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성자 파이시이 스비아토고레츠

말씀

제6권

기도에 대하여

 

 

목차:


편집부 드림

성산(Svyatogor)의 파이지스 성자에게 바치는 트로파르

콘닥

서문

제1부.  하나님과의 교제에 대하여

제1장.  기도란 하나님과의 대화라는 사실

천상의 지휘본부와 교감을 맺은 이들은 복이 있도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그분과 대화할 기회를 주십니다

기도에 대한 간절한 소망

제2장.  기도가 필수적이라는 점

기도를 필수로 여기자

기도는 안전함입니다

기도를 위한 동원

제3장.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도록 기도하는 법

정욕은 하나님과의 교감을 방해하는 전파 간섭과 같다

“나”와 “나의 것”이 하나님과의 연결을 방해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의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

기도에는 끈기와 인내가 필요합니다

제4장.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 준비하는 법

그리스도께 드리는 겸손한 고백

“먼저 화해하라”

기도는 “최후의 심판 전의 심판”이다

제2부.  기도를 위한 투쟁

제1장.  기도의 어려움

낙담 은 사람을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든다

줄을 끊지 맙시다

하나님께서는 선한 뜻을 가진 자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다잡고 시작하라

우리 영혼이 좋아하는 영적 양식을 먹여 주자

기도는 사랑에서 우러나와야 합니다

기도 중에 다른 사람도, 자신도 산만해져서는 안 됩니다

잠들지 못하는 분들에게 이 꿈을 전해 주세요

제2장.  마귀가 기도하는 사람을  기도하는 사람을 상대로

악마와 대화를 나누지 마라

마귀는 사람이 기도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제3장.  기도 속에서 마음이 따뜻해지는 법

성스러운 성화는 기도하는 데 도움을 준다

묵주는 악마를 상대로 한 기관총과 같다

기도 전의 영적 독서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님께 드리는 기도 캐논은 영혼에 지대한 유익을 줍니다

교회 성가는 영혼을 달래고 평온하게 해줍니다

제4장.  “오라, 경배하자…”

절하는 것이 그 어떤 다른 영적 수행보다 더 큰 유익을 줍니다

절로 우리는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그분께 감사를 표합니다

허리 숙임과 땅에 엎드려 절하기

“수행하는 이는 방법을 찾아낸다”

제3부.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 마리아, 천사들, 그리고 성인들 —  하나님 앞의 중재자이자 우리의 수호자들

제1장.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님께서 —  우리의 다정하고 보살피시는 어머니이심에 대하여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님께 드리는 경배

“그리스도여, 당신의 백성들이 기도로 당신의 어머니를 당신께 모시고 옵니다”

“모든 이를 위해 중보하시는 선하신 분”

제2장.  수호천사에 대하여

수호천사는 우리 곁에 계십니다

수호천사는 우리를 지켜줍니다

제3장.  성인들이 바로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들이라는 사실

“성인을 공경한다는 것은 그를 본받는 것을 의미한다”

성스러운 유해에서 풍기는 향기

경건한 마음으로 성자들에게 기도합시다

성인들의 도움

성인들은 거리를 없애십니다

이름 모를 성인들이 “은밀히” 도와주신다

성스러운 “봉사자들”과 성스러운 “수호자들”

성인들의 기적

성인들의 생생한 현존

제4부.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제1장.  자신을 위한 기도에 대하여

우리 자신과 타인을 위해 하나님의 자비를 구합시다

영적 승리를 위한 기도

병중의 기도

제2장.  타인을 위한 기도

자신의 죄성을 깨닫고 세상을 위해 기도하기

남의 고통은 내 고통이 되어야 한다

구체적인 필요와 온 세상을 위한 기도

우리의 기도를 청하는 이들을 위한 기도

병든 이를 위한 기도

고통 속의 기도 뒤에는 신성한 위로가 따른다

제3장.  죽은 자를 위한 기도에 대하여

“죽음에서 생명으로 넘어가리라”

항상 고인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고인들은 기도가 필요합니다

고인들에 대한 위로

제4장.  시편이 마귀를 타격하는 번개라는 사실에 대하여

다윗의 시편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여졌다

성 아르세니우스의 『상황별』 시편 읽기

여러 가지 필요를 위해 기도합시다

시편을 통한 기도

제5부.  예수님의 기도와 정신 차림

제1장.  예수 기도의 힘에 대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여,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기도는 마귀를 대적하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마음을 정화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기도와 수련이 필요합니다

제2장.  기도의 방식에 대하여

소리 내어, 속삭이듯, 아니면 마음속으로?

어디서나 예수님의 기도를 실천하라

스스로 움직이는 기도

기도의 자동성

마음을 집중하기 위한 숨 참기

기도에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회개는 기도를 위한 가장 확실한 길이다

제3장.  현명한 행동에 대하여

지성은 위대한 선물이지만, 그것을 신성한 주파수에 맞추어야 한다

영적 깨어 있음

마음을 가다듬기

우리의 마음에 할 일을 주자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느낌

제4장.  이성과 마음의 협력에 대하여

이성이 마음과 하나가 될 때 기도는 진심 어린 기도가 된다

하나님의 사랑은 지성을 마음속으로 모읍니다

제6부.  예배 생활

제1장.  교회 연도의 기간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시다”

성 사순절 — 골고다로 향하는 행렬

“그대의 수난을 경배하나이다, 그리스도여”

“부활절”

제2장.  공동 기도에 대하여

성전은 하나님의 집

함께 드리는 기도의 힘

제3장.  신성한 성체 성사에 참여하는 것에 대하여

성사는 개인적인 체험을 통해 이루어진다

신성한 성찬을 위한 준비

신성한 성체 성사는 가장 효과적인 약입니다

제4장.  “우리 하나님께 노래하라, 노래하라”

교회 성가는 기도입니다

선한 영적 상태

모든 것은 경건함에 달려 있습니다

성스러운 의미들은 마음을 찔러요

음악은 마음이 작곡한다

제7부.  찬양의 왕국에 대하여

제1장.  하나님을 찬양함에 대하여

찬양 속에도 회개가 담겨 있습니다

찬양은 가장 큰 감사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에서 찬양이 시작됩니다

“하나님, 영광을 돌립니다”

제2장.  찬양의 왕국에 대하여

찬양의 왕국에 있는 두 계급

회개의 눈물과 찬양의 눈물

제3장.  하나님의 은사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은총을 조금씩 베푸십니다

기도 중의 신성한 위로

신성한 은총의 방문

그리스도 곁에서는 마음이 잠잠해진다


 

성 파이지이 스승님은 평신도, 수도사, 성직자 등 모든 이에게 유익한 책을 출간하고자 했으나, 기도와 찾아오는 사람들과의 교제에 모든 시간과 힘을 쏟느라 이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성자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편지와 가르침 및 대화 기록들은 일상생활에서 편리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체계화되었는데, 이는 성자께서 직접 “여러분이 들은 것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는 것이 핵심입니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성자 파이시이 스님은 가장 단순하고 필수적인 것들부터 시작하여 우리를 찬양의 왕국으로 인도합니다. 기도가 우리에게 얼마나 절실한 필요인지 이해하는 법, 기도에 어떻게 임하고 집중력을 유지하는 법, 나태함과 낙담과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등을 가르쳐 주십니다. 시편, 절, 묵주 기도를 영적 무기로 우리에게 건네주며, 장로님은 끊임없이 기도하고 모든 것에 감사하도록 가르치십니다.

 

편집부 드림

독자 여러분께 “장로 파이시이 스비아토고레츠. 말씀” 시리즈의 신간을 소개합니다. 이번 권은 기도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인간 영혼의 생명이며, 그 숨결과 양식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선물로, 우리 창조주께서 언제든지, 어떤 곤경에 처했을 때라도 그분께 나아가도록 허락하신 기회이며, 우리가 그분께 들으실 것임을 의심할 여지 없이 확신하게 해줍니다. 순수한 기도를 위한 필수적인 전제 조건은 사랑, 악의 없는 마음, 집중된 정신, 진실함, 그리고 꾸준함입니다. 기도를 통해 사람은 신성한 은총에 참여하고, 빛으로 깨우침을 받습니다. 기도는 노력과 자기 절제, 인내, 끈기를 요구하는 예술입니다. 이 예술을 파이시이 장로[1] 는 완벽하게 구사했다. 이 책에는 수도사들과 평신도들과의 대화 중 전해 내려오는 발췌문들을 통해 장로의 귀중한 영적 경험의 조각들이 모아져 있다.

 아폰의 파이시이 장로는 오랫동안 러시아 정교회 신자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훗날 성산(스베토고르)의 수도사가 된 그(세속 이름 아르세니 에즈네피디스)는 1924년 7월 25일 소아시아 카파도키아의 파라시 마을에서, 이미 아홉 명의 자녀가 있던 가정에서 태어났다. 미래의 수도사를 세례하고, 세례명으로 자신의 이름을 지어주며, 그의 출가를 예언한 이는 성 아르세니우스 카파도키아스(† 924, 기념일 11월 10일)였습니다.

 에즈네피디스 가족은 1924년 카파도키아에서 그리스로 이주했다. 1945년 아르세니오는 군에 징집되었다. 당시 그리스에서는 내전(1944-1948)이 한창이었다. 아르세니오는 이웃을 구하는 일이라면 자신의 목숨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가장 위험한 임무에 항상 가장 먼저 나섰다. 아르세니는 1950년에 처음으로 아폰 산을 방문했고, 1954년에는 아폰 산의 에스피그멘 수도원에서 라소포르 수계를 받았으며, 2년 후 필로페이 수도원에서 파이시이라는 이름으로 소수계를 받았다.

 1962년부터 1964년까지 2년 동안, 파이시이 수도사는 시나이 산에서 수행한 뒤 다시 아폰으로 돌아왔다. 1979년, 그는 아토스 산의 “수도” 카레이 근처에 위치한 성모 마리아 탄생 수도원 “파나구다”의 수도실에 정착했으며, 이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스승을 찾아왔다. 해가 뜨는 순간부터 저녁이 될 때까지 그는 찾아오는 이들을 맞이하고, 위로하며, 낙담을 떨쳐내게 하고, 영혼을 사랑과 믿음, 희망으로 채워 주었으며, 밤에는 편지를 읽고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했다.

 1988년에 장로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몇 차례 수술을 받았으며, 마지막 수술은 1994년 2월에 이루어졌고 5시간 동안 지속되었다. 1994년 7월 12일 낮 11시, 파이시이 장로는 주님의 품으로 돌아가셨다. 그의 성스러운 유해는 수로티(테살로니키 근교)에 있는 요한 신학자 수도원에 안치되어 있다. 이 수도원은 한때 파이시이 장로의 축복으로 설립된 곳으로, 그곳에서 그는 모든 수녀들의 영적 지도자 역할을 맡기도 했다. 장로께서는 자신의 영적 자녀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며 그들을 격려하고 교훈을 주셨는데, 이 대화들의 기록이 본 서적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영적 자녀들은 자신의 영적 지도자를 “헤론다”라고 부르는데, 이는 러시아어로 번역하면 “장로”를 의미한다. 파이시이 장로의 가르침에서는 ‘사랑의 열정’이라는 개념이 매우 자주 등장한다. 현대 러시아어에서는 이 개념이 통용되지 않지만, 슬라브어에서는 존재했던 용어이다. 여기서 성산 수도자가 사용하는 의미에서의 ‘사랑의 열정’은 열정, 영적 고귀함, 희생 정신, 솔직함, 그리고 자기 자신과 하나님 앞에서의 진실함—이 모든 것이 함께 그리고 동시에 어우러진 것입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장로의 『말씀』 이전 권들에서 조금씩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향하는 주된 목표는 하나님과의 연합, 즉 신성화이며, 이를 인류의 적인 마귀가 온갖 수단을 동원해 방해하고 있다. 사탄은 너무나도 추악하여, 장로는 심지어 그 이름조차 입에 올리는 것을 피하며 “탕갈라슈카”(터키어 dangalak에서 유래 — 어리석고, 무식하며, 교양이 없고, 미성숙하고, 무례하며, 예의가 없고, 무지하며, 정신이 나쁘고, 둔한)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과 하나 되려면 마음의 변화, 사고방식의 변화가 필요하다. 영적인 사람은 이 세상의 사람들에게는 종종 이해하기 어려운 다른 논리를 따른다. 이것이 바로 장로 파이시이가 말하고 권면하는 그 신성한 광기이다. 하나님과의 연합은 외형적인 형식적 유대가 아니라, 조건 없는 유대이며, 사람의 영혼이 불타오르는 때의 유대이자, 사람이 자신을 잊고 오직 사랑하는 분에 대한 갈망과 열망으로만 살아가는 사랑의 유대이다. 신성한 에로스 — 이것이 바로 파이시이 장로가 이 상태를 지칭하는 말로, 그보다 수 세기 전에 성 막심 고백자와 시메온 신학자 같은 비잔틴 신학자이자 신비가들이 말한 바를 되풀이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스타르츠 파이시우스의 『말씀』 제6권이 러시아어로 출간됨으로써, 이 책이 영적 지혜의 보물창고에 확실히 기여할 것이며, 성산(Svyatogor)의 수행자가 남긴 지혜로운 가르침이 담긴 이전 5권의 판본들과 함께 독자들에게 영적 유익을 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성산(Svyatogor)의 파이지스 성자에게 바치는 트로파르

제5음조. 유사: 본래부터 계신 말씀

신성한 사랑의 불을 받아들이시어, / 탁월한 수행으로 온전히 하느님께 바치셨으며, / 많은 이들에게 위로가 되셨으니, / 신성한 말씀으로 가르치시고, / 기도로 기적을 행하시니, / 신을 모신 파이시여, / 지금도 쉬지 않고 기도하소서 // 온 세상을 위하여, 성자여.

 

콘닥

8음. 유사: 선택된

지상에서 천사처럼 사신, / 사랑으로 빛나신, 경건하신 파이시여, / 수도사들의 위대한 버팀목이시며, / 신실한 이들이 거룩한 삶을 살도록 이끄시는 지도자이시며, / 온 세상에 가장 달콤한 위로가 되신 분이시니, / 이를 위하여 우리가 그대께 부르노니: // 기뻐하소서, 온 세상의 아버지여.

 

 

서문

이전 다섯 권의 『말씀』에서 파이시이 장로께서는 종종 기도에 대해 언급하셨습니다. “흠이나 책망받을 데 없는” 수도사였던 파이시이 장로께서는 기도를 자신의 가장 중요한 사명으로 여겼습니다. 다양한 사람들, 수도사와 평신도들과 교류하며, 그는 항상 그들이 기도를 통해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 맡기는 법을 배우도록 돕고자 노력했습니다. 여러분이 손에 들고 계신 이 여섯 번째 권의 ‘말씀’은, 우리 목자의 수장인 카산드리아의 니코디모스 대주교님의 축복으로 출간된 것으로, 전적으로 기도에 헌정된 장로님의 가르침이 담겨 있습니다.

 파이시이 장로에 따르면,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과 교감하고 그분께 도움을 청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위대한 기회입니다. 장로는 사람들이 고통받으며 “자신의 미약한 인간적 힘에만 의지”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가슴 아팠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신성한 힘뿐만 아니라 수많은 신성한 힘을 보내실 수 있는” 하나님께 도움을 청할 기회가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주어지는 도움은 단순한 신성한 도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적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장로는 우리가 기도를 필수로 여겨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아직 기도하는 법을 익히지 못한 이들이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기도 속에서 작동하도록” 좋은 시작을 할 수 있도록 돕고자 노력했다. 이미 기도의 좋은 습관을 익힌 이들에게는, 장로님은 그들이 더 큰 경건함과 따뜻함으로 기도할 수 있도록 굳건히 세워 주셨습니다. 어느 쪽이든 장로님은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전제 조건이 회개와 겸손임을 설명하려고 노력하셨습니다. “내 형제여,” 장로는 자신의 편지 중 하나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기도할 때 회개 외에는 다른 무엇을 구하지 마십시오… 회개는 너에게 겸손을 주고, 겸손은 너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줄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 안에는 네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만일을 대비해 네가 기회가 닿을 때 다른 누군가의 영혼을 도울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것도 그곳에 마련되어 있다.” 또 다른 편지에서 장로는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통회하며, 그분 앞에 나의 죄와 배은망덕함을 드러내고, 겸손히 그분의 자비를 구하며, 찬양으로 그분께 감사드리고자 노력합니다.”

 이 책은 일곱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부분에서는 기도에 대해 전반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특히 장로가 영혼이 하나님과 끊임없이 교제해야 할 필요성으로 느끼며 실천했던 기도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우리가 하나님과 끊임없이 교감해야 하며, 확신을 갖기 위해 하나님의 주파수에 맞춰진 자신의 “무전기”를 결코 끄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기도는 안전함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닫는다면,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교감이 필요함을 느끼게 될 것이며, 끊임없는 기도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파이지이 장로는 우리를 손잡고 참되고 순수한 기도로 이끌어 주시며, 기도를 위해 필요한 전제 조건을 보여주시고, 기도와 동시에 그에 상응하는 영적 투쟁이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그분과 같은 주파수, 즉 겸손과 사랑의 주파수에 맞춰야 합니다. 정욕, 특히 교만과 영적 고귀함의 결여(즉, 희생 정신의 부재)는 우리가 하느님과 소통하는 것을 방해하는 전파 간섭과 같다. 그러므로 기도를 시작하기 전—즉, 하나님과 같은 주파수에 맞춰 그분과 교감하기 전—에는 우리가 성찬식을 통해 그분과 교감하기 전에 행하는 것과 유사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회개와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겸손히 고백하는 것은 “벽을 무너뜨리거나,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문을 열어 주시며, 우리는 그분과 교제하는 은총을 받게 된다.”

 이 책의 두 번째 부분에서는 우리가 기도 중에 직면하는 장애물들, 즉 게으름, 낙담, 그리고 산만함에 대해 다룹니다. 또한 마귀는 우리와 잡담을 나누며, 우리를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떼어내려고 애씁니다. 장로는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따뜻해져서 기도에 집중할 수 있게 될지에 대한 실질적인 조언을 제공합니다. 기도 전에 짧지만 “강렬한” 독서는 마음을 따뜻하게 해줍니다. 교회 찬송가를 부르는 것은 낙담을 이겨내는 데 도움이 되며, 기꺼이 예수 기도에 몰두할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을 만들어 줍니다. 장로는 묵주를 “마귀를 대적하는 기관총”이라고 부르며, 절을 하는 것이 “우리의 영적 엔진을 시동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합니다.

 이 책의 세 번째 부분에서는 우리의 다정하고 사랑이 넘치는 어머니이신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 마리아, 수호천사, 그리고 우리의 수호자이자 하나님 앞에서 중보해 주시는 성도들에 대해 다룹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 마리아께서는 하느님께 대한 완전한 순종과 겸손으로, 인류의 구원에 관한 영원 전부터 정해진 하느님의 계획 실현에 동참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성모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의 간구를 당신의 아드님이시며 하느님이신 분께 올려드립니다. 동시에, 우리가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간다면, 우리의 수호천사는 우리 곁에 머물며 우리를 보호하고 위험과 재앙으로부터 구원해 줍니다. 그리고 모든 성인들은 우리가 믿음과 경건함으로 그들을 부를 때, 서둘러 우리를 도와줍니다.

 네 번째 부분은 기도 속의 간구들에 대해 다룹니다. 장로는 기도를 세 부분, 즉 자신에 대한 기도, 세상에 대한 기도, 그리고 고인에 대한 기도로 나누는 것이 좋다고 말했습니다. 네 번째 부분의 마지막 장에서는 시편과, 카파도키아의 아르세니오스 성자의 『상황별 기도문』을 활용하여 시편으로 기도하는 방법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상황별 기도문’ 자체와 장로 파이시이스가 특정 필요를 위해 기도할 때 해당 시편을 읽으며 따르던 예식은 책 말미의 부록에 수록되어 있다.

 제5부에는 예수 기도와 정신 차림, 즉 마음을 한데 모으는 데 필요한 영적 깨어 있음에 관한 장로의 조언이 담겨 있다. 인간의 마음은 “스스로 내버려진 십대처럼, 끝없이 이리저리 방황하고, 방치된 채로 지내며, 규칙을 어기고 싶어 하는” 것과 같다. 장로는 마음을 영적으로 양육하고, “집인 낙원에서, 자신의 아버지이자 하나님이신 분 곁에 더 많이 머물도록” 가르칠 것을 권고한다.

 예수 기도에서 마음을 한데 모으는 것과 관련하여, 장로는 다양한 기술적 기법을 배제하지는 않으면서도, 이러한 기법들은 단지 보조적인 역할에 불과하며, 예수 기도에 임하기 위한 필수 전제 조건은 회개와 마음의 아픔이라고 강조합니다. 이 아픔은 사람이 하나님의 수많은 은혜에 대해 자신이 얼마나 죄 많고 배은망덕한지 진심으로 깨닫고, 인위적인 노력 없이, 사람이 자신이 얼마나 죄 많고 하나님의 수많은 은혜에 대해 얼마나 감사하지 못한 존재인지 깊이 깨닫게 될 때, 또한 자신의 ‘나’라는 한계를 벗어나 고통받는 이들의 입장에 서게 될 때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 부분에서는 우리 교회의 예배 생활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교회 예배 참여와 그리스도의 거룩한 성찬을 올바르게 준비하는 데 관한 장로의 조언들이 모아져 있습니다. 이 부분의 마지막 소절은 교회 성가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이는 “단순한 기도일 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마음이 마치 터져 나오듯 영적인 감정이 넘쳐흐르는 것”입니다.

 이 책의 일곱 번째이자 마지막 부분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전념하고 있다. 장로는 우리의 간구를 드릴 때마다 “진심 어린 찬양을 드리고 기쁨으로 감사하라”고 조언한다. 또한 그는 어떤 사람이든 하나님의 수많은 은혜를 깊이 생각하게 된다면, 밤낮으로 주님을 찬양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그분을 사랑하는 자녀들은 슬픔과 시련 속에서도 그분을 찬양합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께 감사할 때, 사람은 “그분의 자비의 모든 풍요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할수록,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더 많은 축복을 내려주십니다. 제7부의 마지막 장은 겸손하고 경건한 사람들, 즉 회개를 실천하며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신성한 은사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그 위대한 달콤함과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직접 맛보신 장로께서는, 신성한 은총이 그 은총을 받은 영혼에게 베푸는 그 상태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마음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멈춰 섭니다. 생각들이 사라지고, 영혼은 오직 신성한 사랑과 신성한 온기, 그리고 보살핌의 달콤함만을 느낍니다.” 그때 기도는 멈추는데, 이는 “마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분과 헤어지기를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이 책의 각 부분에서는 겸손과 우리가 자신의 죄성을 깨닫는 것, 그리고 고귀한 행실과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동참하는 것에 대해 반복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파이시이 장로에게 있어 영적 삶의 기본 원칙이자 마음의 기도를 위한 필수 전제 조건이었습니다. “가능한 한 사랑과 겸손이 어우러진 마음의 기도를 갈고 닦으십시오,”라고 장로는 한 편지에서 조언합니다. 또한 장로는 종종 자신의 영적 투쟁 경험에서 예시를 들거나, 자신이 체험한 신성한 경지에 대한 경험을 우리와 나누곤 했습니다. 이는 또한 우리를 돕기 위해 그의 큰 사랑으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영적 자선”의 한 형태이기도 했습니다.

 이 책의 출판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원고를 읽어 주시고, 조언을 통해 책을 더 나은 것으로 만들어 주신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우리가 기도를 사랑하게 되고, 겸손하고 성실하게 기도를 우리 안에 가꾸기 위해 노력하여, 그리스도의 왕국에 참여하게 되며, 영원토록 그분을 하나님으로 찬양하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멘.

 

2012년 부활 후 첫 일주일 금요일, “생명의 샘” 성모 마리아 성화 기념일

성 사도이자 복음서 저자인 신학자 요한 수도원의 원장 필로페아 수녀와 그리스도 안의 자매들.

 

 

제1부.
하나님과의 교제에 대하여

“하늘의 지휘본부와 연결을 맺고, 하느님을 경외하며 그분과 같은 주파수로 함께 일하는 이들은 복이 있도다.”

 

 

제1장.
기도란 하나님과의 대화라는 사실

 

천상의 지휘본부와 교감을 맺은 이들은 복이 있도다

헤론다, 기도란 개인적으로 당신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 기도할 때 저는 무선 신호를 보내며 도움을 청합니다. 저는 끊임없이 그리스도께, 성모 마리아께, 성인들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저 자신을 위해서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요. 결국 청하지 않으면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억나는데, 내전 당시 우리 부대가 한 고지대에서 공산군 부대에 포위되어 봉쇄당했던 적이 있습니다. 적군은 1,600명이었고, 우리는 고작 180명의 전사뿐이었습니다. 우리는 참호를 파고 바위 뒤에서 방어 태세를 유지했습니다. 만약 그들이 우리를 포위했다면, 살아남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을 것입니다. 무선 통신병이었던 나는 사령부와 연락하기 위해 안테나를 설치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지. 안테나는 끊임없이 총탄과 파편에 맞아 쓰러졌다. 소대장이 소리쳤다. “이 안테나 좀 버리고, 당장 나한테 달려와! 수류탄 상자 나르는 걸 도와!” 중대장이 기관총 사수들에게 상황을 확인하고 명령을 내리러 기어갈 때면, 나는 재빨리 무전기 쪽으로 달려갔다. 그가 명령을 내리는 동안 나는 안테나를 설치하려고 몇 번이고 시도한 뒤, 중대장이 꾸짖지 않도록 다시 달려가 상자를 나르는 일을 도왔다. 결국 막대기와 공병 삽을 이용해 안테나를 고정하고 지휘소와 통신을 연결할 수 있었다. 나는 겨우 두 마디, 즉 우리 좌표만 전달할 수 있었다. 다행히도 그 두 마디만으로도 모든 것이 바뀌었다! 새벽이 되자 우리 공격기가 날아와 적의 진지를 폭격했다. 우리는 구출되었다! 이게 네 생각에 하찮은 일이라고? 180명의 병사가 1,600명의 적에게 포위당했지만, 결국 살아남은 것이다!

 그때서야 비로소 나는 수도사의 위대한 사명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바로 기도로 돕는 것이다. 세속 사람들은 이렇게 수군거립니다. “이 수도사들은 뭘 하고 있는 거지? 왜 세상으로 나가 사회를 돕지 않는 거지?”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은 마치 전쟁 중에 통신병을 꾸짖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거기서 무전기로 뭘 그렇게 바쁘게 하고 있는 거야? 그건 버리고 소총을 집어 들고 가서 쏘라고!..”

 세상의 모든 무선국과 통신을 연결한다고 해도, 우리가 하늘과의 교제와 하나님과의 접촉을 갖지 못한다면 그로부터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그분과의 교제와 접촉은 그분께 도움을 청하기 위해 필수적입니다. 그리고 단지 청하는 것뿐만 아니라, 받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의 지휘소와 교신을 맺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과 같은 주파수로 일하는 이들은 복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그분과 대화할 기회를 주십니다

— 게론다, 제 기도는 슬픔과 비탄의 원인이 됩니다. 도무지 잘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 그럼 너는 그리스도께, 성모님께, 천사들과 성인들에게 부담 없이, 진심으로, 굳이 말을 고르지 말고 대화해 보렴. 네가 어디에 있든 그렇게 하고,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해. 예를 들어, “나의 그리스도여!” 또는 “하느님의 어머니, 제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아시잖아요. 저를 도와주세요!”라고 말하세요. 끊임없이 그분들과 이렇게, 단순하고 겸손하게, 당신을 괴롭히는 일에 대해 대화하세요. 그리고 나서 예수 기도를 드리세요. “주 예수 그리스도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 게론다, 저는 기도할 때 마음이 산만합니다.

 — 기도할 때, 지금 누구와 대화하고 있는지 생각하십시오. 바로 하느님 자신과 말입니다! 이것이, 당신 생각에, 하찮은 일입니까? 사람이 중요한 고위 관료와 대화할 때, 그가 얼마나 주의 깊게 한 마디 한 마디를 내뱉는지 보십시오! 어리석은 말을 내뱉지 않도록 조심하고, 때로는 말을 더듬기도 하며, 당황해서 혀가 꼬이기도 하죠… 그런데 사람과 대화할 때조차 그렇게 신중하다면, 하느님과 대화할 때는 얼마나 더 정신을 차려야 하겠습니까! 주목해 보라: 심지어 아이조차도 아버지나 어른과 이야기하고 싶을 때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부끄러워한다. 그리고 아이가 조금은 두려워하는 선생님과 이야기하고 싶을 때는 더욱더 부끄러워한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자신과, 성모 마리아와, 성인과 대화하고 있으면서 이를 깨닫지 못하는가?

 — 수도원에 오기 전까지는, 게론다, 수도 생활과 기도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임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기도하기가 너무 어렵네요… 기도가 가장 어렵고 지치는 일인 것 같습니다.

 — 내 생각에 넌 문과 출신이지? 넌 대화하는 걸 좋아하고,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데는 지치지 않잖아. 그런데 너와 대화하기 위해 낮추어 오시는 그리스도께서는, 너는 그분과 대화하는 데 지치고, 그런 대화가 너에게는 힘들게 느껴지는구나. 정신이 온전한 건가? 이건 마치 “아이고, 큰일 났네, 이제 왕과 이야기하러 가야 하는데… 전혀 하고 싶은 마음은 없는데, 어쩔 수 없이 가야겠네.”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기도를 통해 끊임없이 그분과 교제할 기회를 주시는데, 우리는 이를… 원하지 않는다고?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그리고 가장 놀라운 점은, 그분께서 친히 우리와 대화하시기를 원하시며 우리를 돕고자 하시는데, 정작 우리는 그분과 이야기하는 게 귀찮다는 것입니다!

 — 게론다, 저는 자주 헛소리를 하곤 하는데, 그 때문에 나중에 속상해하곤 합니다.

 — 이야기하고 싶다면 차라리 그리스도와 이야기하는 게 낫습니다. 그리스도와 대화할 때, 사람은 결코 그 시간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수다를 떨려는 성향이 정욕이라는 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 성향을 영적인 유익을 위해 활용한다면, 그것은 기도의 전제가 될 수 있습니다. 상상해 보세요, 말하기조차 귀찮아하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그런데 너 안에는 어떤 힘이 살아 있어서, 자꾸만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어 안달이 나잖아… 만약 그 충동을 영적인 유익을 위해 쓴다면, 네 영혼은 거룩해질 거야. 사람들과는 꼭 필요한 이야기만 하고, 항상 그리스도와 대화하도록 노력해 봐. 그분과 겸손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면,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더 이상 눈치채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만큼 그 교제는 흥미롭고 달콤할 것이다. 나는 심지어 영적인 대화조차 지루하게 느껴지지만, 기도할 때는 비할 데 없는 평안을 경험한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가끔은 그리스도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을 부러워할 때가 있습니다. 그들은 그분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으며, 심지어 그분과 대화까지 나눌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우리가 그들보다 더 나은 처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그분을 자주 귀찮게 할 수 없었던 반면, 우리는 기도를 통해 그분과 끊임없이 대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에 대한 간절한 소망

— 게론다,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 네가 어린 아이이고, 하느님께서 네 아버지이시라는 것을 느껴라. 그리고 그 느낌을 잃지 않은 채, 네게 필요한 모든 것을 그분께 청하라. 그렇게 하나님과 대화하다 보면, 더 이상 그분에게서 한 걸음도 떠나고 싶지 않은 순간이 올 것입니다. 결국 사람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안전과 위로, 신성한 다정함과 어우러진 형언할 수 없는 사랑을 얻기 때문입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자신의 마음에 모시고, 온 존재로 그분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영혼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2] ”라고 성경은 말씀하신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분과 교제할 때,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더 이상 그를 유혹하지 못한다. 그는 마치 미친 사람처럼 된다. 미친 사람에게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음악을 들려줘도 그는 감동받지 않을 것이다. 그를 박물관에 데려가 세상 최고의 화가들이 그린 그림을 보여줘도,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냥 지나칠 것이다. 그 앞에 가장 정교한 요리를 차려 놓고, 가장 아름답고 유행하는 옷을 입혀 주고, 주위에 가장 은은한 향기를 풍겨도 — 그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코도 킁킁거리지 않을 것이다. 미친 사람은 자신만의 세계에 산다. 하늘의 세계와 연결된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는 온전히 그곳에 있으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땅으로 내려오려 하지 않는다. 어머니를 껴안은 아이를 어머니 곁에서 떼어내 보라! 기도의 의미를 깨달은 사람을 기도에서 떼어낼 수도 없는 법이다. 어머니의 품에 안긴 아기는 어떤 기분을 느낄까? 오직 하나님께서 자기 곁에 계신다는 것—가까이, 아주 가까이 계신다는 것—을 느끼고, 자신이 그분의 품에 안긴 어린아이임을 깨달은 사람만이 이를 이해할 수 있다.

 나는 기도 중에 자신을 어린 아이처럼 느끼는 사람들을 알고 있다. 만약 누군가 그 순간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다면, “이 사람들은 그냥 어린아이들이잖아!..”라고 외쳤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누군가 그들이 기도 중에 어떻게 행동하는지 엿보았다면, 이 사람들은 분명 미쳤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들은 아버지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가, 아버지의 소매에 매달리며 간청하는 아이와 닮아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아버지께서 꼭 해 주셔야 해요!.. 어떤 방법이든 상관없으니, 제발, 제발 해 주세요!..” — 바로 그런 단순함과 담대함으로 이 사람들은 하느님께 간청합니다.

 — 게론다,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단순히 교감이나 위로를 받고 싶은 감성적인 욕구에서 비롯될 수도 있습니까?

 — 글쎄요,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선한, 설령 감성적인 하나님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다면 뭐가 나쁠까요? 하지만 당신은 종종 정신을 잃고,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만 기도에 의지하는 것 같군요. 당연히 하나님께서는 그런 이유로 온갖 어려움과 곤란이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께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가 무언가 일이 생겼기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부모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달려가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부모님이 자신을 얼마나 무한히 사랑하는지 알고 있으면서도, 억지로 어머니나 아버지의 품에 안기도록 강요받아야 하는 아이를 상상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우리의 다정하고 자상하신 아버지이시며,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시간이 빨리 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그분과 대화할 때 결코 만족하지 말아야 합니다.

 

 

제2장.
기도가 필수적이라는 점

 

기도를 필수로 여기자

헤론다, 저는 믿음이 깊지 않고 제 자신이 연약하다고 느낍니다.

 — 그럼 어떻게 해야 할지 아세요? 하나님을 껴안고 그분께 매달리세요! 아이가 아버지의 목에 매달려 있는 모습을 본 적 있나요? 당신도 그렇게 하세요: 그분을 껴안고 놓지 마세요. 그래야 그분이 당신을 자신으로부터 떼어낼 수 없게 됩니다. 그러면 당신은 확신과 힘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 네, 헤론다, 저도 하나님께 의지해야 한다는 건 느끼지만, 그게 참 어렵잖아요…

 — 그럼 손을 위로 뻗어, 하늘을 향해 뻗어 봐. 더 세게 뻗을수록 네 팔은 더 길어질 거야. 물론 당장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러다 보면 결국 하나님을 붙잡게 될 거야.

 — 헤론다, 시간이 부족할 때면 저는 서둘러 기도하곤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제가 그리스도께 바쳐야 할 시간을 훔치고 있는 건 아닐까요?

 — 있잖아,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것이 풍족하시단다. 그분께 시간을 훔치든 말든, 그분은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으실 거야. 하지만 너 자신은 그런 성급한 기도로는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해 — 그건 확실해. 생각해 보라. 우리의 기도가 필요한 분은 그리스도께서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그분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원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기도함으로써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과 교제하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다면, 마귀의 손에 넘어가게 될 것이며, 그때는 우리에게 큰 비극이 닥칠 것이다. 기억하시나요? 아바 이사악 시리노스가 이렇게 말했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왜 기도하지 않았는지는 묻지 않으시겠지만, 왜 그분과 교제하지 않았는지, 그리하여 마귀가 우리를 괴롭힐 권리를 주었는지는 물으실 것입니다.”[3]

 — 헤론다, 어떻게 하면 기도를 사랑하게 될까요?

 — 기도가 필수적이라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육체가 살아가기 위해 음식이 필요한 것처럼, 영혼도 죽지 않으려면 양분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영혼을 굶기면 쇠약해지고, 결국 영적 죽음이 찾아옵니다.

 — 게론다, 무엇이 기도를 방해합니까?

 — 기도가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오직 우리가 기도가 필수적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할 때뿐입니다. 사람이 기도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기도가 자신에게 필수적이라는 것을 체험적으로 느끼지 못한다면, 기도를 노예 같은 의무로 여길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어리석은 갓난아기와 같아서, 어머니의 품을 외면하며 어머니의 다정함과 보살핌이 주는 모든 달콤함을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아이는 연약하고 불행하게 자라납니다.

 

기도는 안전함입니다

— 헤론다,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어떻게 느낄 수 있을까요?

 — 아, 만약 당신이 전쟁을 겪어보셨다면, 우린 서로를 이해했을 텐데요!.. 전쟁 중에는 지휘소와 다양한 무선 통신 방식이 있었어요. 우리 통신병들이 무전기에서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고 끊임없이 교신 상태를 유지하는 ‘상시 통신’ 방식도 있었죠. 아, 그때는 정말 마음이 든든했어요. 우리가 보호받고 있다는 걸 확실히 알았으니까요! 두 시간마다 연락을 주고받을 때는 그런 확신을 느끼지 못했고, 아침과 저녁 하루에 딱 두 번만 지휘소와 연락을 주고받을 때는 우리 처지가 매우 위태롭다고 느꼈죠. 기도도 이와 매우 비슷합니다. 사람이 기도를 많이 할수록 영적으로 더 큰 안전감을 느낍니다. 기도는 바로 보호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끊임없이 접촉하며, “상시 연락 상태”를 유지할 때, 우리는 어떤 악도 미리 막을 수 있습니다. 어느 날 버스에 한 수도사가 타고 있었습니다.[4] 그는 눈을 감고 기도하고 있었는데, 모든 승객들은 그가 자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다가오던 트럭이 갑자기 전봇대에 충돌하고 반대 차선으로 날아갔습니다. 차량들이 서로 부딪히기 시작했고, 사고는 끔찍했습니다! 그런데 버스는 알 수 없는 방식으로 도로에서 벗어나 안전한 거리에 있게 되었습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버스를 들어 올려 길가로 옮겨 놓은 것처럼 말이죠!.. 승객 중 누구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수도사의 기도가 그들을 구해준 것이었습니다.

 — 게론다, 평신도들이 종종 어떻게 하면 기도하는 습관을 들일 수 있는지 묻곤 합니다.

 — 자, 들어보세요. 옛날에는 수도 생활에 헌신하고 단호한 성품을 가진 이들 중 일부가 험준한 바위산, 동굴, 이교도의 무덤, 혹은 악마의 제단 속으로 들어가 수행을 하곤 했습니다. 그곳에서는 온갖 위험이 그들을 위협했습니다. 바위에서 떨어진 돌들이 머리에 떨어지기도 하고, 악령들이 그들을 공격하기도 했으며, 그 밖에도 수많은 유혹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이 사람들은 끊임없이 “나의 그리스도여!.. 성모 마리아여!..”라고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두려움을 통해 이 사람들에게 끊임없는 기도의 선한 습관이 몸에 배게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 시대를 상상해 보라. 전날 밤 파티와 클럽에서 술과 마약, 그리고 현대인의 그 밖의 ‘즐거움’들로 ‘즐겁게’ 시간을 보낸 뒤, 아침부터 운전대를 잡는 사람들을 상상해 보라. 잠 못 이루고 미친 듯이 보낸 밤을 보낸 뒤 운전대를 잡는 이런 사람들은 자신도, 자동차도 통제하지 못한다. 그리고 도로에 그런 ‘영웅’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면서도, 아침에 차를 시동 걸고 출근하는 평범한 기독교인을 상상해 보라. 그가 살아서 집에 돌아올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집에 무사히 도착할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아니면 사고로 중상을 입은 채 구급차에 실려 갈까? 이제 말해 보라. 이것이 끊임없이 “나의 그리스도여!.. 나의 여왕이시여!..”라고 부르짖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만일 평신도들이 이러한 위험에 대한 두려움에서 영적인 유익을 얻는다면, 그들은 우리 수도사들보다도 기도에 있어 더 뛰어나게 될 것이다… 게다가 그들에게 닥칠 위험들 또한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기억나는 일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제 칼리바에 찾아왔습니다. 그는 거의 절망에 빠진 상태였습니다. 부주의로 길에서 아이를 치고 말았지만, 하느님께 감사하게도 아이는 살아남았습니다. 그 사람은 “저는 범죄자이고 벌을 받아 마땅합니다.”라고 되뇌었습니다. — “그 아이를 치셨을 때, 기도하셨나요?” — 제가 물었습니다. “아니요,” 그가 대답했다. “당신은 벌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내가 대답했다. “하지만 아이를 치었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닙니다. 당신은 기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훨씬 더 큰 벌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내 지인 한 명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그는 공무원이었지만, 높은 수준의 덕행을 이룬 사람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예수님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직장에서든, 길을 가든, 어디서나 말이죠. 그의 기도는 저절로 흘러나왔고, 그의 눈에서는 찬양과 기쁨의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심지어 그의 책상 위 서류들조차 눈물로 젖어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직장을 그만두고 싶었고, 연금이 줄어들더라도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아폰 산에 와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묻기 위해 내 칼리바를 찾아왔다. “일을 그만두지 마세요.”라고 내가 그에게 말했다. “만약 동료들이 왜 우는지 캐물으면, ‘아, 고인이 된 아버지가 문득 생각나서요’라고 대답하세요.” 그러던 어느 날, 이 분도 차를 운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길 위로 한 아이가 뛰어들었습니다. 충돌은 피할 수 없었고, 충격으로 아이는 공처럼 튕겨 나갔습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아이는 전혀 다치지 않았습니다. 이 분이 운전 중에도 기도를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아이를 재난으로부터 지켜주신 것이었습니다.

 

기도를 위한 동원

— 게론다, 전쟁이 일어날까요?

 —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고 계십니까? 저는 봄부터 가을까지 스스로에게 기도를 위한 동원령을 내립니다. 물론, 조용히 하고 있어서 저 말고는 제 기도의 소명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사람들이 전선으로 나가 피를 흘리는 전쟁과 실제 동원령을 피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다음과 같은 소식을 받았습니다:[5] “10월 16일 일요일, 터키인들이 그리스를 공격할 계획입니다. 그들의 계획이 무산되도록 더 열심히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지금까지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셨습니다. 그러니 성모님께서 앞으로도 계속해서 우리를 지켜주시도록 기도합시다.

 — 게론다, 이제 그리스에 대한 구체적인 위험이 지나갔으니,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계속 기도해야 할까요?

 — 지금 지구상에 전쟁이 그리 적지 않은가? “그리스를 위한”, “그리스를 위한 것이 아닌”이란 게 무슨 뜻인가? 지금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곳에서는 우리 형제들이 고통받고 목숨을 잃고 있다. 우리 모두가 아담과 이브의 후손으로서 형제가 아닌가? 물론 우리 가족은 갈라졌고, 사람들은 지구 곳곳으로 흩어졌다. 정교회 신자들과 우리 그리스인들은 육체와 영 모두에서 형제이지만, 비정교회 신자들과도 우리는 형제입니다. 물론 육체적으로만 그렇지만요. 그러니 비정교회 신자들을 위해 우리는 더 큰 연민을 담아 기도해야 합니다. 그들이 더 불행하기 때문이죠.

 — 헤론다, 지금 그리스는 힘든 시기를 겪고 있습니다. 저는 이 모습을 보며 매일 묵주를 쥔 채 우리 조국에 하느님께서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기도를 하고 또 기도하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과연 그리스의 구원이 내 묵주에 달려 있는 건가?”

 —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스의 구원이 당신의 묵주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당신이 그리스가 겪고 있는 어려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한다는 것은, 조국을 위해 가슴 아파하며 하나님께서 개입해 주시기를 간구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도와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그분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적인 사람들, 마카베오 같은 이들을 일으켜 주시도록 기도하십시오.[6] 지금과 같은 용감한 사람들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선과 악의 싸움이 벌어질 때가 왔습니다. 오늘날 불법이 법의 지위를 차지했고, 죄가 유행처럼 퍼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에서 재앙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것을 보게 되고, 정부가 미친 법들을 제정하는 것을 보게 되며, 온 나라가 불안정으로 요동칠 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도와주실 것입니다.[7]

 — 게론다님 말씀으로 미루어 보면, 우리는 모든 일을 제쳐두고 온 힘을 기도에 쏟아야 할 것 같습니다…

 — 당신의 생각에, 이게 아직 논의할 문제라고요?! 보세요: 온 세상이 거대한 솥처럼 요동치고 있습니다! 교회, 국가, 부족과 민족들 — 모든 것이 뒤집혀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어디로 이어질지, 아무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손을 뻗어 주시기를! 그리고 수도사들은 지금 정말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일과 걱정거리, 심지어 시급한 것들조차 미루고 모든 힘을 기도에 쏟아야 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힘이 닿는 대로 세상의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들은 사탄에게 자신들에 대한 큰 권세를 내주었고, 그로 인해 고통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고 기도로 세상을 돕기 위해 수도사가 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좋은 수도사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묵주를 짚으며 기도하고, 우리 자신과 세상을 위해 땅에 엎드려 절합시다. 결국 묵주와 절을 통해 수도사는 사람들을 돕는 것입니다.

 

 

제3장.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도록 기도하는 법

 

정욕은 하나님과의 교감을 방해하는 전파 간섭과 같다

헤론다, 제 안에 정욕이 살아 있다면, 제 마음이 기도 속에서 움직이기 시작할 수 있을까요?

 — 네 안에 정욕이 있는데 어떻게 네 마음이 기도 속에서 움직일 수 있겠느냐? 썩은 케이블을 가져다가 전화 잭에 연결해 보아라. 전화기 수화기에서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겠느냐? 끊임없는 단락으로 인해 통신이 자꾸 끊어질 것이고, 수화기에서는 휘파람 소리와 딱딱거리는 소리만 들릴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내면에 ‘썩은 부분’이 있고, 정욕이 깃들어 있으면 영적 삶에서도 ‘단락’이 일어난다. 그는 영적으로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것이다. 교만, 이기심, 제멋대로인 태도, 방종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한다. 왜냐하면 만약 이러한 정욕들이 사람을 지배한다면, 기도에 필수적인 하나님의 은총이 그에게 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면의 ‘전선’을 녹으로부터 깨끗이 씻어내어 전류가 잘 흐르게 하고, 하나님과 연결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사람이 정욕에서 더 많이 정화될수록, 기도에 더 큰 성과를 거둘 것이다.

 정욕은 우리가 하나님과 소통하는 것을 방해하는 전파 간섭과 같습니다. 이러한 간섭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사람이 어떻게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겠습니까? 전선에서 무전병이 간섭 소리를 들을 때, 자신을 호출한 사람에게 이렇게 대답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수신 상태 ‘0’(또는 ‘1’)입니다. 통신 상태를 확인하고 다시 시도해 주세요!” 잡음 때문에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수신 상태는 적어도 ‘3’ 이상이어야 했습니다. 수신 상태 ‘5’는 매우 좋은 것으로 여겨졌는데, 그때는 통신 상태가 완벽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선 통신병은 목이 쉴 때까지 소리쳐도, 조정이 제대로 되지 않아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먼저 무선 통신병은 자신의 무전기의 송신기와 수신기를 하나의 주파수로 맞춘 다음, 그 주파수에서 지휘소와 교신을 시도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과 “같은 주파수에 맞추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행동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영적 라디오 방송국의 송신기는 ‘사랑’의 주파수에 맞추고, 수신기는 ‘겸손’의 주파수에 맞춰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들으시고, 우리가 그분을 들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결국 ‘사랑과 겸손’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작동하시는’ 바로 그 ‘주파수’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이 주파수를 “포착”하고 그에 맞춰 조정하기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면 그는 하나님과 교감을 맺게 될 것이며, 그의 마음은 끊임없이 하나님 안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자, 여러분이 이 신성한 교감을 맺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나”와 “나의 것”이 하나님과의 연결을 방해합니다

— 게론다, 제 배터리를 영적인 전기로 충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충전해야 합니까? — 내면에서 영적인 고귀함과 이타심을 가꾸어, 당신 안에서 “나”와 “나의 것”이 사라지게 하십시오. “나”와 “나의 것”은 기도를 방해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마치 절연층으로 사람을 덮어버리듯, 사람을 하느님으로부터 분리시키기 때문입니다. 절연재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느님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킨 사람이 기도하면, 주님께서는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아니, 아들아, 나는 너를 이해할 수 없구나!..”

 — 게론다, 수도사가 자신의 규칙을 성실히 지키면서도, 동시에 희생 정신과 형제들에 대한 사랑을 품지 않을 수도 있습니까?

 —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수도사가 오직 자신만 생각한다면, 기도를 드리고, 상당한 수행을 하고, 금식하고, 절을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수행을 하면서도 그는 단지 자신에 대한 자만심을 부풀릴 뿐, 다른 이들에게는 무관심한 채로 남습니다. 그렇게 행동하는 수도사는 언제나 빈곤한 상태로 남을 것입니다. 고행 중에도 그는 오직 자기 자신에만 몰두하여, 자기 마음대로 행동할 뿐입니다. 그러나 그는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돌봐야 합니다. 즉, 자신의 정욕을 뿌리 뽑아야만 비로소 성공할 수 있습니다.

 — 그러니까, 게론다, 순종에 있어서도, 수녀들과 함께할 때도, 모든 면에서 흠잡을 데 없어야 한다는 말씀이신가요?

