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brotolubie

 

테오판 자트보르니크의 번역

 

 

목차:


1

서문

안토니우스 대성인

안토니우스 대성인의 생애와 저술에 대하여

안토니우스 대성인의 가르침.

1.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에 관한 가르침으로, 아파나시우스의 전기와 그의 20편의 서신 20가지 말씀에서 발췌한

2. 선한 도덕성과 거룩한 삶에 대하여, 170

3. 은둔 생활의 규율

) 그러한 삶의 외적 흐름과 외적 질서

b) 내적 삶의 구조

결론

4. 안토니우스 대성인의 말씀과 그에 관한 이야기

세상을 버리는 것에 대하여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일반적인 답변:

위업을 향해 나아가게 하고 과정에서 지탱해 주는

열심의 지도자들

질투를 어떻게 부추길 있을까?

수행과 선행, 특히

모든 것의 궁극적 목표이자 완전함의 정점

안토니우스의 완전함과 하늘에서의 영광

5. 안토니우스 대성인의 일부 말씀에 대한 해설로, 그가 죽은 노승이 남긴

마카리오 대성인

마카리오의 생애와 저술에 관한 기록

마카리오 대성인의 대화록에서 발췌한 기독교 생활에 관한 가르침

1. 빛나는 원초적 상태

2. 타락한 자의 암울한 상태

3. 구원의 주재자이신 주님

4. 주님 안에서 구원받겠다는 확고한 결심 형성

5. 수고의 상태

6. 성령의 효력을 얻은 자들의 상태

7. 그리스도인의 지극한 완전함

8. 내세

성자 아바 이사야

우리의 성자 이사야, 니트리아의 아바와 그의 저술에 대한 간략한 소개

1. 존경받는 아바 이사야가 자신의 제자들에게 말씀

1. 아바 이사야가 그와 함께 살던 형제들에게 남긴 계명

2. 자연법에 관하여

3. 신앙 생활을 시작한 이들과 켈리오트들의 상태에 대하여

4. 수도실에 거주하는 이들의 여행 양심에 관하여

5. 신자들에게 주어진 계명과, 평화롭게 서로 함께 살기를 원하는 이들의 가정 운영에 관하여

6. 선한 침묵을 지키고자 하는 이들에게

7. 미덕에 대하여

8. 말씀

9. 세상을 저버린 자들을 위한 계명

10. 다른 말씀 (배교자들에게)

11. 겨자씨에 대하여

12. 포도주에 대하여

13. 힘써 싸우고 (위업을) 훌륭히 이룬 자들아

14. 통곡의 행실

15. 세상을 버리는 것에 대하여

16.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하는 영혼 안에 깃드는 기쁨

17. 세상을 등지고 방랑할 때의 마음가짐

18. 원한을 품지 않음에 대하여

19. 정욕에 대하여

20. 겸손에 대하여

21. 회개에 대하여

22. 새로운 사람의 행실에 대하여

23. 완전함에 대하여

24. 무욕에 대하여

25. 제자 아베 페트로에게

26. 이사야의 제자 아바 베드로가 전한 말씀

27. “자신을 삼가라”(신명기 15:9)

28. 악의 가지들에 대하여

29. 통곡

2. 초보 수도자들을 위한 규칙과 조언

3. 아바 이사야의 말씀

4. 마음의 수호에 관하여: 27

5. 수행과 침묵에 관한

마르코 은수자

마르코의 생애와 저술에 관한 정보

영적 삶에 관한 마르코 은수자의 가르침

1. 수도사 니콜라오에게 보내는 서신

2. 수도사 니콜라이의 마르코 포드비즈니크의 글에 대한 답변

2. 마르코의 가르침, 그의 다른 말씀들에서 발췌한

3. 영적 법에 관한 200

4.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자들에 대하여, 226

아바 에바그리우스 폰티우스

아바 에바그리우스의 생애에 관한 기록

수도사 에바그리우스의 수행에 관한 가르침

1. 아나톨리우스에게 보내는 활동적인 삶에 관한

2. 수도사 에바그리우스의 활동적인 삶에 관하여

성스러운 장로들의 명언

3. 수도사 에바그리우스의 저서 수도 생활의 모범』에는 어떻게 수련하고 침묵해야 하는지가 가르쳐져 있다

4. 수도사 에바그리우스의 33개의 비유』

5. 영적 삶에 관한 그의 말씀, 알파벳 순서대로

6. 그의 다른 명언들

7. 아나톨리우스에게 보내는 여덟 가지 마음에 관하여

8. 여덟 가지 생각에 관한 항목과 연계된 그의 생각들

9. 키노비아와 나그네 숙소에 거주하는 형제들에게 주는 교훈

10. 처녀들을 위한 그분의 가르침

11. 온갖 악한 생각에 대하여, 1

12. 에바그리우스 수도사의 격언

2

서문

요한 카시안 로마인

그에 대한 간략한 소개

영적 전쟁에 대한 개관

1. 수행의 목적과 결말

2. 목적을 염두에 두고, 우리의 세속 포기(탈속) 어떠해야 하는지도 결정해야 한다.

3. 육체와 영의 투쟁

4. 정욕에 대한 개요와 그것과의 투쟁

5. 여덟 가지 주요 정욕과의 투쟁

1. 탐식과 싸우기

2. 음탕의 영과의 투쟁

3. 탐욕의 영과의 투쟁

4. 분노의 영과의 싸움

5. 슬픔의 영과의 싸움

6. 낙담의 정신과의 투쟁

7. 허영의 영과의 싸움

8. 교만의 영과의 싸움

6. 생각과의 투쟁, 그리고 이를 통해 악령들과의 투쟁

7. 온갖 종류의 재앙과 역경으로 인한 고통과의 투쟁

8. 신성한 은총과 자유 의지에 대하여

9. 기도에 대하여

10. 영적 생활의 지도에 관하여 가장 경험이 풍부한 이들과의 토론

11. 영적 삶의 완전함에 이르는 단계와, 이를 향한 동기

12. 회개의 수고에 대한 결론

이시히오스,  예루살렘의 장로

그에 대한 간략한 소개

테오둘루스에게 보내는 절제와 기도에 관한 유익하고 구원을 주는 말씀

니로 시나이

그분에 대한 간략한 소개

금욕적 가르침  시나이 산의 니로

1. 기도에 관하여

서문

153. 기도에 관한

2. 여덟 가지 악령에 대하여

1. 탐식에 대하여

2. 음행에 대하여

3. 탐욕에 대하여

4. 분노에 대하여

5. 슬픔에 대하여

6. 낙담에 대하여

7. 허영에 대하여

8. 교만에 대하여

3. 권면하는 장들

4. 사람을 썩어 없어질 것에서 멀어지게 하고 썩지 않는 것에 붙들어 주는 생각들

5. 앞서 언급된 생각과 권면과 유사한 것들, 니로스의 다른 저술에서 발췌한

6. 수도자들에게 주는 권면

에프렘 시리아인

그에 대한 간략한 소개

에프레모스의 수행자들에 대한 가르침

1. 회개와 구원을 얻기 위한 권면

2. 회개에 관한 교훈

3.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자신을 바친 이들의 삶에 대한 일반적인 개요

4. 미덕과 정욕에 대하여

영적 미덕

육체적 미덕

영적 정욕

육체적 정욕

5. 여덟 가지 주요 정욕과의 투쟁에 관하여, 전반적으로

1. 식욕과의 투쟁에 대하여

2. 음탕한 정욕과의 투쟁

3. 탐욕과의 싸움에 대하여

4. 분노와의 투쟁에 대하여

5. 슬픔과의 싸움에 대하여

6. 낙담과의 싸움

7. 허영과의 싸움에 대하여

8. 교만과의 투쟁

6. 수도 생활에 관한 일반적인 교훈

7. 수행자들에게 주는 조언

요한 클리마코스

그에 대한 간략한 소개

요한 사다리꾼의 수행 교훈

1. 수행의 일반적 원리

2. 회개에 대하여

3. 미덕과 정욕, 그리고 후자와의 투쟁에 대하여 전반적으로

4. 여덟 가지 주요 정욕과의 투쟁

1. 탐식과의 투쟁

2. 음행과의 투쟁

3. 탐욕과의 투쟁

4. 분노와의 투쟁

5. 슬픔과의 투쟁

6. 낙담의 영과의 투쟁

7. 허영과의 투쟁

8. 교만과의 싸움

5. 무욕에 대하여

성스러운 경건한 아버지들  바르사누피우스와 요한

그들에 대한 간략한 소개

수행에 관한 가르침

아바 도로페이

그에 대한 간략한 소개

수도 생활에 관한 가르침

이삭 시리아인

그에 대한 간략한 소개

수행에 관한 가르침

3

서문

복자 디아도크, 일리리아 에피루스의 포티키 주교  일리리아 에피루스 지역

그에 대한 간략한 소개

복자 디아도코스가 제시한 주요 미덕의 궁극적 한계, 완전함의 정점

영적 지식과 사색으로 가득 , 실천적인 개의 장으로 나뉜 수행자의 말씀

우리의 경건한 아버지 요한 카르파프스키

그분에 대한 간략한 소개

인도에 머물며 그에게 편지를 보낸 수도사들에게 보낸 편의 권면

복자 아바 조시마  (팔레스타인)

그에 대한 간략한 소개

복자 아바 조시마의 대담

막심 고백자

그분에 대한 간략한 소개

1. 제자의 질문과 장로 답변으로 이루어진 수행자의 말씀

2. 사랑에 관한 400개의

엘피디우스에게 보내는 서문

사랑에 관한 번째 백편

사랑에 관한 번째 백편

사랑에 관한 번째 백편

사랑에 관한 번째 백편

3. 그리스도교 자비론』 700 중에서 선별한 관념적 실천적 장들

복자 아바 팔라시우스

그분에 대한 간략한 소개

아바 팔라시아가 장로 파블로에게 보낸 사랑, 절제, 영적 삶에 관한

101

102

백세 번째

기도

104

테오도르, 에데스 주교

그에 대한 간략한 소개

우리의 성자 테오도르 예데스키의 영혼에 지극히 유익한

테오도르 에데스

그에 대한 간략한 소개

우리의 성부 테오도르의 관념론적 설교

성자 아바 필리몬

그분에 대한 간략한 소개

아바 필리몬에 관한 매우 유익한 이야기

성자 테오그노스트

그에 대한 간략한 소개

활동적인 삶과 관조적인 , 그리고 사제직에 관한 장들

사제직에 대하여

사제직에 대하여

사제직에 대하여

시나이의 필로페이

그분에 대한 간략한 소개

우리의 필로페이 시나이스의 절제에 관한 40장』

일리아 장로 성가대장

그에 대한 간략한 소개

일리아, 최연소 장로이자 에크디크가 정성껏 엮은 꽃모음집

4

테오도르 스투디트

수도자들에게 전하는 가르침

서문

테오도르 스투디토스의 생애 개요

1. 수도 생활이 얼마나 고귀한가

2. 스스로를 높이 여기지 말라

3. 깨어 있으라: 원수가 잠들지 않으니, – 목자에게 위로가 되게 하라

4. 죽음을 기억하고 심판을 생각하며 서원을 지키기 위해 힘쓰라

5. 선한 일에서는 서로 경쟁하되, 악한 일에서는 경쟁하지 말라

6. 정욕에 대항하라. 불로 인해 영원한 불이 타오르기 때문이며, 죽음은 행위가 한창일 닥칠 있다

7. 지위가 높음; 서약을 지키는 것으로 감사함

8. 낙심하지 마십시오: 수고는 적고, 상은 헤아릴 없이 큽니다

9. 영혼의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물을 주어 영적인 열매를 맺게 하라

10. 주님께서 임하시니, 인내하십시오. 그리고 무엇으로 힘을 얻으시겠습니까?

11. 원수가 정욕을 일으키나, 저항하면 이길 것이니, 주님께서 도우시는 분이시니라

12. 여기서 떠나자... , 정욕의 영역에서, 배와 눈과 혀와 귀와 손과 발을 절제함으로써

13. 기상; 아침 기도; 번째 시간;

14. 하느님께로 향하고, 밖의 모든 것은 아무것도 여기지 마십시오

15. 세상에서 도망쳤으나, 원수들이 일으키는 정욕의 파도에서는 도망치지 못했습니다. 이를 주의 깊게 살피고 맞서야 합니다.

16. 여러분의 번영을 보고 기쁩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여 멈추지 않도록, 부디 흐름을 끊지 말고, 모든 부적절한 것을 피하며, 마땅히 해야 모든 일에 열심을 내어 주십시오.

17. 무엇을 위해 세상을 떠났습니까? 정화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삶의 정신, 특히 수도원장님에 대한 믿음 안에서 사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18. 공동체 생활은 지극히 훌륭하니, 안에서 사는 자는 복이 있도다

19. 각자는 자신의 덕목에서 더욱더 발전하라. 순종하는 자는 순종에, 겸손한 자는 겸손에, 근면한 자는 수고에

20. 여러분의 성공이 저를 기쁘게 합니다... 어떤 이에게는 겸손이, 어떤 이에게는

21. 선을 행하라. – 그리고 원수가 곁에 다가오지 못하게 하여, 그가 모두가 악해졌다 외치게 하지 말라.

22.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지만, 지켜내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노력도 필요합니다

23. 원수, 정욕을 일으키는 자에게 맞서라

24. 격한 정욕에 맞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감각, 특히 시선을 지키는 , 육신에 안식을 주지 않는 것이다. 조심하라. 세례 후에 넘어졌으니, 스키마 서원 후에도 넘어지지 말라.

25. 정욕을 이기는 자에게는 면류관이, 정욕에 굴복하는 자에게는 고통이 따릅니다. 여러분이 전자의 부류에 속한다면 좋고, 후자의 부류에 속한다면 서둘러 바로잡으십시오.

26. 수도 생활의 높은 곳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면, 요동치는 헛된 일들의 바다를 보게 것입니다. 그러니 이로부터 벗어났음을 기뻐하십시오.

27. 매일의 교회 예배, 빈약한 생활비, 공동체 생활 규칙의 준수, 벌금과 참회는 많은 수고와 인내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구원에 이르게 하며, 이를 통해 면류관을 얻게 되니, 용기를 내십시오

28. 여러분은 마치 비옥한 땅과 같아서, 누구에게나 미덕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29. 이제 조금만 있으면 이곳을 떠날 것이니, 그러나 우리가 좋은 축복을 받으며 떠나게 하소서

30. 변덕스러움을 피하기 위해, 형제들 사이에서 어떠한 고립도 배제하고, 모든 이를 행실에서 동등하게 대하며, 이를 통해 타락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주는 공동체 규율을 따를

31. 우리가 여기서 어떤 고난을 겪더라도, 저기서는 형언할 없는 보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었던, 길을 먼저 걸어간 성도들의 발자취를 따라, 게으름 피우지 말고 우리의 험난한 길을 꾸준히 걸어가 봅시다.

32. 왕의 길은 모든 일을 규율에 따라 행하는 것이다. 규율을 어기는 자는 지나침이나 부족함으로 치우치게 된다. 규율에서 벗어나는 것도 허용되나, 반드시 수도원장의 허락을 받아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좋은 결과로 끝나지 않는다

33. 하나님의 말씀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지침을 얻을 , 하나님의 경외심으로 시작하여 깊은 겸손으로 끝맺으며, 이를 행함으로 실천한 성인들의 생애를 되새겨야 한다

34. 규율에 대한 반란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음모와 파업을 감지하는 즉시 원장에게 알리도록 하라

35. 우리 안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과 속이는 영의 작용에 대하여, 이를 알게 됨으로써 전자를 열망하고 후자를 멀리하도록 지시함

36. 수고는 필수적이지만, 모든 일에는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있으므로, 수고가 지혜로운 자들의 번영을 방해하지는 않는다

37. 나를 향한 믿음과 사랑 안에서 부지런히 일하십시오. 일을 주관하는 자들은 현명하게 관리하고, 부하들은 성실하게 수행하십시오.

38. 순종의 삶은 무엇보다 뛰어나니, 주님께서도 이를 택하셨다

39. 주님을 눈앞에 두어, 어떤 악한 일에도 흔들리지 말라. 마지막 날을, 나아가 무서운 심판과 결론을 기억하며 선을 행하기 위해 스스로를 다잡으라.

40.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원수의 칼을 물리친다

41. 경제관을 독립된 권력으로 여김으로써, 여러분은 이중 통치와 분열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권력이 분열되면 왕국은 서지 못할 것입니다.

42. 사순절은 육체적인 절제뿐만 아니라 영적인 절제도 요구한다

43. 공동체 생활을 하며 수고하는 이들은 복이 있나니, 기뻐하라!

44. 원장직에 대한 자기 자신에 대한 두려움

45. 악마들은 정욕을 자극하여 유혹하고 파멸시키니, 싸워야 한다

46. 우리는 고귀한 삶을 살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스스로 다짐한 대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기대하는 대로 살고 있을까요?

47. 선택한 삶에서 굳건히 서고, 앞에 놓인 기쁨들을 스스로 박탈하지 말라

48. 죽음이 코앞에 다가왔습니다. 정욕에서 자신을 정화하며 준비하십시오

49.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신 구세주의 모습: 그분께 영광과 감사를 드립니다!

50. 죽은 자를 보며 얻는 교훈: 육신이 아니라 천국을 염려하라

51. 수도원의 모든 이가 일하며 각자의 헌신을 공동체에 바치는데, 수도원에서 생산된 것이 각자에게 귀속되는가

52. 형제 사랑을 지키십시오. 모두 스스로를 정화하며 구원을 얻으십시오. 수다와 웃음을 피하십시오. 여러분 가운데 옳지 않은 일이 있을 듣는 것이 제게는 고통스럽습니다.

53. 나는 떠나가지만, 영혼은 여러분 곁에 남깁니다. 내가 없을 때도, 내가 곁에 있을 때와 같이 지내십시오

54.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라. 서로를 돌보되,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지 말라. 자기 지혜를 자랑하지 말고, 한마음으로 화합하라

55. 열심 있는 수고자들에게 호의를 표하며, 영적 일과 수도원 순종에 대해서도 열심을 내어 것을 요청한다

56. 신앙 생활을 시작한 이들에게는 죄악된 욕망과 습관의 잔재로 인해 유혹이 강하다

57. 우리는 전쟁 중에 있습니다. , 군대 지휘관으로서, 말로 여러분을 격려합니다. 버티십시오.

58. 나는 죽음과 그때 일어날 모든 일을 생각하며, 내게 정화될 기회가 주어지고 불의 시련을 겪지 않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은 비록 현재가 슬픔으로 가득하더라도, 장차 받을 상을 바라보며 기뻐하십시오.

59. 세상의 헛된 일들 가운데 머물렀다가, 우리가 그곳에서 도망쳐 나왔음을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60. 일어나서 만병의 의사이신 주님께 치유를 구하십시오

61. 대사순절의 반환점; 수고한 끝에 열매를 봅니다: 하나님의 자비; 감사를 드리며 앞으로 나아가겠습니다

62. 너희의 질서는 정립되어 있으니, 이를 지키라

63. 유월절을 지낸 , 사순절의 정신으로 나아가, 기간 동안 얻은 것을 낭비하지 않고 오히려 배가시키도록 합시다.

64. 우리는 높은 소명을 받았으니, 기뻐하고 감사하며, 소명을 위해 온갖 수고를 감수하고 모든 것을 견디며 행동합시다.

65. 천국을 위해 선지자들과 사도들, 그리고 다른 성인들이 겪은 고난을 생각하며, 그들에게 본받아 열심을 내자

66.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내게 맡기셨으니, 내가 여러분을 가르치는 열심을 내겠습니까?

67. 여러분을 사랑하기에, 여러분이 잘될 때는 기뻐하고, 어떤 마음가짐을 보일 때는 슬퍼합니다

68. 헛된 일들 속의 평화는 하찮으나, 우리의 목표는 높고, 수고는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

69. 마주치게 되는 모든 불쾌한 일을 참아야 하며, 순교자들의 무리에 합류할 자격을 갖추도록 합시다.

70.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나요? 자신의 뜻을 버리고 수도원장님의 유일한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에서도, 심지어 선한 일이라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과 차별을 두려고 감히 나서지 마십시오.

71. 죄의 원인은 교만과 불순종이며, 이로부터 온갖 고통이 비롯됩니다. 반대로 겸손과 순종으로부터는

72. 참회와 밖의 교정 조치들은 얼마나 구원에 도움이 되는가? 그것들은 천국으로 가는 길이다

73. 길은 힘들고 슬프나, 대가로 헤아릴 없는 위로가 기다리고 있으니, 인내합시다.

74. 왕이 저녁 식사에 부르시면, 모두가 서둘러 갑니다. 하늘의 왕께서 우리를 부르셨으니, 모든 것을 견디며 어떻게 서두르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낙담하지 말고, 모든 것과 용감하게 싸웁시다

75. 우리 방식대로 선한 삶의 열매를 보게 되면, 길을 더욱 엄격히 지키라. 그리하면 너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거처가 것이다.

76. 거룩하게 사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축제가 있습니다. 이것을 원하십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열심을 내고, 그분을 위해 모든 것을 참아내십시오.

77. 인생은 파도가 치는 바다와 같으나, 우선 너희의 조타수가 깨어 있고 지혜로울 있도록 기도하라. 그다음에는 선한 결말을 이룰 것이라는 소망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라

78. 아랍인들이 다가올 그들에게 잡히지 않도록 온갖 방법을 다해 신경 쓰듯이, 영적인 무기를 차고 마음속의 원수들로부터도 그렇게 경계합시다.

79. 시간은 흘러갑니다. 여러분이 지금 하고 계신 것처럼, 특히 겸손과 온유함을 중히 여기며 그리스도를 본받아 주의 깊게 살아가야 합니다.

80. 나는 너희의 순종을 칭찬하노니, 계속 그렇게 하라. 그리고 필요와 순종을 분배하는 자들과, 그것을 받는 자들 모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행하라.

81. 칼보다 무서운 정욕의 반란을 경계하며, 계명으로 스스로를 보호하고 죄에 대한 혐오로 무장하자

82. 형제가 떠났다. 왜인가?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고 유혹적인 생각에 굴복했기 때문이다. 만약 자기 자신을 돌보았다면, 시편의 권면이 그를 깨우쳐 주었을 것이며, 그의 의지가 확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83. 어떤 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지게 하지 않게 하소서.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온전함에 이를 때까지, 우리는 수련과 덕행 속에 머물게 하소서.

84. 누가 이러한 불경건함에 해당하지 않겠는가? 잘못 사는 모든 사람, 특히 서원에 어긋나게 수도원의 빈약한 생활에 불만을 품는 자들이다.

85. 사람이 떠났다는 것이 참으로 쓰라립니다

86. 나는 너희의 굳건함과 변함없는 믿음으로 위로를 받노라. 계속해서 힘쓰고, 스스로를 다잡아 나아가라. 그리하면 하나님의 축복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그러나 그렇지 않은 자들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니라

87. 세상을 등졌다가 다시 그쪽을 바라보는 것은, 어리석고 해로운 짓입니다. 제발 정신 차리십시오

88. 여러분이 정착하신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는 나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내가 기뻐하는 것은 우리가 여러분과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지키시고, 여러분이 번영하도록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89.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아브라함처럼 모든 것을 버렸으니, 슬퍼하지 말고 소망으로 용기를 내어 모든 것을 견뎌내십시오. 앞에는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90. 나에게 주어진 의무는 여러분을 항상 싸움에 나서도록 격려하는 것이니, 여러분에게도 주어진 의무는 항상 영적인 무장을 갖추고 싸우는 것입니다

91. 봄이 왔으니, 조심하십시오. 포도주를 삼가고, 배불리 먹지 말며, 성에 때는 조심하고, 거기서 세속적인 것들을 수도원으로 가져오지 것을 권고합니다.

92. 자기 의지를 끊어내는 것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미덕이다

93. 모든 일에 선을 행하며 힘쓰라. 수고는 크나 상은 크니, 더욱더 힘내어 전진하라

94. 우리가 수도원에 이유가 무엇인지 아시다시피, 그에 반하는 어떤 일도 용납하지 마십시오.

95. 우리는 그리스도의 군대입니다. 보십시오, 여러분의 모든 무기가 준비되어 있는지; 원수는 잠들지 않으니, 싸우십시오

96. 우리가 이전에 어떤 존재였는지, 어떻게 부르심을 받았는지, 그리고 지금 어떤 모습인지를 기억합시다. –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드리되, 말로만 그치지 말고 무엇보다도 바른 생활로 감사합시다.

97. 여러분은 세상을 버린 것과, 순교적인 순종, 그리고 정욕과 보이지 않는 적들과의 투쟁으로 인해 의심할 여지 없이 영원한 복을 상속받으실 것입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십시오

98. 우리는 가난하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먹이시니 그분께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우리도 게으름 피워서는 되며, 각자가 자신의 소명에 따라 일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작은 것을 더해 주실 것입니다

99. 가르침은 헛되지 않다. 그것은 잠든 자들을 깨우고, 깨어 있는 자들을 굳건하게 하며 인도한다.

100. 다스리는 일은 힘드나, 주님을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의 죽음까지 고난을 당하신 분을 위하여, 내가 참아내니, 여러분도 참아내십시오

101. 우리는 수고와 결핍, 그리고 슬픔을 통해 죄에서 정화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102. 공동 생활의 수련을 진실하고 성공적으로 실천한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103. 세상의 생각과 감정, 말과 행동은 우리와 완전히 다르다. 우리는 마치 낙원에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을 대한다.

104. 내게는 말할 의무가 있고, 여러분에게는 들을 의무가 있다

105. 지금은 유혹이 많은 시기()이니, 몸을 다스리십시오

106. 바오로의 말씀과 본보기에 따라, 영원한 복을 바라며 모든 것을 인내합시다.

107. 지금은 사순절이니, 각자가 시기가 요구하는 대로 자신을 단련하라

108. 우리가 하나님께 일하고 있음을 기억하며 나태함을 용납하지 말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열심과 정성에 따라 갚아 주실 것이다.

109. 열정적이고 힘을 다해 세상의 것을 추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것입니다

110. 여러분의 교제를 통해 각자의 선함이 모두에게 전해지고, 모두의 선함이 각자에게 전해집니다

111. 교훈은 여러분이 이를 듣고 바로잡히도록 하기 위해 전해지는 것이나, 여러분은 여전히 변함없이 그대로입니다. 그러니 이상 그렇게 무관심하고 소극적으로 굴지 마십시오.

112. 우리의 영적 경주: 관중은 누구인가? 달리는 자들은 무엇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가? 누가 모범적으로 달리는가?

113. 여러분은 선한 결심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이 현재 겪고 있는 원수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114. 농부가 자신의 밭을 가꾸듯이, 영적인 의미에서 농부가 하는 모든 일을 행하며 우리 영혼을 가꾸어 나가자.

115. 모든 정욕과 분노를 버리고, 주님께 굳게 매달려, 우리 수도자의 소명에 걸맞게 진실하게 그분을 섬기며 일합시다.

116. 어떤 이들이 도망친 사건을 계기로: 굳건히 서서 온전해지라. 선한 일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뜻대로 행동하는 것을 온갖 방법으로 경계하라.

117. 다시 도망친 자들. – 어떻게 하면 이러한 타락을 피할 있을까?

118. 수고는 짧으나 그로 인한 복은 영원하고, 죄의 쾌락은 덧없으나 그로 인한 고통은 끝이 없으니, 부주의한 자들은 이를 피할 없으리라.

119. 우리는 세상에서 나왔으니, 세상에서 고난을 겪는 것이 무슨 놀라운 일인가? 그러나 이는 우리에게 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도움이 되는 것이다

120. 우리의 영적 삶에서 우리는 육신을 입고 땅에서 사셨던 주님의 삶의 모습을 반영할 것입니다

121. 누구도 따로 나서는 없이, 자기 아버지에 대한 믿음을 잃지 말라. 그리고 악을 교묘히 꾸미는 원수의 말은 듣지 말라

122. 여행자들은 여정의 끝을 바라보며 길에서 마주치는 모든 어려움을 기꺼이 견뎌냅니다. 우리도 하늘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참아야 합니다.

123. 서로 어떤 점에서 열심을 내야 하며, 어떤 점에서 서로를 능가해야 하며, 어떤 점에서 서로 뜻을 맞춰야 하는가

124. 모든 일에, 내면과 외면 모두에서 바르게 행하라

125. 선조들을 본받아 하나님의 계명과 우리의 규율을 지키되,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126. 세상의 것을 버리고 하늘의 것을 향하여 나아가며, 특히 분노와 정욕과 싸우라

127. 여러분이 흩어졌던 곳에서 다시 모여 마땅히 그래야 대로 질서를 잡은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128. 여러분은 선하게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품행이 나쁜 자가 명도 없기를 바랍니다.

129. 모든 이에게 감옥에서 구출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라고 권면한다

130.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131. 수도원으로 가는 길에 자신을 위해 기도하며, 그들에게 그들의 수고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노니, 이는 수확이

132. 소프로니우스에게 권고하노니, 선조들의 규율이 이행되는지 살피라. 이는 그것에서 모든 선이 나오고, 반대에서 모든 악이 나오기 때문이다

133. 우리의 수고는 크지 않으나, 상은 헤아릴 없이 크다

134. 모든 일에 온전하여, 여러분 뒤를 이어 수도원에 들어올 이들에게 선한 누룩이 되게 하십시오. 눈앞에 하나님과 죽음,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의 결정을 두십시오. 떠나든지, 오든지

135. 출애굽과 심판을 기억하며 힘쓰라. 여기에는 유익한 행실들이 제시되며, 특히 육신의 정욕과 싸우기 위해 필요한 것이 강조된다.

136. 그들에게 마땅한 위치가 어디인지, 그리고 누군가 마땅하지 않은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지에 대한 질문을 통해, 의무적인 삶의 전체 체계를 상기시켜 주라

137. 수확철에 예배를 드리고, 음식을 섭취하며 휴식을 취하고, 밤을 보내며, 전반적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

138. 형제들에 대한 좋은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지도자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그리고 모든 형제들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 주며 더욱 번창하도록 격려한다.

139.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사랑은 열정을 불태우고 선한 길로 인도하나, 이를 갖지 못한 자들은 게으름에 빠지고 넘어진다

140. 서원을 어기고 수도원을 떠나는 이들을 위해 슬퍼하며, 온갖 방법으로 그들에게 올바른 길로 돌아와 수도 생활에 굳건히 머물도록 설득한다.

141. 마땅한 삶에서 지속적인 번영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지혜와 뜻을 버리고 믿음으로 인도하심에 순종할 것을 권면한다

142. 모든 세속적인 것을 버리고, 고행의 수고를 통해 결핍과 슬픔으로 가득 빈곤한 삶을 살아가도록 기뻐하라고 권면합니다. 이는 천국 유산을 상속받기 위한 확실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143. 수행자의 삶을 경기장에서의 경주에 비유하며, 경주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상을 받는 방법에 대해 상세히 가르친다

144. 우리는 모든 미덕을 열망하고, 모든 악을 경계하되, 특히 선해 보이는 악을 특히 경계해야 한다

145. 공동 생활의 수련에서 인내하는 ;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순교이다

146. 지진을 계기로 마지막 하늘과 땅이 뒤흔들릴 것을 상기시키며, 이에 상응하는 교훈을 주십니다

147. 우리는 모든 덕행에서 더욱더 번창할 것이며, 열심을 내고 모든 악을 피하며, ... 선조들의 본을 따라 천사들의 공동생활의 위업으로 자신을 단장하고, 위대한 약속을 바라며

148. 선은 우리에게 뿌리내리기 어렵지만, 악은 쉽게 받아들여진다

149. 원수의 유혹에 굴복하거나 넘어지는 자들을 질책하고, 주님의 도움을 약속하며 그들에게 맞서 싸우도록 설득한다.

150. 우리가 누구이며, 존재하며, 어디에 있고, 어디로 것인지를 명확히 함으로써, 마지막 심판의 판결과 오른편에 자들과 왼편에 자들의 운명을 묘사하며, 교훈을 이끌어 낸다.

151. 세속적인 경기장에서 경기에 대비하는 방식에서 영적이며 보이지 않는 전쟁에서 싸우는 이들을 위한 교훈을 도출하기

152. 농부, 수영가, 상인, 여행자의 예를 들어 영적 복을 얻기 위해 열심을 내도록 격려한다

153. 주님을 위해 일하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를 가르치며, 형제들도 이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수도원에 들어왔음을 상기시키며, 주님의 말씀으로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준다: “구하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154. 원장직의 짐이 얼마나 무거운지, 특히 각자에 대한 책임을 생각할 무게가 얼마나 큰지를 떠올리며, 도움을 청합니다. 무엇으로? 수도 생활에서의 성공을 통해

155. 용맹한 시민이 왕에게 상을 받으러 부름을 받아 기뻐하듯이, 우리 형제 하리톤도 이곳에서 주님께 부르심을 받아, 수녀원에서 이룬 공로와 수고에 대한 보상으로 이제 형언할 없는 천상의 복을 누리며 기뻐하고 있다.

156. 달마트 수도원에서는 다른 어떤 이유도 아닌, 오직 겸손 하나만을 이유로 새로운 원장을 선출했다.

157. 사순절이 찾아왔고,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을 모두 질서 있게 정리하였다

158. 수도사들을 칭찬하며, 그들이 세상을 버림으로써 고기 먹는 절기와 같은 쾌락과 위안에서 멀어졌고, 경건함과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름받았음을 말하였다. 안에야말로 참된 기쁨과 끊임없는 축제가 있다

159. 스스로를 경계하라. 원수가 갑자기 닥쳐와 너희를 파멸시킬 있으니

160. 형제들의 질서 정연함과, 그들이 모든 일을 규율에 따라 수행하며 수도원 생활에 모두 만족하고 있는 것을 기뻐하며, – 그는 덧붙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죽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있도록 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방향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161. 우리는 노래하노니: “구원의 잔을 받으리이다”. 잔은 순교를 받아들이는 것이니, 이는 우리를 위해 정욕과의 고통스러운 투쟁으로 이루어져 있느니라

162. 고인의 모습을 묘사하고, 묘실에서 보이는 바를 언급하며, 고인의 선한 삶에 대한 간략한 개요를 싣고 나서, 그리스도의 합당한 신부가 되기 위해 몸과 영혼의 순결을 지키는 것에 대한 교훈을 이끌어낸다.

163. 악의 영들과 그들의 우두머리인 마귀를 향한 우리의 싸움

164. 하나님의 사람, 참된 수도자의 외모에 대한 묘사

165. 사도의 말씀인 보라, 지금이 유리한 때라 인용하며, 사도가 이를 통해 우리가 구원을 이루도록 열심을 불태우게 한다고 말한다.

166. 삶에서 굳건히 서서 모든 것을 참아내라. 너희가 누리게 영원한 복을 생각하면, 많이 참지 못한 것을 후회하게 것이기 때문이다

167. 악한 영들과의 싸움

168. 우리 각자의 길을 걸어가며, 세속적이고 덧없는 것들을 바라보지 말고, 하늘에 속하고 영원한 것들에 시선을 고정합시다. 왜냐하면 전자는 우리를 나태하게 하지만, 후자는 우리에게 용기를 주기 때문입니다.

169. 너희는 그리스도의 군인들이다. 너희는 끊임없이 온전한 무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바로 다음과 같이 말이다.

170. 영혼을 돌보는 일을 포도나무를 가꾸는 일과 비교한다

171. 원수가 온갖 방법으로 우리를 밀어내려고 애쓰는 계명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를 성공적으로 이루기 위해 우리는 다음 사항들을 지켜야 한다

172. 우리의 일상은 수도 생활의 규칙과 수도원 순종의 규율에 따라 살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어야 한다.

173. 영혼을 가꾸는 일은 땅을 경작하는 것처럼 특별한 시간이나 준비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언제든지 편리하며, 필요한 모든 준비는 악을 모두 억누르고 선을 모두 돕고자 하는 소망과 결심에 달려 있습니다.

174. 세상을 떠나 서원을 하고 수도원에 들어와 하느님께 기쁨을 드리는 삶을 있는 힘을 얻었으니, 여러분을 길로 부르신 주님께 감사드리되, 말로만이 아니라 여러분이 선택한 삶의 실천으로 감사드리십시오. 이것이야말로 세상에 대한 승리입니다.

175. 잠시 자리를 비우며, 상사와 부하들에게 규율에 따라 행동하고 생활할 것을 요청하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지시한다

176. 산을 바라보며 용감하게 서서, 신성한 묵상을 화살처럼 삼아 구원의 적들을 물리치라

177. 원수의 작동으로 인해 많은 정욕이 우리를 공격한다. 영적 전신 갑주를 입은 채로 싸워야 한다.

178. 여러분은 이제 대사순절을 지내셨고 영적인 열매로 풍성해졌습니다... 그러니 스스로를 엄격히 살피며 열매를 간직하십시오

179. 원수의 유혹에 귀를 기울이지 맙시다: 우리 조상은 유혹에 귀를 기울였고, 낙원에서 쫓겨났습니다

180. 금식은 우리가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절제할 하나님께 기쁘시게 여겨지나, 오직 육체적으로만 절제한다면 그분께는 기쁘시지 않다.

181. 하나님의 계명과 공동체 서원을 이행하는 힘쓰라. 그리하면 주님께서 주시는 형언할 없는 기쁨을 누리게 것이다

182. 가르침도, 아버지의 훈계도, 하나님의 말씀도 듣지 않고, 여전히 고쳐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습니다. 원인은 육신의 욕망을 따르고 구원에 대해 소홀히 하기 때문입니다.

183. 여러분 많은 이들이 마땅히 그래야 모습입니다. 그런데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습니까?

184. 공동 생활 속의 수련 생활에서 보여주는 수행의 모범은 어떤 것보다 뛰어나니, 이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185. 수고하는 이들을 열매가 풍성한 포도나무에 비유함으로써, 덕행의 결실을 맺고자 하는 열정을 불러일으키고

186. 우리가 세상을 떠나 수도원에 들어왔는지를 기억하며, 경험으로 드러난 걸림돌들을 피하여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열심을 내자.

187. 우리 모두는 조화롭게 행하며, 각자 자신의 미덕에서 번영하되,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 어떤 수고도 마다하지 말자. 이를 통해 우리는 의심할 여지 없이 천국을 얻게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188. 원조께서 원수에게 속으셨던 것처럼, 우리도 속고 있습니다. 원수는 악을 선인 속임수로 포장하여

189. 자기 만족을 위한 욕망을 충족시켰을 발생하는 나쁜 결과에 대한 경험들이 우리에게 이를 삼가도록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190. 우리에게 힘든 일입니다. 원수는 우리를 유혹하기 위해 곳곳에서 계략을 꾸미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알고 있으니, 우리 자신을 경계하며 맞서 싸우겠습니다.

191. 인내로써 원수를 이기고, 순교자들이 고문을 자처하고, 경건한 이들이 온갖 엄격한 금욕을 감내했던 바로 말로 다할 없는 은혜를 누리게 것입니다.

192. 우리가 부르짖으면 주님께서 우리를 죄와 원수들의 속박에서 구원해 주실 것이다

193. 우리 생명이 어떻게 끝날지 기억하며, 우리 조상들을 본받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열심을 내자

194. 여러분은 마치 좋은 정원처럼 다양한 미덕의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그러니 스스로 시들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195. 너희는 너희 영적 아버지들의 이름으로 불려야 하며, 정해진 규칙에 따라 하나의 수도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

196. 가르침은 가장 중요한 , 영혼의 구원에 대해 말하므로, 온전한 주의와 열망을 다해 들어야 한다

197. 전쟁 중에는 군인들이 싸우느라 평안을 누리지 못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면 비로소 안정을 찾는다.

198. 우리는 경기장에서 경쟁하고 있다: 힘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199. 격언들은 수도자의 미덕과 위업을 지적하며, 안에서 번창하도록 독려하고 있다.

200. 형제들이 엄격한 수도 생활을 실천하고 있음을 칭찬하고, 속에서 순교의 특징을 지적한 , 장차 순교자들과 함께하게 것이라는 희망을 주며 계속 그렇게 하도록 설득한다.

201. 형제들을 모든 수도 생활의 수련에서 온전한 자들로 묘사하며,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우리는 영원히 그와 같이, 각자가 정해진 때에 자신의 일을 행하며 살자.”

202. 자신의 뜻을 꺾음으로써 자신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라. 항상 모든 일에서 그러하되, 그리하면 하나님의 자비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203. 모든 것을 버리고 기꺼이 좁은 길을 따라가는 여러분을 칭찬합니다

204. 불결한 정욕을 자극할 있는 모든 것에서 멀리하고, 모든 불쾌한 일을 참아내라. 그러면 보상이 크리라

205. 고기 금식 기간에는 절제하지 못하는 빠져서는 되며, 읽는 복음서에 깊이 몰입하고, 그에 따라 거룩하게 살겠다는 결심을 세워야만, 우리가 천국을 상속받을 있다.

206. 비록 우리가 항상 금식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은 다가오는 금식 기간 동안에도 무언가를 실천하도록 하라.

207. 어떤 이는 이것에, 다른 이는 저것에 힘쓰되, 규례에 따라 모두에게 공통된 원칙은 이러하니, 자기 뜻대로 아무것도 행하지 말고, 생각으로 인해 원수가 자기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주의하며, 모든 선한 일에서 방해받지 않고 번창하도록 하라.

208. 금식 수련은 습관을 통해,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행할 수월해지며, 무엇보다도 경건한 묵상을 통해 대상이 제시된다

209.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한다. 존재에 대해, ... 세례를 통한 하나님의 자녀 됨에 대해, 수도 생활에 대해, 성상 파괴자들 앞에서 고백한 신앙에 대해

210. 금식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도록 격려해 것은, 금식이 주는 유익함물론 평화롭고 사랑이 넘치는 마음가짐을 유지하면서, 수고를 감당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위대한 약속들입니다.

211. 평화와 화합에 관한 교훈;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에 관하여; 구원을 이루기 위한 부지런한 수고에 관하여; 그리고 전반적으로 수도자의 삶에 합당한 삶에 관하여

212. 나는 의무에 따라 가르침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열매가 맺히도록, 가르침에 힘입어 여러분이 성장함으로써 저를 도와주십시오.

213. 죽음이 가까웠으니 준비해야 합니다. 어떻게? 모든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하십시오

214. 하나님을 기억할 , 죽음도 기억하라

215.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평화를 주셨으니, 이는 겉으로는 모든 사람과 화목하게 지내되, 속으로는 정욕과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스스로 평화를 누리도록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다.

216. 가르침을 경청하고, 그것을 믿은 , 가르침이 일깨워 주는 바를 실천해야 한다

217. 세속적이고, 세상적이며, 죄악된 속박에서 해방되었으니, 다시는 그것들로 돌아가지 않도록 하자

218.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들어야 한다. 이는 여기서 모든 영적 태도가 비롯되기 때문이다.

219. 우리는 기념 예식을 겉으로만 행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도 행합시다. – 이때 우리도 언젠가 세상을 떠날 것임을 기억하며; 그리고 사실에 힘입어 떠날 날을 준비합시다.

220. 사순절의 끝은 우리를 부활절의 면전 앞에 서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 삶의 과정 또한 부활절의 면전 앞에 있습니다.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헤아릴 없이 나은 부활절입니다.

221. 겨울이 지나고 식물 왕국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듯이, 영혼도 결핍과 슬픔, 고난을 겪은 영적으로 꽃을 피우고 영적인 열매를 맺으며, 주님께서는 열매로 기쁨을 얻으시고 양식을 얻으십니다.

222. 금식 기간 동안 누군가가 특히 탁월했던 수행자의 미덕들을 열거한 , 다음과 같이 덧붙입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변함없이 영원히 그와 같은 모습을 유지하십시오.”

223. 모든 이에게 시련이 되었던 어떤 사건을 상기시키며, 모두가 견뎌낸

224. 정욕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주님의 수난과 부활을 끊임없이 기억합시다

225. 부활절이 지났고, 수난절도 지났으나, 부활절의 기쁨과 주님의 수난에 대한 기억은 우리 안에 살아 있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살아갈 , 우리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위해 살게 것이다.

226. 우리가 세상에 , 우리의 생활 방식을 비방하려는 자들의 입을 막을 있도록 스스로를 다스리자

227. 금식을 통해 여러분은 영적인 은혜를 모았습니다. 이제 은혜를 지키기 위해 힘쓰십시오

228. 방심하지 마십시오. 죽음은 언제나 가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죽음 뒤에는 심판과 보응이 따릅니다.

229. 피조물이 꽃으로 뒤덮이고 향기를 풍기며 그리스도의 부활을 축하하듯이, 우리도 온갖 미덕을 조화롭게 결합하여 우리 안에서 영적인 향기를 준비함으로써, 모든 명절 중의 명절을 축하해야 한다.

230. 승천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본성을 얼마나 높이 들어 올리셨는지 깊이 생각하며, 합당하지 않은 삶으로 본성을 어둡게 하지 않도록 하자

231. 주님의 승천으로 우리 본성도 승천하였으니, 은총의 위대함을 공경하고 온갖 미덕으로 우리 자신을 아름답게 단장합시다

232. 주님께서는 다른 위로자를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이것이 오순절에 이루어졌으니, 이는 참으로 위대한 일입니다

233. 모든 성인의 축일. – 그들은 누구인가? 모든 순교자들이다: 어떤 이들은 피의 순교자이고, 다른 이들은 자기 희생의 순교자들이다

234. 주일에는 주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기억하는 것이 우리에게 교훈이 되게 하소서

235. 어떤 사람이 죽어가며 나는 뜻밖의 순간에 당했다라고 외치고, 말을 마치지 못한 숨을 거두었던 일을 떠올리며, 다음과 같은 교훈을 이끌어 냅니다. , 언제든지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도록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236. 우리는 깨어 있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어 있음을 북돋우고, 주님의 갑작스러운 재림을 기다리자. 그때 깨어 있는 자들은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들림받을 것이니

237. 흩어짐. 이에 대해 기뻐할 것을 권면한다

238. 지금은 추수의 때입니다. 우리의 영적 수확도 이와 비슷합니다.

239. 수확. 모두 지칠 모르고 수고합니다. 우리도 마땅히 그러해야 합니다. – 각자가 자신의 일에 힘써야 합니다

240. 평신도들은 죽을 유언을 남기는데, 수도자들에게도 유언이 있다. 어떤 유언인가?

241. 인내 가장 위대한 미덕이며, 그것은 성인들의 길이다. 우리도 안에서 번창하자

242. 변모는 미래 세상의 모습이다... 우리는 처음에 창조되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러한 광채와 아름다움을 향해 예정되어 있다

243. 시나드 대주교인 복자 미하일이 주님 곁으로 돌아가셨으니, 그를 기리며 추모합시다. 그는 여전히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244. 칼키돈의 요한 성인의 장례식에서 돌아온 , 형제들이 평소와 같이 질서 정연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고 칭찬하며, 그들이 항상 그러하기를 바란다

245. 평소의 축제는 영적인 축제이기도 하며, 평소의 장사도 영적인 장사이다

246.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독생자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의 모든 영적·육체적 병을 고치시고 모든 복을 주시는 분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분은 땅에 계셨을 때에도 그러하셨고, 지금도 그러하시니, 이는 누구나 스스로 알고 있는 바와 같습니다.

247. 지금은 포도 수확의 때입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우리도 포도이기 때문입니다.

248. 성화의 은사를 받았으니, 이를 지키며 무엇보다도 육신의 정욕을 피합시다. 이는 은혜의 상태에 반하며, 노예의 상태로 전락시키고, 두려움으로 가득 채우기 때문입니다.

249. 밭에 씨를 뿌리는 모습을 보며, 우리 자신을 영적인 마음가짐의 씨앗으로 가꾸는 교훈을 얻자

250.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보여준다

251. 자신의 병에서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 그리고 병으로 인한 고통에서 영원한 고통으로 넘어간다

252. 주현절은 주님께서 육신을 입고 땅에 오심으로써 주어진 은혜의 위대함을 떠올리게 한다

253. 광야를 방황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안식이 약속되었으나, 모두가 그곳에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254. 동정은 결혼 생활보다 높다

255. 성상 숭배와 고문으로 인해 유배지에서 얼마나 많은 형제들이 세상을 떠났는가? 이들은 정통 신앙의 진리를 증언하는 증인들이다.

256. 명절을 영적인 위로 속에서 지내야 한다

257. ... 교부들을 본받아야 한다. 그러나 너와 같은 삶의 방식을 가진 이들을 본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해가 것이다

258. 수도사가 무엇인지 밝힌 , 오늘날의 수도사들이 수도사들에 비해 어떤 점에서 뒤처졌는지를 묘사한다

259. 성육신하신 분의 가정을 세우신 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기억하며, 그분의 영에 따라 새롭게 속에서 살아가며, 낡은 것을 벗어나자.

260. 성부들의 생애를 살펴보는 것이 우리 안에 모든 선한 것을 되살리고, 모든 악한 것에서 우리를 멀어지게 한다는 점을 지적한 , 각자의 순종의 본성에 따라 그분들을 본받도록 모든 이를 권면한다.

261. 세상의 정신에 따라 바라는 모든 것은 덧없으나, 오직 미덕만이 영원히 복되다

262. 우리가 광야에서 이곳으로 넘어올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가 많으니, 말로만 감사할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도 감사해야 한다.

263.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와 같이 전심으로 자신의 의무를 다하라

264. 싸웠다: 비난한다

265. 또한 다투는 자들을 책망하고, 성찬식에서 동기를 빌려와 모든 이에게 화해를 권유한다.

266. 열심 있는 사람은 악한 행위뿐만 아니라 악한 생각에서도 자제하며, 이를 통해 하나님의 평안을 얻어 신성한 관상 속에서 황홀함에 빠진다.

267. 순종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서로 도와야 하며, 언제나 거절하거나 지체하지 말고, 지시하는 이들의 말에 순종해야 한다.

268. 사순절 전의 사순절 기간 동안 감각적 쾌락에 빠지는 것은 기독교 정신에 어긋난다

269. 앞에서의 박해: 하나님의 도움을 의지하고, 박해를 견뎌낸 대가로서 믿음으로 인해 주어지는 약속들에 용기를 얻어, 이를 기꺼이 맞이합시다.

270. 다시금 사순절 기간의 방종과, 나아가 세속적인 삶에 대한 훈계, 그리고 하나님께서 수도자들을 이로부터 건져 주심에 대한 감사

271. 사순절은 소란과 헛소문을 잠재우고, 평신도들을 경건한 생활로 이끌었다.

272. 영혼의 집은 세속적인 집보다 정성을 다해 지어야 한다

273. 사순절이 지났습니다. 육신을 굴복시키고 영혼에 덕을 더하여, 신랑이신 그리스도께 기쁨이 되기를 바랍니다.

274. 성상파괴주의자들의 공세가 있었다. 견뎌냈다

275. 이단자들과 교제해서는 된다

276. 이야기는 불가리아에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277. 성모 영보 대축일은 성육신하신 구원의 역사의 시작이므로, 우리가 영적으로 이를 기념할 의무를 지게 한다

278. 성모 영보 대축일에 동정성을 찬양하며

279. 부활절은 모두가 갈망하는 축제이지만, 영적인 부활절은

280.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받는 것은 복된 일입니다. 그러니 용기를 내어 고난을 준비합시다.

281. 주님의 고난을 되새기며, 함께 고난받는 일에 힘내자

282. 주님께서 그와 같은 분이시면서, 어떻게 그토록 고통받으시는가?

283. 여러분의 선한 일에서의 성취를 기뻐합니다

284. 상처를 입은 , 나는 치료를 받았고, 보시다시피 지금 여러분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285. 낯선 땅에서도 그들에게 온갖 풍요로움을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리도록 권면한다

286. 인간의 외적인 유혹은 본질적으로 가볍다

287. 우리의 본성은 졸리고 게으르다. 약속에 관한 말씀이 이를 일깨운다

288. 현재의 박해는 덜하지만, 그래도 참아야 하며, 세대는 일로 인해 칭찬을 받습니다.

289. 박해는 선물이다: 선물에 합당하게 박해 속에서 살아야 한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제시된다

290. 내가 죽어가는 이가 떠났으니, 우리에게도 똑같은 일이 닥칠 텐데, 도대체 육신을 아끼는 것입니까?

291. 구원은 끊임없이 그리고 기꺼운 열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292. 모든 이에게 구원에 대해 끊임없이 열심을 내라고 명한다

293. 경청하고 기를 차려 싸우자. 원수들이 많고, 쉬지 않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294. 하나님께서는 시험을 위해 슬픔과 박해를 보내시나, 시험이 끝나면 이를 끊어내신다

295. 아무리 죄가 많은 사람이라도 회개할 있다: 예시

296. 세속적인 사람들은 하찮은 이익을 위해 많은 것을 참아내는데, 우리야말로 영원한 이익을 위해 참지 않을 있겠는가?

297. 여행자들은 모두 안식을 바라며 모든 것을 참아냅니다. 우리도 영원한 안식을 바라며 모든 것을 참아내어,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합시다

298. 아무리 설명해도, 여러분 일부에게는 여전히 세속적인 마음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299. 테오도르는 성상파괴 이단에서 회개했다가 다시 타락한 자들이 수도원에 보낸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300. 우리는 모든 슬픔을,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우리가 사용해 방법들, 특히 의심 없는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를 통해 견뎌 내자

301. 원수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언제 어디서나 예기치 않게 공격해 오니,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

302. 마음이 헛되이 흐트러지거나 죄악된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하려면, 그것을 하나님에 대한 묵상 하나님의 속성과 행적, 천사들의 계급, 성인들의 거처, 그리고 가시적인 세상을 관조하는 안에 머물게 해야 한다. 이를 통해 영혼의 아름다움이 보존된다.

303. 수도원을 떠난 이단에 빠지고 타락한 자들을 언급하며

304. 특히 박해로 인해 깨어 있자. 이는 이때 원수가 더욱 맹렬히 덤벼들기 때문이다

305. 율법과 복음의 계명을 차이점을 설명하며 제시하고, 어느 것도 지키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없다고 말한

306. 순종을 가장 풍성한 열매를 맺는 위업으로 칭찬하고, 순종하지 않는 삶을 사는 자들을 책망하며

307. 가르침의 유익함을 상기시키며, 모든 이가 서로 협력하여 하나님의 거처 안에서 함께 세워지도록 초대한다

308. 우리의 삶은 바다를 항해하는 것과 같다

309. 어제 왕이 보낸 사자가 왔는데, 우리는 왕이 우리를 호의적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모두 흉한 예감을 품었다

310. 앞으로, 앞으로 덕의 길을 따라

311. 칭찬을 받으며 세상을 떠난 사람이 있다: 그를 본받으라는 교훈이 주어진다

312. 오직 참된 수도자들만이 기뻐할 있으니, 이는 세속적인 일에 대한 염려가 없고 오직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일에만 전념하며, 동정 생활을 지키기 때문이라

313. 땅의 삶은 변덕스럽다. 불순종부터 그렇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314. 형제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를 계기로, 우리가 떠날 날을 준비하고, 항상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힘쓰라는 격려의 말씀을 전합니다.

315. 믿음을 지키며 선한 삶에서도 번영해야 한다. 특히 정절에서 그러해야 하는데, 원수는 우리 가운데서 무엇보다도 정절을 대적하여 싸우고 있다.

316. 수도사들을 선택받은 족속이자 그리스도의 군대라고 칭하며 높이 평가한다

317. 형제는 죽었고, 다른 형제는 임종에 이르렀다. 우리도 과연 불멸의 존재인가? – 그러니 순간을 명심하자

318. 신앙을 이유로 새로운 박해가 준비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모든 것을 견뎌내겠다는 의욕 넘치는 각오를 표명한다

319. 비피니아에 마리의 표범이 나타나 사람들을 납치하고 있다. 이를 계기로, 우리를 삼키기 위해 곳곳을 배회하는 보이지 않는 짐승들에 대해 여러분께 상기시켜 드리고자 한다.

320. 세속적인 사람들은 세속적인 일에 몰두하지만, 우리는 모든 것보다 높은 우리 자신의 일에 몰두합니다

321. 마지막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게으름 피우지 맙시다

322. 시간은 흐르고, 죽음이 다가오는데, 우리가 헛되이 허둥대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323. 고결한 삶을 살던 장로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고행과 성상파괴자들로부터 겪은 고난을 인내한 점을 칭찬하며... – 형제들에게 교훈을 주며 죽음을 기억함으로써 세속적인 모든 것에서 자신을 멀리하고 모든 미덕을 얻기 위해 열정을 불태우라고 권면한다

324. 보이지 않는 원수들의 공격이 닥칠 , 우리를 구원하실 있는 전능하신 분께 의지합시다. 그러면 그분께서 우리를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325. 평범한 여행자들과 마찬가지로, 땅의 나그네로서 하늘의 고향으로 향하는 우리도, 세상의 어떤 것에도 매여서는 되며, 어떤 짐도 지어서는 되고, 그곳의 형언할 없는 복과, 만약 그곳에 이르지 못한다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끔찍한 공포에 고무되어, 목표한 바를 향해 곧장 나아가야 한다.

326. 원수의 올가미로부터 피할 피난처는 어디에 있습니까? 모든 죄악과, 타락한 생각과 욕망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있습니다.

327. 무조건적인 순종을 권면하며: 순종이 얼마나 유익한지, 불순종이 얼마나 해로운지를 예시를 들어 증명한다

328. 성육신하신 주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은 그들이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면 기쁜 일입니다.

329. 자기 의지를 끊어 버리는 것은 그리스도를 본받고 사도적인 가장 위대한 업적이지만, 오늘날 모든 사람이 높이를 깨닫지는 못한다.

330. 영적이며 보이지 않는 전쟁에서, 두려움 없이 희망에 차고 열정적으로 적과 맞서는 자들은 언제나 승리를 거둔다. 적들은 바로 그런 자들을 피한다.

331. 다른 일들에는 제때가 있으나, 구원의 일은 언제나 우선되어야 한다

332. 수도 생활의 목적과 활동이 다른 모든 신분과 직분보다 높으며, – 비록 고통스러운 점이 있더라도 모든 사람을 자신에게로 이끌어 온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 수도 생활을 허락받은 자들은 기뻐하고 주님께 감사하며, 진정한 수도사가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을 권면한다

333. 죽음을 자주 묵상하는 이들은 죽음에 대한 기억을 굳건히 하며, 죽음과 그와 관련된 것들에 대한 기억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심어줍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마음속의 정욕을 정화합니다

334. 마음을 드러내지 않게 것을 책망함

335. 형제들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그들도 자신을 사랑한다고 확신하며, 그러한 유대 관계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리자고 권하며, 때로 그들을 엄하게 책망해야 인내하라고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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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영적 독서를 즐기는 이들에게 모두에게 잘 알려진 『도브로톨리비예』의 러시아어 번역본을 소개하며, 여기에 몇 가지 내용을 덧붙이는 바, 『도브로톨리비예』가 무엇인지에 대해 몇 마디 말씀드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단어는 그 책의 그리스어 제목인 ‘필로칼리아(Φιλοκαλια)’를 번역한 것으로, “아름답고, 고상하며, 선한 것에 대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가장 근접한 의미로, 이 책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진 삶의 해석”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진 참된 기독교적 삶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인들에게 내재한 성령의 은총의 역사로, 그리고 모든 날 우리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하신 그리스도 주님 자신의 인도하심 아래, 각자에게 주어진 분량대로 시작되고 드러나며 완전함으로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이를 그러한 삶으로 부르시며, 이 삶은 모든 사람에게 가능할 뿐만 아니라 필수적입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기독교의 본질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름받은 모든 이가 그 삶에 참여하는 것은 아니며, 실제로 참여하는 이들 중에서도 모두 동일한 정도로 참여하는 것은 아닙니다. 선택받은 자들은 그 안으로 깊이 들어가며, 그 단계들을 따라 높이 올라갑니다. 그 은총의 드러남은, 그것이 펼쳐지는 영역의 풍요로움과 마찬가지로, 일상생활의 현상들 못지않게 풍성하고 다양합니다.

그리고 만일 그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적의 공격과 유혹, 투쟁과 승리, 타락과 부활, 영적 삶의 다양한 현상의 싹트기와 공고화, 전반적인 성취의 단계와 각자에게 고유한 마음과 정신의 상태, 모든 것에서 자유와 은혜의 상호작용, 하나님의 친밀함과 거리감을 느끼는 것, 섭리하시는 전능하심을 깨닫는 것, 그리고 자신의 위치를 – 최종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방식으로 – 주님의 오른손 에 맡기며, 자신의 모든 행동 방식을 내려놓고 끊임없이 집중하여 활동하는 것 – 만약 이 모든 것, 그리고 주님 안에서 참된 삶과 뗄 수 없는 그 밖의 많은 것들이, 명확하고 알기 쉽게 묘사될 수 있다면, 그것은 매력적이면서도 교훈적인 그림을 그려낼 것이며, 마치 전 세계를 여행하는 것과 같은 그림이 될 것이다.

여행자들은 자신의 여정에서 주목할 만한 모든 것에 대해 여행기를 씁니다. 영적 삶의 모든 길을 다양한 방향으로 탐구한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들도, 이 고된 여정에서 마주치고 경험한 모든 것에 대해 자신의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이 두 종류의 기록이 맞이하는 운명과 목적은 다르다. 여행할 수단이 없는 사람들은 제자리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다른 여행자들의 여행기를 읽음으로써 낯선 나라들에 대해 꽤 대략적인 개념과 상상을 형성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피조물의 삶의 형태는 어느 나라에서 나타나든 서로 다소 비슷하기 때문이다.

영적 삶의 경험에 대해서는 사정이 다릅니다. 이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이 삶의 길을 걷는 이들뿐입니다. 그 길에 들어서지 않은 이들에게는 이것이 완전히 알 수 없는 학문이지만, 그 길에 들어선 이들 중에서도 모두가 단번에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개념과 인식은 영의 나라로 나아가고 깊이 파고들수록 점차 명확해집니다. 자신의 영적 삶 경험이 쌓여감에 따라, 성부들이 저술에서 언급한 경험에 대한 지침들도 명확하고 이해하기 쉬워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부들의 저술에 담긴 영적 삶의 다양한 양상에 대한 묘사는 모든 기독교인에게 헛된 선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만약 그가 이 묘사에서 언급된 것을 아직 경험하지 못했다면, 그에게 정착된 삶의 방식이 비록 그의 기독교적 양심과 화해하고 있다 하더라도, 더 바랄 것이 없고 더 나아갈 곳이 없는 완전한 경지에 이른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해 줍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게 함으로써, 이 글은 발전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으며, 그가 현재 소유한 것보다 더 나은 무언가가 그곳에 있음을 가리키며 앞으로 나아가도록 유혹하지 않을 수 없다.

더 나은 것과 가장 완벽한 것을 향한 길에 들어선 이들에게는, 이 말이 의심스럽고 의아한 상황에서, 즉 현장에 경험에 입각한 지침이 없을 때, 그리고 그 지침조차도 진행 중인 이의 모든 망설임을 없애줄 최종적인 결정을 내릴 수 없게 만드는 해결 불가능한 난관에 부딪혔을 때, 필요한 지침을 제공한다. 특정 상황에서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려면 어떻게, 어디로 발을 내딛어야 할지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바로 이때, 어떤 교부들의 말씀이 한밤중의 번개처럼 빛나며 어둠을 몰아냅니다.

일반적으로 이는 영적인 온실과도 같은 곳으로, 신자는 영적 삶의 현상에 대한 지침을 읽으며 의식과 마음으로 그곳에 들어가, 그곳에서 고무된 묵상이 주는 뚜렷한 영향력을 받으며, 그 순간 자신이 빛이 넘치고 생명이 넘치는 어떤 다른 분위기 속에 떠다니고 있음을 느낍니다. 이것은 기쁜 순간들이며, 바로 이러한 순간들이 이어지는 동안에 대개 영적 삶의 나무에 다양한 열매들이 싹트고 익어간다. 그러므로 이를 경험한 사람이 한가한 시간이 생기자마자 영적 삶에 대한 생생한 묘사들로 서둘러 달려가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마치 이익을 사랑하는 사람이 이익을 약속하는 곳으로, 쾌락을 사랑하는 사람이 위안을 주는 곳으로 서둘러 달려가듯이 말이다. 이때 그는 종종 활력을 불어넣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영적인 공기를 마시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닙니다. 아니요, 이것은 우리 영혼의 번영과 안녕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는 영적 삶에 관한 교부들의 저술을 항상 곁에 두고자 하는 필요성이 예전부터 지금까지 계속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필요성을 느끼는 마음이 얼마나 칭찬받을 만한지, 그만큼 그 필요를 충족시켜야 할 의무와 능력을 가진 이들이 이를 반드시 충족시켜야 합니다. 이 필요는 항상 충족되어 왔는데, 예를 들어 성 마카리오스, 성 이사악, 성 에프레모스 시리노스, 『사다리』의 저자 등 많은 성인들의 저작을 전집으로 출판하는 방식뿐만 아니라, 그 저작들을 선집으로 엮는 방식으로도 충족되어 왔습니다.

이러한 선집 중에는 모두에게 잘 알려진 『도브로톨리비예』가 있으며, 이는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꼽힙니다. 이제 『도브로톨리비예』가 무엇인지 분명해졌습니다. 이 책은 우리에게 신성한 절제의 말씀과 핵심을 전해 주는데, 즉 내적 영적 삶에 대한 완전한 고찰과 간결한 명언을, 그 삶에 고유한 모든 표현과 행실과 함께 담고 있습니다. 이 책은 영적 성취를 갈망하는 신자들의 영적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편찬된 것이다. 이 책을 읽는 이들은 『도브로톨리비예』에 어떤 영적 지혜의 보물이 숨겨져 있는지 알고 있으며, 읽으면서 기쁨을 느낀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며 즐거움을 얻고 교훈을 얻으면서도, 그들은 책의 많은 부분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안타까운 아쉬움을 숨기지 않습니다. 이는 내용의 수준이나 깊이가 아니라, 번역이 너무 오래되어 낡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책에 대한 새로운 번역의 필요성은 명백합니다. 이러한 필요성은 오래전부터 인식되어 왔으며, 에서 ‘기독교 독서(Христианское Чтение)’가 창간된 초기부터 실린 번역물들과, 『도브로톨루비예』에 수록된 개별 기사들의 출판(예를 들어, 성 막시모스의 ‘사랑에 관하여’—이 글은 그리스어판 『도브로톨루비예』에 수록되어 있음), 이시히아, 페트로스 다마스키노스의 글 등이 있다.

본 선집의 편집자는 처음에는 이미 번역된 내용을 확인하고, 아직 번역되지 않은 부분을 추가로 번역하여, 독자들에게 그리스어 원본과 동일한 구성으로 완전한 『도브로톨루비예』의 러시아어 번역본을 제공하는 것만을 염두에 두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는 우리에게 있어 『도브로톨리비에』를 그리스어 원본의 분량보다 더 확장해야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왜냐하면, 비록 그리스어판 『도브로톨리비예』가 슬라브어판보다 더 완전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부들이 우리에게 영적 삶의 지침으로 주신 모든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으며, 그러한 독서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유익과 위로를 전하고자 하는 바를 모두 충족시키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이번에 제안하는 선집은 바로 그 『도브로톨리비예』를 확장한 것이다.

우리의 새로운 선집은 이전 『도브로톨리비예』의 발자취를 따릅니다. 그러나 이 선집에 글이 수록된 성부에게 다른 글들이 있음을 발견하면, 그 글들을 참고하고, 자신의 성격에 부합한다고 판단될 경우 그 글들도 함께 수록합니다. 또한, 글을 차용한 성부들 사이에 우리에게 영적 삶에 관한 저술을 남긴 다른 성부들이 있음을 발견하면, 그분들의 글로도 이 선집을 풍요롭게 합니다. 예를 들어, 성 안토니우스의 경우 이전 『자비』에는 170장에 걸친 그의 훈계만 수록되었으나, 이 새로운 선집에는 성 안토니우스의 다른 저술들도 포함되었습니다. 성 마카리우스는 그곳에서 생략되었으나(그의 글 중 메타프라스토가 150장에 걸쳐 재구성한 교훈이 수록되었으며, 우리 판에는 7개의 말씀이 실려 있다), 여기서는 그의 교훈을 어느 정도 체계적인 순서대로, 그 자신의 말로 제시하고 있다. 은둔자 이사야의 글은 거기서 27장—간결한 격언들—만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그의 알려진 29편의 글이 모두 그리스어에서 새로 번역된 형태로 실려 있다. 에바그리우스와 성 마르코 은둔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처리되었다. 이후의 논문 모음집에서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진행될 것이다.

이것이 새로운 『도브로톨리비예』를 편집하는 방식이다. 이 책은 이전 판을 본보기로 삼되, 이를 보완하여 이 책을 사랑하는 독자들이 하나님 안에서 사는 삶을 이끌어 줄 유익한 내용을 하나도 놓치지 않도록 할 것이다. 글의 수록 방식에 관해서는, 모든 저작이 전문 그대로 실리지는 않을 것임을 미리 밝혀 둔다. 많은 내용은 발췌본으로 제시하는 것이 훨씬 더 편리합니다. 이는 때로는 어떤 체계적인 순서에 따라, 때로는 별도의 격언 형태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성부들의 가르침 자체는 항상 그들의 본래 말 그대로 제시될 것입니다. 독자들에게 새롭게 편집된 『도브로톨루비예』 제1권을 소개합니다. 이 책에는 다음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1) 성 안토니우스의 저술; 2) 성 마카리오스의 대화에서 발췌한 내용; 3) 은둔자 이사야의 말씀; 4) 성 마르코 수도자의 가르침; 5) 수도사 에바그리우스의 저술. 그리스어판 『자비』에서도 글들이 이와 같은 순서로 수록되어 있다. 우리 판본에서는 에바그리우스와 성 마르코 사이에 위치해 있던 성 카시아누스가 다음 책으로 미뤄졌습니다. 우리는 이 선집에, 영적 독서를 사랑하는 이들이 편집자가 그들을 위해 담고자 했던 바를 여기서 발견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성 안토니우스 대성인

 

성 안토니우스 대성인의 생애와 저술에 대하여

은둔 수도 생활의 시초를 연 성 안토니우스 대성인은, 그분의 삶을 통해 이러한 종류의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의 이상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모든 영혼이 원한다면 기독교가 제시하는, 이 땅에서 우리가 이룰 수 있는 완전함에 이르는 길을 제시합니다. 성 안토니우스의 생애는 성 아파나시우스 대성인이 기록하였으며(그의 저작 제3권 참조), 거의 축약 없이 우리 『체트 미네이』의 1월 17일 항목에 수록되어 있다. 그 내용을 자세히 알고자 하는 이는 그곳을 참조하기 바랍니다. 여기서는 단지 그 생애의 일반적인 특징들만 언급하겠습니다. 성 안토니우스가 수행한 사명을 위해 하느님께서 그를 선택하신 사실은 그가 아직 어린 시절부터 드러났습니다. 조용하고 온화한 성품에 은둔을 선호하는 기질로 인해, 그는 또래 친구들의 장난과 소란스러운 놀이에서 멀어졌으며, 눈동자처럼 소중히 여기는 부모님의 시선이 닿는 집 안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렇게 그는 사람들과의 교류를 멀리하며,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은 오직 교회에 갈 때뿐인 가운데 자라났다. 이러한 마음가짐과 생활 방식 속에서, 세례를 통해 받은 하느님의 은총은 그의 영적 성숙을 위해 아무런 방해 없이 작용했으며, 그로서는 특별한 노력을 기울일 필요도 없었다. 성 아파나시우스가 말하듯이, 그가 일찍이 하느님을 따르는 삶의 달콤함을 느끼고 신성한 열망에 불타오른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집안에서 그러한 삶을 영위하는 데 아무런 장애물이 없었기에 – 부모님도 같은 정신을 지니고 계셨기 때문이다 – 성 안토니우스는 부모님이 살아 계시는 동안, 그리고 ‘ ’가 피할 수 없는 세속적인 근심에서 그를 해방시켜 주던 한, 집을 떠나고 싶은 어떤 욕구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부모님이 주님께로 돌아가시자, 장남이 된 그는 집안 관리와 여동생의 생계를 책임져야만 했다. 이로 인해 그는 즉시 하나님 안에서 사는 삶과 세속의 여러 걱정거리가 많은 삶 사이의 큰 차이를 실감하게 되었으며,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위해 살겠다는 그의 소망에 확고한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그가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교회에서 들은 주님의 말씀, “네가 온전하고자 하면, 가서 네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네게 하늘에 보화가 있으리라”(마태복음 19:21)와, 그 후 또 다른 말씀,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 (마태복음 6, 34)는 이 소망을 하나님의 인장으로 새겨 주었다. 그는 그 말씀 속에서 자신의 양심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마음속 깊은 곳에 간직한 소망과 열망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명령과 축복도 함께 느꼈기 때문이다. – 그는 돌이킬 수 없는 결심을 굳혔고, 모든 것을 나누어 준 뒤 오직 한 분 하나님을 위해 살기 시작하였다. 성 안토니우스는 세속을 떠난 삶의 초기 몇 년을 당시 잘 알려진 다른 은수자들이 살았던 방식 그대로 보내며, 그들로부터 모든 것을 배웠다. 세속을 버린 수도 생활은, 모든 세속적인 근심을 떨쳐 버리고 오로지 “어떻게 주님을 기쁘시게 할 것인가” (고린도전서 7, 32)에 열중하는 세속을 떠난 은수 생활은, 하나님의 교회에서 그 설립 초기부터 교회의 구조에 있어 필수적인 요소로 자리 잡았으며, 성 사도들로부터 최초의 기본 법칙을 받았다. 그러나 처음에 아스케트들—세상과 세속적인 근심을 버리고 이러한 삶의 방식에 헌신하던 사람들을 일컫는 말—은 자신의 집에 머물며, 단지 눈에 띄지 않는 구석 어딘가에 은둔하여 그곳에서 기도와 하느님을 묵상하는 일, 금식, 밤샘 기도 및 온갖 수행에 전념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기독교가 신자들의 범위와 수적으로 확장되자, 많은 수행자들은 가족을 떠나 도시나 마을을 벗어나 외딴 곳, 즉 자연 그대로의 동굴이나 버려진 무덤, 혹은 일부러 마련한 작은 수도실에서 은둔 생활을 영위하기 시작했다. 성 안토니우스 시대에는 가장 열성적인 은수자들이 주로 이런 방식으로 살았다. 성 안토니우스 대성인도 그들을 본받고자 열망했다. 은수자 생활의 시작은 수련기이다. 성 안토니우스는 그 은수자들을 본받고 순종하며 수련기를 보냈다. – 수련 기간의 본질은 가장 경험이 풍부한 이들의 지도 아래, 마음속에 기독교적 미덕을 확립하고 은수 생활의 규율을 익히는 데 있다. 성 안토니우스는 기독교적 미덕을 가정 교육에서 배웠으므로, 이제 그에게 남은 일은 하느님 안에서 살기를 갈망하는 이들에게 어떤 수행이 필요한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를 알아내는 것뿐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당시 유명한 수행자들을 찾아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보고, 그것을 배운 뒤 그 깨달음을 마치 전리품처럼 자신의 은둔처로 가져왔다. 이처럼 성 아파나시우스가 지적하듯이, 그는 지혜로운 꿀벌처럼 사방에서 영적인 꿀을 모아, 마치 벌통에 담듯이 자신의 마음에 저장했다. 한 사람에게는 음식에 대한 엄격한 절제와 맨땅에서 잠자는 것, 장시간의 기도를 배웠고; 다른 이에게서는 기도에 지치지 않는 끈기와, 마음의 생각에 대한 주의, 그리고 하느님을 향한 묵상을 배웠으며; 세 번째 이에게서는 근면함, 규칙에 대한 충실함, 그리고 인내심을 본받았고; 그리고 모든 이에게서 그리스도 주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만물을 향한 형제적 사랑이라는 동일한 정신을 받아들여, 자신이 만난 각 성인들이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낸 모든 특성을 오직 자신 한 사람 안에 조화시키려 노력했다. 자신의 삶을 다른 이들의 삶과 대조해 보지 않고, 타인의 지도 없이는 그 누구도 수도 생활의 최고 경지에 도달할 수 없었다. 성 안토니우스는 앞서 언급한 장로들에게 자신의 삶을 맡겼으며, 그들의 지도 아래 완성을 향한 흔들림 없는 길로 인도받았다. 그는 이 수련 기간 동안 15년을 마을 외곽의 무덤에서 보냈는데, 처음에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지냈으나 나중에는 더 먼 곳으로 옮겨가, 그곳에서 성 안토니오에게 유일하게 음식을 가져다주던 한 진심 어린 마을 사람이 빵을 가져다주곤 했다. – 그리고 수공예품을 가져가곤 했다. 성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손으로 일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시간을 이 수공예와 기도, 그리고 성경에 담긴 신성한 진리에 대한 묵상 사이에 나누어 보냈다. 어느 날 낙담의 영이 그를 괴롭혔을 때, 그에게 나타나신 하느님의 천사가 바로 이러한 행실 속에서 그를 굳건히 세워 주셨다. 그 당시 그의 삶이 어떻게 흘러갔는지에 대해, 소조메노스(『교회 역사』 제1권, 제13장)의 증언을 인용해 보겠다. 그는 성 안토니우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선한 삶이 처음에는 힘들더라도 습관이 되면 즐거워진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날로 더 엄격한 수행의 시련을 고안해 냈으며, 날이 갈수록 절제를 더하고, 마치 항상 막 시작하는 것처럼 열정에 새로운 힘을 불어넣었다. 육체의 쾌락은 수고로 억제하고, 영혼의 정욕에 맞서 신성한 지혜로 그 정욕을 미워하는 마음으로 무장했다. 그의 음식은 소금을 뿌린 빵이었고, 음료는 물이었으며, 식사 시간은 해가 지는 때였다; 하지만 종종 이틀 이상 음식을 먹지 않은 채 지내기도 했다. 그는 말하자면 밤새도록 깨어 지내며 기도로 하루를 맞이했고, 설령 잠을 자더라도 단 1분뿐이었다. 대부분 맨땅에 누워 지냈으며, 오직 땅만을 침상으로 삼았다. 그는 몸을 연약하게 만든다는 이유로 기름을 바르거나 목욕을 하거나 다른 편의 시설을 이용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게으름을 참을 수 없었기에, 거의 하루 종일 " 동안 일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성 안토니우스는 이처럼 고된 길을 걸었다. 그러나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그림자 없는 빛이 있을 수 없듯이, 이러한 삶은 투쟁 없이는 지나갈 수 없다. 우리 안에 죄가 없고, 원수가 없다면 오직 선함만이 우리 안에서 드러나고 방해받지 않고 자라났을 것이다. 그러나 둘 다 존재하며, 둘 다 우리에게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므로, 그 누구도 그들과의 투쟁 없이 지낼 수는 없었다. – 자유롭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들을 무력화시키고 이겨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올바르게 나아가고자 하는 자, 그가 누구든 간에, 그의 손발을 헷갈리게 할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성 안토니우스의 영 안에서 창조하신 하느님의 은총은 그를 싸움 속으로 이끌어, 마치 도가니 속의 금처럼 그를 시련에 처하게 함으로써 그의 도덕적 힘을 강화하고 그 힘이 발휘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 주셨다. 적에게는 접근이 허용되었으나, 수행자에게는 은밀한 도움이 뒷받침되었다. 성 아파나시우스는 이 투쟁을 상세히 묘사한다. 그는 적의 화살이 매우 예리했다고 말했으나, 용감한 투사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그것들을 물리쳤다. 처음에 원수는 그가 세속을 떠난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 흔들어 보려 했으니, 한편으로는 – 마치 필요 없이 경멸당한 듯한 명문 가문, 헛되이 분열된 듯한 적지 않은 부, 그리고 마치 쓸모없이 버려진 듯한 삶의 모든 편의, – 특히, 자신의 보살핌과 위로 없이 아무것도 없이 낯선 이들의 손에 맡겨진 여동생을 – 떠올리게 했다. 반면, 시작된 희망 없는 삶의 고단함과 가혹함, 그런 결핍을 견디지 못할 것 같은 몸의 낯설음과 연약함, 그리고 이 삶의 길이가 – 마치 그 끝이 보이지 않는 듯, –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그 어떤 위안도 없이, 끊임없는 자학 속에서. 이러한 속삭임으로 원수는 강렬한 생각의 폭풍을 일으켰으나, 자신의 의도와 결의를 흔들림 없이 굳게 지키던 성 안토니우스의 굳건함으로 물리쳐졌을 뿐만 아니라, 그가 버리고 참아낸 모든 것은 세상을 등진 수고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마련해 두신 끝없는 축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며, 모든 세속적·물질적 속박에서 자유로울 때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더 쉽다는 믿음으로, 심지어 그의 끊임없는 기도로 인해 흙으로 돌아갔으며, 그 기도는 그의 마음에 가장 달콤한 영적 위로를 불러일으켰다. 이쪽에서 패배한 원수는 다른 쪽에서 젊은 투사에게 공격을 가한다. 그가 이미 젊은이를 무너뜨리던 바로 그 방식으로, 육신의 정욕으로 싸움을 시작하며 밤에는 혼란을 주고 낮에는 불안하게 만든다. 그 싸움은 너무나 치열하고 길어, 심지어 제3자에게도 숨길 수 없을 정도였다. 원수는 불결한 생각을 심어주었고, 성 안토니우스는 기도로 이를 물리쳤다. 원수는 육체를 불타오르게 만들었고, 성 안토니우스는 금식, 기도, 온갖 고행으로 이를 식혔다. 저쪽은 밤에 여인의 모습을 취하며 온갖 수단을 동원해 유혹적인 욕망을 자극하려 했으나, 이쪽은 고통을 기뻐하며 그곳의 아름다움을 관조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본성이 누리게 되는 고귀함에 대한 생생한 자각을 통해 그 기만적인 유혹을 떨쳐냈습니다; 저주받은 자는 쾌락에서 오는 달콤함을 불러일으켰으나, 복된 자는 영원한 불길과 쉬지 않는 구더기들로 인한 고통의 끔찍한 괴로움을 대조적으로 상기시켰으며, 그로 인해 무사히 버텨 냈다. 공격의 성가심과 추악함은 마침내 투쟁하는 자 안에서 온갖 불결한 움직임에 대한 혐오와 강한 짜증을 동반한 분노를 불러일으켰는데, 이는 원수가 그에게 접근하거나 심지어 멀리서라도 이 방면으로 그를 유혹하고 괴롭힐 기회를 박탈해 버렸다. 왜냐하면 정욕적인 움직임에 대한 혐오와 증오의 감정은 원수를 태우는 불화살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정욕적인 육신을 지닌 그 모든 교활한 젊은이도 이 점에서 패배하여 수치를 당하며 물러났으니, 이는 우리를 위해 육신을 취하시고 그 안에서 원수의 모든 힘을 분쇄하신 주님께서 친히 하나님의 종을 도우셨기 때문이며, 모든 참된 수행자는 사도와 함께 이렇게 고백하듯이: “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나와 함께 하신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니라”(고린도전서 15:10). 그러나 사람을 미워하는 자의 화살은 아직 다 소진되지 않았다. 젊은 투사 위에 펼쳐진 하나님의 보호를 보고, 그것이 오직 겸손한 자들에게만 내리는 것임을 아는 원수는, 그에게 교만과 자만심을 불러일으켜 이 보호를 빼앗으려 꾀한다. 이를 위해 그는 검은 피부의 어린 소년 모습으로 나타나, 가식적인 겸손을 가장하며 성 안토니우스에게 말한다. “네가 나를 이겼다.”라고 말하며, 성 안토니우스가 승리를 자신의 공로로 돌리고 자만하여 자신을 돕는 하느님을 화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성 안토니우스는 그에게 물었다. “너는 도대체 누구냐?” 그러자 그는 대답했다. “나는 음탕의 영으로, 정욕을 부추기고 육신의 죄로 빠뜨리는 것이 나의 임무다.” “나는 정결 서원을 한 많은 이들을 유혹했고, 오랫동안 육신을 죽여 온 많은 이들을 타락으로 이끌었으나, 너로 인해 나의 모든 올가미는 찢어지고 화살은 부러졌으며, 나는 쫓겨났다.” 그러자 성 안토니오는 자신의 구세주이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외쳤다. “주님께서 나의 도움이시니, 내가 나의 원수들을 바라보리라”(시편 117:7), 하고는 두려움 없이 원수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나의 하느님께서 너를 검은 모습으로 내게 나타나게 하신 것은 네 악의의 어둠을 드러내기 위함이며, 소년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하신 것은 네 무력함을 폭로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너는 온갖 경멸을 받을 만하다. 이 말을 듣자 그 영은 불에 타는 듯 도망쳤고, 다시는 복자 안토니우스에게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정욕에 대한 승리는 무정함에 가까워지게 하며, 무정함이 어느 정도 확고해질수록 그만큼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준다: 그리고 영혼의 평화는 기도와 하느님을 생각하는 데서 오는 달콤한 감각들과 함께 마음속에 영적인 온기를 불러일으키는데, 이 온기는 영과 혼과 육체의 모든 힘을 자신에게로 모아, 사람을 내면으로 인도하며, 그곳에 자리 잡은 사람은 유일하신 하느님과 단둘이 있고자 하는 거부할 수 없는 갈망을 느낀다. 이 내면으로, 하나님 앞으로 향하는 거부할 수 없는 끌림은 영적 성숙의 두 번째 단계이며, 바로 그 단계에 이제 성 안토니우스가 도달했다. 그전까지 그는 주로 혼자 지냈지만, 마을에서 온 그의 진실한 친구가 종종 찾아오기도 했고, 그 자신도 때로는 장로들을 찾아가거나, 때로는 마을 교회에 가서 예배, 특히 성찬식을 드리곤 했다. 이 모든 것은 아무리 배제하려 해도 일종의 오락과 얽혀 있었다. 내면이 성숙해진 성 안토니우스의 영혼은 아무것도 보고 듣지 않기 위해 단호한 은둔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영혼은 수행의 직선적인 길을 통해 저절로 그곳에 이르게 되지만, 어떤 강력한 자기 희생의 충동이 이 전환을 가속화하고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다. 성 안토니우스에게 그러한 충동을 일으킨 계기는 악령들이 그를 노골적으로 공격한 사건이었다. 악령들은 정화된 영혼에 대한 생각을 통해 작용할 기회를 잃자, 외부에서 작용하기 시작하며, 눈에 띄게 나타나 수행자에게 그를 해치거나 그의 선한 의도를 흔들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것들을 꾸며낸다. –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은 수행자의 성장을 위해 이를 허락하시며, 이를 통해 그에게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갈 길을 열어 주시고, 동시에 나중에 유혹하는 영들 자체에 대한 권세를 행사할 수 있는 일종의 권리를 부여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성 안토니우스에게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성 안토니우스가 마을 교회 현관에서 정신을 차리고, 간신히 숨을 쉬며 친구에게 “나를 다시 나의 은둔처로 데려가라”고 말했을 때입니다. 이는 그가 자신의 삶이 오직 하느님께만 기쁘게 여겨지는 것임을 깨달았기에, 생명을 위해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였음을 나타낸 것이었습니다. 이는 주님을 위해 죽는 것과 다름없는 의미였습니다. 왜냐하면 그에 대한 준비가 완전히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위해, 그리고 그분께 기쁨을 드리기 위해 죽음을 맞이할 준비는 모든 것을 이기는 무기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가진 사람을 무엇으로 더 유혹하거나 위협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수도 생활의 출발점이자 그 전 과정에 걸친 견고한 버팀목으로 여겨집니다. 주님이자 구세주이시며, 우리의 모범이신 분께서는 이 땅에서의 모든 날 동안 죽음을 눈앞에 두셨으나,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로 씨름하시던 중, 그분은 인간으로서 죽음을 최종적으로 이기셨습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은 그곳에서 선포된 말씀을 성취해 냈습니다. 그 뒤를 이어 영광스러운 부활을 앞둔 사흘간의 안식 기간이 이어졌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모든 영혼은 이 길을 걷습니다. 이 과정에서 첫 번째 단계는 자기 희생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미미한 시작일지라도, 그 안에는 언제나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어느 정도 담겨 있습니다. 그 후 자기 희생이 자라나면, 이 준비 또한 자라나며, 혹은 이 준비야말로 자기 희생의 본질입니다. 구세주께서 동산에서 보이셨던 것과 같은 수준의 각오에 이르는 자에게는, 즉시 영 안에서 십자가로 올라가는 일이 기다리고 있으며, 그 뒤에는 영적 안식이 따르고, 그 뒤를 이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 속에서의 영적 부활이 뒤따릅니다. – 바로 이것이 이제 성 안토니우스의 영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친구에게, 자신을 그렇게 고문했던 바로 그곳으로 다시 데려가지 말라고 말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영 안에 구세주께서 동산에서 기도하신 후 제자들에게 “가자. 나를 배반하는 자가 가까이 왔도다!”라고 말씀하셨을 때와 같은 마음이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 그 직후 그는 더 먼 광야로 떠나 그곳에서 20년 동안 침묵 속에서 지냈는데, 이는 마치 영적 차원에서의 십자가 처형과 안식일 준수나 다름없었다. 성 안토니우스가 악마들이 가한 고통에서 겨우 회복되자마자, 그는 주거지에서 이틀 또는 사흘 거리의 황야로 달려가, 그곳에 있는 오래되고 버려진 신전에 틀어박혔는데, 그 안에는 물이 있는 우물이 있었고, 빵은 그의 친구가 반년에 한 번씩 가져다주었다. 그가 이곳에서 어떤 고난과 위업을 겪었는지, 그리고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은둔처에서 나왔을 때의 모습을 보면, 그 기간이 성령에 의해 그의 영이 형성되던 시간이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여기서는 애벌레가 번데기로 감겨 들어갈 때 일어나는 것과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시기에 애벌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무도 보지 못한다. 마치 움직임을 멈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사이에도 모든 것을 소생시키는 자연의 힘이 그 안에서 작용하고 있으며, 때가 되면 번데기에서 아름답고 다채로운 나비가 날아오른다. 성 안토니우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고, 대부분은 알 수 없었으며 안토니오 자신에게도 대부분 알려지지 않은 채, 그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대로 그 안에 새로운 사람을 창조하고 계셨습니다. 창조의 시간이 끝나자, 그에게 신자들에게 봉사하러 나가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성령의 다양한 은총의 선물로 무장한 채 나섰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 가운데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처럼, 성 안토니우스도 이제 영으로 새롭게 된 삶을 살게 되었다. 이로써 성 안토니우스의 영적 형성은 끝이 났다. 그 후의 그의 모든 삶은, 그의 생애 초기 두 시기에 뿌려진 것에서 맺어진 열매를 맺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이것이 바로 세 번째 시기, 즉 교회의 유익을 위한 사역의 시기였으며, 마치 그의 사도직과도 같았다. 이 사역이 얼마나 풍성하고 광범위했는지는 누구나 성 아타나시우스가 기록한 그의 생애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는 모든 은총의 은사를 통해 봉사했다. 그에게 없었던 은사가 무엇이 있었겠는가? – 기적을 행하는 은사, 악마와 자연의 힘, 동물에 대한 권세를 행사하는 은사, 생각을 꿰뚫어 보는 은사, 멀리서 일어나는 일을 보는 은사, 계시나 환상을 통해 하는 은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은사 중에서 가장 풍성하고 적용 범위가 넓은 것은 말씀의 은사였습니다. – 그리고 그는 다른 모든 은사보다 이 말씀의 은사로 동료 수도자들에게 더 많이 봉사했습니다. 성 아파나시우스는 하느님께서 성 안토니우스에게 마음 깊은 곳까지 스며드는 강력한 말을 주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모든 이에게 유익이 되도록 그토록 강력한 힘으로 말할 줄 알았기에, 많은 귀족들—군인과 민간인, 부유한 사람들—이 세상의 짐을 내려놓고 수도사가 되었다. 게다가 슬픔에 잠겨 그에게 찾아온 사람 중 누가 기쁨을 얻지 못하고 돌아갔겠는가? 죽은 자를 위해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온 사람 중 누가 즉시 울음을 그치지 않았겠는가? 분노에 차서 온 사람 중 누가 그 분노를 온유함으로 바꾸지 않았겠는가? 게을러졌던 수도사 중 누가 그분을 찾아가서 다시 열성적이고 수행에 굳건해지지 않은 이가 있었는가? 어떤 청년이 성 안토니우스를 보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서 세속의 쾌락을 버리지 않고 정절을 사랑하기 시작하지 않은 이가 있었는가? 이미 약혼자가 있던 처녀들 중, 멀리서 성 안토니오를 보기만 해도 그리스도의 신부가 된 이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이 증언을 통해 성 안토니오가 하느님께서 주신 지혜의 샘을 감추지 않았음이 드러난다. 게다가 사람들은 주로 그의 말씀을 듣고,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이며, 자신에게 필요한 지침을 얻기 위해 그에게 찾아왔다. 그리고 그는 사도처럼 모든 사람을 가르치고, 책망하며, 간청했다. 때로는 성 아파나시우스가 그의 전기에서 기록한 것처럼 그의 말씀이 풍성한 물줄기처럼 쏟아지기도 했고, 때로는 그의 ‘20가지 간결한 말씀’처럼 덜 장황한 말을 하기도 했으나, 대체로 그는 의미와 힘이 가득한 간결한 격언들로 말을 제한했다. 이 간결한 명언들은 셀 수 없이 많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마치 순례 생활의 살아있는 규율처럼 자리 잡았고, 마침내 교부들의 명언 모음집에 수록되었다. 때로는 성 안토니우스가 자신의 영적 자녀들, 즉 여러 수도원의 수도사들에게 편지를 쓰기도 했는데, 그 편지들에서는 때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는 삶의 일반적인 특징을 묘사하기도 하고, 때로는 형제들의 개별적인 약점을 치유하기도 했다. 성 안토니우스의 입에서 나와 글로 기록된 모든 것과 그가 직접 쓴 모든 글은 교훈을 찾는 영혼에게 풍성한 양식을 제공할 것이다. 그의 전기 속에 실린 장문의 글 외에도, 수도사들에게 보낸 20편의 서신, 미덕과 악덕에 관한 20편의 간결한 글, 선한 도덕성에 관한 170편의 장, 수도사들을 위한 그의 규칙과 그에 대한 두 편의 부록, 그리고 다양한 교부 문헌에 흩어져 있는, 언제나 교훈적이고 유익한 그의 수많은 명언과 일화들이 우리에게 전해졌다. 그의 서신과 말씀은 러시아어 번역본으로 『기독교 독서』 초기에 수록되어 있으며, 각 장은 『도브로톨리비야』에 포함되어 있고, 명언과 일화는 『기억할 만한 이야기들』의 첫 번째 편을 구성하고 있다. 원본은 모두 『Patrologiae graecae』 제40권(Migne)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본 선집에 수록된 모든 내용은 바로 이 책에서 번역된 것입니다. 여기서는 이러한 독서를 즐기는 분들께 다음을 소개합니다:

1. 서신과 말씀에서 발췌한 내용. 여기 수록된 1~15항은 성 아파나시우스가 쓴 성 안토니우스의 전기를 인용한 것이다. 16~68항의 교훈은 성 안토니우스 성인의 서신에서 발췌한 것이며, 69~82항의 교훈은 수도사들에게 전한 그의 20가지 말씀에서 발췌한 것이다.

2. 선한 도덕에 관한 170장.

3. 은둔 생활의 규율. 미그네(Migne)의 40권짜리 『Patrologiae graecae』 1065쪽에는 80개 조항으로 구성된 『Praecepta Antonii』가 수록되어 있다. 그 뒤에는 같은 저자의 『Spiritualia documenta regulis adjuncta』와 『Admonitiones et documenta varia』가 더 있는데, 이 두 저작 모두 앞서 언급된 규칙에 대한 보충 자료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제목들 아래 수록된 모든 격언들은 내용과 문체 면에서 동일한 성격을 띠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은둔 생활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따라 ‘은둔 생활의 규율’이라는 제목 아래 별도의 항목으로 분류되어 한데 모아져 있다.

4. 성 안토니우스 대성인의 명언과 그에 관한 전설. 이러한 명언과 전설은 『도스토팜』 전설집에 수록되어 있지만, 이 외에도 같은 『Patr. graec.』 제40권과 우리의 『알파벳 순 파테리콘』에 실린 것들이 있으며, 카시아노가 인용한 것들도 있고, 여러 교부 문헌 모음집의 다양한 항목에 몇 가지가 더 수록되어 있다. 우연히 발견된 대로 무작위로 배치하는 대신, 여기서는 앞서 언급한 규칙들과 마찬가지로 일정한 순서에 따라 정리되어 있다. 먼저, 은수 생활의 시작이 되는 ‘세상으로부터의 탈출’과 관련된 이야기들로 시작하며, 그 다음에는 은수 생활의 순서에 따라 다른 모든 격언과 이야기들이 이어집니다.

5. 제자들의 질문과 성 안토니우스 대성인의 일부 명언에 대한 장로의 답변.

 

성 안토니우스 대성인의 가르침.

 

1.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에 관한 가르침으로, 성 아파나시우스의 전기와 그의 20편의 서신 및 20가지 말씀에서 발췌한 것

1. 모든 이가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은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즉, 일단 시작했으면 수고 속에서 기력을 잃거나 낙담하지 말고, “우리는 이미 오랫동안 이 수련을 해왔다”라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매일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열정을 더해 나가야 한다. 인간의 일생은 장차 올 세기와 비교하면 매우 짧으며, 우리의 모든 것은 영생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니,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그 가치에 따라 팔리고, 누구나 동등한 것을 동등한 것으로 교환하는 반면, 영생의 약속은 아주 작은 대가로 얻어지는 것이다. 기록된 바와 같이, “우리의 나이는 칠십 년이요, 힘이 닿는 자는 팔십 년이요, 그 나이를 더해도 수고와 병만 늘어날 뿐이라”(시 89:10)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설령 우리가 여든 해, 혹은 백 해 동안이나 수고하더라도, 백 해에 해당하는 기간 동안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백 해 대신 영원토록 다스릴 것이며, 게다가 땅에서 수고한 대가로 땅이 아닌 하늘에서 상속받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으니, 또한 썩을 몸을 벗어 던지면, 썩지 않을 몸을 입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낙심하지 말자. 우리가 (수행의 길에서) 오랫동안 머물렀거나 위대한 일을 해낸 것처럼 생각하지 말자.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롬 8:18).

2. 마찬가지로, 세상을 바라보며 우리가 무슨 위대한 것을 포기한 것처럼 생각하지 맙시다. 온 하늘에 비하면 이 온 땅은 너무나 작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설령 우리가 온 땅의 주인이 되어 온 땅을 포기한다 해도, 그것조차 천국과 비교할 만한 가치는 없을 것입니다. 한 돔의 구리를 버리고 백 돔의 금을 얻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온 땅의 주인이면서도 그것을 버리는 사람은 별로 남기지 않으면서도 백 배나 더 많은 것을 얻게 됩니다. 만약 온 땅이 하늘과 동등한 가치가 아니라면, 몇 십 분의 일만 버리는 것은 마치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것과 같다. 설령 그가 집과 많은 금까지 남긴다 해도, 그때는 자랑해서는 안 되며, 낙담해서도 안 된다. 반면에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만일 우리가 덕을 위해 (가진 것을) 버리지 않았다면, 나중에 죽을 때 온갖 방법으로 그것을 남기게 될 것이며, 이는 전도서(전 4, 8)에서도 언급했듯이, 우리가 원치 않는 사람에게조차 종종 남기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미덕을 위해 이것을 버리지 않고, 그 대가로 (천국의) 왕국을 상속받지 않겠는가?

3. 바로 이 같은 이유로 우리 중 누구도 소유를 늘리고자 하는 욕망을 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가지고 갈 수 없는 것을 얻는 데 무슨 이득이 있겠습니까? 차라리 우리가 가지고 갈 수 있는 것들, 즉 분별력, 정의, 정절, 용기, 이성, 사랑, 가난한 자에 대한 사랑,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분노하지 않는 마음, 이방인을 사랑하는 마음을 얻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이(미덕)들을 얻으면, 우리는 그 미덕들이 우리 앞에 있어, 온유한 자들을 위한 땅 위의 안식처를 마련해 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4. 이러한 생각들로 각자는 스스로를 설득하여 소심해지지 않도록 해야 하며, 특히 자신이 주님의 종이며 주인에게 일할 의무가 있음을 깨달을 때 더욱 그러해야 한다. 종이 감히 “어제 일했으니 오늘은 일하지 않겠다”라고 말할 수 없듯이, 지난 (노동) 시간을 계산하며 그 후의 날들에 일을 멈추지 않고, 복음서에 기록된 대로 매일 주인을 기쁘게 하고 화를 면하기 위해 같은 열심을 다하듯이: 우리도 매일 인내로써 수련에 매진할 것이니, 하루라도 게으름을 피우면 (주님께서) 지난 시간의 (수고)를 이유로 우리를 용서해 주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게으름 때문에 우리에게 진노하실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예레미야서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들었다(예레미야 18:26): “의인이 자기의 의에서 떠나 죄를 짓고 죽으면, 그가 지은 죄로 말미암아 그 죄로 죽으리라.” 이와 같이 유다는 하룻밤 사이에 지난 모든 시간 동안의 수고를 헛되게 만들었습니다.

5. 그러니 우리는 힘차게 나아가며 낙심하지 맙시다. 이는 우리가 이 일에 주님의 도우심을 받고 있기 때문이니, 기록된 바와 같이 “선한 것을 택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선을 이루도록 도우신다”(롬 8:28)고 했습니다. 이를 위해, 즉 우리가 소심해지지 않도록, 사도의 다음 말씀도 마음에 깊이 새겨 두어야 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린도전서 15:31). 우리가 매일 죽는 사람처럼 산다면, 죄를 짓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바로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즉, 우리가 매일 아침 눈을 뜰 때 저녁까지 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잠자리에 들 때 깨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본성상 우리 생명의 한계가 알려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섭리가 매일 우리 생명에 어떤 분량을 정해 주시는지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매일 그렇게 살아간다면, 우리는 죄를 짓지도 않고, 어떤 것에 대한 욕망도 품지 않으며, 누구에게도 분노를 품지 않고, 땅에 보물을 쌓아 두지도 않을 것이다. 오히려 매일 죽음을 기다리는 자로서 탐욕을 버리고 모든 사람에게 용서할 것이며, 아내에 대한 욕망이나 그 밖의 어떤 불결한 쾌락도 단 한 순간도 마음속에 품지 않을 것이며, 마치 지나가는 것인 양 즉시 그것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마치 죽음 앞의( ) 투쟁 속에 머무르며 심판의 날을 예견하듯 살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통에 대한 강렬한 두려움과 불안은 쾌락의 즐거움을 없애고, 타락하려 하는 영혼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때문이다.

6. 그러므로 (구원의 일)을 시작하고 이미 덕의 길에 들어섰으니, (빌 3:14)에 이르도록 앞을 향해 더욱 힘차게 나아가자. 그리고 아무도 롯의 아내처럼 뒤로 돌아서지 말아야 하니, 특히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밭을 갈다가 뒤를 돌아보는 자는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눅 9,62). 뒤를 돌아보는 것은 곧 (세상을 떠난 것을) 후회하고, 다시 세속적인 지혜를 구하기 시작하는 것과 다름없다.

7. 덕에 대해 듣는다고 두려워하지 말고, 이 이름에 대해 이상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이는 우리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도, 우리 밖에 있는 것도 아니며,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원하기만 한다면, 이는 쉬운 일입니다. 그리스인들은 학문을 배우기 위해 낯선 땅으로 떠나 바다를 건너가지만, 우리에게는 하늘나라를 위해 낯선 땅으로 떠날 필요도, 덕을 위해 바다를 건널 필요도 없다. 주님께서 “하늘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누가복음 17,21)고 말씀하시며 이를 미리 막아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덕을 얻기 위해서는 단지 우리가 그것을 원하기만 하면 되는데, 이는 덕이 우리 안에 있으며 우리 안에서 형성되기 때문이다. 이성적인 영혼이 본래의 질서 속에 있을 때, 바로 그 순간 우리 안에는 덕이 있는 것이다. (영혼은) 창조된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할 때 본래의 질서 속에 있는 것이며, 영혼은 지극히 선하고 의롭게 창조되었다. 왜 여호수아가 계명을 주며 백성에게 “너희 마음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리라”(수 24:23)고 말했고, 요한은 “의로운 길을 만드라”(마 3:3)고 말했는가. 영혼은 그 이성이 본연의 질서 안에 있을 때 의로운 상태가 된다. 그러나 영혼이 다른 쪽으로 치우쳐 본성이 요구하는 질서를 타락시킬 때, 이를 영혼 속의 악이라 부른다. 그러므로 (미덕을 실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창조된 그대로 머무르면 미덕의 상태에 있는 것이지만, 악을 꾀하면 당연히 악한 자로 불리게 된다. 만약 이 일(미덕)을 외부에서 차용해야 한다면, 물론 그것은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안에 있다면, 우리는 단지 악한 생각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담보로서 우리의 영혼을 주님께 바쳐야 한다. 그래야 주님께서 그 영혼이 주님께서 창조하신 그대로임을 보시고, 그것을 주님의 창조물로 인정해 주실 것이다.

8. 분노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고, 정욕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도록 (자신과) 싸우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의를 행하는 자에게는 분노가 없느니라”고 하였으며, “정욕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낳느니라”(야고보서 1:20, 15)고도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삶을 살아가며, 우리는 굳건히 정신을 차리고, 기록된 대로 “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키라”(잠언 4,23)고 하듯이 해야 합니다. – 이는 우리에게 무섭고 온갖 간계를 부리는 원수들, 곧 악한 악마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9. 그리고 바로 그들과 우리가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성 사도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이 세상의 어둠의 지배자, 하늘 아래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하는 것입니다” (엡 6,12). 그들의 거대한 무리가 우리를 둘러싼 공기 속에 있으며, 그들은 우리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그들 사이에도 큰 차이가 있다. 그러나 그들의 본성과 차이에 대해 말하자면 매우 길어질 것이며, 게다가 이에 대해 말하는 것은 우리보다 더 높은 지위에 있는 이들에게 더 어울리는 일이다. 우리에게는 지금 지체할 수 없는 절박한 필요로 인해, 오직 그들이 우리를 상대로 꾸미는 계략만을 알아야 한다.

10. 그러므로 우선, 우리는 악령들이 ‘악령’이라 불리는 그런 상태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압니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것을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들 역시 선하게 창조되었으나, 하늘의 지혜에서 떨어져 나와 이미 땅 주위를 맴돌며, 헬레니스트들을 유령으로 현혹시켰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시기하여, 우리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방해하고자 온갖 수단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그들이 떨어진 그곳으로 올라가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부터 “영적인 분별력”이라는 은사(고린도전서 12:10)를 받아, 그들 중 누가 더 적게 악하고 누가 더 많이 악한지, 각자가 어떤 일을 담당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들을 제압하고 쫓아낼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도록 많이 기도하고 수련해야 한다. 그들에게는 온갖 계략이 많고, 중상모략의 꾀도 많기 때문이다. – 복된 사도와 그의 추종자들은 이를 알고 이렇게 말하였다. – “우리는 그의 생각을 알지 못하노라”(고린도후서 2:11). – 우리도 그들에게서 어떤 유혹을 받았는지, 바로 그 점에 대해 서로 경계해야 합니다. – 그래서 나 또한 (그들의 계략을) 부분적으로 직접 경험해 본 바, 여러분에게 마치 자녀들에게 말하듯 이 이야기를 전합니다.

11. 그들은 어떤 그리스도인, 더구나 수도사가 수고에 매진하며 번창하는 모습을 보자마자, 무엇보다 먼저 유혹의 길을 놓으려고 꾀하고 시도합니다. – 그들의 유혹은 곧 악한 생각들입니다. –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이러한 속삭임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기도와 금식, 그리고 주님에 대한 믿음으로 원수들은 즉시 물리쳐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물리쳐져도 그들은 가만히 있지 않고, 곧바로 다시 교활함과 간계로 공격해 옵니다. 명백히 불결한 욕망으로 마음을 유혹할 수 없을 때면, 또 다른 방식으로 공격해 오는데, 바로 공포를 주기 위해 온갖 유령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변신하여 아내, 짐승, 기어다니는 동물, 거인, 그리고 수많은 전사들의 형상을 띤다. 그러나 그런 유령들조차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무것도 아니며, 누군가 믿음과 십자가의 표징으로 자신을 보호하는 즉시 사라지기 때문이다. – 그나저나 그들은 뻔뻔하고 지극히 부끄러움을 모른다. – 그렇기 때문에, 설령 이 방법으로 패배하더라도 또 다른 방식으로 공격해 온다. – 점쟁이의 모습을 취하여 며칠 뒤에 일어날 일을 예언하기도 하고, 또한 자신을 고귀한 존재로 보이게 하여, 누군가를 생각으로 유혹하거나 적어도 그런 유령들로 유인할 수 없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낯선 존재인 악마들의 말을 듣지 말자. 설령 그들이 우리를 기도로 이끌려고 하든, 금식에 대해 말하든, 그들의 말을 따르지 말자. 대신 우리 수행의 목적을 더 주의 깊게 바라보며, 모든 것을 교활하게 행하는 그들에게 현혹되지 말자. – 비록 그들이 우리를 덮쳐 오는 것처럼 보이고, 죽음으로 위협한다 해도 그들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무력하며, 위협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12. 모든 돌봄은 육신보다 영혼에 더 기울여야 하며, 육신에는 필요한 만큼만 짧은 시간을 할애하고, 나머지 모든 것은 무엇보다 영혼에 바쳐 그 유익을 구해야 한다. 그래야 영혼이 육신의 쾌락에 휩쓸리지 않고, 오히려 육신을 자기에게 복종시킬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구세주께서 말씀하신 “너희는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입을지 너희 영혼을 염려하지 말라” (마태복음 6:25)는 뜻이다. – “너희도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마실지 구하지 말고, 교만해지지 말라. 이 모든 것은 이 세상의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니,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이를 구함을 아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더해질 것이다” (누가복음 12:29–31).

13. 주님을 믿고 그분을 사랑하라. 부정한 생각과 육신의 쾌락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고, 잠언에 기록된 대로 “배가 부른 것에 미혹되지 말라”(잠언 24:15); 허영을 피하고 끊임없이 기도하며, 잠들기 전과 잠에서 깬 후에 시편을 노래하라. 성경에 기록된 계명을 연구하고, 성도들의 행적을 마음에 새겨, 계명을 기억하는 네 영혼이 성도들의 열심을 본보기로 삼게 하라. 특히 사도들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 힘쓰라: “분노한 채로 해가 지게 하지 말라” (엡 4,26) – 이 말씀은 모든 계명에 대해 일반적으로 주어진 것임을 명심하라. 즉, 분노뿐만 아니라 우리의 다른 죄로 인해 해가 지지 않도록 하라. 왜냐하면 낮의 과오로 인해 해가, 밤의 죄로 인해 달이, 심지어 나쁜 생각으로 인해조차 우리가 정죄받지 않는 것이 좋고 또한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14. 이를 피하기 위해서는 사도의 말씀, “자신을 시험하라”(고린도후서 13, 5)를 잘 듣고 지키는 것이 좋다. 그러므로 각자는 매일 낮과 밤의 자신의 행실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만약 죄를 지었다면, 죄 짓는 것을 그치고; 죄를 짓지 않았다면, 그것으로 자랑하지 말고 선한 일에 머물며 게으름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이웃을 정죄하지도 말고,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기지도 말아야 한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고린도전서 4:5),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분을 기다려야 한다. – 우리가 하는 일이 우리 자신에게도 숨겨져 있는 경우가 드물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를 알지 못하더라도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보십니다. – 그러므로 심판을 주님께 맡기고, 서로 동정하며, “서로의 짐을 지어 주자”(갈 6:2)고 노력하며,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우리가 부족한 점이 있다면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 힘쓰자.

15. 죄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다음 사항도 지켜 봅시다. 여러분 각자는 마치 서로에게 알리려는 마음으로 자신의 행동과 마음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기록하십시오. 그리고 드러나는 것을 부끄러워하게 되면, 반드시 죄를 짓는 것을 그칠 뿐만 아니라 심지어 마음속에 나쁜 생각을 품는 것조차 멈추게 될 것임을 확신하십시오. 왜냐하면 누가 죄를 지을 때, 그것을 남들이 보기를 원하겠습니까? 혹은 죄를 지은 사람이, 그 죄를 숨기기 위해서라도 차라리 거짓말을 하고 싶어 하지 않겠는가? 서로를 지켜보며 음행을 저지르지 않는 것처럼, 서로의 생각을 기록하여 서로에게 알리겠다는 의도로 기록한다면, 드러날까 봐 부끄러워하여 불순한 생각으로부터 스스로를 더 쉽게 지킬 수 있을 것이다. – 그러므로 기록하는 일이 우리에게 동료들의 눈 역할을 대신하게 하여, 기록할 때 마치 누군가 우리를 바라볼 때 느끼는 것과 같은 부끄러움을 느끼고, 마음속에 어떤 나쁜 생각도 품지 않도록 합시다. 우리가 이렇게 스스로를 단련한다면, 마침내 우리 몸을 정복하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며, 원수의 계략을 짓밟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16. 나는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가 온 마음을 다해 이 고된 여정에 나서며, 처음부터 어떤 전투에서든 적에게 결코 자리를 내주지 않고, 그를 이길 때까지 끝까지 버티겠다고 결심한 이들에게 더 먼저 임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을 부르신 성령께서는 먼저 모든 것을 그들에게 편안하게 하셔서, 회개의 여정에 나서는 것을 달콤하게 하시고, 그 후에 그 여정의 모든 진리(어려움)를 그들에게 보여 주십니다. – 모든 일에서 그들을 도우시며,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회개의 수고가 어떤 것인지 각인시키시고, 육신에 관해서나 영혼에 관해서나 그들에게 한계와 방식을 정해 주시며, 마침내 그들을 창조주이신 하나님께로 온전히 돌아오게 하실 때까지 이끄십니다. – 이를 위해, 그분은 끊임없이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육체와 영혼을 단련하도록 독려하시며, 둘 다 동등하게 거룩해짐으로써 영생의 유업을 받을 자격을 갖추게 하십니다: (고난을 주다) 육체는 끊임없는 금식, 노동, 잦은 기도로, 영혼은 영적 수련과 육체를 통해 행해지는 모든 섬김(과 순종) 에 대한 정성을 통해. 이 점(아무것도 소홀히 하지 말고, 모든 것을 신중함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행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가 그 일이 결실을 맺기를 원한다면, 육체로 행하는 모든 일에서 힘써야 한다.

17. 회개하는 자를 수련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그를 회개로 부르셨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위로도 주시고, 뒤로 물러서지 말며 이 세상의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도록 가르치십니다. – 이를 위해 그분은 영혼의 눈을 열어 회개의 수고를 통해 이룰 수 있는 순결의 아름다움을 보게 하시고, 이를 통해 영혼 안에 몸과 함께 온전히 정화되려는 열망을 불태우시어, 둘이 순결함에서 하나가 되게 하신다. – 이는 성령의 가르침과 인도하심의 목적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곧 그들을 완전히 정화하여 타락 이전에 있던 원초적인 상태로 되돌려 놓고, 그들 안에 섞여 있는 마귀의 시기심을 모두 근절하여, 그들 안에 적대적인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 그러면 육체는 모든 면에서 이성의 명령에 순종하게 될 것이며, 이성은 음식과 음료, 수면 및 그 밖의 모든 행동에 있어 육체를 권위 있게 지배하게 될 것이다. 또한 성 바울 사도의 본을 따라, “자신의 육체를 죽이고 복종시키라”(고린도전서 9, 27)는 대로 성령으로부터 끊임없이 가르침을 받게 될 것이다.

18. 몸에는 세 가지 종류의 육체적 움직임이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 첫 번째는 몸에 타고난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영혼의 동의 없이 발생하지만(죄를 짓거나 양심을 괴롭히는 것은)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않고, 단지 그것이 몸 안에 존재함을 느끼게 할 뿐이다. – 또 다른 움직임은 몸에 음식과 음료를 지나치게 많이 섭취할 때 발생하는데, 이로 인해 생기는 혈액의 열기가 몸 안에서 영혼에 대항하여 싸움을 일으키고, 영혼을 불결한 정욕으로 이끌게 한다. – 그렇기에 사도도 “포도주로 취하지 말라. 그 안에는 음행이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도 복음서에서 제자들에게 “주의하여, 과식과 술 취함으로 너희 마음이 무거워지지 않도록 하라”고 명하셨다(누가복음 21:34). 수녀 생활에서 거룩함과 순결의 완전한 경지에 이르기를 갈망하는 이들은 특히 항상 사도처럼 “내 몸을 죽이고 복종시킨다”(고린도전서 9, 27)고 말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다스려야 한다. 세 번째 유혹은 악령들로부터 비롯되는데, 이들은 시기심에 사로잡혀 이러한 유혹을 가하며, 이미 순결을 추구하는 수도자들을 느슨하게 만들거나, 순결의 문(즉, 수도 생활에 막 입문하려는 자들)으로 들어가려는 이들을 길에서 벗어나게 하려 합니다.

19. 그러나 사람이 인내와 하나님께로부터 온 계명들에 대한 변함없는 충실함으로 무장한다면, 성령께서 그의 마음을 가르쳐 주셔서 그러한 유혹들로부터 영혼과 몸을 어떻게 정화할지 알게 하실 것이다. 만약 그가 때때로 방심하여, 들은 계명과 명령에 대해 소홀함을 허용한다면, 악령들이 그를 압도하기 시작하여 온 몸을 덮치고, 그 움직임으로 그를 더럽히기 시작할 것이며, 결국 고통받는 영혼은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게 될 것이며, 절망 속에서 어디서 어떤 도움이 올지조차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다시 계명의 편에 서서, 그 멍에를 짊어지고(혹은 의무의 무게를 깨닫고) 자신을 하나님의 영께 맡길 때, 비로소 그녀는 구원의 마음가짐으로 가득 차게 된다. 그제서야 비로소 그녀는 평안을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찾아야 하며, 오직 그런 방식으로만 그녀에게 평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20. 완전한 순결을 추구하며, 회개의 수고를 영혼과 육신 모두에서 균등하고 일관되게 감당해야 한다. 그리고 마음이 자기 연민이나 타협 없이 정욕과 싸울 수 있는 은총을 얻게 되면, 그때 그 마음에는 성령의 감화, 인도, 그리고 힘이 깃들게 되며, 이를 통해 마음은 심장의 정욕에서 비롯된 모든 불순한 유혹을 성공적으로 물리치기 시작한다. 이 성령은 이성(혹은 사람의 영)과 결합하여, 깨달은 계명을 엄격히 이행하겠다는 결의를 바탕으로, 육체로부터 혼에 섞여 들어오는 모든 정욕은 물론, 육체와 무관하게 혼 자체에 내재하는 정욕까지 모두 혼에서 몰아내도록 이성을 인도한다. 그 영은 그에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바르게 다스리도록 가르친다. 눈은 순수하게 바라보게 하고, 귀는 평화로운(혹은 온화한) 말을 듣게 하며, 험담과 헐뜯음, 비방에 빠져들지 않게 하며; – 혀는 매 말을 신중히 헤아리며 오직 선한 말만 하도록 하고, 말 속에 불결하고 정욕적인 것이 섞이지 않도록 하며; 손은 기도할 때와 자비와 관대함을 베푸는 일에 먼저 쓰이도록 하고; 배는 음식과 음료의 섭취를 신체의 유지를 위해 필요한 만큼만 적정 선 내에서 절제하며, 욕망과 쾌락이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없도록 해야 한다; 발은 바르게 디디고 하나님의 뜻대로 걸으며, 선한 일을 섬기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처럼 몸은 온갖 선한 일에 익숙해지고, 성령의 권세에 복종하며 변화되어, 마침내 의인들의 부활 때 얻게 될 영적 몸의 속성들을 어느 정도 공유하게 된다.

21. 영혼은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그 자체의 정욕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들은 교만, 증오, 시기, 분노, 낙담 및 그와 유사한 것들이다. 영혼이 온 힘을 다해 자신을 하나님께 맡길 때, 그때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참된 회개의 영을 주시고, 이 모든 정욕으로부터 그를 정화하시며, 그 정욕을 따르지 않도록 가르치시고, 유혹을 통해 다시 그를 빼앗으려 끊임없이 방해하는 원수들을 이겨내고 정복할 힘을 주신다. 그리고 그녀가 회개를 가르쳐 주시는 성령께 대한 확고한 회심과 선한 순종 속에서 굳건히 머문다면, 자비로우신 창조주께서는 그녀의 수고와, 긴 금식, 잦은 밤샘 기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가르침, 끊임없는 기도, 모든 세속적 쾌락의 포기, 순수한 마음으로 모든 이를 섬김, 겸손과 영적 가난 속에서 – 만일 그녀가 이 모든 것에서 굳건히 버틴다면, 지극히 자비로우신 분께서 자비로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시어, 모든 유혹에서 그녀를 구원하시고 그분의 자비로 원수들의 손에서 그녀를 건져내실 것이다.

22.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분의 자비로, “아끼지 않으시고”(롬 8:32) 독생자이신 아들을 내어주셨으니, 이는 우리를 우리의 죄와 불의에서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낮추시고, 우리의 영적 병을 고치시며, 우리의 죄로부터 구원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께 간청하노니, 이 위대한 하나님의 섭리,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죄를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아지신 ‘말씀’이심을 알고, 항상 마음에 새기십시오. 이성을 부여받은 자들에게는 이 사실을 이성적으로 깨닫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능력으로 (죄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워지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 경륜을 마땅히 활용한 자들은 그분의 종들입니다. 그러나 이 칭호는 아직 완전함이 아닙니다. 완전함은 아들의 지위로 인도하며, 이는 때가 되면 임하는 성화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이 이미 아들의 지위에 이르렀고, 성령의 가르침을 받아 그분 자신을 알게 되신 것을 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 부르지 않고 친구요 형제라 부르노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말하였기 때문이라”(요한복음 15:15).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신이 무엇이 되었는지를 깨달은 이들은 이렇게 외치며 말했습니다. “우리는 두려움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는 아들의 영을 받았느니라” (로마서 8:15). 누구든지 (죄에서) 일어나려는 완전하고 간절한 준비를 보이지 않는 자는, 구세주 주님의 재림이 그에게 심판이 될 것임을 알아야 한다. 왜 시메온이 처음부터 이렇게 노래했는가?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많은 이에게 넘어짐과 일어서게 함이 되며, 논쟁의 표적이 되리라” (눅 2:34)라고 노래했겠는가? 그 후 사도들도 선포했다. “우리는 어떤 이에게는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자요, 어떤 이에게는 생명의 냄새를 풍기는 자니라” (고후 2:16).

23. 진리의 적들이 끊임없이 진리를 파괴하려 애쓰고 있다는 사실은 여러분에게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세상 창조의 시작부터 언제나 당신의 피조물을 돌보셨으며, 온 마음을 다해 창조주께 나아온 이들에게 그분을 어떻게 경배해야 하는지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정욕과 우리를 대적하는 원수들의 악의로 인해, 영혼의 선한 열망이 힘을 잃고, 사람들이 본성과 소명에 따라 자신들에게 주어진 것을 깨닫지 못할 뿐만 아니라, 죄에서 벗어나 원초적인 상태로 돌아가는 것조차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기록된 율법을 통해 참된 하나님 경외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마저도 소용이 없자, 하나님께서는 상처가 커져 가고 단호한 치료가 필요함을 보시고, 우리의 유일한 의사이신 독생자 아들을 보내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24.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에 사로잡힌 나는, 우리 시대를 바라보며 때로는 기쁨을, 때로는 한탄과 눈물을 느낍니다. 우리 민족 가운데 매우 많은 이들이 경건함(수도자)의 옷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만이 온 마음을 다해 그렇게 했으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가져온 구원을 받을 자격을 얻었습니다. 바로 이들이 내가 기뻐하는 자들입니다. 반면, 어떤 이들은 (자신의 서원의) 힘을 경멸하고 육신의 욕망과 마음의 경향에 따라 행하여, 주님의 재림이 그들에게 책망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들이 내가 탄식하는 자들입니다. 마지막으로, 어떤 이들은 이 수고의 길고 힘든 시간을 생각하며 낙담하여, 경건의 옷을 벗어 던지고 마치 말을 잃은 듯해졌습니다. 이들은 바로 제가 눈물을 흘리는 자들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그들에게 정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25. 나는 여러분을 위해 온 힘을 다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주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불을 지르러 오셨던(눅 12:49) 그 불을 여러분의 마음에 부어 주시어, 여러분이 자신의 의도와 감정을 바르게 다스리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26. 바람이 고요히 불 때면, 어떤 항해자라도 자신을 높이 평가하고 자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바람의 변화 속에서야 비로소 노련한 조타수의 솜씨가 드러납니다.

27.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하나님의 종이다. 그러나 우리도 처해 있는 이 종의 신분은 단순한 노예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로 이끄는 의로움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사도들을 택하시고 그들에게 복음의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그들이 전한 계명들은 우리를 위해 아름다운 종의 삶을 정립하여, 우리가 모든 정욕을 다스리고 덕을 위한 아름다운 봉사를 행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은혜에 더 가까이 나아갈 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 부르지 않고, 나의 친구요 형제라 부르노니, 이는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말하였기 때문이라”(요한복음 15:15). 은혜에 다가간 자들은 성령의 움직임을 체험으로 깨닫고, 자신의 영적 구조를 이해하게 됩니다. 이를 깨닫고 알게 된 그들은 외치며 말합니다. “우리는 두려움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아들의 영을 받았으니, 그 영으로 말미암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나이다.” (로마서 8:15).

28.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를 그분의 은혜의 역사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니 게으름 피우거나 낙심하지 말고, 밤낮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어, 아버지 하나님의 자비를 간구하여, 여러분이 어떻게 행해야 할지를 깨닫게 해 줄 하늘로부터의 도움을 내려주시기를 구하십시오. “너희 눈과 눈꺼풀에 잠이 들지 않게 하라”(시편 131:4)고 하며, 하나님을 뵙기 위해 스스로를 깨끗한 제물로 하나님께 바치기를 간절히 원하십시오. 사도가 말했듯이, 깨끗함이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을 뵐 수 없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12:14).

29. 모든 성도들은 우리가 게으르고 소홀히 할 때 슬퍼하며 울고 탄식하지만, 우리가 바르게 행하고 온전함 안에서 성장하는 것을 볼 때는 기뻐하며, 기쁨과 즐거움 가운데 끊임없이 우리를 위해 창조주께 기도를 드린다. 그때 주님께서는 우리의 선한 행실과 성인들의 증언 및 기도로 위로를 받으시며, 온갖 은사로 우리를 풍성히 베풀어 주십니다.

30.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육신의 본성과 그 모든 움직임과 행동에 대해 온 마음을 다해 미움을 품지 않고, 모든 이의 아버지께 향한 슬픔으로 자신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자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이를 행하는 자에게는 우리 주님께서 그 수고에 자비를 베푸시어, 그 안에 있는 모든 정욕을 태워 버리고 그의 마음을 온전히 정화시킬 보이지 않는 비물질적인 불을 주실 것이다. 그러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그 안에 거하시며, 그와 함께 머무르시어 아버지께 합당한 경배를 가르쳐 주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육신의 쾌락에 탐닉하는 한, 우리는 하나님과 그분의 천사들, 그리고 모든 성도들에게 적대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청하노니, 여러분의 생명과 구원을 소홀히 여기지 말고, 이 덧없는 시간이 끝이 없는 영원을 여러분에게서 빼앗아가게 내버려 두지 말며, 이 육신으로 인해 무한하고 형언할 수 없는 빛의 왕국에서 여러분을 배제당하게 하지 마십시오. 진실로 내 영혼은 당혹스러워하고 내 영은 얼어붙습니다. 우리에게 성도들의 일을 선택하고 행할 자유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정욕에 취해 마치 포도주에 취한 자들처럼, 마음을 높이 들어 높은 영광을 추구하려 하지 않고, 성도들의 행실을 본받거나 그들의 발자취를 따르려 하지 않아, 그들의 행위의 상속자가 되어 그들과 함께 영원한 유산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31. 너희는 너희 안에 있는 은혜를 받아 위대한 복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너희는 “높이에서 너희를 방문하신”(누가복음 1:78)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게으름 피우지 말고 힘써 노력하여, 그분께 거룩하고 흠 없는 제물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 본성이 그 높은 곳에서 굴욕과 궁핍의 깊은 곳으로 어떻게 떨어졌는지, 그리고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모세와 다른 선지자들의 손을 통해 그분의 율법으로 우리 본성을 어떻게 찾아오셨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시대에는 그분의 독생자, 곧 우리 대제사장들의 최고 수장이시며, 우리의 참된 의사이시며, 우리의 병을 고치실 수 있는 유일한 분, 우리 육신을 입으시고 우리와 우리의 죄를 위해 스스로를 내어주신 분을 통해 이를 이루셨습니다. 그분의 죽음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성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원수이자 악인이며 거짓의 아버지인 자의 뜻에 따라 어리석게 된 후, 우리 창조주께서 외적·내적 인간을 향해 내리신 명령과 우리를 찾아오신 일들을 깊이 헤아리고 부지런히 살펴보십시오.

32. 악한 악령들이 얼마나 무수하며, 그들의 계략이 얼마나 셀 수 없이 많은가! 그들은 우리가 자신의 정욕과 수치를 깨닫고, 그들이 우리를 유혹하는 악한 행실을 피하려 애쓰며, 그들이 우리에게 주입하는 악한 조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운명이 이미 최종적으로 결정되었고, 그들의 극심한 악의와 (하나님에 대한) 배반으로 인해 그들의 유산이 지옥임을 알면서도, 필사적인 노력으로 일에 착수하였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열어 주시어, 악마들의 계략이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그들이 매일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악을 끼치는지 보게 하시고, – 또한 여러분에게 깨어 있는 마음과 분별하는 영을 주셔서, 여러분이 스스로를 하나님께 산 제물로서 흠 없는 제물로 드릴 수 있게 하시며, 언제나 악마들의 시기심과 그들의 악한 조언, 그들의 은밀한 계략과 숨겨진 악의, 기만적인 거짓말과 모독적인 생각, 매일 우리 마음에 심어 놓는 교묘한 속삭임, 그리고 우리가 서로를 비방하도록 부추기는 분노와 중상모략을 경계하며, 오직 자신만을 정당화하면서, 다른 이들을 정죄하여 서로를 비방하게 하거나, 달콤한 말로 우리 마음속 에 쓴맛을 숨기게 하여, 이웃의 겉모습을 비난하게 하면서 내면에는 포식자를 품고, 서로 다투고 맞서며, 자기 주장을 관철시키고 가장 정직한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애쓰게 하려는 것. 죄악된 생각에 탐닉하는 모든 사람은, 원수들이 그에게 심어 놓은 것에 기뻐하며(공감하며), 겉으로만 행하는 일들로만 자신을 정당화하려 할 때, 마음속에는 온갖 악을 가르치는 악령이 거처하고 있기에 자의적으로 타락하게 된다. 그런 사람의 몸은 수치스러운 치욕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스스로 쫓아내지 않는 악마의 정욕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악마들은 눈에 보이는 육체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 영혼이 그들로부터 어두운 생각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그들에게 육체가 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생각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악마 그 자체를 받아들이게 되고, 그들을 우리 몸 안에서 드러나게 만들기 때문이다.

33. 지혜롭고 불멸하는 본성은 썩어 없어질 우리 몸 속에 감추어져 있는데, 이는 그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활동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이 몸을 향로 제단으로 삼아, 그 위에 너희의 모든 생각과 악한 계획을 바치고, 그것들을 주님의 면전 앞에 드린 뒤, 마음과 정신으로 그분께 나아가, 그분께서 위에서 그분의 비물질적인 불을 내려주시어 이 제단 위에 놓인 모든 것을 태워 없애고 정화해 주시기를 간구하십시오. 그러면 너희의 적들인 바알의 제사장들이 두려워하며, 선지자 엘리야의 손에서와 같이 너희의 손에 의해 멸망할 것이다(열왕기상 18:25 이하). 그때 너희는 신성한 물에서 나오는 한 사람을 보게 될 것이니, 그가 너희에게 영적인 비, 즉 위로자 성령의 비를 내리게 할 것이다.

34. 교만함으로 인해 자신의 천상 지위에서 추락한 마귀는, 온 마음을 다해 주님께 나아가기를 갈망하는 모든 이들을 끊임없이 타락으로 이끌려고 애쓰고 있다. 바로 그 자신이 추락했던 것과 똑같은 길, 즉 교만과 헛된 영광에 대한 사랑으로 말이다. 악마들은 바로 이것으로 우리를 대적하며, 이와 같은 다른 수단들로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려 한다. 게다가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기에, 그들은 우리 마음에 서로에 대한 증오를 심어 놓아, 어떤 이는 형제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그와 한 마디 말도 나누지 못할 지경에 이르게 한다. 많은 참으로 위대한 이들이 덕을 쌓기 위해 수고를 기울였으나, 자신의 무지 때문에 스스로를 파멸시켰습니다. 예를 들어, 행함에 대한 열정이 식은 채로 자신 안에 덕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 가운데서도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이미 이 마귀의 병(자만)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가깝고 빛 속에 머물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어둠 속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옷을 벗으시고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며, 물그릇에 물을 붓고(요한복음 13:4 이하), 자신보다 낮은 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우리에게 겸손을 가르치기 위함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분은 당시 행하신 일로 우리에게 그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확실히, 으뜸이 되고자 하는 모든 사람은 겸손을 통해서만이 이를 이룰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처음에 하늘에서 쫓겨나게 한 것은 교만의 움직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 안에 지극한 겸손, 곧 온 마음과 온 생각과 온 영과 온 영혼과 온 몸으로 하는 겸손이 없다면,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이다.

35. 우리가 진심으로 우리 창조주께 나아가고자 한다면, 영적 법칙에 따라 우리 영혼을 정욕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힘써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악한 행실과 정욕에 대한 탐닉, 그리고 수많은 마귀의 유혹으로 인해 우리의 이성적 힘이 약해졌고, 우리 영혼의 선한 움직임이 멈춰버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빠지게 되는 정욕들 때문에 더 이상 우리 영적 본성의 아름다움(과 요구)을 알 수 없게 되었으며, 사도 바울이 기록한 대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나게 될 것” (고린도전서 15:22)이라고 한 것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우리에게 구원이 없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분의 형상을 닮아 창조된 모든 이성적인 피조물의 생명이시다.

36. 우리는 성도들의 이름을 따르고 그들의 옷을 입었으며, 이를 통해 불신자들 앞에서 자랑하지만, 그들의 행실을 본받으려는 열심은 없습니다. 사도가 말한 “경건의 겉모습은 있으나 그 힘은 버린 자들”(딤후 3:5)이라는 말씀이 우리에게 해당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이 받아들인 삶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시고, 그 정신에 따라 행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유산을 받을 자격이 있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있는 힘껏 주님의 뜻에 따라 우리의 일을 행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우리 본성에 부합하는 것이며, 이 외에 우리의 덕행에 더 큰 것을 요구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을 섬기고 온 마음을 다해 그분을 찾는 사람은 자신의 본성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며, 어떤 죄를 짓는 사람은 비난과 벌을 받아 마땅하니, 이는 그의 본성과 동떨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37. 주님께서 그분의 은총으로 나의 마음을 죽음의 잠에서 깨우신 이후로, 나는 지나치게 많이 울고 위로받을 수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스스로 생각하노니,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모든 일에 대해 우리가 주님께 무엇을 드릴 수 있겠는가? 주님께서는 당신의 천사들로 우리를 섬기게 하시고, 선지자들에게는 예언하게 하시며, 사도들에게는 복음을 전파하게 하셨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더 큰 것은, 주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독생자를 보내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여러분의 마음을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으로 일깨우십시오. 세례 요한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를 준비하기 위해 회개를 위한 물로 세례를 베풀었음을 아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시는데, 그 불은 선한 일을 향한 열정의 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몸과 영을 정화할 열렬한 준비를 보이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를 받음으로써 선한 일을 열정적으로 행하여, 우리 자신을 그분께 기쁘게 받으실 제물로 드리도록 합시다. 세례를 통해 받아들이는 위로자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거룩하게 행할 힘을 주시어, 우리를 다시 처음의 영광스러운 상태로 회복시키시고 영원히 지속되는 유산을 받을 자격을 갖추게 하십니다. 사도가 말한 대로(갈 3, 27, 28) 말씀하신 대로, 성령의 은혜를 받아 그리스도 안에서 옷을 입게 됩니다. 게다가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성이든 여성이든, 이 은혜를 받는 즉시 육체적 차이의 힘은 사라집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그들에게 영원한 하늘 나라의 상속권에 대한 보증이 되시는 동시에,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어떻게 경배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십니다(요한복음 4, 23).

38. 나는 여러분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여러분도 내가 받은 그 위대하고 불타는 성령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분을 받아 그분이 여러분 안에 거하시게 하려면, 먼저 육체의 수고와 마음의 겸손을 바치고, 밤낮으로 생각을 하늘로 향하게 하여, 올바른 마음으로 이 불 같은 성령을 간구하십시오. 그러면 그분이 여러분에게 주실 것입니다. 엘리야 테스비 사람과 엘리사, 그리고 다른 선지자들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그분을 받았습니다. 이 수양(나타난 공로)으로 자신을 단련하는 자에게는 이 영이 영원히 주어질 것이다. 온 마음을 다해 간절히 구하며 기도에 전념하라. 그러면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그 영은 의로운 마음속에 거하시기 때문이다. 그 영이 받아들여지면, 너희에게 지극히 높은 비밀들을 밝혀 주실 것이며, 사람과 짐승에 대한 두려움을 너희에게서 쫓아내실 것이니, 너희에게는 밤낮으로 하늘의 기쁨이 있을 것이며, 너희는 이 육신 안에서 이미 (하늘) 나라에 있는 자들처럼 될 것이다.

39.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얻고자 한다면,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경외심은 눈물을 낳고, 눈물은 용기를 낳는다. 이 모든 것이 영혼 안에서 성숙해지면, 영혼은 모든 일에서 열매를 맺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영혼 속에서 이 아름다운 열매를 보시고, 마치 선택받은 자의 향기로운 향기처럼 그 영혼을 당신께로 이끌어 오시며, 천사들과 함께 언제나 그 영혼을 기뻐하시고, 그 영혼을 기쁨으로 충만하게 하시며, 그 모든 길에서 지켜 주셔서, 그 영혼이 안전하게 안식의 장소에 도달하게 하십니다. 그때 마귀는 그녀를 둘러싼 지극히 높으신 수호자를 보고는 그녀를 공격하지 못하며, 이 위대한 힘 때문에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조차 두려워합니다. 이 힘을 얻으십시오. 그리하면 악마들이 여러분을 두려워하게 되고, 여러분이 짊어지는 수고가 가벼워지며, 신성한 것이 여러분에게 달콤해질 것입니다. 이 신성한 사랑의 달콤함은 꿀이 가득한 벌집보다 훨씬 더 달콤합니다. 공동체 생활을 하는 수도사와 처녀들 중 많은 이들이 이 신성한 사랑의 달콤함을 조금도 맛보지 못하고, 신성한 힘을 얻지도 못했으면서도 이미 그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얻기 위해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누구든지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비로 반드시 이를 성취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차별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기 안에 하나님의 빛과 그분의 능력을 간절히 원하여, 이 세상의 모욕은 물론 그 명예까지도 경멸하고, 모든 세속적인 것과 육체의 안식을 미워하며, 자신의 마음을 모든 악한 생각에서 정화하고, 끊임없이 하나님께 금식과 밤낮으로 흘리는 눈물, 그리고 순수한 기도를 드릴 때,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 능력을 베풀어 주십니다. 바로 그러한 힘을 얻기 위해 힘쓰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모든 일을 평온하고 수월하게 해낼 것이며, 하나님께 대한 큰 담대함을 얻게 될 것이며, 그분께서는 여러분의 모든 간구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40.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사랑하고 온 마음을 다해 그분을 찾는 자들의 기도를 들으시며, 그들의 모든 간구를 들어주십니다. 그러나 온 마음을 다해 그분께 나아가지 않고 마음이 갈라져 있으며, 무엇을 하든지 인간의 영광과 칭찬을 얻기 위해 겉으로만 드러내는 자들의 간구는 들어주시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진노하시니, 그들의 행위는 허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편에 기록된 말씀이 그들에게 이루어지니, “하나님이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자들의 뼈를 흩으시리라”(시 52:6) 하신 말씀이다. 이러한 이유로 하나님의 능력은 그들 안에서 역사하지 않으니, 그들이 행하는 모든 일에 있어 마음이 굳건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달콤함과 그 고요함, 그리고 기쁨을 알지 못한다. 우리 가운데에는 영혼에 달콤함을 주고, 날마다 점점 더 큰 기쁨과 즐거움으로 채워 주며, 그 안에 신성한 온기를 불태워 주는 그 힘을 얻지 못한 이들이 많다. 그들은 자신의 행실을 사람들 앞에서 과시하기 때문에 악한 영에게 현혹된다. 그러나 여러분은 여러분의 수고의 열매를 주님 앞에 드리며, 허영의 영으로부터 멀리 떠나도록 노력하고, 주님께서 여러분이 그분 앞에 드리는 열매를 받아 주시고, 그분의 택하신 자들에게 주어지는 힘을 여러분에게 내려 주시도록 끊임없이 그 영과 싸우십시오. 이 악한 영에 맞서 싸우는 것을 그치지 마십시오. 사람이 선한 일과 훌륭한 업적에 착수할 때면, 이 영도 달려와 그 일의 일부가 되려 하거나, 아예 그러한 시도를 완전히 좌절시키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누구도 의롭게 행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며, 주님께 충실하고자 하는 모든 이에게 대적합니다. 많은 이들을 그는 미덕에 전혀 접근하지 못하게 막고, 다른 이들의 일에는 끼어들어 그들의 열매를 망가뜨리는데, 그들에게 미덕을 실천하고 자비의 행위를 하도록 가르치면서도 그 안에 허영심을 섞어 넣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런 자들에 대해 그들이 열매로 풍성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들은 전혀 열매를 맺지 못한 채, 마치 멀리서 보면 달콤한 열매가 많이 달린 것처럼 보였던 무화과나무와 같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 나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서 어떤 선한 열매도 찾지 못하신다는 이유로 그들을 메마르게 하실 뿐만 아니라, 그분의 신성에서 비롯된 비할 데 없는 달콤함마저 박탈하십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 고된 여정에 나서면서 허영의 영에 맞서 싸우도록 노력하십시오. 그 영에 저항하고 이를 극복하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여 여러분에게 도움을 주시고 여러분과 함께 하시며, 언제나 그 무엇보다도 귀한 열정과 온기를 여러분에게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중 누구라도 자신에게 그 온기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그것을 찾으려고 노력하십시오. 그러면 그것을 찾는 자에게 그 온기가 찾아올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사람들이 약간의 기름을 끓이려고 할 때, 불이 활활 타오를 때까지 부채질하는 불과 같으며, 일단 활활 타오르면 그 본연의 힘을 발휘하여 위로 치솟으며 타오르며 기름을 끓게 한다. 마찬가지로, 부주의와 나태함으로 인해 여러분의 영혼이 식어가는 것을 보게 되면, 서둘러 눈물을 흘리며 그 영혼을 다시 일깨우십시오. 의심할 여지 없이 그 불이 찾아와 여러분의 영혼과 하나가 될 것이며, 그 불을 얻은 자들은 선한 행실로 활활 타오를 것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신의 영혼이 무거워지고 식어버린 것을 깨달았을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옛날의 날들을 기억하며, 주의 모든 일을 배우고, 주의 손으로 지으신 피조물들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나이다. 내 손과 내 영혼을 주께 드리오니, 주께서는 나를 물 없는 땅과 같으시나이다” (시 142:5, 6). 보십시오, 다윗은 마음이 무거워졌을 때, 마음속에 다시 불이 타오를 때까지 이 일로 지극히 근심하다가, 마침내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준비되었나이다, 내 마음이 준비되었나이다”라고 외쳤습니다(시 107:2). 그리고 그는 이 밤낮 없는 보살핌과 돌봄을 통해 다시 제 자리로 회복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이와 같이 행하여, 신성한 빛과 불의 도움으로 마음을 다스리는 데 한마음이 되십시오.

41.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분명히 보고 이해할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어, 선과 악을 올바르게 분별할 수 있게 하소서. 사도 바울은 “완전한 자들에게는 단단한 양식이 있다”(히브리서 5:14)고 기록했습니다. 이들은 오랫동안 꼼꼼한 수련을 통해 선과 악에 대한 자신의 감각과 의도를 단련하여, 왕국의 아들들이 되었고 신성한 양자로 인정받은 자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모든 일에서 지혜와 분별력을 주셔서, 사람이나 마귀도 그들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원수가 선한 것으로 가장하여 신자들을 유혹하며, 분별력과 지혜가 부족한 많은 이들을 미혹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복된 바울은 신자들에게 주어진, 그 위대함이 끝이 없는 이 풍성한 지혜를 깨달았을 때, 에베소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지혜와 총명의 영을 주사,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히시어,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은 소망이 무엇이며, 여러분이 상속받을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성도들 안에서 그분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알게 하시기를 원합니다”(엡 1:17, 18). 그는 그들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이같이 행하셨으니, 그들이 이를 성취하면 어떤 일에도 어려움을 겪지 않을 것이며, 어떤 두려움도 없을 것이며, 주님의 기쁨이 밤낮으로 그들을 위로해 주실 것이며, 그들의 수고가 언제나 달콤하게 느껴질 것임을 아셨기 때문이다. 키노비아에 사는 수도사와 처녀들 중 많은 이들이 이 경지에 이르지 못합니다. 여러분도 만일 완전함의 정점인 이 경지에 이르고자 한다면, 수도자와 처녀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이에 대한 분별력과 판단력이 없는 모든 이들에게서 멀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그들과 교제하게 된다면, 그들은 여러분이 번창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여러분의 열정을 식혀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 안에는 어떤 열정도 없고 오직 냉담함만 있을 뿐인데, 이는 그들이 자신의 욕망대로 행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여러분에게 와서 자신의 욕망에 따라 세속적인 이야기를 꺼낸다면, 이에 동의하지 마라. 사도 바울이 기록했듯이, “성령을 끄지 말고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살전 5:19, 20)고 했습니다. 성령은 헛된 대화만큼이나 쉽게 꺼진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42. 모든 이성적인 피조물, 즉 남성이든 여성이든,에게는 사랑의 기관이 있어, 이를 통해 그들은 신성한 것과 인간적인 것 모두를 품을 수 있다. 하나님의(영적인) 사람들은 신성한 것을 사랑하고, 육적인 사람들은 육적인 것을 사랑한다. 신성한 것을 사랑하는 자들은 자신의 마음을 모든 더러움과 이 덧없는 세상의 일들로부터 정화하며, 세상과 자신의 영혼을 미워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며, 모든 일에서 그분의 뜻대로 행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그들 안에 거하시며, 영혼을 양육하고 채워 주며 성장하게 하는 달콤함과 기쁨을 그들에게 베푸시는 것이다. 나무가 자연의 물로 적셔지지 않으면 자랄 수 없는 것처럼, 영혼도 하늘의 달콤함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자랄 수 없다. 오직 성령을 받아들이고 하늘의 달콤함으로 적셔진 영혼만이 성장한다.

43. 너희가 죄인임을 고백하고, 게으름으로 인해 저지른 모든 일을 통회하라. 그러면 주님의 은총이 너희와 함께할 것이며, 너희 안에서 역사하실 것이다. 그분은 선하시며, 그분께 돌아오는 모든 이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이 누구이든 더 이상 그 죄를 기억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용서받은) 그들이 지금까지 저지른 죄의 용서를 스스로 기억하기를 원하시니, 이를 잊어버림으로써 자신의 행실에서 다시는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여, 이미 용서받은 죄들에 대해서도 책임을 물어야 할 상황에 처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 마치 주인이 그에게 진 빚 전액을 탕감해 준 그 종의 경우처럼 말이다. 왜냐하면, 그 종은 이 은혜를 잊고 동료 종에게 부당하게 대했을 때, 주인은 이미 탕감해 준 빚 전액을 그에게 다시 요구했고, – 그가 동료 종을 불쌍히 여기지 않고 백 디나리온을 탕감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금액은 그에게 탕감된 것에 비하면 미미한 것이었습니다(마태복음 18:23 등). 선지자 다윗을 살펴보겠습니다. 그가 우리아의 아내와 간음한 후, 선지자 나훔이 그 일과 그가 우리아에게 행한 일에 대해 책망했을 때, 다윗은 그 책망을 듣고 즉시 회개하고 겸손해졌습니다. 왜 선지자 나훔은 그에게 “하나님께서 이미 네 죄를 사해 주셨다”(열왕기하 12:13)고 말했을까요? 그러나 다윗은 죄 사함을 받았음에도 그 죄를 잊지 않았으며, 그 기억을 후손들에게 전했습니다. 이는 모든 족보에, 대대로 기억되게 하기 위함이다. “내가 죄인들을 주의 길로 가르치리이다”(시 50:15)라고 그는 말하며, 모든 죄인들이 그의 본보기를 통해 그와 같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았을 때 그것을 잊지 말고 항상 기억하도록 하라고 했다. 하나님께서도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 죄를 지워 버리고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너는 기억하라”(이사야 43:25, 26). 그분은 또한 예언자 예레미야를 통해 “이스라엘 집아,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자비로우니 너희에게 내 얼굴을 돌리지 아니하며 영원토록 너희에게 노하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네 죄악을 보라. 네가 주 너의 하나님을 거역하였고 네 길을 헛되이 행하였느니라” (예레미야 3:12, 13). 이처럼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실 때, 우리는 스스로 그 죄를 용서해서는 안 되며, 항상 그 죄를 기억하며 회개를 새롭게 해야 한다.

44. 영적 수행은 훌륭하지만, 그에는 많은 적들이 있다. 그 안에서 온전해지기를 원하는 자는 어떤 악한 것에도 종노릇해서는 안 된다. 어떤 악한 것에 종노릇하는 자는 온전함의 경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4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헤아릴 수 없는 겸손으로 당신의 신성을 인성으로 감추셨기에, 모든 사람이 그분을 사람으로 여겼으나, 그분은 단지 사람일 뿐만 아니라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이셨으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요한복음 1:14)라고 기록된 대로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필요하셨던 성육신을 통해 당신의 신성 밖으로 벗어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46. 많은 이들이 어리석음으로 말하기를, “우리도 사도들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다”고 하지만, 실은 그들은 자기기만과 미혹에 빠져 있어, 사도들이 그분을 보았던 것처럼 주님을 볼 눈조차 없는 자들이다. 사도 바울은 주님과 함께 계셨고, 주님께서 땅 위를 걸어다니시며 그분을 사람으로만 바라보던 군중들에게 둘러싸여 계셨을 때 그분을 믿었던 사도들이 보았던 것처럼 주님을 보았습니다. 혈루병을 앓던 여인이 마음의 눈으로 그분을 보고 그분이 하나님이심을 믿어, 믿음으로 그분의 옷자락을 만졌을 때, 즉시 병에서 나았으나, 그분은 “누가 나를 만졌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는 모르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믿음을 드러내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백성들이 주님을 괴롭히는데, 주님은 ‘누가 나를 만졌느냐?’고 말씀하십니까?”라고 말했지만, 그 여인이 스스로 나서서 어떻게 치유받았는지 고백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녀에게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누가복음 8:45–48). 빌라도와 안나와 카야파도 주님을 보았으나, 사도들이 그분을 바라보았던 방식과는 달리 믿음 없이 그분을 바라보았던 다른 군중들과 마찬가지로, 그분을 보았음에도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마음의 눈과 지극히 굳건한 믿음으로 그분을 보았으니, 이는 피 흘리던 여인이 믿음으로 그분을 만져 치유를 받았던 것과 같았다.

47. 사람 안에서 죄의 왕국이 사라지면, 그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영혼에게 나타나시어 영혼과 몸을 함께 정화하십니다. 그러나 죄의 왕국이 몸 안에 살아 있다면, 사람은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영혼은 몸 안에 갇혀 있어, 하나님을 보는 빛이 들어설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말합니다.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시 35:10). 사람이 빛을 보는 이 빛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서에서 언급하신 바로 그 빛, 즉 온 사람이 빛나고 그 안에 어두운 부분이 하나도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눅 11:36). 주님께서는 또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하나 오직 아들이 알며, 아들이 계시하고자 하는 자에게만 계시하리라” (마태복음 11, 27). 그러나 아들은 어둠의 아들들에게 자신의 아버지를 계시하지 않으시고, 빛 안에 거하며 빛의 아들인 자들에게만 계시하시는데, 그분은 계명을 아는 지식으로 그들의 마음의 눈을 밝히셨기 때문입니다.

48. 시편에 기록되어 있듯이: “나는 경이로운 거처로, 곧 하나님의 집으로 나아가리라”(시 41:5). 이 ‘나아가리라’는 말은 더 멀리 나아가는 것을 의미하며, 우리에게 영혼이 완전한 나이에 이르렀음을 증명해 줍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영혼은 이미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갔으나, 이전에는 그 길이 하나님으로부터 아직 매우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길이 매우 멀다는 사실에 놀라지 말자. 우리는 아직 영적 유년기에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에게도 “일어나 먹고 마시고 힘을 내라. 네 앞길은 아직 멀다”(열왕기상 19:7)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다(그는 하나님을 뵙기 위해 가고 있었다). 다윗도 바로 이 길의 길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가 내게 날개를 주사 깊은 곳에 날아가 쉴 수 있게 하리이까?”(시 54:7). 그러므로 이 길을 소홀함이나 나태함, 게으름으로 걷지 말고, 주의와 열정으로 걸어야 합니다. 우주의 스승이신 바울은 우리에게 “그렇게 달려서 이르게 하라”고 권면하며, 또한 “내 몸을 죽이고 복종시킨다”고 말합니다(고린도전서 9:27). 그러므로 우리가 이 육신에 있는 동안, 성 바울로께서 그분 스스로 이룬 것처럼 완전함에 이르도록 힘쓰자. 성 바울로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웠고, 경주를 마쳤으며,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의의 면류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2티모 4,7-8).

49. 영혼이 깃들어 있는 동안 육신이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라는 세 시기를 거치듯이, 육신 속에 감춰진 영혼 또한 믿음의 시작, 믿음의 성장, 그리고 완전함이라는 세 시기를 거칩니다. 첫 번째 단계, 즉 영혼이 믿음을 시작할 때, 복음서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납니다. 사도 요한은 이 새로운 탄생과, 중간 단계, 그리고 완전함에 대한 징표를 우리에게 알려 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너희 청년들에게 편지를 썼고, 너희 자녀들에게 편지를 썼으며, “너희 아버지들에게 편지했다”(1요한 2,12–14). 그는 육신적인 친구들에게 쓴 것이 아니라, 신자들에게 쓴 것으로, 영적 영역을 향해 나아가 완전함에 이르러 온전한 은총을 얻고자 하는 이들이 겪는 세 가지 단계를 묘사한 것이다.

50. 영적인 삶을 사랑하는 자는 요셉의 순결과 절제를 본받아야 하며, 묵상을 통해 자신을 다스리기 시작하고, 교활한 원수의 지지를 받아 강해지는 모든 악한 정욕에 대항하여 무장해야 한다. 욥의 말을 빌려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해야 한다. “그의 요새는 허리에 있고, 그의 힘은 태의 배에 있도다” (40장, 11절). 그러므로 과도한 음식과 음료로 인해 흔히 자극받는 이러한 육신의 정욕에 맞서 분투하고 무장하는 모든 이는, 순결을 지키기 위해 엄격한 절제로 자신의 허리를 묶어야 한다. 기록에 따르면, 야곱과 씨름하던 천사가 그의 허벅지 힘줄을 세게 움켜쥐었더니, 그로 인해 그의 육신이 시들고 약해졌으며, 그는 ‘이스라엘’, 즉 ‘하나님을 보는 자’라고 불리게 되었다(창세기 32, 25. 32). 마찬가지로 우리도 정욕을 죽이고 끄기 위해 우리 몸을 시들게 해야 한다. 육체의 시듦은 우리에게 순결이라는 미덕에서 완전함에 이르게 하는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몸이 지칠 때 비로소 영혼은 강해진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질서 있게 다스릴 힘을 얻기 위해 우리 몸을 정화합시다. 우리가 몸을 정복하여 영혼의 종으로 삼는다면, 하나님께 대적하는 육신의 생각들은 육신을 죽임으로써 함께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면 영혼이 밝아져 하나님의 성전이 될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지체에서 깨끗해지려고 노력하는 자, 그야말로 참된 영적 수행자이다. 그는 바로 자신의 모든 감각을 훈련시켜 그것들이 자신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고, 오히려 큰 순결함으로 그것들을 억제하며 주님의 멍에 아래 복종시키는 자이다. 그는 자신의 눈이 어떤 나쁜 것도 보지 못하게 하고, 여성을 탐욕스럽게 바라보지 않게 하며; 귀로 험담이나 마귀의 유혹, 마귀가 심어 놓은 악한 생각을 듣지 않게 하며, 입에 인장을 찍어 혀가 헛된 말을 내뱉지 못하게 하고, 손은 자비와 구제의 아름다운 일을 행하기 위해 뻗으며, 발은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재빨리 움직인다: “누구든지 너를 강제로 한 마일 가라고 하면, 그와 함께 두 마일을 가라”(마태복음 5, 41); 그는 자신의 배와 가슴을 잘 다스려, 그것들 때문에 넘어지거나 땅 위를 기어다니지 않도록 한다. 마치 뱀이 자신의 배와 가슴 위로 기어다니는 것처럼 말이다. 형제들아, 이것이 바로 수행자의 삶의 모습이다.

51. 참으로 영적인 수행자가 되고자 하는 자는 누구나, 몸과 마음과 정신이 세상의 혼란과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있도록, 시끌벅적한 군중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그들에게 가까이 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사람들이 있는 곳에는 혼란이 따르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홀로 산에 올라 기도하실 때, 사람들로부터 멀어지고 은둔하는 본보기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광야에서도 주님께서는 감히 그분과 싸우려 든 마귀를 물리치셨습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마귀를 이길 힘이 없으신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그분은 우리가 고독과 침묵 속에서 적을 이기고 완전함에 더 쉽게 도달할 수 있음을 가르치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사람들 가운데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영광을 보이시지 않으시고, 산 위로 데려가셔서 그곳에서 그들에게 당신의 영광을 보이셨습니다. 세례 요한도 이스라엘에 나타나실 날까지 광야에 계셨습니다. 세상에서는 원수가 자신의 외적·내적 무기로 우리를 압박하기가 더 수월합니다. 그곳에서 원수는 자신에게 복종하는 일부 사람들을 공범자나 조력자로 끌어들여, 그들을 매개로 신실한 자들에게 대항하여 싸움을 벌입니다. 어떤 뻔뻔한 여자 는 원수에게 매우 강력한 무기가 되어, 유혹의 그물을 널리 펼치곤 합니다. 에스겔은 각각 네 개의 얼굴을 가진 네 생물을 보았을 때, 그것들이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었으나, 그는 도시나 마을에 있지 않고 밖, 즉 들판에 있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들판으로 나가라. 그리하면 내 영광을 보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겔 3:22). 그리고 일반적으로 이런 종류의 환상과 계시는 산과 광야에서가 아니면 성도들에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도 하나님께서 은둔을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알고, “젊은 시절에 멍에를 메고, 홀로 앉아 침묵하는 사람은 복이 있도다” (예레미야 애가 3, 27. 28). 그는 또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이들에게 세간의 소문이 얼마나 큰 해를 끼치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누가 내게 광야에 마지막 피난처를 주리이까? 그리하면 내가 내 백성을 떠나 그들에게서 멀어지리라.” (예레미야 9, 2). 또한 엘리야 예언자도 천사들로부터 양식을 받을 은혜를 입었는데, 이는 군중 속에서도, 도시나 마을에서도 아닌, 광야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성인들에게 일어난 이 모든 일과 그와 유사한 일들은, 우리가 고독을 사랑했던 이들을 본받도록 설득하기 위해 기록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독은 우리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고독 속에서 마땅히 굳건히 서도록 힘쓰십시오. 그래야 그것이 여러분을 하나님의 현현, 즉 가장 영적인 관상으로 이끌 수 있을 것입니다.

52. 또한 하나님의 불이 깃든 영혼이 무엇과 닮았는지도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것은 하늘의 공기를 타고 높이 치솟는 두 날개를 가진 새와 같습니다. 모든 피조물 중에서 오직 새들에게만 날개가 있으며, 이것이 그들의 특징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영혼의 날개는 바로 하나님의 불이 뿜어내는 열망이며, 이를 통해 영혼은 하늘로 높이 날아오를 수 있습니다. 만일 영혼이 이 날개를 잃게 된다면, 높이 치솟게 하는 그 불에 참여하지 못한 채로 높이 치솟을 힘을 잃게 되어, 날개를 잃은 새와 같아질 것이며, 그 새는 더 이상 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게다가 사람의 영혼은 새와 닮은 점이 또 하나 있는데, 바로 온기가 새가 세상에 태어나는 원인이라는 점이다. 새가 알을 품지 않는다면, 그 알에서 살아있는 새끼가 부화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알은 온기를 통해서만이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그분께 순종하는 영혼들을 감싸 안고 따뜻하게 하심으로써, 그들을 영적인 삶으로 이끌어 내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붙어 있고 그분께 순종하는 영혼이, 존재의 근원이 온기인 새와 같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결코 이 불의 힘을 잃지 않도록 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이 불을 빼앗기 위해, 마귀가 여러분을 향해 수많은 시련을 준비하고 있음을 알아두십시오. 마귀는 이 불이 여러분 안에 있는 한, 결코 여러분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53. 마귀를 대적하고 그의 계략을 분별하도록 힘쓰라. 마귀는 자신의 쓴맛이 드러나지 않도록 보통 달콤함으로 위장하며, 겉보기에는 매력적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다른 온갖 환상을 꾸며내어, 진정으로 매력적인 진리를 교묘하게 모방함으로써 너희 마음을 유혹하려 한다. 그의 모든 술책은 하나님을 위해 선하게 일하는 모든 영혼을 온 힘을 다해 대적하는 데 맞춰져 있다. 그는 영혼 안에 온갖 다양한 정욕을 심어, 모든 힘이 깃든 신성한 불꽃을 꺼뜨리려 한다. 특히 육체의 안락과 그와 관련된 것들로 유혹한다. 마침내 그가 그러한 모든 것을 경계하고, 그로부터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으며, 언젠가 그의 말을 들을 것이라는 희망을 전혀 주지 않는 것을 보게 되면, 그는 수치심을 안고 그들로부터 물러납니다. 그때 하나님의 영이 그들 안에 거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들에게 임하면, 그들로 하여금 평온하게 지내게 하거나, 그들의 모든 일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며, 복음서에 기록된 대로 “너희 영혼이 평안을 얻으리라” (마태복음 11:29)라고 기록되어 있듯이, 비록 그들이 그분의 멍에를 지고 있더라도 평안을 누리게 된다. 그러면 그들은 덕을 실천하는 일에서나 순종을 이행하는 일, 밤샘 기도에서나 지치지 않게 되며; 사람들의 헛된 비난에도 화를 내지 않으며, 사람이나 짐승이나 영을 막론하고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기쁨이 밤낮으로 그들과 함께하여 그들의 이성을 소생시키고 양육하기 때문입니다. 이 기쁨으로 영혼은 성장하여 모든 일에 적합하거나 완전한 상태가 되며, 이를 통해 하늘로 올라갑니다.

54. 우리는 아이가 처음에는 어머니의 젖을 먹고, 그다음에는 다른 어떤 음식을 먹으며, 마침내 모든 사람이 보통 먹는 온갖 음식을 먹으며 자라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아이는 튼튼해지고, 성장하며, 적들이 그를 공격하려 해도 그의 마음은 담대하게 맞선다. 그러나 어린 시절에 어떤 병에 걸리면, 영양 섭취와 체력 강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이는 약해져서 어떤 적이라도 그를 제압하고 이겨버린다. 아이가 건강해지고 적을 이길 힘을 얻으려면, 경험 많은 의사의 도움과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영혼도, 그 안에 하나님의 기쁨이 없다면 약해져서 많은 상처를 입게 된다. 만약 그 영혼이 영적 치료에 능숙한 하나님의 종인 어떤 사람을 찾아 그에게 의지한다면, 그 의사는 먼저 그 영혼을 정욕으로부터 치유하고, 그다음에 다시 살려내어 하나님의 도움으로 그 영혼의 양식인 기쁨을 얻는 법을 가르쳐 줄 것이다. 그때 비로소 그녀는 악령인 자신의 적들에게 맞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의 계략을 짓밟으며, 더욱 완전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55. 악한 마귀가 너희를 유혹하고 속이려고 진실한 자의 모습으로 올 때, 그 계략을 조심하라. 설령 그가 빛나는 천사의 모습으로 너희에게 온다 해도, 그를 믿지 말고 그의 말을 듣지 말라. 왜냐하면 그는 보통 신실한 자들을 진리의 매력적인 외관으로 매혹하기 때문이다. 미성숙한 자들은 마귀의 이러한 교활함과 그가 끊임없이 그들에게 심어 놓는 것을 알지 못하지만, 성숙한 자들은 사도가 말한 대로 알고 있다. “성숙한 자들에게는 단단한 양식이 있으니, 그들은 오랜 가르침을 통해 선과 악을 분별하는 감각을 훈련받았기 때문이다”(히브리서 5:14). 적은 이들을 유혹할 수 없으나, 스스로를 소홀히 여기는 신실한 자들은 겉보기에는 달콤한 미끼로 쉽게 유혹하여, 마치 낚시꾼이 낚싯바늘 끝을 미끼로 가리고 물고기를 낚는 것처럼 그들을 잡아가곤 한다. 물고기는 그 미끼로 낚싯대가 가려져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므로, 다가와 미끼를 삼키고 곧바로 포로가 된다. 만일 물고기가 그 미끼로 잡힐 것임을 알았다면, 의심의 여지 없이 그 미끼에 가까이 가지 않고 도망쳤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말했듯이 미숙한 신자들도 원수에게 잡히는데, 그 이유는 솔로몬이 말한 것과 완전히 유사하다. “사람이 자기 길을 옳다고 여기나, 그 끝은 지옥의 구렁으로 이른다”(잠언 16:25); 선지자 아모스에게도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그가 대답했다. “새잡이(그물, 올가미)의 그릇이다”(8, 2). 새는 땅에서 잡힐까 두려워 공중을 날며, 휴식과 잠을 위해 가장 높은 곳에 둥지를 짭니다. 그곳에서 새는 아무도 자신을 닿을 수 없거나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걱정 없이 잠을 잡니다. 그러나 새잡이가 어떻게 그 새를 속이는지는 잘 알려져 있다. 그는 그곳에 가서 그물을 펴고, 눈에 띄는 곳에 씨앗을 뿌린다. 이 먹이로 그는 새를 그 높은 곳에서 유인하고, 새는 내려와 그 올무에 걸려든다. 마귀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미숙한 그리스도인들을 자신의 교묘한 꾀로 유인하여 그들의 높은 곳에서 끌어내린다. 그가 뱀의 모습을 하고 하와에게 “너희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그 날에 너희가 그것을 먹으면 너희 눈이 밝아져 너희가 마치 신과 같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을 때도 그렇게 행동했다 (창세기 3:4, 5). 이 말을 들은 하와는 마음속으로 그에게 기울어졌고, 그 말을 진리로 여겼으니, 이는 그 일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가 직접 열매를 맛보고 아담에게도 먹게 했을 때, 그들에게 그 큰 불행이 닥쳤으니, 둘 다 자신의 높은 지위에서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마귀는 선과 악을 분별하는 법을 알지 못해 자신의 성향에 따르며, 자신의 판단과 의견에 만족하는 미성숙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똑같은 방식으로 행동합니다; 선과 악을 올바르게 분별할 줄 아는 완전한 아버지들에게 묻지도 않고, 자신들도 이미 완전함에 이르렀으며 아버지들의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하며 마음의 욕망을 따를 때; 이러한 자들은 높은 곳에 둥지를 틀었으나 땅으로 내려와 새잡이의 그물에 걸려 잡힌 새들과 같다. 그들에게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은, 자만심에 빠져 항상 마음의 이끌림대로 행동하며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아버지들의 말을 듣지도 않고 그들과 상의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귀는 그들에게 환상과 유령을 보여주고, 그들의 마음을 교만으로 부풀린다. 때로는 밤에 꿈을 주기도 하는데, 낮에 그 꿈을 실현시켜 그들을 더 깊은 미혹에 빠뜨린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하여, 때로는 밤에 빛을 보여 주어 그들이 있는 곳이 환하게 되게 하기도 하며, 심지어 표적처럼 보이는 온갖 일을 행한다. 그는 이 모든 것을 그들이 자신에 대해 안심하고, 그를 천사로 여기며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 행한다. 그들이 그런 의미로 그를 받아들이자마자, 그는 그들을 지배하는 교만의 영 때문에 그들을 높은 곳에서 쫓아내 버린다. 그는 그들이 영적으로 많은 이들보다 더 위대하고 영광스러워졌으며, 조상들에게 돌아가 그들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믿게 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성경에 따르면, 그들은 실로 빛나는 포도송이이긴 하지만, 아직 익지 않아 떫은 상태이다. 조상들의 가르침은 그들에게 부담스럽다. 왜냐하면 그들은 스스로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56. 너희는 분명히 알라. 너희가 너희 아버지들에게 순종하지 않는다면, 번영하거나 성장하여 온전해질 수도 없고, 선과 악을 올바르게 분별할 수도 없을 것이다. 우리 조상들도 그렇게 행하였다. 그들은 자기 아버지들에게 순종하고 그들의 가르침을 들었으며, 그로 인해 성공하고 성장하여 스스로 스승이 되었으니, 시라코의 지혜서에 기록된 대로 “노인들의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말라. 그들은 자기 아버지들에게서 배웠으니, 너도 그들로부터 지혜를 얻어 필요한 때에 대답할 수 있게 될 것이다”(시라코 8,11–12). 그러므로 너희는 자기 아버지들에게 순종하고 모든 일에 그들의 말을 들은 자들을 본받아야 한다. 그들의 아버지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자신들이 아버지들에게서 배운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쳤고, 순종하는 아들들에게 전수하였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말을 들었고, 야곱은 이삭의 말을 들었으며, 요셉은 야곱을, 엘리사는 엘리야를, 바울은 아나니아를, 디모데는 바울을 따랐습니다. 이 모든 이들과 그들과 같은 이들은 자기 아버지들의 말을 듣고, 그들의 뜻을 행하며, 그들의 조언을 따랐습니다; 그로 인해 진리를 깨닫고, 의를 배우며, 마침내 성령을 받게 되어, 이처럼 모든 면에서 진리의 선구자 가 되었으니, 이는 예언자 에스겔에게 기록된 바와 같다. “내가 너를 이스라엘 집의 파수꾼으로 삼았으니,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듣고 그들을 나를 대신하여 막으라”(3, 17). 그러므로, 만일 여러분이 번영하고 더욱 온전하게 성장하며, 마음속에서 흔들리지 않고 어떤 일에서도 마귀에게 조롱당하지 않기를 원한다면, 여러분의 영적 지도자들에게 순종하고 그들의 모든 말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러면 영원토록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57. 사람을 선한 길로 굳건하게 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그 길을 지키게 하는 단 한 가지 일을 너희에게 알려 주마. 바로 너희의 온 영혼과 온 마음과 온 정신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오직 그분만을 섬기라. 그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큰 힘과 기쁨을 주시리니, 하나님의 모든 일이 여러분에게 꿀처럼 달게 될 것이며, 모든 육체적 수고와 지적 활동, 그리고 기도와 경건한 생활, 나아가 하나님의 모든 멍에가 여러분에게 가볍고 달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람들을 향한 사랑으로, 그들이 교만해지지 않고 수련에 머물도록 때때로 그들에게 역경을 보내시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용기 대신 무거움과 나태함을, 기쁨 대신 슬픔을, 평안과 고요 대신 동요를, 달콤함 대신 쓴맛을 경험하게 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이와 유사한 많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것과 싸워 이겨냄으로써, 그들은 점점 더 강해집니다. 마침내 이 모든 것을 완전히 극복하게 되면, 그때부터 모든 일에서 성령께서 그들과 함께하시게 될 것이며, 그때 그들은 더 이상 어떤 나쁜 일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58. 성령께서는 끊임없이 가장 기분 좋고, 가장 달콤하며,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향기를 풍기십니다. 그러나 성령의 이 기쁨과 그분의 달콤함을, 그분이 자신 안에 거하시도록 은혜를 입은 자들 외에 누가 알겠습니까? 성령께서는 회개하는 자들의 영혼에 오직 많은 수고를 겪은 후에야 비로소 거하십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도 이와 비슷한 것을 많이 봅니다. 예를 들어, 보석은 큰 수고를 치르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습니다. 이 성령을 간절히 구한 성도들은 그분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야말로 거룩한 복음서(마태복음 13, 45, 46)에 나오는, 값진 진주를 찾던 상인의 비유에서 언급된 바로 그분입니다. 그 상인은 하나의 귀중한 진주를 발견하고는 가서 자신의 모든 것을 팔아 그것을 샀습니다. 그분은 물론 밭에 감춰진 보물에 관한 또 다른 비유에도 등장하시는데, 한 사람이 그 보물을 발견하여 숨겨 둔 뒤 기쁨에 차서 가진 모든 것을 팔아 그 밭을 샀던 이야기입니다(마태복음 13,44). 유혹은 성령을 받은 이들에게 그 누구보다도 더 심하게 닥칩니다. 또한 우리 주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신 후 비둘기 모양으로 성령이 임하셨을 때,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나가사 마귀의 유혹을 받으셨는데, 마귀는 온갖 유혹으로 그분을 시험했으나 그분께 대항하여 아무것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이는 누가복음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든 유혹을 마치시고, 마귀는 당분간 그분에게서 물러났다”(눅 4:13). 주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로 돌아오셨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을 영접하고, 싸우며 이기는 모든 이들을 성령께서는 굳건하게 하시고, 그들에게 모든 유혹을 이길 힘을 주십니다.

59. 선지자 예레미야가 본 세라핌(예레미야 1:4, 9)은 완전함에 이르기 위해 수고하는 신실한 영혼들의 상징이다. 그에게는 눈으로 가득 찬 여섯 개의 날개가 있었고, 사방으로 바라보는 네 개의 얼굴이 있었는데, 한 얼굴은 사람의 얼굴과 같고, 다른 하나는 황소의 얼굴, 셋째는 사자의 얼굴, 넷째는 독수리의 얼굴이었다. 세라핌의 첫 번째 얼굴, 즉 사람의 얼굴은 세상에 살면서 그들에게 주어진 계명을 지키는 신실한 이들을 상징한다. 그들 중 누군가가 수도 생활로 나아간다면, 그는 황소의 얼굴과 같아지는데, 이는 수도 규칙을 이행하는 데 따르는 무거운 수고를 짊어지고 더 육체적인 고행을 행하기 때문이다. 공동 생활의 규율을 완성한 후 은둔의 길로 나아가 보이지 않는 악마들과 싸우는 자는 야수들의 왕인 사자의 얼굴과 닮게 된다. 그가 보이지 않는 적들을 물리치고 정욕을 제압하여 그것들을 자기에게 복종시킬 때, 그때 그는 성령으로 충만해져 신성한 환상을 보게 될 것이며, 이때 독수리의 얼굴과 같아질 것이다. 그의 마음은 그때 여섯 방향에서 자신에게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을 보게 될 것이니, 이는 눈으로 가득 찬 여섯 개의 날개와 같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온전히 영적인 세라핌이 되어 영원한 복락을 누리게 될 것이다.

60. 순결, 끊임없고 변함없는 평화, 충만한 자비, 그리고 축복으로 완성되는 그 밖의 아름다운 미덕들은 바로 하나님의 계명의 본질이다. 너희 영혼에 생명을 불어넣고, 이를 통해 너희가 주님을 너희 안에 모시게 될 성령의 이 명령들을 실천하기 위해 힘쓰라. 이것이야말로 안전한 길이다. 몸과 마음의 순결 없이는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완전해질 수 없으니, 이것이 바로 성복음서에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라”(마태복음 5:8)라고 기록된 이유이다. 완전함은 마음의 순결에서 비롯된다. 마음 속에는 본성적인 선과 비본성적인 악이 있습니다. 악으로부터는 비난, 증오, 자만심 및 그와 유사한 것들 같은 영적 정욕이 생겨납니다. 반면 선(마음의 본성)은 하나님에 대한 인식(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모든 정욕으로부터 벗어난 영혼의 거룩함 또는 순결함(양심)을 낳습니다. 만약 사람이 회개하기로 결심하고 온갖 악을 피하기 시작하며, 울음, 통회, 탄식, 금식, 기도, 가난, 그리고 하나님께 드리는 수많은 기도로 무장하여 악에 맞서 싸운다면, 주님께서는 그분의 은혜로 그를 도우시며 모든 영적 정욕에서 그를 해방시켜 주실 것이다. 많은 이들이 오랫동안 수도 생활과 순결을 지키며 지내면서도 이 순결의 교훈을 배우지 못했는데, 이는 그들의 스승들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의 욕망을 따랐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악령들, 즉 영혼을 파멸시키는 자들이 그들을 지배하게 되었으니, 밤낮으로 은밀한 화살로 그들을 쏴대며 어느 곳에서도 평안을 주지 않아, 그들의 마음은 때로는 교만, 때로는 허영, 때로는 불경한 시기, 때로는 비난, 때로는 분노와 격노, 때로는 다툼과 그 밖의 수많은 정욕에 사로잡혀 있다. – 그런 자들은 자신의 모든 시간을 무분별하게 보내고, – 혀를 다스리지 못하며, 눈과 몸을 정욕으로부터, 마음을 불결함으로부터, 그리고 눈물을 흘릴 만한 다른 일들로부터 깨끗하게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다섯 명의 미친 처녀들과 함께할 운명에 처할 것이다. 그들은 불결하기 때문이다, – 처녀성의 상징일 뿐인 아마 옷 한 벌로 만족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그들은 등불을 밝히기 위한 하늘의 기름마저 잃게 될 것이며, 신랑께서는 결코 그들에게 당신의 궁전 문을 열어주지 않으시고, 어리석은 처녀들에게 하신 비유에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에게 이르시리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마태복음 25장). 나는 여러분이 구원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여러분이 자유롭고 신실한 사람이 되어, 모든 영혼의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순결한 신부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나는 너희를 한 남편에게, 곧 순결한 처녀로 약혼시켜 그리스도께 바치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11, 2).

61. 금은 불로 여러 번 정련되어, 가장 강력한 정화를 통해 더 순수해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께서는 그분의 자비로 사람을 수많은 유혹으로 정화하시고, 시험하시며, 마음의 전쟁을 치르는 데 능숙하게 만드십니다. 그리하여 그 사람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가했던 불의와 모욕을 더 이상 생각이나 기억으로 되새기지 않게 되며,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그분께 모든 소망을 두며, 다윗 선지자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모든 선한 일을 행할 준비가 되어 있게 하십니다. “하나님이시여, 내 마음이 준비되었나이다. 내 마음이 준비되었나이다. 내가 내 영광을 노래하며 찬양하리이다”(시 107:2). 여러분은 어떤 형제들에게 모욕과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동료들에게 굴욕을 당하는 시련을 겪게 될 것임을 마음에 새기십시오. 왜냐하면 여러분에게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날 때, 굳건히 서서 두려워하지 말고 낙심하지 말아야 하며, 이 모든 일에 대해 주님께 감사를 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 없이는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으며, 주님께서 이를 허락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종들에게 시련을 겪는 것이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인한 유혹과 수고, 슬픔과 재앙을 겪지 않고, 모든 상황에서 인내로 선을 굳건히 지키는 법을 익히지 않는 자는 그분으로부터 영광을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62. 너희에게 닥치는 재앙과 슬픔을 인내로 견디고, 큰 겸손으로 주님께 감사를 드려라. 그리하여 너희 수고의 기쁨을 맛보게 될 것이니, - 마치 전투에서 용맹했던 복된 수잔나처럼, 그녀는 그 두 불의한 노인의 음란한 유혹을 이겨내고 그들의 거짓 비방으로 인해 많은 재앙과 슬픔을 겪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인내와 흔들림 없는 굳건함을 보시고 그녀의 투신이 끝날 무렵 그녀를 높이 올리시고, 그녀의 원수들을 굴복시키셨으니, 이는 테클라와 마찬가지로, 더욱 용감한 영혼을 지닌 그녀처럼, 부모가 입힌 상처도, 불길도, 살이 찢기는 고통도, 야수들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그녀의 용감한 믿음이 타오르는 불길을 꺼뜨리고, 피에 굶주린 사자들의 입을 막으며, 모든 적들을 수치를 당하게 했을 때, 하나님께서 마침내 그녀에게 마음의 기쁨과 수고의 상을 주셨던 것처럼; 또한 요셉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했던 그, 즉 아버지가 그에게 베푼 편애를 시기하고 미워한 형제들이 그를 쫓아와 피를 흘리게 하려 했을 때, 신의 도움으로 죽음에서 구원받은 자와 같았다. 질투에 사로잡힌 형제들은 그를 노예로 팔아넘겼고, 그가 섬기던 주인의 아내는 그에게 수많은 고통을 안겨주어 결국 그를 감옥에 가두게 만들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절제하고 온유하며, 영혼과 육체 모두 순결하고 흠이 없었기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푸신 은혜로 인해 그 모든 불행의 무게 아래서 무너지지 않고, 주님을 의지하며 인내로이 견뎌 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그를 높여 이집트와 그 모든 지역의 통치자로 삼으셨으며, 그를 미워했던 그의 형제들을 모두 그의 발 아래 복종하게 하셨다. 앞서 언급된 이들 및 그들과 같은 사람들은 결코 그들의 업적과 투쟁의 초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영광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시고, 재앙과 슬픔으로 정화하시며, 싸움 중에 어떻게 굳건히 서야 하는지를 가르치신 후에야 비로소 영광을 받았습니다. 그제서야 주님께서는 그들이 고난과 슬픔을 용감하게 견디며 모든 소망을 주님께 두는 것을 보시고, 신성한 도움으로 그들에게 영광을 주셨으며, 그들을 미워하던 자들을 수치를 당하게 하시고 그들에게 복종하게 하셨다.

63. 인내를 지키고, 환난 중에 마음이 나태해지지 않도록 하라. 오히려 그 환난을 위해 감사를 드려, 주님께로부터 상을 받으라. 여러분 모두에게 평화와 진리,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상호 호의가 있기를 바라며, 여러분 가운데 다툼도, 비방도, 논쟁도, 악의적인 시기심도, 불순종도, 교만도, 다른 사람에 대한 원한도, 조롱도, 허영도, 증오도, 상호 적대감도 없기를 바랍니다. 어떤 수도원에서든 그러한 행위가 있다면, 그곳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합니다. 또한 이 세상에서의 우리 삶은 매우 짧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그러므로 그 삶을 소중히 여기고 게으름으로 낭비하지 마십시오. 그래야 이 생을 떠나는 순간이 닥쳤을 때, 서로에게 분노하고 있는 상태로 발견되어 성경의 말씀대로 “누구든지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자니라” (요한일서 3:15). 서로 용서하라. 그리하면 주님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시리라. 이는 주님께서 친히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누가복음 6:37)라고 말씀하실 때 가르치신 바이니라. 여러분 중 누구든지 비방을 당한다면, 이를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의로우신 재판장이시며 상을 주시는 주님께 맡기십시오... 그리고 이웃을 비방한 사람은 서둘러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이웃에게 용서를 구하여, 주님께서 그를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이 가르치시는 대로(엡 4:26), 분노한 채로 해가 지도록 내버려 두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에 대해 품고 있는, 여러분을 괴롭히는 악한 생각을 마음속에서 뿌리째 뽑아내어, 그 뿌리가 증오와 시기인 모든 불화의 싹을 미리 끊어내십시오. 이 두 가지 정욕은 하나님과 사람 모두에게 가장 사악하고 혐오스러운 것이며, 믿는 자나 하나님의 종 중 누구에게서도 이런 정욕이 있는 것은 결코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중 누구도 어리석음으로 인해 자랑하며 “내가 형제를 이겼으니, 그에게 자비가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말하고 생각하는 자는 자신이 자신의 영혼을 죽음의 손에 넘겨주었으며, 그의 유산은 울음과 이를 갈며, 쉬지 않는 구더기와 꺼지지 않는 불이 있는 곳이 될 것임을 알아야 한다.

64. 우리가 아직 이 육신에 머물러 있는 동안 잠에서 깨어나,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끝이 없는 그 끔찍한 고통과 신음, 울음과 슬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밤낮으로 온 마음을 다해 우리 자신을 애도합시다. 파멸로 이끄는 넓은 문과 넓은 길을 조심하여 피하자. 비록 많은 이들이 그 길을 가더라도, 우리는 생명으로 이끄는 좁은 문과 좁은 길을 가자. 비록 그 길을 가는 이는 극소수일지라도. 이 마지막 길을 가는 이들은 참된 일꾼들이니, 그들은 기쁨으로 수고의 삯을 받고 왕국을 상속받을 것이다. 아직 그곳에 설 준비가 완전히 되지 않은 이가 있다면, 시간이 다 지나기 전에 소홀히 하지 말기를 간청하노니, 필요한 때에 기름이 없는 자로 드러나지 않도록 하라. 게다가 그 기름을 팔아 줄 사람도 아무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그 다섯 어리석은 처녀들에게 일어난 일과 같으니, 그들은 누구에게서도 기름을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그들은 울며 외치며 말하기를 “주여, 주여, 우리에게 문을 열어 주십시오.” 그러나 그분은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아멘, 아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셨다(마태복음 25:11, 12). 그리고 이것이 그들에게 일어난 것은 다른 어떤 이유 때문이 아니라, 오직 게으름 때문이었습니다. 그 후 그들은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이미 소용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버렸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말입니다. 이와 비슷한 또 다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갔을 때, 자신과 아들들, 그리고 그들의 아내들, 그리고 그와 함께 있던 모든 것을 데리고 방주 문을 닫았을 때,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내린 대홍수의 물 때문에, 그는 다시는 방주 문을 열지 않았고, 아들들이 불경건한 자들에게 내린 그 끔찍한 광경을 보지 못하게 했습니다; 게다가 문이 닫힌 후, 이 악한 자들은 의인들과 함께하기 위해 방주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고, 그들의 나태함과 불순종 때문에 모두 대홍수의 물에 휩쓸려 파멸하고 말았다. 노아는 방주를 짓던 그 백 년 동안 끊임없이 그들에게 더 나은 삶을 살도록 권면했으나, 그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순종하지 않았기에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65. 형제들을 한곳에 모아서 평화와 한마음, 겸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그리고 기도로 그들을 다스리라. 그러면 하나님의 집의 선함이 너희 안에서 온전히 드러날 것이며, 너희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그것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믿음, 소망, 사랑, 겸손, 경외심, 분별력, 경건함, 평화, 형제 사랑이 너희를 아름답게 하기를 바란다. 이는 이 모든 것을 갖춘 자는 혼인 예복을 입고 성령의 계명을 따라 행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모든 겸손과 인내 속에 머물러, 너희에게서 정욕이 사라지게 하라.

66. 꿀보다 달콤하고 모든 기쁨으로 충만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에게는, 그 뜻 자체가 그를 도우며 굳건하게 할 것이며, 그의 영혼으로 하여금 놀라운 일들을 행하게 하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모든 길을 그 앞에 예비해 주실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 때문에, 그 어떤 원수도 그를 대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 뜻대로 행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어떤 도움도 주지 않으시고, 그를 악마들에게 내버려 두실 것이니, 악마들은 밤낮으로 그의 마음속을 맴돌며 그에게 어떤 일에서도 평안을 얻지 못하게 하고, 외적인 일과 내적인 일을 막론하고 모든 일에서 그를 무력하고 연약하게 만들 것이며, 그 밖에도 그에게 해롭고 유해한 많은 일들을 불러올 것이다. 마귀는 때로 그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심어주기도 하지만, 그 속에는 기쁨이 있을 수 없고 오직 슬픔과 비탄만 있을 뿐이다. 설령 기쁨과 비슷한 것이 있다 해도, 그 안에는 진리가 없고 오직 유령일 뿐이니,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정한 기쁨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며, 오직 자신의 뜻을 끊임없이 거부하고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스스로를 다잡는 자에게만 주어집니다. 사람의 마음속에서 작용하는 뜻은 세 가지로 나뉩니다. 첫째는 마귀에게서 온 것이고, 둘째는 사람에게서 온 것이며, 셋째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앞의 두 가지에는 기뻐하지 않으시며, 오직 그분 로부터 온 것만을 기뻐하신다. 그러니 너희 자신을 돌아보고, 모든 외적인 것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사랑하라. 사람이 모든 일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확실히 말씀드리건대, 만일 사람이 자기 마음의 모든 뜻을 버리지 않고, 모든 일에서 자기 자신을 부인하지 않으며, 자신의 모든 부와 재산을 내팽개치지 않고, 영적 아버지들에게 순종함으로써 주님께 복종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도 없고 이를 이행할 수도 없으며, 마지막 축복을 잃게 될 것입니다.

67.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상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으나, 이 세상에는 유혹과 궁핍, 궁여와 슬픔이 있을 것이며, 저 세상에서 상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생은 수련과 시련의 길입니다.

68. 너희가 인내하며, 부모에게 순종하고 복종한다면, 주님께서 너희에게 아름다운 보상을 주실 것이며, 바로 그 수고가 주님 앞에서 기억될 것이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자는 주님께 순종하는 것이요, 주님께 순종하는 자는 부모에게도 순종하는 것이다.

69. 무엇보다 먼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께 경배하며 순종하고, 언제나 매 순간 그분의 뜻을 행합시다.

70. 우리에게 명해진 대로,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행합시다. 곧 두려움과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야 합니다(빌 2:12).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영혼에서 모든 간사와 죄를 뿌리 뽑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수많은 악에 빠지게 된다.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사람이 이 육신을 벗어던질 때까지 그를 지키고 보호해 주니, 기록된 바와 같이 “주의 두려움으로 인해 태중에 받아들였고, 고통받으며 구원의 영을 낳았도다”(이사야 26:18)라고 하였다.

71. 악의를 품지 않는 자는 온전하며 하나님과 닮았다. 그는 기쁨으로 충만하며 하나님의 성령이 머무르는 안식처이다. 불을 소홀히 여길 때 큰 숲을 태워 버리듯이, 악의를 마음에 품으면 그것이 네 영혼을 파멸시키고 네 몸을 더럽히며, 네게 많은 잘못된 생각을 불러일으킬 것이며; 다툼과 분열, 험담, 시기, 증오 및 이와 유사한 악한 정욕을 불러일으켜, 육체를 짓누르고 병을 일으키게 할 것이다. 서둘러 성도들의 악의 없음과 순수함을 얻으십시오. 그래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그분께로 받아들이시고, 여러분 각자가 기쁨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께서 나를 악의 없음으로 받아들이시고, 주 앞에서 나를 영원토록 굳건히 세우셨나이다” (시편 40:13).

72.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시기를, “내가 누구를 바라보겠느냐? 오직 온유하고 침묵하며 내 말씀을 경외하는 자를 바라보리라” (이사야 66, 2)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복음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에게서 배우라. 나는 온유하고 마음이 겸손하니, 너희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복음 11,29). 그러므로 너희는 겸손을 갖추고, 마귀들에게나 있는 마음의 교만으로 행하지 말라. 마음의 교만으로 행하는 자는 마귀의 동조자이다. 교만한 사람은 모든 이에게 미움을 받으니, 그의 행실이 허세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그는 수많은 죄에 빠지게 된다. 모든 죄는 하나님 앞에서 가증스럽지만, 그중에서도 마음의 교만은 가장 가증스럽습니다. 교만한 자를 훈계하거나 조언하는 자는 마치 구멍 난 그릇에 물을 붓는 자나, 날아가는 새에게 말을 거는 자와 같습니다.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경멸받지만, 겸손하고 상한 마음은 하나님께서 깎아내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늘에서 우리에게 내려오신 하나님의 사랑 그 자체가 지극히 겸손해지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겸손을 사랑하여 “나의 겸손과 수고를 보시고, 나의 모든 죄를 사해 주소서”(시편 24:18)라고 부르짖을 수 있게 합시다.

73. 눈의 정욕을 좇지 말고, 마음을 느슨하게 하지 말라. 악한 정욕은 마음을 타락시키고 정신을 어둡게 하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더욱 멀리 떠나, 너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지 않도록 하라.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결을 위해 힘쓰고, 온갖 방법으로 더러운 정욕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자. 이를 위해 여인들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것을 경계하자.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불결한 정욕과 부끄러운 욕망의 노예가 되지 말자. 너희 마음의 눈앞에 하나님의 이름을 새겨 두어, 너희 내면에서 끊임없이 다음과 같이 부르짖게 하라: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라”(고린도후서 6:16)와 “성령의 거처”라는 말이 끊임없이 울려 퍼지게 하라. 부정한 정욕에 사로잡힌 자는 시편 기자이자 성 다윗 선지자의 말씀(시편 48:13)대로, 하나님 앞에서 온갖 이성을 상실한 짐승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음탕한 눈을 미워하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천사들의 영광인 순결을 추구합시다. 그러나 만일 마귀의 유혹으로 넘어진다면, 회개를 통해 다시 일어나 죄 가운데 방황하던 양을 찾으러 오신 분께 나아갑시다(누가복음 15,4).

74. 입과 혀를 지키지 못하는 자는 적어도 “말이 많지 않도록” (욥기 11, 3) 주의하라. 조심하라, 사람아, 네 혀를 다스리고, 죄를 더하지 않도록 말을 늘리지 말라. 네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네 혀에 재갈을 물려라. 말이 많은 사람은 자기 안에 성령께서 거하실 자리를 남기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아직 초보자인 누군가가 너와 대화하며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대해 묻는다면, 그에게 대답하라. 그러나 그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 일에 대해서는,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처럼, 말하지 못하는 벙어리처럼 행동하라.

75. 누구에 대해서든 나쁜 말을 하지 않도록 우리 입에 굳건한 파수꾼을 세우도록 하자. 악한 말은 그 어떤 독보다도 더 나쁘기 때문이다. 모든 상처는 치유되지만, 혀로 인한 상처는 치료할 방법이 없다. 악마에게 이끌린 경솔한 비방자의 혀는 뱀의 혀보다 더 독하다. 왜냐하면 그는 형제들 사이에 다툼과 쓰라린 원한을 일으키고, 평화로운 사람들 사이에 반란과 악행을 퍼뜨리며,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를 흩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을 비난하는 것을 피하고, 침묵을 지키도록 힘쓰라. 침묵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과 그분의 천사들 곁에 머물며, 높은 곳에 자리를 잡는다. 주님께서는 네가 스스로 네 입을 지키면, 그때에 주님께서 네 길을 지켜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잠언 13:3).

76. 성경은 수치심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음을 증언한다. 하나는 죄를 낳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영광과 은혜를 가져오는 것이다(시라 4, 23–25). 죄를 짓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참되고 구원하는 수치심이며, 죄를 낳는 수치심은 하나님의 계명을 이행하는 것을 방해하는 수치심이다.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부끄러워하지 말고, 진리의 일에서 숨지 말라. 주님의 가르침이나 지혜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자신의 죄를 영적 아버지께 고백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77.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영혼에 대한 연민으로 움직이시어, 성복음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람들이 너희에 대해 좋은 말을 하고 너희를 찬양할 때, 너희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는다면 화가 있을지어다”(누가복음 6, 26; 요한복음 5, 44). 그러므로 우리가 멸망에 이르지 않도록, 허영과 그로부터 뻗어 나온 가장 사악한 가지들을 물리치며, 심지어 죽을 때까지 힘써 싸우자. 허영을 피하라. 많은 이들이 그것 때문에 멸망하였기 때문이다. 허영은 사람을 수많은 수고로 이끈다. 금식, 기도, 잦은 밤샘 기도, 사람들 앞에서 베푸는 자선, 그리고 이와 유사한 많은 일들 말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으로 그는 수치와 모욕 외에는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이 때문에 파멸당하지 않고, 허영의 수많은 갈래에 얽히지 않도록, 우리 자신 안에서 특히 위대한 어떤 것도 드러내려고 애쓰지 말자. 허영의 악령들은 지극히 많기 때문이다. 오히려 성도들의 영광과 그들의 가난을 얻기 위해 더욱 열심으로 힘쓰자. 그래야만 하나님의 그 달콤한 칭찬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영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태복음 5:3).

7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구원하라”(눅 21:19). 또한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 (마태복음 10:22; 24:13)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예비된 것을 얻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열심 있게 진정으로 수고하고 인내해야 합니까? 그러나 피를 흘리는 지경에 이르기 전에는 자랑하지 말자. 왜냐하면 어떤 예술가도 작품을 완성하기 전에는 자신의 작품을 자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내로 승리를 얻은 자를 복된 자라 불러야 한다. 때가 되면 그는 나사로처럼 하늘에서 영광을 받을 것이다.

79. 시편 기자 다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목구멍에 달콤하여, 내 입술의 꿀보다 더 달다”(시 118:103). 또한 “주님의 길은 많은 귀한 보석보다 더 소중하다”(시 18:10, 11)고도 했습니다. 진실로 복된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을 깨어 지키며, 그분을 진정으로 알게 될 때까지 실천하여, “네 마음이 나를 보고 놀라리라”(시 138:6) 말할 수 있는 자이다.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 너에게 진노하지 않도록, 불신앙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라. 진리를 믿지 않는 자에게 설교하거나, 그를 책망하거나 가르치는 자는 마치 가장 귀한 진주를 바다 깊은 곳에 던져 버리는 사람과 같다. 반대로, 물이 경사진 땅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려 거기로 급히 달려가듯이, 주님의 말씀은 믿는 자의 영혼으로 흘러 들어간다.

80. 우리가 게으르고 나태하다는 소리를 듣지 않도록, 깨어 있으면서 우리 마음의 집에서 선한 열정을 끊임없이 불태우자. 열정적이고 깨어 있는 자에게는 정욕이 결코 이기지 못한다. 만일 그가 유혹자의 계략으로 인해 넘어지더라도, 그 열정과 깨어 있음이 즉시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 그러나 부주의하고 방심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열심이 없는 사람은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더라도 자신이 저지른 죄를 눈치채지 못하는데, 이는 그의 마음이 돌처럼 굳어 있고, 마치 길들여지고 고삐를 찬 노새와 같아서, 누구든지 저항 없이 그 위에 올라타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사람들에게서 마귀는 자신의 모든 욕망과 온전한 타락을 자행하며, 자신의 불의가 다 이루어질 때까지 그들 각자를 원하는 대로 끌고 가다가, 결국 그들은 신음과 울부짖음 속에서 죽게 된다. 부주의한 사람은 무너져 내리고 주민들이 버린 집과 같다. 그 집은 누구에게도 가치가 없으며, 마치 저주받은 것처럼 모두에게 혐오감을 주는데, 마치 독사, 전갈, 야수들의 보금자리와 같다. 아무도 그 집을 무너지고 황폐해진 집처럼 돌보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부주의한 사람의 상태이다! 적의 지배를 받지 않도록, 열심을 지키고 결코 미루지 않도록 힘쓰십시오. 사람 안에 이 아름다운 열심과 근심이 있을 때, 그것은 모든 넘어짐과 상처로부터 그를 일으켜 세우고 그를 경계하게 하여, 그런 사람은 성령의 안식처가 되며, 행복하게 자신의 여정을 마치고 세상에서 성도들의 안식에 들어갈 자격을 얻게 된다.

81. 우리는 복자 바울이 동정함에 대해 논할 때, “주님의 명령은 받지 못하였다”(고린도전서 7:25)고 말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가 명령을 받지 못한 것은 모든 사람이 이 무거운 멍에를 짊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며, 따라서 이를 감당할 수 있는 자들의 자유로운 선택에 맡겨진 것입니다. 처녀인 자들 중 누구도 처녀성을 자랑하지 말라. 이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 자신의 은혜이기 때문이다. 처녀성은 여성적인 감정, 육신의 생각, 마음의 교만, 그리고 마귀의 모든 것에 대한 사랑을 멀리하게 하며; 또한 참을성 없는 불평, 사람에 대한 증오, 세상의 영광을 멀리 쫓아내며, 예배에 전념하고, 혀를 절제하며, 금식으로 육체를 단련한다. 이 모든 것으로 단장되었을 때, 그것은 흠과 더러움이 없는 제물이 된다. 처녀 같은 영혼이여, 네가 온갖 진미에 신경을 쓰고, 스스로에 대해 놀라워하며(자기 자신에 몰두하여) 살아간다면, 네 모든 일에서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다. 네 혀를 삼가지 않는다면, 네 삶의 전 과정에 걸쳐 헛된 존재가 될 것이며, 네가 기울인 큰 수고는 헛된 것이 될 것이다.

82. “주님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그 길에서 흠 없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시 118:1)라고 기록된 성인들이 걸었던 그 길을 의롭게 걸어가자. 즉, 육체의 순결함, 혀의 순결함, 눈의 순결함, 손의 순결함, 귀의 순결함, 발의 순결함, 하나님 앞에서 바른 생각, 그리고 서로에 대한 순수한 마음, 우리가 기도에서 말하듯이 “하나님이여, 내 속에 순수한 마음을 지어 주시고, 내 속사람에 바른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편 50:12).

 

2. 선한 도덕성과 거룩한 삶에 대하여, 170

1. 사람들은 보통 이 단어를 잘못 사용하여 누군가를 ‘현명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고대 현자들의 격언과 저술을 공부한 사람들이 현명한 것이 아니라, 영혼이 현명하여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분별할 수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현명한 자들이다. 그들은 악하고 영혼에 해로운 것을 피하며, 선하고 영혼에 유익한 것을 지혜롭게 추구하고, 이를 행할 때 하느님께 큰 감사를 드린다. 오직 이들만이 진정으로 현명한 사람이라 불려야 한다.

2. 진정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오직 한 가지 염려만 가지고,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 순종하고 온갖 방법으로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오직 그 한 가지, 즉 어떤 삶의 우연에 처해 있든 간에 하나님의 선한 섭리에 감사하며 어떻게 그분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지에 대해 자신의 영혼을 가르친다. 의사들이 우리에게 쓰라리고 불쾌한 약을 처방할 때, 몸의 치유를 위해 그들에게 감사하지 않는 것은 부적절한 일인 것처럼, 우리에게 기쁘지 않게 보이는 일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우리에게 유익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깨달음과 하나님에 대한 믿음 속에 비로소 영혼의 구원과 평안이 있다.

3. 절제, 악의를 품지 않음, 정절, 굳건함, 인내 및 이와 유사한 위대한 미덕들은 마치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전투용) 힘을 받은 것처럼, 우리가 마주치는 슬픔과 고통에 맞서 저항하고 견디며, 그 시기를 이겨내는 데 도움을 줍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러한 힘을 단련하고 항상 준비해 둔다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떤 일도 우리에게 괴롭거나, 고통스럽거나, 파멸적이거나, 견딜 수 없는 것이 되지 않을 것이니, 그 모든 것은 우리 안에 있는 미덕들로 극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영혼이 현명하지 못한 자들은 이를 생각하지 못하는데, 그들은 모든 일이 우리에게 유익하게 일어나 우리의 미덕이 빛을 발하고, 그 미덕으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상을 받게 될 것이라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4. 부를 숭배하고, 그것으로 얻는 완전한 즐거움을 단지 일시적이고 허상 같은 헛된 일로 여기며, 덕이 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부보다 낫다는 것을 안다면, 이 확신을 굳게 지키고 마음에 새긴다면, 너는 한숨도 쉬지 않고, 한탄하지도, 누구에게도 불평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너보다 못한 자들이 웅변이나 학식, 부로 인해 칭송받는 것을 보더라도 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할 것이다. 진리를 알지 못한 채 부와 쾌락에 대한 끝없는 욕망, 명예를 갈망하는 마음과 허영심은 영혼의 가장 사악한 정욕이다.

5. 현명한 사람은 스스로를 성찰함으로써, 무엇이 마땅하고 유익한지, 무엇이 자신의 영혼에 어울리며 구원을 주는지, 그리고 무엇이 영혼에 낯설고 해로운지를 깨닫는다. 그리하여 영혼에 해로운 것을 낯선 것으로 여겨 피하게 된다.

6. 누구든지 삶을 절제 있게 살아갈수록 더 평온해지는데, 이는 종들, 농부들(고용된 일꾼들), 가축을 얻는 일 등 많은 것에 대해 걱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에 집착하면, 그로 인해 발생하는 비참함에 시달리다가 결국 하나님을 원망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처럼 우리의 자의적인 욕망(많은 것을 원하는)은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고, 우리는 스스로를 알지 못한 채 죄악된 삶의 어둠 속에서 방황하게 된다.

7. 사람이 덕스러운 삶을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해서는 안 되며, 단지 그것이 쉽지 않다고 말해야 한다. 그리고 확실히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쉽게 달성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오직 경건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만이 덕스러운 삶에 동참할 수 있다. 일반적인(평범한) 마음은 세속적이고 변덕스러운 마음이다. 그것은 선한 생각과 악한 생각을 모두 낳으며, 변덕스럽고 물질적인 것에 치우치기 쉽다. 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사람들의 제멋대로인 부주의로 인해 생기는 악을 단죄하는 자이다.

8. 무식한 자들과 천박한 자들은 학문을 우스운 일로 여기고 듣기를 원치 않는데, 이는 학문이 그들의 무지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든 사람이 자신들과 같기를 원한다. 마찬가지로, 생활과 품행이 절제되지 못한 자들도 모든 사람이 자신들보다 더 나쁘기를 간절히 바라며, 악한 자들이 많다는 사실에서 자신들의 면죄부를 얻으려 한다. 영혼은 죄악의 악으로 인해 파멸하고 타락하는데, 이 악은 매우 복잡하며 음행, 교만, 탐욕, 분노, 건방짐, 광기, 살인, 불평, 시기, 강탈, 약탈, 조급함, 거짓말, 쾌락 추구, 게으름, 슬픔, 두려움, 증오, 비난, 나태, 오류, 무지, 유혹, 신을 잊는 것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 모든 것과 유사한 것들로 인해 불쌍한 영혼은 괴로워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9. 누가 덕이 있고 칭송받을 만한 삶을 진정으로 수행자로 살아가고 있는지는, 겉으로만 꾸며낸 품성이나 거짓된 삶의 모습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숙련된 화가나 조각가처럼, 온갖 쾌락을 마치 올가미처럼 피하며, 행동으로 직접 자신의 덕행과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보여주는지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

10. 부유하고 고귀한 가문 출신이지만 정신적 교양과 덕스러운 삶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분별력 있는 사람들의 눈에는 불행한 존재로 보인다. 반대로, 가난하고 신분상 노예인 자라도 교양과 덕을 갖추고 있다면 행복한 것이다. 여행자들이 길에서 길을 잃고(죽음을 맞이하듯이), 덕스러운 삶을 돌보지 않고 욕망에 휩쓸리는 자들도 마찬가지로 파멸한다.

11. 무지한 이들의 성품을 부드럽게 다스리고 그들로 하여금 학문과 교육을 사랑하게 만드는 이를 ‘인간 창조자’라 불러야 한다. 마찬가지로, 절제 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을 덕이 있고 하느님께 기쁨을 드리는 삶으로 이끄는 이들도 ‘인간 창조자’로 여겨야 하는데, 이는 그들이 마치 인간을 다시 창조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온유함과 절제는 인간 영혼을 위한 행복이자 복된 희망이다.

12. 진실로 사람들은 자신의 삶과 품성을 마땅히 바로잡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잡힐 때 비로소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 수 있다. 온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그분으로부터 분노와 정욕을 다스리는 데 필요한 도움을 섭리적으로 받는다. 정욕과 분노는 모든 악의 원인이다.

13. 사람이라 부를 수 있는 이는 (첫 번째 항목에 따라) 지혜로운 자이거나, 스스로를 바로잡기 시작한 자이다. 바로잡을 수 없는 자를 사람이라 불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즉, 바로잡을 수 없음)은 인간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자들로부터는 멀리 피해야 한다. 악과 타협하는 자들은 결코 불멸의 자들(즉, 복된 불멸)의 대열에 들지 못할 것이다.

14. 오직 우리 안에 깃든 지혜(첫 번째 항목에 따름)야말로 우리를 ‘사람’이라 불릴 자격이 있게 한다. 그런 지혜가 없다면, 우리는 말 못하는 동물들과 단지 신체 구조와 언어 능력만 다를 뿐이다. 그러므로 이성적인 사람은 자신이 불멸임을 깨달아야 하며, 사람들에게 죽음의 원인이 되는 온갖 수치스러운 정욕을 혐오해야 한다.

15. 모든 예술가가 자신이 선택한 적절한 재료를 아름다운 형태로 다듬어 자신의 예술을 드러내듯이—예를 들어, 어떤 이는 나무를, 다른 이는 구리를, 또 다른 이는 금과 은을 다듬듯이—우리 역시 우리가 인간임을 육체적 구조 때문이 아니라, 영혼이 진정으로 지혜롭다는 사실, – 즉, 선한 삶, 곧 덕이 있고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의 법칙에 순종한다는 사실로 보여야 한다. 진정으로 지혜롭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영혼은 삶에서 무엇이 마땅히 그래야 하는지 모두 알고, 사랑으로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며, 온 마음과 온 생각을 그분께 향하여 진심으로 그분께 감사드린다.

16. 조타수가 수중 암초나 바위에 부딪히지 않도록 신중하게 배를 앞으로 이끄는 것처럼, 덕스러운 삶을 갈망하는 자들도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피해야 할지 꼼꼼히 살펴야 하며, 참되고 신성한 법칙들이 가르치는 것만을 자신에게 유익한 것으로 여기고, 마음속의 간사한 생각을 잘라내야 한다.

17. 조타수와 마부가 재치와 노력을 기울여 자신의 일을 잘 해내는 것처럼, 의롭고 덕스러운 삶을 열망하는 자들도 주의 깊게 생각하며 어떻게 하면 마땅히 살아야 하고 하느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을지 신경 써야 한다. 왜냐하면 이를 원하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고 확신한 자는, 믿음을 통해 썩지 않는 (순결한 삶)에 이르게 된다.

18. 신분상 자유로운 자들이 아니라, 삶과 품성에서 자유로운 자들을 진정한 자유인으로 여겨야 한다. 예를 들어, 귀족이나 부자라 할지라도 악하고 절제하지 못한다면, 그들을 진정으로 자유로운 자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감각적 정욕의 노예이기 때문이다. 영혼의 자유와 행복은 진정한 순결과 일시적인 것들에 대한 경멸로 이루어진다.

19. 끊임없이 현명함을 보여야 하지만, 그것은 선한 삶과 실제 행동을 통해 드러내야 한다는 점을 스스로 상기하라. 병자들도 말로가 아니라 행동으로 의사를 구원자이자 은인으로 여기고 인정하는 법이다.

20. 진정으로 지혜롭고 덕이 있는 영혼은 눈빛과 태도, 목소리, 미소, 대화, 그리고 대인관계에서 드러난다. 그 영혼 안에서는 모든 것이 변하여 가장 고상한 모습을 띠게 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은 깨어 있는 문지기처럼 악하고 부끄러운 생각들이 들어오는 문을 닫아 버린다.

21. 네 주변을 둘러보고, 통치자들과 권력자들이 오직 육신에 대해서만 권세를 가질 뿐 영혼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아라. 그리고 이 사실을 항상 마음속에 간직하라. 왜냐하면 그들이 예를 들어 살인을 하라고 명령하거나, 부적절하고 불의하며 영혼에 해로운 다른 일을 하라고 명령할 때, 비록 그들이 육신을 고문한다 해도 그들의 말을 들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영혼을 자유롭고 자기 주권적인 존재로 창조하셨으며, 영혼은 선하든 악하든 원하는 대로 행동할 자유가 있다.

22. 현명한 영혼은 방탕함, 오만, 교만, 유혹, 시기, 도둑질 및 이와 유사한 것들로부터 벗어나려고 노력하는데, 이러한 행위들은 악마와 악한 의지의 소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심한 노력과 주의 깊은 숙고를 통해, 저급한 쾌락에 마음을 두지 않는 사람은 이를 성취할 수 있다.

23. 사소하고 하찮은 일들로 삶을 보내는 이들은 위험에서 벗어나며, 특별한 예방 조치도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모든 욕망을 이겨내면, 그들은 하나님께로 이끄는 길을 편안히 찾게 된다.

24. 지혜로운 사람들은 온갖 종류의 대화를 들을 필요가 없으며, 오직 유익을 주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는 대화만을 들어야 한다. 이는 사람들이 다시 생명과 영원한 빛으로 돌아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25. 덕을 쌓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려고 노력하는 이들은 자만과 온갖 헛되고 거짓된 명성을 멀리하고, 삶과 마음을 올바르게 바로잡기 위해 힘써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변함없는 마음은 하나님께 이르는 지침이자 길이다.

26. 영혼이 선하고 하느님께 기쁨을 드리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어떤 학문을 공부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모든 악의 원인은 오해와 미혹, 그리고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데 있다.

27. 선한 삶에 대한 깊은 성찰과 영혼에 대한 돌봄은 선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들어 낸다. 하나님을 찾는 자는 끊임없는 기도로 온갖 욕망을 이겨내며 그분을 얻는다. 그런 사람은 악마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28. 세상의 복에 현혹되어 선한 삶을 사는 이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 한 마디까지 다 알고 있으면서도, 마치 약과 의료 기구를 구해 놓고는 그것을 사용하는 법을 모르고 심지어 신경조차 쓰지 않는 자들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가 저지른 죄에 대해 우리 자신의 출생이나 다른 누구도 탓하지 말고 오직 우리 자신만을 탓해야 한다. 왜냐하면 영혼이 스스로 게으름에 빠진다면, 결코 이겨내지 못할 수 없기 때문이다.

29. 선과 악을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은 사람들 중에서 누가 선하고 누가 악한지 판단할 자격이 없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선한 사람이며, 그가 선하지 않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뜻이고, 결코 (그분으로부터) 알려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아는 유일한 길은 선함이기 때문이다.

30. 선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눈앞에 있을 때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지만, 부재 중인 사람에 대해서는 스스로 책망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 대해 무언가를 말하려는 자들에게도 그렇게 하지 못하게 막는다.

31. 대화에는 어떤 무례함도 있어서는 안 된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대개 처녀들보다 더 겸손과 순결함으로 빛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태양이 몸을 비추듯 영혼을 비추는 빛이다.

32. 너를 사로잡는 모든 영적 정욕이 솟아날 때마다, 올바르게 지혜를 구하며 자신들의 운명을 올바르고 견고한 기초 위에 세우기를 원하는 이들은, 썩어 없어질 부를 얻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의) 참된 영광을 자신들의 기쁨으로 여긴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이것이 바로 그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부는 도둑맞기도 하고 강자들에 의해 빼앗기기도 하지만, 영혼의 미덕이야말로 유일하게 안전하고 도둑맞지 않는 재산이며, 게다가 죽은 후에도 그것을 쌓은 자들을 구원해 주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부와 다른 쾌락들이 주는 허상적인 화려함에 휩쓸리지 않는다.

33. 변덕스럽고 훈련받지 못한 자는 지혜로운 사람들을 시험해서는 안 된다.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주로 침묵을 지키거나, 말을 하더라도 적게 하고 오직 필요한 것과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말만 하는 사람이다.

34. 덕이 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추구하는 이들은, 영적 미덕을 마치 자신들에게서 결코 빼앗길 수 없는 소유물이자 영원한 위로가 되는 재물처럼 소중히 여긴다. 한편, 그들은 일시적인 것들은 오직 필요한 만큼,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시고 원하시는 대로만 누리며, 비록 그것이 매우 절제된 것이더라도 기쁨과 온갖 감사를 담아 이를 사용한다. 왜냐하면 풍성한 식탁은 육신을 양육하는 물질적인 것이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절제, 선함, 자선, 경건함, 온유함은 영혼을 신성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35. 부적절하고 영혼에 해로운 일을 강요하는 통치자들은, 스스로 주권을 가진 존재로 창조된 영혼을 지배할 수 없다. 그들은 육체를 옭아매지만, 지성 있는 사람이 창조주의 은사로 주인이 되어 있는 자유의지는 옭아매지 못한다. 그 자유의지는 그 어떤 권세와 강요, 그 어떤 힘보다도 강하다.

36. 돈이나 자녀, 노예, 혹은 다른 재산을 잃는 것을 불행으로 여기는 자들은, 우선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만족해야 하며, 그 후에 돌려주어야 할 때가 되면 기꺼이 그리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다시) 돌려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을 잃은 것, 혹은 더 나아가 되찾지 못한 것 때문에 슬픔에 잠겨 괴로워해서는 안 된다: 마치 남의 것을 잠시 사용한 뒤 다시 돌려주는 자들처럼 말이다.

37. 훌륭한 품성을 지닌 사람은 부를 얻기 위해 자신의 자유를 팔아서는 안 되며, 설령 그에게 주어지는 것이 매우 막대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러해야 한다. 왜냐하면 세상의 복은 꿈과 같으며, 부는 단지 허상적인 광채를 띠고 있을 뿐, 불확실하고 일시적이기 때문이다.

38.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은) 참된 인간적 덕성을 지닌 사람들은 신을 사랑하고 덕이 있는 삶을 살기 위해 그토록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그들의 덕스러운 삶이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빛을 발할 수 있으니, 마치 흰 옷 위에 장식용으로 걸친 작은 포르피라 조각이 두드러져 모든 이에게 눈에 띄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만 영적 미덕에 대한 그들의 열정이 더욱 확고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39. 분별력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힘(군대)을 살피고, 마음속에 있는 미덕들을 질서 정연하게 유지해야 한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자연스럽게 주신 마음속의 힘(미덕의 군대)으로, 공격해 오는 정욕에 언제나 맞설 준비가 되어 있을 수 있다. 그 본질은 다음과 같다: 아름다움과 모든 영혼을 해치는 정욕에 대항하는 것은 절제이며, 궁핍과 가난에 대항하는 것은 인내이며, 괴로움과 분노에 대항하는 것은 악의를 품지 않는 마음과 이와 유사한 것들이다.

40. 선하고 현명한 사람이 되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나 이는 세심한 고찰과 수련, 경험, 지속적인 노력, 그리고 (가장 중요한) 선한 일을 향한 강한 열망을 통해 이루어진다. 선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진정으로 하나님을 깨달은 사람은 예외 없이 모든 일을 하나님께 기쁘시게 하는 대로 행하며 스스로 안식을 찾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드물다.

41. 선에 대한 타고난 성향이 없는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절망하여 손을 놓아버리고, 아무리 그들에게 어렵고 달성하기 힘들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덕을 행하는 삶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며, 그들도 스스로를 돌아보고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한다. 비록 그들이 덕과 완전함의 정점에 도달할 수는 없더라도, 온갖 방법으로 스스로를 성찰하고 돌봄으로써, 더 나은 사람이 되거나 적어도 더 나쁜 사람이 되지 않을 것이니, 이는 영혼에게 결코 작지 않은 유익이다.

42. 사람은 이성으로 말로 다 할 수 없는 신성한 힘과 접촉하며, 육체적으로는 동물과 친화성을 지닌다. 그러나 진정한 사람으로서 지혜로운 이들은 생각을 하나님과 구세주께로 돌리고 그분과 친화성을 맺으려 노력하며, 이를 행실과 덕스러운 삶으로 보여주는 이들은 드물다. 반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영혼이 어리석어, 그 신성하고 불멸의 신의 자녀됨을 저버리고, 죽은 것과 가난하며 일시적인 육체와의 유대 관계에 치우치며, 마치 말 없는 짐승처럼, 오직 육체적인 것만을 꾀하며 정욕에 불타오르며, 스스로를 하나님으로부터 단절시키고, 영혼을 하늘에서 끌어내려 육체적 고통의 심연으로 떨어뜨린다.

43. 지혜로운 사람은 신성과 함께 거하고 교제하는 것을 생각하며, 결코 세속적이거나 천한 것에 집착하지 않고, 하늘의 것과 영원한 것에 마음을 기울이는데, 이는 하나님의 뜻—모든 선의 근원이자 인간을 위한 영원한 복의 원천—이 바로 사람이 구원받는 데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44. 논쟁을 좋아하여 진리와 명백한 사실에 맞서 너와 싸우려는 사람을 만나면, 논쟁을 그만두고 마음이 완전히 굳어버린 그 사람을 피하라. 왜냐하면 형편없는 물이 가장 훌륭한 포도주조차 쓸모없게 만드는 것처럼, 악한 대화는 삶과 품행이 덕스러운 사람들을 타락시키기 때문이다.

45. 우리가 육체의 죽음을 피하기 위해 모든 노력과 수단을 다한다면, 하물며 영혼의 죽음을 피하기 위해 더욱 힘써야 한다. 구원을 원하는 자에게는 그에 대한 어떤 장애물도 없기 때문이다. 오직 영혼의 무관심과 나태함만이 유일한 장애물일 뿐이다.

46. 무엇이 자신에게 유익하고 무엇이 선한 것인지 알기를 싫어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하다고 말할 수 있다. 반면 진리를 알고도 뻔뻔스럽게 그에 반대하여 논쟁하는 자들에게는 이성이 죽어 있다. 그들의 성품은 짐승과 같아졌으며,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들의 영혼은 빛으로 비추어지지 않는다.

47.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당신의 말씀으로 다양한 종류의 동물을 창조하셨으니, 어떤 것은 식용으로, 어떤 것은 섬김을 위해 창조하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셔서 그분의 행적을 지켜보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해석하는 자가 되게 하셨다. 사람들은 이를 위해 힘써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말을 하지 못하는 짐승들처럼 하나님과 그분의 행적을 보지도 깨닫지도 못한 채 죽게 될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께는 아무도 대적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지니신 분으로서 말씀으로 창조하셨듯이, (지금도)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창조하고 계신다.

48. 하늘의 존재들은 그들 안에 내재한 선함으로 인해 불멸하지만, 땅의 존재들은 그들 안에 있는 자발적인 악으로 인해 죽을 운명이 되었다. 이 악은 이성을 갖지 못한 자들에게서 나태함과 하나님을 알지 못함으로 인해 더욱 증식한다.

49. 죽음을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죽음은 불멸이며,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에게는 죽음 그 자체이다. 이 죽음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된 영혼의 파멸을 두려워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영혼에게 참으로 끔찍한 일이다!

50. 죄는 물질적인 것에 발판을 마련했고, 육체는 그 거처가 되었다. 그러나 지혜로운 영혼은 이를 깨닫고 물질적인 짐을 떨쳐내며, 그 짐 아래에서 벗어나 만물의 하나님을 깨닫고, 육체를 적이자 대적자로 여겨 경계하며 신뢰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영혼은 악한 정욕과 물질적 세계를 이겨내고, 하나님으로부터 면류관을 받는다.

51. 죄는 영혼이 깨달았을 때, 가장 악취가 심한 짐승처럼 영혼에게 미움받게 된다. 그러나 깨닫지 못한 죄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에게 사랑받으며, 자신을 사랑하는 자를 노예로 삼아 자기 곁에 사로잡아 둔다. 그러나 그 불행하고 가련한 자는 자신에게 구원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보지 못하고, 심지어 그것에 대해 생각조차 하지 않으며, 오히려 죄가 자신을 아름답게 만든다고 믿으며 그것을 기뻐한다.

52. 순수한 영혼은 선량하기 때문에 하나님에 의해 거룩하게 되고 빛을 받으며, 그때 마음은 선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의도와 행실을 낳는다. 그러나 영혼이 죄로 더러워지면,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 영혼을 외면하시거나, 더 정확히 말해 영혼 스스로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며, 교활한 악마들이 생각 속으로 들어와 영혼에게 부도덕한 행위들—간음, 살인, 절도 및 이와 유사한 악마적인 악행들—을 부추깁니다.

53.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온갖 선한 생각으로 충만하며, 천상의 것을 갈망하여 세속적인 것을 경멸한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많은 이에게 호감을 얻지 못하므로, 이 때문에 그들은 미움을 받을 뿐만 아니라, 분별력이 없는 많은 이들에게 모욕을 당하기도 한다. 그들은 많은 이에게 악으로 보이는 것이 자신들에게는 선임을 알기에, 극심한 가난도 기꺼이 견딘다. 천상의 것을 생각하는 자는 하나님을 믿으며, 모든 피조물이 그분의 뜻의 산물임을 안다. 그러나 그것을 생각하지 않는 자는 세상이 하나님의 작품이며 인간의 구원을 위해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결코 믿지 않는다.

54. 죄로 가득 차 있고 무지에 취해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니, 이는 그들의 영혼이 맑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성적이시니(즉, 맑은 이성으로만 알 수 있으시다). 그분은 비록 보이지 않으시지만, 육체 속의 영혼처럼 보이는 것 속에서 매우 분명하게 드러나신다. 육체가 영혼 없이는 살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과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55. 사람은 무엇을 위해 창조되었는가? 하나님의 피조물을 알아가면서, 하나님 그분을 뵙고, 이를 사람을 위해 창조하신 분을 찬양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매료된(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받는) 마음은, 선한 삶을 사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보이지 않는 은혜이다.

56. 쾌락(감각적 즐거움)의 노예가 되지 않고, 이성과 절제를 통해 육신을 다스리며, 비록 그것이 매우 적더라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에 온전한 감사로 만족하는 자가 자유로운 자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영혼이 서로 조화를 이룰 때, 그때 육체는 순종하며 저항하지 않으니, 이는 그때 영혼이 마음의 작용을 통해 모든 육체적 움직임을 잠재우기 때문이다.

57.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에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것을 탐하는 자들은, 영혼을 뒤흔들고 점점 더 나쁜 생각과 환상을 심어주는 정욕에 스스로를 노예로 삼는다. 그들은 모든 것이 좋지 않다고 여기며, 따라서 새롭고 더 나은 것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나치게 긴 옷이 여행자의 걸음을 방해하듯이, 지나친 재물에 대한 욕망은 영혼이 수련하고 구원받는 것을 방해한다.

58. 누군가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 처한 상황은 그에게 감옥이자 형벌이다. 그러니 네가 가진 것에 만족하라. 그렇지 않으면, 감사함 없이(불만과 마지못한 마음으로) 그 상태를 견디며, 너는 스스로도 모르게 자신에게 폭군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를 향한 길은 오직 하나, 세속적 복을 경멸하는 것이다.

59.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시력을 받은 것은 보이는 것, 즉 흰 것과 검은 것을 분별하기 위함인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성을 주신 것도 영혼에 유익한 것과 해로운 것을 구별하기 위함이다. – 이성을 저버리고 따르는 욕망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집착을 낳으며, 이는 영혼이 구원받거나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을 방해한다.

60. 본성에 따른 법칙에 따라 행하는 것은 죄가 아니나, 자신의 뜻대로 악한 일을 행할 때 비로소 죄가 된다. 음식을 먹는 것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감사 없이, 경건하지 않게, 절제 없이 먹는 것은 죄이다. 단순히 바라보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시기심과 교만, 탐욕으로 바라보는 것은 죄이다. 평화롭게 듣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분노하며 듣는 것은 죄이다; 혀로 감사와 기도를 하게 하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혀로 비방하고 정죄하게 내버려 두는 것은 죄이다; 자선을 베풀기 위해 손을 움직이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강도와 살인을 방치하는 것은 죄이다. 이처럼 우리 몸의 각 지체는 하나님의 뜻에 반하여, 우리의 자유 의지로 선한 일 대신 악한 일을 행할 때 죄를 짓게 된다.

61. 만약 네 모든 행위가 하나님께 드러난다고 믿기 어렵다면, 너 역시 사람이며 흙으로 된 존재임에도 한 번에 동시에 네가 아는 모든 장소를 마음속으로 둘러보고 그것들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아라. 하물며 모든 것을 보시는 하나님, 곧 그분의 뜻대로 모든 것을 살리시고 양육하시는 분이, 겨자씨 한 알만큼이나 작은 것까지 보지 않으시겠는가?

62. 네 거처의 문을 닫고 홀로 남았을 때,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정하신 천사가 네 곁에 있음을 알라. 헬레니들은 그를 ‘집의 정령’이라 부른다. 그는 졸지 않으며, 항상 네 곁에 있어 모든 것을 보시니, 그를 속일 수 없고 어둠도 그에게서 숨길 수 없다. 그와 함께, 모든 곳에 계시는 하나님을 깨달아야 한다. 왜냐하면 가장 위대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의 손에 품고 계신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이나 어떤 물질도 없기 때문이다.

63. 만일 군인들이 왕에게서 식량을 공급받기 때문에 왕에게 충성을 다한다면,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를 드리며 그분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더 힘써야 하겠는가?

64.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선한 삶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인간의 열매이다. 그러나 땅의 열매가 한순간에 익지 않고 시간과 비, 돌봄을 필요로 하듯이, 인간의 열매 또한 그 모든 영광을 드러낼 때까지 노력과 분별, 기다림, 절제, 인내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 열매들 때문에 때때로 누군가에게 경건한 사람으로 보인다고 해도, 이 육신에 머무는 동안은 스스로를 믿지 말고, 자신의 어떤 것도 전적으로 하나님께 기쁘시게 여기는 것으로 여기지 마라. 사람이 끝까지 죄 없음을 지키는 것은 어렵다는 것을 알아두라.

65. 사람들에게는 말보다 더 정직한 것은 없다. 말은 그토록 중요하여, 우리는 말과 감사를 통해 하나님을 공경한다. 부적절한 말이나 불경한 말을 사용할 때, 우리는 우리 영혼의 부도덕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분별력이 없는 사람은 스스로 나쁜 말을 하거나 악한 일을 저지를 때, 자신의 죄를 자신의 태생이나 다른 무엇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다.

66. 우리가 함께 있는 사람들이 우리를 비웃지 않도록 다른 육체적 질병을 치료하려고 노력한다면, 하나님 앞에서—우리가 심판을 받게 될 그분의 면전에서—불명예스럽고 조롱받을 만한 존재가 되지 않도록, 온 힘을 다해 영혼의 병을 치료하는 데 더욱 힘써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기 주권을 가지고 있으므로, 원한다면 심지어 그것을 갈망할 때조차도 악한 일을 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께 기쁘시게 사는 것도 우리의 권능 안에 있으며, 우리가 원하지 않는 한 아무도 우리에게 악한 일을 하도록 강요할 수 없다. 이렇게 힘쓰면 우리는 하늘의 천사들처럼 살며, 하나님께 합당한 사람들이 될 것이다.

67. 원한다면 정욕의 종이 될 수도 있고, 원한다면 정욕의 멍에에 굴복하지 않고 자유로울 수도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너를 자기 주권을 가진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육신의 정욕을 이기는 자는 썩지 않는 면류관을 받는다. 정욕이 없었다면, 미덕도 없었을 것이며, 하나님께서 합당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면류관도 없었을 것이다.

68. 무엇이 자신에게 유익한지 보지 못하고, 무엇이 선한지 알지 못하는 자들은 영혼이 눈멀었으며, 그들의 이성도 어두워졌다. 그들에게 시선을 두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예기치 않게, 마치 눈먼 자들처럼 같은 처지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69. 죄를 짓는 자들에게 화를 내서는 안 된다. 비록 그들이 저지른 잘못이 처벌받을 만하더라도 말이다. 진리를 위해서라도 죄인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 필요하다면 직접 또는 다른 이를 통해 처벌해야 하지만, 그들에게 화를 내거나 노여워해서는 안 된다. 분노는 오직 정욕에 의해서만 작용할 뿐, 판단과 진리에 근거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땅한 한도를 넘어 자비로운 자들을 칭찬해서는 안 되지만, 악한 자들을 벌하는 것도 선과 진리를 위해서여야 하며, 자신의 분노라는 정욕을 위해서가 아니어야 한다.

70. 오직 한 가지 영적 축적만이 안전하고 도둑질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덕이 있고 하느님께 기쁨을 드리는 삶, 선한 행실을 실천하고 창조하는 것이다. 부는 눈먼 인도자이자 무분별한 조언자이다. 부를 잘못 사용하여 오로지 자신의 쾌락만을 추구하는 자는 타락한 자신의 영혼을 파멸로 이끈다.

71. 사람들은 불필요한 것을 아예 사지 말아야 하거나, 이미 가지고 있다면 세상의 모든 것이 본질적으로 덧없고, 빼앗기거나 잃어버리거나 파괴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확고히 믿어야 하며, 따라서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낙담해서는 안 된다.

72. 육체의 질병은 썩어 없어질 수 있고 물질적인 본성을 지닌 육체에게 자연스러운 것임을 알아두라. 그러므로 그러한 질병이 닥쳤을 때, (선한 일에) 훈련된 영혼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용기와 인내를 보여야 하며, 하나님께서 왜 육체를 창조하셨는지 탓해서는 안 된다.

73. 올림픽 경기에서 경쟁하는 이들은 한 명, 두 명, 세 명을 이겼을 때가 아니라, 자신과 경쟁하는 모든 이를 이겼을 때 비로소 월계관을 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으로부터 월계관을 받고자 하는 모든 사람은 육체의 정욕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탐욕, 남의 것을 빼앗고자 하는 욕망, 시기, 쾌락 추구, 허영, 비난, 죽음의 위험, 그리고 이와 유사한 것들에 유혹받을 때에도 자신의 영혼을 절제하도록 훈련해야 한다.

74. 우리는 인간의 칭찬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혼의 구원을 위해 선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선택해야 한다. 왜냐하면 매일 죽음은 우리 눈앞에 보이고, 모든 인간적인 것은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75. 우리가 정결하게 사는 것은 우리 힘에 달려 있지만, 부자가 되는 것은 우리 힘에 달려 있지 않다. 그렇다면, 어찌할 것인가? 우리가 얻을 수 없는, 일시적이고 허상 같은 부의 화려함을 갈망한다고 해서 우리 영혼을 비난해야 하지 않겠는가? 오, 우리가 모든 부를 갈망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모든 미덕 중에서 가장 높은 것이 겸손함이며, 모든 정욕 중에서 가장 큰 것이 탐식과 세속적 복에 대한 끝없는 욕망이라는 것을 우리가 모르겠는가?

76. 분별력 있는 사람들은 이 생에서 작고 일시적인 수고를 감당함으로써, 죽음 후에 우리는 가장 큰 위안과 영원한 행복을 얻게 될 것임을 끊임없이 기억해야 한다. – 정욕과 싸우며 하나님께로부터 면류관을 받고자 하는 자는, 만일 넘어지더라도 낙담하지 말고 그 넘어진 상태에 머물러 스스로를 절망에 빠뜨리지 말며, 일어나 다시 싸우고 면류관을 얻기 위해 힘쓰되,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일어나는 일마다 다시 일어서야 한다. 육체적인 수고는 미덕의 도구이며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다.

77. 용감한 자들과 투쟁하는 자들이 세상의 안락함을 박탈당하는 것은 그들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면류관을 받을 자격이 있게 한다. 그러므로 이 생에서 모든 세속적인 것에 대하여 자신의 지체를 죽여야 한다. 죽은 자는 더 이상 세속적인 어떤 것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78. 현명하고 수련하는 영혼은 슬픈 일이 닥쳤을 때 즉시 낙담하거나 두려워해서는 안 되며, 그렇지 않으면 겁쟁이로 조롱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화려함에 휩쓸리는 영혼은 제 자리를 벗어나게 된다. 영적 미덕은 우리를 영원한 복을 받을 자격이 있게 하지만, 인간의 자발적인 죄는 영원한 고통의 원인이 된다.

79. 현명한 사람은 이성적인 피조물에게 있는 (육체적인) 감각을 통해 영혼의 정욕과 싸우게 된다. 육체적 감각은 다섯 가지이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이 다섯 가지 감각을 통해 자신의 네 가지 정욕에 사로잡히면, 불쌍한 영혼은 포로가 된다. 이 네 가지 영적 정욕은 허영, 쾌락에 대한 갈망, 분노, 그리고 두려움이다. 그러나 사람이 지혜와 분별력을 가지고 힘차게 싸워 정욕을 이기고 정복할 때, 그때부터는 더 이상 정욕에 휘둘리지 않고 영혼과 화해하며, 승자로서 하나님께로부터 상을 받는다.

80. 여관에 머무는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은 침대를 얻지만, 다른 이들은 침대가 없어 바닥에 누워 침대에서 자는 사람들만큼이나 깊이 잠든다. 밤이 끝날 때까지 기다린 뒤, 아침이 되면 이쪽 저쪽 모두 침대를 떠나 각자 자신의 물건만을 챙겨 여관을 떠난다. 마찬가지로 이 삶의 길을 걷는 모든 사람, 즉 절제된 삶을 살았던 자든 영광과 부유함 속에서 살았던 자든, 이 삶을 여관처럼 떠나며 세상의 쾌락과 부를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고 오직 이 생에서 스스로 행한 자신의 행실만을 가지고 떠납니다. – 그것이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81. 큰 권세를 가졌다고 해서, 누구에게나 당장 죽음을 위협하지 말라. 너 또한 본성상 죽음에 속해 있으며, 모든 영혼이 마치 마지막 옷처럼 자신의 몸을 벗어던진다는 것을 알라. 이 점을 분명히 깨닫고, 온유함을 실천하며 선을 행하고,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하라. 자비롭지 못한 자는 그 안에 미덕이 없다.

82. 죽음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 방법도 없다. 이를 아는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들은 덕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 익숙해져, 죽음을 신음이나 두려움, 울음 없이 맞이한다. 그들은 죽음이 한편으로는 피할 수 없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이 생에서 겪는 악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준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고 있기 때문이다.

83. 선하고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잊고, 올바르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교리에 따라 지혜롭게 행하지 않는 자들을 미워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이성이 빈약하고 마음과 이성이 눈이 먼 자들처럼 그들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 그들은 악을 선으로 착각함으로써 무지 때문에 파멸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경건하지 못하고 영혼이 어리석어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84. 경건함과 선한 삶에 대해 누구와나 대화를 나누지 마라.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시기심 때문이 아니라, 가장 무지한 사람 앞에서는 네가 우스꽝스럽게 보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비슷한 사람은 비슷한 사람에게 공감하지만, 그런 대화를 들어줄 청중은 거의 없거나, 더 정확히 말하면 매우 드물다. 그러니 차라리 말하지 않는 편이 낫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구원을 위해 원하시는 것은 이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85. 영혼은 육신을 동정하지만, 육신은 영혼을 동정하지 않는다. 그러니 육신이 찢어질 때 영혼도 함께 고통받고, 육신이 튼튼하고 건강할 때 영혼의 감정들도 그와 함께 기쁨을 누린다. – 그러나 영혼이 반성(회개)할 때, 육체는 영혼과 함께 반성(회개)하지 않고, 제멋대로 머물며 뒤처져(움직이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반성(회개)은 영혼의 고통스러운 감정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무지, 교만, 불신, 탐욕, 증오, 시기, 분노, 비겁함, 허영, 출세욕, 불화, 선에 대한 무감각, 그리고 이와 유사한 것들 역시 영혼에서 비롯된다.

86. 하나님을 생각하며 경건하고, 시기하지 않으며, 선하고, 순결하고, 온유하고, 능력 범위 내에서 관대하며, 사교적이고, 다투지 않는 등 이와 같은 태도를 가져라: 이는 이 모든 것으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것이 영혼의 훔칠 수 없는 부요함이며, 또한 누구도 정죄하지 말고, 누구에 대해서도 그가 나쁘다거나 죄를 지었다고 말하지 말고, 차라리 자신의 나쁜 행실을 찾아내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돌아보며, 그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지 살펴보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나쁘다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랴?

87. 참된 사람은 경건해지려고 노력한다. 타인의 것을 탐내지 않는 자가 경건한 자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어 모든 피조물은 낯선 것이다. 그러니 네가 하나님의 형상인 만큼 모든 것을 경멸하라. 사람은 바르게 살고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 때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데, 사람이 모든 정욕적인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이는 불가능하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자는 영혼을 구원하는 모든 일과 그에게 요구되는 모든 경건함에 능숙하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책망하지 않으니, 자신도 죄를 짓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며, 이것이 바로 구원받는 영혼의 표징이다.

88. 일시적인 재물을 얻기 위해 애쓰는 자들은 죽음과 자기 영혼의 멸망을 잊은 채 악한 행위에 대한 욕망을 좋아하며, 자신들에게 구원을 주는 것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는다. 불쌍한 그들은 사람들이 죽음 후에 악으로 인해 어떤 고통을 겪는지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89. 하나님은 악의 원인이 아니시다. 그분은 인간에게 이성과 선악을 분별하는 능력, 그리고 자기 통제력을 주셨으나, 악한 정욕은 이미 사람들의 게으름과 부주의에서 비롯된다. 결코 하나님께서 그 일에 대해 죄가 있으신 것은 아니다. 자유로운 의지의 선택에 따라, 악마들은 악해졌으며, 대다수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90. 경건하게 사는 사람은 악이 영혼에 들어오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리고 영혼에 악이 없을 때, 비로소 영혼은 안전하고 무사하다. 그런 이들에게는 사악한 악마도, 우연도 권세를 행사할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악에서 구원해 주시니, 그들은 신과 같은 존재로서 무사히 보호받으며 산다. 누군가 그런 사람을 칭찬하더라도, 그는 마음속으로 자신을 칭찬하는 자들을 비웃을 뿐이며, 비방하더라도 비방하는 자들 앞에서 스스로를 변호하지 않으며, 그들이 자신에 대해 그렇게 말하는 것에 대해 분개하지도 않는다.

91. 악은 본성에 달라붙는데, 마치 녹이 구리에, 더러움이 몸에 달라붙는 것과 같다. 그러나 구리 장인이 녹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며, 부모가 더러움을 낳은 것이 아니듯이, 하나님도 악을 만들어내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양심과 이성을 주셔서, 악이 자신에게 해롭고 고통을 초래한다는 것을 알고 이를 피하게 하셨다. 그러니 힘과 부를 누리는 행운아를 보더라도, 어떤 겉모습에 현혹되어도 그를 아첨하지 말고 주의 깊게 살펴보라. 그러나 즉시 죽음을 눈앞에 두라. 그러면 너는 결코 나쁜 것이나 세속적인 것을 탐내지 않을 것이다.

92. 우리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이들에게 불멸을 주셨고, 땅에 있는 이들은 변할 수 있도록 창조하셨으며, 그 밖의 모든 것에는 생명과 움직임을 주셨으니, 이 모든 것은 사람을 위한 것이다. 그러니 마귀가 네 영혼에 악한 생각을 심어줄 때, 세속적인 유혹에 휩쓸리지 말라. 대신 즉시 하늘의 복을 떠올리고 스스로에게 말하라. ‘내가 원한다면, 이 정욕의 반란을 이길 힘이 내게 있다. 그러나 내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한다면, 나는 이기지 못할 것이다.’ 이처럼 네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위업을 위해 힘써라.

93. 삶은 이성(영), 영혼, 육체의 결합과 조화이며, 죽음은 이 결합된(부분들)의 소멸이 아니라 그들의 결합이 해체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는 해체된 후에도 지켜 주신다.

94. 이성은 영혼이 아니라, 영혼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이성은 영혼보다 앞서 나아가며, 영혼에게 일시적이고 물질적이며 썩어 없어질 것을 경멸하고, 영원하고 썩지 않으며 비물질적인 선을 사랑하도록 권고한다. 그리하여 사람이 육신 속에 살면서도 이성으로 하늘의 것과 신성한 것을 상상하고 관조하게 한다. 이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인간 영혼의 은인이며 구원자이다.

95. 영혼은 육체를 방종하게 내버려 두면 쾌락에 물들어 타락하고 멸망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이와 정반대로 작용한다. 그것은 마치 의사가 몸을 절개하고 소작하듯이, 육체에 고통을 주며 영혼을 구원한다.

96. 이성을 통해 절제되지 않고, 그들의 정욕, 즉 슬픔과 쾌락을 누그러뜨리고 억제하며 (마땅한 곳으로) 인도해 줄 이성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영혼들은, 마치 이성을 잃은 짐승들처럼 파멸에 이르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의 이성은 마치 마부가 순종하지 않는 말들을 다루듯, 정욕에 휩쓸리기 때문이다.

97. 영혼의 가장 큰 병, 극심한 재앙이자 파멸은,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그에게 이성과 언어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 이성과 언어를 통해 인간은 높은 곳으로 올라가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분을 관조하고 찬양할 수 있다.

98. 몸 안에는 영혼이 있고, 영혼 안에는 이성이 있으며, 이성 안에는 말이 있다. 이를 통해 관상되고 찬양받는 하나님께서는 영혼을 불멸하게 하시고, 썩지 않음과 영원한 기쁨을 베푸신다. 이는 하나님께서 온 존재에게 오직 그분의 자비로 존재를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99.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자의적 존재로 창조하셨으며, 시기하지 않으시는(지극히 자비로우신) 선하신 분으로서, 인간이 원한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람 안에 악이 없기를 원하신다. 사람들이 거룩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영혼의 선한 행실과 미덕을 칭찬하고, 부끄럽고 악한 행실을 비난한다면, 사람의 구원을 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더욱더 그러하지 않으시겠는가?

100. 사람은 선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선을 받지만, 악은 사람 스스로가 자기 안에 있는 악과 정욕, 무감각 때문에 당하게 된다.

101. 본성상 불멸하며 육체의 주인인 무분별한 영혼은, 육체의 쾌락 때문에 육체의 노예가 되는데, 육체의 쾌락이 영혼에게 파멸임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감각에 빠져 타락한 채, 그 영혼은 이 육체의 쾌락을 부지런히 좇는다.

102. 하나님은 선하시고, 사람은 악하다. 하늘에는 악이 없고, 땅에는 참된 선이 없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더 나은 것을 선택한다: 만물의 하나님을 깨닫고, 그분께 감사하며 찬양한다; 반면 육체는 죽기 전부터 혐오하며, 그 악한 감각들(요구, 욕망)이 실현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니, 그것들의 해로움과 악한 작용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103. 죄를 사랑하는 사람은 재물을 많이 모으는 것을 좋아하고, 진리를 소홀히 하며, 삶의 불확실성과 변덕스러움, 그리고 덧없음을 생각하지 않고, 죽음의 불가피성과 피할 수 없음을 기억하지 않는다. 만약 노년에 이르러서도 누군가 그렇게 부끄럽고 어리석다면, 그는 썩은 나무와 같이 어떤 일에도 쓸모가 없다.

104. 우리는 슬픔을 겪은 후에야 쾌락과 기쁨을 느낀다. 목마름을 겪지 않은 자는 물을 마셔도 달지 않고, 굶주림을 겪지 않은 자는 음식을 먹어도 달지 않으며, 깊은 졸음이 몰려오지 않은 자는 잠들어도 달지 않고, 슬픔을 겪지 않은 자는 기쁨을 깊이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 마찬가지로, 일시적인 것들을 경멸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원한 복을 누릴 수 없을 것이다.

105. 말은 이성의 종이다. 이성이 원하는 바를 말이 표현한다.

106. 이성은 모든 것을 보나니, 심지어 하늘에 있는 것까지도 보며, 오직 하나의 죄 외에는 그 무엇도 이를 가리지 못한다. 그러나 순수한 이성에게는 그 이성의 말, 즉 형언할 수 없는 것만큼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없다.

107. 육신으로 볼 때 사람은 죽을 운명이지만, 이성과 말로 볼 때는 불멸이다. 침묵 속에서 너는 사색하며, 사색하면서 마음속으로 말한다. 침묵 속에서 이성은 말을 낳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말은 사람에게 구원이 된다.

108. 무분별하게 말하는 자는 이성이 없으니,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혼의 구원을 위해 네가 무엇을 하는 것이 유익한지 잘 살펴보아라.

109. 지혜롭고 영혼에 유익한 말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반면, 하늘과 땅의 거리와 태양과 별들의 크기를 측정하려 드는 헛된 말은, 헛된 자만심에 사로잡혀 자신에게 아무런 유익도 주지 않는 것을 찾는, 헛되이 수고하는 사람의 발명품일 뿐이다. 마치 체로 물을 퍼 올리려는 것과 같으니, 이는 사람들이 결코 찾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110. 하늘을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그 위에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람도, 덕스러운 삶을 열망하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없다. 그는 하늘을 인간의 구원과 생명을 위해 창조하신 분을 알고 찬양하는 자이다. 이러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의심할 여지 없이, 하나님 없이는 아무것도 없으며, 그분은 아무것도 제한받지 않는 하나님으로서 어디에나, 모든 것에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

111. 사람이 어머니의 태에서 나오는 것처럼, 영혼도 몸에서 알몸으로 나오는데, 어떤 영혼은 깨끗하고 밝고, 어떤 영혼은 타락으로 얼룩져 있으며, 또 어떤 영혼은 수많은 죄로 인해 검게 물들어 있다. 그러므로 지혜롭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영혼은 사후의 고통과 극한 상황을 기억하고 숙고하며, 정죄받지 않고 그 고통에 처하지 않도록 경건하게 살아간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그곳에 있을 일을 무시하며 죄를 짓고, 영혼이 미친 자들이다.

112. 태중에서 나왔을 때 태중에 있던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육신을 떠났을 때 육신에 있던 것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113. 태에서 나왔을 때 네 몸이 더 낫고 커졌듯이, 몸에서 깨끗하고 흠 없는 상태로 나왔을 때, 너는 더 낫고 썩지 않는 존재가 되어 하늘에 머물게 될 것이다.

114. 태아로 있을 때 몸이 완전히 자라면 반드시 태어나야 하듯이, 영혼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육체 속에서의 생명의 한계에 도달하면 반드시 육체를 떠나야 한다.

115. 영혼이 육신에 있을 때 네가 그 영혼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영혼도 육신을 떠난 후에 너를 그렇게 대할 것이다. 이 세상에서 자신의 육신에 온갖 쾌락을 베풀며 잘 섬긴 사람은, 죽은 후에 스스로에게 해를 끼친 것이나 다름없다(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알 수 있듯이). 이는 무분별한 자로서 자신의 영혼을 심판받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116. 어머니의 자궁에서 미완성된 채로 나온 육체가 살 수 없는 것처럼, 선한 삶을 통해 하나님을 뵙는 경지에 이르지 못한 채 육체를 떠난 영혼은 구원받거나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다.

117. 육체는 영혼과 결합하여 자궁의 어둠에서 빛으로 나오지만, 영혼은 육체와 결합하여 육체의 어둠 속에 갇히게 된다. 그러므로 육체를 아껴서는 안 되며, 영혼의 적이자 대적자인 육체를 절제해야 한다. 수많은 음식과 달콤한 것들은 사람 안에 악한 정욕을 불러일으키지만, 절제된 배는 정욕을 누그러뜨리고 영혼을 구원하기 때문이다.

118. 육체의 시각 기관은 눈이고, 영혼의 시각 기관은 마음이다. 눈이 없는 몸이 맹목적이어서 온 땅과 바다를 비추는 태양을 보지 못하고 그 빛을 누릴 수 없는 것처럼, 선한 마음과 선한 삶을 갖지 못한 영혼도 맹목적이다: 모든 피조물의 창조주이자 은인인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찬양하지도 못하며, 그분의 썩지 않음과 영원한 복을 누릴 수도 없다.

119.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은 영혼의 무감각과 광기에서 비롯된다. 이 무지에서 악이 태어나고, 하나님을 아는 데서 사람들에게 선이 임하며 영혼을 구원한다. 그러므로, 만일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을 아는 가운데서 자신의 욕망을 따르지 않으려 노력한다면, 네 마음은 미덕을 향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무지로 취해, 자신의 쾌락을 위해 악한 욕망을 따르려 한다면, 너는 말 못하는 짐승들처럼 멸망할 것이며, 죽음 후에 닥칠 재앙들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120. 섭리의 일에는 또한 하나님께서 세상을 위해 정하신 변함없는 질서에 따라 일어나는 것들도 있는데, 예를 들어 해가 매일 뜨고 지며 땅이 열매를 맺는 것과 같다. 이 모든 것은 사람을 위해 창조된 것이다.

121. 하나님께서 선하신 분으로서 행하시는 모든 일은 사람을 위해 행하시는 것이요, 사람이 행하는 일은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스스로를 위해 행하는 것이다. 악한 사람들의 번영을 보고 의아해하지 않도록, 도시들이 사형 집행관을 두는 것은 그들의 가장 사악한 자의지를 칭송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 벌을 받아 마땅한 자들을 처벌하기 위함인 것처럼, 하나님도 악한 자들이 세상에서 우세하게 두시는 것은 그들을 통해 불경건한 자들을 처벌하기 위함임을 알아두라. 나중에는 하나님께서 그들 자신을 심판에 넘기실 것이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오직 자신의 악한 욕망에 아첨하며 사람들을 해쳤기 때문이다.

122.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이 자신이 숭배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마음으로 알고 보았다면, 그 불쌍한 자들은 경건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며,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되고 일어나는 모든 것의 아름다움과 질서, 섭리를 관조함으로써, 이 모든 것을 사람을 위해 창조하신 분을 깨달았을 것이다.

123. 사람은 악하고 불의하여 살인을 저지를 수 있으나, 하나님께서는 합당하지 않은 자들에게도 끊임없이 생명을 베푸신다. 시기하지 않으시고(모든 이에게 관대하시며) 본성상 선하신 그분은 평화가 있기를 원하셨고, 그 평화는 인간과 그의 구원을 위해 생겨났으며 계속되고 있다.

124. (진정한) 사람은 육신이 무엇인지, 즉 그것이 썩어 없어질 것이며 일시적임을 깨달은 자이다. 그런 사람은 영혼도 (마땅히) 이해한다. 즉, 영혼이 신성하고 불멸하며, 하나님의 숨결로서 시련을 겪고 신의 형상을 닮아가기 위해 육신과 결합되어 있음을 안다. 영혼을 올바르게 이해한 사람은 육체를 신뢰하지도, 방종하지도 않으면서 바르고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삶을 산다. 자신의 이성으로 하나님을 관조하며, 그는 하나님께서 영혼에게 베푸시는 영원한 복을 지혜롭게 바라본다.

125. 선하시고 시기하지 않으시는(관대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선과 악에 대한 자유를 주셨으며, 이성을 부여하셔서 그가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관조함으로써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을 알게 하셨다. 그러나 불의한 사람은 이를 원하면서도 이해하지 못할 수 있으며, 자신의 불행으로 인해 믿지 않고 진리에 반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선과 악에 대해 가진 자유이다!

126. 하나님의 뜻은 육체가 자라남에 따라 영혼이 이성을 갖추게 하는 것이니, 이는 사람이 선과 악 중에서 이성이 기뻐하는 것(즉, 선)을 선택하게 하려는 것이며, 선을 선택하지 않는 영혼은 이성을 갖지 못한다. 왜냐하면 모든 육체에는 영혼이 있지만, 모든 영혼이 이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성은 절제하는 자, 경건한 자, 의로운 자, 순결하고 선한 자, 자비롭고 경건한 자에게 있다. 이성의 존재는 사람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데 도움이 된다.

127. 인간에게 단 한 가지 불가능한 것은 불멸(죽음을 피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는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이해한다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다. 믿음과 사랑, 그리고 선한 삶으로 증명되는 바를 원하고 이해할 때, 사람은 하나님의 대화 상대가 되기 때문이다.

128. 눈은 보이는 것을 보고, 이성은 보이지 않는 것을 깨닫는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성은 영혼의 빛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성을 가진 자는 마음이 깨달음을 얻어 자신의 이성으로 하나님을 바라본다.

129. 선한 사람은 누구도 부끄러움이 없다. 선하지 않은 사람은 당연히 악하며, 육신을 사랑하는 자이다. 인간의 본래 미덕은 육신을 경멸하는 것이다. 가난 때문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일시적이고 썩어 없어질 물질적 복을 버리는 것이, 우리를 영원하고 썩지 않는 복의 상속자로 만든다.

130. 분별력이 있는 자는 자기 자신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즉 썩어 없어질 인간임을 안다. 자신을 깨달은 자는 또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창조물이며, 인간의 구원을 위해 창조되었다는 사실도 안다. 이 모든 것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바르게 믿는 것은 인간의 능력에 달려 있다. 그런 사람은 세속적인 복을 경멸하는 이들이 겪는 수고가 매우 적으며, 죽은 후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위로와 평안을 얻게 된다는 것을 확고히 안다.

131.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과 같이, 이성이 없는 영혼은 무활동적이며(무익하며) 하나님을 자신의 소유로 삼을 수 없다.

132.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을 들으시고, 한 사람에게 나타나시니,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며, 사람이 어디에 있든지 그곳에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이다. 오직 한 사람만이 하나님을 경배할 자격이 있는 자이며,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위해 그 모습을 바꾸신다.

133.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위해 별들로 장식된 하늘을 창조하셨고, 사람을 위해 땅을 창조하셨으며, 사람들은 그 땅을 스스로 경작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지 못하는 자들은 영혼이 무지한 자들이다.

134. 선은 하늘에 있는 존재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나, 악은 땅에 있는 존재가 보이는 것처럼 보인다. 선은 비교할 수 없는 것이나, 이성을 가진 사람은 가장 선한 것을 선택한다. 오직 한 사람만이 하나님과 그분의 피조물을 알 수 있다.

135. 영혼 속에서는 이성이 작용하고, 몸 속에서는 본성이 작용한다. 이성은 영혼을 숭배하지만, 본성은 몸을 썩게 한다. 모든 몸에는 본성이 작용하지만, 모든 영혼에 이성이 있는 것은 아니므로, 모든 영혼이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136. 영혼은 태어난 존재로서 세상에 있으며, 이성은 태어나지 않은 존재로서 세상 위에 있다. 세상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구원받기를 원하는 영혼은, 매 순간 스스로에게 ‘지금 이 순간이 (죽음을 앞둔) 시련이자 (행위의) 고문이며, 심판자의 시선을 견딜 수 없어 (시선)을 견딜 수 없는 (죽음을 앞둔) 고된 시련과 고통이 닥쳤으며, 마치 영혼이 이미 멸망하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을 매 순간 스스로에게 되새겨야 한다. 이렇게 생각함으로써, 영혼은 하찮고 수치스러운 쾌락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게 된다.

137. 땅 위에는 하나님께서 탄생과 죽음을 정하셨고, 하늘에는 만물의 충만함과 불변함이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인간과 그의 구원을 위해 창조되었다. 그 어떤 선한 것에도 필요를 느끼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위해 하늘과 땅, 그리고 사물을 마련하시어, 이를 통해 그에게 온갖 선한 것들의 즐거움을 누리게 하셨다.

138. 죽을 운명의 것은 불멸의 것에 복종하며, 즉 원소들은 인간을 섬기는데, 이는 창조주 하느님의 인간 사랑과 본질적인 선하심 때문이다.

139. 해칠 힘이 없는 가난한 자는 적극적으로 경건한 자들의 대열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러나 해를 끼칠 수 있으면서도 자신의 힘을 악에 쓰지 않고, 비천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경건함으로 인해, 죽은 후에도 선한 보상의 참여자가 된다.

140.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영혼을 돌이키고 하늘로 이끄는 구원의 길은 매우 많다. 인간의 영혼은 덕행에 대해서는 상을, 죄에 대해서는 벌을 받는다.

141. 아들은 아버지 안에, 성령은 아들 안에, 아버지는 둘 모두 안에 계십니다. 사람은 믿음을 통해 보이지 않는 모든 것과 마음으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깨닫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바를 영혼이 자유롭게 확신하는 것입니다.

142. 어떤 필요나 사정으로 인해 큰 강을 건너야만 하는 사람들은, 술에 취하지 않은 상태라면 목숨을 보존한다. 비록 물살이 세게 흐르거나, 심지어 배에 물이 차더라도, 그들은 보통 강둑 근처에 있는 무언가를 붙잡아 살아남기 때문이다; 그러나 취해 있다면, 아무리 수없이 강 건너편까지 헤엄쳐 가려고 시도하더라도, 술에 휩쓸려 파도 속으로 가라앉아 생명의 고리 밖으로 밀려나게 된다. 마찬가지로, 영혼이 삶의 파도와 소용돌이에 휩쓸려, 육욕에서 스스로 벗어나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깨닫지 못한다면, 즉 신성하고 불멸인 자신이 단지 시련을 위해 믿음이 약하고 정욕이 많으며 죽을 수밖에 없는 물질적 육체와 결합되어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육체적 정욕에 휩쓸려 스스로 파멸로 치닫는다면; 그렇게 되면 자기 자신을 경멸하고, 무지에 취해 자신을 돌보지 않는 자로서 파멸하여 구원받는 자들의 범주 밖으로 남게 된다. 왜냐하면 몸은 강물과 같아서 종종 우리를 부도덕한 쾌락으로 휩쓸어 가기 때문이다.

143. 현명한 영혼은 선한 의지에서 흔들림 없이 굳건히 서서, 마치 말을 재갈 물리듯 분노와 정욕—자신의 가장 무분별한 정욕들—을 다스리며, 그것들과 싸우고, 그것들을 길들이고 극복함으로써, 하늘에 머무를 자격을 얻어 영광을 누리게 되며, 이는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씨 뿌림과 수고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144. 진정으로 지혜로운 영혼은 악인들의 행복과 합당치 않은 자들의 번영을 보면서도, 무분별한 사람들이 그러하듯 이 생에서의 그들의 쾌락을 생각하며 동요하지 않으니, 그러한 영혼은 행복의 변덕스러움과 이곳에서의 체류가 불확실하다는 사실, 이 생의 덧없음을, 심판의 공정함을 분명히 알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계를 위해 필요한 것을 소홀히 여기지 않으신다고 믿는다.

145. 육신적인 삶과 이 세상에서의 큰 부와 권력을 통한 쾌락은 영혼에게 죽음과 같다. 반대로 수고와 인내,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가난, 그리고 육신의 절제는 영혼의 생명이며 영원한 위로로 가는 길이다.

146. 지혜로운 영혼은 물질적 축적과 덧없는 삶을 경멸하며, 하늘의 위로와 영생을 선택하는데, 선한 삶을 살았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이를 얻게 될 것이다.

147. 더러워진 옷을 입은 자들은 그들에게 닿는 이들의 옷까지 더럽힌다. 마찬가지로 성품이 악하고 행실이 흠 있는 사람들은, 천한 자들에게 다가가 그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말을 함으로써, 마치 진흙처럼 그들의 영혼을 청각을 통해 더럽힌다.

148. 죄의 시작은 정욕이며, 이를 통해 지성 있는 영혼이 파멸에 이른다. 반면 영혼에게 있어 구원과 천국의 시작은 사랑이다.

149. 방치되어 마땅히 돌보아야 할 관리도 받지 못한 구리가, 오랫동안 묶여 있거나 쓰이지 않아 표면에 녹이 슬어 손상되고, 그로 인해 부실하고 쓸모없게 되는 것처럼, 영혼도 무위 상태에 머물며 선한 삶과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돌보지 않고, 악한 행실로 인해 하나님의 보호를 스스로 잃어버리면, 육체의 본질 속에서 그러한 태만에서 싹트는 악에 갉아먹히게 되어, 그로 인해 부실하고 구원에 부적합한 존재가 된다.

150. 하나님은 선하시고, 무정하시며, 변하지 않으신다. 만일 누군가가 하나님께서 변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복되고 참된 것으로 인정하면서도, (그와 같은 분이시면서) 어떻게 선한 자들을 기뻐하시고, 악한 자들을 멀리하시며, 죄인들에게 진노하시다가, 그들이 회개하면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는지 의아해한다면,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거나 진노하지 않으신다고 말해야 한다. 기쁨과 진노는 모두 정욕이기 때문이다. 신성께서 인간의 행위로 인해 좋거나 나쁘게 느끼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다. 하나님은 선하시며 오직 선한 일만을 행하시고,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시며, 언제나 변함없이 동일하시다. 그러나 우리는 선할 때 그분과 닮았기 때문에 하나님과 교제하게 되고, 악해질 때 그분과 닮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다. 덕을 실천하며 살 때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 되지만, 악해지면 그분께 버림받게 됩니다. 이는 그분이 우리에게 분노를 품으셨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죄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빛을 발하시지 못하게 막고, 오히려 우리를 고통 주는 악마들과 결합시키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후 기도와 선행을 통해 죄에 대한 용서를 얻는다면,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여 그분의 마음을 바꾸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러한 행동과 하나님께로 향하는 우리의 태도를 통해 우리 안에 있는 악을 치유함으로써, 다시금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을 외면하신다’고 말하는 것은, 마치 ‘태양이 시력을 잃은 자들에게서 숨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151. 경건한 영혼은 모든 면에서 하나님을 안다. 경건하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 즉, 누군가가 시기하지 않고, 정결하며, 온유하고, 능력 범위 내에서 관대하며, 사교적이고, 편애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하나님의 뜻에 맞는 모든 일을 행하려 할 때이다.

152.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육체의 정욕에 대한 치료제이다. 왜냐하면 영혼 속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무지가 있을 때, 정욕은 치유되지 않은 채로 남아 영혼을 타락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면 영혼은 그 안에 거하는 악으로 인해, 마치 오랫동안 지속된 해악처럼 타락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에 대해 책임이 없으시니, 그분은 사람들에게 지식과 이성을 주셨기 때문이다.

153.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지식과 이성을 부여하시어, 정욕과 자발적인 악을 정화하시고, 그분의 자비로 죽을 운명을 불멸로 바꾸고자 하셨다.

154. 맑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영혼 안에 있는 이성은, 태어나지 않으시고, 보이지 않으시며, 말로 다할 수 없는, 맑은 마음을 가진 자들을 위한 유일하고 맑으신 하나님을 진실로 바라본다.

155. 썩지 않는 면류관, 덕행, 그리고 인간의 구원은 불행을 감사히 견디는 데 있다. 분노와 혀와 배와 쾌락 추구를 절제하는 것은 영혼에게 지극히 큰 도움이 된다.

156. 세상을 지탱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이며, 이 섭리가 미치지 않는 곳은 단 한 곳도 없다. 이 섭리는 스스로 완성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이 세상을 구성하는 물질을 형성하시는 분이자, 일어나는 모든 일의 설계자이자 예술가이시다. 물질이 하나님의 형상, 지성, 지혜, 그리고 섭리인 말씀의 분별력 없이는 그 아름다운 구조를 받아들일 수 없다.

157. 기억에 의해 자극받는 정욕은 어둠과 닮은 정욕들의 뿌리이다. 이 정욕적인 기억 속에 빠져 있는 영혼은 자신이 하나님의 숨결임을 깨닫지 못하고, 죽은 후 처하게 될 극심한 비참함을 생각하지 못한 채 미친 듯이 죄로 달려든다.

158. 영혼의 가장 크고 치유할 수 없는 병이자 파멸은 하나님을 잊는 것과 허영이다. 악을 탐하는 것은 선을 잃는 것이며, 우리의 선은 온갖 일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든 선한 일을 기꺼이 행하는 데 있다.

159. 오직 한 사람만이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 유일한 살아 있는 피조물과 대화하시며, 밤에는 꿈을 통해, 낮에는 이성을 통해 말씀하시고, 그분께 합당한 사람들에게 미래의 선한 것들을 온갖 방법으로 예언하시고 징조로 보여주시기 때문이다.

160. 믿고 소망하는 자에게 하나님을 아는 것은 조금도 어렵지 않다. 만일 그분을 뵙고자 한다면, 그분의 말씀으로 이루어진 과거와 현재의 모든 것의 질서와 섭리를 바라보라. 이 모든 것은 사람을 위한 것이다.

161. 악과 죄에서 깨끗한 이를 성자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사람 안에 악이 없을 때야말로 영혼의 가장 위대한 완전성이며, 하나님께 지극히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162. 이름이란 수많은 것 중 하나를 지칭하는 것(명사)이다. 그러나 유일무이하신 하나님께서 자신과 같은 이름을 가진 분이 계시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이라는 말은 시작이 없으시며,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163. 만일 자신에게 나쁜 행실이 있음을 깨닫는다면, 선한 것을 바라며 그것들을 네 영혼에서 잘라내라.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164.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으로부터 알게 되는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과 떨어지지 않으려 노력하는 사람이다. 하나님과 떨어지지 않는 사람은 모든 면에서 선하며, 어떤 감각적 쾌락도 자제하는 사람인데, 이는 그럴 수 있는 수단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의지와 자유로운 절제심 때문이다.

165. 너를 해치는 자에게 감사하라. 그리하면 하나님을 친구로 얻게 될 것이다. 누구에게도 네 원수에 대해 험담하지 마라. 사랑과 순결, 인내, 절제 및 이와 유사한 덕목에 힘쓰라. 이는 바로 겸손과 같은 미덕을 통해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행실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지혜로운 영혼에게만 해당된다.

166. 식물과 풀에도 영혼이 있다고 감히 말하는 자들을 반박하기 위해, 나는 가장 단순한 이들을 위해 이 장을 썼다. 식물은 육체적인 생명을 가지고 있으나, 영혼은 없다. 사람은 이성을 가지고 지식을 습득할 수 있기 때문에 이성적인 동물이라 불린다. 반면 땅과 공중에 사는 다른 동물들은 목소리를 내고, 호흡하며, 영혼을 가지고 있다. 자라거나 줄어드는 모든 것은 살아 있고 성장하기 때문에 살아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러한 모든 것이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살아있는 존재는 네 가지 종류로 나뉜다. 그중 하나는 천사들처럼 불멸하고 영을 지닌 존재이며, 다른 하나는 사람처럼 이성과 영혼, 호흡을 가진 존재이다. 또 다른 하나는 동물처럼 호흡과 영혼을 가진 존재이며, 나머지 하나는 식물처럼 생명만을 가진 존재이다. 식물의 생명은 영혼도, 호흡도, 이성도, 불멸도 없이 유지되지만, 그 밖의 모든 것은 생명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모든 인간의 영혼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167. 어떤 감각적 쾌락에 대한 환상을 떠올릴 때, 즉시 그 쾌락에 휩쓸리지 않도록 조심하고, 그것을 다소 거리를 두고 바라보며 죽음을 떠올리고, 그때 이 쾌락에 대한 유혹을 이겨냈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얼마나 더 나은지 생각해 보라.

168.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지성과 지식, 이성, 그리고 선악을 분별하는 능력을 주심으로써, 악이 우리에게 해를 끼친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피하게 하심으로써,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인간 내면의 악에 대한 장벽을 세우셨다. 그러나 미련한 사람은 악을 좇아가며, 심지어 그것을 자랑으로 삼기도 한다. 마치 그물에 걸린 것처럼 몸부림치며, 내면이 악에 얽매여 결코 그 아래에서 벗어나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보고 알 수 있는 힘을 잃어버린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인간의 구원과 신성화를 위해 창조하셨다.

169. 필멸자들은 죽음이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음을 미리 알고 스스로를 돌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경건한 영혼이 선할 때에는 복된 불멸을 누리게 되지만, 악할 때에는 영원한 죽음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170. 침상에 누울 때,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를 되새기라. 그때, 이 선한 생각으로 가득 차면, 네 영혼은 온전히 기뻐할 것이며, 육신의 잠은 영혼의 깨어남이 되고, 네 눈의 감김은 참된 하느님을 뵙는 것이 되며, 선함에 대한 감정으로 가득 찬 네 침묵은 온 마음과 힘을 다해 모든 것의 하느님께 올라가는 찬양, 즉 진심 어린 영광을 드릴 것이다. 사람 안에 악이 없을 때, 그 감사는 그 어떤 귀한 제물보다도 더 하나님께 기쁘시게 드려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분께 영원토록 영광이 있기를. 아멘.

 

3. 은둔 생활의 규율

1. 나는 주님께서 내 입을 통해 말씀하시는 대로, 은둔 생활이라는 무거운 멍에를 짊어지기를 원하는 자들을 위해 이 규칙들을 제시한다. 이 계명들을 반드시 따라야 하며, 그중 단 하나라도 어기는 자는 “천국에서 작은 자라 불릴 것”이다(마태복음 5:19).

 

가) 그러한 삶의 외적 흐름과 외적 질서

가) 세상과 사람들과의 동거로부터의 분리.

1. (세상을 등진 생활 방식으로) 구원을 얻고자 하는 자는 자기 집에 머물지 말고, 죄를 지었던 그 도시에 살지 말며, 또한 부모와 혈육인 이웃을 찾아가지 말아야 한다. 이는 그러한 일들이 영혼에 해를 끼치고 생명의 열매를 망치기 때문이다.

2. 한때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었던 그 도시로 돌아가지 마라.

3. 네 친족들이 어떻게 사는지 보러 가지 말고, 그들도 네가 어떻게 사는지 보러 오지 못하게 하며, 심지어 그들과는 아예 만나지 마라.

b) 은둔 생활의 선택.

4. 우리의 영적 스승들은 광야가 죽음에 대해 묵상하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이며, 육신을 달래는 세속적인 것들에 휩쓸리지 않도록 피할 수 있는 확실한 피난처라고 말씀하신다.

5. 광야에서 살며 침묵을 지키는 자는 세 가지 유혹에서 벗어난다. 곧 귀를 통한 유혹, 혀를 통한 유혹, 그리고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있는 것을 보는 것을 통한 유혹에서 말이다.

6. 사막이 시원함을 주는 곳이라고 속삭이는 생각이 너를 유혹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가) 독방에서의 은둔

7. 세상의 소문에서 멀리 떨어져 은둔하라. 그리하면 너는 나그네가 될 것이다. 방에 머무는 것은 마치 낯선 곳으로 떠나는 것과 같을 것이다.

8. 어딘가로 나갔을 때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서둘러 네 은둔처로 돌아와 기도에 전념하도록 하라.

9. 수확하러 갈 때는 그곳에서 지체하지 말고, 서둘러 네 은둔처로 돌아오라.

10. 어떤 형제를 방문할 때는 그의 방에 너무 오래 머물지 마라.

다) 방에서의 활동과 규칙.

11. 자신의 방에 머무를 때는 다음 세 가지 활동을 하라: 수공예, 시편 읽기, 기도.

12. 방에 머물 때는 성경 읽기,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 수공예에 전념하라.

13. 토요일과 주일을 제외하고 매일 9시까지 금식하라. 9시가 되면 네 방(가장 안쪽 방)[1] 으로 가서, 식사를 하기 전에 기도를 드려라. 식사를 마친 후에는 성경 읽기와 기도를 번갈아 가며 행하라.

다) 기도문 낭송과 무릎 꿇기.

14. 정해진 시간에 기도를 드리고, 단 한 번도 빠뜨리지 말아라. 그래야 이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을 것이다.

15. 밤에는 교회에 가기 전에 기도를 드려라[2] .

16. (그리고 언제나) 교회에 가기 전에, 자신의 방에서 기도하라.

17. (일반적으로) 형제들과 함께하는 공동 기도 전후에도 항상 자신의 방에서 기도를 드리고, 결코 이를 게을리하지 마라.

18. 자주 무릎을 꿇고, 악한 죽음을 맞이하지 않도록 이를 게을리하지 마라.

19. 기도할 때 게으름을 피우지 마라. 게으른 자의 기도는 헛된 말일 뿐이기 때문이다.

20. 기도하며 하느님을 기억할 때는, 수도 서원과 네 옷의 의미에 따라, 가볍고 높이 날아오르는 새와 같이 되어라.

e) 성경 읽기와 신에 대한 묵상

21. 성경 읽기에 부지런히 힘쓰라. 그러면 성경이 너를 불결함에서 건져낼 것이다(또는: 불결한 생각을 쫓아낼 것이다).

22. 성경 읽기에 끊임없이 부지런히 힘쓰고 계명을 실천한다면, 하나님의 자비가 너와 함께 하리라.

23. 하나님의 일들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데 게으르지 말라.

24. 자신의 방에 앉아 입을 다물고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는 수도사는, 성 밖의 황폐한 집과 같다. 그 집은 언제나 온갖 더러움으로 가득 차 있는데, 이는 누구든지 자기 집에서 더러움을 치우려 하면 오히려 그곳으로 가져다 놓기 때문이다. (즉, 입으로는 침묵하지만 마음으로는 공상하고, 생각에 방종하며, 마음에 휩쓸리는 것—이 모든 것이 악령들이 영혼에 쏟아붓는 죄악의 쓰레기이다).

g) 수공예와 일반적인 노동.

25. 육체는 긴 노동을 통해 굴복시키고 지치게 해야 한다.

26. 독방에서 할 적당한 노동을 스스로 정하라. 그러면 네 마음이 겸손해질 것이다.

27. 수공예 일을 하도록 스스로를 다그치면, 네 안에 하나님의 경외심이 깃들 것이다.

28. 수공예 일에 부지런히 힘쓰라. 그러면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네게 임할 것이다.

29. 방에 앉아 수공예 일에 전념하되, 그와 동시에 주님의 이름을 네 곁에서 떠나지 않게 하고, 끊임없이 네 마음속으로 그분을 묵상하며, 네 마음속으로 그분께 배우고, 네 입으로 그분을 찬양하며 이렇게 말하라: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또는 “주 예수 그리스도여, 내게 주님의 도움을 보내소서”; 또는 “주 예수 그리스도여, 주님을 찬양하나이다.”

g) 음식.

30. (항상 같은) 한 시간을 정해 두어(식사를 하기 위해), 육신을 보충하기 위함이지 쾌락을 위한 것이 아니도록 하라.

31. 가장 소박하고 값싼 음식을 먹으라.

32. 빵은 침묵과 절제 속에서 먹고, (식탁에) 앉은 자세가 소박하도록 주의하라.

33. 배부르게 먹지 마라.

34. 탐욕스럽거나 음식에 집착하지 마라. 그래야 네 안에 예전의 죄들이 다시 싹트지 않을 것이다.

35. 수요일과 금요일에는 금식을 풀지 마라.

36. 고기는 전혀 먹지 마라.

37. 술을 마시는 곳에는 가까이 가지 마라.

38. 모임이나 잔치(공동 식사)에 서두르지 마라.

39. 공동 식사가 마련된 곳[3] 에 가게 되면, 조금 맛보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라.

40. 세 잔의 포도주에 네 번째 잔을 더하지 마라. 다만 중대한 질병[4] 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41. 네게 권해지는 음식에 즉시 손을 뻗지 마라.

42. 네가 젊다면,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손을 뻗지 마라. 그것은 겸손하지 않기 때문이다.

i) 수면.

43. 잠은 적게, 적당히 자라. 그러면 천사들이 너를 찾아올 것이다.

44. 건강할 때는 허리띠를 풀지 마라.

45. 잠자리에 들 때, 무의식중에 죄를 짓지 않도록 손을 안쪽(아마도 옷깃 안)에 넣지 마라.

i) 옷.

46.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죄수나 수감자처럼 네 겉옷과 망토, 그리고 모든 옷을 입고 지내라.

47. 네가 거만해하거나 자랑할 수 있는 옷은 입지 마라.

48. 심판의 날에 다른 수많은 사람들[5] 사이에서 벌거벗은 채 서게 되지 않도록 네 옷을 잘 간직하라.

k) 그 주된 특징이 궁핍인 모든 내용.

49. 필요한 것 이상으로는 아무것도 저축하지 마라.

50. 가난이란 곧 모든 일에 절제를 지키는 것이거나, 적은 것으로 만족하는 상태를 말한다.

51. 명예를 받는 것보다 모욕을, 육체의 안식을 누리는 것보다 수고를, (필요한) 물건의 부족을 풍요보다 더 사랑하라.

(l) 교회 예배[6] .

52. 교회의 일(교회와 예배를 돌보는 일)은 신실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 맡겨야 한다.

53. 종소리가 울리자마자 게으름 피우지 말고 즉시 교회로 가라.

54. 예배를 소홀히 하지 말라. 그것이 네게 걸림돌과 올가미가 되지 않도록 하라.

55. 교회에서는 결코 말을 하지 말라.

56. 교회에 있을 때는 마치 많은 사람이 모이는 장소에 있는 것처럼 행동하지 말라(즉, 마음속에 소란과 혼란, 온갖 잡생각이 들지 않도록 하라).

57. 교회에서 죽은 자를 장사 지내지 마라(즉, 세속적인 일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지 마라).

m) 관계:

아아) 첫째이자 가장 중요한 것은, 아바, 영적 아버지, 장로들, 그리고 일반적으로 영적으로 성취한 이들에게로 향하는 것이다.

58. 어떤 일이든, 그것이 무엇이든, 수도원의 아바[7] 와 상의하지 않고는 시작하지 마라.

59. 네 아바와 상급자들 앞에서 말을 너무 많이 하지 말라.

60. 네 아버지의 말을 순종하겠다는 것을 항상 마음속에 굳게 간직하라. 그리하면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네 안에 깃들 것이다.

61. 네 수련의 완성은 순종이다. 사람이 젊었을 때부터 주님의 멍에를 지고 섬기며 순종한다면, 그것은 그에게 유익한 일이다.

62. 불순종하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모든 악과 불의의 도구와 그릇이 될 것이다.

63. 겸손과 눈물로 네 아버지께 간구하여, 네가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을 가르쳐 주시게 하라. 그리하면 네가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64. 너에게 선한 가르침을 전해 주는 이를 항상 기억하고, 그로부터 생명을 주는 계명들을 배우도록 힘쓰라. 그리하면 주님의 뜻대로 성공적인 삶을 살게 될 것이니, 이는 복된 사도 바울이 기록한 바와 같다: “이것들을 배우고, 이것들에 머물러라. 그리하면 네가 모든 사람 앞에서 진보를 보일 것이다”(딤전 4:15).

65. 네가 진심으로 순종의 멍에를 짊어졌다면, 네게 전해지는 말을 주의 깊게 듣고, 그 후 계명의 모든 힘을 다해 성실하게 이행하라.

66. 네가 저지른 죄를 네 아버지에게 숨기지 말라.

67. 선한 품성을 매일 네 선배들에게서 배우라.

68. 육신의 부모보다 영적 아버지들을 더 사랑하라. 그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너를 돌보시기 때문이다.

69. 너를 영적으로 낳아 주신 수도원의 스승님들이 성인들의 무리에 네가 들어갈 때 기뻐하실 수 있도록 살아가라.

70. 수도원의 장로들의 축복이 네게 머물도록 온갖 방법을 다해 힘쓰라.

71. 네 생각을 모든 사람에게 털어놓지 말고, 오직 네 영혼을 치유해 줄 수 있는 이들에게만 털어놓으라.

72. 모든 사람에게 네 속마음을 드러내지 마라. 그래야 네 형제에게 유혹이 되지 않을 것이다.

73. 모든 사람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가지되, 모든 사람을 조언자로 삼지는 마라.

bb) 상호적 관계 –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에게.

74. 모든 사람이 너를 축복하도록 노력하라.

75. 형제와 함께 슬퍼하며, 그에게 따뜻한 관심을 보여라.

76. 어떤 형제가 너에게 도움을 간절히 청하면, 그날 하루 종일 그와 함께 일하라.

77. 친구들은 먼저 시험해 보고, 모든 사람을 가까운 친구로 삼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마음을 열지 마라. 세상은 간사함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을 경외하는 형제 한 명을 골라, 형제끼리처럼 친하게 지내라. 무엇보다도 아들이 아버지께 의지하듯 하나님께 의지하라. 사람들은 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간사함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헛된 일과 고통, 슬픔으로 가득 차 있다.

bb) 연장자들을 다른 이들에게.

78. 만일 네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다면, 주님의 이름으로 말하며 주님의 이름이 모독당하게 하는 자들을 훈계하라. 그들은 마치 죽은 자들처럼 살아 계신 주님으로부터 단절되었으니, 그들이 죽은 행실에서 떠나 살아나 영광을 얻게 되도록 힘쓰라.

79. 네 (영적) 자녀들을 가차 없이 책망하고 바로잡아라. 왜냐하면 (만약 그들이 마지막 심판에서 정죄받을 만하다면) 그들의 정죄에 대한 책임은 네게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80. 아낌없이 책망하되, 하나님의 경외심으로 하라. 누구든지, 그가 누구이든 편파적으로 대하지 말고, 진리의 말씀으로 책망하라.

81. 어떤 형제가 네게 와서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으면, 주의하여 그 내용을 누구에게도 전하지 말고, 너 자신과 그를 위해 기도하여 주님께서 너희 둘을 구원하시도록 하라.

82.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찾는 이를 물리치지 말라.

83. 네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에게는 그 말을 하지 말라.

84. 네가 먼저 실천하지 않은 것은 누구에게도 규칙으로 제시하지 말라.

85. 모든 추행 중에서 가장 큰 추행은, 자신이 실천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명령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남의 행실에서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gg) 병자들에게.

86. 매일 아침 일어나면, 여러분 곁에 있는 병자들을 돌보아라.

87. 병자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그릇에 물을 채워 주라.

88. 할 수 있는 한, 남는 것은 모두 수도원의 병자들에게 나누어 주라.

89. 네 아바가 너를 병자들을 돌보도록 지명한다면, 온 마음을 다해 그들을 섬겨라. 그래야 하나님께로부터 두 배의 상을 받을 수 있으니, 곧 사랑으로 가득 찬 순종에 대한 상이다.

dd) 나그네들에게.

90. 어떤 형제가 네게 찾아온다면, 비록 때가 아니더라도 기쁨으로 그를 맞아주어, 그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너를 원망하지 않도록 하라.

91. 어떤 형제가 네게 오면, 그 앞에서 모든 일에 겸손을 베풀고, 주님을 위하여 그에게 친절을 베풀며, 교만해지지 않도록 조심하라.

92. 네 얼굴은 항상 슬픈 표정을 지어야 하나, 방랑하는 형제들이 네게 올 때만은 예외로 하여, 그때는 기쁜 표정을 지어라.

n) 서로 대하는 태도.

93. 모든 행동에서 겸손하라.

94. 모든 행동과 타인과의 상호 교류에서 가난한 거지의 태도를 본받으라. 대화를 나눌 때나, 찬송가나 하느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를 때나 결코 거만해지지 말라. 형제들과 모일 때, 네 말은 꾸밈없어야 한다.

95. 소년이나 청년과는 대화를 나누지 말고, 더구나 친분을 맺지도 말며, 마귀에게 틈을 주지 않도록 그들을 함께 살게 하지 말라.

96. 소년과는 아예 말을 하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그가 네게 걸림돌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97. 네 곁에 서 있는 형제의 손을 잡지 말고, 그가 너보다 나이가 많든 적든 그의 뺨을 만지지 말라.

98. 이성과 조언을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온 힘을 다해 멀리하라.

99. 평온한 삶을 원한다면, 헛된 일에만 신경 쓰는 사람들의 무리에 들어가지 말고, 우연히 그들 사이에 있게 된다면 마치 네가 그곳에 없는 것처럼 행동하라.

o) 대화 및 언어 사용에 관하여.

100. (수도실에서) 기도할 때를 제외하고는 목소리를 높이지 말고(말하지 말고), 침묵을 지키라.

101. 입에서 나오는 욕설을 피하라(말을 삼가라).

102. 하나님의 영이 네게서 떠나지 않도록 말을 많이 하지 마라.

103. 헤롯의 권세에도 불구하고 침묵을 지키신 주님을 본받아 침묵을 지키는 것은 찬양받을 만한 일이다.

104. 너와 같은 신실한 이들과 함께 모일 때, 다른 이들이 말하는 것을 경청하고 그 뜻을 헤아리며, 구원에 이르는 말씀을 기꺼이 실천하는 편이 낫다. 이는 스스로 말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105. 누군가를 찾아갈 때, 네 마음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깃들게 하고, 네 입을 삼가라. 그래야 평안히 네 수도실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106.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잘 알고 있으므로, 서둘러 말하지 않고, 언제 말해야 하고 언제 들어야 할지 신중히 따진다. 반대로, 훈육받지 못한 사람은 혀를 다스리고 절제하는 이 비밀스러운 원칙을 지키지 못한다.

107. 형제들 가운데 앉아 있을 때, 말을 너무 많이 하지 말고, 그들에게 무언가를 묻게 된다면 겸손하게 간결하게 말하라.

108. 네 말은 달콤하고 교훈이 되게 하라. 말 한 마디로 영광도 오고 굴욕도 온다는 것을 명심하라.

109. 짜증 섞인 말투로 말하지 말고, 네 말은 지혜와 분별이 깃들게 하라. 네 침묵 또한 그러해야 한다. 말과 침묵 모두 항상 지혜와 분별이 가득했던 우리 선조들의 모범을 따르라.

110. 네 혀는 언제나 이성을 따르도록 하라. 이성을 벗어난 말은 가시와 바늘과 같기 때문이다.

111. 거짓을 피하라. 그렇지 않으면 거짓이 네게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쫓아낼 것이다.

112. 네 입은 언제나 오직 한 가지 진리만을 말해야 한다.

113. 네 대화의 주제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은총이 되게 하라. 그리하면 너는 그분으로부터 더 큰 은총을 받을 자격을 갖추게 될 것이다.

114. 악한 일에 대해 묻지 말고, 네 주의를 그것들로부터 멀리 돌리라.

115. 헛된 말을 하지 말고, 그런 말을 하는 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라. 그래야 네 영혼이 그들로부터 악을 흡수하지 않을 것이다.

116. 이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헛된 말을 미워하라.

117. 가능한 한 농담과 우스꽝스러운 말을 삼가라.

118. 소리 지르거나 크고 빠르게 말하지 말라. 기록된 바와 같이, 말을 많이 하는 자는 죄에서 안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전도서 10,14).

119. 고집을 부리지 말고 자신의 말을 고집하지 마라. 그래야 악(분노, 화)이 네 안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120.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에서도, 하물며 의심스러운 일에서는 더욱더, 절대 두려워하지 마라.

p) 외출 시에.

121. 부득이하게 도시로 가야 한다면, 혼자 가지 마라.

122. 물을 길으러 가거나 여행을 할 때는 (시편을 암송하며) 묵상하라.

123. 형제들과 함께 여행을 할 때는, 침묵을 지키기 위해 그들과 조금 거리를 두어라.

124. 길을 갈 때, 좌우를 두리번거리지 말고, 주의 깊게 시편을 다시 읽으며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라. 그 후, 네가 어디에 있든지 그곳 주민들과 친하게 지내지 마라.

125. 세속적인 사람들의 무리 속에 끼어들지 말고, 모든 것을 겉으로만 과시하던 바리새인을 본받지도 말라.

126. 여자가 네게 가까이 오게 하지 말고, 그녀가 네 거처(방)에 들어오는 것을 용납하지 마라. 그녀 뒤에는 생각의 폭풍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127. 여자와 함께 식사하지 말고, 소년과는 결코 교제를 맺지 마라.

128. 어딘가에서 하룻밤을 묵어야 할 때는, 다른 사람과 같은 옷을 덮고 자지 않도록 주의하라.

129. 자신보다 어린 사람과 같은 돗자리 위에 누워서는 안 된다.

130. 두 사람이 함께 한 돗자리에서 자지 마라. 다만 극도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말이다. 설령 아버지가나 형제라 할지라도, 이를 허용할 때는 큰 두려움을 품어야 한다.

131. 수도원 여관에서는 오래 머물지 마라.

 

b) 내적 삶의 구조

가) 삶의 근본 원리는 열심이다.

1. 미덕을 쌓는 데 열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게으름에 빠지게 될 것이다.

2. 신성한 사랑이 식는 것을 두려워하라.

3. 네가 시작한 선한 일에서 뒤로 물러서지 마라.

4. 네 고독의 길에서 뒤로 물러서지 마라.

5. 덕을 위해 감당하고 있는 수고를 버리지 마라. 그래야 게으르고 태만해지지 않으며, 마지막 순간에 죄를 짓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주님을 사랑하면, 자비를 얻게 될 것이다.

6. 성 밖의 폐허가 모든 이에게 악취 나는 오물의 소굴이 되는 것처럼, 게으르고 무기력하게 은둔 생활을 하는 자의 영혼은 모든 정욕과 죄악의 오물이 모이는 소굴이 된다.

b) 삶의 규칙은 계명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이다.

7. 네가 자신을 하나님께 바쳤다면, 그분의 모든 계명을 지키고, 네게 명해진 바를 빠짐없이 꼼꼼히 행하라. 왜냐하면, 무언가를 소홀히 하려 한다면 네 과거의 죄들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나, 만일 모든 것을(생명을 바칠 각오로) 굳게 지키기로 결심한다면, 네 과거의 죄들은 이미 용서받았음을 확신하라.

8. 네 생각은 항상 신성한 계명들로 가득 차 있어야 하며, 그 계명들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온 힘을 다해 지키도록 노력하라. 그렇지 않으면 네 영혼이 온갖 더러움의 소굴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9. 어떤 일을 시작하려 할 때, 그 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보지 못한다면,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일을 하지 마라.

c) 목적 – 하나님의 영광.

10.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너를 통해)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도록 힘쓰라 (마태복음 5:16).

d) 묵상 – 열정을 불러일으키고 유지하는 원동력이다.

아아) 서원과 처음의 열정에 대하여.

11. 헛된 것들을 위해 하나님께로부터 물러서지 말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열망이 네 안에서 타오르던 때에 네가 약속했던 것을 기억하라.

12. 처음에 입었던 그 옷의 의미를 잊지 않도록 힘쓰고, 그때 흘렸던 회개의 눈물도 기억하라. 그리고 은밀히 다가오는 (나쁜) 생각들로부터 재빨리 물러나, 그 생각들에 휩쓸려 명백한 죄를 짓지 않도록 하라.

13. 끊임없이 진심으로 회개하라. 그리하면 단 한 순간도 태만과 나태함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bb) 모범적인 열심 있는 자들에 대하여.

14. 너보다 약한 자를 본보기로 삼지 말고, 너보다 더 온전한 자를 본보기로 삼으라.

15.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고 끊임없이 선한 일에 힘쓰는 이들을 본보기와 모범으로 삼으라. 그들이 덕행에 있어 완전하므로, 그들에게 삶의 교훈을 구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16. 세상의 쾌락만을 추구하는 자들을 본받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그 어떤 일에서도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주님을 위해 산과 광야에서 방랑했던(그리고 여전히 방랑하고 있는) 자들(히브리서 11:38)과 경쟁하라. 그리하면 위로부터 오는 힘이 네게 임하리라.

bb) 약속된 복에 대하여.

17. 만일 (명령받은) 모든 것을 행한다면, 눈으로 보지 못했고, 귀로 듣지 못했으며,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하지 못했던 유산을 받게 될 것이다(고린도전서 2:9).

18. 시간이 있을 때, 의인들의 무리에 속할 자격을 얻기 위해 지식의 빛을 활용하라.

gg) 죽음과 심판에 대하여.

19. 네 청춘은 지나갔고(힘은 고갈되었으며), 쇠약함은 더해졌으며, 네가 모든 행위에 대해 심판을 받아야 할 때가 이미 가까웠음을 기억하라. 그리고 그곳에서는 형제가 형제를 속량할 수도 없고, 아버지가 아들을 구원할 수도 없음을 알라.

20. 항상 육신을 떠나는 것을 기억하고, 영원한 심판을 마음에서 잊지 마라. 그렇게 행한다면, 영원토록 죄를 짓지 않을 것이다.

21.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말하라. ‘나는 오늘 하루를 넘겨 이 세상에 머물지 않겠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서 결코 죄를 짓지 않을 것이다.

22. 매일 마음속으로 ‘이 세상에서 네게 남은 날은 오늘 하루뿐이다’라고 생각하라. 그러면 죄에서 벗어날 것이다.

23. 네 방을 감옥으로 바꾸어라. 모든 것이 이미 너에게 끝났으며, 이 세상에서 네가 떠나야 할 시간이 곧 다가올 것이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하라.

24. 장차 올 세상에서 버림받지 않도록 스스로를 지키라. 부주의한 자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니, 그들의 끝이 가까워졌으며 그들에게는 도우미도 없고 구원의 희망도 없기 때문이다.

d) 성공의 원동력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도움과 자신의 노력 및 헌신이다.

아아) 기도로 이끌어내는 위로부터의 도움.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모든 일을 그분의 기쁨을 위해 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26. 무엇보다도 끊임없이 기도를 드리고, 네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항상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라.

27. 하나님께서 너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낡은 사람을 네게서 벗겨내시도록, 눈물을 흘리며 끊임없이 기도를 드리는 데 힘쓰라.

28. (기도의) 눈물을 흘리는 것을 그치지 마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너를 불쌍히 여기시고 네 모든 고통(네 영혼이 아파하는 모든 것)을 덜어 주실 것이다.

29.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다면, 주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의지하라. 그러면 그분께서 너를 구원하시고 보호해 주실 것이다.

bb) 자신의 업적과 노력 전반.

30. 내가 네게 권하는 다음과 같은 수행, 즉 수고, 가난, 방랑, 결핍(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음), 그리고 침묵을 실천하도록 노력하라. 이것들은 너를 겸손하게 만들 것이며, 겸손은 네게 죄 사함을 가져다줄 것이다. 겸손이란, 사람이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고 하나님 앞에서 선한 일을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며, 침묵을 지키고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여기며, 누구 앞에서도 고집을 부리지 않고 자신의 말을 고집하지 않으며, 자신의 뜻을 미루고, 고개를 숙이며, 죽음을 눈앞에 두고, 거짓말을 경계하며, 헛된 말을 하지 말고, 상사에게 반박하지 말고, 모욕을 인내로 견디며, 온유한 마음으로 온갖 어려움과 슬픔을 감내하도록 스스로를 다잡아야 한다. 형제여, 네 삶이 헛되지 않도록 이 규칙들을 지키도록 힘쓰라.

31. 우리 육신에 안식을 주는 모든 것을 멀리하고, 이 삶을 경시하여, 심판의 날에 우리에게 “그분을 위하여 굶주렸는지, 목마름을 겪었는지, 벌거벗음을 참았는지, 통회했는지, 마음 깊은 곳에서 신음했는지, 스스로를 시험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합당한지”를 물으실 하나님 안에서 살자. 그러니, 하나님을 얻기 위해 죄에 대한 통회와 탄식에 힘쓰고, 우리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육신을 경멸하자.

32. 스스로 수고를 택하라. 그러면 그 수고가 금식, 기도, 그리고 밤샘 기도와 함께 너를 모든 더러움에서 벗어나게 할 것이니, 육체의 수고는 마음의 순결을 가져오고, 마음의 순결은 영혼이 열매를 맺게 하기 때문이다.

33. 자비를 사랑하고, 믿음으로 무장하라. 네 마음이 악을 꾀하지 못하게 막고, 악에 선으로 갚도록 마음을 다스리며, 선함과 평화를 추구하고, 모든 아름다운 일을 열정적으로 실천하라.

e) 성공을 좌우하는 영혼의 태도.

아아) 경외심과 깨어 있는 주의력, 그리고 죄와 세상을 멀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안에 머무르는 것.

34. 네 영혼은 언제나 주님과 함께 하되, 네 몸은 땅 위에 조각상이나 우상처럼 있게 하라.

35. 항상 의로움으로 주님의 면전 앞에 서라.

36.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언제나 우리 눈앞에 있어야 하며, 죽음에 대한 기억과 세상과 세속적인 모든 것에 대한 적대적인 혐오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37. 살기 위해 매일 죽으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영원히 살 것이기 때문이다.

38. 나태함과 게으름에 빠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깨어 있으라.

39. 세속적인 모든 것을 미워하고 그것으로부터 멀어져라. 그렇지 않으면 그것 스스로가 너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것이다.

40. 네 영혼에 해가 되는 모든 것을 미워하라.

bb) 인내.

41. 무엇을 하든지 인내심을 가지고 행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네 모든 일과 네게 닥칠 모든 일에서 너를 도우실 것이다.

42. 조심하라, 비겁해지지 말라.

43.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는 모든 일에 대해 평온한 마음을 가져라.

44. 수도실에서 너를 덮치는 생각들 때문에 낙심하지 마라. 주님께서 네가 (그분을 위해) 기울인 어떤 수고도 잊지 않으실 것임을 알라. 이는 네게 성공으로 이어질 것이며, 하나님의 은총이 너를 도울 것이다.

45. 용기란 진리 안에서 굳건함을 지키고 원수들에게 맞서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네가 그들에게 굴복하지 않으면, 그들은 물러날 것이며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bb) 회개와 통곡.

46. 밤낮으로 자신의 죄를 뉘우쳐라.

47. 눈물의 기름으로 네 등불을 밝히라.

48. 마치 네 방에 죽은 자가 있는 것처럼, 끊임없이 네 죄를 위해 울어라[8] .

49. 네 얼굴은 항상 슬픈 표정을 지어야 하며, 그리하여 네 안에 하나님의 경외심이 깃들게 하라.

50. 자신을 무엇이라 여기지 말고, 오직 자신의 죄를 위해 울기에 전념하라.

gg) 겸손.

51. 겸손을 사랑하라. 그러면 그것이 네 모든 죄를 덮어 줄 것이다.

52. 네 생애의 모든 날 동안 겸손을 지키고, 모든 아름다운 것에 전념하라.

53. 덕행에서 너보다 약한 사람은 너와 동등한 것으로 여기고, 덕행에서 너와 동등한 사람은 너보다 훨씬 더 완전한 사람으로 공경하라.

54. 출세하는 이를 시기하지 말고, 모든 사람 중에서 자신을 가장 높은 자로 여기라. 그래야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하실 것이다.

55. 교만한 자들과 어울리지 말고, 겸손한 자들과 어울려라(이는 본받음과 교제에 관한 것이다).

56. 모든 일에서 겸손하라. – 자세, 옷차림, 앉는 모습, 서 있는 모습, 걸음걸이, 침상, 수도실, 그리고 그곳의 모든 소지품에서 그러하라.

57. 네 행실로 인해 사람들이 너를 칭찬하더라도, 그것에 기뻐하거나 즐거워하지 마라. 가능한 한 그 일들을 숨기고, 누구에게도 그 일에 대해 말하지 않도록 하며, 사람들이 너를 칭찬하지 않도록 온갖 방법을 다해 노력하라.

58. 네 행실 중 어떤 것으로 인해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하라.

59. 누군가 네가 저지르지 않은 죄로 너를 책망한다면, 자신을 낮추라. 그러면 면류관을 받게 될 것이다.

60. 네 혀가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말하도록 훈련하라. 그러면 겸손이 네게 임할 것이다.

61. 어떤 경우든, 언제든지, 모든 형제에게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말하도록 입에 익히라. 네가 항상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말한다면, 곧 겸손에 이를 것이기 때문이다.

62. 듣는 모든 (비난하는) 말에 대해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말할 준비를 하라. 그러한 겸손은 원수의 모든 계략을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63. 겸손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자신보다 더 낫게 여기는 것임을 알라. 네가 많은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마음속에 굳게 새기고, 고개를 숙인 채, 너에게 모욕을 주는 이에게 “용서해 주십시오, 나의 주님!”이라고 말할 준비를 하라. 그리고 죽음을 끊임없이 묵상하는 주제로 삼으라.

64. 수고를 사랑하고, 모든 이에게 복종하며, 입을 다물고 있으면 겸손에 이르게 될 것이며, 겸손은 네 모든 죄의 용서를 이끌어 낼 것이다.

65. 무엇보다도 자신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라. 그러면 네 안에 겸손이 생겨날 것이며, 겸손은 지혜(경험과 분별력)를 낳고, 지혜는 믿음을 낳으며, 믿음은 소망을 낳고, 소망은 사랑을 낳으며, 사랑은 순종을 낳고, 순종은 변함없는 견고함(선함에 대한 확고함)을 낳을 것이다.

g) 죄와의 투쟁에서 이룬 위업들.

아아) 무엇보다도 생각과의 싸움.

66. 악한 생각을 멀리 떨쳐 버리고 하나님께 의지하라. 그러면 그분께서 그분의 오른손으로 너를 보호해 주실 것이다.

67. 네 모든 생각을 무조건 따르지 마라.

68. 네 생각과 소망을 그대로 실행에 옮기지 말라.

69. 주의하라. 네 마음이 과거의 죄들을 떠올리며 휩쓸리지 않도록 하여, 그 죄들이 네 안에서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라.

70. 네가 한때 저지른 죄들을 마음속으로 되새기지 마라. 그래야 그것들이 다시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다. 네가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고 회개했을 때 그 죄들이 용서받았음을 확신하고, 그 점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지 마라.

71. 네가 게을렀던 시절에 탐닉했던 쾌락과 위안에 대해서는 떠올리지 말고, “나는 저것을 했다”거나 “이것을 어겼다”는 식의 말도 꺼내지 마라. 이는 네게 걸림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72. 세상에서 네가 좇았던 정욕들에 대해서는, 다시 그 욕망을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그리고 그것이 너에게 유혹이 되지 않도록, 전혀 떠올리지 마라.

bb) 온갖 악한 욕망들.

73. 사도 요한은 세 가지로 모든 인간의 정욕을 종합하여 말하기를,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육신의 정욕과 눈의 정욕과 이 세상의 자랑이다”(요일 2:16)라고 하였다. 육신의 정욕은 온갖 다양한 음식으로 배를 채우는 것이며, 그 뒤를 이어 음란한 부도덕이 따른다. 눈의 정욕은 물질적 재물을 대상으로 하며, 이를 소유할 때 눈은 교만해지거나 마음에 불결한 상상을 품게 된다. 교만은 시끄러운 명성 속의 세속적인 사랑(자신에 대한 높은 자만, 자화자찬, 그리고 타인으로부터의 칭찬에 대한 갈망)으로, 어떤 헛되고 덧없는 외적 장점들 때문에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

74. 욕망과 불순종을 피하고, 무엇보다도 과식을 피하라. 그래야 네가 자신의 정욕이라는 그물에 얽매이지 않을 것이니, 그것들은 마음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쫓아내고 얼굴에서 부끄러움을 없애며, 그 욕망에 사로잡힌 자를 비열하고 수치스러운 일로 내몰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75. 성급함을 벗어 던지고 온유함을 입으라. 타락한 눈을 버리고 순수한(어린아이 같은, 깨끗한) 눈을 가지라.

76. 분노에서 멀리하고, 정욕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며, 온갖 죄악된 욕망에서도 마찬가지로 멀리하라.

bb) 특히, 쾌락 추구와 관련하여.

77. 쾌락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어떤 일에도 쓸모가 없다.

78. 쾌락을 탐하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쾌락을 탐하는 자의 기도를 들으시지 않으시니라.

79. 육체와 그 쾌락을 미워하라. 그것들은 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80. 네 몸을 병상에 누워 있는 몸과 같게 될 정도로 지치게 하라.

gg) 분노와 그로 인한 결과들과 함께.

81. 분노가 너를 덮치면, 서둘러 그것을 네게서 멀리 쫓아내라. 그리하면 네 생애의 모든 날에 기쁨을 누릴 것이다.

82. 결코 누구에게도 화내지 말고, 모든 이를 용서하라.

83. 누군가 부당하게 너를 책망하더라도 화를 내지 마라.

84. 지혜로워라. 그리고 너에 대해 악한 말을 하는 자들의 입을 침묵으로 막아라.

85. 누군가 너에 대해 나쁘게 말하더라도 놀라지 마라. 이는 우리의 가장 사악한 적들이 진리를 알게 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쓰는 계략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86. 쉽게 화내지 말고, 너를 화나게 한 사람에게 원한을 품지 마라.

87. 모욕을 당하더라도, 너를 모욕한 사람에게 원한을 품지 말고, “나는 모든 형제들이 나를 경멸할 만하다”라고 말하라.

88. 불평하지 말고 누구에게도 모욕을 주지 마라.

89.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욕으로 모욕을 갚지 말라. 이는 네가 스스로 겸손해지지 않는 것을 보시고, 주님께서 친히 너를 겸손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90. 어린 자나 늙은 자나 모두 기도하여, 분노의 폭정에 빠지지 않도록 하라.

91. 한쪽 뺨을 때린 자에게 다른 쪽 뺨을 내미는 자는 모욕을 당하는 데서도 기쁨을 얻는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그를 버리지 않으시리니, 그분은 선하시며, 그분을 위하여 참으며 그분을 찾는 영혼들을 도우시어, 그들이 (정욕으로부터) 평안 속에 굳건해질 때까지 그들에게 힘과 강인함을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슬픔과 혼란이 닥칠 때 기뻐하라. 그 뒤에는 달콤한 열매가 따르기 때문이다.

92. 사람들의 모욕을 두려워하지 마라.

dd) 성공을 저해하는 다른 악한 마음의 움직임들: 비난.

93. 어떤 형제가 죄를 지은 것을 보게 되면, 그를 멸시하지 말고, 그에게서 등을 돌리지 말고, 그를 정죄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 자신도 원수들의 손에 빠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94.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말고, 누구도 정죄하지 마라.

95. (다른 사람에 대한) 나쁜 말을 듣기 위해 귀를 기울이지 말고, 사람들에게 관대하고 자비롭게 대하라. 그러면 살아남을 것이다.

96. 누구도 정죄하지 말라. 그것이 곧 네 파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97. 비록 네 형제가 모든 계명을 어기는 자임을 보았다 하더라도 그를 책망하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너 자신도 원수들의 손에 넘어가게 될 것이다.

98. 하나님께서 네 기도를 싫어하지 않으시도록, 어떤 인간도 정죄하지 마라.

99. 어떤 이유로든 누구의 결점도 드러내지 마라.

100. 누구에게도 그의 연약함을 탓하지 마라.

그녀) 허영과 자만.

101. 자선을 베풀 때, 그것을 드러내지 마라.

102. 영적 수행에 몰두하더라도, 그것을 자랑하지 마라.

103. 네가 하려고 마음먹은 선한 일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미리 말하지 말고, 그냥 행하라.

104. 어떤 덕행을 행했을 때, 교만해하지 말고 마음속으로 ‘내가 이러저러하게 했다’고 말하지 마라. 그렇게 행하면 지혜로운 사람이 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105. 명예를 탐하지 말고, 마음속으로 ‘내가 이런저런 일을 했고, 이것저것에 성공했다’라고 자화자찬하지 마라. 그러한 생각은 허영으로 가득 차 있으며, 그런 생각에 사로잡힌 자는 부정한 영들의 거처가 된다.

жж) 사람에게 아첨하고 위선을 부리는 것.

106. 사람들의 뜻을 따르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지 말라.

107. 인간적인 우정을 존중한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지 마라.

108. 위선자나 허세 부리는 자가 되지 말고, 더구나 거짓말쟁이가 되지 말라.

109. 사람들 앞에서만 의로운 척하지 말고, 내면에서도 지혜롭고 온유하며, 선량하고 인내심이 있으며, 열심이고,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

zz) 교만.

110. 네 행실이 어떠하든, 그것으로 인해 자만하지 말라.

111. 교만해하지 말고 자랑하지 마라.

112. 교만을 멀리 떨쳐 버리고, 네 이웃과 모든 사람을 너보다 더 낫게 여기라.

113. 남에게 슬픔을 주고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는 것보다 더 큰 불의는 없다.

114. 자신을 현명하다고 여기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교만으로 네 영혼이 치솟아, 네가 원수들의 손에 넘어가게 될 것이다.

115. 자신을 모든 것을 아는 자나 지혜로운 자로 여기지 마라(즉, ‘내가 안다’, ‘내가 할 줄 안다’라고 말하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네 수고가 헛되고, 네 배는 지금까지 헛되이 달려온 것이 될 것이다.

 

결론

1. 여기에 기록된 모든 것을 지키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나 안토니우스가 네게 진리를 말하노라. 그러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네 마음에 간직하며, 이 계명들을 통해 내가 너를 창조주께 맡긴다는 것을 알라. 네가 이를 지키면, 모든 천사들과 함께 기뻐할 것이며, 모든 악한 영들을 슬픔으로 쳐부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이 계명들을 따라 행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하실 것이며, 그분의 천사들이 네게 내려올 것이니, 네 영혼은 성도들의 향기로 가득 차고, 복된 자들의 빛으로 네 얼굴이 빛날 것이며, 너는 모든 성도들처럼 하나님의 성소가 되어, 마침내 기쁨과 즐거움으로 주님을 맞이하게 될 것이며, 그분의 음성을 듣게 될 것이니, 그분은 말씀하시기를: “잘했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라. 네 주인의 기쁨에 들어가라” (마태복음 25,21).

2. 이 가르침들 중 어느 하나도 어기지 마라. 그러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네게 평안을 주시고, 네가 시작한 일을 평화 가운데 완성하게 하실 것이다. 완전하신 우리 선조들과 그들을 본받은 이들은 그 가르침을 실천함으로써 완전해졌다.

3. 이 말씀에 어떤 선한 일을 더하고 싶다면 더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끊임없이 감사를 드리라.

4. 매일 밤 눈물로 네 침상을 적시고, 네 침대를 적시며, 그리스도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네 죄를 씻어 주시고 너를 다시 새롭게 하시며, 선한 일을 이루는 데 도움을 주시고, 그분의 영원한 왕국을 유산으로 주실 것이다. 그분께 찬양과 존귀와 영광과 경배가, 전능하신 성부와 성령과 함께, 지금과 항상, 그리고 세세토록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4. 성 안토니우스 대성인의 말씀과 그에 관한 이야기

 

세상을 버리는 것에 대하여

1. 수도 생활의 고행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자 하는 자는 세상과 완전히 결별하고, 세상의 모든 재물을 버리며, 세속에서 벗어나고, 세상의 사물에 대한 모든 집착을 끊어야 한다. 성 안토니우스는 이 진리를 한 형제에게 깊이 새겨 주었는데, 그 형제는 세상을 등지고 가진 모든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나, 혹시 모를 필요에 대비해 약간의 물건만 남겨 둔 채 성 안토니우스에게 찾아왔다. 장로는 그를 바라보며 그가 무엇을 품고 있는지 알아차리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수도사가 되고 싶다면, 저 마을로 가서 고기를 사서 얇게 썰고, 옷을 벗어 어깨와 팔에 걸친 채로 이곳으로 오라.” 그 형제는 장로가 시킨 대로 했더니, 곧바로 개와 새, 말벌들이 그를 둘러싸고 온몸을 상처로 뒤덮었다. 그가 다시 장로에게 돌아오자, 장로는 그에게 시킨 대로 했는지 물었고, 그는 신음하며 자신의 상처를 보여주었다. 그때 성 안토니우스는 그에게 말했다. “세상을 떠나면서도 재산 중 아주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남겨두는 자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난다. 악마들이 그를 상처로 뒤덮을 것이며, 그는 온몸이 찢겨진 채 싸움 속에서 쓰러질 것이다.” (Dost. skaz. 20; Patr. Graec. t. 40, p. 1099).

2. 카시아누스가 전한 다음 이야기(Coll. 24, 제11장 10절)도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세상을 떠날 필요가 전혀 없다고 생각하던 한 형제가 성 안토니오에게 찾아와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도시나 마을에서 영적 완성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실천하며 수련하는 사람이 더 가치 있습니다.” 성 안토니오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자네는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느냐?” 그 형제는 대답했습니다. “부모님의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부모님께서 제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챙겨 주십니다.” “이 덕분에 모든 근심과 걱정에서 벗어나, 다른 어떤 일로 마음이 산만해지지 않고 오직 독서와 기도에만 끊임없이 전념하고 있습니다.” 성 안토니우스는 다시 그에게 물었다. “내 아들아, 말해 보거라. 네 부모가 슬퍼할 때 그들과 함께 슬퍼하고, 그들이 기뻐할 때 그들과 함께 기뻐하느냐?” 그가 둘 다 느낀다고 고백했다. 그러자 장로는 그에게 말했다. “알아두거라. 이 세상에서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 그들과 함께, 너는 내세에서도 그들과 운명을 함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네가 선택한 삶의 방식은, 거의 매일 바뀌는 세상의 우연들로 인해 네 마음을 끊임없이 세속적인 생각에 빠뜨린다는 점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 사도처럼, 복음 전파의 수고 속에서도 자신의 손으로 자신과 함께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마련했던 그 열매를 박탈하기 때문이다. 그가 에베소인들에게 말했듯이: “너희도 아시다시피, 내 요청에 따라 나와 함께 있는 자들을 이 내 손으로 섬겼노라”(행 20:34). 그는 이것이 우리에게 본보기가 되도록, 즉 우리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그렇게 했으니, 그가 데살로니가 교회에 쓴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듯이: “우리는 너희 가운데서 무질서하게 행하지도 않았고, 누구에게서도 공짜로 양식을 먹지도 않았으며, 수고와 고생으로 밤낮으로 일하여 너희 중 누구에게도 부담이 되지 않으려 하였으니, 이는 우리에게 그럴 권한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희가 우리를 본받아 우리를 닮게 하려는 본보기를 보이기 위함이라” (데살로니가후서 3:8, 9). 바로 그 때문에 우리도 친척들의 부양을 받을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친척들에게서 생계를 공급받는 것보다 땀 흘려 스스로 생계를 꾸려가는 것을 더 선호합니다. 만약 후자가 더 유익하다고 여길 수 있었다면, 우리는 기꺼이 후자를 선택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건강할 때 남의 돈으로 산다면, 그것은 가난하고 연약한 이들의 재산을 갉아먹는 것임을 알아두십시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일반적인 답변:

세상을 떠난 사람은 완전히 새로운 삶의 영역에 들어서게 되는데, 비록 그 영역이 그에게 전적으로 낯선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측면이 저절로 “무엇을 해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불러일으킵니다. 성 안토니우스께서는 이러한 질문을 여러 번 받으셨으며, 그의 답변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아바 팜보가 그에게 이에 대해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네 의로움을 의지하지 말고, 과거의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며, 혀와 마음과 배를 절제하라.” (Patr. Graec. t. 40, p. 1093. 도스토프, 6권).

2. 그는 같은 질문에 대해 아바 피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이 행할 수 있는 모든 일 중에서 가장 훌륭한 일은, 하나님과 자신의 장로들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스스로를 책망하며, 마지막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모든 유혹에 맞설 준비를 하는 것이다.” (Patr. ib. 1084: 도스토프니키, 4).

3. 어떤 이가 그에게 물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 안토니우스는 대답했다. “네가 어디로 가든지 항상 하나님을 눈앞에 두라. 무엇을 하든지 성경에 그 근거가 있도록 하라. 그리고 네가 어느 곳에 살든지 쉽게 그곳을 떠나지 말라.” 이 세 가지 계명을 지키면 구원을 얻을 것이다 (도스트. 스., 3; 파트. ib. 1083).

4. 또 다른 제자에게는 이렇게 가르쳤다. “네 육신과 이 세상의 요구, 악한 정욕과 사람들의 명예에 혐오감을 품어라. 마치 이 세상에 네가 없는 것처럼 살아가라. 그러면 평안을 얻으리라.” (Patr. Lat. t. 73, p. 1049).

5. 성 아파나시우스가 기록한 바에 따르면, 아바 안토니우스는 자신을 찾아온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항상 너희 눈앞에 두려움을 품고, 죽이시기도 하고 살리시기도 하시는 분을 기억하라(사무엘상 2, 6).”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미워하고, 온갖 육신의 안락함을 미워하며, 하나님을 위해 살기 위해 이 세상을 저버리고, 너희가 하나님께 약속한 것을 기억하라. 이는 심판의 날에 그분께서 너희에게 이를 요구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굶주리고, 목마르게 갈망하며, 몸을 헐벗게 하고, 밤을 새우며 기도하고, 울고, 통곡하며, 마음속으로 탄식하고, 너희가 하나님께 합당한지 스스로를 시험하며, 너희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육신을 멸시하라(성인 전 33 및 행적록).

6. 이와 유사한, 수도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상세한 지침을 성 카시안이 제시하고 있다. 그는 “예로부터”라고 말하며, “복자 안토니우스의 놀라운 가르침이 전해져 오고 있다. 안토니우스의 놀라운 가르침이 전해져 왔는데, 수도사는 지극한 완전함을 추구함에 있어 성공한 어느 한 성인의 본보기에만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누구에게서도 모든 종류의 미덕을 완벽하게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지식으로 빛나고, 다른 이는 건전한 판단력으로 강하며, 또 다른 이는 흔들리지 않는 인내로 굳건하다; 어떤 이는 겸손으로, 어떤 이는 절제로, 또 어떤 이는 은총 어린 마음의 단순함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어떤 이는 너그러움으로, 어떤 이는 자비로, 어떤 이는 깨어 있음으로, 또 어떤 이는 침묵이나 근면함으로 남을 뛰어넘는다. 그러므로 영적인 벌집을 짓고자 하는 수도사는 지혜로운 벌처럼, 각 미덕을 그 미덕을 가장 잘 익힌 이에게서 배워, 누구에게 없는 것은 신경 쓰지 않고 오직 그 미덕에 주목하며, 각자가 두드러지는 그 미덕을 자신에게 체화하기 위해 열심이어야 하는가(Inst. c. V. 1. 4).

 

위업을 향해 나아가게 하고 그 과정에서 지탱해 주는 힘

앞서 언급한 모든 것을 나열해 보면, 위업을 펼칠 수 있는 영역이 꽤 넓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힘이 수고하는 이를 그 위업으로 이끌고 수고 속에서 그를 지탱해 주는가? 이 힘은 구원에 대한 열정이며,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영광을 위해 무엇이든 기꺼이 감수하는 마음이다. 이 열정이 있다면, 수도자의 모든 위업은 순조롭게 진행된다. 그것이 없다면, 모든 것이 멈춰 버린다.

1. 한때 이 열심이 부족했던 한 형제가 성 안토니오에게 와서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청했을 때, 위대한 장로는 그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네가 스스로를 돌보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다면, 나나 하나님도 너를 불쌍히 여기지 않을 것이다.” (도스트. 스. 16).

2. 바로 이 이유로 그는 하나님께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이고 깨어 있으라고 권면하며, 누구든지 평생 동안 주님을 위해 쉬지 않고 일하고,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유혹자의 계략에 맞서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면, 이를 위대한 미덕으로 칭송했다(Patr. Graec. t. 40, p. 1083).

3. 그러므로 그는 어떤 일에서도 스스로를 느슨하게 하지 말고, 인내심을 가지고 항상 같은 열정의 정신을 지키라고 설득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며칠 동안 수련하다가 스스로를 느슨하게 하고, 다시 수련하다가 또 소홀히 하는 수도사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으며, 열정과 인내의 꾸준함이 부족하기 때문에 결코 삶의 완성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Patr. Lat. t. 73, p. 1049).

4. 그는 특권을 추구하는 이를 자신의 수도 생활과 목적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라고 불렀으며, 수도자들의 모든 실패는 수련에 대한 열의 부족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그는 우리가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의 수도 생활을 알지 못하고, 착수하는 일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며, 수고 없이 덕을 이루고자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 때문에, 우리가 있는 곳에서 유혹을 마주치자마자 다른 곳으로 옮겨가며, 어딘가에는 마귀가 없는 곳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싸움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자는 스스로를 게을리하지 않고, 하나님의 도움으로 끊임없이 싸운다(Patr. Gr. t. 40, p. 1093).

5. 이 주제에 관해, 한 가지는 원치 않고 다른 한 가지는 할 수 없는 이들에게 성 안토니우스가 하신 말씀이 참으로 훌륭하다. 어느 날 어떤 형제들이 성 안토니우스에게 와서 그에게 말하였다. “저희가 구원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시오.” 노인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너희는 성경 말씀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 그것만으로도 여러분에게는 충분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버지, 저희는 당신께도 무언가 듣고 싶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장로는 그들에게 “복음서에 ‘누구든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그에게 왼쪽 뺨도 돌려주라’(마태복음 5,39)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저희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장로는 말씀하셨다. “만약 다른 쪽 뺨을 내밀 수 없다면, 적어도 한쪽 뺨으로만 맞으라.” 그러자 그들은 “그것조차 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장로는 “그것조차 할 수 없다면, 적어도 맞으면 맞으로 갚지 마라”고 말했다. 형제들은 “그것조차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성 안토니우스는 제자에게 말했다. “그들에게 먹을 것을 조금 준비해 주게. 그들은 병들었으니.” 한 가지는 할 수 없고, 다른 한 가지는 하고 싶지 않다면,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겠느냐? 그들 안에 열심의 영, 즉 도덕적 에너지가 깨어나도록 (그들 스스로가, 혹은 다른 이들이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성서 19).

 

열심의 지도자들

그러나 열정 그 자체는 때로 맹목적일 수 있으며, 시작한 삶의 목표와 부합하지 않는 방향으로 흐를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도자들에 의해 통제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 지도자들은 누구인가? 성 안토니오는 두 가지를 지적한다: 자신의 분별력과 경험 많은 이들의 조언이다.

가) 자신의 논증.

1. 옛날에 수도사들 몇 명이 성 안토니우스에게 모여, 어떤 미덕이 가장 완전한지, 그리고 어떤 미덕이 수도사를 모든 원수의 올가미로부터 지켜줄 수 있는지 논의하고자 했다. 그들 각자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말했다. 그중 어떤 이들은 금식과 기도를 칭찬했는데, 이는 그것들이 생각을 정돈하고 마음을 맑게 하며 사람이 하느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용이하게 하기 때문이었다. 다른 이들은 가난과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경멸을 더 높이 평가했는데, 이를 통해 마음이 더 평온해지고 맑아지며 세속적인 근심에서 자유로워지기 때문에 하느님께 더 쉽게 다가갈 수 있게 되기 때문이었다. 어떤 이들은 모든 미덕 중에서 자비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는데, 주님께서 자비로운 자들에게 “내 아버지의 복을 받은 자들아, 창세부터 너희를 위해 준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마태복음 25,34)고 말씀하실 것이기 때문이었고, 또 다른 이들은 다른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성 안토니우스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언급한 모든 미덕은 구원에 매우 도움이 되며, 하나님을 찾고 그분께 가까이 가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을 품은 이들에게 지극히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이들이 과도한 금식, 밤샘 기도, 광야로의 은둔을 통해 육신을 혹사하고, 수고에 열심이며, 가난을 사랑하고, 세상의 안락함을 경멸하여 하루에 필요한 양조차 남기지 않을 정도였으며, 가진 모든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 끝에 그들은 악에 기울어지고 타락하여, 그 모든 미덕의 결실을 잃어버리고 비난받을 만한 존재가 되곤 했습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그들에게 분별력과 현명함이라는 미덕이 없었기에, 그 미덕이 주는 도움을 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바로 그 미덕이야말로 사람을 가르치고, 갈림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바른 길을 걷도록 이끄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왕의 길을 걷는다면, 결코 우리의 비방자들에 의해 – 오른쪽으로는 과도한 절제로, 왼쪽으로는 태만과 안일함, 나태함으로 – 휩쓸리지 않을 것이다. 이성은 영혼의 눈이자 등불이며, 마치 눈이 육체의 등불인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 눈이 밝으면 온 몸(우리의 행실)도 밝아지겠고, 이 눈이 어두우면 온 몸도 어두워질 것이니, 주님께서 성복음서(마태복음 6,22-23)에서 말씀하신 대로이다. 이성을 통해 사람은 자신의 욕망과 말과 행위를 분별하며, 자신을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모든 것에서 물러선다. 이성을 통해 그는 자신에게 닥친 원수의 모든 계략을 무너뜨리고 소멸시키며,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올바르게 분별한다.(Patr. Gr. t. 40, p. 1096; 도스트. 스. 8).

2. 다음 격언도 같은 주제를 지적하고 있다. 대장장이가 철 조각을 집어 들면, 먼저 그것을 낫으로, 칼로, 아니면 도끼로 만들지 미리 살펴본다. 우리도 헛수고하지 않으려면, 어떤 미덕을 실천할지 미리 분별해야 한다(도스트. 스. 35). 물론, 자신의 판단에 따르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그것이 언제나 모든 일과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고 할 때, 더 확실하고 안전한 지침은 다음과 같다:

b) 경험 많은 이들의 조언.

3. 이러한 의미에서 성 안토니우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많은 수고를 한 끝에 넘어져 광기에 빠진 수도사들을 알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행위에만 의지하고, ‘네 아버지께 구하라. 그러면 그분께서 네게 알려 주실 것이다’(신명기 32,7)라고 말씀하신 분의 계명을 경시했기 때문이다.” (도스트. 스. 37).

4. 또한 성서는 “지도가 없는 자는 나뭇잎처럼 떨어진다”(잠언 11, 14)고 말하며, 조언 없이 아무것도 행하지 말라고 명령한다. 심지어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영적인 음료조차 조언 없이 마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데, “조언 없이 아무것도 행하지 말라” (시라 32, 21), 또한 “상담을 구한 뒤 포도주를 마시라”고 하십니다. – 상담 없이 자신의 일을 행하는 사람은 성벽이 없는 도시와 같아서, 누구든지 원하면 그곳에 들어가 보물을 약탈해 갑니다 (Patr. Gr. t. 40, p. 1098).

5. 성 안토니우스는 다른 이들에게 묻는 것을 그토록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일로 여겼기에, 심지어 모든 이의 스승인 그 자신조차도 이미 뛰어난 성과를 거둔 제자에게 질문을 던졌고, 그 제자가 말한 대로 행했다. 왜냐하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아바 안토니우스가 콘스탄티우스 황제로부터 콘스탄티노플로 오라는 서면 초청을 받았을 때, 파블로 프렙프로스토에게 “내가 가야 할까요?”라고 물었다고 한다. 그가 “가시면 안토니오가 되시겠지만, 가지 않으시면 아바 안토니오가 되실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그 여행을 반대하자, 그는 평온하게 그 자리에 머물렀다(『신성한 전설』 32).

6. 그는 다른 모든 이들에게도 그렇게 행할 것을 권하며 말하곤 했다. “수도사는 가능하다면, 자신의 방에서 취하는 모든 행동과 마시는 물 한 방울 한 방울에 대해서도 장로들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스스로, 자기 힘으로만 하느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다가 타락한 몇몇 수도사들을 알고 있다(Patr. Gr. t. 40, p. 1082; 『신성한 전설』 38).

7. 이처럼 성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판단을 신뢰하는 것을 찬성하지 않았다. 성경의 한 질문에 대해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한 아바 요셉을 칭찬한 것도, 이것이 겸손함 외에도 자신의 지성에 대한 불신을 나타낸 것이 아니었을까? 사연은 이러했다. 몇몇 장로들이 성 안토니오를 찾아왔는데, 그들 중에는 아바 요셉도 함께 있었다. 한 장로가 그들을 시험해 보고자 성경 구절을 제시하고, 연세가 어린 사람부터 차례로 이 구절의 뜻이 무엇인지 물었다. 각자는 자신의 능력껏 말했으나, 장로는 모두에게 “아니오, 알지 못하겠소”라고 대답했다. 모두가 대답한 후, 그는 아바 요셉에게 말했다. “이 구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오?” 요셉은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아바 안토니우스는 말했다. “아바 요셉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올바른 길에 들어섰습니다.” (성인 전 17).

8. 그러나 그는 다른 이들을 신뢰하는 데에도 제한이 없지는 않다고 조언했다. 먼저 그 장로의 올바른 사고와 경험의 깊이를 확인해야 하며, 그 후에야 비로소 그의 말을 믿고 그의 조언을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 이를 분별할 수 있는 표징은 그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는지 여부이다. 그는 명령되는 바를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만일 누군가 우리 주님의 계명에 부합하는 것을 네게 가르쳐 준다면, 그것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지키기 위해 노력하라. 그리하여 사도의 말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 복종하라”(갈 5:13; 엡 5:21). 반대로, 누군가 네게 하나님의 계명에 어긋나는 것을 가르친다면, 그 가르침을 주는 이에게 말하라. “하나님보다 네 말을 듣는 것이 옳은가?” (행 4:19).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 5:29). 또한 주님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내 양들은 내 음성을 듣고, 낯선 사람의 음성은 따르지 아니하나니, 낯선 사람의 음성을 알지 못함이라”(요 10:5). 마찬가지로 복된 바울도 이렇게 말하며 설득합니다. “우리나 하늘에서 온 천사가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보다 더 나은 복음을 전한다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라디아서 1:8). (Patr. gr. t. 40, p. 1083). 이러한 제한이 생긴 계기는 아마도 아리우스파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경건한 척하며 다른 이들을 유인한 뒤, 자신들의 거짓 교리라는 독을 주입했다. 또한 스스로 많은 경험을 쌓지 못한 채 다른 이들을 지도하려 드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 경우에 그는 늘 이렇게 말하곤 했다. “고대 교부들은 광야로 들어가, 그곳에서 수많은 수고를 통해 자신의 영혼을 치유한 뒤, 다른 이들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는지 깨달았다. 그래서 그곳에서 돌아와 다른 이들의 구원의 의사가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 중 누군가가 사막으로 나간다면, 우리는 스스로 건강해지기 전에 다른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떠맡게 되는데, 그로 인해 예전의 연약함이 다시 우리에게 돌아오고, 그 고통은 처음보다 더 심해집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의사여, 먼저 네가 나으라”(누가복음 4,23)는 말씀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Patr. lat. t.73, p. 1053).

 

질투를 어떻게 부추길 수 있을까?

사람의 마음속에는 변함없이 고정된 것이 없으며, 때로는 강해지고 때로는 약해집니다. 질투도 마찬가지로 때로는 타오르고 때로는 사그라듭니다. 후자의 경우, 질투심이 완전히 꺼지지 않도록 다시 불을 지펴야 한다. 무엇으로, 그리고 어떻게? 첫째, 죽음에 대한 기억이다. 성 안토니오는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는 사실을 모든 이의 마음과 정신에 깊이 새기라고 거듭 강조하곤 했다.

1. 둘째, 죽음 이후에 무엇이 있을지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제자들의 영혼에 이 생각을 깊이 새기기 위해, 그는 아파나시우스 대성인이 자신의 전기에서 전하는 바와 같이, 자신에게 계시된 내용을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어느 날, 식사를 하기 전인 9시 무렵, 일어나 기도하던 중, 성 안토니오는 자신의 정신이 딴 데로 뺏겨 있는 것을 느꼈고,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마치 자신의 몸 밖으로 나온 것처럼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았으며, 마치 누군가가 그를 공중으로 들어 올리는 듯했고, 공중에는 어둡고 무시무시한 얼굴들이 서 있었는데, 그들은 안토니우스가 승천하는 길을 막으려 했다. 안토니우스의 안내자들은 그들에게 저항했으나, 그들은 마치 정당한 권리를 가진 듯이 안토니우스가 자신들의 관할권에 속하는 부분이 있는지 보고를 요구했다. 양보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은 계산을 시작하려 했다. 그러나 그들이 성 안토니우스의 탄생 때부터 계산하려 하자, 그의 길잡이들은 이에 반대하며 이렇게 말했다. “태어날 때부터 있었던 일은 주님께서 그가 수도 서원을 할 때 지워 주셨으니, 그가 수도사가 되어 하느님께 서원을 한 때부터 계산하십시오.” 그러나 이 점에 있어 그를 고발한 자들은 그에게서 어떤 잘못도 찾아낼 수 없었기에 물러섰고, 그로 인해 안토니우스의 승천의 길은 자유롭고 방해받지 않게 되었다. 그 후 성 안토니우스는 자신이 다시 제 정신을 차리고 있음을 느끼기 시작했고, 결국 예전 그대로의 안토니우스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이미 음식에 대한 생각을 잊어버렸고, 그날 남은 시간과 밤새도록 탄식과 기도로 보냈으며, 우리가 얼마나 많은 적들과 싸워야 할지, 그리고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하는지에 대해 놀라워했다. 그때 사도 바울이 말한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엡 2,2)에 대한 말씀이 그의 기억에 떠올랐다. 원수는 공중에서 그곳을 지나가는 자들과 싸워 그들의 길을 막으려 할 권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도는 특히 “하나님의 모든 무기를 취하여, 악한 날에 대적할 수 있도록 하라”(엡 6,13)고 권면했으며, 원수가 “우리에 대해 비난할 말을 할 수 없게”(딤후 2,8) 되어 수치를 당하게 하려 했던 것이다.

2. 성 아파나시우스는 이렇게 전하고 있으며, 비록 후에 성 안토니우스가 다른 이들에게 그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지만, 이를 의심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가 본 것을 아는 것은 그 자신보다 다른 이들을 위해서 더 필요했기 때문이다. 같은 주제와 관련된 또 다른 환상에 대해서는, 그가 다른 이들에게도 그 내용을 이야기했다는 기록이 있다. 성 아파나시우스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성 안토니우스가 어느 날 자신을 찾아온 형제들과 죽음 이후 영혼의 상태와 그 영혼이 머물 곳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다음 날 밤, 위에서 누군가가 그를 부르며 말했습니다. “일어나서 나가서 보아라.” 안토니우스는 (누가 명령했는지 알고 있었기에) 밖으로 나갔고, 시선을 들어 보니 머리가 구름에 닿을 정도로 거대하고 흉측하며 무시무시한 거인이 서 있었습니다. 그때 땅에서 어떤 새들이 날아오르는데, 거인이 그중 한 마리의 길을 막고 있었고, 다른 새들은 그를 넘어 날아갔으며, 그를 지나자 무사히 하늘로 올라갔다. 거인은 뒤따르는 새들을 향해 이를 갈았고, 앞서가는 새들을 보고는 기뻐했다. 이때 보이지 않는 목소리가 말했다. “안토니오여, 네가 본 것을 깨달아라!” 그때 그의 마음이 열려, 이것이 땅에서 떠나는 영혼들의 여정이며, 그 거인은 우리의 원수로서 부주의하고 그의 유혹에 굴복한 자들을 붙잡아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게 막지만, 열성적이고 그의 말을 듣지 않은 자들은 붙잡을 수 없어 그들이 그 위를 지나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성 안토니우스는 이러한 환상을 마치 자신에게 주는 경고로 받아들였고, 모든 적대적인 것에 맞서는 투쟁에서 더욱 큰 성과를 거두기 위해 더 큰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같은 목적, 즉 순결한 삶에 대한 더 큰 열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그는 이 환상에 대해 다른 이들에게도 이야기하곤 했다. 아바 크로니우스는 어느 날 성 안토니우스가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 환상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전한다. 그때 그는 성 안토니우스가 이 환상을 보기 전, 죽은 후 의인과 죄인의 영혼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밝혀지기를 바라며 일 년 내내 기도했다고 덧붙였습니다. 거인의 양손은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고, 그 아래에는 바다만큼 넓은 호수가 있었는데, 거인이 손으로 치는 새들이 그 호수로 떨어졌다고 합니다 (라브사이크, 제24장). 『라틴 교부집』의 이 이야기에 따르면, 새들은 거인의 손 아래 공중에 멈춰 서서 그 손보다 더 높이 올라갈 힘이 없을 때만 거인에게 맞고 호수로 떨어졌으며, 거인의 손과 머리 위로 올라갈 힘이 있는 새들에 대해서는 그들에 대해서는 단지 이를 갈며, 그들이 하늘로 날아오른 뒤 천사들에게 받아들여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고 한다(Patr. Lat. t. 73, p. 1044).

3. 이를 듣고 영혼들은 얼마나 격렬한 두려움에 사로잡혔겠는가! 그러나 여기 위로가 되는 환상이 있는데, 이는 밝은 상태에 대한 “소망”으로 열정을 강력하게 북돋워 준다. 이 환상은 성 안토니우스의 제자라기보다는 친구이자 대화 상대였던 성 암모네에 관한 것이다. 성 아파나시우스는 성 안토니우스가 어느 날 산 위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았더니, 누군가가 불타는 띠처럼 공중을 타고 하늘로 치솟는 것을 보았고, 위에서 기쁨에 찬 천사들의 무리가 그를 맞이하기 위해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광경에 놀라, 그는 주님께서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밝혀 주시기를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그에게 음성이 들려왔는데, 그것은 니트리아의 수도사 암몬의 영혼이었습니다. 이 암몬은 노년에 이르기까지 엄격한 금욕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그는 성 안토니우스를 찾아가기도 했고, 성 안토니우스도 그를 찾아가곤 했습니다. 니트리아 산맥에서 성 안토니오 산까지의 거리는 13일 거리(650 베르스트)였다. 그와 함께 있던 형제들이 그에게 왜 그렇게 놀랐는지 묻자, 그는 암몬에 대해 보고 들었다고 대답했다. 30일 후, 니트리아에서 온 형제들이 암몬에 대해 묻자 , 그가 바로 그 노인이 그의 영혼이 하늘로 승천하는 것을 보았던 바로 그 날과 그 시간에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4. 성 안토니우스가 직접 이야기하는 다음의 환시 또한 나태함을 몰아내고 활력을 북돋우는 데 못지않게 강력하다. “나는 하느님께, 수도사를 둘러싸고 보호하는 그 덮개가 어떤 것인지 보여 달라고 기도했다!”라고 그는 말한다. 그리하여 나는 불타는 등불로 둘러싸인 수도사를 보았는데, 수많은 천사들이 그를 눈동자처럼 지키며 칼로 보호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것이 바로 수도사에게 주어진 것이로구나!”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귀가 그를 이겨 넘어뜨리고 말았다. 그때 자비로우신 주님께서 내게 음성을 보내시며 말씀하셨다. “사탄은 아무도 넘어뜨릴 수 없다. 내가 인간의 본성을 취하여 그의 권세를 꺾은 이후로, 그는 더 이상 아무런 힘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은 스스로 게으름에 빠지고 자신의 정욕과 욕망을 방종할 때 넘어진다.” 내가 물었다. “모든 수도사에게 그런 보호막이 주어지는가?” 그러자 나에게 그런 보호로 둘러싸인 수많은 수도사들이 보여졌다. 그때 내가 외쳤다. “주님께서 이토록 자비로우시고 이토록 사람을 사랑하시는 인류를, 특히 수도사들의 무리를 복되도다!” 그러니 우리도 자신의 구원을 위해 열심을 내고, 모든 나태함을 떨쳐 버리며 부지런히 우리의 수고를 감당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Patr. Graec. t. 40, p. 1083).

5. 또 다른 때, 성 안토니우스는 제자들에게 열심이 약해지면 수도 생활이 쇠퇴하고 그 영광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밝혀 주었다. 그의 제자들 중 몇몇은 광야에서 수많은 수도사들이 그러한 미덕으로 빛나며, 성스러운 은둔 생활에서 성공하기를 그토록 열정적으로 갈망하는 모습을 보고, 아부 안토니우스에게 물었다. “아버지, 이 열정과 고독, 빈곤, 겸손, 절제, 그리고 지금 이 수많은 수도사들이 그토록 부지런히 실천하고 있는 그 밖의 모든 미덕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까요?” 하나님의 사람은 한숨과 눈물을 흘리며 그들에게 대답했다. “사랑하는 내 자녀들아, 때가 되면 수도사들이 광야를 떠나 그 대신 부유한 도시들로 몰려갈 것이며, 그곳에서 이 황량한 동굴과 비좁은 방 대신 왕들의 궁전과 견줄 만한 웅장한 건물들을 세울 것이며; 가난 대신 재물을 모으는 사랑이 자라날 것이며, 겸손은 교만으로 대체될 것이며, 많은 이들이 지식을 자랑하겠지만, 그 지식에 걸맞은 선한 행실과는 동떨어진 텅 빈 지식일 뿐, 사랑은 식어갈 것이며, 절제 대신 탐식이 늘어날 것이며, 그들 중 아주 많은 이들이 세속인 못지않게 호화로운 잔치에 신경 쓸 것이며, 수도사들은 옷차림과 머리띠 외에는 세속인과 아무런 차이도 없을 것이며, 세속 속에서 살면서도 스스로를 은둔자(수도사는 본래 은둔자)라고 칭할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나는 바울의 사람이다, 나는 아폴로의 사람이다”(고린도전서 1:12)라고 말하며 자만할 것이니, 마치 그들의 수도 생활의 모든 힘이 선배들의 위엄에 달려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을 자랑하듯, 자신들의 스승들을 자랑할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우리보다 훨씬 더 훌륭하고 완전한 이들도 나타날 것이니, 이는 죄를 지을 수 있었으나 짓지 않았고, 악을 행할 수 있었으나 행하지 않은 자(시라 31, 11)가, 선을 추구하는 수많은 열성자들의 흐름에 휩쓸려 선을 행한 자보다 더 복된 자이기 때문이다. 왜 악한 사람들 가운데서 열정적인 삶을 살았던 노아, 아브라함, 롯이 성경에서 그토록 많이 칭송받는 것이 마땅한가(Patr. Graec. t. 40, p. 1095).

6. 죽음과 사후에 닥칠 일에 대한 이러한 두 가지 상기,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불타오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열심의 세 번째 원동력이다.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성 안토니우스는 의미심장한 격언을 통해 하나님을 경외할 것을 권면했다.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라. 죽이시기도 하고 살리시기도 하시는 분을 두려워하라”(위 7항 참조). 또 다른 간결한 격언에서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속에서 모든 미덕을 실천할 준비와 자격의 근원을 지적한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모든 미덕의 시작이자 지혜의 시작”이라고 말합니다. 빛이 어두운 집 안으로 들어와 그곳의 어둠을 몰아내고 비추듯이, 하나님의 경외심도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오면 어둠을 쫓아내고 그 안에서 모든 미덕에 대한 열정을 불태운다(Patr. gr. t. 40, p. 1084).

7. 그러므로 그는 이 경외심을 잃지 않도록 온갖 방법으로 경고했다. “수녀실에서 나가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잃게 될 것이다.” 물에서 꺼내진 물고기가 죽듯이, 수도사가 수녀실을 나와 밖을 배회하면 그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시들어 버리기 때문이다(같은 곳).

8. 그러나 경건함을 북돋우는 이 모든 것들은 강압적으로 작용하며, 비록 내면에서 비롯되지만 외부에서 끌어당기는 성격을 띤다. 경건함이 마치 샘물처럼 마음속에서 저절로 솟아나오도록, 내면의 자극 요인들을 얻어야 한다. 마음을 그 지경에 이르게 하는 것은 1) 하나님 안에서 사는 삶의 “달콤함”을 느끼는 것이다. 이 감각이 형성되기 전까지는, 우리의 열정은 신뢰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한 형제가 성 안토니우스에게 물었을 때, “왜 성경 전체에 걸쳐 하나님께서 영혼에게 지극히 높은 선을 약속하시는데도, 영혼은 그것을 추구하는 데 끊임없이 굳건하지 못하고, 지나가는 것, 썩어 없어질 것, 그리고 부정한 것으로 치우치는가?” –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직 천상의 선함의 달콤함을 맛보지 못한 자는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 붙어 있지 않은 것이니, 그렇기에 썩어 없어질 것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 그러한 완전함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순종하며 그분을 섬겨야 하며, 선지자와 같이 “나는 주님 앞에서 가축과 같았나이다”(시 72:23)라고 말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즉, 나는 멍에를 멘 짐승처럼 주님을 섬겼다는 뜻이다(Patr. lat. t. 73, p. 1056).

9. 여기서 2)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가장 강력한 원동력이다. 성 안토니우스는 사랑이 두려움보다 강하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분을 사랑합니다.”(즉,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두려움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의해 움직인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기” 때문입니다(1요한 4,18). (도스트. 스크. 32).

10. 그는 또한 다른 이들에게 무엇보다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꺾이지 않고 변치 않는 힘으로 자신 안에 길러야 한다고 설득했다. 그래서 어느 날 형제들이 그에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는 “하나님께 가장 기쁨을 드리는 일은 사랑의 일입니다.”라고 대답했다. 하나님을 끊임없이 찬양하는 이가 바로 그 일을 행하는 자니, 이는 하나님에 대한 기억과 약속된 복,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위해 기꺼이 이루신 모든 일로 인해 자극받는 순수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기억함에서 완전한 사랑이 솟아나는데, 이는 다음과 같이 명해진 바와 같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영혼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명기 6:5), 그리고 “사슴이 시냇물을 갈망하듯, 내 영혼이 주님을 갈망하오니”(시편 41:2)라고 기록된 대로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할 일이며, 사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도 이루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누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는가? 환난인가, 곤고인가, 박해인가, 굶주림인가, 헐벗음인가, 위험인가, 칼인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로마서 8,35.38). (Patr. gr. t. 40. p. 1094).

11. 이로부터, 혹은 이와 함께 3) “기쁨”이 오는데, 이는 선행을 행하고 하나님의 질서 안에 머무르는 데서 오는 것이며, 이 기쁨은 다시 열심의 원동력이 된다. 여기에는 성 안토니우스의 다음 말씀이 해당한다. 누군가 그에게 물었다. “주님 안에서 기쁨이란 무엇입니까?” 그가 대답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쁨으로 어떤 계명을 실천하는 것, 바로 그것이 주님에 대한 기쁨이다. 우리가 그분의 계명을 실천할 때는 기뻐해야 하고, 반대로 실천하지 않을 때는 슬퍼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는 주님 안에서 서로 위로할 수 있도록 마음의 기쁨으로 계명을 실천하도록 노력하되, 다만 그 과정에서 기뻐한다고 해서 교만해지지 않도록 온갖 방법으로 경계하며, 모든 소망을 주님께 두어야 한다 (Patr gr. t. 40, p. 1095. 바실리우스 대주교의 『간결한 교리 문답』 193번 질문에도 유사한 사상이 있다).

 

수행과 선행, 특히

이처럼 인도받고 불타오르는 열정은 육체적·영적 수련과 온갖 선행으로 이어진다.

1. 자신의 “육체를 얼마나 고갈시켜야 하는지”에 대해 성 안토니우스는 고행에 관한 일반적인 가르침(7항 참조)과 정욕의 동기를 열거한 부분(18항 발췌문 참조)에서 지적했는데, 그 중에는 육체를 충분히 먹이는 것도 포함되어 있는데, (이러한 욕망의 움직임에 대항하는 수단으로서) 금식을 통해 몸을 고갈시키는 것이 제시되었다(도스트. 스. 22). 성 안토니오는 육체에 대해 매우 엄격할 것을 명령했으며(위 7항 참조), 모든 관용을 비난했다. 그래서 그는 목욕탕에 다니는 자들을 호의적으로 대하지 않았다. “우리의 선조들은 얼굴조차 씻지 않았는데, 우리는 세속적인 목욕탕에 다닌다”(『알파베트적 교부들』 제4조)고 그는 말했다.

2. 육신을 절제한 후에는 “혀를 다스리는 것”에 큰 중요성을 두었다. 그는 이 수행을 방랑과 동등하게 여기며, “우리의 방랑은 입을 다물고 있는 데 있다”고 말했다(같은 책, 4쪽).

3.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아무 말이나 내뱉는 자들은 마치 문이 없는 마당과 같다. 그곳에는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들어와 구유에 다가가 당나귀의 밧줄을 풀어버린다. 이 생각은 비록 성 안토니우스가 직접 말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면전에서 제기되었으며, 당연히 그로부터 승인을 받았다(『도스트.』 18).

4. 또한 그는 “세포에 머무르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그가 말하길, 물고기가 육지에 오래 머물면 죽듯이, 수도사들도 세포 밖에서 오래 지내거나 세속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고요함에 대한 사랑을 잃게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물고기가 바다로 달려가듯이, 우리도 방으로 서둘러 돌아가야 하며, 방 밖에 머무는 동안 내면의 경건함을 잊지 않도록 해야 한다(도스트. 스. 10).

