자들이었다.

그중 세 명인 성 파벨(† 1429), 성 세르기(† 1412), 성 실베스트르(† 1379)는 볼고그라드 지방의 오브노르스키 볼로스티에 위치한 자볼지예에서 수도 생활을 했으며, 그곳에 세 개의 수도원을 설립했다. 성 바오로 오브노르스키는 특히 엄격한 수행 생활로 유명하며, 수도원을 설립하기 전부터 3년 동안 나무 구멍 속에서 살았다. 그는 11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수도원에서는 장로 제도가 번성했다는 증언이 있다[77] . 네 번째 제자인 성 아브라암 갈리치스키(† 1375년 이후)는 갈리치(코스트로마 주) 주변에 네 개의 수도원을 설립했다[78] . 코스트로마 지방에 있는 또 다른 수도원[79] 은 세르기우스의 제자였던 니키타에 의해 설립되었다. 야코프(젤레즈노보르스키, † 1442) 역시 세르기우스의 제자였으며, 이 수도원의 창시자이기도 했다[80] . 모스크바 지역에는 세르기우스의 제자들이 두 개의 수도원을 설립했는데, 하나는 메포디우스(† 1392)가, 다른 하나는 사브바 스토로제프스키가 세웠다[81] .

또 다른 그룹은 트로이체-세르기예프 수도원의 수도자 집단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성 세르기우스와 긴밀한 영적 교류를 나누었던 수행자들, 즉 그의 ‘대화 상대들’, 다시 말해 자주 그를 찾아가 그의 조언을 따랐던 이들로 구성된다.

그중에서는 키예프-페체르스크 수도원의 수도사 스테판 마흐리슈스키(† 1406)를 언급해야 하는데, 그는 1355년경 세르기우스를 찾아왔다. 그는 두 개의 수도원을 설립했다. 페레야슬라블 출신의 성 디미트리(† 1392)는 ‘프릴루츠키’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볼가 강 북쪽에 두 개의 공동 생활 수도원을 설립했다. 수즈달 대주교 디오니시우스(† 1385)는 니즈니 노브고로드에 수도원을 설립하여 이 도시와 세르기우스의 학파 사이에 연결 고리를 마련했다. 성 스테판, 페름 주교(† 1396)는 러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선교사로, 이교도인 핀란드 부족들을 개종시키는 위대한 기독교적 사명을 수행했으며, 새로 개종한 땅에 네 곳의 수도원을 세웠다[82] .

그러나 이 수도원 설립자들의 별자리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별은 벨로제르스키의 성 키릴(† 1427)로, 그는 벨로예 호숫가에 유명한 키릴로프 수도원을 세운 인물이다. 성 키릴은 특히 엄격한 수행자 집단의 영적 지도자가 되었으며, 이 집단은 훗날 15세기 말과 16세기 전반에 이르러 그 시대 수도 생활의 특별한 흐름인 ‘자볼제 장로파’를 형성했는데, 이는 성 닐 소르스키를 통해 성고르스크와 이시하스파 신비주의와 연결되어 있다.

러시아 수도원 역사에서 성 키릴은 세르기이 라도네즈키에 이어 아마도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공동 생활을 열성적으로 옹호한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15세기에 그의 수도원 규율은 동시대인들에게 가장 엄격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는 보야르 가문 출신(1337년 출생)이었으며, 아주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었다. 오랫동안 그는 대공의 최측근에 속했던 보야르 벨야미노프의 시중을 들었다. 키릴은 43세 무렵, 스테판 마흐리슈스키의 영향을 받아 비로소 수도 서원을 결심하고 시모노프 수도원에 정착했다. 그는 엄격한 금욕 생활과 지칠 줄 모르는 노동으로 유명해졌다. 성 세르기우스가 시모노프 수도원을 방문할 때면, 그는 무엇보다 먼저 키릴을 찾아갔다. 그러나 엄격한 생활과 은둔을 사랑하는 성향은 부유한 수도의 수도원과는 잘 맞지 않았기 때문에, 키릴은 아르히만드리트이자 수도원장이 되었음에도 그 직책을 오래 맡지 못했다. 그는 그 자리를 떠나 처음에는 자신의 독방에서 엄격한 은둔 생활을 하다가, 이후 수도원을 떠나 ‘북쪽 황야’, 즉 험준하고 늪지대가 많은 벨로제르스카야 숲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1393년, 성 키릴( )은 자신의 수도원을 설립하고, 그곳에 특히 엄격한 공동 생활 규율을 도입했다. 그는 이 수도원에서 30년을 보냈으며, 수많은 수도사들이 그에게서 수련을 받았다. 그는 1427년 6월 9일 세상을 떠났다[83] 키릴이 생전에 이미 그의 수도원 주변에는 많은 작은 은둔처들이 생겨났는데, 이 수도원은 그들에게 영적 중심지 역할을 했다. 이 수도원들은 유명한 수도원 지대인 ‘자볼지예’를 형성했으며, 이는 영적 고향이자 수도원 토지 소유권에 맞서 싸운 특히 엄격한 금욕주의 경향의 보루가 되었다. 자볼지예에서는 러시아 교회 역사상 뛰어난 인물인 성 닐 소르스키도 수도 생활을 했으며, 그는 동시대인들뿐만 아니라 18세기와 19세기의 수도원 생활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84]

앞서 언급했듯이, 키릴로-벨로제르스키 수도원에서는 새로운 수도원을 설립한 수많은 수도자들이 영적으로 성장했다.

그중에서도 먼저 사바티이(† 1435) 수도사를 꼽을 수 있는데, 그는 벨로모르(Belomorskoe)의 한 섬에 솔로베츠키 수도원[85] 을 설립했다. 그 외에도 알렉산드르 오셰벤스키(† 1479), 마르티니아노 벨로제르스키(† 1483)를 언급해야 하는데, 이들은 성 키릴의 제자이자 1447–1454년에 트로이체-세르기예프 수도원의 원장직을 역임했다.[86]

마지막으로, 키릴로프 수도원 출신인 코르닐리 코멜스키(† 1537)도 있는데, 그의 제자들은 15세기 말과 16세기 초에 루스 북부에 많은 수도원을 설립했다. 주로 서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스키타들이었으며, 동시대인들은 이를 ‘성 코르닐리 라브라’라고 불렀다. 성 코르닐리우스는 성 키릴과 마찬가지로 보야르 가문 출신이었으며, 15세기 중반 무렵 20세의 나이에 키릴로-벨로제르스키 수도원에 입회하여 겐나디라는 이름의 장로에게 복종하며 가장 힘든 일을 수행했다. 이러한 생활은 10~15년 동안 이어졌다. 그 후 코르닐리우스는 몇 년 동안 수도원을 전전하며 방랑 생활을 했다. 도시 수도원 생활에 불만을 품고, 완전한 은둔을 찾아 코르닐리우스는 볼고그 지역, 이른바 코멜 숲으로 향했다. 그곳은 울창하고 험준하며 늪지대가 많아, 아직 식민지 개척자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었다. 그는 이곳 숲의 고요함 속에서 몇 해를 보냈다. 그러나 그의 생애는, 전기에 기록된 바와 같이, 모든 하나님의 전사에게 닥치는 고난과 유혹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이는 엄격한 은둔자에게 세상의 명성을 안겨주곤 한다. 존경받는 코르닐리우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전나무 숲 깊은 곳에서 엄격한 금욕 생활을 실천했음에도 그는 세상의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고, 점차 구원을 찾는 새로운 수행자들이 그 주위에 모여들었다. 숲에서 20년을 보낸 후, 이미 50세가 넘은 코르닐리우스는 수도 공동체를 정식 수도원으로 조직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그의 엄격한 요구 사항으로 인해 몇 가지 어려움이 발생하여, 그는 잠시 동안 자신의 수도원을 떠나야만 했다. 성 코르닐리우스는 특히 수도자들을 위해 직접 규율을 집필한 것으로 유명하다. 코르닐리우스의 규율은 독자적인 저작이 아니다. 이 규율에는 한편으로는 성 닐로스 소르스키의 『스키타 생활에 관한 가르침』, 다른 한편으로는 성 요셉 볼로츠키의 『영적 지침서』의 영향이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이 두 저작은 서로 다른 두 가지 수도원 교육 체계를 묘사하고 있다. 이처럼 이색적인 조합은 코르닐리우스가 공동 생활 수도원을 운영해야 했으나, 동시에 자신의 은둔 생활에서 얻은 영적 경험을 잊지 않으려 했기 때문으로 설명된다. 게다가 코르닐리우스가 니라 장로를 개인적으로 알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데, 니라 장로는 아마도 키릴로프 수도원에서 그와 함께 살았을지도 모른다. 코르닐리우스는 닐의 『교훈』에서 개별 수도자의 영적 양육에 중요한 요소인 ‘지적인 기도’를 차용했다. 요시프의 『영적』은 공동 생활의 기초를 정립하고 예배 지침서로 활용되었다. 코르닐리의 규율은 수도원의 토지 소유에 반대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는 다시 한번 닐의 영향을 보여준다. 코르닐리 코멜스키는 1537년 5월 19일에 선종했다. 그의 행적기—고대 러시아 성자 전기의 보석이라 할 수 있는—는 수도사 나파나일(Нафанаил)이 집필했으며, 1600년에 코르닐리우스( )는 사후 기적이 확인된 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87] . 코르닐리우스 코멜스키 수도원에서는 볼로그다에서 백해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에 흩어져 있는 새로운 수도원들의 설립자들이 다수 배출되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인물로는 노보예제르스키(또는 벨리, † 1532)의 키릴, 노보예제르의 크라스노예 섬에 수도원을 세운 창시자, 코스트롬의 겐나디(† 1565), 그리고 이랍스키(† 1527)의 필립이 있다[88] .

지금까지 우리는 성 세르기우스의 영적 영향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수행자들에 대해 이야기해 왔다. 그러나 그들 외에도 정성을 다해 수행하며 러시아 수도원 역사에서 두드러진 위치를 차지한 또 다른 수행자 집단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쿠벤스카호수의 바위투성이 섬에 위치한 스파소-카멘노이 수도원의 수도사들입니다. 이 수도원은 13세기 중반에 설립되었으나, 디오니시우스 수도원장 시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특별한 위상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리스인이나 남슬라브족 출신으로, 아토스 산을 방문한 후 모스크바로 왔습니다. 14세기 말(1389년 이전)에 디오니시우스는 스파소-카멘노 수도원의 수도원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이곳에 엄격한 아폰산 규율을 도입했다. 디오니시우스는 1418년까지 수도원에 머물렀으며, 그해 고대 도시 로스토프의 대주교좌를 맡게 되어 1425년 그곳에서 선종했다. 스파소-카멘니 수도원은 많은 훌륭한 수행자들을 배출했으며, 이들은 차례로 쿠벤 호수 주변에 새로운 수도원을 설립하여 그곳에 기독교의 빛을 전파함으로써 위대한 선교 업적을 이루었다[89] .

여기서 가장 먼저 언급해야 할 인물은 성 디오니시우스 글루시츠키(† 1437)이다. 그의 생애는 온유와 자비, 친절과 겸손으로 가득 찬 수행자의 모습을 그려내는데, 이러한 미덕들에서 그는 성 세르기우스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그는 글루시차 강변(볼고그라드 지방)에 지은 자신의 수도원 교회를 직접 그린 성화로 장식했는데, 이는 고대 러시아 성인들 중에서는 비교적 드문 성화 그리기 재능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의 행적에는 그가 신성한 성찬 예식을 위한 성기와 기구들—디스코스, 성배, 별 모양의 성물—을 매우 능숙하게 제작했다는 사실도 기록되어 있다. 디오니시우스는 자신의 수도원에 키노비아를 도입했으며, 서로 가까운 곳에 총 세 곳의 수도원을 설립했는데, 그중에는 여성 수도원도 포함되어 있다. 그의 선교 활동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농민 마을에 본당 교회를 건축한 것이었다[90] .

그에게는 그레고리라는 제자가 있었는데, 펠셴스키(† 1442)라고 불렸다[91] . 15세기 말이나 16세기 초에 쓰인 그의 행적록에서 우리는 디오니시우스 글루시츠키와 그레고리, 즉 장로와 그의 제자 사이의 대화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다; 비록 이 이야기가 실제로 있었던 대화를 그대로 재현한 것은 아닐지라도, 이는 이시하스주의 사상이 볼고다 숲의 수도원 공동체에 스며들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이다. 성 디오니시우스는 마음과 영의 수양에 대해 말하며, 이는 영혼을 악하고 죄 많은 생각으로부터 정화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연합으로 이끈다고 설명한다. 아마도 이 대화에는 디오니시우스 자신이 스파소-카멘노 수도원에서 성산 출신의 수도원장 지도 아래 수련했던 가르침이 반영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성 디오니시오의 제자 중에는 1446~47년에 라반키 강변에 작은 은둔처를 세운 필립 라반스키도 있었으며, 그보다 조금 뒤에는 스테판(† 1542)이라는 수도사가 활동했는데, 그는 엄격한 은둔자로 역시 은둔처[92] 를 세웠다.

성 디오니시오스의 동시대인인 수도사 알렉산드르 쿠슈츠키(† 1439)는 쿠슈티 강이 쿠벤스코예 호수로 흘러드는 지점, 스파소-카멘노예 수도원 근처에 은둔처를 세웠다[93] .

이들은 14세기와 15세기의 수도원 정착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네 가지 주요 은수자 집단이다. 이 중 세 집단은 성 키릴 벨로제르스키와 성 코르닐리 코멜스키를 통해 성 세르기 라도네즈스키로 거슬러 올라간다. 물론, 이들로만 그 시대의 모든 수도원 정착을 다 설명할 수는 없다. 그 외에도 소규모의 수도자 집단과 개별 수도사들이 이에 참여했다.

그중에서는 니즈니노브고로드의 디오니시우스(† 1385년), 수즈달 대주교와 연관된 소규모 은수자 집단을 언급해야 하는데, 그는 니즈니노브고로드에 페체르스키 수도원을 설립했다; 이 수도원의 수도사 중 유프티미(† 1404)라는 이는 수즈달에 스파스키 수도원을 설립했는데, 이 수도원은 이후 교회 생활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94] . 대주교 디오니시우스는 앞서 언급했듯이 성 세르기우스의 동료 중 한 명이었다.

모스크바 루스에서 매우 숭배받았던 성 알렉산드르 스비르스키(† 1533)의 영향 아래 성장한 소수의 수행자들에 대해서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그의 이름은 두 수도원의 설립과 관련이 있다. 그의 제자들은 라도가 호수 북동쪽, 서로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세 곳의 은둔처를 추가로 설립했다. 이 그룹은 이미 16세기에 속한다.[95]

성 에우프로신 프스코프스키(† 약 1481년)[96] 가 이끄는 프스코프의 은수자들과, 노브고로드 주변에 여러 작은 은둔처를 설립하여 그곳의 도시 수도원들과 행정적·경제적 유대를 맺었던 노브고로드 수도사들[97] 은 별도의 그룹을 이룬다.

후대에 널리 알려진 발라암 수도원 역시 14~15세기의 수도원 식민지화에 참여했다. 이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북동쪽 깊은 곳인 오네가 호수까지, 심지어 그 너머까지 진출했다[98] .

우리는 루스에서 가장 중요한 수도자 집단과 수도원 식민화의 주요 방향들을 살펴보았다. 역사적 사실에 따르면, 수도자들은 식민화 과정에 참여함으로써 위대한 기독교 계몽의 위업을 이룩했을 뿐만 아니라, 거대한 국가·정치적 및 경제적 업적을 달성했으며, 그 결과 볼로그다에서 백해에 이르는 광대한 기독교화된 영토가 모스크바 국가에 편입되었다. 따라서 순수한 수도원적 흐름과 경향은 고대 루스의 국가·정치 생활에서 그토록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수도원 공동체는 종교적 영향력뿐만 아니라 국가 내에서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도 얻게 되었으며, 이는 특히 16세기 중반에 뚜렷이 드러났다. 수도원 내 파벌인 ‘비소유파’와 ‘요셉파’(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다루겠다) 간의 갈등은 이 주장을 잘 입증해 준다.

수도계에게는 그 창시자이자 스승인 성 세르기우스와 키릴, 성 파블로와 코르닐리우스의 이름은 수도원 공동체에 영원히 기억되고 있다. 왜냐하면 이 분들은 한편으로는 영적 권위로 수도 생활의 기초를 다졌을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러시아 고유의 금욕주의가 지닌 가장 훌륭한 특성을 몸소 실천함으로써 수도자들에게 본보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수도원들에 설립자들의 정신이 살아 있는 한, 수도 생활의 전성기는 계속되었으며, 그 형태와 내용은 수도사 세대마다 대대로 전해졌다. 그러나 수도 생활의 내적 결속이 무너지자마자, 수도원들은 위기의 시기를 맞이했다. 일부 수도사들은 이미 15세기 말에 위험이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했다. 그들은 엄격한 키노이아의 근간 자체가 위협받고 있으며, 이대로라면 그 근간이 완전히 무너질 것임을 깨달았다. 이러한 위험은 수도원의 토지 소유 확대에서 비롯되었는데, 그 원인은 국가의 종교적·경제적 생활 양쪽 모두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수도원 생활은 개혁과 금욕주의의 새로운 부흥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구원의 수단으로 엄격한 공동 생활의 회복이 아니라, 빈곤 서원의 철저한 준수와 수도사들의 금욕적·신비적 양성을 위한 학교로서의 장로 제도를 바탕으로 한 개별 거주가 제안되었다.

 

 

제4장. 요세프 볼로츠키와 닐 소르스키. 두 금욕주의 경향 간의 논쟁

 

1. 성 요셉 볼로츠키 수도원장 및 그의 교회·정치적 견해

15세기는 러시아 수도 생활의 전성기였다. 국가 생활 속에서 수도원의 영적 권위를 높인 이 전성기는, 어떤 식으로든 성 세르기이 라도네즈스키의 학파와 연관되어 있던 수많은 수도자들의 결실 있는 영적 활동의 결과였다. 엄격한 공동 생활의 결정적 중요성을 강조했던 세르기우스의 금욕적 견해는 수도원 생활의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성 세르기우스는 금욕적 양성을 위한 완전한 체계를 제시하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후계자들의 영적 은사에 더 많이 의존했다. 그리고 이미 그의 제자들 중 일부—성 파블로 오브노르스키나 성 키릴로 벨로제르스키—에게서 그들만의 독특한 영적 개성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금욕에 대한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접근 방식의 결과는 곧바로 드러났다. 새로운 세대의 수행자들에서 우리는 새로운 특징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특징들은 15세기 마지막 25년 동안 이미 뚜렷하게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수도계에서는 기독교 금욕의 본질을 서로 다르게 이해하는 두 가지 흐름이 형성되었다. 그 결과 러시아 수도계는 두 개의 대립하는 파벌로 나뉘었다. 하나는 ‘요시플리안’(그 주요 대표자인 요시프 볼로츠키의 이름을 따서 불림)으로 알려져 있고, 다른 하나는 ‘비소유파’ 또는 ‘자볼즈키 장로들’로 불린다.

모스크바에서 멀지 않은 볼로카 람스키 인근에 위치한 볼로콜람스카야 수도원의 원장 요시프는 계보상으로도 세르기이 라도네즈스키의 학파와 연결되어 있다. 성 세르기우스의 제자 니키타는 세르푸호프에 수도원을 설립했으며, 생애 말년을 보로브스크(칼루가 주)의 비소츠키 수도원에서 보냈는데,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영적 지도 아래 있던 제자를 두었다. 파프누티라는 이름의 이 제자는 세례를 받은 타타르 가문 출신으로, 1445년경 보로프스크 인근의 울창한 숲속에 수도원을 세웠다. 파프누티우스와 성 세르기우스(니키타를 통해) 사이의 영적 유대는 동시대인들과 후대 모스크바 사회[99] 의 눈에는 그에게 특별한 권위를 부여했다. 파프누티우스는 거의 30년 동안 보로브스크 수도원을 운영했다. 그는 매우 유능한 관리이자 엄격한 원장으로서, 수도원 생활의 외형적인 측면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파프누티는 대공 가문과 좋고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그가 사망한 후(1477년)에도 오랫동안 왕실에서는 그에 대한 기억이 간직되었다; 그의 제자 중 두 명인 성 다니일 페레야슬라프스키와 수도사 카시안 보소이는 이미 노년의 장로들이 되었을 때, 갓 태어난 이반(훗날 차르 이반 4세 그로즈니, 1533–1584)의 대부가 되었다[100] .

경제적으로 잘 갖춰진 이 수도원의 분위기 속에서 — 파프누티는 대공으로부터 많은 돈과 토지를 하사받았다 — 금욕이 어떤 의미에서는 외적인 형태로 이해되던 곳에서, 어린 요셉은 초기 수도자 교육을 받았다[101] . 그는 1439/40년에 보야르 가문에서 태어났다. 20세 때(약 1460년경), 그는 다른 수도원에서 잠시 머물렀으나 그곳의 수도 생활이 마음에 들지 않아 보로프스키 수도원으로 들어왔다. 요시프는 수도 생활에서 파프누티우스의 가르침을 따랐다. 즉, 수도원의 여러 경제 시설에서 힘든 노동을 하고, 파프누티우스파 수도사들이 규율을 지극히 엄격하고 ‘문자 그대로’ 준수하며 거행하던 긴 예배에 참여했다. 이것이 바로 요시프에게 예배 중 수도사의 외적 태도에 대해 각별히 열성적인 태도를 심어준 학교였으며, 이는 그가 작성한 수도원 규정(『영적 문헌』)에서 첫 번째로 강조된 사항이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파프누티는 요세프가 성격상 다른 누구보다 자신의 후계자로 적합하다는 것을 깨닫고, 수도원 운영 업무에 그를 참여시키기 시작했는데, 이는 수도원 형제들이 요세프를 원장으로 선출할 경우, 그가 수도원의 창시자가 심어 놓은 정신을 잘 보존해 줄 것이라는 희망에서였다. 요세프는 종종 수도원장의 모스크바 방문에 동행했으며, 그곳 대공의 궁정에서 호의적인 대접을 받았다. 요세프는 실제로 파프누티우스의 후계자가 되었다. 물론 그가 어떻게 원장 직위를 얻게 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수도사들의 선출을 통해서였는지, 대공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는지: 요셉이 세상을 떠난 직후 작성된 두 편의 전기는 이 사건에 대한 서술에서 서로 상충한다. 어쨌든 요시프와 대공의 우호적인 관계는 수도원 공동체에 의해 무시될 수 없었다. 원장직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요시프는 파프누티예프 수도원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여러 걱정과 어려움에 직면했다. 수도원은 형식적인 엄격함의 분위기 속에서 운영되었으며, 경제 활동에 매우 많은 관심이 기울여졌다. 요시프가 (아마도 대규모 경제 활동 탓에) 세속화되어 가던 수도원의 공동 생활 수준을 높이려 시도했을 때, 수도사들 사이에서 불만과 불평이 일었다. 이미 정착된 생활 방식에 익숙해진 노장 수도사들은 원칙적으로는 질서 개선의 필요성을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개혁에 완강히 저항했다. 파프누예프 수도원 수도사들의 반발이 너무 거세서 요세프는 수도원을 떠나야만 했다. 한 수도사의 호위를 받으며 그는 약 1년 동안 수도원에서 수도원으로 방랑했고, 이 여정 중에 벨로예 호수(Белое озеро)에 있는 키릴로프 수도원[102] 에도 들렀다.

1년 후 요세프는 보로프스키 수도원으로 돌아왔으나, 이미 자신만의 새로운 수도원을 세우기로 결심한 터라 그곳에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그는 몇 명의 수도사와 함께 보로프스키 수도원을 떠나 볼로카 람스키(볼로콜람스크) 방향으로 향했고, 1479년에 수도원을 설립했는데, 이 수도원은 빠르게 성장하여 다음 세기의 교회 업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볼로콜람스크 공작으로부터 요세프 수도원이 받은 풍부한 기부(마을과 돈)는 요세프가 그와 빠르게 우호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는 사실만을 증명해 준다. 수도원의 물질적 풍요로움 덕분에 이미 1486년에 큰 석조 교회를 짓고, 15~16세기의 유명한 성화화가 디오니시우스(Dionysius)[103] 의 프레스코화로 장식할 수 있었다. 디오니시우스 ; 이후 높은 종루와 몇 채의 다른 수도원 건물들이 세워졌는데, 모두 석조로 지어졌으며, 당시 북부 루시의 산림 지대에서 이는 아낌없는 금전적 지원[104] 이 있어야만 가능했던 일이었다. 풍성한 헌물이 사방에서 몰려들었는데, 특히 수도원에서 출가하여 자신의 모든 재산을 수도원에 기증한 사람들로부터 많이 들어왔다. 요시프는 기꺼이 헌물을 받아들였고, 머지않아 그의 수도원은 그 규모 면에서 파프누티우스 수도원과 비슷해졌다. 주변에는 들판이 펼쳐져 있었고, 들판에서는 수도원 소속 마을의 농민들이 일했으며, 곳곳에 곡물 창고, 헛간, 차양이 서 있었다; 수녀원에 갓 들어온 수도사에게 그곳은 거대한 영지로 보였으며, 농사 업무를 맡은 많은 수도사들은 예배 시간 외의 모든 여가 시간을 농사일에 전념해야 했다. 덕분에 수도원장은 자선 활동을 펼칠 수 있었고, 흉년에는 주변 마을 주민들을 도울 수 있었다[105] .

북부 러시아의 수도원들을 순례하던 중, 요시프는 그곳에서 공동생활 규율이 모든 곳에서 엄격하게 지켜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처음부터 자신의 수도원에 키노비아 제도를 도입하고 이를 가장 철저히 준수하기로 결심했다. 나중에 그는 ‘영적 문헌’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수도원 규율을 저술했다[106] . 이 규율은 우리에게 특히 중요한데, 요시프의 종교적·도덕적 및 금욕적 견해를 주의 깊게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107] . 요시프는 외형적이고 형식적으로 이해되는 기독교적 금욕주의의 대변자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요세프는 수도자들의 영적 양육을 영혼과 의지의 완성에 두지 않고, 겉으로 보기에 흠잡을 데 없는 수도자의 행실에 기반을 둔다. 요세프가 말하듯, 행동의 외적 측면인 ‘육체의 단정함’은 훌륭한 수도사가 되고자 하는 모든 이의 주된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요세프는 엄격한 훈계와 의식의 문자적 준수를 가장 중요시했던 고대 러시아적 관점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요세프의 금욕적 엄격주의는 수도원의 일상생활 전반을 겉으로 드러나는 흐름 속에서 가장 미세한 세부 사항까지 규정하고 체계화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그는 이때 세 가지 수도 서원 중 순명 서원이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며, 정확한 규정이 순명을 이끌어내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라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여기서 요시프가 수도자들의 영적 양육을 바라보는 시각은 장로들의 견해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장로들 역시 순종을 초보 수도자를 양성하는 좋은 수단으로 보지만, 그들은 이를 어디까지나 수단으로 활용하며, 영적 지도에 있어 제자의 개성을 고려하고 수도자들의 영적 완성에 대한 접근 방식에서 틀에 박힌 방식을 피하려고 항상 노력한다.

요세프는 기독교 금욕주의의 영적 기초 전반은 물론, 특히 수도원 지도 체계의 기초까지도 경시했다. 이는 특히 원장과 수도자 집단 간의 관계에 대한 그의 견해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요세프가 원장에게 요구하는 조건들은 단지 외형적인 성격만을 띠고 있다. 자신의 규율서에서 이 점을 언급하며, 그는 동방 수도 생활의 역사에서 가져온 수많은 사례를 근거로 삼아 원장에게 수도자들에 대해 극도로 가혹하게 대할 것을 요구한다. 그는 수도자의 양심에 호소하거나 금욕의 영적 가치를 증명함으로써가 아니라, 불순종하는 자들을 위협함으로써 수도자를 교육한다. 이 과정에서 수도사는 원장에게 자신의 마음속 고민을 털어놓고 조언과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영적 지도자가 아니라, 어떤 사소한 잘못이라도 처벌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처벌해야만 하는 의무가 있는 수도원 상급자로 인식하게 된다.

규율은 수도사가 자신의 방, 식당, 일하는 곳, 그리고 성당에서 예배를 드릴 때 지켜야 할 특정 행동 규범을 규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 교회에서는 각 수도사마다 정해진 자리가 있어야 하며, 출입할 때 반드시 같은 문을 이용해야 한다. 요셉은 심지어 수도사가 어떻게 서야 하는지, 십자가의 성호를 그을 때 머리와 손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다. 규율은 주로 공동 기도와 관련되어 있으며, 예배 중에 모든 내용을 생략 없이 낭독하고 노래할 것을 요구한다. 이 때문에 예배 시간이 길어졌고, 수도사는 개인 기도할 시간이 남지 않았다. 그의 수도원 수도사들은 가사 노동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수공예보다는 수도원 시설(제분소, 밭일 등)의 관리에 더 많은 시간을 쏟았다.[108] .

이러한 수도원 생활을 조직함에 있어 요세프는 아주 명확한 목표를 추구했다. 그의 신념에 따르면, 수도원은 교회 기관으로서 그만의 특별한 사명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명은 순전히 금욕적인 성격을 띠지 않는다. 수도원은 미래의 성직자들을 양성하기 위한 일종의 교회-목회 학교가 되어야 한다. 수도자들의 영적 양육 방법에 있어 일관성을 유지하고, 신자들이 지켜볼 수 있는 예배 및 생활의 모든 상황에서 수도자들이 일관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요세프의 생각에 따르면, 신도들의 눈에는 미래의 성직자들에게 특별한 권위를 부여해 줄 것이라고 보았다. 요세프는 일반적으로 주교들의 도덕적·계몽 활동에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교회 계층이 계몽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하고 관리해야 한다고 보았다.

규약에서나 다른 저술에서나 요세프는 교회와 국가의 임무가 밀접하게 상호 연관되어 있다는 생각을 전개한다. 요세프에게 주교는 교회와 국가의 동시에 종이며, 수도원 그 자체가 일종의 교회-국가 기관을 형성한다. 이 핵심 사상에서 자연스럽게 농민들이 거주하는 토지에 대한 수도원의 소유권 주장이 정당화된다. 미래의 교회 지도층을 양성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수도원이 경제 및 재정적으로 보장받아야 한다. “만약 수도원에 마을이 없다면,” 요세프는 한 구절에서 이렇게 지적한다, “어떻게 정직하고 고귀한 사람(즉, 미래의 주교)이 수도자가 될 수 있겠는가?” 수도원의 임무에 대해 간결하게 정리된 이 사상은 당시 수도계와 주교단의 광범위한 계층으로부터 특히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다. 이 사상은 16세기 러시아 교회 계층의 많은 구성원들에게 내재된 세계관의 기초가 되었다. 이 주교들은 이른바 ‘요시플리안’이라 불리는 지극히 영향력 있는 집단을 이루었으며, 이들은 러시아 교회의 삶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고, 머지않아 오랫동안 교회 통치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요시플리안파의 영향력은 16세기에 주교단이 요시프의 사상을 공유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이 요시프-볼로콜람스크 수도원의 출가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여기서 주된 역할을 한 인물은 모스크바 대주교 다니일 (1522–1539)가 주된 역할을 했는데, 그는 요시프의 충실한 제자이자 볼로콜람스크 수도원 운영의 후계자(1515–1522)였으며, 요시프파의 세계관을 지닌 전형적인 교회의 지도자로서 자신의 수도원 수도사들을 주교좌에 등용했다[109] . 16세기의 또 다른 저명한 대주교는 – 마카리(1542–1563)는 요아사프(1539–1542) 대주교의 짧은 재임 기간 이후 다니엘의 교회 정책을 계승하여, 교회와 국가의 과제를 밀접하게 연계하는 측면에서 역시 요시프파의 옹호자 중 한 명이었다[110] . 1551년 모스크바에서 소집된 스토글라비 공의회, 즉 스토글라바의 결의안들은 뚜렷한 요시플리안 성향을 띠고 있다. 공의회 활동에 참여한 9명의 주교 중 5명은 과거 요시포-볼로콜람스크 수도원의 수도사들이었다[111] . 다니일 및 마카리 대주교들의 지지를 받은 요시프파는 모스크바 루스에서 항상 군주제적 절대주의를 옹호했다. 이 사상은 ‘모스크바—제3의 로마’ 교리로 알려진 사상 체계와 융합되었으나, 이 교리는 요시프의 견해와는 다른 출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112] .

수도 생활의 국가적·교회정치적 과제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당연히 수도 생활의 내적 발전에 해로웠다. 요시프의 금욕주의적·교회정치적 견해는 지지자와 계승자뿐만 아니라, 15세기 중반 러시아 수도원 생활을 세속화의 위험과 순전히 국가적 목적에 복무하는 것에서 보호하고자 했으며, 수도 생활을 오로지 영적 수행의 길로 되돌리려 했던 수많은 반대자들도 낳았다. 요시프파에 반대하는 세력은 수도계 내부에서 나왔는데, 그들은 뛰어난 수행자를 내세웠고, 그의 등장은 요시프 볼로츠키와 요시프파와의 격렬한 논쟁의 시작을 알렸다. 그 인물은 장로 닐 소르스키였으며, 그는 반요시프파 세력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이 논쟁은 1515년에 세상을 떠난 요세프가 생전에 이미 불붙기 시작하여 50년 이상 지속되었으며, 이 논쟁에서는 금욕주의와 러시아 교회 생활의 많은 중요한 문제들이 다뤄졌고, 양 진영의 핵심 사상이 드러났다.

 

2. 스승 니일 소르스키 장로와 그의 금욕적 견해

1433년에 태어난 장로 닐 소르스키는 모스크바의 보야르 가문인 마이코프 가문[113] 출신이었다. 닐은 키릴로-벨로제르스키 수도원에서 수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곳의 수도 생활에 불만을 느낀 닐은 성 아폰 산으로 떠나, 그곳에서 자신을 괴롭히던 여러 의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기를 바라며 아폰 산 수도사들의 생활 방식 을 접하기로 결심했다. 젊은 닐의 생동감 넘치는 종교적 영혼과 신비주의적 성향, 신학적 탐구는 키릴로프 수도원[114] 의 다소 건조한 영적 분위기 속에서 완전한 만족을 얻지 못했다.

닐은 다른 러시아 수도사들과 마찬가지로 성산과 그곳 수도자들의 삶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어왔다. 고대 루스와 아폰 산의 첫 접촉은 11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2세기에는 이미 그곳에 ‘크실루르구’라는 이름의 러시아 수도원이 있었으며, 1169년 러시아 수도사들은 아폰 산에서 또 다른 수도원인 성 판텔레이몬 수도원을 얻게 되었는데, 이 수도원은 이후 ‘러시아 수도원’으로 불리게 되었다[115] . 13세기에는 타타르족의 침략과 남부 루스의 황폐화로 인해 이 수도원들과의 교류가 오랫동안 단절되었다. 활발한 교류는 14세기 말과 15세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회복되었으며, 이때 많은 러시아 수도사들이 아폰을 방문했다. 스파소-카멘노 수도원에서는 앞서 언급했듯이 한때 그리스인 디오니시우스가 원장직을 맡았으며, 그는 이 수도원에 아토스 규율을 도입했다. 성산에서는 많은 책이 번역되었고(주로 남부 슬라브인들이 이를 담당했다), 이러한 번역본들은 루스로 전해졌다. 그중에는 이시하즘에 대한 일반적인 정보를 담은 책들도 있었다[116] .

닐은 친구 인노켄티 오흘레비닌(† 1521)과 함께 이시하스트파의 승리 이후에야 아폰 산을 방문했다[117] . 아토스 산 수도사들의 삶을 가까이서 접하고, 장로들과 수행자들을 만나며, 이미 키릴로프 수도원에서 연구했을 수도 있는 금욕적·신비주의적 저작들을 읽은 것—이 모든 것이 그의 영적 탐구의 방향을 결정지었다. 아토스 산으로의 순례는 닐을 이시히아의 신봉자로 만들었다[118] .

아폰에서 닐은, 그가 나중에 썼듯이, “한 좋은 꽃에서 더 좋은 꽃으로 날아다니는 벌처럼” 살며 “기독교 진리의 과수원”과 성인들의 생애를 연구하고, “굳어버린 자신의 영혼을 되살리고 구원을 위해 준비”하고자 했다. 영적으로 충만해지고 마음의 평화를 얻은 닐은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의 키릴로프 수도원에서 그는 이제 모든 것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러니 그가 아토스 산에서 배운 것—지적인 기도에 몰입하는 신비로운 아름다움, ‘마음의 수호’와 ‘영혼의 절제’를 체험하고, 이 ‘천국으로 향하는 사다리’를 오름으로써 기독교적 삶과 이시히아의 목표인 ‘신성화’에 이르는 것이었다.

닐은 친구이자 제자인 이노켄티와 함께 키릴로프 수도원에서 다소 떨어진 소라 강변의 울창하고 습지대인 숲으로 들어가 그곳에 정착하여, 자신의 삶을 금욕적 수행과 신비적 관상에 바쳤다. 점차 닐 주변에는 소수의 수도자 무리가 모여들었고 , 이들은 그의 스키토로 피신하여 그의 영적 지도 아래 러시아에 새로운 형태의 수도 생활과 새로운 수도원 생활 방식을 정착시키려 노력했다. 안타깝게도 닐 소르스키의 전기는 소실되었으나, 그의 동시대인들이 남긴 다른 저작들을 통해 우리는 그들이 장로 닐을 루시의 ‘스키토 생활의 창시자’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그가 고대 루시 수도 생활에 당시에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요소를 도입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의 저술과 제자들 및 동시대인들의 기록을 바탕으로, 러시아 영성사의 수세기에 걸쳐 깊은 흔적을 남긴 이 독특한 인물을 상상해 볼 수 있다. 그의 순수한 기독교적이며 진정으로 금욕적인 견해는 요시프파로부터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의 적대감은 아마도 닐 소르스키의 행적이 소실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반대자들은 신자들, 특히 수도사들의 기억 속에서 겸손한 장로의 모습을 지워버리고자 했으니, 그의 행적은 요시프파와 16세기 후반 및 17세기의 수도원 생활 방식에 대한 생생한 고발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닐의 저서 『스키트 생활에 관한 전승』은 위대한 장로의 견해를 공유하는 이들에 의해 열성적으로 필사되었는데, 비록 주로 볼가 강 이스트쪽의 작은 수도원과 사막에서 이루어졌지만 말이다.

장로 닐은 1508년 5월 7일에 세상을 떠났다. 세상의 명예와 영광을 원치 않았던 그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죄 많은 유해를 숲으로 옮겨 야수들의 먹이가 되게 하라고 지시했는데, 이는 그가 하나님 앞에서 많은 죄를 지었기에 장례를 치를 자격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교회 문서에는 장로 닐이 언제 시성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다. 시성은 18세기 말이나 19세기 초에야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신앙심 깊은 러시아 백성과 경건한 순례자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늪지대 숲을 가로지르는 좁은 오솔길을 따라 닐로-소르스키 스키트로 향하며, 장로를 성인으로 숭배해 왔다[119] .

아폰 산으로의 순례는 닐의 종교적 견해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는데, 그곳에서 기독교 수행자의 삶의 내적·외적 측면에 대한 그의 견해가 최종적으로 정립되었다. 닐의 문학적 유산은 많지 않지만(아마도 그의 저작 중 일부는 이념적 반대자들과 시간의 흐름에 의해 소실되었을 수도 있다), 동시대인과 제자들 사이에서 인정과 막대한 권위를 얻었다. 이 과정에서 그의 인격이 지닌 매력과 도덕적 고귀함이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높이 평가받았다. 닐 소르스키의 금욕적·신비주의적 사상은 고대 러시아 수도원계에서 고대 동방 수도 생활의 이상을 부활시키는 토대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금욕적인 성품을 지닌 닐의 모습은 요셉의 모습과는 상당히 다르다. 닐은 요셉파 지도자의 종교적 형식주의와 겉으로 드러나는 엄격주의에 맞서, 영혼의 종교적 삶에 대한 심리적으로 섬세한 접근 방식을 제시한다. 그에게는 인간의 도덕적 완성을 통해 얻어지는 내적 자유의 기운이 뿜어져 나온다. 그는 기독교적 경건함에 신비적인 근거를 부여한 종교 사상가였다. 그가 수도사에게 제시하는 과제는 요세프의 요구보다 더 어렵고 심오하다. 요세프가 그토록 중요하게 여겼던 수도사와 세속의 모든 기독교 수행자의 활동은, 닐에게 있어 세상을 등진 사람의 주된 과제가 결코 아니다. 그 자신의 영적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자, 그의 저술에서 기독교인에게 제시하는 주된 과제는 영혼의 완성이었으며, 이를 통해 인간의 영적 성장이 이루어지고 구원을 얻게 된다. 닐은 동방 교회의 고대 수행자들의 전통과 이시하즘의 금욕적·신비주의적 관점을 충실히 따랐다.

닐 소르스키의 저작들을 통해 우리는 그의 견해를 간략히 정리해 볼 수 있다.

복음의 정신을 따르려고 노력하는 기독교인의 온 삶은 끊임없는 완성을 향한 여정이어야 한다. 자유롭고 의식적인 의지를 지닌 인간은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이 길, 즉 영적 투쟁의 길을 걷는다. 구원을 추구하는 이의 내적, 도덕적, 영적 성장은 오직 ‘지적인 기도’와 ‘마음의 절제’를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 오직 이러한 금욕적·신비적 실천의 수단만이 결실 있고 활동적인 기독교 생활의 기초를 이룬다. “육체적인 행실, 즉 외적인 기도는 그저 잎사귀에 불과하지만, 내적인 것, 즉 지적인 기도는 열매이다”라고 닐은 썼다[120] . 이를 실천해야 할 사람은 모두이다: 수도자뿐만 아니라 세상에 머무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닐 은 완전함을 추구하는 기독교인의 영혼 상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유혹, 그의 정욕과 오해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그는 우리에게 ‘생각들의 대립’이라는 그림, 유혹과의 투쟁인 ‘마음의 전쟁’이라는 그림을 보여준다. 이 싸움을 겪으며 수행자는 ‘접근’, ‘결합’, ‘합성’, ‘포로됨’, ‘정욕’을 이겨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타락 단계들입니다. ‘접근’이란 단순한 생각, 혹은 어떤 대상에 대한 상상이 갑자기 마음에 들어와 마음에 떠오르는 것을 말합니다… 결합…이란 들어온 생각과의 대화를 말하는데, 즉 마치 우리에게 숨겨진 말처럼 나타난 생각에 대해 정욕적으로든 무정욕적으로든 응답하는 것을 뜻하며, 달리 말하면 원수에게서 가져온 생각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붙잡으며, 이에 동의하고, 자발적으로 그 생각이 우리 안에 머물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성부들은 이를 더 이상 항상 무죄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성부들은 ‘결합’이라 하여, 마음속에 들어온 생각이나 마음에 떠오른 대상을 진심으로 호의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가리킨다. 이는 예를 들어, 누군가가 원수가 일으킨 생각이나 그가 제시한 대상을 받아들이고, 마음속으로 장황하게 떠들며 그와 교감에 들어가다가, 결국 원수의 생각이 속삭이는 대로 행동하도록 마음속에서 기울어지거나 마음을 정할 때 발생합니다… 포로됨이란, 우리 마음이 우연히 마주친 생각에 무의식적으로 휩쓸리거나, 그 생각을 자신 안에 지속적으로 자리 잡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대개 산만함과 지나치게 쓸모없는 대화에서 비롯된다… 정욕이라 함은 오랫동안 영혼 속에 둥지를 틀고, 습관을 통해 마치 그 본성인 양 변해 버리는 그러한 성향과 행동을 말한다… 그 원인은… 부주의와 제멋대로인 태도로 인해 오랫동안 어떤 대상에 몰두한 데 있다. 정욕은 그 모든 형태에서 반드시 죄에 상응하는 회개나, 혹은 장차 닥칠 고통을 겪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정욕으로부터 벗어나기를 회개하고 기도해야 마땅하니, 모든 정욕은 그로 인해 시련을 겪었기 때문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통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121] .

영적 전쟁을 치르는 수행자는 여덟 가지 주요 정욕과 맞서 싸우며, 이를 자신 안에서 극복해야만 경험의 길과 외적 행위의 길을 성공적으로 걸어가 마침내 신비적 관조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정점은 신성화이다. 다음은 수행자의 금욕적 승천의 길을 가로막는 여덟 가지 정욕이다: 폭식, 음행, 탐욕, 분노, 슬픔, 낙담, 허영, 교만[122] .

닐에 따르면, 유혹에 맞서는 현명하고 선한 싸움은 ‘마음을 지키는 것’, ‘침묵’, 그리고 ‘지적인 기도’에 있다. 수도사는 신비적 관상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하며, 예수 기도의 말씀인 “주 예수 그리스도여,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죄인인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가 항상 그의 입에 머물러야 한다. 닐은 또한 예수 기도를 정확히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도 설명한다[123] .

이처럼 우리는 닐의 금욕적 견해가 요시프 볼로츠키의 견해와 매우 크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닐과 요시프의 금욕에 대한 이해 차이는 금식에 대한 그들의 견해에도 반영되었다. 요세프는 자신의 규율서에서 수도자들의 개별적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식사 시간과 양을 매우 상세히 규정하고 있는 반면, 닐은 금식에 대해 전혀 다른 태도를 보입니다. 닐은 외적 금욕을 수행자의 개별적인 정신적 특성에 근거하여 정립하며, 더불어 북부 루스와 팔레스타인 간의 기후 차이도 고려한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식사 규칙을 적용할 수는 없는데, 닐이 말하듯이 “몸은 구리, 철, 밀랍과 마찬가지로 힘과 강인함의 정도가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124] .

닐 소르스키는 수도원 소유지에 관한 문제도 다룬다. 그는 수도원이 마을, 토지 및 기타 재산을 소유할 수 있거나 심지어 소유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요시프 볼로츠키의 견해를 단호히 거부한다. 닐에 따르면, 수도사들은 자신의 손으로 일하며, 직접 만든 제품을 팔거나, 더 나아가 생활에 필요한 물품과 교환하여 살아가야 한다. 수도원과 수도사들은 평신도들로부터 자선을 받아서는 안 되며, 오히려 그들이 자신의 손으로 번 것을 거지들과 나누어 주어야 한다. 닐은 또한 성전 장식에 지나친 사치나 값비싼 금제기 등이 예배에 전혀 필요하지 않다는, 매우 흥미로우면서도 고대 루스에게는 지극히 생소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 첫째, 이러한 사치는 종종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즉 이미 집착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둘째,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자들의 내적 마음가짐이지, 예복이나 성구의 화려함이 아닙니다. 이 견해에서 닐은 성 세르기우스 라도네즈스키와 유사한 면모를 드러내는데, 그는 오랜 세월 동안 소박한 나무 그릇을 사용하여 성찬식을 집전했으며, 예배 시에는 항상 초라한 아마포 예복을 입었습니다[125] .

세 가지 수도 생활 방식 중에서 닐은 ‘중간’인 ‘황금길’, 즉 그가 ‘스키티즘’이라 명명한 두세 명의 수도사가 함께 사는 삶을 선호했다. 그는 엄격한 은둔 생활도, 키노비우스적 생활도 수도 생활의 최상의 형태로 여기지 않았다.

닐이 말하는 ‘스키티즘’은 결코 아나코레티즘을 의미하지 않는다. 스키트는 여러 개의 셀(kelia) 또는 오두막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그곳에는 셀 수도사들(켈리오티)이 거주했다. 이 셀들은 수도원의 소유였다. 켈리오티(스키트 수도사들)는 두 명씩, 드물게는 세 명씩 함께 살았다. 종종 이는 연로한 수도사와 수련 초기의 수도사, 즉 장로와 그의 수련생, 혹은 장로와 두 명의 수련생-제자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생활 방식은 장로 제도가 존재할 때 가장 합리적인 것이었다. 스키트 수도자들은 수도원 원장의 공동 통치 아래 머물렀다. 그들은 수도원으로부터 식량을 공급받았는데, 대부분 일주일 분량을 한꺼번에 받았다. 토요일이나 축일 전날이면 모든 스키트니키들이 수도원 교회에 모여 공동 예배에 참여했다. 예를 들어, 성 사바 라브라에서는 이러한 방식으로 운영되었는데, 이곳은 사실상 거대한 켈리오트식 수도원이나 다름없었다. 스키트 수도자들의 주간 기도 규율은 종종 수도원의 일반적인 규율과 달랐다. 초보 수도자들을 위한 지도 방식도 달랐다. 서로 가까이 위치한 몇 개의 거처는 스키트로 통합되었는데, 이 경우 수도사들은 종종 공동 기도 규율을 따르고 스키트의 원장을 선출했다. 스키트에서의 금욕적 수련은 키노비아보다 더 엄격했다. 키노비아(-공동생활)란 수도원에서 모두에게 공통된 규정이 지켜지는 것을 말한다: 공동 규칙, 공동 식사, 수도사들의 동일한 복장 등이 그것이다. 키노비아 수도원은 정해진 수도원 규약에 따라 원장에게 의해 운영되었다. 이디오리타(-개별 거주)는 키노비아와 정반대이다. 각 수도사는 자신의 판단에 따라 구원을 추구했으며, 독립된 방이나 수도원 공동 건물 내의 방에서 거주했다. 그는 자신의 식사와 복장을 스스로 챙겼으며, 기도 규칙도 자신의 재량에 따라 수행했다. 독립거주 규약을 따르는 수도원은 원장(나스타이텔)에 의해 운영되었으며, 원장은 1년 임기로 선출되었고 수도원 장로회의[126] 에 책임을 지고 있었다.

닐의 견해에 따르면, 스키트는 수행자에게 정신의 절제와 금욕, 기도와 침묵 속에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최상의 기회를 제공한다. 그는 하루를 기도로 시작해야 하며, 모든 시간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 즉 기도와 시편 및 기타 교회 찬송을 부르는 것, 그리고 성경 읽기에 보내야 한다. 성경 책들 중에서 닐은 신약성경, 특히 사도들의 서신을 선호했다. 또한 수행자는 수공예에 종사해야 한다. 첫째는 끊임없이 깨어 있기 위함이고, 둘째는 자신의 손으로 일하여 빈약한 생계를 꾸리고 정욕과 싸우기 위함이다. 수도사의 음식은 그의 체력에 맞춰야 한다. 필요한 양을 넘지 말아야 하는데, 이는 과식은 정욕을 부추기기 때문이다. 수면 시간도 짧아야 하며, 그 속에서 죽음의 예상을 보아야 한다. 죽음에 대한 생각은 항상 수도사를 따라다녀야 하며, 그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면전 앞에 설 준비가 되어 있도록 자신의 영적 삶을 꾸려야 한다.

오직 이러한 정욕과의 투쟁의 길을 걸으며 스스로를 경험적으로 시험해 본 후에야 비로소 수도사는 영적 사다리의 더 높은 단계로 올라설 수 있다. 이제 그의 영적 수행은 관상에 있어야 하며, 모든 세속적이고 육체적인 것을 죽여 나감에 따라 그의 영은 신비로운 하느님의 현현을 뵙는 경지에 이른다. 예수 기도와 마음의 수호, 완전한 평온과 세상으로부터의 완벽한 격리, 침묵, 영혼의 절제 속에서 수행자는 영적으로 성장하며 자신의 수행(경험 † 관상)의 궁극적인 목표인 신성화에 다가갑니다. 그리고 이 은총 넘치는 신비로운 몰입 속에서, 하나님과의 연합을 통해 그는 복락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127] .

닐의 견해는 동방 교회의 금욕적·신비적 전통에 기반을 두고 있다. 성부들의 저작 중 상당수는 닐보다 훨씬 이전에 러시아에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닐은 선구자들과 동시대인들과는 다소 다른 방식으로 이를 활용했다. 고대 러시아의 학자—예를 들어, 요셉 볼로츠키—는 성부들의 저작을 오로지 자신의 주장이 옳음을 증명하고 반대자들의 견해를 반박하기 위해서만 사용했다. 반면 닐은 자신의 주장을 더 명확하고 설득력 있게 만들기 위해 성경이나 성부들의 저작을 활용한다[128] . 그의 논증에는 형식주의의 흔적이 없으며, 그는 독자로 하여금 깊이 생각하게 하고 양심에 호소하며, 단순히 논증하기보다는 분석한다. 이 점에서 닐은 사상가이자 심리학자로서의 면모를 드러낸다. 그는 성부들의 저술과 금욕적·신비주의적 저작들을 많이 인용하지만, 자신의 생각을 설명하는 데 필요한 정도를 넘지 않는다. 요시프 볼로츠키처럼 인용문을 무더기로 나열하는 일은 없다. 요시프 볼로츠키는 그의 주요 저작인 『계몽자』에서 과도한 인용으로 독자를 지치게 한다. 요셉에게 금욕은 언제나 그 자체로 목적이었지만, 닐에게 그것은 단지 수단이자 도구일 뿐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금욕의 영적 의미인데, 금욕 그 자체는 기독교인의 내적 삶을 외적으로 드러내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수련자의 개성적인 면모를 결코 간과하지 않는다.

닐의 주요 저서인 『전승』에서는 금욕적 이상을 달성하기 위해 치러지는 영적 투쟁에 대해 다루고 있지만, 이상 그 자체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는다. 이는 아마도 니일이 훌륭한 심리학자로서, 당시 수도 생활의 상황에서 금욕에 대한 실질적인 지침이 달성 방법이 명확히 제시되지 않은 이상을 묘사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유용하다는 점을 이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3. ‘요셉파’와 ‘비소유파’ 간의 논쟁

수도 생활의 의미와 수도원 생활의 성격에 대한 요세프와 닐의 견해 차이, 그리고 그들의 금욕적 관점의 차이는 16세기 초 모스크바 사회를 특히 뒤흔들었던 두 가지 세계관적 문제를 논의할 때 가장 뚜렷하게 드러났다.

첫 번째 문제는 기독교 교리의 기초를 다루는 것이었고, 두 번째 문제는 다소 실용적인 성격이 강하여 모스크바 루스에서의 교회와 국가 간의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정교회 교리를 왜곡하려 했던 이단과 이단자들은 고대 루스에서 매우 드문 현상이었다. 교회는 내부 사명에서 미신, 이교도의 잔재, 그리고 겉치레에 불과한 경건함의 기형적인 형태들과만 싸웠다. 이단 운동은 고대 루스 기독교를 뒤흔들지 않았다[129] .

물론 14세기 노브고로드에서 발생한 스트리골니키 이단이 역사에서 일정한 역할을 했다. 이 이단을 비판하는 논쟁적 저작들을 통해서만 이 종교 운동에 대한 대략적인 전반적인 이해를 얻을 수 있다. 15세기 말, 다시 노브고로드에서 ‘유대교화 이단’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새로운 이단 운동이 등장했는데, 이는 몇몇 유대인들이 참여했기 때문이다[130] .

이 운동은 노브고로드와 모스크바에서 비교적 널리 퍼졌다. 우리는 이에 대해 자세히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이오시프와 닐이 이단에 대해 보인 태도의 차이이다. 요세프는 자신의 주요 저작인 『계몽자』에서 유대교화주의자들을 매우 날카롭게 비판하며, 그들과 그들의 종교적 견해에 대해 논쟁을 벌이고 있으므로, 『계몽자』는 이 문제에 관한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다른 저술들과 일부 서신에서 요시프는 이단자들에 대한 실질적인 조치들을 제안한다[131] . 엄격한 조치를 지지하는 요시프는 심지어 사형까지 용인한다. 요셉의 이러한 견해는 닐 소르스키의 측근인 비재물주의자들로부터 매우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유대교화 경향을 보이는 자들에 대한 논쟁에서 요셉은 강경 조치의 필요성을 옹호하며 주로 구약성경을 근거로 삼은 반면, 비재물주의자들은 이에 반박하며 신약성경의 정신을 바탕으로 했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이 사형을 집행하는 것에 단호히 반발했다. 이단자들은 죄인들이며, 그들이 자신의 그릇된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면 다른 기독교인들과의 교제를 단절하고 수도원에 가두어, 그곳에서 가르침을 통해 진리를 깨닫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32] . 비록 1504년 공의회에서 요세프의 견해가 사실상 승리했고 교회가 일부 이단자들을 사형에 처하도록 판결했음에도 불구하고[133] , 이 견해의 차이는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수도 생활의 두 흐름에 여전히 매우 특징적인 것으로 남아 있다.

이 두 흐름의 종교적 견해에서 차이가 드러난 또 다른 문제는 수도원 소유지에 관한 것이었다[134] .

모스크바 루스에서 수도원의 부는 점점 더 큰 규모로 성장해 갔다. 13~14세기에 설립된 수도원들은 점차 러시아 중부와 북부의 경제적 식민지로 성장했다. 이들은 농업과 수공업에 종사했으며, 수도원 소유지에는 수도원을 위해 일하거나 지대를 납부하는 농민들이 거주했다. 수도원들이 공작과 대공으로부터 받은 토지 소유에 관한 다양한 특권은 그들의 부를 증대시켰다. 수도원들은 이미 경작된 땅을 직접 매입하기도 했으며, 공작, 보야르, 상인 및 기타 인물들로부터 증여나 유언을 통해 영지를 얻기도 했다. 게다가 수도원에 입회한 부유한 사람들이 기부한 자금 덕분에 수도원의 소유지는 더욱 확대되었다. 농업에 적합한 토지의 상당 부분이 교회의 손에 집중되자, 정부는 국가적 목적[135] 을 위해 상실한 토지를 되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교회 계층과 수도원계에서는 수도원 소유지에 관한 문제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형성되었는데, 하나는 요시프파의 견해였고, 다른 하나는 비재산주의파의 견해였다[136] . 네스티야자텔리, 즉 자볼즈키 장로들 은 교회와 수도원의 토지 소유권을 부정했는데, 그들 중에는 러시아 주교단과 수도자 집단 내에서도 선구자들이 있었다[137] .

1503년 공의회에서 모스크바 정부는 비재산주의자 파벌을 지지하여 수도원 소유지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 시도했다. 공의회에서 수도원 소유지에 반대하는 입장은 닐 소르스키와 파이시이 야로슬라보프가 대변했다. 닐 소르스키는 이미 자신의 저술에서 수차례에 걸쳐 수도원 소유지와 수도자들의 개인 재산에 대해 단호히 반대하는 입장을 밝힌 바 있었다. 그러나 공의회에서 주교들과 다른 성직자들이 이 문제에 대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닐 소르스키가 “수도원에는 마을이 없어야 하며, 수도사들은 사막에서 살며 수공예로 생계를 꾸리기를 바란다”는 뜻을 밝혔을 때, 비록 닐을 장로 파이시이 야로슬라보프가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제안은 공의회에 참석한 대다수의 공감을 얻지 못했으며, 특히 볼로콜람스크 수도원의 원장 요시프 볼로츠키[138] 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닐은 동방 교회의 정경적 규칙에 기반을 둔 순수한 금욕적 견해를 바탕으로 한 반면, 요시프는 교회 운영상의 실용적인 고려 사항에 더 중점을 두었다. 수도원의 주된 임무는 교회 계층을 양성하는 것이다. 수도원은 수도사들을 위해 (요세프는 공동 생활 수도원을 의미한다) 수도사들이 생계 걱정에서 해방되어, 주교나 수도원장 등 교회 계층 내에서 장차 수행하게 될 사역에 전적으로 헌신할 수 있는 생활 조건이 마련되었을 때에만 이 과제를 해결할 수 있다. “만약 수도원에 토지가 없다면,” 요세프는 1503년 공의회에서 자신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어떻게 정직하고 고귀한 사람이 수도자가 되겠는가?”[139] 요세프의 견해는 공의회에서 주교들의 지지를 얻어 우세를 차지했고, 토지는 수도원의 소유로 남게 되었다.

이 문제에 대한 양 진영의 주요 대표자들 간의 견해 차이는, 그들의 금욕적 세계관이 전반적으로 얼마나 상반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닐 소르스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진정한 금욕의 분위기 속에서 수도사의 내적 완성을 이루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신으로 양성된 수도사 세대는, 만일 세속에서 사역을 수행하게 된다면 순수한 기독교적 목표를 추구할 것이다. 요시프 볼로츠키는 수도원 금욕주의를 무엇보다도 수도사들이 교회 행정적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수단으로 보았다. 그는 교회와 국가 업무 간의 긴밀한 연계 필요성을 강조한 반면, 닐은 오히려 이 둘의 분리와 상호 간의 완전한 독립을 요구했다. 요시프의 생각에 따르면, 수도원은 수도사의 개성을 평준화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한때 “개인적인 의견은 모든 정욕의 어머니이며, 의견은 두 번째 타락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반면 닐은 인간의 개성을 옹호했으며, 수도자의 영적 수행에서 내적 자유를 지켰다.

요세프의 승리는 획기적인 의미를 지녔다. 그의 추종자들은 특히 16세기 2분기부터 세력을 확장해 갔으며, – 비재물주의자들에게 동조했던 요아사프 대주교(1539–1541)와 관련된 짧은 기간은 교회의 운명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곧 요시프파는 러시아 교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배 세력이 되었다.

 

 

제5장. 16세기 모스크바의 교회·정치 사상계

 

1. 모스크바 군주들의 정치적 통치 하에 러시아 영토의 통합과 러시아 교회

두 금욕주의 경향 간의 논쟁은, 양측이 이를 통해 올바른 결론을 도출하고 수도사들의 금욕적 양육과 수도원 생활의 체계가 전반적으로 순수한 교회 내 문제임을 인정했다면, 수도 생활에 도움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 비록 이 논쟁 과정에서 금욕적 견해가 국가의 정치·사회적 삶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지만 – 여기서 우리는 수도원 소유지 문제를 염두에 두고 있다 – – 요시프파와 비재산파 모두 절제심을 보였더라면, 수도 생활에서 이 논쟁이 초래한 부정적인 결과를 제거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수도자의 겸손이 그들에게 요구했던 바였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는 요시프파의 과도한 열정이나 비소유파의 고집 때문이 아니라, 이 두 흐름이 16세기 모스크바 국가를 말 그대로 뒤덮은 강력한 국가·정치적 견해, 이데올로기, 사상의 흐름에 휘말렸기 때문이다. 아마도 모스크바 왕국이 역사상 결정적인 시기에 접어들었을 때, 수행의 기초에 대한 논쟁이 불거진 것은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수도 생활의 전체 역사는 수도원을 외부 세계로부터 분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리고 수도사들이 세속 사회에서 순명을 다해야 할 때 수도 생활을 세속화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준다. 위대한 교회적·정치적 사건들은 수도원의 울타리를 무너뜨리고 수도 생활을 세속 생활의 흐름 속으로 끌어들입니다. 비잔티움의 성상파괴 운동, 서양의 클루니 운동, 십자군은 이러한 법칙성을 잘 입증해 줍니다.

모스크바 공국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동시대인들, 요시프파 신도들, 그리고 비재물주의자들에게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에게도 운명을 좌우하는 중대하고 인상 깊은 사건들이었다. 그 시대 사람들, 특히 교양 있는 계층—이 계층은 영적 힘을 오로지 수도 생활에서 얻곤 했다—의 종교적·정치적 견해는 이러한 사건들로 인해 말 그대로 큰 충격을 받았다. 역사학자들, 특히 교회 역사학자들은 종종 과거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행동을 단순화하여 묘사하곤 하는데, 후대 사람들은 그 시대의 상황으로 마음속으로 돌아가 과거의 종교적 관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당시 사람들이 어떤 이념을 바탕으로 살아갔는지 때로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 당시 러시아인의 세계관은 철저히 종교적이었으며, 교회와 국가·정치 생활의 모든 사건은 종교적 관점에서 검토되고, 저울질되며, 평가되었다. 사고 방식과 추론의 성격은 현대와 확연히 달랐다. 당시 사람들은 대체로 신앙심 깊은 아이들과 비슷했지만, 어른들의 열정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참된 기독교적 완전함의 본보기를 볼 줄은 알았으나, 스스로 그곳으로 가는 길을 찾지는 못했던 기독교인들이었다. 그 시대의 심리적 배경을 이해하려면 16세기 초 러시아 사람들의 특징을 다시 한 번 떠올려야 한다. “당시 사람들은 아이디어가 아니라 이미지, 상징, 의례, 전설로 사고했다. 즉, 아이디어는 논리적 조합으로 발전하지 않고 상징적 행동이나 가정된 사실로 발전했으며, 이를 위해 역사에서 정당성을 찾으려 했다. 과거를 돌아본 것은 현재의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면한 이익을 정당화하기 위함이었고,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사례를 찾아내려 했던 것이다”[140] .

러시아인들의 눈앞에서 위대한 러시아 민족적 및 세계적 정치적 사건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모스크바 공국은 러시아 평원의 끝없이 펼쳐진 숲 사이에 있는 작은 땅덩어리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작은 땅은 다른 분봉 공국들을 흡수하며 끊임없이 확장되었고, 모스크바 공국은 영토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성장했다[141] . ‘러시아 땅의 통합자’인 모스크바 공작의 통치 아래 러시아 공국들이 통합된 것은, 한편으로는 교묘한 정치의 결과였고, 다른 한편으로는[142] 민족적 자의식의 성장 때문이었다. “모스크바에 의한 북동부 루스의 영토 통합 완성은 모스크바 공국을 대러시아 민족 국가로 변모시켰다”[143] , –라고 클류체프스키는 말한다.

분봉 공국들의 합병을 통해 모스크바 대공은 이들 지역의 통합된 힘을 자신의 손에 집중시킬 수 있게 되었다[144] . 모스크바 공 이반 3세(1462–1505)는 “군주이자 전제군주”[145] , “전 루시의 대공”이 되었다. 이전에는 이 칭호가 단순한 명칭에 불과했으나, 이제는 실질적인 국가·정치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이반 3세는 사실상(de facto)과 법적으로(de jure) 통치했다[146] . 모스크바 대공의 통치 하에 이루어진 루스의 영토적 통합은 루스 땅에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 통합의 결과는 국제적인 성격을 띠었다. 모스크바 대공국은 이제 다른 국가들과 공동 국경을 갖게 되었다. 한때 오카 강과 볼가 강 사이의 숲속에 숨어 있던 작은 공국이었으나, 수십 년에 걸쳐 복잡한 세계 정치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147] . 이는 모스크바 정부뿐만 아니라 사고하는 모스크바 시민들에게도 완전히 새로운 현상이었다. 단 한 가지 상황만이 성장한 국가의 정치적 영광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는데, 바로 타타르의 속박이었다. 물론 모스크바에서는 사실상 그 속박을 크게 느끼지 못했지만, 법적으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러나 1480년에 이 그림자마저 사라졌다. 러시아는 2세기 반(1238–1480) 동안 자신들을 짓누르던 속박을 떨쳐냈다[148] .

 

2. 15세기 후반과 16세기 초 모스크바의 교회·정치적 사상

이러한 사건들은 당연히 그 시대 사람들의 삶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러시아 땅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교회 계층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러시아의 대주교들[149] , 특히 테오그노스트(1328–1353), 표트르(1308–1325), 알렉세이(1354–1378), 게론티(1473–1489)는 항상 “러시아 땅을 통합하는 자들”의 정책을 매우 열성적으로 지지했다[150] . 이러한 교회 계층의 정책에는 이미 요시프 볼로츠키와 그의 지지자들의 관점에 부합하는 국가와 교회 간의 관계 형성을 위한 전제 조건이 담겨 있었다. 수도사들은 요시프 볼로츠키 이전에도 이미 이와 유사한 정책의 수행에 참여했었다. 엄격한 금욕주의자였던 성 세르기이 라도네즈키는 수도원 밖에서도 같은 정신으로 활동했다. 그는 타타르족에 대한 승리로 끝난 쿨리코프 전투(1380)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이 전투를 앞둔 대공에게 축복을 내렸다.

그러나 교회는 대공을 지지하고 축복했을 뿐만 아니라, 종종 스스로 국가 권력에게 도움을 구해야만 했다. 이는 특히 1439년, 러시아 교회와 러시아의 종교적 의식이 플로렌스 공의회에 대한 입장을 결정해야 했던 시기에 뚜렷이 드러났다. 공의회에 참여하여 연합을 인정한 러시아 대주교 이시도르(1437–1441)의 행보는 모스크바에서 대공 바실리(1425–1462)와 러시아 성직자들[151] 의 단호한 저항에 부딪혔다. 이미 모스크바에 존재하던 그리스인들에 대한 불신은 플로렌티노 연합 이후 더욱 심화되었으며, 대공이 정통 교리를 수호하기 위해 보여준 확고한 태도는 교회계에서 인정받고 찬사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국가 권력이 기독교적 목적을 위해 봉사하고자 하며 그럴 능력이 있음을 그들에게 보여주었다. 이 사건은 러시아 종교 의식의 지극히 중요한 표현이었으며, 후대 세대들도 이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었다. “러시아 역사에서 피렌체 연합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는 15세기 후반 루스가 범유럽 정치에 편입될 것임을 예고하는 전조였다. 동시에 이 연합과 그 중요성에 대한 평가는 종교 저널리즘에서 모스크바의 성장하는 세력에 대한 논의의 토대가 되었다”[152] . 피렌체 연합은 15~16세기 러시아 종교 저널리즘의 발전에 큰 의미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비잔티움과 그리스 교회에 대한 모스크바의 입장을 정립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연합이 체결된 지 20년이 지난 후, ‘제2의 로마’인 콘스탄티노플이 ‘무신론적인’ 터키인들의 공세에 무너졌을 때(1453), 모스크바의 기독교인들은 이 사건을 ‘이단자인 라틴인들’과의 동맹에 대한 벌로 보았다. 러시아인들의 눈에는 그리스 정교회의 종교적 권위가 완전히 무너진 것으로 보였다[153] .

정치적 격변이 러시아인들의 종교적 의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이해하려면, 마음속으로 그 시대의 정신적 분위기로 돌아가 보아야 한다. 러시아인의 기독교적 세계관은 다시 균형을 되찾을 출구를 모색하고 있었다. 수세기에 걸쳐 신성시되던 정교회의 요새가 무너졌고, 그 요새의 형상이 없이는 그는 믿을 수도, 살아갈 수도 없었다. 이는 그에게 다가오는 세상의 종말을 상기시키는 것이었다. 1492년은 (당시 연호에 따르면) 세계 창조 이후 일곱 번째 천년이 끝나는 해였으며, 한편 러시아인들의 의식은 이미 오래전부터 기독교 종말론을 깊이 내면화하고 있었다. 지난 수십 년간의 사건들—‘이단적인 연합’과 ‘배신한 비잔티움’의 몰락—은 이러한 기대를 더욱 암울한 색조로 물들였다. 그러나 1492년 3월 24일에서 25일로 넘어가는 밤, 세상의 종말은 오지 않았다. 모스크바 왕국은 계속 존재했으며, 당시의 여건 속에서 정치적으로 눈부신 성장을 이루고 있었다. 고대 러시아인들에게 이는 새로운 성찰의 대상이 되었으며, 자신의 종말론을 재검토하게 만들었고, 교회 및 국가·정치적 사건들의 원인을 탐구하도록 자극했다[154] .

한편 모스크바에서도 이러한 지적 격동과 종교적 정서, 열정, 의견의 고조라는 분위기에 잘 부합하는 사건들이 일어났다. 모스크바의 국가· 정치적 발전, 즉 작은 공국들이 거대한 영토를 가진 단일 왕국으로 변모한 것은, 앞서 언급했듯이 동시대인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새로운 영토의 양이 아니었다”고 클류체프스키는 지적한다. “모스크바에서는 지상의 삶이라는 내적 질서에 깊이 관련된, 오랫동안 이어져 온 거대한 과업이 마무리되고 있음을 느꼈다… 새로운 지위에 놓였음을 느끼면서도, 그 새로운 의미를 아직 명확히 파악하지 못한 모스크바의 국가 권력은 이 지위에 부합할 만한 형태를 국내외에서 더듬더듬 찾아냈고, 이미 그러한 형태를 갖추게 되자 이를 통해 자신의 새로운 의미를 명확히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반 3세 치세에 등장한 일부 외교적 형식들과 새로운 궁정 의례들은 상당한 역사적 흥미를 자아낸다.[155] .

이러한 상황에서 이반의 두 번째 결혼은 동시대인들의 사고를 특정한 방향으로 이끌었다. 1472년, 이반 3세는 비잔티움의 마지막 황제(1448–1453)인 콘스탄티노스 팔레올로그의 고아가 된 조카딸 소피아와 결혼했다. 그녀는 그때까지 살던 이탈리아에서 모스크바로 왔는데, 그녀의 도착은 호화로운 비잔틴 양식으로 재편된 궁정 의식에 변화를 불러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모스크바 독재자의 국가적·교회 정치적 역할을 강화하고 정당화하며 심지어 영구화하기 위한 특정 종교적·철학적 개념이 형성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모스크바 대공이 비잔틴 황실의 공주와 결혼함으로써 비잔틴 황제들의 후계자가 되었다는 국가 철학적 사상이 생겨났다. 그렇다, 보스포루스의 위대한 기독교 정교회 왕국은 무신론적인 무슬림들에 의해 파괴되었지만, 이 정복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며, 하물며 영원할 리도 없다. “그러나 불쌍한 자여, 잘 알아두라,” 『차리아그라드 함락기』의 저자는 격정적으로 외친다. “…러시아의 혈통은 예로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이스마엘을 이길 것이며, 세드모홀마고(즉, 콘스탄티노플. – I. S.)를 이전의 정당한 통치자들과 함께 받아들여, 그곳에서 통치하게 될 것이다”[156] . 모스크바 군주가 비잔티움 황제들의 후계자가 되었다는 이러한 믿음은, 이제부터 비잔티움 의식을 따르게 된 모스크바 크렘린의 이반 3세 궁전에서 시행된 새로운 궁정 의식과, 비잔티움 양머리 독수리가 그려진 새로운 국가 문장에도 반영되었다[157] . 타타르의 속박에서 벗어난 후(1480년), 모스크바 대공은 자신을 단순히 독재자로만 여기지 않고 ‘전 러시아의 군주’, 심지어 ‘신의 은총을 받은 차르’라고 칭하기 시작했다[158] . 대공들을 예전에도 가끔 ‘차르’라고 부르곤 했지만, 이는 단지 과장된 표현에 불과했으나, 이제 이 칭호는 러시아인들의 관점에서 볼 때 실제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 되었다[159] . 러시아의 정치 및 교회 저널리즘은 수십 년에 걸쳐 이 주제를 심도 있게 다뤘으며, 그 결과 웅장한 세계관적 체계를 구축하게 되었다[160] . 이러한 사상들은 정치적 야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주로 종교적 탐구와 기독교 신앙에서 비롯되었으며, 앞서 언급된 역사적 사건들이 야기한 영적 충격에 대한 응답으로 탄생했다. 당시 러시아 사회에 있어 이는 단순한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종교적·역사적 사건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를 큰 감동으로 받아들였으며 종교적 관점에서 그토록 치열한 논의를 벌였습니다.

종교적 색채가 짙은 논설들이 정교회 차르의 권리와 의무 모두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 특히 주목해야 한다. 이러한 차르 권력의 특성은 당시 교회 계층과 수도자들의 대표자들이 노브고로드의 이단자들, 즉 유대교를 따르는 자들[161] 과의 투쟁에서 대공에게 도움을 요청할 때 강조되었다. 요시프파에게 있어 정통 기독교 차르의 종교적 권리와 의무는 그의 신과 같은 본성에서 비롯된다. “차르는 본성상 모든 사람과 같으나, 권세 면에서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과 같다”고 요시프 볼로츠키가 말한다[162] .

요시플리안들의 사상에 깊고 오랫동안 뿌리내린 차르의 종교적 의무에 대한 사상은 노브고로드 대주교 테오도시우스도 표현했다[163] . 그는 이반 4세(1545–1547)에게 보낸 세 편의 서한을 집필했다[164] . 물론 이러한 견해는 “러시아 교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명”[165] 이자 “16세기 우리 대주교들 중 가장 저명한 인물”[166] 인 모스크바 대주교 마카리(1542–1563)도 공유하고 있었다. 그의 견해는 당대의 사건들의 영향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자신의 삶의 경험과 요셉 및 요셉파의 사상[167] 과 조화를 이루며 형성되었다. 마카리우스의 요셉파적 견해는 그의 대목자적 사역에도 반영되었다. 노브고로드 교구 내 수도원 생활 개선 조치와 관련하여, 그는 1526년에 교회 당국 인 모스크바 대주교가 아닌 대공에게 직접 호소하여, 수도원 규약 개정과 공동 생활 도입에 대한 허가를 요청했다. 대공 바실리 3세에게 보낸 그의 서한은 전적으로 요시플리안 정신을 담고 있으며, 정통 왕에 대한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주님, 전하, 그리고 성모 마리아와 위대한 기적 행자들을 위하여, 신성한 교회들과 존경받는 수도원들을 위해 힘쓰시고 돌보아 주십시오. 왜냐하면, 전하, 주님의 높은 오른손에 의해 전하께서는 전 러시아의 독재자이자 통치자로 세워지셨으며, 주님께서는 전하를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당신을 위한 자리를 택하시고 당신의 보좌에 앉히셨으며, 온 위대한 정교회의 자비와 생명을 당신께 맡기셨습니다.”[168] . 이는 교회 계층의 대표자들이 차르의 종교적 의무, 교회에 대한 그의 태도, 심지어 교회 내에서의 그의 위치에 대해 가졌던 견해를 표현한 것이었다.

앞서 언급한 정치적 사건들은 이러한 견해의 발전과 서면화 과정을 촉진했다. 그 시대에 이는 조작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모스크바 국가에서 형성된 교회-정치적 상황으로부터 도출된 논리적 결론이었다. 비잔티움과의 오랜 교회적 유대는 결실을 맺을 수 있었고 또 그래야만 했으며, 비잔티움에 끔찍한 재앙이 닥쳤을 때, 정교회 세계의 중심지로서 그 자리를 대신할 새로운 강대국이 등장해야 했다[169] . 그러나 모스크바의 독재자들에게는 교회·종교적 근거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으며, 그들은 자신의 권력을 정치적·법적 언어로도 정당화하고, 전통과 ‘옛 관습’에 뿌리를 내리려 했다[170] .

이러한 국가·정치적 견해는 ‘모스크바 통합가들’의 활동과 모스크바의 정치적 전성기와 병행하여 형성되었다. 클류체프스키[171] 는 이 이데올로기적 구조와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간략히 설명하였다: “16세기 초 모스크바의 정치가들에게는 비잔티움(즉, 소피아 팔레올로고스 공주. – I. S.)과의 혼인 관계만으로는 부족했고, 혈연으로도 인연을 맺고 싶어 했으며, 그것도 최고 권력의 근원이나 세계적 표본인 로마 그 자체와 맺고 싶어 했다. 그 시대 모스크바 연대기에는 러시아 공작들의 새로운 족보가 등장하는데, 이는 그들의 혈통을 로마 황제로부터 직접 이어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보아하니 16세기 초에 다음과 같은 전설이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즉, 아우구스투스, 로마의 카이사르이자 온 우주를 지배하던 그가 쇠약해지기 시작했을 때, 우주를 형제들과 친척들 사이에 나누어 주고, 그의 형 프루스를 비스라 강 기슭에서 네만 강이라 불리는 강가에 앉혔으며, 그곳은 오늘날까지도 그의 이름을 따서 프루스 땅이라 불리며, “그리고 프루스의 14대 후손이 바로 위대한 군주 뤼리크”라고 한다. 모스크바의 외교관들은 이 전설을 실질적으로 활용했다. 1563년, 이반 차르의 보야르들은 폴란드 사절단과의 협상에서 그의 차르 칭호를 정당화하기 위해 연대기의 기록을 인용하며 바로 이 모스크바 류리코비치 가문의 계보를 제시했다… 비잔틴 유산의 개념도 역사적 근거를 통해 조명하고자 했다. 블라디미르 모노마흐는 비잔틴 황제 콘스탄티노스 모노마흐의 딸의 아들이었는데, 콘스탄티노스 모노마흐는 자신의 손자가 키예프 왕위에 오르기 50여 년 전에 사망했다[172] . 반면 그로즈니 치세에 편찬된 모스크바 연대기에는, 블라디미르 모노마흐가 키예프에서 대공이 된 후, 자신의 장군들을 차르그라드로 보내 바로 그 그리스 황제 콘스탄티노스 모노마흐와 전쟁을 벌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 콘스탄티노스 모노마흐는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그리스 대주교와 함께 ‘생명나무의 십자가’와 자신의 머리에서 벗은 왕관, 즉 모노마흐의 모자,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즐겨 사용했던 서도리크 보석으로 장식된 잔, 그리고 금사슬을 키예프로 보냈습니다… 블라디미르는 이 왕관으로 대관식을 치렀고, ‘모노마흐’, 즉 전 루시의 신에 의해 대관된 왕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때부터,” 이야기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모든 블라디미르 대공들은 그 왕관으로 대관식을 치르게 되었다…”[173] …이 전설의 핵심 사상은 다음과 같다. 비잔틴 황제들의 교회·정치적 후계자로서 모스크바 군주들의 위상은, 블라디미르 모노마흐 치세에 확립된 그리스와 러시아의 독재 군주들이 전 정교회 세계에 대해 공동으로 통치했던 체제에 근거하고 있다.[174] .

 

3. 수도사 필로페이와 그의 메시아적 사상

이 국가·정치적 전설(물론 종교적 색채도 띠고 있었음)과 앞서 설명한 당시 모스크바 사회의 견해[175] 는 모스크바 왕국을 ‘제3의 로마’로 보는 비잔틴-러시아 사상[176] 에서 최종적으로 구체화되었다. 이 메시아적 사상의 창시자는 프스코프 근교 엘레아자로프 수도원의 수도사 필로페이였다. 이 주제에 관한 저작들이 모스크바나 고대 루스의 교회·문화 중심지가 아닌 지방에서 등장했다는 점은 특징적인데, 이는 물론 프스코프 수도자들이 예배 문제뿐만 아니라 세계관적 주제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177] .

그의 서신들 덕분에 수도사 필로페이는 러시아 역사상 가장 뛰어난 인물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의 삶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는 15세기 후반 프스코프 지방 어딘가에서 태어났으며, 이후 1450년경 성 에우프로신 프스코프스키가 프스코프 근교에 설립한 엘레아자로프 수도원의 수도사가 되었다. 아마도 나중에 그는 엘레아자로프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을 것이다. 그의 저술 활동은 대공 바실리 3세(1505–1533)와 차르 이반 4세(1547–1584)의 통치 시기에 이루어졌다. 그의 유명한 서한들을 집필하기 전, 필로페이는 연대기 편찬에 종사했으며, 1512년 『크로노그래프』의 작성에 참여했는데, 이는 물론 그의 교양과 문학적 재능을 보여주는 것이다[178] .

이미 이 『크로노그래프』에서 필로페이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구절을 남겼다. “우리 러시아 땅은 하느님의 자비와 기도를 통해, 지극히 순결하신 성모 마리아와 모든 성인들의 기적 행하심으로 성장하며, 젊어지고, 높아지며(확장된다)”[179] . 이 말들에는 그의 교회-정치적 이데올로기의 핵심, 즉 모스크바 러시아의 ‘정통하고 정교한 왕국’이 지닌 메시아적 사명에 대한 그의 믿음이 담겨 있다. 필로페이의 교회-정치적 개념은 우리가 이미 설명한 견해와 생각과 가깝다. 이 개념은 유일하고 영원한 종교 공동체이자 ‘신의 도시’ (Civitas Dei)로서, 그리스도에 의해 설립되어 이후 비잔틴 제국에서 구현되었으나, 최근 들어 종교적 배신과 ‘교활한 그리스인’인 비잔틴인들의 신을 모독하는 행위로 인해 파멸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러시아인들의 정교와 모스크바 왕국의 정교는 이 왕국의 그 어떤 종교 저술가에게도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노브고로드 대주교 겐나디, 볼로츠키의 요셉, 모스크바 대주교 마카리우스, 그리고 그들의 동시대인들 모두에게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종교적 책임과 모스크바의 종교·정치적 과업, 그리고 국가·정치적으로 강력한 이 왕국이 정교회 세계에서 종교적 권위와 종교적 우위를 확보해야 할 필요성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질 때면, 이 모든 것은 일련의 역사적 사실로 입증되어야만 했다. 플로렌스 연합을 통해 그리스인들은 그리스도께 배반을 저질렀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정교회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그 명예를 실추시켰다[180] . 이 죄는 정교도 민족인 러시아인들에게도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다. 그 당시 기독교 세계는 중대한 기로에 서 있었는데, 20년 후면 1492년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는 창세 이후 7000년째 되는 해였으며, 비잔틴 달력에 따르면 3월 24일에서 25일로 넘어가는 밤에 세상의 종말이 올 예정이었다. 수년간 이어진 타타르의 압제, 유니온, 비잔틴 제국의 정치적 붕괴, 노브고로드의 이단 사태 등이 과연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징조가 아니었겠는가? 당시 사람들은 이러한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밀레니얼 사상은 고대 루스에서 비옥한 토양을 얻었는데, 그곳의 영적 삶은 언제나 종말론적인 색채가 짙게 배어 있었다[181] . 예전에는 단지 상상만 했던 것이 이제는 현실이 되고, 이미 일어난 사실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공포를 불러일으켰던 1492년이 지나갔지만, 기독교 세계는 멸망하지 않았다. 이는 숙고와 성찰의 대상이 되었다. 러시아인이 자신의 조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깊이 생각할 때, 그는 이곳 모스크바 왕국에서 국가가 번영의 기세를 타고 발전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아마도 필로페이가 자신의 『크로노그래프』를 집필하던 바로 그 시기에 『블라디미르 공작들에 관한 전설』도 집필되었을 것이다. 필로페이는 의심할 여지 없이 당대의 모든 견해와 관념을 잘 알고 있었는데, 이는 그가 말하자면 16세기 1분기 영적·문화적 엘리트에 속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그에게 『크로노그래프』에 앞서 언급한 루스의 특징을 담을 근거를 제공했다. 그의 사상과 신념이 완전히 성숙되기까지는 10년이 더 걸렸다. 이미 20년대에 그는 자신의 서한을 집필했는데, 그 안에서 모스크바를 ‘제3의 로마’[182] 로 보는 유명한 사상을 제시했다.

두 가지 사상이 필로페이의 종교적·철학적 및 메시아적 개념의 기초를 이룬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하나님의 도시’(Civitas Dei)로서 모스크바 왕국의 세계사적 중요성이며, 다른 하나는 이 왕국에 대한 신정적·군주주의적 평가이다.

세계사적 발전은 신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인류 전체와 개별 인간을 모두 인도하시며, 세상 곳곳에서 하나님의 은혜로운 뜻이 다스리고 있다. 하나님은 왕국을 높이시기도 하고, 타락했을 때는 무너뜨리시기도 한다; 주님께서는 군주들을 왕좌에 올리시며, 그들이 죄에 빠지면 징벌하시며, 군주들과 모든 사람을 진리와 정의로 인도하신다. 제1 로마는 아폴리나리우스 이단 때문에 타락하였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독교 정교회 세계에서의 지위를 상실했다. 그 자리를, 하느님의 자비로, 제2의 로마인 콘스탄티노플, 차르그라드가 차지했다. 그러나 타락한 로마와의 연합으로 인해 정통교리를 배반했고, 결국 멸망했다. 그곳의 성소인 콘스탄티노플의 성 소피아 대성당은 이에 대한 벌로 무신론적인 정복자들에 의해 더럽혀지고 파괴되었다. 그러나 정교회 신자들에게는 아직 희망이 남아 있다. 모스크바는 경건함과 하느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빛나고 있다. 모스크바는 연합을 거부함으로써 정교회의 정체성을 확고히 했으며, 그로 인해 세계 역사상 세 번째이자 마지막 로마가 되었고, 네 번째 로마는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러시아 차르는 세상에서 유일한 정교회 군주이며, 러시아 왕국은 마지막 왕국으로, 그 이후에는 오직 천국만이 있을 뿐이다.

필로페이는 자신의 모든 철학을 『점성가들과 라틴인들에게 보내는 서한』에 간결하게 정리했다. “모든 기독교 왕국이 끝을 맞이하여, 예언서의 말씀대로 우리 군주의 단일 왕국, 즉 러시아 왕국으로 통합되었으니. 두 로마는 무너졌고, 세 번째는 서 있으며, 네 번째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니… 곧 천하 만물 가운데 유일한 기독교 군주이자 통치자, 하나님의 성스러운 보좌이자 거룩한 전 세계 사도 교회로서,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을 대신하며, 하나님의 구원이 임한 도시 모스크바에 있는 바로 그 왕국이다”[183] .

그리고 필로페이는 대공 바실리 3세에게 러시아 정교회 왕국에 대한 자신의 구상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옛 로마 교회는 아폴리나리우스의 이단으로 인해 무너졌고, 두 번째 로마인 콘스탄티노플 교회는 아가리안들의 손자들이 도끼와 쇠지레로 그 문을 쪼개 버렸으나, 이 성스러운 총회 사도 교회는 이제 제3의 로마인 당신의 위엄 있는 왕국에 속해 있으며, 이 교회는 우주 끝까지 정통 기독교 신앙 안에서 온 천하, 특히 태양보다 더 밝게 빛나고 있나니… 그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주의하라, 왕이여, 다시금 분명하고 확고히 스스로 깨달으라. 모든 기독교 왕국이 네 왕국으로 귀의하였으니, 두 로마는 무너졌으나 세 번째는 서 있고, 네 번째는 없을 것이니라」[184] .

이처럼 우리는 필로페이의 메시아적 비전이 모스크바 왕국에서 이전에 생겨났고 그의 시대에도 계속해서 등장했던 일련의 견해들 속에서 마지막 고리였음을 알 수 있다. 동시에 필로페이의 가르침은 이 모든 견해와 관념들의 논리적 종합체이다. 프스코프의 이 수도사는 다른 누구보다도 더 뚜렷하고 명확하게, 자신의 모든 동시대인들에게 조국과 그 통치자인 정교회 차르의 위대한 기독교적 사명에 대해, 즉 차르의 지위가 신에 의해 부여된 것임을, 그 신성함을, 그리고 세속적 및 교회적 사안에서 오직 하나님 한 분께만 책임을 지는 차르의 의무와 권리에 대해 이야기한다[185] .

필로페이의 종교적 역사철학과 요시플리안들의 견해는 하나의 교회-정치적 세계관으로 융합되었으며, 이는 모스크바 왕국[186] 은 물론 18~19세기 표트르 제국의 러시아에서 국가와 교회 간의 관계가 더욱 발전하는 토대가 되었다.[187] 모스크바를 ‘제3의 로마’로 격상시킨 이데올로기는 매우 강한 교회-민족적 색채를 띠고 있었다. 이는 러시아 기독교가 그리스 기독교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러시아인들에게 오래전부터 뿌리내린 신념과 부합하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신념은 이미 11세기에 키예프 대주교 일라리온에 의해 표명된 바 있다.[188] 이제 러시아 교회 지도부와 수도자들의 대표들이 이 주장을 실제 사실과 사례, 모범을 통해 입증해야 할 때가 왔다. 이데올로기와 수사학은 아무리 훌륭하고 논리적이라 할지라도, 러시아인들에게는 아직 증거가 되지 못한다. 러시아인의 영혼이 기독교의 진리, 정교회 교리의 진리를 믿게 된 것은 교리적인 체계나 고대 러시아 문헌의 인상적인 설득력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이 교리가 지닌 전례적 풍요로움과 아름다움 덕분이었다. 바로 교회의 전례적 삶이 그에게 영광스러운 순교자와 성인, 기적 행자와 고백자, 심지어 천사들의 무리에 속한 겸손한 일원임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다. 교회는 예배 중에 단순히 의인들의 미래의 복되고 영원한 삶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교회 찬송과 성경 봉독을 통해 모든 사람이 기독교적 경건의 모범을 본받고, 그 모범을 바탕으로 자신의 삶을 꾸려 나간다면 의인들의 이 복된 삶을 맛볼 수 있을 것이라고 확언했다.[189] . 어쩌면 역설적으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러시아의 종교성에서 전례는 교리를 뒷전으로 밀어냈으며, 이 종교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의 내용이 아니라 신앙을 체험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러시아 종교적 영혼의 가장 특징적이고 중요한 특성이다.

고대 교회와 비잔틴 교회는 수많은 성인의 모범을 통해 자신들의 가르침이 진리이며 정통임을 증언했다. ‘제3의 로마’인 러시아 교회도 같은 모범을 통해 자신의 정통성을 증언할 수 없었던 것일까? 그녀도 자신의 의인들에게, 이 영광의 참여자로서 그리스도의 왕국을 열어주고, 러시아인들에게뿐만 아니라 러시아 교회가 이제 정통 신앙의 중심지가 된 온 정교회 세계에 그들의 충실함, 성스러움, 그리고 기적들에 대해 전할 수 없었던 것일까? 러시아 교회 지도부와 수도자들은 기독교적 한 수행, 종교적 열정, 기적 행함에 있어 많은 본보기를 보여주었다. ‘제3의 로마’에는 그만의 러시아식 피바이드와 수행자들이 있었으며, 이곳에서 수행을 하는 것은 이집트나 시리아의 어느 곳보다 결코 쉽지 않았다. 러시아 교회에는 이미 위대한 기독교적 위업을 이룬 몇몇 성인들이 있었다. 러시아 교회의 성인록에는 이미 전 세계 정교회 의인들의 무리에 두드러진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자국의 성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많은 수행자들은 아직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거나, 그들이 수행을 펼쳤던 그 지역에서만 알려져 있었다. 따라서 ‘제3의 로마’를 건설하는 이들에게 있어 성인들의 위업을 문서로 기록하고 그들을 시성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중요하고도 중대한 과제이자 기독교적 의무였는데, 이는 러시아 교회의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했기 때문이다.

 

4. 마카리 대주교와 16세기 러시아 성인전

최우선 과제는 러시아 수행자들의 행적을 집필하는 것이었다. 수도계가 이 일의 대부분을 맡았다. 16세기 초에는 이미 몇 편의 러시아 수행자와 성인들의 전기가 존재했으나, 그 수는 아직 적었다[190] . 이 세기 전반에 러시아 성인전 문헌은 크게 확충되었는데, 이는 주로 마카리이 대주교(1542–1563)의 개인적인 주도와 지도 덕분이었다[191] .

이미 노브고로드 교구를 관할하던 시절(1526–1542)에 대주교 마카리우스는 12권으로 구성된 『대 미네이 체티』(매월 한 권씩)를 편찬하는 거대한 작업을 착수했으며, 이 작업은 1529–1530년에 시작되었으며, 1541년에 마카리우스는 부모의 영혼을 기리기 위한 공헌으로 이 미네이를 노브고로드의 성 소피아 대성당에 기증했다. 1542년 그가 모스크바 대주교가 되었을 때, 이 작업은 완성되었으며, 1552년에는 새로운 필사본이 모스크바의 우스펜스키 대성당[192] 에 기증되었다. 클류체프스키는 “이 선집의 기초가 된 ‘러시아 땅에서 발견되는 모든 성서’를 수집하고 필사하라는 과제에 비추어 볼 때, 마카리우스의 『미네이』는 고대 러시아 문헌사에서 가장 대담한 사업이었다”고 썼다[193] . 이 미네이에는 당시 루스에서 알려져 있던 정교회 모든 성인의 행적뿐만 아니라, 다양한 금욕주의, 교리 문답, 설교 및 일부 정경적 저작들이 수록되어 있었다[194] .

마카리우스는 미네아에 러시아 성인들의 행적을 적절한 위치에 수록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주변에 조력자들을 모았고, 그들은 그의 지시에 따라 이 행적들을 집필했다. 마카리우스가 조세프파 성향을 가진 수도자 집단에서 조력자들을 찾았음은 분명하며, 그는 파프누티예보 보로프스키 수도원에서 수련생으로 지내던 시절부터 이미 오랫동안 이들과 인연을 맺어왔다. 따라서 이 시기에 러시아 성자전(아기오그래피)의 ‘요시프파 학파’가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 학파는 성인들의 행적 을 요시프파의 관점에 따라 제시하고, 그 내용이 이러한 관점에 부합하거나 ‘요시프파’적 색채를 띤 수도자의 삶을 묘사하고자 했다. 이 요시플리안 성인전 학파는, 그 저작들이 문학사에서 통상 ‘마카리예프 편집본의 성인전’[195] 으로 불리는데, 문학적 측면과 교회사적 측면 모두에서 수준이 제각각인 일련의 성인전[196] 을 만들어 냈는데, 첫째, 성인전 집필자들의 문학적 재능이 각기 달랐기 때문이며, 둘째, 그들이 특정 교회-정치적 관점에 입각하여 자료를 가공했기 때문이다.

이미 노브고로드에서(1537년) 당시 대주교였던 마카리우스는 보야르의 아들 바실리 투치코프에게, 노브고로드 주민들에게 매우 숭배받던 그리스도를 위한 성자이자 수행자 미하일 클롭스키(† 1456)의 전기를 집필하도록 지시했다[197] .

1545년경에는 고대 러시아 성자 전기의 보석으로 꼽히는 성 알렉산드르 스비르스키(† 1533)의 전기가 집필되었다. 일라리온이라는 이름의 저자는 알렉산드로-스비르스키 수도원의 원장으로서 성인의 동시대인이자 제자였으며, 그는 역사적으로 매우 정확하면서도 단순하고 표현력 있는 언어로 서술된 이 전기를 집필했다. 이 전기에선 성 알렉산드르의 기적에 특별한 비중을 두었으며, 이를 수사적 과장이나 허구 없이 평범한 구어체로 서술하여 독자와 청중에게 특히 깊은 인상을 남겼다[198] . 이 전기는 알렉산드르가 성인으로 추앙받기 전부터 집필되었으며, 그의 시성(聖人) 선포의 근거가 되었다.

같은 시기인 1545~1546년경, 마카리 사바 대주교의 직접적인 명령에 따라, 요시프 볼로콜람스키의 제자인 크루티츠키 주교가 요시프의 전기를 집필했다. 이 전기도 『미네이』에 수록되었으며, 문학적 측면에서도 고대 러시아 성인전 문학의 가장 뛰어난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이 작품은 역사적 사실이 풍부하고 문체가 뛰어나다. 요시프의 모습은 매우 생생하게 묘사되어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긴다. 그러나 동시에 이 전기는 상당히 뚜렷한 요시프파의 교회·정치적 색채를 띠고 있다. 이 흐름에 속했던 저자 사바 주교는 요시프의 이단과의 투쟁에 특별한 주목을 기울이며, 사형에 이르기까지 이단자들에 대한 엄격한 조치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이미 집행된 처형들에 대해 큰 만족감을 담아 서술하고 있다. 이 전기의 편찬자는 또한 요세프와 대공들 사이의 긴밀한 관계에 대해, 그리고 수도원장 자신과 그의 수도원 수도사들이 모스크바의 독재자를 어떻게 숭배했는지에 대해서도 언급하는데, 사바는 1547년, 차르 칭호가 도입되기 전부터 그를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 “차르”와 “정교 차르”라고 칭하며, 이러한 표현들을 요세프의 입에도 얹어 놓았다[199] .

거의 동시에 혹은 몇 년 앞선 1540년과 1546년 사이에 요시프의 행적이 기록되었는데, 이는 ‘저자 미상의 행적’이라는 제목을 얻었으니, 지금까지도 그 저자의 이름을 밝혀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많은 연구자들은 이 전기의 저자로 오텐스키 수도원의 수도사 지노비우스를 지목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추측은 지노비우스의 생애에 대한 몇 가지 정황과 전기의 내용에 근거하고 있다. 지노비우스는 요시프파의 이념을 공유하지만, 노브고로드 이단을 비난하는 데 있어 어느 정도 절제된 태도를 보이며, 요시프가 이단과 싸운 점을 칭송하는 한편 이단자들에 대한 처벌에 대해서는 매우 신중한 태도를 보인다. 수도원 소유지에 관한 문제에서 저자는 전적으로 요시프파의 견해를 따르지만, 수도원 마을에 대한 비재산주의자들의 견해를 비판하는 데 있어서는 절제된 태도를 보인다. 이 전기는 외적 금욕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요시프와 요시프 수도원의 수도사 카시안 보소그([200] )의 금욕적 행적에서 이 점을 부각시킨다.

요시프에 관한 세 번째 전기는 1547년에 쓰여졌다. 저자는 요시프의 조카인 수도사 도시페이 토포르코프였으며, 이 전기는 성인을 찬양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내용과 전반적인 정신 면에서 볼 때, 이 작품은 순수한 요시프파의 저작이다[201] .

요세프에 관한 성자전(아기오그래피)이 풍부하다는 점은, 마카리 대주교가 1547년 공의회에서 요세프 볼로츠키를 찬양하려 했음을 시사한다. 이는 대주교가 요시포프 수도원의 수도사 포티우스에게 요시프를 위한 캐논을 작성하도록 지시하고, “공의회 규정이 제정될 때까지” 개인 기도실에서 이를 부를 수 있도록 축복한 사실에서도 드러난다[202] .

요시프 볼로츠키는 1515년 9월 15일에 선종했으나, 1547년과 1549년의 공의회에서는 그는 시성되지 않았으며, 1578년 12월 20일에야 비로소 지역 시성식이 거행되었다. 즉, 그의 수도원에서는 더 이상 그를 위한 장례 미사가 봉헌되지 않았고, 예배 중에 그를 성인으로 모시며 기도하게 되었다. 요세프의 공식 시성식은 1591년 요브 총대주교에 의해 거행되었으며, 그는 요세프를 위한 캐논을 작성하도록 축복하고 그의 이름을 미네아[203] 에 등재했다.

요시프파의 금욕주의에 대한 찬사는 앞서 언급된 수도사 카시아노 보소(† 1542)의 행적에도 담겨 있는데, 그는 혹독한 추위를 견디며 수행한 엄격한 수행자였다. 그의 행적은 카시아노가 세상을 떠난 직후 아르히만드리트 바시아노에 의해 기록되었다[204] .

요시프파의 성자 전기를 마무리하는 것은 1547~48년에 수도사 도시페이 토포르코프가, 아마도 역시 대주교의 지도 하에 집필한 《볼로콜람스크 파테릭》이다. 이 파테릭에는 29편의 이야기와 볼로콜람스크 수도원의 창설 역사가 간략히 서술된 서문이 수록되어 있다. 다섯 편의 이야기는 요시프에게 헌정된 것으로, 수도 생활과 수도원 생활, 기독교 금욕주의의 기초에 대한 그의 발언을 담고 있으며, 동시에 다른 형태의 수도 생활에 비해 키노비아의 장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발언들은 이구멘 요시프의 직접적인 말로 파테릭에 수록되었다. 나머지 이야기들은 파프누티 보로프스키 이구멘이나 요시프 자신의 시점에서 쓰여졌다. 비록 이 모든 이야기들이 볼로콜람스크 수도원의 수도 생활을 묘사해야 하지만, 사실 그 내용은 독창적이지 않으며, 고대 루스에서 널리 퍼져 큰 인기를 끌었던 고대 기독교 파테리크들의 영향이 뚜렷이 드러난다. 전체 파테리크를 관통하는 붉은 실은 요시프파의 세계관이다[205] .

요시프파의 활발한 성자 전기 집필 활동과 더불어, 아마도 수많은 러시아 수행자들의 시성 문제를 결정해야 했던 공의회 준비에 대한 소문, 그리고 그 시대의 전반적인 분위기—고대 러시아 수도원 내 두 흐름(요시프파와 비소유파) 간의 쉼 없이 이어지던 이념적 투쟁—은 비소유파들 역시 성자 전기 문학적 저술에 나서도록 부추겼다. 한편으로는 그들 가운데에도 훌륭하고 영광스러운 수행자들이 많았음을 보여주고자 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요시프파의 사상이 확산되는 것을 저지하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네스티야제틀리파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고 엄격한 수행 생활로 유명했던 벨로제르스키 수도원의 수도사 마테이(페라폰토프)는, 수도원 설립자인 이구멘 페라폰트(† 1426)의 행적을 기록했다. 이 전기는 저자가 공동생활의 이념을 지지하고, 수도사들의 직접적인 육체 노동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비소유주의를 옹호한다는 점에서 특히 흥미롭다. 수도사 마테이는 또한 벨로제르스크의 마르티니아노 이구멘(† 1483)의 전기도 집필했다. 이 전기는 이구멘을 성 키릴 벨로제르스키의 금욕적 사상을 지지하는 인물로 묘사하며, 대공들과의 관계에서 , 특히 그가 트로이체-세르기예프 수도원의 원장 직무를 임시로 수행하던 시기 (1447–1455)의 원장 직무를 임시로 수행하던 시기에, 그의 비소유, 영적 침착함, 절제에 대한 성향을 강조하며, 마르티니안이 내적 금욕에 가장 큰 중요성을 부여했다는 점을 언급하고 있다. 즉, 모든 면에서 그를 닐 소르스키의 사상과 연결 짓는 특징들이 드러난다. 두 전기는 모두 1547년과 1549년 사이에 집필되었다.[206]

1547년경, 볼가 강 건너편 수도원계에서 스파소-카멘노 수도원의 수도사 요아사프(† 1483)의 행적이 등장했다. 이 전기에 따르면, 공작 가문 출신인 요아사프는 일생을 유혹과의 투쟁과 내적 수련에 바친 엄격한 수행자의 전형이었으며, 사랑을 가장 높은 기독교적 미덕으로 여겼고, 외적인 금욕과 수도원의 재산을 거부했다. 이 전기에 요아사프의 신비로운 환상에 대한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가 담겨 있다. 구세주가 계시를 통해 그에게 나타나, 겸손과 온유함이 유혹과 싸우는 데 가장 좋은 수단이라고 말씀하셨다[207] .

양 진영의 대표자들이 집필한 성자전 저작들은 고대 러시아 성인들의 위업을 묘사했는데, 이는 16세기 초반에 있어 주목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대주교 마카리우스에게 있어 러시아 교회—제3의 로마인 교회—의 탄생부터 시작해 그 명성을 드높일 수 있는 자료를 수집하는 것이 중요했음은 분명합니다. 바로 이 시기, 40년대 말과 50년대 초에, 루스가 세례를 받게 된 성 블라디미르 대공과 성 올가 대공비의 방대한 행적이 집필되었다[208] . 블라디미르의 행적 기록은 그의 통치 시대 전체에 대한 매우 상세한 묘사(총 72장으로 구성됨)를 담고 있으며, 이 기록이 작성된 시기에 특징적인 교회-정치적 견해를 반영하고 있다. 이 기록에서는 모스크바 군주들의 계보에 대한 문제도 다루어지며, 블라디미르 공과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 사이의 혈연 관계가 강조된다. 이 전기는 ‘스테펜나야 크니가(Степенная книга)’에 수록되었는데, 이는 당시 등장한 방대한 선집으로,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다루겠다.

대주교의 명령에 따라 블라디미르의 로즈데스트벤스키 수도원에 소속된 수도사 미하일이 이미 존재하던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공의 전기를 보완하고 재구성하여, 이를 일종의 성자 찬양문[209] 으로 탈바꿈시켰다. 찬양의 형태로 행적을 집필한 것은 아마도 당시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부합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1547년경 마카리우스의 지시에 따라 같은 취지로 모스크바 대주교 이오나(† 1461)의 행적[210] 과 니콘(† 1426)의 행적, 트로이체-세르기예프 수도원의 수도원장 니콘([211] )의 전기도 같은 맥락에서 작성되었으며, 두 전기 모두 저자가 알려지지 않은 채로 전해지고 있다.

『미네이』를 위해 15세기의 두 명의 저명한 수행자들의 행적이 기록되었다. 그 중 하나는 이미 우리에게 잘 알려진 엄격한 금욕주의자 파벨 오브노르스키(† 1429)의 전기로, 1536~1538년에 익명의 수도사가 집필했으며, 1547년에 그의 기적에 대한 기록[212] 이 추가되었다. 두 번째는 트베르 주 카신 시 인근에 위치한 트로이츠키 칼야진 수도원의 원장 마카리(† 1483)의 전기가 있었다. 부유한 보야르 가문 출신인 마카리는 세속을 완전히 버리고, 금식과 겸손으로 가득 찬 엄격한 수행 생활로 유명했다. 생전부터 그는 동시대인들의 숭배를 받았으며 , 후대 세대들 역시 그를 공경했다[213] . 그의 유해는 1521년에 발견되었다. 대주교의 지시에 따라 칼야진 수도원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한 수도사가 매우 훌륭하고 내용이 풍부한 마카리우스의 행적을 집필했다. 이 수도사는 아마도 그의 유해 발견에 관한 기록의 저자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마카리우스는 사후 수많은 기적 덕분에 이미 오래전부터 그 지역에서 성인으로 숭배받고 있었기 때문이다[214] .

 

5. 러시아 성인들의 공덕 찬양

이 모든 성자전 저작들은 마카리우스 대주교의 주도로 등장했는데, 이는 단순히 그의 『미네이』를 보완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주로 모스크바에서 공의회를 소집하여 그 자리에서 지역적으로 숭배받던 수많은 러시아의 경건한 수행자들을 성인으로 시성함으로써 성인의 반열에 올리고자 하는 그의 의도를 뒷받침하기 위함이었다. 수많은 러시아 수행자, 성직자, 그리고 경건한 공작들을 시성하는 일은 교회와 국가의 위상을 높이고, 모스크바를 ‘제3의 로마’[215] 로 자리매김하는 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1547년 모스크바에서 이 공의회가 열렸는데, 당시 문서에 따르면 이는 대공 이반 4세의 “명령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었다[216] . 성자 전기를 낭독한 후[217] 그 진위 여부를 검증한 공의회는 21명의 경건한 수행자들을 시성하기로 결정했다. 그중 12명은 전 러시아적으로 시성되었으며, 9명은 지역적으로 숭배받는 성인으로 시성되었다[218] . 새로운 성인들의 시성 근거는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아마도 공의회가 열거된 성인들에게 축일을 정한 것은, 오로지 그들만을 숭배와 시성할 자격이 있다고 인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에 대해서만 필요한 자료를 손에 쥐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며, 이를 근거로 자신의 결정을 확정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219] .

마카리 대주교도, 어린 차르 이반도, 주교들도 이번 결정을 완전히 만족스럽게 여기지 않았으며, 러시아 교회의 권위를 공고히 할 러시아 성인들의 수를 더욱 늘리려 했다는 사실은, 2년 후인 1549년에 모스크바에서 다시금 전적으로 시성 문제에 전념하는 새로운 공의회가 소집되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220] . 이상하게도 이 두 번째 공의회의 활동에 관한 신뢰할 만한 문서는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오직 이오나 대주교의 전기에 삽입된 내용을 바탕으로만 시성된 성인들의 이름을 알 수 있지만, 이 삽입문이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출처는 아니라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1549년 공의회에서 교회의 7명의 주교, 6명의 경건한 아버지들, 수도원장 및 새로운 수도원의 설립자들, 3명의 순교자, 그리고 1명의 공작 등 총 17명의 성인이 시성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221] . 따라서 이 두 공의회에서 총 38명의 경건한 수행자들이 시성된 것으로 나타납니다[222] .

두 공의회의 목적은 러시아 교회와 모스크바 왕국을 제3의 로마로 고양하는 것이었으나, 마카리 대주교는 동시대인들뿐만 아니라 후세 사람들에게도 제3의 로마의 내적 교회-정치적 조화를 입증하기 위해 또 하나의 중요한 일을 착수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방대한 교회·국가·역사 자료집인 『스테펜나야 크니가』가 편찬되었는데, 여기에는 교회적 관점에서 치밀하게 고안된 모스크바 국가, 즉 ‘성스러운 루스’의 역사가 담겨 있었다. 이 성자 전기 및 전기적 성격을 띤 선집에는 모스크바 왕조의 시작부터 대공 이반 3세의 통치 말기까지 모스크바 왕조 군주들의 행적에 대한 서술이 수록되어 있었으며, 기독교-교회적 관점에서 이에 대한 평가가 제시되었다. “이 저작은 옛 러시아 연대기, 연대기 및 기타 역사적 자료들을 새로운 원칙, 즉 연도별 단순 서술의 연대기 대신 통치 왕조의 계보에 기초하여 심도 있게 재구성한 것이었다”[223] . 『스테펜나야 크니가』는 모스크바 왕조의 ‘기독교 군주들’에 대한 전기를 모은 선집으로, 루스의 정치사를 다룬 성인전(聖人傳)이라 할 수 있으며, 비록 허구적인 사건에 대한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편찬자들에게는 전적으로 사실적이고 진실된 것으로 여겨졌다. “군주를 통해 구현된 국가의 이념은 러시아 교회의 위대함, 나아가 러시아 국가의 위대함과 하나로 어우러졌기 때문에, 이 책에는 왕과 공작들의 전기와 더불어 대주교, 주교, 성인들의 전기도 함께 수록되었다”[224] .

이 방대한 저작을 집필하는 데는 많은 저자들의 참여가 필요했으며, 그중에서 아마도 가장 중요한 역할, 즉 편집자의 역할을 맡은 사람은 모스크바의 사제 안드레이였는데, 그는 차르의 고해신부였으며 훗날 모스크바 대주교가 되었다. 이 선집의 집필진 중에는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모스크바 수도자들도 많이 있었는데, 문학적 창작 활동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오직 이 계층에서만 찾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사업의 발기인이자 지도자는 마카리이 대주교였다. 『스테펜나야 크니가』의 최종 편집은 마카리이 대주교(† 1563)의 생애 말년에 이루어졌다. 『스테펜나야 크니가』는 그 어떤 다른 기록물보다도 “모스크바는 제3의 로마”라는 사상이 대주교[225] 의 세계관에 얼마나 깊이 뿌리내렸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처럼 이 저작은 ‘모스크바—제3의 로마’라는 사상을 창안하고 전파한 이들의 거의 100년에 걸친 세계관적 창작 활동, 그리고 두세 세대에 걸친 교회 계층과 수도자들의 획기적인 영적 활동을 마무리 짓는다. 이러한 세계관은 어느 정도 후대 왕들과 교회 지도자들, 성직자와 수도자들, 시인과 작가들, 정치가들과 사회, 러시아의 방랑자들과 농민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수도사 필로페이와 그의 동시대인들이 옳았는지 그르렀는지는 여기서 논의하지 않을 문제이다. 이에 대한 답을 찾으려면 러시아 교회와 러시아 국가의 이후 역사를 모두 짚어보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러시아 수도자들이 이 교회-정치적 개념을 정립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보여주는 것뿐이었다.

 

 

제6장. 16~17세기 논쟁 저작과 법률에서 드러난 수도원의 토지 소유권 문제

 

1. ‘수도사 공작’ 바시안과 그의 논쟁적 저작들

1503년 공의회 결의안(제4장에서 다룬 바와 같이)은 요시플리안 사상의 승리를 상징했다. 이때부터 요시프파는 모스크바 교회 생활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게 되었으나, 그들의 반대파인 비재산주의자들은 투지를 잃지 않았다. 그들은 요시프와 그의 지지자들의 승리가 정부를 그다지 기쁘게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금세 눈치챘다. 수십 년이 지난 후, 모스크바 정부는 국가적·정치적 및 경제적 이익을 근거로 수도원 토지 소유권 문제를 다시 제기할 수밖에 없었으며, 1503년 공의회 결정을 철회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국가의 이익을 위해 이를 재검토해야 했다. 닐과 파이시의 공로는 1503년 공의회에서 그들의 발언을 통해 정부의 관심을 수도원 소유지로 돌리고, 이 문제를 순수한 교회 생활의 영역에서 국가 경제 이익의 영역으로 옮겨놓았다는 점에 있었다.

이제 이 문제는 비재산파와 요시프파, 그리고 정부 모두가 다루게 되었다. 전자는 공세적인 입장을 취했고, 정부는 어떤 조치를 취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반면 요시프파는 방어적인 입장을 취하여, 한편으로는 비재산파를 제압하는 데 성공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수도원 소유지의 증대에 대한 정부의 조치가 미온적으로 끝나는 결과를 이끌어냈다.

1503년의 공의회는 비재산주의자들에게 수도원 소유지가 수도원의 정상적인 생활에 해롭다는 견해를 확산시키기 위한 투쟁의 시작이 되었다. 닐 소르스키와 파이시이 야로슬라보프 두 장로는 이 투쟁과 논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들은 공의회 직후 세상을 떠났는데, 첫 번째는 1508년에, 두 번째는 1503년 이후에 사망했다. 수도원 소유지에 대한 문제는 두 장로 모두에게 원칙적이며 순수한 금욕적 의미를 지녔는데, 이는 요시프 볼로츠키 자신도 인정한 바이다[226] . 그러나 닐이 세상을 떠난 후 수도원 소유지에 반대 입장을 표명한 비재산파의 대표자들은 그 외에도 다른 고려 사항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비소유파’의 신분적 소속을 살펴보면, 이 수도자 집단이 모스크바 국가의 보야르 및 관료 귀족층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음이 드러난다. 15~16세기의 많은 러시아 수행자들은 보야르 및 봉신 가문 출신이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이미 제3장에서 다룬 바 있다. 특히 15세기 마지막 25년 동안 이 계급의 상당수가 보야르의 복장을 수도사의 예복으로 갈아입고 볼가 강 건너편 수도원, 주로 키릴로-벨로제르스키 수도원[227] 으로 떠났다. 요시플리안 이데올로기의 경제적 측면이 보야르와 군인 귀족들의 이익과 상충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보야르와 귀족들의 소유지를 통해 수도원의 부가 늘어나는 것은 이 계층의 사람들에게 매우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었는데, 그로 인해 그들의 계급이 가진 국가적·정치적, 경제적 중요성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축재주의자들 가운데 이 사회 계층에서 나온 수도사들이 그토록 많았던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 수도사 집단을 무소유주의자 편으로 이끌었던 것은 오로지 경제적 고려만은 아니었다. 요시프파에 대한 그들의 적대감에는 정치적 이유도 있었는데, 요시프파는 모스크바 군주들의 세력 확장과 전제적 권력의 강화에 열성적으로 협력했기 때문이다. 15세기 마지막 25년 동안 국가 통치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고대 러시아 보야르 계급에게 이러한 새로운 사상은 낯설고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는 보야르 계급의 중요성을 폄하하고 그들의 계급적 자존심을 깊이 모욕했기 때문이다[228] . 요시플리안들로부터 그토록 열렬한 지지를 받은 “모스크바는 제3의 로마”라는 사상은, 교회 계층의 영향력 확대에 공감할 수 없었던 보야르들 사이에서는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분명히 요시프파의 반대자들인 비재물주의자들은 필로페이의 교회-정치적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일 특별한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모스크바 정교회 왕국’에 대한 예언을 위해 그들은 자신의 금욕적 이상과 천상과 지상의 분리가 필요하다는 관념을 희생하고 싶지 않았다. 이 러시아 수도자 집단은 보야르 계층에서 지지자와 추종자들을 얻었다. 파이시이 야로슬라보프, 닐 소르스키, 인노켄티 오흘레비닌은 이미 우리에게 잘 알려진, 볼가 강 하류 숲지대의 금욕적·신비주의 운동의 창시자이자 지도자들로, 엄격한 수행자이자 기독교 이상주의자들이었으며, 그들의 견해는 동시대인들의 세속적 문제에 대한 관점에 좌우되지 않았고, 경제적 고려 사항도 그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그러나 16세기 전반의 비소유자들과 그들의 추종자들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당시 정치적 영향력을 잃어가던 보야르 계급 출신들이 그들의 소수의 은둔처에서 수도 서원을 받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거친 수도복은 그들의 계급적 자존심과 오만함, 그리고 귀족 혈통에서 비롯된 열정을 누그러뜨릴 수 없었다. 그들은 비소유주의자들의 일부 사상을 두고 요시프파와 대립했으나, 수도원 소유권 문제를 둘러싼 논쟁에 그들이 참여한 원인을 단정적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229] .

이 논쟁의 주요 참여자이자, 비록 수도원의 부의 축적을 반대하는 유일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수도사 공작’ 바시안, 세속 이름은 바실리 이바노비치 파트리키예프 코소이였다. 그의 출신과 지위상 그는 모스크바 대공 궁정에서 가장 명문인 보야르 가문 중 하나에 속했다. 파트리키예프 공작 가문의 시조이자 리투아니아 대공 게데민(1315–1341)의 손자는 1408년에 모스크바로 건너가 바실리 1세 대공을 모시게 되었다. 그의 자녀들과 손자들은 이미 파트리키예프 공작으로 불렸으며, 대공의 궁정에서 요직을 맡았을 뿐만 아니라 대공과 혈연 관계이기도 했다. 유리 파트리키예프 공작은 바실리 1세 대공의 딸과 결혼했으며, 그의 아들 이반(바시아나의 아버지)은 바실리 2세와 이반 3세 대공의 궁정에서 제1 보야린을 지냈다[230] . 이반 3세는 젊은 바실리 이바노비치 공작에게 여러 차례 다양한 외교적 임무를 맡겼다[231] . 그러나 1499년 초, 파트리케예프 가문의 공작들은 궁정 내에서의 영향력 있는 지위를 잃게 되었다. 대공 가문의 상속 분쟁에서 그들은 모스크바 보야르 계급의 전통에 충실하여 ‘그리스 여인’인 대공비 소피아에게 반감을 품었고, 대공의 아들인 바실리 2세가 아닌 그의 손자 디미트리야를 왕위 계승자로 지지했으며, 바실리를 지지했으며, 음모와 공개적인 왕조 투쟁[232] 에도 가담했다. 디미트리 지지자 중 일부는 처형당했다. 파트리케예프 부자는 대주교의 중재 덕분에 사형을 면했으나, 대공은 두 사람 모두를 수도사로 출가시키라고 명령했다. 아들은 이제 수도자 이름인 바시안으로 불리며 키릴로-벨로제르스키 수도원으로 유배되었다[233] .

그곳, 수도원 담장 너머에서 그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바시안은 수도원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아마도 수도원 규율이 그의 성격에 잘 맞지 않았던 듯, 그는 자신만의 스키트([234] )를 짓고, 같은 지역에 있는 스키트로 피신해 있던 장로 닐 소르스키를 알게 되었다. 이 만남 이후 바시안(물론, 그 이전부터 이 가르침을 전하는 장로에 대해 소문을 들었을 가능성도 있다) 은 비소유주의자들과 그들의 금욕적 견해를 열렬히 지지하게 되었으나, 특히 자신의 생활 방식과 관련해서는 그 견해를 완전히 공유하지는 않았다. 닐과 바시안은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었고, 그들의 삶도 각기 다르게 펼쳐졌다. 바시안은 자신을 닐의 제자 중 한 명으로 여겼으나[235] , 이는 금욕적 훈련이라는 의미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마음씨가 온화하고 영적 수행과 관상에 치우친 닐은, 자존심이 강하고 활기차며 열정적인 모스크바 보야린의 성격을 바꿔놓을 수도 없었고, 그에게 수도자의 겸손함을 심어줄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바시안은 그의 저술로 미루어 볼 때 많은 것을 배웠지만, 닐과 일반적으로 소유를 탐하지 않는 장로들에게서 받아들인 것은 오로지 그들의 원칙적인 견해와 관점뿐이었다. 이는 자신의 삶에서 그 원칙들을 따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수도 생활의 진정한 이상으로서 이를 옹호하기 위한 것이었다[236] . 보야르 가문의 제멋대로이면서도 활동적인 자손인 그의 성격은 수도원 방에서의 고독을 견딜 수 없었다. 그에게는 닐의 사상을 실제로 실현할 수 있는 활동의 무대가 필요했다.

수도사 공작 바시아ンの 삶과 활동을 되짚어 보면, 그가 16세기 러시아 역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인물 중 한 명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성격과 활동에서 가장 이질적인 특징들을 결합한 독특한 인물이었다: 오만함과 열정; 자신의 이념에 대한 헌신과 요시프 볼로츠키 및 요시프파에 대한 적대감; 시대에 국한된 학식과 비판적·논쟁적인 기백; 기독교 금욕주의의 기본 원칙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삶은 금욕적이지 않은 모습; 마지막으로, 수도원 소유지와 국가·정치 문제에 대한 자볼제 수도사들의 견해에 대한 충성심 – 그는 자신의 신념과 파벌을 위해 끈질기고 맹렬하게 싸웠으나, 적들이 더 강하고 자신에게는 승리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의 운명이 이미 결정되었을 때, 그는 보야르다운 성품에 충실하게도 판결을 아이러니와 풍자로 받아들였다.

닐의 제안과는 달리 수도원의 토지 소유권을 재확인한 1503년 공의회 결의안은 바시아누스에게 수도사의 무소유 정신을 옹호하고, 저술 활동을 무기로 삼아 닐의 금욕적 견해를 방어할 좋은 계기가 되었다[237] . 바시아누스는 당시 상황을 충분히 잘 파악하고 있었기에, 세상과 동떨어진 사막에서 요셉파와 싸우는 것이 얼마나 희망이 없는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승승장구하는 요셉파와 논쟁을 벌이기에 적합한 장소는 모스크바뿐이었다. 일각에서 주장하듯이[238] 바시안이 1503년 공의회 회의에 참석했는지는 불분명하며, 바시안 자신도 공의회 활동에 대한 참여 여부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한 바 없다. 아마도 그는 대공 이반의 사망(1505년 10월)[239] 이후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것이다. 바시안은 곧 대공 궁정과 좋은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는 새로운 대공 바실리의 호의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통치 문제에서도 그에게 영향을 미쳤다[240] . 이와 관련하여 바시안이 새로운 대주교 바르라암(1511–1521)의 임명에 일정한 역할을 했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타당하다. 이 임명은 주교 공의회 없이 대공의 명령에 따라 이루어졌으며, 대공은 바르라암을 대주교좌에 지명했다. 이 상황뿐만 아니라, 바르라암이 무소유주의자들에게 동조했으며, 당시 정직한 수도원장인 바시안을 잘 알고 있던 바시안이 거주하던 시모노프 수도원의 원장이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아마도 바시안은 대공 바실리에게 바르라암을 대주교좌에 추천할 것을 제안했을 가능성이 있다. 만약 모든 상황이 정확히 그랬다면, 이는 바시안의 큰 공로라 할 수 있는데, 바르라암은 모스크바 루스의 교회 계층을 대표하는 최고의 인물 중 한 명이기 때문이다[241] .

바시아ンの 문학적·논쟁적 활동은 주로 1508–09년과 1515–17년 사이의 시기에 집중되어 있다.[242] 바시아ンの 다음 저작들이 전해지고 있다: 1) “닐과 그의 제자 바시아나가 볼로츠키 수도원장 요시프를 두고 쓴 서문, 즉 하나님을 이해하고 경청하며 기도하는 것에 관하여”; 2) “복음의 진리를 비방하는 자들에 대한 반박 설교 및 수도 생활과 교회 제도에 관하여”; 3) “닐 소르스키의 제자 바시안이 볼로츠키의 수도원장 요세프를 주제로, 성 니콘의 규칙[243] 과 수많은 말씀에서 발췌하여 엮은 모음집»; 4) 「동일한 은둔 수도사 바시안이 볼로츠키의 수도원장 요세프를 주제로, 성스러운 규칙과 수많은 서적에서 발췌하여 엮은 모음집, 그리고 그의 제자들을 위한 내용과 서적들 간의 다양한 상호 답변」 (이 저작은 바시안과 요세프 사이의 대화를 담고 있으며, 2번과 3번 저작에 대한 일종의 후기를 이룬다)[244] . 바시아누스가 자신의 『코르므차야』에 후기로 작성한 특별한 「논고」는 매우 간결한 저작 5) 「세상을 배척하기 위해 성경에서 자신의 서약을 상기하는 한 장로의 모음집」[245] 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6) 그의 『코르므차야』는 고대 루스 교회가 사용했던 가장 중요한 교회법 서적을 비평적으로 재구성한 것으로,[246] ; 바시안은 이 책이 다른 저술들에 제시된 자신의 견해를 최종적으로 확증하고, 비소유주의자들의 명백한 정당성을 입증해야 한다고 여겼다.

위에 열거된 바시아노의 저작들은 내용 면에서 서로 차이가 있다. 『서문』(1)은 일반적인 성격의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저자는 무엇보다도 기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데, 이는 닐 소르스키의 금욕적·신비주의적 견해와 완전히 부합하는 것으로, 즉 기도하는 이에게 기도는 영적 전쟁의 무기이자 자신의 ‘내면의 감옥’으로 들어가는 수단이며, 그 깊이와 힘은 기도 찬송의 아름다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바시아누스에게 이 주장은 그의 금욕적 견해를 표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요시프파의 외형적 경건 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대답의 말씀』(2)은 바시아노의 논쟁 원칙과 성격을 특히 잘 반영하고 있다. 그는 여기서 수도 서원의 형식적인 해석을 비판하며, 수도사가 겉으로만 아니라 내면적으로도 자신의 금욕적(수도원적)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계명을 준수할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계명들은 자기 부인과 자기 희생, 세속적인 혜택과 가치에 대한 포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수도원이 농민들이 거주하는 토지를 소유하고 있고, 이와 관련된 경제적 관리 업무가 있기 때문에, 바시아노의 견해에 따르면 수도 생활은 그리스도의 계명을 완전히 망각한 채 이어지고 있다[247] . 복음에 따라 수도 생활을 정립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말하면서, 바시아누스는 수도 생활을 그 기독교적 금욕주의의 근원으로 되돌리려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최초의 영적 아름다움과 양분으로 돌아가고자 한다”[248] . 이 저작에서 바시안은 특정 금욕주의 경향의 대표자이자 자신의 개인적인 영적 경험을 대변하는 인물로 우리 앞에 나타납니다. 반면 그의 또 다른 저작인 『성인들의 규칙 모음』(3)은 전형적인 비판적·논쟁적 저작으로, “재물 추구자들”, 특히 요세프의 주장을 반박하려는 시도입니다. 요세프는 수도원 소유지의 필요성과 허용 가능성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고대 러시아 수도원 설립자들과 경건한 수행자들의 행적에서 가져온 사례들로 정당화했다. 바시아누스는 고대 기독교 수행자들—이집트의 파코미우스, 유피미우스, 팔레스타인의 사바와 테오도시우스[249] —의 행적을 인용하여 이러한 논거에 반박하며, 이 고대 기독교 수행자들은 소유를 추구하지 않았고, 극심한 궁핍 속에서 세속적 복을 배척하며 삶을 살았다고 기록한다. 바시아누스는 이들과 다른 은수자들이 수도원 원장으로서 수도원 소유지를 전혀 관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들은 농장을 소유하고 있었으나, 그것에 대한 집착은 없었다”고 말할 뿐이다. 바시아누스는 교회 기관의 토지 소유권에 대한 권리를 부정하지 않으며, 교구 주교들과 본당 교회들의 그러한 권리를 인정하고, 단지 이러한 소유권과 그 이용이 교회법[250] 에 위배되지 않도록 요구할 뿐이다. 그러나 수도 생활은, 그의 신념에 따르면, 어떠한 재산적 욕망과도 거리가 멀어야 하며, 이 점에서 그는 닐로스의 충실한 추종자이다[251] . 왜냐하면 바시아나의 견해에 따르면, 수도원의 소유지는 비록 매우 빈약하더라도 수도사들에게 새로운 취득에 대한 욕망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들은 부자들에게 수도원을 위한 기부를 청하거나 속임수로 갈취하기 시작하고, 하찮은 땅 조각을 두고 이웃들과 소송을 벌이며, 심지어 문서 위조와 당국에 대한 기만까지 서슴지 않는다[252] .

부유하고 권력을 탐하는 보야르 계층 출신인 바시안에게 있어, 자신의 논쟁에서 순전히 사회적 문제, 즉 수도원 농민들의 처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는 사실은 매우 독특한 것으로 드러난다. 이처럼 농민 문제에서 수도사 공작 바시안 파트리키예프는 러시아 최초의 자유주의자로 드러난다. 그는 수도계, 특히 수도원 원장들과 수도원 소유지를 관리하던 수도사들을 향해, 그들이 수도원 농민들의 노동을 착취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그는 수도사들의 풍요롭고 편안한 삶을 농민들의 고된 삶과 비교하며, 농민들의 지치게 하는 매일의 노동, 소박하고 빈약한 식사, 열악한 주거 환경, 그리고 농민들을 노예 상태로 전락시키는 수도원에 대한 빚과 빈곤에 대해 언급한다[253] .

바시아노의 논쟁적 저작을 읽다 보면, 그가 이러한 문제들을 논의하는 데 얼마나 큰 열정과 열의를 쏟았는지 알 수 있다. 순전히 원칙적인 주제 논의와 닐 소르스키와 같은 금욕적 수행 경험을 가진 수도사들의 냉정함은 바시아노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바시아나의 저작에서 우리는 그의 뜨거운 보야르 혈통이 끓어오르는 모습, 열정, 타협하지 않는 태도, 그리고 반대자들인 요시플리안들에 대한 분노를 느낄 수 있다. 그의 언어는 날카롭고, 평가는 정곡을 찌른다. 그는 홀로 남게 되었을 때, 자신의 처지(이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설명할 것)가 거의 절망적임을 깨달았을 때조차 물러서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는 모스크바에서 그에게 가혹한 판결을 내린 많은 적을 만들었으며, 더 나아가 교회 역사학자들[254] 로부터 날카롭고 부분적으로는 부당한 비판을 받게 되었다.

 

2. 수도원의 토지 소유에 반대하는 다른 저작들

1503년부터 1517년 사이, 자신의 저작을 집필하던 시기에 바시안은 그의 견해가 대주교 바르라암에게서 어느 정도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대공으로부터 묵묵한 지지를 받지 못했다면, 자신의 대의를 위해 거의 홀로 싸우는 투사가 되었을 것이다. 1517년 이후 바시안은 새로운 지지를 얻게 되는데, 아폰 산의 수도사이자 유명한 막심 그리스인을 동지로 맞이하게 되었다. 아폰 산의 바토페드 수도원 출신인 이 외국인 수도사는 우연히 모스크바에 오게 되었으나, 뛰어난 인물이자 러시아 교회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골루빈스키는 “성자 막심은 우리 교회 역사에서 한편으로는 완전히 우연한 인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역사 자체에서 그토록 유명한 만큼, 교회 학문과 관련해서도 그만큼 중요한 인물이다”라고 썼다[255] .

막심이 모스크바에 도착하기 전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단편적이고 신뢰하기 어렵다[256] . 그는 1470년과 1475년 사이에 알바니아의 아르타 시에서 그리스인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부모가 아들이 이탈리아에서 장기간 학업을 이어가는 동안 생계를 책임질 수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그 가정은 아마도 부유했을 것이다. 막심은 베네치아, 페라라, 파두아, 피렌체 및 기타 도시들을 방문하여 이탈리아 학계의 최고 권위자들로부터 배울 수 있었으며; 그는 기독교 저작뿐만 아니라 고전 문학(헤시오도스, 호메로스, 푸키디데스, 플루타르코스)과 그리스 ‘외부 철학자들’(‘외부 현자들이 집필한’)의 저술도 연구했는데, 이는 그의 저작과 바실리 대공에게 보낸 서신에서 확인할 수 있다[257] . 그 무렵 막시무스의 삶에서 가장 큰 사건은 사보나롤라와의 만남이었다[258] . 젊은 그리스인은 자신이 피렌체 설교자의 비극적인 운명을 되풀이하고, 그와 견줄 만한 불굴의 의지와 도덕적 위대함을 갖추게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어쩌면 생애 마지막 몇 년 동안 막심은 마음속으로 사보나롤라의 운명을 본보기로 삼았고, “지극히 경건하고 신성한 열정으로 아름답게 빛나는” 이 ‘수행자’에 대한 추억 속에서 위안을 얻었을지도 모른다[259] . “세속적인 철학자들”은 막심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 없었다; 기독교와 동방 교회의 가르침에 뿌리를 둔 그는 교회 신학과 정교회 교리를 심도 있게 연구하고자 했으며, 내면의 기독교적 완성을 추구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1507년경, 그는 아폰 산으로 향했는데, 그 당시 아폰 산의 수도사들은 정교회의 보루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적 분위기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아폰 산 수도원, 스키토, 그리고 케리아가 만들어내는 고요함과 독특한 생활 방식의 세계로, 그곳에서 수도사들은 11세기, 16세기, 19세기에 걸쳐 거의 똑같은 방식으로 살았으며, – 그들의 삶은 이탈리아 도시들의 다채롭고 분주한 소동과는 전혀 달랐다. 바토페드스키 수도원에서 막심은 신학 공부를 위한 안식처를 찾았고, 이곳에서 수도 서원을 하고 수도자 서품을 받았다. 아토스 산에서 막심은 한 인간으로서, 학자이자 신학자로서 성장한다. 그는 정교회 신학 분야에서 매우 방대하고 탄탄한 지식을 습득하는데, 이에 대한 이해는 그의 저서들을 통해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성산의 분위기가 이탈리아에서 쌓은 학문의 결실을 결코 훼손하지는 않았다. 그의 학문에서 우리는 고전 철학과 기독교 신학의 지식이 훌륭하게 조화를 이루는 것을 발견할 수 있으나, 교회의 가르침과 성부들의 가르침은 막심에게 있어 가장 중요하고 의심의 여지가 없는 권위를 지닌다[260] . 막시모스의 바토페드스 수도원[261] 에서의 학문적 연구는 10년 동안 이어졌으며, 성산 주민들의 눈에는 그가 큰 신학적 권위를 얻었으니, 이는 근거 없이 그에게만 중대한 임무가 맡겨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515년, 대공은 아폰 산으로 두 명의 사절을 파견하여 모든 아폰 산 수도원에 선물을 전하고, 아폰 산의 성직자 대수도원장에게 편지를 전달하게 했다. 대공은 그에게 슬라브어를 구사하는 사바라는 수도사를 잠시 모스크바로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대공의 도서관에서 주석이 달린 그리스어 시편이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는데, 대공은 이를 번역하기를 원했다. 병과 노령으로 인해 사바 수도사는 그렇게 멀고 험난한 여정을 떠날 수 없었다. 이에 성직자 대수도원장은 슬라브어나 러시아어를 전혀 구사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임무를 위해 막심 수도사를 선택했다. 그러나 그의 능력과 문헌학적 소양을 잘 알고 있던 성직자 대수도원장은(대공에게 보낸 답신에서도 이 점을 언급했듯이) 수도사 막심이 슬라브어를 매우 빠르게 익혀 대공의 바람을 이루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렇게 해서 수도사 막심은 전혀 예상치 못하게 — 그가 생각하기에는 잠시 동안일 뿐이라고 여겼지만 — 바토페드 수도원을 떠나 모스크바로 향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성스러운 아폰 산을 영원히 떠난다는 사실이나, 모스크바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비범한 운명이 그를 루스(러시아)의 종교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만들 것이며, 동시에 예상치 못한 반전과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될 것임을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262] .

1518년 3월 4일, 비교적 긴 여정을 마친 막심은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그의 삶에는 완전히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는데, 이는 한편으로는 그에게 폭넓은 존경과 비공식적인 명성을 안겨주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요시프파 성향의 교회 지도부로부터 많은 고난과 부당한 박해를 겪게 했다. 그의 개인적인 운명은 16세기 러시아 교회사의 사건들과 밀접하게 얽혀 있었으며, 그는 자신의 저술과 ‘제3의 로마’인 모스크바 교회의 상황에 대한 비판을 통해 이 역사를 훌륭하게 묘사했다. 그의 많은 저술은 그 시대 러시아 수도원 생활사에 관한 매우 중요하고 신뢰할 수 있는 자료이다. 이 저술들은 깊은 신학적 지식을 갖추고, 성산(聖山) 수도원의 삶을 관찰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그 삶을 살아보았기에 올바른 평가를 내릴 수 있었던 정교회 수도사가 쓴 것이다. 그가 모스크바 교회 지도부와 겪은 갈등은 그 지도부뿐만 아니라 러시아 수도원 생활 전체를 잘 보여준다. 당시 러시아 교회 지도부는 후대와는 달리 수도원 수도자들의 ‘피와 살’ 그 자체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수도원에서 나왔고, 수도사들의 견해를 공유했으며, 대부분 동일한 신학적 지식을 갖추고 있었고, 전반적으로 수도 생활의 모든 장점과 단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주교단의 대표자가 비재물주의자나 요시플리안파의 견해를 공유했다면 — 16세기, 특히 그 전반기에는 중립적인 입장을 취한 주교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 이는 항상 해당 주교가 수도자로서의 삶을 보낸 수도원의 영적 분위기와 관련이 있었다.

분명히, 성산(聖山)의 막심이 모스크바에서 형성된 교회-정치적 상황을 알게 되자마자, 그는 양측 모두에게 유용할 수 있었던 성경과 성부들의 저술에 대한 지식 덕분에, 원하든 원치 않든 이 획기적인 논쟁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의 지식, 그만의 금욕적 체험, 그리고 개인적인 신념이 그를 무소유주의자들의 편으로 이끌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아래에서 설명할 바와 같이, 수도사 공작 바시아누스와의 친분과 잦은 대화는 그러한 선택의 주된 원인이 아니었으나, 우리가 보기에 막심은 바로 바시아누스로부터 수도원 생활의 특징적인 사실들과 전반적인 상황에 대한 정보를 얻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의 선택의 이유는, 비소유파의 견해가 진정으로 교회의 참된 금욕적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스크바에 도착하자 막심은 연대기에 기록된 바와 같이 “큰 영예”를 받으며 환영받았고, 처음에는 추도프 수도원에, 그 후 시모노프 수도원에 정착했다. 그는 슬라브어 중 어느 것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번역 작업을 위해 라틴어 에 능통한 두 명의 러시아인 통역사가 그에게 배정되었다. 통역사 디미트리 게라시모프가 디아코노 미시류 무네히인에게 보낸 편지는 그들의 번역 작업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잘 보여준다. 막심은 그리스어 원문을 라틴어로 번역했고, 게라시모프는 이미 라틴어에서 교회 슬라브어로 다시 번역했다[263] .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꺼운 대부록의 번역은 16개월 만에 완료되었다. 새로운 교회 슬라브어 시편과 함께 막심은 대공에게 장문의 서문을 전달했는데, 그 안에서 모스크바에 오게 된 경위를 설명하는 동시에 바토페드 수도원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264] . 교회 슬라브어 번역본은 미트로폴리트 바르라암과 몇몇 주교들에 의해 검토되었으며 – 물론 슬라브어 본문만 검토되었는데, 그들 중 누구도 그리스어를 구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승인받고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막심은 아폰으로 돌아갈 허락을 받지 못했는데, 그와 함께 모스크바에 도착했던 바토페드 출신의 몇몇 수도사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허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대공과 바를라암 대주교는 모두 모스크바에 교양 있는 인재가 크게 부족한 상황에서 막심이 매우 유용할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었다[265] . 막심에게는 또 다른 중요하고 어려운 임무가 주어졌는데, 바로 많은 오류가 섞여 있는 예배 서적을 그리스어 원본과 대조하여 교정하는 것이었다. 비록 누가 먼저 제안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일을 막심에게 맡긴 것은 대주교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미 우리에게 알려진 수도사 공작 바시안이 대주교에게 이 아이디어를 건넸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데, 그는 모든 슬라브어판 교회 서적 번역본에 오류와 부정확성, 그리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바시아누스에게는 막시무를 가능한 한 오랫동안 모스크바에 머물게 하려는 개인적인 동기도 있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는 『코르메차』 작업에 있어 경험 많은 조언자가 필요했고, 막시무가 그에게 매우 유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막시무는 불확정 기간 동안 모스크바에 머물며 새로운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266] .

모스크바에 머무르며 서서히 러시아어를 익힌 막심은 자신의 관찰과 다양한 인물들, 특히 수도사가 된 공작 바시아안과의 교류를 통해 러시아의 교회 생활, 수도원 생활, 주교와 수도사들의 견해, 정부 정책, 대공의 전제 통치 및 교회 문제에 대한 그의 개입 등을 깊이 있게 파악할 수 있었다. 막심은 미트로폴리탄 바르라암이 불법적으로 축출되는 현장을 목격했는데, 이는 교회가 대공의 전제권력에 종속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가장 노골적인 사례였다. 그는 교회 생활의 이러한 모든 현상에 대해 분개하며 날카로운 비판을 가했고, 이러한 일들은 그가 일련의 논쟁적이고 비판적인 저작들을 집필하도록 이끌었다. 이 저작들은 16세기 러시아의 종교성을 심도 있게 조명하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문서들이다.[267] 예를 들어 요시프나 바시안과 같은 러시아인이 러시아 생활의 다양한 측면을 비판할 때, 우리는 그들이 완전히 객관적이지 않을 수 있으며, 예를 들어 수도원 소유지 문제와 같이 자신의 당파적 편견에 좌우될 수 있다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막심에게는 그러한 편견이 있을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비판적 저작들은 엄격한 교회적 정신으로 쓰여졌는데, 이는 그가 아폰 산과 동방 교회 전반의 교회법과 교회 생활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막시모스의 저작들[268] 중 네 편의 글은 특히 수도원 소유지와 수도원 생활에 관한 문제에 전념하고 있으며, 이는 막시모스가 러시아인이 아니었고 요시플리안(иосифлян) 당파나 비재산주의자( ) 당파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두 당파 간의 논쟁에 관한 본 고찰에서 이 저작들의 자료를 인용할 근거를 제공한다. 이와 더불어, 그의 다른 저작들 중에서도 러시아의 종교성에 대해 언급된 부분들은 러시아 수도 생활의 실태를 다루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269] .

수도원 소유지를 비판하는 주요 저작으로는 대화 형식으로 쓰인 『유명한 수도 생활에 관한 이야기』[270] 가 있다. 필록티몬(재물을 탐하는 자)과 악티몬(재물을 탐하지 않는 자)이 수도 생활의 기초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 요셉의 견해를 대변하는 필로크티몬은 엄격한 키노비아(공동 생활)의 도입이 수도원 소유지 이용의 부정적인 측면을 제거한다고 증명하려 한다. 이는 수도원 형제들 중 누구도 이를 통해 개인적인 이익을 얻지 않기 때문이며, 그는 이러한 방식으로 소유지의 공동 이용을 정당화하려 한다. 이에 아크티몬은 이렇게 대답한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입니다. 이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으니, 만일 많은 사람들이 한 창녀와 불법적으로 관계를 맺고, 그 일로 비난을 받더라도, 각자가 스스로를 변호하며 말하듯이: ‘여기서 저지른 죄는 하나도 없으니, 그 공동 소유는 모두에게 똑같으니; 또는 누군가 많은 강도들과 함께 강도질을 하러 나가 많은 전리품을 모았다가, 어떤 사정으로 인해 강도들을 쫓는 자들에게 붙잡혀 심하게 고문과 학대를 당할 때, 이렇게 대답하는 것과 같다: ‘나는 아무 잘못도 없으며, 그들에게 모든 것을 남겨두고 거기서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다’[271] .

또 다른 저작(『영혼에 유익한 말씀』)에서 이성은 자신의 영혼과 기독교적 미덕에 대해 대화를 나누며 이렇게 묻는다: “어떻게 하면 온유함과 겸손한 지혜, 그리고 신성한 침묵을 마음에 얻을 수 있겠는가? 분노와 다툼, 즉 땅 문제나 농민들, 이웃들에 대해, 그들이 어떤 점에서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보일 때면, 자주 그리고 자제하지 못하고 휘둘리며, 마치 적을 대하듯 그들을 모욕하려 애쓰는 데 휩싸여 있으니 말이다”[272] . 또 다른 저작에서 막심은 수도원 농민들을 대하는 문제에 대한 자신의 원칙적인 견해를 밝히며, 수도원 영지의 소유주들에게 다음과 같이 상기시킨다: “신성한 낙원은, 온갖 탐욕과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땅에 금과 은의 보물을 숨겨 두는 자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배척한다”[273] . 그러나 정작 수도원들은 자신들의 농민들에게 높은 이자율로 돈을 빌려주곤 했다. 막시모스에 따르면, 오직 탐욕을 버리는 것만이 수도 생활에 진정한 기독교적 금욕적 질서를 부여한다: “그러한 이들은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베풀며, 마치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들처럼 끊임없이 많은 이들의 구원을 염려하므로, 모든 이에게 존경받고 사랑받는다”[274] . 이와 같은 정신으로 쓰여진 그의 다른 저작들 중에는 수도원 소유지에 관한 것들과 이를 비판하는 것들이 있는데, 여기에는 다음이 포함된다: 가) 『회개에 관한 설교』, 나) 『수도 생활의 개선에 관한 설교』, 다) 『회개와 만족할 줄 모르는 배에 관한 설교』[275] .

그러나 막심은 수도 생활의 악습에 대한 수사적 비판에만 그치지 않고, 올바른 수도원 생활의 모범을 제시한다. 이는 『무서우면서도 기억할 만한 이야기, 그리고 완전한 수도 생활에 관하여』라는 저작에서 이루어졌는데, 이 글에서 막심은 이탈리아에서 직접 목격한 것을 회상하며 카르테지안 수도사들의 덕행, 이 수도회의 수도 규칙, 그리고 수도사들이 신자들의 자선으로 생활하고 그 대가로 세속의 형제들에게 기독교적 영적 돌봄과, 더 나아가 내적 사명을 제공함으로써 드러나는 그들의 완벽한 무소유 정신에 대해 이야기한다. 막심의 결론은 이렇다. 수도사들이 기독교적 가르침과 계몽으로 보답하는 평신도들의 자선, 이것이 바로 수도 생활의 기초이다[276] .

이 모든 저작에서 수도원 생활의 구조에 대해 논할 때, 막심은 순수한 금욕주의적 관점을 고수한다. 막심 개인에게는 당파적 편향성이 없었는데, 이는 요시플리안이나 바시아노에게서 의심할 수 있는 점이다. 그는 오직 ‘순수한 이념’만을 섬겼으며[277] , 순수한 이상주의와 자신의 신념이 옳다는 확고한 신념에서 글을 썼다. 또한 그의 논쟁 활동이 그에게 위험할 수 있었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새로운 대주교 다니일(1522–1539)은 확고한 요시프파 신봉자였기 때문에, 막심이 비재산주의자들에게 동조한 것을 이유로 그를 처벌할 수 있었고, 실제로 그에게 보복했다.

러시아 수도 생활을 비판하면서도 막심은 수도원 소유지에 대한 폭력적이고 전면적인 세속화를 촉구하지는 않았다.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외적인 개혁을 통해 수도원 생활을 재편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수도 생활의 내적 완성과 활력을 되찾는 것이었다. 국가의 개입은 오직 수도원, 본당 및 교구 소유지에서 발생하는 수입을 신을 기쁘게 하는 목적, 예를 들어 자선 활동[278] 에 사용하도록 할 때만 정당화될 수 있었다.

수도사 바시안 공작과 아폰 산의 수도사 막심, 과거 삶의 환경은 물론 내면의 영적 성향까지 이토록 다른 두 사람이, 특이한 운명 덕분에 같은 이념을 공유하는 동지이자 같은 대의를 위해 투쟁하는 동료가 되었는데, 비록 수도원의 토지 소유에 대한 반감의 전제는, 앞서 보았듯이, 서로 달랐음에도 말이다. 이는 러시아에서 수도원 생활의 올바른 정립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였는지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논쟁가는 16세기 전반의 수도자 중 유일하게 자신의 저술에서 수도원 생활의 개혁을 공개적으로 요구했던 인물들이었다. 유감스럽게도 그들의 문학적 활동은 요시프파의 견해를 고수하던 교회계에서 반향을 얻지 못했으며, 아마도 세속 당국의 일부 미온적인 조치에 간접적으로만 영향을 미쳤을 뿐이다.

이와 관련하여 16세기 가장 흥미로운 인물 중 한 명인 아르테미이 장로에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저술이 아니라 자신의 직접적인 활동을 통해 수도원 소유지 문제가 스토글라프 공의회에 상정되도록 기여했다. 장로 아르테미우스의 생애와 영적 성숙 과정[279] 은 우리를 다시 자볼지예로, 니일 소르스키의 정신이 여전히 살아 숨 쉬고, 그에게 새로운 추종자와 계승자들이 계속해서 등장하던 그 ‘비소유자들의 보금자리’로 이끌어 준다. 러시아 수도원 역사에서 이 흐름의 주요 대표자인 닐과 아르테미이 는 자신들의 견해를 글로 남겼으며, 그들의 저술을 통해 우리는 이 금욕적·신비주의적 운동을 파악할 수 있다. 닐의 견해를 더욱 발전시키면서도 동시에 어느 정도 수정된 형태를 띠고 있는 아르테미우스의 저작들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다루기로 하고, 지금은 그의 생애에 대해 몇 마디 언급하고 수도원 소유지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그가 수행한 역할을 조명하고자 한다.

그의 가문이나 출생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이 없다. 그는 성 코르닐리우스 코멜스키(† 1537) 밑에서 수도자의 삶을 시작했다. 1536년 아르테미이는 그 수도원을 떠나 키릴로-벨로제르스카 수도원 근처의 황야에 정착했는데, 그곳은 아마도 과거 트로이체-세르게이예프 수도원의 원장(1521–1524)이었던 장로 포르피리우스가 설립한 곳일 것이다. 엄격한 금욕 생활을 실천하고 비재물주의적 견해를 가진 장로 포르피리우스 자신도, 몇 마디의 훈계와 책망[280] 을 통해 대공의 분노를 사게 되어 원장직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포르피리우스와 다른 비재물주의자들—티혼, 도로페이, 요아사프 벨로바예프 장로들과의 교제는 아르테미우스를 비재물주의 사상의 세계로 이끌었고, 그를 이 사상의 신봉자로 만들었다[281] . 아르테미이는 1550~51년까지 사막에 머물렀다. 이 무렵이나 1536년 이전—정확한 시기를 파악하기는 어렵다—그는 프스코프로 여행을 떠났다. 프스코프에서 아르테미이는 국경을 넘어 “독일 땅”(즉, 에스토니아)으로 향했는데, 그곳에서 직접 서구 기독교를 접하고 현지 루터교도들과 신앙 문제에 대해 대화하고 토론하기 위함이었다(“책으로 대화하기”)[282] . 포르피리이 사막에 머문 시간은 아르테미에게 있어 인생의 결정적인 시기였다. 그곳에서 그의 영적 성장이 이루어졌으며, 엄격한 생활 태도와 신학적인 소양으로 동료들의 존경을 얻게 되어, 결국 모스크바에서도 그의 소문이 퍼지게 되었다.

1550년 말이나 1551년 초, 아르테미우스는 모스크바로 초청받았으나, 누가 그를 추천했는지는 알 수 없다. 알려진 것은 어린 차르 이반이 그를 추도프 수도원에 머물게 하라고 지시했고, 자신의 영적 지도자인 사제 실베스트르에게 아르테미우스의 지식을 철저히 검증하고 인품을 평가하라고 명령했다는 점뿐이다(“그에게서 모든 올바름과 영적 유익을 살펴보라”). 아르테미우스와 대화를 나눈 후 실베스트르는 차르에게,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아르테미우스의 인품과 신학 교육이 실로 칭찬받을 만하다고 보고했다[283] . 마침 그 무렵 트로이체-세르기예프 수도원에는 원장이 없었기에, 차르는 실베스트르와 수도원 수도사들의 요청에 따라 1551년 5월 17일 아르테미우스를 이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차르가 이러한 선택을 하게 된 데에는 실베스트르의 추천뿐만 아니라 다른 이유도 있었다. 아르테미우스의 저술을 통해 우리는 당시 그가 젊은 차르와 직접 교류를 나누었으며, 차르가 그에게 성경과 세속적인 일들에 대해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음을 알 수 있다. 동시대인인 안드레이 쿠르브스키 공작은 아르테미이에 대해 “예전부터 차르께서 그를 지극히 사랑하시며 여러 번 대화를 나누셨다”고 기록했다[284] . 그러나 아르테미이는 원장직을 오래 맡지 못했고, 6개월 만에 수도원을 떠나 은둔처로 돌아갔다. 쿠르브스키 공작의 주장, 즉 아르테미이가 요시프파 성향의 수도사들과 갈등을 빚어 직위를 떠났다는 말은 사실로 보인다. 왜냐하면 금욕적인 신념을 가진 아르테미이에게 수도원의 분위기는 단순히 불쾌한 수준을 넘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훗날 사제 실베스트르와 시메온의 증언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크고 부유한 수도원의 무질서한 삶보다는 ‘정직한’ 황야의 고요함을 택하기로 결심했다[285] .

우리에게 중요한 점은 아르테미우스가 젊은 차르와의 대화에서 수도원 소유지에 대한 문제도 제기했으며, 특히 이 시급한 문제(바로 그 시기에 100인 공의회가 열리고 있었다)에 대해 비재물주의자의 정신으로 의견을 피력하여, 수도사들은 재산이 아니라 자신의 손으로 일한 대가로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사실이다[286] . 이러한 대화는 헛되지 않았는데, 아르테미우스의 견해가 왕의 공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아마도 1551년 5월 11일 수도원 소유지에 관한 유명한 칙령(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다루겠다)이 이러한 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287] . 이처럼 장로 아르테미우스의 직접적인 참여는 바시아누스나 막시무스의 논쟁적인 저술들보다 더 많은 실질적인 성과를 가져왔다.

수도원 소유지가 수도 생활에 미치는 타락시키는 영향이라는 문제에는 또 다른 저작, 이른바 ‘발라암의 기적행자 성 세르기우스와 성 게르만스의 대화’라는 16세기 중반의 익명 저작이 헌정되어 있다. 이 저작의 집필 시기나 저자(들)에 대해 문학사학자들은 서로 다른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288] . 우리의 견해로는, 이 저작은 비재물주의파에 완전히 속하지는 않았지만, 교회-정치적 활동과 요시프파의 견해에 대해 명백한 혐오감을 느끼던 수도원 계급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또한 우리는 『대화』의 저자들이 바시아노스와 막시모스의 저술에 매우 익숙했으며, 이 저술들이 그들에게 자료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물론 당시 일상적인 교회 생활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과 깊은 이해도 바탕으로 삼았다고 본다. 저자들은 바시아누스나 막시무스만큼 학식이 풍부하지는 않았는데, 이는 저작의 문체에서 한눈에 드러난다. 문장이 서툴고, 생각이 무질서하게 전개되며, 반복이 많다.

네 가지 주요 사상이 저자들의 교회적·정치적 관점을 특징짓는다: (1) 수도원의 토지 소유권 부정, (2) 차르의 통치 관행과 교회 계층 간의 밀접한 유대에 대한 비판, (3) 수도원 농민들의 처지에 대한 동정, (4) 당시 모스크바 생활에 대한 평가에서 드러나는 일정한 보수주의. 처음 두 가지 사상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대화』는 차르가 수도원 소유지의 확대, 수도자들의 부의 축적 및 세속화를 방치하고, 수도사들의 손에 토지 소유가 집중되는 것을 허용하며, 종종 농민들이 거주하는 땅을 직접 수도원에 하사하는 점을 비난한다: “차르가 수도사들에게 기독교인들이 사는 마을과 행정 구역을 하사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으며, 차르가 그러한 일을 하는 것은 칭찬받을 만한 일이 아니다.” 차르는 수도원을 도울 수는 있지만, 오직 자선금으로 간주될 수 있는 돈으로만 도와야 한다. 이 견해는 『대화』에서 여러 번 언급되는데, 아마도 단순한 반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 생각을 강조하기 위함일 것이다. 『대화』의 다른 부분에서는 더욱 날카롭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리석은 왕들은 그리스도의 적들이며, 수도사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그들에게 왕실 영지, 성, 마을, 그리고 기독교인들이 사는 행정구역을 주며, 마치 이교도들로부터처럼 자신의 기독교인들로부터 그들을 분리시켜 내어준다.” 그 결과 농민들은 땅을 잃게 된다. 수도사들은 왕들로부터 그러한 선물을 받아서는 안 되는데, “즉,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마귀로부터 온 것이며, 새로운 은혜에 반하는 새로운 이단, 곧 수도사가 기독교인들이 사는 지역을 소유하게 하는 것”이다.

바시아누스와 막시무스에 이어 『대화』의 저자들은 수도원 당국과 그 관리들이 농민들을 학대하는 행위에 대해 언급한다. 이처럼 『대화』에는 농민 억압에 대한 사회적 항의가 담겨 있다. 동시에 『대화』에서는 수도원의 부유화로 인해 수도 생활이 쇠퇴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수도원이 세속적인 일에 관여함으로써 금욕의 기본 원칙들이 뒷전으로 밀려나거나 아예 무너져 버렸기 때문이다.

『대화』의 집필자들의 정치적 견해는 왕들이 어떻게 통치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를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대화』에서는 교회 지도자들이 통치에 참여하거나 왕의 고문이 될 권리를 단호히 거부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수도사들을 통해 왕이 왕국과 도시, 그리고 지방을 다스리고 권력을 행사하라고 명하신 것이 아니라, 공작들과 볼야르, 그리고 그 밖의 평신도들을 통해, 수도사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왕은 자신의 권력을 통해 모든 일을 스스로 다스려야 하며, 수도사들을 통해서는 안 된다”[289] . 국가 통치에 보야르 계급과 다른 사회 계층의 참여가 필요하다는 이 사상은, 한편으로는 바시아나와 보야르 계급 내 보수 세력의 다른 대표자들의 견해를 떠올리게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공화제 체제의 벨리키 노브고로드에서 존재했던 사회적 관계를 상기시킨다[290] .

『대화』의 보수주의는 앞서 언급된 문제들에 대한 논의뿐만 아니라, 『대화』의 저자들이 기독교인, 즉 러시아인들에게 ‘재앙이자 슬픔이자 파멸’을 초래하며 신앙의 순수성을 의심하게 만든다고 보는 외국적 영향에 대한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이 저작에서는 ‘그릇된’ 서구와 오직 현세적, ‘세속적’ 삶만을 염려하는 외국인들을 비판하며, “우리는 미래의 삶을 위해 노력한다”고 밝히고 있다[291] .

 

3. 수도원의 영지 소유권을 옹호하는 저작들

『대화』는 수도원 소유지에 대한 문학적 논쟁을 마무리 짓는 작품으로, 그 목적은 수도원의 토지 소유 확대와 부의 축적을 완전히 중단시키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지연시키는 데 있었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는 수도원 소유지를 옹호하는 이들의 활동과 정부의 입장이 더 큰 의미를 지녔다.

1503년 공의회와 관련하여 이미 언급한 바 있는 요시프 볼로콜람스키의 견해는, 요시프파 신자들과 교회 지도부에게 항상 일종의 교리처럼 여겨져 왔다. 그 공의회 직후(대략 1504~1505년경), 노브고로드 대주교 겐나디의 지시에 따라 한 저작이 집필되었는데, 이 저작에서는 수도원의 토지 소유권에 대한 문제가 다시 논의되었으며, 이 권리를 교회법적으로 정당화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이 저작은 상당히 방대한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간결한 말씀’[292] 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다. 이 글의 저자는 러시아인이 아니라 도미니코회 수도사 베니아민이었는데, 아마도 슬라브계 출신으로, 운명의 아이러니로 15세기 말 노브고로드에 머물게 되어 대주교의 지시에 따라 라틴어 불가타 성경의 여러 권을 슬라브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그 도미니코회 수도사가 로마 가톨릭 신자로 남았는지, 아니면 그리스 정교회로 개종했는지는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 않다[293] . 『말씀』의 주요 사상은 다음과 같다: 세속화와 심지어 그에 대한 경향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뜻에 대한 적대감의 표현일 뿐이다. 교회 주교단과 수도원들은 이를 끊임없이 명심해야 한다. 그들은 수도원 소유지와 관련된 일에 간섭하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되며, 이러한 시도에 맞서 싸워야 할 의무가 있다. 왕들과 세속 권력자들은 어떤 방식으로도 교회와 그 기관들의 재산 및 소유지를 몰수하거나, 제한하거나, 빼앗아서는 안 된다. 교회가 동산과 부동산을 소유할 권리의 근거는 그리스도께서 직접 하신 말씀에 있으며, 성스러운 사도들도 이 권리를 확인해 주었다. 콘스탄티누스(이때 ‘콘스탄티누스의 유증’이 언급된다)를 시작으로, “로마 황제 루이 1세와 위대한 황제 카를”, 오톤 1세와 하인리히 1세 황제, 로마 카이사르들은 교회의 동산 및 부동산 소유권에 대해 지극한 존중을 표했다. 『말씀』의 마지막 부분에서 저자는 영적 권세가 세속적 권세보다 우위에 있음을 추가로 강조한다. 비록 두 권세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으나, 세속적 권세는 영적 권세에 복종해야 한다[294] .

『말씀』은 1503년 공의회 이후 16세기 전반에 요시프의 견해를 옹호하기 위해 쓰인 유일한 저작이었다. 그의 파벌은 자신들이 충분히 강력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논쟁적인 저술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비재물주의자들의 운명이었으니, 곧 자신들의 이념을 위해 싸우고 요시프파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16세기 전반에 속하는 또 다른 흥미로운 기록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세속 당국이 교회 재산과 관련된 일에 개입하지 말 것을 경고하고 있다. 16세기 중반, 모스크바 대주교좌는 교회, 교회 계층 구조 및 모든 성직자들의 권리를 확인해 주는 타타르 칸들의 고대 얄리크(문서)를 수집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 작업의 목적이 수도원의 토지 소유권을 입증하는 새로운 증거를 확보하기 위함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 야르랏 모음집에는 대주교의 최측근에 있던 익명의 필사자가 작성한 후기가 실려 있다. 저자는 이 후기에서 ‘이교도 칸들’이 러시아 교회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세금 면제권을 포함하여 교회의 모든 특권을 보존해 주었다고 강조한다. 그는 칸들을 ‘정교회 왕들’의 본보기로 삼으며 다음과 같이 훈계한다. “여러분, 정교회 공작들과 귀족들이여, 성스러운 교회들에 자선을 베풀도록 힘쓰십시오. 그래야 심판의 날에 그 야만인들에게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295] .

이 얄리크 모음집의 편찬은 1550년에 젊은 차르 이반 4세가 모스크바 대주교의 영지 일부를 국고로 이관하여, 이 땅들을 관료들에게 영지로 하사하려는 시도에 이어 이루어졌다. 차르의 계획과, 매입이나 교환을 통해 토지를 취득하기 위한 대주교와의 협상은 모스크바 교회 지도부 측으로부터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마카리 대주교는 『세상의 복된 유산으로서 하느님께 바쳐진 부동산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특별 저술을 집필했다. 그 글에서 그는 차르의 계획에 단호히 반대하며, 성서와 공의회 결의문에서 인용한 다양한 구절을 통해 교회가 토지를 소유할 권리를 입증했다. 『간결한 말씀』과 마찬가지로, 마카리우스의 글에서도 “콘스탄티노스의 유산”[296] 이 언급된다.

세속 권력과 교회 권력 간의 이 논쟁은 평화롭게 마무리되었으나, 국가가 교회 소유지의 확대를 전적으로 찬성하지 않았음을 가장 잘 보여준다. 왜냐하면 국가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토지 재분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4. 16세기 수도원 토지 소유를 제한하기 위한 정부의 조치

한편 모스크바 왕국의 교회 소유지는 계속해서 늘어났다. 금욕적 수행을 위한 황량한 은둔처로 설립된 수도원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토지 매입, 기증 및 기타 방법을 통해 진정한 경제 식민지로 변모했다. 수도원에는 수도원에서 일하거나, 지대를 납부하거나, 수도원 토지에서 노역 의무를 수행하던 자체 농민들이 있었다. 수도원의 경제적 번영과 부의 축적에는 국가 권력으로부터 부여받은 수많은 특권이 기여했다. 1553년 모스크바를 방문했던 아담 클리멘트는 모스크바 왕국에서 “plurima ibi exstruuntur Basilianorum coenopia; his magni sunt agrorum reditus, nam tertiam fundorum partem totius imperii tenent monachi” [그곳에는 바실리안 수도원이 많이 세워져 있으며, 그들이 소유한 토지가 많아, 왕국 전체 토지의 3분의 1이 수도사들에게 속해 있다][297] .

그러나 모스크바 공국이 위대한 모스크바 제국으로 변모함에 따라 정부는 국경을 무력으로 방어해야 할 필요성에 직면하게 되었다. 주로 군사적 노고에 대한 대가로 영지를 받던 용병들로 구성된 군대를 유지하는 일은 정부가 결코 완전히 만족스럽게 해결하지 못했던 과제였다. 역사학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토지는 국가의 유일한 자본이었다. 정부가 처분할 수 있고 영지로 분배될 수 있는 경작 가능한 토지는 부족했다. 이는 앞서 언급했듯이, 토지의 상당 부분이 교회와 수도원의 소유였으며, 새로 분배되는 모든 토지 역시 계속해서 정부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갔기 때문이다[298] .

이미 1503년 공의회 이전에 모스크바 대공은 수도원과 교회의 소유지에 대항하여 첫 조치를 취했다. 노브고로드 정복(1478년) 이후, 그는 이전에 대주교와 가장 부유한 수도원들에 속해 있던 노브고로드 지역의 광대한 토지를 모스크바 출신의 관료들에게 영지로 분배했는데, 이는 모스크바의 식민화 정책에서 나타나는 특징적인 양상이다[299] . 노브고로드 대주교 테오필은 노브고로드 주민들이 직접 선출한 마지막 주교로서, 모스크바 정부의 이러한 조치에 단호히 항의했으나, 1480년에 주교좌에서 물러나고 모스크바가 임명한 대주교 세르기(1483–1484)로 교체되었다. 1490–1491년, 모든 교회 및 수도원 소유지는 모스크바에서 특별히 파견된 서기들에 의해 철저히 조사되었다[300] . 이 조사 결과로 1499–1500년에 교회와 수도원의 토지가 국가를 위해 다시 몰수되었는데, 이 조치는 가난한 수도원들까지 영향을 미쳤다[301] .

1503년 공의회에서 자볼즈키 장로들이 제안한 이 계획이 정부에 매우 유리한 것이었음은 분명하다; 비록 요시프 볼로콜람스키의 단호한 반대에 부딪혀 이 제안이 무산되었음에도, 내심 이에 공감했던 대공은 공의회 결의안을 변경하거나 적어도 노브고로드에서의 몰수 조치를 더 광범위한 규모로 재현하기 위해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이반 3세의 후계자들은 수도사 공작 바시아나가 수도원 소유지를 겨냥해 펼친 매우 활발한 문학적 활동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토지 소유를 제한하기 위한 어떠한 구체적인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요시프파의 견해를 전적으로 지지했던 대주교 다니일(1522–1539)이 대공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특히 1525년 바실리 3세의 두 번째 결혼을 축복한 이후 그 관계가 더욱 돈독해졌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스토글라비 소보르의 결의안을 통해 바실리 치세 당시 정부가 트베르, 미쿨린, 토르즈크, 벨로제르스크 군의 관료들이 영혼의 안식을 위한 기부금으로 자신의 영지를 수도원에 양도하는 것을 금지하는 칙령을 반포했음을 알 수 있으며, 이후 이 금지 조치는 야로슬라블, 수즈달, 스타로두브 지역으로 확대되었다[302] . 바실리 3세가 사망한 후(1533년), 이반 4세가 미성년자였을 때이자 대공비 엘레나가 통치하던 시기, 국가 권력이 사실상 그녀의 총애를 받던 보야르들의 손에 있었을 때, 정부는 수도원 소유지의 확장을 부분적으로 제한하는 데 성공했다. 1535년의 칙서가 전해지는데, 여기에는 글루시츠키 수도원이 대공의 허가 없이 영지를 매입하거나 교환하는 것, 그리고 영혼을 기리기 위해 영지를 받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303] . 1년 후, 노브고로드의 여러 교회와 수도원에서 정부에 의해 포즈니, 즉 경작되지 않는 땅이 압류되었다. 이러한 조치들은 보야르들의 영지가 교회로 넘어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보야르 계급의 견해와 완전히 부합하는 것이었다[304] .

이반 4세(1533–1584, 실제로는 1546–1584)의 즉위 초기부터 수도원 소유지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1550년에 시도된 젊은 차르의 수도원 소유지 확대를 억제하려는 첫 번째 시도는, 마카리이 대주교[305] 의 단호한 반대에 부딪혀 성공하지 못했다. 신하들에게 영지로 분배할 토지를 확보해야 할 필요성과, 아마도 장로 아르테미우스와의 대화가 결합되어 차르는 스토글라비 공의회에서 자신의 연설(“차르의 질문들”)을 통해 수도원 생활에 대한 비판과 관련하여 수도원 소유지 문제를 여러 차례 제기하게 되었다. 스토글라비 소보르는 원칙적으로 수도원과 교회의 재산에 대한 불가침성을 확인했으나, 1551년 5월 11일자 ‘판결문’을 발표했는데, 이에 따라 보야르의 자제들, 신하들 또는 농민들로부터 빚을 갚기 위해 토지를 받은 주교들은 이 토지를 원래 소유주들에게 반환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또한, 차르의 허가 없이 주교나 수도원에 양도된 소유지도 반환 대상이었다. “그리고 누가 국왕의 허락 없이 – 판결문에 명시된 바와 같이 – 수도원에 자신의 영지를 마음대로 양도할 경우, 그 영지는 수도원이 국왕에게 무상으로 소유하게 된다.” 이제부터 수도원이 토지를 매입하는 것도 차르의 동의가 있어야만 가능했다[306] . 형식적으로는 엄격해 보였지만, 이 판결은 나중에 보게 되겠지만 실제로는 거의 이행되지 않았다. 동시에 총회가 대주교, 주교, 수도원을 대표하는 교회의 이미 취득한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스토글라비 공의회의 판결은 그저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이후 우리는 수도원 소유지에 관한 법규가 형식적으로는 점점 더 엄격해질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강화 조치의 결과가 차르의 새로운 특권장서에 의해 무효화될 것임을 보게 될 것이다.

1557년의 차르 칙령은 유언자의 친족들이 유언에 따라 수도원에 양도된 상속 토지를 정해진 가격[307] 에 매입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 그러나 몇 년 후 1572년 총회의 판결로 이 칙령은 폐지되었다. 동시에 공의회는 가난하고 토지가 적은 수도원만이 토지 소유권을 기증으로 받을 수 있다고 결정했다. 이론적으로 1572년 10월 9일의 이 판결은 매우 중요했는데, 이는 대규모 수도원의 부의 추가적 증식을 제한했기 때문이다: “토지가 많은 대규모 수도원에는 앞으로 토지를 주지 말 것”. 영지는 군인들에게 반환되어야 했는데, “복무에 손실이 없도록 하고 토지가 복무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308] .

다음 공의회(1580년)는 이 문제를 국가에 더 유리한 방향으로 결정했다: 대주교, 주교, 수도원 어느 누구도 영지 소유자로부터 매입이나 담보의 형태로 토지를 받을 수 없다는 일반 원칙이 채택되었다[309] . 공의회는 모스크바 왕국이 적들에게 포위되어 있다는 점(공의회는 아마도 서쪽 리보니아에서의 전쟁과 크림 타타르족의 침입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을 근거로 이 판결을 내렸는데, 이를 막기 위해서는 무장과 장비가 잘 갖춰진 군인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인들은 극도로 가난해져 자신들의 장비를 마련할 땅도, 돈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공의회는 수도원의 부유화가 수도 생활의 타락을 초래하고, 수도사들에게 과도한 음식과 음주에 대한 습관을 심어준다고 지적했다. 아마도 여기에는 공의회 참가자들의 견해가 반영되었을 것이다.

1580년 공의회의 판결—주로 그 첫 번째 부분—은 실천에 옮겨졌더라면 교회 소유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부의 새로운 정책 프로그램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2년 후인 1584년 7월 20일, 이미 표도르 차르(1584–1598) 치하에서 새로운 공의회가 소집되었다. 이 공의회는 1580년의 판결을 재확인하고 매우 중요한 조치들을 추가했는데, 구체적으로 말하면: 영구적이지는 않더라도 불특정 기간 동안 타르한 제도를 폐지하고 — “국왕의… 칙령이… 내려질 때까지 타르한 제도를 중단하며, 그 동안 토지가 정비될 때까지… 그리고 타르한을 통해 모든 차르의 조세와 지방 세금을, 모든 타르한을 통해… 모든 백성에게 징수한다”[310] .

주로 국가의 매우 어려운 재정 상황으로 인해 취해진 이 새로운 정부 조치는, 사실상 교회와 수도원의 소유지를 겨냥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들 소유지의 거의 전부가 특별 하사장과 타르한을 통해 국가에 대한 세금과 공과금에서 면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 프로그램이 정부에 의해 실행되었다면, 한편으로는 교회 및 수도원 소유지에 대한 정부 정책의 급격한 변화를 말할 수 있었을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국고로의 세입이 크게 증가할 것으로 기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공의회 판결은 모스크바 국가의 행정 관행에서 흔히 그러했듯이, 정부 스스로에 의해 매우 빠르게 위반되었다[311] . 흥미롭고 중요한 점은 당국이 7월 20일 공의회 판결을 타르한의 실질적인 폐지로 간주하고, 이를 가능한 한 빨리 실천에 옮기려 했다는 사실이다. 같은 해 초가을에 이미 수도원들로부터 청원서가 접수되었는데, 이를 통해 지방 당국이 그들에게 세금을 요구했음이 드러난다[312] .

여러 문서에 따르면, 수도원 당국은 1584년 7월 20일 칙령이 발표되자마자 이를 회피하기 위한 조치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 벌써 8월 11일, 즉 3주 만에 솔로베츠키 수도원은 기존의 타르한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으나, 이는 매년 지대를 납부하겠다는 약속을 대가로 한 것이었다[313] . 정부 정책의 미흡함을 보여주는 다른 사례들도 들 수 있으므로, 이 새로운 법안은 국가에 특별한 실질적인 이익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16세기 동안 광대한 토지 소유를 통해 부를 축적한 키릴로-벨로제르스키 수도원의 경제 활동은 매우 특징적이다. 이 수도원의 문서들을 보면, 수도원 당국은 스토글라비 소보르의 판결 이후에도 그 판결에 따라 토지 취득을 줄이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음이 드러난다. 오히려, 공의회 직후인 1551년부터 1572년 사이, 수도원 당국은 주로 북부 지역에서 새로운 토지를 매입하는 데 주력했으며, 가장 중요한 점은 수도원이 이에 대한 허가를 차르에게 요청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1572년, 관료들로부터 영혼을 기리기 위한 토지 기증을 받는 것을 금지한 칙령이 내려진 후에도, 수도원은 기증 형태로 넘겨진 소금 창고와 소금 정제소를 통해 부를 축적하려 애썼다. 그리고 1580년의 판결 이후, 수도원 당국은 차르로부터 이전에 발급된 타르한(tarkhan)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314] . 16세기 말과 17세기 초에 다른 수도원들의 경제 활동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례들을 찾을 수 있는데, 예를 들어 트베르(Tver)와 우글리치(Uglich) 현에서 그러했다[315] . 이러한 사례들은 모스크바 국가에서 형식적인 법률과 그 실제 적용이 얼마나 큰 차이를 보였는지를 다시 한번 입증해 준다. 16세기 내내 교회 및 수도원 소유지에 관한 문제는 결국 최종적인 해결을 보지 못했다[316] .

 

5. 17세기 1648년 이전에 취해진 조치들

‘혼란의 시대’(1598–1613)[317] 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격변은 수도원 소유지 문제에 대한 정부 정책에 일정한 변화를 초래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정책을 분석해 보면, 17세기 전반, 즉 1649년 이전, 알렉세이 차르(1645–1676)의 법전 제정 이전까지는 어떠한 중대한 변화도 발견되지 않는다.

비록 ‘혼란의 시대’ 이후 모스크바 왕국의 재정 및 경제 상황이 매우 어려웠지만, 정부는 수도원 토지 소유권을 몰수하기 위한 어떠한 중대한 조치도 단행할 결심을 내리지 못했다[318] . 교회 소유지의 세속화에 대한 생각 자체가 세속 권력의 교회-정치적 견해와는 동떨어져 있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게다가 미하일 차르(1613–1645) 치세 당시, 차르의 아버지인 필라레트 총대주교(1619–1633)의 영향력이 막대했으며, 총대주교는 당연히 교회의 토지 소유권에 대한 어떠한 제한에도 단호히 반대했을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319] . 따라서 정부는 여전히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그 명령들에서 교회 소유지에 관한 문제를 간접적으로만 다뤘다[320] .

이와 관련하여 두 가지 칙령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는 1620년 11월 28일자 칙령으로, 즉, 미하일 차르가 어렸을 때 필라렛 총대주교가 국가 운영에 막대한 역할을 수행하던 시기에 반포된[321] 으로, 이 칙령은 관료들이 바실리 슈이스키 차르 재임 시절 봉직에 대한 대가로 받은 영지를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도록 허용했으며, 여기에는 영혼의 안식을 기원하는 목적으로 수도원에 기증하거나 매각하는 것도 포함되었다[322] . 2년 후인 1622년 8월 27일, 또 다른 칙령이 공포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1613년 이후 수도원이 영혼의 안식을 위한 기부, 증여 또는 구매를 통해 취득한 영지는 유언자, 증여자 또는 양도자의 친족이 수도원으로부터 되사올 수 있었으며; 반면 1613년 이전에 수도원의 소유가 된 영지는, 이에 대한 청원서가 1613년 이전에 제출되었고 해당 사안이 차르에게 보고된 경우에만 매수될 수 있었다. 청원서가 제출되지 않은 영지는 수도원의 소유로 남았다[323] .

행정 관행상 일부 명령은 국가 전체가 아닌 특정 지역만을 대상으로 발령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이러한 명령은 종종 수도원 소유지에도 적용되었다. 예를 들어, 1624년에는 북부의 우스티우즈스키 우예즈드를 대상으로 한 특별 명령이 반포되었는데, 이는 ‘검은 땅’과 마을, 즉 국가에 세금을 납부하고 기타 의무를 이행하던 자유 농민들이 거주하던 마을의 매각 및 영혼을 기리기 위한 기증을 금지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수도원 당국은 16세기와 마찬가지로 1624년의 이 칙령도 회피할 방법을 찾아냈다. 그 결과 1651년 정부는 1624년 칙령 이후에 취득한 ‘검은 땅’을 국가에 반환하고, 이 땅에 거주하는 농민들을 국고 소속으로 편입하도록 명령했다[324] .

1641년의 칙령은 실질적인 의미를 지녔는데, 이 칙령은 사실 수도원의 소유지가 아니라 주로 수도원 소속 농민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이 칙령이 실효성을 발휘한 이유는 그 이행이 정부의 의지가 아니라 개인의 자발적인 노력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 칙령이 발령된 계기는 잘 알려진 ‘1641년의 청원서’였다이었다. 여러 도시와 현의 관료들은 수도원의 특권으로 인해 수도원이 더 나은 경제적 지위를 확보하고, 관료들의 대물림 영지와 토지에서 농민들을 자기 땅으로 유인하며, 도망친 농민들을 자신들의 소유지에 정착시키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고 차르에게 호소했다. 관료들은 또한 ‘우로치니(우로크)’ 또는 ‘자포베드니’ 연도와 관련된 특권이 관할권 문제에 많은 혼란을 초래한다고 호소했는데, 이는 각 수도원의 사법권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수도원의 경제 활동에는 유리하게 작용했지만, 관료들에게는 큰 손실을 안겨주었다. 청원자들은 농민 소유주들이 세금을 납부할 의무가 있는 도망친 농민이나 교회 소유지로 넘어간 농민들의 귀환을 무기한으로 요구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칙령을 반포해 줄 것을 요청했다. (농민들은 개인적으로는 자유로웠지만, 토지에 묶여 있었다.) 미하일 차르는 관련 칙령을 통해 청원자들의 요청을 받아들였으며, 이제 많은 관료들이 사적 소송 절차에 따라 법정에서 수도원과 소송을 벌일 수 있게 되었다[325] .

이 1641년의 칙령은 수도원 소유지에 관한 원칙적인 문제에 단지 간접적으로만 관련되었지만, 이를 통해 정부의 관심을 다시금 불러일으켰다. 실제로 몇 년 후인 1649년의 《법전》을 통해 세속 권력은 교회 기관의 특권에 손을 댔으나, 당장은 그다지 단호한 방식은 아니었다. 수도원 소유지에 대한 문제가 다른 방식으로 해결되기까지는 반세기 동안 미온적인 조치들이 이어졌다.

 

6. 1648년 법전

1649년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차르의 ‘소보르 법전’은 1648~1649년 제姆斯키 소보르([326] )의 활동 결과물로서, 모스크바 루스 경제에 있어 그토록 중요한 교회 및 수도원 소유지 문제를 외면할 수 없었다. 또한 이 매우 유명한 제스키 소보르의 많은 결의안이, 교회 기관들의 법적·재정적 특권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 즉 그 신분 계층들이 제출한 수많은 청원서에 따라 채택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로 인해, 이러한 계급들의 요구에 부응한 『우로제니예』가 1580년의 기존 칙령을 재확인하고, 총대주교, 주교 및 수도원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새로운 토지를 취득하는 것을 최종적으로 금지한 사실이 설명된다(『우로제니예』, 제17장, § 30 및 42). 또한, 교회 및 수도원 토지에 위치하며 다양한 특권 덕분에 세무 의무에서 면제된 모든 포사드와 슬로보다는 국고 관할로 이관되었으며, 교회 기관들은 그러한 슬로보다를 취득하거나 설립하는 것이 금지되었다(법전, 제19장, § 1, 5, 7–9, 13, 15, 16). 젬스키 소보르에 참석한 각 계급은 더 많은 것을 요구했는데, 즉 1580년 이후 성직자 손에 넘어간 모든 토지를 압류하여 토지가 적은 군인들에게 영지로 분배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러한 신분 계층들의 요구는 성직자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우로제니예』에는 반영되지 않았다. 차르는 1580년 판결 이후 취득된 모든 토지에 대한 실태 조사를 실시하도록 지시하겠다고 약속했을 뿐이다.[327]

부분적인 세속화 요구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정부는 교회 소유지의 추가 확대를 제한하는 데 그칠 수밖에 없었다. 교회는 1580년 판결 전후로 취득한 기존 소유지를 유지했다. 1649년 체르스키 소보르가 1580년 이전에 취득한 소유지에 대해서는 어떠한 판결도 내리지 않았고, 1580년 판결 이후 취득한 토지에 대한 계급들의 몰수 요구가 차르에 의해 기각되었으므로, 교회는 이후 여러 차례 표명된 바와 같이, 『울로옌』에 교회의 처분 하에 있는 토지 소유권에 대한 인정이 포함되어 있다고 간주했다.

1649년 법전에서는 수도원들의 토지 매입을 제한하기 위해 1580년 판결과 그보다 더 이른 스토글라비 소집회의 판결을 법적으로(제17장, § 42) 재확인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1651년 정부는 수도원, 교구, 상인들이 매입하거나 담보로 받은 마을 중, 흑색 과세 구역[328] 에 위치한 경우를 “국왕에게 양도”하도록 지시하기까지 했다. 안타깝게도 이 지시가 실제로 이행되었다는 증거는 없다. 반대로, 정부는 1649년 법전과 1651년 명령에 반하여, 일부 수도원들의 청원에 따라 흑세 부과 지역 내 농민들이 거주하는 토지를 취득하도록 허용한 사실이 알려져 있다[329] . 차르들 스스로도 1649년 법전을 위반했다. 17세기 후반의 문서들에는 수도원들이 차르로부터 국유지 중 경작되지 않은 땅과 농민들이 거주하는 땅을 하사받은 사례가 적지 않게 기록되어 있다[330] . 이처럼 17세기 정부도 16세기와 동일한 길을 걸었으며, 1649년 법전의 엄격한 조항들은 사실상 수도원의 토지 소유권을 거의 제한하지 못했다.

 

7. 대궁청과 수도원청

1649년 법전을 근거로 소위 ‘수도원 관리국’이라는 새로운 기관이 설립되었으나, 이 기관은 실제로 수도원 소유지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그다지 큰 의미를 갖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볼 때 진정으로 새로운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수도원 관리국의 설립은 성직자의 관할권에 변화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교회에 대한 모스크바 정부의 정책에도 몇 가지 변화를 초래했다[331] . 따라서 수도원 관리국의 창설은 성직자들로부터 공개적·비공개적인 매우 강력한 불만과 비판을 불러일으켰는데, 이는 교회 및 수도원 소유지 문제가 아니라 바로 이 분야의 변화 때문이었다[332] .

1503년부터 1649년까지 모스크바 루스의 세속 권력은 교회, 특히 수도원 소유지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을 단행하는 데 결단을 내리지 못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는 주교들이 정부에 미치는 영향 때문이었고, 부분적으로는 그 시대 사람들의 종교적 견해 때문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적어도 교회 및 수도원 소유지의 현황을 파악하고, 이에 대한 일정한 통제를 확립하며, 수도원 경제로부터 일정한 이익을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수도원 관리국의 설립은 정부 정책에서 그다지 중요한 혁신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수도원 관리국과 표트르 시대의 시노드가 설립되기 훨씬 전부터 모스크바의 세속 권력은 교회 기관, 특히 수도원 소유지에 대한 지속적인 통제를 이미 시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통제는 대궁전 관리국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는 모스크바 루스의 기관 중 하나로, 교회와 국가 간의 관계에 대한 논의를 할 때 그 활동을 간과할 수 없는 기관이었다.

대궁전 관리국은 1547년에 처음으로 언급된다[333] . 비록 이 기관이 그 이전, 즉 대공 이반 3세(1462–1505) 시대에도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당시 그 활동 규모는 더 작았다[334] . “교회 기관 및 그 영지와 관련된 모든 업무 중 국왕의 칙령에 직접 종속되는 사항은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 중반까지(1649년 소보르니 울로제니야 제정 전까지) 대궁전 관리국을 통해 국왕에게 보고되었다. 이 기관에서 해당 업무를 관장하였으며, 이 기관을 통해 교회 당국, 기관 및 관련자들에게 차르의 칙서가 발송되었다」[335] . 문서들에는 수도원 관련 사안이 바로 이곳에서 결정된 사례가 여러 번 언급되어 있다[336] . 고대 루스의 행정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가장 다양한 사안을 관할하던 이 기관은 그 밖의 여러 업무 중에서도 수도원 소유지에 대한 통제를 수행했으며; 미하일 차르(1613–1645) 시대의 문서들에는 이미 ‘수도원 관리국 및 수도원 및 이전 업무 관리국’으로 명명된 이 기관의 분과에 대해 자주 언급되어 있다[337] . 이 관리국은 ‘드보레츠키’라고 불리는 보야린과 디아크들의 통제를 받았다. 이곳에서는 수도원 소유지와 관련된 모든 재정 업무가 처리되었는데, 흑토에 대한 일반 조세, 국가가 일정 대가를 받고 수도원에 임대해 주었던 어업 조세, 소금 제조소 및 기타 경제 시설에 대한 조세 등이 포함되었다[338] ; 나중에 17세기에는 이곳에서 수확물 징수와 군 복무용 신병 모집도 관장했다[339] .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차르로부터 하사장을 받은 수도원들 에만 해당되었다. 그러한 하사장을 받지 못한 수도원들(물론 그런 수도원들도 존재했다)은 조세, 지대 및 세금 납부에서 지방 당국에 책임을 져야 했다[340] .

대궁(大宮)의 명령에는 여러 수도원과 관련된 모든 지시 및 하사장이 반영되었으며, 이곳에서는 교회 기관의 토지 소유권 및 기타 재산에 대한 목록 작성과 과세 관리가 집중되었고, 해당 기관들의 구매 및 지출에 관한 보고서가 이곳으로 제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업무는 통일되고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법률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각 수도원에 따라 상이하며 차르의 개인적 성향, 시대적 상황, 수도원 당국의 처세에 좌우되던 개별적인 지시 및 칙령에 근거하여 이루어졌다. 또한 이곳에서는 새로운 하사장과 타르한이 발급되고, 기존 하사장이 승인되며, 분쟁 사안이 해결되고, 청원서와 민원이 심사되었으며, 토지 소유권 형태의 수도원 기증과 연례 또는 일회성 금전 지원(루기)[341] 이 등록되었다. 한마디로, 이곳은 정부 기관과 수도원 및 수도원 경제 간의 모든 교류가 집중되는 중심지였다. 크고 작은 수도원들은 법적 고려보다는 실용적인 이유로 대궁전 관리국의 관할 하에 들어가기를 원했는데, 이러한 종속 관계는 모스크바 루스에서 이러한 종류의 일에 매우 능숙했던 지방 당국과의 빈번하고 수많은 마찰에서 벗어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수도원이 하사장을 소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법적·경제적 측면에서 중요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수도원이 지방 당국의 감독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대궁청에 대한 어느 정도의 종속 관계가 수도원들에게 바람직하게 여겨지고 높이 평가되었던 기이한 상황이 발생했다. 이는 역설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당시 성직자들이 국가와 교회 간의 관계에 대해 가졌던 견해에 따르면, 이러한 종속 관계에는 교회와 그 기관들의 권리가 침해되는 바가 전혀 없었다. 이는 성직자들에게 원칙적으로 매우 중요한 문제였던 성직자의 사법 관할권 문제와는 대조적인 점이었다. 대궁청 명령부는 그 자체로 교회의 토지 소유권을 박탈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교회의 이익을 위해서는 기존 체제에서 비롯된 정부에 대한 재정적·경제적 이점을 강조하며 대궁청 명령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유리했다. 때때로 국가의 재정 및 경제 상황이 악화될 때마다 정부는 수도원 소유지에 대한 문제를 논의에 부치려 시도했으나,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정부는 이 문제를 다룬 어느 공의회에서도 해결에 실질적인 진전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판결은 형식상으로는 종종 상당히 엄격했으나, 실제로는 항상 circulus vitiosus(악순환. – 역자 주)가 반복되었다.

수도원 관리국(Приказ)의 설립 역시 중대한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 모스크바 루스 법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만성적인 불완전성과 복잡성이다. 이는 고대 루스가 서유럽과 달리 모든 법적 문제를 명확하게 규정할 줄 아는 로마법을 알지 못했다는 역사적 상황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이 때문에 『울로제니예』의 법 조항들에는 미흡한 점, 불명확성, 모순, 그리고 원칙에 있어 일종의 이중성이 존재한다”[342] , 특히 성직자의 관할권 문제에서 그러했다. 따라서 새로운 기관을 설립하기 위한 『울로제니예』 내의 명확한 법적 근거는 없었다. 수도원 관리국은 대궁전 관리국으로부터 수도원 소유지와 관련된 모든 사건을 인수하여, 전임 기관과 똑같은 방식으로 이를 처리했다. 1667년 공의회가 성직자들의 관할권을 수도원 관리국으로부터 철회했을 때[343] , 관리국의 관할에는 여전히 교회 및 수도원 토지에 부과된 노동 부담과 세금과 관련된 사건들이 남아 있었는데, 이는 이전에 대궁전 관리국이 담당하던 사항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미미했으며, 원칙적인 성격이라기보다는 실용적인 성격에 가까웠다. 고르차코프가 지적했듯이, 수도원 관리국의 활동은 “지정된 범위 내에서도 매우 미미했다”[344] . 1677년 12월 17일, 수도원 관리국의 존재에 종지부를 찍는 차르의 칙령이 반포되었다. 이 칙령에 따라 수도원 관리국은 모든 업무를 대궁( ) 관리국[345] 으로 이관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그 결과 수도원 소유지는 앞서 언급된 모든 사항에 대해 다시 대궁 관리국의 관할로 넘어갔다.