 — 물론, 모든 면에서요! 그리스도와 유대를 맺고 그 유대를 잃지 않으려면, 당신의 온 삶이 그리스도를 기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우리가 이웃을 기쁘게 하고, 그에게 호의를 베풀 때 — 이 단어의 좋은 의미에서 —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제가 영적 고귀함과 희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수도사가 규칙을 지키고 절을 올린다 해도, 희생 정신이나 고귀함, 타인을 사랑하는 마음 같은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면, 그의 절도 기도도 헛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수도원에 들어왔을 때,[8] 저는 신입 수도사로서 식당 담당을 돕도록 배정받았습니다. 그때 팔순의 한 노승, 아주 쇠약해진 분이 가끔 제게 수프를 자신의 방으로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래서 봉사를 마치고 접시에 수프를 담아 그분께 가져다드렸습니다. 어느 날 한 형제가 그 모습을 보고는 나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았습니다. “너, 그분에게 좋은 습관을 너무 심어주지 마!… 그렇지 않으면, 한 번 익숙해지면 이것저것 요구하기 시작해서 너를 전혀 쉬게 해 주지 않을 거야. 그 노인을 챙기느라 바빠서 규칙조차 지킬 수 없게 될 거야!” 으-으, 넌 그가 자기 부탁들로 날 얼마나 괴롭혔는지 아직 모르겠구나! 나도 그가 감기에 걸렸을 때 한 번 도와줬더니, 그 후로는 아예 날 좀 내버려 두지 않더라고! 자꾸만 벽을 두드리며 “자비를 베풀어, 차 좀 타 줘!”라고 하더니, 다음에는 “자비를 베풀어, 다른 쪽으로 돌아눕게 도와줘!”라고 하더라. 몇 분 뒤 또 톡톡 두드리더니: “사랑을 베풀어 줘, 허리에 뜨거운 벽돌을 올려 줘!..”[9] 차 좀 따라 줘 — 벽돌 좀 줘!.. 차 좀 따라 줘 — 벽돌 좀 줘!.. 근데 나한테는 규칙이 있잖아!.. 내가 그 규칙을 언제 지켜야 하냐?! 이 늙은이가 날 미치도록 괴롭혔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상상이나 가나? 정말 끔찍한 일이야! 벽 너머에서 노인이 고통스러워하며 신음하고 도움을 청하는데, 수도사는 규칙을 어기지 않으려고 가려고 하지 않는다니!.. 이건 완전히 냉담하고 무감각한 상태의 징후다. 도대체 여기서 의심의 여지가 어디 있겠는가? 하느님께서는 ‘흠잡을 데 없는’ 절이나 염주 횟수보다 벽돌 한 장과 차 한 잔을 훨씬 더 중요하게 여기실 터이다! 그 수도사는 자신의 염주를 들고 그리스도 앞에 서서 “주 예수 그리스도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했지만, 정작 고통받는 이웃에게는 “제발 날 좀 내버려 둬!”라고 퉁명스럽게 대했으니 말이다.

 — 게론다, 사람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까?

 —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이 하나님께 친근한 자라면 축복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친근하지 않은 자에게 왜 축복을 주시겠습니까? 그 사람이 하나님의 축복을 땅에 내던져 발로 짓밟게 하려고요? 저는 이것을 직접 경험했습니다. 제가 시나이에서 살 때,[10] 그곳에는 끔찍한 가뭄이 들었습니다. 몇 년 동안 비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아, 성 카타리나 수도원과 그 근처에 살던 베두인족 모두 매우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수도사들은 비가 내리기를 기도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올리브나무를 가지치기할 시기가 되었습니다.[11] 나는 도와주러 갔다. 베두인족은 수도원의 나무들을 가지치기했고, 수도사들은 굵은 가지는 수도원을 위해 남겨두고 가느다란 가지는 한쪽에 쌓아 두었다. 베두인족은 이 가지들을 달라고 부탁했다. 불에 음식을 끓이고 밤에 몸을 녹이기 위해서였다. 시나이 산은 매우 추우니까. 하지만 수도사들은 그 나뭇가지를 가져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베두인족은 실망한 채 떠났다. 다음 날 베두인족은 같은 부탁을 하러 다시 수도원에 찾아왔다. 나는 가느다란 나뭇가지들을 한 묶음씩 묶어 그들에게 건네주었다. 그러자 한 노년의 베두인족이 내게 말했다. “너는 착한 사람이구나. 비가 올 거야.” 그리고 과연, 제가 수도원으로 돌아가기도 전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건 세차고도 오래 지속된 소나기였습니다. 그렇게 베두인의 친절한 한 마디가 하늘을 열어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의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

— 헤론다, 제가 며칠 전 정말 끔찍하게 행동했어요… 이제 제 기도가 하나님께 기쁘시지 않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요.

 — 만약 그 생각이 진정한 겸손에서 비롯된 것이고, 네가 자신의 추한 행동으로 하나님을 화나게 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너는 신성한 위로를 느낄 것이다. 하지만 겸손 대신에 단지 이기적으로 슬퍼하며 머리를 쥐어뜯으며 “오!.. 내가 이 지경까지 와버렸단 말인가?! 어떻게 내가 그럴 수 있었을까?!”라고 외친다면, 아무런 위로도 받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거절하시기 때문이다.[12]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니, 교만은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벽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기도가 들리려면, 그 기도는

 부서지고 겸손한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합니다.[13] 우리가 깊은 겸손으로 “주님, 저 같은 사람을 도대체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기만 해도,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즉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 헤론다, 그런데 가끔 어떤 유혹에 시달릴 때면 왜 기도를 할 수 없을까요?

 — 유혹에 시달려 기도할 수 없다면, 그것은 당신 안에 이기심과 허영심이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내면의 ‘나’를 혐오하게 될 때까지 유혹은 남아 있습니다. 내면의 ‘나’가 사람에게 혐오스럽게 느껴지는 순간, 그리스도께서 도와주시러 오시고 유혹은 사라집니다.

 — 헤론다, 저는 자매들을 대할 때의 건방진 태도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지만, 아무런 결과도 보이지 않습니다.

 — 사람이 수련하고 기도하는데도 결과가 없다면, 그것은 그 안에 이미 이기심과 교만이 자리 잡고 있거나, 교만에 대한 소질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기심과 교만은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신성한 은총이 임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기도 속에서 청하는 것을 주십니다. 단, 우리 안에 겸손과 자신의 죄성을 깨닫는 마음이 있을 때에만 말입니다.

 — 헤론다, 저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저를 특정 약점으로부터 건져 달라고 간절히 구하며, 그 약점과 싸우고, 뿌리 뽑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 교만 때문에 하나님께서 저를 도와주지 않으십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께 용서를 구하십시오. 이렇게 말하십시오. “나의 하느님, 제 안에 교만이 깃들어 있어 제가 스스로 주님의 도움이 오시는 것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간청합니다. 저를 깨우쳐 주시고, 정확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제 약점을 극복할 수 있는지 깨닫게 도와주십시오.” 자신 안에 교만이 있고, 바로 그 때문에 그 정욕이 떠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그 원인과 당신의 연약함의 출발점이 어디인지, 그리고 그것을 뿌리 뽑기 위해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를 즉시 알려 주실 것입니다.

 — 헤론다, 기도할 때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합니까?

 — 겸손한 마음가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도와주실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에게는 자기 뜻이 없으며, 그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에게 하늘의 축복을 내려주십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듣는 만큼, 선하신 하나님도 그를 들으십니다.

 

기도에는 끈기와 인내가 필요합니다

— 게론다, 가끔 저는 하나님께 어떤 구체적인 청을 드릴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저는 스스로에게 묻곤 합니다. “하나님께서 제 기도를 들으시는 걸까요?”

 — 그 “들으시는가?”라는 말은 네가 하느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분의 사랑을 의심하면서, 한 손으로는 그분께 청을 드리고, 다른 손으로는 곧바로 그 청을 다시 거두어들이는 셈이다. 그렇게 행동함으로써, 너는 “우선적으로 응대받을 권리”를 잃게 되는 것이다.

 — 헤론다, 제가 하나님께 무언가를 구했는데 당장 이루어지지 않을 때, 끈기 있게 계속 구해야 할까요?

 — 네, 그래야 합니다. 끈기 있게 구하십시오. 우리가 어떤 기관에 가서 공무원에게 부탁을 할 때, 때로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끈기를 보여야 할 때가 있잖아요. “부탁드립니다, 도와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여기서 떠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듯이요. 기도에서도 같은 끈기가 필요합니다. 가나안 여인이 얼마나 끈질기게 그리스도께 간청했는지 기억하십니까?[14] 그리고 복음서에 나오는 과부도 불의한 재판관에게 간청할 때 끈질기게 구했습니다.[15]

 — 하지만, 게론다, 시간이 지나도 제 간청에 답이 없으면 저는 낙담하게 됩니다.

 — 기도로 무언가를 구할 때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 합니다. 한 번은 제 눈이 부어오르고 심하게 아팠던 적이 있습니다. 저는 성모 마리아 성화상 앞으로 세 번이나 다가가, 밤에 시편을 읽을 수 있도록 저를 치유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저는 성화상 앞에 있는 램프의 기름으로 아픈 눈에 기름을 바르긴 했지만, 눈은 계속 아팠습니다. 며칠이 지나자 상태는 더 악화되어 눈이 아프고 부어오르는 것이 점점 심해졌습니다. 그렇게 두 주가 지났습니다. 그때 저는 무척 부끄러움을 느끼며 다시 성모 마리아 성화상 앞으로 다가가 말했습니다. “하느님의 어머니, 용서해 주십시오. 하지만 다시 한 번 귀찮게 해 드리겠습니다.” 다시 램프의 기름으로 눈에 바르자, 모든 증상이 즉시 사라졌습니다. 혹시 성모님께서 제가 처음 청했을 때 바로 저를 치유해 주실 수 없었던 것일까요? 물론, 하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알지 못했던 무언가를 아셨기에, 성모님께서는 제가 한동안 고통을 겪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겸손하게 간구하며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십시오. 믿음과 고통, 끈기와 인내로 드리는 기도는 반드시 응답받게 됩니다 — 물론, 우리가 구하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한 일일 경우에 한해서 말입니다.

 

 

제4장.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 준비하는 법

 

그리스도께 드리는 겸손한 고백

헤론다, 기도하기 전에 어떤 준비가 필요합니까?

 — 성체 성사 준비와 비슷합니다. 성체 성사는 신성한 참여인 반면, 기도는 신성한 교제이기 때문입니다. 성체를 모실 때 우리는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우리에게 신성한 은총이 임합니다. 반면 기도에서는 우리가 끊임없이 그리스도와 교제하며, 다른 방식으로 신성한 은총을 받아들입니다. 그리스도와 교제하고 신성한 은총을 받는 것이 어찌 작은 일일까요? 성체성사에서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영접하고, 기도에서는 하나님과 교제합니다. 성체를 영하기 전에 영성 지도사에게 고해성사를 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기도를 시작하기 전, 다시 말해 하나님과 교제하기 전에, 그리스도께 겸손하게 고백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기도를 시작하기 전에 사람은 겸손하게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 제 행실은 정말 나쁩니다… 저는 온통 죄와 정욕뿐입니다… 저는 주님께서 저를 한 번이라도 쳐다보시기에도 합당하지 않지만, 그래도 주님께 간청합니다: 저를 도와주소서.” 이러한 겸손한 고백을 그리스도께 드릴 때, 사람에게 신성한 은총이 임하며, 그는 하나님과 교제하기 시작합니다.

 만약 사람이 회개하지 않고 겸손하게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지 않는다면, 그는 그대로 불안정한 상태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불안정은 그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을 방해하는 벽이 될 것입니다. 문은 닫힌 채로 남을 것이며, 영혼은 평안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죄를 지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라고 말한다면, 그 벽은 무너질 것이며,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친히 문을 열어 주실 것이고, 사람은 그분과 교제하는 은혜를 받게 될 것입니다.

 — 게론다, 저는 『사다리』에서 기도를 드릴 때, 사람이 왕 앞에 나아가려 할 때 입는 옷을 입어야 한다고 읽었습니다.[16]

—    그 옷이란 무엇입니까?

 —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죄를 용서해 달라고 겸손히 간구하는 것, 바로 이것이 그 ‘옷’입니다. 이렇게 말하십시오. “나의 하나님, 저는 배은망덕한 자입니다. 주님 앞에서 큰 죄를 지었고, 주님을 슬프게 했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하지만 이 말을 형식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 깊은 회개와 함께 말하십시오. 이제 하나님과 대화할 때 어떤 옷을 입어야 하는지 이해했나요? 만약 이 옷, 즉 통회하는 마음이 없다면, 기도하러 일어설 때 마치 하나님께 “안녕, 잘 지내? 세상에서 새로운 소식은 뭐 있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우리가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조차 용서를 구해야 하잖아요! 하물며 우리의 매일매일의 죄에 대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것이 얼마나 더 중요하겠습니까!

 — 그렇다면, 게론다, 제가 매일 저지르는 그 죄들을 떠올려야 한다는 말씀이신가요?

 — 먼저 낮 동안 저지른 구체적인 죄들에 대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십시오. 그리고 나서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 깊이 성찰하십시오. 그렇게 함으로써 마음을 낮추고, 그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께 필요한 것을 구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기도를 시작할 때, 저는 복음서에 나오는 세리의 말로 기도를 시작합니다. “하나님, 죄인인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17] 저는 이 말을 몇 번 속삭이듯 되뇌고 나서, 예수님의 기도를 드립니다.

 어느 날 나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간구했다. 그러자 환상이 보였다. 기도하고 있는 열일곱 살 정도의 청년이었다. 오, 그는 나를 완전히 통회하게 만들었다!.. 그가 얼마나 울었는지,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는지!.. 저는 놀라움과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그는 고백으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내가 얼마나 배은망덕한지, 얼마나 고칠 수 없는지…” — 그리고는 이어서 말했습니다. “오, 나의 하나님! 저는 이런 죄인입니다!.. 주님께서 저를 도와주지 않으시면 제가 어떻게 고쳐질 수 있겠습니까?!” — 그리고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간구하기 시작했습니다.

 — 게론다, 기도 중에 종종 제 마음이 구체적인 죄악들에 쏠려서 집중할 수가 없습니다.

 — 우리 이미 약속했잖아요. 자기 성찰과 죄 고백은 기도 시작 전에 해야지, 기도 중에 하는 게 아니라고요. 기도 중에 네가 구체적으로 무엇 때문에, 어떻게 넘어졌는지 떠올리는 것은 더 이상 자기 성찰이 아니라 헛소리를 늘어놓는 것에 불과하다. 기도 전에 우리 안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곰곰이 생각하고, 목표를 정한 뒤, 마음의 무기를 그 목표에 겨누고 스스로에게 “발사!”라고 명령해야 한다.

 

“먼저 화해하라”

— 게론다, 만약 제가 고의가 아니라 부주의로 죄를 짓고, 스스로도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경우 저는 자매를 상심시켰다는 것을 짐작할 수 없고, 그녀에게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사실도 모를 텐데요. 이럴 때 저와 하느님 사이의 기도적 유대가 끊어지지 않을까요?

 — 하느님과의 유대를 잃지 않고 평안을 얻으려면, 스스로를 잘 살피라. 항상 경계 태세를 유지하라. 이는 자신의 실수를 파악하고, 회개하며, 용서를 구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래, 기도 중에 어떤 기쁨을 느낄 수는 있겠지만, 그 기쁨은 영적인 것이 아닐 것이다. 네 영혼은 영적인 날개를 펼치고 하늘로 날아오를 수 없을 것이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은 오직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자들뿐이다.

 — 가끔은, 게론다, 기도하기 전에 제 안에서 어떤 두근거림이나 불안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 내면의 불안이나 마음의 굳어짐을 느낀다면, 네가 자매 중 한 명을 상심시켰다는 것을 알아두렴. 그래서 네가 죄책감을 느끼는 거야. 그 자매에게 용서를 구하면, 그 불안은 사라질 거야.

 — 헤론다, 기도로 그 불안감을 떨쳐낼 수는 없나요? 꼭 용서를 구해야 하나요?

 — 글쎄, 네가 자매를 상심하게 했다면 기도만으로는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을 거야. 자매에게 가서 절을 하고 용서를 구해야 해. 자매에게 단 한 번의 절도 하지 않는다면, 독방에서 삼백 번을 절해도 소용없을 거야. 네가 상심하게 한 사람 앞에서 겸손함을 보이지 않고, 그 앞에서 네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거야.

 “먼저 네 형제와 화해하라[18] ”라고 복음서는 말합니다. 그 후에야

 네 예물을 드리라. 단, 자매에게 저지른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기로 결심했으나 그녀를 찾을 수 없는 경우는 예외다. 첫 번째 기회에 자매에게 용서를 구하겠다고 굳게 결심했다면, 네 기도는 하느님께 받아들여진다.

 — 헤론다, 가끔 어떤 자매와 다투고 나서, 내 방으로 돌아와 마음을 가라앉히고 심지어 기도할 수도 있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그 자매를 우연히 마주치면, 제 마음이 — 으악! — 그녀를 향해 그렇게도 격해져 버립니다!.. 심지어 일부러 그녀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쓰기도 합니다.

 — 저는 그런 마음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자매와 다투고 나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방으로 들어가서 “마음이 진정된다”고요? 먼저 그 자매 앞에 절을 하고 용서를 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마음을 진정시키고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가정해 봅시다. 독방 기도 후에 네가 정말로 하나님의 평화를 느꼈다고 치자. 그렇다면 네 마음은 누그러졌을 것이다. 만약 마음이 누그러졌다면, 넌 자매와의 만남을 피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네가 먼저 그녀에게 다가가, 하나님의 축복—자매에게 용서를 구할 기회—를 찾으려 했을 것이다.

 — 아니면, 게론다, 제가 단순히 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도할 수 있는 건 아닐까요?

 — 스스로 생각해 보라, 그것이 어떤 기도가 되겠는가? 오직 사람이 스스로를 책망하고 이웃에게 “용서해 주시고 축복해 주십시오”라고 말할 때만, 그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고, 그는 하나님과 교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기도는 “최후의 심판 전의 심판”이다

— 게론다, 성 요한 사다리꾼은 기도가 “심판 전의 심판”이라고 말합니다.[19]

 — 바로 그렇습니다. 사람이 올바르게 기도할 때, 그 기도는 ‘심판 전의 심판’이 됩니다.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기도를 시작하면서 마음속에 원한을 느낀다면, 그는 그 원인을 찾으려 할 것입니다. 그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질문할 것입니다. “왜 내가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혹시 내 행동으로 형제를 상처 입혔을까? 아니면 누군가를 정죄했거나, 부주의로 인해 정죄하는 생각을 떨쳐내지 못했을까? 어쩌면 교만의 생각에 휩싸여 있었을까? 아니면 내 안에 제멋대로인 마음이 살아 있어서, 그것이 내가 하나님과 교감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 것일까?”

 — 헤론다, 만약 그가 스스로에게 그렇게 묻고 또 묻지만, 여전히 자기 안에서 아무것도 찾지 못한다면요?..

 —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에게 분명 그런 일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내면의 기록들을 좀 더 꼼꼼히 뒤져보고, 스스로에 대한 조사 과정을 거친다면 증거가 드러날 것이며,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 헤론다, “수사 활동”이라고 말씀하실 때 무슨 뜻이신가요? 단순히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나요?

 — 자기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조차 모르는데, 도대체 무엇을 고백하겠습니까? 물론, 우선 자기 자신에 대한 “수사 활동”이 필요합니다: 심문, 범죄 현장 조사, 감정… 글쎄, 그래도 아무것도 찾지 못한다면, 두세 번 땅에 엎드려 절을 하고 무릎을 꿇은 뒤 이렇게 말하게 하라. “오, 나의 하나님, 제가 분명 어떤 죄를 지었을 것입니다. 제게 깨달음을 주십시오. 정확히 무엇입니까?” 그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그 겸손함이 즉시 유혹의 안개를 걷어내어, 그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의 원인을 보게 될 것이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사람의 겸손함을 보시는 하느님께서 그에게 당신의 은총을 내려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총으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자신이 무엇으로 죄를 지었는지 분명히 보게 되며, 바로잡을 기회를 얻게 됩니다.

 — 헤론다, 하나님과 끊임없는 교제를 유지하는 데 무엇이 도움이 됩니까?

 — 영혼의 평화가 큰 도움이 됩니다. 영혼이 평온할 때, 기도는 저절로 흘러나옵니다. 그러므로 누구에 대한 악의를 마음속에 품는 것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만약 그래도 누군가에 대해 악한 생각을 품었다면, 수녀원장님께 고백하십시오. 그 밖의 모든 악한 생각들도 선한 생각으로 몰아내며 떨쳐내십시오. 선한 생각은 기도의 길을 뚫어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기도는 저절로 순조롭게 흘러갑니다.

 

 

제2부.
기도를 위한 투쟁

“하나님의 위대한 축복을 체험한 사람의 마음은 더욱 강해지고 뜨거워지며, 심지어 끊임없는 기도에 이를 수도 있다.”

 

 

제1장.
기도의 어려움

 

낙담[20] 은 사람을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든다

헤론다, 낙담과 나태함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 낙담은 영적인 우울증인 반면, 나태함은 영혼과 육체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어느 것도 없도록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때로는 영적 삶을 위한 진지한 소양을 갖춘 사람들, 감수성이 예민하고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들에게 낙담과 나태함이라는 병이 닥치기도 합니다.

 마음이 두터운 사람에게는 악마가 그다지 큰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유혹이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을 심하게 흔들었다면, 그 사람은 나중에 낙담에 빠지게 됩니다. 다시 영적 동력을 되살릴 힘을 찾기 위해서는, 그 사람은 마음이 흔들린 원인을 찾아내어 영적으로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보라, 그런 상처는 치료하지 않은 채 방치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가는 길마다 걸려 넘어지고 말 것이다.

 영적 쇠약은 시간이 지나면 육체적 쇠약으로 이어져 사람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듭니다. 이때 의학은 병의 원인을 파악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어떻게 그 원인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이 원인은 현미경으로도 볼 수 없는데, 여기에는 영적 세균들이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정직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무용지물이 되었는지 아십니까!

 — 게론다, 저는 너무 지쳐서 제 수도원 규칙을 전혀 지킬 수가 없습니다.[21] 이건 피곤 때문인가요, 아니면 게으름 때문인가요?

 — 기억나십니까? “내 많은 죄로 인해 내 몸이 쇠약해지고, 내 영혼도 쇠약해진다.”[22] 당신은 육체적인 피로가 아니라 영혼의 쇠약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육체적인 피로보다 더 위험합니다. 영혼이 무너진 사람은 “나사 풀린 것처럼”, “헐거워진” 상태가 되어, 차체는 멀쩡하지만 엔진이 망가진 자동차와 비슷해집니다.

 — 게론다, 예전에는 기도하고, 절하고, 영적 책을 읽는 것을 정말 좋아했었는데!.. 그런데 지금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어요.

 — 왜 그런가요? 정말 힘이 없는 건가요? 제가 보기에 당신에게는 힘이 넘쳐 보이는데요. 몇 년 전, 수도원이 지어지던 때, 당신은 하루 종일 공사 현장에서 일했잖아요!.. 그때 얼마나 많이 기도했고, 얼마나 많이 절을 했는지 기억하시나요?

 — 어쩌면, 게론다, 제가 온전히 일에 몰두했기 때문일까요?

 — 차라리 네가 스스로 나태해지도록 내버려 둔 탓일 거야. 자, 이제 단련해 보자, 고행의 삶을 사랑해 봐! 나는 지금 폐의 절반만 가지고 살아가고 있어 — 나머지는 모두 절제했거든.[23] 그런데 내가 땅에 엎드려 절을 몇 번이나 하는지 알아? 에, 아니, 말 안 할게 — 군사 기밀이니까! 하지만 비밀로 이 말만 해줄게: 매일 나는 묵주를 짚으며 허리까지 굽혀 절을 하고, 오른손이 지치면 왼손으로 십자 성호를 긋는다. 자랑하는 게 아니라, 너를 향한 사랑으로 하는 말이다. 너보다 천 배는 더 연약한 사람들이 어떻게 수련하는지 알아? 그런데 넌?.. 너 같은 건강이라면 공수부대에 기꺼이 받아줄 텐데! 어떻게 이렇게 나태해져 버린 거야? 내가 너를 위해 기도하겠지만, 너도 스스로 노력해야 해! 알겠니? 온전히 영적 수행에 몰두하면, 그 대가로 순종하는 일에도 결실이 있을 거야.

 — 게론다, 가끔은 내 방에서 낙담감이 밀려오곤 해요.

 — 그럼 방에서는 뭘 하고 있니? 기도하고, 성부들의 글을 읽고 있니? 아니면 빈둥거리고 있니? 네 시간이 헛되이 지나가지 않도록 온 힘을 다해 노력해라. 기도할 수 없다면 성부들의 저서를 읽어라. 바로 그 상태에서 네게 유익한 글들이다. 만약 포기해 버리면, 마귀가 네가 처한 좋지 않은 상태를 이용해 “너를 파멸로 이끌” 수도 있다.

 

줄을 끊지 맙시다

— 게론다, 정말 많은 분들을 접견하시네요!.. 저녁에는 피로로 인해 얼굴이 핼쑥해지시지만, 아침에는 도저히 얼마나 지치셨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정말 빛나시네요!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 있나요?

 — 뭐, 어떻게요?.. 그냥 “줄을 끊지 않을 뿐”이에요, 그게 다예요.[24]

 — 가끔은, 게론다, 순종 때문에 성당에서 저녁 기도를 놓치곤 해요. 방에 도착하면 온몸이 녹초가 되어서 이렇게 말하죠. “아, 좀 누워야겠다… ‘괜찮아, 누워서 묵주기도라도 하겠어.’ 하지만 제 ‘누워서 하는 묵주기도’는 결국 잠들어 버려서 기도를 하지 못한 채 끝나곤 해요.

 — 아니요, 축복받은 영혼이여, 아무리 피곤하더라도 기도 없이 잠자리에 들면 안 됩니다. 적어도 삼위일체 기도와 시편 50편을 읽고, 그리스도와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 마리아의 성화에 경배하고, 베개에 십자가를 긋고 나서야 잠자리에 드세요. 그리고 자정 기도 시작 한 시간 전에 일어나 개인 기도를 드릴 수 있도록 알람을 설정하는 것도 잊지 마세요! 기도에는 스스로를 다그쳐야 합니다. 하지만 그 다그침은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합니다. 마음속으로 ‘다그치지 않으면 도저히 안 되겠다’고 느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한 뜻을 가진 자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25]

 — 그런데, 헤론다, 힘도 의지도 전혀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 그래도 스스로를 다그치십시오. 비록 조금씩이라도, 어떤 영적 수행이라도 하십시오. 매일 적어도 조금이라도 영적 활동에 시간을 할애하도록 노력하십시오: 영적 서적을 조금 읽고, 기도를 조금 드리는 식으로요. 성부들의 저서를 읽는 것, 기도, 교회 성가는 매일 영혼에 꼭 필요한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하루가 기도 없이 완전히 지나가게 해서는 안 됩니다. 전쟁에서는 이런 식이었습니다. 아무런 공격도 없이 참호에 며칠씩 앉아 있을 때, 우리는 때때로 적을 향해 총을 쏘곤 했습니다. 적이 우리가 자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게 하고, 우리를 기습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죠. 영적 전투에서도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때때로 힘이 다해 우리만의 기도 규칙을 완전히 지키지 못할지라도, 완전히 “연결을 끊어버리지는” 말고, 하나님과 소통을 유지하도록 노력합시다. 약간의 절, 묵주 기도를 조금이라도… 우리의 영적 적, 즉 ‘탕갈라쉬’를 향해 자동소총으로 두세 발 정도라도 쏘아 봅시다. 아예 쏘지 않으면, 그가 우리를 포로로 잡아가 버릴 테니까요. 그리고 잠시 숨을 고른 것 같다고 느껴지면, 다시 전력을 다해 싸우기 시작합시다.

 자신의 수도 규칙을 소홀히 하고, 최소한의 절조차 하지 않으며, 염주를 짚으며 기도조차 전혀 하지 않는 수도사는 점점 더 거칠어지고 야만적으로 변해간다. 그는 영적이지 않은 일, 예를 들어 돌을 나르거나 심지어 책을 쓰는 일은 할 수 있다. 하지만 기도하는 것은 할 수 없다. 나는 어떤 수도사들이 끊임없이 일하면서도 영혼에 유익한 독서와 기도를 완전히 소홀히 하는 모습을 본다. “이것도 하고, — 그들이 말한다, — 그다음에 저것도 하고.” 그들은 멈출 줄 모르고, 기도를 아예 그만두며, 결국은 마음이 굳어지고 야만스러워져 세속 사람들과 다를 바 없게 된다. 세속에서 일만 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는가? 그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뜨거운 햇볕 아래서 돌을 깎기도 하고, 며칠 내내 나무를 베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을 교회로 끌고 가 보십시오! 그곳에서 30분도 버티지 못합니다. 설령 세 배의 월급을 약속한다 해도 말이죠. 성당에서 나와서 서서 담배를 피웁니다. 저도 그런 광경을 한두 번 본 게 아닙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소와 같이 된다: 일하고, 먹고, 자고, 또 먹고, 다시 일하고…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수록 돌아오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마음이 차가워지고, 결국은 전혀 기도할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런 사람이 제 정신을 차리려면, 그의 마음이 부드러워져야 하고, 회개로 돌아서며, 통회하는 마음에 이르러야 합니다.

 

마음을 다잡고 시작하라

— 게론다, 제 안에 이 게으름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 게으름이라니? 아마도 그것은 네가 단순히 영적 삶을 기뻐하지 않기 때문일 거야! 네가 영적인 것을 기뻐하지 않는 건, 영적 삶이 얼마나 달콤한지 아직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이야.

 — 게론다, 가정해 봅시다. 게으름의 시기가 끝난다고 치죠. 정상적인 영적 삶으로 돌아가는 올바른 방법은 무엇입니까? 한 번에 돌아가는 것이 좋을까요, 아니면 서서히 돌아가는 것이 좋을까요? 자신의 규칙을 조금씩 회복해도 될까요? 첫날은 아주 조금만 예수 기도를 하고, 둘째 날은 조금 더 하고, 그 다음에는 또 조금씩 늘려가는 식으로요?..

 — 우선 시작하고 싶다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스스로를 조금 다그쳐 그 의지를 실천으로 옮겨야 합니다. 비록 사람이 지쳐 있다 해도, 자신을 조금만 다그치면 힘이 솟아나는 것을 느끼게 되고, 그 후에도 영적으로 계속 일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작은 자기 다그침은 하느님의 눈에는 엄청난 무게를 지닙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선한 의지를 보시면, 그분께서 직접 개입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개입하실 때, 바로 그 신성한 개입이 우리를 구원해 줍니다.

 — 헤론다, 저에게는 가끔 여유 시간이 생기는데, 영적인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 그런 일도 있죠. 이를 ‘식욕이 떨어졌다’고 합니다. 바로 이때 조금이라도 스스로를 영적인 일로 이끌어야 합니다. 사람이 병에 걸리면 보통 식욕이 떨어지기 마련이니까요. 하지만 환자는 억지로라도 스스로를 먹게 만듭니다. 식욕이 있든 없든, 어쨌든 억지로라도 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위장이 무거운 음식을 소화하기 힘들기 때문에 가벼운 것부터 시작하고, 그다음에는 칼로리가 조금 더 높은 음식을… 그렇게 하면 식욕이 서서히 돌아옵니다. 아무것도 먹지 않으면 결코 다시 일어설 수 없으니까요.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 자신을 방치하지 마십시오! 자신을 내버려 두고 아예 양육하지 않으면, 스스로를 파멸시킬 것입니다. 서서히 정신을 차릴 때까지 숟가락으로 가볍고 영적인 양식을 조금씩 먹이십시오. 시작하려면 노력해야 합니다 — 아주 조금만이라도요.

 — 정말 그렇습니다, 게론다. 바로 그게 제 어려움입니다. 시작을 도저히 못 하겠어요! 규칙을 지키도록 스스로를 다잡을 수가 없어요.

 — 그래… 네 엔진에 기름이 굳어버렸구나. 하지만 작은 것부터 시작해 봐: 절을 조금, 성부들의 말씀을 조금, 묵주 기도를 조금. 그러면 네 마음이 서서히 따뜻해질 거야.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해 보세요. “자, 오늘은 적어도 다섯 번만 땅에 엎드려 절을 하겠어.” 직접 보게 될 거예요. 일단 엔진이 시동 걸리고 회전수가 올라가기 시작하면, 그땐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을 테니까요.

 

우리 영혼이 좋아하는 영적 양식을 먹여 주자

— 헤론다, 만약 제게 영적 양식에 대한 ‘식욕’이 없다면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 당신에게 더 맛있게 느껴지는 영적 양식부터 시작하세요. 그러면 나머지 것들에 대한 식욕도 자연스럽게 깨어날 것입니다. 영적인 식탁을 차리고, 다양한 영적 요리를 늘어놓은 다음, 앉아서 그것들을 살펴보세요. 무엇이 당신의 영적 식욕을 일깨워 줄까요? 성부들의 글을 몇 페이지 읽어볼까? 묵주를 쥔 채 잠시 기도할까? 기도 캐논을 부를까? 시편을 읽거나 땅에 엎드려 절을 몇 번 할까? 뭐,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가? 이마를 숟가락으로 톡톡 두드려보는 건 어때?

 — 헤론다, 바느질부터 시작해도 될까요?

 — 괜찮습니다. 하지만 수공예를 할 때 예수 기도를 잊지 마십시오.

 — 헤론다, 여기 또 다른 위험이 있지 않을까요?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제 뜻을 따르게 되는 건 아닐까요?

 — 지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영적 수행에서는 영혼이 맛있게 여기고 갈망하는 것으로 영혼을 양육해야 합니다. 그래야 영혼이 기쁨을 얻고, 양분을 얻으며, 더 큰 영적 수행으로 이끌립니다. 우리가 아플 때 우리 몸이 무언가를 요구하면, 우리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잖아요. 어릴 적, 제가 빈혈이 있었을 때, 저는 부모님께 끊임없이 레몬을 달라고 조르곤 했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은 제가 그렇게 많이 먹어도 되는지 몰라, 의사의 조언을 기다리며 주지 않으셨어요. 그런데 어떻게 되었을까요? 의사가 와서 저를 진찰하고는 갑자기 이렇게 말하더군요. “아이에게 레몬을 더 많이 주세요!” 보시다시피, 제 몸에는 레몬에 들어 있는 비타민이 부족했고, 몸이 스스로 그것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 게론다, 제가 게으름에 시달릴 때,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 영적 생활 일정을 세우고 그 일정을 따르려고 노력했습니다.

 — 일정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먼저 마음을 다잡아야 합니다. 그 후에야 일정을 세울 수 있죠.

 — 그럼, 게론다, 선생님께서 직접 제게 영적 생활 일과표를 써 주실 수는 없나요?

 — 왜 안 써주겠나? 자, 받아라. “네가 스스로 좋아하는 영적 수행을 하라.” 불안과 죄책감으로 자신을 좁은 틀에 가둘 필요는 없다. 네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아라. 네 영혼에 구체적으로 어떤 양식이 필요한가? 바로 그것으로 영혼을 채워라. 노래하고 싶다면—노래해라. 읽고 싶은 마음이 들면 — 앉아서 읽어라.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갈망을 느낀다면 — 기도하라. 다른 어떤 영혼에 유익한 일이라도 해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를 구석으로 몰아넣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무슨 뜻인지 이해하셨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는 모든 것은, 무엇보다도 당신의 영혼이 영적 삶의 달콤함을 아직 느끼지 못한 영적 여정의 시작 단계에 해당합니다. 그 후에는 영적인 궤도에 오르게 될 것이고, 그 궤도가 스스로 너를 목적지 역으로 인도해 줄 것이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 하나님의 은혜로 네 내면의 엔진이 시동 걸리고 영적인 기관차가 앞으로 질주할 것이다.

 

기도는 사랑에서 우러나와야 합니다

— 헤론다, 스승님께서는 너무 지치셨는데… 도대체 어디서 기도할 힘까지 나오시는 건가요?

 — 저는 기도할 때 힘을 소모하지 않고, 오히려 기도를 통해 힘을 얻습니다. 심지어 저는 이런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사람은 오직 기도할 때만 진정으로 힘을 얻습니다. 기도가 마음에서 우러나올 때, 그것은 피로와 잠, 그리고 배고픔까지 몰아냅니다. 영혼이 뜨거워지면, 더 이상 자고 싶지도, 먹고 싶지도 않습니다. 당신은 초자연적인 상태에서 살며 다른 방식으로 영양을 얻습니다. 영적인 것이 당신을 먹여 살리는 것입니다.

 — 게론다, 저에게는 기도에 대한 사랑이 없어요.

 — 네 마음은 아직 따뜻해지지 않았구나. 네가 기도하는 건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해야 하니까’라는 이유 때문이야. 네 행동의 출발점은 규율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메마르게 느껴지는 거야. 자, 말해 봐, 넌 보통 기도를 무엇부터 시작하니?

 — 뭐, 뭘로 시작하냐고요, 게론다님?.. 제 자신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생각,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생각부터 시작하죠…

 — 너는 역시 놀라운 사람이구나!.. 모든 것을 “그렇게 해야 하니까” 하고 한다. 기도하는 것도 “해야 하고”, 절을 하는 것도 “해야 하고”, 성경을 읽는 것도 역시 “해야 하고”… 이 모든 “해야 한다”는 생각들로 네가 스스로를 궁지에 몰아넣고 있는 거야. 물론, 네가 절제력 있는 사람이라는 건 나쁘지 않아. 하지만 시작은 거기서부터가 아니라, 단순하고 겸손한 마음가짐과 고통에서 시작해야 해. 마음이 움직여야 하고, 그 고통을 느껴야 해. 그러면 스스로에게 부담을 줄 필요도 없을 거야. 기쁨과 경외심, 그리고 황홀함을 느끼게 될 거야.

 — 게론다, 저는 기도할 때 마치 무언가가 짓누르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영혼이 하늘로 날아가지 않아요.

 — 기도할 때 기쁨을 느끼기도 하나요? 제가 이렇게 묻는 건, 당신이 스스로를 궁지에 몰아넣고 있는 것 같아서입니다. 당신은 열의로 영적 수련을 시작하지만, 점차 이기심이 섞여 들어가는데 — 당신은 그걸 눈치채지 못하고 있군요! 너는 계산을 하기 시작해: “오늘은 이만큼 절을 하고, 이만큼 묵주를 돌리고, 내일은 이미 이만큼, 모레는 더 많이…” 그리고 무엇보다도 너를 움직이는 것은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이나, 네 기도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 아니야. 아니요, 넌 자신이 많은 일을 했다는 것을 깨닫고 싶어 하고, 성인 명단에 오르기 위해 서두르고 있습니다. 넌 겸손하게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자, 주님께서 말씀하셨으니:

 ‘거룩하라,[26] ’ 하셨으니 나도 힘닿는 대로 노력하리라.”라고 겸손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당신을 움직이는 것은 “나는 반드시 성인이 되어야 한다”는 냉정한 계산일 뿐입니다.

 — 게론다, 더 잘 기도하기 위해 어떻게 하면 나 자신을 더 단단히 다잡을 수 있을까요?

 — 기도가 ‘자제력을 강화하는 것’과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나요?.. 당신의 기도가 단순히 신에 대한 사랑에서 우러나오면 안 될 이유가 있나요?

 —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게론다?

 — 하느님의 은총을 깊이 묵상하고, 우리 은인인 그분 자신에 대해서도 묵상해야 합니다. 자신의 배은망덕함과 죄성을 깊이 깨닫고, 그분의 자비를 간구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위대한 축복을 체험한 사람의 마음은 더욱 강해지고 따뜻해지며, 심지어 끊임없는 기도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기도 중에 다른 사람도, 자신도 산만해져서는 안 됩니다

— 게론다, 가끔은 내 방에서 기도하고 있는데, 마음속으로 “혹시 지금 어떤 자매가 쓱- 하고 들어올까…”라고 생각하곤 해요. 그런 생각들이 저를 기도에서 딴생각으로 이끌어요.

 — 차라리 제 머리를 도끼로 한 대 맞을지언정, 갑자기 제 방에 쳐들어와 제가 기도하는 모습을 목격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기도 중에 갑자기 누군가 당신을 발견하는 것은 마치 당신이 날아가고 있는데, 누군가 당신의 날개를 잡아 뜯어내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여러분은 기도 중에 사람을 방해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스스로 아직 영적인 기도 상태를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경험으로 하나님과 교감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릅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사람이 땅에서 뜬 듯한 그런 상태를 말합니다. 알았다면 타인의 기도를 존중했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그런 영적인 감수성이 있었다면, “기도하는 사람을 어떻게 방해할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기도를 방해함으로써 그 사람에게 얼마나 큰 해를 끼치는지 이해했다면, 더 조심스러웠을 것입니다. 조심스러움에 대해 말할 때, 제가 의미하는 것은 불안이나 위축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하나님과 교감하고 있는 자매에 대한 존중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에게는 영적인 세심함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예의는 지키십시오. 남의 문을 두드리고 큰 소리로 “우리 성부들의 기도로…”라고 말하는 것을 습관으로 삼으십시오.[27] — 그래야 그 사람이 여러분이 갑자기 들이닥칠까 봐 걱정하지 않고, 끊임없이 긴장한 상태에 있지 않을 테니까요. 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과, 항상 신경이 곤두서서 ‘누가 내 방에 들이닥치지는 않을까?’ 하고 조마조마해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후자는 매우 지치고, 정신을 꺾어버립니다.

 — 어쩌면, 게론다, 그 자매가 악의 없이, 단지 순진해서 문을 두드리지 않는 건 아닐까요?

 — 순진함이라니!.. 문을 한 번 두드리고, 대답으로 “아멘”이라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해서 남의 방에 쳐들어오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소. 도대체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어쩌면 바로 지금 이 문 뒤에서 한 수녀가 울고 있거나, 하느님께 기도하고 있어서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건 아닐까요? 제가 아토스 산의 이웃 방에 갔을 때 형제들이 저녁 기도를 드리는 소리가 들리면, 한 시간 내내 추위 속에서 서서 묵주를 짚으며 그들이 끝낼 때까지 기다리곤 합니다. 내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그들을 방해하거나 당황하게 만들고 싶지 않기 때문이며, 나를 위해 그들이 예배를 서둘러 끝내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찬송 소리가 들려온다고 해서, 마치 나에게 그럴 권리가 있는 것처럼 아무 일도 없는 듯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겠는가? 도대체 누가 나에게 그 권리를 주었단 말인가? 아니, 형제들은 어쩌면 기꺼이 나에게 그런 권리를 주려 할지 모르겠지만, 나 자신은 그런 이기적인 권리를 인정하고 싶지 않다. 마치 내가 뭔가 중요한 존재인 양 여기고 이웃을 존중하지 않는 것은 바로 이기심이다.

 우리는 영적으로 세심해야 한다. 어느 날 시나이 산에서 나는 성 갈락티온과 에피스티미아의 수도실에서 수도원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갑자기 앞쪽에 두 명의 베두인 아이들, 소년과 소녀가 보였다. 아이들은 오솔길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들은 손에 묵주[28] 를 들고 기도하고 있었다. 다른 길은 없었기에, 아이들을 방해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몸을 돌려 조금 뒤로 물러났습니다. 아이들이 기도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제야 다시 길을 이어갔습니다.

 — 게론다, 제가 기도를 시작하자마자, 순종 생활에서 끝내지 못한 여러 가지 일들이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 저도 뭔가 끝내지 못하면 마음 편히 기도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 기도 중에 산만해지지 않으려면, 먼저 빨리 처리할 수 있는 일부터 끝내세요. 그리고 나서 기도를 시작하며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하세요. “자, 이제 모든 일을 다 끝냈어. 이제 미완성인 건 내 영혼뿐이야. 이제 그 영혼을 돌볼 시간이 왔어.”

 — 게론다, 저는 제 삶에 힘든 일이 생기면 기도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전쟁이라도 일어나야 네가 그리스도를 찾게 되는 건가? 주위가 조용하고 평화로울 때야말로 내면도 조용하고 고요해질 수 있는 가장 좋은 조건이다. 기도는 외부에 정신이 산만해지지 않는 것과 올바른 내적 태도를 요구한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영적 삶에서는 정신이 산만해지지 않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

 

잠들지 못하는 분들에게 이 꿈을 전해 주세요

— 게론다, 왜 기도할 때면 졸음이 오는 건가요?

 — 그건 네가 늘 졸고 다니기 때문이야! 스스로를 나태하게 내버려 두었으니, 이제 끊임없이 스스로를 다잡아야 해. 하지만 생각해 봐: 정말로 무언가가 마음을 괴롭힐 때, 네가 평온하게 잠들 수 있겠니? 아니면, 예를 들어 누군가가 우리에게 큰 은혜를 베풀었을 때 — 그럴 때는 게으름 피우지 않고 그 사람을 위해 밤새도록 기도할 수 있잖아. 그 일에 힘을 쏟을 수 있다면, 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보지 않겠습니까? “은인을 위해 잠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는데, 나를 위해 십자가에 오르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기 위해 내 잠을 바치는 것을 무엇이 막고 있는 것일까?”

 — 게론다, 혹시 졸음은 육체의 쇠약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요?

 — 그럴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졸음의 원인이 과로, 혈압 저하, 혹은 그와 비슷한 데에 있을 수 있습니다. 원인을 찾아내어 가능하면 제거해야 합니다.

 — 헤론다, 때로는 어떤 사람이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무언가를 기도하고 있는데도 여전히 잠이 몰려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 마음이 진정으로 아파한다면 잠이 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본인도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예를 들어, 독방 기도 중에 졸음이 온다면 나가서 찬물로 세수를 하고 기운을 차리십시오.

 — 저는 밤샘 기도 중에 잠이 자꾸 몰려와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 그 잠도 이겨내세요. 성당에서 예배를 드리는 동안 사람은 마음은 평온해지지만, 몸은 지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잠이 몰려오기 시작하는 것이죠. 하지만 잠에 굴복하지 않으면, 그 잠을 이겨낼 수 있고, 잠은 물러납니다. 한두 시간 뒤면 다시 졸음이 너를 덮치기 시작할 거야. 이 졸음은 더 집요해서 떨쳐내기 더 힘들지만, 힘을 내면 그것도 이겨낼 수 있어. 너는 ‘졸음 열차 1호’에 휩쓸리지 않았고, ‘졸음 열차 2호’도 너 없이 떠나버렸으니, 그게 다야: 졸음의 유혹이 너에게서 물러난 거야.

 — 게론다, 밤샘 기도 중에 저를 두 시간이나 연속으로 졸음이 덮칠 때가 있습니다…

 —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잠을 더 필요한 곳, 즉 병원이나 정신과 병원으로 보내세요. 이렇게 기도하세요. “주님, 잠들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잠을 내려주소서!.. 아픈 이들, 신경이 줄처럼 팽팽하게 당겨진 이들이 평안히 잠들게 하소서.” 당신을 괴롭히는 졸음을 잡아내어 알약으로 빚은 다음, 기도라는 우편을 통해 고통받으며 잠들지 못하는 불쌍한 이들에게 보내세요. 그리고 당신은 밤낮으로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제2장.
마귀가 기도하는 사람을
기도하는 사람을 상대로

 

악마와 대화를 나누지 마라

헤론다, 저는 하나님과 “소통”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만, 여전히 기도할 수가 없습니다.

 — 정말로 하느님과 소통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면, 왜 기도할 수 없는지 이해가 안 가네요. 어쩌면 그것은 악마의 유혹일지도 모릅니다. 악마는 끊임없이 사람의 발목을 잡아서 기도하지 못하게 합니다.

 — 헤론다, 기도 중에 여러 수도원 일들이 떠오릅니다.

 — 그럴 땐 스스로에게 “이건 나중에 생각해야지…”라고 말하고, 기도를 계속하세요.

 — 게론다, 가장 속상한 건 보통 그런 하찮은 일들에 대한 생각들이 떠오른다는 거예요!..

 — 바로 그 때문에 그런 생각들은 나중에 미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정신이 산만해져서 기도를 중단하고 이런 하찮은 일들에 대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맴돌리기 시작하면, 원수는 더 이상 하찮은 것이 아니라 훨씬 더 심각한 것들을 당신에게 던져줄 것입니다. 당신의 기도를 완전히 멈추게 하려는 것이죠. 자신의 처지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알고 있니, 탕갈라슈카가 얼마나 교묘한지? 세속적인 사람들에게는 온갖 더러운 생각을 떠올리게 하지만, 그 더러움은 한눈에 티가 나. 그래서 영적인 사람들에게는 더러운 생각이 아니라 겉껍질 같은 것을 떠올리게 하고, 그들은 순진하게도 그것을 마음속으로 받아들여. 하지만 이것은 더러운 생각보다 더 위험합니다! 사람들은 마치 자신이 잘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자신 안에 더러운 생각을 보지 못하며, 겸손해질 이유도 찾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마음은 기도에 머물지 않고 여기저기 맴돌며, 마음은 돌처럼 굳어집니다.

 — 아시다시피, 게론다, 가끔 기도 중에 저에게 그런 ‘밝은 생각’들이 떠오르곤 합니다!… 어떤 복잡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아주 선명하게 보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해결책이 잘못된 것이었죠…

 — 마귀가 얼마나 교활한지 아십니까?.. 마귀는 기도 중에 당신에게 더러운 생각을 떠올리게 하면, 당신이 그것을 옆으로 내팽개칠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러운 생각 대신에 마귀는 당신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와줍니다.” 당신은 기뻐서 어쩔 줄 모릅니다. “오, 정말 훌륭한 생각이야!” 게다가 그 생각이 아무 때나 온 게 아니라 기도 중에 왔으니!.. 진정한 신성한 계시야!” 하지만 만약 악마가 정말로 네게 선을 원했다면, 다른 어떤 때라도 이런 생각들을 네 마음에 떠올리게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는 바로 기도 중에 나타나서, 헛소리로 네 주의를 흐트러뜨리며 자신의 중재자 역할을 자처하는 “서비스”를 강요한다. 그러니 그의 성가신 행동에는 전혀 신경 쓰지 마라. 이렇게 말하라. “제안해 주신 종합 서비스에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선생님. 하지만 당신 없이도 잘 해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사라지시오!” 보라, 얼마나 교활한지: 영적인 사람을 속여, 마치 영적인 생각인 양 주입함으로써, 선지자 다윗의 말씀대로 그의 기도가 죄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29]

 — 게론다, 기도 중에 제 머릿속에 불순한 생각이나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 그건 악마의 짓입니다. 악마가 당신을 당황하게 하고 혼란스럽게 하려는 것입니다. 악마는 당신이 육체적으로 지쳐 있을 때, 특히 수면 부족으로 고생할 때 이를 틈타 당신을 함정에 빠뜨리기 쉽습니다. 탕갈라슈카는 적절한 순간을 기다리다가, 네가 잠과 깨어남의 경계에 있을 때 온갖 더러운 장면들을 보여주고는, 곧바로 이렇게 외친다. “자, 이 뻔뻔한 여자의 마음속에 어떤 더러움이 있는지 보라!” 너를 절망에 빠뜨리려는 그는 자신의 더러움을 네 것인 양 속여 넘긴다. 그러니 그냥 그를 무시해라.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기도하고, 기도에 집중하기 위해 그리스도,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 마리아, 성스러운 천사들을 생각하라. 이것이 바로 악마의 계략에 대한 네 대응책이 될 것이다.

 

마귀는 사람이 기도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 게론다, 가끔은 셀에서 밤샘 기도를 하려고 계획하지만, 사정이 그렇게 되어서 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 글쎄, 그 장애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면, 그것은 당신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 그런데 장애물이 연이어 닥친다면요?