5. 일반적으로 그는 수도사가 자신의 방을 마치 바빌론의 용광로처럼 여겨, 그 안에서 모든 불순한 것을 태워버릴 수 있도록 엄격하게 생활할 것을 권고했다(Patr. gr. t.40, 1086).

6. 그러나 그는 사냥꾼에게 한 대답에서 알 수 있듯이, 수행의 강도에 있어 어느 정도 여유를 허용하기도 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사막에서 야생 동물을 사냥하던 어떤 사람이 아바 안토니우스가 형제들과 농담을 주고받는 것을 보고 유혹에 빠졌다고 한다. 장로는 그에게 때로는 형제들에게 여유를 주어야 한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기 위해, 그에게 말했습니다. “활에 화살을 끼우고 활시위를 당겨 보아라.” 그가 그렇게 했습니다. 장로가 말했습니다. “더 당겨 보아라.” 그가 다시 당겼습니다. 장로가 또 말했습니다. “더 당겨 보아라.” 사냥꾼이 대답했습니다. “제가 활을 지나치게 당기면 활이 부러질 것입니다.” 그때 장로는 그에게 말했다. “하나님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형제들의 힘을 지나치게 긴장시키면, 그들은 곧 지쳐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형제들에게 약간의 여유를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 사냥꾼은 이 말을 듣고 감동을 받아 교훈을 얻고 장로 곁을 떠났다. 그리고 형제들은 그 말로 힘을 얻어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성인의 행적』 13). 그 외에도 성공을 좌우하는 영적 수련이나 마음가짐을 지적하는 다음과 같은 격언과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그것들은 다음과 같다:

7. 인내. 이는 수행자에게 그토록 필요한 것이어서, 인내가 없다면 그 자신도 아무런 가치가 없다. 예를 들어, 형제들은 성 안토니우스에게 한 수도사를 칭찬했다. 그 수도사가 오자, 성 안토니우스는 그가 모욕을 견딜 수 있는지 시험해 보고자 했는데, 견디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앞면은 아름답지만 뒤쪽은 강도들에게 약탈당한 마을과 같다”(『성인행적』 15).

8. 인내가 필요한 이유는 우리에게 유혹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성 안토니우스는 이렇게 말하였다. “유혹 없이는 아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으며, 유혹이 없다면 아무도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성 안토니우스의 생애』, 5장).

9. 기도. 그는 몸소 모범을 보이며 이를 가르쳤는데, 모두가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기도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의 제자들이 말하길, 복된 노인은 때때로 기도에 너무 깊이 몰입하여 밤새도록 기도에 잠겨 있었고, 떠오르는 해가 경외심에 불타는 그의 열렬한 기도를 끊어 버릴 때면, 우리는 그가 이렇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왜 나를 방해하느냐, 해여? 너는 마치 나를 신성한 영적 빛에서 멀어지게 하려고 떠오르는 것 같구나(Patr. lat. t. 73, p. 848).

10. 눈물. 어느 날 한 형제가 성 안토니우스에게 “제 죄들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자는 울음과 신음으로 그 죄에서 벗어날 것이며, 덕을 기르고자 하는 자는 눈물을 흘리며 울음으로써 그렇게 될 것이다.” 시편을 부르는 것 자체가 울음이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기록(38장)에 따르면, 울음으로 인해 병에서 치유받았을 뿐만 아니라, 수명을 15년이나 연장받는 은혜를 입었으며, 그를 찾아온 18만 5천 명의 적군을 그가 흘린 눈물 덕분에 하나님의 권능으로 전멸시켰던 그 예를 기억하십시오. 성 베드로 사도는 울음으로 인해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그분을 부인했던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마리아는 구세주의 발에 눈물을 흘려 적신 덕분에, 이 일이 복음 전파와 함께 온 세상에 널리 알려질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Patr. lat. t. 73, p. 1055).

11. 성 안토니우스는 수도자의 삶에서 웃을 여지를 찾지 못했으며,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가 언젠가 웃어도 될까요?”라고 물었을 때,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주님께서는 ‘지금 웃는 자들아, 화가 있을지어다. 너희는 울며 통곡할 것이니라’(루카 6,25)라고 말씀하시며 웃는 자들을 책망하신다.” 그러므로 신실한 수도사는 웃어서는 안 되며,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자들을 위해 울어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평생 죄에 빠져 지내기 때문이다. 우리가 울부짖고 통곡하며,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죄 속에서 굳어지게 하지 않으시고, 회개하기 전에 죽음이 그들을 덮치지 않도록 끊임없이 간구합시다 (Patr. gr. t. 40, p. 1096. 바실리우스 대주교의 『간결한 교리』 31장에도 유사한 내용이 있음).

12. 위로부터 은총을 끌어당기고 모든 타락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주는 겸손. 성 안토니우스는 말하기를, “한 번은 땅 위에 펼쳐진 원수의 모든 그물을 보았고, 한숨을 쉬며 ‘누가 이것을 피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에게 ‘겸손’이라고 말하는 음성을 들었다”고 했다(도스트. 스. 7).

13. 그 후 왜 다음과 같이 가르치셨는가? “만약 우리가 선한 수행을 한다면, 주님 앞에서 지극히 겸손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께서 당신의 오른손으로 우리를 덮어 주시고 지켜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교만으로 치솟는다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서 당신의 보호를 거두어 가실 것이며, 우리는 멸망할 것이다.” (Patr. gr. t. 40, 1090쪽).

14. 또 다른 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만과 마음의 자만심이 마귀를 하늘의 높은 곳에서 심연으로 떨어뜨렸듯이, 겸손과 온유함은 사람을 땅에서 하늘로 높이 들어 올립니다(같은 책, 1081쪽).

15. 예를 들어 침묵과 같은 수행이 교만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그는 그 수행에 자학적인 의미를 부여할 것을 권고했다. 그가 말하길, 누군가 침묵이라는 수행을 실천한다면, 어떤 미덕을 행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말할 자격이 없기 때문에 침묵한다는 것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고 했다(Patr. lat. t. 73, p. 1051).

16. 또한 성 안토니오는 주님께서 우리 내면을 인도하시며,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겸손한 마음을 유지하도록 우리의 선한 점을 우리에게 숨기신다고 가르쳤다.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만약 제분업자가 바퀴를 돌리는 동물의 눈을 가리지 않는다면, 그의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을 것이다.” 그 짐승은 어지러워져 넘어지고, 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 우리도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우리 자신의 선한 행실을 보지 못하도록 가려지는데, 이는 그 행실로 인해 스스로를 칭찬하며 교만해지지 않고 모든 수고의 결실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는 우리가 불순한 생각에 휩쓸릴 때 일어나는데, 그런 생각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생각을 비난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는 우리의 선함에 대한 생각이 자리 잡을 수 없으며, 결과적으로 우리의 작은 선행은 이러한 불순한 생각들 때문에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된다(『페리프라즈』, 같은 책, 1037쪽).

17. 자만심이 얼마나 해로운지, 한 젊은 수행자가 기적을 행한 후 타락한 일에서 그 점이 뚜렷이 드러났다. 이 젊은이가 수행하던 곳을 지나 성 안토니오를 찾아가던 장로들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그는 야생 당나귀들을 불러 그 장로들을 등에 태워 성 안토니오에게 데려가라고 명령했다. 장로들이 이 일을 성 안토니우스께 말씀드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 생각에 이 수도사는 화물로 가득 찬 배와 같으나, 과연 부두에 무사히 도착할지는 모르겠다.” – 그리고 과연, 자만심에 빠져 있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타락하고 말았다. 이를 간파한 성 안토니우스는 제자들에게 말했다. “지금 그 젊은 수행자가 타락했다. “가서 보아라.” 제자들은 가서 그가 돗자리 위에 앉아 지은 죄를 통회하며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성인전』 94).

18. 그러나 자만심이 해로운 만큼, 반대로 자학은 그만큼 구원적이다. 이는 성 안토니우스가 하늘로부터 지시를 받았던 신발 장인의 예를 보여준다. 성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수도실에서 기도하던 중, “안토니우스여, 너는 아직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그 신발 장인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구나!”라고 말하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성 안토니우스는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그 신발 장인을 찾아내어, 그의 삶에 무엇이 특별한지 털어놓도록 설득했습니다. 그 신발 장인은 말했습니다. “제가 언제 어떤 선행을 한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도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 일을 시작하기 전에, ‘이 도시의 모든 사람,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선행 덕분에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나, 나 혼자만 내 죄로 인해 영원한 고통에 처해질 것이다’라고 말하곤 합니다.”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도 저는 마음속 깊은 진심을 다해 똑같은 말을 되뇌곤 합니다.” 이를 들은 성 안토니오는 자신이 아직 그 경지에 이르지 못했음을 깨달았습니다(Patr. lat. t. 73, p. 785).

19. 이것이 바로 그가 나중에 자주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되풀이하게 된 계기가 아니었을까? “우리는 언제나 모든 일에서 스스로를 책망하고 비난해야 하며, 이를 진심으로 해야 한다. 왜냐하면 스스로를 책망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시고 영광을 주시기 때문이다”(같은 책).

20. 상호 섬김과 도움. 형제들이 성 안토니우스께 물었다. “만약 누군가 ‘나는 형제들에게서 아무것도 받지 않을 것이며, 나 자신도 그들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겠다. 나에게는 내 것이면 충분하다’고 말한다면, 이것이 옳은 일입니까?” 성 안토니오는 대답했다. “내 자녀들아! 그런 사람은 마음이 잔인하며, 그의 영혼은 사자의 영혼과 같다. 그는 모든 선한 사람들의 공동체에서 소외된 자로 여겨져야 한다.” (Patr. Graec. t. 40, p. 1095).

21. 또 다른 때,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다. “형제들에게 어떻게 섬겨야 합니까?” 그는 대답했다. “형제들에게 섬기기를 원하는 형제들은, 마치 종이 주인을 섬기듯이 그들을 섬기라. 또한 주님께서 베드로를 섬기신 것처럼 하라.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창조주이시면서도 그에게 최후의 봉사를 베푸셨다.” 이를 통해 주님께서는, 자신에게 베풀어지는 봉사를 거절하는 자들이 흠이 없다면, 형제들에게 봉사하는 것을 천한 일로 여기는 자들은 더욱더 비난받을 만함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대로, 전자가 주님과 함께할 몫을 얻지 못한다면, 후자에 대해서는 무엇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같은 곳).

22. 그리고 그는 일반적으로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이웃으로부터 생명이 오기도 하고 죽음이 오기도 한다.” 우리가 형제를 얻으면 하나님을 얻는 것이요, 형제를 유혹하면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이다 (도스트. 스. 9).

23. 넘어지는 자들에 대한 연민과 관용. 아바 일리아의 수도원에서 한 형제에게 유혹이 닥쳤다. 그는 그곳에서 쫓겨나 산으로 가서 아바 안토니우스에게 갔다. 아바 안토니우스는 그를 잠시 머물게 한 뒤, 그가 왔던 수도원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형제들은 그를 다시 쫓아냈다. 그는 다시 아바 안토니우스에게 와서 말했다. “형제들이 저를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그때 장로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며 그를 보냈다. “바다 위에서 폭풍우가 배를 덮쳐 화물을 잃고 간신히 목숨만 건졌는데, 너희는 해안가에 무사히 도착한 것마저 가라앉히려 하느냐.” 형제들은 아바 안토니우스가 그 형제를 자신들에게 보냈다는 말을 듣자마자 즉시 그를 받아들였다(『성인전』 21).

24. 어떤 수도원에서 한 형제가 음행했다는 누명을 썼고, 그는 아바 안토니우스에게 찾아왔다. 그 수도원의 형제들도 그를 위로하고 다시 자신들 곁으로 데려가기 위해 함께 왔다. 그들은 그가 왜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 추궁하기 시작했으나, 그 형제는 자신이 그런 일을 전혀 하지 않았다고 변명하며 자신을 변호했다. 마침 그곳에 아바 파프누티우스 케팔루스도 있었다. 그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려주었다. “강가에서 무릎까지 진흙에 빠진 사람을 보았다. 어떤 이들이 그를 돕기 위해 다가왔는데, 오히려 그를 목까지 진흙 속에 빠뜨리고 말았다.” 아바 안토니우스는 그 후 이렇게 말했다. “보라, 바로 이런 사람이야말로 영혼을 치유하고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이다!” – 형제들은 장로들의 말에 감동하여 그 형제에게 절을 올렸고, 아버지들의 조언에 따라 그를 다시 받아들이었다(『성인의 행적』 29).

25. 누가 진정한 형제 사랑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한 성 안토니우스의 사상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아무리 원한다 해도, 하나님께서 그 안에 거하지 않으시면 결코 진정으로 선해질 수 없다. 왜냐하면 선한 이는 아무도 없으며, 오직 하나님만이 유일하시기 때문이다.” (Patr. lat. t. 73, p. 785).

 

모든 것의 궁극적 목표이자 완전함의 정점

1. 이 신의 내재, 즉 하나님 안에서 사는 삶이야말로 모든 수도 생활의 궁극적인 목표이자 완전함의 정점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성 안토니우스에게 이를 보여주셨는데, 그가 광야에서 다음과 같은 계시를 받았을 때였다. “도시에는 너와 비슷한 사람이 있는데, 그는 의사로, 자신의 잉여를 궁핍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매일 천사들과 함께 삼위일체 찬송을 부른다.” (즉, 이웃에 대한 사랑이 완전할 때, 하나님 안에서 살며 하나님 앞에서 행한다는 뜻이다). (성인 전기 24).

 

성 안토니우스의 완전함과 하늘에서의 영광

1. 아바 안토니우스에 대해 그는 예지력이 있는 사람이라고들 했지만, 세간의 소문을 피하기 위해 이를 널리 알리기를 원치 않았다. 그에게는 세상의 현재와 미래의 사건들이 모두 드러나 있었다 (성인전 30).

2. 어떤 장로가 하나님께 (영광 중에 계신) 성부들을 보게 해 달라고 간구했더니, 아바 안토니우스를 제외한 모든 분을 보았다. 그는 자신을 인도하던 이에게 물었다. “아바 안토니우스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자 그 사람은 대답했다. “안토니우스는 하나님이 계신 곳에 있습니다!” (성인 전 28).

 

5. 성 안토니우스 대성인의 일부 말씀에 대한 해설로, 그가 죽은 후 한 노승이 남긴 것

1. 수도사들의 질문. 성 안토니오 아바가 제자 파블로에게, 그가 세상을 떠나 그와 함께 살기를 청했을 때 한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수도사가 되고 싶다면, 네 약함을 지탱해 줄 형제들이 많은 수도원으로 가라.”

장로의 답변. 이를 통해 우리는 수도원에 연로하고 쇠약한 이들, 병든 이들, 눈먼 이들, 마비된 이들도 받아들여야 하며, 비록 그들의 쇠약함으로 인해 모든 수고를 감당할 수는 없더라도, 그들이 기쁨과 열정으로 덕을 쌓는 데 전념할 때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배웁니다. 그러므로 노쇠하고 병든 노인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수도원 원장들은 상당한 질책을 받아 마땅하다. 그들은 매우 선한 성품을 지녔음이 알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건장한 청년들을 기꺼이 받아들여 수도원 내 각종 봉사와 심부름을 시킨다. 비록 그들이 건방지고 뻔뻔하더라도 말이다. 이러한 원장들에 대해 복된 해석자 성 요한 크리소스톰([9] )은 (수도원의) 완벽한 관리』라는 책에서 엄하게 질책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제자들이 덕행에 소홀히 하도록 방치하는 한편, 육체적·세속적인 일에는 그들을 강력히 부추긴다.” 덕을 닦기 위해 수도 생활을 선택한 이들에게, 그들은 세속적인 일로부터의 휴식과 평안을 주지 않고 끊임없이 그 일을 수행하도록 강요하며, 욕하고, 조롱하고, 비난하며, 그들이 체력 부족 때문이든 때로는 열의가 약해졌기 때문이든, 맡겨진 일을 특별히 서두르지 않고 수행할 때면, 비록 그들이 영적인 일에는 매우 성실하고 열심이라 할지라도; 반대로 모든 수고와 정성을 세속적인 일에 쏟는 자들을, 비록 그들이 미덕을 쌓는 데는 게으르더라도, 큰 칭찬으로 치켜세운다. 그리고 그들의 이러한 근면함은 순종의 미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세속적인 일에 몰두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나쁜 점은, 그들이 게으르든 부지런하든 상관없이 그들을 노예처럼 대한다는 것이다. 아바 피멘은 이렇게 말했다. “세 명의 키노비트 중 한 명은 훌륭하게 침묵을 지키고, 다른 한 명은 병들었지만 하나님께 감사하며, 세 번째는 기꺼이 순종을 이행한다면, 그들 모두는 하나의 수행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로 이 성인은, 많은 키노비트들이 모인 수도원에는 다양한 순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육체적으로 튼튼한 이들뿐만 아니라, 끊임없는 침묵에 자신을 바치는 연약한 형제들도 있어야 함을 보여주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모든 수고는 헛된 것이다.

2. 질문. 아바 안토니우스가 제자 바울에게 “가서 은둔처에 머물며, 악마들로부터 오는 유혹을 연구하라”고 말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변. (그가 완전해지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수도자의 완전함은 자기 내면의 모든 것을 영으로 다스리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영적 자제력은 마음의 순결과 함께 온다. 마음의 순결은 이성이 마음을 다스릴 때 이루어지며, 이성은 끊임없는 기도가 다스린다. 마귀로부터 오는 싸움은 생각과 환상을 통해 일어나는데, 이는 은둔과 침묵 속에서 더욱 격렬하게 자극받기 때문이다.

주석. 대응의 힘. 은둔은 악마들이 심어 놓는 가장 미묘한 생각들과 끊임없이 싸울 기회를 제공한다. 이 싸움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안에 계시고 마음을 경청하시며 다스리시는 분 안에서 이성적으로 치러진다. 다양한 영적 싸움의 경험을 통해 이 영적 수련을 끊임없이 지속함으로써, 영적 자제력을 배우고 그에 대한 습관을 기르게 되며, 바로 그 안에 수도사와 모든 그리스도인의 모든 영적 완전함이 담겨 있다.

3. 질문. 아바 안토니우스가 “물에서 건져낸 물고기가 죽는 것처럼, 자신의 방 밖에서 오랫동안 머무르는 수도사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고 말한 것은 무슨 뜻입니까? 수도사가 어떻게 물고기처럼 죽게 됩니까?

답변. 영혼의 삶은 끊임없는 사랑 어린 신에 대한 묵상에 있으며, 이는 마음과 영을 포용하고 하나로 결합함으로써 비로소 영혼의 삶이라 불릴 자격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수도사가 도시들을 전전하며 돌아다닌다면, 볼거리와 대화에 정신이 팔려 영적인 삶을 잃고 죽게 된다. 이는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그분을 잊어버리며, 수도실에서 침묵을 지키며 많은 수고를 통해 쌓아 올린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자신의 마음에서 쫓아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고행과 고난에 대한 사랑을 소홀히 여기게 되고, 육체의 안락과 쾌락에 빠져들게 되며, – 시력, 청각, 촉각, 미각, 후각과 말을 통해 들어오고 나가는 형상들의 요동치는 움직임으로 인해 그의 마음의 순결이 흐트러지게 된다; 이 모든 것이 그를 음행과 다른 정욕으로 이끌게 되는데, 이것이야말로 수도사의 진정한 죽음이자 파멸이다. 그러므로 복자 안토니우스가 잘 말했듯이, 육지로 끌어올려진 물고기가 죽는 것처럼, 수도실을 떠나 도시와 마을에서 시간을 보내는 수도사도 죽게 된다.

4. 질문. 아바 안토니우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고독 속에서 사는 자는 세 가지 싸움, 즉 혀와 눈, 귀로 인한 싸움에서 자유롭다. 그러면 그에게 남은 것은 오직 마음의 싸움뿐인가?” 이 복자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답변.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침묵과 은둔 속의 싸움이 시각, 청각, 혀로 마음이 산만해지는 형제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싸움보다 덜하기 때문이 아니라, 은둔 생활을 하는 이들에게는 감각에서 비롯된 싸움이 낯설다는 것을 이 말로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다른 이들은 악마들이 일으키는 마음의 싸움보다 감각에서 비롯된 싸움에 더 많이 시달리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마음속의 싸움이 시각, 언어, 청각에서 오는 싸움들로 인해 더욱 심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침묵의 삶으로 물러났습니다. 왜냐하면 수도원 안팎을 드나들며 수도원을 떠나기도 하고 다시 들어오기도 하는 (공동 생활을 하는) 형제들은, 마음의 갈등에 육체적 감각에서 오는 갈등이 더해지기 때문에 쉽게 넘어지기 마련이며, 침묵 속에서 살며 오직 마음의 싸움만으로 괴로워하는 수도사들도, 육체적 감각에서 오는 싸움이 그들에게 닥친다면 마찬가지로 쉽게 타락하게 된다. 이는 은둔 생활을 하던 중 어떤 계기로 여성들이 찾아와, 그로 인해 마음의 투쟁에 육체의 형상과 얼굴의 아름다움을 보는 환상이 더해졌던 그 형제들(은둔자들)에 의해 충분히 입증된다. 그들은 점점 거세지는 마음의 투쟁에 즉시 굴복하여 타락하고 말았다. 고독 속에서 사는 이들에게 있어 영적 감정의 유혹이 육체적 감각의 유혹보다 더 강력하고 치열하다는 사실은, 복자 에바그리우스의 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고독 속에서 사는 수도사들에게는 악마들이 어떤 매개체도 없이 직접적으로 유혹을 가하지만, 어떤 중재자도 없이 직접 싸움을 벌이는 반면, 수도원에 거주하며 덕을 쌓는 데 열중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도 잔혹하고 성가시며 교활한 방탕한 수도사들을 선동하고 부추긴다고 말합니다.

5. 질문. 성 아바 안토니우스가 한 다음의 말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수도사의 방은 바빌론의 용광로요, 하나님의 아들이 계셨던 세 소년의 장소이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던 불기둥이다.”

답변. 불이 두 가지 성질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고통스럽게 태우는 열기이고 다른 하나는 기쁨을 주는 빛인 것처럼, 수도실에 인내하며 머무는 것에도 두 가지 작용이 있다. 하나는 침묵 속에서 수련생들을 괴롭히고 불안하게 하는데, 때로는 극심한 쇠약으로, 때로는 꾸지람으로, 다른 하나는 성취로 기쁨을 주어, 정욕을 극복하고 순결함에 있어 완전해져 밝은 환상을 누리게 된 이들을 평온하게 만듭니다. 그분께서 세 소년에 대해 말씀하신,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보았다는 말의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나니아, 아사리아, 미사엘이 바빌론에서 불타는 용광로에 던져졌을 때, 타지도 않고 화상조차 입지 않았던 것은, 그들에게 묶인 멍에를 풀어주고 불의 파괴적인 작용으로부터 구원해 주기 위해 하나님의 천사가 보내졌기 때문이듯이, 마찬가지로 은둔 생활을 하는 형제들에게도 은둔 생활을 하는 형제들에게도, 처음에는 악마들이 그들에게 일으키는 정욕과의 싸움이 매우 힘들지만, 우리 주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의 은혜로운 도우심이 결코 그들을 떠나지 않고, 명백히 그들을 찾아와 그들과 함께 머무르시니, 이는 그들이 이 도움으로 정욕과 원수들을 이겼을 때, 그들에게 완전한 사랑과 그분의 빛나는 영광의 은혜를 누리게 하려 하심이라.

6. 질문. 아바 안토니우스의 다음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악으로 악을 갚아서는 안 되며, 수도사가 아직 이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면 침묵과 고요함을 지키라.” 어떻게 침묵을 통해 이(분노하지 않음)를 이룰 수 있습니까?

답변. 만일 연약한 형제가 말로 형제를 모욕하고 마음속에 그를 향한 증오를 품고 있다면, 자신의 방에 머물며 사람들과의 대화를 삼가고, 그 동안 악한 생각을 억누르며 끊임없이 기도와 성경 읽기에 전념한다면, 그에게 평화의 은총이 임하여, – 그의 마음이 밝아지고, 정욕에서 해방되어 그의 영이 하나님 안에서 기뻐할 것입니다. 이는 이 사람이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분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오르고, 그 십자가에 입을 맞추며,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그토록 사랑하셔서 독생자까지 그를 위해 죽음에 내어주셨다는 사실 (요한복음 3:16), 이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우리가 아직 죄인일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로마서 5:8)는 사실로 우리에게 그 사랑을 보여주신 것이다. – 만일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해 그분을 죽음에 내어주셨을 뿐만 아니라, 게다가 십자가라는 그토록 수치스러운 죽음에 내어주셨다면, “그분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더하심” (로마서 8:32)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또 무엇이 우리에게 거절되겠는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위대한 자비와 사랑은, 우리가 결코 자신의 욕망을 위해 살지 말고, 우리를 위해 죽으신 분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할 뿐만 아니라(고린도후서 5, 14, 15)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죽음을 지시고 그러한 모욕을 견디신 후 다시 높은 곳에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을 인내의 시작이자 본보기로 바라보게 합니다. 그러므로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으면 그분과 함께 영광을 얻을 것이며(롬 8:17), 그분과 함께 인내하면 그분과 함께 왕이 될 것입니다(딤후 2:12). 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형제들아, 우리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자”(히브리서 12:2)라고 권면하는가? 보라, 자신의 영혼의 원수였던 죄인들을 위해 그분이 얼마나 많은 것을 견디셨는지! 그러므로 그분을 사랑함으로 인해 당해야 할 곤란과 모욕, 비방, 심지어 죽음까지 겪게 된다고 해서 낙심하거나 영혼이 나태해지지 마십시오. 여러분에게 불쾌감을 주는 자들을 위해 기도 중에 용서를 구하십시오. 마치 주님께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며 말씀하신 것처럼: “아버지, 그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누가복음 23:34), 또한 복자 스테파노가 자신을 돌로 치던 자들을 위해 우리 주님께 용서를 구하며 “주님,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소서”(사도행전 7:60)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만약 그 수도사가 자신의 방에 홀로 앉아 이런 식으로 사색한다면, 그의 영은 굳건해질 것이며, 주님 안에서 모든 정욕을 다스리게 될 것이며,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거나, 누구에게 화를 내거나, 악으로 악을 갚는 일은커녕, 오히려 모욕과 억울한 대우를 당하게 되더라도 큰 기쁨으로 기뻐하며 이를 자신의 영광으로 여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수도사가 자신의 방에서 침묵과 자기 성찰, 그리고 금식, 기도, 신에 대한 묵상 및 침묵 속에서 실천되는 다른 미덕들과 같은 그리스도의 계명을 인내심 있게 이행함으로써 이르게 되는 도덕적 강인함의 경지이다. 그러므로 복자 아바 안토니우스가 아주 잘 말했듯이, 수도사가 자신의 혀를 제어하여 모욕과 불평, 수다를 삼가지 못하고, 자신의 마음을 그러한 타락으로부터 지키지 못한다면, 적어도 할 수 있는 한 침묵과 고요함에 전념해야 한다.

7. 질문. 한때 형제들이 아바 안토니우스에게 와서 그에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지킬 수 있는 계명을 주십시오.” – 그가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듯이, 누군가 네 한쪽 뺨을 치면, 그에게 다른 쪽 뺨도 내밀라(마태복음 5,39).” 그들이 대답했다. “우리는 도저히 이를 실천할 수 없습니다.” 장로는 그들에게 말했다. “다른 뺨을 내밀 수 없다면, 한쪽 뺨을 맞는 것을 인내로 견뎌라.” 그들이 말했다. “그것도 할 수 없습니다.” 장로는 또 그들에게 말했다. “그것조차 할 수 없다면, 적어도 너희를 때리는 자에게 맞받아치지 마라.” 그들이 말했다. “그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때 위대한 장로는 제자에게 말했습니다. “이 형제들에게 먹을 것을 조금 준비해 주시오. 그들은 병들었으니.” 이 성스러운 아버지의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 그는 그런 자들에게는 먹이를 주고 보내주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장로가 결론적으로 “너희에게는 기도가 필요하다”고 말했으니, ‘음식’이라는 말 속에 장로들의 기도를 염두에 두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너희가 그 어느 것도 할 수 없다면, 너희를 위한 기도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병자들은 위장이 약해 온갖 종류의 음식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특별한 음식이 필요한 것처럼, 생각의 힘이 너무 약해 우리 주님의 계명 중 아주 작은 부분조차 지킬 수 없는 여러분에게도 영혼의 치유와 치료, 즉 여러분을 위해 간구해 줄 수 있는 장로들의 기도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8. 질문. 성 아바 안토니우스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온 땅에 펼쳐진 마귀의 그물을 보았고, 이에 탄식하며 말했습니다. ‘인류여, 화가 있을지어다. 누가 이로부터 벗어날 수 있겠는가?’ 그러자 누군가 내게 말했습니다. ‘겸손 이 너희를 구원하리니, 마귀들은 겸손한 자를 얽어매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인은 이 그물을 어떻게 보셨습니까? 감각적으로 보셨습니까, 아니면 마음으로 보셨습니까? 그리고 “겸손 이 그로부터 구원해 주니, 악마는 겸손한 이를 얽어매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그에게 말한 이들은 누구입니까?

답변. 이집트의 위대한 아바 마카리우스는 아바 안토니우스의 제자로, 아바 안토니우스가 보았던 것과 동시에, 다만 다른 형태로, 스키트 사막의 가장 깊은 곳에서 적의 모든 계략을 보았습니다. 성 마카리우스는 두 사람의 모습을 한 악마들을 보았는데, 그중 한 명은 구멍 난 옷을 입고 있었고, 그 옷에는 여러 색의 띠가 달려 있었으며; 다른 한 명은 온몸이 낡은 옷으로 뒤덮여 있었고, 그 위에는 작은 방울들이 매달린 어떤 그물이 씌워져 있었으며, 그들에게 또 다른 한 명이 다가왔는데, 그는 덮개와 같은 날개로 몸을 가리고 있었다. 아바 마카리우스는 육안으로, 즉 육신의 눈으로 바로 이 존재들을 보았으나, 성 아바 안토니우스는 마음의 눈으로, 마치 환상을 보는 것처럼, 마귀가 수도사들에게 항상 치고 그들을 얽어매고, 붙잡아, 덕의 길로 무사히 여정을 마치는 것을 방해하려는 모든 마귀의 그물을 보았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교만의 그물이 나를 덮었고, 덫이 이미 내 발을 가로막고 있도다”(시편 139:5). 그러므로 그는 마귀의 그물들이 사냥꾼들이 그물을 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땅 위에 설치되어 있음을 보았습니다. 이를 보고 그는 놀라움과 공포에 휩싸였는데, 수많은 올가미와 그물들 때문이었습니다. 그 안으로 짐승이라도 한 마리 걸려들었다면, 온갖 종류의 덫과 얽힘이 너무 많아 결코 빠져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아브바 안토니우스에게 육체적·영적 모든 정욕의 모습이 드러났는데, 바로 악마들이 수도사들을 괴롭히는 바로 그 정욕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거룩한 천사들을 보았는데, 그들은 각 정욕의 그물을 하나하나 그에게 지명하여 알려주었다. 즉, 탐식이나 과식의 그물, 탐욕의 그물, 음행, 허영, 교만 및 그 밖의 정욕들의 그물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원수가 형제들에게 걸림돌을 놓아 그들을 얽어매고, 하나님의 사랑의 위대한 길을 걷는 그들의 행보를 막기 위해 어떻게 그물과 매복을 치는지, 그 모든 술책과 교묘한 수법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그물들을 보고 공포에 사로잡힌 그는 신음하며 말했다. “우리 수도자들에게 화가 있도다!” “어떻게 하면 이 올가미에서 벗어나 구원받아 그 속에 얽히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천사들은 그에게 말했다. “겸손이 그 모든 것에서 구원해 주며, 겸손을 지닌 자는 결코 그 속에 얽히지도 않고 넘어지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겸손만으로는 정욕과 악마를 이길 수 없다고 말하지 않았다. 겸손과 더불어 다른 행실과 수련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겸손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하며, 마찬가지로 겸손 없는 행실도 아무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겸손이 없는 행실은 마치 소금으로 간하지 않고 흙으로만 간한 고기와 같아서, 쉽게 상하고 썩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육체적 수고와 마음의 내적 수련, 침묵, 그리고 완전한 겸손을 동반한 끊임없는 기도는 모든 정욕과 악마를 이겨내어, 천사들이 아바 안토니우스에게 말했듯이, 이를 갖춘 수도사를 악마들이 감히 건드릴 수 없게 한다.

9. 질문. 아바 안토니우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선한 수행을 한다면, 우리 연약함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오른손으로 우리를 덮어 주시고 지켜 주시도록, 하나님 앞에서 깊이 두려워하며 지극히 겸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교만해지면, 그분께서 우리에게서 당신의 보호를 거두실 것이며, 우리는 멸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복자의 말씀은 어떤 뜻입니까?

. 우리는 고난과 슬픔, 그리고 전쟁이 있을 때뿐만 아니라, 전쟁이 끝나고 평화와 안식이 찾아왔을 때에도 항상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겸손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겸손은 전쟁 중에는 우리에게 도움을 주고 인내의 무거운 짐을 짊어질 힘을 주며, 전쟁이 끝나고 평화와 안식이 찾아왔을 때는 교만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고 타락하지 않도록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의 나태함과 우리를 사로잡는 신을 잊는 태도 때문에 우리는 겸손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드러나는 우리의 연약함은 저절로 겸손으로 이끌고, 모든 교만을 떨쳐내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항상 위험과 불안 속에 머물기를 원치 않으시며, 오히려 그분의 자비와 인간 사랑으로 우리를 감싸주시고, 정욕의 싸움과 악마들의 사나움을 멈추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싸움과 고난의 시기에 위험과 어려움 때문에 겸손을 구하지만, 평온하고 안전하여 싸움이 없는 시기에는 하나님을 잊고 교만해져 버린다면, 하나님께서는 의심할 여지 없이 우리에게서 그분의 보호를 거두실 것이며, 우리는 파멸과 절망 속에서 망하게 될 것입니다. 어느 때라도 우리에게 겸손이 필요하지 않은 때가 없으니, 이는 모든 장소와 모든 행동에서 우리가 반드시 겸손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10. 질문. 어떤 장로가 하나님께 모든 성부들을 보여 달라고 기도했더니, 성 아바 안토니우스를 제외한 모든 분을 볼 수 있는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분들을 보여 주신 분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에 아바 안토니우스가 계십니다.” 그는 어떻게 모든 성부들을 볼 수 있었으며, 왜 아바 안토니우스는 보지 못했습니까?

답변. 그 장로의 마음이 천국으로 들려 올려져 그곳에서 성부들을 보았거나, 성부들이 직접 그에게 찾아왔거나, 천사가 환상을 통해 그들을 보여준 것일 수 있습니다. 아바 안토니우스는 두 가지 이유로 그에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는 성 아바 안토니우스의 영광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보여주기 위함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 장로가 모든 성부들을 보았다는 사실에 자만하여 교만해지지 않도록 그를 겸손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간구를 들어주시며, 이 성부들의 환상을 통해 그에게 그들을 본받도록 요구하셨고, 성 안토니우스를 볼 자격이 주어지지 않은 것은, 그 장로가 그를 본받을 만큼의 힘이 없다는 것을 암시함으로써, 교만을 누르고 겸손해지도록 동기를 부여하신 것이었습니다.

11. 질문. 어느 날 동정자 아바 암몬이 아바 안토니우스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제가 당신보다 할 일이 더 많은 것 같은데, 어찌하여 사람들 사이에서 당신의 이름이 제 이름보다 더 유명합니까?” 성 안토니우스는 그에게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제가 당신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어떤 의도로 한 것입니까?

답변. 아바 암몬은 자신의 행실을 자랑한 것도 아니었고, 아바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사랑을 자랑한 것도 아니었으나, 그들의 말에는 다음과 같은 의도가 담겨 있었다. 이 성인들이 수도 생활의 첫 창시자이자 은둔 생활의 개척자였기에, 그들은 상호 합의하에 내면의 정신적 질서가 육체적 수련보다 더 뛰어나다는 사실을 확립하고 모든 수도사들에게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 내면의 마음의 질서는 수도사의 영혼을 하나님에 대한 가장 완전한 사랑으로 인도하고 고양시키며, 이를 통해 그를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환상과 계시를 받을 자격이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육체적인 수련은 수도사를 육체의 정욕으로부터 해방시키고, 덕을 굳건히 하며, 정욕을 물리칠 힘을 주고, 육체에 순결을 가져다준다. 반면 마음의 수련은 영혼을 악마들과 그들이 심어 놓는 생각들에 대항하여 무장시키고, 사랑으로부터 견고함을 얻어 성령께서 다스리실 자격을 갖추게 되는 마음의 순결을 가져다준다. 덕행에 정진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영광이 사람들 사이에 널리 알려질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사막 수도자들의 시초이자 수도사들 중 맏아들인 아바 파블로(아바 안토니우스가 때로는 예언자 엘리야, 때로는 세례자 요한, 때로는 사도 바울이라고 부르던 분)는 살아 계실 때 사람들 사이에서 조금도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그 두 성인은 서로를 확증하고 우리에게 어떤 수행의 방식이 다른 것보다 더 뛰어난지 — 육체적인 것인지, 아니면 내면의 은밀한 영적 투쟁인 영적인 것인지 — 가르쳐 주고자 했으니, 끊임없는 기도와 신적 묵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내면의 은밀한 영적 투쟁을 통해, 이것이 완전함에 이르면 수도사의 마음을 영적 차원으로 끌어올려, 영적 기도와 하나님에 대한 경외, 그분을 관조하며, 영원토록 찬양받으실 우리 주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경지에 이르게 한다. 아멘.

12. 질문. 성 아바 안토니우스는 하나님께서 마귀가 이 인류에게 강력한 싸움을 일으키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 어떻게 그런 것입니까?

답변. 하나님께서는 이 인류를 불쌍히 여기시어,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열정과 선한 행위에 대한 열심이 부족하기 때문에 마귀에게 지나치게 괴롭힘을 당하지 않도록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마귀는 우리의 연약함과 나태함 때문에 우리를 약하게 공격합니다.

13. 질문. 아바 안토니우스의 다음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만약 제분공이 노새의 눈을 가리지 않았다면, 그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노새가 머리가 어지러워 쓰러졌을 것이고, 일은 중단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신성한 섭리에 따라 가려지게 됩니다. 우리도 처음에는 선행을 하면서도 그것을 보지 못하도록 하는데, 이는 우리가 스스로를 복된 자로 여기지 않게 하고, 그로 인해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부끄러운 생각에 빠지기도 하는데, 이를 보고 스스로를 책망하기 위함입니다. 바로 이러한 부끄러운 생각들이야말로 우리가 행하는 작은 선행을 가리는 덮개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스스로를 책망하는 사람은 자신의 상을 잃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 이 말씀에 어떤 유익이 있는지 우리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답변. 모든 성인이 환시를 볼 자격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선한 행실과 미덕으로 가득 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행하는 선행이나 그들에게 예비된 약속조차 보지 못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미덕을 기뻐하지 않으시거나 그들의 선한 행실로 인해 위로받지 않으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선한 이들에게 예비된 상에서 무언가를 깎아내리시리라고?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것은, 덕을 갖춘 사람들이 교만해지지 않게 하시고, 그로 인해 그들의 덕의 가치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게 하시며, 그들에게 예비된 복을 잃지 않게 하시며, 하나님의 은총에서 멀어지지 않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왜 그들이 선한 일을 행하고 덕을 좇는 자들이기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하시면서도, 때로는 악마들이 그들을 조롱하고, 그들에게 수치스러운 생각을 심거나,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거나, 상처를 입히도록 내버려 두시는가? 이는 그들이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항상 조심하고 경계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들이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그들의 삶은 변덕스럽고 변덕스러우니까요. 그러나 선한 행실로 인해 그들에게 예비된 복에 대한 생각은, 그것을 얻기 위해 꾸준히 선을 행하려는 열정을 그들에게 북돋아 주는 반면, 자신의 결점과 연약함을 자각하는 것은 그들을 교만에서 멀어지게 하고, 그들이 온갖 종류의 겸손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하며, 또한 끝없는 하늘나라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지극한 기쁨을 얻게 될 그 때에, 자신의 덕을 잃지 않도록 온갖 방법으로 경계하게 만듭니다.

14. 질문. 시리아 출신의 아바 헬레니우스가 아바 안토니우스에게 왔을 때, 아바 안토니우스는 그를 보고 말하였다. “환영합니다, 내일 아침 떠오를 새벽별이여.” 그러자 아바 헬레니우스는 그에게 대답하였다. “당신도 안녕하십니까, 우주를 빛내 주신 밝은 기둥이시여.” – 이 헬레니우스는 누구입니까? 그리고 왜 복된 분께서 그를 그렇게 부르셨습니까?

답변. 이 헬레니우스는 아바 안토니우스 시대에 살았으며, 수행의 경지와 행적 면에서 그와 동등한 인물이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승리자 황제는 그를 칭찬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드립니다. 제 시대에 세 분의 신성한 빛, 즉 복된 아바 안토니우스, 아바 헬레니우스, 아바 에우킨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그들이 그 당시 살아가고 유명했던 모든 수도사들을 훨씬 능가했기 때문이다. 아바 안토니우스가 그를 ‘새벽별’이라고 부른 것은, 마치 새벽별이 크기와 밝기로 다른 모든 별들을 능가하듯이, 아바 헬레니우스가 은총의 빛으로 당대 다른 모든 수도사들을 능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바 엘레니우스 역시 아바 안토니우스에게, 그의 탁월한 경지와 그에게 주어진 은총의 빛이 얼마나 위대한지 자신이 잘 알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그를 온 우주를 빛내 준 ‘빛나는 기둥’이라 불렀다.

15. 질문. 아바 안토니우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자신의 수준과 지위를 알지 못하고, 우리가 착수하는 일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며, 수고 없이 덕을 이루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곳에서 유혹을 마주치면, 어딘가에는 마귀가 없는 곳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다른 곳으로 옮겨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쟁이 있음을 깨달은 자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끊임없이(어디서나) 싸우는데, 이는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누가복음 17, 21)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 주님께서는 이 말씀으로 무엇을 가리키시는가?

. 그 말씀의 뜻은 이러합니다. 어떤 이들은 마귀가 없는 곳을 찾으려고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가지만, 옮겨간 곳에서도 유혹을 만나면 또 다른 곳으로 떠나버립니다. 그러나 영적 전쟁이 있음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자신이 사는 곳에서 싸우며, 다른 곳을 찾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는 말의 뜻은, 우리 수도사들이 세상을 떠나 주님의 계명에 따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르는 자로서, 한 곳에 머물며 오로지 자기 영혼의 구원에만 전념하고, 그곳에서 마주치는 온갖 종류의 시련을 견뎌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그 뜻은 곧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데 있다—우리는 어디에 있든지, 그것이 정욕에서 비롯된 것이든, 악마에서 비롯된 것이든, 사람에서 비롯된 것이든, 모든 시련과 유혹을 인내로 견뎌내야 한다. 그러나 싸움에 능숙하지 못하고 어떤 고난도 견디는 데 익숙하지 않은 이들은, 싸움으로부터의 평안과 생각들로부터의 피난처를 찾으려 하며,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옮겨 다니며 서둘러 떠난다. 그러니 우리가 제자리에 머물며, 만일 시련이나 유혹이 닥치면 금식하고, 기도하며, 무릎을 꿇고, 우리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가슴을 치며, 눈물과 마음의 아픔으로 그분께 도움과 구원을 간구합시다. 그분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주님께서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계시며, 영이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리라”(시편 33:19), 그리고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누가복음 17:21), 즉 ‘내가 너희 안에 거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곧 우리 안에 항상 거하시는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복된 바울도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알지 못하느냐?” (고린도전서 3:16). 그분께서 우리 안에 계실 뿐만 아니라, 우리도 그분 안에 거하니, 그분께서 친히 말씀하신 대로 “너희는 내 안에 있고 나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요한복음 15:4)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며, 우리 자신이 그분의 거처라면, 유혹과 환난과 전쟁이 닥칠 때 우리 주님을 떠나지 말아야 하며, 다른 곳으로 이주할 때에도 타국이나 다른 곳에서 도움과 피난처를 찾지 말고, 각자의 자리에 머물며 우리 안에 거하시는 주님께 도움을 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를 간구합시다. 이와 함께 우리의 생각을 우리 영적 지도자들에게 털어놓고, 우리를 돕기 위해 그들의 기도를 청합시다. 각자의 자리에서 인내하며, 언제나 우리 구세주의 보호하심에 의지할 것이며, 그분은 의심할 여지 없이 모든 싸움에서 우리를 승리자로 만드실 것입니다.

 

성 마카리오 대성인

 

성 마카리오의 생애와 저술에 관한 기록

성 안토니우스의 가르침의 가장 가까운 계승자는 성 마카리오스 이집트인이었습니다. 전승에는 성 마카리오스가 성 안토니우스를 방문한 사례가 단 두 번만 기록되어 있지만, 이것이 유일한 사례는 아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성 마카리우스는 성 안토니우스의 장황한 대화를 한 번 이상 들어야 했을 것이다. 크로니우스(『라브스』 제23장)가 증언하듯이, 성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은둔 생활을 바탕으로, 그에게서 교훈을 얻기 위해 모인 형제들과 수도원에서 그를 기다리던 형제들에게 때로는 밤새도록 설교를 하곤 했다. 그 때문에 성 마카리우스의 대화 속에서는 성 안토니우스의 일부 가르침이 거의一字一句 그대로 들려온다. 이 두 글을 차례로 읽어보는 사람은 이를 즉시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등불인 성 마카리우스가 그 위대한 등불인 성 안토니우스로부터 불을 받았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성 마카리우스의 생애에 관한 전승은 온전히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모든 것은 그의 대화가 출판될 때 함께 수록된 전기 속에 모아져 있다. 그 전기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사건은, 그가 아직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던 시절 겪었던 억울한 누명이다. 여기에는 얼마나 큰 겸손과, 얼마나 큰 자기 희생, 그리고 얼마나 큰 하느님의 뜻에 대한 헌신이 담겨 있는가! 이러한 특성들은 이후 성 마카리오의 일생을 특징짓게 되었다. 사탄조차도 성 마카리오의 겸손에 의해 완전히 패배했다고 공개적으로 시인했다. 그 겸손은 또한 우리가 마침내 성 마카리오에게서 볼 수 있는 영적 완성과 은총의 선물이라는 높은 경지에 이르는 사다리이기도 했다. 성 마카리오의 저술 중에는 50편의 대담과 한 편의 서신이 있다. 이들은 오래전부터 러시아어 번역본으로 출간되어 왔으므로, 우리 선집에 그대로 수록할 필요는 없다. 그 중에서 성 마카리우스의 가르침을 일정한 순서대로 보여줄 수 있는 부분을 선별해 보겠다. 이는 그것들이 하나의 완결된 전체를 이루고 있으며, 기독교의 핵심 사명인 타락한 영혼을 성령의 은총으로 거룩하게 하는 일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그의 거의 모든 가르침이 지향하는 핵심이다. 『그리스도의 자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책은 성 마카리오스의 대화록 전체가 아니라, 시메온 메타프라스토스가 그의 대화록에서 발췌한 150개의 장을 수록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 책에서 일곱 편의 설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메타프라스토스가 한 일은 누구라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성 마카리우스는 수행의 세부 사항에는 다루지 않습니다. 그가 설교를 전하던 대상자들은 본래부터 열성적인 수련자들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주로 그러한 수련에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그들이 지향해야 할 궁극적인 목표를 알려주며, 그러한 수련과 노력을 고양시키는 데에만 주안점을 두었습니다. 이는 앞서 언급했듯이, 성령의 은총으로 영혼을 거룩하게 하는 것입니다. 영성화는 영혼의 영혼입니다. 그것 없이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것은 미래의 빛나는 상태를 보장하는 보증이기도 합니다. 성 마카리오는 타락한 영혼을 다루며, 그 영혼이 어둠과 타락, 생명이 없는 상태에서 벗어나 빛으로 나아가 치유받고 살아나도록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그의 가르침은 세속을 버린 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기독교인에게 중요합니다. 기독교란 바로 타락에서 일어나 다시 일어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오신 이유도 바로 그것이며, 교회 내의 그분의 모든 구원적 제도 또한 그 목적을 향해 있습니다. 비록 그가 이 일에서 성공하기 위한 조건으로 곳곳에서 세속을 등진 삶을 제시하지만, 일종의 세속 탈피는 평신도들에게도 필수적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 대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무슨 구원이 있겠는가? 가르침을 선정함에 있어 우리는 성 마카리오의 대화를 읽을 때 머릿속에 저절로 그려지는 그 순서를 따르기로 하자. 성 마카리오는 종종 우리의 기원으로 생각을 되돌려, 첫 사람이 얼마나 밝은 상태에 있었는지를 묘사하는데, 이는 그가 가장 매력 없는 모습으로 그려내는 타락한 인간의 본모습이 본래 어두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더욱 어둡게 보이게 하기 위함이다. 그가 이 두 가지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성육신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성령의 은총을 베푸신, 그 무한한 하나님의 자비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 세 가지 주제를 제시하는 목적은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구원을 이루고자 하는 열망을 불러일으키고, 그 모든 여정을 인내하며 완수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함이다. 이 길은 주님을 따르겠다는 확고한 결심을 배 속 깊이 새기는 것에서 시작되어, 자기 절제와 자기 저항의 고된 수고를 거쳐, 이를 통해 은혜의 가시적인 작용, 즉 그가 말하듯이 마침내 성령의 은혜가 힘과 효력을 가지고 마음속에 드러나는 지점에 이르러, 이 땅에서 가능한 한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님 안에서 완전함에 이르게 하며, 미래의 삶에서 영혼의 두 가지 상태로 마무리됩니다. 이와 같이, 성 마카리오 대성인의 모든 사상을 다음과 같은 제목 아래 정리해 보겠습니다:

1. 첫 번째 인간의 빛나는 상태.

2. 타락한 자의 어두운 상태.

3. 우리의 유일한 구원 – 주 예수 그리스도.

4. 주님을 따르겠다는 확고한 결심.

5. 수고의 상태.

6. 은혜를 체험한 자들의 상태.

7. 지상에서 가능한 기독교적 완전함.

8. 죽음과 부활 이후의 미래 상태. 모든 곳에서 성 마카리오의 말씀이 한 마디 한 마디 그대로 인용되어 있다. 편집자는 제목만 직접 작성했다. 인용문에서 첫 번째 숫자는 대화를, 두 번째 숫자는 대화의 장이나 단락을 의미한다. 일부 단락에는 하나의 생각이 아닌 여러 가지 생각이 담겨 있기 때문에, 때로는 한 단락이 여러 번 인용되기도 한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성 마카리오 대성인의 대화록에서 발췌한 기독교 생활에 관한 가르침

 

1. 빛나는 원초적 상태

가) 인간의 궁극적인 목표와 지고의 선은 하나님과의 교제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 안에서 안식하시기를 기뻐하시며, 인간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평안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친밀함 속에서 인간은 창조의 본래 목적에 따라 하나님과 하나 된다.

1. 영혼과 하나님 사이, 그리고 하나님과 영혼 사이에 있는 것과 같은 친밀함과 상호성은 그 어디에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피조물을 창조하셨고, 하늘과 땅, 해와 달, 물, 열매 맺는 나무들, 온갖 동물들을 창조하셨다. 그러나 이 피조물들 중 어느 것 하나에도 주님께서 안식하시지 않는다. 모든 피조물은 그분의 권세 아래 있지만, 그분은 그들 안에 보좌를 세우지 않으셨고, 그들과 교제를 맺지 않으셨으며, 오직 한 사람만을 기뻐하사 그와 교제를 맺으시고 그 안에 거하신다. 이 속에서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친밀함을 보느냐? (45, 5).

2. 하나님께서 사람이 거할 곳으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것처럼, 그분은 사람의 몸과 영혼을 자신의 거처로 창조하셨으니, 자신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랑스러운 신부인 영혼을 두시고, 마치 자신의 집인 것처럼 그분의 몸 안에 거하시며 안식을 취하시기 위함이다. 왜 사도는 “우리는 그분의 집입니다”라고 말합니까? (히브리서 3, 6). (49, 5).

3. 인간의 지극히 높은 존엄성. 보라, 하늘과 땅, 해와 달이 어떠한지: 주님께서는 그들 가운데가 아니라 오직 인간 안에서만 안식하시기를 기뻐하셨다. 그러므로 인간은 모든 피조물 중에서 가장 귀중하며, 감히 말하건대, 보이는 것들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들, 즉 섬기는 영들보다도 더 귀중하다. 하나님께서는 대천사 미카엘과 가브리엘에 대해 “우리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으리라”(창 1:26) 말씀하지 않으셨으나, 지성을 지닌 인간의 본질, 즉 불멸의 영혼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씀하셨다. 기록된 바와 같이, 천사들의 군대는 “그분을 경외하는 자들 주위에” (시편 33:8) 있습니다. (15, 20, 41).

4. 그러므로 이성적이고 분별력 있는 영혼은 모든 피조물을 두루 살펴보았으나, 오직 유일한 주님 안에서만 안식을 찾는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오직 한 사람만을 기뻐하시며, 그 외에는 누구에게도 기뻐하지 않으신다(45, 5).

5. 결혼이 약속된 부유한 처녀가 결혼 전에 어떤 선물을 받더라도 혼인 관계가 성립되기 전까지는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하는 것처럼, 영혼도 주님과 완전한 교제를 이루기 전까지는 그 무엇으로도 평안을 얻지 못한다. 혹은 굶주린 갓난아기가 진주나 값비싼 옷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영양가 있는 젖꼭지에만 주의를 기울여 젖을 맛보려 하듯이, 영혼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하라(즉, 영혼은 모든 것을 제쳐두고 오직 하나님을 맛보기를 갈망하며, 그때서야 비로소 평안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45, 7).

b) 이러한 소명을 가진 인간은 창조 그 자체에서 이미 그에 맞게 지어졌다. 창조 속에서 그는 목적지에 놓여 있었다.

6. 영혼은 위대하고 경이로운 존재이다. 그녀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본성 속에 어떤 결점도 심어두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성령의 미덕을 본떠 그녀를 창조하시고, 성령의 형상에 따라 미덕의 법칙과 분별력, 지식, 현명함, 믿음, 사랑 및 그 밖의 미덕들을 그녀 안에 심어주셨다 (46, 5).

7. 하나님께서는 영혼에 이성과 의지, 통치하는 마음을 심어 주셨으며, 그 안에 또 다른 위대한 세련미를 깃들게 하셨고, 영혼을 유연하고 날렵하며 지치지 않게 하셨으며, 성령께서 원하실 때 순식간에 오고 가며 생각으로 그분을 섬길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한마디로, 그분은 그녀를 그분의 신부이자 동역자가 되도록 창조하셨으며, 그분께서도 그녀와 하나 되시고, 그녀도 그분과 한 영이 되게 하셨으니, “주님께 붙어 있는 자는 주님과 한 영이 되느니라”(고린도전서 6, 17)라고 기록된 대로이다(46, 6).

8. 남편이 자신의 집에 온갖 좋은 것을 정성껏 모아 두듯이, 주님께서도 당신의 집, 즉 영혼과 육신에 하늘의 풍요로움인 성령을 모아 두신다 (49, 4).

가) 그 결과, 태초의 인간들은 하나님 안에 있었으며 위대한 특권과 복을 누렸다.

9. 죄를 짓기 전까지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옷 입혀져 있었다... 아담은 계명을 지키는 한, 하나님의 친구였으며, 하나님과 함께 낙원에 머물렀다 (12, 8).

10. 아담 안에는 말씀이 거하셨으며, 그는 자신 안에 하나님의 영을 지니고 있었다(12, 6).

11. 본래 순수했던 마음은 제 본분에 머물며 주님을 관조하였고, 아담은 순결함을 지키며 자신의 생각을 다스리고 신성한 영광으로 덮여 행복을 누렸다 (45, 1, 15, 23, 1.2, 6).

12. 그 안에 거하시던 말씀 그 자체가 그에게 모든 것이었으니, 곧 지식이자 (복락의) 감각이며, 유산이자 가르침이었다. 또한 밖에서는 원초적 존재들에게 영광이 머물러 있었기에, 그들은 자신의 나체를 보지 못하였다(12, 7. 10).

13. 인간은 존귀와 순결 속에 있었으며, 하늘을 비롯한 만물의 주인이었고, 정욕을 분별할 줄 알았으며, 악마와는 거리가 멀었고, 죄나 악덕으로부터 깨끗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26, 1).

d) 그러나 이 풍성한 은혜에는 강요하는 것이 전혀 없었다. 인간은 하나님과 은혜와 함께 있거나, 그들로부터 떨어져 나갈 자유가 있었다. 그는 떨어져 나갔고, 영들이 타락한 것처럼 타락했다.

14. 모든 이성적인 존재들, 즉 천사들과 영혼들, 그리고 악령들을 창조주께서는 순수하고 지극히 단순하게 창조하셨다. 그들 중 일부가 악으로 타락한 것은 그들 자신의 자의에 의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마땅한 생각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16, 1).

15. 보이는 피조물들은 어떤 변하지 않는 본성에 얽매여 있어, 창조된 그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의지도 없다. 그러나 너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되었다. 하나님이 자유로우시며 원하시는 대로 창조하시듯이, 너도 자유롭다. 본성상 너는 변화하기 쉬운 존재이다 (15, 20. 21).

16. 우리의 본성은 선과 악, 하나님의 은총과 그 반대되는 힘 모두를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 그것은 강요될 수 없다(15, 23).

17. 아담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자유 의지로 계명을 어기고 악한 자의 말을 따랐다(12, 8).

18. 그에게 큰 부와 위대한 유산이 예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악한 생각과 마음을 품자마자, 그는 하나님 앞에서 멸망하고 말았다(12, 1).

 

2. 타락한 자의 암울한 상태

a) 악한 자의 말을 들은 아담은 자신을 그에게 팔아넘겼고, 악한 자는 그를 장악하여 온갖 악으로 채웠다.

1. 아담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교활한 뱀의 말을 들음으로써, 자신을 마귀의 소유로 팔아넘겼고, 그 아름다운 피조물인 영혼 속에 교활한 자가 들어왔다. 영적 어둠이 그 안에 머무는 한, 영혼은 사악한 어둠의 몸이라 불린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사악한 어둠의 시대가 지속되는 동안 어둠이 거하며 머무르기 때문이다. 사도도 죄의 몸과 죽음의 몸에 대해 언급하며 “죄의 몸이 폐해지기를” (롬 6:6)이라고 말했고, 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내어 주시겠는가?(롬 7:24). 영혼은 하나님의 본성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며, 사악한 어둠의 본성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라, 지혜를 지닌 피조물로서 아름다움으로 충만하고 위대하며 경이로운, 하나님의 아름다운 형상과 모습입니다. 그리고 어두운 정욕의 사악함은 범죄의 결과로 영혼에 스며들었습니다(1, 7).

2. 교활한 왕은 어둠의 왕국으로, 처음에 사람을 사로잡은 뒤, 마치 사람을 왕으로 삼아 그에게 모든 왕의 예복을 입히고 머리부터 손톱 끝까지 온통 왕의 품위를 띠게 하듯이, 영혼을 어둠의 권세로 감싸고 입혔다. 그리하여 교활한 왕은 영혼을 죄로 감싸고, 그 본성과 전부를 더럽혔으며, 영혼 전체를 자신의 왕국으로 사로잡아, 그 어떤 부분도, 생각도, 정신도, 육체도 자신의 권세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하고, 어둠의 자줏빛 옷으로 감쌌다. 마치 몸(병들었을 때)에서 한 부분만이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온몸이 온전히 고통에 시달리듯이, 영혼도 전적으로 악덕과 죄의 병으로 인해 고통받았다. 사탄은 영혼 전체, 즉 인간의 필수적인 부분이자 필수적인 지체를, 자신의 악의, 곧 죄로 뒤덮었으며, 이로 인해 육체는 고통받고 썩어 없어지는 것이 되었다(2, 1).

3. 사도가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골 3, 9) 말할 때, 그는 눈이 눈대로, 머리가 머리대로, 귀가 귀대로, 손이 손대로, 발이 발대로 제자리를 지키는 완전한 사람을 의미한다. 이는 악한 자가 낡은 사람, 곧 더럽혀지고 부정하며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지 않는 온전한 사람을 더럽히고 자기 쪽으로 끌어들여, 바로 죄 그 자체로 이끌어, 더 이상 사람에게 마땅한 대로 보지 못하고, 교활하게 보고, 교활하게 듣고, 그의 발은 악행을 서두르고, 그의 손은 불법을 행하며, 그의 마음은 교활한 생각을 품게 하려 한 것이다(2, 2).

4. 낡은 사람은 온전한 사람을 벗어 던지고 어둠의 왕국의 옷, 즉 모독과 불신, 경외심 없음, 허영, 교만, 탐욕, 정욕, 그리고 그 밖의 어둠의 왕국의 옷들, 즉 더럽고 추한 누더기를 입고 있다(2, 4).

5. 원수가 노린 바는 바로 아담의 죄로 인해 내면의 사람, 곧 하나님을 바라보는 주권적인 마음을 상하게 하고 어둡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늘의 복이 그에게 닿지 않게 되자, 그의 눈은 이미 악덕과 정욕을 꿰뚫어 보게 되었다(20,4).

6. 악의 영들은 (타락한) 영혼을 어둠의 쇠사슬로 묶어 놓기 때문에, 그 영혼은 아무리 원해도 주님을 사랑할 수 없고, 아무리 원해도 믿을 수 없으며, 아무리 원해도 기도할 수 없다. 이는 첫 사람의 죄를 범한 때부터, 명백히나 은밀히나 모든 면에서 반역이 우리를 지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21, 2).

b) 이러한 파멸적인 상태를 보시고, 하나님과 천사들은 타락한 자를 불쌍히 여겼다.

7. 아담이 타락한 그날, 하나님께서 오셔서 에덴 동산을 거니시다가 아담을 보시고, 말하자면 그를 불쌍히 여기시며 말씀하셨다. “이토록 많은 복이 있는데, 네가 무슨 악을 택했느냐! 이토록 큰 영광을 누렸는데, 네가 무슨 수치를 짊어지고 있느냐! 어찌하여 이제 네가 이토록 어둠에 휩싸이고, 이토록 흉측해졌으며, 이토록 연약해졌느냐? 그토록 찬란한 빛 뒤에, 과연 어떤 어둠이 너를 뒤덮었느냐!” 아담이 타락하여 하나님 앞에서 죽은 후, 창조주께서는 그를 안타까워하셨고, 천사들과 모든 세력, 하늘과 땅, 모든 피조물들이 그의 죽음과 타락을 애도했다. 피조물들은 자신들에게 왕으로 주어진 자가 반항적이고 교활한 어둠의 노예가 되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어둠, 쓰라리고 교활한 어둠으로 자신의 영혼을 감쌌으니, 어둠의 왕이 그 위에 군림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아담)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지나가던 중 강도들에게 상처를 입고 반쯤 죽은 상태가 된 자였다(30, 7).

c) 그러나 진리는 그를 의로운 형벌에 처하게 하였고, 그는 황폐한 집처럼 버려졌다.

8. 아담은 계명을 어기고 낙원에서 쫓겨났으며, 하나님의 진노를 자초했다. 한때 유대인들에게 진노하셔서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원수들에게 수치를 당하게 내버려 두셨고, 그들을 미워하는 자들이 그들을 지배하게 되었으며, 그곳에는 더 이상 절기도, 제물도 없게 된 것처럼, 계명을 어긴 죄로 인해 영혼에게도 진노하셔서 그 영혼을 원수들과 악마들, 그리고 정욕들에게 내버려 두셨고, 그들은 영혼을 유혹하여 완전히 짓밟았고, 그곳에는 더 이상 명절도, 향연기도, 영혼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도 없어졌으니, 그 영혼 안에 있는 경이로운 곳으로 통하는 길들이 야수들로 가득 차고, 기어다니는 것들—즉 교활한 영들—이 그곳에 둥지를 틀었기 때문이다. 주인이 살지 않는 집이 어둠과 치욕, 모욕을 뒤집어쓰고 불결함과 고름으로 가득 차듯이, 영혼도 주님께서 천사들과 함께 그 안에서 기뻐하지 않으시면 죄의 어둠과 수치스러운 정욕과 온갖 불명예로 가득 차게 된다(12, 10, 28, 1).

9. 사람이 불순종함으로 “땅이 네게 가시와 엉겅퀴를 내리라”(창 3, 18)는 맹세를 거듭 받아들였고, 또한 “땅을 경작하라. 그러나 땅이 그 열매를 네게 주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을 들었으므로, 그의 마음의 땅에서 가시와 엉겅퀴가 다시 생겨나 자라났다. 원수들은 속임수로 그의 영광을 빼앗고 그를 수치로 뒤덮었다. 그의 빛은 빼앗겼고, 그는 어둠에 휩싸였다. 그의 영혼을 죽이고, 그의 생각을 흩어뜨리고 분열시켰으며, 그의 마음을 높은 곳에서 끌어내렸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사람은 참된 파라오의 노예가 되었고, 파라오는 그 사람 위에 일 감독관과 감시자들을 세웠으니, 이들은 영이 교활하여 사람을 강제로나 어쩔 수 없이나 그의 교활한 일을 행하게 하고, 허튼소리와 헛소리를 지어내게 한다. 사람을 하늘의 사고 방식에서 멀어지게 한 자들은 그를 교활한 일들—물질적이고, 세속적이며, 덧없는 일들—과 헛된 헛된 생각과 추론으로 내몰았으니, 이는 영혼이 그 높음에서 떨어져 내려와 인간을 미워하는 왕국과 잔인한 통치자들을 마주하게 되었기 때문이며, 그들은 영혼으로 하여금 그들에게 죄악과 타락의 성을 짓도록 강요하기 때문이다 (47, 6).

다) 타락의 결과로 모든 피조물과 온 인류는 원수와 정욕의 폭정에 시달리게 되었다.

10. 재산을 소유하고, 자신을 섬기려는 신하들이 준비되어 있는 한 왕을 상상해 보라. 그런데 우연히 적들에게 붙잡혀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가 붙잡혀 끌려가자마자, 그의 신하들과 관리들도 필연적으로 그를 따라가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아담은 하나님께 봉사하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 순수하게 창조되었으며, 아담을 섬기도록 이 피조물들이 주어졌으니, 이는 그가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자 왕으로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활한 말이 그에게 접근하여 말을 걸자마자, 아담은 처음에는 겉으로만 그 말을 받아들였으나, 그 말은 곧 그의 마음에 스며들어 그의 온 존재를 사로잡았다. 그리하여 그가 사로잡히자, 그와 함께 섬기며 그에게 복종하던 피조물들도 이미 그와 함께 사로잡히게 되었으니, 이는 그를 통해 죽음이 모든 영혼 위에 군림하게 되었고, 그의 불순종으로 인해 아담의 형상이 완전히 지워져 사람들이 변질되어 마침내 악마를 숭배하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보라,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창조하신 땅의 열매들조차 악마들에게 바쳐지고 있다. 그들의 제단에는 빵과 포도주, 기름, 그리고 동물들이 올려진다. 심지어 자기들의 아들들과 딸들까지 악마들에게 제물로 바쳤다(11, 5).

11. 아담의 죄를 범한 이후로, 마음의 생각들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져 이 세상에 흩어지고,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생각들과 뒤섞이게 되었다. 그러나 계명을 어긴 아담이 악한 정욕의 씨앗을 품게 된 것처럼, 그로부터 태어난 자들과 아담의 모든 후손들도 대를 이어 이 씨앗의 일부가 되었으며, 점차 성숙하고 자라남에 따라 사람들의 죄악된 정욕은 이미 배가되어 간통 , 음란, 우상 숭배, 살인 및 기타 터무니없는 행위에까지 미쳤으며, 결국 온 인류가 악덕으로 썩어버렸다. 악이 사람들 안에서 그토록 커져서,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고, 생명이 없는 돌들을 숭배하기 시작했으며, 하나님에 대한 개념조차 전혀 형성할 수 없게 되었다. 악의적인 정욕의 발효제가 옛 아담의 후손을 그 정도로 부패시켰다(24, 2).

12. 사람이 계명을 저버리고 진노의 심판을 받게 된 후, 죄는 그를 자신의 지배하에 두었고, 마치 미묘하면서도 깊은 괴로움의 심연처럼 그 안으로 침투하여 영혼의 가장 깊은 은신처까지 장악해 버렸다. 이처럼 영혼과 그 속에 섞인 죄를, 가지가 많고 뿌리는 땅 깊은 곳에 내린 거대한 나무에 비유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영혼에 들어온 죄는 그 가장 깊은 은신처까지 영혼의 덤불을 장악하고, 습관과 편견으로 변하여, 유아기부터 각 성장 단계마다 자라나며, 그 사람을 길러내고 악한 것을 가르친다(41,1).

13. 주님께서 부활시키신 나사로, 그 썩은 냄새가 너무나 심해 아무도 그의 관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던 바로 그 나사로는, 자신의 영혼에 큰 악취를 받아들이고 어둠과 암흑으로 가득 찬 아담의 형상이었다. 그러나 너는 아담과, 강도들에게 상처 입은 자와, 나사로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 마치 산을 헤매는 것처럼 네 마음이 방황하지 않도록 하고, 네 영혼 안에 머물러라. 왜냐하면 너 또한 똑같은 상처와, 똑같은 악취, 똑같은 어둠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이 어둠에 휩싸인 족속의 자손이며, 모두 그 같은 악취에 휩싸여 있다. 아담이 어떤 연약함을 겪었는지, 아담의 씨에서 태어난 우리 모두도 똑같이 그 연약함을 겪었다. 이사야가 말하듯이, 우리도 똑같은 연약함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궤양도 없고, 상처도 없고, 타는 듯한 상처도 없으니, 붙일 반창고도 없고, 기름도 없고, 치료할 방법도 없다”(사 1:6). 우리는 바로 그런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입고 있다(30:8).

14. 이집트에서 사흘 동안 어둠이 계속되던 때, 아들이 아버지를 보지 못하고, 형제가 형제를 보지 못하며, 친구가 진실한 친구를 보지 못했던 것처럼, 어둠이 그들을 덮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담이 계명을 어기고, 이전의 영광에서 떨어지며 세상의 영에 복종한 후, 어둠의 장막이 그의 영혼을 덮었을 때부터, 그로부터 마지막 아담이신 주님에 이르기까지, 사람은 참된 하늘의 아버지, 자비롭고 선한 어머니이신 성령의 은혜, 가장 달콤하고 갈망하던 형제이신 주님, 그리고 한때 기쁨으로 환호하며 함께 축제를 누리던 친구들과 진실한 성스러운 천사들을 보지 못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아담에 이르기까지뿐만 아니라, 심지어 지금도, 진리의 태양이신 그리스도가 비치지 않은 자, 참된 빛으로 밝혀진 영혼의 눈이 열리지 않은 자, – 그 모든 이들은 똑같은 죄의 어둠에 덮여 있으며, 자신 안에 똑같은 정욕의 작용을 품고 있고, 똑같은 형벌을 받게 되며, 아버지께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지 않다(28, 4).

d) 타락의 가장 뚜렷한 결과는 세상 곳곳에 만연한 혼란이다.

15. 이 세대의 자식들은 이 땅의 체에 쏟아진 밀과 같아서, 이 세상의 변덕스러운 생각들 가운데, 끊임없는 세속적 일들의 소용돌이와 욕망, 그리고 복잡하게 얽힌 물질적 개념들 속에서 체로 거르듯이 가려진다. 사탄은 영혼들을 뒤흔들며, 체, 즉 세상의 일들로 온 죄인인 인류를 체로 쳐낸다. 타락 이후, 아담이 계명을 어기고 그 위에 권세를 잡은 교활한 왕에게 복종한 이래, 사탄은 이 세대의 모든 자손들을 끊임없이 유혹하고 혼란스럽게 하는 생각들로 체질하며, 이 땅의 체질망 속에서 그들을 충돌하게 한다(5, 1).

16. 체로 거르는 사람이 체에 담은 밀이 흔들리며 끊임없이 휘저어질 때, 그 안에서 뒤집히듯이, 간사의 왕은 세속적인 일들로 모든 사람을 사로잡아 흔들고, 혼란과 불안에 빠뜨리며, 헛된 생각과 추악한 욕망, 세속적이고 세간적인 유대에 빠지게 하여, 아담의 모든 죄인들을 끊임없이 사로잡고, 혼란스럽게 하며, 유혹한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사탄이 그들에게 일으킬 미래의 반란을 예언하셨습니다. “사탄이 너희를 밀처럼 뿌리려고 요청하였으나, 나는 내 아버지께 기도하여 너희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였노라” (누가복음 22:31, 32). 이는 창조주께서 가인에게 분명히 하신 이 말씀과 선언, “신음하며 떨며” 불안에 사로잡혀 “땅에서 살게 될 것”이라(창세기 4:12) 하신 말씀은, 모든 죄인들에게 은밀한 본보기와 형상이 되는데, 이는 아담의 후손들이 계명을 어기고 죄인이 됨으로써 은밀히 이 형상을 짊어졌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두려움, 공포, 온갖 혼란과 같은 변덕스러운 생각들과 욕망, 그리고 온갖 종류의 다양한 쾌락들에 의해 흔들리게 된다. 이 세상의 왕은 하나님에게서 나지 않은 모든 영혼을 뒤흔들며, 마치 체에서 끊임없이 맴도는 밀과 같이, 인간의 생각을 다양하게 뒤흔들어 모두를 흔들리게 하고, 세속적인 유혹과 육체적 쾌락, 두려움, 혼란으로 사로잡는다(5, 2).

17. 주님께서는 유혹과 악한 자의 욕망을 따르는 자들이 가인의 간사함을 닮았음을 드러내시고, 그들을 책망하시며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 아버지의 욕망을 행하고자 하니, 그는 태초부터 살인자였으며, 진리 안에 서 있지 아니하니라”(요한복음 8, 44). 그러므로 아담의 모든 죄인 후손은 은밀히 이 정죄를 짊어지고 있다: 신음하며 떨면서, 너희를 뿌리는 사탄에 의해 땅의 체에 걸려 괴로움을 당할 것이다. 한 사람 아담으로부터 온 땅에 온 인류가 퍼져 나간 것처럼, 어떤 한 가지 정욕적인 타락이 온 죄 많은 인류에게 스며들었으며, 악의 왕은 모든 사람을 변덕스럽고, 물질적이며, 헛되고, 반항적인 생각들로 심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하나의 바람이 모든 식물과 씨앗을 흔들고 움직이게 할 수 있고, 하나의 밤의 어둠이 온 우주 위에 펼쳐지듯이, 교활함의 왕은 죄와 죽음의 일종의 정신적 어둠으로서, 어떤 은밀하고 잔혹한 바람으로 땅 위의 온 인류를 휘몰아치고 휩쓸며, 변덕스러운 생각과 세속적인 욕망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무지와 눈멀음, 망각의 어둠으로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지 않았고 생각과 마음으로 다른 세상으로 옮겨가지 않은 모든 영혼을 채우니, 이는 “우리의 삶은 하늘에 있다” (빌 3,20). (5, 3).

e) 모든 사람이 이를 경험했으나, 아무도 이것이 어떤 악인지,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알지 못했고, 그러한 상태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겼다.

18. 보이는 세상, 왕부터 거지까지, 온통 혼란과 무질서, 투쟁 속에 빠져 있으나, 그들 중 누구도 그 이유, 즉 아담의 죄로 인해 발생한 이 명백한 악, 이 죽음의 독침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찾아온 죄가, 마치 이성적인 어떤 힘이자 사탄의 본질인 것처럼, 온갖 악을 뿌렸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면의 사람과 마음에 은밀히 작용하며 생각으로 그와 싸우지만, 사람들은 이 낯선 어떤 힘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이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며 자신의 판단에 따라 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평화와 그리스도의 빛을 지닌 자들은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비롯되는지 알고 있다(15, 47).

19. 아담의 후손 중에서 온 땅을 지배하며 자신의 왕권에 대해 깊이 생각했던 왕들이 얼마나 많이 나타났는가! 그리고 그 누구도 그러한 만족감 속에서, 첫 번째 인간의 죄로 인해 영혼에 어떤 손상이 일어나고 그것이 영혼을 어둡게 만들었는지 깨달을 수 없었기에, 영혼은 자신 안에서 일어난 변화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즉, 마음은 이제 자신의 타락으로 인해 수치심을 뒤집어쓰게 되었고, 마음의 눈이 어두워져서 죄를 짓기 전에 우리 조상 아담이 보았던 그 영광을 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45, 1).

20. 세상에는 한가한 현자들이 있었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다방면에 걸친 학식으로 자신의 우월함을 보여주었고, 어떤 이들은 소피스트적 수련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며, 또 어떤 이들은 웅변술에서 힘을 발휘했고, 어떤 이들은 문법가나 시인이 되어 통용되는 규칙에 따라 역사를 기록했다. 세속적인 예술을 연마하던 다양한 예술가들도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이들은 그들 내면에 자리 잡은 뱀에 사로잡혀 자신 안에 살아 숨 쉬는 죄를 깨닫지 못한 채, 사악한 세력의 포로와 노예가 되어 버렸으며, 자신의 지식과 예술로부터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했다 (45,2).

g) 타락으로 인한 악이 아무리 크더라도, 그것이 인간을 완전히 죽이지는 못했다. 그 안에는 영적 삶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21. 사람이 온전히 상실되거나, 소멸되거나, 죽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죽었으나, 자신의 본성으로 살아가고 있다(12, 2).

22. 사람은 죄로 인해 파멸했고, 상처 입은 존재가 되었으며, 사탄이 그의 마음을 어둡게 했다. 어떤 면에서는 사람이 실제로 죽은 것이나, 다른 면에서는 살아 있고, 사고하며, 의지를 가지고 있다(26, 1).

23. 그리고 죄를 지은 후에도 인식은 남아 있다. (이는 양심의 작용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강도가 법정에 끌려가 심문을 받을 때, 공작이 그에게 묻는다. “네가 악을 저지를 때, 잡혀 죽임을 당할 줄 몰랐느냐?” 그러면 강도는 감히 몰랐다고 말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데, 이는 그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음행하는 자도 자신이 악을 행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겠는가? 도둑도 자신이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을 모르겠는가? – 그렇다면 사람들은 성경 없이도, 본성적인 이성으로 볼 때,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모르겠는가? 그날에 그들이 “우리는 하나님이 계신 줄 몰랐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늘에서 울려 퍼지는 천둥과 번개가 그들에게 이렇게 선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피조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모르겠느냐?” (12, 8. 9).

24. 거짓 가르침에 속아 넘어간 어떤 이들은, 사람이 완전히 죽었으며 선한 일을 전혀 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부당한 일이다 (46, 3).

25. 하나님께서 태초에 인간에게 주신 자유는 여전히 남아 있다. 완전한 자가 어떤 필연성에 의해 선에 얽매이지 않는 것처럼, 죄에 빠져 악을 행하며 스스로를 마귀의 그릇으로 삼는 자도 악에 얽매이지 않는다 (15, 38).

26. 너는 자유롭다. 만일 멸망하기를 원한다면, 네 본성은 쉽게 변할 수 있다. 원하는 자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진리의 길을 걷으며, 욕망을 다스릴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이성은 대적자이며, 확고한 생각으로 타락한 욕망과 추악한 욕구를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15, 21).

27. 그러나 자신의 자유로 죄의 유혹을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는 논리에 저항하는 데까지 미치지만, 그러한 가능성 속에서 반드시 정욕을 지배할 수 있는 권능까지 갖는 것은 아니다. “주님께서 집을 세우시고 성을 지키지 않으시면, 지키는 자의 수고와 건축하는 자의 수고는 헛되리라”(시편 126:1)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25, 1).

28. 우리 안에서는 악이 온 힘을 다해 뚜렷이 작용하며 온갖 불결한 욕망을 불러일으키지만, 그것이 우리와 혼합되어 있는 방식은 다른 이들이 포도주와 물이 섞이는 것을 말하는 방식과는 다르며, 마치 한 밭에서 밀이 저절로 자라고 가라지가 저절로 자라는 것처럼, 혹은 한 집 안에 강도와 집 주인이 따로 존재하는 것과 같다(16, 1).

29. 해가 빛나고 바람이 불 때, 해는 그 자체의 형체와 본성을 가지고 있고, 바람도 그 자체의 본성과 형체를 가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죄가 영혼에 섞여 있지만, 죄와 영혼은 각각 고유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2, 2).

30. 샘은 맑은 물을 쏟아내지만, 그 바닥에는 진흙이 가라앉아 있다. 누군가 그 진흙을 휘저으면 샘 전체가 탁해진다. 마찬가지로 영혼도 동요될 때 악과 뒤섞인다. 사탄은 어떤 한 가지 행위를 통해 영혼과 하나가 되며, 음행이나 살인을 저지르는 순간 두 영은 하나의 존재를 이룬다. 그러므로 “악을 행하는 자여, 음행하는 자와 한 몸이 되리라”(고린도전서 6, 16)고 한 것이다. 반면, 독립적인 영혼은 스스로 행동하며 자신의 행실을 뉘우치고, 울며 기도하고, 하나님을 기억한다. 만약 영혼이 항상 악에 빠져 있었다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 사탄은 무자비한 자로서, 사람들이 회개로 돌아서는 것을 결코 원치 않기 때문이다(16, 2).

 

3. 구원의 주재자이신 주님

a) 타락한 자들에게는 오직 한 가지 구원, 곧 주님뿐이다. 주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시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육신을 입고 오셨다. 그분은 자신의 피로 우리의 죄를 씻어 주셨고, 성령의 은혜로 낡아빠진 우리의 본성을 새롭게 하셔서, 우리를 그분의 하늘나라에 합당한 자로 만드셨다.

1. 세상은 화려하고 거대한 저택을 소유하고, 은과 금, 각종 재물과 온갖 하인들이 넘쳐나는 부자와 같다. 그러나 갑자기 병과 쇠약에 시달리게 되자, 모든 친척들이 그 앞에 서 있지만,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그를 병에서 구해 줄 수는 없다. 이와 같이 세상의 어떤 현명함도, 부도, 그 밖의 그 무엇도 죄에 빠진 영혼을 죄에서 구원할 수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의 재림만이 영혼과 몸을 정화할 수 있다(45, 3).

2. 인류는 불의 속에서 잉태되고 죄 가운데서 태어나, 아담으로부터 죄가 지배하게 된 이후로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소외되었고 어머니의 자궁에서부터 그릇된 길에 머물러 있었으므로, 자비를 베푸신 하나님의 어린양이 오셔서, 자신의 능력으로 세상의 죄를 짊어지시고, 먼저 강했던 자를 결박하신 뒤 그가 전리품으로 모은 그릇들을 빼앗으셨으니, “네가 포로를 사로잡았도다”(시편 67:19)라고 기록된 대로이다. (서신, 433쪽).

3. 사탄과 어둠의 권세자들은 계명을 어긴 때부터 아담의 마음과 정신과 몸 속에 마치 자신의 왕좌인 양 자리 잡았다. 주님께서 마침내 오셔서 동정녀에게서 육신을 취하신 이유는, 만일 주님께서 드러난 신성 그대로 오셨더라면 누가 이를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 반대로, 주님께서는 이 도구, 즉 육신을 통해 사람들에게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육신 안에 자리 잡고 있던 사악한 영들을 주님께서 그들의 보좌, 즉 그들이 지배하던 개념과 생각에서 몰아내시고, 양심을 정화하시며, 마음과 생각과 육신을 주님 자신의 보좌로 삼으셨습니다(6, 5).

4.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놋뱀을 만들어 나무 꼭대기에 들어 올려 못으로 박으라고 명하셨고, 뱀에게 물린 모든 사람은 그 놋뱀을 바라봄으로써 치유를 받았습니다. 죽은 뱀이 살아 있는 뱀들을 이긴 것은, 그것이 주님의 육신을 상징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마리아에게서 받으신 당신의 몸을 십자가에 올리시고, 나무에 눕히시며 못으로 박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죽은 몸은 마음속에서 살아 움직이며 기어다니는 뱀을 이기고 죽였다. 여기에는 위대한 기적이 있다(11, 8. 9).

5. 처음에 해로운 정욕이라는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영혼을, 의인들 중에서도, 조상들 중에서도, 선지자들 중에서도, 족장들 중에서도 아무도 치유할 수 없었다. 모세가 왔으나 완전한 치유를 베풀 수는 없었다. 제사장들이 있었고, 예물이 있었으며, 십일조가 있었고, 안식일 준수가 있었고, 초하루 제사가 있었고, 정결 예식이 있었고, 희생 제물이 있었고, 번제가 있었으며, 그 밖의 모든 의로운 행위가 율법에 따라 행해졌으나, 영혼은 악한 생각의 더러운 흐름으로부터 치유되거나 정화될 수 없었으며, 구세주께서 오시기 전까지는 그 모든 의로운 행위도 사람을 치유할 수 없었다. 참된 의사이시며, 즉시 치유하시고 인류를 위한 속죄의 대가로 자신을 바치신 분이 오시기 전까지는. 오직 그분만이 위대하고 구원적인 속죄와 영혼의 치유를 이루셨으며, 그분은 영혼을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키시고 어둠에서 이끌어내셨다(20, 5. 6).

6. 땅에서 얻은 자기만의 치유법, 즉 오직 자신의 의로운 행실만으로는 그러한 보이지 않는 상처로부터 영혼을 치유하고 고칠 수 없었으며, 오직 하늘의 신성한 본성의 힘과 성령의 은사, 이 유일한 치유법을 통해서만 사람은 치유를 받고 성령으로 마음이 정화됨으로써 생명을 얻을 수 있었다(20, 7).

7. 농부가 땅을 일하러 갈 때 경작에 적합한 도구와 옷을 챙겨야 하듯이, 그리스도, 하늘의 왕이시며 참된 일꾼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악덕으로 황폐해진 인류에게 오셔서 육신을 입으시고 도구 대신 십자가를 지고, 황폐해진 영혼을 가꾸시며 그 안에서 가시와 엉겅퀴를 뽑아내시고, 죄의 쭉정이를 뿌리째 뽑아내시며 모든 죄의 잔재를 불로 태워버리셨습니다. 그리하여 십자가의 나무로 그 영혼을 가꾸어, 그 안에 가장 아름다운 영적 정원을 심으셨으니, 이 정원은 온갖 달콤하고 갈망하는 열매를 주님이신 하나님께 바칩니다(28, 3).

8. 그리스도 주님께서는 새 언약을 갱신하시고, 십자가와 죽음으로 지옥과 죄의 문을 부수시어, 신실한 영혼들을 구원하시고, 그들에게 위로자를 주셨으며, 그들을 주님의 나라로 인도하셨습니다(38, 3).

9. 율법에는 제사장이 두 마리의 비둘기를 가져와, 한 마리는 제물로 바치고, 살아 있는 한 마리에게는 그 피를 뿌린 뒤 자유롭게 날아가게 하라고 규정되어 있었다. 이 행위는 진리의 형상과 그림자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고, 우리를 적신 그분의 피는 우리에게 날개를 달아주었으니, 성령의 날개를 주어 우리가 신성의 공중을 자유롭게 날아오를 수 있게 하셨기 때문입니다(47, 2).

10.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본성을 변화시키고, 변모시키며, 새롭게 하기 위해 오셨으며, 죄로 인해 정욕에 사로잡혀 타락한 이 영혼을 신성한 영으로 다시 녹여내어 새롭게 창조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을 믿는 자들을 새로운 마음, 새로운 영혼, 새로운 눈, 새로운 귀, 새로운 영적인 혀, 한마디로 말해 새로운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 오셨습니다(44, 1).

11. 원수가 자기에게 복종한 사람을 데려가 해로운 정욕으로 뒤덮고, 죄의 영으로 기름 부으며, 온갖 불법의 포도주를 그에게 부어 넣어 자신을 위해 새로운 존재로 만들었듯이, 주님께서도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시고 성령으로 기름 부어 새로운 존재로 만드셨다(44, 2).

12. 보이는 세상에서 누구도 가볍고 움직이기 쉬운 배가 없다면 스스로 바다를 헤엄쳐 건너거나 건널 수 없듯이, 나무로 만들어져 물 위를 떠다닐 수 있는 배가 없다면 바다를 건너는 자는 가라앉아 죽게 될 것이니, 마찬가지로 영혼도 스스로는 죄의 쓰라린 바다, 건널 수 없는 교활한 세력과 어두운 정욕의 심연을 스스로 건너거나 극복하거나 헤쳐 나갈 수 없으니, 모든 교활함을 짓밟고 이겨내시는, 움직임이 자유롭고 천상적이며 날개처럼 가벼운 성령을 자기 안에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44, 6).

b) 구원을 마련하신 주님께서는 구원받기를 원하는 자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시지만,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1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구원에 대한 책임을 짊어지시고, 모든 구원의 계획을 완성하셨으며, 태초부터 조상들과 족장들,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해 세심하게 돌보셨고, 마지막으로 친히 오셔서 십자가의 수치를 무릅쓰고 죽음을 겪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모든 수고와 모든 돌보심은, 그분 자신과 그분의 본성으로부터 성령으로 자녀들을 낳으시려는 것이었으며, 그들이 그분의 신성으로부터 위로부터 태어나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아버지들이 자녀를 낳지 못하면 슬퍼하듯이, 주님께서도 인류를 자신의 형상처럼 사랑하시어, 그들을 자신의 신성한 씨로 낳고자 하셨다. 만약 어떤 이들이 그러한 탄생을 받아들이기를 원치 않고, 하나님의 성령의 태에서 태어나기를 원치 않는다면,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그들을 위해 고통받으시고 인내하신 그리스도께서는 큰 슬픔을 느끼실 것이다(30, 2).

14.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이 탄생을 누리기를 원하시는데, 이는 주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시고 모든 사람을 생명으로 부르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명이란 위로부터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는 것이다. 이 탄생 없이는 영혼이 살 수 없으니,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한복음 3:3)고 하셨다. 그러므로 주님을 믿고 나아와 이 탄생을 얻은 모든 이들은, 하늘에서 그들을 낳은 부모들에게 기쁨과 큰 환희를 안겨 주며, 모든 천사들과 거룩한 세력들도 성령으로부터 태어나 영이 된 영혼을 기뻐합니다(30, 3).

15. 농부는 사방에 씨를 뿌리고 그 모든 씨가 열매를 맺기를 바라지만, 나중에 낫을 들고 와서 열매를 찾지 못하면 슬퍼한다. 주님께서도 그분의 말씀이 사람들의 마음에 뿌려지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농부가 열매가 적은 밭을 보고 슬퍼하듯이, 주님께서도 열매가 적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마음을 보고 슬퍼하십니다(32, 11).

16. 마치 왕이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발견하고도 그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약을 써서 그의 상처를 치료하고 자신의 궁전으로 데려가, 자줏빛 옷과 왕관을 입혀 주고, 자신의 식탁에 함께 앉게 한 것처럼, 하늘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도 병든 사람에게 오셔서, 그를 치유하시고 자신의 왕실 식탁에 초대하셨으며, 게다가 그의 뜻을 강요하지 않고 권면으로 그를 이끄시어 그러한 영광에 이르게 하셨다(15, 28).

17. 복음서에는 주님께서 종들을 보내어 원하시는 자들을 불러 “내 만찬이 준비되었다”고 알리도록 하셨으나(마태복음 22, 4), 부름받은 자들은 스스로 거절하며, 한 사람은 “소 두 마리를 샀다”고, 다른 사람은 “아내와 결혼식을 올렸다”고 말했습니다(누가복음 14, 19. 20). 보라, 초대하신 분은 준비가 되어 계셨으나, 초대받은 자들은 거절하였고, 당연히 그들 스스로가 그 죄를 지은 것이다. 보라, 주님께서 그들을 위해 왕국을 마련하시고 들어오라고 부르시지만, 그들은 원치 않는다(15, 29).

18.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분께 문을 열어 드려, 그분이 들어오셔서 우리 영혼 안에서 안식하시고 우리 안에 거처를 마련하시도록 끊임없이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이는 주님께서 “보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리라” (계시록 3, 20). 이를 위해 그분은 많은 고난을 기꺼이 감내하시며, 당신의 몸을 죽음에 내어주시고 우리를 노예 상태에서 구속하셔서, 우리 영혼에 오셔서 그곳에 거처를 마련하시려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양식과 음료, 옷과 덮개, 그리고 안식처는 모두 우리 영혼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우리에게 들어오기를 원하시며 끊임없이 문을 두드리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분을 영접하여 우리 안으로 모시자. 그분은 우리에게도 양식이자 음료이자 영원한 생명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그분을 자기 안에 받아들이지 않고 그분을 자기 안에서 안식하게 하지 않은, 혹은 더 정확히 말해 그분 안에서 스스로 안식하지 않은 모든 영혼은, 천국에서 성도들과 함께 상속받을 몫이 없으며 천국의 성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여, 주님께서 친히 우리를 그곳으로 인도하소서! (30,9).

 

4. 주님 안에서 구원받겠다는 확고한 결심 형성

구원을 향한 영혼의 움직임은 구원에 대한 소망과 주님 안에서 이를 이루겠다는 확고한 결심을 품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고, 이를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하셨으며,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오직 사람이 나서서 구원을 시작하기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가) 필수 조건으로서 우리의 소망이 요구됩니다.

1. 사람은 본성상 목적을 지니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목적을 요구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먼저 이해하고, 이해한 뒤 사랑하며, 의지로 그 목적을 추구하도록 명하신다. 그러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거나, 수고를 감수하거나, 일을 성취하는 것은, 이를 갈망하고 믿는 자에게 주님의 은혜가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의지는 말하자면 필수적인 조건이다. 의지가 없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유로움으로 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행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성령에 의한 일의 성취는 인간의 의지에 달려 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온전한 의지를 바친다면, 모든 일의 공로는 온전하시고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께 돌리게 된다(37, 10).

2.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비록 치유받지 못하고 궤양 상태로 남아 있었으나, 주님께 나아갈 다리는 있었기에 나아가 치유를 받았듯이, 마찬가지로 그 맹인도 비록 보지 못해 주님께 나아갈 수는 없었으나, 전령보다 더 빨리 달려가는 목소리를 보내어: “다윗의 자손이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막 10:47) – 그리하여 믿음을 품고, 주님께서 그에게 오셔서 시력을 회복시켜 주셨을 때 치유를 받았듯이, 영혼도 비록 수치스러운 정욕의 상처로 흉터가 나 있고, 죄의 어둠에 눈이 멀어 있더라도, 그럼에도 예수님께 부르짖어 그분께서 오셔서 영혼에게 영원한 구원을 베풀어 주시기를 간구할 의지를 가지고 있다(20, 7).

3. 그 맹인이 부르짖지 않았더라면, 그 혈루병 여인이 주님께 나아가지 않았더라면 치유를 받지 못했을 것처럼, 누구든지 자신의 의지와 온전한 결심으로 주님께 나아가지 않고, 확고한 믿음으로 그분을 간구하지 않는다면, 그는 치유를 받지 못할 것이다. 왜 그들이 즉시 치유받았는데, 우리는 아직도 숨겨진 정욕들로부터 치유받지 못했는가? 우리의 불신과, 우리의 마음이 분열되어 있고, 온 마음을 다해 그분을 사랑하지 않으며 그분을 진심으로 믿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아직 영적인 치유와 구원을 얻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을 믿고 진정으로 그분께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그분께서 조만간 우리 안에서 참된 치유를 이루시게 하소서. “그분께 구하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시겠다고” (눅 11:13),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 문을 활짝 열어 주시고, 그분을 찾는 자들에게 그분을 만나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마 7:7). 그리고 “약속하신 분”(딛 1:2) 거짓이 없으시다. (20, 8, 유사 45, 2).

4. 비록 갓난아기는 아무것도 할 수 없거나 자신의 두 발로 어머니에게 걸어갈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를 찾으며 움직이고, 소리치고, 울부짖는다. 그리고 어머니는 그 아이를 불쌍히 여기며, 아이가 애를 쓰고 울부짖으며 자신을 찾는 것을 기뻐한다. 그리고 갓난아기가 어머니에게로 걸어갈 수 없기 때문에, 어머니는 아기가 오랫동안 자신을 찾아 헤매는 모습에 대한 사랑에 이끌려 아기에게 다가가, 큰 다정함으로 아기를 안아 주고 어루만지며 먹여 준다.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도 그분을 찾아오는 영혼에게 똑같이 행하신다. 그러나 그분 고유의 사랑과 그분 자신의 선하심에 훨씬 더 이끌리셔서, 그분은 이성을 가진 영혼에게 밀착하시며, 사도의 말씀대로 그 영혼과 “한 영”이 되십니다(고린도전서 6:17).(46, 3).

5. 주님께서는 자비로우시고 오래 참으시며, 우리의 회개를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죄를 짓더라도 우리의 회개를 기대하시며 이를 참아 주시고, 우리가 넘어지더라도 우리를 다시 받아들이시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 선지자가 말한 대로 “넘어진 자가 다시 일어나지 않겠느냐? 돌아서지 않은 자가 다시 돌아오지 않겠느냐?”(예레미야 8:4)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올바른 생각을 갖게 되면, 서둘러 올바른 방식으로 그분께로 돌아가 그분의 도움을 구할 것이며,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실 준비가 되어 계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의 힘닿는 대로 그분을 향한 열렬한 갈망, 믿음과 열심에서 우러나오는 선한 의지를 기다리시며, 모든 성장을 우리 안에서 직접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온갖 편견과 태만, 게으름을 떨쳐 버리고, 용기를 내어 그분을 따를 준비를 하도록 노력합시다. 그 악습에 휩쓸려 이를 하루하루 미루지 맙시다. 우리가 언제 육신을 떠날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4, 17).

b) 소망이 어떻게 생겨나는가.

아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각성. 주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영혼을 깨우치시며, 때로는 불행으로, 때로는 사도 바울에게 하신 것처럼 그분의 직접적인 역사로 인도하시지만, 회심으로 이끄는 보편적인 전령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6.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다시 생명으로 인도하시기를 기뻐하시며, 그로 하여금 울며 회개하도록 권면하십니다. 그리고 사람이 계속해서 (자신을 애도하며) 그렇게 한다면, 과거의 죄를 회개하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다시 울고 회개하도록 설득하십니다 (평생 동안 세세히 자신의 죄를 애도하도록). (15, 15).

7. 하나님의 뜻에 따라 슬픔과 고통, 상처를 겪을 때, 네가 스스로 싫어하는 바로 그 일이 네 영혼에 유익이 된다. 불행이 닥치면 스스로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한다. ‘나는 이 세상에서 불행하니, 세상을 등지고 하나님을 섬기리라.’ 우연히 이런 생각에 이르렀을 때, “네 재산을 팔아라”(마태복음 19:21)는 계명을 듣고, 육신적인 교제를 미워하며 하나님을 섬기게 된다. 그러면 세상에서의 불행에 대해, 그리고 그로 인해 그리스도의 계명에 순종하게 된 것에 대해 감사하기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만일 네가 보이는 것에 대한 생각을 부분적으로 바꾸고 세상과 육신적인 교제에서 멀어졌다면, 너는 마음속에서도 변해야 하며, 육신적인 지혜를 하늘의 지혜로 바꿔야 한다. 그때 비로소 네가 들은 바로 그 계명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 시작하며, 아직 평안을 얻지 못한 채, 들은 바를 얻기 위한 근심과 수고만을 스스로 짊어지게 된다(32, 7).

8. 성 바울로는 어떻게 하나님께 붙잡혔는가? 반역자가 누군가를 포로로 잡아 자기에게 데려가다가, 나중에 진정한 왕에게 붙잡히는 것처럼, 바울로 또한 그 안에 반역적인 죄의 영이 작용할 때 교회를 박해하고 약탈했으나, 그러나 무지함에서 비롯된 것이지, 하느님께 대항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마치 진리를 위해 싸우는 것처럼 행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를 멸시하지 않으시고 붙잡아 주셨습니다. 하늘의 참된 왕께서는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그를 자비로이 감싸 안으시고, 그분의 음성을 듣게 하셨으며, 종처럼 얼굴을 치시어 그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주님의 자비를 보라. 또한 악에 매여 굳어진 영혼들을 주님께서 어떻게 순식간에 변화시키시고 그들에게 주님의 자비와 평화를 베푸시는지 보라 (18, 8).

9. 왕이 자신의 칙서와 선물을 주고자 하는 이들에게 편지를 써서 모두에게 알리듯이, “서둘러 내게 와서 왕의 선물을 받으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오지 않고 받지 않는다면, 그 편지를 읽는 것이 그들에게 아무 소용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오기를 원치 않아 왕의 손에서 영광을 누리지 못한 죄로 인해 죽음에 처하게 될 것이니, 이와 같이 하나님 왕께서는 신성한 성경을 편지처럼 사람들에게 제시하시며, 하나님을 부르짖고 믿는 자들이 그분의 신성의 위격으로부터 하늘의 선물을 구하고 받도록 선포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신성한 본성에 참여하게 되리라”(베드로후서 1:4)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이 나아오지 않고, 구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성경을 읽는 것이 그에게 아무 유익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하늘의 왕으로부터 생명의 선물을 받기를 원치 않았다는 이유로 죽음에 처하게 될 것이며, 그 선물 없이는 불멸의 생명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39).

bb) 부르심에 마음을 기울이기 위한 자기와의 투쟁.

10.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자마자 즉시 그 고귀한 영광을 받을 자격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를 주장하는 것은 사람의 의지를 박탈하고, 이성에 대항하는 반대 세력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을 듣는 자가 먼저 회개에 이르고, 그 후에 싸움에서 훈련받고 배우기 시작하며, 사탄에 맞서 싸우고 분투하다가, 오랜 경쟁과 투쟁 끝에 승리를 거두고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말한다(즉, 그리스도의 엄격한 제자가 되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27, 20).

bb) 의지의 경향을 좌우하는 관념과 신념. 이 자기와의 투쟁에서 이성은 진리에 대한 다양한 동기 부여적·강제적 관념과 신념을 모아, 이를 통해 자극하고 고무할 수 있게 한다. 성 마카리우스는 여기서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행하신 일과, 그 일을 어떤 약속들로 둘러싸셨는지에 대한 관념을 가장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는 다양한 표현을 통해 이 점을 매우 자주 강조합니다.

11. 영혼의 지적인 본질을 깊이 헤아려 보라. 그리고 대충 넘기지 말고 깊이 헤아려 보라. 불멸의 영혼은 마치 귀중한 그릇과 같다. 하늘과 땅이 얼마나 큰지 보라.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만을 기뻐하신다. 네 고귀함과 존엄성을 바라보아라.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보내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친히 너를 위해 중재자로 오셔서, 망가지고 상처 입은 너를 일으켜 세우고, 순수한 아담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 주시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너를 변호하러 오셔서 죽음에서 너를 구원하셨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너를 향한 그분의 섭리가 어떠한지 스스로 생각해 보아라 (26, 115. 28).

12. 왕이 누더기 옷을 입은 어떤 가난한 소녀를 발견하고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녀의 더러운 옷을 벗겨 주고, 검은 때를 씻어 주며, 밝은 예복으로 단장시켜 왕의 동역자로 삼아 왕의 식사와 연회에 참여하게 했다고 상상해 보라.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는 상처 입고 상심한 영혼을 찾아내어 그에게 치유를 베풀어 주시고, 검게 물든 옷과 죄악의 수치를 벗겨내시며, 천상의 왕실 예복, 신성하고, 빛을 발하며 영광스러운 왕의 예복으로 입히시고, 그에게 면류관을 씌우시며 기쁨과 즐거움 가운데 왕의 잔치에 참여하게 하셨다(27, 3).

13. 그러므로 기독교는 하찮은 것이 아니라 위대한 신비이다. 그러니 네 고귀함을 깨달아라. 즉, 네가 왕의 존엄으로 부르심을 받았으며, 네가 “택함 받은 족속이요 거룩한 민족”이라는 사실을 (베드로전서 2, 9). 기독교의 신비는 이 세상에 있어 비범한 것이다. 왕의 눈에 보이는 영광과 부는 세속적이고, 썩어 없어지며, 일시적인 것이지만, 그 왕국과 그 부는 신성하고, 천상적이며, 영광스럽고, 결코 사라지지 않으며, 결코 끝나지 않는다. 이는 하늘의 교회에서 하늘의 왕과 함께 통치하며, 그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맏아들이 되신 것처럼(골로새서 1:18), 그분과 함께 통치하는 자들도 맏아들이기 때문이다(27:4).

14.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약속은 위대하고 형언할 수 없을 만큼 크며, 그 위대함은 한 영혼이 지닌 믿음과 풍요로움에 비하면 하늘과 땅의 모든 영광과 아름다움, 그 밖의 모든 장식과 다양성, 풍요, 아름다움, 그리고 눈에 보이는 모든 즐거움조차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러니 주님의 이토록 많은 권유와 약속 앞에서, 우리가 온전히 주님께 나아가 그분께 우리 자신을 바치고, 복음에 따라 그 밖의 모든 것을 버리며, 오직 그분 한 분만을 사랑하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기를 어떻게 바라지 않겠는가? 보라,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주어졌으니,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큰 영광인가! 교부들과 선지자들의 시대부터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 얼마나 많은 관심을 기울이셨는지! 얼마나 많은 약속이 선포되었는지! 얼마나 많은 권유가 있었는지! 주님께서는 태초부터 우리에게 얼마나 자비로우셨는지! 마침내 그분은 재림하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써 우리에게 말로 다 할 수 없는 은혜를 증명하시고, 회개한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우리 자신의 뜻과 세상에 대한 사랑, 나쁜 동기와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이로 인해 믿음이 약하거나 불신앙적인 자들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이 모든 상황 속에서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자비로우시며, 보이지 않게 우리를 지키시고 위로하시며, 끝까지 우리의 죄로 인해 타락과 세상의 유혹에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크신 자비와 오래 참으심으로 우리가 멸망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며, 언젠가 우리가 그분께로 돌아올 것을 여전히 염두에 두시고 계십니다 (4. 17. 18).

15.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르지 않은 것, 곧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고린도전서 2:9)이라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 당시 위대한 의인들과 왕들, 선지자들은 구세주가 오실 것임을 알았으나, 그분이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 십자가에서 피가 흘릴 것,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실 것, 교회에서 빵과 포도주가 바쳐질 것, 그분의 살과 피의 형상이 될 것, 보이는 떡을 성찬하는 자들이 영적으로 주님의 살을 맛볼 것, 사도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위로자를 영접하고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입으며, 성령과 하나 되는 경지에 이를 것. 선지자들과 왕들은 이를 알지 못했고, 그들의 마음에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27, 17).

16. 우리에게 이러한 은혜가 예비되어 있고, 이러한 약속이 주어졌으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처럼 은혜를 베푸셨으니, 우리는 게으름 피우거나 주저하지 말고 영생으로 서둘러 나아가며, 온전히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 자신을 바쳐야 한다(49, 5).

17. 영혼의 존엄성과 이 지적인 존재가 얼마나 귀중한지에 대해 들었을 때, 하늘과 땅은 지나가지만 너는 아들의 지위와 형제애, 그리고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깨닫는가? 보이는 세상에서 신랑의 모든 것이 신부에게도 속하듯이, 주님의 모든 것이 너에게 맡겨진다. 이는 바로 그분께서 너를 위해 중보하시며, 너를 부르시기 위해 친히 오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는 스스로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네 고귀함을 이해하지 못하므로, 영적인 사람이 네 타락을 애도하며 이렇게 말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영광 중에 있는 이가 깨닫지 못하니, 무지한 짐승과 같아서 그들과 같아지리라”(시편 48,21). (16,13). 말 에 이어 그는 다른 권면들도 제시하는데, 우리의 목표는 우리와 한 몸인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며, 특히 우리가 주님을 따를 때에만 비로소 우리에게 선이 있고, 그분을 따르지 않을 때보다 더 나쁜 상태는 없다는 것이다.

18. 눈을 들어 해를 바라보면, 하늘에 해의 궤도가 있고, 그 빛과 광선은 땅으로 내려오며, 빛의 모든 힘과 그 찬란함이 땅을 향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시며, 모든 시작과 권세보다 높으시지만, 그분의 눈은 땅에 머무는 사람들의 마음을 향하고 계시니, 그분께 도움을 바라는 자들을 그분께서 계신 곳으로 데려가시기 위함이다. 이는 “내가 있는 곳에 내 종도 있을 것이라” (요한복음 12:26)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 없는 동물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분별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각자는 자기 종족과 결합하기 때문입니다. 야생 동물은 야생 동물과, 양도 자기 종족과 함께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하늘에 있는 당신의 친족, 즉 주님께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당신의 생각으로 악의 생각에 동조하고 기울어지며, 죄의 조력자가 되어, 그와 함께 스스로를 대적하며, 마치 독수리에게 잡힌 새나 늑대에게 잡힌 양이 삼켜지듯이, 혹은 뱀에게 손을 뻗었다가 물려 죽는 아이처럼, 스스로를 원수의 먹잇감으로 내어주고 있다(45, 6).

19. 영혼은 자신의 소망으로 교제하고 하나 되는 대상에게 속한다. 그러므로 영혼은 자신 안에 하나님의 빛을 품고 그 빛 안에서 살며 온갖 미덕으로 단장할 때, 안식의 빛에 참여하게 되거나, 자신 안에 죄의 어둠을 품고 있을 때, 정죄를 받게 된다. 하나님 곁에서 영원한 안식과 빛 가운데 살기를 원하는 영혼은, 예전의 간사한 어둠에 대해서는 죽어야 하며, 신성한 양육을 받기 위해 다른 삶으로 넘어가야 한다. 이 말을 듣고, 네 자신 안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살펴보아라. 만약 그렇지 않다면, 너는 끊임없이 슬퍼하고, 울며, 괴로워해야 한다. 아직 천국에 있어서는 죽은 자와 같은 존재로서, 주님께 부르짖으며 믿음으로 네게 참된 생명이 주어지기를 간구하라. 하나님께서는 이 몸을 창조하시되, 자신의 본성에서나 육체에서가 아니라, 생명과 음식, 음료, 옷, 신발을 빌려오게 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몸을 그 자체로는 벌거벗은 상태로 창조하시고,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외부에서 얻도록 마련하셨으며, 몸은 그 밖에 존재하는 것, 즉 음식, 음료, 옷 없이는 살 수 없게 하셨다. 만약 이 육체가 본성에 있는 것만으로 제한되어 외부에서 아무것도 얻지 않는다면, 그것은 파괴되고 멸망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그 자체에 하나님의 빛을 지니지 않은 영혼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음에도(하나님께서 그 영혼이 영생을 누리도록 계획하시고 기뻐하셨기 때문이다), 자신의 본성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성으로부터, 그분의 성령으로부터, 그분의 빛으로부터 영적인 양식과 영적인 음료, 그리고 하늘의 옷을 받는데, 이것이 바로 영혼의 참된 생명이다(1, 8. 10).

20.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육체에서 생명은 그 자체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그 밖에 있는 것, 즉 땅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그 밖에 존재하는 것 없이는 살 수 없는 것처럼, 만일 영혼이 지금 당장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다시 태어나지 않고, 그곳에서 영적으로 양육받으며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고, 주님 앞에서 무르익지 못하고, 그 신성을 말로 다 할 수 없는 하늘의 아름다움을 지닌 옷으로 입히지 않는다면, 그 양식 없이는 영혼이 스스로 기쁨과 안식 속에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본성에는 생명의 떡, 곧 “나는 생명의 떡이라”(요한복음 6:35) 말씀하신 분과, “생수의 근원”(요한복음 4:10),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시편 103:15), “기쁨의 기름”(시편 44:8)이라 하신 분을 포함하며, 또한 하늘의 성령이 주시는 다양한 양식과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빛을 발하는 하늘의 옷을 지니고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영혼의 천상적 삶이다. 육신이 자신의 본성에 머무르면 화가 있을 것이니, 그것은 썩어 없어지고 죽기 때문이다. 영혼도 오직 자신의 본성에만 머물러 신성한 영과 교제하지 못하면 화가 있을 것이니, 그것은 영원한 신성한 생명을 누리지 못한 채 죽기 때문이다. 병자들이 더 이상 음식을 섭취할 수 없을 때 주변 사람들이 절망하고, 모든 친지, 친구, 가족, 그리고 그들이 사랑하는 이들이 그들을 위해 울듯이, 하나님과 거룩한 천사들도 성령의 하늘 음식을 맛보지 못하고 썩지 않는 삶(1, 11)을 살지 못하는 영혼들을 눈물을 흘릴 만한 존재로 여긴다.

21. 그러므로 만일 네 내면의 사람이 이 모든 것을 체험을 통해 의심할 여지 없이 깨달았다면, 보라, 너는 참으로 영원한 생명을 살고 있는 것이며, 네 영혼은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과 함께 안식을 누리고 있다. 보라, 너는 참된 삶을 살기 위해 주님으로부터 이 모든 것을 진정으로 얻고 받아들인 것이다. 만약 네 안에서 그런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한다면, 울고, 슬퍼하며, 탄식하라. 왜냐하면 지금까지 네가 영원한 영적 부를 얻지 못했고, 지금까지 참된 생명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네 빈곤을 뉘우치며, 밤낮으로 주님께 간구하라. 네가 끔찍한 죄의 빈곤 속에 있기 때문이다. 오, 누군가 적어도 자신의 빈곤에 대한 이 슬픔이라도 얻었더라면! 오, 우리가 배부른 자들처럼 안일함 속에서 시간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슬퍼하며 찾고, 주님께 끊임없이 구하는 자는 더 빨리 구원과 하늘의 부를 얻을 것이니, 주님께서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에 관한 말씀을 마치시며 말씀하신 대로이다. “ , 하물며 하나님께서는 밤낮으로 그분께 부르짖는 자들에게 보복을 베푸시지 않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께서 곧 그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리라” (누가복음 18:7, 8). (1,12).

22. 주님의 모든 강림은 어둠과 죄, 부정한 영과 사악한 세력의 무덤 속에 죽은 자처럼 누워 있던 사람을 위해 이루어진 것이니, 이는 주님께서 지금 이 세상에서 그 사람을 부활시키고 생명을 불어넣으시며, 온갖 어둠에서 그를 정화하시고, 당신의 빛으로 비추시며, 신성의 하늘 옷을 입히시기 위함이다. 또한 육체의 부활 때, 이미 영혼이 먼저 부활하여 영광을 얻은 자들의 육체도 영광을 얻게 될 것이며, 지금 이미 빛을 받고 영광을 얻은 영혼으로 인해 밝아져,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닌 하늘의 거처, 곧 신성한 빛의 영광을 입게 될 것이다. 보라, 하나님의 영광이 얼마나 형언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는지! 측량할 수 없고, 무한하며, 헤아릴 수 없는 그리스도인들의 풍요로움을 표현하거나 묘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온갖 정성을 다해 기독교인의 수련에 착수하고 그 풍요로움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이는 기독교인들의 유산이자 몫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나의 유산과 나의 잔이시니라”(시편 15:5)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34, 2. 3).

23. 소금이 없는 고기는 썩어 큰 악취를 풍기며, 견딜 수 없는 악취 때문에 모두가 그것을 멀리하고, 썩은 고기 속에서는 구더기들이 기어다니며 거기서 먹이를 찾아 먹어 치우고 그 안에 둥지를 틀지만, 그러나 소금을 뿌리는 즉시, 고기를 먹던 구더기들은 몰살되어 죽고, 악취는 사라집니다. 소금은 구더기를 없애고 악취를 제거하는 성질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으로 소금 치지 않은, 하늘의 소금, 즉 하나님의 능력에 닿지 않은 모든 영혼은 썩어가며 사악한 생각들이 내뿜는 끔찍한 악취로 가득 차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얼굴은 헛된 생각과 어둠, 그리고 그러한 영혼 속에 깃든 정욕이 내뿜는 끔찍한 악취를 피하시며, 그 영혼 안에는 사악하고 무서운 벌레들, 즉, 사악한 영들과 어둠의 세력들이 그곳에서 먹이를 얻고, 둥지를 틀고, 기어 다니며, 그 영혼을 갉아먹고 썩게 만든다. 이는 “내 상처들이 썩어 악취를 풍치도다”(시편 37:6)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혼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믿음을 갖고 생명의 소금, 선하고 인자하신 성령을 구하는 즉시, 내려온 하늘의 소금이 그 안에서 무서운 벌레들을 박멸하고, 해로운 악취를 없애며, 그 힘의 작용으로 영혼을 정화합니다. 이처럼 참된 소금이 영혼을 건강하고 온전하게 만들면, 그 영혼은 다시 하늘의 주님을 섬기고 봉사하는 데 쓰이게 된다. 그러므로 율법에서도 이를 나타내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모든 제물에 소금을 뿌리라고 명하셨다(레위기 2, 13). (1, 5).

24. 보이는 세상에서와 마찬가지로, 벌거벗은 자는 큰 수치와 치욕을 당하며, 친구들은 친구를 외면하고, 가족들은 벌거벗은 친족을 외면한다. 또한 자녀들은 아버지가 벌거벗은 모습을 보고는 아버지의 벌거벗은 몸을 보지 않으려고 시선을 돌리고, “뒤를 돌아보며” 시선을 돌린 채 다가가 그를 덮어 주었다(창 9:23).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옷을 온전히 입지 못하고, 능력과 진리 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지 않은 영혼들을 외면하신다(20:1).

25. 최초의 인간은 자신이 벌거벗은 것을 보고 부끄러워했다. 벌거벗음 속에 이토록 큰 불명예가 있다! 만약 육체의 나체조차도 그러한 수치를 안겨준다면, 하물며 신성한 능력으로부터 벗겨져, 온전한 진리 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형언할 수 없고 썩지 않으며 영적인 옷을 입지 않은 그 영혼은, 훨씬 더 큰 수치와 불명예로 덮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신성한 영광으로부터 벗겨진 모든 이는, 육체적으로 벌거벗었을 때 아담이 부끄러워했던 만큼이나 스스로를 부끄러워하고 자신의 불명예를 자각해야 한다. 비록 아담이 무화과 잎으로 옷을 만들었으나, 자신의 빈곤함과 벌거벗음을 자각하며 부끄러움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영혼은 옷을 주시고 형언할 수 없는 빛 속에서 영광으로 입히시는 그리스도께 구하며, 헛된 생각으로 스스로 옷을 만들지 말고, 자신의 의로움에 현혹되어 구원의 옷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20, 2).

26. 주인 자신이 계신 집이 온갖 장식과 아름다움, 화려함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자기 안에 주님을 모시고 그분이 거하시는 영혼도 온갖 아름다움과 화려함으로 충만해지니, 이는 주님께서 그분의 영적 보물들과 함께 그 영혼의 거처에 거하시며 다스리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인이 부재하고 주인이 없는 그 집은 화가 있을 것이니, 무너져 황폐해지고 온갖 더러움과 무질서로 가득 차게 되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선지자의 말씀대로 “시리니와 악령들”이 (이사야 13:21), 왜냐하면 황폐해진 집에는 야생 고양이와 개, 온갖 더러운 것들이 자리를 잡기 때문이다. 자신의 비참한 타락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내면에는 신랑과 원수 지내도록 설득하고 강요하며,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게 하여 그녀의 생각을 타락시키려는 자들이 있는 영혼은 비참하다 (33, 3).

gg) 제시된 생각들에 의해 영혼은 주님을 따르라는 부르심에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지만, ‘아직 할 시간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와 그 소망을 꺾어버린다. 성 마카리우스 는 구원의 일을 미루는 것의 위험성에 대한 강력한 경고로 그러한 생각들을 물리친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고갈될 수 있으며, 그때는 파멸이 불가피하다.

27. 모든 것을 소홀히 여기며 편견에 휩쓸려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간이 지나면서 사도의 말씀, 즉 “그분의 풍성한 선하심과 온유함, 그리고 오래 참으심을 기뻐하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심이 너를 회개로 이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롬 2:4)라는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분의 오래 참으심과 자비와 온유함 속에서도 죄의 수를 더욱 늘리고, 우리의 태만과 무관심으로 스스로에게 가장 무거운 심판을 자초한다면, 사도의 말씀이 우리에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네 완고함과 회개하지 않는 마음으로, 진노의 날과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드러나는 날에 네게 임할 진노를 스스로 쌓아 두고 있다” (롬 2:5). 하나님의 은혜는 크고 헤아릴 수 없으며,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말로 다 할 수 없으니,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온전히 하나님께로 돌아서서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하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4, 19).

28. 만일 네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알고자 한다면, 우리는 성령으로 감동받은 성경에서 이를 배울 수 있다. 약속을 받은 조상들을 가진 이스라엘 백성들, “그들에게서 육신으로 그리스도가 나고, 그들에게서 예배와 언약이 나왔으며”(롬 9:4, 5), 그들이 얼마나 많이 죄를 지었는지 보라. 그들이 몇 번이나 타락했는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영원히 버리지 않으시고, 잠시 동안, 오히려 그들의 유익을 위해 그들을 징벌에 내맡기셨으며, 슬픔을 통해 그들의 완고한 마음을 누그러뜨리시려 하셨고, 그들을 돌이키게 하시며 격려하셨으며, 그들에게 선지자들을 보내셨고, 그들이 죄를 짓고 그분을 모욕할 때에도 얼마나 오랫동안 그들에게 인내하셨는가? 회개하는 자들을 기쁨으로 받아들이셨고, 그들이 다시 타락할 때에도 버리지 않으시고 선지자들을 통해 회개로 부르셨으며, 비록 그들이 수없이 그분을 외면했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했음에도, 매번 호의적으로 맞이하시고 자비롭게 받아들이셨으나, 마침내 그들은 조상들과 거룩한 예언자들의 전승에 따라 자신들의 구속자, 구세주, 왕, 예언자로 기대하던 바로 그 주님께 손을 얹어 큰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그분께서 오셨을 때, 그들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큰 모욕을 가했고, 결국 십자가에서 사형에 처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 큰 모욕과 극심한 범죄로 인해 그들의 죄가 쌓여 가득 차게 되었으므로, 성전 휘장이 찢어지면서 성령께서 그들로부터 떠나가시자, 그들은 완전히 버림받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성전도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파괴되고 황폐해졌으니, 이는 주님께서 “이 성전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라”(마태복음 24:2) 정하신 대로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방인들에게 단호히 넘겨졌으며, 당시 그들을 사로잡았던 왕들에 의해 온 땅에 흩어졌고, 다시는 자기 나라로 돌아오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4,20).

29. 이와 같이 오늘날에도 우리 각자에게 자비로우시고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오래 참으심을 나타내시는데, 비록 각 사람에게서 거듭되는 모욕을 보시면서도 침묵하시며, 사람이 시간이 지나면 정신을 차리고 더 이상 그분을 모욕하지 않도록 변할지 기다리시며, 죄에서 돌이키는 자를 큰 사랑과 기쁨으로 받아들이십니다. 이는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한 죄인이 회개하면 기쁨이 있다”(눅 15:10), 또 “내 아버지께서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멸망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마 18:14), 곧 가장 작은 자들 말이다. 그러나 만일 누군가가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푸시는 큰 자비와 오래 참으심 가운데, 하나님께서 은밀하든 명백하든 모든 죄의 실족에 대해 그를 벌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것을 보시고도 마치 회개를 기다리시는 듯 침묵하실 때, 스스로 큰 무관심에 빠져 죄를 죄 위에 더하기 시작하고, 방심을 방심에 더하고, 한 죄 위에 또 다른 죄를 쌓아 죄의 한계를 채우게 된다면, 마침내 빠져나올 수 없는 죄에 빠지게 되며, 심령이 꺾이고, 악한 자에게 굴복하여 완전히 멸망하게 된다(4. 21).

30. 소돔 사람들도 그러했다. 많은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다가, 마지막에는 천사들을 대적하는 악한 마음으로 그런 죄에 빠졌으니, 더 이상 회개할 여지조차 없게 되었고, 죄의 한계를 채우고 심지어 넘어서 버렸기 때문에 그들은 끝내 버림받았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에 따라 불에 타 죽었다. 노아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는데, 거듭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다가, 마침내 온 땅을 타락시킬 정도의 죄에 이르렀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크게 모독하고 그분의 백성에게 죄를 지은 이집트인들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자비로우셔서 그들을 완전히 멸망시킬 만한 형벌을 내리시지 않으시고, 오직 회개와 돌이킴을 촉구하기 위한 교훈으로 가벼운 징계를 내리시며, 그분의 오래 참으심을 나타내시고 그들의 회개를 기다리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 앞에서 여러모로 죄를 지으며, 때로는 회개했다가도 다시 그 죄를 뉘우치기를 반복하다가, 악한 뜻으로 인한 옛 불신에 굳게 서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무거운 노역을 지우더니, 마침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수많은 기적을 행하시며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을 때, 큰 죄를 저질러 하나님의 백성을 뒤쫓아갔습니다. 그래서 신성한 심판이 마침내 그들을 멸망시키고 파멸시키며 물속에 가라앉혀, 눈에 보이는 삶을 누릴 자격이 없다고 선언하셨습니다(4, 22).

31.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는 성경에서 얻은 생각들로 이를 널리 알리며, 가능한 한 빨리 회개하여 우리에게 자비로우시고 우리가 온갖 간사와 악한 편견에서 완전히 떠나기를 기다리시는 주님께 서둘러 나아가야 함을 확증합니다. 주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주님께서는 큰 기쁨으로 받아들이십니다. 우리가 이를 널리 알리는 것은, 이 말을 더욱 강조하는 것은, 날이 갈수록 우리의 무관심이 커지지 않고 우리 안의 죄가 늘어나지 않도록, 그리고 이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를 자초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실한 마음으로 돌아서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힘쓰고, 절망은 악의와 간사의 속삭임인 만큼, 사람을 절망과 무기력, 무관심과 방심으로 이끄는 것이니, 회개하여 주님께 나아갔을 때, 인류에 대한 주님의 크신 자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4, 24).

dd) 한편, 영혼이 이러한 방식으로 구원의 일을 시작하기로 결심할 때, 원수는 절망과 희망 상실이라는 마지막으로 불타오르는 화살을 그 영혼에게 퍼붓는다.

32. 때로는 사탄이 네 마음속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보아라, 네가 얼마나 많은 악을 저질렀는지, 보아라, 네 영혼이 얼마나 광란으로 가득 차 있는지, 네가 죄로 너무나 무겁게 짓눌려 있어 이제 더 이상 구원받을 수 없다.” 이는 너를 절망에 빠뜨리기 위함인데, 네 회개가 그에게 불쾌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범죄를 통해 죄가 들어오자마자, 죄는 마치 사람이 사람과 대화하듯 매 순간 영혼과 대화를 나누기 때문이다. 너도 그에게 이렇게 대답하라. “주님의 성경에 기록된 증거를 보라. ‘내가 죄인의 죽음을 원하지 아니하고, 그가 악한 길에서 돌이켜 살기를 원하노라’(에스겔 33:11). 그분은 죄인들을 구원하고, 죽은 자들을 부활시키며, 죽은 자들을 살리고, 어둠 속에 있는 자들을 비추기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참으로, 오셔서 그분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의 지위로, 거룩하고 평화로운 성으로, 결코 죽지 않는 생명으로, 썩지 않는 영광으로 부르셨으니, 오직 우리가 우리의 시작을 선한 끝으로 마무리하고, 가난과 나그네 생활과 고난 속에 머물며,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그치지 않고 끈질기게 문을 두드리기만 하면 됩니다. 몸이 영혼과 가까운 것처럼, 주님께서도 가까이 계시며 오셔서 마음의 닫힌 문을 열어 주시고, 우리에게 하늘의 풍요를 베풀 준비가 되어 계신다. 그분은 선하시고 사람을 사랑하시며, 우리가 끝까지 인내하며 그분을 구하기만 한다면 그분의 약속은 거짓이 아니다(11, 15). 99.

33. 페르시아 군대와 로마 군대를 상상해 보라. 그곳에서 용기에 날개를 달고 서로 대등한 두 청년이 나와 싸움을 벌인다. 이처럼 대립하는 힘과 이성은 서로 동등하며, 동등한 힘을 지니고 있다. 사탄이 아첨으로 영혼을 유혹하여 자신의 뜻대로 이끌듯이, 영혼 또한 반항하며 그에게 결코 복종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두 힘 모두 선과 악을 향해 단지 부추길 뿐, 강요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바로 그러한 자유 의지에는 하나님의 도움이 주어지며, 그것은 투쟁을 통해 하늘로부터 무기를 얻어, 그것으로 죄를 이기고 근절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영혼은 죄에 대항할 수는 있으나, 하나님 없이는 악을 이기거나 근절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를 강한 거인과 같고, 영혼을 소년과 같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잘못된 말을 하고 있다. 만일 그러한 차이가 있어서 죄가 거인과 같고 영혼이 소년과 같다면, 인간에게 사탄과 싸우라는 율법을 주신 율법 제정자께서는 불의하신 분이 되셨을 것이기 때문이다(27, 22).

34. 만일 우리를 압도하고 있는 수많은 죄에서 돌이키는 것이 마치 실행하기 어렵고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진다면(이미 우리가 말했듯이, 그러한 생각은 악의에서 비롯된 것이며 우리의 구원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된다), 다음 사실을 상기하고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주님께서 그분의 자비로 우리에게 오셔서, 눈먼 자들에게 시력을 주시고, 마비된 자들을 고치시며, 온갖 병을 치유하시고, 이미 썩음과 멸망에 이른 죽은 자들을 살리시고, 귀머거리들의 귀를 열어 주시며, 한 사람에게서 악령 무리를 쫓아내시고, 그토록 광기에 사로잡힌 자에게 온전한 정신을 되찾아 주셨다는 사실을. 하물며 그분께로 돌아와 그분께 자비를 구하고, 그분의 도움을 청하는 영혼이라면, 그분은 그를 돌이키시고, 절제와 무욕의 경지, 온갖 미덕의 완성과 마음의 갱신으로 인도하시며, 그에게 건강과 분별력 있는 통찰, 생각의 평화를 주시고, 맹목과 귀머거리와 불신, 무지, 그리고 경외심 결여로 인한 무감각함에서 벗어나 절제와 덕, 그리고 마음의 순결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몸을 창조하신 분이 바로 영혼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상에 계실 때, 그분의 자비로, 그분께 나아와 도움과 치유를 구하는 모든 이에게, 선하고 유일한 의사로서, 각자가 필요로 하는 것을 아낌없이 베풀어 주셨듯이, 그분은 영적인 면에서도 그처럼 관대하시다(4, 25).

35.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통해 그분은 우리가 끊임없이, 쉬지 않고, 지치지 않고 그분께 은혜로운 중보를 간구하도록 우리를 설득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죄인들이 그분께로 돌아오게 하고, 그분을 믿는 자들을 치유하시기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힘닿는 대로 나쁜 편견에서 벗어나고, 악한 행실과 세상의 유혹을 미워하며, 교활하고 헛된 생각들을 멀리하고, 힘닿는 대로 항상 그분께 매달린다면, 그분은 우리에게 도움을 주실 준비가 되어 계십니다. 그분은 지극히 자비로우시며, 생명을 주시고, 치유할 수 없는 정욕을 고치시며, 그분을 부르며 그분께로 돌아서는 몸들을 구원하시니, 그들은 자신의 의지로, 강요받지 않은 채 힘닿는 대로 온갖 세속적인 사랑에서 멀어지고, 마음을 땅에서 떼어내어 소망과 구함으로 그분께로 향하기 때문이다 (4, 27).

그것) 모든 거슬리는 생각이 제거되면, 의지를 굽히기 위한 자기와의 투쟁은 끝나고, 자신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주님을 섬기겠다는 결심이 생겨나는데, 그 결심은 죽음처럼 굳건하다. 그 표현은 이렇다: “차라리 죽을지언정, 더 이상 죄를 용납하지 않겠다.”

36. 성 마카리우스는 진정한 결의를 지닌 영혼에 대해, 천 가지 유혹 속에서 어떤 고난이 닥치더라도 모든 것을 견디며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설령 죽는다 해도, 그분(즉, 주님)을 죄와 원수에게 내어주지는 않겠다.” (26,8).

жж) 그러나 그는 이 결의를, 마치 제물로 바치는 동물을 도살하듯 영혼을 바치는 것으로 더 자주 표현한다. 왜냐하면 그 결의는 바로 주님을 위한 전소 제물로 자신을 바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37. 육신적인 사람이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기로 결심하면, 먼저 그는 죽고, 그 이전의 교활한 삶에 대해서는 무익한 존재가 된다 (46, 2).

38. (제물에 관해 정해진 바에 따르면), 먼저 제사장이 그것을 도살하여 죽게 한 다음, 조각내어 소금을 뿌리고, 마지막으로 불에 태워야 한다. 왜냐하면 제사장이 미리 양을 도살하여 죽이지 않으면, 소금을 뿌릴 수도 없고 주님께 온전한 제물로 바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영혼도 참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 나아갈 때, 그분께 의해 도살되어야 하며, 자신의 교만과 이전에 살았던 악한 삶, 즉 죄를 위해 죽어야 한다. 그리고 생명이 제물을 떠나듯이, 정욕의 간사함도 버려야 한다. 마치 육체에서 영혼이 빠져나오면 죽어 더 이상 이전의 삶을 살지 못하고, 듣지도 걷지도 못하는 것처럼, 하늘의 대제사장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능력의 은총으로 영혼을 도살에 내어주어 세속적인 삶을 죽이실 때, 영혼은 자신이 살아왔던 그 간사한 삶을 위해 죽게 되며, 더 이상 듣지도, 말하지도, 죄의 어둠 속에서 살지도 않게 되는데, 이는 정욕의 교활함이 마치 영혼처럼 은총으로 인해 그 영혼에서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사도도 “세상은 내게 십자가에 못 박혔고, 나도 세상에 십자가에 못 박혔다”(갈라디아서 6, 14)라고 외친다. (1, 6).

zz) 이 진리를 마음속에 더욱 깊이 새기기 위해, 성 마카리우스는 영적 삶에서의 모든 실패와 모든 넘어짐과 타락, 그리고 모든 도덕적 기질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섬기겠다는 자기 희생적인 결의의 부족에서 비롯된다고 상세히 설명한다.

39. 좋은 시작을 좋은 끝과 결합하여, 흠 없이 목표에 도달하고, 유일하신 하느님께 대한 한결같은 사랑을 품으며 모든 것을 버린 이들은 극히 드뭅니다. 많은 이들이 감동을 받고, 많은 이들이 하늘의 은총에 참여하며, 하늘의 사랑에 찔리지만, 길에서 마주친 다양한 투쟁과 고행, 고난과 악마의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각자에게는 이 세상에서 무언가를 사랑하고 싶은 욕망이 있어 자신의 사랑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채, 다양한 세속적 욕망으로 되돌아가, 나약함과 무기력함이나 자신의 의지에 대한 두려움, 혹은 세속적인 무언가에 대한 사랑 때문에 세상에 머물러 그 깊이에 빠져버렸다. 반면, 진정으로 끝까지 선한 삶을 살아가려는 자들은 그 천상의 사랑 안에서 자발적으로 다른 어떤 사랑이나 애착도 받아들이거나 섞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만 영적 여정에 장애물을 놓지 않고, 뒤로 물러서지 않으며, 결국 생명을 잃지 않을 수 있다. 하나님의 약속이 얼마나 크고, 말로 다 할 수 없으며, 헤아릴 수 없는지, 그만큼 우리에게 믿음과 소망, 수고와 위대한 업적, 그리고 오랜 시련이 필요하다. 천국을 갈망하는 사람이 얻기를 바라는 그 복들은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다. 그가 그리스도와 함께 끝없는 세월 동안 다스리기를 원한다면, 이 짧은 생의 시간 동안, 죽음이 닥칠 때까지 열심을 다해 투쟁과 수고, 유혹을 견뎌내지 않겠는가? 주님께서는 이렇게 외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기뻐하며 나를 따르라”(마태복음 16:24). 또한 “누구든지 아버지, 어머니, 아내, 자녀, 형제,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가복음 14:26).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비록 천국을 얻고자 하고 영생을 상속받기를 원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욕망대로 살기를 거부하지 않고 그 욕망을 따르며, 더 정확히 말해 그들 안에 헛된 것을 심는 자를 따르면서도, 자기 자신을 부인하지 않은 채 영생을 상속받기를 원하니,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5, 7).

40. 주님의 말씀은 참되시다. 주님의 계명에 따라 온전히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모든 세속적인 욕망과 유대, 오락, 쾌락, 그리고 활동들을 혐오하며, 오직 한 분 주님만을 눈앞에 두고 그분의 계명을 행하기를 갈망하는 자들은 걸림 없이 나아간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버리기를 원하지 않고, 그 사랑 속에서도 여전히 무언가를 사랑하거나, 이 세상의 어떤 쾌락이나 욕망을 즐기며, 자신의 의지와 뜻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주님께 온전한 사랑을 품지 않는다면, 누구나 자신의 의지로 인해 타락하게 된다(5, 8).

41. 때로는 겉보기에는 선해 보이는 일들이 명예와 사람들의 칭찬을 위해 실행되지 못하기도 하는데, 이는 하나님 앞에서 거짓과 도둑질, 그리고 다른 죄들과 다름없다. “하나님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자들의 뼈를 흩으시리라”(시편 52:6)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겉보기에는 선해 보이는 일들 속에서도 악한 자는 자신에게 유리한 점을 찾아내며, 그는 세속적인 욕망 속에서 매우 교묘하고 기만적이다. 사람이 자신의 의지로 얽매이는 어떤 세속적이고 육체적인 사랑이라도, 죄가 그를 사로잡아 족쇄와 밧줄, 무거운 짐이 되어, 이 악한 세상에서 그를 가라앉히고 짓누르며, 힘을 모아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듭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사랑한 것이 바로 그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그를 지배하며, 힘을 모아 다시 일어설 수 없게 만든다. 이것에 따라 균형과 기울기, 그리고 악의 우세가 결정되며, 이로 인해 온 인류와 도시나 산속, 수도원, 들판, 혹은 황량한 곳에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시험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의지에 사로잡혀 무언가를 사랑하기 시작하면, 그의 사랑은 무언가에 얽매이게 되어 더 이상 온전히 하느님께 향하지 않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이는 재산을 사랑하고, 어떤 이는 금과 은을 사랑하며, 또 어떤 이는 인간의 영광을 위한 세속의 깊은 지혜를 사랑하고, 어떤 이는 권세를 사랑하고, 어떤 이는 명성을 사랑하며, 어떤 이는 때 아닌 모임들을 사랑하고, 어떤 이는 하루 종일 산만함과 쾌락 속에 지내고, 어떤 이는 헛된 생각에 현혹되며, 어떤 이는 인간의 영광을 위해 마치 율법 교사처럼 행동하는 것을 좋아하고, 어떤 이는 무위도식과 게으름을 즐기며, 또 다른 이는 옷에 집착하고, 어떤 이는 세속적인 염려에 빠져 있으며, 어떤 이는 잠이나 농담, 혹은 욕설을 좋아한다. 누구든지 세상에 어떤 것으로든, 크든 작든, 매여 있다면, 그것이 그를 붙잡아 두어 힘을 모을 수 없게 한다. 사람이 어떤 정욕과도 용감하게 싸우지 않는다면, 그는 바로 그 정욕을 사랑하는 것이며, 그 정욕은 그를 지배하고 짐을 지우며, 그에게 족쇄가 되어 그의 마음이 하느님께로 향하고, 그분께 기쁨을 드리며, 오직 그분 한 분만을 섬김으로써 천국에 합당한 자가 되어 영생을 얻도록 하는 데 방해가 된다(5, 9).

42. 진정으로 주님을 향하여 갈망하는 영혼은 온전히 그분께 사랑을 뻗어내고, 힘닿는 대로 자신의 의지로 오직 그분께만 매달리며, 이를 통해 은혜의 도움을 얻는다. 또한 스스로를 부인하고 자신의 이성의 욕망을 따르지 않는데, 이는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우리를 유혹하는 악으로 인해 이성이 교활하게 행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영혼이 주님을 사랑하게 되는 즉시, 자신의 믿음과 큰 근면함으로 자신의 그물에서 벗어나며, 동시에 위로부터 오는 도움으로 영원한 왕국에 합당하게 되고, 진정으로 그것을 사랑함으로써 자신의 의지와 주님의 도움으로 더 이상 영생을 잃지 않게 된다(5, 10).

43.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자신의 의지로 인해 파멸하고, 바다에서 익사하며, 포로로 잡혀가는지를 실제 사례를 통해 더 명확히 증명해 보겠다. 어떤 집이 불타고 있다고 상상해 보라. 한 사람은 자신을 구하기로 마음먹고, 불이 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밖으로 뛰쳐나가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자신의 영혼만 돌보기로 결심한 끝에 살아남는다. 다른 한 사람은 집안 물건이나 다른 것을 몇 가지 챙겨가기로 마음먹고, 그것을 가져오려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가, 챙기는 동안 불길이 집을 삼켜 그를 집 안에 가두어 태워 죽였다. 보라, 이 사람은 사랑 때문에, 즉 잠시 동안 자기 자신 이외의 무언가를 사랑한 탓에 자신의 의지로 불길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바다를 건너던 다른 이들도 거센 파도에 휩쓸렸을 때, 한 사람은 옷을 모두 벗고 오직 자신만을 구하려는 마음으로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리하여 파도에 휩쓸리며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얽매이지 않은 채 파도 위를 떠다니다가, 마침내 그 고통스러운 바다에서 빠져나올 기회를 얻었고, 또 다른 사람은 자신의 옷 중 일부라도 구해내려고 마음먹고, 옷을 챙겨서 함께 떠내려가면 바다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가 챙긴 옷들이 짐이 되어 그를 바다 깊은 곳으로 가라앉혔고, 결국 작은 이득을 위해 자신의 영혼을 돌보지 않은 나머지 그는 죽고 말았다. 그가 자신의 자유 의지로 죽음의 희생양이 되었다는 것을 눈치채는가? 또 다른 예를 들어 보자. 이방인들이 온다는 소문이 돌자, 한 사람은 그 소식을 듣자마자 지체 없이 아무것도 챙기지 않고 도망쳤지만, 다른 한 사람은 적들이 온다는 말을 믿지 않거나 자신의 물건 중 일부를 챙겨 가고자 결심하여 도망치는 것을 지체했고, 그리하여 적들이 쳐들어와 그를 붙잡아 이방 땅으로 포로로 끌고 가, 그곳에서 노예 생활을 강요했다. 보라, 이 사람도 자신의 자유 의지와 무기력함, 용기의 부족, 그리고 몇 가지 물건에 대한 집착 때문에 포로로 끌려간 것이다(5, 11).

44. 주님의 계명을 따르지 않고, 자기 자신을 버리지 않으며, 유일한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오히려 자발적으로 세속의 속박에 얽매인 자들도 그들과 같다. 만일 주님을 향한 완전한 사랑의 옳음을 성령으로 감동받은 거룩한 성경에서 알고자 한다면, 욥이 말하자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자녀, 재산, 가축, 종들,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소유물—을 잃어버린 모습을 보라. 사람들은 그를 많은 것을 축적한 자로 여겼으나, 주님께서 그에게 시련을 주셨을 때, 욥은 오직 한 분 하나님 외에는 아무것도 축적하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마찬가지로 아브라함도 주님께서 그에게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창세기 12:1) 명하셨을 때, 즉시 고향, 땅, 친척, 부모 등 모든 것을, 말하자면, 버리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 후, 그에게 닥친 수많은 시련과 유혹 가운데, 아내가 빼앗겼을 때나, 낯선 땅에서 살며 모욕을 견뎌야 했을 때 등 모든 상황에서 그는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을 무엇보다도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마침내, 약속대로 오랜 세월이 지난 후 그토록 간절히 바랐던 외아들을 얻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 아들을 기꺼이 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모든 것을 버리고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부인했다. 왜냐하면 독자를 제물로 바침으로써, 그는 하나님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사랑하지 않았음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그토록 기꺼이 아들을 바쳤다면, 하물며 나머지 재산을 버리거나 한 번에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라면, 그는 온전한 기꺼움과 열정으로 이를 행했을 것이다. 이제 주님을 향한 완전하고 자발적인 사랑의 옳음을 보십니까? (5. 12).

45. 이와 같이 이 의인들과 함께 상속자가 되고자 하는 자들도, 하나님 외에는 아무것도 사랑해서는 안 된다. 그래야 시험을 당할 때, 그 시험에 합당하고 능숙하게 대처하며, 주님에 대한 사랑을 온전히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오직 항상 자신의 자유 의지로 유일하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모든 세속적인 사랑을 버린 자들만이 그 고행을 끝까지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랑을 받아들이고, 모든 세속적인 쾌락과 욕망을 멀리하며, 악마의 반역과 유혹을 너그럽게 견뎌내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사람들 중 아주 많은 이들이 수고도, 위업도, 땀 흘림도 없이 천국을 얻고자 하지만, 이는 불가능하다(5, 13).

46. 세상에서 어떤 이들은 수확철이나 다른 일할 때 부자에게 가서 일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을 얻으려 하는데, 그들 중 일부는 게으르고 빈둥거리는 사람들이라 다른 사람들처럼 수고하지도 않고 마땅히 일해야 할 만큼 일하지도 않으면서, 그러나 부자의 집에서 수고하지도 않고 자신을 혹사시키지도 않으면서, 마치 이미 모든 일을 다 해낸 것처럼, 인내심 있게, 신속하게, 온 힘을 다해 일하는 사람들과 동등한 대가를 받고 싶어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성경을 읽을 때, 어떤 의인이 어떻게 하나님께 기쁨을 드렸는지, 어떻게 하나님의 친구이자 대화 상대가 되었는지, 혹은 모든 성부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친구이자 상속자가 되었는지, 얼마나 많은 슬픔을 견뎌냈는지, 하나님을 위해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는지, 얼마나 많은 용맹한 행적과 위업을 이루었는지에 대해 읽을 때, 우리는 그들을 칭송하며 그들과 동등한 은사와 존엄을 누리고자 하며, 기꺼이 그 영광스러운 은사들을 얻고자 하며, 오직 그들의 수고와 위업, 슬픔과 고통만은 제쳐두고,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영예와 존엄을 얻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그들의 고된 수고와 위업은 우리 자신에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네게 말하건대, 이 모든 것을 모든 사람이 원하고 갈망한다. 음행하는 자들과 세리들, 불의한 자들조차도 수고와 위업 없이 그렇게 쉽게 왕국을 얻고 싶어 한다. 바로 그 때문에 유혹의 길에는 수많은 시련과 슬픔, 투쟁과 땀 흘림이 놓여 있는 것이니, 이는 온전한 의지와 온 힘을 다해 심지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유일한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대한 그러한 사랑으로 인해 더 이상 스스로를 위해 갈망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자들이 분명하게 드러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님의 말씀대로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심지어 자신의 숨결보다도 유일한 주님을 더 사랑함으로써 진정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며, 그 높은 사랑으로 인해 높은 천상의 선물로 보상받을 것이다(5, 14).

 

5. 수고의 상태

a) 결심은 출발점이다. 그 수고가 헛되지 않도록 목표를 정해야 한다. 그 목표는 무엇인가? 성령의 은총으로 본성을 갱신하는 것이다. 이를 결심한 자는 성령께서 힘과 효력을 주셔서, 마치 불처럼 모든 불결한 것을 태워 없애시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 일이 이루어질 때, 마치 영혼이 영혼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사람은 영적으로 살아나거나, 비로소 진정한 사람이 된다. 이것이 성 마카리오의 핵심 사상으로, 다른 모든 사상들이 이 주위를 중심으로 모여 있다.

1. 하느님께 나아와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자는, 변화되어 옛 사람에게서 비롯된 어떤 것도 남기지 않은, 더 나은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한 목적으로 나아가야 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2코린 5,17)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44. 1).

2.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영혼은 현재의 타락한 상태에서 다른 선한 상태로 넘어가야 하며, 현재의 비천한 본성을 다른 신성한 본성으로 변화시켜 성령의 도우시는 힘으로 새로운 본성을 갖추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천국에 합당한 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이룰 수 있는 것은 오직 주님을 믿고,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의 모든 거룩한 계명을 지키는 우리뿐이다. 엘리사 때, 본성상 물 위에서 가벼운 나무가 물에 던져졌을 때 본성상 무거운 쇠를 떠받쳤다면, 하물며 주님께서는 이곳에 더욱 가볍고, 유동적이며, 선하고, 천상적인 당신의 성령을 보내시어, 그분으로 말미암아 간사의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영혼을 가볍게 하시고, 날개를 달아 주시며, 하늘의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시고, 그 본성을 새롭게 변화시켜 온전히 활용하게 하실 것입니다(44, 5).

3.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과 같아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하늘의 영혼, 곧 하나님의 성령이 없으면 영혼도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죽은 것이며, 성령 없이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다(30, 3).

4. 그러므로 믿으려고 노력하고 주님께 나아가는 자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성령을 받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분은 영혼의 생명이시며, 주님께서 오신 것은 바로 이 땅에서 영혼에게 생명, 곧 성령을 주시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30, 6).

5. 하나님께서는 너에게 그토록 큰 은혜를 베푸사 거룩한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네 이성적인 본성과 땅의 육신을 취하시고, 그분의 신성한 성령으로 녹여내셨으니, 이는 너, 이 흙으로 지어진 자도 네 안에 하늘의 영혼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고 네 영혼이 성령과 교제하게 되고, 하늘의 영혼이 네 영혼 안에 들어올 때, 그때 비로소 너는 하나님 안에서 온전한 사람이자 상속자이며 아들이 될 것이다(32, 6).

6.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고, 모든 미덕에서 번영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하며,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간구하여, 그분의 성령에 대한 약속을 온전히 그리고 완전히 받아들여, 우리가 아직 육신에 있을 때 우리 영혼이 생기를 얻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만일 영혼이 이 현세에서 많은 믿음과 기도를 통해 성령의 거룩함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여 은혜와 하나가 되지 않는다면—그 은혜의 도우심으로 너희는 모든 계명을 흠 없이 깨끗하게 이행할 수 있는데—그 영혼은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44. 9). 119.

7. 첫 번째 인간의 불순종으로 인해, 우리는 우리 본성에 낯선 해로운 정욕들을 받아들였으며, 습관과 오랜 기간에 걸친 내면화를 통해 이를 마치 본성인 양 만들어 버렸다. 그러므로 다시금 성령의 비범한 은총으로 우리 안에서 이 낯선 것들을 몰아내고, 우리를 본래의 순결함으로 회복시켜야 한다. 만약 지금 우리가 많은 간구와 탄원, 믿음과 기도, 그리고 세상을 멀리하는 마음으로 성령의 그 하늘의 사랑을 우리 안에 받아들이지 못하고, 악덕으로 더럽혀진 우리의 본성이 사랑, 즉 주님께 붙어 있지 않으며, 성령의 그 사랑으로 거룩하게 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끝까지 흠 없이, 주님의 계명을 온전히 지키며 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천국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4, 8).

b) 회개하며 주님께 돌아온 자에게는 성사를 받은 후 이미 은총이 주어진다. 그러나 그 은총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드러나지는 않는다. 어떤 이에게는 즉시 임하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긴 시련을 겪게 한 뒤에야 비로소 그 효력을 나타낸다.

8. 무한하고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는, 자유 의지를 시험하기 위해, 또한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위해 온갖 위험과 수고를 감내하는 이들이 드러나도록, 헤아릴 수 없고 탐구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인류에게 은총을 다양하게 베푸십니다. 왜냐하면 어떤 이들은 믿음과 기도로 나아가는 즉시, 아직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수고와 땀과 고된 노력 없이도 성령의 은사와 선물을 미리 받기 때문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이유 없이, 때를 잘못 맞추어, 혹은 우연히 은혜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형언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는 어떤 지혜에 따라, 하나님의 은혜를 빨리 받는 자들의 의지와 자유 의지가 선한 것으로 드러나도록 하시는데, 즉, 그들에게 주어진 은혜와 하나님의 달콤함을, 그들 자신의 수고 없이 전해진 은혜의 분량만큼 느끼며, 그 은혜를 입은 자로서 그들은 자신의 의지와 선택에 따라 근면함, 지치지 않는 노력, 분투, 그리고 자신의 의지와 선택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의 열매를 보여야 하며, 그 은사에 보답하기 위해, 즉 온전히 자신을 바쳐 주님의 사랑에 헌신하고 오직 주님의 뜻만을 행하며, 모든 육신의 욕망에서 완전히 멀어져야 한다(29, 1).

9. 그러나 어떤 이들은 비록 세상에서 물러나 복음에 따라 이 세대를 저버리고, 큰 인내로 기도와 금식, 근면함 및 다른 미덕들에서 번창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은혜와 안식, 영적인 은사를 곧바로 주시지 않으시고, 주기를 미루시며 그 은사를 보류하신다. 이는 이유 없이, 때를 잘못 맞춰서, 혹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 말로 다 할 수 없는 어떤 지혜에 따라, 자유 의지를 시험하기 위함이며, 구하는 자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시고,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 생명의 문을 열어 주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을 그들이 과연 신실하고 진실하게 경배하는지, 그분의 말씀을 진정으로 믿었는지, 끝까지 의심 없는 믿음 안에 머물러 온 힘을 다해 구하고 찾게 될지,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하나님께 등을 돌리지 않을지, 게으름에 빠져 불신과 절망에 빠지지 않을지, 그리고 시간이 지체되고 그들의 의지와 선택이 시험받는 탓에 끝까지 견디지 못하고 포기하지 않을지를 보시기 위함이다 (29, 2).

10. 왜냐하면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서 미루시고 지체하실 때, 오히려 더욱 불타오르며 하늘의 복을 더 간절히 갈망하고, 매일 더 큰 소망과 정성, 지칠 줄 모르는 노력, 모든 미덕의 총합, 갈망과 목마름을 쏟아부으며, 오직 그 은혜를 얻기만을 바라고, 영혼에 머무는 악한 생각들로 인해 약해지지 않으며, 나태함, 조급함, 절망에 빠지지 않고, 또는 지연이라는 핑계로 “언젠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될까?”라는 생각에 이끌려 나태함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될까?” – 하고, 이를 통해 교활하게 게으름에 빠져들지 않는다면. 반대로, 주님께서 그분의 뜻을 향한 믿음과 사랑을 시험하시며 미루시고 지체하시는 만큼, 그만큼 그도 더 신속하고 꼼꼼하게, 게으름 없이 지치지 않고 하나님의 은사를 구해야 한다. 한 번 믿고 확신했으니, 믿음과 끝까지 인내하며 구하는 자들에게 자신의 은혜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은 거짓이 아니시고 참되신 분임을 (29, 3).

11. 신실한 영혼들은 하나님을 신실하고 참되신 분으로 경배하며, “그분은 참되시다”는 참된 말씀에 굳게 서 있다(요한복음 3:33). 그리고 이에 따라, 앞서 언급한 믿음의 개념에 따라, 자신들이 책임져야 할 부분에서 어떤 결핍이 있는지—수고에서인지, 노력에서인지, 성실함에서인지, 믿음에서인지, 사랑에서인지, 혹은 그 밖의 미덕에서인지—자신을 점검하며, 온 힘을 다해 세심하고 정밀하게 자신을 점검한 후, 자신을 강제로라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도록 이끈다. 한 번 믿음을 품은 이상, 하나님께서는 참되신 분이시니, 그들이 끝까지 온전한 성실함으로 주님 앞에서 섬김과 인내로 머무른다면 영적인 은사를 빼앗지 않으실 것이며, 아직 육신에 머무는 동안에도 하늘의 은혜를 누리고 영생을 얻게 될 것임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29, 4).

12. 이처럼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온 사랑을 주님께 쏟으며, 오직 그분만을 강렬한 갈망과 굶주림, 목마름으로 기다리며, 언제나 은혜의 안식과 위로를 바라고, 이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위로를 받거나 안식을 얻지 않으며, 자발적으로 자신을 속박하며, 끊임없이 물질적인 생각에 저항하면서 오직 하나님의 도움과 하나님의 중보만을 기다리며, 자발성과 근면함, 인내를 받아들인 그러한 영혼들 안에 주님께서 이미 은밀히 임재하셔서 그들을 도우시고, 보호하시며, 그들 안에 있는 모든 미덕의 열매를 지켜 주실 때를 기다립니다. 왜냐하면 자유 의지와 자유로운 사랑, 그리고 그분의 모든 거룩한 계명에 대한 감당할 수 있는 기꺼움에는 한계와 분량과 무게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처럼 사랑과 의무의 분량을 다하는 영혼들은 천국과 영생을 얻게 된다(29, 5).

c) 은혜의 일반적인 법칙, 즉 갑자기 자신을 억지로 밀어붙이지 말아야 한다는 점은, 성 마카리우스가 신성한 성경의 수많은 예들을 들어 설명하며, 이것이 각 신자에게 어떤 의무를 지우는지에 대한 교훈을 덧붙이고 있다.

13. 하나님의 은혜가 영혼 안에서 행하는 영적 역사는 큰 인내와 지혜, 그리고 마음의 신비로운 통찰을 통해 이루어지며, 이때 사람은 오랜 시간과 수년에 걸쳐 큰 인내로 수련에 힘쓴다. 그리고 은혜의 역사는, 그의 자유 의지가 거듭된 시험을 거쳐 성령께 기쁘시게 여겨지고, 시간이 흐르면서 경험과 인내를 보여줄 때 비로소 그 안에서 완성된 것으로 드러납니다. 이러한 순서에 대한 명확한 본보기를 성령의 감동을 받은 성경에서 제시하겠습니다(9, 1).

14. 내가 주장하는 바는 요셉에게 일어난 일과 유사하다. 얼마나 오랜 시간과 몇 해가 지나서야 그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환상이 성취되었는가! 그 전에 요셉은 얼마나 많은 고난과 슬픔, 그리고 궁핍 속에서 시험을 받았는가! 그리고 그가 모든 것을 용감하게 견뎌내고, 모든 일에서 하나님께 충실하고 능숙한 종으로 드러났을 때, 비로소 이집트의 왕이 되어 자기 가문을 부양하게 되었으며,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예언들과, 오래전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에 따라 미리 예언되었던 그 뜻도 이루어졌습니다(9, 2).

15. 다윗에게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사무엘을 통해 그를 왕으로 기름 부으셨습니다. 그가 기름 부음을 받았을 때, 사울에게 쫓기던 그는 죽음에서 도망쳐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언제 약속이 곧 이루어지겠는가? 왜냐하면 기름부음을 받자마자 그는 혹독한 고난을 겪기 시작하여, 생필품인 빵조차 없이 광야로 물러나야 했고, 사울이 자신에게 품은 악의로부터 이방인들에게 피신하여 도망쳐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왕으로 기름부으신 바로 그분이 그러한 고난 속에 머물러 계셨던 것이다! 그 후, 수년 동안 시험과 유혹을 겪으며 고난을 인내하고 너그럽게 견뎌낸 그는 단호히 하나님을 의지하며 스스로 확신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의 기름 부으심으로 내게 행하신 일과 말씀하신 바는 의심할 여지 없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 그때 비로소 오랜 인내 끝에 마침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고, 수많은 시련을 겪은 후 다윗이 왕위에 올랐으며,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해졌고, 선지자가 행한 기름 부음은 확고하고 참된 것으로 드러났다(9,3). 이와 같은 일이 모세와 아브라함, 노아에게도 일어났다(9, 4. 5. 6).

16. 우리는 성경에서 이러한 예들을 인용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사람 안에서 드러나며, 신실한 영혼만이 오랜 투쟁과 큰 인내와 너그러움의 경험, 유혹과 시련을 거친 후, 자유 의지가 온갖 슬픔으로 시험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성령의 은사를 받을 자격을 얻게 된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한다. 그 자유 의지가 어떤 일로도 성령을 거스르지 않고, 오직 은혜로 모든 일에서 계명에 순종할 때, 비로소 정욕으로부터의 자유를 얻고, 성사 안에서 선포되는 영적 입양의 충만함과 영적 부, 그리고 이 세상에서 비롯되지 않은, 오직 참된 그리스도인들만이 누릴 수 있는 그러한 깨달음을 받아들일 자격을 얻게 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람들은 세상의 영을 품고 있는(9, 7) 모든 분별력 있고, 박식하며, 지혜로운 사람들과는 모든 면에서 구별되기 때문이다.

17.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자기 뜻에서 벗어나 온 마음을 다해 주님께 나아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그리스도의 뜻을 이루고 그리스도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며 지키기 위해, 세상에 대한 사랑을 완전히 버리고 우리의 영혼을 오직 한 분 그리스도께 바칠 때, 오직 그분만을 생각하고, 오직 그분만을 돌보며, 오직 그분만을 찾도록 합시다. 만약 육신의 탓으로 인해 계명을 이행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데 마땅한 열심을 기울이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우리의 마음이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그분을 찾고 그분께로 나아가려는 마음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합시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과 바른 사고방식으로 힘쓰며, 진리의 길을 걷고 항상 자기 자신을 경계하며, 그분의 성령에 대한 약속을 얻게 되고, 은혜로 영혼을 사로잡은 정욕의 어둠 속에서 멸망에서 벗어나게 되며, 이를 통해 영원한 왕국에 합당하게 되어, 영원토록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찬양하며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토록 복을 누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9, 13).

다) 이에 따라, 주님을 섬기기로 결심한 모든 이에게는 처음에는 고된 수고가 기다리고 있다. 이는 자신의 이성적인 의지의 힘으로만 모든 선한 일을 행하도록 스스로를 다그치고,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모든 것에서 스스로를 절제하는 상태인데, 비록 마음속에서 이에 대한 공감이 없더라도 말이다. 자, 결심했는가? 이제 모든 선한 일에 자신을 억지로 몰아붙이고, 모든 악한 일에서 스스로를 거스르기 시작하라.

18. 주님께 나아가고, 영생을 얻으며, 그리스도의 거처가 되고, 성령으로 충만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는 상태에 이르며, 그리스도의 계명을 순결하고 흠 없이 이행하고자 하는 자는, 무엇보다 먼저 주님을 굳게 믿고, 그분의 계명에 온전히 순종하며, 모든 면에서 세상을 버려 온 마음이 보이는 어떤 것에도 사로잡히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그는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며 끊임없이 기도에 머물러야 하며, 항상 주님의 방문과 도움을 기다려야 하며, 매 순간 이를 마음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 그 다음, 그 안에 거하는 죄로 인해, 그는 모든 선한 일과 주님의 모든 계명을 이행하도록 스스로를 다그쳐야 한다. 예를 들어, 모든 사람 앞에서 겸손을 실천하도록 스스로를 다잡아야 하며, 자신을 누구보다 낮고 열등한 자로 여기고, 복음서에 기록된 대로 사람 중 누구에게도 명예나 칭찬, 영광을 구하지 말고, 항상 유일한 주님과 그분의 계명을 눈앞에 두고, 오직 그분 한 분께만 온유한 마음으로 기쁨을 드리고자 해야 하며,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에게서 배우라. 나는 온유하고 마음이 겸손하니 너희가 안식을 얻으리라”(마태복음 11:29) (19, 1).

19. 이와 같이 가능한 한 자비롭고, 선하고, 자애롭고, 선량하게 행동하도록 스스로를 훈련해야 한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선하고 선량하라. ‘너희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과 같이”(누가복음 6, 36). 무엇보다도 잊지 못할 기억 속에, 본보기로 삼아, 주님의 겸손과 그분의 삶, 온유함, 그리고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를 본보기로 삼아 간직해야 하며, 기도에 머물러 항상 믿고 간구하여, 주님께서 오셔서 그 안에 거하시고, 그분의 모든 계명을 이행하는 데 있어 그를 온전하게 하시고 굳건하게 하시며, 주님 친히 그의 영혼의 거처가 되시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 원치 않는 마음을 억지로 다스리며 행하는 일은, 훗날 자발적으로 행하게 될 것이며, 끊임없이 선을 실천하도록 스스로를 훈련하고, 항상 주님을 기억하며, 큰 사랑으로 주님을 쉬지 않고 기다려야 한다. 그때 주님께서는 그의 그러한 자발적인 의지와 선한 노력을 보시고, 그가 어떻게 스스로를 주님을 기억하도록 강요하는지, 그리고 자신의 마음이 심지어 그의 의지와는 반대로 끊임없이 선과 겸손, 온유, 사랑으로 이끌려 가며, 가능한 한 모든 힘을 다해 나아가고 있음을 보시고, 그때, 내가 말하건대, 주님께서는 그에게 자비를 베푸시며, 그의 원수들과 그 안에 거하는 죄로부터 그를 구원하시고, 성령으로 그를 충만하게 하십니다. 그때 그는 더 이상 노력이나 수고 없이 온전한 진리 안에서 주님의 모든 계명을 실천하게 되며, 더 정확히 말하자면 주님께서 친히 그 안에서 당신의 계명을 이루시며, 그는 그때 성령의 열매를 순수하게 맺게 된다(19, 2).

20. 그러나 주님께 나아가는 자는 이처럼 모든 선을 행하도록 스스로를 다그쳐야 하며, 사랑이 없다면 사랑을 실천하도록, 온유함이 없다면 온유함을 실천하도록, 자비롭고 자애로운 마음을 갖도록, 경멸을 참아내도록, 무시당할 때는 너그러워야 하며, 모욕당하거나 명예를 훼손당할 때는 분노하지 말아야 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스스로 복수하지 말라”(롬 12:19)는 말씀대로, 영적인 기도가 없는 사람은 스스로 기도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럴 때,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이 그토록 수고하며 마음의 뜻에 반하여 힘써 자신을 절제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참된 영적 기도를 주시며, 참된 사랑과 참된 온유, “자비의 풍성함”, 참된 선함을 주시며, 한마디로 그에게 영적 열매를 충만하게 채워 주실 것이다(19, 3).

21. 그러나 기도가 없는 사람이 기도하는 은혜를 얻기 위해 오로지 기도에만 자신을 강요할 뿐, 온유함, 겸손, 사랑, 그리고 주님의 다른 계명들을 실천하는 데에는 자신을 강요하지 않고, 그것들을 성취하기 위해 신경 쓰지도 않고 수고와 노력을 기울이지도 않는다면, 그의 뜻과 자유 의지에 따라, 그의 간구에 맞춰 때때로 부분적으로 기도하는 은총이 주어지기는 하지만, 본성상 그는 이전과 다름없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는 온유함을 갖지 못하는데, 이는 온유해지려고 수고를 기울이지 않았고 자신을 준비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며, 겸손함을 갖지 못하는데, 이는 그것을 구하지도 않았고 스스로를 그 길로 이끌지도 않았기 때문이며, 모든 이에게 사랑을 갖지 못하는데, 기도를 구하면서도 이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고 노력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19, 4).

22. 그러나 이러한 미덕을 갖추지 못하고, 그것에 익숙해지도록 훈련하거나 준비하지 않은 사람은, 비록 기도의 은총을 받아들인다 해도, 그것을 받아들인 후 곧 잃어버리고 교만함으로 인해 넘어지거나, 자신에게 주어진 은총 안에서 번영하지도 성장하지도 못한다. 이는 그가 주님의 계명을 이행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의지를 바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겸손, 사랑, 온유함 및 그 밖의 주님의 계명들이 성령의 거처와 안식이 되기 때문이다 (19, 6).

23. 그러므로 진정으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고자 하며, 그분으로부터 성령의 하늘의 은혜를 받아들이고, 성령 안에서 성장하고 온전해지기를 원하는 자는, 모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도록 스스로를 다잡고, 심지어 자신의 뜻에 반하더라도 마음을 복종시켜야 한다. 이는 다음과 같이 기록된 바와 같다. “이를 위하여 주의 모든 계명을 따르며, 모든 불의의 길을 미워하였나이다” (시편 118:128). (19, 7).

e) 선을 행하도록 스스로를 다그치는 것은 수고의 한 측면이다. 다른 한 측면은 악한 일에서 스스로를 거스르는 것이다. 이 후자가 바로 영적 전쟁이다. 성 마카리우스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24. 진정으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고 악의 반대편을 진정으로 미워하고자 하는 자는, 두 가지 종류의 수련과 투쟁 속에서 싸움을 치러야 하는데, 바로: 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일들에서는 세속적인 오락과 세속적인 유대 관계에 대한 사랑, 그리고 죄악된 습관들로부터 멀어지고, 내면의 일들에서는 사도께서 말씀하신 악의 영들 그 자체와 싸워야 합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이 세상의 어둠의 지배자, 하늘 아래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하는 것입니다”(에베소서 6:12). (21, 1).

25. 사람은 계명을 어기고 낙원에서 쫓겨난 후, 두 가지 방식과 두 종류의 속박에 얽매이게 된다: 이 세상에서는 — 세속적인 일들, 세상에 대한 사랑, 즉 육신의 쾌락과 정욕, 부와 명예, 재산, 아내, 자녀, 친족, 조국, 거주지와 옷차림, 한마디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 얽매이게 되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자신의 자유 의지로 이 모든 것에서 떠나라고 명하십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자신의 자유 의지로 보이는 모든 것에 매여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짐으로써 계명을 온전히 실천하는 자가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인데, 악의 영들은 은밀히 영혼을 얽어매고, 파고들며, 가시로 찌르고, 어둠의 쇠사슬로 묶어 놓는다(21, 2).

26. 그러므로 누군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수행의 길에 들어서서, 세속적인 일과 세상의 유대를 떨쳐 버리고, 모든 육신의 쾌락을 부인하며 그것들로부터 멀어지면, 그때 변함없이 주님께 마음을 집중함으로써, 마음속에 또 다른 투쟁이 있음을, 또 다른 은밀한 저항, 교활한 영들로부터 오는 또 다른 생각의 싸움이 있으며, 그에게 또 다른 수행이 기다리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처럼, 의심할 여지 없는 믿음과 큰 인내로 끊임없이 주님을 부르며 그분께 도움을 기다릴 때, 여기서도 사악한 영들의 속박과 그늘, 장벽, 어둠, 즉 은밀한 정욕의 작용으로부터 내적인 해방을 얻을 수 있다(21, 3).

27. 이 싸움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만 그칠 수 있는데, 이는 사람이 스스로는 저항과 생각의 방황, 보이지 않는 정욕, 그리고 악한 자의 계략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가 이 세상의 보이는 것들에 매여, 온갖 세속적인 속박으로 스스로를 얽어매고 해로운 정욕에 휩쓸린다면, 그는 자신의 내면에 또 다른 투쟁과 싸움, 그리고 전쟁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아, 만일 사람이 애를 써서 이 눈에 보이는 세상의 얽힘과 물질적인 근심, 육체의 쾌락에서 벗어나 주님께 끊임없이 매달리며 이 세상에서 자신을 멀리한다면, 비록 그 후에 내면에 자리 잡은 정욕의 투쟁과 내면의 싸움, 그리고 교활한 생각들까지!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힘써 세상을 버리지 않고, 온 마음을 다해 세상의 욕망을 떨쳐내지 않으며, 온전히 주님께 매달리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그는 은밀한 악의의 영들과 숨겨진 해로운 정욕들의 속임수를 깨닫지 못할 것이며, 오히려 자기 자신과도 낯선 존재로 남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상처를 알지 못하고, 자신 안에 은밀한 정욕을 품고 있으면서도 이를 깨닫지 못한 채, 오히려 자발적으로 보이는 것에 매여 세속적인 염려에 달라붙게 된다(21, 4).

28. 그러나 진정으로 세상을 버리고 수련하며, 육신의 짐을 벗어 던지고, 헛된 욕망과 육체적 쾌락, 명예와 권세, 그리고 세상의 존경에서 자신을 해방시킨 사람은 온 마음을 다해 이 세상에서 멀어지는데, 그 사람은 주님께서 이 분명한 수련에서 은밀히 도우시며, 세속을 향한 의지의 단절 정도에 따라, 그리고 그 자신이 온전히, 즉 몸과 영혼으로 굳건히 서서 끊임없이 주님을 섬길 때, 자기 안에서 저항과 은밀한 정욕, 보이지 않는 속박, 내면의 싸움, 은밀한 투쟁, 그리고 은밀한 수련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하여 주님께 간구하여, 복된 사도가 열거한 하늘에서 내려온 영적 무기들, 곧 의의 갑주, 구원의 투구, 믿음의 방패, 영적 칼 (에베소서 6:14–17), – 이를 무기로 삼아, 마귀가 꾸미는 교묘한 계략 속의 은밀한 꾀를 이겨낼 수 있을 것이며, 기도와 인내, 간구, 금식, 더욱이 믿음으로, 권세들과 권능들과 이 세상의 지배자들과의 싸움에서 힘써 싸울 수 있게 될 것이며, 이와 같이 성령의 도우심과 모든 미덕에 대한 자신의 부지런함을 통해 대적하는 세력을 이김으로써, 아버지께서와 아들과 성령을 찬양하며 영생에 합당한 자가 될 것입니다. 그분께 영원토록 영광과 권능이 있기를! 아멘 (21, 5).

29. 어떤 이들은 주님께서 사람들에게는 뚜렷한 열매만을 요구하시고, 은밀한 일은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겉모습을 얼마나 잘 가꾸느냐에 따라 그만큼 마음속의 생각들과 싸우고 투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당신이 스스로에게 분노하고, 자신의 마음과 싸우며, 악한 생각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에 탐닉하지 않기를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3, 3).

30. 영혼은 저항하고, 맞서 싸우며, 물리쳐야 한다. 네 의지는 맞서 싸우며 수고와 슬픔 속에 머물다 마침내 우위를 점하기 시작하지만,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서기도 한다. 죄는 다시 그 의지를 무너뜨리고, 열 번, 스무 번의 격투 끝에 승리하여 영혼을 굴복시키지만, 영혼도 시간이 지나면 어떤 한 가지에서 죄를 이긴다. 그리고 다시, 영혼이 굳건히 서서 어떤 일에서도 약해지지 않는다면, 우위를 점하기 시작하고, 승부를 결정하며, 죄에 대해 승리를 거두게 된다. 그렇게 사람들은 죄를 극복하고 그 승리자가 된다(3, 4, 5).

31. 말은 야생 동물들과 함께 숲에서 풀을 뜯고 있을 때는 사람들에게 길들여지지 않는다. 그러나 잡히면, 길들이기 위해 무거운 고삐를 채워, 예의 바르고 곧게 걷는 법을 배울 때까지 훈련시킨다. 그 후 노련한 기수가 전투에 적합하도록 훈련시킨다. 그때 갑옷, 즉 가슴 보호대와 안면 보호대를 착용시키고, 예전의 고삐를 걸어 말의 눈앞에서 흔들어 대며, 말이 익숙해져 겁을 먹지 않도록 한다. 이렇게 기수에게 훈련받는 말은, 익숙해지지 않으면 전쟁에 나설 수 없지만, 일단 익숙해지고 전투에 적응하면, 전투의 소리를 듣기만 해도 스스로 기꺼이 적을 향해 달려가며, 그 울음소리만으로도 적들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킨다(23, 2).

32. 이와 마찬가지로, 죄를 지은 이후로 야생화되어 불순종하게 된 영혼은 세상의 광야에서 짐승들—즉, 교활한 영들—과 가까워지며 계속해서 죄를 섬기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게 되면, 성령께 길들여져 야생적인 성품과 육신의 계산을 버리고, 그리스도라는 기수 에게 이끌리게 된다. 그 후 그녀는 시련을 위해 필요한 슬픔과 온유함, 그리고 궁핍함 속으로 들어가며, 점차적으로 죄가 줄어들고 근절됨에 따라 성령께서 그녀를 길들이시게 된다. 이처럼 영혼은 진리의 갑옷과 구원의 투구, 믿음의 방패를 입고 영적인 칼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원수들과 싸우는 법을 배우며, 주님의 성령으로 무장하여 악의 영들과 싸우고, 마귀가 쏘아대는 불타는 화살들을 끄게 된다. 영적 무기가 없으면 군대에 합류하지 않지만, 주님의 무기를 갖게 되는 즉시, 격렬한 전투의 소리와 기세를 듣거나 느끼기만 해도 욥기(욥 39:25)에 기록된 대로 “뛰어오르며 울부짖으며” 나아갑니다. 왜냐하면 그 기도의 소리만으로도 원수들이 쓰러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위업을 이루고 성령의 도움으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면, 큰 담대함으로 승리의 면류관을 받게 되며, 하늘의 왕과 함께 안식을 누리게 될 것이다(23, 3).

33. 세속을 떠나 하나님을 찾고 그분에 대해 묵상하기 시작하는 순간, 이미 자신의 본성과 과거의 습관, 그리고 타고난 성향과 싸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습관과 싸우는 동안, 너에게 대항하고 네 이성과 싸우는 생각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며, 이러한 생각들은 너를 끌고 가서, 네가 도망치려 했던 바로 그 가시적인 세상 속에서 너를 맴돌게 할 것이다. 그때 비로소 너는 투쟁과 싸움을 시작하게 될 것이며, 생각에 맞서 생각으로, 마음에 맞서 마음으로, 영혼에 맞서 영혼으로, 영에 맞서 영으로 대항하게 될 것이다(32, 9).

34. 이는 마음속에 머무르는 어둠의 어떤 은밀하고 미묘한 힘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네 영혼과 육신 곁에 계시며, 네 투쟁을 지켜보시며 네 안에 은밀한 하늘의 생각들을 심어 주시고, 은밀히 너를 안식하게 하시기 시작하신다. 그러나 아직은 너를 훈련의 과정에 두시며, 가장 큰 고통 속에서도 너를 위해 은혜를 베푸신다. 그리고 네가 안식에 이르면, 그분께서 네게 그분 자신을 알게 하시고, 네 유익을 위해 네가 투쟁하도록 허락하셨음을 보여 주실 것이다. 유모가 있는 부자의 아들이, 스승이 그를 훈육할 때, 가르침과 상처와 매질이 무겁게 느껴지지만, 이는 그가 성숙한 남자가 될 때까지일 뿐이며, 그때가 되면 비로소 유모에게 감사하기 시작하듯이, 은혜도 네가 완전한 성숙에 이르기 전까지 섭리적으로 가르치시는 것이다 (33. 10).

e) 주님을 위해 일하기로 결심한 자에게 이러한 수고가 요구되므로, 어떤 고된 일에도 자신을 가차 없이 내어놓는 결심 외에도, 그는 분별력과 주의력, 그리고 신중함을 갖추어야 한다.

35. 기독교적 삶을 지극히 정확하게 완전함 속에서 영위하고자 하는 자는, 무엇보다도 영혼의 의미와 분별력을 온 힘을 다해 돌봐야 한다. 그래야 선과 악을 정확히 구별하는 능력을 얻고, 어떤 경우에도 순수한 본성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 스며들었음을 알아차려, 우리가 올바르고 흠 없이 살 수 있으며, 또한 분별력을 눈처럼 활용하여 악의 유혹과 친해지거나 타협하지 않을 수 있게 되어, 이를 통해 신성한 은총을 얻어 주님을 섬길 자격을 갖추게 되기를 위함이다(4, 1).

36. 몸은 눈을 길잡이로 삼으며, 눈은 보고 온 몸을 올바른 길로 이끈다. 누군가 숲이 우거지고 가시덤불이 무성하며 진창이 많은 곳을 걷고 있다고 상상해 보라. 그곳에는 불이 길을 가로막고 칼이 꽂혀 있으며, 급류와 수많은 물이 있다. 만약 그 여행자가 기민하고, 신중하며, 두려움이 없다면, 눈을 길잡이로 삼아 이 험난한 곳들을 큰 주의를 기울여 지나가며, 손과 발로 온갖 방법을 동원해 자신의 히톤을 붙잡아 나무와 가시덤불 사이에서 찢어지지 않게 하고,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게 하며, 칼에 베이지 않게 하고, 그리고 온 몸에 빛을 비추는 눈은 그에게 길을 안내하여, 급류에서 부서지거나 물에 빠져 죽거나, 어떤 험난한 곳에서 해를 입지 않도록 한다. 이처럼 기민하고 영리한 여행자는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 자신의 히톤을 잘 챙기고, 눈의 지시에 따라 곧게 나아가며, 자신은 무사히 지켜내고, 입은 히톤도 타지 않고 찢어지지 않게 보존한다. 반면 부주의하고, 게으르며, 안일하고, 둔하며, 무기력한 사람이 그런 곳을 지나간다면, 그의 히톤은 이리저리 펄럭이며, 여행자가 옷을 온전히 챙길 결단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나뭇가지와 가시덤불에 찢기거나, 불에 타거나, 꽂힌 칼에 찢기거나, 진흙에 더러워지게 된다. 한마디로, 그의 아름답고 새 히톤은 그의 부주의와 무기력, 게으름 때문에 금세 망가져 버린다. 만약 여행자가 눈의 지시에 온전하고 마땅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 자신도 도랑에 빠지거나 물에 빠져 죽게 될 것이다 (4, 2).

37. 이와 마찬가지로 영혼도 마치 아름다운 히톤, 즉 육체의 옷을 걸치고, 이성과 함께하며, 이성은 영혼과 육체가 숲이 우거지고 가시덤불이 무성한 삶의 길, 진흙과 불, 급류, 즉 정욕과 쾌락, 그리고 이 세상의 그 밖의 온갖 부조리들 속에서, 냉철함과 용기, 신중함, 그리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어디서나 스스로를 절제하고 지켜야 한다. 그리고 이 세상의 덤불이 우거지고 가시밭길인 여정 에서 육체의 옷이 근심과 번잡함, 세속적인 오락으로 인해 찢어지지 않고, 욕망의 불길에 타버리지 않도록, 그 옷을 입은 영혼은 간사함을 보지 않기 위해 눈을 돌리고, 험담을 듣지 않기 위해 귀를 돌리며, 헛된 말에서 혀를, 나쁜 일에서 손과 발을 금한다. 이는 영혼에게 육체의 지체들을 돌이키고, 그들을 나쁜 광경이나 교활하고 부끄러운 말, 부적절한 말, 세속적이고 교활한 일들에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할 의지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4,3).

38. 주님께서는 누군가가 세속적인 쾌락과 물질적인 오락과 근심, 땅의 속박, 그리고 헛된 생각의 소용돌이에서 용감하게 등을 돌리는 것을 보시는 즉시, 그에게 은혜로운 도움을 베풀어 주시며, 이 악한 세대에서 자신의 여정을 훌륭히 수행하고 있는 그 영혼을 흠잡을 데 없이 지켜 주십니다. 이처럼 그 영혼은 하나님과 천사들로부터 하늘의 찬사를 받게 되는데, 이는 그 영혼이 가능한 한 모든 세속적인 욕망을 멀리하며 자신과 육신의 옷을 훌륭히 지켜냈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이 세상의 무대에서 자신의 여정을 훌륭히 완수했기 때문이다 (4, 4).

39. 그러나 누구든지 게으름과 부주의로 인해 이 생을 부주의하게 살아가며, 자신의 뜻대로 온갖 세속적인 욕망을 멀리하지 않고, 온 마음을 다해 유일한 주님을 찾지 않는다면, 그의 육신의 옷은 이 세상의 가시와 나무들에 찢기고, 욕망의 불에 타며, 쾌락의 더러움으로 오염될 것이며, 그로 인해 심판의 날에 그 영혼은 담대함을 잃게 되는데, 이는 자신의 옷을 더럽히지 않고 보존하지 못하고 이 세상의 유혹 속에서 그것을 훼손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 영혼은 왕국에서 추방된다. 왜냐하면, 자신의 자유 의지로 세상에 자신을 내맡기고, 세상의 쾌락에 현혹되거나, 물질적인 것들 속에서 방황하며 맴도는 자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하시겠는가? 하나님께서는 물질적인 쾌락과 과거의 습관을 멀리하고, 힘써 항상 자신의 생각을 주님께로 향하며,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오직 한 분 주님만을 찾는 자에게 도움을 베푸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험로에서 어떤 상황에서도 올가미와 그물을 경계하며, 두려움과 떨림으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는 자를 지키시며 (빌 2,12), 온전한 주의를 기울여 이 세상의 올가미와 덫, 그리고 정욕을 피하며, 주님의 도움을 구하고 주님의 자비로 은혜를 통해 구원받을 것을 희망하는 자(4,5).

g) 수고하는 자는 주님께서 그 수고가 얼마나 열심인지를 보시고, 영혼의 충실함을 확인하시며, 성령을 주시고 친히 그와 연합해 주실 것이라는 희망과 흔들리지 않는 확신에서 수고의 동기를 얻어야 한다. 성 마카리우스는 이 주제를 매우 자주 다루며, 수고에 관한 거의 모든 가르침을 이 희망을 심어주는 데로 귀결시킵니다.

40. 세상에서 보이는 모든 일은 수고로부터 유익을 얻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이루어집니다. 만일 누군가가 그 수고의 결실을 누릴 것이라고 완전히 확신하지 못한다면, 그 수고는 그에게 유익하지 않습니다. 농부도 열매를 거둘 희망을 품고 씨를 뿌리며, 그 열매를 기대하며 수고를 견딘다. “소작인은 소작할 때 소작할 소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린도전서 9,10)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아내를 맞이하는 사람은 후손을 얻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상인은 이익을 위해 바다로 나가 기꺼이 죽음을 무릅쓴다. 마찬가지로 천국에서도 사람은 마음의 눈이 밝아지리라는 희망을 품고, 세속적인 일에서 벗어나 기도와 간구로 시간을 보내며, 주님께서 오셔서 자신을 드러내시고 그 안에 거하는 죄를 씻어 주실 때를 기다립니다(14, 1).

41. 그리스도인은 장차 올 왕국과 구원에 대한 소망과 기쁨, 기대를 가져야 하며, “오늘 구원받지 못하더라도 내일 아침에는 구원받을 것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포도원을 가꾸는 사람은 일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마음속에 기쁨과 희망을 품고 있으며, 아직 포도주가 없어도 마음속으로 포도주 틀을 생생히 그려보고, 수익을 계산하며, 그러한 생각 속에서 일에 착수한다. 희망과 기대는 그를 부지런히 일하게 하며, 그는 당분간 집안에서 큰 지출을 감수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집을 짓는 자와 농부도 처음에는 미래의 이익을 기대하며 자신의 재산을 많이 쏟아붓는다.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사람이 구원받고 생명을 얻으리라는 기쁨과 희망을 눈앞에 두지 않는다면, 슬픔을 견디고 짐을 지며 좁은 길을 걸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따르는 희망과 기쁨은 그가 수고하고, 슬픔을 견디며, 짐을 지고, 좁은 길을 걷게 해 준다(26,11).

42. 믿는 자는 자신의 마음이 변화되도록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 너는 마음과 생각을 그분께로 향해야 하며, 그분을 뵙기를 바라는 것 외에는 다른 어떤 생각도 품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활기 넘치는 아이들처럼, 영혼은 죄로 인해 흩어진 생각들을 모아 진정시키고, 그것들을 자신의 육신의 집으로 이끌어 들여, 끊임없이 금식하며 사랑으로 주님께서 오셔서 진정으로 그 영혼을 하나로 모아 주실 때를 기다려야 한다. 미래는 알 수 없으니, 더욱더 희망을 품고, 그 희망을 선장님께 온전히 맡기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네 앞에 나아가리라. 산을 평탄하게 하고, 놋 문들을 부수며, 쇠 빗장을 꺾으리라” (이사야 45:2)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네 마음에 불법의 말이 은밀히 들어가지 않도록 주의하라” (신명기 15:9) 하셨으니, 네 마음속으로 “이 혀는 많고 강하다” (신명기 2:21) 말하지 말라. (31,1. 2).

43. 우리가 게으름 피우지 않고, 마음속에 무질서하고 타락한 생각들이 들끓게 내버려 두지 않으며, 오히려 우리의 의지로 마음을 이끌어 생각들이 주님께로 향하도록 강요한다면, 의심할 여지 없이 주님께서는 그분의 뜻대로 우리에게 오실 것이며, 진실로 우리를 그분께로 모으실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기쁨과 섬김은 생각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힘쓰며, 항상 마음속으로 그분을 기다리고, 생각 속에서 그분을 찾으며, 자신의 의지와 뜻을 끊임없이 그분께로 향하도록 독려하고 이끌어라. 네가 그분을 찾으려고 마음을 모을수록, 그분은 그분의 자비와 선하심으로 인해 그만큼, 아니 그보다 더 큰 정도로 네게 오셔서 너를 위로하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서서 네 마음과 생각, 그리고 사고의 움직임을 살피시며, 네가 온 마음을 다해 그분을 찾고 있는지, 게으름이나 소홀함 없이 찾고 있는지 지켜보신다(31, 3).

44. 그리고 그분을 찾는 네 성실함을 보시면, 그때 그분은 나타나셔서 네게 드러나시며, 그분의 도움을 베풀어 주시고, 네 원수들로부터 너를 구원하심으로 네게 승리를 마련해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몸을 들어 올려 제단을 쌓고, 그 위에 우리의 온갖 생각을 올려놓은 뒤, 주님께 간구하여 하늘에서 보이지 않는 위대한 불을 내려 주시어, 그 불이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을 삼키게 하소서. 그러면 바알의 모든 제사장들, 즉 대적하는 세력들이 쓰러질 것이며, 그때 우리는 사람의 발자국처럼 (열왕기상 18, 44)처럼 영혼 속으로 스며드는 하늘의 비를 보게 될 것이며, 그리하여 선지자가 말한 대로 “내가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다시 세우고, 허물어진 것을 다시 수리하리라”(아모스 9, 11)는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에게 이루어질 것이다. (31, 4. 5).

g) 성 마카리우스는 수고로운 행위의 세부 사항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는데, 이는 그가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이 이미 그 모든 것을 실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때때로 금식, 철야 기도, 은둔, 육체적 노동, 순종, 상호 부조, 인내와 같은 것들을 열거할 뿐이다. 오직 기도에 대해서만 그는 더 자세히 말하는데, 이는 기도가 모든 미덕과 수행의 중심이기 때문이며, 특히 기도가 성령의 감동을 이어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45. 외적인 수행과 어떤 삶의 방식이 가장 높고 우선적인지에 대해, 사랑하는 여러분, 다음 사실을 알아두십시오. 모든 미덕은 영적 사슬의 고리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에게 의존합니다. 기도는 사랑에서, 사랑은 기쁨에서, 기쁨은 온유함에서, 온유함은 겸손에서, 겸손은 섬김에서, 섬김은 소망에서, 소망은 믿음에서, 믿음은 순종에서, 순종은 단순함에서 비롯됩니다. 마찬가지로 반대편에서도 악한 행실들은 서로에게서 비롯됩니다. 증오는 성급함에서, 성급함은 교만에서, 교만은 허영에서, 허영은 불신에서, 불신은 무정함에서, 무정함은 소홀함에서, 소홀함은 게으름에서, 게으름은 낙담에서, 낙담은 조급함에서, 조급함은 쾌락 추구에서 비롯되며, 그 밖의 다른 악덕들도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선한 면에서도 미덕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에게 의존하고 있다(40, 1).

46. 모든 선한 행실의 핵심이자 공로의 정점은 기도에 부지런히 머무르는 것이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간구함으로써, 우리는 매일 다른 미덕들도 얻을 수 있다. 이로 인해 은혜를 입은 자들 안에서는 하나님의 거룩함 안에서, 영적 활력 안에서, 그리고 주님에 대한 말로 다할 수 없는 사랑 속에서 마치 지적인 마음가짐의 연합이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매일 스스로를 기도에 머물도록 다잡는 자는, 하느님을 향한 영적 사랑으로 인해 신성한 헌신과 불타는 열망에 불타오르며, 영적 성화를 이루는 완전함의 은총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40, 2).

47. 육체적인 습관이나, 소리 지르거나 침묵하거나 무릎을 꿇는 것에 익숙해져서 기도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정신을 차리고 명료하게 주의를 기울이며, 하나님께서 오셔서 영혼의 모든 길과 행로, 그리고 모든 감각 속에서 영혼을 찾아주실 때를 기다려야 한다. 이처럼 때로는 침묵해야 하고, 때로는 부르짖으며 간절히 기도해야 하지만, 오직 마음이 하나님 안에서 확고히 굳건해지기 위함이다. 마치 몸이 무언가를 할 때, 그 일에 전념하여 온전히 몰두하고, 모든 지체가 서로 돕는 것처럼, 영혼도 온전히 기도와 주님의 사랑에 헌신해야 하며, 산만해지거나 생각에 휩쓸리지 말고, 모든 소망을 그리스도께 두어야 한다. 그럴 때 주님께서 친히 그 영혼을 깨우쳐 주실 것이며, 참된 간구를 가르쳐 주시고, 하나님께 합당한 순수하고 영적인 기도와 영과 진리로 드리는 경배를 허락해 주실 것이다(33, 1. 2).

48. 주님께 나아가는 자들은 침묵과 평화, 그리고 깊은 평온 속에서 기도를 드려야 하며, 부적절하고 혼란스러운 외침으로 주님께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갈망과 맑은 생각으로 주님께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의 종은 무질서 속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선지자가 말한 대로 “내가 누구를 바라보겠느냐? 오직 온유하고 침묵하며 내 말을 경외하는 자를 바라보리라”(사 66:2)고 한 대로 온유함과 지혜로 살아가야 한다. 또한 모세와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 주님의 위엄 앞에서 수많은 나팔과 군대가 섬겼으나, 주님의 강림은 앞서 언급된 것, 즉 평화와 고요함, 그리고 안식으로 구별되고 드러났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그것은 시원한 바람 소리가요, 거기 주님께서 계신다”(열왕기상 19, 12)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주님의 평안은 평화와 질서 속에 있음을 알 수 있다(6, 1. 2).

49. 기도의 참된 기초는 이러하다. 곧, 생각에 주의를 기울이고, 깊은 고요와 평화 속에서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기도하는 사람은 모든 노력을 생각에 집중해야 하며, 악한 생각의 양식이 되는 것은 잘라내고, 생각을 하느님께로 향하며, 생각의 욕망을 따르지 말고, 사방에서 맴도는 생각들을 한데 모아, 자연스러운 생각과 악한 생각을 분별해야 한다. 죄 아래 있는 영혼은 마치 산 위의 큰 숲이나, 강가의 갈대, 혹은 가시덤불과 나무가 우거진 곳과 같다. 그러므로 그곳을 지나가려는 사람은 두 손을 앞으로 뻗어 힘겹게 앞의 나뭇가지를 헤쳐 나가야 한다. 마찬가지로 영혼은 대적하는 세력이 불어넣는 온갖 생각의 숲에 둘러싸여 있으므로, 사람이 대적하는 세력이 불어넣는 낯선 생각들을 구별해 내기 위해서는 큰 신중함과 주의력이 필요하다. 생각에 주의를 기울이는 이들은 기도의 모든 수행을 내면적으로 이루어 낸다. 이러한 이들은 자신의 이성과 분별력을 통해 성공할 수 있으며, 솟아오르는 생각들을 물리치고 주님의 뜻 안에서 행할 수 있다(6, 3. 4).

i) 수련자가 갖춰야 할 주의사항 중에서 성 마카리우스는 무엇보다도 겉으로만 올바르게 행하는 데 그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외적인 측면에서의 수련은 모든 영적 수행과 모든 미덕을 익히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거기서 멈추기 위함이 아니라, 이를 통해 내적 삶을 발전시키고 성령의 역사력을 얻기 위함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 한 가지에 그쳐, 겉으로만 바른 행실에 이르렀을 뿐, 마음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은총의 성령을 구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수고는 하지만 열매는 맺지 못한다. 성 마카리오는 무엇보다도 이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50. 많은 이들이 겉모습을 엄격히 살피고, 학문을 연마하며, 바른 삶을 영위하는 데 힘쓰면서, 마음속을 깊이 들여다보지 않고 영혼을 지배하는 악덕들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그런 사람이 완전하다고 생각한다. 한편, 신체 각 부위에는 내면의 악한 생각에 상응하는 악의 뿌리가 있으며, 마음속에는 강도, 즉 대립하는 힘, 따라서 적대적이면서도 동시에 정신적인 힘이 숨어 있다. 만약 누군가 죄와 싸우지 않는다면, 내면의 악은 서서히 퍼져 나가며 그 세력이 커짐에 따라 사람을 명백한 죄로 이끌고, 결국 실제로 그 죄를 범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악은 샘의 구멍처럼 항상 스스로에서 물줄기를 뿜어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수천 가지의 악에 빠지지 않도록 악의 흐름을 막아내도록 힘쓰라(15, 46).

51. 세상은 악덕이라는 병으로 고통받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마음을 불태우고 온 몸을 휩쓸며 사람들을 음란과 수천 가지 악행으로 이끄는 불결한 불이 있다. 그리고 화를 내거나 쾌락에 탐닉하는 자들은 내면, 즉 마음속에서 음행을 저지르며, 악이 이런 식으로 양식을 얻게 되면 노골적인 음행에 빠지게 된다. 탐욕, 허영, 오만, 질투, 성급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이해해야 한다. 마치 누군가 점심 식사에 초대되어 수많은 음식이 차려진 것처럼, 죄는 모든 것을 맛보라고 부추기며, 그때 즐거워하는 영혼은 무거운 짐을 지게 된다(15, 48).

52. 누구든지 “나는 금식하고, 방랑하는 삶을 살며, 재산을 흩어 쓰니, 따라서 이미 거룩하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악을 삼가는 것이 그 자체로 완전함은 아니니, 네가 이미 겸손한 마음의 경지에 들어섰고, 마음 바로 아래, 생각의 깊은 곳에 숨어 둥지를 틀고, 소위 영혼의 은신처와 창고에서 너를 죽이고 있는 뱀을 죽였는가? 마음은 심연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과연 네가 그것을 죽이고 네 안에 있던 온갖 더러움을 네 몸 밖으로 내쫓았느냐? 모든 지혜를 추구하는 자들과 율법, 사도들,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은 모두 정화를 목표로 한다.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모든 사람은 순결을 사랑하지만, 스스로 순결해질 수는 없다. 그러므로 어떻게, 그리고 어떤 수단을 통해 마음의 순결에 도달할 수 있는지 찾아내야 한다. 이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분은 길이시며, 생명이시며, 진리이시며, 문이시며, 진주이시며, 살아 계신 하늘의 양식이시다. 이 진리 없이는 그 누구도 진리를 깨닫고 구원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겉사람과 보이는 것들에 대한 판단에서 네가 모든 것을 버리고 재산을 나누어 주었듯이, 만일 네가 지식과 말씀의 능력을 가지고 세상의 지혜에 있어서도 모든 것을 스스로 버려야 한다면, 모든 것을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야만, 그때서야 비로소 설교의 격정 속에서 스스로를 훈계할 수 있게 될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말의 아름다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십자가를 통해 작용하는 힘에 있는 참된 지혜이다(17,15).

53. 투사이자 수행자에게 가장 중요한 무기는, 마음속으로 들어가 사탄과 싸움을 벌이고, 자기 자신을 미워하며, 자신의 영혼을 저버리고, 그 영혼을 향해 분노하며, 책망하고, 익숙한 욕망에 저항하며, 생각과 다투고, 자기 자신과 싸우는 데 있다 (26, 12).

54. 만일 겉으로는 자신의 몸을 타락과 음행으로부터 지키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음란한 생각을 품고 음행을 저질렀다면, 너는 하나님 앞에서 간음한 자이며, 네 처녀 같은 몸은 너에게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할 것이다. 마치 청년이 교묘한 수법으로 처녀를 유혹하여 타락시키면, 그녀는 간음으로 인해 신랑에게 혐오스러운 존재가 되는 것처럼, 내면에 사는 뱀, 곧 간사한 영과 교제하는 무형의 영혼도 하나님 앞에서 음행을 저지르는 것이다. 또한 “누구든지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는 이미 마음으로 간음하였느니라”(마태복음 5:28)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육체적으로 행해지는 음행도 있고, 사탄과 교제하는 영혼의 음행도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 한 영혼이 때로는 악마들의 공범이자 자매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하나님과 천사들의 자매가 되기도 하는데, 마귀와 간음함으로써 이미 하늘의 신랑께 합당하지 않은 자가 되어 버린다(26, 13).

55. 우리는 수없이 농부의 비유를 인용해 왔는데, 그는 수고하여 씨를 땅에 뿌린 뒤에도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를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구름이 나타나지 않고 바람이 불지 않으면, 농부의 수고는 그에게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하며, 씨는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한 채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이를 영적인 영역에도 적용해 보라. 사람이 오로지 자기 자신의 것에만 머물러 자신의 본성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주님께 합당한 열매를 맺을 수 없다. 그렇다면 사람의 본연의 소명은 무엇일까? 바로 자신을 부인하고, 세상에서 물러나며, 기도와 경건한 생활 속에 머물며, 하나님과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 속에 머무는 것이 바로 그 사람의 본연의 소명이다. 그러나 만약 그가 자신의 행위에만 국한되어 다른 것을 받아들일 희망을 품지 않고, 성령의 바람이 영혼에 불어오지 않으며, 하늘의 구름이 나타나지 않고, 하늘에서 비가 내려 영혼을 적시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주님께 합당한 열매를 맺을 수 없다(26, 19).

i) 특히 겉으로는 흠잡을 데 없어 보이는 이들 중에서 성 마카리우스는 서기관들을 따로 꼽는데, 그들은 책과 대화를 통해 무엇이 중요한지 알고 그것에 대해 해설하지만, 정작 그 일 자체에는 손을 대지 않기 때문에 영적 지식 면에서 무지한 자들보다도 뒤처지며, 그들의 해설조차도 무분별해진다.

56. 스스로 맛보지도 못한 채 영적인 것에 대해 말하는 자는, 한낮의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 텅 빈 들판을 걷다가 갈증에 시달리며, 물이 솟아나는 모습을 묘사하며, 마치 마시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타는 듯한 갈증으로 입과 혀가 말라버린 사람과 같거나, 꿀이 달콤하다고 말하지만 직접 맛보지 않아 그 달콤함의 강도를 모르는 사람과 같다. 마찬가지로, 만약 완전함이나 기쁨, 혹은 무욕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 그 효과와 실증을 스스로 체험해 보지 못했다면, 실제로는 그들이 말하는 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이 시간이 지나서 비록 부분적으로라도 실천에 나서게 되면, 스스로 이렇게 판단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달랐다.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성령께서는 다르게 역사하신다’(17, 12).

57. 빵과 식사에 대해 논하는 것과, 실제로 빵을 먹고 그 영양분을 몸에 받아들여 온몸을 강건하게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가장 달콤한 음료에 대해 말로만 이야기하는 것과, 직접 가서 그 원천에서 퍼 마시며 달콤한 음료를 맛보며 배불리 마시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전쟁과 용맹한 투사들, 전사들에 대해 논하는 것과, 사람이 군대에 들어가 적들과 전투를 벌이고, 진격하고 후퇴하며, 타격을 받고 가하며, 승리를 거두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영적인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로, 지식과 이성으로 들은 말을 스스로 설명하는 것과, 실질적으로, 실제로, 의심의 여지 없이 내면의 사람과 마음속에 성령의 보배와 은혜, 감화와 역사를 간직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말만 늘어놓는 자들은 자신의 이성을 자랑하며 자만한다(27,12).

58. 세상에서 전쟁이 선포되었을 때, 현명한 자들과 귀족들은 그곳으로 나가지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여 집에 머무르는 반면, 새로 등장한 가난한 자들과 평민들이 전쟁에 소집되며, 때로는 그들이 적들을 물리치고 국경 밖으로 쫓아내어 왕으로부터 상과 면류관을 받고, 영예와 지위를 얻게 되는 반면, 그 위대한 사람들은 그들 뒤에 남게 되는데, 영적인 영역에서도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난다. 무지한 자들은 말씀을 처음 듣고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것을 실천에 옮기며 하나님께로부터 영적인 은혜를 받지만, 지혜롭고 말씀의 미묘한 점까지 깊이 파고드는 자들은 싸움을 피하여 성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싸움에 참여하여 승리한 자들 뒤에 남게 된다(43, 8).

k) 그러므로 온갖 방법으로 은혜의 성령을 얻는 데 힘써야 한다. 만일 그분이 네 안에 계시지 않는다면, 네 모든 희생과 수고는 헛된 것이며, 죽음을 맞이할 때 악령들이 너를 붙잡아 그들의 심연으로 끌고 갈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가진 자는 그들을 불태워 버릴 것이다.

59. 만일 누군가 주님을 위하여 자기 가족을 떠나, 이 세상을 저버리고, 세상의 쾌락과 재산, 아버지와 어머니를 버리며, 스스로를 십자가에 못 박아 나그네가 되어, 거지처럼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자가 되어, 세상의 평온 대신 자기 안에서 신성한 안식을 얻지 못하고, 영혼 속에서 영적인 기쁨을 느끼지 못하며, 썩어질 옷 대신 신성한 빛의 옷을 입지 못하고, 내면의 사람에 따라, 이전의 육신적인 교제 대신에 자신의 영혼 속에서 하늘과의 교제를 확실하게 깨닫지 못할 것이며, 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기쁨 대신에 내면에는 영의 기쁨과 하늘의 은혜가 주는 위로를 갖지 못할 것이며, 기록된 바와 같이 “주님의 영광이 그에게 나타날 때” 신성한 충만함을 영혼에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시편 16, 15), 한마디로, 이 일시적인 쾌락 대신에 지금 당장 자신의 영혼 속에서 갈망하는 썩지 않는 기쁨을 얻지 못한다면, 그는 소금이 그 맛을 잃은 자이며,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불쌍한 자로, 이 세상의 것에서도 박탈당했고, 신성한 것의 기쁨도 누리지 못했으며, 내면의 사람 안에서 성령의 역사로 신성한 비밀을 깨닫지 못한 자이다 (49, 1).

60. 영혼이 겉보기에는 스스로 하는 것처럼 보이며, 오직 자신의 힘에만 의지하여 무언가를 시도하고 성취하기 위해 애쓰며, 성령의 도우심 없이도 스스로 일을 완벽하게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죄를 짓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영혼은 천상의 거처에 합당하지 않으며, 성령 없이 오직 스스로의 힘만으로 완전한 순결에 이르겠다고 생각하는 그 영혼은 천국에 합당하지 않다. 만약 정욕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세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으며, 소망과 인내로 자신의 본성에는 비범한 은혜, 즉 성령의 능력을 받을 것이라고 믿지 않고, 주님께서 위에서 영혼에 부어 주시는 신성한 생명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는 참된 생명을 체험하지 못할 것이며, 물질적 황홀함에서 깨어나지 못할 것이며, 어두워진 영혼 속에서 성령의 빛이 비치지 않을 것이며, 그 안에서 거룩한 날이 빛나지 않을 것이며, 무지의 가장 깊은 잠에서 깨어나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의 역사로 진정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할 것이다(24,5),

61. 그러므로 믿으려고 노력하고 주님께 나아가려는 자는, 이 땅에서 이미 하나님의 성령을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분은 영혼의 생명이시며, 주님께서 오신 것은 바로 이 땅에서 영혼에게 생명, 곧 성령을 주시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빛이 있는 동안 빛을 믿으라”(요한복음 12:36), “밤이 오면 너희는 일할 수 없으리라”(요한복음 9:4)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누군가 이곳에서 영혼의 생명, 즉 성령의 신성한 빛을 구하지도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았다면, 그는 육신을 떠날 때 이미 어둠의 저편으로 내쫓겨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에서 마귀와 그의 천사들과 함께 끝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마치 금이나 은이 불에 던져지면 더 깨끗하고 순수해지듯이, 나무나 풀도 그것을 변하게 할 수 없으니, 금 자체가 불처럼 되어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것을 삼켜 버리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영혼도 영적인 불과 신성한 빛 속에 머물며, 어떤 사악한 영으로부터도 어떤 악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며, 설령 무엇인가 그에게 다가온다 해도 성령의 하늘 불에 소멸될 것이다. 마치 새가 높은 곳을 날아다닐 때 근심이 없고, 사냥꾼도 교활한 짐승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모든 것 위로 높이 떠서 비웃듯이, 영혼도 성령의 날개를 펼치고 하늘의 가장 높은 곳으로 치솟아 모든 것 위로 비웃는다(30, 6).

62. 그러나 아직 자신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심겨지고 확고히 자리 잡지 못한 사람은, 밤낮으로 마치 자연스러운 일인 양, 때때로 자신을 인도하고, 자극하며, 선으로 이끄는 것에 영혼을 붙들게 하라. 적어도 자연스럽고 변함없는 것으로서, 그 안에 돌봄과 두려움, 근심, 그리고 항상 확고히 자리 잡은 마음의 통회가 있기를 바란다(16, 6).

 

6. 성령의 효력을 얻은 자들의 상태

a) 성실하게, 자기 연민 없이 수행의 수고를 이어가는 이에게는 마침내 은혜의 힘과 효력이 드러난다. 그것은 마음속의 특별한 영적 온기, 생각의 온유함, 모든 피조물에 대한 욕망의 소멸, 그리고 땅에서 귀중하게 여겨지는 모든 것의 가치를 낮추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영적 삶의 씨앗이다. 여기서부터 영혼의 영성화가 시작되고, 정욕으로부터의 정화, 정욕으로 인해 입은 상처의 치유가 이루어진다.

1. 마리아를 본받으라. 다른 어떤 것도 염두에 두지 말고, 오직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으니, 내가 원하는 대로 이미 타오르고 있다”(누가복음 12:49)고 말씀하신 분만을 바라보라. 영의 불타오름은 마음을 소생시키기 때문이다. 비물질적이고 신성한 불은 영혼을 거룩하게 하고, 마치 용광로에서 순금을 정련하듯( ) 시험하며, 악은 가시와 짚처럼 태워버리니, “우리 하나님은 삼키는 불이시기” 때문이다(히브리서 12:29). 이 불의 효력을 구하며, 복된 다윗은 “주여, 나를 시험하시고 나를 검증하시며, 내 속과 내 마음을 살피소서”라고 말했습니다(시편 25, 2). (25, 9).

2. 이 불은 부활하신 구세주께서 클레오파와 그의 동행자에게 말씀하실 때 그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었습니다. 또한 천사들과 섬기는 영들도 이 불의 광휘를 누리는데, 이는 “자신의 천사들을 영으로, 자신의 종들을 타오르는 불로 만드시는” (히브리서 1, 7). 이 불은 내면의 바다에 있는 티끌을 태워 마음을 깨끗하게 하여, 본래의 통찰력을 되찾게 함으로써, 마치 “내 눈을 열어 주시어 주의 율법에서 기적을 깨닫게 하소서” (시편 118:18)라고 말하는 사람과 같이. 그러므로 이 불은 악마들을 쫓아내고 죄를 근절한다(25:10).

3. 마치 불 속에 넣은 철이나 납, 금, 은이 경직성을 잃고 부드러운 물질로 변하며, 불 속에 있는 동안 불의 열기에 의해 녹아내려 본래의 경직성을 바꾸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혼도 세상을 버리고 유일한 주님을 사랑하며, 큰 마음의 갈망으로, 수고와 헌신 속에서 끊임없이 소망과 믿음으로 그분을 기다리며, 신성과 성령의 사랑이 담긴 그 하늘의 불을 자기 안에 받아들임으로써, 진정으로 모든 세속적인 사랑을 버리고, 정욕의 모든 해악에서 해방되며, 모든 것을 스스로에게서 떨쳐내고, 본연의 성질과 죄악된 완고함을 변화시키며, 자신이 받아들인 유일한 하늘의 신랑 앞에서는 모든 것을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고, 그분에 대한 뜨겁고 형언할 수 없는 사랑으로 안식을 얻는다 (4, 14).

4. 내가 네게 말하건대, 눈앞에 있는 가장 사랑하는 형제들조차도, 그들이 그 사랑에 머물러 있다면, 영혼은 말하자면 그들을 외면하게 되는데, 이는 그녀의 생명과 안식이 바로 하늘의 왕과의 신비롭고 형언할 수 없는 교감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육체적인 교제에 대한 사랑은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들과 갈라놓으며, 그들과 관련된 모든 것이 마음속에서 낯선 것이 되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이 그들을 사랑한다 해도, 타인처럼 사랑할 뿐, 여전히 자신의 배우자에게 마음을 두게 된다. “이 때문에 사람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되리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에베소서 5:31). 그러므로 육신의 사랑이 그토록 모든 사랑으로부터 떠나게 한다면, 하물며 진정으로 하늘의 소망이신 성령과 교제할 자격을 얻은 자들은 더욱더 세상에 대한 모든 사랑을 버리게 될 것이며, 모든 것이 그들에게는 불필요한 것으로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늘의 소망에 정복당하여 그 소망에 밀접하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 그들의 소망이 있고, 그곳에 그들의 생각이 있으며, 그곳에서 그들은 살고, 그곳으로 그들의 생각이 향하며, 그곳에 신성하고 천상의 사랑과 영적인 소망에 사로잡힌 그들의 마음이 항상 머무르고 있다 (4, 15).

5. 신성한 생명의 성령의 이슬이 내려와, 하늘의 왕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신성한 사랑으로 마음을 찔린 사람들은, 참되고 영원한 왕이신 그리스도의 그 아름다움과 형언할 수 없는 영광, 썩지 않는 위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풍요로움에 매료된다. 그들은 갈망과 사랑에 사로잡혀 온전히 그리스도께로 향하며, 영으로 관조하는 그 형언할 수 없는 복을 얻기를 갈망하고, 이를 위해 땅 위의 모든 아름다움과 영광, 위엄, 명예, 왕들과 공작들의 부까지 아무것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이는 그들이 신성한 아름다움에 깊이 감동받았고, 그들의 영혼에 천상의 불멸의 생명이 스며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늘의 왕에 대한 오직 한 가지 사랑만을 갈망하며, 그분만을 눈앞에 두고 지극한 열망을 품고, 그분을 위해 모든 세속적인 사랑을 버리고 모든 세상의 속박에서 벗어나, 오직 이 한 가지 소망만을 항상 마음속에 간직하고 그 어떤 것도 섞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5, 6).

6. 진정으로 은혜를 맛본 그리스도인들만이 온 세상의 모든 것과 왕의 보물, 부와 영광, 지혜의 말들, 이 모든 것이 일종의 환상이며, 확고한 근거가 없는 일시적인 것임을 깨달을 수 있으며, 하늘 아래 있는 어떤 것이든 그들에게는 전적으로 무시할 만한 것임을 안다. 왜 그럴까요? 하늘 위에 있는 것, 즉 왕의 보물에도, 지혜의 말에도, 세상의 영광에도 없는 것이 기이하고 경이롭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얻은 존엄, 혹은 부—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 만물의 주님이시며 창조주를 모신 자들이 가진 것—은 덧없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되는 소유입니다(15,40. 41).

7. 그리스도인들은 성령과의 교제와 성찬을 통해 마음과 이성이 확고함과 굳건함과 평온함, 그리고 안식을 얻게 되며, 더 이상 변덕스럽고 헛된 생각들로 흩어지거나 동요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평화와 성령의 사랑 안에 머무르게 된다. 주님께서도 그들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넘어갔다고 하셨다(요한복음 5,24). 마음의 갱신, 생각의 온유함, 사랑, 그리고 주님께 대한 하늘의 헌신으로 인해, 세상의 모든 사람과 구별되는 새로운 피조물, 곧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주님의 강림은 바로 주님을 진정으로 믿는 자들이 이러한 영적 은혜를 누릴 수 있게 하려 함이었습니다(5, 4. 5).

8.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진정으로 믿고 주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자마자 즉시 치유를 받아, 부정한 피의 샘이 마른 것처럼, 치유가 불가능한 죄의 상처, 즉 부정한 생각과 간사한 생각의 근원을 지닌 모든 영혼도 그리스도께 나아와, 진실로 믿으며 간구한다면, 정욕의 흐름으로부터 구원의 치유를 받게 될 것이며, 유일하신 예수님의 능력으로 불결한 생각을 뿜어내는 그 샘이 말라버리고 고갈될 것이나, 그 외에는 누구도 이 상처를 치유할 수 없다(20, 4).

9. 마치 해가 땅 위로 떠오르면 그 모든 광선이 땅 위에 비추고, 해가 서쪽으로 지면 자기 집으로 돌아가며 모든 광선을 다시 거두어들이듯이, 위로부터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영혼은 온전히 땅 위에 그 생각들을 두고 있으며, 그 생각은 땅의 끝까지 뻗어 있지만, 그러나 하늘의 중생과 성령으로부터의 교제를 누릴 자격을 얻게 되는 순간, 모든 생각을 하나로 모으고 그 생각을 자기 안에 간직하며, 주님께로, 하늘에 있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닌 거처로 들어가게 되고, 그 모든 생각은 신성한 공기에 스며들어 하늘의 것이 되며, 순결하고 거룩해진다. 이는 영혼이 악한 통치자, 곧 세상의 영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순결하고 신성한 생각을 얻게 되기 때문인데, 하나님께서 사람을 신성한 본성에 참여하게 하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이다(49, 3).

b) 이는 은총의 영향이 시작되는 첫 순간부터 드러나지만, 이미 어떤 완전함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이것은 단지 시작일 뿐이다. 은총은 그 존재를 느끼게 한 뒤, 모든 것을 채우고 내면의 모든 것을 변화시킬 때까지 조금씩 마음을 사로잡아 간다.

10. 신성한 은총의 작용이 각자의 믿음에 따라 영혼을 비추고, 영혼이 위로부터 오는 도움을 받아들일 때, 은총은 영혼을 부분적으로만 비추게 된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영혼 전체가 환하게 비춰진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영혼 내부에는 여전히 악의 광활한 들판이 남아 있으며, 사람은 그 안에서 작용하는 은총과 조화를 이루는 큰 수고와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한 순간에 사람을 정화시키고 완전하게 만들 수 있는 신성한 은총은, 인간의 자유 의지가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사랑을 지키며, 어떤 면에서도 악한 자와 결탁하지 않고 온전히 은총에 자신을 맡기는지 시험하기 위해 점차적으로 영혼을 찾아오기 시작합니다. 이처럼 오랜 시간과 세월 동안 은혜를 잘 따르며, 어떤 것으로도 은혜를 슬프게 하거나 모욕하지 않는 영혼은, 바로 그 점진적인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위한 도움을 얻게 된다. 그리고 은총 그 자체가 영혼의 초원을 차지하며, 영혼이 오랜 세월 동안 은총에 순종하고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보일수록, 그 가장 깊은 구성 요소와 생각 속까지 뿌리를 내리다가, 마침내 온 영혼이 이미 이 그릇 안에서 다스리고 계신 천상의 은총으로 감싸이게 된다(41, 2).

11. 이처럼 많은 이들이 그들 안에 작용하는 은총 그 자체로 인해 오해에 빠지게 되어, 자신들이 완전함에 도달했다고 생각하고 “이제 충분하다, 우리는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무한하시고 헤아릴 수 없으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깨달았다고 감히 말할 수 없으며, 밤낮으로 겸손해집니다. 영혼에는 많은 지체가 있고 그 깊이가 크며, 그 안에 스며든 죄는 영혼의 모든 부분과 마음의 구성 요소들을 장악했습니다. 그 후, 사람이 은혜를 구하면, 은혜가 그에게 임하여 영혼의 두 부분, 어쩌면 세 부분을 장악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경험이 부족한 자는 은혜로 위로받으며, 찾아온 은혜가 영혼의 모든 부분을 지배했고 죄가 뿌리 뽑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영혼의 대부분은 죄의 지배 아래 있고, 한 부분만이 은혜 아래 있다. 사람은 속아 넘어가며 이를 알지 못한다(26, 17, 50, 5).

12. 병에 걸린 사람이라도 어떤 신체 부위는 건강한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시력을 담당하는 눈이나 다른 어떤 부위는 건강한 반면, 나머지 부위는 손상되어 있다. 영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은 세 가지 영적 부위가 건전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아직 완전한 것은 아니다. 보라, 영적인 단계와 수준이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악이 한 번에가 아니라 부분적으로 정화되고 쫓겨나는지(15, 7).

13. 태중의 태아가 단번에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점차 인간의 모습을 갖추어 태어나지만, 아직 미성숙한 나이의 사람으로 태어나서 처음에는 수년 동안 자라다가 비로소 성인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보리나 밀의 씨앗도 땅에 뿌려지자마자 즉시 뿌리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추위와 바람이 지나간 후에야 제때에 줄기를 틔우며, 배나무를 심는 사람은 즉시 그 열매를 거두지 못하듯이, 지혜와 미묘함이 가득한 영적인 영역에서도 사람은 점차 성장하여 “나이에 걸맞은 온전한 사람” (에베소서 4, 13)에 이르게 되는 것이지, 다른 이들이 주장하듯 마치 옷을 벗고 입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15, 39).

14. 그러나 벌이 벌집 안에서 은밀히 벌집을 엮어내듯이, 은혜도 마음속에 은밀히 그 사랑을 키워내며, 쓴맛을 단맛으로, 무자비함을 자비로 바꾸어 줍니다. 또한 은세공인과 조각가가 접시에 조각을 부분별로 새기며, 그 위에 새겨 넣은 다양한 동물들을 가리고 있다가, 작업을 마친 후에야 비로소 접시를 온전한 광채로 드러내듯이, 참된 예술가이신 (그리스도) 주님께서는 우리가 육신을 벗어날 때까지 신비롭게 우리 마음을 조각으로 장식하시고 새롭게 하시며, 그때 비로소 영혼의 아름다움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16, 7).

c) 그러므로 은혜를 맛본 이들은 끊임없이 그 은혜를 더 많이 맛보고자 갈망한다.

15. 진리를 사랑하고 선을 사랑하는 영혼들은, 큰 소망과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온전히 입기를 갈망하므로, 타인의 상기시켜 줌을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주님에 대한 천상의 소망과 사랑에서 조금이라도 깎이는 것을 스스로 용납하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온전히 못 박혀, 영적인 신랑에 대한 애착 속에서 영적 성장이 이루어지는 것을 매일 스스로 깨닫고, 하늘의 소망에 사로잡혀 덕의 진리를 갈망하며, 강력하고 끝없이 영적인 깨달음을 갈망한다. 만약 자신의 믿음으로 인해 신성한 신비를 깨닫게 되거나, 하늘의 은총이 주는 기쁨에 동참하게 된다면,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며 자만하지 않고, 영적 은사를 어느 정도 받게 되더라도, 하늘의 갈망이 끝이 없기에, 그 은사를 더욱 간절히 추구하며, 자신 안에서 영적 성장을 더 많이 느낄수록 은총에 참여하고 그 은총이 더해지기를 더욱 갈망하고 목말라하며, 영적으로 더욱 풍요로워질수록, 그만큼 마치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에서 더욱 빈곤해지는 것처럼 되는데, 이는 하늘의 신랑을 향하여 나아가고자 하는 영적 갈망이 끝이 없기 때문이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나를 먹는 자는 더욱 배고파하고, 나를 마시는 자는 더욱 목마르게 될 것이라”(시라 24, 23). (10, 1).

16.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영혼은, 설령 수천 가지의 의로운 행위를 행했다 하더라도, 주님을 향한 끝없는 갈망으로 인해, 마치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처럼 스스로를 여기며, 설령 금식과 기도로 몸을 지치게 했더라도, 여전히 미덕을 위해 수고하기조차 시작하지 않은 듯한 느낌을 품고, 설령 다양한 영적 은사나 계시, 하늘의 신비를 얻게 되었다 하더라도, 주님을 향한 헤아릴 수 없고 끝없는 사랑으로 인해, 스스로는 아직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처럼 여기며, 오히려 매일 갈망하고 목말라 하며, 믿음과 사랑으로 기도에 머물러, 은혜로운 신비와 모든 미덕 안에서 자신을 단련하는 일에 결코 만족할 수 없다. 그녀는 하늘의 성령의 사랑에 찔려, 은혜의 도움으로 끊임없이 자신 안에서 하늘의 신랑을 향한 불타는 열망을 불러일으키며, 성령의 성소에서 그분과 신비롭고 형언할 수 없는 교제를 온전히 누리기를 갈망하고, 영혼의 솔직한 얼굴로 하늘의 신랑을 대면하여 바라보며, 영적이며 말로 다 할 수 없는 빛 속에서, 온전한 확신으로 그분과 하나됨에 들어가며, 그분의 죽음에 동참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죽기를 간절히 바라며 끊임없이 기다리며, 성령을 통해 죄와 정욕의 어둠으로부터 완전한 해방을 얻을 것을 의심 없이 믿으며, 성령으로 정화되고 영과 육이 거룩해짐으로써, 하늘의 평화를 받아들이기 위한 깨끗한 그릇이 되고, 하늘의 참된 왕이신 그리스도의 거처가 될 자격을 얻게 된다. 그리하여 비로소 영혼은 이 땅에서 이미 성령의 깨끗한 거처가 됨으로써 하늘의 생명에 합당한 자가 된다(10, 4).

17. 그러나 영혼이 이러한 경지에 이르는 것은 단번에, 또한 시련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 오히려 많은 수고와 노력, 오랜 시간의 지속, 부지런함, 시련과 다양한 유혹을 겪은 후에야 비로소 영적 성장과 성숙을 이루어 심지어 무정(無情)의 완전한 경지에 이르게 되며, 그때 비로소 기꺼이 그리고 용감하게 “죄로 인한 온갖 유혹”을 이겨낸 후, 큰 영광과 영적 은사, 하늘의 풍요를 누리게 되며, 이처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의 하늘나라 상속자가 될 것이다(10, 5).

18. 기독교는 음식과 음료와 같다. 그리고 그것을 더 많이 맛볼수록, 그 달콤함으로 인해 마음이 더욱 자극받아, 억제할 수 없고 만족할 줄 모르게 되어, 점점 더 갈망하고 맛보게 된다. 마치 목마른 사람에게 달콤한 음료가 주어지면, 그것을 맛본 후 오히려 갈증이 더욱 심해져 음료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과 같이, 성령을 맛보는 것도 거의 해소될 수 없는 갈증을 일으키는데, 이는 바로 그런 사람의 갈증에 비유되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마음과 신비롭게 협력하시는 성령의 역사이다(17, 13).

19. 샘물을 상상해 보라. 거기서 목마른 누군가가 마시기 시작했는데, 마시는 도중에 누군가가 그를 방해하여 그가 원하는 만큼 마시지 못하게 한다면, 물을 맛본 그는 갈증이 더욱 타오르고 더 간절히 물을 찾게 될 것이다. 영적인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이는 이미 하늘의 양식을 맛보고 성찬에 참여하고 있는데, 갑자기 바로 그 순간에 누군가가 그를 막아서, 아무도 그가 배불리 먹게 해 주지 않습니다(27, 7).

20. 주님께서는 인간의 연약함을 아시며, 사람이 금세 교만해진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그를 멈추게 하시고, 끊임없는 수련과 동요 속에 있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설령 작은 것이라도 받아들일 때 모든 사람에게 참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 교만해진다면, 한 번 배불리 먹게 될 때는 더욱더 참을 수 없는 존재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네 연약함을 아시고, 그분의 뜻에 따라 네게 고난을 보내시어, 네가 겸손해지고 더욱 간절히 하나님을 찾게 하십니다(27,8).

다) 주님을 점점 더 갈망하는 이들은 모든 면에서 자신이 부족하고 미흡하다고 느끼며, 그로 인해 겸손이 그들 안에 뿌리내린 감정이 된다. 바로 이것이 모든 향후 성장의 전제 조건이기도 하다.

21. 사람이 어떻게 영적으로 가난할 수 있겠는가? 특히 자신이 변했고, 발전했으며, 이전에는 갖지 못했던 지식과 이해에 이르렀다고 스스로 느낄 때 말이다. 사람이 이를 얻지 못하고 발전하지 못한 한, 그는 아직 영적으로 가난하지 않으며, 오히려 자신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이러한 깨달음과 성취에 이르게 되면, 그때야말로 은혜 그 자체가 그에게 영적으로 가난한 자가 되도록 가르치시니, 비록 그가 의인이자 하나님의 택함받은 자라 할지라도, 자신을 무엇으로든 여기지 말고, 마치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소유하지 못한 것처럼 자신의 영혼을 하찮고 비천한 것으로 인정하게 하십니다. 비록 알고 소유하고 있음에도 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마치 타고난 것처럼 인간의 마음에 깊이 뿌리내리게 된다. 우리의 조상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택하신 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흙과 재라고 불렀던 것을 보지 못하느냐(창 18:27). 또한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은 하나님을 앞에 두고 “나는 사람이 아니라 벌레요, 사람들의 조롱거리요, 사람들의 멸시받는 자”라고 말했습니다(시편 21:7).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하늘 성읍의 동포가 되어 그들과 함께 영광을 누리고자 하는 자들은, 그들과 같은 겸손을 가져야 하며, 스스로를 무언가 중요한 존재인 양 여기지 말고, 상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12, 3–4).

22. 은혜를 받은 자는 자신을 모든 죄인들보다 더 비천한 자로 여기며, 그러한 생각이 그에게 자연스러운 것으로 심겨져 있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을 아는 데 더 깊이 들어갈수록, 자신을 무지한 자로 더 많이 여기며, 더 많이 배울수록,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더 깊이 인정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내재하는 은총이 영혼 안에서 마치 자연스러운 것처럼 일으키는 것이다(16, 12).

23. 하나님 앞에서 경건한 자들은 스스로를 지극히 미약하고 극도로 경건하지 못한 자로 인정하며, 그들에게는 스스로를 낮게 여기거나 심지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는 것이 자연스럽고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과연 그들은 자신들에게 이전에 없던 것이 주어졌고, 자신의 본성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놀라운 것을 얻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인가? 내가 네게 말하건대, 그들은 스스로를 경건하고 성공한 자로 여기지 않으며, 자신들이 이전에 갖지 못했던 것을 얻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그러나 그들에게 내리는 은혜가 그들에게 가르쳐 주니, 성공하더라도 자신의 영혼을 귀중하게 여기지 말고, 자연스럽게 스스로를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여기게 한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는 귀중하지만, 그들 자신에게는 그렇지 않아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번영 속에서도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스스로를 여기며, 하나님 앞에서는 부유하지만 스스로에게는 가난한 자로 보인다 (27, 4. 5).

24. 만일 누군가가 은혜의 참여자라는 사실로 자만하고 교만해하는 것을 보게 된다면, 설령 그가 기적을 행하고 죽은 자를 살려내더라도, 자신의 영혼이 불명예스럽고 비천하며, 영적으로 가난하고 추악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는 악의에 사로잡히게 되지만 스스로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비록 그가 기적을 행한다 해도 그를 믿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표징은, 하나님 앞에서 지혜로운 자라면 이를 사람들로부터 감추려 노력하는 것이며, 설령 왕의 모든 보물을 가지고 있다 해도 그것을 숨기고 항상 이렇게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보물은 내 것이 아니요, 다른 이가 내게 맡긴 것이니, 나는 거지일 뿐이라. 맡긴 이가 원하면 내게서 가져갈 것이다.” 반면 누군가 “나는 부자다. 내가 얻은 것만으로도 충분하니 더 이상 필요 없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기독교인이 아니라 미혹과 마귀의 그릇이다.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은 결코 만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 그 기쁨을 맛보고 그분과 교제할수록, 그만큼 더 갈망하게 된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열정과 억제할 수 없는 사랑을 지니고 있어, 더욱 성공하고 얻으려고 노력할수록, 모든 면에서 부족하고 아무것도 얻지 못한 자로서 스스로를 더욱 가난한 자로 인정한다. 그들은 “이 태양이 나를 비추기에 나는 합당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표징이며, 이것이 바로 겸손이다(15, 35).

25. 누구든지 위대한 겸손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는 사탄에게 넘겨지고, 그에게 주어진 신성한 은총에서 벗어날 것이며, 그때 그의 자만심이 드러나게 되는데, 이는 그가 벌거벗고 가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총으로 풍성해지는 자는 큰 겸손과 마음의 통회 속에 머물러야 하며, 자신을 거지이자 아무것도 없는 자로 여기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남의 것이며, 다른 이가 내게 준 것이니, 그가 원할 때면 내게서 가져갈 것이다”라고 생각해야 한다. 누구든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자는,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질 것이라”(마태복음 23:12)고 말씀하신 대로, 자신에게 주어진 은혜를 보존할 수 있다.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로서 스스로를 책망하고, 신실한 자로서 스스로를 합당하지 않은 자로 여겨야 한다. 이러한 영혼들은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며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얻는다(41, 3).

e) 그러나 그들에게는 자만, 교만, 정죄를 무엇보다도 경계하라는 경고가 주어지니, 그것들 때문에 은혜가 떠나고, 은혜가 없으면 곧바로 타락하기 때문이다.

26. 만일 왕이 자신의 보물을 어떤 거지에게 맡긴다면, 그것을 보관하게 된 사람은 그 보물을 자신의 소유로 여기지 않고, 어디에서나 자신의 가난함을 인정하며, 남의 보물을 낭비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는 항상 스스로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보물은 나에게 남의 것일 뿐만 아니라, 강력한 왕이 내게 맡긴 것이니, 왕께서 원하실 때면 언제든지 내게서 가져가실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도 자신에 대해 똑같이 생각해야 하며, 겸손하고 지혜로워야 하며, 자신의 빈곤함을 고백해야 한다. 만약 거지가 왕으로부터 맡겨진 보물을 받고, 그 남의 보물에 의지하여 마치 자신의 재산인 양 자만하기 시작하고, 그의 마음이 허영으로 가득 차게 된다면, 왕은 그에게서 자신의 보물을 되찾아 가실 것이며, 그것을 보관하던 자는 이전과 다름없이 여전히 거지로 남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은혜를 받은 자들도 자만하고 그들의 마음이 교만해지면, 주님께서는 그들에게서 당신의 은혜를 거두어 가시며,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은혜를 받기 전과 똑같은 상태로 남게 된다(15, 25).

27. 성령의 은혜를 받고 안식 속에서 은혜로운 위로를 얻으며, 소망과 영적 달콤함 속에서 은혜로운 위로를 찾고, 이에 안주하여 교만해지며, 방심에 빠지고, 마음으로 뉘우치지 않으며, 생각에서 겸손해지지 않고, 무정함의 완전한 경지에 이르지 못하며, 온전한 근면과 믿음으로 은혜를 온전히 채우지 못한 채, 그것에 만족하고 안주하여, 작은 은총의 위로에 머물러 멈춰 서게 된다면, 이와 같은 영혼들은 겸손보다는 교만에 더 치우쳐, 설령 어떤 은사를 얻었다 하더라도, 그들의 안일한 태만과 허영심에 찬 자만심 때문에 그 은사를 잃게 된다(10, 3).

28. 내가 네게 말하노니, 나는 모든 은사를 갖추고 성령의 참예자가 된 사람들을 보았으나, 완전한 사랑에 이르지 못해 넘어지는 것을 보았다. 어떤 고귀한 사람은 세상을 등지고 재산을 팔아 노예들을 해방시켰으며, 분별 있고 현명한 사람으로서 이미 정직한 삶으로 명성을 얻었으나, 그 와중에 자만과 오만함에 빠져 결국 방탕함과 수많은 악행에 빠지고 말았다(27, 14).

29. 또 다른 이는 박해 중에 자신의 몸을 바쳤고, 순교자가 되었다가 훗날 평화가 찾아오자 풀려나 존경을 받았는데, 그는 짙은 연기에 시달린 탓에 눈꺼풀이 손상되었다. 그는 칭송받던 중 기도에 부름을 받아 빵을 집어 자신의 소년에게 주었는데, 그의 정신은 마치 하나님의 말씀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듯한 상태가 되었다(27, 15).

30. 또 다른 한 사람, 어떤 수행자는 나와 같은 집에서 살며 나와 함께 기도했는데, 은혜가 넘쳐서 내 곁에서 기도할 때면 은혜가 그 안에서 끓어오르는 듯 감동에 휩싸이곤 했다. 그에게는 치유의 은사가 주어졌는데, 귀신을 쫓아낼 뿐만 아니라 손과 발이 묶인 자나 심한 병을 앓는 자들도 안수함으로 치유했다. 그러다가 세상의 찬사를 받고 스스로에 취해 교만해지자, 그는 죄의 가장 깊은 구렁텅이로 떨어지고 말았다. 보라, 치유의 은사를 가진 자조차 넘어졌다. 사랑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자들이 어떻게 넘어지는지 보느냐? 그러나 사랑에 도달하여 그 사랑에 묶이고 황홀해하는 자는, 마치 자신의 본성을 느끼지 못하는 듯이 다른 세계로 빠져 들어가 포로가 되어 끌려간다(27, 16).

31. 신실하고 진정으로 사랑을 품은 영혼은 의로운 자들을 위해 예비된 영원한 복과, 임하실 하나님의 은혜가 베푸실 형언할 수 없는 은총을 바라보며, 자신과 자신의 돌봄, 수고와 업적을 성령의 형언할 수 없는 약속에 합당하지 않다고 인정한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기쁘게 여기시는 영적으로 가난한 자이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굶주리고 목마르게 갈망하는 자이다. 이것이 바로 마음이 상한 자이다. 이러한 마음가짐과 돌봄, 수고, 그리고 덕에 대한 사랑을 받아들여 끝까지 그 모습을 지켜낸 자들은 진실로 생명과 영원한 왕국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 중 누구도 형제 앞에서 자만하지 말며, 간사한 자에게 현혹되어 “보라, 나는 이미 영적인 은사를 가지고 있다”라고 말하며 자만심에 빠지지 말라. 이는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일이 형제에게 어떤 일을 가져올지 네가 알 수 없으며, 너와 그의 끝이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한다. 오히려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을 주의 깊게 살피며, 끊임없이 양심을 살피고, 마음의 일을 점검하여, 마음이 어떤 경건함과 노력으로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지, 그리고 완전한 목표인 자유와 무정욕, 영적 안식을 염두에 두고, 어떤 은사나 변명에도 단호히 의지하지 말고 끊임없이 부지런히 나아가야 한다(29, 7).

32.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던 자들조차 어떻게 타락하는가? 본성상 가장 순수한 생각조차도 유혹에 빠지고 타락하곤 한다. 사람은 자만하기 시작하고, 타인을 정죄하며 “너는 죄인이다”라고 말하면서, 정작 자신은 의롭다고 인정한다. 바울이 뭐라고 말했는지 모르겠는가? “내게 육체의 가시가 주어졌으니, 사탄의 사자로서 나를 괴롭히게 하여 내가 교만해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12,7). 그리고 순수한 본성 속에도 교만해질 가능성이 있다(7, 4).

33.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모든 노력을 다해, 노골적인 음녀든, 죄인들이든, 또는 방탕한 사람들이든, 그 누구도 정죄하지 않도록 해야 하며, 모든 사람을 순수한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맑은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그것이 마치 자연스럽고 피할 수 없는 일처럼 여겨지도록 하여, 누구도 깎아내리거나 정죄하지 말고, 누구도 경멸하지 않으며, 사람들 사이에 차별을 두지 말아야 한다(15, 8).

34. 사람은 은총의 은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타락할 수 있는가? 만약 게을러진다면 타락하게 되는데, 이는 원수들이 결코 가만히 있지 않고 게으름에 빠지지 않은 채 끊임없이 싸움을 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는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구원을 추구하는 것을 결코 멈춰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비록 겉보기에는 은총의 신비 안에서 시험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게으름에 빠진다면 너에게 큰 해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15, 14).

35. 그리스도인의 존엄은 위대하여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그러나 만일 누군가가 정신이 산만해지고 악의에 의해 약탈당한다면, 그는 성벽이 없는 도시와 같아진다. 그러면 강도들이 원하는 곳에서 방해받지 않고 들어와 그 도시를 황폐화시키고 불태워 버린다. 그러므로, 만일 너도 부주의하고 자기 자신에게 무관심하다면, 간사한 영들이 찾아와 네 마음을 헛된 것으로 만들고 황폐화시키며, 이 세상에서 네 생각을 흩어지게 할 것이다(15, 45).

e)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어떤 보물을 얻었는지 깨닫고 그만큼 기뻐하는 만큼, 그것을 잃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은혜의 성령을 모욕하지 않도록, 그리고 그분이 떠나지 않도록 자신의 영적 사역을 수행하려고 노력한다.

36. 수고하는 자는 소원을 이루기 전까지, 주님께서 오셔서 성령의 모든 감각과 역사 안에서 그 안에 거하시게 될 때까지, 자신의 수고와 삶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가 주님의 은혜를 맛보고 영적인 열매를 누리게 되면, 어둠의 베일이 벗겨지고 그리스도의 빛이 비추며 형언할 수 없는 기쁨 속에서 역사할 때, 비로소 주님을 곁에 모시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그 위대한 사랑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이익을 얻은 상인처럼 그는 기뻐하지만, 동시에 강도들과 간사한 영들로부터 닥칠 재앙을 두려워하며, 힘이 약해져서 천국, 곧 하늘의 예루살렘(14, 2)에 들어갈 자격을 얻기 전까지 자신의 수고를 어떤 식으로든 망치지 않을까 걱정한다.

37. 바다를 항해하는 상인들처럼, 비록 순풍과 잔잔한 바다를 만나더라도, 항구에 들어설 때까지는 언제든지 역풍이 불고 바다가 거칠어지며, 배가 위험에 빠질까 봐 항상 두려움에 떨듯이, 그리스도인들도 비록 자신 안에서 성령의 유리한 바람이 불고 있음을 느끼지만, 여전히 맞바람이 불어와 그들의 영혼에 어떤 반란과 동요를 일으키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다. 그러므로 안식의 항구, 완전한 평화, 영생과 영원한 기쁨, 성도들의 도시인 하늘의 예루살렘, 맏아들들의 교회(히브리서 12:23)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큰 신중함이 필요하다. 아직 이 단계들을 거치지 못한 자에게는, 이 과정을 밟는 동안 교활한 세력이 그에게 어떤 타락을 초래하지 않을까 두려워할 이유가 많다(43, 4).

38. 어떤 부자나 매우 유명한 왕이, 자신의 몸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여인에게 호의를 베풀어 그녀의 연인이 되고, 그녀를 신부이자 동거인으로 삼아 자신의 곁으로 데려가려 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녀가 마침내 남편에게 호감을 보인다면, 남편에 대한 사랑을 간직하며 이 가난하고 빈곤하며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했던 여인은 남편이 가진 모든 재산의 주인이 된다. 반면, 의무와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고 남편의 집에서 부적절한 행동을 한다면, 그녀는 수치와 모욕을 당하며 쫓겨나게 되고, 모세 율법에서 남편에게 불순종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아내에 대해 명시한 대로(신명기 24:1) 양손을 머리에 얹고 떠나게 된다. 그때 비로소 그녀는 고통스러워하며 쓰라린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경솔함으로 인해 불명예를 당함으로써 어떤 부를 잃었는지, 어떤 명예를 박탈당했는지를 되새기게 된다(15, 2).

39. 마찬가지로, 하늘의 신랑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분과의 신비롭고 신성한 교제를 위해 신부로 삼으신 영혼, 그리고 하늘의 풍요로움을 맛볼 그 영혼은, 큰 경건함으로 자신과 약혼하신 그리스도께 진심으로 기쁨을 드려야 하며, 자신에게 맡겨진 영적 사역을 마땅하고 합당한 방식으로 수행하여,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성령을 모욕하는 일이 없도록 하며, 온전한 순결과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마땅히 지키고, 하늘의 왕이신 주님의 집 에서 온전히 행하며, 주어진 은혜에 온전히 헌신해야 한다. 보라, 바로 그러한 영혼은 주님의 모든 은혜 위에 여주인으로 세워지며, 그녀의 몸조차 그리스도의 신성으로부터 영광을 받는다. 그러나 만일 그녀가 어떤 점에서 죄를 짓고, 그리고 자신의 사역에서 의무에 어긋나게 행동하며, 그리스도께 기쁨이 되는 일을 하지 않고, 그분의 뜻을 따르지 않으며, 그 안에 내재한 성령의 은총을 돕지 않는다면, 모욕을 당하며 수치스러운 불명예에 처하게 되고, 하늘의 왕과 교제할 자격이 없고 무용지물이 된 자로서 생명에서 배제된다. 그리고 이 영혼에 대해서는 이미 모든 거룩하고 지혜로운 영들, 곧 천사들, 권세자들, 사도들, 선지자들, 순교자들이 슬픔과 애통함과 울음을 터뜨리며, 그녀를 위해 탄식한다(15, 2).

40. 그러므로 우리는 힘써 노력하며 모든 분별력을 다해 신중하게 행동하여, 기록된 바와 같이 두려움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야 한다(빌립보서 2, 12).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성령에 참여하게 된 여러분 모두는, 어떤 일에서든, 사소한 일이나 큰 일에서나, 경솔하게 행동하지 말고 성령의 은혜를 모독하지 마십시오. 그래야 이미 참여하게 된 그 생명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15, 4),

41. 또 다른 예를 들어 설명하겠노라. 만일 종이 왕궁에 들어가 왕을 모시며, 자신에게 맡겨진 것을 바친다면, 그는 그것을 왕의 재산에서 취하여, 빈손으로 들어가면서도 왕의 그릇을 사용하여 왕을 섬기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섬김 중에 부적절한 일을 저지르지 않고, 왕의 식탁에 한 음식을 다른 음식 대신 올리지 않으며, 첫 번째부터 마지막까지 모든 요리를 순서대로 차려 드리기 위해 많은 분별력과 신중함이 필요하다. 만일 무지와 경솔함으로 인해 왕을 제대로 섬기지 못한다면, 그는 위험에 처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15, 5).

42. 마찬가지로, 은혜와 성령으로 하나님께 봉사하는 데 자신을 바친 영혼도, 하나님의 그릇, 즉 영적 봉사에 관해 판단할 때, 은혜와 어긋나는 자기 자신의 임의적인 뜻으로 인해 어떤 실수도 저지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 큰 분별력과 지식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영혼은 내면의 사람에 의해 은밀히 이루어지는 영적 봉사와 자신의 그릇, 즉 내면의 사람의 영을 통해 주님께 섬길 수 있지만, 그분의 그릇, 즉 은혜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을 섬길 수 없으며, 곧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그분께 기쁨을 드릴 수 없기 때문이다(15, 5).

43. 그리고 영혼이 은혜를 받아들일 때, 그에게는 많은 분별력과 현명함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그분께 구하는 영혼에게 직접 주시는 것으로, 영혼이 받아들이는 성령으로 그분께 기쁘게 섬기며, 무지, 대담함이나 태만함으로 인해 길을 벗어나 죄를 짓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영혼에게는 죽음과 통곡이 벌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신성한 사도도 “다른 사람을 가르치면서 정작 나 자신이 실족하지 않도록 하리라”(고린도전서 9, 27)라고 말했듯이 말이다. 보라, 하나님의 사도로서 그가 얼마나 큰 두려움을 가졌는지! 그러므로 우리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로서, 무엇보다도 그분의 뜻에 따라 영적 사역을 수행하고, 모든 것을 소홀히 여기는 생각에 익숙해지지 않도록, 그리고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기쁘게 살며, 그분의 뜻에 따라 영적인 봉사로 그분을 섬김으로써 영생을 상속받게 하소서 (15, 6).

44. 마치 왕의 전각에 들어가는 코미트들, 즉 지방의 수장들이, 어떻게 대답해야 비난과 처벌을 받지 않을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반면, 왕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농민들과 평민들은 태연하게 행동하듯이, 이 천하 세상 전체도, 왕부터 거지까지 모든 이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알지 못한 채 세속적인 일에만 신경을 쓰며, 심판의 날을 떠올리는 이는 드물다. 그러나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심판대, 곧 그리스도의 보좌가 계신 곳에 들어가, 항상 그리스도 앞에 서 있는 이들은, 그분의 거룩한 계명을 어기는 죄를 짓지 않도록 끊임없는 두려움과 경외심 속에 머무른다(15, 17).

45. 종이 주인 곁에 있을 때, 주인 곁에 있는 동안 내내 두려움 속에 있으며 주인이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도 주님이시며 마음을 아시는 그리스도 앞에서 우리의 생각을 엎드려 드러내야 하며, 그분께 희망과 소망을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분은 나의 영광이시며, 나의 아버지이시며, 나의 부요함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는 항상 양심 속에 경건함과 경외심을 품어야 한다(16, 6).

46. 마치 한 지역의 최고 통치권이나 왕의 보물을 맡은 자들이 언제나 왕을 모욕하지 않도록 신경을 쓰는 것처럼, 영적인 일을 맡은 자들도 항상 신경을 쓰며, 평안을 누리고 있어도 마치 평안이 없는 것처럼 여깁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전히 영혼, 도시, 즉 영혼에 침입한 어둠의 왕국과, 그 영혼의 들판을 점령한 야만인들을 쫓아내기 때문이다 (16, 12).

g) 또한 이 목적을 위해, 그들은 온갖 방법으로 마음을 주님에게서 떠나지 않도록 애쓰며, 자신의 내면을 마치 선장이 선원들을 이끄는 것처럼, 혹은 마부가 말을 이끄는 것처럼 질서 정연하게 유지하려 한다.

47. 하나님은 형언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으시며, 산 위에서도, 바다에서도, 심연의 깊은 곳에서도,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않으시면서 두루 나타나시니, 마치 천사들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듯이, 그분은 하늘에 계시고, 여기에도 계신다. 깊은 곳에서 주님을 찾으면, 그분이 그곳에서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구덩이에서 그분을 찾으면, 그곳에서 두 사자 사이에 의로운 다니엘을 지키고 계시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불 속에서 그분을 찾으면, 그곳에서 그분의 종들을 도우시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산에서 그분을 찾으면, 그곳에서 그분이 엘리야와 모세와 함께 계심을 알게 될 것이다. 주님은 어디에나 계시니, 땅 아래에도, 하늘 위에도, 우리 안에도, 그리고 모든 곳에 계신다(16, 5. 12).

48. 그리스도인은 항상 하나님을 기억해야 할 의무가 있으니, “네 마음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신명기 6:5)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즉 기도하는 곳에 들어갈 때뿐만 아니라 길을 갈 때나 대화를 나눌 때, 음식을 먹을 때에도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께 대한 사랑과 헌신을 가져야 한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마음이 있는 곳에 네 보화도 있다’(마태복음 6, 21). 사람의 마음이 무엇에 매여 있고, 그 소망이 무엇으로 향하느냐에 따라, 그것이 바로 그에게 신이 된다. 만일 마음이 항상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은 그 마음의 주님이 되신다. 불 속에 던져진 마른 나뭇가지가 불의 힘을 이겨낼 수 없어 즉시 타버리는 것처럼, 악령들도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을 공격하려 할 때, 그 사람이 항상 주님께 굳게 붙어 계시고 그분께 소망과 기대를 두기만 한다면, 신성한 불의 힘으로 타버리고 멸망당한다. 그리고 만일 악령들이 굳건한 산처럼 강하다 할지라도, 기도로 인해 마치 불에 녹는 밀랍처럼 타버린다(43, 3).

49. 주님의 성도들은 때로 세상의 광경 속에 앉아 그 유혹을 지켜보기도 하지만, 내면의 사람으로는 하나님과 대화하고 있는 반면, 외면의 사람으로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보이고 있다. 세속적인 사람들은 아첨하는 영의 다른 영향 아래 있어, 그 영에 따라 세속적인 것을 지혜로 여기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뜻과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은 다른 시대, 다른 도시의 사람들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이 그들의 영혼과 교제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15, 8. 9).

50. 사도는 “남자들이 분노나 악한 생각 없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딤전 2:8) 말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서에 따르면, 생각은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마태복음 15:19). 그러므로 기도에 임할 때 네 마음과 생각을 살피고, 순수한 기도가 너를 통해 하나님께 올라가기를 소망하며, 무엇보다도 기도에 방해가 되는 것이 없는지, 기도가 순수한지, 네 마음이 농부가 농사에, 남편이 아내에게, 상인이 장사에 전념하듯 주님께 온전히 집중되어 있는지, 그리고 기도하러 무릎을 꿇을 때 다른 생각들이 네 마음을 빼앗고 있지는 않은지(15, 12)를 살피라.

51. “네 마음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명기 6:5)고 기록되어 있다. 너는 “나는 사랑하며 성령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연 네 안에 주님을 향한 기억과 사랑, 그리고 그분에 대한 열정이 있는가? 너는 밤낮으로 주님께 매여 있는가? 만일 그러한 사랑을 가지고 있다면, 너는 깨끗한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렇지 않다면, 세상의 근심과 더럽고 간사한 생각이 닥쳤을 때, 네가 과연 이에 대해 흔들림이 없는지, 네 영혼이 항상 하나님의 사랑을 향하고 하나님께 충실한지 살펴보아라. 세속적인 생각들은 마음을 세속적이고 썩어 없어질 것들로 산만하게 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거나 주님을 기억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종종 무지한 사람도 기도에 임하여 무릎을 꿇으면 그의 마음이 평온에 이르고, 그가 악의 벽을 어느 정도까지 파고들어 그 아래로 깊이 들어갈수록 그 벽은 그만큼 무너져 내리며, 그 사람은 강자나 현자나 웅변가들이 도달하지 못하는 경지에 이르러 통찰과 지혜를 얻게 되는데, 그들은 그의 마음의 미묘함을 헤아리거나 알 수 없으니, 그가 신성한 신비에 몰두하고 있기 때문이다 (15, 13).

52. 놋그릇 밖에 불이 있을 때, 나중에 장작을 더 넣으면 그릇이 달아오르고, 그 안의 것은 그릇 밖에서 피워진 불로 인해 끓어오르고 부글거린다. 그러나 누군가 게을러서 장작을 더 넣지 않으면, 열기가 줄어들기 시작하여 마치 꺼지는 것처럼 된다. 마찬가지로 은총은 네 안에 있는 하늘의 불이다. 기도하며 네 생각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에 맡긴다면, 마치 장작을 더 얹은 것처럼 네 생각이 불이 되어 하나님의 사랑 속에 잠기게 될 것이다. 비록 성령께서 멀어지시어 마치 네 밖에 계신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분은 여전히 네 안에 머무르시며 네 밖에도 나타나신다. 만약 누군가 세속적인 일이나 산만함에 조금이라도 빠져들면, 다시 죄가 찾아와 영혼을 감싸고 사람을 짓누르기 시작한다. 영혼은 예전의 평안을 떠올리며 슬퍼하기 시작하고 더 자주 고통받게 된다 (40, 7).

53. 다시 마음이 하느님께로 향하고, 다시 예전의 평온이 그에게 다가오기 시작하며, 다시 그는 하느님을 더 간절히 찾으며 “주님, 간청합니다!”라고 말하기 시작한다. 점차 영혼을 불태우면서도 평온하게 하는 불꽃이 더해지는데, 마치 낚싯줄이 조금씩 물고기들을 깊은 곳에서 끌어올리는 것과 같다. 만약 이것이 없었다면, 영혼이 괴로움과 죽음을 맛보지 못했다면, 어떻게 쓴 것과 단 것을, 죽음과 생명을 구별하고, 생명을 주시는 성부, 성자, 성령께 영원토록 감사를 드릴 수 있었겠는가! (40, 8).

54. 배가 모든 장비를 완비하고 있을 때, 조타수가 모든 것을 지휘하고 통제하며, 어떤 이에게는 훈계를 하고 다른 이에게는 무엇을 해야 할지 지시하듯이, 마음에도 조타수인 이성과, 책망하는 양심, 그리고 정죄하고 변호하는 생각들이 있다.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서로 정죄하거나 변호하는 생각으로”(롬 2:15). (15. 31).

55. 만약 전차와 고삐, 짐승들, 그리고 그에 필요한 모든 것이 한 명의 마부 손에 있다면, 그가 원할 때 전차를 타고 온갖 속도로 질주할 수 있고, 원할 때 전차를 제어할 수 있으며, 또 어디로 돌리고 싶은지 마음대로 전차를 그 방향으로 이끌 수 있으니, 전차 전체가 마부의 지배 아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음에도 그와 밀접하게 연결된 많은 본능적인 생각들이 있지만, 이성과 양심은 마음에 훈계와 지침을 주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본능적인 생각들을 잠재운다. 왜냐하면 영혼은 하나이지만 그 안에는 여러 구성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15, 32).

56. 사람들은 말을 매어 전차를 몰고 서로를 향해 돌진하며, 각자는 상대를 쓰러뜨리고 이기려고 애쓴다. 이와 같이 수행자들의 마음은 한 편의 광경을 이룬다. 그곳에서 사악한 영들이 영혼과 싸우고, 하나님과 천사들은 그 용맹한 모습을 지켜보고 계신다. 게다가 매 순간 영혼 안에서 수많은 새로운 생각이 생겨나기도 하고, 악의에 의해 주입되기도 한다. 이는 영혼이 많은 은밀한 생각을 품고 있으며, 바로 이 순간에도 그것들을 만들어내고 낳기 때문이다. 또한 악의에는 많은 생각과 계획이 있어, 매 순간 영혼을 대적하는 새로운 생각을 낳는다. 왜냐하면 마음은 기수이기 때문에, 그는 영혼의 전차를 몰며, 생각의 고삐를 잡고 사탄의 전차를 향해 돌진하느니라. 사탄 또한 영혼을 대적하여 그 전차를 준비하였기 때문이다 (40, 5).

g) 이로부터 알 수 있듯이, 여기에서도 죄와 원수로부터의 싸움은 그치지 않으며, 이로 인해 마음의 생각과 움직임과의 끊임없는 투쟁이 이어진다. 여기서는 그 투쟁이 더욱 미묘하다.

57. 많은 이들은 비록 그들에게 은총이 내재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죄에 의해 속아 넘어갔다는 사실을 모른다. 마치 어떤 집에 젊은 여자와 젊은 남자가 함께 살고 있는데, 그 남자에게 유혹당한 여자가 마침내 그와 뜻을 합하여 간음하고 천한 존재가 되는 것처럼, 끔찍한 죄의 뱀도 영혼과 함께 머물며 유혹하고 설득하고, 만약 영혼이 이에 동의하면, 육체가 없는 영혼은 육체가 없는 악한 영과 교제하게 되는데, 즉 영이 영과 교제하게 되는 것이며, 악한 자의 생각을 받아들이고 이에 동의하는 자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간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네 수행의 기준은 생각 속에서 간음하지 않고, 이성으로 맞서며 내면에서 싸움을 벌이고, 악과 투쟁하며 그 말을 듣지 않고, 생각 속에서 그와 함께 즐거워하지 않는 데 있다. 만약 주님께서 네 안에서 이러한 준비를 보신다면, 마지막 날에 너를 그분의 왕국으로 맞아들이실 것이다(15, 26).

58. 사람은 본성상, 죄악의 깊은 구렁에 빠져 죄를 저지르는 자라도 선으로 돌아설 수 있고, 성령과 연합하여 하늘의 기쁨에 취한 자라도 악으로 돌아설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고 이미 성령의 참예자가 된 자들조차, 조심하지 않으면 그 불이 꺼져 세속에서 살던 때보다 더 나쁜 상태가 되어 버린다. 이는 하나님이 변덕스럽거나 무력해서도, 성령이 사그라들어서도 아니며, 오직 사람들 스스로가 은혜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며, 그로 인해 타락하여 수천 가지 악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15, 34).

59. 어떤 이들은 이미 하나님의 달콤함을 맛보았음에도 여전히 그들 안에 있는 원수의 작용을 받으며, 경험이 부족하여 하나님의 방문 이후에도, 심지어 기독교 성사 중에조차 생각이 여전히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에 놀라곤 한다. 그러나 이 상태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이들은 이에 놀라지 않는데, 이는 오랜 경험을 가진 농부들이 풍년이 들 때 완전히 방심하지 않고 기근과 흉년까지 예상하듯이, 반대로 기근이나 흉년이 닥쳤을 때도 시대가 변한다는 것을 알기에 희망을 완전히 잃지 않는 것과 같다. 영적인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로, 영혼이 다양한 유혹에 빠질 때 놀라지도 않고 절망하지도 않으니, 이는 하나님의 허락하심으로 악이 그녀를 시험하고 징벌하도록 허용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반대로, 큰 부와 평안을 누릴 때에도 방심하지 않고 변화를 기다린다(16, 3).

60. 사람이 은혜의 깊은 곳에 머물며 그 은혜로 풍요로워졌을 때, 그 안에는 여전히 악의 독이 남아 있지만, 그를 돕는 중보자가 있다. 샘물이 흐르면 그 주변도 축축하고 습해진다. 그러나 무더위가 닥치면 샘물과 그 주변 지역도 말라버린다. 마찬가지로, 은총이 넘쳐흐르는 하나님의 종들 안에서도, 그 은총은 악마가 부추기는 욕망은 물론 자연스러운 욕망까지도 말려버리니, 이는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 첫 번째 아담보다 더 높은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16, 4).

61.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그토록 안식을 누리기에, 그들 안에 머무르는 악덕보다 더 용감해지기도 한다. 그들은 기도를 드리고 하나님 앞에서 큰 안식을 누리지만, 때로는 악한 생각의 영향을 받아 죄에 물들기도 하는데, 비록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러 있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경솔하고 무지한 사람들은 자신 안에 은혜가 부분적으로 작용할 때, 이미 자신 안에 죄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분별력이 있고 현명한 사람들은 감히 부인하지 않으니, 자신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음에도 부끄럽고 부정한 생각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17, 5).

62. 형제들 가운데서 종종 어떤 이들은 큰 기쁨과 은혜를 얻었으나, 5~6년이 지나자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하곤 했다. “우리 안의 정욕이 시들었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고 나서, 자신들이 정욕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고 여겼을 때, 그들 안에 숨어 있던 악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들은 정욕에 불타올랐다. 그로 인해 스스로 놀라워하며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어떻게 우리 안에서 이런 악이 다시 일어났는가?”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므로 제정신으로 사고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감히 “내 안에 은혜가 머무르니 나는 죄에서 완전히 자유롭다”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마음속에는 두 가지 면이 작용한다. 경험이 부족한 이들은 은혜가 조금이라도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자마자, 이미 승리한 자들이며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제 생각에, 이는 마치 맑은 하늘에 태양이 빛나다가 구름이 끼어 태양을 가리고 공기를 탁하게 만들 때, 구름 뒤에 있는 태양은 빛이나 본질에 있어 아무런 손해도 입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완전한 순결에 이르지 못한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영혼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죄에 사로잡혀 있어, 비록 선에 온전히 굳건하지는 않더라도 하나님을 향한 열망을 강화시켜 주는 자연스러운 움직임과 생각을 품고 있다(17, 6).

63. 반대로, 마음 깊은 곳에서 선한 편을 고수하는 자들, 즉 은혜가 우세한 자들조차도 여전히 사악한 생각의 노예이자 포로로 남아 있으며, 때로는 악의 편에 서기도 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우리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경험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많은 분별력이 필요하다. 내가 네게 말하건대, 사도들조차 자신 안에 위로자(성령)를 모시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근심 없는 상태는 아니었다. 그들 안에는 기쁨과 즐거움과 더불어, 악의 영향이 아니라 은혜 그 자체의 작용으로 인한 두려움과 경외심이 함께 있었으니, 은혜 그 자체가 그들이 사소한 일이라도 타락하지 않도록 경계하게 하셨다. 마치 돌 조각을 벽에 던져도 벽을 조금도 손상시키지 못하거나 제자리에서 움직이게 하지 못하듯이, 혹은 갑옷을 입은 자에게 화살을 쏘아도 철이나 몸에 해를 끼치지 못하는 것처럼, 갑옷이 화살을 막아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사도들에게 악의 일부가 다가왔더라도 그들에게 해를 끼치지 못했는데, 이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완전한 능력으로 무장되어 있었고, 그들 스스로도 완전하여 의로운 일을 행할 자유를 가졌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은혜가 있으면 영혼이 더 이상 걱정할 것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온전한 자들에게도 성령을 섬기기 위한 영혼의 의지를 요구하시며, 그들이 은혜에 따라 행하도록 하신다. 사도가 말하기를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살전 5:19)고 했기 때문이다. (17, 7. 8).

64. 보이는 세상에서 땅은 저절로 가시덤불을 가장 자주 내어놓는다. 농부는 땅을 갈고 부지런히 경작하며 씨를 뿌리지만, 가시덤불과 뿌리지 않은 잡초들은 자라고 번성한다. 이는 아담이 죄를 지은 후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어줄 것이라” (창세기 3, 18). 농부는 다시 수고하며 가시덤불을 뽑아내지만, 그것들은 더욱 번성한다. 이것을 영적으로 이해하라. 죄로 인해 땅은 마음에서 가시와 엉겅퀴를 뿜어내며, 사람은 땅을 경작하고 수고하지만, 악한 영들의 가시는 여전히 생겨난다. 그 후, 성령께서 친히 인간의 연약함을 도우시며, 주님께서는 이 마음의 땅에 하늘의 씨를 뿌리시고 그것을 가꾸신다. 그리고 주님의 씨앗이 떨어질 때에도 여전히 가시와 엉겅퀴가 돋아난다. 주님 자신과 사람이 다시 영혼의 땅을 갈아엎지만, 여름이 오고 은혜가 풍성해지며 태양의 뜨거운 열기로 가시가 시들 때까지, 그곳에서는 일곱 악령과 가시가 계속해서 생겨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26, 21).

65. 비록 악이 본성 그 자체에 내재해 있기는 하지만, 오직 자라날 터전을 찾을 때에만 그곳에서 우세해진다. 연약한 밀 줄기는 가라지에 눌려 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여름이 다가와 식물이 마르면, 그때는 가라지가 밀에 조금도 해를 끼치지 않는다. 순수한 밀이 서른 메르가 있다 해도, 그 안에 불순물과 가라지가 섞여 있다면, 예를 들어 몇 줌 정도가 있다 해도, 가라지는 수많은 밀 속에서 눈에 띄지 않을 것이다. 은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선물과 은혜가 사람 안에서 늘어나고, 그가 주님 안에서 풍성해질 때, 비록 악이 부분적으로 그 사람 안에 남아 있더라도, 그에게 해를 끼칠 수 없으며 그에 대한 어떤 힘도, 또는 그 안에 어떤 몫도 갖지 못합니다. 이는 주님의 강림과 섭리가, 악덕에 노예가 되어 그 지배를 받고 복종하던 우리를 해방시켜 죽음과 죄를 이기는 자들로 만들기 위함이기 때문이다(26, 22).

66. 사도들이 원했다면 죄를 지을 수 있었을까, 아니면 은혜가 의지 자체보다 더 강했을까? 그들은 죄를 지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빛 가운데 머물며, 그러한 은혜를 누리면서도 교만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에게 임한 은총이 미약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은총이 온전한 영적 사람들에게도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원하는 대로 행하며, 마음 가는 대로 기울어질 수 있는 여지를 허락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본성 그 자체도 미약하기 때문에, 자신과 함께 머무르는 선에서 벗어나는 가능성이 있다. 마치 완전한 무장과 갑옷, 그 밖의 무기를 갖추고 내면적으로는 이미 안전에 이르러, 적들이 그들을 공격하지 않거나 설령 공격하더라도 무기를 사용하여 적에 맞서 싸우고, 그들과 투쟁하여 승리를 거둘지 여부는 이미 그들의 뜻에 달려 있는 것처럼, 혹은 무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적들과 싸우지 않고 그들과 함께 기뻐하며 평화롭게 지낼 수도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완전한 힘을 입고 하늘의 무기를 가지고 있다면, 원한다면 사탄과 함께 즐거워하며 그와 평화롭게 지낼 수 있고 싸우지 않을 수 있다. 왜냐하면 본성은 쉽게 변하기 마련이며, 사람은 자신에게 남아 있는 자유 의지로 인해, 원한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도 하고, 마찬가지로 멸망의 아들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27, 11).

67. 완전한 자들에게는 슬픔이 기다리고 있는가, 아니면 싸움이 기다리고 있는가? 아니면 그들은 완전히 평온한가? 원수가 더 이상 공격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사탄은 무자비하고 인간을 미워하므로, 어떤 사람이든 공격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지만, 겉보기에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힘으로 덤비는 것은 아닌 듯하다. 어떤 이들은 죄로 인한 심한 시련과 고통을 겪지만, 그 시련 속에서 굳건해지고 지혜를 얻으며, 대적하는 힘을 무시하므로 이 점에서 그들에게는 위험이 없다. 그들은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악마와의 싸움에서 자주 단련되어 경험을 쌓았으며,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시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안식을 누린다. 그러나 아직 단련되지 않은 이들은, 단 한 번의 슬픔에 빠지거나 그들에게 싸움이 닥치기만 해도, 즉시 재앙과 파멸에 빠진다 (15, 16, 17).

68. 어떤 이들은 스스로를 보호하고, 그들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강력하게 역사함에 따라, 자신의 지체가 그토록 거룩해졌다고 여겨, 마치 기독교에는 더 이상 정욕이 설 자리가 없고, 절제되고 순결한 마음이 얻어지며, 내면의 사람이 이미 신성하고 천상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스스로 결론지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은 자신이 의심할 여지 없이 완전한 경지에 도달했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안전한 항구에 들어섰다고 여길 때, 파도가 그를 덮쳐 오고, 다시 그는 물과 하늘, 그리고 임박한 죽음만이 있는 바다 한가운데로 휩쓸려 가는 자신을 보게 된다. 이렇게 우리 안에 들어온 죄는 온갖 악한 정욕을 일으킨다. 그러나 다시 어떤 은혜를 입게 되어, 마치 바다 깊은 곳에서 작은 물방울 하나를 건져 올린 것처럼, 바로 그 안에서 매시간, 매일 일어나는 기적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처럼 비범하고 새롭고 신성한 작용을 경험한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속아왔는지에 대해 경탄하고 놀라게 된다. 마침내, 신성하고 천상적인 은혜가 그를 깨우치고, 인도하며, 온유하게 하고, 모든 것을 선한 방향으로 이끌어 간다(38, 4).

69. 내면의 사람 안에서 행해지는 의를 실천하라. 그곳에는 그리스도의 제단과 흠 없는 성소가 세워져 있으니, 네 양심의 증거가 죽은 행실로부터 네 양심을 정결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게 하라. 그리하여 네 영으로 하나님께 섬기며, “우리가 경배하는 분을 우리가 안다”는 말씀(요한복음 4:22)에 따라 네가 누구를 경배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분을 경배합니다”(요한복음 4:22). 너를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맡겨라. 네 영혼이 신부와 신랑처럼 하나님과 교제하게 하라. 기록된 바와 같이: “이 비밀은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에베소서 5:32) 그리고 “흠 없는 영혼”(38:5)이라 하였으니.

70. 열매를 맺는 나무들과 향기로운 식물들이 있는 정원을 상상해 보라. 그 정원은 전체적으로 아름답게 조성되고 장식되어 있으며, 보전을 위해 울타리 대신 작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고, 마침 그곳을 빠른 강이 흐르고 있다. 물이 비록 약하게라도 담장에 부딪치면, 그 기초를 훼손하고, 틈을 찾아내어 조금씩 기초를 완전히 깎아내릴 것이며, 정원 안으로 들어와 모든 식물을 부수고 뿌리째 뽑아 버리며, 모든 수고를 헛되게 하고 정원을 불모의 땅으로 만들 것이다.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그 안에는 아름다운 생각들이 있지만, 끊임없이 죄의 흐름들이 마음에 다가와 그것을 무너뜨리고 자기 편으로 끌어가려 한다. 만약 마음이 비록 다소 경솔하여 불순한 생각에 빠진다면, 이미 아첨의 영들이 그곳을 먹잇감으로 삼아 쳐들어와 모든 아름다움을 무너뜨리고, 선한 생각들을 무로 돌리며, 영혼을 황폐하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43, 6).

i) 이 싸움 외에도 또 다른 싸움, 즉 외적인 싸움이 다가온다. 수고하는 자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나기 시작하는 동시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를 향한 적대적인 공격이 시작된다. 내면에서 쫓겨난 원수는 외부에서 무장을 한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영적으로 온전해지기 위한 피할 수 없는 조건이 되었다.

71. 하나님의 백성은 싸움과 위업에 대비해야 한다. 용감한 청년이 싸움을 견디고 자신에게 가해지는 타격에 타격으로 응수하듯이, 그리스도인들도 슬픔과 외적·내적 싸움을 견뎌내어, 타격을 감내함으로써 인내로 승리해야 한다 .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길이다. 성령이 계신 곳에는 그림자처럼 박해와 싸움이 뒤따릅니다. 선지자들이 비록 그들 안에 성령이 역사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동족들에게 박해를 받았던 것을 보십니까? 길과 진리이신 주님께서 다른 민족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백성들에게 박해를 받으셨던 것을 보십니까? 자신의 백성인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분을 박해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와 비슷한 일이 사도들에게도 일어났는데, 십자가 사건 이후 위로자이신 성령께서 오셔서 그리스도인들 안에 거하시게 되자, 유대인 중에서는 더 이상 박해받는 이가 없었고 오직 그리스도인들만이 순교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일에 놀라지 말아야 한다. 진리는 반드시 박해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15,11).

72. 사탄이 욥에 대해 요청한 대로 기록된 내용도 단순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탄은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귀는 주님께 무엇을 말했는가? “그를 내 손에 넘겨주소서. ‘주님을 찬양하지 않을 경우’”(욥기 1:11)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지금도 욥은 여전히 그 욥이며, 하나님은 여전히 그 하나님이시고, 마귀는 여전히 그 마귀이다. 욥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보고 은혜로 인해 열심과 열정을 품고 있을 바로 그 때, 사탄이 그를 자기에게 달라고 청하며 주님께 말한다. “주님께서 그를 도우시고 보호하시니, 그가 주님을 섬깁니다. 그를 내버려 두시고 내게 넘겨주소서. ‘그가 주님을 대면하여 주님을 찬양하지 않을지’?” 결국, 마치 영혼이 위로를 받는 바로 그 순간에 은혜가 그에게서 물러나고, 영혼은 유혹에 빠지게 된다. 그러자 마귀가 다가와 그에게 수천 가지 재앙과 절망, 절망감, 사악한 생각을 안겨주고, 영혼을 짓밟아 그를 나태하게 만들고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멀어지게 한다. 그러나 분별 있는 영혼은 재앙 속에서도, 슬픔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을 굳게 지키며, 천 가지 유혹 속에서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모든 것을 견디며 이렇게 말합니다. “비록 죽는다 해도 그분을 떠나지 않으리라”(26, 7. 8).

73. 그럼에도 모든 의인들은 좁고 험한 길을 걸으며 끝까지 하나님께 기쁨을 드렸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부유했으나, 세상 앞에서는 자신을 흙과 재라고 불렀으며(창 18, 27), 다윗은 자신에 대해 “사람들의 조롱과 비웃음, 벌레요 사람이 아니로다”(시 21, 7)라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 모든 사도들과 선지자들도 고난을 당하고 책망을 받았습니다. 길이시며 하나님이신 주님께서,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을 위해 오셔서, 당신에게 모든 선의 본보기가 되시려고, 보십시오, 얼마나 낮추신 모습으로 오셨는지, 하나님의 아들, 왕이시며 왕의 아들이신 하나님께서 종의 모습을 취하셨습니다. 그분은 치유의 약을 베풀어 상처 입은 자들을 고치시나, 겉모습으로는 마치 상처 입은 자 중 한 분처럼 보이십니다(26, 25).

74. 그러나 겉보기에는 비천해 보이고 마치 우리 중 한 사람과도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경시하지 마라. 그분은 당신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이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라, 못 박아라!”라고 외치며 군중이 몰려들던 그 순간, 그분이 그 누구보다도 더 비천하게 되셨음을 생각해 보라! 세상에서 어떤 악당에게 왕자가 사형을 선고하면 온 백성이 그를 혐오하고 멸시하듯이, 주님께서도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처럼 바리새인들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여겨지셨습니다. 또한 그분께 침을 뱉고, 가시관을 씌우며, 뺨을 때렸을 때, 이것이 모든 모욕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 아니었겠는가? 기록된 바와 같이 “내 뺨을 상처 입은 자들에게 내어주었으며, 침 뱉음의 모욕을 당할 때 내 얼굴을 돌리지 아니하였고, 내 뺨을 때리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어주었노라”(사 50:6)고 하셨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토록 많은 모욕과 고통, 그리고 굴욕을 감내하셨다면, 본성상 진흙과 같은 존재이며 필멸의 본성을 지닌 네가 아무리 자신을 낮추더라도, 네 주님께는 그와 비슷한 어떤 것도 해줄 수 없을 것이다. 너를 위해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낮추셨으나, 너는 심지어 너 자신을 위해서도 낮추지 않고, 오히려 교만해하며 자만하고 있다. 그분은 스스로 슬픔과 고난을 짊어지러 오셨고, 너에게는 그분의 평안을 주시려 했으나, 너는 이를 통해 네 상처가 치유될 수 있도록 수고를 감수하고 고통받기를 원치 않는다. 그분의 고난과 오래 참으심에 영원토록 영광을 돌리세 (26, 26).

75. 만일 하나님께서 땅에서 그러한 길을 걸으셨다면, 너도 그분을 본받아야 한다. 사도들과 선지자들도 그렇게 걸었다. 우리도 주님과 사도들을 기초로 세워지기를 원한다면, 그들을 본받아야 한다. 사도는 성령으로 말하기를 “나를 본받으라.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 같이” (고린도전서 4:16). 그러나 네가 인간의 영광을 사랑하고, 사람들이 네게 절하기를 원하며, 네 자신의 안식을 추구한다면, 너는 길에서 벗어난 것이다. 너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고난 받으신 분과 함께 고난을 겪어야 하며, 그 후에 영광 받으신 분과 함께 영광을 얻게 될 것이다(로마서 8:17). 신부는 신랑과 함께 고난을 겪어야 하며, 이를 통해 그리스도의 동역자이자 공동 상속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구도 고난 없이, 험하고 좁고 꽉 막힌 길을 거치지 않고는 성도들의 성에 들어가, 왕과 함께 끝없는 세월 동안 안식을 누리고 다스릴 수 없다(12, 5).

76. 사탄에게 어느 정도까지 허용되는가, 아니면 그가 원하는 만큼 우리를 공격할 수 있는가? 그의 공격은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우상 숭배자들과 온 세상을 향한다. 그러므로 만일 그가 원하는 만큼 공격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그는 모든 사람을 멸망시킬 것이다. 왜 그럴까요? 그것이 바로 그의 일이며, 그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도공이 그릇을 불에 넣을 때, 가마에 적당히 불을 지피듯이, 너무 많이 지피면 정해진 시간보다 더 오래 구워져 그릇에 금이 갈 수 있고, 너무 적게 지피면 제대로 구워지지 않아 헛되이 버려지지 않도록 하듯이, 또한 은과 금으로 물건을 만드는 자 도 적당히 불을 지피는데, 만약 불을 너무 세게 하면 금과 은이 녹아 액체가 되어 사라지고, 인간의 마음은 짐을 싣는 가축이나 낙타, 혹은 다른 어떤 동물이 정확히 어느 정도의 짐을 짊어질 수 있는지 그 무게를 적절히 가늠할 줄 알기에, 하물며 인간의 그릇이 가진 강도를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각기 다른 정도로 반대되는 힘이 작용하도록 허락하신다(26, 3).

i) 이 모든 것을 인내로 견디며 원수에게 어떤 점에서도 양보하지 않을 때, 영혼은 점점 더 정화되어 성령의 은총이 미치는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받아들일 여지를 마련하게 되며, 이는 마침내 마음의 깨달음과 특별한 기쁨이 넘치는 도덕적 상태, 환상과 인도함으로 드러난다. 영혼이 완전함에 다가가고 있음이 분명해진다.

77.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도 그에게 당신의 사랑을 베푸시며, 한 번 하나님을 믿은 자에게는 하늘의 믿음을 더해 주시므로, 그 사람은 더욱 온전해진다. 그러므로 네가 네 지체로부터 그분께 예물을 바치는 것처럼, 그분도 이와 같이 그분의 지체로부터 네 영혼에게 나누어 주셔서, 네가 모든 일을 행하고, 사랑하며, 순수하게 기도할 수 있게 하실 것이다(15, 20).

78. 마리아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의 발치에 앉아 하루 종일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발치에 앉아 있는 것이 사랑보다 더 뛰어난 일임을 보느냐?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더 밝게 빛나도록, 계속 들어보라. 누구든지 예수님을 사랑하고 마땅히 그분께 귀를 기울이며, 단순히 귀를 기울이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랑 안에 머무른다면,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그 영혼에게 무언가를 주기를 원하시나니, 비록 그 사람이 무엇을 받을지, 혹은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어느 정도까지 축복하실지는 알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의 발치에 앉아 있던 마리아에게도 단순히 상을 주신 것이 아니라, 그분은 자신의 본질로부터 어떤 은밀한 힘을 베풀어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마리아에게 평안히 말씀하신 그 말씀 자체가 영이요, 어떤 힘이었던 것이다. 이 말씀들은 그녀의 마음에 스며들어, 영혼 속의 영혼이 되고, 영 속의 영이 되었으며, 신성한 힘이 그녀의 마음을 가득 채웠습니다. 왜냐하면 그 힘이 깃든 곳에서는 필연적으로 그곳에 머무르게 되어, 떼어낼 수 없는 소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녀에게 무엇을 베풀어 주셨는지 아시고,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누가복음 10, 42).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마르타가 봉사하려는 열심으로 행한 일 또한 그녀를 그와 같은 은총으로 이끌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 역시 자신의 영혼에 신성한 힘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12, 16).

79. 주님께 나아와 그분께 육체적으로 붙어 있는 자들이 능력을 받는 것이 무엇이 놀랍겠는가? 때로는 사도들이 말씀을 선포하자 성령께서 믿는 자들에게 임하셨다(행 10:44). 코르넬리우스는 들은 말씀으로 인해 능력을 받았습니다. 하물며 주님께서 마리아에게, 또는 삭개오에게, 혹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주님의 발을 닦아 드리던 죄녀에게, 또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혹은 강도에게 말씀을 선포하셨을 때, 그때는 능력이 나타나고 성령께서 그들의 영혼과 하나 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주님을 사랑하며 모든 것을 버리고 끊임없이 기도에 머무는 이들은, 알지 못했던 것들을 은밀히 배우고 있다. 진리 그분께서 그들의 뜻에 따라 그들에게 드러나시며 가르치시기를, “내가 곧 진리니라”(요한복음 14:6)고 하신다. 사도들 자신도 십자가 사건 전까지 주님과 함께 지내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죽은 자들이 부활하는 위대한 기적들을 보았으나, 신성한 능력이 어떻게 마음속에 머무르고 작용하는지 알지 못했고, 자신들이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 하늘의 영혼과 하나가 되어 새로운 피조물이 될 것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행하시는 기적들 때문에 주님을 사랑했다. 마침내 주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기적들을 보고 왜 놀라느냐? 내가 너희에게 온 세상에도 없는 위대한 유산을 주리라”(12, 17).

80. 주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우리를 위해 육신을 하늘로 승천시키시기 전까지는, 주님의 말씀이 그들에게는 여전히 낯설게 느껴졌다. 그때 위로자이신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하시어 그들의 영혼과 하나가 되셨다. 진리 그분께서 신실한 자들의 영혼 안에 나타나시며, 하늘의 사람이 네게로 오시고, 그들 사이에 하나된 교제가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사역에 전념하며 믿음에 대한 열정과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모든 일을 부지런히 행하는 이들에게는, 시간이 지나면 이것이 진리 그 자체를 아는 것으로 이어지니, 주님께서 그들의 영혼에게 자신을 드러내시고 성령과 함께 거하는 법을 가르치시기 때문이다(12, 18).

81. “맛보고 보라, 주님께서 얼마나 선하신지”(시편 33:9)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맛보는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마음속에서 사역을 이루시는 성령의 능동적인 힘이다. 왜냐하면 빛의 자녀들이며 성령 안에서 새 언약의 사역을 하는 이들은, 하나님께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자들로서 사람들로부터는 아무것도 배우지 않기 때문이다. 은혜 그 자체가 그들의 마음에 성령의 법을 새겨 넣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잉크로 기록된 성경에서만 스스로의 확증을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석판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성령의 법과 하늘의 비밀을 기록해 놓으시니, 이는 마음이 온 육체의 관절 속에서 주권적이고 왕권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은혜가 마음의 깊은 곳을 차지할 때, 그때 은혜는 모든 지체와 생각 위에 군림하리니, 그곳에 마음과 모든 생각, 그리고 영혼의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은혜가 몸의 모든 지체에 스며드는 이유이다(15, 18).

82. 기록된 바(고린도전서 2:14)와 같이, 그는 모든 사람을 분별한다. 그는 각 사람이 어떤 근원에서 말씀을 얻는지, 어디에 머물러 있는지, 어떤 단계에 있는지 알고 있으나, 그 자신에 대해서는 세상의 영을 품은 사람 중 그 누구도 알거나 판단할 수 없다. 오직 자신 안에 이와 같은 하늘의 하나님의 영을 가진 자만이 그와 같은 이를 알 수 있는데, 사도가 말한 대로 “영적인 사람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한다”(9, 8)는 것이다.

83.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성령으로 위로부터 거듭나, 자신 안에 그들을 깨우치고 평안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모신 이들은, 다양하고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영적인 평안 속에서 은혜가 그들의 마음속에 보이지 않게 역사한다. 그러나 세상에서 볼 수 있는 즐거움들에서 비유를 빌려, 이러한 유사성을 통해 은혜가 그러한 영혼들 안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부분적으로 보여 주려 한다. 때로는 마치 왕의 연회에 참석한 듯 유쾌해지며,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기뻐합니다. 또 다른 때에는 신랑과의 교제 속에서 신성한 평안으로 위로받는 신부처럼 되기도 합니다. 때로는 육체를 벗은 천사들처럼, 아직 육신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자신 안에서 그와 같은 가벼움과 날개 달린 듯한 경쾌함을 느낍니다. 때로는 마치 술에 취한 듯, 성령에 의해 기쁨을 얻고 황홀해지며, 신성한 영적 신비에 흠뻑 취하기도 한다(18, 7).

84. 그러나 때로는 마치 울며 인류를 위해 탄식하듯, 온 아담을 위해 기도하며 인류에 대한 영적 사랑에 불타 눈물을 흘리고 통곡하기도 한다. 때로는 성령께서 그들에게 그토록 큰 기쁨과 사랑을 불어넣으시어, 가능하다면 선한 자와 악한 자를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을 자기 마음속에 품을 수 있을 정도가 되기도 한다. 때로는 겸손한 마음으로 모든 사람 앞에서 스스로를 그토록 낮추어, 자신을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하찮고 작은 자로 여긴다. 때로는 성령께서 그들을 끊임없이 형언할 수 없는 기쁨 속에 머물게 하신다. 때로는 왕의 전신 갑주를 두른 강력한 전사와 같아져, 원수들과 싸우러 나가 그들을 이기기 위해 힘차게 싸웁니다. 이는 영적인 자도 이와 같이 성령의 하늘 무기를 두르고, 원수들을 향해 나아가 그들과 싸워 그들을 자기 발 아래 굴복시키기 때문입니다(18, 8).

85. 때로는 영혼이 어떤 위대한 침묵과 고요함, 평화 속에서 안식을 얻으며, 오직 영적인 기쁨과 형언할 수 없는 평안과 행복 속에 머무르기도 한다. 때로는 은총으로 인해 어떤 것을 깨닫게 되기도 하는데, 이는 형언할 수 없는 지혜와 헤아릴 수 없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한 것으로, 혀와 입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때로는 사람이 평범한 사람 중 한 명처럼 되기도 한다. 은총은 사람들 안에서 이처럼 다양하게 작용하며, 여러 가지 방법으로 영혼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뜻에 따라 안식을 주고, 천상의 아버지께 완전하고 흠없으며 순수한 모습으로 바칠 수 있도록 다양한 방식으로 영혼을 단련시킨다 (18, 9).

86. 우리가 열거한 이 성령의 작용들은 완전함에 가까운 이들에게서 더 큰 차원을 이룬다. 왜냐하면 열거된 다양한 은총의 안식은 말로 각기 다르게 표현되며, 사람들 안에서 끊임없이 이루어져 한 작용이 다른 작용을 잇기 때문이다. 영의 완전함에 이르는 영혼이 모든 정욕에서 완전히 정화되고, 형언할 수 없는 교제 속에서 위로자이신 성령과 하나 되어 함께 거하게 되며, 성령과 함께 거함으로써 스스로 영이 될 자격을 얻게 될 때, 그 영혼은 온전히 빛이 되고, 온전히 눈이 되고, 온전히 영이 되고, 온전히 기쁨이 되고, 온전히 안식이 되고, 온전히 환희가 되고, 온전히 사랑이 되고, 온전히 자비가 되고, 온전히 선함과 친절함이 된다. 마치 바다의 심연에서 돌이 사방에서 물로 둘러싸여 있듯이, 이 사람들도 온갖 면에서 성령과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자신 안에 영적 힘의 미덕을 확고히 지니고, 내면적으로는 흠 없고, 흠잡을 데 없으며, 깨끗하게 머무르게 된다. 성령으로 새롭게 된 자들이 어떻게 겉으로 악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겠는가?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로, 언제나 모든 일에서 그들 안에는 성령의 열매가 빛나고 있다(18, 10).

87. 어떤 이는 무릎을 꿇으러 들어가면, 그의 마음은 신성한 능력으로 충만해지고, 영혼은 주님과 함께 기뻐하되, 마치 신랑과 신부처럼 기뻐합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과 같으니, 그가 말하기를 “신랑이 신부를 기뻐하듯, 주님께서 너를 기뻐하시리라” (사 62, 5)고 하였습니다. 때로는 하루 종일 무언가에 바쁘다가도 한 시간 동안 기도에 전념하면, 그의 내면의 사람은 큰 기쁨 속에서 기도의 상태, 그 시대의 끝없는 깊이로 빠져들어, 그곳을 맴돌며 황홀해하던 마음이 온전히 사라지곤 한다. 이 시간 동안 생각 속에서는 세속적인 고민이 잊혀지는데, 이는 생각이 신성하고, 천상적이며, 무한하고, 헤아릴 수 없으며, 인간의 입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경이로운 무엇으로 가득 차고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이때 사람은 기도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오, 내 영혼이 기도와 함께 떠나기만 한다면”(8, 1).

88. 사람이 언제나 이 상태에 들어가는가? 은총이 어린 시절부터 끊임없이 머물며, 뿌리내리고, 사람 안에서 누룩처럼 작용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사람 안에 머무는 이 은총은 마치 자연스럽고 분리할 수 없는 것, 마치 그와 하나인 본질처럼 되지만, 그 은총이 원하시는 대로, 사람의 유익을 위해 그 안에서 자신의 작용을 다양하게 변화시킵니다. 때로는 이 불이 더 세차게 타오르고 불꽃을 피우기도 하고, 때로는 마치 더 약하고 조용해지기도 하며, 또 다른 때에는 이 빛이 더 밝게 타오르고 빛나기도 하고, 때로는 줄어들어 희미해지기도 하며, 이 등불은 항상 타오르고 빛나지만, 때로는 하나님의 사랑에 취해 더 밝게 타오르기도 하고, 또 다른 때에는 그 빛을 아껴 내뿜어, 인간에게 내재된 빛이 더 약해지기도 한다(8, 2).

89. 게다가 어떤 이들에게는 빛 속에서 십자가의 표징이 나타나 내면의 사람 속에 박혀들기도 했다. 때로는 사람이 기도 중에 마치 황홀경에 빠진 듯하여, 마치 교회에서 제단 앞에 서 있는 것처럼 보였고, 그에게 기름을 섞어 발효시킨 듯한 세 개의 빵이 바쳐졌는데, 그가 그 빵을 맛보는 만큼 빵은 부풀어 올랐다. 때로는 마치 빛을 발하는 어떤 옷이 나타나기도 했는데, 이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고 사람의 손으로 만들 수 없는 것이었다. 주님께서 요한과 베드로와 함께 산에 오르셔서 당신의 옷을 변모시키시고 번개처럼 빛나게 하신 것처럼, 그 옷도 그러했으며, 그런 옷을 입은 사람은 놀라워하고 경탄하곤 했다. 또 다른 때에는 이 빛이 마음속에 나타나 가장 내면적이고, 가장 깊으며, 가장 은밀한 빛을 열어주었기에, 그러한 달콤함과 관상에 온전히 사로잡힌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을 통제할 수 없게 되었고, 넘치는 사랑과 달콤함, 그리고 은밀한 신비들 때문에 이 세상에 있어 마치 미치광이이자 야만인처럼 여겨졌다. 그리하여 그 사람은 이때 자유를 얻어 완전한 경지에 이르러, 순수하고 죄에서 해방된다. 그러나 그 후 은혜는 줄어들고 대적하는 힘의 장막이 내려오며, 은혜는 마치 부분적으로만, 그리고 어느 정도 낮은 수준의 완전함 속에서만 드러나곤 했다 (8, 3).

90. 사람은 말하자면 열두 단계를 거쳐야만 비로소 완전함에 이르게 된다. 때로는 실제로 그 경지에 도달하여 완전함에 이른다. 그러고 나면 은총이 다시 약해지기 시작하고, 사람은 한 단계 내려가 이미 열한 번째 단계에 서게 된다. 반면, 은총이 풍성한 사람은 밤낮으로 항상 가장 높은 경지에 머물며, 자유롭고 깨끗하며, 언제나 황홀하고 고양된 상태에 있다. 이제 그 기적들을 목격하고 직접 체험한 사람은, 만일 그에게 항상 그런 상태가 지속된다면, 더 이상 말씀의 가정을 세우는 일이나 그 밖의 어떤 짐도 짊어질 수 없게 될 것이며, 평소처럼 자신과 내일을 돌보거나 신경 쓰기를 거부하고, 단지 한 구석에 앉아 경탄과 황홀함에 젖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울타리의 중앙 기둥이 이미 무너지고 죽음이 정복되지 않는 한(8, 4), 그가 형제들을 돌보고 말씀에 봉사할 수 있도록 완전한 분량이 그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이다.

91. 실제로는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 마치 응축된 공기처럼, 어떤 어두운 힘이 사람 위에 얹혀 그를 살짝 가리고 있다. 등불은 끊임없이 타오르며 빛을 비추지만, 마치 덮개가 빛 위에 씌워진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사람은 자신이 아직 불완전하고 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음을 인정하게 된다. 그러므로 울타리의 중간 벽은 이미 무너지고 부서졌다고 말할 수 있지만, 또 다른 어떤 면에서는 완전히, 혹은 영원히 무너진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은혜가 사람을 더욱 뜨겁게 불태우고, 위로하며, 평안을 주는 때가 있는 반면, 은혜가 줄어들고 희미해지는 때도 있기 때문인데, 이는 은혜 자체가 사람을 위해 스스로 그렇게 이끌어 가기 때문이다. 과연 누가 적어도 잠시라도 완전한 경지에 이르러, 그 시대를 맛보고 체험해 보았겠는가? 지금까지 나는 완전하거나 자유로운 기독교인을 단 한 명도 알지 못한다. 반대로, 누군가 은혜 안에서 안식을 얻고, 신비와 계시에 이르며, 위대한 은혜의 달콤함을 느끼게 되더라도, 죄는 여전히 그 사람 안에 남아 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 안에 넘치는 은혜와 빛 때문에 스스로를 자유롭고 완전한 사람으로 여기지만, 이는 오해이며, 경험 부족으로 인해 그들 안에서 작용하는 바로 그 은혜에 의해 속아 넘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명의 자유로운 사람도 본 적이 없으며, 과거에 나 자신도 어느 정도 그 경지에 이르렀던 적이 있었기에, 왜 완전한 사람이 없는지 그 이유를 직접 체험하고 알게 되었다(8, 5).

92. 우리에게 말해 보라, 네가 어느 단계에 있느냐? – 이제, 십자가의 표식을 한 후, 은혜가 모든 지체와 마음을 다스리고 평온하게 하여, 영혼이 큰 기쁨으로 인해 악의 없는 갓난아기와 같아지며, 사람은 더 이상 헬라인도, 유대인도, 죄인도, 평신도도 정죄하지 않고, 오히려 내면의 사람이 맑은 눈으로 모든 이를 바라보며 온 세상을 기뻐하고, 온전히 헬라인과 유대인을 존중하고 사랑하기를 간절히 원한다. 또 다른 때에는, 이 왕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마치 아버지처럼 굳게 의지한다. 그 앞에 문들이 열리고, 그는 수많은 수도원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들어갈 때마다 그에 상응하는 수의 문들이 다시 그 앞에 열리니, 예를 들어 백 개의 수도원에서 또 다른 백 개의 수도원으로 이어지며, 그는 풍요로워지고, 풍요로워지는 만큼 새로운 기적들이 그에게 드러난다. 그에게는 아들이자 상속자로서, 인간의 본성으로는 표현할 수 없고 입과 혀로 말할 수 없는 것이 맡겨진다(8, 6).

 

7. 그리스도인의 지극한 완전함

1. 예언자 에스겔은 자신이 목격한 그 신성하고 영광스러운 현상과 환상을 전하며, 그것을 말로 다 할 수 없는 신비로 가득 찬 현상으로 묘사했다. 그는 들판에서 케루빔의 병거와 네 영적 생물을 보았다. 각 생물에게는 네 개의 얼굴이 있었는데, 하나는 사자의 얼굴, 다른 하나는 독수리의 얼굴, 또 하나는 송아지의 얼굴, 그리고 하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리고 각 얼굴에는 날개가 있어, 어느 것에서도 앞면과 뒷면을 구분할 수 없었다. “그들의 뺨은 눈으로 가득 차 있었고, 가슴 또한 눈으로 가득 차 있어, 눈으로 채워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각 얼굴 옆에는 바퀴가 세 개씩 있었는데, 마치 바퀴 안에 바퀴가 들어 있는 듯했고, 그 바퀴들 안에는 영이 있었다. 선지자는 마치 사람의 형상을 보았는데, 그 발은 마치 사파이어 같았다. 이 병거(즉, 그룹과 짐승들)는 그 위에 앉아 계신 주님을 태우고 있었다. 그분이 어디로 가시기를 원하시든, 생물들은 사방으로 얼굴을 돌리고 있었다. 그리고 선지자는 그룹들의 날개 아래에서 마치 그들을 지탱하고 운반하는 “사람의 손”과 같은 것을 보았다(에스겔 1:5–28 및 10장). (1, 1).

2. 선지자가 환상 속에서 본 것은 진실하고 의심할 여지가 없었지만, 그것은 다른 것을 가리키고 있었으며, 신비롭고 신성한 무언가를 예표했고, 대대로 진정으로 감추어져 있다가 마지막 때, 곧 그리스도의 재림에 드러난 비밀을 나타내고 있었다. 선지자는 자신의 주님을 영접하고 그분의 영광의 보좌가 될 영혼의 신비를 관조하였다. 왜냐하면, 자신을 위한 보좌와 거처로 준비하신 성령께서 그 영혼으로 하여금 그분의 빛에 참여하게 하시고, 그분의 형언할 수 없는 영광의 아름다움으로 비추어 주셨으므로, 그 영혼은 온전히 빛이 되고, 온전히 형상이 되며, 온전히 눈이 되는데, 영적인 눈의 빛으로 채워지지 않은 부분이 단 하나도 없으니, 즉, 그 안에는 어두워진 것이 전혀 없으며, 온전히 빛과 영으로 이루어져 있고, 온통 눈으로 가득 차 있어 어떤 마지막이나 뒷면도 없으며, 사방에서 모두 형상으로 드러나는데, 이는 그리스도 빛의 영광의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그에게 내려와 그 위에 앉아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태양이 어디에서나 그 자체와 같듯이, 태양에게는 마지막이거나 불완전한 부분이 하나도 없으며, 동일한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어 온전히 빛으로 찬란하게 빛나고, 온통 빛 그 자체이거나, 마치 불처럼, 즉 불의 빛 그 자체인 것처럼, 전체가 그 자체와 같으며 그 안에 첫 번째나 마지막, 크거나 작은 부분이 없듯이, 그리스도의 얼굴로부터 빛의 영광의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온전히 비추심을 받고, 성령과 온전히 교제하며 하나님의 거처와 보좌가 될 자격을 얻은 영혼은 온전히 눈으로, 온전히 빛으로, 온전히 얼굴이 되고, 온전히 영광이 되며, 온전히 영이 되는데, 이는 그리스도께서 영적인 아름다움으로 그녀를 준비하시고, 정돈하시고, 장식하셨기 때문이며, 그분께서 그녀를 품에 안으시고, 인도하시며, 지탱하시고, 들어 올리시기 때문이다. “사람의 손”이 그룹들 아래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에스겔 1:8). 그리스도께서 친히 영혼을 지탱하시기도 하고 인도하시기도 하신다(1, 2).

3. 병거를 싣고 있는 네 생물은 영혼의 주권적인 정신적 힘을 상징한다. 독수리가 새들 위에, 사자가 야수들 위에, 소가 온순한 동물들 위에, 사람이 모든 피조물 위에 군림하듯이, 영혼 안에도 더 위엄 있는 정신적 힘, 즉 의지, 양심, 이성, 그리고 사랑의 힘이 있다. 이 힘들에 의해 영혼의 병거가 움직이며, 그 안에 하나님이 거하신다. 또 다른 해석에 따르면, 이는 당연히 하늘에 있는 성도들의 교회를 가리킨다. 그리고 그곳에서 선지자가 동물들에 대해 말하듯이, 그들의 키가 지나치게 컸고, 온통 눈으로 가득 차 있어 그 눈의 수나 키를 아무도 헤아릴 수 없었으니, 이는 그에 대한 지식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며, 마치 하늘의 별들을 모든 사람이 보고 경탄할 수는 있으나 그 수를 아는 것은 누구에게도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로, 마찬가지로 하늘의 성도들의 교회에 들어가 그곳에서 기쁨을 누리는 것은 수고하기를 원하는 모든 이에게 허락되었으나, 성도들의 수를 알고 헤아리는 일은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께만 속한 일입니다. 언급된 생물들의 수레와 보좌 위에 앉아 계시거나, 그분의 보좌와 거처가 되고 눈과 빛이 된 각 영혼 안에서, 그분은 그 위에 앉아 영의 고삐를 잡고, 그분께서 아시는 대로 그 영혼을 인도하시며 행진하고 다니신다. 영적인 짐승들이 스스로 가고 싶은 곳이 아니라, 그들 위에 앉아 그들을 인도하시는 분이 아시고 원하시는 곳으로 행진했던 것처럼, 여기에서도 그분께서 친히 다스리시고 이끄시며, 당신의 성령으로 길을 가리키신다. 이처럼 영혼들은 자신의 뜻대로, 원할 때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육신을 벗어던진 영혼이 생각으로 하늘을 향하도록 이끄시며, 다시 그분께서 원하실 때 육신과 생각 속에서 행하게 하시고, 또한 그분의 뜻에 따라 땅의 경계로 넘어가게 하시며, 그분께서 그에게 신비의 계시를 보여 주십니다. 참으로 탁월하시고, 선하시며, 유일하시고, 참되신 통치자이시여! 그러니 만일 영혼이 지금 미리 영광을 받고 성령과 하나 되었다면, 육체도 부활 때 그 몫을 얻게 될 것입니다(1, 3).

4. 의로운 자들의 영혼이 하늘의 빛이 된다는 사실에 대해, 주님께서 친히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복음 5, 14). 주님께서는 그들을 빛으로 만드신 후, 그들을 통해 세상이 밝아지도록 명하셨으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누구도 등불을 켜서 그릇 밑에 두지 않고 등잔대 위에 두어, 성전에 있는 모든 이 에게 비추게 한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에서 비치게 하라”(마태복음 5, 15. 16). 이는 곧, 너희가 나에게서 받은 은사를 숨기지 말고, 원하는 모든 이에게 전하라는 뜻이다. 또한: “눈은 몸의 등불이니, 만일 네 눈이 맑으면 온 몸이 밝아지겠고, 만일 네 눈이 악하면 온 몸이 어두워지리라. 만일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라면, 그 어둠이 얼마나 클까?(마태복음 6:22, 23). 눈이 몸의 등불인 것처럼, 눈이 건강할 때는 온 몸이 밝아지고, 눈에 무엇이 들어와 어두워지면 온 몸이 어둠에 빠지듯이, 사도들은 온 세상을 위한 눈이자 빛으로 세워졌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명령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세상의 빛으로서 굳건히 서서 타락하지 않는다면, 세상의 온 몸이 빛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의 빛으로서 어두워진다면, 그 어둠, 곧 세상은 얼마나 어두워지겠느냐?” 그러므로 사도들은 빛이 되어 믿는 이들에게 빛이 되어 주었으며, 그들 스스로가 비추심을 받았던 그 하늘의 성령의 빛으로 그들의 마음을 비추어 주었다(1, 4).

5. 옛 사람, 곧 세속적인 사람을 벗어 던지고, 예수님께서 어둠의 왕국의 옷을 벗겨 주신 이들은, 새 사람, 곧 하늘에 속한 사람인 예수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형언할 수 없는 빛의 왕국의 옷, 곧 믿음과 소망과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자비와 선함의 옷을 입히셨을 뿐만 아니라, 빛과 생명과 말로 다 할 수 없는 안식의 모든 다른 신성한, 생명을 주는 옷들도 입히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사랑이시며 기쁨이시며 평화, 선하심, 자비이신 것처럼, 새로운 사람도 은혜로 말미암아 이와 같이 되게 하셨다(2, 4, 5).

6. 완전함에 이르러 왕께 가까이 나아갈 자격을 얻은 완전한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자신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바치는 제물로 삼는다. 선지자들의 시대에 기름 부음이 가장 존귀했던 것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들이 왕과 선지자들이었기 때문이었듯이, 오늘날에도 하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영적인 사람들은 은혜로 그리스도인이 되어, 하늘의 비밀을 다스리는 왕과 선지자가 되게 된다. 그들은 곧 아들들이자 주인이자 신들이며, 묶이고, 포로로 끌려가고, 쫓겨나고, 십자가에 못 박히고, 바쳐지는 자들이다. 만약 땅의 식물, 즉 눈에 보이는 나무에서 얻은 기름으로 기름 부음을 받는 것이, 기름 부음을 받은 자들이 아무런 이의 없이 지위를 얻게 할 만큼의 힘을 가졌다면(모두가 그들이 왕으로 세워졌음을 인정했고, 기름 부음을 받은 다윗은 즉시 박해와 고난을 겪었으나 7년 만에 왕이 되었으니), 하물며 마음과 내면의 사람이 빛을 비추고 기쁨을 창조하는 천상적이고 영적인 기쁨의 기름으로 기름부음을 받는 자들은, 썩지 않는 왕국과 영원한 능력의 인장을, 성령의 보증인, – 곧 성령이시자 위로자(위로자께서 위로하시며, 슬픔 속에 있는 자들에게 기쁨을 채워 주신다는 것을 알아두라)의 인장을 받게 된다. (17, 1).

7. 이 하늘의 식목인 생명나무—예수 그리스도—의 기름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이들은 완전함의 경지, 즉 왕국과 양자됨에 들어갈 자격을 얻게 되는데, 이는 그들이 아직 이 세상에 있으면서도 이미 하늘의 왕의 신비를 함께 나누며, 전능자 앞에서 담대함을 가지고, 천사들과 성도들의 영들이 있는 그분의 궁전에 들어갑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저 세상에서 예비된 완전한 유업을 아직 받지 못했음에도, 지금 받은 그 보증으로 말미암아 이미 면류관을 쓰고 다스리는 자들처럼 안전함을 얻었으며, 성령의 풍성함과 담대함 속에서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게 될 것을 전혀 놀랍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요? 아직 육신에 있으면서도 이미 자신들 안에 그 달콤함을 느끼고 그 능력의 작용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17, 2).

8. 세상이 끝날 때, 이 하늘이 사라지면 의인들은 이미 왕국과 빛과 영광 속에서 살게 될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항상 아버지의 우편에서 영광 중에 계시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할 것이듯이, 지금 이미 들림 받아 그 세상으로 포로로 끌려간 이들도 그곳의 모든 아름다움과 기적들을 관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 땅에 있으면서도, 영적인 마음과 내면의 사람으로 볼 때 그 세상의 주민이자 시민으로서 하늘에 거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맑은 눈이 태양을 항상 맑게 보는 것처럼, 온전히 정화된 마음도 그리스도의 빛의 영광을 항상 보며 주님과 함께 밤낮으로 머무르는데, 이는 주님의 몸이 신성과 연합하여 항상 성령과 함께 계시는 것과 같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경지에 단번에 도달하지 못하며, 설령 도달한다 해도 수고와 슬픔, 위대한 업적을 통해야만 한다(17, 4).

9. 주님께서 모든 통치와 권세를 내려놓고 육신을 입으신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성령을 입고 안식에 머무릅니다. 비록 외부에서 싸움이 일어나고 사탄이 유혹을 가하더라도, 그들은 내면적으로 주님의 능력으로 보호받고 있으므로 사탄의 공격에 동요하지 않습니다. 사탄이 광야에서 40일 동안 주님을 유혹했을 때, 겉으로 주님의 육신을 공격했다고 해서 주님께 조금이라도 해를 끼쳤는가? 그 육신 안에는 하나님이 계셨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도 겉으로는 유혹을 받더라도, 내면은 신성의 능력으로 충만하여 어떠한 해악도 입지 않는다. 그러나 누군가 이러한 경지에 이르렀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사랑과 신성의 충만함에 도달한 것이다. 그렇지 않은 자는 내면에서도 여전히 싸움을 벌이고 있다. 어떤 때는 기도 속에서 평안을 누리지만, 또 다른 때는 슬픔과 투쟁 속에 있다. 이는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바, 사람이 아직 갓난아이와 같으므로 주님께서 그로 하여금 투쟁 속에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면에는 마치 두 가지 모습, 즉 빛과 어둠, 평안과 슬픔이 나타나는데, 어떤 때는 평안 가운데 기도하지만, 또 다른 때는 혼란에 빠지기도 한다(26, 15).

10. 바울이 하는 말을 듣지 못하겠는가? 만약 내가 모든 은사를 가졌더라도,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어도, 천사의 언어로 말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고린도전서 13:1–3). 이 은사들은 오직 완전함에 이르는 길일 뿐이며, 이를 이룬 자들은 비록 빛 가운데 있더라도 여전히 젖먹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많은 형제들이 이 단계에 이르러 치유의 은사와 계시, 예언의 은사를 가졌으나, “완전함의 띠”(골로새서 3:14)인 완전한 사랑에 아직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 안에 분쟁이 일어나고, 마음이 흔들려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사랑에 이르는 자는 이미 은혜의 포로가 되고 사로잡힌 자가 된다. 그리고 완전한 사랑의 경지에 점차 가까워지지만, 아직 사랑의 포로가 될 지경에 이르지 못한 자는 여전히 두려움 아래에 있으며, 그에게는 내적 갈등과 타락이 도사리고 있다. 만일 스스로를 지키지 않는다면, 사탄이 그를 무너뜨릴 것이다(26, 16).

11. 모든 사람은 이 눈들 안에 또 다른 눈이 있고, 이 귀들 안에 또 다른 귀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눈들이 감각적으로 보고 친구나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는 것처럼, 신성한 빛으로 비추어진 고귀하고 충실한 영혼의 눈은, 영혼이 경배받으실 만한 성령으로 비추어지는 즉시, 영적으로 참된 친구이자 가장 달콤하고 간절히 갈망하는 주님의 신랑을 보고 알아본다. 이처럼 영혼은 마음속으로 갈망하는 유일하고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관상하며, 신성한 사랑에 찔리고, 모든 영적 미덕을 향해 마음을 가다듬으며, 그 결과 자신에게 갈망되는 주님께 대한 무한하고 고갈되지 않는 사랑을 얻게 된다(28, 5).

12.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의 그늘 아래서,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에 모든 사람이 쉬고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명하셨다. 이는 주님께서 영혼에게 베푸시는 참된 안식일의 모형이자 그늘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수치스럽고 부정한 생각에서 벗어날 자격을 얻은 영혼은 참된 안식일을 지키며, 모든 어두운 일로부터 자유롭고 한가로운 상태로 머물며 참된 안식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 예표적인 안식일에는 육체적으로는 쉬었으나, 영혼은 간사와 악덕에 얽매여 있었으나, 이 참된 안식일은 사탄의 생각에서 정화되어 한가하게 지내며, 주님의 영원한 안식과 기쁨 안에서 쉬는 영혼의 참된 평안이기 때문이다(35, 1).

13. 주님께서는 사람을 안식으로 부르시며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 28)고 하셨다. 그리고 그분께 순종하여 나아오는 영혼들을, 그분은 이 무겁고, 짐이 되고, 부정한 생각들로부터 쉬게 하시며, 그들은 모든 불의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참되고 기쁘며 거룩한 안식일을 지키며,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는 영적인 축제를 누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쁘시게 여겨지는 순수한 봉사를 행합니다. 이것이 바로 참되고 빛나는 안식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께 간구하여, 우리도 이 안식에 들어가고, 부끄럽고, 교활하며, 헛된 생각들로부터 벗어나, 그리하여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성령의 축제를 지킬 수 있게 해 주시기를 구합시다. 그리고 이 안식에 들어가는 자는 복이 있도다 (35, 1. 3).

14. 영혼이 주님께 붙어 있을 때, 주님께서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시어 오셔서 그 영혼에게 붙어 계시고, 그 영혼의 이성이 이미 끊임없이 주님의 은총 안에 머물러 있을 때, 그때 영혼과 주님은 하나의 영, 하나의 융합, 하나의 마음이 됩니다. 영혼의 육체는 땅에 쓰러진 채로 남아 있지만, 그 마음은 온전히 하늘의 예루살렘에 거하며, 제3의 하늘로 올라가 주님께 밀착하여 그곳에서 그분을 섬긴다(46, 3).

15. 하늘 성읍의 높은 곳에 있는 위엄의 보좌에 앉아 계신 그분께서는 온전히 그 영혼과 함께 그녀의 육신 안에 머무르시니, 이는 그분이 그녀의 형상을 하늘 성읍인 성도들의 예루살렘에 두셨고, 자신의 신성의 형언할 수 없는 빛의 형상을 그녀의 육신에 두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육신의 성에서 그녀를 섬기시고, 그녀는 하늘의 성에서 그분을 섬깁니다. 영혼은 하늘에서 그분의 상속자가 되었고, 그분은 땅에서 그녀를 상속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영혼의 상속자가 되시고, 영혼이 주님의 상속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생각과 마음은 심지어 어둠에 휩싸인 죄인들의 경우라도 육체로부터 매우 멀리 떨어져 있을 수 있으며, 순식간에 광활한 공간을 가로질러 먼 나라로 넘어갈 힘을 지니고 있다. 종종 육체는 땅에 쓰러져 있지만, 생각은 저편에서 사랑하는 이와 함께 머물며, 마치 그곳에서 살고 있는 것처럼 스스로를 바라보기도 한다. 만약 죄인의 영혼이 그토록 미묘하고 날개가 빠르며, 그 지성이 먼 곳에 머무는 데 아무런 장애가 없다면, 하물며 성령의 능력으로 어둠의 장막이 벗겨지고, 그 지혜로운 눈이 하늘의 빛으로 비추어졌으며, 불경건한 정욕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은혜로 말미암아 순결해졌을 때, 온전히 하늘에서 영으로 주님을 섬기며, 온전히 육신으로도 그분을 섬기며, 생각이 그토록 넓어져서 어디에나 존재하게 되고, 원하는 곳과 원하는 때에 그리스도를 섬기게 된다(46, 4).

16. 사도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성도와 함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깨달아,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넓고 길고 높고 깊은지를 깨닫고, 하나님의 모든 충만함으로 충만해지기를 바랍니다”(에베소서 3, 18. 19). 주님께서 그 위에 덮인 어둠을 걷어내시고 마음을 열어 주시며, 친히 그 마음에 나타나시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영혼의 신비를 깊이 생각해 보라. 주님께서 어떻게 그 마음의 생각을 넓히고 확장하여,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피조물의 넓이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로 이끄시는지(46, 5).

 

8. 내세

1. 인간의 영혼이 육신을 떠날 때, 그때 이 과정에서 어떤 위대한 신비가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만일 그 영혼이 죄를 지었다면, 수많은 악마들과 악한 천사들이 몰려와 어둠의 세력들이 그 영혼을 사로잡아 자신들의 영역으로 데려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구도 이를 이상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영혼이 이 생에서,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그들에게 복종하고 순종하며 그들의 노예였다면, 세상을 떠날 때 더욱더 그들에게 붙잡혀 그들의 권세 아래 머물게 되기 때문이다. 반면 선한 부분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거룩한 종들 곁에는 지금도 천사들이 머물러 있으며, 거룩한 영들이 그들을 둘러싸고 지키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육신을 떠날 때, 천사들의 형상들이 그들의 영혼을 자신들의 영역인 순수한 세상으로 받아들이고, 그와 같은 방식으로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한다(22).

2. 참된 죽음은 내면, 즉 마음속에 있으며, 그것은 은밀하여 내면의 사람이 그로 인해 죽는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죽음에서 은밀한 생명으로 넘어간 자는 진실로 영원히 살며 죽지 않는다. 비록 그러한 이들의 육신이 일시적으로 썩어 없어지더라도, 거룩하게 되었기 때문에 다시 영광 중에 부활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의 죽음을 잠과 안식이라 부른다(15, 37).

3. 마치 먼 곳에서 돌아오는 상인이 자신의 장사를 여러 배로 늘리고, 가족들에게 집과 정원, 필요한 옷을 마련해 두라고 보낸 뒤, 고향에 도착하여 큰 부를 가져오면 가족과 친척들이 큰 기쁨으로 그를 맞이하는 것처럼, 영적인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어떤 이들이 하늘의 부를 얻게 되면, 이를 알게 된 동료들, 즉 거룩한 천사들의 영들이 놀라워하며 말하되, “땅에 있는 우리 형제들이 큰 부를 얻었도다”라고 한다. 이러한 이들은 세상을 떠날 때 주님을 모시고 큰 기쁨으로 하늘로 올라가며, 주님과 함께 계신 이들이 그들을 맞이하여 그곳에 거처와 정원, 온통 빛나는 귀중한 옷을 마련해 두었다(16, 8).

4. 만일 사람이 아직 영적 투쟁 중에, 곧 그의 영혼 안에서 죄와 은혜가 동시에 작용하고 있을 때 이 세상에서 세상을 떠난다면, 이 양쪽 모두에 사로잡힌 자는 어디로 가게 되는가? 그는 마음이 지향하는 목표와 가장 좋아하는 곳이 있는 곳으로 가게 된다. 너에게 슬픔이나 영적 싸움이 닥친다면, 그저 저항하고 미워하기만 하면 된다. 왜냐하면 영적 싸움이 일어나는 것은 네 몫이 아니지만, 미워하는 것은 네 몫이기 때문이다. 그때 주님께서는 네가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며 수고하는 모습을 보시고, 단 한 순간에 네 영혼에서 죽음을 물리치시며(주님께는 어려운 일이 아니니), 너를 그분의 품과 빛 속으로 받아들이시어, 단 한 순간에 어둠의 턱에서 너를 건져내시고 즉시 그분의 왕국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이루시는 것이 쉬우시니, 오직 네가 그분을 사랑하기만 하면 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그의 행실을 요구하시는데, 이는 영혼이 신성과 교제할 자격을 얻었기 때문이다(26, 18).

5. 태중에 아이를 품은 아내는 말하자면 어둠 속, 더러운 곳에서 자신의 아기를 품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아기가 제때에 태에서 나오게 되면, 그녀는 하늘과 땅과 태양 아래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새로운 피조물을 보게 되며, 곧바로 친구들과 친척들이 기쁜 얼굴로 아기를 품에 안는다. 그러나 어떤 문제로 인해 아기가 자궁 안에서 죽게 된다면, 의사는 날카로운 도구를 사용해야만 하며, 그때 아기는 죽음에서 죽음으로, 어둠에서 어둠으로 넘어간다. 이 원리를 영적인 영역에도 적용해 보라. 신성의 씨앗을 받아들인 자들은 그 씨앗을 자신 안에 보이지 않게 간직하고 있으나, 그들 안에 살아 있는 죄로 인해 어둡고 무서운 곳에 숨겨 두게 된다. 그러므로 만약 스스로를 지키고 그 씨앗을 보존한다면, 정해진 때에 그것을 분명히 낳게 될 것이며, 마침내 그들의 허락에 따라 천사들과 모든 하늘의 존재들이 기쁜 얼굴로 그들을 맞이할 것이다. 그러나 용감하게 싸우기 위해 그리스도의 무기를 짊어진 자가 방심한다면, 곧 적들에게 넘겨지게 되며, 육신과 함께 떠날 때 현재 그를 가두고 있는 어둠에서 벗어나 더 끔찍한 어둠과 파멸로 향하게 될 것이다(43, 5).

6. 좁은 통로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막아 세금을 징수하는 세리들이 그들을 괴롭히듯이, 악마들도 영혼들을 감시하고 붙잡아 둔다. 만일 영혼들이 완전히 정화되지 않았다면, 육신을 떠날 때 천상의 거처에 들어가 주님 앞에 나아갈 허락을 받지 못하고, 공중의 악마들에게 이끌려 아래로 쫓겨나게 된다. 그러나 육신에 머무는 자들은 수고와 큰 노력을 통해 여전히 주님으로부터 위에서 오는 은혜를 얻을 수 있으며, 그들은 덕스러운 삶을 살다 안식을 얻은 자들과 함께 주님께로 갈 것이니, 이는 주님께서 친히 약속하신 바와 같다: “내가 있는 곳에 내 종도 거기 있을 것이라”(요한복음 12:26) – 그리고 끝없는 세월 동안 아버지, 아들과 성령과 함께 다스릴 것이니, 지금과 항상, 그리고 영원토록! (43, 9).

7. 모든 사람은 모든 미덕을 함양하여 그 성전을 얻기 위해 힘쓰고 노력해야 하며, 그것이 이 세상에서 얻어지는 것임을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의 육신의 성전이 무너진다면, 우리 영혼이 거할 다른 성전은 없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이 육신을 벗어버린다면,” 말씀하신 대로, “우리는 다시는 발견되지 않을 것” (고린도후서 5:3), 즉 신실한 영혼만이 안식을 얻을 수 있는 성령과의 교제와 일치를 잃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온전한 실체와 힘으로 그리스도인인 이들은, 이 육신을 떠날 때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닌 성전”을 갖게 될 것을 굳게 희망하며 기뻐합니다. 이 성전은 바로 그들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능력입니다. 그리고 육신의 성전이 무너져도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으니, 이는 그들이 하늘의 영적 성전과 부활의 날에 육신의 성전마저 세우고 영화롭게 할 썩지 않는 영광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가 말한 대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일으키신 분이, 우리 안에 계신 그분의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죽은 육체도 살리실 것”이며,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죽을 몸에 나타나게 하리라”(고린도후서 4:11), 그리고 말씀하신 대로, 죽을 몸이 삼켜지리라”(고린도후서 5:4). (15, 16).

8.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과 덕스러운 삶을 통해 이 땅에서 그런 옷을 미리 입어, 육신을 입은 채로 벌거벗은 상태가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며, 그래야 그날에 아무것도 우리 육신을 영광스럽게 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각자가 믿음과 성실함으로 성령의 참예자가 될 자격을 얻은 만큼, 그날에 그의 육신도 그만큼 영광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영혼이 자신의 내적 보물창고에 모아 둔 것이, 그때 육체 밖에서 드러나고 나타날 것이니, 마치 나무들이 겨울이 지나고 태양과 바람의 보이지 않는 힘이 그들을 따뜻하게 할 때, 옷처럼 잎사귀와 꽃과 열매를 내어놓듯이, 또한 이 시기에 땅속 깊은 곳에서 들꽃들이 피어나 땅과 풀을 덮고 입히는데, 이는 주님께서 “솔로몬도 온 그의 영광을 다하여도 이 꽃들 중 하나만큼도 입지 못하리라”(마태복음 6,29)고 말씀하신 크리나와 같다. 이는 이 모든 것이 부활의 날에 그리스도인의 본보기와 모범, 그리고 형상이 되기 때문이다(5, 17).

9. 이처럼 모든 하나님을 사랑하는 영혼들, 즉 참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샨틱(Ksantik)이라는 첫 번째 달이 있는데, 이는 4월이라고도 불리며, 바로 부활의 날이다. 그 날, 진리의 태양의 힘으로 성신(聖神)의 영광이 내면에서 드러나, 성인들의 몸을 덮고 감싸게 될 것이니, 바로 그들이 영혼 속에 감추어 두었던 그 영광이다. 왜냐하면 지금 영혼이 자신 안에 품고 있는 것이 그때 육신 안에서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달은 여름의 첫 번째 달이며(출 12:2), 온 피조물에게 기쁨을 가져다주고, 땅을 열어 벌거벗은 나무들을 옷으로 입히며, 모든 동물에게 기쁨을 주고, 모든 이에게 즐거움을 퍼뜨립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이 달은 샹틱, 즉 부활의 때로, 그때 그들의 몸은 아직 그들 안에 감추어져 있는 형언할 수 없는 빛, 즉 그때 그들의 옷과 양식, 음료, 기쁨, 즐거움, 평화, 의복, 영생이 될 성령의 능력으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늘의 모든 광채와 아름다움은 그때 그들에게 신성의 영이 되실 것이기 때문이며, 그들은 지금도 이미 그분을 자신 안에 받아들일 자격을 얻었기 때문이다(5, 18).

10. 그러므로 우리 각자는 힘써 노력하고 수고하며, 모든 미덕을 부지런히 실천하고, 주님께 믿고 간구하여 내면의 사람이 지금 이 순간에도 그러한 영광에 참여하게 하고, 영혼이 성령의 그러한 거룩함과 교제를 누리게 되며, 악덕의 더러움에서 정화되어 부활의 날에 우리의 부활한 벌거벗은 몸을 무엇으로 입히고, 그 수치를 무엇으로 가리며, 무엇으로 생명을 불어넣어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안식하게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오셔서 아담의 모든 족속, 태초부터 잠든 모든 이를 부활시키시고, 그들을 두 부분으로 나누시며, 그분만의 표징, 즉 성령의 인을 가진 자들을 그분의 백성이라 선포하시어 그분의 우편에 세우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내 양들은 내 음성을 듣는다” (요한복음 10:27), “나는 내 양을 알고, 내 양은 나를 안다”(요한복음 10:14). 그때 비로소 그들의 몸은 선한 행실로 인해 신성한 영광을 입게 될 것이며, 그들 자신은 지금도 영혼 속에 지니고 있는 바로 그 영적 영광으로 충만해질 것이다. 그리하여 신성한 빛으로 영광을 받고, 기록된 바와 같이 “공중에서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하늘로 들려 올려진 우리는 “항상 주님과 함께 있을 것”이며(살전 4:17), 그분과 함께 통치하며 끝없는 세세토록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미리 주님의 표와 인을 지니도록 힘쓰자. 심판의 때에, 하나님께서 분별을 행하시고 땅의 모든 족속—온 아담—이 모일 때, 목자가 자신의 양 떼를 부르실 때, 그때 표를 지닌 모든 이는 자신의 목자를 알아볼 것이며, 목자께서는 자신의 인을 지닌 자들을 알아보시고 모든 민족 중에서 그들을 모아들이실 것이며, 그분의 목소리를 들은 자들은 그분을 따를 것입니다. 세상은 두 부분으로 나뉠 것이니, 한 부분은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는 어두운 양 떼가 되고, 다른 부분은 빛으로 충만한 양 떼가 되어 하늘의 몫으로 올려질 것이다. 우리가 지금 영혼 안에서 얻은 바로 그것이 그때 빛을 발하며 드러날 것이며, 육신을 영광으로 감싸 줄 것이다(5, 21, 12, 13).

11. 부활의 날에 모든 지체가 부활할 것인가? 하나님께는 무엇이든 어렵지 않다. 이것이 바로 그분의 약속이다. 인간의 연약함과 인간의 이성으로 볼 때, 이는 마치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마치 하나님께서 흙과 땅을 취하사, 땅과는 닮지 않은 육체의 본성을 마치 다른 어떤 본성처럼 조성하시고, 다음과 같은 여러 종류의 본성을 창조하셨듯이: 머리카락, 피부, 뼈, 힘줄 등—그리고 불 속에 던져진 바늘이 색을 바꾸어 불로 변하는 반면, 철의 본성은 소멸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는 것처럼, 부활 때에도 모든 지체가 부활할 것이며, 기록된 바와 같이 “머리카락 하나도 상하지 않을 것” (눅 21:18), 모든 것이 빛의 형상을 띠게 될 것이며, 모든 것이 빛과 불 속에 잠기며 변형되겠지만, 파괴되거나 불이 되어 이전의 본성이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어떤 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베드로로, 바울은 바울로, 빌립은 빌립으로 남아 있으며, 각자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자신의 본성과 실체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만약 본성이 소멸되었다고 주장한다면, 더 이상 베드로나 바울은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과 모든 곳에 오직 하나님만이 계시며, 지옥으로 가는 자들은 형벌을 느끼지 못하고, 천국으로 가는 자들은 은혜를 누리게 될 것이다(15, 10).

12. 온갖 종류의 열매 맺는 나무들이 있는 정원을 상상해 보라. 그곳에는 배나무, 사과나무, 포도나무가 열매와 잎사귀를 달고 있었으나, 정원과 모든 나무와 잎사귀가 변하여 다른 본성으로 바뀌었고, 예전의 모든 것이 빛을 띤 모습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도 부활 때에 변모하여, 그들의 지체들이 거룩하고 빛의 형상을 띠게 될 것이다(15, 11).

13. 주님께서 산에 오르셨을 때 그분의 몸이 영광스럽게 변하여 신성한 영광과 끝없는 빛으로 변모하셨듯이, 성도들의 몸도 영광스럽게 되어 빛나게 될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내적 영광이 그리스도의 몸에 그토록 널리 퍼져 빛났던 것처럼, 이와 마찬가지로 그날 성도들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능력도 그들의 몸 밖으로 쏟아져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금도 이미 자신의 영으로 그리스도의 본질과 성품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거룩하신 분과 거룩하게 되시는 자들은 모두 한 분에게서 나셨다”(히브리서 2,11)고 기록되어 있고,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그들에게 주었나이다”(요한복음 17,22)라고도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불로 많은 등불이 밝혀지듯이, 성도들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들—도 그리스도 자신과 하나되고 동일해져야 한다(15, 36).

14. 그리고 완전해진 자들도 육신에 머무는 동안에는 자유로움으로 인해 근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두려움 아래에 있으므로, 그들에게 유혹이 허용된다. 그러나 영혼이 그 성도들의 도시에 들어갈 때, 비로소 슬픔과 유혹 없이 머물 수 있게 되는데, 그곳에는 근심도, 슬픔도, 수고도, 노년도, 사탄도, 분쟁도 없으며, 오직 평안과 기쁨, 평화와 구원이 있기 때문이다. 그곳 한가운데에는 주님께서 계시니, 그분은 포로된 자들을 구원하시므로 ‘구세주’라 불리며, 하늘의 신성한 치유를 베풀어 사람을 어느 정도 지배하는 영혼의 정욕을 치유하시므로 ‘의사’라 불립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예수님은 왕이시며 하나님이시고, 사탄은 고문자이자 악한 왕자이다(26, 23).

15. 어떤 이들은 재산을 팔고, 노예를 해방시키며, 계명을 지키지만, 이 세상에서 성령을 영접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데, 과연 그런 식으로 살면 그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인가? 이는 논의하기 까다로운 주제이다. 어떤 이들은 왕국도 하나이고 지옥도 하나라고 주장하지만, 우리는 똑같은 왕국과 똑같은 지옥 안에도 많은 단계와 차이, 그리고 기준이 있다고 말한다. 마치 모든 지체에 하나의 영혼이 있어, 위에서는 뇌에서 작용하고 아래에서는 다리를 움직이게 하듯이, 신성 또한 모든 피조물, 즉 하늘에 있는 것과 심연 아래에 있는 것을 모두 포용하시며, 어디에나 온전히 피조물 안에 머무르시나, 그 측량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는 본성으로 인해 피조물 밖에 계시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신성 그분께서 직접 사람들의 기도를 경청하시며, 모든 일에 지혜롭게 다스리십니다. 어떤 이들은 무엇을 구하는지 알지 못한 채 기도하고, 다른 이들은 금식하며, 또 다른 이들은 봉사에 전념하므로, 의로운 재판관이신 하나님께서는 각자의 믿음에 따라 상을 주십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모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나 왕, 상속자들은 아니기 때문입니다(40, 3).

16. 세상에는 살인자도 있고, 음행자도 있으며, 약탈자도 있고, 어떤 이들은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한다. 주님께서는 이쪽과 저쪽 모두를 바라보시며, 선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안식과 상을 주신다. 에는 넘치는 분량도 있고 적은 분량도 있으며, 빛과 영광 속에도 차이가 있다. 지옥과 형벌 속에도 독살자와 강도, 그리고 사소한 죄를 지은 이들이 있다. 그러나 하나의 왕국, 하나의 지옥뿐이며 등급이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잘못된 말을 하는 것이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세속적인 사람들이 오락과 온갖 방탕한 행위에 빠져 있는가? 그리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께서는 이쪽과 저쪽 모두를 바라보시며, 의로운 재판관으로서 한쪽에게는 안식을, 다른 쪽에게는 형벌을 준비하신다 (40, 4).

 

성자 아바 이사야

 

우리의 성자 이사야, 니트리아의 아바와 그의 저술에 대한 간략한 소개

우리의 성자 이사야 은둔자는 서기 4세기 후반(370년 서거)에 살았으며, 아바 마카리오스 대성인과 동시대인이었습니다. 그의 수행지는 이집트 남부였으며, 그중에서도 알렉산드리아에서 멀지 않은 스케토스(Skethos) 사막—우리가 흔히 ‘스키테(Skete)’라고 부르는 곳—에서 수도자들은 깊은 침묵(sige) 속에서 관상적인 삶을 영위했습니다. 그가 몇 살 때 수도자의 길을 택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애도와 제자 엘리세이가 유혹을 받을 때 그를 ‘천한 출신의 사람’이라고 비난했던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그가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부모의 아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성 이사야는 동시대 수도사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그들 중 다수는 그의 조언을 따르고 기꺼이 그에게 완전한 순종을 보였습니다. 그는 당시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에게도 알려져 있었는데, 그 총대주교는 성 이사야를 비방하던 제자 엘리세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의인을 불의하다고 말하며 교만과 멸시로 헐뜯는 아첨하는 입술은 잠잠하게 하소서”(시편 30:19). 성자 이사야는 지극히 겸손했으며 깊은 통곡의 은총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는 유혹 중에 그를 모욕하고 비방하던 제자 엘리세오에게 온유하게 대답한 것과, ‘통곡의 실천’이라 불리는 그의 14가지 말씀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이 말씀을 주의 깊게 읽으면 돌 같은 마음조차도 부드럽게 하고 회개로 이끌 수 있습니다. 스키테에서 침묵을 지키던 성부들의 관습에 따라, 성 이사야는 베드로와 엘리세오라는 두 제자를 두었다. 첫 번째 제자를 위해 그는 교훈적인 말씀(26번째)을 썼으며, 마지막 제자에 대해서는 『게론디카』[10] 에 영혼을 구원하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 두 제자 외에도, 많은 다른 수도사들이 그의 조언과 가르침을 따랐는데, 그는 그들과 직접 대면하여 대화할 뿐만 아니라 서신을 통해 교감하기도 했다. 밤낮으로 신성한 경전을 연구하며, 이 구원의 샘에서 영적 지혜의 풍성한 물줄기를 흠뻑 마신 그는, 다양한 영혼을 구원하는 주제를 아우르며 한 권의 책을 이루는 수많은 아름다운 글들을 창작해 냈다. 성 이사야는 깊은 은둔을 사랑하고 모든 사람으로부터 수행자답게 거리를 두었기 때문에 은둔자로 불렸는데, 27번째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생애 말년에는 가장 가까운 제자들조차 그와 함께 살지 않고 때때로 그를 방문하기만 했다. 성자의 저술에 대해서는 암몬 주교가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테오필로에게 보낸 서신과, 수도사 니키포로가 ‘마음 지키기에 관하여’라는 설교에서 언급하고 있다. 바르사노피오 대성자, 요한 다마스쿠스, 그레고리 시나이트 등도 이를 언급했다. 우리의 성자 이사야를 기리는 기념일은 정교회에서 치즈 주간의 토요일에 거행된다. 우리에게 전해진 아바 이사야의 설교 모음집에는 29편의 설교가 수록되어 있으나, 여기에는 아바 이사야의 모든 설교가 실려 있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왜냐하면 그의 설교에서 발췌된 내용 중에는 이 모음집에 없는 가르침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 말씀들 외에도, 아바 베네딕트 아니안스키(9세기 초)가 그의 수도 규칙 모음집 『[11] 』에 보존해 둔, 이 아바의 초보 수도사들을 위한 규칙들이 있습니다. 해당 모음집에서 이 규칙들에 대해 아바의 말씀에서 발췌한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들 속에서 이 규칙들을 모두 찾아볼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그 중 상당수는 현존하지 않는 아바의 말씀에서 발췌되었거나, 말씀과는 별도로 다양한 사람들에게 각기 다른 시기에 전해진 것일 수 있으며, 이후 구전으로 전해지다가 누군가에 의해 한데 모아졌을 것으로 추정해야 한다. 이때 생각의 흐름에 따라 정리된 것이 아니라, 들은 대로 그대로 종합된 모음집에 수록되었을 것이다. 이 말들은 성 안토니우스 대성인의 규칙들과 정신과 내용이 일치한다. 어떤 것들은 단어 하나하나까지 그 규칙들과 똑같다. 아바 이사야는 아바 안토니우스 대성인의 가르침의 은사를 계승한 가장 가까운 후계자였을 것으로 여겨지며, 아바 마카리우스 대성인과 함께 그 자리를 차지했을 것이다. 『도브로톨리비예』에는 27장에 걸쳐 아바 이사야의 ‘마음 지키기’에 관한 글이 수록되어 있다. 서문에서는 이 글이 해당 아바의 말씀에서 발췌한 것임을 밝히고 있으며, 『 』에는 생각의 유혹을 물리치고, 양심을 흠 없이 지키며, 마음속에 은밀한 교훈을 간직하고, 모든 평온함 속에서 영혼의 삼분성을 현명하게 지키는 방법에 대한 간결한 가르침이 담겨 있다. Patrol. graec. 제40권에서는, 앞서 언급된 글 뒤에 ‘수행과 침묵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유사한 글이 19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그리스어 원문과 함께 실려 있다. 이 장들 역시 그 아바의 말씀에서 발췌한 것이며, 각 장이 어디에서 인용되었는지는 해당 판본 내의 인용 표시를 통해 명시되어 있다. 그중 일부는 『자비』의 글에 수록된 내용과 단어 하나하나까지 동일하다. 그러나 이 19개 장과 『자비』의 27개 장 모두에, 『말씀』에는 없는 가르침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본 아바 이사야의 저작집에 이 두 글을 모두 수록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 아바에게서 나온 어떤 것도 빠뜨리지 않기 위해, 우리는 여기 『기억할 만한 이야기들』에 인용된 것 외에도, 우리 『알파벳 순 파테리크』에 수록된 그의 명언들을 실었습니다. 다만 이 번역은 슬라브어에서만 이루어진 것이며, 그리스어로는 이와 유사한 파테리크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 수행 열성가들의 노력의 결실입니다. 누구나 직접 확인하겠지만, 이 말씀들 중에서도 다른 기록에는 없는 것들이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다음을 제시한다:

1. 아바 이사야의 말씀. 이 말씀들에 대해서는, 초판에서 라틴어 번역본으로 제시되었으며, 인쇄된 것은 오직 그 라틴어본뿐이라는 점을 참고로 밝힌다. 그러나 이후 아폰의 장로들이 아폰에서 이 말씀들의 그리스어 원문을 발견하고 그 사본을 모스크바로 가져오자, 이 원문을 바탕으로 새로운 번역이 이루어졌으며, 바로 그 번역본이 현재 이러한 책을 즐겨 읽는 독자들에게 제공되고 있다. – 이 번역에 있어 우리는 독일인 장로 파이시우스의 이 글 번역본을 참고하였는데, 옵티나 수도원의 장로들이 이 번역본을 기꺼이 제공해 주셨습니다. 필요한 부분에는 각주를 통해 이를 명시하고 있습니다.

2. 초보 수도자들을 위한 그의 규칙.

3. 그의 명언들.

4. 『도브로톨루비예』에 실린, 마음을 지키는 것에 관한 27장의 글.

5. 수행과 침묵에 관한 장들.

 

1. 존경받는 아바 이사야가 자신의 제자들에게 한 말씀

 

1. 아바 이사야가 그와 함께 살던 형제들에게 남긴 계명

1. 나와 함께 머물기를 원한다면, 예수님을 위하여 내 말을 들으라.

2. 각자는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방에 머물며, 하나님의 계명에 따라 수공일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3. 너희의 교훈과 끊임없는 기도를 소홀히 하지 말고, 낯선 생각으로부터 너희 마음을 지키라.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이 세상의 어떤 것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항상 무엇이 너희를 걸림돌로 삼는지 살펴보고, 고치려고 노력하며, 마음의 아픔과 눈물과 고난(육체의 고갈) 가운데 하나님께 간구하여, 그분께서 너희를 용서하시고, 다시는 같은 실수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 주시기를 구하라.

4. 매일 죽음을 눈앞에 두고, 어떻게 육신을 떠나 공중에서 우리를 맞이하는 어둠의 권세를 지나, 아무런 방해 없이 하나님 앞에 서게 될지 신중히 생각하십시오. 또한 그분의 마지막 심판의 두려운 날과, 각 사람의 행실과 말과 생각에 대한 보응을 바라보십시오. 이는 “모든 것이 그분 앞에 드러나고 드러나기 때문”이니, 우리는 그분께 답변을 드려야 할 자들이기 때문이다(히브리서 4:13).

5. 큰 필요 없이는 식사 자리나 교회에서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노래하는 사람이 스스로 무엇을 묻지 않는 한 그를 바로잡지 마십시오.

6. 일주일마다 하나님의 경외심을 가지고 부엌에서 봉사하되, 자신의 영적 수양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7. 누구도 형제의 방에 함부로 들어가지 말고, 때이르게 서로 만나려 하지 마십시오.

8. 서로의 수공예 작업을 엿보지 마십시오. 형제가 당신보다 더 많이 만들었는지, 아니면 당신이 그보다 더 많이 만들었는지 따지지 마십시오.

9. 분배 시간에 나갈 때, 헛소리를 하거나 제멋대로 행동하지 말고, 각자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자신과 자신의 영, 또한 가르침과 기도에 귀를 기울이되, 은밀히(마음속 깊이) 하라.

10. 교회 모임이 끝나거나 식사를 마친 후에는 서로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지 말고, 설령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이야기라 할지라도 그러지 말고, 각자 자신의 방으로 가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울라.

11. 만일 누군가와 이야기해야 할 필요가 있다면, 가능한 한 적게, 겸손과 경건함으로 말하라.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너희의 말을 경청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12. 어떤 일로도 서로 다투지 말고, 누구에게도 큰소리를 치지 말며, 누구도 판단하지 말고, 입으로도 마음속으로도 비하하지 말며, 누구에게도 결코 불평하지 말라. 너희 입에서 거짓말이 나오지 않게 하고, 너희에게 유익하지 않은 말을 하거나 듣기를 원하지 말라.

13. 마음속에 악의나 증오, 이웃에 대한 시기심을 품지 마십시오. 입으로 하는 말과 마음속 생각이 서로 다르지 않도록 하십시오. “하나님은 조롱을 받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갈 6,7). 하나님께서는 숨겨진 것과 드러난 것을 모두 보십니다.

14. 모든 생각과 모든 근심, 그리고 여러분의 모든 소망과 모든 의심을 마음속에 숨기지 말고, 아바에게 자유롭게 털어놓으십시오. 그리고 그분에게서 들은 바를 믿음으로 실천하도록 힘쓰십시오.

15. 내 계명을 지키는 것을 소홀히 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왜냐하면 – 용서해 주십시오 – 그럴 경우 나는 여러분이 나와 함께 머무르게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계명을 지키면, 나는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을 위해 보증하겠으나, 지키지 않으면 그분께서 여러분에게 책임을 물으실 것이며, 여러분의 소홀함과 나의 무익함에 대해서도 묻게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 계명을 지키되, 은밀히든 공개적으로든, 그 사람은 주 하나님께서 모든 악으로부터 지켜 주시며, 앞으로 닥칠 모든 유혹—은밀한 것이든 공개적인 것이든—에서 그를 보호해 주실 것이다.

16. 형제들아, 간청하노니, 너희가 무엇을 위해 세상을 떠났는지를 기억하고, 너희의 구원을 위해 힘쓰라. 그리하여 너희가 세상을 버린 것이 헛되지 않게 하고,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그분을 위해 세상을 버리고 선하게 수고한 성도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도록 하라.

17. 편애하지 않는 마음, 고난을 기꺼이 감수하는 태도(육체를 지치게 하는 수고와 결핍), 겸손, 그리고 모든 일에서 이성을 가지고 자신의 뜻을 억제하며, 자신의 의로움을 믿지 않고 항상 자신의 죄를 눈앞에 두는 것—이 모든 것이 네게 미덕을 낳을 것이다. 또한 (모든 이여) 이 점을 명심하라. (육체의) 안락, 방종(platysmos – 넓은 길, 어떤 제약도 받지 않는 것, 자기 뜻대로 함)과 허영은 수도자의 모든 열매를 망치게 한다.

 

2. 자연법에 관하여

1. 형제들아, 너희가 이 사실을 모르게 하고 싶지 않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그를 낙원에 두셨고, 그는 그때 자신의 본성에 맞는 건전한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를 유혹한 자의 말을 듣자, 그의 모든 감각이 비자연적인 상태[12] 로 변해버렸고, 그는 그때 자신의 영광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인류에게 자비를 베푸셨으니, 그분의 크신 선하심으로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요한복음 1:14) – 즉, 죄를 제외한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은 완전한 인간이 되셔서, 그분의 거룩한 몸을 통해 우리의 비자연성을 자연성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13] . 인간에게 이러한 자비를 베푸신 그분은 그를 다시 낙원으로 돌아오게 하시는데, – (타락한 자를) 그분의 발자취와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계명을 따름으로써 회복시켜 주심으로써, 우리가 우리를 영광에서 쫓아낸 자들을 이길 수 있게 하셨으며, – 또한 우리에게 거룩한 예배(latreian)와 순수한 율법을 보여 주심으로써, 사람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대로의 본래적 질서 속에 서게 하셨다.

2. 그러므로 자신의 본래 상태로 돌아가고자 하는 자는, 육신의 모든 욕망을 잘라내어, 마음의 본성에 따른(영적인) 상태에 자신을 두어야 한다. 우리 안에는 본성상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있는데, 이 하나님에 대한 갈망 없이는 사랑도 없다. 바로 이 때문에 다니엘은 “갈망의 사람” (단 9:23)라고 불렸으나, 원수는 그 본성에 따른 갈망을 수치스러운 정욕으로 변질시켜 온갖 부정한 것을 탐하게 만들었습니다. 본성에 따라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있는데,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없이는 성장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기록한 대로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 (고린도전서 12:31); 그러나 이 하나님에 대한 열심은 우리 안에서 비자연적인 열심으로 변질되어, 서로를 시기하고, 질투하며, 서로에게 거짓말을 하게 되었다. 마음에는 본성상 분노가 있습니다. 분노 없이는 사람이 순결할 수 없는데, 이는 원수가 그 안에 심어 놓은 모든 것에 대해 분노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엘르아자르의 아들 피네하스가 분노하여 한 남자와 여자를 죽였을 때, 주님의 분노가 그 백성에게서 그쳤던 것처럼 말입니다(민수기 25, 7–9), 그러나 우리 안에서는 그러한 분노가 변하여, 불필요하고 무익한 온갖 일들로 인해 이웃에게 분노하게 되었다. 마음속에는 본성상 증오가 존재하는데, 예를 들어, 그 증오가 엘리야에게 닥쳤을 때, 그는 가증한 선지자들을 죽였고(열왕기상 18, 40), 마찬가지로 사무엘도 그 증오에 따라 아말렉 왕 아합을 대했다(열왕기상 15, 33), – 원수에 대한 증오 없이는 영혼의 존엄(가치와 위엄)이 드러나지 않지만, 이 (본성적인) 증오는 우리 안에서 비정상적인 것으로 변질되어 이웃을 미워하고 혐오 하며 그들을 경멸하게 되었으니, 바로 이 증오가 우리 안에서 모든 미덕을 몰아내고 있다. – 이성은 본성상 적들 앞에서 높은 지혜를 발휘하는 것이 특징이다. 예를 들어, 욥에게 그 지혜가 임했을 때, 그는 적들을 비난하며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불명예스럽고 모욕받을 자들이며, 모든 선함이 부족한 자들이니, 나는 너희를 내 양 떼를 지키는 개들조차 될 자격이 없다고 여긴다” (욥기 30, 1. 4), 그러나 적들 앞에서 보이던 이 교만은 우리 안에서 변해 버렸다. 우리는 적들 앞에서는 겸손해졌으나, 서로 앞에서는 교만해져서 서로를 상처 입히며, 이웃보다 우리 자신을 더 의롭다고 여겼다. – 그리고 그러한 교만 때문에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원수가 되신다. 이것이 바로 인간에게 창조될 때(창조 시에 그에게 심겨진) 것이었으며, 그가 불순종으로 인해 그 열매를 맛보았을 때, 그 안에서 이러한 끔찍한 정욕으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3.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그(정욕)들을 버리도록 힘쓰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거룩한 몸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을 얻도록 합시다. 그분은 “거룩하시며 거룩한 자들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의 힘을 다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도록 스스로를 돌보며, 우리의 활동적인 힘을 발휘하고 모든 지체를 (저울에 달듯이) 바로잡아, 그것들이 본래의 질서대로 자리 잡을 때까지 노력합시다. 그리하여 “온 세상에 닥칠”(눅 21:26) 시련의 때에 자비를 얻게 하시고, – 끊임없이 그분의 자비를 간구하여, 우리의 겸손과 함께 그분의 도움이 임하여 우리를 원수들로부터 구원하시기를, 이는 그분의 능력과 도움과 권세가 영원토록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3. 신앙 생활을 막 시작한 이들과 켈리오트들의 상태에 대하여

1.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겸손한 지혜로, 우리가 듣는 어떤 말이나 행위에 대해서도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겸손으로 인해 원수의 모든 계략이 무너져 내리기 때문입니다.

2. 자신의 어떤 일에서도 스스로를 과대평가하지 말라. 그래야만 마음의 평온을 유지할 수 있다.

3. (혼자 있을 때는) 탄식과 통회의 표정을 지으되, 낯선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친절하고 유쾌한 모습을 보여,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네 안에 깃들게 하라.

4. 형제들과 함께 길을 떠날 때, 잠깐 떨어져 침묵을 지키고, 걸을 때는 이리저리 둘러보지 말고, 마음속으로 묵상하거나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라. 어디에서든 쉬게 될 때, 제멋대로 굴지 말고 모든 일에 겸손하고 수줍음을 가지라. 네게 제공되는 것에 대해, 마치 강요당하는 것처럼 마지못해 손을 내밀어라. 가장 어린 자로서, 감히 손을 뻗어 다른 이의 입에[14] (어떤 음식 조각)을 넣어주려 하지 말라. 어디에서든 하룻밤을 자게 될 때는, 서로 담요를 덮지 말고, 누우기 전에 마음속으로 기도를 많이 드려라. 길에서 지쳐서 여행의 고단함을 달래기 위해 기름을 조금 바르고 싶다면, 발만 문지르게 하고, 발을 드러내는 것을 부끄러워하며, 극도의 필요나 병이 아닌 이상 몸 전체에 기름을 바르지 말라.