그러나 1667년 공의회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이 공의회의 구성원인 주교들과 성직자들은 부가 수도원 수도 생활에 미치는 타락시키는 영향을 인정하고, 이것이 수도 서원[346] 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수도사들이 개인 부동산을 소유하는 것을 금지했으나, 이는 반쪽짜리 조치에 불과했다. 1667년 공의회에서는 수도원 소유지에 대한 문제가 아예 거론되지도 않았으며, 다음과 같이 단언할 수 있다. 성직자의 사법 관할권 문제에서 그토록 큰 성과를 거둔 이 공의회는, 교회 기관이 토지 소유에 대한 완전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견해를 확고히 고수했다[347] .

이처럼 17세기 말 수도원 소유지 문제에 대한 결정에서 원칙적으로 새로운 점은 아무것도 없었으며, 토지 소유권은 여전히 수도원의 손에 남아 있었고, 이는 수도원 생활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16세기 전반 비재산주의자들의 우려와 예언은 역사적 전개에 의해 완전히 입증되었다. 두 세기에 걸쳐 수도 생활의 세속화는 끊임없이 강화되었으며, 수도원 생활의 구조 속으로 점점 더 깊이 스며들었다. 자체 농장과 끊임없는 물질적 고민을 안고 있는 수도원은, 세상을 등진 곳에서 일종의 경제 기업으로 변모해 갔다. 16~17세기 수도원의 경제적 지위는 수도원 내부의 삶을 지탱하는 기반이 되었다. 수도 생활을 세속화와 위기로 몰아넣은 많은 부정적인 측면들은 ‘비축하지 않는 자들’의 사상이 실제로 구현되지 않았기 때문으로 설명된다. 이에 대한 책임은 상당 부분 그들의 반대파인 ‘요시프파’에게 있다. 모스크바 루스를 휩쓸고 지나간 표트르 대제의 개혁은 고대 러시아 수도원 생활에도 큰 충격을 주었다. 만약 이 개혁들이 적시에 이루어졌더라면, 적어도 수도원 생활의 세속화 과정을 늦출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표트르의 교회 개혁과 기독교 수도 생활에 대한 그의 견해는 잘못된 토대 위에 세워졌으며, 결코 비소유파의 견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세속화 과정은 멈추지 않았고, 단지 다소 다른 형태로 계속 이어졌다.

 

 

제7장. 16~17세기 수도원 식민화의 주요 방향

 

1. 식민지화의 국가·정치적 조건

수많은 논쟁적 저작과 모스크바 정부의 일부 조치에도 불구하고 끝내 최종적으로 해결되지 못한 수도원 토지 소유권 문제는 이 시기의 수도원 생활 체계를 정립하는 데 있어 특별한 의미를 지녔다. 수도원의 부의 증가는 드문 예외를 제외하고는 러시아 수도계의 최정예 인력을 수도원적 이상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이끄는 흐름에 휘말리게 했다. 그러나 이미 존재하던 수도원들의 경제적 성장만이 이러한 상황을 초래한 것은 아니었다. 16~17세기에는 많은 새로운 수도원이 설립되었는데, 이들은 기증받거나 스스로 광대한 토지를 취득하여, 수도원 소유지의 증가는 기존 수도원의 부유화뿐만 아니라 영토가 확장된 모스크바 왕국의 각지에 새로운 수도원이 등장한 것과도 관련이 있었으며, 이 새로운 수도원들은 매우 빠르게 대규모 경제 식민지로 변모했다.

이 시기(16세기 1분기부터 17세기 말까지)의 수도원 식민지화는, 우리가 이미 설명한 14~15세기의 수도원 식민지화와는 다른 성격을 띠고 있는데, 당시 주요 식민지화 지역은 모스크바 대공국의 중심부와 북부 자볼지예 지역이었다. 15세기 볼가 강 이스트 지역에서는 순전히 금욕적인 동기에 이끌린 고대 러시아 수도사가, 당시 농민 정착의 미미한 ‘초기 단계’ 만이 존재했던 거대한 삼림 지대, 즉 러시아의 피바이다에서 경제 부흥의 주역이었다. 모스크바 국가는 별다른 노력 없이도 자볼지야에 대한 다년간의 수도원 식민지화의 결실을 자신들의 것으로 삼았다. 모스크바 대공국의 영토 확장 및 모스크바 왕국으로의 변모, 분공 공국들의 통합, 1552년 카잔 칸국을 정복하게 한 동쪽에서의 성공적인 전투, 드네프르와 볼가 사이의 대초원 지대를 향한 남쪽 및 남동쪽 방향의 느리지만 꾸준한 식민지화 — 이 모든 것이 수많은 요새 도시의 건립으로 이어졌고, 나중에는 새로운 정착지를 방어하던 요새화된 방어선인 ‘자세치야 체르타’의 구축으로 이어졌다. 동부와 남부에서는 국가 자체가 식민지화의 주된 주체이자 조절자였으나, 자유 식민자들은 종종 새로운 땅 개척에서 국가보다 앞서 나갔다.

16세기 1분기 이후 수도원 식민지화의 역사는 이러한 상황에 의해 결정된다. 이제 수도원들은 대개 도시 내나 그 인근에 지어졌는데, 즉 이는 러시아 북부의 숲속 은둔처와는 크게 다른 도시형 수도원들이었다. 이 중 대부분은 개별 수행자들의 자발적인 주도로 설립된 것이 아니라, 국가 및 교회 당국의 명령에 따라 설립되었다. 거의 모든 수도원은 도시가 설립된 직후에 지어졌으며, 그 존재와 수도원 내의 생활 방식은 수도원이 들어선 도시들의 국가적·정치적 중요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많은 수도원이 세속 및 교회 당국의 명령에 따라 설립되었는데, 이 중요한 사실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수도원 설립은 차르나 대주교에게 있어 국가적 사업이자 선교 사업이었다. 수도원들은 주로 민족적으로 다양한 동방 지역, 비교적 많은 이교도 인구가 거주하는 곳에 지어졌으며, 교회와 수도원이 없는 러시아 도시는 당시 사람들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새로 정복한 지역의 기독교화는 모스크바 정부에게 경건한 의무[348] 였으며, 동부에 새로 설립된 수도원의 수도자들에게는 광범위한 기독교 선교를 수행할 의무가 부과되었다. 14~15세기에는 이러한 활동이 매우 소극적이었다. 수도원 생활의 세속화 과정을 부분적으로 저해했던 이 일 또한 그 시대의 특징 중 하나였다. 식민화 역사를 연구해 보면, 전국 각지에서 지역적 상황이 특정 수도원의 수도 생활 정립에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2. 수도원 식민지화의 6대 주요 지역

16~17세기는 수도원 건축이 급속도로 이루어진 시대였다. V. O. 클류체프스키[349] 의 대략적인 추산에 따르면, 사막 지역 수도원과 도시 수도원의 비율을 나타내는 표를 다음과 같이 작성할 수 있다:

세기 XIV XV XVI XIV-XVI

사막 수도원 42 57 51 150

도시 수도원 42 27 35 104

합계 84 84 86 254

17세기에는 약 220개의 수도원이 설립되었다[350] .

이처럼 두 세기 동안 300개 이상의 새로운 수도원이 생겨났지만, 이는 당시 러시아 국민들 사이에서 금욕적 기풍이 강화되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 일에 있어 개인의 주도적 역할은 미미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새로운 수도원이 설립된 것은 국가적·교회 정치적 고려에 따른 것이었으며, 특정 시기에 특정 지역에서 발생한 필요와 관련이 있었다. 새로 설립된 수도원의 지역적 분포를 살펴보면 이 점이 특히 분명해진다. 이러한 측면에서 모스크바 국가의 영토는 여섯 개의 지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 지역들의 경계는 모스크바 국가의 유기적인 영토 확장의 특성과는 무관하며, 모스크바 정부의 식민화 조치와 관련이 있다. 이러한 식민화 조치는 우리가 구분한 각 지역에서 그 규모와 중요성이 제각각이었으며, 두 지역에서는 이러한 활동이 거의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바로 이 지역들에서 새로운 수도원이 매우 적게 설립되었다[351] .

첫 번째 지역은 모스크바 국가의 중심 지역을 포함한다. 이 지역의 북쪽 경계는 몰로기 강이 합류하는 지점부터 수라 강 하구까지 볼가 강을 따라 이어지며, 동쪽 경계는 오카 강과 수라 강을 따라가고, 서쪽으로는 트베리 지방이 모스크바 중심부의 경계를 이루며, 남쪽으로는 오카 강과 그 지류인 모크샤 강이 경계를 이룬다.

두 번째 지역은 러시아의 북부, 즉 자볼지예와 포모르예, 볼가 강에서 백해에 이르는 땅으로, 우리에게 이미 잘 알려진 러시아의 피바이다이며, 14~15세기 수도사들의 금욕적 업적이 펼쳐진 무대였다.

툴라 남쪽과 칼루가 주변 지역은 돈 강 상류와 오카 강 상류 사이의 끝없이 펼쳐진 대초원의 북쪽 경계를 형성한다; 이들의 남쪽 경계를 명확히 그을 수는 없는데, 해마다 모스크바 국가의 영토가 국가 주도의 식민화와 자발적인 정착을 통해 남쪽으로 확장되었고, 새로운 도시들이 건설되었으며, 경작되지 않은 대초원 땅들은 관료들에게 영지로 분배되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남동부의 유목민들과 크림 타타르족과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들은 새로운 도시와 마을, 그리고 관료들의 영지를 습격하여 약탈하고 불태웠기 때문에 농민 정착촌은 생겨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이 지역들은 식민화의 세 번째 영역을 형성한다.

노브고로드와 프스코프에서 스몰렌스크에 이르는 서부 지역은 네 번째 식민지화 지역을 이룬다.

수라 강 동쪽과 모크샤 강 남동쪽에는 중부 볼가 지역—과거 타타르족의 카잔 칸국—이 위치해 있으며, 이곳에서는 16세기 중반부터 격렬한 식민지화가 전개되었다; 러시아 정교회는 이곳에서 다양한 비기독교인 주민들과 접하게 되었으며, 바로 이곳에서 기독교 선교를 위한 폭넓은 기회가 열렸다. 이것이 다섯 번째 지역인 포니조비예이다.

마지막으로, 여섯 번째 지역은 우랄과 시베리아로, 이곳에서는 러시아의 식민화가 느리지만 끊임없이 진행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러시아화와 기독교화는 하나의 국가·교회·정치적 과제로 통합되었다.

 

3. 모스크바 중심부의 수도원 식민화

모스크바 중심지의 경우, 16~17세기에 54개의 새로운 수도원이 설립되었는데, 그중 32개는 도시에, 22개는 시골 지역이지만 도시 인근에 위치했다. 16개의 도시 수도원은 16세기에, 같은 수의 수도원이 17세기에 설립되었으며, 교외 수도원 중 16세기에 설립된 것은 9개, 17세기에 설립된 것은 13개에 불과했다.

수도인 모스크바는 당연히 1위를 차지한다. 이곳에 설립된 새로운 수도원 중 다음과 같은 곳들이 주목할 만하다: 후대에 매우 유명해졌으며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있는 돈스키 수도원(1592), 즈나멘스키 수도원(1613), 스트라스노이 여성 수도원(1614), 자이코노스파스키 수도원(1660), 그리고 니콘 총대주교가 특히 애정을 쏟았던 부활 신예루살렘 수도원[352] .

블라디미르 지방에 세워진 수도원 중에서는 수즈달 시에서 3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우스펜스카야 푸스티니를 언급해야 하는데, 이곳은 수도사 이오나(1624)가 스스로 나서서 설립한 곳이며, 우스펜스카야 플로리셰바 푸스티니(1654년)와 브베덴스카야 오스트로프스카야 푸스티니(약 1695년); 이 중 후자 두 곳은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이르러 러시아 스타르체스트보의 중심지가 되었다. 루키안이라는 이름의 수도사는 1594년에 페레슬라블-잘레스키 시에서 약 25km 떨어진 곳에 보고로디츠카야 수도원을 설립했다.

코스트롬 지역에는 6개의 수도원이 설립되었으나, 이 수도원들은 특별히 유명한 점은 없다[353] . 야로슬라블 지방에서는 엄격한 수행자 성 게나디(† 1565)가 1529년에 스파스키 수도원을, 1543년에는 성 아드리아노(† 1550)가 포셰호니예 시에서 6km 떨어진 곳에 우스펜스키 수도원을 설립했다.

트베르 지방에는 11개의 새로운 수도원이 설립되었다. 그중에는 셀리거 호수 섬에 위치한 니로-스토로벤스카야 은둔처가 있는데, 이곳에서 은수자이자 은둔자 니로(† 1554)가 27년 동안 기둥 위에서 수행했다. 그는 주변 주민들로부터 깊은 존경을 받았으며, 나중에는 러시아 전역에서도 숭배받았다; 닐이 세상을 떠난 지 40년 후, 그가 수행하던 그 자리에 수도사 게르만이 은둔원을 세웠다. 닐의 유해로부터 수많은 기적이 나타났고, 1667년 러시아 정교회는 그를 성인으로 시성했다[354] .

칼루가 지방의 수도원 중에서는 브베덴스카야 옵티나 은둔원을 언급할 수 있다. 엄밀히 말해 이 곳은 15세기 중반에 이미 설립된 오래된 수도원이었으나, 한때 황폐화되었다가 1625년에 재개원되었다. 19세기에는 이 은둔원이 그곳의 장로들로 인해 명성을 얻었다[355] .

 

4. 북부 지역의 수도원 정착

14~15세기에 러시아의 은둔 생활이 번성했던 북부, 자볼지예 및 포모리예 지역에서는, 숲과 늪의 고요함과 황량함은 여전히 새로운 수도원을 세우는 이들을 끌어모았으며, 이후 두 세기 동안 이곳에 30개의 수도원과 은둔처가 생겨났는데, 그중 도시 수도원은 단 7곳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설립된 은둔처들은 이전의 것들과는 다른 성격을 띠고 있었다: 설립 직후 주로 설립자들의 청원을 통해 토지 소유권을 부여받았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특권을 누렸으며, 활발한 경제 활동을 펼치고, 인근 농민들과 농지를 둘러싼 분쟁을 벌였으며, 그곳의 수도자들은 14~15세기의 엄격한 은둔 수도자들과는 전혀 닮지 않았다. 1520년 성 안토니 시이스키(† 1557)에 의해 홀모고리 시에서 100km 떨어진 곳에 설립된 안토니예프 시이스키 수도원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세속화 법이 제정되던 시기(1764년)에 시이스키 수도원은 이미 러시아에서 가장 부유한 수도원 중 하나에 속해 있었다[356] . 또 다른 예로, 1604년 미망인 사제 미론은 아르한겔스크에서 약 200km 떨어진 곳에 보고로디츠키 크라스노고르스키 수도원을 설립했는데, 이 수도원은 이후 거대하고 번영하는 경제 기관으로 변모했다[357] .

이 기간 동안 포모리에는 총 19개의 수도원이 설립되었는데, 그중 11개는 16세기에(모두 도시 외곽에 위치), 8개는 17세기에 설립되었다(도시 내 수도원 2곳과 은둔처 6곳).

올로네츠 지방에 설립된 수도원 중 두 곳이 특히 주목할 만하다: 올론츠 시에서 30km 떨어진 니콜라예프스카야 온드루소프스카야 은둔처(1520)는 성 알렉산드르 스비르스키의 제자인 성 아드리아노(† 1549)가 설립했으며, 오네가 호수의 클리메츠키 섬에 위치한 트로이츠키 수도원은 성 이오나[358] 가 설립했다.

수도원 설립자들의 개인적인 주도권은 특히 볼고그 지역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는데, 이 시기에 이곳에서 15개의 수도원이 설립되었다[359] . 성 아르세니(† 1550)는 보야린 수호루소프 가문 출신으로, 트로이체-세르기예프 수도원에서 출가한 그는 1521–1529년에 그곳의 수도원장으로 재직했으나, 은둔 생활을 택하여 수도원장 직분을 내려놓고 볼고그의 숲으로 들어가 1530년에 은둔처를 설립했다[360] .

또 다른 엄격한 수행자, 성 테오도시 토템스키(† 1568)는 인근 주민들의 요청에 따라 1554년에 스파소-수모린 수도원을 설립했으며, 이후 이 수도원 역시 대규모 영지를 소유하게 되었다[361] .

블라디미르스카야 푸스티니 역시 설립자의 개인적인 주도로 인해 생겨났다. 경건한 전승에 따르면, 볼로그다의 한 주민이 도시 근교의 울창한 숲에서 블라디미르스카야 성모 이콘을 뵙는 은총을 받았다. 이 기적적인 현상에 깊은 감동을 받은 그는 요셉(† 1612)이라는 이름으로 수도자가 되어, 1588년 환시를 본 그 자리에 작은 수도원을 세웠다. 수도원 주변의 숲은 인근 마을 주민들에게 그야말로 고통의 근원이었는데, 그곳에서 두목 아니카가 이끄는 강도 무리가 횡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승에 따르면, 새로운 수도원의 초대 원장인 요세프는 아니카가 피비린내 나는 짓을 그만두도록 설득하여 사울을 바울로 변화시켰다. 그래서 이 수도원은 아니카가 약탈을 일삼던 숲 너머에 위치해 있다는 이유로, 백성들 사이에서 ‘자아니케예프스카야’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후 은둔자 요셉 볼고그스키는 지역 성인으로 추앙받게 되었다[362] .

17세기 볼고그 지역에는 몇 개의 수도원이 더 설립되었다. 그중 하나는 설립자의 개인적인 주도로 세워진 곳인데, 이를 언급할 필요가 있다. 필립이라는 이름의 수도사는 1654년에 즈나멘스카야 수도원(우스튀가 시에서 약 35km 떨어진 곳)을 설립했으며, 이 수도원은 나중에 지역 주민들로부터 큰 숭배를 받았다. 안타깝게도 이 수도원을 설립한 은둔자의 생애에 대한 정보는 전혀 남아 있지 않다[363] .

1460년, 성 디오니시우스 글루시츠키(제3장 참조)의 제자들에 의해 세미고로드 수도원이 설립되었다. 나중에 수도자들이 그곳을 떠나자 수도원은 황폐해졌다. 17세기 초, 이 수도원은 다시 문을 열었으며(이번에는 15세기에 성 디오니시우스가 설립한 포크로프스키 글루시츠키 수도원의 수도사들이 맡았다)[364] .

 

5. 서부 지역의 수도원 정착

모스크바 중심부 서쪽에 위치한 지역에서는 16~17세기에 23개의 새로운 수도원이 생겨났는데, 그중 15개는 도시에, 8개는 교외에 위치했다.

1위는 9개의 수도원이 세워진 노브고로드 지역입니다. 그중 두 곳은 경건함의 위대한 수행자들에 의해 설립되었는데, 키릴로-노보예제르스키 수도원은 성 키릴 노보예제르스키(† 1532)에 의해, 트로이츠키 이랍스키 수도원은 성 필립(† 1527)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두 수도원 모두 1517년경에 세워졌다.[365] 다른 수도원 중에서는 티흐빈 시에 있는 보고로디츠키 수도원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이 수도원은 1383년 티흐빈에서 나타난, 러시아 국민들에게 큰 숭배를 받고 있는 기적의 성모 마리아 성화를 기념하기 위해 1560년 차르의 명령에 따라 설립되었다.[366] .

프스코프 지역에는 주로 도시 수도원이 등장했는데, 예를 들어 16세기 프스코프 시에는 남성 수도원 외에도 4개의 여성 수도원이 설립되었다[367] . 프스코프 외곽에 위치한 수도원 중에서는 15세기에 설립되었다가 같은 세기 말에 리보니아 독일인들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1520년경에 재건된 프스코보-페체르스키 수도원이 특히 주목할 만하다.[368]

스몰렌스크 지방에는 비교적 많은 수도원이 건립되었다. 성 게라심 볼딘스키(† 1554)는 네 곳의 수도원을 설립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곳은 도로고부자 시에서 약 18km 떨어진 성 삼위일체 볼딘스키 수도원(1528)이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성 게라심은 비아즈마 근교의 숲속에 세례자 요한 수도원(약 1535년)을 설립했고, 그 후 남쪽으로 향해 험준한 브린 숲으로 들어가 그곳 지즈드레 강가에 브베덴스키 수도원 (1535년과 1545년 사이), 그가 설립한 수도원 중 마지막은 도로고부자 시 근처의 로즈데스트벤스키 수도원이었다. 성 게라심 성인이 설립한 수도원들은 수도자 수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예를 들어, 볼딘스키 수도원에는 이미 16세기 중반에 100명 이상의 수도자가 거주했으며, 브린 숲의 은둔처 에는 최대 40명의 수도자가 있었다. 성 게라심은 자신이 설립한 모든 수도원에 엄격한 공동체 규율을 도입했다[369] . 볼딘스키 수도원은 점차 많은 토지를 확보했고, 17세기에는 활발한 경제 활동을 펼쳤다[370] .

17세기에 설립된 수도원 중에서는 브랸스크 시에 위치한 프레오브라젠스키 수도원을 꼽을 수 있는데, 이 수도원은 불과 68년 동안만 존속했다. 이 수도원은 1694년 D. A. 바랴틴스키 공작에 의해 설립되었으나, 세속화 법(1764)이 공포되자마자 폐쇄되었다. 이 수도원은 주로 폴리카르프(† 1624)라는 엄격한 수행자가 그곳에서 은신하며, 엄격한 금욕적 절제 속에서 삶을 살았던 것으로 유명하다[371] .

 

6. 포니조비예 지역의 수도원 정착

중부 볼가 강 양안의 광활한 지역, 서쪽으로는 수라 강까지, 동쪽으로는 우랄 산맥까지 이르는 지역에 수많은 수도원이 설립되었는데, 이 지역은 모스크바 관료 용어로 ‘포니조비예’라고 불리며 별도의 행정 단위를 이루고 있었다[372] . 앞서 언급했듯이, 포니조비예는 수도원과 수도자들에게 기독교 선교를 위한 큰 기회를 제공했다. 비록 적극적인 활동을 하지 않았더라도, 비기독교 인구가 매우 다양하게 분포된 이 지역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은 기독교화 사업에 기여할 수 있었다. 16~17세기에 관해 말하자면, 안타깝게도 이 시기 이곳의 수도자들은 특별히 적극적인 선교 활동을 펼치지 않았다. 18세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포니조비예에서 기독교 선교사들의 몇 가지 성과를 언급할 수 있다.

모스크바 공국의 다른 지역들과 달리, 포니조비에에 대해서는 수도원 식민지화의 역사뿐만 아니라 수도원 토지 소유의 지속적인 확대를 조명하는 많은 자료가 남아 있다[373] . 1552년 10월 2일 카잔 정복으로 끝난 타타르 카잔 칸국과의 100년에 걸친 투쟁 기간 동안[374] , 중부 볼가 지역에서의 모스크바 식민지화는 첫걸음을 내디뎠다. 1523년 수라 강이 볼가 강으로 합류하는 지점에 바실수르스크가, 1551년에는 스비야가 강이 볼가 강으로 합류하는 지점에 스비야즈스크가 설립되었다. 스비야즈스크에서는 차르 이반의 명령에 따라 교회뿐만 아니라 수도원도 건립되었다. 국가 당국의 지시에 따라 설립된 이 트로이츠키 스비야즈스키 수도원은 포니조비예 지역의 수도원 식민지화 역사의 서막을 열었다[375] . 1552년 카잔 정복 이후 수도원 식민지화는 더욱 진전되었으며, 이는 새로운 도시들의 설립과 나란히 진행되었다. 이러한 도시들은 포니조비예와 1557년 모스크바가 최종적으로 정복한 아스트라한까지 이어지는 볼가 강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유지하고자 했던 모스크바 정부의 의지에 따라 체계적으로 생겨났다.[376] 오직 ‘혼란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모스크바의 식민지화 활동이 몇 년간 중단되었다. 따라서 새로운 도시 설립의 역사는 1) 16세기 말까지와 2) 17세기, 이렇게 두 시기로 나뉜다. 또한 새로운 수도원 설립의 역사도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는데, 이들 수도원은 대부분 도시와 동시에 또는 도시 설립 직후에 생겨났다.[377] .

우리는 이 시대에 포니조비에에서 설립된 21개의 도시와 31개의 수도원을 확인했으며, 여기에 1551년 이전에 등장한 3개의 수도원을 더해야 한다(표 6A 참조). 따라서 50년 동안 30개의 수도원이 설립되었으며, 표 6A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수도원들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인다: 1) 모든 수도원은 도시 내 또는 그 인근에 건립되었다. 즉, 이들은 러시아 북부의 황량한 사막 지대의 수도원들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도시형 수도원이었으며, 오직 나중에 크라스노슬로보드스크 시가 그 주위에 형성된 수도원과 니즈넬로모프스키 우예즈드의 수도원만이 도시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진 곳에 건립되었다; 2) 거의 모든 수도원은 도시가 설립된 직후에 설립되었으며, 예외는 아스트라한(첫 번째 수도원이 정복 11년 후에 등장)과 쿠르미시(첫 번째 수도원이 도시 설립 110년 후에 건립됨)뿐이다; 3) 이 모든 수도원은 설립자들의 자발적인 의지가 아니라 국가 또는 교회 당국의 지시에 따라 건립되었다[378] .

17세기에는 새로운 도시와 수도원 설립 양상이 다소 달라 보인다. 이는 표 6B에서 잘 드러난다. 16세기에 등장한 도시들에는 44개의 새로운 수도원이 설립된 반면, 17세기에 생겨난 도시들에는 26개의 새로운 수도원이 설립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총 70개의 새로운 수도원이 설립되었으며, 이는 16세기에 설립된 수도원과 합쳐서 포니조비예 지역만 해도 101개에 달한다. 지리적으로 수도원 정착 지역은 주로 사마라-펜자 선의 북쪽에 위치한다. 그 남쪽에는 단 10개의 수도원만이 설립되었다[379] .

17세기에 등장한 수도원들은 세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제1그룹은 오래된 도시에 설립된 수도원들로 구성되며; 두 번째 그룹은 농업 식민지화가 진행되던 지역에 위치한 새로 설립된 도시의 수도원들; 세 번째 그룹은 당시 아직 농업 식민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니즈니 볼가 지역의 요새화된 도시에 위치한 수도원들이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도식이 도출된다:

수도원 설립 연도 1그룹 2그룹 3그룹 합계

1600–1613 3 – 1 4

1614–1650 18 7 1 26

1651–1700 17 17 6 40

합계 38 24 8 70

이처럼 17세기 후반에는 17세기 전반보다 훨씬 더 많은 수도원이 설립되었다. 이는 볼가 강 남서쪽, 심비르스크와 펜자 지역에 위치한 토지를 식민지화하기 위한 모스크바 정부의 적극적인 조치와 관련이 있다.

포니조비야 지역의 개척은 정치적·경제적 목적을 위해 체계적으로 진행되었다. 교회 기관들—카잔의 대주교좌와 수도원들—에 토지를 분배하는 일은 포니조비예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이는 해당 토지가 단순히 이러한 기관들의 운영비를 충당하기 위한 것뿐만 아니라 모스크바 정부가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귀족들[380] 의 영지와 수도원의 부는 모스크바의 정치적 위력과 새로 개척된 지역에서의 권위 확고함을 보여주는 가장 뚜렷한 증거였으며, 러시아 도시의 건설과 새로운 영지 및 정착지의 출현은 이러한 권위를 공고히 하는 최선의 수단이었다. 정부가 수도원에 하사하거나 양도한 토지 소유지의 수와 규모는, 앞서 언급한 당국의 성장 제한 조치가 점점 더 강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계속해서 증가했다. 수도원 소유지 내 농민들의 처우는 관료들의 영지보다 나았으며, 수도원 당국은 끊임없이 새로운 농민들을 자신들의 땅으로 끌어들이려 노력했기 때문에, 수도원 소유지는 볼가 강 유역의 새로운 지역 정착에 상당한 역할을 했다[381] .

16세기와 17세기에 걸쳐 포니조비예 지역에서는 설립자들의 자발적인 주도로 설립된 수도원이 단 6곳에 불과했는데, 이 기간 동안 이곳에 총 101개의 수도원이 생겨났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물론 매우 적은 수이다.

이 여섯 수도원 중에는 세드미예제르스카야 성모 수도원과 라이프스카야 성모 수도원이라는 두 개의 은둔 수도원이 있다. 이 수도원들은 평범한 수도사들이 설립했으며, 도시 성벽 밖에 위치해 있다. 첫 번째 은둔 수도원의 설립자는 자볼지야 출신, 우스티우그 시에서 온 수도사 예프티미였다. 카잔에서 20km 떨어진, 일곱 개의 호수 한가운데, 자볼지예를 연상시키는 한적한 곳에 그는 자신의 은둔처를 세웠다(1613–15). 1628년이 되어서야 유프티미우스의 작은 스키트가 수도원이 되었다. 그러나 1645~46년에 이미 29명의 수도사가 수도원에서 수행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여전히 매우 가난했고 수도사들은 수공예와 텃밭 가꾸기로 생계를 이어갔다. 이는 15세기 볼가 강 건너편 수도원들의 전형적인 모습이었으나, 포니조비예 지역의 수도원에서는 거의 유일무이한 사례였다. 17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유프티미우스의 수도원은 토지와 농민들을 취득하게 되었다[382] . 라이프스카야 푸스티냐의 형성 과정도 이와 같았다. 그 설립자는 모스크바 추도바 수도원의 필라레트라는 수도사였다. 1613년경 그는 카잔으로 와서 처음에는 스파소-프레오브라젠스키 수도원에서 지냈으나, 이후 카잔 북서쪽의 울창한 숲으로 떠나 라이프 호숫가에 은둔처를 세웠다[383] .

1614년이 되기 직전, 신원 미상의 한 수도사가 라이셰바 시에서 북동쪽으로 47 베르스타 떨어진 카마 강변에 트로이츠키 수도원을 설립했다. 나중에 이 수도원은 모스크바의 노보스파스스키 수도원에 종속되었으나, 18세기 초에 사라졌다[384] . 창립자들의 자발적인 주도로 설립된 수도원 중 네 번째는 알라티르 시에 있는 트로이츠키 수도원(1600년과 1614년 사이)이다. 이 수도원은 토지를 소유하지 않아 매우 가난했다; 1614~15년에 수도사들은 트로이체-세르기예프 수도원에 청원을 올려 이 유명한 수도원에 소속시켜 달라고 요청했고, 그 요청은 곧바로 받아들여졌다[385] . 스무타(대혼란)가 끝난 직후인 대략 1616년, 이오네 수도원장 재임 시절, 엘라부즈의 트로이츠키 수도원이 명성을 얻게 되었다[386] . 1702년 카잔 대주교 티호노가 코즈모데미안스크 시 인근 말류융긴스키 수도원의 대수도원장에게 보낸 서신 에 따르면, 이 수도원은 이미 1627년 이전부터 존재했으며, 신원 미상의 수도사에 의해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387] . 17세기 후반에 수도사들에 의해 두 곳의 수도원이 더 설립되었다. 크라스노슬로보드스크 시 인근의 스파소-프레오브라젠스키 수도원은 수도사 디오니시(1655년 이전)에 의해 설립되었으며[388] , 베르흐니이 로모프 시의 우스펜스키 여자 수도원은 1688년 수도녀 이라이다에 의해 설립되었다.[389]

안타깝게도 이 수도원들의 생활과 설립자들에 관한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도시 수도원의 수도 생활 방식에 불만을 품은 엄격한 금욕주의자들이었을까? 예를 들어, 모스크바 추도바 수도원의 필라레트 수도사도 그런 수행자였을까? 아니면 다른 어떤 이유로 인해 그가 숲속에 자신만의 은둔처를 세우게 된 것일까? 어쩌면 격동의 시대였던 스무타의 혹독한 시절 — 최초의 세 수도원은 스무타 직후에 설립되었다 — 이 수도계에 깊은 인상을 남겼고, 모스크바 수도원들의 수도 생활이 쇠퇴하던 그 시기에 금욕주의적 기조를 다시 일깨웠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질문들에 답하는 것은 러시아 수도원사를 연구하는 역사학자에게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필수적인 일이다.

포니조비에 설립된 수많은 수도원들은 이 지역의 개척에 크게 기여했다. 다음 장에서는 그들이 하사받은 영지에서 어떻게 대규모 경제 활동을 전개하고, 볼가 강 양안의 이전에 무인도였던 숲과 초원을 점차 농업 지대로 변모시켰는지에 대해 더 자세히 다룰 것이다. 포니조비에의 수도원들은 모스크바 제국의 다른 지역 수도원들보다 더 많이 정부의 국가·정치적 및 경제 계획에 기여했을지도 모른다. 이곳에서 수도원 경제의 번영을 위한 노력은 수도 생활의 금욕적 목적을 거의 완전히 밀어내 버렸다. 16세기 후반과 17세기의 우리에게 알려진 경건한 수행자들을 살펴보면, 포니조비야의 수도원들에서는 고대 수도자들의 금욕적 계율이 거의 완전히 잊혀졌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이 수도원들에서 단 한 명의 뛰어난 수행자도 배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포니조비야의 북동쪽에는 비얏스카와 페름 지역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곳은 물이 풍부한 강들과 뚫을 수 없는 울창한 숲이 우거진 땅이다. 이미 14세기에 성 스테판 페름스키(† 1396)의 선교 활동 덕분에 이곳에 기독교의 빛이 스며들었으나, 현지 핀어족 부족들의 개종은 더디게 진행되었다[390] . 16세기 초, 이곳 이교도 오스티아크족의 마을에서 성 트리폰 비얏스키(† 1612)가 선교 활동을 펼쳤으며, 그는 우스펜스키 트리폰 수도원(1580)을 설립했다. 그의 선교 활동은 쉽지 않았는데, 이교도 오스티아크족은 이 엄격한 금욕주의자를 여러 번 살해하려 시도했다. 성 스테판과 성 트리폰의 이름은 이 지역의 역사뿐만 아니라 러시아 기독교 선교의 역사와도 영원히 얽혀 있다[391] .

 

7. 시베리아의 수도원 개척

우랄 산맥은 모스크바 국가의 동쪽 방향 확장을 막지 못했다. 용감한 단독 탐험가들과 진취적인 상인들은 산악 고개를 넘어 점점 더 멀리 나아가, 우랄과 토볼 강, 이르티시 강 사이에 펼쳐진 끝없이 넓은 초원과 숲에 도달했다. 위험한 모험을 갈망하던 코사크 부대의 아타만 예르마크 티모페예프(† 1584), K. 슈텔린이 적절히 명명한 ‘육지의 정복자’는 모스크바에 의한 시베리아의 국가적 식민지화에 첫발을 내디뎠다. 1587년에 토볼스크 시가 설립되었으며, 17세기 동안 시베리아 영토의 식민지화와 정복은 끊임없이 동쪽으로, 태평양 연안까지[392] 진행되었다. 현지 주민들로부터 방어하기 위한 거점 요새로서 러시아인들은 도시들을 건설했고; 곧 모스크바 제국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자발적으로 떠나거나 강제로 추방된 식민지 개척자들의 정착지가 생겨났다. 포니조비예와 마찬가지로 이곳에도 많은 수도원이 건립되었으며, 그 성격도 마찬가지였는데, 주로 도시 수도원이었다. 16세기 말과 17세기 초에 설립된 20개의 수도원 중 12개가 도시 수도원이었다. 시베리아의 수도원들은 포니조비예의 수도원들과 동일한 목적, 즉 이 땅의 러시아화와 기독교화를 위해 봉사해야 했다. 18~19세기 러시아 기독교 선교의 역사는 이 점에서 시베리아의 수도자들이 매우 많은 업적을 남겼음을 보여준다. 수도사들은 주로 교회 당국의 지시에 따라 선교 현장에서 헌신적으로 활동했으며, 동시에 이 선교 활동 속에서 국가 및 교회 정치적 과제와 무관한 진정한 기독교적 수행의 많은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선교사들 중에는 높은 기독교적 덕성을 지닌 인물들도 있었다[393] .

 

8. 남부 지역의 수도원 식민지화

16세기 말부터 오카 강 남쪽, 도나 강 상류와 오카 강 상류 사이의 대초원, 그리고 세이마 강 너머, 베르흐니 도네츠 강 양쪽 기슭에 이르는 지역에 모스크바의 식민지화가 시작되었다. 17세기 내내 이 움직임은 끊임없이 이어졌으며, 이곳에는 요새화된 방어선이 구축되고 새로운 도시들이 설립되었다[394] . 포니조비예와 마찬가지로, 국가 주도의 식민지화는 새로운 수도원 설립과 함께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곳 남부에서는 수도원이 대규모 경제 기업으로 변모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었다. 정부는 도시와 요새화된 방어선을 건설하는 동시에, 국경 수호 임무를 수행한 군인들에게 영지를 하사함으로써 새로운 땅에 이들을 정착시키려 했다. 수도원들도 국가로부터 토지 소유권과 기타 하사를 받았지만, 그 규모는 포니조비에 지역만큼 크지 않았다. 게다가 이 지역의 특히 활발한 식민지화는 17세기 후반에 이루어졌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되는데, 당시 1649년 법전에 따라 정부는 수도원에 토지를 하사할 수 있는 권한이 제한되었으며, 전반적으로 토지 분배에 있어 절약 정신을 발휘해야 했다[395] .

새로 설립된 수도원에 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도표를 작성할 수 있다[396] :

시대 도시 수도원 농촌 지역 수도원

16세기 2 8

XVII 13 21

합계 15 29

언뜻 보면 도시 성벽 밖에서 설립된 수도원의 수가 많다는 점(도시 수도원 15개에 비해 29개)이 우리의 이전 주장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수도원들은 거의 모두 도시 인근(도시에서 3~5km 거리)에 위치해 있었으며, 북부의 진정한 은둔처와는 거리가 멀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오키 강 남쪽 지역의 집중적인 개척과 더불어, 남부 국경 방어를 위한 군사 복무의 필요성에 의해 수많은 새로운 도시와 군인 정착지(소위 ‘슬로보드’)가 설립되면서, 이 지역은 빠르게 인구 밀도가 높아졌으며; 이 지역의 정착 과정은 주로 17세기 후반에 집중되었는데, 바로 그 시기에 특히 많은 새로운 수도원[397] 이 생겨났다.

수도원 수로 볼 때 1위를 차지하는 곳은 오키 강 양안에 위치하며, 서쪽으로는 데스나 강까지 뻗어 있고, 남서쪽 체르니히우 지역에서는 당시 폴란드의 지배 하에 있던 우크라이나와 접경하고 있는 오를로프-쿠르스크 지방이다[398] . 이곳에는 9개의 새로운 수도원이 설립되었다(16세기에 2개, 17세기에 7개). 쿠르스크 지역만 해도 7개의 수도원이 건립되었다(16세기에 4개, 17세기에 3개). 동쪽으로는 오를로프-쿠르스크 지역이 보로네즈 지역과 접해 있다. 이곳에는 이미 17세기 20년대에 국경선이 구축되었는데, 서쪽으로는 벨고로드 시까지 닿았고, 북동쪽 방향으로는 돈 강을 건너 탐보프 지방의 호프라 강 상류까지 이어졌다[399] . 17세기에는 이곳에 7개의 수도원이 설립되었으며, 그중 3곳은 보로네즈 시에 위치했다[400] .

남동부 지역(이 지역의 북동쪽 부분은 행정상 포니조비에 속해 있었다)에서는 이미 1573년에 첫 번째 수도원이 설립되었으며[401] , 17세기에는 이곳에 총 8개의 수도원이 있었다. 나중에 18~19세기에 러시아 수도원 지도부의 역사에서 큰 역할을 한 두 곳의 은둔처가 특히 주목할 만하다: 템니코프 시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보고로디츠카야 사낙사르스카야 수도원(1659)과, 같은 도시에서 약 4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우스펜스카야 사로프스카야 수도원(1679, 1692년에 재개)이 있는데, 후자는 성 세라핌 사로프스키의 생애와 위업 덕분에 러시아 전역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402] .

올로프 지역으로 돌아가서, 이후 러시아 수도원 역사에서 일정한 역할을 한 몇몇 수도원을 언급해 보겠습니다. 16세기 말, 세브스크 시에서 약 60km 떨어진 곳에 보고로디츠카야 플로슈찬스카야 수도원이 설립되었으나, 혼란의 시대에 폴란드 군대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1620년, 키예프-페체르스카 수도원의 수도사 프로코피이는 필라레트 총대주교의 축복을 받아 파괴된 이 수도원을 재건했다. 18~19세기 이 은수원은 장로 전통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403] . 1661년경, 세라피온 신부는 브랸스크 시에서 약 17km 떨어진 스네제트 강변에 요한 세례자 벨로베레즈카야 은수원을 설립했으며, 19세기에는 이곳에서 러시아의 장로들이 수행했다[404] . 쿠르스크 지역의 수도원 중에서는 러시아에서 ‘코렌나야’ 로 알려진 성모 마리아의 성탄 수도원을 언급할 수 있는데, 이는 (예전에) 그곳에 있던 기적을 행하는 ‘코렌나야’ 성모 마리아 성화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쿠르스크에서 30km 떨어진 이 수도원은 1597년에 설립되었다.[405]

17세기 후반, 수도원 정착은 더 남쪽, 드네프르 강과 돈체 강 사이의 대초원 지대로 확대되었으며, 그곳에 여러 수도원이 건립되었다[406] .

 

9. 정착의 전반적인 양상

이것이 16~17세기에 걸쳐 새로운 수도원이 건립된 전반적인 양상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상기하건대, 우리가 제시한 자료는 검증과 정밀 조사가 필요하다. 모든 수도원에 대한 필요한 역사적 자료와 출처가 수집되면, 그 통계는 다소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이 문제를 연구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이유는, 교회나 국가 당국의 지시에 따라, 혹은 설립자 자신의 주도로 지어진 많은 수도원이 수십 년 후 여러 가지 이유로 황폐화되었고, 수도사들이 떠나면서 수도원들은 역사 문서에 표현된 대로 ‘노래 없는’ 상태로 방치되었기 때문이다. 버려진 수도원 중 일부만이 훗날 — 대개 수도사들의 주도로 — 재개되었다. 공식 문서에 그 존재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고, 말하자면 세상으로부터 숨겨진 채 남아 있던 수도원들도 많았다. 교회 당국은 황폐해진 수도원을 재개하기 위해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은 대개 새로운 수도원 설립에 주력했는데, 이는 국가의 식민지화 정책과 밀접하게 연관된 그들의 이익에 부합했기 때문이다. 18세기 초에는 새로운 수도원 설립도 중단되었는데, 이는 표트르 대제와 교회 계층의 유력 인사들이 수도 생활과 수도원에 대해 보였던 태도에서 기인한 것이다. 18세기 전반에는 새로운 수도원이 극히 적게 설립되었다. 19세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수도원 설립의 새로운 물결이 시작되었으나, 이는 모스크바 시대와는 전혀 다른 이유와 고려 사항에 따라 이루어졌다. 이 새로운 수도원 설립 물결은 특별한 주목을 받을 만하다. 왜냐하면 그 형성 과정의 역사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수도원 정착에 대한 개요를 제시하면서, 한 가지 더 답해야 할 질문이 있다. 바로 지역 주민들이 수많은 수도원 설립을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하는 점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이 드러난다. 모든 새로운 수도원 설립이 주변 주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것은 아니었으며, 때로는 주민들이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수도원 건축을 막으려 시도하기도 했고, 종종 수도원 설립자를 구타하는 사태까지 이르기도 했다. 수도원 정착이 국가적 정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던 지역, 즉 포니조비예와 남부 지역에서는 이런 일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이 예로부터 거주해 왔고, 자유롭고 경작에 적합한 토지에 대한 문제가 절실했던 북부와 일부 중부 지역에서는 이러한 일들이 드물지 않게 발생했다. 심지어 큰 숭배를 받던 일부 성인과 경건한 수행자들의 전기에조차, 새로운 수도원의 설립이 이웃 마을과 농촌 주민들에게 항상 반가운 일만은 아니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 경우 경제적·사회적 사정이 백성들의 종교적 견해와 경건함을 압도하곤 했다[407] . 토지와 그 사용권은 때로는 수년에 걸친 분쟁과 소송의 대상이 되기도 했으며, 인근 주민들이 새로운 수도원 설립을 막지 못했을 때는 폭력의 빌미가 되기도 했다.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이에 대한 책임은 지역 농민들뿐만 아니라 수도원 자체와 그들의 토지 소유를 확대하려는 욕심에도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웃 농민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이를 시도했기 때문이다. 교묘한 술책과 금전, 당국과의 유착 관계 덕분에 수도원 기관들은 수년에 걸쳐 법적 분쟁을 질질 끌 수 있었는데, 이는 농민 공동체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농민들의 우려가 헛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정부의 수도원 소유지 확대를 제한하려는 조치에도 불구하고, 새로 설립된 수도원들은 매우 빠르게 기반을 다지고 경제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크거나 작은 토지 분배를 받은 수도원들의 설립은 전체적으로 수도원 토지 소유의 증가로 이어졌다. 이처럼 수도원 수의 증가는 수도 생활의 금욕적 정신 고취로 이어지지 않고, 오히려 수도원들의 부의 축적으로 이어졌으며, 그로 인해 긍정적인 결과보다는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16~17세기 수도원 소유지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를 뒷받침하는 많은 증거를 찾을 수 있으며, 이제 우리는 이 비통한 역사적 상황을 상세히 조명하고자 한다.

 

 

제8장. 16~17세기의 수도원 소유지와 수도원 경제

 

1. 수도원 영지 역사의 자료가 되는 법적 문서들

수도원 토지 소유의 출현과 확장의 역사적 원인은, 예를 들어 성 요셉 볼로츠키가 생각했던 것처럼 수도원 생활의 번영을 위해 필수적이었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로 수도원 소유지가 수도 생활의 근본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수도사들 자신의 깊은 확신에 있었다. 요시프파는 이러한 그릇된 근거 위에 자신들의 견해를 세웠으며, 그러한 구실을 내세워 비재산주의자들과 논쟁과 투쟁을 벌였다[408] . 자신들의 주장이 옳다는 확고한 신념과, 이러한 소유권에 대한 권리가 종교적으로 타당하다는 확신에도 불구하고, 수도원들은 여전히 국가적 문서를 통해 이러한 권리를 재확인하고자 했다. 국가는 한편으로는 수도원의 토지 소유권을 법적으로 확정하는 데 관심이 있었지만, 동시에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 권리를 가능한 한 제한하고자 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국가와 교회는 때로는 동맹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적대자가 되기도 했다. 어느 한쪽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했고, 진정한 패배를 겪지도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수도원의 토지 소유권에 관한 문제가 불확실하고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던 것은 수도원 경제의 성장과 심지어 번영에 유리한 조건이 되었다.

수도원의 토지 소유권 확대에는 공작과 대공들이 수도원에 하사한 다양한 특권(면제권)이 기여했다[409] . 교회 소유지에 대한 특권의 수를 늘리는 데 있어 타타르 칸들의 얄리크(yarlyk)는 막대한 의미를 지녔는데,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이는 교회 계층에 의해 교회의 특별 권리에 대한 근거로 간주되었다[410] . 분명히, 교회 지도자들과 개별 수도원들은 지역(우델) 공작들로부터, 그리고 나중에는 대공들로부터 이러한 권리를 확인해 주는 하사장을 얻으려고 노력했는데, 이는 단순히 세속(공작) 기관들의 요구로부터 자신들의 소유지를 보호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이러한 소유지를 장래에 걸쳐 법적으로 확고히 하기 위함이었다[411] . 수도원의 권리와 특권은 여러 가지 문서를 통해 정당화되고 보호되었다[412] .

가장 중요한 문서는 특권장이었다. 새로운 수도원이 설립될 때, 그 설립자는 대공이나 차르로부터 토지 소유권의 경계가 정확히 명시된 특권장을 받도록 노력했으며, 동시에 – 특히 16세기에 해당되는 사항이다 – 수도원은 대공이나 차르로부터 다른 지역에서 온 이주자들을 받아들일 권리를 부여받았다[413] . 특허장은 종종 특혜 문서로 작용하여, 수도원과 그 수도사들, 그리고 수도원 토지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이 국가에 대한 조세 납부 의무에서 면제되도록 했다. 이러한 특혜는 대개 10년 또는 15년과 같은 일정 기간 동안 부여되었다. 거의 항상은 아니더라도 매우 자주, 이러한 특권은 수도원에 기증된(종종 설립 당시부터) 세습적인 보야르 영지뿐만 아니라, 수도원이 특권 증서를 받기 전부터 이미 그 영지에 거주하던 원주민 농민들에게도 적용되었다. 매우 드물게는 특권 증서가 무기한으로 발급되기도 했다[414] . 하사 증서와 함께 보통 ‘면소 증서’도 발급되었는데, 이는 수도원과 그 농민 및 노동자들을 국가 당국의 관할권에서 면제하고, 절도, 강도, 살인 등 형사 사건을 제외하고는 수도원장에게 사법권을 부여했다[415] . 만약 이러한 모든 권리와 특권이 하나의 특권장에 명시되어 있고 수도원이 조세(비록 일정 기간 동안이라 할지라도)와 국가 당국의 사법 관할권으로부터 완전한 면제를 받는다면, 그러한 특권장은 ‘타르한 특권장’ 또는 ‘타르한’이라고 불렸다. 이러한 타르한은 드물게 발급되었으며, 1584년 공의회 판결에 따라 그 발급이 완전히 중단되었다[416] .

앞서 언급된 문서들은 교회 및 수도원 소유지에 관한 당시 국가법의 주요 자료이다. 이 자료들은 사법적 성격을 띤 다양한 문서들로 보완될 수 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소위 대공과 대주교들의 ‘정관’으로, 이는 대주교와 그 관할 구역 내의 수도원들 간의 법적 관계를 규율하는 문서입니다(단, 특별 특권장에 의해 대주교의 관할권에서 면제된 경우는 제외).[417] . 영토 경계를 둘러싼 분쟁의 결과로 차르의 명령이나 법원 판결에 따라 특정 문서가 작성될 때, 이러한 문서들은 ‘법적 칙서’라고 불렸다[418] . 토지(주로 영지)를 기증할 때, 이전 소유주는 수도원에 이 증서[419] 를 발급했으며, 이를 통해 기증된 토지와 관련된 모든 권리와 특권이 양도되었고, 수도원은 이러한 증서의 내용을 특권 증서로 확인하려고 노력했다. 수도원들은 종종 서로 간에, 혹은 민간 지주들과 소유지의 일부를 교환하곤 했다. 이러한 교환은 교환 증서[420] 로 증명되었다. 이러한 교환은 특히 16세기 말과 17세기 전반에 두드러졌는데, 이 시기에는 공의회 결의에 따라 토지 매입이 제한되거나 아예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인접한 소유지 간의 분쟁이 있는 경계를 확정할 때, 지방 당국은 ‘자예지 그라마타(заезжие грамоты)’를 발급했다. 수도원들에게 이 증서들은 특별한 의미를 지녔는데, 많은 수도원이 소유지 경계를 둘러싸고 이웃들과(특히 북부 지역에서는 농민들과) 장기간의 분쟁을 벌였기 때문이다[421] . 마지막으로, ‘저당 기록’ 또는 ‘카발라’라고 불리는 문서들도 언급할 필요가 있는데, 여기에는 담보로 제공된 금전이나 재산에 대한 권리가 기록되어 있었다[422] .

이것이 바로 수도원의 토지 소유권을 입증하던 국가 및 사법 문서들이다.

새로운 소유지의 취득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대공이나 차르의 하사였는데, 이는 실제로는 수도원 설립자의 청원서에 따라 수도원 설립과 동시에 이루어졌으며, 하사장으로 확인되었다. 새로운 차르가 즉위하면 수도원 원장들은 이미 발급된 하사장을 그로부터 재확인받기 위해 서둘렀다. 이는 화재나 수도원 파괴로 인해 하사장이 소실된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는데, 예를 들어 ‘스무타’ 시기처럼 많은 수도원에서 이런 일이 발생하곤 했다. 두 번째 취득 방식은 개인으로부터의 토지 또는 금전 기증이었는데, 이러한 기증은 해당 증서나 유언장(기증자가 사망 후 자신의 재산을 수도원에 넘기기를 원할 경우 유언장)을 통해 확인되었다. 대규모 수도원들은 주로 경작지, 산림, 어장, 소금 제조장 등을 다수 매입함으로써 부를 축적했는데, 이러한 거래는 매매 증서에 기록되었다. 1551년 부터 모든 토지 매매는 “차르에게 보고”하는 조건으로 대궁전 관리국에 등록되어야 했으며,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580년 이후에는 매매 계약서가 차르가 발급한 특별 하사 증서에 의해서만 법적 효력을 갖게 되었다. 총회 결의에 따라 토지 매입이 공식적으로 금지되었을 때, 수도원들은 각종 토지 소유권 교환을 통해 이러한 금지 조치를 우회할 방법을 찾아냈다. 또 다른 취득 방식은 소유지를 담보로 받는 것이었는데, 수도원들은 성직자와 수도자에게 고리대금업을 금지하는 신성한 규정을 무시하고 이를 꽤 자주 행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러한 거래는 저당 기록으로 관리되었다.

수도원 소유지와 수도원 경제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16~17세기의 ‘피스코비 책(pisco-vye knigi)’과 17세기의 ‘인구 조사 기록부(perepisnye knigi)’도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이는 수도원의 식민지화 활동, 소유지의 지속적인 확대, 그리고 수도원 경제의 발전을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매우 중요한 자료들이다[423] .

 

2. 오프리치나와 16세기의 농업 위기

수도원 경제에 대한 설명으로 넘어가기 전에,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문제와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지닌 두 가지 상황을 더 언급하고자 한다. 첫 번째는 이반 4세 차르의 소위 ‘오프리치니나’로, 이로 인해 많은 보야르의 영지가 수도원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다는 점이며, 두 번째는 16세기 후반 모스크바 중심부에서 발생한 농업 위기이다.

이반 차르의 끔찍하고 피비린내 나는 개혁인 오프리치니나는 20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제대로 조명되었으며, 주로 역사학자 S. F. 플라토노프와 그의 제자들[424] 의 저술을 통해 다루어졌다. 한편으로 이 개혁은 정치적 성격을 띠었으며, 분봉 공작들과 그 후손들(크냐자트)을 겨냥하고 차르의 전제정치를 공고히 했던 모스크바 대공들의 기존 정책을 단순히 이어받은 것에 불과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는 농업적 성격을 띤 개혁이기도 했다. 크냐자트와 보야르들로부터 몰수된 많은 영지는 작은 구획으로 나뉘어 관료들에게 영지로 넘겨졌다. 오프리치니나는 보야르 계급의 사회·정치적 위상을 박탈하고 그들의 파산을 초래했다. 새로운 군사 복무 규정(1570)은 보야르와 많은 관료들에게 힘들고 거의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 모든 상황은 보야르 가문들이 자신들의 세습 영지를 팔거나 저당 잡히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구매자는 오직 수도원뿐이었습니다. 16세기 중반에 금전적 자본을 손에 쥔 것은 오직 수도원뿐이었으며, 오프리치나로 인해 전혀 피해를 입지 않은 것도 오직 수도원뿐이었습니다[425] .

당국의 주목을 끌었고, S. F. 플라토노프가 밝힌 바와 같이[426] 당국으로 하여금 특정 조치(1570년경)를 취하게 만든 16세기 농업 위기는, 본질적으로 차르 이반 4세 통치 전반기에 모스크바 국가가 펼친 적극적인 정치적·경제적 노력의 논리적 결과였다. 카잔 타타르족과의 전쟁, 초반에는 성공했으나 나중에는 실패로 끝난 리보니아 전쟁, 크림 타타르족과 노가이족의 침입으로부터 남부 국경을 방어한 일 등 이 모든 것이 위기의 정치적 측면을 구성했다; 오프리치나, 새로운 군 복무 제도 및 이와 관련된 정부의 주요 자본인 영지 분배의 변화, 정복된 땅에 대한 광범위한 식민지화는 위기의 경제적 측면을 구성하며 위기를 심화시켰다. 오카 강과 볼가 강 유역 사이를 중심으로 한 중앙 지역 주민들의 처지는 해가 갈수록 더욱 어려워졌다. 토지에서 얻는 수입이 적었던(부분적으로는 원시적인 경작 방식 때문이기도 했다) 하급 군인들과, 이 땅에 정착해 살며 경제적 어려움으로 큰 타격을 입은 농민들에게 더 나은 생활 조건을 찾는 일은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 세습 영지와 그곳에 살던 농민들의 사정도 나을 것이 없었다. 반면 중부 볼가 강 양안, 포니조비예, 남부 대초원은 정착민들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게다가 정부 역시 이 지역들을 무력으로 방어하고 농경지로 활용하기 위해 수천 명의 인력이 필요했다. 새로운 식민지 개척자들에게는 많은 토지가 주어졌고, 새로 세워진 수도원들은 농민들을 자신들의 영지로 불러들여 모스크바 중심부에 비해 더 나은 생활 조건을 제안했다. 중심지에서 새로운 지역으로의 대규모 인구 유출이 시작되었는데, 이는 당시 자료에서 ‘이산(散逸)’이라고 표현된 진정한 의미의 이주였으며, 그 결과 경제 위기가 발생하고 중심 지역은 황폐해졌다. 국가 중심부의 많은 수도원들도 이 위기로 인해 큰 타격을 입은 반면, 포니조비야 지역 수도원들의 경제 발전에는 이 위기가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 두 가지 상황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안타깝게도 이에 대해 더 자세히 다루지는 다룰 수 없습니다)는, 수도원 소유지와 수도원 경제에 관한 문제가 모스크바 국가의 정치적·경제적 삶의 다양한 측면에 대해서도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며, 세속의 세상과 세속적인 근심에서 도피했던 수도원과 그 수도자들이 다시금 이 세상의 걱정거리 속으로 휘말리게 되었음을 보여주기 위해 필요했습니다.

 

3. 수도원 경제 운영의 구체적인 사례

수도원 경제의 발전에는 수많은 요인이 영향을 미쳤는데, 수도원의 종교적·역사적 중요성(특히 교회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거나 백성들로부터 큰 숭배를 받던 설립자의 이름이 큰 역할을 했음), 지역적 여건, 차르 가문과의 관계 등이 있었다. 수도원의 경제적 번영을 끊임없이 돌보고, 종종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끈기와 집념으로 수도원의 부를 더욱 증대시키려 노력했던 원장 및 수도원 내 권위를 가진 다른 인물들의 경영 능력과 진취성도 결코 적지 않은 중요성을 지녔다. 이를 단지 개별 원장이나 수도사들의 부정적인 성격적 특징으로만 보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다 . 여기에서 우리는 그 시대의 종교성에 특징적인 무언가를 발견하게 된다. 바로 수도원과 교회 장식에 있어 사치스러움이 하느님께 기쁨을 드린다는 확신이다(이 점은, 덧붙여 말하자면, 비재물주의자들에 의해 매우 날카롭게 비판받았다); 이 호화로움 속에서 수도원 설립자와 전체 러시아 교회의 영광을 위한 봉사를 보았던 것이다. 게다가 많은 수도원이 자선 활동을 펼쳤으며, 어려운 시기에 국가와 백성에게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16~17세기 수도원 경제 발전의 주요 특징은 개별 수도원의 사례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특징들은 사소한 차이를 제외하고는 전국 각지에 위치한 수도원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유명한 트로이체-세르기예프 수도원이 설립된 배경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이 수도원의 창시자인 성 세르기(† 1392)는 자신의 수도원이 세속적으로 번영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그의 금욕적 신조에 따르면, 수도사들은 절제와 가난 속에서 살며 자신의 손으로 일한 대가로 생계를 꾸려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생애 말년에 이미 수도원이 최초의 토지 소유권을 기증받았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427] . 제2대 원장인 성 니콘(1392–1428)의 재임 시기부터, 수도원이 부분적으로는 기증받고 부분적으로는 매입하여 광대한 토지를 확보했다는 기록이 전해져 내려온다. 15세기 말, 수도원은 농민들이 거주하며 이 땅을 임차해 경작하던 마을들이 있는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428] . 16세기 동안 수도원의 소유지는 계속해서 늘어났다. 16세기 말, 1593~94년의 재산 목록에 따르면, 수도원은 2,500개 이상의 마을과 포친카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 중 대부분(약 34개)은 기증받은 것이었고, 매수한 것은 14개에 불과했다[429] . 수도원 경제의 매우 특징적인 점은 16세기 전반에 수도원 당국이 주로 농민들에게 토지를 임대해 주었으나, 이 세기 마지막 4분의 1에는 수도원이 직접 경작하는 농지의 규모를 확대하려 했다는 사실이다; 이 농지는 수많은 수도원 하인과 수도원 소년들, 그리고 그곳에서 노역(바르시나)을 수행하던 농민들에 의해 경작되었다[430] . 16세기의 위기 시절과 17세기의 스무타(대혼란) 시기에도 수도원은 도망친 농민들로 인한 일부 손실과 이로 인한 경작지 감소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으로 버텨냈다. 1620년에는 수도원 토지가 1593~94년과 동일한 규모로 경작되었다[431] 1646년의 세무 장부에 따르면, 수도원의 모든 영지에는 16,838가구가 있었으며, 이곳에는 농민, 수도원 신학생, 보빌[432] , 그리고 수도원 장인[433] 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처럼 3세기에 걸쳐 성 세르기우스의 작은 수도원은 고대 루스의 거대한 경제 기관으로 변모했다. 모스크바를 방문한 외국인들 은 16세기 말 수도원의 매입 비용이 — D. 플레처의 추산에 따르면 — 당시 루블로 100,000 이상(1914년 기준 약 500만 금루블)이 소요되었다고 기록했다[434] . 수도원의 성스러운 창시자에 대한 지극한 숭배는 수많은 기증과 하사, 그리고 대공과 차르로부터의 하사 및 면책 칙서를 이끌어낸 원인이 되었으며, 이 모든 은혜가 수도원의 부를 축적하는 토대가 되었고, 14세기 수도원의 생활이 17세기의 생활과 그토록 달랐던 이유이기도 했다.[435]

모스크바 루스의 가장 유명한 수도원 중 하나였던 키릴로-벨로제르스키 수도원의 경제 활동은 또 다른 기반으로 발전했다. 창립자인 성 키릴 벨로제르스키(† 1427) 시대, 이 수도원은 공동 생활의 엄격함으로 유명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성 요셉 볼로츠키[436] 로부터도 인정과 찬사를 받았다. 키릴이 입적한 후 15세기 80년대까지, 이 수도원은 진정한 수행자적 수도 생활의 모범을 보였으며, 소유를 탐하지 않는 이념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16세기에 들어서면서 이전의 높은 생활 수준이 저하되기 시작했고, 이 수도원의 위대한 창시자 시대는 역사적 전설처럼 여겨지게 되었다[437] . 이미 15세기, 1521년 이전부터 이 수도원은 대공의 수많은 하사물과 보야르 가문들의 헌납을 통해 부를 축적했으며, 게다가 금전적 기부금으로 마련된 자본을 바탕으로 주로 소규모 지주들, 심지어 농민들로부터도 많은 토지를 매입했다[438] . 이러한 토지 취득에 대한 열망은 1551년 스토글라프의 결의 이후에도 줄어들지 않았다. 바로 이 공의회 직후, 수도원은 공의회 결의에 위배되는 수많은 토지 매입 계약을 체결했다. 1551년부터 1555년 사이에만 수도원은 19개의 새로운 토지 소유지를 취득했으며, 1564년부터 1572년까지 수도원 당국은 계속해서 새로운 토지를 취득해 나갔다. 수도원은 보야르들의 상속 영지, 관료들의 영지, 농민들의 작은 토지를 매입했다. 1572년 칙령으로 수도원에 토지 소유권을 기증하는 것이 금지되자, 수도원은 소금 제조소와 도시 내 부지를 매입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수도원의 토지 취득을 전면 금지한 1580년 공의회 이후에도, 수도원장은 뛰어난 기지를 발휘하여 차르로부터 특권 및 면책 칙서를 받아내어, 이를 통해 수도원이 새로운 소유지를 취득할 수 있게 되었다[439] . 이미 1473년에 수도원은 소유지에 대한 정확한 목록을 작성했다[440] .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수도원 기록부(1543–1544년)에는 벨로제르스카 지역 하나만 해도 수도원이 소유하고 있던 399개의 마을과 포친코가 언급되어 있다[441] . 1543–1595년에 취득한 토지에는 적어도 284개의 마을과 포친코프가 있었다. 16세기 80년대에 수도원의 토지는 모스크바 국가의 13개 우예즈드에 분포해 있었으며, 그중 8곳에서만 경작지가 5,000데시아틴을 넘었다[442] . ‘스무타’ 직후 수도원은 토지 취득을 계속했다. 이미 1615년에 수도원은 젊은 차르 미하일로부터 네녹사 마을 근처의 소금 가마에 대한 하사장을 받았으며, 여기에는 마을 내 토지 구획과 숲, 건초지, 어장 등이 포함되었다[443] . 1646년 인구 조사 기록에 따르면, 수도원 소유지에는 3,854개의 농가가 있었다[444] .

세 번째 예로는 도시 수도원인 야로슬라블의 스파스키 수도원[445] 을 들 수 있는데, 이는 루스에서 가장 오래된 수도원 중 하나이다. 연대기에는 1216년에 처음으로 언급되며, 콘스탄틴 야로슬라블 공이 이를 설립했고, 당시 석조 수도원 교회도 착공되어 8년 후에 완공되었다[446] . 15세기 말(1463년), 그곳에 안치된 기적을 행한 공작 테오도르(† 1299), 다비드, 콘스탄틴의 유해를 발견한 후, 이 수도원은 백성들이 숭배하는 성지들 중에서도 두드러진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447] . 이 수도원의 특별한 중요성은 교회 지도부가 수도원 원장을 아르히만드리트(archimandrite)로 승진시킴으로써 강조되었다[448] .

수도원의 소유지는 주로 경작지, 봄철 홍수 때 물에 잠기는 매우 광대한 초지, 그리고 어린 숲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미 1321–1345년에 수도원은 분봉 공작 바실리 야로슬라프스키로부터 소송 면제 증서를 받았다. 아르히만드리트 크리스토포로 재임 시절, 즉 1464년과 1466년 사이에 대공 이반 3세는 수도원에 소송 면제 증서를 하사했는데, 이를 통해 스파스키 수도원이 자체 소금 제조소를 보유하고 있었음이 드러나며, 1478년에는 또 다른 소금 제조소를 매입했다; 1490년, 1508년, 1516년에는 경작지 및 마을과 세입지[449] 를 추가로 매입했다. 1538년, 1545년, 1547년, 1550년에 수도원은 S. F. 쿠르브스키 공작으로부터 영혼을 기리기 위한 매우 막대한 기부금을 받았으며, 차르로부터 하사도 받았다[450] . 스토글라프 이후인 1555년과 1556년에 수도원은 ‘차르와’ 교환을 진행했는데, 흥미롭게도 수도원은 정부에 마을이 딸린 영지를 제안하는 한편, 자신들을 위해 무인지대를 요청했다[451] . 1564년 차르 이반은 수도원에 마을이 있는 땅을 하사했고, 1562년 수도원은 보야린 이. V. 펜코프 공작으로부터 영혼을 기리는 기부금을 받았으며, 1564년에는 D. 자세킨 공작으로부터 기증을 받았다[452] . 이처럼 50~60년대에 걸쳐 수도원의 소유지는 상당히 늘어났으며, 이를 통해 1551년 5월 11일의 판결이 사실상 얼마나 중요하지 않았는지를 알 수 있다. 스토글라프의 요시플리안파 다수가 이 판결에 “수도원은 앞으로도 영혼을 기리기 위한 기부금으로 영지를 받을 수 있다”는 단서를 삽입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토지 소유권 교환은 아직 금지되지 않았고, 스파스키 수도원은 이 기회를 활용했다. 수도원은 국가와 직접 교환을 단행했는데, 이는 1551년 5월 11일 판결을 얼마나 쉽게 회피할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453]

1628–1631년 스파스키 수도원의 회계 장부[454] 를 통해 수도원 소유지의 규모를 다음과 같이 파악할 수 있다:

경작지 15,993.58 체베르트(7,997 데샤틴)

초지 18,745 코펜 (937.14 데시틴)

산림 994 34 데시나

농가 1,947

보빌 가옥 1,374채

수도원 종업원 가구 163

총 3,484 가구, 554개 마을

1646년의 세무 장부를 보면, 당시 수도원 소유지에는 3,183개의 농민 및 무소유자 가구가 있었으며, 1678년의 세무 장부에는 이미 3,915가구가 기록되어 있었다[455] . 즉, 1646년부터 1678년까지 수도원 소유지 내 농민 가구가 적어도 732가구 증가했는데, 이는 1649년 법전 제정 이후, 공식적으로 새로운 가구의 취득이 금지되었던 시기에 발생한 일이었다[456] . 1678년 인구 조사 이후 농가 수의 증가는 미미했는데, 1696년 스파스스키 수도원의 농가 수는 고작 4,049호에 불과했기 때문이다[457] .

16세기 수도원 경제의 발전 양상은 요시포-볼로콜람스크 수도원의 역사를 통해서도 파악할 수 있다. 창시자인 성 요시포 덕분에 지극히 특별한 교회·정치적 중요성을 지닌 이 수도원은 16세기에 풍부한 경제 기반을 갖추고 있었다. 17세기에는 이 수도원의 경제 규모가 거의 성장하지 않았는데, 이는 아마도 수도원의 중요성이 이미 이전 세기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줄어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16세기에 요시프 수도원이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수도원이 예를 들어 트로이체-세르기예프 수도원이나 키릴로프 수도원처럼 축복받은 장소가 된 것은 아니었다. 민간의 경건함은 종교적 성지에 대해 교회 계층과는 다르게 평가하는데, 이 사실은 러시아 교회의 역사학자들에게 꽤 자주 눈에 띈다.

1479년, 15~16세기 모스크바 루스의 가장 활기찬 무역 중심지 중 하나였던 볼로카 람스키 마을 근처에 설립된 이오시포프 수도원은 설립 후 불과 1세기 만에 대규모 경제 기관으로 성장했다[458] . 수도원은 1488~1495년에 보리스 볼로츠키 공작으로부터 첫 토지 소유권을 기증받았으며, 1591~1592년까지 불과 100년 만에 기증과 영혼 기도를 위한 기부로 153곳 이상의 새로운 영지를 취득했다; 그 당시 영혼을 위한 헌금은 매우 거액이었으며, 총액은 30,861루블에 달했다(1914년 환율 기준으로 150만 골드루블 이상).[459] . 이러한 기부 내역은 수도원의 시노딕에 기록되었다. 수도원의 초기 시노딕 중 하나에는 성 요셉 성인이 직접 다음과 같이 기록해 두었다. “이 구원과 영혼에 유익한 책들을 통해 우리는 현세와 내세에서 온갖 선한 것을 얻게 된다… 또한 음식, 생활, 의복, 신발, 그리고 수도실의 배치, 그리고 수도실에 필요한 온갖 물건이 충분하다면, 심지어 밭과 과수원, 강과 호수, 목초지, 그리고 온갖 가축과 네 발 달린 동물들까지»[460] .

이 모든 덕분에 수도원 당국은 이미 1543–1566년에 수도원을 돌담으로 둘러쌀 수 있었는데, 당시로서는 매우 비용이 많이 드는 사업이었다. 그 외에도 다른 수도원 건물들이 세워졌다[461] . 주로 중앙 현에 위치한 수도원의 영지는 경작지, 산림, 초지로 구성된 26,170 데시아틴에 달했으며, 40개의 마을과 포친카를 포함하고 있었다. 이 영지들은 다섯 구역으로 나뉘어 행정 및 업무를 담당하는 수도사들에 의해 관리되었다[462] . 스토글라바의 결의안은 수도원의 경제적 번영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1550년 이후, 이 수도원은 기증과 유언을 통해 토지가 딸린 60개 이상의 마을을 추가로 얻었다. 수도원의 경제적·재정적 상황은 매우 견고하여, 다른 수도원들과 달리 자신의 토지 소유권을 매각하거나 담보로 제공하지 않았다[463] . 수도원의 눈부신 재정 상태는, 하사장과 면세장이 ‘얌스키 돈’과 ‘스트렐체크 곡물 징수금’을 제외한 모든 세금과 납부 의무에서 수도원을 면제해 주었기 때문이었다[464] . 16세기 60~70년대의 농업 위기 XVI 세기의 농업 위기는, 농민들이 도망쳐 땅의 절반이 경작되지 않고 있다는 수도원 당국의 불평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수도원의 경제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465] . 이는 이곳이 다른 수도원들보다 더 빨리 농업 경영 체계를 바꾸는 것이 유리하다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전까지는 수도원이 직접 토지를 경작하거나, 토지를 작은 구획으로 나누어 자신의 농장이 없는 가난한 농민들에게 임대하거나, 소위 ‘수도원 자녀들’을 이 구획에 정착시켰다. 수도원은 이 임차인들로부터 매년 지대[466] 를 받았다. 위기 이후, 대략 1591~1592년부터 수도원 당국은 자체 경작지를 늘리고, 지대를 내던 농민들을 노역(바르시나) 제도로 전환하려 했다. 수도원 입장에서는 자체 곡물 비축량을 확보하여 이를 판매하는 것이 더 유리했기 때문이다[467] . 혼란기 동안 요시포프 수도원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고, 많은 농민들이 수도원 소유지에서 도망쳤다. 1619년, 수도원은 젊은 차르 미하일로부터 도망친 농민들을 다시 불러들일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468] . 16세기는 이 수도원에게 전성기였으나, 이후 혼란기 이후에는 그 규모가 축소되었다. 1646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이 수도원은 단 1,104개의 농민 가구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이 측면에서 439개 수도원 중 19위를 차지했다. 1661년에는 그 소유지에 총 991개의 농민 가구만이 남아 있었다[469] .

 

4. 16세기와 17세기 포니조비예 지역에서 수도원 토지 소유의 확대: 수도원의 식민지화 활동 사례

수도원 경제의 전반적인 모습을 더 명확히 파악하기 위해, 이 나라의 한 지역인 포니조비예로 눈을 돌려보자. 이 지역에 관한 풍부한 자료를 활용함으로써 우리는 주제를 심도 있게 조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470] . 한 편으로는 이곳이 수도원 식민지화에 있어 자유로운 활동 무대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곳의 식민지화가 북부 지역처럼 개별 수행자들의 주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국가와 교회 계층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점을 상기해 보자. 이전 장에서 우리는 16~17세기 포니조비예에서 수도원 정착이 얼마나 광범위한 규모로 이루어졌는지에 대해 이미 언급했으며, 이 정착의 주요 방향도 지적하고, 새로 설립된 수도원의 수와 설립 시기 및 성격을 살펴보았다. 1565–1568년의 피스초 기록부, 즉 모스크바 정부가 포니조비야의 식민지화에 착수한 지 13–15년 후에 작성된 기록에 따르면, 이 지역의 교회 및 수도원 소유지는 아직 비교적 작았다. 다음 표는 포니조비야의 다양한 소유지 규모를 보여준다[471] :

체르트베르트 단위의 경작지 (1 체르트베르트 = 12 데시나)

소유주 카잔 우예즈드 스비야즈키 우예즈드

관료들의 영지 18,243 20,644

황실 소유지 6,225 42,191.6

카잔 대주교 2,087.5 수도원 493 2,086.4

교회 교구 15 174

추바시족과 타타르족 ? 51,944

포사드 주민 700 ?

이곳에서 수도원의 토지 소유는 이제 막 시작되었지만, 개별 수도원의 소유지는 매우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이는 예를 들어, 1551년에 설립된 트로이츠키 수도원[472] 의 경우로, 이 수도원은 짧은 시간 안에 소유지를 몇 배로 늘렸다:

연도 경작지 휴경지 산림 마을

1575 562.4 190 6.52 ?

1593 1005 456 9.26 14

현존하는 자료를 통해 16세기에 새로운 수도원들이 설립된 것이 포니조비아 지역의 개척에 일정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수도원들이 이 지역의 경제 활성화에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다. 수도원들의 경제적 성장은 주로 이 지역의 비옥한 토지가 국가 내 다른 지역의 농민들을 끌어모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동쪽으로의 이주는 70~80년대에 발생한 중앙 지역의 농업 위기와도 관련이 있다. 농장을 꾸리는 데 자금이 필요했던 새로운 정착민들에게 수도원은 최고의 조력자였다. 새로운 농민 정착지는 수도원 소유지나 그 인근에 생겨났다. 농가를 꾸리는 일이 순조롭지 않을 때, 농민은 돈이나 식량이 부족하여 수도원에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곧바로 특정 수도원과 ‘보증 계약서’[473] 가 체결되었다.

16세기 말까지 영지나 수도원 토지에 정착한 농민들은 자유 임차인이었으며, 즉 토지 소유주와의 계약에 따라 수확물의 일부(15%에서 절반까지)를 그에게 바쳤고, 보통 ‘폴로브니키’라고 불렸다. 이와 더불어 그들은 소유주에게 지대(현금 또는 현물로)를 지불하고 그를 위해 각종 노동을 수행했는데, 수도원에서는 이를 ‘수도원 노동’이라고 불렀다. 임대 계약—특히 구두 계약—은 대개 문서로 작성되지 않았으며, 여러 문서에서 다음과 같은 증언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 사이에 서면 계약은 없었으나, 그와 함께 하느님의 진리를 믿고 약속했다”[474] . 16세기에는 지대의 규모와 농역의 양이 항상 정확하게 정해지지는 않았으며, 17세기의 임대 계약서(이때는 대개 서면으로 작성되었음) 역시 임차인의 의무를 항상 엄격하게 규정하지는 않았다[475] . 각 지역과 각 수도원 소유 토지에 따라 농민들의 처지가 결코 동일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주하는 데 타고난 열정을 지닌 고대 러시아 농민들[476] 은 더 나은 땅과 더 부유한 수도원을 찾아 종종 길을 떠났다. 포니조비야의 토지는 이러한 측면에서 그들에게 성공적인 농사 경영의 기회를 제공했으며, 이는 이 지역 수도원 소유지로의 농민 유입을 더욱 촉진시켰다.

포니조비야 수도원들의 경제적 발전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인은, ‘스무타’의 재앙이 서부 및 중부 지역보다 포니조비야에 덜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었다[477] . 일부 수도원 소유지는 스무타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지만, 이 피해는 국가의 중앙 지역 수도원들이 입은 피해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데, 그곳에서는 많은 수도원이 완전히 황폐화되었기 때문이다[478] . 포니조비야 수도원들의 토지 소유 규모에 관해서는, 유감스럽게도 정확한 자료가 없다. 일부 수도원의 소유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자료가 없으며, 다른 수도원들에 대한 자료도 불완전하다. 1620년대 토지 대장 및 1646–1678년의 인구 조사 기록은 일부만 보존되었거나 아예 소실되었다.

1646년의 인구 조사 기록에서 우리는 카잔 우예즈드의 13개 수도원에 대한 정보만을 추출할 수 있는데, 이들 수도원은 총 2,573개의 농민 가구가 있는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479] . P. 스미르노프에 따르면, 1646년 인구 조사 기록을 바탕으로 볼 때, 이 우예즈드의 모든 수도원이 총 2,706가구가 거주하는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480] ; 133가구의 차이는 다른 수도원들에 해당한다. 안타깝게도 수도원의 토지 소유 규모 증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1646년 인구 조사 기록에 따르면, 포니조비아(Понизовья) 지역의 수도원들은 4,567가구의 농가가 있는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481] . 1678년 인구 조사 기록에는 36개 수도원[482] 의 토지 소유 현황과 농민 수, 그리고 21개 수도원[483] 의 토지에 거주하는 농가 수에 대한 보다 상세한 정보가 수록되어 있다. 1646년 당시 이 21개 수도원은 3,057가구의 농가가 있는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으나, 1678년 조사 기록에 따르면 동일한 수도원 소유지에는 2,425가구만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1678년 이후에도 일부 수도원은 계속해서 농민 가구를 잃어갔다[484] . 18세기 전반에 걸쳐 수도원 소유지를 국가 통제하에 두기 위한 일련의 조치들이 시행되었으며(이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설명할 예정임), 이 소유지에서 발생하는 수입을 국가적 목적으로 활용하고, 소유지의 일부를 몰수했다. 1744년 자료에 따르면, 카잔 교구의 14개 수도원은 농민 15,131명이 거주하는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485] . 1762년, 즉 18년 후, 표트르 3세를 위해 교회 및 수도원 소유지에 대한 새로운 목록이 작성되었을 때, 카잔 교구의 38개 수도원에는 14,517명의 농민이 등록되어 있었다[486] .

이것이 16~17세기 모스크바 제국의 한 지역에서 수도원 경제가 발전한 전반적인 양상이다. 이 과정이 전국 모든 지역에서 똑같이 진행된 것은 아니며, 지역적 특성을 설명하기 위해 몇 가지 추가적인 논의를 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모스크바 국가 전체의 수도원 소유지에 대해 살펴본 후, 이 소유지 내부의 관계와 수도원 경제에서 수도자들의 역할에 대한 분석으로 넘어가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한다.

 

5. 수도원 경제의 전반적인 양상

16~17세기에 수도원들이 소유했던 전체 토지의 면적을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다. 이 문제에 관한 가장 중요한 자료인 토지 대장들은 많은 지역에서 아예 소실되었고, 일부 지역에서는 단편적으로만 남아 있다. 많은 수도원의 재고 조사 기록은 수도원 토지 소유에 대해 종종 부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며, 게다가 수도원 당국이 토지 대장 목록의 보존에 신경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수도원에서 이 목록들이 사라져 버렸다. 예를 들어 로즈코프, 유. 고티에 등이 어쩔 수 없이 했던 것처럼, 다양한 출처의 정보를 종합해야만 비로소 국가의 일부 지역에 대한 전체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다. 16세기나 17세기에 모스크바를 방문한 외국인들은 관청 문서에 대한 지식보다는 다양한 인물들의 발언을 바탕으로 자신의 평가를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평가들은 사실과 다소간 부합했기 때문에 별다른 비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1553년에 모스크바를 방문한 클리멘트 아담스라는 인물이 “tertiam fundorum partem totius imperii tenent monachi”[전 왕국의 토지의 3분의 1은 수도사들에게 속한다]라고 말한 것은 다른 외국인들의 언급을 통해 확인된다. 1572년부터 1590년까지 모스크바에 계속 거주했던 영국인 제롬 고르시는 1580년 공의회에서 이반 4세 차르가 “러시아 성직자들이 전 왕국의 3분의 1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한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 16세기 말과 17세기 초에 모스크바를 방문했고, 1615년에 모스크바 국가에 대한 여행기 『[487] 』를 출판한 스웨덴인 페테르 페트레이도 같은 내용을 언급했다. S. F. 플라토노프는 그의 뛰어난 저서 『러시아 역사 강의』에서, 16세기 말 성직자, 대주교, 주교좌 및 수도원들이 전체 경작지의 최대 37%[488] 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그 외에도 숲과 건초밭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충분히 신빙성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모스크바 중심부의 5개 우예즈드에서만 수도원들만 해도 230,721.8 체베르티(115,360.9 데시티나)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489] . 또한 16세기 노브고로드 지방에서도 수도원들의 소유지는 매우 광대했다[490] . 17세기 포모르 지역(우스튀즈스키, 솔비체고드스키, 드빈스키, 토템스키, 아르한겔스키 군)과 비얏스크 지방의 수도원 소유지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다[491] . 포니조비에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수도원 소유지는 서부(노브고로드의 수도원들은 제외)와 남부, 즉 대초원과 접한 국경 지역에서만 규모가 작았는데, 이곳에서는 정부가 토지를 매우 아껴 다루며 이를 관료들에게 영지로 분배했기 때문이다[492] .

많은 수도원의 경제 활동에 있어, 수도원 소유지에 위치해 수도원에 막대한 금전적 조공을 바치던 도시와 슬로보다들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오스타슈코프(Осташков) 도시는 절반이 총대주교좌에, 나머지 절반은 요시포-볼로콜람스키(Иосифо-Волоколамский) 수도원에 속해 있었으며, 티흐빈(Тихвин) 도시는 티흐빈스키(Тихвинский) 수도원의 땅에 위치해 있었다. 네포코크(Непокок) 슬로보다는 키릴로프(Кириллов) 수도원에, 보로브스크(Боровска) 도시의 슬로보다는 파프누티예프(Пафнутьев) 수도원에 속해 있었다. 이 모든 것은 단지 몇 가지 예에 불과하다[493] . 거의 모든 대형 수도원에는 수도원 소유지에 위치하며 수도원을 위해 일하던 장인들이 거주하던 이른바 ‘수도원 슬로보다’가 있었다. 이 모든 도시, 슬로보다, 정착지는 특별한 특권 및 면책 증서를 통해 국가에 납부해야 할 조세에서 면제되었으며, 수도원에 현물과 화폐로 매우 막대한 조공을 바쳤다[494] .

17세기 수도원 경제의 규모는 수도원 소유지에 위치한 농민 가구의 수에서 알 수 있는데, 이러한 정보는 인구 조사 기록에서 추출한 것이다. 1646년 인구 조사 기록에 따르면, 교회 기관 소유의 토지에는 109,267가구 이상의 농민 가구가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495] :

총대주교좌 소유지: 6,481 가구

주교좌 관할 구역: 10,857 가구

439개 수도원의 소유지: 91,829 세대

1661~1662년에 수도원 소유 토지에 위치한 농민 가구에 대한 인구 조사가 다시 한 번 실시되었다; 그러나 수도원 관리국에서는 수도원 당국이 직접 제공한 정보를 바탕으로 인구를 조사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농민 가구의 수가 다소 더 많았을 가능성이 있으며, 수도원들이 일부 가구를 누락했을 수도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이 조사에 따르면 476개 수도원이 87,907가구가 거주하는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으며[496] , 1696년에는 수도원 소유 토지에 102,476가구가 있었다[497] . 각 농가당 노동 가능 성인 남성 4명이 있었다고 가정할 때(농민들은 세금을 피하기 위해 농가를 분할하는 것을 항상 꺼렸다), 수도원 토지에는 남성만 해도 50만 명 이상이 종사하고 있었으며,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하면 적어도 50만 명 이상이 더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498] . 이 수치만 보더라도 수도원 경제 활동의 규모와 모스크바 국가 경제 전체에 대한 그 중요성을 알 수 있다. 바로 이 때문에 표트르 대제가 북방 전쟁과 관련된 재정적 어려움을 해소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던 개혁을 추진할 때, 수도원의 자본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수도원의 풍부한 경제 기반은 그가 필요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탁월한 원천으로 드러났다.

 

6. 수도원 토지 소유의 국가적·법적 기반

우리는 수도원 경제와 그 발전에 대한 전반적인 그림을 그려보려 했다. 이를 보다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수도원 소유지 내부의 경제적 관계와 수도사들의 경제 활동 참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수도원 거주자들이 세속적인 일에 종사함으로써 진정한 수도 생활과 영적 수행에서 벗어나 있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14~15세기 수도 생활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당시 새로운 수도원이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한 대표적인 사례들을 제시한 바 있다. 거의 모든 수도원 설립자는 법적 문서를 통해 수도원이 위치한 땅을 수도원에 귀속시키려 했으며, 처음에는 그곳에 목조 교회와 몇 채의 목조 수도실만 있었을 뿐이었다. 어쩌면 설립자의 마음속에는 항상 자신의 작은 은둔처 자리에 번성하는 농장이 그려지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당시 그는 주로 이웃들로부터 수도원을 보호하는 일(주변 주민들이 새로운 수도원에 대해 때때로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점을 다시 상기해 보자)과, 수도사들이 텃밭을 가꾸거나 곡식을 심을 수 있도록 하는 데 주력했다. 그렇게 수도원이 세워진 땅에 대한 최초의 하사장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 후 후계자들이 등장했다: 새로운 원장들과 새로운 수도사들; 그들은 수도원 설립자만큼은 아니었지만, 금욕적 이상에 영감을 받았다. 일부 엄격한 수행자들의 행적과 그들이 설립한 수도원의 역사에서는 고대 러시아 수도 생활의 가장 특징적인 법칙이라 할 수 있는 한 가지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곧, 종종 입적 직후 지역 성인으로 숭배받게 된 수행자의 세속적 명성이, 그가 설립한 수도원의 부유화와 수도사들의 세속화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성인을 경건하게 숭배하는 신도들로부터 수도원으로 헌물—물품, 돈, 토지—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들어왔다. 수도원의 영토는 해마다 확장되어, 수도원은 더 이상 인접한 땅 뿐만 아니라, 종종 수도원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 때로는 아예 다른 지역[499] 에 위치한 토지 소유지까지 소유하게 되었다. 새로운 영지를 관리하고 지속적으로 감독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기증받은 땅에는 농민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 수도원 및 국가 간의 관계를 조정해야 했다.

수도원 토지 소유의 한 가지 특징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토지 소유주로서 수도원은 그들에게 기증된 토지에 대한 완전한 소유권을 가졌는데, 이는 모스크바 국가의 법적 용어로 보통 ‘영지권’이라고 불렸다[500] . 토지 소유주로서 수도원은 자신들이 소유한 토지에 부과된 모든 세금을 국가에 납부해야 했으나, 동시에 수도원 토지에 거주하는 농민들이 납부한 모든 지대는 수도원으로 귀속되었다. 수도원이 토지에 대해 국고에 납부하던 조세의 규모와 수도원 및 농민 간의 관계는, 이러한 관계에 법적 효력을 부여하던 특권장전 및 면소장전(жалованные и несудимые грамоты)에 의해 규제되었다[501] .

소유자에 따라 경작된 땅이든 경작되지 않은 땅이든, 국가 소유의 땅은 ‘고수다레바(goсударева)’ 또는 ‘궁전 땅(дворцовая)’이라 불렸고, 분봉 공작이나 보야르의 후손에게 상속 재산, 즉 ‘보트치나(вотчина)’로 귀속된 땅은 ‘보트치나 땅’이라 불렸으며, 국가에 대한 봉사를 대가로 관료들에게 할당된 토지는 ‘포메스트 땅’이라 불렸다. 대주교, 주교좌, 수도원 및 교구에 속한 토지는 ‘교회 땅’이라 불렸으며, 소유자에 따라 ‘대주교 소유지’, ‘주교 소유지’, ‘수도원 소유지’로 구분되었다.

모스크바 국가의 인구는 국가에 대한 의무와 이러한 의무와 관련된 권리에 따라 여러 그룹으로 나뉘었다. 이 집단들의 대표자들은 토지 소유주로서 자신들이 소유한 토지의 법적 지위를 결정했다. 이후 16세기 후반부터는 법적 관행에 따라 이 상호 관계가 역순으로 결정되었는데, 즉 특정 유형의 토지를 이용하는 것이 국가 재정에 대한 소유주의 소속 범주를 결정하게 되었다.

기본적으로 인구는 두 그룹으로 나뉘었다: 1) 벨로포메스트치(백토 소유자)와 2) 얄글리(세금 납부 의무자). 첫 번째 그룹에는 성직자와 봉직자(보야르와 지주)가 속했는데, 이들은 자신의 토지에 대한 대가로 교회나 군주에 대한 봉사를 수행했다; 두 번째 그룹에는 현금이나 현물로 세금을 납부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이 속했다. 따라서 모스크바 국가의 토지도 ‘흰’ 땅과 ‘검은’ 땅이라는 두 가지 범주로 나뉘었다. 흰 땅은 세금이 면제된 사람들에게 속한 땅을 가리켰고, 검은 땅은 세금을 내야 하는 사람들에게 속한 땅을 가리켰다[502] .

수도원에 속한 땅은 ‘흰 땅’이 될 수도 있고 ‘검은 땅’이 될 수도 있었다. 수도원 본체와 교회(들), 원장 및 수도사들의 거처, 식당, 예배실이 위치한 땅은 ‘흰 땅’으로 간주되어, 특별 하사장을 통해 세금을 면제받는 것이 거의 일반적인 규칙이었다. 이 땅은 보통 돌담이나 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었다. 수도원 텃밭과 수도원 경작지, 즉 수도원 수도사들 스스로나 수도원 하인들, 그리고 수도원과 맺은 계약에 따라 수도원을 위해 각종 일을 수행해야 할 의무가 있는 농민들이 경작하던 땅도 흰 땅으로 간주되었다. 보통은 그렇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으나, 특별한 하사장을 통해 수도원 인근이나 다른 곳에 위치한 수도원 소유지의 일부도 ‘흰 땅’으로 인정되곤 했다. 수도원은 ‘흰 땅’에 대해 완전한 소유권을 가졌다.

그러나 수도원은 ‘검은 땅’도 소유할 수 있었는데, 이 땅은 비록 수도원 소유지라고 불렸지만, 다른 모든 검은 땅과 마찬가지로 국가와 다른 법적·재정적 관계를 맺고 있었다. 종종 수도원들은 매입, 교환 또는 영혼을 위한 헌금을 통해, 티글로 땅이나 검은 땅에 속하는 마을과 정착지를 포함한 토지 소유권을 취득하곤 했다. 이 땅은 수도원의 소유로 넘어가도 여전히 ‘검은 땅’으로 남아 있었으며, 수도원들은 이전에 그 땅에 부과되었던 모든 세금을 현금과 현물로 국가에 납부할 의무를 지게 되었다. 17세기에는 주로 북부 지역에서 이른바 ‘검은 수도원’이 등장했는데, 이들은 처음부터 ‘검은 땅’ 위에 지어졌으며 소유지 전체가 ‘티글라’ 땅이었다[503] . 개별 수도원의 역사를 살펴보면, 수도원 당국은 항상 하얀 소유지를 확장하고, 하사장을 통해 검은 땅을 하얀 땅으로 전환함으로써 국가에 대한 재정적 의무를 줄이려고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16세기에는 이러한 청원이 거의 항상 성공했으나, 17세기에는 ‘스무타’와 관련된 재정적 어려움으로 인해 정부는 이 문제에 대해 완전히 다른 정책을 펼쳤고, 검은 토지 소유지를 흰 토지로 전환해 달라는 수도원들의 청원을 거의 항상 기각했다[504] .

일부 수도원은 특별 하사장을 통해 개별 의무에서 면제되기도 했으나, 완전한 면제는 드문 일이었다. 유명한 트로이체-세르기예프 수도원은 1551년에 재확인된 ‘타르한’에 따라 모든 의무에서 완전히 면제되었으며, 심지어 이 수도원의 토지에 거주하던 농민들조차 국가에 대한 모든 의무에서 면제되었다. 또한 1541년의 ‘재판 면제 칙서’에 근거하여 농민들은 오직 수도원 원장에게만 재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모스크바 국가의 여러 우예즈드에 위치한 수도원 영지에서 사역하던 성직자들은 대주교(나중에는 총대주교)와 교구 주교들에게 바치는 조공에서 면제되었다. 1625년 미하일 차르 치하에서 새로운 타르한이 도입되면서 비로소 몇 가지 변화가 생겼는데, 이제부터 이 수도원은 다른 수도원들과 마찬가지로 궁정 관리국(Дворцовый приказ)에 야姆斯키 돈(ямские деньги)을 납부하고, 스트렐츠(стрельцы)의 생계를 위한 곡물을 납품하며, 요새 건설을 위한 자금—‘오스트로즈노예 델레(острожное дело)’[505] —을 지불해야 했다. 16세기 요시포-볼로콜람스키 수도원 도 야姆斯키 돈과 스트렐츠의 생계를 위한 곡물 납부를 제외하고는 모든 의무에서 면제되었다[506] .

여기서 언급된 의무는 모든 수도원에서 이행했으며, 그 폐지를 요청한 청원서는 단 한 건도 알려져 있지 않다.

 

7. 수도원 농민

수도원 농민들의 처지는 별도의 연구 주제로 삼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여기서는 대략적인 특징만 기술할 것이다. 이 문제를 자세히 다루면 본 연구의 분량이 상당히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수도원 토지에 거주하는 농민들로 인해 수도원들은 국가 정책의 복잡한 그물망에 점점 더 깊이 휘말리게 되었다. 논쟁 속에서 비재산주의자들은 수도원과 그 농민들 간의 관계 성격[507] 에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거주지가 있는 영지 그 자체에 반대했다. 이는 그러한 영지들 때문에 수도원들이 국가의 정치·경제 생활의 모든 우여곡절에 돌이킬 수 없이 휘말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수도원 경제의 성공적인 발전과 수도원의 부를 증진시키기 위해, 수도원 땅에서 농민들이 노동력으로 거주하는 것은 중요한 유리한 요인이었다. 수도원과 그 농민들 간의 상호 관계뿐만 아니라 농민들의 처지에도 주목해야 하는데, 이는 그 시대 수도 생활의 양상에서 새로운 특징을 발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16세기까지 농민들은 지주의 땅에서 자유로운 임차인으로서 살았으며, ‘포르야드나’라고 불리는 계약에 따라 — 16세기에는 대개 구두로, 17세기에는 서면으로 작성된 — 수확물의 일부를 지주에게 바쳤다. 이 외에도 수확량의 4분의 1에서 절반에 해당하는 지대 외에도, 농민들은 토지 소유주의 지시에 따라 일정한 노역을 수행해야 했다. 종종 ‘포르도르나’ 기록에서 지대를 현금이나 현물로 납부하거나, 수확량의 일부를 바치지 않고도 바르신 노역을 수행해야 한다는 조건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농민들은 토지에 부과된 국가 세금을 납부해야 했다. 임차인들에게는 지대 및 노역세에서 면제되는 기념년이 정해졌으며, 이 기간 동안 국가 세금 납부는 토지 소유주가 부담했다. 임대 계약서에는 임대 기간이 항상 명시된 것은 아니었으며, 일부 경우에는 10년으로 정해졌고, 이 기간이 만료되면 임차인은 지주에게 모든 채무를 완납한 경우 그의 영지에서 떠날 수 있었다. 17세기에 들어 임대 계약서에는 임차인에게 불리한 변경 사항이 도입되었는데, 이제 임차인은 토지를 떠날 권리를 상실하게 되었으며, 만약 그가 어쨌든 떠난다면 토지 소유자는 그를 다시 불러들일 권리를 얻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농민들이 경작하는 토지에 묶이게 되었으며, 이는 나중에 토지 소유자에게 묶이는 형태로 변모하여 농노제의 기초가 되었다[508] .

이 모든 것은 대략적으로 수도원 토지에 거주하던 농민들에게도 적용되지만, 여기서는 다양한 범주의 농민들과 관련된 몇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범주들은 수도원 토지 소유의 발전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수도원이 설립될 당시, 수도원은 하사장을 근거로 이미 농민들이 거주하고 있던 토지를 받았기 때문에, 이들은 이제 수도원 농민 또는 수도원 백성이 되었다. 그들은 수도원과 임대 계약서를 작성하고 지대를 납부했다. 16세기에는 이 농민들이 ‘스타로질체’라는 명칭으로 세무 장부에 등재되었으며, 이후 모든 수도원 문서에서 이 명칭으로 기록되었다. M. 디아코노프가 지적하듯이, 점차적으로 세무 장부에 등재된 이 범주의 농민들은 임대받은 토지를 떠날 권리를 상실하는 관행이 정착되었다. 수도원 당국은 도망친 스타로질체들을 추적하여 돌려보낼 권리를 얻었다[509] . 수도원들은 기증이나 매입을 통해 새로운 토지 소유권을 취득했는데, 이곳에도 농민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수도원 문서들은 이 농민들 역시 스타로질체들로 분류하고 있다. 이들에 대해서는 주로 이전 토지 소유주들과 체결했던 임대 계약이 그대로 유효하며, 수도원 당국은 단지 이러한 계약을 재확인할 뿐, 이 과정에서 농민들의 의무를 완화하는 몇 가지 변경 사항을 추가했는데, 주로 현물 세금과 수도원을 위한 강제 노동에 대한 완화 조치였다[510] .

두 번째 범주의 수도원 농민들은 이른바 ‘신입 농민’ 또는 ‘신규 정착민’으로 구성되었다. 첫째, 이들은 수도원 당국에 수도원 땅에 정착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한 농민들이었고, 둘째는 수도원 측에서 직접 자신의 땅으로 초대한 농민들이거나 한 영지에서 다른 영지로 이주시킨 농민들이었다. 검은 땅에 부과된 노동 부담은 종종 농민들로 하여금 자신의 마을을 떠나 흰 수도원 땅으로 이주하게 만들었는데, 그곳에서는 생계 정착을 위한 금전적 지원과 세금 면제[511] 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입 입주민들은 거의 항상 일정 기간(3년에서 5년, 드물게는 10년까지) 동안 지대 납부 의무가 면제되거나 지대 액수가 대폭 감면되었으며, 게다가 수도원으로부터 생계 정착을 위한 금전적 ‘지원금’을 받았다. 그들이 수도원과 체결한 계약서에는 임대 기간과 지원금, 수도원에 대한 노동 의무, 국가에 납부하는 세금 및 수도원에 납부하는 지대(현금 및 현물)와 관련된 조건이 매우 정확하게 명시되어 있었으며, 또한 수도원 당국이 모든 의무의 이행을 요구하고 이를 이행하지 않은 농민을 법적 절차에 따라 처벌할 수 있는 권리도 포함되어 있었다. 수도원에서는 보통 별도의 장부들을 관리했는데, 여기에는 모든 농민들의 의무가 매우 꼼꼼하게 기록되었으며, 이 장부들은 개별 수도원 농장의 역사와 수도원 농민들의 처지를 파악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장부에는 농민들의 모든 노역도 상세히 기록되었으며, 17세기에는 이러한 노역의 금전적 가치가 명시되기도 했는데, 이는 당시 모스크바 국가에서 화폐 관계의 발전과 관련하여 수도원 당국이 현물 세금을 화폐 세금으로 대체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금전 기반의 농경 운영으로 완전히 전환할 수 있었던 것은 금전적 지대, 소금 판매 및 무역 수익으로 구성된 자본을 보유한 부유한 수도원들뿐이었으며; 콩, 식물성 기름, 버터, 치즈, 꿀, 달걀, 버섯, 열매 등 다양한 농산물이 필요했던 소규모 수도원들은 대개 농민들에게 지대의 일정 부분을 현물로 수도원에 납부하도록 의무화했다[512] . 북부 포모리예 지역에서는 새로 정착한 사람들이 대개 ‘폴로브니키’로서 수도원 땅에 정착하여 경작지의 임대료로 수확량의 절반을 바쳤는데, 여러 문서에 따르면 이 범주의 임차인들은 이미 15세기에 키릴로-벨로제르스키 수도원의 땅 등에서 널리 퍼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폴로브니크들이 수도원에 지는 의무는 대개 수확량의 절반을 바치는 것으로 제한되었으며, 만약 그들에게 추가로 지대(оброк)를 내야 할 경우 그 금액은 미미했다[513] .

수도원 토지 소유에 있어 세 번째 범주인 소위 ‘보빌리’[514] 도 일정한 의미를 지녔다. 보빌리들은 수도원 토지를 임대하는 경우가 드물었으며, 오직 자신의 뜰을 위해만 토지를 배정받았는데, 이는 종종 떠난 농부나 도망친 농부의 뜰이었다; 그들은 수도원과 어떠한 계약서도 체결하지 않았고, 세금을 내지 않았으며, 극히 드문 경우로 자신들이 텃밭이나 아주 작은 밭을 소유하고 있을 때만 소액의 지대를 지불했다. 그들은 수도원을 위해 수행하는 노동으로 생계를 꾸렸는데, 어부, 장인, 재단사, 양봉가 등이 있었다. 각 수도원 영지마다 보빌 가구의 수는 달랐지만, 모든 수도원 영지에는 보빌 가구가 존재했다. 이들의 수는 많은 농가가 완전히 파산한 ‘혼란의 시대’ 이후 크게 증가했으며, 17세기 후반에 들어서야 비로소 보빌 가구의 수가 감소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수도원들에게 보빌은 가장 다양한 업무에 적합한 저렴한 노동력이었으며, 이는 다양한 회계 장부[515] 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영지의 증가와 수도원 경제의 성장은 점점 더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으나, 앞서 언급한 세 가지 범주의 농민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수도원들은 두 가지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첫째, 농민 수를 늘리는 것이고, 둘째, 수도원에 종속된 농민의 새로운 두 범주, 즉 수도원 하인(슬루제크)과 수도원 소년들을 창설하는 것이었다.

 

8. 수도원 영지와 농노제의 출현

수도원들이 자신의 토지에 새로운 농민을 유치하기 위한 활동은 16세기 후반과 17세기 전반 내내 진행되었다. 이는 신하들의 영지와 저택은 물론 국가 소유지에도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정부는 때때로 수도원들의 농민 유인 행위를 금지하거나 제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문제에 있어서도 국가의 정책은 일관성이 없었는데, 끊임없이 새로 발급되는 특전장이 특정 수도원에 대한 예외를 두거나 이미 발표된 명령에 허점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며, 이는 당연히 수도원 측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농민들이 수도원 소유지로 이동하는 것은 사적 또는 국유 영지에서 농민들이 떠나는 것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16~17세기에 시행된 정부의 조치들은 농민들의 이주를 전반적으로 제한하는 데 목적이 있었으며, 달리 말해, 농민들의 자유를 서서히, 점진적으로 제한하는 것이었으며, 이는 결국 농노제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광범위한 역사적 연구에 따르면, 농민들의 농노화는 모스크바 루스의 농업 상황과 관련된 다양한 정황이 복잡하게 얽힌 결과였으며; 본질적으로 이는 봉건적 권력욕의 산물이라기보다는 경제적 필요성의 결과였으며, 농노화의 첫 단계는 농민이 그 땅의 소유주가 아닌, 자신이 경작하고 거주하던 땅에 묶이는 것이었다. 수도원 경제의 거대한 규모는 16~17세기 수도원의 토지 소유가 이 과정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역할은 역사 연구에서 고려되고 있지만, 충분히 반영되지는 못하고 있다. 16세기 중반, 모든 토지 소유자들은 자신의 영지에서 땅을 경작하던 농민들을 붙잡아 두려고 애썼으며, 이 시기에 부유한 수도원들의 활발한 경제 활동은 농민들이 기존 거주지를 떠나 수도원 소유지로 몰려들게 한 주된 원인이 되었다[516] .

이미 15세기에는 — 아래에서 보듯이 — 수도원들이 농업에 종사하는 노동력을 자신들에게 묶어두고 그들의 이탈을 어렵게 하며, 농민들을 자신의 토지에 법적으로 결속시키려 노력했다. 이를 통해 향후 농민을 노예화한 입법의 전제 조건이 마련되었다.

이 글의 목적은 이러한 모든 문제들을 상세히 다루는 것이 아니므로, 수도원 토지 소유의 역사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몇 가지 현상만을 살펴보기로 한다.

지주 전반에 있어서, 특히 수도원 농장 운영에 있어서는 농민들의 외출을 제한하고 이에 대한 특정 기간을 정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리고 수도원 문서에서 우리는 그러한 기한이 정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1450년에 미하일 벨로제르스키 공작이 키릴로-벨로제르스키 수도원에 하사한 특권장문에는 농민들의 외출 허용일로 11월 26일(구력 기준) – 성 게오르기 기념일, ‘유르예프의 날’[517] 이 정해져 있다. 트로이체-세르기예프 수도원에 하사된 칙서 중 하나(1455–1462)에서는 일부 영지에서 농민을 아예 방출하지 않도록 허용하고 있다[518] . 1497년 법전은 11월 26일을 전국적으로 통일된 농민 이동 기한으로 정했으며, 농민들은 이 기한 8일 전부터 8일 후까지 새로운 땅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1550년 법전(제88조)은 이 규정을 재확인했다[519] . 이러한 규정들은 수도원들이 농민들을 자신들의 땅으로 끌어들이는 합법적인 기회를 제공했으며, 이 권리는 매우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스토글라프(1551) 역시 농민들에게 유리예프의 날을 자유롭게 떠날 수 있는 날로 남겨두었으나, 동시에 지주와 수도원들은 이 기한까지 농사에 종사하는 농민과 그렇지 않은 농민을 슬로보다의 빈 농가로 이주시킬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조항이 도입되었다[520] . 스토글라프는 체납금이 없는 농민만을 자신의 토지에 받아들이도록 명백히 규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수도원들은 이 규정을 회피했고, 정부는 수많은 청원서를 통해 이러한 남용에 대해 조치를 취해야만 하는 경우가 빈번했다[521] . 16세기 70~80년대의 경제 위기는 농민들이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대대적으로 이주하는 현상을 초래했으며, 이로 인해 농민들을 수도원 소유지로 유인할 기회가 늘어났다. 정부 또한 농민들이 한 소유주의 땅을 떠나 다른 소유주의 땅으로 옮겨가는 것을 매우 자주 허용했는데, 이로 인해 자신의 생활 조건에 불만을 품은 수많은 농민 계층과 이곳저곳을 떠도는 새로운 이주자들이 생겨났다. 게다가 16세기 80년대 초반, 전반적인 경제 쇠퇴로 인해 농민들의 이주를 유리예프의 날로 제한했던 1550년의 조치가 폐지되었으며; 이제부터는 농민들이 다른 날에도 토지를 떠날 수 있게 되었으며, 동시에 소위 ‘군주의 금지 기간’[522] 이 도입되었다.

끊임없이 이어진 농민들의 도피는 정부를 상대로 한 청원서의 홍수와 세속 지주들과 수도원들 사이, 그리고 수도원들 간의 법적 분쟁을 초래했다[523] . 1597년의 칙령[524] 에 따라 모든 지주(세속 및 종교인)에게는 5년 이내에 도망쳐 다른 영지에 정착한 농민들의 반환을 법원을 통해 요구할 권리가 부여되었다. 5년 이상 전에 도망친 농민들은 더 이상 원래의 장소로 돌아갈 의무가 없었으며, 새로운 지주 곁에 머물 수 있었다. 이처럼 이른바 ‘유로치네 레타’가 생겨났는데, 이는 1649년 법전 제정 이전 모스크바 공국 농민사의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수도원 토지 소유의 발전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1607년 3월 9일 칙령에 따라 우로치니 레타는 15년으로 연장되었다[525] . 스무타 직후 수도원들은 자신들에게 적용되는 우로치니 레타의 연장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정부에 제출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1614년 트로이체-세르기예프 수도원은 지난 9년 동안 자신의 영지에서 도망친 농민들을 되돌려 받을 권리를 얻었으며, 1615년에는 그 수도원의 ‘우로치니 레타’가 10년으로 연장되었다. 1619년에는 요시포-볼로콜람스키 수도원도 같은 특권을 얻었다[526] 이러한 특권은 군인 계층의 불만을 불러일으켰는데, 특히 예를 들어 트로이체-세르기예프 수도원이 10년의 유예 기간이 만료된 후에도 도망친 농민들을 되돌려받았기 때문이었으며, 그들은 이 특권을 폐지해 달라는 청원서를 정부에 제출했다. 그러나 1637년과 1642년의 칙령은 트로이체-세르기예프 수도원에 대한 10년의 노역 기간을 재확인했다[527] . 봉신들의 청원서가 이후의 입법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1646년, 인구 조사 장부의 도입과 관련하여 조사원들에게 내려진 지침에는 이 장부에 등재된 농민과 그들의 자녀들이 어떠한 유로치 기간도 없이 토지에 “영구히 정착할 것”이라고 명시되었다. 2년 후, 유로치니예는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으며, 1649년 법전(제9장, § 3; 제15장, § 3)을 통해 농민을 토지와 지주에게, 지주를 농민에게 결속시키는 제도가 최종적으로 확립되었다. 1646년 인구 조사 장부가 농민을 토지에 결속시키는 근거가 되었다는 사실은 수도원의 경제적 이익에 전적으로 부합하는 것이었으며, 이로써 수도원 토지에 위치한 농민 가옥들은 수도원의 소유로 남게 되었고, 이는 1649년 법전으로 공식적으로 확인되었다.

 

9. “수도원 하인”과 “수도원 자식들”

다양한 성격의 정부 명령(사적 및 공적)과 공의회 판결들은 수도원 소유지의 확대를 제한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보기에 그러한 목적을 전혀 두지도 않았으므로, 차르의 칙령과 1497년 및 1550년의 법전 농민들이 수도원 토지로 끊임없이 유입되는 데 실질적인 장애물이 되지 못했다. 이를 가장 명확히 입증하는 것은 앞서 언급한 17세기 마지막 25년 동안 이 토지에 거주하던 농민 가구의 수에 관한 자료이다. 수도원 당국은 특별한 특허장을 확보하면 이러한 규정들을 언제나 우회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개별적인 경우에는 모스크바에 있는 수도원 대표들의 교묘한 정책 덕분에 이러한 규정들을 수도원에 유리하게 전환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또한 그들은 정부가 스스로 끊임없이 법적 규정을 위반하며 토지를 계속 분배하고 있는 모습도 목격했다. 수도원들은 자신들의 토지로 유입되는 농민 수가 줄어들 것을 우려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노동력을 확보하려고 노력했다. 그 원인 중 하나는 앞서 언급된 상황, 즉 수도원들이 새로운 농업 경영 체계로 점차 전환하고 자체 경작지의 규모를 확대해 나갔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수도원 소유지가 확대됨에 따라 개별 수도원에서는 새로운 농업 분야가 생겨나거나 기존 분야가 확장되었고, 수도원들은 수도원 농민들보다 수도원과 더 밀접하게 연결된 노동력을 이러한 분야에서 활용하는 것이 더 편리했다. 이것이 바로 좁은 의미에서 본 세 가지 그룹의 수도원 사람들이 비교적 널리 퍼지게 된 이유이다: 1) 수도원 하인, 또는 하녀, 2) 수도원 양육 아동, 3) 장인[528] .

수도원 하인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수도원과 수도원 농장에서 활용되어 왔다[529] . 그들은 수도원에서 다양한 종류의 일을 수행했으며, 마부, 목동, 경비원, 어부, 벌꿀 채취자, 장인 등으로 활동했다. 수도원 부지가 확장되고 새로운 별관, 건물, 마구간, 곡물 창고 등이 지어짐에 따라 수도원 하인의 수도 늘어났다. 그들은 수도원으로부터 주거지, 의복, 식량을 제공받았으며, 부분적으로는 금전적 보상도 받았는데, 이는 대개 성탄절, 부활절, 삼위일체절, 또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들의 날에 선물 형태로 주어졌다. 이 집단은 이미 자신의 토지 를 경작할 수 없거나 경작하기를 원치 않는 빈곤해진 농민들, 슬로보자(슬로보자), 전쟁 장애인 등으로 구성되었다. 17세기에는 수도원 종업원들이 대개 수도원과 구두 계약이나 서면 계약서[530] 를 체결했다.

‘데테니시’는 수도원 토지에 거주하던 사람들 중 가장 흥미로운 범주 중 하나이다. 이 범주가 수도원 문서에 자주 언급되기는 하지만, 명확하게 규정된 경계는 없었다. 역사 문헌에는 이 집단에 대한 뚜렷한 특징이 없으며, 그 기원과 형성 과정도 추적되지 않았다[531] . 이러한 불명확성은 ‘데테니시’에 관한 문서들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문서에서는 그들이 수도원 하인들과 같은 범주에 속하여, 하인들과 마찬가지로 수도원을 위해 동일한 일을 수행한다고 언급되는 반면, 또 다른 문서에서는 ‘데테니시’가 땅을 일구는 농민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그들은 수도원 담장 안에서도, 수도원 슬로보다에서도 살았으며, 때로는 수도원 마을에 자신들만의 마당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또한 장인으로 일하기도 했는데, 17세기 후반에는 수도원 경제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활동했다고 할 수 있다[532] . 문헌에는 16세기 중반부터 수도원 출신의 젊은이들이 언급되어 있다[533] . 이들의 출현과 수의 증가는 수도원 소유 농지의 규모 확대와 관련이 있다[534] . 한편으로는 이들은 성인, 즉 빈곤해진 농민과 소작농들이었으며, 수도원 밭을 경작하고, 풀을 깎으며, 어부로 일했다. 수도원으로부터의 금전적 지원 덕분에 그들은 자신만의 농가를 마련하거나, 도망치거나 빚을 진 농민들이 버려둔 황폐한 농가를 얻기도 했다. 수도사들과 마찬가지로, 데테니시들은 세금과 부역에서 면제되었으며[535] , 수도원에 대한 의무를 노동으로 이행했다. 반면, 대부분의 아이들(특히 17세기)은 고아나 수도원 농민 및 소작농의 자녀들이었다. 예를 들어, 1636년 솔로베츠키 수도원에는 본격적인 고아원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약 300명의 아이들이 거주하며 텃밭이나 수도원 부엌 등에서 가벼운 수도원 일을 수행하고 있었다. – 이로 인해 차르는 수도원 원장에게 특별 서신을 보내, 무질서를 방지하기 위해 고아들을 엄격히 감독할 것과, 이 아이들을 위해 수도원 담장 밖[536] 에 별도의 집을 지을 것을 요구했다. 농민들, 특히 보빌들은 기꺼이 자신의 아들들을 수도원에 보냈다. 처음에는 솔로베츠키 수도원처럼 가벼운 일을 했으나, 나중에는 농민 소녀들과 결혼하여 자신들의 가정을 꾸리고 수도원 밭에서 일하기도 했지만, 전통과 재정적 고려로 인해 수도원 문서상에서는 여전히 수도원의 ‘아이들’로 등록되어 있었다. 17세기에는 이미 수도원과 성년 ‘데테니시’들 간의 계약서(이 경우 보통 ‘포르야나’가 아닌 ‘질레츠카’ 기록이라 불렸다)가 발견되는데, 계약서에는 당사자들의 상호 의무가 열거되어 있었다[537] . 17세기 기록부에는 수도원에 종속된 이 집단과 수녀들의 저택에 관한 많은 정보가 담겨 있다[538] .

수도원들은 끊임없이 각종 수공예품을 필요로 했으며, 당시의 자연경제 체제 하에서는 이를 직접 제작해야만 했다. 이것이 바로 수도원이나 인근 수도원 마을에 수많은 장인들이 거주하며 수도원을 위해 일했던 이유이다. 이들은 목수, 석공, 가구장인, 통장인, 대장장이, 구두장인, 재단사, 안장장인 등 다양한 장인들로, 수도원을 위해, 그리고 종종 수도원 소속 농민들을 위해 농기구, 쟁기, 보리, 삽 등을 제작했으며; 재봉사들과 구두장인들은 수도사, 수도원 하인, 그리고 수도원 아이들을 위한 옷과 신발을 만들었습니다.

요시포프 수도원에는 100명 이상의 이러한 장인들이 있었으며, 그중 37명은 어린 장인들이었다[539] . 1628–1629년 야로슬라블의 스파스스키 수도원에는 27채의 가옥이 속해 있었는데, 그곳에서 27명의 장인들이 거주하며 수도원을 위해 일했다. 슬로보다에는 194채의 가구가 있었는데, 이곳에도 역시 수도원 장인들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그중 25명은 어린 장인들이었다. 이들은 수도원과 그 영지에 필요한 거의 모든 물품을 제작했다[540] . 랴잔 현에 위치한 솔로치나 수도원은 자체 장인들의 손으로 수도원 자체에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을 제작했으며, 일부 제품은 심지어 판매되기도 했다[541] . 스몰렌스크 지방에 위치한 도로고부즈의 볼딘 수도원의 회계 장부는 수도원 장인들의 노동이 가지는 중요성, 수도원의 재정 운영, 그리고 장인들에 대한 임금 지급에 대해 판단할 수 있는 풍부한 자료를 제공한다. 그들은 노동에 대한 금전적 보수뿐만 아니라, 장려 차원에서 성탄절과 부활절에 보통 현금으로 지급되는 선물도 받았다[542] .

특정 재봉사들은 사제 예복을 제작했고, 금은 세공 장인들은 예배용 그릇을 만들었으며, 항상 자체 양봉장을 보유한 대규모 수도원에서는 양초를 제작했다.

임용 노동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예를 들어 솔로베츠키 수도원의 광대한 농장에서는 수도원 문서에 따르면 1621년에 700명의 임용 노동자가 일했으며, 이들은 수도원으로부터 주거지, 의복, 그리고 돈을 제공받았다. 그들은 어업, 소금 제조소, 소금 운반 등 다양한 경제 활동에 종사했다[543] .

 

10. 수도원 무역

수도원 소유지의 지속적인 확대와 수도원 경제의 발전으로 인해, 수도원들은 종종 수도원의 필요량을 초과하는 다양한 종류의 제품을 대량으로 보유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무역에 종사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수도원들은 수도자들을 위해 다양한 식료품과 상품이 필요했다. 가장 먼저이자 가장 중요한 무역 품목은 밀이었다. 어떤 수도원은 밀이 넘쳐났지만, 다른 수도원은 반대로 수도자들을 위해 밀을 사들여야만 했다. 수도원들은 주로 고인의 명복을 빌기 위한 금전적 기부금으로 이루어진 상당한 자본을 종종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자본을 무역 목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작고 가난한 수도원들은 필요한 식량을 구입하기 위해 자급 농산물 중 일부를 팔아야만 했다. 극북 지역의 페첸그 트로이츠키 수도원 수도사들은 이반 4세 차르에게 올린 청원서에서, 혹독한 기후와 불모의 땅 탓에 농사를 지을 수 없으며, “그 수도원에서는…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고 소금을 솟아내어, 그 소금을 운반해 팔고… 그 소금을 볼로그다와 볼로그다 주에서 팔아 얻은 돈으로… 수도원 생활에 필요한 온갖 비품을 구입한다: 호밀, 밀가루, 보리, 귀리, 옥수수 가루, 곡물, 버터, 모직물, 신발, 그리고 수도원의 온갖 비축품”[544] . 남부의 비옥한 우예즈드에 위치한 수도원들도, 자체 농경으로 자체 수요를 완전히 충족시킬 수 없는 경우 구매에 의존했다[545] . 무역을 수행하기 위해 많은 수도원들은 17세기에 주요 무역 중심지가 된 볼로그다에 자체 상점과 분점을 세웠으며, 특별히 지정된 수도사나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이 그곳에서 매매를 담당했다. 예를 들어, 1626년 볼로그다에는 적어도 36곳의 수도원 상점과 창고가 있었다[546] .

수도원과 모스크바 루스의 전체 경제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무역 품목은 소금이었는데, 주로 금식 기간 동안의 주된 식량인 생선을 염장하는 데 사용되었다. 당시 금식 기간은 수도원뿐만 아니라 모든 러시아인들이 엄격히 지켰다. 그 다음으로 수도원 무역 품목 목록에는 생선, 꿀, 밀랍이 이어진다. 부유한 키릴로-벨로제르스키 수도원은 자체 농지에서 충분한 양의 곡물을 재배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곡물을 구입하는 한편, 자체 소금 공장에서 생산한 소금을 판매하여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또한 수도사들과 수도원 하인들을 위한 기타 식료품, 수공예품, 농산물, 의복 및 신발도 구매했다[547] .

자볼지예와 포모리예 지역의 수도원들은 특히 활발하게 무역에 종사했다. 그들은 수많은 소금 광산과 소금 정제소, 어장, 양봉장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이곳에서 생산된 물품들은 모스크바 시장에서 빠르게 팔려 나갔다. 반면, 수도원들 스스로도 식량과 수공예품이 필요했다. 볼가강과 카마강에서 어장을 소유한 포니조비예 지역의 수도원들은 캐비어와 수요가 많았던 흰살생선—스터리야, 벨루가, 철갑상어[548] —를 거래했다.

우리는 이미 몇몇 부유한 수도원의 경제 활동을 살펴보았는데, 이제 백해에 위치한 유명한 솔로베츠키 수도원의 경제 활동에 주목해 보자. 이 수도원은 빠르게 극북 지역의 최대 무역 거점으로 변모했으며, 무역을 통해 모스크바 공국의 가장 부유한 수도원 중 하나가 되었다.

솔로베츠키 수도원은 1429–1436년에 두 명의 수행자, 즉 게르만과 사바티우스 성인이 황량한 북부 섬에서 세속을 벗어나고자 하며 설립했으며; 성 조시마(1452–1478)의 수도원장 재임 기간에 수도원은 크게 성장했으며, 수도원의 경제 활동은 미래의 모스크바 대주교가 될 필리프 (1548–1566) 수장 시절에 전성기를 맞이했는데, 그는 훗날 모스크바 대주교가 된 인물로, 비범한 재능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차르 이반 4세와의 논쟁[549] 에서 드러나듯, 교회의 이익을 옹호하는 데 있어 원칙을 고수하는 성직 계급의 뛰어난 대표자였다. 이미 15세기 후반, 이 수도원은 벨리이 노브고로드로부터 하사받은 소송 면제 특권 문서에 근거하여 벨로모르 해안의 광대한 토지와 어장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소유권은 이후 대공들의 칙령을 통해 수도원에 확정되고 확대되었다. 1555년에는 수姆斯키 우예즈드에서만 수도원이 33개의 소금 광산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이후 새로운 광산들을 매입했다[550] . 이를 통해 수도원은 모스크바 제국 전역에서 소금 무역을 할 수 있게 되었다. 16세기 중반, 솔로베츠키 수도원은 6,000푸드의 소금을 판매했으며; 한 세기 후, 수도원의 소금 제련소에서는 이미 130,000 푸드의 소금을 생산했으며, 이 소금은 수도원 소유의 선박을 통해 드비나 강과 수호네 강을 따라 볼로그다로 운반되어 그곳에서 판매되었다. 이 무역을 통해 수도원은 매년 국가에 658 루블의 관세를 납부했다. 17세기 중반 수도원이 납부한 모든 세금의 총액은 4,000루블에 달했다. 수도원의 소금 제염장, 어업 및 선박 운항에는 700명의 노동자가 고용되어 있었으며, 이들은 수도원으로부터 급여, 의복 및 식량을 제공받았다; 이 숫자는 수도원의 경제 활동 규모를 잘 보여준다[551] . 진취적인 원장들은 17세기 후반 백해와 북부 강에서 활동하는 자신들의 상선단을 위해 밧줄 공장까지 세웠다[552] .

수도원들은 산업 기업도 설립했는데, 브랸스크 근처에 위치한 스벤스키 수도원이 대표적인 예로, 이곳에는 자체 제철로가 있었다[553] .

앞서 언급했듯이, 수도원의 상업 활동에 있어 기증금과 영혼을 기리기 위한 기부금으로 구성된 자본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554] . 또한 16세기 중반, 차르 이반 4세의 오프리치나 시대에는 많은 보야르와 신하들이 약탈이나 몰수를 두려워하여 자신의 돈, 금, 보석류를 수도원에 맡겨 두곤 했다[555] . 예치 장부에는 동산인 돈, 금, 장신구, 식량, 가축, 말뿐만 아니라 성화 및 예배서, 의복 등[556] 과 부동산인 토지와 마을도 언급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기증 계약서에는 기증자가 생애 마지막까지 자신의 재산—토지나 영지—를 계속 사용할 수 있다는 조건이 명시되었는데, 파블로프-실반스키의 견해에 따르면 이는 서유럽 중세의 프레카리움(praecaria oblata)과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557] . 기증자는 자신의 영지를 수도원에 완전한 소유권으로 양도하고, 수도원으로부터 이를 다시 돌려받지만, 더 이상 소유권이 아닌 수도원의 하사물로서 사용권을 부여받는다. 기증 기록에는 종종 다음과 같은 문구가 등장한다. “하나님께서 제 생명을 연장해 주시는 동안, 대수도원장님께서 저를 그곳에서 쫓아내지 않도록 하소서.” 16세기 90년대에 정부는 기증된 재산에 대한 종신 사용권의 합법성을 인정했다. 안타깝게도 기증 기록과 유언장만으로는 기증자나 유언자가 살아 있는 동안 수도원이 기증 재산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파악하기 어려우며, 이러한 사용은 수십 년 동안 지속되기도 했다[558] . 유언으로 남겨진 부동산이 수도원에 편리한 위치에 있지는 않았거나 경영상 불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수도원들은 종종 그러한 기증 재산을 더 적합한 영지로 매각하거나 교환했으며, 이는 항상 수도원 측에 이익이 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559] .

이러한 거래들은 수도원들이 토지를 담보로 받는 관행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는데, 이는 수도원들이 항상 막대한 자금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토지 소유주들과는 달리, 수도원들의 경제 활동은 군주에게 봉사하는 일로 인해 큰 손해를 입지 않았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다른 토지 소유주들은 군사 장비에 많은 자금을 지출했고, 군사 원정에 참여한 토지 소유주가 부재함에 따라 그들의 영지와 저택은 피해를 입어 대개 방치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수도원 농장은 항상 세심한 감독을 받았다. 궁핍함으로 인해 군인들은 군사 장비 구입이나 영지 정비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돈을 빌려야만 했다. 이로 인해 수도원에 영지를 담보로 맡기거나 수도원으로부터 이자를 내고 돈을 빌리는 사례가 빈번했다. 전 세계 공의회 규범에 위배되는 이러한 무질서는 러시아 성직자들의 생활에 깊이 뿌리내렸으며, 스토글라비 공의회와 알렉세이 차르의 법전이 성직자들의 이자 징수를 엄격히 금지했음에도 불구하고 16세기와 17세기에도 계속 유지되었다[560] . 돈을 빌려줄 때, 수도원은 토지나 주택을 담보로 받았으며, 이때 담보 기록이 작성되었고, 대출 기간이 만료되면 이는 매매 증서로 대체되었다. 이에 따라 이자 대신 특정 재산(동산 또는 부동산)이 수도원의 소유로 넘어갔다.[561] 유언, 증서 및 저당 기록에 따라 취득한 재산은 종종 수도원 당국에 의해 매각되거나 교환되었으며, 이때는 항상 수도원에 이익이 되는 조건으로 이루어졌다. 수도원은 국고와 재산을 교환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는데, 이는 군주의 뜻에 따라, 혹은 수도원의 청원에 따라 이루어졌다[562] .

이러한 모든 거래는 수도원의 부를 증대시켰고, 수도사들이 수도원 벽 밖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도록 강요했으며, 결국 수도원 규율에 해로운 영향을 미쳤다.

 

11. 수도원 소유지의 관리와 국가에 대한 수도원의 의무

수많은 광대한 수도원 소유지에서 발생하는 수입을 늘리기 위해서는 — 거의 모든 수도원장이 이를 염두에 두었듯이 — 대규모의 관리 인력이 필요했다. 이들은 두 가지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하나는 수도원에 물질적 손실이 발생하지 않도록 철저히 감시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수도원이 국가에 불필요한 것을 넘겨주지 않도록, 실수로 인해 국가 당국이 특권장에 규정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할 빌미를 제공하지 않도록 더욱 철저히 감시하는 것이었다.

수도원장은 수도원의 영적 및 경제적 관리 모두를 총괄했다. 취임 시 수도원장은 매우 상세한 인계 목록, 즉 ‘대재정 목록’에 따라 수도원 재산을 인수했다. 여기에는 수도원에 속한 현금, 예배 용기 목록이 포함된 교회 기구, 성화, 각종 동산, 문서 등이 기재되었으며, 그중에는 수도원과 농민 간의 모든 계약서, 매매 증서 및 저당권 기록 등이 포함되었다.[563] 수도원 운영과 관련된 모든 업무에서 수도원장(이구멘)을 보좌한 사람은 재무관이었으며, 그의 직접적인 의무는 수도원 경작지를 관리하는 것이었다.

수도원 경제는 연로한 수도사들이나 수도원이 신뢰하는 사람들이 관리했다. 보통 수도원 공동체에 의해 선출되거나 때로는 원장에게 임명되던 이 수도사들은 수도원 문서에서 ‘소보르 장로들’로 불렸다[564] . 그들은 ‘마을 장로’로서 수도원 소유지나 마을로 파견되어 그곳에서 수도원의 권위를 대표했다. 수도원 내에서는 가장 다양한 봉사를 수행했는데, 마구간과 마부들은 마구간 장로가, 식당에서는 식당 장로가 감독했다.

점차, 특히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이들은 평신도 출신의 봉사자들인 ‘벨츠’로 대체되는 경우가 점점 더 많아졌다. 이들은 수도원 소속 사람들이었다. 이 수도원 사람들, 혹은 수도원 하인들을 앞서 언급한 수도원 하인들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주로 관리 업무에 종사하던 이 하인들은 대부분 가난해진 보야르 및 귀족 가문 출신이었으며, 문서에서는 종종 ‘수도원 보야르 자제들’로 불렸다. 종종 이러한 보야르의 아들은 빚에 시달리던 자신의 영지를 수도원에 기증하거나 영혼의 안식을 기원하며 기부하고, 자신은 수도원 슬로보다에 정착하여 수도원 영지와 마을에서 마을 관리인이나 관리 담당자로서 수도원을 섬기며 생계를 꾸렸다. 대규모 수도원에서는 이러한 ‘수도원 사람들’ 또는 ‘수도원 하인’의 수가 매우 많았다. 수도원 슬로보다에서 그들은 자신들만의 고정된 주거지를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일 년 내내 먼 마을과 영지로 파견되어 다양한 행정 업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트로이체-세르기예프 수도원에는 이미 15세기 20년대에 ‘사무 슬로보다’가 있었는데, 이곳은 점차 세르기예프 포사드로 발전했다. 1594년 수도원에는 159명의 수도원 종사자가 있었는데, 그중 43명은 행정 업무를 담당했고, 116명은 수도원 기마 연대를 구성했다. 스무타 시기, 폴란드군이 수도원을 포위했을 때 그들은 수도원 성벽 위에서 성공적으로 싸웠다; 1692년에는 슬로보다에 이미 160가구가 있었으며, 1651년에는 수도원에 371명의 기마 전사가 있었다. 1646년의 세무 장부에는 217명의 기마 전사가 기록되어 있으며, 그중 60명은 보야르 및 귀족 출신이었다; 1677년 기록부에는 수도원 하인들의 가구가 242가구로 기록되어 있다. 1651년 알렉세이 차르는 이 수도원에서 기마 전사 230명을 징집하여 원정에 나갔다. 수도원 종사자들 중에는 사제의 아들들과 상인들도 있었으나, 농민들만은 없었으며, 이들은 다른 그룹의 수도원 종사자나 ‘데테니샤([565] )’로 분류되었다. 사제의 아들들은 수도원 사무실에서 서기(디아크)나 서기 보조로 일했으며, 수도원 요리사 역할도 맡았다. 이들은 모든 대형 수도원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은 모스크바에 주재하는 수도원의 공식 대표자들로, 수도원 별장에서 거주하며 수도원을 대신해 궁정 행정국(Дворцовый приказ)과, 나중에는 수도원 행정국(Монастырский приказ)과 다양한 사안에 대해 소통했다. 이들은 매우 활동적이고 유능한 인물들로, 지역 사정에 대한 지식과 모스크바에서 복잡하게 얽힌 관청 업무에 대한 해박함 덕분에 수도원에게 있어 거의 대체 불가능한 존재였다. 그들의 영향력은 매우 컸으며, 수도원장들은 항상 그들의 희망과 요구를 수용했다[566] .

대규모 수도원의 영지 관리가 얼마나 복잡한 일이었는지는, 예를 들어 18세기 초 트로이체-세르기예프 수도원에 60개의 프리카즈가 있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요시포-볼로콜람스키 수도원은 자신의 토지 소유권을 다섯 개의 프리카즈로 분배했는데, 각 프리카즈의 수장은 포셀스키 스타르츠들이 맡고 있었다[567] . 영지와 마을에는 수도원의 분원이 있었으며, 그곳에는 마을 장로들이 거주했다. 이곳은 행정 사무소로, 농민 대표들이 수도원 당국과 문제를 해결하고, 현금 및 현물 조세를 납부하며, 마을 장로들이 면소 특권에 근거하여 농민들을 재판하던 곳이었다[568] .

특허장과, 주로 ‘면소장’은 수도원 영지에 거주하던 농민들에 대한 수도원과 그 원장의 권력에 대한 법적 근거를 이루었다. 대궁전 명령부(1649–1677년) 수도원 관리국 –은 수도원 소유지와 관련된 재정 및 사법 문제를 관장하던 정부 기관이었다[569] . 앞서 제6장에서 대궁전 관리국에 대해 이미 설명한 바 있으며, 여기서는 수도원 소유지의 내부 관리와 관련된 측면에서만 간략히 다루겠다.

특허장은 수도원에 재정적 권리를 부여했으나, 수도원 토지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의무 범위와 규모를 규정하지는 않았으며, 이는 수도원 당국 자체의 사안이었다. 수도원과 그 토지에 거주하는 주민들 간의 수많은 계약서를 통해 볼 때, 이러한 의무의 규모는 수도원마다, 심지어 같은 수도원의 서로 다른 영지마다 달랐음이 드러난다. 수도원은 자신의 대표자인 마을 장로나 관리인을 통해 노역의 이행과 금전 및 현물 조세의 적시 납부를 감독했다. 지역적 여건이나 자연재해—서리, 가뭄, 홍수 등—는 조세 규모를 감면할 근거가 될 수 있었으며, 이는 수도원의 재량에 달려 있었다. 정부와 수도원은 농민들이 조세 납부를 회피하는 것을 막아 “납세 의무자들이 납세 의무를 회피하지 못하게” 하는, 동일한 목표를 추구했다. 대궁(Большой дворец) 관청은 세무 장부를 관리했으며, 이후 수도원 관청(Монастырский приказ) 시대에는 인구 조사 장부가 동일한 역할을 수행했다; 정부에게 있어 이 장부들은 세금을 배분하는 데 있어 법적 근거가 되었다.

수도원이 국가에 납부하던 세금은 기록부에 명시된 소하(소하 – 경작지의 면적을 나타내는 단위)의 양에 따라 결정되었으며, 극히 드문 예외를 제외하고 수도원 소유지에서는 소하가 600 체베르를 차지했다. 각 수도원에서 징수된 세금의 규모는 제각각이었다. 1557~58년에 페스노슈스키 수도원(모스크바 인근)에 발급된 특전장에 따르면, 소하당 1루블의 세금이 정해졌다. 반면, 예를 들어 솔로치ンス키 수도원은 17세기 마지막 4분기에 소하당 3.27루블을 납부했다[570]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679년에는 1676–1678년의 새로운 인구 조사 장부를 바탕으로 소하당 세금이 부지별 과세로 대체되었다. 한편, 수도원 소유지에 대한 부지별 과세는 이미 1623–1630년에 도입된 바 있다. 이는 1630년 5월 19일 칙령으로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다. 흥미롭게도 국가에는 유리하지만 수도원 경제에는 부담이 되는 이 조치가 이미 필라레트 총대주교 재임 시절에 시행되었다. 1630년 5월 19일 소위 ‘거주 구역’에 관한 칙령에 따라 세금은 토지 면적이 아니라 수도원 소유지에 위치한 가구의 수에 따라 부과되었는데, 즉 농업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들, 예를 들어 소작인이나 장인들의 가구도 포함되었다. 이 새로운 관행이 수도원들에게 매우 불리했다는 것은 분명하다[571] . 그러나 17세기에는 재정 문제에서 정부가 16세기보다 더 단호하게 대응했는데, 16세기에는 특별 타르한 칙령을 통해 트로이체-세르기예프 수도원이나 이오시포-볼로콜람스키 수도원 같은 일부 수도원은 모든 과세에서 면제되었고, 다른 수도원들은 일정 기간 동안 특정 종류의 세금만 면제받았었다. 1649년의 법전(울로젬)에 의해 이러한 특권은 완전히 폐지되었다.

토지세 외에도 수도원들은 국가에 다른 의무를 지고 있었다. 이러한 의무와 관련하여, 수도원들에 특권 증서를 발급해 주던 국가는 예로부터 주로 군사 복무 및 감옥 관리 업무와 관련된 특정 의무를 그들에게 부과하려는 경향을 보여왔다. 이미 15세기의 특권장서에는 세금이 면제된 수도원이 요새 건설에 금전적·물적 지원을 제공해야 한다는 조건이 포함되어 있었다[572] . S. 로즈데스트벤스키가 밝힌 바와 같이, 16세기의 특권장서는 항상 수도원이 국가적·군사적 성격의 활동에 참여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기존의 특권장을 재승인할 때, 과거의 특권 중 일부는 종종 폐지되곤 했다[573] . 1584년 칙령에 따른 타르한 제도의 폐지는 국방상의 필요성에 근거했다. 정부는 부유한 수도원들에게 소규모 군 부대를 유지하거나 요새 건설에 참여하도록 의무화했다. 예를 들어, 솔로베츠키 수도원은 100명의 스트렐츠를 유지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백해 연안에 요새를 건설했으며, 그 대가로 스웨덴과의 전쟁이 끝난 후 소포슈나야 오클라드(포세슈나야 세금)에서 면제되었다. 트로이체-세르기예프 수도원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군사 복무를 위해 기마 전사 부대를 파견해야 했다. 남쪽 카시라 시 근처에 위치한 벨로페소츠키 수도원은 강력한 석조 성벽을 쌓았으며, 그 위에는 수도원 수련생들이 관리하는 대포가 배치되어 있었다. 포니조비에 지역 테튜시 시에 있는 트로이츠키 수도원은 요새화된 방어선인 ‘자세크나야 체르타’에서 순찰 임무를 수행했다. 코스트롬의 이파티예프스키 수도원[574] 도 웅장한 석조 성벽과 수도원 신도들로 구성된 군사 부대를 갖추고 있었다. S. 로즈데스트벤스키는 “16세기 후반, 수도원 소유지는 영지나 지방 영지보다 더 무거운 세금을 부과받았다”고 기록했으나, 특권 증서를 통해 다양한 특권을 부여받기도 했다[575] . ‘스무타’(1605–1613) 기간 동안 많은 수도원은 견고한 성벽 덕분에 방어적 중요성을 갖게 되었으며, 모스크바 국가의 군대에 의해 폴란드 부대[576] 와의 전투에 활용되었다; 이처럼 16세기에 시행된 조치들은 그 효과를 충분히 입증했다. 특히 트로이체-세르기예프 수도원의 포위전은 유명하다. 수도원을 포위했던 폴란드 군대는 큰 손실을 입었고, 수도원의 전사들—수도원 종사자들, 수도사들, 인근 마을 주민들[577] —에 의해 격퇴되었다. 스무타 시기에는 국가가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수도원의 자본과 곡물 비축량도 활용했다[578] . 17세기에도 정부는 군사적 목적으로 수도원의 자금과 곡물 비축량을 자주 활용했으며, 수도원들은 군대 유지비를 위한 일회성 징수에서도 면제되지 않았다[579] . 따라서 군사적 목적으로 수도원 자금을 사용한 표트르 대제의 조치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비판적 지적이나 동시대인들의 불평은 근거가 없다. 표트르는 단지 모스크바 정부의 기존 정책을 이어갔을 뿐이며, 1696년에 그가 수도원의 회계 장부를 대궁전 관리국에 제출하도록 명령하고, 수도원들이 자신의 허가 없이는 어떠한 지출도 하지 못하도록 금지했을 때, 이 조치에는 수도원들에게 새로운 점이 전혀 없었다. 이전에도 수도원 관리국이 수도원 회계를 점검하곤 했으나, 이제 국가가 취한 어조가 더욱 날카로워졌기 때문이다[580] .

전국적인 의무에는 소위 ‘얌스키 돈’도 포함되었는데, 그 지불 의무는 15~17세기의 특권 증서에 따라 모든 수도원에 부과되었다[581] . 포로 구출을 위한 자금 모금도 마찬가지였다. 포로 구출금은 수도원은 물론 모든 교회 기관이 납부해야 했으며, 『스토글라프』는 이 의무도 재확인했다[582] .

 

12. 수도원 소유지에 대한 관할권

이제 우리는 수도원 토지에 거주하던 사람들의 관할권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법적으로 수도원과 수도사들이 교회 및 국가와 맺은 관계는 다음과 같았다: 수도사들은 교회법상 성직자로서 대주교와 교구 주교들의 관할을 받았고, 수도원들은 토지 소유자로서 국가, 즉 대공들, 그리고 나중에는 차르들의 관할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은 교회 계층으로부터 이의를 제기받지 않았으며, 이 관할권에 대해 요시프 볼로츠키도, 스토글라브[583] 에 참석한 주교들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상 수도원과 교구 주교들 간의 법적 관계, 그리고 수도원과 국가 간의 법적 관계는 대공이나 차르가 발급한 ‘면소 특권장’에 의해 결정되었다. 내용 면에서 이 특권장들은 서로 달랐다: 일부는 수도원을 교구 주교의 관할권에서 완전히 면제해 주었고, 다른 일부는 순수하게 교회적인 문제를 제외한 모든 사안에 대해 관할권을 면제해 주었다. 교회 계층은 당연히 첫 번째 유형의 ‘면소 칙서’에 반대했는데, 이는 교회 규범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국가가 종교 재판에 개입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스토글라프는 이러한 면소 특권을 더 이상 발급하지 않도록 결정했다. 그러나 이 결정은 곧 잊혀졌고, 이반 4세 차르는 여전히 그러한 특권을 발급했다[584] .

수도원 거주자와 수도원 토지에 대한 사법권을 수도원장에게 이양하는 ‘면소 칙서’에서는 세 가지 유형의 사건을 구분하고 있다: 1) 형사 사건 – 현장에서 적발된 살인, 강도, 절도 등은 일반 국가 법전에 근거하여 국가 당국의 재판을 받아야 했다; 2) 그 밖의 형사 사건과 수도원 농민들 간의 분쟁은 수도원장이나 그의 대리인이 심리했다; 3) 분쟁 당사자들이 서로 다른 관할권에 속할 경우, 수도원장의 대리인이나 수도원장 본인과 국가 관리가 참여하는 ‘혼합 재판소’가 설치되었다. 일반적으로 사법 활동은 수도원장 본인이 직접 수행하지 않았는데, 수도원 소유지의 광활함을 고려할 때 이는 그에게 불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권한을 마을 재판관들에게 위임했으며, 이들은 농민 대표 몇 명(3~5명)이 입회한 가운데 재판을 진행하고 판결을 내렸다. 농민들은 부당한 판결에 대해 수도원장 본인에게 직접 항소할 권리가 있었다[585] .

수도원 간 또는 수도원과 세속 지주 간의 분쟁, 예를 들어 영지 경계, 도망친 농민 등과 관련된 다양한 쟁점들은 대궁(大宮) 관청의 재판에 회부되었으며, 1646년 이후에는 수도원 관청[586] 의 재판에 회부되었다. 수도원 소유지가 이러한 세속 기관에 사법적으로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은 성직자들에게 달갑지 않았는데, 세속 당국이 교회 계층이 자신들의 관할권이 아니라고 확신한 문제들에 수시로 개입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많은 수도원(주로 앞서 언급된 ‘검은 수도원’들)은 오히려 세속 기구들에 대한 이러한 종속을 추구했다. 특히 니콘 총대주교는 수도원 관리국의 존재와 그 활동에 대해 극렬히 반대했다[587] . 1667년과 1675년 공의회의 판결은 는 교회 계층이 국가에 대해 거둔 일시적인 승리를 상징했는데, 알렉세이 차르가 승인한 이 판결들은 수도원 관리국이 성직자들에 대해 행사하던 사법권을 종식시켰고, 수도원 소유지와 관련된 모든 문제에 대해 수도원들은 교구 주교들의 사법권 아래로 넘어갔기 때문이다[588] . 이때부터 수도원 관리국은 수도원 토지에 대한 세금 징수 업무만을 담당하게 되었다. 여전히 수도원의 회계 장부를 검토하고 국가적 의무 이행 여부를 감독하며, 과세 목적으로 수도원 재산 목록을 작성하는 등의 업무를 계속 수행했다. 1677년에 수도원 관리국은 폐지되었고, 이 모든 업무는 다시 대궁전 관리국으로 이관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17세기 말까지 지속되었으나, 그 후 표트르 대제의 개혁과 관련하여 성직자의 관할권 문제와 수도원 소유지 문제 전반에 걸쳐 몇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589] .

 

 

제9장. 16~17세기 수도원 생활의 구조

 

1. 고대 루스의 수도원 규약사: 기원부터 16세기까지

외부에서는 세상의 타락한 영향이 수도 생활에 침투해 들어오는 한편, 수도원 내부에서는 수도 생활의 기초가 때로는 교회 전통의 정신에 따라 이해되지 않고, 각자의 판단에 따라 해석되기도 했다. 이러한 위험은 기독교 금욕주의의 가장 초기 단계에서부터 이미 알려져 있었으며, 이는 가장 오래된 금욕주의 저작들과 수도 생활의 선구자들의 활동에서도 입증된다. 성부들은 저술과 실천을 통해 금욕적 수행에서 제멋대로 행동하는 위험성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는데, 이는 자신의 판단에 따라 구원을 얻으려는 욕구가 대개 수도원 생활의 세속화를 앞당겼기 때문이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다양한 수도 생활 규칙이 제정되었으며, 이들은 수도 규칙이나 수도원 규율에 모아져 있다. 이러한 규율들은 시대적·지역적 조건의 영향을 받으며, 작성자들의 금욕적 견해의 개별적 특성을 반영하여 점차 변화해 왔다. 그러나 그 근본은 모두 수도원의 시조이자 최초의 규율을 제정한 성 파코미우스 대성인의 정신에 기반한 고대 기독교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 후대의 수행자들은 성 파코미우스의 업적을 이어받아 동방 기독교 수도 생활을 참된 기독교 금욕주의의 올바른 길로 이끌었다[590] .

앞서(제2장 참조) 고대 러시아 수도 생활의 초기 단계를 설명하면서, 우리는 이미 키예프 루스의 초기 수도원 규약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이제 16~17세기 수도원 규약에 대한 문제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우선, 14세기부터 17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러시아 교회의 수도원 규약 역사는 매우 단편적이고 상당히 불분명하다는 점을 미리 밝혀 두어야 합니다.

성 테오도시우스가 페체르스크 수도원에 도입한 규율은 알렉시우스 총대주교가 개정된 성 테오도르 스투디투스의 규율이었으며, 여기에는 수도원 생활의 공동거주(키노이) 체제가 규정되어 있었다[591] . 그러나 엄격한 키노비아를 요구했던 스투디트 규칙의 규율적 부분에 대한 운명은 매우 비참했다. 수도원 공동생활의 기초는 금세 잊혀졌고, 수도자들은 거의 모든 곳에서 개별 생활을 고수하게 되었다. 한편, 이디오리듬이 항상 수도 생활의 기초가 된 것은 아니었으며, 12~15세기는 심지어 수도 규율이 없던 시대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13~15세기 프스코프 지방의 수도 생활에 관한 세레브리안스키의 훌륭한 저서에서 잘 드러나 있다.[592] 물론, 『러시아 대주교 성 키릴의 수도 생활 규율 및 모든 생활에 관한 규칙』이라는 제목의 저작이 존재하는데, 이는 아마도 그리스 출신인 키릴 대주교(13세기)가 실제로 집필한 것으로 보인다; 이 문서는 16세기, 심지어 17세기의 필사본에서도 발견되며, 비교적 상세한 공동생활 규율을 담고 있다. 아마도 이 규율은 14~15세기에는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며, 어떤 수도원에서든 도입되었는지조차 의심스럽다[593] . 모든 정황을 고려할 때, 성 세르기이 라도네즈키도 모스크바 루스에서 수도 생활 체계를 정립하던 당시 이 규율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그는 처음에 자신의 수도원에 개별 거주 규율을 도입했으나, 그 후 수도원 형제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공동 거주 규율을 바탕으로 수도원 생활을 재편했다. 그의 제자들은 성자의 모범을 따랐으며, 새로운 수도원을 설립할 때 그곳에 엄격한 키노이아를 도입했으나, 이것이 모든 곳에서 정착된 것은 아니었다[594] . 수도원 생활의 기초에 관한 문제는 14~15세기 러시아 수도자들에게 완전히 명확하지 않았는데, 이를 잘 보여주는 예로 스파소-카멘노이 수도원의 역사를 들 수 있는데, 이곳에서 이구멘 디오니시우스(1389년 직전부터 1418년까지 재임)는 처음에는 엄격한 아폰스 공동 생활 규율을 도입했으나, 이후 그 자신과 일부 수도사들 은 이디오리트마를 따르게 되었다[595] . 트로이체-세르게이 수도원에서는 공동 생활 규율이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1478년에 성 요셉 볼로츠키가 그곳에서 한동안 머물렀을 때, 수도원은 개별 생활 규율에 따라 운영되었는데, 이는 일부 문서에 의해 확인된다[596] . 14~15세기에 이디오리트마가 점차 키노비아를 대체해 갔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고대 러시아 수도원에서 이러한 개별 거주 방식이 어떤 모습이었는지에 대한 질문에 답해 줄 만한 자료는 거의 없다. 그러나 공동 생활 방식이 많은 수도원에서 정착되지 못했다는 사실에 대한 정보는 풍부하다. 당시 형성된 수도원 생활 체계는 매우 날카로운 비판을 받았는데, 이는 실제로 수도원 생활이 진정한 이디오리타의 규범에도, 키노비아 규약의 요구 사항에도 부합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597] .

동시에 그 시대의 문헌에서는 수도원 생활에 대한 비판뿐만 아니라, 공동 생활 규정을 엄격히 준수해야 한다는 끈질긴 요구도 찾아볼 수 있다. 키노비 도입의 필요성은 14~15세기 교회 계층의 많은 대표자들이 강조했습니다: 수즈달의 디오니시우스 대주교(1382), 노브고로드의 시메온 대주교(1417–1421), 포티우스(1418), 이오나(1455), 테오도시(1461–1464)[598] 등이 그 예이다. 비록 개별 수도원에 보낸 그들의 서신과 대주교 관장 헌장(약 1500년)[599] 이 키노비아가 수도 생활의 기초로 인정되었음을 증명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5세기에는 이를 전역적으로 실천하기 위한 어떠한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중앙과 북부의 외딴 산간 지역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수도원의 생활을 모두 파악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이며, 또 다른 이유는 이 시기의 고대 러시아 수도 생활이 바로 은둔과 독거의 길에서 엄격한 수행의 많은 사례를 보여주며, 이러한 형태의 수도 생활을 전면에 부각시켰기 때문이다. 당시 수도계에 특징적이었던, 기록된 수도원 규율에 대한 강한 거부감도 한몫을 했다. 성 요셉 볼로콜람스키는 그의 동시대인인 북부 수도원의 수도사들이 다음과 같이 끈질기게 주장했다고 언급했다. “예로부터 러시아 땅에서 수행해 온 성스러운 선조들은 글로 된 규칙이나 규율을 만들지 않았으며, 살아있는 말로 수도사들을 가르쳤으니, 그러므로 지금도 수도원 규율을 글로 기록해서는 안 되며, 형제들을 구두로 지도해야 한다고 했다[600] . 이러한 견해가 요시프의 동시대인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15세기 전체에 걸쳐 전형적이었다고 보는 것은 과장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이구멘이나 수도원 설립자의 개인적인 모범, 그의 위업, 가르침, 그리고 수도자들에 대한 태도를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겼던 고대 러시아 수행자들의 종교성과 부합했다.

그러나 수도원 규율을 도입해야 할 필요성은 일부 수행자들, 그중에서도 수도원의 설립자와 원장들에 의해 인식되고 있었다. 여기서 무엇보다 먼저 성녀 에우프로시나 프스코프스카야(† 1481)를 언급해야 한다. 그의 행적은 단순히 엄격한 수행자이자 수도원 설립자의 생애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러시아 교회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한 장을 차지하고 있으나, 본 연구의 범위상 이 행적에 대해 자세히 다루기는 어렵습니다[601] . 성 에우프로신은 가장 오래된 공동 생활 규정을 집필한 인물로, 그가 프스코프 지방에 설립한 수도원에 이를 도입했습니다[602] . 그가 자신의 규율을 작성하는 데 어떤 자료들을 활용했는지는 파악하기 어렵지만, 구약과 신약 성경의 인용문 외에도 에우프로신은 성 바실리오 대주교, 요한 사다리수, 이사악 시리노의 저술들을 인용하고 있다. 이 규율서의 독특한 점은 그 안에 오직 규율적 요구 사항 만 포함되어 있고, 예배[603] 에 대해서는 전혀 다루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규율서는 28개의 장, 즉 단락(정확히 말하면 서문과 27개의 규칙)으로 나뉘어 있다. 수도원 생활 질서와 관련된 저자의 금욕적 견해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키노비아를 엄격히 준수해야 한다는 기본 요구 사항 (§ 1–4, 8); 2) 수도원장 의지와 지시에 대한 완전한 복종 (§ 5, 7, 18); 3) 형제들이 사랑과 상호 존중을 바탕으로 꾸준히 수행하는 수공예 작업 (§ 8, 9, 27); 4) 기도, 금식, 정절, 무소유와 관련된 모든 수도사에게 공통된 금욕적 규칙 (§ 10–15, 4, 17, 26, 27) 및 5) 가난하고 궁핍한 이들을 돕는 일 (§ 24 및 25). 이 규율서에는 수도원의 원장 및 그의 의무에 대해서도 언급되어 있다(§ 5, 21, 23, 20). 성 유프로신 성인이 이 규율서를 자신의 수도원을 위해 작성했지만, 상당히 일반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며 공동 생활의 엄격한 준수를 강조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수도원들도 이를 활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규율이 다른 수도원에서 적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며, 에우프로시노스의 엄격한 공동체 생활 규율이 그의 수도원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유지되었는지도 불분명하다. 그의 저술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진 수도사 필로페이는 16세기 초, 즉 에우프로시노스가 세상을 떠난 지 2~3십 년 후에 엘레아자로프 수도원의 수도사였거나, 어쩌면 원장일 수도 있었다. 오로지 교회-정치적 문제에만 전념한 그의 저술만으로는 우리가 관심을 갖는 이 문제를 명확히 밝힐 수 없다. 우리는 그의 수도원 운영이 비판의 여지가 전혀 없을 만큼 흠잡을 데 없었는지, 아니면 그가 교회-정치적 문제에 너무나 몰두하여 일상적인 수도원 생활의 ‘사소한 일’에는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는지 알 수 없다. 그 시대의 가장 흥미롭고 재능 있는 작가 중 한 명인 필로페이가 이 문제를 간과한 것은 아쉽다.

수도원 규약에 대한 논의를 이어가며, 제4장 2절에서 그의 금욕적 견해가 상세히 서술된 장로 닐 소르스키에 대해서도 몇 마디 언급해야 한다. 진정한 수도 생활의 수호자이자 옹호자이며, 성녀 에우프로시나의 동시대인이었던 그는 키노이 규칙보다 스키트 규칙을 선호했으나, 수도사의 일상생활, 수공예, 기도, 무소유에 대한 그의 견해는 에우프로시나의 것과 거의 같았다. 두 수행자는 본질적으로 하나의 목표를 추구했다. 즉, 수도 생활을 세속화로부터 보호할 수 있도록 정립하는 것이었으나, 이 목표를 향한 길은 서로 다르게 제시했다. 에우프로시노스의 규율문은 간결하고 다소 건조한 반면, 장로 닐의 글에서는 수도자가 기독교적 완성에 이르는 길에서 마주하는 유혹에 맞서는 영적 투쟁에 대한 상세한 묘사와, 그 투쟁을 어떻게 수행해야 할지에 대한 가르침을 발견할 수 있다.

니로 장로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장로들도 스키티즘의 특별한 가치를 강조했습니다. 15세기 후반, 아마도 장로 닐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익명의 저자가 집필한 ‘스키트 규칙’이 존재한다.[604] 아마도 이 규칙은 루시에서 공동 생활이 잊혀져 가던 바로 그 시기에 쓰여졌을 것이며, 익명의 저자는 자신의 규칙을 통해 이디오리트모스의 타락에 맞서 싸우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스키트 규율은 러시아 북부의 작은 은둔처에서 실질적으로 적용되었는데, 그곳에서는 특히 15세기와 16세기 초반, 가혹한 수행이 번성하던 시기에 때때로 스키트 생활의 성격을 띠기도 했던 개별 거주 방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스키트 규율의 사본이 다수 존재한다는 사실은 이 규율이 널리 적용되었음을 보여준다[605] .

반면, 성 요셉 볼로콜람스키(† 1515)는 엄격한 공동 생활을 철저히 준수할 것을 요구했다. 그가 작성한 수도원 규약으로, ‘영적 서한’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606] ,은 전반적으로 이미 우리가 설명한 바 있다(제4장, 1). 요세프의 규약은 에우프로시나의 규약과 마찬가지로 공동생활 규약이지만, 에우프로시나의 규약은 지나치게 간결한 반면, 요세프의 규약은 수도 생활의 기본 규칙에 대한 가르침을 모은 것과 같은 성격을 띠고 있다. 이 규율의 이러한 특징, 즉 여러 세대의 수도자 형제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교훈이나 설교 모음집과 유사한 점은, 아마도 요셉 자신이 지적했듯이, 그와 동시대 수도사들이 오직 수도원장 개인의 훈계에만 귀를 기울였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바로 그 때문에 요세프는 자신의 저작을 ‘영적 유언’, 즉 유언으로 명명했고, ‘수도원 규율’이라고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규율서 중 첫 9장은 성경과 성부들의 금욕적 저작에서 인용한 증거들로 뒷받침된 교훈의 성격을 띠고 있다. 11장에는 수도원장에게 주어진 특별한 지침이 담겨 있어, 수도원에 대한 그의 의무를 밝히고 있으며, 수도자들에 대한 교훈도 포함되어 있다. 요시플리안주의 창시자의 상식과 종교적 형식주의는 그로 하여금 이른 아침부터 밤까지 수도원의 모든 생활을 규율해야 할 간결한 규칙의 형태로 처음 9가지 교훈을 반복하도록 이끕니다.

이어서 두 개의 장[607] 이 더 나오는데, 첫 번째 장에는 총회 장로들이 규율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인 아홉 가지 ‘전승’이 담겨 있고, 두 번째 장에는 이구멘과 총회 장로들이 규율을 위반한 수도자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아홉 가지 ‘금지 사항’이 담겨 있다. 이 장의 제목에서 요세프는 수도원 공동생활 규칙이 성 바실리오 대주교의 규칙과 금욕적 가르침, 그리고 성 테오도르 스투디토스의 수도원 규율을 본떠 자신이 작성한 것임을 강조한다.

마지막 장에서 요세프는 엄격한 금욕주의의 필요성을 특히 강조하고자, 러시아 전역에 그 명성이 널리 퍼진 성인들이 이룬 수도적 위업의 사례들을 제시하며, 이들의 생애가 러시아 수도자들에게 ‘규칙’이자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요세프에 따르면, 그는 수도원 순례 중에 이 수행자들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한다. 서문에서 그는 성부들이 구두로뿐만 아니라 서면으로도 공동 생활에 있는 수도사들을 가르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이어 모든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의 삶이 본받을 만하지는 않으므로, 현재의 원장들은 성부들의 가르침만큼이나 수도자들에게 필수적인 구두 및 서면 지침을 제공해야 한다고 말한다[608] .

요세프의 『영적 문헌』은 수도원 규율을 상세히 기술한 것으로, 수도원의 일상생활을 사소한 부분까지 규정하면서도 특히 수도사의 외적 행동에 중점을 두고 있다.

성 니라 소르스키(† 1508)의 『제자들에게 전하는 스키트 생활에 관한 가르침』에서는 다른 분위기가 느껴지는데, 이 글은 내용상 수도원 규율이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수도자의 생활의 기초, 주로 수도자가 유혹과 죄와 싸우는 것에 대해서만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승』의 내용에 대해서는 앞서(제4장, 2절) 많이 다루었다. 여기서는 니일이 수도 생활에 대해 가진 견해가 요세프의 견해와 크게 다르다는 점만 상기시키겠다. 그는 요세프처럼 키노비아(공동체 생활)를 선호하지 않고, 스키트 생활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두 가지 형태의 수도 생활을 결합하고, 양쪽 모두에서 형제들에게 유익한 점을 도출하려는 시도는 성 코르닐리우스 코멜스키(† 1538)의 수도원 규율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가 고대 루스의 이 유명한 수행자의 삶을 서술할 때(제3장, 4절) 인용했던 그의 『규율, 또는 (수도사들의) 생활 규칙』[609] 은 수도 생활의 기초로 요셉의 엄격한 공동 생활과 닐의 완전한 무소유 정신을 삼고 있다. 코르닐리우스는 이 두 원칙을 자신의 수도원에서 실천에 옮겼다.

16세기 중반에는 또 다른 공동 생활 규율이 등장했다. 그 기원은 다음과 같다. 스몰렌스크 지방에 네 곳의 수도원을 설립한 성 게라심 볼딘스키(† 1554)는 어느 날 자신의 트로이츠키 볼딘스키 수도원의 수도사들과 다른 세 수도원의 원장들을 소집하여, 한 수도사에게 자신의 수도 생활에 대한 회고를 받아 적게 했다. 그는 여기에 ‘유언’을 덧붙였는데, 여기에는 자신이 설립한 수도원들[610] 에서 공동 생활을 유지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 이 규율에는 게라심 신부의 금욕적 견해의 개별적 특성이 반영되어 있지 않으며, 단지 공동 생활의 일반적인 원칙만을 담고 있다. 수도원 원장에게 관한 부분이 흥미롭다. 게라심은 수도자들이 모든 면에서 수도원장의 뜻을 따라야 한다고 강조하지만, 만약 수도원장 자신이 규율을 위반할 경우, 수도원 수도자들은 가장 존경받고 생활이 엄격한 수도사들로 구성된 대표단을 파견하여, 사랑과 겸손의 정신으로 그의 실수나 남용을 지적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또한 게라심은 수도사들이 항상 한 수도원에 머물러야 하며, 이 수도원에서 저 수도원으로 옮겨 다니지 말 것을 요구한다.

이 모든 수도원 규율은 개별 수행자들의 개인적인 주도 덕분에 생겨났다. 본질적으로, 이 모든 규율은 수행자들이 이를 통해 자신들이 설립한 수도원의 내부 생활을 그들의 금욕적 이상에 가장 잘 부합하도록 정비하고자 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며, 이러한 규율은 또한 수도원 설립자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정립된 질서가 가능한 한 오랫동안 유지되도록 돕는 역할을 해야 했다. 앞서 우리는 수도원 설립자의 개인적 권위가 얼마나 중요했는지, 그리고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얼마나 숭배받았는지에 대해 이미 언급한 바 있다. 비록 편찬자의 동시대인과 미래 세대의 수도사들을 위해 작성된 이 모든 규약-유언들이 뚜렷한 성자전적 특징을 지니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지역적 색채가 매우 짙게 배어 있다. 따라서 이를 모방하거나 한 수도원의 규율을 다른 수도원에 적용할 가능성은 배제되었으며, 특히 모든 것을 상세히 규정하는 서면 규율에 대한 고대 러시아 수도사들의 편견을 고려할 때 더욱 그러했다. 이것이 바로 서로 다른 수도원들 간의 내부 생활 체계에 놀라운 다양성이 나타나는 이유이며, 비록 이 모든 수도원들이 공동 생활 규율에 따라 생활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같은 수도원이라도 시대에 따라 수도원 생활의 구조에서 나타나는 차이, 즉 수도원 설립자나 강한 의지와 뛰어난 영적 지도력을 지닌 특정 원장의 서거 후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났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점도 설명된다. 이 모든 규율은 고대 러시아 수도 생활의 일반적인 역사보다는 개별 수도원의 역사와 고대 러시아의 도덕적 신학과 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비록 이 모든 규율이 반세기 동안에 걸쳐 등장했음에도 — 15세기 말 닐의 『전승』과 1554년 직전에 작성된 게라심(Gerasim)의 『유언』 — 그 영향력은 그리 크지 않았으며, 수도원 생활에 어떠한 개혁도 일으키지 못했다. 이러한 규약은 그 작성자의 영적 모습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었지만, 실효성 있고 결실을 맺는 것은 오래가지 못했다. 닐 소르스키의 규약을 제외하고 이 모든 규약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유일한 특징은 키노비아를 선호한다는 점이다.

 

2. 16세기와 17세기의 수도원 규약

교회 지도부가 수도원 생활을 개혁하고 그 영적 수준을 높이려는 첫 번째 시도는 16세기 1/4기 말에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이 시도는 노브고로드 대주교 마카리우스, 즉 훗날 모스크바 대주교가 될 인물로부터 시작되었다. 1526~27년에 그는 바실리 3세 대공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의 교구 내 수도원 체제에 대한 몇 가지 변화와 개선을 허가해 줄 것을 요청했다[611] . 마카리우스는 서신에서 노브고로드 교구 내 단 네 곳의 수도원만이 키노이노 규율을 따르고 있으며, 나머지 모든 곳은 이디오리트메 규율을 따르고 있고, 전반적으로 수도 생활에 많은 무질서가 존재한다고 썼다. 연대기([612] )에 따르면, 1528년 마카리우스는 교구 내 모든 수도원장들을 노브고로드로 소집하여, 주교로서의 권고에서 그들에게 수도 생활을 바로잡기 위한 조치를 취하고, 그들이 관리하는 수도원에 엄격한 공동 생활 규율을 도입할 것을 권고했다. 16명의 수도원장은 이를 이행하겠다고 약속했으나, 두 명은 주교의 조언에 반대하며 자신들의 수도원에서 이디오리듬을 고수하겠다고 고집했다. 연대기에 따르면, 대주교는 고집스러운 원장들을 강요하지는 않았으며, 단지 그들이 자신의 행위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만 말했다. 이 개혁과 관련하여 마카리우스 대주교는 수도원들에 소위 ‘규약 서한’을 발송했는데, 그 안에서 공동 생활 준수에 대한 자신의 지침을 재차 강조했다. 성령 수도원에 보내진 이 규약서 중 하나가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있다[613] . 마카리우스의 이러한 가르침은 다른 키노비 수도원 규약, 예를 들어 성 요셉의 규약과 다르지 않으며, 매우 명확한 형태로 서술되어 있다. 흥미롭게도 마카리우스에게서 우리는 나중에 성 게라심 볼딘스키의 규약에서 다시 나타나는 특징, 즉 수도사들이 원장에게 수도원 규약을 위반한 사실을 지적할 권리에 대한 언급을 발견할 수 있다.

독거 생활을 막기 위한 조치와 동시에, 마카리 대주교는 이른바 ‘이중 수도원’을 폐지했다. 그의 교구에는 여덟 개의 여성 수도원이 남아 있었지만, 이들은 이제 이전과 달리 이구멘이 아닌 이구메니아들이 관리하게 되었으며; 이제부터 여성 수도원에서의 예배는 본당 사제들만이 집전할 수 있게 되었다[614] . 이중 수도원()은 이미 비잔티움에서 존재했으며, 중세 시대에는 서방에서도 알려져 있었다[615] . 모스크바 루스의 이중 수도원은 비잔티움과 마찬가지로 ‘별거 규정’을 바탕으로 운영되었다: 수도사와 수녀들은 교회 주변에 배치된 별도의 방에서 살았으며, 이 방들이 모여 수도원을 이루었고, 종종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수도원은 한 명의 원장에게 소속되어 있었다. 성 니일 소르스키는 이러한 무질서를 비난했다[616] . 이러한 수도원은 예를 들어 15세기 말과 16세기 초 프스코프에 존재했다[617] 1503년 공의회는 이중 수도원을 폐지했으며, 또한 여성 수도원이 수도사 출신의 원장이나 고해 신부를 두는 것을 금지했고, 고해 신부는 본당 신부여야 했다[618] . 그러나 1528년에 마카리우스 대주교가 같은 내용을 다시금 금지해야 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금지 조치는 실질적인 효과를 거두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스토글라프 또한 이중 수도원을 무질서한 행위로 규정하고 1503년의 결정을 재확인했다.[619]

이디오리트마에 반대하는 마카리우스의 조치는 그의 교구에만 국한되었으므로 지역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스토글라프의 결의안에서 볼 수 있듯이, 공동 생활 수도원과 개별 생활 수도원이 여전히 공존하고 있었다. 스토글라프의 의정록(제52장)을 보면 두 종류의 수도원 모두 인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스토글라프(제85장)에는 수도사들이 공동 생활 규율을 준수할 수 없거나 원치 않아 키노비형 수도원을 자주 떠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스토글라프』는 수도자들이 보통 개별 거주 규율에 따라 생활하던 새로운 소규모 은둔처를 설립하는 것을 금지했으며, 서로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소규모 은둔처들은 하나의 수도원으로 통합되도록 지시했으나, 이러한 통합된 수도원에 어떤 규율을 도입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규정에서 아무런 언급이 없다. ‘정직한 수도원’에 특별히 할애된 제49장에는 수도원 내부의 생활에 관한 일반적인 조항들이 포함되어 있다. 키노비 수도원에는 공동 식사 규정이 적용되며, 개인 방에 식량을 반입하거나 보관하는 것이 금지된다.

16세기와 17세기에 걸쳐 수도원은 여전히 개별 거주형과 공동 거주형으로 나뉘어 있었다. 일부 수행자들의 주도로 작성된 몇 가지 새로운 수도원 규율이 등장했다. 17세기 초반, 엘레아자르(† 1656)라는 이름의 저명한 수행자는 백해의 안제르 섬에 있는 자신의 은둔처에 대한 규율을 작성했는데, 그곳에서는 수도사들이 개별 거처에서 생활했다. 이 규약은 수도 생활에 관한 엄격한 요구 사항[620] 을 담고 있다. 모스크바 시모노프 수도원의 원장인 아르히만드리트 가브리일(도메츠키)은 두 가지 규약, 즉 개별 거주형(1683)과 공동 거주형(1690)을 제정했는데, 이는 이 시기에 수도원이 이디오리트마에서 키노비아로 전환되었음을 시사하거나, 수도원에서 두 규율이 동시에 적용되었음을 나타낼 수 있다. 이 수도원이 모스크바에서 가장 큰 수도원 중 하나였으며, 특히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차르(† 1676) 시대에 차르 가문과 가까운 관계에 있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모스크바의 또 다른 수도원인 보스크레센스키 수도원의 원장 니카노르(1688–1698)는 자신의 수도자들을 위해 키노비 규칙을 제정했다[621] . 이러한 규칙들이 제정된 진정한 동기는 수도의 중심지인 모스크바의 이 거대하고 부유한 수도원들에서 수도 생활이 쇠퇴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시모노프 수도원은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미 이 수도원이 에 설립되었을 때(1370년), 성 테오도르 로스토프스키는 그곳에 엄격한 공동체 규율을 도입했는데, 성 요셉의 말에 따르면 이 규율은 15세기 후반까지도 여전히 준수되고 있었다; 수도사 지노비 오텐스키는 자신의 저술에서 16세기 20년대에 시모노프 수도원의 수도사들이 특히 엄격하고 검소한 생활을 했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당시 그곳에는 수도사 공작 바시안 파트리키예프[622] 가 머물고 있었다.

교회 지도부 측에서는 수도원 원장들이 두 유형의 수도원 규정을 준수하는지 감독하도록 하는 일반적인 지침을 수차례 내렸다. 이는 1667년, 1675년, 1681년의 공의회에서 논의되었으며, 이 공의회들은 교구 주교들이 규정 이행 상황을 감독하도록 결정했다[623] . 80~90년대부터 현재까지 전해 내려오는 수많은 대주교들의 권고문에는 여러 수도원에 수도원 규정을 위반하지 말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624] . 지금까지 보존된 문서 중 수도원 규약 문제를 직간접적으로 다루는 모든 자료는 16~17세기 러시아 수도원에서 공동 생활과 개별 생활이 모두 유지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안타깝게도 두 유형의 수도원 간 수적 비율을 파악할 방법은 없습니다. 단, 자료에서 공동 생활 규약에 대해 더 자주 언급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규약은 더 널리 퍼져 있었거나 더 자주 위반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주로 북부 황야 지역에서 적용되었던 개별 거주 규약은 더 엄격하게 준수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3. 수도원 생활의 내부 구조

수도원 규율은 분명히 수도원 내부 체제의 초석이 되어야 하지만, 실제로도 그랬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수도원 생활에는 ‘행정 조직’과 ‘규율 준수’라는 두 가지 측면을 구분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 번째 측면에 관해서는,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자료를 바탕으로 판단할 때, 전반적으로 두 유형의 수도원 모두에서 관리 조직은 실제로 서로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중요한 점은 두 유형의 거의 모든 수도원이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그 토지를 경작하는 것이 특정 결과를 초래했다는 사실이었다. 수도원 규율에는 세 가지 요인이 영향을 미쳤다. 첫째, 그 시대의 수도 생활에 대한 관점, 즉 수도 생활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견해, 둘째, 키노이아와 이디오리테에 대한 일반적인 태도, 셋째, 토지 소유의 결과로 인해 수도원 내부의 생활이 지나치게 세속화되고 규율이 무너진 점이었다. 수도 생활의 끊임없는 세속화는 관리 조직과 수도원 당국의 활동, 그리고 수도원 규율에 모두 해로운 영향을 미쳤다. 게다가 수도원 행정의 성격에는 세속 권력이 영향을 미쳤는데, 세속 권력은 교회 문제에 매우 자주 개입했으며, 이는 교회와 국가의 상호 관계, 수도원의 식민지화, 수도원 경제 운영에 관한 본 논고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규정에 따르면, 16~17세기의 수도원 원장(나스타이텔)은 이전인 14~15세기와 마찬가지로 수도사들에 의해 선출되고 교구 주교의 승인을 받았으며, 총대주교의 관할권에 속한 이른바 ‘스타우로피기알 수도원’에서는 원장 선출이 총대주교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625] . 선출 시에는 후보자의 개인적 공로, 엄격한 생활 태도, 학력뿐만 아니라 보야르 출신 여부, 영지 관리 능력 등 다른 사정들도 고려되었다[626] . 몇 가지 흥미로운 문서가 남아 있는데, 이를 통해 새로운 원장을 선출할 때 수도 공동체가 그와 일종의 계약을 체결했거나, 더 정확히 말해 수도 공동체가 그에게 자신들의 ‘판결문’을 제시했고, 그는 이에 서명하고 이후 이를 따라야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627] . 종종 원장은 다른 수도원에서 온 인물이었다. 16세기 후반과 17세기에는 수도사들이 원장을 선출하는 일이 드물어졌으며, 이러한 관습은 오지나 작은 수도원에서만 유지되었다. 크고 부유한 수도원뿐만 아니라 모스크바의 모든 수도원에서는 차르나 총대주교의 지시와 의지에 따라 원장이 임명되었다. 이러한 세속 권력의 수도원 내정 개입 은 그 이전인 대공 바실리 3세(1505–1533) 시대에도 발생했었으나, 이 관행은 특히 차르 이반 4세(1547–1584)와 알렉세이(1645–1676) 치세에 뿌리내렸다[628] . 『스토글라프』(제86장)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원장(나스타니예)은 수도사들의 청원에 따라, 차르의 동의를 얻어 대주교나 교구 주교에 의해 임명된다. 수많은 성자전(지티예)을 통해 수도원 설립자들이 대주교, 그리고 나중에는 총대주교에 의해 임명되는 경우가 얼마나 빈번했는지 알 수 있다[629] .

비록 앞서 언급된 규약들이 수도원 수도자들에게 수도원장(이구멘)의 뜻에 순종할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동시에 수도원장의 권한과 주도권을 어느 정도 제한하고 있다. 이 권한은 수도원 장로회—대개 12명으로 구성된, 가장 경험이 풍부한 연로한 수도사들의 의회—에 의해 제한된다[630] . 에우프로시노의 규약에서는 이 장로회가 전혀 언급되지 않는 반면, 성 요셉의 규약에서는 수도원 장로회에 수도원 운영에 있어 중요한 역할이 부여되어 있다(제13장 및 제14장). 이 장들을 통해 장로회 제도가 수도원장의 의지와 권력과 병행하여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엄밀히 말해, 총회는 아직 원장의 권력을 제한하지는 않았으나, 수도원 규율 문제에서는 원장과 거의 동등한 권한을 가졌는데, 이는 성 요셉이 총회에 규약 위반에 대해 수도사들을 징계하고, 전반적으로 규약 준수를 감독할 권리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헌법적’ 특성은 성 게라심 볼딘스키의 규약에서 더욱 뚜렷하게 드러났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규약에 따라 장로회의 장로들은 원장에게 지적과 훈계를 할 수 있었다. 수녀원 장로들이 원장에게 그의 실수를 지적할 권리에 대해서는, 성령 수도원을 위해 작성된 마카리우스 대주교의 규약에서도 언급되어 있다. 수도사가 원장에게 복종하는 것은, 수도자가 자신의 스승에게 무조건적으로 순종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16~17세기에 장로 제도가 (특히 키노비 수도원에서) 널리 보급되지 못한 이유였을지도 모른다.[631] .

원장 수사와 총회 장로들의 권한을 동등하게 취급하는 것은 불화의 씨앗을 품고 있었다. 우리는 수도원 규율의 금욕적 요구 사항 위반과 싸우려 했던 이구멘이, 이구멘의 지시를 따르기를 원치 않고 규율에 위배되는 자신의 습관을 버리기를 거부하는 수도사들의 저항에 부딪혀 패배한 사례를 꽤 많이 알고 있다. 트로이체-세르기예프 수도원을 몇 년간(1479–1482) 이끌었던 장로 파이시이 야로슬라보프는 원장 직을 내려놓고 벨로제르스카의 숲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아르테미이 장로는 이 수도원을 불과 반년(1551) 동안만 운영할 수 있었고, 그 후 수도사들의 불복종으로 인해 원장직을 사임했다[632] . 성 요셉 역시 수도사들과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대주교 다니일(1522–1539)은 요시프 수도원에서 원장직을 맡았던 시기, 즉 요시프가 세상을 떠난 지 몇 년 후, 역시 수도사들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었으며, 심지어 수도사들에게 공동 생활의 기본 원칙을 설명하고 자신의 지시를 정당화하는 별도의 글을 작성하기도 했다[633] . 17세기 수도원 생활의 부정적인 현상을 다룬 거의 모든 저작에서 수도사들의 불복종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634] 17세기에 일반화된 관행이 된 원장 선출 대신 임명 제도는 당연히 수도원 내에서의 원장의 지위를 공고히 했으며, 이는 부분적으로 총회 장로들의 영향력 감소 때문이기도 했다.

수도원 장로 회의[635] 는 보통 12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여기에는 수도원의 가장 연로한 수도사들뿐만 아니라 수도원 운영을 위해 특정 직무를 맡은 수도사들도 참여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인물은 케라리(keilar)였다. 수도원 내에서의 그의 지위는 특히 책임이 크고 높았으며, 수도원 내부 운영과 관련된 모든 업무가 그의 손에 달려 있었고, 수도원이 토지를 소유하고 있다면 그에 대한 전반적인 감독 권한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감독 권한과 관련하여, 케라리(이미 15세기 말부터)는 수도원 주민과 수도원 농민에 대한 사법권을 가졌으며, 이를 직접 또는 자신의 대리인을 통해 행사했다. 대주교 관장 헌장(약 1500년)에서는 케라리가 수도원장 바로 다음에 언급된다. 1495~1505년에 속하는 트로이체-세르기예프 수도원의 문서들에 따르면, 케라리에게 수도원 소유지의 관리가 위임되었으며, 그는 새로운 소유지의 취득은 물론 기존 소유지의 교환 및 매각 업무도 담당했다. 16세기 트로이체-세르기예프 수도원의 관리나 경제 업무와 관련된 문서에는 심지어 별도의 케라르 인장이 찍히기도 했다. 17세기 후반, 트로이체-세르기예프 수도원의 케라르는 동시에 수도원 관리국(Monastyrsky prikaz)의 서기(dyak)를 겸임했다[636] . 대규모 수도원에는 항상 케라르 직책이 존재했다[637] . 성 요셉의 규약에서는 케라르의 방이 가장 중요한 사안에 대한 회의 장소로 명시되어 있다[638] . 차르의 칙령(1640년, 수즈달의 스파소-예프피미예프 수도원)에는 관리인의 모든 의무가 매우 상세히 열거되어 있다: 내부 경영 및 수도원 소유지 관리, 수도원 금고 보관, 자금 지급 및 수령, 세금이 제때 납부되는지 및 수도원 농민들이 모든 의무를 이행하는지 감독하고, 수도원 회계 장부 관리 감독, 수도원 신하와 농민에 대한 사법권 행사, 차르의 명령 기관 및 관청에서 수도원을 대표하는 역할 등입니다.[639]

16세기 후반, 특히 17세기에는 작고 가난한 수도원들을 크고 부유한 수도원에 소속시키는 관행, 이른바 ‘소속 수도원’이 널리 퍼져 있었다; 이는 소규모 수도원들이 자신의 경제적 상황을 개선하고, 자신들의 특권을 소속된 수도원들까지 확대하고자 했던 영향력 있는 수도원의 보호를 받기 위해 취한 조치였다. 주 수도원의 케라르(kelar)는 종속 수도원들에서 행정권과 사법권을 행사하는 인물이었으며, 더 나아가 종속 수도원 원장들로부터 영적 재판권[640] 까지 이양받았다.

본래 수도원 경영 — 저장고, 곡물 창고, 부엌, 마구간, 가축 우리 —는 경제관, 즉 관리인에게 맡겨졌으며, 그는 케라르의 가장 가까운 보좌관으로서 그에게 복종했다. 그는 수도원 공동체에 의해 이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일정 기간 동안 선출된 연로하고 위엄 있는 수도사였으며; 아마도 그 역시 수도원 원로회의 구성원 중 한 명이었을 것이다. 그에게는 차례로 수도원 경제의 다양한 분야를 담당하는 수도사들이 복종했는데, 지하실과 창고를 관리하는 부관리인, 곡물 담당자, 식당 담당자, 마구간 담당자, 성물실 담당자, 종종 부성물실 담당자 등이 포함되었다. 수도원 소유지를 관리하기 위해 케라리(재무 담당자)에게도 부하 직원들이 한 무리 있었다: 부재무관, 마을 장로들, 또는 관리인들. 큰 수도원에서는 특정 직무를 맡은 수도사들의 수가 상당히 많았다. 예를 들어, 17세기 솔로치나 수도원(랴잔 주)에는 46명 이상, 사브보-스토로제프스키 수도원에는 51명이 있었으며, 이들 중 일부는 다양한 봉사를 수행했는데, 여기에는 예배와 관련된 업무[641] 도 포함되었다.

수도자들의 영적 돌봄에 있어 원장의 가장 가까운 조력자는 수도원의 고해 신부였으며, 일부 수도원에서는 영적 장로들도 그 역할을 맡았다. 영적 장로들은 수련자와 입문한 수도사들의 지도자이자 영적 아버지였다 . 수도원에서는 오직 사제 수도사와 사제 집사만이 예배를 집전했다; 본당 사제들(흰 옷을 입은 사제들, 또는 벨츠)은 1503년과 1551년 공의회에서 정해진 바와 같이 여성 수도원에서만 예배를 집전했다. 예배가 규정에 따라 거행되도록 책임진 사람은 에클레시아르크(우스타브치크)였는데, 이는 티피콘(규약)에 정통한 연로한 수도사였다. 그를 돕는 사람으로는 카노나르크(골로브시크) — 큰 수도원에는 동시에 두세 명의 카노나르크가 있었다 — 그리고 시편 독송자, 파라모나르(포노마르)가 있었다; 그 외에도 야간 예배를 위해 수도사들을 깨우는 ‘깨우는 이’, 예배용 촛불을 배분하는 ‘촛불 담당자’(예를 들어 수난 주간 등), 예배 중 수도사들의 품행과 성전의 청결을 감독하는 교회 감독자, 즉 교회 장로, 성체 분배자, 종지기[642] 가 있었다.

분명히, 크고 작은 수도원에서 특정 직무에 종사하는 수도사의 수는 달랐으며, 공동 생활형 수도원, 특히 광대한 영지를 소유한 곳에서는 꽤 많은 수도사가 다양한 농업 분야에 종사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들을 먼 마을이나 사업장(제분소, 소금 가마, 어장, 벌목 현장)으로 관리자나 감독관으로 파견했다면, 그들은 수도원의 내부 생활에서 완전히 단절되었을 것이다; 비록 여전히 수도원에 깊이 묶여 있었지만, 이 유대는 더 이상 영적·종교적인 성격이 아니라 순전히 세속적인 성격, 즉 수도원 경제 운영에 대한 걱정과 관리에 국한되었다. 작은 수도원과 은둔처에서는 전반적으로 영적 수준이 더 높았고 규정 위반도 드물었으나, 이 주장을 일반화할 수는 없다. 수도자와 수도원 생활의 구조 자체가 세속화의 씨앗을 품고 있었으며, 일반적인 영적 수준을 뛰어넘을 수 있었던 것은 극소수의 수행자들뿐이었다.

 

4. 수계 의식과 신입 수도자들의 영적 지도

수도원에 입회하고 그에 뒤이어 행해지는 수도자 서품식은, 자신의 삶을 특별한 기독교적·금욕적 의미와 내용으로 채우기를 갈망하는 사람에게 있어 언제나 지극히 중요한 단계였다. 이 단계의 중요성은 수도 생활이 지닌 종교적 책임과 관련이 있었다. 미래의 수도사에게 주어진 내적 영적 책임은 동방 교회와 정교회 수도계에서 수도 서원이 예로부터 성사의 의미를 부여받아 왔기 때문에 더욱 강화되었다. 그의 저술이 정교회 수도자들에 의해 높이 평가받는 디오니시오스 아레오파기트(5세기 말 또는 6세기 초)는 수계식을 여섯 가지 성사 중 다섯 번째로 간주했으며, 성 테오도르 스투디트(† 826) 역시 수계식에 성사의 의미를 부여했는데, 새로 수계받은 수도자에게 이는 일종의 두 번째 세례와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견해는 동방 교회의 수계 예식에 반영되었다. 수녀가 될 사람에게 수계의 종교적·신비적 의미를 설명할 때, 수도원장은 이 예식을 “두 번째 세례”라고 칭한다. 그러나 교리적으로 동방 교회는 수계에 단지 예배 예식[643] 으로서의 의미만을 부여한다.

고대 루스에서는 모든 사회 계층이 기독교적 금욕과 수도원 생활에 대한 성향을 보였다. 이에 대한 증거는 고대 루스의 경건한 수행자들의 행적 기록에 많이 나타나 있다. 수도자들 중에는 고대나 후대 모두 학식 있는 이들과 소박한 이들이 있었으며, 수도원들은 신분 계층 간의 차별을 두지 않았다[644] .

이 전기는 또한 수도원에 입회할 때 특정 연령 제한에 대한 논의조차 있을 수 없었음을 보여 주며, 수도사가 청년기나 노년에 수도원에 입회했다는 점만 알 수 있다[645] . 모스크바 루스에서는 생의 마지막 몇 년을 수도원에서 보내는 관습이 널리 퍼져 있었으며;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수도원 금고에 기부금이 납부되었으며, 수도원장과의 계약을 통해 기부자는 이 기부금을 대가로 “하나님께서 생명을 연장해 주시는 한” 남은 생애를 수도원에서 수도사로 지낼 권리를 얻었다. 이것이 이른바 ‘수계 기부금’이었다[646] . 16~17세기에는 또한 도시민이나 농민 공동체(“미르”)가 차르에게 청원서를 보내 수도원 설립 허가를 요청하는 관습이 널리 퍼져 있었는데, 이 공동체-미르의 구성원들은 “자신과 자녀, 손주들을 위해 출가 및 장례 의식을 치를 수 있도록” 수도원을 세우기를 원했다[647] . 이러한 수도원에서는 노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출가 의식이 거행되었으며, 또한 전쟁 장애인 및 기타 불구자들도 이곳에서 출가했다. 수도원에 입소할 때 일정 금액의 현금이나 현물을 기부하는 관습이 존재했다. 일부 수도원, 특히 공동 생활형 수도원은 상당히 높은 금액을 요구하기도 했는데, 이에 대해 차르에게 호소했던 사례도 알려져 있다[648] .

수계식이 항상 수계받는 이의 의지에 따라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으며, 때로는 정부가 정치적으로 원치 않는 인물들을 수도원으로 유배 보내고, 그들이 세속 및 국가·정치 생활에 어떤 형태로든 참여하는 것을 막기 위해 수계를 받도록 강요하기도 했다. 이미 우리에게 잘 알려진 수도사 공작 바시안 파트리키예프도 이러한 불명예를 안고 추방된 자들 중 한 명이었다. 북부 수도원들, 특히 키릴로-벨로제르스크 수도원에서는 많은 수도사들이 보야르 가문 출신이었다. 이러한 출가식은 대공 이반 3세(1462–1505) 시대와 차르 이반 4세(1533–1584) 시대에도 이루어졌다[649] .

수도원에 입회한 후에는 수련 기간, 즉 수련생으로서의 시련 기간이 시작되었다. 앞서 언급된 몇 가지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수도원장들은 종종 수도원에서 수련 기간을 거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수계식을 거행해야만 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모든 규정을 준수하여 수계를 받은 사람은 자발적으로 어린 나이에 수도원에 입문한 이들뿐이었다.

수행의 방식에 따라 러시아 교회의 모든 수도사는 세 단계로 나뉜다: 1) 라소포르 수도사, 2) 소계 수도사, 3) 대계 수도사; 이 단계들은 반드시 순차적으로 거쳐야 한다. 이 세 단계에 따라 세 가지 수계 예식이 존재한다.

수도원에 입소한 사람들은 수련자라고 불린다. 정해진 수련 기간이 끝나면 그들은 라소포르 수도사로 입회하게 되는데, 이때 수도 서원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더 높은 단계의 수도사들이 준수하는 것과 동일한 엄격함으로 수도원 규율을 지켜야 할 의무가 부과되며, 비록 수도 서원을 하지 않았더라도 도덕적으로는 그 서원에 묶여 있다. 라소포르 수도사들은 특정 의식을 거친 후 라사()와 카밀라브카()를 착용할 권리를 얻는다. 갓 수계를 받은 수도사들은 103개의 매듭이 있는 염주()를 받는데, 러시아 수도원에서는 이를 ‘레스토브카’라고 불렀다. 수계 의식을 거행할 때, 원장(주임 수도사)은 수도사의 머리카락을 십자 모양으로 깎은 뒤 그에게 수도복을 입혀 준다. 리아소포르로 수계를 받은 수련자들은 자신의 의지로 수도 생활을 그만두는 것이 금지된다[650] .

두 번째 단계는 소스키마(parvi habitus, ) 수도사들이 차지하며, 이러한 명칭은 대스키마 수도사들과 구별하기 위해 생겨났다. 스키마()는 내면의 영적 회개를 상징하는 외적인 겸손을 의미한다. 이 회개의 정도에 따라 소스키마()와 대스키마()를 구분한다. 소스키마 입회 예식을 거행할 때 수도사는 수도 서원을 한다. 그는 다음을 지켜야 한다: 가)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키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 나) 죽을 때까지 누구에게나 순종해야 한다; 다) 결코 재산을 축적하려 해서는 안 된다[651] . 소스키마 입회 예식을 거행할 때 수도사에게는 또는 이 씌워지는데, 이는 고대 러시아 수도원에서는 ‘스비트카’라고 불렸고, 나중에는 ‘블라사니차’라고 불리며 자발적인 가난을 상징한다; 발사니차 위에는 파라만()이 씌워지는데, 이는 네 모서리에 끈이 달린 네 모서리 천으로, 가슴과 어깨에 걸쳐 입는다. 파라만은 수도사에게 자발적으로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멍에를 짊어졌음을 상기시키고, 그 짐이 가볍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어야 한다. 파라만은 꽉 묶여 모든 세속적 정욕이 결박되었음을 상징한다; 그 위에 망토()를 걸치고, 마지막으로 카밀라브카에 부착된 자락이 달린 특별한 머리 장식—(또는 러시아어로 클로부크)—을 착용한다. 소스키마 수도자들은 수도 생활을 포기할 수 없는데, 이는 특별한 허가와 지극히 타당한 사유가 있을 경우에만 가능한 일이며, 랴소포르 수도자들에게는 허용된다. 그들은 교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죽을 때까지 자신이 한 서원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대수계(大修道)를 받을 때, 수계받는 이에게는 파라마누와 비슷하지만 크기가 더 큰 천인 아날라브()가 씌워지며, 수도모자 대신 쿠쿨()을 착용하는데, 이는 머리와 어깨를 덮는 후드와 비슷한 형태이다; 쿠쿨 위에는 이마, 가슴, 어깨, 등 네 곳에 다섯 개의 십자가가 그려져 있으며, 수계 후 첫 7일 동안 수도사는 이를 벗어서는 안 된다. 대수계(러시아어로 ‘스키므니크’)를 받은 수도사는 특히 엄격한 금식과 끊임없는 기도로 삶을 영위하겠다고 서원하며, 더 이상 자신의 방 밖에서 어떤 봉사도 수행하지 않는다. 모든 수도사가 대수계를 받을 수 있는 조건은 흠잡을 데 없는 수행자의 삶이다; 수도원에서 30년 동안 그러한 생활을 한 후, 높은 수도적 덕행을 갖춘 경우, 원장으로부터 대수계 입문을 위한 허가와 축복을 받으며, 수계식은 수도사 본인의 자발적인 의지에 따라 거행된다. 라소포르 수도사들은 30년 동안 흠잡을 데 없는 수행 생활을 한 후 바로 대수계를 받을 수 있다. 만약 수도사가 대스키마 수계 전에 이미 사제 수도사로 서품받았다면, 그는 전례를 집전할 권리를 유지한다; 반면 주교는 『노모카논』에 따라 대스키마 수계 후에는 더 이상 주교 직무를 수행할 수 없다[652] .