 — 그렇다면 자만심이 조금은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 잘 이해가 안 됩니다, 게론다. “자만심이 조금은 섞여 있었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 잘 들어보게. 중요한 건 우선순위를 올바르게 정하는 것이다. 일을 첫 번째로 두고 기도를 두 번째로 둔다면, 네가 스스로 원수에게 너에게 방해를 가할 권리를 주는 셈이다. 게다가 일을 기도보다 더 높이 평가하는 것 자체에, 오만이 없겠느냐? 오만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그 특징 중 하나가 경외심의 결여다.

 — 게론다, 악한 자가 기도에 어떤 구체적인 방해를 가하나요?

 — 오, 그가 안 하는 게 뭐가 있겠어요!.. 그에게는 천과 한 가지나 되는 수단이 있으니까요! 사람이 기도하기 시작하면 — 그는 금세 나타납니다. 때로는 마음이 딴 데로 쏠리게 하고 공상에 빠지게 하고, 때로는 어떤 소음으로, 또 는 또 다른 방법을 생각해 냅니다… 제가 스토미온 수도원에 살 때 그에게서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 당신이 알기라도 한다면![30]   어느 날 늦은 밤, 나는 기도하러 성당에 들어갔다. 수도원 문은 닫혀 있었고, 나는 성당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자정 무렵, 탕갈라슈카가 자물쇠를 삐걱거리며 “딩딩”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쉴 새 없이 딩딩거렸습니다. 제가 기도를 중단하고 무슨 일인지 확인하러 나가게 만들려는 것이었죠. 저는 그 소음에 정신이 산만해지는 것을 원치 않아 제단으로 들어갔습니다. 결국 아침이 될 때까지 제단 뒤의 십자가상 곁에 서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위대한 힘을 지니고 있다. 내가 수련자가 되었을 때, 탕갈라슈카들은 나를 향해 맹렬히 덤벼들었다. 밤마다 그들은 수시로 내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기도로! 성인들의 기도로! 신부님!” 나는 문을 열었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음에도 강한 공포가 나를 사로잡았고, 마치 그 공포가 나를 방 밖으로 밀어내는 듯하여 방 안에 머물 수 없었다. 나는 매우 괴로웠다. 울기도 하고 기도도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어, 결국 방을 나와 수도원 마당으로 내려가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기도 후 뜰에서 영적 평의회 위원인 한 노승이 나를 보았다. 그는 물었다. “아들아, 왜 네 방으로 돌아가지 않는 거니? 뜰에 너 말고는 수도 형제들이 아무도 없다는 걸 모르니? 모든 신부님들은 지금 각자의 방에서 기도하고 계신다.” 나는 울음을 터뜨리며 그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그분은 주의 깊게 들어주신 뒤,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 주님의 거룩한 십자가 조각이 담긴 작은 밀랍 조각을 가져오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걸 가져가거라, 아들아. 네 방으로 가서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마라.” 저는 방으로 올라가 문을 닫자마자, 큰 노크 소리와 익숙한 외침이 들려왔습니다. “성인들의 기도로! 신부님!” 나는 “아멘”이라고 대답했다. 문이 열리고, 방으로 들어온 것은… 경찰관이었다. 정복을 차려입고 있었는데, 계급장 대신 소매에는 옛 경찰 제복처럼 비스듬한 띠가 달려 있었다. 들어오자마자 고함을 질렀다. “이 더럽고 추잡한 수련생 놈아, 아직 사제 수련생으로 서원도 안 했는데 벌써 온갖 나무 조각을 주워 모으기 시작했냐?!” 계속 소리치다가 갑자기 폭소를 터뜨렸다. 기억하기로는 그의 웃음소리가 정말 소름 끼쳤던 것 같다… 하지만 그는 소리만 지를 뿐, 내게 다가올 수는 없었다. 내 손에는 ‘정직하고 생명을 주는 나무’의 조각이 들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주 예수 그리스도여!”라고 외치자마자, 그 악마 ‘경찰관’은 사라져 버렸다.

 

 

제3장.
기도 속에서 마음이 따뜻해지는 법

 

성스러운 성화는 기도하는 데 도움을 준다

헤론다, 제가 속상할 때 어디서 위로를 찾을 수 있을까요?

 — 기도에 의지하십시오. 비록 경건한 마음으로 이마를 성상에 살짝 대는 것만으로도 위로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의 방을 작은 성당처럼 꾸미고, 당신이 특히 공경하는 성상들을 벽에 걸어두면, 그 속에서 얼마나 큰 위로를 얻게 될지 직접 보게 될 것입니다.

 — 게론다, 가끔 기도 중에 성상에 입을 맞추고 싶은 마음이 들어 키스를 하곤 합니다. 그렇게 해도 될까요?

 —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합니다! 바로 그렇게 성화를 숭배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서 그리스도,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 마리아, 성도들에 대한 사랑이 넘쳐흐르기 때문에 우리는 성화를 입맞춰야 합니다. 이 사랑이 우리를 성화 앞에서 무릎을 꿇고 경건하게 입맞추게 합니다.

 어느 날, 나는 그리스도와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 마리아의 성화 앞에서 서서 기도하고 있었다. 그날은 3월 26일,[31] , 교회에서 대천사 가브리엘의 축일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갑자기 나는 주님과 성모님께서 마치 살아 계신 것처럼 움직이시는 것을 보았다! “나의 그리스도여,” 나는 간청하기 시작했다. “저를 축복해 주십시오!.. 나의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님, 저를 축복해 주십시오!..” 나는 무릎을 꿇기 시작했고, 그 순간 방 안이 비범한 향기로 가득 찼다. 마치 미쳐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제가 절을 올리는 먼지 쌓인 작은 양탄자마저 향기를 풍기기 시작했고, 저는 무릎을 꿇은 채 그 양탄자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 것이 아닌 향기였습니다!

 — 게론다, 기도할 때 마음속으로 그리스도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이 유익한가요?

 — 이렇다. 네가 성화상 앞에서 기도한다면, 그것은 도움이 된다. 성화상을 통해 네 마음은 그 위에 그려진 거룩한 분께로 향하게 된다.[32] 하지만 때로는 성화상 앞에서 기도하지 않을 때도 있다. 의자에 몸을 구부리고 앉아 있거나, 무릎을 꿇고 서 있으면서 눈을 감고 기도할 때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아무리 신성한 이미지라 할지라도 머릿속에 그려서는 안 됩니다. 이는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상상력을 탄갈라슈카가 이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당신의 환상을 신성한 환시인 양 속여, 당신을 미혹에 빠뜨리고 큰 해를 입힐 것입니다.

 특히 이것은 예수 기도에 해당한다. 비록 그것이 그리스도의 형상이나 성경의 장면이라 할지라도, 잡생각이나 형상 없이 맑은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 더 낫다. 이는 상상력이 풍부하고 교만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 특히 위험하다. 마음속으로 성경의 사건들을 떠올리는 것은 오직 예외적인 경우에만 허용됩니다. 바로 우리에게 더러운 생각이나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이 떠오를 때입니다. 하지만 어쨌든 우리에게 가장 유익한 그림은 바로 자신의 죄성과 배은망덕함을 깨닫는 것입니다.

 

묵주는 악마를 상대로 한 기관총과 같다

— 게론다, 왜 우리에게 묵주가 그렇게 중요한가요?

 — 묵주는 우리가 유산으로 물려받은 것입니다. 이는 우리 선조들, 즉 성부들로부터 받은 축복입니다. 이 이유만으로도 그 가치는 엄청납니다. 세상에서도 그렇듯이,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어떤 물건을 유산으로 남기면, 남에게는 그저 하찮은 물건에 불과하지만, 상속자에게는 보물이자 축복이 됩니다. 성부들이 수도자들에게 유산으로 남긴 묵주가 그들에게 얼마나 더 큰 의미를 지닐지 상상해 보십시오!

 예전에는 시계가 없었을 때, 수도사들은 묵주를 통해 기도 시간을 재곤 했습니다. 그 당시 묵주의 매듭은 아주 단순했습니다. 한 수행자가 매우 엄격하게 금식하고 기도하며 많은 절을 올리고 있었는데, 악마가 그를 방해하여 자꾸만 그의 묵주 매듭을 풀어버리곤 했습니다. 불쌍한 수도사는 기진맥진해 쓰러질 때까지 계속 절을 올렸습니다. 절과 기도의 횟수를 셀 수 없었기 때문이죠. 그러던 중 주님의 천사가 그 수도사 앞에 나타나, 매 매듭이 아홉 개의 십자가로 이루어지도록 묵주를 엮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 후로 십자가 앞에서 떨고 있는 악마는 더 이상 매듭을 풀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묵주의 매 매듭은 아홉 개의 십자가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는 천사의 아홉 계급을 상징합니다.

 — 헤론다, 매듭이 서른세 개, 오십 개, 백 개, 삼백 개인 묵주도 있습니다… 이 모든 숫자에는 어떤 영적인 의미가 있나요?

 — 오직 서른세라는 숫자만이 상징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사신 서른세 해를 상징합니다. 나머지 숫자들은 상징적인 의미가 없습니다. 그저 우리가 절이나 기도의 횟수를 세는 데 도움을 줄 뿐입니다.

시동을 걸 때 끝에 손잡이가 달린 밧줄을 사용하는 엔진이 있습니다. 엔진을 시동하고 싶을 때, 밧줄을 잡고 굳은 오일이 예열될 때까지 힘껏 몇 번 당깁니다. 바로 이것이 묵주입니다. 우리가 “당기는” 바로 그 밧줄과 같습니다. 한 번, 두 번, 다섯 번, 열 번… 어느 순간 “기름이 데워지며” 끊임없는 기도의 영적 엔진이 시동됩니다. 그 후로는 마음이 기도 속에서 스스로 움직이게 됩니다. 하지만 심장이 “시동”이 걸려 기도 속에서 작동하기 시작하더라도, 여전히 묵주를 한쪽으로 치워서는 안 됩니다. 아직 심장이 “시동”이 걸리지 않아 예수 기도에 참여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나쁜 본보기를 보여주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 헤론다, 가끔 사람들이 쳐다보는 가운데 제가 중요한 척하며 손에 묵주를 쥐고 훑어보지만, 정작 기도는 기계적으로만 드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위험이 있지 않습니까?

 — 만약 네가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남의 눈치를 보며 묵주를 넘긴다면, 손가락 피부가 다 벗겨질지라도 그건 너에게 아무런 유익도 주지 않을 것이다. 남은 것은 피로감과, 마치 네가 깊은 기도에 몰두하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거짓된 느낌뿐일 것이다.

 — 헤론다, 전 아직 손에 묵주를 쥐는 게 너무 낯설어요…

 — 너는 그것을, 네 마음속에서 실천해야 할 예수님의 기도를 잊지 않기 위해 들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라. 특히 방을 나설 때는, 원수가 언제든 너를 공격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명심해라. 그러니 방을 나설 때는 참호에서 나올 때 무기를 손에서 놓지 않는 훌륭한 군인처럼 행동하라. 묵주는 매우 강력한 무기이며, 진정한 수도자의 기관총이다. 매듭들은 탄약이다. 전투가 벌어지고 영적인 총알이 날아다니면, 악마들은 그 우박 아래에서 마치 풀이 베인 것처럼 쓰러진다.

 

기도 전의 영적 독서

— 헤론다, 기도할 시간이 다가오면 제 마음은 차갑고, 기쁨으로 떨리지도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알면서도 저는 그저 팔짱을 끼고 앉아만 있고, 그리움과 낙담이 저를 짓누르기 시작합니다.

 — 기도하기 전에 영적인 책을 읽으시나요?

 — 보통은 아니에요.

 — 왜요? 기도하기 전에 앉아서 영적인 글을 읽어야 마음이 달콤함을 느낄 수 있다고 우리가 서로 약속하지 않았나요? 당신이 스스로 영적인 양식을 거절하고 있어서 그 맛이 얼마나 달콤한지 느끼지 못하는 거예요. 사실 기도 전에 성경이나 『에베르게티나』[33] , 혹은 『파테리크』에서 아주 조금만 — 설령 두세 줄이라도 — 읽으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영적 양식이 얼마나 달콤한지 느끼게 해 주며, 영적인 것에 대한 갈망을 일깨워 줄 것입니다. 세속적인 근심은 물러가고, 마음은 신성한 영역으로 솟아오를 것입니다. 『파테리콘』은 너를 피바이드[34] 와 니트리아[35] 로 데려갈 것이며, 너는 성부들이 네 곁에 계신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또한 『영적 목초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의 이야기』, 『라브사이크』, 『기억할 만한 전설들』도 읽기 쉽다. 하지만 이것들은 이미 단단한 양식이다.

 — 게론다, 저는 기도보다는 성부들의 책을 읽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 읽는 양을 줄이세요. 매일 자기 성찰과 예수 기도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단지 영적 서적만 읽는 사람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 사람은 수고하기 시작하고 신의 개입과 하나님의 은총을 구할 때 비로소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성부들의 저서를 읽는 것은 그 뒤에 기도가 뒤따를 때 유익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필요한 만큼, 즉 감동을 느끼고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만 읽으십시오.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님께 드리는 기도 캐논은 영혼에 지대한 유익을 줍니다

— 게론다,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합니까?

 — 매일 “페오토카리온”[36] 에 따라 기도하십시오. 이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님께 바쳐진 기도집이 어떻게 당신이 그분을 사랑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될지 아십니까? 나중에 그분이 이를 어떻게 높이 평가하시는지 직접 보게 될 것입니다… 그분께서 당신에게 그런 위로를 보내 주실 것입니다!..

 — 게론다, 여기 수녀 원장님께서 저에게 “이제 깨어날 때다!”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영적 삶에 대한 열정을 다시 불태우기 위해 무엇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까요?

 — 매일 ‘페오토카리아’에서 카논 하나씩 읽어보세요. 그러면 당신이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 될지 보게 될 거예요! 매일 이 아름다운 모음집에서 카논 한 편씩, 마치 수도 규칙처럼 읽으세요. 카논을 통째로 읽을 여유가 없나요? 괜찮습니다. 각 노래의 첫 번째 트로파르를 읽고, 그다음 각 카논 끝에 있는 스티히르를 읽으세요.

 — 게론다, 매일 이 시간에는 오직 기도만 하고 다른 일은 하지 않도록 나만의 시간을 정해두어도 될까요?

 — 그 시간 동안 예수 기도를 드리고, 잠시 멈추었다가 성모 마리아를 위한 기도 캐논을 부르거나 『페오토카리아』에 실린 캐논을 읽어도 됩니다.

 — 헤론다, 『페오토카리아』에 실린 카논은 아침에 읽는 게 좋을까요, 아니면 저녁에 읽는 게 좋을까요?

 — 아침 시간에 읽는 것이 더 좋습니다. 그렇게 하면 읽은 내용이 하루 종일 당신의 기억 속에 살아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낮에 순종을 수행하고 있을 때도 잠시 멈추고 『페오토카리아』의 카논을 읽을 수 있습니다.

 『페오토카리아』에 수록된 기도 캐논은 영혼에 지대한 유익을 줍니다. 기도하는 이의 마음은 따뜻해지고 감동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기억하기로는, 쿠틀루무시 수도원의 원장인 키릴 신부님([37] )께서 “페오토카리온”을 읽으실 때 눈물을 참지 못하셨습니다. “페오토카리온”에 담긴 단 한 가지 생각만으로도 영혼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교회 성가는 영혼을 달래고 평온하게 해줍니다

— 게론다, 저는 예수기도가 얼마나 유익한지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끊임없이 실천하기는 여전히 어렵습니다.

 — 예수 기도를 드리기 어려울 때는 조용히 교회 찬송을 불러 보세요. 그것도 기도입니다. 예배에서 부르는 노래를 부르면 마음에 온화함이 깃들고, 마음이 달콤해집니다. 게다가 교회 찬송에는 많은 ‘영적 칼로리’가 담겨 있어 영혼에 영양을 공급합니다. 이렇게 해서 사람 안에 예수 기도에 대한 취향이 깨어나고, 기꺼이 그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좋은 토대가 마련됩니다. 약간의 영적 독서(‘강력한’ 책들 중에서), 예수 기도, 절, 그리고 교회 찬송 — 이것이 제 생각에 영적 삶의 배를 저어가는 진정한 노입니다.

 — 게론다, 저는 조용한 곳에서 수공예를 하고 있어서 아무도 저를 방해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 기도는 여전히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 자, 가능한 한 예수기도와 조용한 교회 찬송도 당신의 영적 수공예로 삼아, 이제 두 가지 수공예를 동시에 해 보세요! 이렇게 해 보세요: 수공예에 할애된 시간의 3분의 1은 작업과 동시에 예수 기도를 드리고, 나머지 3분의 2는 일하면서 특히 당신의 영혼을 감동시키는 다양한 교회 찬송가를 조용히 흥얼거려 보세요. 그렇게 예수 기도를 드리며 예배용 찬송가를 흥얼거리면, 네 안에 신성한 은총을 간직하게 될 것이다.

 — 헤론다, 제가 속상할 때면 자매들에게 무례하게 굴곤 해요! 그러고 나서 제가 얼마나 잘못 행동했는지 깨닫고 더 속상해지곤 해요.

 — 그럼 교회 찬송가를 흥얼거려 보세요. 그게 큰 도움이 될 거예요. 독방에서 조용히 트로파리 몇 곡을 부르거나, 봉사를 하는 동안 흥얼거려 보세요. 단,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교회 찬송가는 영혼을 평온하게 해줍니다. 심지어 야생 동물도 길들일 수 있으니, 하물며 사람은 더 말할 나위 없죠! 가끔 사자나, 뭐 늑대 같은 짐승들이 교회 찬송을 들으면 어린 양처럼 온순해져서 앉아서 조용히 듣곤 한다. 아니, 내가 네가 야생 짐승 같다는 뜻은 절대 아니야!.. 하지만 탄갈라슈카는 네가 마음이 상한 상태를 이용해서 자매들에게 무례하게 굴도록 부추기고 있어. 만약 네가 조용히 교회 찬송가를 흥얼거린다면, 마음속에서 달콤함을 느낄 거야. 그러면 자매들을 다른 시선, 즉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게 될 거야.

 — 게론다, 가끔은 생각들이 나를 짓누르는 바람에 책을 읽을 수도, 기도할 수도 없을 때가 있어요.

 — 그럼 교회 찬송가라도 부를 수는 있겠니? 수확하지 않은 밀밭 가장자리에 서 있는 농부를 상상해 보렴. 견딜 수 없을 만큼 더운데, 이삭들은 이미 땅으로 굽어졌고, 주위에는 온갖 가시덤불까지 자라고 있다. 그런데 그 농부는 좋아하는 즐거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더니, 곧바로 수확을 시작한다! 노래는 그가 어려움을 잊게 도와주며, 그는 기쁨과 고양된 기분 속에서 수확을 마칩니다. 일석이조입니다: 첫째, 그는 곡식을 얻었고, 둘째, 그에게 아직 힘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예배에서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며 유혹의 무게를 이겨내는 신자는 바로 그런 농부와 닮았습니다.

 — 게론다, 가끔 마음속에 무언가 무거운 느낌이 듭니다. 이것이 유혹인가요?

 — 어떻게 해야 할지 아십니까? 마음속에 그 무거움을 느낄 때, 그것에 신경 쓰지 말고 엄숙하게 외치십시오. “지옥아, 슬퍼하라! 슬퍼하라!”[38] — 그리고 나서 교회 찬송가를 흥얼거리십시오. 그러면 유혹이 사라질 것입니다. 성 요한 사다리꾼은 이렇게 말합니다. “시편 찬송은 슬픔을 쫓아내는 수도사의 무기이다.”[39] 저도 유혹과 슬픔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다양한 교회 찬송가를 부르라고 조언합니다.

 — 게론다, 가끔 한 가지 더러운 생각이 집요하게 저를 유혹합니다. 어떻게 떨쳐내야 할까요?

 — “합당하도다…”를 노래해 보세요. 보시다시피, 그 악마가 금세 도망칠 겁니다! 교회 찬송가를 부를 때, 우리는 악마에게 우리가 그를 얼마나 경멸하는지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제4장.
“오라, 경배하자…”

 

절하는 것이 그 어떤 다른 영적 수행보다 더 큰 유익을 줍니다

헤론다, 아마 다리가 아프시겠네요?

 — 아니요, 아프지 않습니다. 제가 영적 체조를 하고 있으니까요!

 — 무슨 말씀이신가요, 헤론다?

 — 절을 올립니다, 축복받은 영혼이시여! 운동 없이 어떻게 살겠습니까? 세속에서는 체육을 하고, 우리 수도사들은 절을 합니다. 세속에서는 사람들이 체조를 통해 몸을 건강하게 만들지만, 수도사들은 절을 통해 몸과 영혼을 모두 강인하게 만듭니다. 불쌍한 세속인들은 절이 얼마나 유익한지조차 짐작하지 못합니다. 게다가 이는 영적 건강뿐만 아니라 육체적 건강에도 도움이 됩니다. 왜냐하면 절은 관절 질환이 발병하는 것을 막아주고, 근육의 처짐을 없애며, 처진 배를 쫀쫀하게 만들고, 신경계를 정돈하며, 전반적으로 사람을 씩씩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절은 훈련된 사람이 산 정상에 오르는 것처럼, 숨 가쁘지 않고 가볍게 미덕의 영적 고지에 오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절은 젊은이에게도, 노인에게도 필수적이다. 육체의 유혹에 시달리는 사람에게도, 이미 그 유혹에서 해방된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체력이 더 튼튼한 사람은 허약한 사람보다 더 많은 절을 해야 한다. 강한 기계에는 더 무거운 임무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절은 특히 젊은이들에게 유익하며, 육신을 다스리는 데 도움을 줍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조언합니다. “가능한 한 많이 절을 하세요. 자신을 위해서도, 그리고 절을 더 이상 할 수 없는 병든 이들과 노인들을 위해서도 말입니다.”

 절은 기도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는 어떤 다른 영적 수행보다도 더 큰 유익을 주는 금욕적 수행이기도 합니다. 절은 우리가 기도를 만들어내기 시작하는 영적 엔진을 가동하는 데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그 밖에도 많은 유익을 가져다줍니다. 첫째, 절을 함으로써 우리는 하느님 그분께 경배하며 겸손하게 그분의 자비를 청합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둘째, 절을 통해 우리의 제멋대로인 육신이 겸손해집니다. 평온과 육체적 무욕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셋째, 절은 신체 건강에도 이롭습니다. 이렇게 사람은 영혼과 육체 모두 더 건강해지며, 즉 두 배로 강인한 사람이 됩니다.

 

절로 우리는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그분께 감사를 표합니다

— 게론다, 저는 절을 하는 게 힘들어요. 아, 정말 싫어요…

 — 그럼 절을 할 때, 네가 하나님 앞에 서 계시고 그분께 경배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라. 그 생각이 네가 절을 좋아하게 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자신과 이웃, 동료 인간을 위한 절은 모든 수공예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이 수공예는 사람이 회개를 닦아내고자 하는 열정과 기꺼운 마음이 있다면 끝없이 정성껏 다질 수 있는 일입니다. 절이 ‘절’이라고 불리는 이유는,[40] 그것을 행할 때 우리가 자신을 낮추고 하느님께 용서를 구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람에게 잘못을 저지르고 회개할 때, 우리는 그에게 절을 하며 “용서해 주시고 축복해 주십시오”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절을 시작할 때, 겸손과 회개의 마음으로 “주님,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이 유익합니다.

 — 게론다, 하나님께서 제 육체와 영혼의 정욕을 치유하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이제 어떻게 그분께 제 감사를 표현해야 할까요?

 — 그 감사함이 정말 당신 안에 있습니까? 만약 정말로 당신 안에 있다면, 그것은 이미 어떤 식으로든 표현된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이 감사를 어떤 방식으로 표현하느냐가 아니라, 그것이 진정으로 당신의 마음속에 살아 숨 쉬고 있느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곳에 살아 있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선행으로, 절로, 다른 방법들로… 예를 들어, 아토스 산에 있는 내 칼리바 근처에는 가끔 집 없는 새끼 고양이들이 모여들곤 하는데, 나는 그들에게 먹이를 준다. 그리고 저녁에 문을 열고 마당을 지나 대문 옆 우편함에서 편지를 꺼내러 갈 때면, 이 새끼 고양이들은 어떻게 감사를 표현해야 할지 모른다. 정말 온갖 짓을 다 합니다. 어떤 녀석은 달려와 제 다리에 몸을 비비고, 어떤 녀석은 제 앞에서 거만하게 거닐고, 또 어떤 녀석은 키파리스 나무 줄기를 오르내리며 기어오르기도 하고… 공중제비를 돌고, 빙글빙글 돌다가 다시 제 발밑으로 기어들어오기도 하고… 각 새끼 고양이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감사와 기쁨을 표현합니다. 뭐, 설마 제가 새끼 고양이들의 감사를 바라는 건가요? 아니, 물론 아닙니다. 저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을 위한 것이죠. 감사는, 이렇게 표현해도 된다면, 말 없는 동물들이지만 그들 안에서 기쁨으로 ‘펄쩍’ 튀어나옵니다. 이 예를 통해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속에서 감사를 느끼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감사가 있다면, 그것을 진심으로 표현할 방법도 저절로 찾아질 것입니다.

 사람이 사랑과 감사의 공간 속에서 살아가고 움직일 때, 그 사람은 억지로 절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기쁨이 넘쳐흐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에 절을 합니다. 그때 그는 아이들이 아버지를 만날 때 피로를 느끼지 않는 것처럼 피로를 느끼지 않습니다. 아이들의 마음은 사랑으로 넘쳐흐르기 때문에 기쁨에 차서 뛰놀기 시작합니다.

 

허리 숙임과 땅에 엎드려 절하기

— 헤론다, 누군가를 위해 묵주를 짚으며 기도할 때, 매 매듭마다 십자 성호를 긋고 허리까지 숙여 절을 해야 합니까?

 — 그건 네가 하느님께 얼마나 바치고 싶은지에 달려 있다. 더 많은 수고가 담긴 봉헌이 더 큰 가치를 지닌다.

 — 게론다, 묵주를 짚으며 허리 숙여 절을 할 때, 손으로 땅을 닿아야 하나요?

 — 꼭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절을 할 때는 손으로 무릎을 짚은 다음 몸을 일으킵니다. 다른 경우는 성상에 경의를 표할 때나 아침 기도 중 ‘가장 존귀하신 분’ 찬송을 부를 때, 그 외 몇 가지 상황에서 하는 허리까지 숙이는 절입니다. 그때는 신체적으로 가능하다면 손으로 땅을 짚는 것이 좋습니다.

 — 헤론다, 제가 묵주를 짚으며 십자 성호를 긋고 허리까지 숙여 절을 할 때, 집중하는 데 방해가 됩니다.

 — 저는 오히려 묵주를 짚으며 기도할 때 십자 성호를 긋고 허리 숙여 절을 하면 집중하기가 더 쉽습니다. 너무 몰입하다 보니 기도를 마치고 나면 손이 아플 정도입니다.

 — 게론다, 땅에 엎드려 절하는 것은요? 어떻게 해야 올바른 건가요?

 — 정석대로 하세요. 땅에 닿을 듯이 절을 하고, 매번 절을 마친 후 몸을 곧게 펴세요.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 더 ‘진심 어린’ 절을 드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몸도 덜 피곤해집니다. 또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손바닥을 펴고 기대지 마세요. 그렇게 하면 힘줄이 손상될 수 있으니, 주먹의 마디에 기대세요. 그리고 그곳에 굳은살이 생기지 않도록, 절을 할 때는 앞에 부드러운 매트를 깔아두세요.

 

“수행하는 이는 방법을 찾아낸다”

— 게론다, 나이가 들면서 힘이 빠져서 더 이상 절을 많이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 그건 당연한 일입니다. 노년기에 들어서면 살아온 해가 지날수록 기력은 점점 줄어들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성실하게 수련을 계속하십시오. 땅에 엎드려 절을 할 힘이 없을 때는 허리 굽혀 절이나 단순히 예수님의 기도로 대신하십시오. 그나저나, 땅에 엎드려 절을 한 번에 다 하지 말고 여러 번에 나눠서 해도 됩니다. 묵주 백 개를 다 돌렸나요? 그럼 다섯 번 절을 하세요. 그렇게 열 번의 묵주를 돌리면 이미 땅에 엎드려 절을 쉰 번 하게 되는 셈입니다. 한 번에 다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번에 나눠서 하는 이런 방식이 더 쉽고 유익합니다. 체력이 약한 사람에게 한 번에 50번의 땅에 엎드려 절을 하라고 제안하면, 그는 신음하며 자신에게는 감당할 수 없다고 설득하려 할 것입니다. 하지만 땅에 엎드려 절을 조금씩, 단계적으로 나누어 한다면 많은 횟수라도 쉽게 해낼 수 있습니다.

 — 게론다, 요즘 들어 왠지 다리와 허리가 너무 아파서…

 — 그럼 적어도 조금씩이라도 절을 해 보세요.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알게 될 겁니다.

 — 아플 때도요, 게론다?

 — 조금씩 해 보면 무엇이 자신에게 유익한지 스스로 알게 될 거예요. 제 등이 아플 때면, 저는 절할 횟수를 정해두지 않고, ‘신호등’에 빨간 불이 켜질 때까지 세지 않고 계속합니다. 그때 멈춰서 잠시 숨을 고르죠. 그러고 나서 다시 계속하다가 어느 순간 깨닫게 됩니다. ‘아, 또 ‘빨간불’이 켜졌구나…’ 티혼 신부님([41] )이 아주 늙어서 땅에 엎드려 절한 후 일어서지 못하게 되셨을 때, 자신의 방 천장에 굵은 밧줄을 고정해 두고, 땅에 엎드려 절할 때마다 그 밧줄을 잡고 일어서셨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가 땅에 엎드려 절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고안해 낸 방법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티혼 신부님은 이 땅에서의 생애가 거의 끝날 무렵까지 경건하게 하느님께 절을 드렸습니다. 아바 이사악이 말했듯이, “수행하는 자는 방법을 찾아내기” 때문입니다.[42]

 

 

제3부.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 마리아, 천사들, 그리고 성인들 —
하나님 앞의 중재자이자 우리의 수호자들

“네 마음이 항상 그리스도, 하나님의 어머니, 천상의 천사들과 성인들과 함께 있도록 힘쓰라.”

 

 

제1장.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님께서 —
우리의 다정하고 보살피시는 어머니이심에 대하여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님께 드리는 경배

헤론다,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님에 대해 이야기해 주십시오.

 — 제가 무엇을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 저를 난처한 상황에 빠뜨리시네요. 하필이면 하느님의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그분으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 헤론다, 하느님의 어머니의 이름은 그리스도의 이름과 마찬가지로 영적인 힘을 가지고 있습니까?

 — 네.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님께 특별한 경외심을 품고 계신 분은 그분의 이름을 듣기만 해도 내면이 변화합니다. 만약 그런 사람이 예를 들어 종이 조각에 적힌 성모 마리아의 이름을 보게 된다면, 그는 경건하게 그 종이 조각에 입을 맞추며, 이때 그의 마음은 기쁨으로 떨게 됩니다. 그는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 마리아를 기리기 위해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있으며, 그 예배 내내 오직 그분의 거룩한 이름을 찬미할 뿐입니다.[43] 그분의 거룩한 성화에 입을 맞추면, 마치 입술로 나무나 물감이 아니라 그분 자신에게 닿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분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사람의 다리가 풀려 엎드려 절하게 됩니다.

— 게론다, 티노스 섬으로 순례를 떠나 그곳의 기적을 행하시는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 마리아 성화를 경배하셨던 이야기를 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44]

 —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 그렇게 작은 성화인데도 그토록 위대한 은총을 발산하더군요! 저는 그 성화에 입을 맞췄는데, 아주 오랫동안 그곳에서 떨어질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살짝 옆으로 비켜서야만 했죠.

 — 게론다, 순례자들은 기적을 행하는 성모 마리아 성화에 많은 펜던트, 동전, 보석 장신구를 남기는데, 이를 보고 유혹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 아주 소박하고 경건한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그는 이베르의 성모 마리아 성화를 참배하기 위해 아폰 산에 왔습니다. 그런데 그 성화는 온통 금화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돌아가는 길, 이비론에서 스타브로니키타 수도원으로 향하는 도중, 그의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성모님,” 그가 말했습니다. “저는 성모님을 다른 모습으로 뵙고 싶었습니다. 단순하고, 동전도 없고, 금도 없는 모습으로요.” 그렇게 그는 걸어가며 그런 생각에 괴로워하다가 갑자기 너무나 심한 통증을 느껴 눈앞에 어지러움이 일었습니다!.. 그는 심지어 길 한가운데에 주저앉아 더 이상 걸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모님께 도움을 청하기 시작했습니다. “성모님,” 그가 말했습니다. “저를 도와주세요! 도와주시면, 제가 성모님께… 금화 두 개를 바치겠습니다!” 그때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님께서 친히 나타나시어 말씀하셨습니다. “보이지?.. 그렇게 내 성화에 금화가 나타난 것이다. 너와 같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나에게 바친 선물이다. 내가 이 동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니? 내가 이것을 달라고 부탁했다고 생각하니?” 그러자 그 사람의 고통은 즉시 사라졌다. 보라, 그는 선한 마음가짐과 굳건한 믿음을 가졌기에, 하느님의 어머니께서 그를 도와주신 것이다.

가끔 아토스 산의 내 칼리바에서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님께 기도하고 싶을 때면,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어떻게 빈손으로 그분께 무언가를 청하러 갈 수 있겠는가?” 그때 나는 산에서 자라는 야생화를 조금 꺾어 그분의 성화상 앞으로 가져가며 말합니다. “성모님, 이건 성모님의 정원에서 딴 꽃입니다. 받아 주십시오.” 아토스 산에서 수도사가 되기 전, 이곳을 ‘성모님의 정원’이라고 부른다는 말을 듣고는, 마치 평범한 정원처럼 다양한 화단과 꽃밭이 조성되어 있고 과일나무가 심어져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 와 보니 화단과 꽃밭 대신 야생 밤나무와 딸기나무만 보였습니다.[45] 그때야 비로소 아토스가 영적인 정원임을 깨달았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저는 그곳에서 성모님 자신의 현존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 게론다, 제 마음이 따뜻해지도록 성모님의 현존을 어떻게 느낄 수 있을까요?

 — 네가 이미 위대한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자 모든 사람의 어머니이신 분의 이름을 지니고 있으니,[46] 끊임없이 그분을 부르거라. 그분께 이렇게 말하라. “나의 여주인이시여, 주님은 제가 주님의 이름을 지니도록 너그럽게 허락해 주셨으니, 제발 제가 주님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다른 사람들은 당신의 이름 소리 하나만 들어도 감동받는데, 저는 그 이름을 직접 지니고 있으면서도 당신의 임재를 느끼지 못합니까?” 기도로 간구하오니,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님께서 항상 당신 곁에 머무시며, 마치 자신의 새끼를 지키듯 천사의 날개로 당신을 감싸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여, 당신의 백성들이 기도로 당신의 어머니를 당신께 모시고 옵니다”[47]

 — 게론다, 어떤 성모 마리아 성화에서 그분은 외모상 가장 그분 자신과 닮으셨나요?

 — 예루살렘 성모상입니다. 저는 한 번 파나구데에 있는 제 칼리바에서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님을 뵙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당신에게 해준다면, 나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사실을 알게 될까요?

 — 아무도 모를 겁니다, 헤론다.

 — 아무도 모를 거라면, 들어보게… 나에게 환상이 있었소. 마치 내가 아주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는 것 같았지. 길을 떠나려면 서류를 준비하고, 돈을 환전하고, 각종 증명서를 제출해야 하는데, 내 여권은 준비가 안 되어 있었어… 주위에는 사람들이 가득했지만, 아무도 나를 도와줄 수 없었지. “어떻게 해야 하지? — 내가 생각했지. — 설마 나를 아껴줄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을까?” 나는 정말로 겁에 질렸다. 그러다 갑자기 황금실로 짠 옷을 입고 환하게 빛나는 얼굴을 한 성모님께서 나타나셨다. 그분은 얼마나 아름다우셨는지! 온몸에서 빛이 솟아나고 계셨다! “걱정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시며, “내가 도와주겠다. “내 아들이 누군지 아나? 왕이야.”라고 말씀하시며 내 어깨를 부드럽게 어루만지셨다. 그러고는 내 서류들을 집어 드시더니 옷 속에 감추셨다. 오, 그 동작이 얼마나 우아하고 고귀함으로 가득 차 있었는지! 그 후 그분은 “너에게 힘든 날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하시며, 저를 포함한 모두를 위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48] 그 후 오랜 시간이 지나, 저는 한 책에서 예루살렘의 성모 마리아 성화를 보고, 제게 나타나셨던 분을 알아보았습니다.

 — 게론다, 어떤 분이 우리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하느님의 손에 달려 있다면, 왜 우리는 성모님께 기도할 때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님, 저희를 구원하소서’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 자, 어떤 여성에게 이웃이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 이웃의 아들은 장관입니다. 그런데 그 여성이 이웃에게 아들의 일자리를 구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이웃은 도와주겠다고 하지만, 정작 이웃 청년을 위해 일자리를 직접 찾아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니요, 그녀는 장관으로서 실제로 도울 수 있는 자신의 아들에게 부탁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은 어머니가 부탁했으니 도와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어머니께 우리를 구원해 달라고 청하고, 성모님께서는 다시 우리를 구원하실 힘이 있으신 당신의 아드님께 이를 청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성모님을 지극히 사랑하시기에 자비롭게 성모님의 청을 들어주십니다.

 — 게론다, 저는 주님보다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님께 기도하는 것이 더 편합니다. 혹시 이것이 경건하지 못하다는 징후일까요?

 — 아시다시피, 저도 똑같은 기분을 느낍니다. 저는 그리스도를 지극히 공경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님께 기도할 때 더 큰 편안함을 느낍니다. 아이들, 심지어 어른이 된 아들들조차도 아버지를 지극히 공경하기 때문에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에게 더 솔직하게 다가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께 진정한 경외심을 품은 사람들은 그분 앞에 경외심에 사로잡혀 나아가는 반면, 성모님께는 더 큰 담대함으로 다가갑니다. 그분은 사람이시기 때문이죠.

 — 가끔은, 헤론다, 제가 땅에 엎드려 절을 하면서 성모님의 카논이나 아카피스트를 외워 부릅니다. 혹시 절을 할 때는 오직 예수님의 기도만 드려야 할까요?

 — 아니요, 마음에 드는 대로 하십시오. 어차피 성모님께서는 어떤 식으로든 우리의 모든 간구를 그리스도께 전해 주십니다. 하지만 성모님 자신도 그분의 보살핌과 다정한 사랑으로, 우리 영혼을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경외심[49] 으로 채워 주십니다. 저는 성모님께 제 마음을 받아서 정화하신 뒤 네 부분으로 나누어 주시기를 청합니다. 세 부분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께 드리고, 한 부분은 성모님께서 직접 간직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 게론다, 제가 예수 기도를 드릴 때면 시간이 꽤 지나도 성모님께 묵주 한 알도 바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놓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 성모님께서 당신에게 화를 내실까 봐 두려우십니까? 축복받은 영혼이여, 우리의 기도가 성모 마리아께나 어떤 성인에게 드려지더라도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께 향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이미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 하십시오. 성모님과 성인들은 화를 내지 않으십니다.

 — 헤론다,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님을 기리는 개인 전야 기도를 올바르게 드리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 먼저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님에 대해 묵상하십시오. 이때 성모 마리아를 위한 기도 캐논, ‘페오토카리아’ 또는 아카피스트의 구절들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다음 묵주를 짚으며 기도하고, 네 마음의 ‘수장’이 허락하는 대로, 즉 네 자신의 ‘마음의 규율’이 지시하는 대로 행하십시오.[50]

 — 게론다,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님께 드리는 아카피스트는 찬양송입니까?

 — 네, 찬미입니다. 성모님께서 당신의 어떤 간구를 들어주신 후에, 그분께 감사를 드리는 마음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결국 그분께는 단지 청원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감사를 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 마리아의 아카피스트’[51] 에는 위대한 은총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여전히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 마리아의 아카피스트’를 외워서, 규정에 따라 정해진 때뿐만 아니라 하루 종일 계속해서 읽으십시오.

 

“모든 이를 위해 중보하시는 선하신 분”

— 헤론다, 제 이름날에 당신께서 보내주신 “과자”를 결국 받지 못했네요. 수녀님들도 당신께서 보내주신 “맛있는 것”[52] 을 조금이라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정말 기대하고 계셨는데…

 — 그래, 네 말이 맞아… 이번에는 ‘과자’를 보내지 않았으니, 당연히 너도 자매들에게 대접해 줄 게 없었을 거야… 하지만 내 축복은 어쨌든 너에게 보냈어: 다만 평소처럼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말이야.

 며칠이 지나면, 우리도 성 아폰 산에서 우리 어머니의 승천 축일을 기념할 때,[53] 나는 다시 한 번 그분께 간구할 것이다. 그분께서 너에게 그분의 달콤한 사랑과 다정한 보살핌을 베풀어 주시며, 또한 많은 신성한 은총을 내려주시기를.

 — 게론다, 제 영적 투쟁에서 자꾸만 넘어질 때마다 슬픔이 밀려옵니다.

 — “모든 이를 위해 중보하시는 선하신 분”과 “슬퍼하는 모든 이에게 기쁨이시여”를 노래하십시오.[54] 이를 수도 규칙처럼 실천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어머니께서 당신을 도와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그분의 어깨에 메고 가십니다. 우리가 단지 그것을 원하기만 하고, 말썽꾸러기 아이들처럼 발버둥치지 않는다면 충분합니다.

 — 게론다, 저도 성모님께서 그리스도를 안으시는 것처럼 저를 그분의 품에 안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그분께서 너를 한 번도 품에 안아 주신 적이 없니? 그분의 품에서 단 한 번도 아기처럼 느껴진 적이 없니? 나는 그분 곁에 있으면 스스로를 아이처럼 느껴. 그분이 나의 어머니이시라는 것을 느껴. 종종 저는 그분의 성화에 얼굴을 묻고 말합니다. “성모님, 저에게 당신의 은총의 젖을 마시게 해 주십시오!” 저는 어머니의 품에 무심하게 누워 젖을 빨며, 그분의 위대한 사랑과 형언할 수 없는 다정함을 느끼는 아기처럼 느껴집니다. 저 역시 그렇게 은총으로 양육받고 있습니다.

 — 헤론다, 왜 성모님께서는 때로는 제가 청한 것을 즉시 주시고, 때로는 주지 않으시나요?

 — 우리가 절박한 필요를 느낄 때, 성모님께서는 즉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우리 안에 인내와 용기가 길러지도록 잠시 도움을 미루십니다. 제가 필로페이 수도원에 살던 시절,[55] 성모 승천 축일 전야 기도회가 끝난 직후, 영적 평의회 회원 중 한 분이 저를 이베르 수도원으로 편지를 전하러 보내셨습니다. 편지를 전달한 뒤, 나는 수도원 부두에서 배에서 내리는 한 장로를 맞이하여 그를 필로페이로 다시 데려가야 했는데, 거기까지 가는 데는 1시간 반이나 걸어야 했고, 게다가 오르막길이었다. 성모 승천 대축일 금식이 막 끝난 참이라, 우리는 밤새 성당에서 철야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그해 성모 승천 대금식 기간을 나는 두 부분으로 나누었다. 변모 대축일 전까지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고, 변모 대축일 당일에만 식사를 한 뒤, 성모 승천 대축일까지 다시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나는 밤샘 기도회가 끝나자마자 수도원을 나왔는데, 휴식을 취하지도 않았고, 적어도 약간의 마른 빵이라도 챙겨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이베르스키 수도원에 도착해 편지를 건네고 선착장으로 가서 배를 기다렸다. 배는 오후 4시쯤 도착할 예정이었지만 늦어지고 있었다. 몸이 좀 안 좋아졌다. 한쪽 구석에 통나무 더미가 쌓여 있는 것을 보고 나는 결심했다. “가서 한쪽 구석에 앉아, 아무도 나를 보지 못하게 하고 내 기분이 어떤지 묻지 못하게 해야겠다.” 통나무 위에 앉자, 성모님께 묵주를 짚으며 기도해 조금이라도 먹을 것을 보내 달라고 청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곧바로 그 생각을 거부하며 이렇게 생각했다. “이 저주받은 자여, 이런 사소한 일로까지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님을 귀찮게 하려 하는가?” 그때 바로 내 눈앞에 한 수도사가 보였다. 그는 손에 둥근 빵 한 덩어리와 무화과 두 개, 그리고 커다란 포도 송이를 들고 있었다. “성모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것을 받아라.” 그가 말하더니… 사라져 버렸다! 감동과 감사함에 숨이 멎을 지경이었습니다! 저는 울기 시작했고, 심지어 먹을 생각조차 나지 않았습니다. 오 주님! 우리에게는 정말로 비범하신 성모 마리아님께서 계십니다! 우리의 가장 사소한 일들까지도 돌보시는 분이시니 말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얼마나 깊이 사랑하시는지 아시겠습니까?!

 — 게론다,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님께서 어떻게 사람들을 도우시고 보호하시는지 이야기해 주세요.

 — 러시아에서 일어난 일화를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곳의 한 주에 두 개의 수도원이 나란히 서 있었는데, 그 사이를 철도가 가로지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수도원의 수도사들이 이웃 수도원의 주보 축일 미사에 갔다가 그곳에서 술에 취해 만취해 버렸습니다. 취한 채로 돌아오던 그들은 다리를 움직일 힘조차 없어 철로 위에 그대로 누워 코를 골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성모 마리아께서 가장 가까운 역장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지금 네 기차가 내 새끼 돼지들을 깔아뭉개 버릴 거야!” — “무슨 헛소리야, 거기 새끼 돼지들이 어디 있단 말이야?” — 역장은 일축했다. 그러자 성모 마리아께서 두 번째로 그에게 나타나 엄하게 이렇게 되풀이하셨다. “이봐!.. 네 기차가 지금 내 새끼 돼지들을 깔아뭉개 버릴 거야!” — “도대체 무슨 새끼 돼지들이란 말인가? — 역장이 불안해했다. — 돼지 떼라도 선로에 나온 건가?” 그가 확인하러 갔더니, 보라: 정말로 술에 취한 수도사들이 선로 위에서 자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에 간신히 그들을 깨워 선로에서 쫓아낼 수 있었는데, 그렇지 않았다면 큰일이 날 뻔했습니다. 지나가던 기차가 그들을 정말로 모두 깔아뭉개버렸을 테니까요. 보시다시피,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님께서는 자애로운 어머니로서 심지어 자신의 말썽꾸러기 자녀들조차 보호하시고 돌보아 주십니다.

 우리의 위대한 여주인이신 성모 마리아님의 옷자락을 가능한 한 단단히 붙잡으십시오. 그래야 그분께서 여러분을 도와주실 것입니다. 온 세상의 다정하고 보살피시는 어머니이신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 마리아님께서 여러분과 온 세상을 보호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제2장.
수호천사에 대하여

 

수호천사는 우리 곁에 계십니다

헤론다, 모든 사람에게는 수호천사가 있습니까?

 — 네, 성세례 성사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수호천사를 주십니다.

 — 그렇다면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에게는 수호천사가 없나요?

 —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도 하느님께서 보호하시지만, 수호천사는 없습니다. 오직 세례를 받은 사람에게만 있습니다. 수호천사는 세례식 때 그 사람을 맡아 그 후 평생 동안 그와 함께합니다.

 — 게론다, 수호천사는 항상 우리 곁에 계십니까?

 — 항상 그렇습니다. 수호천사는 우리의 모든 발걸음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 우리와 얼마나 가까이 계신가요?

 — 그것은 우리의 영적 상태에 달려 있습니다.

 — 게론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 수호천사는 떠나나요?

 — 우리가 죄를 지을 때, 그는 우리에게서 멀어지지만 완전히 우리를 떠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죄 많은 삶으로 마귀에게 우리에 대한 지배권을 넘겨줄 때, 우리의 수호천사는 절망하지 않고 멀리서 슬픈 눈으로 우리를 지켜봅니다.

 — 게론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분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까?

 —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도 느끼지 못하는 것과 똑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의 눈은 흐릿한 장막으로 가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장막이 사라지려면 사랑과 겸손이 필요합니다.

 사람이 하느님의 현존을 느낄 때, 동시에 곁에 있는 수호천사의 현존도 느낍니다. 이때 그의 움직임은 차분하고 부드러워지며, 세심하지만 경직되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침착함과 절제된 태도는 그에게 고통을 주지 않고, 오히려 평안과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그의 움직임에는 영적인 자유가 드러납니다. 경건함과 주의력은 그의 마음을 달래주며, 그는 자신이 느끼는 그 달콤함을 잃지 않도록 끊임없이 신경 쓴다. 그는 가슴에 두 손을 모은 채 겸손하게 침대에 누워 잠을 잔다. 잠을 잘 때도 겸손하고 경건하며, 일어나서는 차분하고 조용히 움직인다. 누군가 그의 문을 두드릴 때, 그는 몸가짐을 가다듬기 위해 허둥대지 않는다. 그는 원래 항상 단정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런 사람은 자신의 수호천사를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생각한다.

 하늘의 수호천사는 지상의 천사 같은 사람 곁에 머물며 그를 아주 잘 이해하고 기뻐한다. 사람이 영적인 삶을 살고 순종하는 아이처럼 행동한다면, 그의 천사는 고통받지 않고 그 곁에 있으면서 기뻐한다. 결국, 기쁨에 차서 수호천사는 인간의 영혼과 함께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영혼은 천사가 기뻐하는 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해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상상해 보십시오. 수호천사에게 있어 수년 동안 어떤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가, 결국 빈손으로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 오직 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자비심에서, 수호천사가 짊어지는 수고에 대한 존경심에서, 사람은 지옥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 싸워야 합니다.

 

수호천사는 우리를 지켜줍니다

— 게론다, 수호천사는 항상 우리를 도와주나요?

 — 우리가 그분으로부터 어떤 도움을 받을지는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적어도 한 발이라도 단단한 땅에 디디려고 노력한다면, 그 곁에 수호천사가 함께할 수 있으며, 위험에 처했을 때 우리를 구해 줄 것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다면, 수호천사도 자신의 임무를 다할 것입니다. 천사들 덕분에 많은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젊은이들이 마지막 순간에 기적처럼 죄를 저지르지 않은 경우도 있었고, 그 밖에도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천사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아십니까? 천사는 침묵만으로도 사람을 돕습니다. 한 번은 제가 막다른 골목에 처한 적이 있었습니다. 고민 때문에 머리가 너무 아파서 마치 끌로 두개골을 두드리는 것 같았고, 조금만 더하면 머리가 갈라질 것 같았습니다. 눈은 말 그대로 눈구멍에서 튀어나올 지경이었고, 특히 오른쪽 눈이 그랬습니다. 고통,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저는 바닥을 구르며 고통에 몸부림쳤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고, 그저 기도하며 하느님께 어떤 탈출구라도 보여 달라고 간청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오른쪽 어깨 옆에 수호천사가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천사는 열두 살짜리 소년처럼 보였는데, 아주 예쁜 둥근 얼굴에 커다란 눈을 하고 있었습니다. 오, 그 얼굴은 정말로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그 얼굴은 정말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천사가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통과 모든 무거움이 사라졌다. 기쁨 때문이 아니라, 신성한 은총의 작용으로 사라진 것이었다. 기쁨은 고통을 몰아내지 못한다. 고통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기뻐할 수는 있지만, 신성한 은총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 위대한 일이다! 신성한 은총을 묘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내가 되뇌었다. “심지어 끌이 아니라 망치로라도 내 머리를 내리쳐도 좋다!” 그런 상태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도 아깝지 않다. 그리고 나서 막다른 골목에서 벗어날 길이 보였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결코 찾을 수 없었던 길이었다.