5. 네 방에 앉아 있을 때 낯선 형제가 찾아오면, 너도 그에게 똑같이 해 주라. 그의 발에 기름을 바르고 그에게 말하라. “사랑을 베풀어라. 기름을 조금 취하여 몸의 다른 부분에도 바르라.” 그가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면 강요하지 말고, 만약 그 사람이 활동적인 장로라면 온몸에 기름을 바를 때까지 그를 재촉하라.

6. 네보다 연하인 형제들과 함께 식탁에 앉았을 때, “[15] ”라고 스스로에게 말하지 마라. 먹되, 즐거움에 빠져 먹지 않도록 네 죄를 기억하라. 네 손은 오직 네 앞에 놓인 음식에만 뻗고, 다른 사람들의 음식에는 손을 뻗지 마라. 네 옷은 네 다리와 무릎을 가리도록 하고, 그것들이 서로 밀착되게 하라. 식사하는 사람들 중에 나그네가 있다면, 친절한 눈빛으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건네주고, 그들이 식사를 마치면 두세 번 말하라: “사랑을 베풀어 주십시오, 조금만 더 드십시오.” 먹을 때, 곁에 있는 사람을 향해 얼굴을 들지 말고, 이리저리 둘러보지 말며, 헛된 말을 하지 말고, ‘축복해 주십시오’라고 말하지 않고는 네가 원하는 것에 손을 뻗지 말며, 물을 마실 때는 평범한 평신도들이 (하는 것처럼) 목에서 콧소리가 나게 하지 말라.

7. 형제들과 함께 앉아 있을 때 가래가 올라오면, 그들 앞에서 뱉지 말고 일어나 밖에서 뱉으라.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몸을 뻗지 말라. 하품이 나올 것 같으면 입을 벌리지 말라. 그러면 하품이 너에게서 물러날 것이다. 결코 웃기 위해 입을 벌리지 말라. 이는 무모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8. 형제의 소유물을 보고—옷이든, 허리띠든, 쿠쿨라(머리띠)든—그것을 탐내지 말고, 자신도 그들과 비슷해지려는 욕망을 따르지 마라.

9. 책을 구하게 되면, 그 책의 장식을 꾸미지 마라. 이는 정욕이기 때문이다.

10. 무언가 잘못을 저질렀다면, (인정하는 것이) 부끄럽다고 거짓말을 하지 말고,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말하며 절을 하라. 그러면 네 죄는 사라질 것이다.

11. 누군가 네게 거친 말을 한다면, 그에게 마음을 품지 말고, 네 마음에 그에 대한 불만(혹은 서운함)이 생기기 전에 서둘러 그에게 절을 하라. 그 뒤를 이어 분노가 금세 닥치기 때문이다.

12. 누군가 어떤 일로 너를 부당하게 비난한다면, 그에게 대항하지 말고, “용서해 주십시오. 앞으로는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절을 하라. 그가 그 일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관없이, 모든 이런 일은 초보자에게는 성장의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13.[16] 수공예를 할 때, 소홀히 하지 말고, 무지함으로 인해 죄를 짓지 않도록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라.

14. 어떤 수공예를 배울 때, 너를 가르치는 사람에게 말하고, 주저하지 말고 자주 그에게 말하라. “사랑을 베풀어 주십시오. 제가 잘하고 있는지 아닌지 살펴보세요.”

15. 네가 수공예에 몰두하고 있을 때 형제가 너를 부르면,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서둘러 알아보고, 네 일을 잠시 미루고 그와 함께 하라.

16. 식사 시간이 끝나면 네 방으로 들어가 기도를 드리고, 네게 유익이 되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과 앉아서 이야기하지 마라.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장로들이라면, 네 아바에게 말하라: “앉아서 듣도록 할까요, 아니면 제 방으로 가도록 할까요?” 그가 네게 말하는 대로 행하라.

17. 만약 그(아바)가 어떤 일을 위해 너를 밖으로 보내면, 그에게 말하라: “어디에 머물라고 명하시겠습니까?” 그리고 네가 필요한 것과 그가 말하는 대로 행하라. 더하거나 뺄 것 없이 그대로 하라.

18. 밖에서 어떤 말을 듣게 되더라도, 그것을 마음에 담아오지 말고, 돌아와서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 마라. 네 귀를 지키면, 네 혀가 죄를 짓지 않을 것이다.

19. 네가 무언가를 원하지만, 함께 사는 사람이 그것을 원하지 않을 때는, 다툼이 일어나지 않고 그가 슬퍼하지 않도록 그를 위해 네 욕망을 포기하라.

20. 형제와 함께 살기 위해 (어떤 수도실이라도) 들어갈 때, 동거인으로서 그에게 어떤 일에서도 명령을 내리지 말고, 그 위에 우두머리가 되고자 하지 마라.

21. 다른 형제들과 함께 살게 된다면, 그들과 동등해지려 하거나 그들의 영광에 동참하려 하지 마라. 그들이 네가 원하지 않는 일을 시킨다면, 네 의지를 억누르고 그들을 슬프게 하지 않으며, (네게 요구되는) 겸손과 그들과의 평화로운 공동 생활을 해치지 않도록 그 일을 행하라.

22. 형제와 함께 살 때, 그가 네게 “나를 위해 무언가 요리해 달라”고 말하면, 그에게 “무엇을 준비해 드릴까요?”라고 물어보라. 그리고 그가 “네가 원하는 대로 해라”라고 말하며 선택권을 네게 맡긴다면, 하나님의 두려움을 품고 있는 대로 준비하라.

23. 서로 함께 살 때(상호 협력하거나 공동 생활을 할 때) 어떤 분담이 있다면, 너도 그에 동참하고, 모두 함께 참여하며, 모든 이를 위한 양심을 위해 네 몸을 아끼지 말라.

24.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수공예에 착수하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라. 만일 돗자리나 그릇, 혹은 다른 무엇인가를 정리해야 할 일이 있다면, 게으름 피우지 말고 서둘러 처리하라.

25. 보수를 받는 일이 있을 때는 네 형제도 너와 함께 그 일에 참여하게 하라. 그리고 그 앞에서 교만해지지 말라. 만일 사소한 일이 있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가서 네 일을 하라, 형제여. 이 일은 내가 혼자 하겠다”고 말한다면, 그의 말을 따르라. 듣는 자가 바로 위대한 자이다.

26. 나그네 형제가 네게 찾아오면, 그를 반갑게 맞이하며 친절한 표정을 지어라. 그가 지고 온 짐은 네가 직접 들어주라. 그가 떠날 때도 다시 그렇게 하라. 그에게 건네는 인사는 품위 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해야 하며, 그가 해를 입지 않도록 하라. 너에게 유익하지 않은 어떤 것에 대해 그에게 묻지 말고, 대신 그에게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라. 그가 앉으면, “어떻게 지내시나요?”라고 말하고 그 말로 그치라. 그런 다음 그에게 책을 주어, 교훈을 얻으며 읽게 하라. 만일 그가 지쳐서 왔다면, 쉬게 하고 그의 발을 씻겨 주라. 그가 너와의 대화 중에 부적절한 말을 꺼낸다면, 사랑으로 그에게 청하라. “용서해 주십시오. 저는 연약하여 이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가 쇠약하여 옷이 더러워졌다면, 그 옷을 빨아 주라. 그가 소박하여 누더기 같은 옷이 찢어졌다면, 그 옷을 수선해 주라. 그가 게으름을 피우는 자 중 하나이고, 네게 신실한 이들이 있다면, 그를 그들에게 데려가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라. 만일 그가 하나님을 위해 여행하다가 네게 쉬러 온 형제라면, 그에게서 얼굴을 돌리지 말고, 네게 온 신실한 이들과 함께 기쁨으로 그를 맞아들이라. 그가 가난하다면,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말고, 하나님께서 너에게 주신 축복 중에서 그에게 나누어 주라. 네가 가진 것이 네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라.

27. 형제가 네게 무언가를 맡긴다면, 그가 없는 사이에 그것을 열어 그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 만일 네게 맡겨진 것이 지나치게 귀중한 것이라면, 그에게 말하라. “이것을 내 손에 건네주시오.”

28. 다른 사람의 집으로 갔을 때, 그 사람이 나가서 너를 혼자 남겨두면, 그 집 안에 어떤 물건들이 있는지 보려고 고개를 들지 말고, 어떤 문이나 그릇, 책도 열지 말며, 그가 나갈 때 이렇게 말하라: “당신이 돌아오실 때까지 제가 할 일을 좀 주세요.”라고 말하라. 그리고 그가 주는 일이 무엇이든 게으름 피우지 말고 하라.

29. 보지 못한 것을 칭찬하지 말고, 들은 것에 대해서는 마치 직접 본 것처럼 말하지 마라.

30. 옷차림(shema) 때문에 누구도 멸시하지 마라.

31. 물을 길으러 서 있든지, 필요에 따라 앉아 있든지, 소홀히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너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을 기억하라.

32. 네 방에서 일어나 기도를 드릴 때, 부주의하게 게으름 피우지 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대신 그분을 노하게 하는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의 경외심 안에서 서라; 벽에 기대지 말고, 어리석은 자들이 그러하듯 한쪽 다리를 굽히고 다른 쪽 다리를 펴지 마라. 또한 네 마음이 욕망에 휩쓸리지 않도록 다스려, 하나님께서 네 제물을 받아 주시게 하라.

33. 여러 사람이 함께 노래할 때, 각자는 (자신의 차례에 따라) 차례대로 기도를 드리도록 하라. 너희 중에 나그네가 있다면, 그에게도 사랑으로 기도를 드리도록 청하라. 다툼 없이 두세 번 그에게 이를 말하라.

34. (피 흘리지 않는 제물을) 바치는 시간에, 생각을 다스리고 마음을 하느님을 경외하는 데 두어, 거룩한 성사의 참례에 합당하게 되며 주님께서 너를 치유하시게 하라.

35. 보라, 네 몸을 더럽고 단정하지 못한 상태로 내버려 두지 말고, 허영심에 사로잡히지 말라. 그러나 신앙 생활을 막 시작한 자는 자신의 몸에 대해 어떤 단정하지 못한 모습이라도 그대로 두도록 하라. 이는 그에게 유익하기 때문이다.

36. 신앙 생활을 막 시작한 사람은 성숙한 나이가 될 때까지 결코 좋은 옷을 입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그에게 약이 될 것이다. 포도주에 관해서는, 필요할 때 세 잔까지 마시는 것을 스스로의 규칙으로 삼아야 한다. 웃을 때 결코 이를 드러내지 말며, 경건한 수줍음으로 얼굴을 아래로 숙여야 한다. 잠자리에 들 때는 허리띠를 매고 있어야 하며, 어떤 식으로든 손을 옷 속으로 넣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 육신에는 많은 정욕이 있어, 그로 인해 마음도 타락하기 때문이다. 필요할 때 밖으로 나갈 때는 샌들을 신되, 자신의 방에 있을 때는 샌들을 신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 걸을 때는 손을 허리띠에 걸치거나(혹은 허리띠에 바짝 붙이고) 세속 사람들처럼 팔을 휘두르지 말아야 한다.

37. 자신보다 연로한 분들과 함께 걸을 때는 결코 그들보다 앞서가지 말라. 연로한 분이 누군가와 이야기하기 위해 멈춰 서면, 거만하게 굴거나 앉지 말고, 그분이 어떻게 하라는 신호를 줄 때까지 서 있으라.

38. 도시나 마을에 갈 때는 눈을 아래로 숙여, 네 방에 있을 때 비난을 받지 않도록 하라.

39. 낯선 곳에서 하룻밤을 묵을 때는, 네 마음이 죄에 빠질까 두려운 남의 집에는 머물지 마라.

40. 어딘가에서 음식을 대접받을 때, 그곳에 여성이 함께 식사할 것임을 알게 되면, 어떤 일이 있어도 앉지 마라. 차라리 너를 초대한 사람을 실망시키는 편이, 네 마음속에서 은밀히 죄를 짓는 것보다 낫다. 가능하다면 여인들의 옷차림조차 쳐다보지 마라. 길을 가다가 여인이 네게 “평화가 있기를”이라고 말하면, 마음속으로 대답하고, 눈은 땅을 향하여 내려다보아라.

41. 어떤 노인과 함께 길을 갈 때, 네가 가지고 있는 짐을 그에게 지게 해서는 안 된다. 만약 너희 둘 다 초보자라면, 번갈아 가며 지고 가되, 짐을 지고 있는 사람이 앞서 가도록 하라.

 

4. 수도실에 거주하는 이들의 여행 과 양심에 관하여[17]

1. 길을 떠날 때, 여러분 중 누군가 몸이 약하다면, 그 사람이 원할 때 앉을 수 있도록 여러분보다 앞서 가게 하라.

2. 여러분이 초심자라면, 외출할 때 – 미리, 단 한 번에 영원히 – 세면대에 다가갈 때나 식탁에 앉을 때 어떻게 행동할지 규칙을 정해 두십시오. 그래야 그 시간이 왔을 때 서로 방해받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한 사람이 먼저 가고, 다음 번에는 다른 사람이 가도록 하십시오.

3. 장로님께 마음속 생각을 여쭤볼 때는, 그분이 신실하시고 당신의 말을 지켜주실 것임을 안다면, 주저 없이 그 생각을 털어놓으십시오.

4. 형제의 죄에 대해 듣게 되면, 누구에게도 그 이야기를 전하지 마라. 이는 너에게 죽음과 같기 때문이다.

5. 어떤 이들이 너를 괴롭히는 생각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것이 너에게 다툼의 빌미가 되지 않도록 그들의 말을 듣지 마라.

6. 스스로를 다잡아 기도를 많이 드리도록 하라. 기도는 네 영혼을 비추는 빛이니라.

7. 매일 자신이 어떤 죄를 지었는지 되돌아보라. 그리고 그 일에 대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너를 용서해 주실 것이다.

8. 어떤 형제가 네 앞에서 다른 형제를 끈질기게 헐뜯는다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를 말리고) 그의 말을 믿지 마라. 그래야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지 않을 것이니, 겸손히 그에게 말하라. “용서해 주십시오, 형제여. 저는 비참한 자입니다. 당신이 말하는 그 일은 제게도 있는 일인데, 저는 그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9. 형제가 네게 해를 끼치고, 누군가 네 앞에서 그를 헐뜯는다면, 네 마음속에 악의가 다시 싹트지 않도록 조심하라. 대신 하나님 앞에서 네 자신의 죄를 떠올려 보라. 만일 하나님께서 그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원한다면, 네 이웃에게 보복하지 말라.

10. 네가 알지 못하는 형제들과 함께 길을 떠나게 되었을 때, 그들이 너보다 지위가 낮은 자들이라는 것이 드러난다면, 모든 일에서 그들에게 우선권을 양보하라. 만약 네 친구 집에 가게 된다면, 세면대로 갈 때든 식탁에 앉을 때든 모든 일에서 그들을 네 앞에 두라. 그리고 그들이 너를 위해 초대받은 것처럼 가장하지 말고, 그들에게 이 예우를 돌리며 말하라. “이것은 너희를 위해 그분이 나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이다.”

11. 형제와 함께 길을 가다가 어떤 친구를 만나게 되어, 필요한 말을 하려고 형제에게 “여기 앉아 있어라”라고 말하고, 그 친구가 너에게 빵을 먹으라고 권한다면, 형제를 불러 그도 너와 함께 위로받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입에 넣지 말라.

12. 많은 형제들과 함께 길을 가다가, 그 수가 많다는 이유로 그들을 네 친구에게 데려가는 것이 부끄럽다면, 그들을 멸시하지 말고, 몰래 물러나서 그들을 남겨둔 채 혼자 빵을 먹지 말고, 그들과 함께 무엇을 해야 마땅한지 상의하라. 그리고 그들이 네게 하는 말을 겸손히 들어라. 그들과 함께 길을 갈 때는, 스스로 더 큰 몫을 차지하려 하지 말고, 수련자의 의무를 회피하지 마라.

13. 길을 가다가 형제에게 들르고 싶으나 그가 너를 맞이하기를 원치 않는다면, 나중에 길에서 그를 만나거나 그가 네가 모르는 사이에 네게 찾아올 때, 그에게 최대한의 호의를 베풀어라.

14. 누군가 네에 대해 나쁜 말을 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면, 어느 곳에서 그와 마주치거나 그가 네게 찾아올 때, 네가 할 수 있는 한 기쁜 얼굴과 친절한 태도로 그를 맞이하고, 들은 말에 대해서는 “왜 그런 말을 했느냐?”라고 묻지 말라. 잠언에 기록된 바와 같이, 악을 기억하는 자는 율법을 어기는 자이기 때문이다.

15. 형제들아, 가난한 형제를 찾아갈 때, 어떤 필요 사항으로도 그를 슬프게 하지 말고, 스스로를 먹여 살릴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사서, 남는 것이 그에게 남도록 하라. (그가 제공하는) 숙소는 너희가 찾은 그대로면 충분하다.

16. 네가 아는 어떤 장로들을 찾아갈 때, 그 장로들에게 낯선 다른 사람들이 너와 함께 있다면, 그들 앞에서 장로들에게 지나치게 거만하게 굴지 말고, 너와 함께 온 사람들에게 자리를 양보하여 그들이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게 하라.

17. 형제들이 너와 함께 살 때, 그들이 네 말을 듣는다면, 네가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보고할 것임을 알고 엄하게 돌보아라.

18. 하나님을 위해 순례자로서 어딘가로 떠나게 된다면, 그곳에 있는 사람들과 교제를 맺으려 하지 말고, 말로 그들과 얽히지 마라. 왜냐하면 (그런 경우) 육신의 친척들과 함께 있는 것이 너에게 더 유익하기 때문이다.

19. 산으로 올라가 수도원에 있는 형제들을 방문할 때, (처음에) 누구를 찾아가든 그 사람과 함께 머물고, 다른 곳으로 옮기기 전에 그 사람에게 “제가 가도 될까요?”라고 먼저 물어보지 마라. 만약 그가 이를 달가워하지 않는다면, 그곳을 떠날 때까지 그를 슬프게 하지 마라.

20. (낯선 땅에서) 거처할 방을 얻었다면, 친구를 많이 사귀지 마라. 병들었을 때를 대비해 한 명이면 충분하며, 그래야만 네 순례의 힘(의미, 무게)을 훼손하지 않을 것이다.

21. 가난한 (형제)에게 선행을 베풀었을 때, 네 몫을 나누자고 그를 부르지 마라. 그래야 네가 그에게 베푼 선행을 헛되게 하지 않을 것이다.

22. 네가 알지 못하는 수도원(은둔처)에 들어가게 되면, 그곳의 거주자가 네가 살 수 있도록 허락한 곳에서 살며, 그가 직접 너를 부르기 전까지는 다른 방에 들어가지 마라.

23. 네 방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을 때, 형제가 자신의 필요를 위해 어떤 물건을 요청하면, 그 물건을 네게 남겨 두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네 형제에 관한 계명을 어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네게 필요한 것만 가지고 있고 남는 것이 없다면, 그것을 네 자신의 방탕을 위해 낭비하지 마라. 한 지체를 잃는 것이 네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다.

24. 만일 네가 하나님을 위해 나그네가 되기 위해 혈육의 친척들로부터 멀어졌다면, 그들에 대한 달콤한 동정심(그들과 함께 지내며 느끼는 기분 좋은 감정)이 네 마음속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 그리고 수도실에 앉아 있을 때, 아버지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나, 형제나 자매에 대한 추억, 자녀들에 대한 연민, 아내에 대한 갈망 등으로 마음을 동요시키지 마라. 그 모든 것을 네가 이미 버렸으니, 죽음을 앞둔 이 시점에 네 앞날만을 생각하라. 그때는 그들 중 누구도 너를 도와줄 수 없을 터이니, 미덕을 위해 (그들을) 버리지 않을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25. 네 방에서 침묵하며, 네게 해를 끼친 누군가를 떠올릴 때, 일어나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 그 사람을 용서해 주시기를 기도하라. 그러면 복수하려는 생각이 네게서 사라질 것이다.

26. 성찬을 받으러 갈 때, 온갖 방법으로 네 생각을 지키고(혹은 온갖 딴생각으로부터 경계하여), 네게 심판이 되지 않도록 하라.

27. 밤에 부끄러운 환상에 유혹을 받으면, 낮에 그 환상에 등장했던 인물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도록 마음을 지키라. 그들의 유혹에 물들지 않고, 자신에게 맹렬한 분노를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하라. 대신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 의지하라. 그러면 그분께서 너를 도우실 것이니, 그분은 인간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시기 때문이다.

28. 엄격한 수행을 실천하고 있다면, 네 마음이 그것을 의지하여 ‘이것이 나를 지켜준다’고 생각하지 말라. 오히려 네 마음속으로, 육체의 고행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의 비통한 기도를 들으시고(나를 지켜주신다)라고 말하라.

29. 누군가 너를 비방하더라도, 그가 입을 다물 때까지는 반박하지 말고, 그 후에 스스로를 돌아보아 그에게서 들은 말이 네 안에 있음을 발견하면, 네가 죄를 지었음을 회개하라. 그리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너희를 다시 받아 주실 것이다.

30. 형제들과 함께 여행할 때, 그들 중에 네가 하나님을 위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다른 이들이 보는 앞에서 그에게 특별한 친밀감을 드러내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그들 중에 연약한 이가 있어 질투로 인해 죽을 수도 있으니, 네가 그에게 죄를 짓게 할 빌미를 제공한 탓에 너는 그의 죄를 짊어지게 될 것이다.

31. 어떤 사람들을 찾아갈 때, 그들이 너를 무척 반길 것이라고 기대하지 마라. 그래야 그들이 너를 받아들일 때, 네가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을 것이다.

32. 네가 방에서 침묵을 지키다가 연약함에 사로잡히면, 낙담하지 말고 하나님께 감사하라. 네 영혼이 그로 인해 동요하는 것을 보게 되면, 그에게 말하라. “네가 가야 할 지옥보다 이 연약함이 너에게 더 낫지 않느냐?” 그러면 네 영혼은 네 안에서 평안을 찾을 것이다.

33. 형제들에게 갔을 때, 그들 중 한 사람이 네게 “여기서는 평안을 찾을 수 없으니, 너와 함께 살고 싶다”고 말한다면, 다른 이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그에게 자리를 내주지 마라. 그러나 그가 “어떤 숨겨진 일로 인해 내 영혼이 죽어가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에게 도망칠 길을 열어주되, 함께 살게는 하지 마라.

34. 네 방에서 침묵을 지키며 앉아 있을 때, 음식에 관해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은 규칙을 정하라. 즉, 네 몸이 너를 지탱하고 네 기도 봉사를 수행할 수 있도록 몸에 필요한 만큼만 주고, 다른 이들에게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도록 하라. 맛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그것이 좋은 음식이든 좋지 않은 음식이든, 달콤한 음식은 절대 먹지 말라; 만약 형제나 수도원을 방문해야 할 필요가 생기면, 그곳에서 발견되는 어떤 달콤한 음식도 네 몸에 배불리 주지 마라. 그래야 네 몸이 서둘러 방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여, 스스로를 배신하는 일이 없게 하라.

35. 만일 악령들이 네 마음을 네 힘보다 더 큰 업적으로 이끌려고 한다면, 그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대개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온갖 일에 그를 부추겨, 그가 그들의 손에 넘어가게 하고 그를 조롱하며 기뻐하려 하기 때문이다. 하루에 한 번만 먹고, 네 몸이 아직 (먹고 싶은) 욕구가 남아 있을 때 일어날 수 있을 만큼만 몸에 필요한 것을 공급하라. 경건하게 기도에 전념하되, 몸에 필요한 것을 박탈하지 말고, 분별과 절제를 가지고 기도하라. 그렇지 않으면 지나친 기도로 인해 네 영혼이 흐려지고, 신앙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라. 밤의 절반은 기도에, 나머지 절반은 육체의 안식에 충분하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두 시간을 기도와 시편 찬송에 바치고 나서 쉬러 누우며, 주님께서 깨우실 때 다시 열심을 다해 기도를 드려라. 만약 네 몸이 게으름을 피우는 것을 보게 된다면 , 그에게 말하라: “이 짧은 시간 동안 안식을 원하느냐? 그러면 그 후에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던져지기를 원하느냐?” 그리고 조금씩 이렇게 스스로를 일깨워 나간다면, 네게 힘(기운)이 올 것이다.

36. 네 양심이 다른 모습으로(겉으로 보이는 모습이나 네가 바라는 모습과는 다르게) 그들을 마주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그들을 통해 다른 이들과 교제하게 될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들과는 친분을 맺지 마라. 그래야 신앙 생활에 걸림돌이 되지 않을 것이다.

37. 네가 수도원에 있으면서 노예를 두고 곁에 두면, 수도자 계율을 모독하는 것이 된다. 만일 그를 형제에게 선물로 준다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게 될 것이다. 그러니 그를 보내어 가게 하거나,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 주라. 그가 수도사가 되고자 한다면, 스스로 깨닫게 될 것이다(혹은 그가 아는 대로). 너는 그를 곁에 두지 마라. 이는 네 영혼에 유익하지 않기 때문이다.

38. 만일 네가 도시에 살면서 하나님을 위하여 네 몸을 고생시키는데, 그곳 사람들이 시기심에 사로잡혀 그 일로 인해 너를 존경하려 한다면, 그곳을 떠나 다른 곳에 정착하라. 그래야 네 수고가 헛되지 않을 것이니; 그러나 이미 허영을 이겨냈다면, 하나님께서 네가 행하는 일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고,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마라.

39. 네가 세상을 등졌다면, 네게는 아무것도 남기지 말고, 만일 내면에서 돌아다니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면, 네 몸을 수공예로 더 많이 수고시켜, 네 방에서 침묵을 지키며 평화롭게 네 빵을 맛보도록 하라.

40. 만일 도시로 가서 네 수공예품을 팔게 된다면, 세속 사람들처럼 가격을 놓고 다투지 말고, 네 은둔처의 힘(의미)을 훼손하지 않도록, 주어진 대로 내어주어라.

41. 필요한 물건을 살 때, “이것보다 더는 주지 않겠다”고 다투지 말고, 그 물건을 원한다면 조금은 마음을 다잡아 (요구된 대가를) 지불하라. 그러나 그 대가를 낼 수 없다면, 아무 말 없이 그냥 내버려 두어라. 나중에 ‘어디서 구할까’ 하는 생각이 괴롭히기 시작하면, 그 생각들에게 이렇게 말하라. “이제 나는 하나님께서 가난으로 시험하시던 모든 성인과 같아졌으니, 그들의 뜻이 옳음을 아실 때까지 시험하시다가, 그 후에야 그들을 풍요로 이끄셨다.”

42. 형제가 네게 어떤 물건을 맡겼는데, 네가 그것을 필요로 하게 된다면, 그에게 (미리) 말하지 않은 이상, 그가 없는 동안에는 그것을 건드리지 마라.

43. 형제가 따로 자리를 옮기며 네게 “나에게서 이런 물건을 사라”고 말한다면, 살 수 있다면 그에게서 사라. 그러나 네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다면, 그들의 동의와 의견 없이 그렇게 하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너와 함께 사는 사람들을 모욕하게 될 것이다.

44. 어떤 일로 인해 네 고향 마을에 가야 할 필요가 있다면, 혈육인 친척들을 대할 때 지나치게 친근하게 굴지 않도록 주의하고,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지 마라.

45. 형제로부터 일시적으로 무엇인가를 빌렸다면, 소홀히 하지 말고 가능한 한 빨리 돌려주도록 노력하라. 만약 그것이 어떤 작업 도구라면, 네 일을 마치는 대로 즉시 돌려주어라. 만약 네가 사용하는 동안 고장 나면, 고치거나 새 것을 만들어라. 이 일에 소홀히 하지 마라.

46. 궁핍한 형제에게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을 빌려주었다가, 그가 갚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것이 무엇이든—돈이든 옷이든—네가 네 능력껏 준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를 괴롭히거나 압박하지 말라.

47. 어느 곳에 와서 살게 되어 방을 얻었고, 그 안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느라 비용을 썼으나, 시간이 지나 그곳을 떠나게 되고, 그 방에 다른 형제가 살게 되었다가 네가 나중에 다시 그곳으로 돌아오게 된다면, 그를 쫓아내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지 않도록 네게 다른 방을 찾아라. 그러나 그 형제가 자신의 뜻대로 그곳을 떠난다면, 너는 어떠한 죄책감에서도 자유로울 것이다. 네가 방에 물건을 남겨 두었다가 그가 그것을 써 버렸더라도, 그에게서 그것을 되찾으려 하지 마라.

48. 방을 떠날 때, 그곳에서 필요한 물건들을 가지고 나가지 말고, 가난한 형제를 위해 그곳에 남겨 두어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네가 가는 곳에서 너를 잘 돌보아 주실 것이다.

49. 너를 괴롭히는 어떤 생각이라도, 주임 신부님께 털어놓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라. 그러면 그 생각에서 해방될 것이다. 왜냐하면 영들은 자신의 생각이 선하든 악하든 간에 그것을 숨기는 사람 안에 가장 깊이 자리 잡기 때문이다.

50. 성찬에 참여할 때 형제에게 악의를 품지 않도록 조심하라. 그런 경우 네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51. 만일 성경 말씀에서 어떤 비유적(알레고리적) 의미가 드러난다면, 그것을 비유적으로 해석하되, 글자 그대로의 의미(혹은 문자적 의미)를 훼손하지 말라. 그래야만 네 이성을 성경보다 더 신뢰하는 일이 없으니, 이는 교만의 표징이기 때문이다.

52. 만일 네 형제가 이단자들의 말에 현혹되어 무지함으로 인해 믿음에서 벗어나다가 나중에 다시 돌아온다면, 그를 멸시하지 말라. 이는 그에게 있어 무지에서 비롯된 일이었기 때문이다.

53. 신앙을 지키고자 할 때 이단자들과 대화하는 것을 조심하라. 그들의 악한 말들이 어떤 식으로든 너(자신)를 해치지 않도록 하라.

54. 이단적이라고 소문난 책을 만나면, 네 마음을 치명적인 독으로 채우지 않도록 그것을 읽으려 하지 말고, 네가 깨달은 바를 지키되, 거기에 아무것도 더하지도 말고, 아무것도 빼지도 말라.

55. 사도께서 말씀하신 대로(딤전 6:20; 1:10), 건전한 가르침에 반하는 거짓된 이성을 경계하라.

56. 네가 젊고 아직 육신을 정복하지 못했다면, 선조들의 높은 덕행을 듣고 그것들을 향해 나아가되, 안일함에 빠져 그것들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꿈꾸지 말라. 네가 수고로이 그것들을 가꾸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네게 오지 않을 것이나, 네가 그렇게 한다면 그것들은 저절로 네게 올 것이다.

57. 낙담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낙담은 수도자의 열매를 헛되게 만들기 때문이다.

58. 어떤 정욕과 싸울 때, 겁내지 말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엎드려 온 마음을 다해 말하라. “저는 이것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이 가련한 저를 도와주소서.” 그러면 마음이 평온해질 것이다.

59. 네 방에 앉아 있을 때 수치심이 네 마음에 싹트면, 주의하여 네 영혼이 너를 지배하지 못하게 저항하고, 서둘러 하나님을 기억하라. 그분은 너를 주의 깊게 지켜보시며, 네가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모든 것이 그분의 면전 앞에 드러나 있음을 기억하고, 네 영혼에게 말하라: 네와 같은 죄인들이 네 죄를 보지 못하도록 그들을 두려워한다면, 모든 이를 주의 깊게 바라보시는 하나님을 얼마나 더 두려워해야 하겠느냐? 이러한 권면을 통해 네 영혼 안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열릴 것이며, 네가 그 경외심과 함께 머문다면, 다음과 같이 기록된 대로 정욕 앞에서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주님을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과 같으니, 예루살렘에서 영원토록 흔들리지 아니하리라”(시 124:1).

60. 만일 네가 전투 중에 원수의 세력에 맞서 싸우다가, 그들이 지쳐서 네 앞에서 물러나 도망치는 것을 보게 된다면, 네 마음이 그 일로 기뻐하지 말라. 왜냐하면 이 영들이 너를 위해 꾸민 사악한 계략이 그들 뒤에 숨어 있으며, 그들은 처음보다 더 악랄한 전투를 너에게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도시 뒤편에 매복해 둔 특별한 전투 부대를 남겨두고, 그들에게 움직이지 말라고 명령한다. 그 후 네가 그들과 맞서 싸울 때, 그들은 마치 기진맥진한 듯 네 앞에서 도망치겠지만, 네가 그들을 쫓아냈다는 사실에 네 마음이 들뜨면 – 네가 성을 떠날 때, 그들 중 일부는 뒤에서 일어나 너를 대적하고, 다른 이들은 앞에서 맞서며, 가련한 영혼을 그들 한가운데에 가두어 더 이상 피할 곳이 없게 할 것이다. – 이 성은 곧, 모든 원수의 전쟁에서 너를 구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온 마음을 다해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61. 만일 전쟁을 네게서 치워 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했으나 그분께서 네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신다 해도 낙심하지 말라. 그분은 네게 무엇이 유익한지 너보다 더 잘 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쟁 중에 네 모든 간구를 하나님께 드릴 때, ‘이것을 내게서 치워 주시고, 저것을 내게 주십시오’라고 말하지 말고, 다음과 같이 기도하라: 주 예수 그리스도여, 저를 도우소서. 제가 주님을 거스르는 죄를 짓지 않게 하소서. 저는 길을 잃었나이다. 제 뜻대로 행하지 않게 하소서. 제 죄로 인해 멸망하지 않게 하소서. 주님의 피조물을 불쌍히 여기소서. 제가 연약하오니 저를 멸시하지 마소서. 제가 주님께 피했사오니 저를 버리지 마소서; 제가 주님께 죄를 지었으니 제 영혼을 치유해 주소서. 저를 괴롭히는 자들이 저 앞에 가득하나, 주님, 주님 외에는 피할 곳이 없나이다; 주님, 주의 자비로 저를 구원하소서. 저를 대적하고 제 영혼을 찾아내어 멸망시키려는 모든 자들이 수치를 당하게 하소서. 주님, 주께서는 모든 일에 강하시며, 주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와 성령께 영광이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 그때 양심이 은밀히 네 마음에 말할 것이니, 어떤 일 때문에 하나님께서 네 말을 듣지 않으시는지, 네가 해야 할 일은 그 일을 소홀히 여기지 말고, 양심이 네게 무엇을 하라고 하든지 그대로 행하라.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분은 사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으시나, 우리의 욕망이 그분께서 우리를 들으시는 것을 방해한다. 아무도 너를 현혹하지 못하게 하라. 땅이 씨 뿌림과 관개 없이는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사람 또한 악을 견디는 고통(자기 학대, 자기 부정)과 겸손함 없이는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없다.

62.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하나님의 경외함 가운데 서서 덕행(to praktikon – 실천 – ton areton)을 지키고 실천하며, 우리 양심의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하고, 하나님의 경외함으로 우리 자신을 살피자. 그리하여 양심도 우리와 함께 해방되어, 우리와 양심 사이에 일치가 이루어지도록 하자. 그때 그녀는 우리에게 파수꾼이 되어, 우리가 무엇을 잘라내야 할지[18] (자신의 의지)를 모두 보여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녀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그녀는 우리에게서 물러나 우리를 버릴 것이며, 우리는 원수들의 손에 떨어지게 될 것이니, 그들로부터는 더 이상 우리에게 어떤 자비도 없을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 “ ”라고 가르치신 대로, “네 원수와 속히 화해하라, 그와 함께 길을 가는 동안에: 네 원수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지 않게 하라. 재판관이 너를 하인에게 넘기면, 너는 감옥에 갇히게 될 것이다. 아멘, 내가 네게 말하노니, 네가 마지막 코드란트를 갚을 때까지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5,25-26). – 양심은 원수라고들 한다. 왜냐하면 사람이 육신의 욕망을 따르려 할 때 양심이 그에게 저항하고, 사람이 양심의 말을 듣지 않으면 그를 원수들에게 넘겨주기 때문이다. 호세아는 에브라임을 애도하며 왜 “에브라임이 원수를 이기고, 정의를 짓밟았다”(호세아 5,11)라고 말했을까: “이집트를 찾았으나, 어쩔 수 없이 앗시리아 사람들에게 끌려갔다”(호세아 7,11). 이집트는 마음이 육신의 욕망을 추구했음을 의미하고, “어쩔 수 없이 앗시리아 사람들에게 끌려갔다”는 말은 비록 마지못해 적들을 위해 일하게 되었음을 뜻한다.

63.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육신의 욕망의 손아귀에 빠지지 않도록 스스로를 돌보자. 그래야 그 욕망이 우리의 의지와는 달리 우리를 앗시리아인들에게 넘겨주지 않을 것이다. (다음과 같은) 쓰라린 말씀을 들어 봅시다. 앗시리아 왕이 이스라엘 땅에 와서 에브라임과 이스라엘 백성을 앗시리아로 이주시켜, 후잔 강인 엘레와 아모라에 정착시켰으며, 그들은 오늘날까지 그곳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때 앗수르 왕은 자기 백성 중 (일부)를 보내어 이스라엘 땅에서 살게 하였는데, 그들 각자가 우상을 만들어 숭배하였다. 그들은 오늘날까지 그곳에 머물러 있다 (열왕기하 17:6, 24, 25, 29). 이 일이 에브라임에게 일어난 것은 그가 “적과 결탁하여 정의를 짓밟았기” 때문이다.

64. 형제들아, 이제 너희는 자기의 악한 욕망을 따르고 양심을 짓밟는 자들에게 닥친 결말이 무엇인지 알았느냐? 사랑하는 자들아, 그들에게 부러워하지 말고, 죽을 때까지도 죄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거룩한 양심에 순종하여 하늘나라를 상속받은 성도들을 본받자. 그들 각자는 자신의 족보 안에서 흠 없이 세상을 떠났으나, 그들의 이름은 모든 세대에 걸쳐 지워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 우리가 사랑하는 야곱을 본보기로 삼자. 그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따라 부모의 말을 순종했으며, (그들에게서) 축복을 받은 후 메소포타미아로 가서 그곳에서 자식을 얻고자 했으니, 이는 부모에게 불순종하던 가나안 여인들에게서 자식을 낳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그는 지팡이와 기름 그릇을 가지고 베델, 즉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의 그곳에 이르러 거기서 쉬었는데, 밤에 환상 중에 하늘에서 땅까지 뻗어 있는 사다리의 형상과 그 위를 올라가는 하나님의 천사들을 보았습니다. – 주님께서는 그 사다리 위에 서 계셨다. 이는 장차 하나님을 섬길 자를 위한 표징이니, 비록 처음에는 그에게 미덕의 모습이 드러나더라도, 이를 위해 수고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이르지 못할 것임을 의미한다. 야곱이 일어나 하나님과 언약을 맺어 그분의 종이 되기로 하였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굳건하게 하시며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지키리라” 하셨다(창 28:1–15). 그리하여 그는 그곳에서 아내를 얻기 위해 메소포타미아로 갔고, 어머니의 형제의 딸인 라헬을 보고 그녀를 사랑하게 되어, 그녀를 얻기 위해 일곱 해를 일했으나, 먼저 레아를 아내로 맞이하기 전까지는 라헬을 그에게 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라헬을 얻기 위해 또 다른 일곱 해를 일할 때까지 라헬은 아이를 낳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이 말씀(이야기)이 의미하는 바이다.

65. (그 나라는) 메소포타미아라고 불리는데, 이는 두 강 사이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강의 이름은 티그리스이고, 두 번째는 유프라테스이다. 첫 번째 강은 아시리아인들과 마주 흐르고, 두 번째 강은 적(장벽)이 없으나 ‘넓은 들판으로 흐르는’ 강으로 불린다. 티그리스는 ‘이성’을, 유프라테스는 ‘겸손한 지혜’를 상징한다고 해석된다. 리아는 육체적 수고를, 라헬은 참된 관조를 상징한다. 이는 메소포타미아에 사는 한 사람에게 실현되는데, 그는 이성을 바탕으로 육체적 노동을 수행하며 아시리아인들의 적대감에 맞서고, 겸손을 통해 참된 관조로 올라간다. – 그러나 레아는 자신의 모든 자녀를 낳을 때까지 라헬은 그에게 아이를 낳지 못했고, 그는 라헬을 위해 또 다른 7년을 일해야 했다. 이것이 바로 의미하는 바는, 사람이 모든 활동적인 여정을 완수하지 않으면, 진정한 관상은 그 안에서 자유(혹은 자유로운 발현)를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두 아내 모두 그의 것이었지만, 그는 리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했는데, 리아는 “눈이 약했기” 때문이다. – “라헬은 눈매가 매우 아름다웠다”(창세기 29, 17). 이 말은 첫 번째 아내가 눈이 병들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해 준다. 즉, 사람이 육체적인 (수고) 속에 머무는 한, 그는 아직 참된 관조의 영광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원수는 늘 그렇듯이 그의 일에 사람에게 아첨하는 마음을 섞어 넣지만, 그는 이에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 레아가 한동안 아이를 낳지 못하게 되자, 남편에게 자신의 여종 젤프를 주었고, 그 후 다시 아이를 낳아 그 아이에게 ‘아시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는데, 이는 ‘부’를 의미한다. 레아가 더 이상 아이를 낳지 않게 되자, 그때 하나님께서는 라헬을 기억해 주셨다(창세기 30:22). 이는 육체적인 수고가 감각을 정화시키고, 감각이 정욕에서 해방될 때, 비로소 참된 관상이 마음에게 그 영광을 드러낸다는 것을 의미한다(혹은 온전한 영광 속에서 마음에게 자신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 레아의 아들들이 야곱에게 도움이 되었지만, 그는 요셉을 그 누구보다 더 사랑했다. 이는 육체적인 수고가 사람을 원수로부터 보호해 주지만, 진정한 관상이 그를 하나님과 결합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 왜 야곱이 요셉을 보자마자 곧바로 부모 곁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는가(창 30:25)? 그것은 형제들 위에 군림할 왕이 자신에게 태어났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후, 야곱이 자신의 모든 군대(진영, 행렬)를 야모크(슬라브어 및 러시아어 – 야복)을 건너고, 혼자 반대편에 머물렀을 때, 그에게 “이제부터 네 이름은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 불릴 것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의 기쁨을 받았으니(창세기 32:28), 야곱이라 불린 것은 그가 원수를 이겼기 때문이며, (그렇게 불리다가) 비로소 그러한 축복을 받고 원수의 손아귀에 있던 자신의 감정을 (포로 상태에서) 구원할 때까지였다. 그 감정이 그에게서 해방되었을 때, 그는 이스라엘, 즉 하나님을 뵙는 이성으로 개명되었다. 왜냐하면 마음이 신성의 영광을 볼 수 있는 경지에 이르면, 그때 적대적인 원한이 그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사우가 분노에 차서 그를 맞이하러 나왔지만, 야곱의 겸손한 지혜가 그의 악의를 누그러뜨렸고, 더 이상 야곱 자신이 에사우를 이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굽힌 것이 그를 이긴 것이다. 비록 원수가 그 사람이 이룬 위대한 영광을 보고 그를 시기할지라도, 그를 해칠 수는 없으니, 하나님께서 그를 도우시기 때문이다. 기록된 바와 같이, “네가 태어난 땅으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창 31:3)고 하셨다. – 마침내 그는 살림에 이르러 그곳에서 밭을 사서, 슬픔의 날에 그의 기도를 들으신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세웠다(창세기 33:19, 20). 살림이라는 이름은 ‘평화’를 뜻하는데, 즉 사람이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는 싸움을 겪은 후에야 비로소 평화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는 의미이다. 야곱은 열두 개의 돌로 제단을 쌓고, 메소포타미아에서 수고한 노동의 열매로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다.

66. 사랑받는 모세도 그러했다. 그는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 파라오의 손에서 구원하고, 홍해를 건너게 하며, 모든 원수들이 죽는 것을 목격한 뒤, 예수에게 아말렉을 멸망시키도록 보냈고, 자신은 산 꼭대기에 서서(기도하며) 아론과 오르가 그의 손을 받쳐 주어, 그들이 십자가의 표징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했다. 그 후 예수께서 아말렉을 멸망시키고 기쁨으로 돌아오자, 모세는 산 아래 열두 돌로 제단을 쌓고 그곳을 “주님은 나의 피난처”라고 이름 지었다(출 17,15). 이는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손으로 아말렉과 싸우시기 때문이다. – 아말렉이라는 이름은 낙담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사람이 자신의 욕망을 피하기 시작하고, 죄를 버리며, 하나님께로 피신할 때, 낙담, 즉 첫 번째 적,이 그를 대적하여 다시 죄로 돌아가게 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 낙담은 하나님께 부지런히 의지함으로써 쫓아내어지며, 이러한 의지에는 절제가 도움이 되고, 절제는 육체적인 수고를 통해 유지되며, 바로 이를 통해 이스라엘이 해방된다. 그때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말하되, “나는 연약하나, 주님은 대대로 나의 도우심이시니이다.”

67.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도 그러했다. 그는 자신에게 대적하는 모든 악한 예언자들을 멸망시킬 수 없었으나, 열두 돌로 제단을 쌓고 그 위에 장작을 쌓은 뒤, 그 위에 거룩한 제물을 올려놓고 물을 붓자, 하나님께서 그에게 불이 되어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을 태워 주셨다. 그제서야, 바로 그 순간에 그는 자신의 원수들에게 대항하여 담대하게 나섰습니다(열왕기상 18:40 이하). – 그가 그들을 전멸시켜 단 한 명도 남지 않게 하자, 그때 그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말했습니다. “주께서 이 모든 일을 행하셨습니다. 기록된 바와 같이, 그가 자신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열왕기상 18:42). 이와 같이, 만일 마음이 자신의 감각을 꼼꼼히 다스린다면, 불멸(혹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며, 그 불멸(영원한 생명)은 그를 하나님께서 그에게 열어 주시는 이 말씀들로 이끈다. 그 후, 엘리야의 “소년”이 “바라보아” 일곱 가지 정욕 중 어느 하나도 일깨워지는 것을 보지 못할 때, 그때 “남자의 발자국처럼 작은 구름이 바다에서 물을 끌어올리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성령(3열왕기 18:43, 44)의 안식이다. – 불멸이란 바로 이것이다. 즉, 자신의 수고를 온전하고 무사히 간직하며, 용서를 구했던 일로 되돌아가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의 수고를 받아들이시고, 그가 온전하게 행하는 바가 원수의 세력으로부터 보존될 때, 그때 그의 원수들은 그에게 대항하여 설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 안에 자신들의 뜻이 없음을 보게 되면, 스스로 사라지게 될 것이니, 기록된 바와 같이: “너희는 너희 신들의 이름을 부르라. 나도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불로 응답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니라” (열왕기상 18:24). (“그들이 부르나… 소리도 없고 응답도 없더라” – 26절). 이는 원수의 힘으로 사람에게 심겨진 모든 것에 해당되는 일입니다. 원수들은 원치 않는 자 안에서 자신들의 뜻을 이룰 수 없으며, 그들은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온 힘을 다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으니,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그의 마음이 그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록된 바와 같이: “너희는 너희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라. 나도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라.” 그러나 그들의 뜻이 그분 안에 있지 않았으므로, 그분은 그들의 어떤 것도 들어주시지 않으셨다.

68. 이러한 일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모든 이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당시의 사람들에게 이는 예표였으나, 이는 불멸을 얻기 위해 분투하며 모든 원수의 화살로부터 그들을 지켜준 그들의 발자취를 따르기로 결심한 우리에게 교훈이 되도록 기록된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어떤 수고에도 의지하지 않았기에,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그분의 보호 아래로 자신을 맡겼고, 하나님의 보호는 그들에게 견고한 성벽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믿었으며, 겸손히 시편 기자가 말한 대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건축하는 자들의 수고가 헛되고, 주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지키는 자의 경계가 헛되리라” (시 126:1).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온 힘을 다해 그분께 복종하고, 그분 외에는 다른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는 것을 보시면, 그 사람을 능력으로 충만하게 하시며 말씀하시기를: “야곱아, 작은 이스라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이사야 41:14), 그리고 다시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원하였고, 네 이름을 불러 너를 내 것으로 삼았으니, 너는 내 것이다. 네가 물을 건널 때에도 내가 너와 함께 하리니, 강물이 너를 덮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속을 지날 때에도 타지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태우지 못하리라.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로서 너를 구원하는 자니라” (이사야 43:1–3). 마음이 이처럼 용기를 북돋우는 말씀을 들을 때, 담대히 원수의 세력에 맞서며 말하리라. “누가 나와 싸우겠느냐? … 내게로 오라. 보라, 주님께서, 주님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누가 나를 해치겠느냐? 보라, 너희는 모두 옷처럼 낡아지고, 헝겊 조각처럼 썩어 없어지리라” (이사야 50, 8, 9).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도 겸손을 지니고 그로 말미암아 보존된 자들의 수에 포함되도록 하실 수 있으시니, 그 겸손이 그들에게는 투구가 되어 원수의 모든 화살로부터 그들을 보호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니, 그분의 능력과 영광과 권세가 영원토록 있기를. 아멘.

 

5. 신자들에게 주어진 계명과, 평화롭게 서로 함께 살기를 원하는 이들의 가정 운영에 관하여

1. 함께 길을 갈 때, 너희 중 가장 연약한 이의 뜻을 모든 일에 유의하라. 그가 잠시 쉬어야 할지, 아니면 제시간보다 조금 일찍 식사를 해야 할지.

2. 함께 어떤 일을 하러 나갈 때, 너희 각자는 자기 자신에게만 주의를 기울이고 형제에게는 주의를 기울이지 말라. 그를 가르치려 하지 말며, 무엇을 명령하려 하지 말라.

3. 거처에서 무언가를 나누거나, 예를 들어 난로나 다른 것을 마련할 때, 각자의 일을 하는 사람은 그가 원하는 대로 하게 내버려 두라. 그러나 그가 “사랑을 베풀어 주십시오, 저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저는 (이것저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하는데, 너희 중에 (그 일을) 할 줄 아는 이가 있다면, 그가 거짓말하지 말고 “나도 모른다”고 말하지 않도록 하라. 그런 겸손은 하나님께 합당하지 않다.

4. 네 형제가 어떤 일을 (제대로 하지 않고) 하고 있는데 네가 그것을 본다면, 그에게 “네가 이 일을 망쳤다”고 말하지 마라. 그러나 그가 “사랑을 베풀어 주십시오, 저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당신은 가르쳐 주지 않고 침묵만 지키시네요”라고 말하는데도 네가 침묵한다면, 네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네가 (마음속에) 교활함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5. 네 형제가 음식을 끓였는데 맛이 별로라면, “네가 요리를 못했구나”라고 말하지 마라. 이는 네 영혼에 죽음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네가 다른 사람에게서 그런 말을 듣는다면 얼마나 슬플지 생각해 보라. 그러면 마음이 평온해질 것이다.

6. 함께 노래할 때, 누군가 가사를 틀리면 그 사실을 지적하지 말고 당황하게 하지 마십시오. 가사를 빠뜨리더라도 그냥 두십시오. 하지만 그 사람이 미리 “사랑을 실천하십시오. 제가 틀리거나 빠뜨리면 알려 주십시오”라고 말한다면, 그에게 지적해 주십시오.

7. 식사 자리에서 음식을 먹을 때, 여러분 중 누군가가 그 음식을 먹고 싶지 않더라도 “이건 먹을 수 없다”고 말하지 말고, 하나님을 위하여 죽을지언정 스스로를 억지로라도 (침묵하거나, 다른 사람들처럼 먹도록) 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를 평안하게 하실 것이다.

8. 함께 어떤 일을 할 때, 여러분 중 누군가가 소심함 때문에 (일을) 그만두더라도, 그를 책망하지 말고 오히려 그를 너그럽게 대하거나 관대하게 대해 주십시오.

9. 형제들이 너희를 찾아올 때, 결코 너희에게 해가 될 만한 어떤 것에 대해서도 캐물어서는 안 된다. 그래야 그들로부터 너희 거처에 속박(당혹감, 마음의 상처)이 남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방문한 이가 참지 못하고, 앞서 언급된 대로 여러분에게 해가 될 만한 말을 여러분 중 누군가에게 한다면, 그것을 들은 이는 형제들 중 누구에게도 그 말을 전하지 말고 침묵하라. 그래야 그 속박이 (온 것처럼) 그 한 사람에게서만 지나가게 되고, 그가 그들의 마음을 치명적인 독으로 채우지 않게 될 것이다.

10. 어떤 필요로 인해 밖으로 나갈 때는, 네게 어울리지 않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누구에게도 묻지 말아라. 그래야 온전한(흠 없는) 상태로 다시 네 방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원치 않게 무언가를 듣게 된다면, 돌아와서 형제들에게 그 말을 전하지 말아라.

11. 밖에서 지낼 때, 어디를 가든지 어떤 일에서도 제멋대로 행동하지 마라. 그래야 (보는 이들이) 너희의 품위 있는 태도에서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은밀하거나 겉으로 드러나는 침묵 속에서 (자신을 방종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 모든 정욕(방종으로 인한 행동의 실수)은 다른 연약한(형제)에게서 드러나기 마련인데, 이는 그의 마음이 무활동(혹은 공허)하여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알아두라,) 하나님의 도우심, 소망, 온유함, 양심, 자기 뜻을 버림, 그리고 모든 일에 자신을 절제하는 것은 겸손한 자의 마음에 자리 잡는 반면, 교만, 다툼, 자기를 형제보다 더 아는 자로 여기는 것, 양심을 짓밟는 것, 네 형제가 너 때문에 슬퍼한다는 사실에 무관심하며 “나와 무슨 상관이냐”라고 말하는 태도는 잔인한 자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다.

12. 네가 수공예 일을 하고 있을 때, 네 형제가 네 방에 들어오면, 결코 네가 그보다 더 많이 일했는지, 아니면 그가 너보다 더 많이 일했는지 따지지 말라.

13. 연약한 이와 함께 일할 때, 마음속으로 그보다 더 많이 해내고 싶다고 탐내지 말라.

14. 네 형제가 어떤 일을 하다가 망쳐 놓더라도, 그가 스스로 “형제여, 나를 가르쳐 주시오”라고 말하지 않는 한, 그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마라. 만일 네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알면서도 침묵한다면, 그것은 네게 죽음이다.

15. 어떤 수공예 일을 하든지, 네가 몫으로 얼마나 만들었는지, 형제가 얼마나 만들었는지 캐묻지 않도록 힘쓰라. 이는 훈련받지 못했음을 나타내는 표이기 때문이다.

16. 형제들과 함께 일하러 갈 때, 네가 그들보다 더 많이 일했다는 것을 그들이 알기를 바라지 말라. –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바이다. 곧, 사람이 행하는 모든 일을 은밀히 행하라는 것이다.

17. 만일 네 형제가 소심함으로 인해 (불만스러운) 말을 한다면, 기쁨으로 그를 참아 주라. 왜냐하면 (일어난 일을) 하나님의 심판(의롭고 편파적이지 않은)으로 살펴본다면, 네가 죄를 지은 것(형제가 아니라)임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18. 형제들과 함께 살 때, 네 마음이 평소보다 더 엄격하게 식사하는 것을 강요하려 한다면, 네 마음에 이렇게 말하라. “여기 사는 연약한 (형제)가 나의 주인이시다.” 만약 절제를 더욱 강화하고 싶다면, 따로 작은 방을 마련하고, 연약한 형제를 당황하게 하지 마라.

19. 만약 너희에게, 이전에 그가 허영을 좋아하고(filoshematikos esti), 과시하기를 좋아하며, 자신을 박식한 사람이나 수행자 등으로 꾸미는 것을 좋아한다는 소문을 들은 순례자 형제가 찾아온다면, 그가 스스로 그 결점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말로 그를 추궁하지 말고, (그 후에도) 알게 된 사실에 따라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왜냐하면 그 형제가 이를 눈치채면 상처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20. 필요한 것이 있어 무언가를 받고 싶다면, 형제를 향해 (마음속으로) “왜 저절로 내게 주지 않았을까?” 하고 불평하지 말고, 담대하고 솔직하게 그에게 말하라. “사랑을 베풀어 주십시오. 저에게 이것저것을 주십시오. 제가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의 거룩한 순결(혹은 솔직함)이다. 만약 네가 말하지 않고, 그 대신 마음속으로 불평하며 (형제를) 책망한다면, 네가 옳지 않은 것이다.

21. 만일 너희 사이에 성경의 어떤 말씀에 대한 대화가 오가게 되면, 그것을 알고 이해하는 자는 자신의 능력 범위 내에서 자신의 뜻을 형제보다 뒤로 미루고(그에게 양보하며), 형제를 기쁨 가운데 안식하게 하라. – 무엇보다도 추구해야 할 말씀은 바로 이것이다: 형제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22. 자신이 서게 될 두려운 심판을 마음에 새기는 사람은, 그 두려운 순간에 변명할 말을 찾지 못해 입이 막히지 않도록 온갖 노력을 다해 이를 이루려 한다.

23. 이 세상의 일들을 캐묻지 말라. 그래야만 모든 사람이 배의 배설물을 버리러 가는 곳과 같아지지 않을 것이니, 그곳에는 그로 인해 심한 악취가 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라리 하나님께 드리는 깨끗한 제단이 되어, 내면에 (영적인) 제사장을 세우라. 그 제사장은 아침과 저녁마다 이 제단 위에 (이 제단에). 이 제단을 향이 없는 상태로 절대 방치하지 말고, 온갖 기도로 주님의 면전 앞에 끊임없이 (올라가도록) 스스로를 다그치라. 그리하면 주님께서 너희에게 순수함과 어린아이 같은 순결함을 주시고, 그와 반대되는 것, 즉 온갖 간사함, 마귀의 지혜, 호기심(이것저것 보려고, 이것저것 듣기 위해 사방으로 방황하는 것), 자만심, 악한 마음을 제거해 주시기를 구하십시오. 왜냐하면 그러한 모든 것은 그렇게 행하는 자들의 수고를 헛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현명하게 경외하고, 하나님에 따라 자신의 양심에 순종하며 귀를 기울인다면, 앞서 말한 모든 것에 대해 스스로 마음속으로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내면)에 그 주인(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런 가련한 사람의 집(내면)은 방치되어 제멋대로 되어 버리고,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안에서 마음대로 말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은 자신의 지배 아래 있지 않고, 원수들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이다.

24. 여러분이 어떤 작은 일을 하러 나가야 할 때, 아무도 다른 사람을 멸시하지 말고, 형제가 독방에서 양심의 가책을 받으며 괴로워하는 것을 내버려 둔 채 혼자 나가지 말고, 사랑으로 그에게 말하라. “가고 싶니? 가자.” – 그리고 그 순간 형제가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하거나(영적으로 평온하지 못하거나) 육체적으로 쇠약해 보인다면, 지금 당장 가야 한다고 고집하며 다투지 말고, 잠시 미루고 형제에 대한 연민 어린 사랑으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라. 형제를 모욕하지 않도록, 어떤 일에서도 형제에게 반대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25. 아버지나 형제와 함께 사는 사람은 외부인과는 어떤 일에도 상의하지 말고, 모든 일을 함께 사는 사람과 상의하라. 이것이 바로 평화와 순종이다.

26. 네 아버지나 형제와 함께 사는 경우, 누구와도 몰래 친분을 맺거나, 함께 사는 사람들이 알기를 원치 않으면서 누군가에게 몰래 편지를 쓰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게 하면 너 자신도 망하고 그들도 망하게 될 것이다.

27. 네보다 윗사람과 함께 산다면, 그에게 묻지 않고 가난한 이를 위해 자선 활동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이를 은밀히 행해서는 안 된다.

28. 마음속 생각을 묻는다면, 이미 실행한 후에 묻지 말고, 현재 너를 괴롭히는 것이 무엇인지 말하라. 거주지를 옮기는 일, 수공예를 배우는 일, 수공예의 변화를 바꾸는 일, 누군가와 동거를 시작하는 일, 혹은 그런 동거를 끝내는 일 등, 모든 것에 대해 자유롭게 물어보되, 행동에 옮기기 전에 물어보라. 또한 영적 약점이나 육체적 욕망에 대해서도, (그 생각들이) 아직 너를 유혹하고 있을 때 (물어보라). 그리고 물을 때, 아직 그 유혹에 따라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말하지 말고, 이미 상처를 입었다고 말하며 그 상처에 대한 치료법을 구하라.

29. 네 생각에 대해 물을 때, 위선자가 되지 말고, 한 가지를 다른 것으로 대신 말하지도 말고, 마치 다른 누군가가 이렇게 저렇게 행동한 것처럼 (말의 회피를) 하지 말고, 진실을 말하며, 네게 어떤 말을 듣게 되더라도 그대로 행할 준비를 하라. 그렇지 않으면, 네가 묻는 장로들을 비웃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 자신을 비웃는 것이 된다.

30. 장로들에게 훈계를 구할 때, 마음속에서 장로들보다 더 많은 말을 하는 자들의 말을 듣지 말고,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며 말하라. “저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저에 대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바를 제 아버지들이 저에게 말하도록 이끌어 주소서.” 그리고 나서 아버지들이 무슨 말을 하든지 믿음으로 행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너를 평안하게 하실 것이다.

31. 형제들과 함께 살면서 어떤 이유로든 안식을 얻지 못할 때: 수공예 때문이든, 생활의 얽힘(과 비좁음) 때문이든, 평온한 생활 때문이든, (마주치는) 어려움을 참을 수 없기 때문이든, 낙담 때문이든, 혹은 침묵을 지키고 싶어서, 혹은 멍에(복종)를 짊어질 수 없어서, 혹은 네가 원하는 일을 할 기회가 없어서, 혹은 필요한 것을 모두 갖추지 못해서, 혹은 큰 결핍으로 스스로를 괴롭히고 싶어서, 혹은 몸이 약해 (그들이 하는) 수고를 감당할 수 없어서, – 혹은 대체로, 네 마음을 그들로부터 떠나게 하는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 보라, 떠나겠다고 동의하지 말고, 멍에를 벗어던지지 말고, 슬픔을 안고 떠나지 말라 – 혹은 (그들에 대한) 모욕감을 품고 은밀히 도망치지도 말고, 네 내면(마음속)에 그들에 대한 책망과 비난이 가득할 때, 그들에 대한 원한으로 인해 너를 뒤덮은 감정에 사로잡혀 그들과의 형제애를 잊어버리지 말고, – 오히려 이 시기에 평화를 찾아라. 그래야 네 마음이 어디로 떠나든 평온할 것이니, 그들에 대한 비난은 네가 짊어지고, 함께 살았던 형제들을 어떤 점에서도 비난하지 말라; 네 원수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이 네게) 형제들의 선행을 악행으로 뒤바꾸어, 스스로에 대한 책망을 피하고 네 형제의 책망으로 네 자신의 책망을 가리려 한다면, 그로 인해 네가 정착한 곳에서 원수들의 손에 넘어질 것이다.

32. 어느 곳에 정착하러 왔을 때, 그곳의 생활 방식을 파악하기 전에는 거처로 쓸 방을 정하지 마라. – 그곳에 너에게 걸림돌이 될 만한 것이 있는지, 지나친 근심거리(신경 쓸 일이 많다는 것) 때문인지, 혹은 (네게 유익하지 않은) 어떤 사람들을 보게 될지, 혹은 명성(너나 그 장소에 대한) 때문인지, 혹은 안락함(너무 평온하고 편안하게 살게 될 것) 때문인지, 혹은 친구들로부터 오는 유혹 때문인지. 네가 현명하다면, 며칠 안에 그곳이 너에게 죽음인지 삶인지 모두 알게 될 것이다.

33. 형제에게 며칠 동안 머물도록 네 방을 내어준다면, 그를 마치 네 권세 아래 있는 사람인 양 대하지 마라.

34. 누군가에게서 방을 빌려 잠시 머물게 된다면, 아무것도 훼손하지 말고, 그 방에 무언가를 설치하기 전에 먼저 그 방을 빌려준 사람에게 그것이 마음에 드는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물어보지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양심에 어긋나는 일이 될 것이다.

35. 누군가와 함께 살거나 일시적으로 머무르면서 그로부터 어떤 계명을 받았다면, 하나님을 위하여 그 계명을 무시하거나, 공개적으로나 은밀하게나 그 계명을 어기지 않도록 조심하라.

36. 만일 네 방에서 홀로 지내며, 특정 시간에 식사를 하기로 정하거나, 조리된 음식을 먹지 않기로 하거나, 그 밖의 다른 규칙을 정했다면, 나중에 밖으로 나갔을 때, (어디에서든) 식탁에 앉아 누군가에게 “용서해 주십시오, 저는 이것을 먹지 않습니다”라고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네 모든 수고가 헛되이 네 원수들의 손에 넘어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너의 주님이시며 구세주이신 분께서 말씀하셨다. “은밀히 행하라. 그리하면 네 아버지께서 네게 공개적으로 갚아 주실 것이다.” 자신의 수고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것이 헛되이 사라지지 않도록 지키게 된다.

37. 누군가와 함께 살 때, 셀 안이든 밖이든 함께 어떤 일을 하든지, 형제가 너를 그 일로 부르면 “조금만 참아 줘, 이 작은 일만 끝내고 갈게”라고 말하지 말고, 즉시 그의 말에 순종하라.

38. 서로 함께 일할 때, 네가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들에게서 어떤 잘못을 보더라도 그것을 마음에 품지 말라. 그래야 (너와 함께 사는) 형제들에게 그 일에 대해 무심코 말해 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이는 네 영혼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39. 형제들이 너와 함께 살고 있는데, 때때로 하루 종일 고된 일을 하게 된다면, 정해진 시간보다 먼저 음식을 맛보게 하여 그들을 위로하라. 오직 자신만을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심판을 경청하라. 네가 어떤 일을 하든지,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눈앞에 두어라.

40. 어떤 곳에 가서 살게 된다면—혼자서든, 너보다 먼저 그곳에 정착한 이들과 함께든—영혼에 해롭거나 수도자답지 않은 것, 어떤 기술이나 행위를 보게 되더라도, 그것을 지적하기 위해 입을 열지 마라; 오히려 그곳에 머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른 곳으로 가되, 그들을 비난하지 않도록 네 입을 삼가라. 이는 네게 죽음과 같기 때문이다.

41. 만일 네가 정욕에 약하다면, 누구에게도 네 정욕적인 생각을 마치 신실한 이에게 털어놓듯이 드러내지 않도록 조심하라. 그러한 행위는 네 영혼에 파멸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42. 너희 사이에 우스꽝스러운 말이 터져 나온다면, 너희의 (웃음) 소리가 들릴 정도로 커지지 않도록 조심하라. 이는 훈련되지 않았음을 나타내는 표징이며, 너희 안에 경외심이 없음을 드러내는 것이니, 너희 안에 경계하는 이가 없기 때문이다.

43. 오늘날 하나님의 진노가 온 우주를 덮었으니, 무엇을 듣더라도 당황하지 말고,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하라. ‘이것이 우리가 우리 죄로 인해 가게 될 그곳(지옥)에 비하면 무엇이겠는가?’

44. 하나님을 위하여 사랑을 실천하고, (여기에 기록된 것을) 읽어보아 이를 지키도록 하라. 믿는 자에게 있어 이를 사소한 일(하찮은 일)로 여기는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 만일 이 말씀을 순수함과 분별력을 가지고 지키신다면, 기쁨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의 안식에 이르실 것이요, 지키지 않으신다면 이곳에서도 고난을 겪게 될 것이며, 육신을 떠날 때 성경의 말씀대로 지옥으로 끌려가게 될 것입니다. 앞서 말한 바를 위해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오셨으니(즉,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에게 안식을 주시기 위함), 그러나 우리의 완고함이 우리 마음의 욕망으로 인해 우리를 눈멀게 하니, 이는 우리가 하나님보다 그 욕망들을 더 사랑하고, 정욕을 사랑하는 만큼 그분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45. 보라, 내가 이 말까지 너희에게 쓰도록 스스로를 다그쳤으니, 이전의 말만으로는 너희에게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랑을 실천하고, 이제부터 수련에 매진하라. 너희의 마음이 할례받지 않은 채로 머물지 말고, 너희의 남은 짧은 날들 동안 스스로를 도우라(너희의 구원을 위해 힘쓰라). 만약 이 것들, 즉 겸손과 평화, 인내, 자기 의지의 절제와 사랑을 지키신다면 (그리하여 유익하게 삶을 살아가실 것이며), 반대로 지키지 않으신다면, 여러분에게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시기와 열광, 다툼과 교만, 불평과 불순종이 닥칠 것이며, 그리하여 너희는 시간을 헛되이 보내게 되고, 육신을 떠날 때 진실로 지옥으로 가게 될 것이다. 그러니 형제들을 거룩한 사랑으로 사랑하고, 형제를 상처 입힐 수 있는 부적절한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도록 너희 혀를 조심하라. 우리 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행하고 지키게” 하실 능력이 있으시니, 그분의 은혜로 자비를 얻어, 그분을 기쁘시게 한 모든 성도들과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그분께 영광과 존귀와 경배가, 지금과 항상, 그리고 영원토록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6. 선한 침묵을 지키고자 하는 이들에게

선한 침묵을 지키고자 하는 이들은, 자신을 훔쳐가는 도둑들을 물리치고, 포로 생활과 괴로운 노동 속에서 시간을 허비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경계해야 하며,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에 마음을 쏟거나 자신의 죄를 잊어버리지 말아야 한다 .

1. 성경을 탐구하려는 사랑은 논쟁과 원한을 낳지만, 자신의 죄를 통회하는 울음은 평화를 가져온다. 자신의 방에 앉아 있는 수도사가 자신의 죄를 제쳐두고 성경 탐구에 몰두한다면, 그것은 죄이다. 누가 자신의 마음을 (성경 탐구에) 바쳐, – 왜 성경이 이렇게 저렇게 말했는지 – 스스로를 다스리기 전에(자신 안의 주의를 집중하거나, 자기 통제력을 얻거나, 정욕에서 벗어나기 전에), 그 사람은 탐구하는 마음을 가지고 극도의 속박에 빠지게 되며, 어떤 것에도 사로잡히지 않도록 경각심을 가지고 경계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낮추기를 좋아한다.

2. 하나님을 무엇에 비유할지 탐구하는 자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요, 어떻게 (더 온전하게) 그분을 공경할지 찾는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속에서 순결을 사랑하는 자이다.

3.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을 알았다(요한일서 2:3) – 그리고 그런 사람은 (시급한 의무감을 가지고) 빚진 자처럼 그 말씀을 이행한다.

4.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며 기도할 때는, 그분이 오셔서 죄에서 너를 구원해 주시기를 바라며, 더 높은 하나님의 은사를 찾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위해 마련된) 더럽혀지지 않고 깨끗한 자리가 있을 때 저절로 오신다.

5. 자기 자신의 이성에 의지하여 자기 뜻을 고집하는 자는 수많은 악령들을 자신에게 끌어당기며[19] , 마음에 슬픔(혹은 회개)을 가져다주시는 (하나님의) 성령과 함께할 수 없다.

6. 성경의 말씀을 보고도 자기 자신의 이성에 따라 그것을 해석하며, 그것이 바로 사실이라고 스스로 확신하는 자(그에 확신을 두고, 그 말씀들을 그렇게 이해해야 한다고 여기는 자)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의 풍요로움을 알지 못하며; 그러나 그것을 보고 “모르겠습니다. 저는 사람일 뿐입니다.”라고 말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에게는, 그의 능력과 생각에 따라 하나님의 풍요로움이 거합니다.

7. 네 생각을 모든 사람에게 드러내려 하지 말고, 오직 네 아버지들에게만 드러내라. 그래야 네 마음에 슬픔을 불러오지 않을 것이다.

8. 네 입을 지키라. 그리하면 네 이웃이 네 앞에서 정직하게 될 것이니 (이웃에 대한 존중이 네 입이 그를 정죄하지 않도록 지켜 줄 것이다).

9. 네 혀를 분별력 있게 하나님의 말씀에 익숙하게 하라. 그러면 거짓이 네게서 멀어질 것이다.

10. 세상의 명예를 탐하는 마음은 거짓을 낳지만, 더욱 깊은 겸손으로 자신을 낮추면 네 마음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싹트게 된다.

11. 이 세상의 영광스러운 자들의 친구가 되고자 하지 말라. 그래야 그 영광(그 영광이 지닌 해로움)이 네 안에서 무뎌지지 않을 것이다.

12. 만일 누군가 네 앞에서 자기 형제를 헐뜯고, 그를 깎아내리며 (그에 대한) 악의를 드러낸다면, 네가 원치 않는 일이 네게 닥치지 않도록 그에게 등을 돌리지 말라.

13. 단순함과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않는 태도(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는 것)는 마음속의 간사를 깨끗이 씻어낸다. 형제와 함께 간사하게 행하는 자(그를 대하는 자)에게는 마음의 슬픔이 피할 수 없다. 입으로는 한 말을 하면서 마음속으로는 교활하게 다른 생각을 품는 자의 모든 예배(leitorgia – 기도)는 헛된 것이다. 그런 자들 중 누구에게도 가까이하지 마라. 그래야 그의 더러운 독에 오염되지 않을 것이다. 악의를 품지 않는 자들과 함께하라. 그리하면 그들의 영광과 순결을 함께 누리게 될 것이다.

14. 사람에게 악의를 품지 말라. 그래야 네 수고가 헛되지 않을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순수한 마음을 품으라. 그리하면 네 안에서 하나님의 평화를 보게 될 것이다. 마치 누군가 전갈에 쏘이면, 그 독이 온 몸을 타고 흘러 심장까지 손상시키듯이, 이웃에 대한 원한도 마음속에서 그러하다. 그 독은 영혼을 찔러 상처를 입히고, 이 악으로 인해 영혼은 고통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자신의 수고가 헛되이 사라지지 않도록 지키고자 하는 자는, 서둘러 자기 안에서 이 전갈, 즉 간사와 악의를 내쫓아야 한다.

 

7. 미덕에 대하여

1. 항상 지혜롭게 마음을 지키며, 마음이 필요로 하는 세 가지 미덕이 있다. 그것은 (마음에) 본래 내재된 열망, 용기, 그리고 게으름 없음이다.

2. 마음이 자기 안에서 발견할 때, 불멸(갱신, 혹은 불멸의 천상 존재들의 완전함)에 도달했다고 믿게 하는 세 가지 미덕이 있다: 하나를 다른 것과 정확히 구별해 내는 분별력, 모든 일을 미리 내다보는 예지력, 그리고 타인의 일에 동조하지 않는 태도이다.

3. 마음에 항상 빛을 비추는 세 가지 미덕이 있다: 어떤 사람에게서도 간사를 보지 않는 것, 너에게 해를 끼치는 자에게 선을 베푸는 것, 그리고 모든 상황을 당황함 없이 견디는 것이다. 이 세 가지 미덕은 그보다 더 큰 다른 세 가지를 낳는다: 사람 안에서 간계를 보지 않는 것은 사랑을 낳고, 너에게 악을 행하는 자에게 선을 베푸는 것은 평화를 얻게 하며, 당하는 일을 동요 없이 견디는 것은 온유함을 가져온다.

4. 영혼을 맑게 하는 네 가지 미덕이 있다: 침묵, 계명 준수, 절제(모든 일에서 자신을 절제하여 좁은 길을 걷게 함), 그리고 겸손한 지혜이다.

5. 다음 네 가지 미덕은 마음이 항상 필요로 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하고, 하나님의 면전 앞에서 엎드리며,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사는지 – 즉, 그를 판단하지 않는 것) 신경 쓰지 않아 그를 판단하지 않도록 하며, 정욕이 속삭이는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다.

6. 네 가지 미덕은 성벽처럼 영혼을 둘러싸고, 원수들로부터 오는 근심에서 벗어나 평온히 숨 쉴 수 있게 해준다: 자비, 분노하지 않음, 오래 참음, 그리고 모든 죄의 씨앗을 뿌리 뽑는 것; 망각에 맞서는 것이 이 모든 것을 지켜준다.

7. 네 가지 미덕은 하느님을 따라 청년(초심자)을 돕는다: 매 순간의 교훈, 게으름 없음, 깨어 있음, 그리고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않음(자신을 무엇으로도 여기지 않음).

8. 네 가지가 영혼을 더럽힌다: 눈을 가리지 않고 도시를 배회하는 것, 여자와의 친분, 세상의 명망가들과의 친분, 그리고 혈육인 친척들과의 대화를 즐기는 것이다.

9. 네 가지가 육체 속의 음란한 정욕을 부추긴다: 충분한 수면, 배부르게 먹는 것, 우스꽝스러운 헛소리, 그리고 몸을 꾸미는 것.

10. 네 가지로 인해 영혼이 어두워진다: 이웃을 미워하는 것, 그를 깎아내리는 것, 그를 시기하는 것, 그리고 그에게 불평하는 것이다.

11. 네 가지로 인해 영혼은 텅 비게 된다(에스므트): 이곳저곳을 떠도는 것, 오락에 대한 사랑, 물질에 대한 집착, 그리고 인색함.

12. 네 가지로 인해 분노가 커진다: 주고받는 일(거래), 자기 뜻대로 고집하는 것, 가르치고자 하는 욕망, 그리고 자신을 현명한 사람으로 여기는 것이다.

13. 사람이 얻기 어려운 세 가지가 있는데, 그것들로 모든 미덕이 지켜진다: 회개, 자신의 죄에 대한 통곡, 그리고 눈앞에 죽음을 두는 것이다.

14. 영혼이 위대한 경지에 이르기 전까지 영혼을 지배하는 세 가지가 있는데, 바로 그것들이 미덕이 이성과 공존하는 것을 방해한다: 사로잡힘(하나님 외의 무엇에 대한 집착), 나태함, 그리고 망각이다. 망각은 사람이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그와 싸우며, 그를 무익함으로 몰아넣는다. 망각은 모든 생각보다 강하며, 모든 악의 근원이자, 사람이 매 순간 자신 안에서 쌓아가는 것을 파괴하는 자이다.

15. 이것이 바로 새 사람의 행실과 옛 사람의 행실이다! 자기 영혼을 사랑하고 그것을 멸망시키기를 원치 않는 자는 새 사람의 행실을 지키나, 이 짧은 시간 동안 (육체의) 안식을 사랑하는 자는 옛 사람의 행실을 행하며 자기 영혼을 멸망시킨다. –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육신 안에서 새로운 사람을 드러내시며 말씀하셨다. “자기 영혼을 사랑하는 자는 그것을 망칠 것이요”(요한복음 12:25), “나를 위하여 자기 영혼을 망치는 자는 그것을 얻으리라”(마태복음 10:39). 그분은 세상의 주님이시며, 그분으로 말미암아 원수의 장벽이 무너졌습니다(엡 2:14). 또한 그분은 “내가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칼을 주러 왔노라”(마 10:34)고 말씀하셨고, 또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으니, 이미 타오르고 있는 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하리라” (누가복음 12:49). 즉, 그분의 거룩한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에게는 그분의 신성의 불이 (뚜렷이 내재되어 있었기에), 그 결과 그들은 자신 안에 영적인 칼을 지니게 되었고, 그 칼로 자신의 육신의 모든 욕망을 잘라내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기쁨을 주시며 말씀하셨다. “평안을 너희에게 남기노라. 내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요한복음 14, 27).

16. 이처럼 이 세상에서 자신의 영혼을 멸망시키지 않도록 주의하고, 자신의 욕망을 잘라낸 자들은 그분께 드리는 제물로 그분의 거룩한 양들이 되었다. 그리고 그분이 신성의 영광으로 나타나실 때, 그들을 자신의 우편으로 부르시며 말씀하시기를: “내 아버지의 복을 받은 자들아, 창세부터 너희를 위해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 너희가 내게 먹을 것을 주었으니”... 등등. (마태복음 25장 34절과 35절). 이것이 바로 이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의 영혼을 망치는 자들이, 곤경에 처했을 때 영혼을 되찾게 되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보상을 받게 되는 방식이다. 반면 자기 뜻대로 행하는 자들은 이 죄 많은 세상에서 물론 자기 영혼을 보존하겠지만, 부의 헛됨에 현혹되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고 이 세상에 영원히 머물기를 바라는 자들은, 심판의 때에 그들의 눈먼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이며, 그들은 저주받은 염소들로 드러나며, 심판자께서 내리시는 무서운 판결을 듣게 될 것이니,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해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가라. 너희는 거절하였으니, 내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도다.”… 등등 (41, 42). 그들의 입은 막혀 버릴 것이며, (과거와 현재의) 자신의 불자비함과 가난함을 떠올리며 할 말을 찾지 못할 것이다. 물론, 그들은 그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여, 우리가 주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았으나… 주께 섬기지 않았나이까?” (44). 그러나 그분은 그들의 입을 막으시며 말씀하시기를, “이들 중 나를 믿는 자 한 사람에게 선을 행한 자는, 곧 내게 행한 것이다.”라고 하실 것이다.

1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 각자가 자신의 능력에 따라 주님의 계명을 지키고 있는지 아닌지 스스로 점검해 봅시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능력에 따라 그 계명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작은 자는 자신의 작은 능력대로, 큰 자는 자신의 큰 능력대로 말입니다. 보물 상자에 자신의 예물을 던져 넣은 자들은 부자였지만, 주님께서는 두 렙타를 바친 가난한 과부에게 더 큰 기쁨을 느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뜻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낙담이 우리 마음에 자리 잡지 못하게 하여, (남을 향한) 시기심이 우리를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지 않도록 하고, 우리의 가난한 처지에 맞게 섬김을 실천합시다. 주님께서는 회당장의 딸에게 자비를 베푸셨듯이, 그녀를 살리신 것처럼,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 의사들에게 모든 재산을 쏟아부었던 혈루증을 앓던 여인을 불쌍히 여기신 것처럼, 백부장의 종을 그가 믿었기 때문에 고치신 것처럼, 가나안 여인을 불쌍히 여기사 그녀의 딸을 고치신 것처럼, 그리고 그분이 사랑하시는 나사로를 살리신 것처럼, 가난한 과부의 눈물을 보시고 그녀의 외아들을 살리셨으며, 그분의 발에 향유를 부은 마리아를 외면하지 않으셨듯이, 눈물을 흘리며 그분의 발에 향유를 부은 죄인 여인을 밀어내지 않으셨고, 베드로와 요한을 배에서 불러 “나를 따르라” (마태복음 4,19), 그와 같이 세관장에 앉아 있던 마태도 부르셨고, (다른)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처럼, 유다의 발도 차별 없이 씻어 주셨으며; 사도들에게 위로자 성령을 보내신 것처럼, 코르넬리우스에게도 담대함을 주며 성령을 내려 주셨고, 다마스쿠스에서 아나니아를 통해 “이 사람은 내가 택한 그릇이다”라고 말씀하시며 바울을 위해 그를 움직이신 것처럼 (사도행전 9:15)라고 말씀하셨듯이, 사마리아에서 빌립을 움직여 에티오피아 내시를 구원하게 하셨다. 그분께는 작은 자나 큰 자, 부자나 가난한 자를 가리지 않는 편파함이 없으시며, 오직 (선한) 뜻과 그분에 대한 믿음,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일, 그리고 모든 이를 향한 사랑을 찾으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영혼이 육신을 떠날 때 그 영혼의 인장(구별의 표)이 될 것이며,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임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대로이다(요한복음 13:35).

18. 주님께서 “사람들이 너희를 알아볼 것”이라고 말씀하신 대상은, 오른손과 왼손의 세력들 외에 또 누가 있겠는가? (그리하여) 원수들이 영혼과 함께 행하는 사랑의 표징을 보게 되면,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 영혼에게서 물러날 것이나, 성스러운 세력들은 그 영혼과 함께 기뻐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 힘껏 분투하여, 원수들이 우리를 붙잡지 못하도록 그러한 인장을 얻도록 합시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산 위에 있는 성은 숨을 수 없느니라” (마태복음 5, 14). 그분이 말씀하신 산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그분의 거룩한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열심과 분별력을 다해 그분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 힘쓰자. 그 말씀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계명을 지키리라”(요한복음 14:23)라고 말씀하신 그 말씀을 이루기 위해, 우리의 수고가 우리에게 훼손되지 않고 보호받는 성곽이 되어, 주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모든 원수의 손길로부터 지켜 주시기를, 우리가 그분을 만날 때까지(그분 앞에 서기까지) 바랍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담대함을 얻으면, 우리 모든 원수들은 그분의 거룩한 말씀의 능력으로 흩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은 바로 그 산과 같아서, 그곳에서 사람의 손길 없이 돌이 떨어져 나와 은과 구리, 철, 진흙으로 이루어진 네 부분으로 된 금 형상을 깎아내렸으니, 사도가 말한 대로: “하나님의 모든 무기를 입으라. 이는 너희가 마귀의 궤계를 대적할 수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세상의 어둠의 통치자들과 하늘 아래 있는 악의 영들에 대한 것이니라” (엡 6:11, 12). 이 네 권세는 바로 그 네 부분으로 이루어진 형상, 곧 원수(원수의 세력)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 형상을 부순 돌이 큰 산이 되어 온 땅을 채웠듯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 그(권세들)을 멸망시켰습니다 (단 2:34, 35).

19. 형제들아, 우리가 그분(주님)의 그늘 아래로 피하자. 그분이 우리의 피난처가 되어 주시고, 이 네 가지 악한 권세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사, 땅의 네 모퉁이에서 그분 앞에 모일 때, 그분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기쁨을 누리게 하시고(혹은 맛보게 하시고, 혹은 그분의 위로하는 말씀을 듣게 하시고), 그들 각자가 자신의 행실에 따라 자신만의 복(복의 수여, 혹은 바로 그에게 주어진 복)을 듣게 될 때, – 참으로 그분의 거룩하신 이름은 강력하십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굳건하게 하시며, 원수가(적에게 유혹되어) 일으키는 망각으로 인해 우리 마음이 미혹되지 않게 하시고, 오히려 우리의 힘에 따라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것을 견뎌내게 하시고, 그분의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그분의 복을 누릴 자격을 얻은 모든 이들과 함께 우리가 은혜를 얻게 하소서. 그분께 영광과 존귀와 경배가 마땅하니, –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지금과 항상, 그리고 세세토록. 아멘.

 

8. 말씀

1. 아바 이사야가 말하였다. “나는 때때로 주인 없는 말을 방황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 말은 마주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올라타고, 한 사람이 내리면 다른 사람이 잡아타는 것이다.”

2. 다시 말하기를: “나는 마치 원수들에게 붙잡혀 묶인 채 진흙 구덩이에 던져진 사람과 같다. 그가 주님께 부르짖으면, 원수들은 그가 입을 다물게 하려고 온몸을 매질로 때린다.”

3.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어린 소년이 다리에 묶어 둔 새와 같다. (소년이) 끈을 느슨하게 하면 (새는) 곧바로 하늘 높이 날아오르며 풀려났다고 생각하지만, 소년이 끈을 당기면 다시 땅으로 끌어내린다.” 나도 나 자신을 그렇게 보며, 이를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마지막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누구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4. 다시 말하건대,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빌려주고 그를 용서한다면, 너는 예수의 본성을 본받는 것이요, 갚으라고 요구한다면 아담의 본성을 본받는 것이다. 만일 이자를 받으면, 그것은 아담의 본성조차 따르지 않는 것이며(물론 아담보다 더 낮거나 그에 반하는 것이다).

5. 누군가 네가 한 일이나 하지 않은 일로 너를 비난할 때, 네가 침묵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본성에 따른 것이며, “내가 무엇을 했단 말인가?”라고 대답한다면 그것은 그분의 본성에 따르지 않는 것이며,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반박한다면 그것은 그분의 본성에 반하는 것이다.

6. 네 예배(leitorgias – 기도 의식)를 드릴 때, 자격이 없는 자로서 겸손한 마음으로 행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기쁘시게 여겨진다. 그러나 이때 네 마음에 다른 사람이 (이 시간에) 자고 있다거나, (이 일에 대해) 소홀히 하고 있다는 생각이 떠오른다면, 네 수고는 헛된 것이다.

7. 다시 겸손에 대해 말하건대, 겸손은 누구에 대해 ‘부주의하다’거나 다른 누군가에 대해 ‘경멸하는 자다’라고 말할 입이 없으며, 타인의 결점을 샅샅이 살피는 눈도 없고; 또한 영혼에 유익하지 않은 말을 듣기 위한 귀도 없으며, 자신의 죄 외에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우정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에 따라 모든 사람에게 평화롭게 대한다. 누가 6일 동안 금식하고 이 길에서 벗어나 큰 수고와 계명(수행)에 몰두하더라도, 그의 모든 수고는 헛된 것이다.

8. 다시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자신의 필요를 위해 어떤 물건을 얻었으나, 필요할 때 그것을 찾지 못한다면, 그는 헛되이 그것을 얻은 것이다. ‘나는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말하면서도, 그 경외심이 필요했던 상황에 처했을 때—예를 들어, 누군가와 대화해야 할 필요가 생겼을 때, 그때 분노와 무례한 자제력 상실, 혹은 자신이 미치지 못한 것을 타인에게 가르치고 싶은 충동, 남의 눈치를 보는 마음, 사람들 사이에서 명성을 얻고 싶은 욕망, 그 밖의 여러 정욕이 드러나는 상황에서, 바로 그 순간 자기 안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찾지 못한다면, 그의 모든 수고는 헛된 것이다.

9. 만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인 인간의 모든 병을 먼저 고치지 않으셨다면, 어쩌면 십자가에 이르지도 못하셨을지 모른다. 주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시기 전, 인간은 눈먼 자, 벙어리, 마비된 자, 귀머거리, 나병 환자, 절름발이였으며, 온갖 비자연적인 상태들로 인해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분께서 자비를 베푸시고 우리에게 오셨을 때, 죽은 자를 살리시고 절름발이를 걷게 하시며, 눈먼 자를 보게 하시며, 벙어리를 말하게 하시며, 귀머거리를 듣게 하셨고, 모든 연약함에서 해방된 새로운 사람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십자가에 오르셨습니다. 그분과 함께 두 강도가 매달렸는데, 오른쪽에 있던 자는 그분을 찬양하며 “주여, 주의 나라에 이르렀을 때 나를 기억하소서”(누가복음 23:42)라고 기도했으나, 왼쪽에 있던 자는 그분을 비방했습니다. – 이것이 바로 그 의미입니다. 게으름에 빠지기 전에는, 마음이 원수의 세력과 한 편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게으름에서 일으키시고, 눈을 뜨게 하여 모든 것을 분명히 분별하게 하시면, – 그는 그렇게 하여 십자가에 오르실 수 있게 되고, 그때 원수의 세력은 심한 말로 그를 비방하기 시작합니다. 어쩌면 이로 인해 마음이 느슨해져 수고에서 물러나 다시 예전의 게으름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고서 말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서로의 교제를 끊어 놓으신 두 강도의 의미이며, 그중 한 명은 주님을 비방하며, 어쩌면 주님을 그분의 소망에서 멀어지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고, 다른 한 명은 “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이 사람이야말로 낙원을 차지한 자이며, 이제 생명나무의 열매를 맛보고 있다.

10. 다시 성찬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이를 하나님과의 연합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노든, 시기든, 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마음이든, 허영이든, 증오든, 혹은 그 밖의 어떤 정욕이든 정욕에 굴복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연합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11. 여러분이 예배(기도 순서)를 드리고, 그 예배를 마친 후 여러분의 마음속에 앞서 언급한 정욕들 중 어느 것이든 솟아오른다면, 여러분의 모든 수고는 헛된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십니다.

12. 어떤 장로가 그에게 물었다. “왜 그들은 밀지(oy kroyoysi) 않는 것입니까, 아버지[20] ?” 장로가 대답했다. “비가 씨를 뿌린 땅에 내리면 그 땅은 열매를 맺지만, 씨를 뿌리지 않은 땅에서는 어떻게 열매를 맺겠습니까?” 누구든지 자신의 마음에서 부자연스러운 것들(즉, 정욕)을 몰아내기 위해 수고한다면, 그것들은 더 이상 그 안에서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모든 면에서 그분과 닮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굳어진 본성을 변화시키고, 우리의 욕망과 우리 영혼을 지배하고 있는 거짓된 지식을 끊어내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말 못하는 짐승들은 본성을 보존했으나, 사람은 자신의 본성을 바꿔버렸다. 이제 가축이 사람에게 복종하듯이,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위하여 이웃에게 복종해야 한다. 주님께서 바로 이를 위해 오셨기 때문이다. 자, 네가 허황된 지식에 의지하고 있는 것을 보라. 가축이 너보다 얼마나 더 나은지 보라. 그러므로 내가 본래의 상태로 돌아가고자 한다면, 가축이 자기의 의지도 지식도 없듯이, 나도 나와 함께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나를 대적하는 사람에게도 그렇게 행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은둔의 평온함에 들어서기를 원하고, 적대감(적의 힘)에 휘둘리지 않으며(그것의 먹이가 되지 않으려면), 그 사람은 모든 면에서 사람들로부터 멀어져야 한다(그들에 대해 신경 쓰지 않고, 그들의 일에 관여하지 않아야 한다). 이는 누구도 비난하지 않기 위함이며, 칭찬하지도, 옹호하지도, 아첨하지도, 그가 옳다고 말하지도, 그를 슬프게 하지도, 그의 결점을 주목하지도, 마음속에 그에 대한 적대적인 생각을 품지도, 그리고 이해하지 못하는 자에게 자신의 지식을 낭비하지도, 무지한 자에게 자신의 의지를 낭비하지도 말아야 한다. 그때 비로소 너 자신을 알게 되고, 무엇이 너에게 해로운지 깨닫게 될 것이다. 자신의 의로움을 의지하고 자신의 뜻을 고집하는 자는 원수의 적대감(원수의 계략)을 피할 수 없으며, 평안을 찾지도 못하고, 자신에게 무엇이 부족한지 깨닫지도 못한다. 그리고 그가 육신을 떠날 때, 자비를 얻기 어렵다. 모든 것의 끝은 온 마음과 온 힘을 다해 하나님께 가까이 머무르는 것(그분을 묵상하고, 그분께 매달리며,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데 힘쓰는 것), 모든 이에게 자비를 베풀며, 울며 하나님께 도움과 자비를 간구하는 것이다.

13. 이웃을 가르치는 것과 관련하여 다시 하나님의 계명에 대해 말하노니, 내가 내 죄로 인해 회개 중에 있을 때, 어떻게 내가 하나님께서 나를 받아주셨음을 알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에게 ‘이것을 하라’거나 ‘저것을 하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 사람은 언젠가 타락한 자로서 회개의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네 안에서 네 죄의 사함이 이루어졌음을 깨닫기 전까지는 (네 운명에 대한) 확고한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이것의 표징은, 네가 죄를 지은 일 중 그 어떤 것도 네 마음속에서 움직이지 않을 때, 혹은 누군가 그 일에 대해 네게 말해도 네가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할 때이다. 그러면 분명히 네게 자비가 이루어진 것이다. 만약 그것이 여전히 네 안에 살아 있다면, 그것을 억누르고 그 일로 인해 울어라. 두려움과 떨림, 그리고 죽음 같은 고통은, 네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기 전까지 이 일에 대해 무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 누군가 네게 무언가를 가르쳐 달라고 청하면, 네가 목숨을 걸고 그에게 (자신을 짓누르는 것에서) 어떻게 해방될 수 있는지 말해 주었는데, 그가 다시 네게 와서 똑같은 말을 하며 네가 말한 것을 조금도 실천하지 못했다면, 그가 그것을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그에게서 멀어져라. 그는 네 영혼을 죽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신이 하나님께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진리를 버리고, 하나님에 따라 가르치는 이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큰 일이다. 보라,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던 하나님의 사람 아바 니스테로스가 바로 그러했다. 그는 자신의 여동생의 아들들이 자신과 함께 살게 했으나, 그들에게 아무런 명령도 내리지 않고, 각자를 자신의 뜻대로 내버려 두었으며, 그들이 선한지 악한지 신경 쓰지 않았다. 또한 가인과 아벨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하곤 했다. “율법도 성경도 아직 없었을 때, 누가 그들에게 이것저것을 행하도록 가르쳤는가?” (물론 하나님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가르치지 않으시면, 사람은 헛되이 수고할 뿐이기 때문이다.

14. 다시 말씀하셨다. “누군가 네게 유익하지 않은 말을 하기 시작하면, 그가 네 영혼을 파멸시키지 않도록 그 말을 듣지 마라. 그의 얼굴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를 슬프게 할까 봐 걱정하며 ‘어차피 나는 마음속으로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그런 말을 참아서는 안 된다. 아니,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 너는 하나님께서 친히 손으로 지으신 태초의 사람보다 더 높지 않다. 그에게도 악한 대화는 유익하지 않았다. 그러니 도망쳐라, 그리고 듣지 마라. 그러나 주의하라, 육신으로 도망치면서도 그 말들을 기억하려 하지 마라. 비록 네가 아주 조금만 들었더라도, 악마들은 그 말들과 네가 들은 것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고, 그것으로 네 영혼을 죽일 것이기 때문이다. 도망칠 때는 끝까지 도망쳐라.

15. 다시 말하였다. “내가 보는 바에 따르면, 이득과 명예, 평온은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할 때까지 싸우게 한다.”

16. 다시 말하였다. “이웃을 가르치는 것은 영혼이 (제 위치를) 벗어나는 것이며, 그를 선한 상태로 이끌고자 하는 것은 영혼에 대한 큰 파멸이다.” 왜냐하면, 네 이웃에게 ‘이것을 하라, 저것을 하라’고 가르칠 때마다, 네 자신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고 마음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마치 네가 쇠지레를 들어 네 집을 허물면서, 그의 집을 잘 꾸미고자 하는 것과 같다.

17. 다시 말씀하셨다. “성세례 후에 죄를 지은 영혼은 화가 있을지어다!” 그런 사람은 회개의 상태에 있으면서 자신에 대해 평온할 수 없으니, 육신으로 넘어졌든(육체적 죄에 빠졌든), 도둑질을 했든, 그 밖의 어떤 죄에 미끄러졌든, 누군가를 육체적으로 탐욕스럽게 쳐다보았든, 아무도 보지 못하도록 주위를 살피며 몰래 무언가를 먹었든, 혹은 다른 사람이 자신의 자선 헌금[21] 을 놓았을 때,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호기심을 품었다면, – 이는 그렇게 행하는 자가 예수를 모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8. 그때 어떤 이가 그에게 물었다. “아버지, 과연 이 일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까?” 그러자 그가 말하였다. “벽을 뚫고 돈을 훔친 자가 원수에게 유혹당한 것처럼, 이 사람도 (바로 그 원수에게) 유혹당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를 이긴 자가 바로 이 사람도 이긴 것이기 때문이다. 사소한 일에서 이기지 못하는 자는 큰 일에서도 이기지 못한다.”

19. 사람이 아무리 위대한 기적과 치유를 행하고, 모든 지식을 갖추며, 심지어 죽은 자를 살려내더라도, 일단 죄에 빠지면 자신에 대해 안일해질 수 없으니, 회개의 의무 아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회개의) 수고를 많이 감당하더라도, 죄 가운데 있거나 태만 속에 머무르는 누군가를 보고 그를 멸시한다면, 그의 모든 회개는 헛된 것이 된다. 이는 그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배척하고 정죄함으로써, 심판은 오직 하나님께 맡겨야 할 일을 스스로 행했기 때문이다.

20. 또 말씀하셨다. “우리 모두는 마치 병원에 있는 것과 같다. 어떤 이는 눈이 아프고, 어떤 이는 손이 아프며, 또 어떤 이는 종기나 그 밖의 다른 병을 앓고 있다. 어떤 상처는 이미 아물기도 하지만, 해로운 것을 먹으면 다시 터지기도 한다.” 회개 중에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를 정죄하거나 깎아내릴 때, 그는 다시 자신의 회개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 병원에 누워 각기 다른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한 사람이 고통 때문에 비명을 지르면, 다른 누군가가 “왜 비명을 지르느냐?”라고 말하겠습니까? 누구나 자신의 병만 생각하지 않겠는가? 마찬가지로, 내 죄의 고통이 내 눈앞에 있다면, 나는 다른 죄 짓는 사람을 쳐다보지 않을 것이다. 마치 의사의 진료실에 누워 있는 환자들처럼, 각자는 자신의 상처를 다시 찢어 놓을 수 있는 음식을 먹지 않도록 조심하듯이 말이다.

21. 모든 죄를 피하려 하지 않는 영혼이여, 화가 있을지어다![22] 그녀를 시기하고 대적하는 (적들)로부터 오는 슬픔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모든 일에 대해 큰 인내와 감사가 필요합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 있을 때, 모두 마음껏 먹고 마셨으나 파라오를 위해 노예처럼 일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들에게 도움, 즉 모세를 보내 파라오의 손아귀에서 그들을 해방시키셨을 때, 그들은 고된 노동과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리고 모세는 하나님께서 파라오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 속에서도,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 그에게 “ “파라오에게 또 다른 재앙을 내리리니, 너는 그에게 말하라. ‘백성을 보내라. 그렇지 않으면 네 맏아들을 치리라.’ 그러자 마침내 모세는 담대함을 얻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각자가 이웃에게, 여자는 이웃 여인에게 은 그릇과 금 그릇, 옷을 빌려오게 하고, 너희 자녀들의 입에 얹어 이집트인들을 약탈하라.” (출 11:1-2). 이 물건들 중 일부는 나중에 성막을 짓는 데 사용되었다.

22. (그 후 아바가) 말하였다. “이 일에 대해 장로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은 그릇과 금 그릇, 그리고 예복은 원수를 위해 일하는 감각들이다. 이 말씀은, 만일 사람이 그것들을 원수에게서 빼앗아 하나님께 열매를 맺게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안식의 덮개가 그에게 내리지 않을 것이며, 만일 그것들을 원수에게서 빼앗아 그것들로 하나님께 열매를 맺게 한다면, 하나님의 덮개가 그에게 내릴 것임을 의미한다. 성막이 어떤 면에서든 미비한 점이 있을 때는 구름이 그 위에 머물지 않았으나, 완전히 완성되었을 때 비로소 구름이 덮였다. 그 후 지어진 성전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전에 무엇이든 부족한 것이 있을 때는 구름이 덮지 않았으나, 성전이 완전히 완성되고 번제물과 화제물의 피와 기름이 성전 안으로 들여와 하나님께서 그 향기를 맡으셨을 때, 비로소 구름이 그 성전을 덮었습니다. 즉, 사람이 온 힘을 다하고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며, 온 마음을 다해 그분께 매달리지 않는 한, 하나님의 안식의 덮개는 그에게 임하지 않을 것이다.

23. 다시 말씀하셨다. “만약 마음이 감각들이 약해지기(정욕에 휘둘리기) 전에 십자가에 오르기를 원한다면, 자신의 감각을 치유하지 않은 채 자신의 분량을 넘어선 일을 시작했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진노가 그에게 임한다.”

24. 만일 미아즈마(정욕의 악취)가 네 안에서 작용하고, 네가 그것에 동조하며, 그것을 낳는 것에 가담하면서도, 마음의 병으로 인해 이를 슬퍼하지 않는다면, 이는 아담의 본성보다 더 낮은 것이다.

25. 만일 네 마음이 죄를 이기고, 죄를 낳는 것을 멀리하며, 네 앞에 지옥의 고통을 두고, 항상 너와 함께 계시는 (유일한) 도우미께서 항상 네 곁에 계시기를 원하며, 그분을 결코 모욕하지 않고, 그분 앞에서 울며 말하기를 “주님, 나를 구원하시는 것이 주님의 자비입니다. 주님의 도움 없이는 제가 원수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힘이 없습니다.”라고 하며, 그와 동시에, 하나님 안에서 너를 가르치시는 분을 슬프게 하지 않도록 네 마음에도 귀를 기울일 때, 이는 예수님의 본성에 따른 것이니, 그분께서 너를 모든 악으로부터 지켜 주실 것이다. 아멘.

 

9. 세상을 저버린 자들을 위한 계명

1. 만일 네가 세상을 버리고 회개를 위해 자신을 하나님께 맡겼다면, 네 생각에 사로잡혀 과거의 죄들로 인해 슬픔에 빠지지 않도록 하라. 마치 그 죄들이 이 과정에서 용서받지 못하는 것처럼 여겨서는 안 되나, 동시에 주님의 계명들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께서 네 과거의 죄들도 용서해 주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2. 죽을 때까지 이 점을 꼭 지키고, 결코 소홀히 하지 마라: 여자와 함께 식사하지 말고, 어린 이들과 친분을 맺지 말며, 젊을 때에는 형제나 아바를 제외하고는 누구와도 한 돗자리에서 함께 자지 말라. 그리고 이를 소홀히 하지 말고 경건한 마음으로 행하라. 옷을 입을 때에도 눈을 함부로 두지 마라.

3. 부득이한 경우, 포도주는 세 잔까지 마시되, 우정을 위해 이 계명을 어기지 말라.

4. 네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은 곳에서는 살지 말고, 네 예배(기도)를 소홀히 하지 말라. 그래야 네 원수의 손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5. 시편을 공부하도록 스스로를 다그쳐라. 그러면 그것이 너를 미아즈마(정욕)의 포로가 되는 것에서 지켜 줄 것이다. 육체의 온갖 악의를 미워하라. 그러면 네 정욕이 누그러질 것이다.

6. 어떤 일에서든 스스로를 과시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러면 네 죄를 위해 울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7. 거짓말로부터 자신을 지키라. 그렇지 않으면 거짓말이 네게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쫓아낼 것이다.

8. 이웃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모든 사람 앞에서 네 생각을 드러내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가 너를 덮어 주시도록 네 아버지들에게만 네 생각을 털어놓으라.

9. 네 수공예에 전념하라. 그리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너와 함께할 것이다.

10. 만일 네 형제가 죽을 지경에 이르지 않는 죄를 범하는 것을 보거든(요한 5:16), 그를 멸시하지 말라. 그래야 네가 원수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11. 네가 죄를 지었던 일들로 인해 사로잡히지 않도록 스스로를 지키라. 그래야 (네 죄들이) 다시 네 안에서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다.

12. 겸손을 사랑하라. 그러면 그것이 네 죄로부터 너를 덮어 줄 것이다.

13. 편파적이지 말라. 그래야 온갖 간교함이 네 안에 깃들지 않을 것이다.

14. 네 마음을 네 아버지들에게 순종하게 하라. 그리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네 안에 거하시리라.

15. 스스로를 지혜롭다고 여기지 말라. 그래야 네 원수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16. 네 혀가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말하도록 훈련하라. 그러면 겸손이 네게 임할 것이다.

17. 네 방에 앉아 있을 때, 다음 세 가지 일에 항상 신경을 쓰라: 수공예, 경건한 묵상(독서와 하나님에 대한 묵상), 그리고 기도.

18. 매일 이렇게 생각하라. ‘내가 이 세상에서 보낼 날은 오늘뿐이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지 않을 것이다.

19. 음식에 탐닉하지 마라. 그래야 네 안에 예전의 죄들이 다시 싹트지 않을 것이다.

20. 어떤 수고 속에서도 낙심하지 말고(우울해하지 말고), 원수의 유혹이 네게 침투하지 못하게 하라.

21. 스스로를 훈계(성경 읽기와 하나님에 대한 묵상)에 힘쓰게 하라. 그러면 곧 하나님의 평안이 네게 임할 것이다. 도시 밖의 무너진 집이 악취가 나는 곳이 되는 것처럼, 게으른 초심자의 영혼은 온갖 불경한 정욕의 소굴이 되기 때문이다.

22. 눈물을 흘리며 많은 기도를 드리도록 스스로를 다그쳐라. 어쩌면 주님께서 너를 불쌍히 여기사, 죄를 짓는 낡은 사람을 네게서 벗겨 주실지 모르니.

23. 다음의 것들(행위들)과 교제하라: 수고, 가난, 방랑, 육체의 억압, 그리고 침묵. 이는 그것들로부터 겸손이 태어나며, 겸손은 모든 죄의 용서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24. 우리 주 하나님이시며 선하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마땅한 것을) 깨닫게 하시며, 행하게 하셔서, 그분의 계명을 지킨 성도들과 함께 자비를 얻게 하실 수 있으시니, 아멘.

 

10. 또 다른 말씀 (배교자들에게)

1. 하나님께서는 사도 성 베드로에게 어떤 사람도 더럽거나 부정하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셨다(사도행전 10, 15). 그의 마음이 거룩해졌으므로, 그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거룩해졌다. 그러나 마음이 정욕에 사로잡힌 자 앞에서는 그 누구도 거룩하지 않으며, 그는 자신의 마음에 있는 정욕에 따라 모든 사람도 자신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누군가가 그에게 ‘저 사람은 선한 사람이다’라고 말해도, 그는 즉시 마음속으로 분노합니다. 그러니 입으로만 아니라 마음속으로도 누구를 폄하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2.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자만하지 않을 때까지는, 마음속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친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욕에서 해방되면,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지극히 멀리 떨어져 있음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하늘을 쳐다보는 것을 부끄러워한다.

3. 어떤 사람이 두 노예를 데리고 자신의 밭으로 보내 밀을 베게 하며, 각자에게 하루에 일곱 스태크(일종의 단이나 더미)씩 베어 오라고 명령했다. 그중 한 명은 주인이 시킨 일을 완수하기 위해 온 힘을 다했으나, 그 일이 자신의 힘을 넘어서는 것이어서 다 마치지 못했고, 다른 한 명은 성공할 희망을 잃고 낙담한 나머지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누가 하루 만에 그런 일을 해낼 수 있겠는가?” 그리고 (주인의 명령을) 무시하고 일은 신경 쓰지 않은 채 잠자리에 들었는데, 하품도 하고, 잠도 자고, 문이 문틀 위에서 빙글빙글 도는 것처럼 이쪽저쪽으로 뒤척이며 하루 종일 헛되이 시간을 보냈다. 저녁이 되자, 그들은 주인 곁으로 돌아왔다. 주인은 두 사람을 꾸짖으며, 부지런한 종의 일을 (칭찬할 만하다고) 인정해 주었으나, 그가 명령받은 일을 완전히 다 이루지는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게으르고 무책임한 종은 집에서 쫓아내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어떤 수고 속에서도 낙심하지 말고, 어떤 슬픔 속에서도 , 온 마음을 다해 일하며 힘을 쏟아야 한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의 성도들과 동등하게 받아주실 것이라고 믿는다.

4.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마음과 몸을 크게 낮추며 하나님 앞에서 많은 기도를 드려야 하며, 자신이 선한 일을 했다고 여기지 말고, 어떤 일에서도 칭찬을 믿지 말며, 책망에 상처받지 말고, 자신의 죄를 기억하며, 원수들에게도 마음을 평화롭게 유지하고, 그들에게 말하거나 꾸짖기 위해 입에서 쓴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하며, 심지어 친한 친구들 앞에서도 그러해야 한다.

5. 무엇보다도, 수도사는 자신의 영혼의 모든 문을 닫고 모든 감정을 잘 지켜, 그것들로 인해 타락하지 않도록 해야 하며, 세속적인 말을 전해 오는 자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 자신의 죄(즉, 죄를 자각하고 슬퍼하며, 남의 일에 호기심을 갖지 않는 것)로 만족하는 자는 복이 있다.

 

11. 겨자씨에 대하여

(말씀 속에) 겨자씨에 관한 신비가 있는데, 교부들이 말씀하신 대로, (그에 대해) 기록된 내용을 바탕으로 그 의미를 탐구하도록 (우리를 자극하기 위함)입니다: “천국은 겨자씨와 같으니, 사람이 자기 밭에 심으면 모든 씨앗 중에서 가장 작은 것이지만, 자라면 모든 풀보다 커져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게 되느니라”(마태복음 13,31-32). 이것이 바로 겨자씨이며, 이것이 바로 그 씨의 훌륭한 특성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를 드러내시며) 사람이 그분(그분에 대해 말씀하신 모든 것)을 모든 면에서 본받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모든 씨앗 중에서 가장 작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겸손을 심어 주시며, 우리가 모든 사람보다 자신을 낮게 여기게 하시고, (그것이) 완전히 자랐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온유함과 오래 참음을 상기시키시며, 그것이 불 같은 색을 띠고 있다는 점은 – 순결을 상기시켜, 육신에 어떤 더러움도 없도록 하라; 그 속이 쓰다는 것은 – 정욕에 대한 증오를 심어주는데, 이는 평화를 원하는 이들에게는 쓰기 때문이다; 씹어 으깨지 않으면 그 맛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은, 고난을 견디는 것(결핍으로 인한 육신의 분노)을 말해 주며; 누군가 그것을 으깨면 눈을 따갑게 하는데, – 이는 행실(혹은 수행의 수고)의 고된 점을 상기시켜 줍니다; 사람들은 그것(그것으로 만든 겨자)을 사용하여 썩어가는 신체 부위에 바르며, 썩지 않도록 합니다. 그러니 그 의미를 깨닫고 그 성질에 따라 행합시다. – 그리고 손상된 우리 지체들에 그것을 발라, 썩지 않게 하고 구더기가 들지 않게 합시다. 이는 곧 성육신하는 것이며, 우리 안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형상화하여, 우리의 힘껏 그분(겨자씨의 성질에 따라)을 본받아 그분을 위해 우리 자신을 다잡도록 힘쓰는 것이며, 우리가 과연 그 씨앗에서 비롯된 존재인지 아닌지, – 그 본성과 겸손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인지, – (가루로) 빻아진 것에서 비롯된 것인지, 그 쓴맛에서 비롯된 것인지, 그 맛에서 비롯된 것인지. – 하나님의 자비는 그분의 뜻에 따라 우리를 이 일에 힘으로 충만하게 하시는 일입니다. 그분의 영광은 아버지, 아들과 성령께 영원히 있나이다. 아멘.

 

12. 포도주에 대하여

1. 포도주의 성사. (이는) 하나님을 만나고자(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고자) 하는 인간 본성(혹은 사람)의 상징이며, 이를 위해 순결함 속에서 자신의 일을 온전히 지켜, 하나님께서 그(의 일)을 기쁨으로 받아들이시도록 하는 것이다.

2. (포도주를 담는) 그릇은 적절한 방식으로 역청으로 코팅되어 있다. 이는 육체의 흠 없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모든 지체가 음란한 정욕으로부터 건전하고(깨끗하며) 온전한 상태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육체적인) 쾌락 중 어느 하나라도 좇는 자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기 때문이다.

3. 온전히 타르칠되지 않았거나 금이 간 그릇에 포도주를 붓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우리 안에 증오와 원한을 품고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그러니 우리 자신을 점검하여(그것이 우리 안에 없는지) 확인하자. 그것들은 사람이 회개의 길을 걷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4. 포도주는 처음 만들어질 때 발효 과정을 거칩니다. 이는 성숙해지고 차분해질 때까지 요동치는 신앙의 초보 단계를 상징합니다.

5. 포도주는 석고를 넣지 않으면 (진정한 포도주가) 되지 않듯이, 적당한 양의 누룩을 넣지 않으면 안 된다. 마찬가지로 신앙의 초보자가 자신의 뜻대로만 (머물러서는) 성공할 수 없으니, 하나님 안에서 아버지들에게서 누룩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들이 그에게 길을 가르쳐 주지 않으며(그 길을 따라 인도해 주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스스로 그 길을 보게 해 주실 때까지는 불가능하다.

6. (포도주)는 침전될 때까지 집 안(만드는 곳)에 두게 된다. 마찬가지로 침묵과 고난,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행하는 온갖 수고 없이는 초심자가 (굳건히 선한 마음가짐을 가진) 상태에 이르는 것이 불가능하다.

7. 포도주에 알갱이나 나뭇가지가 섞인 채로 두면 신맛이 난다. 마찬가지로, 신앙의 초보자가 육신의 친척들 사이, 혹은 그들과 같은 행실과 수행을 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지내면, 하나님 안에서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그 성품을 잃게 된다.

8. 포도주가 증발하거나 상하지 않도록 흙을 덮어둔다. 마찬가지로, 초심자가 모든 일에 겸손을 갖추지 못하면, 그의 모든 수고는 헛된 것이 된다.

9. 포도주를 자주 맛보면, 그 향이 날아가고 본래의 맛을 잃게 된다. 자신의 행실을 드러내는 사람에게도 종종 같은 일이 일어나는데, 그런 경우 허영심이 그의 모든 일을 망치기 때문이다.

10. 포도주가 든 그릇을 열어두면, 혐오스러운 모기들이 포도주를 망쳐 버린다. 마찬가지로, 말 많음과 농담, 헛소리는 (젊은 수도사들의 선한 마음을 망가뜨린다).

11. 포도주를 바람에 노출시켜 두면, 그 모양과 맛이 망가진다. 이와 같이 교만은 사람의 모든 열매를 망가뜨린다.

12. 사람들은 포도주를 지하실에 숨기고 단단히 덮어둔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꾼을 숨기고 감싸주는 것은) 모든 일에서 침묵과 자기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는 태도이다. 그리고 사람은 이 침묵과 자기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는 태도 없이는 자신의 수고를 보존할 수 없다.

13. 사람들은 포도주가 그 주인에게 기쁨이 될 때까지, 즉 그가 자신의 열매를 기뻐할 때까지 포도주에 대해 이 모든 일을 행한다. 사람은 자신의 일이 하나님 앞에서 기쁘게 여겨질 때까지 이 모든 일을 행해야 한다.

14. 포도주가 어떤지 그 말을 믿기 위해서는 포도주병을 열어 맛보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처럼,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하나님께서 그의 일을 완전하다고 인정하시기 전까지는, 마음속에 담대함을 품고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15. 마치 그릇에서 술이 새기 시작하면, 주인이 부주의하여 그 사실을 알기도 전에 술이 땅으로 흘러내리듯이, 사소하고 하찮은 어떤 (부적절한) 일이라도 사람이 부주의하면 그 사람의 열매를 망치게 된다.

16. 그러니 형제들아, 우리에게 해로운 모든 것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우리의 힘을 다합시다. 그리하면 주님의 자비와 은혜가 그날 우리에게 담대함을 주실 것이니, 우리가 말하리라: “우리의 연약함 속에서 양심이 우리에게 일깨워 준 대로 지키기 위해 수고를 다했으나, (그 일을 위한) 힘은 주님의 것이며, 자비와 도움과 보호와 용서와 인내도 주님의 것입니다. 내가 누구이겠습니까? 지금까지 나는 악한 자들의 손에 있었으나, 주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셨고, 주님께 드릴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는 죄인이며 주님의 은총을 받을 자격이 없으나, 주님께서는 나를 원수들의 손에서 지켜 주셨습니다. 주님은 나의 주님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영광과 자비와 보호와 도움과 권능은 주님께 속한 것이니, 영원토록 그러하리이다. 아멘.

 

13. 힘써 싸우고 (위업을) 훌륭히 이룬 자들아

1. 다음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행하신 표적들이다. “가서 요한에게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라. 곧 눈먼 자들이 보고, 절름발이들이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머거리들이 듣고, 죽은 자들이 살아나며,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있다. 또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 (눅 7, 22, 23)[23] .

2. 이렇듯 주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각각이 문자적인 의미 외에도 비유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소경이 눈을 뜨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 이 세상의 소망에 주의를 기울이는 자는 소경이다; 그러나 그가 그것을 버리고 기대하는 소망에 시선을 고정한다면, 그는 눈을 뜬 것이다. 마찬가지로: 절름발이가 걷는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뜻한다. 하나님을 원하면서도 육신의 마음속 생각들을 사랑하는 자는 절름발이이다. 그러나 그가 후자를 버리고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는 바르게 걷기 시작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다시, “귀머거리가 듣는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뜻이다. 정신이 산만해진 상태(오락에 빠져 사는) 사람은 (주의가 외부 사물에 사로잡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잊어버리기 때문에 귀머거리이다. 그러나 그가 모든 것을 버린다면, 듣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진다”는 말은 다음과 같은 뜻이다.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바와 같이, “부정한 자는 주님의 집에 들어가지 말라”는 것은, 즉 이웃에게 원한이나 증오, 시기, 비난을 품은 자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를 버리는 자는 깨끗해질 것이다.

3. 그러므로 맹인이 보게 되고, 절름발이가 걸을 수 있게 되며, 귀머거리가 들을 수 있게 되고, 나병 환자가 깨끗해지면, 그제야 게으름으로 인해 (그것이 상징하는 도덕적 타락으로 인해) 죽은 상태에 있던 사람은 다시 일어서고 새롭게 되며, 그 후 자신의 감각 을 통해—그 감각들은 성스러운 미덕이 부족했던—자신이 눈을 뜨고, 걸을 수 있게 되었으며, 들을 수 있게 되었고, 깨끗해졌음을 선포한다. 너는 너를 세례해 준 이에게 이러한 의롭다 함을 제시해야 한다.

4. 세례란 바로 이것이다: 악을 견디는 것(육체의 악함)과 겸손, 그리고 침묵이다. 요한에 대해 기록된 바와 같이, 그의 옷은 낙타 털로 만들어졌고, 가죽 띠가 그의 허리를 감쌌으며, 그는 광야에 있었다(마태복음 3:4). 이것이 바로 육체의 고통의 표징이다. 이것이 먼저 사람을 정화하며, 수고하는 자는 이를 얻게 되고, 이를 얻게 되면 비로소 십자가에 오를 길을 열게 된다 (십자가는 미래의 불멸을 상징한다), 먼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입을 막은 뒤(사두개인들은 불신의 상징이며, 바리새인들은 온갖 간사함과 위선, 허영의 상징이다), 기록된 바와 같이: “그 날 이후로는 감히 그분께 그에 대해 묻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마태복음 22:46).

5. 마침내 주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어 유월절을 준비하게 하셨다. 이는 마음이 스스로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함을 깨달을 때, 주님으로부터의 성찬으로 그 감각들을 양육함으로써 감각들을 하나로 모아 단일한 몸으로 만들며, 불멸을 준비한다는 것을 상징한다.

6. 또한 예수님께서 “가능하다면, 이 잔이 지금 이 시간에 내게서 지나가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신 것(마태복음 26, 39)은 우리에 대한 말씀이다. 왜냐하면 마음이 십자가에 오르기를 원할 때, 많은 기도와 눈물, 그리고 온전히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며 그분의 자비하심에 도움을 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자비하심이 그를 굳건하게 하고 지켜 주시어, 거룩하고 끝없이 이어지는 갱신 속에서 그를 일으켜 세우실 때까지, 십자가의 시간에는 큰 위험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그는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가 그와 함께하기를 필요로 하는데, 이들은 곧 건전한 믿음, 소망으로 인한 용기 있는 마음, 그리고 하느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7. 이것이 바로 우리를 위해 주님, 곧 우리의 사랑하는 주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일의 의미입니다. 그분은 사도가 말한 대로 모든 면에서 우리의 본이 되셨습니다: “그분을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알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음에 동참함으로써, 어떻게든 죽은 자들의 부활에 이르기를 원하노라”(빌 3:10-11): –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맛보신 ‘쓴즙’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안에 있는 온갖 악한 정욕을 근절하고 (입을 다물게 하며), 그 어떤 것도 몸 밖으로 나와 행동으로 드러나지 못하게 하도록 일깨워 줍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맛보신 ‘식초’는 우리로 하여금 온갖 제멋대로인 마음과 헛된 반항심을 잠재우도록 일깨워 줍니다; 우리를 위해 그분께 뱉은 침”은 우리에게 모든 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마음과 이 세상의 영광을 갈망하는 모든 욕망을 억누르도록 일깨워 주며; 엮어 그분의 머리에 씌운 “가시관”은 우리에게 비난, 심지어 끊임없이 이어지는 비난도 참아내고, 당황하지 않고 모든 책망을 견디도록 일깨워 주며; 우리를 위해 그분의 머리를 치던 “갈대”는, 우리로 하여금 항상 머리에 겸손의 투구를 쓰고, 원수의 모든 교만을 꺾도록 일깨워 줍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주 예수님께서 “채찍질”을 당하신 일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인간의 모욕과 수치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도록 일깨워 줍니다; 제비뽑기로 “그의 옷을 나누는” 일, 그 과정에서 그분께서는 당황하지 않으셨는데, 이는 사도의 말씀대로 “하늘에 더 나은 재산을 가지고 있음을 알기에, 너희 재산을 약탈당하는 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였다” (히브리서 10, 34).

8. 사람은 십자가에 오를 수 있으려면 이 모든 것을 행해야 한다. 그리고 네가 사람으로서 네 힘으로 그분이 하신 일을 행하지 않는다면, 십자가에 오를 수 없을 것이다. 잔인한 자들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이 제6시였다는 사실은, 기록된 바와 같이 그분이 십자가로 원수를 죽이셨으니, 죄가 죽을 때까지 모든 낙담과 소심함에 맞서 힘으로 무장하라는 우리에게 주는 본보기이다. 또한 제9시에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치셨던 것, “엘로이, 엘로이, 리마 사바크타니”(마태복음 27:46)라고 외치신 것은, 정욕에 맞서 인내로써 고통스러운 수고를 감내하여 그것이 사라질 때까지 견디고, 마침내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담대히 부르짖을 수 있도록 우리에게 본보기가 됩니다. 해가 진 후에 그분께서 영을 내어주신 것은, 만일 마음이 이 보이는 세상의 온갖 소망에서 해방된다면, 그것이 곧 네 안에서 죄가 죽었다는 표징이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성전의 휘장이 위쪽 끝에서 아래쪽 끝까지 둘로 찢어졌다는 것은, 마음이 (정욕으로부터) 해방되면 그와 하나님 사이의 장벽이 사라진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돌들이 갈라지고 무덤들이 열렸다는 것은, 우리 안에서 그 죽음(죄에 대한 죽음)이 이루어질 때, 모든 무거움과 눈먼 상태, 그리고 영혼에 대적하는 모든 것이 사라지고, 죽어 있었으나 죽음을 낳았던 감각들이 다시 살아나 무적의 존재로 부활하기 시작함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비유입니다. 그분이 향기로운 향료와 함께 깨끗한 수의로 감싸이신 것은, 그 죽음(죄) 이후에 거룩함이 감싸이고 썩지 않음이 그것을 안식하게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상징이다. 그분을 아직 아무도 안치된 적이 없는 새 무덤에 모시고, 그 입구에 큰 돌을 굴려 막은 것은, 마음이 모든 것에서 해방되어 안식하게 되면, 이미 다른 새로운 세상에 있게 되며, 새로운 지혜를 얻고, 썩어 없어질 것이 없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며, 썩지 않는 것을 묵상하게 됨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상징이다. – 그 밖에도, “시체가 있는 곳”(시신)에는 “거기서 독수리들도 모일 것이라(눅 17:37). – 그분이 부활하사 , 아버지의 영광 가운데 계시고, 하늘로 올라가 “높이 계신 위엄의 우편” (히 1:3) – 이는 사도의 말씀대로 우리에게 본보기가 되나니, “만일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라”, (a)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너희가 죽을 것이니라” (골 3:1–3).

9. 자비를 베푸시는 그분의 거룩하신 이름은, 모든 면에서 성도들의 본보기가 되셨으며, 우리의 연약함을 위해 강력히 중보하시고, 우리의 궁핍함을 따라 우리의 죄를 용서하사, 우리도 그 자비를 받을 자격이 있는 모든 이와 함께 그 자비를 얻게 하소서. 아멘.

 

14. 통곡의 행실

1. 아아, 나여, 아아, 나여. – 내가 아직 지옥에서 해방되지 못했도다! 나를 그곳으로 끌고 가는 자들이 여전히 내 안에서 그들의 열매를 맺고 있으며, 그곳의 모든 일들이 내 마음속에서 움직이고 있도다. 나를 불길 속으로 빠뜨리는 자들이 여전히 내 육신 안에서 활동하며, 그곳의 열매를 맺고자 하도다. 나는 아직 이곳에서 어디로 떠나야 할지 알지 못하노라; 아직 내게 바른 길이 마련되지 않았고, 내 안에 있는 그들의 악한 행실 때문에 내 길을 가로막으려는 공중의 세력(어둠의 세력)의 영향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으며, 그들의 악의가 여전히 내 안에서 열매를 맺고 있기 때문에, 나를 그들로부터 구원하러 오신 구원자를 아직 보지 못했고; 나는 아직 나와 재판관 사이에 담대하게 중재해 주시는 분을 보지 못했고, 내가 죽을 자격이 없다는 증언도 아직 받지 못했으며, 악을 행하는 자들로부터 아직 멀어지지 못했다.

2. 악인은 감옥에 갇혀서 기뻐하지 않으며, 쇠사슬에 묶여서는 자기 뜻대로 행할 수 없고, 족쇄에 갇혀서는 남을 가르칠 수 없으며, 고통스러운 수고 속에서 평안을 기억하지 못하고, 손발이 묶인 채로 달콤한 것을 먹지도 못하며, 또 다른 악한 일을 꾸미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온갖 죄를 다 저질렀기 때문이다. 오히려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슬픔으로 자신의 모든 악행을 애도하며, 자신에게 닥칠 모든 고통을 생각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래, 나는 그 벌을 받을 만하다.”

3. 자신의 최후가 어떠할지 항상 생각하며, 자신의 죄로 인해 (받을 만한) 고통을 내다보는 자는, 마음속으로 누구를 정죄하지 않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다. (예상되는) 고통에 대한 근심이 그의 마음을 갉아먹는다. 쓰라린—아아! 그것은 언제나 그의 내면 깊은 가르침의 주제이다; 그는 다른 이들이 낙심하지 않도록 격려하지 않는다; 음식에 대한 걱정은 그의 염려의 범주에 들지 않는다; 그에게 자비를 베푸는 이들의 자비를 인정하지만, 슬픔으로 인해 그 자비에서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는 온갖 방식으로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24] ; 그를 비방하는 자들에게 그는 분노로 응대하지 않으며, 고통스러운 고난을 인내로 견디며 말하되: ‘나는 이를 받을 만하다’고 한다. ‘이빨의 비웃음’(시라크 19, 27)은 그에게서 물러났다; 그는 신음하며 고개를 저으며, 앞으로 서게 될 심판의 보좌를 떠올린다. (다른 이들의) 말을 들을 때, ‘좋다’거나 ‘나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 말이 좋든 나쁘든, 그의 귀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를 괴롭히는 병들 때문에 그의 눈썹에서는 눈물의 강이 흘러내린다. 만약 그가 고귀한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면, 재판에서 정죄받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 사람들 앞에서 느낄 수치를 떠올리며 더욱 슬퍼한다. 자신을 위해 준비된 심판을 마음에 품고 있기에, 그는 사람들이 선한지 악한지에 신경 쓰지 않는다. 그와 연관이 있는 다른 사람들이 있다 해도, 그는 그들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며,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그들과 상의하지도 않는다. 이는 각자가 죽음으로 끌려가며 자신의 짐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얼굴은 침울하다. 고문의 두려움 때문에 그를 변호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일을 스스로 고백하며, 자신이 범한 죄에 대해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고 인정한다.

4. 도대체 언제까지 나는 죄 없이 취해 있어야 하는가? 내 앞에 이런 일이 기다리고 있는데, 언제까지 무심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내 마음의 굳어짐이 내 눈을 마르게 하였고, 헛된 근심들로 인한 취함이 내 머리를 마르게 하였으며, 내 마음의 집착이 나를 망각에 빠뜨려 정신을 흐리게 하였다. 육체의 궁핍이 나를 옭아매고, 파멸(절망)이 나를 괴롭혀 삶의 길을 떠나게 한다. 나를 대변해 줄 친구도 얻지 못했고, 시민들에게 보낼 선물도 없다. 나의 악행에 대한 소문 때문에 그들은 나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내가 그들에게 간청해도 그들은 나를 돌보지 않으니, 이는 내가 아직 내 (도덕적) 병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열린 마음으로 그들에게 간청하지 않기 때문이다(고린도후서 6:11).

5. 내 죄의 가시가 아직 끊임없이 내 마음을 찌르지 않고 있다(즉, 죄에 대한 고통스러운 회개가 아직 오지 않았다). 내 죄의 짐이 아직 나를 짓누르지 않고 있다(그 무게로 나를 억누르지 않으며, 죄의 무거움을 느끼지 못한다). 나는 아직 불의 힘을 제대로 온전히 깨닫지 못했기에, 그렇지 않았다면 그 불에 빠지지 않도록 분투했을 것이다. 내 귀에는 지옥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목소리가 들리니, 이는 진실로 내가 아직 내 마음을 정화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 몸의 상처들은 위험해졌으나, 아직 치료법을 찾아야 할 정도로 곪지는 않았다. 나는 사람들에게 화살에 맞은 상처를 숨기고 있으며, 의사가 그 상처를 만지는 것을 참을 수 없다. 의사는 상처에 연고(혹은 찜질)를 바르자고 제안했지만, 나는 그 자극 을 견딜 만큼 마음이 강하지 않다. 의사는 착하고 나에게 보수를 요구하지 않지만, 나의 나태함 때문에 그를 찾아갈 수 없다. 의사가 직접 나를 치료하러 오면, 나는 상처를 곪게 만드는 음식을 먹고 있는 것을 발견하곤 한다. 그는 이제부터 (그런 음식을 먹는 것을) 그만두라고 간청하지만, 그 맛의 달콤함이 내 마음을 유혹한다. 먹고 나면 후회하지만, 내 후회는 진심이 아니다. 의사가 (자신의) 음식을 보내며 (말하길): “건강을 되찾으려면 이것을 먹어라.” 하지만 나쁜 습관 때문에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 이 모든 일의 끝은, –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6. 나를 아는 모든 형제들이여, 나와 함께 울어 주십시오. 그리하여 내 힘보다 더 큰 도움이 내게 임하여 나를 지배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내가 그분(나의 주님)의 제자가 될 자격을 얻게 하소서. 그분의 능력은 영원토록 지속되나이다. 아멘.

 

15. 세상을 버리는 것에 대하여

1. 사랑하는 자들아! “이 세상의 남은 시간이 짧았으니”(고린도전서 7:29) 우리 자신을 돌보자. 누가 육신을 돌본다면 영혼을 돌볼 수 없다. 한 눈으로는 하늘을, 다른 눈으로는 땅을 바라볼 수 없는 것처럼, 마음도 하나님의 일과 세상의 일을 동시에 돌볼 수 없다. 네가 육신을 떠날 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에 대해 신경 쓰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2. 네가 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께서 너를 지켜보고 계심을 명심하라. 네 모든 생각 속에서 하나님께서 너를 보고 계심을 명심하라.

3. 사람들 앞에서 하는 것을 부끄러워한다면, 은밀히(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조차 부끄러워해야 한다. 나무가 열매로 알려지듯이, 마음은 자신의 관조(눈이 향하는 대상)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알게 되고, 이성적인 영혼은 자신의 관조(마음이 주의를 기울이는 대상)를 통해 스스로를 알게 된다.

4. 죄가 너를 유혹하는 한, 자신을 무욕한 자라고 여기지 마라. (정욕으로부터의) 자유를 선물받은 자는 이미 본성에 어긋나게 행했던 일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 네 주님을 모욕하는 한, 자신을 자유로운 자라고 여기지 마라. 네 마음이 세속적인 것을 탐하는 한, 자유는 오지 않기 때문이다.

5. 네 몸을 하나님의 성전처럼 돌보아라. 부활하여 하나님께 대답해야 할 자로서 돌보아라. 네가 저지른 모든 일에 대해 그분께 보고해야 할 자로서 하나님을 경외하라. 네 몸이 상처를 입었을 때 그 상처를 치료하려고 애쓰는 것처럼, 부활할 때 그 몸이 정욕에서 벗어난 상태로 나타나도록 신경 써라.

6. 매일 자기 안에서 어떤 정욕을 이겨냈는지 살펴본 후에, 비로소 하나님께 간구를 드리라.

7. 땅이 씨앗과 물 없이는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사람도 겸손과 육체의 수고 없이는 회개할 수 없다.

8. 공기의 조화가 좋을 때 씨앗이 꽃피듯이, 사람의 마음도 계명을 지키고자 할 때 계명을 통해 꽃피게 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며, 자신의 양심을 모독하지 않으려는 경외심이다.

9. 네가 자신의 방에 앉아 있을 때 음탕한 욕망이 네 안에 싹트면, 그 생각이 너를 휩쓸어 가지 못하도록 주의하여 그 생각에 맞서라. 하나님께서 너를 지켜보고 계시며, 네가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모든 것이 그분 앞에 드러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도록 노력하라. 그러니 네 영혼에게 말하라: 네와 같은 죄인들을 부끄러워하여(그들이 네가 죄 짓는 것을 보지 못하게 하려고 애쓰는)다면, 네 마음의 은밀한 곳까지 들으시는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더 (죄 짓는 것을 두려워해야 하겠는가). 이러한 사유를 마음속에 품음으로써 네 영혼 안에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회복될 것이며, 네가 그 경외심을 따를 때면 (정욕에) 흔들리지 않고 더 이상 정욕에 휘둘리지 않게 될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주님을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과 같으니, 예루살렘에서 영원토록 흔들리지 아니하리라”(시 124:1).

10. 육신을 떠날 때 심판이 있음을 믿는 자는, 자신의 모든 행위에 대해 하나님께 답변해야 할 자로서, 어떤 일에서도 이웃을 판단할 수 없으니, 기록된 바와 같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니, 각 사람이 육신으로 행한 것, 선이든 악이든, 그 보응을 받게 될 것” (고린도후서 5:10)이라 하였기 때문이다.

11. 성도들을 위한 왕국이 있다고 믿는 자는, 선택받은 그릇이 되기 위해 사소하고 하찮은 일에서도 자신을 (흠 없이) 지키려 애쓴다. 이는 “천국은 마치 바다에 던져진 그물과 같아서, 온갖 종류의 물고기를 모은다. 그물이 가득 차면, 그것을 해변으로 끌어올려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은 밖으로 내버린다” (마태복음 13,47–48).

12. 자신의 육신이 부활의 날에 본래의 모습으로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믿는 자는 그 육신을 돌보고 온갖 더러움에서 깨끗이 해야 한다. 기록된 바와 같이: “그분께서 우리 겸손한 몸을 변형시키사, 그분의 영광스러운 몸과 일치하게 하시리니, 이는 그분께서 행하실 수 있는 능력에 따라 그러하시리라” (빌 3:21).

13.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깃든 사람에게는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그를 하나님으로부터 갈라놓을 수 없으니,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듯이: “누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느냐? 환난이냐, 곤고가냐, 박해가냐, 굶주림이냐, 헐벗음이냐, 위험이냐, 칼이냐?(롬 8:35).

14. 하나님께서는 우리도 세상의 그 어떤 것 때문에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떠나지 않은 자들의 무리에 속하게 하시고, 그들과 함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은혜를 얻게 하실 수 있으시니, 그분께 영광이 있나니, 시작이 없으신 아버지와 생명을 주시는 성령과 함께, 지금과 항상, 그리고 영원토록. 아멘.

 

16.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하는 영혼 안에 깃드는 기쁨

1. 먼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너를 환영하며 간청하노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온전해지라. 그리하여 네 수고가 헛되지 않게 하고, 하나님께서 네게서 기쁨으로 온전히 받아들이시게 하라. 상인은 이익을 얻으면 기뻐하며, 기울인 수고를 아무것도 아니 여깁니다. 왜냐하면 (그 수고가 얼마나 유익했는지)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내를 맞이한 사람은, 그녀가 자신을 편안하게 해 주고 잘 돌봐 준다면, 마음을 다해 그녀를 기뻐하며 모든 일에 그녀를 의지합니다. 군대에 입대한 자는, 죽음을 무릅쓰고 왕을 위해 싸워 월계관을 얻으면, 그런 성공을 거두었다는 사실에 기뻐한다. 이것이 바로 멸망해 가는 이 세상의 일들이며, 이를 행하는 자들은 그 일에서 성공을 거둘 때 기뻐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시작하여 그 일을 성공적으로 마친 사람의 영혼에게는 어떤 기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그가 이 세상을 떠날 때, 그러한 그의 행실은 천사들이 그가 어둠의 권세에서 해방된 것을 보고 그와 함께 기뻐하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영혼이 육신을 떠날 때, 천사들이 그에게로 내려오지만, 어둠의 모든 세력들도 그를 붙잡으려 하며, 그 안에 자신들의 것이 있는지 찾아내려고 그를 맞이하기 위해 나서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때 천사들이 그들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행한 일들이 마치 성벽처럼 그를 둘러싸고, 그들이 그를 건드리지 못하도록 지켜준다. 그의 행실이 승리를 거두면, 천사들이 그 앞을 걸으며 노래하리니, 그가 기쁨 가운데 하나님 앞에 서기까지 그러하리라. 그 순간 그는 이 세상의 모든 일과 자신의 모든 수고를 잊게 되리라.

2. 그러니 우리도 이 짧은 시간 동안 선하게 일하기 위해 우리의 힘을 다하고, 우리의 행실을 온갖 악으로부터 깨끗하게 지켜, 우리를 맞서려는 (어둠의) 군주들의 손아귀에서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합시다. 그들은 악하고 자비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것이 조금도 없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 사람의 기쁨과 즐거움, 안식과 면류관은 헤아릴 수 없이 크도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것은 변덕스럽나니, 누가 장사를 하든지, 혼인 문제를 다루든지, 혹은 앞서 내가 말한 다른 어떤 일을 하든지 말이다. 사랑하는 형제여! 하나님 앞에서 눈물로 우리의 힘을 모으자. 어쩌면 그분의 자비로움이 우리에게 임하여, 우리가 행할 (선한) 일들을 통해, (육신을 떠난 후) 우리를 맞이할 악의 지도자들을 물리칠 힘을 보내 주실지 모른다.

3. 굳건한 마음(자기 연민 없이)으로 우리 자신을 돌보고, 악의가 우리를 맞이하러 나올 때 우리를 그 손아귀에서 구원해 줄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품읍시다.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는 것을 기뻐하여, 탐욕의 (영)이 우리를 맞이하러 나올 때 그것이 우리를 구원해 주도록 합시다. 모든 사람, 작은 자나 큰 자를 막론하고 평화와 화합을 사랑합시다. 그래야 그것이 (증오의) 영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줄 것이니, 그 증오가 우리를 맞이하러 나올 때를 대비해서입니다. 모든 사람을 우리 형제처럼 사랑합시다. 누구에 대해서도 마음속에 조금의 원한도 품지 말고, 누구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맙시다; 그리하면 시기가 우리를 맞닥뜨릴 때, 그것이 우리를 시기로부터 구해 줄 것이다. 모든 일에 겸손을 사랑하며, 이웃이 우리를 꾸짖거나 폄하하더라도 그 말을 참아내자. 그리하면 교만이 우리를 맞닥뜨릴 때, 그것이 우리를 교만으로부터 지켜 줄 것이다. 누구든 비방받을 때, 우리가 그를 폄하하지 않도록 이웃의 명예를 지키자. 이는 우리가 시기를 마주할 때, 그로부터 우리를 지켜 줄 것이다. 세상의 이득과 명예를 경멸하여, 우리가 시기를 마주할 때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하자. 우리의 혀를 하나님의 가르침과 진리, 기도에 익숙하게 하여, 거짓이 우리를 맞이할 때 이를 피할 수 있게 하자. 우리의 마음과 몸을 정욕에서 깨끗이 하여, 부정이 우리를 맞이할 때 이를 피할 수 있게 하자. – 이 모든 것은 영혼이 육신을 떠날 때 그 영혼을 붙잡으려 뻗어오나, 만일 영혼이 미덕을 쌓아 두었다면 그 미덕들이 영혼을 도우리라.

4. 지혜로운 자 중 누가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영혼을 죽음에 내어주기를 원치 않겠는가? 그러니 우리 힘껏 행하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은 우리의 겸손을 돕기에 크시다. 그분은 사람이 비천한 피조물임을 아시고, 육신에 있는 동안 마지막 숨을 거두기까지 회개의 기회를 주셨다. 그러니 네 마음에는 오직 하나님만을 향한 한 가지 생각만 두어, 그분께서 너를 지켜 주시게 하라. – 세상의 복을, 마치 그것에 의지할 수 있는 것처럼, 귀담아듣지 말라 – 그리하여 네가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하라.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게 될 것이니,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곤경에 처했을 때 복된 소망을 얻게 될 것이다.

5. 세상의 말을 미워하라, 그리하면 네 마음이 하나님을 뵙게 될 것이다. 자주 기도하는 것을 좋아하라, 그리하면 네 마음이 밝아질 것이다. 나태함을 좋아하지 말라, 그래야 의인들의 부활에 이르렀을 때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네 혀를 삼가라, 그리하면 네 마음이 밝아질 것이다. 나태함을 좋아하지 말라, 그리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네 안에 깃들 것이다. 지금 궁핍한 자에게 풍성한 마음으로 베풀어라. 그래야 성도들과 그들의 선한 행실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음식에 대한 탐욕을 미워하라. 그래야 아말렉이 네 길을 가로막지 못할 것이다. 네 예배(기도 규칙)를 서두르지 말라. 그래야 짐승들이 너를 삼키지 않을 것이다. 취할 정도로 포도주를 사랑하지 말라. 그래야 하나님의 기쁨을 잃지 않을 것이다. 신실한 자들을 사랑하라. 그래야 그들을 통해 은혜를 얻을 것이다. 성도들을 사랑하라. 그래야 그들의 열심이 너를 이끌어 줄 것이다.

6. 천국을 기억하여, 그 갈망이 조금씩 너를 이끌어 가게 하라. 지옥을 생각하여, 그곳의 행실을 미워하게 하라. 매일 아침 잠에서 깨어날 때, 모든 행위에 대해 하나님께 보고해야 함을 기억하고, 그분 앞에서 죄를 짓지 않도록 하라. 그리하면 그분의 경외심이 네 안에 깃들 것이다. 그분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 그리하면 그분의 뜻을 이루게 될 것이다. 매일 여기서 네게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 스스로 성찰하라. 그러면 죽음의 위급한 순간에 곤란을 겪지 않을 것이다. 형제들이 네 행실을 보게 하라. 그러면 네 열심이 그들을 감당하게 할 것이다. 매일 스스로를 시험하여 어떤 정욕을 이겼는지 살펴보되,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말라. 이는 모두 하나님의 자비와 능력 때문이니라. –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까지는 자신을 신실한 자로 여기지 마라. – 마치 네가 선한 사람인 양 교만해지지 마라. 네가 네 원수들에게 자신을 맡길 수 없기 때문이다. – 이 세상에 있는 동안, 그리고 어둠의 모든 권세를 지나치지 않는 한, 스스로를 의지하지 마라.

7. 형제여, 사람에게 슬픔을 가져다주는 영을 경계하라. 그 영은 너를 기진맥진하게 만들기 전까지 많은 함정을 놓기 때문이다. 네가 하나님의 뜻 안에 서 있음을 볼 때, 하나님을 향한 슬픔은 기쁨을 낳는다. 누가 네게 “어디로 도망가야 하느냐?”라고 말하느냐? 너에게는 회개가 없다; 그것은 원수의 편에서 (그렇게 말하며) 사람이 절제된 삶을 살겠다는 결심을 버리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슬픔은 사람에게 (억누르는 무거운 짐으로) 짓누르지 않고, 그에게 말하되 “두려워하지 말고 다시 (하나님께) 오라”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연약함을 아시고 그에게 힘을 주시기 때문이다.

8. 분별력 있는 마음을 가져라. 생각이 떠오를 때, 그러면 그 생각들이 네게서 가벼워질 것이다. 그것을 두려워하는 자를 그 생각들은 그 무게로 인해 나태하게 만든다. (적의) 영향을 두려워하는 자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음을 드러낸다.

9.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않고 무지한 자로 여기는 태도는, 정욕이 원하는 대로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을 나타낸다. 반면 많은 사람 앞에서 자신의 말을 하고자 하는 자는 그 안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음을 드러낸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영혼의 수호자이자 도우미이며, 내면의 주인(이성)을 지키며 그 모든 적들을 소멸시키는 일에서 보호자이다.

10.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자는 자신으로부터 불결함을 떨쳐내려고 노력한다. 자신에 대한 분별 있는 돌봄은 정욕을 잘라내니, 기록된 바와 같이 “돌봄은 지혜로운 자를 찾아내리라”(잠언 17:12. “신중한 사람에게는 근심이 닥치나, 미련한 자들은 악을 꾀하느니라.” 병든 자는 건강의 가치를 깨닫는다. 왕관을 쓰는 자는 왕의 적들을 물리쳤기 때문에 왕관을 쓴다. 정욕이 있는 것처럼 미덕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낙담하고(게으르다면), 우리가 배신자임이 분명하다. 마음의 용기는 하나님 다음으로 영혼을 돕는 것이며, 낙담(게으름)은 악을 돕는 것과 같다. 미덕을 얻고자 하는 이들의 힘은 바로 여기에 있다. 즉, 비록 넘어지더라도 비겁해하지 말고, 다시 구원에 대한 염려를 품는 것이다. 미덕을 실천하는 도구는 이성을 동반한 육체적 수고이다. 정욕의 산물은 게으름에서 비롯된다. 이웃을 정죄하지 않는 것이 이성을 가지고 싸움을 이끄는 이들에게는 방벽(울타리)이 되지만, 이웃을 정죄하는 것은 무분별함 속에서 이 방벽을 무너뜨린다. 말을 조심하는 것은 그 사람이 활동적인 사람임을 분명히 보여주며, 말을 자제하지 못하는 것은 그 사람이 내면에 미덕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성을 바탕으로 행해지는 자선은 (재물에 대한) 경멸을 낳고 사랑으로 이끄나, 자비롭지 않음은 그 사람에게 미덕이 없음을 의미한다. 자비심은 순결을 낳고, 오락(오락과 쾌락에 대한 낭비)은 정욕을 낳으며, 무자비함은 분노를 낳는다. 오락을 미워하는 것은 영혼의 위업이며, 검소함은 육체의 위업이다. 오락에 대한 사랑은 영혼의 타락이며, 분별 있는 침묵은 영혼의 회복이다. 잠에 탐닉하는 것은 육체 속 정욕을 뒤흔드는 것이며, 적당한 기도는 마음의 구원이다. 과도한 수면은 마음을 무디게 하지만, 적당한 기도는 마음을 정교하게 만든다. 헛소리를 하며 깨어 있는 것보다, 이성을 갖춘 채 침묵 속에서 잠드는 것이 낫다. 울음은 근심 없이 모든 악(kakias)을 몰아낸다. 이웃의 양심을 해치지 않는 것은 겸손한 지혜를 낳는다. 세상의 영광은 조금씩 교만을 낳는다. 여유로움(결핍으로 인한 제약 없음)에 대한 사랑은 경건을 쫓아내고, 절제는 정욕을 누그러뜨린다. 음식에 대한 탐욕은 쉽게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몸을 꾸미는 것은 영혼의 파멸이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몸을 돌보는 것은 선하다.

11. 하나님의 심판을 염두에 두는 것은 영혼에 경외심을 낳고, 양심을 짓밟는 것은 마음에서 미덕을 쫓아낸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나태함을 쫓아내고, 무모함은 나태함을 부추긴다. 입을 절제하는 것은 분별 있게 침묵할 때 마음을 하나님께로 이끌지만, 말이 많으면 낙담(나태)과 정신 착란(manian)을 낳는다. 이웃에게 자신의 뜻을 양보하는 것은 마음이 미덕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의미하는 반면, 이웃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뜻을 고집하는 것은 무지를 드러낸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가르침을 받으면 영혼이 정욕으로부터 보호받지만, 세속적인 말을 하면 영혼이 어두워져 미덕에서 멀어지게 된다. 재물 사랑은 마음과 영혼을 뒤흔들지만,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은 그것들을 새롭게 한다. 침묵, 즉 생각을 말하지 않기 위해 침묵하는 것은 네가 세상의 명예와 그 수치스러운 영광을 추구함을 나타내지만, 담대하게(자신을 아끼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아버지들 앞에서 말하는 자는 그들을 자신에게서 쫓아낸다.

12. 문과 창문이 없어 기어다니는 어떤 짐승이든 마음대로 들어올 수 있는 집이 바로, 수고하면서도 그 수고를 지키지 않는 사람이다. 녹이 철을 갉아먹듯이, 인간의 명예는 마음이 그것에 동조할 때 마음을 갉아먹는다. 덩굴이 포도나무와 얽혀 그 열매를 망가뜨리듯이, 허영은 수도사가 그것에 빠져들면 그의 수고를 망가뜨린다. 모든 미덕의 앞에는 겸손이 있고, 모든 정욕의 앞에는 탐식이 있다. 미덕의 끝은 사랑이며, 정욕의 끝은 자기합리화이다. 벌레가 나무를 갉아먹어 파괴하듯이, 마음속의 악의는 영혼을 어둡게 한다.

13. 하나님 앞에서 영혼을 엎드리는 것(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맡기는 것)은 모욕을 당해도 동요하지 않는 마음을 낳으며, 그 눈물은 (그때) 모든 인간적인 것에서 지켜진다. 자기 자신을 책망하지 않는 것은 분노를 견디지 못하고(다스리지 못하고) 있는 것에서도 비롯된다. 세속적인 사람들과 말을 섞는 것(세속적인 방식으로 평신도들과 대화하는 것)은 마음을 불안하게 하고, 기도할 때 마음을 부끄럽게 만드니, 그 후로는 담대함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세속적인 이득에 대한 사랑은 영혼을 어둡게 만들지만, 그것들을 온전히 경멸하는 것은 깨달음을 가져다준다. 수고에 대한 사랑은 정욕에 대한 증오이며, 나태함은 수고 없이도 정욕을 낳는다.

14. 도시 주민들과 어울리지 마라. 그러면 네 마음속에서 침묵이 깃들 것이다. 네 힘에 의지하지 말라. 그리하면 하나님의 도움이 네게 임하리라. 사람에게 원한을 품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네 기도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모든 이와 화목하여 기도할 때 담대함을 얻으라. 네 눈을 지키라. 그리하면 네 마음이 악을 보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를 탐욕스럽게 바라보는 자는 음행을 저지르는 것이다. 너를 모욕한 자가 입은 해에 대해 듣고자 하지 말라. 그래야 마음속으로 그에게 (악으로 악을) 갚지 않을 것이니. 네 귀를 지키라. 그래야 그로 인해 네게 욕설이 쌓이지 않을 것이니. 네 수공예에 힘쓰라. 그래야 가난한 자가 (너에게서) 양식을 얻을 것이니, 무위(無爲)는 영혼의 죽음이자 타락이니라.

15. 부지런한 기도는 사로잡힘(무언가에 대한 집착)을 풀어주나, 기도에 소홀한 것은 비록 사소하더라도 망각의 어머니이다. 임박한 죽음을 기다리는 자는 죄를 많이 짓지 않으나, 수년 뒤에 죽음을 기다리는 자는 수많은 죄에 얽히게 된다. 자신의 모든 행위에 대해 하나님께 보고할 준비를 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그 여정 전체를 온갖 죄로부터 깨끗하게 씻어 주시려 하시나, “언젠가는 거기에 도달하겠지”라고 말하며 이를 소홀히 여기는 자는 악한 자와 이웃이 된다. – 어떤 일을 하기 전에, 매일 네가 지금 어디에 있고, 육신을 떠난 후 어디로 가야 할지 생각하라. 그리고 단 하루도 네 영혼을 소홀히 여기지 말라. 성인들이 누린 영광을 생각하라. 그들과 경쟁하려는 마음이 조금씩 너를 (그들의 뒤를 따라) 이끌 것이다. 또한 죄인들이 겪은 수치를 다시금 생각하라. 그러면 이것이 언제나 너를 악으로부터 지켜 줄 것이다.

16. 항상 네 아버지들의 조언을 따르라. 그러면 네 삶의 모든 시간을 평온함 속에서 보낼 것이다. 자신을 잘 살피라. 만일 네 형제가 너를 원망하여 네 생각이 너를 짓누른다면, 그 생각을 경멸하지 말고, 간청하는 목소리로 형제에게 절하며, 그가 화해할 때까지 물러서지 마라. 형제에게 무정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우리가 원수에게 억압당하기도 한다는 것을) 명심하라. 형제들과 함께 살 때, 그들에게 혼자서 무언가를 하라고 명령하지 말고, 네 몫을 헛되이 하지 않도록 그들과 함께 수고하라. 악마들이 음식이나 옷, 혹은 (모두가 겪는) 극심한 가난 문제로 너를 괴롭히며, 그 일로 인해 사람들이 너를 비난한다고 속삭일 때, 그들에게 반박하지 말고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 맡겨라. 그러면 그분께서 너를 위로해 주실 것이다. 자, 네 예배(기도)를 소홀히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이는 그것이 영혼에 깨달음을 주기 때문이다.

17. 네가 선한 일을 행했다면, 그것을 자랑하지 말라. (반대로, 많은 악을 저질렀다면, 네 마음이 그로 인해 지나치게 슬퍼하지 않도록 하고, 마음이 더 이상 그 일에 연연하지 못하도록 마음을 다스려라.) – 네가 지혜롭다면, 교만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음행의 유혹을 견디고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끊임없이 슬픔을 품고 몸을 다스리며, 네 마음이 ‘네 죄가 용서받았다’고 확신하지 못하게 하라. 그러면 평안을 얻으리라. 질투가 너를 짓누른다면,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지체이며, 이웃이 받는 영광과 모욕은 곧 우리 모두의 영광과 모욕임을 기억하라. – 그리하면 마음이 평온해질 것이다. 음식에 대한 탐욕이 너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다면, 그 음식들이 풍기는 악취를 떠올려 보라. – 그리하면 마음이 평온해질 것이다. 만약 형제를 비난하고 싶은 유혹이 너를 괴롭힌다면, 그가 그 말을 듣게 되면 슬퍼할 것임을 기억하라. 그러면 나중에 그와 마주칠 때 부끄러움을 느낄 것이며, 마음의 평안을 얻게 될 것이다. 교만이 너를 압도하려 한다면, 그것이 네 모든 수고를 헛되게 하며, 교만과 결탁한 자에게는 회개가 없다는 것을 떠올려 보라. 그러면 마음이 평온해질 것이다. 네 마음이 이웃을 깎아내리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면, 그 대가로 하나님께서 너를 원수들의 손에 넘기실 것임을 떠올려 보라. 그러면 마음이 평온해질 것이다. 육체의 아름다움이 네 마음을 사로잡는다면, 그 아름다움에서 풍기는 악취를 떠올려 보라. 그러면 마음이 평온해질 것이다. 만약 여인들의 달콤함이 네게 가장 달콤하다면, 이미 죽은 (여인들)이 어디로 갔는지 떠올려 보라. 그러면 마음이 평온해질 것이다.

18. 이 모든 것을 모아 숙고하면, 이성적 사고가 (다툼을) 없애준다. 그러나 먼저 침묵(세상의 소란에서 벗어남)을 실천하지 않고서는 이성적 사고에 도달할 수 없다. 침묵은 수행을 낳고, 수행은 통곡을 낳으며, 통곡은 하느님에 대한 경외심을 낳고, (하느님에 대한) 경외심은 겸손을 낳으며, 겸손은 깨달음을 낳고, 깨달음은 사랑을 낳으며, 사랑은 영혼을 고통 없고 무욕하게 만든다. 그때 비로소 사람은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깨닫게 된다.

19. 이 모든 것을 마친 후, 이 모든 칭송받을 만한 미덕을 이루고자 하는 자는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염려하지 말고,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 그러면 그는 기도할 때마다 무엇이 자신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는지 깨닫게 될 것이며, 그러한 삶(즉,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삶)을 미워하며 그것을 없애려 할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가 곧 그에게 (앞서 언급한 미덕들을) 베풀어 주실 것이다.

20. 또한 이것을 알아두라. 무분별하게 먹고 마시며 이 세상의 어떤 것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미덕들에 이르지 못할 것이며, 이를 성취하지 못하고 다만 스스로를 속일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회개를 드리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간청하노니, 방탕함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라. 이는 방탕함이 모든 정욕을 되살리고, 영혼에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쫓아내기 때문이다. 반대로 온 힘을 다해 하나님께 간구하여, 그분께서 당신에게 그분의 경외심을 보내주시도록 하십시오. 그리하여 그 경외심이 당신의 하나님에 대한 간절한 소망(하나님과의 교제)을 통해, 가련한 영혼과 대립하며 그 영혼을 하나님으로부터 떼어내어 자신의 소유로 삼으려는 모든 정욕을 당신 안에서 근절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원수들도 바로 이를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며 사람과 대립하고 있습니다.

21. 그러니 형제여, 네가 이 육신에 있는 동안에는 (싸움으로부터의) 평온에 주의를 기울이지 말고, 잠시 동안 정욕으로부터 평온해진 자신을 보게 되더라도 스스로를 믿지 마라. 왜냐하면 정욕들은 때때로 교활한 속셈으로 잠시 잠잠해지곤 하는데, 이는 사람이 마치 정욕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놓아버릴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며; 그러다가 갑자기 가련한 영혼을 덮쳐 작은 새라도 잡듯이 빼앗아 가니, 만일 모든 죄에서 그보다 더 강하다면, 자비 없이 그 영혼을 꺾어버리며, 이미 용서를 구했던 이전의 죄들보다 훨씬 더 파멸적인 죄들로 몰아넣는다.

22.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의 경외심 안에서 굳건히 서서, 그분을 지키며 우리의 일을 행하고, 원수들의 악의를 막아주는 모든 미덕을 지켜 나가자. 이 짧은 시간 동안의 수고와 땀은 우리를 온갖 악으로부터 지켜줄 뿐만 아니라, 영혼이 육신을 떠나기 전에 영혼을 위한 면류관을 준비해 준다.

23. 우리의 거룩한 스승이시며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 원수들의 큰 무자비함을 아시고, 인류를 불쌍히 여기시어, 마음의 굳건함을 위해 이렇게 명하셨습니다. “언제든지 준비되어 있으라. 도둑이 어느 때에 올지 모르니, 그가 갑자기 와서 너희가 잠들어 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게 하라”(마태복음 24, 43, 44), 또 다른 때에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이렇게 명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을 먹으라. 먹기와 마시기와 세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무거워지지 않도록 하라. 그리하면 그 날이 너희에게 갑자기 닥칠까 하노라” (눅 21, 34). 사악한(영들)이 우리를 훨씬 능가한다는 것을 아시고, 제자들에게 그들을 대적할 수 있는 능력이 주님께 있음을 보여 주시며, 그러므로 두려워할 것이 없음을 알려 주시려고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양처럼 이리들 가운데로 보내노라” (마태복음 10:16)라고 하셨으나, 동시에 그들에게 길을 떠날 때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하셨다(누가복음 9:3). 왜냐하면 그들이 그 늑대들에게 속한 것을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그들(늑대들)은 그들을 삼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무사히 돌아와 계명을 지켰을 때,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기뻐하시며, 그들을 위해 하나님과 아버지께 감사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굳건히 하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능력을 이길 권세를 주노니,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하리라” (누가복음 10:18, 19). 그러므로 그분의 말씀은 두려움과 경외심 속에서 전해졌으나, 그들이 그분의 계명을 이행했을 때, 그분은 그들에게 권세와 능력을 주셨다.

24. 이 말씀은 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계명을 지키는 모든 이에게도 해당된다. 그들을 완전한 사랑으로 사랑하신 그분은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라, 작은 양 떼여. 너희 아버지께서 기꺼이 너희에게 나라를 주시려 하심이라. 너희 재산을 팔아 자선을 베풀고, 썩지 않는 보물 창고를 하늘에 마련하라” (눅 12:32, 33). 그들이 이 말씀도 이행했을 때,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 ” “평안을 너희에게 남기노라. 내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요 14:27). 이 사실을 그들에게 확증하시며, 그분은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며, 우리가 그에게로 가서 그와 함께 거처를 삼으리라” (요한복음 14, 23). 그들이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용기를 북돋우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세상에서 너희는 환난을 당하겠지만, 용기를 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요한복음 16:33). 환난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도록 그들을 굳건히 하시며, 그들의 마음에 기쁨을 채워 주시며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고난 중에 나와 함께 있었으니, 내가 내 아버지께서 내게 유언하신 대로 너희에게 유언하노니, 내 나라에서 내 식탁에 앉아 먹고 마시리라” (누가복음 22, 28–30).

25.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모든 사람에게 하신 것이 아니라, 유혹 속에서 주님을 견뎌낸 이들에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유혹 속에서 주님을 견뎌낸 이들이란, 비정상적인 것들(정욕)을 잘라내어 없앨 때까지 그것들에 맞서 싸우는 이들 외에 누가 있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향하시며 그들에게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잔치에서 먹고 마시고자 하는 자는 이 십자가로 그분께 나아가야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정욕을 억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정욕들을 모두 잘라내지 않는 한 말이다. 바로 그 정욕들을 잘라낸 사랑하는 사도도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갈 2:19-20). 그러므로 정욕을 근절시킨 자들 안에는 그리스도께서 사십니다. 그래서 이 사도는 제자들을 가르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은 육체와 그 정욕과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갈 5,24)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또한 자신의 자녀인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시며, “우리가 그와 함께 죽었으면 그와 함께 살 것이요, 우리가 참으면 그와 함께 왕이 될 것이요, 우리가 부인하면 그분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 (딤후 2,11.12)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6. 그분을 배척하는 자들이 과연 누구이겠는가? 육신의 욕망을 따라 행하며, 그로 인해 거룩한 세례를 욕되게 하는 자들 외에 누가 있겠는가? 그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죄 사함이 주어지나, 원수는 시기심에 사로잡혀 다시 죄를 통해 우리를 노예로 삼는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처음부터 원수의 악의가 크다는 것을 아시고,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우리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만일 회개가 없었다면, 구원받는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사도도 세례를 받은 후에도 죄를 짓는 이들이 있음을 아시고, “도둑질하던 자는 더 이상 도둑질하지 말라”(엡 4:28)고 말씀하셨습니다.

27. 그러므로 우리는 성세례의 인장을 지닌 자로서, 우리의 죄를 버리도록 힘써 그 날에 자비를 얻게 하소서. 주님께서 영광의 보좌에 앉아 계시며 가까이 오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든 민족이 그분 앞에 모일 것입니다. 그때 각 사람은 자기 손에 든 등불을 통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드러날 것입니다. 기름이 없는 자의 등불은 꺼질 것이며, 그는 어둠 속으로 내던져질 것입니다. 그러나 등불이 밝은 자는 주님과 함께 왕국에 들어갈 것입니다.

28.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아직 육신에 있을 때 우리의 그릇을 기름으로 채우도록 힘쓰자. 그리하여 우리의 등불이 빛나고 우리가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라. 그릇은 회개이며, 그 안에 담긴 기름은 모든 미덕의 실천이며, 빛나는 등불은 거룩한 영혼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행실을 통해 빛을 발하는 영혼은 주님과 함께 천국에 들어갈 것이요, 자신의 악의로 인해 어두워진 영혼은 어둠 속으로 갈 것이다.

29. 그러므로 형제들아, 힘내라. 우리의 때가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를 염려하는 자는 복이 있다. 열매가 익었고 추수할 때가 왔다. 자기 열매를 간직한 자는 복이 있으니, 천사들이 그것을 영원한 곡창으로 모아 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라지인 자들은 화가 있을 것이니, 그들에게는 불이 닥칠 것이기 때문이다.

30. 이 세상의 유산은 금과 은, 집과 옷이다. 그것들은 우리를 죄로 이끌 뿐이며, 우리가 이곳을 떠날 때면 그것들을 남겨두고 간다. 그러나 하나님의 유산은 헤아릴 수 없이 크니, 눈으로 보지 못했고, 귀로 듣지 못했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르지 않은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 짧은 시간 동안 그분을 따르는 자들에게, 그리고 궁핍한 이들에게 빵과 물, 옷을 제공한 대가로 이를 받은 자들에게 – 이웃을 사랑하고 몸을 깨끗이 지키며,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악의 없는 마음을 품으며, 그 밖의 계명들을 이행한 대가로 – 바로 그 유산을 주셨습니다.

31. 이를 지키는 자들은 – 이 세상에서 평안을 누리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며 – 육신을 떠날 때 영원한 기쁨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죄 가운데서 자기의 욕망을 따르며 회개하지 않고, 쾌락을 좇는 오락과 자기 기만에 빠져 자신의 악한 욕망을 충족시키며, 말만 많고 수다스럽고, 다툼을 좋아하고 논쟁을 일삼으며,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고 가난한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는 등, 그 밖의 죄들을 범하는 자들은, – 그러한 자들의 얼굴은 이 세상에서 수치를 당할 것이며, 사람들은 그들을 경멸할 것이며, 육신을 떠날 때 수치와 부끄러움이 그들을 지옥으로 따라갈 것이다.

32.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일에 성공하도록 도와주실 능력이 있으시니, 모든 악한 일에서 스스로를 지키게 하사, 온 세상에 닥칠 시험의 때에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체하지 않으시고, 보응을 가지고 오셔서 불경건한 자들을 영원한 불 속에 보내시고, 자기 백성에게는 상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분과 함께 그분의 나라에 들어가, 영원토록 그분 안에서 안식을 누릴 것이다. 아멘.

 

17. 세상을 등지고 방랑할 때의 마음가짐

1. 모든 이가 행해야 할 첫 번째 위업은 방랑 생활이니, 특히 은둔처로 물러나 자신의 것(자신의 자리, 가족, 고향. – 편집자 주)을 버리고, 완전한 믿음과 소망, 그리고 자신의 욕망에 맞서는 굳건한 마음을 품고 다른 곳으로 나아갈 때 그러하다. 그때 (적들이) 여러 겹으로 너를 둘러싸고, 유혹과 가혹한 가난, 질병으로 너를 위협하며, 만약 그 유혹에 빠진다면 너를 돌봐 줄 사람도, 너를 아는 사람도 없으니 어떻게 하겠느냐고 속삭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너를 시험하여, 네 열심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드러나게 하려는 것이다.

2. 만일 네가 마침내 결심하고 은둔처에서 홀로 살기로 한다면, (적들은) 너에게 더욱 무거운 두려움의 생각을 심어주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단순히 방랑하는 것만으로는 사람을 구원할 수 없으며, 계명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구원을 준다.” 그러며 그들은 네게 혈육으로 가까운 친척들을 떠올리게 하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들은 어떻나? 이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종이 아니겠느냐?”라고 말할 것이다. 또한 그들은 (그곳의) 공기가 불쾌하고 육체에 고통스럽다는 생각을 네 마음에 심어, 네 마음이 소심함으로 인해 지칠 때까지 계속할 것이다. 그러나 네 마음속에 사랑과 소망이 떼려야 뗄 수 없이 함께 머문다면, 그 (유혹하는 자들의) 악의는 너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못할 것이다. 그리하여 네가 하나님 앞에서 진실함을 드러내고, 네 육체의 안락보다 그분을 더 사랑한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다.

3. 이방 땅에서의 삶이라는 슬픔을 견디는 이들에게, 그 슬픔은 소망을 낳고, 그 소망은 육신에서 오는 유혹들로부터 그들을 지켜준다. 네가 단순히 낯선 곳으로 떠난 것이 아니라, 원수들과의 싸움이라는 고된 노고를 감당할 준비를 하고, 제때에 그들 각각을 물리치는 법을 배우기 위함이며, 무욕의 평온에 도달하여 그들로부터 해방될 때까지, 제때에 싸움에서 그들을 하나하나 이겨내야 하기 때문이다.

4. 허영을 이기고 하나님을 아는 데 성공하는 것은 위대하고도 정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교활한 허영이라는 정욕의 수치에 빠진 자는 세상과 멀어지고, 성도들에게 마음이 굳어지며, 결국 자신의 악행 끝에 사악한 교만과 거짓말(말로는, 더 나아가 위선으로)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너, 충실한 종아, 네 수고를 은밀히 간직하고, 혀를 다스릴 때 마음속으로 아파하며, 혀가 그 수고를 훔쳐가거나 네 원수들에게 넘겨주지 않도록 주의하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일에 힘쓰는) 일꾼으로서, 회개를 통해 육신의 정욕과 모든 죄를 버린 자는,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게 만들어, 흠 없는 제물로 그분께 바침으로써, 그분의 성전이 될 자격을 얻게 된다. 그러나 사람의 영광을 사랑하는 자는 무욕할 수 없으며, 질투와 시기심이 그 안에 깃들어 있다. 그런 자는 자신의 영혼을 수많은 유혹에 내맡기며,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킬 기회를 자주 찾지 못하기 때문에 그의 마음은 악마들에 의해 굳어진다. 그의 끝은 파멸이다.

5. 겸손한 지혜를 얻은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그의 죄를 드러내시어 그가 그 죄를 인정하게 하신다(자백하고 회개하게 하신다). 그 후 여기에 통곡이 더해져 이 두 가지(죄를 인정하는 것과 통곡)가 그 안에 머무르면, 그것들은 그의 영혼에서 악마들을 쫓아내고, 그 영혼을 자신의 영광과 거룩한 미덕들(그 자신과 그로부터 생겨나는 미덕들)로 채워 줄 것이다. 그런 사람은 사람들의 비방을 걱정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기억하는 자신의 죄들은 그에게 분노와 보복으로부터 그를 지켜주는 만능의 무기가 되며, 그는 닥치는 모든 일을 인내로 견뎌낸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그토록 부끄럽게 여기며, 자신의 죄를 눈앞에 두고 있을 때, 어떤 모욕이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 있겠는가?

6. 만일 네가 이웃의 말을 견디지 못하고 그에게 보복한다면, 네 마음속에 원한이 솟아올라, 네가 들은 말로 인해 네 마음에 병을 일으키고, 네가 직접 한 말에 대해 슬퍼하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이 정욕이라는) 속박이 너를 괴롭히게 되어, 너로 하여금 고독 속에 침묵하는 자들을 기쁘게 하도록 강요하고, 이웃을 사랑이 없는 자들로 여겨 네 마음을 잔인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오래 참음을 얻는 수고를 감수하라. 그러면 그것이 분노를 이길 것이며, 사랑은 모욕을 치유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네 안에 이 미덕들을 지켜 줄 것이다. 사랑과 오래 참음은 본성적인 분노를 없애며, 이것들이 네 안에 머무르면, 이웃에게 분노하기보다는 악마들에게 분노하게 될 것이며, 네 안에는 눈물과 겸손함이 있어 이웃에게는 평화로울 것이다.

7. 하나님을 위하여, 그리고 생각의 평화를 위하여, 무례하고 무지한 사람의 가혹한 말을 참아낼 수 있는 자, 그는 평화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그런 사람은 언제나 영혼과 몸과 영의 평화를 지키는 데 강하다. 이 세 가지가 서로 조화를 이루고, 이성의 법에 대항하여 무장하는 (생각들이) 그치며, 육체의 속박이 사라지는 자, 그는 평화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며, 성령께서 그 안에 거하시리니, 이는 그분이 그를 자신의 것으로 삼으셨고, 그에게서 떠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8. 수고가 지혜롭게 정해진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은 이로써 온갖 짐에서 벗어나고, 특히 (악마들 중에서도) 두려움을 조장하는 자들, 즉 사람이 힘쓰는 모든 선한 일에 방해를 일으키며, 그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일 때 마음을 나태함으로 빠뜨려, 어떻게든 그를 이 수고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자들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 우리 안에 사랑과 인내, 절제가 있다면, 그들(적들)은 이 일에서 조금도 성공하지 못할 것이며, 특히 마음이 게으름이 모든 것을 타락시킨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경멸한다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9. 만일 네가 모든 눈에 보이는 물질적 것을 버렸다면, 슬픔의 악마를 경계하여 (모든 면에서의) 궁핍과 (삶의) 비참함 때문에, 다음과 같은 위대한 미덕을 성취할 기회를 잃지 않도록 하라.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는 것, 모욕을 참아내는 것, 그리고 세속적인 어떤 면에서도 명성을 갈망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네가 이러한 태도를 기르기 위해 노력한다면, 그것들은 네 영혼을 위한 면류관을 준비해 줄 것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 겉으로 보기에 가난해진 자들만이 아니라, 온갖 악에서 벗어나 항상 하느님을 갈망하는 자들이 참으로 가난한 자들이다. 또한 눈에 보이는 슬픔을 겪는 자들이 무욕을 얻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사람을 돌보고 자신의 욕망을 잘라내는 자들이야말로 미덕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이다.

10. 그러니 네 마음을 잘 지키며, 네 감정에 주의를 기울이라. 만일 네 마음속에서 기억이 평화롭게 머문다면, 너는 그것을 훔치려는 도둑들을 보게 될 것이다. 생각에 엄격히 주의를 기울이는 자는, 들어와 그것을 더럽히려는 자들을 알아차릴 것이다.

11. 뜨거운 마음으로 계명을 지키려 애쓴다면, (네 생각 속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너를 동요시키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그들은 (선택할 만한 이유가 전혀 없는) 다른 곳을 택하도록 비겁함을 심어주고, (선택이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다음과 같이 속삭인다: “회개하면 다시 (여기) 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마음이 (유성처럼 이리저리 휩쓸리며) 공허하게 방황하도록 교란한다. 그러나 그들의 악랄함을 간파한 자들은 동요하지 않고, 주님께서 그들에게 인내하며 나날을 보내게 하신 그 장소에 대해 주님께 감사를 드린다. 인내와 용기, 그리고 사랑은 수고와 땀에 대해 감사하지만, 나태와 소심함, 그리고 안락에 대한 사랑은 스스로를 영광스럽게 할 수 있는 장소를 찾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많은 이로부터 오는 영광 때문에 감각이 약해지며, 그 결과 정욕의 속박이 그들을 짓누르고, 마음이 산만해지고 (모든 것에) 만족함에 따라 내면의 (교훈)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12. 성자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만약 마음이, 정서가 (정욕이라는 병으로 인한) 쇠약함에서 진정되기 전에 십자가에 오르기를 갈망한다면, 자신의 힘을 넘어선 일을 시작했기에 — 먼저 자신의 정서를 치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 하나님의 진노가 그에게 내릴 것이다.”

13. 네 마음이 방황하고, 그것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모른다면, (알아두라. 네) 행실은 네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 마음을 방황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담의 부자연스러움이다.

14. 만일 네 마음이 온 존재로써 죄를 미워하고, 죄를 낳는 것에서 멀어졌으며, 네가 이성을 가지고 (영원한) 고통을 눈앞에 두고, 죄로 이끄는 모든 것에서 멀어졌으며, 이성을 가지고 창조주께 기도하여 그분이 너와 함께 계시기를 구하며, 그분을 슬프게 할 어떤 일도 하지 않고, 그분 앞에서 울며 말하기를 “나를 구원하시는 것이 주님의 자비이시니, 나는 주님의 도움 없이는 (나의 원수들의) 손에서 벗어날 힘이 없습니다,” – 그리고 (이때) 네 마음을 기울여, 하나님 안에서 너를 가르치는 이마저도 슬프게 하지 않도록 하라.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의 본성에 따른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모든 것을 이루더라도, 순종과 겸손과 인내를 얻지 못한다면, 본성에 어긋나는 쪽으로 치우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네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 순종하며, 진리로 그분께 기도하고 이렇게 말하라. “주님! 제가 주님 앞에 있사오니, 주님의 뜻을 알게 하소서. 나 스스로는 무엇이 내게 유익한지 알지 못하오니. 주님께서 (나의 원수들을) 물리쳐 주소서. 나는 그들의 악한 계략을 헤아릴 수 없나이다.” 그리고 네가 예수님의 본성에 맞는 일을 행한다면, 그분은 네가 어떤 일에서도 길을 잃지 않도록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네가 어떤 계명 하나만 지키고 그분께 온전히 순종하며 자신을 맡기지 않는다면, 그분은 너를 조금도 돌보지 않으실 것이다.

15. 밭이 경작자가 가라지를 제거하고 그 본성에 맞는 (진정한) 씨앗을 뿌릴 때 그에게 반항하지 않는 것처럼, (너도 주님에 대하여 그러해야 한다). 또한 자연스러운 씨앗이 비자연적인 씨앗과 함께 자랄 수 없듯이, 잡초가 그것들을 억누르기 때문이니, 잡초는 그것들보다 더 뻔뻔한 법이다. 마찬가지로 네가 육신의 욕망에서 스스로를 정화하지 않는다면, 죄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없다.

16. (너는 죄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없다), 먼저 죄를 낳는 것에서 자신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 실체이다: 소심함은 죄의 사악한 어머니다; 낙담(나태함)은 자기 의지를 낳고; 자기 의지와 확장성(제한과 제약을 용납하지 않고 넓어지기를 좋아하는 것)은 경멸(모든 마땅한 것에 대한—‘자, 이제 내가 이 일을 하겠다’는 태도)을 낳으며; 지배하기를 원하는(넓음을 사랑한) 마음은 세속적인 대화에 대한 사랑을 낳고, 네게 어울리지 않고 유익하지 않은 것을 찾고자 하는 욕망 을 낳으며, 비난하는(형제)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낳고, (한 사람의) 말을 듣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습관을 낳으며, (한 사람의) 말을 듣고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습관을 낳으며, 이 세상의 것을 추구하는 마음을 낳고, 묻지도 않았는데 가르치고자 하는 욕망을 낳으며, 이웃을 찌르고자 하는 욕망을 낳고, 그 밖에도 많은 악을 낳는다. 그러므로 성공했거나 성공하기를 원하는 자는 죄를 낳는 모든 것에서 분별력 있게 스스로를 지키라. 그러면 죄는 저절로 약해질 것이다.

17. 수련하는 자는 그것들(죄)과 그 쓰라림을 보지만, (구원에 대해) 소홀한 자는 스스로 지옥을 준비한다. (수련으로 인한) 육체의 쇠약함을 두려워하는 자는 본성에 따른 경지에 이르지 못하겠지만, 만일 그가 모든 수고 속에서 하나님께 의지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를 위로하실 힘이 있으시다. 만약 기드온이 물통을 부수지 않았다면(사사기 7:19), 등불의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자신의 몸을 경멸하지 않는다면, 신성의 빛을 보지 못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베르 키네예프의 아내 야엘도, 덤불의 말뚝을 뽑지 않았다면 시사라의 교만을 꺾지 못했을 것이다(사사기 4:21).

18. 마음이 힘을 얻고, 육체와 몸의 모든 정욕을 소멸시키는 사랑을 따르도록 스스로를 준비할 때 (사랑은 오래 참으며, 자비롭고, 시기심과 교만을 미워하며, 마음속으로 본성에 어긋나는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고, 본성에 반하는 어떤 것도 마음을 지배하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때 마음은 그 힘으로 비자연성에 맞서 싸우며, 마침내 그것을 본성에서 완전히 분리해 낸다. 이처럼 마음이 주권을 행사하게 되면, 그때 비로소 마음은 영혼의 우두머리가 되어, (영혼에게) 본성에 어긋나는 것은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말라고 가르치며, 본성에 어긋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과 섞여 있던 동안 영혼에게 저지른 모든 불의를 알려준다.

19. 우리 주 예수께서는 성도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구원의 집을 세우시고) 십자가 위에서 두 강도를 분리하셨다. 두 강도가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분은 그들 가운데 계셨다. 왼쪽에 있던 자는 오른쪽에 있던 자와의 부정한 우정이 깨질 것을 보고 분개했다. 그러나 오른쪽에 있던 자는 예수님께 돌아서서 겸손과 경외심으로 말하였다. “주여, 주께서 이 왕국에 오실 때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누가복음 23:42).

20. 이로부터 분명히 알 수 있듯이, 그들은 더 이상 서로가 아니며, 왼쪽에 있는 자는 자신의 교활한 유혹으로 오른쪽에 있는 자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일 수 없다. 그러나 아직 이 경지에 이르지 못한 이들은 하나님의 자비가 그들에게 임할 때까지 넘어졌다 일어나기를 반복하며, 그 자비가 임하지 않는 한 구원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두려움과 겸손으로, 오른편에 계신 분과 같이 깨달음에 이르도록 힘써야 한다. 겸손한 지혜는 모욕을 견뎌낼 힘을 줄 것이다.

21. 누구든지 자기의 악한 본성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할 때, 비로소 하나님 앞에서 저지른 자신의 모든 죄를 올바르게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마음이 아파하며) 쓰라린 분리로 그 죄들로부터 떨어져 나가지 않는 한, 그는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경지에 이른 자들은 – 울음과 기도를 얻었으며, 정욕과의 교활한 동거를 떠올리며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함 속에서 은밀히 수고하는 자들을 굳건히 세우실 힘이 있으시다. 그분께 영광과 찬송이 세세토록 있기를. 아멘.

 

18. 원한을 품지 않음에 대하여

1. 지극히 거룩하신 사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명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가까이 계십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와 감사를 드리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십시오”(빌 4:5-6);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속에 거하게 하소서” (골 3,15). 그리고 (주님께서는) 마가복음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빚진 자들의 모든 죄를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이다”(막 11,25; 마 6,14). 주님의 이 말씀은 무섭습니다: (이 말씀에 따라) 만일 여러분의 마음이 모든 사람에게 깨끗하지 않음을 안다면, 하나님께 아무것도 구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죄인으로서 자신과 같은 사람을 향해 원한을 품고 있으면서, 마음을 살피시는 분께 “내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나도 용서하듯이)”라고 말할 때, 그분께 모욕을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무지한 채 입술로만 기도하는 것이다. 참으로 마음으로, 성령 안에서,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자 하는 자는 기도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마음이 모든 사람에 대해 근심 없는지 아닌지를 살핀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는 (기도하면서)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니, 그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때 네 마음은 기도하지 않고, 단지 관례대로 정해진 기도 시간을 채울 뿐이다.

2. 그러므로 (기도라는) 행위를 순수하게 행하고자 한다면, 먼저 네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아라. 그래야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할 때, 너 자신도 너에게 구하는 이를 불쌍히 여기고, “나를 용서하소서”라고 말할 때, 너 자신도 불쌍한 자로서 용서하며, – “내 죄를 기억하지 마소서”라고 말할 때, 너 자신도 이웃의 죄를 기억하지 않았고, – “내가 의도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저지른 악행을 기억하지 마소서”라고 말할 때, 너 자신도 (이웃이 저지른) 그 악행을 기억하지 않았을 때, 만약 그렇게 해야 한다면, 어떤 사람 에 대해서도 아무런 악한 생각조차 해서는 안 된다. 만약 네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면, 네 기도는 헛된 것이다: 모든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네 기도를 들으시지 않으실 것이다. –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

3. 주님께서는 마태복음의 기도에서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빚을 탕감해 주시옵소서. 우리도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탕감하오니”(마태복음 6:12). 그리고 누가복음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이다” (마태복음 6,14. 성 루카 복음서에는 “용서해 주면, 너희에게도 용서받을 것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 누가복음 6,37). (대략 이런 뜻이다): 나는 너에게 모든 사랑을 주었으니, 네가 하나님께 바라는 것을 먼저 네 이웃에게 행하라. 그러면 네가 사람들에게 그렇게 행한 만큼 (죄에서) 해방될 것이다. 만약 네가 (하나님의 이성을 지닌) 모든 피조물에 대해 누구에게도 원한을 품지 않도록 네 마음을 정화했다면, 이것을 지켜야 한다. 하나님은 진리이시지, 단지 혀로 하는 말만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스스로를 지옥에 묶기도 하고, 스스로를 그곳에서 풀어주기도 한다. 죽음으로 향하든 생명으로 향하든, 의지보다 더 잔혹한 것은 없다.

4. 영생을 사랑한 자들은, 그들이 걸려 넘어지지 않을 때 복이 있다. 그러므로 수고와 땀 속에서, 마음속 깊이, 너를 괴롭히는 생각(모욕감)에 맞서 싸워야 한다. 그래야 그 화살이 네 마음을 찔지 못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네가 항상 네 눈앞에 네 죄를 두고 있지 않는다면, 그것을 치유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누군가 네게 어떤 악을 저질렀다는 말을 듣게 되면, 이에 맞서 네 선한 뜻을 세우라. 즉, 마음속으로 그에게 갚아주지 말고, 그를 비방하지 말고, 정죄하지 말고, 모든 사람의 입에 넘겨 공개적으로 알리지 말며, 그 후 이렇게 생각하라. ‘내 안에는 나쁜 것이 아무것도 없다.’ 네 안에 지옥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면, 그것은 네 이웃에게 보복하라고 부추기는 악한 (생각)들을 이길 것이며, 네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불쌍한 자여! 너는 네 죄를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께서는 오늘까지 그 죄를 (모든 사람 앞에서) 드러내지 않으시고 너를 참아 주셨으나, 너는 이웃에게 화를 내며 그를 모든 사람의 입에 내던지고 있다. 네 마음속에 이웃에 대한 관용이 전혀 없다면, 네가 네 죄를 진정으로 뉘우치지 않았다는 것이 명백하지 않은가?

5. 그러므로 네 마음이 누그러져 (형제에 대한) 온갖 악의를 멀리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너에게 자비를 베푸실 것이다. 그러나 네 마음이 교활하여 이웃에게 잔인하게 대한다면, (알아두라, 네) 기억이 아직 하나님 앞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용서해 주십시오. 저는 죄로 인해 가난하고 비천하며, 이 글을 쓰면서 마음속으로 부끄러움에 얼굴을 가리고 있습니다.

6.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의 본성에 이르는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면, 그의 모든 수고는 헛된 것이다. 농부는 씨를 뿌리며 훨씬 더 많은 수확을 거두기를 기대하지만, 만약 해로운 바람이 불면, 씨앗과 땅을 일구기 위해 들인 수고가 헛되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그의 마음에는 끊임없는 슬픔이 찾아온다. 로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성 베드로 사도는 머리를 아래로 향하게 매달아 달라고 청하셨는데, 이는 모든 사람을 지배하고 있는 비자연성의 신비를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분은 (이를 통해) 마치 모든 세례받은 자가 아담을 덮쳐 그의 영광에서 악한 모욕과 영원한 수치로 떨어뜨린 사악한 비자연성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할 의무가 있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았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용감하게 분투하여, 사람이 보는 모든 것(그에게 비자연적인 것)을 미워하고, 끝까지 가장 격렬한 증오로 그것과 대적해야 한다.

7. 다음은 아담의 모든 자손을 사로잡은 주요한 (인간에게 비자연적인) 정욕들이다: 이득, 명예, 안락, (마침내) 남기는 것에 대한 자부심, 몸을 깨끗하고 단정하게 꾸미려는 것, 그리고 좋은 옷을 추구하는 것.

8. 이 모든 것은 뱀이 하와의 입에 넣어 준 음탕한 달콤함을 키우며,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아담의 자손임을 알게 된다. 바로 우리를 하나님의 원수로 만든 이 악한 생각들 때문이다.

9.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고, 묻혔다가 새롭게 부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가 자신을 예수님의 본성에 따라 존재하며, (지상에서) 인간으로 계셨을 때 그분의 거룩한 발자취를 따라가신 그분과 같이, 그분의 거룩한 일꾼들을 위해 행하시는 바를 볼 때 그러하리라. 그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겸손, 가난, 궁핍, 탐욕 없음, 용서, 평화, 모욕을 참아내는 것, 육체에 대한 무관심, 그리고 악의적인 자들의 비방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그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것은 모든 일을 미리 아시는 것과 온유함으로 사람들에게 오래 참는 것이다. 이 경지에 이르러 자기 내면의 부자연스러움을 제거한 자는, 자신이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에게서 나온 자이며, 영광과 경배를 받으실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임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영원토록. 아멘.

 

19. 정욕에 대하여

1. 나 또한 선지자 이사야와 함께 “산모가 진통을 겪듯이” (그때까지) 그것들을” “모두” “말리고 멸해 버리리라” (사 42,14)라고 말하고 싶다. 만일 네 안에 성령의 샘이 솟아난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이는 그것들(누구? 정욕들)이 말라 죽었다는 표징이다. 우리 구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나 저기에 있는 것이 아니요( ), 오직 너희 안에 있다”(눅 17,21)고 하셨다. 왕국의 일에 대해 말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이들도 있고, 왕국의 일을 행하지만 경계(주의)와 이성을 갖추지 않은 이들도 있다. 그러나 “너희 안에 있다”는 구세주의 말씀이 이루어진 이들은 드물다. 그들은 희귀하며 찾기 어렵다. 이러한 이들에게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셨고, 복음서 저자 요한의 말씀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그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들은 혈통이나 육신의 정욕이나 남자의 정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요한복음 1, 12, 13). 이들은 하와를 덮친 슬픔에서 벗어났다: “고통 중에 자녀를 낳으리라” (창세기 3, 16). 이들은 아담에게 내린 쓰라린 심판을 벗어났다: “네가 일하는 땅이 저주를 받을 것이라” (창세기 3, 17). 이들은 마리아가 누렸던 기쁨을 받아들인 자들이다: “성령께서 네게 임하시리라”(누가복음 1:35). 슬픔이 하와를 덮쳤고(덮치고 있으며) 그녀의 모든 후손을 오늘날까지 덮치고 있듯이, 기쁨 또한 마리아를 감쌌고(감싸고 있으며) 그녀의 후손을 오늘날까지 감싸고 있다. 우리가 한때는 하와의 자녀들이었고, 우리의 불경건한 생각을 통해 그 저주가 우리에게도 임했음을 깨달았듯이, 이제 다시 우리는 성령의 생각과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그것이 참으로 우리 몸에 있다면—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났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기록했듯이: “너희는 스스로를 시험하여 보라.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지, 아니면 너희가 무지한 자들인지”(고린도후서 13:5).

2. 그러므로 우리가 육신의 형상을 지녔을 때, 우리는 우리 안에 거하는 그분의 생각들, 곧 정욕인 불의한 본성으로부터 그분의 아들들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형상을 입은 자들은 그들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통해 자신이 그분의 아들들임을 깨닫습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외치며 말했습니다. “주여, 주를 경외함으로 우리가 태중에 받아들였고, 자라나서 구원의 영을 낳았으니, 그 영으로 말미암아 땅의 산모들이 되었습니다”(사 26,1–8); 전도서에도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태중에 있는 뼈가 태어나는 것과 같이, 성령의 길도 그러하니라”(전도서 11,5). 성모 마리아께서 육신으로 그분을 태중에 품으셨듯이, 성령의 은총을 받은 자들도 사도의 말씀대로 그분을 마음속에 품고 있으니,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분의 성령으로 너희 내면의 사람을 굳건하게 하시고,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거하시게 하시며,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기초를 다지게 하사, 모든 성도와 함께 서게 하실 것” (엡 3, 16–18);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에 담고 있으니, 이는 능력이 우리에게서 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넘치는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4, 7),

3. 그러므로 네가 “영광에서 영광으로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되어 가노라”(고린도후서 3, 18)는 말씀에 이르렀고, “하나님의 평화가 너희 마음속에 거하게 하라” (골 3,15),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다면”[25] , “육신은 죄로 말미암아 죽었느니라”(롬 8,10); 만약 네가 “어둠 속에서 너희 마음속에 하나님을 아는 빛이 비쳤다”(고린도후서 4:6)는 말씀이 말하는 경지에 이르렀다면, – 그리고 “너희 허리를 동이고 등불을 켜 두라. 마치 주인이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눅 12:35, 36)라는 말씀이 네게 이루어져, 성도들 가운데서 자신을 변호할 말이 없어 입이 막히지 않도록; 만일 네 그릇에 지혜로운 처녀들처럼 기름이 있어, 혼인 잔치에 들어가 밖에서 버림받지 않을 것임을 안다면; 네 영과 영혼과 육체가 흠 없이 하나 되었음을 느꼈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흠 없이 일어날 것이며, 네 양심이 책망받을 것도 없고 흠 잡힐 것도 없게 되었으며, 구세주께서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 “천국은 바로 이런 자들의 것이다”(마태복음 19:14): 그러면 너는 진실로 그분의 신부가 되었으며, 성령께서 네가 아직 육신에 있을 때 너를 상속의 땅으로 인도하셨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슬픔과 쓰라린 신음을 기대하라. 그러면 성도들 앞에서 수치와 모욕이 너를 앞설 것이다.

4. 또한 이것을 알아두라. 처녀가 매일 아침 일어나면, 신랑을 위해 자신을 단장하기 전에는 다른 어떤 일도 하지 않고, 거울을 자주 들여다보며 얼굴에 작은 잡티라도 없는지, 그것이 신랑의 마음에 들지 않을까 걱정하듯이, 성도들 역시 밤낮으로 자신의 행실과 생각을 살피는 데 큰 정성을 기울여, 그들이 하나님과 성령의 멍에 아래에 있는지 아닌지를 알기 위함이다.

5. 그러므로 형제여, 마음과 몸의 고난 속에서 분별력을 가지고 그 영원한 기쁨을 얻기 위해 부지런히 힘쓰라. 사도가 말한 것처럼(고린도후서 7:1; 엡 6:17).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실 능력이 있으시니, 우리가 그분의 성도들과 함께 하도록(그 지위에 이르도록) 합당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20. 겸손에 대하여

겸손이란 무엇인가? 겸손이란, 자신을 죄인이라 여기고 하나님 앞에서 선한 일을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겸손의 실천은 다음과 같다: 침묵, 어떤 일에서도 자신을 과시하지 않음, 자만하지 않음, 순종, 땅을 바라봄, 눈앞에 죽음을 두는 것, 거짓말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대화 중에 헛소리를 하지 않으며, 윗사람에게 반박하거나 자신의 말을 고집하지 않고, 처지를 참아내며, 안식을 미워하고, 스스로를 수고에 부치며, 누구에게도 근심을 주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형제여, 네 영혼이 온갖 정욕의 거처가 되지 않도록, 그리고 네가 영원히 헛되이 생을 마감하지 않도록, 이 모든 것을 정확히 실천하도록 힘쓰라. 아멘.

 

21. 회개에 대하여

1. 아부 이사야에게 물었다. “회개란 무엇이며, 죄에서 도피하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그러자 그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길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생명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의 길이다. 한 길을 걷는 자는 다른 길을 걷지 않는다.” 그러나 두 길을 모두 걷는 자는 아직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으니, 천국으로 이끄는 길에도, 지옥으로 내모는 길에도 속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런 자가 죽는다면, 그에 대한 심판은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몫이다.

2. 그러나 천국에 들어가고자 하는 자는 그 길을 지키나니, 천국은 모든 죄를 근절하는 것이다. 물론 원수들이 씨를 뿌리지만, 그들의 생각은 싹트지 않는다. 왜냐하면 마음이 신성의 달콤함을 관조하는 경지에 이르면, 그들의 화살은 더 이상 그 마음속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마음은 (그때가 되면) 미덕의 온전한 갑옷을 두르고, 그 갑옷이 그를 지키며 세심하게 돌보고, (생각이나 정욕으로 인한) 동요에 빠지지 않게 하며, 오히려 그 관상으로 마음을 채워, 두 길을 알고 분별하여, 한 길은 피하고 다른 길은 사랑하게 한다.

3.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깨달은 자는 원수의 괴로움을 깨달은 것이요, 왕국을 깨달은 자는 지옥을 깨달은 것이며, 사랑을 깨달은 자는 증오가 무엇인지 깨달은 것이요, 하나님에 대한 갈망을 깨달은 자는 세상에 대한 증오를 깨달은 것이다; 순결이 무엇인지 깨달은 자는 (정욕적인) 욕망의 악취가 나는 불결함을 깨달은 것이며, 미덕의 열매를 깨달은 자는 악의 열매가 무엇인지 깨달은 것이다. 천사들이 그의 행실을 기뻐하는 자는, 그가 악마들의 일을 행할 때 악마들이 그를 어떻게 기뻐했는지를 깨달은 것이다. 왜냐하면[26] 그들로부터 도망치지 않는다면, 그들의 쓰라림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누가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위하여 큰 가난 속에 머물지 않는다면, 어떻게 탐욕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겠는가? 온유함을 얻지 않는다면, 어떻게 시기심의 쓰라림을 알 수 있겠는가? 모든 일에 인내를 얻지 못한다면, 분노의 반항성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온유함과 겸손을 얻지 못한다면, 교만의 뻔뻔함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가장 순결한 무죄함의 달콤한 향기를 알지 못한다면, 음행의 악취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자신의 결점을 알지 못한다면, 정죄의 수치스러움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죄에 대한 통곡을 알지 못한다면, 우스꽝스러움의 무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네 마음이 안정되지 않고 하나님의 빛을 알지 못한다면, 낙담의 당혹감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4. 이 모든 (악한 정욕들)의 우두머리는 하나이며, 그것은 원수의 세력의 악의라고 불린다. 반면 모든 미덕의 어머니는 하나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경외심이라 불린다. 이 경외심을 얻은 자 안에서, 그것은 순결함 속에서 미덕을 낳고, 앞서 내가 말했듯이 악의 가지를 잘라낸다. 그러니 사랑하는 자여, 이를 네 것으로 삼으라. 그리하면 네 (삶의) 모든 시간을 평온함 속에서 보낼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은 모든 미덕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과하지 못한 자는 아직 천국의 (아들)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앞서 말한 모든 정욕을 하나하나 잘라낼 때까지 조금씩 노력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이 (이 일에) 힘쓰고 있는지 아닌지 알고자 한다면, 다음이 그 징표가 되리라. 왼쪽 편이 그 영향을 드러내는 한, 그 안에 죄는 아직 죽지 않았으며, 오른쪽 편의 미덕들은 그와 화해하지 못한다.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가 순종할 자를 종으로 삼으면, 너희가 순종하는 자의 종이 되는 것이니, 이는 죄를 따라 죽음을 향하든지, 순종을 따라 의를 향하든지 하리라”(롬 6:16)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 또 “너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알지 못하느냐? 오직 분별력이 부족한 것뿐이겠느냐”(고린도후서 13:5)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또한 야고보는 “누구든지 너희 가운데서 자신이 신실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의 혀를 제어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의 믿음은 헛된 것이다”(야고보서 1:26)라고 말합니다.

5. 이 모든 것을 성령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며, 부자연스러움에서 벗어나고 그것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는 방법을 보여 주십니다. 회개란 죄에서 돌이키는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는 하나가 아니라, 온전한 옛 사람이 곧 죄라 불립니다. 사도가 왜 “경주하는 자들이 다 경주하지만, 상을 받는 자는 한 사람뿐임을 모르십니까?”(고린도전서 9:24)라고 말합니까? 그것은 바로 (모든 이와) 맞서 용감하게 싸우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겠습니까? 또한 (같은 사도가) “모든 사람과 경주하되 , 이기는 자는 자제하는 자니라” (같은 장 25절)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형제들아, 우리 자신을 돌보자.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 앞에 스스로 엎드려(원수들로부터 보호해 주시기를 간구하며) 자신을 내어드리는 것 외에,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돌봄이 아니겠는가? 그분은 원수들에 맞서 강력하셔서 그들이 우리에게 뿜어내는 악한 기세를 꺾으시나, 사람은 육과 피를 가진 존재일 뿐이다.

6. 다시 (이 아부에게) 물었다. “수녀원에서 침묵을 지키는 것이 무엇인가?” 그러자 그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수녀원에서 침묵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원수가 심어 놓는 온갖 악한 생각을 대적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세상으로부터의 도피이다.” 그에게 또 물었다. “세상이란 무엇입니까?” 그러자 그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세상은 죄의 광야이며, 세상은 비정상적인 것들의 작업장이며, 세상은 육신의 욕망을 채우는 것이며, 세상은 항상 이 세상에 머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며, 세상은 영혼보다 몸을 더 돌보는 것이며, 세상은 (마침내) 세상을 떠난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마침내) 떠날 것이라고 자랑하는 것이다. 내가 스스로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 요한이 이렇게 말하느니라.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세상에 있는 것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의 사랑이 없나니,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육신의 정욕과 눈의 정욕과 이 세상의 자랑이니, 이는 아버지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이 세상에서 난 것이니라. 세상과 그 정욕은 지나가나,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리라” (요한일서 2, 15–17).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의인이요, 죄를 범하는 자는 마귀에게 속한 자니, 마귀가 처음부터 죄를 지었음이라” (요한일서 3, 7. 8). “이 세상의 정욕은 하나님과 원수이다” (야고보서 4, 4). 또한 사도 베드로는 자신의 자녀들이 세상의 죄와 거리를 두기를 바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나그네와 이방인으로서 영혼을 치는 육신의 정욕을 멀리하기를 간청하노라” (베드로전서 2, 11).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 많은 세상이 사람이 그것을 버릴 때까지 지독한 짐이 됨을 아시고, 제자들에게 용기를 주며 말씀하셨다: “이 세상의 임금이 오나니, 내 안에는 그에게서 아무것도 없느니라” (요한복음 14:30); 또 다시 “온 세상이 악에 빠져 있다” (요한일서 5:19)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또한 제자들에 대해,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5:19). 온갖 죄의 만연에서가 아니라면, 그분은 어떤 세상에서 그들을 데려가신 것입니까?

7.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자는 정욕을 피해야 한다. 만일 정욕을 끊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의 거처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정욕에서 떠나지 않는다면, 그분의 신성의 달콤함도 보지 못할 것이니, 그분께서 친히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네 눈이 맑으면 온 몸이 밝으겠고, 네 눈이 흐리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라”(마태복음 6:22, 23). 그러므로 보라, 만일 마음이 악으로부터 건전하지 못하면, 신성의 빛을 볼 수 없으니, 악은 그때 마음에 어두운 벽이 되어 영혼을 텅 비게 만들기 때문이다. 복음서에 기록된 대로: “누구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두지 않고, 등잔대 위에 놓아 들어오는 사람들이 빛을 보게 한다” (누가복음 8,16). 여기서 ‘침상’은 세상의 거짓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이 비정상적인 상태에 있는 한, 그 안에는 신성의 등불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마음이 높은 등불이 될 때, 비로소 그 위에 신성의 빛이 비추게 되며, 그는 집 안에 있는 자들을 분별하여, 내쫓아야 할 자는 내쫓고, 화해해야 할 자는 남겨둔다. 주님께서는 그분의 신성의 계명으로 마음이 깨달음을 얻은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치셨습니다. “듣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너희에게 해를 끼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 네 뺨을 치는 자에게 다른 뺨도 내어주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까지 내주라. 너에게 구하는 자에게는 무엇이든지 주고, 네게 빌려가려는 자를 물리치지 말며, 네 것을 빼앗는 자를 괴롭히지 말라” (누가복음 6:27–30. 마태복음 5:42 참조).

8. 주님께서는 세상을 떠난 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셨으니,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들의 구주이신 그분을 따르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완전한 사랑으로 사랑하신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일어나, 여기서 떠나자”라고 말씀하셨다(요한복음 14:31). 그분은 “일어나, 여기서 떠나자”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을 어디로 데려가시는 것일까요? 그분은 이 세상의 일에서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시고, 그분의 나라 안에서 안식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그들을 격려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으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너희도 내 안에 머물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요한복음 15:4, 5). 주님께서는 세상을 떠난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그들에게는 성령이 계시고 그분의 마음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를 고아처럼 내버려 두지 아니하리라. 내가 너희에게로 오리라” (요한복음 14, 18).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이 자신 안에 거하시기를 원하며, 고아가 되는 것을 원치 않는 자는, 먼저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지키는 데 힘써야 하며, 그러면 그분이 그 안에 거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와 멀지 않으시며, 우리와 그분 사이에는 정욕 외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9. 형제여, 만일 네가 스스로를 세상을 버린 자라고 칭하면서도, 정작 세상의 일을 행하고 있다면, 너는 세상을 버린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세상을 버린 자에게 다음과 같은 표징을 주셨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자는 그것을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그것을 얻을 것이라”(마태복음 10:39). 육신의 모든 욕망을 끊어내지 않고서는 어떻게 자기 목숨을 잃을 수 있겠는가? 또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는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눅 14,27)고 하셨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지라고 하신 이 십자가 는, 우리가 십자가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항상 정신을 차리고 덕을 지키며 서 있어야 하는 것 외에 무엇이겠는가? 즉, 정욕들이 완전히 잘려 나가기 전까지는 정욕을 절제하는 것, 그리하여 마음이 마침내 무적의 상태로 일어설 때까지입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마음이 들끓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표징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거니와,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한복음 12:24). 그리고 곡식 알갱이처럼 죽은 자들을 위로하시며, 그분은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존귀하게 하실 것이요, 내가 있는 곳에 내 종도 함께 있을 것이다” (요한복음 12:26). 그렇다면 예수님께 어떻게 섬기는 것이겠습니까? 정욕에 사로잡힌 세상을 미워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있겠습니까? 그 계명을 지킨 그들은 그분 앞에서 담대히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나이다. 그러면 우리에게 무엇이 있겠나이까?(마태복음 19, 27). 그리고 그분은 그들에게 “나를 따르는 너희는, 인자가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보여주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내나 자녀나 밭을 버리는 자는 백 배를 받고 영생을 상속하리라” (마태복음 19, 28–29).

10. 우리 주님, 지극히 달콤하신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모든 것에 대해 염려하지 않는 마음을 얻지 못하면 그의 마음이 십자가로 올라갈 수 없다는 것을 아시고, 습관과 만남이 마음을 십자가에서 떨어뜨리는 모든 것을 버리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그분께 다가와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다만 먼저 제 집에 있는 일들을 정리하고 오겠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눅 9:61)라고 말했을 때, 우리 사랑하는 예수님께서는 그가 그것을 보게 되면 다시 마음이 그쪽으로 기울어질 것이며, 그곳의 여러 우연한 일들이 마치 정당한 권리라도 있는 양 그를 붙잡을 것임을 아시고, 그에게 가지 말라고 금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밭을 갈다가 뒤를 돌아보는 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누가복음 9, 62). (그 후 왕의 아들의 혼인 잔치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시며) (왕이) 아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고, 종들을 보내 초대받은 자들을 부르게 했으나, 그들은 각자 세속적인 것에 대한 사랑 때문에 올 수 없자, 주님께서는 슬픔에 차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게로 오되,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와 아내와 자녀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가복음 14:16–26).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그분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 자는 먼저 마음을 세상으로 끄는 모든 것을 미워할 마음을 품지 않으면, 자신이 갈망하는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음을 가르쳐 주십니다. 또한 믿음만 가지고 그에 따른 실천이 따르지 않는 것에 의지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일깨우시며, 주님께서는 한 왕이 들어와 “앉아 있는 자들을 보았더니, 그 중 한 사람이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것을 보고” 그를 캄캄한 바깥 어둠 속으로 내쫓으라고 명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22,11–13). 그들은 기독교인의 이름으로 들어가지만, (기독교적인) 행실이 없음을 이유로 쫓겨납니다. 마찬가지로 사도도, 아무도 하나님의 것과 이 세상의 것을 동시에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무도 군인이 되어 세상의 장사에 얽매여서는 지휘관에게 기쁨을 줄 수 없느니라. 만일 누가 고난을 당하더라도, 불법적으로 박해를 받는 것이 아니라면, 면류관을 받지 못할 것이다”(딤후 2:4, 5). 또한 그의 수고가 헛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북돋우며,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고하는 일꾼은 먼저 열매를 맛보는 것이 마땅하다”(딤후 2:6). 또 다른 이들에게 편지를 쓰며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혼자는 주님의 일에 전념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할 방법을 찾지만, 기혼자는 세상의 일에 전념하여 아내를 기쁘게 할 방법을 찾습니다” (고린도전서 7:32, 33). 그렇게 염려하는 자는 그를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내쫓으라.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다”라고 외치는 무서운 음성을 듣게 될 것이다(마태복음 22:13).

11. 형제들아, 우리 힘을 미덕의 옷을 입는 데 쓰자. 그래야 쫓겨나지 않을 것이니, 그 날에는 어떤 편파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가 제자들에게 “이런 일을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다”고 말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갈 5:21). 죽은 정욕에서 깨어나게 된 자들은 더 이상 경쟁자가 없음을 아셨기에, 그분은 그들에게 성령의 열매, 곧 “사랑, 기쁨, 평화, 오래 참음, 친절, 자비, 신실, 온유, 절제, 인내”를 보여주셨습니다.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는 율법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갈 5, 22, 23). 그리고 우리의 사랑하는 주 예수님께서는 그날에 우리 행위의 열매가 드러날 것임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며, “많은 사람이 들어가려 하되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집주인은 “일어나 문을 닫은 뒤” 두드리는 자들에게 “너희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실 것이기 때문이다(눅 13, 24. 25). 과연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그분이 무언가를 모르신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라고 두드리며 말하는 이들처럼, 덕을 알지 못했기에 그분께서도 그들에게 “너희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그분은 믿음을 가지고 있으나 행함이 없는 자들에 대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누구든지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안에 있으면, 그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 누구든지 내 안에 머물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으로 내던져져 말라 버리리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 불에 던져 태우리라” (요한복음 15:5, 6). (가지들)이 좋은 열매를 맺으면, (아버지께서) 정결하게 하사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시리라” (요한복음 15:2). 또한, 육신의 욕망대로 행하는 자들을 사랑하지 않으심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며, 그분은 기도 중에 말씀하셨다. “내가 온 세상을 위하여 구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주께서 내게 주신 자들, 곧 주께 속한 자들을 위하여 구하노 ” (요한복음 17:9). 그리고 나는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왔노라 (요한복음 15:19): 이는 세상이 자기 것을 사랑하기 때문이라. 마지막으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여, 그들을 원수로부터 지켜 주소서. 그들은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니이다” (요한복음 17:15, 16).

12. 형제들아, 우리가 세상에서 나온 자인지 아닌지 스스로 살펴보자. 만일 세상에서 나온 자가 아니라면, 그분께서 우리를 악에서 지켜 주시리니, 그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나는 이 사람들만을 위하여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말을 믿고 나를 따르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구하노니, 우리와 같이 그들이 하나가 되게 하소서.”“내가 있는 곳에 그들도 나와 함께 있게 하소서”라고도 하셨다(요한복음 17:20–24). 이제 보라, 이 세상에서 수고하며 육신의 욕망을 미워한 사람들이 그분과 함께 끝없는 영원토록 다스릴 것인데, 그분이 우리를 얼마나 큰 사랑으로 사랑하셨는가? 사도 요한도 그 위대한 영광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분이 나타나실 때, 우리가 그분과 같아질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요한일서 3:2). 우리가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한다면 말입니다. 그리고 다시 그는 (말하기를): “사랑하는 자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더라도 놀라지 말라. 우리가 형제들을 사랑함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음을 우리는 안다” (요한일서 3:13, 14). 그리고 또: “의를 행하지 아니하고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라” (같은 곳, 11절). 또한: “의를 행하는 자는 하나님에게서 난 자니라” (요한일서 2:29), “죄를 범하는 자는 마귀에게서 난 자니라” (요한일서 3:8). 그리고 또: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 안에 거함이라. 또한 죄를 지을 수 없나니, 이는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니라” (요한일서 3:9).

13. 형제들아, 이러한 증거들에서 위로를 얻으며 우리 힘껏 힘내자. 어쩌면 우리 주님의 자비가 우리에게 임하여, 이 더러운 세상의 무거운 짐을 떨쳐버릴 힘을 주실지 모른다. 우리의 원수는 잠들지 않고, 끊임없이 우리를 노리며 우리의 영혼을 빼앗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가 그분의 거룩한 말씀을 지키기만 한다면 그분의 말씀의 능력으로 원수를 막아 주십니다. 과연, 누가 원수를 막을 수 있겠으며, 누가 그에게 대항하여 강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에 대항하여 말씀하신 말씀 외에는 없습니다. 그 말씀들은 사람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도 원수를 대적하여 그 힘으로 그를 꺾어 버립니다.

14. 사도 베드로는 우리에게 가르치며, 행함이 사람을 구원한다는 것을 보여 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 믿음 위에 덕을 더하고, 덕 위에 분별력을 더하고, 분별력 위에 절제를 더하고, 절제 위에 인내를 더하고, 인내 위에 경건을 더하고, 경건 위에 형제 사랑을 더하고, 형제 사랑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것들이 너희 안에 있어 자라나면,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헛되거나 열매 없는 삶을 살지 않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없는 자는 눈이 멀고, 어둠 속에 있으며, 옛 죄들의 정화를 잊어버린 자이다” (베드로후서 1:5–9). 또한 세례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 옆에 놓여 있으니, 선한 열매를 맺지 않는 모든 나무는 찍혀 불에 던져질 것이니라” (누가복음 3:8, 9). 그리고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열매로 나무를 알리라” (마태복음 12:33)고 하셨습니다. “가시나무에서 포도송이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마태복음 7:16) 또 말씀하시기를: “나에게 ‘주여, 주여’라고 말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갈 것이니라” (마태복음 7:21). 야고보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귀신들도 믿고 떨기 때문입니다.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인 것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 (야고보서 2:20, 19:26). 또한 사도 바울은 믿음이 행함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제자들에게 확고히 하며, 그들에게 엄히 명령하여 말하기를 “음행과 온갖 더러움은 성도들에게 마땅한 바와 같이 너희 가운데서조차 언급조차 되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감사함이 있어야 한다. 너희는 이것을 알라. 음행하는 자나 부정한 자나 탐욕스러운 자, 곧 우상 숭배자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 상속받을 자격이 없다” (엡 5:3–5). 그리고 이 말씀을 더욱 확증하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아무도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러한 일들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라. 그러니 너희는 그들과 동참하지 말라. 너희는 한때 어둠이었으나,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 되었느니라. 빛의 자녀들답게 행하라. 영적인 열매는 모든 선함과 의로움과 진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엡 5:6–9). 또 다시 “모든 분노와 노여움과 격분과 고함, 그리고 모욕을 모든 악의와 함께 너희에게서 제거하라” (엡 4:31). “나를 본받으라,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 같이 하라”고 그는 또 말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1:1).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를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옷을 입은 자들이니라” (갈라디아서 3:27).

15. 형제들아,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옷을 입었는지 아닌지 스스로 살펴보라. 그리스도는 순결함으로 드러나시니, 그분은 순결하시고 순결한 자들 가운데 거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순결해질 수 있는가? 이전에 행하던 악을 그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러하니, 사람이 언제든지 자신의 죄에서 돌이키면, 그를 기쁨으로 받아들이시며, 과거의 죄를 묻지 않으십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맏아들의 비유처럼 말입니다. 맏아들은 자신의 몫을 방탕하게 탕진하고, 결국 돼지를 치며 돼지 먹이로 배를 채우기를 원했으나, 마침내 자신이 저지른 일을 뉘우치고, 죄 가운데는 포만감이 없음을 깨달았으니, 오히려 죄를 더 많이 지을수록 그 욕망은 더욱 불타오를 뿐임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회개가 그의 마음에 닿았을 때(문자 그대로: 그에게 두드리자), 그는 미루지 않고(즉시) 모든 육신의 욕망을 버리고 겸손히 아버지께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자비로우시며 자신이 저지른 일을 탓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는 즉시 그에게 깨끗한 옷과 아들이라는 신분의 상징(반지)을 주라고 명하셨다 (눅 15,11–3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말씀을 하셨으니,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려는 뜻으로) 우리가 그분께로 돌아오려면 먼저 돼지의 먹이를 버려야 하며, 그러면 그분은 깨끗해진 우리를 받아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께서 언제 나를 들어주실까?”라고 말하며 낙심하지 않도록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청하는 자가 들을 자격이 있는 때를 아시기 때문에, 그때 주님께서는 곧바로 그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16. 그러니 온 마음을 다해 그분께로 돌아서고, 그분을 간구할 때 “지치지 말자”(눅 18:1)고 하며, 그분은 곧 우리를 들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 친히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그리하면 열릴 것이니라” (마태복음 7:7). 그러니 형제들아, 우리가 구하든지, 찾든지, 두드리든지 하면, 우리가 그분께 구하는 것이나 찾는 것을 얻게 될 것이다. 한밤중에 친구에게 찾아가 “여행에서 돌아온 친구가 내게 왔으니, 제발 빵 세 개를 빌려 달라”고 재촉했던 사람처럼 (누가복음 11, 5), – 그가 두드리는 것을 멈추지 않자, 그 친구는 그가 청한 것을 주었다. 그러니 형제들아, 게으름을 떨쳐 버리고 이러한 부단한 노력에 마음을 다잡자.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내를 보시고 우리가 구하는 것을 주실 것이다. 그분은 자비로우시며, 사람이 그분께로 돌아오기를 원하시니, 기록된 바와 같이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죄인이 회개하면 하늘에서 기쁨이 있느니라” (누가복음 15:7) .

17. 그러므로 형제들아, 그분의 이러한 자비와 풍성한 은혜를 누리고 있는 우리로서는, 아직 이 육신에 머물러 있는 동안 온 마음을 다해 그분 앞에서 힘쓰자. 우리 삶의 시간은 덧없이 지나가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힘써 노력한다면, 영원하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을 상속받겠지만, 만일 뒤로 물러선다면, 주 예수님께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 물었던 그 청년과 같아질 것입니다. 그분은 그에게 대답하셨다. “네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이는 우리에게 자신의 뜻을 끊어 버리는 것이 곧 구원받는 것임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나 그 청년은 이 말을 듣고 매우 슬퍼하며 떠나갔다(눅 18, 22, 23). 그는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보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가난한 이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는 것은 하나의 미덕일 뿐이며, 사람은 십자가를 (더 수월하게) 지기 위해 이를 행하지만, 십자가는 모든 죄를 근절하는 것이며 사랑을 낳는다. 사랑이 없으면 십자가도 없다. 사도는 사랑도 없고 미덕의 완전함도 없는 허울뿐인 미덕들이 있음을 알면서도, 왜 이렇게 말했을까?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방언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놋쇠나 울리는 심벌즈와 같을 뿐이다. 또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눠 주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어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다. 사랑은 오래 참으며 자비롭고,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사랑은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으며, 무례하게 굴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화내지 않고, 악을 생각하지 않는다” (고린도전서 13, 1–5).

18. 그러므로 사랑의 길로 들어서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 선한 자든 악한 자든,에 대해 마음을 비워야 한다. 그러면 마침내 하나님에 대한 (단 하나의) 갈망만이 그의 마음에 남을 것이며, 이 갈망은 본성에 맞는 분노를 낳을 것이고, 그 분노는 원수에게서 비롯된 모든 것에 대항하게 될 것이다. 그때 “하나님의 [27] 이 그 안에서 거처를 얻게 되며, 두려움을 통해 그 안에 사랑이 드러난다. 그러면 그런 사람은 사도처럼 담대하게 말하리라. “나는 묶이는 것뿐만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죽을 준비도 되어 있다”(행 21,13). 이러한 사랑에 이른 영혼은 복되도다. 이는 그때 그 영혼이 무욕해지기 때문이다.

19. 형제들아, 우리는 세상을 떠났으니, 우리가 어떤 지위에 있는지, 그리고 주 예수님께서 자비로우셔서 우리 각자를 그의 행실에 따라, 작은 자는 그의 작음에 따라 안식하게 하신다는 것을 압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내 아버지께는 거처가 많으니라”(요한복음 14:2) 하셨기 때문입니다. 비록 왕국은 하나이지만, 각자는 그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형제들아, 나태함에 맞서 힘쓰고, 어둠의 베일, 즉 망각을 벗어 던지고, 회개의 빛을 바라보자. 고통과 눈물을 상징하는 마르다와 마리아를 우리 곁으로 모시자. 그들은 구세주 앞에서 나사로를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이들, 즉 수많은 욕망의 붕대로 묶인 마음을 상징한다. 그분은 자비를 베푸시고 그들의 마음을 일깨우시지만, 그 이후로는 그들이 그 마음을 풀어주고 (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나사로가 해방되면, 그때 비로소 마리아와 마르다의 정성이 드러난다. 그 후 다음과 같은 광경이 보인다. 나사로는 걱정 없이 예수님과 함께 누워 있고, 마르다는 열정과 기쁨으로 섬김을 다하며, 마리아는 향유가 든 알라바스터 항아리를 가져와 주님의 발에 바른다.

20. 형제들아, 우리 힘껏 힘쓰자.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풍성한 자비로 우리를 도우실 것이다. 만약 우리가 조상들처럼 우리 마음을 지키지 못했다면, 적어도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대로 우리 몸을 죄 없이 지키기 위해 힘을 쏟읍시다. 그리고 우리를 덮친 기근의 때에, 그분께서 모든 성도들에게 베푸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자비를 베푸실 것을 믿읍시다. 이는 비록 해의 영광이 달의 영광과 다르고, 별마다 그 영광이 서로 다르지만, 그들은 모두 한 하늘 아래에 있으며, 그들의 영광과 존귀는 지금부터 영원토록 그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22. 새로운 사람의 행실에 대하여

1. 사랑하는 형제들아! 유대인은 세 가지 행실로 알 수 있으니, 곧 할례와 유월절과 안식일이다. 창세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느니라. “너희 집안 사람과 산 종은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 할례를 받지 않은 자는 자기 족속 중에서 멸망할 것이니, 이는 내 언약을 지키지 아니하였음이라” (창 17:12, 14). 아브라함이 가장 먼저 할례를 받았는데, 이는 그의 ‘슈야’(한쪽)가 죽었음을 나타내는 표징이다. 즉, 이 고대의 사건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거룩한 몸 안에서 드러내신 새 사람의 원형이 담겨 있는데, 이는 남성의 성기를 덮고 있는 고대의 ‘타락’을 잘라내고 분리하기 위함이다. 이에 대해 사도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분 안에서 너희는 사람의 손으로 행한 것이 아닌 할례를 받았으니, 곧 죄의 육체를 벗어버리고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은 것이며, 세례를 통해 그분과 함께 묻혔고, 그분 안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골로새서 2:11, 12).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이전의 생활 방식대로, 정욕의 유혹 속에서 썩어가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너희 마음의 영으로 새롭게 되어, 진리와 의로움 안에서 하나님께 따라 지음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엡 4:22–24). 그리고 또: “죄에 대하여 죽고, 의로 살아가라”(베드로전서 2:24). – 이것은(유대인의 첫 번째 의무에 관하여) 할례에 관한 것이다. 이것을 갖지 못한 자는 할례를 받지 않은 자요, 유대인이 아니니, 이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거룩한 피로 세우신 언약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2. 거룩한 유월절에 대해서는 말할 것이 많이 남아 있다. (첫째는 할례, 둘째는 유월절, 셋째는 안식일이다). 모세가 말하기를 “유월절의 법은 이러하니, 이방인은 누구든지 그것을 먹지 말지니라. 모든 종이나 산 종은 할례를 받게 한 후에야 그것을 먹을 수 있느니라. 할례를 받지 않은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먹지 말지니라. 한 집안 안에서만 먹으라” (출 12,43.46). “너희 허리에 띠를 매고, 발에는 신을 신고,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있으라” (출 12,11). “유월절” — 곧 불에 구워진 이 빵 — 은 무교병과 쓴 나물과 함께 먹지 않고서는 맛볼 수 없다. “너희 허리에 띠를 두르고”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누군가 그가 여기서 띠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말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며, “너희 허리를 띠로 묶고”라고 말한 것은, 부정한 성관계의 영향으로 생기는 온갖 정욕으로부터 깨끗하고 건전한 순결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사포지”는 말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뜻하며, 양심을 상하게 하고 마음이 순결함 속에서 자기 자신을 관조하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상처로부터 도피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팡이”는 두려움 없이 길을 걸어가며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용기 있는 소망이다. 이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자들이다. “피”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표징이며, 그분이 친히 재림하셔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그분의 기업으로 인도하실 때, 준비된 자들과 그들의 영혼에 그분의 표징으로 분명히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이 드러날 것임을 의미한다. “쑥 다발”을 취하는 것은 고난을 의미하니, “쓴 나물과 함께 (유월절 양을) 먹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니 형제여, 스스로를 살펴보라. 네가 할례를 받았는가, 네 집 문설주에 흠 없는 어린 양의 피를 발랐는가, 온갖 세속적인 생각을 버렸는가, 두려움 없이 행진하여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준비를 마쳤는가?

3. 안식일에 관해서도 말할 것이 많으니, 이는 참된 할례를 받은 자들, 거룩한 유월절을 지키는 자들, 이집트인들로부터 해방되어 그들이 홍해에서 모두 익사하는 것을 목격하고, 그들에게서 겪었던 쓰라린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 안식일을 지키는 자들의 몫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여섯 날 동안은 일을 하고,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이라” (출 20:9, 10). “누구든지 그 날에 일을 하면 그 영혼은 멸망하리라” (출 31: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참된 안식일을 지키셨으며, (십자가에) 오르시기 전 모든 준비를 마치신 후, 금요일에 (십자가에) 오르심으로써 제자들에게 어떻게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지를 가르치셨으니, – 즉,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며 겪으시고 참아내신 모욕들을 말하며, 숨이 멎을 때까지 어떤 일에서도 스스로를 풀어주거나 약해지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이 “목마르다”고 외치시자, 사람들이 식초를 적신 해면을 그분께 드렸고, 그분은 그것을 맛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시며 영혼을 내주셨다”(요한복음 19, 28–30). 그 후 사람들은 이미 움직임이 없으시고 진정으로 안식하신 그분을 (십자가에서) 땅으로 내려놓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주 예수께서는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고 그 날을 축복하셨으니, 그날에 그분은 인간의 정욕을 없애신 모든 일에서 안식하셨기 때문이다. 사도도 말했듯이: “그분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그분도 자신의 일에서 안식하시니, 마치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에서 안식하신 것처럼”(히브리서 4:10). 이것이야말로 참된 안식일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자는 유대인이 아닙니다. 예레미야가 자기 백성을 위해 울며 그들에게 말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안식일에 짐을 지지 말고,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성문으로 나가지 말라”(예레미야 17:21).

4. 아아, 나 같은 가련한 자여, 그토록 거룩한 계명을 어기고 안식일에 무거운 짐을 지고 다니는구나. 비록 내가 그분(그리스도)과 함께 죽고, 그분과 함께 묻혔으며, 안식일을 지켰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렇다면 내가 지고 있는 이 무거운 짐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것은 정욕들이다.) 내가 그 정욕에 따라 행동하는 것들이다: 분노는 무거운 짐이며, 열정, 증오, 허영, 비난, 모욕과 비방, 교만,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기는 것, 명령, 다툼, 자만, 시기이다. 이것들은 영적인 (정욕)이며, 육체적인 것들은 탐식, 육체 숭배, 꾸미기 좋아하는 정욕, 쾌락 추구, 음욕, 마음의 메마름(혹은 무정함)이다. 이 모든 것과 이와 유사한 정욕들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도들의 몸에서 없애시고, 사도의 말씀대로 “십자가로 원수를 죽이시고, 계명의 교훈을 폐지하셨다”(엡 2:16, 15)는 대로, 당신의 거룩한 몸 안에서 죽이셨으니, 이것이 바로 거룩한 안식일이다. 그러므로 누가 이 무거운 짐(정욕)을 지고, 안식일에 그것에 따라 행하며 그 욕망을 충족시키면서, 어떻게 “나는 참 유대인이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런 사람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니, 단지 그런 이름만 그에게 붙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는 주 예수님으로부터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니, 주님께서 죽이신 것을 다시 살리고, 주님께서 묻으신 것을 다시 일으켜 세움으로써 자신의 행실로 그분을 부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히 그런 자는 참된 유대인이 아니라 거짓 유대인이며, 할례를 받지 않았고 안식일을 지키지도 않은 자이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께서 그분의 영광 중에 오실 때, 오직 참된 이스라엘의 아들들, 곧 그분 안에서 할례를 받은 모든 자들만을 그분의 영원한 나라로 인도하실 것이니, 사도가 말한 대로 그분께서 모든 민족 중에서 모아 오신 자들이다. “이스라엘에게 부분적인 눈먼 것이 임하였으니, 이는 모든 이방인이 들어올 때까지” (롬 11:25), 또한 “이 규례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평강과 은혜가 있을 것이요,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도 그러하리라” (갈 6:16)라고 하셨듯이. 보라, 하나님의 이스라엘 백성이 누구인가? 바로 마음의 할례와 안식일 준수, 그리고 죄의 사함을 가진 자들이다. 또 (같은 사도)가 말하기를: “겉으로 보이는 유대인이 아니요, 육신으로 할례받은 자가 아니요, 오직 속으로 유대인이며, 글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마음의 할례를 받은 자라” (롬 2:28, 29).

5. 그러니 형제들아, 우리 자신을 잘 살피자! 우리가 수고를 기울이다가도 게으름으로 인해 그 수고를 헛되게 만드는 일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우리 안에 있는 원수가 우리를 아첨하며 끊임없이 (마땅히 해야 할 일에서) 딴 길로 이끌고, 우리 눈으로 신성의 빛을 조금도 보지 못하게 막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분의 죽음으로 세례를 받은 너, 불쌍한 자여, 스스로를 살펴보아라. 그분이 죽으신 그 죽음은 도대체 어떤 죽음인가? 네가 그분의 발자취를 따를 것이라면, 네 행실로 그것을 내게 보여 주라. 그분은 죄가 없으시며, 모든 면에서 네게 본보기가 되시어 가난 가운데 사셨으나, 너는 가난을 견디지 못한다. 그분은 “머리를 뉘일 곳조차 없으셨다”(마태복음 8:20)고 하셨으나, 너는 기쁨으로 방랑(어디서나 나그네로 사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그분은 온갖 모욕을 참으셨으나, 너는 단 한 번의 모욕도 견디지 못한다. 그분은 (악에 대해) 보복하지 않으셨으나, 너는 악으로 갚지 않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그분은 고통받으시면서도 분노하지 않으셨으나, 너는 남에게 짐이 되는 일을 하면서도 분노한다. 그분은 모욕을 당하셔도 평온하셨으나, 너는 모욕을 당하지도 않았는데도 동요한다. 그분은 겸손하셨고 죄인들을 당신께 부르셨으나, 너는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조차 말로 상처를 준다. 그분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모든 것을 기쁨으로 참으셨으나, 너는 사소한 모욕을 듣기만 해도 동요한다. 그분은 죄에 빠진 자들에게 온유하셨으나, 너는 너보다 훨씬 더 높은 자들 앞에서도 교만하게 굴고 있다. 그분은 그분 앞에서 죄를 지은 자들을 속량하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셨으나, 너는 너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서조차 자신을 바칠 수 없다. 그분이 네게 주신 것이 바로 이것인데, 너는 그분께 무엇을 갚았느냐? 그분의 행실을 통해 그분을 알고, 네 행실을 통해 너 자신을 알라. 네가 그분과 함께 죽었다면, 누가 (너 안에서) 그런 죄를 짓고 있는 것이냐?

6. 사랑하는 자들아! 진실로 그분의 거룩한 계명들에 귀를 기울이고, 우리 자신의 뜻을 끊어 버리며, 계명의 빛을 보라. 만일 우리가 우리를 존경하는 자만을 사랑한다면, 우리가 이방인보다 무엇이 더 나은가? 만일 네가 너에게 은혜를 베푸는 자들을 위해 기도한다면, 세리도 똑같이 행한다. 너를 칭찬하는 자와 함께 기뻐한다면, 유대인도 똑같이 행한다. 죄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아난 네가, 도대체 무엇을 더 행하는가? 너를 따르는 자만을 사랑한다면, 네가 죄인보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인가? 그도 똑같이 행한다. 만약 네게 불쾌감을 주고, 네 말을 듣지 않으며, 너와 다투는 자를 미워한다면, 너도 이방인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그런 자를 위해 기도하여, 그가 (너에게 지은 죄를) 용서받게 해야 한다. 만약 너를 비방하는 자를 인해 슬퍼한다면, 세리도 똑같이 한다.

7.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너도 스스로를 돌아보아라. 네 행실이 주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신 모습과 같은가? 아니면, 네가 이미 정복한 정욕에 대한 승리의 면류관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그분의 영광의 날에 나타나 면류관을 받을 수 있겠는가? 네 왕께서는 이미 그 정욕들을 정복하셨으며, 그분 스스로가 너에게 본보기를 보여주셨는데 말이다. 왜냐하면, 통치하는 자들의 왕이시며 주권자 중의 주님이신 그분이 영광 중에 나타나실 때, 그분은 우리를 위해 고난받으셨다는 표징을 지니시고 모든 민족에게 보이실 만큼 위대한 영광으로 나타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는 네 몸속에 그분의 정욕을 전혀 지니지 않은 채 나타나야 하는데, 그분은 네게 “너를 알지 못하노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그곳에서 너는 그분의 이름을 위해 죽고 그분의 표징을 지닌 모든 성도들을 보게 될 것이며, 그들의 면전 앞에 서는 것이 부끄러워질 것이다. 모든 성도들의 삶을 살펴보라. 그러면 그들이 악을 당했으나 그에 대해 보복하지 않았음을 알게 될 것이다. (오직) 그들의 피가 (하나님께) 외쳤다. “땅에 사는 자들에게서 우리를 위해 복수해 주소서.” 평화를 사랑하는 나로서는, 그날 그곳에서 선지자들과 사도들, 순교자들과 그 밖의 성도들을 보게 될 때,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들은 박해를 받으면서도 오래 참았고, 그에 대해 보복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분노조차 하지 않았으니, 이는 그들을 그렇게 대하게 만든 것이 인간의 뜻이 아니라 마귀의 불의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돌로 맞거나, 불태워지거나, 물에 빠뜨려지면서도 그들에게 분노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기도하여 그들의 죄가 용서받기를 바랐으니, 누가 그들을 그렇게 하도록 부추기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8. 그러니 사랑하는 형제여, 너 자신도 무엇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아라. 네 마음을 꿰뚫어 보아라. 하나님 앞에서 네가 어떤 존재인지 깨달아라. 그때에는 네가 아무것도 숨길 수 없을 것이니, 사람이 다른 말을 하든(또는 하지 않든) 그것은 사람의 뜻에 달려 있지 않을 것이며, 부활이 이루어질 때, 그때 모든 사람은 자신의 행실을 옷처럼 걸치고 일어날 것이니, 그것이 죄이든 의로움이든 말이다. 이 행실들이 말해 줄 것이며, 각자는 스스로 자신의 자리가 어디인지 알게 될 것이다. 게헨나로 끌고 갈 것을 벗어 던지고, 천국으로 이끌 것을 입은 자는 복이 있다.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이 땅에 있는 우리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닌, 하늘에 있는 영원한 장막을 갖게 될 줄을 압니다” (고린도후서 5:1). 우리 삶의 시간은 하찮은 것이며, 우리는 (다르게 생각하며)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가, (우리의) 때가 닥쳤을 때 영원한 눈물로 슬퍼하게 될 것이다.

9. 그러니 우리 마음을 나태하게 하지 말고, 우리의 힘껏 모든 것을 행하며, 마음을 돌보고 지키며, 매 순간 하나님의 자비를 간구하여 우리를 도우시도록 합시다. 이해하지 못한 채, 자신의 뜻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오는 영향으로 인해 말하는 이웃들의 말에 대해 분노하지 맙시다. 그들은 원수의 도구가 되어 하나님과 멀어져 있으니, 그들이 깨우침을 받아 이 (나쁜) 길에서 벗어나기 전까지는 그러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모든 일에 겸손을 지키고, 모욕과 견뎌야 할 모든 것을 참으며, 끊임없이 자신의 뜻을 억제하는 데 힘쓰라. 자신의 뜻을 고집하는 것은 모든 미덕을 망치기 때문이다. 생각이 바르고 선한 사람은 온유함으로 자신의 의지를 잘라내며, 뱀과 같은 다툼을 두려워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혼의) 내적 질서를 모두 타락시키고, 영혼을 어둡게 만들어 미덕의 빛을 전혀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미덕에 섞여 들어와 그것들을 파멸시키려는 이 저주받은 정욕을 더욱 주의 깊게 살피십시오. 마찬가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유다를 제자들 가운데서 내쫓으신 후에야 비로소 십자가에 오르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이 불명예스러운 정욕을 잘라내지 않는다면, 하나님 안에서 번영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뒤를 따라 모든 악이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조급함은 그것에서 비롯되고, 허영심도 그것에서 비롯되며;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모든 것이, 호색적이고 교만한 자의 영혼 속에 깃들어 있으며, 그들이 자기 마음을 설득하여 그것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여기는 모든 것은, 모든 성경에 비추어 볼 때 거짓이다.

10. 먼저 자기 자신을 책망하는 것은 겸손한 지혜를 가져오고, 이웃을 위해 이성을 가지고 자신의 뜻을 내려놓는 것은 겸손이다. 순결이란 —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28] , 책망하지 않는 것은 — 사랑이다. 오래 참음이란 — 이웃을 향해 아무런 악한 생각도 품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란 — (악에 대해) 갚지 않는 것이다. 침묵이란 – 자신과 무관한 일에 대해 캐묻지 않는 것이다. 가난이란 – 악의를 품지 않는 마음이다.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는 것은 – 평화이다. (모든 것을) 참아내는 것이 곧 온유함이다. 자선은 용서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자기 의지를 끊어내는 데서 비롯된다. 그것은 미덕들 사이의 조화를 이룬다. 그것은 주권적인(마음)을 평온하게 만든다.

11. 이 모든 것의 결론은: 내가 모든 성경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바라시는 것은 오직 한 가지뿐이니, 곧 그가 모든 일에서 이웃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모든 것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끊어 버리며, 사람에게 도움의 손길을 베풀어 주시기를 항상 그분께 기도하고, 망각의 잠과 사로잡힘의 유혹으로부터 그의 눈을 지켜 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은 교활하고 변덕스럽기 때문이다. 그분(하나님)의 일은 (우리를) 지키시는 것입니다. 그분의 힘은 우리에게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분의 보호는 우리의 궁핍을 막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그분께로 돌이키시는 분이시다. 그분의 은혜는 우리에게 감사를 베푸시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그분을 감사할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그분의 보호는 우리를 원수들의 손에서 지켜 주시는 것이다. 그분께는 영원토록 영광과 찬양이 있다. 아멘.

12. 그러나 바로 이것이 다툼을 낳고, 영혼을 자비 없이 타락시키는 원인이다: 말이 많고, 헛소리하며, 말을 각자 마음대로 해석하고, 자제하지 못하며, 이중적인 말을 하고, 자기 말만 고집하는 것이다. 이런 것을 가진 자의 영혼은 미덕을 맺을 수 없다. 이 모든 것 이후에도, 영혼이 각 미덕을 위해 땀 흘리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아들의 안식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의 삶을 소홀히 여기지 말고, 너희 마음이 악한 나태함을 위한 온갖 핑계를 꾸미지 않도록 하라. 그래야 하나님의 아들의 안식에 도달하기도 전에 너희의 모든 시간이 소진되지 않을 것이다: 즉, 모든 일에 겸손함, 악의를 품지 않음, 그 누구에게도 증오를 품지 않음, 하나님께서 정하지 않으신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음, 자신의 죄를 스스로 직시함, 모든 악한 행위에 대해 죽음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짓이 아니신 하나님”(디도서 1:2)께서는 그분의 풍성하심으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리라. 아멘.

 

23. 완전함에 대하여

1. 어떤 교부께서는,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 끊임없는 하나님에 대한 갈망, 악의를 품지 않음, 악으로 악을 갚지 않음, 고난을 기꺼이 감수함, 겸손, 순결, 이웃 사랑, 모든 것에 대한 포기 , 온유, 오래 참음, 가슴 아파하며 끊임없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진정한 사랑, 뒤를 돌아보지 않는 것, 눈에 보이는 어떤 것도 바라보지 않는 것, 자신의 선행이나 섬김(기도의 수고, – leitorgia)에 대한 기대 없이, 매일 그에게 닥치는 모든 것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마음을 갖지 못한다면, 그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2. 사람아, 네 원수들은 잠들지 않는다. 그러니 게으르지 말고, 네 양심을 소홀히 하지 말며, 결코 네가 (아직도) 원수들의 땅에 있으면서도 하나님께 합당한 무언가에 도달했다고 스스로 믿지 말라. 이성을 갖춘 고난(수행자로서의 육체적 결핍)은 이전의 태만함을 메워 주고, 감정의 눈물은 내면의 적들이 남긴 상처를 치유하며, 하나님의 뜻에 따른 그분께 대한 완전한 사랑은 보이지 않는 전사들에게 맞서고, 보이지 않는 적들을 이기는 은밀한 순결은 하나님의 아들의 안식에 이르게 하며, 그리고 눈에 보이는 순결은 미덕을 보존한다.

3. 만일 깨달음이 (앞서 말한 모든 것의) 근원이라면, 그것은 또한 (그것의) 수호자이기도 하다. 유혹의 때에 (마음속에) 감사를 얻는 것은 닥친 유혹을 되돌려 놓는다. 네 수고가 하나님께 기쁘시게 여겨진다는 믿음이 없다면, 그것은 너를 지키기 위한 하나님의 도움을 준비하게 한다. 진리에 따라 하나님을 경건하게 추구하는 데 마음을 바친 자는, 자신이 하나님께 기쁨을 드렸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양심이 그에게 부자연스러운 어떤 일로 책망하는 한, 그는 자유로부터 멀어져 있기 때문이다. 책망하는 자가 있는 한 정죄하는 자도 있으며, 정죄가 있는 한 자유는 없기 때문이다. 마침내 기도 중에 그 어떤 악도 너를 책망하지 않는 것을 보게 된다면, 그때 비로소 너는 진정으로 자유로워진 것이며, 그분의 뜻에 따라 그분의 거룩한 안식에 들어간 것이다.

4. 만약 선한 열매가 네 안에 굳건히 자리 잡았고, 원수의 가라지가 더 이상 그것을 짓누르지 않는 것을 보게 된다면, 만약 싸우는 자들이 — 네가 더 이상 자신의 감정과 싸우지 않기 때문에 — 스스로 물러나지 않고 교활함으로 물러난 것이 아니라면, 만약 구름이 네 성막을 덮어 주었고, 낮에는 해가 너를 태우지 않으며, 밤에는 달도 (시 120:6), 네 안에 성막을 세우고 지키기 위한 모든 준비(모든 필수품)가 하나님의 뜻대로 갖추어져 있다면, (알아두라,) 하나님께서 네 안에서 승리를 이루셨으며, 이제부터 그분께서 (네) 성막을 덮어 주실 것이니, 그것은 그분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성막 앞에서 행진하시며, 성막을 위한 숙영지(안식, 평안)를 미리 정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이 먼저 원하시는 곳에 멈추지 않으시면, 성경에 기록된 대로 성막도 멈출 수(안식을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민수기 9, 16–23).

5. 사람이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고, 수도 생활을 방해하며 비정상적인 것들을 가르치려는 (적들의 일부)로부터는 이미 그 안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음을 분명히 깨닫지 못하는 한,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혹은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우리를 지배하고, (죽음과 심판에 대한) 기억이 끊임없이 우리를 깨우치며, 거룩한 겸손이 매 순간 우리 마음을 지배하도록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로 말미암아, (이를 위해 우리는) 그 모든 것(그 거룩한 감정과 마음가짐)을 준비하시고 지켜주시는 분을 소홀히 여기지 말고, 끝까지 그 마음가짐을 유지해야 합니다. 즉, 끊임없이 자신의 죄를 바라보고, 우리가 악의 속박 속에 있는 한 어떤 일에서도 자신을 믿지 말아야 합니다.

6. 누군가 이웃을 정죄하고, 마음속으로 형제를 책망하고 깎아내리며, 기회가 닿는 대로 그를 모욕하고, 분노로 가르치며, 다른 사람 앞에서 비방한다면, 이는 그를 성도들이 누리는 자비와 고결한 미덕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이는 사람이 기울인 수고를 헛되게 하고, 그 선한 열매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나는 내 죄를 애도한다”고 말하면서 그 말대로 행하지 않는 자는 어리석은 자이다. “나는 내 죄를 슬퍼한다”고 말하면서 그 말에서 어떤 결실도 얻지 못하는 자는 스스로를 속이는 자이다.

7. 고요함을 추구하면서도 그와 함께 정욕을 끊어내려 애쓰지 않는 자는 미덕을 쌓는 일에 있어 눈먼 자이다. 자신의 죄를 (방치한 채) 타인의 개과천선을 걱정하는 자는 온 마음을 다한 기도와 하나님께 드리는 이성적인 간구와는 거리가 멀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용기이다. 즉, 사람이 과거의 죄와 맞서 싸우며, 그 죄의 용서를 구하고, 다시는 마음속에서도, 행동에서도, 감정에서도 그 죄에 빠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간구할 때이다.

8. 만일 죄에 대한 기억이 끊임없이 그의 마음을 지배하지 않고, 세상의 모든 것에서 그를 돌이키게 하여 그것이 그를 압도하지 못하게 하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의 죄를 멈출 수 없으며, 오직 그 죄들에 대한 (돌봄)만으로 만족하여 하나님의 피조물에 대한 정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진실로, 위선이나 교활함이 아닌 참된 마음으로 이를 이룬 자는 복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슬퍼하는 자들의 일로, 이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해, 이웃을 정죄하지 않도록 마음과 감각을 집중시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네가 자신의 죄를 돌보는 데 만족한다면, 그것은 너를 이웃의 죄로부터 멀어지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9. 악에 대해 보복하는 것은 슬픔과는 거리가 멀다. 허영심 때문에 세속적인 것에 휩쓸리는 것 역시, 심지어 마음속으로라도, 슬픔과는 거리가 멀다. 이 휩쓸림에 대한 네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사실에 슬퍼하는 것 역시, 슬픔과는 거리가 멀다. 자신의 뜻을 행하는 것은 그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누군가에 대해 그가 좋거나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그에게 부끄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그 사람보다 더 나쁘다는 것을 확고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일이 아닌 일에 대해 알고자 하는 것은 그에게 부끄러움이자 무지이며,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하게 하는 악한 속박이다.

10. 누군가 너를 비방하여 네가 그 일로 인해 상처를 받는다면, 진실로 여기에는 눈물이 없다. 네게 어떤 세속적인 거래가 있어 손해를 보고 그 일로 인해 슬퍼한다면, 여기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다. 네가 알지도 못하는 일에 대해 누군가 말하면 네가 동요한다면, 여기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다. 누군가 너를 칭송하고 네가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여기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다. 누군가 너를 꾸짖을 때 네가 그 일로 인해 상처를 받는다면, 여기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다. 세상의 명망가들을 쫓아다니며 그들과 친분을 맺고자 한다면, 여기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다. 누군가 너와 대화하다가 논쟁을 벌이고, 네가 자신의 말을 고집하려 한다면, 여기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다. 네 말을 멸시할 때, 네가 그 일로 슬퍼한다면, 여기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다. 이 모든 것은 옛 사람이 아직 살아 있으며 자신의 권세를 드러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내면)에 그와 대적할 자가 없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으며, 참된 통곡도 없기 때문이다.

11. 하나님을 따라 행하는 자에게는, 자기 자신을 알아보고(자각하여) 자신의 뜻을 방종할 때 자신이 하나님의 적이 될 수 있음을 깨닫는 분별력 있는 눈이 있어야 한다. 만약 네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로서, 하나님을 위해 모든 일을 분별력 있게 행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에 합당하게 그분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고, 네 눈앞에 네 죄들을 두면, 그 죄들이 너를 네 의로움에 대한 생각으로 무너뜨리려는 교활한(영)에 대항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며, – 그리하여 울음이 너를 위해 세운 성소를 지켜 줄 것이다. 그때 비로소 네가 스스로를 깨달았고, 네가 머무는 곳(네가 처한 상태)을 알게 될 것이며, 네가 승리를 거두었다고 네 마음을 믿지 않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심판 앞에 서고, 자신에 대한 (최종적인) 판결을 듣고, 자신의 자리가 어디인지 알기 전까지는, 하나님께 기쁨을 드렸는지 여부에 대한 두려움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를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마음을 갉아먹는 하나님에 대한 슬픔은 감정을 억제할 수 있으며, (생각에 대한) 저항은 냉철한 정신과 함께 마음의 감수성을 보존해 준다. 그러나 사람은 (이것들에) 만족하지 못하며, 육신에 머무는 동안 왜 끊임없이 수고해야 하는지 스스로 믿을 수 없다.

12. 주님께 기쁘시게 여겨질 것이라고 자신의 행실을 과감하게 신뢰하지 않고, 그러한 신뢰 부족으로 인해 하나님을 뵙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분의 영광을 깨닫고 무엇보다 먼저 그분의 뜻대로 그분의 뜻을 행하려 노력하며,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스스로를 애도하기 위해 자기 자신에 대한 슬픔에 만족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심판하실 그분의 다른 피조물들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는 자들이다. (하나님을 따라) 수고하는 자의 승리는, 그가 온전히 하나님과 연합하여 그분의 뜻대로 생을 마감할 때 드러날 것이다. 그가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은, 하늘의 천사들이 그가 그 권세자들을 지나쳤음을 증언할 때이다[29] . 그때부터 그의 기억은 하늘의 (거주민들과) 함께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 싸움이 계속되는 동안, 사람은 두려움과 떨림 속에 놓여 있다. 오늘은 이기고 내일은 패배할 수도 있고, 오늘은 패배하고 내일은 이길 수도 있다.

13. 투쟁은 마음을 조여오지만, 무감정은 이길 수 없다. 그것은 이미 면류관을 받았으며, (우리의) 세 가지 분리된 (부분)이 하나님 안에서 서로 화해에 이르게 될 때, 그 운명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다. 이 세 부분은 사도가 서신(살로니가전서 5:23) 어딘가에서 (그들에 대해) 말한 대로, 영혼, 육체, 영이다. 그러므로 이 세 부분이 성령의 역사로 하나가 되면, 그들은 더 이상 (서로) 분리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도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이제 다시는 죽지 아니하시니, 사망이 그분을 지배하지 못하느니라”(롬 6:9). 그분의 죽음은 우리에게 구원이 되었으니, 그분은 자신의 죽음으로 죄를 죽이셨고, 그분의 부활은 그분을 굳게 믿는 모든 이에게 생명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들 모두를) 그분은 정욕으로부터 치유하셔서, 그들이 하나님 안에서 살며 의의 열매를 맺게 하셨다.

14. 네 원수들로부터 (죄의 유혹이라는) 시련을 견디는 동안, 깨어 있을 때든 잠잘 때든, 네가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지 말라. 왜냐하면, 가련한 사람이 경주장에 있는 한, 그는 감히 자신감을 갖지 못하며, 멀리서 (끝을) 바라보며 자신의 행실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직 어리석은 자만이 매일 넘어지면서도, 경기장에는 싸움이 없기에 자신이 이기고 있다고 생각한다.

15.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내시며 말씀하셨다. “길에서 누구에게도 입을 맞추지 말라.” 다만 집에 있는 자들에게는 입을 맞추라. 그리고 “만일 그곳에 평안의 아들이 있다면” 그에게 “머물러 있으라” (눅 10:4 이하). 그리하면 너희의 평안이 그곳에 머물 것이다. 또한 엘리사도 기세야를 보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을 만나면 그를 축복하지 말라.” 그리고 너도 그 누구에게서도 축복을 받지 말라 (열왕기하 4:29). 그는 그 소년이 살아나지 못할 것임을, 그리고 자신이 그를 일으킬 힘이 없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사람이 들어와, 소년이 침상에 누워 있는 것을 보고는 문을 닫은 뒤, 온몸의 감각을 다해 소년에게 다가가고 물러나며 일곱 번이나 오가며 기적을 행했다. 감각 기관이 따뜻해지자, 하나님의 성령의 뜻에 따라 소년의 눈이 떠졌다.

16. 그렇다면 이 세상의 영광을 사랑하는 우리, 하물며 하나님의 영광을 사랑하지 않고, 어떻게 싸워야 할지 알지 못하며, 안식에 들어가기를 서두르고, 하나님께서 가라지를 좋은 열매와 함께 남겨 두시며, 좋은 열매가 (제때에) 무르익고 완성될 때까지는 가라지를 거두게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알지 못하는 우리, 이 비천한 자들은 무엇을 말해야 하겠는가? 그리고 기에시우스는 생의 여정을 마쳤으나, 소년을 양육하기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의 영광보다 인간의 영광을 더 사랑했기 때문이다.

17. 분별력을 가지고 하나님께 엎드리는 것을 부끄러워하며, 자신의 상처를 분별력 있게 치유하려 애쓰고, 자신의 죄를 자각하며 그 용서를 위해 기도하는 눈들은 복이 있도다. 그러나 자기들이 죄가 없다고 생각하며 시간을 허비하는 자들, 양심이 주는 회개의 고통에 이끌려 뉘우치게 되는 것을 원치 않고, 가장 작은 자가 되는 것이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님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18. 씨를 뿌린 농부가, 그 씨가 열매를 맺지 못하면 헛되이 사라진 것으로 여기며 열매가 맺히지 않은 탓에 자신의 수고를 안타까워하듯이, 비록 모든 비밀을 알고 온갖 지식을 갖추었으며, 많은 기적을 행하고 병을 고치며, 온갖 고난을 겪고 심지어 옷을 벗을 정도로 궁핍해졌을지라도, 여전히 두려움 속에 있으며, 자신의 양심을 의지하지 못하고, 사냥꾼과 비방하는 자들 같은 적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이 말씀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사랑은 결코 사라지지 아니하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참아 낸다”(고린도전서 13:8, 7).

19. 오, 하나님의 길은 얼마나 힘든지! 그분께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은 협착하며, 그것을 찾는 자는 적다” (마태복음 7,14)고 말씀하셨듯이! 그리고 우리, 게으르고 정욕에 사로잡힌 자들은, 주님께서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나는 온유하고 마음이 겸손하니, 너희가 안식을 얻으리라. 내 멍에는 유익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태복음 11:29, 30). 하나님 앞에서 지혜롭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 중에서, 온 힘을 다해 모든 수고와 세상으로부터의 은둔 속에서, 침묵과 마음의 수호, 그리고 구원에 대한 염려로 고난을 감당하지 않는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조차도 여전히 자신의 입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데 합당하지 않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작용하는 정욕들 때문에, 주님이시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육신을 따라 걷지 않고 성령을 따라 걷는”(롬 8:1–4) 우리 안에서 그 정욕들을 죽이시고, 우리에게 아버지의 온전한 뜻을 보여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그분은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다 행하였을 때, ‘우리는 쓸모없는 종들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말하라”(눅 17:10, 11). 그분은 수고를 감당하고 그것을 지켜낸 이들에게 이 말씀을 하셨는데, 이는 그들의 수고를 훔치려는 강도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독이 있는 것을 보면 두려움에 떨며 그곳에서 도망친다. 뱀이든, 독사든, 전갈이든, 아니면 치명적인 독을 가진 다른 무엇이든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가련하고 뻔뻔한 영혼은 자신을 죽이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으로부터 도망치지도 않고 물러서지도 않으며, 오히려 그것에 즐거움을 느끼고 마음속으로 받아들여, 헛되이 시간을 허비하며 결실 없이 무익한 상태로 머물러 있다.

 

24. 무욕에 대하여

1. 미덕의 길에는 넘어짐이 있으니, 이는 원수가 있고, 유혹이 있고, 변화가 있고, 풍요가 있고, 절제가 있고, 궁핍이 있고, 슬픔이 있고, 기쁨이 있고, 마음의 아픔이 있고, 비통함이 있고, 마음의 평안이 있고, 번영이 있고, 궁핍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소망을 이루기 위한 여정이기 때문이다.

2. 무정(無情)은 이 모든 것과는 거리가 멀며, 그 무엇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는 무정이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께서 무정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무정에는 원수가 없으며, 더 이상 타락도, 불신도, 지키는 수고도, 정욕에 대한 두려움도, 어떤 사물에 대한 탐욕도, 원수에게서 오는 어떤 것에 대한 근심도 없다.

3. 그 영광스러운 덕목들은 크고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누구에게든 어떤 정욕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한, 그는 무정(無情)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며, 누구의 마음에서든 정죄가 나오는 한, 그는 무정(無情)과 동떨어져 있는 것이다.

4. 이것이 바로 주 예수님께서 취하신 육신이다. 그것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기쁨으로 실천하도록 가르치신 바로 그 사랑이다.

5. 많은 무지한 자들은 그들의 영혼 속에 아직 정욕이 살아 있고, 그들의 육체가 온전히 정화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그것을 달성했다고 생각하여 마땅한 길에서 벗어났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25. 제자 아베 페트로에게

1. 네가 내게 쓴 편지에, ‘주님께서 내가 겪고 있는 이 쓰라린 세상의 근심에서 나를 건져내신다면, 내 죄에 대해 하나님께 회개하고 싶다’고 했는데, 잘 말했다. ‘이 세상의 일들에서 벗어나게 된다면’이라 한 것은, 마음이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돌볼 수 없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도 “너희는 하나님과 마몬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마태복음 6:24). 마몬은 이 세상의 온갖 일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것을 버리지 않으면,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

2. 하나님께 드리는 섬김이란, 우리가 그분을 찬양할 때 (하나님과) 무관한 어떤 것도 마음에 두지 않고, 그분께 기도할 때 욕망을 품지 않으며, 그분을 찬양할 때 악의를 품지 않고, 그분께 경배할 때 증오를 품지 않으며, 그분께 앉을 때 우리에게 걸림돌이 되는 악한 질투를 품지 않고, 우리가 그분 앞에 앉을 때 우리를 가로막는 것, 그분을 기억할 때 우리 지체 속에 깃든 부끄러운 정욕도 없어야 한다. 이는 이 모든 것이 가련한 영혼을 둘러싼 어두운 벽들이기 때문이며, 이를 품고 있는 한 그 영혼은 하나님께 순수하게 섬길 수 없다. 이것들은 공중에서 그녀에게 걸림돌을 놓아, 그녀가 하나님을 만나거나, 은밀한 곳에서 그분을 찬양하거나, 사랑의 달콤함과 마음의 기쁨,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빛을 받기 위한 거룩한 소망 속에서 그분께 기도하는 것을 방해한다.

3. 이 때문에 마음은 항상 어두워지며, 이를 현명하게 잘라내지 않으므로 하나님을 따라 번영할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이 세상의 일들에 대해 무심해지지 않는다면[30] , 이를 끊어내려고 애쓰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쪽(의 관심은) 바깥을 향하여—이 세상의 일들을 생각하며 육체의 안식을 구하고, 다른 한쪽은 안을 향하여—정욕의 충족을 추구하며, 미덕에 장애물을 세운다. 그러나 영혼은 외적인 것에서 해방되지 않는 한, 이 내적이고 정욕적인 것을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모든 뜻을 부인하지 않는 자는 누구도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눅 14:26).

4. 외적인 염려는 자발적인 것이며, 내적인 염려는 외적인 작용에서 비롯된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어느 쪽이든 의지가 지배하고 있음을 아시고, 그것을 잘라내라고 명하셨다. 영혼이 외적인 것에 신경을 쓰는 동안에는 마음이 죽어 가기 때문에, 내적인 정욕들은 그때 이미 망설임 없이 (억제 없이). 그러므로 영혼이 예수님의 말씀, 즉 자신의 모든 욕망을 잘라내라는 말씀을 순종하면, 이 세상의 온갖 행위를 미워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마음이 깨어나, 영혼의 목소리에 끊임없이 귀를 기울이고, 영혼이 다시는 자신에게 재앙을 초래했던 것으로 되돌아가지 않도록 지키며, 그것들을 자신의 집에서 쫓아낼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5. 영혼은 기혼인 젊은 여인과 같다. 그녀는 남편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두려움이나 부끄러움 없이 (마땅히 그래야 할 것처럼) 집안일을 부지런히 돌보지 않는다. 그러나 남편이 집으로 돌아오면, 그녀는 즉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자신이 하던 일을 제쳐두고 남편의 뜻대로 모든 일을 챙기기 시작한다. 그리고 남편은 돌아오자마자 필요한 모든 집안일을 챙긴다. 마음도 이와 같다. 마음이 깨어날 때면 영혼을 돌보고 끊임없이 지키며, 영혼이 그와 함께 열매를 맺을 때까지, 그리고 그가 그 열매를 양육할 때까지 계속한다. 마침내 그들은 한 마음이 되고, 영혼은 마음에 복종하며, 사도 바울이 기록한 대로 “남편은 아내의 머리”라고 한 대로 그에게 복종한다. 또한 “남편은 하나님의 형상이요 영광인 자기 머리를 가리지 말아야 하며, 아내는 남편의 영광이다. 남편은 아내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아내는 남편에게서 난 것이니, 남편은 아내를 위하여 지음받은 것이 아니요, 아내는 남편을 위하여 지음받은 것이다.” 이 때문에 아내는 천사를 위해 머리에 권세를 가져야 한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남편은 아내 없이는, 아내도 남편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아내가 남편에게서 나온 것 같이, 남편도 아내에게서 나왔으니, 이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다” (고린도전서 11:3, 7–12).

6. 이 말씀은 주님과 하나가 되는 은혜를 입어 더 이상 (이전의) 모습을 지니지 않는 자들에게 해당한다. 이들은 순결함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거룩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빛을 받은 자들이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참된 경배자들이다. 이들이야말로 주님께서 “내가 그들 안에 거하며 그들 가운데 다니리라”(고린도후서 6:16) 말씀하신 바로 그 사람들이다. 그분께서 “두 사람이 (서로) 뜻을 합하면, 그들이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다 이루어지리라”(마태복음 18:19)고 하신 말씀은 바로 이들에게 해당한다. 그러므로 그분은 자신의 백성이 모든 물질적인 것, 눈에 보이는 것과 마음속 깊은 곳의 은밀한 것, 그리고 그분이 성육신을 통해 자신의 몸에서 폐지하신 모든 것에서 깨끗하기를 원하시며, “너희는 내 안에 있고, 나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요한복음 15:4)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보라, 형제여, 주님께서는 먼저 우리가 행실로 그분 안에 있기를 원하시며, 그때 비로소 그분도 우리 안에 계실 것이니, 이는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깨끗함을 위함이다.

7. 그러나 누군가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나는 세례를 통해 그분 안에 있게 되었으나, (그에 걸맞은) 삶을 살아갈 수는 없다.” 들어보라, 사랑하는 자여! 분명히, 세례를 받는 자는 죄를 없애기 위해 세례를 받는 것이니, 사도가 말한 대로 “우리는 세례를 통해 그분과 함께 죽음에 묻혔으니, 이는 죄의 몸을 없애어 우리가 더 이상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로마서 6:4, 6). 그리스도께서 죄와 함께 계실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당신 안에 거하신다면, 죄는 죽은 것이며, “영은 의를 위하여 살아 있느니라”고 사도가 또 말씀하셨습니다(롬 8:10). 이는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 아내는 율법에 따라 남편에게 매여 있으나, 남편이 죽으면 율법의 속박에서 풀려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남편이 있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으면 간음하는 자가 되나, 남편이 죽으면 율법에서 해방되어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어도 간음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롬 7:2-3).

8.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자기 안에 거하시는지 알고자 하는 자는 자신의 생각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죄가 마음을 사로잡는 한, 하나님께서는 아직 그 안에 거하지 않으셨으며, 그분의 성령도 아직 그 안에서 안식을 찾지 못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그에 상응하는) 행실을 할 때 비로소 그 사람 안에 거하시며, 사람은 영혼이 (정욕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 안에 있게 되기 때문이다. 사도가 말한 대로 “악한 자와 연합하는 자는 음행하는 자와 한 몸이 되고, 주님께 붙어 있는 자는 주님과 한 영이니라” (고린도전서 6:16, 17). 모든 부자연스러운 것은 음녀라고 불리기 때문이다.

9. 그러므로 영혼이 해방되어 공중(즉,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길)에서 그 길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지나갈 때, 비로소 그 영혼은 하나님 안에 거하기 시작하며 그분의 성령을 받아들인다. “주님께 붙어 있는 자는 주님과 한 영이 된다”는 말씀대로, – 그분은 그 영혼에게, 끊임없이 그분을 경배하며 그분께 붙어 있는 그 영혼에게,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가르치신다. 그리고 그분은 그 영혼 안에 거하시며, 그 영혼을 인도하고 끊임없이 안식을 주시며, 그분만의 형언할 수 없는 영광과 은사를 그 영혼에게 드러내신다. 그녀는 세례와 그분의 성령의 감동을 통해 그분으로부터 다시 태어났기 때문이다.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죄를 짓지 아니하며, 악한 자가 그에게 미치지 못하느니라”(요일 5:18),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임이라”(요일 3:9). 그분께서 복음서에서 말씀하신 대로: “회개하지 않고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18:3). 또 “갓 태어난 아기들처럼 순수한 영적 젖을 갈망하여, 그것으로 자라나십시오” (베드로전서 2:2)라고 하셨습니다.

10. 아이에게는 어떤 행동이 어울릴까? 아이는 맞으면 울고, 함께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한다. 꾸중을 들어도 화를 내지 않고, 칭찬을 받아도 자만하지 않는다. 친구를 자신보다 더 높이 평가해도 질투하지 않으며, 자신의 소유물을 빼앗겨도 동요하지 않는다; 상속으로 받은 것이 적어도 신경 쓰지 않고, 누구와도 다투지 않으며, 자신의 소유물 때문에 탐내지도 않고, 어떤 사람도 미워하지 않는다. 가난해도 슬퍼하지 않고, 부유해도 교만해지지 않는다. 여자를 보아도 그녀를 탐내지 않으며, 정욕의 달콤함이나 지나친 근심이 그를 지배하지 않는다; 그는 누구도 비난하지 않으며, 누구에게도 군림하지 않는다; 누구도 시기하지 않는다; 모르는 것에 대해 자만하며 말하지 않는다; 겉모습 때문에 이웃을 비웃지 않는다; 누구와도 원한을 품지 않는다; 위선을 부리지 않는다; 이 세상의 영예를 추구하지 않는다; 재물을 모으려 하지 않는다; 돈을 탐하지 않는다; 건방지지 않으며, 정욕에 사로잡히지 않고, 열정적으로 가르치려 들지 않으며, 누구에 대해서도 걱정하지 않는다. 옷을 벗겨도 슬퍼하지 않으며, 자기 뜻을 고집하지 않고, 굶주림이나 악당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짐승이나 모욕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박해가 닥쳐도 동요하지 않는다.

11. 바로 이런 사람에 대해 우리 주 예수님께서 (본보기로 삼으시며) 말씀하셨다. “회개하지 않고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나 아이가 조금 자라서 그 안에 악이 깃들기 시작하면, 사도는 그를 책망하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더 이상 어린아이처럼, 온갖 교리의 바람에 휩쓸려 이리저리 흔들리며, 사람들의 거짓말과 속임수의 교묘한 꾀에 휘둘리지 말자. 사랑 안에서 진실하게 그분 안에서 온전히 자라나자”(엡 4:14-15). 그리고 다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젖먹이들처럼 젖을 먹였지, 단단한 음식을 먹이지 않았으니, 너희가 감당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3:2, 3). 또 말씀하시기를: “상속자가 어릴 때에는 종보다 나을 것이 없으니, 그는 모든 것의 주인이지만, 아버지의 정해진 기한이 올 때까지 감독자와 관리자들의 통치를 받는다. 우리도 어릴 때에는 세상의 규례 아래에서 종노릇을 했다” (갈 4, 1–3). 그리고 또 “젊은이의 정욕은 피하라” (딤후 2:22)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그러한 어린아이 같은 태도를 버리라고 가르치시며, “형제들아, 생각은 어린아이 같지 말고, 악한 일만 어린아이처럼 하고, 생각은 온전하라” (고전 14:20)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믿는 (진정한) 어린아이들의 모습은 무엇일까요? 사도 베드로의 말씀에 따르면 바로 이것입니다. “모든 악의와 모든 기만과 위선과 시기, 그리고 모든 비방을 버리고, 마치 갓 태어난 어린아이들처럼 되라” (베드로전서 2:1). 형제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태복음 18:3)가 무슨 뜻인지 보십니까? 이 말씀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 맹세와 함께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아멘이라 너희에게 이르노라”: 그분 자신이야말로 아멘이시기 때문이다. 사도가 왜 하나님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그분은 자기 자신을 두고 맹세하시며 ‘진실로’ (아멘) ‘내가 너를 축복하리라’고 말씀하셨다”(히 6,13.14)고 말했는지 알겠는가?

12.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을 정확히 깨닫고, 기회가 닿는 대로 매 순간 경외와 떨림으로 이를 실천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원수가 이웃에 대한 원한의 화살로 우리를 찔러 올 때, 혹은 누군가가 우리를 모욕하거나, 명예를 훼손하거나, 비방하거나, 이웃이 우리와 다투어서 그에게 양보하려고 할 때, 혹은 불순한 근심이 우리를 찔러, 이웃이 우리에게 한 일에 대한 악한 기억 을 불러일으켜, 분노와 증오로 우리 영혼을 어둡게 하려 할 때, 그런 일이 우리 영혼에 다가올 때마다, 우리는 서둘러 우리 주님께서 맹세와 함께 선포하신 말씀을 기억합시다. “아멘,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 말씀을 듣고도 두려워하지 않을 자가 누구겠는가? 아니면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현명한 자 중, 이웃에 대한 모든 불만을 마음에서 내쫓지 않을 자가 누구겠는가? 혹은 지옥에 떨어질까 두려워하는 자들 중에서, 천국 밖으로 쫓겨나지 않기 위해 마음속의 모든 증오를 뿌리 뽑지 않을 자가 누가 있겠는가? 우리 주님께서 단호한 말씀으로 이르셨기 때문이다. “회개하지 않고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 말씀은 자기 뜻을 고집하고, 세상을 사랑하며, 성령의 은사를 알지 못한(받아들이지 않은) 자들에게는 무거운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누구에게 임하시든지, 그분께서는 그에게 모든 악을 잊게 하시고, 그분 자신의 것을 가르치시며, – 분노 대신 온유함을, 원수 갚음 대신 화평을, 다툼 대신 겸손함을, 증오 대신 사랑을, 비겁함 대신 인내를 가르치십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남을 얻은 자들의 모습입니다.

13. 그러니 우리도 위대한 사도가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를 우리 마음에서 잘라내고, 어린아이의 경지에 이르도록 그 모든 것을 버리도록 합시다. 이를 염두에 두고 (사도들은) 자신의 영혼에서 그것을 잘라내어 (그리스도 안에서 젖아기가 되기 위해), 그 후 다시 거룩하고 위대한 성숙과 완전함에 이르렀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얼굴에 숨을 불어넣으신 후,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요한복음 20:22); 또한 갈릴리 바다에서 그들에게 나타나시어 “자녀들아, 먹을 것이 있느냐?”(누가복음 24:41)라고 말씀하셨으니, 이는 성령의 숨결을 통해 그들을 자녀로 삼으셨음을 상기시켜 주신 것이요, 육신으로는 그들이 자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 기록된 바와 같이 “나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라 하셨다. “아이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니, 그분도 그들과 같이 참으로 육신을 입으사, 죽음을 통해 죽음의 권세를 가진 자, 곧 마귀를 무력화시키시고 그들을 구원하시려 하셨다”(히브리서 2:14, 15). 그분이 진정으로 동참하신 육체와 피는, 온갖 간사를 버리고 거룩한 어린아이의 경지에 이른 자들의 것이 아니라면 누구의 것이겠는가? 그리고 그들은 사도의 말씀대로 다시 온전해졌습니다. “우리 모두가 믿음과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지식의 연합에 이르러, 그리스도의 충만함에 이르는 나이에 맞는 온전한 사람에 이르도록 하라” (엡 4,13). 그리고 다시 “육체의 회복은 사랑으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을 창조하는 일”입니다(16절).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며 말합니다. “아이들아,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으니… “젊은이들아, 너희가 악한 자를 이겼으니” (요한일서 2, 13. 14). 이제 너희는 악의로 인해 어린아이처럼 되었던 자들이, 악의라는 원수의 모든 무기를 벗어버렸기 때문에 원수를 대적하는 투사가 되었음을 알게 되었으니, 그들은 나중에 아버지들이 되어 완전함에 이르렀으므로, 지혜와 연합과 선함과 온유함과 순결함에 도달할 때까지 계시와 비밀이 그들에게 맡겨집니다. 이는 온유함의 속성들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들이 자신의 몸으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한 자들입니다.

14.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여, 땅에서 일어난 큰 기근 (아마도 영적인) 기근을 본받아, 어떤 일에서도 낙담하지 말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자비를 간구하여, 그분이 우리가 원수와 시기하는 자의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기를 구합시다. 그 원수와 시기하는 자는 무자비하게 악을 행하며, 뻔뻔스럽게 고집하며 “지금이 아니라면 내일이라도, 그러나 내가[31] 그를 이길 때까지는 물러서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왜 우리가 성 다윗처럼 “주 나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보시고 내 기도를 들으소서. 내 눈을 밝히사 내가 죽음의 잠에 들지 않게 하시고, 원수가 ‘내가 그를 이겼다’고 말하지 못하게 하소서. 나를 미워하는 자들이 내가 쓰러지면 기뻐하리라” (시 12:4–6). 원수들이 우리를 압도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하나님, 누가 주와 같으리이까? 침묵하지 마시고, 하나님, 온유하게 대하지 마소서” (원수들에게 온유하지 마소서)라고 외칠 것입니다. “하나님이시여, 주의 원수들이 소란을 피우니”(외치며… 소리치니), “주님을 미워하는 자들이 머리를 들었나이다. 주의 백성을 향해 악한 뜻을 품고”, 말하기를: ‘이스라엘에 대한 기억을 없애리라’ (시 82:2–5). 성령으로 충만하신 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이여, 나를 바람 앞의 기둥과 갈대처럼 세우소서. 그들의 얼굴을 수치를 가득 채우사, 온 땅에서 주께서 유일하신 지극히 높으신 분이심을 알게 하소서” (시 82:14, 17, 19). 이처럼 믿음으로 힘쓰는 자들은 원수들에 맞서 마음을 굳게 하고, 그들이 싸움을 걸기 전에 그리스도이신 거룩한 반석 위에 서서, 굳건한 마음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벌떼처럼 나를 에워쌌고, 가시덤불 속의 불처럼 타올랐으나, 나는 주님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맞섰노라” (시 117:12).

15. 원수들이 그들의 온갖 간계로 우리를 에워싸고 있음을 볼 때, 그 간계란 낙담(나태)이거나, 정욕적인 쾌락으로 영혼을 이완시키거나, 이웃이 마땅치 않은 일을 했을 때 그에게 분노를 표출하지 못하게 하거나, 육체의 욕망을 갈망하도록 우리의 눈을 무겁게 하거나, 혹은 달콤한 음식의 유혹으로 우리를 끌어들여, 혹은 이웃의 말이 우리에게 독이 되게 하거나, 혹은 우리가 타인의 말을 폄하하도록 부추기거나, 혹은 형제들 사이에 차별을 두도록 주입하며 말하기를: ‘이 사람은 좋고, 저 사람은 나쁘다’라고 말하며, 이처럼 우리를 둘러싼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낙담하지 말고, 오히려 다윗처럼 굳건한 마음으로 외치자: “주님은 나의 생명을 지키시는 분이시니! 비록 군대가 나를 치려 해도 내 마음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비록 전쟁이 나를 대적하더라도 나는 주님을 의지하리이다. 주님께 한 가지만 구하오니,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 생애의 모든 날 동안 주님의 집에 거하며, 주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그분의 거룩한 성전을 방문하는 것이로다. 주께서 나를 숨기시고... 나를 높이셨으니, 이제 주께서 내 머리를 나의 원수들 위에 높이셨도다” (시 26:1, 3–6). 이는 사도가 “우리는 밤도 아니요, 어둠도 아니니라” (살전 5:5)라고 말하며 ‘밤’이라 부르는 죽은 일들로부터 마음을 일으킨 자들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자신을 돌보지 않는 자들을 꾸짖으시며,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밤에 자는 자들은 자고, 밤에 취하는 자들은 취하느니라” (- 7절). 또한 “주님의 날은 밤중에 도둑처럼 올 것이니, 피할 수 없으리라”(- 2, 3절)라고 하셨는데, 이는 그들이 밤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밤과 같은 정욕에서 마음을 들어 올린 이들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낮의 자녀들아, 깨어 있으라. 믿음과 사랑의 갑옷을 입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라”(8절).

16.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죽은 행실에서 마음을 깨어 있게 하고, 영혼으로 매 순간 주의를 기울여, 자연스러운 것 외에는 아무것도 행하지 않도록 합시다. 왜냐하면 우리 본성은 변덕스럽기 때문입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과 같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너에게 자비를 베푸시니, 겸손하고 흔들리는 자여, 너는 위로를 받지 못하였도다” (사 54, 10. 11). 영혼은 마치 철과 같아서, 방치해 두면 녹슬지만, 불로 달구면 불이 그것을 정화하며, 불 속에 있는 동안에는 불과 같아져서 아무도 그것을 (손으로) 잡을 수 없으니, 그것은 곧 불이기 때문이다. 영혼도 이와 같다. 영혼이 하나님과 함께 머물며 그분 곁에 앉아 있는 한, 그때까지 불이 되어, 영혼이 소홀했던 시절에 녹슬게 만든 모든 원수들을 태워 버리며, (이 불은) 마치 철처럼 영혼을 새롭게 하여 깨끗하게 한다. 그녀는 더 이상 세상의 그 어떤 것에도 즐거움을 느끼지 않고, 본래부터 자신의 소유였던 그 본성에 안주하게 된다. 그러나 그녀가 자신의 본성을 버리면, 죽게 된다. 왜냐하면 동물이 물에 빠지면 죽는 것처럼, 그것은 땅의 본질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며, 마찬가지로 물고기도 땅에 떨어지면 죽는데, 이는 물의 본질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새들은 공중에 있을 때는 평온을 누리지만, 땅으로 내려오면 잡힐까 두려워한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본성에 머무르는 완전한 영혼도, 그 본성을 떠나면 즉시 죽게 된다.

17. 왜 자격을 갖추고 그 은총을 받은 자들은 세상을 자신들을 위한 감옥으로 여기며, 죽지 않기 위해 세상과 섞이기를 원치 않는가. 그런 영혼은 설령 원한다 해도 더 이상 세상을 사랑할 수 없으니,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되기 전의 자신의 이전 상태를 기억하며, 세상이 자신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그리고 어떻게 자신을 텅 빈 존재로 만들었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왕의 적이 성에 들어와, 성의 사람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에게 항복하면, 그는 즉시 자신의 악의에 따라 왕의 형상을 파괴하고 왕의 법을 폐지하며, 그 후 가혹한 다른 법들을 도입하고 그곳에 자신의 형상을 세운 뒤, 마침내 수많은 백성들을 강제로 자신만을 위해 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민들이 은밀히 참된 왕에게 “오셔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고 알리면, 왕은 원수를 향해 분노하여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온다. 그때 시민들은 그 소식을 듣고 기쁨으로 성문을 열어주며, 왕은 들어와 원수를 죽이고, 원수가 강제로 세운 형상을 파괴하며, 그 법들을 폐지한다; 도시는 기뻐하며, 참된 왕은 자신의 형상과 법을 회복하고 그곳에 거주하며, 다시는 아무도 그곳을 점령하지 못하도록 요새를 강화하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전쟁하는 법을 가르쳐 그들이 어떤 적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도록 한다. 성세례 후에 다시 원수가 강제로 점령한 영혼도 이와 같다. 원수는 온갖 수치스러운 계략으로 그 영혼을 굴복시키고, 왕의 형상을 전복시킨 뒤 자신의 형상과 법을 세웠으며, 이 세상의 일에만 신경 쓰게 하고, 부주의하고 불경건하게 행동하도록 가르쳤으며, 전반적으로 원하던 대로 만들었으나, 마침내 거룩하고 위대하신 왕 예수님의 자비로 회개의 기회가 주어졌고, 영혼은 기뻐했다. 회개가 문을 열어주자, 위대한 왕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들어오셔서, 그녀의 원수를 멸망시키시고, 원수의 형상과 그 불경건한 법들을 지워 버리셨으며, 그녀를 자유롭게 하시고 그 안에 당신의 거룩한 형상을 세우시고, 당신의 법을 전해 주셨으며, 그녀의 모든 감각이 싸우도록 가르치셨고, 마침내 그 영혼 안에서 안식하고 계시니, 이는 그녀가 그분의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비로 인해 영혼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18. 그러므로 영혼이 왕의 형상을 지니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아들의 안식에 들어갈 수 없다. 마치 동전에 왕의 형상이 새겨져 있지 않으면 상인 중 누구도 그것을 받거나 주지 않고, 저울꾼은 그것을 달지 않으며, 왕은 그것을 자신의 보물창고에 들여보내지 않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영혼이 위대한 왕 예수님의 형상을 지니지 않았다면, 천사들이 그 영혼을 들여보내지 않을 것이며, 왕께서도 “내 형상을 지니지 않고 어떻게 이곳에 들어왔느냐?”라고 말씀하시며 그 영혼을 물리치실 것이다. 이 형상의 표징은 바로 사랑이다. 그분께서 친히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임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복음 13:35). 그러나 영혼이 분열되어 하나님을 찾으면서도 세속적인 것을 사랑할 때, 우리 안에 그분의 사랑이 있을 수는 없다. 새가 한쪽 날개만으로 날 수 없거나, 무언가를 몸에 걸치고 있는 것처럼, 영혼도 세속적인 무엇에 얽매여 있다면 하나님을 따라 번영할 수 없다. 배가 그 안에 필요한 것을 갖추지 못하면 항해할 수 없는 것처럼, 영혼도 어떤 미덕을 갖추지 못하면 정욕의 파도를 헤쳐 나갈 수 없다. 선원들이 좋은 옷이나 장갑, 장화를 입지 않고 (필요할 때) 알몸이 되지 않으면 항해할 수 없는 것처럼, 영혼도 세속적인 모든 것에서 벗어날 때만 악의에 찬 대적하는 영들의 파도를 헤쳐 나갈 수 있다. 마치 왕의 적들과 싸우러 나가는 전사가 온전한 무장을 갖추지 않으면 그들을 이겨낼 수 없는 것처럼, 수도사도 어떤 미덕도 갖추지 않고서는 정욕에 맞설 수 없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서 성벽의 작은 부분이 무너졌을 때, 적들은 그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모든 주의를 그 무너진 부분에 집중하여 그곳을 통해 침입하려 하며, 비록 성문에는 경비병이 있더라도 무너진 부분이 복구되지 않는 한 그들은 적들을 막아낼 수 없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수행자 수도사는 어떤 정욕에 사로잡히면, 적들에 맞서 견디지 못하고 완전함에 이를 수 없다.

19. 이 말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신성한 성경도 그렇게 말하고 있다. 창세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이 세대 중에서 너 한 사람만 의롭고 온전함을 보았노라’”(창 7:1). 또한 아브라함에게도 말씀하셨다. “내 앞에서 흠이 없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와 언약을 맺으리니… 영원한 언약이라” (창 17:1, 7). 이삭은 자신의 아들 야곱을 축복하며 그에게 말하였다. “나의 하나님이 너를 굳건하게 하사, 네가 그분의 모든 뜻을 다 이룰 수 있게 하시기를” (창세기 28:1 – ). 또한 민수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서원을 한 자는 누구나 포도주와 포도 식초와 시케르, 그리고 (포도에서) 나오는 모든 것, 심지어 즙까지 삼가야 한다” (민수기 6:1–4). 또한 신명기에는 “네가 나가서 네 원수들과 싸울 때, 네 원수가 네 손에 넘겨질 때까지 모든 악한 말을 삼가라” (신명기 23, 9 –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일곱 민족 중에서 숨 쉬는 자를 하나도 남기지 말라. 그들이 너로 하여금 내 앞에서 죄를 짓게 하지 않도록 하라” (신명기 20, 16. 18). “그들이 이렇게 많은데, 언제쯤 그들을 멸망시키시겠느냐”라고 말하는 우리 중 소심해지지 말라고 가르치시며, 주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너는 한 해 안에 그들을 멸망시킬 수 없으니, 땅이 황폐해지지 않게 하고 들짐승이 네게 번성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조금씩, 네가 번성하고 강해질 때까지… 하나님께서 네 경계를 넓히시리라” (신명기 7:22).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여러 번 명령하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네 앞에서 멸망시키려 하는 가나안 사람들과 결코 언약을 맺지 말라” (– 2절).

20. 또한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포위하고 그 성을 무너뜨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성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저주하라”고 말씀하셨다(여호수아 6:16). 또한 여호수아가 가이(의 주민들)와 싸우려 했을 때, 아하르가 훔친 작은 물건 하나가 저주 아래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적들에게 맞서지 못하고 그들 앞에서 도망쳤습니다. 그때 여호수아는 얼굴을 땅에 대고 하나님 앞에서 울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이 원수들 앞에서 물러나지 않게 하소서”(수 7:8), “내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의 군대 총사령관이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아, 네게 맹세가 있으니 네가 원수들을 당해 설 수 없느니라’ (– 13). 그리하여 (예수)는 아하르를 진멸할 때까지 다시는 전투에 나가지 않았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울에게서 왕권을 빼앗으신 것이, 그가 아말렉 때문에 지게 된 맹세 때문임을 볼 수 있다. 또한 요나단이 “자신의 지팡이를 (새끼 곰의 피에) 적셔 입에 넣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날 이스라엘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셨다” (사무엘상 14:27, 37). 다시 전도서는, 아무리 사소한 정욕이라도 미덕의 힘을 파괴한다는 것을 가르치며 이렇게 말한다: “죽은 파리가 기름의 단맛을 썩게 한다”(10, 1). 예레미야도 말하길, 어느 날 “의인이 자기의 의의 길에서 벗어나 불의를 행하면, 내가 그의 얼굴에 병을 내리리니, 그의 의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예레미야 18, 24). 또한 사도는 “조금의 누룩이 온 덩어리를 부풀게 한다”(갈 5,9)고 말합니다. 아나니아와 그의 아내 사프라는 밭값에서 일부를 떼어내고 거짓말을 했을 때, 이 사소한 일로 인해 즉시 사도들의 발 앞에 쓰러져 숨을 거두었습니다. 또한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되 한 가지에 범하면 모든 것을 어긴 것이 된다”(야고보서 2:10).

21. 우리를 그분께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통해 말씀하시기를 “불의한 자가 어느 날 자기의 불의한 길에서 돌이켜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나는 그의 불의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그가 살아 있게 하리라” (18, 21); “내가 죄인의 죽음을 원하지 아니하고, 그가 돌이켜 살기를 원하노라. 돌이키라. 너희는 다 죽어가고 있도다, 이스라엘 집안아” (33, 11). 또한 예레미야도 이렇게 말합니다. “나에게로 돌아오라, 이스라엘 집안아,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자비를 베풀리라,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예레미야 3, 12; 36, 3).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넘어진 자가 일어나지 못하겠느냐? 돌아서지 않은 자가 돌아서지 못하겠느냐? 예루살렘에 있는 내 백성이 어찌하여 무분별하게 등을 돌리고, 자기 뜻에 굳게 서서 돌아서기를 원치 않느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예레미야 8:4, 5)?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말라기 3:7). 그리고 주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너희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면, 너희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마태복음 6:14, 15). 마찬가지로 사도도 말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어떤 죄에 빠지면, 영적인 너희는 온유한 영 으로 그 사람을 바로잡으라” (갈라디아서 6:1). 또한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진리의 길에서 벗어나면, 그를 돌이키는 자가 있나니, 죄인을 그 길의 그릇된 길에서 돌이키는 자는, 그 영혼을 죽음에서 구원하고 많은 죄를 덮어 줄 것임을 알라” (야고보서 5:19, 20).

22. 이 모든 성경의 증거들은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를 점검하게 합니다.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며) 수고할 때 이웃에게 악의를 품고 있지는 않은지, 혹은 (무언가를) 용서하지 않고 그에게 분노를 품고 있지는 않은지, 그리하여 그것이 우리의 수고를 헛되게 하지 않도록 말입니다. 그런 경우, 우리의 원수들이 우리를 해칠 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 시간에 우리를 도우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분께서도 어떤 자들을 엄하게 꾸짖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악한 종아, 네가 내게 간청했으니 내가 네 빚을 모두 탕감해 주었노라. 너도 네 빚진 자를 불쌍히 여겨 주지 않았느냐? 그가 노하여… 그를 고문관에게 넘겨, 빚을 모두 갚을 때까지 두었다. 너희가 너희 형제들의 죄를 마음속에서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대로 하실 것이다” (마태복음 18:32–35). 그러니 형제여, 네 마음을 살펴보아라. 매일매일, 네 마음속에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 있는지 알고자 한다면, (형제를 향한) 정죄인가, (그에 대한) 증오인가, 시기인가, 아니면 경멸인가? 만일 네 마음에 그런 독이 뿌려진다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너희가 너희 형제의 죄를 마음에서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대로 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기억하라. 게헨나에 떨어질까 두려워하는 자는, 그 끔찍한 심판이 자신에게 내리지 않도록 마음속의 모든 악의를 내쫓아야 한다. 그러니 형제여, 네 마음을 잘 살피고 원수들을 경계하라. 그들은 악을 행하는 데 있어 온통 교활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악을 행할 때는 선을 행할 수 없으나, 선을 가장하여 악을 행할 수는 있다는 이 말씀의 진리를 네 마음속 깊이 확신하라.

23. 그러므로 우리 구주께서는 우리에게 그들(원수들)을 경계하라고 가르치시며 말씀하셨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좁고 그 길은 협착하며, 그것을 찾는 자는 적다. 넓은 문과 넓은 길은 멸망으로 이끄나니, 그 길로 들어가는 자가 많도다. 그러므로,”라고 말씀하시며,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다가오나 속으로는 약탈하는 늑대인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하라. ‘그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태복음 7:14, 13, 15, 16). 그들이 우리에게 강요하며 우리의 마음을 그쪽으로 돌리려 하는 온갖 부자연스러운 것들이 아니라면, 과연 그들의 열매가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거짓 선지자들이 자신들의 어떤 주장도 설득할 수 없으니, 사도의 말씀대로 “누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는가? 환난인가, 곤고인가, 박해인가, 굶주림인가, 헐벗음인가, 위험인가, 칼인가? 내가 이미 알았노니,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높은 것도, 깊은 것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 보라, 나의 형제여,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어떠한지,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그들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겠는가?

24. 그러니 스스로를 잘 살피라. 어떤 해로운 것이든, 금이든, 은이든, 집이든, 쾌락의 달콤함이든, 증오든, 모욕이든, 말로 인한 마음의 상처든, 뱀이 우리 마음에 주입하는 그 밖의 온갖 독이든, 그 어떤 것도 너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지게 하지 않도록 하라. (자신 안에서 그러한 것을 발견했을 때) 당황하지 말고, 오히려 주님의 말씀에 따라 모세가 만든 놋뱀을 향해 시선을 서둘러 돌리자. 모세는 뱀에 물린 모든 사람이 즉시 그것을 바라보고 치유받을 수 있도록, 산 꼭대기의 나무 위에 그것을 매달았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놋뱀과 같으셨습니다. (뱀은) 원수이며, 아담이 그 말을 듣고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죄를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아담과 같은 완전한 사람이 되셨습니다. 반면 놋뱀은 비록 (겉모습상) 하나님의 원수였던 자와 비슷하지만, 악한 생각도 없고, 독도 없고, 악의도 없으며, 기어 다니지도 않고 쉭쉭거리지도 않으며, 원수의 숨결도 없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담이 뱀의 입에서 맛본 독을 없애기 위해 이 예형을 이루셨습니다. 그리하여 비자연적인 것이 되어버린 본성이 다시 자연적인 본성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와 유사하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에 든 것이 무엇이냐?” 모세가 대답했습니다. “지팡이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것을 땅에 던져라.” 그가 그것을 땅에 던지니 뱀이 되었고, 모세는 그 뱀을 피하여 물러섰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네 손을 뻗어 그 꼬리를 잡아라.” 모세가 손을 뻗어 그 꼬리를 잡으니, 그의 손에는 지팡이가 있었다.” (출 4:2–4). 그 후 하나님께서는 여러 차례에 걸쳐 그에게 말씀하셨으니, 때로는 “뱀으로 변하던 지팡이를 가져다가 파라오의 눈앞에서 이집트의 강을 치라. 그러면 그 물이 피로 변할 것이다.”라고 하시고, 또는: “그 지팡이로 홍해를 치라. 그러면 바다가 마를 것이다.” 또는: “네 손에 들고 있는, 네가 바다를 치던 그 지팡이를 들어 바위를 치라. 그러면 바위에서 물이 솟아날 것이다.” (출 7,19; 14,16; 민 20,8).

25. 보라, 한때 원수이자 뱀이었던 자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며 지팡이로 변모하고, 그 어떤 원수도 그에게 대항하지 못하는 것을. 이 신비는 참으로 위대하다. 왜냐하면 뱀이 우리에게 독을 뿌릴 때, 우리는 서둘러 십자가에 달리신 분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고난, 십자가, 죽음)은 우리를 위해 그분께서 겪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변함없이, 자신을 악의적으로 대하는 자들에게 화를 내지 않으시고, 거친 말 한마디 하지 않으시며, 마치 놋 뱀 처럼 흔들림 없이 견디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께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발자취를 따른다면, 숨어 있는 뱀들의 독침으로부터 건전해질 것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 같이, 인자도 들어 올려져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요한복음 3:14, 15)라고 말씀하신 그분의 힘과 도움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이며, 그분을 통해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건강해질 수 있을까요? 그분이 (그 일에) 능력이 있으심을 믿을 때입니다. 광야에서 뱀에 물린 자들에게, 놋뱀 자체가 직접 와서 그들을 치료한 것이 아니라, 뱀에 물린 자가 믿음으로 그것을 바라보았을 때 비로소 건강해졌습니다. 그곳에서는 뱀에 물려 죽은 이들이 많았는데, 이는 사도가 말한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시험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를 시험하지 말라. 그들이 뱀에게 물려 죽었느니라”(고린도전서 10:9).

26. 형제여, 오늘날까지도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하는 뱀이 우리 영혼 속에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분을 시험한다는 것이, 그분의 계명에 대해 묻지 않고 지키지 않는 것 외에 무엇이겠습니까? 기록된 바와 같이: “그들 중 한 율법학자가 그분을 시험하려고 물으며 말하기를, ‘선생님, 율법 중에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선지자들이 달려 있느니라’ (마태복음 22, 35–40). 보라, 묻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자들이 유혹자라고 불리는 것을 알겠느냐? 그들은 보이지 않는 뱀의 독에서 그들을 구원할 수 있는 놋뱀을 믿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네 마음을 굳게 지키고 낙심하지 말며, ‘내가 죄인인 데 어떻게 덕을 지킬 수 있겠느냐?’라고 말하지 말라. 사람이 자신의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설 때, 회개는 그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니, 사도가 말한 대로 “우리가 땅의 형상을 입었으니, (그와 같이) 하늘의 형상도 입자”(고린도전서 15:49)라고 했습니다. 보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회개를 통해 변화되고, 이를 통해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되도록 허락하셨음을.

27. 아기가 어머니의 품에 있는 동안, 어머니는 매 순간 아기를 온갖 악으로부터 지켜줍니다. 아기가 울면, 어머니는 젖꼭지를 물려주고 뺨을 가볍게 두드리며, 아기가 두려움으로 젖을 빨고 건방진 마음을 품지 않도록 경고합니다. 아기가 그 때문에 울면, 어머니는 자궁 속의 태아를 대하듯 아기를 불쌍히 여기며, 아기가 젖꼭지를 물 때까지 위로하고, 입맞추며, 어루만져 줍니다. 아기에게 금이나 은, 진주, 혹은 세상의 그 어떤 물건을 보여줘도, 아기는 그저 쳐다보기만 할 뿐,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는 한 모든 것을 무시하고 오직 어머니의 젖꼭지를 즐기기만 한다. 아버지는 아이가 왜 일을 하지 않느냐, 혹은 왜 적들과 싸우러 나가지 않느냐고 꾸짖지 않는다. 아이는 아직 어리고 그럴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다리는 있지만 그 위에 설 수 없고, 손은 있지만 무기를 들 수 없다. 어머니는 아이가 조금씩 자라날 때까지 너그럽게 참아준다. 그가 조금 자라서 다른 누군가와 싸우려다 상대에게 땅바닥에 쓰러뜨려지면, 아버지는 그가 아직 어린아이임을 알기에 그 일로 그를 꾸짖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어른이 되면, 비로소 그가 아버지의 적들에게 적대적인지 아닌지가 드러난다. 그때 아버지는 그가 자신의 아들이기에 자신의 일을 그에게 맡긴다. 그러나 부모가 그를 위해 기울인 모든 수고 끝에, 그가 자라서 부모에게 재앙이 되고, 부모를 미워하며, 부모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부모의 적들과 결탁한다면, 그때 부모는 그에게 품었던 호의를 거두어 집안에서 쫓아내고, 상속권도 주지 않기로 결심한다.

28. 형제여, 우리도 스스로를 돌보며, 회개의 그늘 아래 머물도록 (스스로를 다그치며) 노력합시다. 그 젖꼭지에서 젖을 받아, 그것이 우리를 양육하게 합시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경멸하여, 그 젖이 우리 입에서 달콤하게 느껴지도록 합시다. 그의 가르침이라는 멍에를 지고, 그것이 우리를 (더 열심히) 돌보게 하자. 만일 우리가 원수들과 싸우다가, 그들이 우리를 어린아이처럼 땅에 쓰러뜨린다면, 그분 앞에서 울며, 그분이 우리 아버지께 간구하셔서 우리를 해친 자들에게 복수해 주시도록 하자. 우리 마음의 온갖 욕망을 잘라내고, 나그네로 사는 것을 사랑하리니, 그리하여 그분이 아브라함을 구원하신 것처럼 우리를 구원하시게 하소서. 야곱처럼 그분의 손 아래 복종하여, 우리 아버지께로부터 축복을 받게 하소서. 모세가 미워했던 것처럼 우리 마음의 욕망을 미워하고, 그 보호 아래 지켜진 채, 그를 죽이려 했던 자들에게 맞서 일어나게 하소서(회개), 모든 정욕의 달콤함에서 자유로운 자처럼. 우리가 그를 멸시하지 말아, 그가 에서처럼 우리를 미워하지 않게 하소서. 그의 순결을 지켜, 그가 우리를 원수들의 땅에서 높이게 하소서. 나빈의 아들 예수, “종”이라 불리는 이가 말한 것처럼, “나빈의 아들 예수, 그 청년은 성막을 떠나지 아니하였더라”(출 33:11)와 같이, 항상 그것을 선한 보호처로 삼자. 우리 마음에 낙담할 여지를 두지 말자. 그래야 그것이 우리를 약속의 땅에서 상속권을 잃은 자로 만들지 않을 것이다. 모든 일에서 겸손을 사랑하고, 갈렙처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기를 간절히 소망합시다. 아하르처럼 멸망당하지 않도록 해로운 것을 탐내지 맙시다. 라합처럼 매 순간 우리를 깨우치고 유혹의 순간에 구원해 줄 그의 (회개하는) 양심을 사랑합시다. 음식 중 어떤 것으로도 목구멍의 쾌락을 탐하지 말자. 그리하여 그것이 엘리야의 아들들처럼 우리를 멸망시키지 않도록 하자. 사무엘처럼 양심에 흠이 없어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도록, 온갖 불의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키자. 타인을 향한 악한 시기심을 사랑하지 말자. 그리하여 그것이(회개) 사울처럼 우리를 버리지 않게 하자. 이웃에게 악으로 갚지 않는 것을 사랑하자. 그리하여 그것이(회개) 다윗처럼 우리를 악으로부터 지켜주게 하자. 과찬과 허영을 사랑하지 맙시다. 그래야 그것이 아베살롬처럼 우리를 우리 아버지의 면전에서 쫓아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겸손과 정직을 사랑합시다. 그래야 그것이 솔로몬처럼 우리를 우리 아버지의 모든 원수들에게 복수하는 자들로 세울 것입니다. 모든 것에서 완전히 단절하는 것을 사랑하며, 우리의 지체를 온갖 죽은 행실에서 절제하여, 테스비 사람 엘리야처럼 우리의 원수들에 맞서 용감한 마음을 품게 하소서. 쾌락과 정욕을 좇지 말자. 그리하여 (회개가) 아합처럼 우리를 멸망시키지 않게 하소서. 이스라엘 사람 나부테처럼, 그분의 거룩한 유산을 잃지 않도록 죽을 때까지 힘쓰자. 하나님 안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모든 일에 순종하며, 우리 자신의 모든 뜻을 잘라내어, 그들에게 온전히 복종함으로써 엘리사에게 임했던 것처럼 그들의 축복이 우리에게 머물게 하자. 은전을 탐하는 자나 거짓된 사람 쫓는 자가 되지 말자. 그래야 기에시아처럼 우리에게 벌이 내리지 않을 것이다. 모든 일에서 신실한 자들을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하자. 그래야 그것이(회개) 소나미 사람처럼 우리를 축복해 줄 것이다. 부끄러운 일을 탐내는 자들이 되지 맙시다. 그래야 그것이 아히야와 시데키야처럼 바빌론 왕의 불에 태워져 그의 면전에서 우리를 멸망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영혼을 위하여, 심지어 죽기까지 죄를 미워합시다. 그래야 그것이 수산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곤경에 처했을 때 우리를 도우게 될 것입니다. 각종 음식을 탐내지 맙시다. 그래야 그것이 느부갓네살의 식탁에서 음식을 받던 자들을 버렸듯이 우리를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일에서 고난을 사랑합시다. 그래야 그것이 아사리아와 함께 있던 자들을 기뻐했던 것처럼 우리를 기뻐할 것입니다. 신실한 자들에게 불평하던 바빌론 사람들처럼 교활하지 맙시다. 다니엘처럼, 매일 드리던 기도를 포기하기보다는 차라리 죽기를 원했던 것처럼, 육체의 나태함을 방치하지 말고 우리의 (기도) 봉사를 다하자.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사랑하는 자들을 유혹으로부터 지키시고, 악한 자들을 멸하실 힘이 있으시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의로운 다니엘을 통해 짐승들을 어린 양과 같은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회개의 하나님은 복되시며, 그분께서 사랑하시는 자(회개)와 그분의 뜻(회개)의 멍에 아래 자신의 목을 굽힌 자는 복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위로부터 다시 태어날 때까지입니다.

29. 그러므로 형제여, 사람은 큰 분별력을 가져야 하며, 모든 육신의 욕망을 끊어내고, 길을 잃지 않고 (회개의) 원수들의 손에 빠지지 않도록 모든 행보에서 주의를 기울여 절제해야 한다. 이처럼 자기 의에 치우치는 것은 그를 단련시키고, 죄인들을 정죄하는 것은 그를 쫓아내며, 부주의한 자들을 낮추는 것은 그를 제지한다. 이에 대해 잠언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 집으로 가는 길은 좁으니, 게으른 자는 먹을 것이 없느니라. 남편을 위하여 두 겹의 옷을 지어 주라. 그녀는 마치 먼 곳에서 무역을 하는 배와 같으니, 스스로 재물을 모은다” (잠언 31:27, 22, 14). 그러니 이 말씀을 통해 그 의미를 이해해 보자. 상인은 배에 화물을 싣는 데 있어 한 가지 종류(의 상품)만 실지 않고,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아는 모든 것을 실는다. 누군가 손해를 보는 것을 보면 그와 경쟁하지 않고, 부유해져 자기 집에서 평안히 지내는 사람들과 경쟁한다. 그는 손해를 보는 모든 것을 피하고, 이윤이 나는 것은 무엇이든 빌려 쓰다가, 결국 자기 것을 사게 된다. 그에게 변함없는 원칙은 바로 이것이다. 이익을 얻은 것이라면 다시 그것을 매입하는 데 신경을 쓰고, (다른 것에 대해서는) 자신을 시기하지 않는, 부유해져서 집에서 평온하게 지내는 이들에게 물어보며, ‘이것을 나에게 얼마에 팔겠느냐, 저것을 얼마에 살 수 있겠느냐’고 묻는 것이다. 하나님을 흠 없이 만나고자 하는 영혼도 이와 같다. 그녀는 한 가지 일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구원을 위해) 유익한 모든 일을 모색한다. 만약 어떤 일이 손실을 초래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 그 일에서 도망친다.

30. 자, 나의 형제여, 네가 스스로를 예수님의 상인이라고 불렀느냐? 그렇다면 그 역할을 다하도록 힘쓰라. 그 왕의 무역은 어떤 손해를 끼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분께 손해를 끼치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 세상의 명예, 교만, 자기합리화, 오만, 남을 상하게 하는 말, 탐욕, 자랑, 오락에 대한 사랑.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의 상인들에게 손해를 끼치며, 그들이 자신의 가게에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있다면 그분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그러니 형제여, 스스로를 살펴보라. 네 안에 무엇이 있는가? 네 마음이 네 감정을 살피게 하라. 그 중 어떤 것이 하나님께 열매를 맺고, 어떤 것이 죄로 이끌리는지. 네 눈이 쾌락의 달콤함에 휩쓸리지 않는가? 네 혀가 건방짐에 굴복하지 않는가? 네 마음이 인간의 명예에 기뻐하는 것을 보지 못하는가? 네 귀는 비방을 듣고 기뻐하지 않는가? 이 모든 것은 이성에 해롭다. 레위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아론에게 이렇게 말하라. ‘내 제단에 흠 없는 짐승 중에서 흠이 있는 것을 가져오지 말라. 그리하면 죽지 않으리라’”(레 22, 18. 20). 아론은 이성의 상징이다. 적(보통)은 의로운 행위에 자신의 악을 섞기 마련이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제물을 그분께 바치기 전에 먼저 검사하여 죽지 않도록 명하셨다. 죽는다는 것은 관조에서 벗어나, 자신의 감각을 더럽히려는 자들과 결탁하는 것을 의미한다.

31.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의지한 자들의 말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영혼은 온갖 미덕으로 단장된 신부가 되었으니, 사도의 말씀대로 “우리 모두는 드러난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그 형상대로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화되어 가나니, 이는 주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라” (고린도후서 3, 18). “지금은 거울에 비친 것처럼 어렴풋이 보나, 그때에는 얼굴을 맞대고 보리라”(고린도전서 13:12). 그러므로 순결함으로 그분의 신부가 된 이들은 마치 거울을 보듯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며, 그들의 얼굴에 어떤 흠이 있어 신랑께서 기뻐하지 않으실까 염려한다. 그분은 처녀들, 곧 흠이 없는 깨끗한 영혼들을 찾으시니, 리브가에 대해 기록된 대로, 그녀는 용모가 매우 아름다웠고 남자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창 24:16). 그리고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처녀들이 그 뒤를 따라 왕에게로 이끌려 오리니, 그분의 진실한 자들이 주께로 이끌려 오리라”(시 44:15). “이끌려 오리니”는 그분의 거룩한 인성을 가리키고, “그분의 진실한 자들”은 그분께 대한 충성을 가리킵니다. 성 세례를 통한 중생이 그들을 온갖 낡은 것에서 새롭게 하였고, 회개가 그들을 정화하여 온갖 낡은 것을 잊고 더 이상 기억하지 않는 거룩한 처녀들로 만들었으니, 이는 (선지자가) 그들에게 말한 바와 같다: “들으라, 딸아, 보고 귀를 기울여라. 네 백성과 네 아버지의 집을 잊어버리라. 그러면 왕이 네 선함을 원하시리라” (시 44:11, 12). 그리고 회개가 그녀를 정화하여 주님과 한 몸이 되게 한 그 순결함 때문에, 모든 하늘의 세력들이 그녀를 보고 놀라며 말하리라. “이 떠오르는 여인은 누구이며, 그녀의 형제에 대해 확고히 서 있는 이 여인은 누구인가?(아가 8, 5).

32. 그러니 눈물을 흘리며 우리의 모든 힘을 다해, 옛 사람의 행실을 벗어던질 때까지 조금씩 노력하며, 그분의 사랑이 우리에게 임하여 우리에게서 이 땅의 형상을 벗겨내고 우리 마음에 그분의 거룩하고 하늘의 형상을 심어 주실 때까지, 모든 해로운 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자. 그리하여 우리가 그분께 합당하게 되고, 사도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흙의 형상을 입었으니, 하늘의 형상을 입자”(고린도전서 15:49)라고 하신 것처럼, 온갖 악덕에서 깨끗해지도록 합시다. 사도는 범죄가 일어난 이래로 죄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회개를 통해 사람이 다시 죄 없는 새 생명으로 돌아갈 수 있음을 알았기에, 그러므로 우리가 계명을 어긴 행위를 버리고, 자비를 베푸시고 인간의 노예 상태를 짊어지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계명, 즉 그분을 따르는 행위를 실천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는 인간을 은밀한 낙원으로 인도하시고, 그분 자신의 모든 거룩한 미덕을 베풀어 주시며, 순결인 생명나무의 열매를 맛보게 하시려는 것이니, 그분께서 당신 안에서 드러내신 순결을 맛보게 하셨으며, 불타는 무기를 든 케루빔들을 진정시키셨으니, 그 무기는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기 위해 돌아다니는 것으로, 곧 그분의 거룩한 말씀에 대한 지식이며, 이 지식은 그들(신자들)을 항상 보호하고, 또한 그들이 이전에 빠졌던 쓰라린 노예 상태를 상기시키는 뱀의 모든 말로부터 그들의 귀를 막아,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게 하시고, 그분의 고귀한 피로 그들을 구속하신 분께 끊임없이 감사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그분은 십자가로 그들의 노예 상태라는 기록장을 지워 버리시고(골 2:14), 그들을 형제이자 친구로 삼으시고(요 15:14; 20, 17), 은혜로 그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고 그들의 마음을 평안하게 하신 뒤, “나는 내 아버지이자 너희 아버지이시며, 내 하나님이시자 너희 하나님이신 분께로 올라가노라” (요한복음 20, 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아버지여, 내가 있는 곳에 그들도 나와 함께 있게 하소서. 이는 내가 그들을 사랑하였사오니,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복음 17:24, 23). 그분은 또한 이 말씀을 모든 사람에 대해 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버리고 그분의 거룩한 뜻을 따르며 이 세상의 모든 욕망을 스스로 끊어버린 자들에 대해 하신 것임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들을 세상에서 택하였나니, 이 때문에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느니라. 그들이 세상에서 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요한복음 15:19; 17, 9. 14). 보라, 세속적인 것을 버린 자들, 바로 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인정받지 않았는가? 그들은 사도가 말한 대로 그분과 하나 되어 있다. “이 때문에 사람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니라. 이 비밀은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말하는 것이니라” (엡 5:31, 32). 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에 관한 그분의 약속을 복음을 통해 함께 상속받고, 함께 참여하며, 함께 누리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라” (엡 3:6). 보라, 주님과 한 몸이 되도록 은혜를 입은 자들 안에 그분의 성령께서 거하고 계심을 알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분은 그들을 도우시며, 그들을 돌보시니,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 안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 말씀하시는 것” (마태복음 10:20)이다. 사도도 마찬가지로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성령으로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성령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며, 하나님의 깊은 곳까지도 아십니다” (고린도전서 2:10). 그는 또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16절). 그런데 그리스도의 마음이 어떻게 어떤 죄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33. 형제여, 네 마음으로 이 신비에 깊이 잠겨 보라. 땅 위의 모든 종류는 자신과 같은 종류를 낳지, 다른 종류를 낳지 않으니, 가축이든, 짐승이든, 기어다니는 것이든, 새이든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 왜 그들 모두를 아담에게로 데려오셨는가? 그와 닮은 자가 있는지 보시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자는 없었으니, 그들은 아담의 본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갈비뼈 하나를 취하여 그의 아내를 지으셨으니, 마치 아담이 그녀의 남편으로부터 나온 것처럼 말이다. 이 위대한 신비는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이들에게도 이루어지는데, 그들은 중생을 통해 그분의 본질에서 비롯되었고, 그분의 거룩한 몸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사도가 말하듯이,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며, 서로 한 지체이다”(롬 12:5). 또 “우리는 그분의 지체요, 그분의 살과 뼈에서 나온 자들이기 때문이라”(엡 5:30)고도 했습니다. 보십시오, 그분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아십니까? 사람이 모든 면에서 그분과 닮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하와가 아담에게서 나왔고 모든 면에서 그와 닮은 것처럼 말입니다. 만약 우리가 짐승의 무지함이나, 야수의 탐욕이나, 새들의 변덕스러움이나, 기어다니는 짐승들의 독을 조금이라도 지니고 있다면, 그러한 영혼들은 그분의 신부인 처녀들이 될 수 없으니, 그들은 그분의 행실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보라, 형제여, 그분이 어떻게 사람이 그분과 같고, 온갖 부자연스러움에서 벗어나, 그분의 신부가 될 자격을 얻기를 원하시는지 알겠는가? 영혼은 자신의 행실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알게 된다. 만약 그 영혼이 (성령의) 행실을 행한다면, (분명히) 성령께서 그 안에 거하시는 것이니, (성령의) 행실은 영혼을 정화하여 무정(無情)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성령께서 그러한 영혼 안에 거하지 않으실 수는 없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리니, 다른 위로자, 곧 진리의 영을 너희에게 주시리라”(요한복음 14:15–17). 사도도 또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심을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혹시 너희가 무지한가”(고린도후서 13:5).

34. 보라, 만일 누가 예수님의 행실을 얻지 못하면, 그는 미숙한 자이며 그분의 신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겠는가? 모든 처녀들은 등불을 준비했으나, 행실이 없는 자들은 문 밖에 남겨졌다. 바다에 던져진 그물은 (온갖 종류의 물고기들을) 모았으나, (오직 선한 것들만) 왕국에 받아들여졌다. 가라지는 밀과 함께 자랐으나, 추수 때가 되자 단으로 묶여 불에 던져졌다. 포도나무 가지들은 모두 포도나무에 붙어 있었지만, 열매를 맺지 못한 것들은 불에 던져졌다. 양들은 염소들과 함께 풀을 뜯었지만, 오직 양들만 그분께서 당신 곁으로 데려가셨고, 염소들은 밖으로 내쫓겼다. 씨 뿌리는 사람은 모든 씨앗을 똑같이 뿌렸지만, 좋은 땅에서 자라난 것들만이 그분을 기쁘게 했다. 은(탈란트, 므나)을 주신 분은 편견 없이 주셨으나, 그것을 두 배로 늘린 자만이 그분께 기쁨을 드렸다. 모든 사람이 혼례에 초대되었으나, 혼례 예복을 입지 않은 자를 (왕)은 영원한 어둠 속으로 내쫓으라고 명하셨다. 이 말씀은 우리와 관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믿는다고 말하지만, 그분의 신성을 나타내는 행실이 없는 자들은 주님께서 밖으로 내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초대받은 자는 많으나 택함 받은 자는 적다”(마태복음 22:14) 하셨기 때문입니다.

35. 형제들아, 우리가 주님을 만나기 전에 우리 자신을 살피고 우리의 행실을 되돌아보자. 우리 마음속의 육신적인 욕망을 따르는 자들을 바라보지 맙시다. 그래야만 곤경에 처했을 때 얻게 될 그토록 큰 부를 잃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 힘쓰고, 우리가 남겨야 할 것은 원수처럼 경멸합시다. 자신의 모든 수고를 멸망할(재물)을 위해 쏟아부은 자들을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그것을 버리고 떠났으나,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그분의 신부가 될 자격을 얻고자 하지 않았기에 지옥을 상속받았습니다. 그러니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앞에서, 가슴 아파하며 속으로 탄식하며 힘써 노력합시다. 그래야 (그분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으시어) 그들과 같은 수치를 당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다에 파도가 일면 많은 배가 침몰하고 다른 배들은 여전히 온전하게 남아 있을 때, 사람들은 “우리도 그들처럼 심연에 빠지겠구나”라고 말하지 않고, 서로 낙심하지 말라고 격려하며 하나님께 도움을 간구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땅 위의 파도는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온갖 방법으로 스스로를 수고에 몰아붙이고, 주님께 부르짖어 멸망하지 않도록 합시다. 마치 바다에 폭풍이 몰아칠 때, 선장은 항상 선원들 가운데서도, 승객들 가운데서도 자신을 격려해 주는 이들을 찾아내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람이 파멸로 이끄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이 파도가 거센 바다에서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모세도 바다를 건너고, 그의 민족을 이집트에 붙잡아 두어 그곳에서 노예로 삼으려 했던 자들이 죽는 것을 보기 전까지는 주님께 찬송을 부를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을 건너게 하고, 그들이 완전히 자유로워졌을 때 비로소 그는 외쳤다. “주님을 찬양합시다. 주님께서 위대하게 영광을 받으셨으니, 말과 기수를 바다에 던지셨도다.” (출애굽기 15:1)

36. 그러므로 마음이 영혼의 감각들을 육체의 욕망으로부터 구원하여 그것들을 피할 때, 그 관조의 기둥이 영혼을 육체의 욕망으로부터 분리시킬 것이다. 그 후, 만일 하나님께서 정욕들이 영혼을 향해 쏠려 그 감각을 죄 속에 가두려 하는 뻔뻔함을 보시되, 그 사이 마음이 은밀한 곳에서 끊임없이 하나님께 머물러 있다면, 그분은 그에게 자신의 도움을 보내시어 그 모든 것을 단번에 멸망시키시니, 기록된 바와 같이: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왜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명령하여 그들이 준비하게 하라. 너는 네 손에 든 지팡이를 들어 바다 물 위에 내리치라. 그러면 물이 마를 것이다’”(출 14,15.16).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원하시기 위해(그들의 손은 우리가 따르던 욕망과 같으니) 지금도 모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시니, 우리도 그분께 새로운 찬송을 부르며 “주님을 찬양하리니, 그분은 영광스럽게 드러나셨도다”라고 말할 자격을 얻게 되리라. 그러나 우리가 원수들에게 매달리고, 우리 뜻대로 이집트를 향하며, 그곳의 음식을 탐내고, 아론에게 강요하여: “우리를 이집트로 인도할 신들을 만들어 달라”(출 32:1)고 강요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비겁함으로 인해 영적인 양식을 멸시한다면, 어떻게 “영광스럽게 찬양받으소서”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노하게 한 뿔을 치는 송아지를 멸하기 위해 모세를 산에서 다시 우리에게 보내실 수 있으십니다. 우리에게 회개를 허락하신 하나님께서는 다시 우리를 그분께로 돌아오게 하시고, 모세가 우리를 위해 기도하도록 굳건하게 하실 것이며,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려면 용서하시고, 그렇지 않다면 나를 생명책에서 지워 주십시오” (출 32:32)라고 말하며, 시기심과 간교함으로 약속의 땅을 자기 소유로 삼은 일곱 민족을 멸망시키기 위해 제때에 예수님께 능력을 입히시어, 이스라엘이 그 유업을 받아 영원토록 시기심 없이 그곳에서 살게 하소서. 아멘. 그분께서는 능력이시며, 도움이시며, 보호자이시며, 지혜이시며, 수호자이십니다. 그분은 우리 안에 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니, 하나님 아버지와 성령의 영광과 존귀를 위하여, 세상이 시작되기 전부터, 지금 그리고 영원토록. 아멘. 형제여, 이 글을 읽은 후에는 이를 실천하는 데 힘쓰고, 시험의 때에 주님께서 너를 덮어 주시기를 기도하라. 아멘.

 

26. 이사야의 제자 아바 베드로가 전한 말씀

1. 내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고쳐야 할 것을 바로잡기 위해 용기를 내라. 순결함은 하나님께 기도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모든 일에 있어) 절제는 죄를 떠나게 한다. 만일 사람이 마음속에 복수심이라는 악의를 품고 있다면, 그의 기도는 헛된 것이다.” 이 시대의 일들에 대해 조언이나 말을 구하려 하지 말고, 너에게 묻는 이들에게도 그런 것을 주지 말라. 네 안에서 말하는 이들에게 끊임없이 귀를 기울이고, 그들 중 누구의 말에 순종해야 할지 분별할 수 있는 은사를 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라. 입으로는 한 말을 하면서 마음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품지 않도록 네 힘을 다하라.

2. 그는 또 이성적으로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게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 사랑을 낳으며, 사랑은 무욕을 낳는다고 말했다.

3. 또한 침묵을 지키는 자는 매 시간마다 자신을 시험하여, 자신을 공중에 떠 있게 해야 할 자들을 지나쳤는지, 그리고 아직 이곳에 머무르면서도 그들로부터 해방되었는지 확인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그가 그들의 노예 상태에 있는 한, 그때까지는 (그들로부터) 아직 해방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에게 자비가 임하기 전까지는 수고가 그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4. 그는 다시 말하기를, “마음속에 정죄를 품은 사람은 하나님의 자비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했다. 내가 그에게 이에 대해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만약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한다면, 그분의 말씀을 지키라. 그분과 함께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고자 한다면, 너를 십자가에서 끌어내리는 자들을 잘라내야 하며, 모욕을 견딜 준비를 하고, 너를 악의로 대하는 자들의 마음을 달래며, 자신을 낮추고, 자신의 욕망을 다스리며, 입을 다물고, 마음속으로 누구도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

5. 또 말씀하시기를, 침묵 속에 있는 자는 하나님을 만나는 두려움을 가져야 하며, 그 두려움이 그의 숨결보다 앞서야 한다고 하셨으니, 죄가 그의 마음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는 한, 그에게는 아직 두려움이 완성되지 않았고, 자비도 그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6. 또 말씀하셨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입으로는 무욕을 말하지만, 마음속에는 불의와 악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7. 또 말씀하셨다. “사람이 죽을 때까지라도 사랑하는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모습과 같은 몸을 갖기 위해 힘쓰지 않는다면, 그분을 기쁨으로 맞이하지 못할 것이며, 쓰라린 속박에서 아직 해방되지 못한 채로 남게 될 것이다.”

8. 그리고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영혼이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 얼마나 순수하게 창조되었는데, 지금은 어떤 권세 아래 놓여 있으며, 어떤 헛된 것에 얽매여 있는가!”

9. 또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이 육신에 있는 동안, 부디 네 마음을 느슨하게 하지 말아 달라. 사람이 밭에 싹이 트는 동안에는 그 열매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기에, 곡식 창고에 저장되기 전까지는 그 열매에 대해 아무런 확신도 가질 수 없는 것처럼, ‘코에 숨이 맴도는 동안’ (욥기 27, 3), 또한 사람이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까지 어떤 시련이 닥칠지 알 수 없듯이, 숨이 멎을 때까지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느슨하게 해서는 안 되며, 항상 하나님께 그분의 도움과 자비를 간구해야 한다.

10. 내가 그에게 물었다. “아버지, 겸손한 지혜란 무엇이며, 무엇이 그것을 낳습니까?” 그러자 그가 내게 말하였다. “순종, 수고 없이 겸손함으로 자기 뜻을 끊어 버리는 것, 순결, 모욕을 참아내는 것, 이웃의 말을 부담 없이 견디는 것—이것이 바로 겸손한 지혜입니다.”

11. 다시 말씀하셨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새로운 사람을 얻은 자는 복이 있도다.” 사도도 “육과 피는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다”(고린도전서 15:50)고 말했고, 또 “너희 가운데 시기, 다툼, 분열이 있다면, 너희는 육신에 속한 자들이며, 사람 꼴을 하고 다니는 것이 아니냐”(고린도전서 3:3) 말하지 않았는가?

12. 또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원수들로 인해 이러한 고난 속에 처해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의 죄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이성을 갖춘 통회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우리 안에 통회가 드러났더라면, 그것은 우리 앞에 우리의 죄를 밝혀 주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우리가 진리 안에서 자신의 죄를 보게 된다면, 그때 우리는 우리 앞에 서 있는 자들의 얼굴조차 쳐다보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하며, 심지어 부도덕한 여성들조차도 부끄러워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보다 더 정직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토록 대담하게 죄를 짓지만, 우리 믿는 자들의 마음은 죄와 한몸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3. 다시 말씀하셨다: 모욕을 참아내고, 원수가 우리 가운데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 안에서 이웃에게 자신의 뜻을 양보하는 것은, 행동하는 사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누군가 정신이 명료하고 이성을 갖추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 아래에 있다면, 그는 이미 사랑하는 주님으로부터 멀어지지 않기 위해 자신의 뜻을 잘라내려고 애쓰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모든 일에서 자신의 뜻을 고집하는 자는 신실한 자들과도 화목하지 못하니, 이는 비겁함과 분노, 형제에 대한 원망이 어디를 가나 그의 마음을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거나 듣더라도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자는, 들어갈 때나 나올 때나 빛을 보지 못하는 맹인과 같다. 이것을 태양에게 일어나는 일에서 깨달으라. 작은 구름 한 점만 끼어도 태양의 빛과 온기를 가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모든 사람에게 명백한 것이 아니라, 오직 깨달음을 가진 자들에게만 명백하다.

14. 다시 말씀하셨다. “자신의 죄를 늘 바라보는 사람은 어떤 사람과도 대화할 혀가 없다.”

15. 다시 말씀하셨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과 육체의 안식을 미워하라. 그것들은 너를 하나님의 원수로 만들기 때문이다. 원수가 있는 사람이 그와 싸우듯이, 우리도 우리 육체와 싸워 그에게 안식을 주지 말아야 한다.”

16. 다시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행하는 자는 자신의 모든 생각을 주의 깊게 살피고, 그것들과 상의하며, 그것이 자신의 육신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닌지를 분별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의 어떤 지체에서든 부자연스러운 것이 힘을 발휘하는 한, 그는 아직 동정자로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17. 내가 그에게 물었다. “복음서에 나오는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라는 기도의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그러자 그가 말하였다. “이는 완전한 자들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왜냐하면 정욕에 사로잡힌 우리 안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18. 그가 다시 말하기를, “우리의 옛 성부들은 (세상으로부터의) 은둔이란 육신을 피하는 것(육신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며, 죽음에 대한 묵상이라고 말씀하셨다.”

19. 다시 이웃과의 화해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화해가 없는 곳에는 하나님도 거하지 않으신다고 하셨다. 자신의 죄를 보는 자는 화해도 본다. 죄를 버리는 것은 거처가 아니라 겸손함이기 때문이다. 다윗은 우리아와의 죄에 빠졌을 때, 자신의 죄를 위해 하나님께 드릴 제물로 다음 말씀 외에는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고 한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상한 마음이라. 상하고 겸손한 마음을 하나님은 멸하지 아니하시리라”(시 50:19).

20. 그는 또 말하기를, 소심함과 남을 비난하는 마음이 반역으로 마음을 채우게 하여, 하나님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한다고 했다.

21. 또 말씀하셨다. “영혼을 타락시키는 다음 세 가지 정욕, 즉 탐욕, 명예심, 안일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힘을 기르라. 이 정욕들이 영혼을 지배하면 영혼이 번영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22. 다시 말씀하셨다. “네가 수도실에 앉아 있을 때, 이웃을 판단하려는 생각이 들면, 네 자신의 죄를 바탕으로 판단하여, 네 죄가 이웃의 죄보다 더 많다고 결론지으라. 또한 네가 의로운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된다면, 그것이 하나님께 기쁘시게 여겨진다고 여기지 말라.” 몸의 건강한 지체는 병든 지체를 돌보며, “나와 그에게는 (공통된) 무언가가 있다”고 말하며, 그가 회복될 때까지 그를 동정한다. 잔인한 사람은 마음속으로 ‘나는 결코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겸손을 얻은 사람은 이웃의 비난을 스스로 감당하며 ‘이것은 내가 죄를 지은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겸손)을 멸시하는 자는 자신이 지혜롭다고 마음속으로 여기며, 결코 누구도 상처 입힌 적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미덕 중 단 하나라도 어떻게든 사라지지 않도록 정성껏 돌본다.

23. 다시 말씀하셨다. “만약 네가 수도실에 앉아 침묵 속에서 (leitorgian)을 드리고, 네 마음이 하나님의 것이 아닌 무언가에 기울어져도, 네가 그것을 죄가 아니라 단지 생각일 뿐이라고 여긴다면, (알아두라,) 네가 침묵 속에서 드리는 예배는 참된 것이 아니다. 만약 네가 “하나님께서는 내가 침묵 속에서 드린 마음의 예배를 받아주신다”고 말한다면, (다음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네 마음이 침묵 속에서 악과 결탁할 때, 그 침묵은 하나님 앞에서 네게 죄로 간주된다는 것을.

24. 내가 그에게 물었더니, 그는 전쟁과 평화의 시기에 도움을 얻지 못하는 자는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25. 그는 다시 가르침에 대해 말하며, (이 일에는) 가르치는 바에 어긋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두려움이 내재되어 있다고 했다. 왜냐하면 일단 죄를 짓는 순간, 더 이상 가르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26. 그는 성찬에 대해 다시 말하였다. “화 있을진저! 화 있을진저! 내가 하나님의 원수들과 교제한다면, 내가 그분과 어떻게 교제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스스로 심판과 정죄를 자초하며 성찬을 받는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말씀은 이러하니, ‘거룩한 자에게 거룩한 것’, 즉 거룩한 자만이 이 거룩한 (비밀)을 받아들일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거룩하다면, 내 안에서 활동하는 이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27. 내가 그에게 물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그가 내게 말하기를, 하나님의 것이 아닌 어떤 것에 마음을 기울이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28. 내가 그에게 또 물었다. “하나님의 종이란 무엇입니까?” 그러자 그가 내게 말하기를, “누구든지 정욕을 섬기는 한, 그 사람은 하나님의 종으로 여겨질 수 없으며, 오직 자신을 지배하는 자의 종이 될 뿐이다.”

29. 다시 말하였다. “화 있을진저! 화 있을진저! 은혜를 얻기 위해 스스로를 정화하기 위해 힘쓰지 않았으니. 화 있을진저! 화 있을진저!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기 위해 싸움에서 나의 원수들을 이기기 위해 힘쓰지 않았으니, 다른 이들에게 노예가 된 자가 어떻게 자기 왕께 가까이 갈 수 있겠는가? 화 있을진저!” 화 있을진저! 주님, 주님의 이름이 내게 얹혀 있는데도 나는 주님의 원수들을 위해 일하고 있으니. 화 있을진저! 화 있을진저! 나의 하나님이 혐오하시는 음식을 먹고 있는데도, 그 때문에 주님께서 나를 치유해 주지 않으시니.

30. 그가 병들었을 때 내가 그를 찾아갔더니, 그가 심히 고통받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의 고통으로 인해 내 마음이 슬퍼하는 것을 보고, 그는 내게 말하였다. “오직 이런 쇠약함에 시달릴 때만 비로소 그 쓰라린 시간을 떠올릴 수 있을 뿐, 육체의 건강은 (그런 일에) 아무 소용이 없다.” 그것은 하나님과 대적하기 위해 튼튼한 건강을 추구하지만, 매일 물을 공급받는 나무는 마르지 않고, (그 본성에 따라) 열매를 맺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31. 다시 말씀하셨다.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데 전념하기 위해 용감하고 위대한 마음이 필요하다.”

32. 다시 말씀하셨다. “화 있을진저! 화 있을진저! 내 앞에 내가 아는 자와 모르는 자, 모두 나를 고발하는 자들이 있는데, 나는 그들을 부인할 수 없으니. 화 있을진저! 화 있을진저! 나를 고발하는 자들이 있는데, 원수들이 주님 앞에서 내 온전한 지체 하나도 남겨두지 않았는데, 내가 어떻게 나의 주님과 그분의 성도들을 맞이하겠는가?!”

33. 내가 그에게 물었다. “침묵을 지키는 자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러자 그가 내게 말하였다. “침묵을 지키는 자에게는 다음 세 가지(미덕)가 필요하다. 끊임없는 경외심, 늘 드리는 기도,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한순간도 느슨하게 하지 않는 것이다.”

34. 그는 또 침묵을 지키는 사람은 자신에게 유익하지 않은 말을 단 한 마디도 듣지 않도록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고 말했는데, 그러한 말은 그의 수고를 헛되게 만들기 때문이다.

35. 또 아바 세라피온에 대해 말하기를, 어떤 장로가 그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시오. 당신이 스스로를 어떻게 보는지 말해 주시오”라고 물었을 때, 그가 대답하기를 “나는 마치 탑 위에 서서 밖을 내다보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손짓하여 그들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하는 사람과 같다”고 했다고 했다. 그에게 질문했던 장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을 마치 주위에 울타리를 치고 쇠자물쇠로 잠근 사람처럼 봅니다. 그래서 누군가 문을 두드리면, 누가 있는지, 어디서 왔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어서, 그 사람이 떠나기 전까지는 문을 열어주지 않습니다.”

36. 다시 말하기를, “마음의 아픔으로 주님을 찾는 자를 주님께서는 들으시나니, 그가 분별력 있게 구하고, 마음의 아픔으로 주님을 부지런히 찾으며, 세상의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흠 없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하려는 두려움으로 영혼을 돌보는 자라면 말이다.”

 

27. “자신을 삼가라”(신명기 15:9)

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곧 하나님이시며, 형언할 수 없는 영광과 위대하심을 지니신 분이시지만, 우리를 위해 본보기가 되셔서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라” (베드로전서 2:21), 우리를 위해 지극히 위대하시고 모든 측량을 초월하시는 겸손으로 자신을 낮추시고, 종의 형상을 취하시어 가난해지셨으며, 수치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시고, 수많은 수치스러운 모욕을 참아내셨으며, 기록된 바와 같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과 같이, 털을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처럼 소리 없이, 그도 입을 열지 아니하시며 그의 심판은 겸손 가운데 이루어지리라” (이사야 53:7, 8), — (마침내) 우리를 위해 큰 모욕을 당하며 죽음을 맞이하셨으니, 이는 우리도 그분의 계명과 우리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누군가 의롭게든 불의하게든 우리를 모욕하거나 비방하더라도 기꺼이 참아내고, 심지어 — 뭐라고 말하겠는가 — 죽음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몰아간다 해도), 도살당할 양처럼 이끌려 가며, 어리석은 가축처럼 결코 대항하지 않고, 오히려 가능하다면 기도하며, 아니면 적어도 침묵하며, 큰 겸손으로 견뎌내도록 하라.

2. 하나님을 위하여 모욕과 치욕을 당하는 것이 영혼에게 매우 유익하고 구원을 주는 일임을 믿으며, 이를 기꺼이 그리고 평온한 마음으로 견뎌내도록 스스로에게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라. 내 죄로 인해 나는 더 큰 고통을 당할 자격이 있으며, 주님을 위하여 어떤 식으로든 고통을 당하고 무언가를 감내할 자격이 있음을 생각하라. 어쩌면 수많은 고통과 모욕을 통해, 비록 아주 작은 점 하나만큼이라도 나의 하나님의 고난을 본받는 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를 모욕한 자들을 떠올릴 때마다, 그들이 너에게 큰 은혜를 베푼 자들인 것처럼 진심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결코 그들에게 불평하지 말라.

3. 자신을 세심하게 경계하여, 마치 큰 죽음과 영혼의 파멸, 영원한 고통처럼, 권력에 대한 욕심과 명성 추구—명예나 존경, 혹은 인간의 칭찬을 갈망하는 것—을 경멸하고 온전히 미워하며, 또한 스스로를 무언가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거나, 어떤 미덕을 이뤘다고 여기거나, 누군가보다 낫다고 여기는 마음을, 그리고 모든 부끄러운 욕망과 육체의 쾌락을 아주 사소한 것까지 단호히 잘라내라; 또한 필요 없이 누군가와 어울리거나, 타인의 몸을 만지거나, 제때가 아닌데 조금이라도 먹는 것을 허락하지 말라. 이렇게 스스로를 절제하고 사소한 일에서 경계함으로써, 중대한 (죄)에 빠지지 않게 하고, 사소한 것을 경시함으로써 점차 더 큰 죄를 짓지 않도록 하라.

4. 스스로를 모든 기독교인 중에서 가장 보잘것없고 가장 죄 많은 자로 진심으로, 그리고 진실로 여기며, 항상 울며, 겸손하며, 신음하는 마음을 품도록 세심하게 주의하라. 그리고 합당하지 않은 바보처럼 항상 침묵하고, 아예 필요 없는 말은 하지 말라.

5. 스스로를 잘 살피며, 영원한 불길과 영원한 고통, 그리고 그곳에 정죄받은 자들을 항상 기억하고 눈앞에 두며, 자신을 살아 있는 자들 중 한 사람이라기보다 그곳에 있는 자들 중 한 사람으로 여기라.

6.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음을 명심하며, 이제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살지 말고,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위해 살도록 하라(고린도후서 5:15). 네가 항상 그분의 면전 앞에 서 있으며, 그분께서 네 마음을 보신다는 것을 믿고 담대히 나아가라.

7. 스스로를 삼가라. 죽음에 이르든, 생명에 이르든, 혹은 어떤 고난에 이르든, 온전한 소망과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준비를 항상 갖추고, 네게 닥칠 크고도 무서운 유혹과 슬픔, 고통, 그리고 가장 쓰라린 죽음을 항상 예상하라.

8. 네가 마치 하나님의 면전 앞에 서 있는 것처럼, 그분의 뜻 없이 어떤 일이라도,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삼가라. 무엇을 원하든지, 말하든, 행하든, 누군가를 만나러 가든, 먹든, 마시든, 잠자리에 들든, 혹은 그 밖의 다른 무엇을 하고 싶든, 먼저 그것이 하나님께 합당한지 알아보고, 왜 그것을 원하는지 그 이유를 고백한 다음,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해야 할 대로 행하라. 이처럼 모든 일과 말에서 하나님께 고백하여, 그분과 더 깊은 친밀함을 얻고 그분께 더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도록 하라.

9. 누군가 어떤 일로 너를 모욕하여 네 안에 슬픔이나 분노가 생기더라도, 기도로 먼저 네 마음을 다스리기 전까지는 침묵을 지키고 마땅한 말 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세심하게 경계하라. 그 후에야 비로소 그 형제와 대화를 나누라. 만약 형제를 (책망해야) 할 필요가 있는데, 네가 분노와 혼란에 빠져 있는 것을 느낀다면, 더 큰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마라. 그러나 너와 그가 모두 온화한 마음과 온유함을 가지고 있음을 볼 때, 그때 비로소 책망하는 자로서가 아니라 상기시켜 주는 자로서, 온전한 겸손함으로 그와 이야기하라.

10. 매일 네게 닥칠 유혹, 그것이 죽음이든, 큰 슬픔과 재앙이든,을 기대하며 스스로를 세심하게 경계하고, (그것이 닥쳤을 때)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사도행전 14:22)는 것을 생각하며, 기꺼이 그리고 당황하지 않고 그것을 견뎌내라.

11. 네 앞에 놓인 모든 일, 곧 말이나 행동이나 생각에 있어서, 결코 네 뜻이나 네 안식을 추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꼼꼼히 알아내고, 그것을 온전히 이행하며, 아무리 힘들어 보일지라도 천국을 위하여 그것을 견디고 행하라. 그것이 인간의 어떤 지혜보다도 네게 유익하다는 것을 온 마음으로 믿으라. 이는 그분의 계명이 영생이며, “주님을 찾는 자들은 어떤 복도 결여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시편 33:11).

12. 마치 항상 하나님 면전에 서 있는 것처럼 스스로를 세심하게 경계하여, 누구에게도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고 오직 그분 한 분께만 믿음으로 의지하라. 그리고 네게 무엇이 필요하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네게 필요한 것이 주어지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라. 네가 가진 모든 것에 대하여, 그 모든 것을 네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 항상 감사하라. 무언가를 잃게 되더라도 결코 사람에게 의지하지 말고, 마찬가지로 슬퍼하거나 누구에게도 불평하지 말고, 마음 편히 그리고 동요 없이 그것을 견뎌내며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라: ‘내 죄로 인해 나는 더 큰 슬픔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시려 한다면 가능하시다.’ 네가 그렇게 마음가짐을 갖출 때, 그분은 네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실 것이다.

13. 스스로를 세심하게 살피되, 하나님께서 의로운 수고로 인해 그것을 보내신 것임을 확실히 알지 못한다면 결코 받아들이지 말고, 그때서야 온전한 평안으로 그것을 받아들여라. 반면 그것이 불의나 다툼, 또는 교활함과 위선에서 비롯된 것임을 보게 되면, “주님을 경외하며 얻는 작은 몫이, 경외심 없이 얻는 큰 보물보다 낫다”(잠언 15:16)고 생각하며 그것을 거절하고 버려라.

14. 스스로를 세심하게 살피고, 침묵을 지키도록 스스로를 다그쳐, 하나님께서 네게 싸우고 수고할 힘을 주시도록 하라. 만약 누군가가 너와 이야기할 필요가 있고, 네가 스스로 먼저 그 필요가 축복받은 것임을 깨닫고, 이 경우에 침묵하는 것보다 말하는 것이 하나님께 더 옳다고 판단한다면, 그때 비로소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떨림으로 입을 열어라. 고개를 숙이고(아래를 향하며) 공손하고 마땅한 말을 하라. 누군가와 대화할 때는 사랑을 위해 너무 많이 말하지 말고, 가능한 한 빨리 입을 다물어라. 무언가 질문을 받으면, 필요한 말만 하고 그 이상은 말하지 마라.

15. 음행을 삼가는 것처럼, 눈과 귀와 혀와 촉각의 정욕도 삼가도록 스스로를 세심하게 경계하라. 네 눈은 항상 오직 너 자신과 네 수공예에만 집중하게 하고, 다른 사람에게로 돌리지 말라. 단, 그 안에 축복이 있는 필요가 있음을 볼 때만 예외로 하라. 여성이든, 혹은 미모가 뛰어난 남성이든, 필요 없는 한 절대로 쳐다보지 마라. 네 귀로 누군가에 대한 험담이나 쓸데없는 대화를 듣지 않도록 하라. 네 입은 침묵을 지키고, 필요 없는 말은 결코 하지 마라.

16. 사랑하는 이여, 이 글을 읽을 때, 네 힘을 다해 이를 실천하도록 힘쓰라. 그리하면 시험의 때에 하나님께서 너를 보호하시리라. 아멘.

 

28. 악의 가지들에 대하여

1. 악의 가지들에 대해 말해야 한다. 이는 사람이 정욕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그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지 알게 하여, 그 각각에 대해 하나님의 자비를 간구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도움이 그와 함께 하시고, 그가 그것들을 완전히 떨쳐낼 수 있을 때까지 (그것들과 싸울) 힘을 주시기를 바란다. 이는 그것들이 영혼의 상처이며, 영혼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2. 그것들을 벗어던진 자는 복이 있나니, 그는 하나님의 제단에 합당한 지혜로운 양이 될 것이며, 주님의 기쁜 음성을 듣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라. 네 주인의 기쁨에 들어가라” (마태복음 25, 21). 그러나 육신의 욕망을 따라 행하고자 하며, 깨끗해지기 위해 회개의 거룩한 치료로 자신을 치유하려 하지 않는 자들은, 위급한 순간에 미덕의 옷을 입지 못한 채 벌거벗은 모습이 드러날 것이며, 정욕의 옷을 입은 마귀가 머무는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던져질 것이니, 그 정욕이란 곧: 음행, 정욕, 탐욕, 험담, 분노, 시기, 허영, 교만. 이것들이야말로 (악의) 가지들이며, 그와 유사한 것들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절제하지 못함, 몸을 꾸미는 것, 오락, 나태, 우스꽝스러운 말, 뻔뻔한 시선, 확장하려는 욕망, 양심 없는 태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무관심, 이웃에 대한 시기, 형제에 대한 거짓말, 사람에게 아부하는 것, 거짓 증언, 그릇된 지식, 가르치고자 하는 욕망, 세상의 풍습에 대한 사랑, 소심함, 조급함, 이웃에 대한 증오, 자기 자신을 책망하지 않음(무자각과 자만), 하나님의 영광보다 인간의 영광을 더 사랑하는 것, 사람들에게 칭송받기 위해 자신의 행실을 드러내는 것, 호화로운 음식에 대한 사랑, 마음속에서 육체의 정욕을 행하는 것, 자제하지 못하는 것(혹은 자기 비하)을 유혹으로 여기는 것,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는 것, 다툼을 좋아하는 성향, 자기 뜻을 고집하는 것, 자신을 현명하고 지혜로운 자로 여기는 것, 형제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고 그를 깎아내리는 것.

3. 이 모든 것은 가난한 영혼 안에서 작용하여, 마침내 그 영혼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때까지 계속된다. 이것이 바로 아담이 나무의 열매를 맛보았을 때 짊어진 무거운 짐들이다. 바로 이들에 대해 “그가 우리의 연약함을 짊어지고 우리의 병을 짊어지셨다”(이사야 53:4...)라고 기록되어 있다. 바로 그것들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죽이셨습니다. 그것들은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없는 낡은 가죽 부대입니다. 그것들은 나사로를 묶었던 수의입니다. 그것들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돼지 떼에게 보내신 악령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가 벗어버리라고 명령한 낡은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가 말한 “육과 피는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다”(고린도전서 15:50)는 것입니다. 그가 말한 바로 이것이다: “만일 너희가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이니라”(롬 8:13). 이것이 바로 아담이 낙원에서 쫓겨났을 때 아담의 땅에서 싹튼 가라지들이다.

4. 그러나 그리스도의 짐은 가볍습니다. 분노 없는 순결, 선함, 온유함, 영의 기쁨, 정욕의 절제, 모든 이를 향한 사랑, 거룩한 분별력, 흔들리지 않는 믿음, 고난에 대한 인내, 자신을 세상과 무관한 이방인처럼 여기는 마음, 육신을 떠나 그리스도를 만나고자 하는 소망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지라고 명하신 가벼운 짐들이다. 이것이 바로 성인들이 완수하기까지 많은 수고를 감내했던 길이다. 이것이 바로 낡은 사람을 벗어던지고, (그것으로부터) 해방되어 사랑을 얻지 않는 한, 그리고 그 사랑이 그를 모든 것에 대해 염려 없는 사람으로 만들지 않는 한, 아무도 이룰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의 어떤 것을 사랑하는 한, 우리 안에 이 사랑을 되살릴 수는 없으니, 기록된 바와 같이 “주님의 식탁에 참여하면서 동시에 마귀의 식탁에도 참여할 수는 없다”(고린도전서 10:21)했습니다. 또한 이사야는 말합니다. “누가 너희에게 불이 타오른다는 것을 알리겠느냐? 누가 너희에게 영원한 곳을 알리겠느냐? (만약 아니라면) 진리 가운데 행하며, 바른 길을 선포하고, 불의와 부정을 미워하며, 뇌물을 거절하고, 귀를 기울여 피의 재판을 듣지 아니하며, 눈을 감아 불의를 보지 아니하는 자, 그가 견고한 바위 동굴의 높은 곳에 거할 것이며, 그에게 떡이 주어질 것이며, 그의 물은 변함이 없으리라” (이사야 33:14–16).

5. 보라, 이 짧은 시간 동안 수고하며 자신의 슬픔을 견뎌냄으로써 세상의 무거운 짐을 벗어던진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어떤 영광을 주시는지. 보라, 자신의 욕망을 끊어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랐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그들에게 임하여 그들 안의 모든 정욕을 지워주시는지. 반면, 자신의 욕망을 붙잡고 그것을 이루고자 하는 자들은 비록 “영으로 시작”하지만, 자신의 욕망을 이루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원수들을 이겨내지 못하고 “육체로 끝을 맺으며”(갈 3,3), 자신의 수고를 헛되고 결실 없는 것으로 만듭니다. 이에 대해 예언자 예레미야는 “주님의 일을 소홀히 행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예레미야 48:10)라고 말하며 그들을 책망한다.