수도자로 입회하기 전, 수련자는 품위 있고 경험이 풍부한 연로한 수도사의 영적 지도 아래 머물러야 한다. 다시 말해, 미래의 수도자는 적어도 입회 전까지는 장로의 지도 아래 영적 수련을 거쳐야 한다. 16~17세기에 이 요건이 어느 정도 이행되었는지는 파악하기 어렵다. 이 시대의 장로 제도의 성격과 보급 정도에 대해서는 제15장에서 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여기서는 수련자의 영적 성숙에 관한 두 편의 저작이 이 시기에 속한다는 점만 언급하겠다.

첫 번째 저작의 제목은 『초보 수도사를 위한 장로의 가르침: 장로 곁에서 순종하며 마땅히 살아가야 할 방식』[653] 이다. 미래의 수도사의 삶은 기도, 성경 읽기(문해력이 있다면, 문맹이라면 오직 기도만), 그리고 수공예로 이루어져야 하며, 이 모든 것은 장로가 지시하는 대로 행해야 한다. 『전승』에 따르면, 수련자는 “어르신의 축복 없이는 어떤 일에도 발을 내딛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수도사에게는 여가 시간이 있을 수 없으며, 그의 삶은 항상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로 채워져야 한다. 왜냐하면 “진정한 수도사에게는 이 땅에 명절도, 부활절도 없으니, 그가 (세상의) 허무함에서 벗어나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때 비로소 그에게 부활절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저작은 『어떤 장로가 제자에게 전한 수도 생활과 신성한 경전에 근거한 독실 규칙에 관한 가르침』이라는 제목으로, 15세기에 성 파블로 오브노르스키 수도원에서 집필되었는데, 당시 그곳에서는 장로 제도가 번성하고 있었다. 17세기에 속하는 사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이 저작이 당시 실질적인 활용을 받았음을 시사한다[654] . 서문만 보아도 이 글이 갓 수계를 받은 형제, 즉 라소포르 수도사의 영적 양육에 관한 것임이 드러나는데, 이는 아마도 수련생들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보이는 첫 번째 저작과는 대조적이다. 차이점은 첫 번째 저작에서는 주로 수행 생활의 일반적인 문제들을 다루며, 특히 수련자의 외적인 행동 양식에 더 중점을 두는 반면, 반면 두 번째 글에서는 이미 어느 정도 영적 경험을 쌓은 수도사를 위한 조언을 제시하며, 예수 기도의 특별한 중요성을 강조하고, 수도사와 그의 스승 간의 지속적인 교류를 위한 기본 규칙을 설명하고 있다.

 

5. 예배용 수도원 규율과 수도사들의 일상생활

실천적·금욕적 관점에서 볼 때, 수련자나 입문한 수도사에게 있어 수도원에 제정된 규율이나 원장의 지도뿐만 아니라 수도원의 전반적인 영적 분위기와 일상 생활의 체계도 매우 중요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하루를 다양한 순종 업무에 배분하는 기초가 된 것은 예배 순서였으며, 이는 기도, 수공예, 휴식을 위한 시간을 정해 주었다.

연중 예배 주기의 전례적 내용은 동방 교회 전체, 특히 러시아 교회의 예배 규정을 결정한다. “우리 교회의 전례와 달리, 신성한 전례 그 자체의 내용은 거의 변함이 없지만, – P. 킬리안 키르호프는 동방 교회의 연간 예배 주기에 대한 간결하지만 내용이 풍부한 소론에서 이렇게 썼다. – 예배의 리듬을 관통하는 동방 영성의 모든 풍요로움은 거의 전적으로 신성한 전례에 부수되는 예배들 속에서 드러난다. “교회 예배의 모든 충만함은 서로 보완하고 서로 스며드는 네 가지 예배 주기, 즉 두 개의 연중 주기, 하나의 주간 주기, 그리고 하나의 일일 주기에 담겨 있다.”[655] . 이처럼 내용이 풍부하고 다채로운 정교회 예배의 특성은 수도원의 삶에 특별한 흔적을 남겼는데, 그곳에서는 모든 규정된 예배가 거행되어야 했고 실제로 거행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수련생이나 경험이 부족한 수도사에게 특히 큰 부담이 될 수 있는 단조로움이 생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교회의 교리적 가르침이 스며들어 정교회 예배의 내용을 구성하는 풍부한 신성한 찬송가들[656] 는 수도원에 예배를 드리러 꾸준히 찾아오는 모든 수도사와 모든 신자에게 영적 계몽의 기회를 제공했다[657] . 두 가지 연간 주기—부활절과 관련된 이동 축일 주기와 구세주, 성모 마리아, 성인들의 기념일에 헌정된 고정 축일 주기—가 기초를 이루며; 이것들은 연간 주기의 전례적 내용이 스며든 주간 및 일일 주기로 보완되는데, 이는 일주일의 매 날이 성서 역사 속의 특정 사건이나 성인들의 기념일에 헌정되어 있으며, 하루 동안에는 엄격히 정해진 시간 기도[658] 가 봉독되기 때문이다. 연간 주기의 축일은 일 년에 단 한 번만 찾아오는 날이며, 일일 및 주간 주기의 예배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찬송으로, 수도원 생활[659] 과 하루 동안의 수도원 생활 전체 질서에 지대한 의미를 지니며, 이들은 저녁 6시를 시작으로 하루를 7개의 부분으로 나눕니다[660] . 수도원 규율은 수도원 생활의 규율적 측면 을 규정하며, 수도원의 일과 순서는 예배 규율에 따라 결정된다. 그 기초는 수 세기에 걸쳐 정립된 정교회 티피콘(러시아어로 ‘우스타프’)이다[661] .

앞서 언급한 성 사바와 성 테오도르 스투디트의 규약은 규율과 예배라는 이 두 부분을 모두 아우르고 있었으며, 러시아로 전해진 후 러시아 교회의 예배 규약의 기초가 되었다[662] . 예배 규정의 부분은 공동 생활 수도원과 개별 생활 수도원에서 다소 다르게 발전했다. 아마도 14세기에 스투디트 규정의 예배 부분은 소위 예루살렘 규정에 의해 점차 대체되었을 것이다. 이는 성 사바의 규약(예배 부분에 한해)에 주로 알렉시우스 총대주교(1025–1043)와 필로페이 총대주교(1354–1355, 1362–1376)가 가한 몇 가지 변경과 보완이 가미된 것이었다. 14~15세기 고대 루스에서는 이 규약의 세 가지 판본이 알려져 있었으며, 이들은 세부 사항에서만 차이가 있었다[663] . 이 규약에 따라 본당 교회에서는 주일과 주요 축일 전날에 성찬례, 저녁 기도, 아침 기도, 그리고 밤샘 기도가 거행되었다. 수도원에서는 또한 제1시간과 제9시간, 저녁 기도, 자정 기도도 거행되었는데, 이때 보통 마지막 두 예배는 하나로 통합되었고, 제3시간과 제6시간은 성찬식과 결합되어 제3시간은 성찬식 전에, 제6시간은 성찬식 후에 봉독되었다. 이러한 예배 순서는 무엇보다도 공동 생활이 이루어지는 수도원들에서 주로 존재했다[664] . 일부 수도원들은 자체적인 예배 규정을 가지고 있었는데, 예를 들어 트로이체-세르게이예프 수도원이나 키릴로-벨로제르스키 수도원이 그러했다[665] . 15~16세기의 다양한 문서들은 수도원들에서 규정(티피콘)의 조항들이 항상 준수되지는 않았음을 보여준다[666] . 『스토글라프』는 본당 교회와 수도원 교회에서 예배가 규약에 따라 거행되지 않는다고 규정했다(제6, 8, 41, 5, 7, 16장). 주로 스키트 규약이 적용되던 북부의 작은 은둔처들에서는 예배 거행에 있어 특정한 특징들이 있었다. 바로 이 규약은 규율적 측면보다 예배적 측면을 훨씬 더 중요시했는데, 특히 주일 전야와 대축일 전야의 시간기도와 전야예배에서 그러했으며, 반면 공동 생활 수도원에서는 주일과 대축일에 종종 저녁기도만 거행하곤 했다; 이러한 점에서 스키트 수도원 규율은 성 사바의 초기 규율[667] 에 더 가까웠다.

수도원에서의 예배 집행 순서에 관한 흥미로운 자료는 이른바 ‘일상규약서’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는데, 이 책들은 수도원 내부의 일상적인 생활상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이 책들은 교회 연도 전체를 아우르며 일종의 수도원 달력 역할을 했던 수도원 디프티크와 관련하여 등장했습니다. 이 책들의 기초는 이동 축일과 고정 축일로 이루어진 연간 주기였으며, 여기에 월력에서 발췌한 내용이 보충되어 있었다. 주님의 축일, 성모 마리아의 축일, 성인들의 축일과 관련하여, ‘오비호드니키’에는 축일 전날 수도원에서 어떤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에 대한 기록이 기재되어 있었다. 또한 이곳에는 고인이 된 대공과 왕, 그리고 살아 있는 대공과 왕들의 이름이 기록되었는데, 특히 그들이 수도원에 자선을 베푼 경우 더욱 그러했으며, 모든 계층의 다른 자선가들의 이름도 함께 기록되어 성전에서 예배를 드릴 때 이 이름들을 기렸다. ‘오비호드니키’는 특정 수도원의 일상생활을 훌륭하게 보여준다. 이 기록들은 공동 생활 수도원, 예를 들어 요시포프, 트로이체-세르게이예프, 노보스파스스키 등에서 전야 예배가 오직 주일이나 대축일 전날에만 거행되었음을 입증한다. 반면, 개별 거주 규율을 따르는 작은 은둔처에서는 그 주에 대축일이 없는 경우 수요일에도 전야 예배가 거행되었다[668] .

이러한 일상 규정은 수도원 금욕주의의 역사에 관한 귀중한 자료를 많이 제공하는데, 이는 매일의 식사 관련 지침이 수록되어 있으며, 동방 교회에서 의무적으로 지켜야 하는 금식 규정을 엄격히 준수하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비잔틴 교회에서도 금식과 그 준수에 관한 문제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669] . 수도원 규율은 이를 수도사의 가장 중요한 의무 중 하나로 간주하며 그 준수에 지극히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고대 러시아인, 특히 수도사는 다른 형태의 금욕적 실천에 비해 금식에 어쩌면 과장된 의미를 부여했을지도 모른다.

러시아 정교회에서는 네 가지의 긴 금식 기간을 지킵니다: 부활절을 앞둔 대사순절(40일 금식)은 치즈 주간이 끝난 다음 월요일부터 시작되며; 성탄절 전 금식(성탄절 전), 사도 필립보의 기념일(11월 14일) 다음 날부터 시작되므로, 민속에서는 이 금식을 ‘필립보 금식’이라고 부릅니다; 베드로 금식, 오순절 후 두 번째 주 월요일부터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축일(6월 29일)까지; 마지막으로, 성모 승천 대축일(8월 15일) 전 2주 동안 지켜지는 성모 승천 대축일 금식. 또한 매주 수요일(유다의 배반을 기념하여)과 매주 금요일(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을 기념하여)에 금식을 지킨다; 주님의 십자가 승천일(9월 14일), 세례자 요한의 참수 기념일(8월 29일), 성탄절 전야 및 주현절 전야(1월 5일)에도 금식이 있습니다. 티피콘의 금식 준수 규정에 따라, 수도원 생활 지침서에는 일 년 내내 수도사들의 식사에 관한 매우 상세한 지침이 담겨 있다.

티피콘은 수도사들이 엄격히 지켜야 할 네 가지 유형(또는 단계)의 금식을 구분하며, 수도자들에게 고기 섭취를 완전히 금할 것을 요구한다[670] . 가장 높은 단계의 금식은 대금식 첫 주 월요일과 화요일, 그리고 성금요일에 규정된 완전한 금식이다. 그 외의 금식일에는 티피콘이 하루에 단 한 번, 해가 진 후 저녁에만 음식을 섭취하도록 허용한다. 두 번째 금식 단계는 대사순절 기간에 지켜야 하는 ‘건식(수고야데니예)’이다. 단, 토요일과 일요일은 예외로, 이때는 기름 없이 삶은 채소를 먹을 수 있다. (식물성) 기름을 곁들인 삶은 채소를 먹는 것은 이미 세 번째 단계의 금식이며, 생선을 먹는 것은 네 번째이자 마지막 단계이다. 생선은 성모 영보 대축일(성주간이 아닌 경우)과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 대축일에 먹을 수 있다.

티피콘에는 포도주와 기름을 섭취할 수 있는 날이 정확히 열거되어 있으며, 이 날들에는 물로 희석한 포도주를 마시고 식물성 기름을 곁들인 음식을 먹을 수 있다. 동방 교회에서는 수도사들에게 고기 섭취가 완전히 금지되어 있으며, 금식 기간과 모든 평일에는 유제품과 달걀 섭취도 삼가야 한다. 유제품 요리나 버터를 곁들인 채소, 우유나 버터를 넣은 죽, 흰 빵, 또는 양배추나 생선으로 속을 채운 파이는 일요일과 축일에만 수도원 식탁에 올라온다. 주님의 축일과 성모 마리아의 축일에는 수도사들의 식사가 성인들의 기념일이나 차르의 이름날보다 더 훌륭하고 풍성합니다(3~4가지 요리). 수도원 예식서에는 당시 경건함의 또 다른 특징이 담겨 있습니다. 특히 성모 마리아의 축일에는 ‘선하고 가벼운’ 식사가 정해져 있으며, 특히 숭배받는 성모 마리아의 성화(이콘)를 기리는 축일—예를 들어 블라디미르의 성모 마리아( )와 카잔의 성모 마리아—에도 더 풍성한 식사가 마련되었다. 수도원 설립자의 서거일은 그가 시성된 후 교회 축일이 되었으며, 그의 이름날과 함께 성대하게 기념되었다.

예를 들어, 요시포프 수도원은 9월 9일 성 요시프의 선종 기념일을 기념했다. 이날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전날인 9월 8일 성모 마리아 탄생절보다 더 좋은 음식을 받았으며, 성 요시프 기념일에는 식탁이 가장 값비싼 식탁보로 덮였다. 9월 8일과 9일 모두 수도사들은 흰 빵을 먹었지만, 9월 9일에는 구운 생선 요리 세 가지를, 9월 8일에는 삶은 생선 요리 두 가지와 두 가지 반찬, 양고추냉이와 겨자만 제공받았다; 9일에는 수도원 설립자를 기리기 위해 속을 채운 파이와 달걀과 꿀을 넣은 작은 파이도 함께 먹었으나, 8일에는 시와 우유를 곁들인 죽만 먹었다; 성 요셉을 기리는 날에는 수도사들이 성모 마리아 탄생일 때보다 더 좋은 꿀 크바스를 마셨다. 만약 9월 9일이 수요일이나 금요일, 즉 금식일에 해당하면, 수도자들은 점심으로 후추를 넣은 완두콩 수프[671] 와 빵 4분의 1 조각, 크바스 한 잔만을 받았으며, 축제 식사는 다음 날인 9월 10일에 마련되었다. 9월 9일에는 모든 거지, 가난한 사람, 그리고 순례자들이 수도원에서 푸짐한 식사를 받았으며, 대성당의 장로들은 성찬식 후 수도원 금고에서 꺼낸 작은 동전을 거지들에게 나눠주었다. 흥미롭게도 수도사들도 이날 수도원으로부터 금전적 선물(1 코페이카씩)을 받았다.

부활절 첫날 식탁은 특히 풍성하고 ‘가벼웠다’: 부활절 쿠리치, 수도사들이 제한 없이 ‘마음껏’ 먹을 수 있는 흰 빵, 삶아서 물들인 달걀, 신선한 생선(두 종류, 그리고 구이와 삶은 것 두 가지 조리법), 우유 죽, 점심에는 꿀 크바스, 저녁에는 흰 빵으로 만든 크바스가 제공되었고; 저녁 식사로는 다시 생선 요리가 제공되었다. 8월 15일, 성모 승천일이자 수도원 교회의 주축 축일에는 모든 음식이 차르의 비용으로 준비되었으며(16세기에는 그랬다), 이는 차르가 수도원에 바치는 특별한 선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사순절과 수난 주간의 첫 번째 주 월요일과 화요일에 대해서는, 수도원 규율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음식도, 빵도, 물도 없어야 한다[672] .

우리는 수도원 생활 규율서에서 이처럼 방대한 내용을 인용한 것은, 수도자의 금욕이 얼마나 표면적으로만 이해되었는지, 그리고 그 이해가 얼마나 왜곡되었는지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물론, 티피콘의 금식 규정은 엄격하고 철저히 준수되었지만, 다른 날들의 수도원 식사는 수도자 금욕의 의미와 요구 사항에 부합하지 않았다. 앞서 우리는 금식의 의미와 형식에 대한 장로 닐의 견해를 이미 인용한 바 있다(제4장, 2). 장로 아르테미우스의 저술에서도 16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도 무소유자들이 금식의 종교적·금욕적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673] .

그러나 무엇보다도 수도원 창립자의 기념일은 전례적으로 거행되었다. 축일 전날 밤에는 밤샘 예배가 거행되었는데, 이는 거의 밤새도록 이어졌다. 티피콘에 따라 정해진 아침 예배의 성경 봉독은 3~4부분으로 나뉘었으며, 제6곡 카논 이후의 마지막 봉독에는 수도원의 찬양받는 설립자인 성인의 행적이 담겨 있었는데, 이는 수도자들에게 다시 한번 상기시키고 교훈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전야예배는 종종 아침까지 이어졌고, 그 후 수도사들이 교회에 머무는 짧은 휴식 시간을 가진 뒤, 축일 전례가 시작되었다. 이 전례는 수도원 원장님과 한 명의 사제 수도사가 함께 집전했다. 성찬식은 점심 시간까지 이어졌으며, 수도원의 보호를 기원하는 기도를 드리며 성인을 기리는 특별한 기도식으로 마무리되었다. 예배가 끝난 후 수도사들은 수도원장님을 앞세우고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라’(시편 145편)라는 시편을 부르며 천천히 그리고 엄숙하게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서는 키보트 앞이나 이코노스타스 앞(식당은 종종 제단과 이코노스타스가 있는 성당 형태로 지어졌다)에서 그날의 트로파르가 불렸다. 이구멘은 이미 식탁 위에 차려진 식사를 축복하고, 교회에서 가져온 프로스포라를 수도사들에게 나눠주었다. 이는 수시간에 걸친 금식 후 처음으로 음식을 맛보는 순간이었다. 수도사들이 그 전 마지막으로 음식을 먹은 것은 전야기도 전 저녁이었다. 수도원장님을 따라 수도사들은 십자 성호를 긋고 식탁에 앉아 묵묵히 식사를 시작했다. 침묵을 깨는 것은 봉사하는 수도사들의 발소리와 성인의 생애를 읽는 소리, 혹은 수도원장님이 지정한 다른 낭독 소리뿐이었다. 점심 식사는 수도원 규율에 따라 정해진 요리로 구성되었으며, 감사의 기도와 트로파리 재창으로 마무리되었다. 수도사들은 같은 순서로 식당을 나와 “주님, 주님의 거처는 얼마나 사랑스러운지요!” (시편 83편)이나 “나에게 ‘주님의 집으로 가자’고 말한 자들로 말미암아 기뻐하였도다”(시편 121편)를 부르며 식당에서 나와 교회로 향했다. 교회에서는 한 명의 사제 수도사나 원장 스스로가 해산 기도를 선포했고, 수도사들은 이제 다음 예배[674] 까지 휴식을 취하기 위해 각자의 방으로 흩어질 수 있었다.

 

6. 수도 생활의 현황

진정한 금욕적 수도 생활의 구축을 가로막는 주된 장애물은, 공동 생활 수도원이나 개별 생활 수도원을 위한 공통 규율이 없었던 것도, 그러한 규율이 교회의 대목자들에 의해 제정되지 않았던 것도, 개별 수도원에서 적용되던 규율들이 서로 상충했던 것도 아니었으며, 오히려 기독교 금욕주의의 내적 의미 전반과 특히 수도자의 수행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소수의 수도사나 수도자 집단에게서만 보존되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요세프파와 비소유파 사이의 논쟁은 요세프와 닐의 저술에 반영되었으며, 이는 후대의 수도원 생활 체계에 영향을 미쳤다. 그 자신도 엄격한 금욕주의자였으며, 자신의 규율서에서 수도 생활의 체계에 대해 가혹한 요구를 제시했던 성 요셉은 금욕을 외형적이고 형식적인 측면에서만 이해했다[675] . 영적 생활의 내적 토대나 수도원의 전례 생활을 소홀히 한 그의 태도는 실로 놀라울 정도이다. 그는 수도사가 예배 중이나 개인 기도 시간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 정확한 지침을 제시하면서도, 동시에 수도사의 영적 집중의 필요성은 간과하고 있다. 종교적 형식주의가 얼마나 만연했는지는, 반세기 후에 막심 그레크와 장로 아르테미우스가 수도 생활에 대해 제기한 비판적 지적에서도 드러난다[676] .

이러한 종교적 형식주의는 요시프파 영적 지도자의 경건함에만 그림자를 드리운 것이 아니라, 경건한 표도르 이바노비치 (1584–1598)[677] 이나 의식에 지대한 중요성을 부여했던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차르(1645–1678)의 성격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17세기의 분열에서 그 최종적인 표현을 찾게 되었는데, 이때 한 세대에 그치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이 피와 분신으로 종교적 형식주의에 대한 충성을 증언했다.

수도원 생활의 쇠퇴는 역사적 관점에서 우리만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인들도 이를 인식하고 있었다. 수도사 바시아나 공작이나 장로 아르테미오 같은 비재물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성 요셉의 가장 충실한 제자 중 한 명인 대주교 다니일이나 차르 이반 4세도 이 쇠퇴에 대해 솔직하게 언급하고 있다. 스토글라프의 결의안과 그 시대의 다른 자료들은 16세기 수도원 생활의 전반적인 모습을 보완해 주며, 그 결과 비재물주의자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나 그들에게 동조했던 막심 그레크의 비판은 당파적 편향의 색채를 잃게 된다.

앞서 언급한 수도사 공작의 저술들(비록 일부 논평이 자신의 운명에 대한 분통에서 비롯되었고 작가의 성격과 관련이 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에서, 수도 생활의 세속화는 수도원의 세속적 부의 축적으로 설명된다. 노장 닐의 견해에 충실하며, 그는 수도사들과 교회 전반의 세속적 부에 아무런 가치도 두지 않는다: “교회의 장식은 불에 타거나 야만인들과 도둑들에게 훔쳐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가난한 자에게 주는 것은, 악마조차 훔칠 수 없다”라고 그는 말한다[678] . 세속적 부의 축적이라는 죄는 수도원뿐만 아니라 개별 수도사들에게도 해당된다고 바시아누스는 생각하며, 이로 인해 수도 생활의 기초가 되어야 할 빈곤 서원이 위반된다고 본다. 이러한 공동체 규율 위반은 가장 널리 퍼진 악이었다. 바시안과 막심 그렉 은 물론, 대주교 다니일과 『스토글라브』[679] 도 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또한 개별 거주형 수도원에서도 수도사들은 수도원에 입회한 후 지나치게 많은 물건과 돈을 소유하고 있었다[680] . 16세기의 여러 문서는 공동 생활 규약과 빈곤 서원이 얼마나 무참하게 유린되었는지를 보여준다[681] . 이러한 악습은 17세기 공동 생활 수도원에서도 여전히 발견되었기에, 1667년 공의회는 이를 가장 엄격한 방식으로 시정할 것을 요구해야 했으며, 1681년 공의회는 다시금 공동 생활 규정을 철저히 준수해야 할 의무에 주목했다[682] . 많은 수도원에서 과도한 식사 습관은 물론 수도사들의 공동 식사 관행이 사라진 점도 지적되었다. 원장들은 종종 특별한 요리를 준비하도록 지시하고, 자신과 손님, 친척, 부유한 신자들을 위해 별도의 식사 자리를 마련하곤 했다. 이러한 무질서가 만연하자, 젊은 차르 이반은 스토글라비 공의회에 제출한 질문 중 하나를 통해 공의회의 주의를 이 추태에 환기시켰다[683] . 이전에 수도사들의 엄격한 금욕적 수행으로 유명했던 키릴로-벨로제르스키 수도원에서도 16세기에 쇠퇴 현상이 관찰되었는데, 이는 1573년 차르가 유명한 서한에서 제기한 질책에 반영되었다; 트로이체-세르게이예프 수도원에서도 유사한 현상이 발생했다[684] . 1547–1551년, 즉 스토글라바가 열리기 직전, 『수도사들의 차르 이반 바실리예비치에게 드리는 청원서』라는 제목의 흥미로운 저작이 등장했는데, 이 글에서 저자 또는 저자들은 모스크바 근교 수도원들의 공동체 규약 위반에 대해 서술하며, 수도원 생활이 규약에 부합하도록 조치를 취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685] . 어쩌면 바로 이 ‘청원서’가 어린 차르에게 그토록 강한 인상을 남겼기에, 그는 공의회에서 수도 생활의 기본 원칙에 대한 끊임없는 위반과 관련된 수많은 질문을 제기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흔히 볼 수 있는 악습 중 하나는 음주였다. 앞서 언급된 수도원 규약들은 이 악습을 엄중히 규탄하며, 수도사들이 자신의 방에서 포도주를 보관하거나 마시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686] . 스토글라프(제49장)는 수도원에서 음주가 매우 만연했음을 증언하고 있다. 아마도 『스토글라프』의 판결문에 담긴 금지 조항들은 실질적인 효과를 거두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20년 후, 차르는 키릴로프 수도원에 보낸 서한(1573년)에서 다시 수도사들의 음주 문제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687] . 1667년과 1682년 공의회의 판결문들은 이 악습이 17세기에도 여전히 만연했음을 보여준다.[688]

16세기 전반 수도원 생활의 부정적인 측면에 대해 대주교 다니일(1522–1539)은 여섯 편의 서신을 바쳤는데, 그 안에서 그는 공동 생활 규약의 위반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 서신들은 개별 인물이나 수도원들에게 보내진 것이다. 저자는 단순히 이러저러한 악습에 대해 언급하는 데 그치지 않고, 수신자들에게 금욕적 수행의 기초를 설명하고, 키노비아와 이디오리트마의 차이를 보여주며, 공동 생활의 우월성을 강조하려 노력한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성경과 금욕주의 저작들의 인용으로 뒷받침한다. 다니엘의 이 저작들은 수도원 생활을 평가할 뿐만 아니라 저자 자신의 금욕적 세계관을 파악하는 데에도 풍부한 자료를 제공한다. 다니일은 여기서 자신의 스승인 성 요셉의 견해에 얽매여 있으며, 그의 저작에는 독창적인 내용이 전혀 없고, 이 권력에 집착하는 교회 고위 성직자이자 국가 권력과의 관계에 능숙한 인물을 독자적인 사상가로 만들 수 있는 어떤 개별적인 특징도 없다[689] .

수도 생활의 금욕적 기초를 이해하는 데 있어 드러나는 형식주의는 대주교 다니엘과 스토글라프 주교들에게도 특징적인 것이었으나, 이는 수도원 생활에서 관찰되던 악습과 무질서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 세기에도 수도 생활의 세속화 과정을 막을 수 있는 실효성 있는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으며, 우리는 그 시대의 저작 중에서도 금욕의 내적 의미를 명확히 밝히려는 시도가 담긴 것을 알지 못한다. 14~15세기의 진정한 금욕적 수행의 고귀한 모범들은 광범위한 수도자 계층의 의식 속에서 빛을 잃었다. 극소수만이 여전히 고대의 금욕적 전통을 고수하고 있었으나, 그들 중에는 조직적 재능을 지녔거나 개혁을 지향하는 인물은 없었다. 교회 계층 역시 수도원 생활의 정화를 위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이 시대—혼란의 시대부터 러시아 사회 전반에 걸친 표트르 대제의 개혁에 이르기까지—는 그 관심과 힘, 열정을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16~17세기 수도원 생활을 특징짓기 위해서는 모스크바 루스의 수도사 수를 파악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17세기 말에는 1,200개가 넘는 수도원이 있었으나[690] , 수도사의 총수에 대한 공식적인 자료는 전혀 없다. 오직 일부 문서와 자료들을 통해서만 몇몇 수도원의 수도사 수를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일반적으로 수도원의 수도사 수는 많지 않았다. 많은 수도원에는 3명에서 10명의 수도사가 있었다. 마카리우스는 『러시아 교회사』에서 16세기에 단 10곳의 수도원에서만 20명에서 50명의 수도사가 있었으며, 8~10곳의 수도원에는 50명 이상의 수도사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691] . 1582~1583년 키릴로프 수도원에는 52명의 수도사가 거주했는데, 그중에는 원장, 재물 관리자, 교회 장로, 두 명의 성물 관리인, 일곱 명의 사제 수도사, 세 명의 부제 수도사, 그리고 36명의 일반 수도사가 포함되어 있었다[692] . 당시 수도사가 많았던 곳은 솔로베츠키 수도원과 트로이체-세르게이예프 수도원 두 곳뿐이었다. 솔로베츠키 수도원에는 1584–1594년에 약 270명, 1649년에는 약 350명의 수도사가 있었다[693] . 모스크바를 방문한 외국인들은 16세기 1분기 트로이체-세르기예프 수도원에 약 300명의 수도사가 거주했고, 세기 말에는 700명에 달했다고 기록했다[694] . 17세기에는 수도원 수가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각 수도원의 수도사 수는 여전히 적었다. 북부 지역의 수도원들은 대개 거주 수도사가 적었다[695] . 모스크바 시내에 위치한 수도원들의 수도사 수는 비교적 많았다. 알렉세이 차르(1645–1676)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던 모스크바 근교의 사브보-스토로제프스키 수도원에서는 1688년에는 165명의 수도사가 있었으며, 그중 20명은 사제 수도사, 15명은 부제 수도사였고, 다양한 행정 업무에 54명의 수도자가 종사하고 있었다[696] . 100인 공의회는 인접해 있는 소규모 수도원들은 하나의 수도원으로 통합되어야 한다고 결정했으나(제5장), 그럼에도 17세기에는 수도사 수가 3명에서 10명 사이인 수도원들이 여전히 흔한 현상이었다[697] . 이러한 모든 자료를 바탕으로 볼 때, 수도원 거주자(수도사와 수녀)의 총 수는 대략 25,000명에 달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698] .

 

7. 영적 사안에 대한 수도원의 관할권

수도 생활과 수도원 규율의 쇠퇴는 부분적으로 수도자들에 대한 관할권 문제의 불명확성에서 기인한다.

수도사들이 저지른 수도원 규율 위반은 교구 주교들의 영적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러나 수도원과 주교 간의 관계, 특히 복종과 관할권 문제에서는 큰 불일치가 관찰된다.

이른바 스타우로피기알 수도원[699] 은 주교의 관할권에서 완전히 제외되어 대주교의 관할권에 속했으며, 1589년 이후에는 모스크바 총대주교의 관할권에 속하게 되었다. 나머지 수도원들은 모든 영적 사안에 대해 해당 교구 주교의 관할을 받았으며, 법원에서 정한 벌금을 그들에게 납부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이러한 교회법적 관계는 동방 교회의 규범에 의해 정립되었으며, 러시아 군주들의 칙령과 특권장[700] 을 통해 인정되고 확인되었다. 그러나 바로 그 군주들은 수도원들에 특권장과 면소장을 발급하면서, 대주교에게 발급한 자신들의 다른 칙령과 특권장을 위반하고 있었다.

앞서 수도원 소유지의 법적 지위에 있어 특권장 및 면소장(不訴狀)의 중요성에 대해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영적 재판 분야까지 변화를 초래하는 면소장들도 발급되었다. 내용에 따라 면소 특권장은 다양했다. 그중 일부는 수도원을 교구 주교의 관할권에서 완전히 면제시켰고, 다른 일부는 영적 문제에 한해 수도원을 주교의 관할권 아래 두었으며, 또 다른 일부는 수도원을 주교 관료들의 관할권에서 면제시켰으나 주교 본인에게는 면제하지 않았다[701] .

스토글라바에서 이반 차르가 제기한(제5장, 제14문) 이러한 ‘심판받지 않는 칙서’의 적법성에 대한 질문은 마카리우스 대주교의 영향이 없지 않았는데, 이는 이러한 칙서들이 주교단에게 교리적인 관점보다는 오히려 실무적인 관점에서 바람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토글라바의 주교들이 이에 대해 단호히 반대 입장을 표명했고, 공의회는 “앞으로 이러한 칙령이 없도록 하겠다”고 결의했다(제67장). 실제로 이 결의는 종이 위에서만 그쳤는데, 이는 차르 이반이 공의회 이후에도 재판 면제 칙서를 계속 발급했기 때문이다[702] . 이 결의에 대한 무시 태도는 17세기에도 지속되었다[703] . 이러한 정부의 정책은 수도원 원장들이 교구 주교와 분쟁이 발생할 경우 청원서를 대주교가 아닌 차르에게 제출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불확실성과 모순된 관계는 교회의 정통적 질서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수도자들에 대한 주교들의 영적 권위를 떨어뜨렸기에, 필연적으로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었으며, 주교들이 수도원 규율 준수에 대해 지속적이고 엄격한 감독을 수행하는 데 방해가 되었다[704] . 한편, 어린 차르 미하일이 총대주교 필라레트에게 하사한 1625년의 유명한 특권장은 어떤 의미에서 교회 계층의 사법권을 회복시켰다[705] , 1649년의 법전과 수도원 관리국의 설립은 교구 주교들과 수도원 간의 정상적인 관계에 새로운 혼란을 초래했다. 니콘 총대주교의 항의와 교회 지도부의 정경적 권리를 전면적으로 회복하려는 그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706] . 1667년 공의회, 1666년 공의회에도 참석했던 구성원들은 당시 차르와 니콘 총대주교 간의 분쟁에서 차르 편에 섰었으나, 이번에는 교회 관할권 문제에 있어 폐위된 총대주교의 견해에 동의하며, 교회 계층이 모든 사법권을 유지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알렉세이 차르가 이 판결을 승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707] . 이는 교회의 완전한 승리였으며, 수도자들은 모든 면에서 이제 자신의 대목자들에게 재판권을 갖게 되었고, 교구 주교들의 재판권이 공고해졌으며, 주교들과 수도원 간의 관계는 정상적인 교회법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1675년 공의회와 이반 알렉세예비치와 표트르 황제가 공동 통치 시절 주교들에게 하사한 특권장은 1667년 판결의 정당성을 재확인해 주었으며, 이러한 상황은 17세기 말까지 지속되었다[708] .

교구 주교들과 그들에게 소속된 수도원들 사이에 정상적이고 체계적이며 지속적인 상호 관계가 결여된 것은, 당연히 영적 사법 사건의 처리에 해로운 영향을 미쳤다. 수도원 원장들은 종종 경제적 문제에 지나치게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만 했기 때문에, 엄격한 규율을 유지할 시간도, 충분한 권위도 갖추지 못했다. 그들의 권리와 의무는 수도원 규약이나 교구 주교의 지시보다는 수도원에 부여된 특권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부분적으로는 단순히 관습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우리는 이미 공의회 장로들에 대해 언급한 바 있는데, 예를 들어 요시프 볼로콜람스키의 규약 제14조는 그들에게 규약을 위반한 자들에게 징계 조치를 내릴 권리를 부여했다. 원장과 성당 장로들이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었지만, 그들 사이에 마찰과 논쟁이 생기면 만장일치가 사라지고 수도원 내에 불화가 발생할 수 있었다. 이러한 모든 상황은 수도원에서 엄격한 규율을 유지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수도원의 전반적인 상황은 한편으로는 교회 당국의 구체적인 조치가 필요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수도자 집단 내에서 활동적인 인물들을 배출해야 할 필요성을 요구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어느 쪽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8. 주교단

16~17세기에는 수도자들이 국가의 전반적인 교회 생활에 참여하고 수도원 벽 밖에서 활동할 수 있었다. 대규모 수도원의 원장들이 교회 공의회 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심지어 특히 17세기에 정부가 다양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수시로 소집했던 지방 공의회에서도 주교들과 함께 수도원 원장들이 참석했습니다[709] . 공의회 결의문 하단의 서명과 1575–1584년 차르 기록 보관소의 기록을 통해 모든 수도원이 등급별로 구분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구분은 어떤 수도원이 특별한 존경과 숭배를 받았는지, 어느 수도원의 원장이 아르히만드리트였는지, 또 어느 수도원의 원장이 이구멘이었는지를 보여준다. 1561년, 트로이체-세르기예프 수도원의 원장이 아르히만드리트 직위에 승진한 이후, 그는 모든 원장들 중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권리를 누렸다. 명예상 두 번째는 블라디미르에 있는 유서 깊은 로즈데스트벤스키 수도원의 아르히만드리트였으며, 그 뒤를 이어 모스크바의 노보스파스키 수도원, 노브고로드의 유르예프스키 수도원, 모스크바의 추도바 및 시모노프 수도원의 원장들이 뒤를 이었다. 키릴로-벨로제르스키 수도원의 아키만드리트는 12위, 요시포-볼로콜람스키 수도원의 아키만드리트는 19위를 차지했다[710] . 이 모든 문서에는 최종 결정 사항만 포함되어 있으므로, 이를 바탕으로 개별 인물의 실제 역할에 대해 파악할 수는 없다.

루시에서는 동방 교회의 규범에 따라 오직 수도사만이 주교로 서품될 수 있었기 때문에, 교회 지도층과 광범위한 수도자 계층 사이에는 긴밀한 유대가 존재했다. 16~17세기의 러시아 주교는 물론 그 이전 시대에도 주교 서품을 받기 전 몇 년을 수도원에서 보냈다. 대주교나 대주교좌의 직함은 사실 교구 장상의 지위와 관련된 명예직에 불과했으며, 교회 행정상으로는 교구 내의 대주교, 대주교급 주교, 주교들이 동등한 권리를 가졌다. 수도원 원장이 곧바로 대주교, 대주교급 주교 또는 주교로 서품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예를 들어, 1491년에는 모스크바 시모노프 수도원의 아르히만드리트 조시마가, 1495년에는 트로이체-세르기예프 수도원의 이구멘 시몬 이 즉시 모스크바 대주교로 서품되었다. 시몬의 후임자인 바르라암 대주교는 시몬 수도원의 아치만드리트에서 대공의 명령에 따라 대주교가 되었다[711] . 다니일 대주교는 이전에 요시포-볼로콜람스크 수도원의 수도원장였고, 요아사프 대주교는 트로이체-세르기예프 수도원의 수도원이었다; 미래의 모스크바 대주교가 될 마카리우스는 모자이스크에 있는 루제츠키 수도원의 아키만드리트였으며, 이후 노브고로드 대주교가 되었다. 아파나시이 대주교(1564–1566)는 모스크바의 추도바 수도원의 수도사였으며, 그 전에는 대제사장이자 차르의 영적 지도자였으며, 주교좌에 등극하기 직전에 수도 서원을 했다[712] . 성 필립, 모스크바 대주교(1566–1569)는 성직 서품 전 18년 동안 솔로베츠키 수도원의 원장(1548–1566)을 역임했다. 17세기, 시모노프 수도원의 아르히만드리트 요세프는 모스크바 및 전 루스의 총대주교(1642–1652)로 선출되었다[713] .

수도원에서 보낸 세월은, 특히 그 당시에는, 한 사람의 세계관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수도원은 그에게 학교와도 같은 곳이었는데, 그곳에서 그는 수도 생활의 일반적인 기초를 터득했을 뿐만 아니라, 그곳에 만연해 있던 견해와 교회·정치적 문제에 대한 관점을 접하게 되었고, 이러한 관점들은 그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 후 수도원 밖의 어떤 삶의 영역에서든 그는 자신의 수도원이 지닌 영적 분위기를 간직하고, 그 정신에 따라 행동하며, 자신의 수도원 전통을 바탕으로 교회 생활의 모든 현상을 평가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영적 태도는 16세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요시포-볼로콜람스크 수도원은 이 점에서 러시아 교회 역사에서 지극히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성 요시프와 그의 수도원은 16세기 교회 생활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흐름과 연관되어 있다. 러시아 교회의 전체 역사를 통틀어, 이 수도원만큼 제한된 기간이든 장기간이든 교회 생활에서 그토록 중요한 역할을 한 다른 수도원은 없었다. 더 나아가, 요시프파의 흐름은 최근까지도 러시아 교회 생활의 전반적인 흐름에 때로는 약하게, 때로는 강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16세기 동안, 더 정확히 말해 1522년부터, 적어도 19명의 수도사와 이 수도원의 원장들이 이곳을 떠나 각지의 주교좌에 올라 수도원 설립자의 사상을 교회 생활에 깊이 뿌리내리게 했다. 이 주교들 중 일곱 명은 이전에 이 수도원의 원장이었으며, 나머지는 평범한 수도사 출신으로 서품을 받았다[714] . 1555년부터 1581년까지 카잔 대주교좌는 지속적으로 이오시포프 수도원 출신들이 맡았다. 17세기에 들어 볼로콜람스크 수도원은 주교좌를 채우는 데 있어 예전과 같은 역할을 더 이상 수행하지 않게 되었다. 수도원장 알렉산드르(1682–1688)가 벨리키 우스티우그 대주교(1688–1699)로 선출된 사례 하나만이 알려져 있다[715] . 요시포프 수도원의 수도사들, 예를 들어 대주교 다니일, 바시안(사닌) 주교, 바시안(토포르코프), 사바(체르니) 주교들, 그리고 요시포프파의 정신을 계승한 파프누티예프 수도원 출신의 마카리이 대주교는 자신들의 행동과 저술을 통해 이 학파의 견해를 전파하고 확립했다. 스토글라프 공의회에서 우세했던 견해들은 바로 이 흐름의 대표자들이 표명한 견해들이었다[716] . 수도원의 정신은 그 후 수많은 성직자들의 활동 속에서 계승되었다. 마찬가지로, 성 세르기우스 시대의 트로이체-세르기예프 수도원의 엄격한 금욕적 공동체 생활은 새로운 수도원들을 설립한 수많은 수도원 창립자들을 양성했으며, 이들은 각자의 수도원에서 성 세르기우스 수도원이 따르던 것과 동일한 수도 생활 체계를 도입했다. 15세기 후반 볼가 강 너머 사막 지역에서 지배적이었던 그 정서와 관점 없이는, 소유를 추구하지 않는 이들의 금욕적 학파를 상상할 수 없다. 이 정신이 사라지자마자 — 수도 생활의 발전에 유익했든 해로웠든 상관없이 — 교회 생활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만한 뛰어난 인물들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17세기 솔로베츠키 수도원에서는 몇 명의 주교가 배출되었으나, 그들에게 교회 생활에 대한 특별히 두드러진 영향을 돌릴 수는 없다. 그러나 솔로베츠키 수도원과 밀접한 관련이 있던 성 필립 모스크바 대주교 (1566–1568)는 자신의 행적과 순교적인 최후를 통해 수도원 공동체 내에서 종교적 책임감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음을 증명했다[717] .

16~17세기에 트로이체-세르기예프 수도원의 13명의 원장들이 주교가 되었다[718] , 그러나 그중 단 두 명만이 교회 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들은 노브고로드 대주교 이오브(1697–1716)로, 새로운 학교 설립과 백인 성직자 양성에 기여한 공로가 높이 평가되며, 11년 동안 (1656–1667) 동안 이 수도원의 원장직을 맡았던 인물이다. 다만, 노년의 총대주교는 그다지 활동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교회의 권리를 적극적이고 성공적으로 옹호했던 1667년 공의회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그리 크지 않았다.

수도 생활의 세속화 과정을 살펴볼 때, 왜 주교단이 이 과정을 막기 위해 단호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는지, 왜 적어도 각 주교가 자신의 교구 내에서라도 수도원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저절로 떠오른다. 하지만 이 주교들은 스스로 수도원에서 생활했었는데, 그곳에서는 금욕적 수행이 아주 명확하고 제한된 위치에 머물러 있었고, 종교적 형식주의—경직된 ‘의식 숭배’—가 뿌리내리고 있었다. 17세기 교회 지도자들 중에서 수도원 생활의 정화와 개선을 위해 헌신한 뛰어난 인물은 찾아볼 수 없다. 랴잔 대주교 일라리온(1657–1673)은 자신의 관할 구역 내 수도원들의 수도 생활 수준을 높이는 데 성공한 몇 안 되는 관구장 중 한 명이었다[719] . 또 다른 일라리온, 수즈달 대주교(1682–1705)는 17세기 중반 플로리슈체바 은수원(블라디미르 인근)에서 매우 엄격한 생활을 영위했으며, 1694년, 당시 공동 생활 규약 위반이 빈번해졌던 이 은둔원의 원장에게 보낸 서신에서, 자신(일라리온)이 원장 재임 시절 그러한 위반 행위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에 대해 적었습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이 수도원은 엄격한 규율로 유명했다. 표도르 알렉세예비치 차르는 이 겸손한 수도원장을 높이 평가했으며, 그의 뜻에 따라 일라리온은 작은 수도원의 수도원장(이구멘)에서 수즈달 대주교로 승진했다[720] . 17세기 후반 가장 뛰어난 두 명의, 진정으로 교양 있는 성직자는 – 노브고로드 대주교 이오브(1697–1716)와 홀모고르 대주교 아파나시이(1682–1702) –는 주로 본당 생활의 개선과 성직자 양성에 주안점을 두었다[721] .

교구 주교들이 수도원 생활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은 수도 생활의 세속화를 더욱 부추겼다. 1667년 수도원 관리국과 공의회가 폐지된 후, 교구 주교들은 각자의 교구에서 성공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더 많은 기회를 얻었지만, 이에 적합한 인물이 부족하여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러시아 주교단 중에서 두 명의 성직자가 특히 두드러지게 돋보이는데, 바로 성 필립 모스크바 대주교(1566–1568)와 니콘 총대주교(1652–1666)이다. 그들의 운명에는 국가 권력과의 충돌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러한 충돌의 교회사적 전제는 서로 달랐으며, 심지어 정반대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또한 이 투쟁의 본질 itself—성 필립에게는 짧았으나, 니콘 총대주교에게는 길었던—도 서로 다른 성격을 띠고 있었다. 두 대주교가 러시아 수도원사의 역사에 동등한 비중을 차지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들의 개인적인 수도자 생활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형성되었다.

교회의 고귀한 공작으로서의 눈부신 위엄은 니콘에게 있어 겸손한 수도자의 수도복을 완전히 가려버렸으며, 그의 행동 양식 또한 수도자의 정신과 부합하지 않았다. 그의 관심사와 목표는 주로 전반적인 교회 생활의 문제들과 연관되어 있었다. 자신의 에너지와 재능, 그리고 자신의 일이 옳다는 확고한 신념에 오만하게 의지하며 실현하려 했던 그 거창한 프로그램 속에는 수도원 생활과 관련된 문제들을 위한 자리가 없었다. 니콘은 위대한 인물이었으며, 그는 러시아 민중의 한가운데서 나왔고, 이 인물의 등장은 민중 속에 어떤 힘이 숨겨져 있었는지를 증명해 준다. 반면 그의 반대자들—그만큼이나 유명한 프로토포프 아바쿠무스와 다른 분열 주동자들을 떠올리기만 해도 충분하다—은 이러한 힘이 얼마나 강력한 에너지로 표출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위대한 역사적 인물들에게 흔히 그렇듯이, 니콘의 경우 타고난 재능은 정신적 경직성과 결합되었고, 종종 전제주의로 변질되곤 했던 에너지는 비겁함과, 원칙주의는 이기심과 얽혀 있었다. 이 인물은 반대자들과 숭배자들, 작가들과 연구자들에 의해 저주와 명성을 동시에 안게 되었다. 니콘에 관한 방대한 문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격과 업적이 철저하고 완벽하게 연구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722] .

러시아 수도원 역사에서 니콘은 그다지 두드러진 위치를 차지하지 않는다; 주교 서품을 받기 전 수도원에서 보낸 세월은 그의 삶에 아무런 의미가 없었으며, 솔로베츠키 수도원과 엘레아자르 안제르스키의 스키트에서 거친 금욕주의적 수련(니콘에게 그런 수련을 적용할 수 있다고 가정하더라도)은 그의 열정적인 성격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소박한 수도사 모자는 그의 기질에 어울리는 복장이 아니었으며, 모스크바 총대주교의 호화로운 금빛 예복이 오히려 그의 기질에 더 잘 맞았는데, 이는 그 예복들이 겉으로 보기에 그의 종교적 견해를 구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니콘의 업적과 운명을 짧은 글로 요약해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17세기 러시아의 교회-정치적 또는 역사적 분위기만을 바탕으로서는 이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 그것들은 한편으로는 기독교 국가에서 국가와 교회 간의 관계 문제를 해결하려는 교회 계층의 시도의 결과이거나, 더 정확히 말해 그 시도의 완성이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 개혁이 이 나라의 교회 역사에 너무 깊게 뿌리내린 교회 내부의 현상들에 대항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대주교 필립의 생애가 드러나는데, 그의 활동은 러시아 수도원사의 틀 안에서 충분히 살펴볼 수 있다. 바로 그 수도원 공동체는 ‘모스크바—제3의 로마’라는 사상의 형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이 사상을 실천적으로 검증해 보도록 성 필립, 즉 교회의 대목자를 전면에 내세운 바로 그 공동체였다. 성 필립과 이반 차르 사이의 갈등은 이론과 실천이 얼마나 크게 어긋났는지, 그리고 전자가 후자에 의해 얼마나 자주 왜곡되었는지를 보여주었다. 성 필립에게 있어 이는 세속 권력에 대한 대목사의 의무에 관한 문제였으며, 그는 교회적·금욕적 관점에서 자신의 직분이 요구하는 대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성 필립은 콜리체프(Колычевы) 보야르 가문 출신이었으며(1507년 출생), 세속 이름은 페도르(Федор)였고, 젊은 시절을 우리가 이미 설명한 바 있는 바실리 3세 치하의 모스크바에서 보냈다. G. 페도토프는 자신의 저서 『대주교 필립의 전기』([723] )에서 당시 모스크바에서 벌어졌던 치열한 정치적 투쟁을 보여주었는데, 이는 어린 콜리체프에게도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30세가 되던 해 페도르는 모스크바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는 북쪽으로 향하여 솔로베츠키 수도원에 수련자로 입문했다(1537년). 그의 행적에 따르면, 그는 어떤 육체노동이든 기꺼이 수행할 준비가 되어 있었으며,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의 의무에 속한 모든 일을 수행했다. 그 후 그는 수도사가 되었다. 그의 영적 지도자는 이오나 장로였다. 필립 수도사는 수녀원 밖 울창한 숲속에서 완전한 은둔 생활을 몇 년간 보냈다. 수도 생활 11년째, 필립이 이미 41세가 되었을 때, 은퇴를 앞둔 수도원장(이구멘)의 제안에 따라 수도원 형제들은 그를 새로운 수도원장으로 선출했다(1548). 그때 겸손한 수행자의 성격에 새로운 면모가 드러났다. 그는 큰 열의를 가지고 수도원의 행정 체계를 정비하기 시작했고, 이 일에서 특별한 재능을 보였다. 어쩌면 16세기 보야르 가문의 아들이 가진 활기찬 기질이, 수도사의 두건 아래 일시적으로 억눌려 있다가 이 활동을 통해 표출된 것일지도 모른다. 필립의 통치 기간은 수도원의 경제가 번영하고 부유해진 시기였다. 그는 수도원 건물을 개축하고, 더 넓은 새로운 가축 우리와 벽돌 공장, 대형 제분소를 지었으며, 신발 공방을 설립했고, 심지어 그의 생애 기록에 따르면 수확을 위한 복잡하면서도 원활하게 작동하는 기계를 고안해 내기도 했다. 그러나 원장님은 수도사들이 엄격한 생활을 영위하도록 신경 쓰기도 했다.

필립은 18년 동안 수도원을 운영했다. 1566년, 그는 차르로부터 모스크바로 소환하는 서신을 받았다. 차르가 어떤 이유로 필립을 선택했는지는 불분명하다. 모스크바에서는 정치적, 교회적 상황 모두 극도로 긴장되어 있었다. 이는 악명 높은 오프리치나 시대였으며, 여러 가지 이유나 아예 아무런 근거 없이 차르의 분노를 사 차르의 불만을 산 보야르와 다른 인물들이 처형당하던 시기였다. 교회 문제에서도 분위기는 불안정했다. 아파나시이 대주교(1565–1566)는 아마도 이반의 광적인 열정을 누그러뜨리거나 적어도 완화시킬 힘도, 심지어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며, 당시 문서 중 하나에 기록된 바와 같이 ‘질병’을 이유로 대주교좌를 떠나 추도프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새로운 대주교 후보자인 카잔 대주교 게르만은, 공작 A. 쿠르브스키의 증언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다면, 취임 전에 차르와 협상을 벌였으나, 그 결과 그의 후보 자격은 기각되었다. 필립 원장 수사는 아파나시이가 아직 직위에 있을 때 모스크바로 초청을 받았지만, 이반이 필립을 모스크바 대주교좌는 아니더라도 다른 어떤 대주교좌에 임명할 계획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필립이 모스크바 대주교좌에 등극한 것에 대한 공식 문서에 따르면, 이반이 필립을 대주교로 선출하자는 제안을 한 후에도 상황은 여전히 긴장된 상태였음이 드러난다. 새로운 후보자가 차르에게 오프리치나에 대해 지적을 하며, 이를 폐지하는 것을 조건으로만 대주교좌에 오를 것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비록 이 제안이 차르의 분노를 샀지만, 그는 여전히 필립을 대주교로 보고 싶다는 뜻을 재확인했다. 차르는 오프리치나 폐지 요구를 거절하며, 주교회의에 오프리치나는 대주교의 권한 범위에 속하지 않는다고 선언했으나, 필립이 대주교로서 오프리치나 시대에 형식적·사실적으로 폐지되었던 고대의 ‘애도’ 권리(및 의무)를 유지하도록 허용했다. 이반의 이러한 양보와, 어쩌면 주교회의의 압력으로 인해 필립은 자신의 요구를 철회하고 대주교 취임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1566년 7월 20일자 문서는 미래의 대주교가 오프리치나 관련 사안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약속이 담겨 있으며, 필립과 주교들의 서명으로 확증되었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이 놀라운 문서는 모스크바 루스의 교회와 국가 간 관계에서 유일무이한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 시대에 살았다면, ‘모스크바—제3의 로마’라는 거대한 이데올로기적 구조가 그로 인해 얼마나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는지 실감했을 것이다![724]

처음부터 대주교의 처지는 쉽지 않았는데, 이는 그가 차르의 범죄를 묵과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1566~1568년은 특히 처형과 기타 악행이 빈번했던 시기였다. 대주교의 행적 기록에 따르면, 이 모든 일이 결국 그에게 주어진 ‘애도권’을 행사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상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하자, 대주교는 공개적인 행동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1568년 3월 어느 날, 당시 대주교가 예배를 집전하고 있던 교회에 차르가 오프리치니크들에 둘러싸인 채, 자신도 오프리치니크의 검은 복장을 입고 들어왔다. 대주교는 차르에게 축복을 내리지 않았고, 오프리치니크 보야르들이 대주교에게 차르가 그의 축복을 기다리고 있다고 상기시켰을 때, 필립은 큰 소리로 훈계하는 연설을 했다. 그 후에도 예배 중에 발생한 대주교와 차르 간의 또 다른 충돌은 차르의 분노를 더욱 부추겼으나, 당시 그는 대주교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진 필립을 상대로 공개적으로 맞서기에는 주저했다. 전기는 두 권력 간의 투쟁을 상세히 서술하고 있으며, 다른 자료들은 왕의 오만하고 격렬한 행적과 대주교의 겸손하면서도 타협하지 않는 태도가 만들어낸 비극적인 그림을 보완해 준다. 모욕을 당했다고 느낀 왕의 분노는 복수심으로 변했다. 대주교의 친척들은 박해와 재산 몰수, 처형을 당했고; 주교들 중에서 필립의 적들과 솔로베츠키 수도원 수도사들 중의 거짓 증인들은 주교를 비방하며, 그중에서도 특히 그가 주술을 행했다는 터무니없는 혐의를 씌웠다; 마침내 이미 순교의 길을 걷기 시작한 대주교에 대한 교회 재판이 열렸다. 재판부는 그에게 성직 박탈과 트베리 오트로치 수도원 유배를 선고했다. 1569년 12월 23일, 수도원에 악명 높은 말류타 스쿠라토프가 나타났다. 그는 차르 이반 4세의 악행에 있어 주요 조력자이자 직접적인 집행자였으며, 순교자를 목 졸라 죽였다.

1590년, 솔로베츠키 수도원의 원장(수장)은 이반의 아들인 표도르 차르에게 순교자의 유해가 담긴 관을 자신의 수도원으로 옮길 수 있도록 허락을 청했고, 이를 허가받았다. 무덤을 개장했을 때 순교자의 유해는 썩지 않은 채로 발견되었다. 솔로베츠키 수도원의 그의 무덤에서는 치유와 다른 기적들이 일어났다. 1636년 순교자는 성인으로 시성되었고, 1646년 그의 유해는 수도원 대성당으로 이장되었다. 몇 년 후인 1652년, 알렉세이 차르는 당시 노브고로드 대주교였던, 훗날 총대주교가 될 니콘을 단장으로 한 특별 사절단을 솔로베츠키 수도원으로 파견했다. 사절단은 성인의 유해를 모스크바로 운반했다. 성 필립을 기리는 예배에서 교회는 그를 ‘진리의 수호자’라고 칭하며, 이를 통해 차르 이반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표현한다.

 

9. 16세기와 17세기의 수도 생활

16~17세기는 러시아 수도원의 위기와 세속화의 시대라고밖에 할 수 없지만, 그 시기에도 또 다른 종류의 현상들이 나타나곤 했다. 재 밑의 불씨처럼, 수도원 담장 안에는 진정한 기독교적 수행의 등불들이 숨어 있었다. 두터운 종교적 형식주의와 무관심의 벽을 뚫고 진정한 금욕주의의 정신이 솟아올랐으며, 수많은 수도자들 중에서 이 비통한 시대의 수행자상을 몸소 구현한 몇몇 인물들이 두각을 나타냈다. 대개 이 수행자들은 14~15세기에는 수도 생활과 세속을 버리는 삶의 중심지였던 크고 명성 높은 수도원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피신했다. 러시아의 경건함과 거룩함은 점차 세상에서 숨어 지내다가,  18~19세기에 이르러 조심스럽고 마치 겁에 질린 듯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으니, 마치 타오르는 불꽃이나 햇살처럼, 끈질기게 그것을 찾는 신을 사랑하는 자나, 그 시대의 수도원 생활 깊숙이 시선을 꿰뚫고자 하는 연구자에게만 비로소 드러나는 것이었다.

연구자에게 있어 어려움은 또한 이 시대를 다룬 러시아 성자전 문헌이 14~15세기를 다룬 문헌만큼 풍부하지 않다는 점과도 관련이 있다. 여기서는 두 가지 사정을 고려해야 한다. 마카리우스 대주교의 활동과 여전히 살아 숨 쉬던 금욕적 전승은 14~15세기에 대한 관심, 즉 그 시대 성인들의 위업을 문학적으론 묘사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이후 수도원 생활의 세속화와 수도사들의 생계 관리로 인해 문학적 활동을 위한 시간도, 힘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17세기에는 수도자 계층에서 우리가 이전 세기 전반기에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저술가나 작가들이 나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세기의 영성 중 일부는, 만약 표트르 시대의 격변이 교회의 모든 삶을 그토록 강력하게 뒤흔들지 않았다면, 문학에 반영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많은 것이 상실되었고, 일부는 단편이나 전설, 민간의 기억 속에만 남아 있었다. 비록 이러한 자료가 민속으로 전해지게 된 것은 동시대인들의 신뢰할 만한 증언이 성실한 수도사의 손길로 종이에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수도계 자체도 더 이상 자신들의 공동체 내에서 나타나는 많은 영적 현상들을 주목하거나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 금욕적 위업에 대한 숭배와 그 의미에 대한 이해는 더 이상 예전처럼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이 모든 것에서 알 수 있듯이, 16~17세기의 소수 수행자들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너무나 부족하다.

정신적으로 15세기 수도 생활에 속해 있던 몇몇 수행자들의 이름은 이미 언급된 바 있다(제4장). 그들은 수도 생활의 위기가 이미 드러나기 시작한 과도기에 살았다. 그들은 모스크바 루스의 수도 생활이 보여준 금욕적 위업의 마지막 빛을 간직하고 있었으며, 새로운 시대의 문턱에 서 있던 경건한 수행자들의 삶은 바로 그 빛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두 시대에 모두 속해 있었다.

러시아 교회의 성인력에는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에 걸쳐 전 교회에 의해 시성된 성인은 적고, 지역적으로 숭배받는 성인이 더 많다. 아마도 이는 러시아 교회가 총대주교 시대와 시노드 시대에 시성 문제에 대해 가끔씩만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일 수 있는데, 비록 민간의 경건함은 아직 시성되지 않은 많은 수행자들을 성인으로 숭배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마카리우스 대주교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상부에서 주도하는 시성 추진은 17~19세기에 매우 드문 현상이었습니다. 따라서 러시아 정교회는 공식적으로 시성되지는 않았지만 진정으로 하느님께 기쁨을 드린 수많은 수행자들을 알고 있으며, 바로 그들 안에서 기독교의 정신이 빛나고 있고, 이 빛은 시대의 어둠을 누그러뜨린다[725] .

14~15세기의 수행자들을 본받아 세상에 대한 엄격한 단절을 실천한 금욕적 정신은, 성 키릴 노보예제르스키(† 1532), 코르닐리 코멜스키(† 1537), 알렉산드르 스비르스키(† 1533)에게서 살아 숨 쉬었다[726] . 17세기 초, 성 키릴의 행적이 기록되었으며, 그의 무덤에서 나타난 17가지 사후 기적에 관한 이야기(1648년까지)가 전해졌다. 1648년에 그는 성인으로 시성되어 전 교회에서 공경받게 되었다[727] . 순교 직후부터 지역적인 숭배를 받았던 성 코르닐리우스에 대한 전 러시아 교회 차원의 시성식은 1600년 총대주교 요브에 의해 거행되었다[728] . 성 알렉산드르 스비르스키는 이미 1547년 공의회에서 시성되었다. 극북 지역에서는 ‘시이(Sii)의 안토니’로 불리며 엄격한 수도 생활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 있었다. 그는 사제 수도사로서 시이 강(홀모고르스키 우예즈드) 기슭에 은둔처를 세웠는데, 이곳은 훗날 광대한 토지를 소유한 수도원으로 성장했다. 안토니는 성화화가로도 유명하며, 화재 후에도 훼손되지 않고 남아 있는 그의 ‘성 삼위일체’ 성화는 러시아 북부의 가장 위대한 성물 중 하나로 꼽힌다. 1579년, 안토니는 전 러시아의 성인으로 시성되었다[729] .

모스크바 지역에서는 특히 닐 스토로벤스키(† 1554)와 니칸드르 프스코프스키(† 1581)라는 두 인물이 두드러집니다. 두 사람 모두 은둔자의 삶을 살았는데, 전자는 셀리거 호수에 위치한 섬의 동굴에서 20년 넘게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채 살았고, 후자는 침묵의 수도자로 수행했습니다. 닐은 수도원도, 은둔처도 세우지 않았다. 오직 그가 세상을 떠난 후, 그가 수행하던 자리에 은둔처가 생겨났고, 이는 훗날 부유한 수도원이 되어 수많은 순례자들을 끌어모았으며, 19세기에는 러시아 중부 지역에서 가장 숭배받는 성지 중 하나가 되었다. 아마도 이미 16세기 말 무렵, 닐은 지역적으로 숭배받는 성인으로 추앙받았을 것이다[730] . 니칸드르의 생애는 닐의 생애만큼 평화롭지 않았으며, 그를 찾아오는 방문객들로부터 숨기 위해 여러 번 이곳저곳을 옮겨 다녔다. 그가 세상을 떠난 곳에는 나중에 블라고베셴스카야 수도원이 세워졌으며, 1686년에 니칸드르는 그의 무덤에서 나타난 기적들로 인해 성인으로 추대되었다[731] .

이미 언급된 수행자들 외에도, 러시아 교회의 성인력에는 수도 생활을 했으며, 겸손한 삶과 세속을 버린 태도, 경건함으로 인해 주변 주민들에게 하느님을 기쁘시게 한 사람들로 숭배받았고, 이후 지역적으로 숭배받는 성인으로 시성된 수많은 성인들의 이름이 실려 있다[732] .

17세기 러시아 성인들의 위업에 대한 기록을 읽다 보면 두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은둔 생활과 폐쇄된 은신처에 대한 비교적 광범위한 경향이며, 둘째, 무거운 사슬을 차는 것과 같은 육체적 고통을 통해 육신을 죽이려는 열망이다. 이전에는 이러한 현상이 러시아의 경건한 수행자들 사이에서 특별히 널리 퍼져 있지 않았다.

아마도 수도사가 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는 갈락티온 볼로그다스키(† 1612)는 자신의 오두막에서 은둔자이자 기둥 수도자의 삶을 살았다. 그는 자신을 사슬로 벽에 묶어두고, 작은 창문을 통해 빵과 물로만 구성된 음식을 받아 먹었다; 그는 자신이 살던 볼로그다 시가 폴란드군에게 함락될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이는 1613년에 실제로 일어났으며, 갈락티온 자신은 폴란드 병사들의 손에 의해 순교자로 생을 마감했다[733] . 그의 동시대인인 로스토프 근교 보리소글레브 수도원의 이리나르흐(† 1616)는 수도원 형제들이 그의 지나치게 엄격한 생활 방식에 불만을 품었기 때문에 수도원을 떠나야만 했다. 그의 행적은 ‘스무타’ 시대에 수도원 생활이 쇠퇴했음을 보여준다. 이리나르흐는 다른 수도원으로 옮겨가 다리와 어깨에 무거운 쇠사슬을 채운 채 방에 틀어박혔다. 그러나 3년 후, 그는 보리소글레브스키 수도원으로 돌아와 다시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의자에 몸을 묶었고, 그런 자세로 30년 넘게 살았다[734] . 볼고그 주 토템스키 현에서도 바시안(† 1624)이, 토템스키 또는 틱센스키라고 불리며, 이와 같은 고행을 실천했다. 그는 은둔자로, 자신의 방에서 무거운 사슬로 벽에 묶인 채 살았으며, 작은 창문을 통해 음식을 받았고, 성찬을 받기 위해 가끔씩만 교회로 나갔다. 솔로베츠키 수도원의 수도사 디오도르(† 1633)는 은둔자 로 살았다. 수도원 생활에 만족하지 못한 그는 벨로모르의 작은 섬으로 옮겨갔다가, 오네가 강을 따라 울창한 숲으로 들어갔고, 마침내 올론츠 시 근처에 은둔처를 세웠다. 추도프 수도원의 생활 방식에 불만을 품은 또 다른 수도사 니코딤은 수도원을 떠나 북쪽으로 향했고, 카르고폴 현의 광활한 늪지 한가운데 자리를 잡았다. 그의 혹독한 생활에 대한 소식이 모스크바까지 전해졌다. 니코딤은 30년 넘게 늪지 한가운데서 지내다가 1640년에 세상을 떠났다.[735] 시몬 볼롬스키(† 1641) 역시 은둔자로, 울창한 볼고그 숲속으로 피신했으나 인근 마을 농민들에게 살해당했는데, 농민들은 그가 수도원을 세우려 하고 있으며 그러면 그들의 땅이 수도원에 넘어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원주민인 보굴족에게 기독교를 전파했던 엄격한 수행자 시메온 베르호투르스키(† 1642)와, 펄펄한 페름 숲속에 은둔처를 세운 레오니드 우스트네두姆斯키(† 1654)도 있었다.[736] .

솔로베츠키 수도원의 생활 방식은 진정한 수행자의 삶을 추구하던 수도사 엘레아자르로 하여금 수도원을 떠나게 만들었다. 그는 안제르스키 섬(수도원에서 약 25km 떨어진 곳)에 정착했고, 몇 년 후 그 주위에 혹독한 수행을 추구하는 다른 수도사들이 모여들자 엘레아자르는 스키트를 설립하기로 결심했다. 수도사들의 거처는 서로 1베르스타 간격으로 떨어져 있었다. 오직 토요일 저녁에만 스키트 수도사들이 모여 공동 저녁 예배와 일요일 성찬식을 드린 뒤, 다시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스키트의 규율은 매우 엄격했으며, 엘레아자르 자신의 삶 자체가 수도원 형제들에게 본보기가 되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엘레아자르는 자신의 스키트를 위해 규율을 제정했다. 그는 1656년에 세상을 떠났다.[737] 스키트 수도사 엘레아자르의 삶에서 우리는, 당시 이미 심각한 세속화를 겪었던 공동 생활 수도원들과는 대조적으로, 오랜 공백 끝에 고대 스키트 규율에 따른 수도원 체제로 돌아가려는 시도를 볼 수 있다.

여기서 언급된 금욕주의자들의 생애를 살펴보면, 당시 수도원에서 형성된 상황에 모두가 만족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불만은 수행자들이 수도원을 떠나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삶 속에서 구원을 찾도록 만들었다. 울창한 숲과 늪지 한가운데, 그리스도를 위해 방해받지 않고 수행할 수 있는 외딴 곳을 찾아 나선 것은, 새로운 금욕주의 경향이라기보다는 수도원 생활의 세속화에 대한 불만을 더 잘 보여준다. 이 17세기의 수행자들은 더 이상 수도원 생활에 전반적인 활기를 불러일으킬 수 없었다. 그들은 각자의 개성을 지닌 고독한 존재로 남았을 뿐, 17세기 수도자 집단의 전반적인 정서와 견해에 어떤 변화도 보여주지는 않았다.

 

10. 수도사들의 선교 활동

모스크바 국가의 영토 확장 및 이교도 민족과 부족들의 편입은 러시아 교회에 이들 민족 사이에서 기독교를 전파할 기회를 제공했다. 수도계는 물론 이 활동에서 마땅한 위치를 차지해야 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분야에서 수도계는 필요한 만큼의 노력을 기울이지 못했다. 교회 지도부 측에서는 수도 공동체의 영적 역량을 이 사명 수행에 집중시키기 위해 너무 적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모스크바 정부는 주교단과 수도원에 대한 선교 과제의 중요성을 여러 차례 강조한 바 있다[738] . 이 분야에서도 개인 수도자들의 자발적인 노력이 더 큰 의미를 지녔다. 기념비에는 수도복을 입은 선교사들의 이름이 모두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니며, 특히 시베리아와 같은 외딴 지역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이미 우리에게 잘 알려진 프스코프-페체르스키 수도원의 원장 코르닐리우스는 설교로 큰 성공을 거둔 선교사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이교도인 에스토니아인들 사이에서 설교했으며, 16세기 중반 이 지역에 침투해 온 칼빈주의자들과도 논쟁을 벌였다.[739] .

북부와 북서부 지역, 특히 라도가 호수 주변 지역에서는 발라암 수도원의 수도사들이 이교도인 카렐족에게 기독교를 전파했는데, 그중에서도 아르세니이 코네브스키(† 1447)는 특별히 언급할 만하다. 북부의 이교도 민족들 사이에서 성 키릴 첼모고르스키(† 1367)는 성공적으로 선교 활동을 펼쳤다[740] .

페름과 비얏스크 지방에서는 성 스테판 주교(† 1396)가 큰 헌신으로 기독교 전파 사업에 힘썼으며, 주교 피티림(† 1455)이 그의 사역을 성공적으로 이어갔으며, 16세기 말에는 성 트리폰 비얏스키(† 1613)가 활동했고, 피스코르 수도원의 수도사들도 기독교 전파를 위해 많은 공헌을 했다. 극북의 포모리예 지역에서는 15~16세기에 솔로베츠키 수도원[741] 이 기독교 신앙의 요새가 되었는데, 러시아 기독교 선교 역사에서 두 인물이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바로 테오도리트 콜스키와 트리폰 페첸그스키이다.

1480년경에 태어난 테오도리트는 14세에 솔로베츠키 수도원에 입소하여 수도사가 되었고, 15년 동안 수도사 조시마의 영적 지도 아래 그곳에서 지냈다; 그 후 그는 성 알렉산드르 스비르스키 수도원으로 옮겼고, 거기서 키릴로-벨로제르스키 수도원으로 갔으며, 1529년경 솔로베츠키 수도원으로 돌아와 조시마가 세상을 떠난 후 은둔자의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테오도리트는 콜라 강변의 외딴 황무지를 찾아, 미트로판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은둔자와 함께 그곳에서 거의 12년 동안 세상에 대한 완전한 단절과 은둔 생활을 보냈다. 1540년, 두 은둔자는 노브고로드의 마카리 대주교를 찾아갔고, 대주교는 테오도리트를 사제 수도사로 서품하고 자신의 영적 지도자로 임명했다. 1542년, 마카리우스가 모스크바 대주교가 되자, 테오도리트는 몇 명의 수도사와 함께 다시 콜라로 돌아가 그곳에 트로이츠키 수도원을 세웠다. 이미 솔로베츠키 수도원에 머물던 시절 테오도리트는 로파르족의 언어를 익혔으며, 이제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그의 선교 활동은 매우 성공적이었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수행자의 금욕적인 엄격함에 불만을 품은 수도원 형제들과의 갈등이 그의 활동을 방해했고, 결국 테오도리트는 자신이 세운 수도원을 떠나야만 했으며 선교 활동을 중단해야 했다. 그 후 그는 몇 년 동안 벨로제르스크 지방에 있는 작은 은둔처의 원장으로서 지내며, 그곳에서 무소유자들과 장로 아르테미우스와 친분을 쌓았다. 1551년, 아르테미우스가 잠시 트로이체-세르기예프 수도원을 관리했을 때, 차르는 그의 추천에 따라 테오도리트를 수즈달의 예프피미예프 수도원의 아르히만드리트로 임명했다. 1554년 공의회에서 바슈킨과 아르테미우스의 사건을 논의할 때 테오도리트의 이름도 거론되었으며, 그는 아르테미우스의 동조자로 누명을 쓰고 키릴로프 수도원으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1557년, 그는 차르의 지시를 받아 콘스탄티노플로 갔다가, 이반 4세의 대관식을 승인하는 총대주교의 서한을 거기서 가져왔다. 콘스탄티노플에서 돌아온 후 테오도리트는 볼로그다 근처의 프릴루츠키 수도원으로 피신했고, 그곳에서 다시 콜라로 떠나 기독교를 전파했다. 테오도리트는 1577년경에 세상을 떠났다. 이처럼 이 엄격한 수행자의 삶은 당대 교회·정치적 사건들의 소용돌이에 얽혀 있었으나, 동시에 러시아 수도원 역사에서 주목할 만한 모범으로 남아 있다[742] .

또 다른 선교사인 성 트리폰 페첸기스의 삶은 테오도리트의 삶보다 더 평화로웠다. 그의 행적은 우리에게 전해져 내려왔다. 청년 시절 그는 부모의 집을 떠나 노브고로드의 숲에서 은둔자의 삶을 살았다. 그 후 그는 북쪽 콜스카 지역으로 떠나, 페첸가 강 기슭에서 테오도리트의 선교 활동이 시작되기 전부터 그곳의 토착 이교도인 로파르족에게 복음을 전파했다. 그 후 트리폰은 교회 건축 허가와 복음 전파에 대한 축복을 받기 위해 노브고로드로 먼 여정을 떠났다. 그는 몇 명의 장인들과 함께 돌아와 교회를 지었다. 이미 러시아 정착지가 된 콜에서 트리폰은 한 수도사를 만나 교회를 봉헌받고, 그 수도사로부터 수도자 서원을 받았다. 이제 그는 이교도들에게 세례를 줄 수 있게 되었고, 그의 교회는 선교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나중에 트리포프는 교회 옆에 수도원을 설립했고, 1556년에는 차르로부터 인접한 토지와 어장을 하사받는 칙서를 받았다. 그는 개종한 원주민들을 위해 두 번째 교회를 지었고, 1583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거의 30년 동안 기독교를 전파했다.[743]

모스크바 정부는 포니조비예 지역의 기독교 선교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으며, 이는 이 지역에 대한 수도원의 집중적인 정착 활동으로 나타났습니다(제7장 참조). 1555년 구리아 주교(1555–1563)가 카잔의 초대 대주교로 임명되었을 때, 그에게 이교도와 무슬림의 기독교 개종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일 것을 지시받았다[744] . 당시 많은 귀족 타타르인들이 기독교 교육과 개종을 위해 여러 수도원으로 보내졌으며; 세례를 받은 신자들은 자신의 소유지를 유지할 수 있었다[745] . 수도원과 심지어 본당 교회들조차 많은 토지를 받았는데, 예를 들어 카잔 현에서는 이미 16세기 말에 경작지의 65%가 교회 기관의 소유였다. 앞서(제7장과 제8장)에서 우리는 포니조프 수도원들의 부의 축적 과정을 상당히 상세히 살펴보았으며, 정부가 왜 그러한 정책을 펼쳤는지도 설명했다. 그러나 카잔 대주교 예르모겐(1589–1606)의 보고서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선교 활동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는데, 이는 무슬림 성직자들이 점차 타타르 주민들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해 나갔기 때문이다[746] . 17세기에도 수많은 수도원에서 특히 활발한 선교 활동은 관찰되지 않았다. 게다가 라진 봉기(1667–1671)와 같이 많은 타타르인이 참여한 정치적 상황의 악화는 이미 세례를 받은 사람들의 신앙 이탈로 이어졌으며, 정부는 이에 대응하는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747] . 리아잔 교구에 속했던 포니조비야의 남서부 지역에서는 토착 주민이 이교도인 모르드바족과 무슬림 타타르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곳에서는 17세기 중반 남쪽으로 확대된 식민지화(샤츠키, 탐보프스키, 카돔스키 우예즈드)와 관련하여, 리아잔 대주교 미사이일(1651–1656)이 특히 활발한 선교 활동을 펼쳤다. 이 지역에도 몇 개의 수도원이 설립되었으나, 그중에서 특별히 언급할 만한 곳은 푸르디셰프스키 수도원[748] 뿐이다.

시베리아에서는 수도원과 도시가 동시에 건설되었다. “도시가 있는 곳에는,” 시베리아의 첫 번째 역사학자 슬로브초프가 썼듯이, “군사 총독의 통치 기관, 화기, 그리고 교회 외에 수도원이 있다”[749] . 그러나 이곳에서의 기독교화 과정은 매우 더디게 진행되었다; 1620년, 토볼스크에 별도의 교구가 설립되었을 때, 그 첫 주교인 키프리아노스(1621–1624)는 필라레트 총대주교로부터 이교도와 무슬림의 개종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라는 지시를 받았으며, 키프리아누스는 심지어 복음 전파를 위해 특별히 몇 명의 수도사를 데리고 토볼스크로 향하기도 했다. 그의 후임자인 마카리우스 주교(1624–1635)에게는 이교도 개종에 대한 상기 내용을 담은 특별 서한(“파미야트”)이 모스크바에서 보내졌다[750] . 이세티 강변에 위치한 우스펜스키 수도원(1644년 수도사 달마트에 의해 설립되어 달마트 수도원으로 알려져 있음)에 대해서는 특별히 언급할 필요가 있다. 이곳에서 수도 생활을 하던 수도사들은 선교 활동을 주저하지 않았다. 1681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동부 시베리아를 위한 특별 선교단이 조직되었는데, 테오도시이 수도원장과 그와 함께한 12명의 수도사가 셀렝긴스크로 파견되어 모든 이교도들을 정교회 신앙으로 개종시키도록 했으며, 명령에 따라 어떠한 강압도 없이 이를 수행해야 했다. 흥미롭게도, 표트르 대제( ) 페도르 차르는 1682년 공의회에서 이교도 개종을 위해 동시베리아에 새로운 교구를 설립할 것을 제안했으나, 주교들은 이 제안을 기각했고, 토볼스크에서 수시로 수도사와 사제들을 동시베리아로 파견하는 것만 결정되었다[751] .

선교 활동의 규모가 이토록 미미했던 이유는 주로 수도사들의 교육 수준이 부족했고, 교회 지도부 측에서 복음을 전파하려는 주도권과 열의가 거의 전무했기 때문이다. 다음 세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러시아에서 선교 활동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으나, 이는 정치적 고려에서 비롯된 정부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11. 수도원의 사회·자선 활동

다양한 역사적 문서를 통해 16~17세기 이전에도 수도원들이 자선 활동을 펼쳤음을 알 수 있다. 16세기의 토지 대장에는 수도원 소유의 토지와 농장을 기술할 때, 수도원의 구제금이나 자선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특별한 보호소[752] 가 매우 자주 언급된다. 성녀 에우프로신은 자신의 수도원 규약에서 별도의 장(24장)을 자선 활동에 할애했으며, 그녀의 규약에 따르면 수도원은 신도들이 수도원에 머무는 첫 3일 동안 무상으로 식사를 제공해야 한다[753] . 닐 소르스키나 아르테미오스와 같은 비재물주의자들은 자신의 저술에서, 수도원에 재산이 있다면 이를 가난한 이들을 돕는 데 사용해야 한다고 썼다. 요시프파의 파프누티 보로프스키와 요시프 볼로츠키는 자신들의 수도원에서 가난한 이들에게 음식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흉년에는 인근 마을에 밀과 기타 식량을 지원하기도 했다. 키릴로프 수도원[754] 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이미 8월 15일, 성모 승천 축일—수도원 성당의 주보 축일—에 요시포프 수도원에서 거지들에게 돈을 나눠주었다고 언급한 바 있다. 트로이체-세르기예프 수도원은 자선 활동으로 특히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곳에는,” 게르베르슈타인(16세기 2분기)이 썼듯이, “매년 수많은 사람들이 성지를 참배하기 위해 몰려든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모여도 모두에게 항상 음식이 충분하며, 수도원 종업원들의 생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만큼은 항상 남기 때문에, 그곳에는 결코 부족함도, 과잉도 없다.” 외국인들은 다른 수도원들의 자선 활동에 대해서도 기록했습니다[755] . 1649년 법령에 따르면, 수도원 구역에 거주하며 수도원에서 식량을 공급받는 거지들은 교회 법원의 관할을 받습니다[756] .

카잔을 정복한 후, 차르는 포로들을 기독교 교육을 위해 각 수도원으로 보내도록 명령했고, 새로 세례를 받은 이들은 수도원의 지원으로 생활했다[757] . 17세기에는 모스크바의 총대주교 관할 구역 내 수도원 소유지에서 발생한 수입을 통해 412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지 보호소가 설립되었으며, 주요 명절에는 교회에서 자선을 베풀었다. 추도프 수도원은 매년 성탄절, 부활절, 용서의 주일에 모스크바 감옥에 수감자들을 위해 빵, 구운 생선, 죽, 크바스, 그리고 현금 선물을 보냈다. 노브고로드 대주교 이오브(17세기 말)는 노브고로드에 있는 빈민 보호소, 두 개의 병원, 두 개의 야간 보호소[758] 를 운영하기 위해 교구 수도원들의 재정에서 상당한 자금을 지원했다. 모스크바 근교의 사브보-스토로제프스키 수도원에는 수도사와 평신도를 위한 48개 병상을 갖춘 두 개의 병실이 있었다. (당시의 상황을 잘 보여주기 위해, 세속 권력과 차르 자신이 수도원의 일상생활에 얼마나 사소한 부분까지 간섭했는지를 설명하자면, 1688년에 차르는 병상 수를 30개로 줄이라고 명령했다는 점을 언급할 수 있다[759] .)

대혼란(스무타) 이후 일부 수도원에는 고아원이 생겨났다. 이러한 시설의 설립은 정부의 마음에 들었으며, 세기 중반(1651년) 트로이체-세르기예프 수도원에는 전투에서 전사한 군인들의 자녀인 많은 고아들이 보내졌다 ; 당시 그곳에는 최대 600명의 고아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숙소와 생계를 제공받을 뿐만 아니라 읽기, 쓰기, 그리고 수공예도 배웠다. 1636년의 서신에서 알 수 있듯이, 많은 수의 아이들이 솔로베츠키 수도원에 그들을 위해 특별히 지어진 집에 배치되었는데, 그곳에서 아이들은 수도원의 지원으로 생활했으나, 그 대가로 수도원 텃밭에서 가벼운 일을 해야 했다[760] . 키릴로-벨로제르스크 수도원의 고아원은 특히 잘 조직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각 방에 배정되었으며, 수도원에서 음식과 옷을 제공받았고 부활절에는 선물을 받았다. 고아원은 ‘고아들을 위한 장로’라는 특별한 수도사 교육자가 관리했다. 아이들은 다양한 일을 했으며, 나이가 많은 아이들은 정원에서 일하거나 수도원 부엌에서 조수로 일했다. 18~20세가 되면 그들은 이미 ‘데테니샤’(이에 대해서는 제8장 참조)로 불렸으며, 수도원으로부터 토지가 딸린 마당을 받아 그곳에서 농사를 지으면서도 수도원을 위해 몇 가지 일을 계속 수행했다. 일부는 마부로 일했고, 어떤 수공예를 배운 이들은 수도원 마을에 정착하여 수도원 장인들로 편입되었다. 고아들은 주로 수도원 소유지에 위치한 마을 출신이었다[761] .

여기서는 단지 몇 가지 사례만 언급되었을 뿐이며, 물론 이것이 수도원의 자선 활동 전체를 파악하기에는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이 사례들만으로도 이 분야에서 많은 선행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스무타’ 시기 및 전쟁 기간 동안 여러 수도원의 국고에 막대한 금액이 납부되었다는 사실을 언급한 바 있으며, 이 납부금은 매우 거액에 달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수도원 소유지는 국가와 사회 모두에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제10장. 16~17세기 수도 생활과 교회 문헌

 

1. 옹호적·논쟁적 저작들. 이구멘 요시프 볼로츠키

교회-정치 저널리즘 분야에서 수도자 대표들의 활동은 16세기 전반 루스의 교회 및 정치 생활에 지극히 중요했으나, 수도자들은 이 분야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활약했다. 세속화 과정에도 불구하고, 수도자 계층에서는 여전히 많은 뛰어난 인물들이 배출되었는데, 이들은 국가의 교회 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거나, 교회 생활의 특정 현상에 대한 입장을 글로 표현하는 것을 자신의 의무로 여겼다. 이러한 종교적 책임감은 특히 15세기 마지막 25년과 16세기 전반에 걸쳐 신자들의 다양한 계층에서 위험한 종교적 동요가 드러났을 때, 변증적 저작을 써야만 했던 수도자들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한편으로 이러한 동요는 외국의 영향 없이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순전히 러시아 교회 생활의 여건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했다. 당시 등장한 새로운 사조들에서 정교회 교리로부터의 명백한 일탈이 드러나자, 교회 지도부와 수도자들은 즉시 이단적 동요에 맞서 적극적으로 맞서기 시작했다. 그 결과, 저자들의 신학적 소양을 입증하는 동시에 교회계의 종교성이 지닌 특징을 반영하는 변증론적·논쟁적 저작들이 등장했다.

앞서 언급된(제4장, 3절) 유대교화 이단 운동은 광범위하게 확산될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으며, 교회가 이에 맞서 단호한 투쟁을 벌이도록 강요했다. 특히 노브고로드 성직자 중 일부가 이단에 연루되어 있었고, 심지어 대주교 조시마(1490–1494)조차 유대교화주의자들의 견해에 일정한 경향을 보였기 때문이다[762] .

이 종파의 대표자들과 그 교리에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이구멘 요시프 볼로츠키는 논쟁가, 옹호자, 그리고 이단에 대항하는 가장 적극적인 반대자로서 특별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매우 방대한 저서를 집필했는데, 이 책은 나중에 『계몽자』라는 제목을 얻게 되었다. 이 책은 의심할 여지 없이 고대 러시아 교회 문헌 중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이며, 이는 러시아 역사학자들[763] 과 근대에 홀츠바르트[764] 가 수행한 철저한 연구를 통해 입증되었다.

『계몽자』는 16개의 장, 즉 ‘말’로 구성되어 있으며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 12장은 논쟁적·변증적 내용을 다루고, 마지막 4장에서는 이단자들과의 투쟁 방안에 대해 논의한다. 『계몽자』는 유대교적 경향을 띤 자들[765] 의 견해를 파악할 수 있는 주요 자료일 뿐만 아니라, 요세프의 신학적 소양과 그 시대 전반의 신학적 지식에 대한 통찰을 제공해 준다.

첫 번째 설교에서 요세프는 성 삼위일체를 부정했던 이단자들을 반박하며, 성 삼위일체에 대한 정통 교리를 설명하는데, 이는 그가 니콘 체르노고르츠(11세기)의 저서에서 거의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766] . 유대교화파의 성 삼위일체 부정은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 부정과도 연관되어 있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에 불과했다. 유대교화 경향자들은 또한 그분의 부활에 관한 교회의 교리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요셉은 이 오류에 대해 자신의 두 번째 설교를 바쳤는데, 그 안에서 그는 이단자들을 그들의 무기로 물리치기 위해 구약의 선지자들의 인용문을 근거로 삼았다. 세 번째 설교에서 저자는 오직 모세의 율법만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에 반박하며, 네 번째 설교에서는 유대주의자들이 부정했던 신적 가정의 질서와 하나님의 전능함에 대해 논한다. 그 뒤를 잇는 세 편의 글(다섯 번째, 여섯 번째, 일곱 번째)은 주로 성상 숭배에 관한 것으로, 요세프는 교회 교부들(요한 황금입, 요한 다마스쿠스, 안드레아 크리토스, 요한 사다리꾼 등)의 수많은 인용문을 근거로 삼고 있다. 특히 일곱 번째 설교는 매우 상세하게 다루고 있는데, 요셉은 여기서 다양한 주제의 성상에 대해 설명하고 성상 숭배의 의미 전반에 대해 논한다. 그의 설명이 완전히 독창적인 것은 아니지만(그는 여기서 성상 반대론자들을 비판한 다마스쿠스의 유명한 저작들을 인용하고 있다), 이 설교는 문체의 순수함과 명료함, 그리고 그 안에 드러난 강한 신앙심으로 돋보인다. 제9장과 제10장은 사도들의 저술과 교회 교부들의 저작을 거부하던 이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데 전념하고 있다. 제11장과 제12편에서 요세프는 수도 생활의 종교적 의미를 설명한다.

이 12편의 글은 『계몽자』[767] 의 신학적 부분을 구성하는 동시에 요세프의 학식을 잘 보여준다. 그는 끊임없이 구약과 신약을 인용하며, 성경을 자주 인용한다. 구약성경에서 가져온 수많은 인용문은 요세프의 논증 기술을 보여준다. 그는 신약성경을 거부하던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을, 그들이 인정하는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반박한다. 요시프는 자신의 종교적·교리적 견해에서 성경뿐만 아니라 모든 ‘신성한 저작물’의 무오성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는데, 여기에는 성부들의 저작, 순교 기록, 성자 전기, 심지어 일부 외경 저작들[768] 까지 포함된다. 이러한 점에서 요셉 은 확고한 신념으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전형적인 고대 러시아 신학자로, 또한 성경과 교회 전승이 동등한 중요성과 동일한 권위를 지닌 고대 러시아의 인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요시프는 교리와 예배, 심지어 전례적 전통까지도 서로 분리하지 않으며, 그에게 있어 이 모든 것은 서로 밀접하게 얽혀 있으며, 종합적으로 종교적 가르침과 신앙의 내용을 구성한다. 주목할 점은 요시프가 성상 숭배 문제에 무려 세 개의 장(다섯 번째, 여섯 번째, 일곱 번째)을 할애함으로써, 이것이 정교회 세계의 종교 생활에서 얼마나 큰 의미를 지녔는지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후에 우리는 16세기 러시아 종교성의 또 다른 대변자인 장로 아르테미우스가, 비록 그의 기독교적 견해가 요세프의 견해와 여러 면에서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성 요세프와 마찬가지로 열정적으로 성화 숭배를 옹호하며 이에 동등한 종교적 중요성을 부여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이러한 교리와 숭배의 융합은 모스크바 루스의 종교성이 지닌 특징이다. 17세기 분열의 시대에 이러한 동일시 현상은 비극적인 사건으로 이어지며, 자신의 신념을 굳건히 지키는 사람들을 순교의 길로 이끌게 된다. 이를 형식주의라고 부르거나 종교 생활의 경직성으로 설명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세속적인 것 속에서 천상의 것을, 인간적인 것 속에서 신성한 것을 보는 이러한 유형의 종교성은 아직 심도 있는 고찰과 연구가 필요하다.

『계몽자』의 마지막 네 단어는 이단과 싸우는 수단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 구절들은 요시프의 인격을 특정한 방식으로 잘 드러내고 있다. 바로 이러한 그의 견해로 인해, 이단을 근절하고 그 주동자들을 처벌하기 위해 교회와 교회 지도부, 그리고 세속 권력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지에 대해 매우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다. 게다가 세속 권력이 교회 내의 자유사상가들, 즉 이단자들에 대해 조치를 취할 권한이 있는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었다.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해 요세프는 모두 긍정적으로 답한다. 대공은 하나님으로부터 권력을 부여받은 기독교 군주로서, 이단적 왜곡으로부터 신앙의 순수성을 수호하고 이단자들을 처벌할 의무가 있다. 이러한 견해는 특히 제14편에서 매우 뚜렷하게 드러나는데, 요세프는 이 글에서 대공에게 이단자들을 “잔혹한 형벌과 죽음”[769] 에 처할 것을 요구한다.

요세프는 세 편의 특별 서한에서도 이단자들에 대한 처벌을 강력히 주장한다. 니폰트 주교에게 보낸 서한(1493년)에서 요세프는 이단자들이 투옥뿐만 아니라 사형에 처해져야 마땅하며, 이단에 가담한 주교들만이 사형에서 제외되어야 한다고 썼다[770] . 대공 이반 3세가 이단자들에 대해 단호한 조치를 취하도록 촉구하기 위해, 요세프는 1504년에 그의 영적 지도자에게 서신을 보내, 그 안에서 다시 한번 이단자들의 처벌과 처형에 대해 언급했다[771] . 그는 대공 바실리에게 보낸 서한(1505년 이후)에서도 같은 내용을 언급하며, 죄인과 이단자들은 인간의 손길뿐만 아니라 교회의 저주를 통해서도 소멸시키고 처벌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다[772] . 이러한 견해는 다른 요시프파 신자들도 공유했다. 예를 들어, 대주교 다니일은 저서 『권세자들에게 어떻게 순종하고 그들에게 존경을 표해야 하는가』에서 세속 권력을 통해 이단자들과 싸워야 할 필요성에 대해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773] .

유대교적 이단과 싸우는 방법에 대한 요세프의 견해, 특히 이단자들을 처형해야 한다는 끈질긴 요구는 다른 수도자 집단, 즉 볼가 강 건너편 수도원의 비재물주의자들로부터 단호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요시프의 주장을 단순히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 문제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를 밝히는 것을 사명으로 여겼다. 『볼고다 수도원 장로들의 요시프에 대한 서한』은 아마도 수도사 공작 바시아ンの 조언이나 도움 없이는 작성되지 않았을 것이다[774] . 『서한』의 서문(“볼고그 모든 수도원의 장로들이 모여 이 일에 힘썼다”)에서 알 수 있듯이, 비재물주의자들의 입장은 최종적인 형태를 갖추기까지 사전 논의의 결과로 도출된 것이었다. 무엇보다 비재물주의자들은 “회개하지 않는 이단자들” 과 “회개하고 자신의 이단을 저주하는 자들”을 구분해야 한다고 본다. 전자는 기껏해야 감금 처분을 받아야 마땅한 반면, 후자는 “하나님의 교회가 두 팔을 벌려 받아들인다.” 이는 “죄인들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오셨으니, 멸망한 자들을 구원하기 위함”이며, “우리에게는 새로운 은혜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는 연합을 보여주셨으니, 형제가 형제를 정죄하지 말고, 오직 한 분 하나님께서 사람의 죄를 심판하시게 하라.”

반면 ‘성경’을 따르는 자들인 볼가 강 건너편 장로들의 글은, 말하자면, 엄숙한 선언문이었다면, 수도사 공작 바시아누스는 정죄받은 이단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려 했으며[775] 비소유주의자들의 견해를 널리 알리려 했다. 타고난 논쟁가인 바시아안은 먼저 말의 힘, 즉 설교와 논쟁을 통해 그릇된 길에 빠진 이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 보아야 한다고 썼다. 볼가 강 건너편의 장로들이 그들의 『성서』에서 그랬듯이, 바시아누스는 회개하지 않은 이단자들을 교회의 저주에 처할 권리와 의무가 교회에 있음을 인정하며, 세속 권력은 독자적으로 행동하여 그들을 투옥하거나 처형할 수 있지만, 바시아누스의 견해에 따르면, 이미 회개를 한 이단자들이 처형된다면, 그들은 더 이상 이단자가 아니라 순교자이며, 그들을 처형한 자들에게는 그 처형에 대한 죄가 돌아간다[776] .

여기서 즉시 의문이 제기된다. 결국 양측 모두 이단자들의 처형을 허용한다고 여긴다면, 대립하는 진영의 대표자인 요세프와 바시안이 각자의 성향에 충실하게 그토록 날카롭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이 논쟁은 도대체 왜 필요한가? 그러나 겉보기에는 입장이 비슷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단자에 대한 그들의 태도가 같지 않고 오히려 정반대이다.

요셉에게 있어 거짓 교리의 길로 들어선 기독교인은 기독교 공동체에서 완전히 추방된다. 그의 종교적 형식주의로 인해, 그는 길을 잃은 이에게 다시 한 번 도움의 손길을 내밀 내적 힘을 갖추지 못했다. 반면 비재물주의자들, 그중에서도 바시아누스에게 있어 이단자들은 교회에서 파문당하기 전까지는 여전히 기독교인으로 남아 있었으며, 그릇된 길로 빠진 그들의 영혼을 교회와 모든 기독교인이 도와야 했다. 여기에는 실제로 사랑, 즉 그리스도 가르침의 가장 높고 은혜로운 힘이 드러나야 했다. 반면 요세프가 이단자들에게 보인 태도는 유죄 판정을 받은 수도사들을 처벌하는 그의 수도원 규약에 내재된 것과 동일한 날카로움과 단호함을 드러낸다. 두 경우 모두 길을 잃은 이의 영혼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그의 곤경에서 도와주려 하지 않는 태도가 드러난다. 이러한 형식적인 종교적 엄격함은 요셉 한 사람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이 특성은 이후에도 러시아의 종교성에서 매우 자주 드러났다. 이는 요셉을 매우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던 니콘은 물론, 아바쿰, 총대주교 요아킴, 그리고 러시아 분열의 거의 모든 지도자들에게도 공통적으로 나타난 특징이었다.

또 다른 한 가지 문제에서도 요세프와 비재물주의자들 사이의 견해 차이가 드러난다. 이단과 싸울 수단을 모색하던 요세프는 교회와 국가를 구분하지 않고, 그 안에서 오직 훈계하고 처벌하는 권력만을 보았다. 이러한 구분 부재 속에 국가와 교회 간의 상호 관계, 상호 지원, 그리고 차르가 교회에 봉사하고 교회가 차르에게 봉사해야 한다는 그의 견해의 핵심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는 바로 여기에 요시프파와 ‘모스크바는 제3의 로마’라는 사상 사이의 중대한 차이점이 있다고 본다. 후자는 세속 권력과 종교 권력의 권리와 의무가 최종적으로 통합되는 것을 전제하지 않았는데, 필로페이의 이데올로기는 정교회 군주의 권리보다는 의무에 특별한 중요성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또한 필로페이가 자신의 사상을 표현한 저술들이, 이단자들에 대항한 요시프의 저술들이 널리 유포되던 시기에 등장했으며, 유대교로 개종한 자들의 반란과 관련된 사건들에 대한 기억이 모스크바에서 아직 생생했던 때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수도사 필로페이는 사실상 이러한 사건들의 동시대인이었기 때문이다. 이단과의 투쟁에서 정교회 군주의 특별한 권리와 의무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거나 심지어 이 문제를 아예 회피했기 때문에, 그의 견해는 아마도 요시프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요시프와 비재물주의자들의 견해를 비교한 결과를 정리하자면, 비재물주의자들은 이단자들에게 가할 수 있는 가장 엄중한 교회적 처벌로 파문을 간주했으며, 세속 권력이 이단자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조치들로부터는 거리를 두었다.

이단과 이단자들에 대한 이와 유사한 태도는 장로 아르테미우스[777] 도 자신의 저술에서 표명했다. 이후 아르테미우스가 리투아니아에 거주하며 그곳에서 루터교도들을 비판하는 일련의 변증적·논쟁적 저작을 집필했을 때, 그는 이단의 종교적·심리적 원인 이 개별 인간의 삶은 물론 전체 교회 공동체에서도 피할 수 없는 종교적 탐구 속에 숨어 있으며, 이는 선과 악의 선택 사이에서 흔들리는 인간의 자유 의지의 표현이라는 확신을 여러 차례 표명했다. 아르테미우스의 견해에 따르면, 타락한 인간 본성의 죄성 그 자체가 이미 인간이 쉽게 오류의 길[778] 로 들어서게 되는 전제 조건을 이룬다. 어떤 의미에서 ‘비소유자’ 운동의 정점을 이룬 아르테미우스의 논증은, 종교적 문제들이 대개 지나치게 형식적으로 해결되던 그 시대의 종교성으로는 이례적인 무언가를 담고 있다. 종교적 삶의 과정을 심리학적으로 탐구하려는 경향은 아르테미우스를 장로 닐 소르스키와 가깝게 만든다. 아르테미우스와 닐의 견해에는 교회 교부들의 영향이 드러나며, 많은 문제에서 그들 사이에 일종의 영적 친화성이 발견된다. 닐이 아르테미우스에게 미친 영향도 뚜렷하지만, 아르테미우스의 저작에서는 닐의 작품에 특별히 반영되지 않은 주제들도 발견된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다루기로 하고, 지금은 아르테미우스의 모습을 더 명확히 조명하기 위해, 소위 마트베이 바슈킨의 이단과 연관된 그의 생애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다. 이 이단은 요시프파와 비재물주의자들 간의 논쟁 역사에서 마지막 장을 장식한 사건이었다.

한편으로, 바슈킨 사건은 아르테미우스 사건의 전초전인 반면, 다른 한편으로 바슈킨의 이단은 공식 정교회 내에서도 종교적 탐구가 이루어지고 종교적 흐름이 등장했음을 보여주며, 16세기 러시아인이 특정 영적 불만족을 겪었기에 자신의 의문에 대한 답을 교회 밖에서 찾아야만 했음을 시사한다. 비록 유대교로 개종한 자들과 마트베이 바슈킨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지만, 그들을 하나로 묶는 것은 교회 전통에 대한 거부감이다.

바슈킨은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당대 기준으로 볼 때 매우 박식한 인물이었다. 성경을 읽으면서 그에게 다양한 의문과 당혹감이 생겼다. 이러한 정신적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모스크바의 한 사제를 찾아가 고해성사에서 성경의 여러 구절에 대한 자신의 의구심을 털어놓았다. 바슈킨의 끈질긴 질문은 사제를 놀라게 했는데, 아마도 그런 신자들을 고해성사받게 하는 데 익숙하지 않았던 사제는 바슈킨에 대해 차르와 가까운 실베스트르 신부에게 알리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해서 모든 일이 드러나게 되었다. 바슈킨과 그의 동조자 몇 명은 심문을 받았고, 1553년 모스크바에서 소집된 공의회에서 바슈킨은 자신의 “이단적 교리”[779] 를 진술했다. 바슈킨의 자백과 공의회에 참석했던 동시대인들의 증언을 대조해 보면, 그의 교리를 다음과 같이 특징지을 수 있다. 바슈킨은 성경—복음서와 사도 서신—을 자신의 이성에 따라 해석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는 관점을 옹호했다. 이를 근거로 바슈킨은 교회의 전승과 성부들의 가르침을 거부했으며, 교리적 가르침을 거부함으로써 공의회의 결정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그리스도론적 가르침도 부정했다. 바슈킨에 따르면,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 아버지께 동등하지 않으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기도할 때 오직 아버지께만 기도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에게 있어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구원의 업적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교회는 단지 신자들의 자유로운 공동체일 뿐이며, 회개와 성찬은 성사가 아니며, 성찬에서 신자들에게는 단순한 빵과 포도주가 제공된다; 죄 사함을 위해 회개는 필요하지 않다. 신자들에게는 일상생활에서 도덕적 규범을 준수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며, 예배는 전혀 필요하지 않다. 바슈킨은 또한 성인 숭배와 십자가, 성화 숭배를 거부했다.

바슈킨의 이단 교리는 주로 유대교화 이단과 동일한 합리주의적 사상을 포함하고 있었다. 1553년 공의회는 유대교화 이단자들에게 적용되었던 사형 선고를 내리지 않았으며, 바슈킨과 그의 동조자들은 종신형에 처해졌다. 심문에서 바슈킨은 자신의 교리를 ‘리투아니아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고안해 냈음을 시인했다. 당시 리투아니아에는 칼빈주의와 소시니안주의가 널리 퍼져 있었으므로, 바슈킨의 자유사상이 서구의 영향을 받았음은 명백하다[780] .

바슈킨과 그의 추종자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그가 볼가 강 건너편 은둔처의 몇몇 수도사들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다양한 문제를 논의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중에서 장로 아르테미우스의 이름이 언급되었다. 이것만으로도 그를 공의회에 소환하여 심문하기에 충분했다. 아르테미우스는 무소유주의 사상을 열렬히 설파하던 인물로, 요시프파 성향의 교회 지도부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아르테미우스가 수도 생활의 수준을 높이려 노력했던 트로이체-세르기예프 수도원에서 원장직을 맡던 시절, 그는 많은 적을 만들었고, 이들은 당시의 상황을 이용하려 했다.

1551년 말이나 1552년 초, 아르테미이는 원장직을 사임하고 자볼지예의 은둔처로 떠났다. E. E. 골루빈스키는 처음에 아르테미우스가 학자 수도사로서 바슈킨을 반대하는 공의회에 소환되었다고 본다[781] . 그러나 바슈킨과 다른 피고인들이 그가 스스로 “기독교 법에 따르지 않는다”고 비방하자, 아르테미우스는 몰래 모스크바를 탈출했으나 도중에 체포되어 이미 피고인 신분으로 모스크바로 송환되었다. 공의회에서 트로이체-세르기예프 수도원과 키릴로프 수도원의 수도사들인 증인들이 나서 아르테미우스를 종교적 자유사상으로 고발했는데, 그에게 요시프 볼로츠키와 그의 저술에 대한 비판적 발언, 노브고로드 이단자들(즉, 유대교를 따르는 자들)에 대한 박해에 대한 반대, 그리고 그 밖의 “신성모독적이고 이단적인 말들”이 죄목으로 제기되었다. 이 모든 혐의는 근거 없는 주장이었고, 종종 타당하지 않았으며, 아르테미우스의 실제 견해를 왜곡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금식 위반과 같은 일부 혐의에 대해서는 아르테미우스가 부인하지 않았으며, 한 번은 차르의 접견 자리에서 고기를 먹었다는 사실을 공의회에 시인했다. 아르테미우스는 또한 프스코프 근처 페체르스크 수도원에 머물던 시절 ‘리투아니아 사람들’과 다양한 종교적 문제를 논의했다는 사실도 부인하지 않았다. 아르테미우스의 견해에는 이단이 없었지만, 그는 자신의 종교적 삶을 요시프파 형식주의의 좁은 틀에 가두기를 원치 않는 사람이었으며; 그는 수도원의 토지 소유에 반대했으며, 수도 생활의 기초에 대해 대주교 마카리우스나 공의회에 참석한 주교들, 그리고 복수심에 불타는 거짓 증인들과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아르테미우스는 승리한 요시프파의 희생양이 될 운명이었으니, 그를 유죄로 판결함으로써 비재산주의자 파에 한 번에 두 가지 타격을 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가장 강력한 대표자를 제거하고, 모든 비재산주의자들에게 이단 혐의를 씌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당연히 그들을 교회·정치 생활에서 배제하고, 그 안에서 요시플리안파의 무조건적인 지배를 보장해 주었다.

마카리이 불가코프는 자신의 『러시아 교회사』에서 비재산주의자들의 활동에 대해 반감을 품고 심지어 편향된 시각으로 서술하지만, 자료상 이를 뒷받침할 근거가 전혀 없기 때문에 아르테미우스를 이단자로 선언하는 데는 주저하며, 그를 “신성한 신앙의 대상에 대해 대체로 마음대로 사색하는 것을 좋아했던” 사람으로 간주한다. 말하자면 종교적 자유주의자였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카리우스는 공의회의 판결을 정당화한다[782] . 예. 예. 골루빈스키는 현존하는 모든 자료를 면밀히 조사한 후에도 아르테미우스의 이단이 무엇이었는지 규명하지 못했으며, 그를 교회-정치적 음모의 희생자로 보는 경향이 있다[783] .

 

2. 장로 아르테미. 그의 금욕적·신비주의적 및 변증론적 저술

정통 교리의 근간 자체를 실제로 부정했던 바슈킨 사건에 대한 관대한 판결과 비교할 때, 장로 아르테미이는 매우 가혹한 처벌을 받았는데, 구체적으로 성직에서 파면(그는 수도사였음)되고 솔로베츠키 수도원에 유배되는 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미래의 필립 대주교가 원장직을 맡고 있던 이 수도원에서 아르테미이는 오래 머물지 않았다.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사정으로 그는 탈출하여 리투아니아로 망명했다. 그곳에서 그는 칼빈주의를 반대하고, 부분적으로는 테오도시오 코소이[784] 를 비판하는 변증적·논쟁적인 내용의 저작들을 많이 집필했다. 이 저작들은 그 내용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아르테미우스의 종교적·금욕적 사상을 접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러한 사상들은 아르테미우스의 금욕적 삶에 대한 관점을 잘 보여주며, 그 안에서 장로 닐의 견해와는 다소 다른 점이 드러나기 때문에 우리의 주목을 받을 만하다. 닐은 구원과 신성화를 향한 영적 수행의 핵심을 ‘지적인 기도’()로 여겼다. 반면 아르테미우스는 ‘영적 사랑’에 대해 더 많이 언급하는데, 그는 이를 금욕적 수행과 수도 생활의 기초로 간주하며, 이는 이웃을 섬기는 데 그 본질이 있다고 본다[785] . 이와 함께 아르테미우스는 수도 생활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밝힌다. 아르테미우스에 따르면, 영적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이웃으로부터 멀어지고 수도자의 고독 속에서 수련해야 하며, 그래야 비로소 사랑에 대한 진정한 욕구가 생겨난다고 한다. 물론 아르테미우스는 공동 생활을 찬성하지 않고 거부하는데, 당시 키노비아의 기초가 거의 모든 곳에서 규율 미준수로 인해 훼손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동 생활은 ‘육체적인 사색’으로 이어지는데, 수도원의 부가 바로 그 사색을 키우는 비옥한 토양이 된다[786] . 영적 사랑을 성취하는 것은 오직 ‘독거하는’ 사람, 즉 스키토에 있는 수도사에게만 가능하다. 그곳에서 홀로, 혹은 기껏해야 둘이서 세상과 단절된 채 침묵과 영적 관상 속에서 살아가며 점차 영적 사랑을 쌓아갈 수 있다. 고독, 성경과 금욕적 저작물의 독서, 침묵, 기도가 스키트에서의 삶을 채워야 한다. 외적인 가난과 이 세상의 나그네라는 자각은, 이를 통해 세속적인 근심에서 벗어나 온전히 영혼을 모으는 데 전념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리기 때문에 특별한 가치를 지닌다[787] .

금욕적인 삶을 결심한 사람이 영혼을 모으기 위한 외적인 전제 조건을 설명한 후, 아르테미우스는 수행자의 영적·도덕적 본성에 대한 특징으로 넘어간다. 이 본성은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감각적, 정서적, 영적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영적 완성을 향한 길에서 인간의 본성은 세 단계를 거치는데, 아르테미우스는 교부들의 금욕적 저작들, 주로 이사악 시린의 저술을 바탕으로 이를 ‘자기 십자가 짊어지기’라고 부른다.

첫 번째 단계에서 인간의 도덕적 감정은 최후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으로 자극받으며, 사람은 자신의 힘껏 선한 일을 행하도록 이끌린다. 아르테미우스가 ‘육체의 십자가에 못 박음’이라 부르는 이 행위는, 감각적·정신적 정욕과의 투쟁 그 자체이다. 이 상태에서는 대개 절망에 빠지고 싶은 유혹이 생기는데, 이는 인내와 끈기,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운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로 이겨낼 수 있다. 기도는 특히 필수적이다. 주님께서는 끊임없이 드리는 기도를 언제나 들으시고, 영적 투쟁을 벌이는 수행자에게 도움을 주시기 때문이다. 수행하는 그리스도인은 점차 선행을 실천하기 위한 새로운 토대를 얻게 됩니다. 그는 더 이상 두려움 때문에 노예처럼 선행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보상을 위해 종처럼 선행을 행하게 됩니다. 그때야 비로소 수행자에게는 두 번째 단계[788] 로 올라갈 기회가 열립니다. 만약 그의 새로운 상태가 그 안에 확고히 자리 잡는다면, 그는 진정으로 이 두 번째 단계, 즉 ‘활동적인 영적 사랑’의 단계로 올라갑니다. 그는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나 보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주님의 계명을 지켜야 할 필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인간의 영혼에 스며들면, 육신의 정욕을 근절하고 영혼을 거룩하게 하며 변화시킵니다. 수행자는 점차 ‘초기의 순결’ 상태로 돌아갑니다. 만약 그가 하느님을 향한 사랑 안에 머물고자 하는 열망을 잃지 않는다면, 그의 영혼뿐만 아니라 마음도 변화되며, 이를 통해 영적 관조의 능력을 얻게 된다. 기도는 이 능력을 얻는 가장 좋은 수단이며, 변화된 마음으로 사람은 자신이 주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아들됨의식은 이미 세례를 통해 맺어졌으나 죄로 인해 단절되었던 기독교인과 하나님 사이의 유대를 공고히 한다. 하나님께 대한 아들됨의식은 사람의 모든 영적 존재에 영향을 미치는 은혜로운 마음의 선물이다; 신성한 빛은 자기 십자가를 지는 길을 걷는 사람을, 아르테미우스가 ‘십자가의 영광’이라 부르는 영적 완전함의 세 번째 단계 경계로 이끌어 올립니다. 아르테미우스 장로는 자기 십자가를 지는 두 번째 단계와 세 번째 단계 사이의 이 경계를, 그리스도인이 오직 내세에서야 비로소 넘을 수 있는 선으로 간주합니다. 그곳, 즉 영원한 생명 속에서 주님께서는 하나님께 대한 아들의 신분을 지킨 이들에게 신성한 신비들을 직접 뵙는 은총 을 베푸시며, 이는 깨달음을 얻은 자를 형언할 수 없고 끊임없는 기쁨으로 충만하게 한다. 지상 생활에서는 소수만이, 즉 완전한 성도들만이 ‘십자가의 영광’이라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 제3단계[789] 에 머무른다.

자기 십자가 지기는 인간에게 은총의 깨달음을 주는 원천이며, 이를 통해 사람은 성경에 담긴 신성한 진리의 목격자가 된다. 오직 깨달음을 얻은 사람만이 진리를 꿰뚫어 보고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자기 십자가 지기는 주님의 계명과 성경 전체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데 있어 초석입니다. 자기 십자가 지기의 위업을 이루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잘못 이해할 위험에 처할 뿐만 아니라 이단에 빠질 위험까지 있습니다. 자기 십자가 지기는 겸손과 회개의 위업이다. 깨달음을 얻지 못한 마음은 오만의 소굴이며, 주님의 계명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는 육신의 이성이다. 그것은 신성한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오직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계명을 이해하지 못하며, 신성한 은총 밖에 머물러 있다. 육신적인 이성을 가진 사람은 신성한 경전을 읽지만, 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거나 왜곡하여 이해한다. 이러한 악의적인 오해는 사람을 유혹자 사탄의 품으로 밀어넣고, 그를 이단자로 만든다[790] .

아르테미우스의 이러한 금욕적 고찰들은 그의 변증적·논쟁적 저술 곳곳에 흩어져 있어 그의 개인적 견해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그가 리투아니아에 머물던 시절 정교회 교리를 옹호하는 데는 기여할 수 없었다. 그가 교회의 교리에 대해 글을 쓴 대상자들은 리투아니아에서 활동하던 칼빈주의자들과 반삼위일체론자들의 강한 영향 아래 있었기 때문에, 아르테미우스의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하는 자들의 견해는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하는 자들의 견해는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하는 자들의 견해는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하는 자들의 견해는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하는 자들의 견해는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하는 자들의 견해는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하는 자들의 견해는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하는 자들의 견해는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하는 자들의 견해는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하는 자들의 견해는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하는 자들의 견해는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하는 자들의 견해는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하는 자들의 견해는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성부- 특히 칼빈주의 목사 시몬 부드노와 다른 리투아니아인들에게 보낸 그의 저작들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791] .

이 저작들, 혹은 더 정확히 말해 서신들(그중 일부는 매우 간결하다)에서 아르테미우스는 그리스도인이 성경을 알고, 심지어 이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이단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정기적으로 연구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지만, 복음을 소홀히 하면서 구약성경에만 지나치게 집중하는 것에는 단호히 반대한다[792] . 복음서가 가장 중요한 이유는, 신약의 그리스도 설교가 구약의 율법을 폐지했기 때문이다[793] . 시몬 부드니가 자신의 반삼위일체적 발언에서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했기 때문에, 아르테미우스는 그의 주장을 반박할 수밖에 없었다[794] . 그는 칼빈주의 교리에 대해 날카롭게 반대하며, 구원을 위해서는 선한 행실이 필수적임을 강조한다. 선행이 없는 믿음은 기독교적 믿음이 아니라 이단적인 교만이며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지만, 아르테미우스는 도덕적 완성과 정욕과의 투쟁, 그리고 그 없이는 어떤 구원도 불가능한 자기 십자가 지기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한다[795] . 아르테미우스는 자신의 저술에서 기독교 예배를 옹호한다. 그의 두 반대자인 시몬 부드니와 이반 자레츠키는 성체 성사와 그것이 신자들에게 미치는 은총의 영향, 그리고 일반적으로 모든 예배를 거부했다. 이러한 오류를 반박하며 아르테미우스는 사도 바울의 서신에서 발췌한 구절들을 근거로 삼고, 성사와 기독교인의 전례 생활에 대한 개신교의 견해 전반에 대해 논쟁을 펼친다[796] . 부드노에게 보낸 두 편지 모두에서 그는 전통을 보존할 필요성에 대해 서술하며, 구약성경 에서도 전통이 인정되었다는 점을 지적한다[797] . 도덕적 완성을 요구함에 따라 아르테미우스는 기독교인들에게 자기 부인과 모든 일에서 절제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며, 금식의 교육적 의미를 이야기한다. 그는 반대자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친히 광야로 가셔서 그곳에서 금식하셨음을 상기시킨다. 따라서 수도 생활은 하느님께 기쁨을 드리는 일이며, 구원의 길에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데, 그 기초는 절제와 자기 부인, 정욕과 교만과의 투쟁이기 때문이다[798] . 마지막으로, 아르테미우스는 기독교인들이 십자가 성호를 긋는 관습과 성인과 성화를 공경하는 것을 옹호한다는 점을 언급할 것이다[799] .

아르테미우스의 모든 변증적 저작을 통해 그가 정교회에 충실한 신자였음이 드러난다. 어쩌면 1553~54년 공의회에서 그에게 제기된 비난들이 당시에는 어느 정도 근거가 있었을지 모르나, 이후 아르테미우스는 자신의 종교적 자유사상(만약 그것이 그에게 언제든 내재되어 있었다면)을 완전히 버리고, 리투아니아에서 이루어지던 개신교 선전에 맞선 자신의 논쟁적 활동을 통해 이를 속죄했다.

 

3. 지노비 오텐스키와 그의 저술

아르테미우스의 옹호론에서 순수한 신학이 보조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면, 오텐스키 수도원(노브고로드 지방)의 수도사 지노비이의 저작에서는 그것이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지노비이의 전기에는 공백이 있으며, 그의 영적 성숙 과정은 지금까지도 충분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는 1568년 오텐스키 수도원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보아하니 그곳에 유배된 것으로 보인다. 16세기 20년대에 지노비이는 수도사 막심 그렉과 연관이 있었으며, 막심 그렉이 유죄 판결을 받은 후 아마도 오텐스키 수도원으로 추방되거나 유배되었을 것이다. 지노비이가 모스크바를 떠난 이유(자발적으로 떠났는지, 아니면 당국의 판결에 따른 것인지)는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지노비이가 사망 후 오텐스키 수도원 대성당에서 성 이오나의 무덤 근처에 안장되었다는 사실은 수도원 수도자들이 그를 크게 존경했음을 보여준다[800] . 수도원 당국이 추방자에게 감히 그런 예우를 베풀었을 리가 없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지노비우스가 오텐 수도원에 도착한 지 40년이 넘게 지났고, 그동안 그의 학식 덕분에 수도원 수도자들과 원장들의 존경을 얻었으며, 게다가 수도 당국에 자주 반대하는 태도로 표출되곤 했던 노브고로드 지역의 정서를 고려해야 한다[801] .

지노비이는 당대의 교회·정치적 삶에 참여하지 않았다[802] . 수도원 독방에서의 은둔 생활은 역사적으로 큰 행운이었는데, 그 덕분에 우리는 16세기에 자신의 저술에서 일정한 독자성과 독창성을 보여준 유일한 신학자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803] . 그의 저작들은 요세프의 『계몽자』와 마찬가지로 논쟁적 목적으로 집필되었으나, 지노비우스의 논쟁은 전혀 다른 성격을 띤다. 요세프의 경우처럼 인용문으로 과도하게 채워져 있지 않다. 지노비우스는 논의되는 문제들에 대한 독자적인 연구를 선호하며, 논쟁 속에서 명확한 개념을 드러내고, 상대의 무기로 상대를 타격하며, 논리적인 추론을 펼치고,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이성적 증거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 지노비우스는 두 편의 방대한 저작을 남겼는데, 『새로운 교리에 대해 질문한 이들에게 보내는 진리의 증언』과 『코소의 악한 교리에 대한 장문의 서한』[804] 이다. 첫 번째 저작은 분량이 매우 방대하며, 한편으로는 코소의 이단적 견해의 내용을 명확히 밝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노비를 훌륭한 논쟁가이자 신학자로 부각시킨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앞서 언급된 1553~54년의 모스크바 공의회는 바슈킨의 거짓 교리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를 위해 볼가 강 건너편 수도원의 많은 수도사들을 증인으로 소환했는데, 이때 또 다른 ‘신성모독적 이단’을 설파하던 테오도시 코소이라는 수도사에게 주목하여 그를 철저히 심문했다. 안타깝게도 심문 기록은 소실되었으며, 테오도시 코스와 그의 종교적 견해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자료는 지노비우스의 저서 『진리의 증언』뿐이다.

코스에 대한 전기적 기록은 그를 그리 호의적인 시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그는 모스크바의 한 보야린을 섬기던 하인이었으나, 주인을 속여 돈을 훔친 뒤 벨라루스 지방으로 도망쳤다. 나중에 코스는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 서원을 받았다. 모스크바로 이송되어 심문을 받은 후, 그는 다시 도망쳐 리투아니아로 건너가 그곳에 정착하며 자신의 사상을 꽤 성공적으로 전파했다.

지노비는 우연히 코소의 그릇된 가르침을 알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어느 날—1554년 이후, 그러나 1566년 이전, 지노비가 자신의 저서를 집필하던 시기에— – 오텐스키 수도원에 이웃 수도원에서 온 두 명의 수도사와 그들과 동행한 한 평신도가 찾아와, 교회 교리, 구원, 성경과 그 신빙성, 구약과 신약을 진정으로 ‘신성한 경전’으로 간주할 수 있는지에 대해 다양한 질문을 던졌다. 대화는 계속되어 총 12차례의 대화가 이루어졌다. 이 대화에서 지노비우스에게 질문한 이들은 수도사 테오도시우스 코소그의 이름을 언급하며, 교회 교리에 대한 그의 견해를 상세히 설명했다. 지노비우스가 코소를 아르테미오스(즉, 우리에게 알려진 장로 아르테미오스)의 제자라고 칭하고 있지만, 코소의 견해는 거친 합리주의적 색채가 짙어 그의 저술에 반영된 아르테미오스의 견해와는 거의 닮은 점이 없기 때문에 지노비우스의 이 견해에 동의할 수 없다. 코소와 바슈킨의 견해에는 훨씬 더 많은 공통점이 있지만, 두 ‘이단 지도자’가 언제 어디서 교류를 가졌는지, 그리고 실제로 서로를 알고 있었는지는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805] . 코소이가 완전히 독자적으로, 혹은 모스크바의 지인들을 통해 교회 교리를 비판하게 되었고 자신만의 교리를 정립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으며, 우리는 이에 대해 거의 확신하고 있다. 반면 코소이의 이단은 모스크바 사회에서 유대교적 성향을 띤 일부 종교적 견해들이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음을 우리에게 증명해 준다. 왜냐하면 코소이의 교리에는 약간의 편차와 변형이 있기는 하지만, 바로 그와 동일한 견해들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코소이 역시 구약성경, 즉 ‘모세의 율법’만을 권위 있고 참된 것으로 인정하며, 신약성경은 거부한다. 코소이는 교회의 정경과 성부들의 저술을 무효라고 선언하지만, 자신의 일부 종교적 견해를 바실리우스 대주교나 요한 황금입의 저서에서 인용한 구절로 정당화하려 시도하기도 한다. 코소이는 삼위일체 교리, 그리스도의 신성 및 그분의 구원 사업, 성사에 대해 단호히 부정하며, 성모 마리아와 성인들에 대한 숭배를 거부하고, 교회 예배와 모든 전례 의식을 우상 숭배라고 칭하며, 교회 계층 구조도 인정하지 않는다. 코소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과의 지노비우스의 대화를 통해 보면, 그의 가르침에서 긍정적인 부분보다는 비판적인 부분이 더 두드러진다. 긍정적인 부분은 진정한 종교가 ‘영 안에서’[806] 유일한 하느님을 숭배하는 데 있어야 한다는, 매우 불명확하고 모호한 주장에 불과하다.

『진리의 증언』은 지노비우스가 자신과 질문자들 간의 대화 형식으로 집필했다. 그러나 책의 내용을 면밀히 연구해 보면, 지노비우스의 답변과 반박으로 구성된 이 책의 긍정적 부분은 러시아 교회 역사학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코소의 이단에 특별히 대항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807] , 지노비우스가 다른 고려 사항에 따라 쓴 것임이 밝혀진다. 한편으로는, 답변들의 내적 논리가 이를 뒷받침하는데, 이 답변들은 말하자면 상호 연결된 신학적 체계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답변들이 코소의 잘못된 견해를 반박하는 데만 필요한 분량보다 훨씬 더 방대하다. 지노비이가 피신하여 코소의 추종자들과 만났던 오텐스키 수도원은 노브고로드 지방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서는 60년 전 유대교화 파당이 생겨났으며, 정부의 조치와 교회 당국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거짓 가르침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노브고로드 지방에서는 모스크바 중심부보다 서방과의 유대가 더 강하고 생생하게 느껴졌으며, 이질적인 서구의 종교적 견해와 의견들이 다양한 경로를 통해 노브고로드로 유입되었다; 그곳 주민들은 문화적 측면에서 모스크바보다 더 높은 수준에 있었으며, 사회적 관계 또한 북동부 루스의 다른 지역에서 형성된 것과는 크게 달랐고, 이는 완전히 다른 유형의 사람들을 낳았다; 또한 노브고로드 사회의 종교 생활에서 우리는 특정한 특징과 많은 독창성을 발견할 수 있다. 유대교 신자들을 제외하고도, 여기서는 교회 문제에 대한 노브고로드 연대기 작가들의 견해와 노브고로드 성인전([808] )의 독특한 성격을 언급할 수 있다. 지노비이가 오텐스키 수도원에 도착했을 때, 이러한 지역적 여건의 모든 독특함은 그에게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히 그의 관심을 가장 먼저, 그리고 주로 끈 것은 종교적·교회적 문제들이었다. 그는 자신의 힘과 지식 범위 내에서 교회에 봉사해야 할 의무를 느꼈다. 그의 거처에 ‘코소이’의 추종자들이 찾아오고 그들과 나눈 대화는 새로운 이단을 비판할 계기가 되었으며, 이를 통해 그의 저술에 시의적절한 현대적 울림을 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신학·변증학적 저작은 대규모의 변증적·논쟁적 저술로 발전하게 되었다.

지노비우스가 자신의 신학 체계를 서술하는 방식에는 일정한 논리가 드러난다. 테오도시우스 코소이와 그의 추종자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지노비우스는 이 교리에 대한 논의를 먼저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다른 고대 러시아 교회 저술가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특징, 즉 자신의 주장을 이성(ratio)에 기반한 증거로 설명하고 뒷받침하려는 경향을 드러냈다. 논제를 논리적으로 타당한 추론으로 입증하려는 이러한 성향은 지노비우스의 저술에서 한 번 이상 드러나며, 성경을 합리적이고 적절하게 인용하는 방식에서도 나타난다. 이는 이 저작이 미리 선정된 주제에 대한 준비 작업을 거친 후에 집필된 것이지, 대화 과정에서 즉흥적으로 탄생한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과학적 도구’를 올바르게 활용하는 능력은 그의 저술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이다. 지노비이는 당대 학문의 수준을 뛰어넘으며, 그는 진정으로 고대 루스의 과학적 신학의 첫 번째 대표자로 간주될 수 있다.

그는 우주를 고찰함으로써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한다. 땅 위의 생명체들이 저절로 생겨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므로, 따라서 그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존재하신다. 모든 사람과 모든 민족은 참되든 거짓되든 하나님을 믿는다. 이는 믿음의 감정이 인간의 본성에 내재되어 있으며, 하나님께서 인간의 영혼에 심어주신 것임을 의미한다. 무생물도 무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며, 스스로 무에서 생겨날 수 없었다. 따라서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계신 것이다. 서로 다른 원소들이 끊임없이 서로 싸우면서도 여전히 안정된 조화를 이루는 세상의 보존은 오직 창조주의 섭리 덕분에만 가능하다. 지노비우스는 이 논증 또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근거로 제시한다. 창조와 창조주 사이의 연관성은 창조주의 섭리에서 드러난다[809] . 우주론적 및 목적론적 신 존재 증명을 제시한 후, 이를 바탕으로 지노비우스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와 신적 본질을 설명한다. 모든 사물, 즉 유정물과 무정물의 제1원인이자 우주의 창조주이자 보존자이신 하나님은 오직 살아계신 본질, 살아계신 하나님일 수밖에 없다. 만약 하나님이 살아 계신 분이라면, 그분은 반드시 그분 안에 말씀과 성령을 지니고 계셔야 한다. 만일 신적 본질이 말씀과 성령을 지니지 않았다면, 그분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물의 제1원인이시므로 영원하시고, 시작이 없으시며, 무한하시고 전능하시며, 그분의 말씀과 성령도 동일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 지노비우스는 창세기 등의 여러 인용문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지노비우스는 23~27장에서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그분의 가정 세우심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 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데, 이는 유대주의자들과 바슈킨, 코소이 모두가 거부했던 교리이다. 지노비이는 구약의 약속을 근거로,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인간의 미래 타락을 아셨으며, 당신의 아들의 성육신을 예견하셨고, 이에 대해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에게 여러 번 그리고 다양한 방식으로 선포하셨다고 기록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가장 높고 완전한 피조물이므로, 인류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만이 이루실 수 있었는데, 이는 완전한 것은 오직 가장 완전한 자에 의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고, 귀중한 것은 오직 가장 귀중한 자에 의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구원의 가능성, 인간의 이성으로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성육신의 신비, 그리고 동정녀에게서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나실 가능성은 모두 하나님의 전능하심 안에 담겨 있습니다. 지노비우스는 주로 구약성경을 근거로 삼던 반대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구약성경에도 이에 대한 수많은 약속이 기록되어 있다고 씁니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해명으로 이 저작의 신학적 부분이 마무리된다. 다음 장들(28–42)에서 지노비우스는 성화상, 성인의 유해, 십자가, 교회 전통에 대한 숭배를 옹호하며, 또한 그리스도인에게 회개와 기도, 금식이 필요함을 주장하는데, 특히 금식에 대해서는 주로 성 바실리오 대주교의 금욕주의 저작들을 인용하여 뒷받침한다. 지노비우스는 이러한 저작들을 활용하여 주교직, 수도원, 그리고 수도 생활 전반의 존재를 정당화하기도 한다(43–46장). 여기서 지노비우스는 당시 논란이 되었던 수도원의 토지 소유권 문제, 즉 수도원이 사람이 거주하는 땅을 소유하고 그곳에서 수입을 얻을 권리에 대해 언급할 수밖에 없었다[810] .

두 번째 저작인 ‘장문의 서한’(첫 번째 저작보다 훨씬 짧음)에서 지노비우스는 다양한 비교리적 문제들을 다룬다. 이 저작은 리투아니아의 여러 인물들이 코소의 이단에 대한 그의 견해를 묻기 위해 보낸 편지에 대한 지노비우스의 여덟 가지 답변을 모은 일종의 모음집이다. 이 질문들은 공동 기도를 위한 성전이 필요한지, 성화 숭배, 신자들에게 세례와 성찬의 필요성, 성인 숭배와 그들의 유해, 사제직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마지막 답변에서 지노비우스는 이단과 이단자들과 싸울 교회의 권리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이 저작에는 『증언의 진리』에서 볼 수 있는 체계성이 없다. 답변들은 지노비우스가 아마도 서로 다른 시기에 작성한 뒤 나중에 하나의 모음집으로 묶였기 때문에, 여기에는 반복되는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

 

4. 대주교 다니일

모스크바 서적계에서는 이미 본 논문에서 여러 차례 언급된 대주교 다니일(1522–1539)의 인물이 두드러진다. 그의 교회·정치적 활동과 저술은 V. 즈마킨이 쓴 러시아 교회사 분야 최고의 단행본 중 하나에서 상세히 다루어졌다. 다니일 대주교의 교묘한 교회 정치는 종종 그를 대공 권력에 대한 아첨으로 내몰았고, 열정과 증오로 벌인 비재산주의자들에 대한 투쟁, 그의 오만함, 요시프파 사상에 대한 그의 숭배와 이를 러시아 교회의 현실에 구현하려는 열망 – 이 모든 것이 다닐을 한 인간이자 교회의 대공으로서 특징짓는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연구자들에게 구 모스크바식 교양과 학문의 귀감으로도 비친다. 동시대인들의 다니일 평가가 매우 엇갈린다: 보야린 이반 베클레미셰프-베르센은 그를 무능한 교회 목자로 여겼다[811] , 반면 다니일의 이념적 적이자 그의 적대감의 희생양이었던 수도사 막심 그레크는 더 객관적인 시각을 보였으며, 그를 신학적으로 교양 있는 인물로 묘사했다[812] . 막심 그렉의 견해는 E. E. 골루빈스키도 그의 『러시아 교회사』에서 공유하고 있다. 문학사학자들은 다닐을 가장 중요한 고대 러시아 작가 중 한 명으로 꼽으며, 그의 생동감 넘치는 문체와 저술가로서의 재능을 높이 평가한다[813] . 우리가 이미 에서 특징을 살펴본 수도원 생활에 관한 저작들 외에도, 다니일은 몇 편의 글과 서한을 더 썼다[814] . 이 글들은 두 권의 선집에 수록되어 있으며, 그 이름도 각각 ‘소보르니크’와 ‘스보르니크’이다. 『소보르니크』에는 16편의 글이 수록되어 있으며, 그중 6편은 수도 생활에 관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스보르니크』에는 14편의 서신이 실려 있다. 이 저작들에서는 교리적 및 윤리적 문제들이 다루어지고 있다[815] .

교리적 문제에는 4편의 설교(5~7편 및 11편)가 할애되어 있는데, 이 설교들은 변증적 성격을 띠며 다니엘이 유대교적 경향을 띤 이단 교리를 명백히 염두에 두고 집필한 것이다. 이 설교들의 내용은 성육신과 그리스도의 가정 건설에 관한 교리를 해석한 것이다. 제5설교는 성육신 교리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설명하는 데 전념하고 있으며, 이는 나머지 세 설교에 대한 서론 역할을 한다. 성부들의 저술에서 잘 선별된 인용문들을 통해(흥미롭게도 저자는 요셉과 지노비우스와 달리 거의 전적으로 신약성서와 성부들, 때로는 예배 서적까지 인용하고 있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아들이 완전한 신이자 완전한 인간이라는 교리적 가르침을 설명하며, 그리스도가 단지 겉으로만 인간의 본성을 취했다는 이단자들의 그릇된 주장에 반영된 추측들은 오류이며 이단적이라고 지적한다. 그리스도는 두 본성과 두 의지를 지닌 신인(神人)의 인격체이시며(이 첫 번째 명제는 다니엘의 저술에서 더 명확하고 훌륭하게 표현되어 있다), 죄를 제외하고는 태어나지 않으신 아버지뿐만 아니라 피조물인 인간과도 동일 본질적이시며, 그분 자신은 태어나지 않으신 분도 아니고 창조된 분도 아니시며, “모든 시대보다 먼저 태어나신” 분이시다. 다니엘은 이와 같은 명료함으로 그리스도론적 교리를 정립한다. 다니엘의 교리적 견해에는, 예를 들어 수도사 공작 바시아노[816] 의 견해에서 볼 수 있었던 모호함이나 불명확함이 없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제6설교는 제5설교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 설교에서 다니엘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음이 죄 많은 인류에 대한 구세주의 무한한 사랑의 증거라고 말하며, 그러므로 유대주의자들이 주장했던, 즉 인간의 본성을 취하시고 수치를 당하신 십자가의 고난은 하나님께 합당하지 않다는 주장은 근본적으로 거짓이며, 이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의 은혜로운 사랑을 폄하하려는 시도이다. 다니엘은 제7강에서 아들의 가정 세우심에 대해 논의를 이어가며, 여기에는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가 드러났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 덕분에 “악한 자의 교활함을 능가”하고, “사탄이 결박당했으며”, “지옥이 멸망”되었고, 인간은 속량되어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설교는 신적 섭리와 그 의미, 그리고 인간 삶 속에서 나타나는 섭리의 양상에 대해 다룬다.

첫 번째 모음집(『소보르니카』)의 나머지 설교들에서는 도덕 신학의 문제들이 다루어집니다. 다니엘은 사람이 모든 일에서 신성한 경전에 따라 믿고 행동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제1설교). 이는 교회의 진리를 흔들림 없이 굳건히 수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교회 목회자들에게 특히 필수적입니다(제2설교). 신성한 경전 외에도 교회 전통을 공경하고, 그 안에 담긴 규정, 예식, 규칙, 법, 그리고 규범을 이행해야 하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삶 속에서 겉모습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도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때문이다(제3설교). 다니엘이 그리스도인들의 세속 권력에 대한 태도와 권력이 하나님에 의해 세워졌음을 언급한 8번째 말씀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국가 권력은 그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신성한 법, 즉 신앙의 법을 준수하도록 요구해야 하며, 어떤 이단자나 거짓 교사들에 의해 그 법이 이행되지 않거나 왜곡될 경우, 유죄자들을 처벌해야 합니다. 믿음의 순수성을 지키고 이단자들로부터 이를 보호하는 것은 모든 신자들의 의무입니다. 나머지 말씀들(9, 10, 12–16)은 사회 생활 속 사람들 간의 관계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여기서는 거짓말, 분노, 교만, 허영, 다툼, 비방, 음모 등 종종 외적으로도 드러나는 내적 유혹을 이겨내야 할 필요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이러한 것들이 사람들 간의 관계를 해치고 사회 생활을 타락시키기 때문이다. 다니엘은 신자들에게 있어 고백이 지닌 특별한 종교적·교육적 중요성을 강조한다(제12언).

과장 없이 말해도 ‘세상과 세상에 있는 자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13번째 말씀이 가장 독창적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이 말씀에서 그 시대 사람들을 매우 불안하게 했던 질문, 즉 세상에 머물러 있으면서도(즉, 수도자가 되지 않고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다니엘은 기독교인이 사회 생활과 가정 생활 모두에서 주님의 계명에 따라 산다면, 그에게 천국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다고 확신에 차서 말한다. 다니엘은 뛰어난 문장력과 아름답고 생동감 넘치는 언어 로 세속에서 사는 사람들을 위한 기독교 금욕주의의 기초를 설명한다. 세상적인 모든 것을 포기한다고 해서 모든 활동을 중단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활동적인 사람이 되어야 하지만, 세속적인 가치에 대해 지나친 집착을 가져서는 안 되며, 천국에서의 영원한 행복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세속적인 일에 소홀한 태도는 기독교인에게 미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죄에 가깝다. 다니엘은 사회 윤리의 문제들을 매우 설득력 있게 서술함으로써 고대 러시아 기독교 사회학의 발전에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제13편에서는 16세기의 도덕적 분위기와 사회적 생활상을 보여주는 많은 특징적인 세부 사항과 사례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이 저작을 고대 러시아 문화사에 있어 귀중한 자료로 만들어 준다[817] .

‘모음집’이라는 제목 그대로인 두 번째 모음집에는 앞서 언급한 수도 생활에 관한 여섯 편의 서신이 수록되어 있으며; 나머지 서신들은 다양한 인물들에게 보내진 것으로, 도덕적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비교적 간결한 편이다(오직 13번째 서신만이 상당히 장황하다). 그 중요성 면에서는 첫 번째 선집[818] 에 수록된 글들에 미치지 못한다. 대주교 다니엘의 『선집』을 읽다 보면, 앞서 인용된 E. E. 골루빈스키의 평가에 전적으로 동의하게 되며, 동시에 16세기 러시아 사람들의 다채로운 성격과 그 시대 역사적 삶 속에서 그들이 맡은 다양한 역할에 다시 한번 놀라게 된다. 이 저작들을 읽다 보면, 그 저자가 자존심이 강하고 교활하며 복수심에 불타는 교회의 지도자이자 정치가였다는 사실을 잊게 되며, 설령 이를 떠올린다 해도 한 사람에게 어떻게 그토록 나쁜 의미의 정치적 교활함과 그토록 큰 재능이 공존할 수 있었는지 놀라게 된다. 요시프의 충실한 제자였던 다니일은 일부 저작에서 요시프파 학파의 경계를 넘어 그 종교적 형식주의를 극복한다.

하지만 그의 전기를 다시 살펴보면, 저술에서 드러난 이러한 ‘학파의 경계를 벗어난 시도’가 결국 그의 교회·정치적 경력에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선집』에 수록되지 않은 그의 서신 중 하나는, 미래의 차르 이반 4세가 미성년자였던 시기에 보야르 당내의 분열과 보야르들의 제멋대로인 행태를 비판하기 위해 쓰인 것이었다. 1539년 1월에 작성되어 모든 교구에 대주교의 서한으로 발송된 이 서한은 그의 문학적·신학적 활동을 마무리 짓는 것이었으며, 이 문서를 발송한 지 한 달 만에 그는 대주교직을 내려놓아야만 했다. 다니일은 한때 수도 서원을 받았던 요시포프 수도원에서 생을 마감했다[819] .

이구멘 요시프, 장로 아르테미, 수도사 지노비, 그리고 대주교 다니일은 16세기 가장 뛰어난 교회 저술가들이다. 하지만 여기에 수도사 필로페이의 이름도 덧붙여야 하는데, 그의 저술은 교회-정치적 성격을 띠고 있다. 이들은 모두 매우 흥미로운 인물들이지만, 활동 영역과 교회 생활에 미친 영향력은 각기 다르다. 그들은 이후 러시아의 모든 교회적·영적 역사의 뿌리를 찾아볼 수 있는 그 시대에 속한다. 교회-정치적 사건들의 격렬함과 긴장감은 그 시대 모든 저작의 변증론과 논쟁, 금욕주의와 교리학에 반영되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시대, 오직 루스, 오직 모스크바, ‘제3의 로마’에서만 정통 신앙의 순수성이 보존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바로 그 세대, 바로 그 시대에, 신앙의 순수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교회의 교리를 공격하며 새로운 이단을 설교하기 시작했고, 무엇보다도 많은 추종자들을 확보한 사람들이 등장했다. 그 시대의 모든 신학적 창작 활동은 이 현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수도자 집단 속에서 교회의 수호자들이 등장한 것은 분명하다. 그들은 자신의 대의가 옳다는 확신뿐만 아니라; 그들은 러시아 수도 생활이 전성기를 누렸던 14세기와 15세기, 즉 성 니라 소르스키의 금욕적 저작들에서 이론적 완성을 이루었으나 역사적으로는 요시프파와 비소유파 간의 논쟁으로 막을 내린 그 시대의 영적 원천에서 힘을 얻었다. 이 시대의 신학적 저작들에서 미래 발전의 뿌리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당시 쓰여진 것 중 상당수가 독창적이지 않았으며,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과학적 신학의 관점과도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을 이해한다. 그러나 이것이 16세기 신학적 저작의 중요성을 깎아내리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선구자들을 더 한 성숙한 시대의 잣대로 평가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 당시로서는 눈부신 불꽃이었으나, 안타깝게도 다음 세기에 꺼져 버렸다. 16세기 후반과 17세기 전체 동안 러시아 수도계에서는 단 한 명의 주목할 만한 교회 저술가도 배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도원 운영에 몰두하던 수도계는 침묵을 지켰다. 오직 니콘 총대주교가 시도한 개혁과 17세기 마지막 25년 동안 격렬하게 벌어진 성찬의 변질 시기에 대한 신학적 논쟁만이 이 침묵을 깼다. 그러나 그전에 16~17세기 수도원의 교회적·문학적 활동과 관련된 몇 가지 현상을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5. 성자 전기 및 역사 저작

16세기와 17세기의 수도원 문학적 활동을 비교해 보면, 17세기에 그 활동이 현저히 쇠퇴했음을 알 수 있다. 16세기 70년대 초부터 17세기 말까지, 우리는 학식, 재능, 웅변력 면에서 앞서 언급된 인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저술가를 단 한 명도 찾아볼 수 없다. 새로운 세대에게는 한편으로는 과거와의 내적 유대가 부족했고, 당대의 격동적인 사건들에 깊이 휘말려 있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수도원 생활의 세속화 과정이 수도자들의 영적 상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이 한 세기 동안 쓰인 모든 저작과 그 저자들의 상세한 목록에는 수도자 출신의 많은 이름이 포함될 것이지만, 이 작가들은 러시아 교회 문학[820] 에 있어 특별히 큰 의미를 지니지는 않았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 관점에서 가장 중요하고 독창적인 저작들만을 언급할 것이다.

성인전 문헌은 마카리우스 대주교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했으나, 그 이후 쇠퇴하기 시작했다. 11세기부터 마카리우스 이전, 즉 그가 아직 노브고로드에 머물며 교양 있는 수도사들과 다른 인물들을 성인전 창작에 참여시켰던 1528년까지, 고대 러시아에서는 총 33편의 성인전이 집필되었다; 마카리우스 시대에는 49편의 성인전이나 기타 성인전적 내용을 담은 저작이 집필되었으며, 그중 28편은 수도사들에 의해 집필되었다[821] . 16세기 후반과 17세기 초반에 집필된 성인전 중에서는 다음 작품들이 주목할 만하다.

솔로베츠키 수도원의 수도사 미사일은 백성들에게 큰 사랑을 받은 바실리 블라젠니의 전기와 성인을 위한 캐논을 집필했다. 노브고로드의 안토니예프 수도원에서는 성 안토니우스 로마인의 전기가 재편집되었으며, 대략 1558년경 같은 수도원의 니키포르라는 수도사가 안토니우스에 대한 새롭고 매우 방대한 전기를 집필했다. 성 니라 스톨로벤스키의 동시대인이었던 수도사 게르만의 기록을 바탕으로, 볼딘 수도원의 수도사 필로페이 피로고프는 16세기 말에 이 성인의 행적과 캐논을 집필했다. 1590년 솔로베츠키 수도원에서는 성 필립 대주교의 유해가 이 수도원으로 이장됨에 따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한 수도사가 성인의 행적을 집필했다. 페레야슬라블의 다닐로프스키 수도원의 수도사 세르기이와 군수 S. R. 올페르예프는 공동으로 『성 로마노 우글리치 공에 관한 이야기』와 성 다닐 모스크바 공에 대한 캐논을 집필했다. 1600년이 되기 얼마 전, 코르닐리예프 코멜스키 수도원의 수도사 나파나일은 이 수도원의 창설자인 성 코르닐리우스의 행적과 그를 위한 캐논을 집필했다. 요바 총대주교의 지시에 따라 볼로그다 출신의 아르히만드리트 이오나 두민이 성 알렉산드르 네브스키 공의 또 다른(이미 세 번째에 해당하는) 행적을 집필했는데, 이는 본질적으로 처음 두 편의 행적[822] 을 재구성한 것에 불과했다.

1627–1632년 동안 방대한 성자 전기 모음집을 편찬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예로모나흐 게르만 툴루포프(† 1637)가 이 방대한 저작의 편집자였다. 그는 마카리우스 대주교의 『미네이』를 기초로 삼아, 마카리우스판 『미네이』에 포함되지 않은 성자 전기를 보충했으며, 일부 성자 전기는 여러 버전을 자신의 선집에 수록했다. 게르만은 성자 전기를 어떠한 축약도 없이 전문을 그대로 베껴 썼기 때문에, 그의 선집은 일정한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823] .

필립 대주교의 시성식과 관련하여 솔로베츠키 수도원의 수도사 게라심 피르소프는 1652년에 세 편의 저작을 집필했는데, 이는 성인의 전기를 비롯해 그를 찬양하는 글, 그리고 캐논이었다[824] .

16~17세기 성인전 문학을 마무리하는 것은 성 디미트리 로스토프스키(† 1709)의 『체티이 미네이』로, 그 제1권은 1689년에 인쇄되었다. 처음부터 매우 널리 퍼져 러시아 국민들에게 사랑받게 된 이 미네이들은 서사적인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를 위해 자료에 대한 상당히 방대한 사전 학술적 연구가 필요했다. 러시아 국민들 사이에서 이 미네이들이 누리는 인기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으며, 이 미네이들의 저명한 편찬자의 이름은 러시아의 가장 외진 구석구석에서도 잘 알려져 있다. 남부 루스 출신(그는 1651년 키예프 근처에서 태어났다)이자 키예프-브라츠카 학교[] 출신인 디미트리 투프탈로는 러시아 민족의 기독교 계몽을 위한 열정적이고 지칠 줄 모르는 활동에 평생을 바쳤다; 그는 뛰어난 설교자였으며 — 그의 설교는 오늘날까지도 그 가치를 잃지 않고 있다 — 그가 교회를 섬긴 모든 곳에서 그의 업적은 좋은 결실을 맺었다. 남부 루시의 수도원 원장, 그 후 시베리아 대주교(1701–1702), 그리고 마침내 로스토프 대주교(1702–1709)로 재임하는 동안, 그는 맑은 영혼과 순수한 마음은 물론, 교양과 지성, 그리고 깊은 종교성이 깃든 뛰어난 웅변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자신의 교구에서 대주교는 본당 성직자들의 교육과 학교 설립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동시에 그는 방대한 문학적 저술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의 모습은 모스크바 루스의 수도 생활에서는 보기 드문 것이었다. 성 디미트리우스는 키예프 대교구 소속의 남부 루스 수도회에 속해 있었는데, 그곳의 수도 생활과 교회계의 세계관, 교육 수준은 모스크바에서 형성된 것과는 다른 역사적 조건에 의해 결정되었다[825] .

또한 16세기 전반에 수도자들이 역사적 내용을 담은 저작을 집필했다는 점도 상기해야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수도자들은 문해력이 뛰어난 사람들로서 고대 러시아 연대기의 집필자이자 필사자 역할을 했다. 16세기 20년대 말, 노브고로드에서는 이른바 ‘소피이스키 브레멘니크(Софийский временник)’라고 불리는 노브고로드 연대기가 편찬되었다. 이 작업의 발기 및 전반적인 지휘는 주로 마카리 대주교가 맡았다. 이 연대기는 1538년까지의 러시아 역사를 다루고 있으며, 내용의 충실성과 역사적 신빙성이 두드러진다[826] . 이미 우리에게 잘 알려진 『스테펜나야 크니가』 역시 그 출현과 편찬이 마카리 대주교의 이름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성자 전기를 다룬 자료를 폭넓게 활용한 일종의 역사 저작으로 간주할 수 있다.

고대 러시아 역사학 분야에서 또 다른 모스크바 대주교인 요아사프의 저술은 특별한 존경을 받을 만하다. 요아사프 스크리피친은 처음에는 평범한 수도사였으나, 이후 1529년부터 1539년까지 트로이체-세르기예프 수도원의 원장직을 역임했다. 1539년에 그는 모스크바 대주교로 추대되었으나, 이 높은 직위에 머문 것은 1542년까지뿐이었다. 이반 4세가 미성년자였던 시기에 보야르 파벌의 압력을 받아 강제로 자리에서 물러나 키릴로프 수도원으로 유배되었다. 1547년, 요아사프는 마카리우스 대주교의 후원을 받아 트로이체-세르기예프 수도원으로 돌아갈 허가를 받았으며, 그곳에서 1555년 또는 1556년 6월 26일[827] 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금욕주의적 및 교회·정치적 견해는 비재물주의자들과 매우 가까웠으며, 그의 중재로 수도원 감옥에서 풀려난 유명한 막심 그레크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요아사프의 반요세프파적 견해는 그가 집필한 노브고로드 대주교 세라피온의 행적기와 『스토글라브』에 대한 비판적 논평에서 매우 뚜렷하게 드러났다[828] . 그의 교회적 견해와 “모스크바는 제3의 로마”라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태도는 특히 그의 『고백록』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났는데, 여기서 그는 모스크바 대주교로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와의 정경적 유대를 강조하고 있다[829] . 당대 기준으로 요아사프는 매우 교양 있는 주교였으며, 개인 도서관을 소유하고 있었고, 트로이체-세르기예프 수도원에서 개정 작업이 진행되던 《티피콘》(예배 의식 부분)의 편집에 참여하기도 했다. 최근 러시아 문학사 학자들은 요아사프가 16세기 중반에 편찬된 『크로노그래프』와 『니콘 연대기』의 서부 러시아 판본의 저자 중 한 명, 혹은 심지어 주 저자였다는 결론에 도달했다[830] .

또한 프스코프-페체르스키 수도원의 원장(1529–1570)이었던 코르닐리우스도 특별한 주목을 받을 만하다[831] . 이구멘 직분을 맡은 코르닐리우스는 뛰어난 인물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수도원 생활의 정비를 돌보았고, 수도원 내 새로운 건축물 건립을 지휘했으며, 에스토니아의 이교도들 사이에서 기독교 선교 활동을 성공적으로 펼쳤고, 수도원 내 성화 제작을 장려하는 데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가 세운 새로운 건물들—더 정확히 말하면 수도원 주변의 웅장한 성벽—은 그의 운명에 치명적인 역할을 했다. 1570년 수도원을 방문한 차르 이반 4세는 당시 폴란드 왕 스테판 바토리와의 지치고도 불리한 전쟁을 치르고 있었는데, 원장을 배신 혐의로 고발했다. 코르닐리우스가 스테판을 지지하기 위해 자신의 군대를 막기 위해 이 돌담을 세웠다는 것이었다. 차르는 늙고 존경받던 이구멘을 도끼로 내리쳐 죽여버렸다. 수도원의 시노디크에는 이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 덧없는 생을 마치고, 지상의 차르에 의해 하늘의 왕께 영원한 거처로 보내진 것은 7078년(1570년) 2월 20일이었다”[832] . 순교자의 유해는 썩지 않은 채 보존되었으며, 코르닐리우스는 수도원과 인근 지역에서 성인으로 숭배받게 되었다[833] . 근대에 들어 이구멘 코르닐리우스가 1547년 『스보드』에 수록된 『프스코프 연대기』의 주 저자였음이 밝혀졌다[834] 코르닐리우스는 또한 『페체르스크 수도원 연대기』를 집필했다. 특이한 점은, 코르닐리우스가 자신의 수도원 창건 역사를 연구하면서 종종 전설적인 내용으로 가득 찬 자료들을, 엄격하고 과학적·역사적인 비판에 부쳤으며, 철저히 검증된 자료를 바탕으로 자신의 『연대기』를 집필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코르닐리우스는 루시에서 역사 서술에 비판적 방법을 적용한 최초의 인물 중 한 명이었다. “『페체르스크 수도원 연대기』는 안타깝게도 저자의 교회·정치적 견해—그가 요시프파에 가까웠는지, 아니면 비소유파에 가까웠는지—에 대해 결론을 내리기 어렵게 한다. 왜냐하면 역사적 사실에 충실한 간결하고 명료한 서술 속에서, 그는 이 두 파벌을 갈라놓은 문제들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했기 때문이다. 성 코르닐리우스 이구멘은 당대 교육받은 인물로서, 활기차고 실리적인 성품을 지닌 엄격한 수도원장으로서 우리 앞에 나타납니다. 그의 페체르스크 수도원 관리 활동은 일정한 금욕적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순교적인 최후는 그의 모습에 수많은 전설을 둘러싸게 했으며, 이 전설들은 후대의 수도원 형제들에 의해 열성적으로 보존되어 백성들 사이에서 성자에 대한 경건한 태도를 공고히 했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이러한 전설이 없더라도 이구멘 코르닐리를 16세기 모스크바 루스의 수도계 최상층을 대표하는 마지막 인물 중 한 명으로 높이 평가한다.

 

6. 수도사 예르몰라이-에라즈모의 저술

16세기 수도자 출신 작가들의 다방면적인 활동을 살펴보는 데 있어, 그들 중 가장 독창적인 작가 중 한 명을 언급하지 않는다면 그 조망은 불완전할 것이다. 이 인물은 최근에야 비로소 문학사학자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는데, 바로 예르몰라이 프레그레슈니, 또는 예르몰라이-에라즈마를 말한다.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매우 적으며, 단지 몇 가지 단편적인 사실들뿐이다. 우리가 아는 것은 그의 활동이 16세기 중반에 이루어졌다는 점뿐이다. 그는 1550~1555년경 모스크바의 스파스카야 성당에서 수석 사제(프로토포프)를 지냈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후 수도사가 되었다; 예르몰라이는 1550년대 50년대에 마카리우스 대주교의 측근에 속해 있었는데, 이때 러시아 ‘지식인’들이 문학 작품을 통해 처음으로 두각을 나타냈으며, 그들의 교양 덕분에 대주교의 거대한 문학 사업들이 실현될 수 있었다. 이 모임에서 예르몰라이-에라스무스는 비범한 논설가로 두각을 나타냈으며, 당대 사회 관계와 관련된 몇 가지 문제에 독창적인 시각으로 답하기도 했다[835] . 그에게 16편의 저작이 귀속되는데, 그중 11편은 의심의 여지 없이 실제로 그가 쓴 것이다.

무엇보다 먼저 언급할 만한 것은 『자신의 영혼을 위한 교훈』으로, 회개의 의미에 대한 서정적인 성찰이자, 특히 권력과 재판권을 가진 자들의 종교적 책임, 성직자의 오만함, 즉 ‘세속적 위엄’이 초래하는 도덕적 위험에 대해 다룬 글이다. 이와 함께 저자는 영적 권세가 영혼을 다스리는 반면, 세속적 권세는 오직 사람의 육신만을 다스린다는 점을 상기시키는 것을 잊지 않는다[836] . 그의 『성삼위일체에 관한 책』 또한 주목할 만하다. 예르몰라이는 이 책에서 삼위일체 원리가 “모든 사물”의 기초에 놓여 있음을 보여주려 한다. 『성삼위일체에 관한 책』의 첫 번째 부분에서 그는 성경의 잘 선별된 인용구를 바탕으로 정통 교리에 따른 성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한다. 그러나 예르몰라이의 견해에 따르면, 삼위일체성은 온 우주에 내재하는 특성이며, 이에 대해서는 『성삼위일체에 관한 책』의 두 번째 부분에서 다루고 있다. 인간은 가장 고귀한 피조물로서 삼위일체 안의 통일성 없이는 상상할 수 없는데, 이는 인간의 구성 요소인 영, 혼, 육체가 오직 그러한 통일성 덕분에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며, 반대로 이 세 가지 요소 없이는 인간 존재가 온전하고 조화롭게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책』의 제3부는 시적 형식으로 서술된 성 삼위일체에 대한 기도문[837] 으로 구성되어 있다. 명료함과 내적 논리를 갖추고 쓰인 예르몰라이의 사색은 언어와 표현의 단순함이 돋보이며, 저자의 지식과 신학적 소양을 부정할 수 없다.

에르몰라이에게는 사회적 문제에 대한 관심도 특징적이다. 『사랑과 진리에 대한 고찰, 그리고 원한과 거짓의 극복에 관한 말씀』[838] 이라는 제목의 그의 도덕적·신학적 고찰이 전해지는데, 이 글에서 저자는 16세기 50년대 모스크바 사회의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그는 모스크바의 상류층, 즉 ‘귀족들’을 기독교적 사랑이 부족하다고 비난한다. 그들의 재산은 다른 사람들, 즉 실제로 노동하는 민중 계층, 특히 고된 일상 노동을 통해 빈약한 생계를 꾸려가는 이들의 궁핍을 대가로 불어나고 있다. 예르몰라이-에라스무스의 이러한 주장은 모스크바 사회의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수도사 공작 바시아나의 지적과, 16세기 중반 농민들을 억압했던 세금 부담에 대한 요아사프 대주교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839] 그의 ‘차르 이반에게 보내는 서한’과, 차르에게 상소한 농민 계급의 경제적 중요성에 관한 논고는 더욱 특징적이다. 여기서 그는 시급한 토지 개혁 프로그램을 제시하는데, 이는 공정한 토지 분배와 조세 감면(수확량의 15분의 1까지!)을 통해 농민들의 처지를 개선하고, 이를 통해 그들의 생산력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 결과, 에라스무스는 왕국의 전반적인 복지가 향상되고, 정의와 사랑에 관한 기독교 계명이 이행되어 차르의 영광이 더욱 빛날 것이라고 믿었다. 아울러 저자는 무역 현황에 대해 몇 가지 의견을 제시하고 다양한 개선 방안을 제안한다[840] .

수도사 복장을 한 이 독특한 ‘전문가’의 저작들은 어쩌면 수도계보다는 그 시대의 전반적인 양상을 더 잘 보여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 시대는 표트르 대제의 개혁 시기 못지않은 역사적 긴장감이 감돌았으며, 러시아의 운명에 있어 그 중요성도 결코 뒤지지 않는 시기였다. 역사가가 표트르의 개혁 속에서 러시아 역사의 다양한 현상—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교회-정치적 현상—의 원인과 뿌리를 찾아내려 할 때, 그는 이러한 뿌리가 훨씬 더 깊게 자리 잡고 있으며, 16세기, 주로 그 세기의 전반부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비록 오늘날의 기준과 인식에 비추어 볼 때, 교회·정치 및 문화 무대에서 활동했던 이 모든 인물들이 특별한 중요성을 지니지 못할지 모르지만, 그들 자신의 시대와 그 시대의 문화적·교회·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그들은 거물급이자 특징적인 인물들이었다.

 

7. 17세기의 문학

17세기는 더 밋밋하고, 개성이 없으며, 창의성이 떨어지는 시기였다. 수도원계에서는 영적·문화적 관심의 쇠퇴를 발견할 수 있다. 이 세기의 사회적·경제적 고민과 어려움은 스무타[841] 의 여파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 본질적으로 그 원인은 이전 세기의 상황에 기인했다. 어떤 의미에서 이는 이미 여기서 언급된, 논설가들이 표명한 견해와 평가를 정당화해 준다. 그들은 비록 당시의 상황을 주목하기는 했으나, 미래의 사건 전개에 대한 예측을 하고 그에 따른 결론을 내리는 데 필요한 지식을 아직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수도계는 이러한 어려움에 반응하지 않았으며, 개별적인 저널리즘 성격의 저작들은 언급할 가치가 없다. 교회-정치 생활에는, 예를 들어 한 세기 전 사람들을 그토록 불안하게 했던 교회 토지 소유권 문제와 같은 급박한 문제들이 없었다.

16세기 당시 교회 문학 분야에서 특별히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트로이체-세르기예프 수도원의 수도자들 중에서도, 그래도 언급할 만한 몇몇 저술가들이 있었다. 이 수도원의 케라르(수녀장)였던 아브라아미 팔리친(† 1627)은 ‘혼란의 시대’에 그의 유명한 『트로이츠키-세르기예프 수도원 포위전 이야기』를 집필했다. 이 저작은 전반적으로 ‘혼란의 시대’ 역사에 관한 매우 훌륭한 자료이며, 저자의 문학적 재능을 부정할 수는 없다[842] .

이 수도원의 또 다른 서기인 시몬 아자리인(† 1665)은 주로 『성 세르기우스(라도네즈키)의 새롭게 드러난 기적들』이라는 저서의 저자로 알려져 있으며, 이 책은 이 성인의 초기 전기를 보완해 준다.[843] . 아자리인의 또 다른 저서인 『우리 아버지 아르히만드리트 디오니시오스의 생애와 위업』도 큰 인기를 끌었는데, 이 책에는 이 뛰어난 인물의 활동에 대해 서술되어 있다. 이 저작은 팔리친의 『전설』을 보완하며, 두 저작을 종합하면 아키만드리트 디오니시우스(1610–1633)가 수도원 원장으로서 재임하던 ‘혼란의 시대’에 수도원이 전국적 중요성을 지닌 사건들에 어떻게 참여했는지에 대한 전모를 알 수 있다[844] . 아자리인의 세 번째 저작인 『모스크바 국가의 멸망에 관한 이야기』는 덜 알려져 있는데, 이 책에서 저자는 1654년 러시아-폴란드 전쟁의 원인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정부의 지시에 따라 작성된 것으로, 국민들에게 이 전쟁의 필요성을 정당화하려는 시도였다[845] . 아자리인의 작품으로는 일 년 주기의 축일과 러시아 성인을 다룬 방대한 달력도 있는데, 이는 원고 형태로만 전해진다. 『성 디오니시오를 위한 기도 캐논』은 아자리인의 문필 활동을 마무리하는 작품이다[846] .

이오나(별명 ‘작은’)라는 이름의 수도사 디아코노스가 쓴 예루살렘 순례(1651–1652)에 관한 여행 수기[847] 도 흥미롭다. 이오나의 소설에는 예루살렘과 그곳의 성지들에 대한 매우 상세한 묘사가 담겨 있으며, 이 작품은 소박함과 사실성을 특징으로 하고, 고대 러시아 작가들의 다른 ‘성지 순례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허구적인 요소가 전혀 없다.

상당히 방대한 저작을 집필한 이는 수도사 아르세니 수하노프로, 그 역시 트로이체-세르기예프 수도원의 식량 담당자였다. 예정된 예배 서적 개정과 관련하여 아르세니는 니콘 총대주교로부터 콘스탄티노플로 가서 그곳에서 직접 예배 의식과 서적을 파악해 오라는 임무를 받았다. 아르세니는 이 여행(1649–1653)의 결과를 『프로스키니타리』[848] 라는 책에 기록했다. 아르세니우스의 『프로스키니타리』는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첫 번째 부분에는 그의 여행 일지가 담겨 있다(아르세니우스는 몰다비아의 야사, 콘스탄티노플, 그리스 군도의 여러 섬, 이집트, 예루살렘을 방문한 후 코카서스와 조지아를 거쳐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두 번째 부분은 전적으로 예루살렘과 그곳의 성지들에 대한 묘사에 할애되어 있으며, 세 번째 부분에서는 그리스 교회의 예배 의식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또한 아르세니는 전례 및 신학 관련 원고(700여 점)를 많이 가져왔는데, 이 원고들은 니콘 총대주교가 추진하던 예배서 개정 작업의 기초 자료로 활용될 예정이었다.

신학 문헌 자체에 관해 말하자면, 17세기 이후로 특별한 독창성을 지닌 저작은 남아 있지 않다. 당시 집필된 저작의 수는 비교적 많았으나, 그 내용 면에서는 주목할 만한 것이 거의 없다[849] . 그러나 성찬의 시간(시간대)에 대한 논쟁의 결과로 나온 저작들이나, 니콘이 추진한 서적 개정과 관련하여 쓰인 저작들은 더 큰 주목을 받을 만하다. 첫 번째 문제는 주로 수도자들에 의해 논의되었으나, 경전 개정과 관련하여 쏟아져 나온 비정상적으로 방대한 문헌에서는 수도자들이 더 이상 주된 역할을 맡지 않았다. 그러나 가장 주목할 만한 저작들을 언급하기 전에, 17세기 교회 문헌에 대한 전반적인 언급을 해둘 필요가 있다. 이 문헌의 언어는 독특한 특징을 지닌다. 그 시대의 작가들은 장황한 문체와 수사법에 특별한 경향을 보였는데, 여기에는 진정한 웅변성이 결여되어 있었으며, 그들은 수많은 러시아화된 폴란드어, 라틴어, 그리고 부분적으로 그리스어 단어들로 언어를 훼손했는데, 이는 서양과 남서부 영향의 부정적인 결과였다. 이 모든 것이 합쳐져 독자를 지치게 하고 이해를 어렵게 만들었으며, 그로 인해 동시대인들에게조차 이 저작들의 실용적 가치는 줄어들었다. 아마도 이러한 이유로 그 대부분은 원고 상태로 남아 있으며, 주로 목록이나 간략한 기록 보관소 설명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수도사 안토니(별명 포돌스키)가 쓴 『천국에 관한 말씀』(1626)은 독창성을 갖추고 있는데, 그는 아마도 남서부 루스 출신이었을 것이다[850] . 『말씀』의 여섯 장에서 저자는 먼저 성삼위의 본질과 우리 구원의 근원이신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해 이야기한 뒤, 천국을 묘사하고 성도들의 복락, 썩지 않음, 그리고 그들의 ‘나이’를 설명하려 시도한다(1~4장); 두 번째 부분(5·6장)에는 세속적 가치와 천상의 행복에 대한 비교 분석이 담겨 있다. 안토니우스의 『말씀』은 내적 논리와 진실한 경건함을 갖추고 있기는 하지만, 지나친 수사적 과장과 기교적인 문체가 이 저작의 가치를 떨어뜨린다[851] . 또한 창세기에 대한 주석서인 홀모고르 대주교 아파나시우스(1682–1702)의 『6일 창조』와, 그가 쓴 『신앙 고백』—신조 해설—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852] .

이그나티이 림스키-코르사코프는 매우 다방면에 걸친 저술가였다. 귀족 가문 출신으로, 한동안 알렉세이 차르의 궁정에서 스토니크로 근무했던 그는 1677년에 솔로베츠키 수도원에 입회했고, 1685년에는 이미 노보스파스키 수도원의 아르히만드리트가 되었으며, 성찬의 전례 방식에 대한 논쟁이 한창이던 시절에는 요아킴 총대주교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 중 한 명이었다. 새로운 총대주교 아드리아노와의 관계는 그리 원만하지 않았으며, 그가 시베리아 대주교로 임명된 것은 어쩌면 일종의 명예 유배였을지도 모른다. 그의 생애는 비극적으로 끝났다. 이그나티는 정신이 이상해져 1700년에 은퇴하게 되었고, 1701년에 세상을 떠났다. 1780~1790년대에 그는 세 편의 성자 전기를 집필했다: 1) 『성 안나 카신스카야 공주 전기』, 2) 『성 시메온 베르호투르스키 전기』, 3) 『요아킴 총대주교의 전기와 유언』. 요아킴의 시성 절차를 돕기 위해 특정 목적으로 집필된 이 마지막 저작은, 그 구상이 총대주교 아드리아누스의 승인을 얻지 못했으나, 성체 전례에 관한 논쟁에서 ‘정통파’의 입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 저작은 그다지 객관적이지 않고 찬양문의 성격을 띠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그 외에도 이그나티우스 는 『소피아, 하나님의 지혜의 형상에 대한 해설』, 개신교와 가톨릭을 비판하는 두 편의 논쟁적 저작, 특히 널리 알려진 분열 반대 저작 세 편, 그리고 마지막으로 『러시아 왕국에 관한 소식』과 1685년 크림 원정과 관련하여 집필된 『군대를 향한 말씀』이 있다. 마지막 두 저작은 정치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소피아 공주의 정권을 지지하기 위해 쓰여졌다; 『소피아의 형상에 대한 해설』 역시 소피아 공주의 ‘지혜’를 암시하고 있다[853] .

자신의 교구 내 질서 유지를 위해 애쓴 주교의 예로, 리아잔 대주교 파벨(1681–1686)을 들 수 있다. 그는 자신의 교구 성직자들을 대상으로 한 장문의 「교구 서한」을 집필했다. 이 서신에서 대주교는 본당 성직자들에게 말하며, 관구를 순회하고 교회들을 방문하는 과정에서 예배 집행에 많은 부적절한 점을 발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가르침을 성경과 교회법 서적의 인용문으로 뒷받침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훌륭한 교육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파벨은 본당 사제들과 수도원 원장들에게, 니콘 총대주교 재임 시절과 그 이후에 개정된 교회 서적에 따라 예배가 거행되도록 강력히 요구했는데, 이는 당시 모든 곳에서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미트로폴리트 파벨은 당시 구두 설교[854] 를 행하던 몇 안 되는 주교 중 한 명이었다.

모스크바 루스에서 강단에서의 설교에는 특별한 관심이 기울여지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성직자들의 교육 수준 부족이나 태만뿐만 아니라 고대 러시아 종교성의 독특한 구조 때문이기도 했다[855] . 11~13세기와 비교해 보면 – 루카 지디야테, 성 테오도시우스 페체르스키, 일라리온 대주교, 키릴 투로프스키, 성 아브라아미 등을 떠올려 보자 – 이 측면에서 후기 시대는 훨씬 뒤처져 있었다. 17세기, 1654년 이후, 특히 1686년 키예프 대교구가 모스크바 총대주교의 관할권 아래로 편입된 후[856] , 키예프에서 비롯된 교회적·종교적 영향이 모스크바의 생활 속으로 집중적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 결과 교회 설교 활동이 다소 활기를 띠게 되었다. 특히 성 디미트리 로스토프스키를 언급할 필요가 있는데, 그는 지난 25년 동안의 교회 계몽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바 수도계의 전형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의 영적 성장은 남서부 루스의 독특한 영적 교육 체제 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857] . 본래 모스크바의 수도계와 주교단은 교회 설교 활동의 발전을 위해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단 몇 편의 지역 서신만이 강단에서 백성들에게 낭독되어 설교를 대신했을 뿐입니다. 그중 세 가지를 꼽자면, 두 편은 니콘 총대주교의 것이고 한 편은 로스토프의 이오네 대주교(1652–1691)의 것입니다. 니콘 총대주교는 보통 직접 설교를 했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드문 일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의 설교문은 소실되었지만[858] , 두 편의 지역 서한(1656)은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크레스티 수도원 설립을 계기로 작성된 것입니다. 총대주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의 은총적인 의미에 대해 서술하며, 세 손가락으로 십자가를 그리는 행위에 대한 교리적 해석을 제시한다[859] . 두 번째 서한은 모스크바 루스에서 전염병이 유행하던 시기(1656년)에 작성되었으며, 이는 백성들에게 보내진 것으로 신자들에게 회개와 도덕적 정화를 촉구한다. 여기서 니콘은 당시 매우 널리 퍼져 있던 미신적 믿음, 즉 전염병을 하나님의 징벌로 간주하여 이에 대항하는 어떠한 조치도 취하는 것이 죄라는 주장을 반박하며, 이러한 조치들을 성경 구절[860] 을 인용하여 정당화한다. 이오나 대주교의 방대한 대목자 서한은 본당 성직자들과 그의 교구 신자들에게 보내는 도덕적 교훈을 담고 있다. 이오나는 이 서한에서 사제들의 직무와 마땅한 생활 방식에 대해 서술하고, 평신도를 위한 기독교 윤리의 기초를 제시하며, 만연해 있는 음주라는 악습을 격렬히 비난한다[861] .

모스크바 추도바 수도원의 수도사 카리온 이스토민(† 1717)은 독특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모스크바 루스의 전통과 세계관이 표트르 대제의 개혁으로 인해 큰 충격을 받았고, 사회의 정신적 양상에 새로운 특징들이 드러나기 시작한 두 시대의 경계에 서 있었습니다. 카리온은 열렬한 계몽주의 옹호자이자 실천가였다. 자이코노스파스 수도원[862] 에서 요안니키와 소프로니 리후드 형제가 설립한 학교의 초기 제자 중 한 명이었으며, 한동안 키예프 아카데미(1681년과 1687년)[863] 에서 수학했다. 모스크바에서 그는 인쇄소에서 교정자로 근무했으며, 극도로 보수적이었던 요아킴 총대주교(1674–1690)의 가장 가까운 측근에 속해 있었는데, 이는 아마도 카리온의 ‘외교적’ 재능을 보여주는 것일 수 있으며, 총대주교의 몇 가지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카리온은 요아킴의 후임자인 총대주교 아드리아노스(1690–1700)에게도 전적인 신뢰를 받았으며, 그에게 일종의 개인 비서 역할을 수행했다. 그 후 그는 인쇄소를 관장했다. 1712년 카리온은 미트로폴리트 이오브가 설립한 학교에서 가르치기 위해 노브고로드로 떠났으나, 그곳에 머문 기간은 길지 않았다. 그는 성 디미트리 로스토프스키와 친밀하게 교류하며, 그의 『미네이』를 위한 성자 전기 자료 선정을 도왔다. 카리온 이스토민은 몇 편의 설교와 다른 저작들을 썼는데, 이들은 ‘베셀리티’(당시 타락한 언어의 특징을 보여주는 제목)라는 기이한 제목의 필사본 모음집에 수록되었으며, 많은 시와 ‘소년’뿐만 아니라 ‘소녀’(!)의 교육용으로도 고안된 『부크바르』, 심지어 예절 교과서인 『선한 품성의 시민』[864] 까지 남겼다. 카리온은 17세기 말 러시아 수도사의 새로운 유형을 보여준다. 이와 유사한 인물들에 대해서는 이 책의 다른 주제들을 다루면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그 당시에는 출세를 위해 수도사 복장을 하는 풍조가 있었다. 하지만 일반 및 교회 교육의 부흥이 절실했던 당시의 상황 속에서, 이러한 사람들의 활동은 여전히 긍정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제11장. 서구의 영향과 성찬식 거행 방식에 대한 신학적 논쟁

 

1. 17세기에 서구적 영향의 유입

17세기 마지막 4분기에 수도계는 다시 모스크바의 종교 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신성한 전례에서 성찬을 옮기는 시기에 대한 신학적 논쟁은 모스크바 수도계 내에서 ‘그리스 정교회’와 ‘서구’, 즉 ‘로마 가톨릭’이라는 두 가지 경향을 뚜렷이 보여준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로마 가톨릭의 교리적 교설이 유입된 것은 갑작스럽거나 예상치 못한 일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문헌에서 ‘서구적 영향’이라는 총칭으로 알려진 일련의 역사적 상황들이 초래한 결과였다. 여기서는 그 다양성과 피터 대제의 개혁 이전부터 모스크바의 생활과 문화의 다양한 측면에 미친 영향[865] 을 상세히 검토할 여지가 없다. 우리는 종교적 세계관 분야에서 드러난 영향에만 주목할 수 있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16~17세기 모스코비트들의 마음속에는 두 가지 신념이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첫째, 기독교가 그리스 정교회 신앙, 혹은 심지어 ‘러시아 정교회’라는 형태에서만 순수하고 훼손되지 않은 채 보존되었다는 신념, 둘째, 인간 사회의 삶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토대로 구축되어야 하며 그 가르침에 따라 발전해야 한다는 신념이다. 이러한 견해는 기독교화 초기부터 오랫동안 러시아인들 사이에서 확고히 자리 잡았으며 – 11세기 일라리온 대주교의 『말씀』(제1장)을 떠올려 보자 – 그 이후로 끊임없이 발전하고 공고해졌다. 수도사 필로페이의 저술과 그 안에 담긴 모스크바를 ‘제3의 로마’로 보는 사상은 이러한 견해들을 엄숙하게 선포한 것에 불과했다.

자신의 올바른 신앙에 대한 확신과, 그 결과로 나타나는 자신의 독보성에 대한 믿음과 함께 일종의 종교적 자만심도 뿌리내리게 된다. 정통성의 진실성에 대한 확신은 그 자체로 지극히 정상적이고 죄가 되지 않는 종교성의 표현이지만, 불필요한 과장은 종종 진정한 교회 정신의 범위를 벗어나곤 한다. 러시아인은 자신의 정통성에 대한 확신과 함께 다른 기독교 교파에 대한 뚜렷한 반감을 결합했으며, 러시아 정교회가 아닌 모든 기독교를 이단으로 규정했다. 이러한 유형의 종교적 의식은 본질적으로 전형적인 러시아적 특성이 아니었으며, 객관적으로 말해 중세 종교성 전반에 공통된 것이었지만, 피할 수 없는 ‘Una Sancta’[하나의 거룩한 교회]의 역사에 러시아가 기여한, 부정적인 기여도 존재했다. 러시아 종교 의식의 이러한 특징들로 인해, 그 자체로는 정당화될 수 있는 옹호론이 지나치게 날카로운 성격을 띠게 되었고, 말과 행동으로 이루어지는 방어가 과도한 적대감을 동반하게 되었으며, 동시에 서구 기독교에 대한 지식의 부족이 드러나게 되었다.

로마 가톨릭의 영향이 처음에는 키예프 교회의 생활에, 그 후 키예프를 거쳐 모스크바 대교구로 침투함에 따라, 로마 가톨릭 교리는 러시아 수도자 계층 내에서도 추종자들을 얻게 되었다. 이미 14세기부터 신앙상 그리스 정교도였던 러시아 민족의 일부는 러시아 교회와의 일치를 오직 신앙과 규율의 일치라는 측면에서만 유지했을 뿐, 위계적 관계에서는 그렇지 않았는데, 이는 특별한 키예프 대교구의 설립으로 인해 그들의 모교회로부터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1448년, 1458년에 최종 확정)[866] 로 인해 모교회로부터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1569년 리투아니아와 남서부 루스는 류블린 연합의 결과로 하나의 국가로 통합되었고, 키예프 대교구의 그리스-정교회 교구는 이로 인해 정치적으로 폴란드 왕들에게 종속되었다. 폴란드는 로마 가톨릭 국가였으며, 가톨릭과 정교도 주민 간의 경제적·문화적 유대는 가톨릭의 영향력이 확산되는 길을 열어주었는데, 특히 이러한 영향력은 폴란드 정부의 단호한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치명적이었던 점은, 루스가 로마 가톨릭 교회를 폴란드의 가톨릭주의를 기준으로 판단했다는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폴란드의 가톨릭주의는 러시아 민족과 러시아 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 사이에 깊은 골을 파놓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상호 이해와 객관적인 평가는 어려워졌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불가능해졌다. 러시아인들은 폴란드 가톨릭교와 마주치며 가톨릭 교회에 대한 인식을 형성했다. 폴란드 정부의 ‘ ’ 정책은 그 지배 하에 있던 순수 러시아 영토에서 정치적 상황과 교회적 상황이 가장 밀접하게 얽히게 했으며, ‘폴란드인’과 ‘가톨릭 신자’라는 단어는 러시아인에게 동의어가 되었다. 특히 폴란드가 러시아의 스무타(가짜 드미트리 등장 당시의 무모한 정책)에 개입하고, 폴란드 성직자들이 러시아에서 가톨릭을 선전하려는 서툰 시도를 한 것은 매우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다. 스무타 이후의 수세기 동안 러시아-폴란드 관계, 분쟁 및 전쟁은 겉보기에는 민족·정치적 성격을 띠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제로는 국가 경계와 영향권 문제뿐만 아니라 더 깊은 교회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사건들로 인해 교회들의 통합 가능성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지역적 현상에 근거해 성급한 판단을 내린 양국 정부와 교회 지도부의 실수, 각 당파 지도자들의 격앙된 태도와 그들의 비열한 행적은 폴란드와 서부 루시의 연합 역사 전체를 암울한 색으로 물들였으며, 이 모든 것이 두 기독교 교파를 적대 관계로 몰아넣었다. ‘분열주의자’와 ‘이단자’는 이제 서로 대립하게 되었으며, 그 어떤 다른 정치나 문학적 논쟁도 이만큼의 상호 편견, 비난, 그리고 비방을 낳은 적은 없었다. 이들은 두 적대 진영이었으나, 서로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관계였다.

서구의 문화적 영향, 특히 서구식 교양은 남서부 루스의 정신생활에 점점 더 깊이 스며들었으며, 이는 16세기 후반에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점차 새로운 기류가 모스크바 루스까지 도달했고, 이 과정은 다음 세기에도 계속되었다[867] . 이러한 영향은 특히 학교 교육 분야에서 깊이 뿌리내렸으며, 많은 도시에 대부분 정교회 형제회에 의해 설립된 학교들이 생겨났고, 이들 학교의 교육 과정과 교수법에는 서구의 영향이 드러났다. 1615년에는 키예프 형제회 학교가 설립되었고, 1631년에는 대주교 페트르 모기라가 콜레지움을 설립했는데, 이곳은 나중에 키예프 신학 아카데미로 발전했다. 키예프 콜레지오의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그곳의 과학 및 신학 교육 체계는 스콜라주의적 교수법을 채택한 예수회 콜레지오와 거의 완전히 동일했다. 점차 남부 러시아의 신학 문헌에 일부 가톨릭 신학적 교리들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교육을 받거나 그러한 문헌을 읽으며 지식을 연마한 성직자, 수도자, 주교단 중 다수는 이러한 교리를 인정하는 쪽으로 기울어, 결과적으로 키예프 대교구[868] 의 교회 생활 속에서 가톨릭 사상의 전파자가 되었다. 그러나 다른 수도사들[869] 과 주교들은 그리스 정교회의 가르침을 굳게 고수했기 때문에, 이미 그곳인 키예프 대교구 내에서 상당히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고, 그 결과 수많은 신학 저작들이 등장했다[870] .

모스크바에서는 이 모든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으며, 키예프 대교구에서 쓰인 거의 모든 교회 저작들을 ‘라틴 이단’으로 의심했고, 이에 대한 방어 조치도 취해졌다. 그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들만 언급해 보겠다. 예를 들어, 1620년 필라레트 총대주교 재임 시절 모스크바에서 소집된 공의회는 가톨릭 신자와 유니아트들이 러시아 교회로 개종하기를 원할 경우, 그들에게 세례 성사를 다시 거행하도록 결정했다; 요아사프 총대주교(1634–1641) 재임 시절 이 판결은 심지어 『예식서』(1639)에 수록되기도 했으며, 1667년 공의회에서야 비로소 가톨릭 신자들의 재세례를 최종적으로 금지했다[871] . 1628년, 차르 미하일과 총대주교는 체르니히프 출신의 아르히만드리트 키릴 트란퀼리온의 저술을 소각하라고 명령했다. 동시에 리투아니아에서 인쇄된 모든 책, 즉 리투아니아나 우크라이나에서 출판된 책들도 금지되었다. 그 전까지는 이러한 책들이 모스크바에서 널리 유포되어 수도원 도서관에 소장되기도 했고, 성직자들과 주교들이 구입하기도 했다[872] . 1644년에는 “키릴의 책”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선집이 출판되었는데, 이는 “로마 가톨릭과 라틴파, 루터파와 칼뱅파”를 고발하여 “그 이단적인 입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873] . 그러나 더 널리 퍼진 것은 또 다른 선집인 『신앙에 관한 책』이었는데, 이 책은 이후 구신도들(분파자들)에게 매우 큰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이 책은 1644년경 키예프 미하일롭스키 수도원의 나파나일 수도원장이 집필하였으며, 모스크바에서 약간의 수정을 거쳐 1648년에 인쇄되었다.[874]

남부 러시아의 영향력 확산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은 정부도, 교회 당국도 아니었다. 또한 30~40년대에 이미 많은 수도사들이 폴란드인들의 박해를 피해 개별적으로나 집단으로 키예프 대교구에서 모스크바 루스로 도망쳐 이주하여 여러 수도원[875] 으로 흩어졌다는 사실도 중요한 요인이었다. 니콘 총대주교는 자신이 착수한 예배서 개정 작업을 위해 교양 있는 인재들이 필요했으나, 그러한 인재들을 키예프 대교구에서만 찾을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이 시기에 모스크바에 남부 러시아 수도원 출신의 많은 수도사들이 나타나, 필사자, 교정자, 번역가로서 서적 개정 작업에 참여하게 된 이유이다[876] .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차르는 자신의 교회적 보수주의에도 불구하고, 성직자들의 교육 수준과 지식 부족으로 인해 교회 생활이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서구의 영향은 심지어 차르 가문까지 스며들었는데, 소피아 공주와 표도르 왕세자는 이전의 관행과는 전혀 다른 정신으로 양육되었다[877] . 1649년 알렉세이 차르는 키예프 대주교에게 “그리스어 성경을 슬로베니아어로 번역할 수 있는 교사들을 모스크바로 보내, 우리 대군주에게 잠시 봉사해 줄 것”을 요청하는 특별 서한을 보냈다. 16세기 초에 같은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 모스크바가 막심(Maxim)을 초청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 후 지난 한 세기 동안 계몽 운동의 성과가 너무나 미미했기 때문에 지금도 외부에서 적합한 인재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 당시 모스크바에 온 다른 이들 중에서도 특히 언급할 가치가 있는 세 명의 수도사가 있었다. 그들은 아르세니 사타노프스키, 다마스킨 프티츠키, 그리고 에피파니 슬라비네츠키[878] 였다.

수도사 에피파니 슬라비네츠키는 니콘 총대주교 재임 시절에 착수된 예배서 개정 사업뿐만 아니라, 그 후 불거진 성체 성혈의 전례 방식에 관한 논쟁에서도 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모스크바에서 겉보기에는 특별히 눈에 띄는 활동을 펼치지 않은 인물이었으나, 오히려 항상 그늘에 머물렀던 겸손하고 재능 있으며 도덕적으로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모스크바의 소란스러움에서 한 발 물러나 있던 전형적인 학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성품과 학식 덕분에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었고, 훗날 사회 생활의 무대에서 활약하게 될 제자들을 양성할 수 있었다.

에피파니는 아마도 서부 루스의 핀스크 시에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을 것이다. 그는 1631년, 즉 대주교 페트로(모길라)가 이 학교를 개혁하기 전, 그곳에서 아직 그리스-슬라브 학파가 주류를 이루던 시절에 키예프 형제 학교에서 공부했다. 그 시절 그는 한 교육을 받았으며, 그리스어와 슬라브어에 대한 상당한 문헌학적 지식을 습득했다. 에피파니우스는 10년 또는 12년 동안 폴란드 서부의 어느 학교에서 지내며, 폴란드어와 라틴어를 철저히 익힐 기회를 얻었다. 40년대 초반, 그는 키예프-페체르스카 수도원에서 수도 서원을 했으며, 1642년에는 이미 자신이 예전에 다녔던 그 브라트스카 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1649년까지 가르쳤다. 이 시기 에피파니는 학문적 연구에 몰두하는 열정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모스크바에서 그에게 주목한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제자이자 수도사인 에우피미우스가 훗날 쓴 저서, 『가장 현명한 수도사 에피파니 슬라비네츠키에 대하여』에서 알 수 있듯이, 에피파니는 폴란드-가톨릭의 영향에서 거리를 두고, 엄격한 정통파로 남으며 그리스 정교회[879] 의 가르침에 충실했던 키예프 학자들의 소수 그룹에 속해 있었다. 바로 이 때문에 모스크바에서는 그를 신뢰와 인정으로 대했으며, 예배 서적을 개정해야 한다는 그의 견해가 니콘의 개혁 의지를 굳건히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데, 이에 대한 내용 역시 에우피미우스의 저서 『가장 현명한 수도사 에피파니우스에 대하여』에서 확인할 수 있다. 거의 30년 동안(에피파니우스는 1675년에 사망했다) 그는 모스크바에서 서적 교정과 교회 교부들의 저서 번역에 매진했다[880] .

 

2. 수도사 예프티미우스와 총대주교 요아킴: 모스크바 보수주의의 대표자들

그 당시 모스크바에는 오로지 무지한 사람들만 살았다고 단정하는 것은 불공평할 것이다. 잘 알려진 교회적 보수주의와 종교적 엄격주의와 동시에, 교육과 지식에 대한 큰 열망도 존재했다. 어떤 이들은 서양을 향해 눈을 돌리는 반면, 다른 이들은 고대 원천인 그리스 정교회 세계에서 지식을 얻고자 했다. 추도프 수도원에서 활동하던 에피파니우스 주위에는 그리스 문화에 끌리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이것이 진정한 학교[881] 였는지는 단정하기 어렵지만, 그들은 에피파니우스와 끊임없이 교류하며 그가 책을 필사하는 것을 돕고 다양한 저작을 읽음으로써 시야를 넓힐 수 있었다.