 — 그분이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셨나요, 게론다?

 — 아니요, 그저 저를 바라보셨을 뿐입니다.

 — 게론다, 사람이 천사를 볼 때 그 형상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실제로 천사의 본질은 어떤 것입니까? 사람의 눈은 눈앞에 무언가 물질적인 것을 보는 것입니까?

 — 아주, 아주 미묘한 무언가…

 우리의 수호천사가 항상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 곁에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분은 우리를 지키고 보호해 주십니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도 자신의 삶을 잘 살피고 죄를 피해야 합니다.

 

 

제3장.
성인들이 바로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들이라는 사실

 

“성인을 공경한다는 것은 그를 본받는 것을 의미한다”

헤론다, 제가 읽은 바에 따르면, 성인들의 기념일이 되는 날, 성인들은 기도하며 그들에게 간구하는 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준다고 합니다. 정말 그런가요?

 — 글쎄,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겠습니까? 성인들의 축일에는 성인들이 사람들에게 영적인 과자를 대접하죠! 우리가 성인을 우리의 삶으로 기쁘게 해드린다면, 성인들도 그 대가로 우리에게 영적인 달콤함을 선사해 주십니다.

 — 게론다, 어떻게 하면 특정 성인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 어떤 성인을 사랑하고 싶으신가요?

 — 성 요아킴과 성 안나 성인을요.

 — 자, 이렇게 합의합시다. 당신은 성스러운 부모님께 저를 위해 기도하여 그들이 저를 도와주시도록 하고, 저는 당신이 그분들을 사랑하게 되도록 기도하겠습니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교회에서 기념하는 그 성인의 행적을 매일 읽어보세요.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모든 성인과 영적으로 하나가 될 것입니다.

 오늘 기념하는 성인의 행적을 읽는 것, 그리고 일반적으로 성인의 행적을 읽는 것은 큰 유익을 줍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독서는 영혼을 따뜻하게 해주고, 사람이 성인을 본받도록 이끄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람은 자신의 “끝없이 쓰라린 운명”에 대해 불평하는 것을 멈추고 용기 있게 앞으로 나아갑니다. 성인의 행적은 영혼의 용기를 굳건히 하며, 심지어 순교에 대한 각오를 더욱 북돋아 줄 수도 있습니다.

 — 게론다, 왜 같은 이름을 가진 성인들이 때로는 똑같은 고난을 겪기도 합니까?

 — 너는 우리와 함께 있을 때 어떤 이름을 쓰고 있니?

 — 마리아요.

 — 어떤 성녀 마리아를 기리는 이름인가?

 — 이집트의 성녀 마리아를 기리기 위해서예요, 게론다.

 — 성녀 마리아 이집트인이 고문을 당하지 않았다는 건 네가 참으로 다행이야. 진지하게 말하자면, 성녀 마리아께서는 지극히 고귀한 수도적 업적을 이루셨으니, 그분을 본받으시오. 그러면 네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너와 그분의 생애는 닮게 될 것이다. 축복받은 영혼아, 네가 묻는 그 성인들이 바로 자신들의 이름과 같은 성인을 경외하며 그분을 본받으려 애썼기에, 결국 그분들과 같은 업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 게론다, 사람은 어떻게 성인과 친구가 될 수 있습니까?

 — 그분과 혈연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성인을 공경하는 것은 성인을 본받는 것이다,”[56] 라고 성 바실리오 대교부가 말씀하셨습니다.

 — 게론다, 저는 위대한 성녀의 이름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삶에서는 그에 미치지 못한다는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 그럼 네 성녀를 본받으려고 노력해라. 성녀 싱클리티키아는 세상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이제는 거리를 초월하여 온 세상에 도움을 주고 있다. 그런데 너는? 너는 그녀와 친구인가, 아닌가? 그녀에게 네 마음을 정화하고 세련되게 해 달라고, 그리하여 네가 신성한 진리의 깊이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간구하는 것을 잊지 않고 있니? 보라, 자매여, 어떤 일들이 있는지: 어떤 이름들은 더 큰 책임과 연결되어 있단다. 어쨌든, 네 수호성인이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아두렴. 그녀가 너를 도와달라고 청하고, 기도 속에서 이를 끊임없이 간구해라.

 저는 요즘 정말 게을러졌네요… 성인들이 베풀어 주시는 자선으로만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가 하는 일이라곤, 마치 거지처럼 끊임없이 그분들께 청하는 것뿐이죠… 그리고 사실 — 성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인들은 그 위대한 사랑으로, 하늘의 빵과 낙원의 꿀에서 나온 자선을 내게 베풀어 주십니다.[57]

 

성스러운 유해에서 풍기는 향기

— 게론다, 아시나요? 성 아르세니오스 카파도키아의 성스러운 머리가 그의 기념일에 정말 강렬한 향기를 풍겼습니다!

 — 글쎄, 왜 향기가 나지 않겠습니까? 성인이 자신의 축일에 손님들을 위해 영적인 잔치를 베풀 수 없는 법이 있겠습니까?

 — 게론다, 그런데 왜 성스러운 유해는 항상 향기를 풍기지 않는 건가요?

 — 모든 경우에 적용되는 단 하나의 규칙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큰 죄인이 유물에 손을 대면 유물에서 향기가 나기 시작하는데, 이는 그가 하느님께로 돌아와 회개하도록 돕기 위함입니다. 또는 반대로, 덕이 있는 사람이 유물에 손을 대도 향기가 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그가 교만에 빠질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함입니다. 때로는 덕이 있는 사람 앞에서도 향기가 날 수 있습니다. 이는 성인이 주는 영적인 선물과도 같은 것이죠. 모든 경우는 각기 다릅니다.

 — 게론다, 어떤 이들은 유해가 향기를 풍긴다는 사실을 의심하기도 합니다.

 — 이성적인 접근 방식 탓입니다. 성인들의 유해에는 신성한 은총이 깃들어 있습니다. 아토스 산에서는 유해뿐만 아니라 파나구다 근처의 한 장소에서조차 향기가 나는데, 심지어 겨울에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제가 살았던 카투나카스에서도, 성 바실리오의 수도실[58] 근처 한 곳에서 향기가 풍겨 나왔습니다. 그곳에는 이제 수도실조차 없고, 폐허만 남아 있습니다. 아마도 그 폐허 근처에 수많은 성인의 유해가 숨겨져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언제 이 유해를 사람들에게 드러내실지 누가 알겠습니까?

 

경건한 마음으로 성자들에게 기도합시다

— 게론다, 괜찮으시다면, 이삭의 글 중 한 구절을 저에게 설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 도대체 무슨 “이사악의 곳”이냐?! 어느 이사악을 말하는 거냐? 카프살라의 이사악 신부님을 말하는 건가? “성 아바 이사악의”라고 말해야지! 우리가 카프살라의 이사악 신부님에 대해 이야기할 때조차도 그를 “이사악 신부님”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성인들의 이름은 그냥 이름으로만 부를 건가요? 그건 도저히 안 됩니다. 예를 들어, 성 대순교자 게오르기우스께 기도하면서 “이봐, 게오르기우스, 나한테 이러저러하게 해 줘”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건방진 태도입니다. 기억나는 게 있는데, 제가 한 평신도에게 성 아르세니오스 카파도키아의 성유물 작은 조각을 건네준 적이 있습니다.[59] 그런데 그 사람은 나중에 성인을 그냥 ‘아르세니오스’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예의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 어쩌면, 게론다, 그가 순수한 마음에서 성 아르세니오를 그렇게 불렀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 무슨 순수함이라니!.. 우리보다 나이가 많은 분에게조차 그렇게 부르면 안 됩니다. 설령 성 아르세니오스 님께서 그의 친아버지셨다 해도, 그래도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성 아르세니우스 신부님이 그보다 고작 몇 살 더 많으셨다 해도, 단순히 이름만 부르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 성 아르세니우스 신부님은 사제셨으니까요. 하물며 지금은 성인이신데 말이죠! 그런데 그는 저와 대화할 때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대화할 때도 성 아르세니우스 신부님을 단순히 이름만 불렀습니다. 기본적인 존중조차 없네요!

 — 게론다, 그래도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사람이 성인을 마땅한 호칭 없이 부르는 것이 건방짐 때문이 아니라, 순수하고 진정한 소박함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 성자들에게 그렇게 부를 권리를 얻으려면, 상당한 영적 경지에 도달해야 하며, 위대한 경건함과 순수함에서 비롯되는 그 거룩한 담대함을 갖추어야 합니다. 실제로, 마치 어린아이들처럼 순수한 영혼들이 있어,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과 천진난만함으로 하느님께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의 하느님, 주님께서는 저에게 이것을 주셔야 합니다! 왜 저에게 이것을 주지 않으십니까?”라고 말할 수 있는,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과 무죄함을 지닌 영혼들이 있습니다. 제가 『성산( )의 성부들』에서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을 지닌 한 수도사에 대해 쓴 것을 기억하십니까? 그의 거처에 있는 우물이 말라버렸을 때, 그는 성당 벽에서 성 니콜라스 성화를 떼어내어 구리 고리에 밧줄을 묶은 뒤, 성화를 우물 속으로 내려보내며 큰 순수함으로 성자에게 말했습니다. “성 니콜라스 신부님! 제가 당신의 거룩한 성화상 앞에 등불을 켜드리면 좋겠습니까? 그렇다면 물과 함께 우물에서 올라오십시오! 보시다시피, 많은 사람들이 우리 거처로 찾아오는데, 그들에게 시원한 물 한 모금조차 줄 수 없습니다.” 그러자 물이 곧바로 조금씩 차오르기 시작했고, 성 니콜라오스 성화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는 성화를 집어 들고 경건하게 경배한 뒤 성당으로 가져갔다.[60] 하지만 이것은 특별한 경우다. 비록 자신이 아직 그에 상응하는 영적 경지에 이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담하게 하느님과 성인들에게 다가가는 사람은 거룩한 대담함이 아니라 어리석은 건방짐을 드러내는 것이며, 하느님을 노하게 한다.

 — 게론다, 성인들의 기념일 전날, 특히 제가 특별히 공경하는 성인들의 경우, 저는 그들의 영광을 위해 독방에서 밤샘 기도를 스스로 드리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 성인과 함께 사는 것”을 실천하는 데 무엇이 도움이 될까요?

 — 먼저 그 성인의 행적을 읽어보십시오. 그런 다음 미네아에서 그 성인을 위한 카논의 모든 트로파리를 읽어보십시오. 그 안에도 그분의 삶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트로파리는 기도라기보다는 성인을 기리는 찬양의 노래에 가깝습니다. 여기서 기도란 각 카논의 트로파리 앞에 나오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이시여,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소서”[61] 라는 후렴을 말합니다. 그런 다음, 당신에게 구체적으로 필요한 일에 대해 성인의 도움을 청하고, 절을 올리며, 묵주를 짚으며 기도하십시오 — 당신의 힘과 마음에 따라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십시오. 중요한 것은 당신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영혼이 성인들과 함께 살아갈 때, 경외심과 믿음으로 그들에게 도움을 청하게 됩니다. 사람이 기도하는 성인들에 대해 경외심을 품고 있다면, 경건한 기도는 저절로, 자연스럽게 흘러나옵니다. 처음에는 서로를 알아가는 단계가 있고, 그다음에는 우정이 싹트며, 나중에는 정중하면서도 소박한 달콤한 대화가 이어집니다.

 

성인들의 도움

— 헤론다, 이제 자신만의 성당이 생긴 성 아르세니오는 지금 어떤 기분을 느끼고 있을까요?[62]

— 기쁨입니다! 이제 그분께는 양 떼를 모아 지키고 계신 양우리(목장)가 있으니까요.

 — 게론다, 어떤 성인이 시성된 후, 사람들은 그분으로부터 이전보다 더 많은 도움을 받게 됩니까?

 — 물론입니다. 교회가 성인을 시성하면, 그분은 이미 우리에게 도움을 주어야 할 의무를 느끼십니다. 비유하자면, 시성되기 전보다 더 많이 우리를 도와주셔야만 하는 셈이죠. 게다가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보내어 사람들을 돕게 하십니다.

 — 게론다, 혹시 어떤 성인이 사람들에게 자신의 기념일을 공경해 달라고 하느님께 청할 수도 있나요?

 — 아니요, 성자들은 그런 부탁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 “주님, 신자들이 저의 기념일을 공경하게 하시고, 주님께서는 그 대가로 그들을 도와주소서”라고 말하지도 않고, “저의 기념일을 공경하는 사람들에게만 도와주소서”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성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이 사람들이 저의 기념일을 공경하니, 그 대가로 그들에게 상을 내려주소서.”

 — 게론다, 저는 제 이름의 유래가 된 성녀보다 복음서 저자 요한 신학자에게 더 큰 존경심을 느낍니다.

 — 두려워하지 마라. 네 수호성인은 네가 사도 요한을 더 사랑한다고 해서 질투하지 않는다. 물론, 너는 그를 이시하스티리아의 수호성인으로 공경해야 하지만, 설령 그가 너희의 수호성인이 아니었다 해도, 네 수호성인은 다른 어떤 성인과 마찬가지로, 네가 어떤 성인에게 마음을 깊이 두어 그분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때 기뻐할 것이다.

 성인은 성인일 뿐이며, 그들에게는 인간의 정욕이나 사소한 편협함이 없습니다. 사람은 자신에게 특히 가까운 성인을 통해 도움을 받습니다. 누군가는 위대한 성인에게 도움을 청하여 받기도 하고, 누군가는 잘 알려지지 않은 성인에게 청하여 역시 도움을 받기도 하는데, 이는 어느 경우든 하나님의 한 가지 힘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 게론다, 만약 어떤 사람이 특정 성인을 향해 특별한 경외심을 느낀다면, 그 전에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 어떤 성인을 향해 특별한 경외심이 생겼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마음이 어떤 식으로든 그 성인의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 누구라도 성인의 도움을 받으면 그 성인을 특별히 사랑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 도움은 중요한 일에서든 사소한 일에서든 나타날 수 있습니다. 저는 어릴 적부터 코니체에 있는 성 바르바라 성당에 다녔기 때문에 이 성녀 대순교자를 특히 공경합니다. 성녀께서는 제가 군대에서 통신병으로 선발되었을 때, 비록 그에 필요한 학력이 요구되었음에도 저를 도와주셨고, 나중에 결핵 병원에서 폐 수술을 받은 후에도 저를 도와주셨습니다. 그때 의사들은 폐가 깨끗해지기만 하면 배액관과 장치를 제거해 주겠다고 말했습니다.[63] 보통은 5일 만에 모두 제거하지만, 제 경우에는 벌써 25일이 지났음에도 배액관을 빼주지 않아 저는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12월 3일 토요일, 나는 의사들이 와서 이 고통에서 나를 해방시켜 주기를 기다렸지만, 그들은 오지 않았다. 일요일 아침, 성 바르바라의 기념일인 그날, 나는 말했다. “성녀께서 도와주실 생각이었다면, 진작 도와주셨을 텐데. 의사들은 떠났고, 오늘은 일요일이라 아무도 오지 않을 거야. 이제 누가 내 몸에서 이 튜브들을 빼줄까?” 몇 마디 말을 내뱉고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성녀의 작은 교회에서 몇 번이나 촛불을 켰고, 촛불 심지도, 기름도 그곳에 가져다주었고, 여러 번 청소를 했는데… 도대체 내 몸에서 튜브 두 개를 빼내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하지만 곧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내가 성녀 바르바라를 뭔가 화나게 했나 봐. 그래서 그녀가 내 몸에서 튜브를 빼내도록 신경 쓰지 않은 거겠지.” 갑자기 소음이 들렸다. “무슨 일이야? — 내가 놀라며 물었다. —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 “의사들이 오고 있어요,” — 사람들이 내게 말했다. 주치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른 아침에 그는 내 담당 의사들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지시했다. “가서 그 수도사의 튜브를 빼내라.” 의사들이 들어와 말했다. “드레나지를 제거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보아하니, 내 쓰라린 말이 성녀 바르바라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다. 가끔은 불평도 해야 하지만, 징징대지 않는 편이 낫다. 징징대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고귀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보시다시피, 똑같은 성인이 때로는 청한 것을 즉시 들어주시기도 하고, 때로는 결코 즉시 들어주시지 않기도 합니다. 또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기도하는 이가 영적으로 올바른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분을 도와주시지만, 다른 경우에는 그 사람이 어린아이처럼 불평하고 울기 때문에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 헤론다, 혹시 제 영적 상태가 좋지 않아서 어떤 성인이 저를 외면할 수도 있나요?

 — 아니요, 다행히도 성인들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들이 그렇게 행동했다면, 우리는 망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죽었을 것입니다. 직접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지금 천국에 계셔서 기뻐하고 계시는데, 우리는 여기 땅에서 고통받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무언가를 청할 때, 그들이 우리의 청을 듣지 않는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불공평한 일입니다.

 — 헤론다, 우리가 기도하며 천사들과 모든 성인들에게 도움을 청한다면, 그분들이 모두 함께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해 주시는 건가요? 그분들의 기도가 하나로 합쳐지는 건가요?

 — 모두 함께기도하고, 필요에 따라—즉 우리에게 유익이 된다면—각자 따로 우리를 도울 수도 있습니다.

 — 헤론다, 제가 어떤 성인에게서 도움을 받았을 때, 그 사실을 수녀님들께 말씀드려도 될까요?

 — 아니요, 수녀원장님께만 말씀드리시고 그 성인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세요. 그분께서 당신에게 무언가를 선물해 주실 권리가 없겠습니까? 성인들이 여러분을 위해 모든 것을 어떻게 잘 챙겨 주시는지, 이미 얼마나 많은 고통과 문제로부터 여러분을 지켜주셨는지 아신다면 말이죠!

 — 게론다, 이 일에 대해 어떤 계시를 받으셨나요? 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건가요?

 — 여러분께 들려드릴 이야기가 많지만, 이미 말한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다만 성인들이 모두 한마음으로 우리를 돕기 위해 나섰으며, 우리가 기쁨과 감사의 마음에 휩싸여 미쳐버리기를 바라고 있다는 점만 덧붙이겠습니다.

 

성인들은 거리를 없애십니다

— 게론다, 성 게오르기우스, 시나이 수도원장께서 어떻게 시나이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셔서 그곳에서 성체를 모셨나요?[64]

— 성체를 모시고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는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 게론다, 그분은 예루살렘과 자신의 수도실에 동시에 계셨던 건가요?

 — 그의 방에는 그가 없었습니다! 몇 초 만에 예루살렘에 들러 성체를 모시고, 엄청난 속도로 시나이로 돌아왔습니다.

 — 그가 그곳으로 날아갔나요, 게론다?

 — 네, ‘슈퍼’ 등급 휘발유를 채우고, 영적 승차권을 받아 필요한 곳으로 날아갔습니다.

 — 헤론다, 성인이 동시에 두 곳에 있을 수 있다는 게 어떻게 가능한 일입니까?

 — 어디에나 계시는 분은 오직 하느님 한 분뿐입니다. 성자들은 어디에나 계신 것이 아니라,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만 그 속도가 워낙 빨라서 거리가 무의미해질 뿐입니다. 그들에게는 ‘가까움’과 ‘멀음’이 없습니다. 제가 결핵 요양소에서 치료를 받을 때, 저와 함께 입원해 있던 한 불쌍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오랫동안 병을 앓고 있었고, 이름은 할람피이였습니다. 그는 심지어 그곳에서 일하던 한 간호사와 결혼하고 싶어 했고, 그녀와 약혼까지 했습니다. 당시에는 결핵 치료제가 없었기 때문에, 그에게 죽음의 위협이 닥쳐 있었습니다. 그래서 할람피이의 어머니는 슬픔을 안고 성 파라스케바 수도원으로 기도를 드리러 갔습니다. 그 당시 할람피이는 이미 중환자실에 누워 있었고, 누구도 그를 만나러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약혼녀조차도요. 갑자기 어머니가 약혼녀에게 전화를 걸어 말했습니다. “걱정하지 마! 성 파라스케바께서 할람피이가 회복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어.” 그리고 덧붙이시며 “이제 라미야로 가야 해. 그곳의 다른 결핵 진료소에도 죽어가는 사람이 있단다.”라고 하셨다.[65] 그러자 곧바로 할람피이의 상태가 호전되었다. 간호사가 라미야에 전화를 걸었더니, 그곳에서는 방금 전까지 위독했던 한 환자가 기적적으로 회복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성녀 파라스케바가 얼마나 빠른 속도로 움직였는지 상상해 보세요! 자동차가 그런 속도로 달렸다면 산산조각이 났을 겁니다. 그런데 성녀 파라스케바는 휘발유도, 타이어도 아꼈네요!

 

이름 모를 성인들이 “은밀히” 도와주신다

— 게론다,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성인들이 우리를 도와주나요? 우리는 기도할 때 그들을 부르지도 않는데 말이죠?

 — 우리가 그들의 존재조차 짐작하지 못하지만, 많은 알려지지 않은 성인들이 우리를 도와줍니다. 저에게 그들은 가장 위대한 성인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사람들로부터의 영광이 전혀 돌아가지 않고 오직 하느님으로부터만 돌아갑니다. 제 마음속의 목소리는, 그들이 지닌 위대한 겸손함으로 인해 하느님께 간절히 청하여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남고, 사람들로부터의 영예를 받지 않으면서도 은밀히 그들을 계속 도와주기를 원했다고 말해줍니다.[66] 이러한 알려지지 않은 성자들을 우리는 특히 공경하고, 각별히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남는 데 성공했고, 침묵 속에서 기도와 말 없는 모범으로 우리를 돕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나는 이미 세상을 떠난 아폰 산의 한 신부에 대해 글을 쓰고 싶었다. 내가 알고 있던 그의 생애에 관한 모든 사정을 떠올리고, 한가한 저녁 시간을 골라 글을 쓰기 위해 자리에 앉았다. 초를 켜고 연필과 공책을 집어 들었지만, 갑자기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심지어 그의 이름조차도요. 비록 지난 며칠 동안 그에 대해 많이 생각했음에도 말입니다. 제가 다녀온 아폰의 모든 수도원, 스키타, 칼리바를 차례대로 떠올려 보았습니다. 동쪽부터 쭉 훑어보았습니다. 어쩌면 무언가 기억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죠.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다음 서쪽부터 다시 훑어보았지만, 역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폰에 온 이후로 해마다 기억을 더듬으며, 만났던 수도사들을 머릿속으로 쭉 훑어보았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었다. 아마도 그 수도사는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남기를 원했던 것 같고, 하느님께서 기적을 베푸신 것 같다. 기억나는 건, 그의 삶이 내가 글을 쓴 다른 모든 아폰 산 수도사들의 삶보다 내게 더 큰 인상을 남겼다는 것뿐이다.[67] 이를 통해 나는 또 한 가지 깨달았다.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으시면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숨결로 사람을 부드럽게 스치기만 하셔도 그 사람은 현자가 된다.

 

성스러운 “봉사자들”과 성스러운 “수호자들”

— 게론다, 제 치아가 아파요.

 — 글쎄, 조금은 아파야 조금이라도 유익을 얻을 수 있을 텐데! 참아라, 성 안티페에게 기도해 보거라[68] — 묵주 한 줄을 바쳐라. 그분은 치통에 도움을 주시니, 네 고통이 모두 사라질 것이다.

 — 게론다, 성 안티포스께 기도드렸는데, 이가 여전히 아파요!

 — 성인이 너를 도와주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는 것 같구나. 만약 네가 그에게 “오늘부터 모든 일에 더 신중하게 행동하겠다”고 약속한다면, 성인은 즉시 도와줄 것이다. 성인 안티파는 위대한 성인으로, 하느님의 기쁨을 얻었다.

 “안티파는 나의 충실한 증인이라,[69] ”라고 요한계시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 게론다, 성 바르바라를 위한 예배와 카논에는 그녀가 전염병을 막아준다고 나와 있습니다.

 — ‘모르’가 무엇입니까?

 — 그건 미생물에 의해 전염되는 전염병이나 질병을 말합니다, 헤론다.

 — 아, 미생물이라… 글쎄요, 그럼 성 바르바라께 기도하셔서 질투라는 미생물로부터 치유받으시고, 그 전염병을 피할 수 있도록 하세요. 성 바르바라 기도문을 복사해서 수녀님들께 나눠주세요.

 — 그리고 또, 게론다, 제가 읽은 바에 따르면 성녀 바르바라는 포병의 수호성인이래요!

 — 뭐가 놀랍습니까? 성인은 여러 가지 사명을 맡을 수 있고, 어디에서나 그 일을 다 해내실 수 있으니까요.

 — 헤론다, 그럼 성녀 이리나는 경찰의 수호성인이신가요?

 — 그래, 그러니 마음에 평화가 없을 때는 성녀 이리나께 기도해라.[70] 그녀는 모든 경찰을 지휘하고 곳곳에 평화를 확립하시니, 네 영혼에도 평화를 가져다주시기를.

 — 게론다, 저는 물건을 자주 잃어버리곤 하는데, 찾느라 시간을 많이 낭비해요.

 — 성 미나[71] 께 기도하는 건 잊으셨나요? 당신 같은 건망증 환자는 바로 그분의 “전문 분야”니까요. 성 미나는 순식간에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주실 뿐만 아니라, 그 대가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제가 공동 생활 수도원에 살 때,[72] 어느 날 방 열쇠를 잃어버린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수도원을 지나가는 낯선 사람들이 많아서 방 문을 잠그곤 했거든요. “별일 아니야,” 하고 생각하며 “목공실로 가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보니 목공실 열쇠도 없더군요. 안장을 만드는 작업실로 가려고 했는데, 거기 열쇠도 없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라고 생각했다. 가서 성 미나에게 촛불을 한 개 바쳤더니, 곧바로 상상도 못 했던 곳에서 모든 열쇠를 찾았다. 촛불 한 개면 끝! 성인들은 촛불 한 개만으로도 기뻐하며 서둘러 도와주시는 법이다.

 나는 예전에는 성 미나가 말을 타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 성화가 있다는 것을 몰랐다. 한때 성 미나가 나타나 어머니의 질문에 답해 주었던 어머니께서, 성 미나를 기마상으로 묘사한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반박하며, 오직 성 디미트리오스와 성 게오르기오스만이 말을 타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고 고집을 부렸다. “아니야,” 어머니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본 분은 적갈색 말을 타고 계셨어.” “당신은 누구세요?” 제가 물었습니다. “성 게오르기우스는 흰 말을, 성 디미트리오스는 붉은 말을 타고 계시잖아요. 당신은 누구세요?” “나는 성 미나야,” 그분이 말씀하셨습니다.”

 — 게론다, 혹시 성 스피리돈[73] 께서 직접 하느님께 자신의 유해가 썩지 않게 해 달라고 청하신 건 아닐까요?

 — 아니요, 당연히 아니죠!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성인들은 그런 것을 청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성 스피리돈의 유해가 썩지 않게 된 것은 하느님께서 이루신 일입니다. 보십시오, 하느님께서 얼마나 지혜롭게 모든 것을 마련해 두셨는지! 케르키라, 케팔로니아, 자킨토스 섬은 이탈리아와 인접해 있어, 그곳 사람들은 가톨릭으로 개종하기 쉬웠을 텐데,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곳에 성 스피리돈, 성 게라시모[74] , 성 디오니시오스라는 성스러운 수호자들을 두셨습니다.[75]

 — 게론다, 스승님께서 이곳 수도원에 계실 때는 제가 정말 안전하다고 느껴집니다. 하지만 스승님께서 없으실 때 어떤 유혹이 닥치면 무섭습니다.

 — 두려워하지 마세요. 당신 곁에는 강력한 수호자들이 있으니, 그들을 잊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로 그들에게 간청하세요. 그리고 저 같은 무능한 자에게 어떤 도움이 필요하다면, 제가 아토스 산에 있든 여기 있든, 할 수 있는 한 도와드리겠습니다. 세속적인 삶에서 사랑하는 형제들이 자매들을 돌본다면, 세속적인 삶보다 더 높은 영적인 삶에서는 더욱더 그러할 것입니다. 저는 특별히 여러분을 위해 제 보물인 성 아르세니우스의 유해를 이곳에 남겨 두었으니, 이제 이곳에 제 마음도 함께 있는 셈입니다.

 왜냐하면 너희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 마음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76] 내가 너희에게 말했듯이, 내가 가진 모든 소중한 것을 성 아르세니우스가 머무르는 너희 수도원에 남기겠다. 성인께서도 한때 어떤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77] “나는 살로니카 근처에 살고 있다.” 그가 이곳에 살고 있다면, 그에게 부탁하여 지팡이를 들고 주인답게 그 탕갈라쉬들을 단호히 처리하게 하십시오! 부끄러우시다면 제 이름으로 부탁하십시오.

 이것이야말로 모든 성인들의 사명이니, 즉 우리 같은 불쌍한 자들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재앙으로부터 돕고 보호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임무는 그리스도인답게 살려고 노력하고, 주님을 슬프게 하지 않으며, 성자들에게 등불을 밝히고 그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도움이 필요합니다. 내세에서, 만일 하느님께서 우리를 그분 곁에 있게 해 주신다면, 우리는 더 이상 성자들에게 청을 드려 번거롭게 할 필요가 없을 것이며, 사실 그때는 그럴 필요조차 없을 것입니다.

 

성인들의 기적

— 게론다, 제가 호텔에서 혼자 봉사를 할 때면 무섭습니다.

 — 하지펜디에게 기도하세요, ‘[78] ’라고. 그러면 강도가 찾아와도 나중에 그 자신이 당신에게 용서를 구하게 될 것입니다.[79]

 — 저, 게론다, 저는 강도들이 아니라 탕갈라쉬들이 무섭습니다.

 — 하지펜디께 기도해 보세요, 그분께서 그들도 마비시켜 주시도록. 설마 못 하시겠습니까?

 — 어떻게 못 하겠습니까, 헤론다!

 — 그분이 한 번은 사람뿐만 아니라 자동차까지 ‘마비’시킨 적이 있다는 거 아세요? 운전자가 문에 열쇠를 꽂아둔 채로 차를 도난당했거든요. 그런데 그분이 성 아르세니우스께 기도하자마자, 차가 마치 땅에 박힌 듯 도로 한가운데서 멈춰 섰어요! 도둑들은 차를 버리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죠.

 — 게론다, 의사들이 제 머리에 종양이 있어서 수술이 필요하다고 하더군요.

 — 가서, 성 아르세니우스의 성스러운 머리에 네 머리를 단단히 대어 보렴. 그가 다른 자매에게 어떻게 도와주셨는지 봤지? 메스 없이 수술을 해 주셔서, 그 자매는 스스로도 무슨 일인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단다. 하느님께 영광을! 의심하지 마, 그분은 너에게도 도움을 주실 수 있어.[80]

 성 아르세니우스는 도와주십니다. 한 의사가 자신의 아픈 딸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제가 성 아르세니우스께 기도했더니, 그 아이의 상태가 조금 나아졌습니다. 여러분도 성인이 이 기적을 완성해 주시도록 기도하십시오. 과학자들이 하나님의 능력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고, 그분의 이름이 찬양받게 하소서. 기적은 신비입니다. 경험할 수는 있지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 게론다, 요즘 사람들은 예전처럼 성인을 믿지 않습니다.

 — 예전에는 스스로를 무신론자라고 칭하던 사람들조차 성인을 존경했습니다. 코니체에 이탈리아 점령군이 주둔하던 시절, 숲에 불이 났던 일이 기억납니다. 이탈리아인들이 주민들이 불을 끄러 나올 때 모두 붙잡기 위해 스스로 불을 지른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사람들은 그 소문을 듣고 각자 흩어졌지만, 숲은 계속 타올랐습니다. 이탈리아군은 마을 이장(그는 무신론자였습니다)에게 가서 물었습니다. “다들 어디 갔습니까?” — “일하고 있습니다.” — 그가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왜 불을 끄러 나오지 않습니까?” — “우리에게는,” 촌장이 대답했다, “화재에 대비해 성 니콜라오가 계시니까요.” (코니체의 주 성당은 성 니콜라오를 기리기 위해 봉헌되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맑던 하늘이 구름으로 뒤덮이고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인들은 그 기적을 보고 크게 두려워했다.

 — 게론다, 기적을 행하지 않는 성인이 있을까요?

 — 성인이 기적을 행할지 말지는 하느님께 달려 있습니다. 하지만 성인들의 수많은 기적에 대해서는 우리가 단순히 알지 못할 뿐입니다.

 하나님께는 어려운 일이 없듯이, 하나님께 담대함을 가진 성자에게도 어려운 일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내가 행한 것보다 더 큰 기적을 행할 능력을 주리라.”[81] 이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분의 겸손과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말해 줍니다. 주님의 겸손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분은 성자들에게 그분께서 친히 행하셨던 것처럼 죽은 자를 부활시킬 은혜와 능력까지 주셨습니다!

 

성인들의 생생한 현존

— 게론다, 저는 성 아르세니오를 제 눈으로 직접 보고 싶습니다.

 — 위험한 소망입니다. 원수가 환상으로 너를 속일 수 있고, 마음속에서는 ‘성인을 뵙는 영광을 누렸으니 너는 뭔가 중요한 존재다’라고 속삭일 테니까요. 그러다 네가 그 ‘중요함’을 받아들이게 되면, 원수는 네 상상 속에서 끊임없이 자기만의 이야기를 꾸며내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니 성 아르세니오를 경외하되, 그를 뵙고자 애쓰지는 마십시오. 그가 당신에게 나타나든 안 나타나든, 그것은 더 이상 당신의 문제가 아니라 그분의 일입니다.

 — 게론다, 성인이 누군가에게 나타나실 때, 다른 사람들도 그분을 볼 수 있나요?

 — 여기에 정해진 규칙은 없습니다. 때로는 보이고, 때로는 목소리만 들리며, 또 때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항상 각기 다르게 일어나며, 공통된 법칙은 없고 있을 수도 없습니다.

 성인들의 현존은 실재하며 생생합니다! 때로는 우리가 그들을 찾을 수 없는데, 그들이 스스로 우리를 찾아오기도 합니다. 제가 ‘성스러운 십자가’ 수도실에서 파나구다로 옮겼을 때, 그 수도원은 방치된 상태였습니다. 어떻게든 한 방을 정리해 살 곳을 마련했습니다. 제 물건은 모두 직접 가져왔습니다. 미네아는 아직 상자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저녁 기도 시간이 다가왔다. 하지만 필요한 미네이 권을 도대체 어디서 찾을 수 있겠는가? 나는 내일 어떤 성인의 기념일인지 확인하려고 달력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안경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달력의 글자는 너무 작아서 내일 기념할 성인의 이름을 알아볼 수 없어 묵주를 짚으며 저녁 기도를 드릴 수 없었다. 45분 동안 찾아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러다 찾느라 시간이 다 지나버리겠구나. 차라리 이렇게 기도하는 게 낫겠다. ‘오늘의 성인들아, 우리를 위해 하느님께 기도해 주소서’”라고 나는 생각했다. 묵주를 짚으며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께 드리는 기도를 읽은 뒤, 이렇게 기도하기 시작했다. “오늘의 성인들아, 우리를 위해 하느님께 기도해 주소서!” 밤에 아침 기도를 드릴 때도 똑같이 기도했다. “거룩한 날들이여, 하느님께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소서!” 그러자 갑자기 내 앞에 사랑과 아버지 같은 자비를 뿜어내는 빛나는 전사가 보였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나는 마음속에서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그가 얼마나 선한 분인지 보고 용기를 내어 물었다. “부디 말씀해 주십시오. 어디에서 봉사하셨으며, 성함이 무엇입니까?” 그가 대답했다. “나는 성 루킬리안입니다.”[82] 잘 들리지 않아 다시 물었다. “성 롱긴이신가요?” — “아니요,” 그가 대답했다. “성 루킬리안입니다.” 그 이름이 낯설게 느껴져 다시 물었다. “성 루키안인가요?” — “아니요,” 그가 세 번째로 되풀이했다. “성 루-킬-리-안입니다.” 그때 내가 문득 말했다. “저도 전쟁에서 입은 상처가 있습니다.” 성자 곁에는 흰 가운을 입은 젊은 의사가 서 있었는데, 그는 대순교자 판텔레이몬이었고, 성 루킬리안은 그에게 나를 진찰해 달라고 부탁했다. 성 판텔레이몬이 나를 진찰한 뒤, 나는 그가 성 루킬리안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의 상처는 모두 아물었습니다. 다만 군 복무 기록부에 그 사실을 기재해야 합니다.” 그 후에도 오랫동안 나는 큰 기쁨과 비범한 기력을 느꼈다. 안경을 찾아 달력을 들여다보니, 그날이 성 순교자 루킬리안의 기념일임을 알게 되었다. 저녁에 나는 아는 신부님들을 찾아가 그분들 앞에서 이 성인의 행적을 읽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이 성인은 저를 그분의 사랑으로 채워 주시며, 저에게 베풀어 주신 그 천상의 기쁨으로 제 영혼과 몸을 달래 주십니다.

 

 

제4부.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자신의 죄성을 깊이 자각하며 자신을 위해 기도할 때, 타인을 위한 단순한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기도조차도 큰 힘을 발휘할 것이다.”

 

 

제1장.
자신을 위한 기도에 대하여

 

우리 자신과 타인을 위해 하나님의 자비를 구합시다

헤론다, 가끔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다가 문득 마음이 뭉클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그 사람을 위한 기도를 멈추고 제 자신을 위해 기도합니다.

 — 왜요? 방금 전까지 기도하던 그 사람이 더 이상 기도가 필요 없게 된 건가요?

 — 멈추지 않았어요, 헤론다. 하지만 이 좋은 기회에 저 자신에 대해서도 기도하고 싶어요. 언제 다시 이런 감동을 느낄지 모르니까요.

 — 훌륭하군요! 그러니까 당신은 즐기면서, 이웃에 대해서는 “괜찮아, 기다리면 돼”라고 말하겠다는 건가요? 에, 당신이라니… 적어도 기도할 때는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하지 말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하세요. 이 “우리”에는 당신도,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저는 기도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여,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모든 이와 나, 이 하찮은 자를 불쌍히 여기소서.”

 기도를 세 부분으로 나누는 것이 매우 유익합니다. 첫 번째는 나 자신을 위한 기도, 두 번째는 산 자들을 위한 기도, 세 번째는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우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나 자신을 위해 더 많이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혼자이지만, 산 자와 죽은 자는 셀 수 없이 많기 때문입니다.

 — 게론다, 저는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기에는 제 평생으로도 모자랄 것 같습니다.

 — 하나님께서 당신을 불쌍히 여기실 것입니다. 그저 단순하고 꾸준히 기도하며, 자신과 모든 사람을 위해 겸손하게 그분의 자비를 구하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며 무리하지 않고, 겸손하고 정직하게 노력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다른 사람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실 것입니다.

 — 헤론다, 혹시 하나님의 자비 외에도 다른 무엇을 구해야 할까요?

 — 하느님의 자비에는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필요하다면, 하느님께 구체적인 것을 청할 수도 있습니다.

 — 헤론다, 성 바실리오 대교황께서는 “기도할 때, 찬양을 드린 후에는 오직 천국만을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83] 그분은 무엇을 의미하시는 것입니까?

 — 성인은 무엇보다 먼저 하늘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후에는 주님의 말씀대로 나머지 모든 것이 우리에게 더해질 것입니다.[84] 중요한 것을 잊고 부차적이고 수많은 청원에 정신을 뺏겨서는 안 됩니다.

 — 게론다, 성경은 우리가 필요에 따라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말합니다.[85] 그러나 성부들은 자신의 필요에 대해 기도하는 것을 피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 영혼에 필요한 모든 것을 위해 기도하고, 육체의 필요에는 덜 신경 쓰십시오. “주님의 기도”에서 우리가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라고 말할 때,[86] 우리는 육체의 양식뿐만 아니라 영적인 삶, 즉 하나님의 뜻에 따른 삶을 위해 필요한 것들도 구하는 것입니다.

 한 번은 제가 ‘성스러운 십자가’ 칼리바에 머물고 있을 때, 배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수도원에서 병 하나를 가져다주었는데, 약으로 마시라고 와인이 들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그 안에는 식초가 담겨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가져다준 수도사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약 40일이 지났다. 나는 빗물을 마셨고, 상태는 더 나빠졌다. 어느 날은 정말로 상태가 심각해졌다. 물을 많이 마신 뒤 밤새도록 고통스러워했다. 다음 날 목이 타는 듯했지만, 마시는 것이 두려웠다. 램프를 켜러 성당에 들어갔을 때, 성상벽의 성모 마리아 성화 아래에 와인 한 병이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병은 내 것이었고, 나는 바로 알아봤다. 하지만 누가 그 안에 포도주를 부어 놓은 것일까? 그 며칠 동안 아무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고, 나는 성당에 자주 갔지만 이콘스타스 근처에는 병이 하나도 없었다. 포도주는 떫은 맛이 났는데, 바로 내 소화 기능에 딱 필요한 맛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날, 수도원에서 포도주 한 병을 더 가져다주었다.

 — 게론다, 제가 진심으로 하느님께 무언가를 청하면, 그분께서 저에게 주실까요?

 — 그것이 당신에게 유익하다면 주실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주님께서 왜, 어떻게 그것을 당신에게 주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이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경고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그들에게 왕을 주시기를 요구했던 유대인들의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87] 왕이 된 것은 교만한 사울이었는데, 그는 그들에게 막대한 세금을 부과하고 괴롭혔습니다.[88]

 종종 우리는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좋고 유익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정반대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본성상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아십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이렇게 말합시다. “나의 하나님, 제 생각에는 이것이 제게 유익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제 영혼에 무엇이 필요한지 저보다 더 잘 아십니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소서.”[89] 우리가 진심으로 이렇게 말한다면: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진심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 영혼에 진정으로 유익한 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영적 승리를 위한 기도

— 게론다, 아바 이사악은 이렇게 썼습니다. “자신이 아직 정욕에서 정화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90] 그러니까, 사람이 자신의 정욕에서 정화되지 않았으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한다면, 그 안에 뻔뻔함이 있다는 뜻인가요?

 — 아니요, 왜 뻔뻔한 일입니까? 사람은 정욕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합니다. 그 두 가지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뻔뻔한 사람은 자신의 정욕에는 신경 쓰지 않으면서 기도할 때만 하나님을 사랑하게 해 달라고 간구하는 사람입니다.

 — 헤론다, 제가 어디선가 읽은 바에 따르면, 기도에서 구하는 것은 믿음과 마음의 온기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하더군요.

 — 당신은 하나님께 정확히 무엇을 구하고 계십니까?

 — 주님께서 제 마음의 완고함을 없애 주시고, 기도할 때 제 마음을 부드럽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91] 라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구하는 것이 순수하고 네게 유익하다면, 네가 구한 것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만약 네가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할 힘과 이웃을 도울 힘을 구한다면, 그것은 선한 간구이며 하나님께서는 네가 구한 것을 주실 것이다. 하지만 만약 네가 기도에서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 기도의 은사를 얻고자 한다면, 과연 하나님께서 네게 그것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 헤론다, 가끔 저는 하나님께 “주님, 저를 깨우쳐 주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 제 기도가 옳은 것입니까?

 — 먼저 네가 스스로 노력한 뒤에, 그제서야 하나님께 깨달음을 구하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노력하는 모습을 보시고 나서야 우리가 구하는 것을 주시는 분이시니. 생각하고, 기도하고, 자기 자신을 살피며 분별력 있게 행동하라. 그러면 주님께서 너를 깨우쳐 주실 것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 무언가에 대해 물어볼 때, 서둘러 대답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깨우쳐 주시도록 기도하십시오. “나의 하나님, — 기도하십시오, — 무엇을 말해야 할지 제게 지혜를 주옵소서,” —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구체적인 상황에 필요한 말씀을 주실 것입니다. 성급한 대답은 이성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기도를 통해 나오는 대답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 헤론다, 저는 부주의한 사람이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회를 자주 놓칩니다. 그래서 차라리 그분께 도움을 청하는 것조차 두려워합니다. 또다시 모든 것을 망치고 비난을 받을까 봐요.

 —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동시에 그분께서 당신이 세심한 사람이 되어 그분이 주시는 유리한 기회를 잘 활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구하십시오.

 — 게론다, 천국에 가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옳은 일입니까?

 —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예를 들어, 천국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아니라, 제 삶으로 그분을 슬프게 하지 않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합니다. 하지만 만약 제가 지옥에 가게 된다면,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슬퍼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분을 결코 슬프게 하지 않도록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사람을 지옥에서 구해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병중의 기도

— 헤론다, 요즘 제 심장에 문제가 있어서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 각자에게는 무언가 문제가 있어야만 합니다. 문제가 있어야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발치에 앉아 그분께 도움을 청할 수 있으니까요.

 — 게론다, 제가 회복되도록 기도해 주세요.

 — 제가 그렇게 기도해 드리는 건 당신에게 이득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마음으로 인내한다면, 천상의 보험 기금에서 농촌 보험 협회의 연금보다 더 많은 연금을 받게 될 것입니다.[92] 어디선가 읽은 바에 따르면, 한 병자가 성 판텔레이몬에게 자신을 치유해 달라고 간청했다고 합니다. 성인은 치유해 주지 않았지만, 병자는 계속 기도했고 결국에는 회복되었습니다. 때가 되어 그 사람이 죽었을 때, 치유 때문에 많은 면류관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성 판텔레이몬에게 말했습니다. “아, 내가 면류관을 잃게 될 줄 알면서 왜 나를 치유해 준 거요?”

 — 게론다, 건강 문제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까지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까?

 — 우선 하나님께 의지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다음으로는 사람, 즉 의사에게 의지하십시오.

 — 게론다, 중병에 대해 어떻게 올바르게 대처해야 합니까?

 — 의사를 찾기 전에 먼저 기도와 철야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의사들을 도우시고 깨우쳐 주시도록 말입니다. 그리고 성 아르세니오의 램프에서 기름을 조금 가져가는 것을 잊지 마시고, 성수를 마시는 것도 잊지 마세요. 시편을 읽으시고…

 — 게론다, 병 때문에 수도 규칙을 지키지 못하고 있어서 마음이 아픕니다.

 — 병에 걸렸을 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묵주기도도 하지 않고, 절도 하지 않더라도, 그저 “하나님, 영광을 받으소서!”라고 말하기만 해도 충분합니다.[93]

 — 게론다, 제가 아플 때는 통증 때문에 기도에 집중할 수가 없습니다.

 — 그런 기도에는 수고도 있고 고통도 있으며, 위업이 담겨 있기에 건강한 사람의 기도보다 더 잘 들립니다.

 고통도 적어도 조금은 사랑해야 합니다. 병은 사람에게 주어진 위대한 축복입니다. 사람이 이를 깨닫게 되면, 기쁨으로 고통을 받아들이고 기쁘게 노래할 것입니다:

 “나는 모든 때에 주님을 찬양하리라.”[94] 기억합니다. 카룰레의 불쌍한 장로 가브리엘[95] 이 얼마나 고통받았는지, 얼마나 고통받았는지… 그런데 통증 발작이 올 때마다 그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는 침대에 묶여 있으면서 의아해했습니다. “사람들이 나에게 ‘이것이 네 십자가다’라고 말하지만, 못은 어디에 있나? 못이 없는데 어떻게 십자가가 되겠는가?”

 — 그게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나요, 게론다?

 — 꽤 오래, 한두 해 정도였죠. 그는 완전히 혼자 살았습니다. 그의 수도실 바닥은 썩어 있었고, 겨울이면 그 구멍 사이로 끔찍할 정도로 찬바람이 스며들었죠! 그런데도 병든 장로는 추위 속에서도 노래를 부르며 하느님을 찬양했습니다.

 병중에는 시편 찬양이 약이 됩니다. 사람이 중병에 걸려 심하게 고통받을 때조차도, 교회 찬송의 소리를 들으면 고통이 가라앉습니다. 만약 그 자신이 조금이라도 노래할 수 있다면, 그건 정말 좋은 일입니다. 저 역시 오늘 저녁, 몸이 아팠을 때 목청껏 노래를 불렀습니다. 제 모든 에너지를 노래에 쏟아부었죠. 그리고 그 노래가 제게 얼마나 큰 힘을 주었는지 아십니까?![96]

 

 

제2장.
타인을 위한 기도

 

자신의 죄성을 깨닫고 세상을 위해 기도하기

헤론다, 가끔 사람들이 고통받는 모습을 보면 제 자신을 위해 기도할 수가 없습니다.

 — 우리는 결국 우리 자신을 위해서만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위한 기도는 하나님 앞에 마땅한 차림새로 나아갈 수 있도록 준비하는 데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느끼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성을 깊이 자각하며 자신을 위해 기도할 때, 타인을 위한 단순한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기도조차도 큰 힘을 갖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기도는 하나님의 큰 자비를 끌어당기는 깊은 겸손으로 드려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 게론다, 저는 제 자신을 위해 많이 기도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다 보니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잊곤 합니다.

 — 보라: 옛 사람이 벗겨지려면, 자신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신성한 열정이 타오르면, 그때 사람은 자신을 잊고 타인을 위해 기도하게 된다. 자신을 위해 잠시 기도한 뒤, 고통받는 세상 전체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이들을 기억하라. 주님께서 주신 시간을 놓치고 하나님 없이 남게 된 이들도 위해 기도하라. 이제 이 사람들은 회개하고 있지만, 이미 소용이 없다. 모든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이 기도하십시오. “주 예수 그리스도여,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자신과 당신의 기도를 청한 이들, 그리고 온 세상을 위해 기도하게 됩니다.

 — 게론다, 저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지만, 하나님께 그들을 도와달라고 간구할 만큼의 담대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마음속에서 이런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이 이토록 부족한 나를 들어주실까요?”