6. 보라, 만일 어떤 이들이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하면서도 정욕을 좇아 일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자기 뜻대로 내버려 두시며, 그들을 미워하는 자들의 손에 넘겨주신다는 것을 알겠는가? 그리고 그들이 사람들로부터 얻고자 하는 영광 대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도움을 주시고 원수들을 굴복시키실 때까지 원수들에게 맞서지 않았다는 이유로 모욕을 당하게 됩니다. 이처럼 모든 성경에 따르면, 수고와 땀과 고난 없이는 사람이 하나님께 들림을 받지 못합니다.

7.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다해, 눈물과 깊은 슬픔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간구하며, 주님을 위하여 모든 사람에게 순종하고, 우리보다 더 지혜로운 자들인 형제들 앞에서도 스스로를 낮추며, 누구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마음속으로 누구에 대해서도 악한 생각을 품지 말며, 오직 한마음으로 지내며, 세상의 육체적 필요에 관해, “ ‘이것은 내 것’이라고 말하지 말고, 매일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 어느 정도까지 이르렀는지 살피며, 그것이 부정한 것을 생각하지 않도록 지키고, – 육신이 만족을 요구하지 못하도록 육신을 배고프게 하여, 육신이 우리에게 자신의 정욕을 충족시켜 달라고 요구하지 못하게 하고, – 육신이 영혼 앞에 겸손해지고, 영혼이 이성에 복종하여 온갖 더러움에서 깨끗한 신부가 되어, 신랑을 부르며 말하기를: “내 형제가 자기 포도원(정원)에 내려와 그 열매를 먹으리라” (아가 5, 1).

8. 형제들아, 우리가 그분께 대한 이러한 담대함을 얻어, 그분이 말씀하신 “내가 있는 곳에 그들도 나와 함께 있게 하리라”는 말씀을 우리도 듣게 되도록 힘쓰자. 아버지여, 주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그들을 사랑하였나이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들 안에 있나이다” (요한복음 17, 23. 24). 그러니 성삼위, 곧 본질적으로 하나이시며 시작이 없으신 분이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사, 심판의 날에 그분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우리가 안식을 얻게 하소서. 그분께 영광과 권능이 세세토록 있기를. 아멘.

 

29. 통곡

1. 오, 우리여, 정욕에 사로잡혀 잠시 머무는 자들아, 이 일시적이고 불법적인 육신의 정욕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리니, 얼마나 비참한가!

2. 화가 우리에게 있도다. 썩을 것이 썩지 않을 것을 상속받지 못하리니(고린도전서 15:50), 우리는 썩지 않을 것을 경멸하고, 썩을 것에 휩쓸려 멈출 수 없이 빠져들고 있으니!

3. 화가 우리에게 있도다. 벌레와 고름으로 썩어질 우리 육신을 죄 가운데서 기르며, 우리를 영원히 괴롭힐 불도, 잠들지 않는 벌레도 두려워하지 않으니!

4. 화가 우리에게 있도다. 더러움으로 오염된 우리 몸을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절하며 숭배하고 입맞추는데, 우리는 그 안에 치명적인 죄를 품고 있는 회칠한 관과도 같으니라!

5. 화가 우리에게 있도다! 음식과 달콤한 것에 절제하지 못하여 우리 안에 정자의 씨앗을 간직하고, 그로 인해 불법적인 육체적 결합으로 이끌리니!

6. 화가 우리에게 있도다. 썩어 없어질 것과 썩지 않을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신성하고 두려운 하나님의 공의를 두려워하지 않으니!

7. 화가 우리에게 있도다, 선을 행할 때는 소심하지만, 악을 행할 때는 열심이고 성급하니!

8. 화가 우리에게 있도다, 영원한 빛의 거처가 될 수 있는 우리 몸을 영원한 어둠의 거처로 만들어 버렸으니!

9. 화가 우리에게 있도다! 인자가 되시고 하나님 아버지께와 본질적으로 하나이신 분이, 우리를 위해 육신을 입으셨으나 우리 안에서 머리를 뉘일 곳이 없으시니, 악한 여우들과 간사한 영들이 우리 안에 굴을 파고 들어갔도다!

10. 화가 우리에게 있도다. 마음이 의로운 자들은 심판자 앞에 자신의 영혼을 흠 없이, 몸을 거룩하고 흠 없이 제시하겠으나, 우리는 더럽혀진 영혼과 부정된 몸을 가지고 있어 영원한 고통에 대한 단 하나의 심판을 기다려야 하니!

11. 화가 우리에게 있도다. 우리는 불의와 온갖 부정한 것을 탐하는 자이면서도, 성도들의 영광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으니!

12. 화가 우리에게 있도다. 수많은 죄를 지은 정죄받은 자들이면서도, 마치 깨끗하고 자유로운 자들인 양 성도들과 악을 행하지 않는 자들 가운데서 맴돌고 있으니!

13. 화가 우리에게 있도다! 죄악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우리보다 훨씬 더 나은 이들을 훈계하고 가르치니!

14. 화가 우리에게 있도다! 우리 눈에는 들보가 있으면서도, 마치 흠이 없는 것처럼 우리 형제들의 가장 미세한(나뭇가지와 같은) 실수에 대해 심판하고 분노하니!

15. 화가 우리에게 있도다! 타인을 위해 무겁고 감당하기 힘든 짐을 지우면서도, 정작 우리 자신은 마치 육신이 가장 연약한 양,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는 것조차 거부하니!

16. 화가 우리에게 있도다. 신성한 수도 생활에 미숙한 채, 부끄러움도 없이 다른 이들에게 실천적인 덕을 가르치려 서두르니!

17. 화가 우리에게 있도다! 우리는 옛날의 죄를 잊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죄에 대해서도 괴로워하지도 않고 울지도 않으니!

18. 화가 우리에게 있도다. 하나님의 도움과 은총으로 잘 시작했으나, 이제 육신에 얽매이게 되었으니!

19. 화가 우리에게 있도다. 불결한 생각에 그토록 깊이 빠져, 마치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하는 듯, 우리가 그 죄를 저질렀는지 묻고 있으니!

20. 화가 우리에게 있도다. 먹고 마실 때, 과식으로 인해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싸움을 떠올리지 않으니!

21. 화가 우리에게 있도다. 악마들이 우리 안에 음탕한 기억을 불러일으키기만 하면, 우리는 이미 그런 생각에 동조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을!

22. 화가 우리에게 있도다. 신성한 기도와 묵상하며 읽는 성경을 저버리고, 헛된 공상과 헛소리로 우리의 날들을 보내고 있으니!

23. 화가 우리에게 있도다. 우리 마음이 너무나 굳어져, 종종 회개와 눈물을 간절히 구하지만, 극도의 게으름과 나태함 때문에 이를 이루지 못하니!

24. 화가 우리에게 있도다. 하나님께서 “죄를 범하는 영혼은 죽으리라”(예레미야 18:4)고 말씀하셨음에도, 우리 영혼이 끊임없이 죄를 짓고 있음에도 우리는 그 영혼을 조금도 돌보지 않으니!

25. 화가 우리에게 있도다. 우리 육신은 죄에 쉽게 빠지는데, 포만과 쾌락 때문에 우리는 음탕한 욕망으로 불결하고 추악한 생각을 부추기며, 눈을 통해 마귀의 화살을 우리 마음에 받아들이고, 육체에 닿음으로써 여자를 탐하는 말처럼 되어, 이성의 존엄성은 생각지도 않고 영원한 고통을 두려워하지도 않으니!

26. 우리에게 화가 있도다! 우리는 육체의 고통과 병에 대해서는 많이 신음하고 근심하지만, 영혼의 상처와 불치병에 대해서는 무감각함으로 인해 아파하지 않으니!

27. 우리 영혼의 주권적인 힘이 그 종인 육신에 복종하고, 더 나쁜 것이 더 좋은 것을 지배하며, 둘 다 그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향한 하나의 소망으로 일하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28. 우리의 죄가 악하고 부정한 생각들로 인해 되풀이되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떠나신 것과 부정한 영들이 우리 안에 침입한 것을 분별하지 못하니, 우리에게 화가 있도다!

29. 화가 우리에게 있도다. 우리가 어리석고 분별력이 없어, 성인들의 위업과 행적이 아니라 그들의 칭찬만을 사랑하고 찬양하기 때문이다.

30. 화가 우리에게 있도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행함에 있어 종의 두려움도, 용병의 열심과 분별력도, 아들의 사랑도 나타내지 않으니!

31. 화가 우리에게 있도다.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옳은 일을 돌보지 않고, 무엇이든지 말하고 행하는 것을 거절하지 않으니!

32. 우리가 죄를 지을 때 사람들의 시선을 부끄러워하면서도, 영원한 수치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으니, 우리에게 화가 있도다.

33. 화가 우리에게 있도다. 가난하고 천한 부모에게서 태어났으면서도 우리 자신을 알지 못했고(자신을 돌아보지 않았으며), 하나님 앞에서 가난과 천함을 서약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자와 명망 있는 자들과 동등하게 대우받기를 갈망했으니!

34. 화가 우리에게 있도다. 세상에서는 가난 때문에 절제했으나, 이제 절제를 부르심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배를 채우고 육체의 안락함을 위해 너무나 많은 신경을 쓰고 있으니!

35. 화가 우리에게 있도다. 천사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 주위에 진을 치고, 악마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그분의 계명을 어기는 자들 주위에 진을 치는 그 때에, 우리는 스스로 악마의 대열에 끼어들고 있으니!

36. 화가 우리에게 있도다. 부자와 권력자들을 만나 대화를 나눌 때는 그들에게 호감을 얻으려 애쓰지만, 가난한 이들이 청원하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때는 마치 성가신 존재인 양 그들을 외면하니!

37. 우리에게 화가 있도다.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의무대로 모든 사람을 대하지 않고, 오로지 우리 마음대로, 우리에게 편한 대로만 대하고 있으니!

38. 우리에게 화가 있도다. 우리는 권리(자신의 주장)를 정확히 규정하고, 그것에 대해 판단하며 가르치면서도, 선을 행하는 일에서는 멀리 물러나 버렸으니!

39. 또한 우리에게 화가 있도다. 땅에서 가시와 엉겅퀴, 그리고 열매에 해로운 다른 잡초들을 꼼꼼히 제거하면서도, 우리 영혼은 거룩한 미덕을 훼손하는 악하고 부정한 생각들로부터 하나님의 경외심으로 꼼꼼히 정화하지 않으니!

40. 우리에게 화가 있도다. 우리가 나그네로 살고 있는 이 땅을 떠나야 함에도 불구하고, 수년 동안 세속적이고 썩어 없어질 것들에 대한 염려에 몰두하고, 이 세상에서 시급히 떠나야 할 때, 그 어떤 것에도 대해 아무런 권세도 얻지 못할 것이니!

41. 우리에게 화가 있도다. 우리는 이 땅에서의 모든 행실과, 모든 헛된 말, 그리고 영혼의 악하고 더러운 생각과 기억에 대해 두려운 심판자께 보고해야 함에도, 마치 우리 삶의 모든 시간에 대해 책임질 필요가 없는 것처럼, 우리 영혼을 소홀히 여기고 있으니!

42. 우리에게 지극히 큰 화가 닥칠 것이니, 이는 우리가 저지른 불경건과 불법 때문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경멸하고 그 약속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43. 우리가 어리석게도 썩어질 것에 집착하고, 복음에 따른 삶을 통해 썩지 않을 것과 하나가 될 기회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세속적인 것에 대한 사랑 때문에 영원한 썩지 않음에 참여하지 못한 것이 참으로 비통합니다!

44. 우리에게 화가 있도다. 썩지 않음을 버리고 역겨운 썩음을 택하였으니!

45. 화가 우리에게 있도다! 온갖 정욕을 이길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자기 만족을 위해 오히려 우리의 정욕에 굴복당하도록 내버려 두었으니!

46. 화가 우리에게 있도다! 사람들 앞에서는 죄 짓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면서도, 은밀한 것까지 보시는 분의 눈앞에서는 불경스럽게 행동하고 죄를 짓는 것을 두려워하지도, 떨지도 않으니!

47. 우리에게 화가 있도다. 우리가 우리 말을 신성한 소금으로 간하지 않고, 항상 이웃에게 무익하고 경건함에서 멀어진 말만 하기 때문이다!

48. 아, 우리에게 화가 있도다! 아첨과 교활함, 위선으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그로 인해 비난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49. 우리에게 화가 있도다, 우리의 잠과 낙담이 마귀들로 하여금 우리 마음의 감동을 빼앗아가게 하니!

50. 화가 우리에게 있도다, 세상을 버렸으면서도 평신도들보다 더 많은 정욕에 사로잡혀 있으니!

51. 우리 스스로 많은 가르침과 훈계가 필요한데도, 다른 사람들이 사소한 일로 실수할 때 그들을 바로잡으려 하니, 우리에게 화가 있도다!

52. 주님께서 이 땅에서 우리에게 시련을 주시고, 우리가 고쳐지지 않은 채로 심판대에 서게 된다면, 우리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53. 우리 배 속에 무엇이 있는지 살피지 않아, 정욕과 교만에 굴복하는 우리, 화가 있을지어다!

54. 우리가 항상 불결한 생각으로 우리 영혼을 더럽히면서도, 남들이 우리를 성자처럼 여기고 그 칭호로 우리를 공경하기를 바라는 것이 참으로 비참합니다!

55. 화가 우리에게 있도다, 헛된 일에 빠져 마귀와의 싸움을 잊었으니!

56. 여기에서 두려움 없이 죄를 짓는 우리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왜냐하면 저기서는 꺼지지 않는 지옥의 불, 칠흑 같은 어둠, 쉬지 않는 구더기, 울부짖음과 이를 갈음, 그리고 우리보다 높은 존재와 낮은 존재들 앞에서 영원히 당할 수치심이 우리를 맞이할 것이기 때문이다.

57. 우리 분별력 없고 회개하지 않는 영혼이여, 화가 있을지어다! 죽은 자의 부활 때, 비명과 이를 갈며 그 죄 많은 육신 속에서 울부짖고 신음할 것이니, 영원한 불 속에서 겪는 쓰라리고 고통스러운 고문으로 인해 절망에 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58. 화가 우리에게 있도다! 우리가 유배와 나그네 생활의 땅에서 저주받은 즐거움을 사랑하고, 낙원의 달콤함은 기억하지 않으며, 천국을 경멸하니!

59. 화가 우리에게 있도다! 우리가 무자비함에서 미친 처녀들과 같아지며, (저곳에서) 등불을 밝히기 위한 기름을 이곳에서 이웃을 향한 자선을 통해 마련하지 않으니!

60. 화가 우리에게 있도다. 우리가 밤낮으로 “주여! 주여!”라고 말하며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뿐, 그분이 명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니!

61. 이 통곡을 기록한 자여, 기록된 모든 것에 대해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회개의 작은 한숨조차 내뱉지 못했으니, 화가 있도다!

62. 다른 사람들을 위해 애통해하면서도, 정작 자신에 대한 애통함은 버린 자(자신에 대해서는 애통해하지 않는 자)여, 화가 있을지어다!

63. 화가 우리에게 있도다. 양심 속에 끊임없이 우리를 정죄하고 우리를 대적하여 증언하는 책망이 있음에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우리가 저지른 모든 일로 인해 정죄와 고통을 받아야 할 자로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대를 두려워하지 않으니!

64. 화가 우리에게 있도다. 악한 행실로 악취를 풍기면서도, 사람들의 칭찬을 기뻐하니!

65. 아, 우리에게 화가 있도다! 마음이 이리저리 방황하고, 산만함과 망각이 우리 마음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앗아가니!

66. 우리가 헛된 일에 마음을 쏟는 바람에 우리 마음이 황폐한 땅이 되고 영적인 것에 대한 감수성이 무뎌져 버리니, 참으로 비참한 일이다!

67. 화가 우리에게 있도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에 이끌려 가면서도, 우리의 행실로 인해 죽음에 이르지 않는데도, 그런 (자비)를 누리면서도 우리 스스로 자비로운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으니!

68. 화가 우리에게 있도다. 지금 우리는 자신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나, 우리 영혼이 육신에서 벗어날 때, 그때 비로소 말과 행실과 생각으로 저지른 모든 죄가 지독하고 쓰라린 회개 속에서 한꺼번에 우리 마음의 기억 속에 새겨지고 기록된 것을 보게 될 것이니!

69. 우리에게 화가 있도다. 사도가 모든 이에게 “(떡을) 먹고 (주님의 잔을) 마시는 자가 합당하지 못하면, 주님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스스로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 (고린도전서 11:29)라고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신의 불결함에 휩싸인 채, 밤의 몽상이나 더러운 생각 속에서 저지른 일들을 스스로 용서하며, 하나님의 두려운 성사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깨끗하지 않고, 눈이 순결하지 않으며, 몸이 썩지 않았고, 영혼과 육체의 욕망이 더럽혀지지 않은 채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얼마나 많은 육체의 병과 영혼의 쇠약에 스스로를 빠뜨리는가? 그리고 나중에는 영원한 고통과 끝없는 수치심에 빠지게 된다.

70. 이 글을 쓰며 쓰라린 눈물을 흘리면서도, 아직 회개의 행실을 시작하지 못한 내가 참으로 비참하도다!

71. 아, 내가 진리를 말하면서도 선한 행실을 하지 않으니, 참으로 비참하도다!

72. 화가 있도다, 가르침은 잘하지만 행실은 나쁜 자여!

73. 쾌락 속에서 죄를 짓는 자들아, 화가 있을지어다! 그들의 끝은 쓰라릴 것이며, 영원한 수치를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74. 무익한 일들로 슬퍼하는 자들아, 화가 있을지어다! 그들은 회개를 위한 영혼에 유익한 슬픔을 스스로 버렸기 때문이다.

75. 비방하는 자들과 해치는 자들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그들은 복된 사랑으로부터 스스로를 멀어지게 했기 때문이다.

76. 원수 삼는 자들과 시기하는 자들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그들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로부터 멀어지게 했기 때문이다.

77. 사람에게만 아첨하는 자들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그들은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 수 없기 때문이다.

78. 아첨하는 자들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에서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다.

79. 교만한 자들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그들은 배교자인 마귀의 편에 서 있기 때문이다.

80. 주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들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그들은 수많은 죄에 휘말려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 채찍질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81. 화 있을진저, 우리에게는 벼룩과 이, 파리, 모기, 벌의 물림과 씹힘을 참지 못하고(그것들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며), 우리를 찔러 마시듯이 삼키고 온갖 치명적인 독침으로 찌르는 거대한 용의 입 앞에서는 아무런 도움이나 피난처를 마련하지 않으니!

82. 화가 우리에게 있도다. 마귀가 달콤한 유혹과 질병, 궁핍, 온갖 세상의 유혹으로 우리를 지치게 하는데도, 우리는 우리의 악을 그치려 하지 않으니!

83. 화가 우리에게 있도다. 배교가 수년 동안 지속되고 수많은 이들이 정통 신앙을 버렸음에도, 우리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마음 아파하지도 않으며, 자신의 정욕을 절제하지도 않고, 오히려 죄에 죄를 더해, 우리의 악한 행실과 불신앙으로 인해 곧 지옥에서 쓰라린 영원한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니!

84. 이 통곡을 기록한 우리에게 화가 있도다. 이미 우리의 끝이 다가왔음에도, 우리는 젊은 시절의 악한 행실을 회개하지도 않고 애도하지도 않은 채, 노년에 더 크고 감당할 수 없는 악과 가장 무거운 죄들을 더했으니 말이다.

85. 화가 우리에게 있도다. 가장 무거운 고통과 온갖 육체의 질병조차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죄악 속에서 방종하며, 마땅히 지켜야 할 것을 경멸하고, 완전히 절제하지 못한 채 방탕하게 우리의 더럽고 죄 많은 몸을 살찌우고 있으니!

86. 화가 우리에게 있도다. 바다의 파도보다 더 거세게 끓어오르는 불길을 우리가 통과해야 마땅하니, “각 사람이 몸으로 행한 것, 선이든 악이든, 그 보응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고린도후서 5:10).

87. 화가 우리에게 있도다. 그 어둡고 비물질적인 불길과, 그곳에서 영원히 이어질 쓰라린 울음과 이를 갈음을 생각하지 않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불꽃의 밝음은 거두시고, 타는 듯한 열기와 어둠은 불의 속에 남겨 두어 불경건한 자들과 죄인들을 위해 두실 것이기 때문이다.

88. 화가 있도다, 이 불쌍한 영혼아! “내게는 슬픔이 있고, 내 마음에 끊이지 않는 고통이 있나니”(롬 9:2)! 이는 스스로를 애도하며 이렇게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악이 이성을 어둡게 하고 진리를 가렸으며, 죽음이 생명을 이겼고, 세속적이고 썩어 없어질 일시적인 것이 하늘의 썩지 않고 영원한 것을 대신했으며, 역겹고 미움받을 만한 것이 그리스도의 참된 사랑과 의 존귀함보다 더 달콤하고 사랑스럽게 보였으며, 오해는 진리를 추방하도록 정죄하여 내 영혼에서 내쫓았고, 나는 기쁨 대신 슬픔을, 대담함과 칭찬 대신 수치와 모욕을, 달콤함 대신 쓴맛을 택하였으며, 하늘과 그 나라보다 땅과 그 재를 더 사랑하게 되었으니, 선을 미워하는 원수의 어둠이 내 마음에 들어와 내 마음속의 지식의 빛을 어둡게 했다.

89. 화가 있도다! 화가 있도다! 마귀의 그물이 나를 감싸고, 얽어매어 얼마나 높은 곳에서 아래로 내던져 버렸는가! 그리하여 나는 기진맥진해졌고, 땀이 헛되이 나를 적셨도다. 누가 나를 위해 울지 않겠는가? 헛된 수고로 지치고, 안식처에서 난파당한 나를 위해 누가 쓰라린 눈물을 흘리지 않겠는가?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오 친구들아” (욥기 19, 21), 그리고 선하시고 악의를 품지 않으신 나의 주 그리스도께 애절히 간구하사, 그분께서 내게 자비를 베푸시고, 선을 미워하는 마귀의 이 끔찍한 안개를 내 마음에서 몰아내시어, 내가 어떤 진창 속에 누워 있는지 깨닫게 하시고, 일어날 수 있음에도 일어나려 하지 않는 나를 보게 하소서. 아니면 이미 짧아진 내 생애가 내게 남은 모든 희망을 끊어버린 것인가?! 내 병보다 더한 병은 없고, 내 상처와 같은 상처는 없으며, 내 마음의 찢어짐과 같은 찢어짐은 없다. “내 죄악이 내 머리를 덮었나이다”(시 37:5). 나의 상처는 칼에 의한 상처가 아니요, 나의 죽은 자들은 전쟁으로 죽은 자들이 아니나, 원수의 불타는 화살이 내게 꽂혀 내 속사람을 눈멀게 하였으니, “나는 깊은 어둠 속에 빠졌으니, 서 있을 곳이 없도다”(시 68:3), – “내가 두려워하던 그 공포가 내게 닥쳤도다”(욥기 3:25), – “죽음의 그늘이 우리를 덮었도다”(시편 43:20).

90. 화가 있도다! 영혼아, 바라보아라. 이 일시적인 현재를 보라. 잠시 후면 쓰라림과 슬픔 속에서 지나가 버릴 이 순간과, 다가올 가장 끔찍한 미래를 보라. 생각해보라, 영혼아, 네가 얼마나 많은 복과 희망을 잃게 될지, 그리고 곧 어떤 고통의 상속자가 될지, 그 고통은 끝이 없고 위로받을 수 없는 것임을! 그러니 네 머리 위로 빛이 사라지기 전에, 미리 와서 엎드려 기도하며 영원한 빛의 주님께 간구하라. 그분께서 너를 모든 것을 삼키는 불길과 빛 없는 어둠에서 구원해 주시기를. 그분은 우리와 같이 그분의 자비를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죄를 용서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시니라. 그분께 영광과 권능이 세세토록 있기를. 아멘.

 

2. 초보 수도자들을 위한 규칙과 조언[32]

사랑하는 형제여! 이미 이 헛된 세상을 떠나 하나님께 자신을 바쳤다면, 네 죄에 대해 회개하고 네가 품은 결심을 지키라. 네 속생각들이 “네 과거의 죄들은 결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너를 괴롭히기 시작할 때, 그 말을 듣지 말라. 그러나 다음 규칙들을 지키라:

1. 여자와 함께 식사하지 말고, 소년과 교제하지 말며, 젊은이와 같은 침대에서 자지 마라. 옷을 벗을 때, 네 몸을 쳐다보지 마라.

2. 누군가 너에게 포도주를 마시라고 강요하더라도, 작은 잔 세 개 이상은 마시지 마라. 우정을 위해서라도 이 규칙을 어기지 마라.

3. 정해진 시간에 드려야 할 기도를 소홀히 하지 마라. 그래야만 원수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시편을 묵상하는 데 최선을 다하라. 이는 너를 부정한 삶으로부터 지켜 줄 것이다.

4. 네 정욕이 가라앉도록 수고와 절제를 사랑하라. 어떤 면에서도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여기지 말라. 그래야만 네 죄를 두고 끊임없이 눈물을 흘릴 것이다.

5. 거짓말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라. 거짓말은 네게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쫓아낼 것이기 때문이다. 네 선한 행실을 모든 사람에게 드러내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네 원수가 그것을 빼앗아 갈 것이기 때문이다.

6. 네 병을 지도자들에게 털어놓아, 그들의 조언을 통해 도움을 얻도록 하라.

7. 수공예에 힘쓰라. 그러면 네 안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다시 살아날 것이다.

8. 죄를 짓는 형제를 판단하지 말고, 그를 멸시하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네 원수들의 손에 넘어가게 될 것이다.

9. 다투지 말고, 자신의 말을 고집하지 마라. 그래야 네 안에 악이 자리 잡지 않을 것이다.

10. 겸손을 사랑하고 네 자신의 조언에 의지하지 마라. 네 혀가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말하도록 훈련하라. 그러면 겸손이 네게 임할 것이다.

11. 네 방에 앉아 있을 때, 세 가지 일에 신경을 쓰라: 끊임없는 기도, 시편에 대한 깊은 묵상, 그리고 수공예.

12.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라. ‘나는 오늘을 넘겨 이 세상에 더 이상 머물지 않겠다.’ 그러면 죄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13. 말수가 많지 말라. 그래야 네 안에 예전의 죄들이 다시 싹트지 않을 것이다. 일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말고, 시편을 깊이 연구하는 데 힘쓰라. 그러면 하나님의 평화가 네게 임할 것이다.

14. 기도할 때 울음을 터뜨리도록 스스로를 다그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너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네게서 낡은 사람을 벗겨내실 것이다.

15. 수고와 가난, 자제, 침묵이 겸손으로 이끈다는 것을 알라. 겸손은 모든 죄의 용서를 가져다준다. 겸손이란 사람이 자신을 죄인이자 불의한 자로 여기고, 자신의 말을 고집하지 않으며, 자신의 욕망을 끊어내고, 눈을 아래로 내리며, 모욕을 참아내고, 명예와 안식을 미워하며, 모든 이에게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데 있다. 겸손의 힘으로 원수들은 도망치게 된다.

16. 항상 슬퍼하되, 형제들이 네게 올 때에는 그들과 함께 기뻐하라. 그리하면 네 안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다시 살아날 것이다.

17. 형제들과 함께 어딘가로 갈 때는, 침묵을 지키기 위해 그들로부터 조금 떨어져 있으라.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지 말고, 시편에 깊이 몰입하여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라. 네가 어느 곳에 이르든 그곳 주민들을 지나치게 신뢰하지 말라. 모든 일에 겸손과 수줍음을 지키고, 네게 건네주는 것에 대해서는 요청받기 전까지 손을 뻗지 말라.

18. 다른 사람과 한 이불 속에서 자지 마라. 잠들기 전에 오랫동안 기도하라. 비록 여행으로 지쳤더라도 말이다.

19. 중병에 걸린 경우가 아니라면, 누구도 네 몸에 기름을 바르게 하지 말라.

20. 형제들과 식탁에 앉았을 때, 탐닉하며 먹지 말고 오직 네 앞에 놓인 음식에만 손을 뻗어라. 무릎을 모으고 앉아라. 다른 사람을 쳐다보지 마라. 목에서 소리가 나게 하며 탐욕스럽게 물을 마시지 마라.

21. 형제들 가운데 앉아 있을 때 가래를 뱉어야 할 필요가 생기면, 일어나서 그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하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몸을 쭉 뻗거나 하품을 하지 말고, 하품이 나올 것 같으면 입을 벌리지 마라. 그러면 저절로 지나갈 것이다.

22. 웃을 때 입을 크게 벌리지 마라. 이는 네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음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23. 남의 물건을 탐내지 마라. 책을 구했다면 그 책을 꾸미지 마라. 이는 네가 그 책에 집착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24. 무언가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것을 고백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거짓말로 변명하지 마라. 대신 무릎을 꿇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용서를 구하라. 그러면 용서받을 것이다.

25. 누군가 네 앞에서 거짓말을 하더라도 화내지 말고,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말하라.

26. 스승님께 질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라.

27. 네가 앉아서 자신의 일에 몰두하고 있을 때 누군가 네 방 문을 두드리면, 일을 멈추고 그를 달래주어라.

28. 아무와도 말하지 말고, 유익하지 않은 타인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마라.

29. 스승님께서 너를 어딘가로 보내신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그분께 여쭈고, 그분의 명령에 따라 행동하라. 말을 함부로 내뱉지 마라. 네 눈과 귀를 잘 지키면, 혀로도 죄를 짓지 않을 것이다.

30. 어떤 형제와 함께 살게 된다면, 그와 함께 있을 때 나그네처럼 행동하라. 그에게 아무것도 명령하지 말고, 자신보다 더 위대하다고 드러내지 마라. 그가 네가 원하지 않는 것을 명령하더라도, 네 뜻을 억누르고 (거절함으로써) 그를 모욕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 사이의 평화가 깨지지 않을 것이다. 순종하는 자가 가장 위대하다는 것을 명심하라.

31. 어떤 형제와 함께 살게 되어 그가 네게 “요리를 해라”라고 말하면, “무엇을 원하십니까?”라고 물어보라. 그리고 그가 네게 선택권을 준다면, 하나님의 경외심을 가지고 손에 닿는 대로 요리하라.

32. 잠에서 깨어났을 때,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에 기도를 드리고, 그다음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한 뒤, 게으름 피우지 말고 일에 착수하라.

33. 나그네를 기쁘게 맞이하고 인사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 만남이 너희 둘 모두에게 해가 될 수 있다. 그가 들어오면 쓸데없는 질문을 하지 말고, 먼저 기도해 달라고 청한 다음, 그가 앉으면 “형제여, 안녕하십니까?”라고 말하고, 그 후 읽을 책을 하나 건네주어라. 그가 여행으로 지쳤다면, 쉬게 하고 그의 발을 씻겨 주라. 그가 헛소리를 하기 시작하면, “용서해 주십시오, 나의 형제여, 저는 연약하여 그런 말을 들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라. 그의 옷에 찢어진 곳이 있으면 꿰매어 주라. 그가 연약하고 옷이 더러워졌다면 씻겨 주라. 그러나 그가 정신이 혼미한 사람인데, 그때 네게 성도들이 있다면 그를 들어오게 하지 말고, 마땅한 인사를 건네고 돌려보내라. 다만 그가 가난하다면 위로 없이 돌려보내지 말고, 하나님이 보내신 대로 그에게 주라.

34. 형제가 네게 무언가를 맡긴다면, 그가 직접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맡겨진 것을 살펴보지 말라.

35. 누군가 너를 자기 방에 남겨두고 나가면, 방 안에 무엇이 있는지 보려고 눈을 들지 말고, 그가 나갈 때 그에게 말하라. ‘나에게 할 일을 하나 맡겨 주시오. 당신이 돌아올 때까지 일하겠소.’ 그리고 그가 네게 맡긴 일은 성심성의껏 행하라.

36. 나태하거나 부주의하게 기도하지 마라. 그렇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대신, 오히려 그분의 진노를 불러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 두려움과 경외심으로 기도에 임하고, 벽에 기대거나 다리를 벌리지 말고, 한 발로 서서 다른 발은 뒤로 빼는 자세를 취하라. 네 생각에 맞서고, 육신의 일로 마음이 산만해지지 않도록 막아라. 그래야 네 기도가 열매를 맺을 것이다.

37. 전례에 참석할 때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다스리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앞에서 경외심을 가지고 서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합당하게 영접하고, 그것으로 자신의 정욕을 치유하라.

38. 젊을 때에는 늙을 때까지 좋은 옷을 입지 마라.

39. 연상인 이와 함께 길을 갈 때는 그보다 앞서 나가지 마라. 연상인 이가 누군가와 이야기하려고 일어서면, 너도 그대로 앉아 있지 말고 그와 함께 일어서서, 그가 앉으라고 할 때까지 서 있으라.

40. 도시나 마을에 들어갈 때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거라. 그렇지 않으면 네가 본 것이 네 방에서 너를 책망하는 빌미가 될 수 있으니.

41. 마음으로 죄를 짓게 될까 두려운 곳에서는 자지 마라. 여자와 함께 식사하지 말고, 가능하다면 그녀를 쳐다보지도 말고, 심지어 그녀의 옷조차 쳐다보지 마라.

42. 장로와 함께 길을 떠날 때, 그가 직접 무언가를 지게 하지 마라. 너희가 젊다면 각자 자신의 몫을 지고 가라. 짐이 가볍다면 시간대로 번갈아 가며 지고 가라. 짐을 지는 사람은 앞서 가도록 하고, 몸이 약한 사람도 마찬가지로 앞서 가게 하라. 그가 지쳐서 쉬려고 앉으면, 너희도 그와 함께 앉아라.

43. 어떤 장로에게 네 생각을 묻게 될 때, 네 비밀을 지켜줄 것이라고 확신하는 사람에게 있는 그대로 자유롭게 털어놓으라. 장로를 선택할 때는 나이가 많은 사람을 우선시하지 말고, 영적 지식과 경험으로 단련된 사람을 택하라. 그렇지 않으면 네가 해를 입거나 네 정욕이 더 커질 수 있다.

44. 밤에 오랫동안 기도하도록 스스로를 다그쳐라. 그리하면 네 마음이 밝아질 것이다. 네 죄를 되새기며 하나님께 그 죄를 위해 기도하라. 그러면 그분께서 네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이다.

45. 누군가 네 앞에서 네 형제를 판단하기 시작하면, 비록 그 판단하는 자가 너를 판단하는 자들 중 한 명이라 할지라도, 겸손히 그에게 말하라. “용서해 주십시오, 나의 형제여. 나는 죄인이며 연약하여, 당신이 말하는 바로 그 일로 인해 나 자신도 죄를 지었기에, 그 말을 들을 수 없습니다.”

46. 모든 일에서 다른 형제들을 너 자신보다 우선시하고, 만일 어떤 친구가 그들 앞에서 너에게 예우를 베풀면, “이것은 여러분을 위해 그가 나에게 그런 예우를 베푼 것입니다.”라고 말하라.

47. 누가 네게 무언가를 빌려달라고 청하면 거절하지 마라.

48. 하나님의 사랑을 위해 네가 떠나보낸 이들에 대한 기억을 마음속에 자주 되새기지 말고, 죽음과 심판을 기억하며, 그때에는 그들 중 누구도 너를 도울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49. 네 방에 앉아 있을 때, 네게 해를 끼친 누군가를 떠올린다면, 즉시 일어나 마음속으로 그를 위해 기도하여 하나님께서 그를 불쌍히 여기시도록 하라. 그러면 그에게 품고 있던 증오심이 곧 사라질 것이다.

50.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을 영성체하고자 한다면, 네 마음에 누구에 대한 분노나 증오가 조금도 남아 있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고 누군가가 너에게 화가 났음을 안다면, 우리 주님께서 명하신 대로 먼저 그에게 용서를 구하라.

51. 밤에(꿈속에서) 정욕의 유혹을 받게 된다면, 낮에 그 음란한 장면들을 마음속으로 되새기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여 쾌락으로 인해 네 마음이 더럽혀지지 않게 하라. 그러나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라. 그러면 그분께서 너를 불쌍히 여기실 것이다. 그분은 인간의 연약함을 아시기 때문이다.

52. 극단적인 금식을 하고 장시간 기도를 드리게 되더라도, 그것들이 너를 구원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네 육체의 고통에 자비를 베푸시고 네 연약함을 도우실 것이라고 믿으라.

53. 병이 닥치더라도 낙심하거나 기운을 잃지 말고, 하나님께서 이 병을 통해 네게 이 유익을 주시려 하신다는 사실에 감사하라.

54. 네 방에서 생활할 때, 음식에 대해 정해진 분량과 정해진 시간을 정하고, 그것에서 벗어나지 마라. 네 몸이 기도와 예배를 드릴 수 있을 만큼의 힘을 갖출 수 있도록 필요한 만큼만 먹어라. 네 방 밖에서 맛있는 음식이 제공된다면, 배부르게 먹지 말고 적당히만 먹어라.

55. 만일 악마들이 네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시작하도록 부추긴다면, 그들의 말을 듣지 마라. 그들은 대개 사람의 마음을 감당할 수 없는 일로 유인하여, 나중에 그 사람을 낙담에 빠뜨리고 조롱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들의 모든 행위는 절제 없이 무질서하다.

56. 하루에 한 번만 먹되, 배부르게 먹지 마라. 본성이 요구하는 대로(네 체질에 맞춰) 몸에 필요한 만큼만 공급하라.

57. 밤의 절반은 기도에 바치고, 나머지 절반은 네 몸을 쉬게 하라. 잠자리에 들기 전에 두 시간 정도는 기도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시편 노래)에 전념한 다음, 네 몸을 쉬게 하라. 기도하러 일어날 시간이 되었을 때 네 몸이 게을러진다면, 그에게 말하라. “이 시간에 잠시 안식을 취했다가 나중에 끝없는 고통 속으로 빠져들고 싶은가? 차라리 여기서 조금 수고하여 저기서 성도들과 함께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그러면 게으름이 너에게서 물러가고, 신성한 도움이 네게 임할 것이다.

58. 수도 서원을 할 때, 네 종을 보내주어라. 만일 그가 너를 따라 수도자가 되고자 한다면, 그가 너와 함께 살게 해서는 안 된다.

59. 수공예품을 팔러 갈 때, 평신도들이 하는 것처럼 가격을 흥정하지 마라. 물건을 살 때도 마찬가지로 행하고, 물건의 부족함이 너를 하느님께 더 가까이 이끈다는 것을 알아라.

60. 형제가 네게 어떤 물건을 맡겼는데 그것이 네게 필요해지면, 그의 허락이 없는 한 그것을 건드리지 마라.

61. 도시로 갈 때 어떤 형제가 무언가를 사 달라고 부탁하면 그렇게 하되, 다른 형제들이 함께 있다면 그들 앞에서 그렇게 하라.

62. 어떤 물건을 받았다면, 필요한 만큼 사용한 뒤 돌려주되, 돌려달라고 요구할 때까지 붙잡아 두지 마라. 만약 그 물건에 손상이 생겼다면 고쳐라. 네가 누군가에게 물건을 빌려주었다면, 그 사람이 어떤 이유로든 돌려줄 수 없다고 판단될 때는, 특히 그 물건이 너에게 전혀 필요하지 않을 때는 돌려달라고 요구하지 마라.

63. 자신의 방을 비워두고 나중에 다시 돌아왔을 때, 이미 다른 형제가 그곳에 살고 있는 것을 발견하면, 다른 방을 찾으라. 그리고 그를 어떤 이유로도 쫓아내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너에게 진노하실 것이다. 하지만 그 형제가 스스로 기꺼이 그 방을 떠나고자 한다면, 네가 옳다. 이때 그 형제가 그 방의 물건 중 어떤 것을 가져가더라도, 그것을 돌려달라고 요구하지 마라.

64. 네 방을 완전히 떠나고 싶다면, 그 방의 물건 중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고, 어떤 가난한 형제에게 넘겨주어라. 그러면 네가 어디로 가든지 하느님께서 너를 자비롭게 대하실 것이다.

65. 악마들은 누군가 자신의 생각을 영적 지도자에게 숨길 때만큼 기뻐하는 일이 없다. 그들의 수고를 본받지 않는다면, 선조들을 닮으려 하지 마라.

66. 부와 부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라. 그것은 수도 생활의 열매를 해치기 때문이다.

67. 너를 괴롭히는 어떤 유혹과 싸우고 있다면, 기력을 잃지 말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말하라. “주님, 저를 도와주소서. 저는 연약하여 이 싸움을 견딜 힘이 없나이다.” 그러면 네 기도가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라면, 그분께서 너를 도우실 것이다. 만약 싸워서 이긴다면, 그 일로 자랑하지 말고 스스로를 의지하지 말며, 오히려 더욱 경계하라. 원수는 지체 없이 이전보다 더 강력한 새로운 싸움을 너에게 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

68. 하나님께 기도할 때, “주님, 이것을 제게서 가져가시고 저것을 주십시오”라고 말하지 말고, “주님, 나의 하나님, 주님께서는 무엇이 저에게 구원이 되는지 아시니, 저를 도우시고 제가 주님 앞에서 죄를 짓거나 제 죄로 인해 멸망하지 않게 하소서. 저는 죄 많고 연약한 자이오니, 저를 원수들에게 넘기지 마소서. 제가 주님께 피신하였사오니, 저를 구원하소서, 주님. 주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소망이시니이다. – 주님께 영광과 감사가 영원히 있기를. 아멘.

 

3. 아바 이사야의 말씀[33]

1. 아바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34] : 죄인과 의인에게 똑같은 우연한 사건들이 닥치므로, 불행을 겪는 모든 사람이 반드시 그 이전에 지은 죄 때문에 그런 일을 당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2. 모든 일을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하는 자들은, 모든 악 중에서 가장 큰 악인 자만심을 키우게 되며, 그로부터 고립, 폐쇄성, 비우호성, 거짓, 불경건함이 생겨난다. 사람은 고립되어 살도록 창조된 것이 아니라, 자신과 같은 이들과, 더 나아가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도록 창조되었다. 그러므로 분별 있는 사람은 사교적이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며, 그리하여 하나님께도 사랑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

3. 아바 이사야는 “[35] ”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의 영광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거짓이 생겨납니다. 겸손으로 거짓을 물리치는 자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자라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영광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그래야 하나님의 영광이 당신에게서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4. 네가 자신의 사역을 수행할 때, 마치 합당하지 않은 자처럼 겸손과 지혜로 행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네 마음에 교만한 생각이 떠오르고, 네가 그것을 받아들이며, 잠만 자고 근면하지 않은 다른 이를 떠올려 마음속으로 그를 정죄한다면, 네 수고가 헛된 것임을 알라.

5. 사람은 언제, 어떻게 겸손해질 수 있는가? 누군가에게 그가 게으르다고 말하거나, 자신을 모욕한 사람에게 대꾸할 혀가 없고, 타인의 죄를 볼 눈이 없으며, 영혼에 유익하지 않은 말을 들을 귀가 없고, 누군가를 제압할 손이 없으며, 어떤 일에 대해서도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자신의 죄로 돌릴 때이다.

6. 사람은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그분께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얻어야 하며, 또한 악의를 품지 않고, 악으로 악을 갚지 않으며, 고된 삶을 견디고, 겸손과 지혜, 순결, 이웃 사랑—모든 이에게 대한 사랑과 순종을 갖추어야 한다.

7. 세상의 모든 것과 육체의 안식을 미워하라. 그것들이 너를 하나님의 원수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이 원수를 만나면 그와 싸우듯이, 우리도 육체와 싸워 그것을 쉬게 하지 말아야 한다.

8. 한 형제가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라는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물었다. 장로는 대답했다. “이는 온전한 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다. 왜냐하면 정욕이 우리를 지배하는 한,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9. 다시 말씀하셨다. “말하는 것보다 침묵하는 것을 더 사랑하라. 침묵은 마음을 모으게 하지만, 수다스러움은 마음을 흩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10. 허영을 이기는 것은 위대한 일입니다. 이 교활한 정욕에 빠진 자는 연민을 잃고, 모든 이에게 마음이 잔인해지며, 결국 자만과 교만에 빠지게 되는데, 이는 지극한 악이자 파멸의 어머니입니다. 그러니 네 일을 비밀로 간직하고 마음의 병을 잘 돌보아, 남의 눈치를 보느라 네 절제의 상을 망치지 않도록 하라.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사람 앞에서 과시하려고 행하는 자는 스스로 그 상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11.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고자 하는 자는 시기심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시기심을 품은 자는 겸손을 얻을 수 없다. 그런 자는 자신의 영혼을 원수들에게 넘겨주었으니, 원수들은 그 영혼을 수많은 죄로 끌어들여 파멸시킨다. 그러니 헛된 영광을 피하라. 그리하면 장차 올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얻게 될 것이다.

12. 만일 어떤 죄로 인해 이웃을 정죄하려는 생각이 들면, 네가 그보다 더 큰 죄를 지었다는 것을 스스로 생각하라. 또한 네가 행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선행이 하나님께 기쁘시게 여겨진다고 믿지 말고, 네 진심 어린 이웃을 정죄하지 말라. 자기 비하야말로 내면의 평안을 얻는 길이다.

13. 아바 이사야는 어느 날 수치스러운 죄를 짓고 있는 형제를 보았으나 그를 책망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이를 보시고도 그를 불태우지 않으시는데, 내가 누구이기에 그를 책망하겠는가?”

14. 또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머리를 뉘일 곳조차 없으신 분을 기억합시다. 이 말을 깨달아라, 사람아, 그리고 현명해 보이려 하지 마라. 그분이시니, 너를 위해 어떤 모습이 되셨는가? 만물의 주님은 나그네이시며 집도 없으시다. 오, 주님, 주님의 인간 사랑은 얼마나 형언할 수 없이 크신가!” 어찌나 나를 위해 그토록 자신을 낮추셨는가? 그러나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 머리를 뉘일 곳조차 없으시다면, 너 이 저주받은 사람아, 헛된 것에 대해 왜 그렇게 많이 생각하는가? 탐욕으로 인해 눈이 멀어 있는 것인가?

15. 겸손한 지혜를 얻은 자는 형제의 죄를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내가 죄를 지었다”고 말한다. 스스로를 지혜롭다고 여기는 자는 형제를 멸시하고 책망하지만, 자신을 낮추는 자는 결코 형제를 책망하지 않는다.

16. 지혜란 말을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말할 때를 아는 데 있다. 분별 있게 침묵하고, 분별 있게 말하라. 말을 시작하기 전에, 무엇을 말해야 할지 생각하여 마땅한 대답을 하라. 자신의 지혜를 자랑하지 마라.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이 누구보다 많이 안다. 지혜의 면류관은 스스로를 책망하고 누구보다 낮게 여기는 데 있다.

17. 헛된 말, 허영, 과도한 수면, 허세, 과식이라는 다섯 가지 원인으로 인해 헛된 말다툼이 심해진다. 헛된 말다툼을 피하고 싶다면, 이 정욕들에 굴복하지 말고, 헛된 말 대신 시편 찬송으로 무장하고, 허영 대신 그리스도의 겸손을 사랑하며, 잠을 많이 자는 대신 깨어 있는 것으로 자신을 지키고, 화려한 옷 대신 낡고 너덜너덜한 옷을 입고, 과식 대신 절제와 금식으로 자신을 다스려라. 왜냐하면 정욕은 사슬의 고리들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18. 분별 있는 부자는 자신의 보물을 집 안에 숨겨 두는데, 이는 드러내어 놓은 보물이 시기심을 불러일으키고 통치자로부터 비방을 받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덕이 있으면서도 겸손한 수도사는 그 부자가 보물을 숨기듯이 자신의 덕을 감춘다. 그런 수도사는 자신의 욕망을 따르지 않고, 매 순간 스스로를 책망하며, 성경의 말씀대로 “내 마음이 내 안에서 뜨거워지고, 나의 가르침 속에서 불이 타오르리라”(시 38:4)는 비밀스러운 가르침을 스스로에게 심어준다. 이것이 어떤 불인가?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니라”(히브리서 12:29)라고 말씀하시는 성경의 말씀을 들으라. 불이 밀랍을 녹이고 더러운 오물의 진창을 말리듯이, 비밀스러운 가르침으로 인해 더러운 생각들이 말라버리고, 영혼의 정욕이 시들며, 마음이 밝아지고, 생각이 명료해지며,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비밀스러운 가르침은 악령들을 상하게 하고 악한 생각을 쫓아내니, 이는 내면의 사람을 밝히기 때문이다. 비밀스러운 가르침으로 무장하는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굳건해지며, 천사들에게서 힘을 받고, 사람들 사이에서 칭송받는다. 비밀스러운 가르침과 독서는 들어갈 수 없는 영혼의 집이며, 흔들리지 않는 기둥이며, 고요하고 평온한 안식처로서, 그곳에서 영혼은 의심할 여지 없이 구원받게 된다. 수도사가 비밀스러운 가르침, 즉 “주 예수 그리스도여,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기도와, 은둔 속에서 신성한 성경을 읽는 것으로 무장할 때, 악령들은 크게 동요하며 수군거린다. 이 은밀한 가르침은 마음의 거울이자 양심의 등불이다. 이 은밀한 가르침은 음행을 말리고, 격정을 누르고, 분노를 쫓아내며, 교만을 없애고, 헛된 생각(헛된 것에 대한 슬픈 감정)을 떨쳐내며, 낙담을 꺾습니다. 이 은밀한 가르침은 위엄 있는 마음을 깨우치고, 나태함을 쫓아내며, 감동을 일으키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심어주며, 눈물을 흘리게 한다. 이 은밀한 가르침은 수도사에게 허영 없는 겸손한 지혜와, 경건한 깨어 있음, 흔들림 없는 기도를 선사한다. 그것은 기도하는 보물로, 부적절한 생각을 쫓아내고, 악마를 무찌르며, 몸을 정화한다. 은밀한 가르침은 오래 참음을 가르치고, 절제를 실천하게 하며, 지옥을 선포한다. 은밀한 가르침은 마음을 공상에 빠지지 않게 지키며, 오직 죽음만을 생각하도록 이끈다. 이 은밀한 가르침은 온갖 선한 행실로 충만하고 온갖 미덕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온갖 악한 행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그로부터 결코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4. 마음의 수호에 관하여: 27[36]

1. 마음은 본성상 정욕에 대한 분노를 지닌다. 분노와 순결 없이는 사람이 될 수 없으니, 즉 원수가 그에게 주입하는 모든 것에 대해 분노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 이성에 본래 내재된 분노에 이르고자 하는 자는, 이성으로 특징지어지는 상태(영혼과 육체가 모든 면에서 영에 복종하는 이성적이고 영적인 상태)에 자신을 두기 전까지 자신의 모든 욕망을 잘라내야 한다.

2. 적과 맞서 싸우다가, 적의 군대가 기세가 꺾여 너에게서 도망치는 것을 보게 되더라도, 네 마음이 기뻐하지 말라. 왜냐하면 이 적들은 네 뒤에서 교활한 함정을 마련해 두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곳에서 그들은 너에게 가장 악랄한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 그들은 너를 대적하며 군대의 상당 부분을 성 밖 매복지에 남겨두고 움직이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네가 그들에게 맞서 싸우러 나섰을 때, 그들은 마치 힘이 없는 듯 네 앞에서 도망쳤으나, 만일 네 마음이 그들을 쫓아냈다는 사실에 들뜨게 되어 그렇게 도시를 떠나게 된다면, 매복해 있던 자들도 일어나고, 네 앞에서 도망치던 자들도 멈춰 설 것이며, 사방에서 그 가련한 영혼을 에워싸서 더 이상 피할 곳이 없게 될 것이다. 도시는 기도이며, 원수들에 맞서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각의 대립이고, 그들에 대항하는 것은 분노이다.

3.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하나님의 경외심 안에서 서서 덕행의 실천을 지키고 준수하며, 우리 양심의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하고, 하나님의 경외심 안에서 우리 자신을 살피자. 그리하여 양심도 우리와 함께 자유로워져, 우리와 양심 사이에 일치가 이루어지고, 그 양심이 마침내 우리의 수호자가 되어, 우리가 걸려 넘어질 수 있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게 하도록 합시다. 그러나 우리가 그 양심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그 양심은 우리에게서 물러나 우리를 버릴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원수들의 손에 빠지게 될 것이며, 그들은 우리를 결코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 “네 원수와 화해하라. 그와 함께 가는 길에 있을 때 곧바로 화해하라”고 가르치신 대로이다(마태복음 5:25). 사람들은 이 상대가 양심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양심은 육신의 뜻을 따르려는 사람을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가 양심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양심은 그를 그의 원수들에게 넘겨줄 것입니다.

4. 하나님께서 그 마음이 온 힘을 다해 그분께 복종하고, 오직 그분 한 분 외에는 어디에서도 도움을 기대하지 않는 것을 보시면, 그분을 굳건히 세우시며 말씀하시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원하였고, 내 이름으로 너를 불렀으니, 너는 내 것이다.” 네가 물을 건널지라도 내가 너와 함께 하리니, 강물이 너를 덮지 못하리라. 네가 불 속을 지날지라도 타지 아니하며, 불꽃이 너를 태우지 못하리라.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로서 너를 구원하는 자니라” (이사야 43, 1–3).

5. 마음이 이러한 격려의 말씀을 들을 때, 그때 비로소 담대히 원수들에게 돌아서서 말하리라. “누가 나와 싸우고자 하느냐? 내 앞에 나서라! 누가 나와 재판을 벌이고자 하느냐? 내게로 다가오라! 주께서 나의 도우심이시니, 누가 나를 해칠 수 있겠느냐? 너희는 모두 옷에 먹이가 먹어 치우는 것처럼 낡아 없어질 것이다.”

6. 만일 네 마음이 죄를 온전히 미워하여 그것을 이기려고 힘쓰고, 죄를 낳는 모든 것에서 멀어지며, 네 눈앞에 (영원한) 고통을 두었다면, 네 도우미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알라. 그리고 너는 그분을 어떤 점에서도 거스르지 말고, 그분 앞에서 울며, 네 마음에 귀를 기울이며 말하라: “주님, 주님의 자비가 나를 구원하소서. 주님의 도움 없이는 내가 원수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힘이 없나이다!” 그리하면 그분께서 너를 모든 악으로부터 지켜 주실 것이다.

7. 수도사는 자신의 영혼의 모든 문, 즉 감각들을 닫아, 그것들을 통해 타락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하여 마음이 아무것도 침입하여 자신을 지배하려 하지 않는 것을 보게 되면, 모든 감각을 하나로 모아 하나의 몸으로 만들며 불멸을 준비하게 된다. (사상: 감각을 통해 외부에 의해 산만해지지 않는 마음은 자기 안으로 집중하여 그 영원한 세상으로 옮겨간다. 바실리우스 대교황의 사상).

8. 마음이 이 세상의 어떤 보이는 것에 대한 희망에서도 자유로워지면, 그것은 죄가 네 안에서 죽었다는 징표이다.

9. 마음이 정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그와 하나님 사이에 있던 장벽이 무너진다.

10. 마음이 모든 원수로부터 해방되어 안식하게 되면, 그때 비로소 그 마음은 다른 새로운 세상에 있어, 새롭고 썩지 않는 것을 관조하게 된다. “시체가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이리라”(마태복음 24:28).

11. 때때로 악마들은 교활하게 숨어 있다가, 사람이 (싸움에서) 이미 쉬었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마음에 자유를 허락하지 않을지 지켜본다. (만약 정확히 그렇게 된다면), 그들은 갑자기 불쌍한 영혼에게 달려들어 작은 새처럼 붙잡아 간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그 영혼보다 더 강해져서 이겨낸다면, 자비 없이 온갖 죄로 그 영혼을 꺾어버리며(굴욕을 주며), 그 죄들은 이전에 용서를 구했던 것들보다 더 사악한 것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경외심 가운데 서며 마음을 엄격히 지키고, 우리의 행실(수행)을 철저히 실천하며, 원수들의 악의를 막아주는 미덕(지성과 마음의 조화)을 간직해야 한다.

12.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원수들의 극심한 무자비함을 아시고 인류를 불쌍히 여기시어, 마음을 얼마나 엄격히 지켜야 하는지를 명하시며 말씀하셨다. “언제든지 준비되어 있으라. 도둑이 어느 때에 올지 너희는 알지 못하므로, 그가 올 때에 너희가 잠들어 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게 하라”(마태복음 24, 43 등). 또한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과식과 술 취함과 세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무거워지지 않도록 하라. 그리하면 그 날이 너희에게 갑자기 닥칠까 하노라”(누가복음 21, 34). 그러니 네 마음을 지키며 감정에 주의를 기울이라. 만일 하나님의 기억이 너와 하나 된다면, 그것을 훔치려 몰래 다가오는 원수들을 쉽게 잡아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생각을 엄격히 살피는 자는 자신을 더럽히려 들어오려는 자들을 즉시 알아차리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음이 산만해지고 무기력해지도록(자기 일을 소홀히 하게 되도록) 마음을 혼란스럽게 한다. 그러나 그들의 간계를 아는 자들은 주님께 기도하며 평정심을 잃지 않는다.

13. 사람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미워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해야 할 대로 하나님을 섬기고 경배할 수 없다. 하나님께 드리는 섬김이란, 기도할 때 마음에 이질적인 것이 전혀 없고, 하나님을 찬양할 때 (감각적인) 쾌락이 없으며, 그분께 노래할 때 분노가 없고, 그분을 높일 때 미움이 없으며, 그분께 경배하고 그분을 기억할 때 악한 열정과 시기심이 없는 것 외에 무엇이겠는가? 이 모든 어두운 것들은 가련한 영혼을 둘러싼 벽과 같으며, 이를 품고 있는 영혼은 하나님께 순수하게 섬길 수 없다. 이는 그 영혼을 공중에 맴돌게 하여, 하나님을 만나(지혜롭게 그분 앞에 서) 은밀히 그분을 찬양하고, 마음의 달콤함으로 그분께 기도하여 그분으로부터 빛을 받을 수 없게 하기 때문이다. 이성은 항상 어둠에 가려져 있으며, 이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잘라내려고 애쓰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따르는 삶에서 성공할 수 없다.

14. 마음이 육신의 욕망으로부터 영혼의 감각들을 해방시키고, 그것들을(배에 태우듯) 무정함으로 인도하며, 영혼 자체를 육신의 욕망으로부터 분리시키려고 애쓸 때, 그때, 부끄러움을 모르는 정욕들이 영혼을 향해 쇄도하여 그 감각들을 장악하고 죄로 끌어들일 때, 마음이 은밀히 끊임없이 하나님께 부르짖기 시작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를 보시고 당신의 도움을 보내시어 순식간에 그것들을 쫓아내실 것이다.

15. 간청하노니, 네가 육신에 있는 동안 네 마음을 느슨하게 하지 말라. 농부가 자신의 밭에서 자라나는 어떤 곡식도 믿을 수 없는 것처럼, 그것을 곡식 창고에 거두기 전에는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듯이, 사람 또한 가슴속에 숨이 멎지 않는 한 자신의 마음을 느슨하게 해서는 안 된다(욥기 27:3). 그는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까지 어떤 시련이 닥칠지 알지 못하므로, 숨이 멎을 때까지 마음을 느슨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하나님의 도움과 자비를 구하며 그분께 부르짖어야 한다.

16. 싸움 중에 도움을 얻지 못하는 자는 평화 속에서도 믿을 수 없다.

17. 누군가 그쪽에서 떨어져 나올 때, 비로소 하나님 앞에서 저지른 모든 죄를 확실히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보통은 쓰라린 거리낌(즉, 통회와 마음의 아픔)으로 죄에서 멀어지지 않는 한,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경지에 이른 자들은 울며 기도를 더하고,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에 휩싸여 정욕과의 부적절한 교제를 회상한다. 그러니 형제들아, 우리 힘닿는 대로 힘쓰자.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풍성한 자비로 우리를 도우실 것이다. 만약 우리가 조상들처럼 우리 마음을 지키지 못했다면, 적어도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대로 우리 몸을 죄 없이 지키기 위해 노력합시다. 그리고 우리를 덮친 기근의 때에, 그분께서 당신의 성도들에게 베푸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자비를 베푸실 것을 믿습니다.

18. 진정으로 경건함으로 하나님을 찾고자 자신의 마음을 바친 사람은, 자신의 수고가 하나님께 기쁘시게 여겨진다는 생각을 당장 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양심이 어떤 비자연적인 일로 그를 책망하는 한, 그는 자유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책망하는 자가 있는 곳에는 정죄하는 자도 있으며, 정죄가 있는 곳에는 자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악에 대해 너를 책망하는 것이 전혀 없음을 보게 된다면, 그때 비로소 네가 자유로워졌으며, 하나님의 기뻐하심에 따라 그분의 거룩한 안식에 들어갔다고 말할 수 있다. 선한 열매가 굳건히 자리 잡고 더 이상 원수의 가라지에 눌리지 않으며, 자신의 온갖 교활함을 의지하던 전사들이 스스로는 아니지만, 더 이상 네 감정과 싸우지 않기 위해 물러났음을, 구름이 네 성막 위에 드리워져 낮에는 해가, 밤에는 달이 더 이상 너를 태우지 않음을, 네 안에 성막을 세우고 하나님의 뜻대로 지키기 위한 모든 것이 이미 준비되었음을 알게 된다면, 네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승리를 거두었음을 알라. 그때 비로소 그분께서 친히 성막 위에 그늘을 드리우시리니, 이는 성막이 그분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싸움이 있는 한, 사람은 두려움과 떨림 속에 놓이게 되는데, 오늘 이길지 패할지, 내일 패할지 이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용기는 마음을 무겁게 하지만, 무감정은 싸움에서 자유롭다. 이미 마땅한 것을 얻었기에, 분리되어 있던 인간의 세 부분에 대해 더 이상 염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세 부분은 곧 영혼, 육체, 그리고 영이다. 그들이 성령의 역사로 하나가 되면, 다시는 갈라설 수 없다. 깨어 있을 때나 잠잘 때나 원수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한, 네가 죄에 대해 죽었다고 생각하지 말라. 왜냐하면 가련한 사람이 아직 삶의 경기장에서 달리고 있는 한, 그때까지는 담대함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19. 만일 마음이 고무되어 육체의 정욕을 소멸시키는 사랑을 기꺼이 따르기로 결심하고, 그 힘으로 비자연적인 것(정욕, 죄)이 마음을 지배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면, 그는 이러한 방식으로 비자연적인 것에 대항함으로써 마침내 자연스러운 것에서 완전히 분리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20. 형제여, 매일 스스로를 시험해 보라. 그리고 하나님의 면전에서 네 마음속에 있는 정욕적인 것을 살피고, (네가 정화되기 전에) 끔찍한 결말(네 운명)이 닥치지 않도록 그것을 네 마음에서 끊어내라.

21. 형제여, 네 마음을 주의 깊게 살피고, 네 원수들을 경각심을 가지고 지켜보아라. 그들은 악의에 차 있어 교활하기 때문이다. 악을 행하는(사랑하는) 사람에게 선을 베풀 수 없다는 진리를 마음속 깊이 확신하라. 그러므로 구세주께서는 우리에게 깨어 있으라고 가르치시며,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좁고 그 길은 괴로우니, 그것을 찾는 자가 적다”고 말씀하셨다(마태복음 7:14).

22. 네 자신을 잘 살피라. 어떤 파멸적인 것이 너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지게 하지 않도록 하라. 네 마음을 지키고, “죄인인 내가 어떻게 그것을 지킬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며 낙심하지 말라. 사람이 자신의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설 때, 그 회개가 그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고 온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23. 구약과 신약의 신성한 성경은 곳곳에서 마음을 지키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수도자는 성경의 목적, 즉 성경이 누구에게 무엇을 말하고 왜 말하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또한 그는 끊임없이 수행의 수고를 이어가며, 대적의 유혹에 귀를 기울여 능숙한 조타수처럼 은총에 이끌려 마음의 파도를 헤쳐 나갈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오직 자신에게만 집중하여, 산만한 생각이나 호기심 어린 마음이 아닌 고요함 속에서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다.

24. 이 시대는 우리에게 기도를 요구하는데, 마치 바람과 파도, 공중의 폭풍우가 조타수에게 요구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선한 생각과 악한 생각 모두를 받아들일 수 있다. 정욕의 주인이라 불리는 것은 바로 경건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생각, 즉 ‘ ’이다. 우리 침묵 수련자들은 주의 깊고 냉철하게 미덕과 악덕을 구별하고 구분해야 한다. 형제들과 스승님들 앞에서는 어떤 미덕을 지켜야 하고, 혼자 있을 때는 어떤 미덕을 실천해야 하는지, 어떤 미덕이 첫 번째이고, 어떤 것이 두 번째와 세 번째인지, 또한 어떤 정욕이 영적인 것이고, 어떤 것이 육체적인 것인지, 어떤 미덕이 영적인 것이고, 어떤 것이 육체적인 것인지, 나아가 어떤 미덕 때문에 교만이 마음을 침범하는지, 어떤 미덕 때문에 허영심이 생겨나는지, 어떤 미덕 때문에 분노가 밀려오는지, 어떤 미덕 때문에 탐식이 닥치는지.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를 거스르는 모든 생각과 모든 교만을 무너뜨려야” 하기 때문이다(고린도후서 10,5).

25. 첫 번째 미덕은 염려 없음, 즉 모든 사람과 모든 일로부터의 죽임이며, 이로부터 하나님에 대한 바람직한 열망이 생겨나고, 이는 자연스럽게 원수가 심어 놓은 모든 것에 대항하여 일어나는 분노를 낳는다. 그러면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사람 안에 거처를 찾게 되고, 그 경외심의 작용을 통해 사랑이 드러나게 된다.

26. 기도할 때, 경건한 반박으로 마음속의 잡생각을 물리쳐야 한다. 그래야 입으로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부적절한 생각을 품는 일이 없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묵상하는 이의 기도 중 생각이 딴 데로 샐 때나 부주의한 기도는 받아들이지 않으십니다. 또한 성경은 곳곳에서 마음의 감정을 지키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수도사의 의지가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고, 마음이 그 법에 따라 자신의 부하들—즉, 모든 마음의 감정, 특히 분노와 정욕—이것들은 이성의 지배를 받는 자들이기 때문이다—을 그 법에 따라 다스리기 시작한다면, 그때 우리는 덕을 완성하고 진리를 이루며, 소망은 하나님과 그분의 뜻으로 향하고, 분노는 마귀와 죄를 향하게 될 것이다. 그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 은밀한 가르침이다.

27. 네가 자신의 방에 앉아 있을 때 수치심이 네 마음에 스며든다면, 보라, 악에 맞서라. 그렇지 않으면 악이 너를 지배하게 될 것이니: 하나님께서 너를 들으시고 계시며, 네 마음이 생각하는 모든 것이 그분 앞에 드러나 있음을 기억하려 힘쓰라. 네 영혼에게 말하라: 네와 같은 죄인들이 네 죄를 보지 못하도록 그들을 두려워한다면, 모든 것을 들으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을 이유가 있겠느냐? 이 권면으로 인해 네 영혼 속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열릴 것이며, 네가 그 마음과 함께 머문다면, “주님을 의지하는 자들은 시온 산과 같아서, 예루살렘에서 영원토록 흔들리지 아니하리라”(시 124:1)고 기록된 대로, 정욕에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께서 네 모든 생각을 보신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면, 결코 죄를 짓지 않을 것이다. 그분께 영원토록 영광이 있기를. 아멘.

 

5. 수행과 침묵에 관한 장[37]

1. 세 가지 미덕은 마음의 영원한 수호자이다: 마음의 본성적인 열망, 용기, 그리고 게으름 없음.

2. 마음이 자기 안에서 다음 세 가지 미덕을 발견할 때, 불멸에 도달했음을 확신하게 된다. 바로 정욕들을 서로 세밀하게 구별해 내는 “분별력”, 모든 일을 미리 내다보는 “예지력”, 그리고 그 어떤 이질적인 생각과도 “혼합되지 않는” 태도이다.

3. 마음에 항상 빛을 가져다주는 세 가지 미덕이 있다. 어떤 사람의 악의도 품지 않는 것,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당황하지 않고 견디는 것, 그리고 악을 행하는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이 세 가지 미덕은 그들보다 더 높은 세 가지 미덕을 낳는다. 사람의 악의를 품지 않는 것은 사랑을 낳고,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당황하지 않고 견디는 것은 온유함을 낳으며, 악을 행하는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은 평화를 낳는다.

4. 영혼을 정화하는 네 가지 미덕이 있다: 침묵, 계명 준수(순종), 자제, 그리고 겸손함이다.

5. 아바 이사야가 말하였다. “나는 나 자신을 주인이 없는 방황하는 말처럼 여긴다. 누구든지 그 말을 발견하면 그 위에 올라타고 타고 다니며, 한 사람이 내리면 다른 사람이 그 말을 데려가 역시 올라타고 타고 다닌다.”

6. 예전에 죄를 지었던 일로 즐거워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지키라. 그래야 네 안에 예전의 죄들이 다시 싹트지 않을 것이다. 겸손을 사랑하라. 그러면 그것이 네 죄를 덮어 줄 것이다. 네 마음을 네 스승들에게 순종하도록 내어주라.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가 네 안에 거하게 될 것이다. 자신을 지혜롭다고 여기지 말라. 그래야 원수들의 손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네 혀가 용서를 구하도록 훈련하라. 그러면 겸손이 네게 임할 것이다. 수도실에 앉아 있을 때, 세 가지 일에 전념하라: 수공예, 하나님에 대한 묵상, 그리고 기도. 매일 이렇게 생각하라. ‘오늘 우리는 이 세상에서 수고해야 하지만, 내일은 알 수 없다.’ 그리하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지 않을 것이다.

7. 음식을 먹을 때 배를 채우려 하지 마라. 그래야 네 안에 예전의 죄들이 다시 싹트지 않을 것이다. 어떤 수고 속에서도 낙심하지 마라. 그래야 원수의 공격을 받지 않을 것이다. (비밀스러운) 가르침을 따르도록 스스로를 다그치면, 곧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나님의 평안)이 네게 임할 것이다. 울며 오랫동안 기도하도록 스스로를 다그치라. 그러면 어쩌면 하나님께서 너를 불쌍히 여기시고, 죄를 사랑하는 낡은 사람을 네게서 벗겨 주실지도 모른다.

8. 수고, 궁핍, 방랑, 고난, 그리고 침묵은 겸손을 낳으며, 겸손을 통해 모든 죄가 용서받는다.

9. 음욕이 너를 괴롭힌다면, 끊임없이 깨어 있고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자신을 혹사하며 모든 사람 앞에서 겸손해져라. 누군가의 육체적 아름다움이 네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하거나 아내에 대한 욕망이 생기면, (무덤에서 날 악취를) 떠올리고 마음을 가라앉혀라.

10. 형제여! 네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네 육신에게 안식을 주지 말고, 육신이 정욕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일 때에도 그것을 믿지 말라. 악마들은 종종 한동안 숨어 있다가, 사람이 자신의 구원에 대해 소홀해지면 갑자기 가련한 영혼을 덮쳐 작은 새를 잡듯 붙잡아 가고, 만약 그 영혼을 제압하면 자비 없이 온갖 죄로 짓밟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의 경외심 안에서 굳건히 서서, 우리의 일을 계속하며 원수들의 악을 막아주는 모든 미덕을 지키며 스스로를 보호합시다. 이 짧고도 소중한 시간 동안의 수고와 노력은 우리를 악한 행실에서 지켜줄 뿐만 아니라, 영혼이 육신을 떠나기 전에 면류관을 준비해 줍니다. 그러므로 성세(聖洗)의 인장을 받은 우리로서는 심판의 날에 자비를 얻기 위해, 우리 자신의 죄에서 멀어지도록 힘쓰자. 사랑하는 자들아, 힘내자. 때가 가까웠기 때문이다. 밤낮으로 이 일을 염려하는 자는 복이 있다.

11. 만일 네 마음이 산만해지고, 그것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모르겠다면, 네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네 어떤 행위가 그 마음을 그런 산만함으로 이끌고 있음을 알아두라. 만약 기드온이 물통을 깨뜨리라고 명령하지 않았더라면, 촛불의 빛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사사기 7:19 이하): 마찬가지로, 사람이 자신의 육신을 경멸하지 않는다면, 신성의 빛을 볼 수 없을 것이다.

12.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서 성벽의 작은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면, 적들은 도시로 들어가려 할 때 그 틈을 통해 들어갈 수 있도록 온전히 그곳에 주의를 집중한다. 경비병들이 비록 성문 앞에 서 있더라도, 무너진 부분이 복구되지 않는 한 적들을 막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수도사가 어떤 정욕에 사로잡혀 있다면 자신의 적들을 이겨낼 수 없으며, 완전함에 이를 수도 없다.

 

성 마르코 은수자

 

성 마르코의 생애와 저술에 관한 정보

성 마르코 은수자는 이집트의 가장 저명한 교부들 중 한 분이다. 그러나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를 직접 본 팔라디우스(『찬양』 제20장)는 그가 지극히 온화하고 온순한 성품을 지녔으며, 이 점에서는 그 누구도 그와 비교할 수 없었다고 전한다. 또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성경을 연구하는 것을 좋아했고, 성경에 매우 정통하여 구약과 신약을 모두 암기하고 있었다고 한다 (소조멘도 『교회 역사』 제6권, 제29·30장에서 이를 반복하고 있다). 엄격한 생활과 순수한 마음은 그를 영적 완성에 이르는 높은 경지에 올려놓았다. 성 마카리오스 알렉산드리아는 성찬식을 거행할 때 그에게 베풀어지신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에 대해 증언하는데, 이는 성 마르코의 위대한 믿음의 힘과 주님에 대한 그의 뜨거운 사랑, 그리고 지극한 겸손을 모두 보여준다. 성 마르코는 100년 넘게 살았으며, 아마도 5세기 초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성 안토니우스의 삶과 가르침을 계승한 초기 제자들과, 어쩌면 안토니우스 자신과도 함께 생활하며 교류했다. 하느님의 은총과 삶의 체험,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연구한 덕분에 그는 영적 삶의 신비를 깊이 통달하게 되었다. 이 재능을 숨기지 않고 그는 많은 가르침을 전하고 글을 썼으나, 우리에게 전해진 것은 그의 저작 중 일부에 불과하다. 러시아어 번역본에는 그의 설교 열 편이 수록되어 있다. 총대주교 포티우스는 그중 여덟 편만을 언급했으나, 니키포로스 칼리스토스는 이 여덟 편 외에도 그에게서 나온 설교 서른두 편을 더 기록하고 있다(『교회 역사』 제13권, 제53장, 544쪽). 본 선집에서는 『도브로톨루비예』에 수록된 내용을 바탕으로, 그 외의 모든 설교에서 발췌한 교훈을 추가하여 다음과 같은 순서로 정리하였다:

1. 수도사 니콜라오에게 보내는 서신. 이 서신이 첫 번째로 배치된 이유는, 그 안에 수도 생활의 시작부터 끝까지에 대한 개요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이어진다:

2. 성 마르코의 다른 말씀들에서 발췌한 교훈들. 이는 서신에서 제시된 가르침의 연장선이자, 곧이어 나오는 장들에 담긴 간결한 명언들을 이해하기 위한 준비 단계이다.

3. 영적 법에 관한 200개의 장.

4.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이들을 위한 226장. 번역 시 참고한 자료는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교 선행(Greek Dobrotolubie)』, 미그네(Migne)의 『성부들(Patrologiae graecae)』 제65권에 수록된 성 마르코의 저작들, 그리고 팔레스타인에 있는 성 사바 수도원의 필사본으로, 이는 다른 자료들보다 더 완전하고 정확하다.

 

영적 삶에 관한 마르코 은수자의 가르침

 

1. 수도사 니콜라오에게 보내는 서신

1. 그전에도 너는 네 구원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하나님께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한 깊은 염려 속에서 네 자신에 대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네가 얼마나 뜨거운 열망으로 엄격한 생활과 절제, 그리고 온갖 다른 자기 수양을 통해 주님께 굳게 붙어 있기로 결심했는지, 기도와 부지런한 기도에 힘쓰며, 또한 어떤 투쟁과 얼마나 많은 육신의 정욕이 네 몸 안에서 타오르고, 우리 이성의 법에 대립하는 죄의 법으로 인해 영혼을 공격하는지, 특히 분노와 정욕이라는 정욕들이 너를 극도로 괴롭힌다는 점에 대해 깊이 탄식하며, 그리고 어떤 방법이나 말로 된 가르침을 구하며, 앞서 말한 해로운 정욕들을 이겨내고(그들보다 우위에 서기 위해) 어떤 수고와 노력을 기울여야 할지 물었습니다.

2. 그 당시, 가능한 한 당신의 사랑을 바탕으로 영혼을 구원하는 생각과 분별력 있는 조언을 제시하며, 어떤 수고와 어떤 수행적 노력을 통해 이성과 깨달음으로 무장하고 복음에 따라 현명하게 살아가는 영혼이, 믿음을 위해 은총의 도움을 받아, 마음속 깊이 파고드는 악한 (생각과 감정), 특히 앞서 언급한 정욕들을 이겨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정욕의 정신에 따라, 그 정욕에 대한 성향과 익숙함으로 인해 영혼이 물들게 되어, 특히 그 정욕들에 의해 자극을 받을 때, 영혼은 그 정욕들에 맞서 끊임없이 가장 세심한 영적 투쟁을 벌여야 하며, 이전에 굴복했던 육신적이고 무언의 죄의 유혹을 정복할 때까지, 내면의 생각 속에서 그들과 동조함으로써(자주 떠오르는 (나쁜) 생각들과 그들과 열정적으로 대화하는 것에 의해 강요되어) 유혹당하고 사로잡혀 왔던, 육신적이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죄의 유혹(끌림)을 정복할 때까지 끊임없이 가장 세심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3. 그러나 이제 나는 육체적으로, 겉으로는 너에게서 멀어졌을지라도 마음으로는 그렇지 않다. 나는 그리스도의 참된 일꾼들과 투사들에게로 광야로 떠나, 원수의 유혹에 맞서 싸우고 정욕에 용감히 저항하는 형제들과 함께 비록 조금이라도 함께 수고하고 투쟁함으로써 나 자신도 나태함을 버리고, 나태함을 끊어내고, 게으름을 떨쳐내며, 열심과 온갖 정성을 품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로 나아가고자 했기에, 당신의 진실함에 대한 간결한 훈계와 영혼을 구원하는 조언을 글로 적어 보냈습니다. 내가 너에게 직접 말했던 바로 그 내용을, 이 짧은 권면의 글에서 주의 깊게 읽어보면서, 마치 우리가 직접 함께 있는 것처럼 그로부터 영적인 유익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4. 내 아들아, 네가 하나님 안에서 구원을 얻는 삶을 꾸려 나가려면 바로 이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너는 인자하신 하나님께서 너에게 베푸신 과거와 현재의 모든 섭리적 행적과 네 영혼의 구원을 위한 그분의 모든 은혜를 끊임없이 묵상하며, 결코 잊지 않고 영원히 기억해야 한다. (적에 의해 유발된) 악한 망각으로 인해, 혹은 나태함 때문에, 그분의 수많은 위대한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게 되어, 그로 인해 남은 생애를 무익하고 배은망덕하게 보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기억들은 마치 가시와 같이 마음을 찌르며, 마음을 항상 (하나님의 자비)를 고백하고, 겸손과, 통회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감사와, 모든 선한 일에 대한 기쁨, 그리고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선한 품성과 관습, 그리고 하나님께 합당한 모든 미덕을 쌓도록 이끕니다. 이는 양심적인 사고로 다음의 예언자적 말씀에 깊이 몰입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내게 베풀어 주신 모든 것에 대해 내가 주님께 무엇을 갚으리요?”(시 115:3). 영혼이 태어날 때부터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풀어 주신 모든 은혜를 떠올릴 때, 또한 얼마나 많은 재난에서 거듭 구원받았는지, 혹은 얼마나 많은 불의에 빠지고 어떤 죄에 무심코 미끄러졌음에도 불구하고, 의로운 심판으로 그녀를 유혹한 영들에게 멸망과 죽음으로 넘겨지지 않았는지를 생각할 때, 오히려 사람을 사랑하시는 주님께서는 오래 참으시며 그 죄를 용서해 주시고, 회개를 기다리시며 그녀를 지켜 주셨다. 그녀가 정욕에 이끌려 적들과 악한 영들을 위해 기꺼이 일하고 있을 때조차, 그분은 그녀를 양육하시고 감싸 주시며 온갖 방법으로 그녀를 돌보셨으며, 마침내 선한 인도하심으로 그녀를 구원의 길로 이끄시고, 그녀의 마음에 수도 생활에 대한 사랑을 심어 주시며, 기쁨으로 세상과 그 육체적 쾌락의 모든 유혹을 버리도록 격려하시고, 수행자의 품위를 천사처럼 아름답게 꾸며 주시고, 성부들이 형제단의 일원으로 그녀를 따뜻하게 받아들이게 하셨으니, (영혼이 이 모든 것을 마음에 떠올릴 때), 선한 양심에 이끌린 생각을 가지고 이 모든 것을 깊이 묵상하는 자가 어찌 영원히 마음의 통회 속에 머물지 않겠는가? 이전에 받은 은혜 속에서 이러한 자질을 지니고 있으면서, 스스로는 선한 일을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때, 그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며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희망을 품지 않겠는가? “그때 내가 선한 일을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분 앞에서 많은 죄를 지으며 육신의 더러움과 여러 다른 죄들 속에 빠져 있었음에도, 그분은 내 죄대로 내게 행하지 않으시고 내 불의대로 내게 갚지 않으셨으며, 오히려 그런 은사와 은혜로 자비를 베풀어 주셨다면, 마침내 내가 온전히 그분을 섬기며 흠 없는 삶을 살고 온갖 미덕을 실천할 때, 그분께서 내게 어떤 복과 어떤 영적 은사를 허락하시며, 모든 선한 일을 굳건히 세우고 인도하며 번영하게 해 주시겠는가?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결코 잊지 않고 이러한 생각을 품는 사람은, 스스로를 모든 선한 덕행과 의로운 행실로 이끌고, 항상 열심이며 하나님의 뜻을 행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로 만듭니다.

5. 그러므로 사랑하는 아들아, 그리스도의 은혜로 타고난 이성을 지닌 자로서, 항상 네 안에 그러한 행실과 선한 생각을 간직하고, 어두운 구름처럼 해로운 망각에 덮이지도 말고, 정신을 텅 비게 하고 올바른 삶에서 벗어나게 하는 나태함에 걸려 발걸음이 막히지도 말고, 모든 악의 원인인 무지로 인해 생각이 어둡게 되지도 말라 – 만악의 근원인 무심함에 휩쓸리지도 말고, 육체의 쾌락에 유혹당하지도 말고, 폭식에 굴복하지도 말고, 마음속에서 욕망에 사로잡혀 음란한 생각으로 스스로를 더럽히지도 말고, 형제간의 증오를 낳는 분노에 굴복하지도 말며, 어떤 비참하고 저주받을 만한 구실을 내세워 슬퍼하며 또 슬퍼하며 이웃에 대한 악한 생각을 마음속에 모으기 시작하더라도, 순수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에서 벗어나는 자도, 마음이 사로잡혀 야수 같은 생각으로 한마음인 형제를 엿보는 자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을 방치한다면) 육신의 꾀로 가득 찬 그러한 말 없는 성품으로 인해 양심에 얽매여, 한때 복종했던 악한 영들에게 교훈적인 징벌을 받기 위해 일시적으로 넘겨지게 될 것이니, 마음이 온전히 고갈되고 슬픔과 낙담에 사로잡혀, 과거의 죄로 인해 하나님 안에서 누리던 번영을 잃은 탓에, 다시 온갖 겸손으로 구원의 길의 시작을 받아들이기 시작할 것이며, 기도와 밤샘 기도에 많은 수고를 기울인 끝에, 하나님과 이웃 앞에서 겸손히 고백함으로써 자신의 죄 사함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다시 정신을 차리기 시작하고, 복음의 가르침의 빛으로 깨우침을 받아, 하나님의 은혜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즉, 겸손한 묵상과 자기 비하로 온전히 십자가에 자신을 내어주지 않고, 모든 사람 앞에서 자신을 짓밟힘과 모욕, 경멸, 비난, 조롱, 모욕을 당하지 않고, 주님을 위하여 이 모든 것을 기쁨으로 견디며, 인간의 어떤 것—명예나 존경, 칭찬, 맛있는 음식과 음료, 화려한 옷차림—도 추구하지 않는 자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6. 그러므로 우리에게 이러한 위업과 투쟁, 그리고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다면, 우리가 언제까지나 위선적인 경건함으로 조롱당하며, 교활하게 주님을 섬기면서, 한편으로는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다른 한편으로는 은밀히 인도하시는 분 앞에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것인가? 왜냐하면 많은 이에게 성도로 존경받지만, 우리는 여전히 본성상 짐승과 같아서, 겉으로만 경건의 모습을 갖추고 있을 뿐, 하나님 앞에서 그 힘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딤후 3:5), 많은 이에게 순결한 자로, 흠 없이 깨끗한 자로 존경받지만, 비밀을 아시는 분 앞에서는 음탕한 생각으로 인한 육체의 더러움으로 내면이 더럽혀지고, 정욕의 영향으로 오염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지극히 위선적인 우리의 금욕 생활 때문에, 심지어 인간의 칭찬 때문에도, 정신이 눈이 멀어 그 사실을 소홀히 여깁니다. 우리가 언제까지나 마음의 헛된 생각 속에 머물며, 복음의 지혜를 체득하지 못하고 양심적인 삶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그 길을 꼼꼼히 따르기로 결심하여 양심 속에서 담대함을 얻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여전히 겉모습만 의로운 척하는 외적인 의에 의지하며, 진정으로 그 일을 이해하지 못함으로 인해 겉으로만 옳아 보이는 행실로 스스로를 속이고, 사람들에게 아첨하며, 그들로부터 영광과 명예와 칭찬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까?

7. 진정으로 어둠의 비밀을 드러내시고 마음속의 생각을 밝히시는(고린도전서 4:5), 누구에게도 속지 않으시는 재판관이 오실 것이니, 그분은 부자를 부끄러워하지도 않으시고 가난한 자를 편들지도 않으실 것이다. 그분은 겉모습을 벗겨내고 내면에 숨겨진 진리를 드러내시며, 양심적으로 사는 참된 수행자들과 투사들을 천사들 앞에서 그분의 아버지 앞에서 면류관을 씌워 주실 것이며, 오직 경건한 척하는 겉모습만을 입고 사람들 앞에서 겉으로만 (바르게) 사는 척하는 위선자들을, 그것에 헛되이 의지하며 스스로를 속이는 자들을, 온 높은 교회와 온 하늘의 군대 앞에서 엄숙히 폭로하고, 지극히 참담한 수치 속에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내쫓으실 것이다.

8. (그들은 마치) 겉으로는 동정심을 지키고(그 때문에 조금도 비난받지 않았기 때문) 게다가 그릇 속에 약간의 기름을 간직하고 있던, 즉 몇 가지 미덕과 겉으로 드러나는 올바름, 그리고 몇 가지 은사를 지닌 성녀들과 같다. 그래서 그들의 등불은 한동안 타올랐으나, 부주의와 무지, 게으름으로 인해 내면의 돌봄을 소홀히 했으며, 악령들에 의해 자극된 수많은 정욕이 내면에 도사리고 있음을 제대로 알지 못했고, 그로 인해 그들의 생각은 적대적인 영향력에 의해 타락해 갔으며, 그들(처녀들)은 은밀히 가장 사악한 시기심, 선을 미워하는 질투심, 도발성, 사랑의 경쟁, 증오, 분노, 슬픔, 원한, 위선, 짜증, 교만, 허영, 사람에게 아첨, 자기만족, 탐욕, 부주의, 육체적 정욕, 생각 속에서 쾌락을 추구하는 것, 불신, (하나님 앞에서의) 두려움 없음, (외부적인 무언가에 대한) 두려움, 슬픔, 반항, 온갖 자기 방종, 잠, 자만, 자기합리화, 교만, 허세, 만족할 줄 모르는 마음, 사치, 탐욕, 절망, 가장 비참한 모든 것, 그리고 그 밖의 가장 미묘한 죄의 영향들. 그들(처녀들)은 선행을 실천하고, 사람들 앞에서 겉으로만 정직한 삶을 살며 그 대가로 칭찬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영적인 은사들, 만일 그런 것에 참여했다면, 그것들마저 허영과 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마음에 팔아넘겼으며, 다른 정욕들에 휩쓸려 선한 일들에 교활하고 육신적인 계략을 섞어 넣음으로써, 카인의 제물처럼 그것들을 부정하고 하나님께 기쁘시지 않은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모든 일로 인해 그들은 신랑과의 기쁨을 박탈당했고, 그들 앞에 닫혀 있는 천상의 궁전 밖에 남겨졌다.

9. 이 문제에 대해 엄격한 분별력과 자기 성찰을 통해 깊이 생각해 본다면,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깨닫고 인식하게 될 것이며, 아직 회개와 돌이킬 시간이 남아 있는 동안 스스로를 바로잡고, 우리의 선한 행실이 순수하게 이루어져 육신의 궤변이 섞이지 않은 참으로 선한 것이 되도록 신경 써야 할 것입니다. 무모함, 태만, 그리고 참된 지식의 부족으로 인해 부정한 제물처럼 배척당하지 않도록 하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순결, 절제, 기도, 금식, 그리고 온갖 자기 수양의 수고를 짊어지고 우리의 나날을 보내게 될 것이나, – 그럼에도 우리에게 의로움으로 보이는 그 모든 것은, 앞서 언급한 정욕들 때문에 흠 있는 제물로 판명되어 하늘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10. 그러므로, 내 아들아,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기를 원하는 자는 무엇보다도 지식과 분별력을 갈구해야 하며, 끊임없이 자신의 생각을 시험하고, 구원에 대한 깊은 염려와 하나님에 대한 큰 헌신을 가지고, 같은 뜻을 품고 같은 마음으로 수고하는 하나님의 종들에게 조언을 구해야 한다. 그래야만 어디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모른 채, 밝은 등불 없이 어둠 속을 걷는 일이 없도록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복음의 가르침과 인도 없이는 제멋대로 행하는 자는 자주 걸려 넘어지고, 악한 자의 수많은 함정과 올가미에 빠지며, 자주 길을 잃고 큰 재앙을 당하며, 결국 어디로 가게 될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하나님을 위해 큰 자기 희생의 위업을 이루고, 큰 수고와 땀을 흘렸으나, 제멋대로 행동하고 분별력이 부족하며, 이웃에게 구원의 조언을 구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탓에 그들의 그러한 수고는 하나님께 기쁘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헛된 것이 되어 버렸다.

11. 그러나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이 권면의 말씀의 서두에서 말했듯이, 숭배받는 인자하신 하나님께서 네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잊지 말라. 원수의 악의와 나태함으로 인해 그 길에서 벗어나지 말고, 영적인 것이든 육체적인 것이든,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네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눈앞에 두고 깊이 생각하며, “그의 모든 은혜를 잊지 말라”(시편 102:2)는 말씀대로 그로부터 교훈을 얻으라. 그리하면 마음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사랑으로 이끌리게 될 것이며, 너는 엄격한 삶과 덕스러운 행실, 경건한 양심, 품위 있는 말, 바른 믿음, 겸손한 지혜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보답할 수 있게 될 것이며, 간단히 말해 온전히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선하시고 인자하신 주님께서 네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기억함으로써 네가 이르게 될 지경이다! 이러한 은혜에 대한 기억, 특히 위로부터 오는 감동의 도우심으로 인해, 네 마음은 저절로 사랑과 (하나님에 대한) 갈망으로 찔리게 될 것이니, 이는 그분께서 너보다 더 합당한 다른 누구에게도, 오직 그분의 형언할 수 없는 인간 사랑으로 너에게 베풀어 주신 그 놀라운 은혜를 베풀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12. 그러니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모든 은혜를 끊임없이 기억하도록 힘쓰고, 특히 네가 내게 말했던 것처럼, 어머니와 함께 성지로부터 콘스탄티노플로 항해하던 중, 밤중에 끔찍하고 견딜 수 없는 폭풍이 몰아쳐 바다가 거세게 요동쳤을 때, 배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 , 선원들과 네 어머니까지 모두 심연 속으로 빠져 죽었으나, 오직 너와 다른 두 사람만이 영광스러운 신성한 능력으로 구원받아 해변으로 밀려나왔고, (기억하라) 또한 (주님께서) 안키라로 향하는 네 길을 어떻게 마련해 주셨는지도. 그곳에서 너는 한 자비로운 이에게 아버지의 자애로움으로 받아들여졌고, 경건한 아들 에피파니우스와 사랑으로 하나가 되었으며, 너희 둘은 한 경건한 분의 인도하심 아래 (세상을 등지고) 구원의 길에 들어섰고,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종들에게 진실한 자녀로 받아들여졌다.

13.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이 모든 은혜에 대해, 너를 영생으로 부르신 분께 무엇을 보답할 수 있겠느냐? 정의가 요구하는 바와 같이, 너는 더 이상 너 자신을 위해 살지 말고, 너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야 한다; 모든 의로운 덕을 추구하고 모든 계명을 이행하며, 항상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며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롬 12:2) 구하고, 그것을 온 힘을 다해 실천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아들아, 네 청춘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하라. “너희 몸을 하나님께 드려 산 제물로 삼으라. 이는 너희가 마땅히 드려야 할 영적 예배니라”(롬 12:1). 육신의 정욕이 뿜어내는 모든 습기를 적게 먹고 적게 마시며 밤새도록 깨어 기도함으로써 식히고 말려버려, 너도 마음으로부터 이렇게 말할 수 있게 하라: “나는 마치 짚단 위의 가죽 주머니 같았도다”[38] , “주의 의로운 길들을 잊지 아니하였나이다” (시편 118:83). 네가 그리스도의 사람임을 깨달았으니, 사도의 말씀대로 “네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아라”, “정욕과 욕망과 함께” (갈 5,24) “육신에 속한 지체들을 죽이라”(골 3,5), 즉 음란한 행위뿐만 아니라 악령들이 육신 안에서 일으키는 부정한 것들까지 죽이십시오. 그리고 참되고, 더럽혀지지 않으며, 온전하게 완전한 동정심의 면류관을 얻고자 하는 자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사도의 가르침을 따르며 이 정욕의 움직임 자체를 죽이기 위해 힘쓰는 것이다. 심지어 (순결에 대한) 굳건한 사랑으로 자신의 몸에 천사처럼 흠 없는 동정심을 심고자 열망하는 이조차도 이것에 만족하지 않고, 육체적 정욕의 움직임이나 영향 없이, 덧없는 환상의 형태로 마음에 스치는 가장 단순한, 단지 한 번의 생각에 불과한 정욕에 대한 기억조차 사라지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이는 오직 위로부터 오는 도움, 곧 성령의 유일한 힘과 은총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으며, 오직 그러한 은총을 받을 자격이 있는 자들에게만 주어진다.

14. 이처럼, 순결하고 비물질적이며 흠 없는 동정심의 면류관을 얻고자 하는 자는 수행의 수고를 통해 자신의 육신을 십자가에 박고, “땅 위에 있는 지체들을 죽이며”, “땅에 속한 것들”을 죽이며, 고된 인내와 절제로 외적인 사람을 쇠퇴시키고, 그를 얇게 만들어 늙고 뼈만 남은 모습으로 만듦으로써, 믿음과 영적 수행을 위한 은총의 작용으로 내적인 사람이 더 방해받지 않고 새롭게 되도록 하며, 날마다 더 나은 방향으로 성장하고, 사랑 안에서 자라나며, 온유함으로 단장하고, 영적인 기쁨으로 즐거워하며, 그리스도께로부터 평화의 보증을 받고, 자비로 이끌리며, 선행으로 옷 입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감싸이며, (영적인) 지식과 이성으로 깨달음을 얻고, 지혜로 무장하며, 겸손한 지혜로 인도받는다. 이러한 미덕과 이와 유사한 미덕들로 성령께 의해 새롭게 된 마음은 신성한 형상의 인장을 받아들이고, 주님의 형상을 닮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지적인 아름다움을 입으며, 영적 지혜의 풍요로움에 참여하게 된다.

15. 그러니 내 아들아, 네 젊은 육신을 얇게 만들고, 네 영혼을 풍요롭게 하며, 앞서 언급한 미덕들과 성령의 도우심으로 네 마음을 새롭게 하라. 온갖 진미와 술로 살이 찐 젊은이의 육체는 도살될 준비가 된 멧돼지와 같아진다. 이때 육체적 쾌락의 불길로 영혼은 단련되고, 사악한 정욕의 불길에 사로잡혀 육체의 유혹에 맞서지 못하는 마음이 포로가 된다. 이처럼 피가 솟구치면 영은 썰물처럼 물러난다. 포도주에 관해서는, 청년 시절에는 그 냄새조차 맡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내면의 정욕과 외부의 음주로 인한 이중의 불길에 휩싸여 육체의 쾌락이 영적 달콤함인 고통스러운 감동을 몰아내지 못하고, 마음에 혼란과 격분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물조차도 배부르게 마시지 말아야 한다. 이는 영적인 갈망(선한 마음가짐)을 보존하기 위함이며, 물을 적게 마시는 것이 육체의 절제를 크게 돕기 때문이다. 이를 실제로 체험해 보면, 그 사실을 자신의 경험으로 확신하게 될 것이다. 내가 이것을 네게 법으로 정하고 규정하는 것은, 네게 어떤 억지스러운 멍에를 씌우려는 뜻이 아니라, 참된 동정성과 엄격한 절제를 보존하기 위한 선한 수단으로 사랑으로 조언하고 제안하는 것이며, 네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자유 의지를 남겨두는 것이다.

16. 이제 무분별한 분노의 정욕에 대해서도 잠시 이야기해 보자. 이 정욕은 그 움직임이 퍼져 나갈 때 영혼 전체를 황폐하게 만들고, 혼란에 빠뜨리며 어둡게 할 뿐만 아니라, 특히 쉽게 유혹에 빠지고 금세 그 정욕에 굴복하는 사람을 짐승과 같은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이 정욕 은 교만으로부터 굳건해지고, 지탱되며, 극복할 수 없게 되는데, 이 악마적인 슬픔의 나무(히브리서 12:15), 즉 분노와 짜증이라는 나무가 교만의 악한 물로 적셔지는 한, 그 나무는 계속 자라고 꽃을 피우며, 불법의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 이처럼, 이 악한 자의 건축물은 영혼 속에서 교만의 기초 위에 보강과 지지를 받는 한 결코 무너질 수 없다. 그러므로, 만일 이 불법의 나무(즉, 근심과 분노, 짜증이라는 정욕을 말한다)가 몸 안에서 말라 죽어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고, 성령의 도끼가 와서 그것을 베어내어, 복음서의 말씀대로 불 속에 던져져 온갖 악의와 함께 사라지게 하고 싶다면, – 만일 사탄이 악을 위해 영혼 속에 짓는 이 불법의 집, 즉 사방에서 돌처럼 근거 있는 것과 근거 없는 변명들을 생각 속에 모아 행동이나 말에서 악의 건물을 영혼 속에 세우고, 그 견고한 기초 위에 교만의 생각을 깔아놓은, 이 집이 파괴되고 파헤쳐지기를 원한다면, 주님의 겸손을 네 마음에 영원히 간직하라. 그분은 누구시며, 우리를 위해 무엇이 되셨는가? 신성의 빛이 어느 높이에 계셨는가? 그 빛은 천상의 존재들에게도 적당히 드러나셨고, 천국에서는 천사, 대천사, 보좌, 주권, 권세, 권세, 케루빔, 세라핌, 그리고 이름이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은 그 밖의 모든 지적인 존재들까지 — 그 모든 빛의 높이에서, 그분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자비로 인간의 겸손의 깊은 곳까지 내려오셔서, 어둠과 죽음의 그늘 속에 앉아 있으며, 아담의 죄로 인해 원수의 포로가 되어, 우리 안에서 작용하는 정욕들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와 모든 면에서 닮으셨는지.

17. 그러므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피조물의 주님께서는, 이러한 속박 속에서 고통받고 쓰라린 죽음을 맞이한 우리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스스로를 낮추시고 (자신 안에) 주님의 정함에 따라 속죄의 형벌로서 슬픔을 짊어져야 할 인간을 받아들이시고, 죄, 즉 불경건한 정욕을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아지셨습니다. 주님의 정하심에 따라 (원조)의 죄에 대한 속죄로서 인간에게 부과된 것들, 즉 죽음, 수고, 굶주림, 목마름 및 이와 유사한 모든 것을 그분은 받아들이셨으며, 우리가 그분이 되게 하시려고 우리와 같은 존재가 되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요한복음 1:14), 육신이 말씀이 되게 하시고, “부유하신 분이 가난해지셨으니, 우리가 그분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부유해지리라”(고린도후서 8:9), 그분의 크신 인간 사랑으로 인해 그분은 우리와 같아지셨으니, 우리도 모든 미덕으로 그분과 같아지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래로, (태초부터)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받은 사람은 참으로 성령의 은혜와 능력으로 새롭게 되어, 두려움을 완전히 몰아내고 더 이상 타락할 수 없는 완전한 사랑의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이는 “사랑은 결코 사라지지 않기” (고린도전서 13:8), 요한이 말하듯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니,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요한일서 4:16). 사도들과 그들과 같이 덕을 쌓아 주님께 온전한 자로 나아간 모든 이들은, 평생 동안 온전한 헌신으로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이러한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18. 그러므로 만일 네가 주님께서 우리를 향한 말로 다할 수 없는 사랑으로 보여주신 그 겸손, 즉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입으시고, 인간의 모습을 취하시며, 여인에게서 태어나시고, 육체적으로 점차 성장하시며, 모욕과 괴로움, 비방, 조롱, 비난, 구타, 침 뱉음, 조롱, 모욕, 붉은 겉옷, 가시관, 통치자들이 내리신 판결, 그분과 같은 민족인 불의한 유대인들이 그분을 향해 외친 “처형하라, 처형하라,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라” (요한복음 19:15), 십자가, 못, 창, 식초와 담즙을 마시게 하심, 이방인들의 환호, 지나가던 자들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리하면 우리가 너를 믿으리라”라고 조롱한 일 (마태복음 27: 42)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위해 겪으신 그 밖의 고난들: 십자가에 못 박히심, 죽음, 사흘간의 매장, 음부로의 하강 – 그리고 그 후 고통의 열매인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 주님께로 모인 영혼들을 이끌어 내심으로써 음부와 죽음을 비우심, 하늘로 승천하심, 아버지의 우편에 앉으심, 모든 통치와 권세와 이름 지어진 모든 것 위에 높이 계심 (엡 1:21), 모든 천사들이 그분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맏이 되신 분께 드리는 존경과 영광과 경배, 사도들의 말씀에 따르면, “이것이 너희 안에 이루어지기를 원하노니,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와 같이, 그분은 하나님의 형상이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하심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신을 비워 종의 형상을 취하시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사람의 모양을 갖추시고, 자신을 낮추사 죽기까지, 곧 십자가의 죽음까지 순종하셨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과 땅과 지하에 있는 모든 무릎이 예수님의 이름 앞에 꿇게 하셨으며, 그 밖의 것들도 그러하니라” (빌 2:5–10)... 보라, 하나님의 진리에 따라, 앞서 말한 그분의 고난이 주님의 사람을 얼마나 큰 영광과 높이로 끌어올렸는가!

19. 그러므로 네가 따뜻한 마음으로 이러한 생각을 잊지 않고 마음에 간직한다면, 슬픔과 분노, 짜증이라는 정욕이 너를 지배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밑바탕 이 제거될 때, 즉 그리스도의 겸손에 깊이 빠져 교만의 정욕이 근절될 때, 그때 불의한 분노와 격분, 슬픔으로 이루어진 모든 구조물은 저절로 쉽게 무너질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잔혹하고 돌 같은 마음이, 우리를 위해 독생자 신성이 보이신 그러한 겸손을 항상 마음에 새기고 앞서 열거된 그분의 고난을 기억한다면, 으스러지지 않고, 감동받지 않으며, 겸손해지지 않겠는가? 오히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기꺼이 모든 사람을 위한 흙과 재, 짓밟힘이 되지 않겠는가? 영혼이 그리스도의 겸손을 바라보며 그처럼 겸손해지고 꺾일 때, 과연 어떤 성급함이 그 영혼을 지배할 수 있겠는가? 어떤 분노와 어떤 슬픔이 스며들 수 있겠는가?

20. 그러나 보아하니, 우리에게 구원과 생명을 주는 이러한 생각들을 잊어버리는 것과, 그와 쌍을 이루는 나태함, 그리고 이를 조장하고 동등한 위치에 있는 무지—이것들은 영혼의 가장 무겁고 내면 깊은 병들로서, 자각하기 어렵고 치유하기는 더욱 힘든데, 억제할 수 없는 호기심 (자신을 제외한 모든 외적인 것에 대한 탐구), 그로 인해 영혼 안에서 다른 모든 악한 정욕들이 작용하고 숨어 있게 되는 원인이 되곤 한다. 그것들은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을 잃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대해 무관심하게 만들며, 온갖 정욕이 영혼에 들어와 부끄러움 없이 활동할 수 있는 자유를 준다. 영혼이 (마치 어두운 덮개처럼) 온갖 악을 낳는 망각과, 파멸을 부르는 나태함, 그리고 모든 악의 어머니이자 양육자인 무지로 뒤덮일 때, 비참하고 눈이 먼 이성은 보이는 것, 생각되는 것, 들리는 것 등 모든 것에 쉽게 매여 버린다: 예를 들어, 여성의 아름다움을 보고는 즉시 육체적 정욕에 사로잡힌다. 기억은 이처럼 열정적이고 황홀하게 본 것, 들은 것, 만진 것을 받아들인 뒤, 상상력을 통해 생각과 그와 함께 얽힌 사악한 대화를 통해 그 형상을 내면에 생생하게 그려내며, 음탕한 영들의 영향을 통해 여전히 열정에 사로잡힌 비참한 마음을 더럽힌다.

21. 마지막으로 육체도, 만약 살이 쪄 있거나, 아주 젊거나, 지나치게 습기가 많다면, 그러한 기억들로 인해 재빨리 정욕에 휩싸여 본성을 드러내며, 음탕함으로 치닫게 되고, 때로는 꿈속에서, 때로는 깨어 있는 상태에서 불결한 행위를 저지르기도 하며, 실제로 아내와의 관계 없이도 그러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많은 이들에게 절제된 자, 동정자, 순결한 자로 여겨질 수 있으며, 심지어 거룩함을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내면의 비밀을 꿰뚫어 보시는 분 앞에서는 그는 추악한 음행자이자 간음자이며, 그 날에 울며 통곡하지 않고, 그분 앞에서 악한 생각을 품고 악한 일을 행했으면서도, 금식과 철야 기도, 끊임없는 기도로 육신을 굶주리게 하고, 거룩한 묵상과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으로 마음을 치유하고 바로잡아 합당한 회개를 드리지 않는다면, 그날 정당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는 이미 마음속으로 그와 간음한 자니라”(마태복음 5:28)라고 말씀하신 살아 계신 음성은 거짓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는 이미 마음으로 그와 간음한 자니라”(마태복음 5:28). 그러므로 특히 젊은이들에게는, 비록 그들이 성자로 여겨진다 할지라도, 결코 여자와 만나지 않는 것이 매우 유익하며, 가능하다면 따로 떨어져 모든 사람과 떨어져 사는 것이 좋다: 이를 통해 그는 영적 싸움을 훨씬 더 수월하게 이겨낼 수 있을 것이며, 자신의 영적 성장을 더욱 뚜렷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자신을 엄격히 경계하고 기도에 전념하며, 적은 양의 음식과 물조차도 절제하고, 장시간의 기도를 통해 노력하며, 경험 많은 영적 지도자들과 상의하여 그들과 함께하며 그들의 지도를 따르려고 노력한다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왜냐하면 증인 없이 자신의 뜻대로 홀로 살거나, 영적 싸움에 경험이 없는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은 지극히 위험하기 때문이다. 악(사탄)에게는 많은 계략이 있고, 많은 은밀한 매복이 있으며, 원수가 사방에 쳐 놓은 그물은 다양하다. 그러므로 가능한 한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영적 일에 정통한 분들과 함께 지내고 자주 대화를 나누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만, 비록 누군가가 영적 나이가 아직 어리고 미숙하여 참된 지식의 빛을 갖지 못했더라도, 그 빛을 가진 이와 함께 걸어가면, 어둠 속을 걷지 않게 되고, 올가미와 그물의 위험에 빠지지 않게 되며, 어둠 속에 숨어 신성한 말씀이라는 지혜의 등불 없이 그 어둠 속을 걷는 자들을 유혹하고 타락시키는 마음의 야수들에게 걸려들지 않게 하려 함이다.

22. 그러나 내 아들아, 네가 이 세상의 가장 깊은 밤 속에서도 걸림 없이 걸을 수 있도록, 그리고 “네 발걸음이 주님으로 말미암아 바로잡히게”(시편 118:133) 하기를 원한다면, 또한 예언자의 말씀대로, “복음의 길을 지극히 갈망”하는 것, 즉 가장 뜨거운 믿음으로 가장 완전한 복음의 계명을 실천하고, 그 계명을 갈망하며 기도함으로써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고자 한다면, 나는 너에게 이를 위한 놀라운 방법을 보여 주겠다. 그것은 육체적인 수고나 위업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스러운 영적 수고와, (내면의 모든 것을 다스리는) 이성의 지배, 그리고 주의 깊은 사고를 필요로 하며, 하나님의 경외와 사랑이 이를 뒷받침하는 것입니다. 이 마음가짐으로 너는 복된 다윗처럼 적군의 대열을 쉽게 쫓아낼 수 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이방인의 거인 한 명을 죽임으로써, 그로 인해 어둠 같은 적들과 그들의 백성을 쫓아냈다.

23. 내 이 말은 세 명의 강하고 튼튼한 이방 거인들을 겨냥한 것으로, 그들 위에 정신적 올로페른의 모든 대적하는 힘이 굳건히 서 있다. 그들이 쓰러져 죽임을 당하면, 사악한 영들의 모든 힘은 완전히 쇠약해질 것이다. 이 스스로 강하다고 여기는 세 명의 사악한 거인들은 우리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모든 악의 어머니인 ‘무지’와, 망각, 즉 무지의 자매이자 공범자이자 조력자, 그리고 어둠 속에서 영혼을 위해 어두운 옷과 덮개를 짜는 나태(무관심)이다. 이 나태는 앞의 두 가지를 지지하고 강화하며, 그들에게 견고함을 부여하고, 가장 부주의한 영혼 속에서 악이 마치 뿌리내리고 실체화된 것처럼 되게 한다. 이는 무관심(나태), 망각, 무지로부터 다른 모든 정욕의 토대가 굳건해지고 커지기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의 조력자가 되어, 하나 없이는 다른 하나가 존재할 수 없기에, 그것들은(모두 함께 연결되어) 대적의 강력한 힘이자 사악한 자의 주요 지도자들이 된다. 이들의 매개를 통해 사악한 영들의 무리는 영혼 속에 함정을 치고, 자신들의 계략을 성공적으로 실행에 옮기게 된다.

24. 만약 정욕을 이기고, 마음속의 수많은 이방인들을 쉽게 쫓아내고 싶다면, 기도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내면으로 집중하여 마음의 깊은 곳으로 내려가, 그 안에 있는 이 세 마리의 강력한 악마의 거인들—즉 망각, 무관심, 또는 나태함—을 찾아내라. 그리고 무지, 바로 이것들을 양분으로 삼아 다른 모든 정욕들이 자기만족에 빠진 마음과 벌 받지 않은 영혼 속에서 활동하고, 살아가며, 더욱 강해진다. 자신에게 엄격한 주의를 기울이고 정신을 맑게 한 채 하늘의 도움을 받으면, 분명 (자신 안에서 포착하고 붙잡을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이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고 심지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치명적인 악한 정욕들을, 그것들과 정반대되는 진리의 무기들—모든 선의 근원인 선한 기억, 깨어 있는 상태에서 영혼이 무지의 어둠을 몰아내는 깨달은 지식, 그리고 영혼을 구원으로 이끌고 고무하는 생생한 열정—으로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후, 바로 이 미덕의 무기를 두르고, 온갖 기도와 간구로, 성령의 힘으로, 용감하고 당당하게 앞서 언급한 세 명의 거대한 정신적 이방인, 즉 하나님께 합당한 아름다운 생각으로, 항상 “진실한 것, 정직한 것, 의로운 것, 순결한 것, 칭찬받을 만한 것, 어떤 미덕이든, 어떤 칭찬이든” (빌 4,8)를 항상 마음에 새기며, 가장 악한 망각을 스스로에게서 쫓아내고, 하늘의 깨달음으로 해로운 무지의 어둠을 없애며, 모든 선을 향한 가장 생생한 열정으로 영혼에 악을 뿌리내리게 하는 경건하지 않은 무관심(나태함)을 몰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미덕들을 얻는 것은 오직 네 자신의 의지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의 도우심, 그리고 끊임없는 주의와 기도를 통해 이루어지며, 이러한 방식으로 미덕을 얻음으로써 너는 앞서 말한 사탄의 세 강력한 거인들을 물리칠 수 있다. 효력 있는 은혜의 힘으로 영혼 안에 (삼중의) 연합, 즉 참된 지식과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함, 그리고 선한 열심이 형성되고 그 안에서 꼼꼼히 지켜질 때, 그때야말로 망각과 무지, 무관심의 흔적조차 영혼에서 사라질 것이다. 그것들은 허무로 돌아가고, 영혼 안에서는 마침내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계신 은혜가 다스리기 시작할 것이니, 그분께 영광과 권능이 세세토록 있기를. 아멘.

 

2. 수도사 니콜라이의 마르코 포드비즈니크의 글에 대한 답변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감사드립니다! 그분의 뛰어남과 헤아릴 수 없는 은사에 감사드립니다. 그분은 사나운 정욕에 사로잡혀 모든 힘을 잃어버린 영혼을 사랑하시어, 자비로우시고 온전히 하나님께 맡겨진 뜻으로 그 영혼을 찾아오셨으니, 덕이 넘치고 하나님과 연합된 당신의 경건한 영혼을 통해, 신성한 빛으로 가득 찬 찬란한 불꽃과 영적인 미끼를 지닌 행운이 내게 보내졌으며, 하나님과 연합된 생각에서 태어난 수고와 사랑의 말씀이라는 등불로, 주님께서는 내 영혼을 가장 짙은 어둠과 폭풍에서 끌어내어, 내게 알려주신 세 거인에 대한 생각이 내 마음속에 활기차게 솟아나게 하셨다. 실로 이 거인들은 위대하고 사나우며, 결코 인류에게 닥치는 공격을 멈추지 않습니다. 과연 이 땅에서 누가 나처럼 그들에게 그토록 사납고 잔혹하게 억눌려 있으며, 여전히 그들의 뜻대로 지배당하고 있겠습니까? 그러나 살아 있는 자들의 파멸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시는 그분은,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내게 그분의 오래 참으심과 인자한 자비를 보이셨으며, 그 경건한 생각을 일으키시고 가장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자유 의지를 깨우치시어, 앞서 말한 거인들을 내게 알려 주시고 드러내 보이셨으니, 내가 말하건대, 첫째로, 아담을 낙원에서 쫓아낸 망각, 왜냐하면 그가 주님의 계명을 잊지 않았더라면 그 영광에서 떠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낙담, 그것에 사로잡혀 아내의 말을 들은 것; 그리고 무지, 그것으로 인해 자신이 무엇이었고 무엇이 되었는지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이 세 가지 영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곧 네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 내게 분명히 드러내 주셨다. 참으로 그분은 양날의 칼, 곧 하나님의 말씀을 보내셔서, 깊은 고요함 속에서 내 마음을 둘로 갈라놓으셨다. 그분은 거기서 멈추지 않으시고, 진실로 당신의 말씀을 통해 어떤 영적인 달콤함을 나의 의지에 심어 주셨습니다. 그러니, 네가 내게 상기시켜 준 그분의 은혜에 대하여, 혹은 다시, 영혼을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도록 자극하는, 지혜롭고 사랑이 넘치는 말씀을 내게 보내 주신 것에 대하여,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생으로 이끄는 주님의 길을 걷고자 하는 이에게 [이를 통해 가져다준] 수많은 유익에 대해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까요? 당신의 말씀은 저에게만 그런 유익을 준 것이 아니라, 그것을 들은 모든 이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의 생각이 크게 밝아졌고, 명확하게 표현된 말씀으로부터 큰 유익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들은 사실 그대로 입증되었으며, 이 말들은 단순한 말로서만이 아니라 우리 눈앞에 놓인 명백한 사실처럼 들렸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이 즉시 [우리의] 의지에 큰 각성을 불어넣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실효성이 있었기에 헛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즉시 이삭을 맺고 익은 열매를 맺었으며,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우리 각자는 이 말씀으로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시다시피, 아무리 많이 읽어도 나의 가련한 영혼은 결코 만족을 얻지 못합니다. 그러니 당신의 거룩함을 위한 기도로 이 은사가 내게 주어지기를, 하늘의 불꽃이 내 안에 머물러 앞서 말한 거인들을 끝까지 완전히 멸망시키기를, 내가 언제든지 제멋대로인 자의적 방종으로 앞서 언급한 악에 빠져 적들의 먹이가 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안에 거하심을 믿나니, 당신의 경건함과 당신과 같이 수고하는 이들을 위하여 그분께서 나를 멸시하지 않으시고 앞서 언급한 거인들의 입에 넘겨주지 않으시며, 오히려 그분의 경건한 종들을 통해 항상 나를 일깨우시며, 당신의 거룩한 기도를 통해 나 같은 저주받은 자에게 그분의 길을 알려 주실 것을 믿나이다. 그러므로 자비로우시고 경건하신 당신의 영혼께 간청하고 애원하오니, 제가 담대하게도 당신의 성하께 답장을 쓰려 한 것을 탓하지 마소서. 그러나 아버지의 자비가 활짝 열려 있음을 보고, 비록 서툰 글씨일지라도 매 순간 저를 기억해 주시기를 간청하고 애원하오니, 주님께서 항상 [그분의] 변함없고 끊임없는 종, 즉 당신의 축복받은 영혼의 합당하게 정화된 마음을 찾아오시니, 당신의 거룩함으로 인해 나 또한 나의 악에서 벗어나, 사람을 사랑하시는 그리스도 하나님의 은혜로 선한 결말을 얻게 하소서. 그분과 함께 아버지께 영광과 권능이 성령과 함께 영원히 있기를 빕니다. 아멘.

 

2. 성 마르코의 가르침, 그의 다른 말씀들에서 발췌한 것

 

1. 믿음은 단지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를 받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데에도 있다. 거룩한 세례는 우리에게 완전함을 온전히 주지만,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를 완전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2. 세례를 받은 후에도 우리가 죄에 빠지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세례가 완전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계명을 소홀히 여기고 우리 자신의 제멋대로인 뜻대로 자기 만족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세례를 받은 후에도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도 사탄도 강요하지 않는다. 세례를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이 기록된 말씀에 따라 죄의 속박에서 신비롭게 해방되었다. “생명의 영의 법이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켰기 때문이라”(롬 8:2). 그러나 우리를 정결하게 하신 분의 계명을 지키는 데 소홀했기 때문에 우리는 죄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고, 계명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다시 원수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3. 사람은 자신의 뜻대로 사랑하는 곳에 머무르는데, 비록 세례를 받았더라도 자기 주권은 강요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이 “가난한 자들이 천국을 차지한다”(마태복음 11,12) 말할 때, 이는 우리 각자가 세례를 받은 후 스스로를 다잡아 악으로 치우치지 않고 선에 머물도록 하기 위함이다. 계명을 이행할 힘을 받은 신실한 자들에게 주님께서는 뒤로 물러서지 않도록 그 계명 안에서 힘쓰라고 명하십니다.

4. 수행은 계명과 별개의 것이 아니다. 그것 자체가 계명이다. 계명 외에 어떤 수행을 보여 달라. 기도를 꼽는다면, 그것은 계명이며, 생각을 쫓아내는 것을 말한다면, 그것도 계명이다(맑은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라). 금식과 기도를 말한다면, 이것 또한 계명이며, 자기 절제를 꼽는다면, 그것도 계명이다(자기를 부인하라), 그리고 네가 어떤 수행적 덕행을 말하든 – 그것들은 모두 계명이다. (수행의 목적은 계명을 가장 정확하게 이행하는 것이다).

5. 거룩한 세례는 (회개와 마찬가지로) 죄의 속박으로부터 완전한 해방을 주지만, 다시 집착에 얽매이거나 계명을 행함으로써 해방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하는 임의의 행위이다. 만일 생각이 어떤 죄악적인 쾌락으로 치우친다면, 이는 자기 마음대로 하는 집착 때문이지, 어떤 강요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성경에 따라 “생각을 무너뜨릴”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후 10:4). 악한 생각은, 그것을 자기 안에서 무너뜨리는 이들에게 있어 죄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표징이다. 왜냐하면 생각이 일어나는 것 자체가 죄가 아니라, 그 생각과 마음속에서 나누는 친근한 대화가 죄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그 생각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왜 그 생각에 머무르는가? 우리가 마음속으로 미워하는 어떤 것이, 우리가 그에 악의적으로 가담하지 않는 한, 오랫동안 우리 마음과 대화를 나누는 것은 불가능하다.

6. 거룩한 세례를 받고 계명을 이행할 수 있는 상태에 있으면서도 이를 이행하지 않을 때, 우리는 원치 않음에도 죄에 사로잡히게 되며(다시 죄의 노예가 되게 되며), 회개를 통해 하나님께 간구하며 그분의 모든 계명을 따를 때까지, 그분께서 우리 내면의 독재적인 죄를 근절해 주실 때까지 그러합니다.

7. 너는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를 입었으며(갈 3:27), 생각을 무너뜨릴 힘과 무기를 가지고 있다(고후 10:4). 만약 그들에 대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첫 번째 유혹부터 그들을 무너뜨리지 않는다면, 이는 불신으로 인해 쾌락을 좇으며 그들과 동의하고 결탁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이러한 행동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당신에게 있습니다.

8. 때로는 우리의 동의 없이, 강도처럼 우리가 혐오하고 미워하는 어떤 사악한 생각이 뜻밖에도 우리를 덮쳐와, 강제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기도 한다. 그러나 이 생각 또한 우리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분명히 알아두라. 왜냐하면 우리는 세례를 받은 후에도 비록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을지라도 그러한 악한 생각에 자신을 내맡겼거나, 혹은 자신의 의지로 우리 안에 어떤 악의 씨앗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악한 자가 우리 안에 자리 잡게 되고, 그가 교활한 씨앗들로 우리를 붙잡아 두어, 우리가 그것들을 버릴 때까지는 떠나지 않을 것이며, 악을 행함으로써 우리 안에 머무르는 더러운 생각은, 우리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하나님께 드릴 때 비로소 쫓겨날 것이다. 그러므로, 무의식적으로 마음을 뒤흔드는 그 악한 생각에 대해 네가 스스로 책임이 있다. 왜냐하면, 그 생각이 처음 스칠 때 그것을 물리치고 마음을 깨끗이 할 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네가 그렇게 하지 않고, 비록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더라도 기꺼이 그 생각과 대화를 나누었기 때문이다. (그 생각은 따뜻해진 곳, 옛 지인이나 친구에게로 찾아온다).

9. 네 마음속에 네게 도움이 되는 것이 보일 때, 이 은혜가 외부에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세례를 받을 때 신비롭게 네게 주어진 것이 이제 네가 그 생각을 미워하고 그것으로부터 등을 돌린 만큼 그 효력을 발휘했다는 것을 확실히 알라.

10. 주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통한 은혜로) 우리를 온갖 폭력에서 구원하셨으나, 우리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억누르지 않으셨으니, 이는 마음속에서 미움받는 것들은 즉시 근절되게 하시고, 다른 것들은 우리가 사랑하는 만큼 그 자리에 머물게 하심으로써, 그리스도의 은혜와 인간의 의지—그것이 은혜를 위한 수고인지, 아니면 자기 만족을 위한 생각인지—가 드러나게 하셨다.

11. 마치 어떤 악한 혈연 관계처럼, 우리의 정욕과 마음속의 생각들은 서로 함께 작용한다. 각 생각은 자기 주인을 사로잡은 뒤, 그것을 이웃에게 전염시키므로, 첫 번째 생각에 습관적으로 강하게 끌리는 사람은 두 번째 생각에 이미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휩쓸리게 된다. 과연 누가 허영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교만을 피할 수 있겠는가? 또는 잠에 푹 빠져 쾌락에 탐닉한 자가 음행의 생각에 굴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혹은 탐욕에 빠진 자가 무자비함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모든 것을 즐기는 자들이 어떻게 짜증과 분노를 피할 수 있겠는가?

12. 은혜를 받아들인 후에도, 육신을 따라 살 것인지 성령을 따라 살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그러나 사람의 칭찬과 육체의 방종을 사랑하는 자는 성령을 따라 살 수 없으며, 내면적으로 현재보다 미래를 더 우선시하는 자는 육신을 따라 살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칭찬과 육체의 안식을 미워해야 하며, 그것들로 인해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우리 안에 사악한 생각들이 자라나고 있으므로, 주님께 진심으로 말해야 합니다. “나는 완전한 미움으로 미워하였나니, 그들은 나의 원수들이었나이다”(시편 138:22).

13. 보편 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자들에게는 세례를 통해 은밀히 은혜가 주어지고 그 안에 숨겨져 살아가나, 그 후 계명을 실천하고 마음속으로 소망을 품는 만큼, 주님의 말씀대로 믿는 자 안에서 드러나니, “나를 믿는 자의 뱃속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이는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이 받아들이고자 했던 성령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요한복음 7, 38. 39).

14. 믿음의 부족으로 인해 누구나 죄의 지배를 받게 되는데, “각자 자신의 정욕에 이끌리고 유혹을 받으며, 그 정욕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이루어지면 죽음을 낳는다”(야고보서 1:14, 15). 자신의 정욕에서 마음속의 죄가 생겨나고, 이로 인해 그에 상응하는 행동이 이루어집니다. (세례의 의무에서) 물러서는 사람은 즉시 죄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15. 굳게 믿는 자에게는 세례를 받는 순간 성령이 주어지지만, 우리 스스로 그분을 모욕하고 우리 안에서 그분의 불을 꺼버립니다. 그래서 사도는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살전 5:19), “구원의 날에 표징으로 받은 성령을 모욕하지 말라” (엡 4:30)라고 명하시는가? 이는 세례를 받고 , 그로 인해 은혜를 받은 모든 사람이 변함없이 더 이상 회개가 필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은사로 우리에게 모든 계명을 이행할 수 있는 완전한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졌으나, 그 후 각자가 그 은혜를 신비롭게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계명을 지키지 않고 소홀히 할수록, 게으름으로 인해 행할 힘을 받았음에도 행하지 않음으로써 죄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완전해지기를 원하든, 빠르든 느리든, 우리는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고 그분으로부터 그러한 일을 행할 힘을 받아 그분의 모든 계명을 지켜야 한다.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만큼,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그분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성 바울에 따르면,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오래 참음, 친절, 자비, 믿음, 온유, 절제”입니다(갈 5:22).

16. 그러므로 신자들 중에서 계명에 따라 살면서 그에 상응하는 영적 활동을 얻은 자가 있다면, 그는 이미 그 일을 위한 능력을 받았음을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세례를 통해 성령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인데, 이 은혜는 모든 선한 것, 즉 은밀하고 영적인 것뿐만 아니라 명백한 미덕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덕을 갖춘 사람 중 누구도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선한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선한 사람은 스스로가 아니라 “마음의 선한 보물에서 선한 것을 내어놓기” (마태복음 12:35) 때문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보물’이란 신자들의 마음속에 감추어져 계신 성령을 의미한다.

17. 사도의 말씀대로, 세례를 통해 자신 안에 그리스도가 내재하고 계심을 확실히 깨달은 자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의 마음속에 머물며 “그것을 온갖 수단으로 지키며”(잠언 4:23) 보호한다. 이는 “우리 안에서 원하시는 바와 행하시는 바를 선한 뜻으로 이루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빌 2:13). “기쁘게 여기심”이라는 말을 통해 사도는 미덕을 기쁘게 여기는 것이 우리의 자기 통제에 달려 있음을 보여주며, 하나님 없이는 미덕을 실천하거나 죄를 뿌리 뽑는 것이 불가능함을 가르칩니다. “나 없이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요한복음 15:5)는 말씀도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우리의 참여도 필요합니다.

18. 각 사람의 왕 같은 마음은 먼저 마음속의 은밀한 성전에서 내면에 거하시는 그리스도께로부터 선하고 유익한 조언을 받아들이고, 이를 덕스러운 삶으로 실천하여, 다시 그 조언을 주신 그리스도께 선한 생각을 통해 돌려드린다.

19. 의인들이 부활 후에 받게 될 복은 하늘에 있으나, 그 예표와 시작은 이미 지금부터 믿는 자들의 마음속에서 영적으로 작용하고 있으니, 이는 우리가 장래를 확신함으로써 현재의 모든 것을 경멸하고, 죽을 때까지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려 함이다. 그러므로 사도는 “다가가야 한다”고 말하지 않고, “이미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 하늘의 예루살렘에 다다랐다” (히브리서 12:2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우리 모두가 세례를 통해 그에 합당한 자가 되었으나, 이를 얻기에 합당한 자들은 오직 굳건히 믿는 자들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위해 매일 죽는 자들, 즉 이 세상의 삶에 대한 모든 생각을 초월하여, 오직 그리스도의 완전한 사랑에 이르는 것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이것을 무엇보다도 추구하며, 성 바오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쫓아가노니, 비록 따라잡을 수 있다 해도, 그분께서 나를 따라잡으실 것이니”, 즉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사랑하리라(필리피서 3,12). 그리고 이 사랑에 이르렀을 때, 그는 더 이상 어떤 것도, 육체에 대한 고통도, 피조물의 경이로움도 생각하려 하지 않았으며, 모든 것을 분명히 뒤로 한 채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는가?(롬 8:35–39). 더 이상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고, 오직 그곳(마음속,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머물기만을 원했다.

20. 사도는 우리가 우리 안에 성령의 첫 열매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며(롬 8:23), 우리 용량의 한계를 보여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완전한 계명을 통해서만이 성령의 모든 역사를 담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태양이 온전할 때, 그로부터 온전하고 단순하며 평등한 은혜를 모두에게 쏟아내지만, 각자가 정화된 눈을 가진 만큼만 햇빛을 받아들이듯이, 성령께서는 세례를 통해 그분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모든 역사와 은사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하셨다: 그러나 그분의 은사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정도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계명을 지키는 정도에 따라 주어지는데, 이는 그가 선한 행실로 증거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정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21. 사탄의 유혹은 오직 한 가지, 즉 생각 속에서 나타나는 악한 것(행위)의 현상에 불과하며, 이는 우리 마음에 접근하기 위해 오직 우리의 믿음이 부족한 점만을 틈타 들어온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온전한 마음의 지키심으로 네 마음을 지키라’ (잠언 4:23) 하고 우리 내면에 있는 하늘나라를 찾으려 할 때, 마음이 마음과 앞서 말한 그 추구에서 멀어지면, 즉시 마귀의 유혹에 자리를 내주게 되고 교활한 조언에 취약해집니다. 그러나 그때조차도 마귀는 우리의 생각을 움직일 권세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우리를 가차 없이 괴롭히며 온갖 악한 생각을 강제로 불러일으키고 선한 생각은 전혀 품지 못하게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오직 첫 번째 생각에서만 그릇된 것을 심어, 우리의 내적 성향이 어디로 기울어지는지—그의 조언 쪽으로 향하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계명 쪽으로 향하는지—시험해 볼 권한만 가지고 있다. 이는 둘이 서로 상반되기 때문이다.

22. 미움받는 생각이 마음속에 머물며 굳어지면, 이는 우리의 새로운 마음가짐 때문이 아니라 예전의 인식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한 가지 생각에 머물러 움직이지 않으며, 마음속의 분노가 그것이 여러 가지 생각과 정욕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는다. 자신을 관찰하는 이에게 혐오스러운 단일한(순수한) 생각은 마음을 여러 가지 생각으로 이끌 힘이 없다. 이는 오직 마음이 그것에 동조할 때만 일어난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든 동조에서 완전히 물러선다면, (마음속에) 이전에 받아들였던 이미지들의 현상은 항상 단일한 사고로 남아, 더 이상 우리에게 해를 끼치거나 우리의 양심을 비난할 수 없을 것이다.

23. 마음이 이전에 받아들였던 이미지(인상)들에 대한 자신의 저항이 헛됨을 깨닫고 하나님께 과거의 죄를 고백할 때, 바로 그 유혹 자체가 사라지며, 마음은 다시금 마음에 귀를 기울이고 “온전한 경계”로 기도를 통해 그것을 지키며, 이미 사악한 생각의 바람이 더 이상 휘몰아치지 않는 마음의 가장 내밀하고 안전한 방으로 들어가려 시도하게 된다. 그곳에서는 더 이상 영혼과 육체를 정욕의 급류와 불결함의 흐름 속으로 내던지는 사악한 생각의 바람이 거세게 휘몰아치지 않으며, 세속적 지혜의 말과 형상으로 포장된 넓고 넉넉한 길도 없으니, 그 길은 따르는 자들을 현혹시키지만, 비록 그들이 지극히 지혜로울지라도, 영혼의 가장 깨끗한 내실과 그리스도의 집은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은, 벌거벗은 우리의 마음을 받아들여 주니, 그것이 이성으로 정당화될 수 있든 없든, 오직 사도가 언급한 “세 가지”, 곧 “믿음, 소망, 사랑”(고린도전서 13장)뿐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사랑하고 진심으로 수고하기를 원하는 자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전에 받아들였던 인상들에 휩쓸리지 말고 자신의 마음에 귀를 기울여, 내면의 경지에 이르러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다. 다만 기도의 수고와 (하나님에 따른) 삶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매일 겉으로뿐만 아니라 속으로도 생각의 방황과 육체의 쾌락으로부터 주의 깊게 자제하는 사람은 마음으로 수고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24. 악의 유혹을 받지 않는 것은 변함없는 본성에 속한 것이지, 인간의 본성에 속한 것이 아니다. 아담도 사탄의 유혹에 노출되었으나, 그 유혹을 따를지 말지 선택할 권능을 가지고 있었다. 생각의 유혹은 죄도 아니고 진리도 아니며, 오직 우리 마음의 제멋대로인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 유혹이 우리에게 허용된 것은, 계명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충실함에 대한 (승리의) 면류관을 주시고, 자기 만족에 빠진 자들에게는 불충실함에 대한 정죄를 받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이것도 알아야 한다. 즉, 우리의 모든 변화 직후에 우리가 능숙했는지, 아니면 배척받을 만했는지에 대한 심판이 내려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생에 머무는 동안 시련을 겪으며, 이기고 또 지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고, 방황하다가 선한 길로 인도받을 때, 비로소 마지막 날에 모든 것을 종합하여 그에 상응하는 심판을 받거나 칭찬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시련 자체가 죄는 아니다. 결코 아니다! 비록 유혹이 (우리의 동의 없이) 무의식적으로 우리에게 (단지) 한 가지 생각만을 보여줄지라도,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영적 행위의 권능을 받았으며, 우리의 자기 통제권 안에 첫 번째 생각이 떠오를 때, 해로운 것과 유익한 것을 분별하여,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마음의 기분에 따라 늘어나는 생각들을 거부하거나 받아들일 수 있는 권한이 있다.

25. 우리 영혼은 쾌락 추구와 허영으로 인해 어두워져 무지의 심연으로 떨어졌기 때문에, 성경의 계명도, 자연적 이성도, 경험자들의 통찰도 듣지 않고 오직 자신의 생각만을 따를 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악의 원인을 품고 있는 한, 그 악에 수반되는 행동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는 것이다. 각자가 장래의 복에 대해 주님을 믿고, 인간의 영광과 쾌락을 경멸하는 만큼, 그 생각도 절제하며, 쾌락을 사랑하는 사람보다 그만큼 더 평온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각과 삶에서 서로 구별됩니다.

26.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신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라. 주님께서는 악한 생각이 처음 싹트기 시작할 때 이를 미워하는 자들을 위해 약속하신 대로 즉시 옹호하시며, 그들의 수많은 잡생각이 일어나 그들의 정신과 양심을 더럽히지 못하게 하시고, 반면, 처음 싹트는 악한 생각을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소망으로 뿌리 뽑지 않고 오히려 그것에 탐닉하는 자들은, 주님께서 불신자로서 도움 없이 내버려 두시어, 주님께서 제거하지 않으시는 뒤따르는 생각들에 의해 치게 되게 하신다. 이는 우리가 그 생각들의 첫 유혹을 사랑할 뿐, 처음 나타날 때 미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님께서 아시기 때문이다.

27. 그 어떤 권세도 우리를 강제로 선이나 악으로 이끌지 않으나, 우리가 자유 의지로 섬기는 대상—하나님이든 마귀든—그가 나중에 우리를 자신의 영역을 이루는 모든 일로 이끌어 간다.

28. 행동의 시작은 이성으로 인식되지 않는 두 가지 마음의 끌림, 즉 인간의 칭찬과 육체의 만족이다. 이것들은 우리 의지가 동의하기 전에 무의식적으로 우리에게 끌려올 때, 악덕도 미덕도 아니며, 단지 우리 의지가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는지를 드러내는 증거일 뿐이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모욕을 참아내고 스스로를 괴롭히기를 원하시지만, 마귀는 정반대를 원하므로, 우리가 앞서 말한 유혹들을 기뻐할 때,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쾌락을 좇는 영을 따르고 있음이 분명하며, 반대로 그 유혹들로 인해 슬퍼할 때, 우리는 좁은 길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따르고 있음이 분명하다. 바로 그 때문에 이러한 유혹들이 사람들에게 허용된 것이니, 이는 하나님의 계명을 사랑하고 그 안에서 기쁨을 얻는 자들이 그리스도 앞에 자신의 뜻을 굽히게 하고, 그분께서 그들 안에서 들어갈 길을 찾으사 그들의 마음을 진리로 인도하시게 하려 함이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이해하라: 반대로 인간의 영광과 육체의 쾌락을 사랑하는 자들은 마귀에게 들어올 틈을 주며, 마귀는 그 틈을 찾아 우리에게 악한 유혹을 제시하고, 우리가 그 생각에 즐거움을 느낄수록, 우리가 마음속 깊이 앞서 말한 두 가지 정욕을 미워하게 될 때까지 끊임없이 그것들을 더해 나간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을 너무나 사랑하여, 그것들을 위해 미덕을 저버릴 뿐만 아니라, 때로는 이 두 가지 유혹을 서로 바꿔 가며 행하기도 한다. 때로는 허영을 위해 육체를 괴롭히고, 때로는 쾌락을 위해 모욕을 감수하기도 한다. 우리가 무심코 그 유혹들에 동의하게 되면, 우리는 그것들을 되돌려줄 수단을 찾기 시작한다. 허영과 육체적 쾌락의 근원은 재물을 탐하는 마음인데, 이는 신성한 성경에 따르면 모든 악의 뿌리이기도 하다(디모데전서 6:10).

29. 주님께서는 아담에게 “그 날에 너희가 먹으면, 내가 너희를 죽이리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으나, 그들을 경고하시며 의의 법을 미리 알리시며 “그 날에 너희가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다(창 2, 17). 그리고 일반적으로 주님께서는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모든 행위에 대해 그에 상응하는 보응이 자연스럽게 따르도록 정하셨지, 영적 법칙을 알지 못하는 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특별한 예정에 따라 이루어지도록 하신 것이 아닙니다.

30. 우리는 만약 같은 믿음을 가진 자 중 누군가를 악한 자로 미워한다면, 하나님도 우리를 악한 자로 미워하실 것이며, 만약 누군가를 죄인으로 여겨 회개에서 배척한다면, 우리도 (하나님에 의해) 죄인으로 배척당할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이웃의 죄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의 죄도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이 법칙을 선포하시며, 우리의 율법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판단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도 판단받지 아니하리라.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도 정죄받지 아니하리라.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도 용서받으리라”(누가복음 6:37). 이 법을 아신 성 바울 사도는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남을 심판함으로 네 자신을 정죄하는도다”(롬 2:1). 그리고 선지자는 이를 알지 못한 채 하나님께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주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갚으시리이다”(시편 61:13). 또 다른 선지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기를 “보복은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신명기 32:35)고 했습니다.

31. 선지자 다니엘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 죄를 자선으로 속죄하고, 네 불의를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대함으로 속죄하라”(단 4:24). 그러나 어쩌면 당신은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나는 돈이 없는데, 어떻게 가난한 자에게 관대하게 베풀 수 있겠는가?” 돈은 없어도 욕망은 있으니, 그것들을 버리고 이를 통해 선한 일을 행하라. 육신의 손으로 자선을 베풀 수 없느냐? 올바른 의지로 자선을 베풀어라. “네 형제가 네게 죄를 지으면, 그를 용서하라”(누가복음 17,3)는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면, 이것이 너에게 큰 자선이 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죄 사함을 구한다면, (복음서에) 기록된 대로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라”(누가복음 6:37)는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모든 죄를 지을 때마다, 누구에게나 그렇게 행해야 한다. 돈이 있는 사람이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도 위대한 일이지만, (우리에게 저지른) 이웃의 죄를 용서하는 것은, 영혼이 본성상 육체보다 더 고귀한 만큼, 죄 사함을 얻기 위해 훨씬 더 큰 일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 (죄의) 용서를 구하여, 구한 바를 여러 번 받아 이 세상에서 그로 인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았으면서도, 우리 이웃들이 이 은혜에 동참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면, 바로 이로써 우리는 그 악한 종과 같아집니다. 그는 주인으로부터 빚—열 타란트—을 탕감받았으나,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만 빚진 이웃에게는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마치 율법에 따라 재판하듯이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악한 종아, 네가 내게 간청했으므로 내가 네 빚 전부를 탕감해 주었거늘,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어, 내가 너를 용서한 것처럼 그의 빚을 탕감해 주지 않았느냐?” “그가 분노하여”라고 기록되어 있듯이, “그를 고문관에게 넘겨, 그가 빚 전부를 갚을 때까지” 두었다. 그리고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 냅니다. “너희가 마음에서 형제의 죄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대로 하실 것이다” (마태복음 18, 32–35).

32. 주님께서는 “부자여, 화 있을진저”라고 말씀하셨다(누가복음 6:24). 그러나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해서, 주님께서 부자가 된 모든 사람을 비난하시는 것은 아니다. 그들 중에는 그 부를 주신 분, 곧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리고 성경에 기록된 대로 이 세상에서 백 배의 보상을 받는, 진정으로 부를 올바르게 관리하는 이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 예로는 다음과 같은 이들이 있다: 복된 아브라함과 의로운 욥은 자비로운 마음을 품고 있어 이 세상과 내세에서 더욱 부유해졌으며, 그러나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탐욕스러운 성품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사를, 재산(물질적)이든 그분의 다양한 관대함이든 간에, 자기 것으로 가로채고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기를 원치 않는 자들을 책망하십니다. 주님께서 주신 재산이 아니라, 불의에서 비롯된 탐욕과 그 근원인 – 자비 없음, 이 두 가지를 철저히 피함으로써 굳건한 신자들은 현세의 복을 온전히 저버렸는데, 이는 하나님의 창조물을 무분별하게 미워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에게 그렇게 행하라고 명하시고 그분으로부터 일상의 필요를 충족받게 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어떤 이는 재산 없이도 부유해질 수 있는데, 이는 탐욕 속에 모든 이에게 주어진 말씀이나 지식, 혹은 자비를 베푸는 다른 어떤 수단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는 그것을 가난한 자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 받는 것이다.

33. 죄를 지은 자들은 절망해서는 안 된다. 결코 그러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수많은 악행 때문이 아니라, 회개하기를 원치 않고 그리스도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정죄를 받기 때문이다. 진리 그분께서 친히 증언하시기를: “너희는 생각하느냐?”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빌라도가 그들의 피를 제물과 섞어버린 이 갈릴리 사람들이, 땅 위에 있는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회개하지 아니하면 너희도 그들과 같이 멸망하리라. 또는 실로암의 탑이 무너져 열여덟 사람을 덮쳐 죽인 그 사람들,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회개하지 아니하면 너희도 그들과 같이 멸망하리라” (누가복음 13:2–5). 보라, 우리가 회개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죄받고 있음을 알겠느냐?

34. 회개는, 제 생각에, 시간이나 어떤 행위에 국한되지 않고, 그리스도의 계명을 통해 그 계명에 상응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계명 중에는 더 포괄적인 것들이 있는데, 이는 많은 세부 계명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한 번에 많은 악의 요소를 잘라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게 구하는 자에게는 주라. 네 것을 빼앗는 자에게서도 네 것을 빼앗기지 말라”(누가복음 6:30), 그리고 “네게서 빌려가려는 자를 물리치지 말라”(마태복음 5:42)는 구절이 있는데, 이것들은 구체적인 계명들입니다. 반면, 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일반적인 계명은 “네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와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마태복음 19,21)는 것이며, 여기서 십자가란 우리를 덮치는 슬픔을 인내하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자기 십자가를 진 사람은, 앞서 언급한 모든 계명을 한 번에 다 이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사도가) 말하길, “남자들이 어디서나 경건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딤전 2:8), 그리고 이것의 일반적인 형태(주님께서): “네 기도실에 들어가서, 은밀히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마태복음 6, 6), 또 “끊임없이 기도하라”(데살로니가전서 5, 17)하셨으니, 자기 기도실에 들어가 끊임없이 기도하는 자는 바로 그 안에서 모든 곳에서 드리는 기도를 온전히 완성한 것이다. 또한 “간음하지 말라, 간통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등과 같은 말씀들이 있는데, 이것들의 총체적인 의미는 “생각을 무너뜨리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판단하는 것” (고린도후서 10:5)입니다. 생각을 무너뜨리는 자는 앞서 언급된 모든 악덕에 대한 장벽을 세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굳건히 믿는 이들은 일반적인 계명들을 지키도록 스스로를 다잡으며, 때때로 마주치는 개별적인 계명들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회개의 일이 다음 세 가지 미덕, 즉 생각의 정화, 끊임없는 기도, 그리고 우리를 덮치는 슬픔에 대한 인내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믿으며, 이 모든 것은 겉으로만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도 실천되어야 하여, 오랫동안 수고한 이들이 이를 통해 무욕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회개의 일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앞서 언급한 세 가지 미덕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으므로, 나는 회개가 구원을 원하는 모든 이, 죄인이든 의인이든, 구원을 원하는 모든 이에게 항상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앞서 언급한 미덕들을 실천하지 않아도 되는 완전함의 경지는 없으며, 이를 통해 초보자는 경건함으로의 입문을, 중급자는 그 안에서 번영을, 완전한 자는 그 안에서 확립을 얻기 때문입니다.

35. 주님께서는 모든 이에게 “회개하라”(마태복음 4,17) 명하시니, 이는 영적인 자들과 신앙 생활에서 잘 나아가는 자들조차 이 명령을 소홀히 여기지 말고, 가장 미묘하고 사소한 잘못들조차 간과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작은 것을 경시하는 자는 조금씩 넘어질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수 시라크 19, 1). 그리고 “영적인 사람이 어떻게 넘어질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지 말라. 그와 같은 상태를 유지할 때는 넘어지지 않지만, 만일 자신 안에 악한 것의 사소한 부분을 허용하고 회개하지 않은 채 그 안에 머무른다면, 그 사소한 것은 싹을 틔우고 자라나 더 이상 그와 분리되어 있는 것을 참지 못하고, 마치 어떤 사슬처럼 그를 자신과 결합시키려 하며, 오랜 기간에 걸친 집착으로 강제로 끌어당깁니다. 만약 기도라는 수단을 통해 그(이 악)와 싸워 이를 물리친다면, 그는 자신의 영적 성숙 단계에 머물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를 지배하는 세력의 점점 더 강해지는 압박으로 인해 (평소의 수준에서) 밀려나, 기도와 투쟁을 소홀히 하게 된다면, 필연적으로 다른 정욕들에도 유혹당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점차 각자 자신의 타락 정도에 따라 멀어지면서 신의 도움을 잃게 되고, 마침내 때로는 원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자신을 지배하고 있던 유혹에 의해 강요되어 더 큰 죄악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너는 내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가 악의 시작 단계에 있을 때, 최종적인 악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께 간구할 수는 없었는가?” 그러면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럴 수 있었지만, 그 작은 것을 경멸하고 자신의 의지로 그것을 하찮은 것으로 받아들였기에, 그는 이미 이에 대해 기도하지 않는다. 그 작은 것이 더 큰 것의 서막이자 원인이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선과 악 모두에서 그러하듯이! 그러나 정욕이 강해져 그의 자의에 힘입어 그 안에 자리를 잡게 되면, 그것은 이미 그의 의지에 반하여 강제로 그를 압도한다. 그때 비로소 자신의 재앙을 깨달은 그는, 무지함으로 인해 이전에는 옹호하고 다른 사람들과 다투며 변호해 주었던 그 원수와 싸우며 하나님께 기도한다. 때로는 주님께 기도가 들리더라도 도움을 받지 못하기도 하는데, 이는 도움이 사람이 생각하는 대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유익을 위해 마련하시는 대로 오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쉽게 타락하는 성향과 경솔함을 아시기 때문에, 슬픔을 통해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시니, 이는 우리가 슬픔 없이 벗어났다가 다시 같은 죄를 부지런히 저지르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닥치는 일을 인내해야 하며, 회개의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매우 마땅하다고 단언합니다.

36. 너는 이에 대해 이렇게 반박할 것이다. ‘진정으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고 완전함에 이른 자들이 또 무슨 회개를 필요로 하겠는가?’ 그런 사람들이 있었고 지금도 있다는 점은 나도 너와 함께 인정하지만, 이 말을 현명하게 들어보면 그런 사람들조차도 회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아내를 탐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간음으로 간주하셨고, 이웃에 대한 분노를 살인과 동일시하셨으며, 헛된 말에 대해서도 심판을 받게 될 것임을 보여주셨습니다(마태복음 5:28, 29; 12:36). 누가 보는 것에서 오는 욕망을 알지 못하고, 이웃에게 헛되이 분노한 적이 없으며, 심지어 헛된 말에서도 무죄하여 회개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있겠는가? 왜냐하면, 비록 현재는 그렇지 않더라도 과거에는 그랬을 것이므로, 회개에 있어서는 죽을 때까지 빚진 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령,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러한 연약함이 없고 태어날 때부터 온갖 악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치더라도,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성 바오로의 말씀에 따르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서 멀어졌으나, 오직 그분의 은혜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로마서 3, 23. 24). 그나저나, 설령 그런 사람들이 있다 하더라도, 그들은 여전히 아담에게서 나왔으며, 모두 죄의 짐을 지고 태어났으므로, 하나님의 심판에 따라 죽음에 정죄받았으며 그리스도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다.

37. 창세 이래 이 세상을 살아온 사람들을 살펴보라. 그러면 (하나님께) 기쁨을 드린 자들에게 경건의 신비가 회개를 통해 이루어졌음을 알게 될 것이다. 회개를 경멸하지 않은 자는 정죄받은 자가 없었고, 회개를 소홀히 한 자는 의롭다 함을 받은 자가 없었다. 삼손과 사울, 그리고 엘리야와 그의 아들들은 이미 부분적으로 거룩함을 얻었으나 회개를 소홀히 여겼기에, 먼저 그것을 잃어버렸고, 그 후 유예 기간이 지나자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마귀가 우리와 싸우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면, 회개 또한 결코 소홀히 여겨져서는 안 된다. 성인들은 실천적인 사랑 없이는 완전해질 수 없기에, 자신뿐만 아니라 이웃을 위해서도 회개하도록 스스로를 다그치며,

38. 회개가 자비를 구하는 것이라면, 가진 자는 “너희는 배부르다”(고린도전서 4:8)라는 말을 듣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며, 하물며 가진 것이 없는 자는 자신의 필요에 따라 구해야 한다. “구하는 자는 다 받을 것”(마태복음 7:8)이기 때문이다. (타인을) 자비롭게 대하는 자가 스스로도 자비를 받게 된다면, 제 생각에 온 세상은 서로를 돌보며 돕는 회개를 통해 유지된다고 봅니다. 회개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니네베 사람들을 구원하셨으나, 회개에 소홀했던 소돔 사람들은 멸망시키셨습니다.

39. 우리가 죽을 때까지 회개에 힘쓴다 해도, 그런 방식으로는 여전히 마땅한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천국에 합당한 어떤 일도 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먹고, 마시고, 말하고, 듣는 것처럼, 회개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어야 한다. 때로는 율법에 따라 죽어야 할 자가 죽임을 당하기도 하지만, 살아 있는 자는 회개를 위한 믿음으로 살아간다. 비록 자신의 죄가 아니더라도 범죄의 죄로부터 우리는 세례를 통해 정결해졌으며, 정결해진 후 계명을 받았으나, 두 번째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첫 번째 계명을 더럽힌 것이니, “옛 죄들의 정결함을 잊어버리지 말라” (베드로후서 1:9), 그 죄들로부터는 누구도 매일 자유로울 수 없으니, 비록 명령받은 것을 단 한 번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고 해도 말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에게 회개가 필요하다. 회개는 한때는 고의로 저지르던 죄들이, 이제는 정욕을 미워하고 그것들로부터 멀어질 때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죄들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회개를 제한하는 자는 과거로 돌아가 옛 죄악을 되풀이하게 된다.

40. 실천적인 삶에 있어, 우리는 회개 없이는 가치 있는 일을 아무것도 할 수 없으나, (주님께서는) 우리의 의도를 보시고 우리에게 많은 자비를 베푸신다. 스스로를 다잡고 죽는 순간까지 회개를 지키는 사람은, 설령 어떤 죄를 짓더라도 스스로를 다잡은 덕분으로 구원을 받을 것이니, 이는 주님께서 복음서에서 약속하신 바이다. 자신이 회개가 필요 없다고 말하는 자는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기며, 성경에서는 그를 ‘악한 자의 자손’이라 부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의로움에 대한 생각으로, 마치 회개를 마친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자신은 알지 못한 채, 십자가에 못 박힘 대신 정욕과 교합하기 때문입니다. 자만과 오만함은 곧 정욕이기 때문입니다. 자만하는 자는 구원받을 수 없으니, 성경에 “오만하고 모욕적인 자, 거만한 자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죽으리라”(하바쿡 2:5)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일 겸손이 완전한 자에게 조금도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그는 그 원인인 회개를 버리지 말아야 한다. 신실한 아브라함과 의로운 욥은 겸손을 실천하며 스스로를 흙과 재라고 불렀는데, 이 말들은 겸손의 표징이다. 진실로 대담하고 위대한 순교자인 세 소년은 타오르는 불길 한가운데서 신앙을 고백하며, 자신들에 대해 “우리는 죄를 지었고 불법을 저질렀다”고 말하며, 이미 완전한 상태에 있었음에도 과거의 악을 회개했고, 그들의 노래 거의 전부가 회개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 (하느님께) 지극히 기쁨을 드리고 행실 면에서 완전한 자들조차 죽을 때까지 회개의 도움을 누렸다면, 누가 자신을 믿고 진리를 핑계 삼아 회개를 경멸할 수 있겠는가?

41. 우리를 해친 자를 용서해야 하며, 원한을 용서하는 것에 대한 보상이 그 어떤 다른 미덕에 대한 보상보다도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일 우리 안에 지배적인 죄로 인해 이를 행할 수 없다면, 깨어 기도하며 고통을 견디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그러한 힘을 주시기를 간구해야 한다. 이와 더불어, 언제 어디서나 어떤 일을 할 때에도 우리는 한 가지 뜻을 품어야 하는데, 바로 사람들로부터 다양한 모욕을 당할 때 슬퍼하지 않고 기뻐하기 위함이다. 이 기쁨은 단순히, 혹은 무분별하게 느끼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죄를 지은 자를 용서하고 우리 자신의 죄에 대한 용서를 받을 기회를 얻었기 때문이다. 이는 모든 지식보다 훨씬 더 광대한 참된 신학이 여기에 담겨 있으며,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 간구하여 응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열매이며, 이를 통해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입증되고, 이를 통해 우리는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다. 이는 첫 번째이자 위대한 계명들의 어머니입니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 우리는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금식하고, 깨어 기도하며, 육신을 절제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 마음과 내면의 태도가 열려 이를 받아들일 수 있고, 더 이상 내뱉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이웃의 죄를 용서함으로써, 성세례 때 우리에게 은밀히 주어진 은혜가 더 이상 알 수 없는 방식으로가 아니라, 우리의 의식과 감정에 뚜렷이 느껴지도록 우리 안에서 작용함을 알게 될 것이다.

42. 말에 능한 지혜로운 자들은 오직 자신을 모욕하는 자들만을 유죄로 여기지만, 성령으로 지혜를 얻은 자들은 다른 이들이 자신을 모욕할 때, 기꺼이 자발적으로 모욕을 참아내지 않는다면 스스로를 책망하며, 단지 그 일 때문만이 아니라, 비록 어떤 죄는 다른 죄보다 가볍더라도 그 슬픔이 바로 자신들의 과거 죄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고 스스로를 책망한다. 스스로 복수하는 자는 마치 하나님께 정의가 부족하다고 비난하는 것과 같고, 자신에게 닥친 슬픔을 마치 자신의 것인 양 견디는 자는, 자신이 이전에 저지른 악을 고백하는 것이며, 그로 인해 고통을 견디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이다.

43. 모욕을 용서하는 미덕을 방해하는 두 가지 정욕이 있으니, 바로 허영과 쾌락 추구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먼저 마음속에서 이 두 가지를 버려야 하며, 그 후에야 비로소 이 미덕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니 이 정욕들을 극복하기 위해 네 의지와 싸움을 벌여라. 이 투쟁은 내적 투쟁이며, 외적인 것이 아니다(우리는 이웃과 싸워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내면의 싸움일 뿐이며, 사람 중 그 누구도 우리를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세례를 받은 순간부터 신비롭게 우리 안에 감추어져 계신 오직 한 분의 도우미, 곧 무적이시며 그분께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는 그리스도께서 계실 뿐이다. 우리가 힘닿는 대로 그분의 계명을 이행한다면, 그분께서 이 투쟁에서 우리를 도우실 것이다. 반면 우리의 적들은 앞서 말한 대로, 육신과 결합된 쾌락 추구와 나와 너를 지배하는 허영심이다. 그것들은 하와를 유혹하고 아담을 현혹시켰습니다. 쾌락 추구는 그 나무를 가리키며 “먹기에 좋고“보는 눈에도 아름답다”고 말했고, 허영심은 거기에 덧붙여 “너희가 마치 신처럼 선과 악을 분별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창세기 3:5, 6).

44. (수도자들은 어디서 그들의 생활 방식을 차용했는가?) 수도자들은 교회에 반하는 사상을 따르지 않고, 사도의 말씀대로 그리스도의 지혜를 따르려고 노력한다: “이 마음이 너희 안에 있기를 원하노니,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던 그 마음이라. 그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과 동등함을 취할 것으로 여길 것을 탐내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상을 취하셨느니라”(빌립보서 2:6-7). 이러한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며, 위대한 미덕인 겸손한 지혜를 낳는다는 것을 알아두라. 주님께서는 교회에서 이 일을 행하라고 명령하시며 말씀하셨다. “멸망에 이르는 일을 하지 말고, 영생에 이르는 일을 하라” (요한복음 6,27). 이 일이란 무엇인가?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눅 17,21)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기도로 구하는 것이며, 주님께서는 그분을 찾는 자들에게 육체에 필요한 모든 것을 더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마 6,33). 주님으로부터 이 말씀을 듣고, (그분의 말씀에) 믿음을 갖고 자신의 힘닿는 대로 이를 실천하는 이들을 ‘본성에 따라 행하지 않는 자’라고 부르는 것은, 이를 명하신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45. 수도자들이 이러한 규율을 지키면서도 어떻게 타락하는가? 타락하는 것은 이를 지키는 자들이 아니라, 이를 버리고 허영과 세속적인 염려에 사로잡혀 그 안에서 가장 중요한 것, 즉 기도와 겸손을 소홀히 하는 자들이다. 바로 그 때문에 마귀는 우리가 세속적인 모든 것을 생각하고 행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오직 우리를 기도와 겸손에서 멀어지게 하기 위함일 뿐이다. 그는 이 두 가지(미덕) 없이 행해지는 일은 비록 선한 일이라 할지라도, 나중에 언젠가 그것을 빼앗아 갈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기도란 육체로 행하는 것뿐만 아니라, 산만하지 않은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이 둘(육체나 생각) 중 하나가 제때에 분리된다면, 나머지 하나도 홀로 남게 되어 하나님을 향하지 않고 자신의 뜻을 따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46. 복자 바울은 우리가 기도에 결코 소홀하지 않기를 바라며, “끊임없이 기도하라”(살전 5:17)고 말했고, 동시에 마음이 산만해지지 않도록 지적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세대를 닮지 말고, 오히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게 되라”(롬 12:2).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이 부족하고 연약함을 아시고, 각자가 자신의 노력에 따라 고통을 피하고 구원을 얻도록 다양한 계명을 주셨으므로, 사도는 우리가 전혀 심판을 받지 않기를 바라며, 기도가 모든 계명의 이행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아시고, 그에 대해 끊임없이 여러 번, 다양한 방식으로 명령하고 말씀하시기를: “항상 성령으로 기도하며, 이를 위해 모든 인내와 기도로 깨어 있으라” (엡 6:18).

47. 기도는 다양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것은 산만하지 않은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고, 또 다른 것은 몸은 기도하는 자세를 취하고 마음은 다른 데로 딴생각을 하는 것이며, 또 다른 것은 시간을 정해 세속적인 대화와 일을 마친 뒤 기도하는 것이며, 또 다른 것은 가능한 한 모든 세속적인 염려보다 기도를 우선시하고 앞세우는 것으로, 바로 그 사도의 말씀과 같습니다. “주께서 가까이 계시니,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의 청원을 하나님께 아뢰라” (빌 4,6). 복자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기도에 힘쓰고 깨어 있으라. 너희의 모든 근심을 그분께 맡기라. 그분께서 너희를 돌보시기 때문이다” (베드로전서 4, 7 및 5, 7). 우선 주님께서도 모든 것이 기도로 굳건해진다는 것을 아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마실지, 무엇을 입을지 염려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더해질 것이다”(마태복음 6,31.33). 그러나 어쩌면 주님께서는 이를 통해 우리에게 더 큰 믿음을 요구하시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일시적인 것에 대한 염려를 버리고 그 안에서 궁핍함을 겪지 않는 자가, 영원한 복에 관해서도 하나님을 믿지 않겠습니까? 이를 드러내시며 주님께서는 “작은 일에 충실한 자는 큰 일에도 충실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누가복음 16:10).

48.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매일 육신을 돌보는 일이 불가피함을 아시고, 일상의 근심을 끊어 버리시지 않으셨으며, 오히려 우리가 오늘 하루를 매우 적절하게 돌보도록 허락하셨습니다. 내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명하시는 것은 신성하고도 인간애가 넘치는 명령입니다. 왜냐하면 육신을 입은 사람들이 육신의 삶과 관련된 일을 전혀 염려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기도와 절제를 통해 많은 것을 줄일 수는 있지만, (육신과 관련된) 모든 것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따라 “완전한 사람으로 자라나 그리스도의 충만한 키에 이르기를” (엡 4:13) 원하는 자는 기도보다 여러 가지 봉사를 우선시해서는 안 되며, 필요 없이 우연히 그것들을 자의적으로 떠맡아서는 안 되며, 또한 어떤 필요에 따라,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주어지는 일들을 기도를 핑계로 회피하거나 거부해서는 안 된다. 그는 (기도와 다른 활동들 사이의) 차이를 분별하고, 시험 없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섬겨야 한다. 다르게 생각하는 자는, 성경에 따라 어떤 계명이 다른 계명보다 더 높고 중요하다는 것을 믿지 않으며, 선지자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계명을 따르려” 하지 않는다(시편 118:128).

49. 우리에게 필요하고 신중하게 마주하는 일들은 피할 수 없지만, 때를 벗어난 일들은 기도를 우선시하며 거절해야 하며, 특히 큰 지출과 불필요한 재산을 모으는 일들은 더욱 거절해야 한다. 왜냐하면 주님 안에서 그러한 일들을 얼마나 제한하고 그 중 불필요한 부분을 잘라내느냐에 따라, 그만큼 마음이 산만해지는 것을 막을 수 있으며, 마음이 산만해지는 것을 막는 만큼 순수한 기도에 자리를 내어주고, 그리스도에 대한 진실한 믿음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가 믿음이 부족하거나 다른 어떤 연약함으로 인해 이를 실천할 수 없다면, 적어도 진리를 깨닫고 자신의 힘껏 앞으로 나아가며, 자신이 아직 어린아이와 같음을 자책해야 한다.

50. 우리는 소망과 기도로 모든 세속적인 근심을 우리 자신에게서 멀리하려 노력할 것이며, 만일 이를 완벽하게 이행할 수 없다면, 우리의 부족함을 하나님께 고백할 것이며, 기도에 대한 부지런함은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주 소홀히 한 것 때문에 책망을 받는 것이, 완전히 포기한 것 때문에 책망을 받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다. 기도와 피할 수 없는 봉사에 대해 우리가 말한 모든 것에서, 우리는 언제 어떤 일을 기도보다 우선시해야 할지 알기 위해, 분별력을 얻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깨달음을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누구나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몰두할 때, 그것이 마땅한 봉사를 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모든 행위는 자기 만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지향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필수적이고 피할 수 없는 계명들조차 항상 똑같은 것은 아니며, 때에 따라 그중 하나가 다른 것보다 우선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별하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각 봉사는 항상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때에 행해지는 반면, 기도의 봉사는 끊임없이 행해야 할 의무로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꼭 필요한 일이 아닌 다른 활동들보다 기도를 우선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차이에 대해 백성들에게 가르치던 모든 사도들은, 그들을 사역으로 끌어들이고자 했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식탁을 섬기는 일을 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 중에서 증언을 받은 일곱 사람을 택하여, 우리가 이 사역을 맡기도록 하라. 우리는 기도와 말씀의 사역에 전념하겠노라. 이 말이 온 백성 앞에서 호감을 얻었더라” (사도행전 6:2–5). 이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우는가? 기도에 전념할 수 없는 사람들은 사역에 종사하는 것이 좋으니, 우리가 둘 다 잃지 않도록 하고, 더 잘할 수 있는 사람들은 더 나은 일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51. 기도의 일을 시작하여 점차 발전해 나가다 보면, 하나님에 대한 소망뿐만 아니라 확고한 믿음, 위선 없는 사랑, 원한을 품지 않는 마음, 형제들에 대한 사랑, 절제, 인내, 내면의 깨달음과 유혹으로부터의 해방, 은혜로운 은사들, 진심 어린 고백과 간절한 눈물이 기도를 통해 신자들에게 주어지며, 이(위에서 열거한 것들)뿐만 아니라 닥치는 슬픔에 대한 인내, 이웃에 대한 순수한 사랑, 영적 율법에 대한 깨달음과 하나님의 진리를 얻는 것, 성령의 감화, 영적 보물의 부여, 그리고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이 세상과 장차 올 세상에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모든 것—(이 모든 것을 그들은 기도를 통해 얻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사람이 큰 겸손과 지혜로 마음을 산만하지 않은 기도에 머물러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 외에는 자기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다른 방법이 없다.

52. 경건함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죄를 짓지 않는 것이고, 둘째는 죄를 지은 후 닥치는 슬픔을 견디는 것이며, 셋째는 슬픔을 견디지 못할 때 인내심이 부족함을 뉘우치며 울어내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곳에서 적절한 화해의 수단으로 바로잡지 못한 것은 필연적으로 저 세상에서 심판을 초래하기 때문이며,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가 울며 겸손해진 모습을 보시고, 그분만이 아시는 대로 전능하신 은혜로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실 때만 예외일 뿐이다.

53. 오, 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정욕이 얼마나 교묘하고 눈에 띄지 않는지, 심지어 현명한 자들까지도 그 정욕에 사로잡히곤 한다! 다른 정욕들의 행위는 그것을 행하는 자에게 쉽게 드러나기 때문에, 그 정욕에 사로잡힌 자들을 눈물과 겸손으로 이끄지만, 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마음은 경건한 말과 겉모습으로 위장되어, 그 유혹에 빠진 사람들이 그 변형된 모습을 간파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54. 성경이 어떻게 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마음을 책망하는지 들어보라. 첫째, 선지자 다윗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자들의 뼈를 흩으시니, 그들이 부끄러워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들을 낮추셨음이라” (시 52:6)라고 말하며, 사도는 “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자들처럼 눈앞에서만 일하는 것이 아니라” (엡 6,6)라고 말하며, 또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하는가? 만일 사람을 기쁘게 하려 했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갈 1,10)라고도 말합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이와 같은 내용을 많이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55. 사람에게 아첨하는 것에는 어떤 변형들이 있는가? 이러한 변형들의 근원이자 첫 번째 것은 불신이며, 그 뒤를 이어 그로부터 파생된 것들로서 시기, 증오, 아첨, 질투, 다툼, 위선, 편파, 겉치레만 하는 섬김, 중상모략, 거짓말, 참된 경건함이 아닌 거짓 경건의 모습, 그리고 이와 유사한, 알아차리기 어렵고 어두운 정욕들입니다. 그러나 가장 나쁜 점은, 어떤 이들은 교묘한 말로 이 모든 것을 선한 것으로 칭송하며, 그 안에 내재된 해악을 감추고 있다는 것이다. 원한다면, 나는 그들의 교활함을 부분적으로 드러내 보이겠다. 교활한 아첨꾼은 한 사람에게 조언하는 척하며 다른 사람에게 함정을 파고, 한 사람을 칭찬하는 척하며 다른 사람을 비난하며, 이웃을 가르치는 척하며 자신을 칭찬하고, 재판에 참여하는 것은 공평하게 심판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원수에게 복수하기 위함이며, 아첨을 섞어 고발하다가, 원수를 책망하다가 그가 받아들일 때까지 계속하고, 자신의 중상모략을 감추기 위해 이름을 밝히지 않고 비방하며, 검소한 이들에게 그들이 무엇이 필요한지 말하도록 설득하여 마치 그것을 주려는 듯이 행하다가, 그들이 말하면 구걸하는 자들인 양 그들을 폭로하고, 경험이 없는 자들 앞에서는 자랑하고, 경험이 풍부한 자들 앞에서는 겸손한 말을 하며, 양쪽 모두로부터 칭찬을 얻어내려 한다. 덕 있는 자들을 칭찬할 때면 분개하며, 다른 이야기를 꺼내어 그 칭찬을 무마시키고, 통치자들이 부재 중일 때는 비난하지만, 그들이 있을 때는 그들의 눈앞에서 칭찬하며, 겸손하고 지혜로운 이들을 조롱하고, 스승들을 엿보며 그들을 비난할 구실을 찾으며, 순박함을 깎아내려 스스로를 지극히 현명한 사람으로 보이려 하고, 모든 이웃의 미덕은 무시하고 그들의 잘못만은 기억에 간직한다. 간단히 말해, 온갖 방법으로 시간을 쪼개어 사람들에게 아부하며, (무의식적으로) 타인의 환심을 사려는 다양한 욕망을 드러낸다. 타인의 일에 대해 묻는 척하며 자신의 악행을 숨기려 한다. 그러나 참된 수도자들은 그렇게 행하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이다. 자비의 마음으로 타인의 악행을 외면하고, 자신의 악행은 하나님 앞에서 분명히 드러내므로, 그들의 의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들을 비난한다. 그들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하기보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 더 힘쓰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때로는 그분을 기쁘시게 하고, 때로는 자신을 낮추며, 이 두 가지 모두에 대해 주님께서 주실 상을 기다리는데, 주님께서는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질 것이요,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누가복음 18:14).

56. 우리에게 닥치는 슬픈 일들 중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부당하게 닥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에 따라 일어난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악한 행실로 인해 고통을 겪고, 또 어떤 이들은 이웃을 위해 고통을 겪는다. 바로 세 소년이 불구덩이에 던져졌을 때, 자신들이 자신의 죄로 인해 던져졌다고 말하며(단 3:28, 31) 우리에게 이러한 사고방식을 가르쳐 주었다. 또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비록 (그 당시) 다른 이들의 모습을 취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또한 성 다윗은 세메에에게 모욕을 당했을 때, 자신이 자신의 잘못과 하나님의 명령으로 인해 모욕을 당했다고 고백했습니다(역대하 16:11). 이사야와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및 다른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 민족들에게, 장차 각 사람의 죄에 상응하는 슬픔이 닥칠 것임을 예고하며, 그들의 죄와 재앙을 함께 알렸습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들이 이런 말을 하고 저런 일을 행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이런저런 일이 닥쳤다고 했다. 그리고 복된 다윗은 이를 설명하며 시편에서 이렇게 말한다. “주여, 내가 깨달았나이다. 주의 심판이 의로우시며, 주께서 진실로 나를 겸손하게 하셨나이다”(시 118:75). 또한: “주께서 미련한 자의 조롱을 내게 허락하셨나이다. 내가 벙어리가 되어 입을 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께서 그렇게 하셨음이니이다” (시편 38:9, 10).

57. 우리를 책망하는 이를, 우리 내면에 숨겨진 악한 생각들을 지적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책망자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우리의 생각을 면밀히 살펴 스스로를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니, 비록 우리 안에 숨겨진 악한 것들 중 많은 것을 알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오직 완전한 사람만이 자신의 모든 결점을 기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명백한 결점조차 우리가 쉽게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하물며 마음속의 생각은 더더욱 그러할 터인데, 우리는 우리 안에 숨어 있는 악의 대부분을 알지 못하므로, 우리를 덮치는 슬픔에 당황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분별 있는 자로서, 주님께서 우리의 유익을 위해 우리에게 슬픔을 허락하시고, 이를 통해 우리에게 많은 선을 베푸신다는 것을 깨닫는다: 첫째, 이를 통해 은밀히 우리를 지배하는 (악한) 생각들이 드러나고, 그것들이 드러나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진실하고 가식 없는 겸손한 지혜를 주시며, 그 후 헛된 자만심으로부터의 해방과 우리 안에 숨어 있는 모든 악을 온전히 드러내 주십니다. 확실히 아십시오. 만일 우리가 닥치는 고난을 믿음과 감사로 견디지 않는다면, 우리 안에 숨겨진 악을 알 수 없으며, 그것을 분명히 알지 못한다면, 현재의 악한 생각을 물리칠 수도 없고, 과거의 악으로부터의 정화를 얻을 수도 없으며, 미래에 대해서도 확고한 확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58. 우리에게 닥치는 슬픔과 책망은 겉보기에는 우리의 죄와 닮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영적인 측면에서는 온전한 진리를 담고 있다. 우리는 성경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실로암 탑이 무너져 죽은 자들이 과연 다른 사람들에게 탑을 무너뜨렸는가? 혹은 70년 동안 회개를 위해 바빌론으로 끌려간 포로들이, 다른 사람들을 회개시키기 위해 포로로 잡았습니까? 그런 식의 징벌은 아닙니다. 오히려 군인들이 어떤 범죄로 적발되면 매질이라는 처벌을 받지만, 그들이 저지른 것과 똑같은 악을 당하는 것은 아니듯이, 우리 모두도 회개에 적합하고 적절한 시기에 닥치는 고난을 통해 징계를 받지만, 그 방식도, 시기 또한, 그 내용도 똑같지는 않습니다. 즉, 시간의 지연과 우리를 덮치는 고통이 우리의 죄와 닮지 않은 점 때문에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믿지 않게 되는 것이다.

59.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슬픈 사건의 원인은 우리 각자의 생각에 있다. 말과 행동도 포함될 수 있겠지만, 그것들은 생각보다 먼저 일어나지 않으므로 나는 모든 것을 생각에 돌린다. 생각이 먼저 있고, 그 후에 말과 행동을 통해 우리(와 우리 이웃들) 사이에 교제가 형성된다. 교제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악의에서 비롯되고, 다른 하나는 사랑에서 비롯된다. 교제를 통해 우리는 서로를, 심지어 모르는 사람까지도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웃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반드시 슬픔이 뒤따르는데, 이는 신성한 성경이 말하듯이 “네 친구를 위해 보증하면, 원수에게 가 네 손을 넘겨주는 것”과 같다(잠언 6:1). 이처럼 각 사람은 자신에게 닥친 고난을 오직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서도 견뎌내는데, 바로 그가 이웃을 자신의 몫으로 받아들인 그 부분에서 그러합니다.

60. 악의에서 비롯된 이웃을 받아들이는 행위는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일이 발생한다: (이웃에게서) 무언가를 빼앗는 자는 비록 원치 않더라도 빼앗긴 자의 유혹을 떠안게 되며, 비방하는 자는 자신이 비방한 자의 유혹을, 강탈하는 자는 강탈당한 자의 유혹을, 지치게 하는 자는 자신이 지치게 한 자의 유혹을, 험담하는 자는 험담당한 자의 유혹을, 경멸하는 자는 경멸받는 자의 유혹을, 거짓말하는 자는 자신이 모함한 자의 유혹을 짊어지게 되며, 일일이 열거하지 않고 간략히 말하자면: 이웃을 해치는 자는 (그 해침에 비례하여) 자신이 해친 자의 유혹을 짊어지게 된다. 이에 대해 신성한 성경도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정직한 자를 위해 구덩이를 파는 자는 그 구덩이에 빠질 것이요, 돌을 굴리는 자는 그 돌에 깔릴 것이라”(잠언 26:27), 또한: “불의한 자의 마음속에는 온갖 악이 들어오나, 주님께서는 의로운 모든 것을 주시는도다”(잠언 16:33). “하나님이 불의하셔서 진노를 내리시는가”(로마서 3:5)는 말은, 고난을 통해 깨우침을 받는 자들뿐만 아니라, 이러한 고난에 무모하게 반항하는 자들에게도 해당됩니다.

61. 사랑으로 이웃을 받아들이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온갖 방법으로 보여주신 바와 같이, 먼저 우리의 영적 연약함을 치유하시고, 그다음 “모든 병과 모든 질병을 고치시며 세상의 죄를 짊어지심”으로써, 그분을 굳게 믿는 자들을 새롭게 하시고 그들의 본성을 깨끗하게 하시며, 그들에게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을 베풀어 주시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유언으로 남기시며, 경건함을 가르치시고, 우리가 사랑을 위해 죽을 때까지 고난을 겪어야 함을 보여 주셨을 뿐만 아니라, 성령의 참여로 인내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며 사람의 마음에 떠오르지 않은” (고린도전서 2:9) 장래의 복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위해 유혹을 받으시고, 모욕과 조롱, 결박을 참으시며, 배반당하시고, 뺨을 맞으시며, 식초와 담즙을 마시게 되시고, 못으로 못박히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시며, 창에 찔리셨습니다. 이처럼 우리와 육신과 영으로 연합하시고, 우리를 위해 고난을 짊어지신 그분은, 그 후 이 율법을 거룩한 사도들과 제자들, 예언자들, 교부들, 총대주교들에게 전하셨으니, 어떤 이들에게는 성령으로 먼저 가르치시고, 다른 이들에게는 그분의 지극히 거룩하신 몸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을 스스로 짊어지시며,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도 이보다 더 큰 사랑을 가질 수 없으니, 곧 자기 목숨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 바치는 자라” (요한복음 15, 13). 그러므로 성 바오로도 주님을 본받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나는 너희를 위하여 내 고난 속에서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내 육신 안에서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채워 나가기 때문이라” (골로새서 1,24), 이는 사랑으로 인한 수용을 암시적으로 지적한 것입니다.

62. 모든 사도들이 어떻게 생각과 말과 행실로 우리와 교제를 나누었고, 그 교제를 통해 우리를 위해 시련을 감내했는지 더 명확히 알고 싶으십니까? (그들은) 생각으로: 우리에게 성경을 제시하고, 예언을 인용하며,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믿으라고 권면하고, 우리가 본성상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을 섬겨야 함을 확신시켜 주며,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눈물을 흘리며, 신실한 생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행함으로써 그렇게 했습니다. 말씀으로: 우리에게 간청하고, 경고하며, 가르치고, 책망하고, 믿음이 부족한 점을 지적하며, 우리의 무지를 질책하시며, 성경을 설명하시고, 때를 밝히시며,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그분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음을 전파하시며, 성육신하신 말씀은 하나이지 두 개가 아님을 확증하시되, 비록 우리가 그분을 분리되지 않고 혼합되지 않은 채 결합된 두 본성으로 이해하더라도, 언제 어디서나 어떤 일에서든 미신을 단절하고, 거짓에 동의하지 않으며, 육신을 자랑하는 자들과 대화하지 않고, 허영심 많은 자들과 어울리지 않으며, 교만한 자를 두려워하지 않고, 악한 자를 파멸시키며, 겸손한 자들을 받아들이고, 경건한 자들을 자신의 곁에 두며, 우리에게도 똑같이 행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행위로 말미암아: 박해를 받고, 모욕을 당하고, 박탈당하고, 모독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고, 죽임을 당하고, 이와 유사한 고난을 우리를 위해 겪으셨습니다. 이처럼 우리와 교제를 맺으시며, 그들은 우리의 시련도 함께 짊어지셨으니,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슬퍼하면, 그것은 너희의 구원을 위함이며, 우리가 위로받으면, 그것은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라”고 하며,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아무도 없나니,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형제들을 위하여 버리는 자라”고 말씀하신 주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았기 때문이다(요한복음 15:13). 그리고 그들은 우리에게 (같은 말씀을) 전하며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주셨으니,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우리 목숨을 내어주어야 합니다”(요한일서 3:16), 또 “서로 짐을 지어 주라. 그리하면 그리스도의 율법을 성취하는 것이니라”(갈라디아서 6:2).

63. 그러므로 우리가 서로 교제하는 두 가지 방식, 즉 필요에 따라 이루어지는 수용과 필요에 의한 것과 사랑에서 비롯된 것, 이 두 가지 유형을 알게 되었다면, 이에 따라 우리에게 닥치는 유혹들이 어떻게, 언제, 누구를 통해 우리에게 닥치는지에 대해 호기심을 품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각 유혹이 전쟁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그것들이 피할 수 없이 이어지는 시기, 그리고 이를 돕는 온 피조물에 대해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진리를 믿고, 우리에게 불가피하게 닥치는 모든 일이 사랑을 위해서든, 악의를 위해서든 우리에게 일어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거부하지 말고 참아야 하며, 우리 죄에 또 다른 죄를 더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64. 육체의 뜻은 신체의 자연스러운 움직임과 그에 뒤따르는 생각 없는 격정이며, 이는 잠과 신체의 안식을 통해 강화된다. 이에 대해 복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 안에 일어나는 유혹을 당할 때, 그것이 너희에게 낯선 일인 양 놀라지 말라”(베드로전서 4:12). 또한 복된 바울은 이에 대해 “육신은 영을 거스르고, 영은 육신을 거스른다”고 말했으며, 그래서 “영으로 행하고 육신의 욕망을 이루지 말라”(갈라디아서 5:16, 17)고 명령합니다. 사도들이 이 말을 한 것은 우리가 그러한 충동에 동조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습니다.

65. 수련하는 자들은 (덕행의 수련을) 시작했으면 끝까지 완수해야 한다. 또한 건강한 몸을 지니고 수고나 적대감을 두려워하지 않는 젊은이와 노인들에게는, 온 힘을 다해 항상 금식을 실천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 적당히 빵을 먹고 때때로 (적당히) 물을 마시되, 식사를 마칠 때 여전히 약간의 배고픔과 갈증을 느끼도록 하여, (음식과 음료로 인한) 쾌락이 하나님께 드려야 할 필수적인 봉사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만약 앞서 언급한 음식을 먹으면서 배불리 포만감을 느낀다면, 곧 다른 음식들을 원하게 될 것이다. 반면 배불리 먹지 않는다면, 항상 배고픈 상태에서 포만감을 원하게 되더라도, 적어도 빵으로라도 배를 채우고 싶어 할 것이다.

66. 뻔뻔한 배를 다스리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것은 정복당한 자들에게는 신과도 같으며, 그 배에 복종하는 자는 죄가 없기를 바랄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배부름뿐만 아니라 음식을 먹지 않는 것에서도 재앙이 닥치는 것을 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여러 날 동안 음식을 먹지 않으면, 낙담이 우리 안에 자리를 잡고 일어나 우리를 괴롭히며, 우리의 밤 기도는 잠으로 빠져들게 하고, 낮의 기도는 육신의 생각으로 빠뜨려 버리니, 이로 인해 우리는 잠으로 인해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하고 육신의 생각으로 인해 더 큰 해를 입게 된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금식하는 우리는 자만하여 더 낮은 자들을 멸시하기 시작하는데, 이러한 (자신과 이웃에 대한) 생각은 그 어떤 죄보다도 무겁기 때문이다.

67. 어리석은 농부가 많은 비용을 들여 밭을 갈아놓고도 씨를 뿌리지 않은 채 방치하여 손해를 보는 것처럼, 우리도 자기 몸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느라 수고를 기울였으면서도 기도의 씨를 뿌리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 스스로에게 해를 끼치는 수고를 한 꼴이 될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기도에 의의 핵심이 담겨 있다면, 금식이 왜 필요하겠는가?” 매우 큽니다. 가난한 농부가 잡초가 무성한 밭에 땅을 다시 갈지 않고 씨를 뿌린다면, 밀 대신 가시덤불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먼저 금식으로 몸을 단련하지 않고 기도의 씨앗을 뿌린다면, 의 대신 죄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이 육신은 바로 그 땅에서 나온 것이므로, 땅을 가꾸는 것과 같은 정성을 다해 가꾸지 않는다면 결코 의의 열매를 맺지 못할 것입니다.

68. 금식은 이를 현명하게 실천하는 이들에게는 유익을 주지만, 무분별하게 시작하는 이들에게는 해를 끼친다. 그러므로 금식의 유익을 추구하는 자들은 그 해로움, 즉 허영을 경계해야 하며, 스스로 정한 금식이 끝난 후 먹는 빵을 음식을 먹지 않는 날들로 나누어, 매일 조금씩 먹음으로써, 우리 육신의 욕망을 정복하고 가장 유익한 기도에 마음을 굳게 다질 수 있도록 하여, 이처럼 하나님의 능력으로 교만함으로부터 보호받음으로써, 우리 생애의 모든 날 동안 겸손함 속에 머물도록 힘써야 한다. 겸손함이 없이는 그 누구도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69. 만일 우리가 겸손을 추구했다면, 우리에게 징계가 필요할 리가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악하고 슬픈 일은 우리의 교만 때문이기 때문이다. 사도에게 교만해지지 않도록 “그에게 해를 끼치게 하려고” 사탄의 천사가 보내졌다면, 하물며 우리가 교만해질 때, 우리 자신이 겸손해질 때까지 사탄이 직접 우리를 짓밟도록 보내질 것입니다. 우리의 조상들은 집을 소유하고, 부를 누리며, 아내를 두었고, 자녀를 돌보았으나, 동시에 끝없이 갈망하는 겸손함으로 인해 하나님과 대화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을 떠나 부를 경멸하고 집을 버렸으며, 하나님과 함께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교만함 때문에 악령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있습니다. 자만하는 자는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합니다. 만일 그가 자신의 어리석음과 연약함을 보았다면 자만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는 자가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겠습니까? 만일 그가 자신이 처해 있는 어리석음을 알지 못했다면, 어떻게 그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낯선 하나님의 지혜를 알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자는 그분의 위대하심을 묵상하며, 스스로를 책망하며 복된 욥과 같이 말합니다. “전에는 소문으로만 주님을 들었으나, 이제 내 눈으로 주님을 보았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를 책망하며 녹아내렸나이다. 나는 흙과 재에 불과하도다”(욥기 42:5-6). 그러므로 욥을 본받는 자들은 그분을 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을 뵙기를 원한다면, 우리 자신을 책망하고 겸손하게 지혜를 구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분을 우리 앞에 보는 것뿐만 아니라, 그분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고 안식하시는 것을 누리며 그분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어리석음이 그분의 지혜로 지혜로워지고, 우리의 연약함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강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70. 금식, 기도, 순례 생활은 좋은 (행위)이지만, 이는 단지 외적인 선한 삶의 수고에 불과하며,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 (육체적인 미덕들)보다 더 내면적인 것이므로, 누구도 (오직) 그것들만을 의지해서는 안 된다. 어떤 이들에게는 은혜를 누리면서도, 여전히 그들 내면에 숨어 있는 (원수의) 악의가 함정을 파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 악의는 자발적으로 그들에게 양보하며 활동하지 않지만, 사람의 마음을 속여 자신의 마음이 정화되었다고 생각하게 만들고, 그 후 그 사람을 자만심에 빠뜨려 자신이 완전한 기독교인이라고 믿게 하며, 그 후, 사람이 자신이 자유롭다고 (자신을 경계하지 않고) 생각하며 방심하게 되면, 그때 악의는 강도처럼 그를 덮쳐 몰래 매복을 하고, 그를 유혹하여 땅 밑 깊은 곳으로 떨어뜨린다. 왜냐하면, 강도나 군인들이 스무 살의 젊은이임에도 불구하고 적들에게 함정을 파고, 매복을 하고, (적을) 기다렸다가 뒤에서 공격하며, 사방에서 포위하여 무찌를 줄 안다면, 하물며 수천 년을 살아온 악의는 더더욱 (이 모든 것을 할 줄 알며), 그 본질이 영혼을 파멸시키는 데 있는 악의는 더욱더 그러할 것이다. 그것은 마음속에 은밀한 매복을 치고, 때로는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음으로써 영혼이 자신의 완전함에 대해 자만하게 만들 줄 안다. 기독교의 기초는 바로 이것이다. 즉, 사람이 아무리 많은 의로운 일을 행하더라도 그것에 안주하지 말고, 자신을 위대한 존재로 여기지 말며, 오히려 영적으로 가난한 자로 남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가 은혜의 참여자가 된다 해도, 자신이 무언가를 성취했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또한 자신이 위대한 사람이라고 자만하지 않도록, 가르치기 시작하지 않도록 해야 하며, 큰 금욕과 방랑, 기도로 선한 삶을 살며 은혜의 참여자가 되었더라도 자신의 영혼을 높이 평가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진실로 그 당시 그에게 주어진 은혜의 시작은 특히 그가 수고와 굶주림과 갈증을 겪게 하여, (그의 열망이) 채워지지 않게 하고, 자신을 의롭거나 은혜가 풍성한 자로 여기지 않게 하며, 오히려 외아들을 키웠다가 그가 뜻밖에도 죽어버린 어머니가 우는 것처럼, 통곡하고 눈물을 흘리게 하기 위함이었다.

71. 겉으로 보이는 삶과 행실에서 율법을 지키는 자는 악한 성품의 결과들로부터만 자유로울 뿐이며, 이성 없는 정욕의 행동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침으로써, 영적 유년기 때문에 구원을 위해 이러한 방식(의 행동)에 만족한다.

72. 복음적인 삶을 진정으로 사랑한 자는 자신의 악행의 시작과 끝을 모두 근절하였으며, 행함과 말로 모든 미덕을 실천하며, 찬양과 고백의 제물을 바치고, 정욕의 작용에서 비롯된 모든 불안에서 벗어나, (그것이) 정욕의 작용에서 비롯된 것이며, 마음속에서 그것과의 투쟁에서 자유로워져 오직 장래의 복에 대한 소망 속에서 영혼을 풍요롭게 하는 끝없는 기쁨을 누린다.

73. 지옥에 대한 두려움은 (미덕의 위업을) 막 시작하는 이들이 악행을 피하도록 독려하고, 선한 보상을 바라는 소망은 이미 성공한 이들에게 선을 행하려는 열의를 불어넣으며, 사랑의 신비는 마음을 모든 피조물 위로 높이 들어 올려, 하나님 다음의 모든 것에 대해 눈이 멀게 한다. 하나님 다음의 모든 것에 대해 눈이 멀어버린 이들 중에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가장 신성한 것을 보여 주심으로써 지혜를 주십니다(11c. 145,8).

74. “천국은 누룩과 같으니, 한 여인이 그것을 받아 밀가루 세 메라에 숨겨 두었더니, 온 것이 다 부풀어 오르지 아니하였느냐?”(마태복음 13,33). 이는 마음이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존재, 즉 사도의 말에 따르면 몸과 영과 영혼, 그리고 그 모든 미묘한 생각들을 마치 다양하게 흩어진 밀가루처럼 모아 하나의 믿음의 누룩으로 뭉쳐,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말씀과 온전히 닮아가기를 기다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주님께서는 진리의 말씀을 겨자씨에 비유하셨는데, 이 씨앗은 작지만 듣는 자의 마음에 심겨지면, 그 후 행함에 따라 자라나 높은 곳에 서 있는 거대한 나무와 같아져 (성경에 따르면) “다가오는 생각들을 위한 피난처가 된다.”

75. 영적인 법은 그리스도의 계명들이며, 그중 첫 번째이자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이다. 사랑은 악을 생각하지 않고, 모든 것을 사랑하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참아낸다(고린도전서 13:5, 7), 성경의 말씀대로이다. 이 사랑으로 우리는 서로 구별되지만, 그 가치의 ‘완전함’에 이르는 사람은 우리 중 아무도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의 부족함을 채워 주시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단, 우리가 자신의 힘으로 행하는 일에 지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연약함으로 인해 무엇을 할 수 없는지, 그리고 게으름으로 인해 사랑의 일을 얼마나 이행하지 못하는지를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자발적인 수고뿐만 아니라 닥치는 고난을 통해서도 굳건해지므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우리는 많은 인내와 온유함이 필요합니다. 신성한 사도는 말씀하시기를 “이 세상에서 지혜로운 자가 되고자 하는 자는, 오히려 더 지혜로워지기를 원하라” (고린도전서 3:18)고 하셨습니다.

76. 칼데아 땅(행 7:4)은 정욕 속에서 살아가는 삶으로, 그곳에서 죄의 우상들이 만들어지고 숭배받는다. 반면 메소포타미아(같은 곳, 2절)는 이 두 가지 상반된 성향 모두에 물든 삶을 의미한다. 반면 약속의 땅(히브리서 11:9)은 온갖 선함으로 충만한 상태이다. 그러므로 옛 이스라엘과 같이 자신의 옛 습관으로 되돌아가는 자는 누구나, 주어진 자유를 상실하고 다시 정욕의 노예 상태로 전락하게 된다.

77. 육신의 정욕을 용감하게 이기고, 사악한 영들에 맞서 충분히 싸워 그들의 계략을 자기 영혼의 땅에서 쫓아낸 자는, 자신에게 깨끗한 마음이 주어지고, 그의 속사람 안에서 바른 영이 새롭게 되기를 기도해야 한다 (시편 50:12), 즉 악한 생각을 완전히 떨쳐내고 은혜의 선물로 신성한 생각으로 충만해져, 그로써 도덕적, 자연적, 신학적 관조로 이루어진 밝고 위대한 하나님의 영적 세계가 되도록 해야 한다.

78. 깨끗한 마음(시편 50:12)이란, 하나님께 완전히 형상이 없고(인상에서 깨끗하며) 어떤 형상도 없는 기억을 드린 마음이며, 오직 하나님의 인상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 그 인상으로 인해 보통 빛나게 되는 마음을 말한다.

79. 신성한 소망으로 육체에 대한 영혼의 경향을 이겨낸 자는, 비록 육신 안에 있더라도 무한한 존재가 되었다. 이는 소망하는 자의 갈망을 끌어당기시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높으시며, 소망하는 자가 자신의 갈망을 하나님 다음의 어떤 것에도 묶어두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갈망의 온 힘을 다해 하나님을 갈망하며,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이 어떤 육체적인 것에도 사로잡히지 않도록 하고, 진리에 따라 모든 감각적·사고적 사물보다 더 높은 (영적) 태도를 취하며, (그때) 우리는 본성상 형언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과 관련하여, 자연적인 삶으로부터 어떠한 해악도 의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80. 위대한 모세는 자신의 성막을 군대 밖, 즉 생각과 마음을 가시적인 것 밖에 두어, 하나님을 경배하기 시작하며(출 34:8), 어둠 속으로 들어가(출 20: 21), 보이지 않고 비물질적인 지식의 장소로 들어가, 그곳에서 가장 신성한 비밀에 입문하여 머무른다.

81. 마음으로 우리 자신의 존재와 하나님 다음의 모든 것에 대한 평소의 집착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는 한, 우리는 덕행에서 불변성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사랑으로 이 경지에 이르면, 그때 비로소 하나님의 약속의 능력을 깨닫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합당한 자들은, 먼저 마음이 사랑으로 그 힘을 확립한 곳에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 있음을 믿어야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과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사고를 초월하는 침묵 속에 자신을 확립하지 못한다면, 이성은 만물에 내재된 변화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82. 갈릴리의 한 다락방에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문을 닫은 채” (요한복음 20:19), 즉 악령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계시의 땅에서 안전하게 살며, 신성한 관조의 경지에 이르러 감각을 문처럼 닫아둔 채,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다. 이 말씀은 감각적 작용 없이 그들에게 임하며, 평화의 선포로서 그들에게 무정함을 부여하고, 그 숨결은 성령의 분열을 의미하며, 악한 영들에 대한 권세를 부여하고, 그들에게 자신의 신비에 대한 표징(요한복음 20, 20)을 보여준다.

83. 복음적으로 여섯째 날을 보내며, 미리 죄의 첫 움직임을 죽인 자는 덕행으로 모든 악에서 깨끗한 무정욕의 경지에 이르고, 마음으로는 상상 속의 가장 미묘한 정욕의 형상조차도 안식하며(출 16,29.30) 지낸다. 그리고 요단강을 건너(창 32:22, 30) 지식의 땅으로 옮겨지는데, 그곳에서 세상이 신비롭게 창조한 마음은 하나님의 영 안에서 거처가 된다.

84. 안식 중의 안식(레위기 16, 31)은 이성적인 영혼의 마음의 평안으로, 이 영혼은 (창조된) 피조물 속에 은밀히 감춰진 모든 신성한 말씀들로부터조차 이성을 멀어지게 하여, 사랑의 황홀경 속에서 이성을 온전히 유일한 하나님으로 감싸고, 신비로운 신학으로 이성을 하나님과 완전히 분리할 수 없게 만들었다.

 

3. 영적 법에 관한 200

1. 여러분이 사도의 말씀대로 “영적인 율법”(롬 7:14)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이들의 마음가짐과 행실이 어떠한지 알고자 하는 소망을 거듭 표명해 왔으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로 이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2. 첫째, 우리가 알고 있듯이, 하나님은 모든 선의 시작이자 중간이자 끝이십니다. 그러나 선[39] 는 그리스도 예수와 성령 안에서만이 실현될 수 있으며, 그 외에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3. 모든 선은 주님께서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를 믿는 자는 그 선을 헛되이 하지 않을 것입니다.

4. 확고한 믿음은 견고한 망대[40] 이다. 믿는 자에게 그리스도는 모든 것이다.

5. 모든 선을 주관하시는 분이 네 모든 일을 주관하시어, 네 일이 하나님께 합당하게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6. 겸손하고 영적으로 활동하는 사람은 신성한 성경을 읽을 때 모든 것을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에게 적용할 것이다.

7. 하나님께서 네 마음의 눈을 열어 주시어, 기도와 성경 읽기가 주는 유익을 체험적으로 깨닫게 해 주시기를 간구하라.

8. 어떤 영적 은사를 가지고 있으며 가난한 자들에게 동정심을 품는 자는, 그 동정심으로 자신의 은사를 지키지만, 교만한 자는 교만의 생각에 사로잡혀 그 은사를 잃게 될 것이다.

9. 겸손한 자의 입은 진리를 말하며, 진리에 반하는 자는 주님의 뺨을 때린 종과 같다.

10. 자만하는 자의 제자가 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겸손 대신 교만을 배우게 될 것이니.

11. 성경에서 얻은 지식(차용한 것)으로 자만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마음이 모독의 영에 빠질까 두려워하라.

12. 어둡고 복잡한 문제를 논쟁을 통해 해결하려 하지 말고, 영적 법이 명하는 대로—인내와 기도,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41] 소망으로 해결하라.

13. 육신으로 기도하며 아직 영적인 분별력이 없는 자는 “다윗의 아들아,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마가복음 10:48)라고 외치던 맹인과 같다!

14. 바로 그(이와 같은) 이전에 눈먼 사람은 시력을 회복하고 주님을 보았을 때, 더 이상 그분을 다윗의 아들이라고 부르지 않고,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며 그분께 경배하였다(요한복음 9:35–38).

15. 기도 중에 눈물을 흘리며 자만하지 마라. 이는 그리스도께서 네 눈을 만지셨고 네가 영적으로 눈을 떴기 때문이다.

16. 맹인의 본을 따라 옷을 벗어 던지고[42] 주님께 가까이 나아간 자만이 그분의 (진정한) 제자가 되며, 가장 완전한 교리를 전파하는 자가 된다(마가복음 10,50.51).

17. 마음속에서 (즐거움을 느끼며) 되새기는 악(죄)은 마음을 거칠게(돌처럼 굳게) 만들지만, 소망을 품은 절제는 악을 근절하며 마음을 부드럽게(가루처럼 빻아) 만든다.

18. 마음을 깎아내리는(부수는) 일 중에는 올바르고 유익한 것이 있어 마음을 연화시키지만, 또 다른 무질서하고 해로운 것이 있어 오직 파멸로만 이끈다[43] .

19. 깨어 있음, 기도, 그리고 닥친 (불쾌함, 재앙, 슬픔)에 대한 인내는 단순히 상처를 입히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자만심으로 그것들의 융합을 막지 않는다면[44] , 마음에 유익한 으스러짐(분쇄)이다. 그것들 속에 머무는 자는 다른 일에서도 도움을 받을 것이나, 그것들을 돌보지 않고 갈라놓는(하나를 다른 것에서 분리하는) 자는 마지막 때에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45] .

20. 쾌락만을 추구하는 마음은 마지막 때에 영혼을 위한 감옥과 족쇄가 되지만, (주님을 위해 자기 자신을 괴롭히고 고생시키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근면한 마음은 (다른 삶으로 통하는) 활짝 열린 문이다.

21. 성으로 들어가는 철문(행 12:10)은 잔인한 마음이다. 고통받으며 꺾인 자에게는 그 문이 베드로에게 그랬던 것처럼 “저절로 열릴” 것이다[46] .

22. 기도의 방식은 서로 다른 것이 많이 있다. 그러나 기도가 아닌, 사탄의 짓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어떤 기도의 방식도 해롭지 않다.

23. 어떤 사람은 악을 행하려다가, 평소처럼 먼저 마음으로 기도했고, 섭리에 의해 (악을) 저지르지 못하게 된 후, (그 일로 인해) 많이 감사했다[47] .

24. 다윗은 카르멜의 나발을 죽이려 했으나,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기억으로 인해 그 의도에서 돌이켜진 후, 그 일에 대해 크게 감사했다. 우리는 또한 그가 하나님을 잊었을 때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그리고 선지자 나핫이 그를 하나님에 대한 기억으로 돌아오게 할 때까지 (하나님을 잊은 채 회개하지 않은 상태로)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25. 하나님을 기억할 때, 주님께서 네가 그분을 잊을 때 너를 기억해 주시도록 기도를 더욱 늘리라.

26. 성경을 읽을 때, 그 안에 (사실은 너를 위해) 숨겨진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 “무엇이든 기록된 것은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라”(롬 15:4).

27. 성경은 믿음을 “소망하는 바를 아는 것”이라고 부르며(히브리서 11:1), 그리스도께서 자신 안에 계심을 알지 못하는 자들을 미숙한 자라고 칭했다(고린도후서 13:5).

28. 행실과 말로 생각이 드러나듯이, 마음의 움직임(무엇을 향하고, 무엇에 즐거움을 느끼는지, 미리 드러나는 것)을 통해 미래의 보응이 드러난다.

29. 관대한 마음은 분명히 관대함을 받을 것이며, 자비로운 마음은 마찬가지로 자비를 만날 것이나, 그 반대의 마음은 반대의 결과를 불러일으킨다.

30. 자유의 법은 모든 진리를 가르치나, 많은 이들이 이성을 통해 이를 읽을 뿐, 계명을 실천함으로써 이를 이해하는 이는 많지 않다.

31. 인간의 미덕 속에서 그 완전함을 찾지 말라. 그 안에는 완전한 것이 없으니, 그 완전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에 감추어져 있다.

32. 자유의 법은 참된 이성으로 읽히고, 계명을 실천함으로써 이해되며, 그리스도의 관대함으로 성취된다.

33. 양심에 따라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따르도록 이끌릴 때, 비로소 우리는 주님의 율법이 흠이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며, 비록 그 율법이 우리의 선함(자연적인 도덕적·종교적 감정과 성향)을 통해 구현되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사람 안에서 온전히 실현될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34. 그리스도의 모든 계명에 대해 빚진 자로 여기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육신적으로 해석하며, “자기가 말하는 것도, 주장하는 것도 깨닫지 못한다”(딤전 1:7)고 하므로, 행위로써 그 율법을 이행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35. 어떤 행위는 겉으로는 선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을 행하는 자의 목적은 선을 향하지 않는 경우가 있고, 또 어떤 행위는 그 자체로는 마치 악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을 행하는 자의 목적은 선을 향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행동뿐만 아니라 말도 앞서 언급한 방식으로 한다. 어떤 이들은 미숙함이나 무지 때문에 행위를 다른 모습으로 보이게 하고, 다른 이들은 고의로 악을 행하며, 또 다른 이들은 경건한 척하며 그렇게 한다.

36. 칭찬의 말 속에 비방과 폄하를 숨기는 자는 단순한 사람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렵고, 겸손한 척하며 허영을 부리는 자도 이와 같다. 그들은 오랫동안 거짓 속에 진실을 숨기는 데 능숙하지만, 결국 (자신의 진정한 성품에) 휩쓸려 행실로 인해 정체가 드러난다.

37. 어떤 이는 겉으로는 이웃을 위해 선한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속으로는 해를 입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그런 겉으로 드러나는 호의를) 베풀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마음속으로 유익을 얻기도 한다.

38. 악의와 복수심에서 비롯된 책망도 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진리에서 비롯된 책망도 있다.

39. 죄를 그만두고 이미 회개하고 있는 자를 더 이상 책망하지 말라. 만일 네가 말하는 대로 하나님 앞에서 그를 책망하고자 한다면, 먼저 그 앞에서 네 자신의 죄를 드러내라.

40. 하나님께서는 모든 미덕 위에, 마치 낮의 빛 위에 태양이 군림하듯이 군림하십니다.

41. 덕을 행한 후에는 “나 없이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요한복음 15:5)고 말씀하신 분을 기억하라.

42. 슬픔은 사람에게 유익이 되고, 허영과 쾌락은 해가 되는 법이다.

43. 사람들에게서 억울한 비난을 받는 자는 죄를 피하며, 그와 같은 슬픔 속에서 중보자를 얻는다.

44.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믿음의 정도에 따른 보상을 믿기에, 어떤 불의라도 기꺼이 견딘다.

45. 자신을 해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자는 악마들을 무찌르나, 먼저 저항하는 자는 후자에 의해 상처를 입는다.

46. 사람들에게서 받는 부당한 모욕이 악마에게서 받는 것보다 낫지만,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는 그 둘 모두를 이긴 자이다.

47. 모든 선은 주님께서 섭리적으로 주시는 것이나, 그것은 배은망덕하고 무감각하며 게으른 자들에게는 은밀히 떠나간다.

48. 모든 죄는 금기된 쾌락으로 끝나고, 모든 미덕은 영적인 위로로 끝난다. 그리고 전자가 자기의 동류들을 자극(움직이게 하고, 화나게 함)하듯이, 후자는 자기의 동류들을 자극한다.

49. 사람들의 비난은 마음에 슬픔을 안겨 주지만, 그것을 견뎌내는 이에게는 순결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50. 무지는 유익한 것에 반대할 구실과 자유를 주며, 더 대담해짐으로써 악에 대한 반박(혹은 제안)을 증대시킨다.

51. 어떤 부족함도 없더라도 (주어지는) 슬픔을 받아들이고, 보고해야 할 자로서 자만심을 버려라.

52. 은밀히 죄를 지었다면, (하나님 앞에서) 그것을 숨기려 하지 말라 – (숨겨진 것도 드러난다고 생각하지 말라), 이는 “모든 것이 주님의 눈앞에서 드러나고, 그분께는 우리가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히브리서 4, 13).

53. 마음속으로 주님께 자신을 드러내라. “사람은 겉모습을 보나, 하나님은 마음을 보시기 때문이라”(사무엘상 16:7).

54. 하나님을 향한 목적 없이 아무것도 생각하거나 행하지 마라. 목적 없이 여행하는 자는 헛되이 수고를 낭비하기 때문이다.

55. 필요 없이 죄를 짓는 자는 회개하기 어렵다. 하나님의 진리 앞에서 숨을 수 없기 때문이다.

56. 슬픈 일은 지혜로운 이에게 하나님을 떠올리게 하지만, 하나님을 잊은 자에게는 그만큼 슬픔을 안겨준다.

57. 모든 뜻하지 않은 슬픔이 너에게 그러한 기억을 일깨워 주는 스승이 되게 하라. 그리하면 네게 회개할 동기가 결코 고갈되지 않을 것이다.

58. 망각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힘도 없지만, 우리의 태만함에 의지하여 그에 비례하여 지속된다.

59. “내가 뭘 하라는 말인가? 나는 원치 않는데도 (망각이) 찾아온다”라고 말하지 마라. 이는 네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기억하고 있었을 때 그것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

60. 네가 기억하는 선행을 행하라. 그러면 네가 기억하지 못하는 선행도 네게 드러날 것이니, 무분별하게 네 생각을 망각에 내맡기지 말라.

61. 성경은 “지옥과 파멸은 주님 앞에 명백하다”(잠언 15:11)고 말한다. 이는 마음속의 무지와 망각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62. 지옥은 무지이며, 이는 둘 다 어둡기 때문이다. 파멸은 망각이며, 이는 둘 모두에서 과거의 무언가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63. 이웃의 악행이 아니라 자신의 악행에 대해 탐구하라. 그러면 네 마음속의 성소가 도둑맞지 않을 것이다.

64. 게으름은 이미 할 수 있는 선을 전혀 받아들이지 못한다(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자선과 기도는 게으름에 빠진 자들을 의무로 되돌려 준다.

65. 하나님을 향한 슬픔은 경건함의 불가분의 일부이니, 참된 사랑은 역경을 통해 시험받기 때문이다.

66. 슬픔 없이 덕을 쌓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러한 덕은 (그것을 쌓는 동안 네가 누리는) 평온함 때문에 신뢰할 수 없다(검증되지 않았다).

67. 모든 불가피한 슬픔의 결과를 살펴보라. 그러면 그 속에서 죄의 정화(정화)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68. 이웃의 조언 중 유익한 것도 많지만, 누구에게나 자신의 결단만큼 적절한 것은 없다.

69. 치유를 구할 때 양심을 돌보아라. 양심이 네게 말하는 대로 행하면 유익을 얻을 것이다.

70. 각자의 은밀한 일들은 하나님과 양심이 알고 있으니, 바로 그것들을 통해 그들이 바로잡히기를 바란다.

71. 사람은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는 만큼 행하지만, 그 행위의 결과는 하나님께서 진리에 따라 정하신다[48] .

72. 사람들의 칭찬을 비난받지 않고 받고 싶다면, 먼저 자신의 죄에 대한 책망을 사랑하라.

73.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진리를 위해 어떤 수치를 당하더라도, 백 배나 더 백성들에게 영광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장래의 (보상)을 위해 온갖 선을 행하는 것이 훨씬 더 낫다.

74. 사람이 말이나 행동으로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줄 때, 양쪽 모두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해야 한다. 이를 깨닫지 못하는 자는 이를 깨닫는 자에게 지배당할 것이다[49] .

75. 어떤 위선적인 이유로 이웃을 칭찬하는 자는 나중에 그를 꾸짖게 될 것이며, 그는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다.

76. 원수들의 함정을 알지 못하는 자는 쉽게 유혹에 빠지고, 정욕의 원인(뿌리, 계기)을 알지 못하는 자는 쉽게 넘어진다.

77. 쾌락 추구(자기 즐거움을 위한 행동)에서 게으름이 생기고, 게으름에서 망각이 온다. 누구에게 유익한지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지식을 주셨기 때문이다.

78. 사람은 자신이 아는 대로 이웃에게 (말을) 전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듣는 자가 믿는 만큼 그 안에서 역사하신다.

79. 나는 행실로 자신을 낮추는 단순한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들은 현자들보다 더 지혜로워졌다[50] .

80. 또 다른 한 어리석은 사람은 그들이 칭송받는 것을 듣고도 그들의 겸손을 본받지 않고, 단지 자신의 단순함을 자랑할 뿐이었으며, 그로 인해 교만을 품게 되었다.

81. 지식을 폄하하고 무지를 자랑하는 자는 말뿐만 아니라 이성으로도 무지한 자이다.

82. 말 속에 담긴 지혜가 있는 반면, 지혜 그 자체가 있는 것처럼, 말 속에 담긴 무지가 있는 반면, 무지 그 자체가 있는 법이다.

83. 경건한 이에게 말솜씨가 서툰 것은 조금도 해가 되지 않듯이, 말솜씨가 뛰어난 지혜도 겸손한 지혜로운 이에게는 해가 되지 않는다.

84. “나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모르므로, 그것을 행하지 않아도 죄가 없다”고 말하지 말라. 만일 네가 알고 있는 선을 행했다면, 다른 것들이 차례로 네게 드러났을 것이니, 이는 한 가지가 다른 것을 통해 이해되듯이, 한 가족의 구성원들이 서로를 알아가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잠언 48장). 첫 번째(알고 있는) 것을 행하기 전에 두 번째(모르는) 것을 아는 것은 너에게 유익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성은 무위(행위의 부족)로 인해 자만하지만, 사랑은 모든 것을 참아내므로 모든 것을 이룬다”(고린도전서 8:1, 13:7).

85. 신성한 성경의 말씀을 행함으로 읽고, 텅 빈 사고만으로 자만하며 말씀을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지 말라.

86. 행함을 버리고 지식만으로 만족하는 자는 양날의 칼 대신 갈대 지팡이를 들고 있는데, 성경(이사야 36:6)에 따르면, 이 지팡이는 전투 중에 그의 손을 찌르고, 그 안에 박혀 적들보다 먼저 교만의 독을 쏟아 부을 것이다.

87. 모든 생각은 하나님 앞에서 그 나름의 분량과 무게를 지닌다. 그러므로 그분 앞에서 편향되게 생각하거나, 오직 한 가지 방식(즉, 행함 없이 오직 이성만으로, 혹은 경험 많은 이들과의 상의 없이 오직 자신의 이성만으로)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모두 같은 것이다.

88. 계명을 이행한 자는 그로 인해 유혹을 받을 것을 예상해야 한다.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은 역경 속에서 시험받기 때문이다(『비유』 65장).

89. 부주의함으로 인해 어떤 생각도 경시(소홀히)하지 말라. 어떤 생각도 하나님 앞에서는 숨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90. 어떤 생각이 네게 세상의 영광을 약속한다고 느껴질 때, 그것이 네게 수치를 준비하고 있음을 확실히 알라.

91. 원수는 영적 법의 요구를 알고 있으며, 오직 영적 삶을 사는 자들에게 (행위가 아니라) 주입된 생각을 통해 마음속으로만 죄를 짓게 하려고만 한다. 그렇게 해서 (누군가 그 유혹에 동의할 때) 그를 자신의 조력자로 삼아, (자신의 죄를 자각한다면) 회개의 고된 수고를 감당하게 하거나, (죄를 자각하지 못해) 회개하지 않을 경우, 그에게 원치 않는 고통스러운 슬픔과 (보통 하나님께서 그런 자들을 깨우치기 위해 보내시는) 고난을 짊어지게 할 것이다. 때로는 그가 그러한 유혹에 맞서 반항하도록 부추기기도 하는데 (고통, 불평,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불복종, 자신이 그 고통을 자초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을 부추기기도 하는데, 이는 그런 식으로 이곳에서도 고통스러운 시련을 가중시키고(하나님께서 그가 정신을 차리도록 계속해서 보내시기 때문이며), 마지막 순간에 그를 불신자로 드러내기 위함이다(섭리에 대한 불신과 자신이 죄가 있었다는 사실을 폭로하기 위함이다).

92. (삶에서) 닥치는 재앙에 맞서 많은 이들이 여러 가지로 성공적으로 대항해 왔으나, 기도와 회개 없이는 그 누구도 (사후에 닥칠) 혹독한 (극단적인 상황)을 피할 수 없다.

93. 악은 서로에게서 힘을 얻으며, 마찬가지로 선도 서로에게서 자라나고(강해지고, 굳건해진다). 이 둘 모두는 그 참여자를 자극하여 앞으로 더 나아가도록 이끈다.

94. 사탄은 사소한 죄들을 우리 눈앞에서 하찮은 것으로 보이게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더 큰 죄로 이끌 수 없기 때문이다.

95. 수치스러운 정욕의 뿌리는 인간의 칭찬이며, 정절의 뿌리는 (우리의) 죄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다만 이를 단지 듣기만 할 때가 아니라, 그것을 스스로 받아들일 때에도 그러하다.

96. 세상을 등지고도 쾌락에 빠져(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항상 마음에 드는 것과 기분 좋은 일만 하며) 사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없다. 왜냐하면 그가 예전에 재산을 통해 행하던 것과 똑같은 일을, 이제는 아무것도 갖지 않은 상태에서도 하고 있기 때문이다.

97. 또한 금욕주의자라 하더라도 돈을 벌게 된다면, 내면의 성향 면에서 첫 번째 사람과 같은 형제나 다름없다. 왜냐하면 그 역시 ‘마음에 달콤한 것’을 추구하는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이며, 단지 정욕의 변화로 인해 다른 아버지에게서 태어났을 뿐이다.

98. 어떤 이는 큰 쾌락을 위해 정욕을 억제하기도 한다(정욕에 사로잡히지 않고 사는 것이 더 평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이들은 그의 목적을 알지 못한 채 그를 칭송한다. 하지만 어쩌면 그 자신도 헛된 수고를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될지 모른다.

99. 모든 죄악의 원인은 허영과 쾌락에 대한 욕망이다. 이를 미워하지 않는 자는 정욕을 억제하지 못할 것이다.

100. 모든 악의 뿌리는 돈에 대한 탐욕이다(딤전 6:10), 그러나 분명히 그것 또한 그 악들을 위해 존재한다(그것들에 의해 요구되고, 그것들에 의해 확립되며, 그것들에 의해 지탱된다).

101. 이 세 가지 정욕, 즉 탐욕과 허영, 쾌락 추구로 인해 이성은 눈이 멀게 된다.

102. 성경에 언급된 거머리의 세 딸은, 광기라는 어머니가 “사랑하는 자를 향한 사랑”으로 낳은 자들이다(잠언 30:15).

103. 이성과 믿음—우리 본성의 동반자들—은 바로 이 세 가지 때문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이겠는가.

104. 분노, 격노, 욕설, 살인,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악행들은 이 세 가지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서 극도로 심해졌다.

105. 그러므로 우리는 탐욕, 허영, 쾌락에 대한 집착을, 악덕의 어머니이자 미덕의 계모로서 증오해야 한다.

106. 그들 때문에 우리는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계명을 받았으며, 세상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말라는 계명을 받았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을 무분별하게 미워하라는 뜻이 아니라, 그러한 정욕으로 이어지는 계기를 끊어 버리라는 뜻이다.

107. 성경은 “군사가 세상의 일들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딤후 2:4)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에 얽매인 채 정욕을 이기려 하는 자는 마치 짚으로 불을 끄려는 사람과 같기 때문입니다.

108. 돈과 명예, 쾌락 때문에 이웃에게 분노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이다.

109. 주님의 말씀,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아니하면 내게 합당하지 못하니라”(눅 14:33, 마 10:38)를 들을 때, 이 말씀이 단지 소유에 대해서만 한 것이 아니라 모든 내면의 악한 요소들에 대해서도 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110. 진리를 알지 못하는 자는 참되게 믿을 수도 없다. 지식은 본질상 믿음보다 앞서기 때문이다.

111. 하나님께서 보이는 모든 피조물 각각에게 그 본성에 맞는 것을 나누어 주셨듯이, 인간의 생각에 대해서도 (그 본성에 따라) 갚아 주실 것이니,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말이다.

112. 만일 누군가가 명백히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으면서도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았다면, 그에 대한 심판은 자비 없이 이루어질 것임을 알아두라.

113. 마음속으로 현명하게 기도하는 자는 당면한 고통을 견디지만, 원한을 품는 자는 아직 순수하게 기도하지 못한 것이다.

114. 누군가에게서 해를 입거나 모욕이나 박해를 당할 때, 현재에 대해 생각하지 말고 미래에 기대되는 바를 생각하라. 그러면 그 사람이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의 세상에서도 너에게 많은 복을 가져다준 장본인임을 알게 될 것이다.

115. 소화가 잘 안 되는 이들에게 쓴 쑥이 유익한 것처럼, 성품이 나쁜 이들에게는 쓰라린 고난을 견디는 것이 유익하다. 왜냐하면 전자에게는 건강을, 후자에게는 회개를 돕는 치료제가 되기 때문이다.

116. 고통을 겪고 싶지 않다면, 악을 행하려 하지 마라. 왜냐하면 (후자) 뒤에는 (전자)가 끊임없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117. 제멋대로 악을 뿌리고, 원치 않으면서도 그 악을 거두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에 경외심을 가져야 한다.

118. 파종과 수확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시간 간격이 있는 법이다. 그러나 이 이유로 인해 우리가 보응을 믿지 않아서는 안 된다.

119. 죄를 지었을 때 비난받아야 할 것은 육체가 아니라 생각이다. 왜냐하면 생각이 앞서지 않았다면, 육체도 그 뒤를 따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120. 은밀히 악을 행하는 자는 노골적으로 해를 끼치는 자보다 더 사악하므로, 그는 더 악하고 더 엄한 벌을 받는다.

121. 음모를 꾸미고 은밀히 악을 행하는 자는 성경에 따르면 “길가에 앉아 말의 발뒤꿈치를 물어뜯는” 뱀과 같다(창세기 49:17).

122. 같은 시간에 이웃을 한 가지 일로는 칭찬하고 다른 일로는 책망하는 사람은 허영과 시기심에 사로잡힌 자이다. 그는 칭찬으로 시기심을 감추려 하고, 책망으로 자신을 그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내세우려 한다.

123. 양과 늑대를 함께 치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이웃에게 교활하게 행동하는 자에게는 자비를 얻을 수 없다.

124. 계명에 은밀히 자신의 뜻을 섞는 자는, 『지혜서』에 나타난 바와 같이 간음하는 자이며, “지혜가 부족하여 병과 수치를 당할 것”이다(잠언 6:32, 33).

125. 물과 불이 상반되어 어우러지지 않는 것처럼, 자기 합리화와 겸손은 서로 상반된다.

126. 죄 사함을 구하는 자는 겸손을 사랑하지만, 타인을 정죄하는 자는 자신의 악한 행실을 굳게 새겨 놓는다.

127. 아무리 사소한 죄라도 용서받지 못한 채로 남겨두지 마라. 그래야 나중에 그것이 너를 더 큰 죄로 이끌지 않을 것이다.

128. 구원받고자 한다면, 참된 말씀(자신에 대한 진리의 말씀)을 사랑하고, 결코 무분별하게 책망을 거부하지 말라.

129. 진리의 말씀은 독사의 자손들을 변화시켰으며, 그들에게 장차 닥칠 진노를 피하는 법을 가르쳐 주셨다(마태복음 3:7).

130.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는 말씀이신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니, “너희를 받아들이는 자는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태복음 10:40).

131. 지붕을 뚫고 내려온 마비된 사람은, 신실한 자들에 의해 하나님 앞에서 책망받는 죄인이지만, 그들의 믿음으로 인해 (죄의) 용서를 받는 자이다(누가복음 5:19).

132. 이웃을 모든 죄로 책망하는 것보다 경건한 마음으로(선의를 담아)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낫다.

133.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들에게 조롱을 당한다. 그러나 이는 그에게 있어 (그의 회개가) 하나님께 기쁘게 여겨짐의 표징이다.

134. 모든 것을 절제하며(고린도전서 9:25) 주님께서 바빌론의 씨를 멸망시키실 때까지 (그 수고를) 멈추지 말라.

135. 불의의 열두 가지 정욕이 있다고 상상해 보라. 만일 네가 의지로 그중 하나라도 사랑한다면, 그것이 나머지 열한 가지를 모두 대신할 것이다.

136. 죄는 타오르는 불이다. 그 불의 연료를 얼마나 덜어내느냐에 따라 그만큼 꺼지고, 얼마나 더하느냐에 따라 그만큼 더 거세게 타오를 것이다.

137. 칭찬에 취해 교만해지면, 불명예를 맞이할 것을 대비하라. 왜냐하면 (성경)에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질 것이요”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마태복음 23:12).

138. 우리가 모든 마음속의 자의적인 죄를 버릴 때, 비로소 우리를 사로잡는 정욕들과의 진정한 싸움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139. ‘기억’이란 과거의 죄를 무의식적으로 떠올리는 것이다. 아직 (정욕과) 싸우고 있는 사람은 정욕에 이르기 전에 (그런 생각을) 막으려 애쓰고, 이미 정욕을 이긴 사람은 그 첫 번째 ‘기억’을 단호히 끊어 버린다.

140. ‘초기 자극’이란 이미지[51] 가 동반되지 않는, 무의식적인 마음의 움직임이다. 그것은 마치 열쇠와 같아서(마음의 문을 죄악에게 열어준다), 그렇기 때문에 경험이 풍부한 이들은 그 움직임을 가장 초기에 잡아내려고 노력한다.

141. 생각의 형상들이 (굳어지는) 곳에는 (아마도) 유혹이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무고한(자발적인) 충동인 그 움직임은 형상을 동반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불에서 숯덩어리가 튀어나오듯(화상을 입었거나, 화상을 입을까 두려워서) 그 생각들에서 빠져나오기도 하고, 어떤 이는 불꽃이 타오를 때까지([52] ) 그 생각들을 물리치지 못하기도 한다.

142. “나는 원치 않는데도 그(생각)가 찾아온다”고 말하지 마라. 왜냐하면, 분명 이것이 아니라면, 그 원인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143. 칭찬을 갈구하는 자는 정욕에 사로잡혀 있으며, 닥친 슬픔을 한탄하는 자는 분명 위로를 사랑한다.

144. 저울의 접시들처럼, 쾌락을 사랑하는 자의 마음은 한쪽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때로는 울며 죄를 한탄하고, 때로는 이웃과 다투며 논쟁을 벌이면서 즐거움을 좇는다.

145. 모든 것을 시험해 보고 선한 것을 붙잡는 자는, 바로 그로 말미암아 모든 악에서도 분명히 멀리할 것이다(살전 5:21, 22).

146. 인내심이 깊은 사람은 지혜가 많으며(잠언 14:29), 지혜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147.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고서는 참된 지식이 있을 수 없다. 전자가 없으면 후자는 거짓이다.

148. 완고한 자에게는 가장 정교한 지식의 말씀도 유익하지 않으니, 두려움이 없기에 (그런 사람은) 회개의 수고를 스스로 감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149. 온유한 사람에게는 믿음의 말씀(믿음의 위로에 관한)이 어울리니, 그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시험하지 않으며, 잦은 범죄(하나님의 뜻이나 계명에 대한)로 인해 타격을 입지 않기 때문이다.

150. 강인한 사람을 허영심 때문에 책망하지 말고, 차라리 그에게 장차 닥칠 불명예의 무거움을 일깨워 주라. 이는 이 방법을 통해 분별 있는 사람이 (스스로) 책망을 더 수월하게 받아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151. 책망을 싫어하는 자는 분명 고의로 정욕에 빠져 있는 것이며, 책망을 좋아하는 자는 분명히 그 정욕과 그 유혹을 멀리한다.

152. 남의 교활함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지 마라. 그렇게 하면 그 교활함의 특징이 우리 안에도 새겨지기 때문이다.

153. 나쁜 말을 많이 듣고 나면, 그 말을 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에게 화를 내라. 교활한 자의 귀는 교활하고, 대답하는 자도 교활하기 때문이다[53] .

154. 우연히 헛소리를 일삼는 사람들의 무리에 끼게 된다면, 비록 현재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해도 과거에 관한 것이라면(자신도 예전에 그들과 수다를 떨었기 때문에) 그런 말들에 대해 스스로를 유죄로 여겨야 한다.

155. 누군가 위선적으로 너를 칭찬하는 것을 보게 된다면, 훗날 그로부터 비난을 받을 것을 예상하라.

156. 현재의 슬픔을 미래의 복으로 여기라. 그러면 게으름이 결코 네의 노력을 꺾지 못할 것이다.

157. 육체적(물질적) 자선을 베푼 사람을, 하나님 외의 다른 존재로서(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잊고) 선한 사람이라고 칭찬한다면, 나중에 그 사람은 너에게 악한 사람이 될 것이다.

158. 모든 선은 주님의 뜻에 따라 그분께로부터 비롯되며, 우리에게 그것을 가져다주는 이들은 선의 종들이다.

159. 선과 악이 얽혀 있는 상황을 평등한 마음으로 받아들여라.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네 삶에서 일어나는 비정상적인 사건들을 물리치실 것이다.

160. (의지하지 않은) 마음의 불균형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마음에도 변화를 일으킨다. 그리고 외부에서 일어나는 의지하지 않은 일들을 하나님께서는 의지하는 일과 조화를 이루게 하신다.

161. 감각적인 것(외부 상태)은 지적인 것(내적 질서)에서 비롯된 것으로, 하나님의 정해진 뜻에 따라 각자에게 마땅한 것을 가져다준다.

162. 마음이 쾌락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 차면, 해로운 생각과 말이 생겨난다. 마치 연기를 통해 (내부의) 물질이 타오르고 있음을 알 수 있듯이 말이다.

163. 마음으로 마음속에 머물러라. 그러면 유혹으로 인해 괴로워하지 않을 것이며, 그곳을 떠날 때는 네게 닥치는 것을 참아내라.

164. 유혹이 닥치지 않도록 기도하고, 닥쳤을 때는 남의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라.

165. 모든 탐욕에서 생각을 돌리면, 그때 비로소 마귀의 계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166. 어떻게 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마귀의 모든 계략을 본다고 말하는 자는, 스스로를 완전한 자로 내세우는 것이다.

167. 마음이 육체에 대한 염려에서 해방될 때, 그에 비례하여 원수들의 계략을 보게 된다.

168. 생각에 휩쓸린 자는 그 생각에 눈이 멀어 죄의 행위는 보지만, 그 원인은 볼 수 없다.

169. 어떤 이는 겉으로는 계명을 지키는 듯하지만, (내면적으로는) 정욕의 노예가 되어 악한 생각으로 선한 일을 망치기도 한다.

170. 자기 안에 죄의 씨앗을 품고(생각을 받아들인 뒤), “그것이 나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하지 말라. 네가 그것을 받아들인 만큼, 이미 그에 의해 패배한 것이기 때문이다.

171. 모든 탄생하는 것은 작게 시작되어 조금씩 자양분을 얻으며 자라난다.

172. 죄의 꾀는 얽히고설킨 그물과 같다. 그물에 부분적으로 얽혀서 이를 깨닫는 자는 곧 그물에 온전히 휘말리게 된다.

173. 네 원수들의 불행을 듣고자 하지 말라. 그런 말을 기꺼이 듣는 자는 (바로 그 자리에서) 자기 마음대로 행한 대가를 거두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174. 모든 슬픔이 사람들의 죄로 인해 닥친다고 생각하지 말라.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혹을 겪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한 “악인과 불의한 자들은 쫓겨날 것”(시편 36:28)이라고만 기록된 것이 아니라, 마찬가지로 “경건하게 살기를 원하는 자들은 그리스도 때문에 박해를 받을 것”(디모데후서 3:12)이라고도 기록되어 있다.

175. 슬픔이 닥쳤을 때, 쾌락에 대한 유혹을 경계하라. 이는 그것이 슬픔 속에서 위로를 약속하므로, 쉽게 그 유혹에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176. 어떤 이들은 감각적인 일들을 현명하게 처리하는 사람들을 분별력 있는 사람이라고 부르지만, 진정한 분별력 있는 사람은 자신의 욕망을 다스리는 사람이다.

177. 악한(정욕)을 근절하기 전에는 네 마음의 소리를 듣지 말라. 마음속에 무엇이 심겨져 있느냐에 따라, 마음은 그에 상응하는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178. 뱀들 중 어떤 것은 숲에서 발견되고, 어떤 것은 집 안으로 은밀히 파고들듯이, 정욕도 어떤 것은 마음속으로 상상되며(생각 속에서 이루어지고), 어떤 것은 활동적으로 작용하여(행위에 스며들어 그 안에 숨어 있다), 때로는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변하기도 한다.

179. 네 내면에 있는 것이 격렬하게 움직이며 침묵하는 마음을 정욕으로 이끌고 있음을 볼 때, 한때 마음이 스스로 그에 몰두하여 그것을 실행에 옮기고 마음에 심어 놓았음을 알아라.

180. 바람의 숨결 없이는 구름이 생기지 않듯이, 생각의 움직임 없이는 정욕도 생겨나지 않는다.

181. 성경에 따라 우리가 더 이상 육신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다면, 주님의 도움으로 이전에 우리 내면에 심겨진 것들(영적 정욕과 악한 습관들)도 쉽게 우리를 괴롭히지 않게 될 것이다.

182. 마음의 본질에 깊이 스며든 형상들은 순전히 생각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들보다 더 사악하고 강력하지만, 후자가 전자를 앞선다.

183.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스며들어 마음과 하나가 되어 마음에서 뿜어져 나와 우리를 사로잡는 악이 있는 반면, 매일 일어나는 사건들로 인해 마음속에서 싸워야 하는 악도 있다.

184. 하나님께서는 행위의 의도에 따라 그 가치를 평가하신다. “주님께서 네 마음에 따라 주시리라” (시편 19:5)라고 말씀하시며,

185. 성실하게 묵상에 머물지 않는 자는 경건함을 위한 육체적 수고조차 받아들이지 못한다.

186. 양심은 (하나님의 계명이 담긴) 자연스러운 책이다. 이를 부지런히 읽는 자는 신성한 보호를 경험하게 된다.

187. 진리를 위해(그것을 수호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수고를 감당하지 않는 자는, 원치 않는 훨씬 더 무거운 벌을 받게 될 것이다.

188.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힘닿는 대로 이를 행하는 자는 작은 수고를 통해 큰 수고를 피하게 될 것이다.

189. 기도와 인내 없이 유혹을 이기려 하는 자는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고, 오히려 그 속에 더 깊이 얽히게 될 것이다.

190. 주님께서는 그분의 계명 속에 감추어져 계시며, 그분을 찾는 자들에게는 (그 계명을 이행하는) 정도에 따라 나타나신다.

191. “나는 계명을 지켰으나, 그럼에도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고 말하지 말라. 주님을 진정으로 찾는 모든 이는 평화를 얻으리라.

192. 평안은 정욕으로부터의 해방이며, 성령의 역사 없이는 이를 얻을 수 없다.

193. 계명을 지키는 것과 덕을 행하는 것은 별개의 것이나, 둘은 서로 선을 행할 동기를 빌려준다.

194. 계명을 지키는 것은 명령받은 일을 행하는 것을 말하며, 덕은 (그 일을 통해) 행한 것이 진정으로 하나님께 기쁘시게 여겨질 때의 (마음의 태도)를 말한다.

195. 감각적인 부가 하나이지만 얻는 대상에 따라 매우 다양하듯이, 미덕도 하나이지만 그 행위는 다양하다.

196. 행함이 없으면서도 현명하게 행세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말을 늘어놓는 자는 불의로 부유해진 자이며, 성경에 따르면 “그의 수고는 낯선 집으로 들어간다”(잠언 5:10).

197. 성경은 모든 것이 금에 굴복한다고 말합니다(전도서 10, 19).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마음속의 삶(영적 삶)은 다스려질 것입니다.

198. 선한 양심은 기도로 얻어지고, 순수한 기도는 양심으로 얻어진다. 그것들은 본질상 서로를 필요로 한다.

199. 야곱은 요셉에게 얼룩무늬 옷을 지어 주었다. 주님께서는 온유한 자에게 진리를 깨닫게 하시니, “주님께서 온유한 자들을 그분의 길로 가르치시리라” (시편 24, 9)라고 기록된 대로이다.

200. 항상 자신의 힘닿는 대로 선을 행하고, 더 큰 일을 할 기회가 닥쳤을 때에는 더 작은 일로 눈을 돌리지 말라.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뒤로 물러선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누가복음 9:62) 하셨기 때문이다.

 

4.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자들에 대하여, 226[54]

1. 아래에 기록된 (장들)에서는 겉으로만 바르게 사는 자들의 믿음의 결함이, 진리를 정확히 믿고 올바르게 아는 자들에 의해 폭로된다.

2. 주님께서는 모든 계명이 반드시 지켜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그분의 피로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임을 보여 주시려고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행하였을지라도, ‘우리는 쓸모없는 종들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말하라” (누가복음 17:10). 그러므로 천국은 행위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신실한 종들을 위해 예비된 주님의 은혜입니다.

3. 종은 보상으로 자유를 요구하지 않고, 빚진 자처럼 주인을 기쁘게 하며, 은혜로서 자유를 기다립니다.

4. “그리스도께서 성경에 기록된 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고린도전서 15:3), 그리고 그분을 성실히 섬기는 이들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이는 “잘했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라. 네 주인의 기쁨에 들어가라” (마태복음 25:23)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5. 단순한 지식에만 의지하는 자는 아직 신실한 종이 아니요, 계명을 주신 그리스도께 순종함으로 믿는 자라야 비로소 신실한 종이라 할 수 있다.

6. 주님을 공경하는 자는 명령받은 바를 행하며, 만일 어떤 일에서 죄를 짓거나 그분의 말씀을 거역하면, 그로 인해 닥칠 결과를 마땅히 받아들인다.

7. 호기심이 많다면 부지런하기도 하라. 헛된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8. 뜻밖에도 우리에게 닥치는 유혹들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우리에게 근면함을 가르쳐 주고, 저절로 회개로 이끌어 줍니다.

9. 사람들에게 닥치는 슬픔은 그들 자신의 악한 행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로 이를 인내해 낸다면, 다시 선의 열매를 얻게 될 것이다.

10. 어떤 이들은 덕행으로 칭찬을 받고는 그 기쁨에 취하여, 그 허영의 달콤함이 (하늘로부터 온) 위로라고 생각했다. 또 다른 이들은 죄를 지적받고는 괴로워했는데, 이 유익한 괴로움을 (적의) 악의적인 작용으로 여겼다.

11. 자신의 공로를 내세워 열심이 부족한 자들보다 우월감을 느끼는 이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행실로 자신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확신하지만, 우리처럼 텅 빈 지식 하나에만 의지하여 지식이 부족한 자들을 깎아내리는 이들은 그들보다 훨씬 더 어리석은 자들이다.

12. 행함이 따르지 않는 지식은 비록 참된 것이라 할지라도 아직 확고하지 않다. 모든 것을 확고하게 하는 것은 행함이다.

13. 종종 행함에 대한 게으름으로 인해 (그 행함과 관련된) 지식마저 흐려지곤 한다. 왜냐하면 완전히 방치된 행위는, 그에 대한 기억마저 서서히 사라지게 되기 때문이다.

14. 성경은 우리가 이성으로 하나님을 알아가도록 권면하는데, 이는 행실로 그분께 바르게 섬기기 위함이다.

15. 우리가 계명을 명백히 이행할 때, 비록 그에 상응하여 주님으로부터 특별한 무언가를 얻기는 하지만, 그 유익은 우리 의지의 목적에 따라 받아들여진다.

16. 무언가를 하고자 그러나 할 수 없는 자는,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마치 이미 행한 것과 같다. 이는 선에 관해서나 악에 관해서나 모두 마찬가지이다.

17. 이성은 육체 없이도 많은 선과 악을 행하지만, 육체는 이성 없이는 그런 일을 할 수 없다. 이는 자유의 결단이 행동에 앞서기 때문이다.

18. 어떤 이들은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서도 올바르게 믿는다고 생각하고, 다른 이들은 계명을 지키면서 마땅한 보상으로 천국을 기대한다. 이쪽도 저쪽도 진리에 어긋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19. 주인은 종들에게 상을 줄 의무가 없으나, 올바르게 섬기지 않는 자들은 자유를 얻지 못한다.

20.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우리가 이제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분을 위해 산다”(고후 5:15)면, 우리가 죽을 때까지 그분을 섬기기로 서약한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어떻게 양자 됨을 마땅한 보상으로 여길 수 있겠는가?

21. 그리스도는 본성상 주님이시며, 구원이라는 가정의 질서 안에서 주님이시니, 이는 그분께서 우리를 창조하셨고, 죄로 인해 죽은 자들을 그분의 피로 속량하셨으며, 그렇게 믿는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이다.

22. 성경 말씀에서 “주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의 행위에 따라 갚으시리라” (시편 61:13)라는 말씀을 들을 때, 행위 자체가 지옥이나 천국에 합당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며, 그리스도께서 우리 창조주이자 구속주로서, 그분께 대한 불신이나 믿음의 행위에 따라 각자에게 갚아 주실 것임을 알아야 한다. 즉, 행위와 상을 단순히 비례시키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이다.

23. 우리는 거듭남의 세례를 받은 자로서, 보상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순결을 지키기 위해 선한 일을 행한다.

24. 우리가 본연의 힘으로 행하는 모든 선한 행위는 비록 그와 반대되는(나쁜 행위) 것에서 우리를 멀어지게 하기는 하지만, 은혜 없이는 우리에게 거룩함을 부여할 수 없다.

25. 절제하는 자는 탐식에서, 탐욕 없는 자는 탐욕에서, 침묵하는 자는 수다에서, 순결한 자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집착에서, 정결한 자는 음행에서, 있는 그대로에 만족하는 자는 재물 사랑에서, 온유한 자는 분노에서, 겸손한 이는 허영에서, 순종하는 이는 반항에서, 자기 반성하는 이는 위선에서 멀어지며, 마찬가지로 기도하는 이는 절망에서, 자발적으로 구걸하는 이는 과도한 탐욕에서, 고백하는 이는 배교에서, 순교자는 우상 숭배에서 멀어진다. 보라, 죽음에 이르기까지 행해지는 모든 미덕은 죄로부터 멀어지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며, 죄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본성에 따른 일이지, 왕국으로 보상받을 만한 것이 아니다.

26. 사람은 자신에게 본성적으로 주어진 것조차 간신히 보존할 뿐이지만,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통해 양자로 삼아 주십니다.

27. 특별한 계명이 있고, 보편적인(모든 것을 아우르는) 계명이 있다. 왜냐하면 한 곳에서는 가난한 자들에게 조금씩 나누어 주라고 명하고, 다른 곳에서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즉시 포기하라고 명령하기 때문이다.

28. (영적 나이로 볼 때) 젖먹이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은혜의 역사가 있는 반면, 진리와 닮은 (원수의) 악의의 역사도 있다. 속임수의 가능성이 있으니[55] 그러한 행위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거기에 진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저주하지도 말며, 모든 것을 희망을 가지고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그분은 그 양쪽 모두의 유익을 아시기 때문이다.

29. 마음의 바다를 건너고자 하는 자는 오래 참으며, 겸손하고 지혜로우며, 깨어 있고, 절제한다. 만일 이 네 가지를 갖추지 않고 (이 수행에) 뛰어들면, 마음만 괴로워할 뿐 건너갈 수는 없다.

30. 침묵은 모든 악을 잘라내는 것이다. 만일 침묵이 그 네 가지 미덕을 기도에 더한다면, (이러한 구조 속에서) 그것보다 더 좋은 도구나 무정함에 이르는 더 짧은 길은 없다.

31. 육신 없이 마음으로 침묵할 수 없으며, 침묵과 기도 없이는 그 둘 사이의 장벽을 무너뜨릴 수 없다.

32. 육신은 영을 탐내고, 영은 육신을 탐내나(갈 6:17), 영으로 행하는 자들은 육신의 욕망을 행하지 않는다.

33. 마음속으로 간구하지 않는 기도는 완전하지 않다. 산만하지 않고 간절히 부르짖는 마음을 주님께서 들으신다.

34. 산만하지 않고 기도하는 마음은 마음을 찢어 놓는다. “꺾이고 겸손한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멸하지 않으시리라”(시 50, 19)

35. 기도는 미덕이라 불리지만, 사실 그것은 미덕들의 어머니이며, 그리스도와 하나 됨을 통해 미덕들을 낳기 때문이다.

36. 기도와 선한 소망 없이 무엇을 하든지, 나중에 보면 해롭고 (적어도) 불완전한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37. “마지막 사람들이 첫째가 되고, 첫째 사람들이 마지막이 될 것”이라는 말씀을 들을 때(마태복음 19, 30), 이를 덕을 갖춘 자들과 사랑을 가진 자들에 대한 것으로 이해하라. 사랑은 순서상 덕들 중에서 마지막이지만, 그 가치에 있어서는 모든 덕 중에서 첫째이며, 자신보다 먼저 생겨난 모든 것을 뒤로 남겨두기 때문이다.

38. 낙담이 밀려올 때, 기도 중에든 원수의 온갖 공략에 시달릴 때든, 출애굽과 혹독한 고난을 떠올려 보라. 그러나 비록 그것이 유익한 일이라 할지라도, 외적인 일을 회상하는 것보다 기도와 소망으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매달리는 편이 낫다.

39. 어떤 미덕도 그 자체만으로는 우리 내면의 문을 열어주지 못한다(비유 224장 및 225장). 모든 미덕이 서로 일관되게 서로에게 의존해야만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이다.

40. 생각에 탐닉하는 자는 절제하지 못하는 자이다. 비록 그 생각이 유익할지라도, 희망보다 더 유익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41. 회개를 통해 정화되지 않는 한, 모든 죄는 죽음으로 이끄는 것이다. 그런 죄에 대해서는, 설령 성인이 다른 이를 위해 기도한다 해도 그 기도는 들리지 않을 것이다.

42. 올바르게 회개하는 자는 과거의 죄에 대한 자신의 수고를 변명하지 않고, 그 회개를 통해 하나님을 달래 드린다.

43. 우리 본성이 감당할 수 있는 모든 선한 일은 매일 행해야 마땅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과거에 저지른 악에 대해 하나님께 무엇을 갚을 수 있겠는가?

44. 오늘 우리가 아무리 덕을 쌓는다 해도, 그것은 단지 우리의 과거 게으름을 드러내는 것일 뿐, (그에 대한) 보답은 아니다.

45. 영적으로 통회하는 자(죄를 슬퍼하는 자)이면서도 육체적으로는 안식을 누리는 자(육체를 모든 면에서 만족시키는 자)는, 육체를 모든 면에서 거절하면서도 정신은 산만해지는 자와 같다.

46. 양쪽(즉, 육체적과 영적)에서 자의적으로 오는 고통은 서로를 부추긴다: 영적인 고통은 육체적인 고통을, 육체적인 고통은 영적인 고통을 부추기며, 이 둘이 분리될 때 그 고통은 더 심해지고 무거워진다.

47. 우리를 닥치는 일을 참아내고, 주님의 말씀대로 우리를 미워하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큰 미덕이다.

48. 위선 없는 사랑의 표징은 모욕을 용서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

49. 참된 깨달음 없이는 누구의 잘못도 진심으로 용서할 수 없으니, 깨달음은 각자에게 닥친 일이 바로 자신의 것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50. 주님을 위해 남겨둔 것 중에서 네가 잃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때가 되면 그것이 네게 몇 배로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51. 마음이 경건의 목적을 잊을 때, 명백한 덕행도 무용지물이 된다.

52. 모든 사람에게 악한 생각(타인의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분별력 부족)이 해롭다면, 엄격한 삶을 선택한 이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53. 행실로 네가 지혜로운 자임을 보여라. 행실보다 더 지혜로운 말은 없기 때문이다.

54. 경건함을 위한 수고(수행) 뒤에는 보호가 따른다. 이는 하나님의 법과 양심에서 알 수 있다.

55. 어떤 이는 생각을 품고도 깊이 따져보지 않은 채 그대로 간직했고, 또 다른 이는 그 생각을 받아들인 뒤 진리로 검증했다. 과연 그들 중 누가 더 경건하게 행동했는가?

56. 슬픔을 참아내고 자신의 재앙에 대해 (타인을) 탓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지혜이다.

57. 선을 행하면서도 보답을 바라는 자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따르는 것이다.

58. 죄를 지은 자는 그 죄에 상응하는 회개를 통해야만 보응을 피할 수 있다.

59. 어떤 이들은 우리가 성령의 은총을 실질적으로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선을 행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이는 틀린 말이다).

60. 자기 뜻대로 항상 자기 만족을 추구하는 자들은, 위로부터의 도움이 없다는 핑계를 대며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조차 거부한다.

61.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를 받은 자들에게는 이미 은총이 신비롭게 주어졌으나, 그 은총은 계명을 실천하는 정도에 따라 (가시적으로) 작용한다. 비록 이 은총이 은밀히 우리를 돕는 것을 멈추지 않지만, 선을 행할지 말지는 우리 자신의 의지에 달려 있다.

62. 첫째, 은혜는 경건하게 양심을 일깨우는데, 이로 인해 악인들조차 회개하여 하나님께 기쁨을 드렸다.

63. 또한 은혜는 이웃을 가르치는 일 속에 숨겨져 있기도 하며, 때로는 독서 중에 떠오르는 생각 뒤를 따라오기도 하여, (그 생각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운 귀결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진리로 인도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러한 경우나 이와 유사한 개별적인 상황에서 주어지는 이 재능을 숨기지 않는다면(즉, 은혜가 속삭이는 바를 따를 것이라면), 진정으로 주님의 기쁨에 들어갈 것이다(효력 있는 은혜를 누리게 될 것이다).

64. 계명을 행하기 전에 성령의 역사하심을 구하는(바라는) 사람은, 돈을 주고 산 노예와 같으니, 그는 막 사인된 직후, 대금과 함께 자유 증서도 서명해 주기를 바라는 자와 같다.

65. 외적인 재앙이 하나님의 진리에 따라 일어난다는 것을 깨달은 자는 주님을 찾음으로써 진리와 함께 지식을 얻었다.

66. 성경에 따라 “온 땅에 주님의 섭리가 임한다는 것을 마음에 새긴다면”(시편 104:7), 모든 사건은 너에게 하나님을 아는 데 있어 스승이 될 것이다.

67. 모든 사람은 자신의 내적 마음가짐에 따라 마땅히 받아야 할 대가를 맞이하지만, 외적인 우연의 사건들이 (각자의 내적 상태와) 어떻게 상응하는지에 대한 세부 사항은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

68. 사람들로부터 어떤 모욕을 당할 때, 서둘러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요한복음 5:44)이라는 보상을 마음에 떠올리라. 그리하면 모욕을 당할 때에도 슬픔이나 당황함 없이, 그리고 영광이 닥쳤을 때에도 신실하고 흠 없이 지낼 수 있을 것이다.

69. 하나님의 은혜로 백성들에게 칭찬을 받을 때, 주님의 시선에 (스스로 의도적으로) 허세나 겉치레를 섞지 말라. 그래야 모든 것이 변하지 않고, 네가 정반대의 결과(수치)를 겪지 않을 것이다.

70. 씨앗은 흙과 물 없이는 싹트지 않듯이, 사람은 자발적인 수고와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유익을 얻지 못한다.

71. 구름 없이는 비가 내릴 수 없고, 선한 양심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72. 비록 네가 매우 지혜롭다 하더라도 배우는 것을 거부하지 마라.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지혜보다 더 유익하기 때문이다.

73. 어떤 자기만족의 유혹에 이끌려 마음이 자기 수양의 자리에서 벗어나면, 마치 미끄러운 경사면을 따라 굴러 내려가는 매우 무거운 돌처럼, 그 기세를 멈출 수 없게 된다.

74. 경험이 없는 송아지가 풀밭에서 풀밭으로 뛰어다니다가 양쪽(오른쪽과 왼쪽)이 가파른 곳에 빠지듯이, 생각들에 의해(자신의 본성과 주의력에서) 조금씩 유혹당하는 영혼도 마찬가지이다.

75. 마음이 주님 안에서 굳건해져 영혼을 오랫동안 지속된 나쁜 습관에서 벗어나게 할 때, 마음은 마치 사형 집행인들처럼, 이리저리로 끌고 다니는 이성과 정욕에 의해 처형당하곤 한다.

76. 이익을 바라며 바다를 항해하는 이들이 기꺼이 뜨거운 햇볕을 견디듯이, 악을 미워하는 이들은 책망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저들은 바람과 싸우고, 이들은 정욕과 싸운다.

77. “겨울이나 안식일로 도망치는 것”(마태복음 24:20)이 육신에 병을, 영혼에 더러움(본질적으로는 굴욕)을 초래하듯이, 낡은 육신과 거룩하게 된 영혼(성직자의 모습) 안에서 정욕이 솟아오르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78. 주님만큼 선하시고 자비로우신 분은 아무도 없으나,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는 그분도 죄를 용서해 주지 않으신다.

79. 우리 중에는 죄를 슬퍼하면서도 그 원인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

80. 땅속을 파고 다니는 두더지는 눈이 멀어 별을 볼 수 없듯이, 일시적인 것에 대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는 영원한 것에 대해서도 믿을 수 없다.

81. 은혜 중의 은혜로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아는 지혜를 주셨는데, 이 지혜는 그분의 백성들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그것을 주신 분을 믿도록 가르친다.

82. 죄 많은 영혼이 닥친 비참함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그것으로 인해 깨달음을 얻지 못할 때), 천사들은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바빌론을 치료하였으나 낫지 못하였도다”(예레미야 51:9).

83. 참된 지식을 잊어버린 마음은 자신에게 해로운 것을 유익한 것처럼 여기며 사람들과 전쟁을 벌인다.

84. 불이 물 속에서 타오를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속에서는 악한 생각이 싹틔울 수 없다. 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누구나 근면하며, 자발적인 수고는 본질적으로 정욕의 적이기 때문이다.

85. 마음속에서 자발적인 행위로 길러진 정욕은, 비록 그 사람이 원하지 않더라도, 결국 그 정욕을 품은 자 안에서 강제로 솟아오른다.

86. 우리는 무의식적인 생각의 원인을 사랑한다. 그것이 어디서 비롯되는지 알기 때문이다. 반면 의식적인 생각의 경우, 당연히 그 대상 자체를 사랑한다.

87. 자만과 허세는 비방의 원인이며, 탐욕과 허영은 무자비와 위선의 원인이다.

88. 악마가 마음이 진심으로 기도하기 시작하는 것을 보게 되면, 그때 비로소 거대하고 교활한 유혹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사소한 미덕에 대해서는 큰 공격으로 방해하지 않을 것이다.

89. 생각의 경직은 사람의 편견을 드러내며, 그것을 신속히 근절하는 것은 투쟁과 저항을 의미한다.

90. 마음이 스스로 변화하며 들어가는 세 가지 정신적 영역이 있으니, 바로 자연스러운 영역, 초자연적인 영역, 그리고 반자연적인 영역이다. 그가 자신의 자연스러운 영역에 들어설 때, 비로소 자신이 악한 생각의 주범이자 정욕의 원인임을 깨닫고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하지만, 반자연적인 영역에 있을 때는 하나님의 진리를 잊고, 마치 자신을 부당하게 해치는 자들처럼 사람들과 싸우게 된다. 그리고 초자연적인 위치로 올라갈 때, 그는 사도가 지적한 “사랑, 기쁨, 평화” 등 성령의 열매를 자기 안에서 발견한다. (갈 5:22), 또한 육신의 염려를 우선시한다면 그곳에 머물 수 없음을 알고, 그곳에서 벗어나면 죄에 빠지고 그에 뒤따르는 비참한 우여곡절에 빠지게 됨을 안다. 비록 당장 그렇지는 않더라도, 하나님의 진리가 아시는 대로 때가 되면 그러할 것이다.

91. 각 사람의 지식은 그의 온유함, 겸손함, 그리고 사랑이 이를 뒷받침하는 만큼 진실해진다.

92. 정통적으로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은 신비롭게 모든 은총을 받게 되며, 그에 대한 가시적인 확증은 결국 계명을 이행하는 정도에 따라 얻게 된다.

93. 성실하게 이행되는 그리스도의 계명은 수많은 마음의 고통 속에서 위로도 베풀어 주시나, 어쨌든 그 둘 모두는 제때에 이루어진다.

94. 어떤 일을 하든지 기도를 잊지 마라.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95.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는 데 기도보다 더 강력한 것은 없으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 기도보다 더 유익한 것도 없다.

96. 모든 계명을 지키는 일은 기도에 달려 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보다 더 높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

97. 끊임없는 기도는 그 안에 머무는 자의 하나님 사랑을 나타내는 표징이며, 기도에 대한 무관심과 (기도 중) 딴생각은 (하나님 외의 무언가에 마음이 사로잡힌) 정욕의 표징이다.

98. 슬픔 없이 밤샘 기도를 드리고, 오래 참으며 기도하는 자는 성령의 역사하심에 참여하게 되나, 비록 이러한 행위를 하는 동안 슬픔을 느끼더라도 의지의 힘으로 기꺼이 인내하는 자도 곧 위에서 오는 중보를 받게 될 것이다.

99. 말씀하신 대로 어떤 계명은 다른 계명보다 높듯이, 믿음도 어떤 것은 다른 것보다 더 확고하다.

100. 사도의 말씀에 따르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롬 10:17), “믿음은 소망하는 것들의 증거”(히 11:1)이기도 하다.

101. 묻는 이들에게 말로 조언해 주는 것도 좋지만, 기도와 덕행으로 그들을 돕는 것이 더 낫다. 왜냐하면 이 후자를 통해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자는 이웃을 돕는 동시에, 자신도 도움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102. 호기심 많은 이에게 간결한 말로 조언하고 싶다면, 그에게 기도와 바른 믿음, 그리고 모든 슬픈 우연에 대한 인내를 가르쳐 주라. 왜냐하면 그 밖의 모든 선은 이를 통해 얻어지기 때문이다.

103. 어떤 일에 대해 온전히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은, 그 일로 인해 더 이상 이웃과 다투지 않을 것이다.

104. 성경에 따르면, 모든 불가피한 일은 자발적인 행위에 그 원인이 있다면, 그 누구도 사람 자신에게만큼 큰 적이 될 수 없다.

105. 모든 악의 우두머리는 무지이며, 그 다음은 불신이다.

106. 인내와 기도로 유혹을 피하라. 만일 이 방법 외에 유혹에 저항하려 한다면, 유혹은 더욱 거세게 덮쳐올 것이다.

107. 하나님 앞에서 온유한 자는 현자들 중의 현자요, 마음이 겸손한 자는 용사들 중의 용사니, 이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멍에를 지혜롭게 지고 있기 때문이다.

108. 기도 없이 우리가 말하거나 행하는 것은 나중에 보면 죄가 되거나 해로운 것으로 드러나며,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 행실로 인해 우리가 정죄받게 된다.

109. 행실과 말과 생각으로 볼 때 의로운 이는 오직 한 분뿐이지만, 믿음과 은혜와 회개를 통해 의로운 이들은 많습니다.

110. 회개하는 자에게 교만함이 어울리지 않듯이, 제멋대로 죄를 짓는 자에게는 겸손함이 있을 수 없다.

111. 겸손은 양심의 책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그분의 자비를 고백하는 것이다.

112. 물질적인 집이 공기를 위한 것이라면, 마음은 신성한 은혜를 위한 것이다. 물질을 얼마나 내보내느냐에 따라 그만큼 은혜가 들어오고, 얼마나 들여놓느냐에 따라 그만큼 은혜가 멀어진다.

113. 집안의 물질은 그릇과 음식이며, 마음의 물질은 허영과 자기 만족이다.

114. 마음의 너그러움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며, 마음의 좁음은 세속적인 걱정이다.

115. 성령의 은혜는 하나이며 변함이 없으나, 각 사람 안에서 그분의 뜻대로 역사하신다.

116. 비가 땅에 쏟아져 내려 식물들의 고유한 특성을 키우고 유지하듯이—달콤한 식물에는 단맛을, 떫은 식물에는 떫은맛을—그 은혜도 믿는 이들의 마음에 임하여, 그들 각자의 미덕에 따라 그들에게 영향을 주되, 그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117. 그리스도를 위해 굶주리는 이에게는 양식이 되고, 목마른 이에게는 달콤한 음료가 되며, 추위에 떠는 이에게는 옷이 되고, 수고하는 이에게는 안식이 되며, 기도하는 이에게는 (기도가 들렸다는) 응답이 되고, 우는 이에게는 위로가 된다.

118. 그러므로 성경에서 성령에 대해 “사도들 각 사람 위에 내려앉으셨다”(행 2:3)거나, “선지자 위에 임하셨다” (사무엘상 10:10), 혹은 그분이 역사하신다는(고린도전서 12:11)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모욕을 받기도 하고 (엡 4:30), 꺼뜨려지신다(살전 5:19), 화를 내신다(행 17:16)는 말이나, 어떤 이들은 성령의 첫 열매를 받았고(롬 8:23), 다른 이들은 성령으로 충만해 있다(행 2:4)는 사실을, 성령 안에 어떤 분열이나 변질, 혹은 변화가 있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되며, 우리가 앞서 말한 대로 그분은 변하지 않으시고, 불변하시며, 전능하시다고 믿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분의 역사하심에서도 그분은 변함없이 동일하시며, 각자에게 경건하게 마땅한 것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분은 마치 태양과 같아서 세례받은 자들에게 온전히 쏟아지셨으나, 우리 각자는 자신을 어둡게 하는 정욕을 미워하고 그 안에서 근절해 내는 만큼 빛을 받게 되며, 정욕을 사랑하는 정도에 따라 그만큼 어두워진다.

119. 정욕을 미워하는 자는 그 원인마저 잘라내지만, 그 원인에 호감을 품은 자는 원치 않더라도 정욕에 휘둘리게 된다.

120. 너희 안에 악한 생각이 작용할 때, 우리는 원죄를 탓하지 말고 우리 자신을 탓하자.

121. 생각의 뿌리는 우리 각자가 손과 발, 입으로 저지르는 명백한 죄들이다.

122. 정욕의 원인을 미워하는 사람은 마음속에서 정욕과 대화를 나눌 수 없다.

123. 수치를 경멸하는 자가 어찌 허영과 대화를 나누겠는가? 비하를 사랑하는 자가 어찌 불명예에 당황하겠는가? 상한 마음과 겸손한 마음을 가진 자가 어찌 육체의 욕망을 따르겠는가?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어떻게 일시적인 것을 염려하거나, 그것 때문에 전쟁을 벌이겠는가?

124. 누군가에게 배척당하더라도, 말이나 생각으로 그 배척하는 자와 다투지 않는 자는 참된 지식을 얻었으며 주님께 굳건한 믿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125. “인류의 아들들은 거짓된 척도로, 진실하지 아니하니라”(시편 61:10),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각자에게 그가 진정으로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지켜 주십니다.

126. 해치는 자에게 (해치는 것이) 과함이 아니며, 해침을 당하는 자에게 (참는 것이) 결핍이 아니라면, “사람은 헛되이 헤매며, 헛되이 분주히 움직이니라” (시편 38:7).

127. 누군가가 불명예로 인해 마음이 극도로 아파하는 것을 본다면, 그가 허영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으며, 이제 자신이 마음속에 뿌린 씨앗의 열매를 불만스럽게 거두고 있음을 알라.

128. 마땅한 것 이상으로 육체의 쾌락을 누린 자는, 그 과잉에 대한 대가로 백 배의 고통을 치르게 될 것이다.

129. 수도원장은 수련자에게 마땅한 말을 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그가 그 말을 듣지 않을 때에는 그로 인해 닥칠 재앙에 대해 경고해야 한다.

130. 누군가에게 모욕을 당하고도 가해자에게 마땅한 (보복)을 요구하지 않는 자는, 이 부분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며, 이 세상에서 백 배의 보상을 받고, 영생을 상속받으리라.

131. 하나님을 기억하는 일에는 경건함에 대한 마음의 아픔이 따르나, 하나님을 잊는 자는 누구나 자기만족에 빠지고 무감각해진다.

132. 무감정적인 사람은 슬퍼할 수 없다고 말하지 말라. 왜냐하면 자신에 대해 아니더라도 이웃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133. 원수가 무심코 저지른 죄에 대한 기록을 많이 모으면, 그때 빚진 자를 강요하여 무심코 같은 죄를 다시 짓게 하며, 죄의 법을 악용하여 축복인 양 행한다.

134. 끊임없이 하나님을 기억하고자 한다면, 불행한 일들을 마치 불의한 것처럼 배척하지 말고, 의롭게 네게 닥치는 것으로 받아들이며 참아내라. 왜냐하면 (그런 마음가짐으로) 인내하는 것은 매번 (하나님에 대한) 기억을 일깨우지만, (그렇게 인내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마음속의 깊은 묵상을 약화시키고(하나님을 향한 열망을 끊어 땅으로 돌리게 하며), (무거운 짐을 내려놓았다는) 기쁨을 통해 망각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135. 만일 주님께서 네 죄를 덮어 주시기를 원한다면, 네게 어떤 미덕이 있더라도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지 말라. 우리가 우리의 미덕을 대하는 방식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하시기 때문이다.

136. 미덕을 숨겼다고 해서, 마치 선한 일을 한 사람처럼 마음속으로 자만하지 마라. 진리는 선한 것을 숨길 뿐만 아니라, 금기된 것에 대해서도 전혀 생각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137. 누군가에게 선행을 베풀었을 때 기뻐하지 말고, 그 후 (은혜를 받은 자로부터) 닥치는 반항을 원한 없이 참아냈을 때 기뻐하라. 밤이 낮을 따르듯이, 악도 선을 따르기 때문이다.

138. 허영심, 탐욕, 그리고 쾌락 추구(자기 만족)는, 먼저 하나님의 두려움 앞에서 스스로 무너지지 않는 한, 선행을 더럽히지 않고는 두지 않을 것이다.

139. 피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시련 속에는 하나님의 자비가 숨겨져 있는데, 이는 그 시련을 견디는 자들을 회개로 이끌고 영원한 고통에서 구원해 준다.

140. 어떤 이들은 계명을 지키며, 이것이 (하나님의 정의의) 저울에서 자신의 죄에 대한 상쇄 요소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다른 이들은 이를 통해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신 분을 달래고자 한다. 과연 이 중 누구의 생각이 옳은가?

141. 지옥에 대한 두려움과 천국에 대한 사랑은 고난 속에서 인내를 주게 한다. 그리고 이는 우리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을 인도하시는 분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142. 미래를 믿는 자는 망설임 없이(혹은 논쟁 없이) 이 세상의 쾌락에서 멀어지지만, 믿지 않는 자는 자기만족에 빠져 무감각해진다.

143. 가난한 사람이 수단이 없는데 어떻게 쾌락에 빠질 수 있겠냐고 말하지 마라. 생각 속에서 쾌락을 탐하는 것이 (행동으로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144. 행위에 대한 지식(실천적 분별력)과 진리에 대한 깨달음은 서로 다르다. 해가 달보다 얼마나 뛰어난지, 그만큼 후자가 전자보다 더 유익하다.

145. 행위에 대한 지식(실천적 분별력)은 계명을 이행함에 따라 늘어나고, 진리에 대한 깨달음은 그리스도를 신뢰함에 따라 깊어진다.

146. 구원받고 진리를 깨닫고자 한다면, 항상 감각적인 것을 초월하여 높이 올라가려 애쓰고, 소망을 가지고 유일하신 하나님께 굳게 매달려야 한다. 이처럼 자신을 내면으로 향하게 하여, 생각의 유혹으로 너와 싸움을 벌이는 원리들과 권세들을 마주하게 될 것이나, 기도로 그들을 이기고 신실함을 지키면, 다가올 진노로부터 너를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얻게 될 것이다.

147. “우리의 싸움은 악의 영들과의 싸움이다”(에페소서 6,12)라고 말씀하신 성 바오로가 신비롭게 전한 말씀을 이해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비유(루카 18,1)도 깨달을 것이다.

148. 율법은 비유적으로 6일 동안 일하고, 일곱째 날에는 일을 쉬라고 명하고 있다. 영혼의 일은 재산을 통해 선을 행하는 것, 즉 선행을 하는 데 있으며, 그 휴식, 즉 안식은 주님의 말씀대로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그러한 탐욕 없음으로 마음을 평온하게 한 뒤, 마음속의 소망 안에서 기뻐하는 데 있다. 바로 이 안식에 성 바오로 사도께서도 우리가 부지런히 들어가기를 권면하시며, “그 안식에 들어가도록 힘쓰자”(히브리서 4,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49. 우리가 이렇게 말한 것은 미래를 배제하거나 모든 보상이 이 땅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마음속에 성령의 참된 은총을 받아들여야 하며, 그 후에 그에 따라 천국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단순히 암시하는 것)입니다. 이를 밝히시며 주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너희 안에 있다”(눅 17,21). 사도도 마찬가지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 (히브리서 11:1)고 말했으며, 또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지 스스로 시험해 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알지 못하느냐? 혹시 너희가 어리석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린도후서 13:5)고도 말씀하셨습니다.

150. 진리를 깨달은 자는 고통스러운 시련을 거부하지 않는다. 이는 그러한 시련이 사람을 하나님에 대한 경외로 이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151. 과거의 죄들이 (자세히) 떠올라 기억될 때, 그것은 신실한 자를 해친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슬픔을 동반하며 마음속에 다시 떠오르면 소망에서 멀어지게 하고, 슬픔 없이 상상될 때는 다시 옛날의 더러움을 마음속에 심어주기 때문이다.

152. 마음이 자기 부정을 통해 의심할 여지 없는 소망을 받아들일 때, 원수는 고백을 구실로 마치 그림처럼 그 앞에 과거의 죄들을 그려내어, 하나님의 은혜로 이미 잊혀진 정욕들을 다시 불태우고, 은밀히 사람을 해치려 한다. 왜냐하면 그런 경우, 이미 밝아지고 정욕을 미워하게 된 (마음)도 필연적으로 어두워져, 저지른 일들로 인해 혼란에 빠지게 된다. 만약 그가 여전히 안개에 휩싸여 정욕에 동조하고 있다면, 온갖 방식으로 (그런 생각에) 빠져들고 그 정욕의 대상들과 열정적으로 대화하기 시작할 것이니, 그러한 회상은 고백이 아니라 정욕에 사로잡히는 것이 될 것이다.

153. 하나님께 흠잡을 데 없는 고백을 드리고자 한다면, 과거의 자신의 욕망을 겉모습대로(세부적으로) 떠올리지 말고, 그 결과를 용감하게 견뎌내라.

154. 무거운 슬픔은 과거에 저지른 죄들로 인해 닥치며, 각 죄에 상응하는 것을 동반한다.

155. 진리를 깨달은 지혜로운 이는, 자신이 저지른 일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닥치는 일을 인내함으로써 하나님께 고백한다.

156. 죄와 불명예에 대한 마음의 아픔을 떨쳐 버리고, 다른 미덕을 통해 회개하겠다고 약속하지 마라. 자만과 무감각은 대개 죄를 기꺼이 섬기기 때문이다.

157. 미덕이 대개 고통스러운 괴로움과 불명예에서 태어나듯이, 죄는 허영과 쾌락에서 태어난다.

158. 모든 육체적 쾌락은 앞서 있었던 (육체의) 안식에서 비롯되며, 이 안식을 초래하는 것은 불신이다.

159. 죄 아래 있는 자는 육신의 계략을 혼자서 이겨낼 수 없으니, 이는 그의 지체 속에 끊임없이 타오르는 불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160. 정욕에 사로잡힌 자는 기도와 순종 안에 머물러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의 도움으로, 혹은 그것들 덕분에) 비로소 유혹과 싸울 수 있기 때문이다.

161. 순종과 기도로 자신의 욕망과 싸우는 자는 능숙한 투사로서, 감각적인 것에서 멀어짐으로써 마음속의 투쟁을 분명히 드러내는 자이다.

162.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과 일치시키지 않는 자는 자신의 계획에서 비틀거리며 원수들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

163. 서로를 사랑하는 두 죄인을 보게 되면, 그들이 서로의 방종에 힘을 보태고 있음을 알아두라.

164. 교만한 자와 허영심 많은 자는 서로 잘 화해한다. 왜냐하면 전자는 자기 앞에 노예처럼 엎드리는 허영심 많은 자를 칭찬하고, 후자는 자주 자신을 칭찬해 주는 교만한 자를 높이 평가하기 때문이다.

165. 하나님을 사랑하는 청취자는 두 경우 모두에서 유익을 얻는다. 그의 미덕을 칭찬할 때면 그는 그 미덕을 더욱 열성적으로 실천하게 되고, 그의 악행을 지적받을 때면 회개하도록 이끌린다. 우리는 성취한 바에 따라 삶을 살아가야 하며, 그 삶에 따라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야 한다.

166. 물론 가장 중요한 덕을 지키고, 세부적인 일들에 대해 걱정하지도, 기도하지도 않으며, 오직 주님의 말씀대로(마태복음 6:33)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각 필요 사항에 대해서도 여전히 염려한다면, 그것들 하나하나에 대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기도 없이 무언가를 행하거나 무언가를 염려하는 사람은 자신의 일을 성공적으로 끝까지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나 없이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요한복음 15:5)는 뜻입니다.

167. 기도의 계명을 소홀히 여기는 자는 가장 부적절한 불순종에 빠지게 되는데, 그중 하나가 마치 죄수처럼 그를 다른 불순종으로 이끌어 간다.

168. 미래의 복에 대한 희망으로 용기를 얻어 현재의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는 진리의 깨달음을 얻었으며, 분노와 슬픔에서 편안히 벗어날 것이다.

169. 진리를 위해 모욕과 치욕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는 십자가를 지고 멍에를 메고 사도들의 길을 걷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없이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려는 자는 지성에 현혹되어 마귀의 유혹과 올가미에 빠지게 된다.

170. 투쟁하는 자에게 이유 없는 생각도, 생각 없는 이유도 결코 이길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둘 중 하나를 따로 버리면,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하나에 의해 다시 둘 모두에 빠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171. 어떤 해악이나 모욕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사람들과 싸우는 자는, 이 세상에서 지나치게 많은 고통을 겪거나, 내세에서 자비 없이 괴로움을 당하게 될 것이다.

172. 모든 짐을 떨쳐버리고자 하는 자는 기도를 통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야 하며, 그분께 대한 확고한 소망을 지혜롭게 간직하면서, 가능한 한 육체적인 염려를 경시해야 한다.

173. 마귀는 사람이 필요 없이 육체적인 일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것을 보면, 먼저 지식이라는 전리품을 빼앗고(마음을 약탈하며), 그 후(이 일에 성공하면) 하나님에 대한 소망마저 머리와 같이 잘라 버린다.

174. 순수한 기도의 성소에 도달했을 때, 이 시간에는 원수가 심어 놓은 사물에 대한 생각을 받아들이지 말라. 그래야 더 나은 것을 잃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래에 갇혀 있는 그를 기도의 화살로 쏴서 쓰러뜨리는 것이, 그가 하찮은 것들을 우리 주의를 끌며 기도를 방해하려 할 때 그와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다.

175. 사물에 대한 지식은 유혹과 낙담의 순간에는 사람에게 유익할 수 있으나, 기도 중에는 대개 해가 된다.

176. 만일 네가 주님에 대해 가르칠 사명을 받았으나 사람들이 네 말을 듣지 않는다면, 마음속으로 이를 슬퍼하되 겉으로는 화를 내지 마라. 그렇게 슬퍼함으로 인해 너는 네 말을 듣지 않는 자와 함께 정죄받지 않겠지만, 겉으로 화를 내면 여전히 같은 유혹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177. 대화 중에 참석자들에게 필요하고 유익한 것을 숨기지 말고, 즐거운 말만 직설적으로 전하며, 가혹한(엄격한) 말은 수수께끼처럼 표현하라.

178. 네게 복종하지 않는 사람을 면전에서 잘못을 지적하지 말라. 이는 조언이라기보다 권위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이다.

179. 많은 사람에게 일반적으로 전해지는 말은 모두에게 유익하지만, 각자에게는 양심이 그 사람만의 길을 알려준다.

180. 옳은 말을 하는 자는, 말해야 할 바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처럼, 스스로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진리는 말하는 자의 일이 아니라, (그 안에서 또는 그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이다.

181. 네게 복종하겠다고 서약하지 않은 자들이 진리에 반대할 때, 그들과 다투지 말라. 그래야 (교훈 대신) 오직 원한만 생기지 않을 것이니, 성경에 기록된 대로이다(참조: 딤후 2:23).

182. 수련자가 마땅치 않은 곳에서 반박할 때 이를 묵과하는 자는, 그 일에서 그를 유혹하며, (전반적으로) 순종의 서약을 소홀히 하도록 부추기는 것이다.

183. 누구든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죄를 짓는 자를 훈계하고 지도하는 자는, 그 잘못과 정반대되는 미덕을 얻게 된다. 그러나 원한을 품고 악의를 품은 채 비난하는 자는, 영적 법칙에 따라 그와 똑같은 정욕에 빠지게 된다.

184. 율법을 잘 가르치는 자는 율법 제정자를 경외하며, 그분을 경외함으로 인해 모든 악을 피한다.

185. 두 얼굴을 갖지 말라. 즉, 말로는 한 가지이면서 양심 속으로는 다른 마음을 품지 말라. 왜냐하면 성경은 그런 자를 맹세하게 하기 때문이다(예수 시라 28, 15).

186. 어떤 이는 진실을 말하여 미친 자들에게 미움을 받고, 어떤 이는 위선을 부려 사랑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보응 중 어느 것도 오래가지 않는다. 때가 되면 주님께서 각자에게 마땅한 보응을 내리실 것이다.

187. 장차 닥칠 고통을 피하고자 하는 자는 현재의 고통을 기꺼이 견뎌야 한다. 왜냐하면 이런 식으로 마음속으로 하나를 다른 것으로 바꾸어 생각함으로써, 그는 작은 슬픔을 통해 큰 고통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188. 자만하는 말을 삼가고 오만함을 품지 않도록 하라. 그래야 그로 인해 네가 반대되는 일을 저지르는 일이 없으리라. 선한 일은 한 사람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보시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189.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행위에 따라 우리에게 합당한 몫을 나누어 주시듯이, 생각과 자발적인 의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나누어 주신다.

190. 무의식적인 생각은 앞서 저지른 죄에서 비롯되고, 자발적인 생각은 제멋대로인 의지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후자가 전자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191. 마음에서 우러나지 않는 악한 생각에는 슬픔이 따르므로 금세 사라지지만, 마음에서 우러나는 악한 생각에는 기쁨이 따르므로 그것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192. 자기만족하는 자는 책망과 결핍으로 인해 슬퍼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칭찬과 풍요로움으로 인해 슬퍼한다.

193. 하나님의 심판을 알지 못하는 자는 마음속으로 양쪽에 급류가 있는 길을 걷고, 어떤 바람이 불어도 쉽게 휩쓸려 넘어진다. 칭찬을 받으면 자만하고, 비난을 받으면 화를 내며, 풍요로움 속에서 잔치를 벌일 때는 정욕에 빠지고, 궁핍을 겪을 때는 울고, 알 때면 허세를 부리며, 모를 때면 아는 척하고, 부유할 때는 거만해지며, 가난할 때는 위선을 부리고, 배부르면 건방져지며, 금식할 때는 허영을 부리고, 자신을 책망하는 자들과는 다투며, 변명하는 자들을 어리석은 자처럼 여긴다.

194. 누군가 그리스도의 은혜로 진리에 대한 지식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얻기 전까지는, 그 사람은 정욕뿐만 아니라 외부의 우연한 사건들로부터도 심한 상처를 입게 된다.

195. 어떤 난해한(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때, 그 문제에 대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를 찾으라. 그러면 반드시 그 문제에 유익한 해결책을 찾게 될 것이다.

196.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에는 온 피조물이 협력하고,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일에는 온 피조물이 반대한다.

197. 어두운 우연에 저항하는 자는, 스스로도 모르게 하나님의 명령에 대항하는 것이며, 이를 참된 지혜로 받아들이는 자는, 성경에 따라 주님을 인내하는 것이다.

198. 유혹이 닥쳤을 때, 그것이 어디서, 왜 찾아왔는지 따지지 말고, 감사하고 슬픔 없이, 원한을 품지 않고 그것을 견뎌내는 데 힘쓰라.

199. 타인의 악은 우리가 그것을 나쁜 생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죄를 더하지 않는다.

200. 유혹 없이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사람이 없다면, 모든 슬픈 일마다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201. 베드로가 밤의 그물을 버리지 않았다면 낮의 그물도 얻지 못했을 것이며, 바울이 육체적으로 눈이 멀지 않았다면 영적으로도 눈을 뜨지 못했을 것이며, 스데반이 모독자라는 누명을 쓰지 않았다면 하늘이 그에게 열리지 않았을 것이고 그는 하나님을 뵙지 못했을 것이다.

202. 하나님 뜻대로 행하는 것을 미덕이라 부르는 것처럼, 뜻밖의 슬픔도 시련이라 불린다.

203.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으니, 즉 그의 유익을 위해 그에게 슬픔을 보내신 것이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기 위함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존재하기 전부터 모든 것을 아시는 분께서 이미 그를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오직 그에게 완전한 믿음(그 믿음을 깨닫고 그 안에서 확고히 서게 함)의 계기를 주기 위함이었다.

204. 모든 슬픔은 우리 의지의 성향이 오른쪽으로 기울어 있는지 왼쪽으로 기울어 있는지를 드러낸다. 우발적인 슬픔이 유혹이라 불리는 이유는, 그것을 겪는 자의 내면 깊은 곳에 숨겨진 성향을 시험에 들게 하기 때문이다.

205.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우리로 하여금 죄와 싸우게 하며, 우리가 싸울 때 하나님의 은혜가 그 죄를 근절한다.

206. 지혜는 단지 진리를 자연스러운 순서대로 아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해치는 자들에게서 오는 악을 마치 자신의 것(마땅히 받아야 할 것)인 양 참아내는 데에도 있다. ( 의 경험에 따르면) 첫 번째 지식에만 머무른 자들은 교만으로 치솟았으나, 두 번째 지식에 이른 자들은 겸손한 지혜를 얻었다.

207. 악한 생각이 너를 괴롭히지 않게 하려면, 마음의 겸손과 육체의 고통을 가져야 하며, 이는 부분적으로가 아니라 언제나, 어디서나, 어떤 일에서나 그러해야 한다.

208. 자발적으로 슬픔으로 자신을 단련하는 자에게는 무의식적인 생각이 지배하지 않을 것이며, 첫 번째 것을 스스로 감당하지 않는 자는 두 번째 것에 포로가 되기를 원치 않더라도 결국 포로가 된다.

209. 모욕을 당하여 네 속과 네 마음이 격앙될 때, 이전에 내면에 잠들어 있던 것이 깨어나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슬퍼하지 말고, 기뻐하며 내면에서 솟아난 생각들을 떨쳐내라. 그 생각들이 첫 번째 자극과 함께 소멸될 때, 그 밑에 깔려 있고 그것들을 움직이게 하는 악도 대개 함께 소멸된다는 것을 알라. 그러나 생각들이 굳어지고 자주 나타나도록 내버려 둔다면, 악도 대개 커지게 된다.

210. 마음이 찢어지지 않고서는 악을 완전히 떨쳐낼 수 없는데, 마음은 세 가지 절제, 즉 잠과 음식, 육체의 안식을 통해 찢어지게 된다. 왜냐하면 이들에 대한 만족은 (충족된) 자기 방종을 키우고, 악한 생각을 번식시키며, 기도하기를 꺼리게 하고 마땅한 순종을 다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211. 형제들을 다스릴 임무를 맡았다면, 네 지위를 지키고 (어떤 이들의) 반대 때문에 마땅히 말하거나 명령해야 할 것을 묵과하지 말라. 무엇을 순종하든, 그들의 덕행으로 인해 상을 받을 것이며, 순종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들을 용서하라. 그러면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누가복음 6:37)라고 말씀하신 분으로부터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을 것이다.

212. 삶의 일상적인 사건들은 장터와 같다. 장사하는 법을 아는 사람은 이익을 얻고, 모르는 사람은 손해를 본다.

213. 첫 말부터 네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논쟁으로 강요하지 말고, 차라리 그가 거부한 그 이익을 네 편으로 끌어들이는 편이 낫다. 왜냐하면 악의를 품지 않는 것이 그 사람의 올바른 행동보다 네게 더 유익하기 때문이다.

214. 한 사람(불순종으로, 혹은 다른 이유로 스스로를 해친 자)의 타락이 많은 이들에게 퍼질 때, 그때는 오래 참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많은 이가 구원받게 하라”(고린도전서 10:33). 왜냐하면 공동의 미덕이 개인의 미덕보다 더 유익하기 때문이다.

215. 만일 누군가 어떤 죄에 빠졌는데 그 죄의 중대함에 걸맞게 슬퍼하지 않는다면, 쉽게 다시 그 같은 (원수의) 올가미에 빠지게 될 것이다.

216. 암사자가 송아지에게 우호적으로 다가가지 않는 것처럼, 뻔뻔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슬픔”(고린도후서 7:10) 받아들이지 않는다.

217. 양이 새끼를 낳기 위해 늑대와 짝을 이루지 않는 것처럼, 마음의 아픔은 미덕을 잉태하기 위해 포만감과 짝을 이루지 않는다.

218. 누구도 먼저 그 원인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향한 아픔과 슬픔을 품을 수 없다.

219.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책망은 슬픔을 받아들이지만(동반자로 삼지만), 절제와 깨어 있음은 아픔과 조화를 이룬다.

220. 성경의 계명과 가르침으로 깨우치지 못하는 자는 “말 채찍과 가시 뿔”로 채찍질해야 한다(잠언 26:3)[56] , 만일 그가 이것마저 거부한다면, “그 턱을 고삐와 재갈로 묶으리라”(시편 31:9).

221. 작은 유혹에도 쉽게 굴복하는 자는 큰 유혹에 어쩔 수 없이 사로잡히게 되며, 작은 유혹을 경멸하는 자는 주님을 거역하여 큰 유혹에도 맞서게 될 것이다.

222. 미덕을 자랑하는 자를 책망으로 고치려 하지 말라. 왜냐하면 한 사람이 허세를 부리는 자이면서 동시에 진리를 사랑하는 자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223. 그리스도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자비와 진리와 지혜를 드러내며, 기꺼이 그 말씀을 듣는 이들의 영혼에 그 힘을 귀를 통해 심어 주신다. 그러므로 자비롭지 않고 의롭지 못한 자들은, 기꺼이 그 말씀을 듣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지극한 지혜를 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지혜를 가르치시는 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러므로 우리도 기꺼이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계명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며, 나도 그를 사랑하고 내 자신을 그에게 나타내리라” (요한복음 14, 15, 21). 보라, 그분이 계명 속에 자신의 현현을 어떻게 감추셨는지! 그러나 모든 계명 중에서 가장 포괄적인 것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며, 이는 모든 물질적인 것에서 벗어나 생각의 고요함 속에서 솟아나는 것이다.

224. 이를 아시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내일 먹을 것을 염려하지 말라”(마태복음 6,34)고 명하십니다. 바로 그렇게 해야 합니다. 물질적인 것과 그에 대한 염려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가 어떻게 악한 생각을 떨쳐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생각에 사로잡힌 자가, 그 아래 숨겨진 본질적(근본적)인 죄, 즉 영혼의 어둠과 안개이며, 모든 사악한 생각과 욕망의 근원이 되는 것을 보게 될 때, 마귀가 유혹을 통해 강제로 강요하지 않으면서 그 죄를 지적하면, 사람이 허영과 자기 만족에 이끌려 그 죄와 결탁한다면? 비록 이성으로 판단하여 그 죄를 저지르지는 않았더라도, 그 움직임에 매료되어 그 죄와 한 몸이 되었다면 말이다. 만약 그가 이 가장 큰 죄를 언제, 어떻게 인식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에 대해 기도하여 그 죄에서 정화될 수 있겠는가? 정화되지 않은 채로, 어떻게 순수한 본성의 자리를 찾을 수 있겠는가(에스겔 37:27)? 이것을 찾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리스도의 내적 성전을 볼 수 있겠는가? – 우리가 선지자와 복음서, 사도들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의 집이라면 말이다(스가랴 2:10, 요한복음 14:23, 고린도전서 3:16).

225. 그러므로 앞서 언급한 순서에 따라 이 성전을 찾기에 힘쓰고, 기도하며 문을 두드리며(마태복음 7:7), 여기에서든, 혹은 나갈 때든 주님께서 그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시기를 바라며, 우리가 다시 깨어날 때 “너희가 어디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누가복음 13:25)라고 말씀하지 않으시도록. 우리는 단지 구하고 받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지키기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이들은 받은 후에도 그것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앞서 언급된 주제들에 대한 단순한 지식이나, 심지어 (그것들에 관한) 우연한 경험조차도, 늦게 배우기 시작한 사람이나 또는 젊은이들도 가질 수 있겠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히 이를 실천하는 것은 경건하고 경험이 풍부한 장로들조차도 드물며, 그들은 종종 부주의로 인해 그것을 잃었다가 나중에 다시 자발적인 노력으로 찾아내고 회복하곤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그 실천을 완전히 익혀, 그것이 우리 안에서 결코 빼앗길 수 없게 될 때까지 끊임없이 같은 일을 행합시다.

226. 우리는 수많은 것 중에서 영적 율법의 의를 이루는 몇 가지를 알게 되었으니, 이를 끊임없이 배우고 실천해야 할 것을 위대한 시편 기자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주 찬양하는 이들에게 권면하고 있다. 그분께는 영광과 권능과 경배가 지금과 영원토록 돌려져야 한다. 아멘.

 

아바 에바그리우스 폰티우스

 

아바 에바그리우스의 생애에 관한 기록

에바그리우스 폰티아니누스, 즉 은둔 수도사이자 아바에 대해서는 4세기 중반 무렵, 폰타 에우크시노스 근처의 이보레라는 도시에서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습니다(성 바실리오 수도원은 이 도시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습니다). 그의 가문이나 재능 덕분에 당시 번성하던 위대한 성자들, 즉 바실리우스 대성인, 그레고리우스 니스쿠스, 그리고 그레고리우스 신학자. 그들의 지도 아래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믿음과 삶에 대한 영적 성숙과 지식을 쌓아가며 성장했다. 바실리우스 대성인은 그를 독서자로 임명했고, 그레고리우스 니스쿠스는 그를 집사로 서품한 뒤 제2차 공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플에 머물게 했다. 그의 순결을 위협하는 한 가지 사정으로 인해 그는 콘스탄티노플을 떠나야만 했다. 그리하여 그는 예루살렘에서 잠시 머문 뒤 이집트로 향했고, 그곳에서 처음에는 니트리아에서, 그다음에는 은둔처에서, 마지막으로 스키테에서 당시의 위대한 아바들과 함께 지도 아래에서 수도 생활을 이어갔다. 그의 제자 팔라디우스는 소크라테스를 인용하여 『라우사이케』 73장에서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저명한 집사이자 사도적 삶을 살았던 에바그리우스의 행적을 침묵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여겼으며, 오히려 이를 글로 남기는 것이 옳다고 판단하여, 독자들에게 교훈을 주고 우리 구세주의 은혜를 찬양하기 위해, 먼저 그가 어떻게 수도 생활에 들어섰는지, 그리고 어떻게 자신의 서원에 걸맞게 수고하며 54년 동안 광야에서 생을 마감했는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성경의 말씀대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 마땅한 세월을 다 채웠으니, 그의 영혼이 주님께 기쁨이 되었음이라’.” 그는 본래 폰티우스 출신으로, 이보라 시의 한 장로의 아들이었으며, 성 바실리오 케사리아 주교에 의해 아르고스 교회의 독서자로 임명되었다. 성 바실리오 주교가 세상을 떠난 후, 사도적 영광을 얻은 바실리오 주교의 형제이자 가장 지혜롭고, 가장 냉철하며, 학식으로 매우 저명한 성 그레고리오 니스 주교는 에바그리오의 재능을 눈여겨보고 그를 집사로 서품했다. 그 후 그와 함께 콘스탄티노플의 대공의회에 참석하게 된 성 그레고리우스 주교는, 그를 모든 이단을 반박하는 데 가장 능숙한 인물로서 복자 네크타리우스 주교 곁에 남겨두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 대도시에서 모든 이단을 말로 용감하게 물리치며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우연히도 온 도시에서 탁월한 품행으로 존경받던 이 남자는, 나중에 이미 그 유혹에서 벗어난 후 우리에게 직접 이야기해 주었듯이, 한 여인에 대한 격렬한 사랑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 여인도 그를 사랑하게 되었는데, 그녀는 명문가 출신이었다. 에바그리우스는 하나님을 경외했고, 자신의 양심도 부끄러워했으며, 에서 악덕의 추악함과 이단자들의 조롱을 떠올리며, 정열에 불타 그를 죄로 끌어들이려 애쓰는 그 여인의 의도를 막아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그는 그녀에게서 멀어지고 싶었지만, 호의라는 얽매임에 갇혀 그럴 수 없었다. 그가 기도로 죄를 저지르는 것을 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천사가 교구장의 군복을 입은 모습으로 환상 중에 그에게 나타났고, 그를 붙잡아 마치 재판소로 데려가듯 이끌고 감옥에 던져 넣으며, 목에 쇠족쇄를 채우고 양손을 쇠사슬로 묶었다. 그를 찾아온 사람들은 투옥된 이유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지만, 양심의 가책을 받던 그는 그 일 때문에 이런 처지에 놓였다고 생각했고, 그 여자의 남편이 판사에게 그 일을 고발했다고 짐작했다. 게다가 그곳에서 다른 사람들도 똑같은 범죄로 재판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로 인해 그는 극심한 당혹감과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때 천사가 그의 한 진실한 친구의 모습을 하고 마치 그를 문병하러 온 것처럼 나타났다. 그는 마치 친구가 수치스러운 족쇄를 차고 마흔 명의 범죄자들 사이에 갇혀 있다는 사실에 지극히 충격을 받고 슬퍼하는 듯이 들어와 그에게 말했다. “디아코노 신부님! 왜 이렇게 불명예스럽게 범죄자들과 함께 갇혀 있는 겁니까?” 그가 대답했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어떤 주교가 미친 듯한 질투심에 저를 고발한 것 같고, 그 주교가 도시의 수장을 매수하여 저에게 가혹한 처벌을 내리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친구로 변장한 이가 그에게 말했다. “만약 네 친구의 말을 듣고 싶다면, 이 도시를 떠나기를 권하겠노라. 내가 보기에 네가 이곳에 사는 것은 유익하지 않기 때문이다.” 에바그리우스가 그에게 말했다. “만약 하나님께서 나를 이 곤경에서 구해 주시고, 그 후에 네가 콘스탄티노플에서 나를 보게 된다면, 내가 더 큰 형벌을 받도록 하라.” 친구는 그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복음서를 가져오겠으니, 그 위에 맹세하여 이 도시를 떠나 수도사가 되겠다고 약속해라. 그러면 내가 너를 이 재앙에서 구해 주겠다.” 에바그리우스는 말했다. “네가 원하는 대로 맹세하겠으니, 제발 이 암울한 구름만이라도 내게서 걷어내 주게.” 그 후 그 친구는 복음서를 가져와 맹세를 요구했다. 에바그리우스는 복음서를 두고, 단 하루를 제외하고는 도시에 머물지 않겠다고 맹세했는데, 그 하루는 단지 배에 짐을 싣기 위해서뿐이었다. 이로써 환상은 끝났다. 불안한 마음으로 일어난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비록 격정 속에서 맹세를 했더라도, 어쨌든 나는 맹세했다.’ 그래서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가진 모든 것을 배로 옮겨 실은 뒤, 예루살렘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그는 수도자의 옷을 입고, 복자 멜라니아 로마 여인에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마귀가 다시 그의 마음을 어둡게 하고 그를 흔들어, 결국 그는 또다시 옷을 갈아입었고, 그의 마음은 웅변가의 허영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우리 모두를 멸망에서 지켜 주시는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열병을 보내시어 또 다른 재앙에 빠뜨리셨고, 여섯 달 동안 지속된 중병으로 그의 육신을 쇠약하게 하셔서, 이미 걷기 시작한 길을 계속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셨습니다. 의사들이 그를 치료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떠나자, 복녀 멜라니아는 그에게 말했습니다. “내 생각에 네 병은 단순한 것이 아닌 것 같아, 내 아들아. 말해 보렴, 마음에 무언가 걸린 것이 있느냐?” 그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그녀에게 털어놓았습니다. 복녀는 그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수도 생활을 하겠다고 맹세해 주시오. 비록 제가 죄인일지라도 주님께 기도하여, 주님께서 회개와 마음의 개선을 위해 당신에게 생명을 연장해 주시도록 하겠소.” 그가 맹세하자, 그녀는 기도했고, 에바그리우스는 며칠 만에 회복되었습니다. 회복된 후 그녀는 직접 그에게 수도복을 가져다주었고, 그는 그것을 입은 채 이집트로 떠났다. 그곳에서 니트리아 산에서 2년을 지낸 뒤, 3년째 되는 해에 사막으로 은둔했다. 그는 소위 ‘켈리야’라고 불리는 곳에서 14년을 살았는데, 오직 빵과 물, 때로는 소량의 기름만을 섭취하며 이 점에서 그 어떤 위안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는 채소도, 과일도, 포도도 먹지 않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았으며 몸을 씻지도 않았다. 이토록 자신을 괴롭혔던 이 사람은 이전에는 풍요롭게 살았으나, 유혹은 이곳에서도 그를 떠나지 않았다. 때로는 음탕의 악마가 그를 심하게 괴롭혔는데, 그가 직접 말한 바와 같이, 그럴 때면 그는 한겨울 밤새도록 우물 속에 알몸으로 앉아 있어 몸이 꽁꽁 얼어붙곤 했다. 또 다른 때에는 비방의 영이 그를 괴롭혔고, 그때 그는 사십 일 동안 지붕 아래로 들어가지 않고 스스로를 고행했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그는 다양한 악마들로부터 너무나 많은 유혹을 겪었기에 일일이 열거하기조차 어려웠으며, 심지어 악마들에게 매맞기도 했다. 그러나 이처럼 자신의 육신을 죽이고 참아내면서, 복된 이는 내면적으로 성령으로 소생되었고, 마음을 정화한 끝에 영을 분별하는 은사를 얻게 되었다. 이 용감한 그리스도의 수행자는 죽기 전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벌써 3년 동안 육신의 정욕이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그토록 엄격한 삶과, 그토록 지칠 줄 모르는 수행의 수고, 그리고 기도에 대한 끊임없는 깨어 있음 이후에도, 선을 미워하는 파멸의 악마가 이 의인을 그토록 공격했다면, 부주의한 사람들은 이 더러운 악마나 자신의 게으름 때문에 얼마나 더 많은 고통을 겪겠는가! 그는 백 편의 기도를 지었고, 소위 “iera” – 더 정확히 말하면 “stihira”(시나 비유 형식의 짧은 격언), “monahon” – 수도사 또는 실천적인 교훈, 그리고 “antirritikon” – 대항 – 악마와 정욕과의 투쟁에 관한 세 권의 책을 집필했다. 소크라테스(제4권, 제23장)의 기록에 따르면, 에바그리우스는 이집트의 마카리우스와 알렉산드리아의 마카리우스 두 사람의 제자였으며, 그들의 지도 아래에서 이전에는 말뿐인 철학자였으나 실천적인 철학을 터득했다고 한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이집트로 온 그는 앞서 언급된 두 분을 만나 그들의 삶을 본받기 시작했다. 아래에서 소크라테스는 에바그리우스 본인의 말을 인용하여 그의 생애에서 두 가지 일화를 소개하는데, 이를 통해 그가 마카리우스 대성인과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 알 수 있다. 첫 번째는 아바 마카리우스가 에바그리우스에게 사람들의 모욕을 기억하는 것과 악마들의 모욕을 기억하는 것의 차이점에 대해 물었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에바그리우스가 아바 마카리우스를 찾아갔을 때, 더위 속에서 긴 여정으로 지쳐 조금의 물이라도 달라고 청했으나 거절당했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 일화는 아나톨리우스에게 보낸 그의 서신 중 활동 기록에 실려 있다(93장, 94장). 아래에서 소크라테스는 에바그리우스가 자신의 저서 『그노스티크』에서 자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고 언급한다. “우리는 의로운 그레고리우스에게서 미덕과 그에 대한 사색이 네 가지, 즉 분별력, 용기, 절제, 정의가 있다는 것을 배웠다.” 이 그레고리우스는 누구인가? 팔라디우스에 따르면 그레고리우스 니시우스이며,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나지안주스 출신의 그레고리우스로, 그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에바그리우스를 집사로 서품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가 나지안주스 출신의 그레고리우스와 니시우스를 혼동한 것은 아닐까? 팔라디우스가 진실을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소크라테스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발견한다. 위대한 아파나시우스와 함께 로마에 머물렀으나 베드로와 바울의 교회 외에는 그곳에서 아무것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경이로운 암모니우스는, 나중에 이집트에서 알렉산드리아의 테오필로스로부터 주교직 제의를 받았으나, 이를 피하기 위해 자신의 오른쪽 귀를 잘라내어, 신체의 흉한 모습으로 인해 안수를 거부하려 했다. 얼마 후, 알렉산드리아의 테오필 주교는 에바그리우스를 주교로 임명했는데, 그 역시 도망쳤으나 자신의 신체 어느 부분도 훼손하지는 않았다. 암모니우스를 만난 에바그리우스는 다정하게 그에게 말했다. “네가 귀를 자른 것은 잘못된 일이다. 그런 행위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그럼 너는, 에바그리우스여, 혀를 자르고 자만심 때문에 네게 주어진 은총을 누리지 않은 것에 대해 책임지지 않을 것인가?”라고 암모니우스가 대답했다. 에바그리우스의 저술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그는 아주 훌륭한 책들을 썼다.” 그중 하나는 『수도사』, 즉 수도 생활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노스티크』, 즉 지식을 얻은 자에 관한 것으로 50개의 장으로 나뉘어 있으며, 세 번째는 『반박자』 (antirritikos), 즉 유혹하는 악마들에 대항하는 신성한 경전의 발췌문으로, 여덟 가지 생각의 수에 따라 여덟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그 외에도 그는 미래에 관한 600가지 질문을 정리했고, 시로 쓴 두 권의 책을 더 저술했는데, 하나는 키노비아, 즉 공동 생활 수도원에 거주하는 수도사들을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처녀를 위한 것이다. 이 책들이 얼마나 놀라운지는, 그것을 읽는 사람이 알게 될 것이다. 소조멘(제6권, 제30장)은 앞서 언급한 암모니우스에 대해, 그가 ‘긴 형제들’ 중 한 명이었으며, 지혜의 경지에 이르렀고 매우 박식하여 오리겐, 디디모스 및 다른 영적 저술가들의 저작을 모두 읽었다고 말한 뒤, 다음과 같이 덧붙입니다: “아모니우스와 친분이 있던 현명한 에바그리우스는 학식이 매우 깊고, 지성과 말솜씨가 뛰어나며, 특히 미덕으로 이끄는 생각(마음가짐)과 악덕으로 이끄는 생각을 분별하는 데 탁월하여, 전자를 발전시키고 후자를 경계하도록 마음을 다스리는 데 능숙했다. 그가 학문적으로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그가 남긴 저술들이 보여 줄 것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의 성품은 절제미로 두드러졌으며, 허영과 교만이 거의 없어, 마땅히 받아야 할 칭찬도 그를 거만하게 만들지 않았고, 부당한 비난도 그에게 슬픔을 일으키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나지안즈의 주교 그레고리우스에게서 지혜를 구하며 성경을 배웠는데, 그레고리우스가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수장일 때 그는 그곳에서 대집사로 섬겼다. 외모가 단정했고 우아하게 차려입는 것을 좋아했다. 어떤 귀족이 그가 자신의 아내와 친분을 맺고 있음을 눈치채고 질투에 불타 그를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그 음모를 실행에 옮기려 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가 잠든 사이에 무섭지만 동시에 구원을 주는 꿈을 꾸게 하셨다.” 그 이후 소조멘은 특별한 내용을 더 언급하지 않는다. 소조멘의 기록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가, 그레고리우스가 에바그리우스를 후원하고 그의 교육을 도왔다는 점에 대해 팔라디우스와 견해를 달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팔라디우스는 그레고리우스 니스키를 언급하는 반면, 소조멘은 그레고리우스 나지안진스를 언급한다. 이들을 다음과 같이 조화시킬 수 있다: 에바그리우스는 그레고리우스 니스키에 의해 집사로 서품받았으나, 그레고리우스 나지안진에게도 지도받았으며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신학자 그레고리우스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직에 부름받았을 때, 그와 함께 열린 공의회에 그레고리우스 니스키와 에바그리우스가 참석했다. 이곳에서 에바그리우스는 나지안진 출신의 그레고리우스 밑에서 수석집사(프로토디아콘)로 섬길 수 있었고, 공의회 이후 두 그레고리우스의 조언에 따라 콘스탄티노플에 머물렀다. 소크라테스와 소조멘은 그가 콘스탄티노플에 있었을 때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팔라디우스는 그 이전의 일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에바그리우스의 제자인 팔라디우스의 기록은 더 신뢰해야 하는데, 이는 그가 직접 에바그리우스로부터 들은 내용을 정확히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Patrologia』(제40권, 1215쪽)는 에바그리우스의 사망 연도를 399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같은 곳에는 에바그리우스의 저술에 대한 평론도 실려 있다. 덧붙여, 복자 히에로니무스는 (Epist. 135 ad Ctesiph) “에바그리우스의 저서들은 동방 전역의 그리스인들뿐만 아니라, 서방의 라틴인들에게도 그의 제자 루피누스가 번역한版本으로 읽히고 있다”고 썼다. 『Patrologia』에는 에바그리우스의 저작 중 현존하는 모든 것이 수록되어 있다. 그 중 첫 번째로 꼽히는 것은 아나톨리우스에게 보낸 ‘실천적 삶에 관한 장’들이다. 이는 짐작할 수 있듯이, 앞서 언급한 역사가들이 『수도사』라는 제목을 붙인 책에서 남아 있는 부분이다. 『실천적 로고스( )』의 장들 앞에는, 그 서문으로서 아나톨리우스에게 보낸 간략한 편지가 실려 있다. 그 다음에는 ‘실천적 로고스(logos praktikos)’—즉 수도자의 수행 활동에 관한 71개의 장이 이어진다. 그 뒤에는 100개의 장이 더 있다. 그러나 이 장들 중 대부분이 앞서 언급한 71개 장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그곳에 없는 장들의 본문만 인용한다. 전체적으로는 여전히 100장이 됩니다. 우리도 제목을 다음과 같이 정하겠습니다: 아나톨리우스에게 보내는 활동적인 삶에 관한 100장. 이어서 『Patrologia』에는 한 편의 글이 나오는데, 이는 우리 『도보톨루비예』에서 더 명확하게 제목을 붙인 바와 같습니다: 수도 생활의 모범, 어떻게 수행하고 침묵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글. 『그리스어 도보톨루비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Patrologia』의 제목은 의역으로도 전달하기 어렵다. 우리 제목을 그대로 사용하자. 그 다음에는 33장의 ‘kat anoloythian’(‘kat analogian’이 아닌지)이 나오는데, 그 내용은 ‘가시적인 것에 비친 영적인 것’이다. 알파벳 순으로 배열된 25장은 영적인 사안에 대한 격언들이다. 이 마지막 부분에 알파벳 순서가 아닌 다른 26개의 격언이 추가되어 있다. 그 다음에는 8가지 악한 생각에 관한 내용으로, 고대 서적 『안티리티콘(antirritikon)』의 일부이다. 마지막으로 키노비트 수도사들과 처녀들을 위한 간략한 규칙이 있다. 이 모든 내용이 여기에서 번역본으로 제공된다.

 

수도사 에바그리우스의 수행에 관한 가르침

 

1. 아나톨리우스에게 보내는 활동적인 삶에 관한 장

이전에 가장 사랑하는 형제 아나톨리우스여, 당신은 성산(아마도 니트리아 산)에서 저에게 스키트로 편지를 보내, 이집트 수도복의 상징적 의미를 설명해 달라고 요청하셨습니다. 당신은 이 수도복이 다른 모든 인간의 복장과 확연히 구별되는 데에는 분명한 근거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성부님들로부터 직접 배운 바를 기꺼이 전해 드리겠습니다. 쿠쿨리이는 우리 구세주 하느님의 은총을 상징하며, 수도자들의 마음을 감싸고 그 은총의 덮개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을, 끊임없이 그들에게 타격을 가하고 상처를 입히려는 자들로부터 보호해 줍니다. 이것을 머리에 쓴 이들은 굳건하고 실효성 있는 믿음으로 노래합니다. “주님께서 집을 세우시고 성을 지키지 않으시면, 건축하는 자의 수고는 헛되고 지키는 자의 경비는 헛되리라”(시편 126:1). 이러한 외침은 겸손을 심어주고 교만을 뿌리 뽑는데, 교만은 새벽을 밝히던 루시퍼를 땅으로 내쫓은 고대의 악이다. 그들의 손이 드러나 있다는 사실[57] 는 그들의 삶이 위선 없음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허영은 스스로를 가리고 미덕의 그늘을 드리우는 법을 알며, 항상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얻으려 하고 믿음을 쫓아내기 때문이다. 구세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서로 영광을 받으면서, 유일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않으니,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요한복음 5:44). 선(善)은 다른 어떤 것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다른 모든 것이 선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만약 이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우리를 선을 행하도록 이끄는 것이 우리 자신에게 있어 선 그 자체보다 더 소중하다는 것이 명백해질 것이며, 이는 하나님보다 더 높은 무언가를 상상하고 그렇게 말하는 극도의 어리석음이 될 것이다. 그들의 어깨를 십자 모양으로 감싸는 아날라브(우리의 파라만)는, 온유한 자들을 받아들이시며(αναλαμβάνεσης), 언제나 장애물을 제거하고 활동에 방해받지 않게 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상징이다. 그들의 허리를 감싸는 허리띠는 온갖 불결함을 물리치고, “남편은 아내와 동침하지 말라”(고린도전서 7:1)고 선포한다. 그들은 언제나 “우리 몸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지니고 있는”(고린도후서 4:10) 자들로서, 모든 무분별한 육체의 정욕을 억제하고, 선을 실천함으로써 영혼의 악을 근절하며, 가난을 사랑하고 우상 숭배와 같은 과다한 재물을 피하는 자들이다. 지팡이는 생명의 나무로, 그것을 손에 들고 의지하는 모든 이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히 서도록 의무를 지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스키마가 상징하는 것들의 요약입니다! (스키마를 입히며) 성부들은 그들에게 항상 다음과 같은 말씀을 전하십니다: 자녀들아! 신앙을 굳건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며, 이를 굳건하게 하는 것은 절제이다. 이를 흔들림 없이 만드는 것은 인내와 소망이며, 이로부터 무욕이 태어나고, 무욕의 결실은 사랑이다. 그리고 사랑은 신학을 받아들이고 지극한 복락으로 이끄는 육체적 인식으로 통하는 문이다. 이 정도면 현재 시점에서 성스러운 스키마와 장로들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충분하다. 이제 우리는 활동적인 삶과 영적인 삶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장로들에게서) 보고 들은 모든 것을 다 다루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전하라는 그들의 명령을 받은 내용만을 다루며, 활동적인 삶에 관한 부분은 100개의 장으로, 영적인 삶에 관한 부분은 650개의 장으로 나누어, 어떤 것은 숨기고, 어떤 것은 가려서,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며,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않도록 하리라(마태복음 7:6). 그러나 이는 그들과 같은 길을 따르는 이들에게는 분명한 바이다.

1. 기독교는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법(dogma)으로, 삶과 사물에 대한 인식, 그리고 신학을 통합한 것이다.

2. 천국은 존재에 대한 참된 깨달음과 함께 하는 영혼의 무욕이다.

3. 하나님의 나라는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에 대한 인식으로, 이는 마음의 상태에 따라 확장되며 끝없는 복된 삶으로 채워진다.

4. 무엇을 사랑하는 사람은 당연히 그것을 원하며, 무엇을 원하는 사람은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모든 즐거움에는 욕망이 선행하며, 욕망은 감정에 의해 생겨난다.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것은 자유로우며, 정욕에서도 자유롭다.

5. 은둔자들과는 악마들이 직접 싸움을 벌이지만, 수도원이나 공동체에서 덕스러운 삶을 사는 이들에 대해서는 가장 부주의한 형제들을 무기로 삼는다. 그러나 후자의 싸움은 전자의 것보다 훨씬 수월한데, 이는 땅 위에서 악마들보다 더 사악하거나 그들의 모든 악랄함을 온전히 받아들인 사람들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6. 방황하는 마음을 바로잡는 것은 독서, 철야 기도, 그리고 기도이다. 타오르는 정욕을 끄는 것은 금식, 노동, 그리고 은둔 생활이다. 요동치는 분노를 가라앉히는 것은 시편 찬송, 너그러움, 그리고 자비이다. 이 모든 것은 적절한 때와 적절한 정도에 따라 실천될 때 그 효과를 발휘한다. 시기를 놓치거나 지나치게 행하는 모든 것은 오래가지 못하며, 오래가지 못하는 것은 유익보다 해가 더 크다.

7. 영혼이 다양한 음식을 갈망할 때, 우리는 빵과 물로 그 욕망을 억제하여, 얇은 빵 한 조각에도 감사하게 해야 한다. 배부름은 다양한 음식을 원하지만, 굶주림은 빵으로 배부름을 얻는 것조차 행복으로 여긴다[58] .

8. 물이 부족한 것은 몸을 절제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 기드온과 함께 미디안을 물리친 그 삼백 명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를 너에게 확신시켜 줄 것이다.

9. 죽음과 생명이 한 사람에게 동시에 찾아오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처럼, 사랑과 돈이 한 사람에게 함께 있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사랑은 돈을 소모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덧없는 삶 그 자체를 희생으로 바친다.

10. 세속적인 쾌락을 좇는 자는 슬픔의 악마가 접근할 수 없는 요새와 같다. 슬픔이란 현재 또는 기대되는 쾌락의 상실이기 때문이다. – 우리가 이 땅의 어떤 것에 집착하는 한, 이 원수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악마는 우리가 가장 집착하는 곳에 슬픔을 일으키기 위해 그물을 치고 있다.

11. 분노와 증오는 마음의 짜증을 배가시키지만, 자선과 온유함은 그것을 잠재운다.

12. 우리 분노 속에 해가 지지 않게 하라. 그래야 밤에 덤벼드는 악마들이 영혼을 겁에 질리게 하거나, 다음 날 싸움을 위해 마음을 더 소심하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무서운 꿈은 대개 분노로 인한 불안 후에 찾아오며, 불안한 분노만큼 우리 마음을 제자리에서 벗어나게(탈주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13. 어떤 이유로든 우리 영혼의 짜증나는 부분이 불안에 휩싸일 때, 악마들은 우리에게 은둔 생활을 선한 일인 양 제안한다. 이는 근심거리를 제거함으로써 우리가 당혹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59] . 반면 정욕이 불타오를 때면, 그들은 우리를 인간애가 넘치는 사람으로 만들려고(사람들 가운데 머물게 하려고) 애쓰며, 우리가 멀어지는 것을 잔인하고 야만적인 행동이라 비난한다. 이는 우리가 육체를 탐하며(사회에 남아) 다른 육체를 만나게 하려는 것이다. 그들을 믿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그들과 정반대의 행동을 해야 한다.

14. 너를 괴롭힌 자와 마음속으로 전쟁을 벌이며 분노의 생각에 사로잡히지도 말고, 또한 음탕한 생각에 빠져 오랫동안 육욕적인 환상을 품지도 말라. 전자는 영혼을 어둡게 하고, 후자는 정욕을 부추기며, 둘 다 마음을 더럽히며, 기도하는 동안에도 우상처럼 상상력을 정욕적인 형상들로 채워, 그로 인해 하나님께 순수한 기도를 드리지 못하면, 즉시 낙담의 악마의 공격을 받게 되는데, 이 악마는 보통 그러한 상태에서 공격하여 마치 개가 시체 조각을 훔치듯 영혼을 빼앗아 간다.

15. 분노는 본성상 악마들과 싸우고 온갖 죄악적인 유혹과 투쟁하도록 정해져 있다. 그러므로 천사들은 우리 안에 영적인 달콤함을 일깨우고 그 행복을 맛보게 함으로써, 우리가 분노를 악마들에게 돌리도록 이끕니다. 반면 악마들은 우리를 세속적인 정욕으로 유혹하여, 본성에 반하여 분노로 사람들과 싸우게 만듭니다. 이는 마음이 어두워지고 이성을 잃어 미덕을 배반하는 자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16. 분노하여 어떤 형제를 쫓아내지 않도록 스스로를 경계하라. 그렇게 하면 평생 동안 슬픔의 악마를 피할 수 없을 것이며, 그 악마는 기도할 때마다 항상 그것을 걸림돌로 삼아 네게 내밀 것이다.

17. 원한은 선물로 해소된다. 네가 마중 나오던 400명의 무리를 거느린 에서를 선물로 달래었던 야곱이 이를 증명해 줄 것이다(창세기 32:6, 33:1). 그러나 우리 같은 가난한 자들은 식사(음식)로 이 필요를 채울 수 있다.

18. 낙담이라는 악마의 공격을 받을 때, 영혼을 둘로 나누어 한 부분은 위로하는 자로, 다른 부분은 위로받는 자로 삼고, 다윗의 다음 시편을 읊조리며 우리 안에 선한 희망을 심어 봅시다. “내 영혼아, 네가 왜 슬퍼하느냐? “어찌하여 나를 괴롭히시나이까?” “하나님을 의지하라. 우리가 그분께 고백하리니, 그분은 내 구원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라” (시편 41:6).

19. 유혹이 닥쳤을 때, 어떤 축복받은 핑계를 대며 수도실을 떠나서는 안 되며, 안에 머물며 인내해야 한다. 모든 공격자, 특히 모든 것 중에서 가장 괴롭지만 그 대신 영혼을 가장 경험 있게 만드는 낙담의 악마를 용감하게 맞서야 한다. 만약 도망치거나 투쟁을 회피한다면, 마음은 미숙하고 소심하며 쉽게 도망치는 성향을 갖게 될 것이다.

20. 허영의 생각을 피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그것을 쫓아내기 위해 무엇을 하든, 그것이 오히려 새로운 허영의 움직임의 시작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올바른 생각에 악마들이 반대하는 것은 아니며, 어떤 경우에는 이 사악한 존재들이 우리를 속이려는 희망으로 오히려 그것을 부추기기도 한다.

21. 지식을 접하고 그 달콤함을 맛본 자는, 설령 교만의 악마가 세상의 모든 쾌락을 제안한다 해도 더 이상 그를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영적 관조보다 더 큰 것을 그가 무엇을 약속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아직 지식을 맛보지 못한 동안에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지식을 위해 행한다는 우리의 목적을 하나님께 드러내며, 부지런히 실천적인 삶을 살아가야 한다.

22. 네 과거의 삶과 옛 죄악들을 기억하라. 또한 정욕에 사로잡혀 있었을 때, 정욕을 용납하지 않는 삶으로 어떻게 넘어갔는지, 그리고 여러모로 너를 자주 크게 겸손하게 만들었던 세상에서 어떻게 다시 벗어났는지를 기억하라. 또한 광야에서 너를 지키시고, 너를 향해 이를 갈며 으르렁대는 악마들을 네게서 쫓아내시는 분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 보라. 이러한 묵상은 겸손한 지혜를 심어주고, 교만의 악마가 접근하는 것을 막아준다.

23. 우리가 열정적으로 기억하는 것은, 이전에 실제로 열정을 가지고 받아들였던 것이며, 마찬가지로 우리가 현재 실제로 열정을 가지고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열정적으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 정욕을 부추기는 악마들을 이긴 자에게는, 그들이 정욕을 부추기는 데 사용하는 것들이 더 이상 아무런 가치가 없다. 비물질적인 싸움꾼은 물질적인 싸움꾼보다 더 위대하기 때문이다.

24. 영적 정욕은 사람들로부터 (그 움직임의) 계기를 얻으며, 육체적 정욕은 육체로부터 얻는다. 육체적 정욕의 움직임은 절제로 막아내고, 영적 정욕의 움직임은 영적 사랑으로 막아낸다.

25. 영적 정욕의 수호자인 악마들은 죽을 때까지 끈질기게 버티며 영혼을 괴롭히지만, 육체적 정욕의 수호자들은 더 빨리 물러난다. 게다가 어떤 악마들은 떠오르거나 지는 태양처럼 영혼의 특정 부분만을 건드리지만, 정오의 악마는 대개 영혼 전체를 감싸고 마음을 잠기게 한다. 왜 정욕이 사라진 후의 은둔 생활이 달콤한가? 그때는 정욕으로부터 텅 빈 기억만 남기 때문이며, 투쟁에 관해서는 그 자체의 위업이라기보다 그것을 관조하는 것이 더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26. 생각이 정욕을 움직이는 것인지, 아니면 정욕이 생각을 움직이는 것인지 주목할 만하다. 어떤 이들은 전자를 받아들이고, 어떤 이들은 후자를 받아들인다. 보통 정욕은 감각에서 비롯되지만, 사랑과 절제가 있는 사람에게는 정욕이 움직이지 않고, 없는 사람에게는 움직인다. 분노는 정욕보다 더 큰 치료가 필요하며, 사랑이 위대하다고 불리는 이유는 그것이 분노를 재갈 물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 모세도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을 열거할 때, 사랑을 상징적으로 ‘오피오마흐’(뱀과 싸우는 자)라고 불렀다(레위기 11, 22).

27. 악마들의 잘 알려진, 결코 그치지 않는 악의로 인해, 영혼은 (그들이 심어 놓은) 생각들이 다가오는 것을 감지하는 즉시 그들에 맞서 불타오르며, 공격자들의 격정적인 성질(분노)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스스로를 방어한다.

28. 항상 일반적인 규칙을 따르는 것이 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상황을 살피고 그 안에서 가능한 한 자신의 능력껏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적시의 법칙을 모르는 것은 바로 악마들 자신이다. 그들은 왜 항상 우리에게 적대적으로 대하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방해하고, 할 수 없는 일에는 강요하는가. 그들은 병자들을, 닥친 슬픔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하고 자신을 돌보는 이들을 너그럽게 참아내도록 하는 일에서 멀어지게 하며, 기력이 약한 이들에게는 가장 엄격한 절제를 강요하고, (나이나 노동으로) 지친 이들에게는 서서 시편을 노래하도록 시킨다.

29. 궁핍으로 인해 잠시 도시나 마을에 머물게 될 때, 평신도들과 어울릴 때는 가장 엄격한 절제를 지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마음이 나태해져 현재 해야 할 평소의 정성을 소홀히 하고, 무모한 행동을 저지르거나 악마들에게 쫓겨 도망치게 될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30. 유혹을 받을 때, 유혹자를 향해 몇 마디 분노 어린 말을 하기 전에는 기도에 나서지 마라. 왜냐하면 영혼이 더러운 생각으로 물들었을 때, 그 기도는 순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분노 어린 말을 한다면, 이를 통해 적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그들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분노는 선한 생각에도 대개 이와 같은 영향을 미친다.

31. 사악한 악마들을 시험해 보고 그들의 계략을 분별하는 능력을 기르고자 하는 자는, 자신의 생각을 관찰하며, 그들이 무엇을 고집하고 무엇을 완화하는지, 어떤 상황과 시간에 어떤 악령이 특히 활동하는지, 어떤 악령이 어떤 악령을 따르고 어떤 악령이 어떤 악령과 맞지 않는지를 살피고, 이 모든 것에 대해 주 그리스도께 해답을 구해야 한다. 악마들은 미덕을 능숙하게 실천하며(모든 것을 명확히 밝히는) 이들에게 매우 분노하며, “어둠 속에서 마음이 바른 자들을 쏴 죽이려” 한다(시편 10:3).

32. 이러한 관찰을 통해 두 마리의 악마가 지극히 빠르게 움직이며, 거의 우리 마음의 움직임을 앞지르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바로 음탕의 악마와 우리를 신성모독으로 유혹하는 악마다. 그러나 후자는 오래가지 못하며, 전자는 정욕적인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한,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데 성공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33. 육체를 영혼으로부터 분리할 수 있는 이는 오직 둘을 결합시킨 자뿐이며, 영혼을 육체로부터 분리할 수 있는 이는 (은둔 생활 속에서) 덕을 추구하는 자이다. 왜냐하면 우리 선조들은 은둔 생활을 죽음에 대한 기억과 육체로부터의 도피라고 부르기 때문이다(즉, 정욕 속에서 육체의 쾌락을 추구하지 않기 위함이다).

34. 자신의 육신을 지나치게 양육하고, 육신에 대한 보살핌을 정욕의 지경까지 확장하는 자들(롬 13, 14)은, 그 후 자신들을 탓해야지, 육신을 탓해서는 안 된다. 반대로, 바로 이 육체를 통해 영혼의 무욕을 얻었고 (그 육체를 매개로 하여) 힘닿는 대로 존재하시는 분을 관조하는 이들은, (우리에게 육체를 주신) 창조주의 은혜를 고백한다.

35. 마음이 산만하지 않게 기도를 드리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밤낮으로 이어지는 모든 투쟁은 영혼의 성가신 부분과의 투쟁으로 귀결된다.

36. 무감정의 징표는, 마음이 자신의 빛을 보기 시작하고, 몽롱한 환상에 대해 평온해지며, 사물을 쉽고 올바르게 이해하게 될 때 나타난다.

37. 기도 중에 마음이 세속적인 것을 전혀 상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마음이 굳건해졌음을 의미한다.

38. 하나님의 도움으로 활동적인 삶의 여정을 완수하고 관조(소저티비오)에 이른 마음은, 이성적이지 않은 영혼의 부분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을 거의 느끼지 못하거나 전혀 느끼지 못한다. 관조(소저티비오)는 그 마음을 황홀하게 하여 감각적인 것에서 분리시켜 준다.

39. 무정(無情)을 지닌 영혼은 사물에 사로잡히지 않는 영혼이 아니라, 사물을 떠올릴 때조차 동요하지 않는 영혼이다.

40. 완전한 용사에 대해서는 엄밀히 말해 ‘자제한다’고 하지 않으며, 무정함에 대해서는 ‘참는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내는 고통받는 자에게서 나타나고, 자제는 욕망에 이끌리는 자에게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41. 산만하지 않고 기도하는 것은 위대한 일이지만, 산만하지 않고 노래하는 것은 그보다 더 위대한 일이다.

42. 자기 안에 미덕을 심어 놓고 그 미덕에 완전히 사로잡힌 사람은 더 이상 율법이나 계명, 또는 형벌을 기억하지 않으며, 확립된 아름다운 품성이 그에게 속삭이는 대로 (마치 자연스럽게) 말하고 행동한다.

43. 악마적인 노래들은 우리의 정욕을 자극하여 영혼을 수치스러운 환상 속으로 빠뜨리지만, 시편과 찬송, 그리고 영적인 노래들은 언제나 마음을 미덕을 기억하도록 이끌며, 그와 동시에 분노의 불길을 식히고 정욕을 잠재운다.

44. 싸움에서 맞붙은 자들이 서로 타격을 가하고 받듯이, 우리와 싸우는 악마들도 우리에게 타격을 가할 때 당연히 우리로부터 그 타격을 받게 된다. “내가 그들을 모욕하리니 그들이 일어설 수 없으리라”(시편 17:39). 또 “나를 모욕하는 자들과 나의 원수들은 기진하여 쓰러졌도다”(시편 26:2).

45. 지혜는 평온과 동행하고, 분별력은 수고와 동행한다. 투쟁 없이는 지혜를 얻을 수 없고, 분별력 없이는 투쟁을 성공적으로 이룰 수 없다. 분별력은 악마들이 일으키는 분노에 맞서 싸우는 임무를 맡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영혼의 힘들이 본성에 따라 작용하도록 이끌어, 그로써 지혜로 가는 길을 닦아낸다.

46. 수도자의 유혹은 영혼의 정욕적인 부분을 통해 들어와 마음을 어둡게 하는 생각이다.

47. 수도사의 죄란, 금지된 죄악적인 정욕을 마음속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48. 천사들은 죄악이 줄어들 때 기뻐하고, 악마들은 덕이 줄어들 때 기뻐한다. 천사들은 자비와 사랑의 종들이고, 악마들은 분노와 증오의 노예들이기 때문이다. 전자는 우리에게 다가와 영적 관상의 기쁨으로 채워 주지만, 후자는 다가와 영혼을 수치스러운 상상에 빠뜨린다.

49. 미덕은 악마들이 우리를 향해 쏠리는 열망을 막아주지는 않지만, 그들로부터 우리를 무사히 지켜준다.

50. 실천적인 삶(미덕의 실천)은 영혼의 정욕적인 부분을 정화하는 영적 방법이다.

51. 영혼의 힘을 온전히 치유하기 위해서는, 마음이 그에 상응하는 관상을 유지하지 않는다면, 계명을 따르는 선한 행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52. 천사들이 우리 안에 심어주는 선한 생각을 거절할 수 없는 것처럼, 악마들이 심어주는 악한 생각도 물리칠 수 있다. 첫 번째 생각 뒤에는 영혼의 평온한 상태가 따르고, 두 번째 생각 뒤에는 혼란이 따른다.

53. 무정(無情)을 낳는 것은 사랑이며, 무정은 활동적인 삶의 꽃이다. 활동적인 삶은 계명을 이행하는 데 있다. 이 계명 이행의 수호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며, 이는 바른 믿음의 열매이다. 믿음은 영혼의 내적 선으로, 아직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54. 영혼이 몸을 통해 활동하며 어떤 지체가 약한지 느끼는 것처럼, 이성도 자신의 활동을 통해 자신의 힘을 깨닫고, 어떤 것이 (손상된 상태로 인해) 자신을 방해하는지 알아차리면, 그것을 치유할 계명을 찾아낸다.

55. 격렬한 전쟁을 치르는 이성은 적의 계략을 보지 못한다. 이는 그 시점에 마치 밤(어둠 속)에서 싸우는 사람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욕을 얻게 되면, 그는 적들의 계략을 쉽게 간파하게 된다.

56. 활동적인 삶의 궁극은 사랑이며, 지식의 끝은 신학이다. 이 둘의 시작은 믿음과 사물에 대한 관조이다. 정욕적인 영혼의 부분에 달라붙는 악마들은 활동적인 삶의 적이라 불리며, 사고력 그 자체를 공격하는 악마들은 모든 진리의 적이자 관조의 적이라 불린다.

57. 몸을 정화하는 것 중 그 어떤 것도 정화된 후에 남아 있지 않지만, 미덕은 영혼을 정화한 뒤에도 정화된 영혼 안에 함께 머무른다.

58. 이성적인 영혼은 그 본성에 따라 행동하는데, 그 중 욕망하는 부분은 미덕을 추구하고, 격정적인 부분은 미덕을 위해 분투하며, 사고하는 부분은 존재하는 것의 관상에 전념한다.

59. 실천적 삶에서 성공하는 자는 정욕을 줄이고, 관조적 삶에서 성공하는 자는 무지를 줄인다. 정욕에 관해서는 언젠가 그것들이 완전히 근절될 것이라고 말하며, 무지에 관해서는 부분적으로는 끝이 나겠지만 부분적으로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60. 삶에서 마주치는 선과 악은 미덕과 악덕 모두에 기여할 수 있다. 분별력의 임무는 이를 활용하여 전자를 성취하고 후자를 극복하는 것이다.

61. 우리의 현명한 스승(그리고리 니스키를 뜻함)의 말씀에 따르면, 영혼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미덕이 사고의 부분에 있을 때, 그것은 분별력(fronesis)이라 불리며, 통찰력(synesis)과 지혜(sofia)라고 불리며, 욕망의 부분에 있을 때는 정절, 사랑, 절제라고 불리고, 분노의 부분에 있을 때는 용기와 인내라고 불리며, 영혼 전체에 있을 때는 의로움이라고 불린다. 신중함의 역할은 우리에게 대적하는 세력과 싸우고, 미덕을 보호하며, 악덕을 몰아내고, 중립적인 사물들을 시기에 맞게 처리하는 것이다. 분별력의 역할은 우리의 목표 달성에 도움이 되는 모든 것을 적절히 마련하는 것이며, 지혜의 역할은 육체적·비육체적 피조물들을 모든 측면에서 관조하는 것이다. 절제의 역할은 보통 우리 안에 무분별한 환상과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것이며, 사랑의 일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모든 사람에 대해, 비록 악마들이 우리 앞에서 다른 이를 비하하려 시도하더라도, 사랑이 원형에 대해 갖는 것과 같은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며, 절제의 일은 목을 즐겁게 하는 모든 것을 기꺼이 거절하는 것이다. 인내와 용기의 길은 적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꺼이 온갖 불쾌함을 견디는 것이다. 의로움의 길은 영혼의 모든 부분을 서로 조화와 화합 속에 두는 것이다.

62. 씨 뿌림의 열매는 수확이며, 미덕의 열매는 지식이다. 씨를 뿌릴 때 눈물이 따르듯이, 수확(좋은 결실)에는 기쁨이 따른다(시편 125:6).

63. 사람은 욕망과 분노의 부분을 치유하는 데 신경을 쓰지 않는다면, 열정적인 기억들을 떨쳐낼 수 없다. 전자는 금식, 기도, 맨땅에서 잠을 자는 것으로 얇게 만들고, 후자는 오래 참음, 원한을 품지 않음, 자선으로 다스려야 한다. 이 두 가지 정욕에서 거의 모든 악마적인 생각이 생겨나며, 이는 마음을 온갖 재앙과 파멸로 몰아넣는다. 그러나 음식과 음료, 재산과 명예, 나아가 자신의 육체까지도, 그것들을 통해 자주 그를 해치려 드는 자들(즉, 악령들)을 위해 완전히 경멸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정욕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다에서 난파당한 자들을 본받아야 할 절실한 필요성이 있다. 그들은 거센 바람과 치솟는 파도 때문에 물건을 버린다. 그러나 이때 주의 깊게 유의해야 할 점은, 이와 같이 물건을 버릴 때 사람들이 우리를 보려고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상을 잃게 될 뿐만 아니라, 허영의 악마가 우리에게 바람을 불어올 때 이전보다 훨씬 더 혹독한 파멸을 겪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 복음서에서 우리의 통치자인 ‘이성’을 가르치시며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자선을 베풀 때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6:1)고 하셨다. 또 “기도할 때”라고 하시며, “위선자들처럼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들이 보도록 광장과 길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이미 자기의 상을 다 받았느니라” (5절)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금식할 때에도 위선자들처럼 슬픈 척하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얼굴을 어둡게 하느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이미 자기의 상을 받았느니라” (16절). 그러나 여기서 영혼의 의사께서 어떻게 자선을 통해 성미를 다스리시고, 기도를 통해 마음을 정화하시며, 금식을 통해 정욕을 죽이시는지 주목하라. 이 모든 것으로 인해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대로 새롭게 되는 새 사람이 만들어진다(골 3, 10.11)에 따라 새롭게 되어 가는 ‘새 사람’을 이루며, 그 안에서는 무정욕으로 인해 “남자나 여자가 없고, 믿음과 사랑의 일치로 인해 헬라인이나 유대인, 할례받은 자나 할례받지 않은 자, 야만인이나 스키타이인, 종이나 자유인이 없으며, 모든 것 안에, 모든 사람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신다”(갈 3, 28).

64. 정욕으로 인해 우리 안에 굳어지는 불순한 생각들은 마음을 파멸과 멸망으로 이끌고 있다. 왜냐하면 굶주린 자에게서 굶주림 때문에 빵에 대한 생각이 굳어지고, 목마른 자에게서 목마름 때문에 물에 대한 생각이 굳어지듯이, 탐욕 때문에 돈과 다른 재물에 대한 생각이 굳어지고, 음탕한 정욕 때문에 부끄러운 생각들이 굳어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의 허영심이나 그 밖의 다른 생각들에 대한 집착도 설명된다. 그러한 생각들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마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의의 면류관을 쓰게 될 수는 없다. 이러한 생각들로 인해, 복음서의 비유에 따라 하나님과의 교제의 만찬을 거절한 그 세 번 회개한 마음이 약탈당했다. 마찬가지로 손과 발이 묶여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던져진 자도, 이러한 생각들로 엮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부르신 분께서는 그 옷을 그러한 혼인 잔치에 합당하지 않다고 인정하셨다. 혼인 예복이란 세속적인 정욕을 버린 이성적인 영혼의 무욕을 말한다. 감각적인 것들에 대한 생각이 굳어져 지식을 타락시키는 이유는 무엇인지, 이에 대해서는 기도에 관한 장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65. 악마적인 생각에는 세 가지 생각이 대항하여, 그것이 마음속에 굳어질 때 이를 잘라낸다. 천사의 생각, 우리의 생각(우리의 자유 의지가 더 나은 것을 향할 때 비롯되는 것), 그리고 또 다른 우리의 생각(인간 본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 본성에 이끌려 이교도들조차 예를 들어 자신의 자녀를 사랑하고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다. 반면 선한 생각에는 오직 두 가지 생각만이 대립한다. 곧 악마적인 생각과, 더 나쁜 쪽으로 치우친 우리의 자유 의지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본성으로부터는 어떤 나쁜 생각도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태초부터 악하지 않았으니, 주님께서 당신의 밭에 선한 씨를 뿌리셨기 때문이다. 악이 없던 때가 있었고, 다시는 악이 없을 때가 올 것이다. 미덕의 씨앗은 지워지지 않는다. 이 사실을 나에게 확신시켜 주는 것은 복음서에 나오는 그 부자이다. 그는 지옥에 정죄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형제들에게 자비를 베풀었는데, 자비는 미덕의 가장 훌륭한 씨앗이기 때문이다.

66. 불결한 악령들 중 일부는 항상 성경을 읽는 이들 곁에 엎드려 앉아 온갖 수단을 동원해 그들의 마음을 다른 데로 돌리려 애쓴다. 종종 그들은 바로 신성한 성경 구절에서 빌미를 삼아 독자들을 나쁜 생각으로 이끌기도 하고, 평소와는 달리 하품을 하게 만들거나, 평소와는 매우 다른 무거운 잠을 유도하기도 한다. 나는 이것을 직접 경험했으나, 자주 그런 일을 겪었음에도 그 이유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성 마카리우스로부터 들은 바에 따르면, 때 아닌 하품과 잠도 악마들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그는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관습에 따라 하품을 할 때 입술에 십자 성호를 긋는 풍습을 예로 들었습니다. 우리가 그들로부터 이 모든 것을 겪는 이유는, 성경을 읽을 때 정신을 차리고 집중하지 않으며, 우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읽고 있다는 사실을 잊기 때문이다.

67. 악마들 사이에는, 그들 중 누군가가 전투에서 기진맥진해지기 전에 자신이 사랑하는 정욕을 일으켜 세우는 경우, 그 정욕을 이어받는 현상이 있다. 이를 관찰한 결과, 나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했다: 어떤 정욕에 대한 생각이 오랫동안 우리에게 드물게 떠오르다가, 갑자기 예기치 않게 움직이기 시작하여 우리를 태우기 시작할 때, 우리가 어떤 부주의로도 그에 대한 계기를 제공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때는 이전보다 더 사악한 악마가 우리를 차지하고, 떠난 자의 자리를 대신하여 자신의 악으로 채웠음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보고, 마음은 주님께로 달려가, 구원의 투구를 쓰고, 의의 갑옷을 입고, 영적인 칼을 뽑아 들고, 믿음의 방패를 들어 올리며(엡 6:14–17), 눈물을 흘리며 하늘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하라: 주 예수 그리스도여, “나의 구원의 힘”(시편 139:8)이시여.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시고, 속히 나를 구원하소서. 나를 구원하시려고 나의 보호자이신 하나님과 피난처가 되어 주소서”(시편 30:3). 특히 금식과 기도로 자신의 칼을 빛나게 하라. 그 후 비록 그가 한동안 더 고통받으며, 악마의 불타는 화살에 시달리고 쏟아지는 화살을 맞을지라도, 결국 이 악마도 서서히 그의 전임자와 같이 되어 잠잠해질 것이며, 그를 대신할 또 다른 더 사악한 자가 올 때까지는 그러할 것이다.

68. 불순한 생각들은 종종 많은 대상에 자리 잡고 뻗어 나가며, 타오르는 정욕에 이끌려 거대한 바다를 건너고 긴 여정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들이 어느 정도 정화되면, 그때는 (제어할 수 없는) 것들보다 훨씬 더 제약을 받게 되며, 열정의 약함으로 인해 여러 사물에 널리 퍼질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주로 자연스러운 것의 범위 내에서 움직이며, 지혜로운 솔로몬의 말대로, 어떤 때는 (잠언 7:12), 불의한 짚 만들기(출애굽기 5:12, 7)를 위해 갈대를 모으고, 가라지는 건드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온갖 경계로 마음을 지키어, “산양처럼 올가미에서, 새처럼 그물에서” 구원받아야 한다(잠언 6:5). 이는 더러운 영혼을 정화하는 것이, 이미 정화되었다가 다시 상처로 뒤덮인 영혼을 다시 건강으로 회복시키는 것보다 더 쉬우므로, 슬픔의 악마가 눈동자 속으로 끊임없이 뛰어들어 기도 중에 죄악된 정욕의 우상을 드러내 보이는 등, 그 장벽이 더욱 견고해졌기 때문이다.

69. 죄로 인해 죽어 있던 이성적 본성을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시대(즉, 과거, 현재, 그리고 앞으로 올 미래)를 관조함으로써 (회개로) 깨우시며, 그분의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의 죽음, 곧 죄에 대한 죽음으로 인해 죽어 가는 이 영혼을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부활시키십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의 말씀, “만일 우리가 그와 함께 죽었으면, 그와 함께 살리라”(딤후 2:11)가 의미하는 바이다.

70. 마음이 낡은 사람을 벗어 던지고 은혜로 말미암은 사람을 입을 때, 비로소 그는 기도 중에 자신의 상태를 사파이어나 하늘의 빛깔과 같은 것으로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하나님의 장소’라고 불리는 것으로, 시나이 산의 장로들이 보았던 바로 그 것이다(출 24, 10).

71. 마음은 물질적이고 피조물에 대한 모든 생각보다 더 높은 곳에 이르지 않는 한,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장소를 볼 수 없다. 그러나 감각적 대상들과 그에 대한 생각을 낳는 것들에 마음을 묶어두는 정욕들을 벗어던지지 않는 한, 마음은 그 생각들보다 더 높은 곳에 이를 수 없다. 그것은 미덕을 통해 이러한 정욕에서 벗어나고, 영적 관상을 통해 단순한 생각들에서 벗어날 수 있으나, 기도 중에 하나님의 장소를 새겨 주는 그 빛이 그에게 나타날 때면 이 또한 내려놓게 될 것이다.

 

2. 수도사 에바그리우스의 ‘활동적인 삶에 관하여’ 백 장

1. 거룩하고 가장 경험이 풍부한 우리의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수도사는 마치 내일 죽을 것처럼 마음가짐을 다잡아야 하며, 마치 오랫동안 살 것처럼 자신의 몸을 대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가 말하길, 그렇게 함으로써 낙담하는 생각을 끊어내고 수도사를 가장 열심 있는 사람으로 만들며, 이는 몸을 건강하게 보존하고 항상 균등한 절제를 지키게 하기 때문이다.

2. 나는 허영의 악마가 거의 모든 악마들에게 쫓기면서도, 쫓는 자들의 시체 위에 뻔뻔스럽게 서서 수도사에게 자신의 미덕이 얼마나 위대한지 과시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60] .

3. 악마들의 차이를 분별하고 그들의 때를 알아차려야 한다. 생각들을 통해(그리고 생각은 행실에서 비롯되니) 어떤 악마들이 드물지만 무겁고, 어떤 악마들이 끊임없이 나타나지만 가볍고, 어떤 악마들이 갑자기 덮쳐와 마음을 빼앗아 신성모독으로 이끄는지 알 수 있다. 또한, 생각이 그 대상을 움직이기 시작할 때, 우리가 평소의 상태에서 벗어나기 전에, 그 생각에 맞서 무언가를 말하고 그 안에 도사리고 있는 자를 간파할 수 있도록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한다. 이는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 스스로도 하나님의 도움으로 성공할 뿐만 아니라, 마귀들이 우리를 경외하며 슬픔에 잠겨 물러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4. 수도사들과 싸우다가 지친 악령들은, 조금 거리를 두고 이 틈새에 어떤 미덕이 소홀히 다뤄질지 지켜보다가, 갑자기 그 부분을 공격하여 가련한 영혼을 약탈해 간다.

5. 사악한 악마들은 때로 자신들보다 더 사악한 악마들을 불러 모아 도움을 청하고, 계획을 세운 뒤 서로 싸우기 시작하는데, 영혼을 파멸시키는 일에만 서로 뜻을 같이한다.

6. 신성모독과, 글로 쓰기조차 부끄러운 가장 추악한 상상들로 마음을 빼앗는 악마가 우리를 당황하게 하거나 우리의 선한 열정을 꺾지 못하게 하소서.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에 있을 때조차도 그런 미친 짓을 하지 않았음을 아십니다. 이 악마의 목적은 우리가 기도를 중단하게 하여, 우리 주 하나님 앞에 서서도 그런 생각을 품은 그분께 감히 두 손을 들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7. 영혼 안에서 작용하는 정욕의 징후로는, 어떤 말을 내뱉거나 몸으로 어떤 동작을 하는 것이 있는데, 이를 통해 원수들은 우리가 내면에 그들의 생각을 품고 그 정욕으로 고통받고 있는지, 아니면 그것을 버리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애쓰고 있는지 알아차립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이 모든 것을 아시며, 마음에 감추어진 것을 알기 위해 어떤 가시적인 징후도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8. 악령들은 평신도들과는 주로 사물을 통해 싸움을 벌이지만, 수도사들과는 대부분 생각을 통해 싸움을 벌이는데, 이는 그들이 광야에 있을 때 사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동보다 생각으로 죄를 짓는 것이 더 쉽고 빠를수록, 사물을 매개로 벌어지는 싸움보다 생각의 싸움이 더 치열하다. 마음은 지극히 빠르고 제어할 수 없으며, 죄악된 상상에 쉽게 빠지는 것이다.

9. 끊임없이 일하고, 깨어 있으며(잠을 자지 않고), 금식하며(먹지 않는 것)는 우리에게 명해진 바가 아니나,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은 율법에 명시되어 있다. 왜냐하면 영혼의 정욕적인 부분을 치유하기 위한 그 수련들은 스스로 활동하기 위해 육체를 필요로 하는데, 육체는 지탱해 주는 것이 없으면 끊임없이 수고와 결핍 속에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도는 마음을 정화하고 투쟁할 수 있는 힘을 주는데, 그 마음은 이 육체 없이도 기도하며 모든 영혼의 힘을 지키기 위해 악마들과 싸우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10. 정욕적인 부분과 싸우는 악마들이 잠든 꿈속에서 우리에게 지인들과의 만남, 가족들과의 연회, 여인들의 무리, 그리고 정욕이 보통 탐닉하는 그 밖의 유사한 것들을 보여주고, 우리가 그것에 휩쓸린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 부분으로 인해 병들었으며, 우리 안에 그 정욕이 강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들이 우리의 성급한 부분을 지배할 때는, (꿈속에서) 우리를 끔찍하게 험준한 곳을 걷게 하거나, 무장한 사람들, 혹은 독사나 육식 동물을 우리 앞으로 보내게 한다. 만약 우리가 (꿈속에서) 그런 장소들을 두려워하고, 짐승과 사람들에게 쫓기며 도망친다면, 우리는 자신의 자극적인 부분을 돌보아야 하며, 깨어 있을 때 주 그리스도를 부르며 앞서 제시된 치료법을 활용해야 한다.

11. 꿈속에서 부끄러운 환상 없이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신체 움직임은 영혼이 어느 정도 건강함을 나타내지만, 그러한 환상들이 얽혀 있는 것은 영혼이 병들었음을 나타내는 징후이다. 이때, 불분명한 인물에 대한 상상은 오래된 정욕의 잔재를 가리키고, 분명한 인물에 대한 상상은 마음의 새로운 상처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아두어야 한다.

12. 무정(無情)의 징후는 낮에는 생각을 통해, 밤에는 꿈을 통해 판단할 것이다. 무정을 영혼의 건강이라 부르고, 경건함을 영혼의 양식이라 부르는데, 이는 오직 경건함만이 우리를 성스러운 힘들과 결합시켜 주기 때문이다. 무형체와의 결합은 그들과 마음이 일치할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13. 영혼의 평화로운 상태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연적인 수분의 고갈과 마름의 결과이며, 다른 하나는 악령들이 물러날 때 나타나는 것이다. 첫 번째 상태에는 겸손과 마음의 통회—눈물과 끝없는 신성한 행위가 수반되며, 두 번째 상태 뒤에는 다른 악령들이 물러난 후 수도사를 지배하는 허영과 교만이 뒤따릅니다. 첫 번째 상태의 경계를 지키는 자는 악령들의 공격과 계략을 더 빨리 알아차릴 것입니다.

14. 허영의 악마는 음행의 악마와 정반대이며, 이 둘이 함께 영혼을 공격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 중 하나는 영예를 약속하는 반면, 다른 하나는 불명예에 빠뜨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 중 어느 하나가 다가와 너를 괴롭히기 시작할 때, 너는 스스로 그와 반대되는 악마의 생각을 마음속에 일으키고, 가능하다면 말 그대로 ‘못으로 못을 뽑아내듯’ 물리칠 수 있다면, 네가 무정(無情)의 경지에 가까워졌음을 알라. 이는 네 마음이 인간의 생각으로 악마의 유혹을 물리칠 만큼 강해졌기 때문이다. 물론 겸손함으로 허영의 생각을 물리치거나, 정절함으로 음란한 생각을 물리치는 것은 가장 깊은 무정욕의 표징이 될 것이다. 서로 상반되는 모든 악마들에 대해 이렇게 행해 보라. 그러면 동시에 네가 어떤 정욕에 더 사로잡혀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모든 힘을 다해 하나님께 간구하여, 두 번째 방법으로 원수들을 쫓아내는 법을 가르쳐 주시고 도와주시기를 구하라.