에피파니우스의 주변에서 두드러진 인물은 수도사 에우피미오스였는데, 그는 훗날 ‘빵 숭배 이단’에 맞서 싸우던 총대주교 요아킴을 도왔다. 에우피미오스(† 1705)는 추도바 수도원의 평범한 수도사였으나, 아마도 우연만이 아니라 다른 이유도 있었기에 같은 수도원에서 피신하며 일하던 에피파니오스와 인연을 맺게 되었을 것이다. 에우피미우스는 타고난 재능을 지녔고 호기심이 매우 왕성한 인물이었다. 그는 그리스어를 매우 유창하게 익혀 에피파니우스의 주요 조력자가 되었으며, 이후 신학적 지식을 한층 더 연마하여 번역가이자 교회 저술가[882] 로 활동했다. 신학적 논쟁에서 그의 상대이자 ‘라틴파’의 지지자인 수도사 실베스트르 메드베데프는 자신의 『회개의 고백』에서 그를 “진리의 열성가, 교회의 옹호자, 신앙의 수호자”라고 칭했다[883] , 비록 이 말이 어느 정도 교묘함과 계산을 배제하지 않고 나온 것이었지만, 그러나 예프티미의 삶과 활동은 그가 확고한 신념과 자신의 견해를 표현하는 데 있어 특유의 직설성, 그리고 모든 비정통적 영향력에 대한 적대감에 가까운 반감을 지녔음을 증명한다. 80년대에 모스크바 사회에서 성찬식 거행 방식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 불거졌을 때, 예프티미이는 그 논쟁의 주요 참여자 중 한 명이자 교육 수준이 낮은 요아킴 총대주교의 가장 열성적인 조력자가 되었으며, 어쩌면 바로 그가 ‘빵 숭배 이단’에 맞서 요아킴이 취한 가혹하고 엄격한 조치들의 진정한 주동자였을지도 모른다. 예프티미와 요아킴은 모스크바 보수주의의 마지막 모히칸족이자, ‘모스크바는 제3의 로마’라는 사상의 마지막 수호자들이었다.

사라져 가던 모스크바 보수주의는 그 어떤 인물보다도 총대주교 요아킴(1674–1690)의 모습에서 그토록 강력하고 선명하게 구현되었다. 그는 1620년 그다지 부유하지 않은 사벨로프 가문의 군인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처음에는 키예프에서 멀지 않은 남부 루스에서 군 복무를 했다. 아내와 자녀를 잃은 후 그는 수도자 서원을 결심하고 1655년 키예프의 메지고르스키 수도원에 입회했다. 그가 어떻게 니콘 총대주교와 알게 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아마도 어떤 용무로 모스크바에 머물던 중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알려진 것은 니콘이 1657년 자신이 설립한 이베르스키 수도원의 건축 책임자로 그를 임명했다는 사실뿐이다. 요아킴의 동시대인이자 적수였던 집사 테오도르는, 처음에는 ‘빵 숭배자’ 중 한 명이었으나 나중에는 분열을 열렬히 지지하는 인물이 되어, 요아킴이 이전에는 문맹이었으며 이베르스키 수도원에서야 비로소 공부를 시작했고, 그 전에는 읽기도 쓰기도 할 줄 몰랐으며, 교회 관련 지식은 전혀 없었고 예배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고(아마도 테오도르는 요아킴이 본성상 종교적이지 않았다는 뜻일 것이다. – I. S.), 그는 외딴 마을에서 살며 토끼 사냥을 하던(!) 용병이었으며, 큰 명절 때만 가끔 교회에 들렀을 뿐이었다[884] . 비록 테오도르가 과장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 당시 기준으로 보아도 요아킴은 교육받지 못한 사람이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실용적인 사고방식과 상식을 갖추고 있었는데, 이는 그의 개인 비서 역할을 했던 에우프티미우스의 문학적 재능과 결합되어 그에게 신학 논쟁에 참여할 기회를 제공했다. 이 상식, 그리고 테오도르의 말에 따르면 교활함 덕분에 요아킴은 교회 권력의 정상에 빠르게 오를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서구식 교육을 열렬히 지지했던 보야린 F. 르티셰프의 지원 덕분에 — 이는 요아킴이 자신과 견해가 다른 계층에서도 친구와 후원자를 찾아낼 줄 알았음을 보여준다 — – 그는 모스크바 안드레이예프스키 수도원의 원장직을 맡았고, 이후 차르 가문과 특히 가까운 노보스파스스키 수도원의 재무관을 지냈으며, 1664년에는 이미 모스크바 추도바 수도원의 대수도원장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예식 준수’와 상냥한 태도로 알렉세이 차르의 특별한 총애를 얻었는데, 바로 그 디아콘 테오도르가 신랄하게 지적한 바와 같다. 1673년, 요아킴이 아마도 차르의 개입 없이는 불가능했을 노브고로드 대주교로 임명되었을 때, 그는 이미 교회 계급 구조의 최상위권에 올라섰다. 요아킴은 그곳에서 권위적인 지도자로서 자신의 교구를 엄격하게 통치하며, 교회 의식의 형식을 준수하는 데 주된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요아킴의 행정 조치 중 일부는 유익을 가져왔는데, 예를 들어 본당 성직자에 관한 그의 지시나, 그가 나중에(1675년과 1687년) 전 러시아 교회를 대상으로 도입한 성직자 조세 징수 방식의 새로운 질서 등이 그러했다. 그는 본당 성직자들의 생계 보장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본당에 토지를 분배했으며, 그의 재임 기간에 수도원 관리국(1677년)이 폐지되었고, 성직자의 관할권 문제와 관련하여 요아킴은 세속 권력이 종교 재판에 개입하는 것을 완전히 배제하는 데 성공했다[885] .

요아킴의 출세는 엄밀히 말해 니콘 총대주교 덕분이었으나, 전임 총대주교가 추방의 마지막 거처였던 키릴로프 수도원에 머물던 시절(이는 요아킴의 주도로 이루어진 일이었다)에 그가 보인 태도는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의 나쁜 면모를 드러낸다. 니콘의 처지를 완화해 달라는 표도르 차르의 모든 시도와 심지어 간청조차도 제멋대로이고 자만심 강한 요아킴에 의해 거절당했다. 동시에 요아킴은 니콘의 개혁을 열렬히 지지하는 지지자이자 자신의 이념적 반대자들을 박해하는 자였다. 그는 잔혹함과 종교적 광신, 그리고 타협하지 않는 태도로 분열주의자들을 박해했다. 그러나 서구의 영향이 드러나는 모스크바 생활의 모든 현상들 역시 요아킴의 단호한 저항과 비난을 받았다. 그에게 ‘외국인’, ‘라틴인’은 언제나 이단자였으며, 그는 외국 사절들을 접견하는 것을 거부했고, 차르의 식탁에서 그들과 함께 앉거나 식사하는 것을 거부했으며, 외국인들이 자신이 집전하는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의 유언을 읽어보면, 우리는 모스크바에서 문화적·종교적 형식주의가 이미 사그라들어가던 그 시절에도 종교적 광신자이자 형식주의자의 모습을 눈앞에서 보게 된다. 비록 요아킴과 같은 성격의 인물들이 17세기 마지막 25년 동안의 에서는 전형적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존재는 모스크바의 종교적 보수주의와 형식주의가 새로운 인물들과 새로운 견해에 자리를 내어주는 과정에서 결코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886] .

 

3. 서구적 영향의 매개체로서의 시메온 폴로츠키와 실베스트르 메드베데프

서구적 영향이 모스크바 사회에 스며드는 데에는 그 내용뿐만 아니라, 훨씬 더 큰程度上에서 매우 성공적이었던 지지자들의 활동이 기여했다. 수도사 실베스트르 메드베데프는 ‘서구파’ 또는 ‘라틴파’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의 신학 교육은 물론, 그의 영적 성숙 과정 전체가 서구식 사고방식을 배우고 서구적 교양을 습득할 수 있게 해준, 그 장점을 확신하게 해준 사람들과의 지속적인 개인적 교류를 통해 형성되었다.

예를 들어, 모스크바의 문화 생활에 다방면으로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활동은 이미 성찬의 전례에 관한 신학적 논쟁의 전사로 우리를 이끄는 유명한 시메온 폴로츠키가 바로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1629년 벨라루스의 폴로츠크 지방에서 태어나 문학사에서 보통 시메온 폴로츠키로 불리는 시메온 페트로프스키-시트니아노비치는 1663년 모스크바에 정착한 이래 그곳에서 서구 계몽주의의 주요 옹호자였다. 그의 동시대인이자 이념적 반대자인 에피파니 슬라비네츠키와 비교하면, 그는 완전히 다른 인물이었으며, 그가 다닌 학교도 에피파니가 다닌 학교와는 확연히 달랐다. 1640년대에 그는 키예프 콜레지움에서 공부했는데, 당시 그곳의 강사(1650년까지)이자 학장(1650–1655)은 유명한 남러시아의 설교자이자 학자인 라자르 바라노비치 (1620–1693)가 있었는데, 그는 이후 체르니히우 대주교(1657–1692)로서 키예프 대교구[887] 의 교회 생활에서 적지 않은 역할을 수행했다. 그의 이름을 여기서 언급해야 하는 이유는, 이후 요아킴 총대주교와 성찬례에 관한 서신 교환에서 라자르 바라노비치가 로마 가톨릭 교리를 지지했기 때문이며, 시메온의 신학적 견해는 키예프 콜레지에서 수학하던 시기에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대학에서는 스콜라주의 교육 체계가 번성했는데, 이는 그의 영적 성향에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저술에도 반영되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시메온은 키예프에서 폴로츠크로 돌아와 그곳에서 수도 서원을 하고 지역 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알렉세이 차르가 도시를 방문했을 때, 시메온 폴로츠키는 차르에게 직접 말을 걸고 이 행사를 위해 특별히 지은 환영 시를 바칠 영광을 얻었으며, 이를 통해 차르의 주목을 받았다. 이렇게 폴로츠크에서 이미 그의 미래 경력이 시작되었다.

1660년 시메온 폴로츠키는 모스크바를 방문하게 되었고, 다시 한번 차르에게 시로 쓴 찬사를 바치며 그의 관심을 끌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폴란드 군대가 폴로츠크를 점령한 후(1661년), 1663년 시메온은 모스크바로 이주했다. 라자르 바라노비치 대주교가 당시 모스크바에 거주하며 알렉세이 차르의 특별한 총애를 받고 있던 가즈 대주교 파이시 리가리드에게 보낸 추천서 덕분에, 시메온은 차르 궁정에서 인맥을 쌓을 수 있었으며, 이때 자신의 시적 재능을 매우 능숙하게 활용했다. 동시에 자이코노스파스 수도원 학교에서 그의 교육 활동이 시작되었는데, 그곳에서 그의 제자 중에는 훗날 예로모나흐가 된 실베스트르 메드베데프[888] 도 있었다. 시메온의 순수 문학 활동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고, 그 시대의 교회 사건들과 관련된 모스크바 시절의 사실들만 살펴볼 것이다.

시메온이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무렵, 알렉세이 차르와 니콘 총대주교 사이의 관계가 특히 격화되었고[889] 동시에 분열 세력의 지도자들과의 논쟁이 불거졌다. 시메온에게는 분열을 선동하는 자들의 견해를 철저히 비판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그렇게 해서 그의 첫 번째 대작인 『통치의 지팡이』가 탄생했는데, 이 책은 처음에는 1666년 분열에 반대하는 공의회의 공식 문서로 여겨졌다. 시메온은 상당한 스콜라적 기교와 논쟁적 솜씨를 발휘하여 이 저작을 집필했으며, 교회 문헌에 대한 탁월한 지식을 보여주었고, 심지어 막심 그리스인과 지노비 오텐스키의 저술 및 스토글라비 공의회의 결의문에서 인용문을 활용하기도 했으나, 하지만 동시에 그의 저작은 몇 가지 오류와 반대파 대표들의 견해 및 발언을 왜곡한 점, 분열의 지도자들에 대한 거친 비난, 심지어 수많은 욕설의 사용에서 자유롭지 못했는데, 이는 중세 논쟁 기법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이었다[890] .

그의 경력은 눈부시게 발전하여, 그는 차르의 자녀들, 즉 장남인 알렉세이 왕세자와, 그가 사망한 후(1669년) 미래의 차르 페도르와 소피아 공주의 가정교사가 되었다. 후자들이 서양 문화에 보인 경향과 그 문화적 현상에 대한 공감은 시메온의 영향으로 확실히 설명될 수 있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좋은 시기가 시작되었고, 그는 호화로운 생활을 누렸으며, 그의 활동 무대는 차르의 궁정이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설교를 하고, 축하 시와 연극 대본, 그 밖의 문학 작품을 집필했다. 그는 모스크바에 아카데미를 설립하자는 제안을 열성적으로 지지했는데, 그 아카데미는 그 자신이나 그의 제자 실베스트르 메드베데프가 구상한 계획에 따라 키예프 콜레지움을 본떠 조직되어야 했다. 1680년 사망할 때까지 시메온은 존경받는 인물이자 인정받는 학자, 그리고 저명한 문인이었다.

시메온 폴로츠키가 차르 궁정과 모스크바 사회(그는 많은 보야르 가문 및 성직자들과 친분을 쌓았다)에서 펼친 다방면의 활동과 그의 높아지는 인기는 모스크바에서 서양 문화의 영향력이 강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그에게 우연히 씌워진 수도사의 후드, 수사학과 열정이 가득한 설교 『[891] 』, 성격과 신념 면에서 시메온의 적대자였던 엄격한 총대주교 요아킴과의 교류에서 보여준 외교적 기지 등, 이 모든 것이 그를 모스크바 보수 세력의 의심에서 벗어나게 했다. 그는 저서 『믿음의 면류관』(1670)을 통해 자신의 ‘정통성’을 입증해 냈다. 『면류관』은 말하자면 정교회 교리학을 서술한 시도였다. 시메온은 이 서술의 기초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를 삼지 않고 ‘사도신경’(4~16장)을 채택했는데, 이상하게도 처음에는 모스크바 보수주의자들의 의심을 사지 않았다. 비록 모스크바에서는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단적 경향’으로 간주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시메온은 여기서 필리오케(Filioque)에 관한 로마 가톨릭 교리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훨씬 후의 논쟁에서야 수도사 에우피미우스가 그에게 이 오류와 더불어 안셀무스, 둔스 스코투스, 토마스 아퀴나스, 벨라르민의 저술에서 차용한 증거들을 사용했다는 점을 비난했다. 그때 시메온의 설교에 담긴 모든 ‘라틴파의 일탈’은 유프티미우스에 의해 기소 자료로 수집되었다[892] . 시메온의 전체적인 세계관이 모스크바의 것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며, 그와 교류하거나 그에게서 배운 사람들은 점차 서구 계몽주의의 지지자가 되었고, 부분적으로는 그의 ‘라틴 경향’을 따르게 되었는데, 시메온 폴로츠키뿐만 아니라 모스크바에서 이와 유사한 견해를 전파한 이들이 한두 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모스크바의 문화적 보수주의를 단호히 거부하고 서구 문화의 우월성을 인정한 이들 중에는, 물론 세속 이름 실베스트르로 알려진 수도사 시메온 메드베데프도 있었는데, 그는 비극적인 운명뿐만 아니라 성격 면에서도 주목할 만한 인물이었다. 그가 당대의 신학적 논쟁에서 수행한 역할의 중요성은, 그를 이긴 상대였던 수도사 예프티미가 실베스트르의 영적 성숙 과정을 다룬 전기를 집필하도록 이끌었으며, 이 전기는 이후 다른 연구들을 통해 보완되었다[893] . 1665년 실베스트르 메드베데프는 알렉세이 차르 의 비밀부서 서기 로 근무했다[894] . 그곳에서 그는 오래 근무하지 않았고, 1672년에는 몰찬스카야 황야에서 살았으며, 대략 1675년부터는 이미 수도사로 알려져 있다. 1년 후, 우리는 그를 모스크바의 자이코노스파스 수도원에서 발견하는데, 당시 시메온 폴로츠키가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 두 사람은 끊임없이 교류했으며, 이때부터 시메온이 실베스트르에게 미치는 영향이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시메온 폴로츠키와의 대화, 남부 러시아와 서양의 저작이 많이 소장된 그의 개인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것(그의 반대자 에우피미우스는 실베스트르가 라틴어 서적을 연구한 점을 바로 이 점을 문제 삼았다)은 실베스트르의 교양을 풍부하게 하고 호기심을 키워주었다. 그는 시메온 폴로츠키의 다양한 연구를 도왔다[895] . 시메온 폴로츠키가 사망한 후(1680년 8월 25일), 아마도 그의 추천으로 실베스트르는 자이코노스파스 수도원의 건축 책임자 자리를 얻었고, 시메온의 학교를 이끌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그는 당시 라틴어 교육도 맡게 되었다[896] .

같은 해에 실베스트르가 신학 문제에 대해 처음으로 공개 연설을 했다. 그 경위는 다음과 같다. 그보다 얼마 전, 얀 벨로보츠키라는 인물이 모스크바에 도착했는데, 그는 폴로츠키가 모스크바에 고등 학교를 설립하려는 계획과 관련하여, 아직 설립되지도 않은 이 학교의 교원 자리를 얻고자 했다. 그의 과거와 종교적 신념은 매우 불분명했다. 그는 서부 루스 출신이었으나 가톨릭 신자는 아니었고, 그의 말로는 아예 어떤 특정 종교에도 속하지 않는 듯했으며, 게다가 기독교 교회의 성찬 예식을 단호히 거부했다. 벨로보츠키의 ‘루터파 이단’에 대한 소문이 총대주교에게까지 전해지자, 요아킴은 그에게 자신의 ‘신앙 고백’을 밝히라고 요구했다. 벨로보츠키의 서면 ‘신앙 고백’을 반박하는 임무는 메드베데프에게 맡겨졌는데, 이 사실은 한편으로는 메드베데프가 당시 어떠한 의심도 받지 않았음을,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신학 교육 수준이 높이 평가되었음을 보여준다. 1681년 7월 11일, 총대주교의 집무실에서 회의가 열렸는데, 이 자리에서 메드베데프는 칼빈주의적 성격을 띤 벨로보츠키의 견해를 반박하며, 성찬례에 관한 동방 교회의 교리[897] 를 제시했다. 아마도 이 신학적 논쟁에서의 승리가 메드베데프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그를 더 깊은 신학적 연구로 이끌었을 것이다. 그는 ‘생명의 빵’이라는 제목의 저술을 썼는데, 이는 스승과 제자 간의 대화 형식으로, 거기서 그는 성체 성사의 변형 시기에 관한 가톨릭 교리를 공개적으로 설명했다: “제자들의 질문: 신성한 전례 중에 빵이 그리스도의 지극히 거룩한 몸으로, 포도주가 지극히 거룩한 피로 변하는 것은 언제입니까? 스승의 대답: 지극히 거룩한 몸과 피는 신성한 전례 중에 사제가 빵 위에 “받아들이소서”라고 선포하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해 변합니다.”[898] .

 

4. 성찬의 변형 시기에 대한 논쟁

메드베데프가 자신의 저서에서 제시한 로마 가톨릭 교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남러시아의 예배 및 교회 문헌에 스며들어 있었다. 이 교리는 게데온 발라반의 《예배서》(1604)와 빌뉴스판 《예배서》(1610)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가장 널리 퍼진 미트로폴리트 페트르 모길라의 《예식서》(1629년판)에는 아직 그리스 정교회의 교리가 담겨 있지만, 1639년과 1646년에 재출간된 판본은 이미 로마 가톨릭 교리를 담고 있다. 또한, 이 교리는 모스크바 루스에서 널리 퍼졌던 다양한 남러시아 신학 저작들[899] 에도 서술되어 있다. 그중에서는 당시 매우 널리 퍼졌던 테오도시 사파노비치의 『성교회에 관한 해설』 (1667)를 특히 언급해야 한다. 이 책은 1667–1674년 동안 남부 루스에서 네 차례에 걸쳐 출판되었으며, 이 책의 러시아어 번역본(원문은 소러시아어, 즉 우크라이나어 방언으로 쓰여졌다)은 17세기 필사본에 보존되어 있다. 저자는 동방 교회의 예배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위해 주로 시메온 테살로니키(† 1429)[900] 와 다른 저자들의 저술을 활용했으며, 특히 성찬의 성변화 시기에 대한 가르침은 로마 가톨릭 교리에 따라 서술되었다[901] .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시메온 폴로츠키는 거의 같은 시기에 자신의 저서 『통치의 지팡이』(1666)와 1673년에 에피파니 슬라비네츠키와의 대화에서 유사한 교리를 제시했다. 하지만 당시 폴로츠키는 여전히 매우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으며, 게다가 니콘이 유배된 후 모스크바에는 확고한 교회 권위가 없었다[902] . 1682년에 표도르 차르가 사망했고, 통치권을 장악한 소피아 공주와 그녀의 총애를 받던 V. V. 골리친 공작은 서구적 영향에 호의적이었기 때문에[903] , 한동안 교회 당국 측에서는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실베스트르 메드베데프는 평온하게 학문적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고, 바로 그 무렵에 그는 앞서 언급한 저서 『동물적 빵』을 집필했다.

진정한 신학적 논쟁은 몇 년 후, 정교회 진영이 ‘가장 현명한 수도사들’인 그리스인 요안니키오스와 소프로니오스 리후도프 형제로부터 강력한 지지를 얻게 되면서 격화되었다. 그들은 1685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추천서를 가지고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개교를 앞둔 아카데미에서 강의할 예정이었다[904] . 실베스트르 메드베데프는 처음부터 두 형제를 적대적으로 대했는데, 그들의 도착이 자신의 계획을 무산시켰기 때문이다. 사실 폴로츠키, 즉 실베스트르가 아카데미의 정관을 작성하여 차르에게 상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관은 승인되지 않았고, 실베스트르에게는 자이코노스파스 수도원의 학교를 예전처럼 운영할 수 있는 권한만 주어졌다. 학교를 위해 지어진 전용 건물은 단 두 채뿐이었는데, 이는 아마도 요아킴의 개입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905] , 그리고 실베스트르는 이를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한편 아카데미의 정관은 개정되었다 (아마도 수도사 에우프티미우스도 개정 작업에 참여했을 것이다). 그 결과 라틴어 대신 그리스어를 가르치기로 결정되었다. 아카데미는 그리스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는 수호자이자 이단과의 투쟁에서 견고한 보루가 되어야 했다[906] . 또한 리투아니아와 남러시아 지역 출신자들을 교수진으로 초빙하는 것이 금지되었는데, “그 이유는 처음에는 그들이 지극히 경건해 보이지만, 점차 타락한 말을 퍼뜨려 신앙을 훼손하고 그 순결함의 온전함을 해치기 시작하기 때문”이었다[907] .

메드베데프와 리후다 형제들 사이의 개인적인 관계도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다. 시메온 폴로츠키를 다소 연상시키는 주장을 펼치던 그리스인 형제들을 위해, 그들 측의 몇 차례 요청 끝에 자이코노스파스 수도원에 별도의 석조 건물이 지어졌는데, 그곳의 원장으로는 실베스트르 메드베데프가 재직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어, 한 수도원에서 곧 격렬한 논쟁 속에서 적대자가 될 사람들이 함께 살며 논쟁적인 저술을 쓰게 되었다. 그러나 리후다 형제들과 예프티미 사이에는 긴밀한 관계가 형성되었는데, 예프티미는 그들로부터 신학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메드베데프에 대한 그들의 반감을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에 유프티미우스는, 아마도 메드베데프의 저서 『동물적 빵』을 아주 빨리 접했을 텐데, 스스로 메드베데프를 공격하며 『빵』에 대한 반박문인 『동방 교회를 옹호하기 위한 성부들의 말씀』[908] 을 썼다. 메드베데프의 주장을 반박하며, 예프티미이는 교회 교부들의 글에서 발췌한 내용과 에피파니 슬라비네츠키와의 대화를 근거로 삼았으며, 메드베데프가 설명한 성찬의 변형에 관한 교리는 1645년 페트르 모길라의 『정통 신앙고백』 1645년판 ‘페트르 모길라의 정통 신앙고백서’에서 차용된 것이라고 본다. 유프티미가 자신의 논증에서 어느 정도 독자적이었는지는 단정하기 어렵다[909] . 그러나 유프티미가 그리스 신학의 ‘건전한 사고’를 칭송하는 문단은, 아마도 그가 리후드 형제 학자들로부터 받은 도움을 시사하는 것일 수 있다.

메드베데프는 아마도 유프티미우스가 “라틴 학문”에 대해 던진 조롱 섞인 비평에 가장 분노했을 것이다. 비록 “생명의 양식”이 실무적이고 과학적인 언어로 쓰였기 때문에 그 비평이 전적으로 타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제 큰 짜증과 논쟁적인 열의를 담아 “생명의 양식 만나에 관한 책”을 집필한다. 이후 심문(1689년 가을)에서 메드베데프는[910] , “만나”를 “소피아 알렉세예브나 공주의 칙령에 따라” 썼다고 말할 것이다[911] . “만나”에서 메드베데프의 저서(1690년 공의회 판결에 따라 소각되어 필사본으로만 전해짐)에서는 성체 성사의 변형에 관한 로마 가톨릭 교리가 다시 한번 상세히 서술되어 있으며, 성부들의 저작과 남러시아의 저작들, 심지어 고아르의 『예식서』[912] 에서도 수많은 인용문이 등장한다.

이미 『생명의 빵』이라는 저작만으로도 예프티미우스는 논쟁에 뛰어들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가장 강력한 무기로서 신학 지식을 갖춘 리후드 형제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형제들은 러시아어를 구사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프티미우스는 메드베데프의 저작을 그들을 위해 번역해 주었거나(이는 가능성이 낮지만), 아니면 ‘이단자’의 주요 주장을 형제들에게 설명해 주었을 것이다. 형제들은 그리스어로 반박문을 작성했고, 이는 예프티미우스의 편집 하에 인쇄소에서 슬라브어로 번역되었다[913] . “아코스, 또는 뱀의 독이 주는 고통에 대항하는 치료법” – 저자들은 자신의 저서에 이러한 제목을 붙였으며[914] , 이 글이 두 왕과 소피아 공주의 명령에 따라, 그리고 총대주교의 축복을 받아 쓰여졌음을 강조했다. 이로부터 1688년 11월 신학적 논쟁에 러시아 교회의 수장도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메드베데프만 홀로 활동한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사바 돌기(Савва Долгий)라는 사제는 모스크바에서 『만나』의 발췌문과 사본을 큰 열의를 가지고 배포했다. 또한 아파나시이라는 디아콘이 있었는데, 그는 메드베데프의 수도실에서 이 사본들을 준비하고 발췌문을 작성했으며, 저작의 보급을 가속화하기 위해 몇 명의 필사자들을 더 동원했다. 심문에서 자이코노스파스키 수도원의 성가대는 1687~1688년 겨울에 “그에게, 셀리베르스트카에게 많은 귀족들(아마도 어떤 보야르들일 것이다. – I. S.)과 귀빈들이 찾아왔으며… 그들의 대화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관한 것이었다”고 진술했다(즉, 성체 변모의 시기에 관한 것)[915] .

메드베데프의 견해를 공유하거나 이에 일정한 관심을 보였던 이러한 계층에서, 『새로 숨어든 늑대들에 대한 고발』이라는 제목의 또 다른 저작이 나왔는데, 그 저자는 “어둠 같은 이방인들”(즉, 리후다들)과 격렬하게 논쟁하며 “광견”, “더러운 박쥐들”, “눈먼 올빼미들”, “그리스도의 양들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드는 늑대들”과 같은 욕설을 사용하며 “어둠의 형상을 띤 이방인들”(즉, 리후다)과 격렬하게 논쟁을 벌인다. 상당히 장황한 서론 이후, 저자는 주로 남러시아의 저작들[916] 을 근거로 로마 가톨릭 교리를 설명한다. 비록 리후다 형제들은 『폭로』의 저자를 메드베데프로 여겼지만, 이는 거의 사실이 아닐 것이다. 저작의 언어, 수많은 욕설, 남러시아 작가들의 인용문 등 이 모든 것이 메드베데프의 저자설을 반박하며, 이는 그의 성격이나 저작 스타일과도 맞지 않는다. 심지어 수도사 예프피미이조차 이 저작의 저자를 “이름 없는 자”라고 불렀다.

메드베데프는 당시 『아코스』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자신의 논쟁적 저서를 집필하느라 바빴는데, 『아코스』는 성체 변모 시기에 대한 정통 교리를 매우 명확하고 분명하게 서술하며 신학 문헌을 폭넓게 활용하고 있었다. 그리스인 형제들의 신학적 소양을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1688년 초가을, 메드베데프는 마침내 『아코스』에 대한 비판을 완성했다. 그 제목은 『정통 신자들에게 전하는 참된 소식과 고대 서적에 대한 모스크바 왕국의 새로운 통치에 관한 세속적 증언』이었다. 이 방대한 저작[917] 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 저작의 약 4분의 1을 차지하는 제1부는 17세기 초부터, 주로 니콘 총대주교 시대와 그 이후 1667년 공의회에 이르기까지의 예배서 개정 역사에 전념하고 있으며, 이 사업에 대한 저자의 정당한 비판적 지적도 포함되어 있다. 메드베데프가 왜 이 서론을 썼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아마도 그의 반대자들이 참고하는 저작들에 많은 오류가 스며들어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 수 있다. 그 뒤에는 아무런 연관성 없이 제2부가 이어지는데, 이는 『[918] 』라는 과학적·신학적 연구로, 저자는 여기서 자신의 관점을 확고히 옹호하고 있다. 아마도 바로 이러한 메드베데프의 고집 때문에 1688년 가을, 그와 예프피미가 가장 박식하고 유능한 전문가들이었던 인쇄국(Печатный двор)의 교정관 직위를 잃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919] .

그러나 ‘정교회당’은 메드베데프에 대한 논쟁을 계속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예프티미우스가 쓴 저서 『진리의 증언』이 출간되었는데, 비록 저자는 이 책에서 소프로니우스 리후다의 이름으로 이야기하고 있다[920] . 이 책에서 예프티미이는 메드베데프의 『진실의 소식』뿐만 아니라, 예프티미이가 이번에는 메드베데프의 작품으로 간주하고 그 내용의 주장을 비난의 근거로 삼은 ‘이름 없는 자’의 『폭로』 와도 논쟁을 벌인다. 게다가 교회 계층의 대표자인 홀모고르 대주교 아파나시이도 이 논쟁에 가세했는데, 그의 일부 신학 저작들은 앞서 이미 언급된 바 있다. 안타깝게도 필사본으로만 전해지고 매우 불충분한 설명을 통해서만 알려진 그의 두 저작은, 그리스 정교회의 가르침에 따른 성찬의 성변화 문제[921] 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점차 신학적 논쟁의 범위를 벗어나게 되었다. 두 가지 관점 모두 백성들 사이에서 널리 퍼졌다. 메드베데프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매우 다양했으며 그와 토론을 벌였고, 모스크바 성직자들 중에서도 그와 뜻을 같이하는 이들이 있었다. 사제 사바, 부제 아파나시이와 야코프, 수도사 안톤 무로메츠 등이 그들이다. 심지어 모스크바 주둔군인 스트렐츠 연대에서도 ‘라틴파’는 관심을 끌며 지지자들을 얻었다[922] . 이 시대의 종교성을 매우 잘 보여주는 특징은, 언뜻 보기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상황인 ‘라틴파’가 분열에 가까운 세력들 사이에서도 지지를 얻었다는 점이었다. 니콘이 추진한 개혁 과정에서 그리스인들과 그들의 신학의 권위는 니콘의 반대자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회의적인 사람들의 눈에도 떨어졌다. 메드베데프는 『진리의 소식』 제1부에서 니콘의 수정안 속 오류들을 지적하며 이 권위에 대해 다시 한번 날카로운 비판을 가했다. “그리스파” 또는 “정통파”를 이끈 것이 요아킴 총대주교였다는 사실도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그는 가혹한 조치와 박해로 분열파와 그들을 은밀히 동정하던 이들의 적대감과 증오를 불러일으켰다. 예프티미우스가 편집하고 부분적으로 집필한 『오스텐』에는 백성들 사이에서 벌어진 격렬한 논쟁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 사실 이 신학적 논쟁에는 모스크바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그러한 토론의 소재가 되는 외부적 측면도 존재했다. 성찬례의 순서에 따라 “받아들이고 먹으라”는 선언을 할 때, 성찬례를 집전하는 사제는 고개를 숙이고, 바로 그 순간 종을 울린다. 그 당시에는 성찬식에 참석하지 않고 집이나 거리에 있던 사람들이 이 시간에 십자 성호를 긋는 관습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 시절에는 외적인 의식에 ‘성찬식적’ 의미가 부여되었으며, 분열의 시대는 이러한 의식 신앙을 더욱 강화시켰다[923] .

신학적 논쟁은 점차 사회 전체의 문제가 되었으며, 모스크바의 정치적 분위기와도 연관되어 있었다. 소피아 공주와 성장해 가는 차르 표트르 사이의 관계는 점점 더 긴장되어 갔다[924] . 메드베데프는 소피아의 파벌에 속해 있었다. 그는 스트렐체키 프리카즈의 수장인 오콜니치 페도르 샤클로비티와 자주 교류했는데, 샤클로비티는 자신의 출세를 공주에게 빚지고 있었으며 스트렐체키 연대를 소피아의 편으로 부추겼다. 게다가, 메드베데프는 전능한 공작 V. V. 골리친의 총애를 받았는데, 그는 공주의 총애를 받는 인물이었으며[925] , 공주 본인에게도 호감을 얻고 있었다. 이것이 메드베데프를 상대로 정치적 혐의를 제기할 근거가 되었다. 당시 총대주교는 표트르의 편에 서 있었는데, 그의 친서방 성향은 그 당시 소피아와 골리친만큼 뚜렷하게 드러나지는 않았다. 게다가 표트르는 아직 어렸고, 그의 어머니인 나탈리아 여왕의 파벌은 항상 총대주교가 구현하고 있던 모스크바의 전통을 지지해 왔다. 요아킴이 메드베데프를 개인적으로 싫어했던 점도 한몫했다. 메드베데프가 그를 조롱하며 말한다는 소문이 총대주교에게까지 전해졌는데, 이는 나중에 심문에서 몇몇 증인들이 증언한 바와 같다. 게다가 골리친의 측근들 사이에서 요아킴 대신 메드베데프를 총대주교로 임명하거나, 적어도 요아킴의 후계자로 삼기로 결정했다는 소문도 돌았다[926] . 이런 상황에서 요아킴이 메드베데프를 증오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했을 것이다.

1689년 8월 8일, 소피아의 정권은 전복되었고, 그녀는 수녀복을 입고 노보데비치 수도원에서 생애 마지막 15년을 보냈으며, 1704년에 세상을 떠났다. 9월 9일 골리친 공작은 유배되었고, 샤클로비티와 다른 소피아의 지지자들은 체포되어 편파적인 심문과 고문을 당했다. 9월 12일 샤클로비티는 처형되었다. 메드베데프는 도망칠 수밖에 없었지만, 도중에 신원이 밝혀져 체포되었다. 반역자이자 표트르 차르에 대한 음모자로 지목된 메드베데프 역시 심문과 고문을 피할 수 없었으며, 이 과정에서 그의 적들은 그를 상대로 허위 증언을 할 좋은 기회를 얻었다. 사실 샤클로비티 사건에 대한 수사 결과에서 알 수 있듯이, 메드베데프는 그 음모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드베데프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는 정치적·종교적 갈등의 희생양이 되어버린 것이다. “메드베데프의 모든 죄는,” ‘수사 기록’을 철저히 연구한 E. 벨로프가 쓴 바와 같이, “소피아 공주와 V. V. 골리친이 그의 지성을 높이 평가하여, 자신들의 계획이 성공할 경우 그를 총대주교로 임명하고자 꿈꿨다는 점에 있었다”[927] . “메드베데프는,” 성찬식 변경을 둘러싼 논쟁의 전 과정을 객관적이고 철저하게 연구한 이. 슐랴프킨이 썼듯이, “자신의 성격이나 착각의 희생양이 된 것이 아니라, 그에게 불리하게 전개된 역사적 상황과 리후드 일가의 음모로 인해 몰락했다”[928] .

그러나 메드베데프는 즉시 처형되지 않았고, 처음에는 그에 대한 교회 재판을 위해 총대주교에게 넘겨졌다. 1690년 1월, “사실상 공의회가 아니었던” 공의회가 열렸는데, 이는 I. 슐랴프킨이 아주 타당하게 지적했듯이, 그 회의에 참여한 이는 단 네 명의 주교와 총대주교뿐이었기 때문이다. 메드베데프는 수도자 자격을 박탈당했고(그는 수도사였음) 종신형에 처해졌으며, 그의 저서 『만나』는 소각되었다[929] . 이 판결에도 불구하고 세속 당국은 메드베데프를 처형했으며, 그는 2월 11일에 처형되었다. 슐랴프킨은, 아마도 충분히 타당하게도, 이 일이 요아킴의 개입 없이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930] .

『오스텐』에는 “로스트리그, 전 수도사 실베스트르 메드베데프에 관하여”라는 기사가 실려 있으며, 여기에 그의 『회개의 고백』이 첨부되어 있다[931] . 이 ‘회개의 고백’이 과연 메드베데프 본인이 직접 쓴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메드베데프의 추종자로서 역시 교회 재판에 회부되었던 사바 돌고이의 ‘회개’와 달리, 이 문서에는 그의 서명이 없다; 자신의 신학적 견해에 대한 가혹한 비난, 성체 변형 시기에 대한 정교회 교리의 수용,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토록 열정과 확신을 담아 썼던 자신의 저작들에 대한 저주—이 모든 것이 독자에게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아마도 ‘고백서’는 메드베데프의 방에 찾아와 그에게 배교를 요구했던 총대주교 측 대표들이 그에게 읽어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들은 그의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고백서’는 서명 없이도 남겨둘 수 있었다. 요아킴과 예프티미우스에게 이 ‘고백서’는 그야말로 필수적이었다. 요아킴에게는 이 문서가 메드베데프의 추종자들에게 타격을 가했기 때문이다. 그의 순교적 죽음은 그들의 눈에는 오직 그의 신념이 옳았음을 입증해 줄 뿐이었는데, 이제 ‘고백서’는 그의 모든 신학적 논증을 무효화해 버렸다. 에우피미우스에게 있어 이 문서는 ‘정교회파’의 정당성을 입증해 주는 것이었으며, 논쟁에 참여하며 겪은 고생에 대한 일종의 보상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메드베데프의 『고백』은 “라틴파”의 입장을 흔들어 놓는 데 일조했는데, 키예프 대교구 내 일부 주교들이 명백히 혹은 은밀히 메드베데프의 신학적 견해를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932] , 게다가 모스크바 주교단 내 상황도 만만치 않았다. 한편, 홀모고르 대주교 아파나시 는 앞서 언급된 저술들이 증명하듯 단호히 ‘정교회파’의 편에 섰던 반면, 카잔 대주교이자 훗날 총대주교가 된 아드리아노와, 비소코페트로프스키 수도원의 아르히만드리트이자 훗날 노브고로드 대주교가 된 요바의 입장은, 물론 아르히만드리트 가브리엘과 이에로디아콘 다마스킨(전자는 ‘라틴파’에, 후자는 ‘정통파’에 속했다)의 언급을 신뢰할 수 있다면, 그리 명확하지 않았다[933] . “정교회파”를 단호하게 지지한 이는 아르히만드리트 이그나티이 림스키-코르사코프(1692–1700년 시베리아 대주교를 역임했다)가 단호히 지지했는데, 그는 『총대주교 요아킴의 생애와 유언』을 저술하여 총대주교를 성인으로 찬양했으며, 이를 통해 저자는 아마도 그의 시성 절차를 준비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934] . 양 진영의 논쟁에서 중립적인 입장을 취한 인물로는, 예를 들어 프스코프(1681–1690) 및 카잔(1690–1698) 대주교 마르켈이 있었는데, 그는 라틴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를 구사할 줄 아는 교양 있는 인물로, 요아킴의 서거 후 총대주교좌 후보 중 한 명이었다[935] . 리아잔 대주교 파벨(모라프스키)(1681–1686)은 자신의 교구 성직자들에게 보낸 회람 서한을 미루어 볼 때, “라틴파”의 견해를 공유했다[936] . 시모노바 수도원의 대수도원장 가브리엘 도메츠키도 “라틴파”에 속했다. 처음에는 그는 뒤에서 조용히 지냈으나, 메드베데프가 처형된 후 이베르스키 수도원으로 전근되었다. 1704년, 도메츠키는 요브 대주교의 교구 내 노브고로드 유르예프 수도원을 관리했으며, 그 무렵 그는 ‘105가지 질문’이라는 저술을 집필했는데, 이 글에서 그는 전례 변경에 관한 로마 가톨릭 교리를 옹호했다. 추도바 수도원의 이에로디아콘 다마스킨이 쓴 저서 『도메츠키에게 보내는 105가지 답변』은 성체 변형 시기에 대한 논쟁을 마무리 짓는다[937] .

‘그리스파’ 또는 ‘정교회파’와 ‘라틴파’ 또는 ‘서방파’ 간의 논쟁은 17세기 마지막 25년 동안 매우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메드베데프의 견해와 저술은 의심의 여지 없이 교회 생활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이 영향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이는 가톨릭교가 모스크바 루스의 교회 생활에 침투한 것일까? 이로 인해 교회들의 연합을 위한 새로운 가능성이 생겼을까? 마지막 질문에 대해서는 단호히 부정적으로 답할 수 있다. 설령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신학적 교리 중 하나가 받아들여졌다고 하더라도(메드베데프와 그의 추종자들이 승리했고, 그들의 견해가 모두에게 받아들여져 상층부로부터 승인받았다고 가정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결해야 할 다른 많은 문제들이 남아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명백한 개신교의 영향을 받고 있던 표트르가 로마 가톨릭 교회를 그다지 호의적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17세기 후반의 분열로 인해 모든 종교적 문제는 매우 예리하고 고통스러운 성격을 띠게 되었다. ‘라틴파’는 남러시아 교회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며, 비록 마로시야에는 가톨릭의 ‘전변’ 교리를 지지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한 적대감은 너무나 컸다. 예를 들어, 라자르 바라노비치는 가톨릭 교리를 받아들였으나, 로마 가톨릭 교회의 확고한 반대자였다. 바로 남부 루스에서 가톨릭의 영향과 동시에 반가톨릭 논쟁 문헌도 모스크바로 유입되었다. 전자는 연합을 촉진한 요인으로 볼 수 있는 반면, 후자는 당연히 이를 저지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메드베데프와 그의 추종자들의 활동과 사상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이는 모스크바 루스의 정신 세계에 완전히 새로운 사고 체계가 스며든 것에 다름 아니었다. 17세기 후반, 특히 니콘 시대의 격변 이후, 모스크바의 보수주의는 더 이상 굳어진 채로 멈춰 있을 수 없었다. 서구의 영향은 비판적 사고의 성장을 촉진했는데, 이는 16세기 중반 프로테스탄트의 영향이 바슈킨이나 코소그의 비판주의에 영양분을 공급했던 것과 유사했다. 또한 ‘전치(preposition)’에 대한 문제, 특히 이에 대한 견해 차이로 인해, 새롭게 성장하며 해방을 모색하던 사고방식에 첫 번째 실천적 적용의 기회를 제공했다. 이 문제는 전적으로 우연히도 교리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메드베데프에게는—물론 그의 반대자들에게는 아니지만—이 문제가 교리적인 것이 아니라 과학적인 문제였다고 말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메드베데프는 정교회 교리가 로마 가톨릭교만큼 체계화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했다[938] . 따라서 『진리의 소식』이라는 저작은 그에게 특히 특징적인 작품이다. 메드베데프의 생애에서는 한편으로는 러시아 과학적 신학의 기원을 찾아야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탐구와 불만족을 담은 러시아적 성격과 사고방식의 지속적인 특성인 러시아 비판주의 역사에서 한 장을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메드베데프는 새로운, 표트르 시대의 러시아라는 역사적 무대에서 더 어울렸을 것이며,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학식과 지성, 호기심에 걸맞은 역할을 찾았을 것이고, 표트르의 개혁을 돕는 조력자 중 한 명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메드베데프의 죽음에 의심할 여지 없이 책임이 있는 요아킴은, 서구에서 모스크바 러시아로 유입되던 모든 것에 대한 증오와 혐오심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고, 어쩌면 의도적으로, 피터의 미래 동지 중 한 명을 빼앗아 버렸다.

 

 

제12장. 분열과 수도 생활

 

1. 분열의 종교적·심리적 원인

17세기는 러시아 국가와 러시아 교회 모두에게 ‘어려운 세기’였다. 이 세기는 스무타로 시작되어 분열과 표트르 대제의 개혁 소용돌이로 끝을 맺었다. 스무타는 새로운 민족·국가적 자의식을 불러일으켰다. 기존의 계급적 자의식은 뿌리부터 뒤흔들렸고, 정치적·사회적 대격변의 결과로 진정한 민족적 자의식이 탄생했다. 마침내 국가와 민족의 주요 과제가 인식된 것이다. 스무타의 여파는 마치 거친 바다와 같았던 17세기 내내 느껴졌다: 정부의 경제 및 재정적 곤란, 민중의 소요, 수많은 젬스키 소보르(지방 의회), 정부가 국가 생활의 다양한 측면을 개혁하거나 적어도 일부 개선을 도입하려는 시도, 15~16세기에 이미 제기된 국가적 과제를 해결해야 했던 이웃 국가들과의 전쟁,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래전부터 형성된 사람들의 습관과 관념, 모스크바 문화의 전체 구조를 바탕으로 한 옛 모스크바 생활 방식의 근간을 뒤흔들며, 서구적 영향이 끊임없이 국가 생활 속으로 스며들었던 것—이 모든 것은 불과 100년이라는 기간에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큰 부담이었을 것이다. 이 모든 현상 속에는 미래의 표트르 개혁의 싹이 숨어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트르 시대의 러시아는 큰 고통 속에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939]

이 ‘어려운 세기’ 동안 러시아 교회의 삶 또한 평온하지 않았다. 교회가 이러한 환경 속에서 존재해야 했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사회적 격변이 기독교 교회의 내부 질서와 성직자들에게도 흔적 없이 지나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직자들의 정신적 상태와 세계관은 예전의 견고함과 명료함을 잃기 시작했다. 16세기는 아직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후기 러시아 종교적 탐구의 선구자인 바슈킨과 코소이는 그 시대의 전형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비소유주의자들의 비판은 의심의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건전한 개혁 열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혼란의 시대’ 이후 ‘모스크바는 제3의 로마’라는 사상은 예전의 뚜렷함과 독보적인 매력을 잃고, 더 이상 국가적·종교적 이상으로 남아 있지 않게 되었는데, 이는 정치적·사회적 격변이 그 사상을 비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17세기는 이 사상을 시험하는 시대였으며, 그것이 실제로 어느 정도 실현 가능한지, 과연 그 안의 모든 것이 어떠한 변화도 없이 그대로 남아 있어야 하는지, 이 사상의 모든 내용이 오류 없이 옳은지 검증하는 시기였다. 동시에 모든 것이 똑같은 종교적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커졌으며, 무엇이 영원하고 불변하며, 무엇이 일시적이고 변화하기 쉬운 것인지 파악해야 했다. 이러한 의구심과 질문들은 교회 지도층은 물론, 그 밖의 모든 성직자, 심지어 신자 평신도들까지 뒤흔들었다.

교회 지도부는 현 상태를 보존하기 위한 조치를 취할 것인지, 아니면 오류를 바로잡을 것인지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제1분기, 필라레트 총대주교 시절과 요아킴 총대주교 시절의 마지막 4분기에 그랬던 것처럼—외부 영향에 맞서 싸우고, 다른 한편으로는 남부 루스 에서 명백한 서구적 영향을 받은 학자들을 영입할 수밖에 없었으며, 게다가 한 세기 내내 다양한 개선과 시정을 단행해야 했다. 따라서 교회 지도부가 항상 직선적인 길을 걸어온 것은 아니라는 점이 놀랍지 않다. 그 대열에는 ‘모스크바는 제3의 로마’라는 사상에 확고하게 충실한 이들이 많았지만, 이 사상을 위해 끈질기게 싸울 준비가 된 고위 성직자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따라서 결정적인 순간에는 교회 지도부가 아니라, 그 아래의 성직자들과 수많은 평신도 신자들이 ‘모스크바는 제3의 로마’라는 이념 전체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그 개별 요소들을 위해 확고하고 끈질기게 싸웠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상층부에서 이러한 요소들을 어떻게든 바꾸거나 개선하려 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요소들이 민중의 종교적 감정에 소중했기 때문이었다.

전례 생활은 그 시대 종교성의 중심이었습니다. 그것은 교리적 의식과 교리 지식을 대신했으며, 그 안에 백성의 모든 신앙이 담겨 있었고, 이는 신자의 마음속에서 가장 민감한 부분이었습니다. 교리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바의 정교회 신자들은 자신과 내면적으로 하나가 된 긴 예배의 내용을 잘 알고 있었으며, 기도의 문구와 예배 의식을 잘 알고 있었다. 종교적 의식은 신자의 영혼에 쉽게 뿌리내리며, 특히 교회와 교회 지도부가 그 보존에 힘쓰는다면, 교리보다 신자에게 더 잘 이해된다. 그런데 교회 지도부가 민중의 종교성에 그토록 소중한 예식을 바꾸려 하자, 다음과 같은 의문이 제기되었다. 이렇게 행동하는 지도부가 잘못되고 파멸로 이끄는 길에 들어선 것은 아닌가? 그들의 조치가 배교와 이단으로 이어지지는 않을까? 이러한 질문들이 제기된 것 자체만으로도 많은 동시대인들의 종교적 의식을 뒤흔들었다. 이처럼 교리에 대한 지식 부족과 예식 및 교회 관습의 중요성을 과대평가한 결과, 두 가지 완전히 다른 사물 사이에 밀접한 연관성이 생겨났다. 예식 개정은 신앙의 변경으로 간주되었고, 신앙에 대한 배신으로 비난받았다. 이러한 종교적·심리적 토대 위에서 17세기 러시아 민족의 운명을 좌우한, ‘분열’이라 불리는 교회적 대격변이 일어났다. 한편, 니콘 총대주교 자신은 (그의 명령에 따라 시작되었으나 그가 구상한 것은 아니었던) 예배 서적의 개정을 위해 완강하게 싸웠는데, 이는 원칙적으로 그 개정의 필요성을 인정했기보다는 자만심과 오만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2. 니콘 총대주교 이전의 서적 개정

교회 서적을 개정하고 일부 예배 의식을 변경하기 위한 니콘의 조치들은 본질적으로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있지 않았으며, 이는 그 이전에 이미 시행되었거나 향후 시행될 예정이었던 일련의 유사한 조치들 중 마지막 고리에 불과했다. 니콘은 지나치게 거칠고 가혹하게 행동했는데, 이는 절박한 필요성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성격 탓이었다. 그는 자신의 신도들의 종교적 심성을 전반적으로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그 때문에 그의 ‘개혁’은 러시아 교회에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입히고 일부 신도들을 교회에서 이탈하게 만든 재앙으로 이어졌다[940] . 분리된 집단(그들이 스스로를 ‘스타로베르’라고 불렀고, 공식 교회는 오랫동안 ‘분열주의자’라고 칭했던)의 존재는 모교회 밖에서의 체류는 러시아 교회의 주류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는 교회의 영적 역량이 본연의 직무를 수행하는 데서 상당 부분 벗어나 분열과의 투쟁에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기독교로 개종한 후, 예배를 집전하는 데 필요한 책들과 전례 의식 자체는 그리스인이나 남슬라브인들로부터 차용되었다. 오랜 사용으로 인해 서적들은 훼손되었고, 새로운 서적들은 오래된 것을 필사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는데, 주로 수도사였던 필사자들의 교육 수준이 부족하여 오기나 오류가 발생하기 일쑤였다. 개별 필사자들의 주도로 시도된 서적 교정은 결함의 수를 더욱 늘렸다. 심지어 그 시대에 속하는 성서의 여러 사본들조차도 종종 서로 매우 크게 다르다 . 예배 서적인 예배서, 티피콘(규약), 트리오디, 시간기도서, 옥토이히 등[941] 의 상황은 더욱 심각했는데, 이는 오류와 판독 차이가 예배 순서 자체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해설에서도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항상 동일한 규정이 사용된 것은 아니라는 점도 중요한 요인이었는데, 앞서 언급했듯이(제8장), 초기에 적용되던 스투디우스 규정은 예루살렘 규정[942] 으로 대체되었다. 참고 자료로 삼을 수 있었던 그리스인과 슬라브인의 예배 관행에서도 일관성이 없었다.

예배 서적에 스며든 오류를 바로잡으려는 첫 시도는 이미 14세기에 알렉시오스(1354–1378)와 키프리아노스(1390–1406) 대주교 재임 시절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15세기에 두 가지 사건이 발생하여 이후의 서적 교정 역사에 비극적인 성격을 띠게 했는데, 바로 피렌체 연합(1439)과 콘스탄티노플 함락(1453)이었다. 이러한 사건들의 결과로 모스크바에서는 그리스인들의 신앙 순수성에 대한 의구심이 생겨났다. 비록 이후 교회 서적을 교정할 때 그리스 서적을 기초로 삼았지만, 여전히 이 서적들을 훼손되지 않은 ‘정통’으로 여기지 않는 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스인인 수도사 막시무스가 경전 교정 작업을 맡게 되었을 때, 그는 러시아 교회 경전과 그리스 경전을 대조해 보던 중 많은 중대한 오류를 발견했는데, 그의 견해로는 일부 경우 이러한 오류들이 거의 이단적인 뉘앙스를 띠고 있었다[943] . ‘모스크바는 제3의 로마’라는 사상을 옹호하는 이들에게 이러한 주장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이었으며, 그 그리스 학자 자신도 이단적인 사상을 품었다는 혐의를 받았고, 게다가 요시프파 성향의 대주교 다니엘의 음모까지 더해졌는데, 그에게 막심과 수도사 공작 바시아노 사이의 긴밀한 관계는 이미 오래전부터 눈엣가시였다. 1525년과 1531년의 공의회는 막심에 대한 모든 혐의(대부분 근거 없는 것들)를 심의한 끝에, 그를 수도원에 유폐하도록 판결했다[944] .

100인 공의회는 일부 예배 의식이 지역마다 다르게 집행되고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린 차르 이반 자신도 공의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제 우리는 신성한 규정을 제외하고, 많은 교회 의식이 온전히 거행되지 않고, 성스러운 규칙이나 규정에 따르지 않고 행해지고 있음을 보고 듣고 있다”[945] , 그리고 공의회는 차르의 주장에 동의했다. 스토글라프 공의회는 훌륭한 번역본을 바탕으로 교회 서적을 수정하기로 결정했으나, 이러한 훌륭한 번역본을 어디서 어떻게 구할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었으며, 무엇보다도 이를 위해 아무런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 스토글라프 공의회 이후 모스크바에 인쇄소가 개설되어 교회 서적을 필사할 때 발생하는 오류를 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본문 교정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는데, 이는 최초의 인쇄본들이 이미 오류가 포함된 필사본을 바탕으로 출판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책 인쇄가 오히려 일을 방해하기도 했는데, 그 후 초판 인쇄본들이 오류가 없는 표준본으로 여겨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교회 서적을 정정하려는 최초의 체계적인 시도는 17세기 초에 이루어졌다. 1617년에 이를 위해 특별 위원회가 구성되었는데, 여기에는 트로이체-세르기예프 수도원의 아르히만드리트 디오니시우스, 그리스어를 비교적 잘 익힌 수도사 아르세니이 글루호이, 수도사 안토니이 크릴로프, 그리고 사제 이반 나세드카가 참여했다. 1년 반의 작업 끝에 이 위원회는 예배서를 교정하는 한편, 다른 예배 서적들에도 오류가 포함되어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나 디오니시우스의 운명은 막심 그레크의 운명만큼이나 비참했다: 그와 그의 조력자들은 이단적인 수정을 가했다는 혐의를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주현절(1월 6일)의 성수 축성 예식에서 성령께 드리는 기도문 중 “그리고 불로”라는 구절을, 후대에 추가된 무의미한 삽입문이라고 판단하여 삭제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심의했던 1618년 공의회는 해당 수정 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할 만한 필요한 자료를 갖추지 못했다. 반대파와 비방자들의 열의가 승리했다. 전혀 무고한 디오니시우스와 아르세니우스는 수도원 유배[946] 를 피하지 못했다. 다행히도 당시 예루살렘 총대주교 테오판이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신임 총대주교 필라레트에게 디오니시우스가 행한 수정의 정당성을 설득했다. 1619년 공의회는 그 불운한 인물을 무죄로 판정했으나, “그리고 불로”라는 삽입구는 예배서에 그대로 남아 있었고, 1626년이 되어서야 예루살렘과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들이 모스크바 총대주교 필라레트에게 보낸 서한에 의해 이 삽입구가 예배서에서 삭제되었다[947] .

필라레트는 교회 서적의 정정 필요성을 인정했지만, 이 문제에 대해 극도로 신중하고 느릿하게 접근했다. 1610년에 인쇄되어 나중에 오류가 많은 책으로 판명된 『예배 규정』은 필라레트의 명령에 따라 사용이 금지되고 소각되었다. 필라레트 재임 기간 동안 몇 권의 서적이 교정되었는데, 이를 비롯한 작업은 여전히 수도사 아르세니 글루호이와 사제 이반 나세드카가 담당했으며, 교정된 서적들은 인쇄되었다. 그러나 오류가 많았던 구판 서적들은 회수되지 않았고, 곳곳, 특히 외딴 오지에서는 여전히 사용되었는데, 이는 당연히 일부 기도문과 예배 의식에서 불일치를 초래했다[948] . 요아사프(1634–1641)와 요시프(1642–1652) 총대주교 재임 기간에 거의 모든 예배 서적이 인쇄되었지만, 교정 담당자들의 역량이 미흡하여 이 시기의 출판물에는 많은 오류와 해설 부분의 모호한 대목이 포함되어 있으며, 특히 1633년 《우스타프》에서 그러했다.[949] 그러나 가장 중요한 점은, 모스크바에서 니콘 총대주교 이전부터 이미 서적 교정의 절대적 필요성이 인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이 작업을 수행하는 데는 마지못해, 큰 우유부단함 속에서 착수했다는 사실이었다. 모스크바에는 이 작업을 수행할 준비가 된 교양 있는 인재가 부족했는데, 이들은 무엇보다도 그리스어를 잘 알고 있어야 했으며, 게다가 그들에게는 가장 필수적인 자료조차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1649년 5월, 알렉세이 차르는 키예프 대주교 실베스트르(코소프)에게 “성경을 그리스어에서 슬로베니아어로 번역할 수 있는 교사들”[950] 을 모스크바로 보내 달라고 간곡히 요청했다.

바로 그때 아르세니 사타노프스키, 다마스킨 프티츠키, 에피파니 슬라비네츠키라는 세 명의 수도사가 모스크바에 도착했는데, 이들은 성경 교정 작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951] .

 

3. 총대주교 니콘

1652년 4월 15일, 총대주교 요세프가 세상을 떠났고, 그의 후임자인 총대주교 니콘 치하에서 교회 서적 교정 역사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니콘은 농부의 아들로 1605년 니즈니 노브고로드에서 태어났으며, 세례를 받을 때 니키타라는 이름을 받았다. 그의 어머니는 출산 직후 사망했고, 니키타는 계모에게 양육되었는데, 계모는 아이를 잘 돌보지 않아 그의 어린 시절은 쉽지 않았다. 아마도 그 무렵, 어린 시절에 이미 그에게 강한 의지가 형성되었을 텐데, 때로는 그 의지가 꺾여 신경 쇠약에 자리를 내주기도 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훗날 그의 행동에서 자주 드러났다. “니콘은,” V. O. 클류체프스키가 썼듯이, “끔찍한 고통은 침착하게 견디지만, 핀 한 방에도 신음하며 절망에 빠지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강인하지만 인내심이 부족한 사람들이 흔히 겪는 약점이 있었다. 그는 평온함을 지루해했고,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는 법을 몰랐다; 그에게는 끊임없이 불안과, 대담한 생각이나 거대한 사업에 대한 열정, 심지어 단순히 싫은 사람과의 다툼이라도 필요했다. 이는 마치 폭풍우 속에서만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잔잔한 바람이 불 때는 돛대에 힘없이 펄럭이는 헝겊 조각과도 같았다”[952] . 니키타는 육체적으로 강하고 당당한 인물이었으며, 재능이 뛰어나고 호기심이 왕성한 사람이었다. 그는 아주 일찍부터 읽고 쓰는 법을 배웠는데, 이는 우리 시대까지 전해 내려온 그의 후기 말과 설교, 그리고 소수의 저작들이 증명해 준다. 책 읽기 — 당시 거의 모든 책이 종교적 내용을 담고 있었음 — 은 그의 영적 발전에 일정한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그는 수도사가 되기 위해 젤토보드스키 수도원에 입소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그 뜻을 말렸고, 니키타는 집으로 돌아왔다. 20세에 그는 결혼하여 사제가 되었는데, 이를 위해 그는 이미 충분한 학식을 갖추고 있었다. 처음에는 시골 본당에서 사목 활동을 하다가, 이후 추천을 받아 모스크바의 본당을 맡게 되었다. 자신의 삶에 대한 불만, 그리고 세 자녀가 모두 세상을 떠난 일은 니키타 신부의 마음을 과거 수도사가 되고자 했던 열망으로 되돌려 놓았다.

그는 아내를 설득해 수도원으로 보내고, 자신은 북쪽으로 향하여, 그곳에서 (앞서 언급했던) 엄격한 수행자 엘레아자르의 스키트에서 수도자 서원을 받았다. 그러나 니콘은 금욕적 수행의 길에 온전히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엘레아자르는 은둔처를 매우 엄격하게 운영했으며, 제자들에게 장로의 영적 지도에 완전히 복종할 것을 요구했다. 장로 엘레아자르와 다툰 후, 니콘은 은둔처를 떠나 코제예제르 은둔처로 들어갔다. 이는 대략 1639~1640년경에 일어난 일이다. 3년 후, 수도사들은 그를 원장으로 선출했다.

1646년, 니콘은 자신의 은둔원 관련 업무를 보러 모스크바에 왔고, 젊고 감수성이 예민하며 매우 경건한 차르 알렉세이에게 소개되었으며, 알렉세이는 그와 몇 차례 대화를 나누었다. 이구멘 니콘의 전체적인 모습—그의 당당한 기품, 위엄 있는 체격, 웅변, 강한 의지, 활기찬 얼굴 생김새—이 모든 것이 알렉세이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본래 온화하고 차분한 성품의 차르는 활기찬 사람들을 주위에 두는 것을 좋아했으며, 그들을 국가와 교회의 핵심 직책에 기용하곤 했다. 니콘이 차르에게 남긴 인상은 아마도 너무나 강렬했던 탓에, 나중에 성숙해진 차르와 총대주교 사이에 논쟁이 불거졌을 때 알렉세이는 오랫동안 니콘을 단호히 반대할 결심을 내리지 못했다. 차르의 뜻에 따라 니콘은 왕실과 가까운 모스크바 노보스파스스키 수도원의 대수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경건한 알렉세이는 이 수도원을 자주 방문했고, 특히 니콘이 집전하는 엄숙한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좋아했다. 이러한 엄숙함은 차르의 취향에 딱 맞았다. 니콘은 그와 자주 만나게 되었고, 매주 차르의 궁전을 찾아가 차르를 위해 아침 예배를 집전하며 그와 긴 대화를 나누었다. 니콘은 종종 이러한 만남을 통해 당국으로부터 부당하게 처벌받은 주로 평범한 백성들을 위해 차르에게 자비를 청하곤 했다. 사건의 경위를 명확히 설명하며 전달된 이러한 청원은 젊은 차르의 이해를 항상 얻을 뿐만 아니라, 감수성이 예민한 알렉세이에게도 깊은 감동을 주었다. 차르가 니콘에게 품은 신뢰와 궁정 내에서의 그의 영향력은 날로 커져 갔으며, 동시에 노보스파스 대수도원의 대수도원장인 니콘의 모스크바 시민들 사이에서의 인기도 높아졌다.

1649년, 유서 깊은 노브고로드 교구가 공석이 되자, 니콘은 노브고로드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자신의 교구를 활기차고, 권위 있게, 그리고 독단적으로 통치했다. 총대주교 본인보다 더 많은 예우와 특권을 누리며, 니콘은 이곳에서 마치 진정한 교회의 공작처럼 통치했다. 수도원 관리국 설립 당시 (1649년) 니콘은 아직 아키만드리트 신분이던 시절, 관련 문서인 ‘수도원 관리국’ 설립 문서에 서명했다. 그는 나중에 “어쩔 수 없이” 서명했다고 설명했으나, 사실 그는 그러한 관리국의 존재를 찬성하지 않았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이는 “성복음과 성부들의 규칙, 그리고 그리스 왕들의 법에 모든 면에서 위배되기” 때문이었다. 그는 심지어 1649년 법전을 “불법적인 책”이라고 불렀고, 수도원 관리국의 칙령을 악마적이라고 칭하기도 했다[953] . 그의 재임 기간 동안 노브고로드 대교구는 모든 사안에 있어 수도원 관리국의 관할권에서 면제되었으며, 법전에 반하여 차르는 대주교에게 수많은 영지를 하사했다[954] . 노브고로드에서 니콘의 활동은 그가 이미 그곳에서 교회 생활의 여러 결함을 제거하기 위한 개혁에 기울어져 있었음을 증명한다.

그와 차르의 우정은 계속되었다. 니콘은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차르와 서신을 주고받았으며, 차르는 강한 성품을 지닌 니콘에게 영적으로 완전히 복종했다. 1650년 노브고로드 반란 당시, 군수 힐코프가 당황해 주저하는 사이, 바로 니콘이 강인한 성품과 의지를 보여주었다. 니콘이 성 필립의 유해를 모스크바로 이송하기 위해 솔로베츠키 수도원을 방문하던 중, 요시프 총대주교가 서거했고, 모스크바에서는 모두 니콘이 차르의 총애를 받는 인물[955] 로서 새로운 총대주교가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짧지만 격동적이었던 재임 기간 동안 니콘은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첫 번째는 예배 서적의 개정이었다. 두 번째 문제는 차르와 총대주교 사이의 복잡한 개인적 관계, 더 정확히 말하면 국가와 교회 간의 관계에 대한 후자의 원칙적인 견해와 전자의 전통적인 관점의 대립에서 비롯되었다(제10장 참조). 이 문제에 대해서는 여기서 자세히 다룰 수 없는데, 첫째, 이 문제가 본문의 주제와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며, 둘째, 세속 권력과 종교 권력 간의 논쟁에는 긴 전사가 있어 이를 설명하려면 너무 많은 분량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독자들에게 N. 카프테레프가 4년간의 연구를 바탕으로 작성하여 당시 꽤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니콘 총대주교와 그의 견해 및 활동에 대한 간략한 평가를 제시하고자 한다[956] ; 어쨌든 이 평가는 정확하다.

“교회 개혁가로서의 니콘은,” N. 카프테레프가 보기에,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차르가 만들어낸 인물이었으며, 그는 자신의 교회 개혁 활동에서 단지 차르의 프로그램을 수행했을 뿐이다. 니콘 자신은 한때 자신의 교회 개혁 활동에 깊이 몰두하기도 했지만, 결코 그것을 자신의 총대주교직의 주된 사명으로 여기지 않았으며, 그 때문에 총대주교좌를 떠난 후에는 더 이상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니콘 총대주교직의 진정한 본질, 즉 그가 스스로 총대주교직의 주된 과업이자 그 모든 의미를 보았던 것, 총대주교좌에 있을 때 끊임없이 그리고 끈질기게 추구했던 것, 총대주교좌를 떠난 후에도 지칠 줄 모르고 열정적으로 투쟁했던 것은, – 그것은 당시 국가 권력이 교회 권력을 지배하고 있었기에, 교회 권력을 국가 권력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것뿐만 아니라, 그가 옹호하던 ‘사제직이 왕권보다 높다’는 입장을 확립하려는 열망이었다”[957] .

그 자체로는 옳았던 그 아이디어에 푹 빠져 있던 니콘은, 서적 개정 작업의 세부적인 사항들을 깊이 있게 숙고할 여유가 없었다. 전반적으로 말하자면, 니콘이 순수한 교회적·종교적·도덕적 관점에서 서적 개정의 필요성과 타당성을 어느 정도까지 인정했는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 N. 카프테레프의 연구에 따르면, 실제로 니콘은 당시 진행되던 서적 개정의 주체가 아니었다. 니콘은 서적 개정 작업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러한 어쩔 수 없는 상황은 오히려 그의 성격과 상충되어 그 일 자체에 대한 진정한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겉으로 보아 니콘이 서적 개정 조치를 매우 성대하게 꾸몄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어쩌면 이 ‘성대함’이 그에게 어느 정도 만족감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이 일에 시간을 써야만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이 모든 것이 그에게 낯선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개혁’을 서둘러 추진한 이유이며, 반대하는 이들의 의견을 완전히 무시하고, 조치를 시행하는 과정에서 무례하게 굴었으며, 반대자들을 탄압하는 데 가혹한 조치를 취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 투쟁에서 니콘은 자신의 본성이 지닌 모든 힘과 일관성을 드러냈다. 그는 개혁에 대한 항의를 자신에 대한 개인적인 적대감으로 받아들였는데—이 점에서 니콘이 부분적으로 옳았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이로 인해 (동시대인들보다는 오히려 후대 사람들에게서) 마치 그가 전적으로 이 개혁 사업에 헌신했던 것처럼 보이는 착각이 생겨났다. 이러한 특성은 니콘 치하에서 이루어진 성경 개정의 전체 역사에 극적인 색채를 더했으며,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했다[958] .

 

4. 니콘 총대주교 시대의 경전 개정

우리의 과제는 분열의 역사를 상세히 서술하는 것이 아니며,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수도자들이 항의 물결과 니콘의 개혁에 맞선 투쟁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보여주는 것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독자들에게 분열의 역사와 개혁에 반대하는 항의에 수도자들이 참여한 내용에 대한 가장 간결한 개요만을 제시하고자 한다.

1652년 7월 25일, 니콘은 성대한 의식을 통해 모스크바 총대주교좌에 즉위했다. 요셉 총대주교 재임 시절에도 진행되었던 예배서 개정 작업은 계속되었다. 키예프에서 온 수도사 에피파니 슬라비네츠키, 아르세니 사타노프스키, 다마스킨 프티츠키 등 키예프에서 온 수도사들은 대조 작업을 계속했고, 수도사 아르세니 수하노프는 이미 1650년에 그리스 교회의 예식을 파악하고 필요한 문서(그리스 서적, 필사본 등)를 모스크바로 가져오기 위해 동방으로 파견되었다. 1649년에 인쇄에 들어갔고 니콘 재임 중에 출간된 『코르마차』[959] 와 1650년에 인쇄된 『셰스토드네프』는 그리스 필사본과 대조한 후 수정되었다. 1650년 말, 나자렛의 가브리엘 대주교가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예루살렘 총대주교가 차르와 모스크바 총대주교에게 보낸 서신을 전달했다. 가브리엘은 모스크바의 예배 의식에 있는 ‘차이점’에 대해 여러 차례 지적을 했다; 모스크바를 방문했던 예루살렘 총대주교 파이시우스도 러시아를 떠나기 전(1650년) 차르와 요시프 총대주교에게 “모스크바의 차이점”에 대해 언급했다. 당시 아직 노브고로드 대주교였던 니콘은 차르와의 지속적인 교류를 통해 당연히 그리스인들의 이러한 견해를 알고 있었다. 니콘은 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아파나시우스(1633, 1633–1635, 1651)에게서도 들은 바 있었다. 아파나시우스는 1653년 4월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니콘을 위해 『동방에서 주교가 집전하는 성찬례 의식』([960] )[961] 을 필사하도록 지시했는데, 그 엄숙한 분위기는 특히 니콘의 마음에 쏙 들었다.

니콘은 1653년 봄, 자신의 개혁을 추진하기 위한 첫걸음을 내디뎠다. 대순교 기간이 시작되기 전, 그는 모스크바 내 모든 교회의 주임 신부들에게 다음과 같은 지시(“기억”)를 내렸다: 대순교 기간 예배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성 에프레모의 기도를 낭독할 때, 경배를 엄격히 “성 사도들과 성부들의 전승에 따라” 행할 것, 즉 17번의 경배 모두를 땅에 엎드려 하는 것이 아니라, 4번만 땅에 엎드려 하고 나머지는 허리까지 숙이는 경배로 하라는 것이었다. 이 첫 번째 ‘그리스식 혁신’은 일부 모스크바 사제들, 특히 이반 네로노프, 아바쿰 페트로프, 코스트로마 출신의 다니일 등 분열의 역사에서 그 이름과 활동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프로토포프들에게 큰 혼란을 야기했다. 프로토포프 아바쿰[962] 은 이 당혹감을 천 번도 더 인용된 말로 날카롭고 생생하게 묘사했다. “우리는 모여서 생각에 잠겼습니다.” 아바쿰은 자신의 『생애』에서 이렇게 썼다. “겨울이 다가오는 것을 보니, 가슴이 얼어붙고 다리가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니코니안 개혁에 반대했던 초기 모스크바 반대파들의 이러한 정신적 혼란은 오랫동안 지속될 것이며, 그로부터 처음에는 절망의 분위기가 싹트고, 나중에는 피를 흘릴 각오로 ‘옛 신앙’을 위해 싸우겠다는 결의가 솟아날 것이다. 네로노프는 정통 신앙의 수호자로서 차르에게 청원서를 제출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는 분열파에게 매우 전형적인 특징이다. 즉, 세속 권력에게 도움과 지지, 보호를 구하는 것이다. 분열파들은 ‘모스크바는 제3의 로마’라는 이념에 대한 충성을 신성하게 지켰다. 나중에 그들은 정교회 왕국에 대한 이 확고한 믿음을 잃고 제국을 이단으로 비난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오랫동안 자신들에게 성지였던 이곳을 떠나, 사막에서 사막으로, 마을에서 마을로 길을 떠나 잃어버린 ‘Civitas Dei’ [신의 도시]를 되찾기 위해, 곳곳에서 세상의 임박한 종말을 선포하며. 결국 분열은 그 일체성을 상실하고, 개별 파벌로 나뉘어 끔찍한 수준의 종파 증가를 초래할 것이다.

네로노프의 청원서와 그 저자와의 후속 논쟁, 그리고 모스크바 성직자들이 네로노프에게 보낸 지지[963] 는 니콘으로 하여금 자신의 활동을 오로지 자신의 이름만으로 진행하는 것보다 더 올바른 방식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했다. 그는 차르에게 공의회[964] 를 소집하여 예배 의식과 경전의 개정 문제를 논의해 줄 것을 요청한다. 1654년 봄, 차르와 총대주교를 비롯해 다섯 명의 대주교, 네 명의 대주교, 한 명의 주교, 여러 명의 대수도원장 및 수도원장, 그리고 13명의 수석사제들이 차르의 궁전에 모여 공의회를 열었다[965] . 니콘은 교의적 의미가 없는 일부 예배 의식의 왜곡과 관련된 문제들을 공의회에 제기하며, 그리스 티피콘을 인용하여 자신의 제안을 뒷받침했다. 공의회는 모든 예배 의식을 그리스 티피콘에 부합하도록 수정하고, 앞으로는 수정된 형태로 예배를 거행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서적 수정과 관련해서도 동일한 결정을 내렸고, 이러한 개혁을 수행하기 위해 니콘 총대주교에게 전적인 권한이 부여되었다. 단 한 명의 공의회 구성원인 콜로멘스키의 파벨 주교만이 자신의 서명 옆에, 대사순절 기간 중 절에 관한 문제에서는 공의회의 결의에 동의할 수 없다는 의견을 덧붙였습니다[966] .

콜로멘스키의 파벨 주교는 처음부터 계획된 개혁에 대해 극명하게 반대 입장을 표명했는데, 이것이 주교와 총대주교 사이의 개인적인 의견 차이와 관련이 있는지는 단정하기 어렵다[967] , – 그는 보수 성향의 수도자 집단 중 첫 번째 희생자가 되었으며, 이후 구신자들의 저술에서 성인으로 추앙받았고 분열의 첫 번째 순교자로 여겨졌다. 파벨에게 가해진 가혹한 처벌은 마카리이 불가코프가 그의 『러시아 분열사』(1855)[968] 에서 정당화하려 했던 것처럼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파벨은 주교직에서 파면되어 북쪽의 팔레오스트로프스키 수도원으로 유배되었으며, 심지어 구신자들의 저술에 언급된 바와 같이 니콘의 명령에 따라 채찍질을 당하기까지 했다.

이제 니콘은 곧 수정되어 재인쇄된 책들이 각 교회에 배포되고, 옛 책들이 회수되면 개혁에 반대하는 새로운 세력이 등장할 것임을 분명히 깨달았다[969] . 그러나 니콘이 서적 수정을 계속하기로 한 결정은, 1654년과 1655년에 모스크바를 방문했던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마카리우스와 세르비아 총대주교 가브리엘 역시 모스크바의 ‘이단적 견해’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그에게 숨기지 않았다는 사실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니콘은 또 다른 공의회를 소집하고, 자신 외에 다른 두 명의 총대주교가 참석함으로써 자신의 결정에 더 큰 권위를 부여하기로 결정했다. 동방 총대주교들이 참여한 이 공의회는 1655년 3월 25일부터 31일까지 열렸으며, 성경 개정 작업을 계속하기로 결의했다[970] .

공의회 직후인 1655년 5월 초,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파이시우스의 사절이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그는 차르와 니콘에게 보내는 서한은 물론, 니콘이 보낸 1654년 공의회 및 그 결의안에 대한 보고서를 논의하고 승인하기 위해 파이시우스가 특별히 소집한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의 의정서도 가져왔다. 흥미롭게도 이 공의회는 파블로 주교의 파면 결정을 승인했다. 니콘은 총대주교 파이시우스에게 보낸 서한에서, 성경과 예식을 개정하기 위한 자신의 조치에 합법적인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26가지 질문을 제기했다. 파이시우스는 이 질문들에 대한 답변과 신앙고백문 본문, “할렐루야” 찬송에 대한 해설, 세 손가락으로 하는 십자 성호 긋기, 그리고 일부 전례 의식에 대한 설명을 그에게 보냈다. 니콘에게 있어 특히 중요한 것은, 니케아(정확히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 역자 주) 신조의 불변성에 대한 공의회의 해설이 담긴 ‘신조’를 확보하는 것이 특히 중요했다. 이 신조에는 단 한 마디도 덧붙일 수 없고, 단 한 마디도 뺄 수 없다[971] . ‘진정한’이라는 단어를 삭제하여 신조 제8항을 수정한 것이 구신도들의 가장 강력한 항의를 불러일으켰으며[972] , 이는 일종의 교리적 분열 근거가 되었다. 1655년 공의회와 파이시우스의 서한 직후, 수정된 예배서와 『스크리잘』이 간행되었는데, 후자에는 ‘세 손가락 경례’와 ‘신조’에 관한 두 가지 부록이 포함되어 있었다[973] .

1656년 4월, 니콘은 서적 개정과 관련된 세 번째이자 마지막 공의회를 소집했고, 이에 참석한 8명의 주교, 22명의 아르히만드리트, 9명의 이구멘은 두 손가락과 세 손가락으로 십자가를 그리는 예식에 대해 최종 판결을 내렸습니다. 두 손가락으로 십자가를 그리는 행위는 이단으로 선포되었으며, 두 손가락으로 십자가를 그리는 자들은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공의회의 결정 사항은 『스크리잘』에 별도의 장[974] 으로 수록되었다.

1656년의 공의회는, 말하자면, 니콘 총대주교 재임 기간에 이루어진 성경과 예식 개정 작업의 마지막 공식적 조치였다. 이처럼 이 시기는 4년을 넘지 않았으며, 이는 러시아 분열의 전초 단계로 볼 수 있다. 바로 그 시기에 러시아 교회 내에서 분열에 대한 입장이 확정되었고, 최초의 분열 지지자들도 등장했다. 개혁의 가장 초기의 반대자들을 살펴보면, 그들 거의 모두가 ‘백색’, 즉 수도자가 아닌 본당 사제 계층에서 나왔으며, 오직 파벨 콜로멘스키 주교만이 수도자 출신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전반적으로 니콘의 조치들은 주로 모스크바 성직자층과 같은 좁은 계층에 영향을 미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일반 대중과 성직자, 수도자 대다수는 당분간 자신의 반대 의사를 매우 모호하게만 표출하고 있었다. 니콘은 여전히 권력의 정점에 있었지만, 그의 운명에 전환점이 찾아오자 개혁에 반대하는 저항 운동이 확산되기 시작했고, 분열은 모스크바 국가의 가장 외진 구석까지 퍼져 나갔다. 이는 부분적으로 니콘의 개혁에 반대하는 일부 인사들이 모스크바를 떠나 전국 각지에서 개혁 반대 선전을 펼쳤기 때문이었다.

1658년 7월 10일, 니콘은 자발적이면서도 독단적으로 총대주교좌를 떠나 모스크바를 떠났고, 이로써 사실상 그가 러시아 정교회를 통치하던 시대는 끝이 났다. 이 행동에는 그의 본성에 내재된 모든 독단성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러나 니콘이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알렉세이 차르와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계획했던 이 조치는 결국 그 자신에게 역풍이 되었다. 이 행동은 지난 2년 동안 차르와의 관계가 냉각된 데 따른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세속 권력과 종교 권력 간의 관계에 대한 니콘의 견해[975] 의 결과이거나 직접적인 표현이었다.

총대주교직을 떠난 니콘은 이후의 성경 개정 역사에서는 모습을 감췄지만, 러시아 분열의 역사에서는 여전히 존재했다. 심지어 니콘의 그림자와 그의 행적이 그를 적그리스도나 적그리스도의 선구자로 보고 싶어 했던 반대자들에게 안식을 주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으며, 니콘의 활동이 아니라 그의 인격 자체를 주제로 한 수많은 저작들이 등장했다[976] . 차르와의 불화는 성경 개정 개혁의 긍정적인 측면을 상당히 약화시켰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분열을 심화시키는 데 기여했다[977] .

 

5. 니콘의 조치에 대한 수도계의 반대

모스크바에서 형성된 개혁에 대한 반대는 점점 더 널리 퍼져 나갔다. 이 반대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는데, 1) 논쟁적인 저술의 집필, 2) ‘니코니안 서적’에 대한 완고한 거부, 그리고 마지막으로 3) 교회 및 세속 권력에 대한 공개적인 투쟁이었으며, 이는 특히 솔로베츠키 수도원 수도사들의 유명한 반란에서 뚜렷하게 드러났다. ‘옛 신앙’을 지키기 위한, 새로 인쇄된 서적들에 맞선 투쟁에는 주교단과 수도자들이 참여했는데, 전자는 덜, 후자는 더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파벨 주교는 니콘의 개혁이 시작되자마자 이에 대한 반대 의사를 공개적으로 표명한 러시아 교회의 첫 번째 주교였다. 비얏스크의 알렉산드르 주교(1657–1674) 역시 공개적으로 항의했는데, 그는 1656년 공의회 결의안에 서명했으나 몇 년 후 (1663년), 차르와 주교직을 떠난 니콘 사이의 관계가 특히 긴장되던 시기에 차르에게 장문의 서신을 보내 니콘과 그가 추진한 성경 개정 작업을 비난했다. 그중에서도 그는 신앙고백문에서 ‘진정한’이라는 단어를 삭제하는 것에 반대했다. 1667년 공의회에서 알렉산더는 자신의 비난을 철회하고, 자신의 견해가 잘못되었음을 인정하며 공의회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저술을 통해 주교단의 보수주의와 반대 정서가 다시 한번 드러났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978] . 알렉산더는 마음속으로는 니콘의 개혁에 반대했던 다른 주교들—예를 들어 노브고로드 대주교 마카리우스(† 1663)나 볼고그대 대주교 마르켈(† 1663)처럼 마음속으로는 니콘의 개혁에 반대하고 있었으나, 공개적으로 항의하기보다는 개혁 시행을 지연시키거나, 현대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이를 방해하는 방식을 택했던 주교들보다 알렉산더는 더 큰 용기를 보여주었다[979] . 이 주교 그룹에는 익명으로 자신의 『니콘 총대주교에 대한 고발』을 유포했던 그 주교도 포함될 수 있다[980] .

교구 주교들이 개혁에 대해 이러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새로 개정된 성서는 물론 먼 도시와 수도원까지 전달되기는 했지만, 이것이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그 성서를 따라 예배를 드릴 것이라는 의미는 전혀 아니었다. 니콘을 지지했던 로스토프 대주교 이오나는 자신의 교구 신자들에게 몇 차례의 교구 서신을 보내, 예배 의식의 시정을 촉구할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성수 축성은 오직 주현절(1월 6일) 전날에만 행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키릴로-벨로제르스키 수도원의 원장 및 수도사들은, 훗날 자신들의 수도원으로 유배된 니콘을 모욕하고 굴욕을 주었지만, 관할 주교가 내린 이러한 지시들에 따르기를 원치 않았다[981] . 17세기 후반 내내 많은 수도원에서 ‘니코니안 서적’에 대한 강력한 반발이 끊임없이 일어났는데, 이는 수많은 교구 주교들의 서신에서 확인할 수 있다[982] . 솔로베츠키 수도원의 아르히만드리트 일리아는 1654년 공의회의 판결문에 직접 서명했으나, 그러나 그는 결코 니콘 개혁의 지지자로서 자신의 수도원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었으며, 사망할 때까지(† 1659) 1658년 7월 8일 수도원 공의회에서 새로운 서적을 받아들이지 않 고 옛 서적에 따라 예배를 거행하기로 결의한 수도원 형제들과 뜻을 같이했다. 솔로베츠키 수도원만큼 단호하게 니콘의 개혁을 거부한 수도원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일반적으로 반대파 지지자들의 견해는 낙담에서 종교적 광신에 이르기까지 다양했으나, 후자는 그 시대 종교 의식의 병리 현상이었기에 프로토포프 아바쿠무뿐만 아니라 총대주교 니콘에게도 공통적으로 나타난 특징이었다. 코제예제르스키 수도원의 장로 보고레프 르보프는 처음부터 니콘의 ‘이단적인’ 개정안을 거부했으며, 자신의 신앙의 ‘순수함’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10년 동안 수도원 고해신부에게 고해성사를 받지 않았고 20년 동안 성체를 영하지 않았다. 이는 그러한 광신주의에 매우 전형적인 행동이었다[983] . 이러한 사례는 결코 드문 일이 아니었으며, 그 수는 해마다 늘어났고, 이는 1667년의 판결이 내려지기 전부터 이미 일어나고 있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보자. 니즈니 노브고로드 근교에 있는 보고로디츠키 수도원의 엄격한 수행자 아브라아미이 신부는 아바쿠무스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그동안 기도와 세상에 대한 완전한 포기 속에서 살아가던 숲속 오두막을 떠나, 모스크바로 와서 차르에게 청원서를 전달했는데, 그 청원서에서 그는 니콘의 개혁을 신랄하게 비난했다. 그는 니콘을 ‘적그리스도’라고 칭했던 분열주의자 중 한 명이었는데, 이는 파벨 크루티츠키와 일라리온 랴잔스키 두 대주교의 설득이 소용없자 이에 맞서 쓴 그의 『질문과 답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니콘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그의 다른 저서들에서도 표현되어 있다: 『신앙인을 향한 편지』와 『적그리스도의 미혹에 관한 글』[984] . 푸스토제르스크로 유배된 아브라아미는 그곳에서 이미 태어난 적그리스도에 대해 설교했으며, 1681년 총대주교 요아킴의 명령에 따라 자신의 동지들인 광신적인 구신자들과 함께 화형당했다. 니콘의 단호한 반대자 중에는 아르히만드리트 스피리돈 포템킨(† 1663)도 있었는데, 그는 방대한 저서인 『올바른 신앙에 관한 책』[985] 을 집필했다.

가장 두드러진 분열 주동자 중에는 또 다른 두 명의 수도자가 있었는데, 이들은 서로 긴밀히 교류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다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티흐빈 근처 니콜스키 수도원의 원장 도시페이는 온갖 혁신에 반대하는 최초의 설교자들 중 한 명이었다. 자신의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그는 수도원을 떠나 포벤차(북부) 근처의 작은 은둔처로 향했다. 그곳에서(약 1685년경) 그는 남쪽의 돈 강 카자크족에게로 갔는데, 그곳에서는 분파에 수많은 추종자들이 있었다. 정부가 돈 강 유역의 분파와 싸움을 시작하자, 도시페이는 돈 강을 떠나 얼마 후(1688년 이후) 북코카서스에 모습을 드러냈으며, 그곳에서 1691년경 사망했다. 도시페이는 어디서나 옛 신앙의 열렬한 설교자였으며 초기 구전파 신자들 사이에서 가장 큰 권위자 중 한 명으로 여겨졌으나, 그는 종교적 광신주의에 반대했고 이를 비난했으며, 특히 80년대에 광신적인 분파자들 사이에서 퍼진 분신자살을 강력히 규탄했다. 그는 분신자[986] 를 신앙의 순교자로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또 다른 분파 지도자인 수도사 코르닐리우스는 스타로베르들 사이에서 가장 권위 있는 인물 중 한 명으로, 심지어 그들에 의해 성인으로 추앙받기도 했다. 그의 행적은 가장 널리 퍼진 스타로베르 문헌 중 하나였으며, 분파의 초기 역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된다. 15세의 나이에 코르닐리우는 코르닐리에보-코멜스키 수도원에서 출가하여 그곳에서 20년 이상을 보냈고, 그 후 여러 수도원을 전전하다가 마침내 모스크바에 도착해 추도프 수도원에 입회했다. 그곳에서 그는 총대주교 요셉 밑에서 제빵사로 일했고, 그 후 노브고로드 대주교 아포니오 밑에서, 마지막으로 니콘 밑에서 일했는데, 이로 인해 니콘을 개인적으로 잘 알게 되었다. 노브고로드에서 그는 앞서 언급한 수도원장 도시페이와 알게 되었다. 노브고로드에서 코르닐리는 다시 요시프 총대주교 곁으로 돌아와 수도원 감옥의 감독관으로 임명되었으나, 이 직책을 오래 맡지는 못하고 곧 평범한 수도사로서 추도프 수도원으로 옮겼다. 성경 개정 작업이 시작된 초기부터 그는 니콘에 반대했으며, 도시페이와 함께 돈 강으로 도망쳤다. 3년 후 코르닐리는 도시페이를 떠나 키릴로프 수도원으로 갔는데, 그곳에서도 개혁에 대한 불만이 컸으나, 결국 그곳에서도 새로운 경전을 따라 예배를 드리게 되자 그는 니로바 은둔처로 옮겨갔다. 당시 니로바 은둔처는 개혁 반대파의 거점 중 하나가 되었으며, 코르닐리는 이 반대 세력의 가장 적극적인 활동가 중 한 명이었다. 닐로바 수도원을 떠나야만 했던 그는 비그 강가의 숲으로 도망쳤는데, 그곳에는 이미 많은 구신도들이 모여 있었다. 코르닐리는 구신도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공동체 설립을 축복했으며, 이 공동체는 이후 분열의 역사 속에서 ‘비그 공동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코르닐리는 그의 행적에 따르면 1695년 3월 21일, 12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광신적인 종교성의 온상이 된 비고 공동체는 가장 엄격한 금욕적 노동 규칙과 세속을 버리는 원칙 위에 세워졌는데, 이것이 바로 코르닐리가 자신의 영적 제자들에게 요구했던 것이었다. 18세기, 비고프 공동체는 무사제파의 분열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 파벌의 거의 모든 분열 지도자들[987] 이 이곳에서 나왔다.

 

6. 솔로베츠키 수도원의 반란

수도계가 ‘니코니안 개혁’과 개정된 예배서에 보인 반대는 특히 솔로베츠키 수도원 수도사들의 반란[988] 에서 뚜렷하게 드러났다. 이 수도사들의 반란만큼 분열의 확산에 크게 기여한 사건은 없었으며, 이는 러시아 민족의 교회 역사에서 지극히 독특한 한 페이지로 기록되었다. 수세기 동안 교회와 국가의 충실한 조력자였으며, 구 모스크바 문화와 세계관의 형성에 주된 역할을 했고, 전반적으로 교회 생활의 주요 원동력이었던 수도계가 갑자기 교회 계층과 국가 권력 모두에 공개적으로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수도원 수도자들이 어떤 모습이든 간에, 그들은 항상 백성들의 눈에는 막대한 종교적 권위를 지녔으며, 고대 러시아의 수도원은 여전히 민중의 종교성과 경건함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많은 수도원에서 다소 눈에 띄게 드러나던 반대 정서는 마침내 솔로베츠 수도원 수도사들의 격렬한 반발로 폭발했으며, 이는 향후 수도원의 역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 반란은 수도계 전체가 니콘의 개혁에 반대하고 있음을 증명했으며, 비록 나중에 수도원과 수도사들이 ‘니코니안 혁신’을 받아들였더라도, 이는 니콘의 개혁에 대한 내적 종교적 동의나 그의 사업을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외형적인 복종에 불과했다; 개혁의 수용은 교회의 권위보다는 국가의 힘 앞에 항복하는 것을 의미했다. 수도계가 외적으로 강요받은 복종은 러시아 교회 생활에서 수도계가 향후 수행할 역할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수도계와 국가, 수도계와 교회 사이의 새로운 유형의 관계의 뿌리는, 우리의 견해로는, 수도원을 교회 생활의 뒷전으로 밀어낸 표트르 대제의 개혁뿐만 아니라, 분열의 초기 역사에서도 찾아야 한다. 수도계는 물론 이전과 마찬가지로 러시아 교회의 품 안에 남아 있었지만, 과거의 내적 유대와 긴밀한 상호 지원 관계는 심각한 상처를 입었으며, 이는 18세기와 19세기에 걸쳐 완전히 치유되지 못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시기의 수도원 생활이 마치 마비된 것처럼 보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솔로베츠키 수도원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비교적 느리게 전개되었는데, 이는 세속 권력이 단호한 조치를 취하는 데 주저했고, 교회 권력은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반란에 대한 조치 채택이 더딘 이유는 수도원이 모스크바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모스크바 당국이 수도원의 사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으며, 무엇보다도 차르가 이 사건들에 대해 보인 개인적인 태도 때문이기도 했다. 1658~1666년은 총대주교와 차르 사이의 지극히 복잡한 모순의 실타래를 풀기에 바빴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는데, 이는 의심할 여지 없이 모스크바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수도원의 입지를 강화시켰다. 수도원의 입장이 더 유리했던 이유는, 수도원 수도자들이 모스크바에서 벌어지는 일을 모스크바 당국이 수도원 내 사정을 아는 것보다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타우로피기알 수도원으로서, 즉 총대주교의 직속 관할 하에 있는 수도원으로서, 솔로베츠키 수도원은 항상 모스크바에 자신의 대표자들을 두었는데, 이들은 당연히 지체 없이 수도원 당국과 수도사들에게 모스크바의 한 정세, ‘니코니안 개혁’에 대한 반감, 그리고 이러한 개혁에 반대하는 세력이 유력한 보야르 가문은 물론 차르 가문 내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한편 모스크바 정부는 수도원 원장의 공식 보고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1654년 공의회(자신이 그 결의안에 서명한)가 끝난 후 수도원으로 돌아온 아르히만드리트 일리아는 새로운 전례서에 따른 예배로 전환하기 위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수도원에서는 여전히 옛 전례서에 따라 예배를 드렸다. 1658년 7월 8일, 수도원 수도자들은 ‘니코니안 서적’을 아예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의했다.

모스크바에서 니콘의 개혁에 반대하는 100여 명이 수도원으로 유배되어, 수도원에 도착하자마자 불에 기름을 부은 탓에 반대 정서는 더욱 고조되었다. 유배자들 중에는 프로토포프 아바쿠ムの 열렬한 추종자인 르보프 공작과, 이곳에서 적그리스도의 왕국에 관한 저술을 쓴 수도사 테오크티스트가 있었다. 게다가 혁신에 반대하던 많은 수도사들이 각자의 수도원을 떠나 솔로베츠키 수도원으로 몰려들었다. 예를 들어, 니카노르 수도원의 사빈나 수도원장도 이곳으로 왔는데, 그는 훗날 반란의 주요 선동자 중 한 명이 되었다.

하지만 개혁 반대자들은 물론 수도원 수도자들 사이에서도 존재했다. 니콘의 가장 영향력 있는 적 중 한 명은 수도사 게라심 피르소프였다. 그는 강한 성격을 지닌 전형적인 지도자였으며, 매우 유능하고 신학 교육도 어느 정도 받은 인물이었다. 이미 1658년에 게라심은 『형제에게 보내는 손가락 모양에 관한 서한』을 썼는데, 이는 교회 문헌을 통해 두 손가락 예식을 정당화하려는 첫 번째 시도였으며, 이 저작은 이후 구신자들 사이에서 널리 퍼지고 인정받았다. 비록 1666년 공의회에서 게라심은 자신의 신념을 재고하고 회개를 표명했으나, 그 회개가 진심에서 우러난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이 저작은 스타로베르들 사이에서 여전히 권위를 유지했다. 게라심은 요시포프 수도원으로 유배되었는데, 그곳에서 공의회 결정에 따라 자신의 『형제에게 보내는 편지』에 대한 반박문을 작성해야 했으나, 그는 이를 미루었다. 아마도 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으며, 1667년 사망할 때까지 그러한 반박문을 작성하지 않았다.[989]

1658년부터 1666년까지 모스크바와 솔로베츠키 수도원 사이, 그리고 모스크바와 수도원 형제들을 훈계하기 위해 특별히 파견된 아르히만드리트 세르기 사이에는 서신 교환이 계속되었다. 수도원 형제들은 차르의 이름으로 다섯 편의 ‘신앙에 관한 청원서’[990] 를 보냈다. 특히 1667년 9월 23일자 마지막 청원서는 수도원 수도사들의 종교적 견해를 잘 드러내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991] . 이 청원서는 말하자면, 수도사들이 새로운 서적이나 예배 의식을 변경하라는 지시를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었다. 내용상 9월 23일자 청원서는 과학적·신학적 비판이라기보다는, 당시 니콘 개혁 반대파들 사이에서 형성되기 시작하여 나중에는 분파의 전체 종교적 세계관의 특징이 된, 종말론적 색채가 짙은 이데올로기를 서술한 것에 가깝다.

이 청원서에는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마지막 때가 다가오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전 세계적으로 신앙이 쇠퇴하고 있으며, 곳곳에 기독교 신앙의 배교자와 배신자들이 나타났으나, 러시아만이 최근까지 흠 없는 순수함을 지켜왔으나, 니콘이 제자들과 함께 찾아왔다. 이제 그들은 모스크바 왕국의 정교회 신자들에게 ‘알 수 없는 새로운 신앙’을 강요하려 하고 있으며, ‘진정한’ 옛 경전들을 훼손하여 이단적인 그리스인들에게서 차용한 수정 사항을 가했고, 예배에 죄악된 변질을 도입했다. 이 모든 것을 볼 때,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믿음이 쇠퇴할 것이라는 그분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이 곧 심판을 받을 것이니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땅에서 이 믿음을 찾을 수 있겠느냐?” (누가복음 18:8). 그러나 러시아와 그 정교회 신자들은 차르가 하나님께 기쁨을 드렸던 선대 군주들의 본을 따라 ‘니코니안 혁신’을 폐지하고 훼손되지 않은 ‘옛 신앙’을 회복한다면, 아직 멸망에서 벗어나 참된 길로 돌아갈 수 있다. 솔로베츠키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1666–1667년 공의회의 판결과 서약을 인정하지 않는데, 이는 그 공의회가 비정통적이기 때문이다. 그 공의회에 참여한 주교들은 참된 옛 신앙에서 이탈한 ‘니코니안’들이었기 때문이다. 수도원 수도사들은 피를 흘릴 때까지 참된 신앙에 충실할 것이며, 필요하다면 기꺼이 목숨을 바쳐 옛 신앙 안에서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992] .

이 서한을 작성한 이들의 영적 시야 앞에는 ‘모스크바는 제3의 로마’라는 사상이 무너질 현실적인 가능성, 즉 세상의 종말이 놓여 있었다. 이는 그들에게 환상이 아니라 확고하고 흔들림 없는 신념이었다. 모스크바 국가가 순수한 기독교의 마지막 보루라는 사상은 민중의 의식에 깊이 뿌리내렸으며, 니콘의 반대자들에게는 이 사상을 창안한 수도사 필로페이에게서보다 훨씬 더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왜냐하면 이 사상이 선포된 이후 흐른 시간 동안, 그 사상은 사생활은 물론 문화·정치적 영역을 아우르는 삶의 모든 분야—교회, 국가, 그리고 백성의 삶—에 깊이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알렉세이 차르 자신과 니콘, 1666년 공의회 주교들은 온 마음과 온 이성을 다해 이 사상에 헌신했다. 솔로베츠키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단 한 가지 점만을 간과했다. 그들은 이 사상을 순수히 종교적인 것으로, 혹은 오로지 종교적인 측면에서만 바라보았으나, 차르와 니콘은 비잔티움으로부터의 이탈을 허용하지 않는 이 교회-정치적 구조의 모든 복잡성을 간파하고 있었다. 이 사상의 내용을 해석하는 데 있어 매우 미묘한 차이는 차르나 니콘 총대주교의 그리스 친화적 성향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사상이 그들에게 어떤 위치를 부여했는지에 기인했다. 그들 각자는 이 사상의 수호자이자 보루, 생명력의 원천이었다. 한 사람은 정교 차르로서, 다른 한 사람은 교회의 수장으로서 말이다. 그러나 알렉세이 차르와 니콘 사이의 논쟁은 그들조차도 이 사상을 똑같이 해석하지는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이 사상의 국가·정치적 요소는 당연히 알렉세이에게 니콘보다 더 중요했다. 니콘은 그 중요성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이 사상을 확립하는 데 있어 차르가 그에게 부여할 수 있고 부여하고자 했던 역할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자 했다.

따라서 똑같은 아이디어가 세 당사자에 의해 각기 다르게 인식되었다. 알렉세이의 입장은 동방 총대주교들이 차르의 편에 섰다는 사실로 인해 공고해졌으며 정당성을 얻었는데, 비록 그들이 원칙적인 고려보다는 실용적인 고려에 따라 그렇게 한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1453년 이후 국가와 교회 간의 관계 문제는 동방 총대주교들에게 모스크바와는 완전히 다른 의미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이 세속 권력의 의지에 반대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 권력은 물질적으로나 외교적으로나 터키와의 투쟁에서 그들을 도울 수 있었고, 실제로 한 번 이상 도움을 주기도 했다[993] . 1666~1667년 공의회의 판결은, 당연히 차르가 전적으로 정통적이고 공정하다고 여겼던 바와 같이, 니콘과의 논쟁에서 종교적·도덕적 측면에서 그를 정당화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니콘의 개혁을 지지하고 세속 권력의 도움을 받아 러시아 교회에 이를 실행에 옮겨야 할 필요성을 그에게 확신시켜 주었다. 이제 알렉세이에게는 개혁 초기, 예를 들어 아바쿠무스와 관련하여 겪었던 의심과 망설임의 시기가 지나갔다. 20년 치세(1646년부터 1666년까지) 동안, 니콘의 영향력 아래 있던 청년은 독재적인 통치자로 성장했으며, 그의 국가·교회·정치적 견해는 훨씬 더 명확하고 분명해졌다. 또 한 가지, 즉 차르에게 미친 서구의 영향과, 그와 관련하여 국가에 교양 있는 인재가 부족하다는 인식에 대해서도 잊어서는 안 된다. 차르는 니콘의 개혁 추진을 신학 교육 분야에서 일정한 성과를 거둔 증거로도 간주했는데, 이는 ‘모스크바—제3의 로마’에 대한 그의 관념과 모순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아이디어 자체에 내적 완결성을 부여하기도 했다. 바로 여기에 차르와 분열 세력 지도자들이 적대관계에 빠지게 된 이유에 대한 해답이 있다. 이 모든 것을 간략히 정리하자면 아마도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양측 모두 ‘모스크바—제3의 로마’라는 동일한 이념을 신봉했으나, 하지만 알렉세이 차르가 이 사상을 굳어진 형태나 마비된 상태로 머물 수 없는 살아있는 유기체로 보았던 반면, 다른 쪽인 분열주의자들은 이 사상이 선포되었을 당시의 정확한 형태 그대로 보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를 되살리려는 시도를 신앙 배반으로 간주했다. 이로 인해 국가 권력은 마침내 지나치게 극단적으로 치달은 솔로베츠키 수도원의 반대에 대해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던 또 다른 이유는, 1667년 5월 13일 불필요한 서두름 속에서 내려진 공의회의 판결이 정부의 개입을 정당화했고, 수도원 수도자들은 이제 개혁에 대한 저항을 옛 신앙을 위한 순교로 여기게 되었기 때문이다. 1667년 5월 13일 열린 마지막 회의에서 공의회는 매우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 판결을 내렸다. 니콘의 개혁안들은 최종적으로 승인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자들은 교회에서 파문당하고 저주받았다. 1654~1666년에 수정 및 인쇄된 예배 서적을 받아들이라는 단호한 요구에 이어, 오직 이 책들에 의해서만 예배를 집전하라는 요구에 이어, 모든 수정 사항을 명확하게 한(이는 오해와 오류를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후, 그 잘못된 해석들을 규탄한 뒤, 공의회 판결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 우리 공의회의 명령과 유언을 앞서 언급된 모든 정통 성직자들에게 전하며, 모든 이가 변함없이 이를 지키고 거룩한 동방 교회에 복종할 것을 명한다. 만일 누구든지 우리가 명하는 바를 듣지 않고 거룩한 동방 교회와 이 거룩하게 된 공의회에 복종하지 않거나, 우리에게 반박하고 대항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전능하시고 생명을 주시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신 권위로 그러한 적대자를, 만일 성직자라면, 추방하고, 그에게서 모든 성직 직무와 은총을 박탈하며, 저주에 넘겨주리라; 만약 세속 신분에 속한 자라면, 우리는 그를 파문하고, 성부·성자·성령으로부터 분리시키며, 이단자이자 불순종자로서 저주와 파문으로 넘겨주며, 썩은 부위이자 쓸모없는 지체로서 정통 교회의 모든 구성원과 양떼,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에서 잘라내어, “그가 깨달아 회개를 통해 진리로 돌아올 때까지”[994] .

이 판결로 인해 옛 신앙, 혹은 더 정확히 말해 옛 예식을 따르는 신자들은 정교회에서 파문당했으며, 따라서 1667년 5월 13일을 러시아 분열의 시점으로 볼 수 있다.

비록 이 판결 이후 알렉세이 차르가 판결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은 솔로베츠키 수도원의 수도사들에 대한 자신의 조치를 전적으로 정당하다고 여길 수 있었지만, 정부는 여전히 수도원에 대한 조치를 미루고 있었다. 수도사들과 추가 협상이 진행되었다. 새로운 대수도원장 요시프는 수도사들로 하여금 자신을 원장으로 인정하도록 강요하기 위해(1668–69년) 스트렐츠들의 호위를 받으며 수도원에 도착했다. 한편, 막대한 식량 비축량과 성벽 및 탑에 설치된 90문의 대포를 보유한 수도사들은 수도원에 틀어박혀 스트렐쪼프들을 향해 사격을 가했다[995] .

1672년에는 예블레프의 지휘 하에 또다시 스트렐츠 부대(775명)가 파견되었는데, 그에게는 우선 수도사들을 설득하여 복종하게 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러한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예블레프는 수도원을 포격하라고 명령했으나, 수도원 측이 스트렐츠보다 더 많은 화약과 포탄을 보유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스트렐츠 진영의 배치도 부실하여 수도원 포위전은 미온적으로 진행되었다. 1673년 5월 12일, 알렉세이 차르는 반란을 일으킨 수도사들에게 수도원 문을 열고 공의회의 판결에 복종할 경우 완전한 사면을 약속하는 칙령을 내렸으나, 수도사들은 굳건히 버텼다. 스트렐츠들 사이에서 괴혈병이 창궐하자, 결국 예블레프는 포위를 해제하고 모스크바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1674년 가을, 솔로브키에는 1,700명의 스트렐츠와 대포를 이끌고 공작 이반 메셰르야코프가 파견되었으며, 그는 반란을 즉시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다시 수도원은 포격을 받았고, 수도사들도 이에 맞서 모스크바 부대를 향해 사격을 가했으며,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1674년 12월 28일, 수도사 총회에서 예배 중에 차르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기로 결정되었으나, 재무관 게론티, 수도사 파벨 등 일부 수도사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아 수도원 감옥에 갇혔다. 포위는 1676년 초까지 계속되었고, 마침내 1월 22일 메셰르야코프는 수도원에서 탈출한 테오크티스트라는 수도사의 도움으로 수도원 내 비밀 통로를 알게 되어 밤중에 수도원에 침입하는 데 성공했다.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고, 수많은 수도사가 살해되었다. 의 소요 사태를 주도한 자들, 예를 들어 이구멘 니카노르 등은 사형 선고를 받았고, 1667년 5월 13일 총회의 판결에 복종하기를 원치 않았던 이들은 다른 수도원으로 유배되었으며, 차르와 총회에 복종한 소수의 수도사들만이 자신의 수도원에 남게 되었다. 많은 수도사들이 도망쳐 목숨을 건졌다.

러시아 북부의 숲으로 흩어지고, 한 은둔처에서 다른 은둔처로 방랑하던 이 방랑 수도사들은 분열의 주된 전파자이자 옛 신앙의 옹호자가 되었으며,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그들은 니콘을 비난하며 그를 “지옥의 아들”, ‘배교자’, ‘적그리스도의 선구자’라고 부르며, 백성들에게 옛 경건함을 지키라고 호소했고, 이는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솔로베츠키 수도원의 포위와 함락은 옛 신앙의 신봉자들과 그들에게 동조하는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전사 수도사들은 신앙을 위한 순교자로서의 후광과 명성을 얻었고, 방랑하는 수도사들은 이 명성을 큰 열정으로 나라의 가장 외진 구석구석까지 전파했다. 1682년 5월 15일, 차르 페도르(1676–1682)의 사망 후 상층부에서 약간의 혼란이 일어나 권력 다툼이 시작된 유명한 스트렐츠 반란에서, 분열은 상당한 역할을 했으며, 반란 지도자인 이. 아. 호반스키 공작이 올드베어들에게 보인 동정심은 말할 것도 없다[996] .

그러나 분열의 확산과 내부적 발전, 그 이데올로기의 확립, 특히 국가와 형성되어 가는 제국에 대한 태도 형성에 있어, 요아킴 총대주교(1674–1690) 재임 시절 교회가 취한 조치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총대주교 요아킴은 분열의 단호한 적이었으나, 그의 종교적 견해는 스타로베르들의 견해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분열에 맞서 가장 가혹한 조치로 투쟁을 벌였다. 1685년 4월 7일, ‘분열에 대한 칙령([997] )’이 반포되었는데, 이에 따라 분열 지지자들은 국가에 적대적인 세력으로 간주되어 박해와 처벌을 받게 되었으며, 이로써 국가는 순수한 교회 문제에 개입하기로 결정했다. 이 칙령은 분열주의자들과 분열에 동조하는 자들에게 다양한 처벌을 경고했으며, 심지어 스타로베르들을 반란자 및 국가 반역자로 규정하여 화형에 처하기도 했다. 이처럼 1667년 5월 13일과 1685년 4월 7일, 이 두 날짜는 분열의 역사에서 출발점이 되었다. 첫 번째 날짜는 스타로베르들의 종교적 분리를, 두 번째 날짜는 매우 오랜 기간 동안 분열주의자들의 민사법적 분리를 의미했다[998] .

수도자 집단에게 분열은 다양한, 그중에는 매우 심각한 결과도 포함하는 파장을 가져왔다. 니콘의 개혁에 반대하는 세력의 선동자로서 수도사들이 분열에 가담한 것은 수도계를 교회 계층 구조와 연결하던 유대를 끊어버렸고, 이로 인해 표트르 대제 시대에 수도계가 국가에 적대적이라는 의혹을 받게 되었는데, 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타당한 근거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분열에 참여한 수도자 집단은 세속화 과정에 가장 덜 노출되었던 계층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교회에 남아 있던 수도자들에게 18세기 전반이 문학적 불모의 시기였으며, 마치 마비된 듯 살아갔다는 점은 매우 특징적이다. 분열에는 제국 시대에 수도자들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스스로를 위한 명확한 사명을 발견하지 못했던 원인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상대적으로 오랫동안 수도계는 정확히 갈림길에 서 있었으며, 일부 수도자들은 자신만의 출구를 찾았으나, 나머지 대다수는 1917년까지 이 상태에 머물렀다.

 

 

제13장. 세속화의 시대 (1701–1764)

 

1. 표트르 대제와 수도계에 대한 그의 태도

17세기 마지막 10년 동안 러시아 수도계는 그 역사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시기에 접어들었다. 수도계의 내부 발전과 외부적 운명에 있어 두 가지 사건이 결정적인 의미를 지녔는데, 바로 분열과 일반적으로 ‘교회 개혁’이라 불리는 표트르 대제의 조치들이다. 그러나 개혁 전후의 러시아 교회의 삶을 비교해 보면, 이 용어는 어느 정도 신중함을 가지고 사용해야 함이 드러난다. 물론 17세기 말 러시아의 교회 생활은 이상과는 거리가 멀었고, 실제로 많은 중대한 변화가 필요했으나, 그러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개혁 이후에도 교회 생활에는 예전의 결함이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 이는 개혁이 일방적이고 불완전한 성격을 띠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가장 중요한 문제인 성직자 양성에 있어서는 시급히 필요한 조치조차 취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개혁은 국가가 러시아 교회에 대해 갖는 태도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이러한 변화는 지극히 중대했다. ‘영적 규정’은 교회와 국가 간의 관계를 완전히 새로운 토대 위에 세웠다. 교회는 법적 독립성을 상실하고 국가 기관인 ‘정교회 신앙국’이 되었으며, 이 명칭은 19세기까지 공식 문서에 그대로 유지되었다. 『영적 규정』은 국가와 교회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형성했는데, 이는 국가가 교회에 대한 보호자 역할을 맡게 되었고, 교회 문제에 대한 국가의 개입이 법적 규범이 되었으며, 국가가 이 원칙을 흔들림 없이 고수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물론 모스크바 루스, 즉 표트르 대제 이전에도 세속 권력은 교회 문제에 매우 자주 개입했고, 러시아 교회는 국가로부터 압력을 받는 일이 드물지 않았으나, 그러한 개입은 정상적인 것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피터 대왕 이전과 이후의 국가와 교회 간의 관계에 대한 인식은 단순히 달랐을 뿐만 아니라 정반대였다. 이제 러시아 교회는 모스크바 루스에서 누리던 과거의 매우 높은 지위를 잃고, 피터의 교회 개혁을 통해 하나의 국가 기관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러한 역할은 교회에게 순수히 영적인 것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국가·정치적 봉사를 요구했던 표트르의 구상에 전적으로 부합했다. 표트르가 구상한 국가에서는 모든 것이 국가에 봉사하고 국가에 이익을 가져다주어야 했다. 여기서 ‘이익’이란 그가 이해한 바에 따른 것이었다[999] .

교회 계층은 물론 수도자들도, 표트르 대제의 개혁으로 인해 생겨난 이 새로운 상황은, 이제 국가와 교회 간의 관계가 명확하고 확고한 법적 정의를 얻게 되었다는 이유만으로도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었다. 모스크바 국가는 세속 권력과 종교 권력 간의 법적 관계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알지 못했다. 이러한 관계는 전승과 옛 관습, 심지어 옛 관습에 대한 정서, 그리고 전제군주인 차르의 사실상의 권력과 위엄[1000] 에 기초하여 형성되고 유지되었다. 교회 문제에 많은 지면을 할애한 1649년의 『우로제니예』조차도 세속 권력과 교회 권력 간의 관계를 세부적으로 규정하지 않았으며, 이러한 관계에 대한 명확한 법적 규범을 제시하지 않았다. 세속 권력의 경우, 통치 관행과 국가·교회 정치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법전을 대체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러시아의 재정 문제에 대한 법적 규범을 제시한 소위 1654년 ‘헌장(Уставная грамота)’에서는 관습법으로부터의 일부 일탈을 발견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도 차르가 “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우리 위대한 군주에게도 의롭고 죄 없이” 통치한다고 강조하고 있다[1001] . 만약 1649년 법전이 국가와 교회 간의 관계에 대해 상세한 법적 정의를 내리고, 동시에 국가의 우선권을 명시했다면, 교회는 이를 분명히 인정했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1667년 공의회의 판결은, 차르와 총대주교 니콘 간의 분쟁에서 명백히 차르를 지지한 것으로, 소급하여 우리의 가정을 뒷받침해 준다. 여기서 언급된 모든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니콘 총대주교를 제외한 교회 지도자들은 국가와 교회 간의 관계가 원칙적으로 어떤 법적 정의를 갖는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으나, 원칙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즉 자신의 특권과 교회 토지 소유에 대한 관할권 및 측면에서, 교회를 위한 ‘status in statu’[국가 내의 국가] 지위를 유지하는 데 큰 관심을 보였으며, 이는 그들이 1667년과 1675년 공의회에서 추구했던 바였고, 이를 위해 수도원 관리국(1677)의 폐지를 관철해 낸 이유이기도 했다.

바로 이러한 정황들이 표트르의 국가·정치적 계획에 있어 용납될 수 없었으며, 그의 교회 개혁, 혹은 더 정확히 말해 그 개혁을 향한 첫 번째 시도는 무엇보다도 이 ‘status in statu’ 지위에 맞서 이루어졌는데, 이는 이후 국가와 교회 간의 관계를 최종적으로 명확히 하고 확립하기 위함이었다. 수도자와 수도원들에게 있어 이 교회 개혁의 전사는 1721년의 총대주교직 폐지 및 성스러운 통치 시노드 설립보다 더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다.

지난 세기의 교회·정치적 사건들은 국가 통치의 고삐를 직접 쥐게 된 표트르에게 여전히 너무 생생하고 위험하게 느껴졌다. 17세기에는 그의 성숙한 국가·정치적 구상에는 어울리지 않는 상황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미하일 차르 시대 국가 통치에서 필라레트 총대주교가 수행한 역할, 니콘의 교회 정책, 1667년과 1675년 공의회에서 러시아 교회의 특권에 대해 내린 판결, 수도원 관리국을 폐지하고 모든 면에서 교회의 국가로부터의 독립을 옹호하려 했던 요아킴 총대주교의 적극적인 활동, 수도원 관리국을 폐지하고 모든 면에서 교회의 국가로부터의 독립을 수호하고자 했던, 마음속으로는, 그렇게 표현해도 된다면, ‘작은 니콘’이었던 인물, 그리고 마지막으로 1690–1700년대에 표트르가 마지막 총대주교 아드리아노와 겪었던 개인적인 갈등 등을 다시금 상기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전에 널리 퍼졌던 아드리아노스의 무활동이나 소극성에 대한 견해는 타당하다고 볼 수 없다. 그의 교회 정책에 특별히 초점을 맞춘 연구[1002] 에서 입증된 바와 같이, 아드리아노스는 성격상 요아킴의 활력이나 니콘의 투지 같은 자질을 갖추지 못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특권을 지키려는 변함없는 열망을 드러냈다. 이러한 소극적인 저항과 그의 보수적인 견해는 교회 개혁은 물론, 피터가 구상한 모든 개혁이 그의 반대에 부딪혔을 것임을 시사했다. 표트르의 어머니인 나탈리아 여왕(† 1694)이 살아 있고, 그녀의 보수적인 성향의 측근들이 모스크바의 옛 전통을 지지하던 동안, 아드리안의 입지는 유리했다. 게다가 표트르는 여전히 자신의 ‘오락거리’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러나 1694년 이후 국가 통치에서 표트르의 역할은 결정적으로 커졌다. 그는 물론 아드리아노가 외국인, 그리고 전반적으로 서구의 영향[1003] 을 혐오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1694년 이후 표트르는 교회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에는 새로운 점이 전혀 없었는데, 이미 그의 아버지인 알렉세이 차르도 같은 방식으로 행동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표트르가 ‘공세에 나섰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러나 표트르가 ‘영적 규정’을 통해 국가와 교회 간의 새로운 관계를 확립하기까지는 20년이 더 걸렸다[1004] .

아드리아노스 총대주교가 서거한 후(1700년 10월 15일), 표트르는 단지 임시적인 교회 권력을 수립하고 비교적 젊은 랴잔 대주교 스테판 야보르스키를 총대주교좌 대리자로 임명했다[1005] . 교회 개혁을 추진하는 데 있어 표트르의 주요 보좌관인 테오판 프로코포비치 대주교 는 그의 저명한 저서 『군주의 의지의 진리』(1722)[1006] 에서 군주가 새로운 법을 제정할 권리를 입증하고 정당화하려 했으며, 이를 통해 『영적 규정』[1007] 에 법적 근거를 마련하고자 했다. “군주는 백성에게 합법적으로 명령할 수 있다”고 테오판은 썼다. “자국의 큰 이익에 필요한 모든 것뿐만 아니라, 그가 원하는 모든 것까지 명령할 수 있다. 단, 백성에게 해롭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 한에서 말이다. 이러한 군주의 권력에 대한 근거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백성이 통치자의 뜻에 복종하여 그 앞에 엎드려 자신에 대한 모든 권력을 그에게 넘겨주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온갖 시민적·교회적 의례, 관습의 변화, 복장의 사용, 주택 건축, 연회·결혼식·장례식 등의 예절과 의식 등이 모두 포함된다.[1008] .

우리가 이 발언을 특별히 인용한 이유는 심리학적 관점에서 매우 흥미롭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니콘의 개혁에 대한 일종의 반향이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교회 예식 분야에서 표트르가 도입할 수 있는 개혁을 정당화하려는 시도가 엿보이지만, 물론 이는 니콘의 경우와는 다른 관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와 같은 정당화와 근거 제시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 바로 『영적 규정』 그 자체인데, G. 플로르프스키가 훌륭하게 지적했듯이, 이 문서는 ‘법전’이라기보다는 ‘논증’에 가까웠다[1009] . 왜냐하면 『규정』의 저자인 테오판은 모든 입법적 결정을 근거를 제시하고 정당화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반대의 유령이 테오판과 페트르의 눈앞에 서 있었다! 사실 그런 위험은 없었다. 교회의 내부 세력은 분열로 인해 너무나도 약화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개혁은 주로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계급적 이익에 영향을 미쳤을 뿐이었다. 교회의 교리는 손대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고, 일반 대중에게는 표트르의 혁신을 니콘의 개혁과 같은 관점에서 바라볼 이유가 없었다. 표트르의 개혁에 대한 종교적 색채를 띤 반대의 뿌리는 그의 교회 개혁에 담긴 개신교적 정신이 아니라, 분열로 인해 야기된 정서에서 찾아야 한다.

미래 러시아의 교회 생활, 특히 수도 생활에 있어 특히 중요한 사실은, 표트르가 자신의 개혁을 통해 모스크바 루스를 경찰 국가로 만들었다는 점이었다. 이제 사회 생활의 모든 측면은 사생활까지 포함하여 국가에 의해 규율되었다[1010] . 이러한 사실, 즉 표트르의 개혁 결과 모스크바 차르의 국가가 경찰 국가로 변모한 것은 교회와 그 제도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은 채 지나가지 않았다. 교회 문제에 대한 세속 권력의 개입이나 규제는 이제 대부분 어떤 개선을 도모하려는 열망과는 무관했으며, 국가적 또는 경제적 이익에 대한 배려에서 비롯되었다. 이익에 대한 배려는 거의 항상 표트르 개혁의 주된 원동력이었다. 수도 생활과 수도원에 관한 수많은 칙령과 명령은 바로 이러한 경찰적 성격과 이익 추구의 관점을 띠고 있었다. 이러한 칙령들은 수도원 생활에 대한 치밀하게 계획된 전국적 개혁의 개별 단계가 아니라, 대부분 국가의 갑작스럽게 대두된 요구와 필요에 대응하여 발표된 것이었다. 수도 생활, 수도원 및 수도원 생활 방식에 관한 모든 명령에는 단 하나의 원칙적인 핵심만이 담겨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수도원을 국가에 유익하게 만들려는 열망이었다. 물론, 수도 생활을 기독교적·교회적 제도로 보는 표트르의 독특한 관점도 드러나기는 했다.

표트르 대제는 무신론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종교적이었으나, 그의 종교성은 교회 중심의 것이 아니었다. 구약성서에 기반한 모스크바의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자란 표트르는, 신이 세상의 창조주이자 섭리자라는 종교적 신념을 평생 간직했으며, 군주로서 신 앞에 지닌 책임감을 항상 지니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기독교 군주’라고 칭했는데, 이는 ‘영적 규정’뿐만 아니라 심지어 ‘군사 규정’(1716)에서도 그러했으며, 그는 전제적 권력을 신의 섭리로 보았다. 테오판 프로코포비치는 표트르를 “기독교 군주이자, 정통 신앙과 교회 내 모든 성스러운 규율을 수호하는 자”[1011] 라고 불렀으며, 이는 표트르 자신의 확고한 신념이기도 했다. 테오판은 예로부터 그의 왕실 선조들과 온 백성에게 내재해 온 이러한 신념을, 이제 러시아에 국가 교회제를 도입하기 위한 근거로 활용한다. 국가 교회에 대한 사상은 국가 내 교회의 역할과 과제에 대한 표트르의 견해와 완전히 부합했다[1012] . 이러한 견해는 모스크바의 독일인 거주지에 거주하던 외국인 개신교도들의 영향 없이는 형성되지 않았다. 표트르에게 교회는 주로 국가의 이익에 기여해야 하는 도덕적·교육적 힘이었다. 그는 교회의 전례 생활을 거부하지 않았고, 스스로도 자주 예배에 참석했으며, 군사적 승리 후에는 항상 감사 기도를 드리도록 명했다; 아조프 정복(1697) 후에는 그곳에 수도원을 설립했고, 나중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알렉산드로-네프스키 수도원을 세우고 성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공의 유해를 그곳으로 이장했는데, 이는 그의 생애에서 잘 알려진 사실들이다. 그는 교회의 교리에 대해서도 무지하지 않았으며, 이는 동시대인들이 차르와의 대화를 통해 알 수 있었다[1013] .

비록 표트르가 모든 것을 개혁하고 개선하는 것을 매우 좋아했지만, 그는 개인적으로나 교회 지도부의 이름으로든, 17세기에 그 이전에 도입되었던 것과 같은 종류의 혁신을 도입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는 자신의 건전한 상식과 뛰어난 지성 덕분에, 니콘의 전술에 있는 오류를 간파했을 것이다. 니콘은 자신의 혁신을 도입하기 전에 영적 교육의 개선에 먼저 신경을 쓴 다음, 그 후에야 개혁에 착수했어야 했다. 동시대 누구보다도 피터는 성직자뿐만 아니라 온 국민의 교육 수준을 높여야만, 계획한 러시아의 변혁을 실현할 수 있다는 점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 이유는 그가 국가 내 교회의 본질과 임무에 대해 러시아 성직자나 러시아 국민과는 완전히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바로 성직자들, 특히 주교단과 수도자들을 피터는 신뢰하지 않았다. 그는 주교단과 수도자들이 자신과 자신의 개혁을 얼마나 적대적으로 바라보는지[1014] , 그것도 교회·문화적 관점뿐만 아니라 정치적 관점에서도 그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에게 그토록 강렬하고 끔찍한 인상을 남긴 스트렐츠 반란에 주교단, 성직자, 수도자들이 연루되지 않았던가? 심지어 총대주교좌 대리인 스테판 야보르스키조차도 그가 구상한 개혁을 내심 찬성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가 느끼지 못했을까? 표트르는 러시아 정교회가 러시아의 유럽화 계획에 동참하게 하려면, 그 교회를 근본적으로 변혁하고 개혁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 후에야, 즉 교회 지도부와 성직자들이 개혁되고, 계몽을 통해 그들이 그의 손에 순종하는 도구가 되었을 때, 비로소 교회 생활에 대한 더 심층적인 개혁을 시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 개혁을 위해 표가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기에, 그는 그 개혁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겼던 부분, 즉 국가와 교회 간의 완전히 새로운 관계 수립과 최고 교회 권력의 재편만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

교회 개혁의 부정적인 측면에 대한 모든 책임을 피터 한 사람에게만 돌리는 것은 불공평할 것이다. 만약 당시 러시아 성직자들 중에서 그를 돕고 그의 신뢰를 받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1721년의 교회 개혁은 완전히 다른 성격을 띠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성직 계급을 이끌던 사람은 소심하고 위선적인 스테판 야보르스키였는데, 그는 국가·정치적 안목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교회의 진정한 필요에 대해서도 올바른 이해를 갖추지 못한 인물이었다. 테오판 프로코포비치에 관해 말하자면, 이 주교는 러시아 교회의 안녕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자만심에 차 있고 야망이 강하며 복수심에 불타는 인물이었던 그는 표트르 치세에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을 어느 정도 자제해야 했지만, 황제가 사망한 후에는 그의 성격에서 가장 나쁜 면모들이 온전히 드러났다.

수도 생활과 교회 소유지에 관한 표트르의 조치들은 주로 기독교적 금욕주의에 대한 그의 부정적인 태도, 그리고 인간 생활과 국가 생활에서 나타나는 온갖 종류의 무활동과 무용함에 대한 그의 반감에서 기인한 것으로, 그의 견해에 따르면 이러한 태도는 수도원 생활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만약 수도원들이 토지를 더 적게 소유했거나 아예 소유하지 않았다면, 표트르는 아마도 이 분야에 그렇게 심도 있게 개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 이 토지들은 국가에 있어 잃어버린 것과 다름없어 보였기 때문에, 점점 더 많은 자금을 필요로 했던 북방 전쟁과 시기가 겹친 개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그는 수도원의 부를 국가적 목적을 위해 가장 급진적인 방식으로 활용하는 데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반면, 어떤 식으로든 수도원 생활의 내부 질서를 침해하는 조치들은, 수도계가 국가·정치적 측면에서 적대적인 요소라는 그의 의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표트르는 분열 사태에서 수도계가 차지한 역할을 잘 파악하고 있었으며, 이를 교회적 차원뿐만 아니라 국가·정치적 차원에서도 판단했다. 그는 수도계가 서구 문화를 혐오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한마디로, 표트르는 당대의 수도계가 개혁의 추진을 저해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의심하지 않았다[1015] . 이 모든 것이 바로 피터가 25년 동안 끊임없이 수도계를 말 그대로 박해하고, 수도원 생활의 사소한 부분까지 간섭했던 사실을 설명해 준다. 그는 수도원 제도를 개혁하거나 어떤 개선책이라도 도입하기 위해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수도원 제도의 권위를 떨어뜨리고 그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

 

2. 수도원, 수도원 소유지 및 수도자들에 대한 정부의 조치

표트르 대제의 교회 개혁은 러시아에 국가 교회 체제를 확립했으며, 이는 교회 기관과 세력, 재산이 앞으로 교회뿐만 아니라 국가에도 봉사하게 될 전제 조건이 되었다[1016] . 1721년 1월 25일은 러시아 국가 교회 체제의 탄생일로 볼 수 있는데, 이날 ‘영적 규정’이 제국 내 러시아 교회의 위치를 규정하는 기본법이 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수도원과 관련된 개별적인 개혁들은 그 당시 이미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었지만 말이다. 이 조치들 중 최초의 것들은 1696–1698년에 이루어졌으며[1017] , 이는 1764년 예카테리나 2세 여제 치하에서 막을 내린 긴 세속화 시대로 우리를 이끈다. 이 70년 기간은 수도원의 생활을 개선하기보다는, 수도 생활을 러시아 교회와 민중 생활 속에서 그 지위를 완전히 바꿔버리는 조건에 놓으려는 시도였으며, 수도 생활을 국가적 존재의 뒷전으로 밀어내려는 시도에 다름 아니었다. 이러한 조치들은 때로는, 예를 들어 안나 요안노브나 여제(1730–1740) 치하에서처럼, 명백한 박해의 성격을 띠기도 했는데, 이는 수도원의 내부 생활을 완전히 무너뜨렸고 그 여파가 오랫동안 지속되어, 시노달 시대에는 수도 생활이 마치 마비된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성스러운 시노드는 200년 동안의 존재 기간 동안 수도원 문제를 여러 차례 진지하게 논의했으나, 수도원 생활의 수준을 높이기 위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성스러운 시노드와 시노달 시대의 러시아 교회 계층은 수도원의 현 상태에 전적으로 만족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수도 생활이 쇠퇴한 상태에 머물게 된 것은 표트르의 교회 개혁이나 그의 초기 조치들이 아니라, 시노드식 통치와 18~19세기 러시아 주교단의 탓이라고 주장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수도 생활을 교회 제도로 본 표트르의 견해는 비교적 늦게, 즉 1724년 1월 31일자 칙령에서 공식화되었는데, 이 칙령은 표트르와 테오판 프로코포비치[1018] 가 공동으로 작성한 것이다. 이 칙령의 제목만 보더라도 그 성격이 잘 드러난다. “수도 제도가 언제, 어떤 죄로 인해 시작되었는지, 고대 수도사들의 생활 방식은 어떠했는지, 그리고 현재의 수도사들을 어떻게 바로잡아야 하는지, 비록 어떤 고대의 본보기를 따르기는 해야 하지만.” 이는 이미 시행된 조치와 동시에 앞으로 시행될 조치들에 대한 뒤늦은 정당화에 다름 아니었다. “진정한 수도사들은 사람들로부터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공고』에 기록된 바와 같이, “사람들이 그들을 보거나 그들에 대해 듣는 것조차 원치 않았다…” 그 후 어떤 위선자들이 그리스 황제들에게, 더 나아가 그들의 아내들에게 접근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아마도 피터의 첫 번째 아내인 유도키아 황후와 그녀의 보수적인 측근들을 암시하는 것일 것이다. – I. S.), 그리고 수도원들이 더 이상 사막이 아닌 도시 한복판과 그 인근 지역에 지어지기 시작했고, 이 허황된 성지를 위해 금전적 지원을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더 심각한 것은 스스로 수고하지 않고 타인의 수고로 공짜로 먹고살기를 원했기에, 황제들은… 스스로도… 매우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현상이 우리 나라에서도 크게 퍼지기 시작했는데… 현재 수도사들의 생활은 다른 법규들에 대한 겉치레에 불과하며 조롱거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상당한 악이 발생하고 있으니, 대다수가 무위도식하는 자들이고 모든 악의 근원이 게으름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얼마나 많은 미신과 분열, 나아가 선동자들이 생겨났는지는 모두가 잘 알고 있다… 그들이 과연 신성한 성경과 가르침을 이해하고 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사람들이 기도한다고 말하니, 다들 기도할 뿐이다… 그렇다면 이로 인해 사회에 어떤 이익이 있는가? 실로 옛 속담 그대로입니다. ‘하나님께도,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대다수가 세금을 피하고 게으름을 피하여 공짜로 빵을 먹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유한한 자들에게도, 게으른 삶이 아닌,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고 부끄럽지 않은 삶의 방식이 있으니, 바로 진정한 빈민과 노인, 그리고 유아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공고』에는 수도 생활에 대한 표트르의 견해와 수도원 수를 줄이고 수도원 소유지를 국가적 목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그의 모든 조치에 대한 근거가 담겨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수도원 관리국은 1677년에 폐지되었으며, 이제 1696년에 표트르는 특별 칙령을 통해 교구 주교들에게 매년 수도원과 교구 본당의 수입 및 지출에 대한 정확한 보고서를 대궁전 관리국에 제출할 것을 요구했다; 2년 후인 1698년에 이 칙령은 재확인되었으며, 곡물 비축량에 대한 특히 정확한 보고를 요구하는 조항과, 차르의 허가 없이는 수도원에서 어떠한 건축이나 수리도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명령이 추가되었다[1019] . 1701년 1월 24일, 수도원 관리국이 부활되었다[1020] . 1701년의 칙령과 그 뒤를 이은 다른 칙령들은 지체 없이 수도원과 수도원 소유지에 대한 목록을 작성하고 수도자의 수를 정확히 파악할 것을 요구했으며; 수도원에는 예배 집전과 재산 관리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인원만큼만 수도사를 남길 수 있었으며(이처럼 정해진 각 수도원의 수도사 수를 ‘정원’이라 칭했다), 수녀 서원을 받지 않은 수도원 거주자들은 퇴거 조치 대상이 되었으며, 신규 수도사의 수녀 서원은 정원에 공석이 발생했을 경우에만 허용되었다[1021] . 『수도사에 관한 영적 규정 보충안』(1722)[1022] 은 30세 미만의 남성에게 수계를 주는 것을 금지했으며, 여성은 50세에서 60세 사이에만 수계를 받을 수 있었다; 예외는 시노드의 허가를 받은 경우에만 허용되었다; 군인과 관료에게는 수계가 아예 금지되었다; 빚을 진 자, 기혼자, 미성년 자녀를 둔 자도 수도원에 입소할 수 없었으며, 농노는 지주의 허락을 받아야만 출가할 수 있었고, 문맹자는 차르나 시노드의 승인을 받아야만 수도원에 들어갈 수 있었다[1023] .

“1701년의 수도원 관리국은 – M. 고르차코프의 견해에 따르면 – 전체 러시아를 아우르는 최고 중앙 기관으로서, 그 활동 전반에 걸쳐 특히 표트르 대제의 개혁 목표에 전념했던 기관이었다”[1024] . 1720년에 폐지되었다가 1721년에 다시 설립되어 1724년 말까지 운영되었다. 이 기간 동안 수도원 관리국은 수도원 생활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거의 모든 사안에 대해 최고 결정 기관의 역할을 했다. 앞서 언급한 ‘영적 규정 보충안’은 시노드의 허가 없이 새로운 수도원을 설립하는 것을 금지했으며, 은둔소나 스키토의 건축은 완전히 금지되었다; 수도사 수가 30명 미만인 소규모 수도원이나 은둔처는 폐쇄되거나 다른 수도원과 통합되어야 했으며; 수도원이 폐쇄될 경우 수도원 교회는 본당 성당이 되었고; 또한 시노드는 필요 시 대규모 수도원도 폐쇄할 수 있는 권한을 차르로부터 부여받았다[1025] .

「부칙」(§ 35)은 또한 문맹인 수도사들이 읽고 쓰는 법을 배우도록 요구했으며, 이를 위해 수도원 내에 학습을 위한 별도의 방을 마련해야 했다; 1723년에는 새로운 명령이 내려졌는데, 이에 따라 30세 미만의 모든 수도사는 교육을 받기 위해 모스크바의 자이코노스파스키 수도원으로 보내져야 했다. 이 명령이 교구 주교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는 1723–1727년 동안 교육을 받기 위해 보내진 수도사가 단 세 명에 불과했고, 그중 두 명은 나중에 도망쳤으며, 네 명만이 자발적으로 교육을 받으러 나타났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1026] . 1724년의 「공고」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에 두 개의 신학교를 설립하는 계획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졸업생들은 이후 같은 신학교의 교사가 되어야 했으며, 30세가 되면 원할 경우 수도사가 될 수 있었다. 그 후 그들은 알렉산드로-네프스키 수도원에서 3년간의 수련 기간을 거쳐 학문 활동에 투입되어야 했는데, 예를 들어 번역 작업이나 설교문을 작성하는 일 등이었습니다; 이 학자 수도사들에게는 일반 수도사들에 비해 더 좋은 음식과 의복이 제공되었으며, 적절한 성실함과 모범적인 행실을 보일 경우 수도원 원장, 신학교 총장, 그리고 교구 주교직[1027] 의 후보자가 될 수 있었다. 당분간 종이 위에서만 머물렀던 이 계획에는 미래의 학자 수도자 계급의 씨앗이 담겨 있었는데, 이는 아래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러시아 교회의 삶에서 긍정적인 현상은 아니었다.

모든 산업 분야를 개선하려는 표트르의 열망은 이곳에서도 드러났는데, 이는 실용주의와 환상적인 공상주의가 결합된 것이었다. 예를 들어, 『프리바제니예』는 남성 수도원에 “공예 기술을 도입”하여 목공 및 기타 수공예에 종사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여성 수도원에서는 수공예가 매우 널리 퍼져 있었으며, 1724년 『공고』에는 브라반트, 즉 릴(Lille) 시에서 ‘숙련된’ 레이스 장인들을 러시아로 초청하여 여성 수도원들에 교사로서 파견하겠다는 계획이 담겨 있다[1028] . 동시에 수도원과 수도원 건물들은 자선 목적으로 활용되었다. 많은 수도원에 고아, 환자, 정신질환자, 전쟁 장애인 등이 수용되었는데, 일부 수도원은 너무 과밀해져 이 사람들을 먹일 식량이 부족할 지경에 이르렀다; 많은 수도사들이 무례하고 거칠게 수도원에서 쫓겨났고, 수도원 소유의 영지는 관리할 사람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 후 수도원 관리국은 훼손된 수도원 운영을 회복하기 위해 쫓겨난 수도사들을 다시 수도원으로 돌려보내야만 했다; 수도원의 새로운 거주자들, 특히 전쟁 장애인들은 종종 난동을 부렸고, 싸움과 그와 유사한 사건들이 발생했으며, 때로는 수도원이 강도 피해를 입기도 했다[1029] .

국가 당국은 수도원의 내부 생활도 소홀히 하지 않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일련의 지침을 발표하였다. 『영적 규정 보충안』에는 원장들이 수도사들의 투표로 선출되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1030] . 또한 이 규정에는 수도원이 공동 생활 규약에 따라 운영되어야 한다는 요구 사항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수계 비용을 징수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수도사가 사망한 후 그의 거처에 있던 모든 물품은 수도원이나 시노드의 소유로 넘어가게 되었으며, 수도사들은 유언장을 작성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예전에는 매우 흔했던 한 수도원에서 다른 수도원으로의 이동은 이제 엄격히 금지되었으며, 수도사는 일생에 단 한 번만, 그것도 원장의 서면 허가를 받은 경우에만 그러한 이동을 할 수 있었다. 교구 주교들은 이 조치가 철저히 준수되도록 관리할 의무가 있었다. 원장들은 수도자 명단을 관리하고 수도사의 도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했으며, 도주한 수도사는 체포된 후 족쇄에 묶였다. 수도원 출소는 오직 원장의 허가를 받은 경우에만 허용되었으며, 그 기간도 짧아야 했다[1031] . 수도원 생활은 수도사들의 지인이나 친척 방문으로 인해 혼란을 겪어서는 안 되었다. 수도사들은 일 년에 네 번 친척을 방문하는 것이 허용되었으나, 매번 원장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반면 수녀들에게는 이마저도 금지되었으며, 연로하고 신뢰할 수 있는 수녀들의 동반이 있을 때에만 친척을 방문할 수 있었고, 그것도 누군가의 병이나 사망이 발생한 경우에만 허용되었다. 수도사들이 청원서나 그 밖의 반체제적인 성격을 띤 글을 작성할 기회를 박탈하기 위해, 그들은 자신의 방에 필기용 종이, 잉크, 깃펜을 소지하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었다[1032] .

1720년, 수도원 당국은 수도원에 보관되어 있던 모든 하사 문서와 면책 문서, 그리고 이와 유사한 기타 ‘특이한 문서’들을 지체 없이 수도원 관리국으로 보내고, 앞으로는 수도원에 보관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러한 조치 덕분에 수도원 관리국은 수도원 소유지에 관한 중요한 문서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 전까지 관리국에는 문서가 지속적으로 부족하여 수도원 경영 상황에 대한 명확한 파악이 어려웠는데, 이는 1701년에 실시된 농민 가구 조사에서 일부 교구가 아예 아무런 정보도 제출하지 않았던 사실[1033] 로 입증된다.

이 조치는 수도원, 수도원 소유지 및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관할권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수도원 관리국이 복원됨에 따라 1667년 공의회의 판결은 공식적으로 무효화되지는 않았는데, 이는 새로운 공의회 판결에 의해서만 이를 폐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며, 단순히 정부의 지시에 따라 효력을 상실했을 뿐이었다. 이는 성직자와 교회 소유지의 관할권 문제에 있어 1649년 법전(Уложение)에 규정된 법적 규범을 복원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1701년 이전에도 많은 정치 재판, 특히 1682년과 1698년의 스트렐츠 반란과 관련된 재판에서 성직자와 수도사들은 교회 대표자의 참여 없이 심문을 받고 유죄 판결을 받았는데, 이는 1667년의 결정을 위반한 것이었다. 수도원 관리국은 종종 교회 대표자 없이 세속 판사들의 손을 빌려 재판을 진행했다. 게다가 많은 재판은 수도원 관리국이 아니라, 일종의 차르 개인 비서실인 프레오브라젠스키 관리국[1034] 에서 진행되기도 했다.

1725년 1월 28일, 표트르 대제가 서거했다. 그 후 수도자 계층과 관련된 새로운 정부 조치들은 그의 정책을 이어갔을 뿐만 아니라, 특히 안나 여제(1730–1740) 치하에서는 훨씬 더 가혹한 것으로 드러났다. 예카테리나 1세(1725–1727) 치하에서는 우선 피터의 수많은 칙령이 재확인되었다. 예를 들어, 수도원에서 도망친 수도사들의 수도사 자격을 박탈하고, 세속 법정에 회부하며, 공개적으로 채찍질 처벌을 가하도록 명령했다; 또한 병자, 전쟁 장애인, 정신 질환자, 심지어 유죄 판결을 받은 범죄자(노역자)들을 수도원에 분산 배치하라는 명령도 내려졌다; 수도사가 되는 것은 사제를 잃은 미망인들에게만 허용되었으며, 그 외의 사람들은 시노드에 수도 입회 허가를 청원해야 했다. 이전에 성공을 거두지 못했던, 어린 수도사들을 자이코노스파스 수도원 부속 학교로 보내라는 칙령이 다시 발표되었다. 사실 이 칙령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는데, 이전에 시행된 모든 조치로 인해 수도원에는 어린 수련생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1035] .

특히 수도사가 적은 수도원들의 수도사 수가 매우 크게 줄어들었기 때문에, 표트르 2세(1727–1730) 치하에서 이 범주에 속하는 수도원들에 대해 이전에 취해진 조치들을 완화하는 몇 가지 명령이 발표되었다. 일부 소규모 수도원이 재개원되었고, 수도사들이 그곳으로 돌아왔다[1036] . 테오판 프로코포비치가 한동안 시노드 및 교회 행정 전반에서 과거의 지위를 잃었던 표트르 2세의 짧은 통치 기간은 수도계에 대한 다양한 완화 조치가 이루어지고 반대 정서가 고조되던 시기였다. 한동안 총대주교직 복원이라는 생각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미성년자였던 표트르(1727년 당시 겨우 11세)의 측근에서는 보수 성향의 A. G. 돌고루키 공작 가문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그 가문의 막내딸 예카테리나는 어린 황제와 약혼한 상태였다. 표트르 2세는 불운한 차르비치 알렉세이, 즉 표트르 대제의 아들이었으며, 반대파 교회 세력들도 그에게 희망을 걸고 있었다. 돌고루키 가문과 일부 교회 지도자들은 어린 표트르 2세의 재위 기간에 표트르 대제의 교회 개혁으로 인한 후유증을 해소하기를 꿈꾸었다. 그러나 1730년 1월 18일, 피터 2세가 천연두로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이러한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1037] .

안나 이오안노브나 여제의 10년 통치 기간(1730–1740)은 러시아 정교회에 있어 특히 견디기 힘든 시기였으며, 특히 수도자들에게는 더욱 힘든 시기였다[1038] . 그 후, 엘리자베타 여제 치하에서 재능 있는 설교자였던 디미트리 세체노프 대주교는 안나 여제의 통치 시기를 “불행한 시기”라고 칭했다: “기독교 교리들은… 우화나 허구로 치부되었고, 하나님의 성도들을 공경하지 않았으며, 사도들의 전승과 성부들의 가르침을 배척했다. 무엇보다도 경건함의 수호자들인 성직자들—주교, 사제, 수도사들을 고문하고, 처형하고, 성직에서 파면했다… 수도사들과 사제들, 경건한 사람들을 먼 시베리아의 도시들로… 끌고 갔다. 그로 인해 사람들은 너무나 공포에 질려, 심지어 목자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들조차 침묵을 지키며 경건함에 대해 감히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1039] . 이는 “독일인들의 횡행”의 시대였으며, “그들에게 이제야 비로소 황금기가 시작되었다”고 K. 슈텔린은 그의 『러시아사』에서 기록하고 있다. – “그들은 위대한 국가의 전권적인 주인이 되었다.” 비론은 “모든 러시아적인 것에 경멸을 품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가 그 경멸을 점점 더 숨기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은, 본래부터 충분히 정당했던 러시아인들의 이방인의 속박에 대한 분노를 두 배로 이해하기 쉽게 만든다; 이 경멸은 또한 이 인물에 대한 러시아 역사학의 평결을 잘 설명해 주는데, 그는 명백히 훌륭한 정치가가 되기에는 많은 것이 부족했다. 그는 말 전문가로 인정받았으나, 러시아인들은 그가 황후 다음으로만 뒤처지는 지극히 높은 자리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백성을 그만큼 잘 이해하고 있다고 인정하지 않았다」[1040] . 독일인들의 횡포는 모든 계층의 국민들에게 증오와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오만한 총애자 비론, 냉혹한 오스터만(그는 뛰어난 외교적 능력과 음모술을 겸비하고 있었음), 정신적으로 한계가 있고 극도로 무례하고 잔인한 성격을 가진 황후 자신[1041] , 마지막으로, 비론의 요원들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던 비밀 관청 – 이 사람들이 러시아를 통치했으며, 그들의 권력을 행사하는 수단은 유배와 단두대였다[1042] .

이 시기에 표트르 대제의 교회 정책을 가장 적극적으로 계승한 인물은 안나와 비론의 신뢰를 얻어낸 테오판 프로코포비치였다[1043] . 사망할 때까지(1736년) 테오판은 시노드에서 전능한 고위 성직자로 군림하며, 이제 자신의 모든 옛 적들에게 복수할 수 있게 되었다. 이미 1731년에 시노드는 오스터만이 통치하던 내각에 완전히 종속되었다[1044] . 기존의 칙령들은 재확인되고 새로운 칙령들로 더욱 강화되었으며, 교구 주교들에게는 관할 하에 있는 사람들의 사소한 위법 행위에 대해서도 전적인 책임이 부과되었고, 100루블의 벌금이 부과되었다; 그 후 1734년에는 법을 어기고 수도사가 된 경우(미망인 사제와 퇴역 군인만 수도사가 될 수 있도록 허용되었음)에 대한 벌금이 500루블로 인상되었으며, 이 경우 수도원 원장에게는 종신 유배형이 선고되었고, 새로 출가한 수도사는 수도사 자격을 박탈당하고 체벌을 받았다[1045] . 교구 주교들은 수도사들을 자신의 대리인으로 세속 기관에 파견하거나, 그들을 통해 그곳에서 협상을 진행하는 것이 금지되었다[1046] . 수도원 원장들에게는 수도원 내 질서를 유지할 뿐만 아니라, 수도사들이 저지른 모든 위법 행위에 대해 시노드에 직접 보고할 의무가 부과되었으며, 유죄 판결을 받은 자들은 군인으로 징집되거나 시베리아 광산으로 유배되었다. 시노드는 사법 사건에서 완전히 배제되었으며, 유죄 판결을 받은 자들의 수도사 자격을 박탈하는 역할만 수행해야 했으나, 이마저도 정부의 지시에 따라 행해졌다[1047] . 당시 수도원 생활의 좋은 예로는, 모스크바의 보즈네센스키 여자 수도원을 수녀원장 대신 세메노프스키 연대의 한 대위가 1년 넘게 관리했던 상황이 들 수 있는데, 수녀원장은 그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심문을 받고 있었다[1048] .

수도원 생활과 수도자들에 특히 파괴적이었던 것은 이른바 ‘수도사 심문’이었다. 이러한 심사를 통해 많은 수도사들이, 주로 정치적 혐의를 이유로, 수도원에서 추방당했다. 젊은이들은 군인으로 징집되었고, 노년층은 수도사 자격을 박탈당해 우랄이나 시베리아로 강제 노동을 하러 보내졌다. 이러한 심사는 앞서 언급한 비밀 사무국이 수행했으며, 그 결과 수도자의 수가 크게 줄어들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1724년 당시 수도원에는 25,207명의 수도사와 수녀가 있었지만, 안나 여제의 통치 말기에는 14,282명(수도사 7,829명, 수녀 6,453명)에 불과했다. 러시아 교회에 많은 재앙을 안겨준 황후의 사망 후, 시노드는 정부를 위해 수도원 생활의 쇠퇴를 여실히 보여주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일부 수도원은 완전히 텅 비어 있었고, 다른 곳에는 수도사가 너무 적게 남아 있었으며 그들은 너무나 늙어 예배를 집전할 사람이 없었다; 조사 과정에서 특히 많은 수도원 원장들이 해임되고 구금되었으며, 수도원 운영은 매우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수도원 생활에서는 수도 생활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고, 신학교에는 교사가 없었으며 그 자리를 대신할 사람도 없었다. 시노드 보고서에서는 러시아의 수도 생활이 완전한 소멸 직전에 놓여 있다는 결론을 내렸으며, 이에 시노드는 3년이 아닌 단 6개월의 수련 기간을 거친 후 수도자 서원을 다시 허용해 줄 것을 요청했다. 안나 섭정 여사의 정부는 이 청원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여 이를 승인했다[1049] .

분명히, 정부가 아무런 정당성도, 심지어 합리적인 근거조차 갖지 못한 이러한 교회 정책 하에서 교회 생활은 비통할 정도로 암울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전반적인 정부 정책과 관련하여 러시아 사회의 다른 측면들 역시 마찬가지였으니, 국가와 국민은 완전히 무시당하고 경멸받는 처지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10년 동안 독일인들의 지배가 이어졌다”고 S. 플라토노프는 썼다. “10년 동안 러시아인들은 그들의 가장 고귀한 동정과 감정을 모욕당했다”[1050] .

엘리자베타 여제(1741–1761) 치하에서 교회와 수도계는 마침내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적어도 경건한 여제는 그녀 이전에는 흔했던 조치들에 의존하지는 않았으나, 많은 문제에서 그녀는 아버지 표트르 대제의 노선을 고수했다. 개인적인 경건함 덕분에 그녀는 교회에 대한 불필요한 공격을 자제했으나, 그녀의 교회 정책은 행정 정책의 일반적인 원칙에 따라 결정되었다[1051] . 수도사들에 대한 탄압은 중단되었고, 황후는 국고를 통해 특히 숭배받던 두 수도원인 발라암 수도원과 코네브스키 수도원을 복원하도록 허가했다. 이 두 수도원은 18세기에 실시된 조치들로 인해 완전히 쇠퇴한 상태였다. 그녀는 또한 트로이체-세르기예프 수도원을 ‘라브라’로 명명하도록 지시했다 (1744)로 명명되도록 지시했으며, 많은 수도원이 금전적 지원을 받았다[1052] . 그러나 수도자 서원은 여전히 정부의 통제를 받았으며, 오직 남러시아 교구(마로로시야 수도원)에서만 주교들과 키예프-페체르스크 수도원의 원장만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서원식을 거행할 권한을 가졌다. 1761년, 임종 직전에야 황후는 자유로운 출가를 허용하는 칙령을 반포했다. 그녀의 통치 기간 동안 수도원들은 여전히 전쟁 장애인, 노병, 정신 질환자, 미성년 범죄자들을 위한 보호소 역할을 했다. 1758년에는 이 거주자들을 수도원에서 퇴거시키고, 그들을 위해 별도의 보호소를 건설하되, 이 보호소의 운영 비용을 수도원의 토지 소유지에서 충당하겠다는 계획이 논의되었으나, 이 계획은 종이 위에서만 머물렀다[1053] . 표트르 3세(1761–1762) 치하에서 다시 수도자로의 자유로운 입회가 금지되었는데, 이는 대러시아 교구뿐만 아니라 남러시아 교구에서도 마찬가지였다[1054] .

수도원 생활을 건설하기보다는 오히려 파괴하는 데 더 가까웠던 이러한 일련의 정책의 결과로, 수도 생활은 비참한 상태로 전락했다. 1762년에는 단 7,659명의 수도사와 4,733명의 수녀만이 남아 있었는데, 이는 1740년보다도 적은 수치였다.[1055] 18세기 전반기에 대해서는 수도원의 내부 생활에 대한 이해를 도울 만한 자료가 너무 부족하다. 수많은 칙령과 지시문만으로는 정확한 그림을 그릴 수 없는데, 이는 (특히 안나 여제 치세 시절) 특정 조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편향된 시각을 담고 작성되었음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수도원 생활의 건전화와 활성화를 위해 이러한 탄압은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당시에는 영적 힘도 부족했고, 수도원 생활의 건전화를 위한 올바른 길을 찾을 수 있는 활기차고 재능 있는 인물들도 부족했다. 나중에,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이 방향으로 일정한 노력이 기울여졌으나 무엇보다 수도계는 국가 권력에 의해 단행된 또 하나의 개혁을 겪어야만 했는데, 이 개혁의 필요성은 한편으로는 이미 오래전부터 성숙되어 있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 시행 과정에서 많은 결함이 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개혁은 수도원 생활의 세속화를 부추겼던 가장 중요한 원인을 제거했으므로, 마침내 수도원 내부 생활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을 고려할 수 있게 되었다.

 

3. 1764년의 세속화

1764년의 세속화는 수도원의 토지 소유권 행사를 제한하고, 그로부터 발생하는 수익의 일부를 직접 국고로 납부하도록 하는 개별 조치들의 완결 단계였으나, 소유권은 여전히 수도원에 남아 있었다. 그 원인은 표트르 대제가 명확한 계획을 수립하지 못했고, 그의 후계자들이 미온적인 조치에 그쳤기 때문이다. 수도원 소유지는 정부가 자금이 필요할 때 자원을 조달할 수 있는 원천이 되었다. 주로 피터 대제의 개혁 시행에 따른 지출과, 그 후 수십 년 동안의 부실한 통치로 인해 러시아 경제가 끊임없이 재정적 어려움을 겪자, 정부는 수시로 수도원과 교회의 소유지에서 발생하는 수입을 가로채곤 했다. 이는 그야말로 약탈이나 다름없었다. 수도원 당국은 어떠한 경제적 개선에도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게 되었다. 그들이 이를 추진할 수는 있었지만, 정부는 당장의 이익에만 몰두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개선이 결실을 맺을 때까지 기다리려 하지 않았다. 수도원 영지의 수입은 다양한 목적과 여러 기관에 의해 사용되었으며, 정부조차도 그 분배에 대해 명확한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 영지들에 대한 감독과 관리는 끊임없이 새로운 개편을 거듭했는데, 이 또한 사정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1701년 1월 24일, 수도원 관리국에 수도원 소유지에 대한 감독권이 이관되었을 때, 이 기관은 칙령에 명시된 바와 같이 이전의 총대주교관, 교구 및 수도원 소유지를 포함한 모든 교회 소유지에 대한 통제권도 동시에 부여받았다. 그러나 수도원 관리국은 자신의 권한 범위에 대한 정확한 지침을 받지 못했다. 이 기관은 약 20년 동안 존속했으나, 그 기간 동안 명확한 조직 구조를 갖추지 못했다. 이 기관의 임무는 감독, 수입 징수(이 수입은 표트르 대제의 지시에 따라 사용해야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토지 조사[1056] 를 실시하는 것이었다. 이 조사는 거의 10년 동안 진행되었으며, 그 결과는 ‘1710년 명부’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 부분적으로만 보존되어 있다. 1701년 12월 30일자 칙령과 이를 보완하는 이후의 몇몇 칙령[1057] 을 통해 볼 때, 표트르는 처음에 수도원 소유지에서 발생하는 수입의 사용에 관해 어느 정도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중 일부는 수도원 운영에, 나머지는 다양한 계몽 및 자선 목적에 할당되었다.

따라서 수도원 관리국에서는 두 가지 수입 범주를 구분하기 시작했는데, 하나는 교회 기관(수도원 포함)의 유지에 쓰이는 ‘지정 수입’이고, 다른 하나는 피터 대제가 지정한 계몽 및 자선 목적을 위해 국고에 귀속되는 ‘비지정 수입’이었다[1058] . 토지가 너무 적었던 수도원은 조세에서 면제되었으며, 이 두 범주 중 어느 쪽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1701년 한 수도사의 유지비는 연간 10루블과 곡물 10체베르트로 정해졌으나, 이후 ‘1710년 규정’에 따라 이에 따라 감축되었고, 마침내 1724년에는 연간 6루블과 곡물 5첼베트로 조정되었으며, 원장 및 수도사들에게는 소액의 추가 수당이 지급되었다[1059] . 그러나 이 외에도, 특히 북방 전쟁 기간 동안 수도원 경제를 비롯한 여러 사항에 관한 전혀 예상치 못한 차르의 명령이 매우 빈번하게 내려졌다. 차르에게 기병대를 위한 말이 필요하면 서부 우예즈드의 수도원들이 말을 공급해야 했고, 드라군 기병대의 말에게 건초가 필요하면 수도원들은 즉시 건초 공급을 책임져야 했다 ; 해외에서 초빙된 담배 재배 전문가(담배 장인)들에게 숙소와 식사가 필요하면, 수도원들이 이를 책임져야 했다[1060] . 수도원 소유지에서 발생하는 수입의 일부를 자선 목적으로 사용하려는 표트르 대제의 초기 계획은 전쟁 수행에 드는 비용으로 인해 실현 불가능해졌으며, 현금 및 현물 수입은 주로 군사적 필요와 국고의 기타 예정되지 않은 지출에 사용되었다[1061] . 일부 수도원 소유지는 프레오브라젠스키(Preobrazhensky)나 우편(Postal)과 같은 별도의 관리국에 소속되었고, 다른 일부는 공장에 배속되었다. 이러한 소유지에서 발생하는 수입을 늘리기 위해 수도원 관리국은 임차인들이 추가 임대료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계약을 체결하는 데 동의할 경우, 해당 토지를 민간인에게 임대했다. 심지어 이전 소유주, 즉 교회 기관들조차도 해당 계약을 체결할 의향이 있다면 이 땅을 임차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한 현상은 1710년 이후 가장 흔한 일이 되었으며, 동시에 수도원 관리국의 중요성과 활동 규모는 점차 사라져 갔다. 이러한 과정은 1720년 8월 17일 칙령으로 마무리되었으며, 이에 따라 수도원 관리국은 폐지되었다. 1720년 10월 16일 칙령에 따라 영지들은 이전 소유주들에게 반환되었고, 그 관리 권한은 다시 수도원 원장들에게 위임되었다. 오직 이전에 수도원 관리국이 정해 놓은 공제금만 수도원들이 계속 납부했을 뿐이며, 수도원 소유지에서 발생하는 수입의 징수는 이제 카메르 콜레기아(재정 기관)[1062] 가 담당하게 되었다.

표트르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법적 측면이 아니라 실질적인 측면이었으며, 즉 누가 영지의 소유주인지, 혹은 국가와 교회 중 어느 쪽을 소유주로 간주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에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는 『영적 규정』에서 이 문제에 거의 주목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이 문제는 그곳에서 단지 가장 일반적인 개요만 언급될 뿐이다: ““성직자 위원회는 누가 어떻게 교회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지, 그리고 곡식과 수익금(금전인 경우)이 어디에, 무엇에 사용되는지를 검토해야 한다. 또한 누군가 교회 재산을 도둑질하여 빼앗는다면, 성직자 위원회는 그 자를 추적하여 빼앗은 재산을 회수해야 한다” (제3부, § 9). 시노드가 누가 교회 소유지를 관리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만 했던 것은 분명하며, 특히 1720년 10월 16일 칙령 이후에는 더욱 그러했다. 이 문제는 이미 1721년 2월 14일 시노드 첫 회의에서 논의되었으며, 차르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질의가 제출되었다: “영지들은… 시민 관리들 때문에 황폐해지고 텅 비게 되었으므로, 신학위원회가 충성심뿐만 아니라 다른 위원회들에 맞서 차르 폐하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도 결코 뒤지지 않겠다고 선서한 바와 같이, 신학위원회가 이를 관장해야 할까요? 또한 『종교 규정』에는 그러한 관리가 종교 위원회의 소관 사항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이는 앞서 인용된 조항에 대한 상당히 자유로운 해석이었으나, 차르는 “그대로 하라”는 결정을 내렸고, 영지들은 다시 교회 기관의 관리 하에 돌아갔다[1063] .

시노드가 이 영지들의 재정 상황과 수익 징수 체계를 철저히 검토한 후, 다시 수도원 관리국을 설립하되 이번에는 시노드 자체의 관리 기관으로 두기로 결정했다. 1721년 3월 10일 시노드의 청원에 대한 응답으로, 표트르는 수도원 관리국을 다시 설립하도록 명령했으나, 이번에는 시노드 산하에 두도록 했다. 시노드는 수도원 관리국을 통해 수입을 징수하여 재무위원회(Камер-коллегия)에 이관하도록 지시받았다[1064] . 시노드 수도원 관리국은 1724년 12월 14일 시노드 행정 카메르 콘토르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이 명칭으로 1726년 9월 29일까지 존속하다가 다시 한 번 시노드 행정 경제 위원회로 개칭되었다. 이 위원회는 1738년 4월 15일까지 존속하다가, 안나 황후의 칙령에 따라 시노드의 관할에서 제외되어 상원의 관할로 이관되었다. 이날부터 모든 교회 소유지는 정부 기관의 관할로 넘어갔다[1065] .

이 기간 동안 시노달 수도원 관리국과 카메르-콘토라의 활동은 전적으로 영지로부터의 수입을 징수하여 국고로 이관하는 데 국한되었다. 이러한 초기에는 순전히 행정적인 조치들이 보여주듯이, 정부는 점차 교회 재산, 특히 수도원 소유 토지를 국가 자산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기울어졌으나, 이 입장이 국가 법률의 효력을 갖기까지는 아직 수십 년이 더 지나야 했다.

이미 표트르 대제의 통치 말기에는 ‘지정된’ 영지로부터의 수입이 전적으로 국가적 필요에 사용되었다[1066] . 수도원 유지 비용을 줄이고 ‘지정된’ 영지에서 발생하는 수입의 일부를 확보하기 위한 중요한 조치로, 1724년의 칙령이 있었다. 이 칙령은 수도원 정원을 편성하도록 명령한 것으로, 우리가 여러 번 인용한 유명한 칙령이며, 여기에는 수도 생활과 수도자들에 대한 표트르 대제의 태도가 특히 충실히 드러나 있다. 그러나 이 칙령은 이념적 의미보다는 실용적인 의미를 더 많이 지녔는데, 즉 수도사의 수를 줄여 교회 운영 비용을 절감하려는 것이었다. 1724년 5월 22일, 시노드는 표트르 대제의 개별적인 지시에 근거하여 이른바 ‘1724년 정원표’를 마련했으나, 한동안 이 조치는 시행되지 못했는데, 이는 황제의 사망[1067] 으로 인해 차질을 빚었기 때문이다. 1726년 시노드 행정부의 경제 위원회는 이제 모든 업무가 성직자가 아닌 세속 관료들에 의해 처리되었으며, 사실상 시노드의 관할에서 벗어나 중요한 사안이 있을 때는 상원에 상의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는데, 1724년 정원을 승인하지 않고 예카테리나 1세 황후(1725–1727)에게 이를 시행하지 말아 달라는 청원을 제출했으며, 황후는 이에 동의했다[1068] . 1724년 정원이 승인되지 않은 결과, 최고 권력 기관들은 수도원 소유지에 대한 문제를 논의 대상으로 삼게 되었다. 최고 비밀 의회와 상원은 모든 것을 기존대로 유지하고 1724년 정원을 도입하지 않기로 결정했는데, 이는 어떤 의미에서 시노드의 승리로 볼 수 있었다. 왜냐하면 경제 위원회는 여전히 시노드의 산하 기관으로 기능하고 있었으며, 이는 어느 정도 시노드가 위원회의 업무 수행에 미치는 영향력을 유지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이후 1727년 2월 6일 칙령을 통해 재확인되었다.[1069]

비록 공식적으로는 경제위원회가 시노드에 보고하는 기관으로 남아 있었지만, 안나 여제 치하에서 1733년 3월 17일 칙령에 따라 시노드가 아닌 상원에 보고서를 제출할 의무가 부과되었으며, 시노드는 상원을 통해 해당 보고서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1070] . 이러한 비교적 복잡한 관료적 보고 체계는 1738년 4월 15일 칙령에 의해 폐지되었으며, 이때 수도원 소유지에 관한 문제는 시노드의 관할권에서 최종적으로 제외되었다[1071] .

1738년 4월부터 1744년 7월 15일까지 경제위원회는 전적으로 상원의 지휘를 받았다. 이 위원회는 이제 1677년 이전과 1701년 이후에 전 수도원 관리국이 가졌던 모든 권한을 부여받았다[1072] . 교회와 수도원 소유지들에게는 이 시기가 가장 힘든 시기였다. 시노드에게는 특히 1739년 1월 2일자 칙령이 불쾌했다. 이전에는 『영적 규정 보충안』에 따라 사망한 주교와 수도원장들의 개인 재산과 자금은 시노드의 소유로 넘어갔으나, 이제는 모든 유산을 지체 없이 경제위원회(Коллегия экономии)의 처분권 하에 넘겨야 하며, 여왕 폐하의 칙령 없이는 그곳에서 반출할 수 없도록 하는 규정이 도입되었다[1073] . 영지들은 수입을 초과하는 세금이 부과된 탓에 황폐해졌으며, 게다가 이러한 세금은 비론이 설립한 말 사육장의 운영비 등을 이유로 수시로 인상되곤 했다. 수많은 영지에는 체납금이 기록되어 있었고, 지정된 영지와 미지정 영지 모두의 상황은 똑같이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 안나 여제 치하에서 설립된 체납세 징수국은 체납된 세금을 강제로 징수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수도원 영지의 금고와 곡물 창고가 텅 비어 있다면, 수도원 농민들은 말 그대로 약탈을 당했다[1074] .

엘리자베타 여제 치세에 다시 한 번 완화 조치와 변화가 시작되었다. 그녀가 즉위한 직후(1741년), 시노드는 교회의 상황에 관한 서한을 여제에게 보내며, 경제위원회를 무능하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불과 3년 후인 1744년 7월 15일, 황후는 경제위원회를 폐지하고 교회 및 수도원 소유지의 관리권을 다시 시노드에 이관하도록 명령했다. 이를 위해 시노드 내에는 시노드 경제 관리국[1075] 이 설립되었다. 이 사무국을 관리하기 위해 시노드는 두 명의 아르히만드리트와 한 명의 이구멘을 임명했다. 그러나 이러한 행정 개혁은 수도원 영지의 경제적 상황 개선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다. 여전히 영지의 수입을 초과하는 세금이 부과되었고, 이 영지의 농민들은 안나 여제의 통치 기간 동안 완전히 파산한 상태였다. 새로 임명된 관리들—예전처럼 다시 마을 장로들이었다—는 매우 가혹하게 업무에 착수했다. 사태는 수도원 농민들의 반란[1076] 으로까지 번졌다. 이제 경건한 엘리자베타의 치세 아래 정부가 교회 소유지에 대한 태도를 바꿀 것이라는 시노드의 기대는 실현되지 않았다. 이 영지들의 수입은 이미 오래전부터 국고로 유입되어 왔으며, 국고는 이제 그 수입 없이는 도저히 운영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내면의 경건함과 교회 계층 및 수도자들에 대한 호의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타는 순전히 국가적·경제적 고려로 인해 시노드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1077] . 게다가 그녀는 아버지인 표트르 대제의 견해가 옳다는 점을 확고히 믿고 있었다[1078] . 정부는 교회 소유지에 대한 최종적인 세속화의 필요성을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다. 이를 위한 준비 단계로 1757년 9월 30일 칙령이 발표되었는데, 이에 따라 이 영지의 관리자로는 퇴역 장교들이 임명되었고, 이 영지들은 지주들이 소유한 영지와 동등하게 과세되었으나, 수도원 유지비를 위해 징수되는 세금은 기존 규모를 유지했다[1079] .

엘리자베타의 후계자인 표트르 3세는 같은 방향으로 단호한 조치를 취했다. 1762년 3월 21일자 그의 칙령은 이 영지들의 관리권을 시노드에서 박탈하고, 옛 경제위원회를 다시 설립했다. 상원에 종속된 국가 권력 기관으로서, 이 위원회는 1757년 9월 30일 칙령에서 이미 규정된 바와 같이 퇴역 장교들을 통해 영지를 관리했다.[1080] 1762년 3월 21일 칙령은 재정적 측면도 완전히 새로운 기반으로 정리했다. 이 영지들의 농민들은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부과되는 인두세(남성 1인당) 70 코펙 외에도 추가로 1루블을 납부해야 했다. 그러나 이전에 그들이 교회 및 수도원 영지 소유주를 위해 경작하던 토지는 이제 그들의 개인적 사용권으로 넘어갔다. 이로써 그들은 현물 세금과 강제 노동에서 해방된 국가 농민이 되었다. 루블 세금은 경제위원회로 납부되었다. 수도원과 교구 주교들은 1724년 5월 22일 정원에 근거하여 급여를 받았으며, 이는 오히려 증액되기도 했다[1081] . 이 칙령의 제6조는 매우 특징적이다: 미납 세금 및 농민 봉기와 관련된 지주와 농민 간의 모든 소송은 살인 혐의를 제외하고는 중단되었으며, 관련 재판 기록은 파기되어야 했다. 이는 엘리자베타 여왕 재위 기간 동안 농민들의 소요와 관련된 모든 소송을 단번에 종결시킨 진정한 사면이었다[1082] . 또한 제7조도 흥미로운데, 이에 따르면 영지를 관리하던 장교들은 수입이 증가할 경우 그 증가분의 10%를 보너스로 받았다. 1762년 4월 6일 상원 칙령에 따라 경제위원회를 조직하고, 가능한 한 빨리 수도원 운영을 위한 인원 편성을 완료하도록 명령되었다[1083] .

이 칙령이 교회 지도부 내에서 매우 큰 실망과 불만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다. 모스크바 대주교 티모페이는 저명한 로스토프 대주교 아르세니 마체예비치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Nunc non Vestram Sanctitatem, sed omnes nos dolenda ista tetigit metamorfosis, quae vitam nostram ad gemitus et dolores ducit” [귀하의 성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를 슬프게 하는 이 변화가 우리 삶을 한숨과 고통으로 이끌고 있습니다][1084] . 그러나 사실 이것은 모스크바 대주교가 생각하는 것처럼 변화가 아니라, 약간의 주저함 속에서 진행되었던 엘리자베타의 조치들의 논리적 연장선상에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에 가장 적절한 시기가 왔으나, 어쩌면 먼저 몇 가지 예비 조치를 취했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 칙령은 A. 자브얄로프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불공평’하지는 않았다[1085] .

전반적으로 예카테리나 2세(1762–1796) 여제의 교회 정책이 그녀의 개인적인 종교적 견해의 영향을 받지 않고 시행된 것은 아니었지만[1086] , 1764년의 세속화는 무엇보다도 18세기에 걸쳐 시행된 일련의 조치들의 연장선이자 완결이었다. 예카테리나는 자신을 표트르 대제의 개혁 사업의 계승자라고 칭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이것이 바로 세속화에 대한 그녀의 근본적인 태도를 결정지었다. 그녀의 개인적인 종교적 견해는 개혁이 최단 기간 내에 이루어지도록 기여했다. 이 개혁이 교회 소유지 문제뿐만 아니라 수도원과 수도자의 수 문제까지 다룬 것은, 예카테리나가 수도 생활을 기독교 교회의 제도적 확립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녀의 견해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이미 다른 저작(참조: 각주 1081)에서, 18세기의 이 위대한 황후가 겉으로만 고국의 개신교와 러시아의 그리스 정교라는 두 종교에 속해 있었을 뿐, 내면의 경건함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그녀는 종교적·교회적 문제들을 오로지 국가·정치적 관점에서만 판단했다. 이로 인해 그녀는 아버지를 당황하게 할 뿐만 아니라, 계몽주의 시대의 데이스적 사상에 강한 영향을 받지 않은 한, 자신의 정교회 신하들에게도 충격을 주게 될 운명이었다. 예카테리나 2세의 종교적 견해는 데이스즘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뛰어난 지성과 역사적 통찰력 덕분에 그녀는 자신의 종교적 견해를 국민 대다수에게 강요하는 것을 자제했다. 즉위하기 전부터 예카테리나는 교회 의식의 모든 측면을 얼마나 높이 평가하는지 모두에게 보여주었으며, 그로 인해 황후는 교회 지도부와 백성들의 호감을 점점 더 얻어갔는데, 이는 왕위 계승자이자 훗날 황제가 된 그녀의 남편과는 대조적이었다. 남편은 의식을 소홀히 여겼기 때문에 러시아 백성들에게 낯선 사람, ‘독일인’으로 남아 있었다. 바로 이러한 ‘정교회’ 황제의 러시아 교회 전통에 대한 일탈과, 엘리자베타 여제의 ‘좋은 시절’ 이후 다시금 국가의 교회 문제에 대한 무례한 개입을 드러낸 그의 칙령들이 교회 지도부를 크게 불안하게 만들었다[1087] . 예카테리나는 이러한 심리적 상황을 매우 잘 파악했고, 1762년 6월 28일자 선언문에서 황제 폐위의 원인을 무엇보다도 종교적 차원에서 설명하였다: “러시아 조국의 모든 진정한 아들들에게, 이 사건 자체가 러시아 국가 전체에 어떤 위험을 초래하기 시작했는지가 명백히 드러났으니, 바로 다음과 같다: 우리의 정통 그리스 법은 무엇보다 먼저 그 자체의 동요와 교회 전통의 말살을 예감했으며, 그 결과 우리 그리스 교회는 러시아의 고대 정통교가 변질되고 이교도적인 법이 채택됨으로써 마지막 위기에 처해 있었다”[1088] .

예카테리나는 스스로를 ‘정교 황후’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1089] , 그리고 그녀가 직접 집필한 통치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Catherine ytoit montée sur le trône; elle y avoit été mise pour défendre la foi orthodoxe” [예카테리나는 정교 법을 수호하기 위해 왕좌에 올랐다]. 그녀는 또한 자신을 “chef de l’Eglise grecque” [그리스 교회의 수장] 또는 “chef de son église” [자신의 교회의 수장]이라고 칭하기도 했다[1090] . 그녀는 자신의 활동을 종교적 의무로 간주한다는 점을 기꺼이 강조했으며, 그녀의 세계관에서는 소명에 대한 종교적 태도, 즉 ‘직업(profession)’에 관한 루터교의 사상이 정통 기독교 군주의 기독교적 의무에 대한 관념과 결합되어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교서’의 표어로 선택한 보슈에의 말은 아마도 이러한 그녀의 신념과 관련하여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Seigneur mon Dieu! Sois attentif à ma voix et donne-moi de l’intelligence pour juger Ton peuple selon Ta sainte loi et selon la justice” [오 나의 하나님, 제 목소리를 들으시고, 주님의 거룩한 율법과 정의에 따라 주님의 백성을 심판할 수 있는 지혜를 저에게 주소서][1091] . 이것이 그녀의 종교성의 공식적인 측면이었다. 그러나 예카테리나의 내면적인 종교 생활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분위기가 드러난다. 그녀의 편지와 측근들과의 대화에서는 또 다른 모습이 그려진다. 그녀는 ‘교회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교회 법과 관습은 그녀에게 그저 필요에 불과했으며, 내면의 충동으로 그들에게 의지한 적은 결코 없었다. 공작 M. M. 셰르바토프는 이를 근거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했다. “그녀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만약 그런 믿음이 있었다면, 하나님의 법 그 자체가 그녀의 마음을 바로잡고 그녀의 발걸음을 진리의 길로 인도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 아니다! 그녀는 무의미한 신진 작가들의 저술에 푹 빠져 있다. 기독교의 법(비록 꽤 경건한 척은 하지만)을 전혀 존중하지 않는다”[1092] . 예카테리나의 교회 정책은 그녀가 즉위하기 전부터 했던 다음과 같은 발언으로 가장 잘 설명될 수 있다. “Respecter la religion, mais ne la faire entrer pour rien dans les affaires d’Etat” [신앙을 존중하되, 결코 국가 업무에 개입하게 해서는 안 된다][1093] .

예카테리나가 즉위하자마자 교회와 수도원의 소유지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1762년 7월 16일, 즉 그녀가 즉위한 지 2주 후, 상원은 “성직자들의 청원”에 따라 교회 기관에 재산을 반환하고, 수도원 농민들에게는 1루블의 인두세 외에도 70코펙을 추가로 징수하되, 이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 50코펙은 장애인을 부양하기 위한 국고로, 나머지 50코펙은 수도원 운영비로 할당하도록 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인두세 외에 1루블을 추가로 징수하되, 이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 50코펙은 장애인의 생계를 위해 국고에, 나머지 50코펙은 수도원 농민들이 복귀하게 될 교회 기관에 귀속시키기로 했다; 이 영지들을 관리하는 것은 교회 기관이 임명한 관리인이 아니라 농민들이 선출한 마을 대표들이 맡아야 했다. 이 칙령이 내려진 지 이틀 뒤인 7월 18일, 상원과 시노드의 합동 회의가 열렸는데, 이 자리에서 시노드 위원들의 의견이 엇갈렸으며, 디미트리 세체노프 대주교는 성직자와 정부 대표로 구성된 특별 위원회를 구성하여 교구 주교좌와 수도원의 정원을 마련하고, 영지 수입의 분배 절차를 정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 회의에 대한 보고서를 받은 예카테리나는 아직 이 문제에 대해 명확한 견해를 정하지 못했으며, 1762년 8월 12일자 그녀의 선언문은 아마도 A. P. 베스트주예프 백작과 이 문제를 논의한 후에 발표된 것으로 보인다[1094] . 이 지극히 장황한 칙령[1095] 에는 앞서 언급된 표트르 3세의 칙령들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담겨 있는데, 이는 예카테리나가 표트르가 교회 소유지에 대해 가졌던 태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가 시작한 일을 그의 정신에 따라 이어가려 하지 않았던 선대 군주들의 조치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교회 재산을 우리 것으로 삼을 의도나 소망이 없다”고 선언문은 밝히고 있다.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권위로, 하나님의 영광과 조국의 이익을 위해 그 재산을 더 잘 활용할 수 있는 법을 제정할 뿐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 아래, 우리 가장 사랑하는 할아버지이신 황제 표트르 대제가 따르셨던 교회 규정에 따라 전체 성직자 조직을 완벽하게 정비할 계획이며, 이를 위해 성직자와 세속 인사들로 구성된 특별 위원회를 우리 직속으로 설립할 것이다.” 이어 상원(7월 16일자)의 결의와 시노드의 청원을 인용하여, 이 선언문은 해당 위원회가 아직 업무를 시작하지 않고 결정을 내리지 않은 시점까지 다음과 같이 명령하였다: 1) 소유지를 성직자들에게 반환하고, 2) 경제위원회를 폐지하고 장교들을 관리직에서 배제할 것, 3) 수도원 농민들에게 1루블의 인두세 또는 “지역의 사정과 필요에 따라” 세금을 부과할 것; 농민들을 계속해서 노동에 동원하되, “어떤 과도한 징수나 불필요한 노동으로도 지치게 하지 말 것”을 명시했다.

1762년 11월 29일, 새로운 황제 칙령에 따라 교회 소유지 위원회가 구성되었으며, 위원 중 3명은 교회를, 5명은 정부를 대표했다[1096] . 위원회는 활동을 위해 특별 지침을 받았다. “우리는,” 지침서 말미에 명시된 바와 같이, “교회 소유지가 하나님의 사역, 즉 경건함의 확립과 백성의 이익을 위해 최선의 방식으로 활용되기를 바란다.” 이 선언문의 목표는 훌륭했으나, 안타깝게도 경건함의 증진으로 이어지지도 않았고 백성에게 유익을 주지도 못했다. 이 위원회 설립과 관련하여 정부는 몇 가지 추가 칙령을 더 반포했다.

이미 1763년 1월 8일, 예카테리나의 또 다른 선언문이 발표되었는데, 이를 통해 첫째, 표트르 3세의 칙령과 8월 12일자 선언문이 수도원 농민들에게 혼란을 야기하고 추가 인두세를 납부하기를 꺼리게 만들었으며, 둘째, 성직자들이 자신들의 손으로 되돌아온 영지 관리에 지나치게 열성적으로 임한 탓에, 마지막 칙령에서는 농민들을 “질서 정연하게”[1097] “관리”하라는 권고가 제시되었다. 1763년 5월 12일, 예카테리나는 성직 영지 경제 위원회[1098] 를 설립했다. 경제 관리 위원회는 세속 관료들로 구성되었으며 황후와 상원에 직속되었고, 오로지 순수한 종교적 사안에 대해서만 시노드에 상의해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1764년 2월 26일, 1503년부터 이어져 온 교회와 국가 간의 수세기에 걸친 분쟁에 종지부를 찍은 유명한 교회 소유지에 관한 칙령이 반포되었다[1099] .

이 법률의 가장 중요한 조항은 다음과 같았다. 1. 시노드, 교구 주교좌, 수도원 및 본당의 모든 영지는 최종적으로 경제위원회로 이관되었다. 모든 교회 기관은 이 영지들의 관리에서 배제되었다. 이 영지들에 거주하던 농민들은 1760년 인구 조사 기준 910,866명의 조사 대상자(즉, 남성만 집계된 수치이며, 여기에 가족 구성원을 더해야 함)로 집계되었으며, 이들은 경제 위원회의 관할로 이관되었고, 이후부터는 ‘경제 농민’으로 불리게 되었다. 2. 1764년 1월 1일부터 농민들은 강제 노동(바르신)과 각종 조세 대신 1인당 1.5루블의 인두세(подушный оклад)를 납부해야 했으며, 이 세금은 경제위원회( )를 통해 국고로 들어갔다. 3. 이전에 토지를 소유했던 교구 본당, 수도원, 본당 교회 등 교회 기관의 운영을 위해 경제위원회( )는 일정 금액을 배정해야 했다. 4. 교구는 세 등급으로 나뉘었으며, 각 교구에 대한 지원금은 등급에 따라 책정되었다. 5. 수도원(초기에는 키예프 대주교에게 소속된 곳을 제외한 대러시아 지역 수도원만 해당)의 경우, 수도원 정원표[1100] 가 작성되었다.

수도원 명부는 우리에게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하다. 첫째, 이 명부에는 해당 명부에 따라 매년 운영비를 지원받던 수도원의 수가 명시되어 있다. 둘째, 명부에 등재된 수도원들은 세 등급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러시아 수도 생활의 후기 역사에서 첫 번째 요소는 두 번째 요소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드러났다. 수도원의 수는 매우 크게 축소되었는데, 즉 많은 수도원이 아예 폐쇄되거나 다른 수도원과 합병되었지만, 명단에 포함되지 않은 일부 수도원, 이른바 ‘명단 외 수도원’은 보존이 허용되었다. 이 두 부류의 수도원의 미래 운명은 재정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특히 중요한 점은 내부적인 영적 발전 측면에서도 달랐다. 이렇게 하여 수도원뿐만 아니라 수도사들, 수도 생활의 양상, 그리고 금욕적 수행의 길에서도 두 가지 서로 다른 유형이 등장하게 되었다. 수도 생활의 기초였던 수도원 규율은 오랫동안 그 중요성을 상실했다.

1700~1701년 러시아에는 1,201개의 수도원이 있었으며, 그중 965개는 남성 수도원, 236개는 여성 수도원이었다[1101] . 1721년 1월 21일, 표트르 대제는 일부 수도원을 폐쇄하고, 수도자 수가 적은 다른 수도원들은 더 큰 수도원으로 통합하며, 수도사 수를 감축하도록 명령했다. 『공고』(1724)에도 수도사 수를 줄이라는 지침이 포함되어 있다. 『영적 규정』(§ 46, 수도사에 관하여)은 한 수도원의 수도사 수가 30명을 초과하지 않도록 권고했다. 18세기 1764년까지 관련 조치가 시행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 총 175개 수도원(남자 수도원 141개, 여자 수도원 34개)이 폐쇄되거나 통합을 통해 규모가 축소되었으나, 동시에 1700~1744년 사이에 33개의 새로운 남자 수도원과 4개의 여자 수도원이 설립되었다[1102] . 이러한 자료는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데, 이는 시노드와 그 산하 기관들이 영지를 통해 운영비를 지원받던 소위 ‘정식 등록된’ 수도원에 대한 정보만을 입수했기 때문이다. 영지를 소유하지 않고 ‘비정식’ 또는 ‘소규모 수도원’에 속했던 작은 수도원들은 종종 사라졌으나, 시노드는 이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1738–1741년에는 유지비를 지원받던 수도원이 624개에 달했다[1103] .

1764년 2월 26일자 법령에 따라 수도원 정원에 다음과 같이 편입되었다:

1급 2급 3급 합계

라브라(알렉산드로-네프스카야 및 트로이체-세르기예바) 2 – 2

남자 수도원 15 41 100 156

여성 수도원 4 18 45 67

이들이 경제위원회로부터 받아야 할 지원금은 다음과 같은 금액(루블 기준)으로 정해졌다:

1등급 2등급 3등급 합계

라브라(알렉산드로-네브스카야 및 트로이체-세르기예바)[1104] 2 10070 – - 2

남자 수도원 15 2017.5 41 1311.9 100806.3 156

여성 수도원 4 2009,[1105] 18475,8 375,6 67 225 207750,4

1762년 1월 1일자 시노드 보고서[1106] 에 따르면, 모든 교구에는 영지를 소유한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을 포함해 총 954개의 수도원이 있었으며, 수도자는 11,153명[1107] 이었다. 1764년 세속화 이후 시노드는 418개의 수도원을 폐지하기로 결정했다. 536개의 수도원이 남았는데, 그중 226개는 국가로부터 지원금을 받았고, 나머지 310개 수도원은 백성들의 자발적인 헌금으로 운영되어야 했다[1108] . 이렇게 하여 두 가지 유형의 수도원, 즉 ‘국가 지원 수도원’과 ‘비국가 지원 수도원’이 생겨났다. 1764년 3월 31일, 비국영 수도원도 3등급으로 분류하라는 추가 명령이 내려졌다. 1등급 20개, 2등급 56개, 3등급 85개로, 총 161개 수도원에 1,247명의 수도사가 소속되어 있었다; 이 수도원들은 백성들의 자발적인 헌금이나, 수도원 근처에 위치한 무인지를 수도사들이 직접 경작하여 얻은 수익으로 운영되어야 했다. 나머지 149개의 수도원 역시 폐쇄 대상이었다. 따라서 정규 수도원 226개와 비정규 수도원 161개, 총 387개의 수도원이 남게 되었다[1109] .

1764년의 세속화 개혁은 대러시아의 수도원들만을 대상으로 했으며; 22년 후인 1786년에는 키예프, 체르니히우, 노브고로드-세베르스크 주에서, 1788년에는 하르키우, 예카테리노슬라프, 쿠르스크, 보로네즈 주에서 유사한 조치가 시행되었다[1110] .

정원으로 정해진 수도원의 운영비는 실제로는 너무 적었다. 이 금액은 수도사들에게 간신히 충분할 정도였으며, 수도원 건물은 해가 갈수록 노후화되고 무너져 갔으나, 원장들은 이 경우 수도원이 폐지될까 두려워 시노드에 이를 보고하지 않았다. 수도원의 재정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원장들은 정원에 규정된 수도사 수를 줄이려고 애썼다. 그 결과, 가장 큰 수도원을 제외한 모든 곳에서 수도사 수는 곧 정원에 규정된 수보다 적어지게 되었다. 이미 1771년에 수도원에는 527개의 공석이 있었다[1111] .

이것이 1764년 세속화 직후 수도원들의 외적 상황과 수도원 생활의 실태였다. 수도원과 수도 생활은 역사상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었다. 상황은 어려웠지만, 교회 지도부와 수도사들은 스스로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할 방법을 모색해야 했으며, 이제 수도원들이 빈곤해진 상황에서 순수한 금욕주의적 기초 위에 수도 생활을 개혁할 수 있게 되었다.

 

 

제14장. 1764년 세속화부터 20세기 초까지의 수도 생활

 

1. 수도 생활의 외부적 역사

1764년의 교회 소유지 세속화는 러시아 정교회에서 수도 생활에 완전히 새로운 조건을 만들어 냈다. 겉보기에는 세속화가 수도 생활에 미치는 세속적인 영향에 종지부를 찍어야 했을 것 같았다. 총회와 교구 주교들은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여 수도원 생활의 개혁 방안을 마련하거나, 적어도 이를 개선하기 위한 실효성 있는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그러나 아무런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고, 이 주제는 아예 진지하게 논의되지도 않았다. 세속화가 이루어진 지 20~30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일부 주교들이(그것도 개인적인 주도로) 수도원 생활을 어떻게든 개선하려는 시도를 볼 수 있었지만, 이는 세속화 과정이 수도 생활 속으로 점점 더 깊이 스며들고 있던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이는 제한적이고 지역적인 성격을 띤 단발적인 사례에 불과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시도들 뒤에 잘 고안된 개혁 프로그램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나중에 보게 되겠지만, 이러한 시도들은 개별 수도원의 삶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러한 개선 조치의 긍정적인 결과가 나타났을 때조차, 시노드는 유리한 기회를 활용하지 않았다. 시노드 측은 미온적인 조치만을 취하거나, 비록 직접적인 대응 조치는 아니었더라도 수도원 생활에서 이미 이루어진 개선의 효과를 약화시키는 부정적인 성격의 조치들을 시행했다.