 — 그러니 ‘오른쪽’에서 다가와 네 ‘겸손한 척’을 빌미로 너를 절망에 빠뜨리는 그 헛소리를 듣지 마라. 이렇게 말하라. “나의 하나님, 저는 믿음이 약하지만, 제 말을 들어주소서. 저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고통받는 것은 불공평할 테니까요.” 어느 날 심한 가뭄이 들었을 때, 아토스 산의 한 수도사[97] 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나의 하나님, 부디 사람들에게 비를 조금 내려 주십시오. 우리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수도사로서 고행하며 살겠다고 서약했습니다. 고통받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결핍[98] 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도 무언가를 베풀고 있습니다. 만약 제가 영적으로 올바른 상태에 있었다면, 주님께서는 제 기도를 들어주셨을 것이고 사람들은 고통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큰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저 때문에 다른 이들이 고통받는 것이 과연 공정한 일입니까? 그러니 그들을 도와주십시오! 그들에게는 기도할 시간이 남아 있지 않으니, 제가 할 수 있는 한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한 시간 반 뒤,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마케도니아 전역과 테살리아, 아폰 산 위로 말이죠!

 — 게론다, 평화를 위해 기도할 때면, 내 마음속에서 ‘내가 ‘내 죽은 자’를 내버려 두고 남의 죽은 자를 묻으러 가니, 하나님께서 나를 혐오하신다’는 생각이 듭니다.[99]

 — 네가 수녀 서원을 할 때 ‘네 죽은 자’를 장사 지내지 않았느냐? 이렇게 기도하라. “나의 하나님, 저는 주님의 종으로서 주님께서 제 기도를 들어주실 자격이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그렇게 고통받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주님께서 불쌍히 여기지 않으시겠습니까? 부디 그들을 도와주소서.” 사람이 사랑과 겸손으로 이웃을 위해 기도하고, 자신의 죄성을 자각하며 수련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서 등을 돌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도 도움을 주십니다. 그러나 만약 사람이 자신을 거룩한 자로 여기면서, 다른 이들은 죄인이라 여기며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면, 그는 하나님께 참으로 혐오스러운 존재가 됩니다.

 

남의 고통은 내 고통이 되어야 한다

— 헤론다, 선생님께서 한때 우리에게 “기도 공동체”를 조직하겠다고 약속해 주셨는데요. 언제 이루어질까요?

 — 여러분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제가 다음에 이곳에 올 때, 여러분이 어떤 상태에 있을지 보겠습니다… 만약 기도가 고통 속에서 드려진다면, 그 기도가 얼마나 큰 힘을 갖게 될지 아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세상의 필요를 위해 기도할 때, 그 순간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며 여러분과 같은 파장에 있는 사람들은 그분으로부터 도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저는 기도하는 영혼들을 느끼며, 그들의 기도를 강력한 전파처럼 감지합니다. 종종 저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은 특정 환자가 정확히 어느 날, 어느 시간에 기도했는지도 알아차리곤 합니다.

 — 게론다, 당신이 기도해 주시는 분들은 그 기도를 느끼시나요?

 — 네, 느낍니다. 마치 발밑의 땅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것처럼, 그들은 경외감에 사로잡힙니다. 자비로운 마음으로 기도할 때면, 낯선 사람들조차도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 게론다, 타인을 위한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가장 기쁘게 여겨질 때는 언제입니까?

 — 그 기도가 타인에게 얼마나 필요한지 느낄 때입니다. 이는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의 입장에 서 볼 때 일어납니다. 만약 우리가 병자나 고인의 입장에 서 본다면, 이는 우리가 연민을 품고 기도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연민이 마음속으로 스며들면, 우리의 기도는 진심 어린 기도가 됩니다.

 — 게론다, 제가 온갖 생각에 빠져 있을 때는 기도할 수가 없어요.

 — 왜 그래, 나의 착한 아이야, 너는 왜 그렇게 자기 자신에만 집착하는 거니? 왜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조금이라도 생각하지 않는 거니? 얼마나 많은 가정이 해체되고, 얼마나 많은 불우한 아이들이 거리에서 ‘자라나며’,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어머니의 보살핌 없이 고아원에서 살고 있는지 알고 있니? 생각해 봐, 바로 이 순간에도 “도와주세요!”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 그런데 곁에는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얼마나 많은 사람이 바다에서 익사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며,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받고 있는지? 세상에는 수도사들의 기도가 필요한 사람들이 그토록 많은데, 우리는 귀중한 시간을 헛된 생각이나 유치한 투정에 낭비하고, 심지어 수도 규칙조차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있다. 그러니 주의하라: 너의 ‘나’라는 경계를 벗어나, 타인의 고통이 너의 고통이 되게 하라. 그렇게 행할 때, 너 자신도 평화를 얻게 될 것이며, 하나님께로부터 상을 받게 될 것이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을 줄 것이다.

 내가 당시 개별 거주를 실천하던 필로페이 수도원에 살았을 때,[100] 어느 날 밤, 나는 방에서 기도하고 있었는데, 어떤 곤경에 처한 사람이 수도원에 온 것을 느꼈다. 그는 악령에 사로잡힌 불쌍한 사람이었다. 수도원 문은 해가 지면 닫히고 다음 날 아침에야 열렸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 나는 생각했다. — 그에게 적어도 먹을 것을 조금이라도 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아침까지 굶주린 채로 거기 앉아 있어야 할 텐데?” 그때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식량 창고로 가서 식료품을 몇 가지 챙겼고,[101] 그것들을 바구니에 담아 끈을 묶은 뒤, 바깥으로 난 내 창문 밖으로 바구니를 내려보냈다. 나는 그 후로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을 정도로 불안한 상태였다. 밤새도록 나는 연민을 품고 기도했다. “오, 주님, 저는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습니다; 제가 주님께 당신의 피조물을 도와달라고 간구할 자격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가 저 때문에 고통받는 것이 과연 공정한 일입니까?” 아침이 되어 수도원 문이 열리고 그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을 때, 그는 건강해져 있었습니다. 그는 성당에 들어가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악령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 게론다, 어떤 고통받는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 기도하는 이의 마음은 그리스도께로 향합니까, 아니면 이웃의 고통으로 향합니까?

 — 이웃을 위해 도움을 구할 때, 그리스도께 구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기도는 인간의 고통에 대한 생각에서 시작되지만, 결국 그리스도께로 향합니다.

 — 게론다, 제 마음이 굳어질 때면, 제가 겪었던 여러 가지 어려움을 떠올리며,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을 도와주시기를 하느님께 청합니다.

 — 그건 옳은 일입니다. 그것이 다른 사람을 더 잘 이해하고 그와 공감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나의 하나님, — 이렇게 말하십시오. — 주님께서 저에게 많은 은혜를 베푸셨으니, 저보다 더 나은 제 형제에게도 도와주소서.”

 — 게론다, 어떤 사람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면서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고통을 허락하지 않으시기를 간구하는 것은, 어쩌면 잘못된 것일까요?

 — 아니요, 축복받은 영혼이여, 그것 또한 자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사람이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품고 있을 때 기뻐하십니다. 하지만 결국 하나님께서는 영혼에 유익한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구체적인 필요와 온 세상을 위한 기도

— 헤론다, 예배가 끝날 때쯤이면 계속 졸음이 몰려와서 기도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을 때면 속상합니다.

 — 졸음을 떨쳐내려면, 영적으로 당신을 깨울 수 있는 것에 대해 묵상해 보세요.

 — 헤론다, 사람들의 고통보다 더 강하게 마음을 깨울 수 있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 네 말이 맞다. 하지만 사람들의 고통을 ‘전반적으로’ 생각한다면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차라리 매우 힘든 처지에 있는 구체적인 사람들을 떠올려 보아라. 그렇게 하면 그들에게 연민을 느끼게 될 것이고, 네 기도는 진심 어린 것이 될 것이다. 네 마음을 가장 많이 뒤흔드는 어떤 사건을 출발점으로 삼고, 그다음 다른 고통받는 이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라. 예를 들어, 어떤 전쟁이든 부상자가 많이 발생한다. 네가 그들을 직접 보지 못하더라도 모든 피해자들에게 공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직접 보지 않고는 그들에게 공감하기 어렵다면, 이렇게 해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손가락을 베는 것을 보았을 때,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 얼마나 아플까! 만약 손가락을 베는 정도가 아니라 장애인이 되어 팔이나 다리를 잃었다면 어땠을까?! 세상에 팔이나 다리가 없는 그런 불쌍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살고 있을까!..” 인정하겠지만, 뉴스에서 기차가 선로를 이탈했다는 소식을 듣는 것과 눈으로 직접 선로 밖으로 굴러떨어진 열차와 수많은 사망자 및 중상을 입은 사람들을 목격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이렇게 구체적인 고통에 대해 아픔을 담아 기도함으로써, 당신은 스스로도 도움을 받고 이웃을 돕는 것입니다.

 — 게론다, 프로스코미디아 때 종소리가 울리면,[102] 저는 구체적인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예를 들어 과부, 고아, 외로운 사람들… 이런 식으로 일반적으로 기억합니다. 이것이 옳은가요?

 — 저도 그렇게 합니다. 하지만 그들을 가슴 아파하며 기억하십시오. 또한 사제도 프로스코미디아에서 단순히 형식적으로 이름을 읽고 성체를 꺼내서는 안 됩니다. 아닙니다. 각 사람에 대해 가슴 아파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기도한다면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어느 날 한 사제에게 귀신 들린 사람이 데려와져 와서 전례를 집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사제는 성체 성사 중에 그를 기억하며, 성체를 꺼내기 전에 깊은 연민을 담아 말했습니다. “주님, 주님의 피조물이 얼마나 고통받고 있는지 보시옵소서!.. 그를 악마의 권세에서 해방시켜 주소서. 주님, 당신의 종을 기억해 주소서…” 그러자 악마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그 불쌍한 사람에게서 빠져나왔다.

 — 헤론다, 한 가지 일에 대해 오랫동안 기도하는 것이 더 나을까요, 아니면 한 청원을 다른 청원으로 넘기며 온 세상을 향해 연민을 품는 것이 더 나을까요?

 — 굳이 한 가지 주제로만 제한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여러 가지를 구하는 편이 낫습니다. 이것, 저것, 또 다른 것… 한 기도가 다른 기도로 이어지게 하십시오… 그리고 이러한 다양한 기도를 마친 뒤에는 온 세상의 공통된 고통에 대해 묵상하며 기도하면 됩니다. 그런 기도는 고귀함이 담겨 있기에 하느님을 감동시킵니다.

 — 헤론다,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 무엇을 구해야 할까요?

 — 모두를 위해 “선한 낙원”을 구합시다.[103]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도록, 그분께 가까운 자든 멀리 있는 자든 모두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사랑하며, 그분께 기쁨을 드리고 구원받기를, 즉 낙원에 들어가기를 기도합시다. 어떤 사람[104] 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나의 하나님, 저는 이미 낙원에서 살았습니다 — 바로 이 땅에서요. 그러니 제가 죽은 후에는 제 형 대신 저를 지옥으로 보내시고, 형은 낙원에 모시어 주십시오.” 비록 그런 사람이 지옥에 가게 된다 해도, 그의 위대한 사랑 덕분에 그가 있게 될 그 작은 지옥의 한 구석이 낙원으로 변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계시고,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에는 낙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청하는 이들을 위한 기도

— 헤론다, 누군가 우리에게 예를 들어 “시험을 치르는 제 아이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라거나 “수술을 앞둔 어떤 사람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라고 부탁할 때, 나중에 일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물어봐야 할까요?

 — 왜 그런 것을 물어봐야 합니까? 나중에 “하나님, 제 기도가 효력을 발휘했으니 영광을 받으소서”라고 자랑하려고요? 기도했습니까? 해야 할 일을 했습니까? 그 외에는 당신에게 요구되는 것이 없습니다.

 — 게론다, 다른 사람들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한 사람들을 위해 어떻게 기도하시나요?

 — 수술 전[105] , 제게 건네준 쪽지들은 서서 읽으며 가끔 땅에 엎드려 절을 하곤 했습니다. 병원에서 돌아온 후에는 누워서 읽기 시작했고, 기분이 좀 나아지자 다시 서서 쪽지들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 게론다, 어떤 순례자들이 기도를 부탁하는 쪽지를 남겨두는데, 우리가 그들의 필요를 알지 못할 때, 어떻게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까?

 — “주님, 주님께서 친히 아시는 궁핍에 처한 주님의 종들을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하십시오.

 — 헤론다, 우리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때 그들이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 이렇게 말하십시오. “주 예수 그리스도여, 주님의 종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 헤론다, 가끔은 특정 날짜와 시간에 어떤 구체적인 일에 대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던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잊을 때가 있습니다.

 — 그들을 먼저 기억하며 기도를 시작하고 이렇게 말하십시오. “주님, 우리 같은 합당치 못한 자들에게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명하신 주님의 종들을 기억해 주십시오.”[106] 그들의 이름을 두세 번 언급한 다음, 온 세상을 위해 기도하며 이렇게 말하십시오. “주 예수 그리스도여, 주님의 종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 가끔은, 게론다, 저에게 기도해 달라고 부탁한 사람들의 이름을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 이름을 잊어버렸다면, 비슷한 필요를 가진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예를 들어, 병든 자들, 올바른 길에서 벗어난 젊은이들, 그리고 그와 유사한 경우들 말입니다. 기도의 시작에 이렇게 말하십시오. “나의 하나님, 무엇보다도 다른 이들보다 도움이 더 절실한 이들을 먼저 도와주소서.”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계속하십시오. “주님의 종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 헤론다, 저는 제 기도를 부탁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그들의 필요에 따라 분류합니다. 건강을 위해, 깨달음을 위해 등등요. 하지만 이름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 이름들을 언제까지 기억하며 기도해야 합니까?

 — 먼저 새로운 이름들을 기억하고, 그 다음에 “주 예수 그리스도여, 주의 종들과 주의 온 세상을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덧붙이십시오. 그래야 당신의 기도 열차가 승객 몇 명만 태우고 출발하는 일이 없으니까요.

 — 게론다, 누군가 어떤 필요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할 때, 얼마나 오랫동안 기도해야 합니까?

 — 어떤 곤란인지, 그리고 그 사람에게 얼마나 연민을 느끼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곤란이 그리 크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 사람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서 몇 년 동안이나 그를 위해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반면, 묵주 한 번 돌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경우도 있습니다.

 — 그렇다면 헤론다, 제가 누군가의 부탁을 위해 충분히 기도했다는 징후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 마음이 평온한 상태일 때는 기도하십시오. 기도에 과도한 고뇌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기도의 길이는 당신이 얼마나 시간을 낼 수 있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하지만 명심하십시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얼마나 기도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기도하느냐입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 때문에 잘 기도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고통 없이 드리는 그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반면 다른 사람은 기도하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더라도, 통회와 겸손으로 드리기 때문에 진정한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물론 양과 질이 모두 갖춰진다면, 신실한 영혼은 하나님으로부터 두 배의 은총과 축복을 받게 됩니다.

 — 게론다, 수도원에 많은 고통을 안고 온 사람들이 저에게 기도해 달라는 쪽지를 남길 때면, 저는 그들을 생각하며 가슴 아파합니다. 하지만 그 후 그들의 고통이 요구하는 만큼 그들을 위해 기도할 시간이 부족해서, 이 점이 저를 당혹스럽게 합니다.

 — 사람이 당신과 자신의 아픔을 나누고, 당신은 그 말을 경청하며, 당신의 마음은 보이지 않게 그를 위해 피를 흘립니다. 설령 그를 위해 기도할 시간이 부족하더라도, 그 흘린 피는 몇 시간의 기도보다 더 큰 가치가 있습니다. 바로 그 연민이 마음의 기도이며,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혹은, 예를 들어, 네게 건네진 쪽지를 읽으면서, 이 사람들을 위해 더 많은 것을 해줄 시간이 부족하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점을 이해해라: 가슴 아파하며 읽은 그 이름은 종이 조각에 적힌 것이 아니라 바로 하늘에 기록되어 있으며, 그것은 하나님의 보좌 바로 앞으로 올라간다!

 

병든 이를 위한 기도

— 게론다, 저는 지금 아픕니다. 병든 동안 어떤 규칙을 지켜야 할까요?

 — 가능하다면 조용히 교회 찬송가를 부르거나 예수기도를 드리며, 하나님께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건강을 구하십시오. 연약한 사람으로서 당신은 다른 이들보다 그들의 고통을 더 잘 느낄 수 있을 테니까요. 병중일 때 당신에게는 기도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이 주어집니다. 심지어 네 자신의 고통조차도,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아픔을 담아 기도하고, 네 기도가 진심 어린 것이 되도록 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전제 조건이다. 사실, 그런 기도가 바로 수도사의 가장 중요한 일이다. 이를 이해한다면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끊임없이 기도하게 될 것이다.

 — 게론다, 어떤 사람들은 병든 이들의 이름을 적은 쪽지를 써서 여러 수도원에 보내 기도를 부탁하기도 합니다.

 — 그건 좋은 일이지만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람들 스스로도 병든 이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며, 환자들에게도 기도를 잊지 말라고 권해야 합니다. 여러 수도원에 기도를 부탁하는 이름 목록을 보냈다는 사실로 스스로를 안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 게론다, 요즘 들어 장애인이 되어 큰 고통을 겪고 있는 제 동생을 하나님께서 데려가 주시기를 기도하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 하느님께 어떻게 하셔야 할지 지시해 드릴 필요는 없습니다. 그분께 맡기고, 그분께서 직접 문제를 해결하시도록 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자녀에게 무엇이 더 좋은지 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다정하고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이시니, 가장 좋은 방법으로 행하실 것입니다.

 — 게론다, 병든 사람에게 죽음의 위협이 닥쳤을 때 어떻게 기도하시나요?

 — 저는 제 힘껏 기도하고, 기도에 금식이나 절, 그 밖의 다른 것들을 더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본성상 선하신 하느님의 손에 모든 것을 맡깁니다.

 — 게론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 없이도 각 환자에게 무엇이 더 유익한지 아신다면, 우리가 왜 기도해야 합니까?

 — 우리는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만약 회복과 수명 연장이 영혼의 구원에 이바지한다면,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즉시 도와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병자를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면, 병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 진행될 것입니다.

 

고통 속의 기도 뒤에는 신성한 위로가 따른다

— 게론다, 사람들의 슬픔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저는 지쳐버립니다. 혹시 이것이 믿음이 부족한 징후일까요?

 — 보라: 믿음이 부족한 것은 자신에 대한 걱정이다. 타인에 대한 걱정은 연민이라 한다. 올바른 연민은 기도를 동반하며, 그 뒤에는 신성한 위로가 따른다. 그러니 할 수 있는 만큼 기도하고, 그 후 모든 것을 하느님의 손에 맡기고 마음을 진정시켜라. 생각해 보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조물을 너보다 덜 걱정하시겠느냐? 그렇다면 왜 네가 지쳐야 하겠느냐?

 영적으로 아파하고, 타인을 위해 고통받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큰 위로를 주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런 사람은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고통과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들이 보낸 산더미 같은 편지를 읽을 때 제가 얼마나 쓰라린지 아십니까? 그 쓰라림 때문에 저는 그 후로는 아무것도 먹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 속에서 진정한 기쁨이 태어납니다. 하나님께서는 고통에 상응하는 위로로 너에게 보답하시며, 네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강하게 위로해 주신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웃을 위해 기도하며 고통받고 울고 있었지만, 이제 너는 기뻐하고 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마치 너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하다. “내 자녀야, 그렇게 걱정하지 마라!.. 내가 이미 네 간구를 들었노라.”

 

 

제3장.
죽은 자를 위한 기도에 대하여

 

“죽음에서 생명으로 넘어가리라”

헤론다, 지금 아프십니까?

 — 글쎄, 네 생각은 어때? 만약 새벽 전에 죽는다면, 나에게는 위대한 날이 시작되는 거야: 저녁도, 아침도 없을 테니까! 그나저나, 내가 죽으면 태양은 네가 가져도 좋아![107]

— 헤론다, 영적으로 준비된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되면, 그 사람은 어떤 기분을 느끼나요?

 —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 헤론다, 아무도 당신께 말씀해 주신 적이 없나요?

 — “죽음에서 생명으로 넘어갔다,[108] ” —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 세상의 삶은 사실 죽음이고, 죽음은 참된 삶으로의 전환입니다. 따라서 영적으로 준비된 사람은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떠납니다!

 — 헤론다, 많은 성인들이 육신을 떠나는 영혼들을 보았습니다. 그 영혼들은 어떤 모습입니까?

 — 마치 아이들 같습니다. 결국 저 세상에서는 모두가 천사처럼 될 테니까요: 남자도, 여자도, 노인도, 늙은 여자도, 갓난아기도 없을 것입니다. 모두가 같은 성별, 같은 나이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 육신을 떠나는 영혼들을 볼 때, 마치 어린 아이들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각자의 얼굴에는 고유한 특징이 있지만, 그 모습은 마치 아이의 얼굴과 같습니다.

 제가 ‘성스러운 십자가’ 수도실에 살 때, 가끔 필라레트 장로를 찾아가곤 했습니다.[109] 그는 옆 수도실에 살던 경건한 장로였습니다. 15년 동안, 자신이 병에 걸리기 전까지 그는 파킨슨병을 앓고 있던 자신의 수련생 바르톨로메이 신부를 돌보아 주었다. 마지막으로 그의 방을 찾아갔을 때, 나는 그가 바닥에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넘어져서 일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벌써 한 달째 아무것도 먹지 않고 물만 마시고 계셨습니다. 누워 있을 수 없어 신발을 신은 채 벽에 기대어 앉은 자세로 주무셨습니다. 옷은 몸에 달라붙어 있었고, 신발은 온통 젖어 있었는데, 다리에 상처가 터져 고름이 흘러나왔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마치 별일도 아닌 듯 행동하셨습니다. “이 고통들도,” 그가 말하길,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입니다.” 나는 필라레트 신부님을 바닥에서 일으켜 세우고, 바르톨로메오 신부님께 그들을 돕기 위해 칼리바에서 하룻밤 묵게 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는 허락하지 않고 다음 날 다시 오라고 했다. 자정 무렵, 나는 묵주를 짚으며 기도하던 중, 필라레트 장로가 환한 얼굴을 하고 마치 열두 살 소년처럼 젊어진 모습으로 신성한 빛 속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가 주님께로 돌아가셨음을 깨달았다.

 — 게론다, 선종이 된 후 처음 40일 동안은 고인을 위한 기도를 더욱 열심히 해야 합니까?

 — 네, 죽은 이의 영혼은 어떤 심판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지 못해 떨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 수로티에서, 호텔 근처에서 나는 어느 날 한 노부인을 만났는데, 그녀는 나에게 축복을 받고 싶어 했습니다. 나도 그녀의 손에 입을 맞췄는데, 그 영혼 위에 하나님의 은총이 깃들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얼마 후, 그 여성은 수녀가 되었습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났을 때, 저는 이곳에 있었고 경건한 마음으로 그녀의 유해에 입을 맞췄습니다. 그 후 제게 두 가지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는 이곳, 이시하스티리아에서였고, 다른 하나는 제 칼리바에서였습니다. 첫 번째 일은 그녀가 세상을 떠난 지 7일 후에 일어났습니다. 저는 그녀의 영혼을 보았습니다. 그녀는 마치 천사 같았고, 열두 살짜리 소녀를 닮았으며 온몸에서 빛이 나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그녀가 꿈속에 나타나 감사의 마음을 담아 땅에 엎드려 절을 하며, 그녀를 위해 드린 제 기도에 감사해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매우 감동적이었고, 저는 큰 기쁨을 느꼈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날짜를 기록하려고 달력을 펼쳤더니, 그녀가 세상을 떠난 지 정확히 40일이 지났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수녀는 대단한 자비로움을 지녔던 분이었는데, 지금도 감사의 마음을 잊지 않고 계십니다.

 

항상 고인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 게론다, 납골당[110] 에서 램파드를 켜야 하나요?

 — 네, 그건 고인을 위한 공덕이니까요. 고인의 영혼은 단순히 촛불 하나만 켜주어도 큰 유익을 얻습니다.

 고인들을 기억하고 항상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들의 영혼을 위한 기도에 소홀하지 맙시다. 그들이 안식을 얻기를 빕니다. 제 칼리바에서 성찬식이 있을 때마다, 마지막에 저는 사제에게 위령 예식을 집전해 달라고 청합니다. 이 예식에서는 “우리가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 모든 고인들을 위한 기도가 드려집니다.[111] 아토스 산의 수도원들에서는 금요일 저녁에 고인을 위한 추모 예식을 콜리보와 함께 거행하고, 토요일 아침에는 대성당에서 아침 기도를 드린 뒤, 묘지 교회에서 성찬식을 거행합니다. 그곳, 묘지에서 우리 모두는 이 세상의 여정을 마치고, 이 “수도원”에서 다른 곳으로 떠날 것입니다.

 — 게론다, 고인을 위해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 일반적으로 이렇게 말하십시오. “하나님, 주님의 종인 고인들의 영혼을 안식하게 하소서.” 고인 중 누군가를 떠올리거나,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 중 누군가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같은 기도 속에서 그 영혼도 함께 기억해 주십시오.

 먼저 도움이 더 절실한 고인들을 기리고, 그다음 도움이 덜 필요한 이들을 기린 뒤, 마지막으로 돌아가신 친척과 가까운 이들을 기리는 것이 더 올바른 순서입니다. 예를 들어, 저는 친척들을 특별히 기억해 드리는 일은 거의 없지만, 혹시 피곤하거나 시간이 부족해 고인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으면 나중에 꿈에서 부모님을 뵙곤 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모든 고인들을 위해 기도할 때, 제 부모님도 도움을 받고 기뻐하시지만, 기도하지 않으면 아버지와 어머니도 그 위로를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미약하지만, 그조차도 가난한 고인들에게 도움을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 수도사들이 고인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 산 자들의 가죽을 벗기고 소금을 뿌려도 마땅합니다.

 

고인들은 기도가 필요합니다

— 게론다, 예배 중에 저는 주로 제 자신을 위해 기도합니다. 심지어 고인 추모 예배에서 “흠 없는 자들”[112] 이 낭독될 때조차도 저는 종종 제 자신을 위한 기도를 계속합니다.

 — 글쎄, 네가 모든 좋은 것을 오직 나 자신만을 위해 원하는 건가? 고인들은 우리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스스로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이 더 이상 없지만, 우리는 그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억나는 게 있는데, 아토스 산에 야니스 아저씨라는 평신도가 살았어요. 그는 수도원과 수도사들의 방을 돌아다니며 “할 일 있나요? 자, 어떤 일을 도와드릴까요?”라고 물었죠. 그는 너무나 착한 사람이라 수도사님들이 그에게 수도사가 되라고 권유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그는 이렇게 대답했죠. “아니요, 아니요!.. 그저 저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제가 얼마나 나쁜 놈이었는지 상상조차 못 하실 거예요! 전쟁 중에 제가 얼마나 많은 악행을 저질렀는지 아세요?” 어느 날, 제가 성서대를 만들 때 도와주던 그는 이렇게 부탁했습니다. “신부님, 저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저는 끔찍한 죄인이니까요.” 그 후 저는 그를 더 이상 보지 못했습니다. 얼마 후 어느 수도원의 수도사가 저에게 찾아와 말했습니다. “야니스 삼촌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분이 제게 두 번 나타나셔서, 당신께 고인들을 기리는 기도 중에 그분을 기억해 달라는 부탁을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사정은 이랬습니다. 야니스 삼촌은 수도사들을 돕기 위해 어느 수도원으로 갔습니다. 임종이 다가오자, 그는 묘지에서 봉사를 맡고 있던 수도사에게 말했습니다. “형제여, 나는 끔찍한 죄인입니다. 부디 매일 내 무덤에서 위령 예식을 집전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가 죽자, 그 수도사는 정말로 매일 저녁 와서 그의 무덤에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얼마 후 그 수도사는 아르콘다리크(arhondarik, 성당 관리실)에서 임무를 맡게 되었고,[113] 때때로 기도를 드리는 것을 잊곤 했습니다. 어느 날 밤, 꿈속에서 야니스 삼촌이 그에게 나타나 말했습니다. “제발, 나를 잊지 말아 주세요! 네가 직접 나를 위해 리티아를 집전할 수 없다면, 파이시 신부님께 가서 내가 죽었다고 말해 줘. 그분은 매일 나를 기억하시지만, 내 건강을 빌며 내가 회개하기를 기도하고 계셔. 하지만 나는 이제 더 이상 회개할 수 없어.”

 죽은 자에게는 산 자보다 기도가 더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산 자에게는 아직 회개의 희망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심판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죽은 자들을 위해 그분께 간구하는 사람들이 있기를 원하십니다. 한 번은 전쟁 중에 중상을 입은 병사가 신부에게 물을 달라고 부탁했지만, 신부는 물병에 물이 조금 남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지 않고 손을 저어 거절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부상병은 숨을 거두었고, 신부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자마자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그 사람을 위해 기도했고, 어느 날 제 칼리바에 찾아와 자신의 비통한 사연을 털어놓았습니다. 사실 이 신부님은 매우 상냥한 분이었고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어떻게 내가 그런 짓을 할 수 있었을까?!”라고 자문했습니다. 이 일은 하느님의 허락으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신부에게 잠시 동안 은총을 거두셨는데, 그 병사가 기도가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신부가 그에게 물을 주었다면, 곧 그를 잊어버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며, 그는 그 영혼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했습니다.

 

고인들에 대한 위로

— 게론다, 우리의 기도가 고인들에게 무슨 도움이 됩니까?

 — 이런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만약 언젠가 당신이 저를 찾아왔다가 제가 여기 있지 않고 습기 찬 지하실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면, 당신은 수녀원장님께 이렇게 부탁했을 것입니다. “장로님이 참 불쌍하네요! 살아 계시는 동안 햇볕을 볼 수 있도록 위층으로 옮겨 주세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수녀원장님께서 그 부탁을 들어주셨을까요?

 — 물론이겠지요, 헤론다.

 — 자, 보시다시피, 설령 수녀장님이 그렇게 해 주신다 해도, 우리가 그분께 간청할 때 하나님께서 친히 고인들에게 안식을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분께서 그들을 더 나은 환경의 방으로 옮기시거나, 심지어 가택 연금 상태로 두시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일까요?

 젊었을 때, 나는 엄청나게 인색한 한 할머니를 알고 있었다. 다만 저에게만은 인색하지 않았는데, 저를 무척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지 3년 후, 제게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제가 예수님의 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 마치 어떤 청년이 제 손을 잡고 그 할머니의 무덤을 찾아가자고 이끌며, 할머니께서 직접 저를 부르셨다고 설명했습니다. 무덤에 도착하자 그 청년이 묘비를 들어 올렸고, 나는 그녀의 시신이 반만 썩어 있으며 참을 수 없는 악취를 풍기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수도사님, 저를 구해주세요! 수도사님, 저를 구해주세요!”라고 소리쳤다. 나는 그녀가 너무 불쌍해서 그녀를 꽉 껴안고 입을 맞췄다. 끔찍한 냄새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녀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고, 만약 그녀가 스스로 떠나지 않았다면 나는 그녀 곁에 남아 있었을 것이다. 이 사건은 내게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겼다. 진정으로, 아픔을 동반한 사랑이라면 썩어가는 살점도, 악취도 혐오감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예를 들어, 세속적인 여성을 볼 때면, 유행에 맞춰 차려입고 향수 냄새가 나는 그녀에게 내면적으로 거부감을 느끼지만, 이 할머니와는 악취에도 불구하고 헤어지고 싶지 않았고, 그녀에게 특별한 연민을 느꼈다. 영적 삶에서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녀는 기도가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저에게 그녀를 그런 모습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후 저는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두 달이 지난 후, 저는 마치 깔때기 같은 어떤 심연 속에 있는 듯한 환상을 보았습니다. 불행히도 그곳에는 끔찍한 모습의 검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그들은 끔찍하게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심연 위, 밝은 구름 위에 그 노파를 보았습니다. 멀리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가까이 있었습니다. 노파는 아주 젊어 보였지만, 분명 그녀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녀 곁에는 천사가 떠 있었는데 — 아마도 그녀의 수호천사일 것이다 — 그가 그녀의 얼굴을 씻겨 주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평화로워 보였다. 나는 그녀를 껴안았고 기쁨을 느꼈다. 그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왜냐하면 죽은 자들은 재판을 받아야 할 사람들, 노예가 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가끔 나는 한 옛 민요를 떠올리며 흥얼거리곤 하는데, 여기서 ‘노예’는 죽은 자들을 의미한다:

 

 의지여, 의지여, 자유를 허락하소서

 고통받는 이 몸에,

 자유의지여, 자유의지여, 내게 목소리를 주오,

 내 안의 모든 것이 노래할 수 있게,

 불로 내 영혼을 따뜻하게 데워다오,

 바위보다 더 죽은 영혼을,

 나는 네 기쁨을 노래하리,

 봄의 꾀꼬리처럼.

 노래의 메아리가

 감옥의 벽 안에 갇힌 노예가,

 그리고 향유로

 기름으로 발라주게 하소서.

 

 나는 이 노래의 가사를 나 자신에게도 적용한다. 내가 고통으로 기진맥진하지 않은가?[114] 이 세상에서 나는 노예다. 그리고 노래에서 노예화된 엘라다를 가리키는 “감옥의 벽 안에 갇힌 노예”는, 나에게 있어서는 포로로 잡혀 있는 고인들이다. 나는 자비로우신 하나님께, 그분께서 그들의 마음에 자비의 기름을 부어 주시기를 간구한다.

 

 

제4장.
시편이 마귀를 타격하는 번개라는 사실에 대하여

 

다윗의 시편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여졌다

헤론다, 아이들이 시편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얼마나 읽고 싶어 하는지 정말 놀랍습니다!..

 — 시편은 어떤 연령대에게도 적합합니다. 아이들은 당신이나 저보다 시편을 훨씬 더 좋아할 수도 있습니다. 시편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여졌으며, 신성한 계시에 따라 기록되었기 때문에 그토록 강력하고 심오한 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설령 모든 신학자와 문헌학자를 한데 모은다 해도, 그런 내용을 담은 시편 한 편도 쓰지 못할 것입니다. 무언가를 쓴다 해도 그것은 마치 플라스틱 꽃과 같을 것입니다. 선지자 다윗은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했지만, 얼마나 깊은 통찰력으로 썼는지요! 그분을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의 성령이셨음이 분명합니다.

 — 게론다, 시편을 읽을 시간이 부족합니다.

 — 낮에 시편을 읽을 시간을 조금이라도 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시간이 없다면, 서둘러 시편 전체를 읽는 것보다[115] 의미를 짚어가며 카피즈마의 절반을 읽는 편이 낫습니다. 읽은 내용을 마음에 새기고 그것에 대해 묵상하십시오. 시편은 기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선지자 다윗을 잘못 이해하고, 그의 시편 중 일부에 저주가 담겨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다윗이 이렇게 기도할 때:

 “죄인들이 땅에서 사라지고, 불의한 자들이 없어지기를, 마치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116] ”라고 할 때, 그는 죄인들이 멸망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회개하여 땅에 죄인이 없어지기를 바라는 뜻입니다.

 저는 시편을 읽을 때 기쁨을 느낍니다. 그곳에는 곳곳에 예언이 있고, 곳곳에 위로가 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 시편을 읽으면 안도감과 해방감, 그리고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얻게 됩니다.

 “의인들의 구원은 주님께 있으며, 그들의 보호자는 환난 때에 계시니,[117] ”라고 그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 아르세니우스의 『상황별』 시편 읽기[118]

 — 게론다, 성 아르세니우스의 『상황별 기도문』을 참고하여 시편을 읽게 되신 계기는 무엇입니까?

 — 성 아르세니우스는 사람들이 그에게 찾아와 상담하는 다양한 상황에 맞는 기도를 예배서에서 찾지 못하자, 여러 시편을 활용하셨습니다. 한 공책에 어떤 상황에서 어떤 시편을 읽어야 하는지 기록해 두셨습니다. 그 공책이 제 손에 들어오자, 저는 그 지침에 따라 시편을 읽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제 마음속에서는 시편을 통한 기도에 성 아르세니우스께서도 큰 도움을 주시고 계신다고 말해줍니다.

 — 게론다, 지금 성 아르세니우스가 우리에게 더 큰 도움을 주시는 것은, 우리가 그분 자신도 기도하셨던 방식 그대로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보시기 때문입니까?

 — 네, 물론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예들도 있습니다!

 — 게론다, 시편을 어떻게 읽어야 하고, 어떤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 기도해야 하나요?

 — 당신은 어떻게 읽고 있나요?

 — 먼저 ‘상황’에 대한 지침을 보고, 그다음에 시편 자체를 읽습니다.

 — 아니요, 먼저 제대로 된 준비가 필요합니다. 성 아르세니오스께서는 성인이셨기에 바로 시편을 읽으실 수 있는 경지에 이르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과연 처음에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119] 를 읽지 않을 건가요? 그리고 시편을 읽은 뒤에는 찬미를 읽지 않을까요? 몇 번 절을 하지 않을까요? 그러니 먼저 제50편 시편을 읽고 겸손히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십시오. 그다음 성모송 “당신의 자비로 피신하오니, 성모님”과 성 아르세니오를 위한 트로파르를 바쳐,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님과 성 아르세니오의 도움을 청하십시오. 그다음 기도하고자 하는 내용을 밝히고, 그에 해당하는 시편을 읽으십시오. 마지막에 “영광… 그리고 지금도…,”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주님께 영광을 돌리나이다, 하느님” (세 번)을 낭송하고, 마지막에는 그리스도께 감사를 드리는 찬송과 성모님께 감사를 드리는 “합당하도다”를 낭송하십시오. 그리고 할 수 있는 만큼 절을 하십시오.

 — 게론다, 저는 시편과 성 아르세니오스가 그것을 사용했던 상황 사이의 연관성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항상 그 연관성을 발견하지는 못합니다.

 — 구체적인 필요에 대한 지침은 시편의 의미와 대략 일치합니다. 하지만 성 아르세니오스께서는 일치의 정확성이나 시편의 내용이 상황에 얼마나 문자 그대로 부합하는지를 더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분께는 바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 게론다, 먼저 ‘상황’에 대한 몇 가지 지침을 읽고, 그다음에 해당 시편들을 모두 함께 읽어도 될까요?

 — 몇 가지 지침을 한꺼번에 읽기 시작하면 잊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시편을 읽기 전에 각 지침을 따로 읽는 편이 낫습니다. 그래야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열심이 깨어납니다. 사람이 어떤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 기도할 때, 이는 마음의 기도에 큰 도움이 됩니다.

 — 헤론다, 예배 중에 시편 낭독에 집중하기가 어렵습니다.[120]

 — 셀에서 ‘상황별 지침’을 참고하여 그날 읽힐 시편에 대한 지침을 확인한 뒤, 구체적인 필요를 위해 기도하면 됩니다. 만약 어떤 필요가 어떤 시편과 관련되는지 잊어버렸다면, 이렇게 말하십시오. “나의 하나님, 이 시편과 관련된 필요를 도와주소서,”라고 말한 뒤 예수기도를 드리십시오.

 

여러 가지 필요를 위해 기도합시다

— 게론다, 봉사를 마치고 제 방으로 돌아오면 보통 묵주를 짚으며 여러 가지 필요를 위해 기도합니다. 혹시 각 상황에 맞는 시편을 몇 편씩 읽는 것도 저에게 도움이 될까요?

 — 원한다면 한번 해보세요, 도움이 될 거예요. 먼저 시편에 붙은 지침, 즉 어떤 곤란한 상황에서 그 시편을 읽어야 하는지 읽어보고, 그다음 묵주를 짚으며 구체적인 필요를 위해 기도한 뒤, 그제서야 시편 본문을 읽으세요. 시편은 진심 어린 기도에 큰 도움이 되는데, 나중에 당신도 그 사실을 깨닫게 될 거예요. 저는 “상황”을 살펴본 후, 마음의 기도를 드리며 한 가지 구체적인 필요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필요를 위해 기도합니다. 즉, 성 아르세니우스의 “상황”에서 시작하여 간구를 넓혀, 물질적인 필요뿐만 아니라 영적인 필요에도 적용합니다. 예를 들어, 성 아르세니우스가 나무와 포도나무를 심을 때 열매를 맺게 해 달라고 기도하며 읽었던 첫 번째 시편에 대해, 저는 먼저 “주님, 심는 모든 것이 싹트게 하소서”라고 말합니다. 그 후 저는 시작되는 모든 선한 일에 대해 기도합니다. 저는 이렇게 간구합니다. “주님! 태어나는 아이들이 거룩해지기를, 그들이 자라나 번영하기를. 뿌려지는 모든 영적인 말씀과 시작되는 모든 영적인 일이 열매를 맺게 하소서.” 신성한 깨달음에 대해 읽는 시편 105편을 시작할 때, 저는 육체적으로 눈먼 이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리고 눈먼 자들에 대해 읽는 시편 122편에서는,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깨우쳐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간단히 말해, 성 아르세니우스의 ‘상황들’로 기도를 시작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른 필요 사항들도 보고 그것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너도 마찬가지다. 영적 수행을 하고 싶다면, 시편집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시편과 성 아르세니우스의 모든 “상황”을 취하여, 이를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영적인 것에도 적용하며 진심 어린 기도를 드려 보라. 한번 시도해 보자. 지금 당장 ‘상황들’에 나오는 성 아르세니우스의 가르침 중 하나를 골라, 이 시편을 읽으면서 또 어떤 것에 대해 기도하고 싶었는지 말해 보세요.

 — 글쎄요, 예를 들어, 헤론다님, 최근에 제 귀가 아파서 성 아르세니우스가 귀머거리들을 위해 읽었던 95편 시편을 읽었습니다. 그때 저는 제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귀머거리들을 위해, 아이들이 부모님의 말을 잘 듣도록, 그리고 수련생들이 스승님께 순종하도록 기도했습니다.

 — 보시다시피, 이러한 어려움을 직접 겪고 고통받았기 때문에, 같은 어려움을 겪는 다른 사람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비록 그들이 겪는 어려움을 직접 경험하지는 않았더라도, 모든 사람에게 연민을 느낄 수 있도록 노력하십시오. 그렇게 점차적으로 너는 가까운 사람이나 먼 사람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에게 연민을 느끼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며, 그들을 위해 진심 어린 기도를 드리게 될 것이다. 네 마음은 그들을 위해 아파할 것이며, 그 아픔에서 기도가 솟아날 것이다.

 — 게론다, 제가 시편의 가르침을 읽으며 다른 비슷한 필요 사항들을 떠올리려고 노력할 때, 머릿속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 “또 무엇을 위해 기도할까” 하고 상상할 필요는 없습니다. 기도의 계기는 순식간에 마음속에서 저절로 솟아나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에게는 이 점이 더 쉽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사람들과 많이 교류하고, 그들의 고통과 필요를 눈앞에 두고 있으며, 그들에게 연민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매번 구체적인 사람들의 구체적인 상황을 바탕으로, 저는 잘 알려진 시편 속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깊이를 발견합니다. “상황에 따라” 기도할 때, 저는 먼저 아는 사람 중 한 명을 떠올린 다음, 같은 필요를 가진 낯선 모든 사람들에게도 기도를 확장합니다. 여러분도 무관심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이 얼마나 고통받고 있는지 생각하십시오. 그래야 여러분의 기도가 진심 어린 기도가 될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이 그 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시편을 통한 기도

— 오늘날 기도에 대한 필요성은 매우 큽니다. 지금 유일한 출구는 기도뿐이며, 기도 없이는 좋은 일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시편에는 엄청난 힘이 있습니다. 시편은 마귀를 타격하는 번개와 같습니다. 시편에서 얼마나 큰 위로를 얻는지 모릅니다! 저는 시편을 세 부분[121] 으로 나누어 매일 한 부분씩 읽습니다. 사흘 만에 시편 전체를 다 읽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합니다. 저는 성 아르세니우스가 시편에 붙인 ‘해설’을 읽고, 해당 필요 사항과 육체적·정신적으로 고통받는 모든 이들을 위해 진심 어린 기도를 드립니다. 그다음 시편을 읽고, 각 시편의 끝마다 “하나님, 주님의 돌아가신 종들을 안식하게 하소서!..”라고 덧붙입니다. 시편을 읽는 그 한 시간 반은 제가 세상에 도울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입니다. 겨울에는 탈장으로 심하게 고통받았지만, 서서 시편을 읽었습니다. 견딜 수 없는 고통에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한 손으로는 탈장을 누르고, 다른 손으로는 시편을 들었습니다. 저는 전선에서 대포를 쏘는 포병처럼 느껴졌는데, 다만 제가 쏜 대상은 마귀였습니다. 낮에는 시편으로 정밀 사격을 가했고, 밤에는 예수님의 기도로 방어 태세를 유지했다. 마귀는 격분했고, 이 탈장은 그의 복수였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 지켜보시기 위해 이 연약함을 허락하신 것이다.

 — 게론다, 저는 무언가에 기대지 않고 서서 시편을 읽기가 힘듭니다.

 — 당신의 ‘성령의 성전’[122] 도 비계로 받쳐 줘야겠군요. 제가 제 자신을 위해 만든 것과 같은 지팡이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손잡이에 판자를 못으로 박아 ‘T’자 모양을 만들었습니다. 시편을 읽을 때 그 지팡이에 기대고 있습니다. 제 방에 하나, 길거리에 하나씩 있습니다.

 — 게론다, 가끔은 기진맥진한 상태에서도 시편을 읽으려고 애쓰곤 합니다. 피곤해서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지만요. 그래도 억지로라도 서서 읽으려 노력하는데, 그렇게 하면 도움이 된다는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런 기도가 ‘그다지 가치가 없다’고 속삭입니다.

 — 네가 읽는 내용을 이해하지 못할지 몰라도, 그런 기도는 여전히 값진 것이다. 왜냐하면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네가 스스로를 다잡고 그리스도 앞에 서 있기 때문이다. 수고가 기도의 필수 조건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라.

 

 

제5부.
예수님의 기도와 정신 차림

“우리는 그리스도의 가장 달콤한 이름을 여러 번 되뇌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처음에 우리의 말을 듣지 못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그분과 하나가 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제1장.
예수 기도의 힘에 대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여,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헤론다, 예수 기도는 어떻게 외우는 것이 가장 좋을까요?

 — “주 예수 그리스도여,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전체를 외우는 것이 더 좋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기도에는 우리의 모든 신학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123] 하지만 전체를 외우기 어렵다면, “주 예수 그리스도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하십시오.

 — 헤론다, 기도는 성삼위의 세 위격 모두에게 드려야 한다는 글을 읽었습니다.[124] “주 예수 그리스도여”라고 말할 때, 우리가 그리스도께만 기도하는 것이 아닌가요?

 —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 아버지께서 세상에 보내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스스로를 희생제물로 바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 그리스도 아니십니까? 세상을 심판하실 분도 그리스도 아니십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 그리스도께 간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그분을 통해 세상의 구원을 확립하셨기 때문입니다.

 — 헤론다, “주 예수 그리스도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말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여, 나를 깨우쳐 주소서”라거나 “나를 용서하소서” 또는 “나를 덮어 주소서”라고 말하는 것이 옳은가요?

 — 관례대로, 마지막에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덧붙여 기도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에는 “구원하소서”, “깨달음을 주소서”는 물론, 육신의 필요와 정욕으로부터의 해방에 대한 간구까지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주 예수 그리스도여, 저에게 깨달음을 주소서”나 “저를 용서하소서”라고 말해야겠다고 느낀다면, 그렇게 해도 됩니다.

 — 헤론다,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한 뒤에 항상 “죄인인”이라고 말해야 하나요?

 — 처음에는 몇 번 말할 수 있지만, 그 후에는 매 기도마다 반복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의 죄성을 자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 게론다, 저는 예수님의 기도를 드리는 것보다 성모 마리아나 성인들의 묵주를 읊는 것이 더 편합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 정상인가요?

 — 성모 마리아와 성인들에게 드리는 기도와 예수님의 기도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이는 서로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다른 의미를 지닙니다. 이를 통해 사람은 그리스도와 하나 되고, 마음은 하느님과 하나 됩니다. 그러나 마음은 기도 속에 머물러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 예수님의 기도의 비밀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성자나 저 성자를 위해 묵주를 많이 짠다면 그것도 좋지만, 그것으로 끊임없는 기도를 얻을 수는 없다. 마음속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여”라는 말에 수없이 몰입할 수 있도록 예수님의 기도를 더 많이 드리는 습관을 들이라. 그러면 자연스럽게 끊임없는 기도 속에 머물게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 기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여,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말로 제한되는데, 우리는 이 말을 온 마음과 온 영혼과 온 생각으로 외쳐야 합니다.[125] 반면, 우리가 어떤 성인이 개입하여 우리의 필요를 도와주기를 청하고자 할 때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물론, 이 모든 말은 제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제게 도움이 되는 바를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하나 되기 위해 예수님의 기도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오직 이것만이 가치를 지니는데, 이는 사람이 하나님의 영과 친밀해지고 영으로 하나님과 연합하게 되며, 이것이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 일종의 신성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가장 달콤한 이름을 여러 번 되뇌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처음에 우리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그분과 하나가 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이시며, 우리의 모든 길은 그분께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마귀를 대적하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 게론다, 저는 어떤 유혹이나 어려움 앞에서도 무력감을 느낍니다.

 — 예수 기도를 드리지 않습니까? 위험에 처한 배들이 SOS 신호를 보내는 것처럼, 당신도 끊임없이 “주 예수 그리스도여,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되뇌십시오. 그러면 도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126]

 예수님의 기도가 아니었다면, 원수는 언젠가 나를 심연으로 떨어뜨렸을 테지만, 기도가 나를 구원해 주었습니다. 제가 스토미온 수도원에 살 때, 어느 날 저녁 절벽 가장자리의 위험한 곳에 있는 동굴로 갔습니다. 그 동굴은 매우 작아서, 제가 앉아서 간신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입구 앞에 돌을 쌓아두었는데, 아래로는 심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밤새도록 나는 예수님의 기도를 드렸다. 새벽녘, 고요함 속에서 갑자기 내 귀 바로 위에서 비명 같은 닭 울음소리와 미친 듯이 날개를 퍼덕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예기치 못한 일에 깜짝 놀라 “주 예수 그리스도여!”라고 외쳤습니다. 밖으로 뛰쳐나와 간신히 심연의 가장자리에 발을 디뎠습니다. 그때야 비로소 이것이 악마의 유혹임을 깨달았습니다. 귀가 윙윙거려 끔찍했지만, 저는 계속 기도했습니다.

 — 게론다, 사람이 마음은 쓰지 않고 입으로만 예수 기도를 드릴 때,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 그런 기도에서도 어느 정도는 효과가 있습니다. 물론 그런 기도가 원수를 쫓아내지는 못하지만, 마치 기관총 연사처럼 원수를 참호 속에 가두어 머리를 내밀지 못하게 만듭니다.

 기도는 위대한 힘을 지니고 있으며, 마귀를 대적하는 무시무시한 무기입니다. 기도를 외울 때, 마치 영적인 총알로 마귀를 쏘는 것과 같아서, 마귀는 당신에게 다가올 수 없습니다. 어느 날, 성 안나 은수원에 살던 한 수련자가 예수 기도를 드리고 있었는데, 마귀가 그를 놀리며 끊임없이 “마이! 마이! 마이-이-이!..” 그러자 그 수련자는 마귀가 “이 늙은 여자의 은둔처[127] 로 가려고 해도 수도사들이 나를 가만히 다가가지 못하게 막는다.”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 게론다, 사악하거나 모독적인 생각이 나를 압도할 때에도 불구하고 내가 기도를 드리려고 노력한다면, 혹시 이로 인해 내가 하나님의 진노를 자초하는 것은 아닐까요?