15. 영혼이 더욱 번영할수록, 그에 대항하는 적대자들은 더욱 강력해진다. 영혼 곁에 항상 똑같은 악마들만 머무르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를 가장 잘 아는 이들은 닥쳐오는 유혹을 예리하게 관찰하는 자들로, 그들은 평소의 냉정함이 이전의 악마들을 이어받은 새로운 악마들에 의해 예전보다 더 심하게 흔들리는 것을 목격한다.

16. 완전한 무정(無情)은 활동적인 삶을 방해하는 모든 악마들을 극복했을 때 영혼 안에 나타나며, 불완전한 무정이라 함은 영혼이 자신의 힘으로, 그러나 양보 없이, 여전히 자신을 공격하는 악마와 싸우고 있을 때를 말한다.

17. 마음은 자신의 내면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그 정욕에 찬 길(고난)을 무사히 지나가지도 못하고, 무형의 영역에 들어서지도 못할 것이다. 이러한 내면의 혼란은 반드시 그 혼란을 일으킨 자들에게로 마음을 되돌리게 할 것이다.

18. 미덕과 악덕 모두 마음을 눈멀게 한다. 전자의 경우 그는 악덕을 보지 못하고, 후자의 경우 미덕을 보지 못한다.

 

성스러운 장로들의 명언

1. 옛 장로들이 올바르게 걸어간 길에 대해 묻고, 그 길을 따라 나아가야 한다. 그들이 말하고 행한 훌륭한 것들을 많이 찾을 수 있다. 그들 중 한 분은, 사랑으로 꾸준히 채식하는 것이 수도사를 곧 무정(無情)의 안식처로 인도한다고 말씀하셨다. 또한 그는 밤마다 꿈에 시달리던 한 형제를, 금식하며 병자들을 돌보라는 계명을 주어 그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었다. 그는 이에 대한 질문에, “자비만큼 정욕을 잠재우는 것은 없다”고 대답했다.

2. 의로운 안토니우스에게 당시의 현자 중 한 명이 다가와 말했습니다. “아버지, 책이 주는 위로를 박탈당한 채 어떻게 그런 삶을 견디십니까?” 그러자 그가 대답했습니다. “철학자님, 저의 책은 바로 이 창조된 자연입니다. 그것은 항상 저와 함께 있으며, 원할 때면 그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3. 어느 날, 선택받은 그릇인 이집트의 장로 마카리우스가 나에게 물었다. “사람들에게 원한을 품으면 왜 우리는 영혼의 기억력[61] 을 해치지만, 악마들에게 원한을 품어도 해를 입지 않는 것입니까?” 제가 대답하기 어려워하며 그분께 직접 설명해 달라고 청하자,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첫 번째는 (짜증나는 힘의) 본성에 반하는 것이지만, 두 번째는 그 본성과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4. 어느 날 한낮의 가장 뜨거운 더위 속에서 나는 성자 마카리오 신부님을 찾아가, 극심한 갈증에 시달리며 물을 한 모금 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그는 말했다. “그늘에 만족하라. 이 시간에 여행하거나 배를 타고 다니는 많은 이들은 그늘조차 누리지 못하니까.” 그 후, 내가 이 일을 계기로 절제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자, 그분은 말씀하셨다. “내 아들아, 믿어라. 나는 무려 스무 해 동안 빵도, 물도, 잠도 배불리 누리지 않았다. 나는 빵을 무게로만 먹고 물을 정해진 양만큼 마셨으며, 벽에 기대어 잠을 조금만 잤다.”

5. 한 수도사[62] 에게 아버지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으나, 그는 그 소식을 전한 이에게 말했다. “신성모독을 그만두어라. 내 아버지는 불멸하시니.”

6. 한 형제가 한때 장로에게 물었다. 집에 돌아가면 어머니와 자매들과 함께 식사해도 되는지. 장로는 말했다. “여자와는 함께 먹지 마라.”

7. 어떤 형제는 복음서 한 권만 가지고 있었으나, 나중에 그것마저 팔아 그 돈을 굶주린 이들에게 먹을 것을 사 주며, 이때 기억할 만한 말을 남겼다. “나는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마태복음 19,21)고 내게 말하는 바로 그 말씀을 팔았다.”

8. 알렉산드리아 근처, ‘마리아 만’이라 불리는 만의 가장 북쪽 끝에 한 섬이 있는데, 그곳에는 영적 문제에 대해 가장 해박한 지식을 가진 한 수도사가 살고 있었다. 그는 수도사들이 하는 모든 일은 다섯 가지 이유에서 비롯된다고 말하였다. 곧, 하나님을 위하여, 본성의 요구에 따라, 관습에 따라, 필요에 따라, 그리고 수공예를 위하여. 그는 또한 미덕은 본질적으로 하나이지만, 마치 햇빛이 형태를 갖지 않으면서도 보통은 통과하는 구멍의 형태를 띠는 것처럼, 영혼의 힘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고 말했다.

9. 또 다른 수도사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분노의 원인을 근절하기 위해 즐거움을 포기한다. 분노는 항상 즐거움 때문에 전쟁을 일으키며, 마음을 뒤흔들고 깨달음을 멀어지게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어떤 장로께서는 사랑은 곡식이나 돈을 아껴 두는 법을 모른다고 말씀하셨다. 그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악령들이 같은 일로 나를 두 번 속인 적은 없는 것 같다.”

10. 모든 형제를 똑같이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악의나 증오에서 벗어나 모든 이를 편견 없이 대할 수는 있다. 하느님 다음으로 가장 사랑해야 할 이들은, 성사들을 통해 우리를 정화시키고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는 사제들이며, 우리 장로들은 천사들처럼 공경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사랑하는 형제 아나톨리여, 우리가 성령의 은총으로 익어가는 우리 포도나무 가지에서 얼마나 많은 열매를 찾아 모았는지에 대해서만 내가 너에게 말해 두겠다. 만일 진리의 태양이 끊임없이 우리를 비추고 열매가 완전히 익게 된다면, 그때 우리는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시편 103, 15), 나를 심어 주신 의로운 그레고리우스와, 나를 적셔 주시는 이곳의 경건한 아버지들의 기도와 간구, 그리고 나를 다시 살리시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마시게 되리라. 그분께 영광과 권능이 세세토록 있기를. 아멘.

 

3. 수도사 에바그리우스의 저서 『수도 생활의 모범』에는 어떻게 수련하고 침묵해야 하는지가 가르쳐져 있다

1. 예레미야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너도 이 땅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라. 주님께서 이 땅에서 태어나는 아들들과 딸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으니, 그들은 고통스러운 죽음으로 망할 것이라” (16, 1 등). 이 말씀은 사도가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을 보여준다. “결혼한 사람은 세상의 일, 곧 아내를 기쁘게 할 방법을 염려하고… 결혼한 여자는 세상의 일, 곧 남편을 기쁘게 할 방법을 염려한다” (고린도전서 7, 33. 34). 여기서 선지자가 말한 “아들과 딸들”은 단순히 혼인 생활에서 태어난 자식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죽음으로 멸망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이, 단지 혼인 생활에서 태어난 아들들과 딸들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태어나는 아들들과 딸들, 즉 육신의 생각과 욕망에 대한 것임을 이해한다면, 그들도 이 세상의 고통스럽고 연약하며 나태한 사고 속에서 죽어가며, 하늘의 영원한 생명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혼하지 않은 자는”이라고 말씀하시며, “주님의 일에 전념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할 방법을 찾는다”(고린도전서 7:32)고 하셨으며, 그는 하늘의 생명이 주는 항상 싱그러우며 불멸의 열매를 맺는다.

2. 수도자는 바로 이와 같아야 하며, 수도자로서 마땅히 그래야 한다. 즉, 아내로부터 떨어져 그 장소에서 아들과 딸을 낳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어 재물을 탐하지 않고, 근심에서 자유로우며, 분주한 세상의 생각과 행실과는 거리가 멀어야 한다. 사도도 말하듯이: “아무도 군인이 되어 세상의 장사에 얽매여서는 안 되며, 지휘관에게 기쁨이 되어야 한다”(딤후 2:4). 수도사는 무엇보다도 이 세상 모든 것을 버리고, 고요함이라는 아름답고 선한 전리품(승리의 상징)을 향해 힘써 나아가야 한다. 침묵 속의 수련은 얼마나 아름답고 선한가, 참으로 얼마나 아름답고 선한가! “그의 멍에는 쉽고 짐은 가볍다”(마태복음 11,30): 삶은 달콤하고, 행위는 기쁜 일이다.

3. 사랑하는 이여, 은둔의 삶을 제대로 받아들이고 고요함의 열매를 얻고자 하는가? 세상의 근심거리와 그 근원 및 권세들을 그곳에 남겨두라. 즉, 마치 비물질적인 존재처럼 무정하고 모든 욕망에서 벗어나, 그와 관련된 불안한 우연들로부터 자유로워져 온전히 침묵할 수 있도록 하라. 왜냐하면 누구든지 이 모든 것에서 스스로를 끊어내지 못한다면, 이러한 삶의 방식을 제대로 영위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음식은 단순하고, 구하기 쉬우며, 준비에 많은 수고가 들지 않는 것으로 정하고, 다양해서 유흥에 빠지게 하는 것은 피하라. 만약 귀한 음식에 대한 생각이, 마치 이국적인 것을 좋아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떠오른다면, 그 생각을 버리고 조금도 귀 기울이지 마라. 이는 이를 통해 원수가 너를 유혹하여, 너를 침묵에서 멀어지게 하려 하기 때문이다. 마르다의 모습 속에서 주 예수님께서, 이런 일에 신경 쓰는 네 영혼을 책망하시며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말하느니라. “한 가지만 필요하니라”(눅 10:41)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계시니,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며, 그 외의 것은 그 후에 수고 없이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곧이어 “마리아는 좋은 부분을 택하였으니, 그것이 그녀에게서 빼앗기지 아니하리라”(42)라고 덧붙이신 것이다. 사렙타의 과부가 선지자를 어떻게 대접했는지에 대한 본보기도 있다(열왕기상 17:10). 설령 빵 한 조각과 물 한 잔밖에 없다 해도, 그것으로 제대로 환대를 베풀고 그에 대한 상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설령 그것조차 없다 하더라도, 선한 뜻으로 나그네를 맞이하고 그에게 선한 말을 건네기만 해도, 그것으로 나그네를 환대하는 보상을 얻을 수 있다. “선한 말은 선물보다 낫다”(시라 18, 16. 17)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4. 또한 자선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야 한다.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 부를 소유하기를 바라지 말라. 이는 종종 허영의 모습으로 다가와 마음을 분주한 일들로 몰아넣는 악한 자의 아첨이기 때문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서에는 두 렙타로 부자들의 뜻과 힘(헌금의 가치)을 뛰어넘은, 좋은 증언을 받은 과부가 등장한다. “모든 사람이”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남는 것에서 보물 창고에 넣었으나, 이 여인은 가진 모든 것을 드렸느니라”(눅 21:4). 옷에 관해서는, 여분의 옷을 갖고자 하지 말고, 육체의 이 필요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한 옷만 마련하라. “주님께 네 슬픔을 맡겨라”(시편 54:23), 그러면 그분께서 너를 돌보실 것이다. “그분께서 우리를 돌보시기 때문이라”고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하신다(디모데전서 5:7). 만일 음식이나 옷이 필요하다면,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네게 건네줄 때 부끄러워하지 말고 받아라. 이는 교만의 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설령 네가 그것들로 풍족하다 하더라도, 없는 자에게 나누어 주라.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들(혹은 종들)이 이렇게 가정을 꾸려가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사도도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며, 필요한 것에서 부족함을 겪는 자들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의 풍족함이 그들의 부족함이 되게 하고, 그들의 풍족함이 너희의 부족함이 되게 하여, 평등이 이루어지게 하라. 기록된 바와 같이, ‘많은 것을 가진 자는 더 많이 가진 것이 아니요, 적은 것을 가진 자는 더 적게 가진 것이 아니니라’”(고린도후서 8:14, 15). 그러므로 현재 필요한 것을 갖추고 있다면, 미래, 예를 들어 내일이나 일주일, 한 달, 혹은 1년 후를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일이 오면, 네가 하늘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한다면 그 때가 네게 필요한 것을 스스로 마련해 줄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6,33) 하셨기 때문이다.

5. 소년을 받아들이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원수가 그를 빌미로 어떤 유혹을 일으키고, 값진 음식에 대한 걱정으로 네 마음을 뒤흔들게 될 것이니, 그때는 더 이상 너 자신만을 돌볼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소년을 두는) 그 생각이 육체적 안락(마치 필수적인 것처럼)을 위해 떠오를지라도, 너는 더 나은 것, 즉 영적 평안을 추구하라. 영적 평안은 육체적 평안보다 훨씬 낫기 때문이다. 그 생각이 ‘소년의 유익을 위해 그렇게 해야 한다’고 속삭인다 해도, 그것을 믿지 마라. 이는 우리의 일이 아니라, 키노비아에 사는 다른 성스러운 아버지들의 일이기 때문이다. 침묵의 삶을 마땅히 지키며 오직 네 자신의 유익만을 돌보아라. 세속적인 것을 사랑하고 분주한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을 좋아하지 마라. 혼자 살든지, 아니면 세속적인 것을 사랑하지 않고 너와 뜻을 같이하는 형제들과 함께 살든지 하라. 물질에 집착하고 번잡한 사람들과 함께 사는 자는, 당연히 그들처럼 번잡해지게 되고, 세속적인 관습과 헛된 말,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악한 일들, 분노, 슬픔, 광적인 물질 사랑, 두려움, 혼란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부모에 대한 걱정이나 친척들과의 우정으로 마음을 빼앗기지 마라. 그들과의 잦은 만남을 거절하여, 그들이 네 은둔처의 고요함을 빼앗지 못하게 하고, 그들에게 익숙한 번잡함 속으로 너를 빠뜨리지 않도록 하라.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죽은 자들을 장사 지내게 하라. 너는 나를 따르라’ (마태복음 8,22).” 설령 네가 사는 수도원이 시끌벅적하더라도, 그곳에 대한 애정으로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주저하지 말고 그곳을 떠나라. 그러니 모든 일을 하고 모든 것을 행할 때, 침묵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에서 벗어나, 오직 한 가지, 곧 하나님의 뜻 안에 머무르는 것과 보이지 않는 세력들과 성공적으로 싸우는 것에만 힘쓰라.

6. 네 고향에서 제대로 침묵을 지키기 어렵다면, 타지에서 침묵을 지키기로 결심하고, 네 모든 생각을 그 일에 집중하라. 능숙한 상인처럼, 진정한 침묵을 이루기 위해 모든 것을 시험해 보고, 이를 위해 필요하고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 기꺼이 받아들여라. 그나저나, 내가 네게 말하노니, 방랑 생활을 사랑하라. 이는 고국에서 피할 수 없는 불편함에서 벗어나게 해 줄 뿐만 아니라, 침묵의 삶이 주는 모든 선을 맛보게 해주기 때문이다. 도시에는 가지 말고 인내심을 가지고 광야에 머물라. “이는 내가 도망하여 광야에 거처를 삼았음이니라”라고 성 다윗이 말하듯이(시편 54:8). 가능하다면 아예 도시에는 가지 마라. 거기서는 네가 선택한 수도 생활의 방식에 도움이 되는 것, 유익한 것, 적합한 것을 아무것도 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보았노라”고 같은 성인이 다시 말하길, “도시에는 불의와 다툼이 있도다” (시편 54:10). 그러니 한적하고 산만하지 않은 곳을 찾아 그곳에 정착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설령 그곳에서 악마의 유령을 보게 되더라도 겁내지 말고, 우리에게 구원이 되는 이 전장에서 도망치지 마십시오. 두려워하지 말고 인내하라. 그리하면 하나님의 위대하심(출 14:13)과 보호, 은총, 그리고 구원에 대한 온갖 증거를 보게 될 것이다. “나는” 그 복된 사람이 말하길, “나를 소심함과 폭풍으로부터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기다리노라”(시 54:9). (고요히 살겠다는) 네 의지를 오락 삼아 돌아다니고 싶은 욕망이 이기지 못하게 하라. 왜냐하면 그러한 방황은 정욕과 함께 선한 마음을 타락시키기 때문이다(데살로니가전서 4:12). 이로 인해 많은 유혹이 생긴다. 타락을 경계하고 네 방에 더욱 굳건히 머물러라.

7. 친구가 있다면, 그들과 자주 만나는 것을 피하라. 오랜 간격을 두고 만나는 것이 너에게도, 그들에게도 더 유익할 것이다. 만일 그들로부터 어떤 해를 입는다고 느낀다면, 아예 그들에게 가까이 가지 마라. 너에게 유익하고 네 삶의 방식에 도움이 되는 친구들을 사귀어야 한다. 교활하고 불화스러운 사람들과의 만남을 피하고, 그런 사람과는 누구와도 함께 살지 말며, 그들의 악한 제안을 거절하라.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며, 그분을 위하여 살지도 않기 때문이다. 평화로운 사람들, 영적 형제들, 거룩한 아버지들이 네 친구가 되게 하라. 주님께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들이 바로 내 어머니요, 내 형제요, 내 자매라” (마태복음 12:50, 마가복음 3:35)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을 그렇게 부르셨기 때문이다. 번거롭고 허둥대는 자들과 어울리지 말고, 그들의 식사에 참석하지 마라. 그들이 너를 그들의 유혹 속으로 끌어들여, 침묵의 삶에 대한 가르침과 수련에서 멀어지게 하지 않도록 하라. 그들에게는 (사람을 유혹하려는) 그런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그들의 마음속 계획을 받아들이지 마라. 그들은 실로 해롭기 때문이다. 네 영혼은 땅의 신실한 자들에게 머물게 하고, 다윗의 본을 따라 그들의 울음에 동참하며 네 마음이 아파하게 하라. 다윗은 시편 100편 6절 에서 “내 눈은 땅의 신실한 자들에게 있어, 그들을 나와 함께 앉히리라”고 말하였다. 만약 하나님의 사랑을 따르는 자 중 누군가가 네게 와서 빵과 소금을 나누어 달라고 청하면, 가고 싶다면 가되, 서둘러 네 방으로 돌아오라. 가능하다면 결코 네 방 밖에서 밤을 보내지 말라. 그래야 침묵의 은총이 항상 너와 함께 머물며, 네가 정한 방 안의 봉사를 방해받지 않고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8. 맛있는 음식에 대한 욕망을 방종하지 말고, 사치의 유혹에 휩쓸리지 말라. 사도가 말했듯이, “풍족하게 먹는 자는 이미 죽은 자나 다름없다”(딤전 5:6). 남의 음식으로 배를 채우지 말라. 그래야 그것에 중독되지 않고, 밖에서 자주 식사하는 습관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배가 부른 것에 미혹되지 말라”(잠언 24:15)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약 네가 자신의 방에서 자주 불려 나가는 것을 보게 된다면, 거절하라. 방 밖을 자주 드나드는 것은 해롭기 때문이다. 이는 은혜를 앗아가고, 생각을 흐리게 하며, (하나님과 함께 침묵하며 머무르려는) 따뜻한 소망을 갉아먹는다. 포도주를 보라. 오랫동안 한 자리에 가만히 두면 잘 가라앉아 맑고 향기롭게 되지만,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닐 경우 침전물과 효모가 떠오르면서 탁하고 어두워지며 맛도 나빠진다. 자신을 그와 동일시하며, 첫 번째 경우처럼 되려고 노력하라: 많은 사람과의 교제를 끊어, 네 마음이 여러 생각에 흩어지지 않게 하고, 네 침묵의 질서가 흐트러지지 않게 하라. 손수 하는 일을 정하고, 가능하다면 밤낮으로 그 일에 전념하라. 그래야 네가 남에게 부담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성 바울 사도가 명하신 대로(살후 3:12, 엡 4:28) 다른 이들에게 베풀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이를 통해 너는 낙담의 악마를 이기고, 그 밖의 모든 원수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낙담의 영은 대개 게으른 자를 공격하는데, 지혜로운 분께서는 그에 대해 그는 정욕 속에 있다”고 말씀하셨다(잠언 13:4). 주고받는 일에서 죄를 피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무언가를 팔든지 사든지, 실제 가치에 비해 약간의 손해를 감수하라. 그래야만 실제 가치를 추구하면서도 탐욕스러운 자들의 수법에 휩쓸리지 않고, 영혼에 해로운 일들—다툼, 맹세 위반, 약속 불이행—에 빠지지 않으며, 그로 인해 우리 직분의 존엄한 품위를 더럽히거나 망신시키지 않도록 하라. 이를 염두에 두고, 베풂과 받는 일에 있어 신중을 기하라[63] . 만약 네가 더 나은 길을 택하고자 한다면 – 그리고 이는 네게 가능한 일이다 – 네 자신을 돌보는 일을 다른 신실한 사람에게 맡겨라. 그리하여 마음의 평온을 얻고(고민에서 벗어나 내면이 평화로워진 상태로), 그 후 희망으로 가득 찬 선하고 기쁜 삶을 살아가도록 하라.

9. 침묵의 규율은 너로 하여금 이러한 유익한 일들을 행하도록 의무 짓는다. 이제 그 규율 안에서 지켜야 할 다른 사항들에 대해서도 네게 제시하리라. 너는 내 말을 잘 듣고, 내가 명하는 바를 실천하라. 네 방에 앉아 죽음을 떠올리고, 그때의 육신의 죽음을 상상하며, (영혼이 처하게 될) 극한 상황을 그려보고, 그로 인해 가슴 아파하라. 이를 통해 너는 세상을 뒤흔드는 헛된 일들에 대한 경멸을 마음속에 굳건히 다지고, 네가 선택한 겸손한 운명에 대한 사랑을 불태우며, 변함없이 그리고 끊임없이 침묵 속에 머물고자 하는 열망을 품게 될 것이다. 지옥에 있는 영혼들의 현재 상태도 떠올려 보라. 그들이 그곳에서 어떤 처지인지, 어떤 쓰라린 침묵 속에 있는지, 어떤 고통스러운 신음 속에 있는지, (심판의 날을) 기다리며 어떤 두려움과 경직 속에 있는지, 그들의 끊임없는 영적 고통이 어떤지, 그들의 끝없는 눈물이 어떤지 생각해 보라. 또한 부활의 날과 하나님 앞에 서는 날을 떠올려 보라. 그 무섭고 공포로 가득 찬 심판을 상상해 보라. 그곳에서 죄인들을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 즉 하나님과 그분의 그리스도, 천사들, 대천사들, 권세자들, 그리고 모든 사람 앞에서 겪게 될 수치심을 떠올려 보라. 또한 영원한 불, 잠들지 않는 벌레, 타르타로스, 어둠과 같은 모든 형벌의 장소를 상상해 보라. 무엇보다도 이 모든 것 위에 이빨을 갈며, 공포와 고통스러운 고난이 얹혀 있음을 생각하라. 또한 의인들에게 예비된 복, 곧 하나님 아버지 및 그분의 그리스도, 천사들, 대천사들, 권세자들, 그리고 모든 성도들과 함께할 담대한 교제, 보물이 가득한 왕국, 기쁨과 즐거움도 마음에 떠올려 보라. 이 두 가지를 모두 기억하라. 그리고 죄인들의 운명을 생각하며 신음하고 울며, 마치 자신도 그들 가운데 포함되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슬픔의 옷을 입으라. 반면 의인들에게 예비된 복에 대해서는 기뻐하고 환호하며 즐거워하라. 이 복들을 얻도록 힘쓰고, 저 고통들은 피하도록 하라. 그러니 결코 이것을 잊지 마라. 네 방에 있든, 밖 어디에 있든, 이 기억이 네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하라. 그래야 적어도 이를 통해 불결하고 해로운 생각들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10. 주님 앞에서 네가 가진 힘만큼 금식하라. 그것은 네 죄와 불법을 씻어 주고, 영혼을 온유하고 위엄 있게 만들며, 마음을 거룩하게 하고, 악마를 쫓아내며,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게 할 것이다. 하루에 한 번 맛본 후에는, 다시는 탐내지 마라. 그래야 과도한 욕망을 품지 않고, 네 마음을 흐트러뜨리지 않을 것이다. 이를 통해 네게는 언제나 자선 활동에 쓸 것이 남을 것이며, 육체의 정욕은 죽어갈 것이다. 그러나 형제들이 찾아와 두 번째, 세 번째로 먹어야 할 필요가 생기더라도, 얼굴을 찡그리거나 불평하지 말고, 오히려 형제들의 필요를 도울 수 있어 기뻐하라. 두 번째, 세 번째로 먹을 때, 사랑의 법을 이행했음을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리하여 이제 하나님께서 친히 네 삶의 보호자가 되실 것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병이 닥쳐 육체의 쇠약함으로 인해 두 번, 세 번, 심지어 여러 번 음식을 섭취해야 할 때가 있는데, 그 생각에 당황하지 마라. 왜냐하면 우리 삶의 육체적 수행을 병중에도 엄격하게 지켜야 할 필요는 없으며, 오히려 일부 경우에는 완화를 주어 하루빨리 건강을 회복하고 다시 그 수행의 노고를 시작할 수 있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음식을 삼가야 할지에 관해, 하나님의 말씀은 먹는 것을 금하신 바가 없으며,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주었으니, 풀과 같은 식물이다. 먹으라, 아무것도 의심하지 말라” (창 9:3, 고전 10:25, 27). 또한 “입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아니하느니라”(마태복음 15:11)고 하셨다. 그러므로 어떤 음식물을 삼가는 것은 언제나 우리의 자유 의지에 따른 일이며, 영혼이 자발적으로 행하는 수련이 되어야 한다.

11. 맨땅에서 잠을 자거나, 밤을 새우거나, 그 밖의 모든 고행을 기꺼이 견뎌내라. 모든 성도들과 함께 네게 드러날 영광을 바라보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니라”고 사도가 말하느니라 (로마서 8:18). 정신이 꺾일 때면, 기록된 대로(야고보서 5:13) 기도하되, 경외와 떨림으로, 가슴 아파하며,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는 마음으로 기도하라. 특히 이 일에서 우리에게 항상 방해를 가하려는 악의적이고 교활한 보이지 않는 원수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그들이 우리가 기도에 전념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그때 그들은 재빨리 우리에게 다가와 기도 중에 떠올리거나 생각해서는 안 될 것들을 우리 마음에 심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아 기도 시간 동안 우리의 간구와 기도를 무익하고 헛되며 쓸모없게 만들려고 한다. 왜냐하면 앞서 말한 대로, 경외심과 떨림, 그리고 정신 차림과 깨어 있는 마음으로 행해지지 않는다면, 기도와 간구, 청원은 헛되고 무익하기 때문이다. 만약 왕이나 사람 앞에 나아갈 때, 누구나 두려움과 경외심, 그리고 온전한 주의력을 다해 자신의 청원을 아뢰는 것처럼, 하물며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통치하는 자들의 왕이시며 다스리는 자들의 주님이신 그리스도 앞에서는 더욱더 그와 같은 태도로 나아가 그분 앞에서 우리의 기도와 간구를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하나님께 영원토록 영광이 있나이다. 아멘.

 

4. 수도사 에바그리우스의 『33개의 비유』

1. 황달은 영혼이 하나님과 모든 피조물을 올바르지 않게 바라보는 악한 상태이다.

2. 뒤로 굽어짐은 이성적 본성의 결함으로, 이로 인해 영혼은 미덕과 신학에 대해 완고해진다.

3. 괴사는 영혼의 이성적인 부분을 침범하는 분노의 발화와 움직임이다.

4. 실명은 활동적인 미덕이나 실재에 대한 인식에 아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지성의 무지이다.

5. 마비는 이성적인 영혼이 실천적 미덕을 향해 움직이지 못하거나 움직이기 어려운 상태이다.

6. 부종은 소홀함으로 인한 이성적 영혼의 이완으로, 이로 인해 영혼은 대개 영적 가르침의 말씀을 거부한다.

7. 마비는 이성적 영혼의 무기력함으로, 이로 인해 그 영혼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형상화하게 하는 미덕들을 거부한다.

8. 나병은 이성적 영혼의 불신으로, 이 상태에서 영혼은 마치 진리를 직접 만지는 듯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확신하지 못한다.

9. 실신은 덕과 신학에서 성과를 거둔 후, 이성적인 영혼이 다시 악으로 기울어지는 것이다.

10. 뇌진탕은 이성적인 영혼이 선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목적을 위해 미덕을 붙잡고 있는 악한 상태이다.

11. 콧물은 그리스도의 향기를 느끼게 해 주던 덕을 상실한 것이다.

12. 귀먹음은 이성적인 영혼이 영적인 가르침을 외면하게 되는 완고함이다.

13. 백내장은 영적 관조의 상태에서 타락하거나, 존재에 대한 잘못된 관점을 내면화하는 것이다.

14. 말더듬은 이성적인 영혼의 병으로, 우연한 일들에 현혹되어 모든 일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못하는 상태이다.

15. 절름발이는 이성적인 영혼이 참된 미덕을 실천하는 데 무력한 상태이다.

16. 수종병은 미덕이 억눌려 악과 무지가 영혼 안에서 지배하게 될 때, 영혼이 길에서 무분별하게 벗어나는 것이다.

17. 개미는 이 세상에서 미래를 위해 먹을 것을 마련하는 부지런한 사람이다.

18. 히로그릴라(돼지과)는 우리 구세주 그리스도의 계명을 받아들인 부정한 이교도들이다.

19. 메뚜기는 죽음이 닿지 않는 이성적인 영혼들로, 씨앗을 먹이로 삼는다(아마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의 복을 누리는 자들일 것이다).

20. 아스칼라보티스(벽과 천장을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도마뱀의 일종)는 미덕을 바탕으로 하늘의 힘에 대한 지식을 탐구하는 실용적인 지성을 상징한다.

21. 스키멘 르보프(사자 새끼)는 내면에 있던 야수들(정욕)을 정복하고 군림한 냉정한 사람이다.

22. 코쳇은 영적인 사람으로, 지혜로 충만하며, 다른 영혼들에게 현명한 태양으로부터 오는 날을 전하는 자이다.

23. 사슴은 자신의 무질서한 생각들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활동적인 남자이다.

24. 거머리는 이성적인 영혼들로부터 의로움의 피를 빨아들이는 불결한 힘이다.

25. 지옥은 이성적인 피조물이 하나님을 관조하는 능력을 상실한 후, 그 피조물을 뒤덮는 무지의 어둠이다.

26. 아내는 이성적인 영혼을 불결함으로 빠뜨리는 광기이다.

27. 땅은 불경건과 불법으로 이루어진 악한 상태이다.

28. 불은 이성적인 피조물 안에서 하나님의 미덕을 말살하는 악이다.

29. 물은 참된 지식을 소멸시키는 거짓 지식이다.

30. 조롱하는 눈은 하나님의 지식을 비웃고, 존재하는 것 안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모독하는 부정한 힘이다.

31. 까마귀는 악을 근절하는 거룩한 힘이다.

32. 심연은 무지와 악으로 파헤쳐진 이성적인 영혼들이다.

33. 독수리 새끼들은 부정한 악마들을 타격하는 임무를 맡은 거룩한 힘들이다.

 

5. 영적 삶에 관한 그의 말씀, 알파벳 순서대로

1. 명예를 추구하는 자가 칭찬받는 일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 것은 부적절하다.

2. 하나님을 알고 싶으십니까? 먼저 자신을 알아가십시오.

3. 기쁜 소식을 서둘러 전해 주는 이가 진정한 친구이다.

4. 하찮은 일을 하면서 자신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다.

5. 어떤 자만심도 자기 인식을 방해한다.

6. 무분별한 삶의 악마는 이게몬(통치자)이다.

7. 영혼의 고귀함은 그 선한 마음가짐에서 드러난다.

8. 신을 경외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과 모순되지 않는 사람이다(이성적인 본성의 요구에 따라 사는 사람).

9. 하나님의 성전은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다.

10. 가장 악한 탐욕은 방탕한 삶이다.

11. 마땅히 말해야 할 것을, 마땅히 말해야 할 때에 말하라. 그러면 마땅치 않은 말은 듣지 않게 될 것이다.

12. 가장 훌륭한 재산은 충실한 친구이다.

13. 영혼의 병은 허영심이다.

14. 나그네와 가난한 자 – 하나님의 콜루리(계시록 3:18). “네 눈에 콜루리를 바르라, 그리하면 볼 것이니라.” 콜루리 – 궁핍한 자에 대한 자비.

15. 그들을 받아들이는 자는 곧 눈을 뜨게 될 것이다.

16. 모든 사람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은 좋은 일이나, 특히 갚을 수 없는 이들에게 베푸는 것은 더욱 좋다.

17. 정직한 웅변가는 시원한 물 한 잔이다.

18. 정절과 온유한 마음은 케루빔이다.

19. 노년의 명예는 노년 이전에 부지런히 일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20. 젊은 시절의 근면함은 노년의 명예를 보장한다.

21. 영혼의 다락방은 참된 관조이다.

22. 마땅하지 않은 것을 사랑하면, 마땅한 것을 사랑하지 않게 된다.

23. 가짜 친구를 사귀는 것보다 가짜 금을 받는 편이 낫다.

24. 하나님 앞에서 깨끗한 영혼은 곧 하나님이다.

25. 모든 것을 미워하는 자만심에서 오는 비탄이여!

 

6. 그의 다른 명언들

1. 사랑의 시작은 “ypolefis doxes” 즉, 서로에게 존경을 표하는 것(혹은 서로에 대한 좋은 평가, 혹은 상대방의 훌륭한 자질을 인정하는 것)이다.

2. 온유함과 사랑으로 부유해지는 것은 좋은 일이다.

3. 고귀한 마음가짐은 미덕을 풍겼다.

4. 자선은 길을 평탄하게 만든다.

5. 불공정한 재판관은 더럽혀진 양심이다.

6. 육신의 정욕에 노예가 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7. 슬픔 없이 살고 싶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도록 힘쓰라.

8. 자신을 잘 돌보는 자를 하나님도 돌보신다.

9. 순결한 마음은 묵상의 안식처이다.

10. 네가 누구인지 알고 싶다면, 네가 과거에 어땠는지가 아니라 태초에 어떻게 창조되었는지를 보라.

11. 허영심에 찬 영혼은 물 없는 구덩이와 같다.

12. 교만한 영혼은 강도들의 소굴이며, 그것은 진리의 음성을 용납하지 않는다.

13. 참된 사람의 악한 오해는 성경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14. 하나님을 경외하느냐? 눈물을 통해 깨달아라.

15. 영혼의 겸손은 깨지지 않는 무기이다.

16. 덕이 있는 사람은 낙원의 나무이다.

17.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나무이시다. 마땅히 그분을 누리면 영원토록 죽지 않을 것이다.

18. 진정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자선을 베풀면, 그리스도를 맛보게 될 것이다.

19. 그리스도의 몸을 맛보는 것이야말로 참된 힘이다.

20.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잊지 마라.

21. 이는 이를 통해 하나님 다음으로 선을 행하는 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22. 하나님 안에서 친구는 진리의 말씀 속에서 꿀과 젖을 흘려낸다.

23. 게으른 영혼은 그런 친구를 얻지 못할 것이다.

24. 쾌락을 좇는 생각은 잔인한 독재자이다.

25. 진리를 숨기는 것은 금을 땅에 묻는 것과 같다.

26.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모든 일을 하나님께 합당하게 행한다.

 

7. 아나톨리우스에게 보내는 여덟 가지 마음에 관하여

1. 모든 주요 생각은 여덟 가지가 있으며, 이로부터 다른 모든 생각이 비롯된다. 첫 번째는 탐식, 그 다음은 음란, 세 번째는 탐욕, 네 번째는 슬픔, 다섯 번째는 분노, 여섯 번째는 낙담, 일곱 번째는 허영, 여덟 번째는 교만이다. 이 생각들이 영혼을 괴롭히든, 괴롭히지 않든, 그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지만, 그것들이 우리 안에 오랫동안 머물든, 머물지 않든, 정욕을 일으키든, 일으키지 않든 – 그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2. 탐식의 생각은 수도사에게 속히 수행을 그만두라고 부추기며, 위장, 간, 비장의 질병이나 수종 또는 그 밖의 어떤 장기적인 질병, 의료 자원의 부족, 의사의 부재를 그에게 묘사한다. 이때 정확히 그러한 질병에 시달렸던 몇몇 형제들의 사례를 떠올리게 한다. 때로는 원수가 그 병에 걸린 형제들 스스로가 금식하는 이들에게 찾아가 자신들에게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도록 부추기기도 하는데, 이때 지나치게 엄격한 절제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덧붙이기도 한다.

3. 음행의 악마는 육체적 정욕을 자극하고, 금욕 실천자들에게 격렬하게 달려들어, 금욕이 그들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생각하게 하여 금욕을 중단하게 만듭니다. 영혼을 더럽히며, 악마는 영혼을 그런 행위로 유혹하고, 마치 그 일이 눈앞에 펼쳐진 것처럼 영혼이 어떤 말을 하고 듣는 것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4. 탐욕은 장수, 수작업에 대한 무력함, 굶주림, 질병, 궁핍의 비참함, 그리고 육체적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타인에게서 도움을 받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등을 수반한다.

5. 슬픔은 때로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함으로 인해 생기기도 하고, 때로는 분노를 동반하기도 한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함으로 인해 슬픔이 생기는 과정은 이렇다. 어떤 생각들이 미리 떠오르며 영혼에게 집과 가족, 그리고 예전의 생활 방식을 떠올리게 한다. 그 생각들이 그녀가 저항하지 않고 그들을 따르며 마음속으로 그들의 즐거움에 흠뻑 빠져들고 있음을 알게 되면, 그때 비로소 그 생각들은 그녀를 붙잡아 슬픔에 빠뜨린다. 그것은 원하는 대상들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정해진 삶의 규칙상 그런 대상들이 있을 수조차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불쌍한 영혼은, 첫 번째 생각에 더 깊이 빠져들수록, 두 번째 생각에 더 큰 충격을 받고 괴로워한다.

6. 분노는 가장 빠른 정열이다. 그것은 부당하게 대우한 자, 혹은 부당하게 대우한 것처럼 보이는 자를 향해 움직이고 불타오른다. 그것은 영혼을 점점 더 격분하게 하며, 특히 기도 중에 슬픔을 안겨준 사람의 얼굴을 생생하게 떠올리게 하여 정신을 빼앗는다. 때로는 마음이 굳어져 원한으로 변하면서, 밤에 불안을 일으키고, 육체를 괴롭히며, 죽음의 공포와 독이 있는 파충류와 짐승들의 공격을 초래하기도 한다. 원한이 생겨날 때 나타나는 이 네 가지 현상은, 어떤 관찰자라도 알 수 있듯이, 수많은 생각들을 동반한다.

7. 낙담의 악령은 ‘정오의 악령’(시편 90:6)이라고도 불리며, 모든 악령 중에서 가장 무겁다. 이 악마는 제4시(우리 시간으로 오전 10시) 무렵 수도사에게 다가와 제8시(오후 2시)까지 그의 영혼을 맴돌며, 처음에는 태양이 느리게 움직이거나 아예 움직이지 않는 것을 불만스럽게 보게 하고, 마치 하루가 50시간이나 되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그 후 그는 수도사가 자주 창밖을 들여다보게 하거나, 심지어 방을 나가서 태양을 바라보게 하여 9시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하게 하며, 이때 형제들 중 누가 있는지 이리저리 살피도록 부추기기도 한다. 그러자마자 악마는 그에게 이곳과 수도 생활 자체, 그리고 수공예에 대한 불만을 불러일으키며, 형제들의 사랑이 사라졌고 위로해 줄 이가 없다고 덧붙인다. 그 시절 누군가 수도사를 모욕했다면, 악마는 이를 떠올리게 하여 불만을 더욱 키운다. 그런 다음,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 필요한 것을 더 쉽게 구할 수 있는 다른 곳들에 대한 욕망을 불러일으키며, 덜 힘들지만 더 수익이 많은 기술을 익히라고 부추긴다. 여기에 더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장소에 달려 있지 않다고 덧붙인다. 하나님은 어디서나 경배할 수 있다고 말이다. 여기에 가족과 예전의 안락함에 대한 추억을 엮어 놓고, 장수할 것이라고 예언하며, 수행의 고된 노고를 묘사하고 온갖 교묘한 수단을 동원하여, 수도사가 마침내 방을 떠나 그 길을 버리고 도망치도록 만든다. 이 악마 뒤를 다른 악마가 즉시 따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싸워서 이기는 자에게는 그 수련 후에 평화로운 어떤 상태가 찾아오고, 영혼은 형언할 수 없는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된다.

8. 허영의 생각은 가장 교묘하다. 그것은 바르게 사는 사람들 앞에 나타나 그들의 공로를 선전하기 시작하고, 사람들에게서 그들에 대한 찬사를 모으며, 쫓겨나는 악마들이 어떻게 비명을 지르는지, 아내들이 어떻게 치유되는지, 군중들이 그의 옷자락을 만지려고 어떻게 몰려드는지 보여주며, 마침내 그에게 사제직까지 예언하고, 그를 문 앞으로 데려가 그를 찾는 자들에게 소개하지만, 거절당하자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묶인 채로 끌고 가버린다. – 그리고 이런 식으로 그에게 헛된 희망을 불러일으킨 뒤, 떠나면서 그 후로는 교만의 악마나 슬픔의 악마가 그를 유혹하도록 내버려 두는데, 이 악마들은 즉시 그 희망들과 정반대되는 생각들을 그에게 심어준다. 때로는 그가 방탕의 악마에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존경받고 거룩했던 이 사제를 넘겨주기도 한다.

9. 교만의 악마는 영혼이 가장 비참하게 타락하는 원인이 되곤 한다. 그는 영혼에게 하나님을 자신의 도우미로 고백하지 말고, 자신의 올바름을 스스로에게 돌리며, 모든 사람이 그녀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형제들을 무지한 자들처럼 얕잡아보게 부추긴다. 교만 뒤에는 분노와 슬픔이 따르며, 최후의 악은 정신의 혼란과 광기, 그리고 공중에 수많은 악마들이 보이는 환각이다.

 

8. 여덟 가지 생각에 관한 항목과 연계된 그의 생각들

1. 하나님의 은총을 얻는 데 도움이 되는 다섯 가지 행위가 있다. 첫째는 순수한 기도, 둘째는 시편을 부르는 것, 셋째는 성경을 읽는 것, 넷째는 자신의 죄와 죽음, 그리고 무서운 심판을 통회하며 되새기는 것, 다섯째는 수공예이다.

2. 육신을 가진 자로서 영적인 존재들처럼 하나님께 섬기고자 한다면, 끊임없이 마음속에 은밀한 기도를 간직하도록 힘쓰라. 이는 이러한 방식으로 네 영혼이 죽기 전에 천사들의 형상에 가까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3. 영혼이 떠난 우리 육신이 죽은 채 악취를 풍기듯이,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 영혼 또한 죽은 채 악취를 풍긴다. 그러나 기도를 잃는 것을 모든 죽음보다 더 쓰라린 일로 여겨야 한다는 사실은, 어떤 순간에도 기도를 포기하기보다는 차라리 죽기를 택했던 선지자 다니엘이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은 숨 쉬는 것보다 더 자주 해야 한다.

4. 모든 영감에 대해, 예수님의 이름을 냉철하게 부르며 겸손하게 죽음을 묵상하라. 이 두 가지 행위는 영혼에 큰 유익을 가져다준다.

5. 하나님께 인정받고 싶으십니까? 가능한 한 사람들에게 덜 알려지도록 하십시오. 당신이 영혼과 육신으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지켜보신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한다면, 어떤 일에서도 죄를 짓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을 당신의 동행자로 모시게 될 것입니다.

6. 다른 이에게 선행을 베푸는 것만큼 사람을 하나님과 닮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선행을 베풀 때, 그것이 자만심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온갖 면에서 조심해야 합니다.

7. 결국, 하나님께 합당하지 않은 일을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비로소 너는 하나님께 합당한 자가 될 것이다.

8. 덕행을 통해 네 영혼에 하나님의 형상을 새겨 넣을 때, 비로소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공경하게 될 것이다.

9. 사람들은 하나님께 가까이 갈수록 더 나은 사람이 된다.

10. 하나님께 영광과 경배를 드리는 지혜로운 사람은 그분께로부터 인정을 받는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해도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다. 분별력의 임무는 분노가 깃든 영혼의 그 부분을 자극하여 내면의 투쟁을 이끌어내는 데 있다. 지혜의 임무는 마음을 자극하여 끊임없이 주의 깊게 깨어 있게 하는 데 있다. 진리의 임무는 정욕이 자리 잡은 영혼의 그 부분을 오직 미덕과 하나님께로만 인도하는 데 있다. 마지막으로 용기의 임무는 오감을 다스려, 그것들을 통해 우리의 내적 존재, 즉 영이나 외적 존재, 즉 육체가 더럽혀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데 있다.

11. 영혼은 살아 있고, 단순하며, 무형이고,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실체로서, 또한 불멸하며 지성과 이성을 부여받은 존재이다. 육체에 눈이 있는 것처럼, 영혼에는 지성이 있다.

12. 하늘 아래 존재하는 이성적인 피조물들 중 어떤 이들은 싸우고, 어떤 이들은 방어하며, 또 다른 이들은 공격한다. 사람들은 싸우고, 하나님의 천사들은 방어하며, 불결한 세력들은 공격한다. 그러나 이는 방어하는 자들의 힘이 부족해서도, 공격하는 자들의 힘이 지나치게 강해서도 아니라, 싸우는 자들의 부주의로 인해 우리 안에 신성한 것들과 하나님 자신에 대한 인식이 자리 잡지 못하는 것이다.

13. 악은 본질적으로 실체가 아니라 선의 결핍이다. 마치 어둠이 빛의 부재에 지나지 않는 것과 같다.

14. 순진함은 그다지 신중하거나 예지력이 없기에, 악으로부터 자유롭고 안전해 있는 사람은 악을 의심하지 않는다.

15. 진실로 방탕함은 어리석은 일이며, 방탕한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도록 유도할 방법을 도무지 생각해 낼 수 없다.

16. 순수하고 은총을 받은 영혼들은 놀라울 정도로 예리하여, 악마가 아무리 교활하고 공격에 있어 지극히 사악하더라도 즉시 알아차리고 쫓아낸다.

17. 하나님께서는 육신을 자제하며 괴로워하는 것만큼 기뻐하시는 것이 없습니다.

18. 성부들 중 한 분은, 엄격하고 고된 수도 생활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은 다른 방법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수도사들을 믿고, 그들을 위로하며,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한다면, 이 또한 구원으로 이끄는 중요한 일 중 하나가 될 것이다.

19. 밤을 기도의 수고로 보내라. 그러면 네 영혼은 곧 위로를 얻으리라.

20. 평온한 마음으로 독서에 몰두하여, 마치 누군가의 손이 뻗어 끌어당기는 것처럼, 네 마음이 끊임없이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묵상하도록 이끌리게 하라.

21. 낮에 잠을 자는 것은 육체의 병이나, 영혼의 낙담, 혹은 안일함, 또는 미숙함을 나타낸다.

22. 모든 영혼은 성령의 은총과 자신의 노력과 정성을 통해 다음과 같은 자질을 자신 안에 모아 조화시킬 수 있다: 지성을 갖춘 말(어쩌면 교양 있는 웅변), 관조를 동반한 행동, 학문을 갖춘 덕, 어떤 망각도 없는 자유로운 인식을 바탕으로 한 믿음, 그리고 그 어느 것도 다른 것보다 더 크거나 작지 않게 조화롭게 결합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때 비로소 그 영혼은 참되고 선하신 하나님, 오직 그분 한 분과만 결합되기 때문이다.

23. 모든 죄를 낳는 여덟 가지 생각이 있다. 은둔 생활을 하는 이들에게는 낙담, 허영, 교만, 인색, 슬픔의 생각이 있고, 타인의 지도 아래(수도원 공동체에서) 사는 이들에게는 탐식, 분노, 음행의 생각이 있다.

 

9. 키노비아와 나그네 숙소에 거주하는 형제들에게 주는 교훈

1. 하나님의 상속자들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 그리스도의 공동 상속자들아, 그리스도의 계명을 경청하라!

2. 믿음은 사랑의 시작이며, 사랑의 끝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3.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영혼을 지키며, 절제는 영혼을 굳건하게 한다.

4. 용기 있는 자의 인내는 소망을 낳고, 선한 소망은 그를 영화롭게 할 것이다.

5. 엄격한 절제로 육신을 다스리는 자는 무욕에 이르고, 육신을 방종하는 자는 그로 인해 고통받을 것이다.

6. 절제하지 못하는 몸에는 음탕의 영이 깃들고, 절제하는 영혼에는 순결한 수치의 영이 깃든다.

7. 사랑이 깃든 은둔은 마음을 정화하지만, 분노로 타인을 멀리하는 것은 마음을 뒤흔든다.

8. 증오를 품고 동굴에 홀로 숨어 있는 것보다, 사랑을 품고 천 명 가운데 있는 편이 낫다.

9. 마음속에 원한을 품는 자는 마치 쭉정이에 불을 숨겨 둔 사람과 같다.

10. 네 몸에 음식을 많이 주지 말라. 그러면 꿈속에서 나쁜 환상을 보지 않을 것이니, 물이 불을 끄듯이, 굶주림은 나쁜 꿈을 끄기 때문이다.

11. 성미가 급한 사람은 겁이 많으나, 온유한 사람은 두려움을 알지 못한다.

12. 거센 바람이 구름을 몰아내듯이, 원한은 마음속의 선한 감정을 몰아낸다.

13. 원수를 위해 기도하는 자는 악을 기억하지 아니할 것이요, 혀를 삼가는 자는 이웃을 모욕하지 아니하리라.

14. 네 형제가 너를 모욕하면, 그를 네 집으로 데려오고, 그를 찾아가는 것을 게을리하지 말며, 그와 함께 네 빵을 나누어 먹으라. 이렇게 행하면 네 영혼을 (반역에서) 구원할 것이며, 기도할 때 걸림돌이 되지 않을 것이다.

15. 지혜를 얻지 못하며,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할 수는 없으나,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16. 돈을 사랑하는 자는 지혜를 보지 못하며, 돈을 모으는 자는 (무지로 인해) 어두워질 것이다.

17. 주님께서는 겸손한 자들의 장막에 거하시나니, 교만한 자들의 집에는 저주가 더해질 것이다.

18.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 자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요, 그 율법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창조주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19. 의인의 영혼은 천사들이 데려가고, 악인의 영혼은 악마들이 데려간다.

20. 죄가 들어가는 곳에는 무지 또한 따르나니, 의인들의 마음은 지혜로 충만해지리라.

21. 무지한 부보다 지혜 있는 가난이 낫다.

22. 머리의 가장 큰 장식은 왕관이며, 마음의 가장 큰 장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혜이다.

23. 가난한 자에게 자비를 베푸는 자는 분노를 근절하며, 그들을 부양하는 자는 복을 가득히 누릴 것이다.

24. 온유한 자의 마음에는 지혜가 깃들며, 절제의 보좌는 덕을 행하는 영혼이다.

25. 자주 기도하는 자는 유혹을 피하겠으나, 게으른 자의 마음은 온갖 생각으로 요동칠 것이다.

26. 포도주에 취하지 말라. 그리하면 육신이 너를 유혹하지 못하리라.

27. 네 육체를 지나치게 채우지 말라. 그러면 네 안에 있는 더러운 생각들이 줄어들 것이다.

28. “오늘은 명절(유월절)이니 포도주를 마시겠다”거나 “내일은 오순절이니 고기를 먹겠다”고 말하지 말라. 수도자들에게는 배를 채우기 위한 명절이 없다.

29. 그리스도의 유월절은 죄에서 벗어나는 것(미덕과 회개로 나아가는 것)이며, 오순절은 영혼의 부활이다.

30. 주님의 명절은 악을 잊는 것이며, 악을 기억하는 자에게는 통곡이 닥칠 것이다.

31. 하나님의 축제는 참된 지식이다. 그러나 거짓과 오류에 귀를 기울이는 자는 비참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32. 마음이 깨끗한 채로 금식하는 것이, 영혼이 더러운 상태에서 배부르게 먹는 것보다 낫다.

33. 마음속의 악한 생각을 뿌리 뽑는 자는 마치 갓난아기를 돌에 부딪혀 죽이는 자와 같다.

34. 잠을 좋아하는 수도사는 온갖 악에 빠지겠으나, 깨어 있는 것을 사랑하는 자는 새처럼 높이 날아오를 것이다.

35. 깨어 기도할 때 헛된 이야기에 빠져들지 말고 영적인 말씀을 외면하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네 마음을 살피시며, 네 죄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36. 긴 잠은 유혹을 불러오지만, 깨어 있는 것은 유혹을 쫓아낸다.

37. 잠을 많이 자면 마음이 무뎌지지만, 깨어 있는 시간은 마음을 예리하게 한다.

38. 불이 밀랍을 녹이듯이, 선한 기도는 악한 생각을

39. 그러나 헛된 말로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잠을 자는 것이 낫다.

40. 천사의 꿈은 마음을 기쁘게 하지만, 악마의 꿈은 마음을 뒤흔든다.

41. 회개와 겸손은 영혼을 일으키고, 자선과 온유함은 영혼을 굳건하게 한다.

42. 항상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를 기억하고, 마지막 심판을 결코 잊지 말라. 그리하면 네 영혼이 죄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43. 낙담의 영이 너를 덮친다면, 네 수도실을 떠나지 말고 슬픔이 닥쳤을 때 피하지 마라(다른 말로, 떠나지 마라): 이는 마치 은을 (문지르며) 정제하듯, 네가 흔들림 없이 견디면 네 마음도 빛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44. 낙담의 영은 눈물을 씻어내고, 슬픔의 영은 기도를 억누른다.

45. 전갈을 품속에 품지 않는 것처럼, 악한 생각을 네 마음에 품지 말라.

46. 금과 은이 불로 단련되듯이, 수도사의 마음은 유혹으로 단련된다.

47. 바라는 영광을 얻지 못하는 자는 슬퍼하고, 그것을 얻는 자는 교만해진다.

48. 네 마음을 교만하게 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나 혼자서도 할 수 있다”고 말하지 말라. 그래야 주님께서 네 영혼을 버리지 않으시고, 악한 마귀들이 네 영혼을 굴복시키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공중의 원수들이 너를 짓밟을 것이며, 밤의 공포가 너를 사로잡을 것이다.

49. 선택받은 그릇은 깨끗한 영혼이며, 더러운 영혼은 슬픔으로 가득 찰 것이다.

50. 젖 없이는 아이가 배부르지 못하듯, 무욕 없이는 영혼이 기뻐할 수 없다.

51. 사랑 앞에는 무욕이 있고, 지식 앞에는 사랑이 있다.

52.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지혜를 낳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준다.

53. 불화살은 영혼을 태우나, 선행을 행하는 사람은 그것을 꺼버린다.

54. 수도사여, 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가르침을 헛되이 하지 말라. 그리하여 악한 생각을 피할 것이며, 악한 악마들이 너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55. (수도원에서) 재정을 잘못 관리하는 자는 형제들의 영혼을 동요시키며, 수도원의 재산을 낭비하는 자는 신성모독을 저지르는 것이다.

56. 형제에 대해 험담하는 자는 멸망할 것이며, 궁핍한 자를 멸시하는 자는 빛을 보지 못할 것이다.

57. “오늘은 여기 머물겠지만 내일은 (수도원에서) 떠날 것이다”라고 말하지 마라. 이는 지혜로운 생각이 아니기 때문이다.

58. 방랑하는 수도사는 거짓말을 지어내며, (돌아와서) 자신의 스승을 속인다.

59. 화려한 옷을 입고 배를 채우는 자는 음란한 생각을 품고 있으니, 성인들의 무리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60. 마을에 갈 때, 여자들에게 가까이 가지 말고 그들과 말을 나누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낚싯바늘을 삼킨 물고기처럼, 네 영혼이 그들을 쫓아갈 것이다.

61. 너그러운 수도사는 무욕의 경지에 이르겠지만, 형제들을 괴롭히는 자는 미움을 받을 것이다.

62. 온유한 수도사는 주님께서 사랑하시나, 심술궂은 자는 주님께서 멀리 내치신다.

63. 형제가 슬퍼하면 위로해 주고, 애통해하면 함께 애통해 하라.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하늘에 큰 보화를 쌓을 것이다.

64. 네 스승을 비방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그를 공경하지 않는 자의 마음을 부추겨 그를 대적하게 하지 말라. 그래야 주님께서 네 행실로 인해 노하지 않으시고, 너를 생명책에서 지워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65. 게으른 수도사는 많은 해를 입을 것이며, 만일 자신의 성품을 고집한다면 수도복마저 벗어 버릴 것이다.

66. 혀가 두 가지인 수도사는 형제들을 분란에 빠뜨리나, 신실한 자는 평화를 가져온다.

67. 자신의 굳건함을 의지하는 자는 넘어지겠고, 자신을 낮추는 자는 높이 들려질 것이다.

68. 배를 채우는 데 탐닉하지 말라. 그리하면 밤의 잠에 이기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하면 곧 깨끗해질 것이며, 주님의 영이 네게 임하실 것이다.

69. 시편을 노래하면 분노가 가라앉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두려움을 떨쳐낼 수 있다.

70. 잔치를 자주 베푸는 자의 빛은 어두워지고, 그의 영혼은 어둠에 덮일 것이다.

71. 빵은 정해진 분량만큼 먹고, 물은 정해진 양만큼 마시라. 그러면 음탕의 영이 네게서 도망갈 것이다.

72. 네 형제에게 걸림돌을 놓지 말고, 그가 넘어질 때 기뻐하지 말라. 주님께서 네 마음을 보시고, 죽음의 날에 그 일로 인해 너를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73. 평신도들을 유혹하는 자는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며, 그들을 모욕하는 자는 자신의 이름을 더럽힐 것이다.

74. 평화를 사랑하는 자는 그 달콤함을 맛보겠고, 평화를 더하는 자는 꿀로 가득 차리라.

75. 하나님을 공경하면 무형의 존재들을 알게 될 것이며, 그분께 섬기면 그분께서 네게 세상의 지혜를 보여 주실 것이다.

76. 그리스도의 육체는 실천적인 미덕들이다. 이를 맛보는 자는 무욕한 자가 될 것이다.

77. 그리스도의 피는 행위의 분별이니, 그것을 마시는 자는 그것으로 인해 깨달음을 얻으리라.

78. 주님의 가슴은 하나님을 아는 지혜이니, 그 위에 눕는 자는 신학자가 될 것이다.

79. 지식으로 충만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서로 만났으니, 그들 가운데에는 주님께서 계신다.

80. 네 세례의 믿음을 버리지 말고 영적인 인장을 훼손하지 말라. 그리하면 주님께서 네 영혼과 함께 계시며 악한 날에 너를 보호하실 것이다.

81. 이단자들의 말은 죽음의 전령이니, 이를 받아들이는 자는 자신의 영혼을 파멸시킬 것이다.

82. 이제 내 말을 들어라, 내 아들아: 불신자들의 문에 가까이 가지 말고, 그들의 그물 위를 걷지 말라. 그래야 얽히지 않을 것이다.

83. 네 영혼을 거짓된 지식에서 멀리하라. 나는 그들(그릇된 자들)과 자주 대화하였고, 그들의 어두운 말을 살펴보았더니, 그 안에서 독사의 독을 발견하였노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는 멸망할 것이요, 그것을 사랑하는 자는 악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84. 나는 그들의 선조들이 행한 지혜를 보았으나, 그들의 말 속에서 진리의 빛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85. 섭리의 길은 어둠에 가려져 있고, 그분의 운명은 이성으로 헤아릴 수 없으나, 선행을 행하는 자는 이를 깨닫게 될 것이다.

 

10. 처녀들을 위한 그분의 가르침

1. 주님을 사랑하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너를 사랑하시리라. 그분을 섬기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네 마음을 밝히시리라.

2. 네 어머니(수녀원장)를 주님의 어머니처럼 공경하고, (영적으로) 너를 낳아 주신 분의 흰 머리를 모욕하지 말라.

3. 자매들을 네 어머니의 딸들처럼 사랑하고, 평화의 길을 떠나지 말라.

4. 해가 뜰 때 네 손에는 기도서를 들고, 두 시가 지나면 수공예에 몰두하라.

5. 끊임없이 기도하고, 너를 다시 태어나게 하신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6. 남자들의 모임을 피하여, 네 영혼에 우상이 남지 않게 하고, 기도할 때 네게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하라.

7. 사랑하는 그리스도를 모신 이상, 모든 남자를 물리치라. 그리하면 네 삶이 책망받을 일이 없으리라.

8. 짜증과 분노를 떨쳐 버리고, 원한이 네 마음에 스치지 않게 하라.

9. “오늘은 먹고 내일은 금식하겠다”고 말하지 말라. 오늘이 무엇을 낳을지 네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10. 고기를 먹는 것은 좋지 않고,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부적절하다. 이 두 가지 모두 병든 자들에게만 허용된다.

11. 안절부절 못하는 처녀는 구원받지 못할 것이며, 방탕하게 사는 자는 자기 신랑을 보지 못할 것이다.

12. “그 여종이 나를 슬프게 했으니, 내가 그녀에게 갚아주겠다”라고 말하지 말라. 하나님의 딸들 사이에는 종의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13. 헛된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빈둥거리는 늙은 여인들의 소문을 피하라.

14. 술 취한 자들의 잔치를 보지 말고, 세속적인 결혼식에 가지 말라. 주님 앞에서 이런 일을 행하는 모든 처녀는 부정한 자니라.

15. 네 입을 열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수다를 삼가라.

16.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라. 그리하면 그분의 오른손이 너를 높이실 것이다.

17. 가난한 자가 곤경에 처했을 때 그를 외면하지 말라. 그리하면 (필요한 때에) 네 등불에 기름이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18. 모든 일을 주님을 위하여 행하고 사람의 영광을 구하지 말라. 사람의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나, 주님의 영광은 영원히 지속되느니라.

19. 주님께서는 온유한 처녀를 사랑하시나, 성미 급한 처녀는 그분께 미움을 받는다.

20. 순종하는 처녀는 은혜를 얻으리라. 그러나 반항하는 처녀는 지극히 어리석다.

21. 불평하는 처녀는 주님께서 멸망시키시겠으나, 모든 일에 감사하는 처녀는 죽음에서 구원하시리라.

22. 웃음은 부끄러운 일이며 (눈의) 뻔뻔함은 책망받을 만한 일이다. 그러나 분별력이 없는 자는 이 두 가지에 빠지게 될 것이다.

23. 옷차림으로 꾸미는 자는 눈빛의 수줍음마저 잃는다.

24. 평신도들과 너무 친해지지 말라. 그들이 네 마음을 돌이키게 하고 의인들의 조언을 헛되게 하지 않도록 하라.

25. 밤에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되, 아무도 네가 기도하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라. 그리하면 은혜를 얻으리라.

26. 즐거운 산책과 남의 집을 방문하는 일은 영혼의 상태를 흐트러뜨리고, 그 의지의 결의를 흔들게 한다.

27. 신실한 처녀는 겁이 없지만, 신실하지 못한 처녀는 자기 그림자조차 두려워한다.

28. 연약한 자매를 멸시하는 자는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질 것이다.

29. “이것은 내 것이고, 저것은 네 것이다”라고 말하지 말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모든 것이 공동의 것이기 때문이다.

30. 다른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 캐묻지 말고, 네 자매가 넘어지는 것을 기뻐하지 말라.

31. 가난한 처녀들을 섬기고, 네 지위를 내세우지 말라.

32. 하나님의 교회에서 네 입에서 말씀을 내뱉지 말고, 누구에게도 눈을 치켜뜨지 말라. 주님께서는 네 마음을 아시고 네 모든 생각을 꿰뚫어 보시기 때문이다.

33. 온갖 악한 생각을 네게서 물리치라. 그리하면 네 원수들이 너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34. 네 마음속으로 노래하고, 입으로만 시편 말씀을 읊지 말라.

35. 불길의 기세를 끄기 어려운 것처럼, 상처 입은 처녀의 영혼은 치유하기 어렵다.

36. 네 영혼을 악한 생각에 내맡기지 말라. 그리하면 그것들이 네 마음을 더럽히지 못할 것이며, 순수한 기도가 네게서 멀어지지 않을 것이다.

37. 슬픔은 무겁고 낙담은 견디기 힘들지만, 주님께 드리는 눈물은 그것들보다 더 강하다.

38. 굶주림과 갈증은 악한 정욕을 꺾어 주며, 선한 기도는 마음을 정화한다.

39. 분노와 짜증은 사랑을 멀어지게 하고, 원한을 품는 마음은 은혜를 부끄럽게 한다.

40. 은밀히 자기 자매를 헐뜯는 여인은 신랑의 혼인 잔치장에 들어가지 못하고, 문 앞에서 부르짖어도 들어주는 이가 없을 것이다.

41. 자비 없는 처녀의 등불은 꺼질 것이며, 그녀는 신랑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할 것이다.

42. 돌 위에 떨어진 유리는 산산조각이 나듯, 남편에게 매달린 처녀는 결백하지 못할 것이다.

43. 성미가 급하고 화를 잘 내는 처녀보다 온유한 유부녀가 낫다.

44. 웃으며 남편의 말을 쫓아다니는 여인은, 마치 원수들이 자신의 목에 올가미를 걸게 한 사람과 같다.

45. 금 테두리에 박힌 진주와 같이, 존경으로 둘러싸인 처녀의 순결이다.

46. 악마의 노래와 거문고는 영혼을 나태하게 하고 결심의 굳건함을 갉아먹으니, 비난받지 않으려면 무엇보다도 이 결심을 굳게 지키라.

47. 조롱을 즐기지 말고 험담하는 자들과 어울리지 마라. 주님께서 그들을 버리실 것이기 때문이다.

48. 음식을 먹는 자매를 정죄하지 말고, 네 절제로 인해 교만해지지 말라. 주님께서 너희에 대해 무엇을 생각하셨는지, 또 너희 중 누가 그분 앞에 설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49. 눈이 퉁퉁 부어 오르고 살이 시들어진 것을 안타까워하는 자는 절제로 인해 기쁨을 얻지 못할 것이다.

50. 절제는 힘들고 순결은 지키기 어렵지만, 하늘의 신랑보다 더 달콤한 것은 없다.

51. 나는 자신의 가르침으로 처녀들을 해치고, 그들의 순결을 헛되게 만드는 남자들을 보았다.

52. 그러나 너, 처녀여, 하나님의 교회의 가르침을 들으라. 그 외에는 아무도 너를 설득하지 못할 것이다.

53.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이를 돌보시나니, 죄를 짓지 못할 천사는 없으며, 본성상 악한 악마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이 둘 모두를 자유 의지로 창조하셨다.

54. 사람이 썩어 없어질 몸과 이성을 가진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듯이, 우리 주님께서도 참으로 죄 없는 사람으로 태어나셨고, 참으로 음식을 드셨으며, 참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니, 그분은 사람들의 눈에 유령이 아니셨다.

55. 죽은 자의 부활이 있을 것이며, 이 세상은 지나갈 것이고, 우리는 영적인 몸을 입게 될 것이다. 의인들은 빛을 상속받을 것이며, 죄인들은 어둠 속에 거하게 될 것이다.

56. 처녀의 눈은 하나님을 볼 것이며, 그녀의 귀는 그분의 말씀을 들을 것이다.

57. 동정녀의 순결은 주님께 기쁘시며, 순결한 동정녀는 신랑의 손에서 면류관을 받을 것이다.

58. 그녀에게 혼인 예복이 주어질 것이며, 그녀는 천사들과 함께 하늘에서 승리를 거둘 것이다.

59. 그녀의 등불은 꺼지지 않고 타오를 것이며, 그녀의 등잔에 기름이 떨어지지 않을 것이니, 그녀는 영원한 부를 얻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것이다.

60. 너를 지키시는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숭배받는 삼위일체의 동질성을 잊지 말라.

 

11. 온갖 악한 생각에 대하여, 제1장[64]

1. 활동적인 삶을 방해하는 악령들 중에서, 가장 먼저 전선에 나서는 자들은 정욕이나 식탐을 부추기는 자들과, 우리에게 탐욕을 심어주는 자들, 그리고 우리를 세상의 명예를 좇게 만드는 자들이다. 나머지 모든 자들은 그들 뒤를 따라가며, 이미 그들에게 상처 입은 자들을 차례로 노린다. 왜냐하면 방탕의 유혹에 빠지지 않은 자는 음행의 손아귀에 빠질 수 없고, 음식이나 돈, 혹은 명성을 위해 서거나 싸우지 않는 자는 분노에 휩싸일 수 없으며, 이 모든 일에서 어떤 손해도 입지 않은 자는 슬픔의 악마를 피할 수 없으며, “모든 악의 뿌리인 탐욕”(딤전 6:10)을 뽑아내지 않은 자는 교만, 즉 악마가 낳은 첫 번째 산물을 피할 수 없으니, 이는 지혜로운 솔로몬의 말씀대로 “가난은 사람을 겸손하게 한다” (잠언 10, 4)라고 했으며, 간단히 말해 사람은 먼저 그 근본적인 유혹들에 상처받지 않는 한 어떤 악마의 유혹에도 빠질 수 없다. 왜 마귀는 그때 구세주께 이 세 가지 생각을 제시했을까? 첫째는 돌들이 떡이 되게 해 달라고 청했을 때, 둘째는 그분이 넘어져 자신에게 경배하면 온 세상을 다 주겠다고 약속했을 때, 셋째는 자신의 말을 따르면 (교회 지붕에서) 그렇게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도 아무런 해를 입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시켰을 때이다 (교회 첨탑에서).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모든 것 위에 계시며 마귀에게 물러가라고 명하셨고, 이를 통해 우리에게 이 세 가지 생각을 경멸하지 않으면 마귀를 쫓아낼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2. 모든 악마의 생각은 감각적인 사물들의 이미지를 영혼에 심어주며, 마음은 그 흔적을 받아들여 그 안에서 되새기게 된다. 따라서 생각의 대상을 통해 어떤 악마가 우리에게 다가왔는지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내 생각 속에 나에게 해를 끼치거나 명예를 훼손한 사람의 얼굴이 떠오른다면, 이는 원한을 품는 악령이 다가왔음을 드러내는 것이며, 다시 돈이나 명성이 떠오른다면, 그 대상을 통해 누가 우리를 괴롭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생각들에서도 그 대상을 통해 누가 앞에 서서 그 생각을 심어주는지 판단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것들에 대한 모든 기억이 악마에게서 비롯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마음을 움직일 때, 마음 자체도 보통 과거의 일을 상상해 내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분노나 욕망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기억들, 즉 비정상적인 기억들만이 악마에게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러한 힘들이 동요됨으로 인해, 마음은 생각 속에서 음란한 행위를 하고 다투며, 더 이상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자신의 율법 제정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더 이상 품을 수 없게 되는데, 이는 이 빛나는 광채(즉, 동요 없는 신에 대한 묵상)가 기도 중에 사물들에 얽매인 생각들을 끊어낼 때 비로소 주권적인 마음속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3. 아나톨리우스에게 보낸 ‘행위의 삶에 관하여’ 제63장.

4. “꿈”에 대하여. 악령들이 잠든 꿈속에서 어떻게 우리 주권적인 마음(정신)에 형상을 각인시키고 재현하는지는 연구할 가치가 있다. 이와 유사한 현상은 (깨어 있을 때에도) 마음이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거나, 다른 어떤 감각을 통해 외부에서 무언가를 지각하고 그것을 기억 속에 간직할 때 흔히 발생하며, 기억은 몸을 통해 받아들인 것을 활성화시켜 주인인 마음 속에 형상을 가져다준다. 그러므로 내 생각에, (꿈속에서) 악마들은 기억을 움직이게 함으로써 마음에 형상을 심어주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 시간 동안 감각 기관들은 잠에 빠져 활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묻자면, 그들은 어떻게 기억을 움직이게 하는가? 정욕을 통해서인가? 그렇다. (정욕적인 꿈을 염두에 둔다면) 순수하고 정욕이 없는 사람들은 그런 것을 전혀 겪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이 점이 드러난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나 거룩한 힘으로부터 비롯되어, 우리가 성도들과 대화를 나누고 함께 식사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단순한(정욕이 없는) 기억의 움직임도 있다. 그러나 영혼이 육체를 통해 어떤 형상들을 지각하든, 기억은 육체 없이도(즉, 정욕적으로든, 정욕 없이든) 그 형상들을 재현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잠을 자는 동안, 즉 육체가 쉬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목마를 때나 목마르지 않을 때나 물을 떠올릴 수 있는 것처럼, 탐욕을 품고 있거나 탐욕이 없을 때나 금을 떠올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대상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깨어 있을 때나 잠을 잘 때나). 그리고 마음이 (잠자는 동안 스스로) 이런저런 환상을 발견하거나 인식할 때, 그 차이 속에서 악마들의 교활함을 간파해야 한다(그들은 모든 일에서 우리의 파멸만을 꾀하고 있다). 아울러 악마들이 환상을 일으키기 위해 파도 소리 같은 외부적 요소도 이용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 물 위를 헤엄칠 때 들리는 파도 소리처럼 말이다.

5. 악마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데 큰 도움이 되고, 그들의 온갖 악의적인 계략에 매우 유용한 것이 바로 본성이 요구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는 우리의 성급함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 중 그 누구도 낮이나 밤이나 이를 자극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성질이 온유함으로 묶여 있음을 보게 되면, 그들은 미리 겉보기에는 정당한 구실을 내세워 그 성질을 풀어주려 애쓴다. 이는 그 성질이 긴장 상태에 이르러, 그들의 야수 같은 사악한 생각을 자극하기에 적합해지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의로운 일이든 불의한 일이든, 그녀가 흥분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그래야만 우리에게 악의를 불어넣는 자들의 손에 위험한 칼을 쥐어주지 않을 수 있다. 내가 아는 바와 같이, 많은 이들이 가장 하찮은 이유로도 마땅한 수준 이상으로 격앙되어 그런 짓을 저지르고 있다. 그러니 말해 보라, 네가 음식과 돈, 명예를 경멸했음에도 왜 그렇게 쉽게 싸움에 휘말리는가? 아무것도 가지지 않겠다고 서약해 놓고는 왜 개를 먹여 키우는가? 만약 그 개가 짖으며 사람들에게 달려든다면, 분명 네 마음속에 무언가가 있어 그것을 지키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분노가 그러한 기도를 파괴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사람이 순수한 기도와는 거리가 멀다고 확신한다. 게다가 그가 성도들을 어떻게 잊어버렸는지 놀랍다. “분노를 그치고 노여움을 버리라”(시 36:8)고 외치는 다윗, “ “네 마음에서 격분을 버리고, 네 육체에서 간사를 떨쳐 버리라”(전도서 11,10), 사도 바울은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분노와 다툼 없이 경건한 손을 들어 기도하라”(디모데전서 2,8)고 명하고 있다. 기도할 때 개를 집 밖으로 내보내는 신비롭고 고대의 관습도 우리에게 다른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기도하는 자에게 분노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이교도 현인 중 한 사람도 신들은 담즙과 허벅지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주장했는데, 제 생각에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담즙은 분노의 상징이고, 허벅지 고기는 짐승 같은 욕망의 상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옷이나 음식에 신경 써서는 안 된다는 점에 대해서는, 구세주께서 복음서에서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마실지, 무엇을 입을지 너희 영혼을 근심하지 말라”(마태복음 6:25)고 말씀하시며 이를 금하셨으니, 굳이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이방인들에게는 주님의 섭리를 거부하고 창조주를 부정하는 불신자로서 어울리는 일이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한 번 영원히 믿음을 갖게 된 후, 한 아사리 값에 팔리는 두 마리의 참새조차도 성스러운 천사들의 돌봄 아래 있다는 사실을 믿었으므로, 이러한 일은 그들에게 완전히 낯선 것이어야 합니다. 한편 악마들은 불결한 생각 뒤에 근심 어린 생각들을 심어, 마음의 밭에 있는 “생각의 씨앗”인 예수님을 빗나가게 하고, 근심 어린 생각들에 눌린 말씀이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려는 관습이 있다(마태복음 13:22). 그러니 그 생각들을 제쳐 두고, “우리의 슬픔을 주님께 맡기자(시편 54:23) “있는 그대로 만족하며”(히브리서 13:5), 검소한 삶을 살고 초라한 옷을 입음으로써 날마다 허영을 낳는 것들을 벗어던지자. 혹시 초라한 옷을 입는 것이 부끄럽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성 바오로가 “추위와 벌거벗음” 속에서(2코린 11,27) “의의 면류관”(2티모 4,8) 받을 것이라는 확고한 소망을 품고 어떻게 지냈는지 살펴보라. 그러나 성 바오로 사도가 이 세상을 수치와 경기장으로 불렀으니(1코린 9,24), “더 높은 소명을 얻기 위해”(필리 3,14) 근심과 염려에 사로잡힌 생각을 품은 자가 권세들과 통치자들과 이 세상의 어둠의 지배자들과 싸울 수 있는지(엡 6,12) 살펴보자. 적어도 나는 이 감각적인 이야기(무대에서 벌어지는 일들)를 통해 배운 바에 비추어 볼 때, 이를(그 투사) 단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옷이 그를 얽매어 방해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마치 염려의 생각이 마음을 얽매는 것처럼 말이다. 만일 “마음은 그 보물이 있는 곳에 머문다”(마태복음 6:21)는 말씀이 사실이라면 말이다.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을 것이라”(마태복음 6:21)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6. 생각들 중에는 베어내는 것도 있고, 베임을 당하는 것도 있는데, 때로는 선한 생각이 악한 생각에 의해 베임을 당하고, 때로는 악한 생각이 선한 생각에 의해 베임을 당하기도 한다. 성령께서는 첫 번째로 떠오르는 생각(선두를 차지하고 우위를 점하는 생각)에 귀를 기울이시며, 그에 따라 우리를 정죄하시거나 받아들이신다.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바로 이것이 사실이다! 내가 어떤 생각, 예를 들어 나그네를 환대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고, 주님을 위해 그 마음을 품고 있지만, 유혹자가 찾아오면 그 생각이 잘려 나가게 되는데, 유혹자가 명예를 위해 나그네를 환대하라고 속삭이기 때문이다. 또다시 내가 사람들 앞에서 잘 보이려고 나그네를 환대하려는 생각을 품지만, 그 생각도 더 나은 생각이 찾아오면, 그 더 나은 생각이 우리의 미덕을 주님께 더욱 향하게 하고, 우리가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 그렇게 행하도록 이끄는 것으로 변해 버린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가장 근본적인 일들에서도 결국 첫 번째 생각에 머물러, 두 번째 생각은 단지 유혹받을 때에만 머문다면, 바로 그 첫 번째로 솟아난 생각들만으로 상을 받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간으로서, 또 악마들과 싸우는 자로서, 올바른 생각을 항상 흠 없이 지켜낼 힘이 없기 때문이다. – 반대로, 악한 생각도 우리 안에 머물러 있을 때, 선한 생각이 그것을 대적하여 일어나려는 유혹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니, 우리 안에는 (억누를 수 없는) 미덕의 씨앗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그 생각을 솎아내는 과정 중 어떤 생각이 굳어지면, 그것은 유혹받는 생각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며(즉, 첫 번째 생각을 완전히 밀어내게 되며), 사람은 마침내 이 생각에 이끌려 행동하기 시작한다.

7. 천사의 생각, 인간의 생각, 그리고 악마에게서 비롯된 생각 사이에는, 우리가 오랜 관찰을 통해 알게 된 바와 같이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 천사의 생각은 사물의 본질을 알고자 하며, 그 영적 의미를 탐구합니다. 예를 들어, 금은 왜 창조되었는지, 그리고 왜 그것이 모래의 형태로 땅의 먼 곳에 흩어져 있어 큰 노력과 수고를 들여야만 찾아낼 수 있는 것인지와 같은 것입니다. 발견된 금은 물로 씻겨지고 불에 정련되어, 그 결과 성막을 위해 등잔, 향로, “잔과 피알”(역대하 4:21)을 만드는 장인들의 손에 넘어가는데, 구세주의 은혜로 인해 이제 바빌론 왕은 더 이상 그것들을 마시지 않는다(다니엘 5:3). 클레오파스는 이 신비들로 인해 불타오르는 마음을 바칩니다. 악마적인 생각은 이를 알지도 못하고 알아내지도 못하며, 오직 뻔뻔스럽게 감각적인 금을 탐내는 마음만을 심어주고, 그로 인해 얻을 즐거움과 영광을 예언할 뿐입니다. 반면 인간의 생각은 탐욕을 추구하지도 않고, 금이 상징하는 바에 대해 호기심을 품지도 않으며, 오직 정욕이나 탐욕 없이 금의 단순한 형상만을 마음에 새깁니다. 누군가 이 본보기에 따라 마음속으로 깊이 성찰한다면, 다른 대상들에 대해서도 이와 유사한 논의를 펼칠 수 있을 것입니다.

8. ‘방랑자’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한 생각이 있다. 이 생각은 대개 새벽 무렵 형제들에게 나타나서 마음을 도시에서 도시로, 마을에서 마을로, 집에서 집으로 이끈다. 이때 처음에는 단순한 대화를 나누다가, 그 후, 몇몇 아는 사람들과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만난 사람들의 성품에 따라 자신의 정신 상태를 타락시키고, 점차 하느님과 덕행에 대한 의식에서 멀어지며, 자신의 신분과 서원을 잊어버리게 된다. 그러므로 은둔자는 이 악마를 경계해야 하며, 그가 어디서 오고 어디에 머무르는지 주시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가 우연히나 무작정 그렇게 큰 원을 그리며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은둔자의 정신 상태를 교란시키려는 의도로, 마음이 이 모든 것에 달아오르고 수많은 대화에 취해 즉시 음행이나 분노, 슬픔의 악마에게 사로잡히게 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악마들은 그의 맑은 정신을 가장 크게 해치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악마의 계략을 더 명확히 파악하고자 한다면, 갑자기 그에게 반박하지도 말고, 그가 어떻게 우리 마음속에서 대화를 꾸며내는지, 어떤 방식으로 조금씩 마음을 죽음의 영역으로 몰아넣는지 즉시 (수도원 장로들에게) 밝히지도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러면 그는 즉시 도망쳐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이 모든 일을 어떻게 하는지 드러나는 것을 참지 못하여, 그렇게 되면 우리가 알고자 했던 것에서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차라리 이튿날이나 사흘째 되는 날까지 그가 자신의 연극을 끝까지 펼치도록 내버려 두는 편이 낫습니다. 그래야 그의 교활한 수법을 정확히 파악한 뒤, 단 한 마디의 폭로하는 말로 그를 쫓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유혹을 받는 동안 마음이 동요되어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정확히 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으니, 악마가 물러난 후에는 다음과 같이 해야 한다: 앉아서 스스로 되돌아보아,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어디서 시작하여 어디로 갔는지, 어느 지점에서 음탕함이나 슬픔, 혹은 분노의 영에 사로잡혔는지, 그리고 그 후 나머지 모든 일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이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기억에 새겨 두어, 다시 찾아올 때 그를 폭로할 수 있도록 하라. 그가 숨기는 그 장소 자체도 유심히 살펴두어, 다시는 그의 뒤를 따르지 않도록 하라. 그 후, 만약 그를 격분시키고 싶다면, 그가 나타나자마자 즉시 그를 폭로하고, (첫 번째 유혹의 방황에서) 네가 (마음속으로) 들어갔던 첫 번째 장소를 말로 지목한 다음, 두 번째와 세 번째 장소를 지목하라. 그는 수치를 참지 못해 크게 화를 내기 때문이다. 그에게 이러한 말을 적시에(유익하게) 건네는 것이 옳다는 증거는, 생각이 너에게서 도망치는 것이 될 것이니, 그에게는 그러한 명백한 폭로 앞에서 버티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악마를 이겨낸 뒤에는 지독한 졸음, 눈꺼풀이 마비되고 몸이 푹 식는 현상, 끝없는 하품, 그리고 어깨의 무거움이 뒤따르는데, 이 모든 것은 간절한 기도를 통해 성령께서 흩어주신다.

9. 악마에 대한 증오는 우리의 구원에 크게 기여하며 덕을 행하는 데에도 매우 유용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를 마치 어떤 선한 열매처럼 스스로 길러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 안의 쾌락 추구하는 영들이 이를 흩어뜨리고, 영혼을 다시 그들과 교제하고 친숙해지도록 부추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혼의 의사께서는 이 교제를, 치료하기 어려운 괴저보다 더 심하게, 방치함으로써 치유하시며, 밤낮으로 우리가 그들로부터 무서운 일을 겪게 내버려 두십니다. 그 결과 영혼은 그들에 대한 본래의(정상적인) 증오로 다시 돌아가며, 다윗의 말로 주님께 기도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내가 온전한 증오로 미워하였나니, 그들은 나의 원수들이었도다”(시편 138:22). 왜냐하면 행위로도, 생각으로도 죄를 짓지 않는 자만이 그 완전한 미움으로 원수들을 미워하기 때문이며, 이것이야말로 가장 위대하고 최초의(아담에게서 있었던) 무정심의 표징이기 때문이다.

10. 영혼을 무감각하게 만드는 악마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조차 있을까? 나는 적어도 그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을 두려워한다. 영혼이 본래의 본성을 벗어나는 동안, 그는 찾아와서 하나님의 경외심과 온갖 경건함을 저버리고,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불법을 불법으로 여기지 않으며, 무서운 심판과 영원한 고통을 마치 단순한(텅 빈) 말처럼 여길 뿐만 아니라, 그 불타는, 진정으로 모든 것을 뒤흔드는 대격변을 비웃으며, – 비록 하나님을 고백하긴 하지만 그분의 계명을 알기를 원치 않는다. 그녀가 죄로 향할 때 가슴을 치며, 그녀는 느끼지 못하고, 성경 말씀을 인용해 말해도, 마치 눈이 먼 자처럼 보지 못하고, 귀머거리처럼 듣지 못하며, 사람들의 조롱을 상기시켜 주어도, 그녀는 그 어떤 것도, 그들 앞에서의 수치심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치 눈을 감은 채 자신의 울타리를 부수어버린 돼지처럼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이 악마는 허영심이라는 생각에 이끌리는데, 우리가 그 생각이 우리 안에 오랫동안 굳어지게 내버려 둔다면, 그로 인해 “그 날들이 단축되지 않았더라면, 모든 육체가 구원받지 못했을 것” (마태복음 24:20)이다. 그는 형제들(즉, 키노비트, 공동생활자)을 드물게 공격하는 자들 중 하나이다. 그 이유는 명백한데, 다른 이들의 재앙을 목격할 때—누군가 병에 걸리거나 갑작스러운 죽음이 닥칠 때—그는 즉시 도망치기 때문이다. 이때 영혼은 연민으로 가득 차서 비통함에 빠지게 되고, 악마가 그에게 씌운 눈의 장막이 벗겨지기 때문이다. 우리(은둔자들)는 사막에 살고 있으며 우리 주변에 병약한 이들이 드물기 때문에 이러한 능력을 상실했다. 이 악마를 특히 쫓아낼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시며, 주님께서는 복음서에서 병자들을 돌보고 감옥에 갇힌 자들을 방문하라고 명하셨습니다. “내가 병들었을 때 너희가 나를 돌보아 주었고, 내가 감옥에 갇혔을 때 너희가 나를 찾아왔다”(마태복음 25,36)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때 알아야 할 것은, 은둔자 중 누군가가 이 악마의 공격을 받았음에도 음란한 생각을 품지 않았거나, 낙담하여 자신의 거처를 떠나지 않았다면, 이는 그가 하늘에서 내려온 인내와 정절을 받아들였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무욕을 얻은 그는 복되도다! 반면, 경건한 신앙 생활로 수행자의 삶을 살겠다고 서약했음에도 불구하고 평신도들 사이에 머무르기를 선호하는 자들은 이 악마를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그에 대해 더 말하거나 글을 쓰는 것은,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도 부끄러울 따름이다.

11. 슬픔의 영에 대하여. 모든 악마는 영혼에게 쾌락을 추구하도록 가르치지만, 슬픔의 악마만은 그렇지 않고, 광야로 들어가는 이들의 생각을 혼란스럽게 하여, 영혼의 모든 기쁨을 꺾고 슬픔으로 영혼을 메마르게 한다. “슬픔에 잠긴 자의 뼈는 마르나니”(잠언 17:22)라고 했듯이 말이다. 그러나 적당히 공격함으로써, 그는 은둔자를 경건하게 만든다. 이는 그가 이 세상의 모든 복을 경멸하고 모든 위안을 멀리하도록 이끄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오랫동안 심하게 괴롭힐 때면, 은둔자에게 자신의 영혼을 없애라고 조언하거나 그곳에서 멀리 도망치도록 강요하는 생각들을 불러일으킨다. 욥도 한때 그로 인해 괴로워하며 이런 생각을 품고 고통받았으니, 그가 말하기를: “만약 가능하다면, 내가 스스로 내 목숨을 끊겠고, 아니면 다른 이에게 간청하여 나를 죽여 주기를 청하리라” (욥기 30:24). 이 영의 상징은 에키드나로, 그 독을 소량 투여하면 다른 독들을 무력화시키지만, 과도하게 섭취하면 그것을 삼킨 생물을 죽인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불의한 자를 이 악마에게 넘겨주었기에, 곧이어 그들에게 다시 편지를 보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를 향한 사랑을 굳건히 하라. 그래야 그가 지나친 슬픔에 삼켜지지 않을 것이니라” (고린도후서 2:7-8). 이처럼 사람들을 괴롭히는 이 영은 때로 선한 회개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 요한 세례자도 그에게 상처를 입고 하나님께 피한 자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 부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가 너희에게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고 말했느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두고 있다’고 속으로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하나님께서는 이 돌에서라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일으키실 수 있으시니라” (마태복음 3,7–9). 그러나 아브라함을 본받아 자기 땅과 자기 족속을 떠난 자(창세기 12,1)는 그로 인해 이 악마보다 더 강해졌다.

12. 분노를 이긴 자는 마귀들을 이긴 것이며, 분노에 사로잡힌 자는 수도 생활과는 거리가 멀고 우리 구세주의 길에서 멀어진 자이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온유한 자들에게 그분의 길을 가르치시기 때문이다(시편 24, 9). 그러므로 은둔자들의 마음은 온유함의 골짜기로 도망치기 때문에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악령들은 온유함만큼 두려워하는 미덕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자’라 불리며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온유했던 위대한 모세도 그 미덕을 얻었습니다(민수기 12, 3). 또한 성 다윗은 “주여, 다윗과 그의 온유함을 기억하소서”(시편 131:1)라고 말하며, 온유함이 하나님의 기억에 합당함을 나타냈습니다. 또한 구세주께서도 우리에게 자신의 온유함을 본받으라고 명하시며 말씀하셨다. “나에게서 배우라. 나는 온유하고 마음이 겸손하니, 너희가 안식을 얻으리라”(마태복음 11, 29). 그러나 만일 누군가 음식과 술을 절제하면서도 악한 생각으로 인해 마음속에 분노를 일으킨다면, 그는 마치 바다를 건너는 배와 같아서, 그 배의 키를 악마가 잡고 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진 모든 힘을 다해 이 ‘개’를 잘 돌보고 훈련시켜, 늑대들만을 괴롭히게 하고 양들을 물지 않게 하며, 모든 사람에게 온유함을 보여야 한다(디도서 3:2).

13. 허영에 대하여. 모든 생각 중에서 오직 허영의 생각만이 다방면에 걸쳐, 거의 온 우주를 아우르며 모든 악마들에게 문을 열어주니, 마치 어떤 도시의 사악한 배신자와 같다. 그것은 은둔자의 마음을 훔쳐가고, 수많은 말과 사물로 채움으로써, 그가 자신의 영혼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애쓰는 기도를 망가뜨린다. 이 생각은 이미 패배한 모든 악령들이 퍼뜨리는 것으로, 이를 통해 다시 영혼에 들어갈 길을 얻고, 이처럼 “마지막 자리가 첫 번째 자리가 되게” (눅 11:26). 이 생각에서 교만의 생각이 태어나는데, 그것은 하늘에서 땅으로 “닮음의 인장과 선함의 면류관”을 떨어뜨린 것이다(겔 28:12). 그러나 그 생각에 얽매이지 말고 멀리 피하여, 우리의 생명을 타인에게 넘겨주지 말고, 우리의 삶을 불의한 자들에게 내주지 않도록 하라(잠언 5:9). 이 악마를 쫓아내는 것은 간절한 기도와, 저주받은 허영으로 이끄는 어떤 행동이나 말도 함부로 하지 않는 것이다.

14. 은둔자들의 마음이 어느 정도 무욕을 얻게 되면, 그때 그들은 허영이라는 말을 타고 도시들을 누비기 시작하며, 자신에 대한 칭찬과 명성에 흠뻑 취해 제멋대로 날뛰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방탕한 영이 그를 만나어 어떤 외양간 속에 가두어 두면, 그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즉, 완치되기 전에는 침상에서 일어나지 말고, 아직 병의 흔적이 남아 있음에도 길을 떠나거나 목욕탕에 다니기 시작하여 그로 인해 다시 예전의 병에 빠지는 참을성 없는 환자들을 본받지 말라고. 그러므로 우리도 방에 머물며 스스로를 더 잘 살피자. 그리하여 덕을 쌓아 악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고, 지식을 새롭게 하여 다양한 통찰을 얻으며, 기도로 높아져 우리 구세주의 빛을 더 선명하게 바라보게 되기를 바란다.

15. 악마들의 모든 악행을 다 묘사할 수는 없으며, 그들의 온갖 악랄한 계략을 모두 열거하는 것도 부끄럽다. 이는 가장 순진한 독자들을 위해서라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음탕한 영의 악랄한 계략에 대해 들어보십시오. 누군가 정욕적인 부분에서 어느 정도 무감각함을 얻고, 추악한 생각들이 그에게 다소 식어갈 때, 그때 그 영은 (그의 생각 속에) 남자와 여자를 끌어들여 그들이 서로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게 하며, 은둔자를 그들의 수치스러운 행위와 몸짓을 지켜보는 구경꾼으로 만듭니다. 그러나 이 유혹은 (마음에) 뿌리내리는 종류가 아니다. 왜냐하면 주의 깊은 기도와 극도로 엄격한 절제, 그리고 깨어 있음과 영적 묵상 연습이 이를 물 없는 구름처럼 쫓아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로는 이 교활한 자가 육체까지 건드려, 그 안에서 이성적이지 않은 타락을 일으키기도 하며, 공개하거나 글로 남길 필요도 없는 수천 가지의 다른 계략을 꾸미기도 한다. 이러한 생각들에 대항하여 매우 효과적인 것은, 그 생각들의 근원인 악마를 향한 분노의 분출입니다. 악마는 이러한 생각들로 인해 분노가 치솟을 때 이를 지극히 두려워하는데, 이는 그로 인해 자신의 모든 계략이 무너져 내리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분노하되 죄를 짓지 말라”(시편 4:5)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이다. 이는 유혹이 닥쳤을 때 영혼에 적용되는 유익한 치료법이다. 분노의 악마도 이 악마를 흉내 내어, (마음속의 환상 속에서) 은둔자에게 마치 부모나 친구, 혹은 친척 중 누군가가 하찮은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이를 통해 그의 분노를 자극하여, (마음속에 떠오르는) 모욕하는 자들에게 악한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하도록 부추깁니다. 이를 주의 깊게 살피고, 그러한 상상에서 비롯된 생각을 재빨리 떨쳐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생각이 굳어져 기도 중에 타오르는 숯덩어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혹에 가장 많이 시달리는 이들은 성미가 급하고 (타인을 향한) 충동에 쉽게 불타오르는 사람들로서, 그들은 순수한 기도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데서 멀리 떨어져 있다.

16. 주님께서는 이 세상의 생각들을 마치 양을 선한 목자에게 맡기듯이 사람에게 맡기셨으며, 그에게 갈망과 분노를 도우미로 주셔서, 분노로 늑대(마귀)의 생각들을 쫓아내게 하시고, 그리고 갈망으로 양들(선한 생각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발을 헛디디게 하는 바람과 비를 수없이 견디며 그들을 돌보게 하셨다. 또한 그분은 그에게 양을 치는 법과 “푸른 초장과 고요한 물” (시편 22:2), 시편과 거문고, 지팡이와 몽둥이를 주셨으며, 이 양 떼(와 목초지)로부터 먹고 입으며, “산 위의 건초”를 거두게 하셨다(잠언 27:25). “누가”라고 말하듯이, “양 떼를 치면서 그 젖을 먹지 않는 자가 있겠느냐”(고린도전서 9:7)? 그러므로 은둔자는 밤낮으로 이 양 떼를 지키어, 어떤 새끼(양의 새끼인 어린 양)도 짐승들에게 빼앗기거나 강도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해야 하며, 만일 덤불 속 어딘가에서 그런 일이 발생하면 즉시 사자나 암곰의 입에서 (빼앗긴 것을) 구해내야 한다 (사무엘상 17:34, 35). 또한 포식하는 짐승과 같은 생각들도 있다. 형제에 대한 생각이 우리 안에서 증오와 함께 자라날 때, 여자에 대한 생각이 우리 안에서 부끄러운 정욕과 함께 맴돌 때, 은과 금에 대한 생각이 탐욕과 함께 자리 잡을 때, 심지어 성스러운 은사에 대한 생각조차도 자만심과 함께 마음속에 자리 잡을 때 말이다. 다른 생각들도 마찬가지로, 정욕에 사로잡힐 때면 마찬가지다. 낮에만 (자신의 양 떼를) 지키면 되는 것이 아니라, 밤에도 깨어 있으면서 지켜야 한다. 왜냐하면 어떤 이는 음란하고 교활한 환상에 빠져 자신의 것을 잃어버리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성 야고보가 말한 바와 같다. “나는 너에게 늑대에게 잡아먹힌 양을 가져오지 않았으니, 낮에 도둑맞은 것과 밤에 도둑맞은 것은 내가 직접 보상하리라. 나는 낮에는 뜨거운 햇볕 아래, 밤에는 추위 속에서 지냈으며, 잠은 내 눈에서 떠나갔느니라” (창세기 31, 39. 40). 만약 과로로 인해 우리에게 낙담이 닥친다면, 지식의 바위에 올라 시편으로 대화를 시작하며, 미덕으로 지식의 현을 튕겨내자. 그러니 다시 시나이 산 아래에서 양 떼를 치자. 그리하여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우리를 떨기나무에서 부르시며(출 3,1.4), 우리에게 표적과 기적의 능력을 베풀어 주시기를 바란다.

17. 죄로 인해 죽어 있던 이성적인 본성을,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시대(즉, 과거, 현재, 그리고 앞으로 올 미래)를 관조함으로써 (회개로) 깨우시며, 그분의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해 죽어 가는 이 영혼(세례나 회개를 통해 죄에서 돌이키는)을, 그분 자신을 아는 지식으로 다시 살리십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말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분과 함께 살리라 믿노라”(롬 6:8)는 뜻입니다.

18. 마음이 옛 사람을 벗어던지고 은혜로 말미암은 사람을 입을 때, 그때 비로소 그는 기도 중에 자신의 내면을 사파이어나 하늘의 빛과 같은 것으로 보게 되는데, 성경은 이를 시나이 산에서 장로들이 보았던 하나님의 장소라고도 부른다(출 24:10).

19. 부정한 악령들 중 어떤 자들은 사람을 사람으로서 유혹하고, 다른 자들은 사람을 말 못하는 짐승처럼 불안하게 만든다. 전자는 다가와 우리 안에 허영이나 교만, 시기, 비난과 같은 생각을 심어주는데, 이는 말 못하는 짐승들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 것이며, 반면 후자는 다가와 본성에 맞지 않는 분노나 정욕을 일으키는데, 이는 이러한 정욕이 우리와 말 없는 동물들에게 공통적이며, 이성적인 본성 아래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즉, 그 본성보다 낮거나 그 아래에 위치한다). 왜 “ ”라고 했을까? 성령께서는 사람으로서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생각을 염두에 두시고, “내가 말하노니, 너희는 모두 신들이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들이라. 그러나 너희는 사람처럼 죽으며, 방백들 중 하나처럼 넘어지리라” (시편 81:6, 7)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사람을 말 없는 존재처럼 여겨 그 안에서 움직이는 생각을 염두에 두신다면, 무엇을 말씀하시겠습니까? “말과 나귀처럼 되지 말라. 그들에게는 이성이 없으니, 채찍과 고삐로 그들의 턱을 잡아당겨 네게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리라” (시편 31:9).

20. 어떤 원수가 와서 너를 해칠 때, 기록된 대로(시편 36:15) 그의 칼을 그의 심장으로 되돌리고자 한다면, 우리가 말하는 대로 행하라. 그가 심어 놓은 그 생각을 네 안에서 분석하여, 그것이 누구인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그리고 정확히 무엇이 네 마음을 뒤흔드는지 살펴보아라. 내가 무슨 말을 하는가, 바로 이것이다. 그가 너에게 보낸 생각이 탐욕이라 치자. 그것을 받아들인 마음, 금에 대한 생각, 그 금 자체, 그리고 탐욕이라는 정욕으로 나누어 분석해 보라. 마지막으로 묻거라: 이 모든 것 중에서 무엇이 죄인가? 마음인가? 그러나 마음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던가? 아니면 금에 대한 생각인가? 하지만 이조차도 이성을 가진 자 중 누가 단정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금 그 자체가 죄가 아닐까? 하지만 금은 도대체 왜 창조된 것인가? 따라서 죄를 네 번째 요소(즉, 탐욕)에 두는 수밖에 없는데, 이는 본질적으로 독립된 사물도 아니고 사물에 대한 개념도 아니며, 오히려 자유 의지에서 비롯되어, 이성을 부추겨 하나님의 피조물을 악용하게 만드는, 인간을 증오하는 어떤 쾌락일 뿐이며, 하나님의 율법은 바로 그러한 쾌락을 근절하라고 명하고 있다. 네가 이것을 깊이 탐구할 때, 그 생각은 본래의 모습으로 분해되어 사라질 것이며, 네 생각이 그러한 깨달음에 힘입어 고양되는 순간, 악마는 도망칠 것이다. 만약 네가 그 악마의 칼을 그에게 되돌려 쓰기를 원치 않고, 먼저 네 슬링으로 그를 쓰러뜨리고자 한다면, 네 목동 가방에서 돌 하나를 꺼내어 다음과 같은 명상에 빠져보라: 천사들과 악마들은 어떻게 우리 세상에 닿아 오는데, 우리는 그들의 세상에 닿지 않는가? 왜냐하면 우리는 천사들을 하느님께 더 가까이 데려갈 수도 없고, 악령들을 더 불결하게 만들 생각조차 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이 점에 대해서도 깊이 묵상하라), “새벽별이 아침에 땅에 떨어지리라”(이사야 14, 12), “바다가 마치 가마솥 같고, 심연의 타르타르가 마치 포로 같으며, 심연을 마치 놋 가마처럼 불태우리라”(욥기 41, 22, 23)처럼, 자신의 악의로 모든 이를 뒤흔들며 모든 것 위에 군림하고자 하는가? 이러한 주제들에 대한 명상은 악마를 크게 상하게 하여 그의 모든 무리를 도망치게 한다. 그러나 이렇게 행동할 수 있는 것은 어느 정도 정화되어 일어난 일의 원인을 어느 정도 꿰뚫어 보는 자들에게만 가능하다. 그러나 부정결한 자들은 그러한 사색을 유지할 줄 모르며, 심지어 다른 이들에게서 유혹하는 법을 배웠더라도, 내면의 전투 중에 먼지가 기둥처럼 치솟고 정욕으로 인해 모든 것이 혼란에 빠졌을 때는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온 군단이 반드시 고요해져야만, 단 한 명의 골리앗이 우리의 다윗을 대적하여 나설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다른 불순한 생각들에 대해서도 (앞서 언급한) 분해(생각의 분석)와 이 (두 번째) 유형의 싸움을 활용해야 할 것이다.

21. 어떤 불순한 생각이 너무 빨리 사라져 버릴 때,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그 원인을 찾아보자. 사물이 드물어서, 즉 생각의 대상을 달성하기 어렵기 때문인지, 아니면 우리에게 내재된 무감정 때문에 원수가 우리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인지. 예를 들어, 어떤 은둔자가 자신에게 최고의 도시를 영적으로 다스리는 임무가 맡겨졌다고 생각하고, 그 생각에 대한 환상에 깊이 빠져들지 않는다면, 이는 분명히 첫 번째 이유(생각의 대상이 달성 불가능하기 때문)로 인한 것임이 명백하다. 그러나 누군가 어떤 도시의 통치자가 된다고 꿈꾸며(따라서 그 일이 실현될 가능성이 매우 높음), 그 역시 그 생각에 (경멸을 담아) 대한다면, 이 복된 이는 무욕의 경지에 닿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다른 생각들에 대해서도 (왜 생각들이 그렇게 빨리 사라졌는지) 같은 조사 방법을 적용하면 밝혀질 것이다. 이는 우리의 열정과 노력을 북돋우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할 사항이다. 이를 통해 우리가 요단강을 건넜는지, ‘대추야자 나무가 무성한 땅’(신명기 34:3)에 가까이 와 있는지, 아니면 여전히 광야에 머물며 이방인들의 공격을 받고 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탐욕의 악마는 매우 교묘하고 기만적인 수단을 잘 구사한다. 그 악마는 종종 모든 것을 극단적으로 포기한 자로 위장하여, 관리자나 자선가의 모습을 취하고, 실은 존재하지도 않는 나그네들을 환대하며, 다른 궁핍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보내주고, 도시의 감옥을 방문하여 팔려가는 자들을 몸값을 주고 풀어주며, 부유한 여성들에게 아부하며 그들이 누구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할지 지시하고, 반면, 재물이 넘치는 이들에게는 세상을 버리라고 주입하며, 이처럼 조금씩 영혼을 현혹시켜 탐욕의 생각으로 물들이고 허영의 생각으로 이끌어 간다. 이 사람은 (그 은둔자의) 그러한 처사에 대해 주님을 찬양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여, 어떤 이들은 서로 은밀히 사제직에 대해 이야기하게 만들고, 현직 사제의 죽음을 예언하며, 그가 아무리 노력해도 (선출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고 덧붙인다. 그리하여 가련한 마음은 이러한 생각들에 얽매여,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과는 다투고,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는 부지런히 선물을 나누어 주며 감사와 환대 로 그들을 맞이하고, 일부 완고한 (반대자들)은 재판관들에게 넘겨 도시에서 추방할 것을 요구한다. 한편, 이러한 생각들이 내면에서 맴도는 동안, 교만의 악마가 나타나 빈번한 번개로 수도실의 공기를 가르고, 날개 달린 뱀들을 불러들이며, 최후의 악으로 이성을 빼앗아 간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하며 그러한 생각들이 사라지기를 바라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궁핍과 조화를 이루도록 노력할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니, 떠날 때도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음이 분명하도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하리라”(1티모 6,7.8), 그리고 성 바오로가 이어서 말한 바를 기억하며: “모든 악의 뿌리는 돈에 대한 사랑이다”(– 6, 10).

22. 모든 불결한 생각은 우리를 파멸과 멸망으로 몰아넣는 정욕들 때문에 우리 안에 굳어진다. 배고픈 이에게 빵에 대한 생각이 탐욕 때문에 굳어지고, 목마른 이에게 물에 대한 생각이 갈증 때문에 굳어지는 것처럼, 돈에 대한 생각과 풍성한 음식에서 비롯되는 부끄러운 생각들도 (이에 상응하는) 정욕 때문에 우리 안에 굳어집니다. 이와 유사한 현상은 허영에 대한 생각은 물론 다른 모든 생각에서도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들에 짓눌린 마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의의 면류관을 쓰기는 불가능하다. 복음서의 비유에 따르면,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한 만찬을 거절한(누가복음 14:18–20) 그 삼중으로 죄를 지은 마음은 바로 이러한 생각들에 사로잡혀 있었다. 마찬가지로 손과 발이 묶여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던져진 자도, 바로 이러한 생각들로 엮어진 옷을 입고 있었는데, 초대하신 분께서는 그 옷을 혼인 잔치에 합당하지 않다고 판단하셨습니다(마태복음 22:11–13). 혼인 예복이란 세속적인 정욕을 버린 이성적인 영혼의 무욕을 말한다. 감각적인 사물에 대한 생각이 우리 안에 오랫동안 머무르면서 지식을 타락시키는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기도에 관한 장들에서 다루어졌다.

23. 활동적인 삶을 반대하는 악마들 중에는 세 명의 주요 인물이 있는데, 이들에 이어 온 무리의 이방인들이 따르며, 이들은 전투의 최전선에 서서 불결한 생각을 통해 영혼을 죄로 유혹한다. 첫째는 식탐을 부추기는 자들이며, 둘째는 돈을 탐하게 부추기는 자들, 셋째로, 우리를 세상의 영광을 추구하도록 유혹하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순수한 기도를 원한다면 분노를 경계하고, 정절을 사랑한다면 배를 절제하여 빵으로 배부르게 하지 말고, 물을 적게 주어 괴롭혀라. 기도에 깨어 있으라. 원한을 품는 마음을 멀리 떨쳐 버리고, 성령의 말씀이 네게서 끊어지지 않게 하며, 성경의 문 앞에서 덕행의 열매를 두 손으로 딴다. 그러면 네 마음속에 무욕이 빛나고, 기도 중에 네 마음이 별처럼 빛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성 니로 시나이스의 글은 27장까지 이어진다. 그 내용도 함께 실겠다. 앞선 23장에 그의 24장이 담겨 있다.

24. 탐식의 악마가 잦고 격렬한 투쟁 끝에 확립된 절제를 무너뜨릴 수 없게 되면, 그때는 마음에 가장 엄격한 수행에 대한 열망을 심어주며, 이를 위해 다니엘에 대해 알려진 이야기—그 검소한 생활과 (그에게 유일한 양식이 되었던) (단 1:16)을 떠올리게 하고, 항상 그렇게 살았던 다른 몇몇 은둔자들, 혹은 신앙 생활 초기의 이들을 상기시키며, 그들을 본받도록 강요합니다. 이는 과도한 절제를 좇다가, 육신이 그 약함으로 인해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절제된 삶조차 누리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나는 그들이 그러한 유혹을 믿지 않고 빵과 기름, 물을 스스로 박탈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형제들은 경험을 통해 그러한 식단이 가장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다만 이 모든 것을 배불리 먹지 말고 하루에 한 번만 섭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빵과 물을 배불리 먹으면서도 무정욕의 면류관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놀라운 일일 것이다. 내가 말하는 무정욕이란 죄악된 일에서 멀어지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이는 절제라고 불리니—마음속의 정욕적인 생각을 잘라내는 것을 말하는데, 성 바오로는 이를 ‘내면의 유대인의 영적 할례’(로마서 2,29)라고 불렀다. 누구든지 이런 말을 듣고 낙심한다면, 굶주림과 목마름 속에서도 자신의 길을 걸어간 사도, “택함 받은 그릇”(사도행전 9,15)을 떠올려야 한다. 이 악마를 본받아 낙담의 영도, 이 진리의 적대자는 인내하는 자에게 가장 깊은 광야로 물러나라는 생각을 불어넣으며, 세례자 요한과 은둔자들의 시초인 – 안토니우스를 본받으라고 부추기며, 장기간에 걸친 초인적인 은둔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수치심에 휩싸여 자리를 버리고 도망가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면 이 악마는 그 후 자랑하며 “그 위에 굳게 섰다”(시편 12, 5)라고 말할 것이다.

25. 제68장과 동일 – 에바그리우스 1세.

26. 악령들은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오직 마음을 아시는 분만이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분”(욥기 7, 20)이시며 “그들의 마음을 홀로 지으신 분”(시편 32, 15)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로는 입에서 나오는 말이나, 때로는 어떤 신체적 움직임을 통해, 그들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많은 움직임을 알아차린다. 예를 들어, 우리가 대화 중에 우리를 비방한 자들을 질책했다고 가정해 보자. 이 말들을 통해 악령들은 우리가 그들에게 호의적이지 않다고 판단하고, 이를 빌미로 그들에 대한 악한 생각 을 우리 마음에 심습니다. 우리가 이를 받아들이면 악령의 원한이라는 멍에 아래 놓이게 되며, 이 악령은 그 후 끊임없이 우리 안에서 그들에 대한 복수심에 찬 생각을 부추깁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네 형제를 헐뜯으며, 네 어머니의 아들을 유혹하려 했다” (시편 49:20)라고 말씀하시며, 즉 원한을 품는 생각의 문을 열어놓고 기도 중에 끊임없이 원수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를 마치 신처럼 여김으로써 마음을 동요시켰습니다. 기도 중에 마음이 끊임없이 바라보는 것은 정당하게 신으로 인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방의 병을 피하고, 누구에 대해서도 악한 말을 하지 않으며, 어떤 이웃을 떠올릴 때라도 얼굴을 일그러뜨리지 말아야 한다. 악한 악령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우리의 모든 움직임을 지켜보며, 우리를 대적하는 데 이용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 일어나거나, 앉거나, 서거나, 걸음걸이, 말, 시선 등 – 빠짐없이 샅샅이 조사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루 종일 우리를 교묘히 유혹하며” (시편 37, 13), 기도 중에 겸손한 마음을 수치스럽게 하고 그 복된 빛을 꺼버리려 하기 때문이다.

 

12. 에바그리우스 수도사의 격언[65]

1. 아바 에바그리우스는 말하였다. “세속적인 것에 대한 대화를 피하라. 그래야 네 마음이 동요하지 않고, 네 침묵의 규칙이 깨지지 않을 것이다.”

2. 또한 이렇게 말하였다. “산만함 없이 기도하는 것은 큰 의미가 있으며, 산만함 없이 (시편을) 노래하는 것은 더욱 큰 의미가 있다.”

3.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마지막을 항상 기억하고, 영원한 심판을 잊지 말라. 그리하면 네 영혼을 온갖 죄로부터 지킬 수 있을 것이다.”

4. 또 말씀하셨다. “유혹이 없다면, 아무도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5. 아바 에바그리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구원의 시작은 자기 책망이다.”

6.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만약 낙담에 빠진다면 기도하라. 그러나 두려움과 경외심으로 기도하고, 부지런히, 정신을 차리고, 냉철하게 기도하라.”

7. 수도 생활을 시작할 무렵, 아바 에바그리우스는 어떤 장로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아바! 제 영혼을 구원할 말씀을 가르쳐 주십시오.” 장로는 그에게 말했습니다. “구원받고 싶다면, 누구에게 가든지 그가 ‘[66] ’라고 묻기 전에는 먼저 말하지 마라.”

8. 어느 날 어떤 일로 인해 수도실들에서 모임이 열렸는데, 아바 에바그리우스가 그곳에서 말씀을 하고 계셨다. 한 장로가 그에게 말하였다. “아바,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당신이 자신의 편에 서 계셨더라면 이미 오래전에 주교가 되어 많은 이들을 이끌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은 이방인처럼 이곳에 앉아 계십니다.” 아바 에바그리우스는 그 말에 감동받았지만 당황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신부님. 하지만 ‘한 가지만 말하겠노라, 두 번째는 덧붙이지 않으리라’(욥기 39:35).”

9. 에바그리우스는 자신의 『그노스티카』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의로운 그레고리우스에게서 네 가지 주요 미덕, 즉 분별력(fronesis), 용기, 정절, 그리고 정의가 있다는 것을 배웠다.” 그는 분별력의 임무는 지혜로운 신성한 힘을 관조하는 데 있으며, 용기의 임무는 진리 안에 굳건히 서서, 설령 대립이 닥치더라도 거짓을 따르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첫 번째 농부로부터 씨앗을 받아, 파종자(적)를 멀리하는 것은, 그의 견해에 따르면, 절제[67] 의 본질이라고 했다. 그리고 정의의 길은 각자에게 그 공로에 따라 갚아 주는 것이다.

10. 같은 곳에서 그는 말한다: 진리의 기둥, 바실리우스 카파도키우스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에게서 비롯된 지식은 끊임없는 연구와 수련을 통해 완성되지만, 은총에서 비롯된 지식은 진리, 온유, 자비를 통해 완성된다. 전자는 정욕에 사로잡힌 사람들도 얻을 수 있으나, 후자는 기도 중에 그들의 마음을 비추는 빛을 바라보는 무정욕한 자들만이 받아들일 수 있다.

11. 또한 그는 그곳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툼위트 교회의 천사 세라피온은, 영적인 깨달음에 흠뻑 취함으로써 마음이 정화되고, 사랑이 분노를 치유하며, 절제가 정욕과 욕망을 억제한다고 말했습니다.

12. 또한 디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끊임없이 스스로와 함께 섭리와 심판에 대해 대화하고, 그 내용들을 기억 속에 간직하도록 노력하라. 섭리는 특히 우리를 죄와 무지에서 벗어나 미덕과 지식으로 이끌어 올리는 데서 뚜렷이 드러난다.”

 

 

2

 

서문

본 권에 실릴 글을 선정함에 있어 그리스어판 『도보톨리비움』의 순서를 따르는 것이 마땅했다. 그렇게 했다. 이전에 생략되었던 성 카시아노의 저서 중에서 수도원 규율은 제외하고 순수한 금욕적 교훈만을 선별하여, 예루살렘의 성 이시히오스와 시나이의 성 닐로스의 수행 지침을 제시한다. 그러나 여기서 그리스의 『도브로톨리비움』을 따르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 책에서는 내적 측면을 중심으로 금욕 생활의 본질을 가장 먼저 해석한 수많은 성스러운 금욕 수도자들, 즉 성 에프렘 시리아인, 요한 사다리꾼, 바르사누피오, 요한, 아바 도로페이, 이삭 시리아인 등이 있습니다. 이분들의 가르침을 우리 선집에서 제외하는 것은 큰 불공평이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분들의 가르침을 활용하기로 했습니다. 이 성부들의 저작을 전편을 수록하는 것은 부적절할 뿐만 아니라, 그럴 절박한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저작들은 이미 러시아어로 번역되었기 때문입니다. 모두 번역되었지만, 모든 사람이 이를 손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성부들의 거룩한 가르침을 갈망하는 모든 영혼에게 전하고자 하는 바람으로, 우리는 영적 삶에 있어 가장 필수적인 내용을 선별하였으며, 여기서 종종 한 마디가 온 통을 대신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발췌본을 선정하는 데 있어 지침이 된 분은 성 카시안입니다. 그는 수행의 목표로 정욕으로부터 마음을 정화하는 것을 삼았으며, 이에 맞춰 자신의 모든 금욕적 설교를 이 방향으로 이끌었습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에 따라 그의 저서에서 발췌한 내용을 담았으며; 성 니로 시나이오스의 글에서 발췌한 내용도 이 사상에 따라 배열되었으며, 성 에프렘의 글에서 선별된 내용도 이 사상에 따라 선정되었다. 또한 성 바르사누피오와 요한, 성 아바 도로테오, 성 이사악 시리아인의 글에서 인용한 부분도 이 사상에 따라 편집되었으나, 마지막 세 분의 글은 별도의 제목으로 표시되지 않았다. 이처럼 우리 『도브로톨리비예』의 제2권 전체는 주로 심령을 정화하기 위한 정욕과의 투쟁에 관한, 신학적으로 지혜로운 교부들의 가르침을 모아놓은 모음집이 될 것이며, 이는 수도 생활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HTML 버전 편집자 주 (2005)

『도브로톨리비예』 제2권부터 제5권까지의 본문은 현대 러시아어의 표기법과 발음에 가깝게 편집되었습니다. 성경 인용문은 변경 없이 그대로 남겼습니다. 필요에 따라 구약과 신약의 신러시아어 판본을 참고하여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미르”(사회, 때로는 피조된 우주 전체), “미르”(평온, 조화, 화합, 조화) 및 “므노”(성스러운 기름 부음을 위한 향기로운 혼합물)라는 단어의 표기 차이도 변경 없이 그대로 두었습니다.

 

성 요한 카시안 로마인

 

그에 대한 간략한 소개

성 요한 카시안 로마인은 (350–360년경) 아마도 마르세유가 있는 갈리아 지방에서 귀족이자 부유한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 훌륭한 학문적 교육을 받았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 삶에서 완전함에 이르고자 하는 열망에 불타 동쪽으로 떠나 베들레헴 수도원에 입회하여 수도자가 되었다. 그곳에서 이집트 수도자들의 영광스러운 수행 생활에 대해 듣게 된 그는 그들을 직접 만나고 그들로부터 가르침을 받고자 했다. 이를 위해 친구 헤르만과 뜻을 모아, 베들레헴 수도원에서 2년간 머문 뒤, 서기 390년경 그곳으로 떠났다. 그들은 그곳에서 무려 7년을 보냈으며, 스키타와 독방, 수도원, 그리고 은둔자들 사이에서 은둔 생활을 하며 모든 것을 관찰하고 연구하며 직접 실천해 보았다. 그리고 그곳의 수도 생활이 지닌 모든 면모를 세밀하게 파악하게 되었다. 그들은 397년에 자신의 수도원으로 돌아왔으나, 같은 해에 다시 그 이집트의 황량한 지역으로 떠나 400년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이번에는 이집트를 떠나, 성 카시안은 친구와 함께 콘스탄티노플로 향했고, 그곳에서 그들은 성 황금입(즈라토우스트)의 호의를 받아 환영받았으며, 성 황금입은 성 카시안을 부제로 서품하고, 그의 친구를 연로함을 이유로 사제로 서품했다(400년). 성 금구사가 유배형을 선고받았을 때, 그를 충성스럽게 따르던 이들은 (405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로마의 교황 이노켄티우스에게 몇몇 중재자들을 보냈는데, 그 중에는 성 카시안과 그의 친구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사절단의 노력은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그 후 성 카시안은 더 이상 동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고향으로 가서 그곳에서 이집트의 전통에 따라 수도 생활을 계속했으며, 성스러운 삶과 가르침의 지혜로 명성을 얻었고, 사제로 서품받았다. 제자들이 하나둘씩 그에게 모여들기 시작했고, 곧 그들만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수도원이 형성되었다. 그들의 본보기에 따라 멀지 않은 곳에 여성 수도원도 세워졌다. 두 수도원 모두 동방, 특히 이집트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이 생활하며 구원을 얻던 규율이 도입되었다. 새로운 정신과 새로운 규칙에 따라 이 수도원들이 정비되고, 그곳에서 수행하던 이들의 뚜렷한 성과는 갈리아 지역의 많은 고위 성직자들과 수도원장들의 주목을 끌었다. 자신들 지역에도 그러한 질서를 정립하고자 했던 그들은 성 카시아노에게 수도 생활의 정신 자체를 담아 동방식 수도 규율을 작성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는 이 청을 기꺼이 받아들여, 12권의 규정집과 24편의 대담록에 모든 내용을 기술했다. 성 카시아노는 435년에 선종했다. 그의 기념일은 2월 29일이다. 성 카시아노의 이러한 금욕적 저작들 중에서, 이전의 『자비』에는 여덟 가지 주요 정욕과의 투쟁에 관한 여덟 권(5–12)과 논증에 관한 한 편의(제2편) 대담이 발췌되어 수록되었는데, 둘 다 요약된 발췌본이다. 우리도 이를 본받는다. 주요 인용 부분은 정욕과의 투쟁에 관한 여덟 권의 책으로, 가장 완전한 번역본을 사용하며, 일부 구절에는 적절한 곳에 ‘기사에 대한 고찰’과 ‘대화록’의 내용을 추가할 것이다. 그러나 그 외에도 그 앞부분에 대화록에서 발췌한 몇 가지 내용을 삽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되었는데, 여기에서는 영적 삶에서 정욕과의 투쟁이 갖는 중요성이나 수행 과정에서의 그 위치를 보여주고, 이 투쟁의 필요성을 밝히며, 정욕과 그에 대한 투쟁에 대한 일반적인 개요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뒤에는 앞서 설명한 여덟 가지 생각과의 투쟁에 대한 보충 자료로서, 다른 두 가지 투쟁, 즉 생각과의 투쟁과 재앙 및 역경으로 인한 슬픔과의 투쟁을 묘사한 발췌문을 추가로 수록하였다. 마지막으로, 부록 형태로 몇 가지 주제에 대한 필요한 가르침을 덧붙이는데, 비록 영적 삶 전반에 대해 다루고 있지만 영적 투쟁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들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영적 삶을 이끄는 주체로서의 은총과 자유의지에 관하여, 이 둘이 수렴되는 기도에 관하여, 영적 삶으로의 동기에 따른 완전함의 단계에 관하여, 그리고 회개의 수고의 끝에 관하여. – 이러한 부록들이 우리가 성 카시아노의 저술에서 발췌한 모든 내용을 “영적 전쟁에 대한 고찰”이라는 제목으로 묶는 데 아무런 지장이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성 카시아노의 발췌문은 다음과 같은 목차로 구성될 것입니다:

1. 수행의 목적과 결말.

2. 이 목적을 염두에 두고,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단절해야 하는지도 규정해야 한다.

3. 육체와 영의 투쟁.

4. 정욕과 그에 대한 투쟁에 대한 전반적인 개요.

5. 여덟 가지 주요 정욕과의 투쟁: 가) 탐식, 나) 음탕함, 다) 탐욕, 라) 분노, 마) 슬픔, 하) 낙담, 치) 허영, 횟) 교만.

6. 악한 생각들과, 이를 통해 악령들과의 투쟁.

7. 온갖 종류의 슬픔과의 투쟁.

8. 영적 생명의 원천인 신성한 은총과 자유 의지에 대하여.

9. 기도에 대하여.

10. 영적 삶에서의 인도에 대하여.

11. 영적 삶으로 이끄는 동기에 따른 영적 삶의 완성에 대한 단계.

12. 회개의 수고가 끝나는 때에 대하여.

 

영적 전쟁에 대한 개관

 

1. 수행의 목적과 결말

1. 모든 학문과 예술은 그 나름의 목적(scopon)과 결말(telos)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염두에 둔 현명한 예술 애호가는 모든 수고와 비용을 기꺼이 감수한다. 마찬가지로 농부는 때로는 무더위를, 때로는 추위를 견디며 지칠 줄 모르고 땅을 갈고 흙을 풀어가는데, 그 “목적”은 온갖 잡초를 제거하여 땅을 더 비옥하게 만드는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목적”, 즉 자신을 부양하고 재산을 늘리기 위한 풍성한 수확을 얻을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수행 생활에도 그 나름의 목적과 결실이 있으며, 이를 위해 우리는 지치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모든 수고를 감수한다. – 그 목적을 위해 금식 식사의 부족함이 우리에게 부담으로 느껴지지 않고, 밤샘 기도로 인한 피로가 기쁨으로 바뀌며, 묵상하며 끊임없이 성경을 읽는 일에 결코 질리지 않으며, 끊임없는 수고도, 모든 것에서 벗어난 적나라함과 모든 면에서의 궁핍함도, 심지어 이 끝없이 넓은 사막의 공포조차도 우리를 두렵게 하지 않습니다.

2. 우리 수행 생활의 종착점은 하나님의 나라이며, 그 목표는 마음의 순결함인데, 이것이 없이는 그 종착점에 도달할 수 없다. 이 목표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하고, 마치 직선을 따라가듯 우리의 행로를 가장 확실하게 이끌어야 하며, 만일 우리의 생각이 그 목표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즉시 그것을 다시 바라보며 마치 어떤 기준에 맞추듯 바로잡아야 한다.

3. 성 바오로는 그리스도의 선한 멍에를 메신 이들에게 “너희는 거룩함 안에서 열매를 맺고, 그 끝은 영생이다”(로마서 6,22)라고 말하며 이렇게 가르칩니다. 이를 통해 그는 마치 “너희의 목표는 마음의 청결에 있고, 그 끝은 영생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이 목표, 즉 마음의 순결로 이끌 수 있는 것에는 온 힘을 다해 따르고, 그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하는 것은 파멸적이고 해로운 것으로 여겨 피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감수하고 행하며, 그것을 위해 부모와 조국, 지위, 부, 이 세상의 즐거움과 모든 쾌락을 버리기 때문입니다. 즉, 변함없는 마음의 순결을 굳건히 지키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항상 이 목표를 염두에 둔다면, 우리의 모든 행동과 생각은 그 목표를 달성하는 데로 곧바로 향할 것입니다. 반면, 그 목표가 끊임없이 우리 눈앞에 자리 잡지 않는다면, 우리의 모든 수고와 힘은 오직 이 한 가지에 집중되지 못한 채 헛되이 소모될 것입니다.

4. 그러므로 우리는 이 순결을 위해 모든 것을 행하고 모든 것을 갈망해야 한다. 이를 위해 광야로 나아가고, 이를 위해 금식하고, 밤샘 기도하며, 수고하고, 육체의 궁핍을 견디며, 성경을 읽고 그 밖의 미덕들을 실천해야 한다. 즉, 우리 마음이 어떤 해로운 정욕에도 시달리지 않게 하고, 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함이다. 금식, 밤샘 기도, 은둔 생활, 성경 공부는 이 주된 목표, 즉 마음의 순결을 위해 우리가 실천해야 마땅하며, 이를 위해 이 주된 덕목을 해치는 일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 주요 미덕이 우리 안에 온전히 보존되고 훼손되지 않는다면, 앞서 언급된 수행 중 어떤 것이든 필요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생략하게 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모든 것을 다 지키면서도 오직 이 미덕 하나만 어긴다면, 그로부터 아무런 유익도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은 이 미덕을 위해 행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들(수행)은 그 자체로 완전함이 아니라, 완전함에 이르는 수단일 뿐이다. 따라서 그것들만을 마치 ‘최고의 선’인 양 만족하며, 그것들에 마음의 열망을 멈추고, 그것들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마음을 더 넓히지 않는다면, 그 수고는 헛된 것이 될 것이다.

 

2. 이 목적을 염두에 두고, 우리의 세속 포기(탈속)가 어떠해야 하는지도 결정해야 한다.

1. 세상으로부터의 초탈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육체적으로 세상의 모든 부와 재물을 버리는 것이며, 둘째는 과거의 습관과 악덕, 정욕을 — 영적인 것이든 육체적인 것이든 — 버리는 것이며, 셋째는, 마음을 현재의 모든 것과 보이는 것에서 떼어내고 오직 미래만을 바라보며 보이지 않는 것을 갈망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 땅과 네 친족과 네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 (창세기 12:1): “네 땅에서”, 즉 세상의 부와 지상의 소유에서; “네 친족에서”, 즉 태어날 때부터 우리에게 달라붙어 마치 한 핏줄처럼 우리에게 친숙한, 예전의 생활 방식과 옛 습관 및 악덕에서; “네 아버지의 집에서”, 즉 세상에 대한 모든 추억과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세상의 모든 것에서 떠나라는 뜻이다.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의 속박에서 죽어, 사도의 말씀대로 더 이상 보이는 것을 바라보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볼 때 이루어진다; “보이는 것은 일시적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니”(고린도후서 4:18) – 그리고 마음으로 이 일시적이고 보이는 집에서 나와, 우리의 눈과 마음을 우리가 영원히 머물게 될 그 집으로 돌릴 때; – “육신으로 행하되 육신을 따라 싸우지 아니하리라”는 주님 안에서(고린도후서 10:3), 그 복된 사도의 말씀을 행실과 삶으로 선포하며: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느니라”(빌립보서 3:20).

2. 믿음의 온기를 다해 첫 번째 포기를 실천하고도, 두 번째 포기를 같은 열정과 열의를 다해 이행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별다른 유익이 없을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이 두 가지를 얻음으로써, 옛 사람으로서 우리 이전 아버지의 집을 떠나, 온전히 우리 마음의 시선을 하늘로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완전함에 이르기를 원한다면, 육신으로 부모와 고향, 세상의 부와 쾌락을 버린 것처럼, 마음으로도 그 모든 것을 버리고, 경멸하며 버렸던 것들에 대한 욕망으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신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그들은 하늘의 만나를 맛본 후에도 이집트의 부정한 음식과 더러운 음식을 갈망하며 “우리가 이집트에 있을 때, 솥 곁에 앉아 있을 때가 좋았도다”라고 말했던 것처럼(출 16:3; 민수기 11, 5). 그리고 세상을 등진 후에도 예전의 근심으로 돌아가 예전의 욕망에 사로잡히는 사람은, 행동과 생각으로 그들과 똑같이 “내가 이집트(세상)에 있을 때가 좋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단지 육체적으로만 세상을 떠나고, 단지 이 이집트에서 이주하는 것만으로는, 우리가 더 높고 유익한 마음의 단절을 똑같이 얻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육체적이라고 부른 그 포기함에 대해 사도는 다음과 같이 선포했다.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다”(고린도전서 13:3). 즉, 내가 아무것도 남기지 않을 정도로 모든 것을 버리고, 이 모든 내어주기에 더해 순교와 내 육체의 불태움을 더하여, 내 몸을 그리스도를 위해 바친다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참을성이 없고, 성미가 급하며, 시기심에 차 있거나 교만하고, 타인의 모욕에 불타오르거나, 내 것을 요구하거나, 나쁜 것을 생각하거나, 내게 가해지는 어떤 일이든 참을성 없이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내면의 사람이 여전히 예전의 정욕에 사로잡혀 있는 한, 외적인 사람을 버리고 태워버리는 것이 내게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할 것이다.

3. 그러므로 우리는 온 힘을 다해 서둘러, 우리 내면의 사람 또한 이전 삶에서 모은 모든 것, 즉 육체와 영혼에 달라붙어 본질적으로 우리 자신의 것이며, 우리가 아직 이 육신에 있는 동안 잘라내어 버리지 않는다면, 죽음을 맞이한 후에도 우리를 따라다니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미덕이나, 그 근원인 사랑 자체가 이 세상에서 얻어지면, 이 생을 마친 후에도 그것을 사랑하는 이를 아름답고 빛나게 만들기 마련이듯이, 마찬가지로 악덕들도 영혼을 역겨운 색으로 뒤덮고, 그로 인해 더럽혀진 영혼을 그 끊임없는 거처로 데려가기 때문이다. 영혼의 아름다움이나 혐오스러움은 미덕이나 악덕의 성질에서 비롯되며, 그로부터 추출된 어떤 색채가 영혼을 그토록 빛나고 아름답게 만들어, “왕이 네 선함을 원하시리라” (시 44:11), – 혹은 지극히 검고, 악취가 나며, 추악해져서, 그녀 스스로 자신의 추악함이 풍기는 악취를 고백하며 “내 미친 짓으로 인해 내 상처들이 썩고 악취를 풍기네” (시 37:6)라고 말하게 된다. 그러므로 바로 그것들(미덕과 정욕)이야말로 본질적으로 우리의 부요함이며, 이는 영혼과 떼려야 뗄 수 없이 함께하며, 그 어떤 왕도 우리에게 줄 수 없고, 그 어떤 적도 우리에게서 빼앗을 수 없는 것이다. 바로 그것들이야말로 본질적으로 우리의 부요함이며, 심지어 죽음조차도 영혼으로부터 이를 떼어낼 힘이 없다. (악한 정욕의 부를 탕진한다는 것은 그것들을 죽이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그것들과의 투쟁 없이는 이룰 수 없다. 왜 세상을 버린 자들에게는 필연적으로 정욕과의 투쟁이 기다리고 있으며, 그들은 처음부터 바로 그 투쟁에 임해야 하는가. 성 카시아누스는 이 투쟁에 대해 『대화록』 제4편 “육체와 영의 투쟁”과 제5편 “여덟 가지 주요 정욕”에서 일반적인 논의를 펼치고 있으며, 『규정집』에서는 특히 여덟 가지 주요 정욕 각각과의 투쟁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제시하고 있다. – 그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을 발췌한다).

 

3. 육체와 영의 투쟁

1. 사도 바울의 말씀에서 읽을 수 있듯이, 우리 지체 안에는 싸움이 있다. “육신은 영을 거스르고, 영은 육신을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하여, 너희가 원하는 것을 행하지 못하고, 행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갈라디아서 5, 17).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이 싸움은 마치 우리 본성 그 자체에 스며든 듯합니다. 그리고 이 싸움이 예외 없이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이라면, 이를 첫 번째 인간의 타락 이후 인간 본성에 자연스럽게 속한 것으로 보지 않고는 어떻게 다른 것으로 여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본성적으로 주어진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 해를 끼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 안에 존재한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더 높은 완전함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남겨진 것입니다.

2. 이 구절에서 “육체”라는 단어는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욕망, 즉 악한 욕망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마찬가지로 “영”이라는 단어도 어떤 인격적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선하고 거룩한 소망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사도 자신도 다음과 같이 말하며 이러한 의미를 분명히 했다. “영으로 행하고 육신의 정욕을 행하지 말라. 육신은 영을 대적하느니라” 등(같은 곳, 16-17절). 이 두 가지 소망이 모두 한 사람 안에 공존하기 때문에, 우리 내면에서는 끊임없는 내전이 벌어집니다. 육체의 정욕은 주로 죄를 향해 나아가며, 현세적 욕구 충족과 관련된 것에서만 즐거움을 찾는 반면; 반면 영은 온전히 영적인 일에 매달리기를 원하며, 육체의 가장 필수적인 필요조차 뒤로 한 채 오로지 그것에만 전념하기를 원하고, 이 썩어 없어질 육체에 대해서는 조금의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다. 육체는 풍요와 온갖 쾌락으로 즐거워하지만, 영은 자연적인 필요 사항에 대한 돌봄조차 달갑지 않게 여긴다. 저쪽은 잠으로 배를 채우고 음식으로 몸을 채우기를 원하지만, 이쪽에게는 밤샘과 금식이 그토록 영양이 되어,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만큼의 잠과 음식조차 허용하고 싶지 않다. 저쪽은 온갖 부를 누리기를 원하지만, 이쪽은 매일 먹을 빵이 조금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하지 않는다. 저쪽은 안락하게 지내며 아첨꾼 무리에 둘러싸이기를 원하지만, 이쪽에게는 가혹한 삶과 접근하기 어려운 광활한 사막이 더 기쁜 일이며, 필멸자들의 존재는 즐겁지 않다. 저쪽은 사람들의 예우와 칭찬에 매료되지만, 이쪽에게는 박해와 모욕이 기쁨이다.

3. 우리의 의지가 자만심과 세속적인 지혜에 이끌릴 때, 그것은 이 두 가지 열망 사이에서 모든 비난을 받아 마땅한 어떤 중도를 지키려 하며, 육신의 정욕을 절제하되, 동시에 영의 요구를 이행할 때 피할 수 없는 고통을 조금도 겪지 않으려 하고, – 육체를 징계하지 않고도 육체의 정결함을 이루고자 하며, 깨어 기도하는 수고 없이도 마음의 정결함을 얻고자 하며, 육체를 안식시키면서도 영적 미덕으로 풍성해지기를 원하며, 격렬한 비방 없이도 인내의 은혜를 얻고자 하며, 세상의 명예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그리스도의 겸손을 나타내고자 하며, 이 세상의 오만함 속에서 경건의 단순함을 따르고, 세상의 영광과 호의를 받으며 그리스도께 섬기며, 단호한 진리를 말하면서도 그 어떤, 심지어 사소한 모욕조차 당하지 않고, – 전반적으로 현재의 복을 잃지 않으면서 미래의 복을 얻고자 하는 것. 이러한 뜻은 참된 완전함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의 온도를 갖게 함으로써, 요한계시록에서 주님께서 책망하시며 말씀하신 바로 그 사람들처럼 만듭니다: “네 행실을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아니하니, 차라리 차거나 뜨거웠더라면 좋았을 것을. 네가 미지근하므로 내 입에서 너를 토해 내리라” (계 3:15, 16). 그러나 은혜가 임하면 영의 에너지를 일깨우고, 그 안에서 모든 세속적인 것에서 벗어나게 하는 더 높은 열망을 회복시킵니다. 그 영향력을 받으면서, 의지는 더 이상 그토록 무관심하고 미지근한 상태로 남아 있을 수 없으며, 더 나은 것을 향한 열정을 품고 모든 하찮은 것을 그것에 희생시킨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예전의 평온과 무관심에 대한 끌림이 의지 안에 남아 있어, 다시 그 속으로 빠져들 준비가 되어 있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육신 안에는 더 높은 열망에 적대적인 움직임들이 남아 있는데, 더 높은 선을 맛본 의지는 이를 용납할 수 없으며, 이를 감지하는 즉시 온전한 열정으로 되살아나 자신의 더 높은 선을 용감하게 수호한다. 때로는 의지가 하느님을 거스르는 미지근함 속으로 떨어지기만 하면, 육체의 투쟁이 일어나 의지를 활기차게 깨운다. 이로부터 분명히 알 수 있듯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투쟁이 우리를 그곳에서 이끌어내지 않았다면, 우리는 앞서 언급한 하느님을 거스르는 미지근함의 상태에 영원히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상태에서는, 자기 만족에 굴복하여 스스로에게 약간의 관용을 베풀고자 할 때, 즉시 육신이 반기를 들고, 죄악된 충동과 정욕의 독침으로 우리를 찌르며, 우리가 바라는 기쁜 순결 속에 머물게 하지 않고, 차가워지는 쾌락—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 마치 가시덤불로 뒤덮인 길로 유인하듯이. 그러나 이는 잠들어 있던 하나님에 대한 열심을 자극한다. 그 열심은 일어나 접근한 적들을 쫓아낸다. 매일 우리 안에서 작용하는 이 투쟁은 우리를 유익한 결심으로 이끄니, – 방탕하고 안일한 삶을 버리고, 많은 땀과 영혼의 통회를 통해 마음의 순결을 얻으며, – 엄격한 금식, 굶주림, 갈증, 그리고 잠을 자지 않음으로 육체의 순결을 지키며, – 독서와 묵상,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 선한 영적 기분에 이르게 한다.

4. 이와 유사한 것이 이스라엘을 적대시하는 민족들에 관한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신비롭게 묘사되어 있는데, 사사기에서 다음과 같이 읽을 있다.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남겨 두사 이스라엘을 시험하시려 하셨으니… 그들에게 싸움을 가르치려 하심이라” (사사기 3:1, 2). – 주님께서 이러한 전쟁을 마련하신 것은 이스라엘에게 평안을 원치 않으셨거나 그들의 복지를 돌보지 않으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유익한지 아셨기 때문이다. 그 민족들의 거의 끊임없는 공격을 받으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도움에 대한 필요성을 끊임없이 느끼지 않을 수 없었고, 따라서 항상 그분을 의지하며 기도하는 자세를 유지해야만 했다. 전쟁을 멈출 수 없었기에, 그들은 방심에 빠지거나 게으름과 나태함으로 인해 느슨해질 시간조차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종종 불행이 이기지 못했던 자를 안전과 행복이 파멸로 몰아넣기 때문입니다.

5. 육신적으로 자제하는 자들 가운데서 우리가 잠든 영혼을 발견하는 것은, 오해로 인해 이 육신의 욕구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킨 뒤, 육체적 절제의 수고도, 마음의 회개도 필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안일함에 빠져 느슨해진 그들은 참된 완전함을 얻거나, 마음속의 정욕으로부터 마음을 정화하는 데 신경 쓰지 않는다. 이러한 상태는 육체적인 상태를 초월하여 단지 영적인 상태에 머무르는데, 이는 주님 자신의 말씀에 따라 버림받을 만한 것으로 지목된 바로 그 상태입니다. 차가운 상태에서 따뜻한 상태로 넘어갔다가, 이 역겨운 따뜻함에 머물러 버렸기 때문입니다.

6. 그러므로, 금욕의 첫 단계에서 육신적인 삶을 버리고, 즉 세속적인 관습에서 벗어나 명백한 육체적 부정을 삼가기 시작할 때, 우리는 서둘러 온 힘을 다해 즉시 영적인 상태를 체득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단지 겉으로 보이는 인간으로서 세상과 단절했거나, 육체적인 음행으로 자신을 더럽히는 것을 그쳤다는 이유만으로, 마치 이미 완전함에 도달한 것처럼 스스로를 착각하여, 나중에 정욕의 원인을 근절하는 데 소홀하고 안일해지지 않도록 해야 하며, 그렇게 하여 육체와 영 사이에서 중간에 머물러, 영적 완전함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채, 그 완전함을 얻기 위해서는 단지 겉으로만 세상의 삶과 쾌락에서 분리되고, 육체적인 방탕과 혼합에 가담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가장 나쁜 것으로 여겨지는 이 미지근함(무관심)의 상태에 머문다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네가 미지근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해 내리라” (계시록 3:16) 하신 대로 주님의 입에서 토해 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사랑의 품에 받아들여졌다가 나중에 식어버린 자들에 대해, 그분께서 어느 정도 혐오감을 품고 그들을 토해내실 것이라고 정당하게 선언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육신적인 사람, 즉 세속적인 자나 이방인이 구원에 더 쉽게 나아갈 수 있고 영적 완전함의 높은 경지에 오를 수 있는 반면, 그리스도의 멍에를 짊어지고도 완전함으로 향하는 길에 들어서지 못하고, 처음 가졌던 영적 열정의 불꽃이 식도록 내버려 둔 자보다 낫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육체적 정욕에 의해 굴복당하고 육체적 더러움으로 인해 자신이 부정하다고 자각한 자가, 회개에 이르러 모든 순결과 완전함의 근원에 의지할 때, 자신이 처해 있던 그 차가운 불신과 안일함의 상태를 혐오하며, 불타는 열정으로 더 수월하게 완전함의 경지에 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냉담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고, 겸손과 마땅한 열심 없이 이 소명의 길에 들어선 자는, 한 번 이 재앙 같은 전염병에 걸리면, 스스로 더 나은 길로 나아갈 수도 없고, 타인의 훈계도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이는 그가 주님의 말씀대로 마음속으로 “나는 부자요, 부유해졌으니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기 때문인데, 사실 그에게 더 어울리는 말은 그 다음에 나오는 “네가 비참하고, 가난하고, 궁핍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줄을 알지 못한다”는 구절이다(계 3:17). 이처럼 그는 자신이 얼마나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었는지, 얼마나 많은 면에서 고쳐야 할지, 타인의 훈계와 권면이 얼마나 절실히 필요한지 깨닫지 못함으로써 세속적인 사람보다 더 나빠지게 되며, 그 때문에 어떤 구원의 말씀도 받아들이지 않고, 장차 오는 세상에서 피할 수 없는 가장 엄중한 심판과 형벌을 받게 될 것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4. 정욕에 대한 개요와 그것과의 투쟁

1. 주요 정욕은 여덟 가지이다: 탐식, 음행, 탐욕, 분노, 슬픔, 낙담, 허영, 교만.

2. 정욕은 “두 가지 종류”로 나뉜다: 예를 들어 탐식과 음행처럼 자연스러운 욕구에서 비롯되는 자연적인 것과, 예를 들어 탐욕처럼 본성에 뿌리를 두지 않는 비자연적인 것이다. 이들의 “행동”은 “네 가지 방식”으로 나타난다: 일부는 탐식과 음행처럼 오직 육체 안에서 그리고 육체를 통해 작용하는 반면, 일부는 허영과 자만처럼 육체의 개입 없이도 나타난다. 또한, 일부는 탐욕과 분노처럼 외부에서 자극을 받아 일어나는 반면, 다른 일부는 낙담과 슬픔처럼 내적 원인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종류의 정욕 작용은 그 안에 두 가지 유형을 더 인정할 근거를 제공하며, 이를 육체적인 것과 영적인 것으로 나눕니다. 육체적인 것은 몸에서 생겨나 몸을 양육하고 쾌락을 주며, 영적인 것은 영적 성향에서 비롯되어 영혼을 양육하지만, 종종 몸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후자는 단순히 마음속을 치유하는 내적 치료로 치료될 수 있지만, 육체적 정서는 외적 치료와 내적 치료라는 두 가지 방법으로 치료된다.

3. 앞서 말한 내용 중 일부를 좀 더 상세히 설명해 보겠다. 식욕과 음탕이라는 정욕은 육체에 뿌리를 두고 있어, 때로는 영혼의 개입 없이도 그 근원이 되는 욕구가 자극받는 것만으로도 발동되지만, 육체와 연결된 영혼을 함께 끌어당기기도 한다. 이들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그들에 대항하는 정신적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며, 동시에 금식, 기도, 노동을 통한 고갈로 육체 자체도 길들여야 한다. 때로는 일시적인 은둔이 필요하기도 하고, 종종 완전한 은둔 생활이 필요하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영혼과 육체의 타락에서 비롯되므로, 양쪽 모두의 노력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 허영과 교만은 육체의 개입 없이 영혼 속에서 싹트게 된다. 칭찬과 영광에 대한 욕망 하나만으로 그에 사로잡힌 영혼을 타락으로 몰아넣는 허영이, 육체적인 것에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혹은 루시퍼가 교만해졌을 때, 선지자가 말한 대로 “네가 네 마음속으로 말하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가리라… 지극히 높으신 분과 같아지리라’”(이사야 14:13, 14)고 마음과 생각 속에서만 그 교만을 품었을 때, 과연 어떤 육체적 행동이 있었겠는가? 그에게는 그러한 교만 속에 부추기는 자가 전혀 없었으니, 그 교만은 온전히 그 내면에서 싹트고 성숙해졌다.

4. 이 여덟 가지 정욕은 비록 기원이 다르고 작용도 다르지만, 그중 첫 여섯 가지, 즉 식탐, 음란, 탐욕, 분노, 슬픔, 낙담은 서로 특별한 유대감으로 연결되어 있어, 앞선 정욕의 과잉이 다음 정욕의 시작이 된다. 왜냐하면 탐식 의 과잉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음란한 욕정이 생기고, 음란함으로부터 탐욕이, 탐욕으로부터 분노가, 분노로부터 슬픔이, 슬픔으로부터 낙담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감정들과 싸울 때는 같은 순서로, 이전 감정에서 다음 감정으로 넘어가며 대응해야 한다. 즉, 낙담을 이기려면 먼저 슬픔을 누르고, 슬픔을 몰아내려면 먼저 분노를 누르고, 분노를 잠재우려면 탐욕을 짓밟아야 하며, 탐욕을 뿌리 뽑으려면 음탕한 욕망을 다스려야 하며, 음탕한 욕망을 누르기 위해서는 폭식 욕구를 억제해야 한다. 그리고 나머지 두 가지 정욕인 허영과 교만은 같은 방식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데, 즉 첫 번째 정욕이 강화되면 다른 정욕이 시작되며, 과도한 허영에서 교만의 정욕이 생겨난다; 이와 같은 순서로 이들에 대한 승리도 얻어지는데, 즉 오만을 근절하려면 허영을 억누르어야 한다. 그러나 이 여섯 가지 정욕과는 본질적인 방식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들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을 근절한 후에 생겨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정욕들을 이기고 정복한 후에 특히 이 두 가지 정욕에 빠지게 된다. – 그러나 이 여덟 가지 정욕이 방금 설명한 대로 서로 이러한 관계를 맺고 있기는 하지만, 더 세분화하면 네 가지 결합으로 나뉜다. 즉, 음탕한 정욕은 탐식과 특별한 결합을 이루고, 분노는 탐욕과, 낙담은 슬픔과, 교만은 허영과 결합한다.

5. 각 정욕은 한 가지 형태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6. 예를 들어, 폭식은 세 가지 유형이 있다: 정해진 시간보다 먼저 먹고 싶은 욕망을 일으키거나, 음식의 질을 가리지 않고 배부르게 먹을 때까지 많이 먹으려 하거나, 맛있는 음식을 갈망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무질서한 식사, 대충 먹는 습관, 폭식, 그리고 쾌락 추구가 생겨난다. 이 세 가지로부터 영혼에 다양한 악한 병들이 발생한다. 첫 번째는 수도원 규율에 대한 불만을 낳고, 이 불만에서 수도원 생활에 대한 불만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커지며, 그 뒤를 이어 대개 수도원을 탈출하는 일이 뒤따른다; 두 번째는 육체적 정욕과 쾌락을 자극하며, 세 번째는 탐욕에 빠지게 하여 그리스도의 가난을 받아들일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7. 음란한 정욕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 번째는 한 성별이 다른 성별과 육체적으로 결합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두 번째는 여성과의 결합 없이 발생하는데, 이로 인해 족장 유다의 아들 오난이 주님께 벌을 받았으며(창세기 38:9, 10), 성경에서는 이를 ‘부정함’이라 부른다. 셋째는 마음과 생각으로 이루어지는데, 이에 대해 주님께서는 복음서에서 “누구든지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는 이미 마음속으로 그와 간음한 자니라”(마태복음 5: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 가지 종류에 대해 복된 사도는 다음 구절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습니다. “땅에 있는 너희 지체를 죽이라. 곧 음행과 부정과 정욕” 등입니다(골로새서 3:5).

8. 탐욕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세상을 등진 자가 모든 재물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이미 모든 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준 자가 다시 같은 재물을 얻게 만드는 것이며, 셋째는 이전에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던 자에게조차 소유에 대한 욕망을 부추기는 것이다.

9. 분노에도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내면에서 타오르는 분노이고, 둘째는 말과 행동으로 터져 나오는 분노이며, 셋째는 오랫동안 타오르는 분노로, 이를 원한이라고 한다.

10. 슬픔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분노가 가라앉은 후에 찾아오거나, 입은 손실과 상실, 그리고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음으로 인해 생기는 것이며, 둘째는 자신의 운명에 대한 우려와 두려움, 혹은 무분별한 걱정에서 비롯된다.

11. 낙담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잠으로 몰아넣고, 다른 하나는 수도실에서 쫓아낸다.

12. 허영은 여러 가지 형태가 있지만,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육체적 우월감과 눈에 보이는 것들로 자만하는 것이며, 두 번째는 영적인 대상들로 인해 헛된 명성을 갈망하는 것이다.

13. 교만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첫 번째는 육체적인 것이고, 두 번째는 영적인 것으로, 이는 첫 번째보다 더 치명적이다. 이는 특히 어떤 미덕에서 두각을 나타낸 자들을 유혹한다.

14. 비록 이 여덟 가지 정욕이 온 인류를 유혹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닥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에게는 음탕함이 주를 이루고, 다른 이에게는 분노가 우세하며, 또 다른 이에게는 허영이 지배하고, 또 다른 이에게는 교만이 군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정욕이 모든 사람을 덮치기는 하지만, 우리 각자는 각기 다른 방식과 순서로 그 정욕에 굴복하게 된다.

15.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정욕들과 싸워야 하는데, 각자가 자신에게 특히 해를 끼치는 정욕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 정욕을 주된 목표로 삼아 싸워야 하며, 그것을 주시하고 억제하기 위해 온갖 노력과 정성을 기울이고, 매일의 금식을 그 정욕을 향한 창으로 삼아, 매 순간 마음의 신음과 한숨이라는 화살을 그 정욕에 쏘아대며, 자신을 뒤흔드는 이 싸움이 그치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며 끊임없이 눈물을 흘려야 한다. 왜냐하면 누구도 자신의 정성이나 노력으로는 그 정욕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기 전까지는 어떤 정욕도 이겨낼 수 없기 때문이다. 비록 그 정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 자신도 밤낮으로 온갖 수고와 정성을 기울여야 하지만 말이다.

16. 그러한 투사가 자신의 가장 첫 번째 정욕에서 해방되었다고 느낄 때, 다시금 온전한 주의를 기울여 마음의 은밀한 구석을 살피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 뒤에 다른 것들에 비해 가장 강한 정욕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특히 그 정욕을 상대로 모든 영적 무기를 동원해야 한다. 이처럼 매번 자신 안의 가장 먼저 솟아나는 정욕들을 이겨낼 때, 그는 나머지 더 낮은 정욕들에 대해서도 더 빠르고 쉽게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17. 하나 또는 몇 가지 정욕을 이겼을 때, 그 승리로 인해 자만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께서 네 마음의 교만을 보시고는 더 이상 네 마음을 보호하고 지켜 주지 않으실 것이며, 주님께서 너를 버리시면, 너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겼던 바로 그 정욕에 다시 흔들리기 시작할 것이다. 또한 선지자는 “주여, 주께 고백하는 이 영혼을 짐승들에게 넘기지 마소서”(시 73:19)라고 기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마음이 교만해진 자들이, 겸손해지도록 이겨냈던 정욕에 다시 사로잡힌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면 말입니다.

 

5. 여덟 가지 주요 정욕과의 투쟁

1. 여덟 가지 주요 정욕과의 투쟁을 다루면서, 우리는 그 정욕들의 특성을 설명하고, 원인을 지적하며, 이에 대항할 수 있는 적절한 치료법을 제시할 것이다.

 

1. 탐식과 싸우기

1. 우리가 가장 먼저 시작해야 할 투쟁은 바로 탐식, 즉 포만감에 대한 정욕과의 투쟁이다.

2. 식욕 절제, 즉 금식에 관해서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규칙을 정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의 체력이 같지 않기 때문이며, 이 미덕은 영혼의 힘만으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힘과도 조화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매주 금식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이틀이나 사흘 이상 음식을 먹지 않고는 버틸 수 없고, 또 어떤 이들은 해가 질 때까지 음식을 먹지 않고 지내는 것조차 힘들다. 또한 채소나 약초, 마른 빵이 모든 사람에게 영양가가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어떤 사람은 배부르게 먹으려면 2파운드가 필요한 반면, 다른 사람은 1파운드나 반 파운드를 먹어도 속이 무거워진다. 그러나 모든 절제 실천자들은 한 가지 목표를 가져야 하는데, 그것은 자신의 능력에 맞춰 음식을 섭취하되 과식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음식의 질뿐만 아니라 양 또한 영혼을 나태하게 만들어, 그 안에 해롭고 죄악된 불을 지피기 때문이다.

3. 어떤 진미로 배를 채우든, 그로 인해 육체적 정욕의 씨앗이 싹트며, 음식의 무게에 짓눌린 마음은 더 이상 이성의 키를 올바르게 잡을 힘을 잃게 된다. 과도한 포도주 섭취만이 마음을 취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온갖 음식의 과잉 섭취 역시 대개 마음을 흔들리고 망설이게 하며, 순수하고 흠 없는 생각을 빼앗아 간다. 소돔 사람들의 타락과 파멸의 원인은 술 취함뿐만 아니라 배를 채우는 과식 때문이기도 했다. 주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예루살렘을 어떻게 책망하시는지 들어보라(예레미야 16:49). 네 자매 소돔이 무엇으로 죄를 지었느냐? 바로 배불리 먹고 포만감에 빠졌기 때문이 아니겠느냐? 그러한 빵의 포만감으로 인해 그들은 육신의 정욕이라는 꺼지지 않는 불길에 타올랐으므로, 하나님의 심판에 따라 하늘에서 유황 불로 불타버렸다. 이처럼 포만감에 대한 욕망으로 인해 빵을 과도하게 섭취한 것 하나만으로도 그들이 타락의 험준한 심연으로 추락했다면, 육체의 건강이 한창일 때 육체를 지탱하는 데 필요한 양이 아니라 자기 만족을 위한 욕망이 이끄는 대로 과도한 양의 고기와 포도주를 마시는 자들에 대해서는 무엇을 말해야 하겠는가?

4. 교부들은 식사에 대한 절제의 기준으로, 육체의 생명을 유지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섭취하게 되는 음식을, 아직 먹고 싶은 욕구가 남아 있을 때에도 더 이상 맛보지 않도록 하는 것을 정했다. 이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육체가 쇠약한 자라도 육체의 연약함이 요구하지 않을 때 의지력으로 음식에 대한 욕망을 억제한다면, 튼튼하고 건강한 사람들과 동등하게 절제의 미덕을 완벽하게 실천할 수 있다. 사도도 “육체의 욕망을 따라 행하지 말라”(롬 13:14) 말했기 때문이다. 그는 몸을 돌보는 것을 완전히 금한 것이 아니라, 단지 욕망에 따라 행하는 것을 금했을 뿐이다. 즉, 육체에 대한 탐욕스러운 돌봄은 배제했으나, 삶에 필수적인 합리적인 돌봄은 배제하지 않았다; 첫 번째는 육체에 대한 방종으로 인해 우리가 파멸을 초래하는 음탕한 행위에 빠지지 않도록 금지한 것이며, 두 번째는 육체가 무분별한 엄격함으로 인해 쇠약해져 우리의 영적 활동과 수고를 감당할 힘을 잃지 않도록 허용한 것이다.

5. 그러므로 절제의 정도는 각자의 양심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 누구나 육신의 반란과 싸우는 데 필요한 만큼 스스로 절제할 정도를 정해야 한다. – 규율에 따라 정해진 금식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그러나 금식 후에도 음식 섭취에 있어 절제를 지키지 않는다면, 그 금식을 지킨다고 해도 완전한 순결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장기간의 금식 기간 동안의 굶주림은 그 당시 일시적인 신체의 쇠약과 기진만력을 가져올 뿐, 그 뒤에 신체를 충분히 채우는 일이 뒤따른다면 정결함의 결실을 맺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영혼의 정결함은 배를 굶는 것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속적인 절제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 만족하지 않는 자는 지속적인 순결을 누릴 수 없다. 엄격한 금식이 그 뒤에 음식에 대한 과도한 방종으로 이어진다면 아무 소용이 없으며, 그 결실은 곧 식욕의 욕망에 의해 밀려나게 된다. 왜 때때로 길고 극도로 엄격한 금식보다 매일 이성과 절제를 바탕으로 음식을 섭취하는 것이 더 나은가? 절제되지 않은 금식은 영혼의 꾸준함과 확고함을 흔들 뿐만 아니라, 육체의 쇠약으로 인해 기도를 생기 없이 만들기도 한다.

6. 영혼과 육체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서는, 다른 영적 미덕들이 이에 더해지지 않는다면 단순히 음식에 대한 절제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먼저 순종의 미덕을 통해 겸손을 배우고, 마음을 찢으며, 육체를 수고시켜야 한다. 돈은 단순히 소유하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돈에 대한 욕망 자체를 뿌리째 뽑아내야 한다. 왜냐하면 돈을 갖지 않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 이는 대개 필요에 의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만, 우연히 돈이 주어지더라도 그것을 갖고자 하는 욕망 자체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 분노의 격정을 누르고, 슬픔의 무거움을 극복하며, 헛된 명예를 경멸하고, 교만의 오만을 짓밟아야 하며, 또한 마음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변덕스럽게 쏠리는 것을 끊임없이 하나님을 기억함으로써 억제해야 한다. 교활한 원수가 우리의 마음을 이 묵상에서 돌리려 시도하며 마음의 은밀한 곳에 스며들 때마다, 우리는 매번 우리의 마음을 방황하는 생각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묵상하는 데로 되돌려야 한다.

7. 식욕의 충동을 억제하는 데 강하지 못한 사람은, 정욕이 불타오를 때 결코 그것을 누를 수 없다. 내면의 사람의 순결함은 이 미덕의 완성에 비추어 드러난다. 왜냐하면 가벼운 싸움에서 가장 약한 자에게도 굴복하는 사람을 보고는, 그가 가장 강력한 적들과의 싸움에서 맞설 수 있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8.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식욕의 정욕을 짓밟아야 하며, 금식뿐만 아니라 기도로, 또한 독서와 끊임없는 마음의 회개를 통해 마음을 정화해야 한다. 그동안 유혹당하거나 패배했던 모든 것을 떠올리며, 수많은 죄에 대한 공포감에 신음하기도 하고, 완전함과 순결에 대한 열망으로 타오르기도 해야 한다. 그리고 마음을 그 지경에 이르도록 다듬어야 하는데, 즉 마음이 그러한 수행의 수고와 사색에 몰두하고 마치 그에 사로잡힌 것처럼 되어, 음식으로 몸을 보충하는 것조차 허용된 쾌락의 대상이 아니라, 처벌의 형태로 부과된 짐으로 여기게 하여, 이를 영혼이 바라는 것보다는 몸에 불가피하게 필요한 것으로 여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끊임없이 이러한 영적 경계와 회개의 태도를 유지한다면, 음식으로 자극을 받아 극도의 광란에 이르는 육체의 정욕을 곧 누그러뜨리고, 그 해로운 독침을 무디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눈물을 풍성히 흘리고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통곡함으로써, 바빌론의 왕, 즉 마귀가 우리 안에서 지피는 우리 육체의 화로를 끌 수 있다. 마귀는 우리에게 죄를 짓게 할 기회를 마련하고 정욕을 자극함으로써, 그때 우리는 마치 화로에 기름과 역청을 더하는 것처럼, (부도덕한 쪽으로); 하나님의 은총으로, 우리 마음에 이슬 같은 성령의 숨결이 불어와 육신의 정욕의 불꽃이 우리 안에서 완전히 꺼질 때까지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첫 번째 투쟁이다. 즉, 완전함에 대한 열망으로 과식과 탐식을 잠재우는 것이다! 이를 위해 과도한 음식에 대한 욕망뿐만 아니라, 우리 본성에 필수적인 양식조차도 절제에 해로운 것으로 간주하여, 마음속으로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섭취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삶의 흐름은 어떤 때에도 영적인 수행에서 주의를 돌리지 않도록 정해야 하며, 오직 육체의 약함이 육체에 필요한 보살핌을 취하도록 부추길 때만 예외로 해야 한다. 그러나 영혼의 욕망에 노예가 되는 것보다 삶의 필요를 더 충족시키기 위해 이 필요성에 순응할 때에도, 우리는 구원의 수행에서 우리를 방해하는 일처럼 그것을 가능한 한 빨리 뒤로 미루어야 한다. 심지어 식사하는 동안에도 이러한 수행에서 뒤처져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영혼이 신성한 관상에 주의를 집중시키면서, 동시에 미덕에 대한 사랑과 필수적인 사물들의 아름다움에서 더 큰 기쁨을 누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눈앞에 놓인 음식의 즐거움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반적으로 모든 현세적인 것은 썩어 없어질 것으로 경멸받기 시작하니, 누군가 마음의 시선을 썩지 않고 영원한 선에 끊임없이 고정시켜, 아직 육신에 머무는 동안에도 마음으로 이미 미래 생명의 행복을 맛볼 때 말이다.

9.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탐식과 과식이라는 욕망을 이겨내고, 더 이상 육체의 노예가 아니게 되면, 우리는 더 높은 차원의 투쟁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 자로 인정받을 것이며, – 보통은 이미 승리한 자들과만 직접 싸움을 벌이는 불결한 세력들과 맞서 싸우게 될 것이다. 이처럼 육신의 욕망을 억제하는 것은 모든 전투의 가장 견고한 토대가 됩니다. 자신의 육신을 이기지 못한 사람은 누구도 정당한 싸움을 할 수 없으며, 정당한 싸움을 하지 않는 자는 승리의 월계를 쓰지 못합니다.

10. 정당한 전투 규칙에 따라 싸우는 참된 그리스도의 전사의 말을 듣고 싶으십니까? – 잘 들어보십시오. – “나는” 그가 말하길, “그렇게 달리고, 헛된 것을 쫓는 것이 아니며, 그렇게 싸우고, 허공을 치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을 죽이고 복종시켜, 다른 사람들에게 설교하면서 정작 나 자신이 실족하지 않도록 하노라” (고린도전서 9:26, 27). 보라, 그가 자기 자신, 즉 자신의 육신 안에서 마치 가장 견고한 기초 위에 서서, 영적 싸움의 핵심 사명을 확립하고, 싸움의 모든 성공을 육신의 고갈과 자기 몸을 정복하는 데에 모두 담아냈음을 알 수 있는가? “나는”이라고 그가 말하길, “불확실한 것을 향해 달리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하늘의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그곳에 흔들리지 않는 목표를 두고, 자신의 마음의 빠른 흐름을 그 목표를 향해 흔들림 없이 향하게 해야 하는 사람은 불확실한 것을 향해 달리지 않는다. 뒤를 잊고 앞을 향해 나아가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높은 소명” (빌 3, 13, 14)를 향해 나아가며, 항상 그곳으로 마음의 시선을 고정하고, 온 마음을 다해 그곳으로 서둘러 가며, 확신에 차서 “나는 선한 싸움을 싸웠고, 경주를 마쳤으며, 믿음을 지켰다”(딤후 4, 7)라고 외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쫓아 “그 향기를 쫓아” 달리는 것이 얼마나 지칠 줄 모르는 일인지, 온 양심에 살아 숨 쉬는 열정으로 깊이 깨달았기에 (아가 1, 3), 육신을 죽임으로써 영적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음을, 그는 의심할 여지 없는 소망을 품고 이렇게 말합니다. “나에게는 의의 면류관이 남아 있으니,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그날에 내게 주실 것입니다” (2티모 4, 8). 그리고 우리도 그와 같은 상급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하려고, 우리가 그와 같은 길을 따라 그분을 본받으면,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나뿐만 아니라, 그분의 나타나심을 사랑하는 모든 이에게도” 라고 선포하시며, 심판의 날에 우리도 그리스도의 재림을 사랑한다면—그분이 원치 않는 자들에게도 나타나실 재림뿐만 아니라, 특히 성도들의 영혼에게 항상 임하시는 그 재림을 사랑한다면—육신을 죽임으로써 싸움에서 승리할 때, 그분의 면류관에 동참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마지막 재림에 대해 주님께서는 복음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와 내 아버지께서 그에게로 가서 그와 함께 거처를 마련하리라”(요한복음 14:23). 또한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그도 나와 함께 하리라” (계시록 3:20)고 말씀하셨습니다.

11. 한편 사도는 자신이 이룬 경주만의 업적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나는 불확실한 것을 향해 달리는 것이 아니라”라고 말합니다: [이는 특히 그의 마음의 열망과 영의 열정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는 온갖 열정을 다해 그리스도를 따랐으며, 신부와 함께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주의 뒤를 따라 주의 평화의 향기를 쫓아 달리나이다”(아가 1,3); 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나이다”(시편 62,9)]; 그러나 그는 또 다른 종류의 투쟁에서도 승리를 거두었음을 증언하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이렇게 싸우노니, 마치 허공을 치는 것처럼 하지 아니하고, 내 몸을 죽이고 복종시키노라”: 이는 본래 절제의 지독한 수고, 육체에 대한 채찍질, 그리고 육체의 고갈을 가리키는 것이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육신과 싸우는 기백 넘치는 투사로서 자신을 묘사하며, 절제의 채찍으로 육신을 길들이고 금식의 타격으로 지치게 함으로써, 승리하는 영에게 불멸의 면류관과 썩지 않는 월계관을 안겨주었을 때, 헛되이 절제의 타격을 가한 것이 아니라 육신을 죽임으로써 승리의 영광을 얻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보라, 정당한 투쟁의 질서를, 영적 경쟁의 결말을 엿볼 수 있지 않은가? — 마치 그리스도의 투사가 반역자인 육신을 이기고, 그것을 자신의 발 아래에 밟아버린 후, 위대한 승자로서 승리의 전차에 올라타고 있는 것처럼! – 그는 헛된 것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머지않아 거룩한 성, 하늘의 예루살렘에 들어갈 것임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금식하며즉, 육체를 죽이는 일에서 헛되이 치는 것이 아니라”, 즉 금욕의 타격을 헛되이 가하는 것이 아니라, 왜냐하면 그는 그것으로 텅 빈 공기를 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죽임으로써 그 안에서 맴도는 악의 영들을 타격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헛된 공기를 치는 것이 아니라”라고 말하는 자는, 텅 빈 공기가 아니라 그 안에 존재하는 어떤 존재들을 함께 타격한다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그가 이러한 종류의 싸움(즉, 육체와의 싸움)을 이겨내고, 이제 수많은 승리의 월계관을 두른 채 다시 모습을 드러내자, 당연히 가장 강력한 적들의 공격을 받게 되었고, 그중 첫 번째인 시기하는 자들을 물리친 후, 확신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을 향한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세상의 어둠의 지배자, 하늘 아래 있는 악의 영들을 향한 것입니다”(엡 6,12).

12. 그리스도의 전사에게는, 그가 육신에 머무는 동안 전투에서 월계관을 얻을 기회가 결코 부족하지 않다. 그러나 그가 승리의 공로로 더욱 높이 올라갈수록, 그 앞에는 더욱 강력한 일련의 전투 가 기다리고 있다. 왜냐하면 그가 승리하여 자신의 육신을 정복한 후, 그의 승리에 분노한 수많은 대적들과 적군의 무리가 이 승리의 그리스도의 전사에게 맞서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전사가 세상의 평온함에 안주하여 자신의 영광스러운 전투들을 잊지 않도록, 그리고 무활동에 빠져 적들로부터 안전하다는 안일함에 빠져, 최고의 상에 걸맞은 승리의 용맹을 발휘하려는 의지와 용기를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힘과 용기를 키워가며 최고의 승리의 환호를 이루고자 한다면, 우리도 같은 순서로 전투의 위업을 겪어 나가야 하며, 먼저 사도와 함께 “나는 공기를 치는 것처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육체를 죽이고 복종시키고 있다”라고 말할 수 있게 하는 일을 먼저 이루어내야 하며, 그 후 이 싸움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면, 그 성공을 바탕으로 또 다른 싸움에 나서서, 그 싸움에서 승리할 때 다시 사도와 함께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을 향한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이 세상의 어둠의 지배자, 하늘 아래 있는 악의 영들을 향한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될 때, 그 싸움에 뛰어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육신을 이긴 후에야 비로소 이들과 싸움을 벌일 수 있기 때문이며, 만일 우리가 육신과의 싸움에서 계속 패배하고 배와의 경쟁에서 쓰러진다면, 결코 영들과의 싸움을 경험할 자격을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도로부터 정당한 책망을 듣게 될 것입니다. “너희에게 닥치는 유혹은 오직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것뿐이라”(고린도전서 10:13).

13. 내적 투쟁의 위업을 이루고자 하는 수도사는, 미리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은 규칙을 정하고 주의해야 한다. 즉, 규율에 따라 정해져 있고 모두에게 공통된 식사 시간 이전에는, 게다가 식사 시간 밖에서는, 아무리 그 맛과 달콤함이 유혹하더라도 음식이나 음료를 결코 섭취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또한 식사 시간이 끝난 후에도, 비록 아주 사소한 것일지라도, 그런 것에 감히 손을 대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그는 규율에 정해진 대로 수면의 시간과 정도를 엄격히 지켜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종류의 욕망은 우리가 음란한 정욕의 움직임을 끊어내야 하는 것과 같은 열정으로 단호히 잘라내야 한다. 왜냐하면 배의 과도한 욕망을 억누르지 못한 자가, 어떻게 육체적 욕망의 불길을 끌 수 있겠는가? 그리고 명백하고 사소한 정욕조차 다스리지 못한 자가, 어떻게 아무런 목격자도 없이 스며드는 은밀한 정욕을 이겨낼 수 있겠는가?

14.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우리 자신 안에 갇혀 있는 적이다. 그렇기에 우리 안에서는 끊임없이 내적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가 그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모든 외부의 싸움은 하찮아질 것이며, 그리스도의 전사에게는 모든 것이 평화로워지고, 모든 것이 그에게 복종하게 될 것이다.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정복되어 영에 복종하게 된다면, 우리는 외부의 적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마음의 완전함과 육체의 순결을 위해, 눈에 보이는 음식물을 절제하는 금식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아니, 여기에 영혼의 금식도 더해야 한다. 왜냐하면 영혼 또한 그만의 해로운 음식물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에서 멀어지면 육체적 양식이 풍부하지 않아도 정욕의 심연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 자만심은 영혼의 양식이며, 게다가 매우 달콤한 양식이다. 분노 또한 영혼의 양식인데, 비록 그렇게 가볍지는 않고 때로는 해로우며 심지어 치명적이기도 하다. 시기심은 영혼의 양식으로, 영혼의 생기를 독처럼 해치고, 다른 이들의 행복한 성공으로 인해 불행한 영혼을 끊임없이 괴롭힌다. 그녀의 허영은 일시적으로 즐거운 맛으로 달래주지만, 나중에는 그녀를 텅 비게 하고, 벌거벗게 하며, 모든 미덕을 박탈하고, 영적 열매를 맺을 수 없는 불모의 상태로 남겨둔다. 결과적으로, 이는 헤아릴 수 없는 수고에 대한 보상을 박탈할 뿐만 아니라, 큰 형벌을 초래하기도 한다. 모든 정욕과 변덕스러운 마음의 방황은 영혼을 일종의 목초지로 이끌어 해로운 음식으로 먹이면서, 하늘의 양식과 단단한 양식과는 거리가 멀게 만드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의 거룩한 금식 생활에서 이 모든 것을 힘닿는 대로 멀리할 때, 우리는 육체적 금식을 적절하고 결실 있게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육체의 수고가 영의 통회와 결합될 때, 그것은 하나님께 가장 기쁜 제물이 될 것이며, 마음의 깨끗하고 아름답게 단장된 깊은 곳에 그분의 거룩하심에 합당한 거처를 마련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육체적으로 금식하면서도 가장 해로운 영적 정욕에 사로잡힌다면, 우리 본성의 가장 소중한 부분이 더럽혀진 채로 남아 있을 때, 즉 성령의 거처가 되는 우리 본성의 그 부분이 흠이 있을 때, 육체의 고행은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썩어 없어질 육체가 아니라, 깨끗한 마음이 하나님의 거처이자 성령의 성전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겉사람이 금식할 때, 속사람도 해로운 유혹으로부터 지켜내야 한다. 성 사도는 “내면의 사람 안에서 믿음으로 그리스도가 너희 마음에 거하시게 하라”(엡 3,16-17) 말씀하시며, 특히 그 마음을 하나님께 깨끗하게 드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방문객으로 오실 자격을 얻도록 권고하십니다.

15. 음식은 육신의 정욕을 자극하지 않고 오히려 절제하게 하는 것을 선택해야 하며, 또한 구하기 쉬워야 하고 형제들의 일반적인 관습과 식습관에 부합해야 한다. 배를 채우는 쾌락은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하나는 규정된 식사 시간을 앞당기게 하고, 다른 하나는 종류를 불문하고 음식을 배불리 먹고 배를 넘치게 채우는 것을 좋아하며; 세 번째는 오직 가장 맛있고 정교한 음식으로만 만족한다. 이에 맞서 수도사는 세 가지 규칙을 지켜야 한다. 첫째, 규정된 식사 허용 시간을 기다려야 하며; 둘째, 과식을 용납하지 말아야 하며; 셋째, 소박하고 값싼 음식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리고 이 점에 있어 일반적인 관습과 관행에 맞지 않는 행위는, 가장 오래된 선조들의 전통이 허영과 자만, 허세로 더럽혀진 것으로 간주하여 승인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지식과 분별력의 은사를 지닌 이들 중에서,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가장 빛나는 등불처럼 모범이 되도록 내세워진 이들 중에서, 단순하고 가치 없다고 여겨지는 빵을 먹지 않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반대로, 채소와 과일만을 섭취하던 이들 중에서 가장 경험이 풍부한 사람들에 속하거나, 분별력과 통찰력의 은총을 얻은 사람을 본 적이 결코 없다.

16. 사랑의 행위는 금식보다 우선시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 점을 이집트의 성부들에게서 배웠다. 우리가 이 장로들의 규율을 배우고자 시리아에서 이집트로 갔을 때, 그들은 놀라울 정도로 생동감 넘치는 진심 어린 환대로 우리를 맞이해 주었으며, 우리가 어디를 지나가든, 어디에서든 우리를 안심시키기 위해, 우리가 팔레스타인 수도원에서 보아왔던 것처럼 규정된 식사 시간을 엄격히 지키는 데 구애받지 않았으며, 수요일과 금요일을 제외하고는 어디서나 그 시간보다 먼저 식사를 허용해 주었다. 한 장로님께 우리가 왜 그곳에서는 매일 금식하는 규칙을 그렇게 자유롭게 어기는지 물었을 때, 그분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금식은 항상 나와 함께 있지만, 여러분을 영원히 나와 함께 머물게 할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금식은 여러모로 유익하고 항상 필요하지만, 그것은 자발적인 희생일 뿐입니다. 반면 사랑의 행위를 실천하는 것은 계명이 요구하는 시급한 의무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안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나는 그분을 양육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을 배웅할 때는, 그분을 위해 베푼 관용을 가장 엄격한 금식으로 보상할 수 있습니다. “신랑이 그들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혼인 잔치에 참석한 자들이 금식할 수 없나니, 그러나 신랑이 그들에게서 빼앗길 날이 오면, 그때에 금식하리라” (누가복음 5:34-35).

17. 성부들이 말씀하시기를, 양쪽의 극단은 모두 해롭다고 합니다. 즉, 지나친 금식과 배를 채우는 과식 모두 해롭습니다. 우리는 식탐에 굴복하지는 않았으나, 지나친 금식으로 인해 쇠약해져, 그로 인한 허약함으로 인해 결국 같은 식탐의 유혹에 빠진 사람들을 알고 있다.

18. 우리는 육체적 쾌락에 대한 욕망 때문에 정해진 시간보다 일찍, 혹은 과도하게 음식을 섭취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뿐만 아니라, 비록 먹고 싶지 않더라도 정해진 시간에 음식을 섭취하도록 신경 써야 한다. 왜냐하면 육체적 쾌락에 대한 과도한 욕망과 음식에 대한 혐오 모두 우리의 원수에 의해 부추겨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절제되지 않은 금식은 과식보다 더 해롭다. 왜냐하면 과식의 경우 회개를 통해 올바른 행동으로 돌아설 수 있지만, 전자의 경우에는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19. 두 극단 사이를 지나며 합리적인 절제를 지키는 방법에 대해, 옛 성부들은 자주 논하셨으며, 모든 종류의 음식 중에서 빵을 가장 선호하셨고, 그 섭취량을 무게 약 1파운드 정도의 작은 빵 두 개로 정하셨습니다.

20. 절제의 일반적인 원칙은 각자가 자신의 체력, 신체 상태, 나이에 따라 포만감을 얻고자 하는 욕구가 요구하는 양이 아니라, 신체의 건강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만큼만 음식을 섭취하는 데 있다. 일관된 절제를 지키지 않고 때로는 지나치게 금식하고 때로는 과식하는 사람은, 그 사람은 기도와 절제 모두에 해를 끼친다. 기도에 해를 끼치는 이유는, 음식을 충분히 섭취하지 못하면 기도 중에 기운이 없어져 기진맥진하여 잠에 빠지기 때문이다. 절제에 해를 끼치는 이유는, 과도한 음식 섭취로 인해 타오르는 육체적 정욕의 불길이 엄격한 금식 기간 중에도 계속 작용하기 때문이다.

21. 교부들의 견해에 따르면, 적당한 식사란 매일 음식을 먹은 후에도 여전히 배고픔을 느낄 수 있을 만큼만 섭취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절제는 영혼과 몸을 균형 잡힌 상태로 유지하며, 몸을 쇠약하게 만드는 과도한 금식이나 영을 억누르는 포만감에 빠지지 않게 해 준다.

22. 금식과 절제에 관한 우리 책을 이 분의 견해로 유익하게 마무리하고자, 복자 마카리우스의 또 다른 구원의 가르침을 제시한다. 그는 수도사가 마치 백 년 동안 육신에 머물러야 할 것처럼 현명하게 금식 생활을 영위해야 하며, 마치 매일 죽을 수 있는 사람처럼 마음의 움직임을 절제하여—원한을 잊고, 슬픔을 떨쳐내며, 비탄과 상실을 아무것도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통해 권고하는 바는, 첫째, 즉 금식에 관해서는, 수도사가 절제에서 항상 균형 잡힌 엄격함의 길을 걷게 하고, 설령 육체가 지칠지라도 엄격함에서 방종으로 넘어가지 못하게 하는, 영혼에 유익한 분별력을 갖추라는 것이며; 그리고 두 번째, 즉 마음의 움직임을 다스리는 것에 관해서는, 이 세상에서 행복해 보이는 것을 경멸할 뿐만 아니라, 불행과 슬픔 앞에서도 꺾이지 않고, 그것들을 하찮은 것으로 여겨 무시하며, 매일 매 순간 부름받을 것을 기대하는 그곳으로 마음의 시선을 끊임없이 향하게 하는 것이다.

 

2. 음탕의 영과의 투쟁

1. 교부들의 전승에 따르면, 우리에게 두 번째로 있는 싸움은 음탕의 영과의 싸움이다. 이 싸움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길고, 끊임없이 이어지며, 극소수만이 완전히 이겨낸 싸움이다. 이는 사춘기가 시작되는 첫 시절부터 시작되는 치열한 전투이며, 다른 정욕들을 이기기 전까지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 이곳에서의 반란은 두 가지 형태를 띠며, 싸움을 위해 두 가지 무기로 무장해 있으므로, 이에 맞서기 위해서도 두 가지 무기를 손에 쥐고 맞서야 한다. 완전한 순결을 얻기 위해서는 육체적인 금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회개하는 마음의 통회와 이 가장 더러운 영에 대항하는 끊임없는 기도가 그것을 능가해야 하며, 그 다음에는 성경에 대한 끊임없는 가르침과 지적인 활동을 병행해야 하며, 또한 육체적 노동과 수공예로 마음을 방황하지 않게 하고 다시 자기 안으로 돌아오게 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깊고 참된 겸손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없이는 어떤 정욕에 대해서도 결코 승리를 거둘 수 없다.

2. 이 정욕의 변화는 마음의 완전한 정화에 달려 있는데, 주님의 말씀에 따르면 이 병의 독은 바로 그 마음에서 흘러나온다. “마음에서”라고 그분은 말씀하시기를, “악한 생각들이 나니… 간음, 음행” 등등이다 (마태복음 15:19). 그러므로 먼저 생명의 근원이자 죽음의 근원이 되는 곳을 정화해야 하는데, 솔로몬이 말한 대로 “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거기서 나오기 때문이라”(잠언 4,23)고 하였으니, 육신은 마음의 뜻과 권세에 복종하기 때문이다. 금식과 절제의 법칙을 온 힘을 다해 반드시 따라야 하는데, 이는 풍성한 음식으로 포만해진 육신이 영혼의 명령에 반항하여, 방탕함 속에서 자신의 통치자인 영을 땅으로 내쫓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리 행위의 모든 본질을 육체의 고행에만 국한시키고, 동시에 영혼을 다른 정욕들로부터 금식시키지 않으며, 신성한 가르침이나 다른 영적 활동으로 영혼을 채우지 않는다면; 그러면 우리는 결코 참된 순결의 정점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경우, 우리 안에 주권을 가진 것이 비록 우리 육신이 깨끗할지라도 그것을 더럽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먼저 잔과 접시의 안을 깨끗이 하여야 그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마태복음 23:26).

3. 그 밖의 정욕들은 대개 사람들과의 교류와 그들과 함께하는 일상적인 활동 및 일을 통해 정화되며, 그러한 정욕에 빠짐으로써 생기는 불쾌감과 짜증 그 자체에 의해 어느 정도 치유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분노, 모욕, 조급함 같은 감정들은 마음속의 훈계와 경각심 외에도, 형제들을 방문하고 이러한 정욕들을 자주 되새김으로써 치유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극을 받으면 그런 감정들이 더 자주 드러나기 때문에, 더 자주 드러나고, 그로 인해 더 빨리 치유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병은 육신이 지치고 마음이 상했을 때, 고독과 사람들로부터의 격리도 필요로 한다. 그래야만 병을 악화시키는 열병 같은 격앙의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더 빨리 완전한 회복의 상태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질병을 앓는 환자에게 해로운 음식이 눈앞에조차 나타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유익하듯이, 그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치명적인 욕망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함인 것처럼, 마찬가지로 이 특별한 병(정욕)을 몰아내는 데에도 침묵과 은둔이 매우 큰 도움이 되는데, 이는 병든 영혼이 외부에서 다양한 사람과 사물에 의해 자극받지 않고, 더 자유롭게 가장 순수한 지적 관조로 올라갈 수 있게 하여, 이를 통해 정욕의 전염성 있는 자극을 뿌리째 뽑아낼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4. 절제하는 것과, 순결하고 동정적인 무결함의 평온한 경지에 이른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이러한 미덕은 영혼과 육체 모두에서 순결한 처녀와 총각들에게만 귀속되는데, 예를 들어 신약성경에서는 두 요한(세례 요한과 복음서 저자 요한), 구약성경에서는 엘리야, 예레미야, 다니엘이 그로 인정받는다. 그들의 경지에 서 있는 자들로서, 타락한 후 오랜 수행의 수고와 잃어버린 것을 되찾기 위한 열렬한 한 노력으로 그들과 유사한 영적·육체적 순결과 흠 없음의 경지에 도달하여, 육체의 욕망을 부끄러운 정욕의 유혹 때문이라기보다는 오로지 본성의 움직임으로 인해 느끼는 이들을 그들과 동등하게 존중하는 것은 부당하지 않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경지에 이르는 것은, 우리가 말하건대,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는 극히 어렵고, 심지어 불가능하지 않을까? – 그러나 누구나 우리의 논증에서 이를 알아내려 하지 말고, 스스로 양심의 시험을 통해 이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 우리는 육체의 유혹을, 드물게든 매일 겪든, 지옥에 대한 두려움이나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물리치고 억누르는 절제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들에 대해 장로들은, 비록 그들이 정욕적인 자극에 의해 완전히 흔들리거나 패배하지는 않을지라도, 공격으로부터 안전하거나 전혀 상처받지 않을 수는 없다고 여깁니다. 왜냐하면 싸우는 자의 입장에 있는 사람은, 비록 자주 승리하고 적을 제압하더라도, 때로는 피할 수 없이 스스로도 불안과 상처를 겪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5. 만일 우리가 사도와 같이 마음속으로 영적인 싸움을 합당하게 치를 수 있다면(딤후 2:5), 우리 자신의 힘에 의지하지 말고(인간의 노력만으로는 이를 이룰 수 없기 때문), 주님의 도우심을 의지하여 온 힘을 다해 이 가장 더러운 영을 이기도록 하자. 왜냐하면 그(영혼)가 그러한 싸움을 성공적으로 이끌어가는 것이 자신의 힘을 넘어선 일이며, 주님의 도움과 중보 없이는 자신의 수고와 노력만으로는 결코 승리를 거둘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이 정욕이 영혼의 승리를 가로막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6. 그리고 실로, 덕행에 있어서의 모든 성공이 주님의 은총의 결과이며, 모든 정욕을 극복하는 것이 그분의 승리라면, 특히 이 일(즉, 순결을 얻고 음탕한 정욕을 극복하는 것)은, 특별한 은총이자 선물이며, 이는 성부들의 견해와 이 정욕으로부터 정화된 경험들, 그리고 이를 얻게 된 이들의 증언을 통해 확인된다. 왜냐하면 육체의 갈망을 느끼지 않는 것은 어떤 면에서 육신 안에 머물면서도 육신을 벗어나, 육신을 입고 있으면서도 본성을 초월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은총이 순결이라는 선물을 통해 그를 세상의 진창에서 끌어내지 않는다면, 사람이 자신의, 말하자면 날개로 그러한 천상의 완전함의 높이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육신에 얽매인 사람들은 어떤 미덕으로도 하늘의 천사들의 삶을 본받는 데 있어, 순결의 은총을 얻는 것만큼 그들에게 가까이 닮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그들은 아직 땅에서 살아가면서도 사도의 말씀대로 “하늘에 거처를 가지고” (빌 3,20)를 갖게 되며, 썩어질 육신을 벗어던진 후 미래의 삶에서 성도들에게 약속된 것을, 이곳에서 썩어질 육신 안에 있으면서도 이미 누리게 된다.

7. 사도가 말하는 것을 들어보라: “경주하는 자는 모든 것을 삼가느니라”(고린도전서 9, 25). 그는 경기장에서 경주하는 자를 우리의 영적 수련에 있어 본보기로 내세운다. 그 선수는 경기에서 승리하기 위해, 모든 금지된 음식과 술, 그리고 취함을 삼가는 것뿐만 아니라, 무위, 게으름, 나태함도 피하며, 끊임없는 훈련과 일에 대한 심도 있는 탐구를 통해 자신의 힘을 기르고 기술을 습득하려 노력합니다; 그는 세속적 일과 부부 관계에 대한 온갖 근심과 슬픔을 뒤로 하고, 오직 어떻게 성공을 거두고 승리의 월계관을 얻을지에 대한 고민만으로 자신을 괴롭히며; 특히 그는 육체적 더러움으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지키기 위해 애쓰며, 심지어 꿈속에서도 부끄러운 환상에 유혹되지 않도록 하여, 그로 인해 오랜 시간과 많은 수고를 들여 얻은 힘을 훼손하지 않도록 한다. 여기서 너는 영적 수행자가 마땅히 해야 할 모든 것을 볼 수 있으며, 또한 네 영적 수행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순결과 절제를 지키는 것이 네게 주어진 과제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세속적인 외적인 경쟁에서 썩어 없어질 월계관을 얻기 위해 순결이 그토록 필수적이라면, 하늘의 월계관을 향한 우리의 영적 내적 열망에서는 그것이 얼마나 더 지극히 필수적겠는가? 우리에게는 육체적 죄나 무의식적인 더러움으로부터의 외적인 순결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생각과 감정의 내적인 순결이 요구된다. 우리는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마음의 가장 깊은 곳까지 깨끗하게 지켜야 합니다. 그들(경기장 경쟁자들)이 단지 육체적으로만 소유하기를 바라는 것을, 우리는 양심의 깊은 곳에서 소유해야 합니다. 그곳에서 우리의 주님이시자 모범이 되시는 분께서는 우리 의지의 모든 움직임을 가장 미세한 부분까지 꿰뚫어 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공개적으로 행하기를 두려워하는 일은 내면에서 부주의한 생각으로조차 싹트지 못하게 해야 하며,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기를 부끄러워하는 일은 마음속의 은밀한 동의로도 더럽혀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는 비록 그것이 사람들에게는 숨겨질지라도, 천사들과 전능하신 하나님 자신께는 감출 수 없기 때문이며, 그분께는 어떤 비밀도 숨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8. 우리가 얻은 순결의 완성도를 가늠하는 징표와 척도는, 우리가 쉬고 있을 때나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 어떤 유혹적인 형상이 떠오르지 않거나, 설령 떠오른다 해도 정욕적인 어떤 움직임도 일으키기에 충분하지 않을 때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움직임은 비록 죄에 대한 완전한 책임으로 간주되지는 않더라도, 영혼이 아직 완전함에 이르지 못했다는 확실한 징표가 되며, 몽상적인 형상들이 이러한 종류의 모독을 일으킬 수 있을 때, 정욕이 아직 완전히 뿌리 뽑히지 않았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9. 낮 동안의 오락 속에서 충분히 철저히 지켜지지 않은 생각의 질은 밤의 안식 시간에 드러난다. 그러므로 앞서 말한 모욕적인 상황이 발생했을 때, 이를 꿈 탓으로 돌릴 것이 아니라, 그 이전 시간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탓으로 여겨야 하며, 여기에서 밤의 시간이 처음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이전에 없었던 것처럼), 단지 영혼의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것을, 잠으로 몸이 회복되는 동안 피부 표면으로 끌어올려, 우리가 하루 종일 선하지 않은 생각으로 자양분을 공급하며 스스로 지핀 내면의 열정적인 열기를 드러낸 것이다. 마찬가지로 육체의 질병도 겉으로 드러나는 시점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앞서 누군가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건강에 해로운 온갖 음식을 섭취하며 병을 일으키는 체액을 몸속에 축적해 둔 시기에 이미 형성되는 것이다.

10. 그러므로 온 인류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그분의 피조물의 본성을 누구보다 잘 아시기 때문에, 이 정욕의 병이 주로 비롯되는 곳을 향해 치유를 제시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는 이미 마음으로 그와 간음한 것이니라” (마태복음 5:28). 눈의 정욕에 대해 언급하시면서, 그분은 눈 자체를 비난하기보다는, 보는 행위를 통해 눈의 기능을 잘못 사용하는 그 내면의 감정을 지적하시는 것이다. 이 마음은 정욕의 화살에 찔려 병들고 상처 입은 채, 탐욕 어린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창조주가 선을 위해 주신 시력의 은총을, 자신의 정욕에 따라 악한 일에 이용하고, 그 안에 숨겨진 정욕의 병을 바라보는 행위를 계기로 드러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시선을 통해 악한 상처가 생기는 열정을 가진 자에게 구원의 계명이 주어지는 것이다. “네 눈을 온전히 지키라”고 말하지 않고, “네 마음을 온전히 지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잠언 4:23).

11. 우리가 마음의 순결을 지키는 데 있어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행동은, 마귀의 교묘한 속임수에 이끌려 어떤 여성에 대한 기억—비록 어머니, 자매, 친척, 심지어 성녀들이라 할지라도—이 우리 마음에 스며들 때, 가능한 한 빨리 그 생각을 우리 마음에서 몰아내는 것이어야 한다; 만약 우리가 그러한 생각에 오랫동안 머뭇거린다면, 우리의 원수이자 유혹자인 마귀가 이 여성들로부터 우리 마음을 은밀히 쏠려, 영혼을 해치는 생각을 심어줄 수 있는 다른 이들에게로 돌리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네 마음을 온전히 지키라”는 계명을 이행하려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원래 명령에 따라 독이 있는 뱀의 “머리”(창세기 3장), 즉 악한 생각의 시작을 세심하게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악마는 이를 통해 우리 영혼에 기어들어오려 시도한다; 만약 우리의 부주의로 인해 그 머리가 우리 마음에 침투하더라도, 그 온 몸이 그곳으로 기어들어가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즉, 불결한 생각과 죄악된 쾌락에 대한 동의가 생겨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원수가 안으로 들어오게 되면, 영혼을 사로잡아 그 독이 든 양심의 가책으로 반드시 죽여 버릴 것이다. “우리 땅에서 생겨나는 죄인들”, 즉 육신의 정욕 또한 우리는 그들이 태어나는 “새벽에” (시 100:8) “때려 죽여야” 하며, 바빌론의 아들들을 그들이 아직 갓난아기일 때 “돌에 부딪혀 부수어야” 한다 (– 136, 9). 왜냐하면 그들이 아직 연약하고 미약할 때 쳐부수지 않는다면, 자라나서 우리의 방종에 힘입어 더 큰 힘으로 우리에게 반기를 들 것이며, 우리를 파멸시키거나, 설령 패배하더라도 분명 큰 한숨과 수고 없이는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강한 자”, 즉 우리의 영이 “무장하고 자기 집을 지키면”, 즉 하나님의 경외심으로 우리 마음의 평안을 지키면, 그때 “그의 소유는 평안 가운데 있다”(눅 11, 21), 즉 오랜 세월 동안 쌓아온 그의 수고의 열매와 덕행이 평안히 보존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이길 때”, 즉 마귀가 그에게 심어준 생각들에 동의함으로써, 그때 “그가 의지하던 모든 무기를 빼앗아”, 즉 성경을 기억하는 것, 혹은 하나님의 경외심, – “그의 재물을 흩어 버릴 것” (눅 11,22), 즉 덕행에 대한 숙련을 그와 정반대되는 온갖 악덕으로 흩어 버릴 것이다.

12. “이것이 곧,” 성 바오로가 말하듯이, “하나님의 뜻이니, 곧 너희의 거룩함이라” (1테살로니카 4,3). 그리고 그가 정확히 무엇을 거룩함이라 부르는지—진리인지, 사랑인지, 겸손인지, 인내인지—에 대해 우리 안에 의문이나 모호한 오해가 남지 않도록—이 모든 미덕을 통해 거룩함이 얻어지기 때문이요—그는 이어서 자신이 실제로 거룩함이라 부르고자 했던 바를 직접적으로 명시한다: “하나님의 뜻은 바로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행을 멀리하고, 너희 각자가 자기 그릇을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지키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처럼 정욕의 욕망에 따라 행하지 말라” (살전 4:3–5). 보라, 그가 정절을 얼마나 높이 칭송하며, 그것을 우리 그릇, 즉 우리 몸의 ‘영예’이자 ‘거룩함’이라 부르는지. 따라서 반대로, 음탕한 정욕에 머무르는 자는 불명예와 부정함의 상태에 있으며 거룩함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사는 것이다. – 조금 아래에서 성 바오로는 다시금 정절을 ‘ ’ 즉 거룩함이라 칭하며 다음과 같이 덧붙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름하신 것은 불결함을 위함이 아니라 거룩함을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이를(이것을) 배척하는 자는 사람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그분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배척하는 것이다” (같은 곳 – 7, 8절). 그는 자신의 계명에 흔들리지 않는 힘과 중요성을 부여하며, “이를, 즉 내가 말한 바를 거절하는 자는 사람을, 즉 이를 명령하는 나를 경멸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경멸하는 것이며, 그분은 우리 마음을 그분의 성령의 거처로 정하셨다”고 말했습니다. 보라, 그가 이 미덕을 얼마나 간결한 말로 찬양하며 높이 세웠는지! 첫째, 그는 이 미덕 자체에 거룩함을 귀속시키고, 둘째, 이를 통해 우리 육신의 그릇이 온갖 부정함에서 해방된다고 단언하며, 셋째, 수치스러운 부정함을 내쫓음으로써 이 그릇이 성소처럼 존귀하게 여겨질 것이며, 마지막으로, 이것이 바로 이 미덕의 가장 큰 장점인데, 이를 통해 우리 마음의 거처에 성령께서 거하시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13. 이와 유사한 또 다른 증거를 같은 사도로부터 인용하겠다. – 히브리인들에게 쓴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사람과 화평을 누리고 거룩함을 지키라.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하리라”(히 12,14). 여기서도 그는 일반적으로 영혼과 육체의 흠 없음과 순결이라고 불리는 거룩함 없이는 하나님을 보는 것이 전혀 불가능하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14. 정절의 존엄성이 높고 천상적일수록, 그것은 원수들의 비방을 더욱 격렬하게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체의 절제뿐만 아니라, 끊임없는 기도의 탄식과 함께 마음의 회개도 더욱 굳건히 지켜야 합니다. 그래야 바빌론 왕이 육신의 유혹이라는 발판으로 끊임없이 불을 지르려 하는 우리 육체의 용광로를, 성령의 이슬이 우리 마음에 내려와 끊임없이 그 불을 끄고 식혀 주도록 해야 합니다.

15. 우리가 하나님께서는 밤낮으로 지켜보시는 분이시며, 우리의 은밀한 일들뿐만 아니라 모든 생각까지 아시는 분임을 항상 기억하고, 우리 마음속에서 맴도는 모든 것에 대해서도 우리의 모든 행실과 행동만큼이나 그분께 답변해야 한다는 것을 믿는다면, 이러한 마음가짐을 끊임없이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16. 잠자는 동안에도 불결한 꿈이 우리를 더럽히지 않도록 하려면, 이를 위해 항상 균형 잡히고 절제된 금식을 지켜야 한다. 왜냐하면 음식 절제에서 합리적인 절제의 정도를 어기는 자는, 나중에 반드시 이 일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완화의 정도마저 넘어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음식으로 몸을 보충하는 정도가 변하면, 우리 순결의 질도 필연적으로 변하게 마련이다. – 그러나 이때에는 마음의 끊임없는 겸손과 인내를 가져야 하며, 낮 동안 분노와 그 밖의 정욕으로부터 자신을 주의 깊게 지켜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분노의 불이 일기만 하면, 그 후로 정욕의 열기도 쉽게 우리에게 스며들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밤에 깨어 자신을 경계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낮 동안의 순결과 자기 수호가 밤의 순결을 준비해 주듯이, 밤의 깨어 있음은 마음과 자기 경계에 낮 동안의 모든 불결한 것에 맞설 힘과 굳건함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17. 우리 육신이 마치 타고난 본능처럼 그 열기를 느끼는 정욕의 불길을 완전히 꺼버릴 수 있을까? – 먼저, 복된 바울이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그는 “땅에 속한 너희 지체를 죽이라”고 말한다(골 3, 5). 그렇다면 그가 죽이라고 명령하는 지체들은 무엇일까요? – 물론 손과 발이나 다른 어떤 신체 부위를 잘라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몸을 근절하라는 것이니, 그는 다른 곳에서 “육신의 죄의 몸을 없애라”(로마서 6, 6)고 말하고 있습니다. – 그리고 그 죄의 몸은 다른 모든 몸과 마찬가지로 그 나름의 지체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는 바로 그 지체들을 죽이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그는 바로 이어서 열거합니다. – “땅에 있는 너희 지체들을 죽이라”고 말한 뒤, “음행, 부정, 정욕, 악한 욕망, 그리고 탐욕, 곧 우상 숭배”라고 덧붙입니다. 첫 번째 지체는 “음행”으로, 육체적인 불법적인 성관계를 의미하는 죄입니다. 두 번째 지체는 “부정”으로, 여성과의 어떠한 접촉 없이도 때로는 잠자는 동안이나 깨어 있는 동안에 발생하기도 합니다. 세 번째 항목은 “정욕”으로, 이는 영혼의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어 육체의 욕망 작용 없이도 불타오를 수 있는 것이며; 네 번째 항목은 “사악한 정욕”으로, 이는 앞서 언급된 불결한 정욕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모든 해로운 갈망에 해당할 수 있으며, 타락한 의지의 병일 뿐입니다; 사도는 죄악된 육체의 마지막 요소로 “탐욕”을 꼽으며, 타인의 소유를 탐내는 것을 삼가야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소유조차도 너그럽게 경멸해야 함을 가르치고 있는데, 이는 사도행전에 언급된 최초의 신자 공동체가 실제로 실천했던 바와 같다(행 4:32, 35). 앞서 말한 모든 것을 종합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립니다.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의 재산을 버렸고, 단순히 돈을 소유하는 것뿐만 아니라 마음속의 욕망마저 끊어 버렸다면, 마찬가지로 음탕한 욕망도 없앨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사도는 불가능한 일과 가능한 일을 함께 묶어 말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두 가지 모두를 가능하다고 인정하면서, 그 두 가지를 똑같이 죽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 그리고 복된 바울은 우리 지체에서 음란한 정욕을 근절할 수 있다는 것에 그토록 확신하여, 그 정욕을 죽이라고 명령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 이름조차 우리 가운데서 입에 올리지 말라고 명하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음행과 온갖 더러움과 탐욕은 성도들에게 마땅한 바와 같이 너희 가운데서조차 언급되어서는 안 되며, 비방과 헛된 말, 또는 신성모독과 같은 것들도 그러하다”(엡 5:3, 4). 그러므로 음행의 정욕이 우리 지체에서 근절될 수 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도가 탐욕, 헛된 말, 우스꽝스러운 말과 마찬가지로 그것들을 잘라내라고 명령했으니, 이러한 것들은 잘라내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18. 그러나 우리는 비록 금욕의 모든 엄격함, 즉 굶주림, 목마름, 밤샘 기도, 끊임없는 수고를 지키고, 쉼 없이 열심을 다해 영혼을 구원하는 책들을 읽는다 할지라도;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 우리를 도와주지 않는다면, 이러한 수행을 통해 우리 스스로 끊임없는 정결함을 얻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모든 사람은, 인내하며 견뎌야 하는 그 수행들로 인한 고통을 통해, 하나님의 자비를 자신에게로 이끌어, 육체의 싸움과 지배적인 정욕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는 신성한 은총을 얻기 위함이지, 마치 자신이 그 수련들을 통해 스스로 갈망하고 추구하는 육체적 정결의 꺾이지 않는 순결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서 하는 것이 아님을 누구나 알아야 한다.

19. 현세적인 것들에 대한 욕망은, 그 대신에 다른 구원에 이르는 욕망들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한, 억누르거나 버릴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속의 육체적 욕망을 근절하고자 한다면, 그 자리에 속히 영적인 소망을 심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 영이 항상 그 대상들을 향하여 나아가며, 덧없는 세상의 기쁨들이 주는 유혹에 주의를 기울일 욕구도, 시간도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영이 매일의 영적 수련을 통해 모든 것에서 초연한 그러한 마음가짐에 정착하게 되면, 그때 비로소 우리 모두가 종종 되뇌이지만 그 힘을 아는 이는 소수의 경험자들뿐인 다음 구절의 힘을 체험적으로 깨닫게 될 것입니다. “내가 주께서 내 앞에 서 계신 것을 보았나니, 주께서 내 오른편에 계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시 15:8). 우리가 말하는 그 육체와 영의 순결에 도달하여, 매 순간 주님께서 다시는 예전의 길로 치우치지 않도록 자신을 지켜 주시고, 자신의 오른손, 즉 거룩한 행실들이 주님에 의해 끊임없이 보호받고 있음을 깨닫는 자만이 비로소 이 구절의 힘과 의미를 진정으로 이해하게 된다. 주님께서는 항상 당신의 성도들 곁에 계시는데, 왼쪽이 아니라 — 거룩한 사람에게는 왼쪽, 즉 나쁜 것이 없기 때문이다 — 오른쪽 곁에 계신다. 그러나 죄인들과 부정한 자들에게는 주님께서 보이지 않으시니, 그들에게는 주님께서 보통 함께 계시는 오른쪽이 없기 때문이다.

20. 흔들리지 않는 순결에 이르는 정절의 단계는 다양하다. 나는 이러한 정절의 완성을 향한 사다리를 여섯 단계로 나누겠으나, 사실 이 단계들은 우리 몸이 매일 눈에 띄지 않게 성장하여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완전한 모습으로 자라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알아차리지 못한 채 지나가게 된다. – “첫 번째” 정결의 단계는, 수도사가 깨어 있는 상태에서 육체적 정욕의 동요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 “두 번째”는, 마음이 음탕한 생각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다; “세 번째”는, 여성을 보아도 조금도 욕망으로 동요하지 않는 것이다; “네 번째” 단계는, 깨어 있는 상태에서 육체적인 움직임조차 허용하지 않는 경우이며, “다섯 번째” 단계는, 사색이나 독서를 통해 인간의 탄생이 떠오를 때 육체적 행위에 대한 아주 미묘한 동의조차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는 경우입니다; "여섯 번째"는, 설령 꿈속에서도 여성에 대한 유혹적인 환상에 동요되지 않는 경우이다.

21. 정욕적인 생각과 행동을 절제하는 초기 단계에서부터 비롯된 완전한 순결은, 육체적 흥분의 완벽한 진정과 그로부터의 평온으로 구별된다. 완전히 성숙한 순결은 언제나 흔들리지 않고 확고한 몸과 영혼의 순결을 지키며, 이는 다름 아닌 거룩함 그 자체이다. 이는 “육체”가 “영을 탐하지” 않고, 영의 소망과 덕과 조화를 이루기 시작할 때, 그리고 둘이 굳건한 화합으로 서로 결합하여 시편 기자가 말한 대로 형제처럼 함께 살게 될 때(시 132:1) 이루어진다. – 그때 비로소 하나님도 그들과 함께 계시니, “평안 중에 그분의 거처가 있다”(시 75:3)고 기록되어 있듯이, 즉 정욕과의 싸움과 투쟁의 소란 속이 아니라, 절제의 평화와 마음의 끊임없는 안식 속에 계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누군가 육신의 정욕을 잠재움으로써 이 평화의 자리를 얻게 되면, 동시에 하나님의 거처가 되기도 한다.

 

3. 탐욕의 영과의 투쟁

1. 우리에게 주어진 세 번째 투쟁은 탐욕의 영과의 싸움으로, – 우리 본성에 낯설고 어울리지 않는 정욕이며, 수도자에게 있어 이는 다른 어떤 것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의지가 약하고 에너지가 부족한 영혼의 소심함, 그리고 제대로 된 마음가짐이 결여된 데서 비롯되며, 대부분은 하나님( )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그 기초에 놓이지 않은 채, 세상에 대한 포기라는 잘못된 시작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른 정욕의 움직임들은 우리 자신 안에서 비롯되는 듯하며, 마치 인간의 본성에 심겨져 있고 어떤 식으로든 육체에 스며든 것처럼 보인다. 그것들은 우리의 탄생과 동시에 존재하며, 그 움직임으로 인해 우리 안에 선과 악을 구별하는 능력이 나타나기 전에 선행한다. 그리고 오직 오랜 수고를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 반면 이 병(돈에 대한 탐욕)은 그보다 나중에 찾아와 외부에서 영혼에 강요되므로, 예방하고 몰아내는 것이 더 쉬울 수 있다. 그러나 부주의로 인해 이를 소홀히 여기고 한 번이라도 마음에 들여보내면, 그 어떤 것보다 치명적이며 쫓아내기 가장 어렵게 된다. 이는 모든 악의 뿌리가 되어(딤전 6:10), 온갖 정욕을 불러일으키는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2. 이 정욕이 비겁하고 냉담한 수도사의 영혼을 지배하게 되면, 우선 그에게 사소한 재물 축적을 부추기며, 마치 정당한 듯하고 합리적인 이유인 양 생생한 묘사를 통해, 세속을 버릴 때 돈을 조금 아껴 두거나 그 후에 돈을 벌어야만 하는 필요성을 설득한다. 그녀는 수도원에서 주는 것이 부족하며, 건강하고 튼튼한 몸에도 간신히 견딜 만한 수준이라고 불평한다. 만약 육체적인 병이 닥쳤을 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숨겨 둔 것이 없어 병약한 몸을 돌볼 수단이 없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수도원의 생계비는 매우 빈약한데, 병자에 대한 돌봄은 너무나 소홀하다. 신체 건강을 회복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자신의 소유물이 아무것도 없다면, 비참한 방식으로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 게다가 수도원에서 제공하는 옷조차도, 다른 옷을 구할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해 두지 않는다면 불충분하다. 결국 한 수도원에서만 평생 지낼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런 경우, 여행 경비와 바다 건너는 비용을 마련해 두지 않으면 원할 때 그곳을 떠날 수 없게 되며,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며 아무런 성취도 없이 비참하고 고된 삶을 계속 이어가게 될 것이다. – 수도사가 이런 생각들로 마음을 사로잡히면, 그때부터 어떻게든 단 한 디나리라도 벌 수 있을지 궁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해 어떤 개인 일을 찾아내어, 자신의 아바가 모르는 사이에 온갖 정성을 다해 그 일을 수행한다. 나중에 그것을 몰래 팔아 원하는 동전을 얻으면, 그 동전을 걱정하며 어디에 둘지, 누구에게 맡길지 분주하게 애를 쓰지만, 그 사이 이미 그 동전을 어떻게 두 배로 늘릴지에 대한 훨씬 더 날카로운 걱정이 그를 갉아먹기 시작했고, 그는 그 돈으로 무엇을 살지, 이를 위해 어떤 수단을 동원할지 중요한 계획을 치열하게 세운다. 마침내 그가 원하는 대로 이 일까지 성공하고, 그에게 금에 대한 가장 탐욕스러운 갈망이 솟아오르면, 이익이 더 많이 발생할수록 그 갈망은 점점 더 거세게 타오른다. 왜냐하면 돈이 늘어날수록 돈에 대한 광적인 욕망도 커지기 때문이다. 그 열망을 더욱 부추기는 다른 근심 어린 생각들도 이어진다. 장수, 노년, 그리고 젊을 때 돈을 충분히 마련해 두지 않으면 늙어서 감당할 수 없을 다양한 질병과 지속적인 쇠약이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다. – 그리하여 이 뱀(돈에 대한 탐욕)의 덫에 얽매인 불쌍한 영혼은, 부당하게 시작된 재산을 불려보려는 부당한 집착 속에서 점점 더 깊이 빠져들며, 스스로 내면에서 불씨와 같은 병을 키우게 되는데, 그 병은 불꽃처럼 그녀를 점점 더 잔혹하게 집어삼킨다. 이득을 탐하는 생각에 온전히 사로잡힌 그녀는, 수도원의 엄격한 속박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기 위해 돈을 어디서 구할 수 있을지에 대한 것 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마음을 두지 않는다. 돈을 얻을 수 있다는 어떤 희망이라도 번뜩이면, 그녀는 더 이상 그 어떤 것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 그 희망 때문에 그녀는 거짓말도, 맹세 위반도, 도둑질도, 충실함의 배반도 마다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금과 이득에 대한 갈망은 다른 이들에게 배가 신인 것처럼, 그녀에게는 모든 것에서 신이 된다. 그러므로 복된 사도께서는 이 병의 치명적인 독을 예견하시고, 이를 모든 악의 뿌리일 뿐만 아니라 우상 숭배라고 부르시며, “탐욕”(– 죽이라), “이는 곧 우상 숭배니라”(골 3,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 이 병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는데, 모든 교부들이 똑같이 혐오하며 비난하는 것들이다. 하나는 앞서 우리가 그 치명성을 설명한 것으로, 일부 불행한 이들을 현혹하여 세속에 살 때조차 가지지 못했던 것을 모으도록 설득하는 것이다; 둘째는, 세속을 버리기로 결심했을 때 처음에 내려놓은 것들을 다시 탐내고 되찾고자 하게 만드는 것; 셋째는, 수도 생활의 시작 단계에서 이미 잘못된 태도로 싹트며, 모든 것에서 불완전한 단절을 바탕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으로, 이 영적 냉담함에 감염된 이들이 세상의 모든 재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없게 막는 것이다. 이는 그들에게 앞으로 닥칠 궁핍을 두려워하게 하고 불신으로 인해 의지가 약해지게 함으로써; 그들은 세속을 등지고 버려야 할 돈과 다른 재산을 자신에게 남겨두었기 때문에, 이 교리는 그들에게 복음적 완전함에 도달할 기회를 결코 주지 않는다. – 그리고 성경에서 우리는 이 세 가지 타락의 유형에 대한 비난의 사례들을 발견하며, 그들에게는 결코 가볍지 않은 형벌이 따르고 있다. 그리하여 기에시는 이전에 가지지 못했던 것을 얻고자 했으나, 마치 상속을 통해 스승으로부터 받아야 할 예언의 은총을 얻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엘리사의 저주로 인해 나병에 걸리고 말았다(열왕기하 5:21, 27). 유다는 그리스도를 따르며 이전에 거절했던 돈을 되찾고자 했으나, 주님을 배반하여 사도의 직분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죽음을 맞이하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마태복음 27:5); 아나니아와 삽피라는 소유한 것 중 일부를 숨겨 두었다가 사도들의 입을 통해 사형을 선고받았다(사도행전 5, 1–11).

4. 세상을 등졌으나 나중에 불신에 굴복하여, 모든 세속적 재산을 버리고 헐벗은 채로 남는 것을 두려워하는 자들에 대해, 신명기에는 다음과 같이 신비롭게 명시되어 있다. “두려움이 많고 마음이 연약한 자”(전쟁에 나가지 말고) “가서 자기 집으로 돌아가라; 그의 형제의 마음을 자기 마음처럼 두려워하게 하지 말라” (신명기 20, 8). 이 예언보다 더 명백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성경은 그들이 차라리 그런 직분을 처음부터 맡지 않고 그 이름을 스스로에게 붙이지 않는 편이, 자신의 말과 나쁜 본보기로 다른 이들을 불확실한 두려움에 빠뜨려 복음의 완전함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보다 낫기를 분명히 원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전투에서 물러나 자기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령받았으니, 마음이 둘로 나뉜 자는 누구도 주님의 전쟁에서 싸울 수 없기 때문이다. “마음이 둘로 나뉜 사람은 모든 행실에서 정립되지 못하기” 때문이다(야고보서 1,8). 또한 그 복음서의 비유, 즉 만 명을 이끌고 나와 이만 명을 이끌고 자신을 향해 오는 적을 맞서던 왕이, 아직 적이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승리를 기대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화해를 청하도록 사자를 보냈다는(분명히 전투를 시작하고 싶지 않았던) 그 비유의 의미를 깊이 헤아려 보면, 우리는 앞서 언급한 사람들에게도 세상과의 단절을 아예 시작하지 않는 편이, 일단 시작했다가 나중에 그것을 성실하게, 그리고 철저히 지키지 못해 스스로를 큰 위험에 빠뜨리는 것보다 낫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왜냐하면, 지혜로운 분이 말씀하시기를, “약속하지 않는 것이, 약속하고 지키지 않는 것보다 낫다”(전도서 5:4)고 하셨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이 사람은 만 명을 거느리고 오고, 저 사람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온다고 잘 말하고 있다. 우리를 공격하는 정욕의 수는, 우리를 위해 싸우는 선한 마음의 수보다 더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도… 하나님과 마몬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마태복음 6,24), 그리고 “누구든지 낫을 쥔 채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누가복음 9,62).

5. 이러한 사람들은 대개 자신들이 여전히 탐욕을 품고 있는 것을 성서의 권위로 정당화하려고 애쓴다. 그것을 잘못된 의미로 해석하면서, 그들은 기꺼이 사도의 생각은 물론 주님의 생각까지 왜곡하고 자기 뜻대로 바꾸려 하며, 자신의 삶이나 이해를 성경의 의미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자기 만족을 위한 욕망에 따라 억지로 해석합니다. 이번 경우에도 성경이 자신들의 견해와 일치함을 보여주고자,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사도행전 20:35). 이 말씀을 가장 왜곡된 방식으로 이해함으로써, 그들은 다음과 같은 말씀의 힘을 완전히 무력화시킨다고 여깁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하면, 가서 네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네게 하늘에 보화가 있으리니, 나를 따르라”(마태복음 19:21). 그들은 이러한 그럴듯한 논리에 따라 자신의 부를 버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며, 이전의 재산으로 이미 안정을 누리고 있는 상황에서 그 잉여를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 줄 때, 재산을 버린 이들보다 자신들이 훨씬 더 복되다고 자처한다; 반면, 그리스도를 위해 사도와 함께 영광스러운 가난을 받아들이는 것을 부끄러워하며, 자신의 수고로 얻은 것과 수도원의 빈약한 생활비에 만족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두 가지 중 하나만 남는다: 이전의 부에 그토록 집착한다면, 스스로를 속아 넘어간 자들이며 결코 세상을 버리지 않은 자들임을 인정하거나; 아니면, 실제 행동과 수고로 수도자의 지위를 시험해 보고자 한다면, 모든 것을 버리고 흩어 버려야 한다. 그래야만, 스스로 버린 것 중에서 아무것도 간직하지 않은 채, 사도와 함께 굶주림과 목마름, 추위와 벌거벗음을 자랑할 수 있을 것이다(고린도후서 11, 27).

6. 케사리아의 주교 성 바실리오가,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것과 같은 냉담함을 보인 한 상원 의원에게 한 말이 전해지는데, 냉담함에 사로잡혀 있던 한 상원 의원에게 한 말입니다. 그 상원 의원은 세상을 버렸다고 말하면서도 자신의 재산 중 일부를 간직하고 있었으며, 자신의 손으로 일하여 생계를 꾸리고, 모든 면에서의 궁핍과 고된 노동, 수도원의 복종을 통해 참된 겸손을 배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 상원 의원아,” 그가 그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상원 의원으로서의 지위도 잃었고, 수도사가 되지도 못했구나.”

7. 그러니 우리가 합법적으로 영적 수련을 하고자 한다면, 우리 마음속에서 이 파멸적인 적도 쫓아내야 한다. – 그를 이기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은 만큼, 그에게 패배하는 것은 불명예스럽고 추악한 일이다. 강자에게 패배하는 것은 땅에 쓰러지기 때문에 고통스럽고, 승리를 놓치기 때문에 안타깝지만, 그런 경우 패배자에게는 적의 강함을 인식함으로써 어느 정도 위안이 된다. 반면, 상대가 하찮고 싸움의 종류도 어렵지 않은 상황에서 이를 겪게 된다면, 땅에 쓰러지는 고통보다 훨씬 더 큰 아픔은 굴욕적인 수치심이며, 훨씬 더 무거운 손실은 치욕일 것이다.

8. 이 적에 대한 최종적인 승리와 완전한 승리는, 수도사의 양심이 아주 작은 동전 하나라도 소유함으로써 더럽혀지지 않을 때에만 기대할 수 있다. 반면, 비록 작은 금전적 선물 하나에 휩쓸려 마음속에 탐욕의 뿌리를 한 번이라도 품은 자라면, 곧바로 큰 욕망의 불길에 휩싸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전사는, 이 가장 추악한 영이 그의 마음에 탐욕의 싹을 뿌리기 전까지는 승자로 남을 것이며, 어떠한 위험에도 노출되지 않고 이 정욕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할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종류의 정욕에서 주로 뱀의 머리를 경계해야 하듯이, 특히 이 정욕에 대해서는 그 머리가 어떤 식으로든 내면으로 스며들지 않도록 가장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 머리가 내면으로 들어오게 되면, 그 자체의 본성으로 양분을 얻어 힘을 얻음으로써 스스로 지극히 거센 불길을 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돈을 소유하는 것을 경계할 뿐만 아니라, 돈을 원하는 욕망 자체를 영혼에서 완전히 뿌리 뽑아야 한다. 또한 돈을 쫓는 행위를 피하는 것보다 그 욕망을 뿌리째 잘라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돈을 갖고자 하는 욕망이 남아 있다면, 돈을 갖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도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9. 돈이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탐욕이라는 병에서 자유롭지 못할 수도 있다. 또한, 가난해지는 행위 자체에 만족했을 뿐 가난이라는 미덕 그 자체에는 만족하지 못하고, 마음의 아픔 없이 (그렇게 해야만 하는) 무거운 필요성에 순응한 사람에게는, 모든 것을 버리는 행위가 아무런 유익도 가져다주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육체적으로는 더럽혀지지 않은 자들을 복음의 말씀이 마음으로는 부정한 자라고 선포하듯이(마태복음 5:28), 돈의 무거운 짐을 조금도 지고 있지 않은 자들도 마음과 생각에 있어 탐욕스러운 자들과 함께 정죄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재물을 모을 기회만 부족했을 뿐, 하나님의 눈에는 필요성보다 항상 더 큰 무게를 지니는 의지는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왜 우리가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우리 수고의 열매가 헛되이 사라지지 않도록 신경 써야 하는가? 모든 것을 버리고 빈곤에 시달리는 결과를 감수하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그 열매를 결실 없는 죄악된 의지의 욕망 때문에 잃어버리는 것은 더욱 안타까운 일이기 때문이다.

10. 이 정욕이, 만약 철저히 근절되지 않는다면, 그것을 받아들인 자에게 어떤 파멸적인 열매를 맺고, 어떤 다른 정욕들의 가지들을 뻗어내어 해를 끼치는지 알고 싶으십니까? 사도들의 무리에 속했던 유다를 보십시오! 이 뱀의 치명적인 머리를 꺾고자 하지 않았던 그를, 이 정욕은 어떻게 자신의 독으로 파멸시켰으며, 자신의 탐욕의 그물로 얽어매어, 서른 은전을 받고 세상의 구세주이자 인류의 구원을 이루신 분을 팔도록 부추겼을 때, 어떤 가파른 범죄의 심연으로 내던져 버렸는가? 그가 은에 대한 탐욕이라는 병에 감염되지 않았다면 결코 그런 신성모독적인 배신 행위에까지 이르지 않았을 것이며, 이전에 자신에게 맡겨진 금고를 훔치는 데 익숙해지지 않았다면 주님을 죽인 신성모독의 주범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11. 이것이 바로 이 정욕의 폭압을 보여주는 가장 극명한 예이다. 앞서 말했듯이, 이 정욕은 일단 그의 영혼을 사로잡으면 더 이상 어떤 정직의 원칙도 지키지 못하게 하며, 어떤 이득에 대한 탐닉으로도 만족하게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정욕의 광란은 부자가 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모든 것을 잃고 텅 빈 상태가 되는 것으로 끝나는 법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유다 역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 지정된 돈주머니를 관리하게 되었을 때, 그 풍부한 돈으로 배를 채움으로써 적어도 자신의 욕망을 누그러뜨리려 했으나, 오히려 그 욕망이 지나치게 불타올라 돈주머니를 몰래 훔칠 뿐만 아니라 주님 자신까지 팔아넘기려 했다. 왜냐하면 이 정욕의 광기는 아무리 막대한 부로도 채워질 수 없기 때문이다.

12. 그러므로 성 베드로 사도는, 욕망에 사로잡힌 자에게는 탐욕을 마땅한 한계 내에서 억제하는 것이 이미 불가능하며, 이 욕망의 끝은 금액의 크고 작음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에서 자신을 완전히 비우는 데에 있음을 알고, 아나니아와 사프이라가 자신의 재산 중 일부를 자신들을 위해 남겨둔 죄로 인해 그들을 죽음으로 처벌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탐욕으로 인한 거짓말 때문에 멸망하였으니, 마치 유다가 주님을 배반한 죄로 스스로를 파멸시킨 것과 같습니다. 그들의 죄와 처벌 사이에 얼마나 큰 유사성이 있는지요! 저기서는 돈에 대한 탐욕이 배반으로 이어졌고, 여기서는 거짓말로 이어졌다. 저기서는 진리가 배반당하고, 여기서는 거짓의 죄가 저질러진다. 비록 저기와 여기서 죄의 행위가 겉보기에는 비슷하지 않지만, 둘 다 동일한 목적에서 일치한다. 저 사람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미 버렸던 것을 다시 차지하고 싶어 했고, 이 사람들은 가난해지지 않기 위해, 사도들에게 온전히 바치거나 형제들에게 모두 나눠주어야 했던 자신의 재산 중 일부를 자신에게 남겨두려고 시도했다. 바로 그 때문에 두 경우 모두 똑같은 죽음의 형벌이 뒤따랐는데, 이는 두 죄 모두 탐욕 이라는 같은 뿌리에서 자라났기 때문이다. –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남의 재물을 탐내지 않고 오직 자신의 재산을 아껴 두려고 했을 뿐, 재물을 모으려는 욕심은 없었고 단지 지키고자 하는 소망만 있었던 사람들에게도 그토록 엄중한 판결이 내려졌다면; 그렇다면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돈을 모으기를 갈망하며, 사람들 앞에서는 가난한 척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탐욕이라는 열정에 사로잡혀 부유한 자들에 대해서는 무엇을 말해야 하겠는가?

13. 탐욕을 품은 자들은 영과 혼이 나병에 걸린 자들로 여겨져야 한다. 마치 이세야처럼, 그는 이 세상의 썩어 없어질 돈을 탐하다가 전염성 있는 더러운 나병에 걸렸던 것과 같다. 그로 인해 그는 우리에게 분명한 교훈을 남겼으니, 탐욕이라는 죄악된 정욕으로 더럽혀진 영혼은 정욕이라는 영적 전염병에 걸리게 되며, 주님의 눈앞에서 영원한 저주를 받은 부정한 존재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14. 그러므로, 만일 네가 완전함을 추구하며 모든 것을 버리고, “가서 네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 보화를 쌓아 두게 될 것이니, 나를 따르라” (마태복음 19, 21)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랐다면, 이미 쟁기에 손을 얹은 채 왜 뒤를 돌아보며, 바로 그 주님께서 천국에 합당하지 않다고 선포하신 말씀(누가복음 9, 62)을 듣게 되는가? 복음의 완전함이라는 높은 지점인 지붕 위에 서 있는데, 왜 다시 네 집으로 내려가서, 그 전에 네가 그렇게 기꺼이 경멸했던 것들 중 어떤 것을 가져가려 하는가(눅 17, 31)? 미덕을 실천하는 들판에 서 있는 자로서, 왜 다시 세상의 재물을 탐하는 짐을 지려고 애쓰는가? 세상과 단절할 때 그 짐을 벗어던졌던 바로 그 짐을 말이다. – 만일 그때 가난으로 인해 미리 경고받아 남길 것이 없었다면, 하물며 지금 와서 이전에 소유하지 않았던 것을 얻으려 해서는 안 된다. 이는 하느님께서 너에게 베푸신 특별한 은총으로, 너는 (가난을 통해 세속을 버리도록) 그렇게 준비된 것이다. – 어떤 재물 추구라는 얽매임에도 얽매이지 않음으로써, 네가 그분께 더 빨리 달려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나저나 가난한 사람 중 누구도 (남길 것이 없다는 이유로) 이에 대해 자존심을 상하지 말아야 한다. 남길 것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재물을 단호히 버린 사람은, 바로 그 재물을 얻고자 하는 욕망 자체를 뿌리째 잘라낸 사람이다.

15. 이 무소유라는 미덕을 온전하고 흠 없이 보존하는 것은, 사도의 말씀대로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하리라”(딤전 6:8)는 마음으로 수도원에서 생활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16. 그러므로 아나니아와 삽피라의 심판을 마음에 새기며, 세상을 버리기로 서약하고 완전히 포기하기로 한 것 중에서 어떤 것도 붙잡아 두지 않도록 조심합시다. 또한 탐욕의 죄로 인해 치유할 수 없는 나병으로 벌을 받은 기에시의 본보기를 두려워하며, 이전에 소유하지 않았던 것을 얻으려 하지 않도록 조심합시다. 유다의 악행과 그의 최후를 똑같이 두려워하며, 한 번 영원히 포기했던 돈을 다시 모으는 일을 온 힘을 다해 피합시다. – 무엇보다도, 우리 본성의 죽음을 피할 수 없음과 죽음의 시간이 언제일지 알 수 없음을 생각하며, 주님의 날이 밤중에 도둑처럼 닥쳤을 때, 비록 한 푼이라도 탐욕으로 얼룩진 양심을 가지고 있지 않도록 조심합시다. 왜냐하면 그것 하나만으로도 우리가 세상을 등진 모든 결실을 무효화시켜, 복음서에서 주님께서 부자에게 하신 말씀이 우리에게도 적용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네게서 빼앗을 것이니, 네가 준비한 것은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누가복음 12:20) 그리고 내일을 조금도 생각하지 말고, 결코 공동 생활 규율에서 벗어나는 것을 용납하지 말자. 의심할 여지 없이, 우리 안에 먼저 견고한 기초 위에 인내라는 미덕이 확립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를 결코 실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수도원 규율 아래 평화롭게 살아갈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인내의 근원은 다름 아닌 겸손입니다.

 

4. 분노의 영과의 싸움

1. 네 번째 싸움에서 우리는 우리 영혼 깊은 곳에서 치명적인 분노의 독을 뿌리째 뽑아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 마음에 둥지를 틀고, 해로운 어둠으로 우리 이성의 눈을 가리는 한, 그때까지는 우리가 선과 악을 올바르게 분별하는 능력과 고귀한 통찰력을 얻을 수도 없고, 성숙한 판단력을 갖출 수도 없으며, 생명의 참된 참여자가 될 수도 없고, 변함없이 진리를 지킬 수도 없으며, 심지어 참된 영적 빛을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이는 “내 눈이 분노로 인해 흐려졌도다”(시 6:8)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록 모든 이의 평가에 따라 우리가 지극히 지혜로운 자로 선포된다 할지라도, “분노는 미련한 자의 가슴속에 깃들어 있나니”(전 7:10)라고 하였으니, 우리는 지혜에 동참할 수 없으며, 비록 사람들의 판단에 따라 현명하다고 여겨진다 해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으니, “분노는 현명한 자마저 멸망시키나니”(잠언 15:1)라고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음의 지시에 따라 진리의 저울을 항상 올바르게 유지할 수 없으니, “분노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느니라”(야고보서 1:20)라고 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세상의 사람들 사이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중요한 존엄성을 결코 가질 수 없으니, 설령 출생의 특권으로 인해 귀족적이고 존경받는 자로 여겨진다 할지라도, “성미가 급한 사람은 품위 있는 사람이 아니기” (잠언 11:25)라고 했듯이, 아무리 방대한 지식을 쌓은 것처럼 보일지라도 성숙한 판단력을 가질 수 없으니, “성급한 자는 상담 없이 모든 일을 행한다”(잠언 14:17)고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근심과 혼란에서 평온을 누릴 수 없으며, 죄에서 자유로울 수도 없습니다. 비록 타인으로부터 전혀 괴로움을 당하지 않는다 해도, “성미 급한 자”는 (스스로) “다툼을 일으키고, 격한 사람은” (부끄러움 없이) “죄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잠언 29:22).

2. 어떤 이들은 이 해로운 영혼의 병을 변명하려고 애쓰며, 성경을 가장 부적절한 방식으로 해석하여 그(부적절함)을 경시하려 드는데, 이렇게 말합니다: “죄를 짓는 형제들에게 분노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도 자신을 알기를 원치 않거나, 알면서도 마땅히 공경하지 않는 자들에게 분노와 격노를 일으키시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주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격노하셨다’ (시 105:40), 혹은 다른 구절에서 선지자가 기도하며 말하듯이: “주여, 주의 맹렬한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며, 주의 진노로 나를 벌하지 마소서” (시 6:2). – 그리고 그들은, 이를 통해 사람들에게 이 정욕에 따라 스스로를 파멸로 이끄는 행동을 할 자유를 주는 동시에, 모든 순결의 근원이신 무한하신 하나님께 불경스럽게도 불순한 육신의 정욕을 돌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3. 만약 이 구절들과 이와 유사한 성경 구절들을 문자 그대로, 즉 거친 감각적 의미로 이해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주무시고 깨어나시며, 앉아 계시고 걸어 다니시며, 누군가에게로 향하시기도 하고 그에게서 등을 돌리시기도 하며, 가까이 오시기도 하고 멀어지시기도 하고, 심지어 머리, 눈, 손, 발 등과 같은 신체 부위를 가지고 계신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 성경의 증언에 따르면 보이지 않으시고, 형용할 수 없으시며, 어디에나 계시는 그분에 대해, 이 모든 것을 극도의 신성모독 없이 문자 그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그분께 분노와 격노를 돌리는 것도 신성모독 없이 할 수 없다. ‘육체의 지체’와 ‘움직임’이라는 명칭은 신성한 속성과 우리를 향한 섭리적인 행위를 가리키며, 우리는 이러한 비유적인 명칭을 통해 이를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눈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함을, 손과 발은 그분의 창조와 섭리를, 근육은 힘과 전능함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분노나 격노에 대해서도, 우리가 이를 읽을 때, 그것을 인간적인 방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며, 어떠한 동요도 없으신 하나님께 합당한 방식으로, – 바로 이를 통해 그분이 이 세상에서 행해지는 모든 부당한 일에 대해 심판자이시며 의로운 보응자이심을 이해해야 하며, 이러한 종류의 말씀을 읽을 때 하나님의 의로운 형벌을 두려워하여, 그분의 뜻에 거스르는 어떤 행위도 하지 않도록 온갖 방법으로 경계해야 한다.

4. 그러므로 완전함을 추구하고 영적 수련을 합법적으로 실천하고자 하는 수도사는, 분노와 격노라는 정욕의 움직임과는 거리가 멀어야 하며, 선택받은 그릇이 그에게 명하는 바를 들을 때, “모든 근심과 분노와 격노와 고함, 그리고 모욕을 온갖 악의와 함께 너희에게서 제거하라” (엡 4,31)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모든 분노가 너희에게서 떠나게 하라”고 말씀하시면서, 마치 필요하거나 유익한 것처럼 보이는 어떤 분노의 움직임도 이 명령에서 제외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수도사는 필요할 때 죄를 지은 형제를 서둘러 치유하려 할 때, 고통받는 이에게 약을 베풀고자 할 때—아마도 매우 가벼운 열병일지라도—분노하여 자신 스스로를 그 병보다 더 심각한 맹목의 병에 빠뜨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다른 이의 상처를 치유하고자 하는 자는, 그 자신에게 “의사여, 너 자신을 고쳐라”(누가복음 4:23)라는 복음의 말씀이 적용되지 않도록, 스스로 건강하고 모든 질병에서 자유로워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다음과 같은 말씀도 있다: “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에게 ‘내게서 네 눈의 티를 빼내게 하라’고 말하겠느냐?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도 말이다”(마태복음 7:3, 4)!

5. 어떤 이유로든 분노의 불길이 타오르면, 그것은 마음의 눈을 멀게 하고, 예리한 영적 시야를 가리는 장막을 드리워 진리의 태양을 보지 못하게 한다. 눈 위에 금박이든, 납이든, 혹은 다른 어떤 금속이든 덮여 있든, 금속의 가치 여부는 눈을 멀게 하는 데 아무런 차이를 만들지 않는다. – 그러나 분노가 우리에게 매우 유익한 도움이 되기도 하는데, 바로 우리가 화를 내며 우리 마음의 정욕적인 움직임에 분개하고, 우리 가슴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일—그것을 행하거나 심지어 말하기조차—에 대해 분개할 때이다.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워하며, 어디에나 계시고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는 천사들과 하나님 자신, 그리고 우리 양심의 그 어떤 비밀도 결코 숨길 수 없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눈앞을 생각하며 두려움에 떨 때, 분노는 우리에게 매우 유용한 도움이 되기도 한다. 혹은 바로 그 분노 자체에 대해 화를 내며, 그것이 어떻게 스며들어 형제를 대적하도록 우리를 부추겼는지 따지며, 분노로 그 해로운 속삭임을 내뱉어, 그것이 우리에게 해를 끼치기 위해 가슴 깊은 곳에 숨어 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때입니다. 선지자께서도 우리에게 이와 같이 분노하라고 가르치시는데, 그분은 이 정욕을 자신의 감정에서 그토록 단호하게 떨쳐내셨기에, 명백한 원수들, 심지어 하나님께서 그분의 손에 넘겨주신 자들에게조차 보복하지 않으셨습니다. 예를 들어, 세메이가 다윗 왕에게 돌을 던지며 모든 사람 앞에서 그를 비방했을 때, 사루인의 아들 아베사가 왕에게 가해진 그러한 모욕에 대한 복수로 그의 목을 베려 했을 때, 복된 다윗은 그러한 유혹에 맞서 경건한 분노를 일으키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온유함을 지키며, 겸손과 확고한 인내의 본보기를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와 너는 무슨 상관이냐, 사루인의 아들아? 그를 내버려 두어라. 주님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고 말씀하셨으니, 그가 저주하게 하라. 누가 ‘왜 그렇게 했느냐?’고 묻겠느냐? 내 태에서 나온 내 아들이 내 목숨을 노리고 있는데, 하물며 예미냐의 아들은 얼마나 더하겠느냐?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가 나를 저주하게 내버려 두어라. 혹시 주님께서 나의 겸손함을 보시고, 오늘 그가 한 저주 대신에 내게 복을 되돌려 주시기를 바란다” (열왕기하 16:10–12).

6. 이처럼 우리는 분노할 수 있으나, 구원에 이르는 방식으로, 즉 우리 자신과 스쳐 지나가는 악한 생각들에 대해 “분노”하“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즉, 그 생각들을 실행에 옮겨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지 말아야 한다. 바로 이 같은 뜻을 다음 구절도 더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너희는 너희 마음속에서, 너희 침상에서 회개하라” (시 4:5), 즉, 갑작스럽게 침투해 들어오는 유혹적인 속삭임들로 인해 마음속으로 품게 되는 생각들은, 평온한 이성으로 분노의 모든 소란과 격동을 가라앉힌 후, 마치 평온한 침상에 누운 것처럼, 구원을 주는 회개로 바로잡고 씻어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복된 바울은 이 구절의 가르침을 인용하여, “분노하되 죄를 짓지 말라”고 말한 뒤, “분노한 채로 해가 지게 하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6, 27)고 덧붙였습니다. 만약 진리의 해가 우리의 분노 속에서 지도록 방치하는 것이 해롭고, 우리가 분노했을 때 즉시 우리 마음속에 마귀에게 자리를 내어준다면, 어떻게 앞서 “분노하되 죄를 짓지 말라”고 명령하셨겠습니까? 그분은 이를 통해 분명히 다음과 같은 뜻을 표현하고 계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곧, 여러분의 정욕과 분노 그 자체에 대해 분노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여러분이 분노에 굴복함으로써 어둠에 휩싸인 마음속에서 진리의 해, 즉 그리스도께서 지기 시작하지 않게 되고, 그분이 떠나가실 때 여러분의 마음속에 마귀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게 될 것입니다.

7. 비유적인 의미에서, ‘해’는 이성을 의미할 수 있는데, 이는 우리 마음의 모든 생각과 열망을 비추기 때문에 정당하게 ‘해’라고 불린다. 그리고 분노를 금하는 것은, 분노라는 정욕으로 이 빛을 꺼뜨리지 말라는 계명으로 볼 수 있다; 그 빛이 지면, 그 원흉인 마귀가 일으키는 격렬한 혼란의 어둠이 우리 마음 전체를 차지하지 않도록 하고, 분노의 어둠에 휩싸인 우리가 마치 어두운 밤처럼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 채 방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도의 이 구절을 이해하는 것은 장로들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진 바이며, 그들은 우리가 단 한 순간이라도 분노가 우리 마음에 스며드는 것을 허용하지 않도록 하며, 복음서에서 이에 대해 선포된 형벌, 즉 “누구든지 자기 형제를 향해 분노하는 자는 심판에 처해질 것이다”(마태복음 5:22)에 빠지지 않도록 온갖 방법을 다해 경계하고 있다. – 게다가, 해가 지기 전까지 계속 화를 내는 것이 허용된다면, 분노라는 정욕은 그러한 허용을 빌미로 해가 지기 전에 마치 합법적인 것처럼 서둘러 복수를 실행하려 할 것입니다.

8. 그렇다면 해가 지는 것조차도 그 무자비함에 한계를 두지 못하는 사람들, 즉 화를 낸 상대에게 며칠 동안이나 원한을 품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무엇을 말해야 할까요? 비록 그들이 말로는 때때로 화가 나지 않았다고 말할지라도, 행동은 종종 그들에게 강한 분개를 드러내곤 한다. 예를 들어, 상대방에게 예의 바른 말을 건네지 않거나 평소의 다정함으로 대화를 나누지 않을 때 말이다. 그들은 자신의 짜증을 복수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이럴 때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감히 드러내지 못하거나 드러낼 수 없을 뿐, 마음속에서는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으며, 침묵 속에서 그 감정을 곱씹으며, 그로 인해 분노의 독을 자신의 파멸로 돌리고 있다. 그들은 영혼의 힘으로 분통 터지는 쓰라림을 즉시 몰아내지 못하고, 여러 날에 걸쳐 그것을 곱씹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간신히 조금씩 누그러뜨릴 뿐이다.

9. 마치 분노에 사로잡혀 할 수 있는 대로만 분출하는 사람은, 자신의 복수와 분통을 이미 충분히 풀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마찬가지로, 평화로운 마음을 원해서가 아니라 복수할 힘이 부족하기 때문에 분노의 충동을 억누르면서도, 할 수 있는 대로 그 분노를 터뜨리는 자들도 그러합니다. 왜냐하면 화가 난 상대에게 평소처럼 다정하게 말하지 않는 것 외에는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그것으로 그들에 대한 분노를 풀어버리는 것입니다. 마치 분노가 드러날 때 행동으로만 누르는 것으로 충분하고, 마음 깊은 곳에서 분노를 끌어낼 필요는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야만 분노의 어둠에 가려져 건전한 분별력과 지식의 빛을 잃지 않고, 우리 안에 분노의 영이 거할 때에도 성령의 성전으로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마음에 숨겨진 분노는 비록 눈앞에 있는 사람들을 모욕하지는 않더라도, 드러난 분노와 마찬가지로 성령의 가장 밝은 광채를 몰아내기 때문이다.

10.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원한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음과 같이 말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적 기도라는 제물을 드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는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가 단 한 순간이라도 분노를 품도록 용납하신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네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가 네게 원한을 품고 있음을 생각하면, 그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와 화해한 뒤에 와서 네 예물을 드리라”(마태복음 5:23, 24)고 말씀하시는데, – 설령 그가 우리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동안, 우리가 형제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것이, 며칠은커녕 해가 질 때까지만이라도 허용된다고 어떻게 생각할 수 있겠는가? 심지어 그때조차도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우리에게는 사도로부터 “끊임없이 기도하라” (살전 5:17), 그리고 “남자들이 모든 곳에서 분노나 다툼 없이 경건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딤전 2:8)라고 명령받은 우리에게 말입니다? –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마음속에 그러한 독을 품고 있다면, 우리에게 남은 길은 – 결코 기도하지 않는 것, 그리하여 우리에게 끊임없이 그리고 어디서나 기도하라고 명하는 사도적·복음적 계명을 어기는 죄를 짓는 것, – 아니면, – 어떻게든 스스로를 속여 그 금지를 무시하고 감히 기도를 쏟아낸다면, – 그런 경우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것은 기도가 아니라, 그분을 대적하는 반항의 정신으로 교만한 불순종을 드러내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11. 그러나 우리의 연약함을 다소 완화해 주는 듯 보이는 옛 율법조차도 “네 마음에 네 형제를 미워하지 말라” (레위기 19:17)라고 경고하고, 또 “악을 기억하는 자의 길은 죽음으로 이른다”(잠언 12:28)고 하며, 나아가 “네 손이 보복하지 말며, 네 동족을 원수 삼지 말라”(레위기 19:18)고도 하고 있는데, – 보라, 거기에서도 형제들에 대한 적대감은 행동뿐만 아니라 은밀한 생각에서도 단절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마음속에서 증오를 뿌리째 뽑아내라고 명령하고, 모욕을 당했을 때 보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 일조차 기억하지 말라고 하고 있다.

12. 때로는 교만이나 조급함에 사로잡혀, 자신의 무질서하고 어수선한 성품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특별한 내적 충동을 느낄 때, 우리는 마음속으로 ‘사막이 없다’고 한탄하곤 합니다. 이는 즉, 그곳에서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다면 즉시 인내라는 미덕을 얻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내포하고 있으며, (분노의 충동을 다스리는 데) 자신의 게으름을 명백히 변명하며, 그 충동이 일어난 원인을 자신의 조급함 탓으로 돌리지 않고 형제들에게 전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식으로 이 결점의 원인을 타인에게 전가한다면, 결코 마땅한 수준의 인내와 완전함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 마음의 교정과 평온을 이루는 일은, 우리의 통제 범위를 조금도 벗어나 있는 타인의 의지에 맡기지 말고, 우리 자신의 의지가 선한 태도를 유지할 때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가 분노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그것이 타인의 완전함에 달려서는 안 되며, 타인의 인내심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너그러움으로 얻어지는 미덕에 달려야 한다.

13. 게다가 광야를 찾아야 할 사람은 온전하고 온갖 정욕에서 정화된 자, 혹은 형제 공동체 안에서 모든 정욕을 깨끗이 걸러낸 자여야 하며, 비겁한 도피가 아니라 신성한 관조의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소망으로 그곳에 들어가야 한다. 그 경지는 온전한 자라 할지라도 광야가 아니면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치유되지 않은 채로 사막으로 가져가는 정욕은, 우리 안에 숨겨져 있는 것으로 느껴질 뿐, 근절된 것으로는 느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막은 마음이 정화된 이들을 위해 가장 순수한 관상을 간직하고, 가장 진실한 환상 속에서 영적 신비의 깨달음을 열어주듯이, 정화되지 않은 이들의 정욕은 보통 그대로 보존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욱 강화시킵니다. 이 경우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과 만나거나 교제하지 않는 한, 스스로를 인내심 있고 겸손한 사람으로 여기지만, 그러나 어떤 계기가 그를 움직이게 하는 순간, 그는 즉시 예전의 성품으로 되돌아간다. 그때 숨겨져 있던 정욕들이 즉시 솟아나와, 오랫동안 활동하지 않아 살이 찐 길들여지지 않은 말들처럼, 큰 열망과 광란 속에서 자신의 우리에서 뛰쳐나와 기수를 파멸로 몰아넣는다. 왜냐하면 미리 정화되지 않은 정욕은, 사람들 사이에서 드러나고 억제될 기회가 차단될 때 우리 안에서 더욱 광란적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형제들과 어울려 살 때, 우리가 겉으로는 가지고 있는 듯했고, 적어도 그들에 대한 존중과 모든 사람 앞에서 비겁해 보일까 봐 부끄러움 때문에 드러내 보였던 인내의 그늘조차, 우리는 무심한 방종의 사막 속에서 잃어버리게 된다.

14. 이는 마치 모든 종류의 독사나 독수들이 사막과 자신들의 굴과 은신처에 숨어 있는 동안에는 해를 끼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경우에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해하다고 선언되지는 않는 것과 같다. 이는 그들의 본성이 선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막이 그들을 그렇게 행동하도록 강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해를 끼칠 기회를 잡는 즉시, 그들 안에 숨어 있던 독과 잔혹함을 드러내고 표출해 낸다. – 그러하듯, 완전함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도 (사람들과 교류나 마찰이 없을 때) 그들에게 화를 내지 않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때 분노는 여전히 살아 있지만, 단지 숨어 있을 뿐이며, 무엇이든 마주치는 대로 즉시 쏟아져 나올 준비가 되어 있다). 사막에서 살 때, 필기용 지팡이의 굵기나 가늘기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끔 화를 냈던 기억이 난다. – 가끔은 칼을 사용할 때, 칼날이 무뎌져 잘 잘리지 않으면 화를 냈고, – 가끔은 서둘러 책을 읽으려 할 때 부싯돌에서 불꽃이 금방 튀어나오지 않으면 화를 냈으며; 그럴 때 밀려오는 분노의 감정이 때로는 너무 거세져서, 무생물에게, 혹은 어김없이 악마에게 저주가 저절로 입 밖으로 튀어나오곤 했는데, 그로 인해 당혹감이 사라지고 영혼이 평온해지곤 했다. 이처럼 완전함을 추구하는 데 있어 분노를 일으킬 만한 사람들이 없다는 것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미리 인내심을 기르지 않으면, 분노라는 정욕은 말 없는 사물이나 사소한 일들에도 그 힘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정욕이 우리 마음속에 남아 있으면, 우리가 평온한 마음가짐에 도달하지도 못하고 다른 정욕들로부터 해방되지도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15.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라”(마태복음 5:8)라고 말씀하신 그 지극히 높은 신성한 선을 이루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 정욕을 우리의 행동에서 배제할 뿐만 아니라, 영혼 깊은 곳에서 뿌리째 뽑아내야 한다. 왜냐하면, 마음의 비밀이 감추어지지 않는 하나님께서 마음 깊은 곳에서 그 분노를 보신다면, 말로 분노의 격정을 억누르고 행동으로 드러내지 않는다고 해서 그다지 큰 유익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의 말씀은 정욕의 열매보다 오히려 그 뿌리를 잘라내라고 명하고 있는데, 뿌리가 뽑히면 열매는 당연히 더 이상 번성하지 않을 것이며, – 분노가 우리 활동과 행위의 표면에서 제거될 뿐만 아니라, 생각의 깊은 곳에서도 뿌리 뽑힐 때, 영혼은 이처럼 모든 인내와 거룩함 속에 끊임없이 머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살인이라는 죄에 빠지지 않기 위해 분노와 증오를 죽여야 하는데, 그것들이 없이는 살인이라는 죄가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형제에게 헛되이 분노하는 자는 심판에 처해질 것이요”(마태복음 5:22); 그리고 “누구든지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자니라”(요한일서 3:15). 왜냐하면 그는 마음속으로 분노하는 대상이 죽기를 원하기 때문이며, 비록 사람들이 그를 자신의 손이나 칼로 피를 흘린 자로 인정하지는 않더라도, 분노라는 정욕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를 살인자로 선포하시니, 주님께서는 단지 행위의 결과뿐만 아니라 의지의 의도까지 보시어 각자에게 상이나 벌을 내리실 것이니, 주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대로: “내가 그들의 행실과 생각을 다 알고 있으니, 내가 와서 모든 민족을 모을 것이니라...” (이사야 66:18). 또한 사도는 “하나님께서 비밀리에 사람을 심판하시는 날에, 서로를 정죄하거나 변호하는 생각을 품고 있는 자들”이라고 말했습니다(로마서 2:15-16).

16.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수행자로서 합법적으로 수련하는 자는 분노라는 정욕을 뿌리째 뽑아내야 한다. 이 병을 완전히 치유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치료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먼저, 어떤 형태로든, 의로운 이유든 부당한 이유든 간에 분노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곧, 우리 마음의 근원이자 빛인 그 빛이 분노의 어둠에 가려지는 순간, 우리는 즉시 사물을 분별하는 빛과, 분별력의 확고함, 품위, 그리고 진리의 기준을 잃게 될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 다음, 분노의 영이 우리 안에 머무르면 그 결과로 우리 영의 순결이 필연적으로 흐려지게 되어, 더 이상 성령의 성전이 될 수 없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분노 속에 머무는 동안에는 결코 기도할 수도 없고 하나님 앞에 우리의 간구를 쏟아낼 수도 없다는 점도 깊이 생각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인간 생명의 한계가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며, 우리는 매일 육신을 떠날 수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생각해야 하며, 단 한 번의 분노와 증오만으로도 우주 만물의 심판자가 영원한 고통을 경고하고 계시는 상황에서, 정결함과 절제를 지키는 것, 모든 재산을 포기하는 것, 부를 경멸하는 것, 금식과 기도의 수고 따위는 그곳에서 우리에게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5. 슬픔의 영과의 싸움

1. 다섯 번째 전투에서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슬픔의 날카로운 창을 막아내야 한다. 이 슬픔은 만약 어떤 식으로든 우리 마음을 지배할 기회를 얻게 되면, 신성한 관조의 비전을 차단하고, 영혼 전체를 거룩한 평온의 높이에서 끌어내려, 끝내 나태하게 만들고 짓누른다: 평소처럼 마음의 생동감으로 기도를 드릴 수 없게 하고, 이 영적인 무기이자 치유제인 성경 읽기에 전념하지 못하게 하며, 형제들과 평화롭고 조용히 지내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 또한 모든 필수적인 순종의 의무에 대해 그녀를 참을성 없고 불평하게 만들며, 온전한 이성을 빼앗고 마음을 동요시켜, 마치 정신을 잃고 취한 것처럼 만들며, 파멸적인 절망으로 그녀를 짓밟고 짓누릅니다.

2. 우리가 영적 전쟁의 대업에 합법적으로 헌신하고자 한다면, 이 병 또한 그만큼의 주의를 기울여 치료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옷에 먹이가 있고 나무에 벌레가 있는 것처럼, 슬픔은 사람의 마음을 해친다”(잠언 25:21) – 신성한 성령께서 이 해롭고 치명적인 정욕의 힘을 얼마나 명확하고 단호하게 표현하셨는지 보라. 나방에 갉아먹힌 옷이 더 이상 아무런 가치도 없고 정당한 용도로 쓰기에 적합하지 않은 것처럼, 그리고 벌레에 갉아먹힌 나무가 비록 평범한 건물이라 할지라도 건축이나 장식에 쓰기에는 부적합하여 버려져야 할 뿐만 아니라 불에 태워져야 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짓누르는 슬픔의 자책감에 휩싸인 영혼은 더 이상 대제사장의 예복에 적합하지 않게 되는데, 그 예복은 성령의 기름이 하늘에서 아론의 수염 위로 먼저 내려와, 그 후 옷자락으로 흘러내리는 것으로, 성 다윗의 예언에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머리에 부은 기름이 수염으로 내려가니, 아론의 수염으로 내려가 그의 옷자락에 이르는도다”(132, 2), – 또한 지혜로운 건축가인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하며 그 기초를 놓은 그 영적 성전을 세우고 장식하는 일에도 적합하지 않다: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느니라” (고린도전서 3, 16)라고 말씀하신, 지혜로운 건축가 바울이 기초를 놓은 그 영적 성전을 건축하고 장식하기 위한 것도 아니며, 어떤 나무들이 그 성전에 쓰이는지는 ‘아가서’에서 신부가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우리 집에 삼나무를 얹고, 우리의 널빤지는 편백나무로 하라” (아가서 1, 16). 바로 이러한 종류의 나무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위해 선택되는데, 향기롭고 썩지 않아 낡아짐으로 인한 손상이나 벌레의 침식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나무들입니다.

3. 때로는 이 병이 앞서 있었던 정욕이나 분노, 욕망, 탐욕에서 비롯되기도 하는데, 이는 누군가가 마음속에 품었던 희망, 즉 자신의 행위나 사물을 통해 그 본성에 따라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기대를 잃었을 때 발생한다. 때로는 아무런 명백한 이유도 없이, 우리를 이 심연으로 몰아넣을 만한 어떤 명백한 이유도 없이, 사악한 원수의 영향으로 인해 갑자기 우리를 사로잡는 비통함으로 인해, 우리는 평소의 친절함으로 가장 소중하고 필요한 사람들의 방문조차 맞이할 수 없게 되며, 그들이 적절한 대화에서 무슨 말을 하든 우리는 그것을 부적절하고 불필요한 것으로 여깁니다; 우리 마음의 구석구석이 쓴 슬픔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어떤 기분 좋은 대답도 해줄 수 없다.

4. 이를 통해 가장 명백하게 입증되는 바는, 우리 안에 솟아나는 슬픔의 가시들이 항상 타인의 탓으로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자신의 탓이 더 크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우리 스스로가 모든 슬픔의 원인을 내면에 품고 있기 때문인데, 바로 정욕의 씨앗들 속에서이다. 이 씨앗들은 유혹이라는 비가 우리 영혼에 내리기만 하면, 즉시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는다. 비록 타인의 나쁜 본보기가 그를 유혹한다 하더라도, 자신의 마음속에 그 죄의 씨앗이 숨겨져 있지 않다면, 그 누구도 결코 죄를 짓도록 강요받지 않는다. 또한, 예를 들어 누군가가 아름다운 여성을 바라보며 그녀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을 때, (이전에 알지 못했던) 수치스러운 정욕이라는 정을 그 순간 갑자기 품게 되었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가 그 순간 그녀를 탐냈다면, 그것은 그녀를 바라보는 행위가 내면에 숨어 있던 병을 밖으로 드러나게 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눈을 정화하고, 자신의 감정과 성향을 바로잡는 데 모든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5. 또 다른 종류의 슬픔이 있는데, 이는 가장 추악한 것으로, 죄를 지은 영혼 속에 삶을 바로잡고 정욕에서 벗어나려는 의도가 아니라, 가장 파멸적인 절망이 스며들 때 나타나는 것이다. 바로 그 절망이 카인이 형을 죽인 후 회개하지 못하게 했고, 유다가 배신한 후 속죄할 방법을 찾지 못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그 절망을 통해 그를 목을 매게 만들었습니다.

6. 우리가 슬픔을 유익한 것으로 여겨야 할 때는 오직 우리가 죄에 대한 회개나, 완전함에 대한 뜨거운 열망, 혹은 미래의 행복에 대한 묵상에 이끌려 그것을 받아들일 때뿐이다. 이에 대해 복된 바울도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슬픔은 회개를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지만, 이 세상의 슬픔은 죽음을 초래합니다”(고린도후서 7:10).

7. 그러나 의심할 여지 없이 확실한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낳는 그 슬픔은 온유하고, 친절하며, 겸손하고, 온화하며, 기쁘고, 인내심이 있다. 이는 그 슬픔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되어, 비록 완전함을 갈망하여 지칠 줄 모르고 육체의 자책과 영의 상심으로 나아가지만, 동시에 성공에 대한 소망으로 위로받고 활기를 얻으며, 그 때문에 친절함과 온화함의 모든 유쾌함을 간직하며, 바로 그 사도가 열거한 성령의 모든 열매를 지니고 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오래 참음, 친절, 자비, 신실, 온유, 절제이다”(갈 5:22). 그러나 이 세상 슬픔은 지극히 불평이 많고, 참을성이 없으며, 거칠고, 거부감을 주는 고집과 결실 없는 비통함, 파멸적인 절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슬픔에 사로잡힌 자를 좌절시키고, 모든 일과 구원에 관한 자기 성찰에서 벗어나게 하며, 기도의 효력을 끊을 뿐만 아니라, 보통 “하나님 안에서 오는 슬픔”이 가져다주는 앞서 언급된 모든 영적 열매를 텅 비워 버린다.

8. 구원을 주는 회개나, 완전함에 대한 열심, 혹은 장래의 복을 갈망함으로 인해 받아들여지는 그 슬픔을 제외하고는, 그 밖의 모든 슬픔은 세속적이고 죽음을 초래하는 것이므로, 음탕함, 탐욕, 분노의 영과 마찬가지로 버려지고 완전히 추방되어야 한다.

9. 우리는 끊임없이 영적인 교훈으로 영혼을 채우며, 미래의 복락에 대한 소망과 묵상으로 영혼을 소생시키고 일으켜 세운다면, 이 가장 해로운 정욕을 우리 안에서 몰아낼 수 있다.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는 모든 종류의 슬픔을 극복할 수 있는데, 이는 이전에 있었던 분노 에서 비롯된 슬픔이든, 이익을 잃거나 손해를 입음으로 인해 오는 슬픔이든, 우리에게 가해진 모욕에서 생겨나는 슬픔이든, 무분별한 정신적 동요에서 비롯되는 슬픔이든, 그리고 우리를 치명적인 절망에 빠뜨리는 슬픔들까지: 이는 이를 통해 우리는 언제나 영원하고 장차 올 복을 묵상하며 위로를 받고, 그러한 마음가짐을 흔들림 없이 유지함으로써, 불행한 상황에서는 낙담하지도 않고, 행복한 상황에서는 자만하지도 않을 것이며, 이 두 가지 모두를 하찮고 금세 지나가는 것으로 여길 것이기 때문이다. (슬픔을 달래기 위해 성 카시아노의 발췌문 제7편—재난과 슬픔과의 투쟁에 관한 내용—을 추가로 읽어보라).

 

6. 낙담의 정신과의 투쟁

1. 여섯 번째 투쟁은 그리스인들이 ‘아케디아(αχηδια)’라고 부르는 정욕과 맞서야 하는데, 우리는 이를 낙담, 권태, 혹은 마음의 애타는 그리움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는 슬픔과 닮아 있으며, 특히 사막을 떠도는 수도사들이 가장 심하게 겪는 것으로, 은둔 생활을 하는 이들에게는 적대적인 원수이며, 모든 수도사를 괴롭히는데, 특히 여섯 시 무렵, (우리 시간으로 정오 12시), 마치 열병이라도 앓는 것처럼, 정해진 시간에 병든 영혼을 덮쳐 모든 것을 뒤흔드는 작용을 일으킵니다. 어떤 장로들(에바그리우스, 제1권, 631쪽)은 이를 ‘정오의 악령’이라 부르며, 이는 시편 90편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2. 낙담이 가련한 수도사의 영혼을 덮치면, 그곳에 대한 공포와, 자신의 방에 대한 혐오, 그리고 함께 살거나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형제들에 대한 경멸을 불러일으키는데, 마치 그들이 부주의하고 전혀 영적이지 않은 사람들인 양 여긴다. 또한 그 자신은 완전히 나태해져 평소 자신의 거처에서 하던 모든 일을 기피하게 만든다. 또한 그것은 그가 방에 앉아 있는 것조차 싫어하게 만들고, 독서에 착수하지 못하게 하며, 이곳에서 이렇게 오랜 시간을 살았음에도 조금도 진전하지 못했고 영적인 열매를 하나도 거두지 못했다고 한탄하고 불평하게 만든다. 또한 이곳에 헛되이 머물고 있다는 병적인 생각을 심어주며, 다른 이들을 이끌고 많은 이에게 유익을 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서는 아무도 양육하지 못했고, 자신의 지도와 가르침으로 영적으로 성장시킨 사람도 아무도 없다고 불안을 조장한다. 그러고 나서 그것은 그에게 멀리 떨어진 수도원들을 칭찬하며, 그곳들을 영적 성취에 더 유익하고 구원에 더 크게 기여할 수 있는 곳으로 묘사하고, 그곳에서 형제들과 나누는 교제를 매우 즐겁고 영적 교훈으로 가득 찬 것으로 그린다; 반면 그가 이곳에서 겪는 상황은 견딜 수 없는 것으로 묘사하며, 이곳에 머무는 형제들로부터는 아무런 영적 교훈도 얻을 수 없고, 육신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은 엄청난 수고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고 상기시킨다. 마지막으로 그것은 은둔자에게, 이 곳에 머무르는 한 구원받을 수 없으며, 만약 더 이상 지체하면 그곳에서 파멸하게 될 자신의 방을 떠나 가능한 한 빨리 이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가야 한다고 속삭인다. 그 후 다섯 시와 여섯 시 무렵이 되면, 그것은 그의 몸을 극도의 쇠약 상태로 몰아넣고, 그토록 심한 굶주림을 일으켜, 마치 긴 여정과 가장 고된 노동으로 지치고 쇠약해진 것처럼, 혹은 음식을 보충하지 못한 채 이틀, 사흘 동안 단식을 견뎌낸 것처럼 느끼게 한다. 그래서 그는 불안한 마음으로 이리저리 둘러보며, 형제들 중 아무도 자신에게 오지 않는다고 한숨을 쉬고, 종종 방을 나갔다 들어갔다 하며, 해가 그렇게 빨리 지려고 하지 않는 것처럼 태양을 바라본다. 이처럼 이성이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마치 어둠에 휩싸인 듯, 그는 어떤 영적 활동도 할 수 없게 되고, 이러한 시련에 맞설 다른 방법은 어떤 형제를 방문하거나 잠으로 위안을 찾는 것 외에는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이때 이 파멸을 부르는 영은 그에게 시달리는 자에게, 형제들에게 필요한 인사를 전하거나, 가까이 있든 멀리 있든 병자들을 방문해야 한다고 속삭이기 시작하며, 또한 의무인 양, 이곳에서 이런저런 친척들을 찾아야 하고, 그들을 더 자주 찾아가야 한다고, 또한 친족으로부터 어떠한 지원도 받지 못하는, 그러나 경건하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친 어떤 여성을 더 자주 찾아가 그녀가 필요한 모든 것을 챙겨 주는 것이 큰 경건의 일이 될 것이라고—왜냐하면 그녀의 친족들은 그녀를 돌보지 않기 때문이며, – 그리고 이런 종류의 경건한 일에 더 힘써야 하며, 결실도 없고 아무런 진전도 없이 수도실에 앉아만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3. 이처럼 가련한 영혼은 적의 온갖 계략에 휘말려 심란해하며, 낙담으로 지친 수도사는 침대에 쓰러지려 하거나, 수도실 문을 열고 어떤 형제를 찾아가 이 재앙에서 벗어날 방법을 모색하려 한다. 그러나 그가 현재 치료법처럼 의지하고 있는 이 마지막 수단은, 얼마 지나지 않아 원수의 손에서 그를 더욱 큰 혼란에 빠뜨리는 수단으로 변할 것이다. 왜냐하면 원수는, 실제로 경험으로 알게 된 바와 같이, 싸움이 시작되자마자 즉시 자신에게 등을 돌리고, 승리가 아니라 대항이 아니라 도피에서 구원을 기대하는 자를 더 자주, 더 맹렬하게 공격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조금씩 수도실에서 멀어지면서, 신성한, 모든 것을 초월하는 순결을 추구하는 데 있는 자신의 소명의 주된 사명을 잊기 시작할 때, 그 순결은 오직 수도실에서 항상 침묵을 지키며 머무르고 끊임없는 신성한 가르침을 받는 것 외에는 어디에서도 달성될 수 없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전사는 마침내 자신의 군대에서 도망쳐 세속적인 일에 휘말리게 되고, 섬기겠다고 약속했던 지휘관(2티모 2,4)께 더 이상 기쁨이 되지 못하게 된다.

4. 복자 다윗은 다음 구절에서 이 병으로 인한 모든 해로운 결과를 매우 아름답게 표현했다. “내 영혼이 낙담하여 졸고 있도다”(시 118:28). 그리고 실로, 이 때 잠드는 것은 육신이 아니라 영혼이다. 왜냐하면 이 파멸적인 정욕의 화살에 찔린 영혼은, 미덕을 향한 모든 열망과 자신의 영적 감정을 살피는 일에서 진정으로 잠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5. 그러므로 완전함을 향한 투쟁에서 합법적으로 분투하고자 하는 참된 그리스도의 전사는, 이 병 또한 자신의 영혼 깊은 곳에서 몰아내려고 노력해야 하며, 이 가장 추악한 낙담의 영에 맞서 대항으로 과감히 무장해야 한다. 그래야만 잠의 화살에 찔려 쓰러지지도 않고, 비록 경건함이라는 그럴듯한 구실을 내세운다 해도 자신의 은둔처에서 도망자로 나서지도 않을 것이다.

6. 왜냐하면 그 병이 어떤 측면에서든 누군가를 지배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을 게으르고 안일한 자처럼 아무런 성과도 없이 수도실에 머물게 내버려 두거나, 혹은 그곳에서 쫓아내어 모든 일에 대해 빈둥거리며 게으르게 만들 것이며, 그를 끊임없이 형제들의 수도실과 수도원을 돌아다니게 하고, 다른 어떤 일에도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어디서든 어떤 구실을 대서라도 다음 번에 점심을 먹을 기회를 찾는 데만 몰두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게으름뱅이의 마음은 음식과 배만 생각할 뿐, 어딘가에서 자신과 마찬가지로 냉담함에 갇혀 있는 남녀와 동지 관계를 맺게 되면, 그들의 일과 필요에 얽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영혼에 해로운 일들에 조금씩 얽매이게 되면, 마치 뱀의 고리에 꽉 조여진 것처럼, 그 후로는 결코 그 고리에서 벗어나 이전 지위의 소홀히 했던 일들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7. 그러므로 우리 안에 낙담의 영을 일으키는 주된 원인은, 그것이 게으르게 만들고, 일에서 멀어지게 하며, 나태함을 가르친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이에 대항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다음과 같다: – 굴복하지 말고, 일에 매진하라. 이 점에 있어 우리는 낙담에 대한 치료법으로, 성 바오로가 데살로니카인들에게 수고에 대해 쓴 다음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기꺼이 부지런히 일하며, 조용히 지내며, 너희 자신의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라”(1데살로니카 4,10-11). – “기꺼이 부지런히 일하며, 조용히 지내라”고 말씀하시니, 즉 각자의 방에서 조용히 머물러, 이리저리 빈둥거리며 다니는 자라면 피할 수 없는 온갖 소문들로 인해 내면의 평안을 잃지 말고, 나중에 다른 이들에게도 같은 불안을 야기하지 않도록 하라는 뜻이다; “자기 일을 하라”는 것은, 즉 호기심에 휩쓸려 세상의 일들을 알아내려 하거나 여러 형제들의 행실을 캐내려 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는 자기 자신을 바로잡는 데 힘쓰고 덕을 쌓는 데 열중해야 할 대신, 형제들을 비난하고 헐뜯는 데 시간을 허비하는 습관이 들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자신의 손으로 일하라”, 즉, 자신의 방에 머물며 수공예에 정진하라. 이를 통해 그는 앞서 경고했던 일들이 일어날 가능성을 근본적으로 차단했다. 일에 몰두하는 사람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남의 일을 캐물어 보고, 그 일에 간섭하며, 험담할 시간이 없다. 같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두 번째 서신에서 그는 이에 덧붙여 말합니다.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명하노니, 우리로부터 받은 전통에 따르지 않고 제멋대로 돌아다니는 모든 형제로부터 너희가 멀리하라”(살후 3:6). 여기서는 더 이상 간청하는 것이 아니라 명령하고 있으며, 단순한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함으로써, 이것이 시급한 계명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이는 노동에 관한 계명이며, 이를 기피하는 자는 기독교 공동체에서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 그러므로 그는 일하기를 원치 않는 자들로부터 멀리하고, 타락시키는 게으름으로 인해 상한 지체들처럼 그들을 잘라내라고 명령합니다. 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병이 치명적인 전염병처럼 건강한 지체들에게까지 번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만으로도 근면함에 대한 강력한 동기가 되었지만, 그는 자신이 본보기가 되어 그들이 따라야 할 모범을 제시함으로써 이를 더욱 강화한다(같은 곳 7절). “우리”는, 그가 말하길, “여러분 곁에 머물 때 누구에게도 공짜로 빵을 먹지 않았습니다”(8절)라고 하는데, 비록 “주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복음 사역으로 생계를 꾸리라고 명하셨습니다”(고린도전서 9:14). 이처럼 복음을 전파하고 그토록 고귀한 영적 사역을 행한 사람조차 공짜로 음식을 받지 않았는데, 말씀 전파의 사명뿐만 아니라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일 외에는 그 어떤 다른 책임도 맡지 않은 우리가, 우리의 게으름을 정당화하기 위해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 어떤 희망을 품고서야 우리는 빈손으로 공짜로 빵을 먹을 감히 할 수 있겠는가? 복음 전파의 짐을 짊어진 선택받은 그릇조차도 자신의 수고로 얻은 것이 아닌 빵은 먹지 않았는데 말이다. – 그러나 그의 본보기가 예외적인 것으로 보이며, 모든 이가 본받아야 할 모범으로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는 인상을 주지 않도록, 사도 은 자신만이 그렇게 행한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있던 모든 사람, 즉 실라와 디모데—그와 함께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이들—도 마찬가지로 손으로 일했다고 강조한다. – 누군가 그들이 모두 침묵 속에서 일했을 뿐, 우리에게도 노동을 의무화하는 본보기를 보여주려는 의도가 없었다고 생각하며 그의 본보기를 따르는 것을 회피하려 할까 봐, 그는 그들이 일하지 않을 권리가 있었음에도 일했다고 말하며, “여러분이 우리를 본받도록 본보기를 보이기 위함” (데살로니가후서 3, 9), – 자주 귀에 들려오는 말의 가르침을 잊어버리더라도, 적어도 눈앞에 펼쳐진 우리의 본보기는 기억 속에 간직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마지막으로, 이토록 많은 설득 끝에 사도는 그들에 대해 더 이상 스승이나 의사의 조언이 아니라 사도적 권위의 위엄을 행사하며, “일하기를 원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10) 말합니다! 이는 사도적 심판의 자리에서 선포된, 이 계명을 무시할 것으로 예상되거나 예견되는 자들에 대한 판결이다.

8. 또한 에베소서에서 사도는 바로 이 수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명하셨습니다. “도둑질하던 자는 더 이상 도둑질하지 말고, 오히려 수고하여 자신의 손으로 선한 일을 행하고, 구하는 자에게 줄 수 있도록 하라”(엡 4:28). – 또한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그가 이를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그렇게 행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고린도에 도착했을 때, 다른 곳에 머물기를 원하지 않고 아퀼라와 프리스킬라의 집에 머물렀는데, 이는 그들이 바로 그 자신이 평소 하던 것과 같은 직업을 가진 장인들이었기 때문이었으며, 그들과 함께 일하려는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행 18:1–3). – 그 후 예루살렘으로 배를 타고 가던 중 밀레토에 머물렀을 때, 그곳에서 에베소로 사람을 보내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불러 모은 뒤, 자신이 부재 중일 때 하나님의 교회를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에 대해 가르치며, 돈이나 옷도 그들에게 요구하지 않았으며, 자신과 함께 있는 이들의 필요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해결했다고 했다. 또한 그는 주님께서 직접 주신 계명, 즉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사도행전 20, 33–35). 이처럼 근면함의 모범을 보임으로써, 그는 동시에 땀 흘려 번 것으로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이 다른 어떤 경로로 손에 들어온 것으로 돕는 것보다 낫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만약 수도사도 이와 같이 행한다면, 그는 두 가지 미덕으로 빛나게 됩니다. 곧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그리스도의 완전한 가난을 얻으며, 자신의 수고와 태도로 부자의 관대함을 보여줍니다. 또한 자신의 의로운 수고로 하나님을 공경하고, 의의 열매로 그분께 제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9. 이집트의 교부들은 수도사들, 특히 젊은 수도사들이 게으름을 피우도록 결코 허용하지 않으며, 수고에 대한 성실함으로 마음의 상태와 인내와 겸손에서 얼마나 성장했는지를 가늠한다. 그들은 자신의 생계를 위해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수고로 찾아오는 형제들과 나그네들을 먹여 살리며, 불모와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리비아 지역으로, 또한 더러운 감옥에서 고통받는 도시들에게도 온갖 종류의 식량을 대량으로 전달하며, 자신의 손으로 일하여 얻은 열매로 이러한 헌물을 드림으로써 주님께 기쁜 제물을 바친다고 믿습니다. – 이 주제에 대해 이집트의 고대 교부들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속담도 전해진다. 일하는 수도사는 한 마리의 악마에게 유혹을 받지만, 게으른 수도사에게는 셀 수 없이 많은 악마들이 덮쳐 온다.

10. 내가 사막에서 생활을 시작했을 때, 아바 모세(리비아의; 그의 1, 2차 대담)에게 어제 낙담이라는 병으로 극도로 기력이 쇠약해져 아바 바울을 찾아가는 것 외에는 그 병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고 말했더니, – “아니, 너는 그 병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병에 충실하고 복종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라고 그가 내게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절망은 네가 첫 번째 싸움에서 스스로 패배를 인정하고 즉시 전장에서 도망친 것을 보고, 겁쟁이이자 도망자처럼 너를 더욱 맹렬히 공격할 것이기 때문이다. 단, 네가 다음 번에는 이 적과 싸우기로 결심하고, 방을 떠나거나 잠에 빠져드는 것으로 그 격렬한 공격을 막아내지 않고, 오히려 인내와 맞서 싸움으로 그를 이겨내야 한다.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낙담의 기세에 쫓겨 싸움을 회피하며 도망쳐서는 안 되며, 용감하게 저항하며 이겨내야 한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7. 허영의 영과의 싸움

1. 일곱 번째 싸움은 허영의 영과 벌여야 하는데, 이는 다양하고 변덕스러우며 미묘하여, 아무리 예리한 눈을 가진 자라도 이를 경계하기는커녕, 제대로 살펴보고 알아차리기조차 어렵다. 다른 정욕들은 단순하고 단조롭지만, 이 정욕은 다면적이고 다양하여, 사방팔방에서 전사를 맞이하며, 그가 아직 싸우고 있을 때나 이미 승자가 되었을 때나 가리지 않고 찾아온다. 이는 그 정욕이 그리스도의 전사를 옷차림과 품위, 걸음걸이, 목소리, 일, 철야 기도, 금식, 기도, 은둔, 독서, 지식, 침묵, 순종, 겸손, 온유함 등으로 해치려 하기 때문이며, – 마치 물밑에 숨어 있는 가장 위험한 암초처럼, 솟아오르는 파도에 가려져 있어 경계하지 않는 사이, 순풍을 타고 항해하는 배들에게 갑작스러운 참사를 일으키듯이 말이다.

2. 그러므로 “오른손과 왼손의 의의 무기”를 가지고 왕의 길을 걷고자 하는 자는 사도들의 가르침에 따라 “영광과 치욕, 비방과 칭찬” (고린도후서 6, 7, 8)을 고르게 걸어가야 하며, 유혹의 거센 파도 속에서 이성과 주님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극도의 주의를 기울여 덕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치우치기만 하면, 즉시 치명적인 수중 암초에 부딪혀 산산조각 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지혜로운 솔로몬으로부터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치우치지 말라”(잠언 4:27)는 권면을 듣게 되는데, – 즉, 미덕 때문에 스스로를 아첨하지 말고, 자신의 영적 성취로 자만하지 말며, 마찬가지로 정욕이라는 험한 길로 치우쳐 사도 바울의 말씀대로(빌립보서 3:19) 그 정욕들로 인해 자신의 수치 속에서 영광을 찾지 말라. – 마귀는 웅장하고 화려한 옷차림의 아름다움으로 자만심을 불러일으킬 수 없었던 자에게는, 투박하고 단정하지 못하며 거지 같은 옷차림으로 자만심을 심으려 애쓴다. 명예로 이 정욕에 빠뜨릴 수 없었던 자에게는, 모욕을 통해 그 정욕으로 유인한다; 지식과 웅변으로 자만하게 만들지 못한 자에게는 침묵 속의 거만함으로 이를 유발한다. 누군가 공개적으로 금식하면 헛된 명성으로 괴롭히지만, 그런 명성을 경멸하여 금식을 숨기려 하면 자만심에 시달리게 된다. 허영이라는 오점을 남기지 않기 위해, 어떤 이는 형제들 앞에서 오랫동안 기도하는 것을 피하기도 한다. 그러나 비밀리에 기도를 시작하여, 그 행실을 지켜보는 이가 아무도 없더라도, 그는 스스로를 과시하는 것을 피하지 못한다. 우리의 장로들은 이 병의 특성을 양파와 마늘에 비유하여 훌륭하게 묘사합니다. 양파와 마늘은 껍질을 한 겹 벗기면 또 다른 똑같은 껍질로 덮여 있는 것이 드러나며, 아무리 여러 번 껍질을 벗겨도 결국은 모두 껍질로 덮여 있는 것입니다.

3. 이 병은 명성을 피하여 사막에 숨어 인간들과의 모든 교제를 끊은 사람조차도 끊임없이 괴롭히며, 세상에서 멀리 도망칠수록 더욱 맹렬하게 그를 공격한다. 반면 수도원에 사는 이들 중 어떤 이는 일과 수고에서 누구보다 인내심이 강하다는 이유로, 또 다른 이는 누구보다 순종에 열심이라는 이유로, 또 다른 이는 누구보다 겸손함이 뛰어나다는 이유로 교만에 빠지게 하려 한다. 어떤 이는 방대한 지식 때문에, 어떤 이는 오랫동안 독서에 몰두한 탓에, 또 어떤 이는 긴 기도 시간 때문에 유혹을 받는다. 그리고 이 병은 누구에게나 그 사람의 미덕을 이용해 상처를 입히려 하며, 생명의 열매를 얻는 바로 그 길에 파멸로 이끄는 걸림돌을 놓는다. 마찬가지로 경건과 완전함의 길을 걷고자 하는 이들에게도, 원수이자 중상모략자들은 그들이 걷는 바로 그 길 위에 유혹의 올가미를 숨겨 놓습니다. 이는 복된 다윗의 말씀, “내가 걸었던 이 길에 그들이 나를 위해 올가미를 숨겨 두었도다” (시 141:3) – 우리가 바로 그 미덕의 길, 즉 더 높은 지위의 영광을 추구하며 나아가던 그 길에서, 자신의 성공에 도취되어 비틀거리게 하고, 허영의 그물에 얽혀 넘어지게 하여, 영혼의 발이 묶이게 하려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원수의 공격에 굴복하지는 않더라도, 그에 대한 우리의 승리가 너무 커져서 오히려 그 승리에 의해 패배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4. 다른 모든 정욕은 극복당하면 시들어가며, 정복당하면 날이 갈수록 점점 약해진다. 또한 장소나 시간의 영향으로 인해 소진되고 가라앉기도 하며, 혹은 그들과 대립하는 미덕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여러모로 그로부터 경계하고 피하는 것이 더 수월해진다. 그러나 이 정욕은 패배당하면 훨씬 더 맹렬하게 반격에 나서며, 이미 숨을 거둔 것으로 여겨질 때조차 그 죽음을 통해 오히려 더욱 생생하고, 건강하며, 강력해진다. 다른 정욕들은 오직 싸움에서 이긴 자들만을 지배하지만, 이 정욕은 자신을 이긴 자들을 더욱 맹렬하게 몰아붙이며, 타격을 입을수록 자기 자신을 이긴 승리를 계기로 교만해지는 생각을 통해 더욱 과도하게 싸운다. 특히 그 적의 교묘한 계략은, 그리스도의 전사가 적의 무기로는 그를 이길 수 없게 된 후, 적의 계략으로 인해 자신의 화살에 쓰러진다는 점에 드러난다.

5. 다른 정욕들은, 우리가 말했듯이, 다른 환경의 영향으로 진정되기도 하고, 죄의 대상이나 죄를 짓기 쉬운 환경, 혹은 계기가 제거되면 가라앉고 소진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정욕은 그것을 피해 사막으로 도망치는 자와 함께 사막 속으로 스며들며, 어떤 지역도 두려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대상에서 멀어졌다고 해서 쇠약해지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이 정욕은 공격하는 대상의 덕행에서 얻은 성공에서 그 용기를 얻기 때문이다. – 앞서 언급했듯이, 다른 정정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때로 누그러지거나 사라지지만, 이 정정에게는 시간이 흐르는 것이 해가 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허영을 부추기는 양분을 더 많이 모아준다.

6. 마지막으로, 다른 정정들은 그들과 대립하는 미덕들과 불화를 일으키며 맑은 날처럼 노골적으로 싸우기 때문에, 이기기 더 쉽고 경계하기도 더 편리하다; 그러나 이 정욕은 미덕들 사이에 끼어들어 우리 편과 섞여, 마치 어두운 밤처럼 싸우며, 사람들이 그 공격을 예상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기 때문에 더욱 잔혹하게 유혹한다.

7. 우리는 유다의 왕 예제키엘이, 모든 면에서 완전한 의로움을 지닌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발의 화살에 쓰러졌다는 기록을 읽는다. 또한, 단 한 번의 기도로 18만 5천 명의 앗시리아 군대를 전멸시킬 수 있었던 그가, 헛된 명예심에 패배했고, – 하나님의 정하심에 따라 정해진 생명의 한계를 넘어서, 자신의 기도로 인해 15년의 수명을 더 연장받았으며, 해가 10도 되돌아가는 기적으로 그 사실이 입증되었던 그 사람이, 자신의 덕행에 대한 그러한 증거와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푸신 은혜의 표징을 목격한 후에도, 단 한 번의 자만과 자기 과시로 인해, 모든 것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뿐만 아니라 온 백성까지 하나님의 진노에 빠뜨렸으며, 그 진노가 너무나 거세서, 그가 겸손히 마음을 고쳐 온 백성과 함께 하나님께 간구했을 때, 그 진노가 자신의 생애 동안 내리지 않게 해 달라는 것밖에 구할 수 없었다(열왕기하 20장, 역대하 32장). 자만이라는 정욕은 이토록 파멸적이며 중대한 죄악이다!

8. 앞서 언급한 왕의 증조부인 우지야 역시 성경에 칭송받는 증인인데, 수많은 미덕과 백성의 복을 위한 훌륭한 업적 및 제도를 세운 후, 허영심에 찬 자만심에 빠져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거스르며” 그분께 기쁨이 되지 않는 일을 행하자, 즉시 영광의 높이에서 추락하여 나병으로 죽임을 당했다(역대하 26장). 이것이 또 다른 비참한 몰락의 예이다! 이를 통해, 행복한 성공이 있을 때 자만과 교만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지 않으면 얼마나 해로운지, 그리고 그런 경우 스스로를 경청하지 않고 경계하지 않는 자들이, 어려운 상황에서는 꺾이지 않다가, 그 어려움을 극복했을 때 오히려 더 혹독한 타격을 받고, 전투 중에 죽음의 위험을 피했다가 오히려 승리와 환호 속에서 쓰러지게 되는지 알 수 있습니다.

9. 사도가 “교만하지 말라”(갈 5:26) 권면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또한 주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며 “너희가 서로 영광을 받으면서, 오직 한 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않으니,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요 5:44) 말씀하셨다. 이러한 자들에 대해 복된 다윗도 경고하며 말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자들의 뼈를 흩으시리라”(시 52:6).

10. 신입 신자들과 덕행과 영적 지식에서 아직 별로 진전을 보이지 못한 자들의 허영심은 대개 목소리의 톤, 즉 다른 사람들보다 더 듣기 좋게 노래한다는 점이나, 육체가 마르거나 몸이 아름답다는 점, 부유하고 귀족적인 부모를 두었다는 점, 혹은 군 복무와 영예를 경멸했다는 점을 이유로 자만하게 만듭니다. 또 다른 이에게는, 비록 결코 이를 이룰 수 없었을지라도, 세속에 머물렀더라면 명예와 부를 쉽게 얻었을 것이라고 속삭이며, 이처럼 실현 불가능한 희망을 희생양으로 삼아 그를 부풀리고, 결코 소유한 적도 없는 것을 포기했다는 사실로 자만하게 만든다.

11. 또 다른 이에게는 사제직이나 부제직에 대한 욕망을 불어넣으며, 그가 그토록 거룩하고 엄격하게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여 다른 사제들에게도 거룩함의 본보기가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게다가 자신의 행실과 설교를 통해 많은 이에게 유익을 줄 것이라고 마음속에 그려 보게 한다. 때로는 사막에서 살거나 독방에 은둔하는 사람조차도, 마치 자신이 여러 사람의 집과 수도원을 돌아다니며, 상상 속의 신념을 바탕으로 많은 이들을 올바른 삶의 길로 인도하는 것처럼 마음속으로 꿈꾸게 만듭니다. 그리하여 가련한 영혼은 이런 헛된 생각에 이끌려 이리저리 방황하며, 마치 깊은 잠에 빠진 듯 헛상상을 하고, 그러한 생각의 달콤함에 휩쓸려 그런 꿈으로 가득 차게 되면, 대부분 자신의 행동도, 형제들이 실제로 눈앞에 있다 해도 그들의 존재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마치 잠들지 않은 채 꿈속에서처럼, 자신의 생각 속에서 방황하며 헛상상을 하는 그 일들에, 마치 실제로 일어나는 일인 양 달콤하게 빠져들기 때문이다.

12. 내가 스키트 사막에 살던 시절, 한 장로가 한 형제의 방을 방문하러 갔다가, 그 형제가 안에서 무언가를 말하는 소리를 듣고는 발걸음을 멈췄던 일이 기억난다. 그는 그 형제가 성경을 읽고 있는지, 아니면 일하면서 하는 관습대로 암송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 했다. 귀를 가까이 대어 들어보니, 경건한 관찰자는 그 형제가 마치 교회에 있는 것처럼 백성들에게 설교를 하고 있는 것을 들었다. 이는 그가 허영의 영에 현혹되어 스스로를 사제로 여기며, 오랫동안 꿈꿔왔던 소명을 수행하고 있음을 의미했다. 조금 더 기다리자, 노인은 그 형제가 설교를 마쳤다는 소리를 들었고, 마치 이미 집사 직분을 맡은 것처럼 태도를 바꾸어 “세례를 받을 자들은 나가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노인은 문을 두드렸다. 형제는 밖으로 나와 평소와 같은 공손함으로 그를 맞이하고, 안으로 안내하며 그가 언제 왔는지 물었다. 그는 형제가 밖에서 오래 서 있어야 했는지, 그로 인해 불편한 점은 없었는지 걱정하는 척했지만, 사실은 자신의 망상과 그로 인해 저지른 행동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노인은 다정하게 대답했다. “방금 왔는데, 네가 ‘세례를 받은 자들은 나가라’고 외치고 있었지.”

13. 내가 이 내용을 여기에 실은 이유는, 가련한 영혼을 괴롭히는 정욕들이 얼마나 강력한 힘으로, 어떤 순서로 우리를 공격하는지 그 전모를 눈앞에 두고, 우리가 스스로를 더 주의 깊게 살피며, 이를 통해 원수의 올가미와 함정을 더 쉽게 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집트의 성부들도 바로 그렇게 행합니다. 그들은 주저함 없이 이와 같은 모든 것을 공개하며, 타인과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 마치 자신들도 여전히 이야기하는 내용을 직접 겪고 있는 것처럼 – – 젊은 수도사들 앞에서 모든 정욕의 투쟁을 드러내고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이미 이 젊은이들이 겪고 있는 것과 앞으로 겪게 될 것들까지 모두 말입니다. 이는 그들이 모든 정욕의 유혹을 이렇게 설명함으로써, 열정 넘치는 초보 수도사들이 자신들이 치러야 할 진정한 전투의 비밀을 깨닫고,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그것을 바라보며, 자신을 괴롭히는 정욕들의 원인과 그에 대항할 수단을 모두 깨닫게 하며, 앞으로 닥칠 전투에 대해서는 그것이 닥치기 전에 미리 어떻게 경계해야 할지, 공격해 오는 자들에게 어떻게 맞서야 할지, 그리고 그들과 어떻게 싸워야 할지를 미리 알게 하려는 것이다. 가장 뛰어난 의사들이 현재의 병을 치료할 뿐만 아니라, 예리한 통찰력과 경험을 바탕으로 미래의 병에도 대비하여, 경고하는 가르침이나 치유하는 약으로 미리 예방하듯이, 마찬가지로 이 가장 참된 영혼의 의사들은 영적인 가르침을 마치 일종의 해독제(안티도트)처럼 사용하여, 앞으로 발생할 수 있는 마음의 병을 미리 근절함으로써, 젊은 수도자들의 영혼 속에서 그 병이 자라나지 못하게 하며, 그들에게 정욕이 공격해 오는 원인과 이를 치료할 수 있는 수단을 밝혀줍니다.

14. 참된 영적 수련을 합법적으로 실천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의 전사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이 다양하고 여러 형태의 짐승을 물리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첫째로, 우리는 사방에서 우리를 향해 뛰쳐나올 준비가 되어 있는 이 다면적인 방탕함과의 만남 자체를 피할 수 있는데, 이는 다윗의 다음 말씀을 마음에 새기면 된다: “주께서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들의 뼈를 흩으시리라”(시 52:6), 헛된 영광을 얻으려는 허영심 어린 의도로는 어떤 일도 행하거나 시도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또한 선한 의도로 행한 일은, 그 후 허영이라는 병이 스며들어 우리 모든 수고의 열매를 헛되게 만들지 않도록, 마찬가지로 선한 경계로 굳건히 지키고 보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또한 형제들의 행동 중에서 일반적인 관습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모두가 행하지 않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로서 온 힘을 다해 배척해야 하며, 우리를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두드러지게 만들 수 있는 것, 그리고 우리만이 그것을 행함으로써 사람들로부터 명성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온갖 방법으로 피해야 한다. 이러한 자기 과시를 통해 우리에게 치명적인 허영의 병이 스며들었음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만심 어린 의도로 행하는 수고의 열매를 완전히 잃을 뿐만 아니라, 더 큰 죄를 짓게 되어 신성모독자처럼 영원한 고통을 겪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마음에 새긴다면, 이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위해 해야 할 일을 사람들을 위해 하기를 원했고, 그로 인해 사람들을 하나님보다, 세상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우선시했기 때문이다. 그때 은밀한 하나님이 우리를 책망하실 것이다.

 

8. 교만의 영과의 싸움

1. 여덟 번째이자 마지막 싸움은 교만의 영과의 싸움이다. 이 정욕은 비록 정욕과의 투쟁을 묘사하는 순서상 마지막에 위치하지만, 그 기원과 시기상으로는 첫 번째이다. 이것은 가장 사나우며 가장 길들일 수 없는 야수로서, 특히 완전한 자들을 공격하여 그들이 미덕의 정점에 거의 다다랐을 때 맹렬히 물어뜯으며 삼켜 버린다.

2. 교만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첫 번째는 앞서 말한 대로 높은 영적 삶을 사는 사람들이 빠지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신앙의 초보자와 육신적인 사람들을 사로잡는다. 비록 이 두 종류의 교만이 모두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해로운 자만심을 불러일으키지만, 첫 번째는 직접적으로 하나님과 관련이 있는 반면, 두 번째는 본질적으로 사람들과 관련된 것이다. 이 후자의 기원과 그에 대항하는 방책은, 하나님의 허락이 있다면 이 책의 마지막 장들에서 살펴보겠지만, 지금은 앞서 말한 대로 주로 완전한 이들이 유혹받는 첫 번째 자만심에 대해, 우리가 잠시 논해 볼 생각이다.

3. 이 사악한 교만만큼 모든 미덕을 말살하고, 사람을 모든 의로움과 거룩함에서 벗겨내어 박탈하는 다른 어떤 정욕도 없다. 그것은 마치 모든 것을 뒤덮는 일종의 전염병처럼, 단지 한 지체나 한 부분의 이완에 그치지 않고 온 몸 을 치명적인 혼란으로 손상시키며, 이미 미덕의 높은 곳에 서 있는 자들을 극도로 심각한 추락으로 끌어내려 파멸시키려 한다. 다른 모든 정욕은 그 자체의 한계와 목적에 만족하며, 비록 다른 미덕들을 괴롭히기는 하지만, 주로 한 가지 미덕을 겨냥하여, 그것을 가장 심하게 압박하고 공격한다. 예를 들어, 폭식, 즉 많이 먹거나 단 것을 탐하는 욕정은 엄격한 절제를 해치고, 음욕은 순결을 더럽히며, 분노는 인내를 몰아낸다. 따라서 때로는 어떤 한 가지 정욕에 사로잡힌 사람이 다른 미덕들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정욕에 맞서 질투심에 불타 무장한 반대되는 정욕에 의해 무너지는 그 한 가지 미덕을 잃은 뒤에도, 나머지 미덕들은 비록 부분적으로나마 지킬 수 있다. 그러나 이 정욕이 불쌍한 영혼을 장악하는 순간, 마치 가장 잔혹한 폭군처럼 미덕의 최상층 요새(겸손)를 점령한 뒤, 그 도시 전체를 뿌리째 파괴하고 황폐화시킨다. 한때 높았던 성스러움의 성벽을 허물어 버리고, 그것을 악덕의 흙과 뒤섞어 버린 뒤, 그에게 정복당한 영혼 속에는 더 이상 자유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다. 그가 더 풍요로운 영혼을 사로잡을수록, 그 영혼을 더 무거운 노예의 멍에 아래에 두며, 가장 잔혹한 약탈로 미덕이라는 모든 재산을 앗아간다.

4. 이 가장 잔혹한 폭군의 힘의 정도를 더 정확히 알고 싶다면, 지나친 광채와 아름다움 때문에 루시퍼라고 불렸던 한 천사가, 다름 아닌 바로 이 정욕 때문에 하늘에서 쫓겨난 일을 떠올려 보자. 그가 교만의 화살에 찔려, 그토록 높은 지위의 복된 천사들 가운데서 지옥으로 추락했는지 떠올려 보자. 그러니, 그토록 막대한 우월성을 지닌 무형의 존재조차 마음의 교만 하나만으로 하늘에서 땅으로 추락하게 되었다면, 덧없는 육신을 입은 우리가 이를 얼마나 경계해야 하는지는, 그 파괴적인 타락의 위대함이 여실히 보여준다. – 그런데 우리가 이 정욕이라는 가장 치명적인 전염병을 어떻게 피할 수 있는지, 앞서 말한 타락의 기원과 원인을 추적함으로써 배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질병이든 그 기원과 원인을 사전에 세심한 조사로 규명하지 않고서는 치료할 수도 없고, 그에 대한 약을 처방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 이 (대천사)는 신성한 광휘로 감싸여, 창조주의 관대하심에 따라 다른 최고 존재들보다 더 밝게 빛나며, 창조주의 은총으로 장식된 이 지혜의 광채와 덕의 아름다움이 하나님의 풍성한 은총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본연의 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오만하게 여겼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로 교만해져, 마치 하나님처럼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존재인 양,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로 여겼으니, 마치 그러한 순결함을 유지하기 위해 신성한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그리하여 그는 전적으로 자신의 자유 의지에 의지하며, 그것만으로도 미덕의 완전한 성취와 지극한 행복의 지속에 필요한 모든 것이 넘치도록 주어질 것이라고 믿었다. 바로 이 한 가지 생각이 그에게 파멸적인 타락의 첫 번째 원인이 되었다. 그로 인해, 자신이 아무런 필요도 없다고 여겼던 하나님께 버림받고, 즉시 그로 인해 불안정해지고 흔들리게 된 그는 자신의 본성적 연약함을 깨닫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은총으로 누리던 행복을 잃어버렸다. 그리하여 그가 “거만한 말들”을 “사랑”하게 되었을 때, 그 말들 속에서 자만하며 내가 하늘에 올라가리라” (이사야 14:13), “아첨하는 혀”를 통해 스스로를 속이며 “내가 지극히 높으신 분과 같아지리라”고 말했고, 나중에 아담과 하와를 속여 너희는 신과 같이 되리라”고 속삭였으니, 이에 대한 심판은 다음과 같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너를 끝까지 멸망시키시고, 너를 휩쓸어 가시며, 네 거처에서 쫓아내실 것이다. 의인들이 이를 보고 두려워하며, 그를 비웃으며 말하리라. ‘이 사람은 하나님을 자신의 도우미로 삼지 않고, 오직 자신의 많은 재물과 헛된 힘을 의지한 자로다’라고” (시 51:6–9). 마지막 말(‘이 사람’)은 하나님의 보호와 도움 없이 지극한 선에 도달하기를 바라는 이들에게도 매우 타당하게 적용될 수 있다.

5. 이것이 바로 첫 번째 타락의 원인이자 주요 정욕의 시작이며, 이 정욕은 나중에 그 정욕에 가장 먼저 상처를 입은 자를 통해 원초적 존재에게 스며들어 수많은 정욕들을 자라나게 했다. 그리고 그—첫 사람—은 자신의 자유 의지의 힘과 노력만으로도 신성의 영광에 이를 수 있다고 믿음으로써, 창조주의 자비로 받은 그 영광마저 잃어버리고 말았다.

6. 이처럼 성경의 예들과 증거들을 통해, 교만의 정욕이 영적 전쟁의 순서상으로는 가장 마지막에 위치하지만, 그 기원은 가장 먼저이며 모든 죄와 범죄의 근원임이 가장 명백하게 입증된다. 이 정욕은 다른 정욕들과 달리, 자신과 대립되는 미덕 하나, 즉 겸손만을 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미덕을 통틀어 파멸시키는 자이며, 그저 평범하고 하찮은 미덕들을 유혹하는 것이 아니라, 특히 권능의 높은 자리에 서 있는 미덕들을 유혹한다. 선지자가 이 영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택한 자들의 양식”(하박국 1:16). 그러므로 복된 다윗도, 비록 자신의 마음 깊은 곳을 그토록 세심하게 지키고 있었기에, 자신의 양심의 비밀이 그분께 숨겨지지 않았음을 알고, 담대하게 외쳤다. “주여, 내 마음이 교만해지지 아니하였고, 내 눈이 거만해지지 아니하였으며, 나보다 위대하거나 놀라운 자들 가운데로 다니지 아니하였나이다”(시 130:1), 그리고 또 “내 집 가운데 교만을 행하는 자가 살지 아니하게 하소서”(시 100:7); 그러나 온전한 자들에게조차 이 정욕의 어떤 움직임으로부터도 스스로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에, 이 일에 있어 오로지 자신의 노력에만 의지하지 않고, 기도 중에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이 원수의 화살에 상처 입지 않게 해 주시기를 간구하며 말하기를: “교만의 발걸음이 내게 미치지 않게 하소서” (시 35:12), (즉, 주님, 교만의 유혹에 이끌려 어떤 한 걸음도 내딛지 않게 하소서)라고 말하며, 교만한 자들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대적하신다” (야고보서 4, 6), – 그리고 또 “교만한 자는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지 못하니라” (잠언 16, 5)라고 기록된 그 처지에 빠지지 않도록 두려워하고 경외하며,

7. 교만이 얼마나 큰 악인지, 그것을 대적하기 위해 천사들과 그 밖의 반대 세력들만으로는 부족하여,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나서신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주목해야 할 점은, 사도가 다른 정욕에 사로잡힌 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에게 대적하시는 하나님이 계신다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탐식하는 자, 음행하는 자, 분노하는 자, 또는 탐욕스러운 자들에게 대적하신다”고 말하지 않았으며, 오직 교만한 자들에게만 그렇게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그 정욕들은 죄를 짓는 개인에게만 향하거나, 겉보기에는 그들과 연루된 사람들, 즉 다른 사람들에게 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교만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향해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특히 하나님을 자신의 적으로 삼을 만하기 때문이다.

8. 이 가장 추악한 영의 올가미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우리가 스스로 잘하고 있다고 느끼는 각 미덕에 대해 사도와 함께 “나 자신이 아니라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고,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있는 자”라고 말하며(고린도전서 15:10), –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일하사 원함도 행함도 그의 기뻐하시는 대로 이루게 하시는 이시니라”(빌 2:13), – 우리 구원의 완성자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내 안에 거하고 내가 그 안에 거하는 자는 많은 열매를 맺으리니, 나 없이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15:5), –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건축하는 자들의 수고가 헛되도다. 주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지키는 자의 경계가 헛되도다” (시편 126:1). 그리고 원하고 달려가는 누구의 의지라도, 영에 대적하여 싸우는 육신을 입은 자가 신성한 자비의 특별한 보호 없이는 완전한 순결과 흠 없음을 달성하고, 그로 인해 그토록 간절히 원하며 그쪽으로 향하는 것을 얻을 자격을 얻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이는 “모든 선한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로부터 내려오나니, 곧 빛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는 것이라”(야고보서 1:17) 했기 때문이다. “네가 가진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은 것이 아니냐? 만일 네가 받았다면, 받지 않은 것처럼 자랑하느냐?”(고린도전서 4:7).

9.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인간의 노력을 폄하하여, 누구라도 성실하고 고된 수고를 기피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 내 의견이 아니라 장로들의 가르침에 따라 – 그러한 노력 없이는 어떤 식으로든 완전함에 이를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그 노력만으로는 누구도 마땅한 경지에 도달할 수 없다고 단호히 주장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그것을 이룰 수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땀 흘려 수고하는 자들에게만 주어지며, 사도의 말을 빌리자면, 원하고 달려가는 자들에게만 주어진다고 단언하기 때문이다. 또한 시편 88편에서 하나님의 입으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강한 자를 도우시며, 사람들 중에서 택하신 자를 높이셨도다”(20절). 비록 주님의 말씀에 따라 우리는 구하는 자에게 주어지고, 두드리는 자에게 열리며, 찾는 자에게 발견된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자비가 우리가 구하는 것을 주지 않으시고, 우리가 두드리는 것을 열어 주지 않으시며, 우리가 찾는 것을 찾게 해 주지 않으신다면, 그 구함과 찾음과 두드림 자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선한 의지를 다해 그분께 기회를 드리는 즉시, 그분은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기꺼이 베풀어 주실 준비가 되어 계시니, 이는 그분이 우리보다 훨씬 더 우리의 완전함과 구원을 원하시고 기다리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복자 다윗은 자신의 일과 수고에서 오로지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깊이 깨달았기에, 주님께서 친히 그의 일을 바로잡아 주시기를 두 번이나 간구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손의 일을 우리를 위하여 바로잡아 주시고, 우리 손의 일을 바로잡아 주소서” (시 89, 17), – 그리고 다시 “하나님이시여, 주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신 이 일을 굳건히 하소서” (시 67, 29)라고 했습니다.

10. 그러므로 우리는 금식, 철야 기도, 기도, 마음과 육체의 자책에 힘쓰며 온전함을 향해 나아가야 하며, 교만에 빠지지 않도록 하여 이 모든 것을 헛되이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오직 완전함 그 자체를 우리 자신의 노력과 수고로 이룰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실천하는 것, 즉 고행과 다양한 영적 행위들조차도 하나님의 은총의 도움 없이는 마땅히 행할 수 없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11.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성적인 존재로 창조하시고, 자유 의지의 능력을 부여하시며, 세례의 은혜를 베푸시고, 도움을 위해 율법의 지식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매일 우리를 돌보시는 그분의 섭리로, 즉 적의 중상모략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시고, 육신의 정욕을 이겨내도록 도우시며,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시고, 죄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주시며, 우리에게 도움을 주시고 그분의 율법의 요구 사항을 깨닫고 이해하도록 깨우쳐 주시며, 우리의 태만과 죄에 대해 은밀히 회개의 마음을 불어넣으시고, 구원적으로 우리를 바로잡아 주시며, 특별한 감동을 허락하시고, 때로는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 마침내 정욕에 더 기울어지기 쉬운 우리의 가장 자유로운 의지조차도, 영혼에 유익한 더 나은 행동으로 인도하시며, 그 의지에 대한 그분의 감동을 통해 덕의 길로 돌이키게 하십니다.

12.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이 무엇인지, 이것이 바로 가장 오래된 교부들의 믿음이며, 이 믿음은 오늘날까지도 그들의 후계자들에게서 흠 없이 이어지고 있다. 이들에 대한 의심할 여지 없는 증거는 사도적 권능으로, 그들이 우리 가운데서뿐만 아니라 불신자들과 믿음이 약한 자들 사이에서도 나타낸 것이다.

13. 유다의 왕 요아스는 처음에는 칭찬받을 만한 삶을 살았으나, 나중에는 교만해져서 불명예스럽고 부정한 정욕에 사로잡혔으니, 사도의 말대로 “미숙한 마음이 낯선 일을 행하게 된 것”(롬 1:26, 28)이다. 하나님의 진리의 법은 이러하니, 회개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교만하게 자만하는 자는 가장 추악한 육신의 수치에 내맡겨져, 그로 인해 비천해짐으로써, 자신이 지금 이렇게 더럽혀진 것은, 이전에 교만한 자만심에서 비롯된 가장 깊고 중대한 부정함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임을 깨닫게 되고, 이를 깨달음으로써 그 두 가지 정욕에서 자신을 정화하고자 열망하게 하기 위함이다.

14. 그러므로 누구도 참된 겸손 없이는 완전함과 순결의 궁극적인 경지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하다. 그는 형제들 앞에서 겉으로 드러내며, 또한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 앞에서도 이를 나타내며, 매 순간 그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보호와 도움 없이는 자신이 갈망하고 힘써 나아가고자 하는 완전함에 결코 도달할 수 없다고 믿어야만 한다.

15. 지금까지, 우리의 부족한 재능이 허락하는 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영적 교만에 대해 충분히 말해 왔는데, 앞서 말했듯이 완전한 자들도 이로 인해 유혹을 받는다. 이러한 종류의 교만은 많은 이에게 알려져 있지 않으며, 많은 이가 경험하지도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시련에 이르기 위해 마음의 완전한 순결을 얻으려 애쓰는 이가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교만은 대개 다른 모든 정욕을 이겨내고 이미 미덕의 정점에 거의 다다른 이들만을 괴롭힙니다. 우리의 가장 교활한 원수는, 육신적인 타락으로 이끌어서 그들을 이길 수 없자, 이제는 그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여 영적인 타락으로 몰아넣으려 시도하며, 이를 통해 그들이 큰 수고를 들여 얻은 모든 이전의 열매를 빼앗으려 꾀하고 있습니다. 한편, 아직 육신의 정욕에 얽매여 있는 우리에게는 그가 그런 식으로 유혹할 자격조차 주지 않고, 거칠고, 말하자면 육신적인 오만함으로 우리를 넘어뜨립니다. 그러므로 우리, 특히 우리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 그리고 젊은 수도사나 수도 생활을 막 시작한 이들의 영혼이 가장 쉽게 빠질 위험이 있는 이 문제에 대해, 우리가 약속한 대로 조금이나마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16. 앞서 말했듯이, 이러한 육신적인 교만은, 세상에 대한 포기라는 마땅한 시작을 제대로 하지 않고, 마땅한 열심도 없이 수도사의 영혼 속에 남아 있다면, 그가 예전의 세속적인 오만함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참된 겸손으로 내려가도록 허락하지 않음으로써, 우선 그를 불순종적이고 고집스러운 사람으로 만들고; 그 다음에는 그가 온유하고 예의 바르게 행동하거나, 모든 형제들과 동등하게 지내며 눈에 띄지 않게 살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특히 그는 하나님과 우리 구세주의 계명에 따라 모든 세속적인 소유에서 벗어날 것을 결코 양보하지 않는다; 한편, 세상을 버리는 것은 곧 모든 것에 대한 죽음을 나타내는 것이며, 십자가를 나타내는 것이나 다름없고, 참된 형태로 시작되고 세워지기 위해서는 다른 어떤 기초도 있을 수 없으니, 단지 이 세상의 모든 일에 대해 영적으로 죽은 자임을 자각할 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매일 죽어야 한다고 믿어야 하는데, –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그에게 장수할 것을 기대하게 만들고, 앞으로 닥칠 여러 가지 장기적인 질병을 떠올리게 하며, 모든 것을 버리고 남의 수단이 아닌 자신의 수단으로 생계를 꾸려나가야 할 때 수치심과 당혹감으로 흔들리게 하고, 음식과 옷을 남의 수단이 아닌 자신의 수단으로 마련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주입하며, 이를 뒷받침하는 다음의 말씀을 상기시키며: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사도행전 20:35), – 이 말씀이 어떤 의미로 말해진 것인지, 마음이 무뎌지고 냉담해진 이들은 결코 깨달을 수 없다.

17. 이렇게 세속을 버리는 삶을 제대로 시작하지 못한 수도사는 결코 그리스도의 참되고 단순한 겸손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는 가문의 명망을 자랑하거나, 몸만 버리고 마음은 버리지 않은 과거의 세속적인 생활 방식을 내세우거나, 자신의 파멸을 초래할 만큼 곁에 간직해 둔 재물을 자랑하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재물들 때문에 그는 더 이상 수도원 규율의 멍에를 평온하게 짊어지지도, 어떤 장로의 가르침에도 복종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교만이 지배하는 사람은 어떤 복종이나 순종의 규칙을 지키는 것을 스스로에게 굴욕적인 일로 여기며, 심지어 영적 삶의 완성에 관한 일반적인 가르침조차 기꺼이 듣지 않고, 때로는 그것에 대해 완전한 혐오감을 품기도 한다. 특히 양심에 의해 책망받을 때, 그것이 고의로 자신을 겨냥한 것이라고 의심하게 될 때 더욱 그러하다. 후자의 경우, 그의 마음은 더욱 완고해지고 분노로 불타오른다. 그 후에는 목소리가 커지고, 거친 말을 하며, 쓴맛이 섞인 거친 대답을 하고, 거만하고 경쾌한 걸음걸이를 보이며, 멈출 수 없는 수다스러움을 보인다. 이처럼 영적 대화가 그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해로워져 더 큰 죄를 짓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18. 나는 한 젊은 수도사가 아바가 “왜 세속을 버린 후 한동안 보였던 겸손을 버리고 악마적인 교만으로 거만해지기 시작했느냐”고 책망했을 때, 극도의 오만함으로 이렇게 대답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한동안 스스로를 낮추었던 것이 영원히 복종하기 위해서였단 말입니까?” – 이처럼 제멋대로이고 범죄적인 대답에, 장로는 놀라움에 넋을 잃어 말을 잇지 못했는데, 마치 그 말을 사람으로부터가 아니라 가장 오래된 루시퍼에게서 들은 것처럼, 그와 같은 뻔뻔함에 맞서 입에서 단 한 마디도 내뱉지 못하고, 오직 마음속에서 한숨과 신음만을 내뱉으며, 우리 구세주에 대해 말씀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신 분… 순종하심으로 자신을 낮추셨다”는 말씀을, (이 교만의 악령에 사로잡힌 자가 말하는 것처럼) 일시적으로가 아니라 “죽음에 이르기까지” (빌 2:6, 8).

19. 이 육신의 교만은 다음과 같은 행동으로 드러난다. 말할 때는 고함치는 듯한 어조가 나오고, 침묵할 때는 짜증스러움을, 즐거울 때는 시끄럽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슬플 때는 무의미한 침울함을, 대답할 때는 날카로움을, 말할 때는 경솔함을 보이며, 마음의 참여 없이 아무렇게나 튀어나오는 말들을 내뱉는다. 그것은 인내를 모르고, 사랑과는 거리가 멀며, 모욕을 가하는 데는 대담하지만, 모욕을 견디는 데는 비겁하며, 자신의 욕망과 의지가 선행되지 않는 한 순종하기를 꺼리고, 타인의 만류에는 완고하며, 자신의 의지를 포기할 줄 모르고, 남의 지배를 받는 데는 극도로 완강하여, 항상 자신의 결정을 관철시키려 애쓰며, 타인에게 양보하는 데는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구원의 조언을 받아들일 능력을 상실한 그녀는 장로들의 이성적인 판단보다 자신의 의견만을 더 신뢰하게 된다.

20. 이러한 타락의 단계들을 거쳐, 한 번 교만에 사로잡힌 자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며, 이미 엄격한 공동체 규율로부터 공포에 질려 등을 돌리고, – 자신이 완전함을 향한 길에서 별로 진전을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형제들과의 교제가 이를 방해하기 때문이며, 인내와 겸손을 쌓는 데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타인의 탓이자 그들이 만든 장애물 때문이라고 여기며, – 고독한 방에서 살고자 하는 욕망을 품거나, 심지어 많은 이들을 엄격한 삶으로 이끌기 위해 별도의 수도원을 세우려 시도하며, 자신의 가르침과 지도를 따라야 할 이들을 서둘러 모으려 한다. 이로써 그는 무능한 제자에서 가장 무능한 스승으로 변모하게 된다.

21. 그러므로 우리의 건물이 가장 높은 곳까지 솟아오르고 하나님께 기쁨이 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자기 만족적인 뜻에 따라가 아니라 정확한 복음의 가르침에 따라 그 기초를 놓도록 노력해야 한다. 복음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러한 기초는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온유함과 순수함에서 비롯된 겸손 외에는 아무것도 될 수 없다. 그러나 겸손은 모든 것에서 벗어남 없이는 얻을 수 없는데, 이를 벗어남 없이는 선한 순종이나 굳건한 인내, 흔들리지 않는 온유함, 완전한 사랑 어느 것에도 결코 굳건히 설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없이는 우리 마음이 결코 성령의 거처가 될 수 없으니, 주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다음과 같이 선포하신 바와 같습니다. “내가 누구를 바라보겠느냐? 오직 온유하고 침묵하며 내 말씀을 경외하는 자를 바라보리라”(시편 66:2).

22. 합법적으로 영적 수련을 하며 주님으로부터 상을 받고자 하는 그리스도의 전사는, 모든 미덕을 삼켜 버리는 이 가장 사나운 짐승을 온갖 방법으로 근절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짐승이 마음속에 있는 한, 그는 모든 정욕에서 벗어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조금이라도 미덕을 얻게 된다 해도 그 독으로 인해 그 미덕마저 망가질 것임을 확신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영혼 속에 미덕의 건물을 세울 수 있는 길은, 먼저 우리 마음속에 참된 겸손의 기초를 놓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이 기초는 가장 견고하게 다져져야만, 그 위에 세워진 완전함과 사랑의 건물을 끝까지 굳건히 지탱해 줄 수 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우선 형제들 앞에서 진심 어린 태도로 참된 겸손을 드러내야 하며, 그들을 슬프게 하거나 모욕하는 일을 결코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모든 소유욕에서 완전히 벗어남으로써 이루어지는 진정한 모든 것의 포기함이 우리 안에 깊이 뿌리내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를 결코 실천할 수 없습니다; 둘째로, 마음의 순수함 속에서 어떤 위선도 없이 순종과 복종의 멍에를 짊어져야 하며, 아바의 “ ”라는 계명 외에는 그 어떤 다른 뜻도 결코 우리 안에 깃들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는 이 세상에 대해 스스로 죽은 자로 여길 뿐만 아니라, 자신을 어리석고 우둔한 자로 여기며, 장로들이 명령하는 모든 것을 아무런 고민 없이, 그것이 모두 거룩하며 하나님께서는 직접 계시하신 것이라고 믿음으로 행하는 자 외에는 누구도 지킬 수 없는 일이다.

23. 우리가 이러한 마음가짐을 유지할 때, 그 뒤를 이어 의심할 여지 없이 그토록 평온하고 변함없는 겸손의 상태가 따를 것이니, 우리 자신을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낮은 자로 여기며, 아무리 부당하고 모욕적이며 심지어 해로운 일이라 할지라도 우리에게 가해지는 모든 것을 가장 인내심 있게 견뎌낼 것이며, – 마치 그것이 우리 상급자 아버지들로부터 (순종이나 시련으로서) 우리에게 부과된 것처럼 여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과 모든 성인들의 수난을 끊임없이 기억하고 마음에 새긴다면, 그러한 모든 것을 쉽게 견딜 뿐만 아니라 사소하고 하찮은 것으로 여길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때 우리가 겪는 억울한 모욕은, 우리가 그들의 위대한 업적과 풍성한 삶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에 비례하여 우리에게 훨씬 더 가볍게 느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비롯되는 인내에 대한 고무력은, 우리가 머지않아 이 세상을 떠나고, 생명이 끝나는 대로 즉시 그들의 복락과 영광에 동참하게 될 것임을 생각할 때 더욱 강해질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교만뿐만 아니라 모든 정욕을 파괴합니다. 그 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이러한 겸손을 굳건히 지켜야 합니다. 즉, 그분의 도움과 은총 없이는 우리 스스로 미덕의 완성에 관한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다는 확신을 품고, 우리가 간신히 깨달은 그 것조차도 그분의 선물임을 진심으로 믿는다면, 우리는 이를 실천하게 될 것입니다.

 

6. 생각과의 투쟁, 그리고 이를 통해 악령들과의 투쟁

1. 질문. 아무리 노력해도 집중력을 유지하는 데 아무런 진전이 보이지 않습니다. 마음이 방황하는 것을 도저히 막을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마음이 공감하며 특정 명상에 몰입하고 있다고 느낄 때조차, 마음은 무감각하게 그곳에서 떨어져 나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평소의 방황으로 빠져듭니다. 그렇게 매일 셀 수 없이 많은 횟수 동안 마음은 이리저리 떠도는 생각에 사로잡혀 포로가 됩니다. 그래서 이 무력함을 언젠가 고치고자 하는 희망조차 절망으로 변하고, 영혼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 순간 빠른 날개로 방황을 거듭하는 것을 볼 때, 이 일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헛된 수고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녀를 영적 관상으로 이끌어도, 그녀는 그곳에 자리를 잡기도 전에 다시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다. 그때, 도망치려는 그녀의 의도를 미리 간파하고, 가장 초기에 그녀를 붙잡아 다시 그녀가 물러서기 시작한 관상 속으로 끌고 가며, 마치 어떤 밧줄로 묶듯이 마음의 가장 집중된 주의력으로 그녀를 묶어두려 할 때, 그녀는 바로 그 노력하는 순간에 낚시꾼의 손에서 미꾸라지가 빠져나가듯 내면의 성소에서 더 빨리 빠져나가 버린다. 매일 온 힘을 다해 생각을 붙잡으려 애쓰면서도 아무런 성과도 보지 못하면, 무의식중에 ‘이러한 생각의 방황은 우리 탓이 아니라, 분명 이것이 바로 우리의 본성인 것이다’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저서 7, 3).

2. 사건을 제대로 조사하지도 않고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는 것은 위험하다. 자신이 무력하거나 능력이 부족하여 어떤 일에 성공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런 성공이 누구에게도 불가능하다고 단정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이는 마치 헤엄칠 줄 모르고 인위적으로 물 위에 떠 있는 사람이, 자신의 몸이 무거워서 물 위에 떠 있을 수 없으니 모든 사람의 몸도 자신과 같으므로 누구의 몸도 물 위에 떠 있을 수 없고, 따라서 아무도 헤엄칠 수 없다고 결론 짓는 것과 같다. 즉, 몸의 본성상 헤엄칠 수 없다는 것이다. 그에게 그런 결론이 아무리 옳게 보일지라도, 경험은 이를 뒷받침하지 않는다. 당신의 판단도 마찬가지다. 우리 마음은 본성상 한가하게 있을 수 없다; 사전에 미리 준비해 둔 대상, 즉 자신의 움직임을 연습하고 끊임없이 다룰 대상이 없다면, 본성상 활동적인 마음은 이리저리 도망치고 사방으로 날아다니게 마련이다. 그러다가 오랜 연습과 꾸준한 숙달을 통해 — 여러분이 헛된 수고라고 부르는 바로 그 과정을 통해 — 경험을 통해 자신의 지칠 줄 모르는 비행 속에서 그 주위를 맴돌기 위해 기억 속에 어떤 소재들을 준비해야 하는지, 그리고 이 수고에 끊임없이 몰두함으로써 이전에는 나를 산만하게 만들었던 적의 반대되는 유혹을 물리칠 힘을 얻어, 그로 인해 자신이 원하는 상태(동요하지 않는 마음과 내면의 평온)에 확고하게 머물 수 있게 되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생각의 무질서한 방황이라는 변덕스러움을 인간의 본성이나, 그 본성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돌리면 안 된다. 성경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바르게 지으셨으나, 이 사람들(인간)은 많은 생각들을 추구하였다”(전도서 7, 30)는 것이 진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각의 질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주님, 주님께 의지할 곳이 있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그 마음속에 주님께로 향하는 생각을 두소서”(시 83, 6). 보시다시피, 우리에게는 마음속에 ‘올라가는 생각’, 즉 하나님께 이르는 생각을 품을지, 아니면 ‘내려가는 생각’, 즉 아래로, 세속적이고 육신적인 것들로 향하는 생각을 품을지 결정할 권한이 있습니다. 만약 생각이 우리 손에 달려 있지 않았다면,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해 “왜 너희는 마음속으로 악한 생각을 하느냐”(마태복음 9:4)라고 책망하지 않으셨겠습니까? 또한 선지자들을 통해 “너희의 악한 생각을 내 눈앞에서 치워라”(이사야 1, 16)라고 명하시지도 않았을 것이며, “네 속의 악한 생각이 언제까지나 머무를 것인가”(예레미야 4, 14)라고 말씀하시지도 않았을 것이다. ( – 소집 7, 4).

3. 많은 헛된 생각들이 심지어 우리의 의지와는 반대로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가 거의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를 현혹시키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들은 너무나 눈에 띄지 않게, 교묘하게 우리 안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우리는 그 침입을 막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알아차리기도 매우 어렵다; 그러나 그것들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그에 대한 노력과 힘을 기울이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가능하다. 그것들이 생겨나는 것이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처럼, 그것들을 거부하거나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의 의지에 달려 있다. 그나저나 생각들이 솟아나는 것 자체를 전적으로 생각의 침입이나, 그러한 생각들을 심으려 애쓰는 영들의 탓으로만 돌릴 필요는 없다. 그러나 생각의 성질을 바로잡고, 우리 마음속에 육신적이고 세속적인 생각 대신 영적이고 거룩한 생각들이—항상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대부분은—솟아나게 하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누군가 성경을 현명하고 꼼꼼하게 연구하고, 시편과 찬송을 실천하며, 금식과 기도를 지속하고, 미래—천국과 불타는 지옥—과 하나님의 모든 일을 끊임없이 기억할 때, 그때 악한 생각은 줄어들고 드물게 나타납니다. 반대로 세속적인 걱정과 육체적인 일에 몰두하고, 헛되고 쓸데없는 대화에 빠져들면, 그때 우리 안의 나쁜 생각들은 더욱 늘어납니다(– 저서 1, 16. 17).

4. 우리 마음의 활동은 물의 거센 흐름에 의해 빠르게 빙글빙글 도는 맷돌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물에 의해 움직이는 맷돌은 결코 회전을 멈출 수 없지만, 밀을 갈 것인지, 보리를 갈 것인지, 아니면 껍질을 빻을 것인지는 관리자의 권한에 달려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도 현세 동안 사방에서 밀려드는 인상들의 흐름에 끊임없이 움직임을 부여받기 때문에, 생각의 동요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중 어떤 것을 받아들이거나 내면화할지는 우리의 의지와 판단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앞서 말한 대로 끊임없이 성경을 연구하고, 기억을 영적인 주제로 채우며, 완전함에 대한 열망과 미래의 복을 얻으리라는 희망을 키운다면, 그로부터 영적인 생각이 솟아나고, 우리의 마음은 우리가 깊이 탐구했던 주제들에 대해 끊임없이 묵상하게 될 것이다. 반면, 부주의와 게으름으로 인해 정욕의 대상과 헛된 대화에 몰두하거나, 세속적인 염려와 헛된 걱정들에 빠져든다면; 그러면 그 본성에 따라 나중에 생각들도 가라지처럼 생겨나, 우리 마음에 해로운 일을 일으키게 될 것이니, 이는 구세주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다. “너희의 행실과 주의가 어디에 있는가, 거기 너희 마음도 반드시 있을 것이다”(마태복음 6:21). (저작집 1. 18).

5. 우리의 생각에는 세 가지 근원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로부터, 마귀에게서,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서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은, 그분께서 성령의 깨달음으로 우리를 찾아오시어, 우리 안에 더 높은 성취를 향한 열정을 불러일으키시거나, 미흡한 성과와 게으름 및 안일함에 대한 회개를 일으키실 때입니다. 또는 하늘의 비밀을 우리에게 열어 주시고, 우리의 뜻을 더 나은 행실로 돌리실 때입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왕에게 기록된 책들을 찾아보도록 감동을 주셨고, 그는 그 책들을 통해 모르드개의 선행을 알게 되자, 즉시 유대 백성을 학살하겠다는 자신의 잔혹한 결정을 철회했습니다(에스더 6장). 사도들에게도 다음과 같이 약속되었습니다. “너희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 아버지께서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것이다”(마태복음 10:20). – 악마에게서 비롯되는 생각들은, 그가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시도할 때, 이를 통해 정욕적인 쾌락을 불러일으키거나, 교활한 간계로 선의 탈을 쓴 악을 제시하며, 우리 앞에서 “빛의 천사”로 “변장”할 때 나타납니다(고린도후서 11:14). 그리하여 그는 “유다 이스카리옷의 마음에 주님을 배반할 생각을 심어주었으며”(요한복음 13, 2), 아나니아에게는 “성령께 거짓말을 하도록”(사도행전 5, 3) 만들었습니다. – 우리가 보고, 듣고, 행했던 것을 자연스럽게 떠올릴 때, 우리 자신 안에서 생각이 생겨납니다(– 『교리문답』 1.19).

6. 우리는 이 세 가지 생각의 원인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하며, 이를 바탕으로 우리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판단하고 그에 따라 적절히 대처해야 한다. 이 점에 있어 우리는 숙련된 화폐 감정가(환전상)들을 본받아야 한다. 그들은 동전에 금이 들어 있는지, 순금인지, 아니면 금과 광택이 비슷한 구리인지, 왕의 초상이 새겨져 있는지, 새겨져 있다면 그것이 합법적으로 표현되었는지, 또한 동전의 무게가 법정 무게를 충족하는지 정확히 판별할 줄 안다. 이와 유사한 모든 것을 영적인 차원에서 우리의 생각에 대해 실천해야 한다. 우선, 우리 마음에 들어온 것이 진실 한 것인지 아닌지를 논의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교리가 제시된다면, 그것이 성령의 신성한 불로 정화되었는지, 아니면 유대인의 미신에 속하는지, 혹은 세속적인 오만한 철학에서 비롯되어 단지 경건함의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인지 살펴봐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사도들의 가르침, “모든 영을 다 믿지 말고, 그 영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시험하라”(요한일서 4:1)를 실천하게 될 것이며, 진리에서 벗어나는 일로부터 안전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고를 따르는 데 소홀했던 자들은 신앙에서 비참하게 이탈하는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달콤한 말로 유혹하는 자들은 처음에 성스러운 신앙과 일치하는 경건한 감정과 사색으로, 마치 금의 반짝임처럼 그들을 자신들에게 끌어들였고; 그 후 신앙에 반하는 사색들을 가르쳤는데, 그들은 처음의 그럴듯한 외관에 속아 이를 토론의 대상으로 삼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고, 이처럼 가짜 구리 동전을 금으로 착각하여 이단적인 오류에 빠지게 되었다. – 둘째로, 우리는 성서 해석에 거짓된 해석이 섞여 있지 않은지 세심하게 살펴봐야 한다. 그러한 해석은 신성한 말씀에 대한 올바른 이해라는 순금인 척 위장하여, 이 귀금속의 외관으로 우리를 속여, 구리가 섞인 거짓된 의미를 받아들이게 하려 한다. 사탄은 바로 이런 방식으로 구세주 그리스도께서도 유혹하려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는 우리 모두를 유혹하고 있으며, 우리 주님을 유혹했을 때처럼 이미 적지 않은 성공을 거두고 있습니다. – 셋째, – 원수가 성서의 귀중한 말씀들을 교활한 해석으로 왜곡하여, 마치 장로들에게서 비롯된 전승인 양 속임수로 위장하고, 마치 위조 화폐에 왕의 인장을 불법적으로 찍어 넣듯이, 우리가 그 말씀들을 올바르지 않게 적용하고 사용하도록 유인하지 못하도록 온갖 방법으로 주의 깊게 살피어야 한다. 그는 우리를 절제하지 못하고 감당할 수 없는 수고, 과도한 철야 기도, 무질서한 기도, 부적절한 성경 읽기로 유혹하여, 선한 것으로 미끼를 던지며 영혼에 해로운 결말로 이끌 때, 혹은 불필요한 방문을 하도록 권유하여 은둔처에서 쫓아내어 복된 고요함을 빼앗을 때, 혹은 경건하지만 도움이 필요한 여성들을 돌보라고 주입하여 치명적인 걱정으로 얽매이게 할 때; 혹은 많은 이들을 교화한다는 구실로 성직에 대한 열망을 부추겨, 그로 인해 우리의 겸손한 소명에서 벗어나게 할 때. 자비와 경건, 그리고 최고의 성취라는 외피로 가려진 이러한 모든 속삭임은 경험이 부족한 이들을 속인다. 겉보기에는 참된 왕의 동전과 비슷해 보이지만, 그것들은 진정한 영적 주화 주조자들—즉, 정통적이고 경험이 풍부한 성부들이—가 주조한 것이 아니라, 해악과 파멸을 위해 악마들의 교활함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이들에게 잠언의 말씀이 아주 잘 들어맞는다. “사람이 바른 길로 여기는 것이나, 그 끝은 지옥의 깊은 곳으로 이끄는 길이라”(잠언 16:25). – 무게를 측정하는 데 관한 경험 많은 주화 주조자의 마지막(4번째) 관찰은, 우리의 영적 행실에서 다음과 같이 실천될 수 있습니다. 즉, 어떤 생각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하라고 속삭일 때, 우리는 그것을 양심의 저울에 올려놓고, 그것이 진정한 무게를 지니고 있는지 — 하나님의 두려움으로 무거운지, 그 안에 그 의미와 가치에 따른 모든 것이 담겨 있는지, 허세와 참신함이 그것을 가볍게 만들지는 않는지, 나중에 허영심이 그 무게를 줄이거나 세상의 명성이 그것을 훔쳐가지 않을지. 이 모든 것을 저울에 달아보고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증언으로 확정한 뒤, 우리는 그것을 그들과 일치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거나, 그들과 상반되고 우리에게 해로운 것으로 엄격히 배척해야 한다(– 저서 1. 20. 21).

7. 이처럼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마음의 모든 은밀한 곳을 살피고, 예리한 관찰력으로 들어오는 자들의 흔적을 알아차려야 한다. 그래야만 어떤 생각의 야수나, 심지어 사자와 용조차 그곳으로 몰래 스며들지 못하게 하고, 은밀히 그곳에 해로운 흔적을 남기고, 우리가 생각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틈을 타 다른 이들이 우리 마음의 구석구석으로 들어올 길을 닦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이처럼 매시간, 매분마다 복음의 쟁기, 즉 주님의 십자가를 끊임없이 기억함으로써 우리 마음의 땅을 갈아엎는다면, 우리는 해로운 짐승들의 소굴과 독사들의 굴을 쉽게 파괴하고, 그것들을 우리 안에서 쫓아낼 수 있을 것이다 (– 소집 1, 22).

8. (자신의 생각을 다스리는) 완전한 마음의 모습은 복음서에 등장하는 백부장의 인물을 통해 훌륭하게 드러난다. 그에 관한 이야기에서, 어떤 생각이 떠오르더라도 그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판단에 따라 선한 것은 받아들이며, 그와 반대되는 것은 아무런 어려움 없이 물리칠 수 있게 해주는 도덕적 힘은, 비유적으로 해석할 때 그의 다음 말에서 묘사되어 있다: “나도 사람으로서 지배를 받는 자이지만, 내 밑에 군인들을 거느리고 있으니, 한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다른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오며, 내 종에게 ‘이것을 하라’ 하면 한다”(마태복음 8,9). 만약 우리도 무질서한 내면의 움직임과 정욕에 맞서 용감하게 싸우며, 그것들을 우리의 권세와 이성에 복종시킬 힘을 얻고, 우리 육신 안에서 전쟁을 벌이는 정욕을 잠재우며, 무질서한 생각의 무리를 이성의 권세 아래 묶어 두고, 주님의 구원의 깃발인 십자가로 우리 마음의 경계에서 가장 사악한 적의 세력들이 모여든 무리를 쫓아낸다면, 그러한 승리와 영광으로 인해 우리는 영적인 의미에서 백부장의 지위에 오르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도 그러한 존엄의 높이에 올라, 그와 같은 지배적인 권세와 힘을 갖게 될 것이며, 그 힘으로 인해 더 이상 원치 않는 생각들에 휩쓸리지 않고, 영적으로 기쁨을 얻는 생각들 속에 머물며 그 생각들에 깊이 몰입할 수 있게 될 것이며, 악한 유혹들에게 권위 있게 명령하여: “물러가라” 하면 물러갈 것이며, 선한 생각들을 초대하여: “오라” 하면 올 것이며, 우리의 종인 육신에게 정결함과 절제를 위해 필요한 것을 명령하면, 그것은 아무런 반항 없이 이를 이행할 것이며, 더 이상 영에 반하는 타락한 욕망을 일으키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온전한 복종을 나타낼 것입니다( – 소브. 7, 5).

9. 그러나 이를 어떻게 이룰 수 있겠는가? 우리가 하나님과 그토록 진심으로 연합하여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때, 이는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다. 사도는 “우리의 싸움의 무기는 육신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강력한 것이니, 우리는 굳건히 서서 악한 생각을 무너뜨린다”(고린도후서 10, 4)라고 말함으로써 이를 확증한다. 우리가 어떤 생각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연합하셔서 그 일을 통해 직접 역사하시기 전까지는 효과가 없을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의 미약한 수단들도 강해지고 모든 것을 이길 수 있게 되어, 원수의 요새를 무너뜨리고 온갖 생각을 쳐부수어 쫓아낼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안에서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약한 자가 말하기를 ‘나는 할 수 있다’(나는 강하다) 하라”, “온유한 자가 용감해지라”(요엘 3:10, 11) – 그리고 성 바울이 자신에 대해 말한 바와 같이, “내가 약할 때에 강하노라” (고린도후서 12:10). 이는 그때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연약함 속에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9). 그러므로 마음의 온 정성을 다해 주님과 하나 되기를 갈망합시다. 그리하여 우리 안에서도 복자 “내 영혼이 주님을 사모하나이다.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들어 주시나이다”(시 62,9)라고 했던 그 경험이 우리 안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그리하여 우리 각자가 그와 함께 “나에게 있어서는 하느님께 붙어 있는 것이 복이니이다”(시 72,28)라고 노래하기 시작하리라. 물론 이는 끊임없는 노력과 수고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이것 없이는 어떤 일에서도 성공할 수 없습니다. 하물며 이처럼 중요한 일에서 성공을 기대할 수는 더욱 없습니다. 어떤 미덕도 수고 없이는 완전함에 이르지 못하며, 마음의 생각이 온유해지는 경지에 이르기까지 누구도 마음의 극심한 수고 없이는 이를 이룰 수 없다. 여기에는 주님의 말씀이 직접적으로 해당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힘써 빼앗는 자들이 차지할 것이요, 힘쓰는 자들이 그것을 빼앗을 것이라” (마태복음 11,12). 우리 영이 “그리스도의 온전한 사람, 곧 그리스도의 완전한 나이에 이르도록”(엡 4:13) 하고, “주님과 한 영이 되도록”(고전 6:17) 하려면, 큰 긴장감을 가지고 항상 깨어 있으며 끊임없는 열정으로 이에 매진해야 한다. 이 경지에 이르면 그는 사도와 함께 당당히 외칠 수 있다. “나를 굳건하게 하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노라”(빌 4,13). ( – 『소브』 7, 5장, 6장에서 인용).

10. 왜 우리의 모든 주의는 항상 그 한 가지, 즉 방황하고 맴도는 생각들을 신속히 하나님에 대한 기억으로 되돌리는 데 집중되어야 하는가. 마치 돔의 아치를 정확하게 세우고 위쪽에서 합치기를 원하는 사람이, 중심에서 줄을 이용해 건축물을 끊임없이 원형으로 감아 돌리며, 그로써 돔의 둥근 형태가 곳곳에서 균일한 방향을 갖도록 하는 것처럼; 이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그런 일을 시도하는 사람은, 아무리 뛰어난 기술을 지녔다 해도 둥근 형태의 정확성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으며, 앞서 말한 정확성의 지표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한눈에 얼마나 벗어났는지 파악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도, 만일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기억을 마치 어떤 움직이지 않는 중심처럼 확고히 세운 뒤, 그곳에서 출발하여, 매 순간 모든 행실과 수고를 그 중심을 기준으로 삼아, 이를 척도로 삼아 생각과 행위의 질을 판단하여 어떤 것은 받아들이고 어떤 것은 버리며, 또한 이를 정확한 원형자처럼 삼아 행하는 모든 일에 방향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그렇지 않으면 건축가인 바울(고린도전서 3:10)이 설계한 그 영적 건물을 마땅히 세워낼 수 없을 것이며, 주님을 위해 자신의 마음속에 지으려 했던 그 집의 아름다움을 그분께 전할 수 없을 것입니다. 복된 다윗은 이를 갈망하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주여, 내가 주의 집의 아름다움과 주의 영광이 거하시는 곳을 사랑하나이다” (시 25:8), 그러나 마음속에 아름답지 않고 성령님께 합당하지 않으며 언제나 무너질 준비가 된 집을 무의미하게 세우게 될 것이며, 기대했던 분으로부터 영광을 얻기는커녕, 그러한 거처에 들어오실 자격이 없는 방문자(즉, 성령)에게서 영광을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건축물이 무너진 잔해 아래 짓눌려 비참하게 될 것이다 (– 『대담』 24, 6).

11. 어두운 세력들은 주로 생각을 통해 우리에게 작용하며, 물론 우리를 적대시하는 이 적들이 끊임없이 그리고 적지 않은 수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지 않았다면 우리가 그들을 다루는 것이 더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이 적들은 확실히 끊임없이 우리에게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리지만, 그들은 단지 우리 안에 악을 뿌리고 부추길 뿐, 그것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만약 그들에게 단지 나쁜 생각을 심어주는 것뿐만 아니라 강제로 그쪽으로 이끌 권능이 주어졌다면, 그들이 우리 마음속에 어떤 죄악적인 욕망을 불태우고자 하더라도, 그 누구도 그로 인한 죄를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를 부추길 수 있는 허락이 주어진 만큼, 우리에게도 그러한 부추김을 물리칠 힘 과 그에 동의할 자유가 주어졌음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 그러나 만일 누군가 그들의 폭력과 공격을 두려워한다면, 우리는 그 반대편에서 하나님의 보호와 하나님의 도움을 제안한다. 그 도움은 그들보다 더 강력하니, “세상에 있는 것보다 너희 안에 계신 분이 더 크시다”(요한일서 4:4)라고 말하듯이, – 그분의 중보하심은 원수 편이 우리를 대적하는 어떤 힘보다도 비교할 수 없이 더 큰 힘으로 우리를 위해 싸워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한 일을 마음속에 불어넣어 주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보호하시고 끝까지 이루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의 의지나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결론은, – 스스로 마귀에게 자신의 뜻을 허락하고자 하는 자 외에는 아무도 마귀에게 미혹될 수 없다는 것이다. 전도서가 다음과 같은 말로 이를 분명히 표현했다.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곧바로 책망이 따르지 아니하리니, 이로 말미암아 사람의 마음이 악을 행하려 함을 확신하느니라”(전도서 8, 11).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은, 악한 생각이 그를 덮칠 때 즉시 반박으로 맞서지 않기 때문임이 분명하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희에게서 도망하리라”(야고보서 4, 7)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 – 대화록 7, 8).

12. 어떤 이들은 이 악한 영들이 어떻게 영혼과 교감하는지, 즉 감각적으로 영혼과 대화하지 않으면서도 원하는 대로 영혼에 심어주고, 영혼의 생각과 움직임을 꿰뚫어 보며 이를 이용해 영혼에게 해를 끼치는지에 대해 의아해할 수 있다. – 그러나 여기에는 놀라운 점이 전혀 없다. 영은 다른 영과 교감할 수 있으며, 그에게 바람직한 것을 심어줌으로써 은밀히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 사이에는, 사람들 사이와 마찬가지로, 본성상 일종의 유사성과 친화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서로에게 들어가 서로를 지배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이는 오직 신성(神性)에게만 진정으로 귀속될 수 있다(– 저서 7, 9. 10).

13. 앞서 말한 내용과 전혀 모순되지 않는 것은, 귀신 들린 자들에게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들은 부정한 영에 사로잡혀 원치 않는 말과 행동을 하며, 이해하지 못하는 말을 내뱉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때 모든 사람이 똑같은 방식으로 영들의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어떤 이들은 그들에게 완전히 지배당하여 자신이 무엇을 하거나 말하는지 전혀 자각하지 못하는 반면, 다른 이들은 자각하고 나중에 그 일을 기억하기도 한다. 이 두 가지 모두 부정한 영의 유혹에서 비롯되지만, 그 영이 영혼의 본질 자체에 침투하여 마치 영혼과 합쳐지거나 영혼을 감싸는 것처럼, 고통받는 이의 입을 통해 말과 말을 내뱉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결코 그런 일을 할 수 없다. 이는 불결한 영이 영혼이 작용하는 신체 부위에 자리 잡고, 그곳에 견딜 수 없는 무거운 짐을 얹음으로써, 끔찍한 어둠으로 영혼의 이성적 감각을 가리고 그 활동을 차단하기 때문이다(이러한 활동 기관의 억제를 통해). 우리가 보듯이, 이는 때로 술 때문이기도 하고, 열병이나 지나친 추위, 그리고 외부에서 비롯된 다른 질병들 때문이기도 하다. 그의 육체에 대한 권세를 얻은 마귀가 복된 욥에게도 똑같은 일을 저지르려 하지 못하도록, 주님께서는 특별한 명령으로 이를 금하시며 말씀하셨다. “보라, 내가 그를 네 손에 넘겨주겠으니, 다만 그의 영혼만은 보존하라” (욥기 2:6), 즉 영혼의 거처를 뒤흔들고, 그의 이성을 침범하며, 그(욥)가 너에게 대항하는 데 필요한 이성의 기관을 손상시켜 그를 미치게 만들지 말라는 뜻이다(– 소브. 7, 12).

14. 그러나 영이 이러한 방식으로 이 거칠고 단단한 물질, 즉 육체와 어설프게나마 융합된다고 해도 – 이는 매우 편리할 수 있겠지만 – 그렇다고 해서 영이 또한 영인 영혼과도 결합하여, 육체와 마찬가지로 영혼을 자신의 존재를 담는 그릇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결론은 도출되지 않는다. 이는 오직 삼위일체만이 가능한 일로, 그분은 모든 이성적인 존재를 포용할 뿐만 아니라 그 안으로 스며드십니다. 오직 한 분의 하나님께서는 어디에나, 모든 것에 계셔서, 우리의 모든 생각과 내면의 모든 움직임, 그리고 영혼의 모든 은밀한 곳까지 보십니다. “그분께 숨겨진 피조물은 하나도 없으며, 모든 것이 그분의 눈앞에 드러나고 열려 있다”(히 4,13), 그리고 “그분은 마음과 속사람을 의롭게 시험하신다”(시 7,10). (– 소집 7,13).

15. 그런데 어떻게 더러운 영들이 우리의 생각을 알 수 있는가? – 그들은 영혼 속에서 직접 그 생각을 읽어내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감각적 징후, 즉 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해 드러나는 것을 통해 알아차린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영혼 깊은 곳에서 밖으로 나오지 않은 생각들 속으로는 결코 침투할 수 없다. 심지어 그들이 심어 놓은 생각들이 받아들여졌는지, 그리고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에 대해서도, 그들은 영혼 자체에서나, 그로 인해 영혼 내부에서 은밀하게 일어나는 가장 내밀한 움직임들을 통해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영혼 밖에서 드러나는 징후들을 통해 알아낸다. 예를 들어, 탐식을 부추기는 생각을 심어 놓았을 때, 수도사가 창밖이나 태양을 바라보거나, 지금 몇 시인지 묻는 것을 보면, 그들은 이를 통해 탐식적인 욕망이 받아들여졌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공중의 세력들이 이와 같은 것들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현명한 사람들도 눈과 얼굴, 그리고 다른 외적인 징후를 통해 사람의 내적 상태를 알아차릴 수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영혼들처럼 의심할 여지 없이 사람들보다 훨씬 더 미묘하고 통찰력이 뛰어난 존재들이라면 이를 훨씬 더 정확하게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저서 7, 15).