1764년 세속화 정책이 시행될 당시, 교회 내에서는 이 개혁에 대해 두 가지 상반된 태도가 형성되었다. 한 가지 관점은 국가가 교회 재산을 세속화할 권리를 원칙적으로 부정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순전히 실용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는데, 즉 세속화가 교회와 그 기관들에 미칠 결과에 대한 고찰, 그 부정적 측면과 긍정적 측면을 저울질하는 것, 그리고 새로운 상황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이러한 기관들의 운영 체계를 정비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우리의 연구에서 알 수 있듯이, 교회는 과거에 국가의 그러한 행위에 대한 권리를 결코 인정하지 않았으며, 세속화 이후에도 국가에 의해 약탈당했다고 여겼습니다. 비록 국가가 몰수한 재산 대신 국고에서 교회에 유지비를 지급했으나, 물론 몰수된 재산에서 얻던 수입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그래도 적지 않은 금액이었으며, 본질적으로 교회를 절망적인 처지에 빠뜨린 것은 결코 아니었고, 게다가 이후 이 지원금은 우리가 보게 될 것처럼 증액되기도 했다. 세속화는 표트르 대제 치하에서 도입된 국가 교회 제도의 논리적 결과였으며, 이는 예카테리나 시대에 최종적으로 정착되었다. 예카테리나 치하에서 절대주의적 황제 권력이 강화됨에 따라, 국가 교회 제도에 대항하는 교회의 모든 투쟁은 희망이 없어졌다. 따라서 교회는 세속화의 실질적인 측면을 고려하여 새로운 처지에 적응해야만 했다. 예카테리나 개혁의 이러한 측면을 고려하는 것은 특히 수도자들에게 중요했는데, 새로운 상황을 인정함으로써 그들은 수도원 내부의 생활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에 착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도계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교회가 실제로 교회 소유지에 대한 권리를 회복하는 데 모든 힘을 쏟았다면, 이를 정당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교회 지도자들은 은밀히 세속화를 일종의 교회에 대한 약탈로 간주했으나, 겉으로 드러난 반대는 로스토프 대주교 아르세니 마체예비치의 유명한 연설에서만 나타났을 뿐이며, 그는 교회 지도부와 수도계 내에서 명백한 지지를 얻지 못했다. 어쩌면 이는 세속화의 경제적 여파가 교계와 수도자들의 모든 관심을 끌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수도계는 명백하고 실효성 있는 반대를 드러내지 않았다. 18세기의 모든 정부 조치들 이후, 수도계는 이를 위해 너무나 기력이 쇠약해지고 내부적으로 짓눌려 있었으며, 세속화에 반대하거나 공개적으로 반대 입장을 표명할 만큼 교회 생활에 미치는 영향력을 거의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르세니 마체예비치는 18세기의 주교들 중에서도 남부 러시아, 즉 마로로시아 출신으로, 표트르 대제 시대에 러시아 교회 내에서 점점 더 큰 영향력을 얻어가던 인물 중 하나였다; 대러시아 주교단을 신뢰하지 않았던 차르는 남러시아 성직 계급의 대표자들에게 호의를 보였으며, 기꺼이 그들을 주교좌에 임명했다[1112] . 아르세니는 1697년 볼리니 지역의 블라디미르-볼린스키 시에서 교구 사제의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처음에는 폴란드에서 공부하다가 1715년에는 이미 키예프 신학 아카데미의 학생이 되었으나, 1년 후 수도원에 입회하기 위해 그곳을 떠났다; 수도원에서 아르세니는 2년을 보낸 뒤, 학업을 마칠 목적으로 다시 아카데미로 돌아왔다. 1723년에 그는 수도사이자 아카데미 교회 설교자가 되었다. 그 후 그는 2~3년(1728–1730) 동안 수도원에서 지냈고, 1730년에는 시베리아 토볼스크로 교구 설교자로 파견되었다. 그는 그곳에 오래 머물지 않았고, 솔로베츠키 수도원에서 잠시 머문 뒤 1734년 영성 지도자로서 캄차카 반도로 향하는 탐험대에 합류했다. 질병으로 인해 아르세니는 러시아로 돌아와 한동안 볼고그 주교 관저에서 지냈으며, 1738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수도사이자 교리 교사로 봉사했다. 전혀 예상치 못하게 1741년 3월 26일, 그는 토볼스크 대주교로 서품되었으나, 토볼스크에서는 오래 사역하지 않았고, 1742년에 유서 깊은 로스토프 교구로 승진했다. 이곳에서 그는 뛰어난 설교자이자 권위 있는 교구 주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아르세니는 성격이 매우 강인하고 고집이 세며 지나치게 예민한 사람이었다. 그의 교회·정치적 견해는 그 성격상 표트르 대제에게 강한 불신을 불러일으켰을 정도였다. 아르세니는 러시아의 ‘ ’ 시대에 국가와 교회 간의 새로운 관계에 원칙적인 반대자였으며, 표트르 시대의 국가 주도적 교회 정책에 대해 극도로 부정적인 태도와 비난을 보였습니다. 표트르 3세가 교회 소유지에 관한 칙령을 발표했을 때조차 아르세니는 황제의 칙령에 가장 크게 불만을 품은 성직자 계층의 선두에 섰습니다. 예카테리나 치하에서 1762년 8월 12일과 11월 29일자 칙령을 이행하기 위해 교회 및 수도원 소유지에 대한 실태 조사를 실시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을 때, 아르세니는 이러한 조치에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그는 시노드에 두 건의 ‘보고서’[1113] 를 제출하여, 11월 29일자 칙령을 매우 신랄하게 비난했다. 그는 교회 재산은 불가침하다는 입장을 고수했으며, 타타르의 이교도 칸들조차 교회 소유지를 빼앗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는 점을 예로 들었다; 아르세니는 국가가 교회 기관의 경제 문제에 개입하거나 그 소유지에서 발생하는 수입을 국가적 목적으로 사용할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표트르 대제가 도입한 교구 주교좌와 수도원의 정원을 매우 부정적으로 보았다. 만약 일이 계속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면, 아르세니는 러시아 제국이 개신교 국가로, 혹은 더 나쁘게는 무신론 국가로 변모할 것이며, 주교단과 수도계는 완전히 쇠퇴하고, 교회와 경건함은 거의 소멸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노드는 로스토프 대주교의 ‘보고서’를 황후에게 제출하기로 결정했다. 황후는 이 글들의 내용과 어조에 분노하며, 그 속에서 자신에 대한 개인적인 모욕을 느꼈고, 시노드에 명령하여, 황제의 위엄에 대한 모독, 반란적인 기조, 그리고 국민의 복지에 적대적인 견해를 이유로 아르세니에게서 주교 직위를 박탈하고 북쪽의 외딴 수도원으로 유배시키도록 했다. 1767년에 아르세니가 자신의 견해를 바꾸지 않았고 자신을 부당하게 유죄 판결을 받은 것으로 여기며, 백성들 사이에서는 진리를 위한 순교자로 숭배받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 게다가 황후에게 보고된 바에 따르면, 그는 대화 중에 황후의 즉위 과정과 표트르 3세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해 암시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기 때문에, – 예카테리나는 아르세니를 다시 재판에 회부할 것을 요구했다. 이번에는 그에게 수도사 자격을 박탈하고 레벨 요새에 유폐했다. 아르세니는 감옥에서 5년을 더 보냈으며, 명부에는 ‘범죄자 안드레이 브랄’이라는 이름으로 등재되었다. 그는 아주 좁은 감방에 갇혀 있다가 1772년에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1114] 요새 사령관에게 보낸 편지에서 예카테리나는 아르세니를 “사기꾼이자 위선자”라고 불렀다[1115] . 물론 이는 수감자의 성격과는 전혀 맞지 않는 평가였는데, 위선적인 행동을 한 것은 바로 그녀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마체예비치의 운명은 앞으로도 예카테리나 자신은 물론 그녀의 교회 정책에도 영원히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울 것이다.

로스토프 대주교의 비극적인 운명은 교회 지도부에 강렬하고 소름 끼치는 인상을 남겼으며, 그들로 하여금 세속화 과정을 묵묵히 지켜보게 만들었다. 오직 토볼스크 대주교 파벨 코뉴스케비치(1758–1768)만이 자신의 교구 내 수도원 폐쇄에 항의했으나, 소용이 없었다[1116] . 수도자들도 공개적인 항의를 감히 하지 못했다[1117] .

1764년의 세속화로 인해 조성된 상황은 변함없이 유지되지는 않았다. 비록 사실상의 교회 소유지는 사라졌지만, 법적으로는 국가가 교회 기관의 토지 소유권을 폐지하지 않았으며, 이후 100년 동안 국가 법률은 교회 소유 토지에 대해 다양한 특혜를 부여했다. 19세기 개별 수도원의 토지 면적은 16~17세기의 규모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수도원들은 여전히 토지 매입을 꽤 성공적으로 진행했다. 일부 수도원은 19세기에도 부를 축적했다. 게다가 개별 수도원들은 금전적 기부와 보석류 기증 덕분에 상당한 부를 누리게 되었다. 16세기와 마찬가지로, 19세기에도 많은 수도원이 막대한 자본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원장들은 수도원의 번영을 위해 이를 매우 능숙하게 활용했다.

세속화도 수도원 수의 증가를 막지는 못했다. 1764–1917년 동안 많은 수도원이 폐지되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수도원들도 설립되었다. 1701년부터 19세기 중반까지, 1764년 세속화 전후를 통틀어 총 822개의 수도원이 폐쇄되었다[1118] .

폐쇄된 수도원 (시베리아 제외) 남성 수도원 여성 수도원 총계

18세기 초부터 1764년까지 141 34 175

1764년 세속화 당시 471 118 589

1764년 이후 ~ 18세기 말 35 8 43

19세기 전반 13 2 15

합계 660 162 822

재개 (시베리아 제외) 남성 여성 합계

18세기 18 4 22

19세기 15 2 17

총계 33 6 39 33 6 39

세속화 이후에도 226개의 정규 수도원과 161개의 비정규 수도원이 남아 있었으며, 총 387개(대러시아)였다. 19세기 초, 남부 러시아와 벨라루스에서 40개의 수도원이 폐쇄되었을 때, 제국 전역에는 단 452개의 수도원만 남아 있었다. 19세기의 수도원 수 증가 추세는 다음과 같다:

연도 남성 수도원 여성 수도원 합계

1810 358 94 452

1825 377 99 476

1836 360 101 461

1855 415 129 544

1887 469 202 671

1893 507 235 742

1907 522 448 970

1914 550 475 1025

이때 주목할 점은 남성 수도원의 수가 주로 폐지되었던 옛 수도원의 재개에 힘입어 증가했다는 사실이며, 여성 수도원은 새로 설립되거나 수녀 공동체가 수도원으로 전환된 경우였다(이에 대해서는 제14장 4항 참조). 이처럼 19세기 동안 수도원의 수는 두 배 이상 증가했으며(여성 수도원의 수는 94개에서 475개로 늘어났다). 1764년 제국 전역에 약 1,070개의 수도원이 있었으나, 1914년에는 그 수가 더욱 늘어[1119] 에 달했다.

이러한 수도원 수의 증가는 1764년 이후 수도원과 관련된 많은 새로운 칙령이 반포되어 1764년의 법규를 근본적으로 변경한 사실에 힘입은 바가 컸다. 이미 예카테리나 치세 때에도 최고 권력의 승인과 허가를 받아 새로운 수도원을 설립하거나 기존 수도원을 재개하는 것이 허용되었다[1120] . 예카테리나의 아들인 파벨 1세 황제(1796–1801)는 부분적으로는 수도 생활에 대한 호의 때문이었고, 부분적으로는 어머니의 모든 처분에 대한 반대 때문이었기에 1764년의 법령을 상당히 완화시켰다. 1797년에 수도원들은 자신들이 보유한 미개간 토지(텃밭, 건초밭, 일부 방목지)를 최대 30데시아틴까지 확대할 수 있게 되었으며; 수도원들은 수도원 건물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이전에는 15 베르스트 이내)에 제분소와 양어용 연못을 조성할 권리를 얻었다[1121] . 동시에 수도원의 정규 유지비가 변경되었고, 수도사들의 생활비 지급액이 인상되었다; 비정규 수도원들도 국가 금고로부터 매년 300루블을 받게 되었다[1122] . 1805년 6월 8일 칙령에 따라, 이미 알렉산드르 1세(1801–1825) 치하에서 수도원들은 토지가 필요한 경우 기증이나 유언을 통해 무인 토지를 취득할 수 있게 되었으나, 토지 매입에는 최고 권력의 허가가 필요했다. 수도원들에게 매우 중요했던 것은 또한 특정 범주의 토지에 대한 토지세 면제 조치였으며, 이는 이후 1857년 법전(Svod zakonov)에서 재확인되었고, 일부 변경을 거쳐 1917년까지 법률 형태로 유효하게 유지되었다.[1123] 같은 정책은 니콜라이 1세(1825–1855) 치세에도 이어졌으며, 1797년의 칙령은 단순히 재확인된 것(1835년)에 그치지 않고, 개별 사례에서는 토지 취득 조건이 더욱 유리해졌다: 매우 자주 최고 권력의 허가를 받아 교구 주교좌와 수도원들이 최대 300 데시아틴 규모의 무인 토지를 취득하기도 했다. 오직 거주지가 있는 토지에 대해서만 정부는 1764년 법령의 입장을 확고히 고수했다. 1841년, 서부 주에 위치한 수도원들로부터 당시까지 여전히 보유 중이던 그러한 영지들이 몰수되었으며, 해당 수도원들을 위해 1842년 특별 정원이 편성되었다.[1124]

1836–1861년 동안 여러 수도원은 국영 산림청으로부터 경작지 9,000 데시틴과 산림 16,000 데시틴을 매입했으며, 이러한 종류의 매입은 19세기 70–80년대에도 드물지 않았다.[1125] 1861년 새로운 정원에 따른 수도원 지원금은 연간 168~200루블 증액되었다[1126] . 1867년에는 비정규 수도원에 대해서만 국가 현금 지원금 지급이 중단되었다[1127] . 1881년 정규 수도원들은 국고로부터 최대 425,000루블을 받았다.[1128]

19세기 수도원의 재정 상황은 지속적으로 개선되었다. 수도원들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 특히 니콜라이 1세 치하에서 급속히 부를 축적하여 수백만 루블의 자본을 확보한 상인들로부터 막대한 기부금을 받았다. 수도원들은 돈과 귀중품(성화, 종, 예복 등)을 기증받았으며, 자선가들은 자비로 수도원 교회와 기타 건축물을 지어주기도 했다. 수도원들 스스로도 대규모로 건축 사업을 전개하여, 거대한 석조 교회와 건물들이 등장함에 따라 그 외관이 크게 변모했다.

이러한 건물들은 종종 정규 수도원에 공동 생활 규정이 도입됨에 따라 지어졌는데, 이는 예를 들어 모스크바 인근 니콜로-우그레슈스키 수도원의 원장인 아르히만드리트 피멘의 『회고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회고록』에는 19세기 초부터 70년대 말까지 모스크바 교구 내 수도원 생활에 대한 많은 세부 사항이 담겨 있다. 수도원들은 도시에서 큰 석조 건물을 매입하려고 노력했으며, 이를 통해 상당한 이익을 얻었다. 19세기 중반 일부 수도원은 수익성 높은 낙농이나 채소 농장을 운영하기도 했다. 게다가 수도원에는 거액의 기부금이 들어왔다. 아르히만드리트 피멘의 『회고록』은 19세기 들어 많은 수도원의 재정 상태가 상당히 호전되었음을 증언하고 있으며, 18세기 후반의 빈곤에 대해서는 이제 수도원 연대기와 수도원 원로들의 이야기에서만 알 수 있게 되었다[1129] .

다른 교구 내 수도원들의 부유해짐에 관한 흥미로운 세부 사항들은 사브바 티호미로프 대주교(1819–1896)의 『내 삶의 연대기』에 많이 담겨 있다. 그는 긴 생애 동안 폴로츠크 교구(1866–1874), 하르키우 교구(1874–1879), 트베리 교구(1879–1896) 등 세 교구를 관할했다. 지극히 상세하게 기록되었으며 수많은 문서와 편지 등을 포함하고 있는 그의 『연대기』는 중산층 및 부유한 상인 계층, 귀족 및 다른 신분의 사람들로부터 수도원들로 쏟아져 들어온 수많은 기부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1130] .

성스러운 시노드 수석 검사의 연례 보고서를 통해 19~20세기에 수도원들이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로부터 귀중품과 부동산 형태로 받은 수많은 기부금에 대해 알 수 있다. 이러한 기부금이 얼마나 막대했을지는, 예를 들어 오르로바-체스멘스카야 백작 부인이 1848년에 작성한 유언장에서 340개 수도원에 1,700,000루블 이상을 기부하도록 지시한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다. (수도원당 5,000루블씩), 게다가 그녀는 솔로베츠키 수도원과 유리예프 수도원, 그리고 포차예프 라브라(볼리니아 소재)에 귀중한 물품을 기증했다[1131] . 그러나 수도원들이 이 모든 재산을 경제적 목적으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첫째, 많은 기부금들은 – 이는 기부자들의 종교적 성향에서 비롯된 특징이다 – 오로지 교회를 호화롭게 장식하고 예배를 드리는 데에만 사용되었으며, 여기에는 금 테두리와 보석으로 장식된 수많은 성화상, 금과 보석으로 장식된 성직자 예복, 예배 용기, 금과 은으로 장식된 성화벽 등이 포함된다. 화려한 예배에 대한 성향과 애정은 16세기는 물론 19세기와 20세기에도 러시아의 경건함에 내재되어 있었다.[1132] 그러나 모든 기부가 이러한 성격을 띠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불공평할 것이다. 앞서 언급된 아르히만드리트 피멘의 『회고록』과 사바 대주교의 『연대기』에서, 우리는 특정 계몽 및 자선 목적, 고아원·병원·학교 건립을 위해 수도원에 거액의 기금이 기부된 많은 사례를 알 수 있는데, 이러한 시설에서는 많은 아이들에게 장학금이 지급되었다. 이러한 기부 덕분에 수도원들, 주로 여성 수도원들은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에 대규모 교육 및 자선 활동을 펼칠 수 있었다[1133] . 여기에는 수도원 원장의 견해가 큰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그다지 부유하지 않았던 베르콜스키 수도원(러시아 북부)은 원장인 아르히만드리트 테오도시 오레호프(1829–1882)의 열정 덕분에 1870년대에 대규모 계몽 활동을 펼칠 수 있었다[1134] .

물론 모든 수도원이 재정에 맞는 자선 활동을 펼친 것은 아니었으며, 이는 종종 사회의 비판을 불러일으켰고, 특히 60~70년대의 신문과 잡지에서 그 비판이 거셌다. 전반적으로 볼 때, 20세기 초 러시아에는 수도사와 수도원 자체를 유지하기에 충분한 자금을 갖추지 못한 수도원이 없었다 (비록 이러한 자금이 각 수도원 사이에 고르지 않게 분배되어 있었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은 자선 활동을 확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2. 수도원 생활의 내부 체제

시노달 시대에는 수도원 생활의 부정적인 측면이 눈에 띄게 드러나고 교회 지도부에도 알려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초기에는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어떠한 실질적인 조치도 제안되거나 시행되지 않았다.

『영적 규율에 대한 부록』(1722)은 수도 생활, 수도원 생활, 수도원 관리와 관련된 모든 문제를 특별히 다루었다. 이 문서에는 수도 생활에 관한 다섯 개의 장이 수록되어 있다: 1) “누구를, 어떻게 수도사로 받아들일 것인가”; 2) “수도자들의 생활에 관하여”; 3) “수녀들에 관하여”; 4) “수도원에 관하여”; 5) “수도원장들에 관하여”. 그 내용상 이 문서는 명확하게 규정된 지시도, 수도원 규약도 아니다. 『부록』은 지나치게 일반화된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수도원 생활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수도원 생활에 대해 서술한 것에 가깝다. 수도원장들에 관한 장조차도 같은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록』은 모든 수도원을 위한 통일된 공동 생활 규약[1135] 을 제정하는 데 기초가 될 수 있었다. 아마도 『부록』의 집필자인 테오판 프로코포비치는 이 방향으로 작업을 계속할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1723년, 그는 아마도 표트르의 요청에 따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새로 설립된 알렉산드로-네프스키 수도원을 위한 규율을 집필했는데, 바로 『알렉산드로-네프스키 수도원 수도사들의 수도 생활 묘사』[1136] 이다. 이 문서는 네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 『수도 생활의 묘사』; 2) 『교회 모임과 공동 기도에 관하여』; 3) 『수도사들의 식사 모임 의식에 대한 묘사』; 4) 『대리 수도원장 직무』.

1년 후, 우리에게 잘 알려진 1724년 1월 31일자 칙령이 발표되었는데, 여기에는 이미 이 글에서 인용된 소위 「수도 생활에 관한 선언」[1137] 이 포함되어 있다. 「선언」 역시 규약이라기보다는 논문의 성격을 띠고 있다. 비록 테오판의 이 모든 논고들이 공동 생활을 찬양했지만, 결국 그것들은 단지 논고로만 남았을 뿐, 수도원 생활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교구 지도자들 측에서는 키노비아의 원칙에 따라 수도원 생활을 재편하기 위한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동시에, 안나 황후 시대의 수도원 소유지에 대한 명령과 조사들은 수도자들에겐 결코 무해하지 않았으며, 긍정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18세기 전반에 목격된 것과 같은 수준의 쇠퇴를 수도원의 내부 생활이 겪은 적은 결코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비록 공식적으로는 일부 수도원은 공동생활 규율을, 다른 수도원은 개별생활 규율을 따르고 있었지만, 실제로 수도사들의 생활은 그토록 혼란스럽고 무질서한 상태였기에, 그 안에서 나타나는 여러 현상들은 발표된 규정과 칙령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만 설명될 수 있었다. 시노드 스스로도 섭정 안나 레오폴도브나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수도계급에 “현재… 쇠퇴가 진행 중”이라는 결론을 내렸으며, 러시아 수도계가 완전한 소멸의 위기에 처해 있다는 우려를 표명했다[1138] .

조사 결과로 인한 여파가 얼마나 끔찍했는지는, 예를 들어 1692년에 설립된 사로프 수도원의 역사에서 잘 드러난다. 요한(† 1737)과 도로페이(1731–1746) 원장들의 열정과 금욕적인 태도 덕분에 이곳에서는 처음부터 엄격한 공동체 규율이 도입되었고, 수도사들의 삶은 상당한 영적 수준에 이르렀다. 그러나 안나 여제 치하에서 시작된 수도자 박해로 인해 2~3십 년간 모든 것이 혼란과 무질서 속으로 빠져들었고, 그 결과 18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원장인 요한( ), 에프레무스(1758–1777), 파코미우스 (1777–1794)가 비로소 공동 생활 규율을 다시 도입하고, 이 수도원을 진정한 금욕적 수행의 장소로 만들 수 있었다[1139] .

중요한 점은 새로운 수도원의 설립과 기존 수도원의 재건이 검증된 수행자들에게 맡겨졌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구멘 필라레트(1773–1841)의 활동은 성공적이었는데, 그는 아폰 산의 엄격한 공동체 규율을 도입함으로써 글린스카야 보고로디츠카야 은둔원(쿠르스크 교구 소속)의 삶을 말 그대로 탈바꿈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그 결과 19세기 전반에 이 은수원은 금욕적 이상들의 부흥에 큰 역할을 했다. 필라레트는 또한 『새로 수계를 받은 수도사를 위한 상세한 가르침』을 집필했는데, 이 책은 당시 수도계에서 널리 퍼졌다[1140] . 수도원 공동생활의 부활을 위해 특히 많은 공헌을 한 사람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및 노브고로드 대주교 가브리일 페트로프였는데, 그는 또한 수도원에 장로제 도입을 장려했으며,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설명할 것이다. 그의 교구에서는 18세기 60년대, 그리고 이후 80년대와 90년대에 공동생활 규정을 바탕으로 여섯 수도원의 생활이 재편되었으며; 가브리일은 스타르츠 테오판 소콜로프의 도움을 받아 『공동생활 규칙』을 작성했으며, 이는 그의 교구 내 수도원 원장들에게 배포되어 수도사들에게 이러한 형태의 수도 생활에 대한 호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이었다[1141] .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764년의 수도원 정원은 남아 있던 수도원들을 ‘정원 내 수도원’과 ‘정원 외 수도원’이라는 두 가지 범주로 나누었다. 비정규 수도원은 신자들의 자발적인 헌금과 기부금에 의해서만 존속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많은 비정규 수도원이 아예 문을 닫았고, 다른 곳에서는 수도자 수가 지속적으로 줄어들었으며, 많은 이들이 아직 자리가 남아 있던 정규 수도원으로 떠나거나 남부 러시아로 향했다; 금욕적 기질이 강한 수도사들은 아폰 산이나 몰다비아로 떠났으며, 그중 일부는 나중에 다시 러시아로 돌아와 18세기 마지막 25년 동안 수도 생활의 부흥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국가로부터 비록 소박하지만 확고하게 정해진 지원금을 받던 국영 수도원의 상황은 더 나았다. 그곳에는 공동 생활 규율을 회복하고 유지하기에 적합한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교회 당국 측에서는 이러한 방향으로 어떤 중요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1142] . 19세기 다양한 자료에서 볼 수 있듯이, 국영 수도원들은 극히 드문 예외를 제외하고는 공동 생활 규율이 아닌 개별 생활 규율에 따라 생활했으며, 그마저도 엄격하게 준수되지는 않았다. 수도사들은 수도원으로부터 거처와 식량을 제공받았는데, 식량은 때때로 식당이 아닌 거처에 보관되기도 했으며, 생활에 필요한 그 밖의 모든 것, 예를 들어 의복 등은 스스로 마련해야 했다. 이를 위해 그들은 수도원으로부터 일정 금액의 돈을 지급받았으며; 그들에게는 어떠한 봉사 업무도 부과되지 않았으며, 만약 어떤 봉사 업무를 맡게 되면 그에 대한 보상으로 더 많은 돈을 지급받았다;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은 예배에 참석하는 것뿐이었고, 나머지 시간에는 수도사들이 수도원을 나갈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원장(수녀원장)은 수도사들을 지속적으로 감독할 수 없었다. 분명히, 정규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이 영위하던 이러한 생활 방식은 수도 생활의 금욕적 원칙[1143] 에 부합하지 않았다. 정규 수도원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한 다양한 조치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비록 이러한 조치들이 일부 수도원에만 국한되었을 뿐이지만—19세기 동안 수도 생활의 영적 수준은 계속해서 저하되었다. 1821년 필라렛 드로즈도프 대주교가 자신의 교구를 처음으로 순회했을 때, 그는 특히 국영 수도원[1144] 에서 수도사들의 생활에 매우 불만을 품었다. 그들 중 대다수는 공동생활 규정을 준수하지 않았으며, 수도자들은 너무나도 자유분방한 생활 조건에 익숙해져 있어 공동생활 도입 시도를 격렬히 반발했다.

아르히만드리트 피멘은 『회고록』에서 공동 생활 규율에 대한 거부감이 국영 수도원들에서 매우 널리 퍼져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심지어 재능이 뛰어나고 활동적인 필라레트 대주교조차도 자신의 이름으로 공동 생활 규율을 도입하는 것을 꺼려했으며, 개별 원장들을 통해 이 규율을 각자의 수도원에 점진적으로 도입하는 우회적인 방법을 선호했다. 예를 들어, 우그레슈 수도원의 경우, 창건(1380년) 당시부터 1764년까지 공동 생활 규율이 채택되어 있었으나, 원장 수사는 1853년이 되어서야 수도사들의 저항을 무릅쓰고 이를 다시 도입할 수 있었으며, 그 후 일부 수도사들은 수도원을 떠났다. 19세기 60~70년대에 모스크바 교구(모스크바 제외)의 정규 수도원 중 단 10곳만이 공동 생활 규율로 전환했는데, 이는 주로 앞서 언급한 피멘[1145] 의 노력 덕분이었다. 개별 원장들의 개인적인 주도권이 이 일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니칸드로바 푸스티니(프스코프 주)에서는 1800년에 원장によって 공동생활 규율이 도입되었으며, 1817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수도원 생활의 기초로서 수도사들에 의해 최종적으로 채택되었다[1146] . 이구멘 일라리온 역시 라도가 호수 섬에 위치한 코네브스키 수도원의 원장(1805–1823)으로 재직하며 가장 엄격한 공동 생활 규율을 복원하려 했을 때(당시 그 수도원은 공식 명단에서 제외된 상태였으며 완전히 쇠퇴해 있었다) 못지않은 어려움에 직면했고; 티흐빈의 우스펜스키 수도원을 관리하던 시기(1823–1851)에도 그에게 똑같은 어려움이 닥쳤다[1147] . 이러한 상황에서 개별 원장들의 개인적 주도권이 얼마나 성공적일 수 있었는지는 볼고그다 교구의 이오나 수도원장의 활동이 증명해 준다. 19세기 초반 20년 동안 그는 적어도 여섯 곳의 수도원에서 수도 생활을 말 그대로 재건하고 개혁했다. 그는 농민 가정 출신으로 특별한 교육을 받을 수는 없었지만, 엄격하고 탐욕 없는 수도사이자 뛰어난 행정 능력을 갖춘 원장이었다; 그는 금욕주의 문헌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수행 경험을 통해 진정한 수도 생활에 대한 올바른 관념을 얻었으며, 수도원 생활에서 온갖 악습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과, 세속화된 정규 수도원의 수도사들을 공동체 규율[1148] 을 준수하도록 이끄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18세기에는 수도원에서 가장 뛰어난 수도사들을 선발하여 교구의 영적 행정에 활용하던 널리 퍼진 관행의 부정적인 결과가 드러났다. 이러한 관행은 한 세기 동안 지속되었으며, 그 결과 수도원 공동체에서는 수도원 내에서 진정한 수행자의 삶을 본보기로 삼을 수 있었던 최고의 인재들이 빼앗겨 버렸다[1149] . 수도원 생활에 해로운 영향을 미친 또 다른 요인은, 교구 주교들이 불량한 행실에 대한 처벌로 도시의 수도원에 있던 수도사들을 시골의 수도원으로 전근시키는 경우가 매우 흔했다는 점이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특히 공동생활 규율이 없는 정규 수도원에서, 수도자 공동체에 특히 유혹적이고 타락시키는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관행은 19세기 중반까지 지속되었다.[1150]

수장 임명 절차도 정립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며 ‘영적 규정’에 명시된, 즉 수도원 수도자들이 수장을 선출하는 옛 관행이 폐지되지 않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18세기에 들어 시노드가 직접 수장을 임명하기도 했다. 그 기원이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러한 관행은 폐지되었거나 완전히 쇠퇴한 수도원이 재개될 때 정당화되었다. 해체된 수도원 공동체 내에서 새로운 원장을 선출하는 일은 의문스러운 일이었는데, 그러한 원장은 대개 수도원 공동체로부터 권위를 얻지 못했고, 수도원 생활에서 난동과 악습을 근절하려는 그의 노력은 그 때문에 애초부터 실패할 운명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아르히만드리트 피멘은 『회고록』에서 원장 선출이 애초에 쉬운 일이 아니며, 훌륭하고 엄격한 삶을 사는 수도사라고 해서 누구나 원장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썼다. 피멘의 시대, 즉 19세기 40~70년대에 정규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자신들 중에서 원장을 선출하는 것에 반대했다. 게다가 경험상, 정규 수도원에 공동 생활 규율이 도입되었을 때 외부에서 온 새로운 원장들이 더 큰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1151] .

그러나 주로 19세기 후반에 시노드에서 매우 빈번하게 적용되었던 조치, 즉 처벌의 일환으로 또는 은퇴 청원을 근거로 교구 주교들을 수도원 원장으로 임명하는 것은 비실용적이었다. 이때 고려해야 할 점은, 아래에서 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시노드 시대의 러시아 주교단은 주로 학식 있는 수도자들 중에서 배출되었으며, 학식 있는 수도자들은 거의 수도원에서 살지 않았고 수도원 업무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주교는 자신에게 맡겨진 수도원을 자신의 영지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으며, 종종 그들에게 매우 이상하게 이해되곤 했던 ‘주교의 위엄’은 수도원 규약의 요구 사항에 따라 원장으로서의 의무를 수행하는 데 방해가 되었다. 또한 수도원의 예배 생활에 있어서 주교의 관리는, 동방 교회에서 주교 예배의 특성에 기인하여, 어떤 이점을 가져다주기보다는 오히려 불편함을 초래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1152] .

많은 수도원들, 즉 정규 수도원과 비정규 수도원 모두, 명확한 수도원 규정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그곳에서는 예배 질서도 훼손되었다. 19세기 도시의 수도원들에서는 방문하는 신자들의 생활 여건을 고려하여 예배 시간이 자주 단축되었으나, 시골 수도원에서도 이러한 단축이 드물지 않게 이루어졌다. 아르히만드리트 피멘은 자신이 담당하던 우그레슈 수도원에서 예배 시 티피콘[1153] 의 모든 규칙과 요건을 철저히 준수하도록 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시노드는 수도원에 키노비아 제도를 도입하기 위해 스스로 단호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으며, 1869년에는 수도원에 수도 생활의 필수적인 토대인 공동 생활을 도입하기를 희망한다는 뜻을 밝혔을 뿐, 이미 1862년에 제시했던 권고를 반복했을 뿐이었다.[1154] 최고 교회 권력이 수도 생활에 얼마나 적은 관심을 기울였는지는 이른바 ‘수도원 감독을 위한 지침’의 역사에서 알 수 있다. 1797년 12월 황제의 칙령에 따라 이러한 ‘지침’을 작성하고 도입할 것이 권고되었다. 그러나 1828년이 되어서야 ‘지침서’가 작성되어 교구 주교들에게 배포되었으며, 이는 20세기 초까지 변경 없이 유지되었다. 다만 새로운 판에서는 교회 슬라브어 서체가 일반 서체로 대체되었고, 일부 조항의 순서가 재배치되었을 뿐이다. ‘지침서’에는 오로지 수도원 관리자들의 권리와 의무에 대해서만 언급되어 있다[1155] . 1910년이 되어서야 시노드의 지시에 따라 세라핌 신부가 수도원 생활의 기초가 될 새로운 공동체 규율을 작성했으나, 이 규율이 어느 수도원에서든 도입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유감스럽게도 우리가 아는 바가 없다. 그 방대한 분량 때문에 이 규약은 실질적인 금욕적 목적을 달성하기보다는 오히려 수도사들과 성실한 원장들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더 컸다[1156] .

이러한 상황은 1917년까지 지속되었다: 두 가지 유형의 수도원이 존재했으나, 특정 규율의 적용과 준수는 원장들의 열의와 영적 성향에 달려 있었다[1157] . 전반적으로 도시 수도원의 생활은 시골 수도원보다 덜 엄격했다. 수도원의 생활 방식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으며, 어떤 신자나 순례자라도 이를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19세기 내내 그리고 20세기 초반에 걸쳐 시노드가 수도원 생활 문제에 대해 단 한 번도 진지하게 다루지 않았고, 단지 때때로 그 사소한 세부 사항에만 주의를 기울였다는 점은 매우 특징적이다. 1906년, 1904–1905년 혁명 운동 이후 기본 국가 법률이 개정됨에 따라 주교단과 성직자 계층 내에서 개혁에 대한 열망이 뚜렷해졌고, 시노드는 주로 상트페테르부르크 대주교 안토니 (바드코프스키, 1898–1912)의 주도로 니콜라이 2세 황제와 협의하여 1906년 1월 14일 ‘총회 전 준비위원회’를 설립하여 교회 생활의 다양한 개혁 실시 가능성을 논의하게 했는데, 수도 생활은 다시금 잊혀졌다고 할 수 있으며, 어쨌든 수도원 문제를 다루는 별도의 소위원회는 구성되지 않았다[1158] .

 

3. 19세기 수도자 수의 증가

19세기에는 수도자 수가 상당히 증가했으며, 수도원의 수도 눈에 띄게 늘어났다. 이러한 현상은 두 가지 이유로 설명할 수 있다. 18세기에 경건함이 쇠퇴한 후, 다양한 계층의 백성들 사이에서 다시금 종교성이 고조되었다. 이러한 고조는 주로 러시아 수도원 지도층의 영향과, 18세기에 붕괴되었던 수도원들의 상황이 개선된 데 기인한다. 이제 수도원과 수도 생활은 다시 백성들이 생각하는 경건함의 기준에 부합하게 되었다. 한 가지 외부적 상황, 즉 1861년의 농노제 폐지도 간과할 수 없는데, 이는 농민들이 자신의 운명을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는 특히 여성 수도원의 상황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곳에서는 수련생 수가 해마다 증가하기 시작했다.

표트르 대제가 도입한 수도 입회 제한 조치는 18세기 내내 거의 완전히 유지되었으나, 19세기에 들어서면 이러한 국가 규정이 예전만큼 엄격하게 시행되지는 않았다. 1738년 전국 인구 조사 자료에 따르면, 전국의 수도원 거주자는 14,282명으로, 그중 7,829명은 남성, 6,453명은 여성이었다(이 수치는 수도사와 수녀, 수련생 남녀를 모두 포함한다)[1159] . 1764년 수도원 정원은 226개의 정규 수도원에 5,105명의 수도사와 수녀를 배정했으며, 그 외에도 수도자 수에 제한이 없던 161개의 비정규 수도원이 남아 있었다[1160] . 1840년에는 수도사와 수녀의 수가 15,251명(수련생 포함)으로 증가했으며, 50년 후인 1890년에는 러시아에 이미 12,712명의 수도사와 27,574명의 수녀(총 40,286명, 수련생 포함)가 있었다; 1907년에는 남성 수도원에 이미 24,144명의 수도자(수련생 포함)가 있었고, 여성 수도원에는 65,989명의 수도자(수련생 포함)가 있었으며, 수도원 수는 970개(남성 522개, 여성 448개)에 달했다(표 X 및 XI 참조)[1161] . 특히 수녀의 수가 급속히 증가했는데, 이는 19세기 러시아 여성들 사이에서 금욕주의적 정서가 고조된 데 기인한다. 러시아 여성 수도원의 역사는 교회 역사학자들의 특별한 관심을 받을 만하며, 향후 충분한 자료가 확보되면 이 주제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가 이루어질 것이다. 여기서는 우리가 확보한 자료를 바탕으로 이 역사의 주요 측면만을 간략히 다루고자 한다.

 

4. 19세기의 여성 수도원

19세기에 여성 수도원의 수가 크게 증가한 것은, 우리의 견해로는 러시아 여성들 사이에서 금욕적 정서가 고조된 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으며, 이는 단순히 종교적 탐구의 표현만이 아니었다. 종교적 부흥과 탐구는 매우 강렬했으나, 이러한 영적 탐구가 수도원 생활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 사실은 장로들의 영향으로 설명된다. 또한 19세기 후반 러시아 영적 역사 전반의 순수히 역사적·문화적 조건들도 일정한 의미를 지녔다.

러시아를 유럽화하기 위해 추진된 표트르 대제의 개혁은 가정과 사회 생활에서 여성의 지위에 변화를 가져왔다. 비록 이러한 변화가 각 계층에서 서서히 그리고 각기 다른 방식으로 나타났지만, 그 결과 어디에서나 여성들의 자립과 교육에 대한 열망이 강화되었다. 이러한 열망이 사회 생활에 뚜렷한 영향을 미칠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19세기 2분기 초반에 이미 러시아 여성이 러시아 정신사에서 수행한 역할에서 찾아볼 수 있다[1162] . 러시아 낭만주의, 러시아 서구주의, 슬라브주의의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이 사조들의 이념적 세계는 해당 흐름의 대표자들이 주고받은 방대한 서신에 가장 잘 반영되어 있다—러시아 영혼의 ‘폭풍과 격동’ 시기였던 이 시기의 수많은 회고록을 읽어보면, – 어디를 보더라도 재능 있고 호기심 많은 여성들의 모습을 마주하게 되는데, 이들은 동시대 남성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거나, 자신의 영적 성장을 통해 그 시대의 사상적 삶에 기여했다. 이때 종교적 문제들도 결코 외면되지 않았다. 비록 이러한 논의가 종종 아직 교파적 성격을 띠지 않았거나, 알렉산드르 1세 시대의 신비주의적 탐구 시기처럼 정교회 교리에서 벗어난 경우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적 문제들이 러시아 여성의 영적 삶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으며, 동시에 여성들은 이러한 문제들을 추상적으로가 아니라 개별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에서 해결하려 노력했다고 말할 수 있다[1163] . 바로 이러한 러시아 여성들의 영적 탐구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이 특징이, 많은 탐구하는 영혼들을 장로들과의 만남으로 이끌었다. 물론 우리는 종교적 탐구가 오직 이러저러한 장로의 영향으로만 수도자의 두건 착용으로 귀결되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며, 많은 이들이 영적 지도 없이도 그러한 결단에 이르렀다.

우리는 방금 러시아의 영적 역사에서 서신이 차지하는 중요한 위치에 대해 이야기했다. 편지는 인쇄된 저작물보다 편지 작성자의 영적 삶의 다양성을 더 잘 반영하며, 수신자에게 자신의 영혼을 드러낼 수 있는 특히 유리한 기회를 제공한다. 이는 19세기 30~40년대에만 국한된 러시아인의 특성이 아니라 편지에 대한 답장에서는 특별한 신뢰와 설득력, 그리고 세심한 배려를 드러낼 수 있었다. 많은 장로들은 특히 여성들과 소통할 때 편지를 통해 구도자의 영혼을 인도하곤 했는데, 이는 그러한 종교적·금욕적 교육 방식이 다른 방법으로는 감히 고백하지 못했을 수신자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켰음을 의미한다.

앞서 말한 내용은 주로 교양 있는 여성들에게 해당되지만, 여성 수도원에는 농민 출신 수녀들이 특히 많았다. 1861년의 농노제 폐지는 농민 가정 내 여성의 지위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관습과 풍습이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법적으로 농민 소녀, 더 나아가 과부는 개혁 이후 상대적인 자유와 자립성을 얻게 되었다. 그녀는 이제 가족의 연장자들의 의지에 반하더라도 더 자주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19세기 후반(2 ) 러시아 국민 전 계층을 강렬하게 휩쓴 교육에 대한 열망은 수도원에서도 충족될 수 있었다[1164] . 바로 이 시기에 여성 수도원들이 민중 계몽 분야에서 광범위한 활동을 펼쳤는데, 이는 지금까지 학술 문헌에서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그들은 또한 러시아 여성들의 마음에 항상 가까이 있던 사회 복지 및 자선 활동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러시아 농민 출신의 소녀는 수도원의 일상생활 속에서 부모님 댁에서도 익숙했던 온갖 종류의 가사 및 농사일을 자신의 일로 삼았다. 수도원에 입회하는 것이 생활 방식의 급격한 변화를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그녀의 영적 탐구에 만족감을 주었으며, 동시에 그녀의 사회적 지위는 높아지고, 그녀의 삶 전체가 깊은 의미를 얻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여성 수도원에서 수녀 서원자가 늘어난 현상을 어떤 특별히 강한 금욕적 기조로 설명해서는 안 된다. 러시아 여성 수도원의 역사에는 가장 혹독한 수행의 사례가 많이 기록되어 있지만, 대다수의 수도원에서는 삶이 절제된 금욕의 분위기 속에서 흘러갔으며, 주된 관심은 세상에 대한 봉사에 있었지, 세상으로부터의 완전한 단절에 있지 않았다.

사회 복지 활동은 여성 수도원 생활에서 주된 역할을 했으며, 남성 수도원의 자선 활동보다 훨씬 광범위했다. 이는 단순히 남성과 여성의 본성 차이 때문만이 아니라, 많은 여성 수도원이 바로 이러한 사회·자선 사명을 통해 성장했고, 이 점에서 다른 수도원들의 모범이 되어 백성들의 인정과 사랑을 얻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러시아 정교회는 문화 분야에서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비난을 자주 받았는데, 이에 대한 반론으로 여성 수도원의 활동을 들 수 있으며, 그러면 이러한 비난의 상당 부분은 그 의미를 잃게 될 것이다. 물론, 이러한 활동이 확고한 기반을 마련하고 특별한 성공을 거두며 본격적으로 전개되어야 할 바로 그 순간에 모든 것이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역사학자에게 이 활동은 여전히 미개척 분야로 남아 있습니다. 관련 자료의 대부분이 소실되었을 뿐만 아니라, 언젠가 이를 기초적인 연구에서 포괄적이고 완벽하게 재구성할 수 있을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성 수도원이 전성기를 맞이했을 때, 수도자들의 개인적인 주도권이 주된 역할을 했으며, 이 수도원들은 말하자면 스스로 성장했고, 교회 당국의 어떠한 지원도 없이 백성들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교회 지도부가 새로운 수도원의 설립을 방해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1764년, 1786년, 1788년에 이루어진 세속화 이후, 18세기 80년대 말 무렵 러시아 전역에는 여성 수도원이 고작 80곳(정규 75곳, 비정규 5곳)에 불과했다. 그러나 1810년에는 러시아에 이미 94개의 여성 수도원이 있었으며, 이는 19세기에 걸쳐 그 수가 급격히 증가한 것을 평가하는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다. 40년이 지난 1855년에는 이미 129개의 수도원(정규 97개, 비정규 32개)이 있었으며, 수녀 2,508명과 수련자 6,606명이 거주하고 있었다(표 X 및 XI 참조).

두 범주에 속한 여성 수도원의 상황은 남성 수도원과 매우 크게 달랐는데, 첫째는 물질적 측면에서, 둘째는 내부 조직 면에서 그러했다. 남성 정규 수도원은 비정규 수도원보다 물질적 여건이 더 양호했다. 반면 여성 수도원에서는 이러한 차이가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비정규 여성 수도원이 정규 수도원보다 더 부유한 경우가 많았다. 창립자들의 개인적인 주도로 설립된 거의 모든 신생 여성 수도원은 처음에는 비정규로 간주되었으며; 창립자(드물게는 남성 창립자)가 해당 수도원에 동산과 부동산을 기증했다. 게다가 여성 수도원(국영이든 비국영이든)에는 항상 남성 수도원보다 거주자가 더 많았기 때문에, 국영 수도원에서도 규정된 정원보다 더 많은 수녀와 수련자가 있었다. 남자 수도원이 여자 수도원보다 국가로부터 더 넉넉한 지원금을 받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여자 수도원의 수녀장은 남자 수도원의 원장보다 수녀 한 명당 훨씬 적은 금액을 사용할 수 있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하지만 여성 수도원들이 농사(젖소 사육, 가금류 사육, 채소 재배)를 매우 성공적으로 영위했기 때문에, 수입을 상당히 늘릴 수 있었고, 그 결과 남성 수도원과 여성 수도원의 재산적 격차는 점차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 수도원의 수녀들과 수련생들을 부양하기 위한 자금은 매우 적었는데, 이는 농사로부터 얻는 연간 수입의 대부분을 사회 복지 및 자선 활동에 지출했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에게 잘 알려진 아르히만드리트 피멘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그가 수도원 감독으로 재직하던 당시 모스크바 교구의 공동 생활 수도원들의 삶에 대한 매우 흥미로운 세부 사항을 전하고 있다. 이 회고록은 60년대 후반을 다루고 있으며, 여기에는 여성 수도원들의 물질적 상황에 대한 많은 정보도 담겨 있다.

아노시노-보리소글레브스키 수도원은 60년대에 공동 생활 수도원이었으며, 그곳에서 180명의 수녀와 수련자가 수행하고 있었다. 이 수도원은 1823년에 설립되었으며, 당시 그곳에는 고작 10여 명의 수녀만이 머물고 있었다. 1860년대 수도원의 연간 수입은 5,000~6,000루블이었으며, 이 금액은 신자들의 기부금과 레이스 공방, 낙농장, 가금류 농장의 수익으로 구성되었고, 수도원에는 텃밭도 있어 그곳에서 수확한 채소가 수도원 식탁에 올라갔다. 이 밖에도 수도원은 병원과 수도원 소속 고령 수녀들을 위한 양로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스파소-보로딘스키 수도원 역시 공동 생활형 수도원이었으며, 이곳에는 170명의 수녀와 수련자가 거주하고 있었다; 이 수도원은 1830년에 설립되었으며, 초기에는 12명의 수녀가 수행했다; 수도원의 연간 수입은 5,000루블이었으며, 이 역시 신자들의 헌금과 수도원 농장의 수익으로 구성되었다; 수도원 내에는 어떠한 자선 기관도 없었다.

트로이체-오디기트리예바 조시모바 여성 은둔 수도원은 공동 생활 수도원으로 1826년에 설립되었으며, 당시 약 40명의 수녀가 수행하고 있었고, 60년대 말에는 이미 160명의 수녀와 수련생이 있었다; 수도원의 연간 수입은 4,000루블에 달했으며, 이는 기부금과 수도원 농장 운영 수익, 그리고 수도원에 기증된 모스크바의 대규모 수익용 건물에서 발생한 수익으로 구성되었다. 이 수도원은 특별한 사회·자선 활동을 하지 않았다.

스파소-블라헤르나 여성 수도원은 공동 생활 규약을 바탕으로 1854년에 설립되었으며, 60년대 말에는 이미 170명의 수녀와 수련생이 있었다; 수도원의 연간 수입은 최대 5,000루블에 달했으며, 이 역시 기부금과 수도원 농장 및 모스크바에 있는 수익용 건물의 수익으로 구성되었다. 이 수도원 역시 특별한 자선 활동을 하지 않았다.

크레스토보즈드비젠스카야 수녀회는 1856년에 공동 생활 규약을 바탕으로 설립되었으며, 100명의 수녀가 소속되어 있었다; 수녀원의 연간 수입은 기부금으로 구성되었으며 약 2,000루블에 달했다; 수녀회는 30명의 소녀들이 다니는 무료 학교를 운영했다.

여기에 언급된 수도원 중 처음 네 곳은 수도원 여관도 운영하고 있었으나, 이는 수입을 창출하지는 못했다[1165] .

이는 모스크바 교구뿐만 아니라 19세기 중반 러시아 전역의 많은 여성 수도원들에게도 전형적인 사례들이다. 그 시대는 수도원들이 사회 복지 및 자선 활동을 막 시작하던 시기였다. 반면 1880년대의 성시노드 수석 검사 보고서를 살펴보거나 이 시기와 관련된 교구 기록을 검토해 보면, 우리 눈앞에는 완전히 다른 양상이 펼쳐진다[1166] . 예를 들어 1887년에는 수도원들이 93개의 병원과 66개의 양로원을 운영했는데, 그중 3분의 2가 여성 수도원에 속해 있었다. 반면 당시 남성 수도원은 469개였던 반면, 여성 수도원은 202개에 불과했다(1887년 보고서). 80~90년대, 알렉산드르 3세 시대(1881~1894)에 정부가 교구 학교 설립을 장려했을 때, 거의 모든 여성 수도원에 이러한 학교가 개설되었는데, 대개 여학생을 대상으로 했으며 항상 수도원 자체의 자금으로 운영되었다[1167] .

광범위한 자선 활동이 점진적으로 발전해 온 훌륭한 사례로는 성모 마리아 레스닌 수도원(1914년까지 러시아 서부 세들레츠 주 (현재 폴란드. – 역자 주), 비알라 시 근처)[1168] 의 이야기가 훌륭한 예가 될 수 있다. 1683년, 숲속 마을 레스니(비알라 지역) 근처에서 두 명의 목동 농부가 숲 속에서 비범한 광채를 발산하는 성모 마리아의 성화를 발견했다. 이 성화는 붉은 돌로 조각된 것으로, 오른손에는 아기 예수를, 왼손에는 책을 든 성모 마리아를 묘사하고 있었으며, 책 위에는 성령의 상징인 비둘기가 그려져 있었다. 전반적으로 매우 드문 구도였다. 그리스 정교회 사제들은 이 성화를 부코비치 마을 교회로 옮겼고, 그곳에서 성화는 인근 마을 주민들로부터 큰 숭배를 받게 되었다. 몇 년 후, 성화가 발견된 자리에 성 바오로 로마 가톨릭 수도원이 설립되었고, 폴란드 당국(당시 이 지역은 폴란드의 영토였다)은 성화를 이 수도원으로 옮기도록 지시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지역 주민들은 유니온으로 개종했다. 1863년, 폴란드 봉기 이후 레스네에 있던 로마 가톨릭 수도원은 반란군을 지원했다는 이유로 러시아 정부에 의해 폐쇄되었으나, 수도원 교회는 모든 성화와 함께 유니아트들의 손에 남게 되었다. 1875년 이후 이 지역에서는 많은 유니아트 본당들이 — 어떤 곳은 자발적으로, 어떤 곳은 정부의 압력을 받아 — 유니온에서 러시아 정교회로 전환했으며, 1881년에는 레스네 본당 성당도 그리스-정교회 성당이 되었다. 당시 성 바오로 수도원의 옛 건물들이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에, 레온티 대주교는 레스네에 수녀 공동체를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1884년에 성모 마리아 공동체가 탄생했다.

공동체가 설립된 초기 몇 해는 수녀원장뿐만 아니라 다섯 명의 수녀들에게도 쉽지 않은 시기였는데, 공동체에 자금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녀원장인 예카테리나 수녀(본명 예피모프스카야 백작부인, † 1925년 세르비아)는 활기차고 재능 있는 여성이었다. 초기에는 공동체 생활이 주변 주민들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는데, 이들 주민의 대다수는 유니아트 교회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예카테리나 수녀와 두세 명의 수녀들은 의학 교육을 받았으며, 그들의 자선 활동은 주로 병든 농민들을 돌보는 데 집중되었다. 그 후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이 시도는 성공을 거두었다. 불과 2년 만에 수녀들은 모든 종교를 믿는 80명의 아이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1889년 레스닌 공동체는 공동 생활형 여성 수도원으로 개편되었고, 그 수장은 수녀원장이 되었다. 수도원은 빠르게 성장하여 1914년에는 이미 20명의 수녀와 300명의 예복 수녀[1169] , 수련생들이 머물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오랫동안 예복 수녀로 머물렀는데, 이는 이구멘니야인 예카테리나 수녀가 수녀들의 입회식을 서두르지 않았고, 입회를 원하는 수녀가 영적으로 그에 대한 준비가 충분히 되었음을 확신한 후에야 비로소 승낙했기 때문이다. 25년(1889–1914) 동안 한때 작았던 수녀 공동체는 병원과 노인 여성 보호소, 약을 무료로 제공하는 무료 외래 진료소를 갖춘 큰 수도원으로 성장했다. 환자들에 대한 외래 진료 서비스는 특히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으며, 게다가 수녀원은 자체 자금을 통해 이러한 의료 기관에서 근무하는 수녀들과 수련생들에게 의학 교육을 제공했다. 어린이들을 위한 학교 외에도 다양한 공예를 가르치는 중등 학교가 개설되었으며, 이 학교의 교사들 역시 수녀원의 지원으로 교육을 받았다. 수녀들과 수련생들은 제본 공방, 자수 교육 학교, 신발 공방, 성직자 예복 제작 공방, 그리고 성화 제작 공방을 설립했으며, 온실과 채소밭이 있는 훌륭한 과수원을 조성하고, 양봉장, 낙농장, 가금류 사육장을 운영했다. 1914년이 되기 직전, 수도원은 인근에 학교, 약국, 의료소를 갖춘 네 개의 작은 공동체를 추가로 설립했다. 물론 이 모든 자선 활동을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했다. 정부는 이 수도원 수녀들의 활동이 폴란드인들 사이에서 정교회 선교에 큰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여, 1914년까지 1,200데시아틴의 경작지와 네 곳의 농장을 수도원에 양도했다. 1914년에는 수도원의 자금으로 두 곳의 민중 학교, 두 곳의 사범 학교, 중학교, 농업 학교, 그리고 고아원이 운영되었다.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수녀들과 수련생들은 당국의 요구에 따라 수도원을 떠나 다른 수도원으로 옮겨갔다. 상당수의 수녀들은 베사라비아에 있는 수도원을 배정받아 그곳에서 두 곳의 교구 학교와 농업 학교를 설립했다. 1920년, 레스닌 수도원의 수녀장 니나 수녀가 이끄는 이 수녀들은 세르비아로 건너가 버려진 호포프 수도원에 정착하라는 초대를 받았다. 루마니아 정부는 수도원의 활동을 불신하며, 이를 베사라비아 주민의 루마니아화 정책에 대한 걸림돌로 간주하여 수녀들에게 여러 가지 어려움을 주었기 때문에, 니나 수녀원장은 소속 수녀원 수녀들과 함께 초대를 수락하고 호포프 수도원(노비사드 시 인근)으로 이주했다. 재정이 넉넉하지 않았던 레스닌 호포프 수도원은 이곳에서 고아원 하나만을 운영할 수 있었다.

레스닌 수도원의 역사는 19세기 많은 여성 수도원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분명히 그들의 사회·자선 활동은 정부로부터 특히 높이 평가받았는데, 정부는 이를 교회-정치적 선교의 수단 중 하나로 보았기 때문에 수도원에 물질적 지원을 제공했던 것이다. 그러나 순수히 교회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이 수도원은 올바른 방향으로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 모든 활동은 백성의 복지를 위해 기여했다.

또 다른 예로, 예카테린부르크 인근 우랄에 위치한 노보-티흐빈 여성 수도원의 역사를 들어보겠다. 1799년 그곳에 작은 수녀 공동체가 생겨났고, 1809년에 기숙형 수도원으로 개편되었다. 1900년에는 이미 6개의 성당과 수많은 석조 건물을 갖춘 대규모 수도원이 되었으며, 450명의 수녀와 수련자가 그곳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수녀원이 두 곳의 농장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본당 학교와 고아원, 병원, 양로원을 운영할 수 있었다. 신자들은 아낌없는 기부로 수녀원의 자선 활동을 지원했다.[1170] .

또한 농민 출신 수녀들의 선행을 보여주는 두 가지 사례가 더 있습니다.

자돈스크 인근 숲속, 성 티혼 자돈스키가 종종 은둔하며 기도하던 곳에 1813년에 작은 예배당이 세워졌다. 그 근처의 작은 오두막들에는 주로 인근 마을인 튜미노 출신의 여성 몇 명이 정착했는데, 1827년에는 그 수가 이미 50명에 달했다. 그들은 기도와 수공예—아마를 짜는 일—로 시간을 보냈으며, 그들 중에서 수녀원장을 선출했다. 1860년, 농부 여성 E. P. 보가레바의 주도로 이 공동체는 수녀회 지위의 인가를 받았고, 7년 후에는 공동 생활 수도원으로 개편되었다.

같은 보로네즈 교구 내 트로이츠코예 마을(노보호페르스키 우예즈드)에는 20명의 농민 여성으로 구성된 수녀 공동체가 생겨났으며, 1878년 그들은 자비로 교회를 세웠고, 부유한 농민 미망인 H. E. 파슈코바가 토지를 매입하여 수녀들이 함께 생활할 수 있는 주거용 건물을 지었다. 1890년 이 공동체는 성직자회의(시노드)의 인정을 받았으며, 1895년 공동 생활 수도원으로 개편되었다[1171] .

탐보프 교구에는 1887년 당시 13개의 여성 수도원이 있었으며, 그중 10곳은 설립 초기 자매 공동체였다. 최초의 공동체는 1783년에 생겨났는데, 당시 교구에는 단 하나의 여성 수도원(1690년 설립)만이 존재했다. 펜자 교구에서는 11개 여성 수도원 중 10개가 원래 공동체였다[1172] .

앞서 언급했듯이, 19세기에 등장한 23개의 새로운 여성 수도원은 공동체에서 발전한 것이다. 이 공동체들은 극히 드문 예외를 제외하고는 공동 생활 규율을 따랐다. 이들은 항상 개별 수도자들의 주도로 생겨났다. 여성들과 소녀들은 어떤 수공예 활동을 위해 함께 모였는데, 이 활동은 공동 기도로 시작하고 끝났으며, 글을 읽을 줄 아는 이들은 일하는 동안 성인들의 행적 등 금욕적인 서적을 소리 내어 읽어 주곤 했다. 결국 수녀들이 함께 거주하는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그들은 직접 만든 제품을 판매하여 얻은 수익으로 생계를 꾸렸다. 공동 기도 는 점차 올바른 수도원 예배의 도입으로 이어졌으며, 신성한 전례는 인근 본당의 사제들이 집전했다. 마침내 수녀들은 자신들의 공동체를 여성 수도원으로 개편해 달라는 청원을 시노드에 제출했다. 그들 중 일부는 수녀 서원을 했고, 다른 이들은 오랫동안 라소포르 수녀나 수련자로 남았다. 종종 이러한 공동체는 교구 주교의 관심을 끌었고, 주교는 때때로 직접 공동체를 여성 수도원으로 전환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1823년 아노시노(모스크바 주) 마을에 보리소글레브스키 여자 수도원이 설립되었다. 이 수도원의 설립자는 예브도키야 메슈체르스카야 공작부인(1774년생, 본명 튜체바)이었다. 그녀는 메슈체르스키 공작과 결혼했으나, 결혼식 두 달 만에 남편은 독감으로 사망했다. 몇 년이 지나자 아노시노 영지에서 공작부인을 중심으로 소수의 여성들(모두 그녀의 농노들이었다)이 모여들었는데, 이들은 앞서 언급한 바로 그와 같은 삶을 살고 있었다. 수년 동안 공작 부인은 자신의 작은 공동체를 여성 수도원으로 바꾸겠다는 꿈을 품고 있었다. 보로네즈 주교 안토니와 모스크바 대주교 필라레트와의 서신은 매우 흥미로운 인간적 기록을 보여준다. 결국 그녀는 1823년에 자신의 공동체를 여성 수도원으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다.

공작 부인은 자신의 영지를 딸에게 물려주고 온전히 수도 생활에 전념했다. 그녀는 필라레트 대주교에게 새로운 수도원의 원장을 임명해 달라고 요청하며, 자신도 수도원에 머물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대주교는 자신에게 적합한 수녀원장이 없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하고, 그녀를 공동체의 임시 수녀원장으로 임명했다. 그녀의 수녀 서원은 연기되었다. 새로운 수녀원은 공동체 규율을 엄격히 따르며 운영되었다. 공작부인은 업무 수행에 있어 과거 자신의 노예들이었던 이들과 자신을 구분하지 않았다(그들 중 일부는 이미 수녀 서원을 마친 상태였다). 1년 후, 그녀는 뜻밖에도 대주교에게 출두하여 수도원 생활에 대해 보고하라는 초대를 받았다. 필라레트는 엄격함으로 유명했고, 두려움에 휩싸인 수녀원장은 모스크바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녀는 내일 대주교님께서 예배를 집전하실 교회에 와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그곳으로 갔고, 예배 도중 그녀에게 이전에 그녀가 밝힌 바람에 따라 대주교님께서 직접 그녀를 라소포르 수녀로 출가시켜 주시겠다고 말했다. 다음 날 필라레트는 수녀 예브게니야(그녀의 새로운 수도명)를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했다. 그녀는 14년 동안 수도원을 운영하다가 1837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 기간 동안 그녀는 수도원 내에서 공동 생활 규율을 더욱 엄격히 준수하도록 노력했다. 그리고 어쩌면 바로 이 점이 수도 생활의 고행을 추구하는 여성들을 그녀의 수도원으로 끌어들인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40년 후, 이 수도원에는 이미 180명의 수녀와 수련생들이 머물고 있었다[1173] .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1812년 전쟁에서 명성을 떨친 장군의 미망인 M. M. 투치코바가 설립한 스파소-보로딘스키 여자 수도원도 생겨났다.[1174] 크레스토보즈드비젠스카야 자매 공동체(모스크바 근교)는 농부 출신인 P. R. 사바츄기나에 의해 설립되었다; 우스만 여성 수도원(보로네즈 주 우스만 시 인근)은 1799년 ‘소령의 딸’ N. 페도로바 덕분에 설립되었는데, 그녀는 자신의 자금을 들여 폐지되고 낡아빠진 수도원을 재건하고, 새로 단장된 수도원에 자신의 재산을 기증했다.[1175] .

새로운 여성 수도원과 수녀 공동체의 설립이 물론 항상 빠르고 순조롭게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19세기 시노달 행정부의 관료주의는 국가 기관의 관료주의보다 훨씬 더 심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미 우리에게 잘 알려진 아노시노-보리소글레브스키 수도원의 수녀 파라스케바 자그레벤나야가 블라디미르 교구 내에 은둔처를 설립하기로 결정했을 때, 이 사안에 대한 서신 교환은 4년 넘게 지체되었다[1176] .

때로는 이러한 수녀 공동체가 장로들의 도움으로 생겨나기도 했는데, 19세기 장로들은 종교적 탐구에 몰두한 러시아 여성들의 영적 양육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며, 그들을 교회 생활로 이끌고자 했다.

이 분야에서 가장 먼저 활동한 인물 중 한 명은 장로 조시마 베르호프스키였다. 18세기 후반, 브랸의 울창한 숲속에는 지극히 엄격한 생활을 영위하는 수도자들과 은둔자 그룹이 은신해 있었다(그들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더 자세히 다루겠다); 이 수행자들은 몰다비아 출신의 파이시이 벨리치코프스키 장로와 영적 교제를 나누고 있었다. 그 밖에도 이곳에서는 아드리안 장로가 제자들과 함께 수행하고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은 고위 관료의 아들이자 과거 장교이자 귀족이었던 자카리이 베르호프스키였다. 이 수도사들의 은둔처는 종종 방랑자들과 강도들의 습격을 받았는데, 그들은 수도자들의 초라한 오두막 속에 가르침과 조언을 구하러 온 사람들이 가져온 금과 은이 숨겨져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괴롭힘은 결국 견딜 수 없을 지경에 이르러, 장로 아드리안과 자카리이는 숲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아드리아누스는 이미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노브고로드의 대주교 가브리엘로부터 그를 찾아와 몇몇 수도원의 재건에 도움을 달라는 초청을 받은 상태였기에, 자카리우스와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했다. 대주교는 아드리아누스에게 상트페테르부르크 교구의 코네브스키 수도원에 공동체 규율을 도입하도록 지시했다. 자카리우스도 그와 함께 갔고, 그곳에서 조시마라는 이름으로 수도사가 되었다. 그는 약 10년 동안 이 수도원에서 장로 아드리아나의 영적 지도 아래 머물렀다가, 침묵과 기도를 추구하며 숲속 깊은 곳으로 떠났다. 그 후 조시마는 한 편지에서, 세상에 대한 완전한 단절을 이루고 하나님의 면전 앞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얻기 위해 은둔 생활과 기도에 전념하는 사람의 내적 상태를 묘사했다.[1177] .

그 후 조시마는 수도사 바실리스크와 함께 먼 시베리아로 떠났다. 그들은 투린스크 시 근처의 울창한 숲에 정착했다. 바실리스크는 완전한 고립과 침묵 속에서 살았고, 조시마는 때때로 인근 마을로 가서 식량을 조달하곤 했다. 그렇게 20년이 흘렀다. 주변 마을 사람들은 조시마를 알게 되었고, 종종 그에게 영적 도움을 청하곤 했다. 어느 날, 한 과부가 조시마에게 찾아와 자신을 영적으로 돌봐 달라고 청했다. 오랜 간청 끝에 조시마는 그녀가 자신의 은둔처에서 약 30 베르스타(약 25km) 떨어진 마을에 정착하여 가끔 그와 대화를 나누도록 허락했다. 그 후 영적인 도움과 조언을 구하는 다른 여성들도 찾아왔다. 그렇게 얼마 후 약 40명의 여성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었고, 조시마의 영적 지도 아래 육체 노동과 기도로 삶을 영위했다. 조시마와 바실리스크 두 장로는 서로 상의한 끝에, 이 공동체가 본격적인 수도원이 되는 것이 더 낫겠다고 결정했다. 투린스크 시에는 폐된 수도원의 건물들이 남아 있었다. 이미 60세 가까이 된 장로 조시마는 투린스크에 여성 수도원을 설립할 허가를 받기 위해 페테르부르크로 힘든 장거리 여행을 떠났다. 조시마는 허가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으나, 교구 주교가 이 일에 대해 장로에게 여러 가지 방해물을 놓았다. 그러자 조시마는 자신의 영적 딸들과 함께 러시아로 가기로 결심했는데, 그곳에서 자신의 계획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공동체의 대부분이 그와 함께 떠났다. 1826년, 그들은 모두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바흐메티예바라는 성을 가진 부유한 미망인이 자매들을 자신의 집으로 맞아주었고, 이후 그들은 모스크바 근교에 있는 그녀의 영지로 이사했는데, 미망인은 그 영지의 일부를 여자 수도원 설립을 위해 기부했다. 이렇게 해서 종종 ‘조시마 수도원’이라고도 불리는 트로이츠카야 수도원이 생겨났다. 장로 조시마는 계속해서 공동체를 영적으로 돌보았으며 1833년에 세상을 떠났다. 1856년, 조시마 수도원은 공동 생활 규약[1178] 을 따르는 여자 수도원으로 개편되었다.

탐보프 주 트로예쿠로베 마을에 위치한 드미트리예프스키 여자 수도원 역시 자매 공동체(1853–54)에서 발전한 것으로, 1871년에 공동 생활 수도원으로 개편되었다. 이 공동체의 창시자는 엄격한 수행자이자 은둔자였던 일라리온 포킨(1758–1853)이었으며; 처음에는 남부 러시아(키예프 인근)에서 수행하다가, 이후 몇 년간 수도원을 전전하며 떠돌았는데, 이는 19세기에 매우 흔한 일이었으며, 마침내 1824년에 트로예쿠로베 마을에 정착했고, 이곳으로 사람들이 조언과 영적 도움을 구하러 찾아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에게 돈을 기부했고, 일라리온은 그 돈으로 토지를 구입하여 그 위에 수녀 공동체를 위한 건물을 지었다[1179] .

러시아 여성들의 영적 돌봄 역사에서 성 세라핌 사로프스키(† 1833)[1180] 에게 지극히 특별한 자리가 주어진다. 1780년에 설립된 카잔의 디베예프스카야 공동체[1181] 는 오랜 세월 동안 내부적인 종교적·금욕적 삶에서 성 세라핌과 가장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는 또 다른 여성 공동체인 멜니치나 공동체를 설립했다. 1842년에 이 두 공동체는 세라핌-디베예프스카야 공동체로 통합되었으며, 이후 1861년에 세라핌-디베예프스카야 여성 수도원으로 개편되었다. 이 지역에는 성 세라핌의 영적 지도 아래 있던 두 개의 수도원이 더 있었는데, 바로 아르다토프 시에 위치한 포크로프스키 여자 수도원과 스파소-젤레노고르스키 수도원이었다. 이 모든 수도원은 수도원 규율을 엄격히 준수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완벽한 공동 생활, 금욕적인 수행, 그리고 예배 규정을 철저히 지키는 것으로 유명했으며, 그중에서도 세라핌-디베예프스키 수도원이 특히 명성이 높았습니다.

19세기의 또 다른 위대한 장로인 암브로시우스 옵틴스키(Amvrosiy Optinskiy)는 경건한 여성들의 영적 삶을 돌보는 일에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1182] . 그는 샤모르딘(옵티나에서 15km 떨어진 곳)에 자매 공동체를 설립했습니다. 수년 동안 그는 이 공동체를 영적으로 돌보았으며, 1891년 샤모르디노를 방문하던 중 세상을 떠났다.

이와 관련하여 또 다른 수행자인 테오판 자트보르니크 주교의 이름을 반드시 언급해야 하는데, 그는 러시아인들의 종교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활동에서는 앞서 언급된 장로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두 가지 특별한 특징이 드러난다. 우리는 여기서 다른 유형의 장로적 영적 돌봄을 볼 수 있다. 다른 러시아 장로들의 경우 영적·금욕적 지도에서 직접적인 대면 교제가 주를 이룬 반면, 테오판 주교는 자신의 영적 자녀들, 특히 영적 딸들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그들을 돌보았다. 한편으로는 이는 이미 그 자신의 은둔 생활이라는 수행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테오판은 성격상 문학적 활동에 소질이 있었으며, 자신의 관심 중심에 있던 기독교 영혼의 삶에 대한 견해를 통합적인 종교적·금욕적 체계로 발전시키려 노력했다. 게다가 테오판은 신학 아카데미(키예프, 1837–1844)에서 철학 및 신학 교육을 받았으며, 비셴스카야 은둔처에서 은둔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학문적·신학적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그의 편지와 저술에 다른 장로들의 구두 가르침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특징과 표현 방식을 부여했다. 따라서 테오판의 영향력은 주로, 아니 거의 전적으로, 교육받은 사람들, 즉 19세기 후반 다양한 종교적 사상의 흐름이 관찰되던 러시아 지식인 계층, 특히 여성들에게 미쳤다.

그의 수많은 저서 중에서도 특히 유명하고 널리 퍼진 책은 1868년에 처음 출간되어 이후 여러 차례 재출간된 『구원으로 가는 길』과, 1860년에 출판된 공작부인 P. S. 루콤스카 공작부인에게 보낸 편지를 모은 것으로, 1860년에 출판되었다. 현재 이 책은 독일어로 번역되어 『[1183] 』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편지』의 번역가이자 출판인은 테오판 주교가 “사람의 영적 삶에 방향을 제시하고, 기독교적인 영혼의 정비를 위한 본보기를 보여주고자 했다”고 언급한다. 그의 편지에는 기독교적인 삶의 방식에 대한 조언이 담겨 있다… 이 편지들은 특별한 매력을 지니고 있으며, 감정의 신선함, 진심 어린 공감, 소박함, 그리고 수정처럼 맑은 사고로 독자를 사로잡으며, 러시아 경건주의의 본질을 내면에서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장로들의 삶과 가르침』[]이라는 책에서 우리는 이미 비셴의 은둔자에 대한 모습을 그려보려 시도한 바 있다. 여기서는 러시아 여성들의 종교적 탐구에 대한 설명과 관련하여, “기독교적 삶에 관한 편지들”이 원래 테오판 주교가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던 한 특정 여성 수신자에게 보낸 것이었으나, 그 형식이 세속적인 일뿐만 아니라 내면의 영적 어려움과 갈등 속에서도 다른 많은 여성들의 영혼에 큰 유익을 줄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편지들은 테오판이 세상을 떠난 지(† 1894년 1월 5일)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큰 열정을 담아 읽히고 있으며, 우리가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알고 있듯이 오늘날까지도 러시아 여성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테오판의 저술이 매우 많은 여성들을 수도원에 입회하도록 이끌었고, 세속 사회에 남아 있는 여성들—주로 교육받은 여성들—의 삶의 방식에 영향을 미쳤다고 단언할 수 있다.

러시아 여성들의 영적 양육은 앞서 언급한 장로들만이 담당한 것은 아니었다. 그 외에도 많은 존경받고 엄격한 수행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활동은 동시대 여성들의 종교적 탐구에 큰 의미를 지녔다. 그들은 제자들을 직접 만나거나 편지를 통해 영적으로 돌보았다. 게라심 주교(도브로세르도프; 1809–1878)를 언급해 보겠습니다. 그는 몇몇 수녀들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그들에게 영적 지도를 제공했습니다. 특히 그의 『영적 아버지가 수녀에게 보내는 편지』[1184] 는 매우 훌륭합니다. 옵틴의 암브로시이 장로 역시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보낸, 기독교적·금욕적인 삶의 방식에 관한 수많은 편지를 남겼는데, 그 편지들에서 그는 특유의 온유함과 친절함, 솔직함과 심오한 통찰력으로 가장 복잡한 삶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었다[1185] .

수도원 안에서 삶을 영위했던 러시아 여성들 중에는 여성 수도원에서 진정한 수도적 생활 방식을 확립하는 데 기여한 많은 수도자들이 있었으며, 그중 일부는 특별히 언급할 가치가 있다.

그러한 수녀 중 한 명이 바로 테오파니아 고토브체바(1787–1866) 수녀장이었다. 그녀는 유서 깊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예카테리나 귀족 여학생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특히 외국어 학습에서 뛰어난 성적을 보였다. 그녀는 A. S. 고토브체바 장군과 결혼했다. 그러나 그녀의 결혼 생활은 단 이틀밖에 지속되지 않았다. 남편은 전장으로 파견되는 명령을 받았고(이는 1809년, 러시아-스웨덴 전쟁 당시의 일이었다), 그곳에서 총탄에 맞아 사망했다. 그녀의 어린 딸은 네 살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고토브체바는 그로부터 몇 년 후인 1818년에 자신의 노예 신분인 소녀 12명과 함께 고리츠키 여자 수도원에 수련자로 입소했다. 1837년에 그녀는 수도자 서원과 스키마를 받기로 결심했다. 고토브체바는 수련자 시절부터 키릴로-노보예제르스키 수도원의 장로 테오판 소콜로프와 수년간 서신을 주고받았는데, 그녀의 금욕적 견해와 수도원 내 공동생활 규약 도입을 위한 노력은 이 서신 교환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이는 장로 테오판 소콜로프가 수도원 공동생활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이자 옹호자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1186] . 1845년, 수녀 테오파니아(그녀는 장로 테오판을 기리기 위해 이 수도명을 받아들였다)는 니콜라이 1세 황제(1825–1855)로부터 황제에게 인사하러 오라는 초대를 받았다. 흥미롭게도 이 초대는 교회 당국이 아닌 세속 권력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시노달 시대에는 이는 흔한 일이었는데, 시노달 계층이 수도 생활에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황제는 테오파니아에게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엄격한 공동 생활 규율을 갖춘 여성 수도원을 설립해 달라고 요청했고, 그녀를 수녀원장으로 임명하도록 지시했다. 그리하여 1845년에 노보데비치 부활 수도원이 설립되었으며, 그곳에서 테오파니아 수녀장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1866년) 지칠 줄 모르는 열정과 놀라운 성과를 보이며 헌신적으로 활동했다. 초창기부터 부활 수도원은 황실의 후원을 받았으며 – 수녀장은 궁정에서 큰 존경을 받았고 여러 대공녀들의 대모이기도 했다 – 대규모의 사회·자선 활동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수녀들과 수련생들(19세기 말에는 그 수가 300명을 넘었다)은 다양한 공방에서 일했다. 그들은 금과 진주로 자수를 놓았고, 신발과 사제 예복을 제작했으며, 고아원과 양로원의 세탁물을 빨았다. 19세기 말, 이 수도원은 여학생을 위한 학교, 민중 여교사를 양성하는 학교, 남학생을 위한 학교, 그리고 훌륭한 금실 자수 공방[1187] 을 열었다.

러시아의 전혀 다른 지역, 그리 유리한 환경이 아닌 곳에서 스키히구메냐 테오파니아 시도로바 역시 그 못지않은 노고를 기울였다. 그녀는 볼로그다 출신으로, 그리 부유하지 않은 상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1800년에 태어난 그녀는 부유한 상인 시도로바와 결혼했으나, 곧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되었다 (1827년). 20년 넘게 그녀는 수도원을 전전하며 팔레스타인의 성지 순례도 다녀왔고, 이 경건한 미망인은 자신의 모든 재산을 교회와 자선 사업에 기부했다. 마침내 60세가 되어서야 그녀는 홀모고르 여성 수도원(북부)에서 수도 서원을 받기로 결심했고(1860), 이 수도원은 후에 폐원되었으며, 5년 후에는 테오파니아라는 이름으로 대수도 서원까지 받았다. 1년 후, 그녀는 당시 셴쿠르스크(벨로예모르 해안)에 있던 작은 여자 수도원의 수녀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녀는 14년 동안 수도원을 운영했으며, 그녀의 지도 아래 수도원에서는 공동 생활 규약의 모든 규칙이 엄격히 준수되기 시작했다. 1880년 테오파니아 수녀의 어머니가 병에 걸려 자주 오랫동안 침상에 누워 지내야 했지만, 여전히 수녀들의 주요 영적 지도자로 남았으며, 1888년 깊은 노년에 세상을 떠났다. 황량한 툰드라에 위치한 이 북부의 수도원은 엄격한 규율과 수녀들의 생활 방식으로 유명했으며, 1900년 당시 이곳에는 36명의 수녀와 86명의 수련자가 머물고 있었다[1188] .

그리고 같은 세계의 또 다른 인물: 필라레타 수녀원장, 본명은 바르바라 슐리펜바흐 남작부인으로, 반은 독일인이다. 테오파니아 고토브체바와 마찬가지로, 그녀는 귀족 가문 출신이었으며, 수도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 귀족 소녀들을 위한 애국 학원을 졸업했다; 아주 어린 소녀였던 바르바라는 12세기에 설립된 노브고로드의 유서 깊은 유명한 성신 수도원(Свято-Духовский монастырь)[1189] 의 수련자가 되었고, 이후 키예프의 플로로프스키 여자 수도원[1190] 으로 옮겨 1848년에 수녀 서원을 했다. 그녀는 8년 동안 교육 활동에 종사하며 오데사의 미하일-아르한겔스키 여자 수도원 소속 소녀들(성직자 가정의 고아)을 위한 학교를 이끌었다. 1858년, 필라레타 슐리펜바흐는 레베딘스키 니콜라예프스키 수도원의 수녀원장으로 임명되었다 (키예프 주 치기린 시 인근)의 수녀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농민 자녀들을 위한 주일학교, 여학생 학교, 그리고 성화 그리기 학교를 설립했다. 1875년, 그녀는 자선 활동이 한창이던 중 세상을 떠났다[1191] .

타이시아 솔로포바 수녀장의 『수기』[1192] 는 19세기 후반 여성 수도원의 내면 세계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녀는 진심 어린 솔직함으로 자신의 개인적인 종교적 문제와 어려움, 당대 수도원 생활의 부정적·긍정적 측면, 수도원과 교회 권력 간의 관계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데, 이 모든 것은 러시아의 여러 수도원에서 생활하며 깊이 연구한 결과이다. 그녀의 서술을 통해 수도원 생활의 올바른 정립에 있어 금욕적 전통, 공동 생활 규율의 준수 여부, 수녀원장의 노력과 모범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녔는지 알 수 있다. 그녀의 『수기』는 여성 수도원에서도 남성 수도원과 마찬가지로, 수도 생활이 교회 당국의 지시에 따라 꽃피운 것이 아니라, 민간의 경건함이나, 시노달 시대의 ‘공식적 정신’이 지지하려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종종 반대하기까지 했던 금욕적 전통에서 영적 힘을 얻었음을 보여준다. 러시아의 종교적 탐구와 교회 생활의 역사에서 알려진 모든 기독교 수행자들 은 이 두 원천으로부터 영적 양분을 얻었다.

러시아 여성 수도자들의 역사는 아직 철저한 연구가 필요한 상태이다. 많은 문제에 대해 아직 자료가 부족하며, 일부 사조와 현상의 기원을 추적하고, 예를 들어 장로들의 영향과 같은 다양한 요인들을 심도 있게 연구해야 한다. 모든 현상을 이러한 영향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내면적인 개인적 경건함은 러시아의 국가·정치 및 경제 생활의 우여곡절과 관련된 일시적인 부침에도 불구하고, 결코 완전히 사라진 적은 없었으나, 종종 공식적인 교회의 정신에 대한 불만족으로 인해 마치 세상에서 벗어나 일종의 영적 은둔처로 물러나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민중의 경건함으로 인해 러시아의 여성 수행자들은, 그들이 어떤 사회 계층 출신이든 간에 힘을 얻었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그들 모두는 똑같은 원천에서 영감을 얻었다. 우리가 제시한 사례들은 어떤 계급도 이러한 원천으로부터 단절되지 않았음을 잘 보여준다. 아래에서 다룰 러시아 장로들의 역사는 이 현상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낼 것이다.

러시아 여성들의 헌신적 삶, 이웃에 대한 사랑,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충실함의 시초에서 우리는 율리아니아 오소리나(또는 오소르기나; † 1605)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녀는 개인적인 경건함 면에서 다른 여성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그녀의 사회 복지 활동은 놀라웠습니다. 그녀는 전염병 환자들을 돌보았고, 자선을 베풀다 보니 자신은 굶어야만 했습니다; 이 모습에서 우리는 16세기 말의 풍속과는 어울리지 않는, 그러나 19세기 많은 러시아 여성들의 모습과 더 가깝게 이어지는 정신을 엿볼 수 있다[1193] .

성 세라핌 사로프스키의 영향으로 형성된 수도자 집단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하느님에 대한 완전한 헌신이었다. 성 세라핌은 영적 지도와 양육에서 기도와 이웃에 대한 영적 사랑에 특별한 중요성을 부여했으며, 사회 복지 활동은 장려하지 않았다. 세라핌-디베예프스키 수도원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성 세라핌이, 여성들의 영적 양육에 종사했던 다른 장로들보다 더 많이, 자신의 영적 딸들에게 금욕적 수행을 요구했음을 알 수 있다. 수도원 내에 이를 위한 토대가 이미 마련되어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며, 그곳에 그가 이어받은 금욕적 전통이 존재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금욕적 수행을 위한 견고한 토대는 공동체의 창립자이자 수녀원장인 알렉산드라 멜구노바 수녀(† 1794)에 의해 이미 마련되었는데, 성자는 그녀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녀로 인정받은 펠라게이아 세레브리아코바(† 1884)와 이 여성 수도원의 다른 수녀들의 모습은, 성인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금욕적 전통이 사라지지 않고 이어졌음을 보여준다[1194] .

『18세기와 19세기 러시아 경건한 수행자들의 전기』[1195] 의 페이지들에서 우리는 수많은 여성 수행자들의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탐보프 인근 즈나멘스키 수도원의 도로페야 수녀원장(1월호); 툴라 교구 카시라 인근 스레텐스키 수도원의 안토니야 수녀원장 (동일 권); 모스크바 요안노프스키 수도원의 수도녀 도로페야(2월); 카시라 인근 스레텐스키 수도원의 스키모나히니 아브라아미야(2월); 니즈니노브고로드 주 아르자마스 수도원의 스키모나히니 마르파; 하르키우 출신의 은둔자 마르파와 에브도키아 두 명 (3월); 니즈니노브고로드 주 아르자마스 시 알렉세예프스키 수도원의 원장인 스키히구메니 올림피아다 (8월); 카시라 인근 스레텐스키 수도원의 수녀 엘리사베타 (9월). 또는, 예를 들어, 수녀 일라리아 코벨레바(1810–1892)는 13세에 쿠르스크의 트로이츠키 여자 수도원에 수련자로 입회하여, 19년간의 엄격한 수행 생활을 거쳐 수계식을 치렀고, 이 수도원에서 70년을 보내며 그 기간 내내 끊임없이 자선 활동을 펼쳤다[1196] .

이 목록만 보더라도 일부 수도자들이 같은 수도원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그곳에 살아 숨 쉬는 금욕적 전통이 유지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특이한 점은 세라피모-디베예프스카야 수도원이 위치해 있던 니즈니노브고로드 주에서 수도자적 금욕주의가 특히 번성했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이는 19세기 러시아 경건함의 정점을 보여준 성 세라핌 사로프스키의 영적 위업이 비친 결과였을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러시아 여성들의 경건한 수행의 길 중 비교적 연구된 부분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이 길들이 역사학에 있어 영원히 사라진 것은 아니며, 언젠가 러시아 여성들의 금욕적 위업에 대한 전체적인 그림을 그려낼 수 있기를 희망한다.

 

5. 주교단과 ‘학식 있는 수도자’

시노달 시대의 수도 생활 역사에는 또 다른 특징이 있다. 바로 주교단과의 과거 긴밀한 유대가 단절된 점이다. 18세기까지 주교단은 수도 생활의 심장에서 배출되었다. 겉으로는 주교의 품위가 주교를 평범한 수도사들과 구분지었지만, 내면적으로는 수도사들과 동일한 금욕적·교회정치적 견해를 고수했다. 주교단의 긍정적·부정적 특징은 주로 지배적인 전통과의 내적 유대 관계에서 기인했다. 주교들이 수도원 생활 개선에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한 것은, 그 생활이 그들에게 일상적이고 익숙한 것이었기 때문이며,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극소수의 주교만이 이에 대해 객관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수도 생활과 주교단의 이러한 연관성을 표트르 대제는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수도 생활과 관련된 조치들을 추진하는 동시에, 자신의 계획과 교회 개혁에 공감하는 인물들로 주교단을 구성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이러한 목적에 적합한 인재를 소러시아 교회 계층에서 찾아냈는데, 이 계층은 대러시아 출신 수도사들과 주교들의 견해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 계층은 표트르의 개혁을 전적으로 수용하는 데 더 호의적이었거나, 적어도 자신들에게 종속된 성직자들 사이에서 반대 세력을 선동하거나 은밀한 선전을 펼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알렉세이 왕세자 사건 이후, 이를 계기로 보수 성향의 구 모스크바 계파인 교회 지도부와 수도자들이 결집하려 시도하자, 표트르는 대러시아 주교들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 교회 개혁과 교회 관련 각종 조치를 추진하는 데 있어 그의 주요 보좌관은 테오판 프로코포비치가 되었다; 그는 남부 러시아 출신으로 대러시아인 주교들에게 특별한 호감을 느끼지 않았다. 표트르는 총대주교좌 대리자로 비교적 젊은 스테판 야보르스키 주교를 임명했는데, 그는 또한 모스크바 사람들이 조롱 섞인 적대감을 담아 ‘체르카스’ (즉, ‘마로로시’) 출신이었는데, 모스크바 사람들은 그를 조롱 섞인 어조로, 적대감을 품고 그렇게 불렀다. 표트르가 스테판 야보르스키가 마음속으로는 자신의 교회 개혁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채자, 그를 뒷전으로 밀어냈다.

1700년부터 1721년까지 이어진 대리 통치 기간이 얼마나 길었는지는 주목할 만하다. 표트르는 총대주교직 폐지를 당장 결단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최고 교회 권력의 형태에 관한 원칙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동안, 표트르는 자신의 정책을 계속 추진했다. 즉, 교회 계층에 리틀러시아인들을 보충했고, 수도원 원장들도 대개 키예프 대교구 출신의 수도사들과 대수도원장들이 임명되었다. 이러한 정책은 18세기 전반 내내 지속되었으며, 특히 엘리자베타 여제 재위 기간(1741–1761)[1197] 에 걸쳐 일관되게 이어졌다.

페테르 대제 이전의 전통을 고수하던 대러시아 수도원 수도자들은 소러시아인들을 ‘라틴인’으로 간주하며 큰 불신을 품고 바라보았는데, 이는 당시 요아킴과 아드리안 총대주교, 수도사 에우피미오스 등이 그들을 바라보던 시각과 같았다. 요아사프 고를렌코 주교(† 1754)는 자신의 편지에서 대러시아인들이 어디서나 소러시아인들을 불신으로 대한다고 썼다[1198] . 게다가 소러시아와 대러시아 성직자 사이에는 사회적 차이도 존재했다. 첫째, 폴란드의 지배 하에 있던 시절(서부 러시아는 많은 주민이 러시아로 이주했음에도 여전히 폴란드에 속해 있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법에 따라 일부 권리 면에서 귀족(슈라헤트)과 동등한 지위를 누렸다. 1728년까지 키예프 대교구의 성직자들은 귀족과 마찬가지로 토지를 매입하고 영지를 기증받을 권리가 있었다. 안나 여제 시대에도 그들은 여전히 대러시아 성직자들이 누리지 못했던 일부 특권을 유지하고 있었다[1199] . 이는 또한 소러시아와 대러시아 성직자들 간의 상호 적대감의 원인 중 하나였는데, 전자가 후자를 경멸의 눈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마로시야 출신의 주교들은 유난히 오만하고, 가혹한 행정 방식과 그들에게 종속된 본당 성직자 및 수도자들에 대한 잔인한 대우로 유명했다. 이러한 유형의 주교들을 몇 명 꼽아 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스몰렌스크 주교 게데온(비슈네프스키, 1728–1761); 티모페이(셰르바츠키), 모스크바 대주교(1757–1767); 암브로시(제르티스-카멘스키), 모스크바 대주교(1767–1771), 1771년 ‘전염병 폭동’ 당시 민중에게 살해당함; 파코미(시만스키), 탐보프 주교(1751–1766); 아르세니(마체예비치), 시베리아 대주교(1741–1742) 및 로스토프 대주교(1742–1763); 파벨(코뉴스케비치), 시베리아 대주교(1758–1767); 키릴(플로린스키), 세브 주교(1766–1778)[1200] .

마로로스 출신 주교들은 종종 눈부신 승진을 이루곤 했다. 설교로 엘리자베타 황후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게데온(크리노프스키) 주교는 27세에 이미 사보-스토로제프스키 수도원의 아치만드리트가 되었으나, 수도원을 직접 관리하지는 않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거주했다; 1년 뒤 그는 성직자회의 위원 겸 트로이체-세르게이예프 라브라의 아치만드리트로 임명되었고, 31세에 프스코프 교구를 맡았으나, 그로부터 2년 후(1763년 7월 22일)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그의 눈부신 경력은 막을 내렸다[1201] .

1764년 세속화 이전까지 교구 주교좌는 수도원과 마찬가지로 광대한 영지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이를 통해 상당한 수입을 얻었다. 특히 이 주교좌를 소러시아 출신 주교들이 맡았을 경우, 매우 많은 수의 하인을 거느리고 있었다. 하인과 관리자의 총 수는 31명에서 135명에 달했다. 로스토프 교구 주교좌는 16,796명의 농민이 거주하는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최대 5,000루블의 지대뿐만 아니라 성직자들에게서 징수되는 ‘조세’까지 납부했으므로, 주교의 총 수입은 8,000루블에 달했다. 한편, 1764년 정원에 따르면 로스토프 교구 운영비로 배정된 금액은 고작 2,014루블에 불과했다. 아마도 이러한 상황이 로스토프 대주교 아르세니 마체예비치가 세속화에 반대하는 항의를 제기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단지 원칙적인 고려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단호하고 격렬하게 예카테리나 2세의 개혁에 반대했다[1202] .

바로 말로로스 출신 주교인 아르세니 마체예비치와 파벨 코뉘스케비치 측에서 세속화에 대한 공개적인 항의가 이어졌다. 이것이 바로 예카테리나가 소러시아인들에게 불신을 품게 된 원인이 되었으며, 1764년 이후로는 주교좌를 대러시아인들이 차지하도록 신경을 썼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 당시(1763~1764년) 26명의 교구 주교 중 대러시아인은 고작 12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예카테리나의 조치들은 다소 사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기에, 주교와 성직자 사이의 깊은 골을 메울 수는 없었다. 이 골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더 깊어졌다[1203] .

18세기 중반에 흥미로운 저작 한 편이 등장했다. 이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주교’와 ‘장로’는 똑같은 사제직의 은총을 지니고 있으며, 두 직분 간의 차이는 역사적으로 형성된 비교적 후대의 현상이라고 한다. 동시에 저자는 주교단과 수도 생활을 전반적으로 매우 신랄하게 비판하는데, 이는 그것들이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고대 교회의 정신에서 멀어졌기 때문이다[1204] . 성직자들 사이에서 유포되었던 이 익명의 저작을 연구자들은 모스크바 크렘린의 아르한겔스크 대성당 소속 성직자인 프로토이레이 페트르 알렉세예프의 작품으로 보고 있다. 그는 모스크바 대주교 플라톤은 물론, 주교단과 수도 생활 전반에 대한 반대 입장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이는 황후 예카테리나의 영적 지도자이자 영향력 있는 수석사제 판필로프와의 서신 교환에서 드러난다. 알렉세예프는 “ 의 자격을 갖춘 사제가 수도 생활을 거치지 않고 주교로 승진될 수 있는가”라는 제목의 또 다른 저작을 썼는데, 이 글의 논지는 “주교들에 대한 논고”[1205] 와 매우 유사하다. 이러한 논리는 백색 성직자와 18세기 후반 급속히 세력을 확장하던 소위 ‘학식 있는 수도자’들 사이의 사회적·물질적 지위 차이로 설명될 수 있는데, 이들은 주교단과 수도원 수도자들과 함께 흑색 성직자 계층을 구성했다[1206] .

학자 수도자들은 신학 아카데미에서 고등 교육을 받은 후 수도사가 된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학자 수도사들은 이미 17세기부터 남부 러시아, 즉 키예프 대교구와 서부 러시아에서 모스크바 루스로 들어왔다. 당시 그들 대부분은 키예프 신학 아카데미 졸업생들이었다. 예를 들어, 이미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시메온 폴로츠키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17세기 후반, 그들은 모스크바로 와서 교육받은 신학자가 부족한 상황을 감안하여 모든 교육 활동을 주도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모스크바 슬라브-그리스 아카데미에서, 18세기에는 새로 설립된 신학 세미나리에서도 그러했다.

1724년의 「수도 생활에 관한 공고」에 따라, 신학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교직에 종사하던 이들은 만 30세가 되면 수도사가 될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1207] . 이들은 수도원의 수도사들보다 더 높은 봉급을 받았으며, 대개 즉시 사제 수도사로 서품되었다. 이후 그들이 신학 세미나리의 학장으로 봉사하게 되면, 동시에 수도원의 원장으로도 임명되어 두 가지 급여를 받게 되었다. 1799년 파벨 황제 치하에서 칙령이 내려져, 교육 활동에 종사하는 사제 수도사들은 도시 대성당에 소속되어 그 수입의 일부를 받게 되었다. 이미 1766년에 주교들과 학자 수도사들은 자신의 재산(돈, 책, 의복)을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으나, 반면 수도원의 수도사들에게는 표트르의 칙령에 따라 이것이 금지되었다; 주교와 학식 있는 수도사들은 자신의 재산을 친척이나 다른 사람에게 유증할 수 있었던 반면, 수도원 수도사들의 재산은 사망 후 국가의 처분권으로 넘어갔다[1208] . 이처럼 학자 수도사들은 수도원 수도사나 본당 사제들(대도시 대성당이나 부유한 본당 교회의 주임 신부들은 제외)보다 더 부유한 사람들이었으며, 세속 신분을 유지한 신학 아카데미 및 신학교 교수 동료들에 비해 경제적으로 더 여유로운 생활을 누렸다.

1724년 ‘수도 생활에 관한 공고’에 포함된, 30세가 되어야만 수계를 받을 수 있다는 규정은 그들에 대해서도 종종 준수되지 않았다. 1832년 5월 29일 성시노드의 칙령에 의해 이러한 교회법 위반은 합법화되었다. 이로부터 신학 아카데미 졸업생 중 수도 서원을 받고자 하는 의사를 밝힌 자들은 수도원에서 수련 기간을 면제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이는 수도사가 되기로 결심한 사별한 사제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1209] . 신학 아카데미 학생들의 경우, 수계 받을 수 있는 연령 제한이 25세로 낮아졌으며, 이들도 수련 기간 없이 바로 수계를 받았다[1210] . 신학 아카데미를 졸업한 이러한 학생들은, 자신의 지식과 능력으로 교직에 종사할 수 있으면서도 수도 서원을 받고자 하는 의사를 밝힌 경우, 상당히 단조로운 삶의 길을 걷게 되었다. 수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사제 수도사로 서품되어 신학교에서 교사로 부임했고(특히 재능이 뛰어난 이들은 아카데미의 조교수로 남기도 했다), 그 후 신학교의 감독관 및 총장으로 봉사했으며, 신학교 총장을 대수도원장(아르히만드리트)으로 승진시키는 관례도 있었다. 그 뒤를 이어 신학 아카데미의 학장직을 맡게 되었다. 종종 28세에서 35세 사이의 인물들이 이러한 아키만드리트 학장이 되곤 했다. 명목상으로는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되었지만, 실제로는 그곳에 단 한 번 방문하거나 아예 본 적조차 없는 경우가 많았다. 이 승진 사슬의 마지막 고리 는 주교 서품식[1211] 이었다. 이 경우 주교는 이전에 수도원에서 살았던 적이 전혀 없었고, 엄밀히 말해 독신 사제[1212] 였다. 18~19세기에 교구 수가 3배로 증가했고, 많은 교구에 대리 주교가 임명됨에 따라, 학자 수도사가 10~12년 만에 주교가 되는 일은 전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이미 18세기 후반에는 학식 있는 수도사 출신이 아닌 주교들이 예외적인 현상이 되었다. 이 경우 거의 항상 지극히 훌륭한 인물들이었으나, 그들이 교회 계급 구조의 최전선에 나서지 않았기 때문에 러시아 교회의 역사학자들조차도 곧 그들을 잊어버렸다. 사생활과 신념 면에서 그들은 정통 수도 생활의 진정한 금욕적 전통과 가장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아마도 그들 중 첫 번째 자리에 대주교 바르라암 (페트로프; † 1802)를 첫 번째로 꼽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는 성직 서품 후 남은 생애 34년 동안 한 곳의 교구에서만 머물렀는데, 이는 당시와 그 후인 19세기에도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그는 시베리아에서 토볼스크 대주교(1768–1802)로 사역했다. 그는 주교의 예복을 입은 진정한 금욕주의자였으며, 겸손하고 자비로우며 이타적이었고, 자신의 모든 생계를 궁핍한 이들에게 아낌없이 베풀었다. 교구의 성직자들은 바르라암을 무한히 사랑했는데, 이는 그의 전임자인 파블 콘유스케비치 대주교 재임 시절, 가혹한 행정 조치로 인해 많은 고통을 겪었기 때문이었다; 백성들도 그를 사랑했는데, 그들은 주교의 진정한 기독교적 성품을 높이 평가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수도자로서의 청년 시절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알렉산드로-네프스키 수도원에서 도시페이 장로의 지도 아래 보냈으며, 이 장로는 그를 진정한 수도자이자 수행자로 키워냈다. 바르라암은 노브고로드 및 상트페테르부르크 대주교 가브리엘의 형제였다. 이러한 혈연 관계는 바르라암이 수도원에서 잠시 원장직을 맡은 후 주교로 서품받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그의 개인적 자질을 고려할 때, 그는 동시대 대부분의 주교들보다 주교직에 훨씬 더 적합했다[1213] .

예카테리노슬라프 대주교 요브(포템킨; 1750–1823)는, 우리가 파악한 바에 따르면, 몰다비아에서 수도 생활을 하던 장로 파이시(벨리치코프스키)의 영적 지도 아래 성장한 18세기 유일한 러시아 주교였다. 그는 유명한 공작 G. A. 포템킨의 사촌이었으며, 눈부신 장교 경력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1214] , 그러나 그는 이를 외면하고 29세에 뜻밖에도 사임했다; 1779년에 그는 몰다비아로 떠나, 파이시이와 연관이 있던 장로들의 지도 아래 몇 년을 보냈다. 그 후 우리는 그를 베사라비아의 우스펜스키 수도원 원장(1785–1793)으로 만나게 되며, 이후 요브는 테오도시이 주교(1793–1797), 그다음 민스크 주교(1797–1812)가 되었고, 마침내 예카테리노슬라프 교구의 대주교(1812–1823)가 되었다. 교구 주교로서 그는 특별한 열정과 시노드와의 관계에서 보여준 독립적인 태도, 그리고 수도원 생활 개선을 위한 조치를 추진하는 데 있어 끈질긴 집념으로 두각을 나타냈다[1215] .

가브리엘 대주교가 트베르 교구를 관할하던 시기(1763–1770)에 그곳에서 수도원 생활 부흥을 위한 첫 시도를 펼쳤을 때, 그의 가장 가까운 보좌자는 오트로차 수도원 원장(1765–1773) 아르세니(베레샤긴; 1736–1799)였다. 이후 가브리엘은 노브고로드 및 상트페테르부르크 대주교가 된 후에도 자신의 사명을 계속 이어갔으며, 그 덕분에 수도원 지도부의 역사에 이름을 남겼고, 아르한겔스크(1773– 1775), 트베르 교구(1775–1783), 로스토프 교구(1783–1799))를 관할하며, 어디서나 대규모로 성공적으로 본당 성직자들의 교육 개선과 신학교 설립에 힘썼다[1216] .

19세기에도 학자 수도자 출신이 아닌 주교들은 여전히 드문 현상이었다. 두 명의 주교를 언급하고자 한다: 유베날리(폴로브체프; 1826–1904), 리투아니아 대주교(1898–1904), 그리고 플라비아네 (고로데츠키; 1840–1912), 키예프 대주교(1903–1912)를 언급하고자 한다[1217] . 유베날리 폴로브체프는 옵티나 수도원의 장로들 밑에서 수련을 거친 유일한 주교였다. 귀족 가문 출신으로, 고등 포병 학교를 졸업한 장교였던 그는 1847년 옵티나 푸스티냐로 들어가 마카리(이바노프) 장로 밑에서 7년 동안 수련자로 지냈으며, 이후 수도사가 되어 예루살렘의 러시아 선교부에서 오랜 세월을 보냈다. 그 후 쿠르스크 주교(1893–1898)를 지내고, 이어 리투아니아 대주교(1898–1904)가 되었으며, 유베날리이는 러시아 교회의 가장 훌륭한 성직자 중 한 명으로 꼽혔으며, 그의 삶과 주변 사람들에게 미친 영적 영향은 그가 옵티나에서 배운 교훈을 잊지 않았음을 증명해 주었다. 그는 저서 『수장 모세 전([1218] )』을 통해 옵티나 수도원의 장로들에게 깊은 감사를 표했다.

세 번째이자 가장 뛰어난 교회 인물로, 비록 눈부신 외적 경력을 쌓지는 못했으나 진정한 수행자의 삶을 살았던 이는 이그나티 브랸차니노프였다. 그는 고대 동방 교회의 금욕적·신비적 전통에서 자신의 견해를 이끌어낸 소수의 러시아 주교 그룹에 속했는데, 이 전통은 그들에게 삶과 행위의 기초가 되었다. 유베날리 폴로브체프 대주교와 마찬가지로, 심지어 그보다 더 큰程度上, 이그나티는 러시아 장로들의 제자였으며, 그는 러시아 수도자 신세대의 영적 성장에 큰 역할을 한 자신의 저술들을 통해 이 전통을 이어갔다[1219] .

그러나 수도원 교육을 받지 않은 학자 수도자들 사이에서 수도 생활의 금욕적 기초가 지닌 의미와 중요성에 대한 이해가 완전히 상실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부당할 것이다. 교회 생활의 내적 분열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 수도계에는 두 개의 평행한 흐름이 형성되었는데, 한편으로는 고대의 금욕적 전통으로 돌아가기 위한 어떠한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던 ‘시노달 수도생활’이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로를 풍요롭게 했던 장로 제도와 진정한 금욕주의의 다른 양상들이 있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스타르체스트보와 진정한 금욕주의는 여전히 그들 주위에 종교적 분위기를 조성했으며, 이는 세상에 강렬한 영향을 미쳤다. 19세기 전반 러시아의 영적 문화를 편견 없이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 문화 속에서 — 수도원 벽 안뿐만 아니라 밖에서도 — 얼마나 강력한 지하 금욕주의 흐름이 존재했는지를 반드시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는 모스크바 시대에는 적절한 활동 무대를 찾지 못하고, 신을 부정하던 18세기에는 숨어 지내야만 했던 러시아 기독교의 영적 힘이 뒤늦게 드러난 현상이었다. 이제 그 힘은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냈으며, 표면적으로는 그다지 강렬하지 않았을지라도, 아무런 결과도 남기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충분히 강렬하게 작용했다. 학식 있는 수도자들과 그들 가운데서 배출된 주교단 역시 이러한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시노달 시대의 주교들의 전기를 살펴보면, 세 가지 주요 주교 집단을 발견할 수 있다.

첫 번째 그룹은 젊은 시절부터 수도 생활에 마음이 기울어 있었거나, 방금 언급한 그 금욕적인 분위기의 영향을 받은 인물들로 구성된다. 신학교에서의 강의나 주교좌에서의 행정 활동은 그들에게 만족감을 주지 못했다. 수년간 주교직을 수행하며 외적인 경력보다 자신의 내적 영적 삶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 후, 그들은 주교좌를 떠나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18세기에 이러한 유형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보로네즈 주교 성 티혼 자돈스키의 생애였다. 19세기 역사에서도 몇 가지 사례를 떠올려 볼 수 있다.

그중 가장 먼저 언급해야 할 인물은 가장 뛰어난 인물 중 한 명인 앰브로시우스 오르나츠키, 펜자 주교(1778–1827)이다.[1220] . 상트페테르부르크 신학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 암브로시우스는 한동안 노브고로드의 신학교에서 가르쳤으며, 27세에 수도 서원을 했다(1805). 그 후(1808–1816) 그는 차례로 세 곳의 수도원에서 원장직을 역임했다; 아마도 모스크바의 노보스파스스키 수도원에 머물던 시절, 그 당시 금욕적 수행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엄격한 금욕 정신으로 유명한 사로프 은둔원[1221] 과 긴밀한 관계가 형성된 것이 젊은 아르히만드리트 암브로시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 후 3년 동안 암브로시우스는 노브고로드 교구의 부주교(1816–1819)로 재직했으며, 그 후 펜자 교구를 독자적으로 관리했다. 그러나 행정 업무는 그의 취향에 맞지 않았고, 1825년에 그는 시노드에 은퇴를 허가해 달라는 청원을 제출했다.

암브로시우스는 키릴로-벨로제르스크 수도원에서 단 2년 동안만 은퇴 생활을 보냈는데, 그의 금욕적인 삶은 예전, 즉 수도원장직과 교구 관리 시절과 마찬가지로 은둔자의 삶 그 자체였다. 그는 하루 종일 초라하게 꾸며진 자신의 방에 갇혀 지냈으며, 방문객을 맞이하거나 수도사들과 대화하는 것을 꺼렸다. 그의 식사는 검소하여, 종종 하루 종일 프로스포라 한 조각만 먹고 조리된 음식은 손도 대지 않았다. 자신의 돈(주교 연금)은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었다. 그가 받은 편지들은 봉인된 채로 방 문턱에 놓여 있었지만, 나중에 그의 시종이 증언했듯이, 그 편지들에 대한 답장은 마치 그 수행자가 직접 읽은 것처럼 정성스럽게 쓰여 있었다. 오직 밤이 되어서야 그는 방을 나와 새벽이 될 때까지 두 손을 높이 든 채 교회 문 앞에 서 있었다. 1,000킬로미터 떨어진 사로프 숲에서(그들은 동시대인이었다) 세라핌 장로도 똑같이 행했으며, – 여름이든 가장 혹독한 겨울 추위든 상관없이 침묵의 기도를 드리며 서 있었다. 1827년 12월 27일, 이 수행자는 주교의 품위를 지닌 채 천국으로 떠나갔는데,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온 마음과 영혼을 다해 그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세상을 등진 그는 모든 근심과 걱정을 뒤로 한 채 마치 시간 밖에서 사는 듯했다. 그는 장로가 아니었으며, 오직 내적 완성과 개인적인 구원을 추구하는 동방 교회의 수행자들 중 한 명이었다.

예레미야 주교(솔로비예프; 1799–1884)는 젊은 시절부터 금욕적인 삶에 마음이 기울어 있었으나, 겸손한 마음으로 비록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그에게 정해진 삶의 길을 걸어갔다. 그는 세브스크의 신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그곳에서 그리스어를 가르쳤으나, 갑자기 직장을 그만두고 브랸스크 근처의 페체르스키 수도원으로 수련자로 들어갔는데, 그곳에서 가축을 돌봐야 했다. 1823년에 그는 수도 서원을 받았다. 그러나 신학교 교장이자 훗날 유명한 설교자가 된 인노켄티(보리소프) 대주교는 그를 설득하여 신학 아카데미에 입학하게 했다. 아카데미에서 3년간 수학한 예레미야는 같은 학년 학생들 중 누구보다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나, 갑자기 시험에 출석하지 않았다. 그는 석사 학위를 받지 않기 위해 그렇게 했는데, 그에게 있어 석사 학위를 취득하려는 열망은 수도자의 겸손과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카데미는 나중에 시험 없이 그에게 석사 학위를 수여했다. 그 후 몇 년간(1827–1841) 그는 교편을 잡아야 했으며, 주교 서품을 받은 후에는 여러 교구를 관할했는데, 그중 마지막은 니즈니노브고로드 교구(1850–1857)였다. 주교로서의 사역은 예레미야에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본성상 그는 시노달 교회의 제한된 정신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이 사역은 그에게 슬픔과 갈등으로 가득 찬 시간이었다. 1857년, 그는 암브로시우스 주교와 마찬가지로 주교좌를 떠나 수도원으로 들어갔으며, 그곳에서 대스키마를 입회(1861)하고 남은 생애(† 1884)를 수도원 독방에서 보냈다[1222] .

그 외에도 몇 명의 인물을 언급할 가치가 있다: 멜레티오스(레온토비치; 1784–1840), 하르키우 대주교(1835–1840)로, 자신의 교구에서 지극한 존경을 받았던 인물; 야코프(베체르코프; 1792–1852), 니즈니노브고로드 대주교(1847–1850)로, 니카노르 브로브코비치의 말에 따르면 “단식으로 인한 쇠약으로 확실히 사망했다”; 안토니(암피테아트로프), 카잔 대주교(1866–1879)[1223] .

우리는 이러한 사례들을 제시함으로써, 교육 및 행정 활동 그 자체가 개인 생활에서 수도 서원을 철저히 준수하는 데 있어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이 아니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물론, 세속에서 그토록 책임감 있고 높은 직책을 수행하면서도 개인 생활에서는 세속을 초월하기 위해서는 영적인 침착함과 강인한 성품이 필요했다. 19세기 주교들의 전기와 활동을 살펴보면, 세기 전반과 후반의 주교들 사이에 큰 차이가 드러난다. 세기 전반에 살았던 주교들은 세기 후반의 주교들보다 더 독특하고 강인한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교회 생활의 심장부로 점점 더 깊이 스며들던 ‘시노달 정신’으로 인해 고통을 겪었지만, 겉으로 반대 의사를 드러내지 않고, 그에 자신의 영적 힘을 낭비하기를 원치 않았기에, 그 힘을 개인적인 수양에 쏟았다. 여기서 무엇보다 먼저 두 명의 저명한 성직자이자 동시대인인 필라레트(드로즈도프) 모스크바 대주교(1821–1867)와 필라레트 암피테아트로프 키예프 대주교(1837–1857)의 이름을 언급해야 한다.

46년 동안 모스크바 교구를 이끌었던 필라레트(1782–1867) 대주교[1224] 는 거의 반세기 동안 러시아 교회 생활의 중심축이었으며; 그는 모든 저술에 스며든 견해와 정신이 사후에도 교회 생활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 고위 성직자였으며, 강인한 성격과 막대한 영적 힘과 에너지를 지닌 인물로, 이러한 자질 덕분에 자신의 영혼 속 내재된 비극성을 감추는 법을 알았던 사람이었다. 겉으로 보아 필라레트(드로즈도프)는 공식 교회의 기둥이었으며, 놀랍게도 진정한 교회 정신의 기둥이기도 했다. 이 인물에 대한 상반된 평가는 그가 내면의 비극을 감추는 데 능숙했음을 보여준다. 그의 내성적이고 절제된 성격, 그리고 자신의 진정한 견해를 발언에 드러내지 않는 놀라운 능력은, 내면의 비극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가 교회 생활의 중심에 설 수 있게 해주었으며, 그것도 니콜라이 1세 황제 시대에 말이다! 필라레트의 가장 충실한 제자이자 숭배자였던 사바 티호미로프 대주교(1819–1896)는 그와 특히 가까웠고 그 누구보다도 그에게 자주 드나들었는데, 극도로 꼼꼼하게 집필된 『내 생애의 연대기』에서 필라레트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전하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내용은 필라레트의 영혼을 드러내기보다는 이 성직자의 외적인 면모를 묘사하는 데 더 기여하고 있다. 물론 사바는 기록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겠지만 말이다. 게다가 사바는 필라레트의 행정 활동에 관한 방대한 자료를 추가로 출판했는데, 이는 지금까지도 연구자들에 의해 완전히 해석되지 않은 상태이다. 이 책들 의 페이지들 속에서 우리 앞에 나타나는 것은 마치 하늘의 주인과 땅의 주인, 두 주인을 섬기는 종과도 같았던 교회의 공작이다. 그렇다. 필라레트는 종종 국가와 교회 간의 관계에 대해 비판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았으나, 항상 일정한 한계 내에서만 그랬다. 시노달 시대의 그 어떤 다른 고위 성직자도 필라레트만큼 러시아의 국가·정치 체제와 절대군주제를 종교적으로 정당화하고 옹호하기 위해 이토록 많은 노력을 기울인 이는 없었다; 교회가 국가에 봉사하는 것은 그의 교회적 견해와 모순되지 않았는데, 그 견해는 아마도 요시프 볼로츠키[1225] 의 보수적 견해와 연관 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막강한 권위를 모두 동원하여 시급한 개혁을 제안하지는 않았다. 니콜라이가 서거한 후 러시아 교회의 삶에 점차 새로운 정신, 즉 ‘60년대 정신’이 스며들기 시작했을 때, 필라레트는 비록 스스로 신중하게 몇 가지 제안을 하기는 했으나(실질적인 개혁이라기보다는 교회 운영 방식에 관한 것이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신에 단호히 반대했다[1226] .

아마도 우리의 평가는 비판적인 반론을 불러일으킬 것이지만, 우리가 필라레트(드로즈도프)의 내면 세계를 어느 정도 파악한 바에 따르면, 이 성직자는 당대 국가 주도의 교회 체제에 대한 단호한 반대자가 아니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는 단지 그 틀 안에서 교회를 위한 더 큰 여지를 확보하고자 했을 뿐, 국가가 교회를 보호하는 권한을 침해하지 않으면서, 교회 생활에서 일부 비정상적인 현상들을 배제함으로써 여전히 국가의 보호 아래 머물러야 했던 교회를 영적으로 강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분명히 필라레트의 이러한 견해는 단지 임시방편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니콜라이 황제가 ‘현명한 필라레트’라고 불렀던 그는 교회의 영적 힘이 국가와 자유를 놓고 싸우기에는 너무 약하다고 여겼는데, 사실 그의 동시대인 중 누구도 필라레트 자신보다 교회의 내적 삶을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필라레트의 시대는 정부가 후견권을 이용해 교회의 내적 삶에 더욱 깊이 침투하려 했던 시기였으며, 앞서 언급한 모든 내용에도 불구하고, 바로 필라레트가 정부의 이러한 시도를 부분적으로 저지해 낸 주역이었다. 다만 그가 국가와 교회의 ‘교향곡’ 속에서 불협화음이 발생할 수 없다고 판단한 영역에 한해서만 가능했던 일이었다.

또 다른 필라레트, 키예프 대주교(1779–1857, 1837–1857)는 니콜라이 황제가 ‘경건한 필라레트’라고 불렀던 인물로, 그의 사상은 필라레트 드로즈도프와 가까웠으며 역시 보수주의자였으나, 그의 보수주의는 모스크바의 필라레트의 보수주의와는 다른 근원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러시아의 국교 체제에 대해 타협할 수 없는 태도를 보였으며, 자신이 구성원이었던 성직자회의 회의에 출석하지 않음으로써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나 교회 내에서 그의 권위는 워낙 막강하여 정부는 이러한 방해 행위를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교회 계층의 위엄과 개인적인 겸손을 조화롭게 겸비한 엄격한 금욕주의자였던 그는, 필라레트 드로즈도프와 마찬가지로 과감한 개혁을 지지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문제에 있어서는 서로 정반대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필라레트(드로즈도프)는 성서를 교회 슬라브어에서 러시아어로 번역하는 것을 지지했는데, 이는 니콜라이 1세 정부가 반대한 반면, 키예프의 필라레트는 그러한 번역에 단호히 반대했다[1227] . 수도 생활에 대한 그들의 견해도 달랐다. 모스크바의 필라레트는 스타르체 제도의 장려에 호의적이지 않았으며, 심지어 스타르체 제도를 교회의 위계적 질서에 대한 일종의 침해로 간주하여 부분적으로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고도 할 수 있다. 반면 키예프의 필라레트는 이미 칼루가 교구를 관할하던 시절(1819–1825)부터, 자신의 관할 하에 있던 옵티나 은수원에 스타르체 제도가 깊이 뿌리내리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이후에도 그는 항상 스타르체들에게 호의적이고 보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의 문학적 유산은 분량 면에서 필라레트 드로즈도프의 유산과 비교할 수조차 없지만, 저자의 성격적 특징은 모스크바의 필라레트의 편지보다 그의 편지에서 더 뚜렷하고 명확하게 드러난다. ‘경건한 필라레트’는 모스크바의 필라레트만큼 웅변적이지도, 논리적으로 일관된 추론을 펼치지도 못했으며, 그의 편지는 간결하고 하지만 겸손과 심오한 사색, 영적 힘, 그리고 놀라운 소박함으로 가득 차 있다. 그의 편지를 접하는 독자는 키예프의 필라레트가 교회 권력의 공식적인 기풍과는 얼마나 거리가 멀었는지, 국가적 교회 체제로 인해 얼마나 고통받았는지를 즉시 알아차리게 되지만, 그는 그 고통을 금욕적인 겸손으로 견뎌냈다[1228] .

모스크바의 필라레트의 입장과 국가 교회 체제에 대한 그의 절제된 태도는 주교들에게 일정한 영향을 미쳤으며, 19세기 주교들의 두 번째이자 상당히 많은 수를 차지한 그룹은 부분적으로 바로 그의 교회 정책에서 교훈을 얻은 주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국가 교회 체제의 틀 안에서 행동할 줄 아는 주교들이었다. 그들 중 일부는 단순히 시노달 시대의 정신에 공개적으로 저항하지 않았을 뿐이지만, 다른 이들은 — 특히 K. P. 포베도노스체프[1229] 가 오버프로쿠로르로 재임하던 시기 및 그 이후 1917년까지 — 그 정신을 확고히 실천하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모든 시간과 힘을 빨아들이는 행정 활동에 전적으로 몰두하여, 자신의 영혼 구원을 돌볼 시간도 기회도 더 이상 남지 않았다. 이러한 유형의 주교들과 그들의 교구 신자들 사이의 유대는 미약하고 불안정했다. 니카노르 브로브코비치 대주교(1826–1890)는 그 자신도 이러한 경향에서 자유롭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어쩌면 그 대표자 중 한 명이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는 자신의 『전기적 기록』에서 1850~1870년대의 많은 주교들에 대해 서술하며, 그들의 활동이 어떤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는지, 그리고 주교들이 시노드뿐만 아니라 사회와 국민을 대하는 관계가 때때로 얼마나 비정상적이었는지를 보여준다[1230] .

이 주교 그룹에서는 많은 훌륭한 설교자들과 뛰어난 행정가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들을 모두 열거하기에는 본론에서 너무 멀리 벗어나게 될 것이다. 19세기 중반부터 이미 시행되다가, 이후 시노드 수석 검사관 K. P. 포베도노스체프 재임 시절에 완전히 의도적으로 이루어지게 된 주교들의 교구 간 빈번한 이동은 주교들의 다소 성공적인 활동을 극도로 방해했다. 주교들은 2~3년 동안 교구를 관장하다가 다른 교구로 전임되었는데, 종종 러시아의 정반대편으로 이동하게 되어 그곳의 지역적·민족적 여건이 이전 근무지와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성직자 및 신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을 틈이 없었고, 교구장직에 머무는 짧은 기간 동안 어떤 유익한 사업도 시작하고 완수할 수 없었다. 니카노르의 『수기』에는 시노드와 오버프로쿠로르가 만든 이러한 관리 체제 때문에, 개별 교구 주교들이 추진한 많은 훌륭하고 유익한 사업들이 미완으로 남거나 아예 무산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포베도노스체프 시대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도, 어느 정도 독립성을 보였거나 진실을 말한 주교들, 예를 들어 톰스크 주교 아가핏 (보스크레센스키; 1834–1841; † 1854)나 돈 대주교 요한(도브로즈라코프; 1847–1867; † 1872)처럼, 어느 정도 독립성을 보였거나 진실을 말한 주교는 은퇴할 수밖에 없었다[1231] . 특히 이르쿠츠크 대주교 이리네이 (네스테로비치; 1783–1864)의 운명이 특히 유명해졌는데, 그는 니콜라이 1세 치하에서 국가가 교회 생활에 개입한 희생양이 되어, 처음에는 심지어 정신 이상자로 선고받기도 했으며, 남은 생애를 수도원에서 은둔하며 보냈다[1232] .

세 번째 주교 그룹에는 수도복 차림의 학자였던 주교들을 포함시킬 수 있다. 그들의 운명 또한 항상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러시아 신학, 주로 교의학, 비교신학, 변증학 및 전례학은 니콜라이 1세 황제 시대,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그 이후에도 국가의 통제와 필라레트 대주교의 보수적인 견해로 인해 객관적인 학술 연구를 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이 글에서 이미 여러 번 언급된 니카노르 브로브코비치 대주교는 신학 분야에서 상당한 업적을 남긴 인물로, 신학 아카데미 재학 시절과 그 이후에 직면했던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는 그뿐만 아니라 그의 많은 동시대인들도 겪었던 일이었다. 그는 1950년대에 신학 아카데미에서는 민감한 문제들을 묵과하는 것이 관례였으며, 재능 있는 교수들은 종종 ‘위험한 학문’의 강의에서 배제되어 자신의 지식을 희생하고 그리스어나 기독교 고고학과 같은 ‘위험하지 않은’ 학문 분야에서 일해야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1233] . 니카노르의 『수기』는 50~60년대의 신학교 상황뿐만 아니라 학자 수도자들의 처지도 잘 보여줍니다. 시노달 시대에 대한 우리의 묘사를 보완하기 위해, 탐구심과 재능을 지녔음에도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한 두 인물의 이름을 더 언급하고자 합니다.

그중 한 명은 아르히만드리트 마카리 글루하레프(1792–1847)였다. 그는 타고난 재능과 히브리어 및 구약성경에 대한 탁월한 지식을 갖추고 있어 다방면에 걸친 학문적 활동을 펼칠 수 있었다. 그는 겸손과 사랑으로 가득 찬 열린 마음을 지녔으며, 동시에 성서를 러시아어로 번역한다는 하나의 분명한 목표를 향한 에너지와 열정을 겸비하고 있었다. 처음에 그는 수도 서원을 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신학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 배정받은 예카테리노슬라프 신학교의 교사가 되면서, 그는 이미 우리에게 잘 알려진 요브(포템킨) 주교와 요브의 측근이었던 몰다비아 출신의 몇몇 다른 수도사들과 친분을 쌓게 되었고, 이를 통해 장로 파이시(벨리치코프스키) 학파의 금욕적 정신을 접하게 되었다. 그는 수도 서원을 하고, 글린스카야 은둔지에서 필라레트 장로 곁에서 한동안 지내며 금욕주의 저작들을 연구했다. 그 후 그는 코스트로마 신학교의 학장이 되었다. 성경을 러시아어로 번역하여 출판하겠다는 그의 학술적 계획은 시노드의 승인을 얻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성경 번역 시도를 중단하라는 권고까지 받았다. 상처받고 분개한 그는 학장직을 사임하고 글린스카야 수도원으로 돌아갔다(1825). 그러나 마카리우스는 단순히 수도원에 들어가 관상적인 삶에 전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시베리아의 이교도 민족들 사이에서 선교 활동을 펼치겠다는 계획이 점차 구체화되고 있었다.

1829년 그는 시베리아로 떠났고, 1년 뒤인 1830년에 알타이 선교부를 설립하여 그곳에 온 힘을 쏟았다. 그의 선교 업적은 러시아 선교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에피소드 중 하나로 꼽힌다. 언어학적 지식과 언어 재능 덕분에 마카리우스는 원주민의 언어를 쉽게 익혔으며, 사전을 편찬하고 시편, 기도문, 마태복음, 세례 예식 순서 등을 현지 언어로 번역했다. 그는 알타이에서 14년 동안 지칠 줄 모르고 헌신적으로 활동했으나, 시노드 관료들로부터는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했으며, 그들은 선교 활동을 위해 매년 570루블이라는 터무니없이 적은 금액만을 지원해 주었다. 마카리우스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인상적인 수의 개종자를 확보하여 시노드에 눈부신 통계를 제시하려는 데 열중하지 않았으며, 기독교를 전파함에 있어 원주민들에게 압력을 가하거나 유혹하는 수단을 쓰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개종자의 수가 아니라, 교회의 새로운 자녀들에게 진정한 기독교적 계몽을 시키는 것이었다. 알타이에서도 그는 성경 번역 작업을 계속하며, 자신의 메모를 통해 시노드 에 번역의 필요성과 유용성을 설득하고자 했으나, 성공하지는 못했다. 영적으로 지치고 육체적 질병으로 고통받던 마카리우스는 1843년에 러시아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마지막 몇 년을 오를로프 교구의 수도원에서 보냈으며, 건강이 회복되면 예루살렘의 성지 순례를 떠나려 했으나, 1847년 5월 18일에 세상을 떠났다. “마카리우스는 그리스도 하나님의 진정한 종이었다”라고 모스크바 대주교 필라레트는 그의 사망 후 말했으나, 이 찬사는 너무 늦게 나온 것이었다. 재능 있는 학자이자 뛰어난 히브리어 학자, 엄격한 수도사는 이미 저 세상으로 떠난 뒤였으며, 그는 끊임없는 학문적 노력보다는 시노달 제도의 희생양으로서 훨씬 더 큰 고통을 겪은 인물이었다. 그의 운명은 이 체제가 교회의 이익을 위해 자신들이 처분할 수 있는 역량을 얼마나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는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가 될 수 있다. 굳어지고 경직된 정신을 가진 이 체제는 종종 그 역량을 단순히 파멸로 몰아넣곤 했다[1234] .

『아르히만드리트 테오도르 부하레프의 역사』는 러시아가 영적 역사상 지극히 극적인 시기를 겪던 1860년대에 펼쳐졌다. 당시 교회 생활, 더 정확히 말해 성직자 및 교회 계층의 일부는 정치적 사상의 소용돌이와 마주하게 되었다.

테오도르 부하레프(1824–1871)는 아직 학생일 때부터 교수들의 주목을 받았다. 1846년 그는 모스크바 신학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곧바로 수도사가 되었다; 이후 그는 자신의 병약함과 영혼을 가다듬기 위해서, 그리고 신학 연구에 전적으로 헌신하기 위해 그렇게 했다고 공개적으로 고백했다.

그가 모스크바 아카데미에서 진행한 주해학 강의는 학생들에게 큰 열광을 불러일으켰으며, 이 강의의 심오함과 형상성, 그리고 (그의 전임 교수들이 보였던) 스콜라적 기법을 배제한 강의 방식 덕분에 이 젊은 학자는 학계 생활에 신선한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었다. 스콜라주의적 정신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았던 미트로폴리트 필라레트조차도 처음에는 테오도르를 호의적으로 대했다. 복음서와 사도 시대를 생생하고 형상적으로 해석한 점은 부하레프의 저서 『성 사도 바울에 관한 몇 가지 논문』(1861년 출간)에서도 두드러지는데, 이 책에는 구약과 신약의 심도 있는 대조가 담겨 있다. 한때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고골의 유명한 『친구들과의 서신 중에서』는 부하레프에게 매우 깊은 인상을 남겼다. 고골을 옹호하기 위해 그는 『세 통의 편지』(1848)라는 글을 썼으나, 이를 필라레트 대주교에게 보여주었으나 대주교는 이를 단호히 반대했다. (『세 통의 편지』는 1861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출판되었다.) 한편, 이 젊은 강사는 아카데미에서 총장과 관계에 있어 어려움과 마찰을 겪게 되었는데, 이는 주로 그의 강의에 포함된 몇 가지 설명이 지나치게 ‘자유주의적’이고 ‘개신교적’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하레바는 아르히만드리트(대수도원장)로 승진하여 카잔 신학 아카데미의 덜 위험한 교리 신학 교수직으로 전임되었다.

카잔에서의 강의는 다시 한번 학생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열광을 자아냈는데, 이곳에서도 부하레프는 새로운 방법을 선보이고 새로운 평가를 제시하며 완전히 새로운 과학적·비평적 접근 방식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이다. 그의 설교는 사회에서 그에게 큰 인기를 안겨주었다. 종교적 문제들이 활발히 논의되던 ‘테오도르 신부님의 저녁 모임’에서 그는 주 연사로 나섰으며, 대화 속에서 명백한 신비주의 성향을 드러냈는데, 이 모임은 카잔 사회의 영적 생활 중심지가 되었고, 이는 다시 한번 당국의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부하레프는 이번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종교 검열 위원회로 전근되었는데, 당국은 그곳에서 사람을 영적으로 고갈시키는 업무가 그의 과도한 혈기 과다를 치유해 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새로운 부임지에서 부하레프는 적을 하나 얻게 되었는데, 바로 잡지 『가정 대화』의 발행인 V. I. 아스코첸스키였다. 그는 엄격한 종교적 보수주의의 화신이자, 부하레프가 훗날 그를 묘사한 대로 “음울한 광신자”였다. 아스코첸스키의 일부 기사가 금지되자, 그는 부하레프에 대한 끝없는 증오를 품게 되었다. 아스코첸스키가 부하레프를 고발하는 내용의 편지를 모스크바 아카데미 학술위원회에 보냈는데, 그 문체가 너무나 거칠었기에 학술위원회는 이 편지를 부하레프에게 전달하며 아스코첸스키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것을 권고했으나, 부하레프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1860년에 그의 저서 『현대 사회와 정교회의 관계에 관하여』가 출간되었는데, 이는 기독교 교리의 기초에 입각하여 기독교와 사회·정치적 삶을 화해시킴으로써 사회적 관계를 조정하려는 시도였다. 저자의 일부 논지는 오늘날의 독자에게도 여전히 흥미를 잃지 않았으며, 이 책에서는 당시 러시아 사회의 개혁 필요성에 대한 지배적인 견해에 따라 ‘기독교 사회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첫걸음을 내디뎠다.[1235] . 부하레프의 책은 아스코첸스키의 비판과 비난을 불러일으켰는데, 그는 저자를 ‘이단자’, ‘무신론자’라고 칭하며 예의의 한계를 완전히 넘어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하레프는 검열관으로서 이 비판문을 출판하도록 허용했고, 자신의 반박문은 잡지 『조국의 아들』에 게재하여 기독교의 사회적 과제에 대한 자신의 논리를 다시 한번 제시했다. 그러나 아스코첸스키의 음모는 성과를 거두었다. 아르히만드리트 부하레프는 검열관 직위를 잃고 페레야슬라프의 니키츠키 수도원으로 전근되었다. 그가 수년간 심혈을 기울여 집필한 신작 『묵시록』은 검열 당국에 의해 출판이 허용되지 않았고, 아스코첸스키의 공세는 계속되었다. 특히 육체적 질병과 정신적 절망감으로 인해 더욱 격화된 치열한 내적 갈등을 겪던 아키만드리트 테오도르는 수도사 직분을 내려놓기로 결심했다. 이는 1863년 여름에 일어났다. 그는 수도사 서약에 따라 복종해야만 했던 대상들에 대해 내면적으로 온 마음을 다해 반발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수도사로 남아 있을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을 그 결정의 근거로 들었다.

이 결정은 그의 인격에 깃든 비극성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생계 수단이 없었고, 많은 이에게 경멸받으며, 소수의 친구들로부터만 도움을 받으며 부하레프는 7년을 더 살았다. 1863년 직후 그가 취한 또 다른 행동, 즉 결혼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가 직장을 구하려는 모든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는 잡지에 실린 짧은 기사에 대한 빈약한 원고료와 소수의 지인들이 주는 돈으로 생계를 이어갔으며, 필라레트 대주교도 몇 차례 몰래 그에게 돈을 보내주었다. 1871년, 부하레프는 오랜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1865년과 1866년에 그는 두 권의 책을 더 출간하는 데 성공했는데, 이 책들에서는 그의 초기 저작들과 동일한 주제들이 다루어지고 있다; 이 책들 중 두 번째인 『나의 변론』(1866)은 보수 진영과 자유주의 진영 양쪽에서 제기된 기독교의 사회적 과제에 대한 그의 견해에 대한 비판에 답하고자 한 마지막 시도였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가해진 매우 다양하고 종종 근거 없는 비난들에 대해 자신을 변호하려는 시도이기도 했다[1236] . 부하레프는 교회 내 보수주의의 희생자일 뿐만 아니라, 자유주의 진영에서도 진정한 이해를 얻지 못했다. 수도 서원을 벗은 후 이 진영에서 지지자들을 찾아 그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했던 그의 희망은 헛된 것으로 드러났다.

부하레프에게 수계는 영혼을 뒤흔드는 사건이 되지 못했다. 다른 학자 수도사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수계는 과학적 활동을 위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기보다는 오히려 비극적인 내적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사생활은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의 불건전한 분위기 속에서 흘러갔는데, 바로 그 시기는 러시아 보수주의가 ‘개혁의 시대’라는 정신에 맞서 교회 및 국가·정치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자신들의 원칙을 확립하려 애쓰던 때였다. 이 보수주의의 대립축인 60년대의 자유주의는, 교회에 적대적이거나 심지어 노골적으로 무신론적인 경향에서 자유롭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부하레프의 견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들에게 부하레프의 저술에서 느껴지는 신비주의는 전혀 용납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다소 의심스럽기까지 했는데, 이는 저자가 자유주의자들에게는 낯선 다른 세계관에 속해 있음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은 옳았다. 부하레프는 시노달 제도의 경직된 정신 때문에 교회권에서 배제되었는데, 그 이유는 단지 다른 이들—예를 들어 훗날 대주교가 된 니카노르 브로브코비치처럼—이 오랜 내적 갈등 끝에 마음속에만 간직했던 의구심을, 부하레프는 감히 입 밖으로 내뱉었기 때문이었다.

고등 신학교들 역시 시대의 흐름이 미치는 영향을 직접 경험했다. 1960년대는 학생과 교수진 사이에서 수도자 서원 수가 감소한 것이 특징이다. 과거 상트페테르부르크 아카데미의 총장으로 미트로폴리트 필라레트 드로즈도프나 아르히만드리트 그리고리 포스트니코프(1856–1860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미트로폴리트)가 재임하던 시절, 그들은 학생들 사이에서 수도 서원을 장려하는 주된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총장이나 교수 측에서 학자 수도자 생활을 장려하기 위해 취한 조치가 거의 없었다. 이 그룹에 속한 조교수와 교수의 수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주교직 자리를 채울 적임자를 선발하는 데조차 어려움이 생겼다.

1970~80년대에는 이 결핍이 미망인 사제들이 수도 서원을 받아 히에로모나흐가 되고, 이후 아르히만드리트가 되어 매우 빠르게 주교로 서품됨으로써 메워졌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는 사별한 사제 출신 주교의 수가 매우 많았다. 사별한 사제들이 이전에도 주교 서품을 받을 수는 있었으나, 이는 드문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주교의 거의 절반이 본당 사제로서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는 주교단에 몇 가지 새로운 특징을 부여했는데, 이는 교회적 견해의 차원이 아니라—본당 성직자 출신 주교들은 수도사 출신 주교들보다 시노달 체제에 훨씬 더 충실했기 때문이다—주로 교구 관리 분야에서 나타난 것이었다. 본당 성직자들의 삶을 잘 알고 있던 그들은 이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고, 그들의 필요를 더 세심하게 돌보았다. 이러한 상황의 결과는 전적으로 긍정적이었으며, 역사학자로서는 아마도 이 주제에 대한 별도의 연구를 진행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 것이다[1237] .

1880년대 후반, 학문적 수도 생활을 옹호하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다. 그는 젊고 재능 있으며, 총명하고 활기찬 아르히만드리트 안토니 크라포비츠키(1863–1936)였다[1238] . 반세기 동안 러시아 교회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인물로, 종종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도 했지만 때로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시노달 체제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 체제를 지지하기도 했다; 수도 생활을 숭상했으나, 수도 생활이 관조적인 삶에 전념해서는 안 되며, 러시아의 교회·정치 생활에 적극적이고 실질적으로 영향을 미쳐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주교단의 독재적 통치를 옹호했으며, 이를 이끌어야 할 인물은 강력한 총대주교여야 한다고 보았다. 러시아 정교회 역사에서 그가 가장 사랑한 인물이 총대주교 니콘[1239] 이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안토니의 간절한 소망은 총대주교좌의 복원이었다; 그는 총대주교제가 러시아 군주제의 주된 버팀목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1240] . 안토니 크라포비츠키는 차르와 총대주교의 일치 속에서 러시아와 러시아 정교회에 있어 유일하게 가능한 국가·교회·정치적 길을 보았다. 이처럼 그의 견해를 살펴보면, ‘모스크바는 제3의 로마’라는 사상과 ‘새로운 니콘’에 대한 꿈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안토니 크라포비츠키는 교회 생활에서 영향력 있는 제도로서 수도 생활을 장려했으나, 무엇보다도 주로 학문적 수도 생활을 후원했다. 그 자신도 아주 일찍 수도 서원을 했다. 그는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으며(1863), 체육관을 졸업한 후 상트페테르부르크 신학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불과 18세의 나이에 학위를 받았다(1881). 4년 후 그는 수도자가 되었고(1885), 몇 달 뒤(22세 때) 사제 수도사로 서품받았으며; 홀름 신학교에서 교편을 잡기 시작했으며, 1887년 철학 박사 학위 논문을 발표한 후, 이에로모나흐 안토니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신학 아카데미의 구약성서학과 부교수로 임명되었다[1241] . 27세의 나이에 그는 아르히만드리트이자 상트페테르부르크 신학 세미나리의 학장이 되었으나, 이 직책을 단 4개월 동안만 수행한 뒤 모스크바 신학 아카데미 학장직으로 전임되었다(1890). 1897년, 34세의 나이에 그는 주교로 서품되어 카잔 교구의 부주교로 임명되었으며, 총장 직책은 그대로 유지했다. 3년 후(1900년) 그는 우파에서 독립된 주교좌를 맡게 되었다(1900–1902).

조교수, 교수, 그리고 세 아카데미의 학장을 역임한 안토니는 뛰어난 재능과 탁월한 웅변으로 학생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어디서나 청년들이 수도 서원을 하도록 독려했다. 그 당시인 1880년대에는 학계 청년들이 수도 생활에 대해 극도로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수도사가 되기로 결심한 학생들의 수는 극히 적었다[1242] . 젊은 아르히만드리트이자 주교였던 그의 열정적인 선전은 세 아카데미 모두에서 성공을 거두었고, 머지않아 학생과 교수진 사이에서 출가하는 이들의 수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 안토니는 『학자 수도생활에 관하여』(1889)라는 소책자를 출판했는데, 이는 학생들 사이에서 널리 유포되었다. 그의 조언에 따라, 미망인 사제 출신으로 카잔에서 안토니에게 수도자 서품을 받은 젊은 아르히만드리트 인노켄티(벨야예프)는 『수도자 서품에 관하여』[1243] 라는 방대한 저서를 집필했다. 수도생활 의 후원자 중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대주교 안토니(바드코프스키; 1898–1912)도 있었는데,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아카데미 총장 재임 시절(1887–88)에 수많은 학생들을 수도생활로 이끌었으며, 마지막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 아카데미의 신임 총장인 세르기 주교 (스트라고로드스키; 1901–1903) 주교가 있었는데, 그는 훗날 모스크바 총대주교(† 1944)가 되었다.

안토니 크라포비츠키의 활동은 우리를 1917년까지 이어진 러시아 교회의 학자 수도원 및 주교단의 마지막 시기로, 말하자면 이미 우리 시대까지 이르게 하므로, 이 막바지 시기에 대한 객관적인 자료는 너무나 부족하다; 만약 결론적으로 이 두 교회 제도의 본질에 대해 종합적인 결론을 내리려 한다면, 학자 수도사들과 주교들 모두 스스로를 수도 생활의 진정한 대표자로 여겼고 러시아 대중도 매우 자주 그들을 그렇게 인식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둘 다 진정한 러시아 수도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오해의 원인은 주교좌를 채울 후보자가 필요했던 교회 당국이, 수도원 형제들 중에서 이러한 후보자를 찾을 수 있을 만큼 수도 생활의 수준을 높일 수 있을 것이라고 더 이상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세기의 교회 생활은 물론 16세기보다 훨씬 더 복잡했으며, 주교단은 교육 수준 면에서 국가와 국민의 문화적 수준에 부합해야 했다. 학자 수도자 계급의 창설은 그 발전 방향이 달랐더라면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도 있었겠지만, 당시 교회는 신학교에서 가르칠 교양 있는 인재들도 필요로 하고 있었다. 학자 수도자 계층은 이 두 가지 목적 모두를 수행해야만 했는데, 이는 19세기 초 교육적 필요와 러시아 교회 운영을 위해 학자 수도자 계층의 형성을 장려하기 시작한 필라레트 대주교가 이미 구상했던 바와 같았다. 그러나 그의 계획이 실제로 실행되면서, 학자 수도자 집단과 그들 중에서 배출된 주교단은 사실상 러시아 수도원사의 흐름에서 벗어나게 되었다[1244] .

 

 

제15장. 18~19세기의 스타르체스트보와 금욕주의

 

1. 스타르체스트의 기원과 그 본질

지금까지의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러시아 수도 생활의 발전은 그 기원에서 19세기 말까지 마찰과 복잡함 없이 진행되지 않았다. 이러한 발전 과정의 어려움은, 수도원 거주자들이 수도원 벽 밖에서 사회·자선 활동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던 시기조차도 수도원 생활이 끊임없이 세속화의 위험에 직면해 있었다는 점에 있었다. 러시아 정교회에서 수도원은, 우리가 알고 있듯이, 결코 민중의 삶으로부터 완전히 격리될 수 없었다. 처음에는 그들이 국가의 문화적 중심지였기 때문이었고, 이후 16세기 초부터는 그 무렵 이미 국가의 정치적·경제적 삶의 구조 속에 깊이 뿌리내리게 되어, 이로 인해 세속화의 과정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비록 이 과정이 상당히 진전되어 수도원 생활의 심층까지 깊이 스며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도 생활의 목적과 의미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돌이킬 수 없이 상실되지는 않았다. 어느 시점에 이르러 러시아 수도 생활을 내부에서부터 다시 되살리려는 강력한 열망이 솟아났으며, 이 부흥의 영적 원천은 동방 교회의 금욕적·신비적 전통 이 되어야 했다. 이를 추구했던 사람들은 위에서 내려오는 수도원 개혁 계획을 꾸미지 않았으며, 오히려 수도 생활의 환경 속에서 금욕적·신비적 정신을 되살리는 길을 통해 수도 생활의 영적 쇄신을 모색했다. 18세기 마지막 25년에서 1917년에 이르는 러시아 장로제의 역사는 이러한 열망이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세속화 과정은 수도 생활의 건전한 힘을 파괴하지 못했으며, 이를 증명하는 것은 장로 제도뿐만이 아니다. 장로들의 영적 영향권 밖에서도 진정한 수행의 사례들이 많이 드러났는데, 이는 기독교 금욕주의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완전히 왜곡되지는 않았다는 또 하나의 증거가 될 수 있다.

수많은 진정한 기독교 수행자들을 키워낸 장로 제도와, 장로들의 영적 영향권 밖에서 펼쳐진 금욕주의는, 생기가 없고 암울했던 시노달 시대의 분위기를 밝히고 따뜻하게 해주었다. 수도 생활의 열성가들과 그들의 동시대인들이 장로제에서 러시아 수도 생활의 지속적인 부흥과 번영에 대한 희망을 보았음은 분명하며, 그 희망은 부분적으로만 실현되었다.

우리는 이미 이전에 『장로들의 삶과 가르침』[]이라는 책에서 장로제에 대해 다룬 바 있으며, 그곳에서 특히 우리가 보기에 탁월한 장로들의 사례를 통해 장로제의 성격과 본질, 주요 특징, 그리고 세상에 미치는 영향의 특이점을 규명하고자 시도했다. 본 논문에서는 러시아 수도 생활의 전반적인 역사와 관련하여, 스승 제도의 간략한 역사[1245] 도 소개하고자 한다.

아폰 산과 다른 정교회 수도원에서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 장로 제도는 예로부터 동방 교회의 수도원들에 존재해 왔다. 또한 이 제도는 교회 당국에 의해 위에서 강제로 도입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먼저 밝혀둘 필요가 있다. 이 제도는 초기 수도원에서 이미 등장하여 동방 고대 수도원들의 비옥한 토양 위에서 자라났습니다. 고대 기독교의 금욕적·신비주의적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스타르체스트보는 수도원 규율과 미래 수도자들의 영적 양육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고대 이집트 수도자들의 금욕적 업적을 전하는 문헌들을 통해 볼 때, 스타르체스트보는 이미 성 안토니우스 대성인(† 356) 시대에 이미 그곳에서 번성했으며,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수도자들을 영적으로 양육하는 주요 수단이었다. 그 본질에 있어, 성스러운 사막 수도자들의 행적록 형태로 편찬된 고대 문헌들이 전하는 스승의 지도(스타르체스토)는 단순히 외적인 수도원 규율을 강화하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또한 기독교적 완전함을 추구하는 젊은 수행자에게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른 그 완전함의 내적 의미를 밝혀주고, 그를 그 가르침의 정신 속에 뿌리내리게 하는 데에도 기여했다. 역사적으로 장로직의 중요성은 정교회 수도원에서 영적 지도자의 중요성이 커짐에 따라 함께 증가했습니다. 영적으로 경험이 풍부한 연로한 수도사는, 가장 오래된 금욕주의 저작들, 예를 들어 5세기 후반의 유물인 이집트 파테리콘 『이집트 교부들의 말씀』이나, 또 다른 파테리콘인 『Verba seniorum』 ["성부들의 말씀"]과 같은 다른 파테리콘에서 patѕr pneumatikТj 또는 pater spiritualis(영적 아버지)로 불렸던 영적으로 노련한 연로한 수도사는, 엄밀한 의미에서 사제나 영적 지도자[1246] 는 아니었다. 대부분의 경우 그는 사제가 아니라, 수도원장의 축복이나 허락을 받아 갓 입문한 젊은 수련자들의 영적 양육을 담당하고, 그들에게 수도원에서의 수행 생활의 의미를 설명해 주던 수도사였다. 작은 수도원에서는 대개 수도원장 자신이 영적 아버지 역할을 했다[1247] . 이러한 영적 지도자, 즉 우리가 ‘스타르체(старцев)’라고 부를 인물은—이 슬라브어 및 러시아어 단어가 자신의 영적 자녀들에게 있어 ‘pater spiritualis’가 무엇이었는지를 충분히 반영하기 때문이다—수련생들 스스로가 선출했으며, 이는 처음부터 종교적·목회적 관점에서 볼 때 당연한 그들의 권리로 여겨졌다[1248] . 일반적으로 장로들은 오늘날 ‘고해 신부’라는 단어의 의미에서 볼 때 수련자들의 고해 신부 역할도 겸했지만, 수련자들에게는 장로 외에도 종종 별도의 고해 신부, 즉 수도원 전체의 고해 신부가 있었는데, 그는 이 경우 초보 수도사들의 영적 성장 에 특별히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장로의 영적 양육을 방해하지 않고 수련자가 수도자의 길을 걷는 데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런 것을 추구하지도 않았다.

장로의 임무는 젊은 수도자의 영혼과 의지를 인도하는 데 있었다. 고대 금욕주의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이 임무는 지극히 중대한 책임이 따르는 것이었다. 장로 밑에서 수련하는 것은 초보 수도자에게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젊은 수도자를 제자로 받아들이는 장로 역시 자신에게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이었다. 스승의 역할은 어떤 의미에서 스승 자신과 그에게 맡겨진 수련생 모두를 위한 기독교적 완성을 위한 수단이었다. 교회의 가장 위대하고 엄격한 수행자 중 한 분인 성 에프레모 시린은 장로의 의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장로가 자신에게 맡겨진 영혼들에 대해 얼마나 큰 책임을 지고 있었는지, 그리고 수련자를 양육하는 일이 장로 자신의 영적 성장에 기여해야 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형제여, 네게 한 영혼이 맡겨졌으니,” 성 에프렘 시린은 그런 장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남자답게 허리를 동여매라. 네가 행하는 업적은 결코 작지 않기 때문이다. 너는 완전한 영혼들을 돌보는 일을 떠맡았다. 그러므로 매우 정신을 차려라. 이 일은 큰 주의를 요하니, 이를 소홀히 하지 마라. 오히려 우리의 상호 대하는 태도는 온전한 거룩함 속에 있어야 하리니, 우리의 부주의로 인해 원수가 부하의 순종을 악용하여 자기의 것을 심지 않도록 하라. 그리고 선배들은 후배들에게 모든 미덕의 본보기가 되어야 하니, 죄를 짓고자 하는 자들에게 빌미를 주지 않도록… 도시는 부분별로 세워지고, 통치에 따라 다툼이 생기기 마련이다. 경험이 없는 자는 숙련된 자처럼 활을 다룰 수 없고, 소년은 어른과 동등하게 달릴 수 없다. 소년에게 감당할 수 없는 짐을 지우면 그에게 해를 끼치게 될 것이며, 그의 교육을 소홀히 하면 그는 아무 쓸모도 없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초보자를 다스릴 때는 분별력을 가지고, 허영심 때문에 그에게 짐을 지우지 말고, 그의 영혼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답게, 네가 어떻게 네 윗사람에게 순종했는지 되새기며, 그와 같은 방식으로 조금씩 그에게 수행의 교훈을 전해라… 밤샘 기도와 일상적인 규칙을 마친 후, 네가 계속 깨어 있기를 원하지만 부하가 잠시 잠을 자고 싶어 한다면, 그에게 휴식을 허락하라.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어린이가 성인과 동등하게 달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가 육체적으로 연약하다면, 그를 외면하지 말고, 그와 함께 수고하며, 마치 자신의 밭에 좋은 식물을 심은 현명한 농부처럼 그에게 오래 참아 주라. 그러므로 온 힘을 다해 그의 몸을 하나님께 기쁘시게 하는 산 제물로 드리도록 하라. 그래야 우리도 사도가 “경건의 겉모습은 있으나 그 힘은 버린 자들”(딤전 3:5)이라고 비난하는 자들과 함께 정죄받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제자에게 모든 선한 일을 가르치라. “네가 합당한 자에게서 합당하지 않은 것을 분리하면, 너는 내 입과 같으리라”[1249] 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영적 양육의 의무는 장로에게, 그에게 맡겨진 수련자나 수도사와의 관계에서 큰 인내와 겸손을 요구했다.

장로들은 영적 지도력의 기초로 기독교 금욕주의의 요구 사항을 여겼으며, 이 전통을 꼼꼼히 지켜온 교회 교부들은 이론적 관점과 실천적 경험을 바탕으로 그 특별한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러한 영적 양육 체계에는 금욕적 경험과 정교회 신비주의가 결합되어 있다. 이처럼 장로 제도는 금욕적 수행과 신비적 관조—장로 제도가 등장할 당시 이미 1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이 두 가지 인격 완성의 길—과 가까워졌으며, 바로 장로 제도 덕분에 금욕주의와 신비주의가 하나의 영적 양육 체계로 통합되었다. 이렇게 하여 점차 ‘내적 수행’이라는 일정한 전통이 형성되었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정교회 금욕주의에서 영적 양육의 전체 체계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그 최고의 목표는 수행자의 신성화이며, 이는 하나님께로 향하는 길고도 힘든 상승을 전제로 한다. 정욕과 유혹으로부터의 정화는 이 상승의 첫 번째 단계이다. 오직 영적 수행, 체험적 실천과 관상, 지적인 기도를 통해 이 상승을 이룩함으로써만 수행자는 가장 높은 단계에 가까워지며, 그때 비로소 그에게 신비적 관상과 침묵의 영적 상태로 이끄는 문이 열리고, 이 단계에서 그는 하나님과의 연합과 신성화[1250] 에 이르게 된다. 동방 교회의 두 위대한 금욕주의자이자 신비주의자인 칼리스토스와 이그나티오스 크산포풀로스(4세기 말)는 그들의 저서 『소트니차』에서 정교회 수행자들의 영적 수행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1251] .

장로들이 수도원에 입문한 초보 수도사에게 가르치려 했던 가장 중요한 것은 ‘순종’이었으며, 초보 수도사가 자신의 장로에게 순종하는 것은 수도사가 영적 완성을 향한 사다리를 오르는 데 있어 첫 번째 필수 조건이다. 앞서 언급한 『아포프그마타(Apofqљgmata)』, 『베르바 시네오룸(Verba seniorum)』, 『라브사이크(Лавсаик)』 및 기타 고대 기독교 파테리콘에는 순종이 금욕적 양육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했는지에 대한 독자의 이해를 돕는 훌륭한 서사와 이야기들이 많이 담겨 있다.

성부들의 저술은 수도자의 금욕적 성숙에 있어 순종의 중요성에 대해 매우 상세히 다루고 있습니다.[1252] . 성 바실리오 대교부는 자신의 『규칙』에서 이 미덕에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며, 순종을 수도 생활의 기초이자 스승과 제자 간의 관계의 기초로 간주합니다. 동방 수도 생활의 영적 아버지가 된 위대한 카파도키아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제자가 스승에게 보이는 참되고 완전한 순종은, 스승의 뜻에 따라 무분별한 행동을 삼가고, 스승의 뜻 없이는 칭찬받을 만한 일조차 행하지 않는 데서 드러난다고 합니다. 그는 수도 생활을 막 시작한 수도사에게, 깊은 신중함과 오랜 숙고를 거쳐 흠 없이 삶의 길을 걷는 사람, 지혜로 하나님을 향한 수행자들을 이끌 줄 아는 사람, 성경의 의미를 깊이 통찰한 사람을 찾으려고 노력하라고 조언한다. 바실리우스 대교황의 말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에게 그분께 대한 완전한 헌신을 요구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법에 따라 자신의 요구를 정하는 영적 아버지는 영적 자녀들에게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순종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1253] .

바실리우스 대교황의 동시대인인 성 에프렘 시린(† 373)은 순종과 겸손 사이의 내적 연관성에 대해 기록하며, 수도자에게 겸손의 가장 위대한 본보기를 다음과 같이 제시합니다: “그와 반대로, 우리 모두의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스스로를 낮추시고, 심지어 죽음, 그것도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음을 마음속으로 떠올리라.” “내가 말하는 바를 깨달아라: 주님께서 네게 모든 것에 대한 분별력을 주시기를”[1254] . 성 요한(† 약 650년)의 『사다리』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이 성스러운 수행자가 순종에 얼마나 큰 의미를 부여했는지 알 것이다. 그에게 순종이란 “의지의 무덤”이자 “자발적인 죽음”이다[1255] .

수도자들의 양성과 자기 수양의 수단으로서의 순종 외에도, 정교회 금욕주의는 영적 완성을 위한 가장 중요한 수단이자 구원의 도구인 기도의 기술을 초보 수도자에게 가르치는 데에도 특별한 주의를 기울인다. 기도는 정욕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도록 돕는 것뿐만 아니라, 수행자의 영적 상승의 기초이자, 경험적 실천에서 신비적 관상으로 이끄는 ‘사다리’이기 때문이다.

이미 이집트의 교부들, 예를 들어 마카리우스는 그의 『영적 대화』에서 기독교인의 영적 삶에 있어 기도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금욕주의자이자 신비주의자인 니로 시나이(† 453)는 기도의 신비주의를 ‘영과 하나님 사이의 대화’로 제시하려는 시도를 최초로 했다. “완전한 자들에게는 지극히 높은 기도가 있다”고 그는 말한다. “이는 일종의 마음의 황홀경으로, 감각적인 것에서 온전히 벗어난 상태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의 탄식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상태를 보시는데, 그 마음은 마치 에 기록된 책처럼 펼쳐져 있으며, 소리 없는 형상으로 자신의 뜻을 표현한다. “그리하여 바울은 제3의 하늘까지 황홀경에 빠져, 자신이 육신 안에 있는지, 아니면 육신 밖에 있는지 알지 못하였다”[1256] .

요한 클리마코스는 기도하는 사람의 상태를 다음과 같은 말로 묘사한다: “기도는 그 본질상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머무르고 연합하는 것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평화의 확립, 하나님과의 화해, 눈물의 어머니이자 딸, 죄에 대한 속죄, 유혹을 건너는 다리, 슬픔으로부터 보호하는 성벽, 다툼을 꺾는 것… 기도할 때 말이 많으면 종종 마음을 산만하게 하고 환상으로 채우지만, 한 마디로 집중하는 기도는 대개 마음을 한데 모으게 한다.” 요한 사다리꾼의 저서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영혼의 기도적 황홀경에 대한 묘사를 발견한다. 이 신비주의 전통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 성 시메온 신학자(† 1022)의 『찬가』[1257] 이다.

말이 없거나 극소수의 말만 동반되는 기도는 이른바 ‘마음의 기도’()에서 그 표현을 찾았는데, 이 예술은 성 아폰 산의 수행자들과 수도사들이 각별한 정성을 다해 간직해 온 것으로, 그들은 이를 통해 금욕적 실천이자 영혼을 신비적으로 모으는 길로 여겼다[1258] . 후기 비잔틴 금욕주의와 신비주의의 가장 위대한 대표자 중 한 명인 그레고리 시나이테(† 1346)는 금욕적·신비주의적 내용을 담은 많은 저작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지적인 기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설명도 우리에게 남겨주었다. 그의 저서인 『침묵하는 자들을 위한 훈계』, 『침묵과 기도에 관하여』, 『침묵에 관하여』[1259] 는 수도자들, 특히 교회의 금욕적 전통을 잊지 않았던 장로들에게 매우 높이 평가받았다. 장로 제도가 번성했던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지적인 기도는 새로운 세대의 수도자들을 양육하고 영적으로 교육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수단이었다.

18세기 후반, 동방 정교회 수도원들, 심지어 아폰산에서도 금욕적·신비적 생활이 쇠퇴한 시기를 지나, 금욕과 신비주의의 부흥이 다시 시작되었는데, 이는 14세기 이시하스트들[1260] 에게서 마지막으로 특별한 위력을 발휘했던 바였다. 아폰 산의 그리스인 수도사 니코디모스 스비아고레츠(1748–1809)는 내적 수행에 관한 동방 교회의 교부들의 저술을 연구하는 데 많은 시간을 바쳤으며, 1782년 베네치아에서 그리스어로 『필로칼리아』[“자비 사랑”]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선집을 편찬했다[1261] . 니코디모스의 저작은 영적 지도에 영양을 공급해 온 자료들이 처음으로 하나의 선집에 모아졌다는 점에서 지대한 의미를 지녔다. 장로들에게 『자비』는 일종의 참고서나 지침서가 되었으며, 수도자들은 이제 위대한 수도 선조들로부터 훨씬 더 편리하게 배울 수 있게 되었고, 장로들이 자신의 수련생과 제자들에게 미치는 개인적인 영향력도 더욱 깊어졌다.

 

2. 고대 루스의 장로 제도

18~19세기의 장로제 역사를 살펴볼 때, 고대 루스와 모스크바 루스의 수도원에서 장로제가 존재했는지, 만약 존재했다면 어떤 형태로, 그리고 당시 어느 정도 널리 퍼져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즉시 제기된다. 고대 루스 수도원 생활사에 관한 우리의 이 소고에서는, 지난 두 세기 동안의 장로제 역사와 관련하여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 문제를 생략했다.

키예프 루스의 가장 중요한 수도원인 성 테오도시우스 페체르스크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의 삶을 살펴보아도, 우리는 그곳에서 신입 수도사들을 양성하기 위한 특별한 제도로서의 ‘스타르체스트보’의 어떠한 징후도 발견하지 못한다. 성 테오도시우스는 자신의 수도원 운영의 기초로, 성 안토니우스로부터 전수받은 비잔티움의 수도원 생활에 대한 지식과 콘스탄티노플에서 가져온 규칙서 를 삼았다. 안토니우스는 성 아파나시우스가 자신에게 반대하던 아토스 산 수도자들을 제압한 직후 아토스 산을 방문했는데, 당시 성산에서는 이전에 채택되었던 개별 거주 규율 대신 키노비아(공동 생활)가 도입된 상태였기 때문에, 성 테오도시우스에게 공동 생활은 수도 생활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여겨졌다. 그리고 성 테오도시우스가 도입한 규율은 초보 수도자들의 금욕적 양성을 위한 기초로 키노이아를 채택했다[1262] .

이 사실은 5~9세기 동방 교회에서 장로들이 공동 생활 수도원과 개별 생활 수도원 모두에서 초보 수도자들을 영적으로 지도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미 파코미우스 대성인의 키노비아에는 장로 제도가 존재했으며, 이후 팔레스타인의 성 사바 성인의 라브라에서는 키노비아와 이디오리트마가 결합된 규율을 따랐는데, 개별 거주 규율에 따라 생활하는 것은 장로들의 지도 하에 공동 생활 훈련을 마친 수도자들에게만 허용되었다. 보통 한 장로의 지도 아래에는 몇 명의 초보 수도사들[1263] 가 있었다. 성 아파나시우스(10세기)가 아폰 산의 개별 거주 수도원에 공동 생활 규율을 도입하기 위해 투쟁하던 시기에, 그곳에서 장로 제도가 유지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아폰 산의 수도원들과 콘스탄티노플에서는 장로 제도가 특별히 널리 퍼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성 테오도르 스투디트(† 826)가 “pater spiritualis”에 대해 말할 때, 그는 수도원의 원장을 염두에 두고 있다. 위대한 스투디트는 수도원 내의 모든 권력이 원장의 손에 집중되어 있는 형태의 공동 생활을 열렬히 옹호했다[1264] . 페체르스크 수도원에서 테오도시우스가 도입한 수도원 규율은, 앞서 언급했듯이, 스투디우스 규율의 특별한 개정판이다. 성 테오도르와 마찬가지로, 테오도시우스는 자신의 수도원에서 원장인 동시에 수도사들의 영적 지도자이기도 했다. 그는 또한 수도원의 영적 지도자였으며, 영적 지도자 역할은 수도자들을 양육하는 주요 수단이 되었다. 이때 그가 수도자들 사이에서 누렸던 막대한 권위를 기억해야 하는데, 덕분에 고대 이집트의 수도원들[1265] 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것처럼, 그에게서 원장직과 영적 지도자 역할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매우 성공적인 결합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성 테오도시우스의 활동에서 수도원장(이구멘)의 권위가 장로직을 뒷전으로 밀어낸 데에는, 부분적으로 루시에서 수도 생활이 시작된 초기 몇 세기 동안 수도원장의 권위를 최대한 높여 수도사들의 순종심을 심화시키는 것이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성스러운 창립자가 세상을 떠난 후 수도원의 삶을 기록한 『키예프-페체르스카야 파테리크』에도 장로제의 존재에 대한 어떠한 기록도 찾아볼 수 없다.

마찬가지로, 개별 거주 규율을 따르던 키예프 루스의 다른 수도원들에서도 장로제에 대한 어떠한 증거도 찾아볼 수 없다.

오직 키릴 투로프스키(12세기 말)의 저작에서야 비로소 장로제의 첫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저서 『검은 수도복 계급에 관한 이야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형제여, 너도 그리스도의 영을 지니고, 미덕으로 단장되며, 자신의 삶에서 순종을 실천하는, 무엇보다도 주님을 향한 사랑과, 수도원장에게 대한 순종(!), 형제들에게 대한 겸손을 지니고, 신성한 경전을 이해하며 이를 통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자를 찾으라. “그분께 자신을 바치라, 마치 할렙이 예수님께 그랬던 것처럼, 네 모든 뜻을 잘라내라”[1266] . 이 말들에서 우리는 고대 수행자들 사이에서 형성되었던 장로와 그의 제자 간의 관계에 대한 묘사를 볼 수 있다.

아브라아미 스몰렌스키(† 1221)와 주변 주민들(제2장 참조)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기는 더 어렵다. 아마도 그것은 장로로서의 권위보다는, 이 성스러운 수행자가 광범위한 대중에게 미친 막대한 영향력의 증거였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는 19세기에 옵티나 수도원의 장로들에서야 비로소 관찰될 수 있었던 현상이다. 아브라함에게 조언과 가르침을 구하던 수많은 사람들, 그의 신비주의 성향, 그의 학식(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 이 모든 것은 그 시대[1267] 에 있어 매우 드문 현상이었습니다.

고대 러시아의 ‘스타레츠’ 제도를 연구하는 이들에게 ‘스타레츠’라는 단어의 다의성은 상당한 난제이다. 무엇보다도 ‘스타레츠’라는 단어는 사제 서품을 받지 않은, 즉 예로모나흐가 아닌 연로한 수도사를 지칭했다. 또한 ‘소보르 스타레츠’라고 불리는 수도사들은 원장(나스티엘)과 함께 수도원을 운영했으며, 종종 ‘스타레츠’라는 칭호가 원장 본인에게도 부여되곤 했다. 마지막으로, ‘스타레츠’라고 불리는 수도사들 중에는 수련자들을 영적으로 지도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노브고로드 대주교 시메온(1417–1421)이 스네토고르스키 수도원에 보낸 서한은 매우 특징적인데, 이 서한에서 ‘스타레츠’라는 단어는 두 군데에서 우리 의미의 스타레츠, 즉 pater spiritualis(영적 아버지)를 가리키고, 다른 두 군데에서는 소보르 장로들[1268] 를 가리킨다.

러시아에서 수도 생활과 은둔 생활이 전성기를 맞이했던 시대의 가장 위대한 성인인 성 세르기이 라도네즈키의 행적과 위업을 살펴보면, 그는 말하자면 러시아 수도원 역사상 하나의 학파를 세운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그 학파의 대표자들은 그의 금욕적 사역을 이어받아 스스로 여러 수도원을 설립했습니다. 우리에게 특히 중요한 것은, 성 세르기우스와 그의 제자들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었는지 규명하는 것입니다. 트로이체-세르기예프 라브라에 ‘스탈체스트보(장로 제도)’가 존재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성 세르기우스와 그의 수도원에서 나온 수행자들의 행적 기록에는 이에 대한 어떠한 암시도 없다. 성 세르기우스는 공동 생활 규약에 기초하여 자신의 수도원을 운영했으며, 무엇보다도 그는 원장 겸 영적 지도자였다. 그의 수도원 운영 방식은 성 테오도시우스의 페체르스크 수도원을 연상시키지만, 성 세르기우스가 페체르스크 수도원의 생활 체계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고 있었다고 추측하기는 어렵다.[1269] . 적어도 트로이체-세르기예프 수도원에 장로 제도가 존재했다는 자료는 우리에게 전혀 없다.

14세기에는 많은 작은 수도원이 생겨났는데, 그중 일부는 볼가 강 이쪽 지역에서 세르기우스의 제자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볼가 강과 벨oye 호수 사이에 위치한 이 광활한 지역은 금욕적 수행의 새로운 무대가 되었다. 수도사들은 이곳에 두세 명씩 정착했는데, 종종 같은 수도원 출신이기도 했고, 때로는 길에서 만나 친분을 쌓아 긴밀한 형제애로 발전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에는 두세 개의 방으로 이루어졌던 그들의 스키트는, 특히 열성적인 수도사들이 교회를 세우는 데 성공했을 경우, 수도원으로 변모했다. 이 시기에 수도자들 사이, 주로 노련한 수도사와 초보 수도사들 사이에서 ‘스승-제자 관계’와 유사한 것이 생겨났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나, 이에 대해서는 여전히 신뢰할 만한 기록이 전혀 없다.

성 키릴 벨로제르스키(† 1427)도 엄격한 공동 생활을 바탕으로 자신의 수도원을 운영했으며, 수도원 내 모든 권력은 원장에게 있었다. 안드레이 모자이스키 공작에게 보낸 서신에서 그는 심지어 자신의 ‘영적 자녀들’인 안드레이 공작과, 자신이 원장직에 임명하려 했던 성직자 인노켄티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 어떤 종류의 영적 관계가 형성되었는지는 불분명하며, 성 키릴이 단지 공작의 영적 지도자였는지, 아니면 어떤 면에서 그의 스승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은 반면, 인노켄티와의 관계는 실제로 스승-제자 관계의 몇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1270] .

고대 루스에서 스승-제자 관계의 존재에 대한 더 많은 증거는 성 파벨 오브노르스키(† 1429)의 수도원에서 발견할 수 있다. 파벨은 성 세르기우스 라도네즈키 수도원의 수도사였다. 성 세르기우스의 축복을 받은 그는 볼가 강 너머의 황량한 숲으로 떠나 오브노라 강 근처에 정착했다. 얼마 후 그곳에 수도원이 세워졌고, 파벨이 그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이 수도원에서는 15세기에 『어떤 장로가 제자들에게 전한 수도 생활에 관한 가르침』이 집필되었는데, 이 문서는 17세기의 사본에 보존되어 있으며, 이는 아마도 당시 『가르침』이 실제로 실천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 저작에는 초보 수도자들을 위한 장로들의 지도 원칙이 서술되어 있으며, 수도원 생활과 장로들과의 관계에 대한 다양한 조언이 담겨 있고, 지적인 기도와 예수 기도[1271] 에 대해서도 언급되어 있다. 또한, 성 바울로의 행적에서 알 수 있듯이, 성자가 장로에게 순종을 요구했던 초보 수도사들 은 경험 많은 수도사들의 영적 지도에 맡겨졌습니다[1272] .

또한 제9장 4절에서 소개된 또 다른 저작인 『수련생과 초보 수도사들에게 전하는 장로의 가르침: 장로에게 순종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15세기 말부터 16세기 초까지 일부 수도원에서 수련생과 초보 수도사들의 양육을 장로들이 담당했음을 보여줍니다[1273] . 16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가는 「제자에게 전하는 가르침: 어떻게 주의 깊게 셀라에 머물 것인가」는 역시 장로직에 관한 금욕주의적 저작으로, 이 저작의 원본은 아마도 14세기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1274] 이 저작이 실제로 적용되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어쨌든 이집트와 시리아의 정교회 수도원에서 널리 퍼져 있던 고대의 장로 제도는 16세기 전반 모스크바의 수도원계에서도 알려져 있었다.[1275] 예를 들어, 모스크바 대주교 성 필립(† 1568)의 행적기에는 필립이 솔로베츠키 수도원에 입회한 후 몇 년 동안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수도사” 이오나[1276] 의 지도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장로직의 가장 뚜렷한 모습은 ‘위대한 장로’인 성 니라 소르스키(1433–1508)의 주변과 영적 제자들 사이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의 『규율』과 스키트 생활에 관한 『전승』을 통해, 그가 장로직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매우 잘 이해하고 있었으며, 스스로도 장로 역할을 수행했음을 알 수 있다[1277] . 15세기 말과 16세기 초에 속하는 여러 짧은 저작들을 바탕으로 볼 때, 자볼지야의 작은 스키트에서 수행하던 무려 세 ‘세대’에 걸친 장로들과 그들의 제자들을 아우르는 그의 학파가 존재했다고 말할 수 있다. 부록에서는 그들 간의 영적 관계도를 제시한다(표 VII). 닐 자신은 아마도 아폰 산에서 장로도의 기초를 배웠을 것이다. 그는 당시 저작들에서 ‘장로’로 불리며, 보아하니 실제로 장로였던 수도사 파이시이 야로슬라보프의 조언에 따라 그곳으로 순례를 떠났고, 닐은 그에게서 금욕적 수련을 받았다. 아마도 파이시이 야로슬라보프(† 1503년 직후)의 영향으로 닐은 성산으로 떠나고 싶은 소망을 품게 되었을 것이다. 파이시 자신은 스파소-카멘노 수도원에서 수도자 생활을 시작했는데, 그곳의 원장 디오니시우스(1389–1418, 훗날 로스토프 주교가 됨)는 아폰 산 출신의 그리스인으로, 성산 수도사들의 삶과 위업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 후 파이시는 키릴로프 수도원으로 피신했는데, 그곳에서 자신보다 훨씬 어린 닐이 그와 알게 되어 그의 영적 지도 아래 들어갔다. 아폰 산으로의 순례는 닐이 장로직에 대해 가진 지식을 보완해 주었다[1278] .

성 카시아노스 망구프스키의 전기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대략 1488–1494년경 자볼지예의 페라폰토프 수도원에서 필라레트 장로의 제자였다. 그리스 출신인 성 카시안은 출가 전 크림 반도의 망구프-칼레 마을 출신의 콘스탄틴 공작이었으며, 이후 이반 3세의 왕비가 된 소피아 팔레올로고스 공주와 함께 모스크바로 왔습니다. 1488년 또는 그로부터 몇 년 후, 그는 페라폰토프 수도원에 입소하여 그곳에서 수도 서원을 하고 필라레트 장로의 제자가 되었다. 1494년 카시안은 공동 생활 규율이 도입된 은둔처를 설립했다. 그는 그곳에서 평범한 수도사로 수행하며 살다가 12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카시안이 닐의 제자였다는 견해는 후대의 연구에 의해 반박되었다[1279] .

이러한 사례는 페라폰토스 수도원에서 드문 일이 아니었으며, 수도사 갈락티온이 그리스도를 위해 성스러운 광인(† 1506)으로 불리며, 이후 성인의 반열에 올랐던 갈락티온 수도사가 이 수도원에 머무는 동안, 수도원 대리자인 성 마르티니아노와 스승과 제자 사이의 관계와 유사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1280] .

이전 장들에서 이미 소개된 장로 아르테미우스는 아마도 자볼지야의 장로 중 한 분의 도움 없이는 자신의 금욕적 수련 과정을 거치지 못했을 것이다[1281] . 그러나 16세기에 비소유파가 겪은 박해는 자볼지야 사막의 수도자들에게도 흔적 없이 지나가지 않았으며, 요시프파와 비소유파 간의 논쟁은 전반적으로 러시아의 장로 전통 발전에 해로운 영향을 미쳤다. 닐과 그와 가까운 제자들(아르테미이 장로는 아마도 이 학파의 마지막 교양 있는 신봉자이자 옹호자였을 것이다)이 주도한 금욕적·신비주의적 경향은 16세기의 지배적인 교회·정치적 흐름에 패배하여 점차 쇠퇴했다[1282] .

그럼에도 불구하고 17세기 수계 예식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에는 초보 수도사를 경험 많은 수도사의 영적 지도 아래 맡기는 것이 관례였다. 이는 장로 제도가 수도사들의 영적 양성을 위한 필수적인 수단으로 여겨졌기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수도 전통에 대한 충실함 때문이었다. 이때 원장(나스타이텔)은 신입 수도사와 경험 많은 수도사, 두 사람 모두에게 15세기 『전승(Предание)』에 수록된 내용과 거의 똑같은 말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스타르체와 그의 제자들 사이의 일상적인 상호 관계, 즉 스타르체 제도의 본질을 결정짓는 부분에 대해서는, 유감스럽게도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1283] .

이것이 18세기 이전 러시아 수도원의 스승 제도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전부이다. 스승 제도의 역사는 매우 불완전하지만, 이를 통해 모스크바 루스에서 스승 제도가 비록 그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하지는 못했더라도 여전히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8세기 말과 19세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장로 제도가 러시아 수도원에 진정으로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3. 스타레츠 파이시이 벨리치코프스키와 그의 ‘학교’

18세기 마지막 25년 동안 수도원 생활과 스타르체 제도의 부흥은, 동방 교회의 고대 수도 전통에 대한 엄격한 수행자이자 열렬한 수호자였던 한 인물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바로 스타르체 파이시이 벨리치코프스키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의 이름은 우리 교회의 역사에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세속 이름은 파이시이였으며, 본명은 페트르 벨리치코프스키였다. 그는 신부의 아들이었다. 1722년 12월 21일 폴타바에서 태어난 그는 경건함이 깃든 가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그 집안에서는 일상생활 속에서 모든 교회 규칙과 규정을 엄격히 준수했다. 페트르는 조용하고 말수가 적은 아이였으며, 독서를 좋아했는데, 집에는 당연히 부모의 경건한 신조에 부합하는 책들만 비치되어 있었다; 당시 가장 널리 퍼진 책은 ‘시간기도서’였는데, 이는 보통 아이들이 처음 읽는 책으로 쓰였으며, 그 다음은 ‘시편’이었고, 마지막으로 성인과 경건한 수행자들의 전기가 뒤를 이었다. 어린 피터는 강요가 아니라 자신의 자발적인 의지와 성향, 마음의 기분에 따라 이 모든 것을 철저히 익혔다. 13세 때 그는 ‘형제 학교’에 입학했다. 어머니는 막내 아들이 모든 조상들과 아버지, 그리고 형처럼 본당 사제가 되어, 당시 관례대로 형의 본당을 물려받기를 원했다. 그러나 페트로는 이미 어린 시절부터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사가 되고자 하는 열망을 품게 되었고, 이 열망은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더 강해졌다. 그가 직접 지켜보며 잘 알고 있던 본당 사제의 사역은 아마도 그를 만족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금욕주의 저서들을 읽은 것은 그의 인생 계획에 영향을 미쳤다. 예루살렘이나 아폰 산, 혹은 경건한 수도사들이 수도원의 고독 속에서 수행에 매진하는 어느 수도원으로의 여행—이 모든 것이 본당 사제로서의 삶보다 그를 더 매료시켰다. 그의 전기에서 이 젊은 제자의 경건한 꿈은 저자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주님께서 그에게 아직 젊은 나이에 분별력과 지혜, 그리고 겸손함을 베풀어 주셨다.”

어느 날 밤, 페트르는 몰래 학교를 빠져나와 키예프를 떠나 긴 여정을 떠났다(1739). 가는 길에 그는 드네프르 강변의 류베치 시 근처에 있는 류베치 수도원에 머물렀다. 수도원장은 그를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수도원에 머물도록 축복해 주었으며 심지어 방까지 마련해 주었다. 이렇게 해서 계획 실현을 위한 첫걸음이 내디뎠다. 왜냐하면 피터의 영적 지도자이자, 청년이 수도 생활에 대한 소망을 털어놓았던 이에로스키모나흐 파코미우스는 그에게 우선 바로 류베치 수도원으로 가라고 조언했고, 그곳에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줄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수련자로 받아들여진 피터는 수도원에서 여러 가지 일을 수행했다.

파이시의 전기 속에 실린, 그가 왜 류베치 수도원을 떠났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그 시대 수도원 생활의 실상을 잘 보여준다.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수도원의 원장 자리에 그 직책에 적합한 수도사가 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알 수 있는데, 이는 종종 매우 단단했던 형제 공동체가 수도원 당국의 잘못으로 인해 붕괴되곤 했기 때문이다. 피터가 수도원에서 이미 몇 달을 지내고 있을 무렵, 새로운 원장이 임명되었는데, 그는 수도복을 입은 제멋대로이고 무례한 인물로, 수도사들의 수행 생활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자신의 사명을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형제들과 함께 식사하기 위해 식당에 가지 않고, 자신을 위해 따로 특별한 요리를 준비해 수도원장 방으로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어느 날, 수도원장의 정확한 지시를 받지 못한 피터의 부주의로 인해 수도원장에게 잘못된 음식이 전달되었다. 분노한 원장님은 무고한 페트르의 뺨을 때렸다. 어쩌면 다른 원장님이나 다른 상황이었다면, 그 젊은 수련자는 겸손하게 그 매를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시 정신적 혼란에 빠진 페트르는 수도원에서 도망쳐 수도 생활을 위한 더 나은 다른 곳을 찾기로 결심했다. 그는 수도원을 떠나 남쪽으로 향했다.

운명은 그를 몰다비아로 이끌었는데, 그곳에는 그가 들은 바에 따르면 수많은 수행자들이 피신해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미 몰다비아에 속한 티아스민 강 한가운데 섬에 위치한 성 니콜라이 수도원에 도착했다. 그는 원장에게 말을 걸었고, 수도원에 수련자로 받아들여졌다. 이곳에는 류베치 수도원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가 감돌았고, 페트르는 자신의 순종을 열성적으로 이행했다. 얼마 후, 그가 19세가 되었을 때, 그는 처음에는 라소포르(수련사)로 입회하여 플라톤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그는 이곳에서 행복했고, 수도 생활은 그의 영적 성장에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이 수도원에서도 떠나야만 했다. 유니아트 측의 박해가 시작되어 수도원 교회들이 폐쇄되고 수도사들은 쫓겨났기 때문이다.

그때 플라톤은 키예프로 돌아가 페체르스크 라브라의 수도자 무리에 합류하기로 결심했는데, 그곳에는 그의 영적 아버지인 예로스키모나흐 파코미오스가 수행하고 있었다. 그의 소원은 이루어졌고, 플라톤은 가장 오래된 러시아 수도원의 수도사가 되었다. 그는 글을 잘 읽을 줄 알았기 때문에 라브라 인쇄소에서 봉사를 맡게 되었으며, 그 외에도 구리에 성화를 새기는 일을 맡게 되었다. 라브라에서의 생활과 이러한 업무가 플라톤의 영적 성향에 부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노련한 수도사의 지도 아래 완전한 은둔 속에서 구원을 얻으려는 예전의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다. 플라톤이 종종 은둔 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곤 했던 옛 학교 동창과의 뜻밖의 만남이 새로운 방랑의 계기가 되었다.

플라톤은 다른 두 명의 수도사와 함께 다시 남쪽으로 향하여, 성스러운 아폰 산에 도달하기를 희망했다. 한편, 순례의 길은 이 순례자를 ‘트레이스테니’라고 불리는 성 니콜라스 스키트로 이끌었다. 고대 팔레스타인 라브라의 수도자들과 마찬가지로, 일부 수도사들은 이곳에서 공동 생활 규율에 따라 살았고, 다른 일부인 연로하고 경험이 풍부한 수도사들은 스키트 주변에 위치한 오두막에서 은둔하며 개별 생활 규율에 따라 수행에 전념했다. 이곳에서 플라톤은 아폰 산의 규율에 따라 거행되는 예배 중에 처음으로 기도했으며, 이곳에서 그는 이디오리트마 규칙을 철저히 지키는 엄격한 은둔자들을 처음으로 목격했다. 얼마 후, 스키트에서 다양한 봉사를 수행하며 작고 가난한 수도원의 삶을 잘 알게 된 플라톤은 키르쿨 스키트로 파견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노련한 장로 바실리와 오누프리우스의 지도 아래 영적으로 성장해 나갔다. 그 당시 몰다비아의 수도원과 스키트, 공동 생활 수도원과 개별 생활 수도원 모두에서 수도 생활은 특히 엄격했다. 장로 제도는 수도사들을 지도하는 수단으로서 매우 널리 퍼져 있었으며, 수많은 수도사들이 장로들의 지도 아래 머물렀다. 플라톤은 자신이 갈망하던 장로들의 지도를 직접 체험할 수 있었다. 1746년까지 3년 동안 플라톤은 이 수도원에 머물렀으나, 마침내 그가 오랫동안 기다려 온 순간이 찾아왔다. 그는 아폰 산을 방문할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스승의 허락과 원장님의 축복을 받아 플라톤은 또 다른 수도사 한 명과 함께 성산으로 향했다.

키르쿨 수도원에 있을 때부터 그는 아폰 산 수도자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설레는 마음으로 듣곤 했다. 전기 작가의 말에 따르면, 아폰 산으로 이주하면서 플라톤에게 수련 기간은 끝나고 독자적인 수행 생활이 시작되었다. 육로와 해로를 거친 힘든 여정 끝에 그는 마침내 성 아파나시우스 라브라에 도착했다. 그에게 수도원 근처에 있는 독방이 주어졌다. 그곳에서는 완전한 가난과 세속을 버린 삶, 그리고 침묵 속에서 많은 수도사와 장로들이 구원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플라톤이 장로의 지도 아래 들어가고자 했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무도 그를 수련생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님의 섭리에 따라 그런 이를 찾지 못했고, 영혼이 갈망하던 수련생으로서의 지위도 얻지 못하자, 그는 자신을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고 홀로 앉아 있었다.”

장로의 도움 없이 영적 싸움을 벌이던 젊은 은둔자의 내적·영적 상태를 수도사 그레고리우스 (1836)가 우리에게 묘사해 주는데, 그는 아마도 금욕주의 저작이나 자신의 경험이 아니라, 냐메츠키 수도원[1284] 의 필사본에 보존되어 있던 파이시이 장로 본인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은둔과 침묵, 영혼의 집중, 끊임없이 예수 기도를 드리며 보낸 삶은 쉽지 않았지만, 파이시이는 “영적 힘을 얻기 위해 힘써 수련하며, 매일 마음속으로 승천을 다짐하고, 위대한 업적을 향한 신성한 열정으로 불타오르며, 동시에 불타는 신성한 돌보심을 만끽했다”라고 저자인 수도사는 기록하고 있다. 이 생활은 3년 동안 계속되었고, 그 후 플라톤은 수행자에게 기쁜 만남을 경험했다. 아폰 산에 그의 옛 스승인 몰다비아 출신의 예로모나흐 바실리가 도착하여, 젊은 수행자와 이야기를 나눈 뒤 그를 소스키마로 수계하고 파이시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때 바실리 장로는 그에게 공동 생활 수도원으로 옮겨가라고 조언했는데, 이는 이디오리트마와 은둔 생활이 연로하고 경험이 풍부한 수도사들에게 적합하기 때문이었다. 파이시의 저술을 통해 우리는 그가 훗날 공동 생활 규율을 따르는 사람이 되었으나, 수련생과 신입 수도사들을 위한 장로 제도를 유지했음을 알 수 있다. 러시아의 여러 수도원에서 수도 생활을 한 파이시의 제자들도 공동 생활 규율을 도입함으로써 수도 생활을 개선하고자 했으나, 그들 자신은 개별 수도사들을 영적으로 지도하며 스승의 역할을 수행했다. 게다가 파이시의 저작 중에는 『공동 생활의 계급과 규약에 관한 해설』이 있는데, 그 안에서 그는 키노비아([1285] )를 온갖 방법으로 권장하고 있다. 그러나 파이시는 그 후로도 3~4년 동안 홀로 지내며 자기 수양의 길을 걸었다. 그 후 몇 명의 젊은 수도사들이 그에게 찾아왔는데, 파이시우스 자신도 아직 젊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에게 수련자로 받아달라고 청했다. 이들은 주로 몰다비아와 발라키아, 혹은 슬라브계 발칸 국가들에서 온 수도사들이었다. 그들의 간절한 요청에 따라 파이시우스는 사제 서품을 받고 예로모나흐가 되었다. 이는 1758년, 그가 36세가 되었을 때 일어난 일이었다.

파이시는 이제 인생의 두 번째 시기로 접어들었다. 그는 자신의 영적 성장을 위해 영적 투쟁을 벌였을 뿐만 아니라, 수도원장 겸 영적 지도자로서 다른 수도사들을 영적으로 이끌었으며, 이러한 그의 노력 덕분에 러시아에서 진정한 수도 생활의 부흥을 이끄는 중심 인물이 되었다.

파이시 주변에 모인 소수의 수도자 무리는 끊임없이 늘어났다. 다행히도 그는 아폰스카야 라브라의 프로타로부터 판토크라토르 수도원 인근에 위치한, 반쯤 무너져 내린 고대 성 엘리야 예언자 수도원을 양도받는 데 성공했다. 수도자들과 함께 그는 교회와 식당, 그리고 60개의 수도실을 지었는데, 수도자 수가 그만큼 늘어났기 때문이다. 비록 새로운 수도원은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지만, 수도사들은 날마다 늘어났고, 수도원 시설은 곧 비좁아졌다. 그러나 수도사들 사이에서도 꽤나 질투심 어린 시기심과 다른 악의적인 감정들이 사라지지 않았다. 파이지의 슬라브 수도원은, 아마도 그곳의 탁월한 질서와 수도원장 파이지의 끊임없이 높아지는 권위 때문이었을지 모르지만, 아토스 산의 다른 수도원에 속한 그리스인들에게 비우호적인 감정을 불러일으켰고, 파이지 신부와 그의 제자들에 대한 부당한 소문이 돌았으며, 터키 당국도 온갖 종류의 방해를 가했다. 그때 파이시이 신부는 몰다비아로 돌아가 산과 숲 사이에 새로운 수도원을 세우기로 결심했다.

1763년, 파이시이 장로는 60명의 수도사와 수련생들과 함께 길을 떠나 몰다비아에 도착했으나, 그곳에서 적합한 장소를 찾지 못했다. 야사에서야 비로소 그는 몰다비아 대주교로부터 성령 강림을 기념하는 드라고미르 수도원을 양도받을 수 있었다. 파이시이는 이곳에 아폰 산의 공동 생활 방식과 예배 규정을 도입했다. 그러나 완전히 새로운 규칙이 하나 있었는데, 저녁마다 예배 시간 사이에 수도사들이 식당에 모여야 했다. 파이시이 신부는 찾아와 그들에게 다양한 금욕적 저작들을 읽어 주며, 그 과정에서 자신의 해설을 덧붙였습니다. 수도사들은 일부는 몰다비아와 발라키아 출신이고, 일부는 슬라브 국가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 독서는 루마니아인과 슬라브인을 위해 격일로 따로 진행되었으며, 예배는 항상 교회 슬라브어로 거행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파이시의 장로로서의 은사가 꽃피었던 드라고미르나 수도원의 수도사들의 생활 방식이었다.

1774년, 러시아-터키 전쟁 이후 몰다비아의 일부가 오스트리아에 편입되었는데, 드라고미르ンス키 수도원이 위치한 지역도 그 중 하나였다. 오스트리아 당국의 관할 하에 있는 수도원의 미래를 우려한 파이시이 장로는 터키의 지배를 계속 받는 몰다비아 지역으로 이주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대주교에게 자신과 수도원 형제들이 절반 가량 비어 있는 세쿨 수도원으로 이주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파이시이 장로는 이 허가를 받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수도사들의 수가 크게 늘어 새로운 수도원조차 비좁아졌다. 그러자 장로는 세쿨에서 두 시간 거리에 위치한 거대한 냐메츠키 수도원을 관리하게 되었고, 그는 수도자들을 두 개의 수도원 공동체로 나누어야 했지만, 두 수도원 모두 그의 관리와 영적 지도 아래 남아 있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냐메츠키 수도원에는 이미 400명, 세쿨스키 수도원에는 100명 이상의 수도사가 있었다.

파이시 자신은 긴 가을과 겨울 밤을 이용해 그리스어를 구사하는 두 명의 수도사의 도움을 받아 성부들의 금욕적 저작들을 몰도바어와 교회 슬라브어로 번역하는 일에 매진했다. 이렇게 해서 성 이삭 시린의 『교훈』, 성 막시모 고백자의 『질문과 답변』, 성 테오도르 스투디토스의 『교훈』, 아바 바르소노피오의 『교훈』 등이 번역되었고, 마지막으로 교회 슬라브어로 된 『자비』도 번역되었다. 『자비』의 번역은 1793년에 완료되었으며, 두 권의 두툼한 필사본이 완성되었다. 이 번역은 앞서 언급한 수도사 니코디모의 저서(1782년 베네치아 판)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1286] .

풍성한 업적으로 가득 찬 파이시의 지상 생애는 1794년 11월 15일, 72세의 나이로 영원히 눈을 감으며 막을 내렸다.[1287] .

31년 동안 이어진 그의 마지막 활동 기간은 그의 이름을 수도원 벽 너머 멀리까지 알리게 했으며, 영적 양육에 특별한 은사를 지닌 장로로서의 명성은 러시아까지 퍼져 나갔다. 장로 테오판 소콜로프의 자서전을 통해 우리는 70년대 초반에 이미 파이시이에 대한 소문을 들은 몇몇 금욕적 수행을 지향하던 수도사와 평신도들이 그에게 가르침을 받거나 심지어 그의 영적 지도 아래 영원히 머물기 위해 드라고미르스키와 냐메츠키 수도원으로 찾아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1288] .

파이시의 초기 제자 중 한 명은 장로이자 성직자인 클레오파 1세(† 1778년 이후)였는데, 그는 장로주의의 기초를 오스트로프스키 브베덴스키 은둔원(블라디미르 교구)으로 전파했다. 이 경건한 수행자에 대한 전기적 기록은 매우 부족하다: 클레오파는 겸손과 온유함의 귀감이었습니다. 심지어 그의 제자인 장로 테오판 소콜로프조차도 그의 과거 삶에 대해 많이 이야기할 수 없었습니다. 클레오파는 남부 러시아 출신으로, 아폰 산에서 몇 년을 보냈으며, 그곳에서 파이시우스를 알게 되었고, 아마도 그와 함께 성 예언자 일리아스 스키트로 피신했을 것입니다. 1760년부터 1778년까지 그는 앞서 언급된 브베덴스카야 은둔원의 건축을 담당했으며, 그 은둔원의 내부와 외부를 정비하는 임무를 맡았다. 클레오파 덕분에 이 은둔원은 진정으로 수도자들의 고행이 이루어지는 곳이 되었다. 그는 러시아에서 진정한 수도 생활을 처음으로 정착시킨 인물 중 한 명이었으며, 자신이 부흥시킨 이 수도원[1289] 에서 스승 제자 관계의 창시자였다. 클레오파가 이 수도원에 도입한 공동체 규율은 이후 그의 제자인 이그나티와 마카리 수도사들에 의해 니콜로-페스노쉬스키 수도원으로 전해졌으나, 안타깝게도 이 규율은 그곳에서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1290] .

그 후, 엄수한 삶을 살았던 수많은 수행자들, 즉 장로 파이시의 제자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러시아 전역에 흩어져 수도원에서 수도원으로, 은둔처에서 은둔처로 방랑하며, 곳곳에 “경건하고 기이한 파이시이 신부”에 대한 소식을 전파했고, 이를 통해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는 새로운 신봉자들을 얻어 그들이 제자가 되게 했다. 파이시이스의 1세대 제자들 중 몇몇 이름은 특별히 언급할 가치가 있는데, 비록 당초 그들의 영향력은 그리 크지 않았고, 주로 남부 대러시아의 가장 작고 가난한 은둔지들—칼루가, 오를로프, 쿠르스크 주—에 정착했음에도 말이다.

그들 중에는 장로이자 아르히만드리트인 테오도시 마슬로프(1720–1802)가 속해 있었다. 그는 글루호프(체르니히프 주)에서 상인의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처음에는 스벤 수도원에서 은신했다가, 그곳 수도사들의 생활 방식에 불만을 품고 몰다비아로 떠나 유명한 몰다비아의 장로 바실리(† 1767)[1291] 에게로 갔는데, 앞서 언급했듯이 파이시이도 그의 제자였다. 1767–1778년 동안 테오도시이는 티아스민스카야와 메를로폴리안스카야 수도원의 원장직을 맡았으며, 1779년에는 수도원 생활을 재개하기 위해 몰찬스카야 소프로니예바 푸스티니로 초청받았다. 그는 그곳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머물렀다(† 1802년 12월 9일). 테오도시우스는 그 은둔처에 아폰 산의 공동 생활 규율[1292] 을 도입했다.