 — 그렇지 않다. 탕갈라슈카는 자신의 악의로 인해 사악한 생각을 뿌리지만, 너는 이를 끊임없는 기도에 대한 교훈으로 삼아라. 그에게 이렇게 말하라. “네가 나에게 이런 생각들을 가져다준 것이 다행이다. 내가 하나님을 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도를 드려라. 탕갈라슈카가 이것이 너에게 유익이 된다는 것을 보게 되면, 스스로 물러날 것이다. 그런 생각이 너에게 기도의 계기가 되는 것은 그에게 유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물러나서 더 이상 너를 유혹하지 않을 때, 그때야말로 네가 끊임없는 기도를 이룬 것이다.

 어쨌든, 악마는 스스로 원치 않으면서도 큰 유익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용납하시는 것이다. 내가 이베르스키 스키트에 살 때,[128] 어느 날 밤 탄갈라쉬족이 바위 조각으로 나를 죽이려 했다! 저녁에 한 가난한 사람이 칼리바에 찾아왔다. 저는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그에게 주었고, 그는 떠났습니다. 밤이 되자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사람이 제게 돈이 더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다시 돌아온 줄 알았습니다. “누구세요?”라고 물었습니다.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러다 다른 문에서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촛불을 켰습니다. “누구세요?”라고 다시 물었습니다. 침묵. 그러다 천장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 이제 알겠구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엄청난 굉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저는 무릎을 꿇고 끊임없이 주기도문을 되뇌었습니다. 갑자기 위에서 무거운 돌덩이 가 떨어졌습니다: 쾅! 천장의 널빤지가 부서지고, 바위 조각 하나가 뾰족한 끝이 아래로 향하게 내 머리 바로 위에 매달렸다. “알겠어,”라고 말하며, “우리에게 즐거운 밤이 기다리고 있군!” 그리고 우리의 밤샘 기도가 시작되었다. 나는 기도를 드리고, 탕갈라쉬들은 위에서 지붕을 두드렸다. 아, 참으로 멋진 밤샘 기도들이었다!

 기도는 탄갈라슈카와의 전쟁이다. 그러니 탄갈라슈카도 맞서 싸울 것이다. 탄갈라슈카는 사람이 용감하게 그들과 맞서 싸울 때만 무기를 내려놓는다. 하지만 그 용기는 이기적인 허세가 아니라 겸손함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한다.

 

마음을 정화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기도와 수련이 필요합니다

— 게론다, 마음은 어떻게 정화됩니까?

 — 겸손, 악의를 품지 않음, 희생, 이타심, 마음의 고백, 수련, 기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기도 — 바로 이것들로 마음이 정화됩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마음을 온갖 잡동사니로부터 해방시켜 줍니다.

 — 게론다, 오직 예수님의 기도만으로도 마음이 정화될 수 있습니까?

 —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의 기도만으로 정화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동시에 겸손과 마땅한 수련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만 하고 겸손과 수련을 소홀히 한다면, 그 기도는 헛된 수고일 뿐입니다. 반대로, 나머지 것은 지키되 기도에 소홀하다면, 그 역시 헛된 수고입니다. 수련도 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점차 마음이 정화될 것입니다. 수련과 기도는 서로 손을 잡고 나아가야 합니다.

 

 

제2장.
기도의 방식에 대하여

 

소리 내어, 속삭이듯, 아니면 마음속으로?

헤론다, 기도는 어떻게 드리는 것이 가장 좋을까요? 소리 내어, 속삭이듯이, 아니면 마음속으로?

 — 소리 내어 기도하면 금방 지치게 된다. 그러니 때로는 속삭이듯, 때로는 마음속으로 기도하라. 마음속으로 기도하는 것이 가장 좋지만, 모든 사람이 항상 마음속으로만 기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므로, 준비를 위해 처음에는 속삭이듯 기도하는 것이 유익하다. 속삭이듯 기도를 시작하고, 그다음 마음속으로 이어가다가, 다시 속삭이듯 하고, 또 마음속으로 기도할 수 있다. 기도가 오직 마음으로만 이루어지게 될 때까지, 즉 ‘지적인 기도’라는 이름 그대로 지적인 기도가 될 때까지 이렇게 번갈아 가며 하라. 그러면 사람은 마음으로 기도하고, 마음은 뛰놀며 기뻐하며, 사람은 신성한 경지에 도달하고 천상의 상태를 체험하게 된다.

 — 최근 들어, 헤론다, 제가 기도실에 들어갈 때마다 산만함과 모독적인 생각이 저를 찾아옵니다. 왜 저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 보아하니, 당신은 예수 기도에 대해 잊어버린 것 같군요. 그래서 유혹이 당신의 방 문턱에 천막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방에서 여가 시간이 있을 때, 속삭이듯 기도하여 원수가 심어주는 산만함과 악한 생각을 물리치도록 노력해 보아라. 속삭이는 기도는 악령의 공격이 있을 때 매우 유용하다. 그런 순간에는 원수의 무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 게론다, 악하거나 모독적인 생각을 물리치기 위해 정반대인 선한 생각을 떠올려야 할까요?

 — 생각, 심지어 선한 생각으로라도 그 생각들에 대항하기보다는 예수님의 기도로 맞서는 것이 더 낫습니다. 할 수 있는 한, 마음을 이성적인 기도를 통해 그리스도와의 대화로 향하게 하고, 이것저것에 대한 추론으로 마음을 채우지 마십시오. 처음에는 악한 생각을 없애 주고, 나중에는 호흡과 하나가 되는 기도를 실천하십시오.

 

어디서나 예수님의 기도를 실천하라

— 게론다, 영적 생활에서 무엇에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까?

 — 마음을 집중하고 가다듬어, 어디서나 마음과 영으로 예수님의 기도를 드리며,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나 자신과 모든 산 자, 그리고 모든 고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청하십시오. 그리고 기도에 지치면,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나 어떤 트로파르를 느린 선율로 큰 소리로 노래하십시오.

 — 헤론다, 저는 보통 성전에서만 예수님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 수도사가 성전에서만 예수님의 기도를 드리는 데 만족한다면, 그는 일요일에만 교회에 가는 세속적인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므로 성전에서만 예수 기도를 반복하는 데 그치지 말고, 봉사 중에도, 수도실에서도, 심지어 잠자리에 들 때에도 — 언제든지 예수 기도를 드려라. 봉사 중에는 네 움직임이 차분하고 이치에 맞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않으면 사소한 일들이 네 마음을 기도에서 딴 데로 돌리게 할 것이다.

 항상 입에 가장 달콤한 예수님의 이름을 머금어, 네 영혼이 달콤해지도록 하라. 하루 종일 예수님의 기도로 보내는 것은 위대한 일이다.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그 후 기도를 되뇌며 일을 하면, 네가 하는 일과 그 일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거룩해진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기도를 드리며 음식을 준비할 때, 네가 만드는 음식과 그것을 먹는 사람들 모두 거룩해집니다.

 — 게론다, 요즘 저에게 끊임없이 강한 유혹이 찾아옵니다.

 — 그 유혹을 기회로 삼아 매번 그리스도께 의지하며 그분의 도움을 구하십시오. 그러면 유익을 얻게 될 것이며, 끊임없는 기도를 얻게 될 것입니다.

 

스스로 움직이는 기도

— 게론다, 자발적인 기도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 자발적인 기도를 얻은 사람은 예수 기도를 드리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으며, 그 어떤 강요도 없이 기도가 저절로 그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잠을 자는 동안에도 기도를 드리며, 깨어날 때에도 기도는 계속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아가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자고 있으나 내 마음은 깨어 있도다.[129]

 아토스 산에는 쉬지 않고 일하던 한 노동자가 있었다. 그는 두 사람 몫을 해냈기에, 수도사들은 그에게 두 배의 임금을 지급했다. 가끔 그는 ‘성스러운 십자가’ 칼리바에 있는 저를 찾아오곤 했습니다. 어느 날 제가 그에게 말했습니다. “일할 때 예수님의 기도를 드려, 네 손으로 하는 일도 거룩해지도록 하라.” 그는 아이처럼 제 말을 따랐고, 곧 기도하는 것에 익숙해졌습니다. 어느 날 그가 내게 와서 말하길, “알다시피, 저는 자면서도 꿈속에서 기도를 드려요. 그리고 일어나면 기도가 계속되죠. 마음속에 이런 기쁨을 느껴요!..” — “달콤한 새벽이 밝아오고 있군요,” — 내가 그에게 대답했다. 상상해 보라, 평신도인데도 그런 경지에 이르렀으니!

 — 게론다, 만약 어떤 사람이 저절로 우러나오는 기도를 얻었다면, 그것은 그가 이미 정욕에서 정화되었다는 뜻인가요?

 — 글쎄요, 어쨌든 그는 선한 마음가짐에 도달한 것이죠.

 — 게론다, 자발적인 기도는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 사람이 자신의 죄성을 깨닫고, 주님께 아무것도 보답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스스로 상기한다면, 그때 그의 영혼은 죄책감으로 쪼그라들고, 그는 겸손히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는 더 이상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예수님의 기도가 저절로 입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하며, 그 기도 자체가 그 안에서 움직이게 됩니다.

 — 사람은 기도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나요?

 — 그것은 필요성이 아니라 좋은 습관입니다. 사람이 기울인 노력 덕분에, 그에게는 끊임없는 기도의 좋은 습관이 형성됩니다.

 

기도의 자동성

— 헤론다, 끊임없이 속삭이듯 예수님의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 자동적인 상태에 이르러, 마치 시계가 똑딱거리는 것처럼 “똑딱, 똑딱” 하고 기계적으로 기도를 외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 마음은 하느님 안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 게론다, 그런 기도에 이득이 있습니까?

 — 사람에게 약간의 겸손이 있고, 자신의 마음이 하느님께 있지 않으며 기도를 기계적으로 외우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그때는 약간의 유익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틱-탁” 소리 때문에 자신이 예수 기도를 훌륭히 실천하고 있다고 여긴다면, 유익 대신 해를 입게 됩니다.

 — 게론다, 사람이 끊임없이 예수님의 기도를 외우는 데 익숙해졌다면, 이것이 그의 수행에 도움이 됩니까?

 — 문제는 그가 무엇을 위해 그 기도를 드리는가 하는 점입니다. 만약 사람이 자기 자신을 깨닫고 하나님의 자비가 필요함을 느끼며, 기도를 드리며 끊임없이 그 자비를 구한다면, 그때 유익을 얻습니다. 혹은 아직 자신을 깨닫지 못했지만, 이미 정욕의 덫에 빠져 있음을 알고 하느님께 의지한다면, 하느님께서는 그의 투쟁을 도와주실 것이며, 게다가 그 사람에게는 예수 기도를 드리는 습관이 남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한 채 단지 기계적으로 기도를 외운다면, 이는 낡은 사람을 벗어던지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 게론다, 사람이 “나는 끊임없이 예수 기도를 외우는 법을 배우겠다”는 목표를 세우는 데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까?

 — 사람이 자기 자신을 돌보는 것을 소홀히 하고, 단지 “요즘 유행한다”는 이유로 예수기도에 몰두할 때, 그러한 열망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기도를 외우는 습관을 들일 수 있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옛 사람이 살아 숨 쉬고 있을 것이며, 미혹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제가 결핵 요양소에 있었을 때, 그곳에서 치료받고 있던 또 다른 수도사가 예수 기도를 외우는 습관을 들인 적이 기억납니다. 그는 눈을 감고 끊임없이 “주 예수 그리스도여… 주 예수 그리스도여…” 한 방문객이 그를 보고는 십자 성호를 긋더니 “저기 성스러운 분이시네요!”라고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수도사가 제게 말했습니다. “제가 여기서 한 주교님과 또 다른 교회 지도자를 질책했죠. 그들에게 몇 마디 다정한 말을 했어요. 그들이 거짓 지혜를 버리라고 편지를 썼습니다! 그렇게 배반하기만 한다면, 내 지지를 기대해도 좋다.” — “잠깐만요, 형제님,” 내가 그에게 말했죠, “형제님 자신은 도대체 무엇이 지탱해 주고 있나요? 초등 교육 3년과 결핵?” 그런데 그가 나에게 뭐라고 대답했는지 아세요? “사실, 나 같은 사람이 한두 명만 있어도 세상은 구원받았을 텐데!” 만약 그가 정신에 문제가 있었다면 그에게 질문할 필요도 없었을 테지만, 문제는 그의 정신이 멀쩡했다는 점이었다. 자신을 억지로 몰아붙이며 끊임없이 기도를 반복한 탓에, 그에게 자동적인 습관이 생겨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신의 계시로 여겼습니다. 결국 세상에는 자신과 같은 기둥 같은 존재가 더 이상 없다고 믿게 된 지경에 이르렀죠!

 

마음을 집중하기 위한 숨 참기

— 게론다, 예수 기도를 호흡과 어떻게 연결하시나요?

 — 예전에는 기도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외우도록 스스로 훈련했습니다. 숨을 들이쉴 때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숨을 내쉴 때 “죄인인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했죠. 하지만 폐 수술 후에는 기도를 통째로 외울 만큼 숨이 차서, 숨을 들이쉴 때 “주 예수 그리스도여,”라고 말하고, 숨을 내쉴 때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 게론다, 우리가 예수 기도를 할 때 왜 숨을 참아야 합니까?

 — 숨을 참는 것은 마음이 기도에 집중하도록 돕습니다. 마치 사수가 표적을 정확히 맞추기 위해 잠시 숨을 참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이는 기도 초반에 잠시만, 그리고 필요할 때만 — 즉 마음이 산만해지거나 잡생각이 들 때만 — 해야 합니다. 그럴 때만 잠시 숨을 참는 것이 의미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계속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심장이 압박을 받아 손상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고개를 숙이고 숨을 참다가, 그로 인해 심장에 육체적인 통증이 생기기도 하는데, 이는 질병으로 발전할 수 있어 결국 기도를 그만두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른 종류의 아픔을 원하십니다. 바로 육체적인 심장 압박이 아니라, 겸손하고 통회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마음의 아픔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기도에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 게론다, 저는 순명을 수행하러 다니기보다는, 셀에 앉아 예수 기도에 전념하는 것을 더 선호합니다.

 — 참으로 놀랍군요! 열반에 가고 싶으신가요?[130] 정교회 수도사의 목표는 열반이 아닙니다. 이 점을 꼭 이해해 주십시오. 수도사는 일을 회피하고 그저 앉아서 예수 기도를 만트라처럼 반복하는 게으름뱅이가 아닙니다. 만약 그가 항상 팔짱을 끼고 앉아만 있고 싶다면, 그는 자기 집중을 위해 요가를 하는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수도사, 특히 젊은 수도사는 모든 일에 열정을 불태워야 하며, 용감하게 나서서 순명을 위해 전속력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 게론다, 절하는 것도 저에게는 어렵습니다…

 — 글쎄, 정말 대단하군: 절도 하지 말고, 봉사도 가지 말고, 그냥 앉아서 기도만 하라는 거냐! 네 생각에, 그렇게 해서 크게 성취할 수 있겠느냐? 아바 이사악은 육체적 수고 없이 드리는 기도는 유산일 뿐, 기도가 아니라고 말씀하셨다.[131]

 — 게론다, 저는 묵주를 짚으며 기도할 때 오랫동안 서 있을 수가 없어요.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무릎을 꿇고 그렇게 기도하곤 합니다.

 — 더 힘든 것부터 시작하고, 지치면 더 쉬운 것으로 넘어가라. 서 있을 수 없다면 무릎을 꿇어라. 무릎을 꿇고 있을 수 없다면 앉아라. 앉아 있을 수도 없다면, 누워서 기도하라. 중요한 것은 네 마음이 하느님과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바 이사악도 그렇게 말씀하셨다.[132]

 — 게론다, 왜 신부님들은 예수님의 기도를 드릴 때는 작은 의자에 앉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나요?

 — 자, 이렇게 생각해 보라. 밤에 일어나 묵주 기도를 다 바치고, 모든 절을 마친 뒤, 지쳐서 잠시 앉아 예수 기도를 드리고 있다. 네가 앉는 이유는, 그 후 하루 종일 기도할 힘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예배와 봉사를 할 때면 서 있는 시간이 충분히 길어 지치게 될 테니 말이다. 만약 수도실에서도 다시 서서 기도한다면, 피로로 인해 기진맥진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잠시만 앉아서 기도를 드려라. 이것이 바로 성부들이 뜻하는 바이다. 하지만 그들은 기도를 드리기 위해 반드시 앉아야 한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 서 있을 수 있는데도 앉아서 기도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어느 정도의 달콤함을 느낀다고 해도, 그것은 나태함입니다. 아르세니 페셰르니크 장로[133] 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서서 기도할 때는 강한 향기를 느끼지만, 앉아서 기도할 때는 약한 향기만 느낍니다.”

 — 게론다, 제가 서서 절을 하거나 묵주를 짚으며 기도할 때 마음이 더 쉽게 집중되는데, 즉 육체적인 노력이 집중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 마음은 당신이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어딘가 아플 때 마음은 그 통증으로 향하는데, 통증이 마음을 끌어당기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절을 할 때도 마음은 적어도 그 행동에 집중하게 됩니다. 하지만 만약 당신의 마음이 온전히 그리스도께 향해 있었다면, 당신은 몇 번이나 절을 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회개는 기도를 위한 가장 확실한 길이다

— 헤론다, 성 이그나티오(브랸차니노프)는 기도를 천천히 해야 하고 절도 천천히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134]

 — 각 성인은 자신이 직접 실천했던 방식대로 기도에 대해 말합니다. 영성 아버지들의 ‘지적인 기도’에 대한 논의를 바탕으로 종종 잘못된 결론을 내리곤 합니다. 성부들은 하나님과 끊임없이 교제하셨으며, 이러한 하나님과의 교제 경험은 그들에게 가장 큰 유익을 가져다준 바로 그 기도 방식을 따르며 올바르게 기도하도록 가르쳐 주었습니다. 하지만 성부들이 기록한 대로 — 머리를 가슴에 숙이고, 숨을 참으며, 그들의 외적인 기도 자세를 흉내 내는 것 — 단지 쾌락과 기쁨을 느끼기 위해서이거나, 자만심에 사로잡혀 ‘금주 실천가’가 되기 위해서라면,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 헤론다, 영적 기도의 특별한 기법에 대해 다루는 책들은 유익한가요?

 — 유익합니다. 하지만 오직 겸손함을 가진 사람에게만 유익합니다. 교만한 사람, 즉 몇 년 안에 ‘자비’의 성부들 무리에 속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사람에게는 유익하지 않습니다. 어느 날 몇 명의 수도사가 제 칼리바에 찾아와 말했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우리에게 예수 기도법의 비결을 가르쳐 주시기를 바라며 왔습니다. “당신이 영적 기도를 터득한 분 중 한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 “당신들의 명단에서 저를 지워 주십시오.”라고 제가 말했습니다. “저는 오직 하나님의 자비를 구할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 헤론다, 그렇다면 성부들이 말씀하시는 몇 가지 실천적인 방법들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씀이십니까?

— 이 모든 것은 마음을 모으기 위한 보조 수단일 뿐이며, 겸손과 회개, 통회가 선행될 때만 도움이 됩니다. 만약 내가 의자에 앉아 고개를 가슴에 숙이고, 『방랑자』([135] )만큼 기도를 반복하기로 결심하면서도 그 전에 회개하는 수고를 하지 않는다면, 겉모습에만 머물게 되고 나의 행위는 기계적인 것이 될 것입니다. 기껏해야 기도를 외우는 기계적인 습관만 들일 뿐입니다. 하지만 먼저 겸손과 회개를 갈고닦은 뒤, 성부들의 몇 가지 실질적인 조언을 보조 수단으로 활용한다면 유익이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에 임하는 사람은 미혹에 빠질 수 없으나, 단지 겉으로만 흉내 내는 것은 미혹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 게론다, 사람이 성부들의 저서[136] 를 읽지 않고, 정해진 방법도 따르지 않으면서도 기도를 이룰 수 있을까요?

 — 물론 가능합니다. 단, 단순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예수 기도를 드린다면 말이죠. 어떤 이들은 방법에 매달려 그 단계에서 멈춰 서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합니다. 즉, 그들에게 방법은 목적이 되어버리지만, 사실 방법은 단지 보조 수단에 불과합니다.

 — 게론다, 기도에 몰입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137]

— 달콤한 몰입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사람은 그것을 목표로 삼고 기도에 임해서는 안 됩니다.

 — 네, 게론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건 알겠습니다만, 그 전에 어떤 수련을 해야 합니까?

 — 가장 중요한 것은 이기심이 없어야 하고, 고귀함과 희생 정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확실한 길은 고귀한 마음으로 기도를 가꾸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그리고 우리 자신이 하느님께 얼마나 배은망덕한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혼은 스스로 겸손하게 자만심을 떨쳐내고, 아픔을 안고 하느님의 자비를 간구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사람은 하나님의 자비가 자신에게 얼마나 필요한지 점점 더 깊이 느끼게 되며, 그의 기도는 진심 어린 것이 되어 점차 영혼에 먼저 신성한 위로의 달콤함을, 그다음에는 신성한 기쁨과 즐거움을 가져다줍니다.

 

 

제3장.
현명한 행동에 대하여

 

지성은 위대한 선물이지만, 그것을 신성한 주파수에 맞추어야 한다

헤론다, 성 그레고리 팔라마는 인간의 미덕이 신과 닮았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해 주지만, 그분을 그 사람과 결합시키지는 않는다고 썼습니다. 반면 기도는 하나님과의 결합을 이루어 냅니다.[138] 그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 여기서 성인은 순수한 기도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 게론다, 순수한 기도란 무엇입니까?

 — 영적인 고귀함과 희생 정신이 있을 때, 사람은 하느님과 친밀해지며 그분과 연결되고, 그의 마음은 끊임없이 하느님 안에 머무르게 됩니다. 그러면 그는 기도하지 않을 때조차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온 삶이 곧 기도입니다. 그는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하든 그의 마음은 항상 하느님 안에 있습니다. 아버지가 없고 어머니 혼자 키우는 아이를 상상해 보십시오. 갑자기 어머니와 멀리 떨어져 있게 되더라도, 무엇을 하든, 어디에 있든, 그 아이의 마음은 끊임없이 어머니와 함께 있습니다. 땅에서 추방되어 아버지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아야 하는 운명에 처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순수한 기도의 경지에 이르면, 그의 마음은 끊임없이 하나님, 곧 그의 아버지 안에 머물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순수한 기도입니다.

 — 헤론다, 마음은 어떻게 정화됩니까?

 — 마음이 정화되려면, 끊임없이 하나님 안에 머물러야 하며, 하나님과 하나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하나 되려면 주의력과 자기 성찰, 끊임없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마음이 하나님과 하나 되면, 사람은 하나님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마음은 깨끗해지는데, 이는 방해물이 들어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때 사람은 단지              형상뿐 아니라 하나님의 닮음까지 갖춘 피조물이 됩니다.[139] 단지 형상만 닮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마음은 위대한 선물이지만, 그것을 신성한 주파수에 맞추어야 합니다.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마음의 위대한 에너지를 활용하여 온전히 빛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로 향해야 한다. 이 에너지가 흩어지면, 마음이 어떻게 힘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리고 사람의 마음이 힘을 갖지 못하면, 사람은 텅 빈 이성만 남게 되고, 두개골의 경계를 벗어나지 못한 채,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형상에서 벗어나 컴퓨터, 즉 한심한 지적 기계로 변해 버립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그들이 이 마음의 힘을 지극히 높은 곳에 쏟지 않기 때문에, 원수가 그 힘을 이용하거나, 더 정확히 말해 그 힘을 타고 내려가게 하여, 처음에는 땅으로, 그다음에는 더 낮은 곳인 죄로 이끌고, 결국 지옥으로 내몰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이 산을 오르는 데 성공하면, 그때 비로소 영혼의 눈, 신성한 눈, 신성한 깨달음으로 높은 곳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게 된다. 안타깝게도 나는 이 모든 것을 이론적으로만 알고 있을 뿐이지만, 설령 그 여정에서 죽음이 나를 덮친다 해도 이 방향으로 노력해 나가려고 한다.

 

영적 깨어 있음

— 게론다, ‘맑은 정신’이란 무엇입니까?

 — 정신 차림이란 바로 네 주의력이다: 생각 속에서, 행동 속에서, 움직임 속에서. 오늘 네가 스스로를 살피고 관찰하며 자신의 행동과 행실을 분석한다면, 내일은 더 주의 깊어질 것이고, 그 후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 기초는 주의력이다. 그러니 성부들이 어떻게 스스로를 주의 깊게 살폈는지 보라! 왜 그들을 “자각의 실천자”라고 부를까요? “자각하는 자”란 자기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세심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며 내면의 수련에 전념했습니다. 생각을 관찰하고 끊임없는 영적 깨어남 속에 머물렀습니다.

 — 헤론다, 아바 이사악은 이렇게 말합니다. “낮의 수행은 밤의 수행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140] 그가 무슨 뜻으로 말한 것입니까?

 — 그분은 사람이 밤에 기도할 때 마음이 하느님 안에 머무르듯이, 낮에도 마음이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지 않도록 주의를 잃지 않으려 노력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낮에 자신을 잘 살피지 않으면, 많은 잡념이 쌓이게 되고, 나중에 그걸 떨쳐내려고 해 보세요! 정말 힘들어요! 한 번만 방심해도, 나중에 기도할 때 집중하려고 애쓸 때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따르는지!

 주의와 자기 관찰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은 몇 시간이고 기도할 수 있지만, 부주의하고 자신을 살피지 않으면 제자리걸음만 하게 됩니다. 하지만 기도에 자기 관찰이 동반될 때, 우리는 무작위로 쏘는 것이 아니라 적의 사격 지점을 정확히 겨냥해 쏘게 됩니다.

 — 게론다, 왜 제 마음이 끊임없이 산만하고 마음을 가다듬을 수 없는 건가요?

 — 그동안 네 마음은 고삐 없는 말처럼 방치되어 왔기에, 지금도 그것을 다스릴 수 없는 것이다. 주의가 필요한 이유는, 마음이 한 순간에는 너를 천국으로 데려갈 수도 있지만, 다른 순간에는 네가 주시하지 않으면 지옥으로 데려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네가 할 수 있는 한,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선하고 거룩한 생각들에 마음을 집중하도록 노력하라.

 

마음을 가다듬기

— 게론다, 제 마음이 이리저리 딴생각에 빠져 있습니다.

 — 제가 어렸을 때, 친구들은 참새를 잡아서 발에 끈을 묶고 이렇게 놀곤 했습니다. 끈을 풀어주면 참새들이 날아오르곤 했는데, 불쌍한 참새들은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했지만, 곧 아이들이 실타래를 감아 올리며 새를 다시 끌어당겼죠. 네 마음도 마찬가지야. 마음은 날아다닐 수 있지만, 다른 한쪽 끝을 그리스도께서 잡고 계신다면 마음은 어디로도 갈 수 없어. 잠시 날아다니다가 다시 그리스도께로 돌아올 거야.

 — 헤론다, 가끔은 기도에 온전히 집중하고 있는데, 잠시만 정신이 딴 데로 가면 순식간에 제 마음이 심지어… 미국에까지 가버리곤 합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건가요?

 — 요즘 미국행 비행기 표는 비싸다! 거기에 자주 가게 되나? 자, 마음을 다스려라. 그렇지 않으면 네가 파산할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를 흩어지게 만들 거야. 나는 네 빚을 갚아줄 수 없으니. 마음으로, 겸손하게 기도를 드려라. 그래야 탕갈라슈카가 생각들과 대화하며 너를 훔쳐가지 못할 것이다. 죽음에 대해 묵상하는 것이 이 일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게 준비할 시간을 주셨고, 그 후에 나를 그분께 부르실 것이다”라고 생각한다면, 어떤 생각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마음은 한곳에 모이고, 알 수 없는 곳으로 흩어지지도 않고, 땅 끝으로 휩쓸려 가지도 않는다.

 — 헤론다, 기도 중에 제 마음이 산만해지는 것이 속상합니다.

 — 제 마음도 온종일 하나님과 함께 있기를 바라지만, 여러 가지 걱정거리로 인해 산만해지곤 합니다. 그럴 때면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 나의 하나님, 이런 마음이 주님 곁에 어떻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제 마음이 주님과 함께 있기를 바라는 것은 제 쪽에서 참으로 뻔뻔한 일입니다!” 단 한 번의 겸손한 생각만으로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마음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세요. “나의 하나님, 제가 비참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이기에, 제 마음이 주님께 집중하도록 도와주지 않으시는 것이 옳습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이를 믿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즉시 여러분이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 헤론다, 제가 묵주를 짚으며 기도할 때, 처음에는 집중하고 있어도 나중에는 마음이 흩어지곤 합니다. 노력해서 집중하려고 해도 다시 흩어집니다.

 — 생각해 보라. 기도의 절반이나 삼분의 일만 하나님의 보좌에 닿고 나머지는 도중에 사라진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끈기와 인내가 필요하다. 마음이 흩어지나? 다시 모으라! 또 흩어지나? 다시 모으라.

 — 하지만 왜, 헤론다, 제가 집중하기 어려운 걸까요?

 — 네가 아직 수행의 첫 단계에 있기 때문이야. 만약 그 반대라면, 마치 아기가 다섯 살짜리로 태어나는 것처럼 사물의 자연스러운 질서에 어긋나는 일이 될 테니까. 우리의 마음은 마치 새끼 망아지와 같습니다. 처음에는 어미를 따라 달리지만, 금세 정신을 잃고 뛰어놀며 풀을 뜯고 놀다가 멀리 달아나 버립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어미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깨닫죠. 달려가 어미를 찾지만, 금세 다시 정신을 잃어버립니다. 조금 자라면, 누군가가 그 망아지를 데려와 어미 뒤에 묶어 두니, 그렇게 해서 항상 어미 곁에 있게 된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처음에는 기도 중에 마음이 흩어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끈기를 보인다면, 그 마음은 하느님께 매달려 그분과 헤어지지 않게 될 것이며, 끊임없이 기도하고 싶어 할 것이다. 그 후에는 완전한 평온이 찾아옵니다: 기도 중에 어떤 생각도 떠오르지 않고, 마음은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141] 그리고 다음 단계는 이미 관상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할 일을 주자

— 헤론다, 저는 아직 세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가능하다면, 제가 정신이 산만해지거나 세속적인 것에 주의를 빼앗기지 않도록 스스로를 지키는 방법을 알려 주십시오.

 —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바 이사악에게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제1장의 첫 네 줄을 주의 깊게 읽고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아라. 성인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덕의 시작이다. 사람들이 말하듯이, 그러한 경외심은 믿음에서 비롯되며, 사람의 마음이 세속적인 오락을 뒤로하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생각을 모은 뒤, 영혼의 미래 운명에 대한 가르침에 몰두할 때 그 사람의 마음에 심겨진다.”[142] 사실, 그러한 영적 수련을 위해서는 일정한 전제 조건이 필요하지만, 너에게는 아직 그런 것이 없다. 하지만 세속에 머물러 있는 지금도 비슷한 일을 할 수는 있다.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은 네게 힘든 일이다. 왜냐하면 기도하는 것은 처음에는 다소 지치게 마련인데, 이는 내면에 아직 정욕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을 때, 네 마음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때, 악마가 자신의 씨를 뿌릴 기회를 얻지 못하도록 그 마음에 할 일을 주도록 노력하라. 마음에 줄 일은 이렇습니다.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죽을 운명을 깊이 새기며 기억을 잘 가꾸는 것이죠. 하지만 여러분, 여성분들은 낙담과 절망에 빠질 구실을 찾기만 하잖아요!.. 그러니 차라리 신약의 사건들을 끊임없이 떠올리며 그것들에 대해 묵상하는 편이 낫습니다. 성모 영보 대축일에서 시작해 십자가 처형으로 끝내며, 당신의 마음이 끊임없이 그 사건들을 맴돌게 하십시오. 당신의 마음이 오직 이 거룩한 사건들만을 끊임없이 맴돌게 될 때, 그때 당신 안에는 내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이며, 그것이 바로 당신의 부활이 될 것입니다.

 — 헤론다, 저는 스티히라의 이 말씀이 정말 마음에 듭니다. “생명의 주님이시여, 찔리신 당신의 갈비뼈로, 모든 이에게 버림받은 자들의 생명의 샘과 구원을 쏟아내셨나이다.”[143]

 — 그 말이 어떻게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와 찔리신 그리스도의 갈비뼈, 못, 식초, 담즙,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겪으신 고난에 관한 복음서의 모든 세부 사항을 묵상할 때, 마음은 산만함 없이 골고다에 고정됩니다. 그때 영혼은 산만함 없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 자신과 모든 산 자와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하며, 우리 모두를 위해 상처를 받으신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기를 간구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스스로 내버려진 십 대와 같아서, 끝없이 이리저리 방황하고, 방치된 채로 지내며, 규칙을 어기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마음의 양육에 우리의 삶과 구원이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다스리고 양육할 수 있다면, 마음은 평온해지고 착하고 순종적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능한 한 마음이 헛되이 방황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영적으로 훈련시키고, 집인 낙원에서, 아버지이자 하나님이신 분 곁에 더 많이 머물도록 가르치십시오.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느낌

— 게론다, 제가 어떤 정신적인 일을 하고 있을 때는 기도할 수 없습니다.

 — 일하는 동안 당신의 마음이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예수 기도와 다름없습니다. 반대로, 기도하고 있지만 마음이 하느님 안에 있지 않다면, 그런 기도에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만약 사람이 예수 기도에 지쳐서 단순히 자신의 마음을 그리스도나 성모 마리아 앞에 두기만 해도, 그것 또한 기도입니다.

 — 게론다, 사람이 예수 기도를 하지 않고도 하느님을 기억할 수 있을까요?

 — 만약 그가 마음속으로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그분 곁에 머물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라고 말하며, 그로 인해 하나님에 대한 기억이 떠오른다면, 기도도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항상 그리스도, 성모 마리아, 성인들의 현존을 느끼려고 노력하고, 마치 그들이 바로 곁에 계신 것처럼 행동하십시오. 사실 그들은 우리가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더라도 실제로 이곳에 계시기 때문이다. 모든 생각과 감정을 하느님께 드리며 이렇게 말하라. “하느님께서 나를 보고 계신다. 내가 지금 하는 일이 그분께 기쁨이 될까? 그분을 슬프게 하지 않으려면 무엇을 피해야 할까?” 점차 이것이 네 내면의 상태가 될 것이다. 너는 하느님을 생각하며 그분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자라나고, 마음과 정신이 기쁨을 얻으며, 수월하게 예수 기도에 끊임없이 머무르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 게론다, “하나님을 기억하면 하나님을 보게 된다”는 속담은 무슨 뜻입니까?

 — 하나님을 기억한다는 것은 마음을 하나님 안에 두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살며, 그로 인해 어디에서나, 모든 것 속에서 하나님을 봅니다. 이를 이룬 사람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그분께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흙으로 돌아갈 지경에 이릅니다. 그는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축복의 인장을 봅니다. 주위를 둘러보며, 하나님께서 사람뿐만 아니라 온 세상, 심지어 가장 사소한 것들까지도 돌보신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어디를 보든, 어디서나 하나님의 위대함을 봅니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변화됩니다. 그는 땅과 새들, 나무들을 바라보며 이 모든 것 뒤에 계신 하나님, 곧 그들의 창조주를 봅니다. 이것이 곧 기도이자 동시에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제4장.
이성과 마음의 협력에 대하여

 

이성이 마음과 하나가 될 때 기도는 진심 어린 기도가 된다

헤론다, 이성은 어떻게 마음으로 내려가나요?

 — 마음이 아플 때, 이성이 마음으로 내려갑니다. “마음이 아프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와 자신의 배은망덕함을 묵상할 때, 그의 마음을 고통이 찌르며, 이성은 그곳으로 향합니다.

 — 게론다, 제가 두통이 있을 때는 기도할 수가 없습니다.

 — 다리가 아프다고 가정해 보세요.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칼로 손을 베어버렸다고 칩시다.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다리의 통증은 잊어버리고 모든 주의를 다친 손으로 돌리게 됩니다. 기도를 방해하는 두통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자신의 죄를 생각하고, 그다음 사람들의 고통을 생각하라. 그러면 네 마음이 아파오기 시작할 것이다. 그 마음의 아픔이 두통을 ‘중화’시켜 주고, 그제야 자신과 온 세상을 위한 진심 어린 기도가 시작된다.

 — 게론다, 마음이 방황하거나 산만해지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 빛의 속도보다 더 빠르게 쏜살같이 달리는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어렵습니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손을 잡고” 고통받는 이들, 병든 이들, 버림받은 이들, 세상을 떠난 이들에게 데려가야 합니다.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목격한 마음이 마음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할 것이고, 그 마음은 아무리 무뎌져 있더라도 열리게 될 것이며, 기도는 진심 어린 것이 되고, 사람은 눈물을 흘리며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사람이 이 모든 것을 생각하면서도 동정심을 느끼지 못한다면 — 사람들의 비극도, 심판받은 고인들의 고통도, 그들의 영혼이 겪는 고난도 그를 감동시키지 못한다면 — 이는 그 사람이 세속적인 것에 얽매여 있으며, 육신적인 사색과 그 안에 있는 낡은 사람이 매우 강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헤론다, 예배 중에 종종 제 마음이 하늘을 향하지 않고 사람들의 고통에 집중되곤 합니다.

 — 이 두 가지는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목표는 단순히 기도문을 읊는 것이거나, 단지 마음을 잡념에서 자유롭게 유지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동력’이 작동하여, 기도하는 대상에 대해 마음이 함께 아파해야 합니다.

 — 게론다, 제가 봉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오면 머리를 가다듬고, 일에 대한 생각이나 온갖 이미지들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쿵쿵거립니다.

 — “뇌를 한데 모으는” 게 아니라 지혜를 모아야 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머리로 기도하기 때문에 뇌를 모으고 있는 거죠. 사람이 머리로 기도하면 당연히 뇌에 무리가 가고, 그 후 두통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이런 문제를 겪는 건 당신뿐만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영혼에 유익한 일을 하곤 하는데, 예를 들어 같은 영적인 책을 읽을 때, 그 과정에서 지성을 사용하지 않고 ‘머리로만 곱씹으려’ 하기 때문에 나중에 두통이 생기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음의 기도에 기계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도 비슷한 문제를 겪습니다.[144] 그러다 보면 심장이 아파오죠. 제가 기도하고 싶어서 집중하려고 할 때, 마음은 그리스도께로 향해야 합니다. 그러면 마음이 흩어지지 않고, 즉시 심장에 ‘전보’를 보내며 그와 하나가 됩니다. 이성과의 작업은 또 다른 문제인데, 이는 지치게 한다. 왜 내가 자주 타인의 고통을 내 것으로 삼아야 한다고 너희에게 되풀이하는가? 이성은 다른 사람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야 하며, 그래야 비로소 기도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기도가 아니라 보고서가 되어 버린다. 예를 들어, 이성으로 ‘아픈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이성도 마음도 그 일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반면, 당신 자신에게 아픈 곳이 있다면, 이성은 끊임없이 그 아픔에 집중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의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다면, 이성은 그 아픔 속에 끊임없이 머물게 될 것입니다.

 — 게론다, 하지만 그런 경우 마음이 산만해지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있을까요?

 — 그런 보장은 없으며, 마음이 딴 데로 쏠릴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고통이 얼마나 강하게 느껴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맹장 수술을 받은 환자가 있는 집에서는 가족들이 잠시 그 곁에 앉아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기도 하겠지만, 그 후에는 각자 자신의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중병, 예를 들어 암에 걸린 경우는 사정이 다릅니다. 집안 누구도 단 한 순간도 잊을 수 없는 큰 불행이 닥친 것이니까요. 그 상황의 심각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만이 정신을 잃을 수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중병을 앓고 있던 제 누나가 집으로 실려 온 적이 기억납니다. 누나는 거의 임종 직전이었는데, 저는 하모니카를 들고 누나 곁에 앉아 연주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누나가 곧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한 채로 말이죠.

 — 게론다, 그러니까 뇌는 육체적인 기관이고, 마음은 영적인 기관이라는 말인가요?

 — 사람의 이성은 와인에 든 알코올과 같습니다. 힘은 알코올에 있는 것이지 포도즙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이성은 뇌의 생명력이며, 사람에게 있는 가장 훌륭한 것입니다.

 — 그렇다면, 게론다, 마음이 작동하지 않아서 심장이 작동하지 않는 건가요?

 — 물론이지, 축복받은 영혼이여! 모든 힘은 바로 그 안에 있느니라.

 — 그럼 뇌는요, 게론다? 기도할 때 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뜻인가요?

 — 뇌도 필요하지만, 어느 정도까지만입니다. 이성은 다른 사람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기로 결정을 내립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그 후에야 지성이 작동하기 시작하죠. 사람들이 겪고 있는 구체적인 고통과 어려움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연민을 느끼며 기도를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지성을 마음속으로 모읍니다

— 헤론다, 때로는 기도 중에 마음이 흩어지지 않도록 “주 예수 그리스도여,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곤 합니다.

 —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예수님께 드리는 기도 중에 당신의 마음이 그분에게서 멀어지다니 — 도대체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한두 번 그분께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가능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말을 계속 반복한다면, 그것은 거짓입니다. 마음에는 한 가지를 품고, 생각에는 다른 것을 품으며, 입으로는 또 다른 말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성경의 말씀이 적용됩니다. ‘이 백성들은 입술로는 내게 가까이 오나, 입술로만 나를 공경할 뿐,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도다.’[145]

 — 헤론다, 왜 저는 열정 없이 기도하나요?

 — 네가 겉모습에 정신이 팔려 있기 때문이다. 네 마음은 다른 곳에 있다. 그 안에는 활기가 없고,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없기에, 예수 기도도 힘없이 나오는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마음을 한데 모으고, 그러면 사람은 ‘미쳐버린다.’

 — 게론다, 어떻게 끊임없이 하나님을 향하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예수님의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까?

 — 사람이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와, 자신이 주님께 그 어떤 보답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상기한다면, 그때 마음은 고통으로 찔리고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마음은 저절로 경건하게 조여들고, 더 이상 사람이 기도를 쫓는 것이 아니라 기도가 사람을 쫓게 됩니다. 그러니 항상 경건하고 겸손한 생각을 품으십시오. 주님께서는 겸손한 자들의 마음에 거하시니[146] , 그렇게 하면 당신 안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들어오고, 마음이 달콤해지며 기도가 진심 어린 기도가 될 것입니다.

 — 그렇다면, 이때는 악한 생각조차 들 수 없나요?

 — 아니요, 올 수 없습니다. 악한 생각이 들기 위해서는 기도를 중단해야 합니다. 하지만 설령 당신이 머리로 예수님의 기도를 드리는 것을 멈추더라도, 당신의 마음이 계속 그 기도를 드리고 있다면, 악한 생각은 여전히 들어올 수 없습니다. 마음이 기도하고 있으니까요!

 — 게론다, 저를 축복해 주시고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법을 조언해 주십시오.

 — 축복받은 영혼이여, 네 마음이 가슴 속으로 모이기를 바란다. 우리가 “가슴”이라고 말할 때 무엇을 의미하는가? 가슴은 마음을 담아두는 그릇이 아니다. 가슴은 우리의 감정과 체험이 모이는 중심지이다. 따라서 “마음이 가슴에 깃들기를”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마음이 사랑과 선함, 경건한 소망, 형언할 수 없는 달콤한 기쁨 속에 깃들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마음에는 사랑이 깃들어 있다. 마음이 정화되었다면, 그 사람은 자신 안에 하나님을 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영혼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147] 네 온 존재로 그분을 사랑하라. 만일 마음이 사랑과 선함 덕분에 마음에 깃드는 그 달콤함을 맛본다면, “주 예수 그리스도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기도는 온 사람을 큰 경외심과 감동에 빠지게 할 것이다.

 영적 삶의 모든 기초는 사람이 마음을 정화하여 그 안에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마음을 다스리는 데 있다. 마음이 마음속에 머무는 것이 달콤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마음속에 머무는 것이 달콤하다면, 마음은 마치 과자 가게에 있는 아이처럼 마음에서 떠나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제6부.
예배 생활

“성전은 하나님 자신의 집이며, 그곳은 사람을 거룩하게 하고, 그곳에서 신성한 은총을 얻습니다. 이것에 대한 생각 하나만으로도 경외감에 휩싸이게 됩니다.”

 

 

제1장.
교회 연도의 기간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시다”[148]

 헤론다, 내일 성탄절 전야 예배 후에 잠깐 눈을 붙일 수 있을까요?[149]

— 자, 그럼 성탄절에도 잠이나 자자! 제 어머니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탄절 밤에는 유대인들만 푹 잔다.”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그 밤, 이 세상의 명망가들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지만, 목자들은 깨어 있었습니다.[150] 그들은 밤새 양 떼를 지키며 피리를 불었습니다. 차이점을 느끼시나요? 깨어 있던 목자들은 그리스도를 뵙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 게론다, 그 동굴은 어떤 모습이었나요?

 — 바위 속에 파인 동굴이었는데, 그 안에는 가축을 위한 먹이통 하나만 있었을 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곳에는 가난한 사람들만이 찾아와 양들을 숨겼습니다. 성모님께서 요셉과 함께 이 동굴로 오셨는데,[151] 모든 여관이 꽉 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안에는 어린 당나귀와 송아지가 있었는데, 그들이 내뿜는 숨결로 그리스도를 따뜻하게 해 주었습니다.

 “소도 먹이를 얻은 자를 알았고, 나귀도 주인의 구유를 알았도다”[152] — 선지자 이사야가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 헤론다, 오늘의 시편에서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님께서 갓 태어난 그리스도를 보시고 “기뻐하며 동시에 울며” 외치셨다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모든 이를 양육하시는 주님께 젖을 드릴까요, 아니면 나의 아들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찬양할까요? 주님을 무엇이라 부를까요?’[153]

— 이것이 바로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의 신비이자, 하느님의 가장 위대한 자비입니다!..

 — 헤론다, 그리스도께서 “오늘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신다”는 이 성탄의 사건을 우리가 마음으로 체험하고 느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154]

 — 우리가 이 신성한 사건들을 마음으로 체험하고 느끼기 위해서는, 마음이 신성한 의미에 집중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은 변화합니다. “오늘 위대하고 찬란한 기적이 이루어졌도다,”[155] — 우리가 노래하듯이 말입니다. 만약 우리의 마음이 그곳, 즉 “영광스러운” 그 신비로운 곳에 머무른다면, 우리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탄생이라는 위대한 신비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여러분의 마음이 베들레헴의 구유가 되어, 신성한 아기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그분의 모든 축복을 내려주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성 사순절 — 골고다로 향하는 행렬

— 사랑하는 자매 여러분, 뜻깊은 사순절을 보내시길 바라며, 특히 첫 3일 동안 하느님의 특별한 도우심이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156] 올해 사순절 기간 동안 여러분께 많은 근심이 닥치지 않기를 바라며, 영적으로 더 열심히 수련하며 그리스도의 수난에 마음으로 깊이 공감하시기를 바랍니다. 사순절 트리오디[157] 의 노래가 시작되면 골고타로 향하는 여정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이 시간을 영적으로 유익하게 보낸다면, 죽은 후 그의 영혼은 산을 오를 때 연옥의 시련에서 어떤 장애물도 만나지 않을 것입니다.[158] 매년 이 거룩한 날들이 찾아오지만, 문제는 해가 갈수록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을까요? 하늘의 유익을 위해 쓰고 있나요, 아니면 세속적인 것에 낭비하고 있나요?

 수도사들은 매번 대사순절을 3일간의 기간으로 시작하며, 이 기간 동안 가장 엄격한 금식과 열렬한 기도에 온 힘을 쏟습니다. 세속적인 사람들에게도 그들만의 특별한 3일이 있습니다. 일 년에 한 번이 아니라 매주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이 날들에는 미친 듯한 오락과 의심스러운 쾌락에 온 힘을 쏟습니다. 다행히도 사순절의 이 3일간의 절제는 수도원과 세속의 소수 기독교 가정에서 지켜지고 있으며, 이를 통해 세상이 유지되고 있습니다. 이 3일 동안의 강화된 기도와 금식은, 보통 세속적인 쾌락이 넘치는 3일 동안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수많은 영적 타락으로부터 세상을 보호해 줍니다.

 — 게론다, 성 대순교 40일 대축제의 첫 3일 동안 왜 이렇게 엄격한 것입니까?

 — 주로 사람이 금식과 절제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두 번째 주부터 매일 음식을 섭취하게 되지만, 하루에 한 번인 저녁 식사만 하게 되면, 그에게는 그것이 왕의 만찬보다 더 달콤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제가 공동 생활 수도원에서 지낼 때, 금식을 시작한 지 며칠 뒤인 오후 4시에 물로 끓인 수프를 먹는 것을 우리는 진정한 축복으로 여겼습니다. 사흘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다가, 이제 매일 수프를 한 그릇씩 먹을 수 있다니—이것이야말로 축복이 아니겠습니까?

 사순절 초기에 3일 동안 완전히 금식하는 것은 사순절 내내 금식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정말로 그런 3일간의 금욕을 견딜 힘이 없다면, 저녁에 마른 빵 조각이라도 조금 씹어 먹거나, 적어도 매일 저녁까지 음식과 물을 삼가도록 하십시오. 이럴 때는 관용을 베푸는 편이 낫습니다. 사람이 기절해 버려 영적으로 수련할 수 없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어느 날, 대사순절 첫 주 화요일에, 성 바르라암과 요아사프의 칼리바( )에 계신 장로 바르라암이, 방금 막 들어와 정착한 두 명의 젊은 수도사, 즉 그가 아는 지인들이 있는 한 방으로 갔습니다. 두드리고 또 두드렸지만, 침묵뿐이었습니다. 직접 문을 열어보니 두 형제가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냐, — 물었습니다. — 아픈가?” — “음식과 물 없이 금식하고 있습니다!” — 그들이 말했습니다. “자, 어서 빨리 일어나라, — 그가 말했습니다. “차나 끓여, 컵당 설탕 두 스푼씩 넣고, 크래커도 좀 먹어. 그래야 기도라도 할 수 있잖아. 이러다간 이미 묵주도 손에 잡히지 않을 판이야. 이게 무슨 금식이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

 — 게론다, 대순교 기간 동안 더 엄격하게 절제하는 법을 어떻게 배울 수 있을까요?