16. 모든 악령이 사람 안에서 모든 정욕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며, 각 정욕마다 특정한 영들이 관여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 중 어떤 자들은 불결하고 수치스러운 정욕을 즐기며, 어떤 자들은 신성모독을 좋아하고, 어떤 자들은 분노와 격노를, 어떤 자들은 슬픔을, 또 어떤 자들은 허영과 교만을 즐기기 때문이며, – 각자는 자신이 특히 즐기는 그 정욕을 인간의 마음에 심어주지만, 그러나 그들이 모두 함께 자신의 정욕을 부추기는 것은 아니며, 때와 장소, 그리고 유혹받는 이의 수용도에 따라 번갈아 가며 그렇게 한다(– 저서 7, 17).

17. 또한 그들 모두가 똑같은 정도로 악하거나 똑같이 강력하지는 않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초심자와 연약한 자들에게는 가장 약한 영들이 먼저 공격해 오며, 이들이 패배하면 그때서야 가장 강한 영들이 보내진다. – 그리고 이러한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전사는 자신의 성장과 영적 힘의 증대에 따라 점차 더 강력해지는 싸움을 견뎌내야 한다. 만약 우리의 전투에 항상 우리 곁에 계셔서 가장 자비로우신 중보자이자 용기를 주시는 그리스도께서 계시지 않으셨다면, 성도들 중 그 누구도 그토록 많은 적들의 악랄함을 견뎌내거나, 그들의 중상과 사나운 분노에 맞서 버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싸우는 자들의 힘을 균등하게 맞추어 주시지 않으시고, 적들의 무질서한 습격을 물리치고 억제해 주시지 않으시며,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시험과 시련을 주시는” (고린도전서 10:13) 분이 아니셨다면 말입니다. ( – 저서 7, 20).

18. 악령들이 모든 사람에게 해를 끼칠 권세가 없다는 사실은, 원수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허락된 범위 이상으로 감히 시험하지 못했던 복된 욥의 사례가 가장 명확하게 증명해 주며, 복음서에 기록된 악령들의 고백 또한 이를 증언하고 있다: “우리를 쫓아내시려면, 돼지 떼 속으로 보내 주십시오” (마태복음 8, 31). 하물며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불결하고 말 못하는 동물들 속에도 들어갈 권세가 없었던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어떤 사람 안에도 제멋대로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더욱 믿어야 한다. 만약 그들에게 마음대로 모든 사람을 유혹하고 악하게 만들 권세가 주어졌다면, 어린 수도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온전한 성인들조차도 그런 무리와 사악한 적들에게 둘러싸인 채 광야에서 살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 저서 7, 22).

19. 또한 더러운 영들이 자신들에게 사로잡힌 자들의 몸에 들어가는 것은, 미리 그들의 마음과 생각을 장악한 뒤에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사실도 알려져 있다. 그들을 미리 하나님의 두려움과 하나님에 대한 기억, 그리고 영적 가르침으로부터 멀어지게 한 뒤, 악령들은 마치 무장 해제되고 하나님의 도움과 보호를 잃어버린 자들처럼 그들에게 대담하게 공격하며, 따라서 쉽게 정복할 수 있는 대상으로 삼고, 마침내 그 안에서 마치 자신들에게 양도된 영토인 양 거처를 마련한다. – 그러나 이보다 더 심하고 과도하게 그들에게 괴로움을 당하는 이들은, 육체적으로는 그들에게 사로잡히지 않았으나 영혼 속에서는 더욱 치명적으로 그들에게 지배당하는 자들, 즉 바로 그들의 정욕과 욕망에 얽매인 자들이다; 사도의 말씀에 따르면, “누구에게 정복당하든지, 그 자의 종이 되는 법”이기 때문이다(베드로후서 2:19), (– 집회 7, 24, 25).

20. 성경은 우리 각자에게 선한 천사와 악한 천사, 이 두 천사가 항상 곁에 있다고 증언한다. 선한 천사들에 대해 구세주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멸시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있느니라” (마태복음 18, 10), – 그리고 복자 다윗 성인은 “주님을 경외하는 자들 주위에 주님의 천사가 진을 치고 그들을 구원하시리라”(시편 33, 8)라고 말씀하셨으며,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에 대해 “그에게는 천사가 있다”(12, 15)고 기록된 것 또한 이를 증언합니다. 이 두 천사에 대해서는 『목자』라는 책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 또한 복자 욥에게 접근을 요청했던 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면, 그가 항상 욥을 헐뜯었지만 결코 그를 죄로 이끌지 못했던 자였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께 욥에 대한 권세를 구했던 것이니, 그동안 자신이 욥의 덕행 때문이 아니라, 항상 주님의 보호막으로 그를 감싸주셨던 주님의 중보 덕분에 이겨내지 못했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유다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마귀가 그의 우편에 서게 하소서”(시 108:6). (– 집 8, 17).

 

7. 온갖 종류의 재앙과 역경으로 인한 고통과의 투쟁

1. 팔레스타인, 예루살렘과 사해 사이의 광야에서 야만인들이 수도사들을 갑자기 습격하여, 매우 많은 이들을 학살했다. 하느님께서 어찌하여 당신의 종들에게 이러한 악행을 저지르게 내버려 두셨는가? – 이 질문은 대개 믿음과 지식이 부족한 자들의 마음을 동요시키곤 하는데, 그들은 성인들의 덕행과 위업이 이 일시적인 현세 생활의 짧은 기간 동안 보상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의 말대로 “이 육신에만 소망을 두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비참한 자가 되지 않도록” (고린도전서 15:19), 그러한 견해에 현혹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사건들에 관한 진리의 올바른 정의를 알지 못해, 유혹에 빠지게 될 때, 그 유혹에 우리가 스스로 사로잡혀 있음을 보고 공포와 혼란에 빠지더라도, 우리가 의의 길에서 발을 옮기지 않도록(시편 72:2), – 혹은, 말하기조차 두렵지만, 마치 “거룩하고 의롭게 사는 사람들을 유혹에서 구원해 주지 않으시고, 선한 자에게는 선으로, 악한 자에게는 악으로 이 세상에서 갚아 주지 않으신다”는 이유로, – 그리하여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소포니아가 경고한 자들과 함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음속으로 ‘주님께서 선을 행하실 것도 없고, 악을 행하실 것도 없다’고 말하는 자들에게 내가 보복하리라” (소포니아 1, 12), 혹은 “악을 행하는 자마다 주님 앞에서 선한 자요, 주님께서 그들을 기뻐하시니, 정의의 하나님은 어디 계시냐?(말라기 2, 17)라고 불평하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지 않게 하실 것인가? 여기에 더해, 선지자가 그 뒤에 묘사한 그 신성모독도 덧붙이자면: “우리가 헛되이 하나님을 섬겼고, 더 나아가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전능하신 주님의 면전 앞에서 기도하며 걸어왔다는 것이 무엇이냐? “이제 우리는 낯선 자들을 축복하고, 불법을 행하는 자들은 모두 번영하며, 하나님께 대적하고도 구원을 얻는다” (말라기 3, 14. 15). –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지극히 터무니없는 오해의 뿌리이자 원인인 무지를 피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참으로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미리 명확히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해 군중의 그릇된 견해가 아니라 성경의 참된 정의를 마음에 새긴다면, 우리는 결코 불신자들의 오해에 현혹되지 않을 것입니다.

2.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과 일어나는 모든 일은 세 가지, 즉 선, 악, 그리고 중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이 무엇인지, 악이 무엇인지, 그리고 중도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올바른 지식으로 무장된 우리의 믿음이 모든 유혹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서 있을 수 있다. 인간의 일에서, 오직 하나의 영적 미덕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본질적인 선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이 미덕은 진실한 믿음으로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며, 변함없는 이 선에 끊임없이 매달리게 한다. 반대로, 오직 하나의 죄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악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이 죄는 우리를 선하신 하느님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악한 마귀와 결속시킨다. 중립적인 것은, 그것을 누리는 이의 성질과 처지에 따라 어느 한쪽 편에 속할 수도 있는 것으로,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부, 권력, 명예, 육체적 힘, 건강, 아름다움, 생명 그 자체나 죽음, 가난, 육체의 연약함, 모함 등 이와 유사한 것들은, 그것을 누리는 사람의 성품과 태도에 따라 선을 위해 쓰일 수도 있고 악을 위해 쓰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부도 종종 선을 위해 쓰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이 세상의 부자들에게 선한 일에 부유해지고, 관대하며, 남을 대할 때 친절하게 하여, 장래를 위한 선한 기초를 쌓아 영생을 얻게 하라”고 명령했다(딤전 6, 17–19)라고 하셨듯이, 부는 종종 선을 위해 쓰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색한 자들이 그러하듯, 단지 모으기만 하고 땅에 묻어 두거나, 궁핍한 이들을 돕기보다는 사치와 쾌락에 낭비할 때, 그것은 다시 악으로 변합니다. 또한 권세와 명예, 육체적 힘과 건강은 중립적이며 양쪽 모두에게 유익하다는 사실은, 구약의 많은 성도들이 이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하나님께 크게 기쁨을 드렸다는 사실로 이미 쉽게 증명된다. 반대로, 이러한 축복을 잘못 사용하여 자신의 악한 욕망을 충족시키는 데 쓴 자들은 불의하게도 처벌을 받거나 사형에 처해졌는데, 이는 열왕기서에 자주 기록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그 밖의 중립적인 것들에 대해서도, 그것들이 오직 미덕에만 있는 진정한 선은 아니며, 오히려 중간적인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의로운 자들, 즉 의롭고 필요한 일에 그것들을 사용하는 이들에게는 유익하고 선한 영향을 미치며 — 그들에게 영생을 위한 선한 열매를 쌓아둘 기회를 주기 때문이지만 — 반대로 그것들을 잘못 사용하는 이들에게는 유익하지 않고 해로우며, 오직 죄와 죽음으로만 이끌기 때문이다.

3. 사물과 행위의 이러한 차이를 마음속에 확고히 새기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서 비롯되는 미덕 외에는 참된 선이 없으며, 죄와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 외에는 참된 악이 없다는 것을 알고, 이제 온전한 주의를 기울여 다음과 같이 살펴보자. 하나님께서, 스스로 또는 다른 이를 통해 그분의 성도 중 누구에게든 그러한 악을 가하신 적이 있었는지? 이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 없이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그 악을 원하지 않고 저항할 때, 다른 이가 그를 죄로 빠뜨릴 수 있었던 적은 결코 없었기 때문이다. 만일 누군가를 죄로 빠뜨린 일이 있었다면, 그것은 오직 마음의 방종과 타락한 의지로 인해 스스로 그 죄를 품기 시작한 자 한 명뿐이었다. 이와 같이, 마귀가 의로운 욥을 이 악, 즉 죄로 빠뜨리려 했을 때, 그에게 모든 악의 계략을 동원하여—그의 모든 재산을 빼앗고, 자녀들을 죽음으로 치고, 욥 자신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주는 상처로 뒤덮었음에도—어떻게 해도 그를 죄로 더럽힐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일이 닥쳤을 때” 욥은 흔들리지 않았고 “하나님을 모독하지 않았으며”(욥기 1:22), 신성모독으로 기울지 않았기 때문이다.

4.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스스로에 대해 “나는… 평화를 창조하고 재앙을 지으시는 자라”(사 45:7)고 말씀하시며, 선지자는 그분에 대해 “주님께서 행하지 아니하신 재앙이 도시에 있겠느냐”(아모스 3:6) 증언하고 있지 않은가? – 성경은 ‘악’이라는 말로 때때로 비통한 우발적 사건들을 가리키는데, 이는 그것들이 본질적으로 악이기 때문이 아니라, 유익을 얻기 위해 보내진 사람들에게 악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과 대화할 때, 필연적으로 인간의 언어로, 인간의 감정으로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의사가 위험한 종기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 행하는 절개와 소작술도, 이를 견뎌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악으로 여겨집니다. 또한 말에게 박차와 죄를 지은 자에게 주어지는 교정은 달콤한 일이 아닙니다; 또한 교육을 받는 이들에게 가해지는 모든 엄격한 훈육은 쓰라린 것으로 여겨지는데, 사도가 말하듯이 “모든 징계는 당장은 기쁨으로 여겨지지 않고 슬픔으로 여겨지나, 그러나 그 열매는 평화를 맺으며, 훈련받은 자들에게 의를 베풉니다. 또한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며, 받아들이시는 모든 아들을 채찍질하십니다.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은 누구입니까?(히브리서 12, 6. 7. 11)라고도 하셨습니다. – 이처럼 “악”이라는 단어는 때로 슬픈 우연의 사건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다음 구절에서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행하려 하셨던 악을 후회하시고, 그것을 행하지 아니하셨다”(요나 3,10). 또한 “주님, 주님은 자비로우시고, 관대하시며, 오래 참으시고, 자애로우시며, 사람들의 악행에 대해 회개하십니다”(요나 4,2), 즉 우리의 죄로 인해 우리에게 내리실 수밖에 없는 비참한 결핍과 재앙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다른 선지자는, 그것들이 어떤 이들에게는 유익하다는 것을 알기에, 그들에 대한 적대감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구원을 바라는 마음으로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여,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소서. 땅의 영광스러운 자들에게 재앙을 내리소서”(이사야 26:15). 그리고 주님께서도 직접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네게 재앙을 내리리라”(예레미야 11:11)고 하셨으니, 즉 현재 구원을 위한 징계로서 겪는 고통과 파멸을 통해, 너는 마침내 회개하고 행복했던 시절에 잊고 지냈던 나를 향해 서둘러 돌아오게 될 것이다. 그것들이 많은 이에게 유익이 되고 영원한 기쁨을 깨닫게 해 주는데, 어찌하여 우리가 그것들을 본질적인 악으로 인정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 제기된 질문으로 돌아가자면 – 일반적으로 악으로 여겨지는 것, 즉 원수들이 우리에게 가하는 것, 혹은 다른 어떤 방식으로 우리를 괴롭히는 것들은 우리가 악으로 여겨서는 안 되며, 그저 중간적인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그때 비로소 그것은 분노에 차서 가한 자가 여기는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을 겪는 자가 느끼는 그대로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경건한 사람에게 죽음이 닥쳤을 때, 그에게 악이 가해진 것이 아니라 중간적인 것으로 여겨야 하기 때문이다. 죄인에게는 죽음이 악이지만, 의인에게는 위로이자 악으로부터의 해방이 되기 때문이다. “의인의 죽음은 안식이며, 그의 길은 감추어져 있느니라”(욥기 3:23). 의인은 그러한 죽음으로 인해 어떠한 손해도 입지 않는다. 그에게 새로운 일이나 전례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그러나 자연적 필연성에 따라 그에게 닥칠 운명이었던 것을, 그는 원수의 악의로 인해 받아들였으나, 영생에 있어 무익하지 않았으며, 우리 현존의 피할 수 없는 법칙에 따라 그가 치러야 할 인간의 죽음이라는 빚을, 그를 위한 위대한 보상의 담보로서 풍성한 고통의 열매로 갚았다.

5. 그러나 이것이 악당들의 죄를 면책해 주지는 않는다. 불경건한 불법자는 자신의 악행으로 의인에게 실질적인 해를 끼칠 수 없었다는 이유만으로 처벌을 면할 수는 없다. 참음은 의인의 미덕이며, 죽음이나 고통을 가한 자가 아니라 그것을 인내로 견뎌낸 자가 상을 받을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저자는 야만적인 잔혹함으로 마땅히 벌을 받을 것이지만, 이 사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실질적인 해악도 입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용기 있는 정신으로 유혹과 고통을 인내하며 견뎌냈고, 악의적인 의도로 자신에게 가해진 모든 것을 자신의 유익으로 바꾸어, 내세에서의 행복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6. 그러므로 욥의 인내는 그를 유혹함으로써 더욱 영광스럽게 만든 마귀에게가 아니라, 그 유혹을 용감하게 견뎌낸 욥 자신에게 선한 보상을 가져다주었으며, 유다의 배신이 인류의 구원에 기여했다는 이유만으로 그에게 영원한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 허락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행위의 결과만을 볼 것이 아니라, 행하는 이의 마음가짐을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도 타인으로부터 해를 입을 수 없으며, 오직 자신의 마음의 연약함과 비겁함으로 스스로 그 해를 자초할 때에만 해를 입을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을 변함없이 간직해야 한다. 복된 사도도 한 구절에서 이와 같은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압니다” (롬 8:28).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말씀하심으로써, 그분은 행복으로 여겨지는 것뿐만 아니라 불행으로 여겨지는 것까지 모두 포괄하셨습니다. 마치 다른 곳에서 그 사도께서 자신에 대해, 그분께서 양쪽 모두를 겪으셨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오른손과 왼손의 의의 무기, 즉 영광과 치욕, 비난과 칭찬: 거짓과 진실: 슬퍼하면서도 항상 기뻐하며, 가난하면서도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하는 자” 등등 (고린도후서 6:7–10). 그러므로 모든 것, 즉 행복으로 여겨지고 사도가 오른쪽에 속한다고 하여 “영광과 칭찬”이라는 말로 표현한 것과, 불행으로 여겨지고 그분이 “ “수치와 모욕”이라는 말로 표현하며 왼편에 속한 것으로 간주한 것들까지, 온전한 사람에게는 “의의 무기”가 된다. 그가 자신에게 가해진 (비통한) 일을 너그럽게 견디며, 이를 통해 싸우고, 즉 “ ”의 무기로 삼아, 자신을 공격하는 바로 그 수단을 활용하며, 그것으로 활과 칼, 가장 견고한 방패처럼 무장하여 자신을 공격하는 자들에게 맞서, 죽음을 초래하는 바로 그 적의 화살들로 자신의 흔들림 없는 굳건함을 가장 영광스럽게 드러내며 인내와 용기를 완벽하게 발휘한다면; 그리고 만약 이러한 방식으로 행복에 취하지도 않고, 불행에 낙담하지도 않으며, 곧은 길과 왕의 길을 걷는다면, 그는 그러한 평화로운 마음의 상태에서 기쁨을 얻었다고 해서 마치 뺨 쪽으로 밀려나지도 않고, 다시 불행의 공격과 슬픔의 밀려옴에 의해 마치 턱 쪽으로 밀려나지도 않을 것이다. – “주님, 주님의 율법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평화가 많으며, 그들에게는 유혹이 없나이다”라고 성 다윗이 증언합니다(시 118, 165); 반면, 마주하는 모든 우연한 상황에 따라 그 성품과 차이에 따라 변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미련한 자는 달처럼 변하느니라” (시라 27, 11). 또한, 완전하고 지혜로운 자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모든 일이 선으로 이른다”고 말해지며, 약하고 분별력 없는 자들에 대해서는 “모든 것이 미련한 자에게는 거슬린다” (잠언 14, 7) 선포되는데, 이는 그가 행복을 통해 자신에게 유익을 얻지도 못하고, 불행을 통해 바로잡히지도 않기 때문이다. 슬픔을 용감하게 견디기 위해서는 기쁨 속에서 마땅한 절제를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것과 같은 도덕적 힘이 요구된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우연 중 하나에 의해 제자리를 벗어나는 사람은 그 어느 것에도 맞설 힘이 없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행복은 불행보다 사람에게 더 큰 해를 끼친다. 왜냐하면 불행은 때로 의지와는 상관없이 사람을 절제시키고 겸손하게 하며, 구원에 이르는 회개로 이끌어 죄를 덜 짓게 하거나 완전히 개과천선하도록 이끄는 반면, 행복은 유쾌하지만 해로운 아첨으로 영혼을 교만하게 만들어, 행복의 성공으로 인해 스스로를 안전하다고 여기는 자들을 끔찍한 파멸 속에 흙으로 돌려보내기 때문이다.

7. 이러한 완전한 사람들은 성경에서 비유적으로 “양손을 다 쓰는 자”라고 불리는데, 사사기에 기록된 아오드처럼 양손을 오른손처럼 능숙하게 사용했던 자를 말한다(3, 15). 영적으로 우리도 이러한 완전함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오른손”으로 여겨지는 행복과 “왼손”이라 불리는 불행을 선하고 바른 용도로 오른쪽으로 돌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사도의 말대로 “의의 무기”가 되도록 한다면 말입니다. 우리 내면의 사람 안에서 우리는 두 측면, 말하자면 두 손을 발견한다. 그리고 어떤 성자도 우리가 ‘오른쪽’이라고 부르는 것과 ‘왼쪽’이라고 부르는 중 어느 하나도 갖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덕행이 얼마나 완전한지는, 그가 양쪽 모두를 오른손으로 돌려 잘 활용한다는 사실에서 드러납니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더 명확히 이해할 수 있도록 말하건대, 성인은 영적인 성장을 보일 때 오른손을 갖게 되는데, 곧 영으로 불타오르며 자신의 모든 욕망과 갈망을 지배할 때, 모든 악마의 공격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아무런 수고나 불편함 없이 육신의 정욕을 끊어내고 잘라낼 때, 땅에서 높이 올라가 모든 현세적이고 세속적인 것을 흔들리는 연기와 헛된 그림자처럼 바라보며, 곧 사라질 것으로 여겨 경멸할 때, 마음이 황홀함에 빠져 미래를 열렬히 갈망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가장 선명하게 볼 때, 영적 묵상에 가장 효과적으로 몰입할 때, 마치 자신을 위해 활짝 열린 문처럼 천상의 신비를 맑고 열렬하게 주님께 기도를 올릴 때, 영의 불길에 타올라 영혼의 온 힘을 다해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로 옮겨가, 마치 자신이 더 이상 육신에 있지 않다고 생각할 때; 그는 또한 다음과 같은 순간도 겪는다, – 유혹의 폭풍에 휩싸일 때, 육체적 욕망에 대한 정욕적인 충동이 밀려와 불타오를 때, 짜증 나는 혼란의 불길에 의해 격렬한 분노로 부추겨질 때, 자만심에 사로잡혀 교만이나 허영으로 이끌릴 때, “죽음을 초래하는 슬픔” (고린도후서 7:10), 악의에 찬 낙담의 공격에 완전히 좌절될 때, 그리고 모든 영적 열기가 사라진 후 냉각과 설명할 수 없는 공허함으로 인해 마비될 때, 그리하여 선한 생각들, 즉 내면의 열기를 달구어 주는 생각들뿐만 아니라 시편과 기도, 성경 읽기, 그리고 독방에서의 고독까지도 그에게 끔찍하게 지루하게 느껴지고, 모든 덕행의 수단이 견딜 수 없는 일종의 혐오와 기피감으로 다가올 때, 바로 그때 수도사가 이러한 상태에 빠졌음을 깨닫고, 자신의 어두운 면이 그를 압박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한 대로 ‘오른쪽 편’에 속하는 어떤 일로 인해 솟아나는 허영에 오만해지지 않고, ‘왼쪽 편’에 속하는 것에 맞서 용감하게 싸우면서도 절망에 빠지지 않는 자라면; 그 사람은 양손을 모두 오른손처럼 능숙하게 사용할 것이며, 두 가지 행동 모두에서 승자가 되어, 왼편과 오른편 양쪽의 처지에서 승리의 월계관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읽은 바와 같이, 이러한 승리의 월계관을 얻은 이는 복된 욥이었으니, 그는 오른손의 행위로 인해 월계관을 썼다. 그는 부유하고 명망 있는 일곱 아들의 아버지로서, 매일 주님께 제물을 드려 아들들을 정결하게 하였는데, 이는 그들을 자신만을 위한 존재로 만들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기쁘시게 하고 친근하게 하기를 원하셨으며, 그의 문은 오는 모든 이에게 열려 있었고, 그는 절름발이의 발이자 맹인의 눈이 되었으며, 그의 양가죽으로 연약한 이들의 어깨를 따뜻하게 해 주었고, 고아의 아버지와 과부의 남편이 되었으며, 심지어 마음속으로도 원수의 파멸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욥은, 다시금 시련 속에서 흉내 낼 수 없을 만큼 높은 용기를 발휘하며 재앙을 이겨냈습니다. 단 한 순간에 일곱 아들을 잃었을 때, 아버지로서 잔혹한 슬픔에 잠기지 않고, 하나님의 종으로서 창조주의 뜻 안에서 평안을 찾았을 때, 부자에서 가장 가난한 자로, 풍요로움에서 벌거벗은 자로, 건강한 몸에서 나병 환자로, 고귀하고 영광스러운 자에서 비천하고 천대받는 자로 전락했음에도, 꺾이지 않는 용기를 잃지 않았으며, 마침내 모든 재산과 소유물을 잃고 쓰레기 더미에 살게 되었을 때, 마치 자신의 몸을 고문하는 자—그야말로 가장 잔혹한 자—가 지붕 기와 조각으로 고름이 고인 곳을 긁어내고, 온몸을 뒤덮은 상처 깊숙이 손가락을 집어넣어 거기서 구더기를 꺼내내던 때에도 그러했다. 이 모든 상황 속에서도 그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에 조금도 빠지지 않았고, 창조주에 대해 어떤 불평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 그토록 무거운, 가장 예민한 유혹의 짐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악마의 약탈로부터 유일하게 보존될 수 있었던, 곧 그의 몸을 덮고 있던 옷조차 찢어내어 내팽개친 뒤, 이 가장 잔혹한 약탈자가 그에게 가한 상처에 더해 자발적인 나체까지 더했다. 또한 이전의 영광의 표식 중에서 유일하게 손대지 않은 채 남아 있던 머리카락마저 잘라내어 그를 괴롭히던 자에게 던져주고, 그 잔혹한 적이 남겨둔 것을 이렇게 잘라내면서, 하늘 같은 목소리로 그에 대한 자신의 승리에 대한 기쁨을 이렇게 드러냈다. “‘주님의 손에서 선한 것을 받았으니, 악한 것도 참지 못하겠느냐? 나는 어머니의 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으니, 알몸으로 거기로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고, 주님께서 거두셨으니, 주님께서 원하신 대로 이루어졌도다. 주님의 이름이 찬송받으시기를!’ (욥기 2:10; 1:21). – 나는 요셉도 마땅히 ‘양손이 능한 자’라고 부르겠다. 그는 행복할 때에는 아버지를 기쁘게 하고, 형제들을 공경하며, 하나님께 기쁨을 드렸고, – 불행 속에서도 절제하며, 주인에게 충실했으며, 감옥에 갇혀 있을 때는 지극히 온유했고, 모욕을 받아도 원한을 품지 않았으며, 원수들에게는 자비롭고, 시기하는 자들과 심지어 자신을 죽이려 했던 형제들에게도 다정하게 대할 뿐만 아니라 풍성하게 베풀었다. 이러한 이들과 그와 유사한 이들은 의롭게 ‘양손을 다 쓰는 자’라고 불린다. 그들은 오른손과 왼손을 모두 사용하며, 사도가 열거한 유혹들을 헤쳐 나가면서 그분과 같이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의 무기, 오른손과 왼손, 영광과 수치, 비방과 칭찬” 등등. – 우리도 양손을 다 쓰는 자가 되자. 때로 주어지는 세속적 복의 풍요나 궁핍에 흔들리지 않고, 전자가 해로운 방종으로 인한 쾌락으로 우리를 유혹하지도, 후자가 절망과 불평으로 몰아넣지도 않을 때, 오히려 그 어느 경우든 똑같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행복과 불행 모두에서 동등한 열매를 거두게 될 때; 참된 양손잡이이시며, “나는 내가 처한 어떤 상황에서도 만족하는 법을 익혔노라”고 증언하신 만민의 스승과 같은 사람이 될 때, 부유할 때나 가난할 때나, 풍족할 때나 궁핍할 때나, 모든 일과 모든 상황에서 만족할 줄을 배웠으니,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모든 것을 나를 굳건하게 하시는 분 안에서 할 수 있노라” (빌 4,11–13).

8. 앞서 말했듯이, 유혹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즉 행복을 통한 것과 불행을 통한 것이다. 사람들이 유혹을 받는 이유는 세 가지인데, 대부분은 시련을 위한 것이고, 때로는 교정을 위한 것이며, 종종 죄에 대한 벌을 위한 것이다. 이처럼 시험을 위해, 우리가 읽은 바와 같이, 욥과 마찬가지로 복된 아브라함과 많은 성인들이 셀 수 없이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또한 유대 민족도 광야에서 시험을 받았는데, 이는 신명기에서 모세가 말한 대로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신 온 여정을 기억하라. 곧 광야에서 네가 지낸 이 사십 년 동안, 그분이 너를 시험하시고 너를 괴롭히사 네 마음에 있는 것이, 곧 네가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를 알게 하셨느니라” (신명기 8:2), 그리고 시편에서도 이와 같은 내용이 상기되고 있습니다: “내가 너를 다툼의 물가에서 시험하였노라” (시편 80:8). 그리고 욥이 바로 이 때문에 겪은 모든 시련을 당했음은, 하나님께서 직접 “내가 너를 다른 목적으로 창조했다고 생각하느냐? 오직 네가 의롭다는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함이 아니었느냐?(욥기 40, 3)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분명히 증언하고 계십니다. 반면, 교정을 위한 시련은 주님께서 의로운 자들을 사소하고 가벼운 죄나, 자신의 의로움을 과시하는 태도 때문에 겸손하게 하시려고 그들을 다양한 유혹에 내맡기실 때 발생합니다. 이는 현재 그들에게서 온갖 더러운 생각을 깨끗이 씻어내고, 그들의 내면에 숨어 있는 모든 불결함(사 1:25)을 모두 태워 없애신 후, 장차 닥칠 시련에 순금처럼 순수하게 맞설 수 있도록 준비시키시는 것입니다. 이는 그들에게, 이후 심판의 불로 시험을 거친 뒤 징벌적인 불태움으로 정화해야 할 어떤 것도 남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의인에게 많은 환난이 있도다”(시 33:20)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아들아, 주님의 징계를 인해 낙심하지 말며, 그분의 책망으로 인해 기가 꺾이지 말라.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며, 받아들이시는 모든 아들을 채찍질하시기 때문이다. 너희가 징계를 참는다면, 너희는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는 것이다.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겠느냐? 만약 징계를 받지 않는다면, 너희는 모두 간음하는 자들이요, 아들이 아니라” (히브리서 12, 5–9);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며 징계하노라” ( – 3, 19). 이와 같은 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비유로 삼아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언자 예레미야를 통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전해집니다: “모든 민족 가운데서 그들을 멸망시키리라”(그들을 끝장내리라), “내가 너를 그들 가운데서 쫓아냈으나, 너에게는 멸망을 내리지 아니하고 심판으로 너를 징계하리라”(예레미야 30, 11). 이러한 구원에 이르는 징계에 대해 성 다윗은 다음과 같이 기도하며 말합니다. “주여, 나를 시험하시고 나를 검증하소서. 내 속과 내 마음을 샅샅이 살피소서” (시 25, 2). 또한 예언자 예레미야도 그러한 시험이 구원에 이르게 함을 깨닫고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주여, 우리를 징계하소서. 그러나 진노가 아니라 심판으로 하소서” (예레미야 10, 24). 이사야도 마찬가지로 말합니다. “주여, 내가 주께 진노를 받았으나 주께서 진노를 거두시고 나를 불쌍히 여기셨으니, 내가 주를 찬양하리이다” (이사야 12, 1). 유혹의 타격은 죄에 대해서도 내려진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음과 같은 타격을 내리겠다고 위협하시며 말씀하신다. “짐승들의 이빨을 네게 보내리니, 땅 위를 기어다니는 것들의 분노와 함께” (신명기 32, 24); 시편에서도 이에 대해 “죄인에게는 상처가 많도다” (– 31, 10)라고 말하고 있으며, 복음서에서도 “네가 낫게 되었으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네게 더 큰 일이 닥칠까 두렵다” (요한복음 5, 14)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경에서 알 수 있듯이, 어떤 이들에게 고통이 주어지는 네 번째 이유가 또 하나 있는데, 바로 이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과 행적이 드러나기 위함이다. 복음서에서는 태어날 때부터 눈먼 사람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 사람도 죄를 짓지 않았고, 그의 부모도 죄를 짓지 않았으나, 이는 하나님의 일이 그에게서 드러나게 하려 함이라” (요한복음 9:3), 그리고 나사로의 병에 대해서는 “이 병은 죽음을 위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니, 이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으시려 함이라” (요한복음 11:4)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가장 극악한 악을 저지른 자들에게 내리는 다른 종류의 하나님의 심판도 있는데, 성경에 기록된 대로 다판, 아비론, 코레가 그 심판을 받았으며, 무엇보다도 사도가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미련한 마음에 내버려 두사 흉한 일을 행하게 하셨다” (롬 1:26, 28)라고 말씀하신 바로 그 자들입니다. 이는 다른 모든 형벌보다 더 무거운 것으로 여겨져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바로 그들에 대해 “사람의 수고 속에 있지 아니하며, 사람에게서 고통을 받지 아니하리라”(시 72:5)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주님의 방문으로 구원받거나 일시적인 형벌을 통해 치유를 받을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마치 “방탕함에 빠져 온갖 부정한 행위에 탐닉하는 자들” (엡 4:19)와 같이, – 또한 오랫동안 끊임없는 죄악 속에 머물러 마음이 굳어져, 이 세상의 매우 짧은 생애 동안 모든 정화와 보복의 한계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선지자 아모스를 통해 이러한 자들을 책망하시기를: “너희는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신 것처럼 스스로를 파멸시켰으며, 불에서 건져낸 숯덩어리처럼 되었으나, 여전히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도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아모스 4:11), 또한 예언자 예레미야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백성을 죽이고 멸망시켰으나, 그들은 자기들의 길에서 돌이키지 아니하였도다” (예레미야 15, 7), 그리고 다른 구절에서는 “너는 그들을 치었으나 그들이 아파하지 아니하였고, 그들을 으스러뜨렸으나 그들이 징계를 받아들이려 하지 아니하였으며, 너희 얼굴을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가 돌보다 그리하여 마침내 주님께서는 가장 능숙한 의사처럼 모든 구원의 치료법을 다 써 보시고, 그들의 상처에 적용할 수 있는 구원의 수단이 하나도 남지 않았음을 보시고, 어떤 면에서는 마치 그들의 죄악의 거대함에 굴복하신 듯, 자비로운 징계에서 물러나실 수밖에 없게 되시어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선포하시며 말씀하셨다: “내 열심이 너희에게서 떠나고, 나는 너희를 돌보지 아니하리라” (에스겔 16:42). 반면, 잦은 죄로 인해 마음이 아직 완고해지지 않았고, 그처럼 가혹하고 멸망시키는 형벌을 받을 만하지는 않지만, 구원을 위한 훈계적인 징계를 받아들일 수 있는 자들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모욕을 듣게 하여 징계하리라” (그들에게 닥칠 슬픔에 대해 듣게 함으로써 깨우치리라) (호세아 7:12).

9. 인내와 온유함을 어떻게 얻고 유지할 수 있는가? – 진정으로 인내와 온유함은 마음의 겸손 없이는 얻거나 유지할 수 없다. 인내가 이 근원에서 솟아날 때, 비로소 역경으로 인한 슬픔을 피하기 위해 수도실에 틀어박히거나 사막에 숨을 필요가 없어진다. 마음 깊은 곳에서 겸손이라는 미덕, 즉 우리의 어머니이자 수호자에 굳건히 뿌리내리면, 더 이상 외부의 도움은 필요하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어떤 허위 비난 때문에 우리가 동요한다면, 우리 안에 겸손의 기초가 확고히 자리 잡지 못한 것이 분명하며, 심지어 작은 폭풍우가 몰아칠 때조차 우리의 내적 구조는 파괴적인 흔들림에 노출되기 때문이다. 내면의 평온이 어떤 적의 화살에도 흔들리지 않고 지켜질 때 인내가 칭찬받을 만하고 경이로울 만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유혹의 폭풍이 몰아칠 때에도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버틸 때 비로소 위엄 있고 영광스러운 것이다. 그리고 겉보기에는 짓눌리고 흔들리는 것처럼 보일수록, 오히려 더욱 굳건해지며; 겉보기에는 그것을 무디게 하는 것일수록 오히려 더욱 정교해진다. 참으로 인내가 ‘고통을 견뎌내는 것’에서 그 이름을 얻었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나 잘 알려져 있으므로, 자신에게 가해지는 모든 것을 동요 없이 견뎌내는 자 외에는 누구도 인내심 있는 사람으로 칭해질 수 없다. 바로 이 때문에 솔로몬은 그를 마땅히 이렇게 칭찬한다. “오래 참는 사람은 강한 사람보다 낫고, 분노를 참는 사람은 우박을 퍼붓는 사람보다 낫다”(잠언 16, 32). 또 “오래 참는 사람은 지혜가 많고, 마음이 약한 사람은 미친 사람과 같다” (잠언 14:29). 그러므로 누군가 억울한 모욕을 당하고 분노의 불길에 휩싸일 때, 그에게 가해진 모욕은 그러한 죄의 원인으로 여겨서는 안 되며, 단지 그 안에 숨겨진 (분노라는) 병이 드러나는 계기로만 여겨야 한다. 구세주의 두 집에 대한 비유의 의미대로, 하나는 바위 위에 지어진 집이고 다른 하나는 모래 위에 지어진 집인데, 이 두 집 모두 물의 세차와 폭풍우가 똑같은 힘으로 들이닥쳤으나 결과는 달랐습니다. 왜냐하면 이때 단단한 바위 위에 지어진 집은 그토록 강력한 압박에도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으나, 움직이는 모래 위에 지어진 집은 즉시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 집이 무너진 것은 분명히 그에게 밀려든 파도와 홍수의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어리석게도 모래 위에 지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인은 죄인과, 그와 같은 강도의 유혹을 받지 않는다는 점에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큰 유혹 앞에서도 결코 굴복하지 않는 반면, 죄인은 작은 유혹 앞에서도 넘어진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그리고 우리가 말한 것처럼, 어떤 의인이 유혹을 받지 않고 승리자라면 그의 용기는 칭찬받을 만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며, 원수의 공격이 없었다면 승리라는 것 자체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시험을 견디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시험을 이긴 자로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임이라”(야고보서 1:12). 또한 사도 바울에 따르면 “하나님의 능력”은 평안과 위로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약함 속에서 온전히 드러난다”(고린도후서 12:9). 주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보라, 내가 오늘 너를 견고한 성벽과 같은 자, 철 기둥과 같은 자, 견고한 놋 성벽과 같은 자로 삼아 유다의 모든 왕과 그 방백들과 제사장들과 그 땅의 백성들 앞에 세우리니, 그들이 너를 치려 하되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예레미야 1, 18. 19). (– 저자 18. 13).

10. 이러한 인내에 대해 적어도 두 가지 예를 여러분께 제시하고자 합니다. 그중 하나는 한 경건한 여인이 보여준 것으로, 그녀는 인내라는 미덕을 완성하고자 하여 유혹을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을 괴롭힐 일을 찾았고, 아무리 자주 모욕을 당해도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이 여인은 알렉산드리아에 살았으며, 명문 가문 출신이었고, 부모님이 남긴 집에서 경건하게 하나님을 섬기며 살았습니다. 어느 날, 복된 기억을 남긴 아파나시우스 대주교를 찾아간 그녀는, 교회의 부양 대상인 과부 중 한 명을 자신에게 맡겨 생계를 꾸리고 안식을 누리게 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저에게 자매 중 한 분을 주십시오. 제가 그분을 편안하게 해 드리겠습니다.”라고 그녀는 말했습니다. 대주교는 그 여인의 선한 의도와 자선 사업에 대한 열의를 칭찬한 뒤, 모든 과부 중에서 품행의 정직함, 품위와 예의범절에서 남다른 과부를 한 명 골라내라고 지시했다. 이는 그러한 관대함을 베풀고자 하는 마음이 그 혜택을 받을 사람의 결점으로 인해 꺾이지 않도록 하고, 또한 관대함을 베푸는 사람이 그 과부의 악한 성품에 상처를 받아 신앙에 해를 입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그렇게 선정된 여인을 받아들여 집으로 데려와 모든 면에서 그녀를 모시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의 겸손함과 온유함을 보고, 자신의 자비로운 행위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매 순간 그녀로부터 존경을 받자, 그녀는 며칠 뒤 다시 앞서 언급한 대주교에게 찾아가 말했습니다. “저는 제가 위로해 주고, 온전한 순종으로 섬길 수 있는 사람을 저에게 보내 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그는 처음에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이 여인이 무엇을 원하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과부들을 돌보는 관리의 부주의로 인해 그녀의 청원이 무시된 것이라고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그 지연의 이유를 물었다. 그에게 그녀에게 보내진 과부는 다른 누구보다도 더 정직한 사람이라는 대답을 들었다. 그제야 그는 그 현명한 아내가 무엇을 원했는지 짐작하고, 모든 과부 중에서 가장 품행이 나쁘고, 성미가 급하며, 다툼을 좋아하고, 난폭하며, 수다스럽고, 허영심에 찬 과부를 그녀에게 보내라고 명령했다. 그런 여자를 찾아 그녀에게 데려다 주자, 그녀는 그 여자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 처음에 섬기던 여자를 섬기던 것과 똑같은, 혹은 그보다 더 큰 열의를 다해 이 여자를 섬기기 시작했고; 그러나 그런 봉사에 대한 보답으로 그녀가 받은 것은, 그 과부가 그녀를 모욕적인 욕설과 험담, 비방으로 모욕하고, 비난하며, 신랄한 욕설을 섞어 불평하며 “대주교에게 그녀를 부탁한 것은 평안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고통을 주기 위해 아키에피스코프에게 부탁해 데려왔으며, 고인의 삶에서 힘든 삶으로 옮긴 것이지, 힘든 삶에서 고인의 삶으로 옮긴 것이 아니라고 비아냥거렸다. 이 여자는 그런 모욕을 감히 일삼으며 때로는 손을 가누지 못할 지경까지 이르렀지만, 그 여주인은 오히려 이에 대해 그녀에게 베푸는 겸손한 봉사를 더욱 늘렸으며, 저항이 아니라 더욱 겸손하게 그녀에게 복종함으로써 그녀의 분노를 이겨내고, 인간애가 넘치는 온유함으로 그녀의 광기를 달래는 법을 배웠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인내심에 완전히 확고해졌고, 이 소망하던 미덕에서 완성에 이르렀을 때, 그녀는 앞서 언급한 성자에게 찾아가, 그의 현명한 선택과 그녀에게 베푼 유익한 가르침,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소망대로 그녀에게 그토록 훌륭한 스승을 지명해 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했다. 그 스승의 끊임없는 모욕 속에서 매일 인내를 다지며, 그녀는 이 미덕의 정점에 이르렀다. 마침내 주님, 당신은 제가 진정으로 원하던 바로 그런 분을 제 마음의 평안을 위해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스승은 저에게 보여준 공경 어린 태도로, 제가 그녀를 위로하고 달래준 것보다 오히려 그녀가 저를 더 위로하고 달래주었습니다. – 여성에 관해 이 정도만 말해도, 그러한 일을 회상함으로써 단순히 교훈을 얻을 뿐만 아니라 ,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기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만약 수도실에 숨지 않는다면, 인내를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소브. 18. 14).

11. 이제 유명한 스키트 사막에서 완전한 은둔 생활을 하며, 현재 그곳에서 장로직을 맡고 있는 아바 파프누티우스의 또 다른 인내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그는 아직 젊은 수도사였을 때부터 그토록 은혜로운 거룩함으로 빛나서, 당대의 위대한 성인들조차 그의 성취에 놀라워했으며, 그가 누구보다 어리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를 장로들과 동등하게 여기고 이 모임에 포함시키기로 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한때 요셉을 향해 형제들의 마음을 부추겼던 시기심이, 이번에는 스키트 수도원 형제 중 한 명을 향해 독이 든 불꽃처럼 타올라, 그의 아름다움을 불명예의 오점으로 더럽히려는 악의를 품게 했다. 이를 위해 그는 파프누티우스가 주일에 교회로 떠난 틈을 타, 그의 방에 몰래 들어가 그곳에서 보통 야자나무 가지로 엮어 놓는 바구니 사이에 자신의 책을 숨긴 뒤, 자신의 교활함에 만족하며 교회로 향했다; 그리고 주일 예배가 끝난 후 모든 형제들 앞에서 당시 장로였던 성 이시도르에게 자신의 방에서 책이 도난당했다는 고소를 제기했다. 이 고발은 모든 사람, 특히 장로를 너무나 당황하게 만들었기에, 그들은 무엇을 생각해야 할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으며, 그곳에서 전례 없이 새로이 발생한 이러한 범죄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자 이 일을 고발한 사람은 모든 형제들을 교회에 머물게 한 뒤, 그중에서 몇 명을 선발하여 모든 방을 수색하도록 요구했다. 장로가 이 일을 위해 지명한 세 명의 장로들이 다른 모든 방을 수색한 뒤 파프누티우스의 방에 들어갔을 때, 그들은 그곳에서 야자나무 엮은 장식품 사이에 숨겨진 책을 발견했는데, 이는 고발자가 그곳에 숨겨 둔 것이었다. 그들은 그 책을 가져와 즉시 교회로 가져가 모든 사람 앞에 놓았다. 파프누티우스는 맑은 양심상 이 죄와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확신하고 있었지만, 마치 절도죄를 저지른 죄인인 양 장로들의 심판에 자신을 맡기며, 배상금으로 선고될 것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회개할 기회를 달라고 간청했다. 그는 자신의 변명을 위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수줍음과 겸손함으로 인해 마치 말로 도둑질의 오점을 씻어내려다, 발견된 것 외에는 아무도 다른 것을 의심하지 않는 상황에서 거짓말에 대한 비난까지 받게 될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심리가 끝나고 판결문이 작성되자, 그는 낙담하지 않고 스스로를 하나님 자신의 심판에 맡기며 교회를 나섰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더욱 간절히 드리고, 금식을 세 배로 늘리며, 지극히 겸손한 마음으로 사람들 앞에 엎드려 회개를 실천하기 시작했다. 거의 2주 동안 그는 이처럼 육체와 영혼의 온갖 고행을 자처하다가, 어느 토요일이나 일요일 이른 아침, 성찬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교회 문 앞에 엎드려 겸손히 용서를 구하기 위해 교회에 왔을 때,-그때 모든 은밀한 것을 증언하시고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그가 더 이상 스스로를 괴롭히며 다른 이들에게 치욕을 당하는 것을 참지 않으시고, 마귀로 하여금 그 악의 발명가이자, 자신의 재물을 훔치는 불의한 도둑이며, 타인의 명예를 교묘히 훼손하는 자가 아무런 증인 없이 저지른 일을 공표하도록 이끄셨다. 왜냐하면 가장 사나운 악마에게 사로잡힌 그는 스스로 자신의 은밀한 계략에 담긴 모든 교활함을 드러냈기 때문이며, 이처럼 범죄와 음모를 부추긴 자가 바로 배신적으로 그 사실을 폭로한 자가 된 것이다. 그 후 이 부정한 영은 이 불쌍한 형제를 심하게 오랫동안 괴롭혔기에, 그곳에 있던 다른 성도들의 기도만으로는 그를 그 영으로부터 정화시킬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악마에 대한 신성한 권세를 지닌 성도들의 기도조차도, 이시도르 장로의 특별한 은총조차도 이 가장 사악한 고문자를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비록 주님의 관대하심으로 그에게 악령들에 대한 그러한 권능이 주어져, 귀신 들린 자들이 치유를 받으면 그의 문 앞까지 다가가지도 못하게 되었음에도 말이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주님께서 이 영광을 파프누티우스에게 아껴 두셨기 때문이었으니, 그 해를 끼친 자가 바로 자신이 음모를 꾸몄던 자의 기도로만 치유받고, 자신의 죄에 대한 용서와 현재의 형벌로부터 해방되어, 질투심 많은 원수처럼 그 영광을 가릴 것을 기대했던 바로 그분의 이름을 선포하게 하려 하셨기 때문이다 ( – 저서 18,15).

12. 이 일을 이야기하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이 남자의 흔들리지 않는 굳건함을 생각함으로써, 우리가 원수의 중상모략에 덜 시달릴수록 더욱 침착함과 인내를 드러내도록 하기 위함이며; 둘째는,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유혹의 폭풍과 마귀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할 수 없다는 확고한 신념을 얻기 위함입니다. 즉, 우리의 인내를 지키는 모든 방패와 그에 대한 모든 희망을 우리 내면의 힘에 두지 않고, 수녀원의 문이나 사막의 은둔, 성인들의 공동체, 혹은 우리 밖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에 두는 한, 우리는 유혹의 폭풍과 마귀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할 수 없다는 확고한 신념을 얻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복음서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누가복음 17:21) 말씀하신 주님께서, 그분의 중보의 힘으로 우리의 영을 굳건히 하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헛되이 희망하게 될 것입니다. 즉, 공중의 원수의 중상모략을 우리와 함께 사는 사람들의 도움으로 이기거나, 물리적인 거리(즉, 광야로 물러남)를 두어 스스로로부터 물리치거나, 벽과 지붕으로 자신을 가림으로써(즉, 수도실에 갇힘으로써) 그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막으려는 희망 말입니다. 이는 성 파프누티우스에게 이 모든 것 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혹자가 그를 공격할 틈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가장 사악한 영을 그에게서 물리치지 못한 것은 견고한 성벽도, 사막의 고독도, 그 공동체에 있던 수많은 성인들의 중보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종인 성인은 마음의 소망을 외적인 어떤 것에 두지 않고, 모든 은밀한 일의 심판자이신 그분 자신에게 두었으므로, 그러한 공격의 계략으로 인해 결코 흔들릴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시기심에 사로잡혀 그러한 범죄를 저지른 자도 사막의 은혜와 외딴 거처의 보호, 그리고 복된 아바 이시도르 장로와 다른 성인들의 공동체를 누리지 않았던가? 그러나 마귀의 폭풍이 그가 모래 위에 자리를 잡은 것을 발견했을 때, 그의 거처(내면의 구조)에 강력한 타격을 가했을 뿐만 아니라, 아예 완전히 무너뜨려 버렸다. 그러니 우리 내면의 흔들리지 않는 평화를 자기 밖에서 찾으려 하지 말고, 우리 인내의 연약함을 타인의 인내가 도울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자.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안에” 있듯이, “사람의 원수는 자기 집안 사람들”이기 때문이다(마태복음 10:36). 그리고 나 자신보다 더 나에게 저항하는 것은 없으니, 바로 나에게 가장 가까운 집안 사람인 내 감정이다. 그러니 우리 집안의 원수들이 우리를 해치지 못하도록, 우리 자신에게 더욱 주의를 기울이자. 왜냐하면 우리 가족들이 우리에게 반항하지 않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흔들리지 않는 영혼의 평화로 머무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원인을 꼼꼼히 따져본다면, 내가 마음의 불평온함으로 스스로에게 반항하지 않는 한, 아무리 악의를 품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나를 상처 입힐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상처를 받을 때, 그 원인은 외부의 공격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조급함에 있기 때문이다. 마치 단단한 음식이 건강한 사람에게는 유익하지만, 병든 사람에게는 해롭듯이 말이다. 그 음식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해를 끼칠 힘을 그의 연약함이 부여하지 않는 한, 그 음식은 그를 해칠 수 없다(– 소브. 18, 16).

 

8. 신성한 은총과 자유 의지에 대하여

1. 우리는 아무리 지칠 줄 모르고 온갖 미덕을 실천한다 해도, 결코 우리 자신의 노력과 업적으로 완전함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을 항상 확고히 믿어야 한다. 주님께서 직접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에게 유익한 것으로 마음을 인도해 주시지 않는다면,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거룩함과 복락의 높은 경지에 이르게 할 만한 가치와 힘을 가질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 순간 다윗과 함께 하나님께 이렇게 부르짖어야 한다: “주님의 길로 내 발걸음을 인도하사, 내 발이 미끄러지지 않게 하소서”(시 16:5) – 그리하여 이 보이지 않는 인간 영혼의 통치자께서, 때로는 선을 알지 못함으로, 때로는 정욕의 유혹으로 인해 악에 더 기울어지기 쉬운 우리의 의지를 덕으로 돌리시기를. 이는 선지자가 한 찬송의 구절에서 매우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나는 길 잃은 양과 같았으나, 주님께서 나를 받아 주셨나이다”(시 117:13). 첫 번째 반절은 우리 의지의 흔들림을 의미하며, 두 번째 반절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항상 베푸시는 도움을 뜻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흔들리기 시작할 때마다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지탱해 주시고 굳건하게 하셔서,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 자신의 의지만으로는 완전히 타락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 그러므로 어떤 의인이라도 스스로 의로움을 얻기에 충분한 힘을 지니고 있지 못하며, 끊임없이 흔들리며 매 순간 넘어질 준비가 되어 있다. 그렇기에 주님의 자비는 그분의 손으로 그를 지탱해 주시니, 그렇지 않았다면 의지의 연약함으로 인해 넘어졌을 때 그 넘어짐 속에서 완전히 멸망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함이다(소베스 3, 12). 그리고 주님께서 복음서에서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너희도 내 안에 거하지 않으면 나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분명히 가르치셨는데, 누가 그렇게 오만하고 눈이 멀어서 하나님의 끊임없는 도우심이 필요 없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요한복음 15:4, 5)라고 분명히 가르치시는가? 주님의 말씀이 그분의 도우심 없이는 아무도 영적인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증언하고 있는데(– 소집 3, 16), 어떤 선한 행위를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으로 돌리는 것은 얼마나 무모하고 심지어 신성모독적인 일인가?

2. 우리가 믿는 이유는, 선한 마음가짐의 시작이 우리 안에 하나님의 특별한 감화로 주어지듯이, 미덕을 실천하는 일도 마찬가지로 그분께서 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몫은 하나님의 감화에 더 많이 혹은 덜 기꺼이 순종하고 그분의 도움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소홀히 대하는지, 아니면 경건한 순종으로 하나님의 섭리와 돌보심, 즉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그분의 자비로운 호의에 따르려고 노력하는지에 따라 상을 받거나 마땅한 벌을 받게 됩니다. 이는 여리고의 맹인들이 치유받은 사건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주님께서 그들 곁을 지나가신 것은 신성한 섭리와 자비의 은혜이다. 그러나 그들이 “주여, 다윗의 아들이시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마태복음 20:31)라고 외친 것은 그들의 믿음과 소망의 표현이며, 시력을 되찾은 것 자체는 다시금 하나님의 자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저서 3, 19).

3. 농부는 땅을 경작하는 데 많은 수고를 기울이지만, 경작된 땅에 제때 비가 내리지 않고 유리한 날씨가 이어지지 않는다면 풍성한 열매를 기대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자신의 땅을 가꾸려 애쓰지 않는 게으른 농부들에게 하나님께서 열매를 주지 않으시는 것처럼, 부지런한 이들에게도 하나님의 자비가 함께하지 않는다면 끊임없는 수고가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안에서 사는 삶에서도 우리의 수고가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떤 일에서도 성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선한 행실뿐만 아니라 선한 생각의 근원이심을 고백하십시오. 그분은 우리에게 그분의 거룩한 뜻을 심어 주시고, 우리가 바르게 소망하는 것을 이루도록 힘과 적절한 기회를 주십니다. “모든 선한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로부터 내려오나니,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는 것이라”(야고보서 1:17). ( – 집성 13, 3).

4.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그분이 창조하신 사람이 멸망하지 않고 영원히 살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속에 선을 향한 마음의 불꽃 하나라도 발견하시면, 그분의 자비로 인해 그것이 꺼지지 않게 하실 것이며, 모든 사람이 구원받고 진리의 깨달음에 이르기를 원하시므로, 그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불길로 변하도록 온갖 방법으로 도우신다.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이에게 가까이 있으며, 예외 없이 모든 이를 구원으로 부르시고, 모든 이가 진리를 깨닫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이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8)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 대화록 13, 7).

5. 이 구원이 어떻게 우리의 자유 의지에도 속해 있는지는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으니, “너희가 원하고 나를 순종하면 땅의 좋은 것을 얻으리라” (이사야 1:19)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동시에 이는 “원하는 자나 달리는 자에 달려 있지 않고,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께 달려 있다”(로마서 9:16)는 일입니다. –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의 행위에 따라 갚아 주실 것이며, 동시에 그분께서 “원하시는 대로, 행하시는 대로” (빌 2:13)이시니, –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새 마음과 새 영을 만들라” (겔 18:31) 명하시는 이유이며, 동시에 “내가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새 영을 너희에게 주리라” (겔 11:19) 말씀하시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의 구원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자유 의지가 모두 관여하며, 사람은 때로 미덕을 원할 수는 있지만 그러한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이러한 의문들을 해결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마치 병든 사람에게 건강해지고자 하는 소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건강을 회복할 힘을 주셔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비로운 창조주께서 주신 타고난 능력에서 비롯된 선한 소망조차도 오직 하나님의 도움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확신하기 위해서는, 사도의 다음 말씀을 떠올리기만 하면 충분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내게 없도다”(롬 7,18). (– 저작집 13, 9).

6. 많은 이들이 묻습니다. 우리 안에 은혜가 작용하는 때는, 우리 안에 선한 소망이 드러날 때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찾아올 때 우리 안에 선한 소망이 드러나는 것인가? 경험은 이 두 가지 모두를 입증한다. 사울과 세리 마태는 스스로 원한 것이 아니라 부르심을 받아 원하게 되었으며, 삭개이와 십자가 위의 강도는 자신의 소망으로 은혜의 일을 앞당겼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선을 향하고자 하는 마음을 보시면, 우리의 의지를 인도하고 굳건하게 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선을 원하지 않거나 선에 대한 열정이 식었을 때는, 우리에게 구원을 주는 감동을 주셔서 선한 마음이 형성되거나 다시 살아나게 하신다(– 저서 13, 11).

7. 인간의 본성이 오직 악만을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창조주께서는 우리 영혼에 모든 미덕의 씨앗을 심어 주셨으나, 이 씨앗이 자라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작용이 필요하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이러한 은혜로운 작용을 받아들일지 말지 선택할 자유 의지가 항상 남아 있다. 만약 우리의 구원이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았다면, 사도는 “두려움과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모든 것이 오로지 우리에게만 달려 있었다면, 그는 “하나님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분이시니, 원하시는 것과 행하시는 것을 모두 하나님의 기뻐하심에 따라 이루시는 분이시니라”라고 덧붙이지 않았을 것이다(빌 2. 12, 13)라고 덧붙이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앞서시며, 선지자가 “나의 하나님, 그분의 자비가 나를 앞서시리라” (시 58, 11)라고 말한 것처럼, 또한 우리의 뜻을 따르시므로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님을 앞서리이다” (시 87, 14)라고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 저서 13, 12).

8.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우리의 의지를 선한 방향으로 인도하시되, 우리로 하여금 그에 상응하는 노력을 기울이도록 요구하거나 기대하십니다. 무심한 자들에게 그분의 은사를 주지 않기 위해, 은혜는 우리를 냉담한 무관심에서 깨우게 할 기회를 찾아내십니다. 또한 그분의 풍성한 은사 베풂이 이유 없이 보이는 일이 없도록, 우리의 소망과 수고 후에야 그 은사를 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는 언제나 선물로 주어지는데, 이는 우리의 작은 노력에 대해 헤아릴 수 없는 관대함으로 갚아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수고가 아무리 크더라도, 그 어떤 것도 은혜가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게 만들 수는 없다. 이방인의 사도는 비록 자신이 “모든 사도들보다 더 수고했다”고 말했지만, 그러나 그 수고가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고 덧붙였습니다(고린도전서 15:10). 이처럼 “수고했다”는 말로 그는 자신의 의지의 노력을 표현하고,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로 신성한 도우심을, “나와 함께”라는 말로 은혜 가 게으름과 안일함에 머물러 있는 그가 아니라 수고할 때 그에게 도우심을 베풀었음을 나타냅니다(– 소브, 13, 13).

9. 하나님께서는 다양하고 헤아릴 수 없는 방법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십니다: 구원을 원하고 찾는 자들에게는 그 소망을 강화하시고, 소망이 없는 자들에게는 그 소망을 일깨우시며, 우리의 구원받는 소망이 이루어지도록 도우시고, 거룩한 소망을 불어넣으시거나 확고히 하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기도 속에서 그분을 보호자이자 구세주이자 도우미라고 부릅니다. 그분은 가장 다정한 아버지이자 자비로운 의사처럼, 우리 모두 안에서 모든 것을 이루십니다: 어떤 이에게는 구원의 시작을 일으키시고 그분을 향한 열정을 불태우시며, 다른 이들에게는 일을 완성하게 하시고, 덕을 완전함으로 이르게 하시며, 어떤 이들은 임박한 타락에서 붙잡아 주시고, 또 다른 이들에게는 구원을 위한 기회와 편의를 베풀어 주시며, 원하고 나아가는 이들에게는 도움을 주시고, 원치 않고 저항하는 이들에게는 선한 마음으로 이끌고 회심하게 하십니다: 어디서나 모든 것을 이루시며 – 자극하고, 돕고, 확고히 하시되 – 그분께서 주신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시며 (– 소브, 13, 18).

 

9. 기도에 대하여

1. 우리는 영혼의 평온과 마음의 순결에 기초한 끊임없는 기도를 스스로의 첫 번째 목표이자 완전함의 정점으로 삼아야 하며, 이를 달성하기 위해 육체의 수고를 감수하고 마음의 통회를 유지해야 한다. 이 모든 행실과 기도 사이의 유대는 끊을 수 없고 상호적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미덕들의 체계가 기도의 완전함으로 이끄는 것처럼, 기도가 그 모든 것을 완성하고 정점을 이루지 않는다면, 미덕들은 확고하고 변함없이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미덕들 없이는 우리가 말하는 그 끊임없고, 순수하며, 흔들림 없는 기도를 얻거나 그 경지에 이를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에 따라 삶을 꾸려가는 데 있어 그 기도를 앞서가는 이 미덕들도, 끊임없는 기도 없이는 온전하게 드러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의 힘에 대한 논의를 바로 시작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기도는 모든 미덕의 건축을 완성하는 것이지만, 이를 얻기 위해 잘라내거나 준비해야 할 모든 것을 미리 순서대로 명시하고 검토하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혹은 복음서의 비유(누가복음 14, 28–30)의 의미대로, 이 지극히 높은 영적 기둥을 세우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미리 계산하고 모아두지 않았다면;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 하더라도, 먼저 온갖 불순물인 악덕을 제거하고, 정욕의 파편과 죽은 쓰레기를 버린 뒤, 우리 마음의 생생하고 단단한 땅, 마치 그 복음서의 돌(누가복음 6, 48) 위에, 단순함과 겸손이라는 가장 견고한 기초가 놓이지 않는다면, 그 위에 영적 미덕을 쌓아 이 기둥을 세우고, 흔들림 없이 서서 자신의 견고함을 의지하여 하늘의 가장 높은 곳까지 머리를 치켜들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기둥이 그러한 기초 위에 확고히 세워지면, 비록 정욕의 폭우가 쏟아지고, 공성 기구처럼 박해의 거센 강이 덮쳐오고, 적대적인 영들의 사나운 폭풍이 몰아친다 해도, 그 기둥은 파괴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공격조차 느끼지 못할 것이다.

2. 그러므로 기도가 마땅한 열정과 순수함으로 드려질 수 있도록, 다음 사항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 첫째, 육신적인 일들에 대한 모든 염려는 철저히 끊어내야 한다; 그다음으로는 어떤 일이나 사건에 대한 근심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기억조차 결코 허용되어서는 안 되며, 마찬가지로 산만함, 헛소리, 장황한 말, 그리고 농담도 근절되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분노나 슬픔으로 인한 동요는 완전히 억누르고, 육체적 정욕과 탐욕을 부추기는 해로운 자극은 뿌리째 뽑아내야 한다. 이러한 악덕들과 그와 유사한 것들, 즉 사람들의 눈에도 드러나는 것들을 완전히 뿌리 뽑고 잘라낸 후, 청결함과 흠 없음으로 마무리되는 이러한 예비적인 정화를 마친 뒤, 다음으로 우선 흔들리지 않는 깊은 겸손의 기초를 놓아야 하며, 이 기초는 하늘 가장 높은 곳까지 닿으려는 기둥을 단단히 지탱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다음 이 기초 위에 영적 미덕의 건물을 세워야 하며, 영이 변덕스러운 방황과 뜸을 뜨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래야만 영적인 시선이 조금씩 하나님을 관조하는 방향으로 높아지기 시작할 것이다. 왜냐하면 기도 시간 이전에 우리 영혼이 받아들인 것은, 기억의 손에 이끌려 기도 중에도 반드시 우리 마음에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도 중에 어떤 모습이 되고자 하는지에 따라, 기도 시간 전에 미리 그 모습을 갖추어야 하며, 기도할 때 우리 안에 자리 잡기를 원치 않는 것이 있다면, 그 전에 서둘러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그것을 몰아내어 사도의 계명인 “끊임없이 기도하라” (살전 5:17)

3. 우리의 마음은 지극히 가벼운 깃털이나 솜털에 비유되곤 하는데, 이는 어떤 외부 액체에도 젖지 않은 상태에서 아주 약한 바람만 불어도 그 가벼움 덕분에 대개 높은 곳으로 떠오르지만, 반면 어떤 수분에 의해 무거워지면, 공중으로 떠오르는 대신 그 수분의 무게로 인해 아래로 떨어져 땅에 달라붙는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도, 외부에서 밀려오는 정욕과 세속적인 근심들로 무거워지지 않고, 해로운 욕망이라는 습기로 손상되지 않는다면, 본래의 순수함 덕분에 가벼워져, 영적인 묵상의 아주 미약한 바람만 불어도 높이 솟아오르며, 이 세상적이고 지상적인 것을 뒤로 하고, 하늘에 속한 보이지 않는 곳으로 날아오르게 된다. 바로 그 때문에 주님의 계명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하십니다. “너희는 삼가라. 과식과 술 취함과 세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무거워지지 않도록 하라”(누가복음 21:34).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가 하늘에 닿을 뿐만 아니라 하늘 너머로까지 뚫고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우리의 마음을 본래의 가벼움으로 되돌리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모든 세속적인 악과 세속적 정욕의 모든 습기를 깨끗이 씻어내어, 기도가 더 이상 어떤 낯선 짐에도 짓눌리지 않고 가볍게 하느님께 솟아오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4. 주님께서 우리 마음을 무겁게 하는 원인으로 지적하신 것들에 주목하십시오. 주님께서는 간음이나 음행, 살인, 신성모독, 절도—이 모든 것을 사람들이 치명적인 죄이자 정죄받을 만한 것으로 인정하는 것들—을 지적하신 것이 아니라, 과식, 술 취함, 그리고 이 세상의 염려와 근심을 지적하셨습니다. 이 것들은 이 세상의 사람들 중 그 누구도 경계하지 않고 부끄러운 일로 여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부끄럽게도 세상을 등진 사람들 중 일부조차도 그 안에서 자신에게 해나 재앙을 보지 못하고 같은 쾌락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을 무겁게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며, 땅으로 짓누르는 이 세 가지 불의는, 문자 그대로 이해한다면 피하기 쉬운 일입니다. 특히 우리처럼 세상과의 모든 교제를 멀리하고, 이러한 눈에 보이는 염려와 술 취함, 과식 등에 개입할 기회가 전혀 없는 우리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피하기 더 어려운 또 다른 영적인 과식과 술취함이 있으며, 우리가 모든 재물을 완전히 버리고, 포도주와 온갖 과식을 절제하며, 황야의 고독 속에 머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감싸는 또 다른 세상의 근심과 슬픔이 있다. 나는 육체의 방종과 집착, 정욕을 말하는 것인데, 이것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정화하지 못한다면, 포도주로 인한 취함이나 풍성한 음식이 없더라도 우리 마음은 훨씬 더 해로운 취함과 포만감으로 무거워질 것이다. 오직 모든 정욕의 속박에서 벗어나 마음이 깊이 평온해지고, 그 마음이 지극한 열망으로 지극한 선이신 하느님께 가장 굳건히 매달리는 자만이,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사도의 계명을 온전히 이행할 수 있습니다.

5. 특별한 마음의 회개와 영혼의 순결, 그리고 성령의 깨달음이 없다면, 모든 종류의 기도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기도의 종류는 한 영혼 안에서, 혹은 모든 영혼에서 생겨날 수 있는 다양한 상태와 기분의 수만큼이나 많습니다. 마음이 순결함에 있어 발전하고, 우연한 상황이나 내적 활동으로 인해 빠져들게 되는 상태의 질에 따라 새롭게 상승함에 따라, 기도는 그러한 순간마다 변모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항상 똑같은 기도를 드릴 수는 없다는 것이 명백합니다. 누구든지 기쁠 때는 다르게 기도하고, 슬픔이나 뜻밖의 일로 짓눌릴 때는 또 다르게 기도하며, 영적 성취가 꽃피울 때는 다르게 기도하고, 수많은 원수의 공격에 시달릴 때는 또 다르게 기도한다; 죄 사함을 구할 때는 또 다르게, 은혜가 더해지기를, 혹은 어떤 미덕을 얻기를, 또는 어떤 정욕이 사라지기를 기도할 때는 또 다르게, 지옥과 장차 올 심판을 생각할 때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는 또 다르게; 또는 장래의 복에 대한 소망과 열망으로 불타오를 때; 또는 궁핍과 위험에 처해 있을 때; 또는 안전과 평화를 누릴 때; 또는 하늘의 신비에 대한 계시로 빛을 받을 때; 또는 덕행의 결실 없음과 감정의 메마름을 슬퍼할 때.

6. 사도는 기도의 주제에 따라 네 가지 종류의 기도를 구분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먼저 기도와 간구와 탄원과 감사를 드릴 것을 권합니다”(딤전 2:1). – “기도”(δεησις)는 죄에 대한 간구 또는 탄원으로서, 누군가 자신이 저지른 현재 또는 과거의 죄에 대해 통회하며 용서를 구할 때를 말합니다; – “간구”, – προσευχη, –는 기도할 때 하나님께 무언가를 바치거나 약속할 때(“주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제가 이러저러하게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이루어집니다; “간구”, – εντεξις, –는 마음이 뜨거워진 상태에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혹은 온 세상의 평화를 위해 기도를 올릴 때 이루어집니다; "감사의 기도", – ευχαριςια, – 이는 마음이 하나님께서 베푸신 과거의 은혜를 회상하거나, 현재의 은혜를 보거나, 혹은 미래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복을 내다보며,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릴 때를 말합니다.

7. 이 네 가지 기도의 형태 뒤에는 가장 고귀한 기도의 경지가 따르는데, 이는 유일한 하나님을 관조하고 그분께 대한 불타는 사랑에 있는 것이며, 그곳에서 우리 마음은 이 사랑에 휩싸이고 스며들어,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서, 그리고 특별한 진솔함으로 대화하게 된다. 우리가 이 상태를 부지런히 추구해야 한다는 사실은 주님의 기도, 즉 “우리 아버지” 등(마태복음 6,9–13)이 우리에게 일깨워 줍니다. 우리는 “우리 아버지!”라고 말함으로써,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고백하며, 동시에 우리가 노예의 상태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양자로 입양되었음을 함께 고백하는 것이다. – 이어서 “하늘에 계신”이라고 덧붙임으로써, 우리는 이 땅의 현세적 삶에 대한 집착을, 마치 나그네의 삶처럼 우리를 우리 아버지로부터 멀리 떨어뜨리는 것임을 온전히 배척하고, 반대로 가장 큰 열망으로 우리 아버지가 계신 그 영역을 향해 나아가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며, 우리 아버지께서 거하시는 그 영역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며, 우리를 높은 양자됨에 합당하지 않게 만들어, 사생아처럼 아버지의 유산을 박탈당하고 의로운 하나님의 심판의 모든 엄중함에 처하게 할 만한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나타냅니다. 이처럼 높은 하나님의 자녀의 지위에 이른 우리는, 더 이상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 온 마음을 다해 우리 아버지이신 그분의 영광을 갈망하며, 그분께 “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라고 말함으로써, 우리의 모든 소망과 기쁨이 우리 아버지의 영광임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의 지극히 영광스러운 이름이 찬양받고, 경건히 숭배되며, 경배받기를 바랍니다. 정화된 마음이 드리는 두 번째 간구는 “그 나라가 임하소서” — 즉, 마귀가 우리에 대한 권세를 빼앗기고 우리 마음에서 정욕이 쫓겨난 후, 하나님께서 미덕의 향기를 통해 우리 안에서 다스리기 시작하실 때, 그리스도께서 성도들 가운데서 다스리시는 그 나라를 뜻하기도 하고, — 또는 예정된 때에 모든 완전한 자들과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약속된 그 나라를 뜻하기도 하는데, 그때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 아버지의 복을 받은 자들아, 창세부터 너희를 위해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마태복음 25:34). 아들에게 어울리는 세 번째 간구: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 이는 사람들이 천사들과 같아지기를 바라는 뜻이며,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듯이, 땅에 사는 모든 이도 자기 뜻이 아니라 그분의 뜻을 행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또한 이는 “우리 삶에서 모든 것이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는 주님께 우리의 운명을 맡기며, 주님께서 모든 것—행복과 불행까지—우리에게 유익하도록 이끌어 주시고, 우리 자신보다 더 우리의 구원을 염려하신다는 것을 믿는다. 이어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 “일용할”이란 실재 그 이상의, 모든 실재 중 가장 높은 것을 뜻하며, (이는 오직 “하늘에서 내려온 양식”만이 될 수 있다). ‘오늘’이라고 말할 때, 어제의 섭취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음을 나타냅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다면, 매일같이 이 빵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여, 언제나 이 기도를 드려야 함을 확신시키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이 빵을 받아들이고 맛봄으로써 우리 내면의 사람의 마음을 굳건히 해야 할 필요가 없는 날은 단 하루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주시옵소서. 우리도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듯이.” 자비로우신 주님께서는 우리가 형제들에게 용서의 본을 보일 때, 곧 “우리도 용서하듯이” 용서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분명히, 이 기도를 바라며 담대하게 용서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이 빚진 자들을 용서한 사람뿐입니다. 만일 온 마음을 다해 자신에게 죄를 지은 형제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이 기도를 통해 자비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을 자초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그의 이 기도가 들린다면, 그의 본보기에 따라 무자비한 분노와 피할 수 없는 형벌의 선고 외에는 다른 무엇이 따를 수 없기 때문이다. “자비를 베풀지 않은 자에게는 자비 없는 심판이 있을 것이라(야고보서 2:13).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사도 야고보 사도의 말씀을 상기시키며: “시험을 견디는 사람은 복이 있도다”(야고보서 1:12); – 이 기도의 말씀을 우리는 “우리가 결코 시험에 들게 하지 마소서”라고 이해해서는 안 되며, “우리가 시험에서 패배하지 않게 하소서”라고 이해해야 한다. 욥은 시험을 받았으나 시험에 빠지지는 않았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께 어리석은 말을 하지 않았기”(욥 1:22) 때문이며, 유혹자가 그를 끌어들이고자 했던 신성모독적인 불평으로 자신의 입을 더럽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도 유혹을 받았고, 요셉도 유혹을 받았으나, 그 누구도 유혹에 빠지지 않았다; 이는 그들 중 누구도 유혹자의 뜻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한 자로부터 우리를 구하소서” – 즉, 우리의 힘을 넘어서는 유혹을 악마에게서 받게 하지 마시고, “유혹과 함께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은혜도 베풀어 주소서” (고린도전서 10:13).

8. 비록 제시된 이 기도가 주님 친히 말씀하신 것이므로 (기도의) 온전한 완전함을 모두 담고 있지만,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의 신자들을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더 고귀한 어떤 상태, 즉 극소수만이 깨달았거나 체험한, 심지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그 불타는 기도로 이끌어 가십니다. 이 기도는 모든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여, 목소리의 소리도, 혀의 움직임도, 어떤 단어의 발음으로도 표현될 수 없으며, 하늘의 빛이 쏟아져 들어와 비추어진 마음이, 미약한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을 모아 마치 가장 풍요로운 어떤 샘에서처럼 를 억누를 수 없이 쏟아내며, 말할 수 없이 어떤 식으로든 주님께 곧바로 토해 내며, 그 가장 짧은 순간에 드러내는 바는, 정신을 차리고 나면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고, 마음속으로 되짚어 볼 수도 없는 것이다.

9. 이러한 종류의 기도 상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일반적으로 은총이 넘치는 기도의 기분은 감동에 의해 특징지어지는데, 이 감동이 찾아오면 사로잡힌 마음이 순수하고 불타는 기도로 이끌린다. 경험에 따르면, 이러한 감동은 다양한 상황에서 찾아온다. 때로는 시편을 부를 때, 어떤 구절의 말씀이 불타는 기도의 계기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형제들의 목소리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선율이 놀라움에 휩싸인 영혼들을 간절한 기도로 이끌어내기도 한다. 또한 때로는 명료하고 경건한 찬양이 예배에 임한 이들에게 많은 열정을 불어넣었으며, 드물지 않게는 성숙한 신자의 권면과 영적인 대화가 무릎을 꿇고 있는 이들에게 기도가 풍성하게 쏟아져 나오게 하는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때로는 형제나 소중한 누군가의 파멸을 목격하며 깊은 감동에 휩싸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우리 자신의 냉담함과 나태함을 회상할 때면, 때로 우리에게 구원을 주는 영적인 열정이 솟아오르곤 했습니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영혼을 무감각과 나른함에서 깨우는 사례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

10. 다양한 상황에서 감동이 찾아오는 것처럼, 그 표현 방식도 다양하다. 때로는 형언할 수 없는 어떤 영적 기쁨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때로는 영혼의 모든 힘과 움직임을 깊은 침묵 속으로 가라앉히기도 하며, 때로는 다소 많은 눈물을 흘리게 하기도 한다. 눈물이나 슬픔에 찬 어떤 심경은 감동의 가장 흔한 표현이다. 이러한 눈물은 때로는 자신의 죄를 자각하여 마음이 찔릴 때, 때로는 영원한 복을 묵상하고 영원한 영광을 갈망할 때, 때로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푸신 큰 은혜를 깨닫고 자신의 부적절함과 부적합함을 느낄 때, 또는 이 땅에서 우리가 겪는 수많은 고난과 방랑을 느낄 때 흘러나온다.

11. 기도가 들렸다는 표징은 무엇인가? – 기도 중에 어떤 의심도 우리를 방해하지 않고, 우리의 간구를 향한 희망이 절망으로 무너뜨려지지 않으며, 기도를 쏟아내는 그 순간에 우리가 구한 것을 이미 받았다고 느낀다면, 기도가 진정으로 들렸음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기도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바라보시고 그 간구를 들어주실 수 있다고 믿는 만큼, 기도가 들리고 구한 것을 받을 자격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의 말씀은 변함없으니, “무엇을 구하든지, 이미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이루어지리라”(마가복음 11:24) 하셨다. 이와 더불어 하나님의 말씀은 기도가 응답받는 데 기여하는 여러 가지 이유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이 한마음으로 기도할 때(마태복음 18:19), 혹은 믿음을 가지고 기도할 때—비록 그 믿음이 겨자씨 한 알만큼 작다 할지라도(마태복음 17:20)—, 또는 끊임없이 기도할 때 (눅 11,8), 혹은 기도와 자선을 결합할 때(시르 29,15), 그리고 그 밖의 자비로운 행실들(시 58,6–9)을 실천할 때입니다. 보라, 기도가 응답받는 은총을 얻는 방법이 얼마나 많은지; 그러므로 누구도 구원을 위한 은혜를 구할 때 절망에 빠지지 말라. 설령 네게 기도가 응답받는 데 필요한 많은 것이 부족하다고 치더라도, 누구나 원하기만 하면 가질 수 있는 기도의 끈기를 네가 가질 수 없는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오직 그 끈기 하나만으로도 주님께서는 구하는 모든 것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의심 없이 기도에 끈기 있게 매진하여, 우리가 구하는 것을 얻도록 합시다. 주님께서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그리하면 열릴 것이니라” (누가복음 11, 9. 10). 그러나 기도하는 모든 사람은, 기도가 응답될지 의심할 때 결코 응답받지 못할 것임을 알아야 한다.

12. 무엇보다도 기도에 관해서는, 우리가 자신의 기도실에 들어가 문을 닫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는 복음의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이는 문자 그대로 지켜야 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영적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방 안에서 기도한다는 것은, 마음을 모든 생각과 근심에서 완전히 떼어내고, 주님께 은밀하고 담대하게 기도를 드리는 것을 말한다. 문을 닫고 기도한다는 것은, 입을 다물고 침묵 속에서, 말이 아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분께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은밀한 곳에서 기도할 때는 오직 마음과 주의 깊은 정신으로 유일하신 하나님께 간구를 드려, 가장 적대적인 권세조차 우리가 무엇을 기도하는지 알 수 없게 합니다. 왜 깊은 침묵 속에서 기도해야 하는가 하면, 단지 곁에 있는 형제들을 기도에서 멀어지게 하지 않고, 우리의 속삭임이나 외침으로 그들의 기도하는 마음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특히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를 비방하는 가장 큰 원수들로부터도 우리 기도의 의도(주제)가 숨겨지도록 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13. 우리의 기도는 주님께서 아버지께 기도하신 바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질 때, 그 본연의 완전함에 이르게 될 것이다. 곧 “주께서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게 하소서”(요한복음 17:26); 그리고 또: “아버지여, 주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주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우리 안에 하나가 되게 하소서”(같은 장 21절). 이는 우리의 모든 사랑과 모든 소망, 모든 열심, 모든 갈망, 모든 생각, 우리가 보는 모든 것, 말하는 모든 것, 바라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 되실 때, 그리고 아버지께서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의 사이에 있는 그 일치가 우리 마음과 생각 속에 흘러들어올 때, 곧 그분께서 진실하고 순수하며 끊어지지 않는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그분과 순수하고 분리될 수 없는 사랑으로 연합될 때입니다. 이 경지에 이른 자는 마음속에 끊임없는 기도가 타오르지 않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며, 그때 그의 삶의 모든 움직임과 마음의 모든 열망은 하나되고 끊어지지 않는 기도가 되어, 영원히 복된 삶의 미리 맛보는 기쁨이자 보증물이 될 것이다.

14. 기도에서 궁극적인 완성에 이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하느님을 기억하는 데 굳건히 서야 하며, 이를 위한 수단은 간결하고 자주 반복되는 기도이다(대담집 9, 36). 우리의 성부들은, 항상 하느님을 기억하고자 하는 자는 다음과 같은 기도를 끊임없이 되뇌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 저를 도와주소서. 주님, 저를 도와주소서”(시편 69, 2). – 이 구절은 성경 전체에서 부적절하지 않게 선택된 것이다. 이 구절은 기도에 필요한 모든 태도를 표현하며, 기도하는 이의 모든 필요를 충족시킨다. 이 구절에는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겸손한 고백과, 언제나 도울 준비가 되어 계신 유일한 도우미이신 하나님에 대한 고백, 그리고 이 기도를 드리는 자에게도 도움을 주시고 모든 환난에서 건져 주실 것이라는 믿음과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이 말로 끊임없이 하나님을 부르짖는 자는 지혜로 하나님을 곁에 계심을 보고 마음으로 느끼며, 아들을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그분께 나아갑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보호와 은총, 그리고 방패를 자신에게 끌어당깁니다. 이처럼 이 간결한 기도는 마귀들의 공격에 맞서는 뚫을 수 없는 성벽이 되며, 생각의 소란을 잠재우고, 악한 생각을 물리치며, 정욕적인 움직임을 다스리고, 마음속에 모든 선한 씨앗을 가꾸어 주는 역할을 한다. 성부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음탕함이라는 정욕이 다양한 형태로 괴롭힌다면, “하나님, 저를 도와주소서, 주님, 저를 도우소서”라고 부르짖으십시오; – 혹은 육신을 다스리기 위해 더 엄격한 금식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스스로를 제어할 희망이 없다면, “하나님, 저의 도움을 들어주소서”라고 기도하라. 낙담의 영이 괴롭히고, 슬픔이 마음을 갉아먹어 마땅히 해야 할 모든 일을 방해한다면, “하나님, 저의 도움을 들어주소서”라고 말하라; – 혹은 영혼에 어떤 영적 기쁨이 찾아와, 그것을 간직하고 더욱 높이고자 한다면, 역시 “하나님, 저를 도와주소서”라고 말하라. 육체의 간지러움이 그 유혹적인 달콤함과 함께 솟아오를 때, – 이 불꽃이 순결이라는 향기로운 꽃을 태워버리지 않을까 두려워한다면, 이렇게 부르짖으라: “하나님, 저를 도우소서”라고 외치십시오; 혹은 당신의 지체에 평온함과 시원함이 들어와, 이 선한 상태가 계속되기를, 혹은 영원히 당신 안에 머물기를 원한다면, 더욱 간절히 “하나님, 저를 도우소서”라고 되뇌십시오. 이처럼 모든 영적 궁핍 속에서도 오직 이 한 가지 기도를 끊임없이 되뇌어라. 그러면 그것은 너에게 모든 악으로부터의 구원이 되고, 네 안에 있는 모든 선을 지키는 방패가 될 것이다. 그러니 이 기도가 네 가슴 속에서 끊임없이 맴돌게 하라. 어떤 일이나 봉사를 할 때, 길을 갈 때나 식탁에 앉았을 때, 잠자리에 들 때나 깨어날 때, 이 짧은 기도를 끊임없이 읊조리고 그 안에서 교훈을 얻으라. 이를 꾸준히 연습하여 꿈속에서도 이 기도를 읊조릴 수 있게 될 때까지 말이다.

15. 이것의 열매는 무엇보다도 네가 생각의 모든 풍요로움을 버리고, 이 시의 일체성에 이끌려, 오직 한 분의 도우미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데 점점 더 익숙해지게 될 것이며, 그분이 항상 네 곁에 계시고, 모든 것을 보시며 모든 것을 포용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로부터 나아가, 하나님과의 가장 생생한 교제로 올라가면서, 점점 더 고귀한 신비들로 충만해지기 시작할 것이며, 하나님 안에 깊이 잠기며, 그분과 하나 되어 머물고, 오직 그분만으로 만족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너는 앞서 언급한 그 순수한 기도에 도달하게 될 것이니, 그 기도는 더 이상 어떤 형상도 염두에 두지 않으며, 어떤 목소리의 소리나 어떤 말의 발음으로도 나타나지 않고, 억제할 수 없는 생동감으로 마음에서 솟아나와, 말할 수 없이 황홀한, 하느님을 향한 마음의 불타는 열망으로, 그분 앞에서 형언할 수 없는 탄식과 신음으로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10. 영적 생활의 지도에 관하여 가장 경험이 풍부한 이들과의 토론

1. 옛날에 장로들이 성 안토니우스 대성자에게 모여 저녁부터 아침까지 다양한 영적 주제들에 대해 논의를 나누었는데, – 특히 어떤 미덕이 가장 큰지, 그것이 우리를 마귀의 유혹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고, 곧은 길로 완전함의 경지로 이끌 수 있는지에 대해 논의했다. 여러 가지 의견이 제시되었다. 어떤 이들은 금식과 기도를, 다른 이들은 소유욕을 버리고 모든 것을 경멸하는 것을, 또 어떤 이들은 은둔 생활이나 광야로 떠나는 것을, 또 다른 이들은 이웃 사랑을 꼽았다. 모두가 이렇게 의견을 밝힌 후, 복자 안토니우스가 말을 시작했다. “여러분이 말씀하신 모든 것은 하나님을 찾고 그분께 나아가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구원을 주고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언급한 미덕 중 어느 하나에 우선순위를 두는 것은, 그 미덕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이들이 타락했던 경험들로 인해 허용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엄격한 금식과 기도로 두각을 나타낸 이들도, 사막의 고독 속에 끊임없이 머문 이들도, 극단적인 수준의 무소유에 이른 이들도, 그리고 관대한 자선가들도 원수의 올가미에 걸려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원인은, 제 생각에, 분별력의 부족 외에는 다른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분별력은 사람이 위험한 극단을 피하며 왕의 길을 걷도록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금식에 관해서는 몸을 지나치게 고갈시키지도, 지나치게 방종하게 하지도 않습니다. 복음서에서 이성은 영혼의 눈이자 등불로 불립니다. “몸의 등불은 눈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눈이 맑으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네 눈이 악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라” (마태복음 6:22, 23). 빛이 모든 것을 비추고 눈이 모든 것을 보는 것처럼, 이 분은 사람의 모든 생각과 행실을 검토하고 살피며,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그리고 무엇으로부터 삼가야 할지를 밝혀내고 결정합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그러한 분별력이 부족할 때, 그의 행실과 생각은 엄격히 검토되지 않은 채 흘러가게 되고, 이때 원수는 참된 선 대신 겉보기만 좋은 선을 그에게 대어 주며, 그것으로 구덩이나 올가미를 가린 뒤 그를 그 속으로 빠뜨려 파멸에 이르게 한다.”

2. 성 안토니우스의 결정은 셀 수 없이 많은 사례들로 입증된다. 이론 장로의 비참한 타락을 떠올려 보자. 그는 극도로 엄격한 금식과 깊은 은둔에 몰두했고, 이를 어떻게든 어기지 않기 위해 원수의 유혹에 따라 토요일과 일요일에 열리는 은수자들의 정기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는데, 그곳에서는 상호 대화를 통해 엄격한 삶의 다양한 길과 갈림길이 밝혀지곤 했다. 마치 원수의 선한 조언인 양 이에 현혹된 그는 원수에게 더욱 깊이 빠져들었고, 원수가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 그를 천사로 착각하여, 그의 말에 따라 말라버린 우물 속으로 뛰어들었다가 몸을 부러뜨리고 사흘 만에 숨을 거두었다. – 또 다른 예가 있습니다. 두 형제는 가장 깊은 사막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하고, 주님께서 직접 주시는 음식 외에는 다른 어떤 음식도 먹지 않기로 다짐했습니다. 사막을 헤매던 중, 그들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기진맥진해졌을 때, 야만적이고 잔인한 부족인 마지키족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토록 비참한 처지에 있는 것을 보고 측은히 여겨 빵을 건넸다. 한 사람은 마음을 고쳐먹고, 비록 사람으로부터 받은 것이지만 주님께서 보내신 것으로 여기며 빵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는 힘을 되찾고 살아남았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고집스럽게 자신의 결심을 굽히지 않았고, 굶주림으로 죽고 말았다.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엄격한 금식자이자 은둔자 중 한 사람이 자신을 천상의 힘과 교감할 자격이 있다고 여겼는데, 원수는 이를 놓치지 않고 이용했다. 원수는 천사처럼 그에게 나타나 인간의 행실과 생각에 대한 계시를 주며, 등불 없이도 수도실에 빛을 비추었다. 이 방법으로 그에게 완전한 신뢰를 얻은 악마는 마침내 아브라함처럼 자신의 아들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아들이 비범한 준비 과정을 보고 도망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이 명령은 분명 실행되었을 것이다. – 또 다른 사례: 메소포타미아에서 한 금욕주의자이자 은둔자를 적들이 꿈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으로 이끌었는데, 꿈속에서 그에게 두 민족을 보여주었으니, 하나는 사도들과 순교자들과 함께 어둠과 치욕, 슬픔과 울음 속에 있는 기독교인들이었고, 다른 하나는 모세와 족장들과 예언자들과 함께 눈부신 광채와 영광, 기쁨 속에 있는 유대인 민족을 보여주었다. – 이 예들만으로도 분별력 없음이 타락과 파멸로 통하는 열린 문임을 확신하기에 충분하다.

3. 분별력은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이를 발전시키고 길러야 한다. 어떻게? 자신의 모든 것을 가장 경험이 풍부한 성부들의 판단에 맡김으로써이다. 이것이 바로 분별력의 가장 지혜로운 학교로, 그곳에서는 특별한 소질이 없는 사람들조차도 마땅히 해야 할 일에 대해 올바르게 판단하는 법을 배운다. 이렇게 하여 ‘분별력은 어떻게 얻어지는가’라는 문제가 해결된다. 진정한 분별력은 진정한 겸손을 통해 얻어지는데, 그 첫 번째 증거는 우리가 하는 일뿐만 아니라 생각하는 것까지 장로들에게 털어놓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에 결코 의지하지 않고, 모든 일에서 장로들의 가르침을 따르며, 오직 그들이 좋다고 인정하는 것만 좋고, 나쁘다고 인정하는 것만 나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위는 바른 길에 안전하게 머무르게 하며, 모든 마귀의 올가미로부터 지켜줍니다. 자신의 삶을 자신의 판단에 따라가 아니라 성공한 이들의 조언에 따라 이끌어가는 사람은 마귀의 유혹에 빠질 수 없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생각을 스승들에게 맡기는 것이 자신의 분별력을 대신하며, 분별력을 길러줍니다. 원수는 빛을 싫어한다. 그러므로 악한 생각이 드러나는 즉시, 그 계시는 그것을 쫓아내고 근절해 버린다. 어두운 굴에서 빛으로 끌려 나온 뱀이 도망쳐 숨으려 애쓰는 것처럼, 악한 생각들도 솔직한 고백과 고해로 드러나면 사람으로부터 도망치려 애쓴다. 이는 수많은 사례와 경험으로 입증된다.

4. 아바 세라피온은 자신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신앙 생활을 막 시작했을 때, 아바 몰래 마른 빵 한 조각을 가져다가 먹곤 했습니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그렇게 했고, 그 정욕이 나를 사로잡아 이겨낼 수 없게 되었다. 양심이 나를 책망했지만, 나는 아바에게 이 사실을 말하기가 부끄러웠다. – 그러나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섭리로 몇몇 형제들이 장로님을 찾아와 그에게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고 허락을 구하게 되었다. 장로는 그들에게 필요한 조언을 해주었고, 그 과정에서 음식에 대한 절제 문제도 언급하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덧붙였다. “수도자들에게 해를 끼치는 것, 그리고 악마들을 그토록 기쁘게 하는 것은, 자신의 생각을 영적 아버지들에게 숨기는 것만큼 큰 것이 없다.” 이 말씀은 나를 크게 놀라게 했다. 나는 하나님께서 그 장로에게 나의 죄를 드러내신 것이라고 생각했고, 깊은 회개에 빠져 울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평소 훔치곤 했던 작은 빵 한 조각을 옷깃에서 꺼내어 땅에 엎드려, 과거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빌며 앞으로는 이런 일을 하지 않도록 나를 지켜 달라고 기도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때 장로께서 말씀하셨다. “네 고백이 너를 네 속박에서 해방시켰다. 네 죄를 드러냄으로써, 네가 침묵할 때 너를 괴롭히던 마귀를 무찔렀다. 지금까지 너는 그에게 반박하지도, 폭로하지도 않음으로써 그가 너를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었으나, 이제 그가 네 마음에서 쫓겨나 드러났으니, 그는 더 이상 네 안에 자리를 잡지 못할 것이다.” 노인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마치 타오르는 횃불이 내 속 깊은 곳에서 나와 방 전체를 악취로 가득 채운 것처럼 보였기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유황이 타는 줄로 생각했다. 장로는 덧붙였습니다. “보라, 주님께서 내 말의 진리와 네 해방의 사실을 분명히 확인해 주셨다.” 그리하여 고백의 힘으로 탐식의 정욕이 내게서 물러났고, 그 이후로는 예전의 욕망이 내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았습니다.

5. 사무엘에게서 무엇을 볼 수 있는가? – 그는 갓난아이 때부터 하나님께 봉헌되어 그분과 대화할 특권을 누렸으나, 자신의 생각을 믿지 않고, 하나님께 두 번이나 부르심을 받자 서둘러 장로 엘리에게로 가서, 그로부터 하나님께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친히 자신과 대화를 나누게 하신 그 사람조차도, 장로의 가르침을 통해 인도하시어 그를 겸손으로 이끄시기를 원하셨습니다. – 성 바오로에게서도 같은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친히 그를 부르셨지만, 곧바로 아나니아에게 보내어 그에게서 진리의 길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 그리고 성 바오로 자신도 복음 전파를 몇 차례 시도한 후, “헛되이 수고하지 않도록”(갈 2,2) 자신의 복음을 검증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했습니다. 비록 그에게 성령의 은총이 뚜렷이 함께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영적 아버지들의 인도를 받는 자 외에는 누구에게도 완전함에 이르는 길을 열어주지 않으시는 것이 분명하며, 이는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네 아버지께 묻으라. 그러면 네 장로들이 네게 알려 주고 말하리라”(신명기 32,7).

 

11. 영적 삶의 완전함에 이르는 단계와, 이를 향한 동기

1. 세 가지 동기가 사람들을 자극하여 정욕을 억제하게 하는데, 바로 미래의 지옥 고통에 대한 두려움, 혹은 현재의 엄격한 법에 대한 공포; 천국을 얻고자 하는 소망과 열망; 마지막으로 미덕에 대한 사랑, 즉 선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두려움이 어떻게 악의 더러움을 혐오하게 하는지에 대해서는 잠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불의를 미워하느니라”(– 8. 13). 또한 소망이 어떻게 정욕에 휩쓸리는 것을 막아주는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를 의지하는 자들은 다 범죄하지 아니하리라” (시 33:23). 사랑에 대해서는, 심지어 죄로 인한 타락조차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랑은 결코 사라지지 아니하느니라”(고전 13:8). 그러므로 사도는 구원의 모든 핵심을 이 세 가지 미덕을 얻는 데 두며 이렇게 말했다: “이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남아 있느니라” (고린도전서 13:13). 믿음은 장차 닥칠 심판과 고통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줌으로써 우리를 정욕의 더러움에서 멀어지게 하고, 소망은 천상의 상을 기대함으로써 우리의 마음을 현재로부터 떼어내어 모든 육신의 쾌락을 경멸하게 하며, 사랑은 그 불꽃으로 우리 안에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영적 미덕의 성취를 향한 열정을 불태우며, 그 미덕들에 반하는 모든 것을 완전한 증오로 멀리하게 이끕니다. 비록 이 세 가지 미덕이 모두 우리를 하나의 목표, 즉 모든 허용되지 않은 것을 삼가게 하는 방향으로 이끌지만; 그 가치의 차원에 있어서는 서로 크게 다릅니다. 처음 두 미덕은 성취를 추구하지만 아직 마음속으로 그 미덕을 진정으로 사랑하지는 않는 사람들에게 해당하며, 세 번째 미덕은 오로지 하나님께만 속하며, 자기 안에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회복한 사람들에게만 해당한다. 이는 오직 하나님만이 두려움이나 보상의 동기가 아니라 오로지 선을 사랑하시는 마음에서 모든 선한 것을 창조하시기 때문이다. ““주께서 모든 것을 스스로를 위하여 행하셨다”고 솔로몬이 말하듯이(잠언 16:4), 즉 그분의 선하심으로 인해 그분은 합당한 자와 합당하지 않은 자 모두에게 온갖 선을 풍성히 부어 주십니다. 이는 영원히 완전하고 본성상 변함없는 선하심이시기에, 사람들의 모욕에 상심하시거나 불의에 분노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그러므로 완전함을 추구하는 자는, 본래 ‘노예적’이라고 불리는 첫 번째 단계의 두려움에서 점차 희망의 길로 올라가야 한다. 여기서 사람은 더 이상 노예가 아니라 용병과 같아지는데, 이는 미래의 보상을 기대하며 행동하기 때문이다. 비록 그는 자신의 죄가 용서받았음을 확신하여 더 이상 그 죄에 대한 벌을 두려워하지는 않지만, 자기 안의 선한 행실을 깨닫고 그 대가로 선한 상을 받기를 기대할 뿐이다. 그러나 그는 아직 아들에게만 해당되는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다. 아들은 아버지의 자비로우신 은총을 완전히 확신하며, 주저함 없이 아버지께 속한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여긴다.

3.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 사랑”을 통해, 아버지께 속한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는 세 번째 단계의 아들들의 경지에 이르러,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형상과 모습을 받아들일 자격을 얻고, 그분의 참된 아들의 본을 따라 다음과 같이 외쳐야 한다: “아버지께서 가지신 모든 것이 내 것” (요한복음 16:15)이라고 외쳐야 합니다. 이는 복자 바울이 우리에 대해 고백한 바와 같으니, 그는 “바울이든 아폴로든 키파든, 세상이든 생명이든 죽음이든, 현재든 미래든, 모든 것이 너희 것” (고린도전서 3, 21. 22). 구세주의 계명 또한 우리를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을 닮도록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온전하라”고 그분은 말씀하시며, “너희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온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태복음 5, 48). 아직 노예와 고용인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선을 향한 마음이 때때로 끊어지곤 하는데, 바로 영혼이 감정이 다소 식거나 세속적인 쾌락과 기쁨에 정신이 팔려 지옥의 두려움이나 미래의 복에 대한 갈망에 더 이상 사로잡히지 않을 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그분께 대한 사랑의 끌림 그 자체로만 하나님을 사랑할 때 비로소 참된 완전함에 이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도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것은 다른 어떤 이유 때문이 아니라 오직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였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불타는 열정으로 두려움에서 소망으로, 소망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 혹은 미덕 그 자체에 대한 사랑으로 나아가야 하며, 온 영혼을 다해 열정을 쏟아 부어 선에 대한 이러한 헌신을 받아들임으로써, 인간의 본성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그 선 안에 흔들림 없이 머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4. 지옥에 대한 두려움이나 미래의 보상에 대한 희망으로 내면의 정욕의 불길을 끄는 사람과, 신성한 사랑을 느끼며 악과 불결함 그 자체를 혐오하며 멀리하고, 순결에 대한 사랑과 헌신으로 마음속에 순결의 선을 지키며,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고 모든 일을 행하는 사람 사이에는 오히려 미덕을 사랑하며, 장차 약속된 보상을 바라보지 않고, 현재의 선을 의식적으로 누림으로써 만족을 얻는다. 이러한 상태에 있는 사람은 비록 자신의 행실을 지켜보는 이가 아무도 없다 하더라도, 죄를 지을 기회를 스스로 허용하지 않을 것이며, 심지어 마음속으로 은밀히 죄악의 쾌락에 휩쓸려 더럽혀지지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속에 미덕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품고 있기에, 미덕에 반하는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혐오감을 느끼며 그것으로부터 등을 돌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려움으로 인해 정욕의 유혹에 휩쓸리지 않는 사람은, 두려움이 주는 장벽이 사라지면 다시 자신이 좋아하는 것으로 돌아갈 것이므로, 항상 덕을 굳건히 지키지는 못할 것이며, 정욕의 투쟁에서 결코 평안을 얻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순결을 함양함으로써 주어지는 확고하고 끊임없는 내적 평화를 결코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싸움에서 평온함이 없는 곳에서는, 때때로 상처를 입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누군가가 싸움에 능숙하고, 아무리 용감하게 싸우며, 적들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자주 입힌다 해도, 때로는 적의 칼날이 그 자신에게도 닿지 않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모든 정욕의 반란을 진압하고 이미 안전한 평화를 누리며, 미덕 그 자체에 전념하게 된 사람은, 순결을 잃는 것보다 더 해로운 것은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기에, 온전히 감싸고 온전히 헌신하는 이 선한 마음의 상태를 끊임없이 유지할 것이다. 그에게 있어 주위 사람들을 존중한다고 해서 정직함이 조금도 더해지지 않으며, 고독을 택한다고 해서 정직함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 그러나 언제나 어디서나 자신의 행실뿐만 아니라 생각까지 심판하는 양심이라는 재판관을 곁에 두고, 그는 무엇보다도 피할 수도, 속일 수도, 숨을 수도 없다고 확신하는 그분을 기쁘게 하려고 노력한다.

5. 자신의 열심한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여 이 경지의 완전함에 이르는 자는, 두려움이 지배하는 노예의 상태에서 그리고 행하는 이의 내적 선함이 아니라 보상을 바라는 마음이 동기가 되는 고용인의 상태에서, 두려움도 보상도 없는, 오직 “결코 사라지지 않는 사랑”만이 끊임없이 작용하는 양자의 상태로 넘어간다. 누구든지 이러한 사랑을 통해 자기 안에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회복하는 자는, 이미 선 그 자체에 대한 마음의 기호에 따라 선을 누리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것과 닮은 인내와 온유함을 얻음으로써, 이후에는 죄를 짓는 자들의 어떤 악행에도 분노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연약함을 함께 슬퍼하고 동정하며, 그들을 용서해 주시기를 기도할 것이며, 자신도 그 전까지는 주님의 자비가 구원해 주시기 전까지 비슷한 정욕에 사로잡혀 있었고, 자신의 노력으로 육신의 속박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그로부터 건져내 주셨음을 기억할 것이며; – 죄인들에게는 분노가 아니라 연민을 나타내야 함을 깨닫게 하여, 평온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주께서 나의 멍에를 찢어 주셨나이다”, “주께 찬양의 제물을 드리리이다”(시 115:7)라고 고백하게 하시고, 또한: “주님께서 나를 도우시지 않으셨더라면, 내 영혼이 곧 지옥에 들어갔으리라” (시편 93, 17); 그리고 그러한 겸손한 마음가짐을 유지하며 복음의 완전함에 대한 다음 계명도 실천할 수 있도록: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며, 너희에게 해를 끼치고 쫓아내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 ” (마태복음 5,44); 그리고 이러한 방식으로 이 계명에 따르는 상을 받을 자격을 얻었으니, 그 상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라 불리게 됩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되리라. 해는 악한 자와 선한 자에게 비추며, 비는 의인과 불의한 자에게 내리느니라” (– 45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랑을 자신이 이룬 것을 깨달은 복자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심판의 날에 담대함을 가지자. 그분께서 이 세상에 계시는 것처럼 우리도 이 세상에 있기 때문이다”(요한일서 4,17). 사람은 본성상 연약하고 약한 존재인데, 하나님을 본받아 선한 자와 악한 자,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모두에게 마음속의 선의로운 사랑을 베푸는 것 외에, 어떻게 그분과 같을 수 있겠는가? – 그리하여 선 그 자체에 대한 헌신으로 선을 행하며, 자신 안에서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임을 드러내야 하는데, 바로 그 복된 사도가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하나님의 씨가 그 안에 거함이라.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이므로 죄를 지을 수 없느니라” (요한일서 3:9),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스스로를 지키므로 악한 자가 그에게 손을 대지 못합니다” (요한일서 5:18). – (이 말은 그러나 모든 종류의 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치명적인 죄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 실로, 가장 거룩한 자라 할지라도 말이나 생각, 욕망 속에서, 무지나 망각, 어떤 극단, 뜻밖의 우연으로 인해 발생하는 그 사소한 과실에 빠지지 않을 수는 없다. 이러한 것들은 ‘죽음에 이르는 죄’라고 불리는 죄와는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의 죄책감과 책망이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한 대로 선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면, 주님의 자비와 오래 참으심을 입음으로써(골 3,12), 자기의 박해자들조차 위해 기도하며, 주님과 같이 이렇게 부르짖을 것이다. “아버지여, 그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눅 23,34). 반면, 아직 더러운 정욕에서 정화되지 않은 영혼의 명백한 징후는, 타인의 죄에 대해 동정심을 느끼지 못하고 그들에게 엄한 심판을 내리는 데 있다.

 

12. 회개의 수고에 대한 결론

1. 완전한 회개란, 우리가 회개하는 죄와 양심이 우리를 책망하는 죄를 다시는 저지르지 않는 데 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죄에 대해 속죄했음을 증명하고, 그 죄가 우리에게 용서받았음을 보여주는 것은, 우리 마음속에서 그 죄에 대한 동정심조차도 몰아내는 것이다. 누구나 자신이 아직 과거의 죄에서 해방되지 않았음을 알아야 한다. 그 죄에 대한 속죄로 수고와 탄식을 드리는 바로 그 순간, 마음의 눈앞에 죄악된 행실의 형상들—자신이 저지른 것들이나 그와 유사한 것들—이 스쳐 지나가고, 이로 인해—부적절한 대상에 대한 쾌락은 말할 것도 없고—그저 그것들에 대한 기억만으로도 영혼의 내적 선한 기질이 무너져 내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속죄를 위해 깨어 있는 마음으로 수고하는 자는, 자신의 마음이 더 이상 그 유혹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것을, 단지 상상 속에서만이 아니라 실제로 느낄 때 비로소 자신의 죄에서 해방되었고, 이전에 저지른 모든 일에 대해 용서를 받았음을 인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회개와 용서의 심판자가 우리 양심 속에 자리 잡고 계시며, 심판의 날이 오기 전, 우리가 아직 이 육신에 머무르는 동안 우리에게 죄 사함을 열어 주시고, 용서에 대한 선포로 속죄의 종결을 알리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말한 바를 더 명확히 표현하기 위해 말하건대, 우리 마음에서 쾌락을 좇는 욕망과 정욕이 모두 쫓겨날 때 비로소 과거의 모든 죄의 더러움이 우리에게서 사해졌음을 믿어야 한다.

2. 질문: 그렇다면 회개하는 자의 입장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되는 거룩하고 구원을 주는 통회와 겸손은 도대체 어디서 우리 안에서 생겨날 수 있겠는가? “나의 죄악을 깨달았고, 나의 죄를 감추지 아니하였으며; ‘주님, 제 죄악을 제게 고백하리이다’라고 하는, 참되고 마땅히 우리에게 적용될 수 있도록,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지는 ‘주께서 내 마음의 악을 용서하셨나이다’(시 31:5)라는 말씀도 그러하겠습니까? 아니면, 기도에 엎드려 성 다윗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에게 죄 사함을 이끌어낼 만큼 강력한 회개의 눈물을 스스로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요? “매 밤 내 침상을 씻으며, 내 눈물로 내 침상을 적시리라” (시 6,7), 우리 마음에서 우리 죄에 대한 모든 기억을 몰아낸다면, 오히려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죄악과 네 죄를 지워 버리고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리니, 너는 기억하라” (이사야 43,25) 명하신 그 기억을 말입니다? 왜 나는 수공예를 할 때뿐만 아니라 기도할 때에도, 일부러 내 영혼 속에 과거의 죄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키려고 애쓰는 것일까? 그것은 참된 겸손과 마음의 통회에 더 효과적으로 마음을 기울여, 선지자와 함께 감히 이렇게 말할 용기를 얻기 위함이다. “나의 겸손과 수고를 보시고, 나의 모든 죄를 사해 주소서” (시 24, 18).

3. 답변: 앞서 말한 내용은 회개의 끝과 양심과 정의가 충족되었음을 나타내는 징후에 관한 것입니다. 죄를 회상하는 것에 관해서는, 물론 이는 상당히 유익하고 필요한 일이지만, 오직 아직 회개의 여정을 걷고 있는 이들에게만 해당됩니다. 그들이 가슴을 치며 끊임없이 다음과 같이 부르짖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내 죄악을 내가 아나니, 내 죄가 내 앞에 드러나도다”(시 50:5), 그리고 또 “내 죄악을 내가 고백하리니, 내 죄를 돌보리라”(시 37:19). 그러므로 우리가 회개를 행할 때, 과거의 죄악된 행실들에 대한 기억이 여전히 우리를 찔러 아파하게 한다면, 그때는 자신의 죄책감에서 솟아나는 눈물의 비가 양심의 불타는 고통을 식혀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마음의 깊은 겸손과 영의 통회로 인해, 지칠 줄 모르는 회개의 수고와 탄식을 통해 그 기억이 잠들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은총으로 양심의 가시가 영혼 깊은 곳에서 제거된다면, 그때 비로소 그가 속죄의 완성에 도달하여 마땅히 모든 용서를 받았으며, 자신의 모든 죄의 더러움에서 정화되었음이 분명해질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망각에 이르는 길은, 과거의 죄와 정욕적인 집착을 씻어내고 마음을 완전히 정화하는 것 외에는 없으며, 겸손 없이는, 부주의나 오만함으로 인해 자신의 정욕을 정화하는 일을 소홀히 하는 자들 중 누구도 이를 이룰 수 없으며, 오직 쓰라린 울음과 끊임없는 탄식으로 과거의 모든 더러움을 씻어내고, 수고를 통해 영혼의 온 힘을 다해 하나님께 다음과 같이 부르짖을 수 있는 자만이 이를 이룰 수 있다: “나의 죄악을 내가 깨달았으며, 나의 죄를 감추지 아니하였나이다” (시 31:5), 그리고 “내 눈물이 낮과 밤으로 나의 양식이 되었나이다” (시 41:4), – 그리하여 마땅히 주님의 입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듣게 되기를: “네 죄악은 구름처럼 사라지고, 네 죄는 어둠처럼 사라지리라” (사 44:22).

4. 당신은 앞서, 고의로 과거의 죄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설령 원치 않는데도 그런 기억이 떠오른다면, 즉시 그것을 쫓아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특히 은둔 생활을 하는 이의 마음을 순수한 묵상에서 벗어나게 하여, 이 세상의 더러움에 휘말리게 하고 정욕의 악취로 숨을 막히게 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네가 무지나 정욕으로 인해 이 세상의 군주를 따라 예전에 저지른 일들을 다시 떠올릴 때, 거기서부터, – 그런 생각을 할 때 그 어떤 어두운 쾌락도 네게 스며들지 않는다는 점은 인정하겠지만 – 그때는 틀림없이 과거의 부패함과 마음속으로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공기를 역겨운 악취로 더럽히고, 영적인 향기, 즉 미덕이 풍기는 달콤한 향기를 쫓아내 버릴 것이다. 왜냐하면, 과거의 정욕적인 행적에 대한 기억이 감정을 자극할 때, 정직하고 품위 있는 남자가 모든 사람 앞에서 포옹이나 말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뻔뻔하고 건방진 여자를 피하듯이, 그 기억으로부터도 똑같이 물러서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즉시 그녀의 접촉을 물리치지 않고, 그녀와의 부도덕한 대화에서 아주 잠깐이라도 지체한다면, 비록 수치스러운 쾌락에 대한 동의를 거절한다 해도, 지나가는 모든 이들의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니, 마치 불명예스럽고 비난받을 만한 일을 저지른 자처럼 여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전염성 있는 기억으로 인해 그러한 종류의 생각에 빠지게 된다면, 그 생각에 조금도 머뭇거려서는 안 되며, 즉시 그 상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래야 천사들이 지나가다가 우리가 그러한 불결하고 수치스러운 생각에 얽매여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우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는 데 아무런 방해가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주님의 축복이 너희에게 있도다. 주님의 이름으로 너희를 축복하노라”(시 128:8). 그러나 종종 경험이 부족한 사람 중 일부는, 회개의 마음으로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의 실수를 되짚어 보다가, 어느새 정욕이라는 가장 미묘한 화살에 찔려 그것에 동의하게 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경건함이라는 외피 아래 시작된 일이 결국 자신에게 수치스럽고 파멸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사람이 의로운 길로 여기는 행실도, 그 끝은 지옥의 깊은 곳으로 이르게 되나니”(잠언 16:25).

 

성 이시히오스,
예루살렘의 장로

 

그에 대한 간략한 소개

예루살렘 출신인 성 이시키오스는 젊은 시절 성 그레고리우스 신학자의 제자이자 청강생이었다. 위대한 스승이 세상을 떠난 후, 그는 팔레스타인의 한 사막에서 은둔자의 삶을 살았으며, 그곳에서 책을 통해, 당시 팔레스타인의 은둔자들과의 대화를 통해, 그리고 자신의 삶의 경험과 연구를 통해 기독교의 정신을 계속해서 탐구했다. 412년에 예루살렘 대주교는 이 깨달음을 얻은 은수자를 장로로 서품했으며, 이때부터 장로의 직분과 설교자의 직함을 겸하면서 그는 교회 역사상 저명한 교사 중 한 사람으로 기록되었다. “위대한 유피미우스는, 그의 제자 키릴 스키포폴스키( )가 (성 유피미우스의 행적에서) 기록한 바와 같이, 429년에 성전 봉헌식을 위해 그의 수도원에 찾아온 예루살렘 총대주교 성 유베날리우스가, 교회를 가르치는 장로이자 교부인 이시키오스를 함께 데려왔다는 사실에 큰 위로를 받았다." 테오판은 자신의 연대기에서 그의 서거 시기를 테오도시우스 3세의 재위 26년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432–433년에 해당한다. 바실리우스 황제의 월력에서는 그의 기념일을 3월 28일로 명시하고 있다. 우리 지역은 물론 동방 전역에서, 현재 그는 치즈 토요일에 모든 성인과 함께 기념되고 있다. 이 날 제9절에 나오는 성 테오도르 스투디토스의 캐논에서는 그가 바실리우스 대제, 그레고리우스 신학자, 요한 황금입, 아타나시우스 대제, 예루살렘의 키릴로스와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 성 에피파니우스, 그레고리우스 니스쿠스와 함께 열거되며, 당연히 그레고리우스 신학자 다음으로 ‘또 다른 신학자’로 불립니다. 그의 학문적 업적을 통해 성 이시히우스는 성 그레고리우스 신학자의 훌륭한 제자였습니다. 바실리우스 황제의 『월력』은 성 이시히오스를 설교자이자 성경 주해자로 높이 평가하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는 성경 전체를 명료하게 해설하고 정리하여 모든 이의 유익을 위해 제시하였으니, 이로 인해 모든 이에게 지극히 유명하고 놀라운 인물이 되었다.” 그의 수많은 저작 중에서, ‘그리스도의 자비’를 본받아, 우리와 유사한 이 선집에 테오둘에게 보낸 203개의 장으로 나뉜 설교 한 편을 수록한다. 이는 절제, 주의, 마음의 수호에 익숙해지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가장 유익하기 때문이다. 복자 포티우스는 자신의 『필로칼리아』 198번째 읽을거리에서, 이 설교를 “천국 유산을 얻기 위해 수도 생활을 영위하는 이들에게 그 어떤 다른 글보다도 더 적합한 것”이라고 칭한다. 그는 “이 말씀은 명확하게 서술되어 있으며, 깊은 연구에 몰두하지 않고 모든 노력과 정성을 활동적인 삶의 업적에 쏟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바로 그 내용 그 자체”라고 말한다. [번역 과정에서 『도보톨리비움』의 그리스어 본문은 일부 구절에서 미그네의 『Patrologiae Graecae』 제93권을 참고하여 보완되었다].

 

테오둘루스에게 보내는 절제와 기도에 관한 유익하고 구원을 주는 말씀[68]

1. 절제는 영적인 수련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오랫동안 꾸준히 실천할 때, 사람을 정욕적인 생각과 말, 그리고 악한 행실로부터 완전히 해방시켜 주며; 이를 실천하는 이에게, 우리에게 가능한 한도 내에서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을 올바르게 알게 해 주며, 신비로운 하느님의 비밀을 깊이 깨닫게 해 줍니다. 또한 이는 구약과 신약의 모든 계명을 이루는 원동력이자, 미래 세상의 모든 선을 베풀어 주시는 분입니다. – 그것 자체가 바로 마음의 순결이며, 그 위대함과 고귀한 특성, 혹은 더 정확히 말해 우리의 무관심과 소홀함 때문에 오늘날 수도자들 사이에서는 극히 드물게 찾아볼 수 있다; 그와 동시에 그리스도께서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라”(마태복음 5:8)라고 말씀하시며 이를 칭송하십니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그것은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얻어야 합니다. 절제는, 만일 그것이 사람 안에 지속적으로 머무른다면, 그에게 올바르고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삶으로 이끄는 길잡이가 됩니다. 그것은 또한 관상의 사다리이며, 우리에게 영혼의 삼분법(즉, 사고력, 감정, 욕망이라는 세 가지 힘)의 움직임을 올바르게 다스리고 감정을 굳건히 지키도록 가르치며, 성찬을 받는 자 안에서 매일 네 가지 주요 미덕(즉, 지혜, 용기, 절제, 정의)을 되살려 줍니다.

2. 위대한 율법 제정자 모세, 더 나아가 성령께서는 이 미덕이 얼마나 흠 없고, 순결하며, 포괄적이고, 고귀한지를 보여 주시며, 우리가 이를 어떻게 시작하고 실천해야 하는지를 가르치시며 말씀하시기를, “네 마음에 불법의 말이 은밀히 품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라” (신명기 15, 9)라고 하시며, ‘은밀한 말’이라 함은 어떤 죄악적이고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에 대한 마음속의 상상을 가리키는 것이다. 성부들은 이를 또한 마귀가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유혹이라 부르는데, 이것이 마음에 떠오르는 즉시 우리의 생각이 뒤따르며, 그것과 함께 열정적으로 떠들어대게 된다.

3. 절제는 모든 미덕과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는 길이다. 이는 또한 ‘마음의 고요함’이라고도 불리며, 완전히 몽상에서 벗어난 상태로 마음을 지키는 것과 같다.

4. 태어날 때부터 눈이 먼 사람은 햇빛을 보지 못하듯이, 정신을 차리고 살지 않는 사람은 위에서 풍성히 내려오는 은혜의 광채를 보지 못한다. 또한 그는 죄악된,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행위와 말과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런 자들은 죽음을 맞이할 때 (그들을 맞이할) 타르타로스의 군주들을 피할 수 없다.

5. 경건함은 모든 생각으로부터 벗어난 마음의 끊임없는 고요함이며, 그 안에서 마음은 그리스도 예수,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이신 분을 통해, 오직 그분만을 향해 항상, 끊임없이, 쉬지 않고 숨 쉬며, 그분의 “ ”를 부르며, 그분과 함께 용감하게 원수들에 맞서 싸우고, 죄를 사해 주실 권능을 가지신 그분께 자신의 죄를 고백한다. 이러한 영혼은 그분을 부르짖음으로써 종종 마음의 유일한 비밀을 아시는 그리스도를 품에 안으며, 모든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달콤함과 내면의 영적 투쟁을 온갖 방법으로 숨기려 애쓴다. 이는 교활한 원수가 어떤 식으로든 악이 그 영혼에 쉽게 침투할 틈을 주지 못하게 하고, 그 영혼의 가장 선한 행실을 파괴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6. 정신 차림이란 마음의 생각을 확고히 세우고 그것을 마음의 문 앞에 서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낯선 생각들, 즉 훔쳐가는 도둑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이 파멸자들이 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을 듣고, 악마들이 어떤 형상을 그려내고 세우며, 이를 통해 마음을 환상에 빠뜨려 유혹하려 하는지 알아차리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과정을 기꺼이 겪어 나간다면, 그것은 우리가 원할 경우 매우 철저하고 명료하게, 경험을 통해 마음의 싸움이라는 기술을 보여주고 그 안에서 경험을 쌓게 해 줄 것이다.

7.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버림으로부터, 다른 한편으로는 교훈을 위한 외적 유혹의 방치로부터 오는 지극한 두려움은, 대개 악한 생각과 행위의 근원을 막으려 애쓰는 사람의 마음속에 빈번한 경계심을 낳는다. 바로 이를 위해 버림이 일어나며,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의 개선을 위해 뜻밖의 유혹을 보내시는데, 특히 누군가 이 선(주의와 절제)에서 오는 안식의 달콤함을 맛보고 – 게을러졌을 때 더욱 그러하다. – 이러한 빈번함에서 습관이 생겨나며; 이로부터는 일종의 자연스러운 깨어 있음의 연속성이 생겨나며, 그 특성상 서서히 전투의 환상이 솟아나고, 그 뒤를 이어 끊임없는 예수님의 기도, 몽상 없는 달콤한 마음의 고요함, 그리고 예수님과의 연합에서 비롯되는 경이로운 상태가 뒤따르게 된다.

8. 굳건히 서서 그리스도를 원수들에게 부르며 그분께 피난하는 마음은, 수많은 개들에게 둘러싸여도 어떤 울타리 안에 숨어 용감하게 맞서는 어떤 짐승과 같다. 멀리서 보이지 않는 적들의 가상의 덫을 마음속으로 그려내며, 그는 끊임없이 그들을 향해 화해자이신 예수님께 기도하고, 그로 인해 그들에게 상처받지 않는다.

9. 만일 네가 알고, “내일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이 네게 주어졌다면—단순히 보이는 존재가 되는 것뿐만 아니라, 또한 보는 자(시 5:4)가 되는 것까지—그때야 비로소 네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라. 그러면 얻게 될 것이다.

10. 바다의 본질은 수많은 물이다. 그러나 정신의 맑음과 경각심, 그리고 영혼의 깊은 고요함의 본질은, 경이롭고 형언할 수 없는 묵상의 심연과 이성적인 겸손, 의로움과 사랑은 (그 자체로) 지극한 정신의 명료함이며, 그리스도 예수께 향하는 생각 없이 탄식하며 드리는 기도, 즉 끊임없이, 수고스럽지만 낙담이나 지루함 없이 드리는 기도이다(눅 18:1).

11. “나에게 ‘주여, 주여’라고 말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갈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마태복음 7:21). 그분의 아버지의 뜻은 바로 이것이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아, 악을 미워하라”(시 96:10).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 기도할 때 악한 생각을 미워하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

12. 우리의 주님이시며 하나님이신 분께서는 육신을 입으시고, 인류에게 모든 미덕의 본보기를 제시하시며, 옛날의 타락에서 벗어나도록 부르시며, 육신 안에서 사신 모든 미덕을 생생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이 보여주신 수많은 선한 본보기를 가운데서, 세례를 받으신 후 광야로 올라가셔서 금식하며 그곳에서 그분을 평범한 사람처럼 대하던 마귀와 영적 싸움을 벌이셨고, 그리고 그분께서, 즉 하나님이자 신들의 하나님이시라 그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겸손과 금식, 기도, 절제를 통해 마귀를 이기신 그 승리의 본보기를 통해, 우리와 같은 미천한 종들에게도 악의 영들에 맞서 마땅히 싸워야 할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13. 내 생각에, 정욕적인 생각으로부터 마음을 조금씩 정화할 수 있는 절제의 방법(기법)이 얼마나 되는지, 이를 나는 화려한 말이나 장황한 수사로 꾸미지 않고 너에게 기꺼이 알려주겠다. 왜냐하면 나는 이 말씀에서도, 마치 외부의 전쟁에 대한 이야기에서처럼, 특히 평범한 사람들에게 유익한 내용을 화려한 말들로 가려버리는 것을 현명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너, 티모테오야,사도의 말씀을 빌려 네게 말하노니, “네가 ‘읽을’ 것에 귀를 기울이라”(딤전 4:13).

14.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는 한 가지 방법(수법)은, 몽상이나 환상을 끊임없이 주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몽상이 없으면 사탄은 생각을 꾸며내어 속임수로 마음을 유혹할 수 없기 때문이다.

15. 또 다른 방법은 – 마음을 항상 깊이 침묵하게 하고, 어떤 생각에도 침묵하며 기도하는 것이다.

16. 또 다른 방법은 – 끊임없이 겸손한 마음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 도움을 청하는 것이다.

17. 또 다른 방법은, 마음속에 죽음을 끊임없이 기억하는 것이다.

18. 사랑하는 자여, 이 모든 행위는 마치 문지기처럼 악한 생각들이 들어오는 것을 막아 주며, 오직 하늘만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항상 마음을 하늘의 일들을 묵상하는 데 두어야 한다는 것), 땅(그리고 모든 세속적인 것)을 아무것도 여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는 다른 방법들과 마찬가지로 정신을 맑게 하는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이기도 한데—이에 대해서는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다른 곳에서 더 자세히 설명하겠노라.

19. 만약 우리가 정욕의 원인(그것을 자극하는 계기)을 끊어내고, 단지 짧은 시간 동안만 영적인 일에 몰두할 뿐, 이 삶의 방식을 영원히 유지하지 않고, 오직 이 일에만 전념한다면; 우리는 쉽게 다시 육체적 정욕으로 돌아가게 되며, 그(선한 시작)로부터 마음의 끝없는 어둠과 물질적 세계로의 가장 깊은 추락 외에는 아무런 다른 열매도 얻지 못하게 된다.

20. 내면에서 수련하는 자에게는 매 순간 다음과 같은 네 가지(행위)가 필요하다: 겸손, 극도의 주의, (생각에 대한) 저항, 그리고 기도. 겸손은, 교만한 악마들인 적들과 싸울 때 언제나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도움을 간직하기 위함이다. 주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미워하시기 때문이다. 주의는, 비록 선해 보일지라도 어떤 생각도 품지 않도록 항상 마음을 지키기 위함이다. 반박은, 누가 다가왔는지 깨닫는 즉시 분노로 교활한 자에게 맞서기 위함이다. “내 말을 비방하는 자들에게 대답하리라”(시 118:42) 하신 말씀처럼, “내 영혼이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겠느냐”(시 61:2)는 것이다. 기도, – 반박 후에 즉시 마음 깊은 곳에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탄식으로 그리스도께 부르짖기 위함이다. 그러면 수련하는 자 스스로가, 숭배받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자신의 원수가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흩어지고 쫓겨나거나, 연기처럼 그 망상과 함께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21. 생각에서 깨끗한 기도가 없는 자는 싸움에 쓸 무기가 없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기도는, 영혼의 가장 깊은 은밀한 곳에서 끊임없이 이루어져,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름으로써 (보이지 않게) 은밀히 싸우는 원수가 채찍질당하고 불타버리게 하는 바로 그 기도이다.

22. 너는 날카롭고 집중된 마음의 시선으로 내면을 들여다보아 들어오는 자들을 알아차려야 한다. 그리고 알아차리자마자 즉시 반박으로 뱀의 머리를 부수며, 동시에 탄식을 담아 그리스도께 부르짖어야 한다. 그러면 너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보호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때 네가 마음의 바름(마음이 바르게 행동하는지, 또는 마음의 바른 행동이 무엇인지를)도 분명히 보게 될 것이다.

23. 마치 손에 거울을 들고 다른 사람들 사이에 서서 그 거울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자신의 얼굴이 어떤지 볼 뿐만 아니라, 같은 거울을 들여다보는 다른 사람들의 얼굴도 보는 것처럼, 온전한 주의를 기울여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그 안에서 자신의 본래 상태를 볼 뿐만 아니라, 마음속의 에티오피아인들의 음울한 얼굴도 보게 된다.

24. 마음은 그 자체만으로는 악마의 망상을 이길 수 없으니, 결코 이를 감히 시도하지 말라. 우리의 원수들은 교활하여 패배한 척하며, 자만심을 통해 싸우는 이를 다른 쪽에서 무너뜨리려 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때면, 잠시라도 멈춰 서서 너를 대적하며 악을 꾸미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25. 옛 이스라엘처럼 자신에 대해 지나치게 큰 꿈을 꾸지 말고(또한 자신만의 투쟁 방식을 고안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마음속의 적들에게 넘겨지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이집트인들로부터 온갖 고난에서 구원해 주셨으나, 그들은 나중에 스스로를 도울 동반자로 주조된 우상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26. ‘합쳐진 우상’이란 바로 우리의 연약한 이성을 의미한다. 이 이성은 악의 영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부를 때면, 그들을 손쉽게 쫓아내고, 교묘한 솜씨로 적의 보이지 않는 전투 병력을 도망치게 만들지만, 그러나 스스로를 무모하게 의지하려만 하면, 이른바 ‘날개 빠른 자’와 같이 쓰러져 산산조각이 난다. 주님을 의지하는 자가 고백하는 바는 이러하다. “주님은”, 그가 말하길, “나의 도우심이시요, 나의 보호자시니, 내 마음이 그분을 의지하리니, 그분이 나를 도우시리니, 내 육체가 번영하리라” (시편 27:7); 그리고 “주님 외에 누가 나를 위해 교활한 자들을 대적하리요? 혹은 누가 나를 위해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막아 주시리요” (시 93:16) – 셀 수 없이 많은 생각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의지하는 자는 끔찍한 추락을 겪을 것이다. 비둘기 떼가 높이 날아올랐다가 방향을 잃고 아래로 떨어진다. 제때 방향을 돌리지 못하면 땅에 부딪혀 죽을 때까지 산산조각 난다.

27. 사랑하는 이여, 네가 마땅히 싸움을 벌이고자 한다면, 마음의 고요함의 본보기와 규범으로 작은 동물인 거미를 본받으라. 그 거미는 작은 파리를 잡아 죽이는데, 너도 그와 같이(거미줄 굴에 앉아 있듯이) 마음속에서 고요함을 지키며, 바빌론의 갓난아이들을 끊임없이 쳐부수기를 멈추지 말라. – 그러한 처형을 행함으로 인해 성령께서는 다윗을 통해 너를 복된 자라 부르실 것이다(시 136:9).

28. 붉은 바다가 하늘의 궁창에서 별들 사이로 드러나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땅 위를 걷는 사람이 이곳의 공기를 마시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자주 부르지 않고서는 우리 마음을 정욕적인 생각에서 깨끗이 씻어내고 그 안에서 마음속의 적들을 쫓아내는 것이 불가능하다.

29. 만일 겸손한 묵상, 죽음에 대한 기억, 자기 절제, (생각에 대한) 저항,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일로 항상 네 마음속에 머물며, 이러한 무기를 가지고 매일 정신 차린 채로 좁지만 기쁨을 주고 달콤한 마음의 길을 걷는다면, 그러면 성도들의 거룩한 관상에 들어갈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주신 깊은 신비의 지식으로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다. “그분 안에는 모든 지혜와 총명의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골 2:3) 하셨고, “그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신으로 거하신다”(–9)고 하셨다. 이는 예수 안에서 네가 성령께서 네 영혼에 강림하셨음을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이니, 그분으로 말미암아 사람의 마음이 밝아져 “하나님의 영광을 낯을 가리지 않고 빤히 바라보게” 될 것이다 – (고린도후서 3, 18). 사도는 “아무도”라고 말하며,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할 수 있다”(고린도전서 12:3)고 하는데, 성령께서는 그분을 찾는 자를 (그분 안에서 진리로) 은밀히 확고하게 하십니다.

30. 가르침을 사랑하는 이들은 또한 이것을 알아야 한다. 곧, 악한 악령들이 우리를 시기하여, 영적 싸움에서 얻는 큰 유익과 그로 인한 지혜, 그리고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것을 이유로, 종종 우리에게서 이 영적 싸움을 숨기고 그 열기를 식히곤 하는데, (이때 다음과 같은 의도도 품고 있다), 곧 우리가 (그들의 공격 위험을 잊고) 방심하게 되면, 갑자기 우리의 마음을 (환상 속으로) 빼앗아, 다시 우리를 마음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부주의한 자들로 만들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단 하나의 목표와 단 하나의 과업만이 끊임없이 염두에 있기 때문이다. 바로 우리 마음이 스스로를 경청하지 못하게 완전히 막는 것인데, 이를 통해 영혼 속에 어떤 풍요로움이 쌓이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 그러나 바로 그때(싸움이 잠잠한 동안)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며 영적인 묵상에 깊이 빠져들게 될 것이며, – 그러면 싸움이 다시 우리 마음을 찾아올 것이다. 다만 우리가 모든 일을, 이렇게 말하건대, 주님 자신의 조언에 따라 그리고 큰 겸손함으로 행하기만 하면 된다.

31. 공동 생활에 머물면서 우리는 자발적인 의지와 마음의 준비로, 원장님 앞에서 우리 자신의 모든 뜻을 잘라내야 하며, 그로써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결코 제멋대로인 의지 없는 자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와 더불어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짜증을 내지 않도록 하고, 무분별하고 부자연스러운 분노의 움직임을 허용하지 않도록 애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적 전쟁이 벌어질 때 우리는 담대함을 잃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의지는, 우리가 스스로 기꺼이 그것을 억제하지 않는다면, 대개 (우리의 동의 없이) 강제로 그것을 억제하려는 자들에게 화를 내기 마련이며; 이로 인해 자극받은 분노는 사납게 짖어대며, 큰 고생 끝에 간신히 얻어낸 영적 싸움의 지혜(그것을 수행하는 능력)를 망가뜨립니다. 분노는 대개 파괴적입니다. 만약 분노가 악마적인 생각들을 향해 분출된다면, 그것들을 분쇄하고 근절시키지만, 만약 사람들을 향해 끓어오른다면, 그들에 대한 우리의 선한 생각들마저 근절시켜 버린다. 이처럼 분노는, 명백히, 악한 생각이든, 설령 올바른 생각이든 간에 모든 종류의 생각에 대해 파괴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분노는 방패와 활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며, 그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지 않을 때 비로소 그런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 목적에 어긋나게 작용하기 시작하면 파괴자가 된다. 나는 때때로 늑대에게 대담하게 달려드는 개조차 양들을 괴롭히는 것을 보았다.

32. 그러므로 우리는 뱀의 독처럼 무모한 방종(타인을 대할 때의 경솔한 자유분방함)을 피해야 하며, 뱀과 이히드나의 자식들처럼 빈번한 대화를 피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순식간에 내면의 투쟁을 완전히 망각하게 만들고, 마음의 순수함이 주는 기쁨의 높은 곳에서 영혼을 아래로 끌어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저주받을 만한 망각은 물이 불을 꺼뜨리듯 주의력을 방해하며, 매 순간 그에게 강력한 적이 된다. 망각에서 우리는 게으름에 빠지고, 게으름에서 (영적 삶의 질서를) 경시하는 태도와 낙담으로, 그리고 제자리 없는 욕망으로 넘어가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마치 개가 자신의 토사물을 다시 먹는 것처럼 다시 뒤로 물러나게 된다(베드로후서 2:22). 그러므로 우리는 치명적인 독과 같은 방종을 피하고, 망각이라는 악한 병은 마음을 지극히 엄격하게 지키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끊임없이 부르짖음으로써 치료해야 한다. 그분 없이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없기” 때문이다(요한복음 15:5).

33. 뱀과 친구가 되어 그 뱀을 자신의 속 깊은 곳에 품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며, 또한 불가능한 일이다. 또한 육체를 온갖 방법으로 어루만지고, 사랑하며, 필요한 것 외에는 그 육체를 기쁘게 해 주면서, 동시에 하늘의 덕을 돌보는 것도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뱀)는 본성상 자신을 따뜻하게 해 주는 이를 해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으며, 이(육체)는 자신을 기쁘게 하는 이를 정욕적인 쾌락의 움직임으로 더럽히지 않고는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육체가 어떤 일로 죄를 지을 때, 포도주로 취한 도망친 노예처럼, 상처가 날 때까지 가차 없이 채찍으로 때려야 한다. 그 위에 그를 벌할 준비가 된 주인(이성)이 있음을 깨닫게 하고, 마치 선술집에서 술에 취하듯 정욕에 휩싸여 취함을 추구하지 않게 하며, 이 밤의 노예가 썩지 않는 주인(영혼)을 알지 못하고 썩어 없어질 흙으로만 여기지 않게 하라. 네 생명이 다할 때까지 네 육체를 신뢰하지 말라. 사도께서 말씀하시기를, 육신의 욕망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니,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지 않기 때문이라”(롬 8:7)고 하셨으며, 또 “육신 은 성령을 대적하느니라”(갈 5:17)고 하셨고, 또한 “육신에 있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그러나 여러분은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습니다” (롬 8:8–9).

34. “분별력”의 임무는 – 언제나 우리의 자극적인 힘을 내적 전쟁의 싸움과 자기 절제로 이끄는 것이며; “지혜”의 임무는 – 우리의 사고력을 엄격하고 끊임없는 절제와 영적 묵상에 집중시키는 것이며; “의”의 임무는 갈망하는 힘을 미덕과 하나님께로 이끄는 것이며, “용기”의 임무는 오감을 다스리고 억제하여, 그것들이 우리의 내적 사람이나 마음, 혹은 외적 사람이나 몸을 더럽히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35. “이스라엘 위에 그분의 위엄이 있나니,– 가능한 한 하나님 자신의 영광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마음에, “그분의 능력은 구름 위에 있나니” (시 67:35), – 빛을 바라보는 영혼들 위에, 새벽에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신 분을 응시하는 영혼들 위에, 그분은 마치 태양이 맑은 구름을 빛으로 비추듯이 그들을 비추시어 가장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드러내신다.

36. “한 사람이 죄를 지으면 많은 선을 망친다”고 신성한 성경은 말합니다(전도서 9:18); 그리고 죄를 짓는 마음은 앞 장에 기록된 것, 즉 이 하늘의 음료와 양식을 망치게 합니다.

37. 우리는 삼손보다 강하지도, 솔로몬보다 지혜롭지도, 복된 다윗보다 총명하지도, 지극히 존귀한 베드로보다 더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맙시다. 성경은 자기 자신을 의지하는 자는 끔찍한 파멸을 당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38.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겸손한 지혜를, 다윗에게서 겸손을, 베드로에게서 일어나는 넘어짐을 두고 울되, 삼손이나 유다, 그리고 지극히 지혜로운 솔로몬처럼 절망하지 않는 법을 배우자.

39.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다”(베드로전서 5:8). 우리 안에서 결코 사라지지 말아야 할 것들, 곧 마음의 경각심, 절제, (생각에 대한) 분별, 그리고 우리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예수님 외에는 평생 동안 더 나은 도움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분만이 하나님으로서 주님이시며, 악마의 꾀와 속임수, 교활함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40. 그러니 영혼은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분을 부르라. 원수들을 결코 두려워하지 말라. 이는 네가 홀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 즉 무형과 유형,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창조하신 위엄 있는 왕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41. 비가 땅에 많이 내릴수록 땅을 더 부드럽게 하듯이, 우리가 아무런 속셈 없이 외치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이름도, 그분을 더 자주 부를수록 우리 마음의 땅을 더 부드럽게 하여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 채운다.

42. 경험이 부족한 이들은 또한 이 사실을 잘 알아야 한다. 곧, 우리 자신이 육체와 사고 모두에서 뚱뚱하고 땅에 엎드러진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무형적이고 보이지 않으며, 악의를 품고 악의적인 계략에 능하며, 빠르고 경솔한, 아담 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온 싸움에서 노련해진, 이러한 적들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끊임없는 정신의 깨어 있음과 우리 주님이시며 창조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는 것뿐임을 알아야 한다. 경험이 부족한 이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가 선을 시험하고 깨닫게 하는 자극과 지침이 되기를 바라며, 경험이 풍부한 이들에게는 선에 있어 가장 훌륭한 스승은 실천이며, 행함을 통한 시험과 선을 맛보는 것임을 기억하라.

43. 어린아이처럼 순진하고 천진난만하여, 누군가가 어떤 환상을 만들어내는 것을 보고는 그것으로 위안을 얻으며, 자신의 악의 없음으로 인해 그 기적의 창조자를 따르는 것처럼, 우리 영혼도 단순하고 선한데—이는 선하신 주님께서 그렇게 창조하셨기 때문이요, – 마귀의 몽상적인 유혹에 달콤함을 느끼고, 그것에 현혹되어 마치 선한 자에게로 가는 것처럼 그 사악한 자에게 달려가니, 마치 비둘기가 자신의 새끼들을 노리고 그물을 치는 자에게 달려가는 것과 같으며, 이처럼 자신의 생각을 마귀의 유혹이 만들어낸 몽상과 뒤섞어버린다. 만약 그것이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이든, 혹은 그리스도의 계명으로 완전히 금지된 다른 무엇이든 간에, 그녀는 나타난 아름다움이 심어준 것을 어떻게든 꾸며내어 실행에 옮길 방법을 꾀한다. 그리고 그 생각과 하나가 된 뒤, 그녀는 이미 육체를 통해 마음속에 상상했던 불법을 실행에 옮겨, 스스로를 정죄하게 된다.

44. 이것이 바로 악한 자의 간계이며, 그는 바로 이러한 화살들로 온갖 먹잇감을 사냥해 낸다. 그러므로, 영적 전쟁에서 큰 경험을 쌓기 전에는, 생각들이 우리 마음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 특히 처음에는, 우리 영혼이 아직 악마의 유혹에 동조하고, 그것에 즐거움을 느끼며, 기꺼이 그 뒤를 쫓아갈 때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그것들이 인식되는 즉시, 바로 그 순간에, 그것들이 나타나고 스며들 때 단호히 잘라내야 한다. 마음이 오랫동안 이러한 경이로운 수행에 머물며 이 고행을 익히게 되면, 그 안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그러한 영적 싸움에 능숙해져서, 생각을 정확히 분별하게 될 것이며, 선지자가 말한 대로 “ 쉽게 “작은 여우들”(아가 2,15) 잡을 수 있게 될 때, 그때 비로소 교묘하게 그들을 안으로 들어오게 내버려 두었다가, 그리스도의 도움으로 그들과 싸워, 그들을 폭로하고 쫓아낼 수 있다.

45. 불과 물이 하나의 통로를 통해 함께 지나갈 수 없는 것처럼, 죄가 먼저 악한 유혹의 환상으로 마음의 문을 두드리지 않는 한 마음속으로 들어올 수 없다.

46. 첫 번째는 유혹이며, 두 번째는 결합으로, 우리의 생각과 사악한 악마들의 생각이 뒤섞이는 것이다. 세 번째는 공모로, 두 종류의 생각이 악을 꾀하며 어떻게 할지 서로 의논하는 것이다. 네 번째는 감각적인 행위, 즉 죄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깨어 있어 자기 자신을 살피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며 그분을 부르짖음으로써 유혹이 싹트기 시작할 때 이를 쫓아낸다면, 보통 그 뒤를 따르는 어떤 일도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악한 자는 무형의 존재이므로, 환상과 생각을 통해서만이 영혼을 유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행위들 중에서) 유혹에 대해 다윗은 “새벽에 내가 온 땅의 죄인들을 쳐 죽였노라”(시 100:8)라고 말하며, 위대한 모세는 혼합에 대해 “그들과 섞이지 말라”(출 23:32) 말합니다.

47. 마음은 마음과 보이지 않게 맞서 싸우는데, 곧 악마의 마음과 우리의 마음이 그러하다. 그러므로 매 순간 영혼 깊은 곳에서 그리스도께 부르짖어, 그분께서 악마의 마음을 쫓아내시고, 인자하신 분으로서 우리에게 승리의 열매를 베풀어 주시기를 간구해야 한다.

48. 마음의 고요함을 닮은 이는 마치 거울을 손에 들고 그 안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는 사람과 같으라. 그러면 (즉, 그를 본받게 될 때) 네 마음속에 악한 것과 선한 것이 어떻게 마음속으로 새겨지는지 보게 될 것이다.

49. 네 마음속에 결코 어떤 생각도 품지 않도록 항상 경계하라. 부도덕한 생각도, 겉보기에는 선해 보이는 생각도 없어야 한다. 그래야만 이방인들, 즉 이집트의 장자들(즉, 정욕을 뜻함)을 쉽게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50. 절제의 미덕은 얼마나 선하고, 기쁘고, 밝고, 달콤하며, 온전하고, 맑고(기쁜 얼굴) 아름다운가! 그리스도 하나님이시여, 주님께서 잘 다스리시고, 인간의 마음이 큰 겸손 속에서 활기차게 실천하는 것이로다! 이는 그것이 바다와 깊은 묵상의 심연까지 그 가지를 뻗으며, 달콤한 신성한 신비의 강들까지 그 가지들을 뻗기 때문이니(시 79, 12)까지 뻗어 나가며, 오래전부터 악마의 교활한 생각과 죽음으로 이끄는 육체의 광란적인 사색이라는 불경함으로 타들어 가던 마음을 적시고 상쾌하게 해 줍니다.

51. 절제는 야곱의 사다리와 같으니, 그 꼭대기에는 하나님이 앉아 계시고, 천사들이 그 위를 오간다. 그것은 우리 안에서 온갖 악을 뿌리 뽑고, 수다와 악담, 비방, 그리고 감각적 정욕의 온갖 목록을 잘라내며, 잠시라도 자신의 달콤함을 잃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52. 형제들아, 바로 그 길을 온 힘을 다해 걸어가자.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순수한 생각으로 그분의 환상 속에 솟아오르며, 우리 자신의 죄와 과거의 삶을 끊임없이 되새기도록 합시다. 그리하여 우리 죄의 기억으로 인해 마음이 찢어지고 겸손해짐으로써, 마음의 싸움에서 우리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끊임없는 도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만이나 허영, 혹은 자만심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의 도움을 잃게 된다면, 동시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당신을 알게 하시는 수단인 마음의 순결도 잃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약속(마태복음 5:8)에 따르면, 전자가 후자(하나님을 보는 데 필요한 마음의 순결)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53. 자신의 내적 행위에 소홀하지 않는 마음은, 끊임없는 수련과 자기 수양을 통해 얻어지는 다른 은혜들과 더불어, 외부에서 닥치는 죄의 유혹에 있어 육체의 오감이 자신의 조력자가 되지 않게 되는 것 또한 얻게 된다. 자신의 미덕인 절제에 온전히 주의를 기울이고, 항상 선한 생각으로 기쁨을 누리기를 원함으로써, 그는 오감이 물질적이고 헛된 생각들을 통해 자신에게 침투하여 자신을 훔쳐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을 통해 어떤 유혹이 일어나는지 알고 있기에, 강한 의지로 내면에서 그들을 억제한다.

54. 마음의 경각심을 유지하라. 그러면 유혹으로 인해 지나치게 지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경각심에서 벗어나면, 닥치는 일을 참아내라.

55. 식욕을 잃고 음식에 혐오감을 느끼는 이들에게 쓴 쑥이 유익한 것처럼, 성품이 나쁜 이들에게는 불행을 견디는 것이 유익하다.

56. 고통을 겪고 싶지 않다면, 악을 행하려 하지 마라. 왜냐하면 전자는 후자를 끊임없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사람이 뿌린 대로 거두게 된다. 그러니 우리가 자발적으로 악을 뿌리고, 원치 않음에도 (슬픔을) 거두게 될 때, 우리는 이 속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경외해야 한다.

57. 마음은 다음 세 가지 정욕, 즉 탐욕, 허영, 쾌락에 눈이 멀게 된다.

58. 우리 본성과 함께 자라난 지혜와 믿음은, 다름 아닌 이 세 가지 정욕 때문에 무뎌져 버렸다.

59. 분노와 격노, 싸움과 살인, 그리고 그 밖의 온갖 정욕들이 이 세 가지로 인해 사람들 속에 깊이 뿌리내렸다.

60. 진리를 알지 못하는 자는 참되게 믿을 수도 없다. 왜냐하면 지식은 본질적으로 믿음보다 먼저 오기 때문이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은 우리가 단지 알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서도 주어진 것이다.

61. 그러니 실천해 보자. 이렇게 점차 발전해 나가다 보면, 하나님에 대한 소망, 확고한 믿음, 내면의 깨달음, 유혹으로부터의 해방, 은혜로운 은사, 진심 어린 고백, 넘치는 눈물이 기도하는 신자들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며; 그뿐만 아니라, 겪는 고난에 대한 인내와 이웃에 대한 진심 어린 용서, 영적 율법에 대한 깨달음, 하나님의 진리를 얻는 것, 성령의 감화, 영적 보물의 선물, 그리고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이 세상과 장차 올 세상에서 약속하신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한마디로, 깊은 겸손과 흩어지지 않는 기도 속에 머무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 외에는, 영혼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존재하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62. 우리는 경험을 통해 참으로 큰 유익을 얻었는데, 그것은 누구든지 자신의 마음을 깨끗이 하고자 한다면, 마음속의 적들에게 끊임없이 주 예수님을 부르라는 것이다. 보라, 내가 경험을 통해 말한 이 말씀이 성경의 증언과 얼마나 일치하는지: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를 부르라”고 기록되어 있다(아모스 4:12). 사도도 “끊임없이 기도하라”고 말한다(데살로니가전서 5:17).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나 없이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내 안에 있는 자, 나 또한 그 안에 있는 자는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러나 내 안에 있으면서 내 안에 머물지 않는 자는, 마치 가지처럼 밖으로 쫓겨나 말라 죽을 것이다” (요한복음 15:5–6). 기도는 모든 선을 그 안에 담고 있는 위대한 선입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믿는 이들이 하나님을 뵙는 마음을 정화하기 때문입니다.

63. 겸손의 보물은 고귀하며 하나님께 기쁨이 되므로, 우리 안에 있는 온갖 악과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모든 것을 근절할 힘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이를 쉽게 얻을 수는 없다. 어쩌면 다른 사람에게서 여러 미덕의 일부 행실을 발견할 수는 있겠지만, 그 안에서 겸손의 향기를 찾으려 한다면 거의 찾아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이 보물을 얻기 위해서는 많은 열정과 노력이 필요하다. 성경은 마귀를 부정한 자라고 부르는데, 이는 그가 태초부터 이 선한 보물인 겸손을 거부하고 교만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 성경 곳곳에서 그는 부정한 영으로 불린다. 왜냐하면 완전히 비물질적이고, 육체가 없으며, 지체도 없는 존재가 어떤 육체적 부정함을 저지를 수 있겠는가? 그 때문에 부정하다고 불릴 수 있겠는가? 분명히 그는 교만 때문에 부정하다고 불리며, 순수하고 빛나는 천사였음에도 더러운 자로 불리게 되었다. “하나님 앞에서 교만한 자는 모두 부정하다” (잠언 16, 5). 성경에 따르면 첫 번째 죄는 “교만”이다(시라크 10, 15). 파라오가 “나는 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 이스라엘을 보내지 않겠다”(출애굽기 5, 2)라고 말한 것은, 교만한 자로서 한 말이다.

64. 우리가 구원에 대해 소홀히 하지 않는다면, 겸손이라는 선한 은사를 얻을 수 있게 해주는 마음의 활동이 많이 있는데, 예를 들어 말과 행동, 그리고 생각으로 저지른 죄를 회상하는 것, 그리고 마음속으로 되새기는 다른 많은 것들이 겸손에 기여한다. 또한 누군가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이웃들의 미덕을 되새기고, 자신의 것을 그들의 것과 비교하며 그들의 다른 타고난 장점을 높이 평가할 때, 진정한 겸손으로 이끄는 데 도움이 된다. 이처럼 자신의 부족함과 타인의 완전함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마음속으로 분명히 보게 되면, 사람은 자연스럽게 자신을 흙과 재로 여기게 되며, 심지어 사람이라기보다 어떤 개와 같다고 여기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땅 위에 존재하는 모든 이성적인 피조물들보다 모든 면에서 뒤처져 있고, 그들보다 훨씬 더 빈약하고 궁핍하기 때문이다.

65. 그리스도의 입술이자 교회의 기둥인 우리의 위대한 아버지 바실리우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죄를 짓지 않고 다음 날에도 다시 같은 죄에 빠지지 않기 위한 큰 도움은, 하루가 끝날 때 자신과 자신의 모든 것을 양심의 심판에 맡겨, 우리가 어디에서 실수했고 어디에서 올바르게 행동했는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욥도 자신에 대하여뿐만 아니라 자녀들에 대해서도 그렇게 행했다.” 이러한 매일의 성찰은 우리에게 매시간 일어나는 일들을 밝혀 주며, (혹은 매시간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기 위해 매시간 성찰하도록 가르쳐 준다).

66. 또 다른 분,[69] , 역시 신성한 일에 통달한 현자 중 한 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열매 맺음의 시작은 꽃이며, 활동적인 삶의 시작은 절제이다.” 그러니 우리는 절제를, 그것도 성부들이 가르치시는 대로 적당한 분량과 균형을 지키며 실천하고, 하루 12시간을 온전히 정신을 가다듬으며 보내도록 합시다. 이렇게 행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스스로를 절제하는 노력을 통해 우리 안의 악을 잠재우고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스스로를 절제함으로써 덕스러운 삶을 얻게 되며, 그 대가로 천국이 주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67. 깨달음으로 이끄는 길은 무정(無情)과 겸손이며, 이것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이다.

68.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에 머물며 그곳에서 항상 마음의 활동을 이어가는 자는 절제를 실천한다. 뿐만 아니라, 관상하고, 신학을 탐구하며, 기도한다. 이것이 바로 사도가 “성령으로 행하고 육신의 욕망을 이루지 말라”(갈 5:16)고 말한 바이다.

69. 영적인 길을 걷는 법을 모르는 자는 정욕적인 생각들을 돌보지 않으며(즉, 그것들을 자신으로부터 쫓아내지 않으며), 오직 육신에만 몰두하여, 식탐에 빠지거나 방탕하게 지내거나, 슬퍼하고 분노하며 원한을 품어 그로 인해 마음을 어둡게 하거나, 과도한 수행을 시작하여 마음을 혼란스럽게 한다.

70. 세속적인 것, 즉 아내와 재산 등 외적인 것만을 버린 사람은 겉으로만 수도사가 되었을 뿐, 내면의 사람은 수도사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 대한 욕망 어린 생각을 버린 사람은, 곧 마음인 내면의 사람까지 수도사가 되게 한 것이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수도사이다. 외적인 사람을 수도사로 만드는 것은 원하기만 하면 쉽지만, 내적인 사람을 수도사로 만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71. 이 부류 중에서 정욕적인 생각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맑고 비물질적인 기도를 끊임없이 드릴 수 있게 된 사람은 누구인가? 이것이 바로 내면의 사람의 특징이 아니겠는가?

72. 우리 영혼 속에는 많은 정욕이 숨겨져 있으나, 그것들은 그 원인(대상, 계기)이 눈앞에 나타날 때에만 스스로 드러난다.

73. 온전히 육체적 훈련에만 몰두하지 말고, 몸에 감당할 만한 수고를 정한 뒤, 온 마음을 내면의 일에 돌리라. “육체적 훈련은 조금만 유익할 뿐이지만, 경건은 모든 면에서 유익하다”(딤전 4:8).

74. 정욕이 잠잠해지면, – 단지 그 원인(대상, 계기)이 제거되었거나, 악령들이 교묘하게 물러났기 때문일 뿐인데, – 거만함이 생겨난다.

75. 겸손과 고행(수행자의 육체적 절제)은 사람을 온갖 죄에서 해방시켜 주는데, 전자는 영혼의 정욕을 끊어내고, 후자는 육체의 정욕을 끊어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라”(마태복음 5,8)고 말씀하셨으니, 사랑과 절제로 자신을 정화할 때 그분 자신과 그 안에 있는 보화를 보게 될 것이며, 정화를 더욱 깊이 할수록 그 보화를 더 많이 보게 될 것이다.

76. 온갖 미덕에 관한 말씀들을 관조하는 곳(관측소, 전망대)은 마음을 지키는 것이며, 이는 옛날 다윗의 파수꾼이 마음의 할례를 가리켰던 것과 같다(열왕기하 18:24).

77. 감각적으로 해로운 것을 바라보면 해를 입듯이, 정신적인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78. 식물의 심지를 손상시키면 그 전체가 말라버리듯이, 인간의 마음도 마찬가지임을 깨달아야 한다. 매 순간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데, 이는 포식자들이 잠들지 않기 때문이다.

79. 주님께서는 모든 계명이 필수적이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지위가 바로 그분의 피로 인해 사람들에게 주어진 선물임을 보여 주시려고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행하였을 때, ‘우리는 무익한 종들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말하라” (누가복음 17:10)고 하셨다. 그러므로 천국은 행위에 대한 상이 아니라, 주님께서 신실한 종들을 위해 마련해 두신 은혜로운 선물이다. 종은 자유를 상으로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유를 얻으면) 빚진 자처럼 감사하고, (얻지 못하면) 자비처럼 기다린다.

80. 그리스도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으며, 그분을 위해 잘 일하는 종들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이는 “잘했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라. 네 주인의 기쁨에 들어가라” (마태복음 25,21)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충성스러운 종은 (종으로서의 의무에 대한) 단순한 지식에만 의존하는 자가 아니라, 계명을 주신 그리스도께 순종함으로써 충성을 보여주는 자이다.

81. 주인을 공경하는 자는 그가 명령한 것을 행하며, 만일 어떤 일에서 죄를 짓거나 명령을 따르지 않았을 때는, 그로 인해 자신에게 닥치는 결과를 마땅히 받아들여야 한다. 호기심이 많다면 부지런하기도 하라(물론, 계명을 이행하는 데 있어서): 왜냐하면 단순한 지식만으로는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82. 우리에게 뜻밖으로 닥치는 유혹은 우리가 부지런해지도록 현명하게 가르쳐 준다.

83. 별의 속성은 그 주위에 비치는 빛이며, 경건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속성은 가난과 겸손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구별하고 드러내는 표징은, 겸손한 사고와 낮춘 태도 외에는 다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 사실에 대해 네 복음서 곳곳에서 소리 높여 선포하고 있다. 누구든지 이와 달리, 즉 겸손하게 살지 않는 자는, 십자가와 죽음까지 자신을 낮추신 분, 곧 신성한 계명 의 적극적인 복음적 율법 제정자이시며, 우리에게 지켜야 할 계명들을 (복음서에 묘사된 행실과 삶으로) 보여주신 분의 일부를 상실하게 된다.

84. “목마른 자들아, 물로 오라”고 선지자가 말합니다(사 55:1); 하나님을 갈망하는 자들아, 마음과 정신의 순결함 속에서 행하십시오. 그러나 그 순결함을 넘어 높이 솟아오른 자는 자신의 비천함이 있는 땅에도 시선을 돌려야 합니다. 겸손한 자보다 더 높은 이는 없다. 빛이 없는 곳에서는 모든 것이 어둡고 음산하듯이, 겸손함이 없을 때 우리의 모든 신실한 수고는 헛되고 결실 없는 것이 된다.

85. “말씀의 결론은 이러하니, 모든 것을 들으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라”(전도서 12,13), 이는 마음으로도, 감각으로도 그러해야 한다. 만약 마음으로 그 계명들을 지키도록 스스로를 다스린다면, 그 계명들을 지키기 위해 육체적인 수고를 할 필요가 거의 없을 것이다. 다윗은 말하기를, “주의 뜻을 행하기를 원하며, 주의 율법을 내 속사람에 두었나이다” (시 39:9)라고 하였다.

86. 사람이 하나님의 뜻과 그분의 율법을 자기 배 속, 즉 마음속에 세우지 않는다면, 밖에서도 그것을 제대로 실천할 수 없다. 절제하지 못하고 무관심한 사람은 마치 하나님께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주의 길을 보고 싶지 않나이다”(욥기 21:14) – 물론 이는 하나님의 계시가 부족하기 때문인데, 그 계시를 받은 자는 확신으로 마음속에 율법을 간직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만큼 충분히 강해진다.

87. 감각적인 소금이 빵과 온갖 음식을 맛있게 하고, 고기가 상하는 것을 막아 오랫동안 흠 없이 보존하게 하듯이, 마음속의 달콤함과 마음속에서 이루어지는 놀라운 일을 지혜롭게 간직하는 것 또한 이와 같음을 깨달아야 한다. 이는 그것이 신성하게 내적·외적 인간을 달콤하게 하고, 악한 생각의 악취를 몰아내며, 우리를 선함 안에서 변함없이 지켜주기 때문이다.

88. 탐욕에서 수많은 생각이 생겨나고, 이로부터 감각적인 악한 행위가 비롯된다. 예수님과 함께 첫 번째 것을 즉시 소멸시키는 자는 뒤따르는 것도 피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달콤한 신성한 지식으로 풍요로워질 것이며, 그 지식 안에서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을 뵙게 될 것이며, 그분 앞에 마음의 거울을 세워, 감각적인 태양 앞에 놓인 맑은 유리처럼 그분으로부터 빛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면 마침내 마음은 자신의 소망이 도달할 수 있는 마지막 경지에 이르러, 자기 내면의 그 어떤 다른 관조로부터도 안식을 얻게 될 것이다.

89. 모든 생각은 감각적인 무언가를 상상함으로써 마음에 들어오기 마련이며(감각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을 방해한다), 따라서 신성의 신성한 빛은 마음이 모든 것에서 비워지고 완전히 형상이 없어질 때(어떤 형상이나 모습도 떠올리지 않을 때) 비로소 마음을 비추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그 빛은 이미 모든 생각이 사라진 순수한 마음 속에서만 드러나기 때문이다.

90. 마음에 얼마나 경각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이느냐에 따라, 그만큼 따뜻한 소망으로 예수님께 기도하게 될 것이며, 반대로 마음을 얼마나 부주의하게 살피느냐에 따라, 그만큼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전자가 마음의 공간을 강렬하게 비추는 것처럼, 후자, 즉 정신 차림과 예수님의 달콤한 부르심에서 벗어나는 것은 대개 마음을 완전히 어둡게 만든다. 이 일이 우리가 말한 대로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달리 될 수는 없다. 네가 직접 실천해 보면 경험을 통해 이를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미덕, 특히 빛을 발하는 달콤한 행실은 대개 경험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91. 달콤함과 기쁨으로 가득 찬 따뜻한 소망을 품고 끊임없이 예수님을 부르는 것은, 마음의 공기가 극도의 집중으로 인해 기쁜 고요함으로 가득 차게 한다. 마음이 온전히 정화되는 것 또한, 모든 선의 근원이자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시는 일이다. 그분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는 주 하나님, 세상을 창조하는 자라” (이사야 45:7) 하셨기 때문이다.

92. 영혼은 예수님께 은혜를 입고 기쁨을 누리며, 어떤 기쁨과 사랑으로 은혜를 베푸신 분께 고백으로 보답하고, 감사와 기쁨으로 자신을 평안하게 하신 분을 부르짖는다. 이는 영혼이 내면에서 마음속으로 그분이 악한 영들의 망상을 흩어지게 하시는 모습을 보기 때문이다.

93. “다윗이 말하기를, ‘내 분별 있는 눈이 나의 “상상 속의” 원수들을 바라보며, 나를 대적하여 교활하게 덤비는 자들의 소리를 내 귀가 듣느니라’ (시 91, 12–13). 그리고 “죄인들에게 내리는 보응”을 나는 내 안에서 이루어지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보았다(시 90, 8). 마음속에 어떤 망상도 없을 때, 그제야 마음은 본연의 질서 속에 머물며, 영적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온갖 달콤한 관상에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다.

94. 이처럼, 내가 말했듯이, 정신의 명료함과 예수님의 기도는 서로를 구성하는 요소로 들어간다. 즉, 지극한 주의력은 끊임없는 기도의 구성 요소이며, 기도는 다시 마음속의 지극한 명료함과 주의력의 구성 요소이다.

95. 몸과 영혼 모두에게 좋은 스승은 죽음에 대한 잊을 수 없는 기억이며, 현재 존재하는 모든 것(즉, 지금 이 순간과 죽음의 순간 사이)을 제쳐두고, 죽음을 항상 눈앞에 두고 바라보는 것, 그리고 우리가 육신을 떠나 누워 있게 될 바로 그 침상 등을 생각하는 것이다.

96. 형제들아, 항상 상처받지 않고 머물고자 하는 자는 잠에 빠져서는 안 된다. 그러나 둘 중 하나는 피할 수 없다. 미덕을 잃고 넘어져 파멸하거나, 무장한 마음으로 항상 (경계하며) 서 있거나. 왜냐하면 원수 또한 항상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매복하며) 서 있기 때문이다.

97. 우리 마음속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끊임없이 기억하고 부르짖음으로써 신성한 어떤 상태가 생겨납니다. 만일 우리가 그분께 대한 끊임없는 마음의 기도와, 쉬지 않는 깨어 있음, 그리고 문지기나 경비원의 임무(즉, 자기 사람은 들여보내고 낯선 사람은 쫓아내는 일)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진실로 우리는 언제나 한 가지 방식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며, 마음의 열정으로 그분께 간구하여, 그분께서 우리에게 그분의 거룩한 이름을 맛보게(마음속에 깊이 새기게) 해 주시기를 구해야 한다. 왜냐하면 반복(같은 것을 자주 되풀이하는 것)은 습관의 어머니이기 때문인데, 이는 미덕에 있어서도, 악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며, 습관은 나중에는 본성처럼 지배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태에 이르면, 마음은 마치 덤불 속의 토끼를 찾는 사냥개처럼 스스로 적들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사냥개는 잡아먹기 위해 찾는 반면, 마음은 그들을 쳐부수고 쫓아내기 위해 찾는 것이다.

98. 그러므로 우리 안에 악한 생각이 많아질 때마다, 그 가운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짖는 기도를 끼워 넣으라. 그러면 즉시 그 생각들이 공기 중의 연기처럼 흩어지기 시작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니, 이는 우리가 경험을 통해 배운 바와 같다. 그 후 마음이 (혼란스럽게 하는 생각 없이) 홀로 남게 되면, 다시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이고 주님을 부르짖어야 한다. 우리가 그러한 유혹을 받을 때마다 이렇게 행해야 한다.

99. 알몸으로 전쟁에 나가거나, 옷을 입은 채로 넓은 바다를 건너거나, 숨을 쉬지 않고 살 수 없는 것처럼, 겸손과 그리스도께 드리는 끊임없는 기도 없이는 마음속의 은밀한 싸움을 배우고, 그것을 능숙하게 추적하여 근절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100. 일에서 가장 경험이 풍부한 위대한 다윗은 주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권세를 주님께 맡기리이다”(시 58:10) – (즉, 주님께 도움을 청하며). 마찬가지로 모든 미덕이 솟아나는 마음과 생각의 고요함을 지키는 일도, 우리에게 계명을 주시고 우리가 끊임없이 그분을 부를 때 마음의 고요함을 무엇보다도 물이 불을 끄듯이 파괴하는 무분별한 망각을 우리에게서 쫓아내시는 주님의 도우심으로 인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수도사여, 게으름으로 인한 잠에 빠져 스스로를 죽음으로 내몰지 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원수들을 채찍질하라. 한 현자가 말했듯이, 이 가장 달콤한 이름이 네 숨결에 스며들게 하라. 그러면 네가 침묵의 유익을 알게 될 것이다.

101. 우리 같은 합당치 못한 자들이 두려움과 떨림으로 우리 주님이시며 왕이신 그리스도의 신성하고 지극히 순결한 성찬에 참여할 자격을 얻게 될 때, 그때야말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가다듬으며, 엄격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리니, 이 신성한 불,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체가 우리의 죄와, 크든 작든 우리의 모든 더러움을 소멸시켜 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성체가 우리 안에 들어오면, 즉시 마음속의 악의에 찬 사악한 영들을 쫓아내고, 우리가 이전에 지은 죄들을 용서해 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마음은 사악한 생각들이 주는 불안하고 성가신 괴로움에서 자유로워진다. 그 후, 마음의 문 앞에 서서 우리의 마음을 부지런히 지키면, 다시 성찬을 받을 때 신성한 성체는 우리의 마음을 점점 더 밝게 비추어 별처럼 빛나게 하실 것입니다.

102. 망각은 대개 물이 불을 끄듯이 마음의 경계를 무디게 한다. 그러나 끊임없는 예수님의 기도와 꺾이지 않는 정신적 명료함은 결국 마음속에서 그 망각을 완전히 사라지게 한다. 기도는 촛불 빛 속에서 작은 등불이 필요로 하듯이(어쩌면 바람 한 점 없는 곳에서 촛불처럼 타오르기 위해 등불이 필요로 하듯이) 정신의 명료함을 필요로 한다.

103. 소중한 것을 보존하는 데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신경을 써야 한다. 진정으로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감각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모든 악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것뿐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며 마음을 지키는 일입니다. 즉, 항상 마음의 깊은 곳을 들여다보고, 끊임없이 생각 속에서 침묵을 지키며—심지어, 이렇게 말하겠는데, 옳아 보이는 생각들조차도 배제하고, 도둑들이 그 아래 숨지 못하도록 모든 종류의 생각에서 완전히 비워지려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우리가 고통스러워도 인내하며 마음속에 머무르면, 위로가 가까이 있습니다.

104. 끊임없이 지켜지며, 어둡고 교활한 영들의 형상, 모습, 환상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막히는 마음은 대개 그 자체에서 빛과 같은 생각들을 낳는다. 이는 숯이 불꽃을 일으키듯이, 성세례 이후 우리 마음속에 거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의 공기가 악의의 바람으로부터 깨끗하고 이성의 경계로 지켜지고 있음을 보시면, 마치 촛불의 불꽃처럼 우리의 사색하는 힘을 불태워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105. 번개가 비가 내리기 전에 공기 중에서 회전하듯이, 우리는 항상 우리 마음의 공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회전시켜야 한다. 이는 내적 투쟁에서 영적 체험을 가진 자들 이 잘 알고 있다. 이 정신적 싸움을 다음과 같은 순서로 벌일 것이다. 첫 번째 일은 ‘주의’이다. 그다음, 원수의 생각이 다가오는 것을 알아차리면, 마음속에서 분노를 담아 맹세의 말을 그에게 퍼부을 것이다. 그 다음 세 번째 일은,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는 데로 돌리며 그 악한 생각을 향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이 악마의 유령이 즉시 흩어지겠으며, 그렇지 않으면 마음이 마치 교묘한 마술사에게 현혹된 아이처럼 그 망상의 뒤를 쫓아가게 될 것입니다.

106. 다윗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여!”라고 부르짖으며 힘쓰자. 우리의 목구멍이 침묵하더라도(목소리를 잃더라도), 우리의 분별 있는 눈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바라며 위를 향하여 바라보는 것을 그치지 않게 하라(시 68:4).

107. 주님께서 우리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함을 가르치기 위해 말씀하신 ‘불의한 재판관’에 대한 비유를 항상 기억하며(그 가르침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우리는 유익도 얻고 보복도 받게 될 것입니다.

108. 태양을 바라보는 사람의 눈동자가 강렬하게 빛나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마음의 공기를 항상 꿰뚫어 보시는 분도 빛나지 않을 수 없다.

109. 음식과 음료 없이 현세적인 삶을 사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마음의 절제와 마음의 순결—즉 ‘맑은 정신’이라 불리는 것—을 지키지 않고서는, 영혼이 영적인 것이나 하나님께 기뻐하시는 것을 이룰 수 없으며, 마음속의 죄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 비록 누군가가 형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강제로 행동으로 죄를 짓지 않도록 자제한다 할지라도 말이다.

110. 그러나 어떤 절제로 인해 행위로 죄를 범하지 않는 자들도 하나님과 천사들,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복이 있다. 왜냐하면 “자신을 절제하는 자들”은 “천국을 차지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마태복음 11,12).

111. 침묵이 마음에 주는 열매 중에서 놀라운 점은, 처음에는 단지 생각으로만 마음에 다가오는 죄들이, 만일 생각으로 받아들여지면 나중에 거칠고 감각적인 죄로 변해버릴 수 있는데, 우리 내면의 사람 안에서 절제의 미덕을 통해 생각으로 모두 잘라내어, 그것들이 안으로 들어와 악한 행위로 드러나는 것을 막으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받습니다.

112. 외적이고 감각적·육체적인 행위의 본보기는 구약성경이며, 신약성경인 성복음서는 마음의 경건함이나 순결함의 본보기이다. 그리고 구약성경은 내면의 사람을 온전하게 만들지 못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서 만족시키지도, 확증하지도 못했습니다. 사도는 “율법은 아무것도 완성하지 못하였으니”라고 말하며 (히브리서 7:19), 오직 거친 죄들만을 막아냈을 뿐입니다(마음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타락한 생각과 욕망을 마음에서 잘라내는 것, 이것이 바로 복음의 계명이며, 예를 들어 이웃의 눈이나 이를 뽑지 말라는 금령보다 더 높은 것입니다): 육체적 의로움과 육체적 수행, 즉 금식, 절제, 맨땅에서 잠자기, 서 있기, 밤샘 기도 및 그 밖의 것들에 대해서도 이와 같이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것들은 대개 육체에서 비롯되며, 육체의 정욕적인 부분을 죄악된 움직임으로부터 진정시킨다. 물론, 구약성경에서 말한 바와 같이(율법이 선하다는 것) 이 모든 것도 좋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외적인 사람을 훈련시키고 정욕적인 행위로부터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수행들은 마음의 죄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거나 막아주는 수단이 아니며, 즉 시기나 분노 등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만큼 강력하지 않다.

113. 그러나 마음의 순결, 즉 새 언약이 그 역할을 하는 마음의 수호와 보호는, 우리가 마땅히 지켜야 할 대로 이를 실천할 때, 모든 정욕과 온갖 악을 마음에서 잘라내고, 그 뿌리를 뽑아내며, 그 대신 기쁨과 희망, 통회, 울음, 눈물, 자기 자신과 자신의 죄에 대한 자각, 죽음에 대한 기억, 참된 겸손,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무한한 사랑, 그리고 신성한 마음의 돌봄을 마음속에 심어줍니다.

114. 땅 위를 걷는 자가 이 공기를 가르지 않고 지나갈 수 없는 것처럼, 아무리 엄격하게 육체적 수행을 실천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마음이 악마들에게 끊임없이 시달리지 않거나 그들로부터 은밀한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115. 주님 안에서 겉으로만 수도사처럼, 선하고 온유하며 항상 하나님과 연합된 자로 보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그러한 자가 되고자 한다면; 그러면 온 힘을 다해 ‘주의’라는 덕목을 실천하도록 노력하라. 이는 마음을 지키고 보존하며, 달콤한 마음의 고요함과 몽상에서 자유로운, 복된 영혼의 상태를 확립하는 데 있다. 이는 많은 이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일이다.

116. 주의의 미덕은 ‘마음의 지혜’라고 불린다. – 너는 큰 절제와 따뜻한 열정으로, 예수님의 기도를 읊으며, 겸손과 끊임없는 마음가짐으로, 감각과 생각의 입을 다물고, 음식과 음료에 절제하며, 모든 죄악된 것에서 멀어지며, 분별력을 가지고 영적으로 능숙하게 그 길을 걸어가라. 그러면 하나님의 도움으로 그 길은 네게 네가 기대하지 못했던 것을 드러내어 줄 것이며, 지식을 주고, 깨우쳐 주며, 지혜를 베풀고, 네가 이전에는 마음속에 받아들일 능력조차 없었던 것—즉 정욕과 어두운 행위의 어둠 속을 걷고, 망각과 혼란의 심연에 빠져 있을 때—을 가르쳐 줄 것이다.

117. 골짜기가 밀을 풍성하게 맺듯이, 그분은 네 마음속에 온갖 선을 풍성하게 맺게 하실 것이니,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를 네게 주실 것이니, 그분 없이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것을 사다리로 발견하게 될 것이며, 그다음에는 읽게 될 책으로 발견하게 될 것이며, 마침내 점점 더 성장하여, 그것을 하늘의 예루살렘인 성읍으로 발견하게 될 것이며, 이스라엘의 그리스도이시며 만군의 왕이신 분을, 그분의 본질이 하나이신 아버지께서와 경배받는 성령과 함께, 진정으로 마음으로 뵙게 될 것이다.

118. 악령들은 언제나 거짓된 환상으로 우리를 죄로 유혹한다. 그렇게 부와 이득에 대한 환상으로 그들은 불경한 유다를 부추겨 만물의 주님이시며 하나님이신 분을 배반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그 자체로는 하찮은 육체적 만족과 명예, 부, 영광에 대한 거짓 환상으로 그를 신살로 끌어들였고, 그 후 목을 졸라 자살하게 만들었으며, 그에게 영원한 죽음을 초래했다. 이는 교활한 자들이 그에게 환상이나 유혹 속에서 제시했던 것과는 정반대되는 결과였으며, 그들이 그에게 갚아준 대가였다.

119. 보라, 우리 구원의 적들이 얼마나 거짓된 환상과 헛된 약속으로 우리를 타락으로 몰아넣는지. 사탄 자신도 하나님과 동등해지겠다는 환상을 품고, 번개처럼 하늘 높은 곳에서 떨어졌다. 그렇게 하여 그는 아담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했으며, 그에게 신성한 어떤 존엄성(전지전능함)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었다. 이와 같이 이 거짓되고 교활한 원수는 죄를 짓는 모든 이들을 흔히 현혹한다.

120. 악한 생각의 독으로 인한 쓰라림이 우리 마음을 가득 채우게 되는데, 이는 망각으로 인해 마음이 흐트러져 예수님의 관심과 기도에서 오랫동안 멀어지게 될 때이다. 그러나 신성에 대한 사랑으로, 굳건한 열의를 가지고, 우리 마음속의 작업장(마음속의 공방, 즉 마음)에서 앞서 언급한 것(즉, 집중과 기도)을 부지런히 실천하기 시작하면, 마음은 다시 신성한 어떤 기쁨으로 인한 달콤함으로 가득 차게 된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마음의 고요함 속에서 항상 걷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게 되며, 다른 어떤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로부터 영혼 속에서 느껴지는 기분 좋은 달콤함과 기쁨을 위해서입니다.

121. 모든 학문의 학문이자 모든 예술의 예술은 악한 생각을 다스리는 능력이다. 그것들에 대항하는 가장 훌륭한 수단과 기술은, 주님의 도움을 받아 그 유혹이 나타나는 것을 주시하며, 육신의 눈을 지키듯 자신의 생각을 항상 깨끗하게 보존하는 것이다. 마치 육신의 눈으로 우연히 그것을 손상시킬 수 있는 것을 예리하고 예민하게 살피며, 어떤 식으로든 먼지 한 톨조차 그곳에 닿지 않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것처럼 말이다.

122. 눈이 불꽃을 일으키지 않듯이, 물이 불을 낳지 못하고, 가시나무가 무화과를 맺지 못하는 것처럼, 모든 사람의 마음도 내면을 정화하지 않고, 절제와 예수 기도를 결합하지 않으며, 겸손과 마음의 고요함을 얻지 못하고, 온 힘을 다해 앞자리를 차지하려 서두르지 않는다면, 악마적인 생각과 말과 행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신을 돌보지 않는 영혼은, 열매 맺지 못하는 노새와 마찬가지로, 선하고 온전한 생각에 있어 필연적으로 결실을 맺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안에는 영적 지혜를 분별하는 이성이 없기 때문이다. 진실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정욕적인 생각을 없애는 것은 영혼의 평화를 가져다주는 달콤한 일이다.

123. 영혼이 육체와 악한 협정을 맺을 때, 그들은 함께 허영의 성을 쌓고 교만의 기둥을 세우며, 그 안에 거하기 위해 불결한 생각들을 낳는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지옥의 두려움으로 그들의 합의를 무너뜨리고 그들을 갈라놓으시며, 주인인 영혼이 지혜를 발휘하여 육체(종)에게 낯설고 반대되는 말을 하도록 강요하십니다. 이 두려움으로 인해 그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납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이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지 않기 때문이라”(롬 8:7).

124. 우리의 일상적인 일들은 매시간 되새기며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하며, 저녁이 되면 회개를 통해 그 짐을 덜어내야 한다. 우리 안에 있는 악을 그리스도의 도움으로 이겨내고자 한다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야 한다. 또한 우리가 모든 감각적이고 눈에 보이는 행위를 하나님께 합당하게, 하나님의 면전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위하여 행하고 있는지 살펴야 하며, 무지함으로 인해 이 과정에서 어떤 불선한 감정들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해야 한다.

125. 우리가 하나님의 도움으로 매일 절제를 통해 무언가를 얻는다 한다면, 유혹적인 대화로 인해 해를 입지 않도록 무분별하게 다른 사람들과 교제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이 미덕(절제)을 위해, 그토록 사랑스럽고 달콤한 미덕을 위해 모든 헛된 아름다움과 유익함을 경멸해야 한다.

126. 우리는 영혼의 세 가지 힘에, 그 본성에 부합하고 이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올바른 움직임을 부여해야 한다. 즉, 분노의 힘은 우리의 외적인 인간과 뱀, 곧 사탄을 향해 움직여야 한다. “분노하라”고 기록되어 있듯이, “그러나 죄를 짓지 말라”(시 4:5). 이는 죄, 즉 우리 자신과 마귀를 향해 분노하여, 하느님께 대항하여 죄를 짓지 않도록 하라는 뜻이다. 욕망의 힘을 하나님과 미덕을 향해 쏟아야 하며, 이성을 그 둘의 주인으로 세워 지혜와 분별력으로 그들을 질서 있게 다스리고, 훈계하며, 징계하고, 마치 왕이 신하들을 다스리듯 그들을 지배하게 해야 한다. 그때 비로소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이성이 그것들을 다스리게 될 것이다(즉, 그것들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지배할 때). 비록 정욕들이 이성에 반기를 들더라도, 우리는 이성이 그것들을 다스리도록 명령하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주님의 형제가 말하기를, “만일 누가 말에서 실수하지 아니하면, 그는 온전한 사람이라, 온 몸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자니라”(야고보서 3:2) 하였기 때문이다. 진실로 말하건대, 모든 불의와 죄는 이 세 가지 힘으로 이루어지며, 모든 미덕과 의로움도 바로 이 세 가지 힘으로 이루어진다.

127. 수도사가 누군가와 세속적인 일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마음속으로 스스로 그에 대해 장황하게 떠들거나, 몸과 마음이 헛된 감각적 대상에 몰두하거나, 혹은 아예 헛된 일(과 허영)에 빠져들 때, 그의 마음은 어두워지고 결실을 맺지 못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런 경우, 그 직후 즉시 그는 온기(회개, 하느님께 대한 담대함, 그리고 깨달음)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하느님과 하느님의 질서를 잊어버린다): 따라서 우리가 마음으로 주의를 기울일수록 그만큼 깨달음을 얻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수록 어두워진다.

128. 매일 마음의 평화와 고요함을 추구하며 이를 부지런히 찾는 사람은, 헛수고를 하지 않기 위해 모든 감각적인 것을 쉽게 경멸할 것이다. 만약 그가 어떤 거짓된 사색으로 자신의 양심을 속인다면(감각적인 일에 몰두하는 것이 별 문제 아니라고), 그는 망각이라는 쓰라린 죽음의 잠에 빠지게 될 것이며, 신성한 다윗은 그 잠들지 않음을 위해 기도합니다(시 12:4 – “내가 죽음을 자지 않게 하소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선한 일을 행할 줄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자에게는 죄가 있다”(야고보서 4, 17).

129. 게으름에서 벗어난 마음은, 우리가 냉담함을 깨닫는 즉시 열정을 불태우고 따뜻한 열의로 마음의 평소 활동(맑은 정신과 기도)을 다시 회복한다면, 다시 본래의 질서와 명료함으로 돌아오게 된다.

130. 제분소 당나귀는 묶여 있는 바퀴 위를 걸으며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걸어도 바퀴가 멈추기 전까지는 제자리에 머물러 있다). 마찬가지로, 마음도 자신의 내면을 질서 있게 정리하지 않는다면(즉, 거기서 생각의 소용돌이를 멈추지 않는다면) (그곳에서 생각의 소용돌이를 멈추게 함으로써) 질서 정연하게 하지 않는 한, 온전함으로 이끄는 덕(즉, 온전함으로 이끄는 절제)을 향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람은 내면의 눈으로 항상 눈멀어 있어, 덕과 빛나는 예수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131. 착하고 힘센 말은 기수를 태우면 즐겁게 달린다. 마찬가지로 마음도 주님의 빛 속에서 기쁨으로 즐거워할 것이니, “내일 아침” 그분 앞에 어떤 생각에서도 자유로운 모습으로 “나설” 때이다(사 5:4). 스스로를 불태우며, 그는 활동적인 지혜의 “힘”에서 경이로운 “힘”, 즉 관상과 형언할 수 없는 신비, 그리고 미덕의 세계로 나아갈 것이며; 마침내 자신의 마음속에 숭고한 신성한 생각들의 헤아릴 수 없는 깊이를 받아들일 때, 그때 “신들의 신”이 그에게 나타나시리니, 이는 마음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일 것이다(시 83:8). 이에 감동받은 마음은 그때 보이는 분이시며 보시는 분이신 하나님을 사랑으로 찬양하리니, 그분은 바로 그 이유로 그분께로 향하는 이 정신적 시선을 구원해 주시는 분이시니라.

132. 이성적으로 유지되는 마음의 침묵은 그 높은 심연을 꿰뚫어 볼 것이며, 침묵에 빠진 마음의 귀는 경이로운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133. 여행자는 멀고 험난하며 힘든 여정을 시작하면서, 돌아오는 길에 길을 잃을까 두려워하여, 편안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줄 길잡이 표지판을 길가에 세워 둔다: 마찬가지로, 절제의 길을 걷는 사람은 자신도 같은 일(즉, 길에서 길을 잃거나 뒤로 물러서는 것)을 겪을까 두려워하여, (표식으로) (교부들로부터 들은) 말씀들을 세워 두어야 한다.

134. 그러나 여행자에게는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 기쁨의 이유이지만, 절제하는 이에게 뒤로 돌아가는 것은 이성적인 영혼의 파멸이며,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행위와 말, 그리고 생각에서 물러나는 징표이다. 그리고 그는 영혼의 치명적인 잠이 닥쳤을 때, 가시처럼 그를 (잠에서) 깨워, 자신의 방종으로 인해 얼마나 깊은 어둠과 나태함에 빠져들었는지를 상기시켜 줄 생각들을 품게 될 것이다.

135. 슬픔과 절망, 그리고 희망 없음(– 빠져나갈 희망이 전혀 없는 극한의 상황)에 빠졌을 때, 우리도 다윗이 했던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우리 마음을 “쏟아내고” “기도”하며, 우리의 “슬픔”을 있는 그대로 “알려야” 주님께(시 141:3). 이는 우리가 하나님께 고백할 때, 그분은 우리와 관련된 모든 일을 지혜롭게 주선하실 수 있으시며, 유익하다면 우리의 고난을 가볍게(견디기 쉽고 해결되기 쉽게) 하시고, 우리를 파멸적이고 파괴적인 슬픔에서 건져내실 수 있기 때문이다.

136. 본성에 어긋나게 일어나는 사람에 대한 분노, 하나님께 합당하지 않은 슬픔, 그리고 낙담은 모두 선하고 이성적인 생각에 치명적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가 고백하기 위해 그것들을 제거하시며 기쁨을 주시는 분이시다.

137. 우리의 의지와는 달리 마음속에 스며들어 자리 잡은 생각들은 대개 마음 깊은 곳에서 맑은 정신으로 드리는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 지워진다.

138. 수많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생각들로 인한 슬픔 속에서 우리는, 진심으로 그리고 편견 없이 스스로를 책망하거나, 마치 (우리와 함께 계신) 한 사람에게 하듯이 모든 것을 주님께 아뢰었을 때, 안도감과 기쁨을 얻게 될 것이다. 이 두 가지 방법을 통해 우리는 모든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으로부터 위안을 찾을 수 있다.

139. 성부들은 율법 제정자 모세를 마음의 모형으로 인정한다. 그는 떨기나무 속에서 하나님을 보았고, 얼굴이 빛나며, 신들의 신이신 하나님으로부터 파라오에게 신으로 세워졌다. 그 후 그는 재앙으로 이집트를 치고, 이스라엘을 그곳에서 이끌어 내며 율법을 주었다. 이 모든 것은 비유적으로, 영적인 의미에서 받아들여질 때, 마음의 작용과 장점을 나타냅니다.

140. 그리고 율법 제정자의 형 아론은 ‘외적인 사람’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분노로 그(외적인 사람)를 비난하며, 우리가 모세가 죄를 지은 아론에게 말했던 것처럼 그에게도 말하리라: “이스라엘(하나님을 보는 이성)이 너를 무엇으로 정당화했느냐? 네가 어떻게 서둘러 그를 살아 계시고 만물을 다스리시는 주 하나님으로부터 배교자로 만들었느냐 (자신의 생각으로 그를 정신 차린 상태에서 하나님을 묵상하는 것에서 멀어지게 했다) (출 32:21)?

141. 그 밖의 수많은 선한 본보기를 통해, 주님께서는 나사로를 죽음에서 부활시키시려 하실 때(“영을 금하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우리의 영혼이 여성처럼 나태한 감성에 빠져들 때, 엄격한 금지로 그것을 다스려야 하며, 전반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엄격한 품성을 확립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엄격한 품성이란, 즉 자기 책망을 통해, 영혼을 자기 방종과 허영, 교만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142. 큰 배 없이는 바다의 심연을 건널 수 없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서는 악한 자의 유혹하는 생각을 쫓아낼 수 없다.

143. 반항은 대개 생각의 더 나아가기를 가로막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그것들을 마음에서 쫓아낸다. 마음속에 어떤 감각적인 대상, 예를 들어 우리를 모욕한 사람이나 여성의 아름다움, 은과 금에 대한 상상으로 유혹이 생기거나, 이 모든 것이 차례로 우리 생각에 떠오를 때, 즉시 우리 마음을 그러한 몽상에 빠지게 한 것이 바로 원한, 음란, 탐욕이라는 영들임이 드러난다. 만약 우리의 마음이 경험이 풍부하고 훈련되어 유혹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며, 낮처럼 선명하게 기만적인 몽상과 교활한 자들의 유혹을 볼 수 있다면, 즉시 반박과 반항,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로 마귀의 불타는 화살을 쉽게 끄고, 정욕적인 몽상이 우리 생각을 끌고 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며, 이러한 생각들이 유혹의 환영과 조화를 이루거나, 그와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며 여러 가지 생각에 빠지거나, 그와 동조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 그 뒤에는 밤이 낮을 따르듯, 필연적으로 악한 일들이 뒤따르게 된다.

144. 만일 우리의 마음이 깨어 있는 절제라는 일에 미숙하다면, 즉시 눈앞에 나타난 유혹—그것이 무엇이든 간에—에 집착하며, 그것과 대화를 시작하여 부적절한 질문을 받고 똑같은 대답을 하게 된다. 그때 우리의 생각은 악마적인 망상들과 뒤섞이게 되는데, 그 결과 망상들은 더욱 번성하고 증식하여, 유혹당하고 사로잡힌 마음에 더 사랑스럽고, 아름답고,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해 노력한다. 그때 우리의 마음은 마치 온순한 어린 양들이 풀을 뜯고 있는 평원에 개 한 마리가 나타나자마자, 어린 양들이 마치 자기 어머니를 만나듯 자주 그 개에게 달려가지만, 그에게 다가가는 것으로 아무런 이득도 얻지 못하고, 오로지 그에게서 더러움과 악취만을 빌려올 뿐이다.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의 생각들은 미숙함 때문에 마음속의 모든 악마적인 환상들에게 달려가, 내가 말했듯이 그것들과 뒤섞이게 되어, 마치 양쪽이 함께 (서로) 의논을 벌이는 것처럼 여겨질 정도가 된다. – 악마의 유혹에 이끌려 그들에게 그토록 화려하고 달콤하게 보였던 것을 육체를 통해 실현하기 위해 어떤 일을 꾸미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마침내 영혼의 타락이 내면에서 이루어지고, 그 후 마치 어떤 필연성에 따라, 마음속에서 성숙된 것이 외부로도 드러나게 된다.

145. 우리의 마음은 가볍게 움직이고 악의가 없으며, 꿈에 쉽게 빠져들고 죄악된 생각에 억제할 수 없이 쉽게 빠지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단, 정욕을 지배하는 군주처럼 끊임없이 마음을 붙잡고 제어해 줄 만한 생각이 그 안에 없다면 말이다.

146. 관상과 통찰은 대개 엄격한 삶의 길잡이이자 원동력이 되는데, 이는 그것들에 사로잡힌 마음이 세상의 쾌락과 삶의 온갖 감각적 즐거움을 하찮은 것으로 여겨 경멸하게 되기 때문이다.

147. 반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지는 경건한 삶은 관상과 통찰의 아버지이자, 신성한 승천과 가장 지혜로운 사색의 근원이 되는데, 이는 신성한 예언자 이사야가 말한 대로 겸손이라는 배우자와 결합되었기 때문이다: “인내하는 자들은 주 안에서 힘을 얻으며, 독수리처럼 날개를 펼치리라”(사 40,31).

148. 사람들에게는 모든 생각을 버리고 영적으로 침묵을 지키는 것이 지나치게 엄격하고 무겁게 느껴진다. 그리고 실로 이는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영적 전쟁의 비밀을 알지 못하는 자들뿐만 아니라, 내면의 비물질적 전쟁에서 시험을 겪은 자들에게도 육신의 집 안에 무형적인 존재를 가두고 붙잡아 두는 것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무겁기 때문이다. 그러나 끊임없는 기도로 주 예수님을 가슴속에 간직하는 자는, 선지자의 말씀대로, “그분을 따르는 데 지치지 않을 것이며, 사람의 날을 사모하지 않을 것” (예레미야 17:16), 예수님의 아름다움과 기쁨, 그리고 달콤함 때문에, 그리고 자기 주위를 맴도는 불결한 악마들인 원수들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마음의 “문”에서 그들에게 “외칠 것”이며(시편 126:5), 예수님을 통해 그들을 뒤로 쫓아낼 것이다.

149. 죽은 후 공중으로 솟아올라 천국의 문에 이른 영혼은, 그리스도를 곁에 모시고 있기에 그곳에서도 원수들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며,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때에도 담대하게 “문에서” 그들에게 외칠 것이다. 오직 자신의 마지막 순간이 올 때까지,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께 부르짖는 것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그분은 불의한 재판관에 대한 비유에서 말씀하신, 거짓 없는 신성한 약속에 따라 곧 그 영혼을 위해 복수해 주실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곧 복수해 주리라” (눅 18:8), – 이 세상에서나 육신을 떠난 후에도 그러하리라.

150. 마음의 바다를 항해하며, 예수님을 의지하라. 그분은 바로 네 안에, 네 마음속에 계시며, 신비롭게 네게 부르시니, “야곱아, 작은 이스라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요, 네 오른손을 붙들어 주리라” (사 41:13, 14).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계시다면”, 어떤 악한 자가 “우리에게” 대적하겠는가(롬 8:31)? 우리를 위해 계신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청결한 자들을 기쁘게 하시고, 가장 달콤하신 유일한 순결하신 예수님께서 신성하게 청결한 마음들 안에 임재하시고 거하시도록 정하셨다. 그러므로 신성한 바울의 가르침에 따라, 우리의 마음을 경건함으로 훈련하는 일을 그치지 맙시다 (딤전 4:7).

151. 다윗의 말씀대로, 많은 평안을 누릴 것이며(시 36, 11), 사람의 겉모습을 따르지 않고 마음속의 거짓을 심판하는 자, 즉 사악한 영들의 형상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 형상을 통해 죄를 꾀하지 않으며, 오히려 엄격히 심판하고 마음의 땅에서 엄중한 판결을 내림으로써 죄에 마땅한 대가를 치르게 하는 자이다. 위대하고 지혜로운 교부들은 그들의 일부 저술에서 악마들을 이성적 존재라는 이유로 사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복음서에서 주님께서는 “이것은 원수가 심은 것이다”(마태복음 13, 28)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밀 가운데 가라지를 뿌린 자(마귀를 가리킴; 그 후 “ “뿌린 자는 마귀니라”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즉시 반박하지 않으면, 그 때문에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다.

152. 만일 마음의 경각 속에서 살기 시작하여, 절제와 겸손을 결합하고, 반박과 기도를 함께 한다면, 우리는 마치 등불을 들고, 경배받으시는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따라, – 죄를 쓸어내고 정화할 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의 집을 단장하고 가꾸는 것처럼. 그러나 만약 우리의 절제나 주의력 하나에만 의지한다면, 곧 원수들의 공격을 받아 쓰러지고 쫓겨나게 될 것이다. 그때 이 가장 교활한 악의 세력들이 모든 면에서 우리를 압도하기 시작할 것이며, 우리는 마치 그물처럼 악한 욕망에 점점 더 얽매이게 될 것이요, – 혹은 우리 안에 승리의 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지니지 못한 채 그들에게 완전히 희생당하게 될 것입니다. 오직 이 거룩한 칼만이, 온갖 형상에서 벗어난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휘둘러질 때, 그들을 뒤로 물리치고 베어내며, 불이 짚을 태우듯 태워버리고 삼켜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153. 끊임없이 정신을 차리는 일, 즉 영혼에 유익하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 일은, 마음속에 생겨나는 몽상적인 생각들을 즉시 간파하는 것이다. 반박의 임무는, 어떤 감각적 대상을 상상함으로써 우리 마음의 공중에 들어오려 하는 생각을 폭로하고 수치스럽게 드러내는 것이다. 적대자들의 온갖 계략과 온갖 말, 온갖 환상, 온갖 우상, 그리고 온갖 악의 기둥을 즉시 끄고 흩어 버리는 것은 주님을 부르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도 마음속에서 우리 위대한 하나님 예수님께서 그들을 권능으로 패배시키시는 것과, 겸손하고 가난하며 아무 쓸모도 없는 우리를 위해 그분께서 복수하시는 것을 보게 된다.

154. 우리의 생각이 감각적이고 세속적인 사물들에 대한 몽상적인 형상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많은 이들이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로서 좀 더 오랫동안 정신을 차리고 머물 때, 기도는 우리의 마음을 온갖 물질적인 악한 생각의 형상으로부터 해방시키고, 그에게 대적들의 말(아마도 생각의 일반적인 의미, 즉 그것들이 무엇인지, 혹은 생각이 주입될 때 적들의 계획과 의도)을 깨닫게 하며, 기도와 정신 차림의 유익을 느끼게 해 줍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주의 눈으로 보시니, 죄인들의 보응을” 마음속으로 마음속에서 직접 “보시며깨닫게 되리라(시 90:8), 복된 시편 기자 다윗이 말하듯이.

155. 가능하다면 끊임없이 죽음을 기억합시다. 왜냐하면 이 기억으로부터 우리 안에 모든 근심과 헛된 일들을 내려놓는 마음, 정신의 온전함, 끊임없는 기도, 육체에 대한 무관심, 죄에 대한 혐오가 생겨나며, 솔직히 말해 살아 있고 활동적인 모든 미덕이 바로 거기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능하다면, 우리의 호흡이 끊이지 않는 것처럼 이 일도 끊임없이 실천합시다.

156. 꿈에서 완전히 벗어난 마음은 신성하고 신비로운 생각들을 낳게 될 것이며, 그 생각들은 마치 잔잔한 바다에서 물고기가 노니고 돌고래가 뛰노는 것처럼 마음속에서 춤추게 될 것이다. 바다에는 산들바람이 불고, 마음의 심연에는 성령이 불어온다. 사도는 “너희가 아들이 되었으므로”라고 말하며, “하나님께서 너희 마음에 그 아들의 영을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게 하셨느니라”(갈 4:6)고 한다!

157. 모든 수도사는 마음이 맑아지기 전에 영적 수행에 착수하는 것을 의심하고 주저할 것이다. 이는 아직 그 아름다움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거나, 알았음에도 열심이 부족하여 결심할 힘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망설임은 그가 ‘마음 지키기’라는 수행에 들어서는 순간 의심할 여지 없이 사라질 것이다. 이는 ‘마음의 지혜’ 또는 ‘마음의 실천적 지혜’라고도 불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 그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신 분의 길을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요한복음 14:6).

158. 그는 다시금 생각의 심연과 바빌론의 젖먹이 무리를 보며 흔들릴 것이나, 우리가 마음의 기초를 끊임없이 그분 안에 굳건히 세우고 바빌론의 젖먹이들을 이 돌에 부딪혀 깨뜨리며(시 136:9) – 말하자면, 그들에 대한 자신의 소원(그들에 대한 분노)을 이루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혜로운 이가 말하듯이, “사악한 말을 헛되이 내뱉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라”(전도서 8, 5). 그리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 없이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요한복음 15, 5)고 하셨다.

159. 절제를 지키는 자가 참된 수도사이며, 마음속으로 수도사인 자(마음속에 오직 ‘하나님’만이 있는 자)가 참된 절제자이다.

160. 인간의 삶은 해, 달, 주, 날과 밤, 시와 분이 번갈아 가며 앞으로 이어진다. 그와 함께 우리도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완벽을 향해) 덕스러운 행실, 즉 절제, 기도, 마음의 평온을 끊임없는 침묵 속에서 앞으로 펼쳐 나가야 한다.

161. 마침내 우리에게도 죽음의 시간이 찾아올 것이니, 그것이 오면 피할 수 없다. 오, 그때 공중의 세상의 왕이 와서 우리의 죄악을 사소하고 하찮은 것으로 여겨, 우리를 정당하게 책망할 수 없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 그렇지 않으면 그때 우리는 울게 될 것이나, 그때는 이미 소용이 없을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주인의 뜻을 알고도 행하지 않은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누가복음 12,47).

162. 마음을 망친 자들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주님께서 찾아오실 때 그들이 무엇을 하겠는가(시라 2,14)? – 그러니 형제들아, 마음의 일에 더욱 열심을 내자.

163. 오랜 경험과 관찰을 통해 우리가 알게 된 바와 같이, 단순하고 무욕한 생각 뒤에는 정욕적인 생각이 뒤따르며, 전자는 후자의 통로가 되고, 무욕한 것은 정욕적인 것의 통로가 된다.

164. 진실로 사람은 자신의 의지를 두 갈래로 갈라야 하며, 가장 지혜로운 생각으로 스스로를 찢어내야 한다. 진실로 그는 자기 자신에게 화해할 수 없는 적이 되어야 마땅하다. 누군가가 자신을 극도로 모욕하고 상처 준 사람에게 품는 태도와 똑같은, 혹은 그보다 더 심한 태도를 우리 스스로에게도 가져야만 한다. 우리가 가장 위대하고 최우선적인 계명, 즉 복된 겸손—그리스도의 거처이자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삶—을 실천하고자 한다면 말이다. 그러므로 사도는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겠느냐”(롬 7:24)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거스르는 마음”(롬 8:7)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육체를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 중 하나임을 보여주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스스로를 판단했다면 정죄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심판을 받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시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11:31, 32).

165. 열매를 맺는 것의 시작은 꽃이며, 마음이 맑아지는 것의 시작은 음식과 음료에 대한 절제, 온갖 생각을 버리고 끊어내는 것, 그리고 마음의 고요함이다.

166.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에 대하여 생각할 때, 정신을 차린 상태에서 확고히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 그때 먼저 우리 마음속에 마치 등불처럼, 우리 마음의 손으로 붙들고 생각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이 나타나고, 그다음에는 마치 마음의 하늘에서 회전하는 보름달처럼, 마지막으로 마치 태양처럼, – 예수께서 마치 태양처럼 의로 빛나시며, 즉 그분 자신과 그분의 온통 빛나는 관조의 빛을 드러내신다.

167. 바로 이것을 그분은 끊임없이 열정을 다해 “너희의 완고한 마음을 베어내라”(신명기 10,16)는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마음에 신비롭게 드러내신다. – 그렇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철저한 절제는 사람에게 경이로운 진리를 가르쳐 줍니다. 신성은 편애하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 왜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가진 자에게는 더 주어 넘치게 하겠고, 없는 자에게는 그가 가진 것마저 빼앗으리라”(마태복음 13, 12, 13)라고 말씀하시며, 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 28)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이 미덕들(절제와 기도)이 그들에게 이를 향해 더욱 힘차게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168. 물 없이는 배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듯이, 겸손과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가 동반된 절제 없이는 정신을 지키는 일도 조금도 성공할 수 없다.

169. 집의 기초는 돌이다. 그러나 이 미덕(마음의 수호)의 기초이자 지붕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고 경배받는 이름이다. 폭풍우가 몰아칠 때, 선원들을 흩어지게 하고 노와 돛을 바다에 내던진 뒤 스스로 잠자리에 드는 무분별한 조타수는 곧 쉽게 난파당할 것이나, 시련이 시작될 때 절제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지 않는 영혼은 악마들에 의해 훨씬 더 빨리 침몰할 것이다.

170. 우리는 우리가 아는 바를 성경을 통해 전하며, 길을 가며 본 것을 원하시는 분들에게 증언하노니, 여러분이 우리에게 전해지는 말씀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말이다. 이는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누구든지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마치 가지처럼 밖으로 내던져져 말라 버릴 것이요,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 불에 던져 태울 것이니라. 그러나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는 자는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요한복음 15:5, 6). 태양이 빛 없이 빛날 수 없는 것처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고서는 마음이 해로운 생각들의 더러움에서 정화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경험상) 내가 보는 바와 같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숨 쉬는 것만큼이나 자주 이 이름을 외쳐야 할 것이다. 이는 그 이름은 빛이요, 저것들(더러운 생각들)은 어둠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분(부름받는 예수)은 하나님이시며 주님이시나, 저것들은 악마의 종들이다.

171. 마음을 지키는 일은 ‘빛을 낳는’, ‘번개를 낳는’, ‘빛을 발하는’, ‘불을 품는’이라 불릴 만하고 합당하다. 실로 말하건대, 그것은 아무리 많은 육체적 미덕을 지녔다 해도 그 어떤 것보다도 뛰어나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그로부터 태어나는 찬란한 빛들 때문에, 이 미덕을 가장 존경받는 이름들로 불러야 마땅하다. 이 미덕을 사랑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인해 방탕하고, 추악하며, 무지하고, 어리석고, 불의한 죄인들에서 의롭고, 선하게 행하며, 순결하고, 거룩하며, 지혜로운 자들로 변모한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비를 관조하고 신학을 탐구하기 시작한다. 관조자가 된 그들은 그 지극히 순결하고 무한한 빛으로 옮겨가, 형언할 수 없는 접촉으로 그분께 닿으며, 그분과 함께 살고 활동합니다. 이는 “주님께서 선하시다는 것을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 첫 천사들에게 신성한 다윗의 말씀이 분명히 성취됩니다: “그러나 의인들은 주의 이름을 고백하며, 의로운 자들은 주의 얼굴을 뵙고 살리라”(시 139:14). 그리고 실로 그들만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부르며, 그분께 고백하고, 그분을 사랑하므로 항상 그분과 대화하기를 좋아한다.

172. 내적 고통은 외적 요인에서 비롯된다. 내적 사람은 외적 감각들로 인해 많은 고통을 겪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고통을 겪더라도, 그는 이 외적 감각들에 맞서 채찍을 휘두르어야 한다. 글자 그대로 해야 할 일을 행한 자는 이미 이성적으로 이해해야 할 바도 깨달은 것이다.

173. 우리 내면의 사람이 정신을 차린다면, 교부들의 말씀에 따르면, 그는 외적인 것까지 지켜낼 힘이 있다. 또한 그들의 말씀에 따르면, 우리와 악한 악마들은 둘 다 함께 죄를 짓는다. 악마들은 생각이나 몽상 속에서 마음속으로만 원하는 대로 죄를 그려내지만, 우리는 내면적으로는 생각으로, 외면적으로는 행동으로 죄를 짓는다. 악마들은 튼튼한 육체를 가지고 있지 않아, 오직 생각과 계략, 그리고 유혹을 통해서만 자신과 우리에게 고통을 안겨줍니다. 그러나 만약 이 가장 추악한 자들이 튼튼한 육체를 가지고 있었다면, 항상 악한 의지를 품고 불경스러운 행위를 저지르려 준비한 채, 행동으로도 끊임없이 죄를 지었을 것입니다.

174. 그러나 주님께 드리는 진심 어린 기도는 그들을 무너뜨리고, 그들의 유혹을 흙으로 돌려버린다. 왜냐하면 우리가 끊임없이 게으름 없이 부르짖는 예수, 곧 하나님이자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그분은 그들이 우리 안에 죄를 심기 시작하는 것—이를 ‘유혹’이라 부르는데—을 결코 허용하지 않으시며, 생각의 거울 속에서 마음에 어떤 형상도 비추게 하지 않으시고, 마음에 어떤 말도 속삭이게 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형상도 마음에 스며들지 않는다면, 마음은 우리가 말한 대로 생각으로부터도 비워질 것이다. 왜냐하면 악령들은 보통 생각을 통해 은밀히 영혼과 대화하며, 영혼을 악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175. 그러므로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 우리 안의 마음의 공기는 어둠의 구름과 악의 영들의 바람으로부터 깨끗해진다. 마음의 공기가 깨끗해지면, 우리가 허영과 자만, 그리고 자랑스러운 자기 과시로 가득 차지 않고, 닿을 수 없는 것을 좇지 않으며, 그로 인해 예수님의 도움을 잃지 않는 한, 예수님의 신성한 빛이 그 안에서 빛나는 것을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겸손의 본이 되시므로 그러한 모든 것을 미워하시기 때문이다.

176.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와 겸손을 붙들어야 한다. 이 두 무기는 절제와 함께 불타는 칼처럼, 마음의 전사들이 악마들에 맞서 무장하는 데 쓰인다. 우리가 이렇게 삶을 살아간다면, 매일 매시간 마음속에서 신비롭고 기쁜 축제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177. 여덟 가지 주요한 죄악된 생각은, 그러한 모든 생각의 영역을 아우르며, 그로부터 모든 생각이 비롯된다. 이 생각들은 모두 마음의 문 앞으로 다가와, 마음이 이성으로 지켜지지 않고 있음을 발견하면, 제때에 하나씩 차례로 마음속으로 들어온다. 이 여덟 가지 생각 중 어느 하나가 마음에 올라와 들어오면, 온갖 불결한 생각들을 대거 끌고 들어와, 이처럼 마음과 정신을 어둡게 하고, 육체를 자극하여 수치스러운 행위를 저지르게 이끈다.

178. 그러나 뱀의 머리(부록)를 경계하고, 분노 어린 반박으로 격한 말을 골라 마치 주먹으로 적의 얼굴을 치듯 하는 자는, 그로써 다툼을 근절한다. 왜냐하면 머리를 잘라내었으므로, 그는 사악한 생각과 가장 사악한 행위들까지 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후 그의 생각은 더 이상 동요하지 않게 된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가 생각을 경계하는 것을 기뻐하시며, 그 대가로 적들을 어떻게 이겨내야 하고, 내면의 사람을 더럽히는 생각들로부터 마음을 어떻게 정화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혜를 주시기 때문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마음에서 악한 생각과 간음, 음행이 나옵니다… 이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입니다”(마태복음 15, 19. 20).

179. 이와 같은 방식으로 영혼은 주님 안에서 그 본래의 고상함과 아름다움, 의로움을 되찾을 수 있는데, 이는 태초에 하나님에 의해 아름답고 의롭게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위대한 하나님의 종 안토니우스가 말하듯이: “영혼 속의 마음이 본성에 따라 마땅히 그래야 할 모습일 때, 그때 비로소 영혼 전체가 덕이 된다.” 그는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혼이 의로운 것은, 창조된 그대로 본연의 상태에 있는 마음을 갖는 것과 같다.” 그리고 조금 아래에서 그는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이성을 정화합시다. 나는 이성이 온전히 정화되어 본래의 자연스러운 상태에 이르면, 계시를 주시는 주님을 품고 있어 통찰력을 얻어 악마들을 더 멀리, 더 깊이 볼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위대한 아파나시우스가 안토니우스의 행적에서 전하는, 영광스러운 안토니우스의 말씀입니다.

180. 모든 생각은 마음속에 어떤 감각적 대상의 형상을 재현한다. 왜냐하면 아시리아인(적)은 그 자체가 지적인 힘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익숙한 감각적 대상들을 이용하지 않고서는 우리를 유혹할 수 없기 때문이다.

181. 우리 인간이 공중을 날아다니는 새들을 쫓아가거나 그들과 같이 날 수 없는 것처럼, 이는 우리 본성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절제된 끊임없는 기도 없이는 비물질적인 악마의 생각에서 벗어나 마음의 주의 깊은 시선을 자유롭게 하느님께 향할 수 없다. 네 안에 이것이 없다면, 너는 땅에 머물며 세속적인 것을 좇게 될 것이다.

182. 만일 진정으로 생각들을 수치심으로 덮고자 한다면, 마땅히 침묵을 지키고 수월하게 마음을 맑게 해야 한다. 예수님의 기도가 네 호흡에 밀착되게 하라. 그러면 며칠 안에 이를 실제로 보게 될 것이다.

183. 글자를 공중에 써서는 안 되고, 오래 보존되도록 어떤 단단한 물체에 새겨야 하듯이: 마찬가지로, 우리가 힘겹게 실천하는 절제와 예수님의 기도를 결합해야만, 절제라는 아름다운 미덕이 그분과 함께 우리 안에 항상 온전하게 남아, 그분을 통해 영원히 우리 안에서 빼앗길 수 없는 것으로 보존될 수 있다.

184. 말씀하신 대로 네 일을 주님께 맡기라. 그리하면 은혜를 얻으리니, 선지자의 말씀, “주님, 주님은 그들의 입술에는 가까이 계시나 그들의 속사람에게는 멀리 계십니다”(예레미야 12:2)가 너와 우리에게 적용되지 않게 하리라. 멀리 떨어져 있는 것들(즉, 신성과 인성)을 자신 안에 결합하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그 누구도 네 마음을 정욕으로부터 확고히 평온하게 해 줄 수 없다.

185.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생각들과의 내적 대화도, 외적인 대화와 헛소리도 똑같이 영혼을 어둡게 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마음에서 모든 해로운 것을 떨쳐내려고 노력하는 이들은, 헛소리를 좋아하는 자들, 즉 생각과 사람들을 가리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매우 중대한 이유, 즉 – 마음이 흐려져 정신을 차리는 데 약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대화들로 인해) 망각에 휩싸여 흐려지면, 우리는 정신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마치 우리 안에 정신이 전혀 없는 것처럼 되어 버린다).

186. 온 마음을 다해 마음의 순결을 지키는 자는, 그 순결의 입법자이신 그리스도를 스승으로 모시게 될 것이며, 그분은 신비롭게 그에게 자신의 뜻을 말씀해 주실 것이다. “주 하나님께서 나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듣겠나이다”(시 84:9)라고 다윗은 이를 가리키며 말한다. 또한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정신적 투쟁과 그 속에서 하나님의 중보적 보호에 대해 마음이 스스로와 나누는 대화를 묘사하며, 그는 “사람이 말하기를, 의인에게 열매가 있다면”(시 57:12)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양측을 모두 고려한 끝에 내린 결론을 밝히며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시리니” – 우리 마음속 “땅 위”의 악한 악마들을 (같은 구절). 또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나아와 마음 깊이 생각하면, 하나님이 높이 올리시리라”; 그리하면 “유아들의 화살”“그들의 상처”가 여겨지리라 (시 63:7, 8).

187. 우리는 항상 “지혜로 마음을 다스리는 자”(시 89:12)처럼 행하며,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 곧 하나님 아버지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를 호흡합시다. 만약 어떤 우연한 이유로 소홀해졌다가 이 현명한 행실을 다시 깨닫게 된다면, 다음 날 아침 다시 우리 마음의 허리를 단단히 동여매고 우리의 일에 더욱 힘차게 매진해야 한다. “선한 일을 행하도록 부름받은” 우리가 그것을 행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188. 마치 방금 섭취한 해로운 음식이 몸에 고통스러운 동요를 일으키면, 그것을 맛본 사람은 그 해로움을 느끼자마자 서둘러 그것을 토해 내어 무사히 지낼 수 있는 것처럼, 마음도 마찬가지로, 받아들인 악한 생각들을 삼켰다가 그것이 영혼을 해치는 쓴맛을 느끼게 되면, 서둘러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예수님의 기도로 그것들을 토해내고 멀리 내쫓는다면, 이를 통해 그것들로부터 오는 모든 해를 피하게 될 것이니, 이는 하나님의 자비로 인해 타인의 가르침과 더불어 자신의 경험을 통해 깨어 있는 자들이 이 진리를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189. 네 숨결에 절제와 예수님의 이름, 혹은 죽음에 대한 묵상과 겸손을 결합하라. 이는 둘 다 큰 유익을 주기 때문이다.

190.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나에게서 배우라. 나는 온유하고 마음이 겸손하니라” (마태복음 11:29).

191. 주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는 자, 그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자니라” (마태복음 18,4);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질 것이요” (누가복음 18,14). – “나에게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배워라.” 보라,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겸손이다. 그분의 계명은 영생이며, 이 계명이 곧 겸손이다. 따라서 겸손하지 않은 자는 생명에서 떨어져 나간 것이며, 당연히 그와 정반대되는 곳에 이르게 될 것이다.

192. 만일 모든 미덕이 영혼과 육체에 의해 이루어지고, 내가 말했듯이 모든 미덕을 이루는 그 영혼과 육체가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면, 우리가 영혼과 육체의 타인으로부터 온 장식으로 자만하고 허영을 부리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이 아닌가? 게다가 자만심을 마치 갈대 지팡이처럼 의지하여, 무한하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우리 자신에게 대적하게 만들고, 그러한 극단적인 불의와 광기로 인해 우리 머리에 하나님의 가장 무서운 불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겠는가? “주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나니”(야고보서 4:6). 겸손함으로 주님을 본받아야 할 대신, 우리는 허영과 교만으로 가득 찬 자만심에 빠져 주님의 맹렬한 원수인 교만한 마귀와 한 편이 되어 버립니다. 바로 그 때문에 사도는 “네가 가진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이냐?(고린도전서 4:7)라고 말합니다. 설마 네가 스스로를 창조했단 말인가? 만일 모든 미덕이 비롯되고, 존재하며, 이루어지는 몸과 영혼을 네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면, “네가 받은 것이 아닌데 무엇을 자랑하느냐”(같은 곳)라고 할 수 있겠는가? 주님께서 이 모든 것을 네게 베풀어 주셨기 때문이다.

193. 겸손은 물론 위에서 내려오는 모든 선한 것이 우리 안에 머무르게 하는 마음의 정화는, 결코 마음속에 스며드는 악한 생각들이 들어오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194. 하나님의 도움으로, 오직 한 분 하나님을 위하여 행해지는 마음의 수호는 영혼 속에 자리 잡음으로써, 하나님께 합당한 행실을 실천하는 데 있어 마음에 지혜를 부여한다. 또한 그것은 그 참여자에게, 흠잡을 데 없는 분별력을 가지고 외적인 일과 말도 하나님께 합당하게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적지 않게 부여한다.

195. 구약성경에서 대제사장의 특징적인 장신구(가슴에 달린 순금 흉패로, ‘여호와의 거룩한 것’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음, 출애굽기 28, 36)는 마음의 순결을 예표한 것으로, 우리로 하여금 우리 마음의 흉패가 죄로 인해 검게 변하지 않았는지 주의 깊게 살피게 하여, (만약 그렇다면) 눈물과 회개와 기도로 서둘러 그것을 정화하도록 이끕니다. 우리의 마음은 가볍고(변덕스러운) 것이어서, 죄악된 기억들로부터 그것을 붙잡아 두기 어렵다. 그러나 마음은 나쁜 생각과 선한 생각 모두를 똑같이 쉽게 따라간다고 말할 수 있다.

196. 참으로 복 있는 사람은, 마치 공기가 우리 몸에 달라붙듯이, 혹은 불꽃이 촛불에 달라붙듯이,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그분께 부르짖으며 예수님의 기도에 생각을 굳게 붙인 자이다. 태양이 땅 위를 지나가며 낮을 만들어내듯이, 거룩하고 경배받으실 주 예수님의 이름이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빛나며, 셀 수 없이 많은 태양과 같은 생각들을 낳습니다.

197. 구름이 흩어지면 공기가 맑게 드러나듯이, 진리의 태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욕적인 환상을 흩어지게 하실 때면, 예수님께서 마음의 공기를 비추심으로써 보통 마음속에 빛과 같은 생각과 별과 같은 생각이 생겨납니다. 이는 지극히 지혜로우신 분이 말씀하시기를, “주님을 의지하는 자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사랑하는 자들은 그분께 충실할 것이라” (지혜서 3,9) 하셨기 때문이다.

198. 어떤 성인이 말하기를, “악을 기억할 때는 마귀들을 기억하고, 원수 지낼 때는 항상 육신을 원수로 삼으라. 육신은 교활한 친구이며, 만족을 얻으면 가장 치열한 싸움을 일으킨다.” 또한, “육신을 대적하고 배를 향해 싸우라.”

199. 제1백과 제2백을 이루는 앞선 장들에서, 우리는 마음의 거룩한 침묵을 위한 수고를 기술하였으며, 이는 오로지 우리 자신의 탐구 결과뿐만 아니라, 신성한 말씀으로 신성한 지혜를 지닌 교부들이 마음의 순결에 관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바를 제시한 것이다. 이제 마음의 수양이 주는 유익을 보여주기 위해 몇 마디 더 덧붙인 뒤, 이 말을 마칠 것이다.

200. 그러니 오라, “선한 날들을 보기를” (시 33:12) 영으로 사랑하는 자여, 네가 누구든지 간에, 나를 따라 행복하게 마음을 지키는 경지에 이르도록 하라. 그러면 내가 주님에 관하여, 눈에 보이는 행함과 무형의 힘들이 거하는 방식에 대해 너에게 가르쳐 주리라. 천사들은 창조주를 찬양하며 만족하지 못하리니, 그들과 순결함으로 경쟁하는 마음 또한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비물질적인 존재들(하늘의 천사들)이 음식에 연연하지 않는 것처럼, 물질적인 비물질주의자들(땅 위의 절제하는 사람들)도 마음의 고요함이 깃든 하늘로 올라갈 때 음식에 연연하지 않을 것이다.

201. 하늘의 세력들이 부와 재물을 염려하지 않는 것처럼, 영혼의 눈을 정화하고 덕(절제)의 습관을 익힌 자들도 악령들의 악행을 염려하지 않는다. 그리고 저들이 하나님 안에서 완전함에 이르는 풍요로움으로 구별되듯이, 이들도 하나님에 대한 갈망과 사랑, 신성한 것을 향한 열망과 승천으로 구별된다. 그리고 그들은 신성한, 황홀경에 이르게 하는 사랑을 맛보는 데서 오는 끝없는 갈망으로, 상승(영적 완성의 단계들을 따라 올라가는 길)을 향해 나아가며, 세라핌과 닮은 경지에 도달할 때까지는 멈추지 않을 것이며, – 그리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천사가 될 때까지, 정신의 명료함과 갈망에 찬 고양에서 쉬지 않을 것이다.

202. 아스피드와 바실리스크의 독보다 더 독한 독은 없으며, 자만심보다 더 큰 악은 없다. 자아애의 산물인 이 날아다니는 뱀들은 바로 다음과 같다: 마음속의 자화자찬, 자기 만족, 탐식, 음행, 허영, 시기, 그리고 모든 악의 정점인 교만, 이는 사람뿐만 아니라 천사들까지 하늘에서 쫓아내고 빛 대신 어둠으로 덮어버린다.

203. 이 글을 너에게 쓴 이는, 테오둘레여, 침묵의 동명자(즉, 이시히오스)이지만, 실제로는 침묵하는 자가 아니다. 어쩌면 이 주제와 관련된 모든 것을 다 적지는 못했을지 모르나, 아버지, 아들, 성령 안에서 모든 이성적인 피조물로부터 찬양과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께서 주신 바를 온갖 방법으로 기록하였노라: 천사들과 인간들, 그리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삼위일체이시며 유일하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로부터 찬양과 영광을 받으시는 그분. 우리도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 마리아와 우리 존경하는 성부들의 기도를 통해 그분의 빛나는 왕국을 누릴 자격을 얻게 되기를 빕니다. 헤아릴 수 없으신 하나님께 영원한 영광을 돌립니다. 아멘.

 

성 니로 시나이

 

그분에 대한 간략한 소개

성 니로는 부유하고 명문가 출신이었으며, 아마도 성 캬시미르가 안티오키아에서 설교자로 활동하던 시절부터 이미 그의 청중이자 제자였을 것으로 보인다. 명문가 출신이라는 배경과 개인적인 덕목 덕분에 그는 수도의 지사 직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의 영혼이 갈망하는 바는 수도 생활에 따르는 의무와 생활 방식과는 맞지 않았다. 그래서 이미 두 자녀를 둔 아내와 상의하여 세속을 떠나, 은둔 생활 속에서 장모보다 더 성공적으로 구원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그는 아들 테오둘을 데리고 시나이 산에 정착했고, 그의 아내는 딸과 함께 이집트의 한 여성 수도원에서 거처를 마련했다. 시나이 사막에서 성 니일은 지극히 엄격하게 살았다. 그는 아들과 함께 직접 동굴을 파고, 그 안에서 살며 빵조차 먹지 않고 야생의 쓴 식물들로 연명했다. 그럼에도 그들의 시간은 기도와 성경 연구, 신에 대한 묵상, 그리고 노동으로 채워졌다. 그러나 세상을 떠났음에도 성 니일은 사람들과의 교제를 끊지 않았다. 온 세상 과 온갖 계층의 사람들이 자신의 영적 필요를 안고 그에게 찾아왔으며, 그 누구도 필요한 훈계와 교훈을 받지 못한 채 떠나지 않았다. 왕도 그에게 편지를 보내 기도를 청했고, 그는 왕에게 편지를 보내 성 금구(Zlatooust)에 대한 부당한 대우를 꾸짖었다. 성자의 다른 저술들은 주로 도덕적·금욕적 내용을 담고 있다. 그가 쓴 모든 글에서 그의 지식이 얼마나 광범위하고 깊었는지, 그리고 이 일에 대한 그의 노력이 얼마나 지칠 줄 모르는 것이었는지가 드러난다. 하나님에 대한 그의 사랑을 시험하기 위해 그에게 특별한 시련이 닥쳤다. 아라비아에서 온 야만적인 바르바리족이 시나이 산과 그 주변 지역을 습격하여 모든 것을 약탈하고, 많은 사람을 죽였으며, 다른 이들은 포로로 잡아갔다. 포로 중에는 성 니로스의 아들 테오둘도 있었다. 이 비극은 성자에게 매우 가슴 아픈 일이었으며, 그는 평안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특히 그 비극이 일어난 지 이틀이나 사흘 뒤, 야만인들이 그의 아들을 새벽의 여신인 금성에게 제물로 바치기로 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그 결정이 실제로 실행되었는지 여부가 확실하지 않았기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아버지의 마음이 오랫동안 괴로워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셨다. 곧 그는 제사가 치러지지 않았고 포로들이 기독교 국가들로 팔려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수색대는 그를 엘루즈라는 도시에서 찾아냈는데, 그곳의 주교가 다른 이들과 함께 야만인들로부터 그를 사들여 이미 교회 봉사를 준비시키고 있었으며, 그를 찾아온 아버지도 그 봉사에 참여해 달라고 간청받고 있었다. 사막 생활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들은 이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주교는 그들을 사제로 서품한 뒤, 그들이 사랑하는 시나이 산으로 떠나도록 축복해 주었고, 그들은 그곳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머물렀습니다. 성 닐은 390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시나이 사막에서 60년을 살다가 450년경에 선종했습니다. 그의 기념일은 11월 12일과 1월 13일이다. 그의 성유해는 유스티노스 2세 치세에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져 성 사도 성당에 안치되었다. 성 니로스의 저술 중 ‘그리스도교 덕행집’에 수록된 내용, 그리고 거기서 슬라브어판으로 옮겨진 내용 중에서 ‘기도에 관한 설교’와 ‘금욕에 관한 설교’가 발췌되었다. ‘기도에 관한 설교’는 우리 ‘덕행집’에도 수록하고; 반면, 수행에 관한 글 대신 “여덟 가지 악령”에 관한 글과 “두 권의 간결한 명언 모음” 및 교훈을 채택하기로 했는데, 그중 하나는 “장(章) 또는 권면”이라는 제목을 달았고, 다른 하나는 “사람을 썩어 없어질 것에서 멀어지게 하고 썩지 않는 것에 붙들어 주는 생각들”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 그러나 기도와 정욕과의 투쟁에 관해서는 존경받는 성자가 다른 저술들에서 이미 수많은 지극히 유익한 조언과 가르침을 제시해 놓았으며, 마찬가지로 그곳 곳곳에서 교훈적인 사상과 일반적인 도덕적 구조, 특히 모든 것에서 초연한 삶에 대한 내용이 풍부하게 등장하고 있기에: 이를 생각하여, 우리의 ‘선애(善愛)’에게 이러한 보물들을 박탈하는 것은 불공평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우리는 성자의 앞서 언급된 저술들에서 이를 차용하기로 하였으며, 기도와 관련된 내용은 ‘기도’ 항목 아래에, 정욕과의 투쟁에 관한 내용은 여덟 가지 정욕 각각 아래에, 일반적인 교훈에 관한 내용은 – 격언 모음 아래에 배치하였다. 우리는 이 점에서 고대인들을 본받고 있다. 왜냐하면 성 니로스의 모든 저작이 수록된 《Patrologia Graeca》(Migne, 제79권)에서, “썩어질 것에서 멀어지게 하고 썩지 않을 것에 붙들어 주는 생각들” – 1249–50쪽 – 1249–50쪽 –에, 이 사색들이 인쇄된 원고에는 “무소유”에 관한 글이나 도시 생활보다 침묵 속의 삶이 “우월하다”는 논설에서 차용한 사색 14개가 더 이어진다는 주석이 달려 있다. 이 인용문들 자체는 인쇄되지 않았으나, 이로 인해 예시의 가치는 전혀 손상되지 않는다. 이 인용문들의 출처는 각 글의 말미에, 성자의 저작 러시아어 번역본에 따른 권수와 페이지 번호를 명시하여 표시할 것이다. 인용문이 없는 글들은 앞서 언급된 것과 동일한 페이지에 실려 있다.

 

금욕적 가르침
시나이 산의 성 니로

 

1. 기도에 관하여

 

서문

당신은 불타는 열병과 같은 불순한 정욕 속에 누워 있던 나를, 신을 사랑하는 당신의 글이 닿는 대로 제때 일으켜 주셨으며, 가장 수치스러운 병으로 고통받던 나의 마음을 위로로 북돋아 주셨으니, 이는 위대한 스승이자 지도자를 복되게 본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당신의 운명은 언제나 영광스럽고 기념비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이었으니, 마치 축복받은 야곱과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라헬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리아를 얻은 뒤에도, 그녀를 위해 7년의 노역을 다한 것처럼(창세기 29:20–28), 사랑하는 이를 계속 찾아다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는 밤새도록 수고했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는 사실을 기꺼이 인정하겠노라. 그러나 네 말대로 그물을 던졌더니 수많은 물고기를 건져 올렸으니, 비록 큰 물고기는 아니었으나 백오십삼 마리나 되었다(요한복음 21:11). 그래서 그 물고기들을 사랑의 바구니에 담아 당신께 보내며, 그에 상응하는 수의 장(기도에 관한)을 엮어 당신의 명령 을 이행합니다. 나는 네게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네가 (다른 것이 아니라) 기도에 관한 장들을 원했다는 그 아름다운 뜻을 무척 기쁘게 여긴다. 게다가 단순히 그것들이 종이에 손으로 쓰여지기를 원한 것이 아니라, 사랑과 악의 없음으로 마음에 깊이 새겨지기를 원했으니 말이다. 지혜로운 시라크의 말씀(42, 25)에 “모든 것은 하나에 대항하는 하나”라고 하였으니, 이를 단지 글자 그대로만 받아들이지 말고 영으로 깨달아라. 장수가 적다고 해서 꾸짖지 마십시오. “풍족할 때나 궁핍할 때나” (빌 4,12) 아는 자로서 말입니다. 주님께서 과부의 두 레프타도 거절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다른 많은 이들의 풍성한 헌금보다 더 호의적으로 받아주셨음을 기억하며, 꾸짖지 마십시오. 더 나아가, 진실한 형제들에 대한 호의와 사랑을 간직할 줄 알며, 병든 자가 건강해지고, 침상에서 일어나 그리스도의 은혜로 걸을 수 있게 되도록 기도하십시오. 아멘.

 

153. 기도에 관한 장

1. 만일 누군가 향기로운 향을 준비하고자 한다면, 율법에 따라 “순수한 유향, 계수나무, 온익, 스타크티”를 같은 비율로 섞어야 한다(출 30:34). 이것이 바로 네 가지 미덕[70] 이다. 이 모든 미덕이 완전한 경지에 이르러 동등한 힘으로 영혼에 깃들어 있을 때, 비로소 마음은(물론 어떤 내면의 배신자에 의해) 배신당하지 않게 될 것이다.

2. 미덕으로 온전히 정화된 영혼은[71] 마음을 흔들림 없는 상태로 이끌어, (기도에서) 요구되는 태도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

3. 기도는 마음이 하나님께 드리는 대화이다. 그렇다면 마음이 뒤를 돌아보지 않고(혹은 이리저리 흩어지지 않고), 주님께로 올라가 그분과 어떠한 중재자도 없이[72] 대화할 수 있으려면 어떤 태도가 필요한가?

4. 땅 위의 타오르는 떨기나무에 가까이 가려던 모세에게, 발에서 신발을 벗기 전까지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금지되었는데(출 3. 5), – 그렇다면 모든 감각과 생각을 초월하신 분을 뵙고 그분과 대화를 나누고자 할 때, 어떻게 네가 온갖 정욕적인 생각을 떨쳐버리지 않을 수 있겠느냐?

5. 무엇보다 먼저 눈물을 얻을 수 있도록 기도하라. 울음으로 마음속에 있는 잔인함(그리스어 – “야만성”)을 누그러뜨리고, “주님께 범한 죄악”(시 31:5)을 고백함으로써 그분께 죄 사함을 얻도록 하라.

6. 눈물을 모든 간구를 들어주시는 도구로 삼으라. 네가 눈물을 흘리며 기도할 때 주님께서는 너를 인해 크게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7. 기도 중에 눈물을 쏟아낼 때, 결코 스스로를 높이 여기지 말라. 마치 네가 다른 많은 사람보다 더 높은 것처럼 말이다. 이는 네 기도가 위로부터 도움을 받아, 네가 자신의 죄를 성실히 고백하고 눈물로 주님을 달래게 하기 위함이다.

8. 그러니 정욕을 이기기 위한 수단을 정욕 자체로 변질시키지 말라. 그래야 이 은혜(즉, 눈물)를 네게 베풀어 주신 분을 더욱 화나게 하지 않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죄를 뉘우치며 눈물을 흘리다가 눈물의 목적을 잊고, 광기에 사로잡혀 타락해 버렸다(바른 길에서 벗어나거나, 정신을 잃어버렸다).

9. 인내하며 굳건히 기도하고, 세속적인 근심과 온갖 생각들을 떨쳐내라. 그것들은 너를 동요시키고 불안하게 하여, 네 기도의 열정을 흐트러뜨리려 하기 때문이다.

10. 악령들은 누군가가 마땅히 해야 할 대로 기도하는 열정과 열의를 가지고 있음을 보게 되면, (기도 중에) 마치 필요한 것처럼 보이는 어떤 생각들을 그에게 심어주곤 한다 (그리고 물러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그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키며, 마음을 그 문제를 검토하도록(문제의 경우 해결을, 사물의 경우 획득을) 부추긴다; – 그리하여 그는 찾고자 했던 것을 얻지 못하고, 분통을 터뜨리며 슬퍼한다. 그 후, (이 열성적인 기도의 수호자가) 기도에 임할 때, 그들은 그가 무엇을 생각했고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를 상기시켜, 마음이 (이전에 해결되지 않은) 그 문제를 다시 파악하도록 이끌어 기도를 헛되게 만든다.

11. 기도할 때 네 마음을 귀머거리와 벙어리처럼 만들도록 힘쓰라. 그러면 비로소 마땅히 기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12. 유혹이 닥치거나 누군가의 반박에 화가 나서, 너를 반박한 자에게 분노를 품거나 심지어 부적절한 말을 내뱉게 될 때, 그때는 기도와 기도 중에 (하나님 앞에서 양심에 따라) 네게 내려질 심판을 떠올려라. 그러면 네 안의 무질서한 움직임이 즉시 가라앉을 것이다.

13. 너를 부당하게 대했던 형제에게 보복으로 무엇을 하든지, 그 모든 것이 기도할 때 너에게 유혹이 되어(너를 혼란스럽게 할 것이다).

14. 기도는 온유와 분노 없음의 (나무에서 뻗은) 가지이다.

15. 기도는 기쁨과 감사의 표현(드러남)이다.

16. 기도는 슬픔과 낙담에 대한 치유이다.

17. “가서 네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마태복음 19,21),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라(– 16, 24), 그래야만 네가 산만함 없이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18. 찬양의 기도를 드리고자 한다면, 기도하는 동안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극심한 분노를 참아내며, 기도를 위해 인내하라.

19. 어떤 슬픔을 겪게 되더라도 인내한다면, 지혜로워질 것이며, 그 열매는 기도 중에 얻게 될 것이다.

20. 마땅히 기도하기를 원한다면, 영혼을 슬프게 하지 말고(혹은 마음에 근심을 품지 말고); 그렇지 않으면 네 행보는 헛될 것이며(혹은 네 기도의 수고는 헛될 것이다).

21. “네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네 형제와 화해하라”(마태복음 5:24)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리하고 나서 돌아와야만 방해받지 않고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원한은 기도하는 이의 주권적인 마음에 어둠을 드리우고, 그 기도를 어둠으로 둘러싸기 때문이다.

22. 슬픔(고통)과 원한을 마음에 품고, (그런 상태로) 기도하는 자들은 마치 물을 길어 구멍 난 대야에 붓는 자들과 같다.

23. 네가 인내심이 있다면, 언제나 기쁨으로 기도할 것이다.

24. 마땅히 기도할 때, 이웃에게 화를 내는 것이 옳다고 여겨질 만한 어떤 일들이 네게 닥치거나(혹은 마음에 떠오를 수 있다). (조심하라). – 이웃에 대한 분노 중 의로운 것은 전혀 없다. 그리고 찾아보면, 분노 없이도 일을 잘 해결할 수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니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분노에 휩쓸리지 않도록 하라.

25. 다른 사람을 치유하려고 생각할 때, 정작 자신은 치유되지 않은 채로 남지 않도록 주의하고, 자신의 기도가 끊기지 않게 하라.

26. 타인을 자비롭게 대하고 그들에게 화를 내지 않으면, 너 자신도 자비를 얻게 될 것이며,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에서 현명함을 드러내고 진정으로 기도하는 자들의 대열에 서게 될 것이다.

27. 분노에 대항하여 무장하면, 결코 정욕의 유혹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정욕은 분노에 먹이를 주며, 분노는 분별력 있는 눈을 흐리게 하고 기도의 태도를 해치기 때문이다.

28. 기도할 때 겉으로 드러나는 몸짓과 자세에만 국한되지 말고, 큰 경외심으로 마음을 영적인 기도의 경지로 끌어올려라.

29. 때로는 기도에 나서자마자 곧바로 잘 기도하기 시작하기도 하고, 때로는 많은 노력을 기울여도 그 소망하는 목표를 이루지 못하기도 한다. (이는 네가) 더욱 부지런히 (기도를) 구하여, 그것을 얻었을 때 도둑맞지 않고 온전하고 안전한 기도를 갖게 하려는 것이다.

30. 천사가 우리에게 다가오면,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것들(악마들)이 즉시 물러난다. 그때 마음은 큰 기쁨에 차서 올바르게 기도한다. 때로는 평소의 영적 전쟁이 치열할 때, 마음이 투쟁하며 흔들려 (하나님을 향한 묵상과 경건한 감정에) 닿지 못하기도 한다. 이는 마음이 이전에 여러 가지 정욕에 물들었기 때문이다(그것에 빠져들고 맛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열심히 찾으면 발견하게 될 것이며, 게으름 피우지 않고 밀어붙인다면 그 길이 열릴 것이다.

31. “네 소망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것들이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배운 대로 “나에게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마태복음 6:10)라고 기도하는 것이 더 낫다. 그리고 모든 일에서 그분께 그렇게 구하라. 그분은 언제나 네 영혼에게 선하고 유익한 것을 원하시지만, 너는 항상 그것을 추구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32. 나는 기도할 때 여러 번, 내게 선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며, 그 청을 고집스럽게 밀어붙여 하나님의 뜻을 무모하게 강요하곤 했지, 하나님께서 내게 유익하다고 아시는 바를 더 잘 마련해 주시도록 그분께 맡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구하던 것을) 얻은 뒤에는 큰 슬픔에 빠지곤 했는데,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더 나은 것이 이루어지기를’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그 일이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33. 하나님 외에 무엇이 복이 되겠는가? 그러니 우리와 관련된 모든 것을 그분께 맡기자. 그러면 우리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선하신 분은 분명 선한 선물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34. 하나님께 구한 것을 즉시 받지 못한다고 해서 슬퍼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인내심을 가지고 더 오랫동안 기도하며 그분 앞에 서게 하심으로써, 더 큰 은혜를 베풀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고 그분과의 교제에 휩싸이는 것보다 더 고귀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35. 산만하지 않은 기도는 가장 고귀한 지적 행위이다.

36. 기도는 마음이 하느님께로 올라가는 것이다.

37. 참된 기도를 갈망한다면,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것을 얻으라.

38. 첫째로, 정욕에서 깨끗해지기를, 둘째로, 무지와 망각에서 벗어나기를, 셋째로, 온갖 유혹과 배반에서 벗어나기를 기도하라.

39. 기도할 때 오직 진리와 나라, 즉 덕과 지식을 구하라. 그러면 그 밖의 모든 것은 “너에게 더해질 것”이다(마태복음 6:33).

40. 의롭게 기도한다는 것은 오직 자신의 정화만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천사들의 본을 따라 모든 사람의 정화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41. 네가 기도할 때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지, 아니면 인간의 칭찬을 받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혀, 이를 (선하지 않은 욕망을 겉으로는 선한 것처럼 위장하여) 기도를 길게 하는 것으로 감추며 칭찬을 얻으려 애쓰고 있는지는 잘 살펴보라.

42. 형제들과 함께 기도하든, 홀로 기도하든, 단지 관례를 따르는 데 그치지 말고, 진심 어린 마음으로 기도하도록 힘쓰라.

43. (이러한) 마음에서 우러나는 기도에는 경건함과 감동, 그리고 영혼의 아픔을 동반한 자기 성찰이 수반되며, 죄를 고백할 때는 소리 내지 않는 탄식과 함께해야 한다.

44. 기도 중에 네 마음이 딴생각에 빠진다면, 그는 수도사처럼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겉모습만 꾸미는 평신도일 뿐이다.

45. 기도할 때, 모든 힘을 다해 네 기억을 지키되, 그것이 네게 무언가를 제시하지 못하게 하라. 그러나 온갖 방법으로 이성적인 경배(누구에게, 무엇을 위해 경배하는지 의식하며)로 자신을 이끌어 올려라. 왜냐하면 기도 중에 마음은 대개 기억에 의해 쉽게 빼앗기기 때문이다(기억은 사물, 인물, 사건들을 떠올리게 하여, 그것들로 인해 기도로부터 마음의 주의를 돌리게 한다).

46. 기억은 기도나 묵상 중에 옛 일들을 떠올리게 하거나, 새로운 근심거리나, 너를 모욕한 사람을 생각나게 한다.

47. 악마는 기도하는 사람을 지독히 시기하며, 그의 그러한 뜻을 방해하기 위해 온갖 교활한 수단을 동원한다; 그러므로 기억을 통해 온갖 사물에 대한 생각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키고, 육체를 통해 모든 정욕을 자극하여, 그 아름다운 흐름(즉, 기도의 수고)과 하나님께로 향하는 상승(주의 집중)을 어떻게든 방해하려 한다.

48. 만악한 악마가 온갖 교활한 수단을 동원하여도 성실한 기도자의 기도를 막지 못할 때, 그때는 (공격을) 다소 누그러뜨리지만, 대신 그가 기도를 마친 후에 그에게 복수한다. 왜냐하면, 그를 분노로 불타오르게 하여 기도를 통해 얻은 그 아름다운 심경을 파괴하거나,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달콤함(감각적 쾌락을 맛보고 싶은 충동)을 자극하여, 그의 정신을 조롱하기 때문이다.

49. 마땅히 기도한 후에는, 마땅치 않은 일을 예상하고, 용기 있게 서서 네 열매를 지키라. 이것이 바로 네가 처음부터 맡겨진 사명이다. 즉, “일하고 지키라”(창세기 2:15)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땅히 기도한 후, 수고로 얻은 것을 무방비 상태로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기도에서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할 것이다.

50. 우리와 불결한 영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모든 싸움은, 영적인 기도 때문이 아니라면 다른 어떤 이유에서도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기도는 그들에게 매우 대립적이고 견딜 수 없는 것이지만, 우리에게는 구원을 주고 유익하기 때문이다.

51. 악마들이 왜 자신들의 영향력으로 우리 안에 탐식, 음행, 탐욕, 분노, 원한, 그리고 그 밖의 정욕들을 일으키고자 하는가? 그로 인해 마음이 이러한 정욕들로 인해 무뎌져 마땅히 기도해야 할 수 없게 하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내면의 이성적이지 않은 부분이 일으키는 정욕들이 작용하기 시작하면(움직이기 시작하면), 마음이 이성적으로 작용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52. 우리는 미덕을 실천하는 것은 그것이 본성에 의해 요구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본성을 실현하신 말씀(주님)을 위해 본성에 순종한다. 이 말씀은 대개 기도하는 상태에서 우리에게 분명하게 드러나며(우리 의식에 선명하게 각인된다).

53. 기도의 상태란 무정(無情)한 마음가짐으로, 지극한 사랑으로 지혜롭고 영적인 마음을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54. 진정으로 기도하고자 하는 자는 분노와 정욕을 다스려야 할 뿐만 아니라, 온갖 정욕적인 생각으로부터도 멀어져야 한다.

55.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모든 정욕적인 생각을 멀리하며, 항상 그분을 아버지처럼 대하며 그분과 대화한다.

56. 무정(無情)을 얻은 사람이라고 해서 누구나 이미 진정으로 기도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여전히 단순한 생각들(정욕적인 움직임 없이 사물에 대한)에 사로잡혀 있을 수 있고, 그 이야기들(어쩌면 그 장면들이나 다양한 조합들)에 정신이 팔려 있을 수 있으며, –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정욕적인 움직임은 없지만, 마음이 공상에 잠겨 있다).

57. 그러나 마음이 사물에 대한 단순한 생각에 머물러 있다고 해서, 그것이 이미 기도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뜻은 아니다. 왜냐하면 마음은 그 사물들에 대한 (철학적) 사색에 몰두하여, 그 사물들의 인과 관계에 깊이 빠져들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이 모든 것이 추상적인 사고이긴 하지만, 그것들이 사물에 대한 사색인 만큼 마음속에 그 형상을 각인시키며, 마음을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게 한다. (정욕은 움직이지 않지만, 마음은 기도하기보다 철학에 몰두한다: 학자들의 상태).

58. 마음이 물질적 본성에 대한 사색보다 더 높은 수준에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이미 하나님의 참된 자리를 보았다는 뜻은 아니다. 왜냐하면 마음은 (천사 세계의) 영적 피조물들에 대한 인식에 몰두할 수 있으며, 그것들로 가득 차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그들에 대한 다양한 생각과 상상으로 가득 차 있을 수 있다).

59. 마땅히 기도하고 싶다면, 기도하는 자에게 기도를 주시는 하나님이 필요하다. 기도 중에 그분을 부르며 말하라.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주의 나라가 임하소서” (마태복음 6:9, 10), 즉 성령과 주의 독생자이신 아들을 부르라. 주님께서 친히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경배하는 것이 마땅하다”(요한복음 4:24)고 말씀하시며 그렇게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60. 영과 진리 안에서 기도하는 자는 피조물로부터 창조주를 찬양할 생각을 빌려오는 것이 아니라, 그분 자신으로부터 그분을 찬양할 묵상을 얻어낸다.

61. 네가 신학자라면 진실하게 기도할 것이며, 진실하게 기도한다면 너는 신학자이다.

62. 네 마음이 하느님을 향한 열망으로 타오르며, 조금씩 육신을 벗어나고 감각적 인상이나 기억에서 비롯된 모든 생각에서 멀어지면서도, 동시에 경외심과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때는 네 마음이 기도의 경지에 가까워졌다고 여겨라.

63. 성령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시어, 우리가 아직 깨끗하지 않을 때에도 우리에게 오신다. 그리고 우리 마음이 그분께 진심으로 기도하고 있음을 발견하기만 하면, 그 마음 위에 임하셔서 그 주위를 둘러싼 온갖 생각과 상상의 무리를 흩어지게 하시며(그것들이 사라지게 하시고), 이를 통해 그 마음을 영적 기도를 갈망하도록 이끄신다.

64. 다른 영들(선한 영과 악한 영)은 육체에 영향을 미쳐 마음에 생각과 관념, 상상력을 불어넣지만, 주님께서는 그와 정반대로 행하십니다. 곧 마음 그 자체를 감싸 안으시며,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그 마음에 심어 주시고, 마음을 통해 육체의 방종을 다스리십니다.

65. 참된 기도를 사랑하면서도 분노하거나 원한을 품는 자는 모든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그는 선명하게 보고자 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눈을 먼지로 가리는 사람과 같기 때문이다.

66. 마땅히 기도하기를 원한다면, 기도에 방해가 되는(적대적인) 어떤 행동도 하지 말라. 그래야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셔서 네게 임하실 것이다.

67. 기도할 때, 신성께 어떤 형상도 부여하지 말고, 네 마음이 어떤 형상으로 변모하거나(혹은 스스로를 어떤 형상으로 상상하거나, 네 마음에 어떤 형상이 각인되도록) 내버려 두지 마라. 그러나 비물질적인 존재에게 비물질적인 방식으로 다가서라. 그리하면 그분과 하나가 될 것이다.

68. 원수의 올가미를 조심하라. 왜냐하면 순수하고 평온하게 기도할 때, 갑자기 낯설고 이질적인 어떤 형상이 네 앞에 나타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원수들이 너를 자만심에 빠뜨리기 위해, 마치 신성(神性)이 (네게 나타난)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고, 나아가 갑자기 네게 나타난 이 형상과 마찬가지로 신성도 양적으로(공간을 차지하고, 길이를 가지며, 부분을 지닌다) 존재한다고 생각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신성은 양도, 형태도 가지고 있지 않다.

69. 시기심 많은 악마가 기억을 움직일 틈을 얻지 못하면, 그때는 피와 체액에 작용하여 이를 통해 마음에 낯선 무언가에 대한 상상을 일으키고, 그 상상으로 마음을 채우려 한다; 마음은 이미 생각 속에서 맴도는 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쉽게 그에 휩쓸리게 되고, 비물질적이고 형체 없는 깨달음에 다다르는 줄로 착각하며, 빛 대신 연기를 받아들이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70. 기도하는 동안 마음을 생각들로부터 지키며 평화로운 상태에 머물도록 노력함으로써, 네 자신을 경계하라. 그래야 “무지한 자들에게 동정하시는 분”(히브리서 5:2)께서 네게 오셔서, 네가 기도의 지극히 영광스러운 선물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실 것이다.

71. 물질적인 일에 얽히고 끊임없이 걱정하며 동요하는 상태에서는 순수하게 기도할 수 없다. 기도는 (모든 딴생각을) 내려놓는 것이기 때문이다.

72. 묶인 자는 도망칠 수 없듯이, 어떤 정욕에 사로잡힌 마음도 영적 기도의 장소를 볼 수 없다. 게다가 그 마음은 정욕적인 생각에 휘둘리며 이리저리 휩쓸려, 흔들리지 않는 자리를 잡지 못한다.

73. 마음이 마침내 순수하고 정욕 없이 기도하기 시작하면, 그때 악마들은 더 이상 왼쪽에서가 아니라 오른쪽에서 그를 공격한다. 마치 하나님의 영광인 듯한 현상을 보여주거나, 감각에 즐거운 어떤 형상적인 환상을 제시하여, 마치 그가 이미 기도의 목적을 완전히 달성한 것처럼 보이게 한다. 이는 그 일을 잘 아는 한 사람(에바그리우스)이 말했듯이, 허영심이라는 정욕과, 악마가 뇌의 특정 부위를 건드리는 것, 그리고 그 부위의 신경에 일어나는 동요(혹은 염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74. 나는 악마가 앞서 말한 부위를 마음대로 건드림으로써 마음 주위의 빛을 변형시킨다고 생각한다. 이로 인해 허영심이 생각을 자극하여, 마음이 경솔하게 신성하고 본질적인 지식을 자신에게 귀속시키도록 부추긴다. 육신의 불결한 정욕에 시달리지 않고 순수하게 기도에 전념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여기에 어떤 적대적인 작용이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며, – 그래서 그는 이것이 분명 신성한 현상이라고 확신하지만, 실은 악마가 극도의 교활함을 발휘하여, 앞서 말한 대로 뇌를 통해 마음과 결합된 빛을 변형시키고 그 자체를 형상화하기(그에게 형상을 부여하거나, 이러저러한 것을 상상하게 만듦)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75.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면, 한마디로 우리 안의 적의 작용을 멈추게 하고, 마음의 빛이 속임수 없이 작용하도록 이끈다.

76. 요한계시록에서 천사가 “성도들의 기도에” 향을 바친다는 말씀(계 8:3)은, 제 생각에, 천사를 통해 작용하여 참으로 기도하는 법을 알려주는 이 은총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리하여 마음은 마침내 생각이 어지럽지 않고, 낙담이나 소심함 없이 기도에 전념하게 된다.

77. 향이 담긴 향로는 거기서 말하듯이 “성도들의 기도”이며, 이를 “이십사 장로”가 드렸습니다(계 5,8). 향로 아래에는 하나님과의 교제, 즉 그분을 향한 완전하고 영적인 사랑을 의미해야 하며, 그 안에서 기도는 영과 진리로 이루어집니다.

78. 기도할 때 죄를 인해 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항상 그분 안에 머물러야 할 의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네가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살펴보라. 그러면 가장 뜨거운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

79. 진실로 그러하다. 자신의 처지(가난함과 하찮음)를 깨닫고, 이사야처럼 “부정한 자요, 입술이 부정한 자”로서 그러한 백성, 즉 (하나님의 적들인, 부정한 세력이나 생각들) 가운데 살면서도, 감히 사바오트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이다(사 6:5).

80. 진실로 기도한다면, 많은 면에서 완전한 확증을 얻게 될 것이며, 천사들이 다니엘에게 그랬던 것처럼 네 곁에 모여, 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그 원인을 깨닫게 해 줄 것이다.

81. 천사들이 우리를 기도로 이끌어 주고, 기도를 드리는 동안 우리 곁에 서서 기뻐하며 우리를 위해 함께 기도하고 있음을 알라. 그러므로 우리가 부주의하여 불순한 생각을 품는다면, 그로 인해 천사들을 지극히 노하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우리를 위해 그토록 수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스스로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려 하지 않고, 하나님께 드리는 섬김을 소홀히 하며, 그들의 하나님이시자 주님이신 분을 떠나 (생각 속에서) 부정한 악마들과 대화를 나누기 때문이다.

82. 평화롭고 평온하게 기도하며, 이성적이고 온화한 마음으로 찬송하라. 그러면 너는 높이 날아오르는 독수리 새끼와 같을 것이다.

83. 시편을 노래하는 것은 정욕을 잠재우고 육체의 방종한 충동을 누그러뜨리며, 기도는 마음을 그 본성에 맞는 지혜로운 행위에 집중하게 한다.

84. 기도는 지성의 품위에 걸맞은 행위이며, 더 정확히 말하면 지성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이다.

85. 시편 찬송은 다채로운 지혜의 모범이며, 기도는 비물질적 지식의 서막이다.

86. 통찰은 아름다운 일이며, 이는 기도를 돕고, 신성한 통찰을 관조하도록 마음의 사고력을 일깨워 준다.

87. 만일 네가 아직 기도나 시편 찬양의 은사를 받지 못했다면, 끊임없이 구하라. 그러면 받게 될 것이다.

88. “주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하셨다”(루카 18,1). 그러므로 아직 받지 못했다고 해서 슬퍼하거나 낙심하지 마라. 나중에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이 비유에 다음과 같은 말씀을 덧붙이셨다.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사람을 부끄러워하지도 않지만, 이 과부가 나를 괴롭히니 , 내가 그녀를 위해 복수해 주리라” (– 5).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밤낮으로 부르짖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곧 보복하실 것”이라 하셨다 (– 7). 그러니 근면한 인내로 기도에 전념하며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라.

89. 네게 관련된 일이 네가 생각하는 대로(더 낫다고 여기는 대로) 되기를 바라지 말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되기를 바라라. 그러면 네 기도 속에서 평온하고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90. 비록 겉보기에는 이미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음탕의 악마를 조심하라. 그는 매우 유혹적이고 교활하여, 네가 경건하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을 때조차도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네 맑은 정신의 열망을 압도하고, 그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려 애쓰기 때문이다.

91. 기도에 열중한다면, 악마들의 유혹에 대비하고 그들의 채찍질을 인내로 견뎌내라. 그들은 마치 야수처럼 너를 덮쳐 네 온 몸을 상처 입힐 것이기 때문이다.

92. 노련한 투사처럼 마음을 단단히 먹으라. 비록 갑자기 유령을 보게 되더라도 흔들리지 말고, 비록 칼이 너를 향하거나 불꽃이 네 얼굴을 향해 쏠지라도 당황하지 말고, 비록 흉측하고 교활한 형상이 네 앞에 나타나더라도 낙담하지(겁먹지) 말라; 그러나 굳건히 서서 선한 믿음을 고백하며, 담대하게 네 원수들을 바라보아라.

93. 슬픈 일을 견디는 자는 기쁜 일도 누릴 자격이 있으며, 불쾌한 일을 견디는 자는 즐거운 일에서도 몫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94. 보라, 교활한 악령들이 어떤 환상으로라도 너를 현혹하지 못하게 하라.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마음을 가다듬고 기도에 전념하며, 하나님께 간구하라. 만일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깨우침을 주기 위함)이라면, 그분께서 친히 너를 깨우쳐 주시기를, 그렇지 않다면 그 유혹자를 속히 네게서 쫓아내 주시기를. 그리고 주저하지 마라. 네가 간절한 기도로 하나님께 달려가면, 이 개들은 버티지 못하고 즉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능력에 맞아 네게서 멀리 도망칠 것이기 때문이다.

95. 너는 악마들의 다음과 같은 교활한 계략도 알아야 한다. 때때로 그들은 무리를 지어 움직인다. 어떤 자들은 유혹을 가지고 온다. 그리고 네가 도움을 구할 때, 다른 자들이 천사의 모습으로 들어와 첫 번째 자들을 쫓아내는데, 이는 네가 그들이 진짜 천사라고 믿게 하여, 네가 그 자격을 얻었다고 자만하게 만들기 위함이다.

96. 가능한 한 겸손하고 용감하게 행동하도록 노력하라. 그러면 악마들의 공격이 네 영혼을 해치지 못할 것이며, 그들의 채찍이 네 몸에 닿지 않을 것이다. “주님께서” “네게 관한 계명을 그분의 천사들에게” “너를 지키게 하셨으니”(시편 90:10, 11); 그리하여 그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모든 원수의 공격을 너에게서 물리칠 것이다.

97. 순수한 기도를 지키려 애쓰는 자는 악마들로부터 소음과 발소리와 비명과 욕설을 듣게 되겠지만, 생각에 흔들리지 않고 그들에게 마음을 내주지 않으며, 하나님께 “내가 악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라”(시 22:4)와 같은 말을 할 것이다.

98. 그러한 유혹이 닥칠 때에는 끊임없이 짧지만 간절한 기도를 드리라.

99. 만일 악마들이 갑자기 공중에 나타나 너를 놀라게 하고 네 정신을 빼앗겠다고 위협하더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런 위협을 전혀 신경 쓰지 마라. 이는 그들이 너를 시험하여, 네가 그들을 무엇으로 여기는지, 아니면 이미 완전히 경멸하고 있는지 알아보려는 것이다.

100. 전능하신 하나님, 창조주이자 섭리자 앞에 기도하며 섰다면, 어찌하여 그분의 극복할 수 없는 두려움은 제쳐두고 파리와 모기를 두려워하며 그분 앞에 그렇게 무모하게 서 있는가? 혹시 선지자가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라”(신명기 10:20) 말한 것과, 또 “모든 이가 그분을 경외하며 그분의 위엄 앞에서 떨고 있다”는 말 등(역대하 36장, 마나세아의 기도)을 듣지 못했는가?

101. 빵이 육신의 양식이 되고, 덕이 영혼의 양식이 되는 것처럼, 영적인 기도는 마음의 양식이다.

102. 성스러운 기도처에서 바리새인처럼 기도하지 말고 세리처럼 기도하여, 너도 주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도록 하라.

103. 네 기도가 (하나님 앞에서) 가증스러운 것이 되어 네가 세운 것을 무너뜨리지 않도록, 기도할 때 누구를 향해 원망하지 않도록 힘쓰라.

104. “열 타란트”를 빚진 자가 너에게 가르쳐 주기를, 네가 네 빚진 자에게 (빚을) 탕감해 주지 않으면, 너 자신도 (네 빚을) 탕감받지 못할 것임을; 이는 “그를 고문자에게 넘겨주리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마태복음 18:34).

105. (하나님께) 기도하는 동안 육신의 욕구를 제쳐 두어라. 그래야 벼룩과 모기, 파리의 물림이 기도를 통해 얻는 가장 큰 유익을 빼앗지 못할 것이다.

106.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어떤 성자가 기도하러 나섰을 때, 마귀가 그토록 심하게 대적하여, 그가 두 손을 들어 올리자마자 마귀는 사자로 변신하여 앞발 을 위로 치켜들고, 수행자의 옆구리에 발톱을 박은 채 그가 손을 내릴 때까지 물러서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평소의 기도를 다 마치기 전까지는 결코 두 손을 내리지 않았다.

107. 우리가 알고 있듯이, 해자 속에서 침묵을 지키던 ‘작은 요한’, 혹은 더 정확히 말해 가장 위대한 수도사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는 용의 모습을 한 악마가 그를 감싸고 그의 살을 갉아먹으며 그의 얼굴에 토해낼 때에도, 끊임없이 하나님과 영적인 교감을 유지했다.

108. 너는 분명 타베니시오 수도사들의 행적을 읽어보았을 텐데, 거기에는 아바 테오도르가 형제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있을 때 두 마리의 두더지가 그의 발로 기어왔으나, 그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발을 마치 아치처럼 굽혀 두더지들이 그 아래로 지나가게 한 뒤, 말씀을 끝까지 이어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후에야 형제들에게 그 일화를 들려주며 그 도마뱀들을 보여주었다.

109. 우리는 또 다른 영적 형제에 대한 이야기도 읽었는데, 그가 기도할 때 한 독사(에히드나)가 기어와 그의 발을 스쳤으나, 그는 평소처럼 기도를 마친 후에야 비로소 손을 내렸다. 그리고 자기 자신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한 이 사람은 아무런 해를 입지 않았다.

110. 기도할 때 마음을 산만하게 하지 말고, 육체와 영혼을 떨쳐 버리고, 영으로 살아가라.

111. 또 다른 어떤 성자, 즉 광야에서 침묵하며 기도에 전념하던 굳건한 기도자에게 악마들이 나타나 두 주일 동안 그를 공처럼 던졌다가 다시 받아내며 놀았으나, 그의 마음을 불타는 기도에서 조금도 빗나가게 할 수는 없었다.

112. 또 다른 하나님을 사랑하는 수도사가 광야를 걸으며 영적인 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 두 천사가 나타나 그를 가운데에 두고 함께 걸었다. 그러나 그는 더 나은 것을 잃지 않기 위해 단 한 순간도 그들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으니, 사도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다. “천사도, 권세도, 능력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느니라”(롬 8:38, 39).

113. 수도자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얼굴을 뵙기를” 갈망하며(마태복음 18,10) 기도를 통해 천사와 동등한 존재가 된다.

114. 기도 중에 어떤 형상이나 모습을 보기를 결코 원하거나 찾지 말라.

115. 천사나 권세나 그리스도를 육안으로 보고자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늑대를 목자로 착각하고 원수인 악마들에게 경배함으로써 정신을 잃게 될까 두려워하라.

116. 마음이 미혹되는 시작은 허영심인데, 이 허영심에 이끌린 마음은 신성을 어떤 형상이나 모습으로 묘사하려 든다.

117. 나는 초심자들에게도 말했던 바를 다시 말하리라. 기도 중에 완전한 침묵을 지키는 마음이 복되도다.

118. 산만함 없이 기도하며,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점점 더 커져 가는 마음을 가진 이는 복이 있다.

119. 기도 중에 물질적이지 않고 탐욕이 없는 마음은 복이 있다.

120. 기도 중에 모든 것에 대해 완전한 무감각을 유지하는 마음은 복되도다.

121. 모든 사람을 마치 하나님 다음으로 신과 같이 공경하는 수도사는 복이 있다.

122. 모든 이의 구원과 번영을 마치 자신의 일처럼 여기는 수도사는 복되도다.

123. 자신을 모든 이의 찌꺼기로 여기는 수도사는 복이 있다.

124. 모든 이로부터 떨어져 있으면서도 모든 이와 하나됨을 이루는 이가 바로 수도사이다.

125. 모든 이와 함께 존재한다고 여기며, 각 사람 안에서 자기 자신을 보는 이가 바로 수도사이다.

126. 항상 자신의 모든 첫 생각을 하느님께 바치는 이가 기도를 드리는 자이다.

127. 기도를 간절히 원하는 수도사로서, 온갖 거짓말과 맹세를 피하라. 그렇지 않으면 네게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헛되이 취하게 될 것이다.

128. 영으로 기도하기를 원한다면, 육신으로부터 아무것도 빌려오지 마라. 그러면 기도할 때 네 앞에 드리워지는 어둠의 구름이 없을 것이다.

129. 육신의 필요를 하느님께 맡기라. 그러면 네가 영적인 필요도 그분께 맡기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질 것이다.

130. 만일 약속을 받을 자격이 주어진다면, 너는 다스리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이를 생각하며, 현재의 궁핍함을 기꺼이 견뎌내야 하지 않겠는가?

131. 가난과 (삶의) 슬픔을 거부하지 마라. 그것들은 가벼운 기도를 위한 도구(날개)이니.

132. 육체적 미덕이 네게 영적 미덕의 담보가 되고, 영적 미덕이 영적 지식의 담보가 되며, 이 모든 것이 비물질적이면서도 실재하는 깨달음의 담보가 되게 하라.

133. 어떤 생각을 대적하여 기도하다가, 그 생각이 금세 쉽게 가라앉는 것을 발견한다면, 그것이 무엇 때문인지 잘 살펴보아 매복에 빠지지 않도록 하고, 속아 넘어가 스스로를 배신하는 자가 되지 않도록 하라.

134. 때로는 악마들이 네게 어떤 생각을 심어 놓고는, 정작 그 생각에 맞서 기도하고 저항하도록 부추긴 뒤, 곧바로 도망치는 경우가 있다. 이는 네가 이미 그 생각들을 이기고 악마들을 위협하기 시작했다고 착각하게 하여, 미혹에 빠지게 하려는 것이다.

135. 어떤 정욕이나 너를 괴롭히는 악마를 대적하여 기도할 때, 시편 기자의 말씀을 떠올려라. “내가 나의 원수들을 쫓아내어 추격하리니, 그들이 다 소멸될 때까지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내가 그들을 모욕하리니, 그들이 일어설 수 없이 내 발 아래 쓰러지리라” 등등(시 17, 38, 39). 그러나 적시에 이 말씀을 되새기며, 겸손한 지혜로 대적자들에 맞서 무장하라.

136. 먼저 피를 흘릴 정도로 싸우지 않고서는 덕을 얻으려 해서는 안 된다. 신성한 사도의 말씀에 따르면, 흠 없이 보존되기 위해 죽을 때까지 죄에 맞서 싸워야 한다(히브리서 12, 4).

137. 때로는 한 사람에게 유익을 베풀었다가 (적의 계략으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서 해를 입기도 한다. 즉, 허위 비난에 직면하여 부적절한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함으로써, 선하게 모은 것을 악하게 낭비해 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활한 악마들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스스로를 현명하게 경계해야 한다.

138. 악령들이 너를 향해 덤비는 공격을 받을 때, 그들에게 노예가 되지 않도록 온갖 방법을 다해 주의하라.

139. 밤에는 교활한 악마들이 직접 영적 스승을 혼란스럽게 하려 들고, 낮에는 사람들을 통해 그를 둘러싸며, 그들에게서 비롯된 불쾌한 우연, 중상모략, 그리고 재앙들로 괴롭힌다.

140. 이 천 조각들을 참아내는 것을 마다하지 마라. 그들이 때리고 발로 짓밟고, 잡아당기고 다듬어도 좋다. 그러나 이를 통해 네 옷은 더욱 빛나게 될 것이다.

141. 네가 정욕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네 마음이 여전히 미덕과 진리에 저항을 드러내는 한, 그때까지는 네 가슴속에서 향기로운 향(즉, 순수하고 따뜻한 기도)을 얻지 못할 것이다.

142. (마땅히) 기도하기를 원하느냐? 이 세상에서 떠나 하늘에 항상 거처를 두라. 단지 말로만 그치지 말고, 천사 같은 행실과 지극히 신성한 이해력으로 그렇게 하라.

143. 만일 고난 중에(강한 유혹에 시달리거나 넘어질 위험에 처해 있을 때) 심판자께서 얼마나 무섭고 용서하지 않으시는 분인지 떠올린다면, 너는 아직 “두려움으로 주님을 섬기고 경외심으로 그분을 기뻐하라”(시 2:11)는 것을 배우지 못한 것이다. 영적인 기쁨과 위로가 있을 때일수록 더욱 경외와 경건함으로 그분을 섬겨야 함을 알아두라.

144. 완전한 회개를 이루기 전까지 슬픔으로 자신의 죄와 그 죄에 대한 영원한 불꽃 속의 의로운 심판을 끊임없이 기억하는 사람이야말로 지혜로운 사람이다.

145. 죄와 하나님을 거스르는 행위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뻔뻔스럽게도 신성한 것들을 깨닫고자 하고 비물질적인 기도에 손을 뻗으려는 자는, 사도의 금지를 받아들여야 한다. 즉, 머리를 드러내고 가리지 않은 채 기도하는 것은 그에게 안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사도의 말을 빌리자면, 그러한 영혼은 곁에 서 있는 자들을 위해 “머리에 천사가 있어야 한다”(고린도전서 11:10)는 것을 명심하고, 수치심을 품으며 겸손한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

146. 정오의 가장 강한 햇빛 아래서 오랫동안 태양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것이 눈이 아픈 사람에게 이로울 수 없는 것처럼, 정욕에 사로잡히고 불결한 마음에게는 영과 진리 안에서 끔찍하고 초자연적인 기도를 상상하는 것이 이로울 수 없다. 오히려 신성은 그에게 분노를 일으키실 것이다.

147.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으시고 편파적이지 않으신 분이, 제단에 예물을 들고 온 자를 그가 자신에게 원한을 품은 이웃과 화해하기 전까지는 받아들이지 않으신다면(마태복음 5:23), 마음의 제단에서 하나님께 기쁜 향을 올리기 위해서는 얼마나 스스로를 잘 지키고 분별력을 가져야 하는지 보라.

148. 말에 탐닉하지 말고, 명성에 탐닉하지도 말라. 그렇지 않으면, 이미 “등”이 아니라 네 얼굴 위에서 “죄인들이 짓는 일”이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시 128:3). 그리고 기도할 때 그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어, 그들에게 이끌리고 유혹되어 헛된 생각에 빠지게 될 것이다.

149. 기도를 추구하는 주의력은 기도를 얻게 될 것이다. 주의력 뒤에는 그보다 더 나은 것이 따르는 것이 아니라, 바로 기도이며, 이 기도에 대해 온갖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

150. 시력이 모든 감각 중에서 가장 뛰어나듯이, 기도 또한 모든 미덕 중에서 가장 신성한 것이다.

151. 기도의 가치는 양뿐만 아니라 질에 있다. 이는 “기도하러 교회에 들어간 자들”(눅 18:10)과 “기도할 때 헛된 말을 반복하지 말라”는 말씀(마 6:7) 등에서 드러난다.

152. 네가 기도에 어울리는 몸가짐에만 주의를 기울이고, 네 마음이 성막의 겉모습의 아름다움에만 신경을 쓰고 있는 한(기도의 다른 외적 요소들에 대해서는… 제44장 참조), 그때까지는(알아두라) 네가 아직 기도의 장소를 보지 못한 것이며, 기도의 복된 길은 너에게서 아직 멀리 떨어져 있음을.

153. 기도 중에 서서 그 어떤 다른 기쁨보다도 더 높은 경지에 이르게 될 때, 그때 비로소 (알아두라) 네가 참으로 기도를 얻게 된 것이다.[73]

154. 기도와 성경 읽기는 아름답다. 그것들은 헛된 생각의 방황을 멈추게 하며, 마땅치 않은 곳에 맴도는 생각을 다스리고, 이 아름다운 활동에 조금도 산만해지지 않도록 유익하게 마음을 붙들어 준다(1, 16).

155. 기도는 우리를 하나님과의 대화에 준비시키고, 이를 오랫동안 실천함으로써 그분과의 교제로 이끈다. 그분은 하찮은 사람들조차 사랑으로 받아들이시며, 그들 안에 머무는 사랑이 그들에게 담대함을 주는 한, 그들과의 친밀한 교제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 (1, 17).

156. 기도는 마음을 감각적인 것에 대한 온갖 생각에서 벗어나게 하고, 모든 존재 위에 계신 하나님 자신께로 이끌어, 그분과 대화를 나누고 그분께 담대하게 원하는 모든 것을 구하게 하며; 그리하여 사람은 마치 이미 하나님과 교제했던 것처럼, 그리고 곧 다시 그 교제를 준비하며, 순결함 속에서 삶을 살아가게 한다(1, 19).

157. 바울은 “기도에 힘쓰라”(롬 12:12) 가르치며, 기도에 지속적으로 머무름으로써 그 습관을 확립하도록 한다(골 4:2; 엡 6:18). 또한 그는 “어디에서나 기도하라”(딤전 2:8)고 명하여, 게으른 자 중 누구도 기도하는 성전에서 멀리 떨어져 산다는 이유로 변명할 수 없게 한다. 어떤 장소든 기도하기에 적합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깨끗한 마음과 의로운 행실로 그분을 부르는 자들을 받아들이시며, 그들의 태도를 보시고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비록 우리가 보기에 그분을 부르는 그 장소가 특별할 것이 없더라도 말입니다(1. 20).

158. 때로는 기도회에서 시편을 빠르게 읽어야 할 때도 있고, 때로는 시편을 노래하는 것을 우선시해야 할 때도 있다. 우리는 행동 방식을 바꿔야 하는데, 이는 때로는 낙담이 영혼을 감싸게 하여 빨리 읽도록 부추기고, 때로는 웅장하고 감미로운 찬송을 부르게 하는 원수들의 계략에 대항하기 위함이다(1, 234).

159. 네 마음에 원수의 생각이 닥칠 때, 이러저러한 기도를 구하지 말고, 눈물의 칼을 갈아 원수를 향해 겨누어라. 그처럼 강력한 무장을 하고 원수를 맞서면, 우리는 그를 더 빨리 우리 곁에서 물러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160. 수공예에 정진하는 것을 좋아하되, 기도에 더 힘쓰라. 왜냐하면 전자는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후자는 끊임없이 그 행위의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기도의 의무를 온전히 다할 때까지는 기도를 중단하지 말고, 이제 일을 시작해야 할 때라는 생각에 귀를 기울이지 마라. 마찬가지로, 일을 하고 있을 때에도 일에 지나치게 몰두하여 서두르다가 마음을 동요시키거나 기도하기에 부적합한 상태로 만들지 않도록 하라.

161.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빼앗기고 그분을 기억하는 일에서 멀어진 마음은, 외적인 감각을 통해서도 무심코 죄를 짓는다. 왜냐하면 귀도 혀도 더 이상 그러한 죄를 부추기는 역할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내면에서 자기 수양에 대한 헌신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1, 244).

162. 때로는 순수한 기도를 드리고자 애쓰지만 할 수 없는 경우가 있고, 또 때로는 스스로를 강요하지 않는데도 영혼이 순수한 기도 속에 머무르는 경우가 있다. 전자는 우리의 연약함에서 비롯된 것이요, 후자는 위로부터 오는 은혜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를 통해 우리에게 영혼의 순결을 추구하도록 부르시며, 동시에 기도할 때 순수하게 기도한다고 해서 이를 자신의 공로로 돌리지 말고, 이를 베푸시는 분의 선물로 인정하라고 가르치시는 것이다. “우리가 마땅히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알지 못하나니”(롬 8:26). 기도를 순수하게 하려고 애쓰지만 할 수 없어 마음이 어두워질 때, 눈물로 뺨을 적시며 하나님께 간구하여, 싸움의 밤이 걷히고 영혼 속에 빛이 비치기를 빌어야 한다(1, 264).

163. 육신의 정욕을 떠올리는 것은 마음을 뒤흔들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겉으로는 기도하는 듯 보이는 마음조차도 추악한 상상들로 더럽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기도 속에 머물며, 마음을 하나님과의 대화에 단련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과연 그런가? – 종종 기도의 말씀에서 정신이 딴 데로 쏠려, 우리를 옴세게 하는 생각들을 좇아가며, 그것들을 거부하지도 않고 슬퍼하지도 않는다. – 이는 부적절한 것을 심어주는 생각들에 대해 의지가 동의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징후일 것이다. 겉모습은 기도하는 듯 보이지만 –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을 보는 이들에게는 기도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지만 – 마음속으로는 즐거운 일을 상상하거나, 친구들과 즐겁게 대화를 나누거나, 분노로 적들을 비방하거나, 손님들과 잔치를 벌이거나, 친척들을 위해 집을 짓거나, 나무를 심거나, 여행하고, 무역을 하고, 강제로 성직에 끌려가기도 하며, 우리에게 맡겨진 교회의 일을 큰 신중함으로 처리하고, 이 모든 것의 대부분을 마음속으로 짚어보며, 생각이 뭘 속삭이든, 정욕이 우리 마음을 그쪽으로 이끌고자 하는 대로 따르고 있다(– 2, 129–130).

164. 기도는 마음이 온갖 생각으로부터 깨끗해야 하며, 비록 그것이 존경받을 만한 일이라 할지라도 기도와 무관한 것은 아무것도 마음속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러나 마치 하나님께 영감을 받은 사람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그분 한 분과만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2, 131).

165. 수공예와 기도를 번갈아 가며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수고를 통해 육체를 다스리고, 육체의 무질서한 욕구를 절제된 상태로 이끌며, 육체와 함께 수고하다가 마침내 안식을 갈망하는 영혼을, 기도가 더 쉬운 일임을 깨닫게 하여, 열정적이고 활기찬 힘으로 기도에 이르게 한다. 이는 그녀가 일을 바꾸고 한 일에서 다른 일로 넘어갈 때 위안을 느끼지만, 오랫동안 똑같은 일만 하고 있으면 지루해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단조로움을 싫어하고, 다양한 활동을 기뻐한다. 한 일을 그만두면 마치 모든 피로를 떨쳐내는 듯한 기분이 들어, 마치 방금 일을 시작한 것처럼 신선한 기력을 가지고 다른 일에 착수하게 된다[74] – (2, 231. 232).

166. 일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무위(無爲)로 인해 정욕을 키우고, 욕망이 자신과 친숙한 대상들을 향해 쏠리도록 내버려 둔다. 이는 특히 기도 중에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데; 그때는 마음의 주의력이 온전히 마음이 몰두하는 것에 사로잡히게 되어, 하나님과 대화하며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구하는 대신, 움직이기 시작한 정욕이 불러일으키는 생각들을 머릿속으로 샅샅이 훑어보는 것밖에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아신 성 바오로 사도는 게으름을 열정적으로 질타하며, 사도적 권위로 모든 이에게 수고를 의무화한다(2테살로니카 3,6–12). 일은 생각의 닻이 되어 생각에 안전한 방향을 제시한다. 사방에서 폭풍이 몰아치고, 돌풍이 파멸을 위협하더라도, 생각은 일이라는 닻에 붙잡혀 흔들림 없이 굳건히 서 있습니다. 떠오르는 생각들로 인해 다소 요동치기는 하지만, 위험 속으로 휩쓸리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생각을 붙잡는 끈이 그것을 몰아치는 바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2, 232. 234).

167.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핑계로 수공일을 거부하는 자들은, 사실 기도조차 하지 않는다. 그들은 게으름 속에서 영혼을 근심에서 해방시켜 주려 한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영혼을 빠져나올 수 없는 생각의 미로에 얽히게 하여, 그로 인해 기도할 수 없게 만든다. 무언가를 하는 데 힘쓰는 몸은, 눈만큼이나 이루어지는 일을 주시하고 행동의 오류를 방지하기 위해 몸을 돕도록 생각을 붙잡아 두지만, 쉬고 있는 몸은 생각이 이리저리 맴돌게 내버려 둔다; 이는 휴식 중에 정욕이 일고, 음탕한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생각을 사로잡아 포로처럼 지배하기 때문이다(2, 234. 5).

168. 완전한 자들에게는 지극히 높은 기도가 있으니, 그것은 일종의 마음의 황홀경이며, 감각적인 것에서 온전히 벗어난 상태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의 탄식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글이 가득 적힌 책처럼 활짝 열린 마음의 상태를 보시며, 소리 없는 형상으로 자신의 뜻을 표현하시는 분이시다. 이처럼 바울은 제3의 하늘까지 황홀경에 빠져, 자신이 “몸 안에 있는지, 몸 밖에 있는지” 알지 못하였다(고린도후서 12, 2) (2, 235).

169. 첫 번째 기도 다음(아래)에는 두 번째 기도가 있는데, 이때는 말을 내뱉을 때 마음이 감동하며 그 말을 따르며, 누구께 간구하는지 알고 있다.

170. 그러나 (하찮은) 생각들로 끊임없이 방해받고 육신의 근심과 얽혀 있는 기도는 기도하는 이에게 어울리는 태도와는 거리가 멀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목소리조차 듣지 못하고, 생각이 이리저리 흩어지며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기도하는 자가 이렇다면, 그가 산만함으로 인해 스스로 귀 기울이지 않는 것을 신성한 귀가 들어 주시겠는가?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내 기도를 받아들이소서”(시 16:1)라고 말한 자들과, “주의 귀가 내 기도의 소리에 귀 기울이시기를”(시 129:2) (시 129, 2)라고 말씀하신 분들의 경우, 온 마음은 그곳에 철저히 집중되어 있었으며, 제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는 부주의한 자들의 생각이 흔히 흩어지고 산만해지는 데로 흩어지지 않았습니다(2, 236).

 

2. 여덟 가지 악령에 대하여

 

1. 탐식에 대하여

1. 결실의 시작은 꽃이며, 활동적인 삶의 시작은 절제이다.

2. 식욕을 절제하는 마음은 정욕을 줄여주지만, 과식으로 지배당하는 마음은 쾌락을 탐하는 욕망을 증식시킨다.

3. 언어의 시작은 아말릭이며, 정욕의 시작은 탐식이다.

4. 불의 양식은 장작이고, 배의 양식은 음식이다.

5. 많은 장작은 거대한 불길을 일으키고, 많은 음식은 정욕을 키운다.

6. 불꽃은 연료가 고갈되면 사라지지만, 음식의 부족은 정욕을 말려버린다.

7. 음식에 대한 탐욕이 불순종을 낳았고, 달콤한 맛은 에덴 동산에서 쫓아냈다.

8. 값비싼 음식은 목을 즐겁게 하지만, 쉼 없이 갉아먹는 정욕의 벌레를 키우기도 한다.

9. 텅 빈 배는 기도로 깨어 있기에 적합하게 하지만, 가득 찬 배는 깊은 잠을 불러온다.

10. 금식 중에는 정신이 맑아지지만, 배부른 삶은 만족감 속에서 마음을 깊은 잠에 빠뜨린다.

11. 금식하는 이의 기도는 높이 날아오르는 독수리 새끼와 같으나, 배불리 먹은 이의 기도는 포만감에 짓눌려 땅으로 떨어진다.

12. 금식하는 이의 마음은 맑은 하늘의 밝은 별과 같으나, 배불리 먹은 이의 마음은 달 없는 밤하늘처럼 어둡다.

13. 안개는 햇살을 가리지만, 먹은 음식에서 뿜어져 나오는 짙은 증기는 마음을 어둡게 한다.

14. 더러워진 거울은 그 안에 비친 형상의 특징을 뚜렷이 드러내지 못하듯, 포만감에 흐려진 정신의 힘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일 수 없다.

15. 오랫동안 경작되지 않은 땅은 가시덤불을 낳고, 탐식가의 마음은 부끄러운 생각을 싹틉니다.

16. 거름더미에서 향기를 찾을 수 없듯이, 탐식가에게서도 관조의 향기를 찾을 수 없다.

17. 탐식가의 눈은 잔치가 열리는 곳을 찾아 헤매고, 절제하는 자의 눈은 지혜로운 자들의 모임이 있는 곳을 찾는다.

18. 탐식가의 영혼은 순교자들을 기리는 날을 세지만, 절제하는 자의 영혼은 그들의 삶을 본받는다.

19. 겁 많은 전사는 전투를 알리는 나팔 소리에 떨지만, 탐식가는 금식이 시작된다는 소식에 떨고 있다.

20. 탐식하는 수도사는 자신의 배의 노예이며, 채찍 아래서 매일 세금을 바친다.

21. 서두르는 여행자는 곧 도시에 도달하고, 절제하는 수도사는 마음의 평온에 이른다.

22. 느릿느릿한 여행자는 (주거지에 도착하지 못한 채) 들판에서 밤을 새우며, 탐식하는 수도사는 무욕의 집에 이르지 못한다.

23. 향을 피우면 공기가 향기로워지듯, 절제하는 이의 기도는 하느님의 향기이다.

24. 만일 배를 채우려는 욕망에 빠진다면, 그 어떤 것도 네 쾌락에 대한 갈망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탐식은 가연물을 태우는 불과 같아서, 항상 새로운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25. (그릇에 담는) 적당한 양은 그릇을 채우지만, 배는 배불러져도 “충분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26. 두 손을 들어 올리는 행위는 아말렉을 도망치게 했으며, 하늘을 향한 행위는 육신의 정욕을 이긴다.

27. 네 안에서 정욕을 부추기는 모든 것을 근절하고, 네 육신의 지체들을 단호히 죽여라.

28. 죽은 적이 네게 두려움을 일으키지 않는 것처럼, 죽임을 당한 육체도 네 영혼을 동요시키지 않을 것이다.

29. 죽은 육체는 불의 고통을 느끼지 않듯이, 절제하는 자도 죽은 정욕의 쾌락을 느끼지 않는다.

30. 이집트인을 쓰러뜨리면 모래 속에 묻어 두라. 즉, 정욕을 이겨내면 육체를 만족시키지 말라(혹은 금식하게 하라). 땅에 물을 주면 그 안에 숨겨져 있던 것이 자라나듯이, 육체를 만족시키면 그 안에 숨어 있던 정욕이 다시 피어오르기 때문이다.

31. 꺼진 불꽃도 마른 나뭇가지를 새로 깔아주면 다시 환하게 타오르듯이, 사그라든 정욕의 불꽃도 배를 음식으로 채우면 다시 살아난다.

32. 몸이 지쳐서 불평할 때, 그에게 동정심을 품지 말고, 그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배불리 채워주지도 말라. 만일 몸이 다시 힘을 얻으면, 너에게 반기를 들고 너를 상대로 화해할 수 없는 싸움을 일으켜, 네 영혼을 사로잡고 너를 음행의 정욕의 노예로 만들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33. 적게 먹여진 몸은 잘 길들여진 말과 같아서, 결코 기수를 떨어뜨리지 않는다. 말은 고삐에 의해 제어되어 기수의 손길에 순종하듯이, 절제와 깨어남으로 길들여진 몸도 그 위에 앉아 있는 생각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으며, 정욕의 충동에 이끌릴 때처럼 울부짖지도 않는다.

 

* * *

34. 음식의 과식은 사색을 부추기고, 술에 취한 자는 꿈으로 잠을 채운다 (1. 248).

35. 음식이 목구멍을 지나가자마자 쾌락의 즐거움은 사라지지만, 그 관 속에서 정욕이 되살아난다.

36. 자신의 몫인 땅을 일구는 수고는 안식을 결말로 삼지만, 온갖 종류의 쾌락은 불타는 고통(여기서는 육체적인 것이거나, 저기서는 형벌적인 것)을 결말로 삼는다.

37. 위업을 통해 육체의 꽃을 시들게 하는 자는 매일 육체 안에서 자신의 죽음을 생각한다(그 육체의 고갈이 끊임없이 죽음을 생각하게 한다) (1. 249).

38. 마음의 분별력이 육체의 상태에 맞춰 절제의 수고를 조절하여, 육체가 쇠약해질 때 자신도 고통받지 않도록 하라.

39. 육체는 자연스러운 욕구의 제한된 충족에 만족하게 하라.

40. 네 육체적 수행은 도덕적인 목적을 위해 이루어져야 하니, 그래야 마음으로 (죄에 대해) 아파하고 영혼으로 함께 슬퍼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41. (음탕한) 쾌락 추구의 어머니는 탐식이다. 이는 탐식이 쾌락을 추구하는 음탕함과 다른 많은 정욕을 낳기 때문이다. 그것으로부터, 마치 뿌리에서 싹이 트듯이, 다른 정욕들이 싹트며, 머지않아 그것들을 낳은 본래의 정욕과 동등한 나무가 되어, 하늘에 닿을 만큼 뻗어 나가는 악덕들로 갈라진다. 이처럼 탐욕, 분노, 슬픔은 모두 탐식의 산물이자 그 결과이다. 방종한 자에게는 무엇보다도 항상 타오르는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돈이 필요하지만, 그 욕망은 결코 충족되지 않는다. 그 다음에는 돈을 얻는 데 방해가 되는 것들에 대해 분노를 일으켜야 한다. 분노가 행동으로 옮겨지지 못할 때, 필연적으로 슬픔이 뒤따른다(2, 73).

42. 탐식과는 무엇보다도 육욕적인 충동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자연 그 자체도 이 두 정욕의 친연성을 보여주기 위해, 성교의 도구들을 배 아래에 배치함으로써, 이러한 근접성을 통해 둘 사이의 긴밀한 유대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이 정욕(욕망)이 약해지면, 위쪽, 즉 배의 부족함으로 인해 약해지는 것이며, 만약 강해져 움직이기 시작하면, 거기서부터 그 힘은 공급받는다. 그러나 배를 채우는 쾌락은 오직 이 정욕만을 양육하고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내면에 있는 모든 선한 것을 말살해 버린다. 그것이 우위를 점하는 즉시, 절제, 순결, 용기, 인내 및 그 밖의 모든 미덕은 대개 무너져 내리고 사라져 버린다(2, 76).

43. 필요의 범위 안에 머무르고, 온 힘을 다해 그 경계를 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만약 누군가가 정욕에 이끌려 세속적인 쾌락의 쪽으로 조금이라도 치우친다면, 그 어떤 말로도 (그 방향으로) 나아가는 그의 열망을 막을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필요를 넘어서는 것에는 한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끝없는 걱정과 끝없는 분주함은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고를 무한히 늘리고, 마치 장작을 더 얹어 불길을 키우듯이 정욕을 부추기기 때문이다(2, 88).

 

2. 음행에 대하여

1. 절제는 정절을 낳지만, 탐식은 음탕한 정욕의 어머니이다.

2. 등유는 등불의 불꽃을 지피지만, 여성과의 교제는 음탕한 쾌락의 불을 지핀다.

3. 파도의 충격에 휩쓸려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은 짐을 싣지 않은 배이며, 방탕한 생각에 휩쓸리는 것은 절제하지 못하는 마음이다.

4. 음탕함은 포만감을 자기 것으로 삼아, 이성의 적들 대열에 합류하여 그 적들과 함께 끝까지 이성과 싸운다.

5. 고요함을 사랑하는 자는 이 원수의 화살에 쉽게 상처받지 않으나, 군중 속에 섞여 다니는 자는 그로부터 끊임없이 상처를 입는다.

6. 여인의 눈빛은 독이 든 화살과 같아서 영혼을 찔러 독을 주입한다. 그리고 이 상처가 오래될수록 더 큰 피해를 입힌다.

7. 이 화살들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자는 사람이 많은 모임에 가지 않으며, 축제에서 정신없이 방황하지 않는다. 이는 축제를 기리려다 적들의 쉬운 먹잇감이 되는 것보다, 차라리 집에서 평온히 지내며 기도에 전념하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8. 정결하고자 한다면 여성들과의 교제를 피하고, 그들에게 감히 너에게 대담하게 다가올 자유를 절대 주지 마라. 처음에는 그들이 진정으로 수줍음을 타거나, 위선적으로 수줍음을 보일지라도, 나중에는 무엇이든 감행하게 되기 때문이다. – 그리고 이는 너에게 죽음으로 유인하는 덫이 되고, 파멸로 이끄는 교묘하게 엮인 그물이 된다. 그들이 수줍은 말로 너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왜냐하면 그 말들 속에도 사악한 짐승의 독(심연에서 나온 짐승의 독)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9. 네가 아직 젊을 때, 젊은 여인에게 다가가는 것보다 차라리 타오르는 모닥불에 다가가는 편이 낫다. 불에 가까이 다가가면 그 열기를 느끼고 즉시 물러나겠지만, 여인의 달콤한 말에 마음이 녹아내리면 쉽게 물러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10. 물가에서 자라는 풀은 시들고, 방탕한 정욕은 여인들과의 교제 속에서 자란다.

11. 배를 채우면서 정절을 지키겠다고 약속하는 자는 마치 짚으로 불의 기세를 막겠다고 주장하는 사람과 같다. 짚으로 번져가는 불의 기세를 막을 수 없는 것처럼, 포만감으로 음탕한 욕망을 멈출 수는 없다.

12. 기둥은 그 기초에 의지하듯, 음탕한 욕망은 포만감에 의지한다.

13. 폭풍에 휩쓸린 배는 부두로 서둘러 향하고, 절제된 영혼은 광야를 찾는다. 배는 위험을 초래하는 파도를 피하고, 영혼은 파멸을 초래하는 여인들의 얼굴을 피한다.

14. 화려하게 차려입은 여인의 모습은 파도보다 더 치명적이다. 파도에서는 생명을 사랑하기 때문에 아직 헤엄쳐 나올 수 있지만, 여인의 매혹적인 모습은 생명 그 자체마저 소홀히 하게 만든다.

15. 사막의 덤불은 불길로부터 안전하듯, 여성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순결한 자는 음탕한 정욕의 불길로부터 안전하다. 불에 대한 기억이 생각을 태우지 않는 것처럼, 정욕도 그것을 부추길 양식이 없으면 힘을 잃기 때문이다.

16. 대적자를 용서하면 네게 원수가 생길 것이며, 이 정욕을 용서하면 그것이 너를 대적할 것이다.

17. 절제하지 못하는 자가 여자를 바라보면 음란한 정욕이 일지만, 절제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마음이 솟아난다.

18. 여성을 대할 때 음탕한 정욕이 잠잠해진다고 해도, 그녀가 약속하는 절제를 믿지 마라. 무리에 둘러싸인 개도 꼬리를 흔들지만, 무리에서 벗어나면 곧바로 본래의 사나움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19. 여인에 대한 기억이 무감정해지면, 그때 비로소 네가 절제의 경지에 들어섰다고 판단하라. 반면, 네가 상상하는 그녀의 모습이 네 영혼을 사로잡는다면, 그때는 네가 아직 이 미덕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아라. 그러나 첫 번째 경우라 할지라도 그러한 생각에 머무르지 말고, 마음속으로 여성의 모습과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지 마라. 왜냐하면 이 정욕은 되돌아오기를 좋아하며, 그로 인한 위험이 가까이에 있기 때문이다.

20. 적당한 정련이 은을 정화하지만, 지나치게 오래 정련하면 은을 손상시키듯이, 정절의 습관도 마음속에 오랫동안 머무는 여성의 이미지를 해친다.

21. 네게 나타난 그 사람과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지 마라. 그래야 그 사람이 네 안에 정욕의 불꽃을 일으키지 않고, 네 영혼의 헛간을 태우지 않을 것이다.

22. 짚더미 속에 오랫동안 방치된 불꽃이 불길을 일으키듯이, 여인에 대한 지속적인 기억은 정욕을 불러일으킨다.

 

* * *

23. 영을 탐하는 육체를 수행의 수고로 제압한다면, 이 세상의 경계를 넘어 ‘복에 관한 말씀’에서 약속된 영광을 얻게 될 것이니, 이는 네 몸 안에서 네 ‘이성의 법’에 “반항하는” 자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네 지체에 있는 죄의 법”(롬 7,23)에 사로잡혀 있는 자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자로서, 이 세상의 경계를 넘어 복에 관한 말씀들이 약속한 영광을 얻게 될 것이다 (1, 230).

24. 육체적 음행과 영적 음행과 같은 개별적인 음행의 종류들이 서로 결합되어 나타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음란한 생각이 네 영과 융합될 때, 그때 네 영혼은 그 안에 있는 유혹적인 흔적과 결합된다 (1, 247–8).

25. 악마는 영혼을 유혹하여 자신과 합쳐지게 하려고 여성의 모습을 취한다. 무형의 악마는 (아내의) 형상을 취하여, 음탕한 생각으로 영혼을 음행으로 이끌고자 한다. 그러니 실체가 없는 유령에 휩쓸리지 말라. 그래야 육체로도 비슷한 일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내면의 간음을 십자가로 물리치지 못하는 모든 이들은 음행의 영에 현혹된다.

26. 음행을 생각하지 않고 굶주림만을 생각하게 하려면, 식사를 줄여 생각들을 징계하라.

27. 기도의 깨어 있음에 눈물을 더하여, 이 진정한 싸움에서 도움을 얻도록 하라.

28. 음행과의 싸움 중에는 연회 초대를 거절하라.

29. 음탕의 악마는 열정적인 수행자에게 재빠르게 달려들어, 정욕의 화살을 갑자기 쏟아 붓는다. 이는 수행자의 수고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을 발하는 불의 타는 듯한 열기를 오래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욕의 달콤함에 현혹되어 자기 절제의 엄격함이 약해진 자에게는, 조금씩 그의 마음과 대화를 나누려 다가와, 그 마음이 사악한 정욕으로 불타오르며 그들과 대화에 빠져들고, 그들에게 사로잡혀 이 죄에 대한 증오를 완전히 버리게 하려 한다 (1, 252–3).

30. 마음이 정욕의 달콤함에 깊이 빠져버렸을 때야말로 가장 위험하며, 이 (정욕적인) 밭을 뿌리째 잘라내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31. 생각이 정욕의 달콤함과 대화를 나누도록 길들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정욕적인 생각과 움직임이 모여들면 불이 타오르기 때문이다(시 105, 18). 그것들은 너를 달아오르게 하여, 본성의 불길을 억제하기 어렵다고, 더 이상 본성을 억누를 힘이 없다고, 그리고 비록 오늘은 어쩔 수 없이 죄를 짓더라도 내일은 계명에 따라 회개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들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 법은 자비로우니, 회개하는 자의 죄를 쉽게 용서하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그들은 금욕 후에 타락했다가 다시 회개한 사람들의 사례를 네게 제시하며, 회개를 통해 쉽게 다시 돌아설 수 있다는 이 희망으로 저항의 굳건함을 무너뜨려, 순결의 성전을 음행의 집으로 만들도록, 자신들의 유혹적인 조언에 신빙성을 부여할 것이다(1, 253–4).

32. 보라, 절제를 실천하는 사람아, 회개를 구실로 알 수 없는 희망에 현혹되지 말라. 많은 이들이 타락한 후 즉시 죽음에 사로잡혔고, 다른 이들은 정욕의 쾌락에 법처럼 얽매여 (타락에서) 다시 일어설 힘을 잃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네가, 사람아, 살아 있을지, 회개할지 알 수 있기에 스스로에게 살 나이를 정해 놓는가? – 이로 인해 넘어지면서 네 육신을 방종하게 내버려 두는 것이니, 오히려 죽음을 기억하는 데 더욱 전념하여, 네 마음속에 심판의 무서운 결론을 생생히 떠올리고, 그리하여 달아오른 육신의 망상을 잠재워야 마땅한 것이다.

33. 창조주께서는 우리와 동물 모두에게 똑같은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을 정해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내가 너희에게 주노니, 들에 나는 모든 풀은 너희와 짐승들의 양식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창세기 1:29, 30). 그러므로 말 없는 동물들과 같은 양식을 받았으면서도, 우리의 기발한 발상으로 그것을 더 호화로운 것으로 바꿔 놓았다면, 짐승들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을 어기지 않고 본성의 한계를 지키는 반면, 반면 우리 인간은 이성을 부여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고대의 법칙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면, 우리가 이성 없는 짐승들보다 훨씬 더 어리석다고 인정받아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과연 이성 없는 짐승들에게는 어떤 진미가 있는가? 어떤 제빵사나 요리사가 천 가지 솜씨로 그들의 빈약한 배를 채워줄 음식을 준비해 주는가? 그들은 풀을 먹고, 주어진 것에 만족하며, 물로 갈증을 해소하는—그마저도 가끔 드물게 마시는—고대의 검소함을 좋아하지 않는가? 그렇기에 그들은 육체적 쾌락에 빠지는 일이 드물며, 살찌게 하는 음식으로 욕망을 부추기지 않고,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항상 알지도 못한다. 이는 자연법이 종족을 번식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일 년에 한 번 그들에게 이 욕망을 주어 자신과 닮은 자손을 낳게 하기 때문이며, 그 외의 시기에는 서로를 기피하여 그 욕망을 완전히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반면 인간에게는 값비싼 음식들이 만족할 줄 모르는 음탕한 욕망을 불러일으켜 광란적인 갈망을 심어주어, 어떤 때에도 그 정욕이 가라앉을 틈을 주지 않는다(2, 90).

 

3. 탐욕에 대하여

1. 탐욕은 모든 악의 뿌리이다. 마치 병든 가지처럼, 그것은 다른 모든 정욕을 키우며, 그로 인해 번성했던 것이 시들지 못하게 한다.

2. 정욕을 근절하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뿌리를 뽑아야 한다. 그러나 탐욕이 남아 있는 한, 가지만 잘라내어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가지를 잘라내더라도 곧 다시 자라날 것이기 때문이다.

3. 재물을 탐하는 수도사는 짐을 지나치게 실은 배와 같아서, 폭풍으로 일렁이는 파도 속에서 쉽게 침몰하고 만다.

4. 재물을 탐하지 않는 수도사는 가벼운 여행자처럼, 어디서나 안식처를 찾는 사람이다.

5. 탐욕이 없는 수도사는 높이 날아오르는 독수리처럼, 오직 먹이가 필요할 때만 아래로 내려온다.

6. 그런 이는 모든 유혹을 초월하여, 세상의 모든 것을 비웃으며, 산 위로 날아올라 세속적인 모든 것에서 멀어지고 하늘의 존재들과 함께한다. 이는 근심에 짓눌리지 않아 그의 날개가 가볍기 때문이다.

7. 슬픔이 닥쳐도 그는 슬픔 없이 그 자리를 떠나며, 죽음이 닥치면 기꺼이 이곳을 떠난다. 왜냐하면 그는 어떤 세속적인 속박으로도 영혼을 묶어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8. 그러나 재물을 탐하는 자는 근심에 얽매여 개처럼 사슬에 묶여 있다. 만약 강제로 이주해야 한다면, 재산에 대한 슬픈 추억을 무겁고 무익한 짐처럼 짊어지고 간다.

9. 죽음이 닥치면, 그는 애틋한 마음으로 현재를 뒤로하고 떠난다. 영혼을 내어주면서도 자신이 가진 것을 눈에서 떼지 못하니, 도망친 노예처럼 강제로 끌려간다. 몸과는 헤어지지만 재산과는 헤어지지 못하는데, 그를 붙잡는 욕망이 끌어당기는 힘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다.

10. 바다는 수많은 강물을 받아들여도 가득 차지 않듯이, 재물을 탐하는 자의 욕망은 이미 모은 재산으로도 채워지지 않는다. 재산을 두 배로 늘리면, 그 두 배를 다시 두 배로 늘리고 싶어 하며, 죽음이 이 무익한 수고를 멈추게 할 때까지 결코 두 배로 늘리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11. 분별 있는 수도사는 오직 육체의 필요만을 염두에 두며, 텅 빈 배를 빵과 물 하나로 채운다.

12. 그는 배를 채우기 위해 부자들에게 아부하지 않으며, 자유로운 마음을 수많은 지배자들에게 종속시키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육신을 섬기고 그 본연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두 손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13. 탐욕 없는 수도사는 포착할 수 없는 투사이자 가볍게 달리는 자로서, “더 높은 소명의 영광”을 속히 이룬다(빌 3,14).

14. 재물을 탐하는 수도사는 많은 수입을 기뻐하지만, 재물을 탐하지 않는 수도사는 성취에 대한 상을 기뻐한다.

15. 재물을 탐하는 수도사는 열심히 일하지만, 재물을 탐하지 않는 수도사는 기도와 독서에 시간을 보낸다.

16. 재물을 탐하는 수도사는 보물창고를 은으로 채우지만, 재물을 탐하지 않는 수도사는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둔다.

17. 우상을 만들어 “은밀한 곳에” 두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신명기 27:15). 그러나 재물을 탐하는 자도 마찬가지이다. 전자는 헛되이 거짓 신에게 절하지만, 후자는 부에 대한 꿈을 우상처럼 마음속에 은밀히 품고 있다.

 

* * *

18. 탐욕이 없는 사람은 근심 없는 삶을 사는 반면, 탐욕이 있는 사람에게는 부에 대한 염려가 끊임없는 병이다(1, 237).

19. 물질적인 것에 대한 염려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때, 비로소 수많은 생각들을 사로잡을 수 있다. 재산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을 버릴 때, 비로소 산만해지지 않고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다.

20. 물질적 축적에 대한 생각은 네게 노년과 질병을 예고하니, 이는 네가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재산에 대한 소망과 나누게 하려는 것이다.

21. 세상을 버리고 수행자의 삶을 선택한 자는 믿음으로 자신을 감싸고, 사랑으로 굳건히 하며, 소망으로 확고히 하라. 믿음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내로운 소망과 생생한 사랑과 함께 가장 완전한 것을 소유하고 있다는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다.

22. 모든 것을 버렸을 때, 가난해진 것을 탓하며 현재를 — 모든 면에서의 궁핍과 빈곤, 그리고 명예의 상실 — 네게 보여줌으로써, 그러한 악의적인 속임수로 너를 그토록 영광스러운 미덕에 대해 회개하게 만들려는 어두운 생각들에 귀를 기울이지 말라. 그러나 그러한 수행의 이치를 깊이 헤아린다면, 오히려 너를 책망하는 바로 그 일로 인해 네게 면류관이 엮어질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23. 세속적인 일들은 제쳐두고 영적인 선에 마음을 돌리자. 언제까지나 어린아이들의 놀이에 머물러, 성인다운 사고방식을 조금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인가? 어린 시절에는 주사위, 공 같은 것들이 오락거리가 되며, 아이들은 성숙한 나이가 될 때까지 그것에 집착하곤 한다. 그러나 누군가 성인이 되면 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온 힘을 다해 중요한 일에 매진한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 유아기에 머물러, 어린 시절에나 어울리는 것에 놀라워할 뿐, 더 나은 것, 즉 남자에게 어울리는 일을 돌보려 하지 않는다. 완전한 남자가 재 더미 위에 앉아 재 위에 어린아이들의 놀이를 그리는 모습을 보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지; 영원한 복을 누리기를 염두에 둔 사람들이 세속적인 것들의 흙더미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그러한 부적절한 행동으로 서원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것을 보는 것은 그만큼, 혹은 훨씬 더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에게 있어 그 원인은, 보아하니,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상상하지 못하고, 현세적 복의 하찮음과 저 세상의 복의 우월성을 깨닫지 못하며, 이곳에서 존경받는 것의 화려함에 눈이 멀어 온 마음을 다해 그것에 매달리기 때문인 듯하다(2, 81).

24. 그러니 이제 현세의 복을 버리기 시작하고, 재산과 돈, 그리고 마음을 자기 자신에 얽매이게 하고 침몰시키는 모든 것을 경시하자. 파도에 휩쓸릴 때, 조타수인 ‘이성’과 함께 항해하는 ‘생각’들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짐을 내던져 버리자.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를 항해하는 이들이 자신의 화물을 소홀히 여기지 않고, 직접 손으로 값진 물건들까지 바다에 던져버리며 재산을 생명보다 낮게 여긴다면, 도대체 우리는 더 나은 삶을 위해 영혼을 심연으로 끌어당기는 것을 왜 외면하지 않는가? 왜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그들이 바다를 두려워하는 마음만큼 강하지 않은가? 그들은 일시적인 삶을 사랑하기 때문에 실어 나르는 것을 잃는 것을 크게 여기지 않지만, 우리는 스스로 영생을 갈망한다고 말하면서도 사소한 것조차 소홀히 여기지 않고, 차라리 하찮은 짐을 짊어진 채 파멸하는 편을 택할 뿐, 그것을 버리고 구원받는 것은 거부한다. – 그러므로 간청하노니, 모든 것을 벗어 버립시다. 레슬러들은 옷을 입은 채로 시합에 나서지 않습니다. 레슬링의 법칙은 그들을 경기장에서 알몸으로 싸우게 합니다. 더위든 추위든, 그들은 옷을 경기장 밖에 두고 나섭니다. 그들 중 누구라도 몸을 드러내는 것을 거부한다면, 시합 자체도 포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수련을 다짐했음에도 불구하고, 옷(재산)을 벗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깨에 수천 가지 짐을 짊어지고 수련에 임함으로써, 적들이 우리를 붙잡기 쉽게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2, 82. 83).

25. 사방에서 마음껏 공격을 가해오는 악의의 영들과 어떻게 싸워야 하겠는가? 돈으로 뒤덮인 자에게서 탐욕의 영을 어떻게 물리칠 수 있겠는가? 온갖 보살핌에서 벗어난 악마들을, 수천 가지 근심으로 뒤덮인 자가 어떻게 앞지를 수 있겠는가? 신성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 날에 벌거벗은 자가 도망하리라” (아모스 2, 16). 벌거벗은 자란, 세속적인 일들에 대한 셀 수 없이 많은 근심의 누더기를 두르지 않은 자이며, 돈과 재산에 대한 복잡한 생각들이 달리는 속도를 방해하지 않는 자이다. 왜냐하면 악의를 품은 자들이 벌거벗은 자를 붙잡기는 어렵고 심지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2, 83. 84).

26. 싸울 때는 알몸이어야 하며, 단순히 알몸일 뿐만 아니라 기름을 바른 상태여야 한다. 알몸이 됨으로써 상대방이 싸우는 이를 붙잡을 곳이 없어지고, 기름을 바르면 설령 붙잡힌다 해도 붙잡은 자의 손에서 빠져나갈 수 있게 된다. 왜 적들은 서로에게 흙을 뿌려, 먼지로 인해 매끄러운 기름의 표면을 거칠게 만들어, 붙잡혔을 때 상대를 쉽게 붙잡을 수 있게 하려고 애쓰는가? 그러나 저기 있는 먼지는 우리 투신에서 세속적인 일들을, 저기 있는 기름은 여기에서 근심 걱정 없음을 의미한다(2, 85).

27. 근심이 없는 것은 완전한 영혼의 특성이요, 근심으로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은 불경건한 영혼의 특성이다. 완전한 영혼에 대해 “가시덤불 속의 수련과 같으니라”(아가 2, 2)라고 말했는데, 이는 많은 것을 걱정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근심 없이 사는 영혼을 의미한다. 백합은 복음서에서도 근심이 없는 영혼을 의미한다. “수고하지도 않고 베를 짜지도 않으면서” 오히려 솔로몬보다 더 영광스럽게 입혀진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마태복음 6, 28). 반면 육체에 대한 근심이 많은 자들에 대해서는 “악인의 온 생애는 근심 속에 있다”(욥기 15, 20)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진실로 육체에 대한 근심을 온 생애에 걸쳐 퍼뜨리는 것은 악한 일이며, 미래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2, 86).

28. 취득의 기준은 필요에 따라야 한다. 이 기준을 초과하는 것은, 즉 과잉은 일을 어렵게 할 뿐, 편하게 하지 않는다. 몸에 맞는 옷이 필요를 충족시키면서도 장식이 되는 것처럼, 사방으로 축 늘어져 발을 얽히고 땅에 끌리며, 보기 흉할 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 방해가 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육체적 필요 를 초과하는 재산은 미덕에 방해가 될 뿐만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탐구할 수 있는 자들로부터 큰 비난을 받게 된다(2, 87).

29. 우리가 ‘검소함’이라고 부르는 것은, 필요에 의해 닥쳐와 정신을 짓누르고, 자발적이지 않기 때문에 견딜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비자발적인 빈곤이 아니라, 생각의 자제력을 통해 얻어지는, 그러나 노력이 필요하며, 그 연습이 습관으로 자리 잡아 오랫동안 어렵고 견딜 수 없다고 여겨졌던 것을 견딜 수 있게 될 때까지는 그렇다. 육체적 아름다움만이 유혹하는 것이 아니라, 부의 화려함 또한 욕망을 그 못지않게 강하게 자극한다. – 그리고 두 경우 모두 그 유혹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용기 있는 영혼이 필요하다.

30. 진실로 위대하고 용감하다고 칭해야 할 이들은, 생각들이 마치 신체 동작처럼 설득력 있는 논증으로 서로 싸우고 경쟁하는 가운데, 이 경기장에서 승리를 거두는 자들이다. 그들은 많은 이들의 의견에 동의해야 한다고 증명하려 애쓰며, 겉으로 보기 좋은 것을 이미 진정으로 좋은 것으로 인정하고, 일반적인 견해에 따라 가치 있는 것으로 존중받는 것을 거부하지 않으며, 창조주께서 사용하도록 주신 것을 소유하는 데서 벗어나지 않고, 헛되이 얻은 것이 아니라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존재하게 된 것을 헛되이 비난하지 않는 것이다. 이 수행자들은 반대자들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았고, 자신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며, 적의 손에 넘어가지 않았기에 진정으로 칭찬받을 만하다. 올바른 판단 위에 무릎을 굳건히 세우고, 세속적인 것들에 쏠리지 않았으며, 분주한 삶보다 평온한 삶을 택하고, 절제된 생활로 마음의 평온을 얻었습니다(2, 99–101).

31. 고대의 성자들은 무소유에 대한 열정을 그토록 극한까지 밀어붙여, 집도 거처도 없이 떠돌며 살았고, 자연이 주는 음식으로 배를 채웠으며, 우연히 마주치는 곳이면 어디든 잠자리를 마련했다. 그들에게는 지붕도, 침상도, 식탁도 없었으며, 양가죽이 그들의 옷이 되었다. 그들은 “하늘의 새들을 보라… 들판의 백합을 보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철저히 따르려 애썼다. (마태복음 6, 26–28). 그들은 육체의 필요에 필요한 것이, 이를 주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무엇보다도 하늘나라를 얻는 데 전념할 때 저절로 따라올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었다 (2, 102–3).

32. 모든 면에서 풍요로움에 둘러싸인 우리의 삶이, 육체와 육체적인 것에 대한 염려로 괴로워하지 않고 오직 신성한 것에 대한 순수한 갈망으로 끊임없이 더 높은 곳으로 이끌려, 이 땅에서 빛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을 잊게 했던 그 복된 이들의 삶과 어떻게 비교될 수 있겠는가? 그들은 자연이 이 땅에 묶어 둔 육체 외에는 이 땅에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으나, 심지어 그 육체조차도 그들이 정신으로 머무르며 천상의 복을 관조하던 그곳에 함께 가지고 가고 싶어 했을 것이다. 만약 자연이 육체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그들을 되돌려 보내지 않았다면, 그들은 그곳의 황홀함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영혼을 육체와 결합시킨 분에 대한 경외심으로 인해, 그들은 육체에 대해서도 돌보아야만 했으나, 동시에 육체로부터의 초월이 지극히 유익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2, 104).

33. 육체의 욕구는 빠르게 흘러가고 지나가니, 과거에는 현재에 대한 염려가 없었고, 현재에는 미래에 대한 염려가 없으며, 오직 현재만을 치유할 뿐이다. 그러나 덕행의 수고는 마르지 않는 열매를 맺는 씨앗이다. – 행하는 그 순간에도 즐거움을 기대하며 양심을 기쁘게 하고, 이곳을 떠난 후에는 영원한 기쁨에 기여하며 빛나는 것으로 드러난다(2, 105).

34. 왕국으로 이끄는 길이 좁고 사방이 험준한 벼랑으로 둘러싸여 있어 그토록 많은 어려움이 따르는 바, 돈과 다른 재산을 산더미처럼 짊어지고는 걷기조차 불가능한 이 길을 가려고 시도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물질적인 것에 대한 염려는 마음을 산만하게 하고 세속으로 강하게 끌어당기므로, 특히 사정의 흐름이 예리하고 냉철한 주의를 요구할 때 넘어지기 쉽게 만든다. 그리고 그런 주의를 기울인다 해도, 험한 급류로 가득한 좁은 길의 어려움 때문에 넘어지지 않고 나아가는 경우는 드물며, 불필요한 재물 축적의 짐을 지고 있는 자에게는 넘어짐이 불가피하다. 게다가 탐욕 그 자체가 이미 타락이다(2, 111).

35. 재물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세 가지로 나뉜다: 재물을 탐하지 않는 태도, 즉 최고와 중도의 태도, 그리고 물질에 얽매여 재물을 많이 탐하는 삶이다. 그 기원은 다음과 같다. 낙원에서 원초적 인간에게 다음과 같이 명해졌다: “들풀을 먹으라”(창세기 1, 29). 명령하신 분의 위엄은 그러한 양식이 인간에게 예정된 삶에 완벽하게 적합함을 보증한다. 그러나 이 적합성을 설명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우리가 갈망하는 세련미를 보존하는 데 있어 그 어떤 것보다 훨씬 더 적합했으며, 이를 통해 사색의 힘이 항상 무거운 짐 없이 머물 수 있고, 정신의 명료함이 흐려지지 않도록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육체의 삶에 필요한 것이 저절로 주어졌을 때, 마음은 육체적 노동에서 자유로운 시간을 모두 누리며 한가히 지내지 않고, 끊임없이 영적인 묵상에 빠져 그 안에서 고갈되지 않는 기쁨을 누렸다. 이러한 태도는 그분께서 친히 그 안에서 길러주신 것이었는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에 따라 매일 그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찾아오셨다. – 이것이야말로 인간에게 본래 주어진 삶의 규범이다! – 그 본질은 변경되거나 폐지될 수 없으나, 겉으로 드러나는 삶의 방식은 달라질 수 있으며, – 바로 그 변화가 뒤따른 타락으로 인해 필연적이 되었다. 계명을 어기고 낙원에서 쫓겨난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그의 타락한 상태에 맞춰 다른 삶의 방식을 정하셨으니, 마땅히 누려야 할 안식을 누리지 못한 자로 하여금 수고와 노동으로 양식을 얻도록 명하셨다; 이는 그가 (낙원에서) 자유 시간이 있고 육체적 노동이 필요하지 않았을 때, 끊임없이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과 교제하는 법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의 양식으로는 땀 흘려 얻은 빵이, 옷으로는 가죽 옷이 정해졌는데, 이는 탐욕과 허영에 한계를 두기 위함이었다. 낙원에서의 본래적인 무소유는 이러한 소박한 소유로 대체되었는데, 이는 땀 흘리는 수고에도 불구하고 오직 그 자신에게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축복에 달려 있었다. 실제로 이로 인해 세 가지 삶의 양상이 드러났다. 어떤 이들은 땀 흘리는 수고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소박한 소유에 만족했고, 다른 이들은 하나님에 대한 의지에 깊이 빠져 모든 소유를 완전히 포기하며(낙원의 소유욕 없음을 회복하고자 열망하며) 하나님께 양육받았으며; 셋째는 온갖 종류의 노동에 몰두하여, 이를 통해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을 두었고, 삶의 보장은 많은 재산을 바탕으로 삼았다. 하나님은 잊혀졌고, 그들에게 있어 재물이 신이 되었다. 이것이 재물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나타내는 세 가지 유형이다(2, 116–123 – 요약).

36. 여기서 두 번째로 제시된 유형은 (주로) 이성적인 존재에게 어울리는 행동을 나타내는데, 바로: 시간을 하나님을 섬기는 데 보내고, 하나님의 섭리의 보물창고에서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얻으며; 하나님의 돌보심을 의지하고 땅을 하사받은 것으로 여기며, 창조주를 진심으로 섬기고 피조물에게 자발적인 헌물로 필요를 충당하는 것; 이곳에서 나그네로 지내며, 하늘에 예비된 곳을 거처로 여기는 것이다. 창조주께서는 태초에 이러한 삶을 명하셨으며, 모든 성도들은 그분께 순종하며 이 삶을 살았다. (모범: 엘리야, 엘리사, 선지자의 아들들, 세례 요한, 사도들) (2, 124–129).

37. 이것이 바로 성인들의 “최고의” 무소유 정신이다. 그러나 그 다음 단계인 “중간” 무소유 정신도 시대와 필요에 부합하는 만큼 많은 유익을 지닌다. 비록 그것이 최상의 삶의 방식과 우위를 다투거나 동등한 영광을 자랑할 수는 없더라도, 의심할 여지 없이 두 번째 단계의 영광을 차지한다. 초기의 성자들(완전한 무소유주의를 실천한)은 오직 영혼과 그 영혼을 창조하신 하느님을 위해 살았으며, 육신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육신을 돌보지 않음에도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었는데, 이는 미리 곡창에 모아둔 것이 아니라, 마치 보물창고에서처럼 하느님의 은총으로 제때에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 뒤를 이은 성자들(중등도의 무소유 정신을 지닌)은 육체의 필수적인 위안을 돌보고, 소홀히 방치된 우리의 동물적 본성이 우리를 그 본성과 결합시키신 분의 뜻에 반하여 타락하지 않도록 염려하며, 피할 수 없는 필요에 따라 육체를 섬기는 데 필요한 만큼만 손을 썼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은 영혼을 돌보는 일, 기도, 신에 대한 묵상, 그리고 마땅한 활동에 바쳤으며, 선한 행실에서 성공하는 것을 염두에 두었다(2, 137).

38. 반면, 후자들은 온전히 육신이 되어 세상의 우상을 섬기는 데 전적으로 헌신했으며, 육신의 삶을 영위하기에 충분한 것뿐만 아니라, 풍요로움으로 남들보다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줄 만한 것까지 소유하기를 원했는데, 이는 적어도 이를 통해 모든 사람의 주목을 받기 위함이었다. 이를 통해 그들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비난받을 만한 것을 스스로 칭찬으로 여기고, 그것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경탄을 얻으려 하는데, 이로 인해 그들은 경멸과 조롱을 받을 만하다. 왜냐하면 각 지위에 걸맞은 행동은 칭찬받을 만한 타당한 근거를 제공하는 반면, 지위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은 비록 다른 면에서는 나쁘지 않더라도, 본래 어울리지 않는 곳에서는 매우 비난받을 만하기 때문이다(2, 138).

39. 양쪽 이웃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중간 계층”은 어느 쪽에 더 가깝겠는가? – 물론 행동으로 더 가까워지는 쪽, 그리고 생활 방식에서 그들과 가까워지려고 노력함으로써 그들과의 친화성을 드러내는 쪽에 가깝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쪽과 저쪽 사이에서 중간 계층을 이루고 있으므로, 양쪽 모두에게 똑같이 기울어지지는 않으며, 비록 앞서가는 자들보다 뒤처져 있기는 하지만, 바로 그 뒤를 따르며 청년의 발걸음으로 그들의 발자취를 밟아가기 때문에, 뒤따르는 자들로부터는 마치 달리는 자가 천천히 걷는 자나 한 자리에 머무르는 자로부터 점차 멀어지는 만큼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반면, 앞선 자들과 뒤따르는 자들 사이에는 공통점이 전혀 없다. 물질적인 것을 많이 가진 자들과 재물을 탐하지 않는 자들 사이에 어떤 교제가 있겠는가? 육신적인 지혜를 추구하는 자들과 영적인 지혜를 추구하는 자들 사이에 어떤 조화가 있겠는가? 세속적인 일에 얽매인 자들과 평온하게 하나님께 봉사하는 자들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겠는가? 어떤 이들은 사도들처럼 얻은 모든 것을 버리고, 다른 이들은 가지지 못했던 것을 얻는다. 어떤 이들은 침묵 속에 머물며 내면적으로 영적 성장을 위해 애쓰는 반면, 다른 이들은 돈과 재산을 놓고 온갖 종류의 투쟁을 벌인다. 어떤 이들은 하늘의 복을 위해 악의 영들과 다투고, 다른 이들은 세상의 복을 위해 자신과 같은 사람들을 공격한다. 바울은 어떤 이들에게 “세상에서 빛과 같이 빛나리라”(빌 2:15) 말하는데, 이는 분명히 생명의 영광으로 빛나며 보는 이들에게 선한 경쟁의 본보기가 되게 하려는 것이며, 다른 이들에게는 “내 이름이 너희로 말미암아 모독을 당하느니라”(롬 2,24), 즉, 자신의 직분에 어긋나게 행하며, 행실과 모순되는 겉모습만을 띠고 있는 너희를 가리키는 것이다(2, 139–40).

40. 세속적인 것을 버렸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그 유흥에 빠져 있는 자를, 어떤 말이 경멸하지 않겠는가? 세상을 경멸했다고 자랑하면서, 미친 듯이 세속적인 일에 몰두하는 자를? 세상의 것에 눈길조차 주지 않겠다고 약속해 놓고, 행동으로 그 약속의 거짓됨을 증명하는 자를? 헛된 일과 작별했다고 주장하면서도, 여전히 그것과 헤어지지 않는가? – “너는 이집트를 떠났다” – 그런데 그 후로 헛된 일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약속의 땅으로 서둘러 가기 위해 광야를 행진하고 있는데, 왜 헛된 일에 매달리며 먼 여정에서 더딘 여행자가 되어 지체하는가? 네 앞에 놓인 길은 모든 세심함을 요구하는데, 어찌하여 갈림길에서 방황하며 안식을 얻지 못하고 남을 위험에 처하게 되는가? 너는 쟁기 손잡이에 손을 얹었거늘, 어찌하여 뒤로 돌아서서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없는 자로 스스로를 만드는가? 네 뒤에는 오성(五城)의 불길도 남겨 두었는데, 도대체 왜 뒤를 돌아보며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고자 하는가? 십자가를 짊어졌는가? – 그렇다면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라. 네가 결합한 그리스도께서는 무엇보다도 사랑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2, 141–2).

41. 육신은 그리 많은 위로를 필요로 하지 않으니, 이 위로를 돌보아라. 왜냐하면 너는 한동안 육신과 묶여 있어, 덕을 행하는 데 육신도 협력자가 되게 하고, 영혼의 번영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소를 돌보고, 매일 양 떼를 세며, 끊임없이 포도밭과 과수원, 밭과 정원을 가꾸느라 하루가 아무리 길어도 이 일들을 다 하기에는 부족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어디서, 언제 하나님을 기억할 시간을 가질 수 있겠는가? 언제 시편을 부를 수 있겠는가? 언제 기도할 수 있겠는가? 어떤 시간을 할애하여 신을 묵상하는 데 자신을 단련할 수 있겠는가? 설령 수많은 일 사이에서 가끔 그럴 기회를 찾는다 해도, 그의 생각이 자신이 많은 걱정과 돌봄을 기울이는 일들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채라면, 어떻게 주님께 순수한 기도를 드릴 수 있겠는가? 어제와의 차이를, 더 나아졌는지 더 나빠졌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어떻게 정욕의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겠는가? 서로 다양하게 뒤바뀌며 관찰 자체를 어렵게 만드는 생각들의 얽힘을 어떻게 찾아낼 수 있겠는가? 아니면 낮에는 일들이, 밤에는 그 일들에 대한 걱정이 너를 짓누르며, 쉼의 시간을 고통의 시간으로 만드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는가? 왜냐하면 그때 기억은 — 누가 경계를 침범했는지, 누가 열매에 해를 끼쳤는지, 누가 관개용 수로를 막았는지, 누가 목초지를 황폐화시켰는지, 누가 다른 어떤 모욕을 가하고 있는지, 그리고 각자가 어떻게 고집을 부리고 다투는지를 떠올리게 함으로써, – 그로 인해 영혼의 자극적인 힘을 광란으로 몰아넣어 복수를 부추기며, 잠과 안식을 취할 시간을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큰 침묵과 긴 여유 시간을 필요로 하고, 부분적으로는 모든 근심으로부터의 해방을 가져다주는 기도조차 할 수 없게 만듭니다(2, 142–144).

 

4. 분노에 대하여

1. 분노는 격렬한 정서로, 지혜를 갖춘 자조차도 쉽게 화나게 하며, 영혼을 야수처럼 만들고 (우호적인) 대화를 피하게 만든다.

2. 거센 바람도 기둥을 흔들지 않듯이, 분노하지 않는 영혼은 짜증에 휩쓸리지 않는다.

3. 물은 바람의 기세에 의해 요동치듯, 성미가 급한 자는 무모한 생각에 휩쓸린다.

4. 성미 급한 승려는 사막의 멧돼지와 같아서, 누군가를 보면 이를 갈며 노려본다.

5. 안개가 짙어지면 공기가 탁해지고, 짜증의 움직임은 성미 급한 이의 마음을 거칠게 만든다.

6. 몰려온 구름이 태양을 가리는 것처럼, 원한을 품는 생각은 마음을 어둡게 한다.

7. 동물원의 사자는 끊임없이 문고리를 흔들어대고, 성미 급한 이는 방 안에서 분노 어린 생각을 곱씹는다.

8. 잔잔한 바다는 보기 좋은 광경이지만, 평온한 마음의 상태만큼 즐거운 것은 없다.

9. 잔잔한 바다에서는 돌고래들이 뛰놀고, 평온한 마음의 상태에서는 신성한 생각이 솟아난다.

10. 오래 참는 수도사는 조용한 샘과 같아서 모든 이에게 기분 좋은 마실물을 제공하지만, 성미 급한 자의 마음은 언제나 요동쳐 목마른 이에게 물을 주지 않는다. 설령 준다 해도 탁하고 마실 수 없는 물일 뿐이다.

11. 성미 급한 자의 눈은 흐리고 붉으며, 마음의 동요를 드러내나, 인내심 깊은 자의 얼굴은 평온하고, 눈빛은 온화하며 똑바로 바라본다.

12. 온유한 사람의 온유함은 하나님 앞에 기억되며(시 131:1), 분노하지 않는 영혼은 성령의 성전이 된다.

13. 그리스도는 오래 참는 자의 영 안에서 고개를 숙이시며, 온유한 마음은 성삼위의 거처가 된다.

14. 여우들은 원한을 품은 영혼 속에 살며, 짐승들은 동요된 마음속에 숨어 있다.

15. 정직한 사람은 수치스러운 피난처를 피하고, 하나님께서는 원한을 품은 마음을 피하신다.

16. 떨어진 돌이 물을 흐트러뜨리듯, 악한 말이 사람의 마음을 흐트러뜨린다.

17. 네 영혼에서 분노 어린 생각을 떨쳐내고, 네 마음에 짜증이 자리 잡지 못하게 하라. 그리하면 기도할 때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18. 타들어가는 짚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눈을 괴롭히듯이, 원한을 품는 마음도 기도할 때 마음을 괴롭힌다.

19. 분노하는 자의 생각은 독사의 산물로서, 그것을 낳은 마음을 갉아먹는다.

20. 화가 난 자의 기도는 역겨운 연기와 같고, 분노한 자의 찬송은 듣기 싫은 소리이다.

21. 원한을 품은 자의 예물은 구더기 낀 제물이라, 그가 정결의 제단에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라.

22. 화가 난 자는 불안한 꿈을 꾸며, 분노한 자에게는 짐승들의 습격이 꿈에 나타난다.

23. 인내심 깊은 사람은 환상 속에서 거룩한 천사들의 회중을 보며, 원한을 품지 않는 사람은 영적인 말씀을 실천하며, 밤에는 신비의 해답을 받아들인다.

 

* * *

24. 악마들은 우리가 모욕을 당했을 때 격분하지 않는 것을 보게 되면, 침묵 속에서 우리를 공격하여 우리 안에 있는 주권자(이성)를 자극하려 한다. 이는 우리가 대면했을 때 평화를 유지했던 상대방들에 대해, 그들이 우리 곁에 없을 때 마음속으로 반항하게 만들기 위함이다(1, 229).

25. 어떤 불만 사항으로 인해 형제와 벌어진 논쟁이나 다툼이 평화롭게 끝났을 때, 스스로를 잘못한 자로 여기라. 그래야 마음속의 고요함 속에서 생각들의 갈등을 겪지 않게 될 것이니, 그중 일부는 모욕의 하찮음을 강조하며, 애초에 거기서 멈춰 설 가치조차 없었다고 책망할 것이고, 다른 생각들은 그 중요성을 부각시키며, 그에 대해 똑같은 모욕으로 보복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만들 것이다.

26. 공동 생활하는 형제들 중 누군가가 심한 분노로 인해 괴로워할 때, 그때 생각들은 그들 앞에서 은둔하며 사는 이들을 달래기 시작하여, 형제들에게서 너그러운 인내심을 빼앗은 것처럼, 그들을 사랑의 길에서도 멀어지게 하려 한다.

27. 화를 너그러운 인내로, 슬픔을 사랑으로 물리치는 자는, 두 가지 미덕으로 두 마리의 사나운 짐승을 물리치는 것이다.

28. 화를 낸 이에게 무릎을 꿇고 분노를 그치도록 간청하는 자는, 한 번에 두 사람 모두를 분노에서 멀어지게 한다.

29. 분노하는 자들을 화해시키는 자는 분노의 정신 그 자체를 이기는 것이다.

30. 평화를 위해 화난 사람을 참아내는 자는 참으로 평화의 아들이다 (1, 230).

31. 온유하고 싸움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도록 스스로를 준비하라: 사람들에게는 온유하고, 우리의 원수에게는 싸움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라. 왜냐하면 (고대의) 뱀과 적대적으로 맞서 싸우는 것이야말로 분노를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1, 235).

32. 온유한 자의 온유함은 바로 사랑으로 형제에게 너그러움을 베풀고, (그를 향해 분노하는) 악한 생각과는 싸우는 데에 있다.

33. 온유한 자는 또한 싸움을 좋아해야 하며, 온유함을 악의적인 생각에까지 확대하지 말고, 본성상 이웃에게까지 싸움을 확대하지 말아야 한다.

34. 분노를 본성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비본성적인 것으로 바꾸지 말라. 즉, 뱀과 같이 되어 형제에게 분노하지 말고, 악의적인 생각에 동조하여 그 뱀과 한패가 되지 말라 (1, 236).

35. 온유한 사람은 모욕적인 일이라도 참아내더라도 사랑을 버리지 않으며,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덮어 주고, 자비를 베풀며, 모든 것을 참아 낸다”(고린도전서 13, 4. 7).

36. 사랑의 일이 오래 참는 것이라면, 분노로 형제를 대적하는 것은 사랑의 일이 아니다.

37. 분노는 슬픔과 적의를 불러일으키지만, 사랑은 이 세 가지를 모두 몰아낸다.

38. 사랑에 대한 확고한 근거가 있다면, 너를 모욕하는 말보다 사랑에 더 주의를 기울여라.

39. 사랑의 미덕을 얻은 자는 악한 자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정욕을 정복한다.

40. 성 삼위일체로부터 이 세 가지 덕, 즉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지닌 자는, 마치 포탑처럼 덕의 탑들로 요새화된 삼중 성벽이 될 것이다.

41. 다른 이들의 악담에 상처를 받으면서도, 그 근원을 마귀에게 돌리지 않는 자는, 오히려 자신의 영혼이 그러한 악담에 상처받아 무너짐으로써, 원수가 자신에게 화살을 준비하도록 더욱 부추기는 것이다 (1, 251).

42. 가장 심한 비방이나 심한 모욕을 당하더라도 원한을 품지 말고, 오히려 축복하라 (1, 252).

43. 악마들에게 원한을 품는 자는 사람들에게 원한을 품지 않으나, 형제에게 원한을 품는 자는 악마들과 화해하는 자이다.

44. 분노와 증오는 마음의 불길이며, 원한을 품지 않는 영혼들은 영적인 이슬로 적셔진다.

45. 불타는 숯이 불꽃을 뿜어내듯이, 원한을 품은 영혼도 악의적인 생각을 뿜어낸다.

46. 전갈에 물린 것이 가장 극심한 고통을 일으키듯이, 원한을 품은 영혼도 가장 쓰라린 독을 품고 있다.

47. 모욕을 당한 다윗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베사의 복수심마저 막아냈습니다(열왕기하 16, 10). 그러니 너도 모욕을 당할 때, 모욕으로 갚지 않을 뿐만 아니라, 너를 대신해 복수하려는 자마저 달래야 합니다(1, 228).

48. 모욕을 인내로 견디고, 입술로 분노의 문을 닫아라. 이것이 네게 성공을 가져다줄 것이다.

49. 위협하는 자들에게는 아예 아무 대답도 하지 말고, 침묵으로 불길을 뿜는 입을 막아라.

50. 네 턱에 고삐를 물면, 너는 너를 위협하고 모욕하는 자들에게 가장 예리한 고통을 안겨줄 것이다.

51. 너는 침묵함으로써 모욕에 휩쓸리지 않을 것이며, 너를 모욕하는 자는 네가 그의 무례함을 얼마나 너그럽게 참아내는지 보고, 네 침묵에 크게 상처를 입을 것이다.

 

5. 슬픔에 대하여

1. 슬픔에 잠긴 수도사는 영적 기쁨을 알지 못한다. 슬픔은 영혼의 침체이며, 분노 어린 생각의 결과이다. 분노는 보복을 원하기 때문이며, 보복에 실패하면 슬픔이 생겨난다.

2. 슬픔은 사자의 입과 같아서, 슬픔에 잠긴 이를 쉽게 삼켜 버린다.

3. 슬픔은 마음속의 벌레와 같아서, 그것을 낳은 어머니를 갉아먹는다.

4. 어머니는 아이를 낳을 때 고통을 겪지만, 낳고 나면 그 고통에서 해방된다. 그러나 슬픔은 아이를 낳는 동안에도 큰 고통을 일으키며, 낳은 후에도 그 고통이 줄어들지 않는다.

5. 슬픔에 잠긴 수도사는 영적인 기쁨을 알지 못하니, 마치 심한 열병에 시달리는 자가 꿀의 맛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6. 슬픔에 잠긴 수도사는 마음을 관상에 집중시킬 수 없으며, 결코 순수한 기도를 올리지 못한다. 슬픔은 모든 선한 일에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7. 발에 묶인 족쇄는 빠른 행진을 방해하고, 슬픔은 관상에 걸림돌이 된다.

8. 야만인들에게 사로잡힌 자는 쇠사슬에 묶이고, 정욕의 포로인 자는 슬픔에 묶인다.

9. 다른 정욕이 없을 때 슬픔은 힘을 잃으며, 묶는 것이 없을 때 족쇄도 묶지 못한다.

10. 슬픔에 얽매인 자는 정욕에 패배한 것이며, 자신의 패배를 드러내는 증거로 족쇄를 차고 다닌다. 왜냐하면 슬픔은 자만심에 찬 욕망이 충족되지 않았을 때 생기는 결과이며, 그러한 욕망은 모든 정욕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11. 욕망을 이긴 자는 정욕을 이긴 것이며, 정욕을 이긴 자에게는 슬픔이 지배하지 못한다.

12. 절제하는 자는 먹을 것을 얻지 못했다고 슬퍼하지 않으며, 정결한 자는 부끄러운 방탕을 저지르지 못했다고 슬퍼하지 않으며, 분노하지 않는 자는 복수하지 못했다고 슬퍼하지 않으며, 겸손한 자는 인간의 존경을 받지 못했다고 슬퍼하지 않으며, 탐욕이 없는 자는 실패했다고 슬퍼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 안에 있는 그러한 모든 욕망을 완전히 소멸시켰기에 슬픔을 느끼지 않는다. 무욕한 자에게는 슬픔이 상처를 주지 않으니, 마치 갑옷을 입은 자에게 화살이 꿰뚫지 못하는 것과 같다.

13. 전사에게는 방패가, 도시에는 성벽이 안전을 보장해 주지만, 수도사에게는 방패와 성벽보다 더 큰 안전을 무감정이 보장해 준다. 방패는 종종 빠르게 날아오는 화살에 뚫리기도 하고, 성벽은 수많은 전사들에 의해 무너질 수 있지만, 무감정은 슬픔에 굴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14. 정욕을 이긴 자는 슬픔을 이긴 것이나, 정욕의 달콤함에 굴복하는 자는 그 속박을 피할 수 없다.

15. 자주 슬퍼하면서도 스스로를 무욕하다고 여기는 자는 건강한 척하는 병자와 같다. 병자는 얼굴빛으로 드러나듯이, 욕망에 사로잡힌 자는 슬픔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16. 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슬픔이 많으나, 세상의 모든 것을 경멸하는 자는 언제나 즐겁다.

17. 재물을 탐하는 자는 손실을 입으면 쓰라린 슬픔에 잠기지만, 재물을 경멸하는 자는 근심 없이 산다.

18. 명예를 탐하는 자는 수치를 당하면 슬퍼하지만, 겸손한 자는 그것을 동행자로 받아들인다.

19. 제련로는 정제되지 않은 은을 정화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슬픔은 죄 속에 있는 마음을 정화한다.

20. 자주 녹이면 납이 줄어들듯이, 세속적인 슬픔은 정신을 약화시킨다.

21. 어둠은 눈의 활력을 앗아가고, 슬픔은 마음의 관조력을 무디게 한다.

22. 물의 깊은 곳에는 햇빛이 닿지 않듯이, 슬픔에 잠긴 마음에는 명료한 사색의 빛이 비치지 않는다.

23. 모든 사람에게 해돋이는 즐겁지만, 슬픔에 잠긴 영혼은 그것조차 달콤하게 느끼지 못한다.

24. 황달이라는 병은 미각을 마비시키고, 슬픔은 영혼의 감각을 앗아간다.

25. 세속적인 쾌락을 경멸하는 자에게는 슬픈 생각이 그를 괴롭히지 않는다.

 

* * *

26. 네 안에 있는 삼위일체(즉, 영, 영혼, 육체)를 평화의 유대로 결합시킬 때, 신성한 삼위일체의 계명에 따라 자기 안에서 하나가 된 자로서,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마태복음 5,9)는 말씀을 듣게 될 것이다. (1, 230).

27. 이 평화의 결합은 위대하니, 그와 함께 더 높은 선들을 관조하도록 마음의 눈을 밝혀 주는 기쁨도 결합되기 때문이다.

28. 만약 우리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평화를 이루는 기쁨을 얻게 된다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닥치는 슬픔들을 쉽게 물리치고, 영혼을 삼키려 하며 특히 슬픔 속에서 영혼을 공격하는, 포효하는 슬픔의 악마가 우리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낙담의 영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여, 둘이서 힘을 합쳐 영혼을 더욱 어둡게 하고 그 수고를 헛되게 만들려 한다.

29. 세상의 기쁨이, 슬픔을 쫓아내고, 분노를 잠재우며, 증오를 물리치고, 복수심을 없애고, 낙담을 흩어뜨리며,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는 것이 우리 마음에 새겨진 법이 되게 하소서 (1, 231).

30. 평화로운 온화함 속에 숨어 있는 이 기쁨은 미덕의 바다로서, 십자가로 대적하는 악마의 무리를 침몰시키는 것이다.

31. 또한 이 기쁨과 반대되는, 즉 모호한 기쁨이 있다는 것도 알아두라. 그림자에 속아 둘을 혼동하지 말라. 악마들은 영적 은사까지 위장하여, 유령으로 마음을 오도함으로써 정신이 혼미해지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영적인 기쁨은 어떤 외적인 이유 없이 찾아오며, 하나님을 향한 슬픔 속에서 지극히 고귀한 인도자를 발견한다.

32. 하느님을 향한 슬픔은 눈물로 영혼을 새롭게 하고, 다가오는 죽음과 심판에 대한 세심한 염려를 심어주며, 조금씩 그것들을 갈망하며 기다리도록 가르친다(1, 232).

33. 이루어지지 않은 소망은 슬픔을 낳지만, 기도와 감사는 그 슬픔을 시들게 한다.

34. 다투는 사람들 사이에는 중재하는 슬픔이 흐른다. 그들 중 누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 격정에서 벗어나 다른 이에게 사과하며 손을 내민다면, 그는 그 쓰라린 슬픔을 쫓아낼 것이다.

35. 슬픔은 영혼과 육체의 병이 되기도 한다. 슬픔은 영혼을 사로잡고, 육체는 그 자리에 남겨둔 채 말라버리게 한다.

36. 슬픔은 불쾌한 일들(재앙, 비탄, 근심)에서 비롯되며, 슬픔으로부터는 음울한 기분(흔히 말하는 ‘기분이 안 좋다’는 것)이 생기고, 이 둘 모두로부터는 무의미한 투덜거림(모든 것에 대한 불평)이 생겨난다.

37. 슬픔과 우울한 기분을 누그러뜨리고 싶다면, 너그러운 사랑을 품고 악의 없는 기쁨으로 자신을 감싸라.

38. 슬픔 속에서는 무엇보다도 감사하라. 왜냐하면 그 슬픔을 통해 중보의 은혜가 더 뚜렷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감사함으로 네게 닥친 슬픔에서 오는 우울함을 몰아내면, 용기 있는 너그러움의 눈부신 아름다움을 흐리지 않을 것이다.

 

6. 낙담에 대하여

1. 낙담은 영혼의 쇠약함이며, 쇠약해진 영혼은 본성에 따라 마땅히 가져야 할 것을 잃어버린 채, 유혹에 맞서 용감하게 견디지 못한다.

2. 건강한 몸에 음식이 필요한 것처럼, 용기 있는 영혼에게는 유혹이 필요하다.

3. 북풍이 식물을 자라게 하듯, 유혹은 영혼의 인내심을 단련시킨다.

4. 물이 없는 구름은 바람에 휩쓸려 가지만, 인내심이 없는 마음은 낙담의 기운에 휩쓸려 간다.

5. 봄 이슬은 밭의 열매가 자라게 하고, 영적인 말씀은 영혼의 성품을 고양시킨다.

6. 낙담의 영은 수도사를 그의 거처에서 쫓아내나, 인내를 가진 자는 언제나 침묵 속에 머무른다.

7. 낙담한 자는 병자 방문을 밖으로 나가는 핑계로 내세우지만, 실상은 그 속에 자신의 목적을 품고 있다.

8. 낙담에 빠진 수도사는 봉사에 소홀하며, 이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을 계명으로 여긴다.

9. 약한 식물은 산들바람에도 꺾이고, 방랑에 대한 생각은 낙담한 이를 쉽게 휩쓸어 간다.

10. 단단히 뿌리내린 나무는 바람의 세기에 꺾이지 않듯이, 낙담은 굳건해진 영혼을 흔들지 못한다.

11. 방랑하는 승려는 메마른 사막의 나뭇가지와 같다. 방에 잠시 머물다 보면, 또다시 마지못해 어딘가로 달려간다.

12.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는 식물은 열매를 맺지 못하듯, 방랑하는 수도사는 덕의 열매를 맺지 못한다.

13. 병자는 한 가지 음식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우울한 수도사는 한 가지 일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14. 쾌락을 좇는 자에게는 아내 한 명으로도 충분하지 않고, 낙담한 승려에게는 방 하나만으로는 부족하다.

15. 의기소침한 사람의 눈은 끊임없이 문을 향하고, 그의 마음은 방문객을 갈망한다. 문이 삐걱거리면 그는 벌떡 일어나고, 목소리가 들리면 창밖을 내다보며, 지루해질 때까지 그곳에서 떠나지 않는다.

16. 우울한 사람은 책을 읽다가 자주 하품을 하고, 잠이 들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얼굴을 비비고, 팔을 뻗으며 몸을 쭉 뻗고, 책에서 눈을 돌려 벽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려 조금 읽은 뒤, 페이지를 넘기며 단어의 끝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하며, 페이지 수를 세고, 전체 장 수를 계산해 보며, 필체와 장식을 헐뜯다가, 마침내 책을 접어 머리 밑에 베고 잠이 들지만, 그 잠은 그리 깊지 않다. 배고픔이 이미 그의 영혼을 괴롭히기 시작하여,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신경 쓰게 만들기 때문이다.

17. 우울한 수도사는 기도하기를 게을리하며, 결코 기도문을 끝까지 읊지 않는다.