이어서 파이시의 제자 두 명을 더 언급해야 한다. 그들은 파이시에게 출가식을 받은 장로 이에로모나흐 클레오파 2세(† 1817)와 이에로스키모나흐 테오도르(1756–1822)이다.

클레오파 2세는 1800년에 벨로베레즈카야 은둔처에 들어갔는데, 당시 그곳의 원장으로는 장로 바실리 키슈킨이 있었다. 이곳에서 클레오파는 당시 그 은둔처에서 수행 중이던 수도사 레오니드 나골킨을 알게 되었고, 이후 둘은 함께 여러 수도원을 방문했다; 클레오파는 1817년 발라암 수도원[1293] 에서 선종했다.

이예로스키모나흐 테오도르 역시 상인의 아들로, 카라체프(오를로프 주) 출신이었는데, 아주 젊은 나이에 부모의 집을 떠나 플로슈찬스카야 황야로 향했다. 부모가 그를 집으로 데려왔지만, 그는 다시 도망쳐 이번에는 멀리 떨어진 벨로베레즈카야 황야로 갔다. 어느 날, 페체르스크 라브라로 가는 길에 젊은 수련자는 ‘기적의 노인 파이시이’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 먼 냐메츠키 수도원으로 향했으며, 그곳에서 파이시이는 그를 출가시켜 자신의 제자로 받아들였다. 테오도르는 학식이 매우 풍부하여 파이시의 번역본을 필사하며 그를 도왔다. 파이시의 후임인 소프로니우스 원장님은 테오도르에게 스키마(수도복)를 입혀 주고 그를 벨로베레즈카야 은둔처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교구 주교는 그에게 작고 가난한 촐나 은둔처로 가서 원장직을 맡아 달라고 요청했으나, 테오도르는 이 제안을 거절하고 원장의 보좌자로만 활동하는 데만 동의했다. 그의 도움 덕분에 이곳에는 파이지스 장로의 공동체 규율과 아토스 산의 예배 규율이 도입되었다. 한편 테오도르에게 조언과 가르침을 구하러 찾아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져, 그는 수도원을 떠나야만 했다. 그는 벨로베레즈카야 수도원으로 옮겨가 그곳에서 8년을 머물렀다. 마침내 그는 클레오파 2세 장로와 레오니드 수도사(후에 옵틴스키로 불림)와 함께 노보예제르스키 수도원으로 떠났는데, 당시 그곳은 테오판 소콜로프 장로가 관리하고 있었으며, 거기서 팔레오스트로프스키 수도원으로, 그다음 발라암 수도원(이곳에서 그의 동행자였던 클레오파 2세 장로가 세상을 떠났다)으로, 그리고 마침내 알렉산드로-스비르스키 수도원으로 옮겨가, 그곳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1822년 4월 7일) 머물렀다.

테오도르의 생애에 나오는 한 에피소드는 수도자들이 모든 곳에서 수도 생활의 개선을 위해 열성적으로 노력한 것은 아니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장로 테오판은 그에게 16세기에 장로 닐로에 의해 설립되었으나 당시에는 비정규 수도원으로 분류되던 닐로-소르스카야 황야로 가달라고 요청했다. 그곳의 수도 생활 수준은 매우 낮아져 있었다. 수도사들은 테오도르 장로를 매우 적대적으로 맞이했고, 수도원에 질서를 회복하려는 그의 노력은 성공하지 못했다[1294] .

장로이자 수도사인 아파나시이 자하로프(† 1823) 역시 파이시이스의 금욕주의 학파 출신이었다. 귀족 가문 출신으로 후사르 연대의 소대장이었던 자하로프는 화려한 군복을 벗고 수도자의 예복을 입은 뒤, 러시아-터키 전쟁 당시 몰다비아에서 알게 된 장로 파이시우를 찾아갔다. 1777년에 우리는 그를 이미 플로리슈체바 은둔원(블라디미르 교구)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그 후 그는 플로슈찬스카 은둔원(오를로프 교구)으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장로직을 맡았고, 훗날 옵틴의 장로가 된 마카리 이바노프는 13년 동안 그의 수련생으로 지냈다[1295] .

파이시의 다섯 번째 제자는 또 다른 아파나시이였는데, 과거 관료 출신의 스키모나흐로, 미트로폴리트 가브리엘에게 『도브로톨루비야』의 교회 슬라브어 번역본을 헌정했다. 그는 그 후 로슬라블의 숲에서, 완전한 은둔과 세상과의 단절 속에서 수행했으며, 나중에는 스벤스키 수도원(오를로프 교구)에서 지냈으나, 그곳에서 장로직을 맡았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1811)[1296] .

파이시의 여섯 번째이자 가장 어린 제자는 필라렛 장로(† 1841)였는데, 그는 글린스카야 황야의 원장(1817–1841)으로 재직하며 아폰 산의 규율을 바탕으로 그곳을 개혁했다. 그는 『새로 수계를 받은 수도사를 위한 상세한 가르침』(1824)을 집필했으며, 수도사들을 지도하고 돌보는 일에 전념했다[1297] .

모스크바 시모노프 수도원의 수도사 파벨[1298] , 소프로니예바 은둔처의 수도사 게라심, 그리고 옵티나 출신의 스키모나흐 테오판(† 1819)은 파이시우스의 제자 세대 중 마지막 대표자들이었다[1299] . (러시아 수도원들에서 ‘파이시이 장로의 학파’의 후속 역사에 대해서는 표 VIII을 참조하라.) 한동안 냐메츠키 수도원에서 파이시이와 함께 지낸 키예프-페체르스크 라브라 출신의 수도사 테오판은 페체르스크의 장로 도시페이의 제자였으며, 이후 솔로베츠키의 은둔자로 유명해졌다[1300] .

이 모든 파이시우스의 제자들은 직접 또는 자신의 제자들을 통해 여러 수도원에서 금욕적 전통을 부흥시키고 공동 생활 규율을 도입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나, 파이시우스를 엄격한 은둔자 집단과 연관 짓는 다른 수도 생활의 열성가들도 있었다. 이들은 이른바 ‘로슬라블 숲의 장로들’이었다. 로슬라블 숲은 스몰렌스크 주 남부에 위치해 있으며, 브랸 숲과 함께 광활하고 험준하며 울창한 산림 지대를 이룬다. 18세기 후반, 이 숲은 부유한 지주 브로네브스키의 소유였다. 이 수행자 집단의 출현 배경은 완전히 명확하지 않다.

브랸스카야 숲의 첫 번째 은둔자는 아마도 수도사 또는 사제 수도사 요아사프(1692–1766)였을 것으로 보이며, 그는 몇 년간의 은둔 생활 끝에 더 이상 고독한 은둔자가 아니었다. 그의 엄격한 수행 생활에 대한 소문이 플로슈차나 은둔처까지 전해졌고, 요아사프에게 그곳을 비참한 상태에서 구해내기 위해 은둔처의 원장직을 맡아 달라는 제안이 들어왔다. 요아사프는 그곳에서 5년을 보낸 뒤 다시 자신의 숲속 오두막으로 돌아왔다. 그는 아마도 인근 마을 농민들로부터 존경을 얻었던 듯하며, 위안과 조언을 구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들었다. 장로가 백성들과 교류하는 모습은 교회 당국에 의심스럽게 여겨졌다. — 여기서 주목할 점은 브랸 숲 남부 지역에 수많은 이단자들이 숨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 이에 세브스카야 교회 당국은 경찰이 요아사프를 체포하도록 지시했고, 그는 셀 수 없이 많은 심문을 받았다. 교구 주교와의 대화 덕분에야 장로 요아사프는 유배, 어쩌면 여권도 없는 의심스러운 인물로 간주되어 시베리아로 보내질 수도 있었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주교의 지시에 따라 요아사프는 석방되어 자신의 숲으로 돌아갔고, 그곳에서 1766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 무렵, 로슬라블 숲에서 소유주의 허락을 받아 은둔을 선호하는 몇몇 수도사와 평신도들이 가장 엄격한 수행 생활을 영위하며 지내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은 두 제자 일라리온과 요셉을 둔 장로 바르나바, 니키타(† 1793), 테오판, 전직 성직자 디아코노스 아나스타시우스, 그리고 장로 바실리 키슈킨 (1745–1831)[1301] , 장로 사제 아파나시이, 앞서 언급된 파이시이스의 제자 중 한 명으로, 가브리엘 대주교를 방문하여 그에게 슬라브어판 『도브로톨루비야』를 헌정한 후 이 숲으로 돌아온 인물이다. 이곳에서 바실리스크와 조시마도 금욕의 길에 들어섰는데, 앞서 언급했듯이 이들은 나중에 시베리아로 떠났고, 그곳에서 바실리스크는 세상을 떠났다. 조시마는 수녀 공동체를 돌보았던 일로 유명해졌다. 마지막으로, 그곳에서 바실리스크와 조시마의 스승이었던 예로모나흐 아드리안도 수행했다. 이후(1790년) 그는 가브리엘 대주교로부터 공동 생활 규약[1302] 에 근거하여 코네베츠 수도원에서 수도 생활을 재건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아르세니라는 또 다른 은둔자는 이전에 파이시의 제자였으며, 몰다비아에서 로슬라블 숲으로 왔다. 이 모든 장로들 에게는 제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훗날 수도원 생활의 부흥에 기여하며, 예를 들어 말로야로슬라프 수도원의 원장 아나톨리(† 1865)와 옵티나 은둔원의 원장 모세(† 1862)와 같은 원장들에게 영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 수행자들을 수도원으로 강제 이주시키려 했고 때로는 오두막에서 강제로 쫓아내기도 했던 경찰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 일부는 여전히 경찰의 눈을 피해 숨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도로페이(† 1865)는 숲속에서 거의 60년 동안 은둔 생활을 했다[1303] .

 

4. 수도 생활의 부흥을 목표로 한 가브리엘 페트로프 대주교의 활동

로슬라블 숲의 은둔자 집단은 그 시대의 파괴적인 영향에도 불구하고 영적 힘과 진정한 수도 생활에 대한 열망을 잃지 않은 수도계에서 나온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열망은 수도계 내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수도계를 평가할 때 이 점은 특별한 주목을 받을 만하다. 만약 교회 당국이 이 흐름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것이 수도원 생활에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면, 이는 광범위한 개혁의 원천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현상을 역사적 관점에서 살펴보면, 어쩌면 성스러운 시노드가 자신의 행정적 지혜에 의존하여 위에서 이 금욕적 흐름을 주도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 시노드 주교들은 시노드가 설립된 지 200년 동안 단 한 번도 그러한 지혜를 보여준 적이 없으니! – 지도권은 하느님의 섭리에 맡겨졌다. 그 덕분에 이러한 영적 힘들은 스스로 비옥한 토양을 찾아 수도 생활의 새로운 부흥을 키워낼 수 있는 곳으로 자유롭게 흘러갈 수 있었다.

그러나 교회 계층의 가장 뛰어난 대표자들에게는 수도원과 수도 생활의 필요성도, 수도자 사회에서 드러난 영적 흐름도 숨겨지지 않았다. 이 점에서 트베리 대주교 가브리엘 페트로프(후에 노브고로드 및 상트페테르부르크 대주교가 됨)의 활동은 특별한 평가를 받을 만하다. 겉으로 보기에는 눈부신 지위를 누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브리엘 대주교는 경력의 파괴적인 영향이나 시대의 정신[1304] 조차도 그의 도덕적 품격을 훼손할 수 없었던 그런 인물이자 성직자로 남았다. 그의 시종이자 훗날 유명해지고 칭송받게 된 장로 테오판 소콜로프는 가브리엘에 대해 간결하지만 인상적인 평가를 남겼다[1305] . 성품이 온화하고, 황후와의 대화에서든 평범한 수도사나 본당 신부와의 대화에서든 똑같이 꾸밈없는 태도를 보였던 가브리엘은 어디서나 존경과 사랑을 받았으나, 오직 교회 지도자들만이 그에게 어느 정도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이는 그가 소박한 태도로 주교 직분의 위엄을 훼손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들은 접견 자리에서 가브리엘 주교가 완두콩 속을 넣은 파이나 죽 같은 소박한 음식으로 대접할 때 자신의 위엄이 훼손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수행자 정신을 가진 이 대주교는 그 음식을 특히 호화로운 요리로 여겼는데, 그 자신은 양배추 수프만으로 만족했고, 게다가 그 수프는 며칠 치를 한꺼번에 끓여 두곤 했다. 그는 자신의 생활비를 거의 전액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그의 시종 테오판은 그가 모든 것을 다 나눠주지 않도록 주의해야 했다. 시노드에서의 바쁜 일정과 교구 관리와 관련된 수많은 업무에도 불구하고, 성 가브리엘은 매일 교회에 나가 예배에 참석했으며, 수도자의 기도 규칙을 철저히 지켰다.

B. 티틀리노프가 쓴 가브리엘의 전기에 따르면, 그의 영향력은 교회 생활의 모든 영역에 미쳤으며 매우 긍정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수도 생활의 부흥에 있어 가브리엘 주교의 역할을 평가하는 것이다. 이미 트베리에서 주교로 재임하던 시기(1763–1770)에 가브리엘은 이 방향으로 첫 번째 조치를 취했다. 그는 주로 정규 수도원과 비정규 수도원 모두에 공동 생활 규약을 도입하고 이를 실질적으로 준수하도록 하는 데 주력했다. 1764년 관제상 특권 수도원에 편입된 니로-스토로벤스카야 수도원은 민중 사이에서 가장 존경받는 수도원 중 하나였으며, 특권 수도원에 포함된 니로-스토로벤스카야 수도원에서는 가브리엘의 노력 덕분에 수련생과 신입 수도사들의 양육이 경험이 풍부하고 연로하며 신뢰를 주는 수도사들에게 맡겨졌는데, 즉 장로제의 기초가 마련되었으나, 사실 이후 그곳에서 유리한 발전을 이루지는 못하였다[1306] . 그 뒤를 이어 클롭스키, 티흐빈스키, 모덴스키 수도원의 개혁 조치가 이어졌다.

그 후, 이미 상트페테르부르크 대주교가 된 가브리엘은 1782년 알렉산드로-네프스키 라브라에서 금욕적인 수도 생활을 복원하기 위해, 엄격한 규율과 생활로 유명한 소프로니예바 푸스티니에서 수도사 다섯 명을 그곳으로 이송했다[1307] . 18세기 전반에 화재로 거의 완전히 파괴되어 수도 생활이 완전히 쇠퇴했던 발라암 수도원은, 사로프 은둔처 출신의 엄격한 수행자 나자리우스(† 1809) 신임 원장(1782–1801)의 노력으로 재정비되었다. 나자리우스는 상당히 엄격하면서도 겸손하고 소박한 수도사였다. 나자리우스 신부를 가브리엘 주교에게 추천한 이는 탐보프의 테오필 주교(1788–1811)였는데, 그는 자신의 교구 내 수도원들의 생활 개선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원장님과 수도자들은 그 장로를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고, 원장님은 가브리엘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자리우스를 소박하고, 배운 것이 없으며, 거의 어리석은 사람으로 묘사했다. “내게는 똑똑한 사람들이 많습니다.”라고 가브리엘 주교는 원장에게 답장하며 썼다. “당신의 그 어리석은 사람을 내게 보내주십시오.” 발라암 수도원에서도 가브리엘 주교는 공동 생활 규율[1308] 을 도입했다. 파이시우스의 제자인 장로 아드리아누스에게는 코네베츠키 수도원[1309] 을 재건하는 임무가 맡겨졌다. 키릴로-노보예제르스키 수도원에서는, 앞서 여기서 언급된 가브리엘의 셀 담당자였던 장로 테오판 소콜로프(1793–1832)가 관리하고 있었는데, 공동 생활 규율의 도입과 테오판 장로의 지도력 덕분에 완전히 새로운 환경이 조성되었고, 거의 폐허가 된 수도원은 금욕적 수행의 장이 되었다[1310] . 수도원 생활 개선을 위한 가브리엘의 조언과 권고는 그의 교구 밖에 위치한 많은 수도원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모스크바의 시모노프 수도원이 부흥할 수 있었던 것은 주로 가브리엘 대주교 덕분인데, 가브리엘이 티흐빈 수도원의 아르히만드리트 이그나티우스를 그곳의 원장으로 파견했기 때문이다. 이그나티우스는 파이시우스의 마지막 제자 중 한 명이었다[1311] .

가브리엘 주교의 공로는 수도사들에게 금욕주의적 내용을 담은 저작들을 널리 알리려 노력한 점에서도 크다. 그의 노력 덕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도브로톨류비야』의 초판이 출간되었는데, 이 선집은 수도사들의 금욕주의 독서 목록에 확고히 자리 잡았으며, 나중에는 신자 평신도들에게도 널리 읽히게 되었다. 19세기 전반과 같은 후기 시대의 수도원 생활에 영향을 미친 가브리엘의 모든 활동은 진정한 금욕적 수도 생활의 기초를 마련하는 첫걸음이었으며, 스타르체스트보(장로 제도)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 덕분에 스승 제자 관계가 뿌리내리지 못한 곳에서도 수도사들의 삶에는 여전히 긍정적인 방향으로 상당한 변화가 일어났다.

 

5. 사로프 은둔원과 세라핌 스승

18세기 마지막 25년, 특히 19세기 전반에 걸쳐 수도자들의 생활이 유난히 엄격했던 수도원 중 하나로 비교적 새로 설립된 사로프 은둔원이 꼽힌다. 이 수도원이 전성기를 맞이한 것은 일련의 수도사들과 원장들 덕분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소수의 수행자만 있어도 수도원의 전체 생활을 변화시키고, 오랫동안 진정한 수도원적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탐보프 교구의 템니코프 시에서 40km 떨어진 곳, 인접한 니즈니노브고로드 교구 경계 바로 근처에 위치한 사로프 은둔원은 이 두 교구와 그 산하 수도원 모두에게 영적 중심지로서의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이 수도원은 비교적 늦은 시기인 1692년경에 설립되었으며, 설립자는 이에로모나흐 이사아키(† 1737)였다. 그는 1731년까지 수도원의 원장직을 맡았다가, 이후 관리권을 이구멘 도로페이(1731–1746)에게 넘겨주었고, 자신은 요한[1312] 이라는 이름으로 대스키마를 입었다(1731). 그는 아폰 산의 규율과 유사한 매우 엄격한 공동체 규율을 도입했으며, 이 규율은 그의 후임자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사로프 은둔원에 있어 큰 행운은 150년 동안 그 운영이 진정한 수행자 수도사들의 손에 맡겨졌다는 점이었다. 이 시대의 거의 모든 원장들—도로페이(1731–1746), 필라레트(1746–1749), 에프레임(1758–1777), 파코미오스(1777–1794), 이사야 1세(1794–1807), 니폰트(1807–1842), 이사야 2세(1846–1858) – 모두 훌륭한 수도사들이었다. 그들은 수도원을 운영하며 공동체 규율을 철저히 준수할 뿐만 아니라, 그 규율에 생명을 불어넣고 내적 영적 의미를 부여하고자 노력했다; 그들은 사로프 은둔처로 몰려드는 신입 수도자들을 올바르게 양성하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당시 사로프 은둔처에서 원장(修道院長)은 고대 교회에서 흔히 그러했듯이 영적 아버지(pater spiritualis)의 역할도 겸했다고 할 수 있다. 은둔처의 내적·영적 삶은 고대 기독교의 금욕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사로프 수도원의 역사를 되짚어 보면, 이 수도원을 명성으로 빛나게 하고, 수도 생활을 막 시작한 수도자들에게 매력적인 중심지로 만든 엄격한 삶을 살았던 여러 수도사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중 몇몇은 특별히 언급할 가치가 있습니다. 이에로모나흐 요아킴(1732–1802)은 수도원에서 약 50년 동안 쉬지 않고 지냈으며, 시편 독송자이자 사서로서 많은 시간을 (마카리오스 대성자, 에프레모스 시리노스 등)[1313] 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으나, 수도원 담장 너머의 세상도 잊지 않았으며 주변 주민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아마도 바로 그 덕분에 이 수도원은 백성들 사이에서 성스러운 장소로 숭배받게 되었을 것이다. 이미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장로 나자리(1735–1809)는 발라암 수도원으로 옮겨가기 전까지 이곳에서 지냈으며, 생의 마지막 몇 년도 이곳에서 보냈다. 또한 그의 제자인 마르코 푸스티니크(† 1817), 성 세라핌의 동시대인이었던 이에로모나흐 피티림(† 1789), 발라암 수도원의 이에로모나흐 일라리온(1776–1841) — 그는 장로 나자리의 제자였다 — 을 언급해야 한다. 일라리온은 1797년에 사로프로 와서 44년 동안 은둔처에서 지냈으며, 수도원의 영적 지도자로서 그곳의 영적 분위기를 보존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가 남긴 훌륭한 『서한집』은 기독교적 삶에 관한 것으로, 그 내용은 성 세라핌의 영향을 잘 보여준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사막 수도원의 주된 버팀목이 된 이는 부유한 상인의 아들인 이사야 2세(푸틸로프; 1786–1858, 1846–1858년 원장) 이구멘이었다; 그는 1805년에 사로프로 와서 1858년까지 이곳에서 수행하며 단 한 번도 수도원 담장을 벗어나지 않았으며, 그의 원장 재임 기간 중 그의 주도로 예로모나흐 아벨이 수도원의 역사서 『사료집』([1314] )을 집필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이 은둔지를 그곳의 겸손한 수도사만큼 빛내지 못했는데, 러시아 정교회는 1903년에 그를 성인으로 시성했다. 바로 성 세라핌 사로프스키이다. 그리고 세라핌처럼 세속을 버리는 것과 세상에 봉사하는 것을 자신의 삶 속에서 이토록 경이롭게 결합시킨 러시아 성인은 없었습니다. 그는 진정한 기독교적 성덕의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한 번 이 고행자이자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이에 대해 소개한 바 있으며, 여기서는 그 내용을 간략히 다시 정리하겠습니다[1315] .

성 세라핌은 비록 자신이 이 세상의 사건들과는 거리를 두었지만, 세상에 머무르는 많은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고대의 기독교 수행자들과 사로프 은둔원의 동료들 중 일부와 마찬가지로, 세라핌은 50년 넘게 숲속의 고독 속에서 은둔 생활을 했으며, 지상 생애(1759–1833)의 마지막 몇 년 동안에야 비로소 오랜 수행 끝에 영적 성숙을 깨닫고, 8년 동안 (1825–1833) 동안 이 세상의 고통과 궁핍에 응답하고 세속 사람들에게 영적 도움을 베풀 용기를 냈습니다. 그의 장로로서의 사역은, 그 자신이 내면 깊이에서 끝까지 이겨낸 세상에 대한 기독교적 사랑의 경이로운 빛을 발산합니다.

다른 많은 러시아 수행자들과 마찬가지로, 세라핌은 부유한 상인 가문 출신이었다. 이는 여러 세대에 걸쳐 조상들에게서 이어져 온 세속적인 실용주의 분위기 속에서 자라난 러시아 경건주의 수행자들의 전기에서 매우 특징적인 점이다. – 그들에게는 이 세상의 혜택을 누리고 세상과의 단절을 생각하지 않을 기회가 많았지만, 우리는 경건함의 정신이 러시아 기독교 가정의 삶 속에서 그 힘을 발휘하며, 수많은 이들에게 세속적인 유혹보다 더 큰 권세를 행사하는 사례를 끊임없이 목격합니다. 프로호르 모슈닌 역시 젊은 시절부터 이 세상의 가치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겼던 이들 중 한 명이었다. 젊고 건장하며 당당한 프로호르는 수도자의 삶에 이끌렸다.

약 20세의 나이에 그는 키예프-페체르스카 라브라로 순례를 떠났을 때, 그곳에서 은둔하고 있던 장로 도시페이(† 1788)로부터 받은 조언에 따라 사로프 수도원에 들어갔다. 7년 동안의 수련 기간 동안 프로호르의 지도 장로는 이예로모나흐 요시프였다. 1786년 프로호르는 세라핌이라는 이름으로 수도 서원을 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은둔원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테오필 주교에 의해 세라핌은 이에로디아코노스로 서품되었다(1793). 그가 임종 직전에 털어놓은 바에 따르면, 그 시절 그는 환시를 보았는데, 지극히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나타나 그를 축복해 주셨다고 한다. 다른 어떤 러시아 성인에게도 성모 마리아께서 성 세라핌([1316] )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신비적 체험의 중심이자 그토록 경건한 숭배의 대상이 되신 적은 없었다. 세라핌의 이러한 종교적·신비적 체험의 특징은 그를 동시대 수행자들과 구별할 뿐만 아니라, 러시아 신비주의 역사, 혹은 더 정확히 말해 러시아의 신비적 탐구 역사 속에서 그를 특별한 위치에 올려놓는다. 이 책에서 우리는 이 점을 특별히 부각시키고 상세히 기술하였다.

1794년 말, 세라핌은 사막에서 두 시간 거리에 있는 울창하고 험준한 전나무 숲 속에 지어진 작은 숲속 오두막으로 은둔하여, 그곳에서 30년(1794–1825) 동안 이어진 은둔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검은 수도복을 벗고 흰 속옷만 입고 다녔다. 세라핌은 지나치게 튼튼한 육신을 죽이기 위해 돌로 가득 찬 배낭을 항상 등에 메고 다녔으며, 그와 항상 어디를 가든 떼려야 뗄 수 없었던 것은 성서였으며, 겉옷 아래 가슴에는 무게가 20파운드나 되는 무거운 철제 십자가를 차고 있었고, 등에도 똑같은 십자가를 메고 있었으며, 허리에는 철제 허리띠를 두르고 있었다. 겨울에는 난로를 위해 숲에서 장작을 패곤 했는데, 혹한이 닥치면 그 난로도 그의 수도실을 조금밖에 따뜻하게 해 주지 못했고, 여름에는 텃밭에서 일하며 직접 재배한 작물로 식사를 해결하다가, 나중에는 숲에서 채취해 삶아 먹은 풀과 이삭만으로 연명하게 되었다. 세라핌은 3년, 1,000일이 넘는 낮과 밤을 거대한 바위 위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높이 든 채 끊임없는 기도로 보냈으며, 그렇게 기둥 수행의 위업을 이루어 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그의 금욕적 수행의 시작에 불과했다.

그때 그에게 유혹이 닥쳤다. 어느 날, 성인이 숲에서 장작을 패고 있을 때, 강도들이 그를 습격하여, 그들이 생각하기에 그가 경건한 신자들에게서 받아낸 돈이라고 여긴 돈을 요구했다. 성자가 자신에게 아무것도 없다고 대답하자, 그들은 도끼로 그를 때렸다. 세라핌의 손에도 도끼가 있었고, 그 자신도 강도들로부터 방어할 만큼 충분히 강했지만, 그는 그들에게 저항하기를 원치 않았다. 그는 깊은 밤까지 피투성이가 된 채 의식을 잃은 채 땅에 누워 있었다. 이튿날 이른 아침, 피투성이가 된 채 수도원으로 돌아왔다. 원장 스님은 그에게 의사를 찾아가라고 했지만, 피로와 쇠약으로 인해 세라핌은 의사가 오기 전에 잠들어 버렸다. 나중에 성자 세라핌이 직접 전한 바에 따르면, 바로 그 순간 머리에 왕관을 쓴 성모 마리아께서 다시 그에게 나타나셨고, 그분의 오른쪽과 왼쪽에는 첫 번째 환상에서와 마찬가지로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서 있었다. 세라핌이 성모님을 부르는 것을 좋아했던 ‘하늘의 여왕’께서, 나중에 성인이 깨어났을 때 의사들이 서 있던 쪽을 향해 몸을 돌리시고, 환자를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왜 그렇게 애쓰고 있느냐?” 그러고는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사람은 우리 족속이다!”라고 하셨고 , 바로 그 순간 세라핌은 잠에서 깨어났다. 성자는 의사들의 도움을 거절하고, 몇 주 동안 방에 누워 일어나지 않았다. 그의 강인한 체질 덕분에 결국 병상에서 일어날 수 있었지만, 영원히 허리가 굽은 채로 남게 되어 지팡이 없이는 걸을 수 없게 되었다. 이코닉에는 그가 흰색 겉옷을 입고, 짚신에 발을 신은 채, 돌로 가득 찬 무거운 배낭을 어깨에 메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는 회복된 후에도 이 배낭을 계속 메고 다녔지만, 얼굴의 특징은 변하지 않았다.

몇 달 후, 성자는 수도원에서 자신의 숲속 오두막으로 돌아왔다. 이사야 1세 원장(1807)이 선종한 후, 수도원 형제들은 세라핌에게 원장직을 맡아 달라고 청했으나, 그는 겸손하게 이 영예를 거절했다. 이제 세라핌은 새로운 수행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3년 동안 완전한 침묵 속에서 살았으며, 성찬식을 거행하기 위한 프로스포라와 먹을 빵을 가져다주는 수도사들과조차 대화를 나누지 않았습니다. 그는 누군가 자신에게 다가오면 얼굴을 가리며 사람들에게 자신의 얼굴을 숨기려고 애썼습니다. 침묵의 수행은 세라핌에게 있어 새롭고 더 높은 수행을 위한 준비에 불과했다.

1810년 5월 8일, 그는 3년 동안이나 떠나 있었던 숲에서 다시 은둔처로 돌아왔다. 그는 성 니콜라이 축일 전날 저녁 기도 시간에 수도원에 모습을 드러냈고, 말없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축일 당일, 성 세라핌은 이른 미사에 참석하여 성체를 영하고 원장 니폰트 신부로부터 축복을 받았다. 그 후 그는 다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문을 잠갔다. 세라핌은 새로운 수행, 즉 은둔의 수행에 착수했다. 그는 15년 반 동안 은둔 생활을 했다. 겨울에는 천상의 여왕 성화상 앞에 놓인 램프의 희미한 빛만이 비추는 난방 없는 방에서 모든 시간을 보냈다. 처음에는 장작더미 위에 앉아서 잤고, 나중에는 스스로 깎아 만든 관에 누워 잤다. 예전 숲속 오두막에서와 마찬가지로, 세라핌은 몸에 쇠사슬을 차고 다녔으며, 스스로를 더욱 고생시키기 위해 방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장작을 옮기곤 했다. 낮에는 성경을 소리 내어 읽었고, 밤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여,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영적인 기도를 드리며, 금식과 마음 가다듬기에 힘썼다. 이 무렵 기도 중에 성 세라핌은 여러 가지 환상을 보았는데, 그는 나중에 그 내용을 제자들 중 몇 명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일요일과 축일에는 성찬을 받았는데, 이는 원장의 축복에 따라 이른 아침 성찬식 후 그의 거처 문에 있는 작은 창문을 통해 전달되었다. 교구 주교가 은둔처에 도착하여 그의 방으로 다가갔을 때, 주교 앞에서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10년간의 은둔 생활 끝에야 세라핌은 사람들이 자신의 방에 들어오도록 허락했으며, 침묵으로 이에 대한 축복을 내렸다.

1825년 11월 25일, 은둔자의 방 문이 열렸고, 그날부터 세라핌에게는 장로로서의 삶, 세상에 봉사하는 삶—끝없는 사랑으로 가득 찬 위대하고 은총 넘치는 위업—이 시작되었다. 신도들이 무리를 지어 그의 방으로 찾아왔다.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가르침을 주면서, 세라핌 장로는 그들에게 끊임없이 주님을 기억하고, 특히 ‘마음의 기도’를 꾸준히 드릴 것을 권면했다. 세라핌 신부님은 보통, 그 안에 모든 절제와 깨어 있음이 담겨 있으며, 이 기도는 항상 마음과 가슴에 간직해야 하고, 걸을 때나 앉을 때, 일할 때, 예배가 시작되기 전 교회에서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평안과 영혼과 육체의 정결함을 얻게 될 것이며, 모든 선의 근원이신 성령께서 네 위에 머무르시며, 너를 하나님의 경외와 정결함 가운데 지키실 것이다. 대화가 끝날 무렵, 장로는 축복의 기도를 올리고 축복을 내린 뒤, 방문객에게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나이다, 나의 기쁨이시여!”라고 말하며 입맞춤을 해주었고, 그 사람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그의 은둔처에서 떠났다.

은둔 생활이 끝날 무렵, 세라핌에게서 비범한 힘이 흘러나왔다. 그는 오랫동안 다리 마비로 고통받던 지주 미하일 만투로프, 즉 경건한 기독교인을 치유했다. 그리고 이는 수많은 기적적인 치유의 시작에 불과했다. 성인의 기도를 통해 오랫동안 몹시 고통스러운 병을 앓거나 갑작스럽게 병에 걸린 환자들이 다시 건강해졌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세상에 베푼 사역의 증인이 되었다. 그의 예언 중 많은 것도 실현되었다. 다음은 그 중 한 가지 예입니다. 1831년 폴란드 반란 당시, 한 연대의 한 중대가 사로프 수도원을 행군하며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중대장(아마도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은 병사들에게 장로의 축복을 받기 위해 멈추라고 명령했습니다. 장로는 그의 요청을 들어주어 병사 한 명 한 명을 따로 축복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이 중대에서는 아무도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중대는 폴란드 전역전을 모두 치렀고, 바르샤바 공략전에도 참여했으나, 그 중대 소속 병사 중 단 한 명도 전사하지 않았습니다.

장로는 방문객 중 한 명인, 다리 질환을 앓고 있던 니콜라이 모토빌로프를 각별한 사랑으로 대했으며, 그를 병에서 치유해 주었다. 1831년 11월, 1825년 이후 성 세라핌이 수행하며 방문객을 맞이했던 오두막 근처 숲속 빈터( )에서 모토빌로프는 장로로부터 성령을 얻는 법에 대한 가르침([1317] )을 받았으며, 성인과 함께 성령의 은총이 나타나는 광경을 목격하는 영광을 누렸다. 또한, 성 세라핌의 삶에서 여성 수행자들을 영적으로 돌보는 일이 큰 비중을 차지했는데, 이는 후에 수도원으로 개편된 디베예프스카 자매 공동체의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세라핌 장로의 삶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 8년 동안 진정으로 성인의 삶이 되었다. 사랑으로 가득 찬 그의 수행으로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 세상의 경계를 넘어섰다. 그리고 그의 숲속 은신처로 찾아오던 신실한 신자들에게 그는 더 이상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오직 사람에 대한 사랑 때문에 여전히 육신을 입고 계신 성인이었습니다. 그의 외모에는 다른, 천상의 세계의 빛이 비치는 특징들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1833년 1월 1일 일요일, 그 장로는 신성한 전례에서 마지막으로 기도했다. 그는 자신의 거처에서 하루 종일 부활절 찬송가를 불렀고, 자신이 무덤으로 정한 장소로 세 번이나 찾아갔다. 다음 날인 1월 2일, 사람들은 그의 거처에서 ‘감동’이라 불리는 천상의 여왕 성화상 앞에서 기도하는 자세로 무릎을 꿇고 있는 그를 발견했으나,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성 세라핌은 영원한 생명으로 떠나신 것이었다. 여러 세대에 걸친 신자들이 경건한 마음으로 그의 무덤에 와서 기도하며 깊은 숭배를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성직자 회의는 이러한 숭배에 대해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성 세라핌은 1903년이 되어서야 성인의 반열에 올랐으며, 1903년 7월 19일 그의 부패하지 않은 유해가 이장되었다. 러시아에서 살아본 사람이라면, 이 성인이 국민 각계각층에서 얼마나 큰 숭배를 받고 있는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1318] .

 

6. 옵티나 수도원과 그곳의 장로들

19세기 러시아의 영적·종교적 삶에서 옵티나 수도원은 지극히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수도원 자체와 옵티나 장로들이 수행하던 스키트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쳤다. 이곳에서는 거의 한 세기(1828–1922) 동안 러시아의 영적 삶에 막강한 영향을 미친 ‘옵티나 학파’가 형성되었다. 무엇보다 먼저 레오니드(1828–1841), 마카리(1841–1860), 암브로시우스(1860–1891), 요세프(1892–1911), 바르소노피우스(† 1913), 넥타리우스(† 1928), 아나톨리우스(† 1922) 장로들을 먼저 언급해야 한다. 이 은둔원은 엄격한 공동 생활 규율을 따랐다. 원장부터 수도사들까지 개인 소유물은 전혀 없었으며, 모두 원장과 함께 식당에서 식사를 했고, 차나 설탕 같은 사소한 것조차 수도사들은 은둔원에서 제공받았으며, 옷과 신발은 말할 것도 없었다. 오직 스키트의 장로들을 위해서만 음식이 따로 준비되어 그들의 거처로 가져다주었다. 각 수도사에게는 각자의 방이 있었으며, 19세기 초 약 300명에 달했던 수련생과 수도사들은 원장이나 식량 담당 수도사로부터 임무를 부여받았다. 예배 규정은 특히 엄격하게 준수되었는데, 티피콘에 규정된 모든 예배가 정해진 순서에 따라 거행되었고, 수도원 공동체는 이에 반드시 참석해야 했다; 수도원의 내적 정신은 그토록 일체감을 이루고 있었으며, 거주자들의 의식과 영혼 깊숙이 스며들어 있었기에, 원장이나 장로들은 수도사들을 무언가로 강요하거나 훈계할 필요가 없었다. 이러한 정신은 수도원을 찾는 신자들과 방문객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으며, 그들은 수도원에 머무는 동안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석하곤 했다.

이러한 수도원의 내적 생활 체계는 19세기에 이르러서야 확립되었으나, 옵티나는 이미 고대부터 설립되어 있었다. 내면적으로 옵티나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겉모습도 금욕적인 풍채로 인해 장로와 닮았던 프로토이레이 세르기이 체트베리코프는 수차례 수도원을 방문했으며, 자신의 관찰과 인상을 바탕으로 옵티나 푸스티나에 관한 훌륭한 책 『[1319] 』을 저술했다.

이 고대 러시아 수도원은 오카 강의 지류인, 폭은 좁지만 수심이 깊은 지즈드라 강변, 거대하고 울창한 소나무 숲의 가장자리에 자리 잡고 있다. 수도원은 네 모퉁이에 작은 탑이 있는 하얀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네 면 모두 담장 중앙에 문이 있다. 성벽과 탑들은 수도원이 군사적 방어에 대비하고 있음을 상기시키는 동시에, 신자들에게 영적 원수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의 영혼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심어줍니다. 수도원 성벽 안에는 여러 개의 교회가 서 있는데, 그중 가장 큰 것은 성모 마리아의 성전 입성을 기념하는 수도원의 주성당이다. 성벽을 따라 수도원 수도실과 각종 부속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는 또한 세상을 떠난 수도사들이 안장된 수도원 공동 묘지가 있다. 감동적인 비문들은 고인들과 그들의 수도 생활에 대한 모습을 엿보게 해준다. 예를 들어, 장로 레오니드의 무덤에 세워진 비석에는 “자신의 슬픔 속에서 위로를 받은 많은 이들의 마음에 자신의 기억을 남겼다”라고 적혀 있다. 옵티나 수도원의 교회들은 화려하지도, 특별히 아름답지도 않지만, 모든 것이 조화롭고 소박하며 꾸밈없고, 모든 것이 너무나 아늑하고 위로가 되어 그곳을 떠나고 싶지 않을 정도입니다. 예배는 지나치게 길지도, 짧지도 않으며 깊은 영적 감동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옵티나의 장로들은 보통 스키트에서 살았다. 스키트란 고요함과 은둔을 추구하는 수도사들이 피신하는 수도원의 일부이다. 옵티나의 스키트는 숲속에 위치해 있으며, 수도원 본원으로부터 0.5km 떨어져 있다. 그곳으로 가는 길을 잘 모르는 사람은 쉽게 찾을 수 없다. 스키트는 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다. 대문에는 성자들의 성화가 그려져 있다. 성스러운 대문 오른쪽에는 장로 암브로시우스가 살았던 작은 오두막이 있고, 왼쪽에는 그의 스승인 장로 마카리우스가 은거했던 또 다른 오두막이 있다. 경건한 마음으로, 머리를 가리지 않은 채 신자는 작은 문을 열고 기도와 깊은 경건함이 깃든 이 스키트의 성스러운 문턱을 넘어선다. 그를 맞이하는 것은 넓고 모래가 뿌려진 오솔길 양쪽에 피어 있는 꽃들의 진한 향기이며; 꽃들은 교회를 둘러싸고, 현관 바로 앞까지 닿아 있으며, 식당, 수도사들의 방, 벌통이 있는 양봉장, 연못, 키파리스 가로수길, 묘지로 이어지는 작은 오솔길을 따라 자라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화려함 한가운데에는 작고 투명한 창문이 달린, 밝고 깨끗한 은둔자들의 거처가 숨어 있다[1320] .

옵티나 수도원의 외적 역사는 고대 루스의 다른 많은 작은 수도원들의 역사와 비슷하다. 15세기에 설립된 이 수도원은 ‘혼란의 시대’에 폴란드 군대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 오래된 시노디크를 바탕으로 볼 때, 이 수도원은 파괴되기 전까지는 ‘남녀 공존 수도원’이었으나, ‘혼란의 시대’ 직후 재개된 후에야 비로소 남성 전용 수도원이 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1717년 표트르 대제 치하에서 이 수도원은 몇 년간 폐쇄되었다가 1726년에 재개되었으나, 18세기 내내 수도사 수가 10명에 미치지 못하는 작은 수도원으로 남아 있었다. 모스크바 대주교 플라톤 레브신(1775–1812)은 가브리엘 페트로프 대주교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교구 내 수많은 수도원을 재개하고 정비한 인물[1321] 이었는데, 강변에 그림처럼 자리 잡은 이 수도원에도 주목했다. 그는 페스노슈스키 수도원(1788–1811)의 원장인 아르히만드리트 마카리(브류슈코프)에게 수도원을 정비하도록 지시했다[1322] . 이 마카리는 장로 파이시이 벨리치코프스키의 학파와 연관이 있었으며, 그와 서신을 주고받았다. 마카리우스는 나중에 옵티나 수도원의 원장이 된 수도사 아브라아미를 그 은둔처로 보냈으며, 아브라아미는 주로 은둔처의 외부 정비를 담당했다.

수도원의 내적 생활을 정비하는 데 있어 가장 큰 공로는 원장 모이세이 푸틸로프(† 1862)에게 돌아간다. 그는 이전에 로슬라블 숲으로 피신하여 그곳의 한 은둔처에서 원장으로 지냈다. 인 1820년에 칼루가 주교 필라레트(암피테아트로프, 훗날 키예프 대주교)가 옵티나 근처에 스키트를 설립했을 때, 모이세이는 그곳에 정착했고, 1825년에 주교는 그를 스키트의 원장으로 임명했다. 모이세이는 몇 명의 은둔자들을 더 초빙했는데 (안토니, 일라리, 사바티)를 더 초청했는데, 이들은 모두 파이시의 가르침에 따라 엄격한 공동생활 규율을 신봉했으며 이를 철저히 준수했다. 모이세이의 원장 재임 기간(1825–1862)은 옵티나의 독특한 정신과 내부 생활 체계를 형성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1323] .

이곳에서 장로 제도는 레오니드 나골킨 신부(1768–1841)에 의해 도입되었다[1324] . 레프 나골킨은 중산층 가정에서 자랐으며, 약 10년 동안 한 상인의 집에서 일했으나, 그 후 그 자리를 떠나 1794년에 옵티나로 와서 2년을 보냈다. 그곳에서 그는 벨로베레즈카야 푸스티니(오를로프 교구)로 옮겨갔는데, 그곳의 원장으로는 파이시이 장로의 친구인 바실리 키슈킨 장로가 있었다. 바실리 신부는 그를 레오니드라는 이름으로 수도자로 서품했다. 레오니드는 바실리 키슈킨 장로를 통해 아폰 산의 규율과 전통을 접하고, 파이시이의 가르침을 알게 되었다. 바실리 신부가 은둔 생활을 하기 위해 원장직을 내려놓자, 수도원 형제들은 레오니드를 신임 원장으로 선출했다(1806년). 레오니드는 또한 당시 벨로베레즈카야 수도원에서 수행 중이던 테오도르 장로(† 1822)의 제자이기도 했으며, 테오도르 장로 역시 파이시이 장로의 제자 중 한 명이었다. 4년 후 레오니드는 원장직을 사임하고 장로 테오도로와 함께 다시 수도원을 둘러싼 숲으로 들어갔다. 이곳에서는 이미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장로 클레오파가 완전한 은둔 속에서 수행하고 있었다. 숲속에서 레오니드는 대스키마를 입었다. 그러나 이 수행자들의 은둔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고, 수도 생활을 추구하는 경건한 사람들이 그들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들은 발라암 수도원으로 가서 작은 스키트에서 수행했다. 이 무렵 레오니드 신부는 영적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시작했는데, 그에게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영적 조언을 통해 도움을 주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약 40세였다. 영적 지도자 역할은 당시 모든 수도사들에게 인정받지는 못했으며, 특히 상급자들은 그를 자신의 명예와 지위를 훼손하는 존재로 여겨 특별한 의심을 품고 있었다. 아마도 발라암 수도원의 원장도 같은 종류의 의구심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테오도르와 레오니드(클레오파 장로는 1817년에 별세했다)는 발라암을 떠나 알렉산드로-스비르스키 수도원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1822년에 장로 테오도르가 세상을 떠났다. 1829년까지 레오니드는 이 수도원에서 지내며, 많은 제자들을 두었는데, 그중에는 평신도 신자들도 포함되어 있었고, 영적인 장로로서의 그의 명성은 수도원 벽을 훨씬 넘어 널리 퍼져 나갔다.

파이시(벨리치코프스키), 바실리 키슈킨, 클레오파, 테오도르 등 장로들은 거의 전적으로 수도원 거주자들에게만 영적 지도를 제공했다. 그들은 입문자들을 받아들여 순종의 삶을 살게 했으며, 수도 생활의 영적 양성이 그들의 주된 관심사였다. 레오니드는 이 장로 시대의 막을 내리고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그는 장로 제도를 수도원의 울타리 밖으로 이끌어내어 외부 세계로 확산시켰으며, 영적 도움과 조언을 구하는 모든 이들에게 축복이 되게 했다. 이처럼 장로 레오니드의 위업은 장로 제도의 역사에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이 새로운 시대는 1829년, 레오니드 신부가 옵티나 수도원으로 돌아왔을 때 특히 뚜렷하게 드러났는데, 그는 1841년 10월 11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곳에서 수도 생활을 이어가며 수도원 내 영성 지도 전통의 초석을 다졌다. 레오니드의 업적은 옵티나를 러시아의 영적 중심지로 변모시키는 데 기여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생활의 다양한 문제에 대한 도움과 영적 조언을 얻기 위해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이 장로의 생애에는 이 은혜로운 수행자가 때로는 엄격함으로, 때로는 온유함으로, 그리고 종종 심오한 농담을 통해 세상에서 그를 찾아온 사람들에게 영적으로 어떻게 도움을 주었는지에 대한 많은 사례가 담겨 있다. 다른 옵티나 장로들보다 레오니드는 특유의 소박한 성품과 가르침으로 두드러졌으며, 그 때문에 러시아 민중의 가장 폭넓은 계층과 가까웠다. 민중은 이러한 대접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겼는데, 이는 그들 스스로도 자신의 농담과 속담에 첫눈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레오니드의 행실에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유로드(성스러운 광인)’의 기질이 많이 담겨 있었으며, 그 ‘sancta simplicitas’[성스러운 단순함]은 가장 학문적인 가르침[1325] 보다 민중에게 더 많은 것을 말해 주었다.

옵티나에서 장로 전통을 이어간 마카리 이바노프 장로는 완전히 다른 인물이었다. 그 덕분에 많은 러시아 작가, 시인, 사상가들이 기독교의 금욕적 정신을 깊이 체득할 수 있었다. 19세기 러시아의 영적 역사에서 장로들의 영향력은 의심할 여지 없이 지극히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며, 이를 빼놓고는 그 시대 사람들의 견해와 철학적 체계를 명확히 파악할 수 없다[1326] . 마카리 장로는 귀족 출신이었다. 플로슈찬스카야 은둔처로 순례를 다닐 때, 그는 그곳의 원장인 파이지의 제자인 장로 예로모나흐 아파나시우스를 알게 되었다. 수도원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아파나시이 장로와의 대화는 젊고 섬세하며 감수성이 풍부하고 어느 정도 예술적인 기질을 지닌 이 젊은 귀족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고, 그는 수도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는 24년 동안(1810–1834) 은둔원에서 수행했으며, 그중 13년(1810–1823)은 장로 아파나시우스(† 1823)의 지도 아래 지냈다. 마카리우스는 그로부터 성부들의 금욕적 저작을 심도 있게 연구하려는 성향을 물려받았다.

마카리우스는 다른 장로들보다 자신의 수도 생활에서 단지 자신의 영적 수행 경험뿐만 아니라 교회 교부들의 저술에 더 많이 의지했다. 수많은 책으로 가득 찬 그의 방은 방문객들에게 마치 학자의 서재 같은 인상을 주었다. “그의 장로로서의 활동에는 나름의 특징이 있었다. 방문객들과는 농담 없이 차분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레오니드는 요점을 재빨리 파악하는 재능을 지녔으며, 이는 영리한 러시아 농민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재치와 결합되어 있었고, 이 재능은 그의 풍부한 경험을 통해 더욱 발전되었다. 마카리이는 전적으로 금욕주의 저작 연구에 몰두해 있었으며, 평생 그 내용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그의 대화는 인용구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평범한 경건한 신자와도, 학식 있는 신학자와도, 철학 교육을 받은 방문객과도 똑같이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마카리 장로의 나무로 지어진 작은 방은 레오니드 신부의 방보다 훨씬 더 다양한 방문객들을 맞이했다. 책과 성화로 가득 찬 이 방의 문턱에 서기만 해도, 마치 인간의 지혜가 이곳에서 기독교적 경건함과 결합된 듯, 방문객은 그곳의 지극히 특별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고, 장로와 한두 시간 대화를 나눈 후에는 그의 시각이 완전히 달라지기도 했다… 많은 이들이 마카리우스가 가장 어려운 신학적 문제들을 얼마나 단순하고 수월하게 해결해 내는지 놀라워했다. 사회의 영적 양육에 있어 러시아의 가장 외진 구석구석까지 전해지던 그의 편지들은 특별한 의미를 지녔다. 그는 수많은 영적 아들들과 딸들을 단 한 번도 직접 만나지 않은 채 편지를 통해 돌보았다. 일부 여성 수도원들도 이러한 영적 지도 아래 있었다. 그의 엄청나게 방대한 서신집은 훗날 여러 권으로 출판되었으나, 이 출판물은 그의 편지 중 일부만을 다루었을 뿐이다.[1327] .

20년 동안(1841–1860) 장로 마카리우스는 옵티나 영적 생활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공적이 그에게 있다. 그의 지도 아래 많은 교부 문헌과 금욕주의 저작들이 러시아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철학자이자 신학자이며 모스크바 신학 아카데미 교수인 F. A. 골루빈스키, 슬라브주의 사상가 I. V. 키레예프스키, 그리고 당시 옵티나에서 수행하던 몇몇 교양 있는 수도사들이 이 사업에서 그의 조력자가 되었다. 장로의 거처는 마치 편집실과도 같았는데, 이곳에서 성부들의 저작들이 번역되었으며, 번역의 한 단어 한 단어를 신중히 다듬었기 때문에 옵티나 출판물들은 훌륭한 문체와 금욕적·신비주의적 저작들 중 가장 난해한 표현들의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특징을 지녔다. 가장 중요한 간행물 몇 가지만 꼽자면, 장로 파이시이 벨리치코프스키의 전기와 저술, 장로 닐 소르스키의 저술, 아바 바르소노피오의 저술, 시메온 신학자의 전기와 저술, 성 테오도르 스투디토스의 『위대한 설교집』, 4권으로 엮인 성 이삭 시리노스의 저작, 성 막시모스 고백자의 『팔라시오에게 보내는 질문들』 등입니다.[1328]

1860년대 초, 옵티나 은수원은 큰 상실을 겪었다. 1860년 9월 7일, 장로 마카리우스가 선종하였고, 2년 후 오랫동안 은둔원의 원장직을 맡아온 아르히만드리트 모세이가 세상을 떠났으며, 1865년에는 그의 형제이자 엄격한 수행자였던 안토니우스가 선종했는데, 그는 모세이와 함께 로슬라블 숲에서 옵티나로 들어와 은둔원의 영적 생활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었다. 그러나 레오니드와 마카리이 두 장로의 제자인 새로운 원장 아르히만드리트 이사아키(1862–1894)를 통해 은둔원은 다시 선한 목자를 얻게 되었다. 또한 수도원의 금욕적 정신을 보존하고 심화시키는 데 기여한 두 명의 수행자, 즉 스키타의 원장인 이라리온(1860–1873)과 아나톨리(제르찰로프; 1874–1894) 신부도 언급할 필요가 있는데, 두 사람 모두 마카리이 장로의 제자였다.

19세기 후반, 옵티나 수도원의 영적 삶의 중심이 된 인물은 장로 이에로스키모나흐 암브로시(그렌코프, 1812–1891)였다. 그를 개인적으로 잘 알고 대화를 나누었던 프로토이레이 S. 체트베리코프는, 성격과 장로로서의 지도 방식에서 두 선임자인 레오니드와 마카리우스의 은사를 조화롭게 결합해 낸 ‘암브로시 신부’의 생생한 초상을 우리에게 전해 주었다. S. 체트베리코프는 “암브로시우스는 ‘크고 사랑이 넘치는 마음을 지녔다’고 썼다. ‘그는 신학적으로 매우 교양이 깊었고, 위대한 삶의 지혜를 지녔으며, 생동감 있고 유쾌한 성품을 가졌고, 실천적인 활동에 큰 소질을 보였으며,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다’.” 장로 레오니드와 마카리우스와 달리 알렉산드르 그렌코프(세속 이름 암브로시우스)는 탐보프의 신학교를 졸업한 후, 한동안 성직자 자녀들에게 초등 교육을 제공하던 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의 종교적인 영혼 속에는 점차 수도 생활에 대한 끈질긴 열망이 싹트기 시작했고, 병을 앓은 후(그는 태어날 때부터 체질이 약했다) 알렉산드르는 수도사가 되기로 굳게 결심했다. 그의 고향 마을 근처에서 은둔 생활을 하던 한 장로의 조언에 따라 그렌코프는 옵티나로 떠났고(1839년), 한동안 레오니드 장로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임종을 앞두고 레오니드 신부는 마카리 신부에게 암브로시우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아이를 너에게 전한다. 이 아이는 우리 장로들에게 유난히 잘 따르거든.” 그리하여 암브로시우스는 스승의 뜻에 따라 마카리우스 신부님의 지도 아래로 옮겨갔다. 암브로시우스는 금욕주의 저작물 출판을 준비하던 마카리우스 장로에게 자신의 지식과 힘을 아낌없이 바친 이들 중 한 명이 되었다.

암브로시오의 신체적 질병에 대한 다음과 같은 발언은 그를 잘 나타내는 특징이다. “수도원에서는 약간 아픈 것이 유익하다. 수도사는 본격적으로 치료받지 말고, 가볍게 관리만 하면 된다.”

장로 암브로시오의 영향력은 그의 전임자들보다 훨씬 더 넓었다. 마카리우스와 마찬가지로, 그는 옵티나 수도원의 수도사들뿐만 아니라 수도원 담장 너머 멀리 사는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영적 지도자가 되었다. 그의 장로 시절은 1874년부터 1891년까지 20년 동안 이어졌으며, 그는 1891년 10월 10일에 선종했다.

수많은 신자들이 장로 암브로시우스를 찾아왔는데, 그들은 조언과 영적 도움을 구하기 위해 그에게 왔고, 스키트(은둔처)에 있는 그의 작은 오두막을 떠날 때는 위로받고 기쁨에 차 있었다. 암브로시우스는 자신의 거처에서 블라디미르 솔로비예프, F. M. 도스토옙스키, 레프 톨스토이와 긴 대화를 나누곤 했는데, 이들은 서로 매우 다른 사람들이었고, 각기 다른 시각으로 평가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 뛰어난 러시아 사상가들이었으며, 그들의 저술은 조국 밖에서도 널리 퍼지고 인정받았다. 그리고 아마도 그들의 견해나 견해의 변화에 대해 고찰하는 모든 독자가, 여기서 옵티나 수도원의 정신과 옵티나 원로들인 마카리우스와 암브로시우스가 얼마나 큰 의미를 지녔는지 알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유명하든 무명이든 많은 러시아 지식인들이 교회와 화해하는 데 있어 옵티나 은둔원의 장로들의 영향력은 결정적인 의미를 지녔다. 같은 방향으로 활동한 테오판 자트보르니크 주교는 자신의 저술을 통해 길을 잃은 많은 이들을 교회로 되돌려 놓는 데 성공했다.

장로 암브로시의 방대한 서신 교환은 옵티나 사막이 세상에 미치는 영향력을 상당히 확대하고 심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는 여성들의 종교 생활에 많은 관심과 시간을 쏟았다. 디베예프스키 수도원이 성 세라핌의 영적 지도에 자신을 맡긴 것과 마찬가지로, 암브로시이 장로가 설립한 샤모르딘 자매 공동체도 그의 영적 돌봄 아래 머물렀다[1329] .

옵티나 수도원의 삶과 정신을 잘 알고 있던 S. 체트베리코프는 자신의 저서 결론에서, 장로 암브로시우스의 서거 이후 “옵티나 사막의 장로직은 사라지지 않았으나, 예전과 같은 힘과 영향력은 더 이상 발휘하지 못했다”고 결론지었다[1330] .

암브로시우스의 제자인 장로 요셉(† 1911)은 스승의 업적을 이어갔으며, 내면의 고통과 근심을 안고 옵티나로 찾아온 신자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사막의 영적 생활 중심에는 ‘아나톨리 2세’(† 1922)로 불리는 장로(스키타의 수장인 ‘아나톨리 1세’ 신부장과 구별하기 위해)가 자리 잡았는데, 그 역시 암브로시우스 장로의 제자였다; 방문자들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자비와 진심 어린 정성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아나톨리 신부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던 S. 체트베리코프에 따르면, 그는 성 세라핌 사로프스키[1331] 를 연상시켰다고 한다. 아나톨리 신부와 동시에 옵티나에서 수행한 장로 넥타리(† 1928)는 장로 아나톨리(장로)의 제자였다. 넥타리우스는 내면적으로 은둔을 갈망하던 소년 시절에 은둔처에 들어와 스키트에서 수행했으며, 장로 요시프가 입적한 후에야 비로소 장로의 임무를 맡았으나, 세상에 미친 그의 영향력은 다른 장로들에 비해 더 좁았다[1332] .

끊임없이 이어진 장로들의 계보는 물론 옵티나 은둔원의 내적 삶에 지대한 의미를 지녔다. 그러나 옵티나 장로직은 장로직 역사 전반에서 하나의 시대를 이루었는데, 이는 옵티나 장로들이 자신의 영적 힘을 세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바쳤기 때문이다. 이는 일종의 러시아 수도 생활의 사랑의 수련이었으며,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각 개인이 자신의 짐을 짊어지도록 돕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었다. 한편, 장로들은 기독교적 사랑의 정신으로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나아가 교회의 문턱에 서 있는 이들을 교회 안으로 이끌어, 이후 그들의 삶이 기독교적 도덕의 정신에 따라 세워지도록 노력했다. 어쩌면, 이 일에서 장로들의 성과가 항상 충분히 뚜렷하지는 않았을 수도 있고, 어쩌면 미래의 역사가가 그들의 활동이 펼쳐졌던 그 역사적 조건 속에서 장로들이 세상에 미친 실질적인 영향 자체를 의심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로 제도는 시노달 시대 수도원 역사에서 강력한 금욕주의적 흐름이었으며, 러시아 교회 생활에서 매우 결실 있는 현상이었다.

어쨌든, 이 시기의 장로제는 위로부터, 즉 계층 구조 측의 어떠한 영향도 없이 아래에서부터 자발적으로 발전한 통합적인 현상이었습니다. 이는 ‘국가적 교회성’이 신자들과 수도사들의 영혼 주위에 세운 장벽을 뚫고 나온 독특한 돌파구였으며, 스타르체스트보에서는 고대 기독교의 금욕적 정신을 부활시키려는 열망이 드러났는데, 어떤 수도원에서는 더 강하게, 다른 곳에서는 덜 강하게 나타났습니다.

 

7. 다른 스타르체스트보의 중심지들

러시아의 스타르체스트보는 지난 두 세기 동안 수도 생활에서 말 그대로 금욕주의 운동, 혹은 흐름이었는데, 사로프와 옵티나만이 그 중심지였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스타르츠 파이시의 직계 제자들의 노력 덕분에, 고대 교회의 금욕적 정신을 되살린 이 흐름에 다른 수도원들도 동참하게 되었다. 이곳들은 파이시이의 제자들이 오랫동안 혹은 적어도 일정 기간 동안 수행하며, 그들의 노력이 결실을 맺은 수도원과 은둔지들이었다.

이러한 수도원 중 하나는 1659년, 포니조비야 지역에 수도원이 확산되던 시기에 설립된 사낙사르스카야 은둔처(탐보프 교구)로, 당시 이곳은 가장 외진 수도원 중 하나였다. 이 은둔처의 수도사 수는 항상 매우 적었으며, 1753년에 이 수도원은 사로프 은둔처에 편입되었다. 노장 수도사 테오도르 우샤코프(1762–1774, 1783–1791)가 두 차례에 걸쳐 원장직을 맡은 시기에야 비로소 수도원의 수도 생활이 올바른 궤도에 올랐고, 공동 생활 규율이 도입되었다. 18세기 마지막 4분의 1과 19세기 전반에는 사로프 수도원과 엄격한 금욕적 생활 체계를 특징으로 했던 다른 은둔지들[1333] 와 밀접하게 연결된 이 은둔지에서 금욕적 수행이 전성기를 맞이했다.

금욕적 수행의 또 다른 중심지는 여기서 여러 번 언급된 플로슈안스카야 사막이었는데, 이곳은 1764년에 비정규 수도원 범주에 포함되었다. 특히 언급할 만한 인물로는 1741–1746년에 이 수도원의 원장직을 맡았던 장로 요아사프와, 1772년에 시모노프 수도원으로 옮긴 장로 알렉시(블린스키; 1722–1812)가 있다. 오랫동안 사막에서 수행한 장로 아파나시이(자하로프; † 1823)는, 그의 영적 지도 아래에서 훗날 옵틴의 장로가 된 마카리이 이바노프 신부가 이곳에서 구원을 얻었다. 아파나시이 장로의 또 다른 제자인 알렉산드르는 스파스스키 수도원의 원장 재임 기간(1810년–약 1820년) 동안 공동 생활 규약[1334] 을 도입함으로써 그곳의 수도 생활을 진정으로 혁신했다.

파이지스 장로의 제자들의 노력 덕분에 벨로베레즈카야 은둔원(오를로프 교구)의 수도사들의 삶도 변화되었습니다. 이 은둔원은 비교적 늦은 시기인 1661년경, 예로모나흐 세라피온(대스키마 수계를 받을 때 받은 이름인 시메온으로 더 잘 알려져 있음)에 의해 설립되었으나, 이미 18세기 초에 은둔원은 완전히 쇠퇴해 버렸고; 1721년에 브랸스크의 포크로프스키 수도원 원장인 아르히만드리트 피티림이 이를 재개했으나, 1764년에 폐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수도사들이 은둔원에 남아 있었는데, 말하자면 시노드에게는 잊혀졌지만 하느님께는 잊히지 않은 이들이었으며, 그들의 노력으로 이 수도원의 삶을 상당한 금욕적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1817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 은둔원은 시노드에 의해 ‘공식적으로 재개’되었다. 1801년부터 1809년까지 이곳에서 파이시우스의 제자인 이에로스키모나흐 테오도르가 수행했으며,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는 클레오파 2세의 제자인 장로 마카리이 즈로빈(† 1839)도 이 은둔처에서 피신 생활을 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장로 바실리 키슈킨과 장로 레오니드 옵틴스키는 이곳에서 수년 동안 원장직을 맡았다(1806–1811). 이 작고 가난한 은둔처는 주로 바실리 키슈킨 장로(1800–1806년 및 1811–1827년 원장) 덕분에, 거주 수도자들의 엄격한 생활 방식[1335] 으로 수도자들 사이에서 명성을 얻었다.

16세기에 설립되었다가 타타르족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1630년경 재개되어 ‘성모 마리아 소프로니예프 수도원’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진 이곳에서도 수도사들의 삶은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 1656년까지 이 수도원은 푸티블에 있는 몰첸스키 수도원 (쿠르스크 교구)에 소속되어 있었다. 소프로니와 니콘이라는 두 명의 엄격한 수행자의 노력 덕분에, 니콘 총대주교는 이 수도원에 자치권을 부여했고, 소프로니 원장 수사는 오랜 기간 수도원을 이끌며 그곳에서 수도 생활을 마땅한 수준으로 유지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이 수도원은 일반적으로 소프로니예바 푸스티니라고 불리게 되었다. 심지어 1764년의 규정에서도 이 수도원을 위해 30명에 달하는 상당수의 수도사가 배정되었다. 1779년, 테오도시 마슬로프 장로가 티아스민 수도원의 수도사 대다수와 함께 소프로니예프 푸스티니로 이주하여 1803년까지 이곳에서 수행했으며,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수도원에는 아폰 산의 공동 생활 규율이 도입되었다. 또한 파이시우스의 제자이자 엄격한 은둔자였던 게라심 수도사도 이곳에서 피신 생활을 했다[1336] .

장로 파이시의 금욕적 계명을 각별히 소중히 간직했던 또 다른 수도원은 키릴로-노보예제르스키 수도원[1337] 이었는데, 이곳에서는 그 계명의 수호자인 장로 아르히만드리트 테오판 소콜로프가 40년(1793–1832) 동안 원장직을 맡아 수도원을 이끌었다. 긴 생애(1752–1832) 동안 테오판은 당대의 거의 모든 엄격한 수행자와 장로들을 직접 만나고, 그들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는 소콜로프 귀족 가문 출신으로, 14세 때 , 테오도르(그의 세속 이름)는 수도원에 들어가기로 결심했으나 부모가 그를 보내주지 않았다. 1771년 그는 모스크바에 거주하며 관료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당시 모스크바를 휩쓸었던 끔찍한 흑사병(테오판이 나중에 자신의 『수기』에서 묘사한 바와 같이)과 그로 인한 재앙들은 그가 수도 생활로 향하는 경향을 더욱 강화시켰다. 1772년 또는 1773년에 그는 마침내 자신의 소원을 이룰 수 있었다.

그는 스타레츠 테오도르 우샤코프가 원장으로서 섬기고 있던 사낙사르 은둔처로 들어갔다. 테오판 소콜로프는 그로부터 수도 생활의 금욕적 기초를 배웠으며, 평생 수도원 장로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신봉자로 남았다. 이 무렵 그는 금욕적인 주교 티혼 자돈스키를 알게 되었는데, 이 만남은 젊은 수도사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수밖에 없었다. 1774년, 세속 당국의 간섭과 음모로 인해 테오도르 우샤코프 장로가 수도원을 떠나야만 했을 때, 수도사 테오판 역시 수도원을 떠나 당시 클레오파 1세 장로가 수행 중이던 브베덴스카야 오스트로프스카야 수도원으로 옮겼다. 이곳에서 테오판은 클레오파의 영적 지도 아래 3년을 지내며, 그로부터 아폰 수도사들의 생활 방식과 장로 파이시이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그 후 그는 자신의 장로로부터 아폰으로 갈 수 있는 허락과 축복을 받았다. 가는 길에 테오도르 소콜로프와 그와 동행한 몇몇 수도사들은 티아스민 수도원에 들렀는데, 그곳에서는 당시 장로 테오도시 마슬로프가 원장직을 맡고 있었다. 테오도르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장로 테오도시는 그가 아폰으로 더 나아가도록 축복해 주지 않았고, 그는 티아스민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서 테오도르 소콜로프는 테오판이라는 이름으로 수도자가 되었으며, 장로 테오도시는 그를 자신의 영적 지도 아래 두었다.

테오판은 항상 장로 테오도시의 지도 아래에서 보낸 시간을 큰 애정으로 회상하곤 했다. 안타깝게도 그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1774년 러시아와 터키 간의 큐추크-카이나르지 조약에 따라 오스만 제국에 귀속된 몰다비아 지역의 그리스 정교회 수도원들은 터키 당국의 각종 박해로 인해 매우 힘든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래서 장로 테오도시우스는 티아스민 수도원의 수도사들을 러시아로 이주시키기로 결심했다. 여기서 한 가지 덧붙이자면, 수도사들 중에는 아파나시이라는 이름의 수도사가 있었는데, 그는 지극히 겸손한 사람으로 수도원에서 가장 힘들고 더러운 일을 기꺼이 맡아 하는 것을 좋아했다. 이 아파나시이는 바로 앞서 언급된 요브 주교의 형제이자, 막강한 권력을 가진 G. A. 포템킨 공작의 친척이었다. 오직 장로 테오도시만 이 겸손한 아파나시의 비밀을 알고 있었으며, 그를 상주 이전을 요청하는 사절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보내면, 그의 가족 관계 덕분에 이 노력이 성공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아파나시이는 장로 테오도시우스의 축복을 받아 수도사 테오파노를 동행자로 선택했다. 테오도시우스의 청원은 성공을 거두었고, 황후의 명령에 따라 테오도시우스 장로는 수도원 수도사 대다수와 함께 러시아로 이주할 허가를 받았으며, 그곳에서 그들을 위해 소프로니예바 푸스티니가 배정되었다. 처음에는 테오판도 이 수도원에 머물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가브리엘 대주교의 지시에 따라 티아스민에서 이주해 온 일부 수도사들, 그중에는 테오판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수도원 생활을 정비하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알렉산드로-네프스키 라브라로 소환되었다.

그리하여 테오판은 장로 테오도시의 지도를 따르며 머무는 대신,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게 되었는데, 그곳은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으며, 당연히 그의 금욕적인 성향과는 맞지 않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미트로폴리트 가브리엘이 직접 그를 잘 알게 되었다. 테오판은 라브라의 케라르로 오래 머물지 않았는데, 가브리엘 주교가 그를 자신의 측근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매우 짧은 시간 안에 테오판은 주교의 심복이자 비서가 되었으며, 주교는 곧 테오판이 수도원들에서 진정한 수도 생활을 회복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음을 깨달았다. 순수하고 겸손한 가브리엘 대주교는 테오판 신부를 엄격한 수도사로서뿐만 아니라, 그의 조언이 필요했기 때문에 높이 평가했다. 왜냐하면 테오판은 장로들과의 교제와 수도원 생활 덕분에 수도 생활 쇠퇴의 원인을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를 바로잡기 위한 대책도 제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테오판의 이름은 수도원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가브리엘 주교의 이름과 밀접하게 연결되게 되었다. 테오판의 도움 덕분에 이 개혁들은 장로 파이시이 벨리치코프스키의 금욕적 견해를 바탕으로 했으며, 테오판이 가브리엘에게 추천한 수도사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10년 동안 테오판은 대주교의 시종이었으나, 사실 단순한 시종이 아니라 그의 수석 보좌관이자 조언자였다. 그리고 이 모든 기간 동안 그는 평범한 수도사로 남았다. 그의 의지와는 달리 대주교는 테오판에게 사제 수도사 서품을 주었고(1785년), 1791년에는 거의 완전히 파괴된 수도원을 재건하기 위해 모덴 수도원(노브고로드 교구)의 원장으로 임명했다. 이곳에서 성직자 테오판은 2년 동안 수도 생활을 했으며, 1793년에는 키릴로-노보예제르스키 수도원의 원장으로 파견되었다.

벨로제르스크 시민들은 과거에 그토록 명성이 높았던 이 유서 깊은 수도원에 진정한 수도 생활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을 미트로폴리탄에게 여러 차례 호소하며, 수도원이 완전히 황폐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조치를 취해 줄 것을 요청했다. 테오판 신부는 수도원이 극도로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을 목격했다. 그곳에서는 노쇠한 예로모나흐가 사제직을 맡고 있었는데, 노환으로 인해 더 이상 예배를 집전할 수 없는 상태였다. 때때로 인근 시골 본당의 사제가 수도원에서 예배를 집전하곤 했다. 수도 공동체는 단 두 명의 수도사와 여덟 명의 수련자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이들은 제멋대로 생활하고 있었다. 수도원의 건물들은 완전히 낡아 떨어져 있었는데, 이는 이미 수십 년 동안 아무런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금 부족으로 인해 교회와 다른 건물들을 붕괴로부터 보존하기 위한 조치를 취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키릴로-노보예제르스키 수도원의 운명은 많은 외딴 수도원들의 전형적인 사례로 볼 수 있는데, 이는 18세기에 시행된 정부의 조치로 인한 결과였다. 당시 경제위원회는 수도원들을 말 그대로 약탈하며, 종종 매우 훌륭한 석조 건물인 수도원 건축물들을 실질적인 용도로 활용하기보다는 방치해 자연 재해의 영향에 내맡겨 버렸다. 구멍 난 지붕 사이로 해마다 빗물이 새어 들어오고 눈이 쏟아졌다. 수도사들은 완전히 무너진 거처에서 조금 더 나은 곳으로 옮겨 다녔고, 아무도 수도원 건물의 보존을 신경 쓰지 않았다. 게다가 세속화와 1764년의 예산 제도가 도입되었지만, 수도원에 배정된 예산은 소수의 수도자들을 먹여 살리는 데에만 겨우 충분할 뿐이었다. 19세기 초에 들어서야 수도원의 물질적 상황이 개선되었고(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새로운 건물을 지을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많은 수도원의 역사에서 알 수 있듯이, 19세기 전반에는 모든 수도원 자금이 건축에 쓰였다. 앞서 언급했던 아르히만드리트 피멘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원장 재임 시절 건축 업무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할애했는지 이야기한다. 다른 수도원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1338] .

테오판 역시 수도원의 외관 정비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을 수밖에 없었기에, 그가 원장직을 맡았던 시절 수도원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졌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수도원의 내적 생활도 재편했다. 그는 공동 생활 규율을 도입했고, 수도원의 수도사 수는 해마다 늘어났다. 테오판은 많은 수련생과 신입 수도사들을 영적으로 지도하며 원장직을 훌륭히 수행했다. 테오판이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당시 아직 젊은 수련자였던 아르히만드리트 피멘이 키릴로-노보예제르스키 수도원을 방문했을 때, 그는 그곳에서 큰 변화를 발견했다. 수도원의 외관과 내부 상태 모두 훨씬 나아졌으며, 그곳에는 질서가 깃들어 있었고 금욕적인 정신이 느껴졌으며, 수도원은 신자들로부터 다시 예전의 사랑을 되찾았다. 테오판 장로는 30년 넘게 이 수도원에서 수행하며, 파이시예 학파의 수도 생활에 대한 관점을 이곳에 뿌리내렸다.

테오판 신부의 영적 영향력은 그의 감독 하에 있던 인근 수도원들까지 미쳤다. 이 수도원들 중에는 고리츠키 여자 수도원이 있었는데, 테오판 장로는 고리츠키 수녀들을 돌보았으며 이 수도원을 매우 사랑했다. 생애 마지막 3년 동안 테오판 신부는 더 이상 원장이 아니었지만, 고리츠키 수도원의 수녀들을 돌보는 장로로서의 역할은 계속 수행했다.

1832년 12월 3일, 장로 테오판은 길고도 결실 있는 삶을 살다 세상을 떠났다. 그의 모습은 후대 사람들에게 옵틴 장로들의 모습에 가려져 있었으며, 테오판 신부는 러시아 장로사의 역사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연구자로서의 의무는 수도 생활 역사에서 그가 차지한 역할을 특별히 강조하는 데 있다. 그는 18세기 말 수도 생활의 부흥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1339] .

테오판의 모습을 통해 파이시이 벨리치코프스키 학파에 속했던 장로들과 수행자들의 특징을 정리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된 영적 중심지와 인물들만으로는 그 시대의 금욕주의 흐름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파이시이 학파의 범위를 벗어나서도 이 흐름은 그 못지않은 힘으로 드러났으며, 수도 생활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8. 성 티혼 자돈스키

우리가 이 금욕주의 흐름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우리 눈앞에 성 세라핌 사로프스키의 경이로운 모습과 나란히 또 하나의 놀라운 인물이 떠오르는데, 바로 성 티혼 자돈스키이다.

이 성인들, 티혼과 세라핌은, 신실한 러시아 백성들로부터 특별한 숭배를 받고 있는데, 이는 그들이 근대에 진정한 기독교 정신으로 살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고행과 성스러움의 모습이 겸손과 소박함, 세상에 열린 진심, 그리고 이 세상과의 내적 유대를 소중히 여겼던 백성의 경건한 이상과 특히 가깝기 때문이다. 성 세라핌과 성 티혼과 같은 러시아 수행자들의 행적을 읽으며, 무의식중에 그들을 가톨릭 교회의 성인들과 비교하게 되면, 우리는 성 프란치스코 아시시(St. Francis of Assisi)를 떠올리게 되는데, 그의 모습은 러시아 경건주의의 기독교적 이상과 매우 가깝습니다. 일부 연구자들이 성 프란치스코를 성 세라핌과 비교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1340] .

성 티혼은 1724년 가난한 시골 성가대원의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아주 일찍 아버지를 잃었고, 온 가족은 농민들에게서 보잘것없는 임금을 받으며 일하던 어머니의 빈약한 수입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1735년에 소년은 노브고로드의 신학교로 보내졌고, 1740년에는 그 학교의 최우수 졸업생 중 한 명으로서 그곳의 신학대학원에 입학했다. 모범적인 품행과 성실함 덕분에 그는 졸업 시험을 치르기도 전에 저학년 그리스어 교사로 임명되었고, 시험 후에는 수사학 강사가 되었다. 극심한 가난 속에 살던 친척들은 가족의 형편을 호전시키기 위해 시골 신부 자리를 맡아 달라고 그를 설득했다. 그러나 티모페이 소콜로프스키(세속 이름 티호나)는 이 요청을 거절했다. 훗날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몇 가지 사건들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그는 이를 다른 길을 선택하라는 하늘의 지시로 받아들였다.

비교적 늦은 34세의 나이에 티모페이는 티혼이라는 이름으로 수도자가 되었는데, 이는 1758년 4월 10일에 일어났다. 몇 달 후 그는 사제 수도사로 서품받았고 신학교의 감독관(교장)으로 임명되었다. 1년 후(1759년) 그는 아키만드리트가 되어 젤티코바 수도원의 원장 겸 트베리 신학교의 학장이 되었다. 이렇게 티혼은 학자 수도사의 일반적인 길을 걷게 되었는데, 바로 이 시기에 학자 수도자 집단이 특별한 계층으로 완전히 자리 잡으며 안정된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교육 활동은 먼 곳에 있는 수도원에 들어가 은둔 생활을 하고자 하는 그의 내적 영적 열망에 부응하지 못했고, 그의 마음속에서는 금욕적 수행에 대한 열망이 점점 더 강해졌다.

1761년 5월 13일, 티혼은 주교로 서품되어 노브고로드 교구의 부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미 1763년 2월 3일, 티혼 주교는 보로네즈 교구를 독자적으로 관할하게 되었다. 당시 이 교구는 가장 가난한 교구 중 하나였다. 경제위원회의 정책으로 인해 수도원과 주교좌는 완전히 황폐화되었고, 본당은 수가 적을 뿐만 아니라 극도로 가난했다. 게다가 교구에는 예카테리나 여제 치하에서 더 많은 자유를 얻은 구의식파 신자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정교회 신자로 등록된 이들 중에서도 분열을 지지하는 이들이 많았다. 나라 변방에 위치한 이 교구는 불안한 요소들로 넘쳐났고, 백성들 사이에서는 미신과 악덕이 극도로 만연해 있었다. 티혼 주교에게는 너무나 거대하고 중대한 임무가 기다리고 있었기에, 처음에는 용기를 잃고 시노드에 은퇴를 청원했으나, 이 청원은 기각되었다.

티혼은 4년 반 넘게 교구 주교직에 머물렀다. 초기의 당혹감은 금세 사라졌고, 짧은 기간 동안 티혼 주교는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본당 성직자들은 교육적·도덕적 수준이 낮았기에, 티혼은 큰 열의를 가지고 영적 교육의 현장에서 힘써 일하기 시작했다. 주교는 잘못을 저지른 이들에게 매우 엄격하게 처벌을 내렸다. 그는 성직자들을 위해 교회의 교리를 밝히는 각종 교훈과 해설을 작성했으며, 사제들의 의무, 사제직의 도덕적 토대와 의미, 본당에서의 영혼 돌봄 및 기타 주제에 대해 글을 썼다. 그는 신학교와 자신이 설립한 두 곳의 신학 교육원에 많은 시간과 정력을 쏟았다. 본당을 방문할 때, 주교님께서는 설교를 통해 백성들에게 기독교 생활의 의미를 설명하려 애쓰셨으며, 신자들을 위한 서면 설교문도 작성하셨습니다. 티호노 주교님의 주교 재임 시절 보로네즈 교구의 역사에서 알 수 있듯이, 성하께서는 결코 한가히 지내신 적이 없으셨으며, 대목자의 의무에 온전히 헌신하셨습니다. 교구에 있던 13개의 수도원들도 끊임없이 그의 관심 대상이었습니다. 이후 그는 수도사들을 위한 몇 가지 교훈과 『수도자들에게 주는 훈계』, 『이 헛된 세상에서 그리스도께로 돌아선 자를 위한 권면』이라는 두 편의 특별한 저서를 집필했습니다.

티혼 주교는 백성들 사이에 널리 퍼진 미신에 맞서 특별한 열정으로 싸우며 설교를 통해 이를 규탄했다. 그의 말에 담긴 내적 힘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그는 그전까지 민속 생활에 널리 퍼져 있던 수많은 이교적 관습을 근절하는 데 성공했다.

이처럼 활발하고 고된 행정 업무에도 불구하고, 주교는 자신의 내적·영적 삶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는 밤을 기도와 다양한 저술 집필, 혹은 교회 교부들의 저서, 특히 그가 매우 높이 평가했던 성 요한 크리소스톰의 저서를 읽는 데 보냈다. 그러나 그의 체질은 그토록 고된 삶을 견디기 어려워 자주 병을 앓았다. 주교는 은퇴를 청원하기 위해 시노드에 두 번째로 청원을 제출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시노드가 그의 청원을 받아들여, 1767년에 티혼 주교는 주교직에서 물러났다.

처음에 주교는 톨셰프스키 수도원에서 은퇴 생활을 보냈으나, 건강에 해로운 기후 탓에 같은 보로네즈 교구 내 도나 강변에 위치한 자돈스키 수도원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여 그는 온전히 내면의 영적·금욕적 수행에 전념한 생애의 마지막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겉으로 보기에 성인의 삶은 소박하고 거의 가난에 가까웠다. 그는 작은 수도실에서 살았고, 낡고 해진 털옷 아래 얇은 짚 매트리스 위에서 잠을 잤으며, 거친 천으로 만든 소박한 수도사 옷을 입었고, 수도실에서는 항상 짚신만 신고 있었다. 그의 모든 소유물은 낡은 가죽 배낭에 다 들어갈 정도였으며, 가죽으로 제본된 책들만이 그의 방의 초라한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달래주었다. 주교님의 식사는 너무나 소박하고 부족하여, 그의 시종 체보타레프는 종종 그 수행자에게 적어도 무언가 더 먹으라고 설득하곤 했다. 그의 삶의 주된 내용은 기도였으며, 매일 모든 예배에 참석했고, 예배 중에 성경을 낭독하고 수도사들과 함께 성가대에서 노래하는 것을 좋아했다. 초창기 몇 년간 티혼 주교는 주교의 예복을 입고 성사를 집전했으나, 나중에는 겸손을 표하기 위해 평범한 수도복 차림으로 예배에 참석하기 시작했고, 오직 식당에서 점심을 먹을 때만 가끔 망토나 에피트라킬을 걸쳤다. 예배가 없는 시간에는 성경 읽기에 몰두했고, 점심 식사 시간에는 수도원 규율에 따라 시종이 그에게 성경을 소리 내어 읽어 주었다. 성 티혼은 밤을 거의 항상 잠을 자지 않고 기도하며 보냈다.

그는 개인 비서에게 다양한 유혹과 싸워야 했다고 털어놓곤 했다. 특히 주교 직분에서 부과된 의무를 회피하고 더 이상 기독교인들을 섬기지 않으며 오직 자신의 영혼 구원에만 전념할 내적 권리가 자신에게 있는지 하는 생각이 그를 괴롭혔다. 마음의 불안이 너무나 커져서 티혼은 한때 부주교로 섬겼던 상트페테르부르크 대주교 가브리엘에게 편지를 써서 어떤 직책이라도 맡게 해 달라고 청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편지를 보내기 전날 밤, 주교는 그 편지를 찢어버리라는 깨달음을 주는 꿈을 꾸었다. 그 무렵 그에게 또 다른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는 수도원에 영원히 머물겠다는 그의 결심을 더욱 굳건하게 했다. 어느 날 성자 티혼은 자신의 방 문턱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는데, 그는 나중에 이를 ‘자만심에 빠지는 유혹’이라고 불렀다. 갑자기 수도원에 살던 카메네프라는 이름의 성스러운 광인이 그에게 달려와 주교님의 뺨을 치며 “자만하지 마라”라고 말했다. 티혼은 이 일에서 자신의 내적 약점에 대한 질책을 보았다. 성 티혼만큼 자신의 내적 고뇌와 육체적·영적 유혹, 내면의 의지력 상실과 낙담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육체를 지치게 하기 위해 그는 정원에서 일하고 장작을 패곤 했다.

동시대인들은 그의 겸손과 사람들에 대한 기독교적 사랑, 통찰력에 대해 많이 이야기했다. 점차 성인의 영적 삶은 내면의 평안을 얻게 되었고, 그는 외적인 활동적인 삶에서 점점 더 멀어져 거의 은둔자처럼 생활했으며, 금식 기간은 점점 더 길어지고 기도에 바치는 시간도 점점 더 많아졌다. 마지막 3년 동안 그는 은둔처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그를 은둔 생활로 이끈 것은 꿈속의 환상이었다. 희미한 꿈속에서 그는 투명한 수정 궁전 앞 초원에서 열리는 연회를 보았고, 그 초원으로 가고 싶었지만 어떤 힘이 그를 막았고, 그때 그는 “3년 후에 들어갈 수 있으니, 지금은 수고하라”는 목소리를 들었다. 은둔처에서 그는 자신의 수련사(케레이니크)와만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것도 극히 드물게였다. 성 세라핌과 마찬가지로, 그는 두 사도와 함께 계신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 마리아를 보았다. 어느 날 그는 꿈속에서 또 한 번 뺨을 맞았다. 사제가 제단에서 수건으로 덮인 아기를 두 팔에 안고 나와 있었다. 티혼은 아기의 오른쪽 뺨에 입을 맞췄고, 아기는 그에 대한 응답으로 그의 왼쪽 뺨을 때렸다. 성자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자신의 왼쪽 뺨과 왼쪽 다리가 마비된 것을 느꼈는데, 이는 그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말년에 그의 목소리는 극도로 약해져서, 오직 개인 비서만이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어느 날 티혼은 시종에게 자신이 살 날이 사흘밖에 남지 않았다고 말했고, 그 기한이 지나자 그는 실제로 주님께로 돌아가셨는데, 이는 1783년 8월 13일 이른 아침에 일어난 일이었다.

티혼에 대한 민간의 숭배는 그가 세상을 떠난 직후부터 시작되었는데, 특히 수도원 교회 내 그의 무덤에서 해마다 기적적인 치유 사례가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1863년에 이루어진 그의 시성식 이전에, 이곳에서는 공식적으로 100건에 달하는 치유 사례가 기록되었다. 이미 1845년에 성인의 유해가 부패하지 않은 채 발견되었으나, 니콜라이 1세 황제는 성 티혼의 시성식을 허가하지 않았다. 알렉산드르 2세 치하인 1863년 8월 13일에야 비로소 그의 유해가 성대하게 공개되었고, 성 티혼은 교회로부터 시성되었다.

성 티혼 자돈스키는 자돈스키 수도원에 머무는 동안 주로 도덕 신학 문제에 관한 일련의 저술을 남겼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저작으로는 『진정한 기독교에 대하여』 (1770–1771)이며, 그 외에도 『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와 『수녀원 편지』(두 모음집 모두 1772–1775년에 속함)가 있는데, 이 책들은 그에게 제기된 질문이나 편지에 대한 답변 형식으로 작성된 다양한 종류의 훈계와 교훈을 담고 있다. 말년(1777–1779)에 성인은 『세상에서 모은 영적 보물』이라는 책을 집필했는데, 이는 성인의 수많은 신비적 체험에 대해 서술한 간결한 묵상집(총 157편)이다. 『영적 보물』은 금욕주의자이자 신비주의자인 저자의 영적 모습을 훌륭하게 반영하고 있다. 이 책에 수록된 성인이 자연 현상과 그 의미에 대해 쓴 묵상들도 아름답다. 성 티호노의 저작들은 수많은 판을 거듭해 왔으며, 신자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책들에 속합니다. 성 티호노의 저서 『진정한 기독교에 대하여』는, 성인이 매우 높이 평가했던 아르ント의 동명 저서[1341] 의 영향을 받아 집필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9. 수도 생활의 몇 가지 사례

18세기와 19세기의 수도 생활을 그 주요 특징을 통해 더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몇 인물들을 더 떠올려야 한다.

18세기 교회 계층 내에서 요아사프 고를렌코(1705–1754) 주교는 내면의 경건함으로 특히 두드러졌다. 성 티혼과 마찬가지로, 그는 온유함과 친절함, 그리고 기독교적 사랑의 화신이었다. 벨고로드 주교(1748–1754)로 재임하던 요아사프는 백성과 성직자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는데, 이는 주교단과 성직자 사이에 보통 짙은 벽이 존재하던 18세기에는 드문 현상이었다. 모든 교구 행정 업무에서 요아사프 주교는 가난한 시골 사제들의 처지를 훌륭히 이해했으며, 성직자들의 물질적 궁핍을 덜어주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사생활에서 요아사프는 지극히 엄격한 금욕주의자였다. 아마도 그의 조기 사망 원인은 지나치게 엄격한 금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요아사프가 세상을 떠난 직후 신도들 사이에서 그를 숭배하는 풍조가 시작되었으며, 그의 무덤에서는 종종 병자들의 치유가 일어났다. 무덤을 개장했을 때 그의 유해는 썩지 않은 채로 발견되었으며, 1911년 9월 4일 그는 러시아 정교회에 의해 ‘ ’ 성인의 반열에 올랐습니다.[1342] . 성 요아사프와 성 티혼 자돈스키는 주교단과 신자들 사이의 긴밀한 상호연대의 모범을 보여주며, 그것은 바로 교회 계층과 신도들 사이의 단절이 점점 더 두드러지던 시대였으며, 이는 시노달 시대에 극히 만연했던 현상으로, 백성의 종교 생활에 매우 해로운 것이었습니다.

이그나티이 브랸차니노프 주교(1807–1867) 역시 교회 지도부의 뛰어난 인물로, 금욕적인 삶과 장로들과의 유대, 그리고 저술 활동을 통해 수도자들로부터 특별한 인정을 받았다. 이그나티이의 영적 성장은 19세기 주교들에게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 브랸차니노프는 볼고그 주 출신의 지주 집안의 아들이었다. “나의 어린 시절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브랸차니노프는 훗날 고백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아들이 귀족 신분에 걸맞은 진로를 선택하기를 바랐던 아버지와 벌였던 갈등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린 드미트리야는 수도원의 방을 꿈꾸고 있었다. 그는 겸손하게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떠나 군사공병학교에서 장교 교육을 받기로 했다.

그의 생애를 대략적으로 볼 때, 공병학교 입학은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곳에서 브랸차니노프는 뛰어난 재능 덕분에 니콜라이 파블로비치 대공의 주목을 받았기 때문이다. 대공은 군사공병학교를 특별히 후원하고 있었으며, 1825년 니콜라이가 러시아 황제의 자리에 올랐을 때, 그는 성실한 군사 공병 브랸차니노프를 잊지 않았다. 그러나 학업은 브랸차니노프에게 내적 만족을 주지 못했다. “내 영혼 속에 어떤 끔찍한 공허함이 생겨나 이미 커져 있었고, 굶주림과 견딜 수 없는 신에 대한 갈망이 나타났다. 나는 내 게으름을 애도하기 시작했고, 신앙을 저버린 그 망각을 애도하며, 잃어버린 달콤한 고요함을 애도하고, 얻게 된 그 공허함을 애도했다. 그 공허함은 나를 짓누르고 공포에 떨게 하며, 고아처럼 느껴지는 고독감과 삶의 상실감으로 가득 채웠다. 그리고 확실히, 그것은 진정한 삶이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영혼의 갈망이었다. 회상해 보니, 유커 제복을 입고 상트페테르부르크 거리를 걷고 있었는데, 눈에서 눈물이 빗발치듯 쏟아져 내렸다… 엄숙한 생각에 잠겨 나는 유커 제복을 벗고 장교 제복을 입었다. 나는 유커 제복을 벗게 된 것을 아쉬워했다. 그 제복을 입고 하나님의 성전에 가면, 병사들 무리 속에, 평민들 무리 속에 섞여 들어가 마음껏 기도하고 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1343] . 그는 나중에 자신의 정신적 상태를 이렇게 묘사했다. 하지만 드미트리이와 그의 친구들 중 일부는 수업과 군사 훈련 사이의 틈을 타 자신의 내적 영적 욕구를 충족시킬 시간을 마련할 줄 알았다. 드미트리(Dmitry)와 그의 친구 미하일 치하체프(Mikhail Chikhachev)를 중심으로 종교적 성향을 가진 젊은 사관생도들의 작은 모임이 형성되었는데, 이들은 저녁 강의와 예배가 끝난 후 종교적 문제를 토론할 뿐만 아니라 기도하기 위해 모이기도 했다[1344] . 1827년 초, 브랸차니노프는 장교로 승진했으나, 같은 해 말에 중병에 걸려 마침내 사직 청원을 제출할 수 있게 되었고, 청원이 승인되어 군에서 제대했다. 이제 수도원에 들어가겠다는 자신의 뜻을 이룰 수 있게 된 것이다.

처음에 그는 당시 레오니드 장로가 수행 중이던 알렉산드로-스비르스키 수도원으로 가서 그와 만나고자 했다. 브랸차니노프는 키릴로-노보예제르스키 수도원에서 테오판 소콜로프 장로의 지도 아래 수련 기간을 보냈으며, 드미트리이는 약 3년 동안 그분 밑에서 수련을 이어갔다. 그 후 그는 한동안 플로슈찬스카야 황야에서 수행하다가, 그곳에서 다시 한 번 레오니드 장로를 만나기 위해 옵티나로 옮겼고, 마침내 볼로그다 근처의 글루시츠키 수도원에 입소했다. 이곳에서 1831년, 그는 이그나티라는 이름으로 수도사가 되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미 사제 수도사가 된 이그나티는 작지만 유서 깊은 펠셴스카야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이곳, 울창한 볼로그다 숲 깊은 곳에서 이그나티는 세상과 멀리 떨어져 수행에 전념할 수 있었고, 그의 젊은 시절 꿈이 마침내 이루어진 듯했다. 그러나 바로 그 무렵, 니콜라이 황제는 공병학교를 방문하던 중 그를 떠올렸고, 교장으로부터 브랸차니노프가 사임했을 뿐만 아니라 수도사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황제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대주교에게 브랸차니노프의 행방을 물었고, 그가 작은 수도원을 운영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에 따라 차르 이그나티우스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파견되었다. 그곳에서 26세의 이에로모나크는 ‘승진’하여 아르히만드리트가 되었고, 차르는 그를 수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하도록 명령했다.

그곳은 쇠퇴한 상태에 있던 세르기예프스카야 푸스티니였다. 차르의 자금으로 수도원은 재건되었고, 24년 동안 이그나티 신부가 그곳을 관리했다. 젊은 원장의 금욕적인 신념과 성실함 덕분에 수도원에서는 진정한 수도 생활이 다시 시작되었다. 황제는 한때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여전히 네가 마음에 든다! 너는 내가 너에게 준 교육과 너에 대한 나의 사랑에 대해 나에게 빚을 지고 있다… 내가 너에게 세르기예프스카야 푸스티니를 주마. 네가 그곳에서 살며, 수도의 눈에는 수도원의 모범이 될 만한 수도원을 만들어 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차르의 이 바람이 없었더라도 이그나티우스의 원장직은 수도원에 이로움을 주었을 것이니, 왜냐하면 수도 생활에 대한 그의 견해는 개인적인 경험뿐만 아니라, 레오니드와 테오판 두 장로의 영향 아래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들로부터 수도 생활의 기초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공동체 규율의 장점에 대한 확신을 얻었다.

게다가 이그나티우스 자신에게 있어서도 사막에서 보낸 세월은 큰 의미를 지녔다: 그것은 그의 영적 성장의 시기이자, 수도사이자 엄격한 수행자 및 금욕주의자로서의 정체성이 확립되던 시기였으며, 또한 성부들의 저작을 면밀히 연구하던 시기이기도 했는데, 이는 훗날 집필된 『금욕적 체험』의 기초가 되었으며, 이 책은 수도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1857년, 아르히만드리트 이그나티는 주교로 서품되어 스타브로폴(당시 카프카스)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1861년, 그는 교구장직에서 은퇴하고 니콜로-바바예프스키 수도원(코스트로마 교구)으로 이주했다. 생애 마지막 순간(1867년 4월 30일)까지 그는 이곳에서 세상과 거리를 두고 자신의 저술 집필에 매진하며 수도 생활을 이어갔으며, 이곳에서 많은 신자들과 광범위한 서신을 주고받았는데, 이들은 종종 수도 생활이나 세속 생활에 대한 조언을 그에게 구하곤 했다. 그의 가장 중요한 저서로는 『금욕적 체험』, 『금욕적 설교』, 『현대 수도 생활에 바치는 헌사』(수도사의 외적 행동 규칙과 내적 수행에 관한 지침), 『예수 기도에 관하여. 장로와 제자의 대화”, “고통을 인내함에 대하여” 등이다.[1345]

그의 저술들은 이그나티우스가 금욕주의자이자 신비주의자였음을 보여준다. 그는 금욕의 궁극적인 목적을 단순히 영혼의 구원만이 아니라 신성화라고 여긴 동방 기독교의 대표자 중 한 명이었다. 우리가 자주 언급했던 아르히만드리트 피멘은 이그나티우스 주교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으며, 이그나티우스가 당시의 수도 생활에 매우 불만을 품고 있었고, 세속의 허영에서 멀어졌기 때문에[1346] 만이라도 본래의 순수함을 지킬 수 있었던 고대 수도자들을 본보기로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그나티우스 주교는 60년대 초반에 흔히 볼 수 있었던 수도 생활에 대한 날카로운 비난에 큰 슬픔을 느꼈는데, 이러한 비난은 수도사들의 삶에서 부정적인 현상이 나타났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사회의 자유주의 세력들 사이에서 퍼진 반기독교적 정서에 기인한 것이기도 했다. 이그나티우스 주교의 확신에 따르면, 이는 단순한 수도 생활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수도원 벽 밖에서도 이루어지는 수도 생활의 일부를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온갖 유혹에 노출시키려는 시도였다. 따라서 이그나티는 수도사들이 세상과 가능한 한 멀리 떨어져 지내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첫째는 도덕적 순결을 지키기 위해서이고, 둘째는 그러한 비판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1347] .

이그나티 브랸차니노프 주교의 영적 모습은 동방 교회의 금욕적 전통에서 영적 힘을 얻고, 러시아 수도 생활의 건전한 부분과 유대를 유지했던 시노달 시대의 러시아 주교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이다. 그들은 스스로 기독교적 금욕 실천의 모범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수도 생활의 부흥에도 기여했다. 그들의 노력과 저술을 통해 개별 수도사들, 심지어 수도원 전체가 올바른 금욕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고, 수도원 생활에서 많은 결점들이 제거되도록 도왔다. 기독교적 금욕의 정신으로 살려는 열망은 수도원 공동체 내에서 결코 사그라들지 않았으며, 수도사들이 스스로 또는 성 티혼 자돈스키, 암브로시우스 오르나츠키 주교, 테오판 자토르니크 주교, 이그나티이 브랸차니노프 주교 등 다른 성자들의 영향을 받아, 세상과 단절하는 길을 걸으며 영적 투쟁을 벌였던 진정한 금욕주의의 사례들을 여러 가지 들 수 있다.

아르히만드리트 니코디모의 저서 『18세기와 19세기 러시아 경건한 수행자들의 전기』[1348] 에는 러시아 주교, 수도사, 평신도 중 많은 수행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들 모두에 대해 여기서 전해지는 정보의 신뢰성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신뢰할 만한 자료가 우리에게 수집된 것은 아니다. 많은 훌륭한 수행자들에 대해서는 부정확하고 종종 서로 모순되는 이야기와 회고록, 혹은 아예 이 수행자들에 대한 올바른 인상을 형성할 수 없는 정보들만이 우리에게 전해져 왔다. 따라서 본 고찰에서 우리는 한편으로는 특히 잘 알려진 수행자들로만 범위를 제한할 수밖에 없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상세한 전기 자료가 없는 경우, 이름만 간략히 언급하는 데 그쳐야 한다.

특히 유명한 인물로는 게오르기 마슈린이 있는데, 그는 금욕주의자이자 은둔자로, 기독교적 겸손과 ‘천사와 동등한 지위’인 수도사로서 자격이 부족하다는 자각으로 인해 평생 수련자로 머물렀다. 마슈린(1789–1836)은 귀족이자 후사르 연대의 장교였다. 이 책에서 우리는 18~19세기에 많은 이들이 화려한 장교 제복을 수도사의 예복으로 바꾸었고, 눈부신 경력을 쌓을 수 있었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전사가 되는 것을 선호했다는 점을 여러 번 언급한 바 있는데, 마슈린도 바로 그러한 전사 중 한 명이었다. 1818년 그는 제대하고, 이전에 성 티혼이 수행했던 자돈스키 수도원에 수련자로 들어갔다. 1년 후 그는 특히 혹독한 한파가 몰아칠 때만 겨울철 난방을 하는 작은 수도실에 틀어박혔다. 게오르기우스는 자신의 방 아래에 동굴과 비슷한 구덩이를 파고, 낮에는 그 동굴 안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으며, 밤에는 성경이나 금욕주의 서적을 읽으며 보냈고, 음식은 매일 먹지 않았다. 이러한 수행은 약 5년 동안 계속되었고, 그 후 그는 동굴을 떠나 수도실에 틀어박혔다. 게오르기우스는 백성들 사이에서 매우 존경받았으며, 많은 이들이 그를 장로처럼 여겨 조언을 구하러 찾아왔다. 그러나 그는 방문객을 자신의 수도실에 들여보내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 그는 많은 신자들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세속 생활에 대한 조언을 해주었다. 이 편지들은 1870년 이전에 이미 5판이나 출간되었으며, 특히 세속인들 사이에서 장로 암브로시우스 옵틴스키나 테오판 고보로프 주교의 편지 못지않게 널리 읽혔다. 게오르기 마슈린은 형식적으로는 수도사가 아니었지만, 삶에서는 수도 서원을 한 많은 이들보다 더 수도사다운 모습을 보인 드문 수행자의 본보기였다. 그의 은둔 생활은 17년 동안 이어졌다[1349] .

엄격한 금욕주의자이자 은둔자, 사막 수도자였던 테오판 솔로베츠키(1739[?]-1819)는 아마도 남부 러시아 출신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키예프-페체르스카 라브라에 들어와 도시페이 장로(† 1788)의 지도 아래 수행을 하다가, 이후 순례길에 올라 먼저 냐메츠키 수도원의 파이시이 벨리치코프스키 장로를 찾아갔고, 거기서부터 걸어서 솔로베츠키 수도원으로 향했다(1778). 그곳에서 그는 수년 동안 숲속 오두막에서 지내며, 솔로베츠키 수도원의 수도사들을 포함해 사람들과는 전혀 교류하지 않았다. 그에게 헌정된 매우 흥미로운 필사본 이야기가 하나 있는데, 그 안에는 테오판이 은둔자의 오두막에 자주 찾아와 그에게 은둔 생활을 그만두도록 강요하려 했던 악마와 벌인 투쟁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러시아의 성인 전기와 수행자들의 생애에 관한 이야기에서 이와 같은 악마학적인 이야기는 비교적 드물다. 소설에 따르면, 테오판은 1819년 7월 26일 12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노쇠로 인해 완전히 기력을 잃은 상태였으며, 생의 마지막을 솔로베츠키 수도원 병원[1350] 에서 보냈다. 솔로베츠키 수도원의 또 다른 엄격한 금욕자는 테오판의 동시대인인 스키모나흐 게라심(1740–1848)이었다. 처음에 그는 아르세니 장로의 지도 아래 로슬라블 숲에서 은둔 생활을 했다. 1823년, 성지들을 오가며 수년간 방랑한 끝에, 그는 솔로베츠키 수도원에 들어와 10년(1823–1833) 동안 숲속의 작은 동굴에서, 그 후 숲속 오두막에서 수행했다.

키예보-페체르스카 라브라에서도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전반에 걸쳐 몇몇 뛰어난 수도사들이 활동했다. 무엇보다 먼저 앞서 언급한 도시페이 장로를 꼽을 수 있는데, 그는 수년 동안 동굴에 갇혀 지냈다. 바로 그가 훗날 장로가 될 파이시우스에게, 당시 어린 수련자였던 그에게 몰다비아의 바실리 신부 곁으로 가서 수도 생활의 기초를 터득하라는 조언을 해주었다. 수십 년 후, 그는 같은 목적으로 테오판 솔로베츠키를 파이시우스에게 보냈다. 도시페이 장로는 30년을 은둔 생활 속에서 보냈으며, 깊은 노년에 세상을 떠났다(† 1788). 아마도 그의 제자 중에는 스키모나흐 미하일(† 1815)이 있었을 것이다. 이곳에서는 이에로스키모나흐 바시안도 수행했으며, 알렉산드르 1세 황제는 1816년에 그와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이 수도원의 또 다른 엄격한 수행자이자 이에로스키모나흐이자 장로인 파르페니(1790–1855)는 특히 유명하고 존경받았다. 그는 방문객들과 영적 자녀들에게 단 하나의 기독교적 미덕만을 요구했는데, 바로 노동과 세속적인 일에서 자유로운 모든 시간을 기도에 바치는 것이었다. 그의 전기에는 그가 누린 환시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환시에서 성모 마리아께서 그에게 나타나셨고, 그는 수도사(스키모나흐)의 의무가 무엇인지 여쭈었더니, “단 하나의 의무, 곧 온 세상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뿐이다[1351] ”라는 대답을 들었다.

은둔자이자 성직자 멜키세덱(1715–1840)의 모습은 우리를 로슬라블 숲의 수행자들에게로 되돌려 놓는다. 그는 하르키우에서 멀지 않은 수미 시에서 부유한 상인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25세 때 아버지의 뜻에 따라 약혼을 했다. 우연히 막심(멜키세덱의 세속 이름)은 한 노승과 마주쳤는데, 그 노승은 그에게 세속에서 살지 말고 수도원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키예보-페체르스카 라브라로 순례를 떠났고, 그곳에서 수련자로 남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소프로니예바 은둔처로 피신했다. 이곳에서 막심은 다른 수도사들로부터 몇 가지 유혹을 겪어야 했고, 벨로베레즈카야 황야로 떠나 그곳에서 미하일이라는 이름으로 수도 서원을 받았다. 몇 년 후 그는 멜키세덱이라는 이름으로 대수도 서원을 하고, 성직 디아코노로 서품받았다. 이 무렵(1800년) 수도원에 새로운 원장인 장로 바실리 키슈킨이 부임했고, 당시 이미 노년에 접어든 멜키세덱은 그와 끊임없이 영적 교제를 나누었다. 멜키세덱은 벨로베레즈카야 수도원에서 50년을 보냈으며; 그의 전기 작가가 기록한 바에 따르면, 그는 이미 95세가 되었을 무렵인 1810년, 알 수 없는 이유로 갑자기 로슬라블 숲으로 가서 그곳의 작은 오두막에 정착하기로 결심했다. 그 무렵 이 숲에는 이사야와 안드레이와 같은 다른 은둔자들도 수행하고 있었다. 노승 멜키세덱은 수많은 방문객들로 인해 평온을 누릴 수 없었기에, 모살스크(칼루가 주) 인근의 다른 숲으로 떠나기로 결심했고, 그곳에서 이사야 신부와 함께 12년 동안 수행했다. 그리고 다시 사람들이 그에게 찾아와 대화를 나누고 위로와 조언을 구하기 시작했다. 이사야가 세상을 떠났을 때, 멜키세덱은 또 다른 수도사인 미하일을 제자로 받아들였고, 둘은 함께 로슬라블 숲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그곳에서 멜키세덱은 제자와 함께 생애 마지막 3년을 보냈다. 그는 1840년 7월 9일, 12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1352] .

트로이체-세르게이 라브라에 속한 게프시만스키 스키트에서도 몇몇 매우 존경받는 수행자와 장로들이 수행을 이어갔는데, 동굴에서 피신 생활을 했던 수행자 필립, 장로 이시도르, 알렉산드르, 그리고리, 게르만(† 1918), 일라리온[1353] 등이 있었다. 특히 장로 바르나바 메르쿨로프(1831–1906)는 유명하다. 그는 농부의 아들이었으며(세속 이름은 바실리), 양철공 기술을 배웠다. 20세에 그는 트로이체-세르기예프 라브라에 와서 수련자로 입회했다. 그의 영적 지도자는 장로 그레고리였다. 아직 수련자였을 때 바실리는 한 자매 공동체의 설립에 참여했으며, 그곳에서 훗날 장로직을 맡았다. 장로 그레고리우스가 입적했을 때(1862년), 바실리는 다니일이라는 이름의 다른 장로에게로 옮겨갔는데, 다니일 장로는 1865년에 입적하며 임종 전에 바실리에게 그도 훗날 장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1865년, 바실리는 바르나바라는 이름으로 수도 서원을 받았다. 1872년에 그는 사제 수도사가 되었다. 이미 그 당시, 그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를 찾아오는 방문객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는 게프시만스키 스키트에 정착했고, 1873년부터 1906년 2월 17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장로 바르나바는 수많은 신자들을 끌어모았다. 경건한 사람들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옵틴의 레오니드와 암브로시우스 장로들의 방식을 연상시켰다. 그는 자신의 가르침과 조언을 속담이나 농담의 형태로 표현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가 설립한 자매 공동체는 1878년 비크세 마을(니즈니노브고로드 교구 아르다토프 인근)에서 여성 수도원으로 개편되었으며, 장로 바르나바는 줄곧 그 수도원 수녀들의 영적 지도자로 남았다[1354] .

19세기 전반, 모스크바에서는 노보스파스키 수도원의 장로 필라레트(1752–1842)가 큰 존경을 받았다. 그는 로슬라블의 숲에서 왔는데, 그곳에서 11년(1799–1810) 동안 완전한 은둔 생활을 했다. 그 덕분에 유명한 러시아 사상가 이. V. 키레예프스키는 자신의 데이스적 신념을 버리고 교회로 돌아왔다. 키레예프스키의 아내는 필라렛 장로의 영적 딸이었으며, 바로 그녀가 남편에게 장로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조언했다. 나중에, 이미 장로 필라레트가 세상을 떠난 후였지만 그의 조언에 따라 키레예프스키는 옵틴의 장로 마카리우스를 알게 되었고, 그에게서 금욕주의 저작들의 출판을 돕게 되었다[1355] . 장로 필라레트는 또한 미트로폴리트 필라레트 드로즈도프의 영적 지도자이기도 했다.

19세기에는 발라암 수도원이 특별한 명성을 얻게 되었다. 1782년 장로 나자리가 가브리엘 대주교로부터 이 수도원을 재건하라는 임무를 받았을 때, 이곳은 겉으로는 황폐해져 있었고 내적으로는 영적 쇠퇴에 빠져 있었다. 1723년 화재로 수도원의 건물 대부분이 소실되었고, 나자리 신부가 도착하기 전까지 그곳에는 소수의 수도사들만이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나자리 신부는 몇 채의 수도원 건물을 복구한 후, 수도원 생활의 내부 질서에 주된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고, 그 아래에서 수도 생활을 하는 이들의 수는 꾸준히 늘어났다. 수십 년이 지나자 이 수도원은 특히 엄격한 생활 방식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19세기 20년대 말 무렵, 다시 규율에서 벗어난 여러 가지 일탈이 드러났고, 이로 인해 1829년 장로 레오니드는 그곳을 떠나 옵티나 수도원으로 향했다.

19세기 중반, 발라암의 수도사 스키모나흐 테오크티스트는 엄격한 수행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는 출가 전 해군에서 복무했으며, 1827년 발라암에 도착해 1835년에 수도 서원을, 1853년에는 대스키마를 받았다. 마지막 10년 동안 그는 숲속 오두막에서 은거하며 특히 엄격한 수행으로 두각을 나타냈고, 그를 찾아온 젊은 수도자들에게 수도 생활에 대한 가르침을 주었다. 그는 1863년 노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 무렵 발라암 수도원은 백성들 사이에서 특별한 명성을 누렸으며, 참배객과 방문객의 수는 해마다 늘어났다. 수도원의 외관은 크게 변했다. 다마스킨(코노노프, 1839–1871)과 이오나판(드미트리예프, 1879–1891) 원장들은 대대적인 건축 사업을 전개했으며, 석조 성당과 수도사 숙소, 순례자들을 위한 여관, 그리고 수많은 부대 시설(제분소, 펌프장, 발전소 등)을 갖춘 현재의 모습은, 이러한 경제적이고 진취적인 원장들의 활동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다마스킨은 경제적 진취성과 함께 수도원 내부의 질서를 유지하는 능력을 겸비한 원장으로서, 수도사들은 엄격한 원장의 무거운 손길을 몸소 느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수도사 수는 300명을 넘어섰다[1356] .

앞서 언급한 아르히만드리트 니코디모의 저서에는 지난 두 세기 동안 러시아의 여러 수도원에서 살았던 수많은 경건한 수행자들의 전기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 수행자들 덕분에 수많은 부정적인 현상으로 얼룩진 시노달 시대의 암울한 분위기가 다소 누그러진다. 금욕주의 정신은 이 시기에도 사그라들지 않았으며, 모든 러시아 수도원에서 다소간 드러나고 있었다. 특히 이 정신은 대개 수도사 수가 적은 수도원에 피신해 있던 장로들의 위업 속에서 더욱 강렬하게 살아 숨 쉬었다.

수도원 생활에 있어 장로 제도의 중요성과 금욕적 저작물에 대한 관심으로 인해, 학술 연구에서는 한편으로는 정교회 금욕주의의 역사 전반에, 다른 한편으로는 장로 제도의 역사에 특별한 주목이 쏠리게 되었다. 동방 교회의 금욕적·신비적 삶의 역사와 본질에 관한 저술들이 등장하고 있다. 심지어 모스크바 신학 아카데미에서도 일부 학생들이 자신의 학위 논문 주제로 장로 제도와 그 역사를 선택하고 있다. 1911년 트로이체-세르게이예프 라브라에서 열린 여러 수도원의 수도자 대표 회의는 수도원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스승 제도의 보존—여기에는 초보 수도자들을 지도하는 스승의 역할도 포함되며—과 고대의 금욕적 전통에 대한 충실함[1357] 이라고 결의했다. 스타르체 제도의 중요성을 이론적으로 인정한 이 사실 자체만으로도, 장로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가장 잘 증명해 준다. 그러나 1911년 회의에서 표명된 이러한 열망은 실질적인 실현을 보지 못했는데, 이는 몇 년 후 러시아 교회의 수도원 생활이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결론

이 책은 러시아 수도 생활의 상세한 역사를 다루지는 않지만, 가장 중요한 현상과 가장 저명한 인물들을 모두 다루고 있다.

이 역사의 세 시기를 거치며 수도 생활의 성격은 변화했다. 이는 수도원의 생활뿐만 아니라, 수도승들(심지어 같은 세대에 속한 이들조차도)이 수도 생활의 기초에 대해 가졌던 인식에도 해당되며, 이는 특히 16세기 초에 불거진 금욕의 의미에 대한 논쟁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두 가지 경향의 존재는 이후 러시아 수도 생활의 전체 역사에 지극히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이 논쟁은 무엇보다도, 러시아에서 5세기 동안 수도 생활이 지속되고 14~15세기에 수도 생활이 전성기를 맞이한 후, 기독교 금욕주의의 본질 전반과 특히 수도원 생활의 기초를 명확히 밝힐 필요성, 그리고 수도원 생활을 올바른 길로 이끌기 위해 이러한 기초를 가능한 한 정확하게 정의할 필요성이 대두되었음을 증명해 주었다.

이 움직임은 고대 수도 생활의 금욕적·신비적 정신과 긴밀한 유대를 맺고자 했던 수도사 집단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이와 관련하여 러시아 수도 생활사에서 스타레츠 닐 소르스키와 그의 동료들은 특별한 평가를 받을 만하다. 주목할 점은 그들의 움직임이 15세기 마지막 수십 년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인데, 당시에는 세속화 과정이 16세기 초처럼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았던 시기였다. 이를 통해 닐과 그의 동료들이 세속화에 맞서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 아니라, 수도 생활의 진정한 기초가 무엇인지 깨달았기 때문에 그러한 금욕적 견해에 도달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들의 반대파인 요셉파는 수도 생활의 과제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를 주로 비소유주의자들의 주창에 대한 반론의 형태로 정리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러나 이로 인해 그들의 관점이 역사학자들에게 갖는 중요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이는 정치적 내용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러시아 수도 생활의 미래 역사에 지극히 중요한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논쟁이 격화되었던 시기를 우리는 수도 생활의 발전사와 그 자아 인식의 역사에서 전환점으로 명명했다.

16~17세기 동안 수도원의 대외적·내부적 역사는 거의 전적으로 승자, 즉 요시프파의 정신에 따라 전개되었으며, 이러한 정신은 수도원 생활에 수많은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수도원의 상황은 개혁을 절실히 요구하고 있었으며, 이것이 바로 교회 지도부의 주요 과제였다. 1764년의 세속화 조치는 수도원으로부터 토지 소유권을 박탈함으로써, 토지 소유와 관련된 부정적인 현상들이 사라졌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그러한 개혁을 추진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시노달 시대의 교회 권력이 상부에서 그다지 의미 있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도 생활은 아마도 완전한 쇠퇴의 위험에 직면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수도 생활 자체 내에서 건전한 세력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수도원 생활의 부흥에 있어 가장 큰 공로는 18~19세기 러시아의 장로들에게 돌려야 하며, 이는 러시아에서 파이지이 벨리치코프스키 장로의 이름과 직접적이고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진정한 금욕적 수행의 다른 양상들은 세속화의 위험이 모든 곳에서 수도 생활의 미래에 똑같이 위협적이지는 않았음을 보여준다. 장로들의 업적과 위업은 수도 생활, 특히 18세기 말과 19세기의 젊은 세대 수도자들 속에서 여전히 건전한 힘이 솟아나고 있었으며, 그들 안에 진정한 수도자적 삶에 대한 열망이 컸음을 증명한다. 이 사실은 교회 역사학자뿐만 아니라 문화사학자들의 주목을 받을 만하다. 이는 모든 계층의 백성들 사이에서 종교적 열망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민중의 경건함이 어떤 의미에서는 외부에서 수도원 생활에 영향을 미쳤음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19세기의 장로들은 수도원 벽 밖에서 살던 평신도들뿐만 아니라 수도사들의 영적 삶에도 영향을 미쳤다. 장로들이 세상에 행한 이러한 사역 덕분에 러시아 수도 생활은 정교회 수도 생활의 전형적인 특징인 폐쇄성과 자기 몰입성을 잃어갔다. 이는 상당히 중요한 점이다. 거의 모든 장로들이 영적 유대를 맺고 있었으며, 초기에는 그 자체로 폐쇄적인 성격을 유지했던 파이시이 벨리치코프스키 신부의 금욕주의 학파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수도사들뿐만 아니라 세속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도 봉사하는 사명을 띠게 되었다. 이렇게 동방 교회의 금욕주의 전통은 러시아 장로 전통 속에서 새로운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이는 저절로, 자발적으로 일어났으며, 평범한 신자들과 진정한 내적 유대 관계를 맺지 못했던 교회 당국의 어떠한 압력도 없이 이루어졌다. 장로 전통의 본질 자체가 수도 생활과 백성 사이의 영적 유대감을 점차 회복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수도 생활이 영적 성장을 지속하고 신자 백성과의 긴밀한 유대를 유지할 만큼 충분한 활력을 가지고 있었는지, 그리고 기독교 생활의 선한 열매가 얼마나 빨리 맺어졌을지에 대해서는 확신 있게 답할 수 없다. 왜냐하면 20세기 20년대 말, 러시아 수도원 생활의 역사는 러시아의 국가·정치적 역사 사건들의 결과로 외부적 영향 아래 단절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러시아에서 수도원 생활이 언제, 어떻게 부활할지, 그때 어떤 모습을 띠게 될지, 그리고 과연 언젠가 그런 일이 일어날지 여부는,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 미래에 이 주제를 연구하게 될 역사가들이 답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로서는 러시아 수도원 생활의 역사가 역사적 관점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살펴볼 수 있는 완결된 현상으로 보인다.

이 연구를 마무리하며, 우리는 독자들에게 러시아 수도원 역사 전문가이자 서구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상가인 세르게이 니콜라예비치 트루베츠키 공(† 1905)의 말을 상기시켜 드리고자 한다: “수도원은 우리 삶의 가장 귀중한 보물이며, 우리의 자부심입니다. 비록 영적 삶을 알지 못하고,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왜 이 희생적인 길을 선택하는지 생각조차 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무리 오만하고 경멸적인 태도로 대하더라도 말입니다. 물론 일부 수도원의 풍기 문란이나 수도사들의 나태함, 게으름, 그리고 그들의 악덕에 대해 말할 수도 있다. 이상과 현실 사이의 대비가 수도원만큼 컸던 곳은 없었지만, 그 대비가 그 어느 곳보다도 깊고 고통스럽게 체험되었던 곳도 없었다. 우리는 수도원을 교회의 가르침이 삶 그 자체로 표현된 기관으로서 소중히 여깁니다… 우리는 수도원의 결점과 연약함을 떠나, 그 담장 너머로 빛나는 성자들 의 진주들을 위해 수도원을 소중히 여깁니다. 수도원은 백성의 영적·도덕적 양성의 장이었습니다»[1358] .


[1] 참조: 『러시아 교회의 역사』. 모스크바, 1997. 제8권. 제1–2부.

[2] I. K. 스몰리치의 간략한 약력은 『러시아 교회의 역사』. 모스크바, 1997. 제8권. 제1부. 5–16쪽을 참조하라.

[3] 러시아 수도원 역사 관련 자료의 현황과 특성에 대한 간략한 개요는 본 판 15–18쪽을 참조.

[4] 번역본은 모스크바 총대주교청 출판사에서 친절히 제공해 주었다.

[5] 목록을 작성하는 데 있어 Jahrbücher für Geschichte Osteuropas, 1971, 19, 4, 629–630쪽에 게재된 자료를 활용하였다.

[6] 전반적인 이해를 위해: Stählin K. Geschichte Russlands. 1 (1923); Kljutschewskij V. Geschichte Russlands. 1 (1925); Laehr G. Die Anfänge des russischen Reiches (1930); Djakonov M. 『고대 러시아의 사회 및 국가 체제에 관한 스케치』(1928); 필라레트 대주교. 『러시아 교회의 역사』. 2권 (1872); Bonwetsch N. 『러시아 교회사』(1923); Harnack. 『초기 3세기 기독교의 선교와 확산』. 2 (1924). 797쪽; 쿠라코프스키 유. 『타우리다의 과거』. 키예프, 1914; 스트라토노프 I. 『크림 반도와 동슬라브족의 기독교화에 대한 그 중요성』, 『Kyrios』 1호, 381–395쪽.

[7] Laehr. 앞의 책; Heyduk J. 『러시아 부족의 기독교화 초기』. 빈, 1888; Leib, 『11세기 말의 로마, 키예프, 비잔티움』. 파리, 1924 (완전히 객관적이지는 않음); 파르호멘코. 『루시의 기독교 시작』. 폴타바, 1911; 토마셰프스키, 스. 『우크라이나 교회사 서론』, 『Analecta Ordinis S. Basilii Magni』 4 (리비우, 1932).

[8] 고대 수도원에 관한 최신 문헌 중에서는 가장 중요한 저작들만 언급하겠다: 코흐 휴고. 『고대 교회의 금욕주의와 수도원 생활사에 관한 자료』(1933); 로트-보로딘 M. 『11세기까지 그리스 교회에서의 신성화 교리』, 『종교사 연구 저널』. 55–56 (1932), 57–58 (1933); Heussi K. 『Der Ursprung des Mönchtums』(1936); 참조: 하이러(Heiler Fr.)의 『Urkirche und Ostkirche』(1937), 365쪽 이하에 인용된 문헌. 또한 참조: 『Enchiridion Asceticum』. M. 루에 드 주르넬 편집. 프라이부르크, 1936. 144–147쪽, 360–367쪽, 410–416쪽, 635–637쪽 (파코미우스), 645쪽 이후 (사바).

[9] Holl K. Enthusiasmus und BuЯgewalt. 156쪽 이하; 참조: Kranich. Die Asketik in ihrer dogmatischen Grundlage bei Basilius d. Gr. (1896).

[10] 팔레스타인에 관하여: 올타르제프스키 F. 『4세기부터 6세기에 걸친 팔레스타인 수도생활』, PPS. 15. 제2부 (1896). 51. 성 사바의 규약에 대해서는: Kurtz E., BZ. 2 (1894); 웰처. 『교회 백과사전』. 10. 1. 434–37쪽. 시리아에 관하여: 휴고 발. 『비잔틴 기독교. 세 성인의 생애』. 뮌헨, 1932; 아나톨리, 신부. 『6세기 중반까지의 시리아 수도생활에 관한 역사적 고찰』, 『TKDA』(1911); 스미르노프 이. 『시나이 수도원 기록』. 세르기예프 포사드, 1917.

[11] 예를 들어 다음을 참조: 그라니 B. 『유스티니아누스 법에 따른 그리스 수도원의 법적 지위와 조직』, BZ. 29 (1929–30); 니센 W. 『9세기 말까지 로마 제국의 수도원 제도 규제』(1897); 참조: 보이그트 K. 『콘스탄티노스 대제부터 카롤링거 시대 말까지의 국가와 교회』(1936). 103쪽 이하; 마린 E. 『도시 건립부터 포티우스의 죽음까지의 콘스탄티노플 수도사들』(1897).

[12] 오스트로고르스키 G. 『비잔틴 성상 논쟁사 연구』(1929); 막스, 작센 공작. 『성 테오도르, 스투디온의 아키만드리트』(1929); 바실레프 A. 『비잔틴 제국의 역사』 1권 (1932). 333쪽 이하, 373쪽 이하.

[13] 마린. 앞의 책; 소콜로프 이. 9세기 중반부터 13세기 초까지 비잔틴 교회의 수도원 현황 (1894).

[14] 바실리예프스키. 『러시아-비잔틴 발췌문』. 6: 『스테판 노보의 생애』, 『ZhMNP』. 1877. 6월. 299, 307, 308쪽; 『성 스테판 노보의 생애』, 『Migne. PG』. 100. 1117쪽.

[15] 스테판 수로즈키의 생애, 출처: 바실리예프스키. 논문집. 3 (1915). 238쪽, 서론; 참조: Stratonov. Op. cit. 387, 389쪽.

[16] 성 테오도르의 행적, 출처: Migne. PG. 99. 253, 1344, 1350쪽; 쿠라코프스키. 앞의 저서. 74쪽; 바실리예프스키. 저작집. 3. 159쪽.

[17] Stratonov. 앞의 서적, 392쪽. 흥미롭게도, 이후 이곳에 세워진 수도원들(스비아토고르스키와 디브노고르스키)은 동굴을 수도사와 성당으로 사용했다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 참조: 즈베린스키. 『정교회 수도원사를 위한 자료』 1권, 169, 421쪽.

[18] Laehr. 앞의 책; 파르호멘코. 앞의 저서.

[19] 골루빈스키. 『러시아 교회의 역사』. 1. 1 (제2판). 63–104쪽.

[20] 프리셀코프. 『에세이』. 98쪽.

[21] 일라리온. 『율법과 은혜에 관한 설교』, 포노마레프 편, 1권, 71쪽 및 그 이후.

[22] 골루빈스키. 1. 1. 553–557쪽; 야코프 수도사의 저작 『블라디미르에 대한 추모와 찬사』 참조: 골루빈스키. 1. 1 (제2판). 238쪽 이하.

[23] 프리셀코프. 『에세이』. 84–87쪽; 또한 참조: 샤흐마토프. 『연구』.

[24] 『라브렌티예프 연대기』 1037년 항목 (제3판). 148쪽.

[25] 골루빈스키. 1. 2 (제2판). 698쪽; 트로이츠키 S. 『비잔티움과 네만 강 유역 세르비아의 기부자 권리』, 『세르비아 왕립 아카데미 회보』 제84호 (168) (1935); 지슈만 J. v. 『동방 교회의 기부권』(1888).

[26] D. 아브라모비치, L. K. 게츠, M. 프리셀코프, A. 샤흐마토프의 저술을 참조하라.

[27] 라브르 연감, 1051년 항목; 프리셀코프. 에세이. 88쪽 및 이후; Goetz. Staat und Kirche in AltruЯland (1908). 82쪽; 골루빈스키. 1. 1 (2판). 297, 300쪽; 마카리. 2(2판). 5–13쪽.

[28] 샤흐마토프. 『연구』. 434, 271, 257쪽; 참조: 프리셀코프. 『에세이』. 166쪽.

[29] 참조: 샤흐마토프. 앞의 저서. 제12장; 프리셀코프. 『에세이』. 253, 264–274쪽; Goetz. 『키예프 동굴 수도원』. 17; 골루빈스키. 1. 2 (제2판). 647쪽.

[30] 골루빈스키. 1. 1 (제2판). 286쪽; 일라리온-니콘에 대해서는 참조: 프리셀코프. 에세이. 172–189쪽; 동 저자. 연대기 작가 네스토르 (1924); 동 저자. 독립적인 러시아 교회를 위한 투사로서 대주교 일라리온(수도명 니콘), 수록: S. F. 플라토노프 기념 논문집 (1911). 188–201쪽.

[31] 성 테오도시우스의 행적은 여섯 차례 출판되었다: 1. 보디안스키, 『독본』 1858년 3호; 2. 야코블레프, 『12~13세기 러시아 문학 유산』(1873); 3. A. 포포프, 『독본』 1889년 1호; 4. 샤흐마토프, 『체테니야』 1899. 2; 5. 아브라모비치, 『슬라브-러시아 문학 유산』 2: 『키예프-페체르스키 파테리크』(1911); 6. 아브라모비치, 『키예프-페체르스키 파테리크』(1930). 참고 문헌은 다음을 참조: Goetz. Das Kiever Höhlenkloster. 15쪽, 각주. 참조: 라브라 연감 155; 파테릭. 제1장.

[32] 골루빈스키. 1. 2 (제2판). 607–627쪽, 494–507쪽, 776–790쪽; Migne. PG. 99. 1704쪽; 라브라, 연표, 1051년 항목; 프리셀코프. 에세이. 202쪽; 『파테리크』. 「페체르스크 수도원 설립에 관하여」 편.

[33] 파테릭. “위대한 니콘의 서거” 편; 골루빈스키. 1. 2 (제2판). 588, 746쪽.

[34] 라브라 연감, 1064년; 프리셀코프. 에세이. 206, 235쪽; 골루빈스키. 1. 1 (제2판). 682쪽; 1, 2. 776쪽; 샤흐마토프. 연구. 435쪽.

[35] 골루빈스키. 1. 2 (제2판). 585–587, 746쪽; 괴츠. 《키예프 동굴 수도원》(Das Kiever Höhlenkloster). 57쪽; 라브라 연감, 1091년 및 1094년 항목; 즈베린스키. 제1580호.

[36] 골루빈스키. 1. 2 (제2판). 746쪽; 마카리(1. 200쪽; 2. 95쪽)는 18개의 수도원을 집계하고 있다.

[37] 골루빈스키. 1. 2 (제2판). 748, 760쪽.

[38] 골루빈스키. 1. 2 (제2판). 746–776쪽; PSRL. 2. 78, 111, 114, 192쪽.

[39] 코노플레프. 『볼고그 지역의 성자들』(1894). 14쪽; 즈베린스키. 2. 623쪽; 골루빈스키. 1. 2 (제2판). 775쪽; 마카리. 3. 78쪽.

[40] 괴츠. 《키예프 동굴 수도원》. 3; 참조: 니콜스키 N. “고대 러시아 기독교에 관하여”, 『러시아 월간지』 1913. 6; 페도토프. 248쪽.

[41] 드미트리예프스키. 『전례 필사본에 대한 설명』. 1. 키예프, 1895. 서론. XCV-XCVI쪽, 1–152쪽; 리시친. 13–160쪽; 참조: Diehl, 『BZ』 1권, 521쪽; 크라스노셀체프. 『콘스탄티노플 성 소피아 성당의 전례 규정』. 오데사, 1892.

[42] 성 테오도르의 규약, Migne. 99. P. 1704 및 그 이후, 1813 및 그 이후; 또한 드미트리예프스키. 1. 224–238쪽. 서론. CVII쪽 및 그 이후; 참조: 리시친. 161쪽 이하. 알렉시오의 규약: 골루빈스키. 1. 2 (제2판). 494–507쪽. 키예프-페체르스키 파테릭 (1911). 24–26, 28, 14쪽.

[43] 파테릭 (1911). 14–56쪽; 차고브츠와 페도토프의 저술 참조.

[44] 테오도시우스의 가르침: 포노마레프. 1; 가르침의 동일성에 대해서는 참조: 샤흐마토프, 『IORYAS』, 1893. 827–33쪽; 니콜스키. 『10세기와 11세기 러시아 작가 및 그들의 저작에 대한 연대기 목록을 위한 자료』. 상트페테르부르크, 1906. 157–166쪽.

[45] 파테릭 (1911). 26, 27, 29, 39, 41, 43쪽. 라브라 연감, 6559, 6582, 6583, 6599, 6604년 항목; Goetz. Das Kiever Höhlenkloster.

[46] 파테릭 (1911). 83–86쪽; 프리셀코프. 에세이. 246, 367쪽; Goetz. 207쪽.

[47] 참조: 각주 4; 아브라모비치. 133쪽 및 그 이후; 슈나이더. 『테오도르 폰 슈투디온과 그의 시대』(1892). 40쪽.

[48] 성 테오도시우스의 금욕적 전통을 대표하는 수도자들은 니콜라 스비아토샤, 프로호르, 그레고리, 스피리돈, 알리피우스이다; 참조: 『파테리크』. 제20장, 제27장, 제28장, 제31장.

[49] 스몰렌스크의 문화적 전성기에 대해서는 니콜스키, 『대주교 클리멘트 스몰야티치의 문헌에 관하여』(1892), 138쪽; 라브로프스키, 『고대 러시아 학교에 관하여』(1854), 49쪽; 클류체프스키, 『고대 러시아 성자전』(1871), 54쪽. 아브라아미에 대해서는: 레드코프. 앞의 저서; 페도토프. 앞의 저서, 『프라브. м.』 2(1930)에 수록; 마카리. 3. 64–67, 205–210쪽. 『천상의 힘에 관한 글』, 『과학 아카데미 소식』 9 (1860–61). 188쪽 및 그 이후; 또한 참조: 빌린스키. 『성 바실리 노보이 전』 1 (1913). 311쪽; 베셀로프스키 A. N. 『러시아 영성 시에 관한 연구』(1889). 121쪽; 그 외: 셰비레프. 『러시아 문학의 역사』. 3 (1858). 15쪽; 부슬라예프. 『러시아 민속 문학 및 예술의 역사적 고찰』. 2. 119쪽.

[50] 칼라이도비치. 『12세기 러시아 문학의 유물』(1821). 102–131쪽 (두 편의 서한); 세 편의 서한 모두 수록된 곳: 『우리의 성부 키릴, 투로프 주교의 저작』(1880). 90–127쪽; 키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저작집』의 서문; 골루빈스키. 1. 1 (제2판). 797쪽; 포노마레프. 1. 98쪽 및 그 이후; 『파테리크』(1911). 28쪽.

[51] 골루빈스키. 1. 1 (제2판). 743쪽; 샤흐마토프. 『연구』. 437–438쪽; 프리셀코프. 『논고』. 215쪽 이후; 파테릭 (1911). 27, 53, 57쪽; 마카리. 3. 101쪽. 크티토르 권리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트로이츠키 I. 『비잔티움과 네만 치하의 세르비아에서 크티토르 권리』, 『글라스 스르프스케 아카데미예 나우크』(1935). 168 (세르보-호르바트어).

[52] 파테리크 (1911). 24–26쪽; Goetz. 128–134쪽; 라브르 연대기, 1051, 1074, 1086, 1096, 1108년 등; 파테리크 (1911). 39, 41쪽 등; 이파트 연대기, 1154, 1158, 1187, 1113년 등; Goetz. 165쪽. 또한 S. 게르베르슈타인의 저명한 저서 『Rerum Moscoviticarum Commentarii』에 수록된 성 바르라암 후틴스키(1112)의 유언서 발췌문도 참조. Antverpiae, 1557. 29–30쪽.

[53] 스미르노프. 『고대 러시아 유언서』(1914). 제1장.

[54] 각주 50 참조.

[55] 니콜스키 N. 12세기 작가인 클리멘트 스몰야티치 대주교의 문학적 저작에 관하여 (1892). 또 다른 러시아 설교자인 블라디미르 주교 세라피온(† 1275)을 언급할 수 있는데, 그는 한동안 페체르스크 수도원의 원장으로도 재임했다. 그의 설교(총 5편)는 심오하며 문학적 측면에서도 매우 훌륭하다.

[56] 니콜스키. 자료집 (1906). 75–76쪽; 프리셀코프. 에세이; 포노마레프. 1. 48–58쪽; 골루빈스키. 1. 1 (제2판). 844쪽; 「율법과 은혜에 관한 설교」: 포노마레프. 1. 59–79쪽.

[57] 샤흐마토프. 『블라디미르의 세례에 관한 코르순 전설』(1906); 동 저자. 『연구』; 파르호멘코. 『루시의 기독교 시작』(1911); 프리셀코프. 『연대기 작가 네스토르』(1924). 52, 74–77쪽; 참조: Baumgarten N. de. 『성 블라디미르와 러시아의 개종』(1932), 『Orientalia Christiana』 79호.

[58] 프리셀코프. “독립적인 러시아 교회를 위한 투사, 대주교 일라리온(수도명 니콘)”, 『S. F. 플라토노프 기념 논문집』(1911). 188–201쪽; 동 저자. 에세이; 동 저자. 『연대기 작가 네스토르』(1924); 참조: 샤흐마토프. 『연구』.

[59] 각주 25 참조.

[60] 파테릭 (1911). 21, 24, 33쪽; 프리셀코프. 에세이. 206, 235쪽; 골루빈스키. 1. 1. 687쪽; 1. 2. 776쪽 (제2판); 샤흐마토프. 연구. 435쪽.

[61] 게오르기예프스키. 『몽골 침입 이전 시기 러시아인들의 기독교 이해』(1893); 솜초프. 『몽골 침입 이전 루스의 민족적 자의식에 관하여』(1905); 샤흐마토프 A. 『연구』(1908); 샤흐마토프 M. 『고대 러시아 정치 사상에 관한 연구』. 1. 프라하, 1927. 고대 러시아 연대기 작성에 대한 총론은 다음에서 다뤄진다: 스페란스키. 『고대 러시아 문학사』. 1 (1914). 301–318쪽; 1 (1920). 325쪽 이하.

[62] 푸시킨 A. S. 『보리스 고두노프』.

[63] 고대 러시아 연대기의 발생사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샤흐마토프 A. 『연구』(1908). 420–460쪽; 동 저자. 『시대의 이야기』(1916); 스페란스키. 앞의 저서; 보구슬라프스키. 네스토르의 문학적 활동의 성격과 규모에 관한 문제, 『IORYAS』(1914). 1. 131쪽; 3. 153–191쪽; 이스트린. 러시아 연대기 기록의 시작에 관한 고찰, 『IORYAS』(1921). 45–102쪽; (1922). 207–251쪽; 니콜스키 N. 『시대의 이야기』. 1 (1930). 연대기에 관한 문헌은 다음을 참조: 니콜스키. 자료 (1906). 독일어 번역: Die Nestor-Chronik. K. 트라우트만 편집. 라이프치히, 1931, 수록: Slav. – Baltische Quellen und Forschungen. 6.

[64] 프리셀코프. 『연대기 작가 네스토르』(1924); 페투호프. 『러시아 문학. 고대 시기』(1916). 16–18쪽; 각주 56의 문헌 참조.

[65] 골루빈스키. 1. 1 (제2판). 743쪽; 「기억」. 같은 책. 238–247쪽. 샤흐마토프. 『연구』. 34–40, 437쪽 및 그 이후; 니콜스키. 『자료집』(1906). 225, 228, 230–233쪽; 세레브리안스키. 『고대 러시아 공작들의 생애』(1915). 48–51쪽.

[66] 개요를 파악하기 위해 다음 문헌을 추천한다: 슈톨린 카를. 『러시아의 역사』 1권 (1923). 66–134쪽; 괴츠 L. 『알트루야의 국가와 교회, 988–1240』 (1908); 그 외: 클류체프스키. 『러시아의 역사』 (1925). 2. 제14장.

[67] 류바브스키 M. “대러시아 민족의 주요 국가 영토 형성. 중심지의 정착과 통합”(1929); 프레스냐코프 A. “대러시아 국가의 형성”(1918); 류바브스키 M. “모스크바의 부상”, 『과거와 현재의 모스크바』 1권(1912).

[68] D. 라조프스키의 최신 저작 참조: 1. 『루시와 헝가리의 페체네그족, 투르크족, 베렌데이족』, 『Seminarium Kondakovianum』 7권 (1935); 2. 『폴로브족』. 동서 7–10권 (1935–1938).

[69] 제1 노브고로드 연대기, 6732년(1224년) 항목.

[70] 앞서 언급된 류바브스키와 프레스냐코프의 저술을 참조하라.

[71] “13세기 말까지 알려진 100개가 넘는 수도원 중에서,” V. 클류체프스키가 썼듯이, “그런 작은 은둔처는 열 개도 채 되지 않으며, 그중 대다수는 바로 13세기에 속한다. 반면 14세기부터 북부 러시아 수도원계에서는 숲속 은둔처로의 움직임이 빠르고 강력하게 발전했다. 이 세기에 생겨난 은둔 수도원의 수는 새로 지어진 도시 수도원(42개와 42개)과 맞먹었으나, 15세기에는 그 수를 두 배 이상 앞질렀고(57개 대 27개), 16세기에는 1.5배나 앞질렀다(51개 대 35개). 이처럼, 이 3세기 동안 모스크바 루스 영토 내에는 알려진 바에 따르면 150개의 황야 수도원과 104개의 도시 및 교외 수도원이 건립되었다» (Kljutschewskij. Geschichte RuЯlands. 2. S. 259).

[72] 보야르나 신하 출신으로는 세르기이 라도네즈스키(† 1392), 키릴 벨로제르스키(† 1427), 페라폰트 벨로제르스키(† 1426), 파벨 오브노르스키(† 1429), 그리고리 펠셴스키(† 1441), 야코프 젤레즈노보르스키(† 1442); 예프로신 프스코프스키(† 1481); 파프누티 보로프스키(† 1478) – 개종한 타타르 가문 출신; 마카리 칼야진스키(† 1483); 닐 소르스키(† 1508); 요시프 볼로츠키 또는 볼로콜람스키 († 1515); 인노켄티 오흘레비닌 (약 1481), 코멜스키라고도 불림; 키릴 노보예제르스키 († 1532); 코르닐리 코멜스키 († 1537); 아르세니 코멜스키 († 1550); 다니일 페레야슬라프스키 († 1540); 스테판 코멜스키 († 1542); 사바 비셰르스키 († 1460); 페라폰트 모자이스키 († 1426); 공작 가문 출신: 이그나티이 볼고그스키 († 1523). 상인이나 도시 주민 출신: 디미트리 프릴루츠키(† 1392); 디오니시 글루시츠키(† 1437); 알렉산드르 스비르스키(† 1533); 아르세니 코네프스키(† 1447); 게라심 볼딘스키(† 1551); 엘레아자르 안제르스키(† 1656). 부유한 농민 가문 출신: 알렉산드르 오셰벤스키(† 1479); 안토니 시이스키(† 1556). 사제 가문 출신: 예프피미 노브고로드스키(† 1458).

[73] 이 주제에 대해서는 저의 논문을 참조하십시오: Smolitsch. Studien zum Klosterwesen RuЯlands. 2, in: Kyrios. 3 (1938). 제4호.

[74] 그의 제자 에피파니우스 프레무드리(† 1420)가 쓴 성 세르기우스의 행적은 아기오그래프 파코미우스(† 1484년 이후)가 편집한 형태로 우리에게 전해졌다. 원본이지만 축약된 판본의 행적은 니코노프 연대기(ПСРЛ. 11. 127–147쪽). 파코미우스의 편집본은 다음에서 볼 수 있다: 1. OLDP. 58. 모스크바, 1885; 2. VMCh. 9월. 제3부 (9월 25일). 상트페테르부르크, 1883; 3. 시몬 아자리인 편집. 모스크바, 1646; 4. 트로이체-세르기예프 라브라 판. 1853. 참고 문헌: 클류체프스키 V. 역사적 자료로서의 고대 러시아 성인 전기. 모스크바, 1872; 골루빈스키 E. 성 세르기이 라도네즈키와 그가 설립한 트로이체 라브라. 모스크바, 1892; 제2판, 1909. 에피파니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카들루보프스키 A. 고대 러시아 성인 전기 문학의 역사에 관한 고찰. 바르샤바, 1902. 171–178쪽. 파코미우스의 성자전 저술 양식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네크라소프, N. 『파코미우스 세르브, 15세기 작가』. 오데사, 1871; 야블론스키, V. 『파코미우스 세르브와 그의 성자전 저술』. 상트페테르부르크, 1908; 또한: 카들루보프스키, 179–188쪽.

[75] 클류체프스키. 『러시아사』. 2권 (1925). 263쪽.

[76] 이는 다음과 같다: 1. 키르자치에 있는 수도원; 2. 모스크바의 안드로니코프 수도원 (1360); 3. 로스토프 인근의 보리소글레브스키 수도원 (1363); 4. 모스크바의 시모노프 수도원 (1370); 5. 콜롬나 인근의 골루트빈스키 수도원 (1381); 6. 보고로드스크 인근의 두벤 수도원 (1381); 7. 두벤-오스트로프스키 수도원 (1380); 8. 세르푸호프에 위치한 비소츠키 수도원, 이곳은 세르기우스의 축복을 받아 그의 제자 아파나시이가 설립했다 (1374). 즈베린스키. 참고 문헌 2. № 864, 675, 1990, 1212, 1313, 753; 1. № 72. 골루빈스키. 참고 문헌. 75–79쪽.

[77] 저의 저서 참조: Smolitsch. Leben und Lehre der Starzen. 65–70쪽.

[78] 즈베린스키. 앞의 저서 2. 제598, 597호; 3. 제1915, 2031호. 클류체프스키. 『고대 러시아 성자전』. 196, 276쪽. 마카리. 4. 196, 195쪽. 골루빈스키. 『성 세르기우스』. 81쪽.

[79] 즈베린스키. 2. 제754호.

[80] 즈베린스키. 2. 제796호. 골루빈스키. 앞의 저서, 82쪽.

[81] 즈베린스키. 1. 제404호; 골루빈스키. 79쪽; 즈베린스키. 2. 제1140호; 골루빈스키. 80쪽.

[82] 골루빈스키. 82–84, 86쪽. 즈베린스키. 2. 제1959호; 1. 제524호; 2. 제1330호. 마카리. 4. 142, 147, 211쪽. 클류체프스키. 앞의 저서. 96쪽. 『강연집』. 1878. 3. 43쪽.

[83] 골루빈스키. 앞의 저서. 84쪽; 클류체프스키. 앞의 저서. 159쪽; 카드루보프스키. 앞의 저서. 182–187쪽; 무라비예프. 『러시아의 피바이다』. 147쪽 및 그 이후; A.I. 1. 제21, 22, 25, 26, 55, 56, 32호; 성 키릴의 행적은 카들루보프스키(1912)에 의해 다음 책에 수록됨: 야블론스키. 파호미이 로고페트 (1908); 발췌문은 다음 책에 수록됨: 마카리이. 4. 부록. 356–360쪽; 행전 요약은 필라레트, 『러시아 성인들』 6월호, 206–222쪽에 수록. 또한 참조: 바르수코프. 『자료집』. 297–306쪽 및 앞서 언급된 야블론스키의 저작. 성 요셉 볼로츠키의 키릴에 대한 견해는 그의 『성스러운 아버지들에 관한 이야기』 (LZAK. 2. 82쪽)에서 확인할 수 있다. 즈베린스키. 2. 제867호. 성 키릴의 규약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니콜스키. 『키릴-벨로제르스키 수도원의 공동체 및 독방 생활』, 『크리스토스 기념 논문집』 1907. 224. 163쪽.

[84] 성 닐에 대해서는 제4장을 참조하라.

[85] 즈베린스키. 2. 제1151호; 사비치. 『15~17세기 솔로베츠키 영지』(1927); 여기에는 자료에 대한 새롭고 중요한 평가가 실려 있다.

[86] 즈베린스키. 2. 제606호. 성 마르티니아노에 대해서는: 브릴리안토프. 페라폰토프 벨로제르스키 수도원. 17쪽. 고르스키. 『성 삼위일체 세르기예프 라브라의 역사적 서술』(1890). 69쪽. 마르티니아노는 보즈호 호숫가에 수도원을 설립했으며, 종종 보제예제르스키라고 불리기도 한다. 참조: 즈베린스키. 2. № 1188.

[87] 성 코르닐리에 대해서는 참조: 코노플레프. 『볼고그 지역의 성자들』, 『치테니야』 1895. 4. 86–101쪽. 클류체프스키. 앞의 저서. 303, 308, 389, 393, 401쪽. 무라비예프. 전게서, 64쪽; 그 수도원 규약은 『IRI』 4권, 673–704쪽 참조; 발췌문은 코노플레프, 94–100쪽에 실려 있으며, 무라비예프가 이를 재구성함. 마카리, 7권. 49, 69쪽; 아아에. 1. 제222호, 380–397쪽. 그의 수도원이 소유하고 있던 영지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아유. 1. 제76호. 즈베린스키. 2. 제884호.

[88] 즈베린스키. 2. 제868호, 1157, 557. 표 I 및 II 참조.

[89] 우리는 스파소-카멘노 수도원의 역사를 알 수 있는데, 이는 15~16세기의 저명한 인물인 파이시이 야로슬라보프 장로가 쓴 『스파소-카멘노 수도원에 관한 전설』이다. 그는 1503년 이후에 사망했다. 『전설』은 『Prav. sob.』 1861. 197–214쪽. 즈베린스키. 1. 제446호. 표 III 참조.

[90] 코노플레프. 앞의 저서. 43–53쪽, 여기에는 성 디오니시오스의 생애에 대한 훌륭한 요약이 수록되어 있다; 클류체프스키. 앞의 저서. 493, 415, 462쪽; 즈베린스키. 2. 제766, 767호; 3. 제1150호; 사비치. 14~15세기 러시아 북부 수도원 식민화의 주요 양상, 『페름 대학교 논문집』 3 (1929). 25쪽.

[91] 성 그레고리 펠셴스키의 행적, 『VMCh』 9월호, 제3부 (9월 30일); 또한: 코노플레프, 앞의 저서, 60쪽 및 이후; 즈베린스키, 2권, 제909호; 클류체프스키, 앞의 저서, 196쪽.

[92] 즈베린스키. 2. 제1173호, 제1208호; 세미고로드스키 수도원 역시 디오니시오스의 제자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같은 책. 2. 제1144호.

[93] 즈베린스키. 2. 제605호, 제1189호; 클류체프스키. 앞의 저서. 300쪽, 372쪽.

[94] 즈베린스키. 2. 제1055호, 제1158호.

[95] 즈베린스키. 2. 제607호, 1215호; 1. 제344호, 193호.

[96] 세레브리안스키. 『프스코프 지방 수도원 생활에 관한 에세이』(1908).

[97] 그레코프. 『성 소피아의 집』(1914).

[98] 발라암 수도원과 그 수행자들 (1889).

[99] 요시프 볼로츠키. 『성부들에 관한 전설』, 수록: 『독본』. 1847. 7; 참조: 리야잔 주교 레오니드가 테오도르 이오안노비치 차르에게 보낸 서한 (1584–1598), 수록: 티혼라보프. 『러시아 문학 및 고대 연대기』. 5. 제3권. 142쪽; A.I. 1. 제410호. 연대기 기록(PSRL. 8. 183쪽)에 따르면, 파프누티는 1443년에 수도원을 설립했다.

[100] 클류체프스키. 앞의 저서. 294, 439–453쪽; 카들루보프스키. 앞의 저서. 209쪽 및 그 이후.

[101] 요세프의 행적: 『VMCH』 9월 9일. 455–498쪽; 그의 수도원 규약(『영적 문헌』): 같은 책. 499–615쪽. 요세프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흐루쇼프. 『요세프 사닌, 볼로츠키의 존경받는 수도원장(이구멘)의 저작에 관한 연구』(1868); 그 외에도 불가코프, 즈마킨, 카들루보스키, 페도토프의 저작들.

[102] 요시프의 이 순례에 대한 설명은 그의 규율서 제10장 제2부에 수록되어 있으며, 이는 『LZAK』 2권(1862/63)에 별도로 게재되었고, 요약본은 『Chteniya』 1847년 7호에 실렸다.

[103] 디오니시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게오르기예프스키 V. 『페라폰토프 수도원의 프레스코화』(1911); 여기에는 1545년 요시포프 수도원의 상세한 재고 목록도 수록되어 있다. 수도원의 부유해짐에 대한 역사적 배경은 요시포프가 B. V. 쿠투조프에게 보낸 서신(『DRV』 14. 177쪽) 및 마리아 골레니나 공작부인에게 보낸 서한(출처: 흐루쇼프. 255–260쪽); 또한: 흐루쇼프. 39쪽 및 그 이후; 즈베린스키. 2. № 845; 게론티(쿠레아노프스키), 대수도원장. 『볼로콜람스크의 성 요세프 2급 수도원』(1903).

[104] 성 세르기이 수도원에서는 그가 입적한 지 30년 만에 첫 번째 석조 교회가 건립되었다. 고르스키 A. 『성 삼위일체 세르기이 라브라의 역사적 서술』 1권 (1890). 6쪽.

[105] 그러나 G. 플로로프스키(『러시아 신학의 길』, 1937, 18쪽)가 요시프의 사회 활동에 대해 내린 결론은 전적으로 옳지 않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이에 대한 나의 서평은 『Jahrbuch für neuere Geschichte Osteuropas』 3권(1938), 262쪽을 참조하라.

[106] 참조: 『VMCh』. 9월호. 499–615쪽; 참조: 흐루쇼프. 59–63, 75–80쪽.

[107] 이와 관련하여 요시프의 주요 저작인 『계몽자』에 나오는 7번째 말씀과, 수도원 규율 준수에 관한 그의 지시문(『수도원 규율을 준수하지 않은 한 수도사에 대한 성 요시프 볼로츠키의 지시』)이 특히 중요하다. 이 내용은 『DAI』 1권, 제211호에 수록되어 있다.

[108] 제9장을 참조하라. 그곳에 요세프의 수도원 규약에 대한 상세한 내용이 실려 있다.

[109] 『VMCH』. 9월호. 491쪽; 즈마킨. 『대주교 다니일』. 110쪽 및 이후, 129, 138, 452–456쪽; 파블로프. 세속화에 관한 역사적 고찰. 86쪽; 쿠르브스키. 전설 (제2판). 42쪽. 다니일은 대공 바실리 3세의 지시에 따라 모스크바 대주교로 선출되었다; ПСРЛ. 6. 254쪽; 8. 269쪽.

[110] 골루빈스키. 2. 1. 734쪽; 디아코노프. 모스크바 군주들의 권력 (1880). 108쪽; 즈마킨. 16세기 전반 러시아의 사상 투쟁, 『즈므NP』 1882년 4월호. 160쪽; 파블로프. 앞의 저서. 109쪽; 마카리이는 아마도 파프누티예프 보로프스키 수도원의 출가자였을 것이다. 골루빈스키. 2. 1. 747쪽; 자우스친스키. “전 러시아의 대주교 마카리이”, 『즈므넵』. 1881. 10월.

[111] 『스토글라프』. 코잔치코프 판 (1863). 19–20쪽; 참조: 『AI』. 1. 제216호.

[112] “모스크바 – 제3의 로마”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제5장을 참조하라.

[113] 성 닐 소르스키에 대해서는 저의 저서 『Leben und Lehre der Starzen』(1936) 71–76쪽을 참조하라; 이 책(77–89쪽)에는 그의 주요 저작 『제자들에게 전하는 가르침』에서 발췌한 가장 중요한 구절들이 수록되어 있다; 아르한겔스키. 『닐 소르스키와 바시안 파트리키예프』 (1881); 즈마킨. 앞의 저서; 프라브딘. “성 니일 소르스키와 그의 스키트 생활 규율”, 『크리스토스 독본』 1877. 1. 114–157쪽; 그레체프. “니일 소르스키와 자볼즈카야의 장로들”, 『BV』. 1907. 7–8; 1908. 5, 9, 11; 스몰리치 이. “위대한 장로 닐 소르스키”, 『푸트』 19 (1929); 페도토프. 『고대 루스의 성자들』(1931). 166–175쪽.

[114] 15세기 3분기 키릴로-벨로제르스키 수도원의 상황에 대해서는 요시프의 『영적 서한』 제10장을 참조할 것, 또한: 니콜스키. 15세기와 16세기, 그리고 17세기 초 키릴로-벨로제르스키 수도원의 공동체 생활과 개인 생활, 『크리스트』 1908년호 225 및 227쪽; 동 저자. 『키릴로-벨로제르스키 수도원』(1897). 1권.

[115] 고르스키 A. 『러시아 교회와 성산 수도원들의 관계에 관하여』(1848); 솔로비예프 A. 『아폰 산의 러시아 수도원 역사』, 『베오그라드 러시아 국립 연구소 회보』 7 (1932). 137–156쪽.

[116] 소볼레프스키. 모스크바 루스의 번역 문학 (1903). 5–6쪽; 일린스키. 슬라브 문헌사에서 아포스의 의의, 『ZhMNP』 1908. 11; 오를로프 A. 16세기 루스에서 행해진 예수의 기도, 『PDP』 185 (1914).

[117] 이시하스파 논쟁과 아토스 수도자들의 삶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Engelhardt G. “Die Arsenianer und Hesychasten”, Z. f. hist. Theologie (1838); Stein F. Studien uber die Hesychasten (1879); 포르피리우스(우스펜스키), 주교. 『기독교 동방. 아토스』. 3. 제2권 (1892); 우스펜스키 F. 『비잔틴 문명사 개론』(1891); Meyer Ph. 『아토스 수도원 역사를 위한 주요 문서들』(1894) 및 아토스 수도원의 근대사와 현대 상황에 관한 그의 논문, 『Z. f. Kirchengeschichte』 2 (1907); 소콜로프 이. 바르라암과 바르라아미트들, 『PBЕ』 3; 라드첸코 K. 터키 정복 이전 시대 불가리아의 종교 및 문학 운동 (1898); 하우스헤르 I. 헤시카스트 기도의 방법, 『OCА』 9. 2 (1927); 알렉시우스 주교, 『14세기 비잔틴 교회 신비주의자들』 (1906); 오스트로고르스키 G. 『아폰의 헤시카스트들과 그들의 반대자들』, 『베오그라드 RNI 회보』 5 (1931); 저의 저서. Op. cit. 45–58쪽; 운더레 G. 『아토스의 성스러운 세계에서』(1937), 『동방 기독교』 2권; 동 저자. 『헤시카스트 기도의 심리학』(ibidem. N. F. 2). 제2판 (1947). 중요한 헤시카스트 저작으로는 칼리스토스 크산포풀라스의 『센투리에』(「백인단」)가 있으며, 이는 최근 A. M. 암만에 의해 독일어로 출판되었다: Ammann A. M. 『팔라마스파 헤시카즘에서의 신관』(1939), 『Das Östliche Christentum』 6/7호. 바실리, 수도사. 『성 그레고리우스 팔라마스의 금욕적·신학적 가르침. 1296–1351』(1939) (ibidem. 8).

[118] 금욕적·신비주의적 및 신학적·신비주의적 흐름으로서의 헤시카스모스를 이해하기 위해 다음을 참조하라: 시르쿠. 《티르노프스카야 총대주교 에우피미오스의 시대와 생애》(1898); 슈미트 B. 《영적 기도》(할레, 신학 박사 학위 논문, 1916); 바우어 I. 『그리스 교부 신학에서의 신화(神化) 교리에 관한 연구』, 『신학 분기별 저널』, 98–100 (1917/18); 주지 M. 『동방 기독교의 교리 신학』. 2 (1933). 47쪽 및 이후; Lot-Borodine M. 『11세기까지 그리스 교회에서의 신성화 교리』, 『종교사 연구지』 55 (1932). 1–35쪽; 56 (1933). 325–374쪽; 57 (1933). 8–55쪽; 또한 수도사 바실리의 저서에 수록된 문헌을 참조하라. Op. cit. 9쪽.

[119] 참조: 로스티슬라보프 A. 『닐로바 사막의 스키트』, 『옛날의 세월』(1913), 4월호.

[120] 나는 닐의 주요 저작인 『우리의 경건한 아버지 닐 소르스키가 제자들에게 전한 스키트 생활에 관한 전승』(1849)을 인용한다. 22쪽.

[121] 전승. 27, 28, 29, 31, 32쪽. 죄를 짓는 사람의 모습은 니로가 고대 금욕주의 전승을 바탕으로 묘사했다. 참조: 필자의 저서. Op. cit. 24–59, 81–89쪽; Ammann A. M. Op. cit., 수도사 칼리스토스와 이그나티우스의 『센투리아』(43쪽 및 이후).

[122] 전승. 67–68쪽; 69–103쪽. 이 정욕의 체계는 이미 에바그리우스 폰티우스(† 402)의 저서 『Antirrytikon』(Migne. PG. 40. P. 1272A-1276A). 이 도식은 후대의 금욕주의 저술가들, 예를 들어 시나이 산의 닐로스, 요한 사다리, 요한 카시안 등에 의해 채택되었다. 예를 들어 다음을 참조하라: 시나이 산의 닐로스. Tractatus de octo spiritibus malitiae (8가지 치명적 죄에 관하여), 출처: PG. 79. P. 1145, 1164.

[123] 전승. 36–40쪽; 저의 저서 참조. Op. cit. 82, 48쪽; 그 외: Schmidt E. Das Geistige Gebet (1916).

[124] 전승. 70쪽; 금식에 대해서는 닐의 저서를 참조하라. 같은 책. 69–80쪽.

[125] 전승. 18–20쪽.

[126] Meyer Ph. 『아토스 수도원 역사를 위한 주요 문서들』(1894) 및 아토스 수도원의 근대사와 현대 상황에 관한 그의 논문, 『Z. f. Kirchengeschichte』 11 (1890); 소콜로프 이. 『9세기 중반부터 13세기 초까지 비잔틴 교회의 수도 생활 내부 상황: 842–1204』(1894), 『Prav. sob.』 1893에 수록. 3. 닐 소르스키는 은둔 생활을 항상 스키트로 이해했다. 고대 루스에서는 스키트가 종종 독립 생활의 일부 특징을 지니곤 했다. 고대 루스에서 이러한 형태의 수도 생활을 이해하기 위해 다음을 참조하라: АИ. 1. № 26 및 181; ПСРЛ. 6. 284쪽. 일부 러시아 역사가들은 실수로 닐을 아나코레트(은둔자)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예를 들어: 니키츠키. 『노브고로드 내부사 개론』. 86쪽. 자볼지예(볼로그다 일대)에는 1371년까지 키노비(공동 생활 수도원)가 없었다(마카리. 4. 214쪽), 그러나 그 북쪽, 백해 근처에는 15세기 중반에 이미 공동 생활 수도원이 존재했다(아유. 제110호. 6. 145쪽). 노브고로드와 그 주변 지역에는 대체로 단독 거주 수도원만 있었다. PSRL. 6. 284쪽.

[127] 전승. 6–65쪽, 69쪽 이후, 107쪽 이후.

[128] 닐은 다음과 같은 교회 교부들과 금욕주의 저술가들을 인용한다: 마카리오스, 바실리우스 대성인, 요한 황금입, 닐 시나이, 이사악 시린, 에프라임 시린, 아부 도로테우스, 이시히오스 예루살렘의, 카시아노스, 요한 사다리, 막시무스 고백자, 페트로스 다마스쿠스, 교황 그레고리오스 이중언자, 테오도로스 스투디테, 필로페이, 시메온 신학자, 특히 그레고리 시나이타를 비롯해 그 외의 인물들.

[129] 고대 러시아 연대기에서 수도사 아드리아노(니코노프 연대기, 1004년 항목)와 (20년 후의) 어떤 드미트리라는 인물의 ‘이단’에 관한 비교적 모호한 기록만 언급할 수 있는데, 이는 아마도 불가리아의 파블리키안주의와 관련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마르틴이라는 이름의 아르메니아인 장로 한 명을 더 언급할 수 있는데, 그의 생애와 가르침에 대해서는 극히 모호한 기록만 남아 있다; 참조: 골루빈스키. 1. 2 (제2판). 795쪽. 수요일과 금요일의 금식에 관한 논쟁(12세기)과 ‘할렐루야’에 관한 논쟁(14세기)은 이단적인 성격을 띠지 않았다.

[130] 이 운동에 대해서는 제10장을 참조하라.

[131] 미트로판과 대공 바실리 이바노비치에게 보낸 서한, 『체테니야』 1847. 1; 니폰트 주교에게 보낸 서한, 『RIB』 6. 825쪽 이하.

[132] 비소유주의자들의 답변 – 『볼고다 장로들의 서한』, 『DRV』 14 (1792). 424–428쪽.

[133] PSRL. 6. 49쪽; 8. 244쪽.

[134] 이 주제에 관한 문헌은 상당히 방대하지만, 가장 중요한 저작들만 언급하겠다: 밀류틴. 『성직자의 부동산에 관하여』, 『체테니야』 1859. 4; 1860. 3; 1861. 1, 2; 고르차코프. 『러시아 대주교, 총대주교 및 성스러운 시노드의 토지 소유에 관하여』(1871); 동 저자. 『수도원 관리부』(1868); 파블로프. 앞의 저서; 즈마킨. 앞의 저서. 간략한 개요는 다음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고티에. 『러시아 토지 소유사 개론』 (1915). 북부 루스의 수도원 경제 운영에 대한 포괄적인 연구 시도는 다음 저서에서 이루어졌다: 사비치 A. 『15~17세기 솔로베츠키 영지: 러시아 최북단 지역의 경제 및 사회 관계 연구』. 페름, 1927. 제6장 및 제8장 참조.

[135] 1553년 모스크바를 방문한 아담 클리멘트는 수도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Plurima ibi exstruuntur Basilianorum coenopia (coenobia); 그들의 토지 수입은 막대하니, 이는 수도사들이 제국 전체 토지의 3분의 1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바실리안 수도원이 많이 세워져 있으며, 그들은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어 제국 전체 토지의 3분의 1이 수도사들에게 속해 있다), 『Rerum Moscoviticarum scriptores varii』. 프랑크푸르트, 1600. 152쪽.

[136] 교회는 자신의 권리를 보편 공의회와 지역 공의회의 규범과 규칙에 근거했으나, 이러한 규범과 규칙은 토지 소유에 반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도 규칙 제38조, 제7차 보편 공의회 규칙 제12조(성 사도들, 성 공의회 및 성 교부들의 규칙과 해설. 모스크바, 1876. 87, 668쪽) 및 특히 861년 제2차 콘스탄티노플 지역 공의회 제6규칙(『9개 지역 공의회 행적』. 카잔, 1877. 238쪽). 성 테오도르 스투디트는 자신의 수도자들에게 가장 엄격한 빈곤을 요구했으며, 수도사들의 개인 재산 소유권을 거부했다. 도브로클론스키 A. 성 테오도르, 고백자이자 스투디오스 수도원의 원장. 오데사, 1915. 498쪽.

[137] 모스크바 대주교 키프리아노스(1381–1382, 1390–1406)가 남긴 아파나시이 수도원장에게 보낸 서한(1395/1405)이 있다(A.I. 1. 제253호)가 남아 있는데, 이 서신에서 그는 수도사들의 개인 재산권에 대한 문제를 다루며, 이 권리가 성부들의 견해에 위배된다고 하여 이를 거부한다. 그러나 그는 공동 생활 수도원의 토지 소유에 대해서는, 그 소유지가 수도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는 평신도의 관리하에 있는 경우, 그 정당성을 인정한다. 성 세르기이 라도네즈스키와 성 키릴 벨로제르스키도 같은 견해를 공유했는데, 이들은 원칙적으로 공동 생활 수도원의 토지 소유권을 인정했으나 개별 수도사의 개인 소유권은 부정했다. 비록 두 성인 모두 각자의 수도원에서 가장 엄격한 키노비아를 도입하고 유지하려 노력했으나, 수도원에 기증된 토지, 특히 공작들로부터 받은 기증지는 거부할 수 없었다. 파블로프. 앞의 저서. 11, 66쪽; 마카리이. 8 (1874). 154쪽; 니콜스키. 키릴로-벨로제르스키 수도원. 1. 2 (1910). 11쪽. 키릴로-벨로제르스키 수도원에서는 수도사들이 두 파로 나뉘었는데, 이들 간의 논쟁은 15세기 후반 내내 계속되었으며, 결국 수도원 소유지에 단호히 반대하는 비재산주의 수도사 집단의 형성을 초래했다. 니콜스키. 키릴로-벨로제르스키 수도원의 공동체 생활과 독방 생활, 『크리스토스』 1907년 8월호. 155–173쪽. 참조: 『VMCh』 9월호. 550쪽. 아마도 바로 이러한 논쟁들이 닐 소르스키로 하여금 자신만의 스키트를 설립하도록 이끈 것일 수 있다.

[138] 전승. 81, 14, 18쪽; 부록. 10. 505쪽.

[139] 보충자료. 10. 508쪽.

[140] 클류체프스키. 『러시아의 역사』, 2권, 127쪽.

[141] 15~16세기 모스크바 국가의 성장에 관한 일련의 문제들을 이해하는 데 입문서로 활용할 수 있는 저작들은 다음과 같다: 클류체프스키. 앞의 책, 제2권, 제1, 2, 5장; 슈틀린 카를. 『러시아사』, 제1권 (1923). 197쪽 이후; 프레스냐코프 E. 『대러시아 국가의 형성』(1918); 류바브스키. 『대러시아 민족의 주요 국가 영토 형성』(1929); 플라토노프 S. 『러시아사』(1927).

[142] 모스크바 대공은 다음과 같은 지역을 자신의 지배하에 두었다: 1463년 – 야로슬라블 공국(평화 조약에 따라); 1472년 – 유리 공(이반 3세의 형제)의 영지: 드미트로프, 모자이스크, 세르푸호프; 1472년 – 페름을 정복; 이 땅의 일부는 이미 이반 1세 칼리테 치세에 편입되었음; 1478년 – 벨리이 노브고로드를 정복; 1481년, 이반의 형제 안드레이의 영지인 볼로그다와 타루사; 1482–1493년 – 체르니히프와 노브고로드-세베르스크 지역의 소규모 공국들: 비야즈마, 체르니히프, 스타로두브, 노브고로드-세베르스키; 1485년 – 트베르 공국을 정복; 1485년에는 강요된 유언에 따라 베레야 영지가 편입되었고, 1489년에는 비얏카를 정복했으며, 1492년에는 형 안드레이 볼쇼이의 영지인 우글리치를 편입했고, 1503년에는 리아잔 공작 페도르의 유언에 따라 리아잔 공국의 일부를 편입했다. 이 모든 것은 이반(1462–1505)의 노련한 정치의 결실이었다. 그의 아들인 대공 바실리 3세(1505–1533) 치하에서도 모스크바의 부상은 계속되었다: 1510년 – 프스코프가 복속되었고, 1513년 – 작은 볼로콜람스크 공국이 편입되었다; 1514년 – 리투아니아로부터 스몰렌스크 공국을 탈환했고, 1517년 – 리아잔 대공국을 병합했으며, 1523년 – 세베르스크 공국을 병합했다. 문헌은 앞선 각주를 참조하라.

[143] 클류체프스키. 2. 116쪽.

[144] 로즈코프. 『러시아 역사』. 3권, 25쪽; 프레스냐코프. 앞의 저서, 458, 429쪽.

[145] 플라토노프. 『러시아사 강의』. 제9판 (1915). 156쪽. 참조: 이 용어의 의미에 대한 클류체프스키(2. 126쪽)와 디아코노프(『모스크바 군주들의 권력』(1889). 54쪽 이후)의 견해.

[146] 참조: 디아코노프. 앞의 저서; 로즈코프. 『러시아 자치제(самодержавие)의 기원』(1906); Philipp W. Ivan Peresvetov (1935). 제4장; 블라디미르스키-부다노프. 『개관』; 세르게예비치. 『러시아 법학 고대사』.

[147] 참조: 슈트흘린. 1; 클류체프스키. 2 (1925); 플라토노프. 『러시아의 역사』(1927); 프레냐코프. 『교육』(1918); 우베르스베르거 H. 『15세기 말 이후의 오스트리아와 러시아』(1906); 포르슈로이터 K. 『중세 시대의 프로이센과 러시아. 13세기부터 17세기까지 양국 관계의 발전』(1938); 바르바쇼프 A. 『비토프트. 통치 마지막 20년』(1891).

[148] 슈텔린. 1. 216 및 그 이후. 또한: 그레코프 B. 및 야쿠보프스키 A. 황금 오르다. 13세기와 14세기에 걸쳐 형성 및 전성기를 맞이한 주치 울루스의 역사 개론 (1937); 스풀러 B. 『황금 오르다의 대외 정책』, 『동유럽 역사 연감』 5권 (1940); 동 저자. 『황금 오르다』(1941) (방대한 참고문헌 수록); 필자의 논문 「15세기와 16세기 러시아의 동방 정책사에 관하여」, 『동유럽 역사 연감』 6권 (1941). 55–84쪽. 타타르 칸들이 러시아 교회에 대해 보인 태도에 대해서는: 프리셀코프 M. 『러시아 대주교들의 칸 칙서』(1916).

[149] 참조: 프리셀코프 M. 『10~12세기 키예프 루스의 교회·정치사 개론』(1913); 프레스냐코프. 『교육』; 소콜로프 D. 『러시아 대교구의 분열사』(1900); 소콜로프 P. 『비잔티움 출신의 러시아 주교와 15세기 초까지의 그 임명권』(1913); 마카리. 5–6 (관련 장).

[150] 소콜로프스키. 『참여』(1902); 프레냐코프. 『교육』; 마카리. 6; 디아코노프. 『모스크바 군주들의 권력』(1889). 국가 권력을 지지하기 위한 대주교들의 정책은 대주교좌에서 편찬된 연대기 모음집들에서도 드러나는데, 참조: 프리셀코프 M. 『11~15세기 러시아 연대기 편찬사』(1940), 특히 149–155, 162쪽; 샤흐마토프 A. 『14~15세기 전러시아 연대기 모음집』, 『지MNP』 1900. 9–10, 11; 프레스냐코프 A. 『14~16세기 연대기 사업』, 『19세기 이전 러시아 문학사』 A. 그루진스키 편. 1 (1916).

[151] Ziegler A. 『Die Union』(1938), 이 책에는 해당 주제에 관한 문헌 목록이 수록되어 있다; 다음 서평을 참조하라: Philipp W., 『Jahrbuch für Geschichte Osteuropas』 5 (1940), 213쪽 이하; 또한: 슈파코프 A. 『국가와 교회』(1904), 지글러의 저서에는 이 작품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152] Philipp. 앞의 책, 213쪽.

[153] 바로 그 때문에 연대기에 콘스탄티노플(차르그라드) 함락에 대한 그토록 상세한 묘사가 담겨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차르그라드 함락에 관한 이야기」, 『PSRL』 12, 83–97쪽; 독일어판: 「Bericht über die Eroberung Konstantinopels」. (니코노프 연대기를 바탕으로 한) 번역 및 해설: M. 브라운과 A. M. 슈나이더. 괴팅겐, 1940. 이 『이야기』, 또는 『차르그라드에 관한 전설』은 고대 러시아 저널리즘의 중요한 자료로서, 풍부한 비평 문헌을 낳았다: 야코블레프 V. 『차르그라드에 관한 전설』(1868); 스레즈네프스키 I., 『러시아 과학원 제2부 학술 기록』(1854)에 수록; 오를로프 A., 『이오라스』 12호 (1908); 레오니드, 대수도원장. 『15세기 네스토르-이스칸데르의 차르그라드에 관한 이야기』, 『PDP』 62호 (1886). 또한 참조: 페투호프. 101쪽.

[154] 즈마킨. 대주교 다니일. 364쪽, 362–367쪽; 참조: 《AI》 1. 제282호. 513쪽; 《Prav. sob.》 1860. 2. 337쪽; 막심 그렉. 《저작집》 1. 132쪽; 지노비 오텐스키. 『진리의 증언』. 48–49쪽; 장로 아르테미. 『서신집』. RIB. 4. 1221. 종말론적 정서에 대해서는 전반적으로 다음을 참조: Bonwetsch N. 『Methodius v. Olympus』. 1 (1891); 사하로프 이. 고대 러시아 문헌에 나타난 종말론적 저작과 전설 (1879); 말리닌. 장로 필로페이. 426, 429, 430쪽; RIB. 6. 800, 806, 810쪽.

[155] 클류체프스키. 2. 115, 123쪽. “이반 3세가 대공의 자리에 올랐을 때,”라고 클류체프스키(같은 책, 115쪽)는 말한다, “모스크바 영토는 1만 5천 제곱마일을 조금 넘을 뿐이었다. 이반 3세와 그의 아들이 영토를 확장함에 따라 이 면적은 적어도 4만 제곱마일이나 늘어났다.”

[156] PSRL. 12. 97쪽; 『이야기』. 33쪽.

[157] 비잔틴 궁정 의식의 신성한 성격과 관련된 관념 및 교리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Treitinger O. Die oströmische Kaiser-und Reichsidee (1938); 자료가 풍부한 저서: Dölger F. 『사상 세계 속의 로마』; 그 외: 사바 V. 『모스크바의 차르들과 비잔티움의 바실레우스들』(1902). 비잔티움 제국 이념 속의 신성 요소가 비잔티움인들의 의식 속에서 매우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Baynes N. H. Eusebius and the Christian Empire, in: Annuaire de l’Inst. de Philos. et Hist. d’Orient, 2 (1934). 13쪽 및 그 이후.

[158] 클류체프스키. 2. 126쪽.

[159] 디야코노프. 『모스크바 군주들의 권력』; 발덴베르크. 『고대 러시아의 교의』(1916). “자주군주(самодержец)” 칭호의 역사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오스트로고르스키 G. 『아우토크라토르와 자주군주』. 비잔티움과 남슬라브족에서 자주군주 칭호의 역사에 관하여. 부록: 러시아의 자의통치자 칭호, 『글라스 스르프스케 K. 아카데미예』 2권, 제84호 (1935). 95–181쪽 (세르비아어); 참조: 필자의 서평, 『키리오스』 2권 (1937). 79–80쪽. 또한: Vernadskij, 『Byz. – Neugriech. Jb.』 7; 러시아어판: 『N. V. 콘다코프 기념 논문집』(1926).

[160] 차르 칭호의 의미와 중요성에 대한 흥미로운 관점은 16세기 러시아 저술가 이반 페레스베토프의 글에서 찾을 수 있다; 참조: Philipp. Op. cit.

[161] 국가 권력의 협력을 통한 이단 퇴치 문제와 관련하여 기독교 차르의 교회에 대한 의무에 대한 요시프파의 견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다음 서한들을 참조하라: 노브고로드 대주교 겐나디가 수즈달 주교 니폰트에게 보낸 서한, 『흐루쇼프. 전게서, 부록 XXIII; 동 저자. 로스토프 대주교 요아사프에게 보낸 서한, 『치테니야』 1847. 8; 동 저자. 대주교 조시메에게 보낸 서한, 『RIB』 6. 775쪽 (또한 『AAE』 1. 제380호); 동 저자. 1490년 공의회에 관하여, 『RIB』 6권, 779, 764쪽; 이 주제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요시프 볼로츠키의 『계몽자』 제13장에 수록되어 있음; 동 저자. 대공에게 보내는 서한, 『DRV』 16권, 424쪽. 주교들 간의 분쟁을 해결해야 할 차르의 의무에 대한 장로 게오르기 스크리피차의 견해는 흥미롭다. 이 견해는 그가 이미 1503년에 밝힌 바 있다(『독서』. 1848. 6. 제4부). 물론 요시프파 신도들이 세속 권력의 그러한 권리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13세기에 『기독교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저작에서 이 사상이 표현되었는데, 『법전 모음집』 1859. 128쪽 이하; 14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저작으로는 『성모 마리아 라브라의 수도사 아킨딘이 대공에게 보낸 편지』가 있으며, 이는 『RIB』 6권 155쪽 이하에 수록되어 있다; 이 글에서는 대공이 교회 계층과 이단 간의 투쟁을 감독하는 것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다. 참조: 발덴베르크. 앞의 저서, 137쪽 및 골루빈스키. 2. 1. 106쪽. 베네셰비치(『고대 슬라브어 코르마차』, 739쪽)는 아킨딘의 견해를 유스티니아누스의 제6 노벨라와 비교한다. A. 파블로프의 오래된 저작 『트베르의 대공 미하일 야로슬라비치에게 보낸 두 통의 서한』, 『법학 선집』 1867. 2. 236–253쪽,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흥미를 끕니다.

[162] 요세프. 계몽자 (1896). 제16장. 547쪽. 요시프의 세계관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를 제공하는 새로운 저작: 홀츠바르트 이레네. 『볼로콜람스크의 요시프, 계몽자』(베를린 철학 박사 학위 논문, 1944. 타자기 원고); 요시프가 모스크바 대공을 지칭할 때 사용한 다양한 칭호에 대해서는: 동서, 250쪽 및 그 이후 참조.

[163] 테오도시우스는 요시프-볼로콜람스크 수도원의 수도사였다. 1531년 그는 노브고로드의 후틴 수도원 원장으로서, 나중에 모스크바 대주교가 된 마카리우스 대주교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마카리우스 대주교 자신도 열렬한 요시프파 신봉자였다; 마카리우스가 모스크바 대주교가 되었을 때, 테오도시우스는 마카리우스의 추천으로 노브고로드 교구를 맡게 되었다(1542).

[164] 1545~46년의 서한은 대공이 카잔 타타르족을 상대로 벌인 원정에 대해 작성된 것으로, 테오도시우스는 대공을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비교하며 “그리스도의 적들”, “무신론적인 타타르족”을 상대로 한 이 원정의 종교적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출처: DAI. 1. 제37호; 1년 후(1547년) 테오도시우스는 다시 젊은 차르에게 편지를 썼는데, 이번에는 노브고로드에서 자행되고 있는 각종 범죄에 관한 것이었다: “이 일에 대해 당신께 편지를 드립니다, 하느님께서 세우신 군주여. 이는 당신의 예리함과 고귀한 지혜를 가르치거나 꾸짖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가 자신의 분수를 잊고 그런 일에 감히 나서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제자가 스승에게, 종이 군주에게 하듯, 당신께 상기시켜 드리며 지금 끊임없이 간구합니다: 하늘의 권세를 닮아 하늘의 왕께서 주께 지상의 왕국의 권능을 상징하는 홀을 주셨으니, 이는 사람들이 진리를 지키도록 가르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경건하신 왕이시여, 경건함에 온 힘을 기울이시고, 당신 치하 백성들을 영적·육체적 고통으로부터 구원하셔야 마땅합니다.”, 출처: DAI. 1. № 41. 55쪽. 그 이전에 후틴 수도원의 원장으로서, 테오도시우스는 대공 바실리 3세가 서거한 직후 보야린 이반 시고네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1534). “…깊고 어두운 밤이 우리를 덮쳤으니, 우리는 굳건하고 튼튼한 기둥이자, 목자이자 스승이며, 의로운 왕… 그리고 온 양 떼를 영적 구원으로 인도하고 양육해 주시는 분을 잃었습니다” (АИ. 1. № 294. 537쪽).

[165] 골루빈스키. 2. 1. 744쪽.

[166] 마카리. 제2판. 6. 211쪽. 마카리 대주교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레베데프 N. 『마카리, 모스크바 대주교』(1880); 자우스친스키 K. 『마카리, 전 러시아 대주교』, 『ZhMNP』 1881. 제10–11호; 안드레예프 N. “종교 예술의 활동가로서의 마카리 대주교”, 『Seminarium Kondakovianum』 7 (1935); 마카리. 6–7; 골루빈스키. 2. 1. 744–875쪽; 그 외: 클류체프스키. 『고대 러시아 성자전』(1871). 221–297쪽; 카들루보프스키 A. 앞의 저서, 219–284쪽; 골루빈스키. 『시성사의 역사』(1903); 바실리예프. 『시성사의 역사』(1893).

[167] 즈마킨. 『16세기 전반 러시아의 사상 투쟁』, 『즈므NP』 1882. 4. 160쪽; 디아코노프. 앞의 저서. 108쪽; 파블로프. 『러시아 교회 토지의 세속화에 관한 역사적 고찰』(1871). 109쪽. 마카리우스는 요시포프 수도원과 밀접한 관련이 있던 파프누티예프 수도원에서 금욕 수련을 시작했으며, 이후 루제츠키 수도원(모자이스크 인근)의 원장직을 역임했고, 1526–1542년에는 노브고로드 대주교로 재임했다. 골루빈스키. 2. 1. 745쪽; 마카리. 6. 210쪽; 자우스친스키. 213쪽.

[168] DAI. 1. 제25호. 마카리가 이반 4세 차르에게 보낸 서한: 첫 번째는 1547년 그의 결혼과 관련하여(AI. 1. 제40호), 두 번째는 카잔 타타르족과의 전쟁(1552년)과 관련하여(AI. 1. 제160호). 정교회 차르의 종교적 의무는 『왕위 즉위식 예식서』(DAI. 1. № 39; PSRL. 13. 1. 151쪽)에도 명시되어 있는데, 이는 1547년 1월 16일 이반의 대관식을 위해 마카리우스가 직접 작성한 것이다. 참조: 발덴베르크. 앞의 저서, 277쪽. 이 의식의 신성한 순간들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바르소프 E. 『고대 러시아의 왕위 대관식 유물』(1883); 로파레프. 『대관식 의식에 관하여』(1887); 포포프. 『성스러운 대관식 의식』(1896); 프로조로프스키. 『차르 칭호의 의미』(1875); 사바. 앞의 저서; 말체프. 『Die heilige Krönung』(1896); 카텐부시. 1권, 374–393쪽. 또한 다음의 흥미로운 논문을 참조하라: EnЯlin W. 『Gottkaiser und Kaiser von Gottes Gnaden』, 『Sitzber. Bayer Ak. d. Wiss., Phil. – hist. Abt.』(1943)에 수록, 그리고: Treitinger. 앞의 저서.

[169] 비잔티움의 교회적 의미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Holl, Karl. “중세 시대 콘스탄티노플의 교회적 의미”, 『전집』 2권 (1928), 416쪽 (이전에 『Z. fur Theologie und Kirche』 11권 (1901), 83–96쪽에도 게재됨).

[170] 참조: Kljutschewskij. 2. 129쪽. 모스크바의 국가·법적 관점에 있어 전통(고대)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다음 논문을 참조: Philipp W. Ivan Peresvetov (1935). 42–60쪽; 페레스베토프의 독특한 인격을 다각도로 조명하고 있는 이 연구는 16세기 모스크바 사회의 관점과 그 시대 교회 및 정치 사상의 논리를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하다.

[171] 클류체프스키. 2. 127쪽.

[172] 모노마흐라고 불린 블라디미르(II) 브세볼로도비치 대공은 1113–1125년에 통치했다. 콘스탄티노스 9세 모노마흐 황제는 1042–1054년에 통치했다.

[173] 여기서 말하는 것은 클랴즈마 강변의 블라디미르로, 이곳은 1157–1328년 동안 몇 차례의 공백기를 제외하고 러시아 대공들의 수도였기 때문에, 이 전설적인 연대기 이야기는 「블라디미르 공작들에 관한 전설」이라고 불린다. 16세기 전반(1533년 이전)에 이 이야기는 재구성되어 ‘모노마흐의 왕관에 관한 이야기’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지게 되었다. 참조: 페투호프. 103, 101쪽 및 그 이후.

[174] 이 주제에 관한 모든 문헌은 다음을 참조하라: 발덴베르크. 앞의 저서; 디아코노프. 전게서; 소콜스키. 전게서; 즈다노프 이. 「바빌론에 관한 이야기」와 「블라디미르 공작들에 관한 전설」, 『즈므NP』 1891. 9. 샤에더 H. 『모스크바, 제3의 로마』(1929).

[175] 15세기 말의 교회·정치적 분위기는 디미트리 공작의 성대한 대관식(1498)이 특징인데, 그는 이반 3세의 손자이자 일찍 세상을 떠난 아들 이반(† 1490)의 아들이다; 디미트리 공은 이반 3세(† 1505)가 생전에 이미 대공 작위가 아닌 차르로 즉위식을 거행했다(!) (СГГД. 2. № 25); 또한 이 즉위식 당시 이반 3세의 연설도 참조하라 (Kljutschewskij. 2. S. 133). 두 차례(1517년과 1526년) 모스크바를 방문한 게르베르슈타인은 그의 저명한 저서 『Rerum Moscoviticarum Conmentarii』에서 “대공들이 왕위에 오르는 방식”이라는 제목의 별도 장을 통해 이 엄숙한 의식에 대해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제가 보유하고 있는 것은 새로운 독일어판인 『Moskovia von Herrn Sigmund Freiherrn zu Herberstein, Neyperg und Guettenhag』뿐이다. V. F. 슈타이나가 독일어로 번역했다. H. 칸더스 편집. 에를랑겐, 1926. 59–64쪽. 초판은 1549년 빈에서, 개정 2판은 1556년 바젤에서 출간되었으며; 헤르베르슈타인이 직접 수행한 최초의 독일어 번역본은 1557년 빈에서 출간되었다. 헤르베르슈타인의 저작은 E. 자미슬로프스키의 저서 『헤르베르슈타인과 그의 러시아에 관한 역사·지리적 기록』(상트페테르부르크, 1884)에서 입증된 바와 같이 매우 귀중하고 신뢰할 수 있는 자료이다.

[176] 이 메시아적 교리에 관한 가장 중요한 저작들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말리닌. 엘레아자로바 수도원의 필로페이 장로 (1901); 디아코노프. 앞의 저서 (1889); 발덴베르크. 앞의 저서 (1916); 키릴로프 (1914); 루키야노프 (1913); 파블로프. 『교회법 강좌』(1892, 제2판 1905); 소콜스키. 앞의 저서 (1902); 파블로프. 엘레아자로프 수도사의 바실리 이바노비치 대공에게 보낸 서한, 『법률집』 1863. 1. 337–348쪽; 슈파코프. 앞의 저서 1 (1904); 제르노프. 모스크바 – 제3의 로마 (1936). 독일어로 이 주제를 다룬 저작으로는 다음이 있다: Schaeder H. 『모스크바, 제3의 로마』(1929); 관련 서평: Woltner M., 『Z. f. Sl. Philologie』(1931) 및 Ostrogorskij G., 『Hist. Z.』 146(1932), 368–371쪽.

[177] 여기서 프스코프가 ‘정통’ 모스크바 왕국과 러시아인들에게 종교적 불신이나 심지어 혐오감을 불러일으켰던 ‘이단적인’ 서방 사이의 국경에 위치해 있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프스코프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다양한 종교적 사조가 등장해 왔는데, 금식 기간이나 ‘할렐루야’에 대한 논쟁이 있었으며, 이후 70년대에 ‘스트리골니키’ 운동이 일어났다. 참조: 세레브리안스키 N. 『프스코프 지방 수도원 생활사 개론』, 『체테니야』 1908; 또한 마카리우스와 골루빈스키의 관련 저서; 클류체프스키. 『프스코프 논쟁』, 『프라브. 소브.』 1872. 12; 동 저자. 『Geschichte RuЯlands』 2; 게링 요한. 『러시아 교회의 종파들』(1898); 아르한겔스키. 『닐 소르스키』(1882). 256쪽 및 그 이후. 세레브리안스키의 심도 있는 연구는 프스코프 지방에서 수도자들이 열정적인 종교 생활을 영위했음을 입증한다.

[178] 샤흐마토프 A. A. 『M. G. 미수리야 무네히나의 동방 여행과 1512년판 연대기』, 『IORYAS』 1899. 1. 215쪽.

[179] 같은 책. 214쪽.

[180] 이러한 관점은 플로렌스 연합과 관련된 모든 저술에서 드러난다. 참조: 지글러. 앞의 저서 및 슈파코프. 앞의 저서. “그리스인”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은 이반 3세가 노브고로드 대주교 이오네에게 보낸 서신(1465–1470년 사이)에도 담겨 있다, RIB. 6. 710쪽.