 — 세속의 사람들은 적어도 대사순절 기간 동안만 절제를 떠올리지만, 우리 수도자들은 일 년 내내 절제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 각자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영적 정욕이며, 그 다음이 육체적 정욕입니다. 만약 사람이 육체적 수행을 우선시하고 영적 정욕을 뿌리 뽑는 데 힘쓰지 않는다면, 그는 제자리걸음을 하게 됩니다. 어느 날 사순절 초에 한 평신도가 수도원에 찾아왔는데, 어떤 수도사가 그에게 무례하게 대했다. 그러나 그 불쌍한 사람은 선한 마음을 품고 그를 비난하지 않았다. 그 후 그 평신도가 나에게 와서 말했다. “헤론다, 저는 그에게 서운해하지 않습니다. 그도 3일 동안 엄격한 금식을 했으니까요!” 만약 그 수도사가 3일 동안 영적으로 금식했다면, 어떤 영적인 달콤함을 느꼈을 것이고 다른 사람들과도 더 정중하게 대화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만심에 사로잡혀 3일 동안 엄격하게 금식하도록 스스로를 강요했고, 그래서 모든 사람이 그에게 빚진 것처럼 여겼던 것입니다.

 — 게론다, 금식할 때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분의 십자가 희생에 대해 생각하십시오. 하지만 큰 그림에서 보면, 이를 위해 굳이 금식 기간을 기다릴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수도사들은 매일 그리스도의 수난을 체험해야 합니다. 매일 교회 찬송과 예배가 이를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대금식 기간 동안 우리에게는 더 큰 수행의 기회가 주어지며, 회개와 절, 정욕을 끊고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위해 음식 섭취를 줄이는 등, 우리 주님의 구원의 수난에 더 온전히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 영적 여정에서 최대한의 유익을 얻읍시다. 바로 지금 우리에게 지극히 유리한 조건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께 엎드려 그분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최고의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우리가 금식을 얼마나 더 영적으로 보내느냐에 따라, 우리는 그만큼 더 크게 변화될 것이며, 그만큼 더 기쁘게 성부활절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대사순절 기간 동안 여러분께 힘과 굳건함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그리하여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 마리아와 여러분의 수호성인인 성 요한 신학자와 함께 골고다의 그리스도께 나아가, 우리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그대의 수난을 경배하나이다, 그리스도여”[159]

 — 게론다,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경외심을 키울 수 있을까요?

 — 무엇보다 먼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바치신 그 위대한 희생에 대해 생각해야 하며, 또한 우리가 얼마나 배은망덕하고 죄 많은 존재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합니다. 이 점에 대해 말씀하신 성부들을 공경하십시오. 그것도 당신에게 조금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성스러운 수난 그 자체, 주님의 희생 그 자체가 당신에게 훨씬 더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단순히 말로만 우리를 가르치신 것이 아닙니다. 아니요, 그분은 인류를 위해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치시고, 고난을 당하시며,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수많은 모욕과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 그리고 십자가에서의 수치스러운 처형도요, 게론다…

 — 네, 가장 굴욕적인 처형이었죠!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모든 선지자들이 그리스도를 예언했으나, 유대인들은 그분을 때리고, 침을 뱉고, 조롱하다가 결국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 모든 것을 생각하면 사람은 큰 경외감에 사로잡힙니다. 아무리 무관심한 사람이라도 선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이러한 묵상은 그를 영적인 삶으로 깨우쳐 줍니다.

 — 헤론다, 성목요일 저녁, 그리스도의 수난 예식을 마친 후 저는 성당에 밤새 머물지 않고, 제 방으로 돌아갑니다.

 — 안타깝군요. 저는 당신에게 적어도 한 방울의 경건함이 있나 보다고 생각했는데요! 설마 성목요일 저녁에 성당에 남지 않으시는 건가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홀로 남겨두고 각자 방으로 흩어지시는 건가요?

 — 많은 수녀님들, 게론다, 대다수가 성당에 머무르지만, 저는 사소한 소음에도 주의를 빼앗겨 집중하기 어려워서, 그래서 제 방에서 밤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 글쎄, 그렇다면 괜찮습니다. 네 방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성화상을 두고, 그 앞에서 “주님, 당신의 거룩한 십자가에 영광을 돌립니다”와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님, 우리는 당신의 아들의 성육신을 경배합니다”라고 기도하십시오. 동시에 가능한 한 많이 절을 하시오. 이 날은 온전히 보내고, 온몸으로 느껴야 합니다. 저는 성금요일에 이를 위해 방에 틀어박혀 지냅니다.

 — 올해, 게론다, 성금요일에 저는 엄격한 금식을 지켰지만, 저녁에 성의 장례 예식이 진행될 때 발을 딛고 서 있을 수 없었습니다. 제가 주님의 수난을 충분히 경건한 마음으로 대했다면, 그런 순간에 성전에서 앉아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 그렇게 절제하며 수련하는 것이 참 잘된 일입니다. 게다가 그런 날에 어떻게 먹을 수 있겠습니까? 힘들다면 마른 빵 조각으로 배고픔을 달랠 수 있습니다. 예전 수도원에서는 성금요일 저녁에 노약자나 병든 수도사들만 차와 마른 빵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어떤 수도사들은 이날, 유대인들이 십자가 위에서 담즙이 섞인 식초를 마시게 했던 주님을 본받아,[160] 와인 식초를 조금 맛보기도 합니다. 제가 필로페이 수도원에 들어왔을 때, 첫해 성주간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습니다. 성금요일에 어떤 이들은 식초를 마시는 관습이 있다는 것을 알고 저도 마셨습니다. 하지만 식초가 너무 독해서 의식을 잃고 말았습니다.

 — 게론다, 평소에는 금식하기가 힘든데, 왜 성주간에는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을 수 있나요?

 — 성주간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애도하는 시간입니다. 당신에게 가까운 사람이 죽는다면, 음식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비통한 일이 닥치면, 먹지도 마시지도 못할 것입니다.

 — 헤론다, 이번 성 토요일에 우리는 처음으로 찬송과 함께 “흠 없는 자들”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에는 그냥 읽기만 했었죠.[161]

 — 들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저에게 진실을 말해 주셨으면 합니다. 노래할 때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그분의 장례를 거행하고 계셨나요? 시편 구절을 낭송하던 자매도, 트로파리를 부르던 자매들도 모두 마치 무대 위에 서 있는 것 같았어요! 도대체 무슨 연극을 벌인 건가요? 새로운 음악 작품을 연습한 건가요? 하지만 이건 완전히 세속적인 방식이잖아요! 도대체 이해하기 어려운 건가요? ‘거룩한 토요일’의 “흠 없는 자들”은 무덤 앞에서 우는 애가입니다. 울음이에요! 다른 일에서는 조금 열중하는 것이 그리 큰 문제가 아닐지 몰라도, 여기서는 그리스도께서 고문당하시고, 매맞으시고, 모욕을 당하신 뒤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며, 이제 우리가 그분을 장사 지내는 날입니다. 이런 날조차도 여러분이 노래하고 있다는 실감을 하지 못한다면, 제가 도대체 어떻게 여러분을 도울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 게론다, 아폰스 규율에 따르면 성 금요일에는 종을 장례 종소리로 울리나요?

 — 성의가 운구될 때 종을 울립니다.

 — 그런데 낮 동안에도 장례 종소리가 울리나요?

 — 그게 뭐, 어디서 어떻게 울리는지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장례를 알리는 종소리가 제 마음속에서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부활절”

— 게론다, 방금 아이들을 데리고 온 순례자들이 왔는데, 아이들이 기뻐하며 “와, 여기 달걀이 정말 예쁘고 빨갛네요!”라고 하더군요.

 — 아이들이 겉모습에만 매몰되지 않도록 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겉모습에만 머물러 깊은 의미를 찾지 못할 테니까요. 빨간 달걀은 그리스도의 피로 물든 지구를 상징하며, 온 세상이 죄에서 속량받았다고만 말씀해 주세요.

 — 헤론다, 향유를 바친 여인들의 대담함에 저는 감탄합니다.

 — 향유 여인들은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의지했고, 그들 안에는 신성한 사랑이 타오르고 있었기에 모든 위험을 무릅썼습니다. 만약 그들 안에 신성한 사랑의 불꽃이 타오르지 않았다면, 과연 그들이 감히 그런 결심을 했을까요? 새벽녘, 아직 거리에 나가는 것이 금지되었던 이른 시간에, 그들은 향료를 손에 들고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주님의 성묘로 향했습니다. 그래서 천사로부터 부활의 기쁜 소식을 듣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 게론다, 우리는 어떻게 부활의 기쁨을 느낄 수 있을까요?

 — 진정한 기쁨이 찾아오려면, 우리 안에 기쁨을 낳는 슬픔을 가꾸어야 합니다. 우리가 경건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수난 주간을 보낸다면, 영적인 환희와 거룩한 기쁨 속에서 성스러운 부활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 게론다, 저는 부활절 밤에 왠지 모르게 특별히 기뻐할 수가 없네요…

 — 그런 일도 있습니다. 결국 수난 주간 내내, 특히 그 전날인 성금요일에 우리는 수난의 슬픔을 겪었으니까요. 그리고 슬픔의 감정은 기쁨의 감정보다 더 깊기 때문에, 우리는 하루 만에 그 마음의 상태를 극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영혼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뻐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요. 다만 이 밝은 날이 요구하는 만큼 충분히 기뻐하지는 못할 뿐입니다. 하지만 온통 하나의 긴 부활절 날과도 같은 ‘빛나는 일주일’ 동안 서서히 수난 주간의 아픔은 사라지고, 영혼은 부활절의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벌써 둘째 날부터 사람은 부활절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 헤론다, 왜 어떤 수도원에서는 부활절 둘째 날, 심지어 셋째 날에도 십자가 행렬을 거행합니까?

 — 주위 사람들에게 부활의 기쁨을 전파하기 위해서입니다.

 — 뭐, 종도 치나요, 게론다?

 — 빛나는 일주일 동안에는 종을 울릴 뿐만 아니라, 빌라, 클레팔라, 시만드라[162] 도 기쁘게 울려 퍼지고, 마음은 “부활의 날”을 체험하며 노래합니다.[163]

 

 하늘의 기쁨, 그리스도의

 그리고 끊이지 않는 부활절의 기쁨

 달콤하고 평온한 설렘과 함께

 하나님께서 제 영적 자매들에게 언제나 주시기를!

 

 

 

제2장.
공동 기도에 대하여

 

성전은 하나님의 집

헤론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는 것이 필수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사람들은 성전을 방문하는 데 어떤 깊은 의미가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주님의 집을 소홀히 함으로써 스스로 하나님과 연결된 끈을 끊어버립니다. 그런 사람들이 나중에 어디서 도움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안타깝게도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교회의 성사에 참여하지 않기 때문에 악령의 영향력에 빠지게 됩니다.

 저는 항상 평신도들에게 성전에 나가라고 말합니다. 성전은 하느님 자신의 집이며, 그곳은 사람을 거룩하게 하고, 신성한 은총을 받는 곳입니다. 이 사실만 생각해도 경외감이 솟아납니다. 성전에서는 그리스도, 성모 마리아, 성인들이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며, 그곳에서 우리는 그분들께 도움을 청하고, 그분들과 직접 대화할 수도 있습니다. 성전 문턱 밖에서 머무르면, 우리는 성사를 통해 살아갈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그곳, 주님의 성전에서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희생 제물이 되시며, 우리에게 그분의 몸과 피를 주십니다. 이것이 우리를 큰 경외심으로 이끌지 않겠습니까?

 — 게론다, 지금 병 때문에 성당에 다니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배가 정말 그리워요!

 — 지금은 조금만 참아야 합니다. 제가 군 복무 중 산악 작전에 참여했을 때,[164] 그때 — 상상이나 되시나요! — 저는 7개월 동안 성당을 보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몇 대의 무전기를 수리하러 나브파크트로 보내졌는데, 바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할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길가에 있는 교회에 잠시 들렀습니다. 대순교 기간이었고, 성당에서는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 마리아께 바치는 아카피스트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었고, 무전기를 방치해 둘 수도 없었으며, 시간도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교회 문 앞에 고작 5분 정도 서 있었을 뿐입니다. 그때 제가 얼마나 낙담했는지 아세요? 마치 아이처럼 울었습니다! “오, 주님,” 제가 한탄했습니다. “내가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 어릴 적부터 성당에는 성가대장보다 먼저 왔었는데. 그런데 이제 벌써 일곱 달이나 성당에 가지 못했으니!”

 — 게론다, 제가 아르콘다리크에서 봉사를 마치고 바로 성당으로 들어오면 예배에 집중할 수가 없습니다.

 — 아르콘다리크에서 성당으로 가는 거지. 성당에서 하늘로 가고, 그다음에는 더 멀리 — 하느님께로 가라.

 — 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게론다? 하느님의 영광을 생각해야 하나요?

 — 성전은 이 땅 위에 있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하느님의 집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닌 하느님의 집은 낙원에 있으며, 우리의 진정한 집도 마찬가지로 낙원에 있습니다.

 

함께 드리는 기도의 힘

— 게론다, 가끔은 예배 대신 방에 머물며 묵주를 짚고, 절을 하고, 규칙서나 영적 서적을 읽어야 할 필요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 예배 시간을 옮길 수 있겠습니까? 못 하죠. 하지만 방에서 하는 활동은 다른 시간으로 미룰 수 있습니다.

 — 네, 하지만 교회에서는, 헤론다, 제가 독방에서 기도할 때 느끼는 그 은혜로운 변화를 항상 느끼지는 못합니다.

 — 보라, 개인적인 기도는 공동 기도를 위한 준비이다. 성전에서 드리는 네 기도는 질적으로 독방 기도보다 낮을 수 있다. 왜냐하면 성전에서는 은둔처에서처럼 그렇게 자유롭게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전에서 드리는 공동 기도는 훨씬 더 강력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서는 모두가 함께 기도하기 때문이죠. 어떤 사람은 기도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고, 어떤 사람은 더 많은 온기를 담으며, 또 다른 사람은 또 다른 무언가를 더합니다… 그러니 예배가 진행되는 그 두세 시간 동안, 너도 교회에 머물며 모두와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가운데 있느니라.”[165]

 — 헤론다, 저는 독방에서 기도할 때 영적으로 더 편안함을 느낍니다. 예배 중에는 너무 산만해지거든요.

 — 네가 셀라에서 ‘영적으로 더 편안하다’고 느끼는 건 단지 네 생각일 뿐이다. 예배 중에 교회에서 기도에 힘쓰고, 집중하며, 예수기도를 드릴 때 비로소 올바른 영적 태도를 갖게 될 것이다. 어려움 속에서 어려움을 극복하는 법을 배워라. 그렇지 않으면 극복할 수 없다. 모든 훈련에서 실탄 대신 빈 탄환만 지급받는 군인이 어떻게 싸우는 법을 배울 수 있겠느냐?

 — 게론다, 저는 예배 중에 마음이 찢어집니다. 예수기도를 드리는 동시에 성경 낭독과 찬송을 따라가는 것이 잘 안 되기 때문입니다.

 — 왜 그렇게 갈팡질팡하느냐? 어쩌면 이 모든 불안은 네가 스스로에게 “자, 이제 내가 영리한 기도에 얼마나 잘 성공할지, 얼마나 부자가 될지!”라고 말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그 안에는 숨겨진 이기심과 교만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네가 수련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내 예는 과장된 것입니다. 네 안에는 선한 마음이 있으니, 그리스도께서 너를 도우실 것입니다. 어린아이처럼 하나님 앞에 서서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십시오. 좀 더 단순해져 보라. 그러면 그리스도와 성모님께서 당신에게 어떤 은총을 내려주실지 보게 될 것이다. 교회에 들어설 때, 마치 배에 오른 것처럼 상상하고, 자신을 하느님의 손에 맡겨라. 그리고 그 배가 당신을 마땅히 가야 할 곳으로 데려가게 하라.

 — 헤론다, 저는 예배 중에 하품을 하곤 해서 가끔은 전혀 집중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다 보면 마음속에서 이런 생각이 듭니다. “예배에 참석했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어? 어차피 기도도 안 했잖아!..”

 — 어쩌면 네가 하품을 하거나 졸고 있을지 모르지만, 배는 계속해서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배 위에서는 이렇지 않나? 한 사람은 계산을 하고, 다른 사람은 하품을 하고, 또 다른 사람은 자고 있지만, 배는 어쨌든 정해진 목적지에 다가가고 있다. 하지만 넌 차라리 당직을 서고 깨어 있는 편이 낫다.

 — 게론다, 예배 중에 마음이 기도하지 않으면 예배가 지루해집니다.

 — 그렇습니다. 그때는 사람이 영적으로 양식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신성한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면, 예배는 비록 하느님의 사랑을 위한 것이더라도 육체적인 운동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심지어 예배 중에 코를 골고 있어도 잠에 저항하는 사람조차도 적지 않은 상을 받습니다. 성당 안의 스타시디아[166] 는 잠을 자러 있는 곳이 아닙니다. 잠을 자려면 당신의 독방에 있는 침대가 있으니까요. 어느 날 두 명의 평신도가 아폰 산에 와서 전야 기도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수도원 여관에서 기도회 내내 잠을 잤고, 찬양 기도 직전에야 성당에 도착했습니다.[167] 옆 자리에 앉은 수도사는 자꾸만 고개를 끄덕였지만, 잠들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평신도 중 한 명이 다른 사람에게 말했다. “저기 봐, 수도사가 자고 있잖아!” 그러자 다른 사람은 마치 현명한 강도처럼 대답했다.[168] “부끄럽지도 않니? 우리는 몇 시간이나 잤는데 이제야 왔잖아. 그 수도사가 자기 방으로 가서 잠을 잘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물론 깃털 이불 위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돗자리 같은 데서라도 말이야.”

 — 저요, 게론다, 저는 예배에서 기쁨을 느끼지 못합니다.

 — 우리에게 항상 기쁨만 필요한가? 너는 그리스도를 위해 성전에 있는데, 정작 스타시디에 서서 팔걸이에 기대어 쉬고 있잖아. 이렇게 생각해 보라.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두 팔을 벌리셨는데, 나는 서서 기도할 뿐만 아니라 그 와중에 쉬고 있다!..”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면, 예배 중에 낙담하는 일이 없어질 것이다.

 — 게론다, 예배 중에 잠시 앉아도 될까요?

 — 힘들면 조금 앉아도 됩니다. 하지만 할 수 있다면 서서 기도하는 편이 낫습니다. 이는 “그렇게 해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와야 합니다. “나는 교회에 가서 스타시디아에 서서 바닥을 바라보며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강요한다면, 모든 것이 인위적이고 형식적으로 변해버릴 것입니다.

 — 헤론다, 저는 교회에서 오랫동안 서 있다 보니 다리가 아파서 집중을 못 할 때가 자주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 그리스도의 발이 박혀 있던 나무 못을 떠올리며, “내가 아픈 것을 주님께 감사드립니다”라고 말하라. 그러면 네 자신의 고통은 잊게 될 것이며, 네 마음은 평안해지고 기도는 진심에서 우러나올 것이다.

 

 

제3장.
신성한 성체 성사에 참여하는 것에 대하여

 

성사는 개인적인 체험을 통해 이루어진다

헤론다, 제가 성찬식에서 기도할 때, 그리스도께서 저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사실이 저를 전율하게 만들었고,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했습니까?” 헤론다, 그리스도께 감사를 표하기 위해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 네가 그 사실을 마음 깊이 체감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우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치셨으며, 이제 우리에게 그분의 몸과 피를 주시고 계신다. 사람은 이 사실을 묵상할 때 가슴이 뜨거워져야 한다.

 — 헤론다, 신성한 성체 성사의 신비를 어떻게 깊이 체감할 수 있을까요?

 — 신성한 성체성사로 살아가십시오. 이 위대한 성사의 의미를 깊이 체득하려면, 바로 이곳, 바로 이 순간에 그리스도께서 친히 현존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단지 믿는 데 그치지 말고, 그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 헤론다, 전례 중에 집중하는 데 무엇이 도움이 될까요?

 — 신성한 전례에는 거룩한 천사들이 참여합니다. “천사들의 보이지 않는 대열로,”[169] 라고 우리는 노래합니다. 이 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생각하고, 에크테니아의 간구를 주의 깊게 듣고, 진심으로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기도하십시오. 얼마나 많은 귀중한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를 헛되이 날려버렸는지 모릅니다! 가득 찬 성가대가 아름다운 “키리예, 엘레이손”을 부르고, 수많은 자매들이 그 소리에 황홀해하지만, 수십 개의 마음은 무감각한 채로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설령 여러분의 주의가 예수 기도에 집중되어 있다 해도, 그 안에 고통과 연민이 없다면, 이 모든 것은 무의미한 낭비일 뿐입니다.

 — 게론다, 밤샘 기도회 때 너무 지쳐서 전례가 시작될 때쯤이면 제게는 힘이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 그건 놀라운 일이 아니지만, 싸워야 합니다. 인내심을 발휘하고 스스로를 다잡는다면, 하느님께서 도움을 주실 것이며 힘이 솟아나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피로가 사라지고, 밤샘 기도 후에도 잠이 오지 않을 것이며, 하루 종일 지속될 만큼 영적 활동에 대한 열의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 게론다, 전례 중에 앉아도 됩니까?

 — 보통 성찬식 때는 앉지 않습니다. 힘들면 사도서 낭독 때 잠시 앉아도 됩니다. 하지만 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있어 서 있을 수 없는 경우에는 앉아도 됩니다. 비록 저 자신은 성찬식 중에 절대 앉지 않지만요.

 — 게론다, 사제가 “주의 것은 주의 것…”이라고 선포할 때, 어떻게 기도하시나요?

 — 그 순간 성령께서 강림하시므로, 저는 마음속으로 “하늘의 왕이시여,” “축복받으소서, 그리스도여…”[170] 그리고 “강림하셨을 때…”[171] 를 외우며 신성한 깨달음을 얻도록 기도합니다.

 

신성한 성찬을 위한 준비

— 게론다, 신성한 성찬을 어떻게 준비해야 합니까?

 — 사실 항상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성체를 모실 예정일 때는 기도를 더 많이 드리고, 성경과 영적 서적을 더 많이 읽는 것이 좋습니다… 성당에서 듣게 될지라도, 독방에서 신성한 성체 성사 예식을 스스로 읽어보는 것이 매우 유익합니다.[172] 그렇게 하면 이 기도들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하고, 자신의 죄성을 더 깊이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대회개 카논’의 첫 번째 찬송[173] 과 ‘페오토카리아’에 수록된 월요일과 수요일 제5음조의 카논 첫 번째 찬송을 부르며 절을 할 수도 있습니다.

 — 게론다, 성찬식을 위해 미리 준비하지 못했다면, 전례 중에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 설마 “복되도다, 왕국”이라는 찬송 후에 기도문을 다 읽으려고 하는 건가요? 이해하세요, 그리스도는 검사님이 아니십니다. 만약 정말로 준비할 기회가 없었다면, 그분은 그것을 아십니다. 피할 수 없었던 장애물들이 당신의 준비를 방해한 것일까요, 아니면 당신 자신이 스스로에게 장애물이 된 것일까요? 때로는 신자가 밀려드는 일들 때문에 성체성사를 위한 기도문조차 다 읽지 못하고, 마치 100로소 무게의 뭉툭한 나무토막처럼 성찬대에 다가가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는 “하나님, 저 같은 뭉툭한 나무토막을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보신다. 종종 사람은 성찬을 받을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있고, 또 다른 때는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바로 그때가 준비된 때이기도 합니다. 가장 좋은 준비는 겸손한 마음가짐, 회개, 그리고 경건함입니다.

 성체성사 준비는 옷을 갈아입고 양치질을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 스스로를 점검하는 것입니다: 신성한 성체성사를 필요로 느끼고 있는가? 양심과 화해하고 있는가? 어쩌면 성체성사를 받는 데 방해가 되는 무언가가 있어 지금까지 고백하지 못한 채 남아 있는 것은 아닌가? 성체와 성혈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선한 전제 조건이 있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마음에서 떠나시지 않도록 자신의 정욕을 끊어내려는 겸손한 열망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 는 성체성사 안에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지만… 곧바로 떠나시며, 우리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랫동안 머무르실 때, 사람 안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한 성체성사부터 다음 성체성사까지 쉬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 안에서 그리스도를 느끼기도 합니다.

 — 게론다, 때로는 사제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믿음, 그리고 사랑으로 나아오십시오”[174] 라고 선포할 때, 저는 성체를 모실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느낍니다.

 — 병원에서는 정해진 시간에 의사들이 병실을 순회하고, 간호사들이 큰 소리로 “회진!”이라고 외칩니다. 그러면 모든 방문객들은 병실에서 나가고, 환자들은 각자의 침대로 돌아가 의사를 기다리며 자신의 건강 상태를 이야기하고 치료에 관한 적절한 지시를 받습니다. 마찬가지로, 사제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라고 말할 때, 마치 의사가 오신 것처럼 상상하고, 자신의 죄성을 자각하며 겸손히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마음으로 성체 성사에 다가서십시오.

 

신성한 성체 성사는 가장 효과적인 약입니다

— 게론다, 성찬식 때 매우 지치셨는데,[175] 감사 기도를 듣기 위해 남아 계실 필요는 없으셨을 텐데요.

 —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저는 그리스도의 성찬을 받았는데, 설마 하느님께 “감사합니다”라는 말 한 마디도 드리지 않겠습니까? 오직 매우 급한 사정이 있을 때만 일찍 떠날 수 있습니다. 너도 절대 떠나지 말고, 감사 기도를 들으며 끝없이 이렇게 되뇌어라. “감사합니다, 나의 하느님, 감사합니다! 영광을 받으소서, 하느님, 영광을 받으소서, 하느님!” 그러면 네 마음이 기쁨으로 넘칠 것이다.

 어느 날 나는 한 수도실에 있는 성찬식에 갔었다. 무척 피곤하고 지쳐 있었고, 게다가 성체를 모실 준비를 하고 있어서 배도 고팠다. 그곳에는 난로가 없어서, 나는 추위에 떨며 예배 내내 서 있었다. 하지만 성체를 모시는 순간, 온몸에 온기가 퍼지는 것을 즉시 느꼈다. 알다시피, 나선형 히터처럼 — 전류가 나선을 따라 흐르면 나선이 달아오르듯이, 나도 온몸에서 똑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점차 온몸이 불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달콤한 불꽃으로!

 — 타오르지만 타버리지는 않는, ‘[176] ’라고 하시던 게론다…

 — 네, 타오르는 거죠… 달콤한 불꽃으로! 그 후에는 배고픔도, 피로함도, 추위도 없어요!..

 — 그게 얼마나 지속되었나요, 게론다?

 — 저는 성당에서, 성찬을 받은 직후에 그 느낌을 받았고, 그 후 이미 떠난 뒤에도 가는 내내 더웠습니다!

 — 게론다, 왜 어떤 사람들은 육체적으로 약하고 병약한데도 금식을 잘 견뎌내는 것입니까?

 — 그들의 비결은 기도와 지극히 거룩한 성사의 참여가 동반되는 겸손하고 경건한 수행에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거룩한 성사로 자신의 영혼을 양육하고, 그 성사로 자신의 몸도 양육합니다. 우리가 성체를 영할 때, 우리는 가장 효과적인 약인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제4장.
“우리 하나님께 노래하라, 노래하라”
[177]

 

교회 성가는 기도입니다

헤론다, 저는 종종 성가대에 가서 돕는 일을 하는데, 이것이 제 의무라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제가 옳은 일을 하고 있는 건가요?

 — 교회 성가는 수도원의 순종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제는 “노래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합니다.[178] 성가대는 성전에 서 있는 모든 신자들을 대표합니다. 하지만 신자들도 마음속으로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말해야 하며, 성가대의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노래만으로 영적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고대에는 모든 신자들이 함께 노래했고, 교회 규율에 따르면 그래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 구성원 중에는 각기 다른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노래 중에 멈춤이나 혼란을 피하기 위해 교회는 신도들 중에서 경건하고 노래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을 선발하여 오직 그들만이 노래하도록 정했습니다. 그때부터 나머지 예배자들은 입으로가 아니라 마음으로 노래하며, 성가대원들의 노래를 들으며, 하나님께 그분을 아름답게 찬양하는 사람들을 우리 가운데서 바쳤다는 사실에 기뻐합니다.

 — 헤론다, 노래하지 않고 그저 교회 찬송을 듣는 사람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는 것입니까?

 — 사람이 하나님의 찬양을 듣고 그분께 감사한다면, 그런 사람이 주님께 기쁘시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하나님께 드리는 헌사입니다.

 — 게론다, 때로는 어떤 특정한 필요를 위해 밤샘 기도회가 거행되기도 합니다.[179] 제가 성가대에서 노래하고 있어 주로 성서와 노래에 집중하고 있다면, 이 필요에 대해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 기도회가 시작되기 전에 그 필요를 위해 기도할 수 있고, 그 후 성가대가 노래하지 않을 때 묵주를 짚으며 기도하십시오. 게다가 예배 내내 당신의 마음과 정신이 기도가 드려지는 목적에 끊임없이 집중되어 있다면, 노래를 부르든, 시편이나 카논을 읽든, 다른 방식으로 예배에 참여하든, 이 모든 것이 구체적인 필요를 위한 기도입니다. 아시다시피, 우리가 어떤 필요를 위해 전야 예배를 드릴 때, 엑테니아에서 그 필요를 위한 간구는 단 두세 개뿐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일반적인 예식 순서에 따라 진행되지만, 전야 예배 전체는 그 필요를 위해 바쳐지는 것입니다.

 

선한 영적 상태

— 게론다, 저는 노래를 잘 못 부릅니다. 마음속에서는 제 발음이 제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 하지만 네 마음속도 항상 정돈되어 있는 것은 아니잖아. 내면이 어수선하면 노래도 잘 나오지 않아. 노래는 네 내면의 상태에 달려 있으니, 그 상태를 잘 살피도록 해. 목소리가 약한 사람이라도 영적 상태가 좋으면 꾀꼬리처럼 노래하지만, 상태가 좋지 않으면 모기처럼 삐삐거릴 뿐이야. 반면 목소리는 잘 다듬어졌지만 마음가짐이 바르지 않은 사람은 노래 대신 늙은 할아버지처럼 중얼거린다. 어떤 자매가 노래할 때, 여러분도 직접 그녀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들을 수 있을 것이다.[180]

 — 게론다, 우리가 성전에서 노래할 때 음이 틀어지지 않도록 주의합니다.

 — 물론 주의해야 합니다. 모든 일은

 품위 있게 그리고 규례에 따라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181] 하지만 무엇보다도 마음속이 품위 있게 유지되도록, 내면은 물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모든 것이 질서 정연하도록 신경 써야 합니다. 사람이 영적으로 바른 마음가짐을 갖추지 못한 채 노래할 때, 그것은 음이 틀리는 것보다 더 나쁩니다. 좋은 노래는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를 일으키지만, 나쁜 노래는 더 나쁜 방향으로 이끌며, 사람들은 기도할 수 없게 됩니다. 사람의 내면이 평온하지 않고, 잘못된 생각이 있으며, 마음속에 사소한 집착이 있다면, 그가 무슨 좋은 노래를 부를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천국의 달콤함을 느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노래를 부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마음이 평안한 자는 노래하라.” ([182] ) 사실, 성전에서 노래하는 이들은 다른 형제자매들보다 더 예민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지녀야 하며, 더 달콤하고 기쁜 내면의 상태를 가져야 합니다. 자,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 스스로 안에 빛이 없다면 어떻게 “고요한 빛이여”라고 노래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은 경건함에 달려 있습니다

— 게론다, 사람들이 제 노래 실력이 부족하다고 말할 때, 저는 노래 기법에서 무엇을 고쳐야 할지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 너는 연주 기량이나 순수한 기법 따위를 생각하기보다, 수도자의 마음가짐과 경건함, 분별력을 기르려고 노력해야 한다. 경건함이 없는 기량은 분장에 불과하다. 겉치레일 뿐, 부자연스럽고 인위적인 것이다. 세속에서는 어떤 성가대원들이 생계를 위해 성당에서 노래할 기회를 얻거나 더 많은 급여를 받기 위해 목소리를 ‘화장’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만약 내가 작은 본당에 배치된다면, 어떻게 먹고살겠는가?”라고 말합니다. 결국 그들에게는 변명의 여지가 있습니다. 가족을 부양해야 하니까, 그래서 과장된 방식으로 노래하고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수도사에게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는 자연스럽게 노래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노래가 자연스럽고 감동을 주도록 주의하십시오. 노래하는 기술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노래하십시오. 노래할 때는 내면적이고 진심 어린 것과 겉치레적이고 인위적인 것을 구분해야 합니다.

 — 게론다, 제가 세속적인 방식으로 노래하는 건 제 목소리 탓일까요?

 — 네 목소리가 문제가 아니라, 수도원식 노래 방식이 문제야. 넌 마치 세속적인 허세라도 부리는 듯이 노래하고 있어. 수도원에 오기 전에 들었던 어떤 성가대원들이 노래하던 방식처럼 말이야. 네 노래는 자연스럽지 않아. 성대를 무리하게 쓰지 마. 그게 듣는 이들을 얼마나 지치게 하는지 알지? 마음에서 우러나오게, 자연스럽게 노래해.

 — 어쩌면, 게론다, 당분간 아예 노래하지 않는 게 더 나을까요?

 — 아니, 노래해. 다른 자매들의 노래를 듣다 보면 서서히 그런 세속적인 기질이 사라질 거야. 아토스 산에서도 젊은 수도사들은 처음에는 세속적인 방식으로 노래하곤 해. 아직 수도 생활의 경험이 없다면, 어떻게 수도사답게 노래할 수 있겠어? 예전에는 아폰의 성가대원들이 세속 성가대원들과 교류가 적어서 수도원식으로 더 잘 불렀습니다. 지금은 교류가 늘어나면서 조금 방향을 잃었죠. 호박 옆에 멜론을 심으면 멜론도 맛을 잃는 법이니까요.

 모든 것은 경건함에 달려 있다. 경건함이 없는 교회 성가는 마치 산소가 빠져버린 와인과 같고, 조율이 어긋난 악기처럼 듣기만 해도 짜증만 나게 한다. 사람이 크게 부르든 작게 부르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경건하게 부르는 것이다. 그러면 조용한 노래도 졸린 느낌이 아니라 겸손하고 달콤하게 들린다. 그리고 큰 목소리도 거칠게가 아니라 강렬하고 진심 어린 소리로 들린다. 마카리우스 부지카스 신부[183] 는 천둥 같은 목소리를 가졌지만, 자연스럽고 경건하며 감동적으로 노래했다. 그의 심장이 떨리는 것이 느껴졌고, 그 순간 듣는 이의 심장도 멈출 듯했다. “영혼 전체가 뒤집힐 지경이다,”라고 한 노승이 그에 대해 말하곤 했다. 마카리 신부는 카프살레의 스타브로니키타 수도원 독방에서 홀로 살았다. 그 아래층에는 루마니아인이 살았는데, 그는 노래를 잘 부르지는 못했지만 경건함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저녁이 되면 마카리 신부님은 자신의 방 발코니로 나가 “주님께 손을 펼치리이다,”[184] 를 부르기 시작했고, 아래층에 있던 루마니아인이 다음 절을 이어 불렀다! 아, 그건 정말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이었는지!

 노래하는 이에게 경건함이 있는 것은 큰 일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시나요? 그 자신도 내면적으로 변화하고, 그 내면의 변화가 바깥으로 흘러나오기 때문에, 그의 노래를 듣는 사람도 선한 방향으로 변화합니다. 그렇게 그들의 공동 기도는 하느님께 기쁘게 받아들여집니다.

 

성스러운 의미들은 마음을 찔러요

— 게론다, 저는 두 번째 음조를 좋아합니다.

 — 두 번째 성가는 순수한 비잔틴 양식입니다. 어떤 서양 악기로도 연주할 수 없고, 오직 바이올린으로만 연주할 수 있죠. 보세요, 터키인들이 비잔틴에서 음악을 가져왔는데 — 얼마나 감동적으로 노래하는지! 하지만 그들이 노래에서 무슨 내용을 노래하고 있나요? “슬픔을 우조로 씻어내고, 배를 고기로 채우리, 와-와, 오-오-오!..” 터키인들은 우조 한 잔과 고기 한 조각에 대해 노래할 때 황홀경에 빠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치신 그리스도에 대해 노래하면서도, 무감각한 채로 남아 있습니까?

 “오, 복되도다 그 나무여, 그 위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왕이시며 주님이시여…”[185] 사람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기만 해도 눈물이 날 정도로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성스러운 십자가’의 수도실 근처에서 어느 날 나는 길이가 약 1미터 정도 되는 들보 조각을 발견했고, 곧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떠올랐다. 그것을 수도실로 가져와 마치 그리스도의 십자가인 양 그 앞에 엎드렸다. 오, 내 심장이 얼마나 격렬하게 뛰었는지! 나는 잠을 자는 동안에도 그것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 게론다, 그때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을 생각하셨습니까?

 — 오직 십자가 처형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성스러운 십자가를 껴안고 있는 것처럼, 제가 골고다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만약 그것이 진짜 성스러운 십자가였다면, 제 감정이 더 강렬했을지 모르겠습니다. 가슴이 찢어질 듯했고,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심장이 너무 세게 뛰어서 가슴을 찢어 버릴 지경이었습니다. 갈비뼈가 부러지지 않도록 그 나무를 가슴에 꼭 껴안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십자가 예배 순서가 적힌 책을 들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여,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이시여,”[186] 라고 노래하지만, 마음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영혼이 어떻게 변할 수 있겠습니까? 아, 만약 마음이 움직이고 영혼이 변한다면 — 그때야말로 얼마나 위대한 성좌 축제가 시작되겠습니까! 여러분은 한 도시 전체가 참여하는 성좌 축제에 가본 적이 있습니까?

 사람이 이성과 마음으로 자신이 부르는 노래를 따라갈 때, 경건해지기 시작하고, 감동과 그 밖의 모든 감정이 찾아옵니다. 그러니 신성한 의미를 붙잡아 그것이 마음을 꿰뚫게 하십시오. 단 한 마디가 우리 마음의 장벽을 뚫고 들어간다면, 그때 사람은 기운을 차리고 내면이 고양되며 영적으로 변화할 것입니다. 그러면 예배의 나머지 말씀들이 그의 마음속으로 거침없이 흘러들어갈 것이며, 이 영적 변화는 그의 온 존재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제가 “이성을 놀라게 하고,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 참으로 훌륭하도다, 성모여,”[187] 라는 말을 들을 때면 제 이성은 “놀라”서, 즉 작동을 멈추고, 저는 거의 의식을 잃을 뻔합니다. 그리고 “기뻐하라, 땅아, 큰 기쁨을,”[188] 라는 말을 들을 때면, 제가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기쁨에 가슴이 두근거리고, 온몸이 달콤한 전율로 떨립니다. 하지만 교회에서 노래하고 낭독되는 내용의 의미를 간과한다면, 사람의 마음에도 몸에도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 헤론다, 저는 조국을 노래하는 옛 군가들을 정말 좋아합니다.

 — 옛 군가들은 조국에 대한 사랑을 일깨우고, 영웅적인 업적을 이루도록 영감을 주며, 사기를 북돋우고 투쟁으로 이끌어 줍니다. 독일 점령 시절, 피리를 부는 한 맹인 음악가가 있었는데,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투쟁으로 이끌었는지 아십니까? 그 불쌍한 사람이 “건강하소서, 가난한 백성들아”를 얼마나 애절하게 불렀는지! 그는 온 백성을 안타까워했고, 그의 아픔은 피리 소리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모자를 내밀며 구걸을 했습니다. 독일인들은 “눈먼 사람인데 뭘 뜯어낼 게 있겠어”라고 말하며 건드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돈을 던져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음악으로… 설교를 했던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절망에 빠져 있었지만, 그는 그들의 마음속에 불을 지폈고, 많은 이들이 결의에 불타 제르바스의 게릴라 부대가 있는 주메르카 산으로 곧장 향했습니다.[189] 이제 상상해 보세요: 모든 것을 뒤로하고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으로 영적 전쟁에 나서는 것을!

 행진곡 소리가 들릴 때면, 내 눈에는 눈물이 고입니다… 곧바로 전쟁과 해방을 위한 투쟁, 피를 흘리고 목숨을 잃은 영웅들이 떠오릅니다. 교회의 참회 트로파리를 들을 때면, 가슴이 아파옵니다. 부활절 스티히르를 들으면 기쁨에 차오릅니다. 그리고 제가 직접 부를 때면, 제 마음은 하느님 안에 머물고, 가슴은 설레입니다. 슬픔의 스티히르를 부를 때는 영혼이 아파하며 슬프게 노래합니다. 기쁨의 스티히르를 부를 때는 환호합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의미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마음이 신성한 의미에 집중되어 있습니까? 그렇다면 사람은 영적으로 변화하고, 가슴이 타오르며, 이 영적인 감동을 영적인 기쁨으로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마음이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다면, 감동도 기쁨도 없습니다.

 

음악은 마음이 작곡한다

교회 찬송은 단순한 기도일 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광기”이기도 합니다. 마치 마음이 터져 나오는 듯하고, 그 가장자리를 통해 영적인 심정의 감정이 쏟아져 나옵니다. 사람이 그리스도와 천국을 생각할 때, 비로소 마음에서 우러나와 노래합니다. 그리고 조금씩 천상의 맛을 느끼기 시작하면, 모든 찬송 속에서 그 마음의 뛰는 소리가 들립니다. 심지어 마음이 가사에 깊이 빠져 있지 않고 단지 낙원에 대한 생각만 있을 때조차, 그때 심장은 꾀꼬리처럼 떨립니다. 꾀꼬리가 노래할 때면, 꾀꼬리 자신도 온몸이 떨리고, 꾀꼬리가 앉아 있는 나뭇가지마저 온통 흔들립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 나에게는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나는 완전히, 완전히 미쳐버렸어요!”

 — 게론다, 제 생각에는 악보대로 부를 때는 노래가 좀 더 건조하게 나오고, 기억에 의존해 부를 때는 더 진심 어린 느낌이 드는 것 같습니다.

 — 악보는 우리를 다소 옭아매지만, 마음은 옭아맬 수 없습니다.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소리는 경계를 벗어나 무한한 공간으로 날아오르며, 그때 노래는 천상의 소리가 됩니다! 그때는 설령 어딘가 음이 틀리더라도 여전히 달콤함을 느끼게 되는데, 그 달콤함이 마음에서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 게론다, 성가대원이 혼자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합창단과 함께 부를 때는 어떻게 이를 이룰 수 있습니까?

 — 프로토프살트[190] 가 마음에서 우러나와 노래한다면, 나머지 성가대원들도 그에게서 감화받아, 좋은 의미에서 말하자면, 열정을 불태우게 됩니다.

 — 게론다, 만약 프로토프살트가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게 노래한다면요? 그럴 때 다른 성가대원이 마음에서 우러나와 노래할 수 있을까요? 그는 프로토프살트가 정하는 리듬과 음조를 따를 테니까요.

 — 그러니까, 네 생각에는 프로토프살트가 그 사람의 마음을 빼앗아 간다는 건가? 마음은 여기랑 아무 상관없다. 성가대원 중 목소리가 가장 약한 사람일지라도, 노래에 마음을 담는다면 마음에서 우러나와 노래할 것이다. 왜냐하면 달리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노래를 부르면 내면이 뒤집히고, 심장이 두근거리며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이해되시나요? 프로토프살트도, 다른 성가대원들도 그를 방해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 스스로를 변명하지 맙시다. 제 생각에는, 여성들이 진심을 다해, 정성스럽게, 그리고 감동적으로 노래하지 않을 때 변명의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본래 그런 진심 어린 사랑과 부드러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 게론다, 제게는 이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찬송의 분위기를 전달하지만, 그저 피상적으로만 전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 교회 찬송의 정서는 내면, 즉 마음에서 우러나옵니다. 마음이 그 의미에 집중될 때, 비로소 진심 어린 정서, 즉 마음의 전율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음악은 마음이 작곡합니다. 사람의 내면에 있는 힘, 연민, 고통이 감정과 생명, 맥박을 낳고, 이것이 교회 찬송에 달콤함을 더해줍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내면의 의미를 깊이 헤아린다면, 어떻게 노래하게 될지 아시겠습니까?!

 — 헤론다, 당신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이해하겠습니다.

 — 단순히 깨닫는 것이 아니라, 저와 함께 이성을 잃게 될 것입니다! 보세요, 어떤 음악가들은 연주하기 전에 일부러 먼저 와인을 마시고 나서 영혼을 담아 노래하곤 하는데, 그들의 원동력은 와인입니다. 여러분은 신성한 불꽃과 성령으로 취해 있으십시오![191]

 

 

제7부.
찬양의 왕국에 대하여

“영적인 영역, 찬양의 왕국으로 향하십시오. ‘하나님, 영광을 받으소서, 하나님, 영광을 받으소서’ — 이 말을 끊임없이 되뇌십시오.”

 

 

제1장.
하나님을 찬양함에 대하여

 

찬양 속에도 회개가 담겨 있습니다

헤론다, 저는 마땅히 해야 할 대로 수련하지 못하고 있어서 마음이 아픕니다.

 — 마음을 가다듬고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 헤론다, 저는 하나님을 찬양하기보다 용서를 구하는 일이 더 많습니다.

 — 용서를 구하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그래도 그분을 찬양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찬양 속에는 회개가 담겨 있는데, 이는 겸손을 내포하고 있기에 신성한 위로를 가져다줍니다. “하나님이시여, 영광을 받으소서”라는 말은 “나의 하나님, 제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래야 제가 천사들이 주님을 찬양하듯이 주님을 찬양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 가끔은, 헤론다, 제가 기도할 때 죄인인 저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청하는 것부터 시작하지 않고 찬양으로 시작하곤 합니다. 혹시 이것이 잘못된 것일까요?

 — 그건 오히려 옳은 일입니다. 찬양 속에도 회개가 담겨 있다는 이야기를 우리가 하지 않았습니까? 명랑한 사람들은 찬양을 잘 합니다. 보시다시피, 누군가 자애로움으로 인해 자신의 어떤 타락을 깊이 뉘우치고 회개를 보인다면, 이는 하느님을 감동시킵니다. 반면 성품이 다른 사람은 회개한 뒤, 과거의 죄 많은 삶에서 구원해 주신 하느님께 밤낮으로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자녀의 자애로움을 기뻐하십니다.

 

찬양은 가장 큰 감사의 표현입니다

— 헤론다, 방금 내린 비가 도대체 뭐였나요? 나뭇잎이 완전히 마른 채로 남아 있잖아요![192]

— 이 일에 대해 뭐라고 말해야 할까? 나뭇잎을 살짝 적시기만 한 이런 비조차도,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은가? 나는 하늘에 구름이 보이는 것을 보자마자, 하느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나의 하느님, —라고 말했지, — 우리는 비를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배은망덕함을 경계하라.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모든 것에 대해 감사하라.

 — 헤론다, 하나님께서 수도원의 필요에 대한 우리의 간구를 들어주실 때, 우리는 어떻게 그분께 감사를 표해야 합니까?

 — 성인을 통해 도움을 보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기 위해 철야 기도를 드리십시오. 그리고 항상 이 규칙을 지키십시오. 어떤 간구를 하든, 진심 어린 마음으로 간절히 청했을 때,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시면 즉시 진심 어린 찬미를 드리고 기쁨으로 감사하십시오.

 — 헤론다, 그분께 어떻게 찬양을 드려야 합니까?

 — 찬양은 소리 내어[193] 할 수도 있고, 오직 마음속으로만 할 수도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 그것은 내면의 찬양입니다.

 — 게론다, 찬양에는 항상 감사가 포함되어 있나요?

 — 글쎄요, 감사함이 없는 찬양이 어디 있겠습니까? 천사들도 하나님을 찬양할 때 그분께 감사하지 않습니까?

 — 헤론다, 찬양과 감사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 찬양이란 기쁨에 찬 감사, 감사의 분출, 내면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환희입니다. 사람은 어떤 트로파리의 모든 가사를 외우지 못할 수도 있고, 절반만 알고 자신의 말을 끼워 넣을 수도 있지만, 마음은 여전히 기쁨으로 떨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에 감사한다면, 감사와 찬양을 통해 그분의 자비의 모든 풍요로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에서 찬양이 시작됩니다

— 게론다, 우리가 하느님께 품는 감사의 마음이 바로 찬양입니까?

 — 감사의 마음이 가장 중요합니다. 바로 그 감사의 마음에서 찬양이 시작됩니다.

 — 헤론다, 그렇다면 하느님께 대한 감사하는 마음을 어떻게 기를 수 있을까요?

 — 마음속으로 하느님께 대한 감사를 느끼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돌아보고, 이웃에게 올바르게 대하며,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매우 유익합니다. 사소한 은혜에도 이웃에게 감사를 느끼는 사람은, 의심할 여지 없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풍성히 주시는 그리스도께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감사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람은 끊임없이 감사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그리스도께 어떻게 감사를 표현할지 고민하는 바로 그 순간, 주님께서는 그에게 더 큰 축복을 베풀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그분께 대한 사랑으로 인해 그저 녹아내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에게 영적인 감수성이 있어, 비록 아주 작은 선물이라도 끊임없이 하나님께 감사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이에 더 큰 은혜로 응답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 게론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는 각각 구체적으로 생각해야 할까요, 아니면 전반적으로 생각해야 할까요?

 — 각 은혜를 구체적으로 묵상할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좋습니다. 모든 것에 주의를 기울이고 아무것도 놓치지 않는다면,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아주 사소한 손길조차 느끼고 큰 감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아이의 마음이 어머니에게 집중되어 있을 때, 아이는 어머니의 부드러운 손길을 느낍니다. 하지만 아이가 장난감에 푹 빠져 있다면, 어머니가 아이를 어루만지고 입맞춤을 해 주더라도 아이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를 다정하게 어루만지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는 사람은 마음이 뭉클해지고, 가슴이 벅차오르며, 끊임없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 게론다, 어떻게 하면 마음이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기 시작할 수 있을까요?

 — 겸손과 사랑을 통해 사람은 하느님의 위대한 은총을 깨닫고 감사하는 종이 됩니다.[194] “나의 하느님, — 그가 말합니다. — 저는 주님의 돌보심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저보다 더 힘든 처지에 있는 다른 누군가를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사랑과 겸손을 보시고 그 사람에게 당신의 은총을 쏟아 부어 주십니다. 이렇게 이 상호적인 추구가 계속됩니다. 사람이 감사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은사를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 영광을 돌립니다”

— 헤론다, “하나님, 영광을 받으소서”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 “하나님, 영광을 돌립니다”라는 말은 “모든 이가 하나님을 알게 하소서”라는 뜻입니다. 보시다시피, 그리스도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땅에서 주님을 영화롭게 하였으니, 이제 아버지여, 주님께서도 나를 영화롭게 하소서.” ([195] ) 어떤 이들은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하여 “그리스도께서도 영광을 추구하신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은 뜻입니다. “아버지여, 제가 땅에서 주님을 드러냈으니, 주님께서도 저를 드러내 주셔서 사람들이 믿게 하소서.”