18. 병자가 무거운 짐을 견디지 못하는 것처럼, 낙담한 자도 하나님의 일을 꼼꼼히 수행할 수 없다. 병자는 육체의 힘이 쇠약해진 반면, 낙담한 자는 영혼의 힘이 고갈되었기 때문이다.

19. 낙담은 인내로 치유되며, (의욕이 부족하더라도) 하나님의 두려움으로 인해 온갖 자기 절제를 다해 자신의 일을 행하는 것이다.

20. 어떤 일을 하든지 스스로 분량을 정하고, 끝내기 전에는 그만두지 마라. 또한 분별 있게 그리고 열심히 기도하라. 그러면 낙담의 영이 너에게서 도망칠 것이다.

 

* * *

21. 네 모든 수고 속에서 용감한 인내가 모든 것을 이끌게 하라. 왜냐하면 낙담은 온갖 악의를 품고 너를 대적하여 서 있으며, 네 수고를 지켜보며 그 모든 것을 시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중 어느 하나라도 인내로 굳건히 다져지지 않은 것을 발견하면, 그것을 견딜 수 없을 만큼 무겁게 만든다(1, 233).

22. 예배 중에 낙담의 영이 너를 덮칠 때면, 시편 찬송이 부담스럽다고 영혼에게 속삭이고, 그 열심에 대항하는 적으로 나태함을 내세우며, 육신에 휴식을 주기 위해 시편 찬송을 서둘러 끝내라고 부추긴다. 마치 육신이 어떤 이유로 인해 매우 지쳐 있는 것처럼 말이다.

23. 밤에 기도회에 참석할 때, 예배 중에 낙담하여 앉지 말자. 그렇지 않으면 악령들이 와서 생각의 쭉정이를 모아 즉시 우리 마음에 뿌릴 것이기 때문이다.

24. 예배 전에 잠에서 깨면, 밝은 생각들로 마음을 채우자. 그리하여 그 생각들에 마음을 맞추고, 맑은 정신으로 나중에 시편 찬송에 임할 수 있도록 하자 (1, 234).

25. 우리의 외적인 사람이 다른 이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자신의 손으로 일하는 것처럼, 내적인 사람도 (자신의 일터에서) 일하여 마음이 생각들로 무거워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생각들은 영혼이 하나님을 향한 생각들로 가득 차 있지 않을 때, 영혼에게 자신의 일을 부과하기 때문이다 (1. 235).

26. 이웃 사랑을 위한 수공예와 같이, 지혜를 위한 정신적 힘을 가꾸어, 전자는 나그네들을 부양하고 나태함을 물리치거나 완전히 몰아내는 데 쓰게 하며, 후자는 관조와 마음속의 생각들로부터의 완전한 정화를 이끄는 길잡이가 되게 하라.

27. 이곳저곳을 떠돌지 말고, 차라리 침묵 속에서 수고에 매진하자. 게으름(과 나태) 때문에 생각이 우리를 지배하게 되기 때문이다(1, 238).

28. 잡념들이 우리를, 이전에 그 유혹으로 인해 사랑하게 만들었던 그 장소로 이동하게 할 때, 그때는 우리를 모든 면에서 변덕스럽고 무익하게 만들기 위해 그 일에 대해 후회하게 만든다.

29. 장소를 옮기는 일은 더 평온한 삶을 위한 것이 아니라, 더 영적인 삶을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1, 239).

30. 인내와 온유함, 사랑은 고난 속에서도 감사한 마음이 되게 하지만, 낙담과 안일함, 자만심은 평온한 삶을 기뻐한다.

 

7. 허영에 대하여

1. 허영은 무분별한 정욕이며, 모든 미덕의 행위에 쉽게 섞여 들어간다.

2. 물 위에 그은 선은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듯이, 미덕을 위한 수고도 허영심에 찬 마음속에서는 사라진다.

3. 가슴속에 감춰진 흰 손은, 숨겨진 행위가 빛보다 더 눈부시게 빛난다.

4. 담쟁이덩굴은 나무를 감싸고 올라가 정상에 이르면 뿌리를 말려 죽이듯이, 허영은 미덕에 접목되어 그것에서 떨어지지 않다가, 결국 미덕의 모든 의미를 빼앗아 버린다.

5. 땅까지 내려오거나 땅에 닿은 포도송이는 쉽게 썩어버리니, 허영에 달라붙은 미덕 또한 망해 버린다.

6. 허영심에 찬 수도사는 무보수 노동자나 다름없어, 수고를 치르지만 보상은 받지 못한다.

7. 구멍 난 자루는 그 안에 담긴 것을 간직하지 못하듯이, 허영심은 미덕이 주는 보상을 헛되이 망가뜨린다.

8. 허영심 많은 자의 절제는 화로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같으니, 둘 다 공중으로 흩어진다.

9. 바람이 사람의 발자국을 지워버리듯, 허영심은 자선을 헛된 것으로 만든다.

10. 돌은 아무리 세게 던져도 하늘에 닿지 않듯이, 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자의 기도도 하늘에 오르지 못한다.

11. 허영은 암초와 같다. 그 암초에 부딪히면 화물을 잃게 된다.

12. 분별 있는 사람은 보물을 숨기고, 선한 마음을 가진 수도사는 덕행의 결실을 숨긴다.

13. 허영은 지붕 위에서 기도하라고 부추기지만, 허영과 싸우는 자는 자신의 작은 방에서 기도한다.

14. 무모한 사람은 자신의 부를 온 세상에 알리며, 많은 이들이 자신에게 악의를 품게 만든다. 그러나 너는 강도들이 도사리는 길을 갈 때, 평화의 성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안전하게 재물을 누리기 전까지는 네가 가진 것을 숨겨라.

15. 허영심 많은 자의 미덕은 상한 제물과 같으니, 그러한 제물은 하나님의 제단에 바쳐서는 안 된다(레위기 22:22).

16. 낙담은 마음의 힘을 약화시키지만, 병든 자의 허영심은 그를 건강하게 만들고, 노인을 청년보다 더 강하게 만든다. 단, 그 일이 많은 이에게 목격될 때에만 그러하다. 그럴 때 금식도, 철야기도도, 기도도 수월해진다. 많은 이들의 칭찬이 열의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17. 인간의 명성을 위해 수고를 저버리지 말고, 하찮은 칭찬을 위해 장차 얻을 영광을 포기하지 말라. 인간의 명성은 흙으로 돌아가고 그 소문은 땅에서 사라지지만, 덕의 영광은 영원히 남기 때문이다.

 

* * *

18. 참된 덕은 사람의 칭찬을 구하지 않으며, 악의 어머니인 명예(1, 226)를 즐기지 않는다.

19. 영예의 시작은 남의 눈치를 보는 것이며, 그 끝은 교만이다.

20. 영예를 탐하는 자는 스스로를 높이 여길 뿐이며, 그런 사람은 모욕을 견디지 못한다.

21. 덕을 쌓는 수고가 너에게 영광이 되고, 억지로 얻은 칭찬은 수치로 여겨지기를 바란다 (1, 227).

22. 육신으로부터 명예를 구하지 말라. 너는 육신의 정욕을 버리기를 갈망했으니, 더 나은 것을 추구하라. 그러면 그것이 네게 영광이 될 것이다.

23. 존경을 받고자 하는 자는 자신보다 더 큰 영광을 누리는 이를 시기하며, 그 시기심에 증오까지 더한다.

24. 명예를 향한 강한 욕망에 사로잡힌 자는 누구도 자신보다 앞서기를 용납하지 않으며, 누구에게도 뒤처진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스스로 으뜸이 되기를 탐한다.

25. 그는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이 자신이 없는 곳에서도 존경받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며, 그 사람의 업적에 대한 명성을 대개 아무 의미 없는 것으로 치부한다.

26. 명예를 탐하는 자에게 모욕은 가장 잔혹한 상처이며, 그는 모욕한 자에 대한 증오를 피할 수 없다.

27. 명예를 탐하는 자는 잔인한 여주인의 노예가 되어, 자만과 시기, 질투, 그리고 온갖 악령 무리들에게 팔려간다. 그러나 겸손으로 야망의 영을 무찌르는 자는 온 군단의 악마들을 쫓아낸다.

28. 겸손함으로 스스로를 모든 이의 종으로 삼는 자는, 스스로를 낮추시고 종의 형상을 취하신 분(빌 2,7)과 같아진다.

29. 자신을 작은 잣대로 평가한다면,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지 않게 될 것이다.

30. 눈물로 마음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사람은 자신의 수고를 높이 평가하지 않을 것이다(1, 228).

31. 악령들은 종종 겸손한 이들에게 모욕과 비방을 부추겨, 그들이 당할 이유 없는 경멸을 견디지 못하고 겸손함을 버리도록 한다. 그러나 겸손함 속에서 불명예를 용감하게 견뎌내는 자는, 바로 그로 인해 지혜의 높이로 더욱 승화된다.

32. 인간의 칭찬에 대한 생각조차 마음속에서 몰아내어, 그로 인해 허영심이라는 과시욕을 그 생각이 생기기 전에 미리 물리쳐라.

33. 정욕의 원인과 맞서 싸워 이를 이겼을 때, 교활한 생각이 너를 높이게 두지 말라. 그것을 믿고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하라. 오히려 네가 수고한 일에서 결점을 찾아내려 노력하여, 네 성공이 내면의 적들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하라 (1, 230).

34. 어떤 이들은 성공으로 인해 칭찬을 받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게을러졌다. 그 결과 칭찬은 사라지고, 수고도 헛되이 끝났다.

35. 어떤 이들은 자신의 업적에 대한 오만함으로 마음이 굳어져, 스스로를 위대한 존재로 꿈꾸었다. 그 사이 양심은 점점 더 굳어지고, 칭찬을 갈망하는 병은 심해졌으며, 생각들은 영혼의 시선을 그 상처에서 돌리게 하여, 칭찬이라는 가면 아래에서 그들의 모든 수고를 훔쳐갔다 (1240).

36. 죄에 대해 진심 어린 회개를 드릴 때, 악마들은 네 회개의 업적을 과대평가하여 죄를 경시하고, 종종 망각으로 덮어 버리거나, 죄가 용서받았다는 생각을 심어주어, 수고를 게을리하게 하고 네가 더 이상 자신의 타락을 쓰라리게 애도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게 만든다.

37. (고대의) 뱀이 가진 가장 날카로운 무기는 우리의 모든 수고의 열매를 무너뜨리는 허영이다. 그러나 미리 그것에 대항하는 은밀한 선행이라는 전략을 세우는 자는, 마귀의 머리를 베어 버릴 수 있는 지경에 가까워진다(1, 241).

38. 수행의 결실을 침묵의 인장으로 감추어라. 혀를 통해 밖으로 드러나면, 그 결실이 명성에 의해 훔쳐지지 않도록 하라.

39. 수행의 길을 실천적으로 걸어가는 동안 네 혀를 감추어라(즉, 혀 대신 행적이 말하게 하라); 왜냐하면 그럴 때 침묵 속에서도 네 삶에 대해 믿을 만한 증인인 동료들, 곧 네 수고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현존하는 수고들이 그를 증언해 준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혀로 스스로를 증언할 필요가 없다.

40. 어떤 이들은 수고의 짐을 내려놓고, 과거의 업적을 내세워 자신의 나태함을 감추려 하며,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일들을 마치 명백한 증인인 양 불확실하고 설득력 없이 제시한다.

41. 네 죄를 사람들에게 숨기듯이, 네 수고도 그들에게 숨겨라. 너는 모욕과 멸시를 당하지 않기 위해 네 부끄러운 일들을 드러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만, 사실 그것은 네 영혼에 유익한 일이다. 자신의 수고도 드러내는 것을 경계하라. 그래야만 인간 사랑이라는 죄가 네 영혼에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다. 오직 하나님 한 분께만 부끄러운 실족을 드러낸다면, 사람들이 그것을 승리의 정점으로 여기지 않도록, 그 실족에 맞서 싸운 과정을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마라.

42. 어떤 이들은 백성들 사이에서 나쁜 행실로 악명을 얻은 뒤, 경건한 삶을 흉내 내곤 하는데, 이는 자신의 죄악된 실족을 금욕적인 수고로 애도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비난의 소문을 덮어 버리기 위함이다. 그러나 오직 명성만을 위해 경건한 행위에 손을 대는 자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다(1. 245. 6).

43. 수행 생활에서 창백한 얼굴로 두각을 나타내는 자들은, 사람들의 칭찬이 닥치기 전에, 즉 아직 사람들을 만나기도 전에 원수가 칭찬을 갈망하는 생각을 심어놓을 때, 그 칭찬을 미리 스스로 멀리해야 한다(1. 249).

44. 포도주와 기름, 그 밖의 사치스러운 것들을 절제하며 오랜 시간을 보내다 보면, 칭찬을 바라는 생각들이 시간을 계산하며 육신을 위해 수고를 줄이라는 생각을 심어줄 것이다. 이러한 악의적인 계산가들에게는 그들의 의도를 무너뜨리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모든 말을 되받아쳐라. 그리하여, 악마들과의 싸움에서 자신의 수고를 내면의 생각들로 자축하던 한 형제는 시편의 말씀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를 비웃으며 ‘좋다, 좋다’라고 말하던 자들이 즉시 돌아오게 하소서”(시 69:4).

45. 허영이라는 악마의 옷을 더 뚜렷이 입지 않도록 아름다운 옷을 차려입지 말라. 옷의 아름다움이 네가 미덕의 옷을 입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금 장신구와 같은 수행의 수고가 네 영혼의 옷차림이 아름답음을 증언하기 때문이다 (1, 256).

46. 활동적인 삶과 관조적인 삶을 경험한 후, 생각을 분별하는 기술을 경험이 부족한 이들에게 전수하는 사람은, 그러한 지식으로 인한 자만심이나 명성을 얻기 위해 그것을 과시하려는 욕망이 스며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47. 육체적 고행을 감당하며 자신에게 가장 가차 없이 수고하는 자는, 칭찬을 받기 위해 자신을 지치게 해서는 안 되며, 영광으로 인해 교만해져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악마들이 이러한 수고와 영광으로 그의 영혼을 교만하게 만들어, 자신에 대한 가차 없음을 더욱 강화시킨 뒤, 그가 더욱 교만해지도록 더 큰 고행을 감당하게 유혹할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그들은 어떤 이에게 내면 속에서 다음과 같은 대화를 생각으로 이끌어낸다. ‘누구는 자신을 아끼지 않고 수련하여 그토록 위대한 명성을 얻었으니, 죽은 후에도 여전히 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너도 마찬가지로 수련의 가장 높은 경지에 올라 명성을 얻고, 네 이름이 위대해져 죽은 후에도 큰 찬사와 함께 회자되게 하라 (1, 268).

48. 또 어떤 이는 꿈속에서 스승의 자리에 올려놓고, 마치 그가 말씀을 전하는 것처럼, 그리고 마치 세간의 소문이 수행의 수고와 다방면에 걸친 지식으로 명성을 떨친 모든 이들보다 그를 더 높이 평가하는 것처럼 묘사한다. 이를 통해 그들은 그 사람 안에 경쟁심뿐만 아니라, 그 업적이 칭송받고, 행적은 경이로울 뿐만 아니라 다방면에 걸친 지식 또한 놀라울 정도로 뛰어난 모든 이들에 대한 시기심까지 불러일으킨다 (1, 269).

49. 때로는 그들이 육체의 욕망을 잠잠하게 하고, 교활한 의도를 품고 내면의 불순한 생각들을 끌어내어, 수행자가 자신의 엄격한 생활로 음탕한 영을 완전히 이겼다고, 자신의 마음이 정화되어 성자들의 거룩함에 가까워졌다고, 심지어 거룩함의 정점에 올랐다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들은 종종 그러한 사람에게 자신의 공로를 스스로 자랑하게 만듭니다. “나는 이것저것을 이루었고, 이렇게 저렇게 수련하며 자신을 고생시켰다”라고 말하게 하면서, 그러나 “나 자신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은혜”라고 덧붙이는 것은 허락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들은 그가 자랑하도록 강요받는 일에서 하나님을 도우미로 고백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는 그가 마치 자신의 노력으로 모든 수행을 이룬 것처럼, 그에 대한 모든 찬양을 자신에게 돌리게 하기 위함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음으로써, 그는 신성모독의 깊은 수렁에 빠져, 무분별하게 스스로를 자력으로 이룬 자라고 자만하게 된다.

50. 마음속에서 이러한 명예를 탐하는 생각이 들리는데도 마음이 그에 맞서지 않을 때, 수도사(특히 은둔자)는 정신이 손상되는 데서 멀지 않은 상태에 이르게 된다. 그때 이성은 혼란에 빠질 위험에 처하게 되는데, 이는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악마의 꿈 때문이거나, 기도 중에 나타나는 환영 때문이거나, 혹은 어떤 밝은 모습으로 나타나는 악마들 때문일 수 있다. 왜냐하면 사탄 자신도 우리를 미혹하기 위해 때로는 빛의 천사로 변장하기 때문이다; 그때 그는, 만일 네가 그에게 경배하면, 이런저런 은사를 주거나, 마치 새로운 엘리야처럼 불의 병거를 타고 너를 하늘로 데려가겠다고 약속한다. 그리고 이를 믿고 받아들인 자들은 진리에서 벗어나 정신이 타락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를 피하기 위해, 어떤 이유로 사랑으로 수행의 수고를 감당하는지 기억하며, 온갖 경계로 네 마음을 지키라. 그래야 겉으로 드러나는 위업에만 주의를 기울이다가 내면에서 (무의미한) 자만심에 교묘히 사로잡히지 않을 것이다 (1, 270).

51. 선한 일을 행하는 이들에게 주님께서는 권면하시며 말씀하시기를, “기도할 때 네 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히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마태복음 6,6),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자선을 베풀 때, 네 앞에서 나팔을 불지 말라”(– 2)라고 하시며, 남에게 보이려고 선행을 하는 것을 해로운 일처럼 피하라고 명하신다. 그리고 선지자는 “보상을 받으려고 모은 자는 구멍 난 주머니에 모은 것” (하가이 1, 6)라고 말씀하시며, 명예를 탐하는 타락한 목적이 모든 수고(노력과 선행)를 헛되게 만든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마치 구멍 난 주머니를 통해, 겸손한 지혜로 보호받지 못한 마음을 지나가듯이 말입니다. 겸손한 지혜를 지닌 마음은 참으로 보물창고이며 사방에서 견고하게 요새화된 성벽이라, “거기에는 벌레도 썩이지 않고, 녹도 먹지 않으며, 도둑이 파고 들어오지도 않고, 훔쳐가지도 않는다”(마태복음 6:20). ‘벌레’란 내면에서 싹트는 자만심을 뜻하며, 이는 사람 안에 있는 선한 것을 파괴한다. 그리고 ‘도둑’이란 외부에서 들어오는 칭찬을 가리키는데, 이는 무분별한 허영심을 부추겨, 선행을 통해 오랜 수고 끝에 모은 영적 보물을 순식간에 약탈해 간다. 왜냐하면 구더기가 자신이 태어난 물질을 갉아먹고, 도둑들이 벽을 파고들어 정성껏 모은 (물질적인 선)을 훔쳐 가듯이, 선한 행실로 인해 자만심에 사로잡힌 마음은 바로 그 행실의 가치를 파괴하며, 사람들의 칭찬은 가벼운 마음을 파고들어 (내면으로 침입하여) 그곳에 아무런 선한 것도 남기지 않으니, 그것은 밖에서 합법적인 길(문)을 통해 들여온 것이었으나, 그곳에서 귀의 구멍을 통해 그들에 의해 내뱉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이 정욕이 자신을 지배하여, 명예를 탐하는 달콤한 말에 취해, 고된 수고로 얻은 모든 것을 완전히 상실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며, 모두가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어, 중상모략자들이 아직 흙을 파고들기 시작할 때, 그들이 해를 끼치기 전에, 해가 떠오르기 전에, 흙을 파고드는 바로 그 순간에 그들을 타격하여 근절해야 한다. 그래야 생각이 행동으로 이어진다(2, 106–7).

 

8. 교만에 대하여

1. 교만은 타락한 피로 가득 찬 영혼의 종기(부풀어오름)이다. 만약 성숙해지면 터져 나와 큰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2. 번개의 섬광은 천둥의 타격을 예고하고, 교만은 허영의 출현을 예고한다.

3. 교만은 교만한 자를 높은 곳으로 치켜올렸다가, 그곳에서 심연으로 내던진다.

4. 하나님을 떠나 자신의 힘으로 선한 일을 이룬다고 여기는 자는 교만으로 병들게 된다.

5. 거미줄 위에 선 자가 뚫리고 아래로 휩쓸려 가듯이, 자신의 힘에만 의지하는 자도 그렇게 넘어진다.

6. 풍성한 열매는 나무 가지를 땅으로 굽히게 하고, 수많은 미덕은 사람의 교만을 낮추게 한다.

7. 썩은 열매는 농부에게 무용지물이며, 교만한 자의 덕은 하나님께 필요 없다.

8. 장대는 열매로 무거운 가지를 지탱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덕스러운 영혼을 지탱한다.

9. 열매의 무게가 가지를 꺾듯이, 교만은 덕스러운 영혼을 무너뜨린다.

10. 네 영혼을 교만에 내맡기지 말라. 그리하면 끔찍한 환상을 보지 않을 것이니, 교만한 자의 영혼은 하나님께 버림받고 악마들의 기쁨이 되기 때문이다.

11. 교만한 자는 밤에는 수많은 짐승들이 공격해 오는 것을 상상하고, 낮에는 두려운 생각에 당황한다. 잠을 자다가도 자주 벌떡 일어나며, 깨어 있을 때는 새의 그림자조차 두려워한다.

12.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만으로도 교만한 자는 공포에 휩싸이고, 물소리는 그의 영혼을 뒤흔든다.

13.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하나님께 대항하며 그분의 도움을 거부하던 자가, 이제는 하찮은 유령들조차 두려워한다.

14. 교만은 대천사를 하늘에서 쫓아내어, 그가 번개처럼 땅으로 떨어지게 했다. 그러나 사람의 겸손은 그를 하늘로 올려 보내며 천사들과 함께 기뻐할 준비를 시킨다.

15. 사람이여, 네가 먼지와 재에 불과한데도 어찌 그리 높이 올라가 구름 위로 치솟으려 하는가?

16. 네 본성을 보아라. 너는 흙과 재이며, 머지않아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지금은 위엄 있게 보이지만, 잠시 후면 벌레가 될 것이다. 머지않아 썩어버릴 것을 왜 높이 치켜세우는가?

17. 하나님께서 도우실 때 사람은 위대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시면 자신의 본성의 연약함을 깨닫게 된다.

18. 네게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않은 선한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 어찌 남의 것을 마치 자신의 것처럼 자랑하느냐? 어찌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것을 마치 자신의 노력으로 얻은 것처럼 자랑하느냐?

19. 베풀어 주신 분을 인정하고 지나치게 자만하지 마라. 너는 하나님의 피조물일 뿐이니, 창조주로부터 멀어지지 마라.

20. 하나님께서 너를 도우시니, 은혜를 베푸신 분을 부인하지 마라. 네가 삶의 높은 경지에 올랐으나, 너를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니; 덕행에서 성공했으나, 네 안에서 역사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니; 너를 높이신 분을 고백하여, 그 높은 경지에 흔들림 없이 머물 수 있도록 하라.

21. 네 동료가 너와 동일한 본질을 지녔음을 인정하고, 오만함으로 인해 그와의 친족 관계를 부인하지 말라.

22. 그는 낮아져 있고, 너는 높이 올려졌으나, 오직 한 분 창조주께서 둘 모두를 지으셨다.

23. 겸손한 이를 경시하지 마라. 그는 너보다 더 굳건히 서 있으며, 땅 위를 걷고, 쉽게 넘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교만한 자는 넘어지면 산산조각 날 것이다.

24. 교만한 수도사는 뿌리가 없는 나무와 같아서 바람의 세기를 견딜 수 없으나, 교만하지 않은 지혜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와 같아서 그 안에 거하는 자는 안전하다.

25. 풀잎은 바람의 숨결에 높이 솟아오르나, 교만한 자는 광기의 유혹에 휩쓸려 치솟는다.

26. 터진 거품은 허무로 돌아가고, 교만한 자의 기억도 사라질 것이다.

27. 겸손한 사람의 말은 영혼을 달래는 연고와 같으나, 교만한 사람의 말은 허세로 가득 차 있다.

28. 겸손한 자의 기도는 하나님을 감동시키나, 교만한 자의 간구는 그분을 모욕한다.

29. 겸손은 집의 면류관이며, 그 안에 들어간 자를 안전하게 지켜 준다.

30. 덕의 높은 곳에 오르면, 그때야말로 너에게 보호 장치가 절실히 필요하다. 왜냐하면 바닥에 서 있다가 넘어진 사람은 곧 일어설 수 있지만, 높은 곳에서 떨어진 사람은 죽을 위험에 처하기 때문이다.

31. 보석에는 금 테두리가 어울리듯, 겸손한 사람의 품성은 수많은 미덕으로 빛난다.

 

* * *

32. 회개하더라도 네가 넘어졌던 일을 잊지 말라. 그러나 네 죄를 눈물로 기억하여 네가 겸손해지도록 하라. 그래야 겸손해짐으로써 필연적으로 네 교만을 잘라낼 수 있으리라 (1, 240).

33. 마치 심판자인 양 너를 거만하게 만드는 오만한 마음으로 넘어진 자들을 바라보지 말고, 냉철한 마음으로 너 자신을 살피라. 너의 행실을 시험하고 평가하는 이는 바로 너 자신이다 (1, 245).

34. 넘어질 때는 탄식하고, 성공할 때는 교만해지지 마라. 네가 흠잡을 데 없다는 사실로 자만하지 마라. 그래야 화려함 대신 수치심을 입지 않을 것이다.

35. 가장 지혜로운 이들 중 한 사람이 겸손에 대해 이야기하며 다음과 같은 일화를 전하였다. “매우 지혜로운 한 신부가 심한 광기 발작을 일으키고 있던 귀신 들린 자에게 뺨을 맞았다. 그러자 그 신부는 즉시 몸을 돌려 다른 뺨을 내밀며 기꺼이 또 한 번의 타격을 받아들이려 했다. 그때 악마는 번개에 맞은 듯 겸손함에 휩싸여 비명을 지르며 즉시 하나님의 피조물에서 빠져나왔다” (1, 259–60).

36. 땅속 깊은 곳으로 내려가 그곳에서 금을 캐내는 것처럼, 금과 같은 겸손의 경지에 이르는 자들은 그곳에서 미덕을 캐낸다 (1, 266).

37. 성 바오로는 “뒤는 잊어버리고 앞으로 나아갈 것”을 명한다(필리피서 3, 13). 그런 성향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성취한 것으로 자만하기보다는, 목표에 미치지 못한 부족함으로 인해 오히려 겸손해지며, 미완성된 일을 완성하기 위해 정성을 기울이고 이미 끝난 일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미 이루어진 일은 종종 경솔한 자들을 무모함까지 오만하게 만들지만, 아직 이루어져야 할 일은 그것이 끝까지 이루어질지 알 수 없다는 불확실성으로 마음을 겸손하게 하며, 완성되기 전부터 슬픔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덕의 높은 경지에 오른 이들이 자만심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다 행하였을 때, ‘우리는 무익한 종들일 뿐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말하라”(눅 17,10). 비록 의무를 다했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것을 막지는 않지만, 스스로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이는 빚을 갚은 것이지, 자발적으로 드린 선물이 아니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2, 112–13).

38. 교만은 생각을 거만함으로 부풀리고, 모든 사람을 경멸하도록 가르치며, 자신과 같은 피조물을 하찮은 것으로 멸시하게 하여 광기에 이르게 하며, 거창한 생각을 심어주고, 하느님과 동등해지기를 꿈꾸게 하며,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섭리와 보살핌 을 인정하지 않고, 행한 일에 대한 당연한 대가로서 자신이 누리는 모든 은혜를 당연한 대가로 여긴다. 자신이 하는 일과 성공하는 데 있어 하나님의 도우심을 보려 하지 않으며, 어떤 선한 일에도 스스로가 충분하다고 여기고, 자만심에 빠져 모든 것에 힘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전혀 힘이 없다. 그녀는 헛된 자만심으로 부풀어 오른 물방울과 같아서, 조금만 불어주어도 허무로 돌아간다 (2, 184).

 

3. 권면하는 장들

1.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양심의 맑은 목소리에 따라 모든 사람에게 행하라.

2. 네가 매일 행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네 곁에 계신다는 것을 믿으라.

3. 칭찬은 피하고, 수치와 책망은 받아들여라.

4. 선행을 할 때는 기뻐하되, 자만하지 말라. 그래야 안전한 항구에서 난파되는 일이 없으리라.

5. 율법을 지키는 데 더 큰 성과를 거둘수록, 자신이 완전함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더욱 깊이 깨달아야 한다.

6.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에 그 끝을 먼저 살펴라.

7. 밤낮으로 자신의 마지막 날을 바라보라. 그러면 이 세상에 대한 어떤 사랑도 너를 땅에 묶어두지 못할 것이다.

8. 선한 사람들이 경멸하는 사람과 어울리지 마라.

9. 무엇을 하든지, 말하든지, 사색하든지, 누구에게도 해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라.

10. 삶의 꽃에 취하지 마라. 그것은 풀꽃과 같아서, 손만 대도 시들어 버린다.

11. 슬픔 속에서도 감사하라. 그러면 네 죄의 짐이 가벼워질 것이다.

12. 유혹에 맞서 굳건히 버티라. 유혹은 많은 이, 심지어 위대한 이들조차도 (불확실함이나 자제력 부족으로) 드러내 보였기 때문이다.

13.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비난하지 마라. 그것은 만병통치약이기 때문이다.

14. (인간의) 무질서한 삶을 혐오하되, 그 안에서 하나님을 탓하지 말라.

15. 우리 자신을 잘 살피자. 그러면 다른 사람을 정죄하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 자신 안에도 우리가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것과 같은 점이 많기 때문이다.

16. 기도하는 시편이 항상 네 입에 있기를 바라라. 하나님의 이름을 한 번만 불러도 악령들이 도망치기 때문이다.

17. 우리의 기도는 절제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니,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실 것을 그분께 구하지 않도록 하라.

18. 항상 하나님을 기억하라. 그러면 네 마음이 하늘과 같아질 것이다.

19. 눈을 다스려라. 왜냐하면, 그것을 잘 살피지 않으면, 눈은 이리저리 맴돌기 때문이다.

20. 혀를 조심하라. 혀는 종종 숨겨 두는 편이 더 나을 말을 밖으로 내뱉기 때문이다.

21. 율법의 가르침으로 마음을 가꾸어라. 끊임없는 가르침이 마음속의 악한 생각을 뿌리 뽑기 때문이다.

22. 미덕은 숨기되, 네 삶의 증인이 많도록 힘쓰라.

23. 육체의 쾌락을 미워하라. 그것들은 몸과 영혼을 더럽히기 때문이다.

24. 육체에게는 필요한 것만 주고, 정욕이 원하는 것은 주지 마라.

25. 쾌락 속에서 사는 것을 좋아하지 말라. 이는 현세 생활에 얽매이게 하며, 그로 인해 하나님에 대한 원한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26. 세상의 즐거움을 멀리하라. 그것들로 인해 (삶의 길을) 걷는 자들이 미끄러져 넘어지기 때문이다.

27. 재물이 있다면 흩어 버리고, 없다면 모으지 마라.

28. 금식을 무기로, 기도를 성벽으로, 눈물을 정화탕으로 여기라.

29. 네가 무슨 죄를 지었든지, 모든 것을 탄식하며 회상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영혼에 끊임없는 감회가 솟아나기 때문이다.

30. 가난한 자들을 위로하라. 그들은 우리를 향한 재판관의 자비를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31. 성도들의 필요에 동참하라. 그들을 통해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32. 교회에 들어갈 때는 마치 천국에 들어가는 것처럼 하라. 그리고 교회 안에서는 세상의 어떤 것에 대해서도 말하거나 생각하지 말라.

33. 삶에 필요한 것을 적당히 갖추는 것을 필수로 여기되, 그에 대한 돌봄은 하나님께 맡겨라.

34. 선한 수고로 육신을 지치게 하되, 그것이 (그 무게로 인해) 완전히 무너지지 않도록 주의하라.

35. 포도주는 가능한 한 적게 마시라. 마시는 양이 적을수록 마시는 이에게 더 유익하다.

36. 분노를 다스려라. 분노가 도를 넘으면 광란의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37. 병이 났을 때는 의사와 약보다 먼저 기도를 의지하라.

38. 모든 사제를 공경하되, 선한 사제에게 의지하라.

39. 하나님의 집을 사랑하되, 또한 스스로를 하나님의 집으로 가꾸어라.

40. 교회에 자주 다니라. 교회는 우리를 외부의 폭풍과 동요로부터 구해 주기 때문이다.

41. 땅 위의 모든 것은 일시적인 것이니, 그런 것이 네게서 빼앗긴다고 해도 슬퍼하지 말라.

42. 음탕한 생각이 네게 닥칠 때, 사람들 앞에서의 수치심과 하느님께 대한 모욕을 그 생각에 대항하라.

43. 귀와 눈을 막아라. 그것들을 통해 모든 원수의 화살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44. 기도할 때, 마음을 하느님께 향하게 하라. 만일 마음이 산만해져 아래로 내려가면, 다시 그곳으로 돌려보내라.

45. 마음은 끊임없이 생각을 낳지만, 너는 나쁜 생각은 쫓아내고 선한 생각은 가꾸어라.

46. 겸손을 기뻐하라. 겸손이 낳는 높이는 크고 결코 무너지지 않기 때문이다.

47. 육신의 욕망을 억누르기 위해 필요한 만큼만 힘쓰라. 만약 지치면, 쾌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건강을 위해 몸에 휴식을 주라.

48. 나쁜 생각은 다른 생각, 즉 선한 생각으로 몰아내라.

49. 하늘의 축복이 주는 아름다움을 생각하라. 그러면 땅과 세상의 쾌락에 대한 어떤 집착도 네 마음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50. 악한 생각은 마귀가 뿌린 씨앗임을 믿으라. 그러면 그것들은 그칠 것이며, 뿌린 자는 수치를 당할 것이다.

51. 무엇보다도 듣는 것을 조심하라. 듣는 것은 영혼을 산만하고 부주의하게 만들기 때문이며, 부주의한 영혼은 법의 고삐를 쉽게 벗어던지기 때문이다.

52. 영혼은 일과 기도로 나누어져야 한다(즉, 때로는 일에, 때로는 기도에 전념해야 한다); 그러면 마귀가 우리에게 침투할 틈이 별로 없을 것이다.

53. 일을 하려고 손을 뻗을 때, 혀는 찬송하고 마음은 기도하게 하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항상 그분을 기억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54. 모든 일을 기도로 감싸주되, 특히 마음이 의심에 빠지는 것을 느낄 때 더욱 그러해야 한다.

55. 네 손의 일이 세속적이지 않고 신성한 것이 되기를 원한다면, 그 일로 얻은 것은 궁핍한 이들과 나누도록 하라.

56. 성인들이 찾아오는 것을 기뻐하라. 그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타나시기 때문이다.

57. 참된 성도들은 그들의 행실로 분별하라. 모든 나무는 그 열매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58. 성도들을 만날 때마다 항상 그들에게서 무언가를 배우려 노력하라. 그들의 시선과 태도를 유심히 관찰하라. 그 둘 모두 매우 유익하기 때문이다.

59. 마음속으로는 악의를 품지 않도록 힘쓰고, 몸으로는 순결을 지키라. 이는 둘 다 너를 하나님의 성전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60. 너를 창조하시고 심판하실 분, 그리고 네가 그분의 형상으로서 깨끗해지도록 모든 것을 마련해 주시는 분의 성전처럼, 네 성전을 지키라.

61. 세속적인 사람들과의 대화는 생각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그러므로 너 자신은 그들과 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과 대화하는 자들도 그로부터 멀어지게 하라.

62. 네가 비방을 받을 때, 네가 비방을 받을 만한 일을 했는지 살펴보아라. 만약 그런 일이 없다면, 그 비방을 금세 사라지는 연기처럼 여기라.

63. 뉘우치는 마음이 없이는 정욕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마음은 세 가지 절제를 통해 뉘우침에 이르게 되는데, 곧 잠, 음식, 육체의 안식을 절제하는 것을 말한다.

64. 무언가로 인해 상처를 입었다면 인내를 베풀어라. 그러면 그 해악은 상처를 준 자들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65. 부나 명예, 세속적인 권력을 보게 되면, 그것들의 덧없음을 생각하라. 그러면 그 유혹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66. 슬픔을 참아라. 그 안에는 가시덤불 속의 장미처럼 미덕이 싹트고 익어가기 때문이다.

67. 어떤 것도 미덕과 동등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여기지 마라. 미덕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이며, 그분처럼 변함없기 때문이다.

68. 형통한 죄인을 위해 울어라. 의로운 재판관의 칼이 그 위에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69. 모든 악의 근원은 게으름이라 여기라. 게으름은 네가 가진 선한 것들을 앗아가고, 네가 가지지 못한 선한 것들을 얻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70. 악을 행하는 자가 이를 부끄러워하지 않을 때, 그 상처는 더욱 심해지며, 파멸은 절망으로 이어진다.

71.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신실한 자들에게 어떤 복이 예비되어 있는지 생각하라. 그러면 영적인 열매(기쁨)가 곧 네게 임할 것이다.

72. 신실한 자는 모든 사람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왜냐하면 오직 일부 사람 앞에서만 겸손한 것은 거짓된 겸손을 가진 것이기 때문이다.

73. 이웃에 대한 사랑을 그 어떤 것보다 우선시하지 말라. 다만, 그로 인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경시되는 경우는 예외로 하라.

74.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게 누구에게도 집착하거나 편애하지 마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다른 누군가보다 우선시하는 자는, 하나님을 그보다 덜 가치 있는 존재로 여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75. 악한 자들을 옹호하지 말라. 그렇게 함으로써 너는 그들을 악한 일에 부추기고, 그들의 행위에 가담함으로써 스스로를 더럽히게 되기 때문이다.

76. 죄를 짓는 자를 깨우쳐 주되, 넘어진 자를 정죄하지 말라. 후자는 비방하는 자의 행실이고, 전자는 바로잡고자 하는 자의 행실이기 때문이다.

77. 항상 성도들의 행실을 듣고 말하도록 힘쓰라. 이는 영혼을 선한 경쟁으로 이끄는 것이기 때문이다.

78. 우리 각자에게 마음이 바로 가정 교회라면, 그 안에서 우리는 교회 예배도 드려야 한다.

79. 교회에서 예배가 거행되면 그곳에 가라. 그러나 예배가 거행되지 않는다면, (찬송을 부른 후) 사도들의 복음을 읽고, (자신의 일터로) 가라.

80. 미덕의 영광에 대해서는 성인을 본보기로 삼아 판단하라. 그들의 영광은 죽은 후에도 불멸하기 때문이다.

81. 그것이 우리를 대적하는 악마의 번쩍이는 칼임을 깨닫게 되면, 악을 미워하게 될 것이다.

82. 타락한 자를 훈계할 때는 자비로 네 말을 부드럽게 하라. 그러면 그의 귀도 부드러워지고 마음도 밝아질 것이다.

83. 성인과 대화할 때는 영적인 것에 대해 묻고, 성인이 아닌 사람과 대화할 때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 마라.

84. 선한 일을 행하는 데는 항상 서둘러야 한다. 그래야만 그 일을 소홀히 하여 미완성된 채 이곳을 떠나지 않을 수 있다.

85. “그렇게 달려서 이르게 하라”(고린도전서 9:24), 즉 멈추지 말고; 왜냐하면 우리가 삶의 경주장에서 내려오기 전까지는 덕을 좇아 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86. 계명을 지키는 일에 소홀히 하지 마라. 그런 자들에게는 수고가 헛되이 쌓이기 때문이다.

87. 인내를 연습하고, 그것이 필요해지기 전에 미리 준비하라. 그래야 필요할 때 그 모든 무기를 준비된 상태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88. 악한 생각들과 싸우고, 율법(즉, 그것들에 대항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대로 그들에게 말하라.

89. 큰 노력을 기울여 이 세상에서 눈을 돌리라. 악한 연기가 이 세상에서 솟아올라 영혼을 뒤흔들기 때문이다.

90. 만일 어떤 나쁜 습관이 너를 지배하고 있다면, 그것을 조금씩 잘라내라. 그러면 큰 수고 없이도 그 가시를 영혼에서 뽑아낼 수 있을 것이다.

91. 순수하신 하나님을 순수하게 사랑하라. 그리고 만물 위에 계신 그분을 모든 것보다 낮게 여기라.

92. 하나님의 성전이 되고자 한다면, 끊임없는 기도를 마치 끊어지지 않는 제물처럼 하나님께 드려라.

93. 부주의하게 사는 사람을 조언자로 삼지 마라. 그는 악을 사랑하므로, 선을 사랑하지 않을 때 선한 조언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94. 썩어 없어질 모든 것을 멀리하고, 매일 신비로운 성찬에 참여하라. 그리하면 그리스도의 몸이 우리의 것이 되기 때문이다.

95.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징계를 받을 때 불평하지 말라. 그분은 아버지로서 징계하시며, 은혜를 베푸시는 분으로서 감사를 받으실 만하시니라.

96. 모욕을 당할 때 기뻐하라. 그것이 부당하다면 너에게 주어질 상이 크고, 정당하다면 이를 통해 절제함으로써 징벌의 채찍에서 벗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97. 세상의 슬픔과 기쁨을 그림자와 바퀴에 비유하라. 그것들은 그림자처럼 변하지 않고, 바퀴처럼 돌기 때문이다.

98. 항상 하나님 안에서 번영하도록 힘쓰라. 왜냐하면 작은 것을 작은 것에 더해 가는 자는 짧은 시간 안에 모든 이가 갈망하는 선한 부를 모을 것이기 때문이다.

99. 고통스러운 고문을 피하고 싶다면, 결코 누구에 대해서도 험담하지 마라. 이는 신께서 이를 슬퍼하시기 때문이다.

100. 네 집에서 모든 징벌의 재앙을 물리치고 싶다면, 너와 같은 피를 나눈 사람을 비방하지 마라. 그를 창조하신 분께서 이에 대해 의롭게 슬퍼하시기 때문이다.

101. 모든 죄보다 더 높은 존재가 되고 싶다면, 남의 일을 캐묻지 마라. 네 안에도 네가 다른 사람을 죄인으로 여기는 것과 같은 점이 많기 때문이다.

102. 사람아, 비록 네가 부자라 할지라도 교만을 피하라. 그래야 하나님을 네 원수로 삼지 않을 것이다.

103. 비록 네가 위대하더라도 겸손을 사랑하라. 그래야 심판의 날에 높이 들어 올려질 것이다.

104. 사람을 조롱하지 마라. 그래야 평생 조롱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105. 교회에 있을 때는 마음을 산만하게 하지 마라. 왕 앞에 선 자들은 웃지도 않고 정신을 딴 데 두지도 않기 때문이다.

106. 이 말씀을 굳게 마음에 새기라. 그러면 이것이 네 생애를 영광스럽게 할 것이다.

107. 존경받을 만한 삶을 위해 힘쓰라. 그래야만 죄를 짓는 자들을 바로잡을 용기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108. 건방진 마음을 다스리고, 누구도 비난하지 마라. 그래야만 교만하다고 정죄받지 않을 것이다.

109. 다른 사람의 실수를 비웃지 마라. 그래야 네가 원치 않는 사람에게 조롱당하지 않을 것이다.

110. 이 권면들을 지키라. 그러면 이것이 네게 영광의 면류관을 안겨 줄 것이다.

111. 이 계명들을 실천하라. 그러면 그것들이 너를 사람들 앞에서 영광스럽게 하고 하나님께 기쁨이 되게 할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를 기뻐하시며, 이러한 성취를 통해 그분께 참된 봉사가 드려지기 때문이다.

112. 항상 선한 일에서 성공하도록 힘쓰라.[75]

113. 또한 전사도, 미리 오랜 기간 훈련을 받고 고난과 전투를 겪으며, 경험을 통해 적들을 이길 수 있음을 증명하지 않는다면, 영광을 얻지 못한다.

114. 하물며 하늘의 참된 왕께서는, 미리 성스러운 계명을 연구하는 데 힘쓰지 않고, 그로써 은총 그 자체인 하늘의 무기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악의 영들과의 싸움에 나서지 않는 자에게는 누구도 성령의 하늘의 은사를 받을 자격을 얻지 못한다.

115. 누가 영적 수련에서 어느 정도 성공하느냐에 따라, 그만큼 성령의 신비와 지혜의 감춰진 보물에 더 가까이 다다르게 된다.

116. 그리고 은총으로 풍성해지는 만큼, 주님의 도우심으로 악의 계략을 분별하는 데에도 그만큼 더 잘하게 된다. 그분께 영원토록 영광과 권능이 있기를! 아멘. (Patr. gr.에서 이 권면 장들의 첫 번째 장들은 다음과 같으며, 그 뒤에야 비로소 “하나님을 경외하라...” 등이 이어진다.)

117. 구원의 시작은 자기 자신을 책망하는 것이다.

118. 말을 하는 것보다 무작정 돌을 던지는 편이 낫다.

119. 네가 다른 사람들이 너에게 대하기를 바라는 대로,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대하라.

120. 진리는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라.

121. 경건한 사람은 많은 이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아니라,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이다.

122. 대담함(맑은 양심)을 가지고 땅 위의 나뭇잎 위에서 자는 것이, 그것 없이 황금 침대에서 자는 것보다 낫다.

123. 영혼에 양식을 주는 친구야말로 달콤한 친구이다.

124. 말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행실로 그분께 경배하며, 생각과 마음으로 그분 앞에서 경외심을 품으라.

125. 이레엠은 이성, 선한 삶, 그리고 고귀한 감정이 만들어 낸다.

126. 가장 나쁜 일은 모든 수치스러운 것에 아부하는 것이다.

127. 말로는 덕을 배우고, 행동으로 그것을 전파하라.

128. 단순히 덕을 지니는 것만을 훌륭한 행위로 여기지 말고, 마땅히 그래야 할 대로 덕을 실천하는 것을 훌륭한 행위로 여기라.

129. 율법을 존중하면, 율법에 따라 살게 될 것이다.

130. 세상의 모든 것이 낯선 이가 바로 방랑자이다.

131. 부자에게 아첨하지도 말고, 그를 화나게 하지도 마라.

132. 포도주는 몸을 튼튼하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영혼을 튼튼하게 한다.

133. 달콤한 음식보다는 건강한 음식을 먹으라.

134. 군중을 기쁘게 하려 하면, 너도 군중과 같아질 것이다.

135. 무엇보다도 네 몸을 죽여라.

136. 여가 시간이 없는 사람이야말로 근면한 사람이다.

137.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은 용서받지 못할 죄이다.

138. 귀와 혀에서 큰 재앙이 비롯된다.

 

4. 사람을 썩어 없어질 것에서 멀어지게 하고 썩지 않는 것에 붙들어 주는 생각들

1. 덕으로 가는 길은 세상에서 도피하는 것이며, 이는 선하고 짧은 길이다.

2. 썩지 않는 것을 갈망하는 자는 썩어 없어질 모든 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야 한다.

3. 참된 삶을 원한다면, 언제나 인간의 죽음을 기다려라.

4. 현세적 삶을 혐오하라. 그 바퀴가 얼마나 무질서하게 돌아가는지 보았으니.

5. 누리는 즐거움이 지나가고 소유가 사라지는 복을 탐내지 마라.

6. 모든 일에 성공하는 자들을 비웃고, 모든 일에 실패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라. 이는 상으로 이끄는 길이며, 저것은 지혜로 이끄는 길이기 때문이다.

7.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순교자들이 보여준 인내를 실천하라. 왜냐하면 우리에게도 양심의 순교(양심의 요구에 굳건히 서기 위해)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8. 모든 것보다 영혼을 우선시하라. 그러면 덕의 길은 수월하게 펼쳐질 것이다. 모든 것은 썩어 없어지지만 영혼은 불멸하며, 썩어 없어질 것보다는 불멸하는 것을 우선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9. 고난에 대비하라. 그러면 그로 인해 더 큰 유익을 얻게 될 것이다.

10. 하나님께 즐거운 것을 구하지 말고, 오직 유익한 것만을 구하라. 왜냐하면 전자는 아무리 구해도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실 것이며, 설령 어떻게든 얻는다 해도 그것은 곧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11. 가난을 비난하지 마라. 가난은 율법의 경기장에서 싸우는 자를 그 어떤 것에도 산만해지지 않게 만들기 때문이다.

12. 부에 휩쓸리지 마라. 부에 대한 염려는 사람을 가장 자주, 그리고 원치 않게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13. 끝이 가까웠다. 게으른 자여, 채찍질에 대비하라.

14. 추수 때가 멀지 않았으니, 우리 영혼의 밭에서 가시덤불을 제거하자.

15. 심판자께서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으니, 우리가 죄를 지으며 숨으려 애쓰는 것은 헛된 일이다.

16. 사람들보다 우리 곁에 많이 계신 천사들을 더 부끄러워하고, 모든 수치스러운 행위를 멀리하라.

17. 심판자의 저울을 신중히 생각하라. 그리하면 네 삶의 일들 중에서 진정한 무게(그 저울 위에서)를 견디지 못하거나, 이질적인 성향의 불순물로 인해 가짜로 드러나는 모든 것(예를 들어, 다른 원소들이 섞여 정상적인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금화처럼).

18. 게으름과 안일함을 스스로에게 해로움으로 여기고, 우리에게 요구되는 일을 서둘러 행하라.

19. 이 세상의 삶이 변덕스럽다는 것을 항상 명심하라. 그러면 그 어떤 것도 너를 즐겁게 할 수 없을 것이다.

20. 일시적인 세상의 기쁨에 빠져들지 말라. 이는 마치 물고기를 유인하여 잡는 미끼와 같아서, 네 영혼을 유혹하고 사로잡기 때문이다.

21. 유혹에 맞서 필요한 용기를 보여라.

22. 눈물을 흘리는 가난한 이를 결코 멸시하지 마라. 그래야 네 기도의 눈물이 멸시받지 않을 것이다.

23. 지혜는 사람들에게 가장 훌륭한 재산이다. 그러나 그것은 유일무이하기 때문에, 그것을 얻은 유일한 사람과 함께 머물기를 원한다.

24. 미덕은 하나님의 히톤이니, 그것을 짜라. 그리하면 온 피조물을 입히시는 분을 입히는 자가 될 것이다.

25. 세상의 것은 도둑들에게 빼앗기니, 도둑들의 손이 닿지 않는(이 손가락으로는 잡을 수 없는) 하늘의 것을 쌓아 두라.

26. 쾌락은 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사람을 어떤 일들에 휘말리게 하는데, 그 일들로 인해 나중에 정신을 차렸을 때 신음하게 되기 때문이다.

27. 육욕적인 생각은 온갖 방법으로 혐오해야 하니, 그것들은 육체와 영혼을 타락시켜 더럽히기 때문이다.

28. 세상의 복도 수고 없이는 얻을 수 없는데, 어찌 수고 때문에 우리가 하늘의 복을 외면하겠는가?

29. 수고 없이 덕을 행하고 싶으십니까? 그 수고는 일시적이지만, 그 대가는 영원하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십시오.

30. 무의미한(쓸모없는) 쾌락에 탐닉하는 모든 이들은, 그 쾌락의 짧음과 그 대가로 받는 형벌의 길이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31. 모든 것을 썩어 없어질 것으로 여기라. 오직 덕만이 썩지 않는다.

32. 사람을 짐승처럼 만드는 모든 것을 경멸하고, 오직 너를 천상의 존재로 만들 수 있는 그 한 가지만 행하라.

33. 덕을 갈망하라. 왜냐하면 덕은 지혜를 통해 아담을 신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34. 배를 절제하느냐? 혀도 절제하라. 그래야 한쪽에서는 노예가 되지 않고, 다른 쪽에서는 쓸모없는 자유인이 되지 않을 것이다.

35.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보다 네 가족에게 더 집착하지 마라. 그래야 그분의 말씀대로, 비록 네가 원치 않더라도 그분께 합당하지 못한 자가 되지 않을 것이다.

36. 슬픔을 인내로 견뎌라. 그 안에 싸우는 자들을 위한 면류관이 있기 때문이다.

37. 악을 참는 것은 복되나, 악을 행하는 것은 지극히 가증한 일이다. 악을 참는 자는 그리스도의 상속자요, 악을 행하는 자는 마귀의 공동 상속자이기 때문이다.

38. 금식하는 빵은 선하니, 그 안에는 쾌락에 대한 욕망의 누룩이 없기 때문이다.

39. 기도의 제단은 거룩하니, 이는 우리에게 지극히 거룩하신 분을 이끌어 주시기 때문이다.

40. 공의를 미덕의 일부로 여기지 말라. 공의 없이는 모든 행위가 부정하기 때문이다.

41. 가난한 자들에게 뿌린다면, 네 것을 뿌리는 것이다. 남의 것은 가라지보다 더 쓰기 때문이다.

42. 자비로운 자라도 불의하면 눈먼 자와 같다. 왜냐하면 그는 수확을 거둘 수 없는 밭을 경작하기 때문이다.

43. 항상 죽음을 기다리되, 두려워하지 말라(혹은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가짐을 갖도록 하라); 이는 둘 다 지혜의 참된 특징이기 때문이다.

44. 덕행의 모습을 지니되, 속이려는 것이 아니라 너를 보는 이들에게 유익을 주기 위함이라.

45. 선한 일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선한 말을 해야 한다. 그래야 그가 자신의 말에 부끄러움을 느껴 선한 일을 하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46. 진정으로 천국을 원한다면, 이 땅의 어떤 것도 네게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네가 천국으로 날아오르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47. 가난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부자가 되고자 하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의인이 “있는 것에서”(눅 11:41; – 자신이 가진 것 중에서) 자선을 베풀도록 정하셨기 때문이다.

48. 차가운 물 한 잔이 자비로운 이를 의롭게 한다면, 가난한 이들에게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베푸는 이에게는 어떤 상이 기다리고 있겠는가?

49. 순결과 연민은 미덕의 어머니이니, 그러므로 그 둘 없이는 그리스도에게 헌신할 수 없다(혹은 그리스도를 위해 싸울 수 없다).

50. 연민을 소홀히 하지 말라. 이는 연민이 선하신 주님을 하늘에서 내려오게 했기 때문이다.

51. 순결을 소홀히 여기지 말라. 순결을 통해 성육신의 도구가 된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녀)께서 우리를 위해 성육신하신 하나님을 사람들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52. “원수에게 복수하겠다”고 말하지 마라. 우리에게는 하늘에 의로운 재판관(이자 복수자)이 계시기 때문이다.

53. 쾌락 속에서 살기를 원하지도 말고, 부자가 되기를 원하지도 말고, 명성을 얻기를 원하지도 말라. 이는 세상의 헛된 것일 뿐이며, 우리는 썩어 없어지도록 창조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54. 죽은 자를 위해 울지 말라. 이는 모든 이가 걷는 길이며, 그 길을 (흠 없이) 끝까지 이룬 자는 복이 있다.

55. 가난한 자를 위해 울지 말고 죄인을 위해 울라. 죄인은 스스로 면류관을 준비하지만, 가난한 자는 고통을 준비하기 때문이다.

56. 무질서하게 돌고 도는 삶의 수레바퀴를 비웃으라. 그러나 그 위에서 잠든 자들을 그 수레바퀴가 내던지는 심연을 조심하라.

57. 하나님과는 많이 대화하고, 사람과는 적게 대화하라. 그러나 율법을 배우면 이 두 가지를 모두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58. 영혼에 유익한 목욕은 기도할 때 흘리는 눈물이다. 그러나 기도가 끝난 후에는 네가 무엇 때문에 울었는지 기억하라.

59. 세상의 강자들을 기쁘게 하지 말라. “강한 자들은 강한 자들에게서 고통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잠언 6:6).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에게 가장 엄격한 심판자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60. 아담(즉, 타락한 인간)에게는 수고해야 할 운명이 정해져 있다(육체로, 어쩔 수 없이, 보답 없이); 그러나 율법 안에서 수고할 때, 우리는 상을 얻는다.

61. 하와의 후손들은 슬픔을 겪어야 하지만,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슬픔을 견뎌낼 때, 그 맹세는 우리에게 축복이 된다.

62. 네 행실에서는 양심을 등불로 삼으라. 양심은 어떤 행실이 선하고 어떤 행실이 악한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63. 우리 스스로를 책망하면, 심판자께서도 화해하시니, 그분은 선하신 분이시라 죄인이 자신의 짐을 내려놓는 것을 보시고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64. 우리가 부정한 일을 저질렀다면, 회개로 그것을 씻어내라. 우리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깨끗하게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65. 마음의 딱지가 드러나기 전에 치료하자. 그리하여 이러한 치료를 통해 형벌의 채찍을 물리치도록 하자.

66. 묶인 자가 걷기 불편한 것처럼, 세속적인 일과 얽혀 있는 자는 덕의 길을 깨끗하게 걸을 수 없다.

67. 죄를 미워해야 한다. 그래야만 설령 누군가 죄에 빠지더라도 그 올가미에서 더 빨리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68. 죄를 미워하지 않는 자는 비록 죄를 짓지 않더라도 죄인들 중 하나로 간주된다.

69. 죄를 짓는 이웃을 위해 탄식하라. 그리하면 너 자신에 대해서도 탄식하게 될 것이니, 우리 모두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70. 넘어진 친구에게 심판자에 대해 상기시켜 주라. 그리하면 그로 인해 네 자신의 죄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게 될 것이니, 그러한 조언은 만병통치약이기 때문이다.

71. 무언가를 말하거나 행하려 할 때, 곧바로 네게 요구될 대답도 염두에 두어라. 그러면 두려움의 작용으로 절제하게 될 것이다.

72. 죄에 대한 벌을 두려워하고, 그 죄로 인해 수치를 당할 것이라는 생각에 묶이는 쇠사슬을 두려워하라. 왜냐하면 그 둘의 무게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겁기 때문이다.

73. 아름다움과 미래의 수많은 복은 끝이 없으나, 현재의 것들은 그림자요, 연기요, 물방울에 불과하다.

74. 악을 뿌리지 마라. 수확이 가까웠으니, 가시를 심은 자에게는 불이 기다리고 있다.

75. 위선자들과 탐욕스러운 자들, 쾌락을 좇는 자들은 이 세상의 장미들이다. 그러나 잠시만 기다려 보면 (장미 대신) 짓밟힌 풀만 보게 될 것이다.

76. 모든 악한 행위는 마귀에게 우리를 대적할 무기를 주나니, 마귀는 그 무기로 무장하여 무기를 준 자들을 잔혹하게 대한다.

77. 원수를 기진맥진하게 만들고 싶으냐? 죄를 잘라내라. 그러면 깃털이 뽑힌 참새를 조롱하듯 그를 조롱할 수 있을 것이다.

78. 불경건한 자에게는 화가 있을지어다. 모든 이가 빛을 받을 때, 그는 어둠에 덮이기 때문이다.

79. 신성모독자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심판자 앞에서 그의 혀가 묶여, 자신을 변호할 말을 전혀 할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80. 불의한 자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그는 엄한 재판관과 의로운 율법 제정자 앞에 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81. 화가 있을지어다, 탐욕스러운 자여! 부는 그에게서 도망치고, 불이 그를 삼킬 것이니라.

82. 게으른 자여, 화가 있을지어다! 그는 헛되이 낭비한 시간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83. 오만자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그가 관에 누울 때 비로소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될 것이다.

84. 혼인 예복을 더럽힌 음란한 자여, 화가 있을지어다! 그는 수치 속에서 왕의 혼인 전당에서 쫓겨날 것이다.

85. 욕설을 일삼는 자와 그와 함께 술에 취한 자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그들은 살인자들과 같이 취급받고 간음한 자들과 같이 벌을 받을 것이다.

86. 이 짧은 시간 동안 쾌락에 탐닉하는 자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그는 도살될 운명의 송아지처럼 스스로를 살찌우고 있다.

87. 좁은 길을 걷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는 면류관을 쓰고 하늘에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88. 쾌락을 짓밟는 자는 복이 있나니, 악령들이 그를 두려워할 것이기 때문이다.

89. 마음이 청결하고 덕행에 있어 위선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그가 세상을 심판할 것이요, 세상과 함께 심판받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90. 기도와 성경 읽기, 선행에 게으르지 않은 자는 복이 있나니, 그는 죽음 속에서도 잠들지 않을 것이니라.

91. 높은 삶을 살며 겸손한 지혜를 지닌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그가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리스도와 함께 앉을 것이기 때문이다.

92. 율법이 입에서 떠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하나님의 성막에서 그와 함께 계신 하나님께서 결코 떠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93. 많은 이에게 은혜를 베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심판의 날에 그는 많은 변호자를 얻으리라.

94. 덕이 가식이 아닌 자는 복이 있나니, 심판자의 삽이 모든 것을 틀림없이 흩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95. 모든 것을 시험할 불이 나타나기 전에 자신의 행실을 단장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96. 장래의 삶을 향해 서두르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현재가 썩어가는 악취를 풍기며 죽음으로 이끌리기 때문이다.

97. 모은 악을 버리고 깨끗한 심판자 앞에 깨끗한 모습으로 서는 자는 복이 있도다.

98. 그러나 이 말씀의 요점은 이러하니, 영혼아, 방심하지 말라! 왜냐하면 머지않아 우리 하나님 그리스도의 무서운 심판대 저울 앞에 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5. 앞서 언급된 생각과 권면과 유사한 것들, 성 니로스의 다른 저술에서 발췌한 것

1. 평화로운 시기에 덕의 용기를 보이는 것도 칭찬할 만하지만, 전쟁이 닥쳤을 때 그 덕의 용맹함은 더욱 칭찬할 만하다.

2. 덕은 행하는 일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와 대립하는 역경 속에서도 드러난다.

3. 수많은 전투에서 고통을 견디며 승리를 거둔 자는 정욕을 이긴 자이다. 그러나 전투 없이 덕을 얻었다고 말하는 자는 여전히 정욕에 사로잡혀 있다.

4. 투쟁이 없는 마음은 덕을 발휘할 기회를 잃게 된다. 왜냐하면 덕은 투쟁 속에서 행해지는 용맹한 업적에서 그 이름을 얻었기 때문이다.

5. 우리는 생각에서 오는 쾌락을 단호히 끊어내고, 그 생각들에 온 분노를 쏟아부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쾌락을 느끼며 생각을 받아들이는 바람에, 그 생각의 대상들에까지 동조하게 될까 두렵기 때문이다.

6. 침묵하지 않는 사람은 감각적 인상과 싸우지만, 감각을 지키며 침묵을 사랑하는 사람은 생각과 싸운다.

7. 은혜로 인해 수행의 수고에 힘을 얻은 자들은, 그 힘이 스스로에게서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는 유혹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선의 근원은 계명에 대해 말씀하신 분이시며, 모든 악의 근원은 교묘하게 유혹을 심어주는 사악한 자이다. 그러므로 어떤 선행을 하든지, 선의 근원이신 분께 감사를 드리고, 유혹으로 너를 괴롭히는 악은 모든 악의 근원자에게 돌리라.

8. 모든 수고(어려움, 슬픔)의 끝에는 하나님, 곧 은혜의 주님께 감사를 드리라. 그리하여 진심으로 드리는 그 감사로 원수의 악의가 수치를 당하게 하라. 일에 감사를 더한 자는 훔칠 수 없는 마음의 보물을 갖게 될 것이며, 죄를 막는 흉창이 있는 이중 성벽을 쌓게 될 것이다.

9. 활동적인 삶과 지적 삶을 조화시킨 사람은 칭찬받을 만하니, 이는 영혼의 밭이 두 샘에서 물을 받아 더 풍성하게 미덕을 맺게 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사색은 지적인 본성을 고무하여 가장 완전한 것들을 관조하게 하고, 활동은 “땅에 속한 지체들, 곧 음행, 더러움, 정욕, 악한 욕망” (골 3,5) 죽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활동과 사색이라는 온전한 무기로 무장한 자는 이미 악마의 교활함에 효과적으로 맞서 나설 수 있다.

10. 악마들은 생각으로 영혼과 싸우지만, 그들에게 더 민감하게 작용하는 인내심이 이에 맞서 싸운다. 그리고 그들은 이 강력한 전투의 지휘관을 보고는 이미 두려움에 떨며 싸움에 임한다.

11. 만일 악마의 무리와 성공적으로 싸우고자 한다면, 네 영혼의 문(감정)을 고독한 침묵으로 막고, 귀를 스승들의 말씀에 기울여, 그로써 생각의 가시들을 더 잘 분별하고, 분노와 배척으로 그것들을 태워버리는 법을 배우라.

12. 아버지들의 조언에 귀를 기울일 때, 그들의 행실을 심판하는 자가 되지 말고, 그들의 말씀을 이해하고 연구하는 자가 되어라.

13. 원수들은 질문하는 이의 주의를 조언하는 이의 행동으로 돌리는 습관이 있는데, 이는 너로 하여금 그를 엄격하게 심판하는 판사가 되게 하여, 그로부터 유익한 조언을 얻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14. 조언을 받을 때, 비록 네가 스스로 박식하다 하더라도 그것을 거절하지 마라.

15. 아버지의 계명을 귀담아듣지 않는 자는 율법의 계명도 무시하는 것이다.

16. 조상들의 업적을 단지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이야기만 하지 말고, 스스로도 그 업적을 이룬 가장 근면한 실천자가 되도록 노력하라.

17. 어떤 생각이 어떤 위업과 대립하는지 부지런히 알아내려는 자는 원수의 유혹과 싸우는 데 능숙해질 것이다.

18. 네 영적 수고의 전체적인 과정에서 부족한 그 위업 대신에, 그것을 빼앗아 간, 대개는 그 위업에 반대되는 생각이 스며들었음을 알아두라.

19. 수행의 수고 속에서 분별력을 가지고 마음도 지키도록 명심하라. 그래야 더 나은 것들에 대한 돌봄을 소홀히 함으로써 마음이 빼앗겨, 생각들의 포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 포로 상태에 대한 망각은 악(적)과 결탁하여, 그것이 마음을 훔치는 즉시 악(적)이 더 재빠르게 그 안으로 들어와 마음대로 약탈하게 한다.

20.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이 누군가를 비방하는 말을 듣는 것을 좋아할 때, 그 둘은 서로 협력하는 두 영의 도구가 된다. 악한 말을 듣는 것은 악한 말을 부추기고, 악한 말은 악한 말을 듣는 것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이 둘은 모두 마음을 해치는 데 서로를 좋아한다.

21. 험담으로부터 귀를 막아라. 그래야 두 가지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으니, 하나는 스스로를 해로운 정욕에 빠지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타인이 험담을 하는 것을 막지 못하는 것이다.

22. 조롱하기를 좋아하는 자는 강도처럼 (자신과 가까운) 훌륭한 이들의 영혼을 훔치며, 비방으로 약한 귀를 뚫어 놓는다.

23. 이웃을 비방하는 말을 피하는 자는, 자신의 입에서도 비방을 쫓아낼 것이다.

24. 비방하는 자의 말을 기꺼이 듣는 자는 귀로 (심연에서) 나오는 짐승의 독을 빨아들인다.

25. 네 귀가 이 쓴 독을 맛보지 않게 하라. 그래야 너도 다른 사람에게 같은 독을 건네지 않을 것이니.

26. 헛소문으로 네 귀를 어지럽히지 말라. 이 정욕에 자신을 팔아넘겨 수많은 정욕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하라. 한 가지 정욕이 네 안에 자리를 잡으면, 그 같은 둥지(혹은 마구간)로 다른 정욕들도 끌어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주인 노릇하던 마음도 어떤 정욕과 결탁하여 수행의 노력을 완전히 저버릴 때, 비로소 수많은 정욕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27. 네 안에서 시기받을 만한 것이 있다면, 특히 시기하는 자에게서 그것을 숨겨라.

28. 네 친구가 네 행실에 대한 좋은 평판을 자신에게 모욕으로 여기고, 시기심에 상처를 받아 심지어 어떤 비난으로 그 평판을 훼손하려 한다면, 너도 상처받지 않도록 주의하여, 괴로움이라는 쓴 독이 네 영혼에 스며들게 하지 마라. 사탄이 노리는 바는 바로 그의 질투를 부추기고, 너를 근심으로 갉아먹는 것이다.

29. 그러나 차라리 겸손해져서 그러한 이들에게 “더 큰” “존경”을 베풀자(롬 12:10). 질투로 인해 야수처럼 변해버린 그들의 영을 식사 자리에서도 달래 주도록 노력하며.

30. 어떤 사람이 한 인내심 깊은 사막의 은둔자 노인을, 그가 너무 늙었다는 이유로 사막에서 데리고 나가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 노인은 그에게 말했다. “더 이상 나를 그렇게 강요하지 마십시오. 나 같은 악인에게 주어진 유배의 기간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31. 내가 그에게 교훈이 될 말을 해 달라고 청했을 때, 그는 대답했다. “무엇보다 먼저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뿌리내리도록 부지런히 힘쓰라. 그러면 네 내면에서 사람을 지혜로 이끄는 필요한 말을 언제나 발견하게 될 것이다.”

32. 이 같은 장로는 경외심을 얻는 법에 대해 질문을 받자 이렇게 말했다. “죽음을 부지런히 기억하는 자는 그 기억에 이끌려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 이르게 된다.”

33. 두려움에 이끌려 매일 성경을 읽으라. 성경을 통해 낯선 생각들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34. 신성한 경전의 가르침을 통해 마음속에 영적 지혜의 보물을 쌓아두는 사람은, 마음속의 잡생각을 쉽게 몰아낼 수 있다.

35. 밤샘 기도 중에 성경을 읽을 때, 잠으로 귀를 무디게 하지도 말고, 마음을 생각의 포로로 만들지도 말자. 오히려 성경의 날카로운 말로 마음을 찌르어, 회개에 이르러 구원에 대한 열정을 품고, 그와 반대되는 태만을 끊어내도록 하자.

36. 하늘을 기억하며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는 자는 생각 속에서 모든 사람 흉내 내기를 몰아낸다.

37. 네 행실의 증인인 양심을, 타락함을 경멸하며 그것에 대해 달콤한 말로 포장하는 생각에게 넘겨주지 말라.

38. 육체의 정욕을 꺾지 못할 것이니, 만일 네 육체에 그 정욕을 꺾어 주는 금욕적 수련의 치료제를 적용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또한 네 마음을 먼저 사랑의 열매로 채우지 않는다면, 영혼의 정욕도 꺾지 못할 것이다.

39. 육체의 정욕은 육체의 자연스러운 욕구에서 비롯되므로, 이를 대항하기 위해서는 절제가 필요하다. 반면 영혼의 정욕은 영혼의 욕구에서 비롯되므로, 이를 대항하기 위해서는 기도가 필요하다.

40. 사랑은 무정(無情)의 충만함이며, 정욕을 없애는 것이다. 사랑은 오래 참음을 가져오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식히며, 겸손을 심어주고, 교만을 꺾는다.

41. 사랑은 사실 하나님 외에는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42. 영원한 고통에 대한 두려움 위에 하나님의 두려움을 입으라. 그리하여 지옥의 불에 대한 두려움으로 내면에 꺼지지 않는 열정(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대한)을 불태우고, 악의적인 생각들에 맞서 더 빨리 지혜를 얻도록 하라. 두려움은 지혜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43. 경험을 통해 생각의 유혹을 설명하는 이는 모든 이에게 알려지지 않을 것이며, 오직 스스로 경험이 있는 자들에게만 알려질 것이다. 왜냐하면 이를 깨닫는 길은 모든 이에게 단 하나, 곧 경험뿐이기 때문이다.

44. 경험적 깨달음의 학교는 활동적인 삶이니, 이를 가장 부지런히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 자신을 알게 되고, 생각을 분별하는 법을 배우며, 하나님을 깨닫게 된다.

45. 네 생각들을 다스리는 힘이 되게 하라; 왜냐하면 행동은 지식과 말보다 더 지혜로울 뿐만 아니라, 훨씬 더 힘들기 때문이다. 행동할 때 말은 번개처럼 번쩍이지만, 행동이 없을 때는 말이 행동의 힘으로 빛나지 않는다.

46. 생각들은 영혼의 눈을 찌르며 우리를 눈멀게 하여, 우리가 가장 훌륭한 계명들조차도 최악의 방식으로 따르게 한다.

47. 악령들은 자기 아바에게 순종하는 (형제들)을 향해 격노하며, 그들을 향해 이를 갈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순종과 함께 세상에 대한 걱정 없는 초탈을 결합했기 때문이다.

48. 자신의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자들에게 악마들은 온갖 핑계를 찾아내어 그에게 근심을 안겨주고, 이때 분노가 일면 그에게 화를 돋우며, 그 후 조금씩 그를 억압하고, 마치 그가 부당하게 처벌하고 편애하는 것처럼 하여 그에 대한 증오를 불러일으킨다; 악마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영혼을 동요시켜 아버지의 품에서 빼앗기 위해 이렇게 한다.

49. 때로는 악마들이 마음속에서 수행의 수고를 과대평가하기도 하고, 때로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처럼 폄하하기도 하는데, 이는 어떤 곳에는 자만심을 심고, 어떤 곳에는 절망을 심기 위함이다. 그들은 나태함으로 이끌 수 없는 이들의 수행을 과대평가하여 오만함에 빠지게 하고, 오만함에 빠지기를 거부하는 이들에게는 그들의 업적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점만을 끊임없이 강조하여, 이를 통해 그들을 나태함으로 이끌고 절망에 빠뜨리려 한다.

50. 생각이 우리의 수행적 노력을 높이 평가할 때, 그것을 경멸하며 물리치고 영혼을 낮추자. 그리고 그 노력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으로 폄하할 때, 우리가 가진 모든 힘을 다해 그리스도의 자비를 높이 평가하자.

51. 네 몸을 얼마나 괴롭히느냐에 따라, 그만큼 네 양심을 시험해 보라. 생각의 은밀한 침식을 느끼며 스스로를 알아가라. 그래야만 그 은밀한 침식에 무감각해지지 않고, 마치 덕이 오직 엄격한 삶에서만 결실을 맺는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어둠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52. 용광로에 넣은, 아직 사용되지 않은 금이 더 깨끗해지는 것처럼, 초보 수도사도 수도원에서 자신의 성품을 재단련함으로써 인내의 경험을 통해 밝아진다. 형제들의 지시를 통해 그는 순종을 배우고, 훈계하는 이(아바나 장로)의 징계를 통해 오래 참는 마음을 깊이 뿌리내리게 된다. 만약 그가 기쁨으로 모욕을 받아들이고, 비하당하는 상황 속에서 겸손을 사랑한다면, 그때 그는 그와 반대되는 정욕들보다 더 높은 경지에 이르러, 은총으로 그에게 주어지는 힘이 점점 더 커짐에 따라 미덕으로 더욱 빛나기 시작할 것이다.

53. 마음은 정욕의 원인을 잘라내고 관상에 들어갈 때 비로소 안식을 느끼게 되나, 정욕을 잘라내기 전까지는 경쟁자들과의 싸움에 흔들리는 발걸음으로 나서며 수고와 위험을 겪게 된다.

54. 장로들은 은둔 생활이 적절한 시기에 이루어질 때, 즉 공동 생활 속에서 덕을 완성한 후에 이를 시작하는 경우를 매우 높이 평가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먼저 자신이 은둔 생활에서 성공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 스스로 시험해 보아야 한다. 만약 힘이 부족하여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면, 공동체로 돌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생각의 꾀를 이겨낼 힘이 없어 이성을 잃게 될까 두렵기 때문이다.

55. 우는 과부에게 아들들이 위로자가 되는 것처럼, 타락한 영혼에게 위로가 되는 것은 수행의 수고이다. 이는 절망의 생각을 흩어지게 하고, 믿음에 기반한 회개를 깊게 하며, 그리스도의 자비를 선포하고, 저지른 죄를 씻어준다.

56. 어린 강아지가 갓난아기의 빵을 훔치려 하듯이, 교활한 생각은 마음의 이성을 노린다. 그러므로 갓난아이처럼 행동하지 말고, 대적하는 세력들의 교활함을 분별하여, 그들에게 영혼을 약탈당하지 않도록 하자.

57. 반짝이는 별들의 무리가 하늘을 환하게 하듯이, 신성한 말씀의 진리는 마치 등불을 안으로 가져와 사람을 비추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동일한 진리의 형상을 지니도록 하자. “주님께서 뜻을 같이 하는 자들을 한 집에 모이시나니”(시 67:7)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58. 해가 빛나는 광선으로 온 땅에 미소 짓듯이, 사랑도 빛나는 행실로 모든 영혼을 반긴다. 우리가 그 사랑을 얻으면, 정욕을 잠재우고 하늘까지 빛나게 될 것이다. 거룩한 사랑을 얻게 되는 즉시 어떤 일이라도 해낼 수 있겠지만, 그것이 없으면 그 어떤 일에서도 성공할 수 없으니, 그때는 분노가 거세지고 품성이 거칠어지며, 고상한 지혜를 위한 수고에 허영심이 섞이게 된다.

59. 먼저 정욕과 싸워 이겨내야 하며, 깊은 자제심을 가지고 싸움 중에 있었던 일들을 기억에 새겨 두어야 한다. 그 후, 스스로 경험한 바를 바탕으로 다른 이들에게도 투쟁의 규칙을 전하고, 싸움을 어떻게 이끌어갈지 미리 알려줌으로써 그들이 더 수월하게 승리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어떤 이들은 아마도 오랫동안 엄격한 생활을 통해 내면의 정욕을 이겨냈을지 모르나, 승리의 방법을 알지 못한다. 마치 밤의 전투에서처럼, 그들은 전황의 흐름을 주시하지 않았고, 그들의 마음은 적의 악의를 간파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60. 고요함을 맛보고 어느 정도 관상에 정진하기 시작한 사람은 육체에 대한 걱정으로 마음을 얽매이게 하거나, 영적 깨달음에서 마음을 돌리고 세속적인 일로 향하게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대부분 초월적인 경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61. 정욕이 정복되면, 어느 쪽에서도 더 이상 적들이 방해하지 않으며, 방어 무기를 사용할 필요도 없다. 그때 비로소 다른 이들의 영혼을 가꾸는 일에 착수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 정욕이 지배하고, 육신의 교묘한 계략과의 싸움이 계속되는 동안에는 무기를 내려놓아서는 안 되며, 교활한 적들이 우리의 평온함을 공격의 기회로 삼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우리를 사로잡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무기를 손에 쥐고 있어야 한다.

62. 성 모세(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 그곳에 사는 민족들을 정복할 때, 다음과 같은 교훈을 준다. “그들을 정복한 후에 그들을 본받으려 하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하라”(신명기 12,30). – 이 교훈은 정욕을 끊은 후에도 자신의 마음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이들에게 매우 적합하다. 왜냐하면 그런 경우, 마치 어떤 자식들처럼 오래전에 사라졌던 것들의 형상이 그들 안에서 싹트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주 지배적인 사고방식에 빠질 자유를 주며, 그곳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지 않는 자는, 정욕을 이긴 후에도 다시금 자기 안에 정욕을 품게 되어, 그로 인해 삶이 투쟁으로부터 안전하지 않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정욕은 비록 길들여져 소처럼 건초를 먹도록 훈련받았더라도, 길들이는 이의 소홀함으로 인해 다시 야생으로 돌아가 짐승 같은 사나움을 띠게 되는 것이 본성이기 때문이다.

63. “은밀한 곳에 우상을 두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신명기 27, 15). 무언가를 땅속에 영원히 숨겨 두는 것과 성소에 두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니다. 땅속에 숨겨져 더 이상 감각에 드러나지 않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 기억에서도 지워지지만, 성소에 놓인 것은 비록 남들에게는 감춰져 있더라도 그것을 놓은 이에게는 자주 눈에 띄어 그에 대한 기억을 되살린다. 이처럼 성소에 모셔진 우상은, 마음속에 생겨났으나 내뱉지 않고 은밀히 간직한 모든 부끄러운 생각이다. 그렇게 하는 자는 율법에 명시된 형벌을 받게 되는데, 부끄러운 생각을 품는 것은 우상 숭배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64. 생각을 해치는 상상들이 마음에 들어오게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마음이 불결한 생각들로 인해 어둠에 빠지게 되면, 마치 강제로, 그리고 자신의 의지와는 반대로 정욕적인 행위로 끌려가게 되기 때문이다.

65. 성령께서는 성인들의 행적을 기록하셨으니, 이는 어떤 삶의 방식을 따르는 사람이라도 그러한 모범을 통해 진리로 이끌리도록 하기 위함이다.

66. 세속의 소동에서 막 벗어난 이들에게는 (수도원이나 집 안의) 침묵 속에 머물도록 권고해야 하며, 잦은 외출로 인해 감각적 자극을 통해 마음의 상처를 다시 긁어내지 않도록 하고, 옛 죄의 우상들에 새로운 형상을 더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세상을 최근에 등진 이들에게 이 침묵은 어렵다. 왜냐하면 그때 기억은 그 안에 저장된 모든 불순물을 되살리기 때문인데, 이전에는 끊임없이 이어지던 수많은 일들로 인해 이를 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시작 단계에서만 그러할 뿐, 시간이 지나면 침묵은 인내를 무기로 삼아 더러운 생각들로 인한 혼란으로부터 마음을 완전히 해방시켜 줄 것이다.

67. 죄를 간신히 피한 사람의 마음은, 오랜 병을 앓은 후 기력을 회복하기 시작한 몸과 같다.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이 몸은, 사소한 계기만으로도 병이 재발할 수 있다. 그의 기력은 아직 약하다; 그러므로 누군가 군중 속을 헤매며 정욕이 자극받을 빌미를 제공한다면, 정욕이 다시 되살아날까 두려워해야 한다. 단단히 굳어지고 강인해진 수행자들은 이곳으로 나와 과감히 싸울 수 있으나, 아직 싸울 힘이 없는 자는 침묵 속에서 집에 머물며 평온한 안전을 누려야 한다.

68. 내면에 진정한 고요함이 깃들고, 단지 정욕적인 움직임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기억마저 가라앉을 때, 그때 비로소 영혼은 평온한 상태로 머물며, 이전에 각인되어 내면에 숨어 있는 형상들을 분별하고, 그 각각과 싸워 마음속에서 뿌리 뽑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형상들이 잇달아 떠오를 때는, 이전의 흔적을 지울 수 없다. 왜냐하면 생각은 새로운 형상들에 사로잡혀, 끊임없는 끌림 속에서 영혼의 시야를 어둡게 만들기 때문이다. 마치 강바닥이 마른 것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찾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물을 퍼내어 보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비워진 자리는 곧바로 흘러드는 물로 다시 채워지기 때문이다; 반면 위에서 물의 흐름을 막으면, 남은 물이 저절로 흘러내려 그들이 원하는 탐구를 위해 땅을 마르게 남겨두므로 바닥이 쉽게 드러나게 된다: 마찬가지로, 감각이 외부로부터 더 이상 아무것도 전달해 주지 않을 때, 마음에 각인된 정욕의 형상들을 소진시키는 것은 편리하다. 그러나 그것들이 마치 물줄기처럼 끊임없이 새로운 인상을 쏟아낼 때는, 정욕적인 형상과 움직임으로부터 영혼을 완전히 정화하는 것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불가능하기까지 하다.

69. 예언자는 “바빌론의 씨를 근절하라”고 명한다(예레미야 50, 16). 이것은 우리에게 주는 조언이다. 즉, 그 형상들이 아직 감정의 자궁 속에 있을 때 근절하여, 마음의 땅에 떨어져 싹을 틔우지 못하게 하고, 그들과 자주 대화하는 비를 머금어 악의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다. 또 다른 예언자는 정욕이 성숙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아직 젖꼭지를 빨고 있는 갓난아기처럼 보일 때 이를 근절하는 자들을 칭찬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네 갓난아기들을 돌에 부수어 죽이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36, 9). 욥이 말한 것도 이와 비슷한 의미를 지닙니다. “개미는 굶주림으로 망하였으니, 먹이가 없었기 때문이라”(4, 11). 위대한 욥이 정욕의 교활함을 묘사하고자, 가장 강한 사자와 모든 피조물 중 가장 하찮은 개미의 이름을 조합하여 “개미와 ‘사자’”라는 복잡한 명칭을 만들어 냈음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정욕의 유혹은 미묘한 생각에서 시작되어 개미처럼 눈에 띄지 않게 스며들지만, 나중에는 커져서 그 유혹에 빠진 이에게 사자의 공격 못지않게 위험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정욕이 아직 개미처럼 다가올 때, 즉 그 하찮음을 미끼로 삼을 때 이를 물리쳐야 한다. 왜냐하면 정욕이 사자의 힘을 얻게 되면, 더 이상 이길 수 없게 되어 큰 고통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이때 결코 그들에게 먹이를 주어서는 안 된다. 이미 여러 번 언급했듯이, 그들의 먹이는 감각을 통해 들어오는 정욕의 형상들이며, 이 형상들은 정욕을 키우고, 각자가 자신의 우상을 무기로 삼아 영혼을 대적하게 만든다.

70. 또한 성전에서 율법 제정자는 “창살이 쳐진 창문들”(에스겔 41:16)을 마련하셨는데, 이는 자신의 마음을 성전처럼 깨끗하게 지키고자 하는 자들에게, 마치 성전에 쇠창살 창문이 설치되어 불결한 것이 안으로 들어올 수 없게 된 것처럼, 미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으로 감각을 보호해야 하며, 이는 마치 새로 생겨나 안으로 침입하려는 불결한 이미지들의 진입을 막아주는 쇠창살과 같아야 한다.

71. 71, 자극적인(정욕적인) 시선과 싸울 때, 미래에 닥칠 처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마치 바다에서 파도에 휩쓸린 사람이 파도와 맞서 싸우듯 그토록 치열한 대립 상태에 자신을 몰아넣는 자는, 자신을 괴롭히는 자들을 수월하게 이겨내고 가해지는 타격을 느끼지 못하여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들이 나를 때렸으나 나는 아프지 않았고, 그들이 나를 조롱하였으나 나는 알지 못하였도다”(잠언 23:35), 즉 그들은 나를 조롱하려고 때렸으나, 나는 그 타격을 느끼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화살은 어린아이들의 상처와 같았음”(시편 63:8) 때문이요; 나는 그들의 유혹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고, 그들의 존재를 눈치챈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72. 세속적인 일들을 버리는 것은, 자신의 결심을 지키지 못하고 다시 유혹에 휩쓸려 생각에 굴복하며, 종종 버렸던 것으로 되돌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다. 이는 마치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보았다가 썩은 기둥이 되어, 그런 사람들을 훈계하는 본보기가 된 것처럼, 그 일에 대한 집착을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가 멀리했던 것들에 자주 끌리는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아직 확고히 자리 잡지 않은 선한 습관에서 우리를 뒤로 물러나게 할 것이며, 앞으로 나아가려는 열망을 약화시켜 다시 온전히 그쪽으로 끌어들여 예전의 나쁜 일들로 돌아가게 만들 것이다. 이로 인해 오래된 나쁜 습관은 더욱 강해질 것이며, 선한 품성을 기르기 위해 시작했던 습관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거의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습관에서 숙달이 생기고, 숙달은 본성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성을 바꾸고 변화시키는 것은 어렵다. 자신의 습관을 따르는 영혼을 보라. 그 영혼이 마치 우상에 박힌 듯이 자신의 우상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라. “나는 네 앞에 일어설 수 없나니, 나는 여자로서 늘 그러하노라” (창세기 31:35)라고 말한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세속적인 일들에 안주해 온 영혼은 그것들을 마치 우상처럼 얹고 앉아, 그것들에 묶여 있어 그것들과 헤어질 수도 없고, 헤어지려 하지도 않는다.

73. 하나님의 성도들은 방탕한 사람들과의 교제가 전염병보다 훨씬 더 해롭다는 것을 알고 도시들을 피했다. 엘리야는 유다를 떠나, 황량하고 짐승들로 가득 찬 카르멜 산에 머물렀다. 이 스승의 광야 사랑을 그의 제자 엘리사도 본받았습니다. 요한도 요단강 광야에서 메뚜기와 야생 꿀을 먹으며 살았는데, 이는 육신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이 얼마나 어렵지 않은지를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어쩌면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루치만 만나를 거두라는 율법을 주면서 이와 비슷한 것을 예고했을지 모른다. 이는 인간의 생계를 위한 걱정을 하루로만 제한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한 것이었다. 또한 “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었던” 모든 성도들은 거주 가능한 우주를 떠나 “광야에서 방황하며”(히브리서 11:37, 38) 겉보기에는 옳아 보이는 인간의 악덕들을 피했습니다. 이는 그들의 열망이 마치 물줄기처럼 세속적인 삶의 해로운 흐름에 휩쓸리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74.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니, 그분의 형상을 우리 안에 간직하고, 우리를 바라보는 이들에게 훌륭한 삶을 통해 하나님 닮음의 분명한 표징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는 나는 관대하고 자비로우며, 오래 참으시고 자애로우시며”(시 102:8; 요엘 2:13), 진리를 지키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신성한 용모의 특징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신성과 친화된 영혼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신성을 닮은 완전함에 대한 열망을 품고, 자신을 묶고 있는 육신의 속박 속에서 노래하며, 영혼은 스스로를 정화하기 위해 수고 위에 수고를 거듭하여, 마침내 신성의 본질을 구별 짓는 것—선하심, 오래 참으심, 자비, 그리고 인간 사랑—을 얻게 될 때까지 노력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천사보다 조금 낮은 존재”(시 8:6)가 된다.[76]

75. 세상의 반란을 피하고, 일상적인 허영의 근심에 휩쓸리지 않으며, 경솔하고 신중한 판단력이 부족한 사람들과의 교제를 피하는 자는, 집에서는 대부분의 시간을 침묵 속에서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며 보내고, 드물게 집을 나설 때는 품위 있고 온유하며, 화를 내지 않고, 자비로우며, 형제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을 보이는 사람; 이런 사람을 누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열심 있는 일꾼이라, 하나님의 참된 형상과 모습이라, 하나님의 선하심의 신성한 광채로 비추어진 자라, 그리고 하나님과 닮은 자신의 모습을 가장 매력적인 꽃들처럼 밝게 드러내는 미덕으로 표현하지 않겠는가.

76.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특징이며, 또한 하나님과 닮기를 열망하는 사람의 특징이다: 온유함, 악의를 품지 않음, 분노하지 않음, 시기하지 않음, 자선, 연민, 원한을 품지 않음, 선을 사랑함, 선함, 공경심, 타인의 이익을 돌봄, 사교성, 봉사 정신, 허영심 없음, – 한마디로, “악한 자와 선한 자에게 모두 해를 비추시고,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모두 비를 내리시는”(마태복음 5:45) 하나님께서 풍성하게 드러내시는 모든 선함이다. 이러한 특성들을 통해 하나님을 본받으려 노력하는 사람을 알아볼 수 있다.

77. 이 지침만으로도 순종하는 이들에게 온전한 삶을 가르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 길로 인도받기 어렵다는 것을 아신 성 바오로 사도는, 여러 가지 권면을 통해 우리를 헛된 일에서 교묘히 멀어지게 하려 노력하시며, 다양한 칭찬의 말로 우리의 열정을 북돋우신다. 그는 때로는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이라”(고린도전서 3, 16) 말하고, 때로는 “빛의 자녀들로서 행하라”(에페소서 5, 8) 말하며, 또 “그리스도의 복음을 흉내 내어 살라”(빌립보서 1, 27) 말하고, 또는 “너희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라”(고린도전서 6:15)라고 하시며, 어떤 곳에서는 우리를 “거룩하고 흠 없는 자들”(에베소서 1:4)이라 부르시고, 다른 곳에서는 “순결하고 온전한, 흠 없는 하나님의 자녀들”(빌립보서 2:15)이라 부르십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마치 우리 안에 이미 존재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 아직 우리 안에 없는 것들입니다. 그 목적은, 우리가 그런 칭찬에 깜짝 놀라, 만일 우리가 그런 모습이 되지 못한다면 그 칭찬이 우리에게 책망과 조롱으로 돌아갈까 두려워하여, 온전한 열심을 다해 그런 사람이 되고 계속 머물러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왜 성 사도는 이러한 칭찬에만 그치지 않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충만한 나이에 이르러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는 다양한 방법과 수단도 제시하는가(엡 4,13).

78. 무엇보다도 그분은 우리가 세상에 대하여 죽고 십자가에 못 박히기를 요구하시며, 그리하여 세상의 즐거움이나 슬픔을 조금도 느끼지 않도록 하십니다. “너희는 죽었으니,”라고 말하며, “너희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골 3,3)고 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자들, “위엣 것을 구하는” 자들, “위엣 것을 생각하는” 자들, “세상의 원소들로부터” 죽은 자들이 더 이상 그것에 따라 살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는 또 “너희 몸을 하나님께 드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자처럼 여기라”(롬 6:13) 말하며, 한편으로는 영을 흉내 내는 육체의 정욕이 작용하는 바로 그 것들에 대해 우리가 죽기를 바라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덕행이 이루어지는 대로 살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인 자들”(롬 12:1; 골 3, 5)와 “새 생명으로 걷는 자들”(롬 6, 4)을 ‘살아 있는 제물’이라 칭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희생적인 죽음을 통해 악으로 이끌리지 않으며, 선한 일을 위해 게으름 피우지 않고 살아갑니다; 이는 산 제물이 됨으로써 그 힘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며, 오히려 꽃피는 젊은이처럼 그 힘을 이용해 예로부터 적대적이었던 육체의 계략에 맞서고, 더 이상 이러한 무분별한 욕망에 휩쓸리지 않으니, 육신의 삶에서 영적인 삶으로 완전히 넘어가 육신으로 살지 않고 영으로 살기 때문이다.

79. 육신에 갇혀 있으면서도 더 이상 그 무질서한 요구에 시달리지 않는 이들에게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느니라”(롬 8:9). 이는 죄가 더 이상 그들의 죽은 몸 안에서 왕노릇하지 않았고, 이성의 법에 대항하며 보통은 지체 안에 있는 어떤 법으로 그들을 사로잡아 강제로 자신의 명령에 복종하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영의 법이 왕노릇하여, 그들을 그리스도의 계명에 온전히 순종하도록 사로잡았다. 이러한 질서 속에서 그들은 내면의 사람에 있어 더 나은 것을 누릴 뿐만 아니라, 그것을 완성하며, 육신이 기뻐하도록 허용되었던 과거의 모든 불순종을 미덕을 위한 반대되는 수고로 기꺼이 갚아 주려 한다. – 이것이 과연 어떤 보복이며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해 사도는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너희가 전에 너희 지체를 불결함과 불법에 종으로 내어주어 불법을 행하였거니와, 이제 너희 지체를 의에 종으로 내어주어 거룩함을 이루라”(롬 6:19). 이 수고가 얼마나 큰지는, 습관에 지배당하여 나쁜 습관을 선한 것으로 바꾸어야만 하는 사람들이 잘 알고 있다. 수고는 크지만, 자신을 아끼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 일에서 성공한다. 수많은 후퇴와 수많은 전진을 거듭한 끝에, 그들은 마침내 자신들이 사로잡혀 있던 나쁜 유혹들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자신의 모든 성향을 나쁜 것에서 좋은 것으로 온전히 돌릴 수 있게 됩니다. 그리하여 모든 지체를 적대적인 정욕에 대항하는 데 사용하여, 그것들을 불의의 도구에서 의의 도구로 바꾸는 것입니다.

80. 생각의 움직임을 주의 깊게 살피되, 생각이 사물에 대한 기억을 어떻게 불러일으키는지, 그 사물들에 대한 인상을 편향적으로 받아들이는지 아니면 공정하게 받아들이는지 관찰하라. 많은 이들이 행동보다 생각 속에서 더 많이 정욕에 굴복하며, 눈에 보이지 않게 그들과 동의하고 그로부터 쾌락을 얻는다. 겉으로는 타락한 흔적이 보이지 않더라도, 내면적으로는 이미 타락한 것이다. 때로는 겉모습만으로는 전혀 흠잡을 데 없어 보이는 사람도, 자신만이 내면에 숨겨진 추악함을 자각하며,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과 정반대이고, 진실이 존경받는 겉모습과 모순되어 양심이 정당하게 부끄러워하게 만들기 때문에 얼굴을 붉히기도 한다. 그의 영혼이 마땅치 않은 것을 생각하고 수치스러운 감정으로 가득 차 있을 때, 그런 사람은 관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오히려 그는 관보다 더 나쁘지 않은가? 관은 시신에 수분이 남아 있는 동안 악취를 오래 머금지 않지만, 수분이 고갈되자마자 악취도 사라진다. 그러나 수치스러운 생각으로 가득 찬 마음은 썩어가는 시신보다 더 악취를 풍기며 항상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고, 오직 자신의 수치심만을 즐긴다.

81. 기쁨과 슬픔이 소망에 뒤따르는 것처럼(기쁨은 소망이 이루어졌을 때, 슬픔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소망은 감각(외부 사물로부터의 인상이나 그에 대한 생각)에 의해 자극받는데; 따라서 이 마지막 것(인상, 생각)을 허용하지 않는 자는 첫 번째 것(소망과 기쁨 또는 슬픔)에도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 마치 문 입구에 끼인 뱀의 머리를 부러뜨린 사람이, 문 뒤에 머리를 따라오는 뱀의 몸 전체를 남겨두는 것과 같다. 만약 앞으로 나온 머리가 자유로운 통로를 찾았다면, 그 몸은 의심할 여지 없이 문으로 자유롭게 들어왔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기 성찰이나 명료함의 법칙이다.

82. 누군가 나쁜 것을 갈망한다면, 그 갈망을 충족시키든 충족시키지 않든, 둘 다 그에게 똑같이 해롭다. 즉, 첫 번째 경우의 기쁨도, 두 번째 경우의 슬픔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이 슬픔은 성 바오로가 말한 대로 “구원을 위한 참된 회개를 낳는”(2코린 7,10) “하느님을 향한 슬픔”이 아니며, 이 기쁨은 양심에 거리낌 없이 기뻐하는 이들이 누리는 주님을 향한 기쁨(필리 4,4)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 기쁨은 어떤 영적 기만으로, 악마가 심어주는 것이며, 실재하는 선을 맛보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환영에 휩쓸리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83. 이것이 덕에 헌신한 마음이 가능한 성공을 향해 나아가는 방식의 특징이다. 성취는 미덕이 먼 미래로 미루어 두려움을 주려는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그리 멀지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추격하는 자가 이를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고정되어 있지도 않다. 이는 그가 죽을 때까지 열정을 멈추지 않고, 평생 동안 근면함을 강화하며 이를 모든 것에 확대해 나가도록 하기 위함이다.

84. 설령 일생 전체의 시간으로도 덕을 가꾸기에 부족하고, 수련하는 이들에게 방해가 되는 육체의 욕망 때문에 큰 절제가 필요하다 하더라도; 그렇다면 생각이 산만하고 변덕스러울 때, 우리가 어떻게 그토록 길고 힘든 여정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수많고 눈에 보이지 않는 적들의 계략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겠는가? 그들은 우리의 정욕과 감정을 우리를 대적하는 무기로 삼아, 하필이면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을 막아내기 위해 우리에게 주신 바로 그 것으로 우리를 무너뜨리려 하니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깊어야 하며, 우리의 적들이 우리를 대적하는 데 이용하는 것들에 휩쓸리지 말아야 한다. 이는 명백한 사실이다. 즉, 우리의 위업에서 성공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적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

85. 자신의 생각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고자 하는 이들은 어떤 생각에 이끌려야 하는가? – 잘 들어라. – 다윗은 한 구절에서 “내 마음의 교훈은 지혜라”고 말했고(시 48:4), 또 다른 곳에서는 “주의 법규를 항상 배우리이다”(시 118:16)라고 하였으며,“주의 모든 일을 배우고 주의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이다”(76:13)라고도 했습니다. – 그렇게 하라. 그러면 영원히 움직이는 네 마음이 부적절한 곳으로 쏠릴 틈이 없을 것이며, 깊이 탐구할 때 기쁨과 큰 유익을 주는 일에 끊임없이 몰두하여, 감각은 시각으로, 영혼은 관상으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6. 수도자들에게 주는 권면

1. 음식에 대한 절제 부족은 금식을 무효화시키며, 음탕한 정욕은 기도와 함께 하는 자기 절제로 물리칠 수 있다.

2. 탐욕은 우상 숭배의 어머니로서, 검소함을 억누르고, 육체의 필요를 돌보는 일은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가로막는다.

3. 방황하는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일과 기도로 깨어 있는 것을 방해한다.

4. 분노의 맹공은 온유함과 시편 찬양을 누그러뜨린다.

5. 낙담은 인내와 눈물로 쫓아내지만, 세속적인 슬픔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혐오로 인해 잠잠해지게 한다.

6. 이방인을 사랑하는 마음은 겸손한 지혜와 권력을 탐하는 마음, 그리고 타인보다 우월함을 추구하는 마음을 버리는 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교만, 이 고대의 악, 주님 앞에서 가증한 것, 곧 하나님께서 반대하시는 것은 오직 “ “나는 흙과 재로다”(창 18,27), 그리고 또 “주님께서 집을 세우지 않으시면, 짓는 자의 수고는 헛되고, 지키는 자의 깨어 있음도 헛되리라”(시 126,1).

7. 물을 가만히 두지 않고서는 탁한 물을 맑게 할 수 없는 것처럼, 수도사가 침묵 없이는 자신의 내적 상태를 알 수 없다.

8. 전사가 전투에 나서지 않고는 승리의 월계관을 쓸 수 없는 것처럼, 위업을 이루지 않고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9. 저울의 양쪽 접시가 한쪽이 무거운 짐을 지고 있을 때 똑바로 서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육신의 계산이 우세할 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10. 부지런히 연습하지 않고서는 어떤 기술도 익힐 수 없는 것처럼, 올바른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엎드리지 않고서는 기도를 얻을 수 없다.

11. 순수한 기도를 얻지 못한 자는 싸움을 위한 무기를 갖지 못한다.

12. 겉모습은 화려하지만, 내면에는 하나님의 미덕이 결여된 자는 악마들의 거처이다.

13. 왕이 가난한 사람의 집에 살지 않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죄로 더럽혀진 영혼 안에 거하지 않으십니다.

14. 방치된 밭이 부지런한 수고로 경작되듯이, 죄로 인해 야생처럼 변해버린 영혼도 하나님의 법에 따라 살게 되면 길들여진다.

15. 바다 깊은 곳에 있는 돌이 파도의 침식을 받지 않는 것처럼, 덕행에 정진하여 마치 그 속에 잠긴 사람처럼 된 자는 마귀에게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16. 숙련된 의사가 당면한 병에 대한 치료법을 즉시 생각해 내듯이, (마음과 마음에) 간직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그 신자에게 (타락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법을 가르쳐 준다.

17. 물줄기가 스스로 길을 내듯이, 죄도 일단 받아들여지면 저절로 그것을 범한 자를 파멸로 이끈다.

18. 그물에 걸린 사슴이 도망칠 여지가 없는 것처럼, 자신의 세상 속에서 맴돌며 정욕을 키우는 자도 죄를 피할 수 없으니, 이는 교활하고 달콤한 정욕이 풀기 어려운 얽매임이기 때문이다.

19.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가 헛되이 자리를 차지하지 않도록 베어내듯이, 성령의 열매를 맺지 않는 자도 주님으로부터 뿌리째 뽑힐 것이다.

20. 화살에 맞은 사람이 해를 입지 않고 버틸 수 없는 것처럼, 악한 생각을 품은 수도사가 그로 인해 상처를 입지 않을 수는 없다.

21. 바른 길을 잃은 사람이 낯선 땅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 채 방황하듯이, 동일 본질인 삼위일체를 믿지 않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방황한다.

22. 여러 부분으로 나뉘어 있어도 본질상 하나인 사람처럼, 성삼위일체도 이름과 위격으로는 나뉘어 있지만 본질상 하나이시다. 비록 네가 날개를 달고 그분께 날아오른다 해도 하나님의 본질을 헤아릴 수는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이시니 헤아릴 수 없으시다.

23. 만들어지는 그릇이 그것을 만드는 이의 본질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사람 또한 하나님의 본질을 알 수 없다.

24. 삼위일체에 대해 의심하지 말고, 오직 믿고 경배하라. 의심하는 자는 믿지 않는 자이기 때문이다.

25. 은을 모으지 말고 지혜를 얻으라. 온갖 비단 옷보다 우리 주 그리스도의 빛나는 옷을 입으라. 죽는 날에는 재물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26. 불이 가시덤불을 삼키듯이, 모든 죄인은 영원한 불에 삼켜지되 죽을 수는 없으니, 불멸의 고통을 겪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7. 우리가 의인이 되는 데에는 아무런 위대한 점이 없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우리는 단지 태초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대로, 지극히 선한 존재가 될 뿐이기 때문이다.

28. 본성에 따라 살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

29. 모든 지혜는 주님을 경외하는 데 있다. 그러나 주님의 율법을 가르치지 않는 모든 학문은 난동과 무지일 뿐이다.

30. 의로운 행함이 없는 믿음과 세례는 영원한 불에서 구원해 주지 못한다. 네가 그리스도와 연합했다면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미래를 믿는다면 영원한 영광을 얻기 위해 힘쓰며 불의 칼을 두려워하라. 만일 네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면, 자신을 신자라고 부르지 말라.

31.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나, 오직 사람만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존재하게 된” 분께 순종하지 않으려 감히 대적한다.

32. 우리가 자신을 깨끗하게 지키면 하나님께 드릴 것은 아무것도 없으나, 우리 자신에게는 영생을 얻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영원한 복을 누리게 된다.

33. “아버지나 어머니, 아내나 자녀, 혹은 다른 누군가로부터 오는 방해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없다”고 말하지 말라. 그들은 다가올 진노와 잠들지 않는 구더기로부터 너를 구원해 주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네가 하나님과 미덕을 얻는 데 방해가 되는 모든 이는 네게 가증스럽고 미워해야 할 존재가 되게 하라. 그런 자와는 “함께하지 말라.”

 

성 에프렘 시리아인

 

그에 대한 간략한 소개

성 에프렘은 4세기 초반, 니지비아 근교나 그 도시 자체에서 그리 부유하지 않은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 부모는 그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키웠으나, 청년 시절의 유혹으로 인해 그는 몇 가지 도덕적 실족을 저지르게 되었고, 그로 인해 점차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그의 믿음도 흐려지기 시작했고, 그는 우리 삶의 모든 일이 우연히 일어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마음의 상태에서 하느님의 섭리는 그에게 매우 깊은 교훈을 통해 치유해 주셨다. 그는 양을 훔친 혐의로 기소되어 감옥에 갇혔다. 그와 동시에 또 한 명이 그곳에 수감되었고, 그곳에서 그들은 세 번째 사람을 발견했다. 이들 모두는 이번 사건에 있어 무죄였음에도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 감옥에서 7일을 보낸 성 에프렘은 꿈속에서 계시를 들었다. 비록 이번 사건에서는 자신이 잘못이 없지만, 과거의 죄로 인해 고통받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그의 동료 수감자들도 과거의 죄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그는 그 꿈을 다른 두 사람에게 이야기했고, 모두 과거를 되돌아보더니 과연 자신들이 예전에 비슷한 종류의 선하지 않은 일들을 저질렀음을 깨달았으나, 처벌을 면하게 되었다. 판사는 성 에프레모를 무죄로 선고했는데, 이는 다시 꿈속의 환상에서 그에게 예언되었던 대로였다. 이 사건은 성 에프레모의 마음에 우리를 지켜보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눈에 대한 완전한 믿음을 심어주었고, 그에게 깊은 감명을 주어 그는 지체 없이 세상을 떠나 인근 산속의 은둔자들에게로 향했으며, 그곳에서 훗날 위대한 니시비우스의 성 야고보의 제자가 되었다. 그의 지도 아래 성 에프레모스는 경건한 삶을 실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였으며, 이 두 가지의 영향으로 성품이 완전히 바뀌었다. 분노하기 쉽고 의심에 흔들리던 청년 대신, 성 에프렘은 이제 낮과 밤으로 자신의 죄를 통회하며 전적으로 섭리의 길에 헌신하는 겸손하고 통회하는 은둔자로 나타납니다. 성 야고보는 제자의 뛰어난 자질을 알고 있었기에, 주교가 된 후에도 교회 운영에 그의 능력을 활용하며,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일을 맡기고,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맡겼으며, 니케아에서 열린 제1차 세계 공의회에 그를 동반했고, 귀환 후에는 자신의 결정에 동참하게 하고, 페르시아의 사포르의 침략으로부터 도시를 구해 달라고 기도하는 일에도 함께하게 했다(337년). 성 야고보가 세상을 떠난 후(338년), 성 에프렘은 어머니의 고향인 아미두를 방문하기로 마음먹었는데, 이 도시는 메소포타미아에 위치해 있었으며, 그는 어머니 곁에서 얼마 동안 머물렀다. 거기서 그는 그곳의 성지들을 참배하고 싶은 마음에 예데사로 향했는데, 그곳에는 구세주 그리스도께서 아바르 왕에게 보내신 답장이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곳에서 ‘손으로 만들지 않은 그리스도의 형상’이 알려지게 되었으며, 그곳에는 왕과 도시, 그리고 온 나라를 신앙으로 깨우친 사도 팍데오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었으며, 도시 주변에서는 수도 생활이 번성하고 있었다. 이 도시에 도착한 성 에프렘은 그곳에 머물렀다. 생계를 꾸릴 수단이 없던 그는 목욕탕 주인에게 고용되어 일하게 되었다. 이 일은 그의 마음가짐과 목표에 맞지 않았지만, 그는 하늘로부터의 지시를 기다렸고, 그 지시는 머지않아 내려왔다. 기도와 맡은 일로 바쁘지 않은 시간에는 이교도들과 대화를 나누는 데 보냈다. 그런 대화 중 한 번은 우연히 사막에서 온 한 노승이 그의 말을 듣게 되었는데, 그는 그 대화의 높은 수준에 비추어 볼 때 성 에프렘이 이곳에 머물기에는 부적합하다고 정당하게 판단했다. 그래서 대화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와 말을 걸었고, 그의 수행에 대한 열망을 알게 된 후 인근 수도원 중 한 곳에 입회할 것을 제안했으며, 성 에프레임은 즉시 이에 동의했다. 산으로 물러난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영혼이 찾던 모든 것을 발견했다. 그곳에는 온 생애를 기도와 시편 찬송, 그리고 하느님을 찬양하는 데 바친 위대한 은수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동굴 외에는 다른 피난처가 없었으며, 평범한 음식도 먹지 않고 오직 식물만으로 연명했다. 이 모든 것을 본 성 에프레모스는 온 마음을 다해 그러한 삶의 방식을 받아들였으며, 수행과 기도의 수고에 더해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을 더했다. 그의 영혼은 곧 이 사막을 사랑하는 이들과 가까워졌으나, 특히 그와 마찬가지로 겸손한 마음을 지니고 신성한 성경 연구를 똑같이 사랑했던 은수자 율리아누스와 친해졌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던 성 에프렘은 그로부터 감화와 지혜를 얻었다. 그러나 그의 지식의 보물은, 대부분 그의 겸손함 때문에,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아직 특별한 가르침의 은사가 아니라 그 자신의 지적 노력의 결실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는 감춰진 채로 남아 있었다. 특별한 가르침의 은사는 숨어 있기를 좋아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가르침을 아낌없이 퍼뜨리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 은사가 곧 내려졌는데, 이는 성 에프렘을 도시 밖으로 이끌어낸 바로 그 통찰력 있는 노인이 환상 속에서 밝은 천사가 성 에프렘의 입에 어떤 신비로운 책을 넣어주는 것을 목격함으로써 드러났다. 그때부터 하나님의 지식과 신성한 것들에 대한 생수로 충만해진 그의 영혼은, 감동을 주는 가르침의 멈출 수 없는 흐름으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생생한 감정으로 따뜻하게 데워지고, 하나님의 은총으로 거룩하게 된 마음의 충만함에서 우러나온 그의 말들은 영적인 기름부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입술에서는 가장 설득력 있는 권면과, 자신과 타인을 향한 감동적인 책망, 지혜로운 규칙과 조언들이 기적처럼 쏟아져 나왔으며, 종종 그의 경건한 생각이 뜻밖의 비상을 통해 하나님께로 치솟아, 그분의 무한한 사랑의 영광을 고백하거나 그분께 죄의 용서를 구하곤 했다. 성경의 예와 말씀, 수도 생활의 체험, 자연계의 비유와 비교 등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고, 그의 소박하고 꾸밈없는 대화 속에서 저절로 드러났다. 그러나 도덕적·영적 교훈과 수도 생활의 교훈만이 그의 저술의 주제를 이루지는 않았다. 그는 성경 해석에도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특히 동시대 및 이전의 이단자들이 잘못을 범했던 측면들을 중심으로 교리를 설명하는 데에는 더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일생은 이러한 저술 활동에 전념하며 흘러갔고, 이미 생의 끝자락에 다다랐을 무렵, 그는 이집트의 은수자들을 만나고 카파도키아의 위대한 대주교 바실리우스 대성인을 방문하고 싶은 소망을 품게 되었다. 그리스어를 구사할 줄 아는 제자를 데리고 그는 지중해에 이르러 배에 올랐다. 기도와 하느님에 대한 신뢰 덕분에 그와 함께 항해하던 이들은 익사하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 니트리아 산은 그를 반가운 손님으로 맞이했고, 위대한 파이시우스와 요한 콜로브, 그리고 다른 장로들과 6일 동안 대화를 나누며 그에게 큰 위로를 안겨주었다. 니트리아 외에도 그는 은수자들이 거주하는 다른 곳들을 방문했으며,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께 깨달음을 얻은 사람으로서 따뜻한 기억을 남겼고, 그곳에서 이집트의 고인들과 아직 살아 계신 은수자들의 삶과 규율에 대한 교훈을 얻었다. 이집트에서 돌아오는 길에 성 에프렘은 성 바실리우스 대성인을 뵙기 위해 카파도키아의 케사리아를 방문하기로 마음먹었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성전에서 이루어졌다. 성 에프렘이 성전에 들어섰을 때, 성 바실리우스 대성인은 백성들에게 설교를 하고 있었으며, 성 에프렘은 그분의 지극히 은총이 넘치는 상태를 확인하게 되었다. 성 바실리오 대성인도 성령의 계시를 통해 성 에프레무스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를 성소 로 초대했다. 그곳에서 짧은 설명과 상호 인사를 나눈 후, 대화는 집으로 옮겨져 다양한 주제를 다루며 이어졌다. 케사리아의 성자는 성 에프레모에게 장로 직분을 부여하고자 했으나, 겸손한 에데사의 수도사는 어떤 이유로도 이 직분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고, 성 바실리우스는 그를 집사로 서품할 수밖에 없었으며, 장로 직분은 그의 제자에게 서품했다. 그 후 성 바실리우스는 성 에프레모를 주교좌로 초빙하기 위해 두 제자를 에데스로 보냈으나, 성 에프레모는 겸손함으로 인해 자신이 그 영예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여기며, 마치 미친 척하며 이 영예를 거절했다. 예데사의 자신의 은둔처로 돌아온 성 에프레모스는 남은 생을 은둔 속에서 보내고자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다시 한번 그를 이웃을 위한 봉사로 부르셨다. 당시 도시 주민들은 기근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성 에프레임은 강력한 말로 부자들에게 가난한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도록 설득하고, 그들의 기부금을 관리하는 일을 스스로 맡았다. 이것이 교회를 위한 그의 마지막 위업이었다. 도시에서 산으로 돌아온 후, 그는 곧 병에 걸렸고, 유언을 남긴 뒤 372년 또는 373년에 평안히 세상을 떠났다. 그는 제자들과 그를 사랑하던 예데스 주민들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으며, 수많은 백성과 성직자, 은둔자들이 모인 가운데 그의 시신은 땅에 묻혔으나, 얼마 후 썩지 않는 유해는 성당으로 옮겨졌다.

 

* * *

『그리스도의 자비』에는 성 에프렘의 글이 전혀 실려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보물 모음집에서 그의 가르침을 제외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저작 중 가장 교훈적인 것들을 다음과 같은 제목으로 선정하기로 했습니다:

1. 회개와 구원을 이루기 위한 권면.

2. 회개에 관한 교훈.

3.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고 자신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헌신한 이들의 삶에 대한 전반적인 개요.

4. 미덕과 정욕에 대하여.

5. 여덟 가지 주요 정욕과의 투쟁.

6. 수도 생활에 관한 일반적인 교훈.

7. 이 모든 것에 더해, 모든 교훈의 목록으로서 50번째 말씀: 수행자들에게 주는 조언이 있으며, 55번째 말씀에 나오는 유사한 조언들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발췌 내용은 성 에프렘의 저서, ‘성부들의 저작’ 시리즈에 수록된 성경 판본을 기준으로 한다. 각 부문의 인용문은 해당 목차 뒤에 명시되어 있다).

 

성 에프레모스의 수행자들에 대한 가르침

 

1. 회개와 구원을 얻기 위한 권면

1. 오라, 사랑하는 자들아, 아직 구원의 날이 지속되는 동안 구원에 힘쓰자. 오라, 영생을 얻고 우리 영혼의 구원을 사자. 아름다운 생각을 품고, 천국과 낙원을 갈망하자.

2. “열한 번째 시간”에 힘써라. 닫힌 문 밖에 남겨지지 않도록 서둘러라. 저녁이 가까웠고, 상을 주시는 분이 큰 영광 가운데 오셔서 각자에게 그의 행실대로 갚아 주실 것이다. 형제들아, 시간이 있을 때 회개하자.

3.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보라: “하늘에서는 한 죄인이 회개하는 일로 인해 기쁨이 있다”(누가복음 15:10). 죄인아, 왜 게으름에 빠지는가? 왜 절망에 빠져 있는가? 네가 회개할 때 하늘에서 기쁨이 있다면, 네가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천사들이 기뻐하는데, 너는 게으름에 빠져 있느냐? 대천사가 회개를 선포하는데, 너는 두려워하겠느냐? 하나이시며 숭배받으시는 삼위일체께서 너를 부르시는데, 너는 한숨을 쉬고 있느냐!

4. 여기서 조금만 울자. 그래야 저기서 영원히 고통받으며 울지 않을 테니. 그리스도의 재림은 무서운 번개처럼 갑작스럽다. 그 시간에 각자는 자신의 행실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며, 각자는 뿌린 대로 거두게 될 것이다. 우리는 모두 가림 없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며, 각자는 심판자께 스스로에 대한 답변을 드려야 할 것이다. 그 순간에는 아무도 누구를 도울 수 없다. 각자는 두려움과 떨림으로 서서 하나님의 판결을 듣기를 기다릴 것이다.

5. 우리는 왜 성경과 그리스도의 말씀을 소홀히 하는가?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보라. “내가 한 말이 마지막 날에 너희를 심판하리라”(요한복음 12:48). 이 말씀이란 무엇입니까? 바로 그분의 거룩한 복음과 성선지자들과 사도들의 다른 성서들입니다. 그러니 기록된 말씀을 소홀히 여기지 맙시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그리스도의 말씀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 (마태복음 24, 35).

6. 그러니 사랑하는 여러분, 그 무서운 날이 오기 전에 하나님의 자비의 바다에 몸을 던지십시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부르십니다. “누구든지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28). 모든 이를 초대하시니, 이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망설이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에게 오는 자를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6,37)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 그분께 나아오는 이는 누구인가?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자이다. 그러니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자.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떨어지는 것은 무서운 일”이기 때문이다(히브리서 10:31).

7. 회개하라, 죄인아. “의인들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회개하게 하려고 온 것”이라고 말씀하신 그리스도의 헤아릴 수 없는 인간 사랑을 담대히 바라보라 (마태복음 9:13). 시간이 있을 때 회개하라. 수천 수만의 천사들과 성인들이 두려움 속에 서 있을 그 무서운 심판의 날에 수치를 당하지 않도록 하라. 거기서 행실의 책이 펼쳐지고, 숨겨진 것이 드러날 것이며, 심판자는 위대하시고, 심판은 무자비하며, 모든 행적이 눈앞에 드러나고, 불의 강이 기다리고 있다. 이 모든 것을 깊이 생각하고, 서둘러 구원을 받으라.

8. 무엇을 기다리는가? 네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도대체 누가 너를 대신해 대답해 줄 수 있겠는가? 각자가 스스로 하나님께 대답해야 한다는 것을, – 각자가 뿌린 대로 거두게 될 것임을, – 각자가 자신의 짐을 짊어져야 한다는 것을 모르겠는가? 아직 시간이 있을 때 이 죄의 짐을 떨쳐 버려라.

9. 너는 한 번에 영원히 사탄과 그의 모든 행실을 저버리고, 많은 증인 앞에서 그리스도와 언약을 맺었다. 이를 기억하고 잊지 말라. 그 순간 천사들이 네 말과 서약, 그리고 저버림을 기록하여, 심판의 두려운 날까지 하늘에서 간직하고 있음을 알라. 심판의 날에 그들은 네 필사본과 네 입의 말을 무서운 심판대 앞에 가져올 것이다. 그때 네가 이렇게 듣게 될 것이다. “네 입에서 나온 말로 너를 심판하리라, 악한 종아”(누가복음 19:22). 그러니 네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고 네 영혼을 불쌍히 여기라.

10.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수고하며, 어떻게 구원을 얻으려 애쓰는지, 온갖 선한 일에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지, 모든 악에서 어떻게 스스로를 지키는지, 어떻게 좁고 험한 길을 사랑하는지 살펴보라. 그들은 금식하고, 깨어 있으며, 고난을 견디고, 울며, – 그들의 입은 언제나 신랑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그들의 눈은 언제나 그분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그들의 영혼은 기뻐합니다.

11. 생각하며 보라: 보라, 신랑이 이미 가까이 오고 계신다. – 그분은 율법에 따라 수고하며 좁고 험한 길을 사랑한 자들을 관으로 씌우러 오시며, 자비로운 자들을 용서하시고, – 가난해진 자들을 복되게 하시며, 그분을 위하여 선을 갈망하고 목마르게 구한 자들에게 선을 채워 주시려 오시며; “은밀한 어둠을 빛으로 이끌어 내시고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시려” (고린도전서 4:5) 오시며, – “각 사람에게 그의 행한 대로 갚으시려” (로마서 2:6) 오신다.

12. 마침내 갑작스럽게 외침이 터져 나올 것이다. “보라, 신랑이 오신다!(마태복음 25, 6). 이것이 바로 기다리던 기쁨, 의인들의 찬양, 진리의 태양이다! 이것이 바로 “신랑이시니, 나가서 맞이하라”!

13. 그때 등불이 밝게 타오르고 깨끗한 옷을 입은 자들은 기쁨과 담대함으로 그분을 맞이하러 나갈 것이며, 그들의 등불이 꺼지지 않을 것을 기뻐하고 희망할 것이다. 그러나 너는 어떻게 될 것인가? 네 등불이 꺼져 가는 것을 깨닫고, 공포와 슬픔 속에 너는 처음 온 이들에게 간청하며, “기름을 조금만 달라”고 할 것이나, “파는 자들에게 가서 사라”는 대답을 듣게 될 것이다(마태복음 25:9).

14. 가서도 살 곳을 찾지 못할 것이다. 생명의 거래는 이미 끝났기 때문이다. 그때 극심한 당혹감 속에 울며 탄식하며 스스로에게 말하리라. “가서 그리스도의 자비의 문을 두드려 보리라. 어쩌면 자비로우신 주님께서 내게 문을 열어 주실지도 모르지?” – 가서 문을 두드리지만, 신랑께서 안에서 대답하시기를 “아멘, 내가 네게 말하노니, 나는 너를 알지 못하노라”(– 12) 하실 것이다. 불법을 행하는 자여,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자비를 베풀지 않았으니, 자비를 받지 못할 것이다. 너는 네 육신을 탐닉했고, 네 옷을 부정한 것으로 더럽혔으니, 어떻게 이곳에 올라와 내 왕국을 더럽히려 하는가? 너는 마귀의 뜻을 행하고, 내 뜻은 거절했으니, 너에게는 나와 함께할 몫이 없다. “가라, 나를 떠나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마태복음 25,41).

15. 이 말을 듣고 너는 부끄러움에 휩싸여 서 있을 것이다. – 그때 동시에 기쁨과 환희의 소리가 네 귀에 들릴 것이며, 네 친구들 각자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그때 쓰라린 한숨을 내쉬며 말하리라: “아, 불쌍한 나여! 내가 얼마나 큰 영광을 잃었으며, 내 악하고 부도덕한 행실 때문에 어떤 교제에서 배제되었는가!” – 그러나 진실로 하나님의 심판은 의로우시니, 진실로 내가 이러한 박탈을 겪는 것은 의로운 일이다. 그들은 절제하며 살았으나, 나는 온갖 쾌락을 좇았으니; – 그들은 시편을 불렀으나, 나는 부끄러운 노래를 흥얼거렸고; 그들은 기도하였으나, 나는 안일하게 누워 있거나 거닐었으니; 그들은 울었지만, 나는 웃었다. – 그 때문에 그들은 이제 기뻐하고, 나는 한탄하며; 그들은 즐거워하고, 나는 울고;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끝없는 영원토록 다스릴 것이나, 나는 적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불길에 던져질 것이다. 아, 불쌍한 나여!

16. 그때 네가 괴로워하며 이와 같은 말을 하겠지만, 그로 인해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는 회개조차도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 그러니 이제 마침내 영혼의 구원에 대한 돌봄을 시작하자. 이는 “필요한 것은 하나뿐”이기 때문이다(누가복음 10:41).

17. 육체도 돌봄을 필요로 하지만, 그리 많지는 않다. 그러나 영혼에 대한 돌봄은 끊임없이 이어져야 한다. 영혼이 모든 것보다 높기 때문이다. 너는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 있으니, 영혼에게는 영적인 양식을, 육체에게는 육체적인 양식을 주라. 영혼이 죽지 않도록 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시편, 찬송과 영적인 노래, 영혼을 구원하는 성경 읽기, 금식, 기도, 눈물, 소망, 그리고 장래의 복에 대한 묵상으로 영혼을 양육하라. 이 모든 것과 이와 유사한 것들은 영혼을 위한 양식이자 생명이다.

18. 성경 전체를 통틀어 좁은 길을 걷는 자들만이 복을 받으며, 넓고 넉넉한 길로 들어선 자들에게는 곳곳에서 비참함이 예고되어 있다. 그러니 파멸로 이끄는 넓은 길을 버리고 좁은 길로 들어서자. 그리하여 이곳에서 잠시 수고함으로써 끝없는 세월 동안 왕노릇하게 될 것이다. 다가오실 분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것을 항상 눈앞에 두고, 영생과 끝없는 왕국, 천사들과 함께 기쁨에 찬 기쁨,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것을 끊임없이 마음에 새기며 수고합시다.

19. 삶의 꽃들에 취하지 마십시오. 입술에는 항상 시편이 맴돌게 하십시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악령들이 도망치기 때문입니다. 일을 할 때에도 손은 일에 뻗되, 혀는 시편을 읊고, 마음은 기도하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친히 여기 있는 모든 이에게 다른 삶을 준비하라고 권고하신다. 우리도 그렇게 하자. 만일 실수로 죄를 짓게 된다면, 회개할 시간이 남아 있는 동안 눈물로 그 죄를 씻어내자. 회개의 시간은 짧으나, 하늘나라에는 끝이 없다.

20. 우리는 성도들을 찬양하며 그들에게 주어진 면류관을 우리도 얻기를 바라지만, 그들의 고행을 본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혹시 그들이 수고와 고통 없이, 공짜로 면류관을 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세상에서 성인들이 어떤 안식을 누렸는지 들어보시겠습니까? “매맞고… 감옥에 갇히고… 박해받고, 슬퍼하며, 괴로워하며…” 등등 (히브리서 11, 35–38). 그들과 함께 영원히 다스리고 싶습니까? – 그들의 길을 따르십시오.

21. 우리 조상들은 마치 빛나는 별들처럼 온 땅을 비추었으니, 가시와 엉겅퀴, 이단자들과 불경건한 사람들 가운데서, 마치 귀중한 보석과 값진 진주처럼 살아갔습니다. 그들의 고귀하고 순결한 삶 때문에 적들조차 그들을 본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누가 그들의 겸손을 보고 마음이 찔리지 않았겠는가? 이곳에서 그들은 수고했으나, 저곳에서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 안에서 영광을 받으셨고, 사람들이 그들을 통해 교훈을 얻었기 때문이다.

22. 그러나 우리 삶의 흐름은 바른 길을 떠나 험한 급류와 울퉁불퉁한 길을 따라가고 있다. 하나님을 위해 재산을 완전히 버리고, 영생을 위해 세상을 온전히 저버린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온유한 자도, 겸손한 자도, 침묵하는 자도 없다. 아무도 모욕을 참지 못하고, 아무도 비방을 참지 않는다. 그러나 모두 분노하기 쉬우며, 반박하기를 좋아하고, 모두 게으르고 짜증이 많으며, 화려한 옷차림에만 신경 쓰고, 모두 허영심에 차 있고 명예를 탐하며, 모두 자만심에 차 있다.

23. 우리 죄를 위해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나무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말을 듣고도, 우리는 헛된 생각에 빠져 비웃고 있습니다. 태양은 주님의 모욕을 참지 못하고 그 빛을 어둠으로 바꾸었으나, 우리는 죄로 인한 어둠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습니다. 성전의 휘장은 조금도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저절로 찢어졌으나, 우리는 우리 죄로 인해 마음이 찢어지는 고통을 겪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 형제들아, 마침내 회개하여 우리 죄로 인해 하나님을 달래야 합니다.

24. 그 날이 우리를 갑자기 덮쳐 오지 않을까 두렵고, 우리가 벌거벗고 가난하며 부적합한 상태로 드러나 버림받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노아 시대에 살던 사람들에게도 바로 이런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장사하고, 사고, 팔다가, 홍수가 닥쳐 모두 멸망했다”(누가복음 17:27, 28).

25. 구원받고자 하는 자는 구원을 위해 열심을 내고, 천국에 들어가고자 하는 자는 게으르지 말라. 지옥의 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자는 율법에 따라 힘쓰라. 쉬지 않는 구더기에게 던져지는 것을 원치 않는 자는 정신을 차리라. 혼인 잔치에 들어가 즐거워하기를 원하는 자는 밝게 타오르는 등불과 그릇에 담긴 기름을 준비하라. 그 혼인 잔치에 초대받기를 기대하는 자는 자신에게 빛나는 옷을 마련하라.

26. 왕의 도시는 기쁨과 환희로 가득 차 있으며, 빛과 즐거움으로 충만하여, 그곳에 거하는 자들에게 영생과 더불어 온갖 위로를 쏟아 붓는다. 왕과 같은 도시에 살고자 하는 자는 서둘러 나아가라. 날이 저물었으니, 길에서 무엇을 만날지 아무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떤 여행자는 길이 멀다는 것을 알면서도 저녁까지 누워 잠을 자다가, 깨어보니 날이 이미 저물어 있음을 깨닫고, 막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을 때 갑자기 구름과 우박, 천둥, 번개, 사방에서 닥치는 재앙을 마주하게 되어, 하룻밤 묵을 곳까지 갈 수도 없고,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처지가 되듯이, 마찬가지로 우리도 회개의 시기에 소홀히 한다면 똑같은 일을 겪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나그네요, 이방인”입니다(시 38:13). 그러니 제때에 우리 성읍과 조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힘쓰자.

27. 형제들아, 우리는 영적인 상인으로서, 우리의 구주이신 그리스도이신 그 귀중한 진주, 곧 도둑맞을 수 없는 보물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진주를 얻기 위해 게으름 피우지 맙시다. 이를 얻기 위해 열심을 낸 자는 복이 있나니, 세 배로 복이 있도다. 그러나 이를 소홀히 여겨 우리 모두의 창조주를 스스로 얻지도 못하고, 그분께로부터 얻어지지도 못한 자는 지극히 불쌍하고 가난한 자라.

28. 우리가 주님이신 참 포도나무의 가지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그러니 우리 중 누구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가 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진리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포도원을 가꾸시며, 열매를 맺는 자들을 사랑으로 돌보아 그들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그러나 열매를 맺지 않는 자들은 잘라내어 포도원 밖으로 내쫓아 불에 태우실 것입니다. 그러니 스스로를 잘 살피십시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로 드러나서 베임을 당하고 불에 던져지지 않도록 하십시오.

29. 우리 또한 하늘과 땅의 창조주이시며 집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뿌리신 선한 씨앗입니다. 이제 추수 때가 이미 무르익었고, 추수하는 자들의 손에는 낫이 들려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손짓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가라지처럼 되지 않도록, 단으로 묶여 영원한 불길 속에 던져지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마태복음 13,30).

30. 왕 중의 왕께서 우리를 그분의 궁전으로 열리는 혼인 잔치에 초대하셨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그런데도 왜 우리는 게으름에 빠져, 우리 자신을 위해 빛나는 옷과 밝게 타오르는 등불, 그리고 우리 그릇에 담긴 등유를 마련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입니까? 어떻게 생각해보아도, 아무도 벌거벗은 채로 그곳에 들어갈 수는 없다는 것을 모르시겠습니까? 만일 누군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채로 들어가려고 고집을 부린다면, 그런 자가 어떤 벌을 받게 될지 아십니까? 왕의 명령에 따라 그의 손과 발을 묶어, “울며 이를 갈게 될” (마태복음 22:13)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내던져질 것입니다. 겉으로만 단장한 우리가 육신의 정욕 때문에 혼인 잔치장에서 쫓겨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31. 어떤 아버지가 이토록 자비로우시겠습니까? 어떤 아버지가 이토록 자애로우시겠습니까? 우리 주님께서 당신의 종들에게 베푸시는 사랑처럼, 이토록 사랑하시는 아버지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모든 것을 공급하시고, 모든 것을 풍성히 비축해 주시며, 우리 영혼의 상처를 치유하시고, 우리가 그분을 저버려도 오래 참으시며, 모든 이가 그분의 왕국의 상속자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죄인의 죄를 용서하시며 그를 열심으로 이끄시고, 연약한 자의 기도에 속히 응답하셔서 그가 낙담하지 않게 하십니다. 그분은 권능으로 우리를 강제로 선한 길로 이끌 수도 있었으나, 우리의 자유 의지가 그분의 찬양을 잃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 그러지 않으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이토록 사랑하시고 자비를 베푸시는데, 우리가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그분은 우리의 마음의 눈을 속량하시고 밝히셨으며,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온전히 찾게 하시려고, 그분에 대한 지식과 그분의 달콤함을 맛보게 하셨다. 그분의 사랑을 맛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는 이를 통해 그 사랑을 끊임없이 맛볼 준비를 마쳤다.

32. 누가 이런 주님을 사랑하지 않겠는가? 누가 그분의 선하심을 고백하고 경배하지 않겠는가? 만일 우리가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지 않는다면, 심판의 날에 우리가 무슨 변명을 할 수 있겠는가? 아니면 그분께 무엇을 말하겠는가? 듣지 못했거나, 알지 못했거나, 가르침을 받지 못했다는 말인가? 그러나 그분의 소식은 온 땅에 퍼져 나갔습니다. 우리를 위해 해야 할 일을 그분이 하지 않으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분은 우리를 위해 측량할 수 없는 높이와 아버지의 축복받은 품에서 내려오지 않으셨습니까? 보이지 않으시던 그분이 우리를 위해 보이시는 분이 되지 않으셨습니까? 불멸의 불이신 그분이 우리를 위해 육신을 입지 않으셨습니까? 불멸의 그분이 우리를 살리기 위해 우리를 위해 죽지 않으셨습니까? 우리를 그분과 함께 부활시키기 위해 묻히지 않으셨습니까? 그분은 원수를 결박하여 우리를 해방시키시고, 우리가 원수를 대적할 힘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부르었을 때, 그분이 우리를 듣지 않으셨던 적이 있었는가? 우리가 문을 두드렸을 때, 그분이 우리에게 열어주지 않으셨던 적이 있었는가? 설령 때때로 지체하셨다 해도, 그것은 우리의 상을 더 크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이 모든 것을 마음에 새기면, 누가 여전히 무관심과 안일함에 머물며, 그로 인해 그러한 주님을 모욕하겠는가?

33. 형제여, 이 점을 깊이 생각해 보라! 어제 우리와 함께 있어 대화를 나누던 형제들은 오늘 이미 우리 곁에 없습니다. 그들은 각자의 수고를 보여드리기 위해 우리 모두의 주님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어제”와 “오늘”이 무엇인지 보십시오. “어제”가 아침 꽃처럼 지나갔듯이, “오늘”도 저녁 그림자처럼 지나갈 것입니다. 그러니 네가 얻은 것을 살펴보아라.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유익한가? 우리의 날들은 광대처럼 스쳐 지나간다. 날마다 자신의 일에서 큰 이득을 얻고 영생에 쌓아 두는 자는 복이 있다. 그런데 너는 왜 소홀히 하는가, 사랑하는 자여? 왜 게으름을 피우는가? 왜 낙담(게으름)에 취해 마치 포도주를 마시듯 하는가?

34. 두 여행자가 있다고 상상해 보라. 각자가 자기 집으로 가던 중 길에서 서로 마주쳤는데, 저녁이 되자 둘 다 도착한 여관(숙소)에 머물렀다가 아침이 되자 서로 헤어졌다. 그들 각자는 자기 집에 무엇이 있는지, 즉 부유함인지 가난인지, 평안인지 슬픔인지 알고 있다.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이 삶은 여관과 같아서, 거기서 각자의 곳으로 떠나며 헤어지고, 우리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자신이 하늘에 무엇을 바쳤는지, 예를 들어 눈물의 기도나 잦은 기도를, 또는 통회하는 시편 찬양이나 겸손한 지혜를 동반한 절제, 혹은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포기, 또는 위선 없는 사랑과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을 바쳤는지는 분명하기 때문이다. 만약 네가 이를 미리 드렸다면, 담대히 나아가라. 네가 안식으로 떠나기 때문이다.

35. 너에게 회개할 시간이 주어졌으나, 너는 회개에 소홀히 하고 있다. 설마 죽음에게 “기다려라, 내가 회개할 시간을 달라”고 말하겠느냐? 그러니 정신을 차려라, 사랑하는 자여, 정신을 차려라. 마지막 시간이 그물처럼 너를 덮칠 때, 그때서야 공포에 질려 “아아! 내 날들은 산만함 속에서 흘러갔구나. “부적절한 생각들로 내 시간을 허비했구나!”라고 비명을 지르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이 세상에 더 이상 머물 수 없게 된 죽음의 순간에 그런 생각을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지금 당장 네 마음으로 이 말씀들을 깊이 새기고, 그 힘에 따라 네 삶을 바로잡아라.

36. 누가 울지 않겠으며, 누가 슬퍼하지 않겠으며, 누가 전 우주의 주님께서 친히 그리고 그분의 종들, 곧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통해 설교하시고 외치시는데도 듣는 이가 없다는 사실에 공포에 휩싸이지 않겠는가? “혼인 잔치가 준비되었다”고 그분은 외치시며, “내 양은 살이 쪄서 도살당했다” (마태복음 22:4). 신랑은 영광과 화려함 속에서 혼인 잔치장에 앉아 계시며, 오는 자들을 기쁨으로 맞이하신다. 문은 활짝 열려 있고, 종들은 성심을 다해 섬기고 있다. 문이 닫히기 전에 서둘러 들어가라. 그렇지 않으면 밖에 남겨질 것이며, 너희를 들여보내 줄 이가 없을 것이다.” – 그러나 이를 깨닫는 이가 없으며, 아무도 노력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나태함과 이 세상의 염려가 마치 사슬처럼 우리의 마음을 얽어매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올바르게 기록하고 올바르게 읽지만, 그 말씀을 올바르게 따르려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명해진 것을 행하는 것이 우리에게 달갑지 않기 때문입니다.

37. 한밤중에 인류가 잠에 빠져 있을 때, 때로 하늘에서 갑자기 큰 소리와 끔찍한 천둥, 그리고 지진과 함께 무서운 번개가 치면, 잠자고 있던 자들이 갑자기 공포에 휩싸이듯이; 그 시각에, 온 땅을 순식간에 공포에 빠뜨리는 가장 빠른 번개와 같이, 하늘에서 나팔 소리가 무섭게 울려 퍼져, 잠든 자들을 깨우고, 옛날부터 잠들어 있던 죽은 자들을 일으킬 것이다. 이 하늘과 “하늘의 권세들”이 흔들릴 것이며 (마태복음 24:29), 온 땅이 마치 바다의 물처럼 그분의 영광 앞에서 흔들릴 것이니, 이는 무서운 불이 그분의 얼굴 앞에 앞서 나아가 땅을 더럽히는 불의로부터 정화할 것이기 때문이며; 지옥은 영원한 문을 열고, 죽음은 폐지되며, 썩어 문드러진 인간의 육신은 나팔 소리를 듣고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때 의인들은 기뻐하고 경건한 자들은 즐거워할 것이며, 온전한 수행자들은 그들의 수고의 대가로 위로를 받을 것이며; 순교자들과 사도들, 예언자들은 면류관을 쓰게 될 것이다. 그 시간에 “구름 속으로 영광 중에 들려 올려져” 불멸의 신랑을 맞이할 자격을 얻은 자는 복이 있도다(살전 4:17). 이곳에서 각자가 자신의 날개를 펼쳤듯이, 저곳에서도 하늘로 날아오를 것이며; 이곳에서 각자가 자신의 마음을 정화했듯이, 저곳에서도 그분의 영광을 볼 것이며, 각자가 그분을 사랑한 만큼, 저곳에서 그분의 사랑으로 충만해질 것이다.

38. 나는 그 시간을 떠올리며 전율했고, 그 무서운 심판을 생각하니 공포에 휩싸였다; 낙원의 기쁨을 떠올리며, 벌떡 일어나 울음을 터뜨리고는 더 이상 울 힘이 남아 있지 않을 때까지 울었다; 이는 내가 나태와 산만함 속에서 나날을 보내고, 불순한 생각들로 세월을 허비했기 때문이다. – 세월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깨닫지 못했고, 어떻게 지나갔는지 느끼지 못했다; 날들은 줄어들었으나, 나의 죄악은 늘어났도다. 아아! 그 때 내가 무엇을 해야 하리요? 나를 둘러싼 지인들이, 내가 경건한 모습으로 보이는 것을 보고 나를 칭찬했으나, 실은 내면은 죄악과 부정한 것으로 가득 차 있었고, 마음을 살피시고 내면을 꿰뚫어 보시는 주님을 잊고 있었으니. – 그곳에는 참된 수치가 있으며, 그곳에서 수치를 당할 자는 불쌍한 자라. – 주님의 자비로 간구하오니, 사람을 사랑하시고 선하신 주님, 저를 주님을 크게 슬프게 하는 염소들과 함께 왼쪽에 두지 마시고, 저에게 “ “너를 알지 못하노라”라고 하지 마시고, 주님의 자비로 저에게 끊임없는 눈물을 주시고, 제 마음에 통회와 겸손을 주시며, 그것을 정화하사 주님의 은혜의 성전이 되게 하소서.

39.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한마음으로 간구합니다. 시간이 있을 때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기 위해 힘쓰십시오. 기도와 시편 찬양으로 주님 앞에서 밤낮으로 울부짖으십시오. 그리하여 주님께서 우리를 그 끝없는 울음과, 이를 갈음과, 지옥의 불과, 쉬지 않는 구더기로부터 구원하시고, 슬픔과 병과 한숨이 사라진 곳, 곧 항상 기쁨과 즐거움과 황홀함이 넘치고, 하나님께서 그분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마련하신 영적인 음식으로 가득 찬 잔치가 있는 곳입니다. 그곳을 누릴 수 있는 자는 복이 있고, 그곳을 잃게 될 자는 불쌍합니다.

40. “부자가 말하니, 모든 이가 잠잠하였고, 그의 말이 구름까지 닿았도다”(시라 13,28).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나, 우리는 잠잠히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고; 오히려 말씀하시는 분 앞에서는 어떤 이는 졸고, 또 다른 이는 마음속으로 어딘가 다른 곳에 딴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느냐? “지극히 높으신 분의 율법을 듣지 않으려 귀를 돌리는 자는, 자기 기도를 더럽힌 자니라” (잠언 28, 9).

41. 네가 부름받은 영생을 위해, 많은 증인들 앞에서 네 선한 고백을 고백하라: “이제 조금만 더, 오실 분이 오셔서 그것을 완성하실 것이니” (히브리서 10:37).

42. 온 힘을 다해 주님을 경외하고, 악인들의 행실을 본받지 말라. 그들의 불은 꺼지지 아니하며, 그들의 구더기는 죽지 아니하리라 (마가복음 9:44).

43. “너는 아직 젊고, 앞으로 살 날이 많이 남았으니, 지금은 즐거워하고 네 영혼을 슬퍼하지 말라. 늙어서 회개하면 된다”라고 말하며 너에게 기만적인 생각을 심어주는 교활한 자를 믿지 말라. – 형제여, 네가 과연 그렇게 분별력이 없어, 교활한 자가 이 일로 너를 속일 것임을 알지 못하는가? 네가 젊고 기력이 충만하여 온갖 수고를 감당하고 고행을 견딜 수 있을 때 회개하지 않는다면, 늙어서 노년의 무력함을 핑계로 삼지 않겠느냐? – 설령 네가 아직 젊은 나이에 이곳에서 데려가진다면, 그때는 어떻게 하겠느냐? 그러니 원수의 길을 버리고, “깨어 기도하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간을 알지 못하느니라”(마태복음 25:13)고 말씀하신 참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라.

44. 그 무서운 시간이 반드시 올 것이며, 지체되지 않을 것이다. 그때 우리는 고초를 당하면서도 변명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과연 우리가 주님께 무엇을 대답할 수 있겠는가? 그분이 우리를 위해 하지 않으신 일이 무엇이 남아 있었단 말인가? – 우리가 겸손해지도록, 종의 형상으로 낮추신 하나님, 곧 말씀이신 분을 보지 못했단 말인가? 우리가 모욕당할 때 분노하지 않도록, 그분의 헤아릴 수 없는 얼굴이 침을 맞으시는 것을 보지 못했단 말인가? 아니면 우리가 순종이라는 멍에를 온유하게 지도록, 그분의 거룩한 등이 채찍질당하는 것을 보지 못했단 말인가? 아니면 우리가 모욕당할 때 격분하지 않도록, 그분의 얼굴이 뺨을 맞으시는 것을 보지 못했단 말인가? 혹은 그분이 “나에게서 배우라. 나는 온유하고 마음이 겸손하니라”(마태복음 11:29)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지 못했는가? 이는 우리도 온유하고 겸손해지며, 서로 시기하지 않고, 서로를 괴롭히거나 잡아먹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그분께 어떤 변명을 드릴 수 있겠는가?

45. 하나님께서 회개한 많은 이들을 용서하셨음을 압니다. 그러나 그들 중 대다수는 무지함으로 인해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이들을 용서하셨음을 압니다. 그러나 그들 중 많은 이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그들을 변호해 줄 중보자들이 있었습니다. – 고레와 다판에 대해 기록된 내용을 읽으며, 하나님께서 모세를 위해 그들을 어떻게 벌하셨는지 보고 소름이 끼칩니다. 그의 누이 마리아에 대해 기록된 내용을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그녀가 모세에게 한 마디 말을 했다는 이유로 온몸이 나병으로 뒤덮였던 일 말입니다. – 그 생각만으로도 전율합니다. 거룩한 사람에게도 그런 벌이 내렸다면, 영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어떤 형벌을 내리실까요? 형제를 죽인 가인은 그토록 오랜 형벌을 받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을 모독한 자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대홍수 때의 심판은 엄격했으니, 나는 그때 멸망한 자들과 같은 운명을 맞을까 두렵다. 하나님께서는 완성될 수 없었던 기둥을 세운 것 때문에 진노하셨는데, 하물며 내가 스스로 넘어진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실까? 저는 회개했으나, 과연 하나님을 달래드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성자들에게도 간청하지만, 어쩌면 그들의 기도가 받아들여지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노아도, 욥도, 다니엘도” 그들이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 예레미야의 말을 듣기 때문입니다(예레미야 14:18).

46. 아버지의 품에서 내려오셔서 우리를 위한 구원의 길이 되신 주님께서는 신성한 음성으로 우리에게 회개를 권면하시며 말씀하시기를, “내가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회개하게 하려 함이라”(마태복음 9:13)고 하셨습니다. – 내가 이 말을 했다면, 너는 내 말을 듣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님께서 친히 이 말씀을 하셨는데, 어찌하여 네 생명을 돌보지 않고 이를 무시하는가? 네 내면에 생각과 행실의 상처가 있음을 스스로 깨닫고 있다면, 어찌하여 네 숨겨진 상처들을 돌보지 않는가? 의사를 두려워하는 것인가?! 그러나 그분은 선하심과 자비로 충만하시다. 그분은 너를 위해 아버지의 품에서 오셨다. 네가 두려움 없이 그분께 나아갈 수 있도록 너를 위해 육신을 입으셨고, 네 무거운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너를 위해 사람이 되셨다. – 그리고 그분께서도 큰 사랑과 온갖 선하심으로 너를 그분께로 부르신다.

47. 회개의 문이 열려 있다. 그러니 죄인아, 그 문이 닫히기 전에 서둘러 들어가라. 그 문이 닫힐 시간이 다가왔을 때 네가 여전히 무관심 속에 머물러 있다면, 그 문은 너를 기다려 주지 않을 것이다. 왜 네 삶을 미워하게 되었느냐, 불쌍한 자여? – 사람아, 네 영혼보다 더 높은 것이 무엇이랴? 그러나 너, 죄인아, 그것을 소홀히 여겼다. 사랑하는 자여, 하늘의 의사가 언제 자신의 치유의 문을 닫으라고 명하실지 네가 알지 못한다. 어서 다가와라, 간청하노니, 치유받으려 애쓰라. 그분은 네 회개를 통해 하늘의 군대를 기쁘게 하기를 원하신다. 해는 이미 저녁 시각에 이르렀고, 오직 네가 성소에 도달할 수 있도록 너를 위해 시간을 늦추고 있을 뿐이다.

48. 네 더러운 원수를 얼마나 더 참아줄 것이냐? 뻔뻔스럽게도 그 원수의 뜻을 따르면서 말이다. 그는 너를 불길 속으로 던져 넣고자 한다. 이것이 바로 그의 속셈이다! 이것이 바로 그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주는 그의 선물이다! 그는 항상 모든 사람과 전쟁을 벌이며, 그들을 나쁘고 더러운 욕망으로 타격하고, 또한 그에게 굴복한 자들을 다시 절망으로 몰아넣고, 마음을 잔인하게 만들고, 눈물을 말려버려 죄인이 회개에 이르지 못하게 한다. 사람아, 그가 기뻐하는 모든 것에 대해 증오와 혐오를 품으며, 온전히 그에게서 멀어져라.

49. 자, 시작합시다. 아직 시간이 있을 때 기도합시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언제나 하나님을 달래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아직 그분의 자비의 문을 두드릴 때가 남아 있는 한, 용서를 얻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눈물이 받아들여질 시간이 아직 남아 있을 때 눈물을 흘립시다. 그래야 저 세상으로 떠나서 헛되이 울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눈물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50. 왜 우리는 구원을 소홀히 하는가? 왜 아직 시간이 있을 때 치유되기를 원하지 않는가? 이 시기에 흘린 몇 방울의 눈물과 회개만으로도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다. 이곳에서 조금만 울어라. 그래야 저기 영원한 어둠 속에서 영원토록 울지 않을 수 있다. 이곳에서 회개하여, 저곳에서 꺼지지 않는 불길에 던져지지 않도록 하라.

51. 많은 성도와 의인들은 자유의 선한 뜻과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굳건한 소망을 따라 이 세상과 그 일들을 버렸으니, 그들은 달콤한 낙원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것임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사랑한 그들은 모든 썩어 없어질 것보다 그분을 더 귀히 여겼기에, 매일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빛을 얻고, 성령 안에서 끊임없이 즐거워하고 있다. 성 삼위일체께서 그들을 기뻐하시며, 천사들과 대천사들이 그들을 기뻐하며, 달콤한 낙원이 그들을 기뻐한다.

52. 그러나 다른 이들은 썩어 없어질 것에 빠져 거의 무의미한 존재와 같아졌다. – 사람아, 너는 왜 그런 죄 많은 삶을 살고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너를 이성 있는 존재로 창조하셨거늘, 스스로 말을 못하는 짐승과 같은 존재가 되려 하는가. 제발 정신을 차리고 제정신을 차려라. – 너를 위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셨으니, 너를 땅에서 하늘로 들어 올리시려는 것이다. 너는 하늘의 신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았는데, 어찌 무심할 수 있느냐? 어찌 주저하느냐? 말해 보라, 결혼식에 어울리는 예복을 갖추지 않고 어떻게 그 자리에 갈 수 있겠느냐? 만약 예복 없이 들어간다면, 즉시 이런 말을 듣게 될 것이다. “친구여, 어떻게 예복 없이 이곳에 들어왔느냐?”(마태복음 22:12). 그를 묶어 불타는 화로에 던져 버리라. 과연 이것을 두려워하지 않는가? 신랑께서 그분의 영광 중에 나타나실 때가 가까워졌다는 사실에도 떨지 않는가? – 모든 것이 이미 준비되어 있고, 하늘의 나팔이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모르겠는가? – 마땅히 준비하지 않는다면, 그 시간에 너는 무엇을 하겠느냐?

53. 죽음을 맞이할 때 모든 죄인들에게는 큰 두려움이 닥친다. 이별의 시간은 모든 성도들과 의인들, 모든 수행자들에게 기쁨을 주지만, 바로 그 시간이 부지런하지 못하고 연약한 자들을 슬픔에 빠뜨리며, 그들에게 지난 생애 동안의 태만과 안일함을 떠올리게 한다. 그때까지 자신의 구원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던 사람의 마음은 회개의 고통으로 끔찍하게 괴로워한다. 이 회개의 고통은 죽음과 이별에 대한 두려움 그 자체를 능가한다. – 반대로 의인과 성도들, 그리고 수행자들은 죽음과 이별의 순간에 기뻐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수행, 철야 기도, 기도, 금식, 눈물, 맨땅에 엎드려 눕기, 그리고 거친 짚자루 위에서의 수고라는 위대한 노력을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영혼은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육신과 이별한 후 안식에 들어갈 것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음의 현상은 죄인들과, 헛된 세상에서 삶의 순결을 돌보지 않는 연약한 사람들에게는 두려운 일이다. 그리고 죄인의 이별의 시간은 매우 큰 슬픔을 안겨준다. 그에게는 자신을 위해 어떤 말도 할 수 있는 권한이 전혀 주어지지 않으며, 그 시간에 대한 명령은 엄격하게 내려진다.

54. 이 세상 모든 것에서 해방된 이에게는 이별의 시간이 슬픔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정욕에 사로잡힌 자에게는 죽음이 슬픔이 되며, 죄인에게는 슬픔이 되고,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일을 게을리했던 게으른 자에게는 슬픔이 되며, 세상의 염려로 자신의 영혼을 얽매어 둔 탐욕스러운 자에게는 슬픔이 된다. 부자에게는 슬픔을 안겨주니, 이는 그가 원치 않게 자신의 부와 헤어지게 되기 때문이며; 평화를 사랑하는 자에게는 슬픔을 안겨주니, 이는 그가 세상과 헤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든 이들은 세상의 근심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죽음의 순간에 슬퍼한다. 그러나 세상으로부터 자유롭고 그 근심에서 벗어난 영혼이 무엇을 한탄하고 슬퍼하겠는가? 그녀는 자유를 갈망하고, 그것을 추구하며, 얻어냈으며, – 항상 그 모습을 유지하며, 용감하게 하나님의 길을 걸어가며, 기꺼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일을 행했다. – 너도 온 마음을 다해 하느님께 의지한다면, 결코 죽음의 순간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죽음과 육체와의 이별은 너에게 기쁨이 될 것이다.

55.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깨달음의 은총을 주셨으나, 우리는 날마다 그것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실천했다면, 그분의 뜻을 행한 모든 이들과 함께 심판의 때에 복을 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천하지 않았으니, 그곳에서 우리에게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깨달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죄를 짓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섭리와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모든 은총을 경험합니다. 그분의 은혜는 종종 언제나 우리 마음을 찾아오시며, 안식을 얻으면 들어와 영혼 속에 끊임없이 머무르시지만, 깨끗한 마음을 찾지 못하면 즉시 물러가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관대하심이 다시금 그 은혜를 내려 우리 죄인들을 찾아오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본성상 그렇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뜻에 따라 변덕스럽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산만하고 연약하며, 시기심 많고 교활하며, 종종 서로에 대해 나쁘게 생각하고, 악한 생각을 품으며, 마치 끔찍한 진창 속에 빠진 것처럼 항상 온갖 생각에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은혜가 우리를 찾아올 때, 우리 마음속에서 불결한 생각들이 풍기는 악취를 마주하고는, 즉시 물러나 버립니다. 은혜가 원하는 대로 우리 안에 들어와 거할 입구를 찾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 빛나는 달콤함으로 마음에 인상을 남길 뿐, 사람이 은혜가 자신을 찾아왔으나 들어올 길을 찾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게 하여, 은혜의 빛에 달콤함을 느끼고 그 은혜를 찾게 할 뿐입니다. 그러나 은혜 그 자체는 우리에게서 완전히 물러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체의 자비로 인해 모든 이를 사랑하도록 이끌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보십니까? 그리스도의 자비를 보십니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보십니까? 은혜가 찾아왔을 때 덕행의 향기와 영혼의 거룩함을 발견하고, 영원토록 그 안에 거할 수 있도록, 항상 깨끗한 마음을 준비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56. 원수의 그물에 걸렸으나 그 얽힘을 끊어내고, 그물에서 탈출한 물고기처럼 그에게서 도망쳐 숨은 자들은 복이 있다. 물고기는 물속에 있을 때 잡혔더라도 그물을 찢고 깊은 곳으로 숨으면 구원받지만, 하지만 육지로 끌어올려지면 더 이상 스스로를 구할 수 없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아직 이 생에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원수의 의지의 얽힘을 끊고, 회개를 통해 죄의 짐을 벗어던지며, 천국으로 구원받을 권능을 가지고 있다. 만약 그 무서운 명령이 우리를 덮쳐 영혼이 떠나고 육신이 땅에 묻히게 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스스로를 도울 수 없게 될 것이니, 마치 물에서 건져 올려 그릇에 갇힌 물고기가 더 이상 스스로를 도울 수 없는 것과 같다.

57. 죽은 자의 부활 날에 수치 속에 남지 않도록, 죽음이 올 때까지 기다리지 맙시다. 그때 성도들은 선한 행실로 스스로 마련한 빛나는 옷을 입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우리가 밝은 영광을 입지 못한 채, 오히려 검게 물들고 악취로 가득 찬 모습을 보게 된다면, 과연 어떤 수치심이 우리를 사로잡겠는가? – 그러니 회개의 길에 들어서고 정욕에서 스스로를 정화함으로써, 그러한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힘쓰자.

58. 죄는 어둠이고, 덕은 빛이다. 죄는 그것을 사랑하고 행할 때, 행하는 자를 어둡게 하지만, 덕은 그 안에서 힘쓰고 성공한 자를 빛나게 한다.

59. 우리 몸에서 영혼을 거두라는 무서운 명령이 내려지기 전에,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열매를 맺읍시다. 그때 주 우리 하나님을 모독하고 회개하지 않은 자에게는 화가 있을 것입니다! 그는 태만함으로 허비한 시간을 찾으려 하겠지만, 결코 찾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우리 주 하나님 앞에서 울며 그분의 자비를 구하자. 우리에게 시간이 있는 동안, 스스로를 지키고 주님의 축복을 얻자. 우리는 돈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설령 누군가 돈을 잃는다 해도, 그 대신 다른 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혼이 위험에 처해 있으니, 이를 잃어버리면 다시는 되찾을 수 없다(마태복음 16,26.27).

60. 우리의 날들은 빠르게 지나가고, 끝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갇히기 전에, 우리 주 하나님 앞에서 울부짖읍시다. 만일 우리가 이 날들을 게으름 속에서 보내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조금도 활용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아무리 많은 눈물을 흘려도 이 날들을 되돌릴 수 없을 것입니다. “보라, 지금이 은혜의 때요, 지금이 구원의 날이라”(고린도후서 6:2). 깨어 있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기쁨으로 관을 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울고 있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라” (마태복음 5:4),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과 함께. 주님을 위해 수고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에게는 낙원의 기쁨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61. 우리도 다른 이들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할 것이며, 다른 이들도 우리의 행위로 인해 정죄받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모든 것이 드러난 채 심판자 앞에 서서 우리가 행한 일에 대해 보고할 때, 그때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대신해 정죄받지 않을 것이니, “각자 자기 짐을 지리라”(갈 6:5) 했기 때문이다.

62. 악한 일을 한 사람이 통치자에게 고발된다면, 피고인은 다른 곳으로 도망쳐 처벌을 피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의 면전에서 우리가 어디로 도망칠 수 있겠는가? “주의 영을 피하여 어디로 가겠으며, 주의 면전에서 어디로 도망하리이까?”라고 말씀하신 분의 말씀대로 말이다. 내가 하늘에 올라가도 주께서 거기 계시고, 음부에 내려가도 주께서 거기 계시니, 내가 아침 일찍 날개를 펼치고 바다 끝으로 피하더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라” (시 138, 7–10).

63. 좁고 험한 길을 걸어가며, 회개를 사랑하여 우리 안에 죽음에 대한 기억이 머물게 하고, 우리가 심판에서 해방되게 하자. 기록된 바와 같이 “지금 웃는 자들아, 화가 있을지어다. 너희는 울며 통곡할 것이니라” (누가복음 6, 25). “지금 우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라” (마태복음 5:4). 무덤을 들여다보면 우리 본성의 신비를 보게 될 것이니, 서로 겹쳐 쌓인 뼈 더미와 살이 벗겨진 두개골, 그리고 그 밖의 뼈들이리라. 그것들을 바라보며, 우리는 그 안에서 우리 자신을 보게 될 것이다. 진정한 색채의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으며, 뺨의 화사함은 어디에 있는가? 이를 깊이 생각하며, 부활의 날에 수치를 당하지 않도록 육신의 욕망을 버리자.

64. 매일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며, 그 여정을 준비하라. 네가 예상치 못한 그 시간에 무서운 명령이 내릴 것이니,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마음의 통회는 아름답다. 그것은 인간의 영혼을 치유한다.

65. 선원들이 배에 영원히 머물 수 없고, 여관에 머무는 여행자가 그곳을 떠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도 이 생에 영원히 머물 수는 없다. 우리는 나그네요 이방인이다. 그러니 이 사실을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이 생을 떠날 준비를 하자.

66. 네가 수고하는 자였다면, 다른 삶으로의 선한 이주가 다가온다고 해서 슬퍼하지 말라. 재물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자는 결코 슬퍼하지 않는다.

67.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자유롭게 창조하셨으니, 그러므로 그에게 영광과 형벌이 예정되어 있다. 즉, 선하게 수고하는 자에게는 영광과 면류관이, 범죄자와 태만한 자에게는 형벌과 고통이 주어진다. “죽음에 이르는 죄”가 있다(요한일서 5:16); 죄에 빠져 굳어지고, 금기된 행위에서 벗어나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지 않는 자는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것이다.

68. 영혼이 육신과 헤어지는 죽음의 순간에 두려움이 크다. 왜냐하면 이 이별의 순간에 영혼 앞에 그 영혼이 낮과 밤으로 행한 선한 일과 악한 일들이 모두 드러나기 때문이다. 두려움에 떨며 자신의 행실을 바라보며 영혼은 그들에게 말합니다. “물러가라, 나를 나가게 해 달라.” 그러자 그 행실들은 한 목소리로 대답합니다. “네가 우리를 만들어 냈으니, 우리는 너와 함께 하나님 앞에 나아가 심판을 받을 것이다.”

69. 이별의 날과 시간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우리가 땅 위에서 걱정 없이 거닐며 즐거워할 때, 갑자기 우리 영혼을 육신에서 거두라는 무서운 명령이 우리를 덮친다. 그리하여 죄인은 예상치 못한 날과 시간에, 죄로 가득 차고 변명할 여지가 없는 영혼을 안고 그 길을 떠난다.

70. 형제여, 네가 이 땅에서 아직 많은 해를 더 살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리고 죄악된 생각과 행위에 눈감으며 나태해지지 말라. 주님의 명령은 갑작스럽게 닥쳐올 것이며, 죄인은 회개하고 용서를 받을 시간이 이미 없는 상태에서 그 명령에 휩쓸리게 될 것이다. – 형제여, 이별의 순간에 닥칠 죽음에 대해 무엇을 말하겠는가?!

71. 끊임없이 죽음과 이별, 그리고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날을 기다려라. 그리고 구원을 지혜롭게 준비하는 자로서 항상 네 등불을 준비해 두며, 매 순간 눈물과 기도로 그것을 점검하라.

72. 날이 저물어 가고, 우리의 시간은 끝나가고 있는데, 우리는 믿음 없음으로 인해 아직 아침이라고 생각한다. 수확의 때가 이미 다가왔고, 이 세상이 끝나가고 있다. 천사들은 낫을 준비해 두고,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두려워하자! 벌써 낮 11시인데, 갈 길은 아직 멀다. 우리가 길 위에서 발견되도록 힘쓰자. 정신을 차리고, 잠에서 깨어나자.

73. 스스로에게 말하라. “저기, 우리 형제들은 일하고 있는데, 우리 둘은 게으름만 피우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들은 신성한 경전을 들으며 목마른 땅이 비를 흡수하듯 그 말씀을 흡수하고 있는데, 우리는 수도원 안에 있으면서도 온통 생각만 이리저리 떠돌고 있다. 그들은 정신을 차리고 있는데, 우리는 게으르다. 그들은 기도에 깨어 있는데, 우리는 잠과 나태함에 얽매여 있다; 그들은 면류관을 받았는데, 우리는 여전히 나태함에 머물러 있다; 그들은 주님께 기쁨을 드리는 반면, 우리는 세상에 아부한다. 도대체 왜 정신을 차리지 않아서 우리도 상을 받지 못하는가?

74. 이 날들과 해와 달들은 꿈처럼, 저녁 그림자처럼 지나가고, 머지않아 두려우면서도 위대한 그리스도의 재림이 닥칠 것이다. – 참으로 그 날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구원받기를 원치 않았던 죄인들에게 두려운 날이다. – 그러니 이제 마침내 세상의 근심을 떨쳐 버리고, – 그 날을 맞이할 준비를 시작합시다.

75. 모든 것은 지나가고, 모든 것은 사라지며, 그 순간에 우리에게 유익을 줄 것은 우리가 이곳에서 행한 선한 행실 외에는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때 각자는 자신의 행실과 말을 의로운 심판자의 보좌 앞으로 가져갈 것이다. 행실이 드러나고, 생각과 말이 엄격히 심판받을 때, 마음은 떨리고 내면은 변할 것이다. 거기서 우리 각자가 은밀히 그리고 어둠 속에서 행한 모든 것이 드러날 때, 누가 떨지 않겠으며, 누가 울지 않겠으며, 누가 눈물을 흘리지 않겠는가.

76. 이를 설명하기 위해, 제때에 잎과 함께 열매를 맺는 결실 많은 나무들을 예로 들어 드리겠습니다. 나무들은 외부 어딘가에서 그 아름다움을 입는 것이 아니라, 각자 내면에서 자기 본성에 따라 열매를 맺습니다. 마찬가지로 그 무서운 날에 모든 인간의 육신은 선한 것과 악한 것을 모두 스스로 드러낼 것이며, 각자는 위엄 있는 심판자의 보좌 앞으로 선한 열매와 같은 행실과 잎사귀와 같은 말을 바칠 것입니다. 성인들은 선행의 열매, 즉 아름답고 귀중한 열매를 바칠 것이며, 순교자들은 고난과 박해 속에서 보여준 칭송받을 만한 인내를 바칠 것이며, 수행자들은 절제와 철야 기도, 그리고 기도의 결실을 바칠 것이다. 그러나 죄 많고, 불경하며, 더럽혀진 사람들은 수치와 울음과 탄식으로, 거기 더러움과 불의의 열매를 바칠 것이니, 이는 잠들지 않는 구더기와 꺼지지 않는 불을 위한 양식이다.

77. 그런데도 왜 우리는 소홀한가? 아니면 우리에게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는 것인가? 알고 있으면서도, 왜 그 수치와 영원한 어둠에서 벗어나기 위해 회개를 허락해 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하며 밤낮으로 울지 않는가? 그곳에서는 우리의 죄 많은 입이 막힐 것이며, 그곳에서는 모든 피조물이 떨게 될 것이며, 주님의 재림의 영광과 위엄 앞에서 성스러운 천사들의 계급들조차도 떨게 될 것이다. 우리가 모든 시간을 태만하게 보낸다면, 그날 그분께 무엇을 말하겠는가? – 여기서는 그분께서 오래 참으시며, 모든 이를 이끌어 자비롭게 당신의 왕국으로 받아들이십니다. 그러나 저기서는 결산을 요구하실 것이며, 그분을 따르려 했으나 소홀히 했던 자들에게 자비 없는 심판을 내리실 것입니다.

78. 한쪽에는 왕국과 생명, 안식과 기쁨이, 다른 쪽에는 칠흑 같은 어둠 속의 영원한 고통이 준비되어 있다. – 가고 싶은 곳으로 가라. 모든 것에 자유가 주어졌다. – 그러므로 네가 소홀히 하고, 구원을 원하면서도 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바른 길을 걷지 않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려 하지 않는다면, 네가 스스로를 파멸시키고, 스스로를 천상의 궁전에서 쫓아내는 것이다. –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위해 독생자조차 아끼지 않으셨는데, 너 이 불쌍한 자여, 정작 너 자신조차 불쌍히 여기지 않는구나. – 그러니 제발 조금만 정신을 차리고, 그 죄악의 잠에서 깨어나거라!

79. 높은 곳에 올라가면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이 하찮게 보일 것이요, 높은 곳에서 내려오면 하얗게 칠해진 작은 집 하나에도 놀라게 될 것이다.

80. 우리의 구원을 염려하고, 죽음의 시간을 염려합시다. 아아, 영혼이 육신과 헤어지는 죽음의 시간이 얼마나 무서운지요! – 그때는 아버지가 아들을, 어머니가 딸을, 아내가 남편을, 형제가 형제를 동반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각자의 행실, 즉 그가 행한 선과 악만이 동반할 것이다. 그러니 우리도 선한 행실을 앞서 보내어, 우리 스스로도 그곳으로 갈 때 그들이 우리를 그들의 성으로 맞아들이게 하자.

81. 만일 왕국을 상속받고자 한다면, 이곳에서 먼저 왕과의 교제를 쌓아야 한다. 네가 이곳에서 그분을 얼마나 공경하느냐에 따라, 그분께서도 너를 그만큼 높이실 것이며, 네가 이곳에서 그분을 얼마나 섬기느냐에 따라, 그분께서도 저곳에서 너를 그만큼 존중하실 것이다. 기록된 바와 같이: “나를 영화롭게 하는 자를 내가 영화롭게 하겠고, 나를 멸시하는 자는 수치를 당하리라” (사무엘상 2:30). 그러니 온 마음을 다해 그분을 공경하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너에게도 성도들의 영광을 누리게 하실 것이다. – 네가 묻겠지: 어떻게 그분의 호의를 얻을 수 있겠는가? – 네게 있다면, 궁핍한 자들을 돕는 것을 통해 그분께 금과 은을 바쳐라. 만약 그런 것이 없다면, 다른 선물들을 그분께 바치라. – 믿음, 사랑, 절제, 인내, 너그러움, 겸손함; 남을 정죄하지 말고, 네 눈을 지켜 헛된 것을 보지 않게 하며, – 네 손을 지켜 불의를 행하지 않게 하고, – 네 발을 악한 길에서 돌이키라; 소심한 자들을 위로하고, 연약한 자들에게 동정심을 베풀며, 목마른 자에게 시원한 물 한 잔을 건네고, 굶주린 자에게 빵 한 조각을 주라. 네가 가진 것과 그분께서 네게 주신 것을 그대로 그분께 바치라. 그리스도께서는 과부의 두 렙타조차 거절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82. 죄인을 기다리는 고통을 더 자주 떠올려, 회개하고 죄악된 삶을 끊도록 스스로를 일깨우자. – 모기보다 더 작은 것이 무엇이랴? 그러나 우리는 모기의 물림조차 견딜 수 없는데, 독이 있고 쉬지 않고 갉아먹는 벌레가 있는 그곳에서는 과연 어떻게 되겠는가? – 저녁이 되면 사람들은 “어두우니 등불을 켜라”고 말합니다. 등불이 어둠을 쫓아내니까요. 그렇다면 그곳에서 뚫을 수 없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어둠을 어떻게 견뎌내겠습니까? – 이곳에서 햇볕에 타는 사람은 그늘로 도망칩니다. 그렇다면 꺼지지 않는 지옥의 불길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83. 정신을 차리고 결코 꺼지지 않는 불길을 소홀히 여기지 마라. 만약 소홀히 여긴다면, 여기서 먼저 스스로를 시험해 보아라. 고통스러운 불의 잔혹함을 견딜 수 있는지. 등불을 켜고 손가락 끝을 대보아라. 이 고통을 견딜 수 있다면, 어쩌면 그곳에서도 스스로를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온 몸이 불길 밖에 있을 때조차 작은 한 부위의 고통도 견디지 못한다면, 온 몸과 영혼이 함께 불타는 지옥에 던져졌을 때 어떻게 하겠는가?

84.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이자 이방인이다. 그러나 언제 이곳에서 데려가실지 알지 못한다. 많은 이들이 아침에 눈을 떴다가 저녁까지 살지 못하고, 또 어떤 이들은 저녁에 잠들었다가 아침을 맞이하지 못하느니라. “사람은 헛된 것과 같으니, 그의 날들은 그늘처럼 지나가느니라”(시 143:4). 누가 알겠는가,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다 된 것은 아닐까? 그러니 우리의 구원을 소홀히 여기지 말자.

85. 죽음을 맞이할 때 주님께 기쁘게 받아들여지는 거룩한 제물이 되고, 큰 기쁨으로 육신과 헛된 삶을 떠나는 자는 복이 있다. 천사들은 하늘에서 그를 보고, 주님을 잘 아는 자신들과 같은 종으로서 그를 찬양할 것이다.

86. “주님 앞에서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귀중하니라”(시 115:6); 그러나 “죄인들의 죽음은 끔찍하니라”(시 33:22), – 그 날이 올 것이요, 반드시 올 것이며, 우리를 지나치지 않을 것이니, 그날, 사람이 모든 것과 모든 이를 뒤로하고 홀로 떠나, 모든 이에게 버림받은 채, 벌거벗고 무력한 상태로, 변호자도 동행자도 없이, 준비되지 않은 채, 대답할 말도 없이, 만일 그날이 무심코 지내는 중에 닥친다면, “아무도 알지 못하는 날,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는 때” (마태복음 24, 50), – 그때 사람은 즐기고, 보물을 모으고, 사치스럽게 지내며, 방탕에 빠져 있을 것이다. – 그 시간이 갑자기 닥칠 것이며, – 모든 것이 끝날 것이다. 깊고 고통스러운 밤 하나, – 그리고 사람은 재판을 받는 자처럼, 그를 데려가는 자들이 이끄는 곳으로 갈 것이다. 그때 너, 사람아, 많은 도우미가 필요할 것이며, 영혼이 떠나가는 그 시간에는 많은 기도가 필요할 것이다. 그때는 두려움이 크고, 전율이 크며, 저 세상으로 넘어갈 때 큰 격변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시간이며, – 무섭지만 피할 수 없는 시간이다. 이것은 모두에게 공통된 끝이며, – 모두에게 무서운 끝이다; 힘든 길이지만, 모두가 반드시 지나가야 할 길이며; 좁고 비좁은 길이지만, 우리 모두가 그 길을 걷게 될 것이며; 이는 쓰라리고 무서운 잔이지만, 우리 모두가 그것을 다 비워 마실 것이다. 그때 영혼이 겪는 것은 두려움과 공포로 가득 차 있지만, 우리 중 그 누구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 오직 그곳에 먼저 간 자들, 즉 그것을 직접 경험해 본 자들만이 알 뿐이다.

87.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아라, 그때가 얼마나 무서운지. 그들이 얼마나 혼란스러워하는지, 어떻게 한숨을 쉬는지, 어떻게 이리저리 눈을 돌리는지 보아라. 때로는 어떻게 이를 갈고 있는지 보아라. 그때 그들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을 보고,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것을 듣고,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것을 견뎌내며, 구원자를 찾지만 구원해 줄 이는 없다.

88. 죽어가는 이들 중 한 사람이 말한다. “안녕히 계십시오, 형제들아, 안녕히 계십시오. 나는 먼 길을 떠납니다. 아직 가보지 못한 길, 나에게 낯선 나라, 그곳에서 돌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는, 어둠의 땅으로. 그곳에서 무엇이 나를 맞이할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이제 떠나니, 다시는 여러분 곁으로 돌아오지 못하리라. 이 순간이 내게는 답답하니, 준비되지 않은 채 떠나기 때문이라. 이 밤이 내게는 어둡으니, 열매 맺지 못한 나무처럼 잘려 나갈 것이기 때문이라. 앞날의 여정이 내게는 무겁니, 선한 길잡이가 없기 때문이라. – 이제야 비로소 내가 스스로를 속이며 “나는 젊으니, 당분간은 인생을 즐기고 나중에 회개하면 되겠지.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니 분명 나를 용서해 주실 것이다”라고 말했던 것을 깨닫습니다. 매일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내 삶을 헛되이 보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가르쳤으나 나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훈계를 주었으나 나는 비웃었으며, 성경을 들었으나 마치 듣지 못한 사람처럼 생을 마감하고, 심판에 대해 들었으나 조롱했으며, 죽음에 대해 들었으나 마치 불멸인 양 살았다. 그리고 이제 나는 전혀 준비되지 않은 채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나를 도울 이가 없고; 회개하지 않은 채 붙잡혔으니, 나를 구원해 줄 이가 없으며; 정죄를 받게 되었으니, 나를 구해 줄 이가 없다. – 몇 번이나 회개하겠다고 결심했다가, 다시 더 나쁜 일을 저질렀는가? 몇 번이나 하나님께 매달렸다가, 다시 그분께로부터 멀어졌는가? 그분이 나를 몇 번이나 자비롭게 대하셨는데, 나는 또다시 그분을 크게 슬프게 했는가? – 그리고 이제 나는 절망적인 처지로 떠나간다. – 형제들아, 한숨을 쉬며 나를 위해 눈물을 흘려다오!!" – 이렇게 말을 마치던 이가 때때로 우리와 대화를 나누다가, – 갑자기 혀가 굳어지고, 눈빛이 변하며, 목소리가 끊기고 입이 다물어진다.

89. 마지막 시간이 다가오면, 영혼을 거두는 천사들이 보내져 떠나가는 영혼을 데려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세웁니다. 그들이 다가오는 것을 본 가련한 사람은, 설령 왕이든, 통치자든, 세상의 지배자라 할지라도, 마치 지진이 일어난 듯 온몸이 혼란에 빠지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온몸이 떨며, 사냥꾼의 손에 잡힌 새처럼 몸부림친다; 무서운 힘을 보고, 자신에게 낯설고 위대한 광경을 보고, 위압적이고 엄중한 얼굴을 보고, 이전에 본 적 없는 사물의 질서를 보며 온몸이 굳어지고 경악한다. — 이 모든 것을 그때 우리 곁에서 떠나가는 한 사람이 보고 있으며, 이미 우리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내면에서 힘이 닿는 대로 기도를 드릴 뿐이다. 그의 태도를 보고 우리는 그가 초월적인 힘을 보고 있음을 짐작하며, 서로 손짓하며 말한다. “침묵하고 더 이상 누워 있는 이를 방해하지 말자. 그를 혼란에 빠뜨리지 않도록.” 차라리 그의 영혼이 평안히 떠나고, 그가 자비로운 심판자를 만나게 되기를 기도하는 편이 낫겠다.

90. 그는 세상을 떠났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생을 다하고, 움직이지 않은 채 숨도 쉬지 않고 말도 없이 누워 있다. –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가? – 잠든 꿈과 그림자일 뿐이다. – 천사들은 영혼을 거두어, 공중으로 올라가니, 그곳에는 통치자들과 권세자들, 그리고 대적하는 세력의 지배자들이 서 있다. 이 사악한 우리의 고발자들은, – 이곳에서는 우리를 유혹하고 우리의 악행을 기록하는 자들이며, 저곳에서는 고문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하늘로 올라가는 영혼을 길에서 맞이하여 살피고, 자신들의 기록에 따라 그 죄를 계산해 낸다. – 청춘과 노년의 죄, 자발적인 것과 비자발적인 것, 행동과 말과 생각으로 저지른 모든 죄를 말이다. 오, 그곳에서 가련한 영혼이 겪는 두려움과 떨림이 얼마나 큰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어둠 속의 적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그녀가 하늘로 올라가 생명의 땅에 들어가 산 자들의 빛 속에 거하게 하지 않으려 그녀를 비방할 때, 그녀가 그때 겪는 고통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이다.

91. 그리하여 천사들은 영혼을 데리고 오직 그들만이 아는 길로 인도한다. – 우리는 몸을 정돈하여 묘지로 운반하는데, – 바로 그곳에서 또 다른 끔찍한 신비를 마주하게 된다. 작은 자와 큰 자, 왕과 평민, 주인과 노예, – 모두가 하나의 흙, 하나의 흙먼지, 하나의 재, 하나의 악취, 하나의 썩은 냄새가 되었다. 에티오피아인이 그러하듯, 한때 용모가 훤칠했던 자도 그러하고, 청년이 그러하듯, 노인이도 그러하며, 마비된 자가 그러하듯, 몸이 튼튼한 자도 그러하다; 모두 태초에 정해진 대로 흙과 재가 되었다(창세기 3:19). – 그리고 아무것도 구별할 수 없다. – 참으로 위대하고도 두려운 신비가 우리 앞에 펼쳐져 있다! 우리는 그곳에서 모든 나이가 지워지고, 모든 육체의 단정함이 변하며, 모든 얼굴의 아름다움이 사라지고, 모든 눈부신 광채가 꺼지고, 모든 유창한 입술이 봉인되며, 모든 머리카락이 썩어버린 것을 봅니다. –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우리가 말해도 – 아무도 듣지 않고, – 울어도 –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92. 누워 계신 분들께 여쭙고 싶다: “어디로 떠나셨습니까, 우리 형제들이여? 어디에 계십니까?” 여러분의 거처는 어디인가요? 우리에게 목소리를 내어 주시고, 예전처럼 우리와 이야기를 나누어 주십시오. 그리고 그들이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해 준다면 교훈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 지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여러분 곁을 떠난 자들, 즉 우리 각자의 영혼은, 각 영혼의 가치에 걸맞은 곳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앞에 놓인 이 흙, 여러분이 보고 있는 이 재, 이 악취, 이 썩어 문드러진 뼈들은 한때 여러분이 갈망하던 그 청년들과 소녀들의 몸입니다. 이 재는 바로 여러분이 품에 안고 끝없이 입맞춤하던 바로 그 살입니다. 이 드러낸 이빨들, 바로 그 입술들은, 여러분이 밤낮으로 셀 수 없이 많은 입맞춤으로 덮어주던 바로 그 입술들입니다. 이 고름과 역겨운 진액은, 여러분이 그 품에서 죄를 저지르던 바로 그 살입니다. 그러니 잘 보시고, 여러분의 침상에서 젊은 연인들을 껴안는 것이 곧 흙과 진창을 껴안는 것임을 확실히 깨달으십시오. 그들의 신체를 입맞출 때, 여러분은 악취와 고름을 입맞추고 있다는 것을 알아두십시오. 그들에게 사랑에 불타오를 때, 여러분의 갈망의 대상은 구더기와 재, 악취라는 것을 깨달으십시오. 어리석은 청년들과 처녀들이여, 착각에 빠지지 마십시오! 헛된 청춘의 아름다움에 현혹되지 마라. 왜냐하면 너희 눈앞에 누워 있는 이 썩어가는 시체들인 우리도, 한때는 너희가 지금 그러하듯, 눈에 띄고 위엄 있었으며, 향유로 몸을 바르고, 사랑받으며, 즐거움을 누리고 풍요로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시다시피, 이 모든 것이 헛된 꿈과 흙, 재, 그리고 악취로 변해버렸습니다. 더 이상 스스로를 속이지 마십시오; 그러나 여러분보다 먼저 떠나 지금 무덤에 있는 우리를 통해 배우고, 경건해지며, 확신하십시오. 심판이 있고, 끝없는 고통이 있으며, 뚫을 수 없는 어둠과 희망 없는 지옥이 있고, 잠들지 않는 구더기와 그치지 않는 울음, 끊임없는 이를 갈음, 치유될 수 없는 슬픔이 있다는 것을".

93. 이 모든 것을, 말로만 아니라 행동으로, 그곳에서 우리보다 먼저 간 형제들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러니 잠에서 깨어나자. 헛된 희망으로 스스로를 속이는 것을 그만두자. 더 이상 교활한 원수가 우리를 조롱하게 내버려 두지 말자. 긴 생을 약속하는 아첨하는 생각이 우리를 속이지 못하게 하자. 많은 이들이 온갖 계획을 품었지만 아침까지 살아남지 못하고, 마치 새가 매에게, 어린 양이 늑대에게 잡히듯 갑작스럽게 죽음에 사로잡혔다. 어떤 이들은 저녁에 건강하게 잠들었다가 다시는 깨어나지 못했고, 어떤 이들은 식사 중에 숨을 거두었으며, 또 어떤 이들은 산책이나 오락을 즐기다 갑자기 죽었고; 또 어떤 이들은 목욕탕에서 죽어가며 그곳에서 장례용 세례까지 받게 되었고, 어떤 이들은 결혼식 도중, 바로 신방에서 죽음에 휩쓸려 갔으니, 그들의 예복은 장례복이 되었고, 결혼식에서 연주하던 자들의 자리는 애도하는 자들이 차지했으며, 춤추던 자들의 자리는 울부짖는 자들이 차지했다. – 이 모든 것을 우리는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속이는 것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께 어떠한 자비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무지 때문이 아니라, 알면서도 속임수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 그러니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 이제 더 이상 듣기만 하는 자가 되지 말고, 여러분에게 제시된 가르침을 실천하는 자가 되어 주십시오.

94. 우리가 이 생을 떠나 영혼이 육신과 분리되는 그 순간, 우리는 어떤 두려움과 어떤 곤경에 처하게 될까?! 그때는 무섭고도 위대한 신비가 이루어진다! 선한 천사들과 수많은 천상의 군대, 그리고 모든 대적하는 세력과 어둠의 군주가 영혼에게 다가온다. 양쪽 모두 영혼을 자기들의 곳으로 끌고 가려고 한다. 이때, 만일 영혼이 이 세상에서 선한 자질을 갖추고, 정직한 삶을 살며, 덕을 쌓았다면, 그 영혼이 떠나는 날, 이곳에서 쌓은 덕행들이 선한 천사들이 되어 영혼을 둘러싸고, 어떤 대적 세력도 영혼을 건드리지 못하게 막아 줄 것이며; 오히려 기쁨과 즐거움 속에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그 영혼을 맞이하여, 영광의 주님이시며 왕이신 그리스도께로 데려가며, 그 영혼과 모든 천상의 세력들과 함께 그분께 경배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영혼은 안식의 장소,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 영원한 빛 속으로 인도되는데, 그곳에는 슬픔도, 한숨도, 눈물도, 근심도 없으며, 오직 하늘나라에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린 다른 모든 이들과 함께 불멸의 생명과 영원한 기쁨이 있을 뿐이다. – 그러나 만일 그 영혼이 이 세상에서 부끄러운 삶을 살며, 불의한 정욕에 빠져 육신의 쾌락과 이 세상의 헛된 일에 휩쓸렸다면, 이 생을 떠나는 날, 그가 이 생에서 얻었던 정욕과 쾌락들은 사악한 악마들이 되어 가련한 영혼을 둘러싸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에게 다가가는 것을 막으며, 오히려 대적하는 세력들, 곧 어둠의 군주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며 비탄에 잠겨 탄식하는 그 불쌍한 영혼을 붙잡아 어둡고 음울하며 슬픈 곳으로 데려가는데, 그곳은 심판의 날과 영원한 고통을 위해 모든 죄인들이 가두어져 있는 곳이며, 마귀가 그의 천사들과 함께 던져질 곳이다.

95. 그러므로 아직 시간이 있을 때, 회개를 통해 정욕에서 스스로를 정화하고, 자제함과 선행을 통해 그 자리에 미덕을 심어야 한다. 이 미덕들은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우리를 변호해 줄 것이며, 하나님의 천사들과 함께 우리 주님 앞에 나아가 그분의 은총을 우리에게 이끌어 줄 것이다.

 

2. 회개에 관한 교훈

1. 아, 나여! 내가 얼마나 부끄러운가! 내 속사람은 겉모습과 다르다! 진실로 내게는 경건의 겉모습만 있을 뿐, 그 힘은 없다. 내 마음의 은밀한 곳까지 아시는 주 하나님 앞에 어떤 얼굴로 나아가야 하겠는가? 이토록 많은 악행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터라, 기도할 때조차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나를 소멸시키지 않을까 두려워합니다. –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를 의지하며 절망하지 않습니다.

2. 내 마음은 굳어졌고, 내 이성은 변질되었으며, 내 정신은 어두워졌다. 마치 개가 “자신의 토사물”로 돌아가는 것처럼(베드로후서 2:22). 내게는 진실한 회개가 없고, 기도할 때 눈물이 나지 않는다. 비록 한숨을 쉬고, 정욕의 거처인 가슴을 치지만 말이다.

3. 그곳에서는 어둠 속에서 행한 일도, 공개적으로 행한 일도 모두 드러날 것입니다. 지금 나를 흠잡을 데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내가 정죄받은 자로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된다면, 내 영혼은 얼마나 큰 수치심에 휩싸이겠습니까! 영적인 것을 버리고, 나는 정욕에 굴복했습니다. 배우고 싶지는 않지만 가르치는 것은 좋아하고, 복종하고 싶지는 않지만 남을 내 뜻대로 부리는 것을 좋아하며, 수고하고 싶지는 않지만 남을 힘들게 하는 것은 기꺼이 하고, 존경을 베풀고 싶지는 않지만 존경받는 것을 원하며, 책망을 참지 못하지만 남을 책망하는 것을 좋아하고, 남에게 깎아내려지는 것은 원치 않지만 남을 깎아내리는 것을 좋아한다. – 나는 조언을 하는 데는 현명하지만, 스스로 그 조언을 따르는 데는 현명하지 않다. 해야 할 일은 말하지만, 말해서는 안 될 일은 행한다.

4. “오늘은 죄를 짓고 내일 회개하겠다”고 말하지 마라. 차라리 오늘 회개하는 것이 낫다. 우리가 내일까지 살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5. 우리가 죄를 지었는가? 회개하자. 주님께서는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들의 회개를 받아주시기 때문이다.

6. 형제가 죄를 지으면 기꺼이 그를 책망하지만, 우리가 죄를 지으면 책망을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7. “진리를 거스르지 말고, 네가 벌을 받지 않는다고 부끄러워하지 말라. 네 죄를 고백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시라 4,29.30). “‘죄를 지었으니 내게 무슨 일이 있겠느냐?’라고 말하지 말라. 주님께서는 오래 참으시는 분이시니라. 주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지체하지 말고, 날을 미루지 말라” (시라 5,4.8). “분노가 지체되지 않을 것임을 기억하라” (시라 7,18).

8. “누가 내 머리에 물을, 내 눈에 눈물의 샘을 주리이까, 내가 밤낮으로 내 죄를 인해 울게 하려 함이라” (예레미야 9, 1)? 나는 웃음에게(전도서 2, 2) “나에게서 물러가라”고 말하였고, 눈물에게는 “내게로 오라”고 말하였으니, 이는 주님 앞에서 나의 죄가 지극히 크고, 나의 죄를 범한 횟수가 셀 수 없이 많기 때문이다.

9. 사람들에게는 세 가지 다른 종류의 눈물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보이는 것들에 대한 눈물이 있는데, 그것들은 매우 쓰라리고 헛된 것입니다. 회개의 눈물이 있는데, 이는 영혼이 영원한 복을 갈망할 때 흐르는 것으로, 매우 달콤하고 유익합니다. 그리고 “울며 이를 갈게 될”(마태복음 8,12) 때 흘리는 눈물이 있는데, 이 눈물은 쓰라리고 무익합니다. 왜냐하면 회개할 시간이 이미 없을 때는 전혀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10. 겉으로는 겸손해 보이지만, 속마음은 잔인하고 비인간적이다; 겉으로는 경건해 보이지만, 속마음은 살인자다; 겉으로는 사랑이 넘쳐 보이지만, 속마음은 적이다; 겉으로는 친절해 보이지만, 속마음은 증오하는 자다; 겉으로는 수행자 같으나, 속은 수행자들에게 해를 끼치는 해충과 같고; 겉으로는 금식자 같으나, 속은 해적과 같고; 겉으로는 정절하나, 속은 간음자이며; 겉으로는 침묵을 지키나, 속은 방랑자이며; 겉으로는 온유하나, 속은 오만하며; 겉으로는 조언자 같으나, 속은 타락시키는 자; 겉으로는 순진해 보이나, 속은 위험한 자. – 왜 이럴까? 우리 눈앞에 하나님의 경외심이 없고, 주님의 계명을 모르거나, 알면서도 자기 편의를 위해 왜곡하기 때문이다.

11. 그리고 지금도 (오랜 세월의 자기 수양 끝에) 내 안에는 여전히 많은 불순한 생각들이 있다. – 시기, 악의, 자기만족, 탐식, 성급함, 허영, 소유욕. 나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데, 스스로를 무언가 있는 것처럼 여깁니다. 악한 자들 중 하나인데, 거룩함의 명성을 얻으려 애씁니다. 죄 가운데 살면서, 사람들이 나를 의로운 자로 여길 것을 원합니다. 나 자신이 거짓말쟁이면서, 거짓말쟁이들을 비난합니다. 생각으로 스스로를 더럽히면서, 음행하는 자들에게 심판을 내립니다; 도둑들을 비난하면서도 가난한 이들에게 해를 끼치고; 온통 더러운데도 깨끗한 척하며; 교회에서는 첫 번째 자리에 서지만, 사실 마지막 자리조차 감당할 자격이 없으면서; 수치를 당해야 할 때 오히려 존경을 요구하며; 여자들 앞에서는 친절하게, 부자들 앞에서는 경건하게 보이고 싶어 한다. 모욕을 당하면 복수하고; 비난받으면 분노를 드러내고, 아첨을 눈치채지 못하면 화를 내며, 높은 자들을 경멸하면서도 그들 앞에서는 위선을 부린다. 합당한 이에게 존경을 베풀지 않으면서, 정작 자격이 없는 나 자신은 존경을 요구한다. 매일 나를 사로잡는 생각들, 헛된 일에 대한 걱정, 기도에 대한 소홀함, 험담에 대한 집착에 대해서는 일일이 기술하지 않겠다. 대신 정해진 순서에 따라 교회에 다니는 일과, 그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시간을 끌거나, 일부러 마련한 만남, 경건한 여성들과의 위선적인 대화, 선물을 받는 데 있어 끝없는 탐욕,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한 아첨에 대해서는 기술하겠다. 이것이 바로 나의 삶이며, 이것이 바로 나의 결점들이다!

12. 어쩌면 누군가는 ‘생각이 무슨 대수냐!’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이에 대해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매우 중요하며, 성경에 그 증거가 있습니다. 욥은 자녀들을 위해 제사를 드리며 말했습니다. “어쩌면 그들이 마음속으로 어떤 악한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니”(1:5). 만약 생각이 책임의 대상이 아니었다면, 왜 생각의 죄를 위해 어린 소 한 마리를 제물로 바쳤겠습니까? – 코레의 무리 중 악한 생각을 품은 자들도 정죄받았으며, 그들이 나쁜 생각을 품었기 때문에 불에 타 죽었습니다. 그리고 구세주 주님께서는 간음을 간음이라 부르셨고, 아내에 대한 욕망을 그 행위 자체로, 분노를 살인으로, 증오를 살인과 동등하게 여기셨습니다. 복된 바울도 우리가 생각에 대해 책임이 있음을 증언하며, 주님께서 심판의 날에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시고 “어둠 속에 감춰진 것들”을 명백히 드러내실 것이라고 말합니다(고린도전서 4:5). – 그러므로 그 생각들에 대한 동의가 바로 그 행위 자체로 인정되는 이상, 생각이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13. 우리는 단지 생각만 고려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생각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따르기로 마음먹는 의지를 더욱 중시해야 한다. 농부는 땅에 씨를 뿌리지만, 땅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마음도 의지에 씨를 뿌리지만, 의지가 모든 것을 승인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땅이 받아들인 것에서 농부는 열매를 기대하며, 의지가 승인하고 받아들인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책임을 물으십니다.

14. 사도는 자연스럽게 행하는 사람들을 ‘영적인 자’라고 불렀고, 자연에 반하여 행하는 사람들을 ‘육적인 자’라고 불렀다. 영적인 자란 본성마저 영으로 변화시키는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각자의 본성과 자유의지, 그리고 능력을 아시고, 그들에게 당신의 말씀을 심으시며, 그들의 능력에 맞는 행실을 요구하신다. 그분은 초자연적으로 영혼과 영, 본성과 자유의지(후자를 강제로 억누르지 않으면서) 속으로 스며들으신다. 만일 사람이 자연스러운 것에 만족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책망하지 않으시니, 이는 본성의 한계를 정하시고 그에게 법을 세우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자유의지가 본성에 굴복한다면, 그분은 만족할 줄 모르는 마음과 하나님의 규율을 어긴 것에 대해 책망하신다.

15. 나는 죄를 미워하지만 정욕 속에 머물러 있다; 불법을 거부하지만 마지못해 쾌락에 굴복한다. 나는 내 본성을 죄에게 노예로 삼았고, 죄는 내 자유 의지를 사들여 나를 위해 필연성을 만들어 낸다. 정욕이 강물처럼 내게 쏟아진다; 왜냐하면 내가 내 정신을 육신과 결합시켰고, 그 둘을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서둘러 내 의지를 바꾸려 하지만, 이전의 상태가 이를 방해한다. 서둘러 내 영혼을 해방시키고자 하지만, 수많은 빚이 나를 옭아매고 있다.

16. 악마, 그 사악한 대부업자는 갚을 것을 상기시키지 않는다. 아낌없이 빌려주면서도 결코 돌려받으려 하지 않는다. 오직 노예로 만들려고만 할 뿐, 빚에 대해서는 따지지 않는다. 우리가 정욕으로 부유해지도록 빌려주며, 빌려준 것은 되찾지 않는다. 나는 갚고 싶지만, 그는 예전 빚에 또 다른 빚을 더한다. 내가 그에게 갚으라고 강요하면, 마치 내가 그의 대출로 갚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다른 것을 준다. 그는 새로운 빚으로 나를 짓누르는데, 이는 예전의 정욕을 지금까지 없던 다른 정욕들로 대체하기 때문이다. 옛것은 갚은 듯 보이지만, 그는 나를 새로운 정욕의 의무로 끌어들여, 내 안에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 냅니다. 정욕에 대해 침묵하고 고백하지 못하게 하며, 마치 해롭지 않은 것처럼 새로운 정욕을 추구하도록 설득합니다. 전에는 없던 정욕들에 익숙해지고, 그것들에 휩쓸려 이전의 정욕들을 잊어버리게 된다. 새로 찾아온 것들과 계약을 맺고, 다시 빚쟁이가 되어 버린다. 친구처럼 그들에게 달려가지만, 나에게 돈을 빌려준 자들은 다시 내 주인이 되어 버린다. 해방되고 싶지만, 그들은 나를 매수당한 노예로 만든다. 서둘러 그들의 얽매임을 끊으려 하면, 새로운 얽매임에 얽히게 되고; 정욕의 깃발 아래서 싸우는 것을 벗어나려 애쓰지만, 그 성공과 선물들 때문에 결국 나는 그들의 집사 신세가 되어 버린다.

17. 오, 이 뱀의 노예 상태를 내게서 치워라! 이 정욕의 권세를 치워라! 이 뿌리 깊은 죄를 치워라. 그것은 내 정신을 사들일 담보까지 제공했고, 육체를 아첨하여 내 영혼을 그 종으로 내주게 했다. 이성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하도록 청춘을 미리 가로챘고, 미성숙한 이성을 자신에게 묶어 두었으며, 이를 마치 구리 사슬처럼 이용해 근시안적인 마음을 붙잡아 둔다. 그리고 이 마음이 도망치려 하면 묶어 둔 채로 놓아주지 않는다. 죄는 마음을 둘러싸고, 지식의 문을 잠근다. 정욕은 끊임없이 이성을 감시하며, 이성이 하나님께 부르짖어 육신이 팔려가는 것을 방해하지 못하게 한다. 육신을 탐하는 것이 조금도 나쁘지 않으며, 그런 사소한 일로 인해 벌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맹세한다. 수많은 뒤얽힌 생각들을 예로 들며, 그것들이 조사받게 될 가능성은 없다고 단언한다. 그것들의 미미함을 내세우며, 모든 이와 같은 것들은 망각 속에 묻힐 것이라고 확신시킨다. 이것이 바로 원수가 속임수와 아첨으로 나를 얽어매고 묶어두는 방식이다.

18. 바울은 죄를 짓는 자에 대해 그가 “육신에 속한 자”라고 말했습니다(롬 7:14). 죄는 그것을 자의적으로 행하는 자들에 의해 드러나지만, 본성과 죄 사이에는 습관이 중재하며, 정욕은 죄에 의해 주어지고 본성에 의해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이를 사용하는 것은 영혼의 복종, 마음의 혼란, 그리고 노예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는 죄가 육신 안에 머물러 있어 이성을 지배하고 영혼을 장악하여, 육신을 통해 영혼을 복종시키기 때문이다. 죄는 육신을 관리자 대신으로 이용하며, 이를 통해 영혼 자체에도 짐을 지우고 마치 그 집의 집사처럼 행동한다. 왜냐하면 죄는 일을 시키고 그 수행에 대한 보고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만약 영혼에게 매질을 가해야 한다면, 육체를 통해 그 매질을 가하여 영혼을 짓누릅니다. 이는 육체를 마치 자신의 사슬로 바꾸어, 영혼을 도살될 양처럼 그 사슬에 묶어 두고, 높이 날아오르는 새를 이 사슬로 묶은 것처럼, 그 사슬을 통해 마치 강인한 거인이 칼로 하듯 영혼의 손과 발을 잘라버렸기 때문입니다. 도망칠 수도, 스스로를 도울 수도 없으니, 나는 살아 있으면서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눈으로 보지만 눈먼 것이나 다름없고, 사람에서 개가 되어 버렸으며, 이성을 지녔음에도 말 못하는 짐승처럼 행동한다.

19. 그러나 주님께서 나를 도와주신다면, 이 비참하고 정욕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주님께서 그 풍성한 자비로 나를 대하신다면, 나를 죄에서 구원해 주실 것이며, 주님께서 내게 그 은혜를 쏟아 부어 주신다면, 나는 구원받을 것입니다. 나는 주님께서 이를 행하실 수 있다고 확신하며, 나의 구원에 대해 절망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수많은 자비가 나의 수많은 죄를 이길 것임을 압니다. 주님께서 오셔서 모든 이를 용서하셨고, 세례를 통해 죄 사함을 베풀어 주셨음을 압니다. 제가 이 은혜를 누렸기에 이를 고백합니다. 세례 후에 저지른 죄들의 치유가 필요하지만, 죽은 자를 살리신 주님께서는 이 일에서도 저를 치유하시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나는 눈이 멀었지만, 그분은 태어날 때부터 눈먼 자도 고치셨습니다. 나는 나병 환자처럼 배척받았으나, 그분이 원하신다면 나 또한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나는 죄로 가득 차 있지만, 그 죄들이 그분이 내게 베푸시는 은혜를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그분은 자케오를 합당한 자로서 자비를 베푸셨으니, 나를 합당하지 않은 자로서도 자비를 베푸실 것입니다.

20. 헛된 말도 심판을 받게 된다. 그런데 헛된 말이란 무엇인가? 믿음의 약속을 실제로 이행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은 그리스도를 믿고 고백하지만,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것을 행하지 않음으로써 헛된 상태에 머무른다. 또 다른 경우에도 말이 헛된 것이 되는데, 바로 사람이 고백만 하고 고쳐지지 않을 때, 회개한다고 말하면서도 다시 죄를 지을 때이다. 또한 타인에 대한 나쁜 평가는 헛된 말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일과 보지 못한 일을 전하기 때문이다.

21. 죄인아, 선한 의사께 나아가 수고 없이 치유받으라. 죄의 짐을 벗어 던지고, 기도를 드리며, 썩어가는 상처를 눈물로 적시라. 이 하늘의 의사는 눈물과 탄식으로 상처를 치유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니 눈물을 흘리며 나아가라. 이것이 가장 훌륭한 치료법이다. 하늘의 의사께서는 각자가 자신의 눈물로 스스로를 치료하고 구원받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이 치료법은 오래 걸리지 않으나 효과가 있으며, 상처를 끊임없이 감싸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순식간에 너를 치유해 준다. 의사는 오직 네 눈물을 보기를 기다릴 뿐이다. 두려워하지 말고 나아가라. 눈물과 한숨이라는 치료법을 함께 바치며 그분께 상처를 보여 드려라.

22. 우리 영혼의 구세주이신 주님께서, 주님의 치료 대가로 눈물을 기꺼이 받아주실 때, 누가 놀라지 않겠으며, 누가 경탄하지 않겠으며, 누가 주님의 자비로운 은혜를 찬양하지 않겠습니까! 오, 눈물의 힘아! 그 힘은 얼마나 멀리 뻗어 있는가! 너는 큰 담대함으로 아무런 방해 없이 하늘 그 자체로 들어간다. 오, 눈물의 힘아! 천사들의 계급과 모든 하늘의 세력들이 네 담대함을 보고 끊임없이 기뻐한다. 오, 눈물의 힘아! 네가 원한다면, 기쁨으로 지극히 거룩하신 주님의 거룩하고 높은 보좌 앞에 설 수 있다. 오, 눈물의 힘아! 눈 깜짝할 사이에 너는 하늘로 치솟아, 네가 구하는 것을 하느님께로부터 얻나니; 이는 그분께서 너를 맞이하시러 나오시며, 기꺼이 용서를 베푸시기 때문이라.

23. 나의 구주여, 내 입이 악한 말로 가득 차 있을 때, 내가 어떻게 주님을 간구하리이까? 내 양심이 더럽혀졌을 때, 내가 어떻게 주님을 찬양하리이까? 주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았을 때, 내가 어떻게 주님을 부르리이까? – 그러나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주님, 이 하찮은 나를 멸시하지 마시고, 이 가증스러운 나를 물리치지 마시며, 이 절망에 빠진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내 원수는 내가 스스로 절망하는 모습을 보는 것을 무척 기뻐하오니, 절망의 결과로 나를 그의 포로로 보는 것만이 그의 유일한 기쁨이니이다. 그러나 주께서 당신의 자비로 그의 소망을 무색하게 하시고, 그의 이빨에서 나를 건져내시며, 악랄한 계략과 그가 나를 향해 쳐 놓은 모든 올가미에서 나를 구원하소서! – 그리고 자신의 부도덕한 행실로 인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모든 이에게 간청하노니, 스스로를 절망하지 말고, 원수에게 기쁨을 주지 마십시오. 그러나 부끄러워하지 말고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 앞에서 울며, 스스로에 대한 희망을 잃지 마십시오. 우리 주님께서는 회개하는 자들을 매우 기뻐하시며 우리의 회심을 기다리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모든 이에게 부르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8)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죄를 지었더라도 누구도 스스로를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오직 그분을 거부하고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만 엄격하십니다.

24. 분별 있는 마음으로 울기를 원하고, 주님 앞에서 귀중한 진주처럼 눈물을 땅에 흘리는 자는 복이 있다.

25. 영혼이 마치 새로 심은 나무와 같아져, 언제나 물을 주는 것처럼 하느님을 향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복이 있다.

26. 자신의 영혼에 선한 식물, 즉 미덕을 심고, 눈물로 기도하며 그 심은 것을 적셔, 자신의 심은 것이 주님께 기쁘시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기를 바라는 자는 복이 있다.

27. 눈물의 힘을 여러분에게 보여 드리고자 합니다. 안나는 눈물 어린 기도로 선지자 사무엘을 얻었으며, 마음속에 기쁨과 슬픔,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마음을 품게 되었습니다. 시몬의 집에 있던 죄인 여인은 울며 눈물로 주님의 거룩한 발을 씻어 드림으로써 그분께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감동( 하나님 앞에서 우는 마음)은 영혼의 치유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분을 갈망할 때 독생자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게 하며, 성령을 우리 영혼으로 이끌어 오십니다. 이 땅에는 감동에서 오는 기쁨보다 더 달콤한 기쁨은 없다. 너희 중 누구라도 하나님을 향한 눈물의 기쁨으로 빛난 적이 있는가? 너희 중 누군가 이것을 체험하고 그 달콤함을 누리며 기도 중에 땅 위로 떠오른 적이 있다면, 그 순간 그는 온전히 자신의 육신을 벗어나,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초월하여, 이미 이 땅에 있지 않았던 것이다. – 거룩하고 순수한 하느님을 향한 눈물은 언제나 영혼의 죄를 씻어내고 불의로부터 정화시킵니다. 하느님을 향한 눈물은 언제나 하느님 앞에서 담대함을 주며, 불순한 생각은 하느님을 향한 끊임없는 감동을 지닌 영혼에게는 결코 다가갈 수 없습니다. 감동은 빼앗길 수 없는 보물이다. 여기서 말하는 감동이란 하루만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밤낮으로 끊임없이, 생의 끝까지 이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감동은 영혼의 열매 맺는 나무들(즉, 미덕)에 물을 주는 맑은 샘이다.

28. 누군가가 불법을 저지르기 전에, 원수는 그 사람의 눈앞에서 그 죄를 매우 경시하게 만든다. 특히 쾌락에 대한 욕망을 경시하여, 마치 그것을 충족시키는 것이 바닥에 찬물 한 그릇을 쏟아붓는 것과 다름없다고 여길 정도로 만든다. 이렇게 교활한 자는 사람이 죄를 저지르기 전에 그 죄를 경시하게 만든다; 그러나 죄를 범한 후에는, 교활한 자가 그 죄에 빠진 자의 눈앞에서 그 죄악을 극도로 부풀린다. 이때 그에게 절망의 파도를 일으키며, 종종 비유를 무기로 삼아 다음과 같은 생각을 심어준다. “헛된 수고자여, 네가 무엇을 했느냐? 네 행위는 무엇과 같으냐? 바로 이것이다. 어떤 사람이 포도나무를 심고, 열매를 맺을 때까지 지키고 돌보았다. 그리고 포도를 수확하여 통에 포도주를 가득 채웠으나, 갑자기 일어나 도끼를 들어 통을 부쉈다. 포도주는 쏟아져 버려 헛된 것이 되었다. 네 행실이 바로 이것과 같다.” 이것이 바로 악한 자가 사람을 유혹하여 절망의 심연으로 빠뜨리려는 의도이다.

29. 그러므로 원수의 계략을 미리 알고 죄를 피하라. 만일 어떤 죄에 빠지게 되더라도 죄에 매여 머물지 말고, 일어나 온 마음을 다해 주 하나님께로 돌아서서 네 영혼이 구원받게 하라. 악한 생각에게 이렇게 말하라. “비록 내가 통을 깨뜨리고 포도주를 망쳤을지라도, 내 포도원은 온전하며, 주님께서는 오래 참으시고, 자비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고 의로우시다. 나는 그분의 은혜가 함께하심으로써 다시 내 포도원을 가꾸고 포도를 수확하여, 예전처럼 내 통을 채울 수 있기를 희망한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그분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죄가 붉은 색 같을지라도 눈처럼 희게 하리라. 붉은 색 같을지라도 물결처럼 희게 하리라’ (시 1:18) 하셨기 때문이다.

30. 어떤 이에게는 이런 생각이 스며들어 “너는 아직 젊으니, 늙어서 회개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노년에 이른 이에게는 “너는 이미 늙었으니, 회개의 수고를 감당할 힘이 어디 있겠느냐? 너에게는 안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31. 스스로를 절망하지 말고, “이제 더 이상 구원받을 수 없다”고 말하지 마라. 오히려, 너는 아직 충분히 구원받을 수 있다. 온 영혼을 다해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사랑하라. 그러면 그 마음이 네 상처를 치유하고, 앞으로도 너를 해를 입지 않게 지켜 줄 것이다. 네 영혼이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사랑하는 한, 마귀의 올가미에 빠지지 않고, 마치 높은 하늘을 날아오르는 독수리처럼 될 것이다. – 그러나 만일 영혼이 그 후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을 소홀히 여기고 자기 자신을 높이 여긴다면, 높은 곳에서 추락하여 지하의 악령들의 놀잇감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영혼의 눈을 가리고, 멍에를 메고 끌려가는 소처럼 그 영혼을 음란한 정욕 속으로 몰아넣을 것이다.

32. 만일 사악한 원수의 화살에 맞더라도 조금도 절망에 빠지지 마라. 오히려, 아무리 여러 번 굴복당하더라도 패배한 채로 머물지 말고, 즉시 일어나 원수와 싸워라. 왜냐하면 승리의 주님은 언제나 네게 그분의 오른손을 내밀 준비가 되어 계시며, 네가 넘어졌을 때 다시 일으켜 세우실 것이기 때문이다. 네가 먼저 그분께 오른손을 내밀기만 하면, 그분도 너를 일으키기 위해 그분의 오른손을 내밀어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악한 원수는 네가 쓰러지는 즉시 너를 절망에 빠뜨리려고 온갖 수단을 다 쓴다. 그를 믿지 마라. 설령 하루에 일곱 번 쓰러진다 해도, 다시 일어나 회개를 통해 하나님을 달래도록 노력하라.

33. 비록 우리가 유혹에 빠져 넘어졌을지라도, 회개를 통해 스스로를 치유하도록 노력합시다. 비록 인간으로서 정욕에 사로잡혔을지라도, 끝까지 스스로를 절망하지 맙시다. 오히려 하나님께 귀를 기울여,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태복음 4:17)라고 말씀하시는 그분의 음성에 순종합시다. 그분은 어떤 죄에 대해서만 회개를 정하시고 다른 죄에 대해서는 정하지 않으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영혼의 의사이신 그분은 모든 죄의 상처를 치유할 이 치료법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34. 회개는 언제나 가꾸어지는 밭이다. 그것은 풍성한 열매를 맺는 나무로서, 온갖 방법으로 하나님께 훌륭한 열매를 드리는 것이다. 그것은 죄로 인해 죽은 자들을 되살리는 생명의 나무이다. 그것은 신성과 하나이며, 하나님께서는 이를 마치 자신의 창조의 힘처럼 기뻐하신다. 왜냐하면 죄가 파멸시키는 자들을,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다시 창조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영적인 이자이다. 왜냐하면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고, 주지 않은 것을 취하기 때문이다.

35. 선한 일꾼들은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밭을 비옥하게 하고, 이를 통해 교회를 풍요롭게 하며, 하나님의 곡창을 가득 채웠다. 이를 통해 땅은 하늘이 되었으니, 성도들—이 땅의 천사들—로 가득 찼기 때문이다. 회개를 통해 뿌린 것을 여러 배로 불린 선한 일꾼들이 찬양받는다.

36. 하나님께서는 인류가 원수에게 흔들릴 것을 아시고, 그를 무너뜨리기 위해 회개를 대항 수단으로 세우셨다. 원수는 죄를 짓도록 유혹하지만, 회개는 죄를 지은 자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원수는 불법을 저지르도록 부추기지만, 회개는 회심하라고 권한다. 원수는 절망으로 이끌지만, 회개는 구원의 희망을 약속한다. 죄는 양심을 무너뜨리지만, 회개는 양심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돕는 지팡이 역할을 한다. “주님께서는 엎드러진 자들을 일으키시나이다”(시 145:7); 주님께서는 회개를 통해 이를 이루신다.

37. 회개에서 율법은 등불의 역할을 한다. 죄를 짓는 자들이 이를 통해 다시 하나님을 만나기 때문이다. 불의한 자는 마음이 어두워져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지 못한다. 원수가 그의 영혼을 절망으로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개는 선한 의사처럼 영혼의 안개와 모든 걸림돌을 걷어내고, 하나님의 선하심의 빛을 보여준다. 마귀는 회개의 엄격함을 내세워 불경건한 자들이 마음을 돌이키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회개는 마귀의 교활함을 꿰뚫어 보고 다정하게 다가와 말한다. “오직 하나님을 기억하기만 하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위해 수고하리라. 마음속으로 그분의 자비를 떠올리라. 그러면 내가 탄식으로 너희를 위해 중보하리라.” 죄인들아, 회개의 마음으로 가볍게 한숨만 내쉬어 보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하나님의 종으로 만들겠다. 선지자 이사야도 말하기를, “너희가 돌아와 한숨을 내쉬면, 그때에 구원을 얻을 것이다”(사 30:15)라고 했다. “자, 여기 증거를 보여 주마. 다만 회개하기만 하라.” 죄를 지은 자가 탄식하면, 그 탄식과 함께 뱀이 얹어 놓은 죄의 짐이 그에게서 벗겨질 것이다. 그러면 무지의 안개도 마음에서 걷히고, 영혼의 눈이 밝아지며, 회개가 영혼을 구원으로 인도하기 시작할 것이다.

38. 회개하는 죄인이 하나님의 자비를 뵈게 되면, 그때는 탄식할 뿐만 아니라 큰 슬픔으로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영혼은 하나님과 오랫동안 떨어져 있다가 그분을 아버지로서 뵈게 되면, 눈물을 흘리게 되기 때문이다. 마침내 자신의 창조주를 보게 되었기에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의 은총을 사랑하므로 하나님을 자신에게로 모시게 됩니다. 그리하여 뱀에 의해 이끌려 갔던 모든 것에서 정화됩니다. 다윗이 “매 밤마다 내 침상을 씻으시나이다”(시 6:7)라고 말한 것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까? 그러나 그는 먼저 한숨을 쉬었고, 그 후에 울기 시작했습니다. 자연의 이치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바람이 불고, 그 후에 비가 내립니다. 먼저 천둥이 울리고, 그 후에 구름에서 빗방울이 맺힙니다.

39. 한숨을 내쉬던 다윗은 간음으로 더럽혀진 자신의 침상을 눈물로 적셨다. 그는 불법적인 결합으로 더럽혀진 자신의 침상을 눈물로 씻어 냈다. 그는 “내 한숨으로 지쳤도다”(시 6:7)라고 말했는데, 한숨의 수고는 마음의 병이 낳은 열매이며, 이는 수많은 눈물을 낳는다. 이처럼 눈물은 앞서 있던 한숨들로 인해 더욱 많아진다.

40. 양심은 하나님을 향한 본능적인 갈망을 지니고 있으며(하나님과 하나님의 모든 것을 옹호하며), 스며든 유혹을 물리친다. 종종 죄가 뻔뻔스럽게 침투하지만, 양심은 당시의 상황을 잘 활용하여 우위를 점한다. 어둠 속에 있을 때 누군가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양심은 그것이 죄 때문임을 폭로한다. 성경은 “악인은 쫓는 자가 한 사람도 없는데도 도망한다”(잠언 28:1) 말하기 때문이다. 또는 배 위에서 누군가 거친 파도로 인해 혼란에 빠지면, 양심은 그에게 자신의 불의를 상기시킨다. 혹은 지진이 일어날 때 양심은 불법에 대한 생각을 떠올리게 한다. 또는 누군가 길을 가다가, 정욕에 찬 행실들을 기억해 낸다. 마지막으로, 죄인이 회개하지 않으면, 그가 쇠약해지고 육체적 질병에 빠졌을 때 양심은 그를 책망하며, 그는 목숨을 아끼는 마음에 하나님께 자기 안의 죄를 꺾겠다고 서원한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영생의 복을 잃을까 봐,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며 회개, 즉 하나님과 인간을 중재하는 이 길로 달려간다.

41. 복음서에 언급된 한 청년은 아버지에게서 유산을 받아 먼 곳으로 떠나 창녀들과 함께 그것을 탕진했고, 그 결과 모든 면에서 고통스러운 궁핍을 겪게 되었다. 그가 궁핍의 무게에 짓눌려 기진맥진해졌을 때, 회개는 아버지 곁에서 누리던 평온한 삶의 상실을 그에게 일깨워 주었고, 그 삶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소망과 회개를 통해 아버지의 용서를 구할 희망을 다시 일깨워 주었다. 그래서 그는 외쳤다. “일어나 내 아버지께로 가리라. 그리고 그분께 말하리라.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서 죄를 지었습니다.” (누가복음 15:18). 유혹에 굴복한 청년에게 원수가 덤벼들어 그를 마음대로 다루었을 때, 회개는 잠잠해져 양심을 잠잠하게 하고 때가 될 때까지 행동에 나서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그에게 어려운 시기가 닥쳤을 때, 회개는 마치 어머니처럼 품을 벌려 그를 품에 안고, 계모인 쾌락주의의 손아귀에서 그를 끌어내어 어머니인 경건함에게 돌려주었다.

42. 청년이 외쳤다.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 앞에서 죄를 지었습니다.” 죄를 지은 아들은 아버지를 알아보고, 자신을 유혹한 자가 의붓아버지이자 악의적인 자라고 호소했다. 그는 간계를 보았고, 유혹을 깨달은 뒤, 마치 어머니에게로 달려가듯 회개로 달려갔다. 오랫동안 그는 쑥으로 연명하며 굶주림을 견뎌야 했지만, 회개는 자비로운 어머니처럼 이 청년을 품에 안고 다시 젖으로 기르며, 그에게 젖꼭지를 내밀어 주었다. 죄가 수치스러운 삶으로 인해 그의 기력을 고갈시켰기에 젖으로 그를 기른 것이다. 이 젖이 없었다면 그는 치유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일어설 수 없었던 자를 회개가 일으켜 세우고 젖으로 먹였다. 회개는 지극히 쇠약해진 자를 치유하고, 그를 아버지의 품에 안겨 주었다.

43. 보라, 회개가 처음에는 죄인들에게 엄하지 않고, 오히려 관대하고 가볍게 다가온다는 것을! 그것은 금식을 제안하지도 않았고, 절제나 밤샘 기도를 요구하지도 않았으며, 단지 “죄를 지었다”는 고백으로 시작하라고 초대했을 뿐이다. 가장 쉬운 것부터 시작하며, 그 이후의 일은 양심이 완성할 것임을 알고 있다. 양심은 회개의 동지로서, 영혼을 자신의 보살핌 아래 두고 서둘러 정화하려 한다. 그녀는 영혼의 온순함을 알고 있으며, 마치 기수처럼 그 영혼을 이끌어 간다. 그녀는 회개가 받아들여지기를 원하며, 그것이 죄인들 안에 굳건히 자리 잡고, 마치 태양처럼 마음속으로 스며들어 비추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그녀는 그들을 편안하게 하나님께로 인도하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을 하나님의 소유로 만든다.

44. 형제들아, 우리에게는 회개라는 어머니가 있으니 구원에 대해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어머니가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데, 구원에 대한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사나운 원수에게 붙잡힌 자들을 회개는 하나님께로, 낙원으로 인도했습니다. 과연 우리를 외면하시겠습니까? 교회 밖에 있던 자들을 용서하셨는데, 하물며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으시겠습니까? 누구도 자신이 고생하며 모은 것을 남들이 마음대로 낭비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이자 아버지이신 분이, 자신의 아들의 피로 얻으신 우리를 원수에게 내어주실 리가 있겠습니까? – 우리는 그분의 양 떼요, 그분은 우리의 목자이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을 때 씻어낼 수 있도록, 정화하는 물과 같은 회개를 주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재탄생’을 위한 ‘목욕탕’뿐만 아니라 ‘갱신’을 위한 ‘목욕탕’도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죄를 지어도 회개로 씻어내면 깨끗해집니다.

45. 회개는 하나님의 제단입니다. 왜냐하면 죄를 지은 자들이 회개를 통해 하나님을 화목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율법 아래 있던 사람들은 죄를 지으면 물질적인 제물을 바쳐야 했고, 이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인색함 때문에, 어떤 이들은 가난 때문에, 또 어떤 이들은 게으름 때문에 이를 이행하지 못했습니다. 새로운 은혜 안에서 이 모든 것은 단 한 번의 회개로 이루어지며, 양심 안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회개는 염소를 요구하지 않고, 고백을 요구한다. 죄인아, 네게 비둘기가 없느냐? 한숨을 쉬어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비둘기보다 더 귀하게 여기실 것이다. 네게 비둘기가 없느냐? 네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라. 그러면 그것이 네 번제물이 될 것이다. 다른 새도 하나도 없느냐? 울어 보라. 그러면 그것이 네 제물로 인정될 것이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송아지 대신 네 기도를 받아 주실 것이다. 진실한 마음으로 엎드리면, 네 열심이 제물로 바쳐진 황소보다 더 높이 평가될 것이다. 향을 피울 필요가 무엇이 있겠느냐? 회개가 연기를 피우지 않고도 너를 정결하게 할 것이다.

46. 회개는 또한 하나님의 잔치이기도 한데, 이는 회개를 통해 하나님께서 인류의 구원을 맛보시기 때문이다. 구세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양식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 (요한복음 4:34) 하셨다. 그러므로 회개는 놀라운 하나님의 떡이니, 하나님께서는 그 안에서 양심의 고백을 맛보시고, 회개 속에서 감동의 눈물을 마시며, 그 안에서 향기로운 향기—진심 어린 탄식의 감정—을 즐기시니, 이는 그것들이 하나님께 향기로운 향로이기 때문이다. 보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다양한 제물들이다: 절제, 금식, 밤샘 기도, 부지런한 기도, 겸손을 동반한 복종; 이는 많은 제물보다 하나님께 더 기쁘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47. 회개는 하느님께 드리는 축제이다. 복음서는 하느님께서 “회개하는 한 죄인 때문에 아흔아홉 의인보다 더 기뻐하신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루카 15,7). 회개는 하나님께 잔치를 베풀며, 하늘도 잔치에 초대한다. 천사들은 회개가 그들을 만찬에 초대할 때 기뻐한다. 모든 천상의 계급은 회개에 의해 기쁨으로 북돋워져 잔치를 벌인다.

48. 회개는 죄를 지은 자들을 제물로 바치지만, 그들을 다시 살리기도 한다. 죽이지만,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기도 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들어보라. 회개는 죄인들을 데려다가 의인으로 만든다. 어제는 죽어 있었으나, 오늘은 회개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 살아 있다; 어제는 낯선 자였으나, 오늘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어제는 불의했으나, 오늘은 거룩해졌다. 회개는 구리를 받아들여 금으로 바꾸는 위대한 도가니이며, 납을 받아들여 은을 내놓는 것이다. 만약 유리가 히아신스나 에메랄드, 또는 사파이어의 색을 띠는 것을 본 적이 있다면, 회개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이러한 변화들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회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회개하는 자를 성령의 은혜와 하나로 녹여, 그 사람을 온전히 하나님의 아들로 만드신다.

49. 율법은 성물들을 모두 금으로 만들 것을 명했다. 율법 제정자는 이 보물들 속에 빈 공간을 두지 않았으니, 이는 하나님의 성도들이 온전한 거룩함을 지니고 있음을 우리가 알도록 하기 위함이다. 회개하는 자여, 들으라!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 나아오라. 그러면 그분께서 너를 온전히 정련하여 갱신해 주실 것이다. 네가 회개의 불 속에서 정련되기를 구했으니, 보라, 정련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남기지 말라. 내가 이해하는 바는 이렇다. 가령 네가 음행에 대한 회개를 드린다고 치자. 보라, 모든 종류의 음행을 버려라. 왜냐하면 그것으로부터 온갖 방탕함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 더러워지게 하는 모든 것—웃음, 농담, 욕설, 탐식—을 버려라. 이것들은 음행으로 이끄는 길이다.

50. 모든 죄악을 온전히 버려라. 선지자 모세는 백성이 죄를 지었을 때 뱀을 십자가에 매달라고 명령하였으니, 즉 죄를 근절하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는 뱀을 속이 빈 것이 아니라 주조하여 온전한 것으로 만들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를 통해 네가 온갖 “교활함”을 완전히 멀리해야 함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그는 뱀을 온통 구리로 만들었는데, 이는 모든 악의 뿌리가 “돈에 대한 탐욕”이기 때문이다. 주조하여 도가니에서 꺼낸 것은, 네 안에서 마음의 타락을 향해 번져가는 “불길”을 멈추게 하려는 것이다. 나무에 뱀을 매달아 두신 것은, 네가 회개하며 네 안에 있는 이 세 가지 악덕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려 함이니, 그것들로 인해 영혼의 죽음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51. 회개하는 자여, 내 말이 너에게 한다. 네 안에 빈 공간을 두지 말고, 죄에 맞서고 선을 지키는 데 있어 바위처럼 굳건한 결의를 가져라. 선지자의 말씀대로 “네 마음을 굳게 하여 흔들리지 않게 하라”(시 111:5, 8). 너는 베드로처럼 확고한 회개를 드려야 한다. 왜냐하면 너는 확고하게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확고한 실천이 따르지 않는 회개를 받아들이지 않으신다. 많은 이들이 걸음걸이만 왕을 흉내 내지만, 그렇다고 해서 왕처럼 존경받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회개하는 자들도 굳건한 회개를 드리지 않는다면, 회개하는 척만 할 뿐, 회개가 주는 힘은 갖지 못할 것이다. 겉으로만 회개하는 자들은 한 가지 죄뿐만 아니라 많은 죄를 짓는 것이니, 다른 이들도 겉으로만 회개하도록 부추기기 때문이다. 그런 자들에게는 죄가 용서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죄가 더해진다.

52. 그러니 죄를 지은 자여, 용서를 얻기 위해 굳건한 회개를 하라. 성 바오로는 “나무, 건초, 갈대” 위에 집을 짓는 자는 상을 받지 못한다고 말했는데, 이는 가르침뿐만 아니라 회개에 대해서도 한 말이다. 누구든지 굳건한 회개를 드리지 않는다면, 그는 물 위에 떠다니는 갈대와 장작과 같다. 회개에 굳건히 임하지 않는 자는 장작과 같으며, 그런 자는 버림받을 뿐만 아니라, 말씀하신 대로 불에 타버릴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을 조롱하려 했기 때문이다.

53. 니네베 사람들처럼 회개하여 우리도 구원을 얻도록 합시다. 그들은 진정으로 회개하였고, 진정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죄를 지은 만큼 회개하였고, 받아들여졌습니다. 단지 반만 회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왕과 백성 모두가 똑같이 울었기 때문입니다. 그들 중 일부만이 회개한 것이 아니니, 통치자와 노예들이 함께 울었기 때문이다. 짧은 시간 동안만 회개한 것도 아니니, 사흘 내내 남자와 여자, 젖먹이와 노인들이 끊임없이 고백을 드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심판을 믿었고, 마치 죽음을 준비하는 듯 서로를 향해 쓰라린 탄식을 쏟아냈다. – 니네베는 사람을 의미하며, 그곳의 수많은 주민들은 영혼의 각 부분과 마음의 움직임을 나타냅니다. 그들이 온 민족이 하나 되어 회개에 나섰듯이, 우리도 온 힘을 다해 온 공동체가 함께 회개를 드려야 합니다.

54. 율법에서 하나님께서는 우상과 제단, 우상 숭배처를 멸망시킬 뿐만 아니라, 불에 타버린 돌과 나무의 재도 부정한 것으로 간주하여 진영 밖으로 내버리라고 명하셨다. 회개하는 자여, 네 안에 있는 모든 죄의 흔적을 근절할 의무가 네게 있음을 마음에 새겨라. 네 안에 죄의 재가 남아 있다면, 부정한 짐승들과 기어다니는 것들이 끌려올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네 안에서 내쫓는다면, 죄의 모기나 작은 파리조차도 너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네 마음을 죄의 시체들로부터 완전히 정화하라. 그러면 그 악취조차 네 안에서 사라질 것이다. 죄의 시체란 바로 정욕적인 추억들이다. 그것들이 네 안에 남아 있다면, 네 생각을 어둡게 할 것이며, 네 마음속 생각들을 맴돌게 하여, 마치 짙은 안개처럼 네 영적인 눈을 가릴 것이다.

55. 우리가 용서의 은총을 마치 본래의 색깔처럼 잃지 않도록, 회개로 우리 자신을 짤아내자. 짤아내는 것은 불쾌한 것을 철저히 제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방식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용서의) 색깔은 우리 영혼 속에서 굳어지면 다시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염색공들이 양털을 씻어내듯 눈물로 자신을 철저히 씻어내고, 겸손에 몸을 맡기며 모든 면에서 자신을 낮추라. 왜냐하면 이러한 방식으로 자신을 미리 정화함으로써, 은혜를 받을 준비가 된 채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56. 회개하는 이들 중 어떤 이들은 다시 죄로 돌아간다. 이는 그들 안에 숨어 있는 뱀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며, 설령 알았더라도 그것을 자신 안에서 불완전하게 쫓아내고 그 형상의 흔적들이 안에 남도록 내버려 두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뱀은 마치 태중에서 잉태된 것처럼 곧 다시 그 악의 완전한 형상을 회복한다. 회개하는 자를 보았는데 다시 죄를 짓는다면, 그가 마음속으로는 변하지 않았음을 깨달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 안에 모든 죄의 유혹을 남겨두었기 때문이다. 반면 확고한 회개를 하는 이의 표징은, 절제되고 엄격한 삶의 방식, 교만과 자만심을 버리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새로운 사람이 되고자 하는 소망으로 항상 갈망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눈과 마음을 두는 것이다.

57. 미덕과 반대되는 것들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라. 금식하면서도 미친 듯이 웃는다면, 너는 쉽게 넘어질 것이다. 기도할 때는 울면서도 사람들 앞에서는 세속적으로 행동한다면, 곧 그물에 걸려들 것이다. 정결한 행실을 보이지만 방심한다면, 머지않아 넘어질 것이다. 회개는 온 마음을 다해 드려야 한다. 회개하는 자는 끊임없이 한결같아야 하며, 즉 처음 시작했을 때의 모습 그대로여야 한다. 누구에게든 부족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불완전한 회개의 징후이다. 그가 변한다면, 이는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따르는 삶의 확고한 기초가 놓여 있지 않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배우는 아이처럼 회개하며, 매를 맞은 아이가 울듯이 필요에 의해 울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울지 않는다. 세상의 법은 두려움을 통해 행동을 바로잡지만, 마음의 태도를 바꾸지는 못한다. –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의 회개는, 어쩌면 스스로도 잘 깨닫지 못하는 속마음, 즉 때때로 죄를 눈감아 주려는 생각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58. 어떤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의 회중에서 ‘눈물’로 비방하지 말라(미가 2:5, 6). 이 말로 선지자는 회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며, 주님 앞에서 겸손한 마음을 고백하는 것을 비방이라고 부르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악한 의도를 품고 위선적으로 눈물을 흘린다면, 그러한 회개는 견고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너희 옷을 찢지 말고 너희 마음을 찢으라”(요엘 2,13). 이는 우리가 회개로 허영을 부리지 말고 진정으로 회개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다윗도 “내 눈물로 내 침상을 적시리라”(시편 6,7) 말합니다. 나는 교회에서 눈물을 흘리며 사람들 앞에서 겉모습만 보여주고, 의로운 사람으로 여겨지기를 바라며 명예를 추구하지 않을 것이며, 대신 내 침상에서 매일 밤 눈물로 내 침상을 적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와 화합하고자 할 것이다: “네 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기도하라. 그러면 네가 이 일을 ‘은밀히’ 행하는 아버지께서 ‘공개적으로’ 네게 갚아 주시고 너를 용서해 주실 것이다”(마태복음 6,6).

59. 많은 이들이 고해성사를 이용해, 종종 실제 모습보다 더 나은 사람인 양 자신을 내세우며, 그것으로 자신을 감추곤 한다. 다른 이들은 회개를 통해 명성을 얻으려 한다. 또 어떤 이들은 회개를 교만의 구실로 삼아, 용서 대신 자신에게 새로운 빚을 지게 한다. 아직 이전 빚에서 벗어나지도 못했는데, 또 새로운 빚을 지는 것인가? 빚을 갚으러 왔는데, 스스로를 새로운 의무에 얽매는 것인가? 빚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면서, 스스로를 새로운 노예 상태로 몰아넣고 있는 것인가? – 이것이 바로 “그의 기도가 죄가 되리라”(시 108:7)는 말씀의 뜻이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죄로 돌아가지 않겠는가? 어떻게 다시 정욕에 빠지지 않겠는가? 뱀이 그를 내버려 둘까? 기어다니는 자들이 그를 괴롭히는 것을 그칠까? – 아아!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대로, “일곱 다른 더 악한 영들”이 그 안에 들어와 살게 될 것이다(누가복음 11:26).

 

3.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자신을 바친 이들의 삶에 대한 일반적인 개요

110절에서 발췌하여 요약한 내용이다. 비록 이 말씀이 수도자들에게 주어진 것이지만, 전반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다.

1.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고, 항상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산 제물, 거룩하고 하나님께 기쁘시게 하는 제물”이 되도록 노력하는 모든 이(롬 12, 1) “자신의 몸을 살아 있고 거룩하며 하나님께 기쁘게 받으실 제물로 드리기” 위해 항상 노력하는 모든 이에게는, 복음과 그 밖의 성서의 거룩한 약속에 따라, 모든 선한 일과 모든 덕행에 전념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영혼과 육신에서 일어나는 불경건한 정욕으로부터 완전한 해방과 정화를 얻을 수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일도 약속하신 하나님께는 가능합니다. 게다가 죄악된 정욕들은 원조 인간의 범죄로 인해 나중에 영혼과 육체에 스며들었습니다.

2. 우리 믿는 자들은 성세례를 통해 은총의 보증, 즉 재능을 받았으며, 이를 통해 약속된 유산을 여러 배로 불리고 증식시킬 수 있습니다. 사도들에게 주어지고, 그들을 통해 유일하고 참된 하나님의 교회에 전해진 신성하고 위로하시는 성령은, 세례를 받는 순간부터 순수한 믿음으로 세례를 받은 모든 이 안에 머무르시며, 복음서에 기록된 대로 각 사람은 이 “은사”를 받아 이를 증식하고, 가꾸며, 더하게 됩니다.

3. 이 세상에 태어난 갓난아기가 영원히 유아기에 머무르지 않고, 자연의 법칙에 따라 매일 자라 완전한 성인이 될 때까지 성장하듯이, 물과 성령으로 위로부터 태어난 자도 영적 유아기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끊임없이 수련과 수고, 그리고 많은 인내 속에 머물며, 영적 대적과의 투쟁을 통해 영적 성숙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번영하고 성장해야 할 의무가 있다. 즉, 사도가 가르친 대로 “그리스도의 충만한 나이에 이르는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엡 4:13).

4. 그러나 육신의 탄생으로 태어난 아기는 필연적인 자연의 법칙에 따라 성년의 나이에 이르게 된다. 이는 하나님의 섭리가 육신의 나이가 자신의 임의에 따라가 아니라 본성의 법칙에 따라 완전함에 이르도록 정하셨기 때문이다; 반면 위로부터의 영적 탄생에서는 하나님께서 다른 질서를 정하셨으니, 즉 영적 성장의 과정에서 인간의 자유 의지에 수고와 노력, 그리고 확고한 인내를 바탕으로 한 힘겨운 여정을 맡기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좁은 문을 통해 들어가라”(눅 13:24)고 하셨으며, 또 “열심히 찾는 자들이 천국을 차지한다”(마 11:12)고 하셨고, 또한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라”(누가복음 21:19).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각자가 자신의 성향과 의지에 따라 수고와 노력으로 영적 성장을 이룰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5. 누구든지 육체적·영적 수련에 전념하며 선한 행위로 온갖 기쁨을 누릴수록, 그만큼 성령의 참여로 마음의 갱신을 통해 영적으로 성장하며, – 은혜와 선물을 통해 구원에 이르는 힘을 얻으며, 믿음과 사랑, 그리고 자유 의지의 수고를 통해 성취와 완성에 이르러, 은혜와 진리 모두에 따라 영생의 상속자가 되기 위함이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만으로, 인간의 자체적인 협력과 노력 없이 그가 번영 속에서 성장하는 것은 아니며, 전적으로 자신의 힘과 능력만으로, 성령의 협력과 도움 없이 우리가 하나님의 완전한 뜻과 순결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는 “주께서 집을 세우시고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건축하는 자의 수고와 건축하는 자의 수고는 헛되리라”(시 126:1)고 했기 때문이다.

6. 사도가 모든 사람에게 권면하고 설득하여 이루도록 하는 완전한 하나님의 뜻(롬 12:2)이란 무엇인가? – 믿음과 사랑으로 온전히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는 영혼 안에서 의심할 여지 없이 일어나는,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 이루어지는 마음의 정화와 성화이다. 주님께서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라”(마태복음 5:7)고 말씀하셨으며, 그러한 복을 얻고자 하는 이들에게 죄로부터의 완전한 정화, 즉 불경건한 정욕으로부터의 단호한 해방과 자기 안에 지극히 높은 미덕을 온전히 심어 놓을 것을 요구하십니다. 선지자도 기도하며 “하나님이여, 내 속에 깨끗한 마음을 지어 주시고, 내 속사람에 바른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0:12)라고 말했을 때 이를 지적하고 있으며, 또한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것이며, 누가 그분의 거룩한 곳에 설 것인가”라고 물었을 때,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청결한 자” (시 23, 3. 4)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성령께서는 우리가 자신의 노력으로 행위와 말과 생각으로 저지르는 죄를 완전히 끊어내고, 완전한 영의 청결을 추구하며, 성령의 은총으로 이를 성취하기를 희망해야 함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도 역시 육신의 결혼과 세속적인 속박에서 벗어나 동정 생활을 유지하고자 하는 영혼들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하며, “주님을 섬기는 자는 주님을 기쁘시게 할 방법을 찾으며, ‘몸’뿐만 아니라 ‘영’으로도 거룩해지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고린도전서 7:34). 그는 이를 통해, 순결한 하늘의 왕과 결합하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의 신부인 영혼은, 요한 신학자가 말한 바와 같이, 행동과 생각의 죄악, 즉 명백한 죄뿐만 아니라 은밀한 정욕으로부터도 자유로워져야 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소망을 그분께 두는 자는 누구나, 그분께서 깨끗하신 것처럼 자기 자신을 깨끗하게 한다”(요한일서 3:3).

7. 음행, 도둑질, 탐식, 비방, 헛소리, 고함, 웃음, 탐욕과 같은 명백한 죄들뿐만 아니라, 세속적인 교제를 멀리하고 썩지 않는 신랑과의 연합과 교제를 갈망하는 영혼은 깨끗해야 하며; 오히려 가장 강력한 내적 정욕과 은밀한 죄들, 즉 음탕함, 허영, 사람에게 아첨, 위선, 독단, 아첨, 악한 성품, 증오, 불신, 시기, 교만, 질투, 자기만족, 자만, 허세 및 이와 유사한 보이지 않는 “부끄러운 정욕들”(롬 1:26)로부터 순결을 지켜야 한다. 성경은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진 죄들을 행동으로 드러난 죄들과 동등하게 여깁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같은 뿌리에서 나온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어떤 자들을 이렇게 책망합니다. “너희는 마음속에서 불의를 행하느니라”(시 57:3).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나의 은밀한 죄에서 나를 깨끗하게 하소서”(시 18:13). 그러므로 우리가 외적인 사람, 즉 하나님의 성전인 몸을 명백한 죄로부터 지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든, 내적인 사람, 즉 영혼을 온갖 악한 생각으로부터 지키기 위해서도 그만큼의 부지런함과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다음과 같이 기록된 대로입니다: “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키라. 이는 생명의 근원이 거기에서 나오기 때문이니라”(잠언 4:23).

8. 우리가 항상 교활한 생각들—허영, 증오, 자만, 아첨, 정욕, 경쟁심, 독단 등—에 맞서 싸우고 반대한다면, – 우리 자신을 철저히 시험하며, 마음속의 은밀한 정욕들과 연합하거나 조화를 이루지 않도록 마음을 지키고, 반대로 모든 선한 일과 수고, 그리고 위업에 힘써 매진함으로써 우리의 원수에게 걸림돌을 놓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렇게 행한다면, 주님께서는 우리의 영적 노력을 보시고, 그분의 자비로움과 성령의 능력으로 반드시 우리 안에서 은밀한 정욕으로부터의 위대한 치유를 이루시며, 우리의 마음속 원수들에게 보복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9. 우리가 어떤 영적 경지에 이르기를 지향해야 하는지, 이를 성 바오로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우리의 모든 염원은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게 세우는 것’에 있습니다”(골 1,28). 그리고 이 완전함이 무엇인지는, 그가 에베소인들에게 보낸 기도의 축복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기를) – ‘그분의 성령으로 내면의 사람 안에서 굳건히 서게 하시고,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거하시게 하시며, 사랑에 뿌리를 내리게 하사, 여러분이…’”. 등등 (엡 3,16–18). 모든 것의 정점은 사랑입니다. 그는 또 다른 서신에서 이를 더욱 뚜렷하게 제시했는데, 거기서 하나님의 다양한 은사와 인간의 자기 희생들을 열거하며, 각각에 대해 “사랑이 없으면 이 모든 것과 그와 유사한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덧붙였습니다. 그리고 사랑은 모든 정욕을 삼키고 소멸시키는 것으로 묘사됩니다(고린도전서 13:1–8). 이것이 바로 완전함의 극치입니다.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이 도출된다. 즉, 성 바울이 열거한 은사를 받았으나, 가장 완전하고 효과적인 영적 사랑의 힘으로 (정욕으로부터의) 해방을 아직 얻지 못한 이들은, 비록 이미 영적 은사를 가지고 있더라도 여전히 위험과 투쟁, 두려움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10. 사도는 기독교적 완전함에 올바르게 나아가기를 원하는 이들을 위해 이 점을 보여주었으니, 어떤 은사를 받은 자라도 은혜가 온전히 작용하지 않는 상태에서도 이미 완전함에 도달했다고 스스로 생각하지 않도록 하고, 마치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망상하여 가장 낮은 은사들만으로 만족하여, 마땅히 도달해야 할 완전함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채 머물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사도는 이 완전함의 목표를 제시하며, 모든 이가 그러한 사랑의 풍요로움 앞에서 자신을 빈곤한 자로 인정하고, 끊임없이 그리고 지치지 않고 선한 일을 행하며, “그렇게 달려서 얻으라”(고린도전서 9, 24)는 말씀대로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영적 경주를 완주하도록 가르친다.

11. 내가 수행의 목표에 대해 이토록 길게 논한 것은, 이를 받아들이고자 하는 이들에게 우리가 어떤 소망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경주가 우리 앞에 놓여 있는지에 대한 올바른 생각을 확립하게 하고, 또한 하나님께 자신을 바친 모든 이가 이 생각의 인도에 따라 우리가 어디로 부름받았는지, 그리고 어떤 수준에 도달해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염두에 두며, 모든 방법과 온 힘을 다해, 그리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우리 자신과 이 세상에서 가진 모든 것을 항상 선한 일에 부지런히 바치며, 마치 우리가 무언가인 양 자만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 소명의 탁월한 높이와 그리스도의 사랑의 헤아릴 수 없는 풍성함에 비하면 우리가 실로 언제나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게 하려 했습니다. “그러므로 인내로써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달리며, 믿음의 창시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히브리서 12:1), “뒤는 잊어버리고 앞을 향해 나아가자”(빌립보서 3:14).

12. 그렇다면 형제들아,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서로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진리를 사랑하는 자들은 어떤 수고와 땀, 그리고 수련을 통해 앞서 말한 목표를 이룰 수 있을까요? 이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자는 세상과 세속적인 쾌락에서 물러나, 자신의 영혼을 형제애에 바쳐야 한다. 구세주께서는 그분을 따르기를 원하는 자가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 열거하신 후, “심지어 자신의 영혼까지도”라고 덧붙이시며 이렇게 명하셨다(눅 14,26). 과연 자신의 영혼을 버린다거나, 그것으로부터 단절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조건 없이 온전히 형제회에 자신을 바치고, 결코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으며, 입는 옷 외에는 자신의 소유를 단 하나도 갖지 않아, 아무것도 염려할 것이 없이 언제나 기쁨으로 명령받은 것만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자신의 영혼을 버린 자는 모든 형제들, 특히 원장들을 주인과 지배자로 공경할 것이며, 온갖 “분별”을 가지고 그들에게 섬기되, “사람의 눈앞에서만 일하며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엡 6,6) 해야 한다. 자신을 주님께 맡긴 자는 이 좁고 험한 길(순종)을 걸어가며, 기꺼이 그리스도의 이 선한 멍에를 메고, 그것이 그에게 큰 구원을 마련해 준다는 것을 의심 없이 믿어야 한다.

13. 형제들은 서로 간에 단순함과 순결함, 한마음, 평화, 그리고 진심 어린 성실함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아무도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높이지 말고, 자신을 누구보다 더 낫거나 높다고 여기지 말아야 하며, 오히려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자신을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자로 인정해야 한다; 사랑과 소박함, 경쟁과 교만의 부재 속에서, 서로에게 복종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마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몸과 한 영인 것처럼 형제애의 평화로운 유대가 유지되도록 해야 한다.

14. 이러한 규칙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무엇보다도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자신의 마음에 거룩한 사랑과 하느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품도록 힘써야 한다. 끊임없이 하느님께 이를 청하며, 주님과 하늘의 사랑을 자주, 아니 차라리 끊임없이 기억함으로써, 은총의 도움으로 매일 그 마음을 되살리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15. 이웃에 대한 사랑(그 다음)은 이미 쉽게 성취할 수 있다. 첫 번째를 첫 번째 자리에 두면, 두 번째는 첫 번째를 따라 순서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만약 누군가 첫 번째 인 위대한 계명, 즉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우리 안에 내적 성향과 선한 양심,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건전한 생각에서 솟아나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대해 소홀히 하고, – 그와 유사한 두 번째 계명을 돌보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거기서 비롯되는 것은 오직 형제들에 대한 겉치레뿐이며, 그는 결코 이 봉사를 순수하고 건전하게 수행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악의의 계략은, 그의 마음이 하나님을 기억하는 일과 그분에 대한 사랑 및 갈망에서 멀어져 있음을 틈타, 형제들에 대한 봉사를 어렵고 무거운 일로 묘사하며 마음속에 불평과 원망을 일으키거나, 그를 교만하게 만들어 자신을 존경받을 만하고 위대한 존재로 꿈꾸게 하며, 모든 이를 위해 많은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그를 현혹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기억하는 일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에서 멀어지면, 그는 필연적으로 영광을 추구하며, 자신이 섬기는 이들에게서 칭찬을 얻으려 애쓴다. 그러나 마음과 영적 태도가 항상 하나님에 대한 묵상과 그분을 향한 갈망으로 가득 차 있을 때, 그때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에 부합하여, 사람은 모든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행하며 형제들에 대한 순수하고 하나님께 기쁘시게 하는 사랑의 행실로 풍성해짐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상을 받게 될 자신의 수고에서 완전한 성공을 거두게 된다.

16. 우리가 행하는 모든 덕행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루어져야 하며, 결코 우리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행해져서는 안 된다. 계명을 따르는 모든 행위는 오직 주님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행할 때에만 거룩하고 순수하게 이루어진다.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계명의 실천을 더럽히려 항상 엿보는 원수가 우리로부터 멀리 쫓겨나며, 계명에서 명하는 모든 것이 우리에게 쉽고 실천하기 편해집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의 사랑이 계명을 어렵지 않게 만들고, 계명을 실천하는 데 따르는 모든 어려움을 제거해 주기 때문입니다. 적은 온갖 방법으로 세속적인 유혹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을 기억하는 일과 주님을 향한 경외심 및 사랑에서 돌리려 애쓰며, 그 후 어떤 그럴듯한 겉모습으로 우리의 마음을 참된 선, 즉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서 벗어나 허상의 선으로 돌리려 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행하는 모든 선한 일에 대해, 악한 자는 계명을 이행하는 과정에 자신의 허영이나 의심, 불평, 혹은 그와 유사한 것들을 섞어 넣어 그 선행을 어둡게 하고 더럽히려 애쓰며, 그렇게 함으로써 행해지는 선행이 참된 선이 되지 못하게 합니다. 참된 선은 오직 겸손하고 지혜롭게, 그리고 열성적으로 하나님을 위해 행해질 때만 이루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많은 지식과 분별력을 갖추어야 하며, 이를 통해 마음이 원수의 계략과 꾀를 간파하고 자신의 행실에서 모든 죄악을 제거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부주의하거나 소홀히 하거나, 불순한 의도로 행하면 하나님께 기쁘시게 여겨지지 않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신중하고 절제 있게, 하나님을 위해 행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기쁘시게 여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17. 온전히 자신을 하나님께 바친 자들은 자신의 힘닿는 대로 모든 계명을 이행해야 하는데, 이는 모든 이에게 경건의 단 하나의 목표가 분명히 놓여 있기 때문이며, – 즉, 믿음과 모든 미덕에 대한 열심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누리게 되고, 정욕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 즉 신실하고 경건한 자들의 영혼 안에서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에 의해 이루어지는 마음의 정화를 얻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각자는 하나님에 대한 마음의 사랑이 닿는 만큼 선에 자신을 바쳐야 한다. – 그리고 마지막으로, 끊임없이 기도하기를 원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항상 기도 속에 머물러야 한다. (물론 은둔자들을 말한다).

18. 그러므로 형제들 중에서 하늘의 복을 향한 사랑으로 기도의 수련에 들어가고자 하는 이가 있다면, 그를 그렇게 하도록 허락해야 하며, 그는 사람들과 하나님 앞에서 매우 칭찬받을 만하다. 형제들이 한마음으로 기쁨을 가지고 그러한 이가 기도에 머물도록 허락해야 하니, 그래야 그들 자신도 형제에게 허락하고 선하게 도운 것에 대해 하나님께 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니; 다만 이를 결심한 자가 오직 한 분 주님과 함께 머물고자 하는 억누를 수 없는 갈망을 품고 결심해야 하며, 모든 불필요한 생각을 물리치며 주님을 향한 끊임없는 열망이라는 이 수행 속에 실제로 머물러야 한다. 그래야만 그의 열매가 매일 모든 이의 공동 유익을 위해 분명히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비록 기도 중에 아직 신성한 사랑으로 인한 가슴 찔림과 불타는 열정이 없더라도, 스스로 노력하며 수고하고 의지를 이 일에 몰아붙여, 조건 없이 자신을 하늘의 사랑에 맡기며 참된 영적 기도를 얻으려 애쓴다면; 그에게는 다른 형제들이 기쁨으로 기도에 머물도록 허락해 주어야 하며, 더 정확히 말하자면, 형제의 완전한 성취를 자신들의 성취로 여기며 조력자로서 그를 돕고, 경쟁심과 질투심으로 인해 그를 방해하지 말며, 아름답고 열정적인 수련의 시작을 가로막지 말고, 하느님을 향한 선한 열망을 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상호 사랑의 열정을 보시고, 서로에 대한 올바르고 선한 뜻을 기꺼이 받아들이시며 모든 이의 간구를 들어주실 것이다.

19. 기도하는 자의 반열에 들어선 자는, 가장 위대한 사명을 스스로 맡았으니, 그에 걸맞은 가장 광범위한 수행을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기도에 머무르는 데에는 많은 장애물이 있기 때문이다: 잠, 낙담, 육체의 무거움, 생각의 혼란, 조바심, 나태함; 이 모든 것 외에도, 끊임없이 하나님을 찾는 영혼과 싸움을 벌이며, 그 영혼에 대항하고 온갖 방법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을 막는 사악한 영들의 반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내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끊임없이 깨어 있는 주의를 기울이며, 투쟁과 인내와 통곡 속에서 기도에 불리한 어떤 것도 허용하지 않도록 온 힘을 다해야 한다.

20. 만일 우리의 기도에 겸손과 지혜, 사랑, 순수함, 선함이 깃들지 않는다면, 그러한 기도는 우리에게 조금도 유익을 주지 못할 것이며,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기도의 겉모습에 불과할 것이다. 이 말은 사실 기도 한 가지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영적 수행—정결함, 금식, 밤샘 기도, 시편 찬송, 봉사, 그리고 덕을 위해 행해지는 그 밖의 모든 수고—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만약 그러한 행위 속에서 우리 안에서 사랑, 평화, 기쁨, 온유, 겸손, 단순함, 진실함, 인내, 시기하지 않음 등과 같은 열매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러한 모든 수고와 행위는 헛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열매를 맺기 위해 그 모든 것을 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이러한 열매가 없다면, 우리의 모든 행실과 모든 수고는 헛된 것이다. 이러한 열매를 맺지 못한 자들은 심판의 날에 미친 처녀들과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다.

21. 아직 기도에 온전히 헌신할 수 없는 자들은, 믿음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형제들을 섬기거나 순종의 길을 걷기 위해 스스로를 준비하라. 그리고 이 일에 착수하였으면, 주님의 계명을 이행하고 영적인 일을 행하는 자로서 이를 완수하라. 그 일을 하나님의 일처럼 세심하게 돌보고, 주님의 종들로서 기쁨으로 섬기되, 원수의 악의가 사람 흉내 내기나 불평, 오만, 나태, 부주의로 너희의 선한 일을 더럽히지 못하게 하라; 오히려 온갖 방법으로 너희의 아름다운 순종을 경외심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거룩하게 하여, 그것이 그분 앞에서 기쁘게 받아들여지도록 하라.

22. 그러므로, 한 가지 삶의 방식을 따르는 모든 형제들에게는 앞서 말한 하나의 목표가 주어져 있으니, 각자는 자신의 힘닿는 대로 힘쓰며, 성실함과 덕을 연마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아들의 지위에 온전히 도달할 것임을 하나님께 믿으라. 또한 단순함과 진실함, 상호 사랑, 기쁨, 그리고 모든 일에서의 겸손함이 형제애 안에서 언제나 흔들리지 않는 기초가 되게 하소서. 그렇지 않으면 서로를 높이거나, 서로를 얕보거나, 불평에 빠짐으로써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도록 하소서. 또한 끊임없이 기도에 머무르는 자는, 아직 그러한 꾸준한 기도에 미치지 못하는 자를 향해 교만해지지 말아, 그의 일이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번창할 수 있도록 하라. 그리고 자신을 사역이나 다른 어떤 순종의 길에 헌신한 자는, 악의에 이끌려 불평하지 말며, 기도와 금식에 전념하는 자를 비방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그 역시 하나님께 은혜를 얻고, 그의 일이 하나님께 기쁘게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 우리는 서로의 지체로서, 서로를 위로할 의무가 있다. 하나의 영혼에 의해 다스려지는 신체의 지체들이 시기심 없이 서로를 섬기듯이, 우리도 서로의 지체로서, 한 분 성령께 이끌리고 한 분의 살아 계신 진리의 말씀으로 양육받으며, 서로를 위로하기 위해 사랑과 단순함, 선함과 기쁨으로 서로 화합해야 한다. – 서로에 대한 이러한 단순함의 태도가 유지될 때, 기도에 힘쓰는 이들의 풍성함이 이 일에 순종하는 이들의 부족함을 채워 줄 것이며, 반대로, 순종을 실천하는 이들의 수고에서 나오는 풍요로움이 기도에 머무르는 이들의 부족함을 채워 줄 것이며, 사도의 말씀대로 “평등”이 이루어질 것입니다(고린도후서 8:14). 오직 형제들 사이에 단순함, 사랑, 겸손, 그리고 시기하지 않는 마음이 확고히 자리 잡기만 한다면. 그러면 각자가 믿는 만큼, 사랑하는 만큼, 수고하는 만큼, 매일 그 만큼 번창하며, 천국에 합당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천사 같은 삶이다! 이것이 바로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시기심 없이 단순함, 사랑, 평화, 기쁨으로 서로 연합할 때, 이웃의 번영을 자신의 성취로 여기고, 마찬가지로 연약함이나 결점, 슬픔을 자신의 손실로 인정할 때, 다음과 같이 기록된 대로입니다: “자기 것만을 생각하지 말고, 각자가 다른 이들의 것까지 생각하라”(빌 2,4). 이처럼 서로를, 특히 강한 자들은 약한 자들을, 튼튼한 자들은 연약한 자들을 위해 동정함으로써, 성 바오로가 지시한 대로(갈 6,2) 그리스도의 법을 이행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4. 미덕과 정욕에 대하여

1. 사람은 이중적, 즉 몸과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감각도 두 가지로 나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영혼의 감각 다섯 가지와 육체의 감각 다섯 가지가 있다. 현자들은 영혼의 감각을 ‘ ’ 즉 영혼의 힘이라 부르며, 이는 다음과 같다: 지성, 이성(분별력), 판단력(의미), 상상력, 그리고 감지력; 육체적 감각은 시각, 후각, 청각, 미각, 촉각이다. 여기서 두 가지 미덕과 두 가지 악덕이 비롯된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어떤 것이 영혼의 미덕이고 어떤 것이 육체의 미덕인지, 또한 어떤 것이 영혼의 정욕이고 어떤 것이 육체의 정욕인지 명확히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영적 미덕

2. 정신적 미덕에 관해, 우리는 주로 네 가지 기본 미덕, 즉 용기, 분별력, 절제, 정의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정신적 미덕들이 파생된다: 믿음, 소망, 사랑, 기도, 겸손, 온유, 너그러움, 인내, 친절, 분노하지 않음, 신에 대한 지식, 짜증 내지 않음, 순수함, 평정심, 위선 없음, 진실함, 자유, 비난을 멀리함, 허영을 멀리함, 과시를 멀리함, 교만을 멀리함, 시기심을 멀리함, 간계를 멀리함, 탐욕을 멀리함, 연민, 자비, 관대함, 공경, 경외심, 미래의 불멸의 복에 대한 갈망,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자 하는 열망.

 

육체적 미덕

3. 육체적 미덕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의해 미덕의 도구로 변모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며, 만일 모든 위선과 사람에게 아첨하는 태도에서 벗어나 있다면, 사람을 겸손과 무욕에서 번영하도록 이끄는 것으로, 다음과 같다: 절제, 금식, 굶주림, 갈증, 철야 기도, 밤새도록 서 있기, 무릎 꿇기, 목욕을 전혀 하지 않기, 히톤 한 벌로 만족하기, 건식 식사, 늦은 시간에 소량만 음식 섭취하기, 물만 마시기, 맨땅에 눕기, 빈곤, 재물 탐욕을 버림, 쇠약함, 옷차림에 대한 무관심, 자만심 없음, 은둔, 침묵, 수도실에 갇혀 지내는 것, 검소함, 적은 것으로 만족함, 침묵, 직접 수공예에 힘쓰기, 온갖 고난과 육체적 수련. 이 모든 것은 몸이 건강하고 육신의 정욕이 몸을 괴롭힐 때에는 매우 필요하고 유익하지만, 몸이 쇠약해지고 하나님의 도움으로 내면의 정욕을 이겨냈을 때에는 그다지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거룩한 겸손과 감사가 채워주기 때문이다.

 

영적 정욕

4. 영적 정욕이란 망각, 나태, 무지이다. 이 세 가지 정욕에 의해 가려진 영혼의 눈, 즉 이성은 다른 정욕들의 지배를 받게 되는데, 그것들은 다음과 같다: 불경건, 불신앙, 즉 온갖 이단, 모독, 짜증, 분노, 원한, 성급함, 인간 혐오, 원한 품기, 중상, 비난, 무분별한 슬픔, 두려움, 공포, 불화, 질투, 시기, 허영, 교만, 위선, 거짓말, 불신, 분별력 부족, 안일함, 근시안적 사고, 만족할 줄 모르는 마음, 탐욕, 게으름, 욕심, 편애, 세속적인 것에 대한 집착, 낙담, 비겁함, 배은망덕, 불평, 허세, 자만, 성급함, 오만, 권력에 대한 집착, 사람에게 아부, 교활함, 뻔뻔함, 무감각, 아첨, 은밀함, 조롱, 이중성, 정욕에 따라 죄를 용인하는 것, 끊임없이 죄를 생각하는 것, 마음이 이리저리 떠도는 것, 자만심 – 모든 악의 어머니, 탐욕 – 모든 악덕과 정욕의 뿌리, 악의와 교활함.

 

육체적 정욕

5. 육체적 정욕이란 곧: 탐식, 폭식, 사치, 주정, 몰래 먹는 것, 온갖 종류의 쾌락 추구, 음행, 간음, 방탕, 불결, 근친상간, 아동 성추행, 수간, 추악한 욕망, 그리고 온갖 비자연적이고 수치스러운 정욕, 절도, 신성모독, 강도, 시기심이나 무분별한 분노로 인한 살인, 온갖 육체적 안락, 특히 건강한 신체 상태에서 육체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행위, 마법, 점술, 마법, 점치기, 예언, 허영, 경솔함, 나태, 옷차림에 대한 집착, 얼굴 문지르기, 비난받을 만한 방탕함, 주사위 놀이, 세속적 쾌락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 육체를 좇는 삶은 정신을 무디게 하여, 이를 땅에 발을 붙인 채 짐승과 같은 상태로 만들며, 결코 하나님과 미덕의 행실로 시선을 돌리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모든 악의 뿌리이자, 어떤 이가 말하듯, 첫 번째 원인은 쾌락 추구, 명예 추구, 그리고 재물 추구이며, 이로부터 모든 나쁜 것이 생겨난다.

6. 그러나 현명한 수행자 마르쿠스가 말하듯, 이 강력한 거인들, 즉 망각, 나태, 무지가 미리 그를 압도하고 지배하지 않는다면, 사람은 그 어떤 죄도 짓지 않는다. 이러한 것들은 쾌락과 안락한 삶, 세속적인 명예와 오락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근본적인 원인이자 가장 부적절한 어머니는 자만심이며, 즉, 육체에 대한 무분별한 집착과 열정적인 애착, 정신의 산만함과 흩어짐, 그리고 재치 있는 욕설과 말과 웃음에 대한 온갖 방종은 많은 악과 수많은 타락으로 이끈다.

7. 게다가 명성을 갈망하는 마음이 정욕으로 변하면 그 양상이 매우 다양하고 여러 형태를 띠며, 영혼이 하나님 앞에서 절제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경외심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감싸이지 않은 채 덕행을 실천하는 데 전념하지 않을 때, 영혼을 현혹하는 수많은 쾌락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사방에서 영혼의 눈을 사로잡는 수천 가지의 쾌락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육체의 아름다움, 돈, 사치, 명예, 나태, 분노, 소유욕, 권력에 대한 집착, 탐욕 등이 우리를 현혹하기 위해 우리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데, 그 즐거움은 눈부시고 사랑스러워, 이와 유사한 것에 매료된 자들, 즉 미덕에 대한 강한 사랑을 품지 못하고 어려움을 겪는 자들을 끌어들이기에 충분하다. 모든 세속적인 유대, 어떤 물질적인 것에 대한 모든 집착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그에 빠진 사람에게 즐거움과 기분 좋은 감각을 일으키는데, 비록 그것이 이성적이지 않고 결국에는 해롭지만, 영혼의 욕망하는 힘을 너무나 강하게 노예로 만들기에, 정욕에 굴복한 사람은 사랑하는 것을 잃음으로써 짜증, 슬픔, 분노, 원한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만약 집착 위에 비록 사소한 습관이라도 사람을 지배하게 된다면, 아아! 그 습관은 무분별한 집착에 사로잡힌 자가 그 안에 숨겨진 쾌락 때문에 끝까지 그 집착에 몸을 맡기게 만든다.

8.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정욕의 쾌락은 다양하며, 음행과 다른 육체적 쾌락뿐만 아니라 그 밖의 다른 정욕들에서도 만족을 찾는다. 그리고 절제는 단지 음행과 육체적 쾌락을 삼가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정욕들로부터도 자유로워지는 데 있다. 그러므로 이득을 탐하는 자, 돈을 탐하는 자, 소유욕이 강한 자는 절제된 사람이 아니다. 어떤 이는 육체적 아름다움에 사로잡히듯, 이 사람은 돈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후자는 전자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절제되지 못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전자와 같은, 본성 자체의 요구로 인해 그를 괴롭히는 동기가 그에게 없기 때문이다. 사실, 정의에 비추어 볼 때 가장 서툰 기수는 고집스럽고 성난 말을 제어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온순하고 순종적인 말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다. 이 모든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돈에 대한 욕망은 다른 어떤 것보다 더 강하며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욕망에 대한 충동은 우리의 본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변덕스러운 의지에 기인한다; 그러므로 그 욕망에 굴복하는 자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쾌락 추구라는 것이 단순히 음란함과 육체적 쾌락에만 국한되지 않고, 마음의 변덕과 편애에 따라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것에서 나타난다는 점을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9. 우리가 정욕을 더욱 명확히 알기 위해, 우리는 다음 내용을 덧붙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영혼은 사고력, 자극력, 욕망력의 세 가지로 나뉜다. 사고력의 죄는 다음과 같다: 불신, 이단, 무분별, 신성모독, 분별력 부족, 배은망덕, 그리고 영혼 속의 욕망력에서 비롯된 죄들을 용인하는 것. 이러한 죄들을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데에는, 하나님에 대한 의심 없는 믿음, 참되고 오류가 없는 교리, 성령의 말씀을 끊임없이 연구하는 것, 순수한 기도, 그리고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드리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분노의 힘에서 비롯된 죄들은 다음과 같다: 잔인함, 증오, 무자비함, 원한, 시기, 살인, 그리고 이와 유사한 것들에 대한 끊임없는 생각. 이러한 죄들을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데는 인애, 사랑, 온유, 형제애, 연민, 인내, 그리고 선함이 도움이 된다. 정욕의 힘에 속한 죄들은 다음과 같다: 폭식, 과식, 술주정, 음행, 간음, 불결함, 방탕, 탐욕, 헛된 명예, 금전, 부, 육체적 쾌락에 대한 갈망. 이러한 죄들을 치유하고 치료하는 데에는 금식, 절제, 고난을 기꺼이 감수함, 탐욕 없음, 가난한 자들을 위한 자선, 미래의 복을 향한 열망,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자 하는 열망이 도움이 된다.

10. 이제 모든 죄를 실행에 옮기게 하는 정욕적인 생각들에 대해서도 말하겠다. 모든 악한 생각은 여덟 가지이다: 탐식, 음행, 탐욕, 분노, 슬픔, 낙담, 허영, 교만. 이 모든 생각이 우리를 괴롭히든 괴롭히지 않든, 그것은 우리의 뜻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우리 안에 머무르든 머무르지 않든, 그리고 정욕을 일으키든 일으키지 않든, 그것은 우리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유혹은 별개의 문제이고, 동조는다른 문제이며, 정욕은 또 다른 문제이고, 투쟁은 또 다른 문제이며, 그 일에 가까워지게 하고 그와 닮게 하는 승낙은 또 다른 문제이고, 자발적 행동은 또 다른 문제이며, 사로잡힘은 또 다른 문제이다. 유혹은 원수가 행하는 단순한 상기시키는 행위이다. 예를 들어, “이 돌들을 떡으로 만들어 보라”고 원수가 우리 주 그리스도께 말씀하신 것처럼, “이것을 해라, 저것을 해라”라고 하는 것이다(마태복음 4:3). 그리고 이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의 의지에 달려 있지 않다. 반면 ‘동조’란 원수가 심어주는 생각을 받아들이고, 마치 그 생각에 몰두하듯, 우리 자신의 의지에 따라 원수와 즐거움을 느끼며 대화하는 것을 말한다. ‘정욕’이란 동조의 결과로 형성된, 원수가 심어주는 생각에 대한 습관이며, 마치 그 생각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꿈꾸는 것과 같다. 투쟁이란 생각과 이성이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 생각 속에서 정욕을 근절하는 쪽으로 기울거나, 정욕적인 생각을 용인하는 쪽으로 기울게 되는 것을 말하며, 사도가 말한 바와 같다. “육신은 영을 거스르고, 영은 육신을 거스르나니, 이 둘은 서로 대립하느니라”(갈 5:17). 포로됨이란 편견과 오랜 습관에 지배당하여 마음이 강제로, 자의하지 않게 끌려가는 것을 말한다. 수긍이란 생각 속에서 정욕에 대한 동의를 표명하는 것이며, “자발적 행위”란 정욕적인 생각에 수긍하여 행하는 그 행위 자체를 말한다.

11. 자신의 모순과 확고함으로 맨 처음에 첫 번째 것, 즉 유혹을 물리치는 자는 단 한 번에 나머지 모든 것을 근절한다. 또한 탐식은 절제로, 음행은 신성한 사랑과 미래에 대한 열망으로, 탐욕은 가난한 자에 대한 연민으로, 분노는 선한 마음과 모든 이에 대한 사랑으로, 세속적인 슬픔은 영적인 기쁨으로, 낙담은 인내와 굳건함과 하나님 앞에서의 감사함으로, 허영은 은밀히 덕을 행하고 진심 어린 회개를 담은 끊임없는 기도로, 교만은 자만심에 찬 바리새인처럼 누구도 정죄하거나 깎아내리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모든 사람 중 가장 마지막이라 여기는 것으로 극복된다. 이처럼 마음은 앞서 말한 모든 정욕에서 해방되어 하느님께로 승천함으로써, 이미 이 땅에서 성령의 보증을 받아 복된 삶을 살기 시작하며, 이곳을 떠난 후에는 무정함과 참된 깨달음으로 거룩하고 신성한 삼위일체의 빛 속에 자리 잡게 되어, 신성한 천사들과 함께 무한한 영원토록 빛나게 된다.

12.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영혼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안에는 세 가지 힘이 있기 때문이다: 생각, 성미, 그리고 욕망. 만약 성미 속에 사랑과 인간애가 있고, 욕망 속에 순결과 정절이 있다면, 그 생각은 밝다. 반면, 성미 속에 인간 혐오가 있고, 욕망 속에 방탕함이 있다면, 사색은 어둡다. 이성은 정욕이 그에게 복종할 때 건전하고, 순결하며, 밝아지며, 영적으로 하느님의 피조물들 간의 관계를 관조하고, 거룩하고 복되신 삼위일체로 승화된다.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그들 중 누구에게도 원망하지 않으며 악을 기억하지 않을 때, 성급함도 자연스러운 흐름이 된다. 또한 절제, 겸손, 그리고 탐욕 없음으로 정욕, 즉 육체적 쾌락, 이득에 대한 욕망, 그리고 덧없는 명성에 대한 욕망을 죽일 때, 욕망은 본성에 부합한다; 왜냐하면 욕망은 세 가지 갈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즉, 육체적 쾌락, 헛된 명예, 또는 부의 유혹을 향한 갈망이다. 그리고 이 이성에 반하는 갈망 때문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계명을 소홀히 여기며, 자신의 고귀함을 잊고, 이웃에게 적대적으로 변하며, 생각을 어둡게 하고 진리를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지고의 사고 방식을 얻은 자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미 이 땅에서 천국을 미리 맛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예비된 복을 기대하며 복된 삶을 살기 시작하는데,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 같은 합당치 못한 자들도 그 복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13. 어떤 미덕이든 그 완전함에 도달하는 것은, 일생 동안 지칠 줄 모르는 근면함으로 적극적인 성실함을 통해 그것을 얻으려 노력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는 자선, 기도, 사랑, 혹은 용기, 분별력, 정절, 정의와 같은 모든 종류의 미덕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바이다. – 미덕을 실천하는 데 있어 끊임없이 노력할 때, 그 과정에서 부적절한 목적, 예를 들어 남의 눈치를 보거나 헛된 명성 등을 허용함으로써 미덕의 가치와 중요성을 훼손하거나 완전히 없애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덕을 실천할 때는 항상 분별력을 가지고 행해야 하는데, 이 분별력은 마치 여왕과도 같으며 모든 미덕 중에서 가장 높고, 미덕 중의 미덕이다.

14. 미덕에서 성공하기를 바라고 죄를 피하려고 노력하는 모든 사람은, 영혼이 육체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기 때문에, 그만큼 영적 미덕, 특히 신의 이름을 딴 미덕과 신을 본받는 미덕이 육체적 미덕보다 높다는 사실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영적 악덕은 신체적 악덕보다 더 무겁고 해롭다. 이는 그 작용 면에서도 그렇고, 부과되는 처벌 면에서도 그러하다. 비록 왜 많은 이들이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술주정, 음행, 도둑질 및 이와 유사한 악덕들은, 많은 이들이 겉으로는 혐오하고 경계하며 두려워하고 피하는 것들이지만; 그러나 정신적인 측면에서 훨씬 더 중대한 악덕들—시샘, 원한, 오만, 교활함, 그리고 모든 악의 근원인 탐욕, 그리고 이와 유사한 악덕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게 바라봅니다.

 

5. 여덟 가지 주요 정욕과의 투쟁에 관하여, 전반적으로

1. 모든 악을 낳는 여덟 가지 생각이 있음을 알아두라: 탐식, 음행, 탐욕, 분노, 때 아닌 슬픔, 낙담, 허영, 교만. 바로 이 생각들이 모든 사람과 싸움을 벌인다.

2. 네가 “식탐”을 이기고자 한다면, 절제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라. 그러면 이길 것이다.

3. “음행”을 이기고 싶다면, 깨어 있는 삶과 갈망을 사랑하고, 항상 죽음을 생각하며, 결코 여자와 대화를 나누지 마라. 그러면 이길 것이다.

4. “탐욕”을 이기고 싶다면, 소유욕을 버리고 낭비를 삼가라.

5. “분노”를 이기고 싶다면, 온유함과 너그러움을 기르고, 유대인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얼마나 많은 악을 저질렀는지를 마음에 새기라. 그럼에도 그분은 인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으로서 그들에게 분노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기도하시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이 죄를 그들에게 용서해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누가복음 23:34).

6. 때 아닌 “슬픔”을 극복하고 싶다면, 결코 일시적인 일로 인해 슬퍼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누군가 말로 당신을 모욕하거나, 괴롭히거나, 명예를 훼손하더라도 슬퍼하지 말고, 오히려 기뻐하십시오. 오직 죄를 지었을 때만 슬퍼하라. 그러나 이 경우에도 절제를 지켜 절망에 빠지거나 파멸에 이르지 않도록 하라.

7. “낙담”을 이겨내고 싶다면, 비록 잠시라도 어떤 수공예에 몰두하거나, 책을 읽거나, 자주 기도하라.

8. “허영”을 이기고 싶다면, 칭찬도, 영예도, 좋은 옷도, 앞자리에 앉는 것도, 특혜도 좋아하지 말고, 오히려 비난받고 모욕당하며 거짓말이 퍼지는 것을 기뻐하라. 그리고 스스로를 책망하며, 네가 그 어떤 죄인보다도 더 큰 죄인임을 자각하라.

9. “오만”을 이기고 싶다면, 무엇을 하든지 그것이 네 자신의 수고나 네 자신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하지 마라. 금식하든, 기도하며 시간을 보내든, 맨땅에서 자든, 시편을 부르든, 또는 절을 많이 하든, 이것이 나의 힘이나 나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과 보호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하라.

 

1. 식욕과의 투쟁에 대하여

1. 수도사는 고기를 탐내지 말고, 취할 정도로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네 마음이 무뎌지고, 세속적인 근심에 끝이 없을 것이다.

2. 젊은 수도사의 선한 삶의 징표는 겸손하고 지혜롭게 술을 절제하고 말을 아끼는 것이다. 이를 좋아하는 자는 선한 삶을 끝까지 이어가지 못할 것이다.

3. 비록 형제가 예전부터 포도주를 마셔 왔다고 해도, 그를 취할 때까지 포도주를 마시도록 강요하지 말라. 배는 오랜 시간 동안 지어지지만, 단 한 번의 충격으로 순식간에 부서지기 때문이다.

4. 육체의 안식을 바라는 자는 스스로 많은 재앙을 자초하는 것이나, 오래 참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5. 주님을 생각하며 먹고 주님께 감사하는 것이, 먹지 않으면서 먹고 주님께 감사하는 자들을 비난하는 것보다 낫다.

6. 식탁에 앉았느냐? 빵을 먹되 이웃을 비난하지 말라. 비난함으로 말미암아 네가 네 형제를 삼키는 자가 되지 않도록 하라.

7. 믿음 안에서 굳건히 서서, 주님을 위해 네게 제공되는 모든 것을 먹으라. 만일 네가 먹고 싶지 않은 음식이 제공된다 해도, 다른 사람들이 먹고 주님께 감사드리고자 할 때 그것을 식탁에서 치워 버리지 말라.

8. 식탁에 앉았느냐? 사람답게 먹고, 무지한 자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지 말라.

9. 한 형제가 말하기를: “내가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어떤 혐오감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은 선하며, 아무것도 정죄할 것이 없나니’(딤전 4:4)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에게는 단맛이 유익하지 않다’(잠 19:10) 기록되어 있듯이, 수도사가 동물의 고기를 먹는 것은 현명하지 못합니다.”

10. 조각(남은 음식)이 제공될 때, 그 조각들조차 경멸하지 말라.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남은 빵 부스러기를 모아 “아무것도 버려지지 않게 하라”(요한복음 6,12)고 명하셨기 때문이다.

11. 사람에게 치욕이 되는 것은 포도주에 취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을 보았으나, 취한 자와 같은 사람은 아무도 찾지 못했다.

12. 절제는 육체를 지치게 하고, 과식은 마음을 둔하게 만든다.

13. 수도사여, 네 육체를 억누르고 굴복시켜라. 그래야 네가 버림받지 않을 것이다.

14. 네 육신 안에서 행하라. 그리하면 하나님께 열매를 맺을 것이다.

15. 수도사여, 형제들의 공동체 안에서 평안을 얻고 싶으냐? 형제들의 공동 식사로 만족하라. 그러면 네 육신에 “치유가” 있고, 네 뼈에 “회복이” 있을 것이며(잠언 3:8), 네 영혼은 해를 입지 않을 것이다. “만일 네 눈을 잔과 술잔에 고정한다면, 나중에 뱀에게 물린 것처럼 고통받을 것이다”(잠언 23:31).

16. 사자는 배를 채우기 위해 먹이를 쫓다가 포로가 되나니, 배를 채우는 자도 배의 쾌락을 위해 스스로를 낮추느니라.

17. 음식을 많이 먹으면 마음이 둔해지나, 절제는 마음을 맑게 한다.

18. 술에 취하고 성미가 급한 사람은 형제들의 마음을 뒤흔들며, 그에게 수치는 항상 따라다닌다.

19. 저녁에 술을 마시는 사람은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말을 하며, 아침이 되면 뉘우치나, 다시 술을 찾으면 또다시 똑같이 행한다.

20. 함께 있는 친구들이 아무리 권해도 취할 때까지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 만일 포도주가 너를 지배하게 되면, 먼저 너를 권했던 자들이 가장 먼저 너에게 유혹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1. 배를 채우는 데만 신경 쓰는 사람은 배를 음식으로 채우는 데 애를 쓰고 고생하지만, 먹고 나면 소화를 하는 동안 괴로워한다. 그러나 절제는 건강과 맑은 정신을 가져다준다.

22. 배를 채우는 데만 신경 쓰는 수도사는 많은 것을 걱정하지만, 절제하는 자는 들판의 산양과 같다.

23. 수도사여, 배를 염려하지 마라. 그러면 평안을 누릴 것이다.

24. 숲에 있는 모든 장작으로도 불을 채우기에는 부족하듯, 육체는 아무리 만족시켜도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

25. 술에 취한 목자는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을 돌보지 못할 것이며, 졸린 자는 스스로 짐승의 먹이가 될 것이다. 이는 “술꾼의 손에는 가시덤불이 자라나기 때문”(잠언 26:9)이며, 절제하는 자의 영혼은 하느님께로 기울어지기 때문이다.

26. 절제는 인내의 덕목이다.

27.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취할 때까지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 만일 네가 취한 채로 발견된다면, 그때 네게 큰 수치가 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28. 네가 떡을 맛보고 배부르게 먹었으니, 너를 먹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만일 네 몸을 적은 것으로 만족시키고자 한다면, 너를 강건하게 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는 이만큼의 떡도 먹지 않았다”고 말하지 말라. – 그것으로 네게 무슨 이득이 되느냐? – 단지 먹고 감사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뿐이 아니냐?

29. 배를 채우는 데만 열중하는 수도사는 금식을 슬픔의 시간이라 부르지만, 절제하는 사람은 금식 중에도 침울한 표정을 짓지 않는다.

30. 지나치게 절제하는 것은, 제 생각에, 칭찬받을 만한 일이 아니며, 마땅히 지켜야 할 절제를 소홀히 하는 것도 유익하지 않습니다. 정해진 식사를 오랫동안 거르는 것이 나태함을 초래하고 봉사에 필요한 힘을 약화시키듯이, 음식에 탐닉하는 것 또한 비난을 받게 합니다. “지금 배부른 자들아, 화 있을진저.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니라”(누가복음 6:25)라고 말씀하셨다. 게다가 절제하지 못하는 자는 절제하지 못함으로 인해 육신의 정욕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경건하고 마땅한 방식으로 몸을 다스려야 한다.

31. 위로의 식사(식사)를 마친 후 일어나서, 다른 방들을 돌아다니지 말고 자신의 방에서 침묵을 지키라. 마귀가 포도주로 많은 이들을 유혹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위로의 식사를 마친 후 타인의 방에 머무는 것은 두려움이 없고 타락한 듯한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모임에서는 영혼들이 타락하게 되는데, 특히 원장님의 통제가 소홀할 때 더욱 그러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두려움으로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기를 원하지 않는 자에게는, 주인의 엄격함 아래에서 종이 절제를 지키듯이, 헛된 일에서 자신을 억제하기 위해 인간의 두려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32. 음식은 소박하고 필요한 것만 섭취하여, 네 마음이 “먹는 일과 마시는 일과 이 세상의 근심”(누가복음 21:34) 속에서 무뎌지지 않도록 하라. 왜냐하면 그러한 정욕과 음란에 사로잡힌 자들은 음란을 음란으로 여기지 않고, 간음을 간음으로 여기지 않으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이 행하는 모든 것을 거부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모든 것을 두려움 없이 행하며, 진흙 속에 있는 돼지와 다를 바가 없다. 율법도, 선지자들도, 불의한 죄를 파멸시키기 위해 육신을 입으신 주님 자신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 그러니 고기와 술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마음이 영적인 은사를 받아들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33. 목욕과 술, 그리고 과도한 고기 섭취에 탐닉하지 마라. 그래야 중요한 일에서 실수하여 극복할 수 없는 위험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34. 자기만족에 빠진 사람들의 조언을 듣지 마라. 그들은 스스로를 배와 육신의 정욕의 노예로 만든 자들이다.

35. 과식과 과음은 당장은 즐거움을 주지만, 다음 날에는 마음에 불쾌감과 나태함을 남긴다.

36. 수도사는 먼저 침묵과 절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한 곳에 오래 머물지 못할 것이며,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할 것이다. 침묵은 고요함과 끊임없는 기도를 가르쳐 주고, 절제는 마음이 산만해지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마침내 이를 얻은 자에게는 마음의 평화가 기다리고 있다.

37. 배를 채우는 것에 현혹되지 말고, “술에 취하지 말라. 술에는 음행이 있으니”(엡 5:18)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네게 유익이 되지 않는다.

38. 누구든지 자신의 육신을 달래는 만큼, 스스로에게 해가 되어 정욕을 키우게 되며, 결국 육체의 나쁜 습관에 짓눌린 영혼은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두라. 그러므로 구주께서는 “너희는 조심하여, 과식과 술 취함과 세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무거워지지 않도록 하라” (누가복음 21:34)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사도도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내 몸을 죽이고 복종시키나니,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설교하면서 나 자신은 실격자가 되지 않으려 함이라” (고린도전서 9:27). – 만일 누군가 주님의 일에 자신을 강제로 몰아세운다면, 그만큼 그의 몸도 강해지고 영혼도 밝아집니다. 레슬러가 자신의 몸을 레슬링 기술에 적응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신체 훈련에 시간을 쏟듯이, 경건의 수행자도 모든 선한 행위에 힘써야 하는데, 사도가 말하듯이 “경건을 위해 스스로를 훈련하라”(딤전 4:7-8).

 

2. 음탕한 정욕과의 투쟁

1. 정욕에 사로잡힌 자는 여성을 만나면 기분이 들뜨고 그들의 아름다움에 매료된다. 육체의 아름다움은 그를 미치게 하고, 단정한 얼굴은 그를 황홀하게 하며, 우아한 몸매는 그를 매혹시키며, 여성들과의 대화 속에서 그는 쾌락에 녹아내린다; 본 것을 떠올릴 때면 음탕한 환상에 빠져, 마음속으로 여성들의 얼굴과 그들의 열정적인 표정, 매혹적인 미소, 눈짓, 화려한 옷차림, 아첨하는 말투, 오므린 입술을 생생하게 그려본다. 남자들과 함께 있으면 지루해하지만, 여성을 보면 얼굴에 생기가 돌며, 도움을 주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그때 비로소 노래할 목소리가 나오고, 재치 있는 말을 할 줄 알게 되며, 웃음을 터뜨리고 자신을 유쾌하고 매력적인 사람으로 드러낸다.

2. 네 눈이 이리저리 방황하지 못하게 하고, 남의 아름다움을 뚫어지게 쳐다보지 말라. 그래야 네 눈이 네 원수가 너를 넘어뜨리는 도구가 되지 않을 것이다.

3. 수도자에게 있어 책망받을 만한 것은 방황하는 눈이다. 방황하는 눈은 그것을 따르는 자에게 많은 슬픔을 안겨준다. 눈의 방황을 자제하지 못한다면, 정결함의 바른 길을 걷지 못할 것이다.

4. 절제를 사랑하면 음행의 악마를 제압할 수 있다.

5. 자기 육신을 양육하는 자는 악한 정욕을 키우는 것이니, 그에게 부끄러운 생각들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6. 눈을 절제하는 자는 마음이 가벼워지겠으나, 시선이 방황하는 자는 스스로 짐을 지게 될 것이다. “정욕의 날뜸은 선한 마음을 변질시킨다”(지혜서 4,12)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7. 만약 충동에 휩쓸려 눈이 헛된 것을 바라보게 된다면, 육체의 쾌락이라는 수치에 빠지지 않도록 즉시 눈을 멈추게 하라.

8. 육체의 욕망이 타오를 때, 더 강한 욕망을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몸을 만지지 마라.

9. 수도사여, 스스로를 경계하라. 여성을 만날 때 각별히 주의하라.

10. 몸을 갉아먹는 뱀을 피하듯, 영혼을 갉아먹는 여인을 더욱 피하라.

11. 여인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두는 자는 자신의 영혼 속에 그 아름다움을 갈망하는 마음을 심는 것이며, 그녀의 집 문 앞에서 머뭇거리는 자는 마치 얼음 위를 걷는 사람과 같으니, 유혹이 그로부터 멀지 않기 때문이다.

12. 두 레슬러가 싸우는 것과 같으니, 이는 수도사가 여인과 어울리는 것과 같다. 그러나 절제하는 자는 이득을 얻되, 자신은 도둑맞지 않을 것이다.

13. 네 마음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부끄러운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라. “연기가 눈에 해롭듯이”(잠언 25:20), 부끄러운 말도 영혼에 해롭다.

14. 음탕한 영이 너를 괴롭힌다면, “주님께서 너를 멸망시키시기를, 악취로 가득 찬 불결함의 악령아”라고 말하며 그를 물리쳐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라고 말씀하신 분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롬 8:7).

15. 정결과 순결을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

16. “하나님의 성전을 훼손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훼손하실 것” (고린도전서 3:17)이라고 신성한 성경은 말씀하신다. 개처럼 음행의 악마를 힘껏 물리치라. 결코 그러한 생각에 휩쓸리지 말라. 불꽃 하나에서 많은 숯이 생기듯, 나쁜 생각에서 나쁜 욕망이 배가되기 때문이다. 진흙의 악취보다 더 심하게 그것들에 대한 기억을 근절하도록 힘쓰라.

17. 향기가 후각을 기쁘게 하듯이, 성령께서도 순결함을 기뻐하시며 사람 안에 거하신다.

18. 돼지가 진흙탕에서 뒹굴기를 즐기는 것처럼, 악령들도 음란과 불결함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다.

19. 청결함 속에는 위대한 빛과 기쁨, 평화, 인내가 깃들어 있고, 음란함 속에는 슬픔과 낙담, 끝없는 잠, 짙은 어둠이 깃들어 있다.

20. 수도사여,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순결을 사랑하라. 그것은 목수가 대패를 가지는 것이 마땅한 것처럼, 네 삶에도 마땅한 것이다.

21. 어떤 수도사는 음행의 유혹을 견디며 악마에게 이렇게 말하며 물리쳤다. “어둠 속으로 가라, 사탄아! 비록 내가 합당하지는 않으나, 그리스도의 지체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그러자 즉시 그 열정이 멈췄다(마치 누군가 불어 끄듯이 등불을 끄는 것처럼); 그는 스스로 이 일에 놀라워하며 주님을 찬양했다.

22. 도대체 왜 그렇게 두려움 없이 꾸미기를 좋아하는가? 사도가 하는 말을 들어보라. “젊은이의 정욕은 피하라”(딤후 2:22). 네가 어떤 원수와 싸우고 있는지 모르겠느냐? 다른 영혼을 유혹하는 그물이 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르겠느냐?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이 어떤 썩음과 부패를 물려받게 될지 어떻게 생각하지 않겠느냐? 내가 너에게 알려주고 싶은 것은, 겉모습은 화려할지라도 영혼의 거처가 더럽혀져 있다면, 그 아름다움은 머지않아 손상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네가 영혼의 아름다움을 얻게 된다면, 그 아름다움과 빛에서 무언가가 겉모습에도 흘러넘칠 것이며, 그런 아름다움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23. 옷을 화려하게 차려입고 배를 채우는 자는 많은 비난을 받게 되겠지만, 절제하는 자는 적들에게 두려운 존재이다.

24. 일하는 중에 음탕한 생각이 너를 괴롭힌다면, 게으름 피우지 말고 두 손을 들어 기도하라. 그러면 믿음의 기도가 너를 위해 맞서 줄 것이다.

25. 정욕이 너를 짓누르기 전에 네 안에서 그것을 억누르라. 정욕에 굴복하는 자를 그것은 지옥의 심연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26. 주 하나님의 얼굴을 뵙게 될 자격을 얻기 위해, 평화와 거룩함(순결)을 사랑하라.

27. 형제여, 농담을 삼가라. 그것이 너를 뻔뻔하게 만들지 않도록 하라. 뻔뻔함은 방탕의 어머니이니라.

28. 술에 취한 자들의 방에 들어가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순결이라는 네 보물을 순식간에 잃게 될 것이다.

29. 육신에 정욕이 타오를 때, 꺼지지 않는 불과 끝없는 벌레를 마음에 떠올리라. 그러면 즉시 지체들의 불타오름이 사그라들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방심하여 패배하고 후회하게 될 것이며, 회개의 슬픔이라는 불길에 휩싸여, 비록 후회하더라도 죄를 짓는 데 익숙해질 것이다. 처음부터 이 욕망의 모든 움직임에 대해 엄격하게 대처하여, 그것에 압도당하지 않도록 하라. 그래야만 싸움에서 자신에게 승리를 내주는 것에 익숙해지지 않을 것이다. 습관은 제2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나약함에 익숙해지면 결코 엄격함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항상 창조하고 파괴하며, 죄를 짓고 회개하기를 반복한다. 만약 네게 유혹이 닥쳤을 때 느슨해지는 데 익숙해진다면, 네 삶의 기록에는 영원토록 “회개”라는 글자가 새겨질 것이다. 욕망에 굴복하는 데 익숙해진 자는 언제나 양심의 책망을 받는다; 그는 언제나 슬퍼하며,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즐거운 얼굴을 보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양심의 책망 때문에 침울해진다. 왜냐하면 정욕의 일반적인 속성은 그것을 행하는 자에게 고통스러운 슬픔을 안겨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온 영혼을 다해 경청하고, 항상 네 안에 하나님을 모시라.

30. 자기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죽을 때까지 자신을 깨끗하게 지키도록 힘써라. 그래야만 담대함과 기쁨으로 불멸의 신랑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순결을 존중하라. 그러면 그것이 너를 하늘의 궁전으로 인도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너희를 한 분 남편, 곧 순결한 처녀에게 약혼시켜 그리스도께 바치려 하노라”(고린도후서 11:2).

31. 창조주 앞에서 거짓말하지 않도록 몸을 죄로부터 지키라. 우리는 이미 우리 자신을 주님께 바쳤으므로, 더 이상 우리 몸에 대한 권세를 갖지 못하며, 우리 자신의 뜻대로 그 헌물을 되돌릴 수도 없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하나님께 서원하여 주님께 예물을 드렸고, 제사장이 그 예물을 받아 성전에 모셨다면, 비록 예물을 드린 자가 나중에 회개하더라도, 주님께 드린 후에는 그 예물을 되돌려 받을 권한이 더 이상 없습니다. 만약 몰래 그것을 훔치려 한다면, 자신의 재산을 가져간 자로서 면책될 수 없으며, 신성모독자로서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영혼을 하느님께 바친 자들도 더 이상 자신의 육체에 대한 지배권을 갖지 못한다.

32. 나쁜 조언을 조심하라. 덕을 저버린 자들은 자신들만 방탕한 삶을 살지 않도록 다른 이들도 함께 넘어뜨리려 애쓰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달콤한 말로, 자기들에게 순종하는 자들을 순결에서 벗어나게 하여 죄에 빠뜨리려 한다. 스스로 타락한 그들은 다시 일어서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을 고의로 유혹하여 타락과 타락으로 이끌기도 한다. 그리고 마귀는 그들을 낚싯바늘의 미끼처럼 이용한다. “그들의 목구멍은 무덤과 같으니”, “부끄러운 정욕”에 사로잡힌 자들이다(롬 3:13; 롬 1:26). 그들이 부드러운 말로 너를 태워버리지 않도록 조심하라.

33. 겸손함으로 거룩함(순결)을 지키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 그러나 아무도 (이 일에서) 평안을 얻으리라고 희망하며, 원수의 속삭임에 순종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때 이 고문자는 비록 부끄러운 행위는 없더라도, 음탕한 생각과 쾌락을 통해 그들을 사로잡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이 여성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원수는 그들에게 처녀성을 자처하도록 속삭이지만, 사실 그들의 온 몸은 정욕의 더러움으로 가득 차 있다. 이렇게 원수는 그들이 죄에서 자유로운 것처럼 자만하게 만들지만, 정작 그들을 “담즙의 송이와 슬픔의 송이”로 채우고 있다(신명기 32:32),

34. 포도주에 취하지 말고 여성들과 시간을 보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이는 누구나 그것이 덕행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스스로 분명히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악마들의 유혹을 경계해야 할 것은 이것뿐만이 아니라, 남성들과도 음탕한 쾌락을 자극하고 영혼을 파멸로 이끌 수 있는 유약한 대화를 나누어서는 안 된다. – 우리가 여성들과의 만남을 거부하는 것은 여성을 교활하다고 여기기 때문이 아니라, 여성들과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원수가 우리를 쉽게 타락시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령의 온전한 무기와 능력에 희망을 두며, 사방에서 교활한 영들의 유혹을 경계해야 한다. 누가 원수에게서 한 문만 닫고 두 문을 열어주면서, 자신이 안전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아니다. 사방에서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야 하며, 구실을 찾는 자에게 구실을 주어서는 안 된다.

35. 정결함이라는 미덕을 소홀히 하지 말고, 온 힘을 다해 내면에 거룩함(순결)을 간직하도록 노력하라. 네가 세상을 떠난 것도 바로 이를 위함이니. 성령께서 네 안에 거하시도록 네 순결을 지켜라. 부끄러운 욕망과 헛된 애무에 귀를 기울이지 마라. 자신을 깨끗하게 지키고, 만일 네 안에서 죄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하면, 거룩함을 추구하고 그 안에서 주님을 섬기는 자들을 사랑하시는 주님께 눈물과 기도로 그 불길을 끄라. – 올바른 마음가짐으로 지키는 순결은 귀중한 보물이다. 그것을 사랑하면 주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며, 모든 일에서 번영할 것이다.

36. 만일 네 안에서 육신의 싸움이 일어난다면, 두려워하지 말고 낙심하지 마라. 그렇게 하면 원수에게 대항할 용기를 주게 될 것이며, 그는 네게 유혹적인 생각을 심어주며 이렇게 속삭일 것이다. “네 정욕을 만족시키지 않는다면, 네 안의 불길은 결코 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인내하며 기다리라”, 눈물을 흘리며 그분의 자비 앞에 기도를 쏟아내라. 그러면 그분께서 너를 “들으시고”, “정욕의 구덩이”, 즉 불결한 생각들로부터, 그리고 “진흙탕의 환상”, 즉 수치스러운 환상들로부터 너를 “들어 올리시며”, 네 “발”을 거룩함(순결)의 “바위” 위에 “세우실” 것이며(시 39:1–3), 그분께로부터 네게 임한 도움을 보게 될 것이다. 그저 인내하라. 생각을 게을리하지 말고, 배에서 물을 퍼내는 것처럼 지치지 말라. 삶의 항구가 가까웠기 때문이다. “네가 아직 말하기도 전에, ‘내가 여기 있다’고 말씀하시리라”(사 58,9). 그러나 그분은 네가 죽음까지도 마다하지 않고 죄와 맞서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지, 네 투신을 지켜보시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그러니 겁내지 마라. 하나님께서는 너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그분은 네 용기를 지켜보고 계시니, 성스러운 천사들의 얼굴과 수많은 악마들도 그것을 지켜보고 있다. 천사들은 승자에게 면류관을 씌워 줄 준비가 되어 있고, 악마들은 패배자에게 수치를 덮어씌울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니 주의하라. 네 편(천사들)을 슬프게 하지 말고, 적들(악마들)을 기쁘게 하지 마라.

37. 하나님의 눈앞에는 숨길 곳이 없다. “보지 못하실 것이다”라고 속삭이며 너를 유혹하는 원수의 말에 현혹되지 말라. 너는 하나님의 발치에 서 있다. 이를 소홀히 여기지 말라. 기록된 바와 같이,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내 발의 발판이니라”(행 7:49)라고 하였느니라.

38. 우리를 사로잡는 정욕과 싸워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비극은 아니다. 그러나 스스로를 방종하여 대적들 앞에 넘어지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비극이다. 그러니 너를 태우는 정욕에 맞서 싸워, 결코 꺼지지 않는 불길에서 벗어나라. 정욕이 한 번 너를 이긴다면,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더욱 맹렬히 너를 공격할 것이다. 그러니 네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여, 하나님의 얼굴이 네게서 떠나지 않도록 하라.

39. 술 취함을 피하고, 가능한 한 여인과의 만남을 피하자. 여인의 말은 마음속에 “그물”과 같기 때문이다(잠언 7:21), 그것을 듣는 자는 추악한 관계로 이끌리게 된다.

40. 영생을 잃지 않도록, 일시적인 달콤함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주의하라. 너는 상인이 되도록 부름받았다. 진주를 잃지 않도록, 원수가 네 보물을 빼앗아가지 않도록, 화물을 실은 네 배를 침몰시키지 않도록, 그리고 빈손으로 집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온전히 정신을 차려라. 적은 육체의 더러움으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지키는 자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영광을 얻는지 알고, 그 사람을 생각들로 강력하게 공격하여 그 생각들에 얽매이게 함으로써, 그로 하여금 미래의 영광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한다. 만약 부도덕한 생각을 거부하는 영혼을 발견하면, 그에게 자주 공격하지는 않지만 완전히 물러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가 살짝 밀기만 해도 즉시 문을 열어주는 곳으로 향하며, 저항하지 않는 자의 몸과 영혼을 가장 더러운 욕망으로 더럽히고; 마지막으로, 마치 선한 조언자인 양, 그에게 이런 생각을 심어준다. “네 육신을 이렇게 짓밟는 것보다 세상으로 나가 동거녀를 얻는 편이 낫다.” 그러나 이런 것은 절제 있는 사람에게는 결코 다가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네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여, 이런 일이 네게 닥치지 않도록 하라.

41. 네가 하나님께 약속한 것을 기억하고 거룩함(순결)을 지키라. 그래야 주님 앞에서 은혜를 얻을 수 있다. “음행을 피하라”(고린도전서 6:18)고 말씀하신 분의 말씀을 들어라. – 음행이 얼마나 중대한 죄인지 알고 싶으냐? 보라: 광야에서 뱀들이 죽이지 못했던 자들을, 미디안 땅에서 음행이 쓰러뜨렸다. 만일 네가 죄에 빠졌다면, 그 상태에 머물러 있지 말고,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자비를 소홀히 여기지 마라. “죽음이 지체하지 않을 것임을 기억하라”(시라 14, 12). 네가 하나님의 손길을 피할 수 없음을 기억하라. 그러니 태만하지 말고, 회개하며, 울고, 네가 유혹당했음을 탄식하라. 비록 우리가 그 타락을 잊어버린다 해도,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각자의 행실을 아시기 때문이다.

42. 게으르지 말고, 용감하게 원수에게 맞서라. 그리고 원수가 너를 파멸시키기 위해 흔히 들어오는 틈을 막아, 편한 진입로를 찾지 못하고 빈손으로 물러나게 하라. 그리고 그 틈을 막는다는 것은, 선한 것과 악한 것이 모두 영혼으로 들어오는 감각, 즉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을 안전하게 지키고, 생각이 마땅치 않은 곳으로 쏠리지 않도록 막는 것을 의미한다. 땅을 자신의 지배로 황폐화시켰던 거인들을 마음에 새기고, 주님께서 순식간에 대홍수로 그들을 땅 위에서 쓸어버리신 것을 기억하라. 그들의 힘은 그들에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곳 주민들의 죄로 인해 어떻게 멸망당했는지 생각해 보라. 그들의 사치와 교만도 그들에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러니 우리도 구원을 위해 힘써야 한다. 우리도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지 않도록, 그리고 큰 심판을 받고 이곳을 떠나지 않도록 말이다.

43. 네게 추악하고 부정한 욕망을 불어넣는 자에게 말하라. “오, 진리의 원수여! 설마 네가 네 욕망을 이루게 하려고 내가 스스로를 부끄럽게 해야 하겠느냐? 너와 같은 방탕한 자들에게로 가라. 네가 스스로 돼지 떼를 구했으니, 그들과 함께 빠져 죽어라. 그러나 나는 더 이상 내 욕망에 복종하는 노예가 되지 않겠다. 지난 시간은 이제 충분하다. 이제부터는 진리를 돌보며, 나의 하나님께서 너의 행실로부터 나를 완전히 건져내시도록 간구하리라. 그분은 내게 성령을 주셨으나, 나는 그분을 화나게 하였고, 깨끗한 영혼과 몸을 주셨으나, 나는 그것들을 더럽혔노라.” 사랑하는 자여, 너에게 그런 정욕을 부추기는 자에게 이렇게 말하라.

44. 어떤 성인이 말하기를, “음행은 개와 같다. 어루만져 주면 네 곁을 떠나지 않겠지만, 쫓아내면 도망갈 것이다.” 자신을 주의 깊게 살피고, 네 삶을 소홀히 여기지 마라. 사소한 쾌락 때문에 네 수고의 결실을 망치지 않도록 주의하라. – 불결함 때문에 네 행위의 보상을 잃지 않도록, – 불결함 때문에 침묵과 기, 절제, 그리고 그 밖의 미덕에 대한 상을 망치지 않도록 하라; 자신이 받은 보수를 구멍 난 지갑에 넣는 사람과 같지 말라. –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스스로를 지키라.

45. 만일 꽃피는 듯한 미인과 대화를 나눈다면, 욕망이 네 마음을 뒤흔들지 않도록 눈을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열정적인 감정으로 가득 찬 말을 늘어놓게 될 것이며, 입술 끝으로는 정절을 이야기하는 척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정욕에 빠져 온전히 그것에만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만남이 생길 때는, 말을 빨리 끊고 침묵을 지키는 편이 낫다. 성경은 “많은 말로 그를 유혹하라”(잠언 7:21) 말하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대화가 잦으면 영혼에 적지 않은 해를 끼친다.

46. 음란한 자는 자신의 정욕을 혐오하는 이를 사랑할 수 없으며, “자신과 같은 자에게 남자는 달라붙는다.”

47. 자신의 정욕을 어떻게 극복할지 깊이 탐구하라. 이는 네가 실천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48. 음탕함으로부터의 피난처는, 첫째로 자주 그리고 절제 있게 기도하는 것이며, 둘째로 이성과 순수한 생각이 지배하도록 하고, 경건한 영의 태도와 어울리지 않는 무분별한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주님께서 오류 없는 심판자이시라는 확신에서 비롯된다. 마음의 경각심과 심판을 기다리는 마음은 내면의 간지러움을 없애고 점점 강해지는 정욕을 말려버릴 것이며, 그러한 영혼 안에는 고요함이 찾아올 것이다(정욕적인 움직임이 가라앉을 것이다).

49. 네가 정결하다면, 네 절제를 자랑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께 기도하여 끝까지 네 수호자가 되어 주시기를 구하라. 왜냐하면 종종 네 발 달린 짐승들이 포도원에 갑자기 침입하여, 파수꾼의 부주의로 인해 열매를 순식간에 망가뜨리는 일이 드물지 않기 때문이다.

50. 잠자리에 들 때, 필요 이상으로 침구를 두툼하게 깔지 말라. 안락함은 자연스레 네 몸을 달아오르게 하여 정욕의 불씨를 크게 지필 수 있기 때문이다.

51. 구세주께 자신의 몸을 거룩한 성소로 지키고, 낯선 행실로 자신의 영혼을 수치스럽게 하지 않고 주님께 기쁨이 되는 자, 복이 있도다. 가증스럽고 부끄러운 일을 미워하고, 주님께 기쁨이 되는 산 제물로 자신을 바친 자, 복이 있도다.

52. 행실로 고문자(마귀—영혼의 폭군)를 책망하고, 정욕의 불길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은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그의 영혼이 성령의 이슬로 적셔질 것이기 때문이다.

53. 만일 네가 네 행위의 열매를 빼앗으려는 자들(허영심)에 맞서 용감하게 싸운다면, 누군가 교묘히 아래에서 몰래 다가와 너를 넘어뜨리지 않도록(음란한 생각) 주의하라. 그러나 네 생각을 바로잡아(주의하여), 순풍을 놓치지 말고 무기를 준비하여, 배를 생명의 항구로 인도하여 구원하라.

54. 누가 자기 곁에 무화과나무를 심어 놓고 그 열매를 돌보지 않겠느냐? 하물며 순결과 정결함은 더욱더 지켜야 한다. – 아니면 독사에게 물린 사람이 그 굴에 접근하는 것을 경계하지 않는 자가 있겠는가? 만약 물린 후에도 손을 굴 속으로 넣는다면, 다음 번에도 물릴 것이다. 그때 죽음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독을 가진 동물인가, 아니면 스스로를 지키지 못한 사람인가? – 너는 이 말을 깊이 새겨라.

55. 수도사가 여인과 어울리는 것은 해롭다. 그리고 네 안에 육체적인 생각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처녀에게는 아예 가까이 가지 마라. 여인들과 함께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내는 수도사는 불 속으로 뛰어드는 사람과 다를 바 없다. 사슴이 올가미에서 도망치듯, 그들과의 만남을 피하라.

56. 네 몸의 순결을 지키라.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그것을 보존한다면, 모든 미덕에서 순조롭게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네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는 네가 하나님의 성전인 네 몸을 순결과 올바른 뜻의 향기로 채우고 있음을 기뻐하시며, 모든 선한 일에 너를 굳건하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덕목과 신성한 순결에서 성공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수단이 있다: 배와 혀를 절제하고, 눈을 다스리는 것이다. 이 세 가지를 모두 지켜야 한다. 만약, 예를 들어 처음 두 가지는 지키되, 눈을 방황하지 않게 지키지 못한다면, 견고한 순결을 얻지 못할 것이다. 깨진 수도관이 물을 담을 수 없는 것처럼, 산만한 눈은 순결한 마음을 지킬 수 없다. “남의 아름다움을 훔쳐보지 말라”(시르 9,8) – 그리하여 네 마음이 하느님을 경외하는 데 굳게 매여 있게 하라(이사야 118,120).

57. 수도사는 몸이나 발을 지나치게 꼼꼼하게 씻어서는 안 된다. 쾌락을 추구하는 자들이 몸과 옷차림의 우아함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처럼, 경건함을 실천하는 수도자는 이와 정반대의 태도로 적대자들에게 맞서야 한다.

58. 거룩함(순결)과 더러움 사이의 싸움은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다. 우리를 더럽히도록 부추기는 자들은 이런 생각을 심어준다. “아무도 너를 보지 못하는데, 뭘 두려워하느냐?” 그러나 거룩함 안에서 우리를 돕는 자들은 그들에게 반박한다. “하나님께서 보시고, 그분의 천사들도 너와 함께 있는데, 어떻게 ‘누가 너를 보느냐’고 말할 수 있느냐?” 유혹자는 계속 말한다. “그들이 어디 있느냐? 지금은 여기 아무도 보이지 않는데.” 그러자 거룩함을 돕는 이들이 그를 가로막으며 말합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 네 말이 옳다. 기록된 바와 같이 ‘그들의 악의가 그들의 눈을 멀게 하리라’(지혜서 2,21). ‘눈을 지으신 분이 보지 않으시겠느냐’(시편 93,9)? 어디서 하나님으로부터 숨을 수 있겠느냐(시 138, 1–12)?” – 바로 이것을 마음에 새기라. 그러면 죄가 더 이상 너를 지배하지 못할 것이며, 죄로 인한 슬픔이 너를 덮치지 않을 것이요, 성령으로 말미암은 기쁨과 평화가 네게 임하리라.

59. 주님 안에서 네 몸의 순결을 귀중한 진주처럼 간직하라. 옷차림으로 허세를 부리지 말고, 시선은 아래로, 영혼은 위로 향하라. 청년과는 친밀한 관계를 맺지 말고, 여자와는 말조차 나누지 말라. 소년과는 대화를 길게 하지 말고, 술에 취한 자들과 웃음거리로 삼는 자들과 어울리지 말라 , 오직 온전히 하나님의 경외함 속에 머물며 사도의 계명을 기억하라: “포도주로 취하지 말라. 그 안에는 음행이 있느니라”(엡 5:18).

60. 때로는 악한 자가 다음과 같은 유혹적인 생각을 심어주기도 한다. “매 순간 음란한 생각이 너를 괴롭히고 있다. 이 불안감을 얼마나 더 짊어지고 견뎌야 하겠느냐? 육체를 만족시켜서 더 이상 투쟁하지 않도록 하라. 나중에 회개하면 된다. 그건 별일도 아니다.” 냉철한 마음으로 그에게 대답하라. “누가 내게 말해 줄 수 있겠는가? 만일 내가 내 육신을 타락시킨다면, 회개할 시간을 찾을 수 있을 것이며, 불법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끌려가지 않을 것이라고? 우리의 ‘삶은 땅 위의 장막’이기 때문이다(욥기 8:9).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내가 죄를 짓는 것이 칼을 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과 다를 바가 있겠는가? – 게다가 어떻게 이 일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느냐? 이 유혹에 굴복하지 않은 이들은 얼마나 높이 존경받는지를, 그리고 그 유혹에 굴복한 이들은 얼마나 불명예스럽게 여겨지는지를 내가 보고 있으니 말이다. 요셉은 대대로, 하늘과 땅에서 칭송받는 반면, 그 이집트 여인은 조롱의 대상이 되었고; 순결한 수잔나는 찬양받는 반면, 음탕한 노인들은 후세에 악명을 남겼습니다. – 그런데도 어떻게 “한 번만 만족시키면 마음이 진정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 악마여, 짐승이 육식을 습관으로 삼으면 이 정욕을 더 자주 충족시킨다는 것을 모르느냐? 그런데도 네가 내게, 정욕을 한 번만 충족시키면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시키려 하느냐? 주님께서 너를 금하시기를, 사자처럼 내 영혼을 삼키려 하는 교활하고 간사한 자여. 네 달콤함은 쓰며, 네 유혹은 악의 심연이고, 네 약속은 죽음과 파멸로 가득 차 있다. 너는 나를 주님의 은혜에서 멀어지게 하고 성령을 모욕하게 할 죄를 부추기고 있다. 나는 “구원의 날”에 “그분으로 말미암아” 표징을 받았는데(엡 4:30); 그런데 너는 이것이 중요하지 않은 일이라고 말한다. 너는 나를 유혹하여 “그리스도의 지체를 음행하는 자의 지체로 만들게”(고린도전서 6:15) 하려 하니, 그리하여 내가 한 순간에 불멸의 풍요를 잃고, 그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거룩함을 망치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네 말대로, 아무 의미도 없다는 말인가? 너는 내가 주님을 노하게 하도록 유혹하여, 그 두려운 날, 두려운 심판의 보좌 앞에서, 의로운 재판장이신 그분으로부터 “악한 종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쾌락을 더 사랑한 자여, 네 부정한 것과 죄로 땅을 더럽혔도다”라는 말을 듣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하지 않단 말인가? – 의로우신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얼마나 엄격하고 변함없는지, 그분께서 너와 “너와 함께 죄를 지은 천사들을 용서하지 않으시고, 어둠의 사슬로 묶어 큰 날의 심판에 넘겨 고통받는 자들을 지키게 하셨다”는 사실을 너 스스로 경험하지 못했느냐? 그런데도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말하느냐? – 너는 거짓과 아첨, 그리고 파멸이다. 거짓과 아첨으로 너는 이성의 눈을 가리고, 다른 이들을 유혹하여 이 작은 쾌락을 영생보다 더 선호하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 우리 자신을 맡겼으므로 너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주님은 우리의 요새이시며, 주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시며, 주님은 우리의 도우시며 보호자이시다.”

61. 음행의 악마는 육체적 절제뿐만 아니라, “헛된 것을 보지 아니함”(시 118:37)과 같은 눈의 절제를 통해서도 무력화된다. 산만하게 돌아가는 눈에는 이미 음행이 있는데, 주님께서 이에 대해 증언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는 이미 마음으로 그와 간음한 자니라”(마태복음 5:28). 눈을 아래로 돌리고 영혼을 주님께 향하는 자는 이러한 간음을 자기 안에서 뿌리 뽑으며, 육체를 이긴 자는 시선도 이긴 것이다. 산만한 눈은 우리에게 무서운 배신자이다.

62. 산만한 눈으로 인해 일어난 욕망은 대상이 있든 없든 영혼을 정욕으로 불태운다. 심지어 꿈속에서도 그 대상을 마음에 떠올리게 하는데, 이는 악령들이 생각 속에 유혹적인 것을 그려내고, 사람의 눈으로 이전에 보았던 유혹적인 대상의 형상을 되살려 마음을 사로잡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선지자는 “헛된 것을 보지 않도록 내 눈을 돌리소서”라고 기도한다.

63. 악마가 네 마음속에 유혹적인 대상을 그려내기 시작하고, 네가 한때 보았던 여인의 아름다움을 네 마음에 새길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품고, 죄 가운데 잠든 자들을 떠올리라. – 네 영혼이 육신과 헤어지게 될 그 마지막 날을 생각하라. – 진리를 소홀히 여기고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지 않은 자들이 듣게 될, 그 무섭고 전율을 일으키는 음성을 상상하라: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 마귀와 그의 사자들을 위해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가라”(마태복음 25:41), – 잠들지 않는 구더기와 끝없는 고통도 상상해 보라. 이것을 깊이 생각하고 되새기라. 그러면 즐거움을 갈망하는 마음이 불 앞에서 밀랍이 녹듯이 네 마음속에서 사라질 것이다. 마귀들은 하나님의 두려움 앞에서는 순간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64. 정욕에 저항하지 않고 눈으로 마음대로 방황하게 내버려 두는 자는 이미 정신적으로 정욕 앞에 굴복한 것이며, 인간의 수치심이 아니었다면 몸을 여러 번 타락시켰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정신을 차리고 끊임없이 눈앞에 하느님의 두려움을 두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자신의 몸도 타락시킬 것이다. 왜냐하면 눈을 산만하게 만드는 이 악마 뒤에는, 육신 안에서 실질적으로 죄를 짓게 하는 또 다른 악마가 따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악마는 첫 번째 악마가 이미 영혼을 산만하게 만들고 흩어지게 하는 데 성공했음을 보게 되면, 즉시 육신의 죄도 저질러지도록 부추기기 시작한다. 자신의 눈에 굴복한 자에게 그는 이와 비슷한 말을 속삭이기 시작한다. “보라, 네가 이미 마음속으로 죄를 짓고 간음했으며, 계명을 어겼으니, 계명을 어긴 죄가 이미 네게 돌렸다. 그러니 이제 정욕을 충족시켜라. 행하는 것과 갈망하는 것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네 욕망만큼은 만끽하라.” – 그러나 사도의 말씀대로 “우리는 그의 속셈을 알지 못한다”(고린도후서 2:11)는 대로, 그의 속셈을 믿지 마라. 이는 그가 이를 통해 네 영혼을 사로잡으려 하기 때문이다. – 불법적인 죄를 저지르라고 부추기는 이 악마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비록 내 눈이 넘어가고 마음으로 간음했더라도, 나는 회개의 탄식으로 간음한 내 마음을 찢어 뉘우치며, 넘어간 눈을 눈물로 씻어낸다. “마음이 상하고 겸손한 자를 하나님은 멸하지 않으시리라”(시 50:19).

65. 만일 마을까지 가야 할 필요가 생기면, 여자들과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네 영혼이 마치 삼켜버린 먹잇감처럼 휩쓸려 갈 것이다. 그때는 더욱 정신을 차려라. 왜냐하면 네가 넘어질 위험이 코앞에 있기 때문이다. 네 자신을 잘 살피면, 마치 안전한 항구에 있는 것과 같을 것이다. 경건함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유혹과 싸워라. 부끄러움을 모르는 태도는 음행의 어머니이다. 여자들은 네가 그들에게 함부로 대하고 헛된 말을 하는 것을 보면, 더 나쁜 일로 부추겨 너를 타락으로 이끌 것이다. –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회개와 경건함을 가장하여 그들의 말로 네 마음을 느슨하게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어떤 성인은 이렇게 말하였다. “그들은 너를 정욕에 빠뜨리려고 말을 하는 것이다.”

66. 어떤 생각이 너를 소년이나 아름다운 여인과 만나게 하려고 유혹하는 것을 눈치챈다면, 네가 원수의 그물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아두어라. 만약 (그렇게 하지 말라는) 훈계를 듣고도 그 뜻을 버리지 않는다면, 네가 이미 그물에 걸려들었으며, 정욕을 이겨내기란 쉽지 않음을 알아두어라. “나는 이로 인한 해를 입지 않는다”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뜨거운 숯 위를 걸어가면서 발을 데지 않고 지나갈 수 있겠는가?

67. 정결하고 싶다면 절제를 지키고, 해로운 만남을 끊어라. 사람이 유혹을 일으키는 것에 얼마나 가까이 다가가느냐에 따라, 그만큼 그의 마음은 생각이 혼란스러워지고 사악한 욕망이 타오르지 않고는 있을 수 없다. 보이는 얼굴과 말들이 그를 정욕으로 부추기기 때문이다. 마치 젖은 것에 닿은 스펀지가 부풀어 오르며 수분을 흡수하듯이, 생각에 확고하지 못한 사람은 육신적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과 가까워지거나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면 해로운 것을 흡수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에 취해 죄가 없음에도 취한 사람이 되고, 이미 해로운 것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영적인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68. 스스로를 바로잡고 순결함을 굳건히 지키고자 하는 자는, 정결한 생각을 굳게 붙들고, 선한 수고로 육신을 지치게 하며, 끊임없이 하나님을 기억함으로써 모든 악하고 부끄러운 것들로부터 생각을 정화해야 한다. 이를 통해 우리의 마음은 은혜로 충만해지며, 마음에 거하며 마음을 지배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악의에 찬 원수들이 침입하려 할 때 그들에게 접근을 막아줍니다.

69. 아름다움이 눈부시고, 눈빛이 맑으며, 뺨이 빛나고, 얼굴에 일종의 인위적인 표정이 담긴 분별력 있는 여인을 보게 될 때, 그녀가 네 마음을 달아오르게 하고 네 안에 욕망을 부추긴다면, 너를 놀라게 하는 것은 흙이며, 너를 불타오르게 하는 것은 재임을 깊이 생각해 보아라; – 그러면 네 영혼은 더 이상 광란하지 않을 것이다. 생각으로 그녀의 얼굴 피부 속을 들여다보라. 그러면 그 미모가 얼마나 하찮은지 알게 될 것이다. 뼈와 힘줄, 그리고 악취 외에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녀가 늙고, 변하고, 죽으며, 그 모든 아름다움이 사라진다는 것을 상상해 보라. 네가 무엇에 놀라고 있는지 깊이 생각하고, 부끄러워하라. 그리고 부끄러움을 느끼고 회개하라.

70.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마음을 품고, 그리스도의 왕이신 분의 거룩한 성전이 되기 위해 자신의 몸을 깨끗하게 지키는 사람은 복이 있다. 자발적으로 이미 성전이 된 사람인가? 네 성전이 타락하지 않도록 밤낮으로 스스로를 주의 깊게 살피라. 만일 그것을 깨끗하고 주님께 합당하게 보존한다면, 하나님의 성령께서 네 안에 거하시며 너를 점점 더 거룩하게 하실 것이다.

71.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자신을 단단히 묶고, 강인한 파수꾼이 되어 온갖 불결한 생각으로부터 하나님의 성전을 지키라. 온전히 눈처럼 되어, 끊임없이 지켜보며 악한 자의 약탈자들을 경계하라. 이 약탈자들은 누군가 느슨해지고 정신이 산만해진 것을 발견하는 즉시, 항상 그에게 달려들어 이 불쌍한 자의 육신의 성전을 타락시켜, 그가 더 이상 주님께 합당하지 않게 만들려 한다. 그러니 네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여, 네가 스스로 이 악한 자의 약탈자들, 즉 불결한 생각과 추악한 욕망을 받아들이는 일이 없도록 하라.

72. 정욕의 뿌리는 뻔뻔하다. 매일 그 뿌리를 베어내더라도, 그것은 매시간 시들시들해진다. 정욕의 뿌리를 네 마음에서 완전히 뽑아내어, 그것이 매시간 시들시들해지거나 자라나지 않도록 하라. 천 번 베어내더라도, 그 뿌리를 완전히 뽑아내기 전까지는 두 배나 더 많은 횟수로 다시 싹트게 될 것이다.

73. 네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여라. 거룩하고 지극히 순결하신 주님 대신에 더러운 원수가 네 성전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선을 미워하는 이 원수의 뻔뻔함으로 인해 네 성전이 타락하지 않도록 하라. 그는 뻔뻔하고 자신의 의도에 완고하여, 네가 몇 번이고 꾸짖으며 쫓아내도 뻔뻔하게 들어오려 애쓴다. 만일 그를 네 성전에 들여보내면, 하느님께서는 너를 버리실 것이다. 그리고 네 성전은 온갖 더러움과 악취, 어둠으로 가득 찰 것이다.

 

3. 탐욕과의 싸움에 대하여

1. 영혼에 해가 되는 이익을 탐하지 말라. 영혼보다 더 귀한 것이 무엇이랴?

2. 겸손함으로 침묵하는 가난한 수도사가, 교만과 오만함으로 가득 찬 부유한 수도사보다 낫다.

3. 금을 사랑하는 자는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겠으나,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복을 받을 것이다. 금에 소망을 둔 자는 넘어지겠으나, 주님께 소망을 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4. 은을 탐하면 이곳에서 아무것도 없이 떠나게 되겠지만, 탐욕을 버리면 하늘의 부를 잃지 않을 것이다.

5. 가난을 사랑하면 음행의 악마를 쫓아낼 것이다.

6. 자기 방에 금을 숨기는 자는 교만과 불순종의 정욕을 쌓아 둔다. 그러나 기도와 자선을 보물창고에 모은 자는 하나님 안에서 부유해진다. 다른 이들은 돈을 모으나, 수도사인 너는 기도와 자선을 모아라.

7. 우리는 오직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만을 추구하자. 지나친 것은 단지 즐거움을 줄 뿐, 유익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8. 육신의 부모로부터 유산을 바라는 수도사는 유혹에 빠지지만, 주님을 구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9. “늙으면 무엇을 먹고 살까?”라고 말하지 마라. 우리에게 내일 일을 염려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는데, 너는 벌써 노년을 걱정하고 있으니 말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해 주시리라”(마태복음 6:33). 만약 우리가 이것을 무엇보다 먼저 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것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네 근심을 주께 맡기라, 그분께서 너를 양육하시리라” (시 54:23).

10. 재물을 탐하는 수도사는 열매 맺지 못하는 야자나무와 같고, 재물을 탐하지 않는 수도사는 가지치기를 한 야자나무가 높이 자라는 것과 같다.

11. 물질에 집착하는 수도사는 발에 끈이 묶인 채 날아가는 매와 같다. 그가 어디에 앉든 즉시 얽히게 된다. 그러나 물질에 집착하지 않는 수도사는 언제나 길을 떠날 준비가 된 여행자와 같다.

12. 금은 인내를 주지 않지만, 믿음은 그것을 얻은 이를 견고한 기초 위에 세워 준다.

13. 왜 우리는 온갖 쓸모없는 근심을 떨쳐버리고, 세상의 짐에서 벗어나 마음을 가볍게 하지 않는가? 문은 좁고 비좁으며, 재물을 탐하는 자는 그곳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하느님께서는 재물을 탐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해 기꺼이 결핍과 슬픔을 감수하며, 수련과 기도, 그리고 많은 고난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사랑하십니다.

14. 네 손이 취하기 위해 뻗어 있지 말고, 차라리 베풀기 위해 뻗게 하라 (시라 4, 35).

15. 탐욕은 가장 무거운 죄악이니, 이는 그것이 “모든 악의 뿌리”이기 때문이다(디모데전서 6, 10). 이 탐욕을 어떻게 뿌리 뽑을 수 있는지 알고 싶은가? – 온 마음과 온 영혼으로 하느님을 의지함으로써이다.

16. 어떤 형제에게는 악한 자가 정해진 것 이상으로 수공예에 열중하게 만든다. 여기서 탐욕의 정욕이 생겨난다. 그러면 영혼이 모든 악의 뿌리인 돈에 대한 탐욕에 물들게 되면, 수도사가 아침에는 평소보다 일찍 수공예에 착수하고, 저녁에는 마땅한 시간보다 늦게까지 일을 마치도록 부추깁니다. 그리하여 가능하다면 기도나 예배는 뒷전으로 미루고, 돈에 대한 탐욕 때문에 오직 일에만 몰두하게 됩니다. 예배 종소리가 울릴 때, 이 형제는 모두보다 늦게 도착하고, 누구보다 먼저 예배를 빠져나갈 핑계를 찾는다. – 이를 알고 스스로를 경계하여, 완전히 허용되지 않는 길로 치우치게 된 네가 자신의 신분을 잃지 않도록 하라. – 원수는 여기서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틈을 타면, 다른 이를 길에서 벗어나게 만들어 “너는 수고하고 또 수고하지만, 결국 거의 아무것도 얻지 못하네. 가서 더 수익성 있는 수공예를 배워라”라고 속삭인다. – 사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어떤 형제는 이를 따라 세상으로 나가고, 결국 그곳에 완전히 머물러 버린다. 그러니 조심하라.

17. 정결함은 단지 음행과 육체적 쾌락을 삼가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정욕들로부터도 자유로워지는 데 있다. 이득을 탐하는 자, 돈을 탐하는 자, 재물을 탐하는 자는 정결하지 못하다. 어떤 이가 육체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히듯, 이 사람은 돈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후자는 전자와 비교할 때 더 큰 의미에서 정결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전자와 같은, 본성 자체의 요구로 그를 괴롭히는 동기가 그에게 없기 때문이다. 돈에 대한 집착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며, 그에 대한 충동은 우리의 본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의지에 기인한다. 그러므로 자발적으로 그 유혹에 굴복하는 자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이다.

 

4. 분노와의 투쟁에 대하여

1. 분노와 짜증의 영을 스스로 쫓아내는 사람은 전쟁과 반란과는 거리가 멀며, 항상 마음이 평온하고, 얼굴에 미소가 띠며, 정신이 맑으니, 바로 성령의 거처이다.

2. 온유한 사람은 비록 상처를 입어도 기뻐하고, 모욕을 당해도 감사하며, 분노하는 자들을 사랑으로 달래고, 타격을 받아도 동요하지 않으며, 다툼이 있어도 평온함을 유지한다; – 복종당할 때는 기뻐하며, (남의) 교만에 상처받지 않고, 모욕을 당할 때 기뻐하며, 공로를 자랑하지 않고, 모든 이와 화목하며, 윗사람에게 순종하고, 어떤 일에도 준비되어 있으며, 간사함을 멀리하고, 시기심을 알지 못한다.

3. 시기심이 없는 사람은 명예를 탐하지 않으며,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고, 성공하는 자를 돕고, 선한 길을 걷는 자들을 기쁘게 바라보며, 마땅히 살아야 할 대로 사는 자들을 칭찬한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시기심이 없고 내면에 경쟁심이 없는 사람은 타인의 모든 성공과 모든 훌륭한 업적을 기뻐한다.

4. 시기심과 경쟁심에 시달리는 자는 불쌍한 자이다. 왜냐하면 그는 마귀의 공범자이기 때문인데, 바로 그 마귀의 “시기”로 인해 “죽음이 세상에 들어왔다”(지혜서 2,24). 그의 마음은 항상 슬픔으로 지쳐 있고, 몸은 창백해지며, 기력은 고갈된다. 시기심과 경쟁심은 끔찍한 독이다. 그것들로부터 중상모략과 증오, 살인이 생겨난다.

5. 악한 말로 자신의 혀를 더럽히지 않은 자는 자신의 마음과 양심을 깨끗하게 지켰다. 악한 말의 유혹에 빠지지 않은 자는 자신이 육신에 속한 사람임을 진정으로 깨달았으며, 원한을 품지 않는 삶을 살았다. 악한 말을 하는 자들과 교제하지 않는 자는 천사들과 함께 거하게 될 것이다. 악한 말로 귀와 혀를 오염시키지 않은 자는 사랑의 치유로 충만하다. 악한 말로 자신의 입을 더럽히지 않는 자의 입에서는 성령의 열매가 향기롭게 피어오른다.

6. 남을 비방하는 자는 스스로를 정죄하는 것이다. 비방하는 자 안에는 중상모략과 증오, 그리고 옴슬러기가 있으며, 그는 마땅히 형제 살해자로 인정된다.

7. 경건함의 가면 아래 숨겨진 증오나 시기심은 금 그릇에 담긴 쓴물과 같다. 그 안에 생명나무를 심으면, 그 물은 달콤해질 것이다. 우리 구세주의 십자가로 인해 교활한 원수의 모든 중상모략은 무효화되었다.

8. 사랑은 마음의 눈을 밝게 비춘다. 그러나 원수와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마치 자주 뱀이 있는 굴에 손을 넣는 사람과 같다.

9. 만일 네 마음에 원한을 품고 있다면, 너는 분노와 무지, 그리고 슬픔의 거처가 될 것이며, 네 얼굴의 표정도 변할 것이다. “원한을 품는 자의 길은 죽음으로 이른다”(잠언 12:28)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10. 마음에 원한을 품고 있는 자는 마치 자신의 가슴속에 뱀을 키우는 사람과 같다.

11. 성급한 사람은 형제들의 마음을 동요시키지만, 사랑으로 오래 참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한다.

12. 북풍이 바다를 요동치게 하듯, 성급함은 사람의 생각을 뒤흔들지만, 너그러움은 짜증을 몰아내고, 짜증이 사라지면 분노도 그친다.

13. 길들여지지 않은 말은 기수를 악인들의 손에 넘겨주며, 성급한 사람은 재앙에 빠진다.

14. 수도사여, 시기심을 듣지 말고, 형제에게 함정을 파지 말며, 그에게 비난받을 만한 이름을 붙이지 말라. 수치심을 주어 그를 제자리에서 쫓아내려 할 때, 네가 다른 사람에게 꾸미는 것과 똑같은 일을 네가 당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이웃을 위해 구덩이를 파는 자는 그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전도서 10,8). 기록된 말씀을 들어라. “죄인들은 자기들이 친 그물에 걸릴 것이다”(시편 140,10).

15. “이 형제는 공동체에 해를 끼친다”는 핑계를 대지 마라. 그러나 너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말고, 악을 행하는 자들과 교제하지 마라. 하나님께서는 “마음과 속을 살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시 7, 10).

16. 오래 참음과 악을 행하지 않는 길을 찾은 자는 생명의 길을 찾은 것이다.

17. 형제의 성공을 시기하는 자는 스스로 영생에서 멀어지나, 형제를 돕는 자는 영생에서도 그의 동역자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심판 때 악을 행하는 자와 그들과 공모하는 자들이 벌을 받는다면, 주님께서 그분의 뜻을 이루는 데 협력하는 자에게 상을 주시는 것은 더욱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18. 미소로 짜증을 누그러뜨리는 것이, 거침없이 격노하는 것보다 낫다.

19. 연기는 벌들을 쫓아내지만, 원한을 품는 마음은 마음속의 지혜를 쫓아낸다.

20. 주님께 기도하고, 그분의 자비 앞에서 눈물을 흘리라. 그러면 원한을 품는 마음이 네 영혼에 자리 잡지 못할 것이며, 네 기도는 그분 앞에서 “향로”와 같으리라 (시 140:2).

21. 어디서나 평화롭게 살고자 하는 자는 자신의 안식을 구하지 말고, 주님 안에서 다른 이들의 안식을 구하라. 그러면 스스로도 안식을 얻으리라. 그러나 다투기 좋아하고 성질이 고약한 자는 결코 평안을 얻지 못하리라.

22. 형제들 사이에 다툼이 생기면, 먼저 회개한 자가 승리의 면류관을 얻겠지만, 다른 자도 회개를 거부하지 않고 화해를 위해 필요한 일을 기꺼이 행한다면 면류관을 받게 될 것이다.

23. 사람의 성급함은 그에게 함정과 같으니, 자기 안의 성급함을 이겨낸 자는 그 함정을 피한 것이다.

24. 형제들의 한마음 속에 주님께서 거하시나니, 그들의 원수는 악한 자를 기쁘게 한다.

25. 죄를 지적받고도 침묵하는 자는 마음속에 원한을 품고 있는 것이나, 온유하고 평화롭게 변명(혹은 자백)하는 자는 원한을 품지 않는 자이다.

26. 성미가 급하고 시끄러운 사람은 맹세를 남발하지만, 침묵하는 사람은 분별력이 있다.

27. 성급함이란 무엇인가? 뻔뻔하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정욕이며, 그 뒤에는 회개가 따른다. 그러나 슬픔은 그 슬픔에 빠진 사람의 마음을 갉아먹는다.

28. 반역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갑작스러운 파멸과 분열, 그리고 치유할 수 없는 비탄이 닥칠 것이니, 이는 그가 주님께서 미워하시는 모든 것을 기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화를 사랑하는 자는 평화를 상속받으며, 사람의 온유함은 성질을 막아준다.

29. 독사의 독과 같은 것이 바로 성급함과 원한을 품는 마음이다. 그것들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생각을 혼란스럽게 하며, 혈관을 이완시키고, 사람에게 일을 완수할 힘을 잃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온유함과 사랑은 이 모든 것을 멀리한다.

30. 원한을 어떻게 없앨 수 있는가? 마음속에 하느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죽음을 기억하는 마음을 간직함으로써이다. “마지막 날을 기억하고 원한을 품지 말라”(시라 28,6). 죽음을 기억하고 교만해지지 마라. 조금만 더 있으면 너는 무덤으로 끌려갈 것이니, 악한 행실이 너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느냐?

31.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얻을 수 있도록 화평을 이루는 자가 되라.

32. 불의 양식은 장작이고, 성미의 양식은 교만이다.

33. 성미를 다스리고 싶으냐? 겸손을 실천하고 온유하고 겸손한 자들의 길을 걸어가라.

34. 형제들이 서로 심하게 다투고 있다면, 화평을 이루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러나 그들을 다툼으로 부추기는 자는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35.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 안에는 지혜의 영이 깃들어 있으며, 지혜의 길을 걷는 자들을 주님께서 사랑하신다.

36. 온유하고 침묵하는 수도사는 영생을 상속받는다.

37. 온유한 수도사는 정욕을 지켜보는 파수꾼이다.

38.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지었다면 그를 용서하라. 그러면 주님께서도 네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이다.

39. 너를 모욕한 형제에게 먼저 나아가,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마태복음 18:22) 형제의 죄를 용서하라고 명하신 분의 말씀대로, 순수한 마음으로 그 앞에서 회개하라.

40. 형제여, 형제의 회개를 마치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의 회개인 것처럼 받아들이라. 그래야 보내신 분을 모욕하지 않고, 그분께서 네게 진노하시게 하지 않을 것이다.

41. 형제가 슬픔에 잠긴 날에는 그를 공격하지 말고, 그의 마음의 슬픔에 또 다른 슬픔을 더하지 말라.

42. 형제의 악행을 기억하지 말라. 기록된 바와 같이 “악을 기억하는 자의 길은 죽음으로 이른다”(잠언 12:28).

43. 모욕을 참을 수 없느냐? 침묵하라. 그러면 마음이 평온해질 것이다.

44. 자신을 잘 살피라. 성급함, 짜증, 원한 품는 마음이 너를 지배하지 않도록 하라. 그렇지 않으면 불안하고 어수선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너그러움, 온유함, 악의를 품지 않는 마음, 그리고 그리스도인에게 어울리는 모든 것을 갖추어 평온하고 고요한 삶을 살아가라.

45. 누구에게도 마음속에 증오를 품지 말고, 악으로 악을 갚지 말라. 그러나 신성한 성경이 모든 미덕보다 더 높게 평가한 사랑을 네 마음에 심으라.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한일서 4:8) 말씀하시며, 그 사랑을 만물을 창조하신 분 자신에 비유하셨기 때문이다.

46. 넘어졌으나 마음속에 증오와 시기심을 품지 않는 자를 주님께서는 넘어진 채로 내버려 두지 않으실 것이며, 그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실 것이다. 이는 그가 사랑을 저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겉보기에는 굳건히 서 있는 듯하지만 교만으로 거만해하며 마음속에 증오를 품고 있는 자는 안전하지 않습니다. 증오의 어둠이 그의 눈을 가려서,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47. 화를 잘 내지 않도록 힘쓰라. 그래야 무고한 채로 분노라는 정욕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짓누르는 일이 없으리라.

48. 이웃의 성공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완전함의 특징이다. 반면, 다른 사람이 칭찬받을 때 슬퍼하고 불만을 품는 것은 악한 성품과 교활한 마음가짐의 징표이다.

49. 사랑을 잃지 않고 덕을 굳건히 다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고린도전서 13:2).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천국의 문으로 이끄는 바른 길에서 멀리 떨어져 버릴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증오와 시기, 교만, 그리고 온갖 악마적인 더러움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눈물을 흘립시다. 성공한 이들의 미덕에 대해 모욕감을 느끼는 것은 악마적인 일입니다. 악마들 속에는 증오가 스며들어 있으며, 그들에게 가장 바람직한 것은 모든 사람이 완전히 멸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주님을 본받아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의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딤전 2:4); 이는 사랑으로 충만하여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50. 분별력에서 강해지기 위해 오래 참으라. 오래 참음은 훌륭한 은사이다. 그것은 짜증과 분노, 경멸을 몰아내고 영혼을 평화로운 상태로 이끈다.

51. 누군가 너를 비방할 때, 분노에 휩싸이지 말고, 즉시 겸손한 태도로 얼굴에 미소를 띠며, 짜증을 평화로 바꾸어라. 그러나 짜증 난 상태에서 미소를 지으면 상대방에게 더 큰 분노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을 명심하라. 그러므로 먼저 마음을 평온하게 한 다음, 미소를 띠고 말을 건네라. 불은 불로 끄지 못한다. 그리고 너는 사랑과 너그러움으로 화가 난 사람의 분노를 달래라. 만일 형제가 이것으로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그를 치유하기 위해 온갖 다른 수단을 다 동원하여, 결국 그의 화가 이기지 못하게 하고, 우리의 모든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이 하나님께 기쁘게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 (마태복음 5, 23, 24). “자신을 모욕하는 자를 모욕하지 않으신”(베드로전서 2, 23) 구주 주님을 본받고, 세메이의 비방을 듣고 “그가 저주하게 내버려 두라. 주님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고 명하셨으니… 주님께서 나의 겸손함을 헛되이 여기지 않으시기를”(열왕기하 16, 10. 12).

52. 해가 우리의 분노 속에 지지 않게 하시고, 모든 빚진 자들을 용서하며 사랑을 굳건히 하라. 사랑은 많은 죄를 덮어 주기 때문이다. 형제에게 원한을 품고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 생각인 자는, 마치 개를 제물로 바치거나 창녀의 대가를 바치는 자와 다름없이 여겨질 것이다. 형제에게 원한을 품고 있으면서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자는 거짓말쟁이요, 스스로를 속이는 자이다.

53. 네가 형제에게 원한을 품고 있거나, 형제가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다면, 화해하라. 이를 행하지 않는다면, 네가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것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막 11:25; 마태복음 5, 23. 24). 그러나 주님의 이 명령을 이행한다면, 담대히 그분께 기도하며 말하라. “주님, 제가 주님의 계명을 이행하여 제 형제에게 빚을 탕감해 준 것처럼, 제 빚도 탕감해 주십시오!” 그러면 사람을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실 것이다. “네가 용서했다면, 나도 용서하리라. 네가 빚을 탕감했다면, 나도 네 빚을 탕감하리라.”

 

5. 슬픔과의 싸움에 대하여

1. 비방이나 모욕을 인내로 견디는 사람은 마치 사자 우리에 사자를 가둔 사람과 같고, 비방과 모욕에 맞서는 사람은 마치 스스로를 (무기로) 치는 사람과 같다.

2. 낙담하지 맙시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3. 네 마음에 슬픔을 품지 말라. “이 세상의 슬픔은 죽음을 낳지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슬픔은” 네게 영생을 가져다준다(고린도후서 7:10).

4. 무슨 일이 일어나든 용감하게 견뎌낼 준비가 된 수도사는 슬픔을 거의 겪지 않을 것이다.

5. 네 마음에 슬픔을 품지 말고, 주님 안에서 스스로를 위로하라.

6. 비방을 당했다가 나중에 네 양심의 청결함이 드러난다면, 교만해하지 말고, 사람의 비방에서 너를 건져내신 주님을 섬기며 겸손함으로 일하라. 그래야 극심한 타락을 면할 수 있다.

7. 간사한 영혼은 아첨을 받으면 교만해지고, 모욕을 당하면 광란에 빠지나, 선한 영혼은 아첨에도 기뻐하지 않고, 모욕에도 분개하지 않는다.

8. 인내가 사랑으로 녹아들지 않는다면, 그 인내에는 한계가 없다.

9. 슬픔의 날에 주님을 인내하라. 그리하면 진노의 날에 주님께서 너를 덮어 주실 것이다.

10. 슬퍼하는 자를 비웃지 말고, 타락하는 자를 보고 기뻐하지 말라. 그래야 주님께서 너에게 진노하지 않으시고, 슬픔의 날에 네가 보호받지 못하는 처지가 되지 않을 것이다.

11. 오직 너만이 누구보다 더 큰 슬픔을 견디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땅 위에 사는 자가 이 공기를 피할 수 없는 것처럼,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이 슬픔과 질병의 유혹을 피할 수는 없다. 세속적인 것에 몰두하는 자들은 세속적인 일로 인해 슬픔을 겪으며,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자들은 영적인 일로 인해 고통을 겪는다. 그러나 후자들이 복이 있을 것이니, 이는 주님 안에서 그들의 열매가 풍성하기 때문이다.

12. 우리가 구주 하느님의 포로라면, 슬픔의 멍에를 메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기쁨으로 그것을 참아내며, 하늘에서 그분의 재림을 기다릴 것이니, 그때 그분께서 우리도 성인들의 무리에 포함시켜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분의 고난에 동참한 자들은 위로에도 동참할 것이기 때문이다(고린도후서 1,7).

13. 오늘날 해 아래 모든 사람을 둘러싼 두 가지 종류의 슬픔이 있으니, 곧 하나님을 향한 슬픔과 세상의 슬픔이다. 그리고 이 중 어느 하나 없이—하나님을 향한 슬픔이든, 세상의 슬픔이든—이 현세 삶을 살아갈 수는 없다. – 세상의 슬픔은 무겁고 보상을 약속하지 않지만, 하나님을 향한 슬픔은 위로와 더불어 영생의 약속으로 더욱 기쁨을 안겨줍니다. 전자의 슬픔에 직면했을 때, 서둘러 그것을 후자의 슬픔으로 바꾸십시오. 그러면 마음속의 고통스러운 슬픔을 몰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14. 만일 네가 겸손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일을 행할 때, 원수가 네 의로운 삶을 방해하려는 의도로 부주의한 자들을 네게 대적하게 한다면, 두려워하지 말고, 겁먹지 말며, 바른 길에서 벗어나지 말라. “주님을 인내하라”(시 26:14), 하나님의 택하신 자여, 지금 너를 모욕하는 자들이 네 영광스러운 구원을 보고 놀라게 하리라. 기록된 바와 같이 “의인은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평안히 잠들리라”(솔로몬의 지혜서 4:7).

15. 용광로의 불이 금과 은을 시험하듯이, 환난 속에서 주님을 도우미로 삼은 필멸자들의 영혼도 시험을 받습니다.

16. 유혹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더 높은 지위의 영광을 향해 담대히 나아가자. 주님께서는 그분을 사랑하는 모든 이에게 면류관을 씌우시기 때문이다.

17. 수도사가 되고자 하면서도 모욕과 굴욕, 손해를 견디지 못하는 자는 결코 수도사가 될 수 없다.