[181] 참조: 각주 149. 밀레니얼리즘, 즉 ‘천년 왕국’과 ‘최후의 심판’에 대한 기대는 러시아인들의 종교적 의식에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널리 퍼졌다. 이는 기독교와 함께 비잔티움에서 러시아로 전해졌는데, 이 과정에서 메포디우스 올림피우스(† 약 311년)의 저술이 큰 역할을 했는데, 고대 루스에서는 보통 ‘파타르의’라고 불렸으며, 이 저술은 『계시』라는 제목으로 이미 11세기에 슬라브어 번역본이 등장했다(1096년 연표). 『우리의 거룩한 아버지, 파타라 대주교 메포디우스의 최후의 날에 관한 저작』이라는 이 번역본은 N. S. 티혼라보프에 의해 『배척당한 러시아 문학의 유물』 제2권, 268–281쪽에 게재되었다. V. 이스트린의 심도 있는 연구 『비잔틴 및 고대 러시아 문학 속의 메포디우스 파타르스키의 계시 및 다니엘의 외경적 환시』(1897)를 참조하라; 또한 Bonwetsch(각주 149)를 참조하라. 여기서는 그의 『심포지온』 중 아홉 번째 연설(BdKV. 40. 제2판, 370쪽)만을 인용한다: “…일곱 번째 천년에 이 세상이 멸망하고, 우주가 끝난 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기쁨 속에서 살아가실 때.” 또한 다음을 참조하라: 알츠베르거. Geschichte der christlichen Eschatologie innerhalb der vor-nicdnischen Zeit (1896). 497쪽 및 Kirsch Joh. P. Die Kirche in der antiken griechisch-rцmischen Kulturwelt (1930). 234, 319쪽. 또한: 『디다케』(『열두 사도의 가르침』). 16장: “…마지막 날에는 거짓 선지자와 파멸자들이 늘어날 것이며, 양들이 늑대로 변하고, 사랑이 증오로 바뀔 것이다” (BdKV. 35. 제2판, 16쪽); 요한의 『계시록』(20장); 바르나바 서신(15장): “그러므로 내 자녀들아, 6일 후, 즉 6천 년이 지나면 모든 것이 끝날 것이다. 그리고 일곱째 날에 그분(하나님)은 쉬실 것이다” (BdKV. 24. 제2판, 129쪽). 대부분 종말론적·천년왕국론적 색채를 띠고 있는 많은 외경 저작들은 신자들에게 풍부한 성찰의 소재를 제공했다. 이미 12세기 루시에서 스몰렌스크의 수도사 아브라아미가 종말론적 내용을 담은 저작을 집필했다(위 제2장 2절 참조); 아마도 이것은 세상의 종말을 7000년과 연결 지은 최초의 러시아 작품이었을 것이다(참조: Philipp W. Ansdze. 1940. S. 46). 1492년까지만 기록된 고대 러시아의 부활절 달력은 다음과 같은 예언적인 말로 끝을 맺고 있다. “여기 두려움이 있고, 여기 슬픔이 있으니, 마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과 같도다. 이 순환이 이루어지고, 이 해가 지나 마침내 나타나리니, 우리는 그날에 주님의 전 세계적인 재림을 기다리노라” (즈마킨. 대주교 다니일. 364, 362–367쪽). 1492년 이후 시기의 부활절 달력을 이어 작성한 이는 노브고로드 대주교 겐나디였으며, 그는 1489년에 요아사프에게 서신을 보내 로스토프 대주교에게 서신을 보내, 당시 교회계에서 큰 신학적 권위를 누리고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둘 다 요아사프의 교구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파이시이 야로슬라보프와 닐 소르스키 두 장로에게 세상의 종말에 대한 의견을 묻고, 그 의견을 그(겐나디)에게 전해 달라고 요청했다 (아르한겔스키. 앞의 저서, 16, 30쪽; 말리닌. 앞의 저서, 429쪽). 1492년 모스크바 대주교는 겐나디에게 다가올 천년을 위한 부활력표를 작성하도록 지시했다(마카리. 제2판, 6. 103쪽); 이 저작(같은 책. 부록 III. 376–383쪽)에서 겐나디는 구약과 신약을 인용하여 세상의 종말이 임박했다는 견해를 반박하고, 기대했던 세상의 종말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정교도들을 조롱하던 노브고로드의 유대교화 경향자들과 논쟁을 벌였다. 요시프 볼로츠키도 주로 유대교화 경향을 보이는 이들의 이단적 견해를 반박하기 위해, 자신의 저서 『계몽자』 제8장과 제9장에서 동일한 주제를 논의한다(참조: Holzwart, 119쪽 및 이후).

[182] 그의 저작 중 우리에게 특히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 1. 1510년과 1520년 사이에 쓰여진, 프스코프의 성직자 M. G. 미시류 무네히노에게 보낸 「점성가들과 라틴인들에게 보내는 서한」(말리닌, 『선집』, 159쪽; 같은 책, 부록, 45쪽, 및 『법전 모음집』 1861. 2. 95쪽); 2. 『대공 바실리 이바노비치에게 보내는 서한』(1533년 이전), (말리닌. 앞의 저작. 부록. 49–55쪽; 『법전 모음집』 1863. 1. 337–348쪽); 3. 「차르 이반(IV) 바실리예비치에게 보낸 서한」 (말리닌. 전집. 부록. 62쪽 이하 및 DAI. 1. 제23호). 각주 171의 문헌 및 Schaeder. Op. cit. 55쪽 이하. “Roma mobilis”(이동하는 로마)에 대한 학설은 서양에서도 해석자들을 얻었으며, 참조: Limnacus Johannes. Juris publici Imperii Romano-Germanici. Argentorati, 1629. 1. 1. 제4장. 제16호.

[183] 말리닌. 앞의 저서. 부록. 45쪽.

[184] 같은 책. 49, 55쪽.

[185] 필로페이는 이러한 사상의 전체적인 복합체를 젊은 차르 이반 4세에게 보낸 서한에서 다시 한 번 설명했는데, 이 서한은 그의 다른 두 서한만큼 간결하고 내용이 알차지는 않았으며, 훨씬 더 장황했다(말리닌. 앞의 저서. 부록. 62쪽). 이반이 아. м. 쿠르브스키 공작에게 보낸 첫 번째 서신에서 필로페이의 견해가 반영된 부분을 참조하라: “하나님의 말씀의 뜻이 온곳에서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이 마치 독수리가 날아다니듯 온 우주를 훑어내리니, 경건함의 불꽃이 마침내 러시아 왕국에도 이르렀도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정교회를 가진 러시아 왕국의 자치 통치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성스러운 세례로 러시아 땅을 계몽한 대공 블라디미르와, 그리스인들로부터 지극히 높은 영예를 받은 분이자, 무신론적인 독일인들에게 위대한 승리를 거둔 용맹한 대군주 알렉산드르 네브스키, 그리고 돈 강 너머에서 무신론적인 아가리안들(즉, 타타르족. – I. S.)를 상대로 도네 강 너머에서 위대한 승리를 거두신 분, 나아가 불의를 응징하신 우리 할아버지이신 위대한 군주 요한, 그리고 오랜 세월 방치되었던 조상의 땅을 되찾으신 분, 복된 기억을 간직한 우리 아버지 위대한 군주 바실리, 나아가 우리와 같은 겸손한 자들, 러시아 왕국의 지팡이를 쥔 자에게까지 이어졌다” (서신집. 26쪽). 앞서 언급된 「블라디미르 공작들에 관한 전설」은 물론 젊은 차르에게도 알려져 있었다. 또한 이반이 독재자의 의무에 대해 가졌던 견해도 참조하라(같은 책, 40쪽).

[186] “모스크바—제3의 로마”에 대한 필로페이의 가르침은 교회나 국가 어느 쪽에서도 공식적으로 ex cathedra로 선포되지는 않았으나, 1589년 총대주교좌 설립 이유(『우로제니야 그라모타』)를 설명하는 공식 문서에서 그 반영을 찾아볼 수 있다: SGGD. 2. 97쪽. 총대주교좌 설립 직후인 17세기 초, 모스크바에서는 『러시아 성도에 관한 설교서』라는 제목의 성자전 저작이 집필되었다. 후기에 저자는 참된 신앙이 비잔티움에서는 쇠퇴한 반면, 모스크바 왕국과 러시아 교회는 올바른 신앙과 수많은 성인을 바탕으로 정교회 세계에서 1위를 차지했다고 말한다. 이 후기는 I. 만스베토프에 의해 『우바로프 백작상 제21회 수여에 관한 보고서』에 처음 게재되었으며, 전문은 『체테니야』 1887년 4호에 수록되어 있다.

[187] 저의 논문 참조: “러시아 교회 역사 시기 구분 문제에 관하여(Zur Frage der Periodisierung der Geschichte der russischen Kirche)”, 『키리오스(Kyrios)』 5 (1940–1941). 66–81쪽.

[188] 위의 제2장을 참조하라.

[189] 저의 저서 『Leben und Lehre der Starzen』(1936)에 실린 개별 사례들을 참조하라.

[190] 러시아 성인전 연구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클류체프스키. 『고대 러시아 성인전』(1871); 세르기이, 아키마нд리트. 『동방 완전 월력』. 2권 (1875); 카들루보프스키. 『에세이』(1902); 야혼토프. 『역사적 자료로서의 포모르 지방 성인 전기』(1881); 코노플레프. 『볼고그라드 지방의 성인들』(1895), 또한 『논문집』 1895. 4호에 수록; 세레브리안스키. 『고대 공작들의 전기』, 『논문집』 1915. 3호에 수록; 또한 매우 유용한 연구: 보구슬라프스키 S. 『북부 러시아 성자전(아기오그래피)의 문학적 전통』, 『IORYAS』 101 (1928)에 수록됨. 러시아 교회의 시성(카노니зация)에 관한 문헌: 바실리예프. 『러시아 성인들의 시성』 (1893), 『논문집』 1893호에도 수록됨; 골루빈스키. 『러시아 교회 성인의 시성 역사』(1903), 또한 『체테니야』 1903호에 수록; Peeters P. 『러시아 교회의 시성』(La canonisation dans l’église russe), 『아날렉타 볼란디아나』 33호 (1914)에 수록. 네크라소프. 대러시아 북부 지역의 민족 문학 탄생 (1870) (구식); 베류즈스키. 볼고그 지역 성인들의 생애에 관한 역사적 전설 (1880); 페도토프 G. 고대 루스의 성인들. 파리, 1929.

[191] 우리는 이미 11~15세기의 성인들에 대해 다룬 바 있다(제2장 및 제3장). 16세기 이전에 다음과 같은 러시아 성인들이 지역적 또는 전 러시아적으로 숭배받았다: 1. 순교자 성 보리스와 글레브 공(† 1015); 2. 성 블라디미르 공(† 1015); 3. 성 올가 공주 († 969); 4. 성 레온티우스, 로스토프 주교 († 1072); 5. 성 미하일 체르니고프 공작과 그의 보야린 테오도르 († 1245); 6. 성 이그나티우스, 로스토프 주교 († 1288); 7. 성 베드로, 모스크바 대주교 († 1325); 8. 성 알렉시우스, 모스크바 대주교 († 1378); 9. 성 세르기우스, 라도네즈의 성자 († 1392); 10. 성 이사야, 로스토프 주교 († 1190); 11. 성 바르라암 후틴스키 († 1192); 12. 성 테오도르 스몰렌스키 및 야로슬라프스키 공 († 1299)과 그의 아들 다윗과 콘스탄틴; 13. 성 안토니 페체르스키 († 1073); 14. 성 테오도시 페체르스키 († 1074); 15. 성 키릴 벨로제르스키 († 1427); 16. 성 디미트리 프릴루츠키 († 1391); 17. 성 아브라암 로스토프스키 († 11세기); 18. 성 니키타 페레야슬라프스키 († 1186). 참조: 세르기. 앞의 저서 1. 부록 15.

[192] 자우스친스키. 앞의 저서. 229쪽; 마카리(불가코프). 노브고로드의 마카리예프스키 체티이 미네이(Chetii Minei)에 관한 메모, 티호노라보프. 『러시아 문학 및 고고학 연보』 1 (1959). 제5부. 68쪽 및 그 이후; 클류체프스키. 『성인전』. 228–231쪽; 마카리. 제2판. 7권. 407쪽 이후.

[193] 클류체프스키. 앞의 저서. 228쪽.

[194] 전체 모음집의 내용에 대해서는 마카리. 제2판. 7권. 409쪽 이하를 참조하라. 『위대한 미네이 체티』의 전체 목차는 『독회집』. 1877. 4권. 제4부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5] 스페란스키. 『고대 러시아 문학사』(1911). 161쪽; 클류체프스키. 앞의 저서. 222쪽.

[196] 같은 책. 222–296쪽.

[197] 1537년 이전에는 이미 미하일 클롭스키의 행전 두 가지 판본이 존재했다(같은 책, 209쪽); 이들은 『고대 러시아 문학의 유물』 1권에 수록되어 있으며, 투치코프 판본은 같은 책 4권에 수록되어 있다.

[198] 대주교 테오도시우스의 의뢰로 『미네이』를 위해 집필된 전기는 『미네이』의 8월 30일 항목에 수록되어 있다. 마카리우스. 제2판. 7. 418쪽.

[199] VCHM. 9월 9일. 455–498쪽; 마카리. 제2판. 7. 418–419쪽; 클류체프스키. 같은 책. 292, 293쪽.

[200] 클류체프스키. 앞의 저서. 293쪽; 르지가. 『16세기 러시아 저널리즘사 연구』. 『저널리스트로서의 막심 그렉』, 수록: TODRL. 1 (1934). 8쪽. 이 전기는 이전에 네보스트루예프에 의해 출판된 바 있다: CHOLDP. 1865.

[201] 네보스트루예프. 앞의 저서.

[202] 자우스친스키. 앞의 저서, 『쥴리안』 118호 (1881). 30쪽.

[203] 헤론티. 『요시포-볼로콜람스크 수도원 설명』(1894). 47쪽; 클류체프스키. 앞의 저서. 296, 312쪽; 마카리. 제2판. 8. 47, 61쪽.

[204] 클류체프스키. 앞의 저서. 295쪽. 이 카시안 수도사는 이반 4세 차르의 대부모였으며, 이는 요시포프 수도원과 대공 가문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이다. 카들루보프스키. 전게서, 『러시아 문학』 제45권 (1901). 35쪽 이하; 클류체프스키. 전게서. 289, 294–295쪽. 카시안 보소의 생애도 이 『이야기』에 포함되어 있다. ‘파테리키(PaterikЈ)’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고대 기독교 금욕주의 선집의 영향에 대해서는(참조: 크룸바허. 1897. 188쪽), 카들루보프스키. 앞의 저서, 51–70쪽을 참조하라.

[205] 카드루보프스키. 앞의 저서, 『러시아 문학』 제45권 (1901). 35쪽 이하; 클류체프스키. 앞의 저서. 289, 294–295쪽. 카시아노스 보소의 전기도 이 『이야기』에 포함되어 있다. ‘파테리키(PaterikЈ)’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고대 기독교 금욕주의 선집의 영향에 대해서는 (참조: Krumbacher. 1897. p. 188), 다음을 참조하라: 카들루보프스키. 앞의 저서. 51–70쪽.

[206] 클류체프스키. 앞의 저서. 272–273쪽; IRI. 6. 849–853쪽, 853–855쪽.

[207] 스파소-카멘노 수도원에 관한 전설, 『Прав. соб.』 1861. 1. 197–214쪽; 클류체프스키, 앞의 저서, 275쪽. 요세프에 대한 지역적 숭배에 대해서는 골루빈스키, 『성인 시성사』, 149쪽을 참조하라. 비소유주의자들의 견해는 성 다니엘 페레야슬라프스키(† 1540)의 행전에도 반영되어 있다. 이 행전은 차르의 요청에 따라 1547년과 1549년의 공의회 이후인 1553년경, 익명의 저자에 의해 집필되었다. 이 행전은 고대 러시아 성인전 문학의 보석 중 하나이다. 클류체프스키, 앞의 저서, 282쪽; 마카리, 제2판, 7권, 433쪽 참조.

[208] 세레브랸스키. 『고대 러시아 공작들의 생애』. 43쪽; 블라디미르의 생애에 관한 가장 오래된 간략한 판본은 12세기 말이나 13세기 초에 작성되었다(같은 책, 44쪽); 수도사 야코프가 쓴 『공작 블라디미르에 대한 추모와 찬사』는 11세기 중반 이전에 등장하지 않았으며, 이는 성 블라디미르에 관한 최초의 교회 문헌이다(같은 책, 50쪽). 참조: 마카리. 제2판. 7권, 436쪽.

[209] 마카리. 제2판. 7. 421쪽; 클류체프스키. 앞의 저서. 238쪽; 참조: 보구슬라프스키.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대공의 전기에 관한 원본 텍스트 문제에 대하여, 『IORYAS』 1914. 1. 261쪽. 이 전기는 만시카에 의해 『PDP』 180 (1913)에 출판되었다.

[210] 마카리. 제2판. 7. 422쪽; 클류체프스키. 앞의 저서. 238, 240쪽; 카들루보프스키. 앞의 저서. 64쪽.

[211] 마카리우스. 제2판. 7권. 421쪽; 클류체프스키. 앞의 저서. 247쪽; 니콘의 전기의 첫 번째, 고대 판본은 그보다 더 이른 시기에 15세기의 유명한 성자 전기 작가 파호미우스 로고페트에 의해 집필되었다. 같은 책. 248, 152, 119쪽.

[212] 마카리. 제2판. 7. 421쪽; 클류체프스키. 앞의 저서. 272쪽; 코노플레프. 앞의 저서. 68쪽; 카드루보프스키. 앞의 저서. 47쪽.

[213] 요시프 볼로츠키는 마카리 칼야진스키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으며, 그의 수행자적 삶에 대해 큰 존경심을 담아 기록하고 있다; 요시프의 「영적 서한」 참조: 『VMCH』 9월호, 제1부, 558쪽.

[214] 클류체프스키. 앞의 저서, 289쪽; 마카리. 제2판, 7권, 21–22쪽, 423–424쪽.

[215] 클류체프스키. 앞의 저서. 222–225, 228쪽; 세르기. 앞의 저서. 1. 194–196쪽

[216] AAE. 1. 제213호; 골루빈스키. 『시성사의 역사』. 94쪽; Herman. 『De fontibus』. 50쪽.

[217] 가장 오래된 전기로는 노브고로드 대주교 요한(† 1186)과 솔로베츠키 수도원의 두 설립자인 사바티우스(† 1435) 및 조시마(† 1478)의 전기가 낭독되었다. 마카리우스. 제2판. 7권. 420쪽; 클류체프스키. 앞의 저서. 198, 269쪽.

[218] 전 러시아적으로 시성된 인물로는 두 명의 성직자, 아홉 명의 경건한 수도자, 그리고 한 명의 대공이 있다: 1. 요한, 노브고로드 대주교 († 1186); 2. 이오나, 모스크바 대주교 († 1461); 3. 니콘, 트로이체-세르기예프 수도원 원장 († 1426); 4. 파벨 오브노르스키 († 1429); 5. 사바티이 솔로베츠키 († 1435); 6. 디오니시이 글루시츠키 († 1437); 7. 미하일 클롭스키 († 1452); 8. 파프누티 보로프스키 († 1478); 9. 조시마 솔로베츠키 († 1478); 10. 마카리 칼야진스키 († 1483); 11. 네프스키라고 불린 대공 알렉산드르 야로슬라비치 († 1263), 그리고 12. 알렉산드르 스비르스키 († 1533). 골루빈스키. 『시성사의 역사』. 100쪽; 마카리. 제2판. 7. 219쪽. 지역적으로 숭배받던 성인들 중 한 명의 성직자, 다섯 명의 공작, 그리고 세 명의 그리스도를 위한 성자(salo…), (그들은 수도 서원을 하지 않았다)가 시성되었다: 1. 아르세니, 트베르 주교 († 1409); 2, 3, 4. 콘스탄틴, 무롬 공작 († 1129), 그리고 그의 아들 미하일과 테오도르; 5, 6. 표트르, 무롬 공작, 그리고 그의 아내 페브로니아; 7. 프로코피우스 우스티우즈스키 († 1285), 아마도 독일계 출신; 8. 요한 우스티우즈스키(† 1494); 9. 막심 모스크바(† 1433) – 마지막 세 사람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성스러운 광인이었다. 골루빈스키. 같은 책. 100쪽; 마카리. 제2판. 7. 219쪽. 그리스도를 위한 성스러운 광인들의 전기는 아마도 그들이 시성된 후에야 비로소 등장했을 것이다. 클류체프스키. 같은 책. 277, 278, 246쪽. 러시아의 성스러운 광인들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페도토프. 『고대 러시아의 성자들』(1931). 205–219쪽.

[219] 마카리. 제2판. 7. 219쪽.

[220] 이는 1547년 공의회 이후에 집필된 성 알렉산드르 네브스키의 전기에 포함된 삽입문이 증명해 준다. 마카리. 제2판. 7. 227쪽, 각주, 그리고 미트로폴리트 이오나의 전기에 실린 장문의 서문(클류체프스키의 견해에 따르면 소위 ‘제3판’. 앞의 저서, 241쪽)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삽입문은 클류체프스키의 저서(앞의 저서, 460–463쪽)에 수록되어 있다.

[221] 이 삽입문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목록을 작성할 수 있다: 성인들: 1. 스테판 페름스키 († 1396); 2. 에우피미오스, 수즈달 대주교 († 1405); 3. 에우피미오스, 노브고로드 대주교 († 1458); 4. 이오나, 노브고로드 대주교 († 1470); 5. 야코프 로스토프스키 († 1391); 그리고 아마도 6. 니키타 노브고로드스키 († 1107) (클류체프스키. 앞의 저서, 460쪽, 각주); 7. 니폰트 노브고로드 주교 († 1156); 리투아니아 이교도들에게 살해된 세 순교자: 안토니, 요한, 유스타피 († 1347); 여섯 명의 수도사: 1. 아브라암 스몰렌스크 수도사 († 1219–20); 2. 사바 스토로제프스키 († 1407); 3. 그레고리 펠셴스키 († 1441); 4. 에우프로신 프스코프스키 († 1481); 5. 에프레임 페레콤스키(† 1492) 및 6. 사바 비셰르스키(† 1460); 공작 1명: 브세볼로드-가브리일 프스코프스키(† 1138). 같은 책. 462–463쪽; 세르기. 앞의 저서 1. 194–196쪽; 골루빈스키. 『시성사의 역사』. 103–105쪽. 1549년 공의회에 대해서는 참조: 골루빈스키. 2. 1. 772쪽; 바실리예프. 앞의 저서. 183–203쪽.

[222] 또한 이반 4세 차르의 서한에 언급된 성인들의 이름을 참조하라. A.I. 1. 제213호.

[223] 스페란스키. 앞의 저서 (1921). 172쪽.

[224] 같은 책, 173쪽. 『스테펜나야 책』은 다음에서 출판되었다: ПСРЛ. 21 (1908). 바센코 P. 『차르 가계도의 스테펜나야 책과 고대 러시아 역사 문헌에서의 그 의의』. 1 (1904); 제2권은 출간되지 않았다.

[225] 참조: 디아코노프. 앞의 저서. 108쪽; 자우스친스키. 앞의 저서, 『지엠NP』 1881. 218. 32쪽; 스페란스키. 앞의 저서. 172–173쪽; 마카리. 제2판. 7. 434쪽. 사실, 첫 번째 준비 작업인 이른바 ‘고대 판본’은 물론 대주교 마카리우스에게도 알려져 있었으며, 파호미이 로고페트가 집필했다. 참조: 클류체프스키. 앞의 저서. 242쪽; 세르비아 출신이거나 세르비아에서 태어난 성자 전기 작가 파호미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야블론스키 V. 『파호미이 세르브와 그의 성자 전기 저작』(1908); 클류체프스키. 지정 저작, 119쪽, 그리고 오래된 저작: 네크라소프 이. 파호미이 세르브, 15세기 작가 (1871).

[226] 그의 서한 「사랑받지 못하는 자들에 대하여」를 참조하라: 『부록』 10. 505, 509–510쪽. 대조: 파블로프. 『역사적 개론』. 46쪽.

[227] 니콜스키. 앞의 저서, 『크리스토스 독본』 1908. 8. 178–188쪽.

[228] 클류체프스키. 『보야르 두마』(1880); 동 저자. 『강좌』 2권, 제27–28장; 디아코노프. 전게서 (1889); 슈트흘린. 1. 244쪽 이하. 보야르 계급의 견해를 매우 잘 보여주는 것으로는 보야르 이. н. 베르센-베클레미셰프와 수도사 막심 그렉 간의 유명한 『대화』(1525)가 있다(AAE. 1. № 172). 모스크바 보야르 계급은 거의 한 세기 동안 자신들의 국가·정치적 이념을 지키고 국가 업무에서 자신의 역할을 유지하기 위해 투쟁했으나, “오프리치나” 시대(16세기 60~70년대)에 최종적인 패배를 당했다. 오프리치나에 대해서는 플라토노프. 모스크바 국가의 ‘혼란의 시대’에 관한 고찰 (1899, 제2판 1912); 동 저자. 이반 그로즈니 (1924); 슈틀린. 269쪽 및 이후; 하인리히 폰 스타덴. 모스크바 국가에 관한 기록. F. 에프슈타인 편집, 수록: 함부르크 – Abhandlungen aus dem Gebiet der Auslandskunde. 34. Reihe 1. 5; 부도브니크 이. 『러시아 역사 문학 속의 이반 그로즈니』, 『역사 기록』 21 (1947). 271–330쪽 (방대한 참고문헌 포함).

[229] 비소유주의자들의 사상에 대한 내부적 분위기를 가장 잘 이해하게 해주는 저작은 다음과 같다: 니콜스키 N. 『15~16세기 및 17세기 초 키릴로-벨로제르스키 수도원의 공동체 및 독방 생활』, 『크리스토스 기념 논문집』 1907–1908; 또한: 그레체프. 『자볼즈카야의 장로들』, 『BV』(1907). 7–8.

[230] 파트리케예프 가문의 기원에 대해서는: 『PSRL』 7. 254쪽.

[231] PSRL. 8. 227–228, 256쪽; 4. 164쪽.

[232] 이반 3세는 이미 첫 번째 결혼에서 낳은 아들 이반을 공동 통치자이자 후계자로 지명했으나, 이반은 1490년에 갑작스럽게 사망하여 7살 된 아들 디미트리만을 남겼다. 두 번째 결혼에서 그리스인 소피아와의 사이에서 이반 3세에게 아들 바실리가 태어났다. 소피아가 자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세우려 한다는 의심을 받자, 소피아는 총애를 잃었고, 바실리는 유배되었으며, 디미트리야는 1498년에 차르로 즉위했다(!). (주 170 참조. 그러나 이후 보야르들의 음모로 인해 이반 3세는 후계자 문제를 다시, 이번에는 최종적으로 바실리에게 유리하게 재검토했고, 디미트리야는 어머니 엘레나와 함께 유배되었다; 바실리 치세(1505–1533)에 그는 사망(1509)했는데, 아마도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숨진 것으로 보인다. 파트리키예프 가문의 부자(父子)는 모두 디미트리파에 속해 있었다.

[233] PSRL. 12. 248쪽; 『치테니야』. 1847. 9. 제4부. 9쪽.

[234] PSRL. 7. 236쪽; 『체니야』. 1847. 9. 제4부. 9쪽.

[235] 보충자료. 10. 505쪽. 바시아안이 닐의 열렬한 추종자였다는 사실은 그의 저서 『성 요셉 볼로츠키 수도원장에게 바치는 은둔 수도사 바시아안의 성부들의 가르침 모음』에서 가장 잘 드러나며, 이 책은 『정통 문집』 1863. 3에 수록되어 있다. 204–210쪽. 바시아누스는 닐을 자신의 스승이라 칭하고, 자신을 그의 제자라고 부른다. 같은 책, 208쪽.

[236] 즈마킨. 대주교 다니일. 65쪽. 지노비 오텐스키가 제시한 바시아노에 대한 매우 부정적인 평가(『진리의 증언』, 900쪽)는, 우리의 견해로는 전적으로 객관적이라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지노비는 어쨌든 요시플리안 파에 동조하고 있었으며, 1531년 바시아노가 추방된 이후에야 이 글을 썼기 때문이다.

[237] 즈마킨. 앞의 저서, 65쪽; 즈마킨의 저서에서 우리는 바시아노와, 더 나아가 비재물주의자 및 요시플리안파의 견해와 활동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발견할 수 있다. 대주교 마카리이 불가코프가 그의 『러시아 교회사』(제2판, 6권, 195–204쪽)에 담긴 견해는 그다지 객관적이지 않은데, 이는 그가 다른 러시아 교회 계층의 대표자들(심지어 19세기의 인물들까지)과 마찬가지로 요시프 볼로츠키의 견해에 동조했기 때문이다.

[238] 마카리. 제2판. 6. 127쪽; 흐루쇼프. 앞의 저서, 『고대와 새로운 러시아』에 수록. 1875. 3. 270쪽.

[239] 『법전』 1863. 3. 207쪽. 골루빈스키의 견해에 따르면, 바시안은 1509년 2월 14일에 사망한 불운한 디미트리 공작이 세상을 떠난 후에야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골루빈스키. 2. 1. 654쪽.

[240] 페라폰토프 수도원의 수도사 파이시이는 바시안이 궁정을 자주 방문했고 대공과 오랫동안 “진심 어린 대화”를 나누었다고 언급한다; 바실리의 두 번째 결혼(1525)에 관한 그의 저술을 참조하라, 『독본』. 1847. 8; 이 저작에 대한 마카리우스의 견해 참조(제2판 6. 175); 또한: 파블로프. 『역사적 에세이』. 87쪽; 골루빈스키. 2. 1. 732, 892쪽. 또 다른 동시대인인 미하일 메도바르체프 역시 바시아누스를 개인적으로 잘 알고 있었으며, 그를 바실리의 총애를 받는 ‘위대한 시대의 인물’이라고 칭했다. 『독본』 1847. 7. 제2부. 11쪽. 또한 공식 문서에서도 바실리가 바시아누에게 가졌던 신뢰의 증거를 발견할 수 있다. 1523년, 카잔 타타르족을 상대로 원정을 떠나던 바실리는 바시아누가 지켜보는 가운데 대주교 다니일에게 자신의 유언장을 전달했다. SGGD. 1. 제150호. 416쪽. 골루빈스키(2. 1. 654쪽)는 바실리가 수도원 소유지에 관한 논쟁적인 문제에서 교회 계층에 대항하기 위해 바시아누를 이용하려는 특별한 교회·정치적 고려로 인해 그를 호의적으로 대했다고 본다.

[241] 바르라암의 임명에 대해서는: ПСРЛ. 6. 252쪽; Herberstein. Op. cit. (1926). 66쪽. 바르라암의 도덕적 품성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그곳으로 파견되었을 때(1517년 모스크바로의 첫 방문을 가리킴 – I. S.) 막시밀리안 황제에 의해 그곳으로 파견되었을 때, 대주교는 바르톨로메오(즉, 바르라암. – I. S.)였는데, 그는 성스러운 인물로 여겨졌다”고 말한다(ibidem. p. 66). 이 저작에서 바르라암의 향후 운명에 대해 다룬 다음 단락은 사실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참조: 골루빈스키. 2. 1. 637–645쪽; 바르라암이 비소유주의자들의 견해와 가까웠다는 점에 대해서는: PSRL. 6. 252쪽; 8. 252쪽. 안타깝게도, 바르라암 대주교에 대한 정보는 매우 부족하다.

[242] 바시안은 한 저술에서 1515년 9월 9일에 별세한 요시프의 답장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 요시프의 답장은 알려져 있지 않다; 바시안이 궁정에서 누리던 영향력 때문에 요시프의 논쟁 활동이 방해받았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요시프가 보야르 V. A. 첼야딘에게 보낸 서한은 현존하는데, 그 안에서 그는 대공에게 자신의 ‘저작’에 대한 허가를, 혹은 우리가 보기에 바시아ンの 공격에 대한 반박문을 배포할 수 있는 허가를 청원하고 있다. 참조: 흐루쇼프. 앞의 저서, 260쪽. 1517년에 바시안은 이미 자신의 『코르므차』 집필을 마쳤는데, 이는 2~3년이 걸린 쉽지 않고 매우 방대한 작업이었다; 따라서 논쟁적 저작들은 1515년 이전에 작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논쟁적 저작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바시아나는 자신의 논쟁적 주장에 특별한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정경 규칙 모음집을 참고해야 했다.

[243] 바시아누스가 언급한 인물은 니콘 체르노고르츠(† 약 1092년), 안티오키아의 라이프 수도원 소속 수도사이다. 니콘의 저서 『판데크티온(Pandљkthj)』과 『타크티콘(TaktikТn)』은 고대 루스에서 널리 퍼져 있었으며 매우 높이 평가받았다. 골루빈스키. 1. 1. 910–912쪽; 스레즈네프스키 이. 『니콘 체르노고르체의 판데크티온』, 『러시아 과학원 회보』 21. 194쪽; 소콜로프 이. 9세기 중반부터 12세기 초까지 비잔틴 수도원의 도덕적·지적 상태. 842–1204, 『법학집』 1893. 2, 3. 608–610쪽.

[244] 참조: 수도사이자 공작인 바시아나 파트리키예프의 논쟁적 저작, 『법학집』 1863. 3. 제1편 – 102–104쪽; 제2편 – 104–112쪽; 제3편 – 180–206쪽; 제4편 – 206–210쪽. 제1편은 제2편과 제3편에 대한 서론 역할을 한다.

[245] 참조: 티혼라보프. 『러시아 문학 및 고대사 연표』. 5 (1863). 제3부. 139–141쪽.

[246] 『코르메치 책』 또는 『코르메치』—성 사도, 보편 공의회 및 지역 공의회, 그리고 성부들의 규정을 모은 선집—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Herman. 『De Fontibus juris ecclesiastici Russorum』. 23쪽 및 그 이후 (방대한 참고문헌 포함); 러시아어 판본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마카리. 8. 143쪽 및 그 이후; 골루빈스키. 1. 1. 659쪽.

[247] 법전집 1863. 3. 104–112쪽.

[248] 같은 책. 183쪽.

[249] 바시아누스의 주장이 역사적으로 타당하다는 점은 파블로프가 입증했다. 앞의 저서, 69쪽, 각주. 11~13세기의 수도원 소유지(요시프는 성 테오도시우스 페체르스키도 언급했다)는 15세기 말과 16세기 초의 것과는 성격이 완전히 달랐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참조: 골루빈스키. 1. 1 (1880). 435쪽.

[250] “논쟁… 바시얀 장로와”, 『독서』 1847. 9, 6; 『정통 문집』 1863. 3. 200–210, 192쪽; 『보충편』 10. 505쪽.

[251] 성자 닐 소르스키와 그의 스키트 생활 규약 (1864). 7–9, 175쪽.

[252] 『법규 모음』 1863. 3. 109, 110쪽; 니일의 관점에 대해서는 아르한겔스키, 『닐 소르스키와 바시안 파트리키예프』 72쪽 참조; 막심 그렉, 『저작집』 2. 37, 89, 41, 95, 110쪽. 바시안이 자신의 주장을 논쟁적인 열의에서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스토글라비 공의회의 공식 결의안에서 확인된다. 『AAE』 1권, 제227호, 218쪽.

[253] 『교리 모음집』 1863. 3. 112, 187, 105, 184, 109, 190, 184쪽. 우리는 막심 그레크의 저술에 모스크바 루스의 농민 지위에 대한 수많은 언급이 등장하는 것이 바시안의 영향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참조: 막심 그렉. 전집 2. 「전설」 – 94, 98–100쪽; 「회개에 관한 설교」 – 130, 131, 132쪽; 「영혼에 유익한 설교」 – 34, 38쪽.

[254] 마카리. 제2판. 6. 141, 205쪽. 참조: 즈마킨. 앞의 저작. 65쪽.

[255] 골루빈스키. 2. 1. 665쪽. 막심 그리스인에 관한 문헌은 비교적 방대하며, 주요 저작으로는 이콘니코프(1915)가 있으며, 또한 클로스터만 R. A.의 「전설 속의 막심 그리스인(Maksim Grek in der Legende)」, 『ZfKG』 53(1943), 177–228쪽; 데니소프 E. 『막심 그레크와 서구』. 파리-부벤, 1943. XIX–XXXIV쪽.

[256] 앞서 언급된 E. 데니소프의 저서를 참조하라. 그는 다양한 이탈리아 및 그리스 자료와 문헌을 바탕으로 막시무스의 어린 시절부터 모스크바 도착까지의 생애를 추적하려고 시도한다. 또한 다음을 참조하라: 골루빈스키. 2. 1. 667쪽 및 그 이후.

[257] 시편 번역과 관련하여 막심이 대공에게 보낸 서한을 참조하라. 『부록』 18권, 184쪽.

[258] 막심 그렉. 전집 3. 158, 194쪽.

[259] 같은 책. 158쪽.

[260] 구지이 N. 『막심 그렉과 르네상스 시대에 대한 그의 태도』, 『키예프 대학』 1911. 7.

[261] 막심 그렉. 전집 2. 377쪽.

[262] 마카리. 제2판. 6. 159–160쪽; ПСРЛ. 6. 257쪽; 8. 259쪽; Denissoff. Op. cit. 329–333쪽. 대공의 서한(문서)과 바토페드 수도원 아치만드리트의 답장(미완성) 수록: 『브레멘니크』. 5. 제3부. 30쪽; 미트로폴리트 바르라암에게 보낸 서한 수록: 『AI』. 1. 제122호.

[263] 게라시모프의 편지, 『보충편』 18, 190쪽.

[264] 막심 그렉. 저작집 2. 299쪽 및 그 이후. 이 저작은 앞서 언급된 두 편지를 보완해 주며, 이를 통해 막심이 오직 하나의 특정 번역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 파견되었음을 알 수 있다.

[265] 막심은 성 사도행전에 대한 익명의 주석을 대주교를 위해 직접 번역함으로써 대주교의 호의와 감사를 얻었다. 마카리우스. 제2판. 6. 166쪽.

[266] 안타깝게도 이 막시무스의 저작에 대해서는 막시무스 자신이 남긴 몇 가지 언급 외에는 아무런 정보도 없다. 저작 1. 33, 37쪽. 참조: 골루빈스키. 2. 1. 683쪽. 막시무스에 대한 게르베르슈타인의 기록(Op. cit. 91쪽)은 사실과 다르다. 아마도 1526년에 모스크바를 방문한 게르베르슈타인은 모스크바에 떠돌던 여러 소문을 근거로 삼았을 가능성이 있다.

[267] 골루빈스키. 2. 1. 665쪽.

[268] 막심 그렉. 저작집. 카잔 신학 아카데미 간행. 3권: 1 (1859, 제2판 1894), 2 (1860), 3 (1862, 제2판 1897). 제2판: 세르기예프 포사드, 1910–1911. 3권 (교회 슬라브어 원본에서 러시아어로 번역). 막심의 저작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골루빈스키. 2. 2. 232–263쪽. 데니소프. 앞의 서적. 35–40쪽. 막심의 저널리즘에 대해서는: 르지가. 16세기 러시아 저널리즘사에 관한 연구. 저널리스트로서의 막심 그렉, 수록: TODRL. 1 (1934).

[269] 참조: 프레오브라젠스키(1881); 이콘니코프(1915).

[270] 막심 그렉. 전집 2. 89–119쪽. 정확한 제목은 「유명한 수도원 생활에 관한 전설. 경쟁하는 인물 필로크티몬과 악티몬, 즉 탐욕스러운 자와 탐욕스럽지 않은 자”. 르지가의 견해에 따르면, 이 이야기는 1531년과 1537년 사이에 쓰여졌다. 르지가. 앞의 저작, 105쪽.

[271] 막심 그렉. 저작집 2. 114쪽.

[272] 같은 책. 2권, 5–52쪽. “이 말은 그것을 경청하는 이에게 영혼에 매우 유익하다. 지성이 자신의 영혼과 대화를 나누며, 그 안에서 탐욕에 대해서도 다룬다.” 42쪽; 이 작품 또한 1531년과 1537년 사이에 집필되었다. 르지가. 앞의 저작, 105쪽.

[273] 막심 그렉. 저작집 3. 178–205쪽 (제2판 145–167쪽): “완전한 수도 생활에 관한 무섭고도 기억할 만한 이야기”. 205쪽 (제2판 167쪽).

[274] 막심 그렉. 전집 2. 147쪽.

[275] 같은 책. 2: 가) 「위선 없는 회개와 잘 알려진 수도 생활에 관한 설교」. 119–144쪽; 나) 「어떤 경건한 수녀들에게 수도 생활의 개선에 대해 회고하며 전하는 설교」. 394–415쪽; c) 「회개와, 만족할 줄 모르는 배, 그리고 셀 수 없이 많은 악행에 대해 죄를 지은 수도자들에 관한 설교」. 148쪽. 막심은 『교훈적인 장들』이라는 저작에서도 수도원 소유지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같은 책. 157–184쪽.

[276] 같은 책. 3. 178–205쪽.

[277] 파블로프. 앞의 저서. 79쪽.

[278] 막심 그렉. 저작집 2. 172쪽.

[279] 아르테미오스 장로에 대해서는 제10장의 참고 문헌을 참조하라.

[280] 고르스키 A. 『성 삼위일체 세르기예프 라브라의 역사적 서술』. 1 (1890). 78쪽.

[281] AAE. 1. 제238호.

[282] AAE. 1. 제238호. 251쪽.

[283] 같은 책. 246쪽.

[284] AAE. 1. 제72호. 제238호; AI. 1. 제132호. 쿠르브스키. 전설 (1842). 136쪽. 아르테미. 서한, 『RIB』 4권. 1388, 1383, 1386, 1390, 1440쪽.

[285] 쿠르브스키. 앞의 저서. 134쪽; 고르스키. 앞의 저서. 84쪽; AAE. 1. 제238호.

[286] 이반 차르에게 보낸 서한, 『RIB』 4권, 1440, 1432–1441쪽. 이 저작은 아마도 1553년에 쓰인 것으로 보이며, 여기서 아르테미우스는 차르에게 과거 그와 나눈 대화를 상기시키고 수도 생활에 관한 자신의 말을 되풀이한다. 참조: 골루빈스키. 2. 1. 836쪽.

[287] 참조: 즈다노프, 『즈므np』 1876. 7. 67쪽; 골루빈스키. 2. 1. 836쪽.

[288] 『대화』의 첫 번째 출판자인 오. 보디안스키(『독본』 1859. 3)는 『대화』의 저자가 수도사 공작 바시안이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많은 이들에게 반박을 받았다. A. S. 파블로프 (『역사적 개론』, 136쪽, 각주)는 『대화』가 수도원 계통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예. 예. 골루빈스키(2. 1. 655쪽) 역시 보디안스키의 견해에 이의를 제기했다. 보디안스키의 판본은 매우 미흡하여, V. 드루지닌과 M. 디아코노프가 새로운 판본을 편집했다(『LZAK』 9호); 언어와 문체를 면밀히 연구한 결과, 그들도 『대화』가 수도원 계통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으며; 이와 유사한 견해를 I. A. 스트라토노프도 표명했다(『지방 의회 역사에 관한 메모』, 『카잔 대학교 학술지』 1906. 3). 보디안스키의 견해는 S. L. 아발리아니(『BV. 1909. 1)에 실린 글에서, 그 역시 『베세다』의 저자를 수도사 공작 바시아나로 보고, 집필 시기를 1531–1537년으로 추정했다(같은 책, 380쪽). 이에 대해 다른 문학사학자들인 N. 구지(『러시아 문학』 1913. 3)과 G. 벨첸코(1914)가 이에 반박했다. 최근에는 자볼지예 지역에서 수도원 소유지의 급속한 증가가 농민들에게 강한 불만을 야기했기 때문에, 『대화』가 자볼지예 농민 사회에서 비롯되었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차르가 정책을 수행할 때 농민 대표들(미르)과 상의해야 한다는 점을 자주 상기시킨 덕분에, 이. 스미르노프(『역사 기록』 15권, 1946년, 257쪽)가 『대화』가 농민 계층에서 나온 저널리즘적 저작이라고 주장할 수 있게 했다.

[289] 『베세다』(1890). 4, 5, 3, 10, 7, 8, 21, 17, 24, 13쪽.

[290] 안타깝게도 스미르노프의 견해는 『베세다』의 전체 맥락으로 뒷받침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북부의 자유 농민층(“흑토 농민층”)이 수도원 설립자들과 매우 격렬하고 꽤 자주 대립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이하 제7장 참조). 북부 농민층에 대해서는 전반적으로 다음을 참조하라: 보고슬로프스키 M. 『17세기 러시아 북부의 젬스카야 자치』 1 (1909).

[291] 『베세다』(1890). 14, 22, 24쪽. 『베세다』 저자들의 일부 견해는 대주교 다니일의 『서한』에 표현된 견해와 유사하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 『서한』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다루겠다.

[292] 『수도원 재산을 옹호하는 간략한 글』. A. D. 그리고리예프 편집, 『체테니야』 1902. 2호; 참조: 아발리아니, 『BV』 1908. 3호. 374쪽.

[293] 같은 책. 서문. XXV-XXVII쪽.

[294] 같은 책. 12, 16, 24, 29–31, 48쪽. 참조: 골루빈스키. 2. 2. 635쪽, 및 마이코프. 『이오리아스』. 1900. 2. 377쪽.

[295] 프리셀코프. 『칸의 야르리키』(1916). 61쪽. 황금군단의 칸들이 발급한 야르리키는 러시아 교회의 권리를 확인하고 칸에게 바치는 조공 의무에서 면제해 주는 문서였다.

[296] 마카리우스의 저작: 티호노라보프. 『연대기』. 5. 제3부. 129쪽; 골루빈스키. 2. 1. 800쪽. 차르의 칙령: 『연감』. 20. 제3부. 41쪽.

[297] 클레멘트 아담. 『Rerum Moscoviticarum scriptores varii』(프랑크푸르트, 1600). 152쪽.

[298] 제7장 및 제8장에 대한 참고 문헌 참조 – S. 로즈데스트벤스키(1897), N. 로즈코프(1899), Y. 고티에(1915), V. 밀류틴(1859–1861), 고르차코프(1868)의 연구; 또한: 클류체프스키. Geschichte RuЯlands. 2; Stдhlin. 1. 296쪽 및 그 이후; 파블로프-실반스키 N. 고수다레프의 신하들 (1909).

[299] PSRL. 4. 216–217쪽. 니키츠키. 《벨리이 노브고로드 교회의 내부사에 관한 고찰》(1879). 126쪽.

[300] 파블로프. 『역사 개론』. 32쪽; 그레코프. 『노브고로드의 성 소피아 성당』(1914). 246–247쪽.

[301] PSRL. 4. 271쪽; 또한 노브고로드 공화국에 속했던 벨로제르스키 지역에서는 많은 농민 가옥이 국가의 처분권으로 이관되었다. S. A.Yu. 제5호.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참조: 그네부셰프 A. 모스크바에 편입된 후 노브고로드 지역 농촌 인구의 경제 및 사회 생활에 관한 고찰. 1 (1915). 3–8쪽, 276–307쪽, 347쪽 이후, 355쪽 이후 (요약본: 『BV』 1911. 2); 야니츠키 N. 『16세기 노브고로드 지역의 경제 위기』, 『키예프 대학』 1914. 7. 12–14쪽.

[302] AAE. 1. 제227호. 219쪽; 파블로프. 『역사적 개론』. 37쪽.

[303] IRI. 3. 714쪽. 서한의 첫 번째 단락에서 볼 때, 이러한 규정은 글루시츠키 수도원에만 적용된 것이 아니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이 규정이 보편적이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문서는 보존되지 않았다.

[304] PSRL. 4. 299쪽. 모스크바 법무부 기록관에 소장된 문서 및 사건에 대한 목록. 1 (1869). 169쪽 (№ 1736); 알렉산드로-네프스키 연대기, RIB. 3. 248쪽.

[305] 참조: 스토글라프. 제98장 (카잔판, 412쪽).

[306] AAE. 1. 제227호. 219쪽.

[307] AI. 1. 제154호. IV.

[308] АИ. 1. № 154. XIX. 파블로프(역사적 개론, 142쪽)와 고르차코프(토지 소유에 관하여, 62쪽)는 이 칙령의 연대를 1573년으로 잘못 기록하고 있다.

[309] SGGD. 1. 제200호 (AAE. 1. 제308호, 372쪽에 수록된 판본은 오류임).

[310] SGGD. 1. 제202호. 594, 595쪽.

[311] 이 사실은 이미 S. F. 플라토노프에 의해 밝혀졌다(『스무타 시대의 역사에 관한 고찰』(1899). 593쪽); 또한 그의 뛰어난 저서 『보리스 고두노프』(1924). 82쪽을 참조하라. A. 슈파코프 (『모스크바 국가에서 국가와 교회의 상호 관계. 러시아의 총대주교직 설립』(1912). 85, 39쪽)은 타르한 제도의 복원이 경건한 표도르 차르의 뜻에 따라 이루어졌다고 보았는데, 그는 수도원들의 청원을 거절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312] 예를 들어 다음을 참조하라: 야로슬라블 스파스스키 수도원의 역사적 문서. 1 (1896). 제58, 59, 60호; 슈마코프 S. 『경제위원회 문서 목록』. 4 (1917). 제1798호; 카타예프 I. 및 카바노프 A. 『우바로프 백작 회의 문서 목록』. 역사적 문서 (1905). 제58호 – 이미 1584년 10월 11일자; 페트로프 V. 타르한 폐지에 관한 1584년 소보르노예 우로제니예, 『S. F. 플라토노프를 기리는 논문집』(1922). 191–201쪽.

[313] AAE. 1. 제323호.

[314] 니콜스키. 키릴로-벨로제르스키 수도원. 1. 2. 부록: XLII, LVI, LXXV, LXXVIII. 차르 자신도 소보르의 판결을 위반하곤 했다. 예를 들어, 1575년에 그는 이미 가장 부유한 수도원 중 하나였던 키릴로프 수도원에 토지를 하사했다(Ayu. 제126호); 1583년에는 다시 이 수도원에 세 개의 마을을 하사했다(마카리. 8. 255쪽).

[315] 트베리 문서집. S. 슈마코프 편. 1 (1896). 제19, 20, 75호; 우글리치 문서집. 1 (1898). 제46, 48, 70–73호 등.

[316] 교회 계층이 교회 소유지의 불가침성을 계속 주장했다는 사실은 1589년에 새로 취임한 요바 총대주교가 그루지야 대주교에게 보낸 서신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마카리우스. 10. 68쪽; 서신 수록: 『크리스토스』 1869. 2. 867–893쪽. S. 플라토노프의 주장에 따르면, 차르 보리스(1598–1605)의 통치 초기에는 타르한 제도를 폐지한다는 1584년의 판결이 다시 효력을 발휘했으나, 그러나 이미 표도르 치세인 1593–1594년에, 사실상 보리스 고두노프가 장악하고 있던 정부는 수도원 관련 문서를 재검토할 수밖에 없었으며, 수도원이 어떠한 문서도 제시하지 못한 소유지는 국고로 몰수되었다. 플라토노프. 보리스 고두노프 (1924). 149–150쪽. 안타깝게도 이 “재조사”에 대해서는 공식 문서도, 그 밖의 역사적 자료도 남아 있지 않다.

[317] 오늘날까지도 S. F. 플라토노프의 저서 『모스크바 국가의 혼란기 역사에 관한 고찰』(1899; 제2판 1912)은 혼란기의 원인과 사건에 대한 최고의 연구로 평가받고 있다.

[318] 혼란기 당시 교회와 수도원 측의 재정 지원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다루겠다.

[319] 필라레트 총대주교는 차르로부터 새로운 광대한 토지를 하사받았으며, 그 외에도 많은 영지를 매입하거나 기증받아 취득했는데, 이때 16세기의 판결들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고르차코프. 『토지 소유에 관하여』(1871). 329–336쪽. 통치 문제에서 필라레트의 막대한 영향력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스타세프스키. 차르 미하일 페오도로비치의 치세에 관한 고찰 (1913) 및 마카리. 11. 1–75쪽. 여기서 1625년의 유명한 칙령도 언급할 필요가 있는데, 이 칙령은 총대주교의 사법권을 상당히 확대했으며(고르차코프. 『수도원 명령』, 53쪽), “총대주교 관할 구역”에 속한 수도원들에게 큰 의미를 지녔다.

[320] 예를 들어, 1619년 젬스키 소보르의 판결에 따르면, 스무타 기간이나 그 이후에 교회 및 수도원 토지에 정착한 포사드 및 우예즈드 주민들은, 하사장과 타르한에 근거하여 관례적으로 면제되던 것과 달리, 세금 및 기타 의무에서 면제되지 않았다. AAE. 3. № 105.

[321] ПСРЛ. 5. 64쪽; 참조: СГГД. 3. № 4 및 스미르노프. “총대주교 필라레트”, ЧОЛДП. 1873. 6월. 829쪽.

[322] 지방 행정국 명령 기록부. N. 스토로제프 편집. 제6호, 『법무부 기록 및 사건 목록』 6 (1896)에 수록.

[323] 같은 책. 제96호.

[324] 디아코노프. 『16~17세기 모스크바 국가의 농촌 인구사에 관한 고찰』(1898). 180쪽. 보고슬로프스키. 앞의 저서, 『학술 논문집』 1909. 1. 59쪽. 특징적인 점은 수도원 당국이 이 칙령을 별 어려움 없이 회피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르한겔스크 수도원은 1624–1648년 동안 바로 우스티우그 시에서 토지 매입 및 저당 설정 거래를 50건 이상 체결했으며, 이 기간 동안 다른 북부 수도원들에서도 42건의 유사한 거래가 이루어졌다. 같은 책. 86쪽 이하.

[325] A.I. 3. 제92호. 33쪽. ‘우로크니 레트’에 관한 문제는 수도원 경제에 관한 장에서 다시 다루겠다.

[326] 1648~1649년의 젬스키 소보르를, 일부 예배 관련 문제를 다룬 1649년의 소보르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벨로쿠로프. 『1649년 모스크바 교회 소보르의 행적』, 『치테니야』 1894. 4. 1648–49년의 젬스키 소보르와 1649년의 법전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라트킨 V. 『고대 루스의 젬스키 소보르』(1885); 플라토노프 S.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차르의 법전 출처』, 『법률 공보』 1889. 11호(매우 귀중한 연구); 아르한겔스키. “정교회 러시아 교회에 관한 1649년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차르의 소보르 법전”, 『크리스토스 기념 논문집』 1881. 2. 42–134, 300–365쪽; Stдhlin. 1. 379쪽 및 그 이후. 법전 제정의 전사 및 역사에 있어, 공의회에 참석한 각 계층의 견해와 요구 사항에 대해 다룬 P. 스미르노프의 저술들은 매우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1. 1648–49년 법전 및 제스키 공의회의 기원에 관하여, 『ЖМНП』 1913. 9; 2. 『소보르 법전』과 1648–49년 제스키 소보르의 역사에 관한 몇 가지 문서, 『체테니야』. 1913. 4 (별책 ‘스메시’); 3. 17세기 전반 모든 도시의 귀족 및 보야르 자제들의 청원서, 『체테니야』. 1915. 3; 4. 외국인 추방에 관한 모스크바 상인들의 새로운 청원서, 『네스토르 연대기 작가 협회 논문집』 22 (1912). 제4호. 스미르노프의 연구는 교회와 수도원의 소유지 확대에 대한 각 계층의 불만이 얼마나 컸는지를 다시 한번 보여준다.

[327] AAE. 4. 제33호. 1649년 법전이 실제로 이행되었다는 점(이는 특히 슬로보다의 국고 편입과 관련됨)에 대해서는 AAE. 4. 제35, 36, 39호; AI. 4. 제32호; PSZ. 1. 제35호; 2. 제731호.

[328] RIB. 12. 261, 910, 932쪽.

[329] 1652년에 이러한 권리가 북부의 이바노프스키 수도원과 글레덴스키 수도원에 부여되었다(RIB. 12. 261쪽); 1663년에는 두 수도원 모두 하사장을 받았는데, 이에 따라 그들의 토지는 이전 소유주나 그 상속인에게 반환될 수 없게 되었다(같은 책, 372쪽). 이는 1622년 8월 27일자 칙령과 상충되는 것이었다. 이 특권은 아마도 광범위하게 실질적으로 적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다른 수도원들도 청원서를 바탕으로 특별한 권리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17세기에는 국가 각 지역의 토지 상당 부분이 관료 귀족들의 빚 부담으로 인해 수도원 소유로 넘어갔다. 참조: 고티에. 《모스크바 근교 지역》(1937). 232–233쪽; 슈마코프. 《베제츠키 문서》, 『논문집』 1899. 1; AЮ. 제119호. 3; 동 저자. 《우글리츠키 문서》. 같은 곳.

[330] 기부를 받은 곳: 1682년 사보-스토로제프스키 수도원; 1682–83년 – 총대주교 요아킴; 1683년 – 로스토프 대주교 이오나; 1685–86년 – 노보예루살렘스키 수도원; 1692–93년 – 고리츠키 수도원; 1689년 – 로스토프의 로즈데스트벤스키 수도원. 고티에. 앞의 저서. 224, 222쪽. 1672년 칙령에 따라 여러 우예즈드의 황무지와 경작되지 않는 토지를 총대주교, 주교좌 및 수도원에 양도하는 것이 허용되었으며, 1년 후 새로운 칙령이 발표되어 새로운 토지 취득의 가능성이 확대되었다. PSZ. 1. № 521, 549, 552, 554.

[331] 수도자의 관할권에 대해서는 제9장을 참조하라. 수도원 관리국에 대해서는: 고르차코프 M. 『수도원 관리국』(1868) – 오늘날까지도 과학적 가치를 잃지 않은 연구; 또 다른 저작인 심코 이. 『총대주교 관할 국영 관리국』(1894)과 고르차코프의 『전러시아 대주교, 총대주교 및 성스러운 시노드의 토지 소유에 관하여』(1871)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332] 특히 니콘 총대주교는 수도원 관리국 설립에 대해 극렬히 반대했다: 「울로옌에 대한 니콘 총대주교의 견해」, 『ORSA 기록』 2권 (1861). 456–497쪽, 특히 451쪽; 교회 재산에 대한 교회의 권리에 대해서는 453, 449쪽. 참조: 고르차코프. 『수도원 관리국』. 19쪽 및 주코프 A. 『세속 권력과 교회 권력 간의 관계에 대한 니콘 총대주교의 견해』, 『법률집』 1916. 3–4. 세속 권력과 교회 권력 간의 관계에 대한 견해, 『법전 모음집』 1916. 3–4. 다만, 니콘은 성직자의 관할권 변경에만 반대했다. 수도원 관리국에 대한 반대 의견은 1667년 공의회에서 표명된 견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PSZ』. 1. 제412호; ААЭ. 4. 제167호. 공의회는 성직자들의 관할권이 수도원 관리국에 속하는 것을 없애고자 했다. 참조: 고르차코프. 앞의 저서. 95–97쪽.

[333] АИ. 1. № 149.

[334] 네볼린 K. A. 『요한 3세부터 표트르 1세까지의 행정 체제 형성』, 『전집』 6권.

[335] 고르차코프. 『수도원 관리국』. 40쪽; 같은 책에서 대궁전 관리국의 간략한 역사를 참조.

[336] 예를 들어: A.I. 1. 제155호; 2. 제353호; A.A.E. 1. 제299호.

[337] I. 3. 제65호; AAE. 2. 제277호; AI. 2. 제355호; SGGD. 2. 제219호.

[338] AI. 1. 제192호 외.

[339] AAE. 4. 제16, 82호; DAI. 2. 제37호; 참조: 고르차코프. 앞의 저서, 42쪽.

[340] AI. 1. 제155호, 제158호; 2. 제249호; 3. 제162호; AAE. 4. 제56호, 제315호.

[341] 고르차코프. 앞의 저서, 42쪽; AI. 3. 제162호; AAE. 1. 제227호; 2. 제56호.

[342] 고르차코프. 앞의 저서. 68쪽. 다른 견해 참조: 블라디미르스키-부다노프 M. 『개관』(1888). 210쪽.

[343] 고르차코프. 앞의 저서. 95쪽. PSZ. 1. 제412호.

[344] 고르차코프. 앞의 저서. 101쪽. 일부 수도원은 토지 소유권과 관련된 사안에 대해 대궁전 관리국(Приказ Большого дворца)에 호소하려고 했다(예: АИ. 4. № 166).

[345] PSZ. 2. 제699호. 고르차코프. 전게서, 101쪽. 이 칙령의 출현은 1675년 공의회의 판결에 크게 기인한 바가 있다. 해당 판결에서는 관할권 문제와 관련하여 성직자들을 세속 권력의 간섭으로부터 보호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아아에. 4. 제204호 및 제205호.

[346] 고르차코프. 앞의 저서, 112쪽; PSZ. 1. 제412호. 1669년 공의회는 이 판결을 승인하고, 성직자나 수도원에 속해 있으며 그들의 관리인이 운영하던 상점과 기타 상업 시설을 차르에게 양도, 즉 국가에 넘기도록 명령했다. PSZ. 1. 제442호, § 12; AAE. 4. 161쪽.

[347] 고르차코프. 앞의 저서. 114–115쪽.

[348] 이반 4세 차르는 카잔의 초대 대주교 구리(1555–1563)에게 보낸 서한에서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언급했다. ААЭ. 1. № 241. 흥미롭게도 이러한 사상은 스비야즈크 신학 수도원의 프레스코화에서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다: 아이나로프 D. 『스비야즈스키 성모 수도원 내 성모 승천 성당의 프레스코 회화』, 『고고학』. 러시아 고고학 협회 논문집 21. 1 (1906); 네크라소프 A. N. 『고대 러시아 회화 예술』(1937). 292쪽.

[349] 클류체프스키. 『강좌』 2 (1907). 263쪽. 16세기 포니조비예 지역의 수도원 설립 문제를 연구한 결과, 우리는 클류체프스키의 자료가 정정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실제로 16세기에 설립된 수도원의 수는 그보다 더 많았다.

[350] 즈나멘스키. 『러시아 교회사 안내서』(1896). 279쪽. 18세기 초 러시아에는 1,201개의 수도원이 있었다. 베르호프스키. 『성 시노드의 거주용 부동산…』(1909), 부록 8에는 거주용 부동산을 소유한 500개 이상의 수도원이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성 시노드가 작성한 1762년 명부에는 954개의 수도원이 기록되어 있으며, 이 수에서 남부 러시아의 약 70개 수도원을 제외해야 한다. 자브얄로프. 예카테리나 2세 치하의 교회 소유지에 관한 문제 (1900). 346–348쪽. 17세기 체르니히우 교구의 수도원 중 일부는 모스크바 총대주교청의 관할 하에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이 자료를 확인할 수 없었는데, 본서의 최종 원고 작성 시점에 V. 즈베린스키의 저서를 확보하지 못했고, 그 책에서 처음 발췌해 둔 자료도 분실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수도원 정착 현상을 분석할 때 각 지역별로 새로 설립된 수도원의 수에 대한 정확한 자료를 제시할 수 없다(포니조비야 지역은 예외로, 이 지역에 대한 자료는 필자가 보관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새로 설립된 수도원 중 가장 중요한 것들, 즉 나중에 러시아 수도원 역사에서 일정한 역할을 한 곳들이 반영되었기를 희망한다. 결론적으로, 18세기에 성 시노드 자체가 수도원 수에 대해 매우 모순된 정보를 제공했음을 언급하며, 이는 부분적으로 역사학자들에게 변명의 여지가 될 수 있다.

[351] 17세기 초 모스크바 제국의 여러 지역과 그 정치적·경제적 중요성에 대해서는 플라토노프의 『스무타(혼란기)에 관한 고찰』(1899); 체추린. 『모스크바 국가의 도시들』(1889); 야코블레프 A. 『모스크바 국가의 경계선』(1916); 스미르노프 P. 『17세기 모스크바 국가의 도시들』(1918).

[352] 마카리. 제2판. 7. 2, 14쪽; 불가코프. 『참고서』. 76–82쪽.

[353] 마카리. 제2판. 7. 20, 23, 15쪽. 불가코프. 60, 73–74쪽.

[354] 불가코프. 103쪽; 『성인에 관한 역사 사전』(1862). 187쪽; 우스펜스키 V. 『닐로바 푸스티니에 대한 설명』(1886).

[355] 무라비예프 A. 『성산과 옵티나 수도원』(1852); 체트베리코프 S. 『옵티나 수도원』(1926).

[356] 생전에 성 안토니우스는 차르로부터(1544) 12제곱킬로미터가 넘는 땅을 하사받았다(SGKE. 1. 1. № 97). 1764년, 이 수도원은 3,333개의 농가를 소유하고 있었다. IRI. 3. 103–104쪽. 마카리 주교, 『안토니예프 시이 수도원에 대한 역사적 서술』, 『체테니야』 1878. 3; 참조: 룬케비치, 『아르한겔스크 교구에 대한 서술』, 『ПБЭ』 1. 1113–1117쪽. 수도원 경영에 관하여: 안토니예프 시이 수도원의 예금 장부. A. F. 이즈유모프 편집, 『논문집』 1917. 2. 참조: 마카리. 제2판. 7. 42쪽.

[357] 마카리 주교. 『크라스노고르스크 수도원의 역사적 서술』, 『논문집』. 1880. 3. 참조: 마카리. 제2판. 7. 41. 1763년에 이 수도원은 매우 가난하여 매년 성 시노드로부터 25루블의 지원금(루구)을 받았다. 자브얄로프. 385쪽.

[358] IRI. 4. 530. 바르소프. 올로네츠의 클리메네츠키 수도원, 『논문집』. 1870. 4.

[359] 불가코프. 61–62쪽.

[360] IRI. 2. 279쪽.

[361] 같은 책. 6. 412–413쪽.

[362] 같은 책. 5. 134쪽; 불가코프. 184쪽; 골루빈스키. 『시성사의 역사』. 136쪽; 클류체프스키. 『성인전』. 324쪽.

[363] IRI. 6. 593쪽.

[364] 즈베린스키. 2. 제1144호.

[365] 즈베린스키. 2. 제868호 및 제557호.

[366] 마카리. 제2판. 7. 34쪽. 참조: 필자의 논문: “러시아의 경건주의와 민속 종교성에서 성모 마리아 숭배(Die Verehrung der Gottesmutter in der russischen Frömmigkeit und Volksreligiosität)”, 『Kyrios』 5 (1940–41). 208쪽.

[367] 마카리. 제2판. 7. 38쪽.

[368] 1급 프스코보-페체르스키 수도원 (1893); 마카리. 제2판. 7. 39쪽.

[369] IRI. 3. 413쪽; 마카리. 제2판. 7. 18–19쪽.

[370] 참조: 볼딘-도로고부즈 수도원의 수입·지출 장부, 『RIB』 37 (1923).

[371] IRI. 5. 588쪽.

[372] 모스크바 국가에 특징적인 행정 구역 경계의 불명확성은 개별 프리카조(Prikaz)들의 기능 구분이 모호했던 것과 관련이 있었다. 주로 포니조비예 지역은 ‘카잔 궁전’—매우 불명확한 관할권을 가진 특수한 프리카즈—에 의해 관리되었는데, 17세기에는 새로운 영토 행정 기관(프리카즈, 특히 ‘체티’)의 출현으로 인해 그 관할권이 끊임없이 변화했다; 이러한 상황은 수도원 소유지가 어느 프리카즈의 관할권에 속하는지에 있어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녔으며, 특히 수도원 프리카즈(1649–1677)가 이 문제에 있어 가장 다양한 권한을 부여받았던 시기에 그러했다. 1574년 직전에 설립된 카잔 궁전은 표트르 대제의 행정 개혁(1708)까지 존속했다. 참조: 페레티아토비치 G. 『16~17세기 볼가 강 유역』(1877); 플라토노프. 『스무타 시대의 역사에 관한 고찰』. 제1장 § 6 (1937년판, 78–86쪽); 밀류코프 P. 『18세기 초반의 국가 경제와 표트르 대제의 개혁』(1890). 366–373쪽; 네볼린 V. 『저작집』 6. 179쪽.

[373] 이 문제는 우리가 『Kyrios』 저널에 기고할 목적으로 작성한 논문에서 연구했으나, 전쟁으로 인해 출판되지 못했다. 여기에는 해당 연구의 자료가 활용되었다.

[374] 참조: 필자의 논문: “15세기와 16세기 러시아 동방 정책의 역사에 관하여. 1. 카잔 제국의 정복”, JGO (1941).

[375] 제베린스키. 3. 제1248호; DRV. 17. 146쪽.

[376] 1569년에 터키가 모스크바의 손아귀에서 아스트라한을 빼앗으려 했던 시도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사디코프 P. 『1569년 타타르와 터키의 아스트라한 원정』, 『역사 기록』 22 (1947). 132–165쪽.

[377] 도시 설립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네볼린. 전집, 70쪽.

[378] 이 마지막 특징에 특히 주목해야 한다. 수도원 설립은 차르와 대주교에게 있어 국가적 과제이자 선교적 과제였다. 카잔 교구는 1555년에 설립되었으며, 그 초대 대주교인 구리(1555–1563)는 이전에 트로이츠키 셀리자로프스키 수도원의 원장이며, 요시포-볼로콜람스키 수도원에서 출가한 수도사였다. 카잔 정복 직후 이반 4세는 우스펜스키 수도원을 설립했는데, 이후 ‘질란토바 수도원’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는 1560년 구리 대주교가 이 수도원을 질란토바 산으로 이전했기 때문이다. 즈베린스키. 제1286호 및 제196호. 1556년 구리 대주교는 아르히만드리트 바르소노피가 두 번째 수도원인 스파소-프레오브라젠스키 수도원을 건축하는 것을 축복했다(카린스키. 『고대 카잔의 개요』(1879). 96쪽). 구리의 후임자인 대주교 게르만(1564–1568)은 도시 외곽에 요한 세례자 수도원을 건립했다(즈베린스키. 제843호). 1579년 차르의 자금으로 최초의 여성 수도원인 성모 마리아 수도원이 설립되었다(같은 책. 제55호). 바시아네 대주교 재임 시절(1575년)에는 페오도로프스키 트로이츠키 수도원이 건립되었다(같은 책, 제555호). 이처럼 25년 동안 카자니에는 5개의 수도원이 생겨났다. 이교도 체레미스 지역의 행정 중심지였던 스비야즈스크에는 3개의 수도원이 설립되었다 (즈베린스키, 제657, 874, 2148호). 지도를 살펴보면, 수도원들은 주로 볼가 강과 수라 강 사이의 도시들에 설립되었으며, 이 지역의 남쪽 경계는 테튜시 시까지 이어지는 알라티르 강이 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선보다 남쪽에는 단 두 개의 수도원만이 설립되었는데, 하나는 아스트라한, 즉 카스피해 바로 연안에, 다른 하나는 니즈니 로모프 근교, 옛 랴잔 공국의 남동쪽 경계에 위치해 있었다. 볼가 강과 수라 강 사이에 위치한 이 지역은 당시 모스크바 정부에 의해 집중적으로 개척되고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아르자마스 지방 문서집』. S. 베셀로프스키 편집 (1916), 제390호; 에마우스키 A. 『16~17세기 아르자마스 현의 토지와 농민을 위한 투쟁사』, 『키로프 지역학 연구소 논문집』 7. 3 (1934). 7, 9쪽; 게라클리토프 A. 『17~18세기 세무 장부와 인구 조사 장부에 나타난 아르자마스 모르드바족』, 『사라토프 대학교 학술지』 8권, 2쪽. 1568년 이반 4세는 키릴 수도원장에게 아스트라한에 트로이츠코-니콜라예프스키 수도원을 건립하도록 명하고 이 수도원에 금전적 지원을 제공했다; 『러시아』. 6. 544쪽; 몇 년 후(1573년, 1575년, 1588년) 이 수도원은 어업 및 소금 제조에 대한 특권 증서를 받았다. A.I. 1. 제184, 193, 223호.

[379] 이 수도원들은 세 개의 요새화된 도시에 위치해 있었는데, 아스트라한에 5곳, 차리친에 2곳, 사라토프에 3곳이었다. 이 수도원들은 선교 활동에는 거의 기여하지 않았으며, 우리가 보기에 국경 도시들을 장식하고 볼가 강 유역 초원의 유목민들 사이에서 모스크바 왕국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380] 도시의 설립과 관료들에게 토지를 분배한 것은 모스크바 국가의 정치적 강화에 기여했다. 참조: 페레티아토비치. 앞의 저서, 107쪽; 체추린. 앞의 저서, 202–206쪽; 1565–1568년 및 1646년 카잔의 세무 장부, 『소련 민족사 자료집』 2권 (1933). 표 1–3, 9–11; 코르사코프 D. “16세기와 17세기 카잔 지방에서 어느 도시 출신의 봉신들이 지주 및 영지 소유자였는가?”, 『고고학 대회 논문집』 1 (1884). 173쪽. 포니조비예 지역에도 많은 장인들이 파견되었다; 로마노프 K. 『문화·예술적 상호 관계 속의 프스코프, 노브고로드, 모스크바』, 『물질문화 아카데미 소식』 4 (1925). 239쪽.

[381] 포크로프스키 이. 『1764년 이전 카잔 수도원의 역사』 (1902). 6쪽.

[382] 즈베린스키. 제1143호; 포크로프스키. 앞의 저서. 7, 21쪽; 즈나멘스키에 따르면(『세드미예제르스카야 성모 수도원 설명』, 『법률집』 1869. 2. 214, 231, 232), 이 수도원은 1645년 직후 첫 번째 기증을 받았고, 두 번째 기증은 1686년에 이어졌다; 1744년 감사 결과, 이곳에는 513명의 농민이 있었다. 밀류틴. 『부동산에 관하여』, 『논문집』 1860. 3. 145쪽.

[383] 즈베린스키. 2. 제1110호; 포크로프스키. 앞의 저서. 9쪽. 1744년에 이 수도원은 이미 506명의 농민을 소유하고 있었다. 밀류틴. 앞의 저서. 145쪽.

[384] 즈베린스키. 3. 제2154호.

[385] 같은 책. 제1249호. 고르스키. 『설명서』. 204쪽.

[386] 즈베린스키. 3. 제1267호.

[387] 랴빈스키 K. “말로융긴스키 수도원”, 『이즈브. 카즈.』 13권, 3쪽.

[388] 즈베린스키. 3. 제1169호.

[389] 같은 책. 제1324호. 17세기 초까지만 행정적으로 포니조비에에 속해 있던 니제고로드 우예즈드에서는 17세기에 설립자들의 주도로 두 개의 수도원이 설립되었다. 수도사 이오나는 도시에서 남쪽으로 약 85 베르스타 떨어진 곳에 스파스키 수도원(1658)을 설립했고 (즈베린스키. 3. 제1192호), 수도사 파프누티는 발라흐나 마을에 포크로프스키 수도원을 설립했다(즈베린스키. 2. 제1061호).

[390] 비아트카 지역 러시아 식민화의 초기 단계에 대해서는 플라토노프, 『에세이』(1899) 171쪽 및 그 이후를 참조하라. 성 스테판은 이곳에 네 개의 수도원을 설립했다. 즈베린스키, 2. № 1959; 1. № 524; 3. № 1330. 참조: 마카리. 4. 142, 211쪽. 15세기에는 이곳에 트로이츠키 페체르스키 수도원 단 한 곳만이 설립되었으며, 그 설립자는 페름 주교였다. 마카리. 제2판. 7. 46쪽.

[391] IRI. 6. 437쪽.

[392] Stдhlin. 1. 287쪽, 285–287쪽. 시베리아 식민지화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오고르드니코프 V. 2권 (1920–1924); 바흐루신 S. (1927) 및 새로운 연구: 순코프 V. (1946), 이 책은 필자가 입수할 수 없다. 또한: Wirth A. Geschichte Sibiriens und der Mandschurei (1899). 101–105쪽, 112쪽 및 그 이후.

[393] 새로 설립된 수도원에 대한 저의 메모는 분실되었다. 자료는 즈베린스키, 2–3권에 수록되어 있다. 불가코프(전게서)가 제시한 자료는 제 생각에 불완전하며, 『러시아 백과사전(ПБЭ)』에 실린 교구 설명도 불완전하다. 따라서 제가 제시한 정보는 재검증이 필요할 수도 있다.

[394] 가장 중요한 저작들만 언급하겠다: 플라토노프. 『에세이』(1899); 바가레이 D. 『학술지』 1886–1887; 도브로클론스키 A. 『학술지』 1888; 야신스키 A. (1900); 야코블레프 A. (1916); 그리고: 미클라셰프스키 I. 『모스크바 국가의 경제 생활사에 관하여』 1. 17세기 남부 우크라이나의 정착과 농업 (1894).

[395] 로즈코프 N. (1898); 라포-다니레프스키. 『모스크바 국가의 직접 과세 조직』(1890); 간결하지만 훌륭한 개요는 다음 저작에 수록되어 있다: 그네부셰프 A. 『16~17세기 모스크바 국가의 토지 소유와 농업』, 『에세이와 기사로 보는 러시아 역사』. M. 도브나르-자폴스키 편집. 3 (1912). 267–311쪽.

[396] 이 표는 다양한 출처를 바탕으로 작성된 것으로, 우리는 이 표가 불완전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 책을 최종 편집할 당시 즈베린스키의 저작을 입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수도원의 총 수는 더 많았을 가능성이 있는데, 주로 17세기 초 설립 직후 사라진 비도시 지역 수도원들 때문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397] 요새화된 방어선을 구축할 때 정부는 수도원들이 소속 농민들을 건설 작업에 동원할 것을 요구했다. 예를 들어, RIB. 10. 268–269쪽을 참조하라; 또한 야코블레프. 집성본, 여기에는 이에 관한 많은 정보가 수록되어 있다. 포니조비예 지역에서 이루어진 이와 유사한 정부의 조치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역사 및 법률 문서집』. S. 멜니코프 편. 1 (1859). 22, 23, 24쪽.

[398] 행정 용어로 17세기 우크라이나는 ‘말로로시아’라고 불렸다. ‘폴란드 우크라이나’라는 명칭은 주로 벨고로드와 하르키우 지역을 가리켰다. ‘우크라이나’라는 단어는 ‘가장자리에 위치한’ ‘들판’, 즉 대초원을 의미한다.

[399] DAI. 9. 270–288쪽. 또한 참조: 바갈레이. 앞의 저서. 197쪽; 야코블레프. 앞의 저서. 284쪽.

[400] 보로네즈(1586년 설립)에서는: 1620년 – 아카토프스키 수도원, 키릴 수도원장(즈베린스키. 2. № 609)에 의해 설립됨; 1623년 – 포크로프스키 여자 수도원(동서. № 1060). 1620년 이전에 자돈스크 시에 보고로디츠키 수도원이 설립되었다(같은 책, 1권, 제59호). 1640년경, 오스트로고즈크 시에서 20km 떨어진 곳에 우스펜스키 디브노고르스키 수도원이 건립되었다(같은 책, 1권, 제169호). 1646년 직전, 콘스탄틴이라는 이름의 엄격한 수행자가 보로네즈에서 40km 떨어진 우스마니 강변에 스파소-프레오브라젠스키 여자 수도원(일반적으로 톨셴스키라고 불림)을 설립했다(같은 책, 2권, 제1222호). 1613년 미하일 차르의 명령에 따라 발루이키 시에서 3km 떨어진 곳에 우스펜스키 수도원이 건립되었다(같은 책, 2권, 1329번). 일곱 번째 수도원인 프레데테첸스키 수도원은 1697년 표트르 대제의 명령에 따라 정복된 아조프 요새에 설립되었으며; 1711년, 표트르 대제의 프루트 원정이 실패로 끝나 러시아가 아조프를 상실한 후, 이 수도원은 보로네즈로 이전되었다. 참조: 불가코프. 앞의 저서. 63쪽.

[401] 샤츠카 시에서 2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니콜라예프스키 체르네예프스키 수도원(즈베린스키. 2. 제569호); 아마도 16세기에 레베디야니 시 근처 도나 강변에 트로이츠키 수도원도 설립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수도원에 대한 최초의 정확한 기록은 1620~21년에 속한다(동서. 1. 제529호).

[402] 즈베린스키. 2. 제644호 및 제1141호.

[403] 즈베린스키. 2. 제1057호; 데니소프. 앞의 저서. 제630호.

[404] 즈베린스키. 1. 제92호; 데니소프. 앞의 저서, 제626호. 이 은둔원은 이미 17세기 말에 수도사들이 떠난 후 황폐한 상태에 놓여 있었으나, 1721년에 피티림 대수도원장(브랸스크의 페트로파블로프스키 수도원 출신)에 의해 재개되었으나, 1764년에 폐지되었음에도 수도사들은 그곳에서 계속 거주했고, 이후 1817년에 ‘공식적으로’ 다시 재개되었다. 이 수도원은 18세기 말, 그곳에서 수행한 장로들 덕분에 매우 유명했다. 제15장을 참조하라.

[405] 불가코프. 전집. 74쪽. 새로 설립된 두 개의 수도원을 더 언급하겠다: 1) 푸티블라 시 근처의 보고로디츠카야 글린스카야 푸스티니(1557년)와 2) 푸티블에서 25km 떨어진 성모 마리아 글린스카야 수도원(보통 소프로니예바라고 불림)으로, 15세기에 설립되어 1593년에 재개된 곳이다. 즈베린스키. 2. 제933호. 두 수도원 모두 그곳의 장로들로 인해 명성을 얻었다. 제15장 참조.

[406] 1654년에는 아흐티르카 마을 근처에 성 삼위일체 수도원이 설립되었는데, 이곳은 기적을 행하는 아흐티르카의 성모 마리아 성화로 유명하다. 1663년에는 하르키우에서 약 10km 떨어진 곳에 변모 수도원이 설립되었는데, 이곳은 오제리야의 성모 마리아 성화로 명성을 얻었다. 불가코프. 앞의 저서, 100쪽. 가장 남쪽에 위치한 수도원은 사마라 강변(예카테리노슬라프, 현재 드니프로페트로프스크 시 북쪽)의 노보모스코프스키 마을 근처에 세워진 니콜라예프스키 수도원(1680년)이었다. 불가코프. 앞의 저서, 65쪽.

[407] 특히 흥미로운 사례들만 언급하겠다. 성 아드리아노 포셰혼스키(16세기 말)의 행적에서 알 수 있듯이, 1543년에 그는 포셰혼예 시 근처에 은둔처를 설립했으나, 이 은둔처는 농민들에 의해 파괴되었다(IRI. 3. 70쪽). 생전에 이미 성인으로 숭배받았던 성 알렉산드르 스비르스키(1533)는 자신이 설립한 은둔소 중 한 곳을 떠나야만 했다(같은 책, 6권, 115쪽).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VChM』 12월 7일 항목도 참조. 성 레오니드 루즈스키, 또는 우스트네두姆斯키(† 1654)는 1603년에 교회를 짓기로 결심했으나, 역시 지역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혔다(IRI. 1. 114쪽). 성 시몬 볼롬스키(† 1644)는 교회를 지었으나, 훗날 그가 이곳에 수도원을 세울까 두려워한 주변 주민들이 그 교회를 불태워 버렸다(같은 책, 3권, 608쪽). 또한 이교도 주민들은 순교자들의 선교 활동에 큰 불신을 품고 있었는데, 이는 성 트리폰 페첸그스키(† 1583)와 트리폰 비얏스키의 행적에서 확인할 수 있다(IRI. 4. 582쪽; 6. 437쪽)에서 알 수 있다. 수도원 설립자들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는 성 디미트리 프릴루츠키, 스테판 마흐리슈스키, 마카리 젤토보드스키, 마카리 칼야진스키(모두 14세기)의 행전에서도 묘사되어 있다. 파블로프. 『개론』. 20쪽. 성 아가핏 마르쿠셰프스키(† 1584)는 자신의 은둔처를 위해 모스크바로부터 토지 소유권을 인정하는 칙서를 받았을 때, 이웃 농민들에게 살해당했다(IRI. 5. 51쪽). 이러한 분쟁에서 종종 수도원 측에 책임이 있었는데, 이는 그들이 농민들의 토지를 불법적으로 점유했기 때문이다. 키릴로-벨로제르스키 수도원의 역사에서 이와 유사한 사례들을 참조하라. 니콜스키. 앞의 저서 1. 2, 8–10쪽.

[408] 수도원 소유지에 관한 문제를 연구하면서 V. O. 클류체프스키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수도원의 토지 소유는 경건한 사회가 수도 생활이라는 개념을 충분히 명확히 이해하지 못한 채 치른 이중으로 부주의한 희생이었으며, 이는 수도원 자체의 도덕적 정비를 방해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국가의 경제적 힘의 균형을 깨뜨렸다.” (Geschichte Russlands. 2. p. 294). 러시아 수도원들은 이미 성 테오도시우스 페체르스키 시대부터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테오도시우스의 행적을 참조하라: 1. 야코블레프, 『지정된 저작』(1873, XII); 2. 『논문집』(1889). 1. 25쪽. 수도계는 이러한 토지 소유가 수도 서원의 정신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견해를 고수했으며, 이에 대한 견해를 비잔티움에서 수도원 토지 소유가 존재했던 사실에 근거를 두었는데, 그곳에서는 ‘알렉시우스 총대주교의 교회 규정’에 따라 토지가 관리되었다. 참조: 설명. 3. 제330호 (규약). 231쪽. 대조: 골루빈스키. 1. 2. 597쪽. 고대 러시아 연대기 작가들은 공작이 수도원에 토지를 하사한 것을 ‘신에게 공덕을 쌓는 행위’라고 불렀다(예: PSRL. 1. 65, 85, 92, 129, 187쪽; 2. 11–113, 154쪽 등). 그러나 이 연대기 작가들이 전적으로 수도승들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미 12세기에는 수도원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토지를 소유하는 것이 흔한 현상이었다. 고르부노프. 수도원과 교회에 하사된 특혜 칙서, 『아르히브』. N. 칼라초프 편집. 5 (1860–61). 4–5쪽. 그러나 일부 주교단 대표들, 예를 들어 클리멘트 스몰야티치 대주교(1147–1154)는 수도원의 토지 소유에 반대했으며, 이것이 수도 생활의 타락을 초래한다고 지적했다는 점을 즉시 언급해야 한다. 니콜스키, N. 『대주교 클리멘트 스몰야티치의 문헌에 관하여』(1892). 104, 220쪽. 골루보프스키. 『15세기 초까지의 스몰렌스크 지역사』(1895). 238쪽. 12~15세기의 토지 취득 방식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고르부노프. 전게서, 11–19쪽; 밀류틴. 전게서, 42쪽; 고르차코프. 『토지 소유에 관하여』(1871). 83–109쪽; 메이치크. 『14~15세기 문서집』(1883). 3쪽.

[409] 일반적으로 고대 루스에서 면책 특권의 출현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파블로프-실반스키. 저서 3권; 블라디미르스키-부다노프. 『개관』(1888). 153, 195쪽 및 그 이후, 또한: 세르게예비치, 자고스킨, 파블로프. 『교회법 강좌』. 158쪽; 수보로프 N. 『교회법 강좌』; 마카리. 8. 191, 267, 285쪽.

[410] 칸의 얄리크는 성직자의 토지 소유에 대한 권리와 특권을 매우 정확하게 규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 멘구-테미르의 얄리크(약 1267–1279)를 참조하라. 출처: СГГД. 2. № 2. 야르리크에 대해서는 다음 저작을 참조하라: 프리셀코프 M. 『러시아 대주교들의 칸 야르리크』(1916); 또한 오래된 연구인 그리고리예프. 『칸 야르리크의 신빙성에 관하여』(1842) 및 Hermann. Op. cit. 69–71쪽.

[411] 가장 오래된 하사장(13~15세기)에 대해서는: 고르부노프, 앞의 저서 및 밀류틴, 앞의 저서를 참조하라.

[412] 다양한 종류의 문서에 대해서는: 고르부노프, 앞의 저서 및 슈마코프 S. 『경제위원회 문서 개관』 제4부, 『학술 논문집』 1917년 제2호, 17쪽 이하; 블라디미르스키-부다노프. 『개요』(1888). 195쪽 이하; 헤르만. 앞의 저서. 69–71쪽; 또한 다음 저작도 중요하다: 베셀로프스키 S. 『영지 제도의 기원에 관한 문제』(1926). 26쪽 이하, 84–89, 90쪽.

[413] 참조: 고르차코프. 『토지 소유에 관하여』. 105쪽. 가장 오래된, 특히 주목할 만한 하사장 중 몇 가지만 꼽자면, 예를 들어 이반 칼리타 공작(14세기)이 유르예프 수도원에 하사한 하사장: ААЭ. 1. № 4 및 5; 벨로제르스키 공작들이 페라폰토프 수도원에 하사한 하사장(1450년): ААЭ. 1. 제47호; 또한 참조: 제20, 21, 51, 53호; 이 모든 칙서는 수도원들의 식민지화 활동, 즉 경작되지 않은 땅을 개간하고, 새로운 정착민을 유치하며, 새로운 마을을 건설하는 것을 지지하고 있다. 원주민의 권리에 대해서는 참조: ААЭ. 1. № 34 및 35. 특히 야로슬라블의 바실리 공(1321–1345)이 스파스키 수도원(약 1325년)에 하사한 칙령은 매우 상세하며, 다음 문헌에 수록되어 있다: 야로슬라블 스파스키 수도원의 역사적 문서. 바흐라메예프 편집. 1. 제1호; 이 칙서는 나중에 대공 이반(약 1464–1466)에 의해 보완되고 재확인되었다: OAMYU. 4. 제147호. 16세기에 전형적인 다음의 하사장은 다음과 같다: 1551년 – 유르예프 수도원(DAI. 1. 제46호); 1560년 – 미하일롭스키 여자 수도원(DAI. 1. 제113호); 1556년 – 트로이츠키 페첸그 수도원(СГКЭ. 2. № 136); 1554년 – 코네프스키 수도원(ДАИ. 1. № 48); 1560년 – 스파소-카멘니 수도원(동서. 1. № 115).

[414] 참조: 밀류틴. 앞의 저서; 디아코노프. 에세이 (1898); 그레코프 V. “유리예프의 날과 금기된 해”, 『소련 과학원 회보』 (1926). 제1–2호; 동 저자. 『고대부터 17세기까지 러시아의 농민들』(1946). 명령어와 구어체로 작성된 특혜 칙서는 ‘오벨니예 칙서’라고도 불렸다. ‘오벨야트’는 ‘검은 땅’, 즉 세금이 부과된 땅에 사는 농민들이 납부해야 했던 세금을 면제해 준다는 뜻이다.

[415] ‘면소 특권장’ 참조: 바즈키 수도원(1548). DAI. 1. 제44호; 니콜라예프스코예-코렐스키 수도원(1542). AI. 1. 제141호; 스트로키나 푸스티니(1547). 같은 책. 제147호; 아스트라한에 있는 트로이츠키 수도원(1573). 같은 곳. 제184호; 코네브스키 수도원(1578). DAI. 1. 제122호; 트로이체-세르기예프 수도원(1535년 및 1551년), 『아크티』. 페도토프-체호스키 편집. 1. 제57호 및 제75호; 페라폰토프 수도원(1534). 같은 책. 제42호; 수즈달의 포크로프스키 수도원(1528). 아카이브. 1. 제131호; 추흘롬스키 수도원(1518). 아카이브. 1. 제125호; 안토니예프-시이스키 수도원(1545). SGKE. 1. № 109; 성 요셉이 생전에 설립한 볼로콜람스카야 수도원(1500). AAE. 1. № 136. 15세기에 발행된 비소송 문서로는 키릴로-벨로제르스카야 수도원에 대한 문서를 들 수 있다. AAE. 1. № 95; 트로이체-세르기예프 수도원(1494). 동서. 1. № 131. 연구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수도원 소유지와 보야르의 세습 영지는 이미 14세기와 15세기에 면책권을 누리고 있었다: 프레스냐코프. 『공작의 권리』(1909). 296쪽; 세르게예비치. 앞의 저서 1. 328쪽, 특히: 파블로프-실반스키. 저서 3. 281, 295쪽; 파블로프. 교회법 강좌 (1902). 158–160쪽.

[416] 페트로프 V. 타르한 폐지에 관한 1584년 소보르 법전, 『S. F. 플라토노프를 기리는 논문집』(1922).

[417] 예를 들어, 『AAE』 1권 제9호 — 대공이 키프리아노스 대주교에게 하사한 칙서(1392년) 및 제11호.

[418] 예를 들어, 『아유(АЮ)』 1권, 제8, 12, 16, 17호 등.

[419] 예를 들어, 『АЮ』 1권, 제32호, 제63호; 종종 유언장이 이러한 증서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가장 오래된 예로는 수즈달의 바실리예프스키 수도원에 대한 재산 유언장(1253년)이 있으며, 이는 『АЮ』 1. 제439호; 또는 추흐체넴 수도원(15세기)에 대한 유언장: 『СГКЭ』 1. 제24, 19, 26, 11, 27호 등. 필자의 논문 참조: 『Studien zum Klosterwesen RuЯlands』. 2. Zum Problem des Klosterbesitzes im 15. und 16. Jahrhundert, 『Kyrios』 4 (1939). 보치나(вотчина)는 상속 재산으로, 봉사에 대한 대가로 조건부 소유권으로 하사된 영지(поместье)와는 구별된다; 서유럽의 유사 개념으로는 알로드(allod)와 베네피시움(benefice)이 있다.

[420] 예를 들어: АЮ. 2. № 156; СГКЭ. 1. № 45, 49, 156.

[421] 예를 들어: 『АЮ』 2. 제178, 179, 180호 등. 이러한 ‘자예지 그라모타’는 하사 문서의 근거가 되었으며, 종종 그 내용에 인용되기도 했다.

[422] 예를 들어: 아유. 2. 제126호; SGKE. 1. 제3, 6, 10호(15세기). 이들은 특히 16세기 후반과 17세기 전반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423] 피스코비 책(писцовые книги)은 일종의 토지 대장으로서, 인구(가옥 소유주) 조사 결과와 그들의 소유지에 대한 설명이 담겨 있습니다. 피스초비 책의 출현과 성격은 과세와 관련이 있다. 고대 루스에서 최초의 전면적인 인구(정확히는 가옥) 조사는 1257년과 1275년에 타타르족에 의해 실시되었다. ПСРЛ. 1. 2 (제2판). 474쪽; 10. 152쪽. 모스크바 국가에서 첫 번째 가옥 조사는 1538–1547년에 실시되었으며, 이를 ‘큰 조사(большое письмо)’라고 불렀다. 이 조사는 부적합한 것으로 판명되어, 1551–1580년에 토지 이용 현황에 대한 지적 조사가 포함된 새로운 조사인 ‘새로운 조사’가 실시되었으며, 이때 서기들이 서기 장부를 작성했다. 이 중 일부는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모스크바 국가의 토지 관계사, 특히 수도원과 교회의 토지 소유사에 관한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17세기에는 두 차례의 조사가 실시되었는데, 하나는 20년대에, 다른 하나는 1646년부터 1678년까지 진행되었다. (AAE. 4. № 14). 첫 번째 인구는 기존의 방식에 따라 실시되었는데, 주요 조사 단위는 영토 단위인 ‘소하’였으며, 토지와 그 특성에 대한 설명이 포함되었다. 1646–1678년에는 토지에 대한 설명 없이 세금을 납부하는 가구에 대한 인구 조사 기록부가 작성되었다. 신하들의 영지에서 소하 1개는 800 체베르티를, 교회 및 수도원 소유지에서는 600 체베르티를 의미했으며, 즉 더 높은 세금이 부과되었다. 당시 체베르티 또는 체티라고 불린 것은 호밀 1 체베르티(150 리터)를 파종할 수 있는 면적을 가리켰다; 1체트베르는 데시티나의 절반에 해당했다(1데시티나 = 1.9헥타르); 토양 품질에 따라 400~1,000체트베르가 1소하를 구성했으며, 토양은 ‘비옥한’, ‘보통’, ‘불모’의 세 가지 종류로 구분되었다. 소하(соха)는 17세기 20년대 말까지 모스크바 국가에서 과세(포소슈나야 포다티)의 기본 단위를 이루었다. 이 제도는 16세기 중반, 군인들에게 영지를 분배하는 절차가 변경되었을 때(1556년 법전) 생겨났다. 관련 자료는 『연대기: PSRL』 13권에 수록되어 있다. 268–269쪽. 참조: 보로딘 A. 『1556년 복무에 관한 법전』, 『S. F. 플라토노프 기념 논문집』(1922). 143–153쪽. 지적 조사서(“소슈노예 피스모”)에 대한 포괄적인 연구는 다음 저작에 수록되어 있다: 베셀로프스키 S. 경작지 명부. 2권 (1915–1916), 참조: 1. 97쪽; 2. 348, 363쪽 및 그 이후. 또한: 니키츠키 A. 고대 루스의 측정 단위에 관한 문제, 『지리·역사·자연과학 학회지』 1894. 4. 414–415쪽; 로즈코프. 『쟁기』, 『그라나트 백과사전』 40. 3 (1925). 275쪽; 라포-다니레프스키 A. 『모스크바 국가의 직접 과세 조직』(1890). 220, 229–233쪽; 밀류코프 P. 『모스크바 국가의 재정사상 논쟁적인 문제들』(1892). 35–76쪽 (이 저작에서는 라포-다니레프스키의 주장이 비판을 받는다). 역사적 자료로서의 피스코프 책에 대해서는 로즈코프. 『모스크바 루스의 농업』(1899). 221–231쪽; 카우프만 A. 『역사경제학 연구에서의 통계적 방법 문제에 관하여. 역사적 자료로서의 피스초브 책 활용 문제에 관하여. 1. 1』(1913). 10–39쪽; 그네부셰프 A. 모스크바 국가의 피스초브 책 처리 시 통계적 방법, 『새로운 역사 저널』 2 (1914). 제3호. 16쪽 이하. 연구 결과에 대한 훌륭한 간략한 개요는 다음 책에 실려 있다: 야코블레프 A. 병사 징집 명령 (1917). 제1장.

[424] 다음 단행본을 참조하라: 플라토노프 S. F. 『이반 그로즈니』(1923. 베를린판 1924), 여기서 플라토노프는 서문에서 이반 4세에 관한 역사 서술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제시하고, 오랜 연구를 바탕으로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이반의 인격에 대한 자신만의 해석을 제시한다. 제4장에서는 오프리치나 제도의 기원을 다각도로 연구하고 있다. 또한 다음을 참조하라: 플라토노프, 『에세이』(1899) 및 동 저자, 『러시아사』(1927), 157쪽; 그리고 주로 플라토노프의 연구에 의존하고 있는 슈트흘린 K., 1권, 270–278쪽. 클류체프스키의 『러시아사』(Geschichte Russlands. 2)에 나오는 오프리치니나의 묘사와 특징은, 플라토노프와 그의 제자들이 입증했듯이, 만족스러운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또한 최근 영어로 출간된 비퍼 V.의 『이반 그로즈니』(1922)를 참조할 것. 이반 4세와 오프리치나에 관한 거의 모든 문헌을 반영한 I. 부도브니크의 저서도 언급할 수 있다.

[425]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류바브스키 M. 『16세기 말까지의 고대 러시아 역사 강의』 제3판 (1918). 255–270쪽; 로즈데스트벤스키 S. 『모스크바 국가의 신하 토지 소유제』 (1897).

[426] 플라토노프. 『이반 그로즈니』(1924). 116쪽. 위기의 일반적인 원인과 전개 과정에 대해서는: 같은 책. 117–127쪽; 그레코프. 『유리예프의 날』. 75쪽, 저자는 리보니아 전쟁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클류체프스키. 『보야르 두마』(제5판). 305쪽 및 이후; 16세기 후반 모스크바 국가의 사회·경제적 관계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플라토노프의 『에세이』를 참고할 것을 권장한다; 그 외에도: 로즈코프. 『농업』(1899), 이 책에서는 농업 구조의 거의 모든 측면과 위기의 원인이 연구되어 있다.

[427] 1391년, 성 세르기우스가 입적하기 직전, 수도원은 솔리가리치 현에 있는 소금 광산을 기증받았다. AJU 1. 제63호. 15세기 중반, 수도원은 이미 그곳에 세 곳의 소금 정제소를 보유하고 있었다. AAE. 1. 제52호. 또한, 대공 디미트리(1363–1389)가 수도원에 하사한 불소송 증서가 존재하는데, 이는 수도원이 이미 토지 소유권을 가지고 있었음을 입증한다. 고르스키. 『설명』. 1 (1890). 210쪽.

[428] 니콘의 비교적 긴 원장 재임 기간 동안 수도원은 하사 및 매입을 통해 24개의 소유지를 확보했다. 같은 책. 211–212쪽. 로즈코프. 앞의 저서. 405쪽. 토지 소유에 관한 가장 오래된 문서는 1414–15년에 속한다. AAE. 1. № 19.

[429] 로즈코프. 앞의 저서. 377, 402, 405, 410–415쪽. 1592–1594년의 목록에 따르면, 수도원은 142,999 체베르트의 경작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고티에. 《모스크바 외곽 지역》(1937). 116쪽; 그 외에도 휴경지, 숲, 어장 및 소금 가마가 있었다. 게다가 목록이 분실된 5개 우예즈드의 토지 또한 고려해야 한다. 수도원 땅에는 3,988개의 농민 가옥과 502개의 무자녀 가구가 있었다. 같은 책. 이 소유지 중 15세기에는 17.3%, 16세기에는 66.8%가 취득되었으며, 15.9%는 취득 시기가 불명이다. 로즈코프. 전게서, 406, 410–413쪽. 1432년부터 1633년까지 수도원은 새로운 토지 소유권을 취득하며 16,934루블을 지불했다. 고르스키. 전게서, 217쪽.

[430] 로즈코프. 앞의 저서, 132쪽. 디아코노프. 『에세이』(1898). 296쪽; 고티에. 앞의 저서, 332쪽.

[431] 같은 책, 329쪽. 1614–1616년의 조사 기록에 따르면, 경작되지 않은 토지는 54,604 체베르티였으나, 1624–1640년에는 34,980 체베르티에 불과하여, 즉 1592–1594년(당시 40,062 체베르티)보다 적었다. (같은 책, 116쪽). 농민 가구의 수도 증가했다: 1614–1616년(즉, 스무타 직후)에는 농민 가구가 623가구, 보빌 가구가 426가구에 불과했으나, 1624–1640년에는 이 수치가 각각 1,536가구와 1,199가구로 늘어났다. 같은 책.

[432] 보빌은 처음에는 자신의 땅이 없는 농민, 즉 무토지 농민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17세기에는 땅을 소유한 농민들도 매우 자주 보빌로 불렸다. 디아코노프. 『에세이』(1889). 218쪽 및 이후. 보빌을 농민 인구의 특별한 범주로 보는 문제는 러시아 농민사 역사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는 문제 중 하나이다. 참조: 슈마코프 S. 『러시아 법사의 모호한 점들』, 『ZhMNP』 1904. 4. 특히 206쪽; 베셀로프스키 S. 『소슈노예 피스모』. 2. 517쪽; 세르게예비치. 『고대사』. 3 (1903). 135–136, 467쪽. 스타셰프스키 E. 『미하일 페도로비치 차르 치세사에 관한 에세이』. 1 (1913). 47–49쪽; 그레코프 B. 『루시의 농민들』(1946). 734쪽. 또한 참조: 클류체프스키. 『러시아 농노제의 기원』, 『실험』 1권, 252쪽.

[433] 니콜스키. 키릴로-벨로제르스키 수도원. 1. 1 (1897). 부록 VIII-XXV.

[434] 루슈친스키. 앞의 저서. 139쪽. 당시 루블의 가치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클류체프스키. 『16~18세기 러시아 루블과 현재 루블의 비교』, 『강연집』 1884. 참조: 동 저자. 『러시아사』 2권, 337쪽.

[435] 트로이체-세르기예프 수도원의 경제사에 관한 가장 중요한 자료는 수도원 자체의 회계 장부(‘감시 장부’, ‘종합 장부’ 등)에 담겨 있으며, 『16~17세기 모스크바 국가의 사회경제사 유물』에 수록되어 있다. S. 베셀로프스키와 A. 야코블레프 편집. 1 (1929).

[436] 요시포보의 『성부들에 관한 전설』, 『LZAK』 2권, 82쪽.

[437] 이 수행 생활의 쇠퇴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N. 니콜스키의 저술에 수록되어 있다(제3장 및 제4장의 참고문헌 참조).

[438] 1397–1521년 기간에 대해 N. 니콜스키는 60건의 하사 및 41건의 토지 매입을 확인했다. 니콜스키. 1. 2 (1910). 6, 11쪽. 성 키릴로스의 매매 증서 (1427). A.Yu. 1. 제72호; 1430년. 동서. 제6호; 카시안 수도원장(1448–1468)이 어업권을 취득했다. 동서. 제73호; 필로페이 수도원장(1469)이 또 다른 어업권을 취득했다. 동서. 제74호. 1519년 – 토지가 딸린 여러 마을과 포친크(pochinok)를 매입. 같은 곳. 제77호. 1539년 – 여러 마을을 사브보-스토로제프스키 수도원에 매각. 같은 곳. 제80호. 수도원의 운영 장부를 보면 ‘영혼당 기부금’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바실리 3세(1505–1533) 재위 시절에는 1,000루블이 하사되었고, 이반 4세(1547–1584) 재위 시절에는 28,201루블, 17세기 1분기에는 5,444루블이 하사되었다. 니콜스키. 같은 책. 1. 2. 170쪽; 그 외에도 수많은 금, 은 및 기타 귀중한 물품들이 기증되었다. ‘사료 장부’, 『ORSA 기록』 1권 (1851). 46–139쪽.

[439] 니콜스키. 같은 책. 1. 1. 부록 XLII, LVI, LXXV, LXVII; 1. 2. XI-XIII. 그레코프. 『루시의 농민들』(1946). 605쪽; 1568년에 수도원은 드빈스키 우예즈드에서 소금 제조소와 어업권을 매입했다. 아유. 1. 제85호; 1577년에 소금 제조소 두 곳을 추가로 매입했다. 같은 책. 제88호 및 제98호; 1598년에 카르고폴 시의 토지를 매입했다. 같은 책. 제96호.

[440] AAE. 1. 제377호.

[441] AI. 1. 제163호.

[442] 로즈코프. 앞의 저서. 394, 391쪽; AAE. 1. 제285호.

[443] 스미르노프. 앞의 저서. 1 (1917). 111쪽; АИ. 3. № 61.

[444] 니콜스키. 같은 책. 1. 1. 부록 VIII-XXV; 1637년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AAE. 3. 제274호 및 AI. 3. 제198호. 여기서, 아마도 오류로 인해, 농민 가구는 2,101가구로만 집계되어 있으며, 경작지는 25,490 체베르트로 평가된다.

[445] 주요 출처: 야로슬라블 스파스키 수도원의 역사적 문서. 바흐라메예프 편집. 3권 (1896). 이 수도원의 경제에 대해서는 다음 논문에서 연구하였다: Zur Geschichte der Wirtschaft des Spasskij-Klosters in der Stadt Jaroslavl’ im 16. – 17. Jahrhundert (원고).

[446] PSRL. 1. 186, 190쪽; 10. 69쪽.

[447] 프레오브라젠스키 G. 『야로슬라블시의 수도원과 성당』(1901). 3, 7쪽; 마카리. 7. 171쪽; 클류체프스키. 『성인전』. 74쪽.

[448] 스트로예프. 『러시아 교회의 주교 및 수도원장 명단』(1877). 377쪽.

[449] AI. 1. 제3호, 제4호. OAMYU. 4. 제147호, 제149호, 제253호; AYU. 2. 제481호.

[450] AI. 1. 제10호; 2. 제13–15호.

[451] 같은 책. 2. 제19–21호.

[452] 같은 곳. 2. 제32, 33, 30, 31, 35, 26, 27, 28호.

[453] 1573년 10월 9일 및 1584년 10월 1일의 판결(AAE. 1. 제308호; SGGD. 1. 제208호)은 영혼의 안식을 위해 영지를 수도원에 기증하는 것을 금지하고, 이러한 종류의 교환을 장려했다. 심지어 1674년에도 수도원은 이. 프. 프론스키 공작과 자신들에게 매우 유리한 교환을 성사시켰다. 홀모고로프. 『러시아 십일조』(1891). 64쪽.

[454] 1627–1629년, 1629–1631년 기록. A.I. 3. 계산은 우리가 수행했다. 각 데샤티나당 약 20 코펜이 할당된다고 가정할 경우(클류체프스키. 『강좌』. 2 (1908). 366쪽)이라면, 수도원에는 937.14 데시나(!)의 초지가 있었다.

[455] 같은 책. 3. 130–252쪽, 253–255쪽. 계산은 우리가 수행했다.

[456] 당시 조세 문제로 인해 아들들 간의 농장 분할이 드물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러한 분할로 인한 농장 수 증가분은 기껏해야 10–15%에 불과할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새로 취득한 농장은 600개 이상이었다.

[457] 시브코프. 『토지 소유의 역사에 관하여』. 222쪽.

[458] 본 설명의 기초가 되는 것은 이오시포프 수도원의 풍부한 기록 자료를 바탕으로 한 K. 슈체페토프의 논문, 「16세기 말 이오시포-볼로콜람스크 수도원 영지 내 농업」, 『역사 기록』 18호 (1946)에 실린 글이다. 이 수도원은 모든 세금에서 면제되는 완전한 면세 특권장(타르한)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는 모든 조세 부담에서 해방시켜 줌으로써 수도원의 부를 축적하는 데 기여했다. 같은 책, 96쪽.

[459] 같은 책. 95쪽. 그중 대공과 차르로부터 10,031루블, 공작으로부터 4,389루블, 성직자(대주교 및 주교)로부터 7,195루블, 보야르와 신하들로부터 9,345루블을 받았다. 이반 4세 차르 혼자서도 7,000루블을 하사했는데, 그중 4,300루블은 오프리치니나에서 살해된 군수, 보야르, 공작, 귀족, 보야르의 자녀들, 그리고 유배 중에 사망한 모든 이들의 영혼을 기리는 헌금이었습니다. 이반 차르의 아들인 테오도르 차르는 수도원에 1,035루블을 하사했고, 보리스 차르는 800루블, 이리나 차리차는 500루블을 하사했는데, 이 모든 것은 고인의 명복을 빌기 위한 것이었다. 흥미롭게도 17세기에는 예전만큼 많은 기부금이 수도원으로 몰려들지 않았는데, 이는 우리 생각에 이 수도원이 이전 세기만큼 거대한 ‘민족적·교회적’ 역할을 더 이상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설명된다.

[460] 같은 책. 94쪽. 수도원 당국은 자금을 절약적으로 사용했다: 153건의 신규 취득 중 단 23건만이 매입된 것이었고, 12건은 교환되었으며, 118건은 고인의 명복을 빌기 위한 기부금으로 받은 것이었다.

[461] 같은 책. 96쪽. 게론티. 《볼로콜람스크 요시포프 수도원》. 46쪽. 트로이체-세르기예프 수도원은 1510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석조 성벽 축조에 착수할 수 있었는데, 이는 창건된 지 거의 200년이 지난 후였다. 고르스키. 《설명서》. 7쪽. 1592년 요시포프 수도원은 매우 풍요로운 가축을 보유하고 있었다: 젖소 292마리, 송아지 62마리, 황소 117마리, 양 153마리; 마구간에는 말 385마리가 있었다. 슈체페토프. 앞의 저서. 134, 137쪽.

[462] 같은 책. 94, 115쪽.

[463] 로즈코프. 앞의 저서. 418쪽; 주로 영지는 봉신들로부터 예치금이나 매입을 통해 취득되었다. 차르는 수도원에 19개 마을을 하사했고, 개인들은 53개 마을을 기증했다. 같은 책. 421쪽.

[464] 슈체페토프. 앞의 저서. 96쪽. 마차 통행세와 스트렐츠의 곡물 징수는 모든 수도원에 의무적으로 부과되었다. 타르한은 이오시포프 수도원이 관세 없이 다양한 식량 및 기타 상품—빵, 소금(!), 생선, 버터, 식물성 기름, 꿀, 헝겊, 모피 등—을 구매하여 수도원으로 반입하는 것을 허용했다. 같은 책. 97쪽.

[465] 같은 책.

[466] 같은 책. 99쪽; 로즈코프. 앞의 저서. 146쪽.

[467] 슈체페토프. 앞의 저서. 100–102쪽. 이러한 경제 운영 체계의 변화는 다른 수도원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로즈코프. 앞의 저서. 132쪽; 17세기에 대해서는 고티에. 앞의 저서 (1937). 329, 251쪽을 참조. 관리 수도사(마을 장로)나 평신도 관리인이 반드시 작성해야 했던 각종 농사 장부(‘파종 장부’, ‘탈곡 장부’ 등)는 매우 정확하며, 여기에는 곡물의 모든 측정 단위와 건초의 모든 단위가 기록되었고; 농민들의 조세도 마찬가지로 기록되었으며, 농민이 빚진 각 그로슈에 대해서는 수확기나 재차 대출을 받을 때 그에게 상기시켜 주었다. 코리야젬스키, 볼딘스키, 안토니예프-시이스키 등 다른 수도원들의 경리 장부들도 이와 같은 특성을 보인다.

[468] 참조: RIB. 35 (1917). № 263; 디아코노프. 『에세이』(1898). 49, 52, 54, 59쪽; 클류체프스키. 『강좌』. 2. 342쪽 이하, 326쪽.

[469] 니콜스키. 앞의 저서 1. 1. 부록 VIII.

[470] 페레티얏코비치의 초기 저작(1877년 및 1882년)에서는 수도원 소유지에 대해 그다지 상세히 다루지 않았다. 이후에 출판된 자료들을 통해 수도원 경제에 대해 보다 완전한 이해를 얻을 수 있다.

[471] 로즈코프. 앞의 저서. 374쪽.

[472] 같은 책. 25쪽; 바실리예프 A. 『스비야즈스키 우예즈의 토지 소유사에 관하여』, 『이즈브. 카즈.』 12 (1894). 605, 608쪽. 참조: 페레티아토비치. 앞의 저서 (1877). 21쪽. 스비야즈스크에 있는 또 다른 수도원인 우스펜스키 수도원은 소금에 대한 관세 면제 무역 덕분에 막대한 수입을 올렸다. AAE. 1. 382쪽. 트로이체-세르게이예프 수도원 역시 포니조비예에 영지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1593~94년에 카잔 우예즈드 내에만 경작지 1,275 데시아틴, 산림 3,125 데시아틴, 방목지 41 데시아틴을 보유하고 있었다. 로즈코프. 앞서 언급한 저서에 따르면, 카잔의 지란토프 수도원은 1552년부터 1598년까지 그 소유지를 상당히 확장했다. 흥미로운 점은 수도원의 소유지가 이전에 카잔의 관료들에게 영지로 할당되었던 방치된 땅을 능숙하게 경작함으로써 늘어났다는 사실이다. 질란토프 수도원의 문서. 270, 278, 281–285쪽; A.I. 1. № 191; 리빈스키. 카잔 시의 간략한 역사. 1 (1898). 48쪽.

[473] 테튜샤에 있는 포크로프스키 수도원이 농민들과 체결한 이러한 계약서의 예는 다음을 참조하라: 『문서집』. S. 멜니코프 편집. 1 (1859). 제27호, 31–37쪽.

[474] 예를 들어: RIB. 14. 제275호 또는 제302호; 참조: 디아코노프. 『고대 루스의 사회 및 국가 체제에 관한 고찰』(1912. 제4판). 105쪽.

[475] 북부 지역 등을 비롯한 다양한 순번 기록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보골로프스키. 『젬스키 자치』. 1; 디아코노프. 『논고』(1898). 163–165쪽. 또한 참조: 그레코프. 『루시의 농민들』. 725쪽. 그리고: 『세금 부담 인구의 역사와 관련된 문서들』. M. 디아코노프 편집 (1897). 1.

[476] 클류체프스키가 주장하듯이. 『강좌』 1 (1906). 24쪽.

[477] 스무타의 여파는 포니조비야의 서부 우예즈드, 즉 아르자마스, 알라티르, 스비야즈에서 더 크게 나타났습니다. 플라토노프. 『에세이』. 329, 513쪽; 또한 미트로폴리트 예르모겐의 서한(1606년 12월 24일자)을 참조하십시오: ААЭ. 2. 제61호 및 군수 G. G. 푸슈킨의 서한. 같은 책. 제160호; 또한: ААЭ. 2. 제104, 144, 149, 156호; АИ. 2. 제112, 113, 141, 145호.

[478]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참조: 베셀로프스키 S. 『미하일 페오도로비치 치세 초기 7차례의 질문세 및 피아틴세 징수』, 『논문집』(1909). 1. 150쪽; 고티에. 『모스크바 외곽 지역』(1906). 213, 230쪽; 니콜스키. 전게서 1. 2 (1910). 261, 266쪽. ‘스무타’ 기간 동안에는 심지어 다섯 개의 새로운 수도원이 설립되기도 했다: 즈베린스키. 3. 제1449, 2154, 1249호; 2. 제1110호; 포크로프스키. 수도원의 역사에 관하여. 7쪽. 카잔 교구의 토지 소유지가 지속적으로 증가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1623년의 목록을 통해 1603년부터 1623년까지 이 소유지가 얼마나 늘어났는지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1612년에 카잔 대주교 예프레무(1606–1613)는 “카잔 국가 전역(!)의 판결에 따라” 새로운 소유지를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이 주목할 만한 문서는 『체니야』 1896, 제3권, 제5부, 9쪽에서 확인할 수 있다.

[479] 이 정보는 우리가 발췌한 것으로, 『포크로프스키. 1764년 이전 카잔 수도원의 역사에 관하여』, 『이즈브. 카즈.』 18 (1902). 부록 I-XXV에 수록된 “자료”를 참조하라.

[480] 스미르노프. 『모스크바 국가의 도시들』. 1. 2 (1919). 298, 290쪽.

[481] 1646년 인구 조사 기록부(누락된 부분 있음), 니콜스키. 앞의 저서 1. 1 (1897). 부록 IV-XXV. 카잔 우예즈드에 대해서는 5개 수도원에 대한 자료만 수록되어 있다.

[482] 자료는 우리가 추출한 것으로, 포크로프스키, 앞의 저서, 부록 X-XXV의 「자료」를 참조하라.

[483] 같은 책. 부록 I-XXV.

[484] 1696년, 이미 표트르 대제 치하에서 교구 주교좌와 수도원들은 아조프 원정을 위한 배를 자비로 건조해야 했다. 엘라긴 S. 『러시아 해군의 역사: 아조프 시대』(1864). 51쪽. 성직자들의 토지는 17개의 ‘쿰판스트’로 나뉘었으며, 각 쿰판스트에는 8,000가구의 농민 가구가 속해 있었다. 카잔 대주교는 1,126가구의 농민 가구로 구성된 별도의 쿰판스트를 이루었으며, 9,800루블을 납부했다. 같은 책. 54, 61쪽. 이를 위해 농민 가구의 집계가 이루어졌다. 포니조비에 대한 이 조사에서는 4개의 수도원이 집계되었다. 1696년의 가구 수를 1646년과 1678년의 자료와 비교해 보자.

[485] 밀류틴. 앞의 저서, 『체테니야』 1860. 3. 132, 142–143, 151쪽.

[486] 자브얄로프. 《예카테리나 2세 치하의 교회 소유지에 관한 문제》(1900). 246–347쪽. 시노드 사무국은 1744년의 자료를 활용했는데, 이는 두 인구 조사 자료를 대조해 보면 알 수 있다.

[487] Clemens Adam, 앞의 책, 152쪽; Horsey, 『16세기 말의 러시아』. 런던 (하클리트 협회 간행). 인용 출처: 마카리. 8. 229쪽; Petrejus. 『Regni Muschkowitici Sciographia』. 스톡홀름, 1615년 (독일어판: Historien und Bericht von dem Großfürstentum Muschkow durch Petrum Petrejum de Erlesunda. 라이프치히, 1620년; 러시아어판: 모스크바 대공국에 관한 역사, 『Chteniya』 1867년, 제2권, 418쪽).

[488] 플라토노프. 『강의』(1915, 제9판). 165쪽. 소규모 토지 소유지, 주로 소규모 영지는 수도원에 매각되거나 저당으로 맡겨졌다. 베셀로프스키. 『14~16세기 북동부 루스의 마을과 농촌』(1936). 56쪽. 다수의 문서를 참조: 《트베리 문서집》. S. 슈마코프 편집. 1 (1896) 및 《우글리츠 문서집》(1899); 이러한 과정은 17세기에도 계속되었다.

[489] 로즈코프. 앞의 저서. 399, 400쪽. 17세기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고티에. 앞의 저서 (1937). 251–255, 329, 351쪽.

[490] 로즈코프. 앞의 저서. 385쪽.

[491] 보고슬로프스키. 앞의 저서. 65–77쪽.

[492] 그네부셰프. 앞의 저서; 바가레이. 앞의 저서.

[493]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참조하라: 스미르노프. 앞의 저서 1 (1917). 108–134쪽.

[494] 같은 책. 170–231쪽.

[495] 이 목록은 다음에서 참조: 니콜스키. 앞의 저서 1. 1 (1897). 부록 VII-XXV.

[496] 1661년 명부(170년 명부)는: ORSA 회보. 2 (1861). 401–422쪽; 348개 수도원의 경우 100가구 미만이었습니다.

[497] 시브코프. 앞의 저서. 221–225쪽.

[498] 1480년 모스크바 국가의 인구는 약 210만 명이었으며, 100년 후인 16세기 말에는 430만 명, 17세기 말에는 약 1,260만 명에 달했다. 포크로프스키. 인구, 『ES』 40. 밀류코프는 16세기 중반 인구를 1,000만~1,150만 명, 17세기 말에는 1,700만~1,800만 명으로 추산한다. 밀류코프. 『러시아 문화사 에세이』 1 (6판). 26쪽.

[499] 일부 성인들의 행적 기록은 경제적인 걱정거리가 수도원 생활의 전반적인 구조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를 전하고 있다. 예를 들어, 수도사 인노켄티우스가 파프누티이 보로프스키의 생애 마지막 날들에 대해 전한 이야기에서, 인노켄티우스는 파프누티이가 임종 시에도 일상적인 걱정거리로 바빴다고 기록하고 있다. 클류체프스키. 『성인행적록』. 437쪽.

[500] 이미 언급된 세르게예비치(3), 블라디미르스키-부다노프, 파블로프-실반스키의 저서 외에도 다음을 참조하라: 자고스킨 N. 『모스크바 국가의 법사』(1877). 디아코노프 M. 『고대 루스의 사회 및 국가 체제에 관한 고찰』(1908, 제2판 1912); 벨야예프 이. 『모스크바 국가의 토지 소유 형태』, 『브레멘니크』 11호 (오래되었으나 가치 있는 연구); 블루멘펠트. 『고대 루스의 토지 소유 형태』(1884); 로즈데스트벤스키. 『16세기 모스크바 국가의 봉직 토지 소유』(1897); 베셀로프스키 S. ‘보치나 제도의 기원에 관한 문제’ (1926); 동 저자. 『16세기 후반 모스크바 루시의 수도원 토지 소유』, 『역사 기록』 10 (1941) (안타깝게도 이 저작을 입수할 수 없음).

[501] 특히 다음을 참조: 베셀로프스키. 『문제에 관하여』(1926).

[502] “벨리(белый)”라는 용어는 명령어에서 세금을 내지 않는 사람을 의미했으며, “벨리티(обелить)”는 세금에서 면제한다는 뜻이었다. “벨로포메스트츠(белопоместец)”는 국가에 세금을 내지 않는 “벨리” 땅의 소유자를 가리킨다. 이러한 토지를 소유할 권리는 국가에 봉사할 의무와 연결되어 있었다. ‘티아글리’ 사람들은 ‘벨리’ 땅이나 국왕의 땅에 살았으며, 두 땅을 모두 사용할 권리에 대해 세금을 납부했다. 따라서 ‘티아글리’ 사람들의 토지에 대한 권리는 타인의 땅을 사용할 권리에 불과했다. 군주의 땅에 거주하며 도시 사회와 농촌 공동체를 구성하던 티아글리 사람들은 ‘검은 사람들’이라 불렸다. 이들은 주로 국가 소속 농민과 도시 주민들이었다. 또한 다음과 같은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하들의 땅이나 교회 소유의 땅에 거주하며 국가에 일정한 의무를 지고 있던 농민들은, 관용어에서 ‘검은 사람들’이라 불리지 않고, 그들이 거주하고 일하던 땅의 성격에 따라 ‘지주 소속 사람들’ 또는 ‘수도원 소속 사람들’로 불렸다. 이 범주의 농민들에게 있어 토지 소유주는 의무와 관련하여 그들과 국가 사이의 중개자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면소 증서’에 근거하여 사법권도 행사했다. 반면 ‘검은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통해 국가에 대한 의무를 이행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디아코노프 M.의 『에세이』(1908)를 참조하는 것이 가장 좋다. ‘황제의 흑인 땅’은 《명령서》 용어로, 세금을 부담하는 흑인들이 이용하던 땅을 가리켰으며, ‘황제의 땅’이라는 표현은 국가가 신하들에게 복무 기간 동안 그리고 복무 성격에 따라 영지로 할당해 주던 땅을 지칭했다. 참조: 로즈데스트벤스키. 앞의 저서. 그러나 모든 땅은 항상 ‘고수다레바 땅’, 즉 차르와 대공의 땅으로 남아 있었다. 예를 들어, 1550년 법전 § 84를 참조하라. A.I. 1. № 155. 모스크바 군주의 신하들의 법적 인식과 법적 문서의 용어에서 볼 때, 모든 토지의 최고 소유자는 국가나 차르였다. 여기서 고대 러시아의 다음과 같은 표현이 유래했다. “땅은 차르의 것이나, 나는 그 주인이다”, “땅은 하느님과 차르, 대공의 것이나, 밭과 수확물은 우리의 것이다”.

[503]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보고슬로프스키. 앞의 저서 1. 91쪽 및 그 이후. 그러한 ‘검은 수도원’ 중 하나는, 예를 들어, 첼모고르스카야 푸스티니였다. 1676년의 수도원장 보고에서 알 수 있듯이, 이 푸스티니에는 농민이 없었으며; 수도원 토지는 일부는 임대되었고, 일부는 수도사들과 수확철에 고용된 일꾼들이 직접 경작했다; 수도원의 모든 소규모 소유지는 ‘검은 땅’이었다. RIB. 14. 442쪽.

[504] 보고슬로프스키. 앞의 저서. 93, 96쪽. ‘야생 들판’이라 불리던 남부 지역에서는 모든 토지가 형식상 차르의 소유(국왕의 땅)였으나, 실제로는 이곳의 모든 땅이 신하들 사이에 분배되었으며, 새로 설립된 수도원들은 이곳에서 매우 적은 양의 땅만을 할당받았다. 참조: 네크라소프 N. 『16세기 리아잔 지방의 역사에 관한 고찰』, 『ZhMNP』 1914. 4; 벨로체르코프스키 G. 『16세기와 17세기의 툴라와 툴라 우예즈드』, 『키예프 대학』 1914–1915. 비록 그곳에 비옥한 토지는 없었지만, 농민과 수도원,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군인들까지 국가에 세금을 납부했다. 도브로클론스키 A. 『솔로치나 수도원』, 『체테니야』. 1888. 1. 48, 61, 62–68쪽.

[505] 고르스키. 『설명서』. 1. 324쪽. 면소 특권장에 중요한 변경이 이루어졌다: 이전에는 (비종교적 사안에서) 차르의 관할을 받던 수도원 원장이 이제 총대주교의 관할을 받게 되었다. 보리스 차르 시대에 수도원 영지에 거주하던 농민들은 몇 가지 새로운 특권을 얻었다. 같은 책. 225쪽.

[506] 스미르노프. 앞의 저서. 96쪽.

[507] 농민들의 경제적 상황이 매우 양호하여 수도원에 대한 채무가 전혀 기록되지 않은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오시포-볼로콜람스크 수도원의 농민들도 그러한 처지였으며, 특히 1573–1581년 모스크바 중심부를 뒤흔든 농업 위기가 사방에서 맹위를 떨치던 시기에 그러했다; 주목할 점은, 계약 기간이 만료되어 빚 없이 수도원 땅을 떠나는 농민들에게 수도원 당국이 퇴소금을 지급했다는 사실이다. 16세기 말 볼로콜람스크 수도원의 수입·지출 장부, 『역사 기록물』 2권, 72, 76, 83쪽 등.

[508] 참조: 벨야예프, 이. 『러시아의 농민』(1860); 디아코노프, M. 『에세이』(1898); 그레코프, B. 『러시아의 농민』(1946). 농노권의 발생에 관하여: 그레코프. 앞의 책; 엥겔만 I. 『러시아의 농노제』(1884); 클류체프스키 V. 『러시아 농노권의 기원』, 『러시아 월간지』 1885. 10호, 그리고 『실험과 연구』(1918)에 수록; 동 저자. 『러시아사』. 2. 제17장; 데볼스키 N. 소유 농민의 농노화 문제에 관하여, 『지리·역사·자연과학 저널』 1895. 11호; 벨야예프 P. 고대 러시아의 영주제와 농민 농노화, 『지리·역사·자연과학 저널』 1916. 8–9호.

[509] 디야코노프. 『에세이』(1898). 16–39쪽. 그레코프. 앞의 저서. 630, 641쪽, 여기서 그는 디아코노프의 일부 주장을 보완하고 있다; 또한: 스미르노프 이. ‘오래 거주한 주민들에 관한 문제’, 『역사 문제』. 1946. 8–9 (이 논문은 필자가 입수할 수 없음).

[510] 디아코노프. 앞의 책; 니콜스키. 앞의 저서 1, 2. 37쪽 및 그 이후; 슈체페토프. 앞의 저서. 97쪽. 이미 15세기에 하사장(賜地狀)에는 나중에 수도원 토지에 정착한 농민들과 구별되는 ‘스타로질체’가 언급된다. 예를 들어 다음을 참조하라: AAE. 1. 제20, 21, 51, 53호; 또한 제5, 34, 35호. 키프리아노스 대주교의 서한(1391)은 농민들이 수도원을 위해 수행해야 했던 노동에 대해 명확한 이해를 제공한다. AAE. 1. 제11호.

[511] 우리는 16세기와 17세기의 여러 문서를 보유하고 있는데, 이 문서들은 ‘검은 마을’과 관료들의 영지에서 농민들이 도망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AAE. 1. 제234호 (1552). 제258호 (1561); 아유. 제177, 178, 183호 (16세기); 제189, 194, 196호 (17세기). 트로이체-세르기예프 수도원에 관해: 수납 장부 (1614), 『사회·경제사 유물』. 1 (1929); 요시포프 수도원에 관하여: 수입·지출 장부, 『역사 기록물』 2. 70, 74, 83, 84쪽.

[512] 위임장 예시: 아유(АЮ). 제177, 178호 (16세기, 비아지츠키 수도원 관련); 리브(РИБ). 12. 458, 1366, 1468쪽 (프릴루츠키 수도원 관련); 아크티(Акты). 멜니코프 편집. 1. 제21, 23, 26, 27호 외 (포니조비예의 포크로프스키 수도원 자료). 각 수도원의 농장에서는 지역별 영지에 따라 농민들이 서로 다른 의무를 수행했는데, 이는 현지 상황에 따라 달랐으며, 예를 들어 다음을 참조: AAE. 1. 제348호 (트로이체-세르기예프 수도원). 도브로클론스키. 앞의 저서, 61, 69–85쪽; 디아코노프. 『에세이』(1898). 131, 163쪽. 회계 장부: 요시포바 수도원, 『역사 아카이브』 2; 볼딘스키 수도원, 『RIB』 37; 코르닐리예바-코멜스키 수도원, 『LZAK』 5 (1871); 코리야젬스키 수도원 문서, 『LZAK』 23 (1910).

[513] RIB. 12. 198쪽 (1634), 201쪽 (1637); AI. 3. 제240호 (1627). 디아코노프. 『에세이』(1898). 147쪽 이하; 그레코프. 『루시의 농민들』. 694쪽.

[514] 고대 러시아어 단어 ‘보빌’은 독일어로 ‘Unglückliche’(‘불행한’)로 번역하며, 문서에서는 이 농민들을 종종 ‘불운한 자들’이라고 부른다. 참조: 디아코노프. 에세이 (1898). 206–240쪽; 보고슬로프스키. 앞의 저서 1. 136쪽.

[515] 또한 참조: 로즈데스트벤스키 S. 『16~17세기 모스크바 국가의 농촌 인구』, 『에세이로 본 러시아 역사』. M. 도브나르-자폴스키 편집. 3 (1912). 41–44쪽.

[516] 각주 503을 참조하고, 또한 다음 저작들을 참조: 오디네츠 D. 『모스크바 국가의 소유 농민들이 잃어버린 전출권』, 『P. N. 밀류코프를 기리는 논문집』. 파리, 1929; 미하일롭 P. 『스타로질스투프 제도와 농노권』, 『ZhMNP』. 1912. 1; 동 저자. “토지 스타로질스투의 기원에 관한 문제.” 같은 책. 1910. 6.

[517] AAE. 1. 제48호; DAI. 1. 제198호. 러시아 농민 달력에서 유르예프의 날의 역할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칼린스키 I. 『러시아의 교회-민속 달력』, 『지리학회 민족지학 부문 회보』 1 (1877). 325쪽.

[518] AI. 1. 제59호; AAE. 1. 제64, 83호.

[519] 실제 관행에서 이 달력으로부터 벗어난 사례에 대해서는, 예를 들어: 아유. 제186호 및 제290호를 참조하라.

[520] 스토글라프 (카잔판, 1862). 412–414쪽; АИ. 1. 165; ААЭ. 1. 제257호.

[521] AAE. 1. 제234호 (바즈키 및 셴쿠르스키 우예즈드 관련, 1552); AI. 1. 제193호 (아스트라한 트로이츠키 수도원 관련, 1575); 디아코노프. 에세이 (1898). 6 (스비야즈스크의 보고로디츠키 수도원에 관한 기록, 1576). 이 문제에 관한 자료는 16세기 세금 장부에도 수록되어 있다. 참조: 네볼린. 『피아티나와 포고스타에 대하여』. 167쪽.

[522] 데볼스키. 앞의 저서, 『쥴리안-마르틴-노비』 1895. 1. 99쪽; 그레코프. 『유리예프의 날』. 78쪽; 동 저자. 『노브고로드 소피아 궁전의 경제에 관한 고찰』, 『LZAK』 34 (1927). 113쪽; 오디네츠. 앞의 저서. 205쪽.

[523] RIB. 14. 135쪽. 17세기에 대해서는 이러한 소송에 관한 문서가 다수 존재한다: AI. 3. 제286호 (1621). 제160호 (1629); AAE. 3. 제141호 (1623); RIB. 35. 제263호 (1616). 또한 참조: 디아코노프. 『에세이』(1898). 52–59쪽.

[524] 이 칙령은 이전에 농민을 토지에 최종적으로 결속시키고 농노제를 확립한 시점으로 잘못 여겨져 왔다. 이 칙령은 원본이 보존되지 않아 후대의 문서를 바탕으로 재구성되었다. 참조: 블라디미르스키-부다노프. 앞의 저서. 139쪽.

[525] 같은 책, 139쪽; 로즈데스트벤스키. 앞의 저서, 『에세이로 보는 러시아 역사』 제3권, 63쪽. 1597년의 규정들은 이후 몇 년 동안 1601년 11월 28일, 1606년 2월 1일, 1607년 3월 9일자 새로운 칙령을 통해 재확인되고 보완되었다. 블라디미르스키-부다노프. 같은 책. 139쪽 및 그 이후; 클류체프스키. 『러시아의 역사』. 2권. 342–344쪽; 디아코노프. 『에세이』(1898). 49쪽.

[526] 도망친 농민에 대해서는 수도원 기록을 참조: 트로이츠코-세르게이예프 수도원의 종합 기록, 『16~17세기 모스크바 국가의 사회경제사 유물』 1권 (1929); ААЭ. 3. № 66 (1615); AMG. 2. 제143호. 참조: 로즈데스트벤스키. 『17세기 모스크바 국가에서 도망친 농민을 수색하기 위한 ‘정해진 해’의 역사』, 『V. O. 클류체프스키 기념 논문집』(1909). 152–154쪽.

[527] AMG. 2. 제143호.

[528] 수도원 하인들과는 구별해야 할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문서상 ‘수도원 사람들’로 불리기는 했지만 전혀 하인이 아니었으며, 수도원 농장 관리에 종사했고 주로 보야르의 자제나 귀족 출신이었다. 이들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영지 관리 체계를 설명할 때 다루겠다.

[529] 특히 게론티우스 대주교의 서한에는 수도원 하인들에 대해 많이 언급되어 있다. AAE. 1. 제113호 (1478).

[530] 아르세니이, 대수도원장. 논문, 『학술 논문집』 1867. 3; 도브로클론스키. 지정 저작. 11–12쪽; 야로슬라블 스파스스키 수도원의 역사적 문서. 3. 77쪽. 티호미로프 M. 『16세기 영지를 소유한 수도원』, 『역사 기록』 3. 149–152쪽 (요시포프 수도원에 관하여).

[531] 주로 다음을 참조: 디아코노프. 『에세이』(1898). 295–321쪽 (참고문헌 포함). 그레코프. 『루시의 농민들』. 695쪽 및 그 이후.

[532] 디아코노프의 저서에서 새끼에 관한 방대한 참고문헌 목록을 참조. 앞의 저서, 295, 298쪽; 도브로클론스키. 앞의 저서, 33쪽; 페레티아트코비치. 『17세기와 18세기의 볼가 강 유역』(1882). 93, 117쪽.

[533] 1547년 요시포프 수도원에 대한 기록: 그레코프. 앞의 저서. 695쪽; 1576년 트로이체-세르게이예프 수도원에 대한 기록: 모스크바 국가의 세금 장부. 1. 제1권. 68, 73, 82, 76, 611, 642쪽 등.

[534] 그레코프. 앞의 저서, 695, 710쪽; 디아코노프. 『에세이』(1898). 303쪽 – 거의 유사함.

[535] 그레코프. 앞의 저서. 711쪽.

[536] AAE. 3. 제262호. 차르의 질책은 정당했다: 수도원 규약에 따르면 남자 아이들은 수도원에서 살거나 머물러서는 안 된다. 스토글라프는 이러한 관행을 엄격히 금지했다: 스토글라프. 카잔판. 229, 233, 236쪽. 트로이체-세르기예프 수도원에 있던 고아들(그 수가 600명에 달했다)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아르세니. 앞의 저서. 8, 56쪽.

[537] 디아코노프. 『에세이』(1898). 333쪽.

[538] 같은 책. 298, 303, 306쪽; 도브로클론스키. 앞의 저서. 33쪽.

[539] 티호미로프. 앞의 저서. 151쪽.

[540] 스파스키 수도원의 역사적 문서 3. 77–85쪽; 니콜스키. 앞의 저서 1, 2. 부록 “D”.

[541] 도브로클론스키. 앞의 저서. 74쪽.

[542] 볼딘스키 수도원의 수입·지출 장부, 『RIB』 37. 20–22, 36–38, 43–46, 64–69쪽 등.

[543] 클류체프스키. 벨로모르스크 지방 솔로베츠키 수도원의 경제 활동, 『모스크바 대학 소식』 1866–67. 제7호. 574쪽; 또한 『연구 시도』(1913)에 수록.

[544] 사비치. 『주요 사항』. 55쪽.

[545] 예를 들어, 랴잔 현에 있는 솔로치ンス키 수도원: 도브로클론스키. 앞의 저서, 89–93쪽; 또는 스몰렌스크 지방에 있는 볼딘스키 수도원: RIB. 37. 188, 192, 219, 240쪽 등, 그리고 니즈니 노브고로드의 블라고베셴스키 수도원: RIB. 2. 제51호; 참조: 코리야젬스키 수도원 문서, 수록: LZAK. 23 (문서 설명만 수록).

[546] 스토로제프. 『볼로그다 지역의 수도원 토지 소유』, 『V. O. 클류체프스키 기념 논문집』(1909). 362, 366쪽. 그곳에는 멀리 떨어진 수도원들도 자신들의 상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547] 이미 15세기 말에 키릴로프 수도원은 매년 볼로그다에서 적어도 2,400푸드의 곡물을 매입했다. AAE. 1. 제126호, 제283호 참조; 니콜스키. 앞의 저서. 1. 1. 「D」편. 248쪽. 수도원은 여러 도시에 소금을 판매하는 상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AAE. 1. 제378호; 1566년에는 드미트로프 시의 한 상점에서만 수도원이 최대 10,000푸드의 소금을 판매했다. 같은 책. 제271호; 참조: 마카리. 8. 제2판. 8. 267쪽.

[548] 문서 모음집(AI, AAE, SGGD)에는 이 문제에 관한 방대한 자료가 수록되어 있다; 참조: 헨슬러의 수도원 무역 활동에 대한 논평, 『치테니야』. 1874. 4. 24쪽. 아스트라한에서의 수도원 무역에 대해서는: AI. 1. 제193호; 또한: 쿨리셔. 『러시아 경제사』. 2 (1925). 324쪽. 예를 들어, 트로이체-세르기예프 수도원은 자체 곡물을 수도원 제분소에서 제분한 밀가루를 아스트라한으로 수출했다. 고티에. 앞의 저서. 537쪽.

[549] 마카리. 제2판. 7. 41쪽.

[550] 클류체프스키. 『솔로베츠키 수도원의 경제 활동』, 『실험과 연구』 수록. 11쪽; 사비치. 『솔로베츠키 영지』(1927). 148쪽. 수도원의 토지 소유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보고슬로프스키. 앞의 저서. 1권. 73–75쪽.

[551] 클류체프스키. 앞의 저서, 『실험』. 36쪽 (『모스크바 대학 학보』 7권, 574쪽). 수도원의 소금 무역 규모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자료가 있다: 1588년에 볼로그다로 81,201 푸드가, 1598년에는 – 92,990 푸드, 1608년에는 123,137 푸드가 운송되었다. 사비치. 앞의 저서, 148쪽. 볼로그다에서 수도원은 다양한 곡물을 구입했으며, 이 곡물들은 동일한 선박을 통해 수도원으로 운반되었다. 예를 들어, 1608년에 수도원은 자체 소비용으로 호밀 15,000 체베르를 매입했는데, 당시 수도원에는 상근 근로자 827명과 계절 근로자 286명이 있었다. 같은 책. 110, 142, 154, 213, 221쪽.

[552] 같은 책. 167쪽.

[553] 예로페이, 대수도원장. 《오를로프 주 브랸스크 스벤스키 우스펜스키 수도원》(1866). 47쪽.

[554] 이 문제에 관한 많은 자료가 기부 장부에 수록되어 있으며, 예를 들어 다음을 참조하라: 안토니예프 시이 수도원의 기부 장부. A. 이즈유모프 편집, 『체테니야』 1917년 1호. 이 문제에 관한 자료는 수도원 경비 장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555] 로즈데스트벤스키. 『종교적 토지 소유』. 87쪽; 파블로프. 『세속화에 관한 고찰』. 150쪽.

[556] 아브라아미 팔리친은 훗날 트로이체-세르기예프 수도원의 유명한 케라르가 되었는데, 수도원에 입회할 때 자신의 마을과 예배서, 금을 기부했다. 슈마코프. 『소트니체』, 『체테니야』 1902. 2. 226쪽.

[557] 파블로프-실반스키. 『분봉제 러시아의 봉건주의』, 『저작집』 3권, 338쪽. 기부 기록에는 종종 “내가 생을 다할 때까지 그 영지에서 살겠다”는 문구가 등장한다. 참조: 로즈데스트벤스키. 『봉직 토지 소유』, 104–107쪽.

[558] 파블로프-실반스키. 앞의 저서, 389쪽; 로즈데스트벤스키. 앞의 저서, 107, 105쪽.

[559] 클류체프스키의 수도원 무역에 대한 견해 참조, 『보야르 두마』(1884). 288쪽.

[560] 제1차 전교회, 제17조; 제6차 전교회, 제10조 및 라오디키아 공의회, 제4조. 이 규정들은 모스크바 루스에서 알려져 있던 요한 스콜라스티쿠스의 『노모카논』에도 수록되어 있다. 1416년, 미트로폴리트 포티이(Фотий)는 프스코프 성직자들에게 서신을 보내 이 무분별한 행위를 엄중히 비난했다. A.I. 1. 제22호, 또한: 『스토글라프』. 카잔판. 345쪽; 1649년 법전. 제10장. 1727년, 성직자들은 대출 기간 만료 후 연 6%의 이자를 징수할 수 있도록 허가받았다. 밀류틴. 전집, 『체니야』 1859, 4, 101쪽. 이 허가는 1754년 5월 13일 칙령으로 재확인되었다. PSZ. 제10235호. 15~16세기의 수많은 문서에서 수도원과 수도사들이 직접 이자를 받았음이 드러난다. 참조: 아유(АЮ). 제15, 71, 232, 238, 241, 243, 245, 248, 255, 267호 등; DAI. 1, 제51, 55호.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Kyrios. 4 (1939). 29–38쪽의 필자 논문을 참조하라.

[561] 개별 사례: АЮ. 제234, 236, 237, 241호(세 건 모두 키릴로프 수도원 관련), 254호; АИ. 1. 제104, 106, 163호; DAI. 1. 제157호; AI. 3. 제138호; 5. 제32호 등.

[562] AAE. 2. 제42호 (1646); 4. 제26호 (1648); 다이. 1. 제21호, 제113호 등. 아유. 제108호. 1649년 법령(제16장, § 4–5)에서는 이러한 교환을 금지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563] RIB. 32. 제229호 (1567년, 코리야젬스키 수도원 관련) 또는 RIB. 35. 제470호 (1638년, 프릴루츠키 수도원 관련).

[564] 고대 러시아 교회 문헌에서 ‘스타르체’라는 단어의 매우 다양한 의미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 첫째, 스타르체라고 부를 때는 종종 성직 서품을 받지 않은, 즉 예로모나흐가 아닌 단순히 연로한 수도사를 가리켰다. 이러한 의미에서 ‘제3의 로마’인 모스크바에 관한 저서를 쓴 스타르체 필로페이에 대해 언급한다; 둘째, 소위 ‘성당 장로들’이라 불리는 수도사들을 스타레츠라고 칭했는데, 이들은 수도원장과 함께 수도원을 운영하며 특별한 직무를 수행한 수도사들이었다; 마지막으로, 수련생과 다른 수도사들을 영적으로 지도한 연로하고 경험 많은 수도사들도 스타레츠라고 불렸는데, 이들은 단어의 본래 의미에 따른 스타레츠들이다. ‘스타레츠’라는 단어가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 예로는 노브고로드 대주교 시메온이 스네토고르스크 수도원에 보낸 서한을 들 수 있는데, 이 서한에서 ‘스타레츠’라는 단어는 두 곳에서는 영적 지도자를, 다른 두 곳에서는 공의회 장로를 가리킨다. RIB. 6. № 45; 또한 참조: 스미르노프. 고대 러시아의 영적 지도자, 『치테니야』. 1914. 2. 26쪽.

[565] I. A. 세르기예프 포사드의 성탄절 교회, 『체테니야』. 1891. 3. 4–8, 17, 28, 33쪽. 이러한 수도원 관계자 명단은 참조: 아르세니. 앞의 저서, 『체테니야』. 1867. 3.

[566] 이는 예를 들어 솔로치나 수도원의 문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도브로클론스키. 앞의 저서. 28–29쪽. 수도원 요리사에 대해서는 참조: 브베덴스키 A. 『16–17세기 북러시아 수도원의 요리사들의 노동 활동』, 『세베르』(1923). 36–64쪽 (안타깝게도 필자는 이 자료를 입수할 수 없었다).

[567] I. A. 크리스마스 성당. 8쪽; 슈체페토프. 앞의 저서. 115쪽.

[568] 도브로클론스키. 앞의 저서. 24쪽 및 그 이후; 참조: 마카리. 제2판. 8. 260–262쪽.

[569] 고르차코프. 『수도원 관리부』. 40쪽 이하.

[570] 수도원 소유지에서 세금을 징수하는 것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로즈코프. 『농업』. 221–231쪽; 베셀로프스키. 『소슈노예 피스모』. 1. 1. 300쪽; 블라디미르스키-부다노프. 앞의 저서. 189쪽; 도브로클론스키. 앞의 저서. 61쪽.

[571] 디아코노프. 『에세이』(1898). 312–316쪽. 동 저자. 『역사 문헌에 나타난 거주 구역』, 『러시아 역사 저널』 5(1918). 154–176쪽; 베셀로프스키. 앞의 저서 1. 제1장; 2. 660쪽. 라포-다니레프스키. 『직접 과세 제도』. 530쪽 (참고로, 이 저작은 교회 역사학자들에게도 큰 가치를 지닌다). 1630년 칙령은 다음 저서에 수록되어 있다: 스토로제프. 『지방 행정국 칙령집』. 101–103쪽.

[572] AAE. 1. 제28호, 131; AYU. 1. 제31호. 4; AI. 1. 제71호, 74; 참조: 로즈데스트벤스키. 『봉직자 토지 소유』. 138쪽.

[573] 같은 책. 138쪽; ААЭ. 1. № 200; АИ. 1. № 143; 밀류코프.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제들』. 17쪽.

[574] 로즈데스트벤스키. 앞의 저서. 140–143쪽; 스미르노프. 모스크바 국가의 도시들. 1 (1917). 108쪽; 스토로제프. 코스톰의 이파티예프스키 및 보고야블렌스키 수도원의 농업 생활사에 관하여, 『학술 논문집』. 1894. 137쪽.

[575] 로즈데스트벤스키. 앞의 저서. 144쪽; 밀류코프도 같은 견해를 표명했다(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제들. 48, 79쪽).

[576] AAE. 3. 제34호, 97–99; DAI. 2. 제26호, 33 (키릴로프 수도원); AAE. 3. 제97호 (프스코보-페체르스키 수도원); AAE. 2. 제160호 (프릴루츠키 수도원).

[577] 아브라암 팔리친. 전설, 『RIB』 13.

[578] AAE. 2. 제135호. 특히 트로이체-세르기예프 수도원의 성물실에서 거액이 빼앗겼는데, 보리스 차르는 15,400루블, 가짜 드미트리(Lzhdmitry)는 30,000루블, 바실리 슈이스키 차르는 20,000루블을 가져갔으며, 이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재산에 해당했다. 마카리. 10. 223쪽. ‘혼란의 시대’ 이후 모스크바를 방문한 외국인들은 수도원으로부터 돈을 징수하는 일에 대해 기록하였다. 루슈친스키. 앞의 저서, 『체테니야』 1871. 3. 144쪽.

[579] AI. 4. 제3호; 마카리. 11. 204쪽; DAI. 10. 제34호; RIB. 12. 1046–1065, 1188–1215쪽; 밀류틴. 앞의 저서, 『체니야』 1861. 2. 465, 471–477쪽. 예를 들어, 알렉세이 차르는 폴란드 전쟁 당시 트로이체-세르기예프 수도원에서 100,000 루블을, 키릴로프 수도원에서 10,000 루블을 징수했으며, 총대주교 관할 구역(수도원 포함)은 10,000명의 병사를 파견했다.

[580] AAE. 1. 제298호; 스토글라프. 카잔판. 235, 297쪽; AI. 1. 제154. 2호; AAE. 4. 제315호. PSZ. 3. 제1664호; 고르차코프. 수도원 관리부. 41–55쪽.

[581] AI. 1. 제115호 (1505), 제147호 (1547); AAE. 1. 제164호 (1517), 제179호 (1534); AYU. 1. 제30호. 4 (1554) 등.

[582] 아유. 1. 제30호 4; 209. 5; 211; 스토글라프. 카잔판. 제5장 및 제72장.

[583] DRV. 14. 196쪽; 스토글라프. 카잔판. 235, 297쪽.

[584] 같은 책. 제5장 및 제67장; DAI. 1. 제46, 48, 114, 130호. 비공식 문서 예시: 1471년 – 키릴로프 수도원. AAE. 1. 제95호; 1494년 – 트로이체-세르기예프 수도원. 같은 책. 제131호; 1500년 – 이오시포프 수도원. 같은 책. 제136호; 1535년 및 1551년 – 트로이체-세르기예프 수도원. 아유. 1. 제97호 및 제75호; 1542년 – 니콜라예프스코예 코렐스키 수도원. 아이. 1. 제141호; 1547년 – 스트로킨스카야 푸스티니. 같은 책. 제147호; 1573년 – 아스트라한 트로이츠키 수도원에. 같은 책. 제184호 외. 종교 문제에 대한 사법 권한을 주교들에게 이양한 사례: AAE. 1. 제386호; 2. 제16, 62호; 3. 제67호; АИ. 2. 제58, 69, 77, 86호; АИ. 2. 제65호; ДАИ. 2. 제37호 등. 그러나 매우 자주, 비사법적 칙령을 통해 종교 문제에 대한 사법 권한이 교구 주교 본인에게 직접 부여되었지, 그의 사법 관리(데시아틸니크)들에게는 부여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DAI. 1. 제44호 (1548); 참조: 마카리. 제2판. 8. 223쪽.

[585] 마카리. 제2판. 8. 263–265쪽.

[586] 같은 책. 265쪽; 고르차코프. 『수도원 명령서』. 43, 48, 54–57, 66쪽 및 그 이후.

[587] 같은 책. 91쪽.

[588] AAE. 1. 제155호 (1667), 204호 (1675); PSZ. 1. 제412호; 고르차코프. 같은 책. 96쪽 및 그 이후.

[589] 같은 책. 99–102쪽; PSZ. 2. 제699호 (1677). 흥미롭게도 1667년과 1675년의 판결 이후에도 일부 수도원들은 다양한 사안으로 대궁전 관리국에 계속해서 청원을 제기했는데, 예를 들어, AI. 4. 제166호.

[590] 제1장 1항 참조. 성 파코미우스와 성 바실리우스 대주교의 규율은 교회 내 수도 생활의 기초를 이루었다. 새로운 시기는 성 사바 오스비셴니(† 532)가 팔레스타인에 있는 자신의 수도원을 위해 작성한 성 사바의 규율로 시작된다. 이 규율은 『Cotelerii Ecclesiae graecae monumenta』 3권, 222쪽 이후에서 출판되었다; 또한 다음을 참조하라: Bardenhewer. 5권, 127쪽; Welzer. 『Kirchenlexikon』 제2판, 10권, 1434쪽; Fischer W. “Zu dem Typikon des hl. Sabbas”, in: BZ. 8 (1890). S. 306 및 이후; Kurz E. Op. cit. 3 (1894). S. 167–170; 또한: 올타르제프스키. 『4세기부터 6세기에 걸친 팔레스타인 수도생활』(1896) 및 테오도시, 사제. 『4세기의 팔레스타인 수도생활』, 『TKDA』(1899)에 수록. 사바의 규약은 개별 감방에서 생활하는 수도사들을 위해 마련된 것이므로, 몇 가지 예배 지침을 포함하고 있다. 성 사바의 예배 규정은 정교회 전야 예배의 초석이 되었다. 만스베토프 I. 『교회 규정(티피크), 그 형성 및 그리스와 러시아 교회에서의 운명』(1885). 168쪽 및 그 이후. 성 테오도르 스투디트(† 826)는 자신의 수도원을 위해 ‘스투디트 규칙’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특별한 규칙을 제정했다. 독거 수도자들을 위해 마련된 사바의 규칙과 대조적으로, 테오도르의 규칙은 공동 생활 규칙의 성격을 띠고 있다(PG. 99. P. 1704 및 그 이후). 10세기 마지막 4분기에 아폰 산의 라브라 설립자인 성 아파나시우스가 작성한 이른바 ‘성산의 규율’이 등장했다(참조: Meyer Ph. Die Haupturkunde fur die Geschichte der Athosklöster (1894). S. 101 및 그 이후). 아토스 규율은 스투디우스 규율을 개정한 것으로, 이 규율에서도 공동 생활의 필요성이 강조되지만, 그 외에도 금식과 수도원 규율에 관해 특히 엄격한 지침이 제시되어 있다 (만스베토프. 앞의 저서, 222쪽). 이후 수세기 동안 비잔틴의 공동 생활 수도원들은 주로 스투디우스 규율을 따랐으나, 그들의 예배 규정은 사바의 규율을 일컫는 ‘예루살렘 규율’에 의해 상당 부분 결정되었다. 소콜로프. 9세기 중반부터 13세기 초까지 비잔틴 교회의 수도 생활 현황. 842–1204, 『법전 모음집』 1893. 3. 122쪽; Leclercq H. 『Cénobitisme』, 『기독교 고고학 및 전례 사전』 2. P. 3049–3248 및 Monachisme. 동서. 11. 2. P. 1774–1974. 세르기. 앞의 저서 1. 33–46쪽, 113쪽 및 그 이후; 골루빈스키. 2. 2. 429쪽.

[591] 골루빈스키. 1. 2. 320–371쪽, 502–608쪽; 2. 2. 428쪽; 만스베토프. 같은 책. 113쪽 이하, 121쪽 이하.

[592] 세레브리안스키. 앞의 저서. 261쪽.

[593] 고르차코프 M. 『정교회 참회 규범(노모카논)의 역사에 관하여』(1874). 104–110쪽.

[594] 골루빈스키. “성 세르기이 라도네즈키와 그가 설립한 트로이체-세르기예프 라브라”, 『체테니야』 1909. 2. 47쪽, 75–86쪽; 3. 103쪽; RIB. 6. 제21호.

[595] 스파소-카멘노 수도원에 관한 전설, 『프라브. 소브.』 1861. 1. 203, 206쪽.

[596] 요시프의 「영적 서한」, 『VChM』 9월호, 제1부, 551쪽; 『AI』 1권, 제274호; 『AYu』 2권, 제126호.

[597] 수즈달 대주교 디오니시오스가 스네토고르스키 수도원 수도자들에게 보낸 서한(1382), 『RIB』 6. 제24호 (또한 『AI』 1. 제5호); 노브고로드 대주교 시메온이 같은 수도원에 보낸 서한. 같은 책. 제45호; 1488년 포티이 대주교의 서한. 같은 책. 제46호; 이오나 대주교가 블라디미르의 보고륨 수도원에 보낸 서한 (약 1455년). 같은 책. 제75호 (또한: АИ. 1. 제265호); 테오도시 대주교가 페스노슈스키 수도원에 보낸 서신 (1461–64). 같은 책. 제96호 (또한: АИ. 1. 제276호).

[598] 앞서 언급한 각주 참조. 그러나 예를 들어, 필립 대주교가 수도자들이 출가 후에도 재산을 소유할 권리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은 상당히 특징적이다. RIB. 6. № 104 (1472), 수도사 팜바의 말과 관련된 사건.

[599] 대주교 관장 헌장, 출처: RIB. 6. 제128호 (또한 AAE. 1. 제381호에도 수록).

[600] VChM. 9월. 제1부. 548, 547쪽.

[601] 에우프로시나의 생애, 『고대 러시아 문학 유산』 4 (1862). 67–119, 172–179쪽. 에우프로시나에 대해서는 참조: 세레브리안스키. 앞의 저서. 대조: 마카리. 제2판. 8. 129쪽 및 그 이후.

[602] 세레브리안스키. 앞의 저서. 508쪽.

[603] 같은 책. 275–278, 271쪽.

[604] 만스베토프. 앞의 저서. 298–300쪽. 이 규약은 그에 대한 상세한 설명 덕분에만 알려져 있다. 설명. 2. 3. 730–732쪽; 이 규약이 닐 소르스키의 제자에 의해 작성되었을 수 있다는 마카리우스의 추측(제2판 6. 77–78쪽)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이 규약의 가장 오래된 사본들은 15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다.

[605] 만스베토프. 앞의 저서. 301–303, 299쪽.

[606] VCHM. 9월. 제1부. 499–615쪽. 요약은 다음에서 확인할 수 있다: 흐루쇼프. 이오시프 볼로츠키. 59–63, 75–80쪽. 마카리. 제2판. 7. 61–66쪽.

[607] 일부 『영적 서한』 목록에는 본문 없이 이 두 장의 장황한 제목만 수록되어 있다. 설명. 2. 2. 520쪽.

[608] ‘호기심 많은 자들에게 보내는 답변’이라는 명칭으로 알려진 이 장들(VChM, 546–563쪽)은 종종 별도로 출판되는데, 예를 들어 LZAK 2(1862)나 ‘독서’ 1847년 제7호(축약본)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요시프의 수도원 생활에 대한 견해는 그의 주요 저작인 『계몽자』의 7번째 설교와, 익명의 수도사에게 보낸 서신(DAI. 1. 제211호)에서도 드러나 있다.

[609] 규약, 『IRI』 4, 673–704쪽; 상세한 요약은 코노플레프, 앞의 저서 96–100쪽 및 마카리, 제2판 7, 67쪽; 또한 무라비예프, 『러시아의 피바이다』 20쪽.

[610] 게라심(Gerasim)의 ‘유언’: 『스몰렌스크 교구 개요』(1864). 291–295쪽; IRI. 3. 413쪽; 클류체프스키. 『성인전』. 305쪽; 카들루보프스키. 전게서, 290쪽 및 그 이후. 안토니 시이스키의 행적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수도원에도 공동 생활 규율이 도입되었다. 카들루보프스키. 전게서, 311쪽.

[611] DAI. 1. 제22호.

[612] PSRL. 6. 284쪽.

[613] AI. 1. 제292호.

[614] PSRL. 6. 285쪽.

[615] 소콜로프. 『내부 상황』. 325쪽.

[616] 닐의 『전설』(1849). XXI-XXII쪽.

[617] PSRL. 4. 278쪽.

[618] 마카리. 제2판. 6. 123–124.

[619] 스토글라프. 제82장. 코잔치코프 판. 244쪽.

[620] 필라레트. 『러시아 성인들』(1861). 1월. 77쪽. 『성인들에 관한 설교집』, 『독서』 1887. 4. 제324호; 야혼토프. 『북러시아 수행자들의 생애』(1882). 197–198쪽.

[621] 필라레트. 『개관』. 1권. 377, 363, 266쪽; 포포프 N. 『모스크바 시모노프 수도원 필사본에 대한 설명』, 『논문집』. 1910. 3권. 233쪽.

[622] 요시프의 『영적 서신』, 『VChM』. 552쪽; 지노비 오텐스키. 『진리의 증언』(1863). 901쪽.

[623] AAE. 4. 제204호; AI. 4. 제253호; 5. 제75호. PSZ. 1. 제412호.

[624] AAE. 4. 제311, 312호; 아드리아노의 정관, 『브레멘니크』 11. 30–46쪽.

[625] 예를 들어: RIB. 6. 제54, 61, 63, 129, 113호; AI. 1. 제37호; AAE. 1. 제40, 108호. 수도원장의 선출에 대해 수도원 공동체가 결정한다는 내용은 요시프와 게라시모의 규약에서도 언급되며, 또한 『스토글라브』 제86장에서도 다루고 있다. 코잔치코프 편집. 250쪽; 아유. 2. 제274호; 즈마킨. 대주교 다니일. 110쪽. 스타우로피기알 수도원에 대해서는: Milaљ. Op. cit. 672, 675쪽.

[626] RIB. 6. 54쪽. OLDP (1881). 89쪽.

[627] 도시페이. 『솔로베츠키 수도원 설명』(1836). 67쪽.

[628] 골루빈스키. 2. 1. 700쪽. 요시프 볼로츠키는 바실리 3세에게 원장을 임명해 줄 것을 요청하며 10명의 후보자 명단을 보냈다. 그러나 바실리는 명단에 없던 (같은 수도원의) 수도사 다니일을 원장으로 임명하라고 지시했다. 즈마킨. 전게서. 110쪽; ПСРЛ. 6. 288, 289쪽; ААЭ. 1. № 238; АЮ. 1. № 381; РИБ. 6. 61쪽. 고르스키. 트로이체-세르기예프 라브라에 대한 설명. 1 (1890). 77, 80, 84, 85, 88, 97, 130, 156쪽. 알렉세이 차르 시대에 대해서는: AAE. 3. 제262, 307, 331호; 4. 제37, 225, 253, 275, 322호.

[629] 성자 세르기이 라도네즈스키, 키릴 벨로제르스키, 파프누티이 보로프스키, 요시프 볼로츠키, 게라심 볼딘스키, 엘레아자르 안제르스키, 마카리이 칼야진스키, 안토니이 시이스키, 에우프로신 프스코프스키 등.

[630] 17세기에 들어 수도원장이 차르에 의해 임명되게 되자, 소보르 장로들은 수도원 운영에서 예전과 같은 역할을 점차 상실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차르 알렉세이의 특별한 총애를 받던 사보-스토로제프스키 수도원에서는 1688년에 소보르 장로들이 단 세 명에 불과했던 반면, 수도사는 150명이 넘었다. 벨로쿠로프. 『러시아 역사 자료』(1888). 161쪽.

[631] 제15장 참조.

[632] 고르스키. 앞의 저서 1. 73쪽; AAE. 1. 제237호. 247쪽. 쿠르브스키. 『전설』(1842). 134, 132쪽. 수도원장에게 불복종한 사례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АИ. 1. № 265 및 276 (둘 다 15세기 관련).

[633] 저자 미상의 『요셉의 생애』, 『체테니야』 1903. 3. 18쪽; 즈마킨. 앞의 저서. 664쪽. 다니엘의 저작: 같은 책. 부록. 55–57쪽. 다니엘의 다른 저작들에서도 순종의 필요성이 강조된다.

[634] A.I. 5. 제75호; A.A.E. 4. 제311, 312호; P.S.Z. 1. 제412호.

[635] 우스펜스키 N. 『키릴로-벨로제르스키 수도원의 위대한 건축가들에 대하여』, 『체테니야』 1897. 1. 3, 4, 11–12, 17쪽.

[636] 골루빈스키. 1. 2. 692쪽; АИ. 1. 제100, 192, 292호; 3. 제69호; ДАИ. 3. 제87호; AAE. 1. 제381호; 3. 제47, 104, 294호 등; 케드로프. 아브라아미 팔리친, 『논문집』. 1880. 6. 18쪽. 고르차코프. 수도원 관리국. 78쪽.

[637] VChM. 9월. 607쪽; AAE. 1. 제221호; 3. 제298호; AI. 1. 제212호; 마카리 주교, 『크라스노고르스크 수도원의 역사적 서술』, 『논문집』. 1880. 3. 81쪽; 보고슬로프스키. 전게서 1. 72쪽; 벨로쿠로프. 『자료집』(1888). 164쪽; 도브로클론스키. 전게서. 11쪽.

[638] VChM. 9월호. 607쪽.

[639] AAE. 3. 제298호.

[640] AI. 1. 제25호, 178; 5. 제65호, 195; AAE. 4. 제144호.

[641] 세레브리안스키. 앞의 저서. 472쪽; VChM. 9월호. 600, 605, 588–590쪽; 바르라암 후틴스키의 생애, 수록: OLDP (1881). 72, 78, 80, 93쪽; ААЭ. 2. № 298; ИРИ. 7. 193, 194쪽; 도브로클론스키. 앞의 저서. 11, 14쪽; 마카리이 주교. 앞의 저서. 81쪽; 보고슬로프스키. 전집, 72쪽; 벨로쿠로프. 자료집, 164쪽; АИ. 1. № 212; ААЭ. 1. № 56, 75.

[642] 골루빈스키. 1. 2. 689쪽. 사제 수도사와 부제 수도사의 수는 다양했다. 예를 들어, 1582~83년에 키릴로프 수도원에는 사제 수도사 7명과 부제 수도사 3명이 있었으며; 1688년 사브보-스토로제프스키 수도원에는 20명의 사제 수도사와 15명의 사제 부제가 있었다. A.I. 1. 제212호; 벨로쿠로프. 자료집. 164쪽.

[643] 참조: Stiglmayr J. Die Lehre von den Sakramenten und der Kirche nach Pseudo-Dionysios, in: Zeitschrift für Katholische Theologie. 22 (1898). p. 246 이하; Holl K. 『열광과 참회』(1898). 205쪽 이하; Heiler. 『초기 교회와 동방 교회』. 1 (1937). 375쪽; 레베데프 P. 『정교회 예배학』. 2 (1881). 169쪽; 안토니(크라포비츠키) 대주교, 『기독교 정교회 교리문답의 시도』(1924). 65쪽.

[644] 참고: 각주 67.

[645] 골루빈스키. 1. 2. 668쪽.

[646] 로즈데스트벤스키. 앞의 저서. 105–107쪽; 보고슬로프스키. 앞의 저서. 82, 77쪽.

[647] AI. 1. 제211호; AAE. 2. 제11호; RIB. 12. 1218쪽 외; 즈베린스키. 2. 제1247, 122, 924호.

[648] 예를 들어, ‘세속적’ 수도원이기도 했던 흐리노프스키 우스펜스키 수도원의 원장(수장)은 10루블의 입회비를 요구했는데, 이는 당시(1559년)로서는 상당한 금액이었다. AAE. 2. 제11호.

[649] 니콜스키. 공동체 생활과 독실 생활, 『크리스토스』 1907년 8호, 181, 184쪽; АИ. 1. № 214.

[650] 골루빈스키. 1. 2. 668–670쪽; Milaљ. Op. cit. 657쪽. 수계 의식에 관하여: Maltzew. Begrдbnis-Ritus (1898). 202–203쪽; 17세기 수계 예식: OLDP. 24 및 63; 인노켄티, 대수도원장. 『수도 생활로의 수계』(1899); 팔모프, I. 『동방 정교회의 수계 예식』(1914). 수도복의 개별 부분에 대한 종교적 상징성에 관하여: 오펜하이머 Ph. Symbolik und religiöse Wertung des Mönchskleides im christlichen Altertum (1932). 또한 참조: 골루빈스키. 1. 2. 675–686쪽.

[651] Milaљ. 앞의 책, 658쪽.

[652] 같은 책; Maltzew. 앞의 책, 203–204, 280쪽; Heiler. 앞의 책 1, 382–384쪽. 현대 그리스 교회의 수계 예식에 대해서는 Spunda F. 『Griechische Mönche』(1928). 27–44쪽(예식 순서 발췌문 포함)을 참조하라. 라예프스키. 『에우홀로기온』. 3권. 199–217쪽; Kattenbusch. 1권. 529–536쪽.

[653] 출처: 세레브리안스키. 앞의 저서. 265–267쪽 (발췌).

[654] 같은 책. 571쪽 및 그 이후 (독일어: 저의 저서 『Leben und Lehre der Starzen』 65–70쪽).

[655] Kirchhoff P. Kilian, O. F. M. 『Das heilige Jahr – der heilige Dienst』, 『Der christliche Osten』에 수록. G. Wunderle 편집 (1939). 75쪽. 예배의 내용과 발전에 관한 추가 자료: Heiler. 1. 335–364쪽; Kattenbusch. 1. 447–456쪽. 레베데프. 앞의 저서. 2. 44–82쪽.

[656] P. K. 키르호프가 번역한 훌륭한 정교회 찬송가들을 참조하라: 1. 『동방 교회의 기도』(Die Ostkirche betet). 4권 (1934–1937); 2. 『천국으로』(In paradisum). 장송 찬송가 (1939); 3. *Ehre sei Gott. Dreifaltigkeitshymnen* (1940). 4. *Uber Dich freut sich der Erdkreis. Marienhymnen* (1940); 여기에는 내용이 풍부한 서문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잔코프. 앞의 책, 93–99쪽. “성 요한 크리소스톰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것도 조화로운 노래와 질서 정연하게 구성된 신성한 찬송만큼 영혼을 고양시키고 날개를 달아 주며, 영혼을 땅에서 떼어내고, 육체의 속박에서 해방시키며, 지혜를 구하고 세상의 모든 것을 경멸하도록 이끄는 것은 없다. 우리의 본성은 노래에 그토록 즐거움을 느끼고 그것에 끌리기 때문에, 젖먹이 아기들조차 울거나 안절부절할 때 노래에 잠이 든다.” 시편 41편에 대한 설교; 인용 출처: Kayser Joh. Beitrage zur Geschichte und Erklärung der älteren Kirchenhymnen. 제2판, 1881. 47쪽. 그리스(정교회) 찬송학에 대해서는 다음 문헌도 참조: Christ W. 《중세 그리스 시에서 히르모이(Hirmoi), 트로파리아(Troparia), 카논(Kanon)의 의미에 대하여》, Sitzungsberichte bayer. Ak. d. Wiss. 1870. 2; 야코비 L. 『그리스 교회 찬송가의 역사에 관하여』, 『Z. f. KG』(1882); 마이어 W. 『라틴어 및 그리스어 리듬 시의 시작과 기원』, 『바이에른 과학 아카데미 논문집』 17. 2 (1885). 크룸바허 (1897). 655쪽 및 그 이후.

[657] Wunderle G. 『아토스 산의 신성한 세계에서: 연구와 회고』(1937. 『동방 기독교』 2권) 참조.

[658] 각주 651 참조; 또한: Büdumer S. 『브레비어의 역사』(1895); Leclercq H. 『브레비어』, 『기독교 고고학 및 전례 사전』 2. 1 (1925). 1262–1316쪽.

[659] 일주일 중 매일은 우리 구원의 역사 속 어떤 사건이나 성인들에게 헌정되어 있다: 월요일 – 성 천사들; 화요일 – 세례자 요한; 수요일 – 유다의 배반; 목요일 – 성 사도들, 기적 행자들과 성주교들; 금요일 – 그리스도의 수난과 성십자가; 토요일 – 성 고백자들, 순교자들 및 모든 성인들; 일요일 –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삼위일체. 지극히 복되신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께는 일주일 중 모든 날이 바쳐져 있으나, 특히 수요일, 금요일, 일요일이 그러하다. 이 주제에 대한 훌륭한 성찰을 참조하십시오: 키프리아노 신부, 『기도의 꽃』. 베오그라드, 1928. 57–208쪽.

[660] 정교회에서는 요일 계산이 일요일이 아니라 월요일부터 시작되며, 하루의 시작은 자정이 아니라 저녁 6시로 간주되고, 시간은 아침 6시부터 계산됩니다. 하루 동안 수도사들은 다음과 같이 예배를 드려야 한다: 저녁(6시)에 저녁기도, 그 뒤를 이어 밤기도, 밤(12시)에 자정기도, 이른 아침(3시)에 새벽기도; 아침(6시)에 제1시간; 9시에 제3시간; 정오에는 제6시간, 오후 3시에는 제9시간을 거행한다. 성찬예식은 제3시간과 제6시간 사이에 거행된다. 이러한 주간 예배의 순서에는 로마 가톨릭의 주간 예배와 일정한 차이가 있다. 참조: Bdumer. Op. cit. S. 31–130.

[661] 주간 예배의 집전 순서는 규약(티피콘)에 의해 정해진다. 티피콘의 발전과 구성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만스베토프. 앞의 저서, 269쪽 및 그 이후. 수많은 고대 규약 사본에 대해서는 다음의 기초적인 연구를 참조하라: 드미트리예프스키 A. 동방 도서관에 소장된 전례 필사본에 대한 설명. 2권 (1894, 1916). 또한: Kattenbusch. 1. 479쪽 이하; 세르기이, 아키마нд리트. 앞의 저서. 2권 (1875–76); 니콜스키 K. 『전례 규범 연구를 위한 지침서』(1884, 1908); 스카발라노비치 M. 『해설 티피콘』. 2권 (1911–1913); Bdumer. 31쪽 및 이후; Heiler. 1. 297, 299쪽 및 이후.

[662] 만스베토프. 앞의 저서, 78, 127, 294–296, 298쪽 및 그 이후; 오딘초프 N. 『16세기 이전 고대 러시아의 공적 및 사적 예배 질서』(1881); 드미트리예프스키 A. 『러시아 교회의 첫 5세기 예배』, 『법학집』 1882–1883; 동 저자. 『16세기 러시아 교회의 예배』(1884). 레오니드, 대수도원장. 『교회 예배 규정의 슬라브어 번역에 관하여』, 『논문집』. 1867. 2; 만스베토프 이. “키프리아노스 대주교의 전례 활동” (1882); 리시친 M. “초기 슬라브-러시아어 티피콘” (1911). 러시아 교회의 최초의 인쇄본 티피콘은 1610년 모스크바에서 출간되었다.

[663] 만스베토프. 앞의 책. 269, 275, 284, 304쪽; 골루빈스키. 1. 1. 320–329, 330–377, 507쪽; 2. 2. 406쪽; 마카리. 제2판. 8. 77쪽.

[664] 골루빈스키. 2. 2. 428–433쪽; 오딘초프. 앞의 저서. 40쪽. 만스베토프. 앞의 저서. 271쪽.

[665] 마카리. 제2판. 8. 78쪽.

[666] 세레브리안스키. 앞의 저서. 368–371쪽; AI. 1. 제478호.

[667] 만스베토프. 앞의 저서. 301쪽; 마카리. 제2판. 8권. 77쪽.

[668] 디프티크에 대해서는 Leclercq H. 『기원부터 8세기까지의 기독교 고고학 핸드북』(Manuel d’archéologie chrétienne depuis les origines jusqu’au VIIIe siècle). 2 (1917). 333쪽 및 그 이후를 참조하라. 식당 운영 지침서: 1. 요시포바 수도원(1589–90), 출처: 레오니드, 아키마. 『수도원 식당 식단표』, 『논문집』. 1880. 3. 5–22쪽; 2. 모스크바 노보스파스스키 수도원(17세기 후반). 같은 책. 24쪽; 3. 트로이체-세르기예프 수도원 (1 – 1445–1533년 기간, 2 – 1533–1547년 기간), 출처: 고르스키. 『역사적 서술』. 2 (1900). 16–44쪽. 만스베토프. 앞의 저서. 301쪽.

[669] 동방 교회의 금식에 관하여: 만스베토프. 『정교회 동방 교회의 금식에 대하여』, 『부록』. 1885. 36. 355–399쪽; 37. 630–698쪽; 홀(Holl) K. 『그리스 교회에서 네 가지 주요 금식 기간의 기원』, 『논문집』 2권 (1928) (또한 『베를린 아카데미 논문집』 1923; Phil-hist. Kl. № 5); Büdumer. Op. cit. 63–67쪽; 골루빈스키. 1. 2. 399–462쪽; 2. 2. 607쪽.

[670] 레베데프. 앞의 저서, 84–91쪽.

[671] 16세기에는 후추가 진미로 여겨졌다. 필립 대주교는 솔로베츠키 수도원에 보낸 서신에서 수도원 수도자들에게 후추 1파운드를 하사했다는 사실을 특별히 언급하고 있다; 이 서신은 다음에서 참조할 수 있다: 페도토프 G. 『성 필립, 모스크바 대주교』(1928). 222쪽.

[672] 요시포프 수도원의 생활 규정. 7, 8, 17, 22, 13, 16쪽. 이 생활 규정을 노보스파스키 수도원의 생활 규정과 비교해 보면, 그곳에서 수도원 생활의 세속화가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다. 수도사들은 그곳에서 볼가 강에서 잡힌 최고급 생선, 최상급 절인 버섯, 치즈 파이가 들어간 파이, 캐비어, 꿀을 곁들인 스프레드 등을 제공받았다. 16세기 요시포프 수도원에서는 수도사들과 수도원 하인들이 똑같은 식사를 했으나(9쪽), 노보스파스스키 수도원에서는 수도원 하인들이 더 소박한 다른 식사를 제공받았다(24쪽).

[673] RIB. 4. 1210, 1419쪽. 금식이 금욕적 실천으로서 갖는 중요성은 15세기 말이나 16세기 초에 쓰인 『필리포프 금식에 관한 설교』에서 특히 강조된다; 아르한겔스키. 닐 소르스키. 215, 217쪽.

[674] 설명. 2. 1. 239쪽; 비노그라도프. 『규정된 성경 읽기』, 『BV』 1912. 4. 785쪽.

[675] VChM. 9월호. 505–513쪽; 또한 스미르노프의 『고대 러시아 영성 지도자』(1899)에 수록된 그의 서한 「금식에 관하여」를 참조하라. 『고대 러시아의 영성 지도자』(1899). 부록 VI. 특히 109, 110, 111쪽. 성 코르닐리우스 코멜스키의 규율서에도 동일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음, 『IRI』 4권, 669쪽.

[676] 막심 그렉. 전집 2. 241, 243쪽; 아르테미우스의 「알 수 없는 이에게 보내는 서한」, RIB. 4. 1399쪽.

[677] RBS에 수록된 그의 전기를 참조하라.

[678] 『법전 모음집』 1863. 3. 209쪽.

[679] 바시안, 『교리 모음집』 1863. 3. 109쪽; 막심 그렉. 전집 2. 37, 89, 41, 110, 131, 104, 262쪽; 다니일 대주교, 『수도 생활의 법과 일반 생활 규칙에 관하여』, 출처: 즈마킨, 『선집』 부록, 644, 666쪽 및 그 이후; 『스토글라프』 제5장.

[680] 지노비 오텐스키. 『진리의 증언』(1863). 899쪽.

[681] 참조: 필자의 논문, 『Kyrios』 4호 (1939). 29–38쪽; 즈마킨. 앞의 저서. 부록. 39–44쪽.

[682] PSZ. 1. 제412호. AAE. 4. 제161호; AI. 5. 제112호; 또한 AAE. 4. 제311, 312호.

[683] 스토글라프. 제5장. 49, 52쪽; 지노비 오텐스키. 앞의 저서. 899쪽; 대주교 다니일(Даниил)의 저서 『수도 생활의 차이』에 나타난 독립 수도원 수도사들의 특성, 출처: 즈마킨. 전게서. 부록. 660쪽. 키릴로프 수도원과 트로이체-세르게이예프 수도원에 관하여 (1590), 출처: DAI. 1. 제135호.

[684] 니콜스키. 공동체 생활과 독실 생활, 『크리스토스』 1907. 224. 157, 173쪽 및 그 이후; A.I. 1. 제204호. 이 서신의 작성 시기에 관하여: 니콜스키. 이반 바실리예비치 4세 차르가 키릴로-벨로제르스키 수도원에 보낸 질책 서신이 언제 작성되었는가, 『그리스도 교양지』 1907. 223. 852쪽.

[685] 『청원서』 참조. G. 쿤체비치 편집 (1912).

[686] 에우프로시나 규정, 제11장; 요시프 규정, 제2장; 코르닐리 규정, 제13장; 참조: RIB. 6. 209, 602쪽; 또한: 『대화』. 드루지닌 편집. 13, 21쪽.

[687] AI. 1. 제204호; 스토글라프. 제52장.

[688] AAE. 4. 제161호. 참조: 동서. 제311, 312호; AI. 5. 제7, 75호.

[689] 즈마킨. 앞의 저서. 650–690쪽. 여기에는 다니엘의 서한들이 수록되어 있다.

[690] 추데츠키, 『TKDA』 1877. 4. 73쪽.

[691] 마카리. 제2판. 7. 54쪽.

[692] AI. 1. 제212호. 1508년 닐로-소르스카야 수도원에는 단 12명의 수도사만이 있었다. 마카리. 제2판. 7. 44쪽.

[693] 클류체프스키. 『실험』(1913). 36쪽; 1568년 솔로베츠키 수도원에는 200명의 수도사가 피신해 있었다. 페도토프. 앞의 저서. 224쪽.

[694] 마카리. 제2판. 7. 55쪽; 『독본』. 1884. 4. 23쪽.

[695] 보고슬로프스키. 앞의 저서. 1. 72쪽; 1606년에 설립된 크라스노고르스크 수도원(홀모고르스키 우예즈드)에는 1624년에 9명, 1677년에 12명의 수도사가 있었으나, 이미 1661년에 키예프 대교구에서 17명의 수도사가 그곳으로 이주해 왔다. 마카리, 주교. 『크라스노고르스크 수도원의 역사적 서술』, 『체테니야』 1880. 3. 62, 81쪽. 남부 루스에서 북부 루스의 수도원으로의 수도사 이주에 대해서는 다음 문헌도 참조: 하를람포비치 K. 『르티슈체프스카야 학교』, 『BV』 1913. 5. 8쪽.

[696] 벨로쿠로프. 『자료집』. 164쪽.

[697] 스비리 강변에 보즈네센스키 수도원이 세워졌는데, 1684년 당시 이곳에는 5명의 수도사가 있었으며, 그곳에서 3~4km 떨어진 곳에는 또 다른 수도원인 니콜스키 수도원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단 3명의 수도사만이 남아 있었다. 벨로쿠로프. 앞의 책. 445쪽.

[698] 1724년, 시노드는 남성 수도원에 14,534명의 수도자와 여성 수도원에 10,673명의 수녀가 있는 것으로 집계했다. 추데츠키, 『TKDA』. 1877. 10. 46쪽.

[699] Milaљ. 앞의 책. 672, 675쪽.

[700] 참조: Goetz L. K. Staat und Kirche in AltruЯland. Kiever Periode. 988–1240 (1908). 151–154쪽; (성 블라디미르 대공의 규약), 또한: 마카리. 제2판. 8. 143–168, 176, 202쪽; Hermann. 앞의 책. 23쪽 및 그 이후.

[701] 마카리. 8. 220쪽; 10. 207, 209쪽; АИ. 1. 제224, 232, 234, 235, 240호; 2. 58, 86, 77호; AAE. 1. 제386호; 2. 제14호, 62호; 3. 제67호; RIB. 2. 제190호.

[702] AI. 1. 제46, 114, 130호 등.

[703] AI. 1. 제46호, 114; AAE. 2. 제62호. 동시에 신임 총대주교와 일부 주교들에게 특허가 하사되었다: SGGD. 2. 제73호; AAE. 3. 제109호; AI. 1. 제148호.

[704] AAE. 2. 제17호; 도시페이. 『솔로베츠키 수도원 설명』. 3. 205쪽. DAI. 1. 제148호; AAE. 2. 제14호; 3. 제285호.

[705] AAE. 2. 제164호 (또한 SGGD. 3. 제7호). 특전장에는 여전히 세속 법원의 관할에 속하는 형사 사건에 관한 별도의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706] 고르차코프. 『모스크바 명령』. 91쪽. 참조: 『ORSA 기록』 2 (1861); AAE. 3. 제225, 262, 275호에 수록된 다양한 문서들.

[707] PSZ. 1. 412.

[708] 고르차코프. 앞의 저서. 95쪽. PSZ. 1. 제442호 (1669년, 형사 사건에 대한 판결), 또는 AAE. 4. 제204호 (1675년). 1667–1675년 동안, 아마도 1667년 이후에 설립된 것으로 보이는 영적 관리국(수도원 관리국의 한 부서)의 활동 결과, 1667년의 판결이 위반되었기에 1675년 공의회의 판결이 필요하게 되었다. 카프테레프. 세속 주교 관료들. 211쪽. 표트르 대제 치세에 새로운 마찰이 드러났고, 이는 아드리아노스 총대주교로 하여금 교회 재판 문제에 관한 결정문 모음집을 편찬하도록 이끌었다. 칼라초프 N. 『고대 러시아 법 체계에서 『코르메차』의 의의』, 『체테니야』 1847. 4. 부록 4. 11–80쪽: “성직자 재판에 관한 조항들”. 이 “성직자 재판에 관한 조항들”은 스토글라프의 규정, 1625년(1657년에 재확인된) 특권장전, 그리고 1668년과 1671년의 요아사프 총대주교의 명령을 근거로 하고 있다. 같은 책. 15, 16, 67, 69쪽. 게다가 총대주교청은 교회의 권리에 관한 타타르 칸들의 칙령을 다시 모아 편집했으나, 이는 차르에게 승인을 요청하지는 않았다(같은 책, 2쪽).

[709] 마카리. 제2판. 7. 84–86쪽; 또한 『치테니야』. 1912. 2. 2. 잡문집. 39–41쪽.

[710] 마카리. 제2판. 7. 85쪽.

[711] PSRL. 4. 157–158, 165쪽; 8. 219, 230쪽; 6. 252쪽.

[712] AI. 1. 제173호.

[713] 마카리. 11. 96쪽.

[714] 헤론티우스, 대수도원장. 볼로콜람스크 요세프 수도원. 44–45쪽.

[715] 헤론티우스. 앞의 책. 45쪽.

[716] 참조: 클류체프스키. 『성인전』. 291쪽. 요시프가 트로파리에서 “러시아의 별”로 불리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게론티. 앞의 책. 48쪽. 아직 19세기에도 수도사들은 요세프의 규율을 필사하여 전승했다. 포포프 N. 『시모노프 수도원 필사본 모음집』, 『논문집』 1910. 2. 14, 15쪽.

[717] 마카리 주교, 『아르한겔스크 교구 내의 기독교』, 『논문집』. 1878. 3. 52쪽.

[718] 고르스키. 『설명서』. 2. 122–123쪽.

[719] 필라레트. 『개관』. 1. 234쪽.

[720] AAE. 4. 제311호; 바르수코프. 『러시아 성자전 문헌』. 218쪽. 『일라리온의 생애』, 『블라디미르 학술 기록 보관 위원회 논문집』 10 (1908). 짧은 논문: 예로니모. 수즈달 대주교 일라리온의 생애 (1867) – 이 책은 제가 입수할 수 없었다.

[721] 치스토비치 I. 노브고로드 대주교 요브, 『스트란니크』 1861. 2; 논문: 포스트니코프. 아파나시이, 제1대 홀모고르 대주교 (1866); 베류즈스키. 아파나시이, 홀모고르 대주교 (1914) – 유감스럽게도 이 책들 역시 입수할 수 없었다. 또한 참조: ПБЭ. 1. 1087쪽; 2. 181, 182쪽.

[722] 니콘에 관한 주요 문헌은 제12장에서 참조하십시오.

[723] 페도토프 G. 성 필립, 모스크바 대주교 (1928). 특히 120–137쪽, 206–220쪽; 로즈데스트벤스키 S. 필립 대주교, 『RBS』 수록.

[724] 페도토프. 앞의 책. 104쪽.

[725] 17~19세기의 시성식에 대해서는 골루빈스키, 『러시아 교회의 시성사』(1903)를 참조하라.

[726] 제3장, 4항 참조.

[727] 클류체프스키. 『성자전』. 319쪽; 골루빈스키. 『시성사의 역사』. 130쪽.

[728] 같은 책. 120쪽; 코노플레프. 앞의 저서, 『논문집』 1895. 4. 86–101쪽.

[729] 골루빈스키. 앞의 저서. 117쪽; 마카리 주교. 안토니예프 시이 스키 수도원에 관한 역사적 자료, 『논문집』 1878. 3.

[730] 골루빈스키. 앞의 저서. 155, 314쪽; “닐로바 푸스티니”, 『체테니야』 1875. 3호; 우스펜스키 V. 『닐로바 스톨로벤스카야 푸스티니에 대한 역사적 서술』(1867. 3판 1886).

[731] 골루빈스키. 앞의 저서. 132쪽; 클류체프스키. 앞의 저서. 392쪽; 세레브리안스키. 앞의 저서. 317–326, 538–545, 568쪽 및 그 이후 (니칸드르의 생애).

[732] 특히 유명한 수행자들 중 몇 명만을 꼽자면: 겐나디 볼고고드스키(† 1565), 이로디온 일로에제르스키(† 1564), 요시프 자오니키예프스키(† 1612); 아드리안 안드루소프스키(† 1549), 아드리아노 포셰혼스키(† 1550), 시몬 소이긴스키(† 1561), 조시마 보르보좀스키(† 16세기 후반), 레온티 레흐노프스키(† 1611), 아르세니 노브고로드스키(† 1570), 마르티리이 젤레네츠키(† 1603), 아가핏 마르쿠셰프스키(† 1584), 이그나티이 볼고그스키(† 1592), 세르기이 슈흐토프스키(† 1609), 크리스토포르 코리야젬스키(† 약 1572), 페오도시 토템스키(† 1568), 페라폰트 몬젠스키(† 1591). 참조: 『성인에 관한 역사 사전』(1836, 제2판 1862); 골루빈스키, 앞의 저서; 바르수코프, 앞의 저서.

[733] IRI. 4. 64쪽; 그가 벨스키 가문 출신이라는 소문은 전설에 불과하다.

[734] 클류체프스키. 앞의 저서. 323쪽; 사전 (1862). 105–107쪽; 골루빈스키. 앞의 저서. 158쪽; 플라토노프. ‘혼란의 시대에 관한 고대 러시아 전설’. 293쪽.

[735] IRI. 6. 366쪽; 클류체프스키. 앞의 저서. 334쪽; 사전 (1862). 181쪽.

[736] 클류체프스키. 앞의 저서. 346쪽; 이리. 3. 607쪽; 골루빈스키. 앞의 저서. 129, 136쪽.

[737] 야혼토프. 『북러시아 수행자들의 행적』. 197쪽 이하; 『성인들에 관한 글』, 『독서』 1887. 4. 제324호. 『엘레아자르의 행적』, 『법전 모음집』 1860. 1.

[738] 예를 들어, 이반 4세가 카잔 대주교 구리에게 보낸 서한, 『AI』 1권, 제241호를 참조; 또한 1649년 법전 제20장, 제21장, 제26장; 『DAI』 5권, 제241–244호; 마카리. 10. 72쪽; A.I. 5. 제69, 75호; 시베리아 대주교에게 보낸 서한, 이바노프, 『구 문서 국가 기록 보관소 목록』 1 (1850). 263쪽.

[739] 도브로클론스키. 『러시아 교회사 안내서』. 12 (1889). 131, 132쪽.

[740] 마카리. 제2판. 6. 357쪽; 골루빈스키. 『시성사』. 148쪽; 세레브리안스키. 앞의 저서. 342–344쪽; 클류체프스키. 『성인전』. 236쪽.

[741] 15~17세기 북부 포모르 지역의 러시아 교회, 『법률집』 1860. 2. 3쪽 및 이후.

[742] 셰스타코프 P. “로파레족의 계몽자 아르히만드리트 테오도리트와 성 트리폰 페첸그스키”, 『지므넵』 1868. 7. 242쪽 이하; 마카리. 제2판. 6. 330–332쪽.

[743] 트리폰의 행적, 『Prav. sob.』 1859. 2. 89–120쪽; 『IRI』 4. 582쪽; 골루빈스키. 앞의 저서. 156쪽; 셰스타코프. 앞의 저서.

[744] AAE. 1. 제241호; DRV. 5. 241쪽; 포크로프스키 I. 『카잔 주교관』(1902). 6쪽. 카잔 대주교(후에 대교구장)는 지위상 주교들 중에서 세 번째 순위를 차지했다(1위 – 모스크바, 2 – 노브고로드). DAI. 4. № 102; SGGD. 2. 59쪽.

[745] DAI. 1. 제97호; 게센 G. 『모스크바 국가 내 포로들의 삶』, 『러시아의 과거』 2 (1923). 61쪽. 포니조비예 지역의 기독교 선교사에 관한 역사 참조: 모자로프스키 A. 『1552년부터 1867년까지 카잔 이주민 계몽을 위한 선교 활동의 경과에 대한 개요』, 『체테니야』 1880. 1; 니콜스키 N. V. 『16~18세기 중부 볼가 지역 추바시족 사이의 기독교』, 『이즈브. 카즈.』 28. 1 (1912); 스미르노프 이. N. 『체레미스족』, 『카잔 학보』 6 (1889); 동 저자. 『보티아키족』, 『카잔 학보』 8. 2 (1890); 동 저자, 『페르미아키족』, 『카잔 학보』 9. 2 (1891); 동 저자. 『모르드바』, 『카자흐스탄 학회지』 10–12 (1892–1895); 페레티아토비치 G. 앞의 저서 (1877 및 1882); 또한 N. N. 및 N. A. 피르소프의 초기 연구 (1864 및 1868). 새로 개종한 타타르 귀족들에게 영지를 하사한 것에 대해서는, 『V. I. 바유셰프 공작 기록 보관소. 구 카잔 궁전 관리국 관할 구역의 역사 및 법률 자료』 1권 (1882)에 수록된 다수의 문서를 참조하라.

[746] 1. 마카리. 10. 72쪽; 모자로프스키. 앞의 저서. 7, 23쪽; AAE. 1. 제358호.

[747] 모자로프스키. 앞의 저서. 23, 30, 32쪽. PSZ. 2. 제867호; 1649년 법전. 제16장. § 44; 제20장. § 70–71; 제25장. § 24. 일부 타타르 공작들의 개종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벨야미노프-제르노프. 카시모프 왕들에 관한 연구. 3 (1866). 207–215쪽.

[748] 보즈드비젠스키, 이. 《랴잔 교계사》. 122쪽.

[749] 슬로브초프. 『시베리아 역사 개관』. 1 (1836). 58쪽.

[750] 이 서한은 다음 문헌에 수록되어 있다: 이바노프. 『설명서』. 1 (1850). 263쪽.

[751] AI. 5. 제69, 75호; 비스트로프 F. 시베리아 지역의 초기 기독교인들 (1586–1631), 『법률 저널』 1866. 2. 377쪽; 수마로코프. 『시베리아의 선교 활동』, 『기독교 문집』 1883. 9–10; 1884. 5–6.