 — 헤론다, 저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보다 “하나님, 영광을 받으소서”를 더 자주 되뇌고 싶습니다. 혹시 이것이 잘못된 것일까요?

 — 아니요, 축복받은 영혼이여, 그건 옳은 일입니다! 저는 하루 종일 수공예를 하며 “하나님, 영광을 받으소서! 하나님, 제가 살아 있다는 사실에 영광을 받으소서. 하나님, 제가 죽어 주님께로 갈 수 있다는 사실에 영광을 받으소서.”라고 되뇌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영광을 받으소서. 설령 제가 지옥에 가게 되더라도, 지옥에서 누군가를 대신하여 천국으로 데려가실 테니까요. 그리고 제가 지옥에서 고통받는 것을 슬퍼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지옥에서 많은 죄인들을 천국으로 데려가시어,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기쁨이 더 커지고, 저에 대한 하나님의 슬픔이 줄어들게 하소서.”

 “하나님이시여, 영광을 받으소서”라는 말이 여러분의 입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게 하소서. 제게 아픈 곳이 있을 때, 제 약은 바로 “하나님이시여, 영광을 받으소서”입니다. 다른 약들은 제게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이시여, 영광을 받으소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보다 훨씬 더 높습니다. 티혼 장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여’는 백 드라크마의 가치가 있고, ‘하나님이시여, 영광을 받으소서’는 천 드라크마의 가치가 있다,” 즉 훨씬 더 크다는 뜻입니다. 이를 통해 그는 사람이 필요에 따라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지만, 기꺼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므로, 찬양은 하나님 앞에서 더 큰 가치를 지닌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장로는 “하나님이시여, 영광을 받으소서”라고 말할 때, 우리에게 모든 것이 잘될 때뿐만 아니라, 우리가 고난을 겪을 때에도 그렇게 하라고 조언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시련조차도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의 유익을 위해 허락하시기 때문입니다.

 — 게론다, 가끔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말할 때 마음속에서 어떤 기쁨을 느낍니다. 이게 무엇일까요?

 — 그야말로 진정한 영적 기쁨입니다!.. 그 말씀으로 저를 얼마나 기쁘게 해 주셨는지요! 지금 기쁨에 차서 펜을 들어 “하나님께 영광,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종이 한 장을 이 말로 가득 채울 때까지 써 내려가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음 생에 끊임없이 그분을 찬양하는 천사들과 함께할 자격을 당신에게 허락하시기를 빕니다. 아멘.

 

 

제2장.
찬양의 왕국에 대하여

 

찬양의 왕국에 있는 두 계급

찬미를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점은, 이 왕국에 두 단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사람이 첫 번째 단계를 거치지 않으면 두 번째 단계로 올라갈 수 없다. 첫 번째 단계에서 사람은 고통을 겪지만 모든 것을 올바르게 받아들인다. 그는 선한 마음을 따르며, 스스로를 책망하고, 겸손해지며, 회개하고, 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나의 하나님, — 그가 말합니다. — 제 죄로 인해 이 모든 것을 겪고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저는 더 심한 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견디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부디 모든 것을 견딜 수 있는 인내와 힘을 주시옵소서.” 그러면 신성한 위로가 찾아오고, 사람은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갑니다. 그곳에는 이미 회개의 길을 걸어와 죄를 버릴 때 찾아오는 신성한 위로를 맛보았고, 기쁨의 눈물을 흘린 뒤 찬양에 이른 이들이 있습니다. 그때 사람은 슬픔이 없으며,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거룩한 기쁨과 하나님에 대한 감사를 느낍니다. 끊임없이 “주님, 영광을 받으소서”라고 되뇌며, 하나님의 위대한 은혜와 위대한 사랑에 감사드리고, 그러면 영혼은 저절로 기도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로 나아가거나, 적어도 하나님의 축복에 합당하지 못함을 용서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 게론다, 티혼 신부님은 어떻게 기도하셨나요?

 — 티혼 신부님은 찬양의 왕국에 들어가서 더 이상 기도 속에 머무르지 않고 찬양 속에 머물렀습니다. 그분의 입에서는 오직 “하나님, 영광을 받으소서, 하나님, 영광을 받으소서!..”라는 말만 들려왔고, 일 년 중 거의 모든 날이 그분에게는 “빛나는” 날이었습니다.[196] 왜냐하면 그분은 끊임없이 부활절의 기쁨 속에 살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부활절이고, 언제나 부활입니다! 모든 종과 방울이 기쁨으로 울려 퍼집니다.

 아름다운 음색의 심벌즈로 그분을 찬양하라, 환호하는 심벌즈로 그분을 찬양하라![197] 그들은 하루 종일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들의 심장 박동은 마치 종소리 같다.

 

회개의 눈물과 찬양의 눈물

— 헤론다, 아바 이사악이 눈물에 대해 쓴 다음 말씀을 우리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어떤 눈물은 몸을 태우고 말리지만, 다른 눈물은 몸을 기쁘게 하고 영양을 공급합니다. 죄로 인해 겸손해진 마음이 뭉클해져 흘러나오는 눈물은 몸을 태우고 말라버리게 하지만… 다른 종류의 눈물은 깨달음과 분별에서 비롯되는데, 이 눈물은 얼굴을 아름답게 하고 몸을 기르며 살려줍니다.”[198]

 — 첫 번째 눈물은 회개의 눈물이다. 너는 저지른 죄를 깊이 그리고 진심으로 뉘우치며 겸손하게 그것을 애도한다. 이 눈물은 사람을 지치게 하지만, 그 안에는 신성한 위로도 있다. 영혼이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면, 감사와 찬양의 눈물이 흘러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기쁨의 눈물이다. 그때 영혼은 다른 곳에 이르러, 천상의 달콤함 속에서 기쁨으로 맴돈다. 이 두 번째 상태에서 사람은 적은 양의 음식으로도 충분하다. 마음이 기뻐하며, 그가 먹는 그 적은 양으로도 몸에는 충분하고, 수면 부족도 그에게 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가 억지로 잠을 자지 않는 것이 아니라, 기쁨이 넘쳐서 잠들 수 없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신성한 열정이 타오르니, 그는 잠을 잊어버립니다. 이 위대한 기쁨이 수면 부족을 넉넉히 채워줍니다.

 — 게론다, 사람이 눈물을 흘리며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시니, 찬양하라”고 노래할 수 있을까요?

 — 네, 그는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의 눈물을 흘리며 이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 그러니까, 헤론다, 사람은 하나님을 찬양할 때 울 수도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 네! 그는 감사함에서 오는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느껴서 참을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찬양의 넘침입니다. 영적인 영역, 찬양의 왕국으로 나아가십시오! “영광이 주께 있나이다, 하나님, 영광이 주께 있나이다, 하나님,” — 이 말씀을 끊임없이 되뇌이십시오. 그러면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감동을 줄 것이며, 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께 큰 감사를 느끼게 될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풍성한 축복으로 여러분을 황홀하게 하실 것입니다.

 

 

제3장.
하나님의 은사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은총을 조금씩 베푸십니다

헤론다, 왜 때로는 기도 중에 은혜를 분명히 느끼지만, 또 다른 때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까?

 —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용기를 내어 위업을 이루도록, 때때로 우리에게 이러한 축복을 내려주십니다. 마치 우리가 어린 아이에게 사탕을 주며 “잘 행동하면 더 줄게”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도 우리에게 그런 ‘사탕’을 주셔서, 그분이 얼마나 달콤하신지 깨닫게 하시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며 그분 곁에 머물기 위해 노력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 게론다, 아직 정욕에서 정화되지 않은 사람이 기도 중에 느끼는 그 달콤함은, 영적인 것이 아니라 감각적인 느낌일 수도 있습니까?

 — 처음에는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성장해 감에 따라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게 됩니다. 과일이 익기 전에는 시큼하고 떫은 맛이 나듯이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유익을 위해 점차적으로 은혜를 베푸십니다. 만약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한꺼번에 온전히 느낀다면, 그 은혜를 감당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이 작은 것조차도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확고히 서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이 이 은사들이 자신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깨달을 때까지 그에게서 은사들을 거두어 가실 것입니다.

 — 때로는, 헤론다, 하루 종일 순종의 일을 마치고 내 방에 돌아오면 쉬고 싶은 마음보다 하나님과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 그렇다면 네 영적 밭에 밀이 열렸다는 뜻이다. 게으름 피우지 말고 풍성한 수확을 거두어라.

 — 헤론다, 그런 경우에 저는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까요?

 — 그냥 네 마음에 있는 대로 하나님께 말씀드리면 돼. 하나님께서 너를 어루만지셨으니, 너도 그걸 느끼고 있을 거야.

 

기도 중의 신성한 위로

— 게론다, 왜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향기를 내려주시는 건가요?

 — 하느님께서는 때로는 기도 중에, 때로는 다른 때에 향기를 느끼게 하셔서 위로하시거나, 힘을 주시거나, 무언가를 알려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그분은 항상 어떤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그렇게 하십니다.

 — 때때로, 헤론다, 제가 예수 기도를 드리며 하나님의 자비를 구할 때면, 제 안에서 어떤 내적 변화와 감동을 느낍니다.

 — 사람이 겸손히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며 자신의 죄성을 깨달을 때,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은총을 내려주시고, 사람은 영적으로 변화합니다. 그는 자신의 죄로 인해 하느님을 슬프게 했다는 것을 후회하고, 참회하며, 통회하는 마음을 느끼고,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신성한 위로로 그에게 보답해 주십니다.

 — 게론다, 제가 예수 기도를 드릴 때 어떤 위로와 기쁨을 느낍니다.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까, 아니면 미혹의 소행입니까?

 — 나쁜 것은 아니지만, 차라리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사람이 그런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는 더욱 기뻐하시며 다른 방식으로 그에게 도움을 주십니다. 즐거움이나 기쁨을 느끼기 위해 기도하려고 애쓰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아이가 아버지께 달려가는 것은 아버지가 초콜릿을 주시기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를 사랑하기 때문이니까요. 아버지가 스스로 아이에게 초콜릿을 주고 싶어 하시는 경우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하나님과 하나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쁨을 느끼기 위해 드리는 기도는 진정한 기도가 아닙니다.

 — 가끔, 헤론다, 어떤 어려움을 해결해 달라고 기도할 때, 제 기도 속에 찬양이 담겨 있는 것을 느낍니다. 이게 정상인가요?

 — 기도 후에 신성한 위로를 느끼시나요?

 — 잘 모르겠습니다, 헤론다, 그것이 신성한 위로인지 아닌지는… 하지만 평안함과 확신을 느낍니다.

 — 그렇다면, 하느님에 대한 희망과 신성한 위안이 함께 찾아온 것이군요.

 — 헤론다,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과 올바르게 교제하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나요?

 — 신성한 위로를 느낀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과 올바르게 교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신성한 위로는 인간의 위로와는 비교할 수 없는데, 마치 천국이 땅과 비교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 게론다, 저는 노력하고 기도에 힘쓰고 있지만 위로를 느끼지 못합니다.

 — 그건 좋은 일입니다. 즉, 당신은 대가 없이 하느님을 위해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을 하느님께 맡기고 겸손히 그분의 자비를 구합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정확히 무엇이 필요한지 아십니다. 영적인 사람은 자신의 영혼의 구원 외에는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는 신성한 쾌락을 위해 수고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요, 그는 사랑으로 그렇게 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신성한 은총의 방문

— 게론다, ‘창조되지 않은 빛’이란 무엇입니까?

 —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제 난로는 사람이 만든 것이며, 저는 몸을 녹이기 위해 그 난로에 불을 지핍니다. 그리고 빛이 필요하면 촛불을 켜면 모든 것이 보입니다!

 빛이나 신성한 은사를 결코 찾아다닐 필요는 없으며, 오직 겸손으로 이끄는 회개만을 구하면 됩니다. 그러면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주실 것입니다. 어느 날 저는 다윗 디오니시아스 신부님을 문병하러 갔습니다.[199] 그는 더럽고 어둡고 정돈되지 않은 수도실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어두운 수도실 안에서 그는 빛 가운데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기도에 크게 진전하여 높은 영적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저는 그에게 무언가를 묻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건 말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는다,”라고 그는 되풀이했습니다. 어둠 한가운데서 빛이 없으면서도 빛을 보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쓰레기 더미 속에서 살면서도 하나님의 성소에 거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려면 피를 흘려야 한다.”[200] 기숙사에 살던 시절, 어느 대림절에 나는 이를 실제로 실천해 보기로 결심했다. 나는 스스로를 전혀 아끼지 않았고, 활시위를 너무나 세게 당겨서 조금만 더 당겼다면 시위가 끊어질 뻔했다. 너무나 지쳐서 길 한복판에서 쓰러지곤 했는데,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일어나게 도와달라고 하느님께 간구했다. 사람들이 보고는 “자, 보세요. 이 수도사들은 그렇게 고행하느라 피로에 지쳐 쓰러지네요.”라고 말하지 않도록 말이다. 그것은 매일 반복되는 고행이었다. 나사로 토요일 전 목요일 저녁, 독실에서 기도하던 중 나는 그토록 달콤하고 기쁜 감정을 느꼈다! 빛이 나를 비추었고,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으며, 달콤한 울음이 터져 나왔다. 이 상태는 20분에서 30분 정도 지속되었고, 그로 인해 얻은 힘은 이후 무려 10년 동안이나 나를 영적으로 양육해 주었다.

 내가 이 일에 대해 페트르 장로([201] )께 여쭈었더니,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끊임없이 그런 상태를 경험합니다. 신성한 은총이 나를 찾아오는 그런 순간들에는, 내 마음이 하느님의 사랑으로 달콤하게 따뜻해지고, 어떤 비범한 빛이 내 안과 밖을 비춥니다. 그럴 때면 제 얼굴마저 빛나는 것을 느낍니다. 심지어 제 수도실까지 환하게 밝혀지죠! 그때 저는 스쿠피를 벗고, 겸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그리스도께 말합니다. ‘주님, 주님의 자비의 창으로 제 마음을 꿰뚫어 주십시오.’ 큰 감사의 마음으로 제 눈에서는 달콤한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저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멈춥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리스도를 아주 가까이에서 느끼고 더 이상 무엇을 청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끝나고, 묵주도 움직일 수 없게 됩니다.”

 — 게론다, 사람은 감각적인 눈으로 비창조적 빛을 볼 수 있습니까?

 — 자, 그 사소한 다툼은 그만두세요. 그러면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 게론다, 우리가 그 일에서 벗어나기 전에, 당신은 이미 아폰으로 떠나버리실 텐데요… 자, 제발: 이것이 영적인 자선이 되게 해 주세요!

 — 제가 카투나크에 살 때, 성 이파티오의 수도실에서 어느 날 저녁, 묵주를 짚으며 저녁 기도를 드리고 차를 마신 뒤 계속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녁 기도와 아카피스트를 위해 필요한 횟수의 묵주 기도를 마쳤고,[202] 그 후에는 그저 예수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기도를 더 오래 반복할수록 피로는 점점 사라지고 더 큰 가벼움을 느꼈습니다. 마음속에 너무나 큰 기쁨을 느껴 잠들고 싶지 않았고, 쉬지 않고 예수 기도를 드렸다. 밤 11시경, 내 방이 갑자기 어떤 달콤하고 천상의 빛으로 가득 찼다. 그 빛은 매우 강렬했지만 눈을 부시게 하지는 않았다. 동시에 내 눈도 “더 강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빛을 견딜 수 있을 만큼 강해진 것이다. 내가 그 상태, 즉 그 신성한 빛 속에 있는 동안, 나는 다른 세상, 즉 영적인 세상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고, 몸은 가벼워져 육체의 무거움이 사라졌다. 나는 하나님의 은총과 신성한 깨달음을 느꼈다. 신성한 답변들이 마음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질문이 떠오르는 동시에 답도 받았다. 답변은 단순한 말들이었지만 신학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것은 신성한 말씀들이었다. 만약 그 모든 것을 기록한다면, 두 번째 『에베르게틴』이 탄생했을 것이다. 이는 밤새도록, 아침 9시까지 계속되었다. 그 빛이 사라지자, 모든 것이 어둡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는 거리로 나갔는데, 마치 밤인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 몇 시입니까? 아직 해가 뜨지 않았습니까?” — 나는 지나가던 수도사에게 물었다. 그 승려는 나를 쳐다보며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파이시 신부님?” — “내가 뭘 말했지…?” — 나는 스스로에게 되물으며 방으로 돌아왔다. 시계를 보니 갑자기 무슨 일이 있었는지 깨달았다. 아침 9시였고, 해는 높이 떠 있었는데, 내게는 낮이 밤처럼 보였던 것이다! 태양이 거의 빛나지 않는 것 같았고, 마치 일식이 일어난 듯했다. 나는 마치 밝은 빛 속에서 갑자기 어둠 속으로 들어간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 차이가 컸다! 그 신성한 상태가 끝나자, 나는 평소의 일상으로 돌아와 늘 하던 일을 하기 시작했다. 손바느질을 조금 하고, 묵주를 짚어가며 시간을 확인하고, 9시가 지나자 먹을 것을 위해 마른 빵을 조금 불렸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을 하면서 나는 마치 울타리에 몸을 비비기도 하고, 풀을 씹기도 하고, 이리저리 멍하니 쳐다보기만 하는 동물처럼 느껴졌고,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봐,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야! 이러고 — 몇 년이나?” 저녁이 될 때까지 나는 너무나 큰 기쁨을 느꼈기에 쉴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을 정도였다 — 그만큼 그 상태가 강렬했던 것이다! 그날 하루 종일 모든 것이 흐릿하게 보였고, 일을 거의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여름이라 햇살이 눈부시게 내리쬐고 있었다. 다음 날에는 이미 평소처럼 사물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내 규칙을 지켰지만, 전날처럼 동물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우리는 도대체 얼마나 무의미한 일들에 시간을 낭비하며, 결국 무엇을 잃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 사소한 일이나 시시콜콜한 다툼, 비겁함을 볼 때면 나는 크게 실망한다.

 

그리스도 곁에서는 마음이 잠잠해진다

— 게론다, 아바 이사악은 이렇게 썼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서서 감히 기도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203] 그렇다면 겸손한 사람은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 그는 기도하거나 하나님과 대화할 자격이 없다고 느낍니다.

 — 그럼 그는 무엇을 합니까, 게론다?

 — 그에게는 단순히 하나님 앞에 서기만 해도 충분합니다.

 — 게론다, 그분께서 수련하시던 곳에서 어떻게 기도를 실천하셨습니까?

 — 기도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기도 속으로 빠져든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기도에 깊이 잠기는 것입니다. 달콤한 몰입이죠.

 — 게론다, 장소와 시간의 감각을 잃으셨다는 말씀이십니까?

 — 네, 저는 온전히 기도 속으로 빠져들곤 했습니다… 어떤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르기만 해도 기도를 멈춰야만 했죠. 점점 더 깊이, 더 깊이 빠져드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아시나요?.. 그러면 더 이상 아무것도 원하지 않게 되고, 그저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게 됩니다.

 — 그 다음에는, 게론다, “주 예수 그리스도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만 말씀하시나요?

 —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신성한 온기와 달콤함만을 느낍니다. 이때 예수님의 기도는 멈춥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하느님과 하나가 되어, 그분과 결코 헤어지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죠. 그만큼 마음이 편안해지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그런 상태에 이르면, 기도는 저절로 멈춥니다. 게다가 기도뿐만 아니라, 마음 자체도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멈춰 섭니다. 생각들이 사라지고, 영혼은 오직 신성한 사랑과 신성한 온기, 그리고 보살핌의 달콤함만을 느낍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어머니 품에서 기뻐하는 갓난아기와 같습니다. 아이가 어머니 품에서 조용해지면, 과연 무언가를 말하겠습니까? 아니요, 이제 그들은 하나가 되었고, 바로 그 안에 그들의 교감이 있습니다.

침묵 속의 예수님의 기도는 선한 것이지만, 침묵 속의 침묵은 더욱 선한 것입니다 — 그리스도 곁에서 침묵하는 마음입니다.


[1] 아폰 전통에 따르면, 요한 신학자 수도원의 수녀들은 스타르체 파이시이 스비야토고르츠에 대해 언급할 때, 출판물 곳곳에서 대문자를 사용함으로써 그를 영적 지도자이자 스승으로서 특별히 존중하는 마음을 표현합니다. 우리는 러시아어로 재출간되는 책들에서도 이러한 특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 편집자 주

[2] 누가복음 10:27

[3] “그 날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시편을 외우지 않았거나 기도를 소홀히 한 것 때문이 아니라, 이를 소홀히 함으로써 마귀들에게 틈을 준 것 때문에 우리를 심판하실 것이다.” 참조: 이삭 시린, 성자. 《수행자의 말씀》. 71번째 말씀. 성 삼위일체 세르기예프 라브라, 2008. 432쪽. — 역자 주.

[4] 나중에 이 수도사가 바로 성 파이시우스 자신임이 밝혀졌다. (이하 그리스어 판 편집자들의 주석은 출처를 명시하지 않고 인용한다.)

[5] 1983년 11월에 선포되었다. 이 소식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었다.

[6] ‘마카베오’(고대 히브리어로 “망치”를 뜻함)라는 별명은 기원전 166년에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와 그의 후계자들을 상대로 일어난 유대인 봉기의 지도자 유다에게 붙여진 것이다. 마카베오 가문은 조상의 신앙과 이스라엘의 국가적 독립을 위한 투쟁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참조: 마카베오서 1, 2, 3권.)

[7] 1981년에 기록됨

[8] 1953년, 에스피그멘 수도원에서.

[9] 예전에는 온열 패드 대신 달군 벽돌을 사용했다.

[10] 1962년 10월부터 1964년 4월까지.

[11] 1963년 2월.

[12] 야고보서 4:6, 베드로전서 5:5, 잠언 3:34 참조.

[13] 시편 50:19 참조.

[14] 마태복음 15:21-28, 마가복음 7:25-30 참조.

[15] 참조: 누가복음 18:2-8.

[16] 참조: 요한 클리맥스, 『사다리』. 28번째 설교, 3항.

[17] 누가복음 18:13.

[18] 마태복음 5:24.

[19] “진실로 기도하는 자에게 기도는 심판이며, 재판소이며, 최후의 심판 전에 있는 심판자의 보좌이다.” 참조: 요한 사다리, 성 요한 사다리. 28편, 1항. 모스크바, 2002. 283쪽. — 역자 주.

[20] 우니니예(그리스어 άκηδία — 직역하면 “부지런하지 않음”)는 일반적으로 현대 러시아어에서 슬픔, 우울함, 지루함과 연관된다. 그러나 금욕주의 성부 문헌에서 이 정정은 슬픔의 정정과 구별되며, 더 정확하게는 게으름, 용기의 결여, 비겁하게 고행을 포기하는 것, 오락에 대한 갈망, 영적 이완 등으로 묘사될 수 있다. 겉으로 보았을 때, 낙담은 무활동의 형태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내적 경직 상태를 유지하면서도 매우 끈질기고 적극적인 외적 활동의 형태로도 나타날 수 있다. “기도에서는 연약하지만, 육체적인 봉사에 있어서는 철처럼 강하며, 수공예에는 게으름이 없다” (사다리. 13장, 2항). — 역자 주.

[21] 수행 규칙이란 묵주 기도, 절, 그리고 영혼에 유익한 독서를 의미한다.

[22]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 마리아께 드리는 기도 캐논 후의 스티히라.

[23] 1966년 11월, 존경받는 장로께서는 기관지확장증이 관찰되어 왼쪽 폐의 상엽과 하엽 일부를 절제하는 수술을 받으셨습니다. — 역자 주.

[24] 성인은 하나님과의 교제와 기도를 중단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25] 고린도후서 9:7.

[26] 베드로전서 1:16, 레위기 11:44.

[27] 수도원에서는 타인의 방에 들어가기 전에 문을 두드리고, “우리 성부들의 기도로, 주 예수 그리스도 우리 하나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한 뒤, “아멘”이라는 대답을 기다리는 것이 관례이다. — 역자 주.

[28] 성 파이시우스는 여기서 “κομπολόγια”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보통 엮지 않은 묵주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구슬 목걸이와 비슷한 것을 뜻하며, 무슬림과 가톨릭 신자들도 이와 같은 것을 사용합니다. — 역자 주.

[29] 시편 108:7.

[30] 1958년부터 1962년까지.

[31] 1984년에.

[32] “성상의 숭배는 원형으로 이어진다.” 참조: 성 바실리오 대주교, 『성령에 관하여』, 이코니아의 주교 성 암필로키오에게 보낸 편지, 제18장. 제7차 공의회는 이 문구를 인용하며, 이는 성상 숭배를 옹호하는 교부들의 증언이 되었다. — 역자 주.

[33] “에베르게틴”은 11세기에 콘스탄티노플의 파나기아 에베르게티다(자비로우신 성모) 수도원의 창립자이자 기부자, 원장인 수도사 파블로스가 편찬한 성부들의 다양한 가르침과 이야기를 모은 선집으로, 이 수도원의 이름에서 선집의 제목이 유래되었다. 그리스어로 1783년에 처음 간행되었으며, 러시아어 번역본은 『에베르게티노스, 또는 자비』로 4권(2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모스크바: 성 삼위일체 형제회, 2011. — 역자 주.

[34] 피바이다— 상이집트의 한 지역으로, 수도는 피바이다. 이곳 사막에서는 기독교 초기부터 수도 생활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35] 니트리아— 리비아 사막에 가까운 이집트의 계곡으로, 소금과 질산염을 함유한 수많은 호수가 있다. 기독교 초기에는 수도 생활의 가장 큰 중심지 중 하나였다.

[36] “페오토카리온”— 성 니코딤 산악자가 성산의 필사본에서 수집하여 1796년에 간행한,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 마리아를 위한 62편의 예배 캐논 모음집. 슬라브어 번역본 참조: 『보고로디치크. 매일의 성모 캐논』. 모스크바: 정교회 성 티호노프 인문대학교, 2006. — 역자 주.

[37] 참조: 스타레츠 파이시이 스비아토고레츠. 『스비아토고르스키 수도원의 수도사들과 스비아토고르스키 이야기』. 성 삼위일체 세르기예프 라브라, 2001. 126-129쪽. — 역자 주.

[38] 참조: 요한 황금입, 성. ‘성대한 부활절 설교’. 그리스에서는 부활절 예배 중 성 요한 황금입의 설교가 낭독될 때, 예배자들은 사제를 따라 “설교” 중 일부 문장의 끝부분을 합창으로 반복하는데, 예를 들어: “지옥아, 슬퍼하라…” 모두: “슬퍼하라!” — 역자 주.

[39] 참조: 『사다리』. 13편, 15항. — 역자 주.

[40] 그리스어에서 “경배”와 “회개”는 동음이의어이며, μετάνοια(문자 그대로 “마음의 변화”)라는 단어로 표기된다. — 역자 주.

[41] 참조: 파이지스 스바토고레츠 장로. 『스바토고르의 성부들과 스바토고르의 역사』. 13-39쪽. — 역자 주.

[42] 참조: 이삭 시린, 성자. 『수행자의 말씀』. 70번째 말씀. 429쪽. — 역자 주.

[43] 성 파이지스 스님 자신도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 마리아께 특별한 경외심을 품고 계셔서, 때로는 종이에 적힌 그분의 이름을 오랫동안 입맞추곤 했다.

[44] 메갈로하리(“큰 기쁨”을 뜻함)라고 불리는 티노스 섬의 성모 마리아 성화는 크기가 약 25×35cm인 고대 성모 영보 대축일 성화이다. 10세기에 이 성화는 성당 폐허 아래 묻혔다가 1823년에 발견되었다. 이 성화에서는 수많은 기적이 일어나며, 이를 위해 지어진 성모 수태고지 성당에는 매년 백만 명 이상의 순례자가 찾아온다. — 역자 주.

[45] 딸기나무(라틴어: Arbutus)는 에리카과에 속하는 상록의 작은 나무나 관목으로, 매끄러운 산호색 붉은 껍질이나 갈라진 거친 갈색 껍질을 가지고 있다. — 번역자 주.

[46] 그리스 정교회에서는 평신도와 수도사들이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 마리아를 기리는 이름, 예를 들어 마리아, 파나기아, 파나구다, 심지어 주님을 기리는 이름인 ‘그리스도’를 사용할 수 있다. — 역자 주.

[47] 옥토이흐, 제1음조. 주일 미사, 복된 자들, 성모 찬미.

[48] 성 파이시이 스님은 1984년에 이 이야기를 전했으나 아무런 설명도 덧붙이지 않았다.

[49] 라체니(그리스어 έρως) — 강렬하고 뜨거운 사랑; 기쁨, 위안. — 번역자 주.

[50] “수녀원장이 허락하신다면”이라는 표현은 수도원 규율에서 차용된 것으로, 규율의 일부 변경 사항을 수녀원장의 재량에 맡긴다는 뜻이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성 파이시우스는 “마음의 재량에 따라 행동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51] 여기서 말하는 것은 대사순절 다섯 번째 주 토요일에 낭독되는 ‘위대한 아카피스트’를 가리키며, 이는 다른 모든 아카피스트의 원형이 되었다. 그리스어 원문은 놀라운 시적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 번역자 주.

[52] 여기서 말하는 것은 축하 편지를 뜻하며, 이 편지에는 대개 영적인 가르침도 담겨 있었습니다.

[53] 수로티 수도원은 신력을 따르고, 아폰은 구력을 따르기 때문에, 수로티에서는 성모 승천절과 기타 고정된 교회 축일을 13일 일찍 기념하지만, 부활절과 부활절 주기의 축일들은 같은 시기에 기념한다. — 역자 주

[54]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 마리아를 위한 기도 카논이 끝날 때 부르는 스티히라.

[55] 1955-1958년.

[56] “왜냐하면 뛰어난 인물들을 찬양하는 자는 비슷한 상황에서 그들처럼 행동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참조: 성 바실리오 대주교. 저작집. 제1권. 제19강론. 40명의 순교자 성인들의 날을 기념하며. 모스크바: 시베리아 블라고즈보니차, 2012. 1028쪽. — 역자 주.

[57] 성인은 사람을 양육하고 기쁨을 주는 신성한 은총을 염두에 두고 있다.

[58] 1967-1968년.

[59] 성 아르세니우스 카파도키아스(†1924)는 성 파이시우스의 동향인이자 친척이었다. 성 아르세니우스는 사제 수도사로서 직접 그를 세례하고, 갓 태어난 아이에게 자신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사랑이 넘치는 목자이자 기적을 행하는 이, 그리고 고행자였던 그는 1986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청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그의 성스러운 유해는 수로티 수도원의 그에게 봉헌된 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카파도키아의 아르세니오 성인의 기념일은 10월 28일(신력 11월 10일)이다. — 역자 주.

[60] 참조: 파이지스 스바토고레츠 장로. 『스바토고르의 수도사들과 스바토고르의 이야기』. 9-10쪽. — 역자 주.

[61] 그리스 교회에서는 성인의 지위(성인, 존경받는 성자, 순교자)와 관계없이, 아침 기도(우트렌)에서 캐논의 트로파리 전에 항상 동일한 후렴이 불린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거룩한 바실리오여,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소서.” — 역자 주.

[62] 성 아르세니오스 카파도키아스를 기리는 성당은 1974년 수로티에 있는 여성 이시하스티리아에서 존경받는 파이시오스 성인의 축복으로 건립되었으며, 2014년 파이시오스 장로의 시성식 이후 아르세니오스와 파이시오스, 두 존경받는 성인을 기리는 이 성당의 대성당 봉헌식이 거행되었다. — 번역자 주.

[63] 수술 후 체액을 배출하기 위해.

[64] 성 게오르기 시나이트(†552)는 어느 부활절에 예루살렘의 그리스도 부활 성당에서 성찬을 받고 싶다는 소망을 기도로 표현한 적이 있다. 시나이의 자신의 수도실에 머물고 있던 그는 갑자기 부활 성당(도보로 12일 거리)의 예배 현장에 나타나 예루살렘 총대주교의 손에서 성찬을 받았다. 성 게오르기우스의 기념일은 부활 후 일주일째 수요일(시나이 성인 대축일)과 3월 11일(24일)에 거행된다. — 역자 주

[65] 성 파이시우스가 치료를 받았던 테살로니키에서 라미아 시까지의 거리는 약 270km이다. — 역자 주.

[66] 마태복음 6:4.

[67] 참조: 스타레츠 파이시이 스비아토고레츠. 『스비아토고르의 성부들과 스비아토고르의 이야기들』. — 역자 주.

[68] 성고문자 안티파, 페르가모 주교(†약 68년)는 불에 달궈진 구리 황소 안에서 순교했다. 기념일은 4월 11일(24일)이다. — 역자 주.

[69] 계시록 2:13.

[70] 이리나라는 이름은 그리스어에서 “평화”를 의미한다. 대순교자 이리나의 기념일은 5(18)일 5월이다. — 역자 주.

[71] 이집트의 대순교자 미나(†약 304년)는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 것을 거부하며 군인 신분을 버렸다. 한동안 산에서 은둔 생활을 하다가, 그 후 그리스도를 위해 잔혹한 고문을 당했다. 기념일은 11(24)일 11월이다. — 역자 주.

[72] 1953-1955년 에스피그멘 수도원에서.

[73] 성 스피리돈 트리미푼트스(†약 348) — 키프로스 섬의 주교였으며, 제1차 세계 공의회에 참여했다. 예로부터 성 니콜라오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기적 행자로 숭배받고 있다. 기념일은 12(25)일 12월. — 역자 주.

[74] 성 게라심 케팔로니아스(†1579) — 사제 수도사로, 아토스 산, 예루살렘, 그리고 케팔로니아 섬에서 수도 생활을 했으며, 그의 썩지 않는 유해는 케팔로니아 섬에 안치되어 있다. 기념일은 8월 15일(28일)과 10월 20일(11월 2일)이다. — 역자 주

[75] 성 디오니시오스 자킨토스(†1622) — 성 게라심 케팔로니오스의 대자이며, 학자이자 수도자로, 자킨토스의 성모 마리아 아나포니트리아 수도원에서 수도 생활을 했다. — 번역자 주.

[76] 마태복음 6:21.

[77] 경건한 파이시이 성인은 여기에서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참조: 스타레츠 파이시이 스비아토고레츠. 『성 아르세니우스 카파도키아의 성인』. 모스크바: 스비아타야 고라, 2010. 33쪽. — 역자 주.

[78] 성 아르세니오스 존자가 성지 순례를 마친 후부터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 하지펜디 — 터키어로 직역하면 “순례자님”이다. — 역자 주.

[79] 성 파이시이 스님은 성 아르세니우스 카파도키우스가 행한 구체적인 기적들(그의 집에 침입한 도둑들이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하고 오히려 용서를 구했던 사건)을 염두에 두고 있다. 참조: 파이지스 스바토고레츠 장로. 『성 아르세니우스 카파도키아스』. 94-95, 96, 100-101, 101-103, 104쪽. — 역자 주.

[80] 이러한 조언이 존경받는 파이시이 성자가 의학적 치료를 부정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여기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성인들에게 도움을 청하도록 권면하기 위함입니다.

[81] 요한복음 14:12 참조.

[82] 순교자 루킬리안 니코미디우스(†275) — 그와 함께 클라우디우스, 이파티아, 파블, 디오니시우스라는 네 소년, 그리고 성녀 파블라의 기념일은 6월 3일(16일)이다.

[83] “그리고 찬양과 겸손이라는 두 가지 부분을 다 마쳤을 때, 비로소 구해야 할 것을 구하라. 즉, 앞서 내가 말했듯이, 부나 세상의 영광, 육체의 건강을 구하지 말고… 그러나 네게 명령된 대로 오직 하나님의 나라만을 구하라.” 참조: 성 바실리오 대주교. 저작집. 제2권. 『수도 규칙』. 제1장. 모스크바: 시베리아 블라고즈보니차, 2009. 323-325쪽. — 역자 주.

[84] 마태복음 6:33.

[85] 마태복음 21:22 참조.

[86] 마태복음 6:11.

[87] 참조: 열왕기상 8:4-22.

[88] 참조: 사무엘상 14:24-31, 22:16-21.

[89] 마태복음 6:10.

[90]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참조:  이사악 시린, 성자. 『수도자의 말씀』. 35편. 190쪽. — 역자 주.

[91] 마태복음 7:7.

[92] 그리스의 많은 수도사들은 OGA('Οργανισμός Γεωργικών Ασφαλίσεων) — 농업 보험 협회 —로부터 연금을 받는다. —  번역자 주.

[93] 성인은 여기서 중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매우 열성적인 자매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

[94] 시편 33:2.

[95] 그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새로운 아폰스 파테릭』 제1권. 모스크바: 오르포그라프, 2013. 62-89쪽. — 번역자 주.

[96] 1994년 6월 11일, 서거하기 정확히 한 달 전에 성 파이지스께서 말씀하신 내용이다.

[97] 그분 바로 존경받는 파이시이 성자이셨습니다.

[98] 마가복음 12:44.

[99] 마태복음 8:22 및 누가복음 9:60 참조.

[100] 개별 생활(이디오리듬) 수도원— 수도사들이 공동의 수도원장을 선출하지 않고, 영적 생활과 생계 유지에 있어 각자 개별적인 방식을 따르는 수도원. 성산(판토크라토르)의 마지막 이디오리듬 수도원은 1992년에 공동 생활 수도원으로 개편되었다. — 역자 주

[101] 성 파이시이스는 한동안 식량 담당자로서 식료품의 보관과 배분을 책임졌다.

[102] 아폰 전통에 따르면, 사제는 프로스코미디아(성체 성사)가 끝나기 전에 작은 종을 울리고, 신자들은 마음속으로 살아계신 분과 세상을 떠난 정교회 기독교인들의 이름을 기억하며 기도하며, 이때 사제는 그들을 위해 성체 조각을 떼어낸다.

[103] “좋은 낙원” — 그리스에서 흔히 쓰이는 축복의 말이다. — 역자 주.

[104] 여기서 말하는 것은 바로 성 파이시오스입니다.

[105] 대장 악성 종양 제거 수술 (1994년 2월).

[106] 참조: 시간기도서. 자정기도와 저녁기도 말미의 에크테니아 기도문.

[107] 1994년 6월 28일, 서거 두 주 전에 성 파이시우스가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108] 요한복음 5:24.

[109] 파이지이 스바토고레츠 장로. 『스바토고르스키 수도사들과 스바토고르스키 이야기』. 89-93쪽. — 역자 주.

[110] 그리스 교회의 전통에 따르면, 고인의 유해는 몇 년 후 발굴하여 씻은 뒤 특별한 보관소인 ‘유골실’에 안치한다. — 역자 주.

[111] 슬라브어 버전에는 이러한 문구가 없다. — 역자 주.

[112] 이것은 “길에 순결한 자들은 복이 있도다”라는 말로 시작되는 시편 118편을 가리키는 말이다.

[113] 아르콘다릭 — 방문객을 맞이하는 장소이자 수도원의 여관. — 역자 주.

[114] 1993년 12월에 언급된 내용이다.

[115] 카피즈마(그리스어 καθίζω — ‘앉다’에서 유래)는 비잔틴 전례의 예배 전통에서 시편집의 한 부분이다. 150편의 시편으로 구성된 시편집은 모든 카피즈마의 길이가 대략 비슷하도록 20개의 카피즈마로 나뉘어 있다. 시편을 낭독하는 동안 교회 규정은 앉는 것을 허용한다. — 역자 주.

[116] 시편 103:35.

[117] 시편 36:39.

[118] 본 판의 부록, 251-268쪽 참조.

[119] 교회 예배 규정에 따라 저녁 기도에서는 시편집의 카피즘 한 편이, 아침 기도에서는 두 편이 낭독된다. 이처럼 일주일 동안 시편집 전체가 모두 낭독된다.

[120] 시편 50편.

[121] 첫 번째 부분은 1편부터 54편까지의 시편, 두 번째 부분은 55편부터 100편까지, 세 번째 부분은 101편부터 150편까지이다.

[122] 성인은 사도 바울에 따르면  성령의 성전(고린도전서 6:19 참조)이다.

[123] 우선 예수님의 기도 말씀에는 하나님의 말씀의 성육신에 관한 교리가 담겨 있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나타내고, “예수님”은 그분의 인성을 드러내며, “그리스도”는 둘 다 한 인격 안에 결합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두 본성이 결합된 후에도 서로 섞이지 않은 채로 존재함을 나타냅니다. 참조: 신원 미상의 한 성인이 신성한 기도의 말씀에 대해 남긴 경이로운 말씀. 그리스어에서 번역. 『도브로톨루비야』, 제5권. 모스크바: 아토스 산 판텔레이모노스 수도원 분원, 1991. 5쪽. — 역자 주.

[124] 참조: 익명의 히시카스토스, 『네프티키 테오리아』, 아토스 산 제노폰트 성모 수도원 필사본에서 발췌, “오르토도크소스 키프셀리” 출판, 테살로니키 1979, 97-99쪽.

[125] 마가복음 12:30 참조.

[126] 바로 그 존경받는 파이시이 성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127] 즉, 성 안나 수도원을 말합니다.

[128] 1964~1967년.

[129] 아가 5:2.

[130] 성자는 기도의 행위가 육체적인 노력과 정욕과의 투쟁을 요구하며, 소위 열반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동양 종교의 신자들이 사용하는 기법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131] “몸을 수고시키지 않고 마음이 슬퍼하지 않는 모든 기도는 자궁 속의 미숙아와 다를 바 없으니, 그러한 기도에는 영혼이 담겨 있지 않기 때문이다.” 참조: 이삭 시린, 성자. 《수행자의 말씀》. 11편. 78쪽. — 역자 주.

[132] 참조: 같은 책, 설교 52, 70. — 번역자 주.

[133] 아르세니 페셰르니크 장로(1886-1983)는 아토스 산의 성 안나 소수도원 동굴에서 수행했다.

[134] 참조: 성 이그나티우스(브랸차니노프), 『전집』 제1권. 『금욕적 체험』. 『예수 기도 수행에 관하여』. 291쪽.

[135] 성 파이시이스는 『방랑자가 자신의 영적 지도자에게 털어놓은 이야기』라는 책을 염두에 두고 있다.

[136] 기도와 절제에 관한 성부들의 글 중 가장 잘 알려진 선집은 1782년에 성 마카리오스 코린토스(†1805)와 성 니코디모스 스비아토고르츠(†1809)가 편찬하고 간행한 『도브로톨리비예』이다.

[137] 기도에 깊이 몰입하는 것에 대해서는 245쪽을 참조하십시오.

[138] 그레고리 팔라마, 테살로니키 대주교, 성자. 『기도와 마음의 순결』, 3장 // 『도브로톨루비예』. 5권. 제5권. 제4판. 모스크바: 스레텐스키 수도원 출판사, 2010. 291-294쪽.

[139] 창세기 1:26 참조.

[140] 이사악 시린, 성자. 『수도자의 설교』. 제70설교. 78쪽. — 역자 주.

[141] 이는 사람이 정욕에서 정화되어 더 이상 생각이 없는 영적 상태이다. 아바 이삭이 기록했듯이, “영혼은 생각의 평온을 얻으며, 생각의 평온을 통해 마음의 순결로 승화되고, 마음의 순결에 이르러 사람은 하나님의 신비를 뵙게 된다… 그 후 마음은 예언자 예레미야가 보았던 것처럼 계시와 표징을 보는 경지에 이른다.” (참조: 이삭 시린, 성자. 《수도자의 말씀》. 제59편. 386쪽.) — 번역자 주.

[142] 참조: 이삭 시린, 『수도자의 말씀』. 제1편. 19쪽. — 번역자 주.

[143] 참조: 옥토이흐, 제5음조. 토요일 저녁, 성가대에서 부르는 스티히라. 러시아어 번역: “생명의 주님이시여, 주님의 찔리신 가슴에서 주님은 모든 이에게 생명과 구원의 흐름을 쏟아내셨습니다.”

[144] 예를 들어, 숨을 참는다.

[145] 마태복음 15:8. 또한 참조: 이사야 29:13.

[146] 이사야 66:1-2 참조.

[147] 마태복음 22:37.

[148] 그리스도 탄생 축일 캐논의 첫 번째 노래에 나오는 이르모스.

[149] 성 요한 신학자의 수도원에서는 보통 저녁 9시에 철야 기도가 시작되어, 성찬식과 함께 새벽 4시경에 끝납니다. — 역자 주.

[150] 참조: 루카 2:8.

[151] 누가복음 2:7 참조.

[152] 이사야 1:3.

[153] 슬라브어 미네아에는 이 스티히라가 없지만, 그리스어 미네아에서는 12월 24일 저녁 기도에서 “주여, 내가 부르짖나이다”에 맞춰 부르는 세 번째 스티히라이다. — 역자 주.

[154] 그리스도 탄생 축일 전야 제9시 기도문.

[155] 그리스도 탄생 축일 성가 첫 번째 스티히라.

[156] 규정에 따라 대사순절 첫 3일 동안은 음식과 물을 완전히 금해야 한다.

[157] 사순절 트리오디는 세리と바리새인의 주일부터 대토요일까지 불려진다.

[158] 참조: 성 바실리오 노보의 제자인 그레고리 수도사. 죽음의 순간에 영혼이 겪는 시련에 대하여.

[159] 성 금요일 제9시 기도문.

[160] 마태복음 27:34, 요한복음 19:28-29 참조.

[161] 고대 교회 전통에 따르면, 성 토요일에는 시편 118편(“흠 없는 자들”)이 불려지며, 그 구절들은 ‘찬양’이라 불리는 장례 트로파리 노래와 번갈아 가며 불린다. — 역자 주.

[162] 빌로 — 큰 나무로 만든 매달아 놓는 천. 클레팔로 — 금속으로 만든 매달아 놓는 천. 시만드르 — 나무로 만든 휴대용 천. — 역자 주.

[163] 부활절 카논의 첫 번째 노래에 나오는 이르모스.

[164] 서부 그리스의 나우파크토스 산맥을 가리킨다.

[165] 마태복음 18:20.

[166] 스타시디아— 등받이가 높고 좌석이 뒤로 젖혀지는 나무 의자로, 서서도 앉아서도 사용할 수 있다. 스타시디아는 그리스 성당의 벽을 따라 배치되어 있다. — 번역자 주.

[167] 즉, 철야 예배의 맨 마지막을 의미한다.

[168] 이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두 강도 중 한 명이 다른 한 명에게 한 말을 가리킨다. “너는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느냐? 너도 나와 같은 형벌을 받게 되었는데.” “우리는 우리 행실에 합당한 벌을 받았으나, 그분은 아무 악한 일도 하지 않으셨다”(누가복음 23:40-41).

[169] 케루빔 찬가. 이 예배 찬송은 우리가 창을 든 의장대에게 둘러싸여 도시로 행진하던 비잔틴 황제 못지않은 존경심으로 그리스도를 맞이할 것을 촉구한다. — 역자 주.

[170] 오순절 트로파리.

[171] 오순절 콘닥.

[172] 성체 성사 예식은 보통 성당에서 아침 기도 시간에 봉독된다.

[173] 성 안드레아 크리토스가 지은 ‘대카논’은 대사순절 첫 주간의 첫 4일 동안 대저녁기도에서 부분별로 불려지며, 다섯 번째 주간의 수요일 대저녁기도와 목요일 아침기도에서 전체가 불린다.

[174] 러시아 전통에서는 이 외침이 약간 다르게 들립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믿음으로 나아오소서.” — 역자 주.

[175] 1994년 6월, 존경받는 파이시이 성인이 선종하기 한 달 전에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176] 출 3:2.

[177] 시편 46:7.

[178] 에크텐예(기도문)에 나오는 간구 중 하나.

[179] 축일을 기념하기 위한 기도회뿐만 아니라, 화재나 질병과 같은 특별한 상황이나 어떤 일에 대한 감사의 뜻 등으로도 기도회가 열리곤 한다. —               역자 주.

[180] 보통 평일에는 자매들이 교대로 스티히라와 트로파리를 부릅니다. — 번역자 주.

[181] 고린도전서 14:40.

[182] 야고보서 5:13.

[183] 수도사 마카리우스 부지카스(1886-1965) — 스타브로니키타 수도원에 속한 수도실 중 한 곳에서 살았던 성가대원. — 번역자 주.

[184] 시편 103:28. 이 시편의 28절부터 끝까지의 구절은 축일 전야 예배에서 불린다.

[185] 주님의 거룩한 십자가 승천 축일(9월 14일(27일))의 캐논 제5곡 이르모스.

[186] 주님의 거룩한 십자가 승천 축일 아침 예배에서 제50편 시편에 따른 스티히라.

[187] 주님의 현현 축일 제1카논 제9곡의 이르모스.

[188]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 마리아의 수태고지 축일 캐논 제9곡의 후렴.

[189] 제르바스 나폴레옹(1891-1957) — 정치가이자 군인이며, 독일 점령기 동안 민족 저항 운동의 주요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점령이 끝날 무렵, 제르바스의 군대는 주메르카 산이 위치한 그리스의 에톨리아-아카르니아와 에피루스 지역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었다.

[190] 프로토프살트(그리스어 “첫 번째 성가대원”) — 성가대의 수석 성가대원, 지휘자. — 역자 주.

[191] 참조: 마태복음 3:11.

[192] 심한 가뭄이 계속되던 중, 어느 날 약간의 비가 내렸을 때 한 말이다.

[193] 하나님께 감사를 표하는 의미로 “주님께 영광이 있나이다…”라는 찬송을 읽거나, 묵주를 짚으며 “우리 하나님, 주님께 영광이 있나이다”라고 기도할 수 있다.

[194] 마태복음 25:21-23 참조.

[195] 요한복음 17:4-5 참조.

[196] 부활절 이후 첫 주간을 ‘빛의 주간’이라고 부릅니다.

[197] 시편 150:5.

[198] 참조: 이삭 시린, 성자. 《수행자의 말씀》. 21번째 말씀. 126쪽. — 역자 주.

[199] 그에 대해서는 『신 아폰스 파테릭』 제1권, 172-181쪽을 참조하라. — 역자 주.

[200] 참조: 『기억할 만한 이야기들』. 아브바 롱기노스에 관하여.

[201] 페트르 카투나크스키 신부에 대해서는: 스타레츠 파이시이 스비아토고레츠. 『스비아토고르츠의 신부들과 스비아토고르츠의 이야기』. 65-75쪽.

[202]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 마리아를 위한 아카피스트는 보통 아폰의 저녁 기도 시간에 낭송된다. — 역자 주.

[203]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은 기도에 임할 때 감히 하느님께 기도하거나, 자신을 기도할 자격이 있다고 여기거나, 다른 무엇을 청하지도 않으며,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알지 못하고, 오직 모든 생각을 가라앉힌 채 침묵하며, 자신에게 내려질 단 하나의 자비와 그 뜻만을 기다릴 뿐이다…” 참조: 이삭 시린, 성자. 《수행자의 말씀》. 48번째 말씀. 262쪽. — 번역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