[752] 모스크바 국가의 세무 장부. 1. 1. 76, 279, 611쪽 등.

[753] 세레브리안스키. 앞의 저서. 325쪽.

[754] 마카리. 7. 299쪽; A.I. 1. 제204호.

[755] 헤르베르슈타인. 『모스코비아』. V. F. D. 슈타인 편집 (1926); 92쪽; 『치테니야』. 1884. 4. 24쪽.

[756] 필라레트. 『러시아 교회의 역사』. 3. 211쪽.

[757] DAI. 1. 제149호; 즈베린스키. 3. 제2231호; 헤센. 앞의 저서. 61쪽.

[758] 필라레트. 앞의 저서. 4. 240쪽; 『독본』. 1863. 4. 부록. 22쪽.

[759] 벨로쿠로프. 『자료집』. 163, 166쪽.

[760] 아르세니. 앞의 저서. 3쪽; 도시페이. 『솔로베츠키 수도원 설명』 1 (1853). 267쪽 및 그 이후.

[761] 페트로프 V. 『수도원 생활』, 『일과 날들』 1923년 3호.

[762] 이 종교 운동의 대외사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Gehring Joh. 『러시아 교회의 종파들』(1898). 11–16쪽; Arndt A., 『Z. f. Kath. Th.』 38 (1914). Kostomarov N. 『전기 속의 러시아 역사』. 라이프치히, 1886. 292–322쪽; 마카리. 6. 81–118쪽; 골루빈스키. 2. 1. 560–607쪽; 파노프. “유대교화 이단”, 『지엠NP』 1877. 2; 니키츠키. 『벨리키 노브고로드 교회의 내부사에 관한 고찰』, 『같은 곳』. 1879. 7; 일린스키 F. 『대주교 조시마와 성가대원 페도르 쿠리친』, 『BV』. 1905. 10. 212–235쪽; 돌고프 S. “유대교 신봉자들을 반대하는 1490년 모스크바 공의회”, 『체테니야』. 1902. 3. 113쪽; 세델니코프 A. “1490년 공의회와 종교 재판”, 『고대 러시아 문학 위원회 논문집』. 1 (1932). 33–58쪽: 또한: 『Religion in Geschichte und Gegenwart』. 4 (1930). 2159–2165쪽 (오류 있음); 오래된 연구: 세르비츠키. 『노브고로드 이단자들의 이단에 관한 연구 시도』, 『Prav. ob.』 1862. 6–8, – 이미 구식이 되었다.

[763] 마카리. 제2판. 7쪽, 184쪽; 골루빈스키. 2. 1. 606쪽; 2. 2. 219쪽. 지금까지도 그 가치를 잃지 않은 P. 즈나멘스키의 논문(익명으로 게재됨) 「계몽자 성 요셉 볼로츠키」, 『Prav. sob.』 1859. 3; 흐루쇼프. 『선집』 133쪽을 참조하라.

[764] Holzwart. 앞의 책, 264쪽.

[765] 이 운동의 종교적 뿌리가 완전히 밝혀졌다고 볼 수는 없다. 보차노프스키 V. (『14~16세기 러시아의 자유사상가들』, 『새로운 말』 1896. 12. 170쪽)은 유대교화주의자들의 견해를 후시트파와 연관 짓고 있다; 반면 F. 일린스키는 이를 보고밀파의 견해로 거슬러 올라간다(『15세기 러시아 보고밀파』, 『BV』 1905. 6. 447쪽). 본질적으로 이 종파의 견해는 뚜렷한 합리주의적 성향을 띠고 있었으며, 그들의 교리는 주로 구약성경에 근거하여 신약성경의 삼위일체와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교리, 그리고 십자가와 성화 숭배를 부정했다. 또한 그들은 교회 계급 체계와 수도 생활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학술적 논쟁에 대해서는 다음 문헌도 참조: 페레츠 V. 『15세기 유대교 신봉자들과 그들의 문헌에 관한 새로운 연구』, 『키예프 대학』 1908. 10; 베데르지츠키. 『유대교 신봉자들에 관한 문헌에 대한 메모』, 『러시아 문학 저널』 1911. 3–4; 동 저자. 『유대교 신봉자들의 문학 활동』, 『ZhMNP』 1912. 3; 또한 스페란스키. 『지정된 저작들』 및 페투호프. 『지정된 저작들』.

[766] 마카리. 제2판. 7. 187쪽.

[767] 『프로스베티텔』의 출판사(제4판, 카잔, 1904)는 첫 11단어가 마지막 5단어(12–16)보다 먼저, 1490년 공의회 직후에 작성되었다는 견해를 표명했다(15쪽).

[768] “구약과 신약 성경 외에도, 요세프는 외경과 비정경 서적을 여기에 포함시키며, 교부들의 저작과 순교 기록, 성인의 행적에 무오성을 부여한다… 신성한 경전과 교회 전승의 무오성, 그리고 이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용납될 수 없다는 점은 요셉에게 있어 자명한 사실이다”라고 홀츠바르트는 주장한다 (Holzwart. Op. cit. S. 266, 268); 요세프의 교리 중 개별 항목에 대한 열거를 참조하라 (Ibidem. S. 293, 311).

[769] 『계몽자』(1857). 539, 597, 601, 604, 588쪽.

[770] 니폰트에게 보낸 서한, 『RIB』 6권, 825쪽.

[771] 『독서』. 1847. 1.

[772] DRV. 16 (1791). 423–424쪽.

[773] 즈마킨. 앞의 저작. 406–424쪽 (다니일 저).

[774] DRV. 16 (1791). 424, 428쪽; 바시아노가 서한 작성에 참여한 것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흐루쇼프. 앞의 저서. 188쪽; 즈마킨. 앞의 저서. 69쪽.

[775] 참조: 즈마킨. 앞의 저서. 69쪽; 부록. 10. 506쪽.

[776] 『법률 모음집』 1863. 3. 199, 201, 204쪽.

[777] AAE. 1. 제239호. 253쪽.

[778] RIB. 4. 1221, 1384, 1232쪽.

[779] 바슈킨의 견해에 대하여: AAE. 1. 제239호, 제238호. 마카리. 제2판. 6. 250–258쪽; 골루빈스키. 2. 1. 821–825쪽

[780] 이미 16세기 30년대에 모스크바에서 루터에 대한 첫 소식이 전해졌는데, 이는 1536년에 집필된 『루터와 그의 이단에 관하여』라는 저작에서 확인할 수 있다. 포포프 A. 『러시아판 연대기 총람』 2 (1869). 130쪽. 막심 그렉은 주로 성화 숭배와 관련하여 루터를 반박하는 글을 썼다(저작집 1, 485–494쪽). 1552년 폴란드 세임에서 귀족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부여하기 전부터, 칼뱅의 교리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 유입되었으며, 동시에 이곳에서는 소시니안주의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었다. 참조: 퓌르커 K. 『폴란드 교회사』(1930); 그라보프스키 Th. Z dzejow literatury Kalvinskiej w Polsce (1906); 류보비치 N. 폴란드의 종교개혁사. 칼빈주의와 반삼위일체론자들 (1883); Wotschke Th. Geschichte der Reformation in Polen (1901); 소콜로프. 16~17세기 러시아와 프로테스탄티즘의 관계 (1880).

[781] 골루빈스키가 아르테미우스의 전기를 재구성하려는 시도를 참조하라 (2. 1. 832–836쪽); 또한: 사드코프스키. 앞의 저서. 60–85쪽.

[782] 마카리. 제2판. 6권. 265쪽.

[783] 골루빈스키. 2. 1. 835쪽.

[784] RIB. 4. 여기에는 아르테미우스의 저작 14편이 수록되어 있다. 그중 5편은 그의 생애 중 모스크바 시기에 해당한다(1359–1373, 1382–1390, 1390–1400, 1400–1420, 1432–1441); 9편은 리투아니아에서(1555년 이후) 집필되었다: 1편: 1201–1266쪽; 2편: 1266–1273쪽; 3편: 1273–1287쪽; 4편: 1287–1328쪽; 5권: 1423–1432쪽; 6권: 1420–1423쪽; 7권: 1441–1448쪽; 8권: 1328–1359쪽; 9권: 1373–1381쪽. 특히 중요한 것은: 1. 클루토르파 교사들에게; 4. 이단자 시몬 부드니에게; 5. 그에게 보낸 편지. 또한 참조: 플리스 V. 『시몬 부드니와 리투아니아의 종교개혁』, 『크리스토스 기념 논문집』 1911. 2, 9, 10.

[785] RIB. 4. 1228, 1259, 1261, 1249쪽.

[786] 같은 책. 1223, 1260, 1224, 1261, 1236, 1271쪽.

[787] 같은 책. 1261쪽.

[788] 같은 책. 1232, 1275, 1342쪽.

[789] 같은 책. 1278, 1343, 1298, 1299쪽.

[790] 같은 책. 1341, 1335, 1406, 1303, 1324, 1275, 1301, 1444, 1384, 1407쪽.

[791] 시몬 부드니는 처음에는 아마도 그리스 정교 신자였으나, 훗날 칼빈주의자가 되어 16세기 중반 리투아니아 민스크 근교의 클레츠크에서 칼빈주의 목사로 사역하며 칼빈주의 교리를 열정적으로 설교했다. 그는 두 편의 저서를 집필했다: 1. 『교리문답』(1562, 벨라루스어)과 2. 『인간의 의화에 관하여』(러시아어). 이후 부드니는 반삼위일체론자로 전향했다; 말리셰프스키 I. 폴로베츠 이반 스메라가 대공 블라디미르에게 보낸 위조 서한, 『TKDA』. 1876. 2. 507–513쪽; 플리스 V. 앞의 저서.

[792] RIB. 4. 1442쪽 (제4호: 시몬 부드니), 1231쪽 (루터교 교사), 1343쪽 (제8호: 미상); 또한: RIB. 4. 1265쪽, 1309쪽.

[793] 같은 책. 1205–1208쪽, 1278쪽, 1350쪽.

[794] 같은 책. 1314쪽.

[795] 같은 책. 1203, 1265, 1326, 1342, 1443쪽.

[796] 같은 책. 1251, 1277–1279쪽.

[797] 같은 책. 1253, 1264, 1268, 1348쪽.

[798] 같은 책. 1210, 1255, 1358–1359, 1265, 1422쪽.

[799] 같은 책. 1211, 1250, 1295–1297, 1444–1445, 1243, 1247, 1270, 1284, 1446쪽.

[800] 참조: 안드레예프 N. “이콘 숭배와 이콘 제작에 관한 오텐스키의 수도사 지노비”, 『Seminarium Kondakovianum』 8 (1936). 259–262쪽; 저자는 지노비의 생애를 재구성하려고 시도한다. 지노비이에 관한 주요 저작: 칼루긴 F. 『지노비이, 오텐스키 수도사와 그의 신학·논쟁 및 교회 윤리 저작들』(1894) – 안타깝게도 필자는 이 책을 접할 수 없었다. 이 저작에 대한 러시아어 서평을 참조하라: 보차노프스키 V., 『ЖМНП』. 1894. 11; 또한: 칼루긴 F. 오텐스키의 수도사 지노비이의 설교집, 『ЖМНП』 1893. 2 및 5; 타라시이, 사제. 고대 러시아 신학의 전환점 (1927).

[801] 참조: 포먀로프스키 M. 『15~16세기 모스크바-노브고로드 관계에 관한 문제』, 『쥴리야 모스크바 신학 저널』. 1898. 9.

[802] 르지가. 『저널리스트로서의 막심 그렉』. 8쪽.

[803] 골루빈스키. 2. 2. 224–225, 227–228쪽; 또한: 타라시이, 이에로모나흐. 앞의 저서.

[804] 지노비 오텐스키: 1. 『진리의 증언』, 『법전 모음집』 1863–1864 (카잔, 1863) 및 2. 『장문의 서한』, 『논문집』 1880. 2; 골루빈스키 (2. 1. 827쪽; 2. 2. 230쪽)은 지노비이를 첫 번째 저작의 저자로만 간주한다. 참조: 구지. 『고대 러시아 문학사』(1938). 282쪽.

[805] 참조: 골루빈스키. 2. 1. 819, 820쪽.

[806] 지노비. 『진리의 증언』. 제4장, 21, 22, 8, 29, 26, 30, 23, 27, 43, 44, 45. 참조: 마카리. 제2판. 6. 275–278쪽; 예멜야노프 이. 테오도시우스 코소그의 가르침, 『TKDA』 1862. 6; 골루빈스키. 2. 1. 820, 825–830쪽; 사드코프스키. 장로 아르테미오스, 『독본』 1891. 4. 106–109쪽; 말리셰프스키. 앞의 저서. 518–524쪽; 소콜로프 이. 16세기와 17세기 러시아에 대한 개신교의 태도 (1880). 266–267쪽.

[807] 참조: 마카리. 제2판. 6. 273쪽; 8. 467쪽; 골루빈스키. 2. 1. 826쪽; 2. 2. 225쪽. 이 저작이 과연 우연히, 단지 지노비에게 수도사들이 찾아와 코소의 견해에 대해 이야기해 준 것만으로 탄생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참조: 지노비. 『장문의 서한』, 『독본』 1880. 2. N. 포포프의 서문. 1쪽.

[808] 참조: 베스트셰프-류민. 『러시아의 역사』 1 (1877), 230쪽 이하, 265쪽, 273쪽 이하; 류바브스키 M. 『16세기 말까지의 고대 러시아 역사』 (1918); 니키츠키. 『벨리키 노브고로드의 삶에 관한 에세이』, 『ZhMNP』 1869, 10; 그레코프 B. 『노브고로드의 성 소피아 성당』(1914).

[809] 『진리의 증언』. 제5–12장, 제14–19장, 제20장.

[810] 또한 참조: 마카리. 제2판. 7. 467–492쪽 및 골루빈스키. 2. 2. 225–229쪽. 지노비우스와 요시프에 대한 비교 분석은 다음에서 참조: 마카리. 제2판. 7. 492–494쪽; 또한 다음을 참조: 타라시이, 이에로몬크. 앞의 저서. 7–16쪽, 32–40쪽, 98–110쪽, 137쪽, 146쪽. 1899~1900년에 카잔 신학 아카데미에서 학위 논문으로 이 저작을 제출한 타라시 신부는 수도 생활과 수도원 소유지에 대한 요시프파의 견해를 공유하고 있다(40–46쪽). 이러한 견해가 러시아 수도 생활에 얼마나 깊이 뿌리내렸는지를 보여주는 매우 대표적인 증거이다.

[811] AAE. 1. 제172호. 142쪽; 마카리. 제2판. 6. 169, 170, 171, 172쪽.

[812] 막심 그렉. 전집 1. 530쪽.

[813] 골루빈스키. 2. 1. 703쪽; 2. 2. 221쪽. 스페란스키 M. 『고대 러시아 문학사. 모스크바 시기』(1921). 146쪽; 구지. 앞의 저서 (1938). 279쪽; 마카리. 제2판. 7권. 295쪽; 즈마킨. 앞의 저서. 259쪽 등.

[814] 다니일(Даниил)의 저작에 대해서는: 즈마킨. 앞의 저서. 263–270쪽.

[815] 같은 책, 263쪽.

[816] 마카리. 제2판. 6. 203쪽.

[817] 즈마킨. 앞의 저서. 263쪽 및 그 이후.

[818] 참조: 마카리. 제2판. 7권. 345–367쪽.

[819] 고대 러시아 문학의 명작들. 4. 194–199쪽 (“온 러시아의 대주교 겸 겸손한 다니일, 겸손과 연합에 관하여”). 참조: 마카리. 6. 206–207쪽.

[820] 이에 대해서는 다음 문헌을 가장 먼저 참조할 것: 필라레트. 『개관』. 1–2.

[821] 골루빈스키. 2. 2. 181–182, 184–187쪽.

[822] 마카리. 10. 226–227쪽.

[823] 클류체프스키. 『성인전』. 297, 298쪽; I. 밀류틴의 『미네이』 편집에 대해서는: 같은 책. 298쪽 및 마카리. 11. 222쪽.

[824] PDP. 188 (1916). 그 외 덜 중요한 성자 전기 저작들에 대해서는: 필라레트. 『개관』. 1. 303, 316, 319, 351, 354, 360, 367, 369; 마카리. 11. 220–222쪽.

[825] 성 디미트리 로스토프스키에 대해서는 다음 단행본을 참조하라: 슐랴프킨 I. A. 『성 디미트리 로스토프스키와 그의 시대. 1651–1709』(1891).

[826] 골루빈스키. 2. 2. 192쪽; 《소피이 스키 연감》, 수록: 《PSRL》. 6.

[827] 마카리. 제2판. 6. 207–209쪽; 니콜스키. 키릴로-벨로제르스키 수도원. 1. 1. LXVIII쪽; 골루빈스키. 2. 1. 740쪽.

[828] 로자노프 S. 「니코노프식」 연대기 모음집과 그 편찬자 중 한 명인 요아사프, 『이오리아스』 1930. 13. 277쪽; 스토글라프. 제100장; 샤흐마토프 A. 『요아사프 연대기』, 『쥴리야』. 1904. 5.

[829] 골루빈스키. 2. 1. 740쪽.

[830] 같은 책. 620쪽. 로자노프. 같은 책. 268–270쪽. 라브로프 N. 『니코노프 연대기에 관한 메모』, 『LZAK』 34 (1927). 1. 55쪽. 이 연대기는 그 필사본이 총대주교 니콘의 소유였기 때문에 니코노프 연대기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831] 세레브리안스키. 앞의 저서. 21, 39–46, 339–341, 345, 370쪽. 코르닐리이 수도원장(이구멘)에 관한 많은 정보는 미술사학자 N. E. 안드레예프(프라하)에게 빚지고 있다. 그는 1937–1938년에 프스코보-페체르스키 수도원에서 수행한 자신의 연구 활동과, 이 연구 자료를 바탕으로 한 자신의 단행본에 대해 나에게 알려주었으나, 안타깝게도 1939–1945년 전쟁 기간 중 아무런 근거 없이 독일 당국에 의해 압수되어 소실되었다.

[832] 『성인들에 관한 책』, 『치테니야』. 1887. 4. 55쪽 (제157호).

[833] 골루빈스키. 『시성사의 역사』. 332쪽.

[834] 나소노프 A. 『프스코프 연대기 기록의 역사』, 『역사 기록』 18 (1945). 261쪽.

[835] 슐랴프킨 이. ‘현명한 예르몰라이’, 그로즈니 시대의 새로운 작가, 『S. F. 플라토노프를 기리는 논문집』(1911). 550, 553쪽. 니콜스키 N. ‘에라즈무스 프레그레슈니에 관하여 다시’, 『서지 연보』 1 (1914); 르지가. ‘예르몰라이-에라즈무스의 문학적 활동’, 『LZAK』 33 (1926). 103–200쪽; 야보르스키 A. “예르몰라이-에라즈모의 문학 활동에 관한 문제”, 『Slavia』 9 (1930–31). 59–80, 273–299쪽.

[836] 슐랴프킨. 앞의 저서. 555–562쪽.

[837] 르지가. 앞의 저서. 173–176쪽.

[838] 같은 책. 157쪽.

[839] 제6장 참조; 『스토글라브』 제100장. (832) 르지가. 앞의 저서. 173–176쪽.

[840] 이 저작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르지가. 앞의 저서. 193–199쪽; 그 외 152, 158, 186쪽; 일부는: 즈마킨. 앞의 저서. 69–71쪽. 참조: 소볼레프스키 A. 『고대 러시아 문학에 관한 자료와 메모』, 『IORYAS』 17 (1912). 2쪽, 94–96쪽.

[841] 다음 저작을 인용한다: 플라토노프 S. F. 『모스크바 국가의 스무타 시대에 관한 고찰』(1899).

[842] 『전설』(1784년에 처음 출판됨)은 86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중 1–6장은 1584년부터 1611년까지의 시기를 다루고 있다. 7–58장은 수도원 포위에 대한 상세한 서술을 담고 있으며, 마지막 장인 59~86장은 스무타 시기 전체 루스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아브라아미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케드로프. 앞의 저서 및 동 저자. 『작가로서의 아브라아미 팔리친』, 『러시아 고고학』 1886. 8; 『전설』, 『PDP』 8 (1883).

[843] 클류체프스키. 『성인전』. 350–351쪽.

[844] 이 저작인 『우리 아버지 아르히만드리트 디오니시우스의 생애와 위업』은 여러 차례 출판되었으며(초판 1809년), 매우 인기가 높다.

[845] 『모스크바 국가와 전 러시아 땅의 멸망에 관한 이야기』, 『독서』 1881. 2 (초판).

[846] 고르스키. 『성 삼위일체-세르기예프 라브라에 대한 역사적 서술』. 2 (1890). 15쪽.

[847] 이 저작인 『예루살렘과 콘스탄티노플로의 여정에 관한 이야기와 전설』은 여러 차례 출판되었다: 1836; 1849; 『독서』 1871. 1; PDP (1882); 가장 우수한 판은 『PPS』 42권에 수록되어 있다. S. 돌고바가 편집하였으며, 서문에는 이오네에 대한 정보가 실려 있다.

[848] 수하노프 아르세니. 『프로스키니타리』, 『PPS』(1889)에 수록. 수하노프에 대해서는: 벨로쿠로프 S. 『아르세니 수하노프』(1891).

[849] 참조: 필라레트. 『오브조르』 1–2, 이 저작들은 연구라기보다는 단순히 목록으로 정리되어 있다.

[850] 참조: 마카리. 11. 223–227쪽; 『프라브. 소브.』 1864. 1. 108–126, 227–246쪽에 게재됨. 또한 마카리. 10. 195쪽 참조.

[851] 안토니 포돌니는 도덕적 교훈을 주는 성격의 저작을 몇 편 더 집필했다; 마카리. 11. 224쪽; 그 외에도 17세기 초반에 이루어진 서적 정정 작업과 관련하여 쓰인 논쟁적 저작 『정화하는 불에 대하여』(마카리. 10. 195쪽)가 있다.

[852] 필라레트. 『개요』. 1. 제367호.

[853] 슐랴프킨. 성 디미트리 로스토프스키. 168–169쪽; 「총대주교 요아킴의 생애와 유언」, 수록: OLDP (1879) 및 PDP. 1880. 제2호. 논쟁적 저작: 레베데프 A. 남러시아 기록보관소에서의 역사적 조사, 『체테니야』 1884, 3; 참조: 츠베타예프. 『러시아 내 외국 교파의 역사에서』(1866). 215–236쪽. 분열에 반대하는 저작: 『서한집』(카잔, 1855); 나머지 저작들은 원고 형태로만 보존되어 있다. 논문: 아브라모프 N. 『대주교 이그나티 코르사코프』, 『스트란니크』 1862년 – 필자는 이를 입수할 수 없었다. 이그나티와 아드리아노스 총대주교 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우스트랴로프. 『표트르 대제의 역사』 3권. 부록 7. 536쪽.

[854] 이 서한은 다음 자료에 수록되어 있다: 픽사노프 A. 『리아잔 지역의 고대 문서 및 기록』(1854). 제51호 및 보즈드비젠스키 T. 『리아잔 교구 역사 개관』(1820). 171–181쪽. 참조: 필라레트. 『개관』. 1. 제236호; 또한: 솔로비요프. 『러시아사』. 14. 90쪽.

[855] 필라레트. 『개관』. 1권. 제367호; 페투호프. 앞의 저서. 234쪽.

[856] PSZ. 2. 제1198호 및 제1199호.

[857] 참고: 각주 820 및 포포프 M. 『성 디미트리 로스토프스키와 그의 저작』(1910).

[858] 마카리. 12. 269쪽 및 그 이후.

[859] IRI. 4. 831–860쪽; 마카리. 12. 255–257쪽.

[860] PSZ. 1. 제188호.

[861] AI. 4. 제172–177호.

[862] 미르코비치. 총대주교 시대의 학교와 교육에 관하여, 『ZhMNP』 1878. 7. 스멘초프스키 M. 리후다 형제들. 17세기 말과 18세기 초 교회 교육 및 교회 생활사에 관한 연구 시도 (1899); 리후다 형제들에 대해서는 제11장을 참조.

[863] 슐랴프킨. 전게서. 부록. 77–79쪽. 카리온 이스토민에 관하여: 브라일로프스키 S. 『카리온 이스토민. 그의 생애와 저작』, 『초르노브르스카야 문학·역사·철학 저널(ЧОЛДП)』 1889. 4–6; 동 저자. 『카리온 이스토민의 전기』, 『주모스크바 신학·철학 저널(ЖМНП)』 1891. 8.

[864] 슐랴프킨. 앞의 저서. 256, 263, 283, 368, 370, 442쪽; 부록. 79쪽.

[865] “그리스의 영향은 교회적이었고, 서구의 영향은 국가적이었다.”라고 V. O. 클류체프스키는 썼다. “그리스의 영향은 사회 전체를 포괄했으나 인간 전체를 포괄하지는 않았고, 서구의 영향은 인간 전체를 포괄했으나 사회 전체를 포괄하지는 않았다.” (Geschichte Russlands. 3. p. 283). 개요를 위해 서구적 영향의 전반적인 그림을 명확히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가장 중요한 저작들만 언급하겠다: 플라토노프 S. 『모스크바와 서구』(1925); 페트로프 N. 「서구-러시아 문학이 고대 러시아 문학에 미친 영향에 관하여」, 『TKDA』 1872. 4, 5 및 7호 (이 오래된 저작도 여전히 충분히 유효하다); 클류체프스키 V. 『17세기 러시아의 서구적 영향: 역사·심리학적 고찰』, 『철학 및 심리학 문제』 36, 38, 39호 (1897); 동 저자. 『러시아사』 3권, 281–307쪽; 밀류코프 P. 『러시아 문화사 스케치』. 2권 (1898–1901); 브뤼크너 A. 『러시아의 유럽화』(1888); 루터 A. 『러시아 문학사』(1925); 윙클러 M. 『17세기 초부터의 러시아사』, 『프로필레온 세계사』 9권 (1933), 310–420쪽.

[866] 1037년부터 키예프는 러시아 정교회 수장인 키예프 대주교의 거처였다. 키릴 2세 대주교(1240–1280)는 키예프와 클랴즈마 강변의 블라디미르를 번갈아 거처로 삼았으며; 그의 후임자인 막심 대주교(1283–1305)는 1299년에 최종적으로 블라디미르로 거처를 옮겼다. 표트르 대주교(1308–1325)는 자신의 거처를 블라디미르에서 모스크바로 옮겼다. 이 시기에 러시아 남서부 교구는 리투아니아에 속해 있었다. 1448년 이오나가 모스크바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폴란드 왕이자 리투아니아 대공 카지미에르 4세는 특별 칙서를 통해 리투아니아 교구에 대한 이오나의 정통 관할권을 인정했다(1451). 1458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그레고리 마마는 9개 리투아니아 교구(브랸스크, 스몰렌스크, 페레미슐, 투로프, 루츠크, 블라디미로-볼린스크, 홀름, 갈리치)를 관할할 별도의 ‘키예프’ 총대주교로 그레고리 볼가린을 임명했다. 이오나 대주교가 서거한 후(1461년), 모스크바 대주교들은 ‘모스크바 및 전 루스’라는 칭호를 얻었다. 이때부터 키예프 대교구는 독자적인 역사적 길을 걷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소콜로프 D. 『러시아 대교구의 분열사』(1900); 소콜로프 P. 『비잔티움 출신의 러시아 주교와 15세기 초까지의 그 임명권』(1913); 또한: 마카리. 4–5 및 골루빈스키. 2. 1.

[867] 이 주제에 관한 방대한 문헌 중 다음을 꼽을 수 있다: 소볼레프스키 A. 『15~17세기 모스크바 루스 문학에 미친 서양의 영향』(1899); 슐랴프킨 A. 앞의 저서; 플로로브스키 A. 『16~17세기 동유럽 지적 생활에서 두 전통의 갈등』. 프라하, 1937; 초드니키 K. 『정교회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1370–1632』(1934).

[868] 슐랴프킨. 앞의 저서. 108쪽 및 이후; 하를람포비치 K. 16세기 및 17세기 초 서부 러시아 정교회 학교들 (1905); 골루베프. 키예프 대주교 페트르(모길라)와 그의 동료들. 1 (1883); 마카리(불가코프). 『키예프 아카데미의 역사』(1843); 티토프 F. 『키예프 우크라이나의 고등 교육』(1924); 골루베프. 『키예프 신학 아카데미의 역사. 모길라 시대 (1886); 페트로프 N. 17세기 후반의 키예프 아카데미 (1885).

[869] 그리스 정교회 파의 흥미로운 인물로는 수도사 요한 비셴스키(† 17세기 1분기)가 있었다. 참조: 지테츠키 이. 요한 비셴스키의 문학 활동 (1890); 프랑코 I. 《이반 비셴스키와 그의 작품》(1895); 그의 저작 중 일부는 다음에서 출판되었다: 《아유즈르》 2(1865). 205–270쪽; 《아르흐. 유즈르》 1. 7(1887). 19쪽 이하 및: 골루베프 S. 키예프 대주교 페트르(모길라). 1 (1883). 부록. 67쪽 이하. 비셴스키의 저작들은 그 시대 남부 루시의 사회적 관계와 수도원 생활에 관한 풍부한 자료를 제공한다.

[870] 이 분야의 문헌은 매우 풍부하다. 그중 몇 가지만 꼽자면: 『서부 루시의 논쟁 문헌 유물』, 『RIB』 7 및 19호; 아르한겔스키 A. 『가톨릭교와의 투쟁과 16세기 말 및 17세기 전반의 서부 루시 문헌』, 『학술 논문집』. 1888. 1; 이어서: 마카리. 10; 그리고 앞서 언급된 A. 플로로프스키의 저작. 전문 단행본: 자비트네비치 V. 자카리아 코피스텐스키의 『팔리노디아』와 16~17세기 서부 루스 논쟁사에서의 그 위치 (1883); 솜초프 N. 요안니키 갈야토프스키 (1884); 동 저자. 17세기 남부 러시아 문학사에 관하여. 1. 라자르 바라노비치 (1885); 시체브스카야 K. 팜바 베린다, 『네스토르 연대기 작가 협회 논문집』 23. 1 (1912); 오트로코프스키 V. 타라시이 젬카, 17세기 남러시아 활동가, 『러시아어 분과 논문집』 96. 2 (1921).

[871] 마카리. 11. 25쪽 이하; 12. 171, 195–197쪽; 그렌코프 A. “1620년 필라레트 총대주교 재임 시절 러시아에서 열린 공의회와 그 결정”, 『법률 총집』 1864. 1. 153–180쪽. 알렉세이 차르 시대에 채택된 가톨릭에 대한 조치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마카리. 11. 232쪽.

[872] SGGD. 3. 제77호; 마카리. 11. 48쪽 및 그 이후; 슐랴프킨. 앞의 저서. 108, 100쪽.

[873] 마카리. 11. 122쪽.

[874] 같은 책. 11. 124쪽.

[875] 바갈레이. 앞의 저서, 『논문집』 1887. 2. 162쪽; 마카리 주교, 『크라스노고르스크 수도원의 역사적 서술』, 『논문집』 1880. 3. 81쪽; 벨로쿠로프. 『자료집』(1888). 79, 162, 164쪽.

[876] 카프테레프 N. “교회 개혁가로서의 총대주교 니콘과 그의 반대자들”, 『법학 논문집』 1887. 1. 145쪽.

[877] 알렉세이에 대한 평가는 다음을 참조: 클류체프스키 V. 『러시아의 역사』. 3.

[878] 아유즈르. 3. 제259호. 323–324쪽: 아인고른 V. 『관계에 관하여』, 『논문집』. 1893. 2. 38–39쪽; 클류체프스키. 3. 302쪽.

[879] 유프티미우스의 에피파니우스에 관한 저작 참조, 『예브게니. 성직자 사전』 1권, 178–183쪽; 및 『오스텐(1865)』, 70쪽; 슐랴프킨. 전게서, 149쪽; 아인고른. 전게서, 1113쪽. 에피파니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페브니츠키 V. 『에피파니 슬라비네츠키, 17세기 러시아 종교 문학의 주요 인물 중 한 명』, 『TKDA』 1861. 2–3; 로타르 이. 『17세기 문학가 에피파니 슬라비네츠키』, 『키예프』 1900. 10–12.

[880] 아인고른. 앞의 저서, 『체테니야』 1899. 2. 1013–1026쪽; 로타르. 앞의 저서 11. 199쪽 및 그 이후.

[881] 로타르. 앞의 저서, 12권, 383쪽.

[882] 그 밖에도 에우피미우스는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우스의 저서 몇 편과 예루살렘의 성 키릴로의 설교 몇 편을 번역했으며, 스스로도 도덕적 교훈을 담은 저서 몇 편을 집필했다. 필라레트. 『개요』. 제2판. 1권. 259–261쪽; 브라일롭스키 S. “기적의 수도사 에우피미우스의 자비에 관한 설교”, 『PDP』 100 (1894); 『설명』 2. 3. 서론. 424, 447, 461, 501쪽 등.

[883] 설명. 2. 3. 501쪽; 오스텐 (1865). 93쪽; 슐랴프킨. 앞의 저서. 231쪽.

[884] 분열사에 관한 자료. N. 수보틴 편집. 6 (1879). 227쪽. 슐랴프킨. 앞의 저서. 140–141쪽. 요아킴의 학력에 대한 근거 없는 주장은 다음을 참조하라: 류비모프 S. “대표자들 간의 투쟁”, 『ZhMNP』 1875. 180. 127쪽; 또한 다음 저작에서도: N. A. A. 『모스크바 총대주교들. 요아킴 총대주교』, 『Chteniya』 1847–48. 123–136쪽.

[885] AI. 4. 제175, 259, 228, 204, 253호; 5. 제135, 167, 156, 183, 186호; 특히 4. 제204호와 5. 제75호.

[886] 총대주교 요아킴의 생애와 유언. N. 바르수코프 편집, 『OLDP』 62 (1879)에 수록. 슐랴프킨. 전게서, 139–144쪽; 벨로프. 전게서, 『쥘리안 모스크바 신학 저널』 1887. 1; 스멘초프스키. 『리후다 형제들』(1899).

[887] 바라노비치의 설교에는 스콜라주의의 영향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특히 17세기에 널리 알려져 널리 유포되었던 바라노비치의 저작집 두 권은 『영적 검』(키예프, 1666. 2판은 1686년에 출간됨)과 『설교의 나팔』 (키예프, 1674. 제2판 1686)이다. 바라노비치는 성체 성사의 변형에 관한 로마 가톨릭 교리를 따랐으나, 많은 남러시아 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논쟁적 저작들에서 필리오케를 거부했다. 바라노비치에 대해서는: 각주 865 참조, 또한: 아인고른. 앞의 저서 및 마카리. 12. 535–540, 553쪽.

[888] 마이코프. 『에세이』(1889). 8–17쪽; 마카리. 12. 640쪽; 시메온 폴로츠키에 대해서는: 포포프 V. 『설교자로서의 시메온 폴로츠키』(1886); 타타르스키 이. 『시메온 폴로츠키, 그의 생애와 활동』(1886); 또한 오래된 저작: 페브니츠키. 『시메온 폴로츠키』, 『법률 저널』 1860. 10. 193–232쪽; 11. 327–356쪽.

[889] 마카리. 12. 443, 592쪽.

[890] 마이코프. 앞의 저서, 27쪽 및 그 이후; 마카리. 12권, 681쪽. 제1판은 1667년에 출간되었다.

[891] 1682–83년에 출판된 폴로츠키의 『영혼의 점심』과 『영혼의 만찬』 선집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전자는 주일 설교를, 후자는 주님의 축일과 성모 마리아 축일 설교를 수록하고 있으며; 이 설교집들은 도덕적 교훈을 주는 성격을 띠며, 악덕, 미신, 분파주의자들의 견해 등을 신랄하게 고발하고 있다. 페브니츠키. 앞의 저서 11. 327쪽 이하.

[892] 페브니츠키. 앞의 저서 10. 218쪽 이하; 오스텐 (1865). 130–137쪽.

[893] 이것은 총대주교 요아킴의 지시에 따라 수도사 에우피미우스가 다양한 문서를 바탕으로 집필하고, 에우피미우스 자신의 해설과 저술을 보충하여 완성한 유명한 『오스텐』이다(1690). 제1판은 1865년 카잔에서 출간되었다. 실베스트르 메드베데프에 대한 간략한 전기는 S. 벨로쿠로프가 그의 저서 『진실한 소식』 서문에서 다루고 있으며, 이는 『치테니야』 1885년 4호에 수록되어 있다; 심도 있는 단행본: 프로조로프스키 A. 『실베스트르 메드베데프』, 『치테니야』 1896. 2–4; 또한: 코즐로프스키 이. 실베스트르 메드베데프, 『TKDA』. 1895. 2, 3, 5.

[894] ‘비밀 명령부’는 단순히 차르의 사무처였으며, 이 명칭 뒤에는 이전에 추측되었던 것처럼 특별한 정부 기밀이 숨겨져 있지 않았다. 참조: 자오제르스키 A. I.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차르의 가사 관리』(1917).

[895] 오스텐 (1865). 74; 《설명서》. 2. 2. 제151호.

[896] 프로조로프스키. 앞의 저서, 『체테니야』 1896. 2. 183–185쪽. 아마도 1681년과 1684년 사이에 메드베데프는 두 편의 저작을 썼을 것이다: 1. 「서적 목차와 저자 목록」, 『체테니야』 1846. 3. 제4부. 1–90쪽; 2. 「7190, 91, 92년(즉, 1682–1684년 – I. S.)에 대한 간략한 고찰, 그리고 그 기간 동안 시민 사회에서 일어난 일들」, 『체테니야』. 1894. 4. 1–197쪽. S. 벨로쿠로프 편집. (다른, 후기의 판본은 『키예프 대학』 1895–1896. I. 코즐로프스키 편집에 수록됨.) 이는 1682년 스트렐츠 반란에 대한 매우 훌륭하고 객관적인 서술이다. 참조: 서문. XXXVI쪽. 또한: 슈무르로, E. 『실베스트르 메드베데프의 기록에 관하여』, 『ZhMNP』 1889. 262. 335–369쪽. 메드베데프는 차르브나 소피아의 의뢰를 받아 이 『사색』을 집필했다. 1682–1684년 사건의 역사에 관한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구판(투만스키, 『표트르 1세의 생애에 관한 기록』 1권, 제6부; 사하로프 A., 『러시아인들의 기록』 1권, 1841년)에는 오류가 없지는 않다.

[897] 프로조로프스키. 앞의 저서. 198, 203, 205, 208쪽; 슐랴프킨. 앞의 저서. 145쪽. 벨로보드스키의 『신앙 고백』과 메드베데프의 『반론』은 『러시아 개신교 역사에 관한 자료집』, 『학술지』에 수록되어 있다. 1884. 3. 제20호. 또한 참조: 가브릴로프 N. 『모스크바의 독일 신앙 설교자들과 요아킴 총대주교의 그들에 대한 태도』, 『스트란니크』. 1873. 3. 125–137쪽.

[898] 슐랴프킨. 앞의 저서. 146쪽; 『설명』. 2. 3. 470쪽. 이 답변은 신성한 전례에서 성체 성혈의 변화 의식이 제정문을 낭독한 후가 아니라, 오직 에피클레시스, 즉 빵과 포도주를 성체와 성혈로 변화시켜 달라고 성령께 드리는 기도 후에 행해진다는 그리스 정교회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것을 의미했다. 참조: 마카리(불가코프). 『정교회 교리 신학』. 2 (1868). 381쪽. 또한: Hoppe A. 『그리스 및 동방 전례의 에피클레시스 및 로마 전례의 성체 성혈 축성 경문』(1864); Gass. 『그리스 교회의 상징학』(1872); Franz J. Th. 『그리스 및 동방 전례의 성체 변화와 에피클레시스』(1879); Höller J. 『그리스-동방 전례의 에피클레시스』(1912); Streitz. 『그리스 교회의 성찬 교리』, 수록: Jb. d. deutsch. Th. 9–13 (1864); 스파일 Th. 『동방 정교회의 성체 교리』, 『OCA』 13. 3 (1928); 14. 1 (1929). 정교회의 전례 교리에 대한 역사신학적 개관은 다음에서 다뤄진다: 하이러 Fr. 『초기 교회와 동방 교회』 1 (1937). 250–262쪽. 또한 참조: Casel O. 『동방 교회의 제사 예식으로서의 신비적 사건』, 『Der Christliche Osten』(1939). 59–74쪽, 특히 68–71쪽.

[899] 슐랴프킨. 앞의 저서. 115쪽, 117–118쪽; 골루베프 S. 《페트르 모길라》. 1 (1883). 373쪽; S. P. 《페트르 모길라》, 『체테니야』. 1877. 1. 142, 124쪽. 모길라에 대해서는 다음 단행본도 참조: Viller M. 『La Confession orthodoxe de Pierre Mogilas』; 또한 Jugie. 『Theologia dogmatica christianorum orientalium』 3권 (1930).

[900] 프로조로프스키. 앞의 저서, 221–222쪽. 테살로니키 대주교 시메온(† 1429)은 자신의 저서들(Migne. PG. 155)을 통해 그리스 정교회의 ‘비밀 신학’을 제시함으로써, 동방 교회의 가장 저명하고 존경받는 신학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성 키릴로스 예루살렘의 주교(† 386)는 그의 『입교 설교』를 통해 비밀 신학의 기초를 마련했다. 신비 신학의 가장 중요한 대표자로는 디오니시오스 아레오파기트(5세기), 막심 고백자(† 662), 소프로니오스 예루살렘의(† 638), 게르만 콘스탄티노폴리스의(† 738), 테오도르 안디드스(11세기) 및 니콜라이 카바실라(† 1371)였다. 참조: PRE. 13. 612쪽 및 그 이후. 또한 매우 흥미로운 논문을 참조하라: Engdahl R. „Beitrage zur Kenntnis der byzantinischen Liturgie“, in: Neue Studien zur Geschichte der Theologie und Kirche. 5 (1908).

[901] 슐랴프킨. 앞의 저서, 134쪽.

[902] 니콘이 폐위되고 모스크바로 유배된 후, 모스크바에서는 다소 혼란이 일어났다. 새로운 총대주교 요아사프 2세(1667–1672)는 나이가 매우 많았고; 그 후 짧은 기간 동안 피티림이 총대주교를 맡았으며(1672년 10월–1673년 4월), 그 뒤 1674년 7월 26일 요아킴이 즉위할 때까지 ‘공백기’가 이어졌다. 게다가 정부와 교회 당국의 모든 관심은 분열과의 투쟁에 쏠려 있었다.

[903] 17세기 80년대와 90년대 초반에 대한 가장 훌륭한 개관은 다음 문헌에서 찾을 수 있다: 벨로프 E. A. 『17세기 말 모스크바의 혼란』, 『ZhMNP』 1887. 9. 99–146쪽; 10. 319–365쪽.

[904] 리후다 가문에 대해서는 매우 훌륭한 저서인 스멘초프스키, M. 『리후다 형제들』(1899)을 참조할 것; 또한 스미르노프, 『모스크바 슬라브-그리스 아카데미의 역사』(1855)도 참조할 것.

[905] 스멘초프스키. 앞의 저서, 37쪽 및 그 이후.

[906] 개정된 정관(메드베데프의 초안은 아쉽게도 소실되었으며, 아마도 반대자들에 의해 파기되었을 가능성이 있음)은: DRV. 제2판. 6권. 397쪽 이하, 참조: 스멘초프스키. 앞의 저서. 42–46쪽.

[907] 슐랴프킨. 앞의 저서. 147쪽.

[908] 『강연집』. 1885. 4. p. XVII.

[909] 슐랴프킨. 앞의 저서. 148쪽.

[910] F. 샤클로비트에 관한 수사 사건. 1 (1884). 제15호. 544쪽.

[911] 소피아 알렉세예브나(1657년생)는 차르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의 딸로, 재능 있고 영리하며 야망이 큰 여성이었다. 그녀는 시메온 폴로츠키가 그녀의 형제인 차르비치 알렉세이와 페도르에게 가르치던 수업을 자주, 그리고 즐거워하며 들었으며, 이 공주는 서구식 교육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책을 많이 읽고 즐겨 읽었다. 1682년, 표도르 차르가 사망한 후, 형제인 이반과 표트르가 차르로 선포되었을 때—바로 이때 총대주교 요아킴이 어린 왕세자 표트르의 즉위를 직접 도왔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우스츄랄로프. 『표트르 대제의 역사』. 1. 16쪽; 벨로프. 앞의 저서, 『지모프』 1887. 1. 109쪽 이하), 소피아는 두 차르 모두 미성년자라는 점을 이유로 권력을 장악하고 국가의 섭정이 되어 직접 나라를 다스릴 호기라고 판단했으며, 실제로 그렇게 했다. 통치 기간(1682–1689) 동안 소피아는 서구적 영향과 서구식 교육에 대한 뚜렷한 호감을 드러냈다. 1689년 표트르에 의해 축출된 그녀는 모스크바의 노보데비치 수녀원에 유폐되어 수녀 서원을 했으며, 그곳에서 1704년에 세상을 떠났다. 소피아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아리스토프. 『차르브나 소피아 치세 시절의 모스크바 소요사』(1871); 벨로프 E. 앞의 저서; 슈무르로 E. 『차르브나 소피아의 몰락』, 『즈흐MNP』 1896. 1; 또한: 솔로비요프. 『러시아사』 13–14.

[912] 슐랴프킨. 앞의 저서. 150쪽. 메드베데프의 신학적 지식은 매우 방대했는데, 그의 저서 『진리의 소식』에서는 수많은 교회 교부들의 인용문과 이에 대한 참조를 찾아볼 수 있다. 체포 후 그의 개인 서재에 대한 목록이 작성되었는데, 그곳에는 독일어, 라틴어, 폴란드어로 된 603권의 책이 소장되어 있었으며, 그중 슬라브어로 된 책은 단 18권에 불과했다. 『체테니예』. 1885. 4. 서문. XXXV쪽.

[913] 목록. 2. 3. 제299호. 461쪽; 원고는 에우피미우스가 직접 필사했다.

[914] 『아코스, 또는 치료』는 필사본으로만 알려져 있다. 자세한 설명은 다음을 참조하라: 목록. 2. 3. 제299, 300, 301호.

[915] F. 샤클로비트에 관한 수사 사건. 1. 제29호.

[916] 슐랴프킨. 앞의 저서, 154쪽 및 그 이후.

[917] 『진실된 소식』, 『독회』 1885년 4호, 1, 79쪽.

[918] 슐랴프킨. 앞의 저서. 157쪽.

[919] 벨로쿠로프, 『독회집』 1885. 4. 19쪽.

[920] A. 고르스키의 견해 참조: 『설명』. 2. 3. 제299호. 469쪽.

[921] 이는 1) 「정통 신앙 고백서 요약…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성변화에 관하여」와 2) 「성목요일에 행하는 예식… 성사의 성별과 성변화에 관하여」이며; 참조: 슐랴프킨. 앞의 저서. 164쪽.

[922] 수사 사건. 제29, 30, 26호.

[923] 페트르 모길라의 『예식서』(1639)와 다른 남러시아 저작들에서는 성물을 바치는 사제의 이 행위가 특히 강조된다. 슐랴프킨. 앞의 저서, 115쪽; 프로조로프스키. 앞의 저서, 225쪽.

[924] 플라토노프. 『강의』(1915). 474, 478쪽; 개별적인 세부 사항: 슈무르로 예. 앞의 저서, 『ZhMNP』 1896. 1호.

[925] 바실리 바실리예비치 골리친 공작(1643–1714)은 교양 있는 인물이었으며, 서유럽에 큰 관심을 보였고, 서양의 문화적 영향과 서구식 교육을 장려했으며, 사생활도 서구식으로 꾸렸다. 골리친은 다양한 개혁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1682년부터 1689년까지 그는 대외 업무(대사관 사무국)를 총괄했으며, 소피아의 무한한 신뢰와 개인적인 총애를 누렸다. 소피아가 실각한 후(1689년 8월 8일), 골리친은 북부로 유배되어 1714년 4월 21일 그곳에서 사망했다. 골리친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Brückner, A. *Beiträge zur Kulturgeschichte Russlands im 17. Jahrhundert* (1887); 페트로프스키. “공작 V. V. 골리친”, 『러시아 논문집』 1875. 5; Gordon, General. Tagebuch; 또한: De la Neuville (모스크바 주재 프랑스 대사). Relation curieuse et nouvelle de Moskovie. Paris, 1698 (러시아어 요약본: 『러시아 논문집』 1891. 9 및 11); 솔로비요프. 12–14.

[926] 수사 사건. 1. 제26호 및 제30호; 벨로프. 지정된 저작. 365쪽, 각주. 홀모고르 대주교 아르세니의 유명한 저서 『신앙의 방패』에는 메드베데프가 민중을 선동하여 폭동을 일으키고 총대주교 요아킴 및 다른 인물들을 살해하도록 부추겼다고까지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우리의 견해로는 사실과 일치할 수 없다. 참조: 목록. 2. 3. 제310호. 503쪽.

[927] 프로조로프스키. 앞의 저서. 324–377쪽; 벨로프. 앞의 저서. 365쪽; 슐랴프킨도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다(앞의 저서. 208, 211, 234쪽).

[928] 슐랴프킨. 앞의 저서. 235쪽.

[929] AI. 5. 제194호, 339호.

[930] 슐랴프킨. 앞의 저서. 201쪽; 솔로비예프. 14. 137쪽.

[931] 오스텐(1865). 83–90쪽; 다른 판본은 『체테니야』 1870, 2, 1–12쪽에 수록되어 있다. 슐랴프킨의 견해(전게서, 208쪽)와 비교하라.

[932] 슐랴프킨. 앞의 저서. 176–201쪽.

[933] 같은 책. 165–166쪽.

[934] 같은 책. 169, 212쪽. 또한 이그나티 코르사코프의 반가톨릭 저작을 참조하라: 『체테니야』. 1884. 3.

[935] 슐랴프킨. 앞의 저서. 167쪽.

[936] 솔로비예프. 14. 90쪽; 슐랴프킨. 앞의 저서. 168쪽; 필라레트. 1. 제236호; 피스카레프. 앞의 저서. 제51호.

[937] 슐랴프킨. 앞의 저서. 164–166쪽; RBS. 54쪽; 다마스킨에 관하여: 야혼토프, 이. 『17세기 러시아의 논쟁가, 성직자 다마스킨』(1884) (저자는 열람 불가); N. 페트로프의 서평을 참조: 『쥴리안』 1884. 4.

[938] ‘전환(prelation)’에 관한 동방 교회의 교리 설명은 다음을 참조: Heiler. Op. cit. 1. 257쪽 이하; 또는: Gass. Symbolik. 225쪽 이하.

[939] 참조: 플라토노프. 『강의』(1915). 315쪽 이하, 특히 317–318쪽; 또한: 슈무르로 E. 『러시아사』. 뮌헨, 1922. 190–248쪽, 여기서 17세기의 가장 중요한 사건들에 대한 간략한 개요를 찾을 수 있다. 또한 이 세기에 대한 흥미로운 특징을 다음에서 참조하라: 플로르스키 G. 『러시아 신학의 길』. 파리, 1937. 57쪽 이하.

[940] 그러나 러시아의 분열을 단순히 성경 개정 반대 운동으로만 설명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분열의 역사는 이것이 러시아 종교 생활에서 매우 복잡한 현상이었음을 보여 주며, 안타깝게도 그 다면성을 이 자리에서 충분히 상세히 다루기는 어렵다. 이에 도움이 될 만한 저작들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멜니코프 P. 『분열에 관한 편지』(1862) (또한 『북쪽의 벌』 1862년호에 수록); 길야로프-플라토노프 N. 『분열의 논리. 이반 악사코프에게 보낸 편지』, 『러시아 리뷰』 1895년 10호; 그로모글라소프 이. 『러시아 분열과 세계 정교회』, 『BV』 1898년 4–5호; 골루빈스키 예. 『구예식파와의 논쟁에 관하여』(1905); 로자노프 브. 『러시아 분열의 심리학』, 『종교와 문화』(1901); 보로즈딘 아. 러시아의 종교적 이견 (1907); 옛 신앙의 진실 (선집) (1916); 카르타쇼프 A. 구례파의 의미, 『P. B. 스트루베 기념 선집』. 프라하, 1925; 플로로프스키 G. 러시아 신학의 길 (1937).

[941] 예배 서적에 대해서는 Heiler, 앞의 책 1, 297쪽 이하; Kattenbusch, 1, 498쪽; 또한 Lübeck, K., 『동방의 기독교 교회들』(1911), 120쪽 이하를 참조하라.

[942] 카프테레프. 『총대주교 니콘과 차르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1 (1909). 213–216쪽; 마카리우스. 8. 75쪽 이하.

[943] 막심 그렉. 전집 1. 28, 30쪽; 3. 51–60, 62, 67쪽 등. 참조: 마카리. 제2판 6. 179쪽 이하.

[944] 마카리우스의 저서(제2판, 6권, 177–195쪽)은 전적으로 객관적이라고 볼 수 없다. 골루빈스키는(2. 1. 663, 712쪽 및 그 이후) 막심이 음모와 러시아어에 대한 지식 부족의 희생자였으며, 그에게 제기된 이단 혐의는 근거가 없다고 본다. 우리는 이 견해에 동의한다.

[945] 『스토글라프』 제5장 및 제23장(차르에 관한 문제); 제16장, 제6장, 제9장, 제10장, 제12장, 제33장, 제34장. 지노비 오텐스키도 같은 현상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이스티나 포카자니예』, 952, 955, 958–961쪽). 또한 노브고로드 대주교 겐나디에 대해 제기된 몇 가지 비난(PSRL. 6. 221, 232쪽)에 제기된 몇 가지 비난도 참조할 수 있는데, 이 역시 예배 의식의 차이를 입증해 준다. 게다가 프스코프에서 일어난 ‘할렐루야’에 대한 유명한 논쟁과 십자 성호 긋기 방식—두 손가락으로 할지 세 손가락으로 할지에 대한 문제도 있다. 마카리우스. 8. 129, 91쪽 및 그 이후.

[946] 마카리. 11. 173–199쪽; 카잔스키 P. “필라레트 총대주교 재임 시 교회 예배 서적의 개정”, 『체테니야』 1848. 8; 디오니시이에 대해서는 참조: 스크보르초프 D. 『디오니시이 조브니코프스키, 트로이체-세르기예프 수도원의 대수도원장』(1890).

[947] 마카리. 11. 10쪽 이하; RIB. 2. 902; 10. 189–190.

[948] 만스베토프. 『교회 규정』. 311쪽 이하, 319쪽 이하; 동 저자. “우리나라에서 교회 서적이 어떻게 관리되었는가”, 『부록』. 1883. 4; 마카리. 9. 43, 66, 89, 120쪽.

[949] 만스베토프. 『교회 규정』. 319쪽; 카프테레프. 『교회 서적과 예식 개정 문제에서 니콘 총대주교와 그의 반대자들』. 1. 요시프 총대주교 시대 (1887; 제2판, 증보 및 개정판 1913); 제1판은 또한 논문 형태로 수록됨: “교회 개혁가로서의 니콘 총대주교와 그의 반대자들”, 『Prav. ob.』 1887. 1–2, 약간의 차이점이 있음.

[950] 아유즈르. 3. 제259호. 323쪽.

[951] 로타르. 에피파니 슬라비네츠키, 『키예프 저널』 1900. 10–12. 제11장 참조.

[952] 클류체프스키. 『러시아사』. 3. 327쪽.

[953] 고르차코프. 『모스크바 명령서』. 77쪽; 「울로옌에 대한 니콘 총대주교의 견해」, 『ORSA 회보』 2 (1861). 423–497쪽, 특히 449, 451, 453, 456쪽.

[954] 마카리. 11. 193–196쪽; 고르차코프. 『토지 소유에 관하여』. 330, 337쪽. 니콘의 교회 정책에 대해서는: 카프테레프. 총대주교 니콘과 차르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2권 (1909–1912); 또한 지지킨과 주코프의 저술 참조.

[955] 1652년까지의 니콘의 전기는 마카리. 11. 162–166쪽을 참조; 또한 다음을 대조해 보라: Bonwetsch. Nikon, in: PRE.

[956] 여기서는 1980년대 N. 카프테레프와 N. 수보틴 사이의 논쟁을 의미한다. 카프테레프, N. 『니콘 총대주교와 그의 반대자들』(1913) 참조. 185–203쪽; 수보티닌이 니콘의 활동을 ‘정당화’한 것은 M. 지지킨의 저서 『총대주교 니콘』에서 그를 이상화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3권 (1931–1937).

[957] 카프테레프. 니콘이 총대주교가 되기 전 고대 루스의 국가 권력과 교회 권력 간의 관계, 『BV』 1910. 1, 20, 21. 또한 카프테레프가 『총대주교 니콘과 차르 A. M.』 1권(1909) 60–62쪽에서 제시한 니콘에 대한 평가를 참조하라. G. 플로르프스키의 개별적인 지적들(『러시아 신학의 길』, 63쪽)은 탁월하다.

[958] 니콘과 그의 교회 정책에 관한 가장 중요한 문헌은 이미 인용한 바 있다. 특히 다음 저서를 추가로 언급하고자 한다: Palmer William. The Patriarch and the Tsar. London, 1871–1876. 6권; 여기에는 거의 모든 주요 원천 자료가 수집 및 번역되어 있다. 또한, 팔머는 이 저서에 니콘에 관한 몇 가지 연구 결과를 포함시켰다.

[959] 『코르메차』와 그것이 러시아 교회에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Hermann. Op. cit. 23쪽 이하; 여기에는 관련 문헌이 제시되어 있다. 또한: 마카리. 제2판. 8권. 143쪽 이하.

[960] 마카리. 11권, 118쪽 이하; 12권, 117, 125쪽.

[961] 이러한 상호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카프테레프 N. 『16세기와 17세기 러시아와 정교회 동방 간의 관계 특성』(1885).

[962] 프로토포프 아바쿠움에 대해서는: 「Das Leben des Protopopen Awwakum von ihm selbst」. 번역 및 서문: R. 야고디치 (1930). 그 외 문헌은 참고문헌 목록을 참조. 아바쿠움에 대한 가장 훌륭한 평가는 미야코틴과 멜니코프의 저서에서 찾을 수 있다. 분열과 관련된 모든 문제에 대해서는, I. 바르스코프와 P. 스미르노프가 아바쿠ムの 저작에 쓴 서문을 참조하라. RIB. 39(1927)에 수록된 서문과 주석, 그리고 N. 구지야의 서문과 해설(『프로토포프 아바쿠ムの 생애』, 1934)을 참조하라; 또한 Jagoditsch, 『Kyrios』 1(1936), 410–413쪽을 참조하라.

[963] 마카리. 12. 125–138쪽; 브베덴스키 S. 『코스트롬의 프로토포프 다니일』, 『BV』 1913. 4.

[964] 16세기와 17세기 모스크바 교회 공의회의 조직은 전적으로 차르의 의지에 달려 있었는데, 차르는 세속 권력의 수장으로서 모든 통치 수단을 장악하고 있었다. 차르는 공의회의 발기자였으며, 그의 의지 없이는 공의회가 열릴 수 없었다. 그는 회의의 시기와 장소는 물론, 참가자의 구성과 수를 결정했으며; 그는 회의를 개회하고, 공의회 결정을 승인하여 법적인 효력을 부여했으며, 자신의 차르 칙령과 명령을 통해 그 결정이 이행되도록 조치했다. 참조: 카프테레프. 총대주교 니콘과 차르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1 (1912, 제2판). 82, 62쪽.

[965] 1654년 공의회 의정서는 처음에 니콘에 의해 『스크리잘라』(1656)의 부록으로 간행되었으며, 이후 『1654년 교회 서적 정정에 관한 공의회 의정서』(1873)라는 별도의 판으로 출간되었다.

[966] 마카리. 12. 139–145쪽; 마카리. 『러시아 분열사』. 160쪽.

[967] 파벨 주교는 니콘과 같은 고향 출신으로, 두 사람은 젊은 시절부터 서로를 알고 지냈으며, 게다가 파벨은 수도사 안토니의 친척이기도 했다; 이 안토니는 1652년 새 총대주교 선출 과정에서 세 후보자 중 제비뽑기를 통해 선출되어 총대주교좌의 유일한 후보가 되었으나, 알렉세이 차르가 니콘을 총대주교로 원했기 때문에 안토니는 총대주교 직분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마카리. 『러시아 분열사』. 178쪽; 멜니코프. 『사제 계급에 관한 고찰』. 14쪽; 포고딘 M. 『총대주교 니콘과 그의 반대자들의 고향에 관한 고찰』, 『모스크비티아닌』. 1854. 19호 (이 저작을 확인할 수 없음).

[968] 마카리. 앞의 저서. 180쪽.

[969] 니콘 총대주교 재임 시절, 다음과 같은 수정된 예배 서적들이 인쇄되어 각 교회에 배포되었다: 1. 예배서 (1655). 2. 스크리잘 (1656) – 성찬례에 대한 해설이 담긴 책. 3. 소기도서 (1656). 4. 사순절 트리오드(1656). 5. 이르모로기온(1657). 6. 복음서(1657). 7. 시편(1658) 및 8. 예식서(1658). 마카리. 앞의 저서, 182쪽.

[970] 니콘의 명령에 따른 1655년 공의회에 관한 보고서는 1655년 예배서에 서문으로 수록되었으며, 이후 P. 스트로예프가 자신의 『톨스토이와 차르 도서관 목록』에 이를 게재했다. 특히 1654–1655년 및 1666년 모스크바 여행 당시 총대주교 마카리우스 안티오키아의 아들이자, 총대주교를 수행했던 부집사 파벨 알레포의 여행 일기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참조: Travels of Macarius. London, 1829–1836. 2권 (일기 일부는 러시아어로 번역됨: 『Chteniya』. 1890. 4) 및 이후: Palmer W. 2. 1655년 공의회에 대해서는: 마카리우스. 12. 172쪽 이하.

[971] 마카리우스. 『러시아 분열의 역사』. 161–165쪽; 마카리우스. 12. 179쪽 이후; 파이시우스의 서한은 『그리스도 교양』 1881. 1호에 수록됨 (원본 및 번역).

[972] 구교도들의 신조 제8조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또한 성령을 믿나니, 그분은 참되시고 생명을 주시는 주님이시며,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며,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경배와 찬양을 받으시는 분이시니, 선지자들이 그분에 대해 말하기를 ‘그분의 왕국은 끝이 없을 것’이라 하였도다.” 이러한 추가 문구들은 잘못된 번역의 결과로 삽입된 것으로, 모스크바에서는 16세기에 들어서야 등장한다. 마카리. 『러시아 분열의 역사』. 23–25쪽.

[973] 마카리. 12. 186쪽.

[974] 같은 책. 12. 191–195쪽; 마카리. 『러시아 분열사』. 170–175쪽. 러시아에서 두 손가락으로 하는 십자 성호 기호의 출현에 대하여: 같은 책. 25–31쪽; 또한: 카프테레프. 『니콘 총대주교와 그의 반대자들』(1913). 58–61, 78–96, 189–203쪽; 골루빈스키. 『구례파와의 논쟁에 관하여』(1905, 또한 『논문집』 1905, 3호에 수록). 153–196쪽; 이바노프스키(『지침서』 2권. 126–135쪽)는 세 손가락 십자 표시를 유일하게 올바른 손가락 모양으로 옹호하며, 그의 저서는 시노달 선교사들의 참고서 역할을 했다. 공의회의 판결은 지나치게 성급했으며, 아마도 니콘의 강요로 채택된 것으로 보이며, 그 근거는 비판을 견디지 못한다. 왜냐하면 두 손가락 십자 표시에는 어떠한 이단도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니콘이 취한 조치에 대한 정당화 참조: 마카리우스. 12. 221–223쪽.

[975] 우리는 세속 권력이 영적 권력에 복종해야 할 필요성, ‘사제직’이 ‘왕권’보다 우선한다는 니콘의 원칙적인 견해를 염두에 두고 있다. 『우로제니예』에 대한 니콘 총대주교의 견해, 『ORSA 기록』 2(1861), 특히 456, 449, 451, 453쪽; 또한 참조: 파블로프 A. 『동방 교황주의 이론』, 『법률 저널』 1879. 12호 및 운돌스키 V. 『니콘 총대주교의 A. M. 차르의 법령에 대한 평론』, 『러시아 고문서』 1886. 2호. 615–620쪽.

[976] 페레츠 V. 『소문과 해설』, 『IORYAS』 5권, 1909년 1호, 123쪽 이하.

[977] 니콘이 주교좌를 떠난 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마카리이. 12. 326–524, 683–751쪽; 니콜라예프스키 P. 『유배 생활 속의 니콘』(1882).

[978] 1667년 공의회 회의록, 『DAI』 5권, 제102호, 447쪽 또는 『자료집』 1권, 79쪽; 카프테레프. 『니콘 총대주교와 차르 A. M.』 1권 (1909). 494쪽.

[979] 카프테레프. 앞의 저서. 492쪽; 멜니코프. 『사제 계급에 관한 고찰』, 『전집』 7 (1909). 14쪽; 마카리. 『러시아 분열사』. 274쪽.

[980] 카프테레프. 앞의 저서. 500쪽; 「니콘 총대주교에 대한 고발」, 『러시아 문학 연보』 5권 (1863). 제2부.

[981] 이오나의 서한, 『독본』 1884. 1. 잡문집. 21–22쪽.

[982] 예를 들어, 랴잔 교구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픽사노프. 『고대 문서』(1851). 제51호.

[983] 『사도행전』, 『DAI』 5권, 제102호, 458쪽; 『자료집』 1권, 제11호.

[984] 자료집. 7 (1885). 제3, 4, 5호.

[985] 스미르노프. 『분열 속의 내부 문제』(1898). 12, 137쪽; 『자료집』. 6. 230쪽; 참조: 마카리. 12. 627쪽 및 그 이후.

[986] 스미르노프. 앞의 저서. XXIV-XXVII쪽; 마카리. 러시아 분열의 역사. 273쪽; DAI. 12. 제130, 134, 180호.

[987] 앤더슨 V. 『구예식파와 이단주의』(1903). 131쪽 이하; 드루지닌. “비고프스키 은둔자 코르닐리의 생애에 관하여”, 『지므넵』 1884. 9; 오스트로프스키 D. 『비고프스키 은둔처와 그 의의』(1914); 필리포프 I. 『비고프스키 은둔처의 역사』(1862) (저자는 입수할 수 없었다).

[988] 마카리. 12. 630쪽; 마카리. 『러시아 분열사』. 215쪽; 여러 문서: 『AAE』. 4; 『DAI』. 5; 『AI』. 4; 『논문집』. 1846. 3. 제1부; 카잔스키 P. “솔로베츠키 봉기의 주동자들은 누구였는가”, 『논문집』 1867. 4; 시르초프 이. 『솔로베츠키 구전파 수도사들의 반란』, 『법률집』 1880. 1, 2, 4, 5–7, 10; 1881. 1, 2, 4, 5 (또한 별도 간행물: 카잔, 1881); 『자료집』 3. 중요하지만 완전히 객관적이지는 않은 자료로는 스타로베르의 비고프스키 파의 지도자 S. 데니소프의 저서 『솔로베츠의 수도사들과 순교자들에 관한 역사』(제1판 1788; 제2판 1788; 제3판 1789)가 있다.

[989] 자료집. 3. 107쪽; 2. 116쪽; 니콜스키 N. 솔로베츠키 수도사 게라심 피르소프의 저작, 수록: PDP. 188 (1916).

[990] 자료집. 2. 제14, 30, 31, 43, 45호.

[991] 같은 책. 213–262쪽. 이 청원서는 차르에게 제출되지 않았다. 시르초프. 앞의 저서, 『법률 모음집』 1880. 1. 164쪽; A.I. 4. 제248호.

[992] 시르초프. 앞의 저서, 169–173쪽.

[993] 카프테레프. 『러시아와 정통 동방의 관계』(1885).

[994] DAI. 5. 제102호. 487쪽. 공의회의 판결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1) 예배는 새로 수정된 성경에 의해서만 거행하도록 허용되었는데, 이는 그 수정이 옳았기 때문이다; 2) 신앙고백문 제8조에서 “진정한”이라는 단어가 생략되었다; 3) 찬송에서 ‘할렐루야’는 ‘하나님이시여, 영광을 받으소서’를 덧붙여 세 번 외쳐야 했다; 4) 세 손가락으로 십자가를 그리는 것이 규정되었다; 5) 예수님의 기도는 정해진 형식으로 드려야 했다: “주 예수 그리스도여, 우리 하나님이시여, 우리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6) 프로스포라에는 네 갈래 십자가를 그려야 했다(같은 책, 485–487쪽). 1667년의 ‘서약’은 구예식 신봉자들이 정교회에서 파문당하는 근거가 되었으며, 스타로베르들이 통합 교회의 품으로 돌아올 때 원칙적인 정경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이 ‘맹세’는 문헌에서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는데, 가장 중요한 저작들을 꼽자면 다음과 같다: 『1667년 모스크바 공의회의 맹세에 관하여』, 『크리스토스』 1872. 5; 필리포프 T. 『1667년 공의회의 맹세에 관하여』, 『그라즈다닌』 1876. 17; 파벨, 이구무. 『1667년 공의회 맹세에 관하여』, 『비얏스크 교구 소식』 1871. 4; 그렌코프 A. 『1666–1667년 모스크바 공의회 결정』, 『법률 총집』 1863. 5, 9, 11 및 12; 이바노프스키. 『지침서』. 2. 150쪽; 골루빈스키 예. 『구예식파와의 논쟁에 관하여』, 『논문집』. 1905. 3.

[995] 도시페이. 『솔로베츠키 수도원 설명』. 1. 151쪽; 시르초프. 앞의 저서. 281, 347쪽; 솔로베츠키 수도원은 백해에 위치한 모스크바의 거점으로서, 주로 스웨덴을 상대로 하여 특히 견고하게 요새화되어 있었다. P. 카잔스키(『논문집』. 1867. 4. 6쪽)은 상시 상당수의 스트렐츠 병력이 주둔해 있던 수도원의 이러한 ‘군사화’와 수도원 무역이 수도원의 세속화에 기여했다고 본다. 그러나 이 견해에는 동의할 수 없는데, 수도사들의 종교적 광신주의가 세속화의 결과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분열에 동조하여 저항 운동에 참여했던 수많은 유배자들이 수도원에 머물렀던 사실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참조: 시르초프. 앞의 저서, 372쪽 이하.

[996] 포위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시르초프의 저서나 다음 문헌을 참조하라: 마카리. 『러시아 분열사』. 240–258쪽.

[997] PSZ. 2. 제1102호.

[998] 1905년 4월 17일자 칙령을 통해야 비로소 스타로베르(구교도)에 대한 공식 명칭인 ‘분열주의자’가 폐지되었으며, 이 칙령에서는 앞으로 “현재 사용되고 있는 ‘분열주의자’라는 명칭 대신, 정교회의 기본 교리를 받아들이되 교회가 채택한 일부 예식을 인정하지 않고 고전 인쇄본에 따라 예배를 드리는 모든 교파와 파벌의 추종자들에게 ‘구전파’라는 명칭을 부여하라”고 명시하고 있다. (인용 출처: 골루빈스키 E. 『구예식파와의 논쟁에 대하여』. 238–239쪽.)

[999] 표트르 대제의 교회 개혁에 대해서는 베르호프스카야 P. 『영성 위원회의 설립과 영성 규정』. 2권 (1916); 이 주제에 대한 입문서로는 다음 저서를 추천한다: Stupperich R. 『표트르 대제의 국가 사상과 종교 정책』(1936) (Osteuropische Forsch. N. F. 22); Brückner A. 『Peter d. Gr.』(1879). 러시아 교회의 새로운 지위와 국가에 대한 복종은 1817년 11월 19일 및 1824년 3월 15일의 칙령을 통해 최종적으로 확립되었다. (PSZ. 34. 제27106호 및 39. 제29919호; 또한 1824년 8월 26일자 제30037호 참조).

[1000] 참조: Philipp W. Ivan Peresvetov und seine Schriften zur Erneuerung des Moskauer Reiches (1935). 42쪽 이하, 이 책에는 이러한 국가·정치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간결한 개요가 실려 있다.

[1001] PSZ. 1. 제122호. 이러한 전통からの 일탈은 『신상거래 규정』(PSZ. 1. 제408호)과 1682년 자선법 초안에서도 발견될 수 있는데, 이 법안에서는 표트르 대제 이전부터 이미 “유럽의 관습”에 대한 언급이 이루어졌다. 참조: 블라디미르스키-부다노프. 『개관』(1888). 211쪽.

[1002] 스크보르초프. 파트리arch 아드리안. 17세기 마지막 10년 동안 러시아 교회의 상황과 관련된 그의 생애와 저술 (1913) (또한 『법률 선집』 1912–1913에 수록).

[1003] 페트르 모길라의 『정교회 신앙고백서』 신판 서문에서 아드리안은 외국인들이 마치 “양의 가죽을 쓴 늑대”처럼 러시아에 침투했다고 썼다. 소콜로프. 『17세기 러시아에 대한 개신교의 태도』, 139쪽. 이미 우리에게 잘 알려진 수도사 예프피미(메드베데프의 반대자)는 아드리아노의 가장 가까운 측근에 속해 있었으며, 그에게 루터교도와 칼뱅주의자들이 정교회에 대항하여 선전을 펼치고 있다고 썼다. “교회의 적은 많으나, 수호자는 보이지 않는다” – 유프티미우스는 이러한 말로 자신의 서신을 마무리한다. 설명. 3. 2. 제310호. 496쪽.

[1004] 이 글의 목적은 『영적 규정』을 상세히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원칙적인 점을 강조하고자 할 뿐입니다. 『영적 규정』이 법으로 제정되었을 때, 러시아 교회는 지역 교회로서 러시아 국가의 일부가 되었고, 성 시노드는 국가 기관이 되었으나 교회 기관은 아니게 되었습니다. 오직 교리와 예배에 있어서만 러시아 교회는 보편 동방 교회들과의 일치를 유지했다. 러시아 교회에 있어 중요한 것은 표트르 대제가 총대주교제를 합의회적 통치로 대체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국가와 교회 사이에 완전히 새로운 관계 체계가 생겨났다는 점이었다: ‘러시아 교회’는 ‘러시아 내의 정교회’로 변모했으며, 즉 국가의 통제 하에 놓이고 국가 법률에 근거하여 운영되게 되었다. 참조: 템니코프스키 E. 『영적 규정의 출처 중 하나』, 『하르키우 역사·문헌학회 논문집』 18 (1909). 5쪽; 동 저자. 『교회 권위에 관한 일반 교리와 관련하여 러시아 정교회 내 전러시아 황제의 지위』(1909). 15쪽; 또한 앞서 언급된 P. 베르호프스키의 저서와 『Kyrios』 5호(1940–41)에 실린 필자의 논문을 참조. 66쪽 및 그 이후.

[1005] 참조: Stupperich. Op. cit. 제2장.

[1006] 이 테오판의 저작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구르비치 D. 『테오판 프로코포비치의 「군주 의지의 진리」와 그 서유럽적 출처』(1915). 테오판에 대해서는 다음 문헌도 참조: 사마린 유. 『스테판 야보르스키와 테오판 프로코포비치』, 『전집』 5권 (1880) (초판 1844년 – 검열로 인해 일부 구절이 삭제됨); 카르타쇼프 A. 『테오판 프로코포비치의 정교성에 관한 문제』, 『D. F. 코베코 기념 논문집』(1913); Koch H. 『피터 대제 시대의 러시아 정교회』(1929); 플로로프스키 G. 『러시아 신학의 길』(1937). 특히 89쪽 이후. 지금까지도 그 가치를 잃지 않은 오래된 저작: 페카르스키 P. 『표트르 대제 치하의 러시아 과학과 문학』(1862); 테오판의 전기에 대해서는: 치스토비치 I. 『테오판 프로코포비치와 그의 시대』(1868) 및 티틀리노프 B. 『테오판 프로코포비치』, 『RBS』 수록.

[1007] 『영적 규정』에 대해서는 P. 베르호프스키의 기초적인 저작을 참조할 것. 이 저작에는 모스크바 루스 시대와 표트르의 개혁 이후 국가와 교회 간의 관계에 관한 문헌에 대한 상세한 개요가 수록되어 있다. N. 케드로프의 논문 「표트르 대제의 개혁 활동과 관련된 영적 규정」(1886) (또한 『Prav. ob.』 1885에 수록)은 매우 미흡하며 일방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1008] 『군주의 의지의 진리』, 『PSZ』 7권, 제4870호, 628쪽.

[1009] 플로로프스키. 앞의 저서. 84쪽 및 그 이후. 참조: 베르호프스카야. 1. 156쪽.

[1010] 특히 경찰의 임무와 의무를 명시한 「수석 치안관 규정」이 대표적이다. 『PSZ』 제3708호. 표트르 대제의 개혁에 대한 간결하고 명확한 설명은 슈무르로 E. 『러시아사』(1922) 270–342쪽에 실려 있다.

[1011] 영적 규정. 제1부. 서론. PSZ. 6. 제3718호. 군사 규정. PSZ. 5. 제3006호. 제20조.

[1012] 표트르의 국가 개념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Stupperich. Op. cit. S. 23.

[1013] 같은 책, 32쪽.

[1014] 솔로비예프. 17. 246쪽. 모든 주교들이 표트르의 개혁을 부정적으로 바라본 것은 아니었다. 테오판은 그의 가장 유명한 보좌자 중 한 명이었다. 또한, 비록 1709년에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미트로판 보로네즈 주교를 언급해야 한다; 노브고로드의 대주교 요브(† 1716); 어쩌면 홀모고르의 대주교 아파나시우스도 언급할 수 있는데, 그는 개혁이 시작될 무렵 피터의 개혁에 대해 호의적인 평가를 내렸으나, 1702년에 이미 세상을 떠났다. 참조: 스크보르초프. 총대주교 아드리안. 112쪽.

[1015] 플라토노프. 『강의』(1915). 485쪽.

[1016] 영적 규정은 페오판 프로코포비치가 표트르의 지시에 따라 작성했다. 1721년 1월 25일, 영적 사무 위원회 설립에 관한 선언문이 발표되었으며(PSZ. 제3718호; 참조: PSPiR. 1. 제2판, 제1호), 2월 14일에는 이 기관이 성대하게 개관되었다. 이날 ‘종교 사무 위원회’라는 명칭은 ‘지극히 거룩한 통치 시노드’로 변경되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P. 베르호프스키의 저서를 참조하라.

[1017] PSZ. 3. 제1541호 및 제1664호.

[1018] 치스토비치. 앞의 저서. 139쪽. “수도 생활이 언제, 어떤 죄로 인해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선언”이라는 제목의 칙령, 출처: PSPiR. 4. 제1197호. 표트르는 이미 1701년 12월 31일자 칙령에서 당대 수도 생활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 바 있다. PSZ. 4. 제1886호.

[1019] AAE. 4. 제315호; PSZ. 3. 제1664호. 1701년 12월 31일자 칙령은 수도사에게 연간 10루블과 밀 10체베르의 급여를 규정했으나, 1705년에 이 급여는 절반으로 삭감되었으며, 이는 1710년 타벨을 통해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다. 고르차코프. 『토지 소유에 관하여』. 473쪽; 케드로프. 앞의 저서. 229쪽. 이 타벨은 수도사의 연간 급여를 6루블과 밀 5첼베트로 정하고, 원장에게는 소액의 가산금을 지급하도록 규정했다. PSPiR. 4. 부록. 333–335쪽; 이 급여조차 항상 지급되지는 않았다는 점에 대해서는, 같은 책 2권 998쪽을 참조하라.

[1020] PSZ. 4. 제1829호; 또한 제1834호 참조.

[1021] 같은 책. 제1834호, 1839호, 1886호, 1948호.

[1022] 이 “부록”은 다음 문헌에 수록되어 있다: ПСПиР. 2. 제596호; ПСЗ. 6. 제4022호; 또한 이 부록은 이후 판의 《규정》에도 포함되어 있다.

[1023] ПСПиР. 2. 제596호, 제671호; 4. 제1197호.

[1024] 고르차코프. 수도원 관리국. 123쪽; 수도원 관리국의 관할권에 대해서는: 같은 책, 123–128쪽.

[1025] ПСПиР. 2. 제596호. § 44, 45, 48; 4. 제1200호, 1244호, 1379호; 3. 제1091호. 1724년 보고서에 따르면, 수도사의 수는 다음과 같았다: 남성 수도원 14,534명, 여성 수도원 10,673명, 총 25,207명. 추데츠키. 『연구 경험』, 『TKDA』 1877. 4. 46쪽.

[1026] ПСПиР. 3. № 1099, 1136; 5. № 1929. 세 개의 수도원(안드로니코프스키, 페레르빈스키, 니콜스키, 모두 모스크바 교구 소속)에서 수도자들이 추방되었고, 수도원 건물은 학교 용도로 넘겨졌다. PSPiR. 4. 제1316호, 제1328호, 제1284호.

[1027] ПСПиР. 4. № 1197. 2.

[1028] ПСПиР. 2. № 596. § 18; 4. № 1197. 1. § 12.

[1029] ПСПиР. 2. № 596. § 46 및 47; № 997; 3. № 1153; 2. 제536호, 제595호; 1723년에는 수도원 정원 내 ‘공석’에 ‘퇴역 군인’을 배치하라는 기이한 칙령이 반포되었으나, 이후 폐지되었다. PSZ. 제4141호, 제4455호, 제4672호. 『보충편』에 따르면, 추도프 수도원과 보즈네센스키 수도원 등 일부 수도원은 병원 및 야간 보호소를 마련해야 했으며, 노보데비치 수도원은 고아원을 설립해야 했다. ПСПиР. 2. № 1279. 1724년의 「공고」에는 수도원을 병원으로 개편하는 계획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는 일부 수도사가 환자를 돌보고, 다른 ‘농사 짓는 수도사’들은 이 병원들을 유지하기 위해 땅을 경작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PSPiR. 2. 제1197호. 1. § 1–8. 피터 대제는 일련의 칙령을 통해 전쟁 장애인들의 부양 책임을 수도원과 그 소유 토지에 전가하려 시도했다: ПСЗ. 4. № 1856 (1701); 5. № 3409 (1719); 7. № 4183 (1723); № 4450. 제1부. § 1 및 3 (1724); 또한 참조: 6. 제3576호, 여기서 1720년 4월 8일자 칙령이 무효로 선언되었다.

[1030] PSPiR. 2. 제596호. § 49. 새로 설립된 알렉산드로-네프스키 수도원의 원장만이 정부에 의해 임명되었으며, 이 규정은 후일의 칙령을 통해 재확인되었다. PSZ. 제2959호; § 50은 원장들에게 수도원 규약에 따라 수도원을 운영할 것을 요구하며, 원장이 병에 걸리거나 부재 시 수도원 운영을 대신할 수 있는 보좌관을 두도록 규정하고 있다. 영적 규정. 주교에 관한 장. § 7.

[1031] PSPiR. 2. 제596호, § 30, 51–53, 31–33; 제426호 및 제954호; 4. 제1456호; 영적 규정. 주교에 관한 장. § 8; PSZ. 제1834호, 제2985호, 제3172호.

[1032] 『영적 규정』 부록. PSPiR. 2. 제596호; 2. 제984호; PSZ. 제1834호.

[1033] 즈나멘스키. 『표트르 대제 시대의 교회 영지』, 『법전 모음집』 1864. 1. 140쪽; 고르차코프. 『수도원 관리국』. 131쪽. 1701년 당시 수도원 관리국은 아스트라한, 프스코프, 시베리아 교구를 제외하고(이 교구들은 해당 관리국의 관할을 받지 않았음) 수도원 소유 토지에 단 137,823가구의 농민 가구를 관리하고 있었다.

[1034] 1700년 12월 16일 칙령에 따라 성직자와 평신도 간의 모든 분쟁은 관할 기관에 이관하도록 규정되었다. PSZ. 제1818호. 고르차코프. 앞의 저서. 132–136, 195쪽. 제국 전체를 통치하는 최고 기관으로서 상원이 설립됨에 따라 수도원 관리국은 상원에 종속되었다. PSZ. 4. 제1829호, 제1834호; 또한 제2321호, 제2349호, 제2571호 등을 참조. 참조: 자브얄로프. 앞의 저서. 64쪽.

[1035] PSPiR. 5. 제1678호, 1778호, 1492호, 1787호.

[1036] 같은 책. 제1716, 1767, 1772, 1786, 1907호. 레오니드, 아키마. “칼루가 교구에 위치한 폐지된 수도원들에 관하여”, 『논문집』. 1862. 2. VI쪽.

[1037] 베르호브스키. 앞의 저서 1. XXVI-XXVII쪽; 『모음집』 63. 696쪽 이하, 793쪽; 다슈코프 게오르기, 『RBS』 135쪽; 플라토노프. 『강의록』 546쪽. 또한 참조: 반슨. 『가계 및 통치자 표』. 3. 제81호.

[1038] 안나의 교회 정책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티틀리노프 B. 『안나 이오안노브나의 통치』(1905); 치스토비치. 『테오판 프로코포비치』. 316쪽 이하; 베르호브스키. 앞의 저서 1. 32쪽 이하. 또한 엘리자베타 황후 선언문에 실린 안나 통치에 대한 평가를 참조. PSZ. 11. 제8506호.

[1039] 1742년 3월 25일에 행한 설교, 출처: 포포프 N. 『엘리자베타 여제 치세기의 궁정 설교자들』, 티혼라보프. 연대기. 2. 12쪽. 키릴 플로린스키 대수도사는 비론과 그의 요원들을 “악마의 사자”라고 불렀다. 솔로비요프. 21. 182쪽.

[1040] 슈트홀린. 2. 222, 223쪽.

[1041] 안나에 대한 평가는 다음을 참조: 셰르바토프 M. M. 『러시아의 풍속 타락에 관하여』, 『러시아 논문집』 1870. 7. 50쪽. 안나의 교회 정책 수행에 있어 A. I. 오스터만의 역할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러시아 역사 유물집』. 카슈피로프 편집 (1873). 3. 260쪽; PSZ. 11. 제8506호.

[1042] 플라토노프. 『강의』. 552쪽; 코르사코프 D. 『안나 이오안노브나』, 『RBS』 수록; 비론에 대해서는: 스트로예프 V. 『비론 정권과 각료회의』(1909). 안나 시대에 관한 매우 중요한 자료로는 다음 회고록이 있다: 만슈타인 장군. Memoires historiques, politiques et militaires sur la Russie, depuis 1727–1744. 저자 전기 포함, 유베르 편 (Leipzig, 1771; 독일어판: ibidem. 1771; 러시아어판: Рус. ст. 1875).

[1043] 치스토비치. 앞의 저서. 257, 295, 316쪽; 티틀리노프. 앞의 저서. 146, 162쪽.

[1044] PSPiR. 7. 제2505호 및 제2531호 (둘 다 1731년). 각료회의는 1731년 11월 1일, 칙령에 명시된 바와 같이 “국가와 우리의 충성스러운 신하들의 이익을 위해” 설립되었다. PSZ. 8. 제5871호; 시노드는 각료회의에 매월 보고서(“보고서”)를 제출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1045] PSZ. 제6177호, 제6189호, 제6574호, 제6561호, 제6585호.

[1046] PSZ. 제7993호.

[1047] PSZ. 제7660호 및 제7538호, 그리고 제8543호.

[1048] 자비알로프. 앞의 저서, 72쪽.

[1049] N. M. 『18세기의 러시아 수도원 생활』, 『스트란니크』 1884년 1호, 212, 435쪽 및 그 이후; PSZ. 제8303, 8309, 9382호.

[1050] 플라토노프. 『강의』. 556쪽.

[1051] 엘리자베타의 교회 정책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베데냐핀 P. “정교회 성직자에 관한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 황제의 입법”, 『법률 저널』 1865. 5, 7, 10; 즈나멘스키 P. 『표트르 개혁 시기 이후 러시아의 본당 성직자』(1873). 242쪽, 441–459쪽; 동 저자. 『1808년 개혁 이전 러시아의 신학교』(1881). 175쪽 이후, 188쪽. 엘리자베타에 관한 또 다른 흥미로운 전기가 있다: 베인 N. 『피터 대제의 딸』(웨스트민스터, 1891).

[1052] IRI. 3. 618, 486쪽; 4. 662쪽; PSZ. 제8959호; 동시에 1744년 7월 8일 칙령(PSZ. 12. 제8960호)을 통해 엘리자베타는 라브라가 소유한 모든 영지에 대한 소유권을 재확인했다. 고르스키. 역사적 서술. 2. 129쪽.

[1053] PSZ. 제9591호, 제10665호, 제11332호, 제1079호; 참조: 제8583호, 이에 따라 장애를 가진 장교들은 예배 중 질서를 유지해야 했다.

[1054] PSZ. 제11441호, 제11481호.

[1055] IRI. 2. 81쪽.

[1056] 고르차코프. 『모스크바 명령집』. 102, 122쪽 및 그 이후; 자블야로프. 『저작집』. 50쪽. 저서: 자블야로프. 예카테리나 2세 치하의 교회 소유지에 관한 문제 (1900)와 베르호프스카야 P. 『성 시노드, 주교 관저 및 수도원의 부동산 소유지』(1909)는 1701–1764년의 세속화 시대 전체 역사에 관한 가장 중요한 자료들이다.

[1057] 고르차코프. 앞의 저서, 139쪽; PSZ. 제1886호.

[1058] 참조: 밀류코프. 『국가 경제』(1890). 495쪽.

[1059] PSZ. 제1886호; 고르차코프. 『토지 소유에 관하여』. 473쪽.

[1060] 고르차코프. 『모나스타리 명령』. 140쪽. 부록. 제6, 10, 11호.

[1061] 자비알로프. 앞의 저서. 60쪽; PSZ. 제1926, 2462, 3659호; 고르차코프. 모스크바 명령. 165쪽 및 그 이후.

[1062] 고르차코프. 앞의 저서. 167쪽; PSZ. 제3659호.

[1063] PSPiR. 1. 제3호; PSZ. 6. 제3734호. § 5. 표트르의 결정은 1741년 6월 26일자 칙령에서만 알려져 있다. PSZ. 제8406호.

[1064] PSPiR. 1. 제30, 41, 79, 273, 729호.

[1065] 자브얄로프. 앞의 저서. 66–70쪽. PSZ. 제4567호. 시노달 수도원 관리국과 카메르-콘토라의 조직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바르소프 T. 『과거의 시노달 기관』(1897). 171–184쪽. 1726년 9월에 단행된 개혁은 시노드 총괄 행정의 새로운 조직과 관련이 있었다. 1726년 7월 15일, 시노드는 두 개의 부서로 나뉘었는데, 그중 하나는 일상 업무를 담당했고, 다른 하나는 교회 재판 및 재산 관리를 담당했다. PSZ. 7. 제4559호. 참조: 바르소프. 앞의 책. 187쪽 및 그 이후.

[1066] ПСПиР. 1. № 313.

[1067] PSZ. 7. № 4488; PSPiR. 4. № 1237, 1266.

[1068] 참조: 1726년 9월 25일자 「최고 비밀 의회 저널」, § 4, 『모음집』 56, 100쪽.

[1069] PSZ. 7. 제5005호; PSPiR. 5. 제1907호.

[1070] PSZ. 제6354호.

[1071] 시노드 관리 하에 남아 있던 것은 1721년 시노드 설립 이후 시노드에 이관된 옛 총대주교 소유지뿐이었다. 시노드는 표트르 대제의 새로운 명령이 내려질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이 소유지들을 시노드 산하 수도원 관리국에 이관하지 않고 직접 관할하에 두었다. 그러나 1738년 5월 15일 칙령이 내려진 후, 이 영지들마저 시노드 관리에서 제외되어 경제위원회로 이관되었다. 자브얄로프. 앞의 저서, 74쪽; PSZ. 10. 제7679호.

[1072] PSZ. 제7639호(1738), 제7850호(1739), 제8074호(1740).

[1073] ПСПиР. 2. № 596. § 61. 자브얄로프. 앞의 저서. 75쪽. 이때 교회 계층 지도자들의 개인 재산이 상당했을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즉, 계층 지도자들에게는 귀중한 예복, 성기, 성화, 서적 등이 속해 있었다.

[1074] 1. 자멘스키. 앞의 저서; 『법전』 1864. 1. 274쪽, 참조: 자브얄로프. 앞의 저서. 77쪽 및 그 이후.

[1075] PSZ. 12. 제8993호; 참조: 자브얄로프. 앞의 저서. 77쪽. 이미 그 이전인 1741년 6월 26일 칙령에 따라, 경제 위원회는 일시적으로 시노드에 이관되었다. PSZ. 제8406호.

[1076] PSZ. 13. 제10168호; 자브얄로프. 앞의 저서. 100쪽; 솔로비요프. 24 (1874). 242, 360, 363쪽.

[1077] 베데냐핀. 앞의 저서, 『법률 총람』 1865. 3. 220쪽; PSZ. 14. 제10765호.

[1078] 이와 관련하여 엘리자베타 여제가 전쟁 장애인을 수도원에 수용하고 수도원 예산으로 그들을 부양하도록 지시한 조치와, 시노드가 이에 대해 너무 적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에 대해 그녀가 불만을 표명한 사실이 특징적이다. 『PSZ』 14. 제10765호.

[1079] PSZ. 14. № 10765; 자브얄로프. 앞의 저서. 96–100쪽. 엘리자베타의 갑작스러운 사망(1761년 12월 25일)만이 교회 소유지의 세속화를 막았다고 추측할 수 있다.

[1080] PSZ. 15. № 11481. 표트르 3세에 대해서는 다음 단행본을 참조하라: Bain N. Peter III, Emperor of Russia. The story of a crisis and a crime (Westminster, 1902).

[1081] 이전에는 스타우로피기알 수도원의 대수도원장들이 연간 100루블을 받았으나, 1762년 3월 21일 칙령에 따라 500루블을 받게 되었고, 2급 수도원의 원장들은 200루블, 3급 수도원의 원장들은 150루블을 받게 되었다.

[1082] 러시아에서 농노제가 절정에 달했던 18세기에 표트르 3세가 이 칙령을 반포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이 칙령은 이후 예카테리나 2세 치하와 푸가체프 시대에 발생한 농민 봉기에 일정한 역할을 했다.

[1083] PSZ. 15. № 11498.

[1084] 《러시아 연감》 제25권 (1879). 586쪽, 또한 솔로비예프. 제25권 (1875). 147쪽. 또한 예카테리나가 즉위한 후 아르세니 마체예비치가 A. P. 베스트주예프-류민 백작에게 보낸 편지를 참조하라; 같은 책, 146쪽.

[1085] 자브얄로프. 앞의 저서. 123, 125쪽.

[1086] 예카테리나의 종교적 견해에 대해서는 저의 저술인 『Jahrbuch für Geschichte Osteuropas』 3 (1938); 또한: 티틀리노프 B. 『가브리일 페트로프, 노브고로드 및 상트페테르부르크 대주교』(1916) – 예카테리나 2세 치하의 러시아 교회에 관한 심도 있는 연구로, 이 책의 여러 곳에서 황후가 가진 견해가 묘사되어 있다. 또한 오래된 연구인: 즈나멘스키 P. 『예카테리나 2세 치하 러시아 교회의 역사에 관한 강연』, 『Prav. sob.』 1875에도 참고할 수 있다.

[1087] 저의 저서, 571, 574쪽. 앞서 언급한 교회 소유지에 관한 칙령에 대한 내용을 참조하라; 게다가 표트르 3세가 일부 ‘개신교적 혁신’을 도입할 계획이라는 소문도 돌고 있었다. 메르시-아르젠토 백작이 카우니츠 백작에게 보낸 편지(1752년 5월 28일 및 6월 18일) 참조, 『모음집』 18권, 371쪽 및 391쪽; 또한: 볼로토프, 『수기』 2권. 172쪽; 다치코프 공주의 회고록. 1. 41쪽; 러시아 기록. 1871. 2055쪽; 또한 PSZ에 수록되지 않은 1762년 3월 26일 칙령, 『러시아 논문집』 6(1872). 567쪽.

[1088] PSZ. 16. 제11582호; 1762년 7월 7일 대관식과 관련하여 발표된 칙령은 6월 28일의 조치를 다시 한 번 정당화했다: 황후는 이것이 “하나님(!), 그분의 교회, 그리고 거룩한 신앙에 대한 관점에서 볼 때 그녀의 지위 그 자체가 요구하는 바”라고 선포했다. PSZ. 16. 제11598호; 표트르 3세의 죽음은 신의 섭리의 의지가 드러난 것으로 묘사되었다. PSZ. 16. 제11599호. 참조: 필자의 저서, 574쪽.

[1089] 집성. 7. 156쪽.

[1090] 러시아 정교회 연감 1865. 490쪽; 모음집. 13. 378쪽 (볼테르에게 보낸 편지, 1773년 12월 27일자). 33. 142쪽 (그림에게 보낸 편지, 1781년 4월 23일자).

[1091] 『나카즈』. 체추린 편집 (1907). 비록 주교들(소위 인노켄티 대주교 위원회)이 예카테리나의 업적을 칭송했음에도(티틀리노프, 가브리엘 페트로프. 131–134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전 제정 위원회에게 러시아 정교회와 그 이익은 시야 밖으로 밀려났다; 성직계는 그 위원회에 자체 대표를 파견하지 않았으며, 오직 시노드만이 한 명의 대표를 위원회에 보냈을 뿐이다. 플로르스키 A. 1767–1774년 입법 위원회의 구성 (1915). 57쪽; Stдhlin. 2. 468쪽. 또한 필자의 저서 참조.

[1092] 셰르바토프. 『러시아의 풍속 타락에 관하여』, 『러시아 논문집』 1871. 686쪽; 또한: 돌고루키 이. M. 『1777년 키예프 여행기』, 『논문집』 1870. 3. 8쪽; 필자의 앞서 언급한 저서 574–576쪽.

[1093] 선집. 7. 97쪽.

[1094] 솔로비예프. 25 (1875). 148쪽; 참조: 예카테리나가 A. P. 베스트주예프 백작에게 보낸 편지. 모음집. 7. 135쪽.

[1095] PSZ. 16. 제11643호.

[1096] PSZ. 16. 제11716호; 위원회의 활동에 대해서는: 자브얄로프. 앞의 저서. 127쪽 및 그 이후.

[1097] PSZ. 16. 제11730호, 추가로 같은 곳 제11745호, 11747호, 11789호 및 11791호 (수입 및 지출의 관리와 회계에 관하여).

[1098] PSZ. 16. 제11814호; 경제위원회에 대한 특별 지침: 같은 곳. 제11844호; 위원회는 7월 12일부터 활동을 시작했다. 같은 곳. 제11864호.

[1099] PSZ. 16. 제12060호.

[1100] 참조: 자브얄로프. 앞의 저서. 155–190쪽, 190–234쪽, 283–321쪽, 322–340쪽 (A, B, C, D 항목에 관하여).

[1101] 추데츠키 P. 18세기와 19세기에 폐쇄된 러시아 수도원의 수에 관한 역사적 연구 사례, 『TKDA』. 1877. 4. 73쪽.

[1102] PSPiR. 4. № 1200; 추데츠키. 앞의 저서. 57, 58, 73, 74쪽; IRI. 6. 1144–1147쪽.

[1103] 포크로프스키, 이. 『18세기의 러시아 교구』. 부록 2; 자브얄로프. 앞의 저서. 235쪽.

[1104]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알렉산드로-네프스키 라브라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교구 주교좌와 함께 운영비를 지원받았다.

[1105] 수도원 1곳 2009,8; 수도원 1곳 2007,7 및 수도원 1곳 1506,38 루블.

[1106] 밀류틴. 앞의 저서, 『독회집』 1861. 2. 565쪽; 자브얄로프. 앞의 저서, 266쪽. 1768년, 1775년 및 1793년에 정원에 따른 수도원 총 지출액이 증가했다. PSZ. 제13061호, 14361호 및 17124호.

[1107] 자브얄로프. 앞의 저서. 346–348쪽, 표.

[1108] 같은 책. 274쪽. 이 자료는 완전히 신뢰할 수 없는데, 개별 수도원들이 한 범주에서 다른 범주로 이동하기도 했고, 일부는 이후 폐쇄되었다가 다른 일부는 다시 재개되었기 때문이다. 추데츠키. 앞의 저서. 73–75쪽, 88–102쪽, 104–107쪽.

[1109] PSZ. 16. 제12121호; 밀류틴. 앞의 저서, 『치테니야』 1861. 2. 568–569쪽; 추데츠키. 앞의 저서. 74쪽; 자브얄로프. 앞의 저서. 270–271쪽.

[1110] PSZ. 22. 제16375, 16649 및 16650호.

[1111] PSZ. 제13721호.

[1112]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하를람포비치. 『마로로시야 성직자층』(1898) 및 슐랴프킨. 앞의 저서.

[1113] 아르세니의 「보고서」, 『체테니야』 1862, 2, 25쪽.

[1114] 아르세니 마체예비치에 대해서는 매우 알찬 연구 자료를 참조하라: 포포프 M. 『아르세니 마체예비치와 그의 사안』(1912); 티틀리노프. 『가브리일 페트로프』(1916); 모로슈킨 I. 『아르세니 마체예비치와 그의 사안』, 『스트란니크』 1885. 3. 457–487, 655–672쪽; 이콘니코프 V. 아르세니 마체예비치, 『루스. 스트.』 1879. 4, 5, 8–10; 아르세니 마체예비치와 동시에 그와 뜻을 같이했던 두 명의 아키만드리트도 유죄 판결을 받았다.

[1115] 『Православные сочинения』 1875. 3. 248쪽.

[1116] 티토프 A. 파벨 코뉘스케비치, 『역사 저널』 1888. 1. 180쪽 및 그 이후; 톨스토이 M. 성자 파벨, 토볼스크 대주교, 『논문집』 1870. 2. 158, 163, 168쪽.

[1117] 수도원계의 저항 사례로 다음 사건을 들 수 있다. 키예프 대교구 내 수도원 소유지의 세속화(1786) 직후, 예카테리나 2세는 키예프를 방문하여 키예프 근교에 위치한 메지고르스크 수도원에서 예배에 참석하고자 했다. 그러나 수도사들은 황후가 이러한 의도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자, 방문 예정일 이른 아침에 소문에 따르면 자신들의 수도원에 불을 지르며, 결국 예카테리나의 방문은 성사되지 않았다. 로즈데스트벤스키 P. 사무일 미슬라프스키, 키예프 대주교, 『TKDA』. 1877. 4. 17쪽.

[1118] 추데츠키. 앞의 저서, 『TKDA』. 1877. 4. 104쪽 및 그 이후. 벨라루스에서는 1796~1797년에 처음으로 수도원이 폐쇄되기 시작했으며, 마지막 수도원 폐지는 1855~1860년에 이루어졌다; 카프카스와 그루지야에서는 1811년과 1819년에 일부 수도원이 폐쇄되기도 했다. 추데츠키. 앞의 저서, 68, 73–76, 88–102쪽.

[1119] 1882년, 1889년, 1894년, 1910년, 1916년 성 시노드 수석 검사의 보고서를 참조하라.

[1120] PSZ. 제15379호. § 58 (교구 관리위원회 칙령). 예를 들어, 모스크바 대주교 플라톤의 노력 덕분에 1766년에 니콜로-페스노쉬스키 수도원이 재개되었고, 1780년에는 베를류코프스카야 푸스티니가 재개되었다. 피멘. 회고록, 『체테니야』 1877, 1권, 250, 253쪽.

[1121] PSZ. 24. 제18273호, 제18590호. 수도원이 매입하는 토지의 규모를 추가로 확대해 달라는 청원은 1800년 4월 5일 칙령에 의해 기각되었다. 같은 책. 제19370호.

[1122] 같은 책. 제18273호; 《슈타티》(Staty). 제2권. 제3부. 63–67쪽.

[1123] PSZ. 28. 제21785호; 참조 제24246호 (1810). 이 칙령의 조항은 1819년에 본당 교회로도 확대 적용되었다. PSZ. 36. 제27622호. 도시 내에 위치한 수도원 소유 주택들은 숙박세와 토지세에서 면제되었으며, 도시 당국에 납부해야 했던 그 밖의 일부 공과금도 폐지되었다. PSZ. 제22894호; 24627, 28611; 2 PSZ. 제3326호; 이후 1857년 법전(9. § 386, 391–392)에서 재확인되었다. 1819년 이후, 자금을 유익하게 투자하고자 하는 수도원들은 종종 도시의 주택을 매입했다.

[1124] 2 PSZ. 제26313호, 제15152호, 제15189호, 제15907호. 수석 검사 보고. 1836. 80쪽; 1846. 91쪽; 1841. 39, 80쪽; 1842. 6, 12쪽; 1856. 90쪽; 1859. 5쪽; 2 PSZ. 제26736호 – 그루지야의 수도원에 관한 유사한 칙령(1852).

[1125] 1838년 이후에는 무인지와 산림을 최대 150 데시아틴까지 더 큰 규모로 매입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2 PSZ. 제11518호. 참조: 법전. 8. 제1부 (산림 규정). 536쪽. 예를 들어, 트로이체-세르기예프 라브라는 1,249 데시아틴의 국유림을 취득했다. 피멘. 앞의 저서. 259쪽. 로스티슬라보프. 연구 사례. 73–74쪽 (산림 취득 사례 몇 가지). 로스티슬라보프는 (같은 책, 86쪽) 19세기 70년대 초반에 200개 수도원이 소유한 토지가 25만 데시틴 이상에 달한다고 집계한다.

[1126] 2 PSZ. 제36967호.

[1127] 2 PSZ. 제45341호; 확보된 금액은 교구 주교좌의 정원 급여 인상을 위해 배정되었다.

[1128] 《스트란니크》. 1882. 8. 622쪽; 《보고서》. 1884.

[1129] 피멘, 대수도원장. 『회고록』(1877) (또한 『독서』 1876년 3–4호; 1877년 1호에 수록됨). 엄격한 수도 생활을 영위한 이 수도사의 『회고록』은 19세기 수도원 역사에 관한 중요한 자료이다. 안타깝게도, 이와 같이 신뢰할 수 있는 다른 자료는 우리에겐 너무나 부족하다.

[1130] 사바 대주교, 『나의 생애 연대기』. 5권, 172, 178, 216쪽; 6권, 276쪽; 7권, 59, 221, 385쪽; 8권, 739쪽. 사바 대주교의 간략한 약력은 『이스트.』 1896. 66. 1106쪽; 1910. 120. 316쪽. 사바의 『연대기』에는 많은 진본 문서와 서신 등이 수록되어 있어 19세기 러시아 교회사에 있어 매우 귀중한 저작이다. 또한: 로스티슬라보프. 『연구의 시도』. 329, 331, 232, 212, 336쪽. 수도원에 관한 많은 자료를 수록한 로스티슬라보프의 저작은, 그가 편향된 시각으로 글을 썼기 때문에 어느 정도 주의를 기울여 활용해야 한다.

[1131] 보고서. 1848. 86쪽; 다른 연도의 보고서와 비교. 예를 들어, 1869년에 (모스크바 교구의) 이바노프스키 수도원은 마카로바-주브차니노바 미망인으로부터 300,000루블을 받았으며; 데르자비나라는 인물이 (노브고로드 교구 소재) 즈나멘스키 여자 수도원을 설립하고, 그곳에 98,279루블과 경작지 및 산림 890데시아틴을 기부했다.

[1132] I. M. 돌고루키의 『메모』에 실린 견해를 참조하라. 『체테니야』 1870, 2, 54, 51쪽.

[1133] 피멘. 앞의 저서. 103, 246, 280, 282쪽 등; 또한 사바의 『연대기』와 『보고서』의 여러 대목을 참조하라; 예를 들어, 1887년에는 100개의 병원과 72개의 야간 보호소가 수도원으로부터 운영비를 지원받았다. 1887년 보고서 (1889). 156쪽; 1884. 231쪽 이하. 또한 전쟁 시기, 예를 들어 1812년에는 수도원들이 야전병원에 거액을 기부했는데, 트로이체-세르기예프 라브라만 해도 70,000루블을 기부했다. 즈나멘스키. 『러시아 교회사 개론』(1876). 429–431쪽; 1877–78년에는 많은 수도원에 병원이 설치되었다. 보고서. 1877. 5–29쪽; 1878. 145–146쪽.

[1134] 그에 관한 A. 그레코프의 매우 흥미로운 저작 『아르한겔스크 주 피네즈키 현 베르콜스키 수도원의 원장 테오도시 아치만드리트 신부』(1893)를 참조하라. 테오도시 오레호프는 장교의 아들이었다. 그는 체육관과 농업 고등 학교를 졸업한 후, 2년 동안(1854–1856) 여러 수도원을 전전했다. 1857년에 그는 코제예제르스키 수도원에 수련자로 입회했고, 1860년에 수도 서원을 받았다. 이미 1861년에 테오도시이는 작은 베르콜스키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으며, 그곳에 공동체 생활 규율을 도입했고, 곧 거의 버려진 상태였던 수도원은 진정한 수도 생활의 터전이 되었다. 테오도시 신부는 수도원에 보호소와 농민 자녀들을 위한 기숙학교 두 곳을 마련하고, 공예 학교를 건립했으며, 인근 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성공적인 계몽 활동을 펼쳤다.

[1135] 『영적 규율에 대한 부록』, 출처: PSZ. 제4022호 및 PSPiR. 2. 제596호. 이 『부록』은 『영적 규율』의 모든 후속 판본에 수록되어 있다.

[1136] 이 『수도원 생활의 묘사』는 아마도 수도원 방 벽에 걸어두기 위해 별도의 포스터 형태로 인쇄되었다. 최초 출판: 보그다노프. 『상트페테르부르크 묘사』(1779); 이후 유제니 볼호비티노프 대주교는 『러시아 성직 계보사』 제2권에 이 『묘사』를 수록하였다; 참조: 티틀리노프 B. 『테오판 프로코포비치』, RBS, 433쪽.

[1137] PSZ. 7. 제4450호; PSPiR. 4. 제1197호; 치스토비치. 『테오판 프로코포비치와 그의 시대』. 부록.

[1138] N. M. 『18세기의 러시아 수도원 생활』, 『스트란니크』 1884. 1. 212, 435쪽.

[1139] 즈베린스키. 2. 제1141호; 데니소프. 제889호; 『법전』 1863. 7. 154쪽; 『사로프 은둔원의 창설자이자 초대 원장인 성직수사 요한의 생애와 공적』(1892).

[1140] 이 『교훈』은 집필된 지 몇 년 후에 출판되었다(모스크바, 1824). 필라레트 장로와 그의 활동에 대해서는 『글린스카야 은둔원의 부흥자이자 복된 기억을 가진 장로, 이구멘 필라레트의 생애』(1860)를 참조하라.

[1141] 마카리이, 아키마. 『노브고로드 및 상트페테르부르크 대주교 가브리엘 성하의 생애와 업적에 관한 기록』(1857). 69–71, 172쪽; 우스펜스키 V. 『닐로바 수도원 설명』(1886). 45쪽; 또한 참조: 티틀리노프 B. 가브리엘 페트로프 (1916), 여기 제6장에서 이에 대해 상세히 다루고 있다.

[1142] 1816년에 요아사프 레베딘스키라는 이름의 한 아키만드리트가 시노드에 공동생활 규약 초안을 제안했으나, 시노드는 『영적 규정』에 포함된 지침만으로도 수도 생활을 올바르게 영위하기에 충분하다고 답했다. 『체르니히프 교구의 역사적 서술』. 3. 232쪽; RBS. 290쪽.

[1143] N. M. 『18세기 러시아 수도 생활』, 『스트란니크』 1884. 1. 210쪽. 이에 대해서는 피멘의 『회고록』과 그의 논문 「수도생활과 이에 대한 현대의 해석」, 『체테니야』 1874. 2. 96쪽 이하, 그리고 「우리의 수도원」이라는 논문, 『베세다』 1872 (저에게는 접근할 수 없었음)을 참조하라.

[1144] 피멘. 앞의 저서. 121쪽.

[1145] 같은 책. 90, 100, 127, 250, 256, 275, 282–286쪽.

[1146] 세레브리안스키. 앞의 저서. 328쪽.

[1147] 선집. 113. 1 (1902). 21쪽. 일라리온의 『코네브스키 수도원 규정』(1824)은 매우 희귀한 소형 소책자로, 필자는 베를린 시립 도서관(1943년 이전)에서 운 좋게도 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존경받는 수도 생활의 열성 옹호자에 대해서는 또 다른 소책자를 참조하라: O. A. M. 『코네브스키 수도원 설립자 아르히만드리트 일라리오ンの 생애 개요』(1861). 그의 규율은 앞서 언급한 아르히만드리트 테오도시 오레호프(주 1127 참조)에 의해 베르콜스키 수도원에 도입되었다.

[1148] 피멘. 앞의 저서, 112–114쪽.

[1149] PSZ. 제8988호 (1744); 제13163호 (1768); 제18273호 (1797).

[1150] 피멘. 앞의 저서. 246, 250, 254쪽.

[1151] 같은 책. 101, 120, 243, 252, 255쪽 등.

[1152] 피멘. 앞의 저서, 363쪽. 아스트라한 주교 이사아키(펠로빈스키)(† 1894)나 리아잔 교구 부주교 이시도르(콜로콜로프)(† 1911)의 사례가 그 예가 될 수 있다. 참조: 르보프 N. N. 드레브니크, 『크라스니 아키브』 39. 148쪽; 『차르 정권의 몰락』. 2권. 68, 88쪽; 4권. 190, 199, 308, 479, 480쪽. 툴라 주교 라브렌티(네크라소프)는 1908년 자신의 ‘자유주의’로 인해 주교좌에서 해임되고 모스크바 비소코페트로프스키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역사 연감』 122권, 778쪽; 『러시아 연감』 1908년, 제4권. 니콜라이 1세 황제 시대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자료집』, 『선집』 113. 특히 제2부.

[1153] 피멘. 앞의 저서. 249, 265, 252, 275, 120쪽. 물론 이는 개별 독경이나 스티히라가 생략되거나 축약되었던 시간 기도, 즉 아침 기도와 저녁 기도에만 해당되며, 전례는 확고한 순서를 따르므로 결코 축약되지 않는다.

[1154] 참조: 「내부 교회 회고록」, 『스트란니크』 1897년 8호, 560쪽. 19세기 전반에 걸쳐 시노드는 다양한 지침을 발표했으나, 이는 교구 주교들에게만 전달된 것이었으며 수도원 생활을 개혁하려는 시도로 간주될 수는 없다. 참조: 『보고서』. 1841, 1862(본문은 『БВ』 1905. 9. 158쪽에도 수록됨), 1874, 1884 등.

[1155] PSZ. № 18273; 바르소프 T. 시노드 기관. 162쪽. 부록 43–48.

[1156] 세라핌, 사제. 『남자 수도원 공동 생활 규약』. 3권 (1910).

[1157] 수도원과 수도 생활에 관한 시노드의 각종 지침 및 명령 모음집은 다음을 참조하라: 치제프스키. 『수도원에 관한 결의 모음집』(1896).

[1158] 개혁 계획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수에토프. 전러시아 공의회에서 심의해야 할 사안들을 마련하기 위해 성 시노드 산하에 황제의 승인을 받아 설립된 특별 위원회에 관하여 (1912); 오그네프. 교회 공의회 (1905); 공의회 전 위원회의 회의록 및 의정서. 4권 (1906–07); 보충권: 교회 개혁 문제에 대한 교구 주교들의 의견 요약 (1906); A. R. 『정교회 운명에 관한 역사적 서신집』 (1912); 필자의 논문: 『1906년 총회 전 특별위원회』, 『길』 (1933). 38; 또한 참조: Stupperich R. 《피터 대제의 국가 사상과 종교 정책》(1936). 105–107쪽. 골루빈스키 E. E. “러시아 교회의 생활 방식 개혁에 관하여”, 『독회집』. 1913. 3. 126쪽.

[1159] 솔로비예프. 4 (OP판). 1510, 1649쪽.

[1160] PSZ. 16. 제12060호. 관보.

[1161] 1890년 및 1907년 보고서 (1893년 및 1910년). 또한: 프레오브라젠스키. 『통계 자료에 따른 러시아 교회』(1897), 1840–1891년의 통계 자료가 수록된 표.

[1162] 19세기 러시아 여성의 해방 문제와 교육에 대한 열망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쇼홀, K. P. “러시아 여성 고등 교육의 발전에 관한 문제”, 『지엠NP』 1912년 8호; 1913년 3호 및 7호.

[1163] 19세기 전반 러시아 문화사에 대해서는 다음 저작들을 추천할 수 있다: 자모틴, 『19세기 20~30년대 러시아 사회의 낭만적 이상주의』(1907); 게르셴존 M. 『니콜라이 1세 시대』(1910); 바르수코프 N. 『M. P. 포고딘의 생애와 저작』 1권 및 후속권 (1888–1899); 코셸레프 A. I. 『수기』(1884); 필리포프 M. M. 『러시아 철학의 운명』, 『러시아의 부』 1894년 1, 3, 4, 8, 9호; 스미르노바 A. I. 『수기』(1897); 『알렉산드르 1세 치하의 종교 운동』, N. 픽사노프 편집 (1916); 투르게네프 형제 아카이브. 과학 아카데미 간행. 4권 (1911–1915); 두브로빈 N. F. 『우리의 신비주의자-이단자들』, 『러시아 논문집』 1895–1896; 우트킨스키 선집 (1897); 게르셴존 M. 『역사적 기록』(1910; 제2판 베를린, 1923); 자비트네비치 A. S. 『호미야코프』. 2권 (1902); 코르닐로프 A. 『미하일 바쿠닌의 방랑 시절』(1925); 스탄케비치 N. V. 『저작집』(1890); 헤르첸. 『과거와 사색』(다양한 판본, 독일어판 포함); 스테푼 F. 『독일 낭만주의와 슬라보필들의 역사철학』, 『로고스』 16호 (1927); 코르닐로프 A. 『미하일 바쿠닌의 젊은 시절』(1915) 외. 상세한 참고문헌 목록(1918년까지)은 폴리에브크토프 M. 『니콜라이 1세 황제: 전기와 치세』(1918)에 수록되어 있다.

[1164] 19세기 초, 사설 인쇄소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많은 금욕주의 저작, 성인의 행적 및 기타 영적 유익을 주는 책들이 널리 보급되었다. 1821년부터 잡지 『기독교 독서』(상트페테르부르크 신학 아카데미 발행)는 러시아어로 된 수많은 금욕주의 저작을 게재했으며; 일부 금욕주의 저작들은 옵티나 수도원에서 인쇄되었다. 제15장 참조. 1860년대의 신학 잡지들은 학문적 문제뿐만 아니라 당대의 영적 흐름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며, 지방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1165] 피멘. 전집. 309–311쪽.

[1166] 통계 자료가 포함된 교구에 대한 간략한 설명은 《러시아 정교회 백과사전》(ПБЭ)에서 찾을 수 있으며, 이는 공식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또한 19세기 후반 거의 모든 교구에서 발행되기 시작한 『교구 소식지』도 중요한 자료이다.

[1167] 안타깝게도 현재 『오베르-프로쿠로르 보고서』는 제가 열람할 수 없습니다. 1943년 이전에는 이 보고서에서 각종 통계 자료를 발췌해 두었으나, 매우 불완전했기 때문에 지금은 제 서류 속에 흩어져 있는 몇 가지 메모와 제 기억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1168] 저의 자료 출처는 『레스니ンス키 성모 마리아 수도원의 간략한 역사』(1925년 세르비아 호포프 수도원에서 과거 레스니ンス키 수도원의 원장 수녀였던 니나 수녀가 작성한 타자기 원고)였습니다.

[1169] 리아소포르 수도사들에 대해서는 제9장을 참조하라.

[1170] 예카테린부르크 교구에 대한 설명은 『PBE』 5권, 353쪽; 불가코프, 65쪽을 참조하십시오. 예를 들어 블라디미르 교구에서는 1895–1899년에 세 개의 수녀 공동체가 설립되었습니다(『PBE』 2권, 625쪽), 비록 당시 이곳에는 이미 6개의 여성 수도원이 있었으며, 그중 하나인 페레야슬라블 시의 포크로프스키 수도원은 1899년 당시 350명 이상의 수녀와 수련생을 보유하고 있었고, 병원, 양로원, 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ПБЭ. 3. 619, 624, 625쪽.

[1171] 보로네즈 교구에 대한 설명, 출처: ПБЭ. 3. 866, 867쪽.

[1172] 불가코프. 97, 89쪽.

[1173] 보리스글레브 공동 생활 여자 수도원의 설립자인 유제니아 수녀장, 『치테니야』 1875. 2; 같은 책에 수록된 그녀의 서신; 참조: 피멘. 앞의 저서. 309쪽.

[1174] 피멘. 앞의 저서. 310, 288쪽.

[1175] 같은 책. 310쪽; PSZ. 제19110호.

[1176] 도브론라보프 V. G. 『스비아토예제르스카야 푸스티니』, 『블라디미르 학술 기록 보관소 위원회 논문집』 11 (1909). 60쪽. 수녀원 설립자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인맥이 있었다면 일은 더 빨리 진행되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V. B. 스비아토폴크-체트베르틴스카야 공작 부인이 설립한 블라디미르 자매 공동체(모스크바 교구)의 창설 역사를 참조하라. 솔로비예프, I. 『블라디미르 여성 공동체』, 『러시아 연감』 1898. 49. 869–885쪽; 이 저서에는 공동체의 일상생활에 관한 흥미로운 세부 사항이 많이 담겨 있다.

[1177] 이 놀라운 편지는 장로 바실리스크(† 1824)의 전기인 『수도사이자 은둔자 바실리스크의 생애』(1849)에 실려 있으며(안타깝게도 필자는 이를 접할 수 없었다), 발췌문은 피멘, 『선집』 298쪽에 수록되어 있다. 아마도 이것이 바로 필사본 『장로 바실리스크에 관한 이야기』에 수록된 「지적인 기도의 작용에 대하여」라는 논고일 것이다; 참조: 포포프 N. 『모스크바 시모노프 수도원 필사본 목록』, 『체테니야』 1910. 3. 53쪽.

[1178] 피멘. 앞의 저서. 295–300, 310쪽.

[1179] PBÉ. 5. 853–854쪽; RBS. 86–87쪽.

[1180] 성 세라핌 사로프에 대해서는 저의 저서 『Leben und Lehre der Starzen』(1936)과 제15장을 참조하십시오.

[1181] 디베예프스카야 공동체는 니즈니노브고로드 교구에 속해 있었으나, 이미 탐보프 교구에 속해 있던 사로프 은둔지로부터 불과 15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참조: 세라핌(치차고프), 대수도원장. 『세라핌-디베예프스키 수도원 연대기』(1903); 여기에는 성 세라핌의 전기에 관한 많은 자료가 수록되어 있다; 또한: 일린. 『성 세라핌 사로프스키』(1925). 87쪽 이하.

[1182] 저의 저서. 앞의 책, 202쪽 이하; 본 저작의 제15장도 참조. 샤모르딘의 수녀 공동체에 대해서는: 체트베리코프 S. 『옵타의 장로이자 사제 수도사 암브로시오의 전기』(1912) 및 동 저자. 옵티나 수도원 (1927). 옵티나의 장로 마카리(이바노프) 역시 일부 수녀 공동체를 영적으로 돌보았다(체트베리코프. 앞의 저서 (1927). 52쪽), 예를 들어 크레스토보즈드비젠스키 여자 수도원; 자세한 내용은: 레오니드(카벨린). 『벨레프스키 크레스토보즈드비젠스키 3급 여자 수도원의 역사적 서술』(1863).

[1183] 이 책에서 발췌된 최근 독일어 번역본을 참조하라: Russische Frömmigkeit. Briefe eines Starzen. 러시아어에서 번역, 서문 및 편집: N. 부브노프 (Wiesbaden, 1947).

[1184] 이 『편지들』은 『스트란니크』 1865년 1호에 실렸으며, 또한 『수녀 에우프락시아의 질문과 아키마이트 게라심 신부의 답변』 2권 (1883)에도 수록되어 있다 (일부는 『영성 독서』 1882-83년호에도 실림). 게라심 주교는 처음에 본당 사제였으나, 이후 수도 서원을 받았으며, 옵티나 수도원과 영적 교류를 맺고 매우 흥미로운 저서 『브베덴스카야 옵티나 수도원 원장 아르히만드리트 모이세이 신부의 생애에 대한 간략한 개요』(1865)를 집필했다.

[1185] 옵티나 은둔원의 장로 암브로시오가 수도자들에게 보낸 편지 모음. 2권 (1908–1909).

[1186] 장로 테오판 소콜로프에 대해서는 저의 저서를 참조하십시오. Op. cit. 128쪽 및 그 이후, 그리고 본 저작의 제15장을 참조하십시오.

[1187] 테오파니아 고토브체바에 대해서는: 아스코첸스키 V. 『테오파니아, 부활 수도원의 수녀원장』(1866) (매우 간략함); 또한: 《이구메니아 테오파니아》(1868), 다수의 편지가 수록되어 있음; 그녀의 수도원에 대해서는: 스네소레바 S. 『상트페테르부르크 부활절 여자 수도원』(1887).

[1188] 스키히구메니아 테오파니아 시도로바에 대해 쓰여진 흥미로운 소책자가 있는데, 이는 먼 지방의 수도원 생활을 소개해 준다: 『쉔쿠르 수도원의 스키히구메니아 테오파니아를 기리며』(1891).

[1189] 성령 보로비츠키 수도원은 1162년 이전부터 알려져 있었으며, 처음에는 남성 수도원이었으나 1787년에 여성 수도원으로 재건되었다. 이곳은 16세기 초에 제작된 성 니콜라이 기적행자(성 니콜라이)의 아름다운 고대 성화로 유명하다.

[1190] 이 키예프의 수도원에서는 특히 엄격하게 예배 규율을 준수했다. 1917년까지 이곳에는 약 500명의 수녀와 수련자가 머물렀다.

[1191] RBS. 76쪽. 또한 하르키우 인근 니콜라예프스키 수도원(1845년 설립)의 창립자인 에밀리아 수녀장도 언급하고자 한다: 코발레프스키 A. 베르흐네-하르키우 니콜라예프스카 여자 수도원의 설립자 에밀리아 수녀장, 『두셰프』 1885년 제2호, 283–311쪽, 385–428쪽.

[1192] 타이시아 수녀장의 기록. 베를린, 1939.

[1193] 이에 대한 많은 예는 다음에서 참조: 아르세니예프 N. v. 『성스러운 모스크바』(1940). 라자레브스카야라고 불리던 율리아니아 오소르기나에 대해서는(부유한 귀족과 결혼하여 무로모 근처 라자레브스크 마을에서 살았다), 다음을 참조: 클류체프스키 V. 『고대 루스의 선한 사람들』, 『에세이 및 연설』(1913) 수록; 페도토프 G. 『고대 루스의 성자들』(1931). 228–232쪽.

[1194] 참조: 필자의 저서. Op. cit. 및 일린. 앞의 저서. 87쪽.

[1195] 니코딤, 대수도원장. 『18세기와 19세기 러시아의 경건한 수행자들의 생애』 12권 (1908–1909); 이 저작은 월별로 나뉘어 있으며, 수행자들의 생애에 대한 정보는 그들이 입적한 날짜 순으로 달력 순서에 따라 수록되어 있다. 필자는 1월부터 9월까지의 권만 열람할 수 있었다.

[1196] RBS. 87쪽.

[1197] 도브로클론스키. 『지침서』. 4 (1893). 107쪽; 앞서 언급된 K. 하를람포비치와 I. 슐랴프킨의 저작도 참조; 또한 P. 밀류코프의 견해(『에세이』. 3 (1930). 169쪽) 및 제11장도 참조.

[1198] ODDS. 4. 515쪽.

[1199] 티틀리노프. 《안나 이오안노브나의 정부》. 183쪽.

[1200] 『러시아 역사』 1871. 3. 583쪽; 1908. 7. 40–54쪽; 스네기레프. 『수기』, 『러시아 고고학』 1866; 『선집』 10. 275쪽.

[1201] 티틀리노프. 가브리일 페트로프. 46쪽; 티토프. 프스코프 및 나르바 주교 게데온 크리노프스키의 전기 (1907).

[1202] 포크로프스키. 『카잔 주교관』(1906). 367, 372–381쪽; 포포프. 아르세니 마체예비치. 99쪽. 주교좌에 대한 새로운 정원에 대해서는: 자브얄로프. 『저작집』. 216쪽. 주교좌가 성직자로부터 얻는 수입에 대해서는 다음 문헌을 가장 먼저 참조할 것: 카프테레프 N. 세속 주교 관료들 (1874). 114, 135쪽 및 그 이후; 골루빈스키. 1. 1. 423, 436쪽; 고르차코프. 수도원 관리국. 236쪽.

[1203] 즈나멘스키. 『본당 성직자』. 615쪽.

[1204] 『주교들에 대한 논고』. V. I. 사바 편집, 『독본』 1909. 1. 7, 35, 26, 4쪽.

[1205] 『체테니야』. 1867. 3. 17쪽; 『러시아 고문서』. 1871. 218–220, 230쪽; 1892. 4. 456쪽. 작가로서의 알렉세예프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필라레트. 『개관』. 제3판. 2권. 384쪽; 즈나멘스키. 앞의 저서. 651쪽; 수호몰리노프. 『러시아 아카데미의 역사』. 1권. 280쪽.

[1206] 흑색 성직자와 백색 성직자, 즉 수도자와 본당 사제 사이의 격차는 이미 비잔티움 시대에도 존재했었다. 이에 대해서는 트로이츠키 이. 에. 『니케아 및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아르세니우스』(1873)를 참조하라.

[1207] PSPiR. 4. 제1197호.

[1208] PSZ. 제12577호, 16684호.

[1209] Milaљ. 앞의 책. 663쪽.

[1210] 때로는 25세가 되기 전에 수도자가 되기도 했는데, 예를 들어 아르히만드리트 부하레프와 미트로폴리트 안토니 크라포비츠키의 경우가 그러했다.

[1211] 이러한 학자 수도사의 경력에 관한 매우 다양하고 수많은 사례는 19세기 40~70년대를 다루는 대주교 니카노르(브로브코비치)의 지극히 흥미롭고 내용이 풍부한 『전기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전기 기록』 1 (1900).

[1212] “동방 교회의 주교들이 수도사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라고 스. 쯔앙코프(Das orthodoxe Christentum des Ostens. Berlin, 1928. 각주 125)는 썼다. 그들은 단지 수도사들 중에서 선출될 수는 있지만, 그들 자신은 수도사가 아니다. 왜냐하면 879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제2규정에 따라 주교직은 수도 생활과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주교가 된다는 것은 ipso facto(그 자체로) 수도 생활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베트(Beth Karl. Die orientalische Christenheit der Mittelmeerländer. Reisestudien zur Statistik und Symbolik der griechischen, armenischen und koptischen Kirchen. Berlin, 1902. S. 333)가 정교회 주교의 경우 수도 생활이 아니라 독신 생활에 대해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본 것은 전적으로 옳다.

[1213] 바르라암 페트로프에 대하여: 아브라모프 N. 『바르라암, 토볼스크 대주교』, 『스트란니크』. 1863. 3.

[1214] 주목할 점은 그의 형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나 아폰 산으로 가서 그곳에서 수도사가 되었고, 이후 코로차 시의 니콜라예프 수도원 원장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본 저서 제15장을 참조하라.

[1215] RBS. 301–303쪽.

[1216] 티토프 A. “마지막 로스토프 대주교 아르세니”, 『이스트.』 1886. 2.

[1217] 플라비안 고로데츠키(1840–1912)는 모스크바 대학교 법학부에서 공부했다. 국가 시험을 앞두고 그는 페스노시 수도원으로 걸어서 향했고, 그곳에 머물렀다. 1863–1866년 동안 그는 모스크바의 시모노프 수도원에서 수련자로 지냈으며, 그 후 한동안 로마에 있는 러시아 정교회 소속 비서로 근무했다. 1870–1880년, 이미 수도사가 된 그는 중국에 있는 러시아 정교회 선교부에서 사역했다. 1880년 플라비안은 돈 교구의 부주교로 서품되었으며, 1885년부터 1896년까지 폴란드에서 처음에는 부주교로, 나중에는 바르샤바 대주교로 사역하며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한 단호한 반대자로 자리매김했다; 1896년부터 1903년까지 그는 조지아의 대주교 겸 엑사르흐를 역임했으며, 1903년에는 키예프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알렉산드르 3세 시대(1880~1890년대)의 특징이었던 가톨릭주의와의 투쟁을, 플라비아누스는 시노드 내에서 그리고 오버-프로쿠로르 K. P. 포베도노스체프에 대한 태도에서 큰 독립성을 보였으며, 금욕적인 생활 방식과도 조화를 이루었다; 그는 자신의 교구 내 수도 생활에 대해 엄격한 태도를 보였으며, 본당 성직자들 사이에서 큰 권위를 누렸다. 그의 전기는 다음을 참조하라: 로도스키. 앞의 저서, LXXIX쪽; 또한: 《니바》. 1910. 177쪽. 필자는 이 평가에서 키예프 시절 플라비아노를 잘 알고 있던 그의 동시대인, 고(故) 프로토이레아 G. 프로조로프(† 1942)의 구술 증언도 근거로 삼았다.

[1218] 유베날리, 아키만드리트. 코젤스카야 브베덴스카야 옵티나 수도원 원장 아키만드리트 모이세이(1882)의 전기; 참조: 체트베리코프. 『옵티나 수도원』. 51쪽.

[1219] 이그나티우스에 대해서는 아래 제15장과 저의 저서(op. cit.)를 참조하라.

[1220] 암브로시우스 오르나츠키 주교에 대한 가장 훌륭한 전기로는 V. 즈마킨의 글이 있으며, 『루스』 제39호(1882) 129–178쪽에 실려 있다; 또한: 포셀야닌. 『19세기 러시아의 수행자들』(1910).

[1221] 참조: 포포프. 모스크바 시모노프스키 수도원 필사본 목록 (각처).

[1222] 로도스키. 앞의 저서, XLI쪽 및 181쪽; 티토프 A. 예레미야, 니즈니노브고로드 주교, 『역사 저널』 1889. 9; 『독회』 1887. 3. 예레미야 주교는 『하늘로부터의 경고』(1865)와 『영혼의 치유』(1890)라는 두 편의 금욕적 저작과 몇 편의 짧은 글을 남겼으며, 참조: RBS. 164–165쪽.

[1223] 로도스키. 앞의 저서, XX쪽; 니카노르 대주교. 앞의 저서, 26쪽. 우리는 여기에서 몇 명의 이름만 언급했을 뿐이며, 언급할 가치가 있는 주교들이 아직 많이 있지만, 이는 19세기 러시아 주교단에 관한 별도의 연구 주제로 다뤄질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다른 역사가라면 다른 이름들을 꼽았을지도 모른다. 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교회 지도자들의 전기는 매우 불완전한 경우가 많으며, 특히 부고 기사에서는 공식적인 어조로 작성되는 경우가 많아, 주교들의 활동에서 나타나는 긍정적·부정적 측면이 ‘시노달 정신’에 따라 묘사되곤 한다.

[1224] ‘필라레티카’는 그 범위가 매우 광범위하다(참조: RBS., 여기에는 가장 중요한 문헌들이 수록되어 있다). 미트로폴리타 필라레트 드로즈도프의 교회적 및 교회-정치적 행적과 견해를 평가하는 데 있어 주요 자료는 사보이 티호미로프 대주교가 여러 권으로 엮어 출판한 그의 수많은 서신, 설교, 연설 및 행정 규정들이다. 이 책들의 거의 전부가 예전에는 베를린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었다. 또한 중요한 자료로는 사바(티호미로프)의 『내 삶의 연대기』(9권, 주로 첫 3권)와 모스크바 신학 아카데미의 P. S. 카잔스키 교수와 그의 형제인 코스트롬 대주교 플라톤 간의 서신집(1960년대)이 있으며, 이는 『BV. 1903.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라레트에 관한 방대한 문헌이 그의 활동과 견해의 모든 측면을 만족스럽게 밝혀주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특히 그의 교회·정치적 견해는 아직 전문적인 연구를 기다리고 있다.

[1225] 필라레트. 『의견 모음집』. 4권, 578쪽; 5권, 362쪽; 4권, 469쪽; 5권, 232쪽; 7권, 49쪽; 보충권, 143쪽 등.

[1226] 1856년에 러시아 교회의 지역 공의회 소집 가능성에 대한 논의가 매우 신중하게 제기되었다. 참조: 『러시아 주교회지』 1883. 3. 175–203쪽, 여기에는 A. N. 무라비예프의 기념비적인 메모 「러시아 정교회의 현황에 관하여」가 요약본으로 게재되어 있으며, 또한: 필라레트. 『의견 모음집』. 4. 141, 149쪽. 필라레트의 개혁안은 다음 사항들을 논의하자는 제안 단계에서 더 이상 진전되지 않았다: 1. 예배의 외형적 개선(경건함, 위엄); 2. 새로운 교구 설립; 3. 분열 방지를 위한 조치. 치스토비치 이. 『지도적 인물들』. 361쪽.

[1227] 치스토비치. 『지도적 인물들』. 361쪽.

[1228] 필라레트 암피테아트로프 대주교에 대해서는 다음의 방대한 저작을 참조하라: 세르기이(바실레프스키), 대수도원장. “고귀하신 필라레트, 수도명 테오도시(암피테아트로프), 키예프 및 갈리치 대주교”. 3권. (1888) (저에게는 입수할 수 없었습니다); 스미르노프 D. 『필라레트 암피테아트로프』, 『아카데미의 삼위일체』 선집 (1914). 223–251쪽; 또한 레스코프 N. 『주교의 삶 속 사소한 일들』, 전집 35 (1903). 22, 107쪽 등. 주교 이그나티이 브랸차니노프에게 보낸 편지(『БВ』. 1913. 3)와 대주교 인노켄티이 보리소프에게 보낸 편지 (ТКДА. 1884. 5); 필라레트가 옵티나 수도원에 대해 가졌던 태도에 대해서는 다음의 짧은 논문을 참조하라: 피르소프 A. I. 『코젤스카야 옵티나 수도원』, 『이스트. v.』 1899. 3; 또한: 체트베리코프. 『옵티나 수도원』.

[1229] K. P. 포베도노스체프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Steinmann F., Hurwicz E. K. P. Pobjedonoszew. Der Staatsmann der Reaktion unter Alexander III (Quellen und Aufsätze zur russischen Geschichte. K. 슈텔린 편집. 11). 알렉산드르 2세 황제에게 보낸 그의 편지들은 매우 특징적이다. 『P.의 알렉산드르 3세에게 보낸 편지들』. 2권 (1925). 그의 저서 중 일부는 독일어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Moskovitische Studien』(1904) 및 『Streitfragen der Gegenwart』(1897).

[1230] 니카노르. 전집, 143쪽 외. 주교단의 특성에 대해서는 다음도 참조: 페브니츠키. 『수기』, 『러시아 학보』 1905년 7호 및 이후; 필라레트(드로즈도프). 『트베리 대주교 알렉시우스에게 보낸 편지』(1883). 211쪽; 골루빈스키 E. 『러시아 교회의 생활 개혁에 관하여』. 117쪽; 솔로비예프 S. M. 『수기』, 『VE』 1907년 3호, 74–76쪽.

[1231] 아가피트 주교에 대하여: 니카노르. 앞의 저서. 196–200쪽; 부록. 43. 526쪽; 필라레트. 설교와 연설. 2 (1887). 279쪽; 바르수코프. 모스크바 대주교 이노켄티. 150쪽. 요한 대주교에 대하여: 니카노르. 앞의 저서. 196, 226쪽. 나나나일(소보로프), 아스트라한 주교는 포베도노스체프의 “독재”에 맞서 싸우려 했으나, 1890년에 자신의 주교좌를 떠나야만 했다: 『이스트.』 1907. 106. 1049쪽. 라스푸틴의 영향력에 맞서 싸웠던 블라디미르(보고야블렌스키) 대주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교구(1912–1915)에서 키예프로 전임되어 ‘명예 유배’를 당했다(† 1918). 차르 정권의 몰락. 1. 361, 366쪽; 4. 164, 190, 195, 266, 271쪽.

[1232] 권리 역사에 관한 자료. 니콜라이 1세 황제 치하 교회의 역사, 『집성』 113. 제1부 및 제2부; 『기독교 문집』 1881. 5–6.

[1233] 니카노르. 앞의 저서. 258, 257, 253, 254, 269쪽; 특히 “자서전 발췌문” 장(253–281쪽)이 중요하다. 니카노르 브로브코비치 대주교(1826–1890)는 시노달 체제의 지지자는 아니었으나, 이 체제와의 어떠한 투쟁도 전망이 없다고 여긴 주교들 중 한 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교직의 가장 훌륭한 자질을 몸소 실천했으며, 훌륭한 행정가, 설교자, 작가로 알려져 있었다. 기독교 및 이상주의 철학 분야의 그의 저술들은 실증주의와 유물론에 반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주요 저서: 『실증 철학과 초감각적 존재』, 1875). 니카노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D. V. 체르트, 『헤르손 대주교 니카노르 성하의 생애 단편』, 『이스트.』 제50권 (1892). 753–763쪽; 제51권 (1892). 651쪽 이하.

[1234] 마카리이 글루하레프에 대해서는: 『보고서』. 1836–1844; 그의 서신 (1905); 로도스키. 앞의 저작. 255–257쪽; 야스트레보프 이. 알타이 선교회의 창설자 대수도원장 마카리이 글루하레프의 생애와 활동에 관한 간략한 고찰 (1893); 프토호프 P. V. “알타이 선교회의 창설자 마카리이 G. 대수도원장 (1899)”; 치스토비치 I. 『성경의 러시아어 번역사 (제2판, 1899)』. 207–240쪽; 플로로프스키. 전집, 187쪽 및 그 이후. 마카리우스의 번역본들은 나중에 『정교회 회고』 (1860–1867) 잡지에 게재되었다.

[1235] 아르히만드리트 테오도르 부하레프만이 기독교와 사회적 문제들을 “조화”시키려 시도한 것은 아니었다. 이 점에서 아르히만드리트 요한 소콜로프(† 1868), 이후 스몰렌스크 주교(1866–1868)가 된 인물의 설교도 의미가 없지는 않다. 그의 경력은 그의 “자유주의”로 인해 방해를 받았다. 그에 대해서는: 비노그라도프 V. 『모히칸족의 마지막 사람』, 『BV』 1911. 10. 278쪽 이하; 바르소프 T. 『설교자로서의 스몰렌스크 주교 요한』, 『기독교 문집』 1872.

[1236] F. M. 부하레프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즈나멘스키 P. 『카잔 신학 아카데미의 역사』. 1권, 124쪽 이하, 142쪽; 2권, 200쪽 이하; 사바. 『연대기』. 2권, 724쪽; 스미르노프. 『모스크바 신학 아카데미의 개혁 이전 역사』(1879). 138, 260, 460, 628쪽 및 그 이후; 부하레프의 동시대인들의 편지는 『아카데미의 성 삼위일체 앞에서』(1914). 123, 237, 571; 그의 저술에 대해서는: 벤게로프 S. A. 『러시아 작가 사전의 출처』 1권을 참조하라. 기독교와 삶 사이의 ‘화해’ 문제에 대한 논쟁에 대해서는: 즈나멘스키 P. 『1860년대의 신학적 논쟁: 정교회의 현대 생활에 대한 태도』(1902).

[1237] 저는 제 자료실에서 19세기 교구 사제로서 교회 사역을 시작한 30명의 주교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습니다(이는 전체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여기서는 몇 가지 이름만 언급하겠습니다: 암브로시이 클류차레프, 하르키우 대주교(1882–1901), 뛰어난 설교자로도 잘 알려진 인물; 아나스타시 도브라딘, 보로네즈 대주교(1890–1906); 안토니 바드코프스키, 상트페테르부르크 대주교(1898–1912); 안토니 라팔스키, 상트페테르부르크 대주교(1843–1848); 게라심 도브로세르도프, 아스트라한 주교 (1878–1888), 설교와 저술에서 드러나는 금욕적인 정신으로 유명함; 구리이 오호틴, 노브고로드 대주교 (1900–1912); 디미트리 삼비킨, 카잔 대주교 (1905–1908); 디오니시이 히트로프, 우피 대주교(1888–1896), 선교 활동에서 큰 성공을 거둔 ‘진보적인 주교’로, 외딴 교구의 사제들의 필요를 세심하게 돌보아 본당 성직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인노켄티 베니아미노프, 모스크바 대주교(1868–1879), 시베리아에서의 활동으로 명성을 떨친 뛰어난 선교사; 요한 크라티로프, 사라토프 주교(1899–1903), 주교계에서 인기가 없었으며, ‘시노달 정신’에 명백한 반대를 표명하다가 은퇴 조치당했다(† 1909); 라브렌티 네크라소프, 툴라 주교(1904–1908); 니칸드르 몰차노프, 리투아니아 대주교(1904–1910); 니콜라이 자르케비치, 헤르손 교구 부주교(1884–1885), 실증주의에 반대하는 공개 강연과 저술로 유명했다; 스테판 아르한겔스키, 쿠르스크 대주교(1911–1914), ‘개혁’, 특히 신학교와 본당 생활 개혁의 지지자였으며, 기독교 윤리 신학 분야에서 몇 편의 중요한 저서를 집필했다; 비스사리온 네차예프, 코스트롬 주교(1891–1903), 그는 34년 동안 모스크바에서 본당 사제로 사역했으며, 잡지 『영혼에 유익한 독서』(1860)를 창간했다; 비탈리 그레굴레비치, 모길레프 주교(1881–1885), 매우 재능 있는 인물로, 1860년대 초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본당 사제로 재직할 당시 설교와 공개 강연을 통해, 특히 노동자 계층과 지식인들 사이에서 폭넓은 인기를 얻었다; 1860년 비탈리는 잡지 『스트란니크』를 창간했으며, 그가 발행인을 맡았던 시기(1860–1869) 동안 이 잡지는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 볼린 교구의 부주교(1879–1881)와 모길레프 주교로 재임하는 동안, 그는 민중 교육의 옹호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으며, 자신의 교구 내에 268개의 본당 학교를 설립했다; 블라디미르 보고야블렌스키, 모스크바(1898–1912), 상트페테르부르크(1912–1915), 키예프(1915–1918) 대주교로, 라스푸틴에 대항한 투쟁으로 유명하다.

[1238] 그의 전기는 『선집』(1935) III-XLVI쪽을 참조할 것; 또한 네스토르 대주교가 저술한 『안토니 대주교』(하얼빈, 1936)에서도 안토니의 인격과 활동을 묘사하려 시도했으나, 안타깝게도 이 소책자는 여러모로 객관적이지 않다.

[1239] 몇 년 전 출간된 M. V. 지지킨의 3권짜리 저서 『총대주교 니콘』은 니콘을 재평가하려는 시도를 담고 있으며, 안토니 크라포비츠키의 영향을 받아 쓰여졌다.

[1240] 이러한 측면에서 안토니의 논문 「총대주교직의 복원」(『교회의 목소리』, 1912년 1호)은 특히 특징적이다. 그의 생애 주요 연혁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1890년 – 모스크바 신학 아카데미 학장; 1895년 – 카잔 신학 아카데미 학장; 1899년 – 총장직을 유지한 채 카잔 교구의 부주교; 1902–1914년 – 볼린 주교; 1906년부터 – 대주교; 1906–1907년 – 성직자 대표로 국가평의회 위원; 1912–1913년 – 시노드 위원; 1914–1917년 – 하르키우 대주교; 1917년 봄, 임시 정부에 의해 해임됨; 러시아에서 총대주교제가 복원되었을 때(1918년), 안토니는 총대주교 후보 3인 중 한 명이었음; 1918년 – 키예프 대주교, 1918년 말 페틀류라 우크라이나 정부에 의해 체포되어 갈리시아의 한 수도원으로 유배됨; 그곳에서 안토니는 도스토옙스키에 관한 책을 집필함; 1919년 항정국(Entente)의 청원에 따라 석방되어 키예프로 돌아옴; 데니킨 정부(백군)와 긴밀히 협력했다; 1920년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다; 1920년 해외 최고 교회 행정부(소위 ‘카를로바츠 그룹’ 주교단)의 수장이 되었으며, 그 이후로 전체 러시아 정교회 망명자들에 대한 최고 교회 권위를 주장하며, 사실상 모스크바 총대주교청과의 교류를 단절했다. 1936년 베오그라드(세르비아)에서 별세했다.

[1241] 그의 박사 학위 논문 제목은 『자유 의지와 도덕적 책임에 대한 심리학적 근거』였으며; 이 논문은 슬라브주의 철학, 특히 블라디미르 솔로비예프(안토니는 가톨릭주의의 맹렬한 반대자였기 때문에 그의 후기 저작이 아닌 초기 철학 저작들)와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로부터 큰 영향을 받아 쓰여졌는데, 이 두 사상가는 크라포비츠키의 청년 시절 세계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안토니의 ‘신슬라브주의’와 그의 교회·정치적 견해는 슬라브주의자들의 견해, 즉 ‘선배’ (I. V. 키레예프스키나 A. S. 호미야코프)와 ‘후배’들(유리 사마린이나 I. S. 악사코프 등) 모두의 견해와는 매우 거리가 멀었다.

[1242] 니카노르. 전집, 122쪽 등.

[1243] 이노켄티(벨야예프), 대수도원장. 『수도 생활에 대한 고찰』(1899); 이노켄티 벨야예프(1862–1913)는 매우 빠른 속도로 출세했다: 1903년에는 이미 탐보프 주교였으며, 1909년에는 대주교이자 조지아 엑자르흐로 임명되어 1908년 5월 25일 암살된 니콘(소피야) 대주교의 후임자가 되었으나, 1913년에 별세했다. 안토니의 영향으로 수도 서원을 한 이들은 다음과 같다: 재능 있는 학생 미하일 그리바노프스키, 타브리야 주교(1856–1898); 요한 알렉세예프, 페름 주교(1902–1905); 세르기 스트라고로드스키(† 1946) (실제로는 † 1944. – 역자 주), 그는 안토니 크라포비츠키가 상트페테르부르크 신학 아카데미에서 강의를 시작했을 때 마지막 학기 재학 중이었던 학생이었으며; 또한 폴란드 정교회의 대주교 디오니시 발레딘스키(현재, 1947년 기준)도 있었다. 세르게이는 또한 상트페테르부르크 지식인층이 주최한 이른바 ‘종교·철학적 모임’(1902–03)에 참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후 핀란드 대주교가 된 세르게이는 전공의회 준비위원회(1906)에서 가장 활동적인 위원 중 한 명이었다; 1918년 이후 그는 총대주교좌 대리(1925–1943)가 되어(실제로는 1936–1943; 1936년까지는 대리 부총대주교. – 역자 주); 1946년(1944년. – 역자 주) 모스크바 및 전 러시아 총대주교로 재임 중 별세했다.

[1244] 1862년, 시노드 수석 검사 아흐마토프는 심지어 신학 아카데미들에 주교 서품을 받기 위해 수도 생활이 정말로 필요한지 여부에 대한 질문을 제기했는데, 이는 당시 주교직에 대한 관점과 수도 생활에 대한 태도를 매우 잘 보여주는 사례였다. 아르히만드리트 요한 소콜로프는 『주교들의 수도 생활에 관하여』(『교리 모음집』 1863년)라는 저서를 집필했는데, 이 책은 필라레트 드로즈도프 대주교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사바. 연대기. 2. 731쪽; 4. 487쪽. 요한 소콜로프(후에 스몰렌스크 주교, † 1868)는 이 책에서 몇 차례 언급되었으니, 각주 1228을 참조하라.

[1245] 장로직에 대해서는 아래 참고 문헌을 참조하라. 거기에는 동방 교회의 수도 생활 역사에서 이 현상에 관한 거의 모든 연구가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1246] Apophthegmata, Migne. PG. 65; 매우 귀중한 연구인 Bousset W.의 『Apophthegmata』(1923)를 참조하라; 또한 Viller M. S. J.와 Rahner K. S. J.의 『Aszese und Mystik in der Vдterzeit』(1939)도 주목할 만하다. 115–121쪽; 여기에는 이 주제에 관한 주요 문헌이 수록되어 있다. 『Verba Seniorum』, PG 73, 855–1066쪽. 다른 『파테리크』와 『꽃밭』에 대해서는: Viller, 110쪽 및 그 이후.

[1247] 스미르노프, 『BV』. 1904. 11. 447쪽 이하. 또한 참조: Holl. 『Enthusiasmus und BuЯgewalt』. 255쪽 이하.

[1248] 스미르노프. 앞의 저서. 496–499쪽. 스미르노프의 저작에는 4세기부터 8세기에 이르는 장로제의 역사에 대한 가장 훌륭한 서술과 그 본질을 탁월하게 규명한 내용이 담겨 있다.

[1249] Ausgewählte Schriften des hl. Ephrem von Syrien. 번역: P. Zingerle (1871). 3권, 227쪽 이하 (BdKV. 13); 저의 저서 내 인용문 참조. Op. cit. 27–31쪽.

[1250] 자세한 내용은 저의 저서(38쪽)를 참조하고, 또한 다음 문헌을 참조하십시오: 슈미트 B. 『영적 기도』(1916); Wunderle G. 『헤시카스틱 기도의 심리학』(1947) – 예수 기도에 대한 금욕적·신비적 기원을 다룬 매우 중요한 연구로, 이 금욕적 수행에 대한 기존의 잘못된 판단들을 반박하고 있다; 그 외: Baur I. 『신성화 교리에 관한 연구』(1917–18); 포포프 이. 신성화의 사상 (1909); 동 저자. 성 아파나시우스 대성인의 종교적 이상, 『BV』, 1903–1904; 미닌 P. 고대 기독교 신비주의의 주요 흐름, 『BV』, 1911–1914. 또한 본 서지 목록에서 성 시메온 노브 신학자에 관한 문헌을 참조할 것; 특히 I. 하우스헤르의 연구를 추천한다. 후기 비잔틴 시대의 가장 위대한 신비주의자 그레고리 시나이테에 관한 문헌은 매우 부족하며, 그에게 특별히 헌정된 알렉시우스 (몰차노바) 주교의 『14세기 비잔틴 신비가들』(1906)은 아쉬운 점이 많다. 또한 다음의 짧은 논문도 참조하라: Bois J. 『14세기 아토스 산의 그레고리 시나이테와 헤시카즘』, 『Echos d’Orient』 5. 190102. 65–73쪽. 또한 다음을 참조하라: Heiler. 1. 390쪽 이하, 특히 407쪽 이하. 매우 가치 있고 유익한 연구: Lot-Borodine M. (1932–33).

[1251] 『소트니차』 본문, 『팔라미티스 헤시카스무스에서의 신관(Die Gottesschau im palamitischen Hesychasmus). 후기 비잔틴 신비주의 핸드북(Ein Handbuch der spätbyzantinischen Mystik)』. 서문(매우 가치 있음) 및 A. M. 암만의 번역 (1938).

[1252] 저의 책에 실린 개별 사례들을 참조하라. 예를 들어, 아바 도로페오에 관한 훌륭한 이야기. Op. cit. S. 31–34.

[1253] 바실리우스 대주교, 『PG』 31권, 884C, 632B, 1388B. 성 안토니우스 대주교는 한때 순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네가 젊은 수도사가 자신의 뜻대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되면, 그의 발을 붙잡고 아래로 끌어내려라. 이는 그에게 유익하지 않기 때문이다.” 출처: 팔라디우스, 대수도원장. 콥트어 모음집에서 새로 발견된 격언. 성 안토니우스에 관한 전설 (1898). 14쪽.

[1254] 에프렘 시린. 앞의 저서. 226쪽. 여기서 한 가지 언급할 점은, 많은 고대 정교회 저작들에서 그리스도가 수도사였다는 견해가 표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참조: Holl. 앞의 저서. 164쪽.

[1255] PG. 88. P. 706 C.

[1256] 『필로칼리아』(Philokalia). 2 (1879). 229쪽.

[1257] 이 「찬송가」들의 훌륭한 번역본을 참조하라: 키르히호프 P. 킬리안. O. F. M. 시메온 데어 테올로게. Licht vom Licht. 제2판, 1951; 후기는 시메온에 관한 매우 귀중한 연구를 담고 있다.

[1258] Meyer Ph. Die Haupturkunden (1894) 및 ZfKG 11, 1890에 실린 논문들; 또한 G. 운더레와 포르피리우스 우스펜스키의 저작들(참고 문헌 목록 참조).

[1259] 이 저작들은 『PG』 150권, 1329–1346쪽, 1313–1314쪽, 1303–1304쪽에 수록되어 있다. 필자의 저서 『Op. cit.』 47쪽 이하, 264쪽을 참조하라.

[1260] 이시하스트에 대해서는 참고문헌에서 엥겔하르트, F. 슈타인, P. 시르쿠, 바실리 수도사의 저술을 참조할 것; 또한: 오스트로고르스키 G. 『아폰의 이시하스트와 그들의 반대자들』, 『벨그라드 러시아 과학 연구소 기록』 5 (1931) 및 키프리아노스 대수도사의 신간 저서 키프리아노의 신작 『성 그레고리 팔라마의 영적 선조들』, 『신학적 사색. 파리 정교회 신학 연구소 논문집』. 파리, 1942. 102–131쪽; 여기서 저자는 아레오파기트에서 그레고리 팔라마에 이르는 정교회 신비주의의 역사에 대한 개요를 제시한다.

[1261] 니코디모스 아기오리테스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Viller M. Nicodime l’Hagiorite, 『Revue d’ascétique et de mystique』 5 (1926); 5. Grumel. Nicodime l’Hagiorite, 『DTS』 11. 1. 487–490쪽; 또한 참조: Ammann. Op. cit. 7–11쪽.

[1262] 골루빈스키. 1. 1. 571, 605–606, 625쪽. 프리셀코프. 『키예프 루스의 교회·정치사 에세이』(1913). 168쪽.

[1263] 스미르노프. 『영적 아버지』. 487–492쪽. 흥미롭게도 성 베네딕트 누르시우스도 자신의 규칙(제21장)에서 “데칸(decani)”, 즉 경험이 풍부한 연로한 수도사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이들의 영적 지도 아래에는 각각 10명의 수련자가 맡겨졌다. PL. 66. p. 483.

[1264] 스미르노프. 앞의 저서. 481쪽. 또한 성 테오도르에 관한 방대하고 기초적인 저작을 참조하라: 도브로클론스키 A. 성 테오도르, 고백자이자 스투디오스 수도원의 원장. 1 (1913). 441, 443쪽; 또한 참조: PG. 99. P. 1784 A, 1717 C – 1820 B, 1822 B.

[1265] 스미르노프. 앞의 저서. 477쪽; 동 저자. 『고대 러시아의 영적 지도자』(1914). 22, 25쪽; 바실리 대제, 출처: PG. 31. P. 1185.

[1266] 「흑수도회 계급에 관한 전설」, 칼라이도비치, 『12세기 러시아 문헌 유물』(1821). 107쪽; 참조: 골루빈스키. 1. 1. 797쪽; 니콜스키 N. 『고대 러시아 종교 문헌사 자료』(1907). 65–94쪽.

[1267] 『아브라아미우스의 생애』, 『고대 러시아 문학 유산』 1권 (1911); 제1장 참조.

[1268] RIB. 6. 45. 389쪽; 스미르노프. 『고대 러시아 영성 지도자』. 26쪽; 말리닌. 『엘레아자로바 수도원의 장로 필로페이』. 40–42쪽.

[1269] 한편, 스테판 마흐리슈스키(† 1406)는 남부 루스에서(1355년 이후) 성 세르기우스에게 찾아왔는데, 그는 페체르스크 수도원의 전승을 함께 가져왔을 수도 있다. 골루빈스키. 『성 세르기우스와 그가 세운 트로이츠카야 라브라』(1909). 82쪽.

[1270] 서한은: A.I. 1. 제32호 및 제15호.

[1271] 제9장 4절 말미 참조.

[1272] 코노플레프. 앞의 저서. 71쪽.

[1273] 제9장 4항 참조.

[1274] 골루빈스키. 2. 2. 295쪽.

[1275] 즈마킨. 대주교 다니일. 375, 492, 602쪽; 페트로프 N. 슬라브-러시아어 『프로로그』의 기원과 구성에 관하여 (1875). 116쪽.

[1276] 페도토프. 『고대 루스의 성자들』. 60쪽.

[1277] 닐라 소르스키의 『전승과 스키트 수도 생활에 관한 규약』(1849) 및 기타 간행물; 제9장 4항 및 저의 저서 『Leben und Lehre der Starzen』을 참조하라.

[1278] 클류체프스키. 『성인전』. 190쪽; 필라레트. 『개관』. 제3판. 1권. 106쪽; 코노플레프. 앞의 저서. 38쪽 및 그 이후; 아르한겔스키. 『닐 소르스키와 바시안 파트리키예프』. 16, 30쪽; 『정통 문헌집』 1861. 1권. 197–214쪽; 『PSRL』. 5권. 236쪽.

[1279] 브릴리안토프. 『페라폰토프 수도원』(1899). 56–59쪽; 즈베린스키. 1. 제810호; 아르한겔스키. 앞의 저서. 55쪽.

[1280] 《브릴리안트》. 선집. 17쪽. 은수자 갈락티온에 대해서는: 『체테니야』. 1887. 4. 147쪽; 이 갈락티온을 성자 갈락티온 볼고그스키(† 1612)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1281] 장로 아르테미우스의 금욕적·신비주의적 견해에 대해서는 제10장을 참조하라.

[1282] 모스크바 루스에서 예수 기도문의 확산(이것이 항상 장로직과 연관된 것은 아님)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오를로프 A. 『16세기 루스의 예수 기도문』, 『PDP』 185(1914), 서문 및 본문.

[1283] 인노켄티, 아키마. 『수도 서원』(1899). 230쪽; 이 가르침은 소스키마 서원식 때 원장 신부가 낭독한 것이다.

[1284] 야치미르스키, 『오르야스(ORYS) 선집』 79. 521쪽. 1836년에 니아메츠 수도원에서 몰다비아어와 교회 슬라브어로 출판된 장로 파이시의 전기에는 저자의 이름이 명시되어 있지 않다. 교회 슬라브어 원문은 1845년 모스크바에서 옵티나 은둔원의 마카리 장로에 의해 재출간되었다: 『몰도바의 파이시이 벨리치코프스키 장로의 전기』. 옵티나 수도원 발행. 1847년에는 파이지스 자신이 쓴 몇 편의 저작이 부록으로 수록된 새로운 판의 전기서가 출간되었으며, 3판은 1892년 모스크바에서 출간되었다. 이 마지막 판본은 S. 체트베리코프의 저서 『몰다비아의 장로 스키아르히만드리트 파이시(벨리치코프스키). 1』(페테리-에스티(에스토니아), 1938–39)의 기초가 되었다; 제2권이 파이시의 편지를 수록하여 출간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러시아어 판은 아마도 루마니아어로 된 그의 파이시 관련 저작의 변형판일 것으로 보이며, 이에 대한 서평은 『Irenikon』 11(1934), 66쪽을 참조하라.

[1285] 전기 (1847). 58쪽 및 그 이후. 독일어 번역본은 저의 저서에 수록되어 있다. Op. cit. 108–117쪽.

[1286] 이 파이시우스의 번역본들은 이후 러시아에서 출판되었다: 이삭 시린은 1811년, 막심 고백자는 1855년, 테오도르 스투디트는 1855년, 아바 바르소노피우스는 1855년; 마지막 세 권은 러시아 사상가 이. V. 키레예프스키의 도움을 받아 옵티나 수도원의 마카리 장로가 출판했다; 이 출판과 관련된 그들의 서신 교환은 다음에서 참조할 수 있다: 체트베리코프. 『옵티나 수도원』. 107쪽 이하; 야치미르스키. 앞의 저서. 546쪽 등. 『필로칼리아』를 『도브로톨루비예』라는 제목으로 번역한 책은 1793년에 2권짜리 in folio 판으로 출간되었다. 『도브로톨루비예』의 인쇄는 가브리엘 페트로프 대주교의 축복 아래, 나자리이 장로와 필라레트 (후에 노보스파스키 수도원의 장로 필라레트)의 감독 하에 이루어졌다. 시노드 측의 공식 검열관은 모스크바 신학 아카데미 학장인 아르히만드리트 메포디우스와 로스토프의 야코블레프스키 수도원 원장인 이구멘 아론이었다 (포포프. 시모노프 수도원 필사본 목록, 『치테니야』 1910, 2, 6쪽). 1857년까지 『도브로톨루비예』는 적어도 여섯 차례 출간되었으며, 흥미롭게도 다음 판은 1880년이 되어서야 출간되었다. 그 후 테오판 자트보르니크(고보로프) 주교가 새로운 5권본을 편집했는데, 이는 아토스 산의 러시아 판텔레이모노프 수도원에서 인쇄되었으며, 1878년부터 1914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출간되었다. 테오판의 『도브로톨루비예』는 파이시의 『도브로톨루비예』와 다음과 같이 구별된다: 일부 내용은 보충되었고, 다른 부분은 축약되었다. 언어에 관해서는 이것이 교회 슬라브어인지 러시아어인지 단정하기 어려운데, 테오판의 언어와 문체는 매우 독특하여 슬라브어적 표현과 그리스의 금욕적·신비적 개념을 전달하기 위해 사용된, 독자에게는 완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신조어들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저서들은 수도사들과 경건한 신자들 사이에서 지극히 널리 퍼졌으며, 구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파이시우스의 『도브로톨루비야』 2권본은 1902년에 다시 한 번 재인쇄되었으며, 이 역시 서지학적으로 희귀한 책이 되었다.

[1287] 파이시의 저작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자서전』(원고는 이전에 상트페테르부르크 과학아카데미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었다)이다. 안타깝게도 A. 야치미르스키는 『ORYS 선집』 79권 515–541쪽; 같은 책에 그의 『규약』(533–538쪽)이 발췌되어 실려 있으며; 방대한 참고문헌 목록(550–544쪽), 파이시의 저작 목록(548–550쪽), 그리고 그의 도서관 목록과 파이시 자신 및 그의 제자들이 편찬한 금욕주의 저작 번역 목록(555–583쪽)이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참고문헌 자료들은 역사학자에게도 흥미로운데, 이는 파이시우스가 어떤 금욕주의 저작들을 선호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닐 소르스키의 『전승』 사본 6부, 성 시메온 신학자의 저술이 담긴 필사본 15권, 시나이 필로페이의 저술 사본 14부, 칼리스토스와 이그나티오스 크산포풀로스의 『소트니차』 사본 8부가 열거되어 있다. 파이시우스와 그의 제자들의 영적 생애에 대해서는 포포프 N.의 『모스크바 시모노프 수도원 필사본 목록』(『치테니야』 1910, 2)이 방대한 자료를 담고 있어 이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닐 소르스키의 저술이 파이시우스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보로브코바-마이코바의 저서를 참조하라. 닐 소르스키와 파이시이 벨리치코프스키. 또한 N. 아르세니예프의 참고 문헌 목록을 참조: 『Der christliche Osten』. 193쪽; 파이시이의 저작에서 발췌한 일부 구절은: 체트베리코프 S. 『현명한 행실과 영적 절제의 길』, 『푸트』. 1926. 3. 65–83쪽; 『러시아 장로제의 역사에서』. 같은 책. 1927. 7.

[1288] 수보틴. 아르히만드리트 테오판, 키릴로-노보예제르스키 수도원 원장 (1862). 57–75쪽. 「테오판 신부님의 이야기 중에서」.

[1289] 야치미르스키. 앞의 저서. 546쪽; 도브론라보프 V. 클레오파 신부, 브베덴스카야 은둔원의 창설자 (1908); 수보틴. 같은 책. 59–62쪽; 이 책에는 이 금욕자에 대한 매우 생생한 묘사가 실려 있다. 나중에 우리가 확인한 바와 같이, 은둔처에서의 빵에 관한 이야기(참조: 필자의 저서, 132쪽)는 성 사바 성인의 행적에 나오는 이야기와 매우 유사하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Cotelerii, *Monumenta Eccles. Graecae*, 4, 322쪽.

[1290] 포포프. 앞의 저서, 75쪽, 그리고 피멘. 『회고록』(여러 곳).

[1291] 보로브코바-마이코바. 앞의 저서. 32쪽.

[1292] 몰찬스카야 소프로니예프 수도원 묘사 (1856). 56쪽; 무라비예프. 성산과 옵티나 수도원 (1852). 129쪽; 야치미르스키. 앞의 저서, 545쪽; 수보틴. 앞의 저서, 15, 18쪽; 데니소프. 제585호; 즈베린스키. 2. 제933호.

[1293] 야치미르스키. 앞의 저서. 546쪽; 첫 번째 위대한 옵티나 장로, 성직자 레오니드 (1917). 14–44쪽. 1809–1817년에 세 사람은 모두 러시아 북부의 수도원들을 순례하며 팔레오스트로프스키, 발라암스키, 알렉산드로-스비르스키 수도원을 방문했으나, 그곳의 상황은 아마도 장로제 도입에 그리 유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는 발라암 수도원에서 두드러졌는데, 그곳에서는 1804년까지 장로 나자리우스가 피신해 있었으며, 그는 공동 생활 규율에 엄격히 따라 수도 생활을 정립했다.

[1294] 야치미르스키. 앞의 저서, 545쪽; 피멘. 앞의 저서, 66–68쪽. 포셀야닌. 『19세기 러시아의 수행자들』(1910). 194–201쪽; 『스키모나흐 테오도르의 생애와 위업』(1839; 제3판 1907)과 『스키모나흐 테오도르의 수행 생활』(1901)은 제가 입수할 수 없었다.

[1295] 야치미르스키. 앞의 저서. 545–546쪽; 체트베리코프. 옵티나 수도원. 44쪽; 즈베린스키. 2. 제1057호, 1338호.

[1296] 야치미르스키. 앞의 저서. 546쪽.

[1297] 무라비예프. 『성산과 옵티나 은둔원』. 136쪽; 야치미르스키. 앞의 저서. 546쪽; RBS. 106쪽. 필라레트 장로에게는 (우리가 알고 있는 한) 네 명의 제자가 있었다: 마카리 장로(† 1864), 필라레트, 아르세니(하르키우 교구의 스비아토고르스크 수도원 원장), 그리고 일리오도르(† 1879). 무라비예프. 앞의 저서.

[1298] 19세기 초, 이 수도원에서는 금욕주의 저작들의 사본이 많이 제작되었다. 닐 소르스키와 파이시의 저작들은 여러 번 필사되었으며, 사본들은 종종 다른 수도원으로 보내지곤 했다. 포포프. 앞의 저서.

[1299] 야치미르스키. 앞의 저서. 546쪽; 피멘. 앞의 저서. 53쪽. 사순절 첫 주간 동안 테오판은 음식을 전혀 먹지 않고 하루에 물 두 잔만 마셨다. 필라레트, 대주교. 아르히만드리트 안토니에게 보낸 편지. 2. 391쪽.

[1300] 포포프. 앞의 저서. 65쪽; 니코딤. 전기. 7월; RBS. 454쪽.

[1301] 바실리 키쉬킨 장로에 대해서는 그를 영적으로 은총을 받은 인물로 묘사하는, 완전히 신뢰할 수 없는 정보가 많이 존재한다. 많은 장로들이 바실리에 대해 큰 존경심을 담아 이야기했다. 그의 생애에 대한 몇 가지 세부 사항은 다음에서 참조할 수 있다: 일라리온, 수도사. “이예로디아콘 멜키세덱의 생애”, 『영성 독서』 1889. 2. 184–201쪽. 우리가 아는 한, 그의 생애를 다룬 간략한 저작이 1915–17년에 출간되었으나, 필자는 이를 입수하지 못했다.

[1302] 피멘. 앞의 저서, 295–300, 310쪽; 장로 아드리안은 600쪽 분량의 2권으로 구성된 많은 금욕주의적 내용의 저술을 남겼다(참고 문헌 참조).

[1303] 피멘. 앞의 저서. 53쪽; 체트베리코프. 앞의 저서, 31쪽; 게라심. 『간략한 개요』(1865). 1–10쪽; 무라비예프. 앞의 저서, 135–139쪽; 아르세니예프. 앞의 저서, 『Der christliche Osten』, 197쪽.

[1304] 가브리일 페트로프 대주교(1730년 5월 18일–1801년 1월 26일)와 그의 활동에 대해 다룬 기초적인 저작으로는 티틀리노프 B. 『가브리일 페트로프』(1916)가 있으며, 이 책에는 예카테리나 2세 시대의 러시아 교회 전반에 대한 역사도 수록되어 있다. 또한: 마카리이, 대수도원장. 『노브고로드 및 상트페테르부르크 대주교 가브리엘 성하의 생애와 업적에 관한 기록』(1857)은 여전히 그 가치를 잃지 않고 있다. 가브리엘의 인격은 장로 테오판의 회고록(주 1298 참조) 외에도 그의 서신에 잘 드러나 있으며, 이는 『러시아 정교회 연보』 1864, 1869; 1895. 1; 1898. 3; 1908. 2 및 『독본』 1902. 1에 수록되어 있다. 또한 참조: 골루빈스키. 『시성 역사』. 320쪽 (가브리엘의 유해에 관하여).

[1305] 수보틴. 앞의 저서. 63–67쪽. 포셀야닌. 『18세기 러시아 교회와 러시아 수행자들』(1905). 198–214쪽.

[1306] 우스펜스키. 『닐로바 사막에 대한 서술』(1886). 45쪽. 가브리엘이 수도원과 관련하여 취한 조치에 대해서는: 티틀리노프. 앞의 저서. 754쪽, 그의 모든 조치에 대해서는 전반적으로 제6장을 참조.

[1307] 마카리, 대수도원장. 앞의 저서. 172쪽.

[1308] 『발라암 수도원과 그 수행자들』(1903). 147–157쪽; 수보틴. 앞의 저서. 67쪽. 테오필(라예프) 주교는 장로직을 높이 평가했던 주교들 중 한 명이었으며, 이에 대해서는 『러시아 논문집 1914』 160호, 608–624쪽에 실린 그가 사로프 은둔처 수도사들에게 보낸 편지를 참조하라.

[1309] 피멘. 전집, 295쪽 및 이후; 『러시아 논문집』 1835. 1, 119–126쪽.

[1310] 참조: 필자의 저서. Op. cit. 128–143쪽; 수보틴. 앞의 저서.

[1311] 마카리, 대수도원장. 앞의 저서. 69쪽, 73–74쪽; 포포프. 전게서, VI쪽. 시모노프 수도원에서 진정한 수도 생활의 회복에 대해 말할 때, 40년 동안(1772–1812) 수도원의 영적 생활의 중심이었던 알렉시이(블린스키; 1722–1812) 장로를 특별히 언급해야 한다. L. 수도사 알렉시, 모스크바 시모노프 수도원의 수행자 (제2판, 1891); 제1판이 언제 출간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1312] 1732년 요한은 비밀청의 요원들에게 체포되었는데, 그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테오판 프로코포비치(제13장 참조)를 비판하는 일부 저작들을 소지하고 있었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것은 안나 이오안노브나 치세 때 시작된 수도사 박해의 시대였으며, 이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요한은 사망할 때까지(1737년 4월 4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다. RBS. 139쪽.

[1313] 사로프 은둔지에서는 항상 금욕주의 저작들을 필사해 왔는데, 예를 들어 보니파티라는 수도사가 그곳에서 다음과 같은 저작들을 필사했다: 칼리스토스와 이그나티오스 크산포풀로스의 『소티니차』(1814), 바실리우스 대제와 요한 다마스쿠스의 다양한 금욕주의 저작들(1815); 켐피의 토마스(!)의 저서(1816), 그가 『영혼의 세례반』 (1817), 다시 한 번 바실리우스 대제의 금욕적 저작들(1820), 마르쿠스 포드비즈니크에게 귀속되는 금욕적 내용의 발췌문(1821) 등. 포포프. 앞의 저서. 12, 17, 19, 23, 44, 69쪽.

[1314] 데니소프. 제889호; 즈베린스키. 2. 제1141호; 『정통 교리』 1863. 7. 154쪽; 아벨, 사제. 『사로프 공동 수도원』(1853). 7–15쪽; 같은 책에 수녀 일라리온의 편지 일부(167–174쪽)가 수록되어 있으며, 또한: 일린. 성 세라핌 사로프스키 (1925); RBS. 141쪽(이사야), 178쪽(요아킴).

[1315] 성 세라핌에 대해서는 저의 저서 『Leben und Lehre der Starzen』(1936) 209–258쪽을 참조하십시오; 일린. 앞의 저서 (여기에는 주요 문헌 목록이 수록되어 있음); 세라핌(치차고프), 대수도원장. 『세라핌-디베예프스키 수도원 연대기』(1903).

[1316] 저의 저서 『러시아의 경건주의와 민속 종교성에서 성모 마리아 숭배』(Die Verehrung der Gottesmutter in der russischen Frömmigkeit und Volksreligiosität), 『키리오스』(Kyrios) 5호 (1940–41)에 수록된 글을 참조하라.

[1317] N. 모토빌로프의 수기 「성 세라핌의 성령 얻음에 관한 가르침」은 1903년 『모스크바 베도모스티』에 처음 게재되었다(본 저서 230–245쪽 참조) – 그 이전에는 종교 검열을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참조: 플로렌스키 P. 『기둥과 진리의 확립』(1914). 제5장 (제5서신).

[1318] 우리가 아는 한, 성 세라핌에 대한 최초의 인쇄물 언급은 『사로프 은둔지의 장로이자 스키모나흐이자 수행자 마르코의 생애에 대한 간략한 개요』(1839)라는 저술에 포함되어 있었으며, 여기에는 세라핌의 몇 가지 가르침이 실려 있었다. 그 후 잡지 『마야크』 (1845년, 제16호)에 “세라핌의 위업에 관한 이야기”라는 짧은 기사가 실렸다. 그를 위해 특별히 집필된 최초의 전기인 『사로프 수도원의 장로 세라핌, 사제 수도사, 은둔자 및 은거자의 생애』(상트페테르부르크, 1863)는 1863년에 출간되었으며, 아마도 사로프 은둔원의 수도사 중 한 명이 집필한 것으로 보인다.

[1319] 우리는 프로토이레아 세르기이 체트베리코프(† 1947)를 직접 알게 된 행운을 누렸으며, 그로부터 암브로시우스 신부를 비롯해 그가 알고 지내던 옵틴의 장로들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의 저서 『옵틴 은둔지』(1927)는 본 연구에서 참고 자료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1320] Tschetwerikoff. Das russische Starzentum. 67–69쪽.

[1321] 1799년까지 칼루가 주(州)는 모스크바 교구에 속해 있었으며, 칼루가 교구는 1799년에 설립되었다.

[1322] 아르히만드리트 마카리 브류슈코프는 모스크바 대주교 플라톤의 지시를 받아 자신의 교구 내 몇몇 수도원—페스노쉬스키, 드미트로프의 보리소글레브스키, 콜로므나 인근의 스타리 골루트빈—을 정비하고, 그곳에 공동 생활 규약을 도입했다. 피멘. 전게서, 242, 253쪽; 『베를류코바 수도원의 역사적 개요』, 『논문집』 1875. 2. 35쪽; 포포프. 전게서, 75쪽. 그러나 이 공동 생활 규약은 오래 지켜지지 않았다. 피멘. 같은 책.

[1323] 레오니드, 아키마. 『칼루가 교구의 폐지된 수도원들』, 『논문집』 1862. 2; 체트베리코프. 전게서, 30쪽; 피멘. 전게서, 53쪽.

[1324] 최초의 위대한 옵틴의 장로이자 예로모나흐 레오니드(스키마명 레프) (1917). 1–15, 53–72, 123–189, 242–275, 306–321쪽; 그의 편지: 같은 책. 329–401쪽. 참조: 필자의 저서 (143–156쪽).

[1325] Karsavin. “러시아 교회의 성자 전통”, 『Zeitwende』 3호 (1927). 5월, 6월; 또한 참조: Hilprich St., O. S. B. 『그리스도를 위한 어리석음』, 『Z. f. Askese und Mystik』 6 (1931); 그리고: 알렉시이(쿠즈네초프), 사제. 『유로드스트보와 기둥수행』 (1913).

[1326] 옵티나 수도원과 다소 관련이 있었던 인물로는 다음과 같은 이들을 꼽을 수 있다: S. O. 부라체크, V. I. 아스코첸스키, I. M. 스네기레프, M. P. 포고딘, S. P. 셰비레프, M. A. 막시모비치, A. K. 톨스토이, V. A. 골루빈스키, A. N. 톨스토이, T. I. 필리포프, I. V. 키레예프스키, A. S. 호미야코프, P. A. 불가코프, L. A. 아르놀디, A. N. 무라비예프, D. A. 오볼렌스키, E. N. 노로프, N. V. 고골, N. N. 스트라호프, F. M. 도스토옙스키, P. A. 유르케비치, 블라디미르 솔로비예프, K. 레온티예프,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대공(K. R.) 그리고 마지막으로 레프 톨스토이. 1912년 모스크바 신학 아카데미에서 V. 트로이츠키의 논문 「옵티나 수도원이 러시아 지식인층과 문학에 미친 영향」 (참조: 아카데미 저널, 『BV』 1913. 4. 부록. 415쪽)가 발표되었는데, 이 논문에서는 푸스티냐와 그곳의 장로들이 미친 영적 영향에 대해 다루고 있다.

[1327] 나의 책. 160–161쪽.

[1328] 장로 마카리우스와 이. V. 키레예프스키 간의 서신 교환을 참조하라: 체트베리코프. 앞의 책. 49, 107쪽 및 그 이후.

[1329] 같은 책. 55–96쪽; 저의 저서. 194–206쪽.

[1330] 체트베리코프. 앞의 책. 97쪽.

[1331] 같은 책, 100쪽.

[1332] 네크타리이 장로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V. Sh. 『크론슈타트 요한 신부와 옵틴 장로들에 관한 기록』. 개인 회고록에서 발췌 (세르비아 벨라 체르케브, 1929). 51–60쪽. 저자는 장로 네크타리우스가 1928년 수도원 밖에서 선종했다고 주장한다. 이 책의 한 장(20–50쪽)은 장로 바르소노피우스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는 이전에 장교로 복무하다가 전역한 후 옵티나 수도원의 수도자 대열에 합류했다. 바르소노피는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직전인 1914년에 세상을 떠났으나, 안타깝게도 그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가지고 있지 않다.

[1333] 제베린스키. 2. 제644호; 데니소프. 제888호; 수보틴. 전게서, 56–59쪽; 『사낙사르 수도원의 전 원장 테오도르 신부의 생애』(1847) (소형 소책자); 포셀야닌. 『러시아의 수행자들』(1905). 285–291쪽.

[1334] 제베린스키. 2. 제1057호; 데니소프. 제630호; 스트로예프. 앞의 저서. 913쪽; 『정교회 러시아 수도원들』. 373쪽; 미사이일 주교. 『보고로디츠카야 플로슈찬스카야 공동 생활 은둔원』(1897). 8, 10쪽; 포포프. 앞의 저서. 9쪽. 아파나시이 고로프스키라는 이름의 수도사가 이곳에서 파이시의 저서들을 많이 필사했다. 아마도 이 사람이 바로 유명한 장로 아파나시이였을 것이다. 또한 참조: ПБЭ. 1. 592쪽.

[1335] 즈베린스키. 1. 제92호; 데니소프. 제626호; 『러시아 수도원』. 919쪽; 스트로예프. 저서. 376쪽; 피멘. 저서. 66–68쪽; 일라리온, 수도사. “성직자 멜키세덱의 생애”, 『영성 독서』 1889. 2. 186–187쪽; 일라리이, 수도사. 벨로베레즈스키의 마카리 장로의 생애. 같은 책. 290–302쪽; 또한 저작: “브랸스크 벨로베레즈스키 은둔원의 장로들: 이즈라일 성직 수도사의 기록에 기초하여”, 『오를로프 교구 소식지』 1909. 44–45 (저자는 열람할 수 없음).

[1336] 야치미르스키. 앞의 저서. 545쪽; 피멘. 앞의 저서. 19쪽; 수보틴. 앞의 저서. 15, 18쪽; 푸티블의 성탄절 소프로니예 수도원 설명 (1846).

[1337] 즈베린스키. 2. 제868호; 데니소프. 제565호; 『러시아 수도원 규정』. 128쪽. 키릴로-노보예제르스키 수도원은 1507년에 성 키릴 노보예제르스키(† 1537), 성 코르닐리 코멜스키의 제자에 의해 설립되었다. 이 수도원은 엄격한 내적 생활로 두각을 나타냈으며, 항상 공동 생활 규율을 준수했고, 소유한 토지는 많지 않았다. 우리는 이 수도원이 무역이나 토지 교환에 관여했음을 입증할 만한 어떠한 문서도 발견하지 못했다.

[1338] 피멘. 전집, 여러 곳.

[1339] 테오판의 전기를 다루는 주요 자료는 그의 『수기』로, 분량은 많지 않지만 생생한 서술을 통해 독자를 그 시대의 장로 생활과 전반적인 수도원 생활의 분위기로 아주 잘 이끌어 준다. 이 『수기』는 다음 책에 수록되어 있다: 수보틴 N. 『아르히만드리트 테오판, 키릴로-노보예제르스키 수도원 원장』(1862). 55–75쪽. 이 책의 발췌문은 저의 저서(128–139쪽)에서 확인할 수 있다. 수보틴의 저서에서는 테오판의 전기(1–54쪽)와 다양한 금욕적 교훈이 담긴 그의 편지(76–178쪽)도 참조할 수 있다. 또한 테오파니아 고토브체바 수녀장이 테오판에게 보낸 편지들도 『테오파니아 수녀장』(1868)에 수록되어 있다. 아르히만드리트 피멘이 테오판과 그의 수도원에 대해 전한 이야기는 매우 흥미롭다. 피멘. 앞의 저서, 33–37, 45–47쪽.

[1340] 예를 들어, 로디젠스키의 매우 심오한 저서들인 『초의식』(1911)과 『보이지 않는 빛』(1912)에서 찾아볼 수 있다.

[1341] 포포프 A. 『성 티혼 자돈스키와 그의 교훈』(1916); 레베데프 A. 『성 티혼 자돈스키와 그의 생애, 저술 및 시성』(제2판 1890, 대중적인 형식으로 집필됨). 수도사 V. P. 체보타레프의 『기록』은 다음 저서에 수록되어 있다: 티혼. 저작집 (1899). 5. 1–18쪽. 동시대인들의 증언을 부분적으로 바탕으로 한 성인의 첫 번째 전기서는 이미 1796년에 훗날 대주교가 된 예브게니 볼호비티노프에 의해 집필되었다: 《티혼 보로네즈스키의 생애에 대한 기술》(상트페테르부르크, 1796); 또한: “보로네즈 주교 티혼 성하의 생애와 공적에 대한 서술”(모스크바, 1837). 시성식 이후 티혼에 관한 많은 새로운 저작들이 등장했는데, 대부분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으며, 성 디미트리 로스토프스키의 미네아와 마찬가지로 가장 널리 보급되었다. 이 성인의 성화는 그 보급 정도 면에서 성 세르기우스 라도네즈스키와 성 세라핌 사로프스키의 성화와만 비교할 수 있다. 그의 저작집 제1판(1836)은 불완전했다. 완전판은 1889–1895년에 5권으로 출간되었으며; 2권으로 된 『성 티혼 자돈스키의 저작』(상트페테르부르크, 1910)은 완전히 완전하지는 않다. 참고 문헌: RBS (1912), 589쪽. 또한: Arseniew N. v. Die Grundzüge des russischen Frömmigkeitslebens, in: Russische Blätter. 1929. 2; 동 저자, 『Der christliche Osten』. 191–193쪽; 『카라마소프 형제의 원형』. 코마로비치 교수의 해설, 『도스토옙스키 F. M. 전집』. 1929. 파이퍼 판. 60쪽.

[1342] 그레체프 B. 『성 요아사프』, 『БВ』. 1911. 2–3. 제바호프 H. 『성 요아사프 고를렌코, 벨고로드 및 오보얀 주교 (1705–1754). 전기 자료』. 3권. (1909–1911).

[1343] 참조: 필자의 저서 (169쪽). 그의 서한은 『BV』 1913년 1–2호; 『독서』 1875년 2호에 수록되어 있다.

[1344] 참조: 레스코프 N. 《이득을 추구하지 않는 기술자들》. 전집 2 (1903); 독일어판: Leskow N. Die Rechtschaffenen, 『Corona』 3. 3–4.

[1345] 피멘. 앞의 저작집, 22–24, 68–70, 101–111, 404–407쪽. 이그나티우스의 전기: 『저작집』 1권 (1885). 1–80쪽; 그의 저작집 제1판(4권)은 1867–1868년에 출간되었으며, 제2판(5권)은 1885–1886년에 출간되었다; 서한: 『독서』. 1875. 1; 『BV』. 1913. 1–2 (제3호 – 필라레트 암피테아트로프 대주교가 이그나티우스에게 보낸 서한); A. I. 게르첸과의 논쟁: 『BV』. 1913. 2. 이그나티우스에 관하여: 이그나티우스, 사제. 『살아계신 하나님을 찾아서』, 『교회의 목소리』 1913. 1–2; 주요 저서: 소콜로프 L. 『이그나티우스 브랸차니노프. 그의 생애, 인격 및 도덕적·금욕적 견해』. 2권 (1915) – 안타깝게도 우리에게는 입수할 수 없다. 『금욕적 체험』, 제1권, 제2판; 『금욕적 설교』, 제4권; 『수도 생활에 바치는 헌사』, 제5권. 저의 저서(168쪽)를 참조하십시오. 그곳에는 그의 편지 중 일부가 재인쇄되어 있습니다.

[1346] 피멘. 전집, 407쪽.

[1347] 『금욕적 체험』, 『전집』 1권(1867). 532쪽 및 『성인전』(1903). 184쪽.

[1348] 니코디모의 저서는 수도사 파르테니우스가 러시아의 성지들을 순례하며 겪은 이야기들로 보완된다(참고 문헌 참조); 여기에는 수도원과 세속 사회에서 나타난 진정한 수행의 수많은 사례들이 묘사되어 있다. 또한 아토스 산, 몰다비아, 예루살렘에서 수도사들의 생활에 대한 그의 기록도 수록되어 있다.

[1349] 포셀야닌. 『러시아의 수행자들』(1910); 『마슈린의 편지』(2권)는 여러 차례 재출간되었다(제5판 1870).

[1350] 니코딤. 『전기』. 7월; 『은둔자 테오판에 관한 이야기』의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포포프. 앞의 저서. 65–66쪽; 야치미르스키. 앞의 저서. 546쪽; 『18세기와 19세기의 솔로베츠키 경건한 수행자들』. 22–23쪽.

[1351] 키예프-페체르스카 라브라의 장로이자 성직자 파르페니우스의 생애와 위업에 관한 전설 (1898). 27쪽; 포셀야닌. 『러시아의 수행자들』 (1910). 452쪽 및 그 이후; 니코딤. 앞의 저서. 9월.

[1352] 일라리온, 수도사. 『이레오디아콘 멜키세덱의 생애』, 『영성 독서』 1889. 2. 184–201쪽.

[1353] 이 장로들에 대해서는 제가 아는 바가 거의 없습니다. 알렉산드르 장로에게는 다음과 같은 작은 소책자가 헌정되어 있습니다: 『트로이체-세르게이 라브라 근처 게프시만스카야 스키타의 은둔자 장로의 생애와 업적』 (모스크바, 1900; 장로 이시도르에 대해서는: 플로렌스키 P. 『땅의 소금』, 즉 게프시만스키 스키타의 장로이자 성직자 아바 이시도르의 생애에 관한 전설로, 그의 영적 아들인 파벨 플로렌스키가 수집하여 순서대로 정리한 것 (세르기예프 포사드, 1909). 두 저작 모두 제가 접할 수 없었습니다. P. A. 플로렌스키(1881-?)는 매우 흥미로운 인물이자 독창적인 사상가입니다. 물리학자, 자연과학자, 문헌학자, 철학자, 신학자로, 물리수학 학부와 모스크바 신학 아카데미를 졸업했으며; 1911년에 사제로 서품되었으며, 수많은 저서를 남겼으나 그 대부분은 출판되지 않았다. 특히 그의 저서 『기둥과 진리의 확립』(1914)이 잘 알려져 있는데, 이는 철학적, 신학적, 금욕적-신비주의적, 그리고 수학적-철학적 저작이다. 이 책의 발췌문은 『Ostliches Christentum. Dokumente』(N. F. 부브노프와 H. 에렌베르크 편, 2권: Philosophie, 뮌헨, 1925) 28–194쪽에 수록되어 있으며, 그의 영적 성숙 과정에 대해서는 410쪽을 참조할 수 있다. 플로렌스키가 장로들에 대해 내린 평가는 독특하다: “성 세라핌 사로프스키와 위대한 옵틴 장로들—레프 장로, 레오니드 장로(플로렌스키에게 있어 레프와 레오니드는 서로 다른 인물로 나타났는데, 사실 레프는 레오니드 장로가 대스키마 수계를 받을 때 받은 이름이다. – I. S.)와 마카리, 특히 암브로시우스는 마치 불타는 초점처럼 민중의 성스러움을 자신들 안에 모아들인다. 그들은 반쯤은 성인이자, 더 이상 좁은 의미의 수도사가 아니다. 그들을 통해, 마치 원거리용 안경을 통해 보듯이, 오실 분이 보인다. 그들의 모든 면모는 여기서 새롭고, 특별하며, 묵시적이다. 오직 눈먼 자들만이 이를 보지 못할 뿐이다. 그들을 따르지 않고 그들을 제쳐두고 나아가는 것은 경솔함이나 광기일 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세기부터 예정된 세계사의 흐름을 제멋대로 단축하려 드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는 주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것이 될 것이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한다고 해서 자기 키를 한 팔꿈치라도 더 키울 수 있겠느냐?” (마태복음 6,27; 누가복음 12,25). 같은 책, 72쪽 (편집자 강조).

[1354] 베르코프, A. 『위로의 장로, 예로모나흐 바르나바』(1940); 이 소책자는 바르나바 신부에 관한 다른 책, 『하느님 품에 안긴 위로의 장로 바르나바 신부, 이베르스키 비크신스키 여자 수도원의 설립자이자 건축가의 전기』(1907)를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1355] 니코딤. 앞의 저서. 8월; 사바. 『내 삶의 연대기』. 2. 283쪽; 『영적 독서』 1866. 3. 201–206쪽 (필라레트 장로의 간략한 전기); 키레예프스키 이. V. 저서 1. 서문.

[1356] 발라암 수도원과 그 수행자들 (1889). 16, 23쪽 등. RBS. 51–52쪽 (다마스킨); 319쪽 (이오나판). 또한 참조: 슈멜레프 이. 《옛 발라암》(1936). 80, 122쪽

[1357] BV. 1913. 4. 399, 400쪽. 아카데미 회의록. 또한 참조: 아르세니예프 N. v. 『성스러운 모스크바』(1940), 여기서는 장로들의 영향력에 대해 많이 다루고 있다. 현대의 아폰 산에 있는 러시아 장로들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퓌르츠-뮐러 R. 『“침묵의 사막”의 장로들 곁에서. 금욕자들의 마을에서』, 『베를린 타게블라트』. 1926. 419 (5. 9).

[1358] 인용 출처: 아르세니예프 A. v. 『동방의 교회』(1925), 『게셴 컬렉션』 제918호, 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