18. 비방으로 인한 모욕을 너그럽게 참아내라. 악한 칭호를 선한 칭호로, 가장 부적절한 칭호를 주님께 기쁨을 드리는 칭호로 여기라. – 그리고 “주님의 종은 다투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온유해야 한다”(딤후 2:24)는 것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19. 만일 병에 걸리게 된다면, 무익한 도움이나 사람의 보호를 구하지 말고, 차라리 인내하며 하나님께 자비를 구하여 그분께서 모든 일을 다스려 주시기를 기다리자. 육체조차도 훈계를 필요로 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일에서 주님을 기쁘시게 합시다. “주님께서 우리를 돌보시기 때문입니다”(베드로전서 5:7). 사람이 병들었을 때, 그의 영혼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주님을 찾기 시작합니다. 왜 훈계가 좋은가 하면, 훈계를 받는 자가 감사할 때이다. 물론 그런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께서 선한 것을 주셨다면, 악한 것도 참지 못하겠는가? 주님의 이름이 영원토록 찬송받으시기를”(욥기 2:10; 1:21).

20. 시련의 때에 소심해져서는 안 되며, 기도와 선한 행실로 정신을 차려야 한다. 마치 바다를 항해하는 사람들이 폭풍이 몰아칠 때 모든 것을 주의 깊게 살피고, 깨어 있으며,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것처럼 말이다. 주님께서는 진리로 그분을 부르는 자들을 멸시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슬픔이 닥칠 때, “주여, 우리가 슬픔 중에 주를 기억하리이다”(사 26,16)라고 말한 이처럼 주님께 의지할 것입니다. 바다는 항상 잔잔한 것이 아니며, 이 현세에서 유혹 없이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향한 믿음을 키처럼 굳게 붙잡는다면, 그 믿음은 우리를 생명의 항구로 인도할 것이며, 그때 우리는 수고를 내려놓고 생명과 썩지 아니함을 입게 될 것입니다.

21. 슬픔이 우리에게 닥쳤다면, 기쁨이 우리에게 다가올 것을 기대합시다. 바다를 항해하는 사람들을 본보기로 삼아 봅시다. 그들에게 바람과 거센 폭풍이 몰아치면, 그들은 잔잔한 날씨가 오기를 기다리며 파도와 싸웁니다. 그리고 고요함이 찾아오면 폭풍을 기다립니다. 그래서 그들은 갑자기 불어오는 바람에 대비하지 못한 채 바다에 전복되지 않도록 항상 경계합니다. 우리도 그렇게 행동해야 합니다. 슬픔과 곤경이 닥칠 때,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위로와 도움을 기대해야 한다. 그래야 슬픔이 계속되더라도, 더 이상 구원의 희망이 없다는 생각이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넣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기쁨이 있을 때는 슬픔을 기다려야 한다. 그래야 기쁨이 넘쳐날 때 눈물을 잊지 않을 수 있다.

22. 유혹과 슬픔 속에서 굳건히 버티고, 너를 달아오르게 하는 정욕에 맞서라. 그래야 너도 구워지지 않은 벽돌처럼 빗방울에 씻겨 나가지 않을 것이며, 네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굳건함을 실제로는 갖추지 못한 자로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23.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로 결심했다면, 오래 참으라. 옛 선조들을 돌아보면, 모든 성인들이 꾸준하고 오랜 인내로 약속을 이루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들과 함께 천국을 상속받도록 매일 스스로를 독려하자. – 우리의 불신으로 인해 인내가 우리에게서 멀어진다. 주님을 향한 열정을 품고, 신실한 자로서 용기를 내어 큰 슬픔으로 인해 마음의 힘을 잃지 않도록 하라. 유배지, 광산, 그리고 쓰라린 노예 생활 속에서 고문을 당했던 이들을 떠올려 보라. 그리고 주님을 위해 네게 닥치는 슬픔들에 순종하라.

24. 만일 네게 슬픔이 닥친다면, 그것을 참아내는 것 자체가 아직 최악의 악은 아니다. 그러나 그 슬픔 속에 머무르는 것은 무겁고도 위험한 일이다. 네가 없는 사이에 누군가 너에 대해 험담을 했다가, 다른 이가 와서 ‘그 형제가 너를 험담했다’고 알려준다면, 지혜로운 사람답게 그것이 누구의 유혹인지 분별하고, 네 형제를 향해 속상해하지 마라. 그리고 그 사실을 알려준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하라. “비록 그가 나를 모욕했지만, 그는 나의 형제이며, 나 자신도 그 모욕을 받을 만했다. 게다가 그가 스스로 모욕한 것이 아니라, 원수가 우리 사이에 원한을 심기 위해 꾸민 일이다. 주님께서 악한 자의 계략을 무너뜨리시고, 형제를 불쌍히 여기시며,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기를 바란다.” – 만일 다시 얼굴을 마주하고 모욕을 당하더라도, 이를 원망하지 말고 마음이 동요하지 말라. – 만약 잘못된 일로 인해 모욕을 당하게 된다면, 우리는 냉혹해지지 말고 차라리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자.

25. 슬퍼하는 사람을 위로하는 이가 영적인 사람이라면, 그는 해를 끼치러 온 것이 아니라 큰 유익을 주기 위해 그에게 다가가는 것이다. 그러나 육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은 조금도 유익을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슬퍼하는 사람을 위로하러 왔다가 오히려 그를 더욱 괴롭게 할 것이다.

26. 불쾌한 말을 듣고 슬퍼하는가? 그러나 그 말이 정당한 이유로 네 마음을 찔렀다면, 깨달음을 얻기 위해 찔렸음을 기뻐하고, 네 실수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라. 헛되이 찔렸는가? 그렇다면 너그러운 마음으로 견뎌낸다면 그 보상은 더욱 클 것이다. 사도들도 악당들처럼 도시 한복판에서 매를 맞았으나, 분노하지도, 분개하지도 않고 기뻐하며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모욕을 당할 자격을 얻었노라” (사도행전 5:41)고 말했습니다.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모욕을 당할 자격을 얻었으니, 너도 기뻐하라.

27. 게으른 사람 중 누군가는 어쩌면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이토록 많은 수고를 한 뒤에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났다는 것이 참으로 유감스럽다.” – 주님의 종인 네게 이것이 유감스러운 일인가? 이 일을 통해, 그토록 오랜 세월 수고한 후에도 네 정욕이 여전히 이겨지지 않았음을 깨닫고, 이를 깨달은 뒤 이번 일을 계기로 그 정욕을 이겨내기 시작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누구든지 자기가 무엇이 된다고 생각하되 실상은 아무것도 아닌 자라면, 자기 마음을 속이는 자니라”(갈라디아서 6:3). 조타수의 솜씨는 폭풍우가 몰아칠 때 드러난다. “나는 수년 동안 수도자의 삶을 살아왔다”고 자랑하면서도 그 삶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자는, 아직 익히지 못한 기술의 도구를 몸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 사소한 슬픔이 닥쳤을 뿐인데, 너는 곧바로 수도 생활의 규율에서 벗어나 마치 수도자의 삶을 저버린 듯했다. 단 한 순간에 너는 그토록 오랜 세월의 수고를 헛되게 만들었다. – 아니, 형제여, 네 등을 원수들에게 돌리지 말고 굳건히 서서 싸우라. 그러면 원수들은 너에게서 도망칠 것이다. 믿음의 갑옷을 입고, “구원의 투구”를 쓰고,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엡 6,17)을 받아들여라. 그리고 싸워라. 그리하면 네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네 용맹을 기뻐하실 것이다.

28. 작은 유혹도 견디지 못한다면, 어떻게 큰 유혹을 견딜 수 있겠는가? 어린아이도 이기지 못한다면, 어떻게 온전한 남자를 이길 수 있겠는가? 말 한마디도 견디지 못한다면, 어떻게 타격을 견딜 수 있겠는가? 꾸지람과 매질도 참지 못한다면, 어떻게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겠는가? 십자가를 지지 못한다면, 어떻게 “주님을 위하여 우리는 하루 종일 죽임을 당하며, 도살당할 양처럼 여겨지나이다”(시 43:23)라고 말하는 이들과 함께 하늘에서 영광을 상속받겠는가? 형제여, 우리 둘이 과연 우리를 위해 우리 주님께서 겪으신 일을 잊은 것입니까? 그분은 모욕을 당하시고, 비하당하셨으며, “네게 귀신이 들렸다”는 말을 들으셨으나 분노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을 아첨꾼이라 부르며, 귀를 때리고, 구타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분은 담즙이 섞인 식초를 마시고, 갈비뼈에 창을 찔리셨습니다. 이 모든 것을 그분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참아내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아, 불쌍한 우리여! 우리를 위해 그토록 많은 고통을 겪으신 그분을 위해, 그 어떤 모욕도, 심지어 말 한마디조차도 감내하려 하지 않습니다.

29.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어, 성령으로 태어난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고자 하는 자는, 무엇보다도 온유함과 인내를 입어야 하며, 자신에게 닥치는 슬픔과 재앙, 궁핍을 용감하게 견뎌내야 한다. – 그것이 육체의 질병과 고통이든, 사람들로부터의 모욕과 상처이든, 아니면 악한 영들이 영혼을 나태와 무관심, 조급함으로 이끌어 생명의 길로 들어가는 것을 방해하려는 의도로 영혼에 불러일으키는 온갖 보이지 않는 슬픔이든 간에 말이다.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일어나는 것으로, 는 각 영혼이 다양한 슬픔으로 시험받도록 허락하심으로써,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드러나게 하시며,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잃지 않고 모든 것을 용감하게 견디며,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과 인내로 구원을 기다리는 자들이 되게 하시고, – 그리하여 이러한 방식으로 온갖 시련을 견뎌냄으로써, 그들이 천국에 합당한 자들이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30. 용기를 내지 못하고 모든 유혹과 모든 슬픔을 굳건히 견디지 못하며, 오히려 슬퍼하고 낙담하며, 분개하고 불안해하며, 영적 수련에 소홀히 하거나 심지어 절망에 빠지는 영혼은; 이미 구원에 대한 희망을 잃은 것처럼, 의심할 여지 없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기다리는 소망을 마음속에 간직하지 못한 자는, 당연히 삶에 합당한 자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성인을 따르지 않았고,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옛날부터 교부들과 족장들, 예언자들, 사도들, 순교자들이 어떻게 이 유혹과 슬픔의 길을 지나가며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고, 위대한 상을 받을 자격을 얻었는지 살펴보고 관찰하라.

31.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신뢰하고 인내하는 영혼이 절망에 이르게 될 정도로, 즉 감당할 수 없는 유혹과 슬픔에 빠지게 될 정도로 유혹받지 않도록 허락하지 않으십니다(고린도전서 10:13). 또한 마귀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영혼을 유혹하고 슬픔으로 짓누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범위 내에서만 그렇게 한다. 영혼이 믿음으로 소망을 붙잡고, 하나님께로부터 도움과 구원을 기대하며 모든 것을 용감하게 견디기만 한다면, 그 영혼이 버림받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반대로, 영혼이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께 의지하며, 그분으로부터 도움과 구원을 의심 없이 기대할수록, 주님께서는 그 영혼을 붙잡아 두는 모든 슬픔에서 더 빨리 구원해 주십니다. 이는 주님께서 영혼이 얼마나 많은 시련과 유혹을 겪어야 하는지 아시기 때문에, 그만큼만 허락하시기 때문입니다. 도공이 그릇을 빚은 후, 구워 단단해지도록 가마에 넣지 않으면, 그 그릇들은 사람들이 사용할 수 없게 된다. 또한 (그릇을 가마에 넣을 때) 그는 그릇이 쓸모 있게 될 때까지 불 속에 얼마나 오래 두어야 하는지 알고 있으며, 과도하게 구워져 갈라지지 않도록 정해진 시간 이상 가마에 두지 않고, 또한 미완성되어 쓸모없게 되지 않도록 제때에 꺼내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썩어 없어질 것에 대해 이토록 분별력과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하물며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기쁘시게 하고 영생을 얻기를 갈망하는 영혼들이 시련과 유혹을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 얼마나 더 잘 아실까.

32. 삼줄기가 여러 번 털어지지 않으면 가느다란 실을 뽑아낼 수 없듯이, 털어낼수록 더 깨끗해지고 실을 뽑기에 적합해지듯이: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영혼도 수많은 유혹과 시련을 겪고, 용감하게 슬픔을 견뎌낼 때, 더욱 깨끗해지고 영적 사역에 적합해지며, 마침내 천국을 상속받을 자격을 얻게 된다. – 슬픔과 유혹은 영혼이 모든 일어나는 일을 용감하고 기꺼이, 또한 하나님을 의지하며 견디고, 의심 없는 믿음으로 주님의 구원과 그분의 자비를 기다릴 때, 영혼을 온전하고 굳건하게 만듭니다.

33. 시험을 위해 고난에 내맡겨진 영혼들과, 교활한 영들에 의해 다양한 방식으로 괴로움을 당하는 영혼들—비밀스럽게는 내면의 무거운 슬픔이나 악한 생각으로, 또 명백하게는 육체적 고통으로—그들이 용감하게 인내하며 소망을 지키고 주님으로부터의 상을 기다린다면; 그들은 의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이며, 심판의 날에 순교자들과 동등한 담대함을 하나님 앞에서 얻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십자가 위에서 겪는 고통이든, 사악한 영들의 작용으로 인해 겪는 고통이든, 그 고통은 모두 동일하기 때문이다.

34. 원수는 누군가를 악으로 이끌거나 생각으로 타락시킬 수 없을 때, 그 후 그 사람에게 슬픔을 불러일으켜 그의 이성을 어둡게 한 다음, 비로소 그 안에 원하는 대로 씨를 뿌린다. 만약 이 방법으로도 그를 악의 길로 이끌 수 없다면, 그에게 삶의 모든 안락함을 주며, 그를 높이 들어 올려 모든 정욕보다 더 위험하고 악한 큰 미혹에 빠뜨린다. 이는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고, 쾌락의 심연으로 끌어들여, 하나님과 자신의 연약함,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기 때문이다. 사탄은 사람이 무엇에 기울어 있는지 그 성향을 엿보고, 그와 정반대되는 쪽으로 나서서 온갖 불의로 그와 대적한다.

35.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 좋은 것도, 슬픈 것도; 그러나 하나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세 번째는 하나님의 허락에 따라 온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오는 것은 우리가 덕스럽게 살 때이다. 이는 덕스럽게 사는 자들이 인내의 면류관을 쓰게 되는 것이 하나님께 기쁘시기 때문이다; 교화를 위한 것은, 우리가 죄에 빠졌을 때 훈계를 받을 때이며; 방임을 위한 것은, 훈계를 받았음에도 회개하지 않을 때이다. –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인들을 교화하기 위해 징계하시는데, 이는 우리가 세상과 함께 정죄받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사도가 말하듯이: “주님께로부터 징계를 받아, 세상과 함께 정죄받지 않도록 하라” (고린도전서 11:32). – 여기서 말하는 뜻은 “주님께서 행하지 아니하신 재앙은 도시에 없느니라”(아모스 3:6)것이며, 기근, 역병, 질병, 패배, 전쟁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는 이 모든 것이 죄를 정화하는 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 없이 살기를 원치 않거나, 훈계를 받아도 회개하지 않고 죄 가운데 머무르는 자들을 방치하시며 , 완전히 내버려 두십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그들을 분별력 없는 마음에 내버려 두시니”, 즉 그들이 “부적절한 행위”를 저지르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1, 28).

 

6. 낙담과의 싸움

1. 불평이 많은 사람은 어떤 일에도 적합하지 않으며, 의욕도 없다. 그는 게으르고, 일을 회피할 핑계를 항상 준비해 둔다. 그리고 다른 이들도 타락시키며 말하기를, “이건 뭐 하러, 저건 왜? 이건 아무런 유익도 없다”고 한다.

2. 게으른 사람은 찬송을 부르라고 부르면 짜증을 내고, 철야 기도를 위해 깨우면 배와 머리가 아프다며 핑계를 대며 거절한다. 누군가 그에게 권면하면 “네가 스스로 가르쳐라”라고 말하고, 무언가를 가르쳐 주면 “나도 알고 있다”고 소리친다.

3. 일할 힘이 있는 사람이 게으름 피우며 남의 빵을 먹는 것은 옳지 않은데, 사도는 “나는 스스로를 절제해 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고린도후서 11:9).

4. 불평이 많은 수도사는 큰 해를 입는다. 그러나 모든 것을 용감하게 견디는 자는 기쁨을 상속받는다.

5. 낙담의 영이 너를 찾아온다면, 네 집을 떠나지 말고 인내로 그 영에 맞서라.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게 하는 생각이 너를 설득하지 못하게 하라. 만일 그 생각에 굴복한다면, 너에게는 결코 인내가 생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6. 그러나 수도사는 이렇게 말하리라. “여기서는 싸움과 비좁음이 있지만, 저기(어느 곳)에는 평온하고 근심 없는 삶이 있다(그곳으로 옮기려 마음먹으며).” 과연 누가 우리와 싸움을 벌이는지 아느냐? 우리의 원수는 마귀가 아니겠느냐? 그는 “온 천하를 두루 다니며”(욥기 2:2) 돌아다니고 있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로 가든지, 어디서나 이 세상 안에 있을 것이니, 어디서나 마귀의 손아귀에 놓이게 될 것이다. 그러니 제자리에 머물며 “마귀를 대적하면, 그가 네게서 도망갈 것”이고, 반대로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그분께서 네게 가까이 오실 것”(야고보서 4:7, 8)이니, 이것이 더 낫다.

7. 게으른 수도사는 핑계를 대며 말합니다. “오늘은 여기 살지만 내일은 다른 곳으로 갈 텐데, 내가 왜 수고해야 하겠는가?”

8. 게으른 수도사는 온갖 핑계를 늘어놓지만, 졸음이 많은 자는 화를 자초하게 된다.

9. 끊임없이 한 방에서 다른 방으로 옮겨 다니는 자는 헛된 생각을 품게 되나, 한 곳에 머무르는 자는 더욱 침묵을 지키게 된다.

10. 방랑하는 수도사는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무사할 수 없으나, 부름받은 그 자리에 머무는 자는 더 빨리 평안을 얻으리라.

11. 게으름은 당장은 즐겁지만 그 끝은 쓰라리니, 일하며 지치더라도 나중에는 기쁨을 누릴 것이다.

12. 게으르고 자만심(자기 연민)에 빠진 수도사는 일을 보자마자 숨어버리지만, 저녁 식사 때는 가장 앞자리에 앉으려 한다.

13. 죽음과 형벌을 기억하는 것은 낙담이라는 악마를 대적하는 칼이다.

14. 무거운 멍에 중에서도 가장 무거운 것은 낙담이며, 특히 불신이 그 동조자가 될 때 더욱 그러하다. 이는 그 열매가 치명적인 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15. 수도사여, 너는 수도원을 떠나 세속을 떠돌고 있다. 과연 “성읍에서의 불의와 다툼”(시 54:10)을 두려워하지 않는가?

16. 샘물 곁에 앉아 있으면서도 손을 뻗어 물을 떠 마시지 않고 갈증을 해소하지 않는 목마른 자보다 더 게으른 자가 누구겠는가? 또한 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읽기를 소홀히 하는 사람보다 더 무책임한 자가 누구겠는가?

17. 글을 배우는 것이 바람직한 사람을 가르쳐, 그가 하나님의 놀라운 행적을 읽으며 그 놀라운 이름을 찬양하게 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네게 상을 주실 것이다.

18. 낙담한 수도사에게는 게으름이 닥치고, 인내심이 있을 때는 교만이 닥치나,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이 두 가지를 모두 물리친다.

19. 게으른 수도사는 많은 것을 잃게 되겠지만, 절제하는 수도사는 단 한 시간도 소홀히 하지 않을 것이다.

20.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마라. 차라리 인내로 네가 머무는 곳에서 마주치는 불편함에서 유익을 얻으라. 말해 보라, 우리 둘이 온 세상을 다 돌아다닌 후에도, 구원을 원한다면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결국 수도실이지 않겠는가? 만약 공동 생활에 머물 인내심도 없고, 은둔 속에서도 고요함을 찾지 못한다면, 도대체 어디에서 우리가 안식처를 찾을 수 있겠는가? 이는 마치 “태양의 열기도 견딜 수 없고, 그늘도 내게는 참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결국 그 동굴이 우리를 덮쳐 버리지 않을까 두렵다.

21. 마음을 굳게 합시다. 마음의 연약함은 미덕에 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약간의 낙담이 닥친다 해도 소심해지지 말고, 선한 여행자처럼 스스로를 다잡아야 합니다. 여행자는 길에서 기력이 쇠할 때, 앞으로의 여정이라는 목표를 포기하지 않고, “이제 조금만 더 가면 하룻밤 묵을 곳에 도착해 쉴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말로 스스로를 위로한다. –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가 스스로를 다잡는 모습을 보시고, 우리에게 힘을 주시며 어려움을 덜어 주실 것이다.

22. 생계를 위해, 하나님을 의지하며 일합시다. 수고를 근심하지 마십시오. 많은 이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그 무위 자체에 지쳐 있었습니다. 구걸하는 법을 배우지 않도록 일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일에 소홀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계십니다”(빌 4,6).

23. 우리 방에 앉아 있을 때 낙심하지 맙시다. 성스러운 순교자들이 수많은 고문을 겪은 후 쇠사슬에 묶여 감금되었음을 떠올립시다. 그러므로 우리 방의 불편함을 피하려 하지 말고, 일을 그리워하지 맙시다. 많은 성인들이 주님을 위해 광산으로 보내졌음을 기억합시다. 만약 우리가 그 시대에 살았다면, 과연 고문 때문에 우리의 삶을 바꾸었겠는가? 과연 극도로 열악한 환경 때문에 우리의 믿음을 저버렸겠는가?

24. 게으름에 맞서며, 네가 살고 있는 그 자리를 굳게 지키라. 왜냐하면 장소의 변화나 거리가 아니라 오직 마음의 주의력을 통해서만 정욕을 다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내”로, 이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약속을 얻게” 될 것이다(히브리서 10:36). 낙담에 빠진 자는 건강한 자와 병든 자의 관계처럼 인내와 거리가 멀다. 미덕은 낙담에서가 아니라 인내에서 드러난다. 인내는 마음이 관상과 신성한 가르침에 몰두할 때 새롭게 되고 굳건해진다. 이로써 풍요로워진 마음은 건강한 음식을 섭취하여 몸이 힘을 얻는 것처럼 힘을 얻는다. 만약 마음이 이 은총과 이 고귀함에서 물러난다면, 진정으로 가난하고 연약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물질에 대한 집착을 떨쳐 버리고, 그 신성한 행위에 마음을 단련하라. 그러면 몸을 이곳저곳으로 옮기거나, 축복받을 만한 이유 없이 방랑으로 몸을 지치게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안에 있다”(누가복음 17, 21)고 했기 때문이다.

25. 네 안에서 신성한 경전을 읽는 것이 지루하게 느껴지고, 영적인 가르침을 듣기를 꺼려하게 된다면, 그때는 네 영혼이 중병에 걸렸음을 알아라. 이는 악의 시작이며, 이로 인해 병든 자들은 죽음의 열매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26. 매 순간 자신 안에서 아름답고 선한 생각을 가꾸며, 주님의 수행자들이 싸우는 교활한 절망의 정욕을 소망으로 이겨낸 자는 복이 있다.

27. 주님의 일에서 용맹한 전사와 같이 되어, 주님의 길에서 게으른 자들을 일깨우고 소심한 자들을 격려하는 자는 복이 있다.

28. 낙담이라는 정욕에 의해 용기 없는 자처럼 쓰러지지 않은 자는 복이 있나니, 그는 모든 성인들이 면류관을 받은 바로 그 완전한 인내를 얻었기 때문이다.

29. 낙담의 영이 너를 괴롭힐 때, 그 생각에 휩쓸리지 말고, 하나님께서 너를 두신 그 자리에 머물며, 처음에 수도원 문 앞에 왔을 때 네가 하나님께 품었던 사랑이 어떠했는지 스스로 되새겨 보아라. 그와 같은 사랑을 끝까지 간직하며, 주님을 인내로 견뎌내자. 마치 인내로 자신을 때리는 자를 이기는 씨름꾼처럼 말이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마태복음 10,22).

30. 어떤 형제에게 밤샘 기도 전에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오늘은 좀 쉬고, 밤샘 기도에 일어나지 마라.” 그러나 그는 그 생각에 이렇게 대답했다. “누가 알겠는가? 내일은 어쩌면 일어나지 못할지도 모르니, 그러니 오늘 일어나야 한다.” 일할 때도 그에게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오늘은 좀 쉬고, 내일 일하자.” 그러나 그는 다시 대답했다. “아니, 오늘은 일하고, 내일은 주님께서 돌보실 것이다.”

31. 낙담이 너를 괴롭힌다면, 낙심하지 말고 주님께 기도하여 인내를 얻도록 하라. 기도를 마친 뒤에는 앉아서, 마음을 가다듬고 시편을 읊으며 네 영혼을 위로하라. “내 영혼아, 네가 왜 슬퍼하느냐? 왜 나를 괴롭히느냐? 하나님을 의지하라. 그분께 고백하리니, 그분은 내 구원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라”(시 41:6). 또한 이렇게 말하라. “내 영혼아, 왜 나태해졌느냐?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수는 없는 법이 아니냐? 시편 기자가 말하는 것을 들어보라. ‘나는 땅에서 나그네요, 이방인이니, 내 모든 조상들처럼’(시 38:13). 하나님께서 원하실 때, 우리도 너와 함께 떠나리라.” 의인들의 삶은 그들이 세상을 떠난 후에 비로소 시작된다. 그러므로 선지자도 장래의 삶을 갈망하며 이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사슴이 시냇물을 갈망하듯, 내 영혼이 주님을 갈망하오니, 주님, 내가 언제 주님의 면전에 나아가 뵙겠나이까?(시 41:2, 3). 성인들은 이 현세를 감옥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 중 한 사람은 기쁨으로 “주여, 이제 주의 종을 평안히 떠나게 하소서”라고 외쳤고(눅 2:29), 또 다른 사람은 “이 몸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원한다”고 고백했습니다(빌 1:23).

32. 아침이 되면 형제는 일어나 기도를 드린 뒤 수공예에 착수한다. 그때 선을 미워하는 자, 곧 악마가 그에게 낙담의 생각을 심어준다.

33. 형제가 낙담이 닥쳤을 때에도 계속해서 일하고 수고한다면, 은총의 도우심으로 그 낙담을 물리칠 수 있다. 그러나 형제가 낙담이 닥쳤을 때 인내로 그것을 물리치지 못하면, 낙담에 패배하여 그에게 사로잡히게 된다. 그 생각에 휩쓸려 그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하기 시작한다. “오늘은 왠지 기분이 가라앉고 몸이 개운치 않다. 오늘은 좀 쉬고, 내일 이틀 분량을 한꺼번에 해치우자.” 그리하여 형제는 첫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내일이 되면 이 소홀함을 만회하겠다고 꿈꾸게 된다. 이튿날 아침, 선을 미워하는 악마는 그에게 어제보다 훨씬 더 심한 낙담을 불러일으킨다. 그때 이미 생각에 사로잡힌 형제는 일어나 수공예를 제쳐두고, 아예 손도 대지 않거나 대충, 제대로 된 일처럼 하지 않는다. – 혹은 원수가 그를 방에서 끌어내어 빈둥거리게 만든다.

34. 네가 무엇을 하든지, 일을 하는 도중에 원수가 너에게 낙담을 불러일으킨다면, 그 대적에 맞서서 비슷한 어떤 수공예라도 지목하라(이렇게 덧붙이면서: “보라, 그들이 일시적인 것을 위해 어떻게 수고하는지? ‘영원한 것을 위해 왜 수고하지 않으려 하는가?’라고 덧붙이면서). 그리고 네가 어떤 일을 하든지, 네 양심을 증인으로 삼아 네가 행하는 일이 하나님께 합당하게 이루어지도록 하라. 그러면 (낙담에서) 구원받을 것이다.

 

7. 허영과의 싸움에 대하여

1. 수도사여, 내가 하는 말을 명심하라: 우리 둘 사이에 밖에서는 경건함을, 방 안에서는 방종한 태도를 보이지 말라. 그래야 “회칠한 무덤”(마태복음 23:27) 같지 않을 것이다. 어디에서나 영광이 영원히 있으시는 한 분 하나님만이 계시기 때문이다! 아멘.

2. 자신의 강인함을 자랑하는 수도사는 가장 어리석은 자이다. 수도사에게 자신의 힘을 자랑하는 것은 수치이자 책망이다. “주님을 자랑하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있으리라”(고린도전서 1:31).

3. 선한 명성을 얻고 싶으십니까? “온유함으로 네 일을 처리하라”(시라 3,17).

4. 모욕을 당하고도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미덕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느끼면서도 경건함을 위해 참아내는 것이야말로 미덕이다. “게으른 자는 모욕을 당해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잠언 20,4)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5. 명예를 탐하는 마음은 영혼의 병이며, 사악한 정욕이다.

6. 기록된 바와 같이: “네 입이 아니라 진실한 자가 너를 칭송하게 하라. 네 입술이 아니라 타인이 너를 칭송하게 하라”(잠언 27:2). 또한: “은과 금은 시험을 받음이라”: 사람은 “자기를 칭송하는 자들의 입술로 인해 시험을 받는다”(–21).

7. 주님을 위하여 모든 이에게 존경을 베풀고, 스스로 영광을 구하지 말라. 그리하면 주님으로부터 은혜를 얻으리라.

8. 많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애쓰되 주님을 위해서는 아니 하는 사람에게 결코 놀라지 말라.

9. 사랑하는 자여, 은밀히 주님의 계명을 지키라. 그러면 주님께서 네게 공개적으로 갚아 주실 것이다.

10. 땅에서 어떤 사람이 큰 존귀에 이르렀음을 보더라도,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 오히려 세상의 영광을 미워한 사람을 이상하게 여기라.

11. 과도한 영예를 탐하다가 오히려 불명예를 자초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참된 의미에서 사람에게 영예란 모든 일을 하나님 뜻대로 행하는 것이며, 큰 불명예는 계명을 어기는 것이다.

12. 모든 일에 능숙한 척하려 애쓰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허영에 빠지게 될 것이며, 이는 명성을 갈망하는 마음과 분노, 슬픔으로 이어진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소박하고 모든 면에서 평온하게 만들도록 힘쓰라.

13. 웅변으로 자만하며 자랑하지 말고, 차라리 학식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의 경험을 통해 얻은 가르침을 전파하여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제자가 되도록 하라. 겉으로 드러나는 지혜를 자랑하는 것은,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금기되어 있다. “주님에 대하여 자랑할 것이면 자랑하라”(고린도후서 10:17).

14.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마음으로 덕을 행하는 자들의 구원의 터는 바위가 아니라 모래 위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비가 내리고 강물이 흐르며 바람(유혹)이 불기만 하면, 그들은 생각의 유혹에 넘어가게 된다. 그들은 넘어지지 않고 마땅히 살아갈 때면 큰 교만으로 거만해지며, 넘어질 때는 무익한 절망에 빠진다.

15. “자기를 칭찬하는 자는 지혜로운 자라 하지 말라”(고린도후서 10,18). 너는 먼저 네 행실을 시험해 보아라. 과연 네가 자만하듯이 마땅히 살아왔는지 — 정욕을 이겼는지, 가난을 사랑했는지, 험담을 미워했는지, 허영심을 버렸는지, 음욕을 미워했는지, 쾌락 추구를 혐오했는가, 과연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았는가, 정욕을 이겨냈는가, 모욕을 당해도 화내지 않았는가, 칭찬을 들을 때 자만하지 않았는가, 온 힘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했는가? – 만약 우리가 이것을 지키지 못했다면, 도대체 왜 우리 자신에 대해 말하겠는가? – 이에 대하여 주님의 자비 앞에서 울며, 주님께서 우리 마음의 굳어짐을 치유해 주시고, 마땅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강하게 해 주시기를 간구해야 한다.

16.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되며, 모든 일에 있어 순수한 마음으로 행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숨겨진 것과 비밀스러운 것을 아시기 때문이며, 오직 그분께만 보상을 받을 것을 희망하기 때문이다.

17. 허영심 많은 사람은 재물이 부족함에도 왕의 칭호를 스스로 취한다고 해도 왕이 될 수는 없듯이, 은밀히 음식을 먹으면서도 형제들의 식사 자리에서는 위선적으로 금식하고 절제하는 사람인 척하는 수도사는 아직 참된 수도자가 아니다. 그는 거미줄 같은 옷을 짜고 있으며, 성인들의 바른 길을 걷지 않고, 사람에게 아첨하는 자들의 길을 걷고 있다.

 

8. 교만과의 투쟁

1. 교만한 자는 자신보다 뛰어난 이를 용납하지 못하며, 그런 사람을 만나면 시기하거나 경쟁한다. 경쟁과 시기는 서로 얽혀 있으며, 이 두 정욕 중 하나를 가진 자에게는 그 둘이 모두 있다.

2. 이 두 가지가 있는 사람은 타인의 성공에 괴로워하지만, 없는 사람은 타인의 성공에 슬퍼하지 않는다. 후자는 다른 이에게 영예가 돌아갈 때 당황하지 않으며, 다른 이가 높이 평가받을 때 불안해하지 않으니, 모든 이에게 우선권을 주고, 모든 이를 자신보다 우선시하기 때문이다.

3. 겸손함이 없으면 어떤 위업이든, 어떤 절제든, 어떤 순종이든, 어떤 무소유 정신이든, 어떤 학식이든 헛된 것이다.

4. 교만의 더러운 영은 교묘하고 다채로우며, 모든 이를 지배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한다. 지혜로운 자를 지혜로, 강한 자를 힘으로, 부자를 부로, 아름다운 자를 미모로, 예술가를 예술로 유혹한다.

5. 또한 영적 삶을 사는 자들도 예외 없이 같은 방식으로 유혹하며, 세속을 버린 자에게는 그 버림 속에서, 절제하는 자에게는 절제 속에서, 침묵하는 자에게는 침묵 속에서, 소유를 탐하지 않는 자에게는 소유를 탐하지 않음 속에서, 기도하는 자에게는 기도 속에서 자신의 올가미를 놓는다. 모든 이에게서 그는 자신의 가라지를 뿌리려고 애쓴다.

6. 교만을 치료하는 약으로, 교만을 겨냥한 다음의 성경 구절들과 그와 유사한 다른 구절들을 더 자주 읽어보라. “너희가 명령받은 모든 것을 다 행하였을 때, ‘우리는 쓸모없는 종들일 뿐입니다’라고 말하라” (누가복음 17:10). “누구든지 자기를 무엇인 양 여기되 실상은 아무것도 아닌 자라면, 자기 마음을 속이는 것이다” (갈 6:3). “사람들 가운데서 높은 것은 주님 앞에서 가증한 것이다” (눅 16:15). “나에게서 배우라. 나는 온유하고 마음이 겸손하니, 너희는 너희 영혼의 안식을 얻을 것이라,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마 11:29). “주님께서 우리의 겸손함을 기억하시고, 우리를 원수들로부터 구원하셨도다” (시 135:23). “내가 겸손하였더니 주님께서 나를 구원하셨도다” (시 114:5). “주님 앞에서 교만한 자는 모두 부정한 자니라” (잠 16:5).

7. 네 몸이 건강하다면 교만해하지 말고, 경외하라.

8. 스스로를 높이는 자는 자신에게 수치를 자초하는 것이요, 겸손한 마음으로 이웃을 섬기는 자는 영광을 얻을 것이다.

9. 교만의 생각이 너를 꺾기 전에 먼저 그 생각을 꺾어라. 오만함이 너를 무너뜨리기 전에 먼저 그 생각을 무너뜨려라. 정욕이 너를 짓밟기 전에 먼저 그 정욕을 꺾어라.

10. 형제가 변덕스러워도 정죄하지 말라. 그래야 너 자신도 같은 약함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11. 겸손함이 없는 초심자는 대적할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런 사람은 큰 패배를 당할 것이다.

12. 수도사는 자신을 가장 낮은 자 중에서도 가장 낮은 자로 여기라. 그리하면 소망을 얻게 될 것이다.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질 것이요, 높아지는 자는 낮아질 것”이기 때문이다(누가복음 18:14).

13. 수도사에게 해로운 것은 교만, 건방짐, 무감각, 뻔뻔함, 무모함, 성급함, 광기이다.

14. 교만을 사랑하면 마귀의 편이 되고, 겸손을 사랑하면 주 그리스도 편이 될 것이다.

15. 교만한 사람은 많은 슬픔을 겪겠지만, 겸손한 사람은 언제나 주님 안에서 기뻐할 것이다.

16. 교만한 자는 언제나 영광을 추구하지만, 겸손한 자는 영광 속에서도 교만해지지 않고, 비천함 속에서도 근심하지 않으니, 이는 주님으로부터 상을 받을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17. 교만은 지혜로운 눈을 어둡게 하지만, 겸손은 사랑으로 그 눈을 밝게 비춘다. 주님께서 “온유한 자들을 그분의 길로 인도하시나니”(시 24:9)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18.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는 것은 위험하나, 주님을 의지하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9. 옷을 꾸미는 자는 교만해지나니, 교만한 수도사는 깃털이 자라지 않은 독수리와 같다.

20. 겸손하고 지혜로운 수도사는 가볍게 빠르게 걷는 이요, (마치) 명사수 같다.

21. 철이 모든 것을 깎아내고 정복하듯이, 하느님을 향한 겸손도 원수의 계략을 무너뜨린다.

22. 사냥꾼에게 창이요, 전사에게 무기가 있는 것처럼, 수도자에게는 겸손이 그러하다.

23. 교만은 어떤 형태로든 사람에게 위험하다. 교만을 좋아하지 말라. 그 안에는 유익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연약함은 보살핌을 통해 치유되지만, 교만의 병은 치료하기 어려운 악이다. 왜냐하면 교만은 치유의 약을 거부하고 스스로를 위한 치명적인 독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종들 가운데는 교만이 없기를 바란다.

24. 위대해지고 싶으냐? –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작은 자가 되라(마가복음 9:35).

25. 형제가 수도원을 떠난다면, 마음속으로 그를 우쭐대지 말고, 네 눈앞에서 그를 불명예스럽게 여기지 말라. “오늘이 무엇을 낳을지 알 수 없으니”(잠언 3:28).

26. “서 있는 자는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린도전서 10:12) 말하는 이 말을 들으라. 또 “자기가 능숙하다고 자랑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칭찬하시는 자를 자랑하라”(고린도후서 10:18)는 말도 들으라. 많은 이들이 스스로를 이기고 지배한다고 생각했으나, 그들은 가장 깊은 어둠 속에 빠졌고, 절망에 빠진 자들은 은혜를 받았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에게는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시기” 때문이라 (야고보서 4:6).

27. 불순종하고 교만하며 “자신을 지혜롭다”고 여기는 사람을 본다면, 그 사람의 뿌리는 이미 반쯤 죽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두려움으로 전해지는 양분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침묵하고 겸손한 사람을 본다면, 그 사람의 뿌리가 견고함을 알라.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두려움이라는 양분을 흡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28. 겸손한 지혜에는 큰 번영과 큰 영광이 있으며, 그 안에는 넘어짐이 없다. 겸손한 지혜의 표징은 마치 네가 직접 도움을 받는 것처럼 양손으로 형제의 필요를 채워 주는 것이다.

29. 교만하고 불순종하는 사람은 괴로운 날들을 겪게 되겠으나, 겸손하고 인내하는 사람은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리라.

30. 겸손하고 인내심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큰 일이며, 그의 선함은 헤아릴 수 없다.

31. 형제를 향해 거만하게 굴면, 악령들이 그를 조롱한다.

32. 비는 잡초를 번성하게 하고, 세속적인 사람들과의 교제는 교만의 정욕을 일으킨다. 그러나 주님을 경외하는 자는 교만해지지 않는다.

33. 만일 네게 은사가 주어졌다 해도 교만해하지 말라; 네게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 외에는” 단 하나의 완전함도 없기 때문이다(고린도전서 4:7); 만일 네가 그분의 계명과 뜻을 따라 행하지 않는다면, 그분은 네게서 그분의 소유를 빼앗아 더 나은 자에게 주실 것이며, 그때 너는 마치 방금 잉크에 적신 붓을 빼앗긴 사람과 같을 것이다.

34. 사람이 마음의 교만으로 아무리 자만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자신이 나온 땅, 그리고 돌아갈 땅을 짓밟고 있을 뿐이며, 주님께서는 겸손한 자들을 높이신다.

35. 교만은 사람을 깎아내리지만, 겸손은 승리의 상을 얻는다.

36. 만일 형제들 앞에서 금처럼 순수함을 드러낸다 해도, 그때에도 자신을 쓸모없는 그릇으로 여기라. 그리하면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미움받는 교만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37. 형제가 죄를 짓는 것을 보고 다음 날 아침 그와 마주친다면, 마음속으로 그를 죄인이라 여기며 멸시하지 말라. 네가 그에게서 떠난 후에, 그가 넘어진 뒤 어떤 선한 일을 행하여 탄식과 쓰라린 눈물로 주님을 달래드렸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38.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것을 삼가야 한다. 우리 각자는 시편의 말씀처럼 스스로를 낮추어야 한다. “나의 죄악이 내 머리를 덮었으니, 무거운 짐처럼 나를 짓누르도다”(시 37:5).

39. 만물의 주님이시여, 순종과 아버지의 훈계를 미워하는 마음을 제게 주지 마소서. 교만한 생각을 저에게서 멀리 하소서. 주님, 주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금하셨나이다 (시 118:21).

40. 눈만 아래로 숙여져 있을 뿐만 아니라, 마음도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지 않게 하소서.

41. 두 명의 초심자가 장로와 함께 산다면, 그들 중 누가 주님 앞에서 더 큰 자인가? 하나님의 경외심으로 형제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자이다.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질 것이라”고 말씀하신 분은 거짓말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누가복음 18:14).

42. 돌을 움직이고자 하는 자는 위에서가 아니라 아래에서 지렛대를 받쳐야 하며, 그러면 돌을 쉽게 돌릴 수 있다. 이것이 겸손의 본보기이다!

43. 교만은 하나님과 사람 모두에게 미움을 받으나, 겸손을 사랑하는 자를 주님께서는 높이신다.

44. 존엄도, 명예도, 위대함도 천국으로 인도하지 못하지만, 겸손과 순종, 사랑, 인내, 그리고 너그러움이야말로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다. 마귀가 교만 때문에 하늘에서 쫓겨났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까? 마귀가 하나님께 대항한 탓에 얼마나 큰 영광을 잃었는지 들어본 적이 없습니까?

45. 겸손한 사람은 허영을 부리지도, 교만해하지도 않으며,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분을 섬긴다. 겸손한 사람은 진리를 거스르며 자신의 뜻을 고집하지 않고, 진리에 순종한다. 겸손한 사람은 이웃의 성공을 시기하지 않으며, 그의 파멸(실패)을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고 우는 자와 함께 울어준다. 겸손한 사람은 궁핍과 가난 속에서도 비굴해지지 않으며, 번영과 영광 속에서도 거만해지지 않고, 항상 같은 덕을 지키며 산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보다 높은 자뿐만 아니라 낮은 자도 공경한다. 겸손한 사람은 짜증을 내지 않으며, 누구도 모욕하지 않고, 누구와도 다투지 않는다. 겸손한 사람은 한밤중에 일을 하라고 부름을 받더라도 고집을 부리거나 게으름을 피우지 않으니, 이는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겸손한 사람은 원망도, 교활함도 알지 못하고, 순수함으로 주님을 섬기며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낸다. 겸손한 사람은 꾸지람을 들어도 불평하지 않으며, 모욕을 당해도 인내심을 잃지 않습니다. 그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분의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만심을 미워하므로, 으뜸이 되려 하지 않고, 이 세상에서 자신을 마치 배 위의 일시적인 선원처럼 여깁니다.

46. 만일 네가 모든 신성한 성경을 연구했다면, 성경에 반하는 생각으로 인해 교만해지지 않도록 주의하라. 왜냐하면 성령으로 감동받은 모든 성경은 우리에게 겸손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배운 것과 반대되는 것을 생각하거나 행하는 자는, 바로 그 자체로 자신이 죄인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47. 만일 교만이나 독단, 혹은 부에 대한 욕망이 너를 괴롭힌다면, 그것에 휩쓸리지 말고, 오히려 사악하고 아첨하는 영의 군대에 대항하여 용감하게 맞서라. 마음속으로 오래된 건물들, 낡아빠진 조각상들, 녹이 슨 기둥들을 떠올려 보라. 그리고 스스로 깊이 생각하며, 이 모든 것의 주인과 건축자가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라. 또한 주님을 기쁘시게 하여 네가 천국을 얻도록 힘쓰라: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사람의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라”(베드로전서 1:24). 왕의 위엄과 영광보다 더 높고 더 영광스러운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왕들도 지나가고 그들의 영광도 사라진다. 반면에 천국을 얻은 자들은 이와 같은 것을 전혀 겪지 않고, 천국에서 천사들과 함께 평화와 기쁨 속에 머물며, 병도 슬픔도 한숨도 없이, 기쁨과 즐거움 속에서 하늘의 왕이시며 온 땅의 주님이신 분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며, 높이며 찬미할 것이다.

48. 만일 누구보다 먼저 예배에 와서 끝까지 머무른다고 해도, 그 생각으로 교만해지지 말라. 교만은 뱀이 둥지를 틀고 다가오는 자를 죽이는 굴과 같기 때문이다.

49. 교만해지지 말고 차라리 스스로를 낮추는 편이 낫다. 하물며 사소한 어려움 하나만으로도 우리를 땅에 쓰러뜨리는데, 우리에게 교만할 만한 힘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서 등을 돌리지 않도록 겸손을 사랑하자.

50. 어떤 장소에서든, 어떤 일에서든 너와 함께 겸손이 있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몸이 밖이 따뜻하든 추우든 옷이 필요하듯이, 영혼도 항상 겸손으로 자신을 감싸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옷도 신발도 없이 다니는 것이, 겸손의 옷을 벗은 채로 있는 것보다 낫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겸손을 사랑하는 자들을 덮어 주시기 때문이다.

51. 겸손한 마음가짐을 가져라. 그래야 높은 곳에 올라갔다가 끔찍한 추락으로 부서지지 않을 것이다.

52. 겸손의 시작은 순종이다. 겸손이 네게 기초가 되고 대답의 옷이 되게 하라. 네 말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단순하고 친절하게 하라. 교만은 복종하지 않고, 불순종하며, 반항적이며, 자기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인다. 그러나 겸손은 순종적이고, 온유하며, 겸손하여, 작은 자와 큰 자 모두에게 존경을 표한다.

53. 경건한 삶을 선택했다면, 교활한 자가 경건의 탈을 쓰고 네게 낯선 생각, 즉 허영과 교만을 심어주어 형제들과 함께 수고하기를 원치 않게 하지 않도록 경계하라. 다른 형제들처럼 일하며 네 경건함을 지키라.

54. 만일 자만심이라는 생각이 너를 괴롭힌다면, 너와 싸우는 그 생각에게 말하라. “나에게서 물러가라, 사악한 생각이여. 내가 무엇을 했기에, 어떤 덕을 이뤘기에, 네가 내게 이런 생각을 심어주는가? 성도들은 “돌로 맞고, 고문을 당하고, 시험을 받고, 칼에 죽임을 당했다”(히브리서 11:37). 만물의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수난을 “견디셨으니”, 부끄러움을 아시는 분이시라(– 12, 2). 그러나 나는 평생 죄 가운데 지내왔는데, 심판의 날에 어떤 대답을 할 수 있겠는가?” – 이렇게 함으로써 교만을 네게서 쫓아내라.

55. 한 형제가 말했습니다. “저는 주님께 겸손한 마음을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래야 제 형제가 저에게 무언가를 하라고 명령할 때, 마음속으로 ‘이분은 네 주인이니, 그분의 말을 들어라’라고 말할 수 있고, 다른 형제가 명령하면 다시 ‘이분은 네 주인의 형제다’라고 말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리고 아이가 명령하면, 그때는 “네 주인의 아들의 말을 들어라”라고 말하곤 했다. – 그리하여 그는 낯선 생각들에 맞서며, 은총의 도우심으로 평온하게 자신의 일을 수행했다.

56. 두려움 없음은 교만을 낳고, 교만은 불순종의 어머니이다. 겸손과 온유는 이를 지닌 자를 하나님의 두려움에 굳게 붙들어 주니, 마치 하나님의 성전에 굳게 세워진 기둥과 같다.

57. 교만의 악마를 경계하여, 교만과 불복종의 영에 빠지지 말고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도록 하라. 주님을 위해 복종하며 자신의 손으로 선한 일을 하는 데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이 작은 시련과 주님을 위해 네가 겪는 고난은 네게 영생을 안겨 줄 것이다. 누군가 드라크마 한 닢으로 수천 탈란트의 금을 얻는다고 상상해 보라. 이는 장차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닥칠 고통에 비하면 수도 생활의 모든 슬픔도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너는 작은 것을 내어주지만, 너에게는 큰 것이 주어진다. – 그러므로 교만을 버려라. 그러면 주님께서 네 몫이 되실 것이다.

58. 참된 겸손을 지닌 사람의 특징과 표징은 다음과 같다. 자신을 모든 죄인들 중에서도 가장 큰 죄인으로 여기며, 하나님 앞에서 선한 일을 아무것도 행하지 못했다고 여기고, 언제나 스스로를 책망하며, 어디서나, 어떤 일을 할 때나 자신을 책망하며, 누구도 비방하지 않고, 이 땅에 자신보다 더 죄 많고 게으른 사람을 찾지 않으며, 오히려 모든 사람을 항상 칭찬하고 찬양하며, 결코 누구도 정죄하거나 깎아내리거나 중상모략하지 않는 것, 언제나 침묵을 지키며, 명령이나 극심한 필요 없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 그러나 질문을 받거나, 말할 의도가 있거나, 극도의 필요에 의해 말하고 대답해야 할 때는, 마치 강요당하고 부끄러워하는 듯이 조용하고 차분하며 드물게 말해야 한다; 어떤 일에서도 자신을 과시하지 말고, 누구와도 신앙이나 그 밖의 어떤 것에 대해서도 논쟁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누군가 좋은 말을 하면 “네”라고 말하고, 나쁜 말을 하면 “네 마음대로 하라”고 대답해야 한다; 복종하는 자세를 취하고, 자신의 의지를 해로운 것으로 여겨 혐오해야 한다; 시선은 항상 땅을 향해 숙여야 한다; 눈앞에 자신의 죽음을 두고, 결코 헛소리를 하거나 빈말을 하지 말며, 거짓말을 하지 말고, 상급자에게 반박하지 말아야 한다; 기쁨으로 모욕과 굴욕, 상실을 견디며, 안식을 미워하고 수고를 사랑하며, 누구도 슬프게 하지 말고, 누구의 양심도 상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참된 겸손의 표징이며, 이를 지닌 자는 복이 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집이자 성전이 되기 시작하고, 하나님이 그 안에 거하시며, 그는 왕국의 상속자가 되기 때문이다.

59. 죄인이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는 데에는 겸손함이 없다. 그러나 겸손함은 자기 안에 크고 많은 것이 있음을 알면서도,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위대하다고 상상하지 않는 데에 있다. 바울과 같은 사람이야말로 겸손한 자이다. 그는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내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고린도전서 4:4), 혹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죄인들을 구원하시려 함이요, 그 중에서도 내가 첫 번째이다”(디모데전서 1:15)라고 말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공로에 있어서는 높으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자신을 낮추는 것, 이것이 바로 겸손함이다!

 

6. 수도 생활에 관한 일반적인 교훈

1. 혀를 절제하는 것이 있다. 즉, 말을 많이 하지 않고 헛된 말을 하지 않으며, 비방하지 않고, 욕하지 않고, 헛소리를 하지 않고, 서로 험담하지 않고, 남의 사정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비밀을 누설하지 않으며, 우리와 상관없는 일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다.

2. 귀를 절제하는 것이 있으니, 귀를 다스리고 헛소문에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3. 눈의 절제가 있으니, 시선을 다스리고 죄가 되면서도 유혹적인 것, 그리고 부적절한 것에 시선을 두지 않는 것이다.

4. 성급함을 절제하는 것이 있으니, 분노를 다스리고 갑자기 화를 내지 않는 것이다.

5. 명예를 절제하는 것이 있으니, 명성과 영예를 원하거나 추구하지 말고, 자만하지 말고, 거만해지지 말고, 자신에 대해 과도한 환상을 품지 말아야 한다.

6. 생각에 대한 절제가 있으니, 하나님의 두려움으로 생각을 제압하고, 유혹적이고 격앙시키는 생각에 기울지 않으며, 그 생각에 탐닉하지 않는 것이다.

7. 음식에 대한 절제가 있으니, 다양하고 달콤하며 값비싼 음식을 원하거나 추구하지 말고, 정해진 시간 외에 먹지 말며, 탐식에 빠지지 말고, 음식의 맛에 탐욕을 부추기지 말며, 이 음식 저 음식을 번갈아 갈망하지 말아야 한다.

8. 음료에 있어서 절제란, 포도주뿐만 아니라 물도 과도하게 마시지 않고, 정교하게 조제된 혼합 음료를 마시는 쾌락에 휩쓸리지 않으며, 다양한 음료를 찾지 않고, 필요 없이 포도주를 마시지 않으며, 연회에 참석하지 않는 것이다.

9. 타락한 쾌락 추구를 절제해야 한다. 즉, 우연히 일어난 정욕의 충동에 휩쓸리지 말고, 부끄러운 생각에 빠지지 말며, 육체의 욕망을 따르지 말고, 하나님의 경외심으로 정욕을 다스려야 한다.

10. 훌륭한 성부들은 우리에게 회개의 수행과 수고를 위한 규칙을 남겨 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만 절제하고 내일은 음식을 준비하지 말라. 오늘만 물을 마시고 내일은 포도주를 구하지 말라. 오늘만 털옷을 입고 내일은 값비싼 옷을 입지 말라. 오늘만 온유하고 겸손하게 지내지 말고, 내일은 거만하고 교만하게 지내라; 오늘만 온순하고 순종하지 말고, 내일은 무질서하고 완고하게 지내라; 오늘만 울고 통곡에 빠지지 말고, 내일은 웃음과 무관심에 빠져라; 오늘만 맨땅에서 자지 말고, 내일은 부드러운 침상에서 쉬어라. 그러나 사랑하는 이여, 오직 한 가지 규칙만을 지켜라. 그 규칙을 통해 네가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고, 너 자신과 이웃에게 유익을 줄 수 있을 것이다.

11. 40년이든 50년이든 성부들은 자신들의 규칙, 즉 음식과 말, 맨땅에서 잠자는 것, 겸손, 온유, 믿음과 사랑, 탐욕 없음, 눈물과 통회로 드리는 쉬지 않는 기도 등 – 이러한 규칙을 지키며 스스로를 정화했습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그들 안에 거하시고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12. 만일 누구든지 온갖 악한 행위와, 부정한 생각과, 타락한 욕망과, 분노와, 성급함과, 시기심과, 교만과, 허영과, 증오와, 비방과, 정죄와, 헛된 말, – 한마디로, –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모든 것에서, 그리고 그것들을 멀리하고 스스로를 그로부터 멀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거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가 그분의 약속을 누릴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정화하자.

13. 네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으냐? – 잘 들어라! – 칭찬을 좋아하는 것은 우리가 허영심이 많다는 표징이며, 음식의 즐거움은 우리가 배를 채우는 데만 열중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게으름은 우리가 나태함을 드러내고, 탐욕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음을 나타내며, 시기심은 우리 안에 사랑이 없음을 알리고, 타인을 정죄할 때 느끼는 즐거움은 우리가 증오로 가득 차 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영혼은 육체의 행동을 통해 선한지 악한지 드러나게 된다.

14. 그러나 마음이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에 집착하는지를 가장 억제할 수 없이 드러내는 것은 혀이다. 입술을 통해 우리 마음의 비밀이 드러난다. 입이 열려 있고 그것을 지키는 이가 없을 때, 우리의 말은 가리지 않고 쏟아져 나오며, 마음속에 있는 모든 것을 함께 밖으로 내뱉는다. 그러므로 마음속 생각을 알고 싶다면 입에 주의를 기울이라. 입을 통해 마음이 무엇을 염려하고 추구하는지 — 세속적인 것인지 천상의 것인지, 영적인 것인지 육적인 것인지, 쾌락인지 절제인지, 탐욕인지 검소함인지, 겸손인지 교만인지, 사랑인지 증오인지 — 알 수 있다. 입은 마음의 보물창고에서 찾아오는 이들에게 양식을 내어주며, 혀가 무엇에 몰두하고 있는지는 마음이 무엇을 사랑하는지—그리스도를 사랑하는지, 아니면 현세의 어떤 것을 사랑하는지—를 보여준다.

15. 우리 영혼은 본성상 선하지만, 자유 의지에 따라 악한 것으로 변한다. 정욕은 본성에 어긋난 것이며, 악한 의지에 의해 심어지고 자라난다. 그리고 습관은 본성이 강한 것처럼 그것들을 강하게 만든다. 본성은 노예 상태이며, 습관은 의지이다. 자유로운 의지는 마치 농부처럼, 우리 본성에 자신이 원하는 대로 나쁜 습관과 선한 습관을 심어주는 존재와 같다. 자연은 우리가 경작하는 땅이며, 의지는 농부이고, 신성한 경전은 우리 농부에게 어떤 나쁜 습관을 뿌리 뽑아야 하고, 어떤 선한 미덕을 심어야 하는지 가르쳐 주는 조언자이자 스승이다.

16. 우리의 농부가 아무리 냉철하고 열심이라 할지라도, 신성한 경전의 가르침 없이는 그는 강하지도, 지혜롭지도 못하다. 신성한 경전의 가르침은 그에게 지혜와 힘을 주며, 동시에 그 자체의 가지들로부터 선한 미덕들을 가져와 자연의 나무에 접목하게 한다. 즉, 믿음, 소망, 사랑, 지식, 근면 등과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의 농부가 자신의 교만함으로 인해 언젠가 자신의 스승이자 조언자인, 즉 신성한 경전을 버리기로 마음먹는다면, 그는 잘못된 행동을 하기 시작하며, 본성에 어울리지 않는 것들, 즉 불신, 무지, 증오, 시기, 교만, 허영, 명예심, 탐식, 다툼, 반항 및 그 밖의 수많은 유사한 것들을 본성에 접목시키게 된다; 왜냐하면, 율법 제정자를 버리면, 그 자신도 그분에게 버림받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개하여 스스로를 책망하고, 율법 제정자에게 엎드려 “주님을 버린 것이 제 죄입니다”라고 말한다면; 그때 율법자는 그분 특유의 자비심으로 즉시 그를 받아들이시고, 그에게 분별력과 선한 힘을 주셔서 다시금 자신의 본성이라는 밭을 가꾸게 하시며, 그 안에서 나쁜 습관을 뿌리 뽑고 그 대신 선한 미덕을 심게 하신다. 그뿐만 아니라, 그 대가로 그에게 면류관을 주시고, 칭찬을 아낌없이 쏟아 부어 주신다.

17. 그런데도 네가 여전히 세상의 쾌락을 추구한다면, 왜 세상을 등진 것이냐? 벌거벗은 몸 대신 옷을 갈망하고, 목마름 대신 술을 마시려 하니 말이다. – 너는 전투에 부름받았으면서도 무기 없이 원수와 싸우러 나가려 하고, 깨어 기도해야 할 때 잠에 빠져들며, 울고 탄식해야 할 때 웃음에 빠져들고, 형제를 사랑해야 할 때 오히려 미움을 품고 있다. 너는 복종하도록 부름받았으나, 거역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의 상속자로 부르심을 받았으면서도, 세상의 것을 생각하며, 겸손과 온유 대신 오만과 교만을 드러내고 있다.

18. 형제들아, 우리는 영적인 상인들이며, 세상의 상인들과 비슷하다. 상인은 매일 이익과 손실을 계산하며, 만약 손실을 입었다면 그 손실을 어떻게 보상할지 애를 쓴다. 그러니 너도, 사랑하는 자여, 매일 아침과 저녁마다 네 거래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꼼꼼히 되새겨 보아라. – 그리고 “저녁”이 되면, 네 마음의 성소에 들어가 되짚어 보며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내가 무언가로 하나님을 화나게 하지 않았는가? 헛된 말을 하지 않았는가? 부주의하지 않았는가? 내 형제를 슬프게 하지 않았는가? 누군가를 정죄하지 않았는가? 입으로 시편을 부를 때, 내 마음이 세속적인 것을 꿈꾸지 않았는가? 내 안에 육신의 욕망이 다시 솟아나지 않았는가? 그리고 나는 그것을 즐기며 몰두하지는 않았는가? 세상의 근심에 내 자신을 내어주지는 않았는가?” 만약 앞서 말한 것들 중 어떤 부분에서든 손해를 입었다면, 잃어버린 것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라. 그런 다음 한숨을 쉬고 울며,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하라. 그리고 “아침”이 되면 다시 스스로를 돌아보며 물어보라. “이 밤은 어떻게 지났는가? 이 밤에 나는 내 대가로부터 어떤 이득을 얻었는가? 내 정신은 육체와 함께 깨어 있었는가? 내 눈에서 눈물이 흘렀는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동안 잠에 짓눌리지는 않았는가? 교활한 생각들이 내 마음에 떠오르지 않았으며, 나는 그 생각들에 기꺼이 빠져들지는 않았는가?” 만약 이 중 어떤 것에라도 굴복했다면, 치유되도록 노력하고, 다시는 같은 일을 겪지 않도록 네 마음에 파수꾼을 세워라. – 그렇게 신중하게 행동한다면, 네 소유를 온전히 보존할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네 주님께 기쁨을 드리고, 네 자신에게도 유익을 얻을 것이다.

19. 게으름에 빠지지 않도록 스스로를 주의 깊게 살피라. 게으름이 우세해지는 것은 파멸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꿀벌을 본받고, 땅에 흩어진 꽃들로부터 어떻게 자신의 결실을 모으는지 그 경이로운 비밀을 유심히 살펴보라. 이 하찮은 피조물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라. 세상의 모든 현자와 우주 속의 모든 철학자를 한데 모은다 해도, 그들은 꿀벌의 지혜를 제대로 설명해 낼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이성적인 사람은 꿀벌의 수고를 보며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토록 작은 생물에게서 이토록 많은 지혜가 나온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이와 같이 너도, 나의 사랑하는 이여, 꿀벌처럼 되어 신성한 경전에서 풍요롭고 도둑맞지 않는 보물을 모아 하늘로 보내라.

20. 수도사는 전쟁터로 나가는 전사와 같아서, 온몸을 온전한 무기로 사방에서 보호하며, 승리가 올 때까지 정신을 차리고, 적의 갑작스러운 공격을 경계하며, 만일 예방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포로가 되지 않도록 조심한다. 마찬가지로 수도사도, 스스로를 나태하게 내버려 두어 게을러지면 적에게 쉽게 잡히게 된다; 이는 원수가 그에게 불순한 생각을 심어주면, 그가 이를 기꺼이 받아들이기 때문인데, 여기서 말하는 생각이란 교만과 허영, 또한 시기심과 비난, 탐식, 끝없는 잠을 의미하며, 나아가 그를 절망에 빠뜨리기까지 한다. 반면 수도사가 항상 정신을 차리고 있다면, 하나님의 은총을 자신의 도움으로 끌어들이게 되며, 하나님께 어떻게 기쁨을 드릴지 하나님께 배우게 되고, 하나님 앞에서 칭찬받을 만한 사람이 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가 된다. 거울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이가 동시에 관찰자이자 관찰되는 대상이 되는 것처럼, 은총도 사람 안에서 안식을 찾고 그 안에 거하게 되면, 그를 영화롭게 할 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그를 통해 영화롭게 된다.

21. 은혜의 도움 없이는 마음이 주님께 마땅히 고백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힘을 갖거나 감동을 가득 채울 수 없다. 반대로, 사람은 온전함이 부족하고 빈약해지며, “폐허 위의 밤까마귀처럼” (시 101:7). 그러므로 사람은 은혜를 불러와, 그 은혜가 임하여 자신을 비추게 할 의무가 있으며, 또한 자신을 정화하여 은혜가 자신 안에 거하며 자신을 도우도록 간구할 의무가 있다; 은총이 함께할 때 그는 모든 미덕에서 성공할 것이며, 그 은총으로 깨달음을 얻어 장차 올 세상의 선들이 지닌 다양성과 아름다움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은총은 그에게 성벽이자 요새가 되어, 이 세상에서 그를 보호하여 장차 올 세상의 생명을 얻게 한다.

22.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모든 것(그것은 곧 사랑이다)으로 장식된 완전한 덕을 얻기 위해 힘쓰라. 이를 ‘단일한 덕’이라 부르며, 이 덕은 모든 덕의 아름다움과 다양성을 그 안에 담고 있다. 왕관의 디아데마가 보석과 엄선된 진주 없이는 엮어질 수 없는 것처럼, 이 유일한 미덕 또한 다양한 미덕들의 아름다움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왕관의 디아데마와 완전히 닮아 있다. 왕관의 경우, 그 안에 하나의 보석이나 진주가 부족하면 왕의 머리 위에서 빛날 수 없는 것처럼, 이 유일한 미덕도 다른 미덕들의 아름다움 중 하나라도 부족하다면 완전한 미덕이라고 불릴 수 없다.

23. 또한 그것은 온갖 정교한 양념으로 조리되지만 소금 없이는 완성될 수 없는 귀한 음식과도 닮았다. 이 귀한 음식들이 소금이 없으면 먹을 수 없고 맛도 없듯이, 다양한 미덕의 모든 아름다움으로 장식된 이 미덕도 그리스도와 이웃에 대한 사랑이 결여되어 있다면 조금도 매력적이지 않다.

24. 또한 그것은 완벽하고 아름다운 알파벳 체계와도 닮았는데, 그 안의 글자들은 정교하게 다듬어지고 장식되어 있지만, 단 한 글자라도 빼면 전체가 아무 쓸모가 없어진다. 마찬가지로 이 미덕도 다른 미덕 중 하나라도 결여된다면, 전체가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다.

25. 또한 그것은 크고 높이 날아오르는 독수리와도 같다. 그 독수리는 그물에 걸린 먹이를 발견하고는 온 힘을 다해 그쪽으로 돌진하지만, 먹이를 빼앗으려다 발톱 끝이 그물에 걸리고, 이 사소한 일로 인해 그 모든 힘이 묶여 버린다. 겉보기에는 온몸이 자유롭고 그물 밖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그 모든 힘은 그물에 얽매이게 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이 미덕도, 만약 세속적인 무엇에 얽매이면, 죽어가고, 쇠약해지며, 파멸하여 더 이상 높은 곳으로 날아오를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세속적인 것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26. 마치 어떤 이가 귀중하고 뛰어난 진주를 찾기 위해 깊은 물속으로 잠수했다가, 그것을 발견하고는 수면으로 떠오른 뒤, 큰 부를 안고 발걸음을 재촉하여 육지로 향하듯이. 그대도 마찬가지로 모든 세속적인 더러움에서 벗어나, 이 미덕을 입으라. 그리고 그 미덕으로 단장하여, 밤낮으로 정신을 차려, 그 미덕이 그대에게서 벗겨지지 않도록 하라. 이 미덕을 지닌 영혼은 어떤 재앙도, 굶주림도, 벌거벗음도, 낙담도, 질병도, 가난도, 박해도, 그 밖의 어떤 악마의 유혹도 흔들 수 없다. 만약 그 영혼이 깨어 있다면, 이를 통해 더욱 성장하고 영광을 얻으며, 끊임없이 하나님 안에서 번영하고 밝아진다. 죽음 그 자체조차도 그 영혼에게 해를 끼칠 수 없다. 오히려 육신을 떠난 후, 천사들이 기뻐하는 그 영혼을 하늘로 맞아들이고, 빛의 아버지께로 인도한다.

27.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그녀를 기뻐하십니다. 성부께서는 그녀가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 외에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를 기뻐하십니다. 그분의 독생자께서는 그녀가 그분을 갈망하고 그분 외에는 아무도 얻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를 기뻐하십니다. 성령께서는 그녀가 그분을 위해 거룩한 성전이 되어 그분이 그녀 안에 거하시게 되었기에 그녀를 기뻐하십니다. 하늘과 하늘의 군대들도 그녀를 기뻐하며, 그녀가 의로움의 온전한 아름다움 속에서 천사의 미덕으로 단장된 것을 보고, 한마음으로 엎드려 아버지, 아들과 성령을 찬양합니다. 천국도 그녀를 기뻐하노니, 그녀가 천국을 유산으로 받았기 때문이다. 오직 선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께 영광과 위엄이 있나니, 그분은 당신의 자비로 우리에게 당신의 왕국을 주시는 분이시다.

28. 이 짧은 시간 동안 정신을 차리고 힘써 일합시다. 저녁이 가까웠습니다. 상을 주시는 분이 영광 중에 오셔서 각자에게 그 행한 대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중 누구라도 성공한 후에 교만해지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그리하여 구세주께서 주시는 헤아릴 수 없는 상을 망치지 않도록 하십시오. 수도사는 씨를 뿌린 밭과 같아서, 비옥한 비와 이슬로 자라나 기쁨의 열매를 맺으며, 결실의 시기가 되면 농부가 우박과 야생 짐승이 밭을 황폐화시키지 않도록 큰 신경을 쓰게 만듭니다. 농부가 수확을 통해 보상을 받고, 베어 모은 열매를 곡창에 모아 둘 때, 그는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마찬가지로 수도사도 이 육신에 머무는 동안 영생을 위해 염려하며, 마지막 날까지 수련에 힘써, 게으름으로 인해 자신의 모든 삶을 헛되게 만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수련을 마치고 농부처럼 자신의 수고의 열매를 하늘로 옮길 때, 천사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선사한다.

29. 어떤 이가 왕 앞에 서서 그분과 대화를 나누다가, 자신과 같은 종의 부름을 받고 왕과의 경이롭고 영광스러운 대화를 중단하고 그 종과 대화를 시작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시편을 노래하는 동안 대화를 나누는 자도 이와 같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아, 우리가 누구 앞에 서 있는지 깨달아야 한다. 천사들이 큰 경외심으로 서서 창조주께 찬송을 드리는 것처럼, 우리도 시편을 부를 때 두려움으로 서야 합니다. 우리 몸만 서 있고 마음은 딴생각에 빠져 있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

30. 세 가지 종류의 행실이 악을 키우며, 네 번째는 선한 행실에 속하지 않는다. 곧, 젊은이들이 말을 듣지 않을 때; 장로들이 후배들의 성공을 시기할 때; 경건한 이들이 부도덕한 일에 빠져들 때; 그리고 수도원장이 자신의 무지함으로 형제들을 억압하고 괴롭힐 때이다.

31. 세 가지 행실이 선을 더하고, 네 번째는 주님 앞과 사람들 앞에서 선한 것으로 여겨진다. 형제들이 온유와 진리 안에서 한마음으로 화합할 때; 형제가 형제에게 주님을 경외하도록 가르칠 때; 어린 이들이 맏이들을 자신의 주인처럼 따를 때; 그리고 수도원장이 자신의 형제들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며, 진정으로 그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 애쓸 때이다.

32. 무언가를 장사하는 사람을 보게 되면,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하라. “이 사람은 헛된 것을 탐내며, 덧없는 이익을 모으기 위해 이토록 많은 고생을 하고 있구나. 과연 너, 내 영혼아, 영원하지 않은 것을 갈망하겠느냐?” – 서로 다투는 사람들을 보게 되면,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하라. “이 사람들은 전혀 유익하지 않은 일로 그토록 애를 쓰고 서로 다투고 있다. 과연 너, 나의 영혼아, 수많은 재능을 지녔으면서도, 네 빚을 용서받기 위해 마땅히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겠느냐?” – 진흙으로 집을 짓는 사람들을 본다면,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하라: “이 사람들은 진흙으로 집을 짓는 데 정성을 다해 일을 완수하고 있다. 과연 너, 나의 영혼아, 영원한 거처를 소홀히 하겠느냐?” 그러나 이것저것을 따로따로 이야기하며 말을 길게 늘어놓지 않기 위해 말하건대, 우리가 삶에서 무엇을 보든, 세속적인 생각과 일상적인 논리를 영적인 것으로 바꾸면, 우리를 돕는 은총으로 반드시 유익을 얻을 것이다.

33. 수도사란 무엇인가? 수도사는 마치 높은 곳에서 떨어지다가 땅 위로 높이 매달린 밧줄을 발견하고 그것을 붙잡은 사람과 같다. 그는 그 밧줄에 매달린 채 끊임없이 주님께 도움을 간구하며, 만약 힘이 풀려 양손으로 밧줄을 놓아버리면 떨어져 죽게 될 것임을 알고 있다.

34. 주님을 위해 작은 슬픔을 참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무의식중에 수많은 무거운 슬픔에 빠지게 된다. 주님을 위해 자신의 뜻을 버리려 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에게 영적 해를 끼친다. 주님을 위해 복종과 겸손을 견디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 의인들의 위로를 잃어버립니다. 주님을 위해 우리에게 주는 훈계를 듣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를 악령들의 놀이터로 만듭니다. 채찍으로 내리는 징계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를 위로해 줄 이가 없는 지옥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35. 교활한 자는 원수로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 각자에게 독을 주입하고, 자신의 계략으로 각자를 넘어지게 한다. 어떤 이는 금식을 지켰으나, 경쟁심과 시기심에 사로잡혀 있다. 또 어떤 이는 부끄러운 욕망을 절제했으나, 허영에 얽매여 있다. 또 다른 이는 기도에 힘썼으나, 정죄의 그물에 얽혀 있다. 어떤 이는 정죄를 피하려 하나, 불순종과 반항으로 가득 차 있다. 어떤 이는 음식을 삼가지만, 교만과 오만 속에 빠져 있다. 어떤 이는 기도에 지칠 줄 모르지만, 짜증과 분노에 휩쓸린다. 어떤 이는 사소한 일에서 성공했다고, 자신보다 게으른 자들 위에 이미 우쭐대고 있다. 누구나 저마다 어떤 식으로든 죄에 얽매여 있으나, 이를 깨닫는 이는 없다.

36. 우리의 싸움은 눈에 보이는 사람들과의 싸움이 아니니, 그들을 경계하여 스스로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그런 싸움이 아니다. 우리와 싸우는 자들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부주의한 자들에게는 위험이 크고, 승리하는 자들에게는 큰 상이 있다. – 우리는 지혜를 발휘하여 그들과 싸워 이겨내야 한다. – 예를 들어, 원수가 – 탐식을 부추긴다면, 금식으로 그를 공격할 것이며; 여인에 대한 욕망을 자극한다면, 인내를 발휘하여 그 감정을 이겨내면, 원수는 즉시 우리 곁을 떠날 것이며; 분노를 부추긴다면, 평화로 무장할 것이며; 우리를 짜증 나게 한다면 온유함을 택하고, 우리 안에 증오를 불태운다면 사랑에 매달리며, 명예를 추구하도록 부추긴다면 겸손을 보이고, 영광을 추구하도록 부추긴다면 우리의 보잘것없음을 깨닫고, 몽상적으로 높은 곳으로 이끌면 주님의 겸손을 우리 앞에 새겨 두자. – 우리가 이런 방식으로 원수에게 맞서면, 그는 우리를 이기지 못하고 도망칠 것이며, 우리에게 은혜가 돌아올 것이다.

37. 수행의 길을 사랑한 자여, 네 날들이 산만함 속에서 흘러가지 않도록 네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여라. 네 힘이 원수와의 싸움에서 쇠약해지지 않도록, 네 안에 교활한 생각을 품지 말라. 네 수고의 여정이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항상 가장 달콤하신 주님을 마음에 간직하라. 네 수고의 투쟁을 서둘러라. 수고하는 자들은 상을 받고, 게으른 자들은 후회하게 될 날이 갑자기 닥칠 것이기 때문이다. 때가 있을 때 덕을 쌓으라. 네 눈에는 경외심을, 네 귀에는 진리를, 네 혀에는 생명의 말을, 네 발에는 병든 자를 방문하는 일을, 네 마음에는 주님의 형상을, 네 지체에는 정결함의 성취를 쌓아, 천사들과 사람들 앞에서 더 큰 영광을 얻게 하라. 영혼이 없는 나무도 그 위에 죽을 운명의 왕의 형상이 있다면 존경받는데, 하물며 현세와 내세에서 하나님을 품은 영혼이 얼마나 더 높이 평가되겠는가.

38. 오라, 나의 친구들아, 주님께 엎드려, 우리 영혼이 모든 아름다운 것을 미워하는 우리의 원수인 적의 계략을 분별할 수 있도록 깨달음을 주시기를 구합시다. 그는 우리 길에 걸림돌과 유혹, 해악, 이 세상의 산만함, 육신의 쾌락, 현세 생활의 영속성에 대한 희망, 수고할 때의 두려움, 기도할 때의 나태함, 시편을 부를 때의 잠과 육신의 안식을 놓아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얼마나 부지런한지, 우리는 그만큼 방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악한 계략을 더 많이 꾸밀수록, 우리는 더욱 소홀히 여깁니다. 비록 우리의 날이 짧다는 것과 영광의 주님께서 오신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39. 우리는 생명의 열매를 맺겠다고 서약했다. 그러나 우리의 열매에는 그것을 성숙하게 할 눈물이 없고, 눈물의 숨결로 꽃피게 할 통회도 없으며, 뜨거운 더위 속에서 그늘을 드리워 줄 겸손도 없고, 어떤 반대되는 것도 그 열매를 짓누르지 않게 할 탐욕 없음도 없다; 하나님의 사랑, 곧 그 열매를 지탱해 주는 튼튼한 뿌리도 없고, 세속적인 것에 대한 염려도 없으며, 깨어 있음도, 기도 속에서 정신을 차리게 하는 명료한 마음도 없다. 이 아름답고 선한 미덕들 대신에 우리에게는 그와 정반대되는 것들이 있다. 격렬한 분노와 짜증이 있어, 그것에 짓눌린 열매는 아무 쓸모가 없게 되고; 그 열매를 아래로 짓누르는 탐욕이 있고, 큰 낙담이 있다. 이 모든 불리한 요소들이 열매가 마땅히 익어가도록 내버려 둘까? 그래야만 그 열매가 주님께 합당해질 수 있을 텐데.

40. 각자의 삶의 모습을 보고 그들의 삶을 본받기 위해서는, 즉 누가 열심을 품고 “더 높은 소명의 영광”을 향해 달려가는지(빌 3:14)를 본받기 위해서는, 한 사람에게는 완전하고 정확한 믿음을, 다른 이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또 다른 이에게는 주님과 이웃에 대한 이중의 사랑을, 또 다른 이에게는 어떻게 그가 하나님의 경외심 안에서 자신의 파수꾼이 되어 모든 악한 행실에서 스스로를 지키며, 비난받거나 흠잡힐 만한 삶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순결하고 흠 없는 행실로 인해 모든 이에게 칭찬받는 삶을 사는지 관찰해야 한다.

41. 보라, 어떤 이는 원수에게서 오는 여러 가지 정욕에 시달리며 기도 중에 하나님께 피난처를 구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사랑으로 그분께 매달려 은혜의 도움을 얻으며, 부도덕하고 불결한 생각에서 벗어나, – 큰 통곡과 눈물, 한숨으로 저지른 일을 뉘우치며, 슬픔으로 자신의 죄를 애도하고, 기도와 철야 기도로 하나님께 고백하며, 금식과 절제, 슬픔으로 악을 견디고, 이러한 무기로 자신을 구원하려 애쓴다. 그대도 참된 전사처럼 죽을 때까지 싸우도록 힘쓰라. – 수행은 결코 가볍게 여길 일이 아니며, 구원은 오직 큰 근면함으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며.

42. 세상에 대한 완전한 초탈을 보여주는 이들을 본받으라. 그러면 덕의 높은 경지에 쉽게 도달할 것이다. 누군가에게서 완전한 무소유 정신을 보게 된다면,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온갖 근심에서 마음을 해방시켜 산만함 없이 기도에 전념하며, 어떤 생각이나 걱정도 기도를 방해하지 않도록 애쓰는 모습을 보고, 온 힘을 다해 그와 경쟁하라. 누구든지 깨끗한 마음으로 사랑과 눈물을 담아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는, 마치 거울에 비치듯 자신의 마음속에 하나님 그분을 비추어 낸다. 그리고 이 헤아릴 수 없는 은혜는 궁핍과 가난, 그리고 온갖 면에서 궁한 생활을 통해 얻어진다. “좁은 문과 좁은 길이 생명으로 이끈다”(마태복음 7,14).

43. 생활 방식에서 성도들을 본받으라. 어떤 이는 경건함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어떤 이는 겸손함으로, 어떤 이는 자학과 자기 비난으로, 어떤 이는 침묵으로, 누구는 온유함으로, 누구는 너그러운 인내로, 누구는 양보와 평화 사랑으로, 누구는 우애와 한마음으로, 누구는 절제와 분별력으로, 누구는 친절한 대인관계와 상냥함, 너그러움으로, 누구는 원한을 용서하는 것으로, 용기와 너그러움에서, 어떤 이는 위업과 순종에서, 어떤 이는 수공예와 형제들에 대한 섬김에서, 어떤 이는 열정과 불타는 영혼에서, 어떤 이는 세상과의 완전한 단절과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처럼 매일 죽어가는 삶에서, 어떤 이는 굳건한 영혼과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어떤 이는 절제와 순결에서. 또한 살펴보라 – 누구에게는 자비와 돕는 마음, 누구에게는 온유한 성품과 선함, 누구에게는 연민과 자비, 누구에게는 공평함과 정의, 누구에게는 까다롭지 않음과 겸손, 누구에게는 적은 것에 만족함과 절제, 누구에게서는 단순함과 솔직함을, 누구에게서는 끊임없는 기도와 시편 찬양, 눈물의 흐름을 – 한마디로 말해, 모든 사람에게서 하느님께 기쁨을 드리는 삶의 특징을 살펴보고 – 그들을 본받으라.

44. 우리는 하늘을 바라보고, 하늘에 대해 생각하며, 하늘을 항상 기억하고, 하늘에 온전히 매여 있으며, 하늘과 끊임없이 교제하도록 노력할 것이며, – 결코 우리의 시선을 쾌락이 있고, 이 간사하고 생명을 죽이는 세상의 정욕이 있는 땅으로 돌리지 말아야 한다. 항상 마음의 눈으로 하늘을 깊이 응시하며, 이 눈동자에 어떤 것도—사악한 생각이나 하나님께 기쁘시지 않은 다른 무엇이든—들어와 마음을 어둡게 하지 않도록 온갖 방법으로 경계해야 한다.

45. 우리는 주님께서 마귀의 궤계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를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생각들은 우리가 독방에 홀로 앉아 있을 때뿐만 아니라, 주님의 집에 모일 때에도 우리를 짓누를 뿐만 아니라, 심하게 솟아오르기 때문이다; 심지어 남성의 몸을 순수하지 않게 바라보게 만들기도 하며, 뱀은 몽상적인 생각들로 우리를 가장 수치스러운 행위에까지 이르게 한다. 그는 형제가 정신이 산만해져, 깨끗한 마음으로 우리 구주이신 하나님께의 지극히 순결한 신비를 경청할 수 없게 하려고 온갖 잡다한 생각을 심어 놓는다. – 그러나 눈을 지키고 마음을 경각하게 함으로써, 절제하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 의 도우심으로 이를 이겨냅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경계심으로 자신의 마음과 감각을 지켜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우리는 위대한 싸움을 치르고 있으며, 우리의 원수는 광란하기 때문입니다.

46. 투쟁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정욕과 화해한 자는, 이미 자신을 죄의 쾌락에 노예로 팔아넘기고 기꺼이 고문자에게 조공을 바치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그들과 싸움을 벌일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원수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싸움이 있고, 싸움이 있는 곳에는 투쟁이 있으며, 투쟁이 있는 곳에는 면류관이 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쓰라린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마귀와 싸움을 벌여야 한다. 이 싸움에서 승리함으로써 성도들은 하늘의 축복을 누리게 되었다.

47. 원수의 모욕에서 벗어나고, 그 쓰라린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기를 원하는 자는, 우리 모두의 이 폭군의 뜻에 맞서 싸워야 하며, 창조주에 대한 사랑으로 그와 전쟁을 벌여야 한다. 그때 비로소 그들은 용맹한 투쟁의 증거를 보여 줄 것이니, 입술로만 아니라 마음의 태도로 그에게 말할 때이다. “우리는 네 목소리를 듣지 않겠노라, 마귀여. 다시는 네 정욕을 섬기지 않겠노라.” 그러나 투쟁하는 동안에는 하나님께 기도의 목소리를 올려야 하니, 그분께서 악을 꾀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도록. 그때, 이 사나운 고문자가 일곱 배로 정욕의 용광로를 달구더라도, 주님을 의지하는 자들은 곧 그 용광로가 이슬로 변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며, – 이전에 두려움을 심어주던 고문자 자신도 그들 앞에서 떨게 될 것이다.

48. 어떤 성인이 말하기를, “나쁜 것을 생각하지 않으려면 좋은 것을 생각하라. 마음은 한가함을 참지 못하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가르침과 기도, 선한 행실에 바치자. 헛된 생각에 몰두하면 헛된 행실이 낳고, 선한 생각에 몰두하면 선한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49. 비록 눈에 보이는 눈물이 없더라도, 마음속으로 깊이 통회하라. 눈물에도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 그러나 자신의 영혼을 마치 거울처럼 삼아 주님을 묵상하며, 눈물과 함께 그분의 자비로운 면전 앞에서 그분을 찬양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의 기도가 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50. 만일 네가 선택받은 그릇이 되고자 한다면, 주님에 관하여 네 스승에게 순종하고 겸손함에서 뛰어나도록 하라. 성인들의 삶은 순종으로 인해 높여져 빛나게 되었다. 여호수아는 모세에게 온전히 순종한 덕분에 그의 후계자가 되는 은총을 얻었다. 사무엘은 제사장 엘리에게 순종하며 지내던 중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은혜를 입었다. 엘리사는 순종함으로 인해 스승의 특별한 은총을 받았다. 하나님 자신이신 말씀은 육신을 입으시고 겸손과 순종 속에서 삶을 사셨는데, 복음서 저자가 말하듯이 “그들에게 순종하셨다”(누가복음 2:51)고 합니다. 사도 또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기를 낮추사 죽기까지, 그것도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종하셨느니라”(빌립보서 2:8). 너는 선한 뜻으로 시작했으니, 주님께서 너를 온유하고 겸손한 자들과 함께 천국에서 높여 주시도록 굳건히 서라.

51. 어떤 형제가 영적 스승들에게 순종하며 지내다가 다른 형제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영적 스승들에게서 떠나, 혼자서 침묵하며 지내고 싶습니다.” 그 형제가 대답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있었는데, 그는 그 아들을 한 장인에게 맡겨 자신의 기술을 배우게 했습니다.” 그 소년은 일에 소홀했다. 며칠 후 그 아이가 아버지에게 와서 말했다. “아버지, 저를 스승님 곁에서 데려가 주세요. 혼자서도 이 기술을 더 잘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말했다. “다른 사람들에게서 배우면서도 그들의 지도 아래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면, 어떻게 혼자서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겠느냐?” 네가 그 기술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 같으니, 내가 너를 위해 애쓴 것이 헛된 것이 아닐까 두렵구나. 그러니 이제 제대로 네 일에 매진하고, 스승의 지도 아래 그 기술을 익혀, 이 분야에서 숙련된 장인이 되어 나중에 그 기술로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도록 하라.” – 그러니 우리도, 형제여, 주님을 섬기는 일에 서툴지 않고, 유혹에 빠졌을 때 무력해지지 않도록, 주님에 대한 복종의 멍에를 벗어던지려 애쓰지 맙시다.

52. 정욕을 이기고 우리 안에 있는 온갖 세속적인 집착을 뿌리 뽑을 때, 성령의 은총이 우리 안에서 안식을 얻으시고, 기름이 풍성하고 등잔이 갖춰진 준비된 등불처럼 우리 마음을 비추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전히 정욕에 사로잡혀 그 속에 빠져 있다면, 기름도 등대도 없는 등대와 같아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니 지혜의 빛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도록 합시다. 영적인 삶을 추구하여, 우리 안의 마음이 성령의 지배 아래 놓여 거룩해지고, 육체도 성령과 하나 되어 거룩해지도록 합시다.

53. 비유. 두 사람이 서른 스타디온 떨어진 도시로 향했다. 그들이 두세 스타디온을 걸었을 때, 길가에서 그늘진 숲을 만났는데, 그곳에는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고, 기분 좋은 장소들이 많았다. 여행자들이 그곳에 들어서자, 한 사람은 도시를 빨리 보고 싶어 서둘러 지나갔고, 다른 한 사람은 멈춰 서서 둘러보다가 뒤처졌다. 주위를 둘러본 후 , 그도 도시로 가고 싶었지만 더위를 두려워하여 나무 그늘 아래에 더 머물렀다. 그러나 그가 그곳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며 지체하는 동안, 숲에서 짐승 한 마리가 나와 그를 붙잡아 자신의 굴로 끌고 갔다. 한편, 그 풍경에 매료되지 않은 다른 한 사람은 무사히 도시에 도착했다. – 이 비유의 뜻은 이렇다. 두 사람은 경건의 길에 들어서서 그 길에서 수련을 시작한 자들이다. 길 위의 매력적인 풍경은 세상의 유혹을 의미한다. 그곳을 지나친 사람은 어떤 것에도 주의를 두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높은 지위의 영광에 이르기” 위해 서두르는 자들을 의미한다(빌 3,14). 그리고 매력적인 풍경에 휩쓸린 사람은 자신의 목적을 잊고, 마음을 보이지 않는 것에서 보이는 것으로 돌린 자들을 의미한다. 무더위는 덕을 쌓는 수고입니다. 그 사람이 한곳에 머무르다가 짐승의 먹이가 되었다는 것은, 즉 누군가 세상의 욕망에 마음을 두면 그 욕망에서 죄가 생겨나 사람을 지배하고, 사나운 짐승처럼 그를 갉아먹는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욕망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자라나 죽음을 낳느니라”(야고보서 1:15). 그러니 우리가 다시는 죄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세속적인 욕망을 피합시다.

54. 부끄러운 생각에 빠지지 않도록 쓸모없는 말을 피하라. 선한 말이 영혼에 유익한 것처럼, 선하지 않은 말은 영혼을 타락시키니, 사도가 말한 대로 “선한 습관은 선한 말을 낳고, 악한 습관은 악한 말을 낳는다”(고린도전서 15, 33).

55. 수도 생활 속에서 나이를 먹었음에도 게으른 사람들을 보게 될 때, 그들에게 질투하여 같은 길을 걷지 않도록, 또 절제하는 사람이 되어 그들 앞에서 자만하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자만하는 것은 곧 교만함에 승리를 내어주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을 잘 살피라”고 말하는 이의 말을 듣고, 네 영혼을 꼼꼼히 지키라.

56. 모든 사람에게 네 생각을 털어놓지 말고, 오직 영적인 사람임을 알게 된 이들에게만 털어놓으라. 마귀의 올가미는 많기 때문이다. 영적인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숨기지 말라. 그래야 원수가 틈을 타서 네 안에 둥지를 틀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육신적인 사람들과는 의논하지 말라.

57. 무익한 대화를 피해야 하며, 하나님의 경외심을 소홀히 여기는 자들과는 어울리지 말라. 그들은 유익한 말을 하지 않고, 주님을 위해 아무것도 행하지 않으며, 덕이나 경건함, 순결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말은 죽음의 올가미요, 그들의 조언은 지옥의 심연이며, 그들과의 교제는 영혼의 파멸이다.

58. 인간의 명예나 영광, 혹은 음식이나 음료, 옷차림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잃지 않도록 주의하라. 이 모든 것은 썩어 없어질 것이나, 각 사람의 행실,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모두 기록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늘의 것을 생각하라,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2), 그리하여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약속을 얻으라.

59. 땅의 왕의 군인들은 자기 왕을 기쁘게 하려고 피를 흘리나, 너는 피를 흘릴 필요가 없다. 다만 죄에게 패배하지 않도록 하여, 네게 죽음의 열매를 맺지 않게 하라(롬 7,5). 정신 차려라, 형제여, 정신 차리고 수고에 힘쓰라. 하나님은 불의하지 않으시니 네 수고를 잊지 않으실 것이다. 또한 네가 수도실에 머물며 견디는 그 고난을 통해, 진리의 빛이 네게 비칠 것이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딤전 6:12), 그리하여 네가 원수를 이기고, 부끄러움 없이 영광의 왕께 경배할 수 있도록 하라. 주님께서는 칼에 죽임을 당한 자들과 박해자들에게 고통받은 자들뿐만 아니라, 수행과 사랑에 있어 탁월함을 보인 자들에게도 면류관을 씌우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위해 먼저 모욕을 참아낸 자들이 있었듯이, 주님을 위해 마지막까지 슬픔 가득한 삶과 수행을 견뎌낸 자들도 있습니다.

60. 네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네 마음에 악한 말이” 없도록 하라. 악한 생각에 기울어지지 말라. 고대 사람 중 한 명이 덤불 속에 맹세에서 제외된 물건을 숨겨 두었다가 벌을 받았고(여호수아 7:1–26), 선지자 엘리사의 시종 기에시도 마찬가지로 벌을 받았다. 그들은 하나님뿐만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도 숨지 못했다. 그들은 비밀리에 죄를 저질렀으나, 그 대가는 공개적으로 받았다. 한 사람은 온 백성 앞에서 돌에 맞아 죽었고, 다른 한 사람은 나병에 걸렸다(열왕기하 5, 27). “하나님은 조롱을 받지 않으시니,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라디아서 6, 7)라고 말씀하신 분은 거짓말하지 않으셨다.

61. 원수가 무엇으로 우리를 이기는가? 무엇으로 우리 안에 정욕이 늘어나는가? – 우리의 불순종 때문이 아니겠는가? – 누군가 우리를 가르칠 때 우리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잘못을 바로잡으라고 책망할 때 우리는 거부한다. 사람들 앞에서는 숨고, 하나님 앞에서는 소홀히 여깁니다. 무시무시한 뱀은 우리를 바로잡고자 하는 이들을 말로 이길 수 있는 지혜를 우리 안에 심어 놓습니다. 그리하여 죄는 우리에게 대적할 자가 없기에 더욱 번성합니다.

62. 수도사의 영적 타락의 시작은 웃음과 방종이다. 수도사여, 네 안에서 이것을 보게 된다면, 네가 악의 심연에 빠졌음을 알아라. 하나님께서 너를 이 죽음에서 구원해 주시도록 끊임없이 기도하라. 웃음과 방종은 젊은 수도사들뿐만 아니라 노장 수도사들까지도 수치스러운 정욕에 빠지게 한다. 방종에 대해 한 성인은 이렇게 말했다. “방종은 뜨거운 바람과 같아서, 수도사의 열매를 망가뜨린다.” 이제 웃음에 대해 들어보라. 웃음은 우는 자들에게 약속된 복(마태복음 5:4)을 사람에게서 빼앗고, 내면의 선한 질서를 파괴하며, 성령을 모욕하고, 영혼에 해를 끼치며, 육체를 타락시킨다. 웃음은 미덕을 쫓아내고, 죽음에 대한 기억도, 고통에 대한 생각도 없다.

63. 울음의 시작은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울음이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마음의 은밀한 것을 아시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 되어, 그분으로부터 우리가 기쁨을 얻게 하라.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은사와 성령을 기뻐하며 밝은 얼굴을 지을 것이며, 마음속으로 울고 탄식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가 죽을 때까지 영원히 그 죄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시기를 간구할 것입니다. 울음은 새롭게 하고 지켜 줍니다. 울음은 눈물로 영혼을 씻어 주며, 그것을 깨끗하게 만듭니다. 울음은 정절을 낳고, 정욕을 끊어내며, 미덕을 굳건히 한다. 울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천사들의 위로를 받는다.

64. 네 안에 하나님에 대한 기억이 보존되도록 영적인 일에 전념하라. 쓸모없는 말들은 혐오하라. 악취와 향기가 조화를 이루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65. 은둔자는 세 가지 전투, 즉 보는 것, 듣는 것, 말하는 것에서 해방된다. 그리고 주의 깊은 공동체 생활자도 세 가지 전투, 즉 사는 것, 파는 것, 강도들의 습격에서 해방된다. 그러나 어디에서나 자신을 경계하고 양심을 깨끗하게 지켜야 한다.

66. “나는 수도원에 들어와 천사의 모습을 띠고 있다”고 말하지 마라. 사람뿐만 아니라 하느님 자신께서도 겉모습 하나만으로는 기뻐하지 않으시니, 무엇보다 선행의 열매가 요구된다. – 그러니 꽃을 피운 나무처럼 굳건히 서서, 네 미덕의 열매를 지키라. ‘교만’이라는 벌레가 슬그머니 다가와 네 안에 있는 겸손의 열매를 갉아먹지 못하게 하고, ‘허영’이 네 경건함을 어둡게 하지 못하게 하며, ‘분노’가 네 온유함을 빼앗지 못하게 하고, 짜증이 네 너그러움을 고갈시키지 않게 하고, 다툼이 네 평화를 깨뜨리지 않게 하며, 원수가 우정을 방해하지 않게 하고, 원한을 품는 마음이 상호 사랑을 끊지 않게 하고, 서운함이 화합을 깨뜨리지 않게 하며, ‘식탐’이 금식을 방해하지 않게 하고, 탐욕이 절제를 말살하지 않게 하고, “부주의”가 근면함을 가로막지 않았고, 잠이 경계를 무디게 하지 않았으며, “낙담”이 열심을 짓누르지 않았고, 나태함이 섬김을 방해하지 않았으며, 불평이 복종을 줄이지 않았고, “불순종”이 순종의 문을 막지 않았으며, 헛소리가 시편 찬양을 이기지 못했고, 장난기가 찬양보다 우세해지지 않았고, 웃음이 울음을 이기지 못했으며, “음행”이 정절을 타락시키지 않았고, 재물 사랑이 무소유보다 우선시되지 않았다. 부모를 그리스도보다 더 사랑하지 않도록, 그리고 이 세상을 천국보다 더 달콤하게 여기지 않도록 조심하라; 험담에 대한 욕망이 네 혀를 부추기지 않도록; 누구에 대한 질투가 너를 괴롭히지 않도록; 기만이 네 마음의 순결을 더럽히지 않게 하고, 위선이 네게 참된 복을 누리는 기쁨을 빼앗지 않게 하며, 도둑질이 너를 천국에서 멀어지게 하지 않게 하고, 거짓이 네게 낙원을 가로막지 않게 하며, 사람에게 아첨하는 마음이 네 안의 담대함을 없애지 않게 하고, 쾌락에 대한 사랑이 네게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훔쳐가지 않게 하며, 정욕이 네 안의 마음의 통회를 꺼뜨리지 않게 하라.

67. 누구든지 자신의 뜻을 어느 정도 잘라내고 낮추면, 그만큼 성공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자신의 뜻을 더욱 고집스럽게 붙잡을수록, 자신에게 더 큰 해를 끼친다. 그러므로 자신의 뜻에 아첨하지 말고, 차라리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라.

68. 봉사를 하러, 혹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러 방을 나설 때, 눈을 지키고, 마음은 경건한 생각으로 북돋우며, 이때 이렇게 말하라. “너는 화가가 아니며, 사람의 모습을 베껴 그리는 법을 배우러 나온 것도 아니다.” 자신을 주의 깊게 살피라. 만일 네 주의가 감각적인 것에 사로잡혀 있다면, 어떻게 맑은 마음속에서 마치 거울을 보듯 하늘의 것을 관조하고, 하나님을 기억하며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겠느냐?

69. 남의 죄에 대해 호기심을 품지 마라. 그래야만 네 경건한 생각이 자연스럽게 타락하지 않을 것이다.

70. 침묵을 지키라. 침묵은 너를 많은 더러움에서 구해 줄 것이다. 죄인들의 비참함을 끊임없이 기억하며, 머지않아 너도 그들 대열에 끼지 않을까 두려워하라.

71. 자만하지 말자. 자만에서 모든 정욕이 마치 가지처럼 뻗어 나오기 때문이다. 자만은 사랑을 통해 근절되는데, 그 사랑은 모든 이를 한마음으로 이끌고 하나로 묶어준다. 사랑은 위대하고 귀중한 보물이다. 그러므로 사랑에서 떠나지 않도록 힘쓰라.

72. 우리의 구원을 염두에 두고, 믿음과 사랑, 인내, 순결, 순종, 겸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에서 이웃에게 덕행의 본보기가 되도록 합시다. 악한 욕망에 휩쓸리지 말고, 영적인 수련에 힘쓰십시오.

73. 하나님의 계명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비둘기 같은) 순수함을, 원수의 계략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뱀 같은) 교활함을 갖추라.

74. 네 내면의 사람이 평안히 쉴 수 있도록 해로운 만남을 현명하게 피하라.

75. 네 생각이 타락하지 않도록 연극 배우들과 시간을 보내지 마라. 그들의 말은 매우 해롭기 때문이다. 그들은 노인들로 하여금 젊은이처럼 행동하게 만들고, 젊은이들을 불법적인 일에 끌어들인다.

76. 누군가 울고 있을 때는 결코 죄를 짓지 않는다. 또한 마음이 찢어지는 고통을 겪는 사람은 아무도 악을 꾀하지 않는다. 마음이 찢어지는 고통이 있으면 눈물이 흐르고, 눈물 뒤에는 악한 일을 삼가 함으로써 악이 줄어들게 된다.

77. 네가 젊다면, 침묵과 수고에 익숙해지도록 하라. 수고는 너를 남에게 부담이 되지 않게 할 것이며, 침묵은 어떤 정욕으로도 그 빛이 가려지지 않도록 하여, 네 영혼의 빛을 꺼지지 않게 보존해 줄 것이다.

78. 사람을 세속적으로 만드는 것은 머리카락이나 옷차림이 아니라, 나쁜 품성과 세속적이며 불결한 욕망에 대한 성향이며, 그것들로 인해 영혼은 추악해진다.

79. 삭발과 복장이 사람을 수도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향한 소망과 신성한 삶이 사람을 수도사로 만드는데, 그 안에서 삶의 완전함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80. 유혹에 빠지기 전에 스스로를 과대평가하지 말라. 왜냐하면 닥친 유혹은 겉보기에는 굳건해 보이는 자들조차 종종 당황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마음이 넘어지지 않도록 안전하게 지켜야 한다.

81. 모든 일을 행하고 모든 것에 대해 생각할 때,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도록 하라. 만일 네게 이러한 생각이 없다면, 네가 하는 모든 행위는 그 가치를 잃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82. 공동체에 머물든, 아니면 모든 이로부터 떨어져 침묵을 지키며 은둔하든, 네가 추구하는 것, 즉 깨끗한 마음과 꿍꿍한 영을 소홀히 하지 말라. 이를 얻은 자는 하나님께 비하당하지 않을 것이나, 이를 소홀히 여기는 것은 큰 위험이다.

83. 신성한 물(하나님의 말씀과 성사)로 네 영혼을 적셔라. 그래야 영혼이 번성하여 진리 안에서 열매를 맺을 것이다. 우리가 영혼에 유익한 것을 추구하는 것은, 마치 짐승들이 푸른 초원으로 달려가듯이 열정적으로 해야 한다.

84. 영혼이 건강할 때, 비로소 몸도 선한 수고를 감당할 힘을 얻는다. 그러나 영혼이 악한 생각에 빠져버리면, 몸도 필연적으로 죄로 인해 타락하게 된다.

85. 마귀는 매일 우리 영혼에 은밀한 올가미를 놓아, 유혹하여 영원한 고통에 빠뜨리려 한다. 이 올가미들은 달콤함으로 가득 차 있어, 스스로를 돌보지 않는 영혼들을 현혹하고 유인한다. 형제여, 유혹적인 생각에 휩쓸려 이 죽음을 부르는 달콤함에 빠져들지 마라. 생각은 유혹자라, 영혼에 침투할 틈을 찾으면 죄악된 생각으로 영혼을 달래다가, 나중에 죄로 영혼을 죽여 버린다. 그리하여 그것은 영혼을 위한 올가미가 된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이 올가미를 끊어내라. 기도와 눈물, 절제와 깨어 있음으로 그 생각을 영혼에서 쫓아내라. – 그 외에는 항상 깨어 있으라. 유혹하는 생각에 단 한 순간도 머물지 말라. 모든 그물과 유혹, 정욕에서 벗어나기 위해 항상 기도와 금식, 눈물로 하나님께 의지하라.

86. 우리가 깨어 있는 전사가 되어, 매일 악마와의 싸움에서 승리합시다. 이 싸움의 법칙을 배웁시다. 이 싸움은 보이지 않으며, 그 법칙은 모든 세속적인 것에서 자신을 벗어던지는 것입니다. 죽음을 기다리며 매일 그것을 눈앞에 두면, 우리는 죄를 짓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모든 세속적인 것에서 자신을 벗어던진다면, 전투에서 패배하지 않을 것이다. 세속적인 것은 우리를 아래로 끌어당기고, 정욕은 마음의 눈을 어둡게 하므로, 악한 자가 우리와의 전투에서 우리를 이겨 버린다.

87. 수도사여, “수행의 고된 수고는 크나 나는 힘이 약하고 연약하여 수행할 능력이 없다”고 말하며 궤변을 늘어놓지 마라. – 만약 먼 나라와 땅으로 가기로 마음먹었다면, 한 순간에 그 여정 전체를 다 갈 수는 없겠지만, 매일 밤 숙소에서 숙소로 이동하며 시간이 흐르는 대로 나아가면, 네가 염두에 둔 그 나라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천국과 달콤한 낙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은 일생의 수고, 즉 금식, 절제, 기도로 그곳에 이릅니다. 절제, 눈물, 기도, 경건한 깨어 있음, 사랑—이것이 바로 하늘로 이끄는 숙소들입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그리고 기쁨을 품으며 그 길을 걸어가라. 매 숙소를 지날 때마다 네 영혼의 발걸음이 더욱 굳건해질 것이며, 하늘로 향하는 네 여정에서 어떤 어려움도 만나지 않을 것이다.

88. 깊은 고민 없이 수도 생활에 뛰어든 사람에게는 원수가 교묘히 방종을 심어줍니다. 반면 경건한 마음으로 수도자가 된 사람에게는 자신의 힘을 넘어서는 고행을 부추깁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그 어떤 생각에도 휘둘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그의 마음을 밝혀 바른 길로 나아가게 한다.

89. 한 형제는 수도자의 삶을 받아들인 후, 공동 생활에서 떠나고 싶은 생각과 싸웠다. – 그리고 생각들은 그에게 다음과 같은 예를 제시했다. “정원의 이 초록을 보아라. 이 밭을 가꾸는 사람이 식물을 뽑아내어 다른 곳으로 옮겨 심지 않으면, 그것들은 자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형제 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생각에 대답했다. “과연 정원사가 이 밭에 심은 모든 것을 끝까지 뽑아 버릴까? 밭이 영양을 공급할 수 있는 것은 남겨두지 않을까? 게다가 뽑아낸 것은 제자리에 남은 것만큼 견고하지 않다. 그러니 너도 뽑히지 않는 자들 가운데 있으라.” – 그리하여 그는 은총의 도우심으로 그 생각을 이겨냈다.

90. 수도사는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 적들이 자신을 상대로 꾸민 계략을 간파하고, 어떤 것은 웃으며 넘기고, 어떤 것은 겸손하게 대하며, 또 어떤 것은 적절히 다듬어진 말로 물리쳐야 한다.

91. 영혼이 세속적인 것을 갈망하는 한, 이 세상의 온갖 욕망과 헛된 쾌락들이 생각 속에서 영혼에 떠오르며 그 힘을 약화시키니, 이로 인해 수도실에 머무는 자는 게을러지게 된다. 그러나 누군가 세상과 그 유혹을 완전히 버리고 미워하며, 온 마음과 온 영혼을 다해 주님의 종이 된다면, 나태함이 그를 지배하지 못할 것이며, 그 결과 그는 자유롭게 자신의 일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는 오직 허영의 생각과의 싸움만이 남아 있을 것이나, 주님의 종은 자신의 연약함과, “네가 가진 것은 받은 것”이라고 말씀하신 대로(고린도전서 4:7)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가 누구에게서 것인지를 깊이 생각함으로써 이 생각마저도 물리칠 것이다. 그에게는 육체의 연약함과도 싸워야 할 때가 있겠지만, 주님의 종은 이로 인해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며, “누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느냐(롬 8:35–39)라고 말씀하신 분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의 사랑에서 스스로를 멀리하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정욕 뒤에는 음란의 영이 따르나니, – 그러나 음란한 말을 피하면, 부정한 생각도 피하게 될 것이다.

92. 지혜로운 장로들은 형제들에게 영혼을 기름 바르고 굳건하게 하는 향유와 같다.

93. 만일 네가 세상을 저버렸다면, 네가 찾는 진주를 얻기 위해 네 일에 전념하라. 어떤 이들은 세상을 저버리고 세속적인 삶에서 물러났으나, 어떤 이는 군 복무를 그만두었고, 다른 이는 재산을 탕진하였으나, 결국 자기 뜻에 이끌려 넘어지고 말았으니, 자신의 뜻대로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보다 가장 비참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든 세속적인 것에서 벗어나는 주된 문을 통해 떠나는 척했으나, 다시는 숨겨진 문을 통해 세속으로 돌아갔다.

94. 이것이 바로 사람 안에 있는 지혜의 향기이다. 어떤 경우든 그는 스스로를 책망하며, 자신을 책망하면서도 같은 잘못에 빠진 타인을 정죄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95. 마음이 생각의 폭풍으로 어두워지고 정욕에 굴복한 자는 사람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그가 권력자라면 두려움 없이 악을 행한다. 만약 그가 연약하고 가난하다면, 자신의 거친 성품에 빠져 부끄러움 없이 역시 악한 행동을 한다.

96. 전사들의 싸움은 잠시뿐이지만, 구원을 갈망하는 자의 싸움은 그가 주님께로 떠나갈 때까지 계속된다. 그러므로 모든 정성을 다하고, 냉철함과 인내심을 가지고 일에 임해야 한다. 사자를 죽이기로 마음먹었다면, 사자가 마치 토기 그릇처럼 네 뼈를 부수지 못하도록 단호하게 임하라. 바다에 빠졌다면, 육지에 올라설 때까지 용기를 잃지 말라. 그래야 네가 돌처럼 심연 속으로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싸움에 나설 때는 정신을 차려라. 그래야 상대가 너를 이기고 기뻐하지 않을 것이며, 너는 왕관 대신 그와 정반대되는 것을 얻지 않을 것이다.

97. 수도사가 되고자 하는 자는 용감한 인내를 준비해야 한다. 그래야 수도 생활에 들어섰을 때 “나에게 이런 일이 닥칠 줄 몰랐다”고 말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 사실을 네가 분명히 알도록 하라. 그러니 네 생각을 바로잡고 인내로 무장하라. 그래야 지금 수계식에서 “모든 것을 참아내겠다”고 말했을 때, 이튿날 아침에 말과 행동으로 이를 어기는 자가 되지 않도록 하라. 하나님의 천사들이 곁에 서서 네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을 듣고 있다. 거짓말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주님께서는 “거짓을 말하는 자들을 모두 멸하시리라”(시 5:7) 하셨기 때문이다.

98. 주님을 섬기려 하는 자를 둘러싼 유혹은 많습니다. 그러나 온 마음을 다해 자신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맡기고, 하나님의 뜻 안에 머무는 자는 그 모든 유혹을 이깁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직 결단력만을 요구하시며, 친히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승리를 베푸십니다. “그를 의지하는 자에게는 보호자가 되시나니”(시 17:31).

99. 게으른 자들을 바라보지 말고, “주님께서 내 앞에 계시니, 내 오른편에 계시니 내가 흔들리지 않으리라”고 기록한 이의 본을 따라, 하나님을 눈앞에 두고 스스로를 경계하라 (시 15, 8).

100. 누구도 정죄하지 말자. 우리는 그가 자신의 방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 혹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수고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가 웃거나 이야기하는 것을 보더라도 정죄하지 말자. 우리는 그가 방 안에서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 각자는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 각자는 스스로에 대해 하나님께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101. 유혹에 굴복하지 않기를 원하느냐? 네 모든 뜻을 잘라내라. 어떤 일이 네게는 선해 보여도, 원장님이 주님 안에서 그것을 선하다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주님 안 에서 그에게 순종하라. 논쟁을 벌이거나 자신의 뜻을 따르는 것은 이미 타락의 징후이다. 모든 사람이 시편에 기록된 말씀을 들으라. “주님을 경외하며 섬기고, 떨림으로 그분을 기뻐하라. 주님께서 진노하시기 전에 징계를 받아들이라. 그렇지 않으면 의인의 길에서 벗어나 멸망할 것이다”(시 2:11, 12).

102. 오늘 우리는 절제와 온유함을 보이다가 내일 아침에는 절제하지 못하고 교만해지는 식으로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은 침묵과 기도, 겸손을 보이다가 내일 아침에는 오락과 끝없는 잠, 불순종 등을 보이는 식으로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은 주님을 의지하여 세상과 모든 세속적인 것, 조국과 친구들, 부모를 버리지만, 내일 아침에는 고향과 가족, 유산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솟아나 수많은 악에 빠지게 되는 식이어서는 안 됩니다.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보았다가 소금 기둥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누구든지 밭을 갈다가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누가복음 9,62).

103.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주님을 위해 세상을 떠났던 그날, 곧 네가 하나님의 경외심으로 불타올랐고 주님을 향한 열정으로 타올랐던 그날을 항상 마음에 새겨라. 그리고 끝까지 그러한 마음을 지키라.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마태복음 10:22).

104. 네게 떠오르는 생각들 때문에 느슨해지지 말라. 이는 투쟁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빗물이 고인 연못에서 교훈을 얻으라. 비가 그친 직후, 빗물의 축복이 막 연못에 모였을 때는 물이 탁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맑아진다. – 조금만 참아라. 네 생각들도 가라앉을 것이며, – 너에게 평안을 줄 것이다.

105. 나쁜 생각에 관한 비유를 들어보라. 포도송이가 포도나무에서 수확되어 압착기에 넣어지고, 즙이 짜여져 포도주가 되고, 그 포도주가 그릇에 담겨지면, 처음에는 마치 가장 강한 불에 달궈지는 것처럼 포도주가 끓어오르는데, 그 기세가 너무 거세서 훌륭한 그릇조차 그 기세를 견디지 못하고 때로는 긴장으로 인해 터져 버리기도 한다. 이 세상의 헛된 삶과 그 걱정거리에서 하늘의 일로 마음을 돌릴 때, 인간의 생각도 이와 같이 된다. 악령들은 사람 안에 있는 열정을 참지 못하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여, 그 안에 “혼탁한 타락”(아바카 2, 15) 섞어 넣으려 한다. 그리고 결함이 없는 그릇, 즉 불신하고 의심하는 영혼을 발견하면, 그것을 찢어 버린다. 악령들은 마치 포악한 늑대들처럼 수도사들의 방을 돌아다니며, 자신들을 위해 열려 있는 문을 찾아내어 안으로 쳐들어와 그들에게 복종하는 영혼을 타락시키려 한다. 그러나 문이 잠겨 있고, 믿음에 굳건히 서 있는 영혼을 발견하면, 고개를 숙인 채 물러난다.

106. 모든 일에서 순종의 어머니인 겸손을 지키라. – 이중성을 떨쳐 버리고, 모든 일에 믿음을 입으라. 그리하면 주님께서 네 영혼의 열심을 보시고 네 행실을 굳건히 하실 것이다. –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렸으니, 게으름과 경쟁심, 온갖 악한 성품과 시기심에 대해 마음속 깊이 강한 증오를 품으라. 처음에 그러한 생각들에 휩쓸린다면, 훗날 많은 수고와 해를 겪게 될 것임을 명심하라.

107. 마당에 오물이 쌓이지 않게 하듯이, 네 마음속에서도 육신의 욕망이 강해지지 않도록 하라.

108. 넓은 길에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나타난다: 악의, 오락, 탐식, 술주정, 낭비, 방탕, 불화, 짜증, 오만, 변덕 등;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불신, 불순종, 반항이 따르며, 모든 악 중에서 가장 마지막인 것은 절망이다. – 그리고 좁은 길에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나타난다: 침묵, 절제, 순결, 사랑, 인내, 기쁨, 평화, 겸손 등과 같은 것들이다. 그 뒤를 이어 불멸의 생명이 따른다.

109. 특히 제멋대로인 태도를 경계하여, 말이 많고 뻔뻔한 태도에 사로잡히지 말고, 악마들의 기쁨거리가 되지 말며, 결국 형제애와 결별하지 않도록 하라. 야생 당나귀가 곡식을 휩쓸어 가는 것보다, 제멋대로인 태도가 수도사들의 수고를 파멸시키는 것이 더 크다.

110. 지상의 왕 앞에 서 있고 썩어질 왕좌를 섬기는 자들을 상상해 보자. 그들은 얼마나 경건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자기 왕 앞에 서 있는가? 하물며 우리 신실한 자들은 하늘의 왕 앞에 두려움과 떨림, 그리고 온갖 경외심으로 서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우리 주님이자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신비를 뻔뻔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옳지 않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신성한 성경이 “모세는 두려워하여 감히 (불타는 덤불을) 쳐다보지 못하였다”(사도행전 7:32)라고 말함으로써 이 점을 우리에게 확신시켜 줍니다.

111. 내가 보기에, 밤에 사람을 혼란스럽게 하는 졸음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 번째”는 형제가 시편을 부르기 시작할 때, 악한 자의 작용으로 인해 겪는 것이다. 그러나 형제에게 게으름이 없다면, 그것은 아무런 힘도 갖지 못하지만, 형제의 배가 음식과 술로 무거워져 있다면 더 심하게 괴롭힌다. “두 번째”는 형제가 예배 중에 자신의 부주의로 인해 겪게 되는데, 형제가 예배 규칙이 끝날 때까지 버티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예배 도중에 시편을 부르는 사람들을 떠나 잠자리에 들려고 할 때입니다. “세 번째”는 평소 예배 규칙이 끝난 후 육체의 욕구에 따라 겪게 됩니다. – 그러니 게으르지 마라. 선지자 사무엘이 여러 번 부름을 받았을 때, 비록 아직 소년이었음에도 단 한 번도 일어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느냐? 하나님의 예배 중에, 형제들과 함께 있든 홀로 있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기 위해 서 있을 때, 첫 번째 졸음이 너를 괴롭힌다면: 그것을 알아차리고 저항하여, 네 게으름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열매를 잃지 않도록 하라. 비록 졸음이 한두 번 네 눈을 감게 하더라도 굳건히 견뎌라; 네 자리에서 떠나지 마라. 그러면 큰 유익을 얻게 될 것이다. 끝없는 잠에 대한 집착은 폭식에 대한 욕망과 같다. 많이 먹는 데 익숙해진 사람은 본성상 많은 양을 요구하게 되지만, 절제에 익숙해진 사람은 본성상 과식을 요구하지 않는다. 어부들을 본보기로 삼아 보라. 그들은 밤새도록 깨어 있으면서 자신의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군가가 졸음에 짓눌려 게으름에 빠져 잠이 든다면, 잠에서 깨어났을 때 아무것도 잡지 못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게으름을 탓하며 자책하기 시작할 것이다. 너도 졸음과 잠에 빠져들면 똑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선지자가 말한 대로 “잠에 빠져 아무것도 얻지 못하였도다”(시 75:6)라고 한 것처럼 말이다.

112. 마치 바다 위의 배가 작은 구멍 하나만 생겨도 재빨리 수리를 하지 않으면, 그 배가 아무리 거대하더라도 그 작은 구멍 때문에 파도에 휩쓸려 가라앉는 것처럼, 원수의 유혹을 마음속에 받아들인 영혼도 창조주께로 돌아서지 않으면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므로 형제여, 우리에게는 냉철함과 큰 겸손이 필요합니다. 모든 간사한 것은 마음을 하나님께 돌림으로써 무력화됩니다.

113. 때로는 어떤 이가 물을 길으려고 그릇을 들지만, 물을 채우지도 않은 채 그릇을 뒤집어 깨뜨리기도 한다. 기독교적 완전함을 얻기 위해 수도원에 들어갔다가, 하나님의 은혜를 외면하고 다시 세속적인 삶으로 돌아가는 자도 이와 같다.

114. 믿음은 모든 선의 어머니이며, 이를 통해 사람은 우리 주님이시자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을 자신에게 성취하게 된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히브리서 11:6)고 기록된 대로이다. – 그러나 마귀가 풍성하게 거두는 열매는 불신이며, 이는 모든 악한 행위의 어머니이다. 그로부터 이중성이 태어나는데, 이는 혼란이다. “마음이 두 가지인 사람은”라고 기록되어 있듯이, “그 모든 길에서 정돈되지 못한다”(야고보서 1:8).

115. 유혹과 험담을 피하고 싶습니까? 주님에 관해 말할 때 입에 문을 닫고, “헛된 것을 보지 않도록 네 눈을 돌리라”(시 118:37) – 그러면 험담은 침묵으로, 유혹은 눈을 지키며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 안에서 이것을 이기지 못한다면, 어디를 가든지 우리 자신 안에 원수를 품고 다니게 될 것이다. 그들을 이기면, 어디에 살든지 평안을 누리게 될 것이다.

116. 기도와 금식은 훌륭하지만, 자선이 이를 굳건하게 한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는 원치 않는다”(호세아 6:6)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구세주께서는 자비로운 자들을 복되다 하셨다. “자비로운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용서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천사가 고넬료에게 “네 기도와 자선이 하나님 앞에 기억되었느니라”(사도행전 10,4)라고 말한 것은, 기도뿐만 아니라 자선도 포함된다는 뜻이다.

117. 어떤 일이라는 핑계로 교회 예배를 소홀히 하지 마라. 비가 씨앗을 되살리듯이, 교회 예배는 영혼을 덕행 안에서 굳건하게 한다.

118. 오늘은 침묵과 하나님의 일에 전념하다가, 내일 아침에는 방에서 방으로, 혹은 더 나쁘게는 마을에서 마을로 돌아다니는 일이 없도록 하라. 오히려 끊임없이 침묵을 지키되, 침묵을 지키는 정도만큼 그 사람의 생각이 맑아지고, 침묵에서 멀어지는 정도만큼 그 사람의 마음이 거칠어진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119.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원수의 앞에서 견고한 기둥이다. 이 기둥을 무너뜨리지 말라. 그리하면 포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인자하신 분께 의지하고, 선지자와 함께 그분의 자비하심을 간구하라. “주여, 내가 주를 의지하였사오니 영원토록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소서. 주의 의로 나를 구원하시고 나를 구해 주소서” (시 30:1–6). 그때 주님께서 네게 말씀하시리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너를 버리지 아니하며 경멸하지도 아니하리라. 힘을 내고 용기를 내라” (여호수아 1:5, 6).

120. 우리가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고 서로의 짐을 짊어지며, 넘어진 자와 원수에게 사로잡힌 자를 일으키기 위해 힘쓰자. 어떤 전사가 동료가 원수들에게 사로잡힌 것을 보고도, 그를 사로잡은 자들의 손에서 동료가 구출되도록 싸우지 않고 맞서 싸우지 않겠는가? 만약 그를 구해낼 힘이 없다면, 그때는 친구를 떠올리며 울고 슬퍼할 것이다. 우리가 서로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할 의무는 그보다 훨씬 더 크지 않은가? 주님이시며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나니,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다른 사람을 위해 바치는 자라” (요한복음 15, 13).

121. 나태함 속에서 나날을 보내는 사람은, 주님께서 의인들에게 예비하신 복과 죄인들에게 예비하신 형벌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아무런 두려움 없이 쾌락에 빠져 지내며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에게 마귀는 온갖 육신의 정욕을 일으키나, 그는 마치 문이 드나드는 사람들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처럼 이를 알아차릴 수 없다. 정욕이 그의 마음에 자리 잡아 그의 눈을 어둡게 했기 때문이다.

122. 방종과 웃음을 피하라. 탐식을 절제로, 탐욕을 무소유로, 수다를 침묵으로, 가만히 앉아 있기를 참지 못하는 성질을 은둔처에 머무름으로, 나태함을 장차 올 복을 기억함으로, 불순종을 겸손함으로 다스리라; 더욱이 방종을 피하라. 내 생각에 그것은 모든 악의 근원이다. 그것을 억제하지 않으면, 그것은 너를 뻔뻔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억제하면, 너는 복을 얻을 것이다. “모든 것을 경외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잠언 28:14)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123. 게으름과 산만함으로 인해 네 시간을 낭비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잘 살피라. 네가 포도나무를 심었으니, 울타리를 쳐서 둘러싸라. 네가 정원을 얻었으니, 그 열매를 지키어 마지막에 기쁨을 누리도록 하라. 그리고 네 수고로 가꾼 밭에 돼지들을 들여보내지 말라. 그들이 그곳을 황폐하게 만들지 않도록 하라. 하루는 세우고 이틀은 허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이런 식으로 행동한다면 일이 어떻게 끝날 수 있겠느냐?

124. 온 인류 속에 온갖 종류의 죄의 유혹이 흩어져 있어, 사람은 끊임없이 정신으로 싸워야 한다. 그러나 어떤 이는 싸우지만, 어떤 이는 유혹에 굴복하여 넘어진다. 그리고 그들은 각자의 성향에 따라, 어떤 이는 이 유혹에, 다른 이는 저 유혹에 넘어진다. 이는 원수의 개입 없이는 일어나지 않지만, 원수 또한 우리의 성향을 고려합니다. 그리고 원수는 어떤 사람을 죄악적인 욕망으로 묶고자 할 때, 그 사람이 즐거워하는 것으로 그를 묶어, 얽매임 속에서 즐거움을 느끼며 결코 스스로를 풀어내려 하지 않게 만듭니다. 우리를 묶는 자는 교활하여, 무엇을 통해 어떻게 누구를 묶어야 할지 잘 알고 있다. 그는 누군가를 무의식적인 속박으로 묶으면, 그 마음이 즉시 속박을 끊고 곧바로 도망칠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각자가 즐거워하고 위안을 얻는 것으로 그들을 묶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묶여 있어도 슬퍼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며, 사로잡혀 있어도 그것을 자랑한다; 자랑하는 이유는, 예를 들어 시기심에 얽매인 자가 간통에 얽매이지 않는 한, 자신을 아무것도 얽매이지 않은 자로 여기고, 허영심에 얽매인 자가 명백한 불의에 얽매이지 않는 한, 자신이 천한 속박에서 자유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얽매인 자들 중 누구도 자신의 속박을 알지 못하며, 자신에게 쳐진 그물을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모두 취한 자들의 무지로 고통받는다. 얽매인 자는 마치 취한 사람처럼 자신이 얽매여 있음을 모른다. 술기운에 얽매임을 잊고, 취한 상태에서는 주위에 놓인 올가미를 보지 못한다.

125. 죄악된 정욕이 섞이면 모든 선함이 훼손되고 소멸된다는 점을 명심하라. 진리는 비열한 간계와 섞일 때 소멸되고, 정결함은 음탕함이 닿으면 손상되고, 믿음은 점술에 귀를 기울이면 소멸되며, 자선은 교만이 깃들면 어두워지고, 금식은 비난을 용납하면 수치를 당한다. 그러니 스스로를 경계하고, 선을 해치는 이러한 불순물이 섞이지 않도록 하라.

126. 너는 각 지체를 해로운 것들로부터 마땅한 방식으로 지켜야 한다. 네 몸이 음행에서 깨끗하다면,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말로부터 네 입을 지키라. 입은 음행을 저지를 수는 없지만, 거짓말을 하고 비방할 수는 있다. 네 지체 중 하나는 무죄이지만 다른 하나는 유죄라면, 그 한 지체를 비난함으로써 너 전체가 비난을 받게 된다. 비난을 사소한 일로 여겨 소홀히 하지 마라. 사냥꾼들의 먹이가 되는 자들의 예를 통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함을 배우라. 때로는 새가 작은 발톱 하나로 그물에 걸리기도 하는데, 하찮은 발톱 끝 하나 때문에 날개의 위력이 꺾이고 제압당한다. 비록 새가 그물 밖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하더라도, 결국 그물 전체에 포획되고 만다.

127. 악한 생각을 피하자. 왜냐하면 생각은 행실과 동등하게 심판받기 때문이다. 시험하시는 분께서 마음의 의도를 행실과 동등하게 보상해 주시는 선한 생각을 품자. 의도는 이미 행실이다. 왜냐하면 그 안에는 모든 것을 만들어 내는 근원으로서 우리 자유의 기초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128. 자비로우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원수의 온갖 공격에 맞설 무기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다만 그 무기를 사용하는 데 게으르지 말면, 해를 입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원수가 불타는 화살을 우리에게 쏘아온다면, 우리에게는 뚫을 수 없는 방패인 기도가 있다. 만약 그가 거짓으로 우리를 사로잡으려 한다면, 우리는 진리에 의지하여 구원받을 것이다. 만약 그가 인간 혐오로 너를 상처 입히려 한다면, 인간 사랑의 위대함으로 맞서라; 교만으로 너를 사로잡으려 하면, 겸손으로 그와 맞서라; 육신의 정욕을 부추기면, 서둘러 절제의 갑옷을 입어라; 탐욕으로 우리를 공격하면, 금식으로 날개를 달자. – 이처럼 우리 적들에게 화살이 있는 것처럼, 우리 의 연약함에도 화살이 있다. 전투에서의 패배는 무기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무기를 사용하려는 주의와 의지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129. 누군가 모든 것을 가졌으나 구원하는 사랑을 갖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누군가 왕과 귀족들을 초대하기 위해 성대한 잔치를 베풀고, 그 무엇도 부족함이 없도록 풍성하게 준비했으나 소금이 없다면, 과연 그런 잔치를 맛볼 수 있겠는가? 의심할 여지 없이 불가능하다.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순결을 지켰든, 금식했든, 밤샘 기도를 드렸든, 기도했든, 가난한 자들에게 거처를 제공했든, 예물이나 첫 열매나 과일을 바치려 했든, 교회를 세웠든, 그 밖의 다른 일을 했든 간에, 사랑이 없으면 이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 소용이 없다(고린도전서 13:1–4).

130. 우리에게 약속된 영원한 복을 얻는 일에 신경 쓰자. 아직 어두워지기 전, 장터가 끝나기 전에 이에 힘쓰자. 저 세상 삶을 위해 가난하고 소유가 없는 이들과 친구가 되자. 그들에게서 기름을 사서 그곳으로 우리 자신을 앞서 보내자. 왜냐하면 이곳에서는 저 세상의 등불을 위한 기름을 과부들, 고아들, 병든 자들, 불구자들, 절름발이들, 눈먼 자들, 그리고 교회 문 앞에 앉아 있는 모든 거지들이 팔고 있기 때문이다.

131.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할 때, 네가 하나님께 노래하는 아름다운 악기, 즉 네 생각들이 네 원수들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주의하라. 네 악기, 즉 네 생각이 사로잡혀 버린다면, 어떻게, 혹은 무엇으로 하나님께 섬기겠느냐? 하나님께 섬기는 일은 생각과 영혼의 모든 견고함과 힘, 그리고 온 마음을 산만함 없이 온전히 하나님께 집중해야 함을 요구한다. 네 금에 구리나 납을 섞지 말라. 즉, 네 영혼에 수많은 불결한 생각들을 섞지 말라. 남편과 약혼한 처녀가 다른 이들에게 유혹당하면 남편의 눈에 가증스럽게 되는 것처럼, 불결한 생각에 휩쓸려 그것에 동의하는 영혼도 하늘의 신랑이신 그리스도께 가증스러운 존재가 된다. – 영혼은 이러한 생각들과의 유대를 온갖 방법으로 피하고, 그것들에 동의함으로써 즐거움을 삼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주님께서 그녀가 주님을 향한 사랑을 보시고 기뻐하시며, 오셔서 그녀의 생각을 주님으로부터 돌리려 하는 원수들을 멸망시키실 것이다. 주님께서 영혼이 온 힘을 다해 마음을 가다듬고, 끊임없이 주님을 찾으며, 밤에는 주님을 기다리고, 낮에는 주님께 부르짖는 것을 보시는 즉시, 지체 없이 그녀를 위해 복수하시며, 그녀 안에 남아 있는 모든 죄악을 깨끗이 씻어내시고, 더러움이 없는 신부로서 주님 앞에 서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132. 네 마음을 열고, 네 생애의 모든 날 동안 하나님을 갈망하기로 결심하라.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은 끊임없는 기쁨과 깨달음이며, 영원한 즐거움이다. 네가 항상 그분을 갈망한다면, 그분은 항상 네 안에 거하실 것이다. – 그분은 그분을 경외하는 자의 영혼 안에 거하시며, – 그분을 사랑하는 자들의 뜻을 이루신다.

133. 거룩하고 흠 없는 하나님의 성전이 되고자 하는가? 항상 네 마음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간직하라.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이란 물감으로 그린 그림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선한 행실과 금식, 기도, 선행, 절제, 기도로 영혼 속에 그려지는 그 형상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천상의 주님의 형상을 그리는 물감은 순수한 생각, 모든 세속적인 것의 벗어남, 그리고 언제나 깨끗한 삶입니다.

134. 세상이든 수도 생활이든, 누구도 투쟁 없이는 면류관을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투쟁 없이는 누구도 시들지 않는 면류관과 영생을 얻을 수 없다. 참된 삶은 언제나 경기장과 같기 때문이다. 투쟁 속에서 완전해지고 싶으냐? 항상 미덕을 마치 투쟁의 무기처럼 몸에 두르라. 미덕을 입었느냐? 그것을 벗어 던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라.

135. 경건한 성부들의 삶과 덕을 본받으려 힘쓰라. 그들의 삶의 길을 따르고 그들처럼 수련하라, – 마음으로 수련하고, 영으로 수련하고, 몸으로 수련하며, 옷차림에서도 수련자가 되고, 음식에서도 수련자가 되고, 말에서도 수련자가 되고, 시선에서도 수련자가 되고, 생각에서도 수련자가 되어, 모든 면에서 완전해지도록 하라.

136. 기도할 때 마음이 산만해지지 않도록 스스로를 주의 깊게 살피라. 하나님 앞에 기도하러 나설 때, 경외심과 떨림으로 그분 앞에 서라. 마음속에서 이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생각과 염려를 단호히 떨쳐내라. 기도하는 시간에는 온전히 하늘의 천사가 되어, 네 기도가 거룩하고 순결하며 흠이 없도록 힘쓰라. 그리하여 그 기도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하늘의 문이 즉시 그 앞에서 열리며, 그 기도가 (거기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천사들과 대천사들이 모두 기쁨으로 맞이하여, 지극히 순결하신 주님의 거룩하고 높이 들린 보좌 앞으로 모셔가게 하소서. 그러니 기도할 때면 언제나 케루빔과 세라핌처럼 하나님 앞에 엎드려라.

137. 네 싸움은 그저 평범한 싸움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천사들과 그들의 주님께서 네가 원수와 벌이는 그 싸움을 지켜보고 계신다. – 그러므로 네가 원수를 이길 때, 하나님과 천사들이 너를 향해 박수를 치실 것이며, 천사들은 기뻐하며 네게 악한 자를 이길 힘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다 . 네가 능숙해지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며, 사람들이 너를 본받게 되었기에, 그 싸움은 점점 더 치열해지는 것이다.

138. 지쳐서 나태해지지 말고, 소망을 마음에 새기라. 왜냐하면 위업이 있는 곳에 상이 있고, 싸움이 있는 곳에 영광이 있으며, 투쟁이 있는 곳에 면류관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바라보며 인내의 교훈으로 스스로를 단련하라. 성인들과 함께 끊임없이 외치며 주님께 부르짖으라. “용기를 내고, 네 마음을 굳게 하며, 주님을 인내로 기다리라”(시 26:14).

139. 네가 떠날 날을 위해 네 일을 준비하라. 네 밭을 모두 정돈하라. 그 밭이란 바로 이 삶이다. 좋은 방패인 새 언약을 취하고, 네 소유지를 가시덤불로 둘러싸라(가시 돋친 식물들로 울타리를 치라) – 금식, 기도, 그리고 가르침으로. 네게 그런 울타리가 있다면, 짐승, 즉 마귀가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아름다운 포도원처럼 네 영혼을 가꾸어라. 포도원을 지키는 사람들이 손뼉을 치고 큰 소리로 외치며, 그 소음으로 악의를 품은 자들을 막듯이: 너도 그렇게 하라. – 목소리를 높여 시편을 노래하며 외치면, 교활한 짐승인 여우, 즉 마귀를 쫓아낼 수 있을 것이다. 네 마음이 부적절한 일로 치우치려 한다면, 끊임없이 원수를 경계하라. 그리고 마치 투석기로 던지듯 더러운 생각들이 네 영혼을 향해 날아들면, 믿음의 방패를 들어 맞서고, 소망의 투구를 머리에 씌우라. “영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엡 6,17)을 뽑아 들라. 그리하여 원수를 향해 이렇게 무장하고, 인내하며 싸움에서 게으르지 말라. 오히려 모든 일에 정신을 차리고, “우리는 그의 계략을 알고 있다!”라고 말하라.

140. 네 안에 악한 생각이 솟아오를 때, 네 칼을 뽑아들라, 즉 마음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세우라. 그리하면 원수의 모든 세력을 베어 버릴 것이다. 그리고 군대의 나팔 대신에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라. 나팔이 그 소리로 전사들을 모으듯이, 하나님의 말씀도 우리에게 호소하여 선한 생각들을 모으고, 하나님의 경외심으로 그들을 질서 있게 정렬시켜 원수와 맞서 싸울 부대를 구성한다. 이는 우리의 생각들이 마치 전사들처럼 왕의 원수들과 싸우기 때문이다. 또한, 나팔이 전투 중에 그 소리로 젊은 전사들에게 적을 향해 나아갈 준비를 북돋우듯이, 하나님의 성경은 네가 선을 향한 열정을 북돋우고, 정욕과의 싸움을 위해 너를 굳건하게 한다.

141. 네 힘닿는 대로 가능한 한 자주 성경을 읽도록 스스로를 다그쳐라. 그래야만 원수가 자신의 악한 계략으로 네 생각을 흩뜨리고, 네게 교활한 생각을 심어 놓는 동안—그가 네게 잦은 슬픔을 안겨주거나, 혹은 많은 성공과 세속적인 안락함을 제공하더라도—성경이 네 생각을 한데 모아 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악의적인 속임수로, 사람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려는 의도로 이렇게 행한다.

142. 정신을 차리고, 항상 부지런히 성경을 읽도록 힘쓰라. 그리하여 성경이 너에게 원수의 올가미를 피하고 영생을 얻는 법을 가르쳐 주게 하라.

143. 신성한 경전을 읽는 것은 방황하는 마음을 차분하게 하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준다. 기록된 바와 같이, “마음을 비우고 깨달으라. 내가 하나님이니라”(시 45:11)라고 했다. 청중 여러분, 깨끗한 마음으로 신성한 경전을 읽는 데 힘쓰는 자가야말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게 된다는 것을 들으십시오. 그러므로 게으르지 말고, 이 읽기와 기도에 힘써라. 그래야 네 마음이 밝아지고, 네가 “완전하고 온전하며,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야고보서 1:4).

144. 어떤 이들은 귀족, 공작, 왕들과의 대화를 자랑하지만, 너는 성경 안에서 성령과 대화한다는 것을 자랑하라. 왜냐하면 성경을 통해 성령께서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145. 신성한 성경을 읽으려 노력하고, 끊임없이 기도에 머물러라. 네가 그것들을 통해 하나님과 대화할 때마다, 네 몸과 영혼이 거룩해지기 때문이다. 이를 알고, 더 자주 그것들을 실천하도록 힘쓰라.

146. 읽을 줄 모른다면, 듣고 유익을 얻을 수 있는 곳에서 떠나지 마라. 기록된 바와 같이, “지혜로운 사람을 보거든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라. 네 발이 그의 문턱을 밟게 하라”(시라 6,36). 이는 읽을 줄 모르는 사람에게만 유익한 것이 아니라, 읽을 줄 아는 사람에게도 유익하다. 왜냐하면 많은 이들이 읽으면서도 자신이 무엇을 읽고 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147. 책을 읽고 싶을 때, 원수가 낙담이나 산만함을 불러일으키거나, “이 일은 크지 않으니 먼저 해치우고, 그 후에 마음 편히 읽으라”고 말하며 너를 방해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이런 말을 심어줌으로써, 그는 너를 독서에서 빨리 멀어지게 하려고 수공예에 대한 특별한 열의를 불태우게 한다. 그는 형제가 부지런히 읽고 그로부터 유익을 얻는 것을 볼 때, 그를 이 활동에서 멀어지게 하고 이런저런 핑계로 방해하려고 한다. 그를 믿지 말고, 마치 물샘, 즉 신성한 성경으로 나아가 그곳에서 마시며 정욕으로 타오르는 갈증을 해소하고자 갈망하는 사슴처럼 되라.

148. 주님께서 성경의 어떤 말씀을 읽고 깨닫게 해 주실 때, 그 말씀이 헛되이 지나가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러나 네 마음으로 그 말씀을 깊이 음미하고, 네 마음에 새기며, 지워지지 않게 네 기억 속에 간직하라. 이는 “주의 법규들로 내가 배우리이다”(시 118:16)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간직하였나이다”(시 118:11)라고도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149. 읽을 때는 열심과 성실함으로 읽으라. 각 단어에 깊은 주의를 기울이며, 단순히 페이지만 넘기지 말고, 필요하다면 게으름 피우지 말고 한 구절을 두 번, 세 번, 여러 번 읽어서 그 힘을 깨달으라.

150. 150 앉아서 읽거나 읽는 사람의 말을 들을 때는, 먼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라. “주 예수 그리스도여! 제 마음의 귀와 눈을 열어 주사,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뜻을 이루게 하소서. “내 눈을 열어 주시면, 주님의 율법에서 기적을 깨닫겠나이다”(시 118:18). 나의 하나님이시여, 주님께서 제 마음을 밝혀 주시리라 믿나이다.” – 항상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여, 그분께서 네 마음을 밝히시고 그분의 말씀의 능력을 네게 드러내시도록 하라. 많은 이들이 자신의 이성을 의지하다가 미혹에 빠졌으며, “자칭 지혜롭다 하다가 어리석어졌다”(롬 1:22).

151. 침묵을 견고한 성벽처럼 삼으라. 침묵은 너를 정욕보다 더 높은 곳에 세워 줄 것이기 때문이다. 너는 위에서 싸움을 벌일 것이요, 그들은 아래에서 싸울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침묵을 얻으라. 그러면 원수의 모든 화살이 너에게 해를 끼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결합된 침묵은, 그것을 얻은 자를 하늘로 들어 올리는 불타는 병거와 같다.

152. 침묵은 회개의 어머니요, 죄의 거울이며, 멈출 수 없는 눈물의 샘이요, 생각과 그 판단을 살피는 학교요, 금식의 확고함이요, 탐식의 장벽이요, 기도와 성경 읽기를 연습하는 장이요, 생각의 온유함, 근심으로부터 흔들리지 않는 안식처, 선하고 가벼운 멍에로서 이를 지는 자를 위로하고 지탱해 주는 것, 경건의 어머니, 정욕의 족쇄, 눈과 혀와 귀를 다스리는 고삐, 탐욕 없음의 포도주, 선한 열매를 맺는 그리스도의 풍성한 밭이다.

153. 주님의 발치에 앉아 오직 그분 한 분께만 매달려 침묵의 본보기가 된 마리아가 선택한 이 선한 몫을 너희도 얻으라. 이를 위해 주님께서 그녀를 칭찬하시며 말씀하셨다. “마리아는 선한 몫을 택하였으니, 그것이 그녀에게서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누가복음 10:42). 보라, 침묵이 얼마나 위대한지! 주님께서 친히 그것을 얻은 이를 칭찬하신다. 그러니 침묵을 얻으라. 그러면 “주님” (시 36:4)를 누리게 될 것이며, 그분의 발치에 앉아 오직 그분께만 매달리게 될 것이니, 그리하여 담대하게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내 영혼이 주님을 사모하나이다.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들어 주시나이다” (시 62:9).

154. 병은 갑자기 불치병이 되는 것이 아니라, 소홀함에서 비롯된 나쁜 시작을 통해 헤아릴 수 없는 손상으로 이어진다. 또한 영혼 속의 정욕은 사소한 원인에서 비롯되지만, 근절되지 않으면 영혼에 헤아릴 수 없는 혼란을 초래한다. 구리 표면의 녹색 녹이 점점 더 깊어지는 것을 보느냐? – 그러므로 소홀함 속에서 정욕이 영혼에 어떻게 생겨나는지 깨달아라. 녹을 깨끗이 닦아내지 않으면 얼룩을 없앨 수 없듯이, 육신의 본성을 완전히 꺾지 않으면 정욕을 스스로에게서 몰아낼 수 없다. 녹은 구리와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정욕도 마찬가지로 본성에 뿌리내린다. 녹이 슬기 전에 구리를 깨끗이 닦아내는 사람은 더 이상 그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으며, 영혼을 미덕으로 감싸는 사람은 위험에 처하지 않을 것이며, 은밀한 악의 침투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구리는 닦임으로써 마치 옷을 입듯 광택을 얻는다. 그리고 녹이 슬기 전에 깨끗이 닦아낸 구리는 오랫동안 사용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그 광택은 허상일 뿐이다. 그런 그릇은 부실하여 손상된 구리로 만든 것처럼 금방 망가진다. 마음도 이미 타락한 상태에서 미덕을 실천하려 하면 망설임에 빠지게 되고, 그 망설임으로 인해 다시 타락하게 된다.

155. 영혼이 물기 있는 육체와 결합함으로써 육적인 것이 되는 것처럼, 영혼이 썩지 않고 하나님의 씨와 하나 될 때 육체도 영적인 것이 된다. 또한 성 바오로는 영적인 사람과 육적인 사람을 구분한다. 그는 육적인 자들도 영혼을 가지고 있고, 영적인 자들도 육체를 가지고 있음을 알았으나, 사람 안에서 더 많이 차지하는 것이 우세하기 때문에, 그 우세한 것을 전체 사람을 지칭하는 이름으로 삼았다. 만일 사람 안에서 육체가 영혼보다 우세하면 그는 육적인 자이며, 만일 영혼이 우세하면 그는 영적인 자이다. 또 다른 곳에서도 같은 뜻을 전하며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육신은 영을 거스르고, 영은 육신을 거스르나니, 둘이 서로 대립하여 서로 원하는 대로 행하지 못하느니라”(갈 5,17). 복음서는 하늘나라가 힘써 찾는 자들에게 속한다고 말했습니다(마 11,12). 영은 본성을 신성한 차원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힘쓰는데, 이는 본성이 육체를 통해 세속적인 것에 끌리기 때문이다. 본성에 대한 영의 이러한 노력은 투쟁이며,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초심자들에게는 육체와 하나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고, 온전한 자들에게는 몸 자체를 영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함이다.

156. 만일 사람의 핵심이 불멸의 영혼이라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썩지 않음으로 돌리신 것은 결코 부당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잡한 인간의 본성을 강제로 억누르지 않으시고, 오직 영의 힘으로 죄로 타락한 육체를 마치 종처럼 썩지 않음으로 자발적으로 이끌도록 촉구하실 뿐이다. 불타는 도가니 속에서 구리도 불의 모습을 띠듯이, 육체도 썩지 않음과 융합될 때 영성화된다. 땅에 묻힌 그 구리는 녹에 갉아먹혀 흙으로 돌아가듯이, 정욕에 빠진 육체도 마찬가지이다.

157. 성도들은 육체를 어떻게 대하는가? – 육체의 본성은 안식을 요구하지만, 그들은 오히려 육체를 꺾고 괴롭히는 데 더 힘쓴다. 우리의 본성(타락하고 육적인)은 영광을 누리기를 원하지만, 그들은 비방을 받으면서도 위로를 얻으며 자신의 행실을 숨긴다. 육체의 본성은 음식을 맛보기를 원하지만; 그들은 금식으로 육신을 지치게 하고, 고행으로 쇠약하게 만든다. 본성은 결혼 생활에 기울어지려 하지만, 그들은 절제로 이를 억제하며, 정욕을 자극하는 모든 원인을 잘라낸다. 본성은 삶의 안락함을 좇지만, 성도들은 모욕을 당할 때 참아내고, 도둑질을 당할 때 너그럽게 견딘다. 전반적으로 그들은 주님의 말씀,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마태복음 16:24)에 따라 육신의 삶을 완전히 버립니다. 사도도 “땅에 있는 너희 지체를 죽이라”(골로새서 3:5)고 말하며 같은 가르침을 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피조물을 죽이라고 정죄하시는 것이 아니라, 영의 힘으로 그 안에 있는 부자연스러운 것을 죽임으로써 육적인 것을 소생시키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은 “육체의 지체를 죽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땅에 속한 지체들”을 죽이라 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 음행, 부정한 행위, 악한 정욕, 탐욕, 그리고 그와 유사한 모든 것들입니다. 육신적인 사람은 죄로 인해 비천해지고 타락하면서, 이와 같은 모든 것에서 쾌락을 얻습니다. 죄는 본성에 폭력을 가합니다. 그리하여 본성은 만족 대신 탐욕에, 갈증을 해소하기 위한 음주 대신 술주정에, 결혼 대신 음행에, 진리 대신 거짓에, 사랑 대신 원한에 빠지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은 본성에 얽매인 것이며, 사도는 이를 죽이라고 가르치면서, 손상된 본성을 제압하여 영의 통치 아래 있을 때 본성이 그 한계를 벗어나지 않도록 하라고 합니다. 또한 구세주께서는 수행자에게 “절름발이”나 “가난한 자”가 천국을 얻는 것이 더 낫다고 말씀하셨을 때(마태복음 18:8), 그분이 창조하신 지체를 잘라내라고 명하신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죄의 도구로 삼지 말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158. 그리스도를 위해 수련하고자 하는 자는 마귀에 맞서고 우리 구세주께 기쁨을 드릴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은 무장을 갖추어야 한다.

159. 다툼 대신, 겨자씨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본질적으로 하나이며 분리될 수 없는 삼위일체를 받아들여라. 겨자씨가 완전히 둥글고 마치 스스로 움직이는 것처럼, 네 믿음도 그렇게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되게 하라. 믿음의 움직임은 덕행이다. 어떤 이들은 믿음은 있으나 행함이 없으니, 이는 죽은 믿음이라 할 수 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기록된 대로이다(야고보서 2:20). 믿음을 가지고 믿음의 행함을 실천하는 자에게서야 비로소 믿음은 마치 스스로 움직이는 겨자씨와 같다. 그것을 얻어, 믿음 안에서 건강하고 무사하며, 우리 구세주의 계명에 대한 의지로 불타오르라. 그리하여 너도 그분으로부터 “잘했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 주인의 기쁨에 들어가라”(마태복음 25:23)는 말씀을 듣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의 행실로 인해 그를 ‘착한’ 자라 부르셨고, 믿음으로 인해 ‘충성된’ 자라 부르셨다.

160. 투구 대신 장차 올 복에 대한 소망을 받아들여라.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며, 사람의 마음에 떠오르지 않은 것들, 곧 천사들도 엿보기를 갈망하는 것들”(베드로전서 1:12; 고린도전서 2:9). 이 소망은 고난과 슬픔 속에서 네게 굳건한 위로를 주며, 이를 기억하는 것은 너를 기쁘게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된 순교자들은 이 소망을 귀담아들었으니, 그들은 창끝과 끔찍하고 다양한 고문, 뜨거운 불길 속에서도 이 간절히 바라는 소망을 눈앞에 두고 있었기에, 소망하는 바를 얻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기꺼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참아 냈습니다. 이 소망을 항상 끊임없이 눈앞에 두어, 소망하는 바에 대한 갈망이 네가 변덕스러운 어떤 것도 생각하지 못하게 하고, 나아가 네 안에 모든 선한 일을 행할 준비를 불러일으키게 하라.

161. 허리띠 대신,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완전한 사랑으로 허리를 묶으라. 사랑은 네가 달려가도 아무런 장애물을 만나지 않게 할 것이다. 허리를 묶은 자는 모든 것을 편리하고 순조롭게 지나가나니, 하물며 사랑으로 허리를 묶은 자는 어디를 가든지 편리하게 지나갈 것이다. “사랑은” 말씀하신 대로 “모든 것을 덮고, 모든 것을 참아 낸다”(고린도전서 13:7)고 하였으니, 그 사랑으로 충만했던 성 바오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가 약해지면, 내가 약해지지 않겠는가? 누가 유혹을 받더라도, 나 또한 타락하지 않는다” (고린도후서 11, 2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사랑의 연민과 힘을!

162. 신발 대신 겸손을 입으라. 신발이 발에 짓밟히듯이, 겸손을 얻은 자도 모든 이가 자신을 짓밟을 때 이를 세상의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 일로 여긴다. 형제여, 너도 겸손을 얻으라. 이 신발은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다. 그것은 너를 지켜 “네 발이 돌에 걸리지 않게” 할 것이다(시 90:12). 복된 다윗은 겸손을 얻어 “나는 사람이 아니라 벌레와 같다”(시 21:7) 말했다. 하나님께서 겸손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겸손을 얻은 자에게 얼마나 가까이 다가가시며 항상 그를 돌보시는지 보라. 기록된 바와 같이 “높은 자들 가운데 거하시며 겸손한 자들을 돌보시는” (시 112:5-6) 것이며, 또 “그의 눈은 가난한 자들을 돌보시나니” (시 9:29). ‘가난한 자’에 대해 들을 때, 재산을 잃은 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으라. 많은 왕들이 하나님께 기쁨을 드렸으나 , 많은 가난한 자들이 멸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난한 자’란 영적으로 가난한 자를 가리키니, “영적으로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마태복음 5:3)라고 기록된 대로이다.

163. 방패 대신, 거룩한 십자가로 자신을 지키며, 그것으로 자신의 온 몸과 마음을 인치라. 그리고 단지 손으로만 십자 성호를 긋는 것이 아니라, 생각 속에서도 그 십자로 네 모든 활동을 새겨라: 들어가고 나오는 것, 앉고 일어나는 것, 그리고 네 침상까지—그리고 어떤 봉사를 하든지, 무엇보다도 축복을 위해,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십자로 네 자신을 표시하라. 이것은 지극히 강력한 무기이니, 이 무기로 무장되어 있다면 그 누구도 결코 너에게 해를 끼칠 수 없다. 세상의 왕의 인장을 지닌 자에게도 아무도 해를 끼칠 수 없다면, 하물며 우리가 위대한 하늘의 왕의 인장을 지니고 있을 때, 누가 감히 우리와 맞설 수 있겠는가? 이 무기를 더욱 자주 사용하라, 형제여; 이는 그것이 원수의 화살을 강력히 막아내기 때문이다. 십자가로 자신을 보호하는 것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그러면 마귀가 당신을 위해 숨겨 둔 올가미를 끊어 버릴 것입니다. 기록된 바와 같이, “내가 걷던 이 길에, 그들이 나를 위해 올가미를 숨겨 두었도다”(시 141:4). 항상 십자가로 자신을 인치십시오. 그러면 악이 당신의 영에 닿지 않을 것입니다.

164. 활 대신에, 기록된 대로 “주께서 내 팔에 놋 활을 주셨나이다”(시 17:35)라고 기도하며 두 손을 펴라. 실로 원수들에 대한 놋 활은, 깨달음 가운데 드리는 기도에 펴진 두 손이며, 이는 활을 당긴 자가 명중하여 쏘아낸 화살과 같다. 만약 생각이 방황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활을 손에 쥐고 있으면서도 적을 겨냥하지 못하고 우연히 화살을 쏘아대는 사람과 같아질 것이다. 활을 손에 쥐고 있으면서도 적을 겨냥하지 않고 무작위로 화살을 쏘아댄다면, 그 공격이 네 적을 겁주겠는가? – 전혀 아니다. 오직 깨달음을 가지고 기도하며, 생각이 방황하지 않도록 막고, 자신이 누구이며, 누구 앞에 서 있는지, 그리고 누구와 대화하고 있는지 아는 사람만이, 그 기도가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며, 원수는 마치 심장에 화살을 맞은 것처럼 크게 고통받는다. 그때 영혼은 하나님의 은혜로 점점 더 성장하고, 원수는 하나님의 천사에게 쫓기며 바람 앞의 먼지처럼 도망칩니다. 이것이 바로 깨달음을 가지고 기도하며, 자신의 생각을 다스리며 용감하게 수련하는 자가 원수를 고통스럽게 하는 이유입니다.

165. 분별력을 가지고 기도하라(누구께, 무엇을 기도하는지 의식하며). 그리고 기도 중에 무언가가, 혹은 눈을 통해, 혹은 다른 어떤 이유로든 네 마음을 산만하게 한다면, 이것이 원수의 소행임을 알아라. 그리고 서둘러 기도를 끝내지 말고, 스스로를 책망한 뒤 다시 마음을 가다듬어, 네가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는지, 왜 구하는지 알 수 있도록, 또 헛된 말을 하거나 장황하게 말하지 않도록, 분별력을 가지고 기도하라. – 그리고 이것이 바로 사탄의 소행이니, 생각을 마치 무작위로 쏘아진 화살처럼 흩어지게 하여, 사람이 자신이 염려하는 일에 집중하지 못하게 한다. 왜냐하면 사탄은 사람이 기도를 계속하면, 비록 그가 수많은 죄를 지었더라도 그를 창조하신 분이 그의 기도를 들으실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 때문에 원수는 그를 온갖 생각에 빠지게 하여, 생각이 우박을 향해 쏘아진 화살처럼 날아가게 한다. 때로는 기도를 위해 두 손을 벌리고 있지만, 혀는 한 가지를 말하면서도 마음은 다른 것을 생각하고 상상하곤 하는데, 이는 원수가 비웃을 거리일 뿐이다. 그러므로, 나의 형제여, 항상 특히 필요하고 절실히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필요를 깊이 느끼며 하나님께 구하라. 여리고의 두 맹인을 보라. 그들은 주님께 “다윗의 아들이시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너희를 위해 무엇을 해 주겠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그들은 병든 몸과 가슴 아픈 탄식으로 “그들의 눈이 열리게 해 주십시오”라고 간구했습니다(마태복음 20:30). “이것저것 달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부족한 것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단 한 가지만을 간구했습니다. – 가나안 여인을 보십시오. 그녀가 주님을 따라가며 무엇을 외쳤습니까? – “주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제 딸이 귀신에 들려 심하게 괴로워하고 있습니다”(마태복음 15:22). 그녀는 자신의 마음의 병 외에는 다른 어떤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분께 나아온 모든 이들도 그분 앞에서 자신의 마음의 병을 털어놓지 않았습니까? 병자가 의사에게 가면, 자신이 어디가 아픈지 말하지 않습니까? 형제여, 당신도 하나님께 당신의 영혼의 병을 고백하십시오. – 믿음의 도움으로 마음의 눈으로 그분을 바라보아, 기록된 대로 “높고 높으신 보좌에 앉아 계신 분”(사 6,1)과 그분 앞에 서 있는 천사들과 대천사들의 군대를 보고, 그분의 자비 앞에 엎드려 그분께 간구를 쏟아내라. 먼저 네 죄를 고백하고, 그 후에야 그분 앞에서 네 말이나 네 슬픔을 아뢰어, 그분이 그분의 자비로 불쌍히 여기시고 네게 그분의 은혜를 아낌없이 부어 주시기를 구하라. 오, 영혼아! “네 믿음이 크도다. 네 뜻대로 되리라”(마태복음 15:28).

166. 영적인 눈이 밝아지고 항상 열려 있는 자들은, 자신의 힘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무적의 능력으로 악마의 유혹에서 벗어나게 됨을 정확히 알고 있다.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는 오직 마귀에 맞서 싸울 결심이나 주저함에만 있다; 그러나 그렇게 대항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그는 정욕에 대한 완전한 지배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만일 인간의 본성이 성령의 모든 무장 없이라도 마귀의 계략에 맞설 수 있었다면, 주님께서는 기도에서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한 자로부터 구하소서”라고 말하라고 명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러므로 악마의 불타는 화살에서 벗어나고, 무정(無情)의 경지에 이르며, 신성한 영광에 참여하고자 하는 자는 끝없는 열망으로, 온 마음과 온 힘을 다해 언제나 위로부터 오는 도움을 구해야 하며, 그 도움으로 정욕을 이기고, 그러한 굴욕적이지 않은 승리를 통해 “그곳 외에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하는” 순결의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

167. 흠잡을 데 없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세례 요한이 우리를 위해 들어가신 안식”(히브리서 6:20)에 들어가도록 힘쓰라. 장자들과 함께 하늘 교회에 이름을 올리도록 힘쓰라. 달콤함의 낙원이 있는 하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도록 힘쓰라. – 그러나 밤낮으로 눈물을 강물처럼 흘리지 않는다면, 이 놀라운 유산을 누릴 자격을 얻지 못할 것임을 알아두라. 마치 “매 밤 내 침상을 씻고, 내 눈물로 내 침상을 적시리라”(시 67,7)고 말씀하신 성인과 같이. “눈물로 파종하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라”(시 125:5)는 것을 모르느냐? 그러므로 선지자는 “나의 눈물을 묵과하지 마소서”(시 38:13)라고 말하며, 또 “주께서 내 눈물을 주님 앞에 두셨으니, 이는 주님의 약속과 같나이다” (시 55:9); 또 “내 눈물이 낮과 밤으로 나의 양식이 되었나이다” (시 41:4); “내 음료도 울음으로 희석하였나이다” (시 101:10). 지식을 바탕으로, 큰 슬픔 속에서, 마음 깊은 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순수한 열정으로 흘리는 눈물은 영혼의 양식이며, 영생을 위해 영혼을 기르는 하늘의 양식이다.

168. ‘창공’이라 불리는 이 보이는 하늘이 있는 것처럼, 그 위에는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또 다른 빛나는 하늘이 있는데, 그곳에는 천사들의 대열이 있다. 그곳에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닌 성막이 있으며, 그 안에서 거룩한 천사들이 그들의 봉사를 수행한다. 이 모든 것은 신성하고, 형언할 수 없으며, 빛을 발하며, 이 세상이 아니라 밤도, 악한 영도, 전쟁도 없는 다른 세상에 속해 있다. 그러나 누구든지 내면의 눈으로 하늘의 것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므로, 이를 위해 마치 어떤 휘장처럼 천장이 세워져, 그들도 그곳에서 모든 이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마음이 깨끗하고 정신이 거룩해진 자들, 즉 자신의 동포이자 동지들만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휘장이 걷히면, 의인들에게는 의인들을 기다리는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169. 고통스러운 영혼과 집중된 마음으로 오랫동안 드리는 기도는 하늘로 올라간다. 물이 평탄한 곳을 따라 흐르며 넓은 공간을 누릴 때는 높이 올라가지 않지만, 수로들이 아래에서 흐름을 막아 물을 압박할 때, 그 물은 억눌린 채 어떤 화살보다도 더 빨리 위로 치솟듯이, 마찬가지로 인간의 마음도 큰 자유를 누릴 때는 흩어지고 산만해지지만, 마음의 통회와 아픔이 그것을 억누를 때, 그 아름다운 억눌림 속에서 마음은 높이 솟아올라 하나님께 순수하고 간절한 기도를 올립니다. 슬픔을 담아 드리는 기도가 특히 잘 들린다는 사실은 선지자가 “내가 슬퍼하며 그분께 부르짖었더니, 그분께서 내 기도를 들으셨도다”(시편 119:1)라고 말함으로써 증언하고 있다. 그러니 양심을 자극하고, 죄를 기억함으로써 영혼 속에 슬픔을 일깨워, 그 기도가 들릴 만하고, 냉철하며, 깨어 있고, 그 외침으로 하늘에 닿을 수 있도록 합시다. 아무것도 고통스러운 감정과 슬픔만큼 우리로부터 나태함과 무관심을 몰아내지 못합니다. 그것들은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다시 자기 자신 안으로 돌아오게 합니다. 그렇게 슬퍼하며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 후에 자신의 영혼 속에 큰 위로를 안겨줄 수 있을 것이다. 마치 구름이 몰려오면 처음에는 공기를 어둡게 만들지만, 비가 내리고 구름이 그 안에 쌓인 수증기를 하나씩 잃어갈 때면 공기가 다시 맑고 청명해지듯이, 마찬가지로 영혼의 슬픔도 내면에 갇혀 있는 동안은 우리의 생각을 어둡게 하지만, 기도의 말과 눈물로 그 힘을 다 소진하고 밖으로 나오면, 그때 비로소 영혼에 큰 맑음을 가져다주며, 마치 어떤 광선과 같이 기도하는 이의 마음에 하느님의 도움에 대한 생각을 내려줍니다.

170. 산만하지 않게 기도하고 싶습니까? – 당신의 기도가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게 하십시오.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린 나무들이 아무리 천 배나 더 강한 바람을 맞아도 부러지지 않고 뽑힐 수 없는 것처럼, 그 뿌리가 땅속 깊은 곳에 단단히 박혀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는 마치 든든히 뿌리내린 것처럼 높이 뻗어 나가며, 어떤 생각의 시련도 그것을 흔들 수 없다. 이에 대한 본보기를 선지자가 우리에게 보여주며, 자신에 대해 “주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나이다”라고 말한다(시 129:1).

171. 나는 승리자들의 무기고를 둘러보며, 어떤 무기가 그것을 착용한 자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가져다주는지 깊이 살펴보았다. – 그곳에서 내 눈앞에 수많은 무기가 드러났는데, – 그 각각으로 눈부신 승리를 거둘 수 있다. 우선 나는 순수한 금식을 보았으니, – 이는 결코 무뎌지지 않는 검이다. 그다음에는 순결과 청결, 거룩함을 보았으니, – 이는 날카로운 화살이 악한 자의 심장을 꿰뚫는 활이다. 또한 은과 온갖 재물을 경멸하며 버리는 빈곤을 보았으니, 이는 악마의 교묘한 화살이 심장에 닿지 못하게 막아주는 이 갑옷이다. 거기서 나는 한 사랑을 보았으니, 이것이 방패이며; 평화를 보았으니, 이것이 단단한 창이라, 사탄은 이를 보고 떨며 도망친다. 나는 깨어 있는 경건함을 보았으니, 이것이 바로 갑옷이며, 기도를 보았으니 이것이 바로 갑옷이고, 의로움을 보았으니 이것이 바로 가벼운 전차임을 알았다. – 그러나 이 모든 무기를 살펴보며, 그 중 무엇이 가장 견고한지 헤아려 보니, 나는 겸손의 요새를 보았고, 그보다 더 견고한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어떤 적의 무기도 그것을 뚫을 수 없으며, 교활한 자도 그것을 공격하여 점령할 힘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네가 치르는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고자 한다면, 겸손의 요새 뒤에 피난처를 찾으라. 그곳에 숨어 이 성벽을 떠나지 마라. 그러면 포식자가 너를 사로잡지 못할 것이며, 교활한 자가 너를 치지 못하도록 다른 무기들에 전적으로 의지하지 마라.

 

7. 수행자들에게 주는 조언

1. 수도 생활의 시작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수도사는 하나님의 왕국 문 밖에 머물게 될 것이다. 수도사의 선한 삶의 시작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함은 수도사의 영혼을 어둡게 한다.

2. 수도사에게 주어진 선한 유산은 정절과 거룩함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를 갖추지 못한 수도사는 조상들의 유산을 잃게 된다.

3. 수도자에게 있어 수행이란 성경을 연구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며, 이를 실천하지 않는 수도자는 진정한 수행자가 아니다.

4. 수도사의 양식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며, 육체적인 양식은 수도사를 그리스도 앞에 서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배에 들어갔다가 아페드론으로 나간다”(마태복음 15:17).

5. 수도사의 발은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며 교회의 계단을 밟아 나가되, 무질서하게 집집마다 돌아다니지 말아야 한다.

6. 수도사의 조언은 분별 있는 자들과 나누되, 분별 없는 자의 조언은 그의 마음에 스며들지 않게 하라.

7. 시편과 찬송, 영적인 노래로 깨어 있는 수도사는 밤의 몽상을 쫓아내나, 자신의 선한 행실을 자랑하며 잠드는 수도사는 거미줄을 엮는다.

8. 용감한 수도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마귀의 올가미를 피한다.

9. 땅에 발을 디디고 땅을 향해 고개를 숙인 수도사는 모든 면에서 사탄처럼 행동한다(계명에 대한 저항, 교활함, 그리고 자기 만족).

10. 수도사의 생각은 언제나 선한 행실로 가득 차 있어야 한다. 수도사의 수행은 선한 생각이다. 수도사의 깨어 있음은 불순한 생각을 다스린다.

11. 수도사의 경작은 복음에 따라 열매를 맺는 선한 영혼이다. 이를 가꾸는 수도사가 그 열매를 가장 먼저 맛본다.

12. 수도사 안의 불멸의 힘은 십자가를 지는 무욕이며, 탐욕은 그들에게 해롭다. 이는 그들에게 천국의 문을 막기 때문이다.

13. 수도사에게 주어진 선한 선물은 정결함으로, 이는 엘리야와 함께 병거를 타고 그를 하늘로 승천시킨다. 정결함의 힘은 음식에 대한 절제이며, 탐닉하는 수도사는 자신의 육신을 더럽힌다.

14.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은 겸손의 높이로 뻗어 올라가는 생명나무이다. 이를 얻은 수도사는 선한 열매를 거둘 것이다.

15. 자신의 은사를 모든 사람에게 떠벌리는 수도사는 혐오를 불러일으키며, 주님으로부터 “너는 이미 네 상을 다 받았다”는 말씀을 듣게 될 것이다(마태복음 6:2). 그러나 이를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자는 은밀한 일을 주관하시는 주님으로부터 상을 받을 것이다.

16.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칠 때, 자만하지 말라, 수도사여. 그러나 주님께 기도하며 말하라. “주님, 주님의 것 중에서 주님께 바칩니다. 주님, 오직 주님께만 제 영혼의 구원을 구합니다.”

17. 깨끗한 마음으로 밤 기도를 드리는 수도사는 주님께서 들으시며, 낮에는 그를 낮처럼 밝게 하시고, 날마다 점점 더 밝게 보이게 하신다.

18. 수도사의 교만 속에는 주님께서 머무르지 않으시나, 그의 겸손함 속에는 성령께서 머무르시느니라.

19. 수도사의 히톤(직조된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은 언제나 더럽혀지지 않게 하라. 그런 수도사는 한밤중에 신랑과 함께 궁전에 들어갈 것이다.

20. 수도사여, 신랑을 맞이할 때 기름을 준비하라. 그때 등불에 부어 밝게 타오르게 할 것이 없다면, 너는 미친 처녀들과 함께 궁전 밖에 남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1. 수도사의 삶은 천사들을 본받아 죄를 태워 없애는 것이어야 하며, 회개하는 자의 끊임없는 선한 열매가 되어야 한다.

22. 수도사의 삶은 그의 모든 지체에 정욕을 죽이는 인장을 찍어야 하니, 세례 요한의 삶이 그에게 본보기가 되리라.

23. 악마의 폭풍은 수도사들에게서 물러가고, 천사의 고요함이 그들 가운데서 기뻐하게 하라. 악마의 폭풍이 닥칠 때, 수도사여, 네 성급함을 다스려라. 수도사의 삶은 언제나 온유와 인내의 옷을 입어야 하기 때문이다.

24. (하나님을 향한) 열정으로 불타는 수도사는 악마들을 쫓아내나, (교만한) 경쟁심으로 형제와 다투는 수도사는 마귀를 자기 곁으로 끌어당긴다.

25. 네 분노 속에 해가 지지 않게 하라. 그리고 화가 난 네 목구멍에서 터져 나오는 무질서한 외침이 형제들을 동요시키지 않게 하라.

26. 찬송을 듣는 것을 거절하지 말라. 이는 천사들의 찬송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마적인 구경거리의 소음은 피하라. 이는 악마의 유혹이기 때문이다.

27. 네 이마에는 항상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기를 바란다.

28. 깨끗한 마음을 가진 침묵은 수도사를 성령의 기름으로 기름 부어 준다.

29. 선한 성품은 형제 사랑을 낳고, 다툼을 쫓아낸다.

30. 주님과 하나 된 자는 결혼의 전당에서 수치를 당하지 않기 위해 자신을 마귀에게 넘겨주지 않을 것이다.

31. 수도자에게 뚫을 수 없는 방패는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천사들의 노래이며, 그에게 죽음은 노래보다 더 사랑스러운 잠이다.

32. 수도사에게 보물은 자발적인 가난이다. 그 가난을 입은 수도사는 신성하다. 하늘에서 네 보물을 모아라. 즐거움의 세월은 끝이 없으니.

33. 네 마음이 항상 신성한 경전에 몰두하게 하라. 네 문은 쇠빗장으로 잠그는 것이 아니라, 모퉁이 돌(맑은 정신으로 선포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로 막혀 있게 하라.

34. 기도하는 수도사의 얼굴은 경이롭게 변하며, 그로부터 비롯된 영적 기쁨의 흔적은 수많은 수도사들을 기쁨으로 이끈다.

35. 육신을 소홀히 여기지 않고 술을 좋아하지 않는 수도사는 마치 천사와 같이 된다.

36.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은 수도사의 영혼 속에서 빛나는 순결이며, 순결이 더럽혀지면 그의 얼굴은 가장 추악해진다.

37. 수도사에게 가장 나쁜 것은 죄에 빠지는 것이다. 죄는 마치 불이 짚을 태우듯, 그에게서 모든 선함을 갉아먹는다.

38. 세상을 버린 수도사는 그리스도의 대화 상대가 되나, 세속적인 일에 얽매인 자는 군주이신 그리스도께 기쁨을 드리지 못한다.

39. 재물을 탐하지 않는 수도사는 천국 왕국의 가장 충실한 전도자이며, 재물 탐욕에 시달리는 자는 비참하게 파멸한 사람이다.

40. 젊은 수도사에게 가장 큰 장식은 흠 없는 순결을 지닌 절제이다.

41. 수도사에게 보배는 순종이다. 이를 얻은 자는 주님께서 들으실 것이다.

42. 수도사는 선한 말을 내뱉고, 자신의 입으로 지극히 높으신 분의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

43. 수도사는 육신을 낮추고 하늘에 거하는 영혼을 높이기 위해 자발적으로 굶주림을 감내해야 한다.

44. 수도사는 진리의 말씀을 전할 것이며, 거짓은 그의 입에서 쫓겨나야 한다.

45. 거친 말을 듣더라도 성급하게 반응하지 말고, 겸손하라. 이는 네가 화해의 중재자가 됨으로써 평화를 위한 확실한 상을 받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기 때문이다.

46. 사자는 야생 당나귀들에게 두려운 존재이니, 수도사도 음탕한 생각에 대하여 그러해야 한다.

47. 금식 기간이 아닌 때에 금식을 허락하는 수도사는 마치 (자신이 거주하는) 기둥의 기초를 파헤치는 자와 같다.

48. 평원에서 먼지를 일으키는 회오리바람과 같이, 수도원에서 정욕적인 움직임을 부추기는 교만한 수도사도 그러하다.

49. 땅 위의 천사는, 정욕의 화살에 찔리지 않은 선한 수도사이다.

50. 끔찍한 추락을 당하지 않도록 교만에 빠지지 마라. 바울의 겸손을 본받아 그와 함께 상속자가 되라.

51. 모세의 온유함을 본보기로 삼아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네 돌 같은 마음을 물이 가득한 호수로 바꾸어 주실 것이며, 너는 그 유익함을 체험하고 찬양하며 외칠 수 있을 것이다. “주께서 물 위에서 나를 평안히 양육하셨도다”(시 22:2).

52. 겸손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깨닫고, 그것을 네 것으로 삼으라. 그것은 너를 하늘로 이끄기 때문이다. 겸손에 대한 좋은 상급, 곧 천국이 네게 주어졌으니, 그것을 소홀히 여기지 말라.

53. 젊은 수도사는 허영을 경멸하고 정절에 굳건히 서야 한다. 정절로 양육된 수도사는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신 새 묘목이다.

54. 금식은 수도사의 고삐이다. 이 고삐를 벗어던지는 자는 “제멋대로 달리는 말”(예레미야 5:8)이 된다. 젊은 수도사여, 배를 다스리지 못하면 육신의 죄를 피할 수 없다.

55. 밤낮으로 부지런히 기도에 전념하는 깨어 있는 수도사는 자신의 가슴을 치며 눈물을 흘리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기름을 자신에게 부어낸다.

56. 땅 위의 생명나무는 정욕에 사로잡히지 않고 천사의 삶을 받아들인 수도사이다.

57. 마귀를 대적하는 가장 날카로운 칼은 수도사의 입에 담긴 시편이다.

58. 엘리사의 마른 나무는 깊은 곳에서 쇠를 끌어올렸으니, 수도사의 몸이 마르게 되면 깊은 곳(정욕)에서 영혼을 끌어올린다. 수도사의 금식은 쾌락에 대한 갈망을 말려버린다. 수도사에게 금식의 끝은 죽음이며, 죽기 전까지 그를 떠나지 않게 하라.

59. 정욕을 향한 칼은 수도사의 기도 속 깨어 있음이다. 수도사에게 기도의 한계는 정해져 있지 않으니, 그러므로 그는 언제나 주님을 찬양할지어다.

60. 분노의 날에 자신의 혀를 다스리지 못하는 수도사는 정욕을 제어하기도 쉽지 않다. 분노하는 수도사는 자신의 영혼을 죽이고, 날카로운 화살로 이웃을 상처 입힌다.

61. 유혹이 닥치기 전에 스스로 무장하라. 그러면 유혹 속에서 지혜롭게 대처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62. 재물을 모으지 말고, 육신을 방종하지 말라. 좁고 비좁은 길은 그 길에 도움이 되지 않는 모든 것을 제쳐 두기를 요구한다. 바울을 본받아, “모든 것을 손실로 여기고 그리스도를 얻으라”(빌 3,8)는 말씀을 실천하라. 부유함과 육체의 쾌락은 천국의 문으로 들어갈 수 없다. 그러니 탐욕을 버리고 절제를 사랑하라. – 그러면 그 문 밖에 머물지 않을 것이다.

63. 수도자의 내면에서 타오르는 불은 술을 마심으로써 지펴진 쾌락 추구이다. 그리스도는 끊임없이 흐르는 샘이시니, 그분으로부터 물을 길어 그 악취 나는 불길을 꺼라.

64. 악한 말을 내뱉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가시덤불을 키우는 포도원이 될 것이다. 이웃과 대화할 때는 가장 기분 좋은 말만 사용하라. 항상 쓴맛 없는 꿀을 가져오는 벌을 본받으라.

65. 경솔한 수도사는 생각의 폭풍에 휩쓸리나, 자제력을 갖춘 자는 복음의 말씀으로 자신을 굳건히 한다. 그러나 부주의한 수도사는 생각에 짓눌리니, 마치 밀이 가시덤불에 눌리는 것과 같다.

66. 형제에 대한 악한 말을 마음에 품지 말라. 그래야 기도할 때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우리도 용서하듯이” (마태복음 6,12)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67. 수도자에게 있어 칭찬의 면류관은 평화와 거룩함이다. 이를 얻은 자는 “주님을 뵙게 될 것”이다(히브리서 12:14).

68. 수도사의 지혜는 어떤 수고를 감당해야 하는지를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현명하게 감당하는 데 있다. 그런 사람은 말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행실로 깨우쳐 준다.

69. 지혜로운 수도사는 마귀의 무리와 싸우면서도 그들의 화살에 상처를 입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힘을 얻어 뱀의 머리를 부순다.

70. 수도사에게 가장 귀중한 재산은 자비의 빛으로 비추어지는 순결이다. 이를 얻고 지켜낸 자는 의심할 여지 없이 혼인의 전당에 들어갈 것이다.

71. 지극히 높으신 분의 계명을 지키고, 성부들의 규율을 보존하라. 그리하면 너는 천국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

72. 방종하고 거만한 수도사는 유혹과 마귀의 올가미에 빠지겠으나, 온유한 자에게는 평화와 거룩함의 면류관이 주어지리라.

73. 과식하는 수도사는 유혹과 밤의 몽상에 빠지겠으나, 금식하는 자의 침상은 더럽혀지지 아니하며, 잠은 평온하리라.

74. 하나님을 경외하는 수도사는 해로운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니, 주님께서 그를 지키시기 때문이며, 죽는 날 그에게 화해의 제물이 있을 것이다.

75. 수도자의 온유함은 위대한 업적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유혹 속에서 시험을 통해 드러난다. 고난 속에서 굳건히 지켜지는 수도자의 인내는 그에게 부끄러움 없는 소망을 얻게 한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이를 지키기를 바라노니,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마태복음 10,22). 인내하라, 수도사여. 인내의 시간은 짧으나, 기쁨의 세기는 끝이 없으니.

76. 수도사의 찬송은 끊이지 말아야 한다. 세라핌들이 쉬지 않고 찬양하기 때문이다. 수도사여, 네 입술에는 너를 덮치는 유혹의 짐을 덜어주는 영적인 찬송이 있기를 바란다.

77. 순종하는 수도사는 선한 담대함으로 십자가 곁에 서리라. 십자가 위에는 죽기까지 순종하셨던 주님께서 계시니, 그 죽음은 십자가의 죽음이시니라.

78. 수도사의 목소리가 기도의 온유함 속에서 변함없는 입술을 통해 하나님께 진심으로 올라가게 하소서.

79. 땅 위의 참된 빛은 혀로 비뚤어지지 않은 수도사이다. 그런 자로서 죄로 자신의 몸을 더럽히지 않은 이는 그리스도의 친구이다.

80. 만일 경외심이 수도사를 감싸면, 그는 무너뜨릴 수 없는 기둥과 같다. 경외심을 얻지 못한 수도사는 적들에게 쉽게 사로잡힐 것이다.

81. 이 땅에서 순수한 빛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수도사이다. 왜냐하면 “모든 악의 뿌리인 재물 사랑”(딤전 6:10)은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이다.

82. 수도사가 험담으로 형제들의 육신을 갉아먹는 것보다 차라리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편이 낫다.

83. 금은 불타는 용광로에서 시험을 받듯이, 수도사는 수많은 수도자들 가운데서 그 진가가 드러난다.

84. 수도사의 손은 원수를 물리치기 위해 경건하게 하느님께 뻗어져야 하니, 손으로 십자가를 형상화하여 아말렉을 물리친 모세를 본받아야 한다.

85. 십자가에 못 박혀 매일 죽어가는 수도사에게 풍성한 은총이 있나니, 천사들이 그를 기뻐하며 천국으로 맞아들이느니라.

86. 정욕을 다스리는 고삐는 금식이며, 정욕을 죽이는 것은 자선과 함께하는 기도이다.

87. 육신의 정욕을 초월한 수도사는 눈보다 더 하얗다. 오직 그리스도만을 갈망하는 그는, 자비의 날에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면류관을 씌우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88. 속삭이는 수도사는 수많은 수도사들을 쫓아내고 친구들을 흩어지게 한다. 뱀은 속삭임으로 하와를 낙원에서 쫓아냈으니, 속삭이는 수도사는 그와 같으니, 이웃의 영혼을 파멸시키고 자신의 영혼도 구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89. 마음속으로 지혜롭게 노래하는 자는 하나님께 들릴 것이다. 수도사의 영혼은 산만하지 않은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세상과 단절하고 그리스도와 결합한 그에게는 모든 세속적인 것을 무시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90. 영적으로 향기로운 수도사의 영혼은 뱀의 악취를 맡지 않도록 자신의 후각을 거룩하게 막아, 그 안에서 정욕의 더러움을 맡지 않게 한다. – 또한 마음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있다면, 그에게는 정욕의 더러움이 닿지 않을 것이다.

91. 항상 순수하고 진실하게 행동하도록 힘쓰고, 마음속으로는 한 가지 생각을 품고 입으로는 다른 말을 하지 말라. 이는 교활함이기 때문이다.

92. 진실을 사랑하고 거짓말하지 마라. 거짓말은 마귀에게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93. 악으로 악을 갚지 말라. 그러나 누군가 네게 악을 행하면, 그를 용서하라. 그래야 하나님께서도 너를 용서하실 것이다.

94. 원한이 네 마음을 사로잡는다면, 온 마음을 다해 그 형제를 위해 기도하라. 그러면 원한이 네게서 물러날 것이다.

95. 질투라는 정욕이 네 마음속에 들어오지 못하게 주의하라. 그래야 마귀가 너를 산 채로 삼키지 못할 것이니, 차라리 고해성사를 보고, 하나님께서 너를 그러한 위험에서 건져 주시도록 기도하라.

96. 죄를 짓는 사람을 보게 되면, 그의 죄를 퍼뜨리지 말고, 그를 정죄하지 말고, 그에게 증오를 품지 마라. 그래야 너도 같은 죄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라. “나는 그보다 더 나쁘다. 오늘은 그가 죄를 지었지만, 내일 아침에는 내가 죄를 지을 것이다.”

97. 또한 악령들은 침묵과 금식, 밤샘 기도, 절제, 겸손, 기도, 눈물, 그리고 그 밖의 수도자의 미덕들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알아두라.

98. 하나님께서 네게 눈물과 회개하는 마음, 그리고 무욕을 베풀어 주시기를 원한다면, 끊임없이 죽음과 네 무덤을 떠올려라.

99. 만일 마귀에게 현혹되어 크든 작든 죄를 짓게 되더라도, 절망에 빠지거나 스스로를 파멸로 내몰지 말고, 고해와 회개에 의지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너를 외면하지 않으실 것이다.

100. 도시로 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마라. 죄악된 것을 보지 않는다면, 너는 깨끗하게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101. 취할 정도로 포도주를 마시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네 마음이 광란처럼 쾌락으로 치닫게 될 것이다.

102. 하루에 두 번씩 먹지 마라. 그래야 네 몸이 둔해지지 않고, 그와 함께 정욕도 강해지지 않을 것이다.

103. 잠을 많이 자지 말고, 끊임없이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여 “새가 그물에서 벗어나듯” (잠언 6,5) 피하게 하라.

104. 거짓말에 빠지지 않도록 말을 많이 하지 마라.

105. 필요 이상으로 아무것도 얻지 말고, 적당한 풍요로움 속에서 살아라.

106. 침묵하며, 네 할 일을 하라.

107. 온 힘을 다해 혀와 배를 다스려라.

108. 겸손한 지혜를 지니고, 아는 척하지 말고 무지한 사람처럼 행동하라.

109. 모든 사람에게 온유하게 대하라.

110. 수다와 웃음은 많은 해를 끼치니, 분별 있는 사람은 침묵을 지킨다.

111. 항상 죽음의 모습을 눈앞에 두라. 그러면 유혹이 결코 너를 넘어지게 하지 못할 것이다.

112. 저녁과 아침에 네가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스스로 점검하라. 그러나 이는 (끊임없이 자신을 살피고 마음을 관찰하는) 노력 없이는 불가능하다.

113. 네 모든 행위에 대해 그분께 답변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라.

114. 매일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오늘 어떤 정욕을 이겨냈는가?

115.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그 누구도 판단하지 않으며, 오히려 자신을 더 잘 지키고 사소하고 하찮은 악으로부터조차 보호한다.

116. 자신의 육신이 부활할 것을 믿는 사람은, 그 육신을 더러움에서 깨끗하게 하려고 애쓴다.

117.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에 굳게 서서, 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지키고 실천하라. 그리고 양심의 가책을 무시하지 말고, 오히려 양심에 주의를 기울여 그것이 네 수호자가 되어, 네가 어떤 잘못에 빠지는지 즉시 알려주게 하라. 양심이 너를 떠나지 않게 하고, 네가 원수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하라.

118. 수도사의 마음이 자기 의지를 떠나 하나님께로 향하기 시작할 때, 먼저 낙담이 그를 덮친다는 것을 알아두라. 그러한 낙담을 없애는 데는 기도와 하나님에 대한 끊임없는 묵상이 도움이 되며, 이 묵상은 절제로 지탱되고, 절제는 육체적인 수고로 지켜진다. 이것이 바로 “생명으로 이끄는”(마태복음 7,14) 좁은 길이다.

119. 만일 네가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장차 올 왕국을 얻기 위해 힘쓰며, 네 죄로 인해 수고하겠다고 서약했다면, 심판과 영원한 고통을 기억하며, 이 세상에서 떠날 날을 두려움으로 기다려라.

120. 돈이나 재산, 부모, 세상의 명예, 친구, 친척, 형제, 그리고 이 땅의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마라. 이것들에 대해 근심하거나 염려하지 말고, 모든 유대를 끊고, 걱정을 내려놓고, 이를 미워하며, 심지어 자신의 육체마저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내어, 근심 없이 게으름 없이 그리스도를 따르며, 항상 하늘을 바라보고 거기서 도움을 기다려라. 죽음은 갑작스럽고 심판은 가까우니라. 그리고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는 화가 있을지어다!

 

성 요한 클리마코스

 

그에 대한 간략한 소개

성 요한의 부모, 출생지, 그리고 그가 시나이 수도원에 입회하기 전의 사정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저술들을 통해 그가 훌륭한 교육을 받았음을 알 수 있으나, 하느님과 함께 머무르고자 하는 열망이 그를 세속과 그 명예를 버리고, 당시 현명한 성부들로 유명했던 시나이 수도원에 은둔하게 만들었다. 그는 16세에 그곳에 입문하여 마르티리우스 장로의 가르침과 지도에 전념했으며, 4년 후인 20세에 그 장로로부터 수도자 서원을 받았다. 그가 장로에게 보인 순종은 너무나 컸기에, 마치 자신의 의지가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으며; 그러나 형제들에 대해서는 소박하고 겸손하게 행동하며, 누구에게도 우월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스승과 19년을 함께 지낸 후, 성 요한은 스승을 잃고, 그의 죽음 이후 홀로 살기 위해 은둔처로 ‘폴라’라고 불리는, 수도원에서 5 스타디온 떨어진 곳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40년을 살았다. 은둔 생활은 평화롭게 흘러갔으며, 엄격한 수행을 실천했으나, 그는 이를 숨기는 법을 잘 알고 있어 특별한 점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이면 그는 수도원에 와서 성당에서 예배를 드리고, 그리스도의 성찬에 참여하며, 그 후 성스러운 교부들과 대화를 나누고 그들의 지침을 통해 자신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곤 했다. 이러한 대화 자리에서, 모임에서, 성 요한도 종종 말을 하곤 했는데, 당연히 그의 말은 다른 이들의 말보다 돋보일 수밖에 없었다. 겸손한 이들은 이를 기뻐했으나, 분별력이 부족한 일부는 그 현명한 대화가를 허영심에 빠진 사람으로 의심하기 시작했고, 그러한 의심을 감추지 못했다. 그때 성 요한은 약한 이들을 유혹하지 않기 위해 완전한 침묵을 지키기로 결심하고, 일 년 내내 이를 엄격히 지켰으며, 결국 자신을 그러한 고행에 몰아넣었던 바로 그 이들의 간절한 간청에 따라 침묵을 풀었다. 40년 동안 침묵 속에서 생활한 후, 성 요한은 모든 형제들의 공동 바람에 따라 시나이 수도원의 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이 영적 양떼를 4년 동안 이끌고 난 후, 그는 다시 은둔 생활로 돌아갔으며, 이는 그가 563년에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의 일이었습니다. 라이프 수도원의 수도원장(그와 같은 이름을 가진)의 요청에 따라, 성 요한은 영적 사다리를 저술했는데, 이 책에서 30개의 ‘말’을 통해 영적 완성에 이르는 단계를 묘사하고 있다. 그는 『영적 사다리』에 ‘목자에게 보내는 글’을 덧붙여, 영적 목자의 의무를 설명하였다. 『영적 사다리』의 30개 장 중에서 다음 제목들로 발췌해 본다:

1. 수행의 일반적 원리

2. 회개에 대하여

3. 미덕과 정욕, 그리고 정욕과의 투쟁에 관하여

4. 여덟 가지 주요 정욕과의 투쟁: 가) 음란, 나) 분노, 다) 낙담, 라) 교만

5. 무정욕에 대하여

 

성 요한 사다리꾼의 수행 교훈

 

1. 수행의 일반적 원리

1. 하느님께서는 자유 의지를 부여받은 모든 이에게 생명이자 구원이시다.

2. 자신을 하느님께 바친 자는, 물질적이고 덧없는 육신을 입고 있으면서도 무형의 존재들의 삶과 상태를 본받아, – 언제나, 어디서나, 어떤 일을 할 때에도 오직 하느님의 말씀과 계명만을 따르며, – 언제나 지치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며 본성에 대한 억제와 책망을 행하며, – 항상 죽음을 생각하며 영혼으로 슬퍼하고 고통받으며, – 세상이 칭송하는 물질적 복을 멀리하고, 이 세상 너머의 복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3. 세속적인 삶을 열심히 버린 모든 이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미래의 천국을 위해서이거나, 자신의 수많은 죄 때문이거나, 아니면 하나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만일 그들이 이러한 의도 중 어느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그들이 세상에서 물러난 것은 무모한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선한 모범자는 그들의 행보가 어떻게 끝날지 지켜보고 계신다.

4. 우리가 이집트를 떠나 파라오로부터 도망치고자 할 때, 우리 역시 어떤 모세, 즉 하나님께 나아가며 하나님을 대변해 줄 중보자가 필요하다. 그는 행함과 이성의 한가운데 서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두 손을 들어 올려, 그의 인도하심을 따라 우리가 죄의 바다를 건너고 정욕의 아말렉을 이길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다.

5. 육신을 지닌 채 하늘로 올라가려 시도하는 모든 이에게는, 진실로 자기 절제(자신을 억누름)와 끊임없는 자기 고행(자발적인 결핍)이 필요하다. 특히 금욕의 시작 단계에서는, 쾌락을 좇는 우리의 성품이 정화되고 무감각한 마음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따뜻해질 때까지 더욱 그러하다. 왜냐하면 이 고행에는 진실로 수고와 위대하고 은밀한 고통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 이 격렬하고 쾌락을 탐하는 개가 절제되고 사랑이 넘치는 마음이 될 때까지는 말이다. – 그러나, 정욕에 사로잡히고 연약한 이들이여! – 온유한 마음을 갖자. 그리스도 주님께 우리의 연약함을 고백하며, 확고한 믿음으로 그분께 그것을 내밀어 오른손처럼 의지하면, 반드시 그분의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니, 비록 우리의 자격을 넘어서는 도움이라 할지라도, 오직 우리가 항상 자신을 겸손의 깊은 곳으로 낮추기만 한다면 말이다.

6. 이 수행에 나서는 자들은 견고한 기초를 다지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것을 경멸하며, 모든 것을 비웃고, 모든 것을 떨쳐내야 한다. 다음의 세 기둥으로 이루어진 기초가 좋다: 악의를 품지 않음, 금식, 그리고 정절.

7. 확고한 시작(결심)은 비록 우리가 나중에 약해지더라도 의심할 여지 없이 우리에게 유익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전에 용감했던 영혼이 약해지더라도, 과거의 열정을 날카로운 무기처럼 떠올림으로써 상처를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나태함으로 인해 이런 식으로 스스로를 여러 번 다시 일으켜 세우곤 했다.

8. 영혼이 스스로를 배신하듯 변절하여, 행복하고 갈망하던 열정을 잃어버렸을 때, 그 열정을 잃게 된 원인을 부지런히 탐구해야 한다. 그리고 그 원인에 온 힘을 쏟고 온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예전의 열정은 그것이 빠져나간 바로 그 문을 통해서만이 되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9. 금욕의 시작 단계에서는 의심할 여지 없이 고생과 자기 강압, 그리고 슬픔 속에서 덕행을 실천하지만, 그러나 익숙해지면 그 안에서 슬픔을 느끼지 않게 되거나, 느낀다 해도 미미해집니다. 그리고 우리의 육신적인 계략이 열정의 불길에 의해 정복되고 사로잡힐 때, 비로소 우리는 온전한 기쁨과 갈망, 그리고 신성한 불꽃으로 그 미덕들을 실천하게 됩니다.

10. 평신도들이 나에게 물었다. “우리가 아내와 함께 살며 세속적인 걱정들에 얽매여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가장 완전한 기독교인의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 나는 그들에게 대답했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모든 선한 일을 하십시오; 누구도 정죄하지 말고, 도둑질하지 말고, 누구에게도 거짓말하지 말고, 누구 앞에서도 교만해지지 말고, 누구에게도 증오를 품지 말고, 교회 모임을 빠뜨리지 말고, 궁핍한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누구도 유혹하지 말고,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지 말고, 아내들에게 충실하십시오. – 그렇게 행한다면, 천국에서 멀지 않을 것이다.

11. 기쁨과 용기를 가지고 이 선한 업적에 착수합시다. 우리의 원수들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그들은 비록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 영혼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려움으로 인해 그 얼굴이 변한 것을 알아차리면, 우리가 겁을 먹은 것을 보고 더욱 격렬하게 우리를 향해 무장할 것입니다. 그러니 과감히 그들에 맞서 무장합시다. 용감한 투사와는 아무도 싸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12.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섬기기를 원하는 자들은 무엇보다 먼저 영적 지도자들의 도움과 자신의 분별력을 통해 자신에게 적합한 장소와 삶의 방식, 길과 훈련을 선택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공동체 생활이 모든 사람에게 유익한 것은 아니며, 모든 사람이 침묵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각자는 자신의 자질에 맞는 길이 무엇인지 살펴봐야 한다.

13. 모든 수도 생활은 세 가지 주요한 생활 방식과 수행의 형태에 담겨 있다. 즉, 수행자의 은둔과 고독 생활이거나, 한 사람 또는 기껏해야 두 사람과 함께하는 침묵 생활이거나, 마지막으로 공동 생활 속에서 인내하며 머무르는 것이다.

14.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한 자, 장차 올 왕국을 진정으로 갈망하고 찾는 자, 자신의 죄에 대해 진실한 슬픔을 가진 자, 심판과 영원한 고통에 대한 기억을 진정으로 마음에 새긴 자, 이 생의 끝을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자는, 그 사람은 더 이상 일시적인 어떤 것도 사랑하지 않을 것이며, 더 이상 재물과 소유물, 이 세상의 명예와 영광, 그리고 세상의 그 어떤 것에도 헛된 분주함을 보이며 신경 쓰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이 세상에 대한 모든 근심을 버리고, 심지어 자신의 육체마저 미워하여, 벌거벗은 채로 근심과 나태함 없이 그리스도를 따르며, 끊임없이 하늘을 바라보고 거기서 도움을 기다릴 것이니, 이는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나이다” (시편 62:9), 그리고 또 다른 영원히 기억될 분의 말씀대로: “주여, 나는 주님을 따르는 데 지치지 않았으며, 사람의 안식일도 원하지 않았습니다” (예레미야 17:16).

15. 모든 것을 버린 우리가 다시금 같은 일에 신경 쓰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이것이 바로 뒤로 물러서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받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16. 거의 모든 계명을 이행한 그 청년에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들어보라.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너 자신도 가난한 자가 되어 다른 이들에게서 자선을 받도록 하라” (누가복음 18:22, 마태복음 19:21).

17. 우리가 좁은 길을 걷는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은 넓고 넉넉한 길에서 방황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경계하자. 다음이 바로 좁은 길의 진정한 모습이다: 배고픔을 참는 것, 밤새도록 서 있는 것, 물을 적당히 마시는 것, 빵을 적게 먹는 것, 정화되는 음료, 모욕, 조롱, 욕설, 자기 의지를 꺾는 것, 공격에 대한 인내, 경멸을 받을 때 불평하지 않기, 무거운 괴로움을 견디기 – 즉, 모욕을 당할 때 용감하게 견디고, 비방받을 때 분개하지 않으며, 비난받을 때 화내지 않고, 모욕당할 때 겸손해지는 것이다. 여기에 제시된 길의 궤도를 걷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에게 천국이 있느니라”(마태복음 5:3–12).

18. 어떤 것에 대한 집착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을 잃고 나면 마음이 슬퍼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19. 이 피난처(세상을 버림)는 구원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재앙의 원인이 되기도 하는데, 이 마음의 바다를 건너는 이들은 이를 알고 있다. 그러나 심연에서 구원받은 자들이 바로 그 피난처에서 익사하는 모습은 참으로 안타까운 광경이다.

20. 세상에서 물러났으면, 세상에 손을 대지 마라. 정욕은 다시 돌아오기 쉬우니.

21. 너를 넘어지게 할 기회를 주는 곳들은 마치 채찍처럼 피하라. 우리가 금단의 열매를 보지 않을 때, 그것을 그리 강하게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22. 롯을 본받으려 노력하고, 그의 아내는 본받지 말자. 왜냐하면 영혼이 떠나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면, 힘을 잃은 소금과 같아져 움직이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집트에서 돌이킬 수 없이 도망쳐라. 그곳으로 마음을 돌린 자들은 예루살렘, 즉 무욕의 땅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23. 네 죄의 짐을 벗어던지는 데 도움을 줄 수 있고 기꺼이 돕고자 하는 이를 네 아버지로 삼으라. 네 어머니는 너를 더러움에서 씻어 줄 수 있는 회개의 마음이라. 네 형제는 하늘을 향한 열망에서 함께 일하고 경쟁하는 동역자라. 떼어 놓을 수 없는 동거자로는 죽음에 대한 기억을 삼으라. 네 마음의 탄식이 네 사랑스러운 자녀가 되게 하라. 네 몸은 네 종이 되게 하고, 영혼이 떠날 때 네 친구가 된다면 네게 유익할 수 있는 하늘의 세력을 네 친구로 삼으라. “이들”은 “주님을 찾는 자들”이다(시 23:6).

24. 세상에서 물러나면서, 우리는 위안과 허영의 유혹이 없고 겸손한 곳을 거처로 선택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정욕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25. 한쪽 눈으로는 하늘을, 다른 쪽 눈으로는 땅을 바라볼 수 없는 것처럼, 생각과 몸으로 세상과의 모든 유대를 끊지 않은 사람은 영적 재앙을 피할 수 없다.

26. 선하고 건전한 품성은 많은 수고와 노력으로 얻어지지만, 오랜 노력으로 얻은 것을 순식간에 잃을 수도 있다. “선한 습관은 악한 말을 썩게 하기 때문이다”(고린도전서 15,33).

 

2. 회개에 대하여

1. 회개는 세례의 갱신이다. 회개는 양심의 정화이다. 회개는 삶을 바로잡겠다는 하나님과의 언약이다. 회개는 과거의 죄와 정반대되는 선한 행실을 통해 주님과 화해하는 것이다. 회개는 자기 비난의 마음이며, 외부의 염려에서 자유로운 자기 돌봄이다. 회개는 소망의 딸이며, 절망의 배척이다.

2. 불법의 구덩이에 빠진 우리로서는, 겸손의 심연에 몸을 담그지 않는 한 그곳에서 건져 나올 수 없다.

3. 회개하는 자들의 꺾인 겸손은 한 가지이며, 여전히 자신의 죄에 빠지는 자들의 양심의 가책은 또 다른 것이며,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온전한 자들에게 임하는 겸손의 복된 풍요는 또 다른 것이다. 두 번째(겸손의 종류)의 징표는 모욕을 온전히 참는 것이다. – 예전의 습관은 종종 (그 습관을 뉘우치며) 울고 있는 이들조차도 괴롭힌다. 그리고 이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 무엇이, 어떻게 타락으로 이어지는지는 영혼에게 어둡고 완전히 헤아릴 수 없는 일이다. 그중 어떤 것은 게으름 때문이고, 어떤 것은 가정 관리의 소홀함 때문이며, 어떤 것은 하나님의 외면 때문인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어떤 이가 내게 말하기를, 가정 관리의 소홀함으로 인해 우리에게 닥치는 타락에서는 우리가 그로부터 빨리 돌아올 수 있게 된다고 했다. 우리를 그 타락에 내어주시는 분께서 슬픔의 악마가 우리를 오랫동안 붙잡아 두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4. 상처가 아직 새롭고 뜨거울 때는 쉽게 치유되지만, 오래되어 방치되고 방치된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으며, 치유되기 위해서는 많은 수고와 절개, 약재 뿌리기, 소작 등이 필요합니다. 많은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낫지 않게 되지만,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태복음 19,26).

5. 죄에 빠지기 전에는 악마들이 하나님을 사람을 사랑하시는 분으로 묘사하지만, 죄에 빠진 후에는 접근하기 어려울 정도로 엄격한 분으로 묘사한다.

6. 타락한 후, 죄가 사소하다고 속삭이며 “그것만 하지 않으면 되고,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말하는 원수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종종 작은 선물로도 심판자의 큰 분노를 누그러뜨리기도 했습니다(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7. 진정으로 자신의 죄 사함을 확신하고자 하는 자는, 비록 그날에 어느 정도 선행을 했다고 해도 울지 않는 날은 모두 헛된 날로 여긴다.

8. 죄를 인해 울어야 할 사람 중 누구도 이에 대한 열정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며, “내 생의 마지막(죽음의 순간)에 용서받았다는 소식을 듣게 될 것이다”라는 허황된 기대로 스스로를 속여서는 안 된다. 알 수 없는 일은 확실하지 않다. “나를 위로해 주십시오”라는 소식으로, “그 소식이 없이는 여기서 떠나기도 전에 쉬게 해 주십시오”(시 38:14).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속박이 풀린다”(고린도후서 3:17); 헤아릴 수 없는 겸손이 있는 곳에는 속박이 풀린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없는 자들은 스스로를 속이지 말라: 그들은 묶여 있다.

9. 세상에 사는 자들, 오직 그들만이 이 깨달음에서 멀어져 있다. 그러나 그들 중 자선을 실천하는 이들은, 떠나는 순간에 이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유익한지 깨닫게 될 것이다.

10. 자기 자신만을 위해 울부짖는 자는 다른 이의 울음이나 넘어짐, 혹은 책망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 짐승에게 상처를 입은 개는 그 상처로 인한 고통 때문에 오히려 그 짐승에게 더욱 격노하여, 억제할 수 없이 광란하며 덤벼든다.

11. 양심이 더 이상 우리를 책망하지 않는 것이, 마치 악에 눌려 꺾인 탓인지, 아니면 깨끗해졌기 때문인지 깊이 생각해 보자. 타락 속에서 해방의 징표는 언제나 자신을 빚진 자로 인정하는 것이다.

12. 우리 모두, 특히 타락한 자들은 경청하여, 경건하지 않은 오리겐의 해로운 가르침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지 않도록 합시다. 그 사악한 가르침은 주로 하나님의 인간 사랑을 내세웠는데, 이는 쾌락을 좇는 자들의 마음에 매우 잘 맞았습니다.

13. 수행의 맨 처음에, 우리는 우리의 선한 재판관(영적 아버지)께 단둘이서 우리의 죄를 고백할 것이며, 만약 그분이 명하신다면 모든 사람 앞에서 고백할 것이다. 왜냐하면 상처는 드러나면 오히려 악화되지 않고 치유되기 때문이다.

14. 고백하는 동안에는 겉모습은 물론 내면의 감정과 생각까지, 마치 유죄 판결을 받은 죄인처럼 얼굴을 땅에 숙이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영적 아버지의 발을 마치 그리스도 자신의 발처럼 눈물로 적시라.

15. 악령들은 대개 우리에게, 아버지께 죄를 전혀 고백하지 말거나, 고백하더라도 자신의 죄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도록 부추긴다.

16. 자만심에 현혹되지 말고, 숨기지 말고 네 아버지께 네 죄를 고백하라. 왜냐하면 스스로를 부끄러워하지 않고서는 영원한 수치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의사에게 네 상처를 드러내고, 그에게 “선생님, 이 궤양은 제 것이고, 이 상처는 제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누구 때문이 아니라 제 자신의 게으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해 책임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도, 영도, 육체도, 그 밖의 그 무엇도 아니라 오직 제 게으름뿐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17. 세례 요한은 세례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에게 고백을 요구했는데, 이는 그 자신이 고백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찾아온 사람들의 구원을 원했기 때문이다.

18. 회개하는 이들에게 짜증으로 인한 당혹감만큼 역겨운 것은 없다. 왜냐하면 회개는 큰 겸손을 요구하지만, 짜증은 큰 교만의 표징이기 때문이다.

19. 구멍을 통해 집 안으로 스며든 햇살은 그 안의 모든 것을 비추어, 공중에 맴도는 가장 미세한 먼지조차 보이게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마음에 들어오면 그 마음의 모든 죄를 드러내 보인다.

20. 물이 글자를 씻어내듯이, 눈물도 죄를 씻어낼 수 있다.

21. 물이 없어 글자를 지울 때 다른 방법으로 지우듯이, 눈물이 없는 영혼들도 슬픔과 한숨, 그리고 끊임없는 탄식으로 자신의 죄를 씻어내고 지워 나간다.

22. 갓 난 상처가 금방 낫는 것처럼, 반대로 오랫동안 앓아온 영혼의 상처는 치유될 수는 있지만 치료하기가 쉽지 않다.

23. 아버지를 장사 지낸 사람이 장례식에서 돌아오자마자 결혼식에 가는 것이 부끄러운 것처럼, 자신의 죄를 통회하는 이가 현세에서 사람들에게서 평안이나 명예와 영광을 구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24. 시민들의 거처가 유죄 판결을 받은 범죄자들의 거처와 다른 것처럼, 자신의 죄를 통회하는 이들의 삶의 방식도 죄 없는 이들의 삶의 방식과는 완전히 달라야 한다.

25. 영혼의 감정은 그 본연의 속성이나, 죄는 이 감정을 무디게 한다. 양심은 악을 그치게 하거나, 적어도 그 악을 줄이게 한다. 양심은 양심의 산물이며, 양심은 세례를 받을 때 우리에게 주어진 수호천사의 말씀이자 책망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세례를 받지 못한 자들이 자신의 악한 행실로 인해 신자들만큼 영혼의 고통을 겪지는 않지만, 어쩐지 명확하지 않은 고통을 겪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6. 자신의 죄의 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자는 성 밖 무덤 곁에 앉아 있는 이들을 본받아, 따뜻하고 뜨거운 눈물을 끊임없이 흘리며, 마음속에서 소리 없는 흐느낌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그도 예수님께서 오셔서 마음의 완고함의 돌을 치워 주시고, 우리의 마음을 나사로처럼 죄의 속박에서 풀어 주시며, 천사들에게 “그를 정욕에서 풀어 주고 가게 하라” (요한복음 11, 44), 복된 무정욕의 상태로 나아가게 하소서.

 

3. 미덕과 정욕, 그리고 후자와의 투쟁에 대하여 전반적으로

1. 분별은 언제 어디서나, 어떤 사물에서든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깨닫는 것이며, 이는 오직 마음이 깨끗한 자에게서만 나타난다.

2. 주요 정욕 중 처음 세 가지(허영, 탐욕, 식욕)를 물리친 자는 나머지 다섯 가지(음란, 분노, 슬픔, 낙담, 교만)도 함께 물리친 것이나, 처음 세 가지를 물리치는 데 소홀한 자는 그 어느 것도 이기지 못할 것이다.

3. 모든 악마의 공격은 세 가지 주요 원인에서 비롯된다: 우리의 게으름에서, 교만에서, 혹은 마귀의 시기에서이다.

4. 모든 경우에 있어 우리의 양심(믿음과 주님의 계명으로 깨달음을 얻은)을 하나님께 따라 지침으로 삼고, 바람이 어디서 부는지 알아낸 뒤, 그 지시에 따라 돛을 펼치도록 하자.

5.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노력하는 모든 행실에서, 악령들은 우리에게 세 가지 함정을 파놓는다. 첫째, 우리의 선한 일을 방해하기 위해 싸운다. 둘째, 그들이 이 첫 번째 유혹에서 패배하면, 행해진 일이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게 되도록 애쓰며; 이 음모에서도 성공하지 못하면, 그때 비로소 우리 영혼에 은밀히 다가와, 마치 우리가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삶을 사는 것처럼 우리를 달래줍니다. – 첫 번째 유혹에는 (구원에 대한) 열심과 죽음에 대한 염려가 대항하며, 두 번째 유혹에는 순종과 겸손이, 세 번째 유혹에는 끊임없는 자기 책망이 대항한다. “이 수고가 우리 앞에 놓여 있으니, 하나님의 불이 우리 성소에 들어올 때까지”(시 78:16). – 그때가 되면 우리 안에는 더 이상 악한 습관의 폭력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모든 정욕의 불타오름과 움직임, 모든 악한 습관, 내적·외적, 보이는 것과 마음속의 모든 것을 삼키는 불이시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12:29).

6. 악령들이 영혼을 제압하고 이성의 빛을 어둡게 할 때, 그때 우리 저주받은 자들 안에는 더 이상 냉철한 주의력도, 분별력도, 지식도, 수치심도 없을 것이며, 그 자리를 잔인함, 무감각, 무분별, 그리고 맹목이 차지할 것이다.

7. 영혼의 강탈이란, 선함이 없는 것을 선함으로 여길 때 일어나는 것으로, 이는 눈에 띄지 않는 부의 상실이며, 알 수 없는 영혼의 포로 상태이다. 영혼의 “살해”란 언어적 이성을 죽이는 것이며, 부도덕한 행위에 빠지는 것이다(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양심, 영적 감정이 치명적인 죄들로 인해 억압당하는 것). 영혼의 “파멸”이란 불법을 저지른 후 절망에 빠지는 것이다.

8. 정욕에 굴복했던 자들과 회개한 자들은 용기를 내라! 그들이 비록 모든 구덩이에 빠지고, 모든 그물에 걸리고, 온갖 병으로 고통받았더라도, 회복된 후에는 모든 이에게 등불이요 의사가 되며, 등불이요 지도자가 되어 각 병의 성질과 종류를 밝히고, 자신의 경험을 통해 넘어질 뻔한 이들을 구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9. “모든 사람”(초보자)을 위한 가장 훌륭한 알파벳은 다음과 같다: 순종, 금식, 자루옷, 재, 눈물, 고백, 침묵, 겸손, 기도, 용기, 추위, 수고, 고난, 자학, 통회, 원한을 품지 않음, 형제 사랑, 온유, 단순하고 호기심 없는 믿음, 세상에 대한 무관심, 부모에 대한 흠 없는 증오, 공평함, 악의를 품지 않는 단순함, 자발적인 금욕.

10. “성공하는” 자들의 상태와 징후는 다음과 같다: 허영심 없음, 분노 없음, 선한 소망, 침묵, 분별력, 심판에 대한 확고한 기억, 자비, 이방인을 사랑하는 마음, 절제된 가르침, 끊임없는 기도, 재물을 탐하지 않음.

11. “경건함에 있어 온전한” 영혼들의 한계와 상태, 그리고 법칙은 다음과 같다: 포로가 되지 않는 마음, 완전한 사랑, 겸손의 샘, 마음의 초월, 그리스도의 감동, 빛과 기도의 도둑맞음 없음, 하나님의 빛의 풍성함, 죽음을 갈망함, 삶을 미워함, 육체를 혐오함, 평화를 위한 기도자, 마치 강제로 하나님을 자비로 이끌 듯이, 천사들의 동역자, 지성의 심연, 신비의 거처, 형언할 수 없는 계시의 보물창고, 인류의 구원자, 악마들 위에 계신 신, 정욕의 주인, 육체의 주인, 본성의 통치자, 죄와 거리가 먼 자, 무정욕의 거처, 주님의 도움으로 주님을 본받는 자.

12. 우리는 끊임없이 영적 감각을 돌보고 그것을 추구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나타나면, 그때야말로 외적인 감각들이 영혼을 유혹하며 작용하는 것을 멈출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알고 있는 한 현명한 이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감각을 얻으리라”(잠언 2:5, 3).

13. 수도 생활은 행동, 말, 생각, 그리고 몸짓에 있어 마음의 감수성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수도 생활이라 할 수 없으며, 하물며 천사 같은 삶이라 할 수는 더욱 없다.

14. 어떤 이들은, 말하자면, 본성상 절제나 침묵, 순결, 겸손, 온유, 또는 감동에 기울어져 있지만; 그러나 다른 이들은 본성이 앞서 말한 선한 자질들과 거의 정반대임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자신을 그 자질들로 이끌며, 비록 때로는 이겨내지 못하더라도, 본성을 이겨내는 자로서 나는 그들을 첫 번째 사람들보다 더 높이 평가한다.

15. 수도사들의 빛은 천사들이며, 수도사들은 모든 사람에게 빛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든 일에서 선한 본보기가 되도록 힘써야 하며, “누구에게도 어떤 일로도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고린도후서 6:3) 행동이나 말로 인해 누구에게도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

16. 성 삼위일체의 도움으로, 세 가지 주요 정욕에 맞서 세 가지 미덕으로 무장합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스스로 수많은 고난을 자초하게 될 것입니다.

17.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심으로 부활하신다면, 그분의 원수들은 흩어질 것이며, 만일 우리가 환상을 통해 그분께 가까이 간다면, “그분을 미워하는 자들”은 그분의 “얼굴”과 우리의 “얼굴 앞에서 도망칠 것이다.

18. 그 후 (수고를 통해) 무엇보다도, 헛된 말만으로는 아니라, 신성한 진리를 깨닫는 데 힘쓰자. 왜냐하면 우리가 심판의 때에 보여야 할 것은 말이 아니라 행실이기 때문이다.

19. 보물이 알려진 곳에 숨겨져 있다는 말을 들은 자들은 그것을 찾고, 수고 끝에 찾아내면 얻은 것을 정성껏 간직하지만, 수고 없이 부자가 된 자들은 낭비하기 일쑤이다.

20. 여덟 가지 주요한 정욕적 생각에서 어떤 죄들이 비롯되며, 나머지 다섯 가지 각각에 대해 세 가지 주요 정욕 중 어느 것이 근원이 되는가? – 음행의 근원은 과식이며, 낙담의 근원은 허영이다. 슬픔과 분노는 세 가지 주요 정욕 모두에서 비롯되며, 교만의 근원은 허영이다. – 그렇다면 여덟 가지 주요 정욕에서 어떤 죄가 비롯되는가? 이에 대해 말하건대, 격렬한 정욕 속에는 이치도 질서도 없으며, 온통 무질서와 혼란뿐이다.

21. 때 아닌 웃음은, 예를 들어, 때로는 음탕의 악마로부터 비롯되기도 하고, 때로는 허영심에서 비롯되기도 하는데, 이는 사람이 내면에서 뻔뻔스럽게 스스로를 칭찬할 때이다. 때로는 포만감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22. 과도한 수면은 때로는 포만감에서 비롯되고, 때로는 금식 중에 금식하는 이들이 들뜬 상태에서 비롯되며, 때로는 낙담에서 비롯되기도 하고, 때로는 단순히 본성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23. 말이 많은 것은 때로는 포만감에서 비롯되고, 때로는 허영심에서 비롯된다.

24. 비방은 본질적으로 교만의 산물이다. 그러나 종종 그것은 이웃을 똑같은 점으로 비난하거나, 악령들의 적대적인 시기심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25. 마음의 굳어짐은 때로는 포만감에서, 때로는 무감각에서, 때로는 어떤 것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집착은 또 때로는 음란함에서, 때로는 탐욕에서, 때로는 탐식에서, 때로는 허영심에서, 그리고 그 밖의 여러 가지 원인에서 비롯된다.

26. 교활함은 자만과 분노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27. 위선은 자만과 제멋대로인 태도에서 비롯된다.

28. 이와 정반대되는 미덕들은 정반대의 근원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각각에 대해 따로 논할 시간이 부족하므로, 전반적으로 간략히 말하자면, 앞서 언급한 모든 정욕을 죽이는 것이 바로 겸손함이며, 이 미덕을 얻은 자는 모든 정욕을 이긴 것이다.

29. 상사에게 느끼는 두려움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본보기가 되게 하라. 그리고 육체적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본보기가 되게 하라. 왜냐하면 미덕을 위한 본보기를 그와 반대되는 행동들에서도 찾는 데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30. 하나님은 수고 그 자체에만 나타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수고와 함께 있는 단순함과 겸손함 속에서도 나타나신다. 비록 “하나님의 능력은 약함 속에서 온전히 드러난다”(고린도후서 12:9)고 하지만, 겸손하지 않은 일꾼은 주님께서 물리치실 것이다.

31. 병은 때로는 죄를 정화하기 위해, 때로는 교만을 꺾기 위해 내려집니다.

32. 우리의 선하시고 모든 선을 베푸시는 주님이시며 주님께서는, 누군가가 수련에 매우 게으른 것을 보시고, 덜 힘든 수련인 병으로 그의 육신을 낮추시며, 때로는 이를 통해 교활한 생각과 정욕으로부터 영혼을 정화시키십니다.

33.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세 가지 태도로 받아들여집니다. 즉, 선한 마음가짐으로, 정욕적인 마음가짐으로, 혹은 그 중간 정도의 마음가짐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저는 손해를 입은 세 형제를 보았습니다. 그중 한 사람은 분개했고, 다른 한 사람은 슬픔 없이 지냈으며, 세 번째 사람은 이를 큰 기쁨으로 받아들였습니다.

34. 나는 똑같은 씨앗을 땅에 뿌리는 농부들을 보았다. 그러나 그들 각자는 저마다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한 사람은 빚을 갚기 위해, 다른 한 사람은 부자가 되기 위해, 세 번째 사람은 주님께 예물을 드려 공경하기 위해;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 과정에서 자신의 선행으로 인해 이 삶의 길을 지나는 이들에게 칭찬을 받거나, 시기심 많은 적을 괴롭히거나, 게으름으로 인한 사람들의 비난을 피하려는 것을 염두에 두기도 했다. – 이 농부들이 뿌린 씨앗의 이름은 금식, 기도, 자선, 다양한 봉사 등이며, 이와 유사한 것들이다. 형제들은 각자의 의도를 주님 안에서 스스로 꼼꼼히 살펴보아야 한다.

35. 샘에서 물을 길어 올릴 때, 때로는 물과 함께 개구리도 눈에 띄지 않게 건져 올리듯이, 미덕을 실천할 때도 우리는 종종 그와 은밀히 얽혀 있는 정욕을 행하곤 한다. 예를 들어, 이방인을 사랑하는 마음에는 탐식이 얽혀 있고; 사랑과는 음행이, 분별력과는 지나친 엄격함(엄격주의)이, 현명함과는 교활함이; 온유함과는 의심, 더딤, 나태, 반항, 제멋대로 함, 불순종이; 침묵과는 교만함이; 기쁨과는 자만심이; 소망과는 나태함이, 사랑과는 다시 비난이, 침묵과는 낙담과 나태함이, 순결과는 쓴맛이, 겸손함과는 (도리를 모르는) 건방짐이 뒤따르며; 이 모든 것 뒤에는, 마치 만병통치약처럼, 아니 차라리 독과도 같은 허영이 뒤따른다.

36. 주님께 무언가를 구할 때 오랫동안 응답을 받지 못한다고 해서 슬퍼하지 말자. 주님께서는 스스로 모든 사람이 한 순간에 무욕의 경지에 이르기를 원하시지만(그러나 우리의 자유 의지로부터 큰 방해를 받고 계신다).

37. 하나님께 무언가를 구하고도 받지 못하는 모든 이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다음 중 어떤 이유 때문일 것이다: 때이르게 구했기 때문이거나, 자신의 분수를 넘어 허영심 때문에 구했기 때문이거나, 구한 것을 얻으면 교만해지거나 게을러질 것이기 때문이다.

38. 때로는 신자뿐만 아니라 비신자들에게서도 모든 정욕이 사라지고, 오직 단 하나의 정욕만이 남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가장 근본적인 악으로서 다른 모든 정욕을 대신하며, 그 해로움이 너무나 커서 하늘에서조차 떨어뜨릴 수 있는 것이다(이것이 바로 교만이다).

39. (정욕의) 본질은 신성한 불에 의해 갉아먹히고 영혼에서 뿌리 뽑히며 소멸된다.[77]

40. 때로는 악령들이 우리를 방심하게 만들기 위해 스스로 물러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 후 갑자기 가련한 영혼을 덮쳐 약탈하고, 그 영혼을 악덕에 그토록 깊이 길들여 놓아, 그 후로는 영혼이 스스로를 비방하고 자신과 싸우게 만든다.

41. 나는 그 짐승들의 또 다른 물러남을 알고 있는데, 이는 영혼이 죄악된 습관에 완전히 굳어졌을 때 일어나는 일이다. 이에 대한 예는, 어머니가 더 이상 젖을 먹이지 않을 때 오랫동안 손가락을 빨아온 습관 때문에 손가락을 계속 빨아대는 갓난아기들에서 볼 수 있다.

42. 나는 또한 지나친 순진함과 칭찬받을 만한 온화함으로 인해 영혼에 생기는 다섯 번째 무정(無情)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이러한 이들에게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시 7:11) 하나님으로부터 도움이 보내지는데, 그들 자신은 정욕에서 해방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마치 갓난아기들이 옷을 벗겨졌을 때, 자신의 나체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43. 죄와 정욕은 당연히 인간의 본성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정욕의 창조주가 아니시다. 반면 그분은 우리 본성에 많은 미덕을 베풀어 주셨는데, 그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자선—이교도들조차도 동정심을 보이기 때문이다; 사랑—말 못하는 동물들조차도 서로를 잃었을 때 종종 눈물을 흘리기 때문이다; 믿음—우리 모두가 스스로 그것을 낳기 때문이다; 희망—우리가 서로 주고받을 때나, 심을 때나, 항해할 때나, 부유해지기를 바라며 그렇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과 미덕이 우리 본성에 자연스럽게 내재해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고, 사랑이 곧 율법의 실천이라면, 미덕이 우리 본성과 동떨어진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리고 미덕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을 자신의 무능함 탓으로 돌리는 자들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다.

44. 그러나 순결, 분노 없음, 겸손, 기도, 경건한 깨어 있음, 금식, 그리고 끊임없는 감회에 관해서는, 이 미덕들은 본성을 초월한다. 그중 일부는 사람들이 자신의 모범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고, 다른 것들은 천사들이 우리에게 본보기가 되어 주었으며, 또 다른 것들의 스승이자 주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 말씀 그분 자신이다.

45. 때로는 기도 중에 지체할 수 없는 자선 행위가 닥치기도 한다. 그런 경우에는 사랑의 일을 우선시해야 한다. 사랑은 기도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기도는 개별적인 미덕인 반면, 사랑은 모든 미덕을 아우르기 때문이다.

46. 종종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섭리에 따라 영적인 사람들에게 아주 사소한 정욕을 남겨 두시는데, 이는 그들이 이 가볍고 거의 죄가 없는 연약함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많이 책망하게 하여, 그로 인해 훔칠 수 없는 겸손의 풍요로움을 얻게 하시기 위함이다.

47. 처음부터 순종하며 살지 않은 사람은 겸손을 얻을 수 없으니, 스스로 기술을 익힌 자는 누구나 자신에 대해 큰 꿈을 꾸기 때문이다.

48. 성부들은 활동적인 삶을 주로 두 가지 미덕, 즉 금식과 순종으로 제한한다. 이는 옳은 일이다. 왜냐하면 첫 번째는 쾌락 추구를 근절하고, 두 번째는 이 근절을 겸손함으로 보호하기 때문이다. 또한 눈물은 두 가지 작용을 하는데, 한편으로는 죄를 근절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겸손함을 낳기 때문이다.

49. 구하는 자에게 주는 것은 경건한 이들의 본성이며, 구하지 않는 자에게 주는 것은 가장 경건한 이들의 일입니다. 그리고 받은 자에게서 되돌려 달라고 요구하지 않는 것, 특히 그가 돌려줄 능력이 있을 때, 이는 오직 무욕한 자들에게만 해당됩니다.

50. 모든 정욕과 미덕에 관해,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시작에 있는지, 중간에 있는지, 아니면 끝에 있는지—끊임없이 점검하자.

51. 우리를 향한 모든 악마의 공격은 다음 세 가지 이유에서 비롯된다: 자기 만족, 교만, 그리고 악마들의 시기심.

52. 생각에 맞서 기도하는 것과, 그 생각에 반박하는 것, 그리고 그 생각을 아무 것으로도 여기지 않고 그보다 더 높은 위치에 서는 것(혹은 그 생각들을 지배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이 중 중간 단계에 있는 자(즉, 반박할 수 있는 자) 는 준비가 부족하기 때문에 종종 첫 번째 방법에 의지하지만, 첫 번째 단계에 있는 자는 아직 두 번째 방식으로 적들을 물리칠 수 없으며, 세 번째 단계에 있는 자는 결국 적들을 비웃는다.

53. 후각이 온전한 사람들이 누군가가 몰래 지니고 있는 향기를 감지할 수 있는 것처럼, 순수한 영혼은 다른 사람들 안에서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향기로운 향기도, 그리고 자신이 완전히 벗어난 악취도 알아차리는데, 비록 다른 사람들은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54. 비록 모든 사람이 무욕할 수는 없으나,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있다.

55. 너를 부추겨,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와 돌보심 속에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운명을 시험해 보도록 유도하고, 주님께서 편파적이라고 은밀히 주입하는 그 이방인들에게 네가 지배당하지 않도록 하라. 이들은 오만의 산물이며, 스스로도 그렇게 인정한다.

56. 어떤 이들은 어떤 악령들이 다른 악령들과 대립한다고 말했으나, 나는 그들 모두가 우리의 파멸을 꾀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57. 눈에 보이는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모든 영적 행위에 앞서, 자신의 의지와 가장 진실한 소망이 있으며, 이것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실행에 옮겨진다. 왜냐하면 첫 번째 것(의지와 소망)이 앞서지 않으면, 두 번째 것(하나님의 도우심)도 뒤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58. 전도서는 “하늘 아래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시기보다 앞서 제때에 올 것을 찾도록 부추기는 교만한 열심에 현혹되지 말자. 파종할 때에 추수에 속한 것을 찾지 맙시다. 수고할 때가 있고, 형언할 수 없는 은혜의 선물을 거둘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제때에 그 시기에 마땅하고 어울리는 것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59. 어떤 이들은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수고하기 전에 은혜로운 은사를 받았고, 다른 이들은 수고하는 도중에, 또 다른 이들은 수고 후에, 그리고 어떤 이들은 죽음을 맞이할 때 그 은사를 받았다. 그들 중 누가 다른 이들보다 더 겸손한지 시험해 볼 만하다.

60. 수많은 죄와 양심의 가책으로 인한 절망이 있고, 죄에 빠진 자들이 자신들이 타락하기 전까지 버림받지 않을 자격이 있었다고 생각할 때 생기는 교만과 자만에서 비롯된 절망도 있다. – 전자는 죄를 멀리하고 선한 소망을 품음으로써 치유되며, 후자는 겸손과 누구도 정죄하지 않음으로써 치유된다.

61. 네 모든 시작과 행실, 즉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 모두에서, 그것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시작되고 이루어지는지 시험해 보라. 우리의 행위가 하나님께 기쁘시게 여김받는다는 징표는, 초보자에게는 겸손함에서의 성취이며, 중급자에게는 내적 갈등의 종식이며, 완성된 자에게는 신성한 빛의 증대와 풍요로움이다.

62. 구름이 걷히면 태양이 온전한 광채를 드러내듯이, 죄 사함을 받고 정욕적인 습관(과 생각)에서 해방된 영혼도 의심할 여지 없이 신성한 빛을 보게 된다.

63. 어떤 이들은 기적 행함과 다른 눈에 보이는 영적 은사들을 무엇보다도 높이 여기지만, 훨씬 더 뛰어난 은사들이 많이 있으며, 그것들은 은밀하기 때문에 타락의 위험에서 안전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64. 정욕에서 완전히 정화된 자는 이웃의 영혼을 보는데, 그 존재 자체는 아니지만 그 구조와 감정, 성향을 보게 된다. 반면 아직 성장 중인 자는 육체적 행동을 통해 영혼을 판단한다.

65. 영적으로 연약한 자들은 육체의 질병과 고난, 그리고 외적인 유혹을 통해 주님의 임재와 그들에 대한 주님의 자비를 깨달아야 한다. 반면, 온전한 자들은 그들 안에 계신 성령의 임재와 은사의 증식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는다.

66. 악령들 중에는 ‘선봉자’라는 악마가 있는데, 그는 우리가 잠에서 깨자마자 나타나 우리를 유혹하고 우리의 첫 생각을 더럽힌다. 하루의 시작을 주님께 바쳐라. 누구에게 먼저 그것을 바치느냐에 따라 그날은 그 사람의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 매우 능숙한 실천가가 내게 다음과 같은 주목할 만한 말을 해주었다. “아침이 시작될 때 나는 그날의 모든 흐름을 알게 된다.”

67. 우리에게 닥치는 유혹 속에서 악령들은 우리가 무분별한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하도록 유혹한다. 그리고 우리를 이기지 못할 때면, 조용히 다가와 은밀히 하나님께 교만한 감사를 드리게 한다.

68. 죽음을 맞이할 때 영적인 것을 지혜롭게 추구한 자들은 하늘로 올라가고, 세속적인 것에 집착한 자들은 지하 세계로 내려간다. 왜냐하면 육신과 분리된 영혼들에게는 제3의 중간 지대가 없기 때문이다.

69. 갈증에 시달리는 사슴이 물을 갈망하듯, 수도자들은 하느님의 선한 뜻을 깨닫기를 갈망해야 한다. 그리고 단지 그 뜻뿐만 아니라, 그 뜻에 우리의 뜻이 섞일 때와, 심지어 반대되는 힘이 작용할 때 도 갈망해야 한다. 또한 어떤 일은 지체 없이 즉시 수행되어야 하고, 어떤 일은 서두르지 않고 신중하게 수행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깊이 숙고해야 한다.

70. 주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모든 이는 먼저 자기 안의 자기 의지를 죽여야 한다. 그리고 믿음과 거짓 없는 순수함으로 하나님께 기도한 뒤, 마음의 겸손함으로, 생각 속에 그 어떤 의심도 없이, 아버지들과 형제들에게 묻고, 비록 그것이 자신의 이성에 반할지라도 그들의 조언을 마치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처럼 받아들여야 한다. – 이 규칙을 의심 없이 따르는 이들은 큰 겸손으로 충만해 있다. –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미혹당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71. 어떤 이들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 즉, 자신의 생각을 영혼이 이쪽이나 저쪽을 향하는 어떤 경향, 즉 어떤 일을 하도록 부추기는 경향이나 그와 상반되는 경향으로부터 모두 떨쳐내고, 자신의 의지를 벗어던진 마음을 정해진 날 수 동안 주님께 간절한 기도로 드렸으며; 그렇게 하여 그분의 뜻을 깨닫게 되었으니, 이는 마음속의 지성이 그들의 마음에 그 뜻을 마음속으로 말해 주었기 때문이거나, 혹은 그러한 생각 중 하나가 영혼에서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72. 어떤 이들은 그들의 사업이 마주한 슬픔과 어려움들을 통해, 그것이 신의 뜻에 부합한다고 결론지었다. 반면, 다른 이들은 자신의 일에서 받은 뜻밖의 도움을 통해 그것이 하나님께 기쁘시게 여김을 받는 것임을 느끼며,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하곤 했다. “하나님께서는 선을 선택하는 자에게만 도우심을 베푸신다.”

73. 위로부터 오는 깨달음을 통해 자기 안에 하나님을 모신 사람은, 신속한 조치가 필요한 일뿐만 아니라 지체해도 되는 일에서도, 두 번째 방식(즉, 순조로운 진행)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곧 알게 된다.

74. 하나님은 의로우시니, 겸손히 두드리며 찾아오는 자들에게 그분의 자비의 문을 닫지 않으실 것이다.

75. 우리는 모든 경우에 우리의 의도를 점검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일에서 그 의도를 살피시기 때문이다. 편견과 온갖 불결함에서 벗어나 오직 하나님만을 위하여, 다른 어떤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행해지는 모든 일은, 비록 그것이 완전히 선한 것이 아니더라도 우리에게 선한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76. 하나님에 대한 강한 사랑과 마음의 겸손으로 인해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행위에 도전하는 용감한 영혼들이 있는 반면, (우리의 원수들의 부추김으로 인해) 똑같은 시도를 감행하는 교만한 마음들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원수들은 종종 고의로 우리를 우리 능력을 넘어서는 일로 부추기곤 하는데, 이는 우리가 그 일에서 성공하지 못해 낙담에 빠지고, 심지어 우리 힘에 맞는 일들조차 포기하게 만들어, 결국 원수들의 조롱거리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77. 나는 영혼과 육체가 연약한 자들을 보았는데, 그들은 수많은 죄로 인해 자신들의 능력을 넘어서는 위업을 시도했으나 감당하지 못하였다.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회개를 수고의 정도가 아니라(울음과 통회, 그리고 죄에 대한 혐오가 동반된) 겸손의 정도에 따라 심판하신다고 말하였다.

78. 때로는 양육이 극단적인 악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나쁜 교제가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종종 영혼의 타락 그 자체만으로도 파멸에 충분하다. 처음 두 가지 악에서 벗어난 자는 어쩌면 세 번째 악에서도 벗어날 수 있겠지만, 세 번째 악이 지배하는 자는 어느 곳에서도 쓸모가 없다. 하늘보다 더 안전한 곳은 없으나, 그곳에서도 어떤 이들은 타락한 의지로 인해 파멸했다.

79. 부정한 영들 중에는 다른 영들보다 더 교활한 자들이 있다. 그들은 우리만을 죄로 이끌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에게 다른 이들을 악의 공범자로 삼도록 부추겨, 우리에게 가장 혹독한 고통을 안겨주려 한다. – 나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죄악된 습관을 전염시킨 것을 보았다. 그 후 정신을 차리고 회개하기 시작하여 죄에서 벗어났으나, 그에게 배운 자가 죄를 그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회개는 실로 진정한 것이 아니었다.

80. 영적 스승들의 위업과 덕행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은 마음과 영혼을 열정으로 북돋우며, 그들의 가르침을 듣는 것은 어둠 속의 등불이요, 길을 잃은 자들을 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며, 눈먼 자들을 깨우치는 빛이다.

81. 주님께 순결한 몸과 깨끗한 마음을 바치고자 하는 자는 분노를 억제하고 절제를 지켜야 한다. 왜냐하면 이 두 미덕 없이는 우리의 모든 수고가 헛될 것이기 때문이다.

82. 미덕들 중에는 딸들도 있고, 미덕들의 어머니들도 있다. 현명한 사람은 어머니들을 얻는 데 가장 힘쓴다. 하나님께서 친히 어머니들에게 가르치시나, 딸들을 가르치는 스승들은 많다.

83. (음식으로 인한) 즐거움이 부족하다고 해서 과도한 수면으로 이를 보충하지 않도록, 또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임을 유의하자. 왜냐하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84. 부정한 영들 중에는 우리 영적 삶의 초기에 우리에게 신성한 경전을 해석해 주는 자들도 있다. 그들은 대개 허영심 많은 자들의 마음속에서, 더 나아가 외적인 학문을 배운 자들의 마음속에서 이를 행하여, 그들을 조금씩 현혹시켜 마침내 이단과 신성모독으로 빠뜨리려 한다. 우리는 이러한 악마적인 신학, 혹은 더 정확히 말해 신을 대적하는 행위를, 그러한 해석이 이루어지는 동안 영혼에 일어나는 혼란과 질서 없고 무질서한 기쁨을 통해 알아차릴 수 있다.

85. 우리는 이 세상에서든, 미래의 세상에서든, 위에서 내려오는 빛(계시)을 통해 항상 새로운 이성의 빛을 받아들이며, 덕과 사랑에서 결코 발전하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천사들, 이 지적인 존재들조차도 발전 없이 머무르지 않고, 항상 영광 위에 영광을, 이성 위에 이성을 더해 나간다.

86. 말로는 위대한 덕을 가르치면서도 선한 행실에는 게으른 자들을 엄하게 판단하지 말라. 행위의 부족은 종종 그 가르침의 유익으로 채워지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모든 것을 동등하게 얻은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행실보다 말에 더 뛰어나고, 다른 이들은 반대로 행실이 말보다 더 강하다.

87. 하나님은 악의 창조주가 아니시다. 그러므로 어떤 정욕들은 영혼에 본성적으로 속해 있다고 말하는 자들은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 스스로 선을 향한 본성적 속성을 정욕으로 변질시켰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본성상 우리는 자손을 낳기 위한 씨앗을 가지고 있으나, 우리는 그것을 불법적인 정욕에 이용한다; 본성상 우리 안에는 분노도 있지만, 그것은 옛 뱀을 향한 것이어야 함에도 우리는 그것을 이웃을 향해 사용한다; 우리에게 열심이 주어진 것은 미덕을 위해 열심 내도록 하기 위함인데, 우리는 악덕을 위해 열심 내고 있다... 이와 같은 것들이 있다.

88. 게으르지 않은 영혼은 악마들을 불러내어 자신과 싸우게 한다. 그러나 싸움이 늘어날수록 면류관도 늘어날 것이다. 원수들에게 상처를 입지 않는 자는 어떤 면류관도 얻지 못할 것이나, 닥치는 공격에도 낙담하지 않는 자는 천사들이 용감한 전사처럼 칭송할 것이다.

89. 끊임없이 네 안에 나타나는 정욕적인 움직임을 살펴보라. 그러면 네 안에 많은 정욕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영혼의 병에 시달리다 보니, 우리의 연약함 때문이든, 깊이 뿌리내린 죄악된 습관 때문이든, 그 정욕들을 분별조차 할 수 없다.

90. 악마들은 종종 우리를 가장 쉽고 유익한 일에서 멀어지게 하고, 가장 어려운 일을 하도록 부추긴다.

91. 하나님께 합당한 공동체 생활은 모든 더러움과 거칠음, 그리고 영혼의 모든 추함을 씻어내는 영적 표백소와 같다. 반면 은둔 생활은 먼저 정욕과 원한, 성급함에서 정화된 자들을 위한 염색소라고 할 수 있으며, 그런 후에야 비로소 고요함 속으로 물러난 것이다.

92. 음행의 악령과 분노의 악령, 탐식의 악령, 낙담과 졸음의 악령은 우리의 마음을 교만하게 만들지 않으며(오히려 겸손하게 한다), 반면 탐욕, 권세욕, 수다스러움, 그리고 그 밖의 많은 악한 죄들은 대개 교만의 악을 동반한다; 비난의 악령도 이 점에서 그들과 같다.

93. 수도사가 세속 사람들을 방문하거나 그들을 자신의 처소에 맞이한 후, 한 시간이나 하루가 지나 그들과 헤어지고 나서 슬픔의 화살에 찔려, 자신의 흐름을 방해하던 그 그물에서 벗어난 것을 기뻐하기는커녕, 자만심이나 음란이라는 정욕의 놀이터가 된다면.

94. 우리는 언제, 어떤 경우에 정욕의 대상들에 맞서 싸워야 하고, 언제 물러서야 하는지를 깊이 숙고해야 한다. 때로는 연약함 때문에 영적으로 죽지 않기 위해 도피를 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95. 바람이 잔잔한 날에는 바다의 표면만을 흔들지만, 다른 때에는 가장 깊은 곳까지 움직이게 하듯이, 어둠의 바람에 대해서도 그렇게 결론지어야 한다; 왜냐하면 정욕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는 그 바람들이 마음의 가장 깊은 감정을 뒤흔들지만,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들에게는 이미 단지 마음의 표면만을 흔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후자들은 훼손되지 않고 남아 있던 평소의 평온을 더 빨리 되찾는다.

96. 절제는 건강의 어머니이며, 절제의 어머니는 죽음에 대한 묵상과, 우리 주님이시며 주인이시며 하나님이신 분이 맛보신 식초가 섞인 쓴맛에 대한 확고한 기억이다.

97. 침묵은 정절의 원인이자 조력자이며, 금식은 육체의 욕망을 잠재우고, 마음의 통회는 사악하고 음탕한 생각들의 적이다.

98. 뱀이 좁은 구멍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낡은 허물을 벗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도 금식과 고행이라는 좁고 험한 길을 걷지 않고서는 예전의 악한 습관과 영혼의 낡음, 그리고 낡은 사람의 옷을 벗어던질 수 없다.

99. 날개 아래서 따뜻하게 품어진 알이 생명을 얻듯이, 영적 아버지에게 숨겨진 생각들도 행동으로 변한다.

100. 착한 말들이 함께 달릴 때 서로 앞다투어 열정을 불태우듯이, 선한 형제들이 함께 생활할 때도 서로 선한 열정을 북돋아 줍니다.

101. 구름이 해를 가리는 것처럼, 간사한 생각들도 마음을 어둡게 하고 망가뜨린다.

102. 가난한 자들이 왕의 보물을 보고 자신의 궁핍함을 더욱 깨닫는 것처럼, 영혼도 성부들의 위대한 덕행에 대한 이야기를 읽을 때, 저절로 자신의 사고방식을 더욱 겸손하게 한다.

103. 향기를 지닌 자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향기로운 냄새를 풍기듯이, 주님의 성령을 품은 자도 그의 말과 겸손함으로 드러난다.

104. 도둑들이 왕의 무기가 놓여 있는 곳을 보고는 함부로 그곳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처럼, 마음속의 도둑들도 기도를 마음속에 깊이 새기고 굳게 다진 사람을 기꺼이 노리려 하지 않는다.

105. 훌륭한 조타수를 둔 배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무사히 부두에 들어서는 것처럼, 선한 목자를 둔 영혼도 한때 많은 죄를 지었더라도 편안히 하늘로 올라간다.

106. 길잡이가 없는 사람은 아무리 총명하더라도 쉽게 길을 잃게 되는 것처럼, 수도자의 길을 제멋대로 걷는 자도 비록 이 세상의 모든 지혜를 다 안다 할지라도 쉽게 파멸에 이르게 된다.

107. 육신이 연약하고 무거운 죄악을 많이 저지른 자는 겸손과 그와 관련된 미덕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그에게 다른 구원은 없기 때문이다.

108. 악행을 경시하는 마음은 그로부터의 회개를 낳으며, 그로부터의 회개는 참회의 시작이다. 참회의 시작은 구원의 시작이며, 구원을 이루는 시작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선한 결심이다. 이 선한 결심은 수고를 낳으며, 수고의 시작은 덕목들이다. 미덕의 시작은 꽃이며, 미덕의 꽃은 실천이다. 미덕의 탄생은 끊임없음(그에 대한 생각과 열심)이며, 끊임없는 생각(과 열심)의 열매이자 결과물은 습관화이다. 습관의 산물은 영혼이 선으로 다듬어지는 것이며, 영혼이 선으로 다듬어지는 것은 두려움의 어머니이다. 두려움은 하늘과 땅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낳으며, 계명을 지키는 것은 사랑의 표징이다. 사랑의 시작은 겸손의 풍요이며, 겸손의 풍요는 사랑의 충만함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무정심을 통해 마음이 깨끗해진 자들 안에 하나님의 완전한 내주하심이 있다. “그러므로 마음이 청결한 자들은 하나님을 볼 것이라”(마태복음 5:8).

 

4. 여덟 가지 주요 정욕과의 투쟁

 

1. 탐식과의 투쟁

1. 누군가가 무덤에 들어가기 전에 배의 유혹에서 벗어나는 일이 있다면 참으로 놀라운 일일 것이다.

2. 과식이라는 정욕에 사로잡히면, 배는 배부른 상태에서도 “배고프다!”라고 외치고, 가득 차서 과식으로 인해 부풀어 오를 때조차 “배고프다”라고 호소한다. 이 정욕은 눈앞에 음식이 놓여 있을 때, 모든 것을 한 번에 먹어치우도록 부추긴다.

3. 사자를 어루만지는 자는 종종 그를 길들일 수 있지만, 육신을 기쁘게 하는 자는 그 사나움을 더욱 부추긴다.

4. 배의 노예는 어떤 음식으로 명절을 치를지 고민하지만, 하나님의 종은 어떤 은사로 자신을 풍요롭게 할지 생각한다.

5. 손님이 오면, 배를 쫓는 자는 탐식에 부추겨져 환대를 베풀고, 온 손님을 위로할 기회가 자신에게도 모든 것을 허용하는 면허가 된다고 생각한다. 타인의 방문을 포도주를 마셔도 된다는 구실로 삼으며, 덕을 숨긴다는 명목 아래 정욕의 노예가 된다.

6. 종종 허영심은 과식을 적대시하며, 이 두 정욕은 마치 사들인 노예처럼 가련한 수도사를 두고 서로 싸운다. 과식은 방종을 부추기고, 허영심은 자신의 덕을 과시하도록 부추기지만, 분별 있는 사람은 이 두 심연을 모두 피하며, 한 정욕을 다른 정욕으로 물리칠 수 있는 적절한 때를 잘 활용한다.

7. 육신이 여전히 거칠게 날뛰면, 언제 어디서나 절제로 그것을 다스려야 한다. 그러나 육신이 가라앉았을 때(비록 죽기 전까지는 그런 날이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때 비로소 우리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절제를 숨길 수 있다.

8. 영적 지도자가 젊은이인 너에게 연회에서 포도주를 마시도록 허락한다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살펴보아라.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면 조금은 허용해도 되겠지만, 그가 온전히 현명하지 않다면, 그의 축복에 신경 쓰지 말고 절제를 지키는 편이 너에게 더 낫다. 특히 육신의 정욕이라는 불길과 아직 싸우고 있을 때는 더욱 그러하다.

9. 배를 다스리는 데에는 현명한 점진성을 발휘하자: 우선 살을 찌게 하는 음식을 끊고, 그다음에는 열을 일으키는 음식을, 그 다음에는 달콤한 음식을 끊어야 한다. 배에 적당하고 소화가 잘 되는 음식을 주어, 적당한 포만감으로 배의 탐욕을 잠재우고, 음식이 빨리 소화됨으로써 불타오르는 욕망을 재앙처럼 떨쳐내도록 하라.

10. 타락하지 않은 자들에게는 정욕이 일어날 때만 특별한 절제가 필요하지만, 타락한 자들에게는 죽을 때까지라도 그것이 필수적이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들은 자신의 육체에 위안을 주지 말고, 타협 없이 그것과 싸워야 한다. 전자의 임무는 오직 항상 질서 정연한 마음의 안정을 지키는 것뿐이며, 후자의 임무는 또한 영적인 탄식과 (굶주림과 갈증으로 인한) 쇠약함을 통해 하나님을 달래는 것이다.

11. 장차 닥칠 불을 생각하며 배를 다스리자. 배의 욕망에 굴복한 어떤 이들은(그로 인해 욕정이 불타오른 탓에) 결국 자신의 성기를 잘라버렸고, 이중의 죽음을 맞이했다. 자세히 살펴보면, 과식이 바로 우리에게 닥치는(욕정의 바다에) 침몰의 유일한 원인임을 알게 될 것이다.

12. 금식하는 이의 마음은 맑게 기도하지만, 절제하지 못하는 이의 마음은 불결한 환상으로 가득 차 있다. 배를 채우는 것은 눈물의 샘을 말리지만, 절제로 말라버린 배는 눈물을 흘리게 한다.

13. 자신의 배를 섬기면서 동시에 음탕한 영을 이기려 하는 자는, 마치 기름으로 불을 끄는 사람과 같다.

14. 배가 굶주릴 때, 마음도 겸손해지나니, 만일 배가 음식으로 편안해지면, 마음은 생각으로 치솟는다.

15. 절제로 배를 괴롭히라. 그리하면 네 입을 막을 수 있으리니, 혀는 많은 음식에서 힘을 얻기 때문이다.

16. 배를 채우는 자는 내장을 넓히지만, 절제로 배를 괴롭히는 자의 내장은 조금씩 좁아진다. 좁아진 내장은 더 이상 많은 음식을 요구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17. 악마가 종종 배에 얹혀 앉아, 비록 사람이 이집트의 모든 음식을 먹어 치우고 나일강의 물을 모두 마셔 버린다 해도, 사람이 배부르게 먹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알아두라.

18. 만일 네가 그리스도께 좁고 험한 길을 가겠다고 약속했다면, 네 배를 절제하라. 방종과 “넓은 길”인 탐식, “파멸로 이끄는” 음행은 “많은 사람이 그 길을 걷고” 있지만, 절제의 “좁은 문과 험한 길”, “생명으로 이끄는” 순결은 “그곳으로 들어가는 자가 적다”(마태복음 7,14).

19. 음식으로 가득 찬 식탁에 앉아 있을 때, 마음의 눈으로 죽음과 심판을 떠올려라. 그래야만 과식의 욕망을 조금이나마 억제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술을 마실 때는 언제나 주님의 신맛과 쓴맛을 떠올리라. 그리하여 절제의 경계를 지키거나, 적어도 정신을 차려 자신의 생각을 겸손하게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다.

20. 과식은 수도원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타락과 서원 위반의 원인이다. 네가 이 여주인을 이긴다면, 어떤 곳이라도 네가 무욕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될 것이나, 만약 그녀가 너를 지배한다면,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어디서나 고통받을 것이다.

21. 죽음에 대한 생생한 기억은 식욕의 절제를 막아줍니다. 그리고 식욕의 절제가 겸손과 함께 이루어지면, 다른 정욕들도 동시에 끊어집니다.

22. 한때, 내가 아직 젊었을 때, 어느 도시나 마을에 갔는데, 그곳에서 점심 식사 도중 갑자기 과식과 허영에 대한 생각이 나를 덮쳤다. 그러나 과식의 유혹을 두려워하여, 차라리 허영에 굴복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평신도들에게 있어 모든 악의 뿌리는 재물 사랑이며, 수도자들에게는 과식이다.

23. 나는 어떤 용기 있는 수행자들을 보았는데, 그들은 어쩔 수 없는 필요에 따라 배에 약간의 음식을 허락한 뒤, 곧바로 이 저주받은 몸을 밤새도록 서서 지치게 만들었고, 이를 통해 몸이 포만감을 기꺼이 멀리하도록 가르쳤다.

24. 수도 생활을 시작할 때 과식과 허영에서 완전히 깨끗해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허영에 맞서기 위해 배를 채우는 쾌락으로 싸워서는 안 된다.

25.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장으로 향하는 죄수가 대중의 구경거리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것처럼, 자신의 죄를 진정으로 애도하는 자도 배를 만족시키려 하지 않을 것이다.

26. 많은 거름 더미에서 많은 구더기가 태어나듯이, 많은 음식에서도 많은 타락과 사악한 생각, 그리고 (부끄러운) 꿈들이 생겨난다.

27. 탐식의 극한이 먹고 싶지 않을 때에도 억지로 음식을 섭취하는 것이라면, 절제의 극한은 배가 굶주릴 때, 비록 그 순간 배가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본성을 억제하는 것이다.

28. 살찐 새가 높이 날 수 없는 것처럼, 자신의 육신을 탐하는 자도 하늘에 오를 수 없다.

29. 말라버린 진흙은 돼지들에게도 먹히지 않듯이, 고행으로 시든 육체는 더 이상 악령들을 달래주지 못한다.

30. (식탐의 고백). 내가 너희의 본성과 얽혀 있는데, 어떻게 나를 떨쳐낼 수 있겠느냐? – 나의 문은 식욕이며, 습관이 나를 만족할 줄 모르는 존재로 만든다. – 그 습관은 나중에 영혼의 무감각과 죽음에 대한 망각과 함께, 나를 향한 정욕의 근거가 된다. – 나의 맏아들은 음행이며, 그 다음으로 태어난 자식은 마음의 잔혹함이고, 세 번째는 졸음이다. 악한 생각의 바다, 더러움의 파도, 이름 붙일 수 없는 불결함의 심연 또한 나로부터 비롯된다. 나의 딸들은 게으름, 수다, 건방짐, 조롱, 신성모독, 반항, 잔인함, 불순종, 무감각, 정신의 포로, 자만, 오만하고 미친 듯한 자만심, 세상에 대한 사랑이며, 그 뒤를 이어 더럽혀진 기도, 생각의 방황과 종종 뜻밖의 불행; 그리고 이 모든 것 뒤에는 절망이 따른다 – 모든 정욕 중에서 가장 사나운 것이다. – 죄의 기억이 나를 대적하지만, 이기지 못한다. 죽음에 대한 생각이 나를 심하게 적대하지만, 인간에게는 나를 완전히 없애버릴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위로자를 받아들인 자는 기도로 그분께 나를 호소하며, 그분은 간청을 받으시고 내가 그 안에서 정욕적으로 활동하지 못하게 하신다. 그러나 그분을 맛보지 못한 자들은 온갖 방법으로 나의 달콤함을 즐기려 한다.

 

2. 음행과의 투쟁

1. 배를 채우는 것은 음행의 어머니요, 배를 절제하는 것은 순결의 원천이다.

2. 우리가 배부르게 되면 방탕의 영이 떠나고, 우리에게 음란의 영을 보내며,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알리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가서 저 사람을 유혹하라. 그의 배는 배부르니, 그러니 너는 조금만 수고하면 된다.” 이 영은 다가와 미소를 지으며, 잠으로 우리의 손과 발을 묶은 뒤, 원하는 대로 우리를 다루며, 꿈으로 영혼을 더럽히고 정욕으로 몸을 타락시킨다.

3. 순결을 지키는 법을 배운 자 중 누구도 그것을 스스로 이룬 것으로 여기지 말라. 누구도 자신의 본성을 이길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본성이 정복된 곳에서는 본성을 초월하신 분의 임재가 드러난다. 왜냐하면, 의심의 여지 없이, 작은 것은 큰 것에 의해 사라지기 때문이다.

4. 순결의 시작은 생각이 음란한 욕망과 결합되지 않을 때이며, 몽상 없이 때때로 꿈속에서 정액이 배출될 때이다. 순결의 중간 단계는 자연스러운 움직임이 오직 음식에 대한 만족에서 비롯되고, 몽상과 정액 배출로부터 자유로울 때이다; 순결의 끝은 불순한 생각을 죽이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육체를 죽이는 것이다.

5. 기도로 음탕한 개를 쫓아내는 자는 사자와 싸우는 자와 같으며; 저항으로 그를 제압하는 자는 적을 도망치게 하고 추격하는 자와 같으며; 정욕 그 자체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져, 단 한 번에 영원히 그에게 접근할 수 없게 만든 자는 비록 육신에 머물러 있더라도 이미 무덤에서 부활한 것이다.

6. 순결의 징표가 잠든 꿈속에서도 음탕한 충동을 느끼지 않는 것이라면, 음탕함의 극한은 분명 깨어 있는 상태에서도 단지 생각과 기억만으로도 정욕을 참아내는 것이 될 것이다.

7. 육체적인 수고와 땀으로 이 적과 싸우는 자는 마치 밧줄로 적을 묶어 둔 자와 같으며; 절제와 깨어 있음으로 적과 싸우는 자는 마치 적을 쇠사슬로 묶은 자와 같으며, 겸손과 분노 없음, 그리고 갈망으로 무장하여 그와 맞서는 자는 마치 적을 죽여 모래 속에 숨긴 자와 같다.

8. 어떤 이는 위업으로, 어떤 이는 겸손으로, 또 어떤 이는 하나님의 내적 감화로 이 고문자를 묶어 둔다. 첫 번째는 새벽과 같고, 두 번째는 보름달과 같으며, 세 번째는 환히 빛나는 태양과 같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하늘에 거처를 두고 있다.

9. 여우는 잠든 척하고, 악마는 순결한 척한다. 여우는 새를 속이기 위함이고, 악마는 영혼을 파멸시키기 위함이다. 평생 이 덧없는 육신을 믿지 말고, 우리가 그리스도 앞에 서기 전까지는 그에게 의지하지 말라.

10. 신앙의 초보자들에게는 육신의 죄로 넘어지는 일이 대개 풍성한 음식 때문이며, 중급 신자들에게는 교만 때문이고, 초보자들에게도 마찬가지 이유에서 비롯되지만, 완전함에 가까워지는 이들에게는 오직 이웃을 정죄할 때만 그런 일이 일어난다.

11. 어떤 이들은 타고난(선천적인) 거세자들을 육체의 고통에서 해방된 자들로 칭송하지만, 나는 매일같이 스스로를 거세하고, 생각이라는 칼로 자신을 잘라내는 데 익숙해진 사람들을 칭송한다.

12. 반박과 논증으로 음탕의 악마를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에게는 유리한 조건들이 있으니, 그는 우리의 본성을 이용해 우리와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13. 자기 육신과 싸우거나 자신의 힘으로 그것을 이기기를 바라는 자는 헛되이 수고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육신의 정욕의 집을 허물지 않으시고 영혼의 집을 세우지 않으신다면, 스스로 이 일을 이루려 애쓰는 자는 헛되이 깨어 있고 금식하는 것이다.

14. 주님 앞에서 자신의 본성의 연약함을 엎드려 인정하고, 모든 면에서 자신의 무력함을 깨달을 때, 비로소 절제의 은사를 눈에 띄지 않게 받게 될 것이다.

15. 정욕의 구덩이에 미끄러져 떨어진 자들은, (야곱이 본) 그 사다리를 오르내리는 자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가며, 그들이 다시 그러한 상승에 나서기 위해서는 많은 수고와 극도의 금욕이 필요하다.

16. 아내를 알지 못한 채 저지르는 음행도 있는데, 이는 본성에 어긋나는 것이므로 더 큰 고통을 안겨준다. 이는 일종의 죽음이자 파멸로, 우리가 항상, 특히 젊은 시절에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파멸을 성경 구절로 감히 밝히지 못하겠으니, “그들 앞에서 부끄러운 일이라 말하기도, 기록하기도라고 하신 분의 말씀이 내 손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엡 5:12).

17. 비인간적인 원수이자 음행을 부추기는 유혹자는 하나님을 자비로운 분으로 묘사하며, 그분이 이 정욕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 크게 관대하게 대하신다고 속삭인다. 그러나 이 악랄한 자를 유심히 지켜보면, 이 죄를 범한 후에 그는 이미 하나님을 전혀 다른 분, 즉 오직 공의로우시며 용서하지 않으시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첫 번째 유혹은 우리를 죄로 끌어들이기 위함이고, 두 번째는 우리를 절망에 빠뜨리기 위함이다.

18. 죄를 범한 후, 우리를 괴롭히는 슬픔과 절망이 닥쳤을 때, 우리는 다시 타락에 빠지는 일이 흔하지 않다. 그러나 그 감정이 가라앉으면, 사악한 원수는 다시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비에 대해 설교하기 시작한다.

19. 주님께서는 썩지 않으시고 형체가 없으시기에 우리 몸의 순결과 흠 없음을 기뻐하시나, 마귀들은 악취 나는 음행만큼 기뻐하는 것이 없으며, 몸을 더럽히는 이 정욕만큼 좋아하는 것도 없다.

20. (위로가 되는) 과일의 달콤함의 어머니는 땅과 이슬이며, 순결의 어머니는 침묵과 순종이다. 침묵만으로 이룰 수 있는 육체의 순결은 세상과 가까워지면서 종종 흔들리기 마련이지만, 순종을 통해 얻는 순결은 어디서나 훌륭하고 흔들림이 없다.

21. 절제만으로 이 싸움을 막으려 하는 자는 마치 한 손만으로 바다의 심연에서 헤엄쳐 나오려 애쓰는 사람과 같다. 절제와 겸손을 함께 하라. 왜냐하면 전자는 후자가 없으면 무익하기 때문이다.

22. 네 안에서 지배하고 있는 어떤 정욕을 보게 되면, 바로 그 정욕에 맞서 가장 힘써 무장하라. 특히 내면의 자연스러운 적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둘이 이 정욕을 이기지 못한다면, 다른 것들에 대한 승리도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이집트인을 물리친다면, 우리도 분명 겸손의 덤불 속에서 하나님을 뵙게 될 것이다.

23. 유혹에 빠졌을 때, 나는 기쁨과 눈물, 위로를 느꼈고, 어린아이처럼 이것이 영적인 열매라고 생각했으나, 그것은 원수의 미혹이었다.

24. 속지 마라, 청년아! 나는 어떤 이들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들은 음탕한 정욕에 이끌려 그렇게 하면서도, 오히려 거룩한 사랑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25. 침상에 누울 때야말로 우리가 가장 정신을 차려야 한다. 그때는 육신을 떠난 마음이 마귀들과 싸우기 때문이다. 만일 그 마음이 아직 정욕의 달콤함에 대한 동조를 끊어내지 못했다면, 기꺼이 배신자가 되어 버릴 것이다.

26. 죽음에 대한 기억이 너와 함께 잠들고 깨어나게 하라. 또한 예수님의 기도도 함께 하라. 왜냐하면 잠자는 동안 이 일들만큼 너에게 강력한 보호를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27. 잠자는 중에 때로는 음식의 과다 섭취나, 일반적으로 육체의 지나친 안락함으로 인해 실수가 일어나기도 하고, 때로는 교만 때문이기도 하다. 즉, 오랫동안 실수 없이 지내다 보니 이에 자만하게 될 때이다. 때로는 이웃을 정죄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때로는 단순히 악마의 시기심 때문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이에게 이를 허락하시어, 죄 없는 자로 하여금 이러한 불행한 일을 통해 겸손을 배우게 하신다.

28. 낮에 꿈에서 꾸었던 환상에 대해 생각하지 말라. 마귀들은 바로 그 의도로, 꿈의 환상을 통해 깨어 있는 우리를 더럽히려 하기 때문이다.

29. 정욕의 유혹이 몰아치는 폭풍우가 몰아칠 때,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되는 것은 털옷, 재, 밤새도록 서 있는 기도, 굶주림, 타는 듯한 갈증(몇 방울의 물로도 식히기 힘든), 묘지에 머무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음의 겸손, 그리고 가능하다면 영적 지도자나, 도움을 주기에 신속하고 지혜가 풍부한 형제; 왜냐하면 나는 누군가가 혼자서, 스스로 이 심연에서 자신의 배를 구해낼 수 있다는 것을 기적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30. 어떤 이는 비범할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그녀를 통해 창조주를 찬양했다. 그녀를 바라보는 순간 그 안에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타올랐고, 눈에서는 눈물의 샘이 솟아났다. 그리고 다른 이에게는 파멸이 되었을 일이, 그에게는 본성을 초월하여 (승리의) 면류관이 된 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만일 그런 사람이 항상 이와 같은 상황에서 같은 감정과 행동을 보인다면, 그는 보편적인 부활 이전에 이미 썩지 않음을 얻은 것입니다.

31. 우리는 찬송과 노래에 관해서도 같은 원칙을 따라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세속적인 노래와 영적인 노래를 통해 대개 거룩한 기쁨과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눈물로 이끌리지만, 쾌락을 좇는 자들은 그 반대 방향으로 이끌린다.

32. 어떤 이들은 육신의 죄를 맛본 후에는 깨끗하다고 자칭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들의 견해를 반박하며, 원한다면 접목으로 야생 올리브나무를 좋은 올리브나무로 바꾸는 것이 가능하고 편리하다고 말한다. 만일 천국의 열쇠가 육체적으로 순결한 자에게 맡겨졌다면, 앞서 말한 사람들의 견해는 어쩌면 타당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장모를 둔 채로 순결해져 천국의 열쇠를 지니고 있는 자가 그들을 부끄럽게 하리라.

33. 육신의 정욕이라는 뱀은 여러 가지 모습을 띤다. 그 달콤함을 맛보지 못한 자에게는 ‘단 한 번만 맛보고 그만두라’고 속삭이고, 이미 맛본 자들에게는 이 교활한 뱀이 다시 새로운 유혹으로 이끌고 있다. 초기 신자들 중 많은 이는 이 악을 알지 못하여 유혹에서 자유롭지만, 후기의 신자들은 이 가증함을 경험한 자로서 유혹과 부추김을 견뎌야 한다. 그러나 종종 이와 정반대의 경우도 발생한다.

34. 우리가 선하고 평화로운 기분으로 잠에서 깨어날 때, 이는 성스러운 천사들의 은밀한 영향 때문이며, 특히 기도와 절제 속에서 잠들었을 때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때로는 악몽 때문에 우울하고 짜증 나는 기분으로 깨어나기도 한다.

35. 비물질적인 것이 비물질적인 것과 싸우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물질로 둘러싸인 자가, 적대적이고 교활한 자신의 물질과 싸우면서 비물질적인 적들을 쫓아내는 것은 참으로 경이로운 기적이다.

36. 분별력 있는 성부들은 어떤 것은 ‘연관’이고, 어떤 것은 ‘결합’이며, 어떤 것은 ‘합성’이고, 어떤 것은 ‘포로됨’이며, 어떤 것은 ‘투쟁’이고, 또 어떤 것은 소위 ‘영혼 속의 정욕’이라고 여긴다. 그들은 ‘접속’을 단순한 단어(생각)나 어떤 대상의 형상으로, 다시 마음에 떠오르고 심장에 새겨지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결합’은 나타난 형상이나 정서와 대화하는 것이며, 이는 정서가 동반되기도 하고 무정하게 이루어지기도 한다. ‘합성’은 본 것에 대한 영혼의 끌림으로, 즐거움과 결합된 것이다. ‘매혹’이란 본 것에 대한 마음의 강압적이고 무의식적인 끌림, 혹은 그것과의 완전한 융합으로, 우리의 선한 본성을 파괴하는 것을 말하며; ‘투쟁’이라 함은 상대방에 대한 격렬한 저항을 말하며, 이는 승리로 끝나거나 패배로 끝나는 것으로, 자발적인 것이다; 반면 ‘정욕’이라 함은 영혼에 뿌리내린 후 오랜 습관을 통해 마치 영혼의 본성인 양 굳어져, 결국 영혼이 자발적으로 그리고 저절로 그 충족을 추구하게 되는 그런 탐욕스러운 성향을 말한다. 이 모든 것 중에서 첫 번째는 죄가 없으며, 두 번째는 전적으로 그렇지 않고, 세 번째는 투쟁하는 이의 성향에 따라 죄가 되기도 하고 죄가 되지 않기도 한다. 투쟁은 때로는 영광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고통이 되기도 한다. 사로잡힘은 기도 중에 일어날 때는 어떤 판단을, 다른 때에 일어날 때는 또 다른 판단을 받게 되며, 무관심한 사물을 생각할 때는 한 가지 판단을, 악한 사물을 생각할 때는 또 다른 판단을 받는다. 그러나 정욕 은 의심할 여지 없이 어떤 경우든 비난받으며, 이에 상응하는 회개로 정화되지 않는다면 영원한 고통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첫 번째, 즉 정욕에 대해 무감각하게 대하는 자(그것을 떨쳐내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자)는 그 한 번으로 그 뒤따르는 모든 것을 단번에 잘라낸다.

37. 가장 깨달음이 깊고 분별력 있는 교부들은 앞서 언급된 모든 것보다 더 미묘한 또 다른 생각을 지적했습니다. 이를 ‘생각의 습격’이라 부르는데, 이는 정해진 시간도, 말이나 형상도 없이 화살처럼 빠르게 유혹받는 이에게 정욕을 불어넣습니다. 육체에서는 이보다 더 빠르게 달리는 것이 없고, 영혼에서는 이보다 더 빠르고 순간적인 것이 없으니, 바로 이 생각이 하나의 미묘한 암시—시기도 없고, 말로 표현되지 않으며, 어떤 이들에게는 심지어 알 수조차 없는—로, 사전 대화나 협의 없이 갑자기 영혼 속에 그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다. – 울음으로 (이해하고, 깨닫고), 그 미묘한 생각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영혼이 한 번의 시선이나 손의 접촉, 혹은 노래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도 않고 계획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열정적으로 타락하는지(욕망으로 더럽혀지고 타락하는지) 우리에게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이다.

38. 때로는 정욕이 영혼 안에서 생겨나 육체로 옮겨가기도 하고, 때로는 육체에서 영혼으로 옮겨가기도 한다. 후자는 대개 세속에서 사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고, 전자는 수도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데, 이는 그들에게 정욕을 일으키는 요소(혹은 정욕의 재료)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39. 우리의 썩어질 육체의 동맹자인 악마와 오랜 투쟁 끝에, 마침내 금식의 돌과 겸손의 칼로 그를 우리 마음에서 쫓아내면, 이 저주받은 자는 마치 벌레처럼 우리 몸속을 기어다니며, 시기적절하지 않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움직임을 일으켜 우리를 더럽히려 애쓴다.

40. 이 악마는 우리가 육체적으로 그에게 대항하여 기도할 수 없는 순간을 다른 누구보다도 면밀히 지켜본다. 그리고 그때 이 추악한 자는 특히 우리를 공격하려 든다.

41. 아직 진정으로 마음에서 우러나는 기도를 터득하지 못한 이들에게는 (음란한 정욕과의 싸움에서) 육체적인 기도로 몸을 지치게 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즉, 손을 흔드는 것, 가슴을 치는 것, 하늘을 향해 감격에 찬 눈빛을 올리는 것, 신음과 탄식을 곁들인 한숨, 그리고 자주 무릎을 꿇는 것 등을 말한다; –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주변에 있기 때문에 종종 이를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 바로 그때 악마들이 특히 그들을 공격하려 든다. 그리고 그들은 아직 마음의 굳건함과 기도의 보이지 않는 힘으로 악마들에 맞설 힘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때로는 자신들을 괴롭히는 자들에게 굴복하기도 한다. 너는 그런 경우, 가능하다면 서둘러 사람들로부터 물러나, 잠시 동안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어라. – 그리고 그곳에서, 가능하다면 영혼의 눈으로,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육신의 눈으로 슬픔에 찬 시선을 하늘로 향하고, – 양손을 십자 모양으로 벌리며, 이러한 방식으로 마음속의 아말리크를 수치스럽게 하고 물리치기 위해, – 구원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께, 교묘한 말이 아니라 겸손한 말로, 무엇보다 먼저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가 연약하오니”(시 6:3)라고 부르짖으라. 그러면 경험을 통해 지극히 높으신 분의 능력을 깨닫게 될 것이며, 보이지 않는 도움으로 보이지 않는 자들을 도망치게 할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싸우는 데 익숙해진 자는 머지않아 영혼 하나만으로 원수들을 쫓아내게 될 것이니, 이는 첫 번째 일에 대한 보상으로 하나님께서 행하는 자들에게 두 번째 일을 주시기 때문이다.

42. 음탕한 정욕을 씻어 주는 이 약으로 너를 마시게 하려는 모든 사람의 모욕을, 생명의 물처럼 부지런히 마시라. 그러면 깊은 순결이 네 영혼 속에서 빛나고, 하나님의 빛이 네 마음에서 부족함이 없을 것이니라.

43. 어두운 불의 심연과, 자비 없는 종들, 무자비하고 가차 없는 심판자, 지옥 불꽃의 끝없는 심연, 지하로 통하는 비좁은 계단, 끔찍한 심연, 그리고 이와 유사한 것들을 끊임없이 상상하고 떠올리라; 이러한 기억에서 솟아나는 두려움으로, 네가 음탕한 감정을 떨쳐내고, 썩지 않는 순결과 하나가 되어, 모든 불보다 더 찬란한 비물질적인 빛의 광채를 네 영혼에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라.

44. 우리가 침상에 누우자마자 우리에게 다가와 교활하고 불결한 생각들을 쏘아대는 악마가 있다. 이는 우리가 기도로 그들에 맞서 무장하는 것을 게을리하고, 더러운 생각들을 품은 채 잠들게 하여, 나중에 더러운 꿈에 사로잡히게 하려는 것이다.

45. 눈이 보지 못한 것은, 귀로만 들은 것만으로도 목이 크게 갈망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육체가 깨끗한 자들은 (음탕함의) 유혹을 알지 못함으로 인해, 음탕함과의 싸움에서 큰 위안을 얻는다.

46. 사자와 싸우는 자가 그에게서 눈을 돌리면 즉시 죽게 되는 것처럼, 자기 육신과 싸우는 자도 육신을 방치하면 마찬가지로 망하게 된다.

47. 육체의 정욕과 싸우는 이들에게는 때로 침묵이 마땅하나, 이는 그들을 잘 아는 스승의 허락을 받은 경우에 한한다.

48. 나는 낙담의 악마가 음행의 악마보다 먼저 나타나 그 길을 닦아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육체를 완전히 이완시키고 잠에 빠지게 하여, 음행의 악마가 잠든 자에게 마치 깨어 있을 때처럼 더러움을 저지르게 할 기회를 주기 위함이다.

49. 세상의 왕이 자기 앞에 서 있으면서도 동시에 얼굴을 돌리고 적들과 대화하는 자를 혐오하듯이, 주님 앞에서도 기도하는 척하면서 불결한 생각을 품는 자는 혐오스러운 존재가 된다.

50. 이 개(음란의 악마)가 네게 다가올 때, 기라는 영적 무기로 쫓아내라. 그가 아무리 뻔뻔하게 굴어도 그에게 굴복하지 말라.

51. (음탕한 정욕에 대한 고백). 영혼이 묻는다. “내 아내여, 내게 말해 다오. 내 본성아(나는 너 외에는 누구에게도 너에 관한 일을 묻고 싶지 않으니), 어떻게 하면 네게 상처받지 않고 지낼 수 있겠느냐? 어떻게 네가 주는 고통을 이겨낼 수 있겠느냐?” 그녀는 자신의 영혼에게 대답하며 말한다. “네가 모르는 것은 말하지 않겠으나, 우리 둘 다 이해하는 바는 말하겠노라. 내 안에는 나의 아버지인 자만심(자기 만족과 자기 연민)이 있다. 멀리서부터 나를 달아오르게 하는 것은 온갖 내게 맞는 쾌락과 안식이다; 이 안식과 그에 상응하는 행위들로 인해 내면에는 욕망의 불길이 타오른다. 그리고 그때, 잉태하여 나는 죄를 낳고, 그 죄들은 태어나자마자 차례로 절망을 통해 영혼의 죽음을 낳는다. – 내 약함과 네 약함, 즉 명백하고도 깊은 약함을 깨닫는다면, 내 손을 묶게 될 것이다. 목구멍을 굶주림으로 괴롭힌다면, 내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도록 내 발을 묶게 될 것이다. 순종과 결합한다면, 나와 맺은 유대를 끊게 될 것이다. 그리고 겸손을 얻게 된다면, 내 머리를 잘라내게 될 것이다.

 

3. 탐욕과의 투쟁

1. 탐욕은 불신의 딸이다. 그것은 가뭄으로 인한 굶주림의 갑작스러움, 노년의 도래, 가능한 약점들을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는 구실로 내세운다.

2. 재물을 탐하는 자는 복음을 조롱하는 자이자 자발적으로 복음을 어기는 자이다. (복음의 정신은 사랑이다.) 그러나 사랑을 가진 자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 사랑과 돈, 이 둘을 모두 누리려 하는 자는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3. 자신을 애도하는 자는 (재산뿐만 아니라) 자신의 몸마저 버리는 것이니, 때가 되면 그 몸조차도 아끼지 않을 것이다.

4. 가난한 자들을 위해 모금해야 한다고 말하지 마라(그들을 돕는 것을 통해 천국을 얻기 위해서라고), 천국은 두 레프타로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5. 방랑을 좋아하는 자와 돈을 사랑하는 자가 서로 마주쳤는데, 후자가 전자를 무모하다고 비난했다.

6. 이 정욕(돈에 대한 탐욕)을 이긴 자는 모든 근심을 끊어냈으나, 그 정욕에 얽매인 자는(항상 근심에 시달리며) 결코 순수한 마음으로 기도할 수 없다.

7. 돈에 대한 탐욕은 자선을 베풀겠다는 생각에서 시작되지만, 가난한 자들에 대한 증오로 끝난다. 그리고 그(돈에 집착하는 자)는 모으는 동안에는 자비롭지만, 일단 모으고 나면 손을 꽉 쥔다.

8. 나는 돈으로 인해 가난한 자들이, 영적으로는 가난한 삶을 살면서도 영적으로 부유해져, 예전의 가난을 잊어버린 것을 보았다.

9. 탐욕이 없는 사람은 (세속적인) 모든 근심을 내려놓고, 삶과 세속적인 일에 연연하지 않으며, 아무런 방해 없이 자신의 길을 걷는다. 그는 온 세상의 주인이니, 자신의 모든 슬픔을 하나님께 맡긴 자이다. 그는 사람에게 자신의 궁핍함을 말하지 않으나, 오는 모든 것을 주님의 손에서 오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10. 탐욕 없는 자는 그 무엇에도 매이지 않으며, 자신이 가진 것에 대해서는 마치 없는 것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은둔자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 이미 모든 것을 마음속으로 정리해 두었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슬퍼하는 자는 아직 탐욕 없는 자가 아니다.

11. 소유에 집착하지 않는 자는 순수하게 기도하지만, 소유에 집착하는 자는 기도할 때 물질적인 형상들로 가득 차서, 마치 그것들에게 기도하는 것처럼 된다.

12. 순종 속에 머무는 자들은 재물 탐욕과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미 자신의 육체마저 내어주었으니, 더 이상 무엇을 소유로 가질 수 있겠는가.

13. 하늘의 것을 맛본 자는 세상의 것을 아무것도 여기지 않으나, 하늘의 것을 맛보지 못한 자는 (세상의) 재물을 모으는 데서 즐거움을 얻는다.

14. 오, 수도사들아! 새들보다 믿음이 약해지지 말자. 새들은 굽지도 않고 모으지도 않느니라.

15. 모든 재물을 경건하게 버린 자는 위대하나, 자신의 뜻을 버린 자야말로 거룩하다. 전자는 재물이나 은사로 백 배를 받을 것이요, 후자는 영생을 상속받으리라.

16. 바다에는 파도가 떠나지 않듯이, 재물을 탐하는 자에게는 분노와 슬픔이 떠나지 않는다.

17. 흔들리지 않는 믿음은 모든 근심을 끊어 버리고, 죽음을 기억하는 것은 육신마저 버리는 법을 가르쳐 준다.

18. 욥에게는 탐욕의 흔적조차 없었기에, 그는 모든 것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요하지 않고 견뎌 냈다.

19. “모든 악의 뿌리는” “돈에 대한 탐욕”이라 불린다(딤전 6:10); 이는 그것이 증오, 도둑질, 시기, 분열, 원한, 혼란, 원한 품기, 무자비함, 살인을 낳기 때문이다.

20. 믿음과 순례 생활은 돈에 대한 탐욕을 죽이는 것이며, 자비와 사랑은 심지어 육신조차도 아끼지 않는다.

21. 발에 족쇄를 찬 사람이 편히 걸을 수 없는 것처럼, 돈을 모으는 자들도 하늘에 올라갈 수 없다.

22. 탐욕의 극단이 사람이 부를 모으는 것을 멈출 수 없거나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무소유의 경지는 자신의 몸조차 아끼지 않는 데 있다.

23. 근심을 버리자. 우리는 근심에서 자유로운 자들의 대열에 이름을 올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것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어떤 변명으로도 우리 자신을 정당화할 수 없다. 한 가지를 기억합시다. 곧, 성세례를 통해 다시 태어나 주님을 영접한 자들에게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는 사실입니다(요한복음 1:12). 그러므로 그들에게 “잠시 멈추고 내가 하나님임을 깨달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시편 45:11).

24. 주님께서,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소명을 받은 후,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도 가져다줄 수 없는 일들을 돌보는 데 모든 것을 내버려 둔 우리에게는 큰 수치입니다. 특히 우리의 큰 궁핍의 때, 즉 영혼이 떠나는 순간에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뒤로 물러서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25. 탐욕의 악마는 소유를 탐하지 않는 자들과 싸우며, 그들을 이길 수 없을 때면 그들에게 거지들을 보여주고, 자비의 외피를 뒤집어쓰고 그들을 설득하여, 그들이 비물질적인 존재에서 다시 물질적인 존재로 돌아가게 한다.

26. 금을 진흙으로 바꾸는 자들이 큰 손해를 보는 것처럼, 육체적 이익을 얻기 위해 자신의 영적 성취를 과시하고 널리 알리는 자들도 오직 손해만을 입는다.

 

4. 분노와의 투쟁

1. 분노란 숨겨진 증오, 즉 원한을 떠올리는 것이다. “분노”란 자신을 화나게 한 자에게 해를 끼치고자 하는 욕망이다. “성급함”(격한 성미)은 마음이 순간적으로 불타오르는 것이다. “분통”은 영혼에 자리 잡은 불쾌하고(짜증 나는) 감정이다. “분노”는 선한 기분을 타락시키고 영혼을 수치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2. 어떤 이들은 짜증과 분노에 쉽게 휩쓸리면서도 이를 신경 쓰지 않고, 이 정욕을 치유하는 데 신경을 쓰지 않으며, 지혜로운 분이 말씀하신 “분노의 열망은 그에게 파멸이 된다”(시라 1,22)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는다.

3. 분노는 빠르게 돌아가는 맷돌과 같아서, 단 한 순간에 영혼의 밀과 열매를 갈아 없애버릴 수 있는데, 이는 하루 종일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큰 피해를 입힌다. 그러므로 자신을 세심하게 살피어야 한다. 분노는 강한 바람에 부채질당하는 불꽃처럼, 느린 불보다 더 빨리 영혼의 밭을 태우고 망가뜨린다.

4. 분노하지 않음은 불명예를 향한 끝없는 갈망과 같으며, 이는 허영심 많은 자들이 칭찬을 지나치게 갈망하는 것과 같다. 분노하지 않음은 모욕에 무감각한 상태에서 수고와 땀을 통해 얻어지는 본성에 대한 승리이다.

5. 온유함은 모욕을 당할 때나 칭찬을 받을 때나 변함없이 유지되는 영혼의 확고한 태도이다.

6. 분노하지 않음의 시작은 마음이 동요할 때 입을 다무는 것이며, 중간 단계는 영혼이 미묘하게 흔들릴 때 생각을 가라앉히는 것이며, 끝은 불순한 바람이 불어올 때 흔들리지 않는 고요함을 유지하는 것이다.

7. 불 위에 끊임없이 쏟아지는 물이 불을 완전히 끄듯이, 참된 눈물의 울음은 대개 모든 분노와 격분의 불길을 꺼버린다.

8. 빛이 나타나면 어둠이 물러가듯이, 겸손의 향기 앞에서 모든 근심과 분노가 사라진다.

9. 회개하는 이에게 짜증 섞인 분노만큼 부적절한 것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은 큰 겸손을 요구하지만, 짜증은 자만심의 표징이기 때문이다.

10. 지극한 온유함의 극한이, 자신을 화나게 하는 자의 면전에서도 마음속으로 그에게 평화롭고 사랑스럽게 대하는 것이라면, 의심할 여지 없이 지극한 성난 마음의 극한은, 누군가 혼자 있을 때 자신을 모욕한 자와 말과 몸짓으로 격렬한 다툼과 싸움을 벌이는 것이다.

11. 성령께서 영혼의 평화이시고, 분노가 마음의 혼란이라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는 데 있어 짜증 섞인 분노만큼 큰 장벽이 되는 것은 없다.

12. 입을 다무는 것은 분노에 대항하는 첫 번째 무기이다. 그러나 침묵이라는 가면 아래 원한을 숨길 수도 있다. 이는 더 나쁜 일이다. 차라리 분노에 휩싸여라도 속마음을 털어놓는 편이 낫다. 어떤 사람은 분노 중에 음식을 거르는데, 이는 오히려 그 정욕을 더욱 깊게 할 뿐이다. 또 어떤 사람은 많이 먹는데, 이로 인해 광란에 빠지기도 한다. 반면 절제된 위로는 종종 분노를 가라앉히는 데 도움이 되곤 했다. 그러므로 이 정욕과의 싸움에는 큰 신중함이 요구된다. 그리고 이 정욕은 육체적 욕망이라는 뱀처럼 본성에 의해 조장된다.

13. 때로는 절제된 달콤한 노래가 짜증을 성공적으로 달래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지나치고 부적절한 노래가 정욕을 부추기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 방법을 활용할 때는 그 정도와 시기를 현명하게 정해야 한다.

14. 성미가 급한 이들에게는 형제적 공동체 생활이 더 유익하고, 음탕한 이들에게는 음행과 악취 나는 불결함에 대한 치료법으로서 침묵의 삶을 사는 것이 더 낫다. 한편, 이 두 가지 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은 지도 신부님의 손에 자신을 맡겨야 하며, 신부님께서 때로는 그들을 침묵 속에 머물게 하시고, 때로는 공동체 생활의 순종이라는 수행으로 이끌어 주시도록 해야 한다.

15. “내 눈이 분노로 인해 흐려졌도다”(시 6:8)라고 말한 대로, 짜증으로 마음의 눈을 흐리게 하는 것은 큰 해악이다. 그러나 분노로 인한 마음의 동요를 말로 표현하는 것은 더욱 큰 해악이다. 이때 손을 써서 행동에 옮기는 것은 수도 생활, 즉 천사적이고 신성한 삶에 완전히 어긋나고 낯선 일이다.

16. 자세히 살펴보면, – 분노하기 쉬운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경건한 기도와 금식, 침묵을 부지런히 지키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며, – 원수는 이를 방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회개와 통곡의 수련 속에서도 이 정욕을 키우고 되살릴 재료를 마련할 줄 알기 때문이다.

17. 복된 온유함의 시작은 영혼의 괴로움과 아픔에도 불구하고 모욕을 인내로 견디는 것이며, 중간 단계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마음을 슬픔 없이 평온하게 유지하는 것이고, 완전함은—만약 그것이 이루어진다면—그 모욕을 자신의 칭찬으로 삼는 것이다.

18. 초심자들에게서 나타나는, 회개의 눈물에서 비롯된 분노 없음은 한 가지이며, 완성된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분노에 대한 흔들림 없음은 또 다른 것이다. 전자의 경우 분노는 마치 고삐와 같이 눈물에 묶여 있으나, 후자의 경우 이 뱀은 무정함의 칼로 죽임을 당한다.

19. 나는 함께 모욕을 당한 세 명의 수도사를 보았다. 그중 한 사람은 모욕을 느꼈으나 침묵을 지켰고,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을 위해 기뻐했으나 모욕한 이를 위해 슬퍼했으며, 세 번째 사람은 이웃이 입힌 해를 마음에 새기며 그를 위해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여기에서 두려움, 보응, 그리고 사랑을 실천하는 자들이 드러난다.

20. 원한을 품는 것은 분노의 극치이며, (우리에게 해를 끼친) 이웃의 죄를 마음에 간직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정하신) 용서의 길(‘용서하라, 그리하면 용서받을 것이다’)을 외면하는 것이며, – 이는 모든 과거의 미덕을 파멸시키는 것이며, 영혼을 죽이는 독이자, 마음을 갉아먹는 벌레이며, 기도하기를 부끄럽게 하는 것(어떻게 “우리도 그러했으니, 주여, 용서하소서”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영혼에 박힌 못이며, 끊임없는 죄, 쉬지 않는 불의, 매 순간의 악이다.

21. 분노를 다스린 자는 원한 품기의 싹을 잘라냈으니, 자식을 낳는 것은 오직 살아 있는 아버지에게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22. 사랑을 얻은 자는 원한과 멀어졌으나, 원한을 품는 자는 자신 안에서 평안을 모르는 수고를 더할 뿐이다.

23. 원한을 품으려면 악마들에게 원한을 품고, 원수를 삼으려면 항상 자신의 육신을 원수로 삼으라. 육신은 배은망덕하고 교활한 친구니, 그것을 기쁘게 해 주면 오히려 더 큰 해를 끼친다.

24. 원한을 품는 마음은 성경을 왜곡하여 해석하는 자로서, 성령의 말씀을 비유적으로 자기 뜻대로 바꿔 해석한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기도가 그를 부끄럽게 하기를 바란다. 마음에 원한을 품고서는 그 기도를 드릴 수 없기 때문이다.

25. 만일 스스로를 다스리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네 마음에서 이 가시를 뽑아낼 수 없다면, 적어도 말로는 적대감을 품고 있던 그 사람 앞에서 회개하는 마음으로 겸손히 엎드려라. 그리고 그 사람 앞에서 오랫동안 보여 온 네 위선을 부끄러워하며, 양심이 불처럼 찌르는 고통을 느끼며 그를 네 사랑 안에 받아들여라.

26. 모욕한 자를 위해 기도하거나, 그에게 선물을 주거나, 식사에 초대했을 때가 아니라, 그가 어떤 정신적 또는 육체적 불행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치 자신처럼 그를 위해 가슴 아파하며 눈물을 흘릴 때 비로소 이 상처에서 벗어났다고 인정하라.

27.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하는 것은 원한을 치유해 주니, 그분의 원한을 품지 않으시는 태도에 크게 부끄러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28. 어떤 이들은 용서를 얻기 위해 수고와 땀을 흘리지만, 원한을 품지 않는 사람은 그들보다 앞서 나간다. “너희가 용서하면, 너희에게도 너그럽게 용서받을 것”이라는 말씀이 참으로 옳기 때문이다(누가복음 6:37).

29. 악을 기억하지 않는 것은 참된 회개의 표징이다. 그러나 악을 기억하면서 회개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치 꿈속에서 자신이 달리고 있다고 상상하는 사람과 같다.

30. 나는 원한을 품은 자들을 보았는데, 그들은 다른 원한을 품은 자들에게 원한을 품지 말라고 조언하다가, 자신의 말에 부끄러움을 느껴 그 정욕에서 벗어났다.

31. 증오와 악의를 품는 마음에서 비방이 생겨나는데, 이는 미묘한 병이며, 사랑의 피를 빨아먹는 은밀한 거머리이다.

32. 어떤 이는 비방을 사랑이나 바로잡고자 하는 마음으로 위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네가 이웃을 사랑한다면, 그를 헐뜯지 말고 그를 위해 기도하라. 오직 그런 행동 방식만이 주님께 기쁘시게 여겨진다.

33. 정죄하는 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자는 넘어지는 자를 책망하지 말고, 유혹하는 마귀를 책망하라. 아무도 하나님께 죄를 짓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모든 사람은 강요당하지 않고(즉, 스스로 죄를 짓지만) 자유롭다.

34. 죄 사함을 받는 가장 간결한 길 중 하나는 아무도 정죄하지 않는 데 있다. “너희는 판단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도 판단받지 아니하리라”(누가복음 6:37)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35. 불이 물과 상반되듯이, 회개하는 자에게는 다른 사람을 심판하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 설령 영혼이 육신을 떠나는 순간에 누군가가 죄를 짓는 것을 보았다 하더라도, 그를 정죄하지 말라. 하나님의 심판은 사람들에게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겉으로는 크게 타락한 것처럼 보였으나, 은밀히 훨씬 더 큰 선행을 행하기도 했다. 험담을 좋아하는 자들은 연기만 보고 그 뒤에 있는 태양을 알아보지 못해 오판에 빠졌다.

36. 경험으로 알 수 있듯이, 육체적이든 영적이든 어떤 죄로 인해 이웃을 정죄하든, 우리도 바로 그 죄에 빠지게 된다.

37. 이웃의 죄를 신속하고 엄격하게 질책하는 자들은, 자신의 죄에 대해 완전하고 지속적인 기억과 슬픔을 품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열정에 사로잡혀 분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만심의 가림막 없이 자신의 악한 행실을 올바르게 바라보는 사람은, 그것 외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비록 백 년을 산다 해도, 심지어 자신의 눈으로 요단강 전체가 쏟아지는 것을 목격한다 해도, 자기 자신을 애도하는 데만도 평생의 시간이 모자랄 것이라고 올바르게 판단할 것이기 때문이다.

38. 영혼을 죽이는 악령들은 우리를 죄를 짓게 하거나, 죄를 짓지 않는다면 죄를 짓는 자들을 비난하게 하여, 이를 통해 우리와 죄를 짓지 않는 자들까지 더럽히려고 한다.

39. 원한에 찬 마음으로 이웃의 가르침과 행실, 미덕을 즐거워하며 비난하는 것은 원한을 잘 품고 시기심 많은 사람들의 징표임을 알아두라.

40. 나는 비밀리에 중대한 죄를 짓고 있지만, 그것이 드러나지 않은 채로, 자신의 순결함을 자만하며 비록 사소한 죄라 할지라도 공개된 죄를 지은 자들을 무자비하게 공격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41.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를 뻔뻔스럽게 빼앗는 것이며, 정죄하는 것은 자신의 영혼을 파멸시키는 것이다.

42. 제사 드림이 다른 어떤 정욕 없이도 사람을 파멸시킬 수 있듯이, 정죄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를 완전히 파멸시킬 수 있다. 바로 그 바리새인이 이 때문에 정죄를 받았다.

43. 성미 급한 자와 위선자가 서로 마주쳤는데, 그들의 대화에서는 단 한 마디의 진리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전자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광기를 발견하게 되고, 후자의 영혼을 살펴보면 간사를 보게 될 것이다.

44. 바람이 심연을 요동치게 하듯이, 분노는 모든 정욕 중에서 가장 심하게 마음을 뒤흔든다.

45. (이 정욕에 대한 고백). 우리에게 말하라, 미친 듯하고 수치스러운 정욕아, 너를 낳은 아버지의 이름은 무엇이며, 너를 악하게 낳은 어머니의 이름은 무엇인가? 또한 네 사악한 아들들과 딸들의 이름은 무엇인가? 그뿐만 아니라, 너와 싸우는 자들은 누구이며, 너를 죽이는 자들은 누구인가? – “ , 나에게는 어머니가 많고, 아버지도 한 분이 아닙니다. 나의 어머니들은 허영, 탐욕, 탐식, 때로는 음행이며, 나의 아버지는 무엇보다도 교만입니다. 나의 딸들은 원한 품기, 증오, 적대감, 자기합리화입니다. 나의 경쟁자들은 내 딸들과 정반대되는 미덕들, 즉 분노하지 않음과 온유함이며, 나를 비방하는 자는 겸손함이다."

 

5. 슬픔과의 투쟁

1. 세상을 미워한 자는 슬픔을 피했다. 그러나 보이는 어떤 것에 집착하는 자는 아직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사랑하는 것을 잃고서 어떻게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비록 모든 일에 있어 우리는 냉철함을 가져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점에 있어서는 가장 신중하고 주의 깊어야 한다.

2. 수도원장이 유익한 징계로서 꾸지람과 질책으로 우리를 시험할 때, 우리는 만물의 심판자께서 하신 무서운 말씀을 떠올려야 하며, 우리 안에 깃든 무분별한 슬픔과 비통함을 의심할 여지 없이 온유와 인내라는 양날의 칼로 베어내야 한다.

3. 우리가 넘어졌다면, 무엇보다 먼저 슬픔의 영에 맞서 싸워야 한다. 왜냐하면 그 영은 우리가 기도할 때 나타나, 우리가 예전에 하나님께 대담하게 나아갔던 일을 상기시키며, 우리를 기도에서 멀어지게 하려 하기 때문이다.

4. 불명예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마음은 성급함을 치유해 주며, 시편을 노래하는 것과 자비, 그리고 탐욕 없음은 슬픔을 죽이는 무기이다.

5. 지나치게 많은 장작이 불길을 누르고 꺼뜨리며 많은 연기를 내뿜듯이, 지나친 슬픔도 영혼을 마치 연기로 자욱하고 어둡게 만들며, 눈물의 물을 말려 버린다.

6. 좁은 길은 치욕과 비난, 조롱, 욕설, 고통과 괴로움으로 표시된다. 그러나 네가 – 모욕을 당할 때 – 용감하게 참아내고, – 중상모략을 당할 때 – 분개하지 않으며, – 모욕을 당할 때 – 화내지 않고, – 비난을 받을 때 – 겸손하게 받아들인다면, 그 길은 구원을 가져다준다. 이 길의 좁은 길을 걷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에게 천국이 있느니라 (마태복음 5:3–12).

7. 모든 슬픔을 자발적으로 인내하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구원을 주는 회개의 길이다.

8. 이미 겪고 있는 눈에 보이는 고통과 보이지 않는 고통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고통까지도 감당할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것은 적극적인 회개의 표징이다.

9. 물이 압박을 받으면 위로 솟아오르듯이, 재앙으로 짓눌린 영혼도 회개를 통해 하나님께로 돌아가 구원을 얻는다.

10. 수도원에 있던 아바키르라는 사람은 매일 모욕을 당했고, 봉사자들은 거의 매일 그를 식사 자리에서 쫓아내어, 그는 종종 굶주린 채로 지내야 했다. 나(성 요한 사다리)가 그에게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대답했다. “신부님, 믿어 주십시오. 이 아버지들이 제가 정말 수도자인지 시험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진심으로 그러는 것이 아니기에, 저도 그들의 의도를 알고 기꺼이 이를 참아내며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 그리고 2년 후 임종할 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 여러분, 감사합니다. 여러분이 저의 구원을 위해 저를 시험해 주셨기에, 저는 17년 동안 악마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11. 또 다른 어떤 노장 마케도니우스에게는 정당한 사유로 인해 처벌로서 항상 초심자들 가운데 머물도록 정해졌으나, 기간이 끝났을 때 그는 마치 중대한 죄를 지은 사람인 양 스스로 이 굴욕적인 참회를 계속하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 그 후 그는 성 사다리 수련자에게 고백했다. “나는 그 어떤 내적 투쟁 속에서도 이토록 큰 안도감을 느껴본 적이 없으며, 지금처럼 내 안에서 신성한 빛의 달콤함을 느껴본 적도 없습니다.”

12. 책망으로 인해 상처를 입을 때, 주님께서 우리의 궁핍함과 우리가 스스로에게 가하는 학대를 보시고 기꺼이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며, 우리 마음을 갉아먹는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실 때까지, 우리의 죄를 되새기자. 시편 기자가 말한 것처럼: “내 마음에 병이 많으나, 주의 위로가 내 영혼을 기쁘게 하셨나이다” (시 93:19).

13. 하나님을 위하여 매일 책망받고 모욕당하면서도 스스로 인내하도록 다잡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는 순교자들과 함께 기뻐하며 천사들과 담대히 대화할 것이다. – 의로운 책망이든 불의한 책망이든 그것을 스스로 거부하는 자는 자신의 구원을 거부하는 것이며, 슬픔을 동반하든 그렇지 않든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는 곧 죄 사함을 받을 것이다.

14. 내 아들아! 네가 처음부터 모욕을 참아낸다면, 영혼의 복된 평안을 얻기 위해 조금만 수고하면 될 것이다.

15. 작은 불이 많은 밀랍을 부드럽게 하듯이, 작은 모욕도 종종 갑자기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달콤하게 하며, 그 모든 사나움과 무감각함, 그리고 잔인함을 없애 버린다.

16. 수련자의 영혼 속에서 겪는 좌절, 굴욕 및 그와 유사한 모든 상황은 쑥의 쓴맛에 비유될 수 있으며, 칭찬, 명예, 찬사는 꿀에 비유된다. 그러나 쑥은 모든 내면의 불순물을 정화하지만, 꿀은 대개 담즙을 증폭시킨다.

 

6. 낙담의 영과의 투쟁

1. 낙담은 영혼의 나태함이며, 수행에 대한 소홀함, 서원에 대한 혐오이다; 평신도들을 유혹하는 자요, 마치 자비롭지 않고 비인간적인 것처럼 하느님을 비방하는 자이다; 시편을 부를 때는 조화가 없고, 기도할 때는 힘이 없으며, 육체적인 봉사에 있어서는 철처럼 단단하고, 수공예에는 게으르지 않으며, 순종할 때는 빠르고 기꺼이 한다.

2. 순종적으로 복종하는 사람은 낙담을 알지 못하며, 감각적인 것을 통해 영적인 것에서 성공한다.

3. 공동체 생활은 낙담의 적이지만, 침묵을 지키는 이에게는 낙담이 늘 함께하는 동반자이다. 죽기 전까지 낙담은 그에게서 떠나지 않을 것이며,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를 괴롭히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은둔자의 방을 보자 낙담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그 곁에 자리 잡는다.

4. 의사는 아침에 환자를 찾아가지만, 낙담은 정오 무렵에 수행자들을 찾아온다.

5. 낙담은 나그네를 환대하도록 부추기고, 수공예로 얻은 돈으로 자선을 베풀라고 끊임없이 속삭이며 귀찮게 한다. 또한 “내가 병들었을 때 너희가 내게 왔노라”(마태복음 25:36)라고 말씀하신 분의 말씀을 상기시키며, 병자들을 방문하도록 열심히 부추긴다; 끊임없이 “슬퍼하는 자와 낙담한 자들에게 가라”고 되뇌이며, 스스로도 낙담해 있으면서도 낙담한 자들을 위로하라고 조언한다.

6. 기도에 몰두한 이에게는 꼭 해야 할 일들을 상기시키며, 온갖 수단을 동원해 마치 말 없는 고삐처럼 어떤 축복을 내세워 우리를 기도에서 벗어나게 하려 한다.

7. 다른 모든 정욕은 어떤 미덕 하나로도 근절될 수 있으나, 낙담은 수도자에게 있어 모든 것을 삼키는 죽음과 같다. 여덟 가지 악의 지도자들 중에서도 낙담의 영은 가장 무거운 것이다.

8. 시편 찬양이 없을 때, 낙담은 찾아오지 않으며, 기도 규칙이 끝난 후(그때 졸음이 찾아오곤 한다) 눈이 생기 있게 떠진다.

9. 낙담이 닥칠 때면 (본성의) 유혹자들이 드러나며, (주의 깊은) 수도사에게 낙담만큼 큰 영광을 안겨주는 것은 없다.

10. 자기 자신을 위해 울어대는 자는 낙담을 알지 못한다.

11. 돈을 사랑하는 수도사는 낙담을 알지 못한다. 그는 매 순간 사도의 말씀을 떠올린다. “게으른 자는 먹지 말라”(살후 3:10), 그리고 또 다른 말씀, “이 손들이 나와 나와 함께 있는 자들을 섬겼다”(행 20:34).

12. 낙담은 때로는 감각적 쾌락을 탐닉함에서 비롯되고, 때로는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이 없음에서 비롯된다.

13. 부지런한 기도는 낙담의 파멸자이며, 최후의 심판에 대한 기억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동하려는) 열정을 불러일으킨다.

14. 선한 소망은 수도사가 낙담을 이기고 단련하는 칼이다.

15. (우울함에 대한 고백). 우리에게 말하라, 게으르고 나태한 정욕아, 누가 너를 악하게 낳았느냐? 네 자식들은 누구냐? 누가 너와 싸우는 자들이냐? 그리고 누가 너의 살인자냐? – (답변). – 나를 낳은 어머니는 많습니다. 때로는 영혼의 무감각, 때로는 천상의 은총을 잊는 것, 또 때로는 과도한 수고입니다. 나와 함께 머무는 나의 자식들은 거처의 변화, 영적 아버지의 계명을 소홀히 하는 것, 최후의 심판을 잊는 것, 그리고 때로는 수도 서원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나를 옭아매는 나의 적들은 바로 시편 찬송과 수공예입니다. 나의 원수는 죽음에 대한 생각이며, 영원한 복을 누릴 수 있다는 확고한 소망을 품은 기도가 나를 죽입니다.

 

7. 허영과의 투쟁

1. 허영은 수고의 낭비요, 땀의 손실이며, 영혼의 보물을 훔치는 자요, 삶의 타작마당에 있는 개미와 같아서, 비록 작지만 언제나 우리의 수고와 업적의 열매를 훔칠 준비가 되어 있다.

2. 허영은 모든 것에 달라붙는다: 금식할 때 허영을 부리지만, 사람들에게 내 절제를 숨기기 위해 금식을 풀 때도 다시 허영을 부리며 스스로를 현명하다고 여긴다; 좋은 옷을 입을 때 허영에 사로잡히지만, 초라한 옷을 입을 때도 마찬가지로 허영을 부린다; 말을 하면 허영심에 사로잡히고, 침묵하면 또다시 그 허영심에 굴복하게 된다. 이 삼지창을 어떻게 던지든, 항상 뾰족한 쪽이 위로 향하게 마련이다.

3. 자만심에 찬 사람은 우상 숭배자이다. 그는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아첨하고 있다.

4.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나 허영심이 있다. 허영심 많은 사람의 금식은 상을 받지 못하고, 그의 기도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 이는 그가 이 두 가지를 모두 사람들의 칭찬을 받기 위해 행하기 때문이다.

5. 허영심 많은 수행자는 스스로에게 이중의 해를 끼치는데, 이는 자신의 몸을 지치게 하면서도 상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6. 주님께서는 우리가 얻은 미덕들을 종종 우리의 눈에서 감추시나, 우리를 칭찬하거나, 더 정확히 말해 아첨하는 사람은 그 칭찬으로 우리의 눈을 뜨게 하는데, 눈이 뜨자마자 미덕의 풍요로움은 사라져 버린다(눈앞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7. 아첨꾼은 악마의 종이며, 교만의 지도자, 감동의 파괴자, 미덕의 파멸자, 참된 길에서 벗어나게 하는 자이다. “너희를 복되다 하는 자들은 너희를 아첨하며, 너희 발의 발걸음을 비틀게 한다”고 선지자가 말하였다(이사야 3:12).

8. 나는 칭찬을 받고는 그 칭찬 때문에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마치 장사할 때처럼 한 가지 욕망을 다른 욕망으로 바꿔버린 채 울고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9. 이웃이나 친구가 네가 없는 곳에서든, 네가 있는 곳에서든 너를 꾸짖을 때, 그때는 사랑을 보여 주라. 그를 칭찬하라.

10. 사람의 칭찬을 마음속 깊이 거절하는 것은 위대한 일이지만, 악마의 칭찬을 자신에게서 물리치는 것은 더 위대한 일이다.

11. 스스로를 비하하는 자가 겸손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누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오는 모욕을 참아내겠는가?).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책망받더라도 그에 대한 사랑을 줄이지 않는 자가 바로 겸손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12. 허영의 악마가 수행자가 비록 작지만 마음의 평온을 얻었음을 보게 되면, 즉시 그를 세상으로 나가게 부추기며 말하되, “멸망하는 영혼들을 구원하러 가라”고 한다.

13. 허영은 경솔한 자들로 하여금 남들이 있을 때 겸손한 척하게 하고, 행동과 표정, 목소리에서 경건함을 보이게 한다. 식사 자리에서는 눈에 띄게 절제하도록 강요하며, 시편을 부를 때는 게으른 자들을 열심 있게 만들고, 목소리가 쉰 자들을 목소리가 좋은 사람으로 만든다.

14. 허영은 사랑받는 자들을 교만하게 만들고, 경멸받는 자들에게는 원한을 품게 한다.

15. 허영은 타고난 재능에 매우 잘 스며들며, 이를 통해 종종 불행한 자신의 종들을 파멸로 몰아넣는다.

16. 한 번은 내가 허영의 악마가 분노의 악마를 쫓아내는 것을 보았다. 한 형제가 다른 형제에게 화를 냈으나, 평신도들이 오자 그는 갑자기 잠잠해지며 허영에 자신을 다시 팔아넘겼다. 왜냐하면 그는 이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17. 허영의 노예가 된 자는 이중의 삶을 산다. 하나는 겉으로 드러나는 삶이고, 다른 하나는 생각과 감정의 모습대로 사는 삶이며, 하나는 혼자 있을 때의 삶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 앞에서의 삶이다.

18. 하늘의 영광을 미리 맛본 자는 당연히 모든 세상의 영광을 경멸한다. 그리고 나는, 전자를 맛보지 않은 채 후자를 완전히 경멸하는 사람이 있다면 오히려 놀랄 것이다.

19. 나는 어떤 이들이 허영심 때문에 영적 수련을 시작하는 것을 보았으나, 나중에 수련에 대한 의도를 바꾸어 비난받을 만한 시작을 칭찬받을 만한 결말로 장식하는 것을 보았다.

20. 재치, 이해력, 읽기와 발음의 솜씨, 빠른 사고력, 그리고 우리가 수고 없이 얻는 그 밖의 유사한 능력들과 같은 타고난 재능을 자랑하는 사람은 결코 타고난 축복 이상의 것을 얻지 못할 것이다; 이는 “작은 일에 불성실한 자는” 자신의 허영심 때문에 “큰 일에도 불성실할 것”이기 때문이다(누가복음 16:10).

21. 수고에 대한 보상으로 하나님께 은사를 구하는 자는 위험한 토대 위에 서 있는 것이나, 반대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늘 빚진 자로 여기는 자는, 자신의 기대를 뛰어넘어 갑자기 하늘의 부로 풍요로워진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22. 이 유혹자가 듣는 이들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 네 미덕을 드러내라고 가르칠 때, 그의 말을 듣지 마라.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자기 영혼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마태복음 16:26)고 하지 않았는가? 겸손하고 꾸밈없는 품성과 그러한 말만큼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것은 없다. 이와 같이 우리는 다른 이들도 교만해지지 않도록 격려할 것이며, 이보다 더 유익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23. 칭찬은 영혼을 높이 들어 올리고 교만하게 만든다. 영혼이 교만해지면, 그때 교만이 그 영혼을 감싸 안아 하늘 높이 치솟게 하기도 하고 심연으로 떨어뜨리기도 한다.

24. 추악한 허영심은 우리에게 없는 미덕의 모습을 취하도록 가르치며, 구세주의 말씀, “너희 빛을 사람 앞에서 비추게 하여, 그들이 너희의 선한 행실을 보고” (마태복음 5:16) 이용해 우리를 현혹시킵니다.

25. 이웃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으려는 생각으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숨기지 말라. 비록 이 ‘반창고’를 사용하는 것이 모든 경우에 유익한 것은 아닐지라도, 죄의 특성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26. 우리를 칭찬하는 자들, 혹은 더 정확히 말해 아첨꾼들이 우리를 칭찬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서둘러 우리의 수많은 죄(그리고 인간의 심판과는 다른 하나님의 심판)를 떠올려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그들이 우리를 위해 말하거나 행하는 일에 우리가 합당하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27. 마음이 순수한 사람들은 이 독에 그다지 쉽게 중독되지 않는다. 허영은 순수함을 망가뜨리고 위선적인 삶을 살게 하기 때문이다.

28. 종종 구더기가 성숙기에 이르러 날개를 얻고 높이 날아오르는 일이 있는데, 마찬가지로 허영심도 강해지면 모든 악의 근원이자 종결자인 교만을 낳는다.

29. 허영을 근절하는 첫걸음은 입을 삼가고 불명예를 사랑하는 것이며, 중간 단계는 허영이 낳는 모든 마음의 유혹을 잘라내는 것이고, 마지막 단계(만약 심연에 끝이 있다면)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불명예를 초래하는 일을 행하는 것이다.

30. 네 고귀함을 숨기고, 네 명성을 자랑하지 말라. 그래야 말로는 한 가지 태도를 보이다가 행동으로는 다른 태도를 보이는 일이 없게 될 것이다.

31. 나는 미숙한 제자를 본 적이 있는데, 그는 어떤 사람들 앞에서 스승의 미덕을 자랑하며, 남의 공로를 가로채어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려 했으나, 오히려 모든 사람이 그에게 “어떻게 좋은 나무에서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가 나왔는가”라고 말했을 때, 수치만을 얻게 되었다.

32. 허영은 장황한 말의 자리에 위엄 있게 나타나는 것을 좋아하지만, 입의 침묵은 허영을 없애 버린다.

33. 허영의 악마에게 굴복한 자들은 음탕한 생각에서 일시적으로 벗어나 자신에 대해 지나치게 생각하기 시작할 때, 시기적절하지 않은 정욕의 충동에 시달리게 된다. 이로 인해 일어난 음탕한 충동은 그로 하여금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는 허영을 깨닫게 하며, 때때로 나타나는 마음의 순결을 자신의 노력이나 수고 탓으로 돌리지 말고, 사도의 가르침을 따르도록 가르친다: “네가 가진 것은 네가 받은 것이니, 그것을 지니라”(고린도전서 4:7), 즉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혹은 다른 이들의 도움과 그들의 기도를 통해 받은 것임을.

34. 침묵과 고요함은 허영의 적이다. 그러나 공동 생활 속에 있다면 모욕을 참아내라.

35. 극단적인 허영이란, 자신을 칭찬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혼자 있을 때 허영심 어린 행동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완전한 무허영의 표징은 다른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도 허영심 어린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다.

 

8. 교만과의 싸움

1. 교만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며, 사람을 경멸하는 것이며, 정죄의 어머니이며, 칭찬의 산물이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물리치는 것이며, 타락의 원인이자, 분노의 근원이며, 남의 일을 괴롭히는 쓰라린 고문자이며, 비인간적인 심판자이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이며, 비방의 뿌리이다.

2. 교만의 시작은 허영이 뿌리내리는 것이며, ‘중간’은 이웃을 깎아내리고, 자신의 수고를 뻔뻔스럽게 선전하며, 마음속으로 자만하고, 책망을 미워하는 것이며, ‘끝’은 하나님의 도움을 거부하고, 자신의 노력에 오만하게 의지하며, 마귀 같은 성품을 갖는 것이다.

3. 나는 입으로는 하나님께 감사드리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스스로를 자랑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이에 대한 분명한 증거는 바리새인이 “하나님, 제가 주님께 감사드립니다”라고 말했을 때이다(누가복음 18:11).

4. 타락이 일어난 곳에는 이미 교만이 자리 잡고 있었으니, 교만은 타락의 전조이기 때문이다.

5. 교만한 수도사는 심하게 반박하겠지만, 겸손한 수도사는 반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눈을 들기도 감히 하지 못한다.

6. 사이프러스 나무는 굽히지도 않고 땅에 엎드리지도 않듯이, 교만한 수도사는 겸손한 순종을 가질 수 없다.

7.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대적하신다”(야고보서 4:6)면, 누가 그들을 불쌍히 여길 수 있겠는가? –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교만한 자는 모두 부정하다”(잠언 16:5)면, 누가 그를 깨끗하게 할 수 있겠는가?

8. 책망을 거부하는 자는 교만의 정욕을 드러내는 것이며,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는 교만의 얽매임에서 풀려난 것이다.

9. 한 현명한 장로가 교만한 형제를 훈계했으나, 그 형제는 영혼이 눈이 멀어 “용서해 주십시오, 아버지, 저는 전혀 교만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현명한 장로는 “내 아들아, 네게 교만이 없다고 단언하는 것보다 네가 교만하다는 것을 더 분명히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어디 있겠느냐”라고 반문했다.

10. 교만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순종하는 것이 가장 유익하며, 가장 거칠고 천한 삶을 살며, 교만의 해로운 결과와 그로부터의 초자연적인 치유에 관한 이야기를 읽는 것이 가장 유익하다.

11. 남의 장식을 자랑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며, 하나님의 은사를 자랑하는 것은 극도의 어리석음이다. 오직 네가 태어나기 전에 이룬 미덕들만을 자랑하라. 그리고 태어난 후에 이룬 미덕들은, 네 탄생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네게 주신 것이다. – 만일 네가 이성의 도움 없이 어떤 미덕을 실천했다면, 그것만이 네 것이 되게 하라. 왜냐하면 이성 그 자체도 하나님께서 네게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 그리고 만일 네가 육신 없이 어떤 위업을 보여주었다면, 그것만이 네 노력에서 나온 것이다. 왜냐하면 육신조차 네 것이 아니며,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이다.

12. 심판자께서 너에 대해 내리실 마지막 말씀을 듣기 전까지는 네 미덕을 의지하지 말라. 복음서에서 우리는 이미 혼인 잔치에 앉아 있던 자조차 손과 발이 묶여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내쫓겼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마태복음 22:13).

13. 우리 스스로를 끊임없이 시험하고, 우리의 삶을 우리보다 먼저 사신 성부들과 성인들의 삶과 비교하는 일을 그치지 말자. 그러면 우리는 이 위대한 분들의 삶의 발자취를 따르기 위해 아직 한 걸음도 내디디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서원조차 마땅히 이행하지 못하고 여전히 세속적인 생활 방식에 머물러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14. 수도자는 자신이 뛰어들어 온갖 악한 영을 가라앉힌 겸손의 심연이다.

15. 교만에서 죄를 잊는 일이 비롯되며, 죄에 대한 기억은 겸손의 중재자이다.

16. 교만은 영혼의 비참함으로, 스스로를 부유하다고 꿈꾸며, 어둠 속에 있으면서도 빛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17. 교만한 자는 속은 썩었지만 겉으로는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사과와 같다.

18. 교만한 자는 유혹자인 마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는 스스로를 위해 마귀이자 원수가 되었다.

19. 교만한 마음에서는 모독하는 말이 태어나고, 겸손한 영혼에서는 하늘의 환상이 솟아난다.

20.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겠지만, 교만한 자들 중 아주 많은 이들이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한 채 무욕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생각하다가, 이 세상을 떠날 무렵에야 비로소 자신의 비참함을 깨닫는다.

21. 교만에 사로잡힌 자에게는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특별한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 인간의 힘으로는 그를 구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22. 모독적인 생각은 교만에서 비롯되지만, 교만은 영적 지도자에게 그 사실을 털어놓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종종 이 비참함이 어떤 이들을 절망에 빠뜨려, 마치 나무를 갉아먹는 벌레처럼 그들의 모든 희망을 앗아가곤 한다.

23. (교만 때문에) 모독적인 생각만큼 고백하기 어려운 생각은 없다. 그러므로 종종 많은 이들에게서 그 생각이 노년에 이르기까지 남아 있다. 그러나 그 와중에 우리가 그 생각들을 고백하지 않고 마음속에 숨겨 두는 것만큼, 악마와 악한 생각들을 우리에 대항하여 강화시키는 것은 없다. 바로 그것이 그 생각들을 키우는 것이다.

24. 누구도 모독적인 생각 때문에 자신이 죄를 지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주님께서는 마음을 아시는 분이시며, 그러한 말과 생각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원수들의 것임을 아시기 때문이다.

25. 우리는 모독의 영을 경멸하는 법을 배우고, 그 영이 심어 놓는 생각들에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 그에게 말해야 한다. “나를 따르라, 사탄아; 나의 주 하나님께" 경배하며, "그분 한 분께만" 섬기리라; "병"과 네 말은 " 머리에" 돌아가게 하시고, 네 모독은 " 정수리"에 내리기를, 이 세상에서나 장차 올 세상에서나 그러하리라 (시 7:17).

26. 이 원수를 경멸하는 자는 그 고통에서 해방되나, 다른 방식으로 그와 싸우려 하는 자에게는 그가 우세할 것이다. 말로 영을 이기려 하는 자는 마치 바람을 가두려 애쓰는 사람과 같다.

27. 우리 안에 거룩한 겸손이 꽃피기 시작하면, 그때 우리는 모든 칭찬과 인간의 영광을 경멸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것이 완전히 성숙해지면, 우리는 자신의 선한 행위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길 뿐만 아니라, 매일 알 수 없는 미덕의 낭비로 인해 자신의 죄의 짐을 더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오히려 그것들을 가증스러운 것으로 여길 것이다.

28. 성실한 회개와 온갖 더러움에서 정화된 눈물은 마음속에 겸손의 성전을 세움으로써, 모래 위에 지어진 교만의 허름한 오두막을 무너뜨린다.

29. 교만이 사라지고 겸손이 자리 잡았음을 나타내는 징후는, 모욕과 굴욕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분노를 가라앉히며, 자신의 미덕을 믿지 않는 것이다.

30. 모든 정욕의 끝은 허영과 교만이며, 이는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는 모든 이에게 해당한다. 그러나 이를 근절하는 것은 겸손한 지혜로, 이는 그와 함께 사는 이를 모든 치명적인 독(정욕)으로부터 무사히 지켜준다.

31. 겸손한 수도사는 헤아릴 수 없는 것들에 대해 호기심을 품지 않으나, 교만한 자는 주님의 섭리의 심지까지 탐구하고자 한다.

32. 가장 분별력 있는 형제 중 한 명에게 악령들이 다가와 그를 아첨했다. 그러나 이 겸손하고 지혜로운 이는 그들에게 말하였다. “만약 여러분이 내 마음속에서 나를 칭찬하는 것을 그친다면, 나는 여러분이 물러난 것을 보고 내가 위대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칭찬을 멈추지 않는다면, 나는 여러분의 칭찬을 통해 나의 더러움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교만한 자는 모두 더럽다’(잠언 16:5)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내가 나를 위대한 사람으로 여기게 하려면 물러가시거나, 아니면 칭찬해 주십시오. 그러면 나는 여러분을 통해 위대한 겸손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 양날의 검 같은 말에 그들은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아 즉시 사라져 버렸다.

33. 자만하는 것과 자만하지 않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며, 또 다른 것은 겸손이다. 어떤 사람은 하루 종일 남을 판단하고, 어떤 사람은 아무것도 판단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을 정죄하지 않으며, 또 다른 사람은 죄가 없으면서도 항상 스스로를 정죄한다.

34. 말은 혼자 달릴 때는 빨리 달리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다른 말들과 함께 달릴 때는 자신의 느림을 깨닫게 된다. (자신을 더 뛰어난 이들과 비교하면 자만심을 피할 수 있다).

35. 불결한 악령들이 한 주의 깊은 수행자의 마음에 은밀히 칭찬을 심어 놓았다. 그러나 그는 신성한 영감의 인도하심을 받아, 다음과 같은 경건한 지혜로 악령들의 교활함을 이겨낼 줄 알았다. 그는 자신의 방 벽에 가장 고귀한 미덕들, 즉 완전한 사랑, 천사 같은 겸손, 순수한 기도, 썩지 않는 순결, 그리고 그와 유사한 것들의 이름을 적어 두었다. 그 후 생각들이 그를 칭찬하기 시작하면, 그는 그들에게 “폭로하러 가자”라고 말하곤 했다. 그리고 벽에 다가가 적힌 이름들을 읽어 내려가며, “이 모든 미덕을 얻게 되더라도, 네가 아직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음을 알라”라고 덧붙이곤 했다.

36. 기도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얻고 싶다면, 먼저 마음이 남의 죄를 엿보지 않도록 훈련해야 하며, 이를 위한 선결 조건은 허영에 대한 증오여야 한다.

37. 우리 자신을 깨닫고자 한다면, 끊임없이 스스로를 시험하고 단련해야 한다. 그리고 영혼의 진실한 감정으로 우리 이웃 모두가 우리보다 뛰어나다고 여긴다면, 하나님의 자비는 우리에게서 멀지 않을 것이다.

38. 많은 이들이 스스로를 죄인이라 부르며, 어쩌면 실제로도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나, 마음은 (타인으로부터 오는) 비하로 인해 유혹을 받는다.

39. 누가 자신이 겸손의 향기를 느낀다고 말하느냐? — 칭찬을 받을 때조차 마음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속지 말아야 한다. 그는 속은 것이다.

40. “주여, 우리에게가 아니라, 우리에게가 아니라, 오직 주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소서”라고 어떤 이가 영혼의 감흥 속에서 말했습니다(시 113:9). 그는 인간의 본성이 그토록 연약하여 칭찬을 해를 입지 않고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주님, 교회에서 내 찬양은 주님께로부터 나옵니다”(시 21,26) – 이는 장차 올 세상에서일 것이며, 그 전에는 내가 그것을 안전하게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41. 레몬나무의 본성은 열매를 맺지 못할 때 가지가 위로 뻗어 올라가지만, 그 가지들이 아래로 기울어지면 오히려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 지식을 얻은 자는 이를 이해한다.

42. 만일 어떤 천사들의 교만이 그들을 악마로 변모시켰다면, 의심할 여지 없이 겸손은 악마를 천사로 만들 수도 있다. 그러니 타락한 자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담대하게 나아가라.

43. 가난 속에 머물며 구걸로 생계를 꾸려가는 것만큼 영혼을 겸손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44. 대화 중에 자신의 의견을 고집스럽게 옹호하려는 자는, 설령 그 의견이 옳다 하더라도, 자신이 악마의 병(교만)에 사로잡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만약 그가 동등한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그렇게 행동한다면, 연장자들의 질책이 그를 치유해 줄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그가 자신보다 위대하고 더 현명한 이들에게 그렇게 대한다면, 사람들은 이 병을 치유할 수 없다.

45. 한 번은 내가 가장 지혜로운 장로 중 한 분께, 어떻게 순종이 겸손과 연결되는지 물었다. 그분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현명한 순종자는 설령 죽은 자를 살려내고, 눈물의 은사를 받으며, 비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해도, 항상 이것이 자신의 영적 아버지의 기도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며, 헛된 자만과는 거리가 멀고 낯선 채로 머무른다; 게다가 자신이 스스로 알고 있듯이, 자신의 노력이 아니라 다른 이의 도움으로 이룬 일로 인해 어떻게 자만할 수 있겠는가.

46. 공동 생활에 있을 때는 스스로를 잘 살피고, 결코 어떤 면에서든 다른 형제들보다 더 의로운 척하려 애쓰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두 가지 악을 저지르게 될 것이다. 형제들을 네 거짓되고 위선적인 열정으로 상처 입힐 것이며, 스스로 교만의 빌미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47. 열심을 내되, 마음속으로만 하고, 외적인 태도나 표정, 어떤 말, 혹은 암시적인 신호로도 조금도 드러내지 마라. 교만을 피하기 위해 모든 면에서 형제들과 같아야 한다.

48. 거짓된 감동에서는 교만이 생겨나고, 참된 감동에서는 위안이 생겨난다.

49. 자신의 눈물을 속으로 자랑하며, 울지 않는 자들을 마음속으로 비난하는 사람은, 왕에게 원수를 물리칠 무기를 청했다가 그 무기로 스스로를 죽이는 사람과 같다.

50. 만일 누군가 자신이 교만과 성급함, 간사함과 위선으로 쉽게 굴복한다는 것을 깨닫고, 이 적들에 맞서 온유와 악의를 품지 않음이라는 양날의 칼을 뽑아들고자 한다면, 그는 마치 구원의 세례탕에 들어가는 것처럼 형제들의 모임에 서둘러 들어가야 한다. – 게다가 자신의 악한 습관을 완전히 떨쳐버리고자 할 때는 가장 엄격한 형제들의 모임으로 서둘러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그곳에서 형제들의 질책과 모욕, 그리고 동요에 흔들리며, 그들에게 정신적으로 타격을 받고 때로는 육체적으로도 짓눌리고, 짓밟히고 발뒤꿈치로 차이는 가운데, 자신의 영혼의 옷을 그 안에 깃든 모든 더러움으로부터 깨끗이 씻어낼 수 있을 것이다.

51. 나는 교만이 겸손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보았다. 오만함의 열매는 죄에 빠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원을 원하는 이들에게 있어 죄에 빠지는 일은 종종 겸손한 지혜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곤 한다.

52. 교만한 영혼은 두려움의 노예이다. 자기 자신에게만 의지하는 그 영혼은 피조물들이 내는 미약한 소리나 그림자조차도 두려워한다.

53. 음란한 자들은 사람이 바로잡을 수 있고, 간사한 자들은 천사들이 바로잡을 수 있으나, 교만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치유하신다.

54. 겉으로 드러나는 교만은 고통스러운 역경이 치유하고, 보이지 않는 교만은 보이지 않으시는 분께서 먼저 치유하신다.

55. 영혼의 눈으로 교만을 끊임없이 지켜보라. 왜냐하면 유혹들 중에서 이 정욕보다 더 파멸적인 것은 없기 때문이다.

56. 파멸, 즉 교만의 징후가 누군가 사소하고 하찮은 일로도 자만하는 것이라면, 구원의 징표인 겸손은 위대한 사업과 개혁을 행할 때에도 겸손한 마음가짐을 유지하는 것이다.

57. 한때 나는 이 미친 유혹녀를 내 마음속에 포착했으니, 그녀는 허영이라는 어머니의 어깨에 업혀 그곳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나는 두 사람을 순종의 밧줄로 묶고, 겸손의 채찍으로 때리며, 그들이 어떻게 내 영혼에 들어왔는지 말하도록 강요했다. 마침내 채찍질에 시달리던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는 시작도, 탄생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정욕의 주인이자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적 중 하나인 ‘복종으로 인해 생겨나는 마음의 상심’이 우리를 적지 않게 적대시합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복종하는 것, 이는 우리가 결코 참을 수 없는 일이라.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하늘에서도 지도자였으나, 그곳을 떠났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우리는 겸손의 지혜에 반대되는 모든 것의 어머니이며, 겸손의 지혜에 도움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 우리에게 저항한다. 그나저나, 우리가 하늘에서도 그런 권능을 지녔다면, 네가 어찌 우리 앞에서 도망칠 수 있겠느냐? 우리는 모욕을 참는 일, 순종과 분노하지 않음, 원한을 품지 않음, 그리고 이웃을 섬기는 일을 매우 자주 쫓아다닌다. 우리의 산물은 영적 지도자들의 타락의 결과인 분노, 비방, 원한, 짜증, 고함, 모독, 위선, 증오, 시기, 반항, 제멋대로인 태도, 불순종이다. 우리가 맞서 싸울 힘이 없는 한 가지가 있으니, 네가 우리를 심하게 때릴 때 우리는 네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만약 네가 주님 앞에서 진심으로 스스로를 책망한다면, 우리를 거미줄처럼 경멸하게 될 것이다.” “보라,” 교만이 말하였다. “내가 타고 있는 이 말은 허영이다. 반면 경건한 겸손과 자기 책망은 그 말과 기수를 비웃으며, 달콤하게 그 승리의 노래를 부를 것이다. “주님을 찬양하리니, 그분은 영광스럽게 높임을 받으셨도다. 말과 기수를 바다에 던지셨도다”(출 15:1), 즉 ‘겸손의 심연’에 던지셨도다.”

 

5. 무욕에 대하여

1. 하늘의 위엄은 별들이며, 무정욕의 장식은 미덕들이다.

2. 무정함이라 불리는 이는, 자신의 육신을 정욕으로 썩지 않게 만들고, 마음을 모든 피조물보다 높이 들어 올리며, 모든 감각을 마음에 복종시키고, 자신의 영혼을 주님의 면전 앞에 바쳐, 자신의 힘을 넘어서는 한계를 넘어서서라도 항상 그분께로 뻗어 나가는 자이다.

3. 어떤 이들은 무정함이 육체의 부활 이전에 이루어지는 영혼의 부활이라고 말하며, 또 다른 이들은 그것이 천사들 다음으로 두 번째인,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인식(하나님과의 일체감)이라고 말한다.

4. 주님에 대한 완전한 자들의 이 완전하고 결코 끝나지 않는 완전함은, 이를 맛본 어떤 이가 내게 말했듯이, 마침내 이성을 거룩하게 하고 모든 물질적인 것에서 이를 떼어내어, 이 천상의 안식처에 도달한 후 육신으로 사는 삶의 대부분을 천상에 대한 황홀한 환시 속에 머물게 한다.

5. 무정(無情)한 이가 있고, 무정함 중에서도 가장 무정한 이가 있다. 이는 한 사람은 악을 심히 미워하는 반면, 다른 한 사람은 미덕을 끝없이 쌓아가기 때문이다.

6. 순결(정절) 또한 무정욕이라 불린다. 이는 타당한데, 그것이 바로 일반 부활과 썩어질 것들의 부패하지 않음의 서막이기 때문이다.

7. 만약 정욕에 대한 완전한 노예 상태의 징표가, 사람이 악마들이 은밀히 심어 놓은 거의 모든 생각에 곧바로 순종하는 데에 있다면, 나는 누군가가 다윗과 함께 거짓 없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때를 거룩한 무정욕의 징표로 여긴다. “나를 피하는 악한 자를 나는 알지 못하노라” (시 100:4)라고 거짓 없이 말할 수 있는 것을 성스러운 무정욕의 징표로 여깁니다. 또한 그 악한 자가 어떻게 왔는지, 무엇을 하러 왔는지, 어떻게 떠났는지 알지 못합니다. 저는 온전히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으며, 항상 그러한 상태에 머물기를 소망함으로써, 그 모든 것에 대해 무감각해졌습니다.

8. 이 경지에 이르게 된 자는, 아직 이 세상에 갇혀 썩어질 육신을 입고 있음에도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 되며, 그분은 그의 모든 말과 행실과 생각 속에서 그를 인도하시고 가르치신다; 그리고 그는 내면의 깨달음으로 인해 마치 어떤 음성을 듣는 것처럼 주님의 뜻을 깨닫게 되며, 모든 인간의 가르침을 초월하여 “내가 언제 가서 하나님의 면전에 나타날까”(시 41:3)라고 말합니다. 나는 더 이상 하늘에 대한 갈망의 고통을 견딜 수 없으니, 썩어질 몸에 빠지기 전에 주님께서 내게 베풀어 주신 그 불멸의 아름다움을 찾고 있습니다.

9. 무정욕자란, –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서 사시는 것”(갈 2:20)이라, “선한 싸움을 싸우고, 경주를 마치고, 정통 신앙을 지킨”(딤후 4:7) 이가 말한 대로이다.

10. 하나의 돌로 왕관이 만들어지지 않는 것처럼, 비록 단 하나의 미덕이라도 소홀히 한다면 무정심도 완성될 수 없다.

11. 순종에서 겸손이 태어나고, 겸손에서 무정(無情)이 태어나며, 무정은 겸손을 완성한다. 겸손의 시작은 순종이며, 겸손의 딸인 무정은 그 어머니를 완성한다.

12. 어떤 이들은 무정심과 풍성한 은사, 기적 행하는 능력과 통찰력을 얻기 위해 자신의 몸을 혹사한다. 그러나 이 불쌍한 이들은 수고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겸손이 바로 이러한 선한 것들의 어머니임을 알지 못한다.

13. 겸손이라는 미덕과 결혼한 자는 온유하고, 온화하며, 쉽게 감동받고, 자비로우며, 무엇보다도 평화롭고, 기쁘고, 순종적이며, 근심 없고, 깨어 있으며, 게으르지 않고, 또 – 뭐라고 더 말하겠는가? – 정욕을 이겨낸 자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의 겸손함을 기억하시고, 우리를 원수들로부터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시편 135:23–24), 즉 우리의 정욕과 더러움으로부터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14. 많은 이들이 곧 죄 사함을 받았으나, – 아무도 곧 무정함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무정함을 얻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과 많은 사랑의 수고, 그리고 하느님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성스러운 경건한 아버지들
바르사누피우스와 요한

 

그들에 대한 간략한 소개

니코디모스 아기오리트가 엮은 그들의 생애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성 바르사누피우스는 이집트 출신이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수도자의 삶을 살고자 하는 열망에 불타올랐다. 어느 날 말 경주장을 지나가다가 그곳으로 들어갔는데, 모두가 서로를 앞지르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고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보라, 헛된 영광을 추구하는 자들이 얼마나 열심히 수련하고 있는가? – 하물며 우리, 천국 왕국의 상속자들은 더욱더 수련에 힘써야 하지 않겠는가?” – 하고는 그 광경을 뒤로 하고, 이전보다 더욱 뜨거운 열정으로 은수 생활에 매진했다. 그가 이집트의 어느 수도원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팔레스타인에서 바로 수도자로 지냈다고 한다. 성지를 참배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온 그는 그곳에 머물렀고, 처음에는 마르켈 장로의 지도 아래에서 지내다가, 나중에는 가자 근처에 있는 아바 세리다의 수도원으로 옮겼다. 이곳에서 더 높은 수행을 추구하며, 그는 수도원 밖에서 작은 방을 마련하고 그곳에 틀어박혀 가장 달콤한 고요함을 만끽했다. 이 침묵 생활의 초기에 수도원에서는 일주일에 빵 세 개만을 그에게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그가 눈물을 흘리며 눈물에서 큰 달콤함을 얻자, 이 형언할 수 없는 달콤함을 느끼며 종종 빵 한 개만으로 만족하기도 했고, 심지어 빵을 먹는 것조차 여러 번 잊어버리곤 했다. 그리하여 그는 때로는 일주일에 두 번, 때로는 한 번만 식사를 하곤 했는데, 이는 그가 종종 영적인 양식에 사로잡혀, 그 달콤함으로 인해 육체적인 음식을 잊어버리곤 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끊임없는 눈물로 자신을 씻어내며, 그 복된 이는 마음과 육체의 정욕으로부터 자신의 마음을 깨끗이 정화하여 원수의 화살을 뛰어넘게 되었고, 성령의 은사가 깃드는 곳인 마음의 평화를 얻었으며, – 또한 그분 안에서는 온갖 정욕적인 움직임과 꾀가 잠들었거나, 더 정확히 말해 죽어버렸기에, 그는 자신의 은둔처를 무덤이라 불렀다. 그가 자신의 마음을 정욕으로부터 정화하고 성령의 성전과 거처가 될 자격을 얻은 바로 그 순간부터, 그러한 순결의 결과로 그는 고귀하고 참되며 완전한 겸손으로 풍요로워졌는데, 그 겸손으로 인해 그는 자신을 흙과 재로 여겼습니다. 이는 말뿐이 아니라 실제로 그러했으며, 항상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도대체 누구인가? 그리고 누가 나를 무언가로 여기는가?” 이러한 겸손을 통해 그는 모든 미덕 중 가장 위대한 것, 즉 하나님께서 수도자에게 청지기로서 주신 분별력을 얻게 되었다. 또한 분별력을 통해 위대한 바르사누피우스는 통찰력을 얻게 되었는데, 성 베드로 다마스쿠스의 설명에 따르면, 이를 통해 감각적·정신적 피조물들의 사색적이고 은밀한 본질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그 통찰력을 통해 그는 예지력과 예언의 은사를 얻게 되었으니, 멀리서 일어나는 일을 마치 가까이 있는 것처럼, 그리고 미래를 마치 현재인 것처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답변 31. 812). 그는 또한 은총으로 사람들의 마음속 기질을 알아차렸으며, 그에게 질문하는 이들에게 그들의 말 그대로가 아니라 그들의 마음과 생각의 방향에 따라 대답하곤 했다. 또한 신성한 다윗의 말씀대로 끊임없이 마음속으로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기도를 드리며, 겸손에 겸손을, 침묵에 침묵을, 사랑에 사랑을 더한 끝에, 마침내 가장 높은 은사인 하나님께로 승천하는 은총을 얻게 되어, 일곱 번째 하늘까지 올라갔으니, 꿈꾸는 듯한 생각의 날개가 아니라, 형언할 수 없는 성령의 능력으로, 그곳에서 축복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의 형언할 수 없는 복과 비밀을 보았으니, 위대한 바울과 같이(고린도후서 12:3) 자신이 육신 안에 있는지, 아니면 육신 밖에 있는지 알지 못하였다. 그 후 그에게 기적을 행하는 풍성한 은사가 주어졌기에,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죽은 자를 살리고, 악령을 쫓아내며, 고칠 수 없는 병을 치유하고, 그 밖의 다른 능력과 기적을 행하며, 엘리야와 같이 하늘을 닫고 열 수 있었다. 이러한 위대한 은사를 받게 되었고, 그토록 위대한 덕행의 경지에 이른 분이 바로 성부들 가운데 위대한 바르사누피우스입니다. 그러나 그토록 위대한 은사들은 많은 이들이 실제로 견뎌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소문조차 감당할 수 없는 유혹 속에서 그가 얻은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지극히 복된 분은 큰 병에도 시달렸으나, 이를 그토록 용감하게 견뎌내어 병들었을 때조차 안식을 위해 침상에 누워 쉬는 일은커녕, 심지어 자신의 수공예 작업조차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 성인은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대에 살았으며, 무려 50년 이상 동안 그 누구도 그를 본 적이 없었다. 오직 한 번, 몇몇 형제들에게 모습을 드러내 그들의 발을 씻어 주었는데, 이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심을 불식시키기 위함이었다. 또한 생애 말년에 그는 교회의 이익을 위해 소중히 여겼던 침묵을 내려놓았는데, 이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자신이 후원하던 아포르토도케트파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을 탄압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예루살렘 총대주교는 이 곤경 속에서 이 위대한 아바에게 황제에게 나아가 그의 분노를 자비로 바꾸어 달라고 청원하도록 설득했다. 사절단의 임무는 성공을 거두었다. 아바의 말의 힘에 설득된 황제는, 자신에게 불복종한다고 여겼던 자들에 대한 계획된 박해를 중단하고, 예루살렘 교회에 다시 호의를 베풀며 바르사누피우스를 통해 선물을 보냈다. 위대한 아바는 563년에 선종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정확한 연도를 밝히지 않고, 일반적으로 600년 이전이라고 말한다. 또 다른 장로이신 요한 성인은 바르사누피우스와 마찬가지로 침묵의 삶을 살았으며, 그와 똑같은 성령의 은사를 받았는데, 특히 예지력과 예언의 은사를 두드러지게 받았기에 예언자라고 불렸다. 성 요한이 어디 출신이며, 이 수도원에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위대한 바르사누피우스가 같은 수도원 근처에 또 다른 거처를 마련했을 때, 바르사누피우스의 첫 번째 방에서 살았으며, 그곳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18년 동안 침묵의 삶을 살았다. 그 수도원의 원장 수도사가 증언했듯이, 아무도 그가 미소를 짓거나 당황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으며, 눈물 없이 신성한 성찬을 받는 일도 없었다. 섭리의 은총으로 요한 스승은 다른 많은 일들을 예언했고, 그 예언들은 그대로 이루어졌으며,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예언했다. “나는 아바 세리드의 수도원에서 생을 마감할 것이다. 만약 아바 세리드가 더 오래 살았고, 나도 5년 더 살았다면 좋았겠지만, 하나님께서 이 사실을 내게 숨기시고 그를 데려가셨으니, 나도 더 이상 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당시 아직 젊은 나이의 아바 엘리안은 수도 서원을 하고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되었으나, 수도원의 규율과 형제들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알지 못해, 복자 요한에게 간청했다. 요한 성자에게 “비록 2주만이라도 시간을 주시어, 수도원과 그 운영에 관해 여쭤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간청하자, 장로는 그를 불쌍히 여기고 그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 “좋다, 내가 너와 함께 2주 더 머물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아바 엘리안은 공동 생활의 운영과 관련된 모든 것에 대해 그에게 물었다. 두 주가 끝날 무렵, 그 성자는 수도원의 모든 수도자들을 불러모아 각자에게 따로 인사를 건네고, 그들을 각자의 방으로 돌려보낸 뒤, 평온한 가운데 자신의 영혼을 하느님의 손에 맡겼다. 존경받는 요한이 세상을 떠난 후, 성 바르사누피우스는 완전히 침묵에 빠졌고 더 이상 누구에게도 대답하지 않았는데, 이는 아바 도로페이가 자신의 두 번째 설교 제목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아바 도로페이는 바르사누피우스가 침묵에 빠지자 그 수도원을 떠나 자신만의 별도의 공동체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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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복된 아버지들은 온 마음을 다해 이웃을 사랑하셨을 뿐만 아니라, 생전에 영적인 은혜로 그들에게 선행을 베풀었을 뿐만 아니라, 죽은 후에도 계속해서 선행을 베풀고 계시니, 마치 아버지께서 자녀들에게 남기신 유산처럼, 우리에게 영혼을 구원하는 그들의 신성한 답변이 담긴 책을 남겨 주셨으니, 우리가 이를 부지런히 읽음으로써 그로부터 큰 영적 유익을 얻기를 바라신 것이다. 이 책에는 주교, 사제, 수도사, 평신도, 장로, 젊은이, 병약한 자, 건강한 자 등 다양한 사람들이 제기한 여러 질문에 대한 850개의 답변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답변 중 일부는 소위 ‘다른 장로 요한’이 기록했고, 나머지는 – 게다가 그 대부분은 – 위대한 장로 바르사누피우스가 직접 제시한 것으로, 그는 직접 기록하지 않고 아부 세리다를 통해 전달했다. 이때 다음과 같은 사정이 놀랍게도 주목할 만하다. 위대한 바르사누피우스가 답변을 하기 시작했을 때, 아바 세리드를 불러 자신의 답변을 전해 주고 그것을 기록하라고 지시했다(그 답변은 미로사브 수도원의 수도사 요한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아바 세리드는 성자가 자신에게 한 모든 말을 머릿속에 다 담아둘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지 못했고, 어떻게 그토록 많은 말을 기록할 수 있을지 의아해하며, 장로께서 잉크와 종이를 가져오라고 명하셔서, 듣는 대로 한 마디 한 마디 모두 기록하게 하실 것이라고 생각했다. 성 바르사누피우스는 그에게 주어진 통찰의 은총으로 세리드의 속마음을 알아차렸다. 그의 얼굴은 불꽃처럼 환하게 빛났고, 그는 세리드에게 말했다. “가서 써라,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네가 적도록 셀 수 없이 많은 말을 한다 해도, 성령께서 네가 말한 것보다 한 글자도 더 쓰거나 덜 쓰게 내버려 두지 않으실 것임을 알아두어라. 설령 네가 스스로 그렇게 원한다 해도, 성령께서는 네 손이 모든 것을 순서대로 정확하게 적도록 인도하실 것이다.” 이 책이 바로 그러하다! 이 책은 경이로운 논리로 가득 차 있어 가장 풀기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해 주며, 인내의 스승이자 불평의 근절을 돕는 자, 자기 의지를 잘라내는 칼, 사람에게 아첨하는 마음을 베어내는 도끼, 참되고 완전한 겸손으로 이끄는 인도자이며,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를 무로 여기게 가르치는 분이자, 회개의 선구자, 눈물의 어머니, 그리고 주 그리스도 안에서 영혼의 구원과 완전함을 위해 중보하시는 분이다.

 

수행에 관한 가르침

(수행과 정욕과의 투쟁에 관한 모든 내용을 연속해서 선택함)

1. 사도의 말씀, “모든 일에 감사하라”(살전 5:18)를 듣고, 모든 일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라. 슬픔 속에 있든지, 궁핍 속에 있든지, 박해 속에 있든지, 병고와 육체의 고통 속에 있든지, 네게 닥치는 모든 일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라.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함이 마땅하니라”(행 14:22). 그러므로 네 영혼으로 의심하지 말고, 어떤 일에서도 네 마음을 느슨하게 하지 말라. 대신 사도의 말씀을 기억하라. “우리의 겉사람은 쇠퇴해 가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진다”(고린도후서 4:16). 고난을 견디지 못하면, 십자가에 올라 그 구원의 열매를 누릴 수 없다.

2. 배가 바다에 있는 동안에는 위험과 바람의 거센 파도에 노출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고요하고 평화로운 항구에 도달하면 더 이상 위험이나 재앙, 거센 바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안전하게 머무르게 된다. 마찬가지로, 네가 사람들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슬픔과 위험, 그리고 마음의 바람이 몰아치는 것을 예상해야 한다. 그러나 네게 마련된 고요함의 안식처에 도달하면, 그때는 더 이상 두려움이 없을 것이다.

3. 공동체를 위해 수고하며 겪는 육신의 슬픔과 고난 속에서 낙심하지 마라. 이는 또한 “형제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주는 것”(요한일서 3:16)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이 수고에 대한 상 이 크리라 믿는다. 주님께서 요셉을 이집트에서 기근 때(시편 32:19) 형제들을 먹여 살리도록 세우신 것처럼, 그분께서는 너를 공동체를 섬기도록 세우셨다. 나는 사도의 말씀을 너에게 다시 전하노니, “그러므로 내 아들아, 성령의 은혜로 힘을 내라”(디모데후서 2:1).

4. 어떤 이는 하나님을 위한 수고를 통해 그분의 안식에 이르고, 또 다른 이는 겸손을 통해 그곳에 이릅니다. 너는 네 마음속의 성급함을 다스려 분노가 사라질 때, 그 두 가지 모두를 얻도록 그 태도를 지키라. 그러면 성경의 말씀이 네 안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나의 겸손과 수고를 보시고, 나의 모든 죄를 사해 주소서”(시 24:18). 주님께서 당신의 영혼과 몸과 영을 모든 악과, 마귀가 가하는 모든 대적과, 생각의 반란을 일으키는 모든 환상에서 지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5. 무엇보다도 모든 악과 온갖 유혹을 낳는 낙담의 영을 조심하라. 그리스도의 양들로부터 받는 고통 때문에 네 마음이 왜 나태해지고 지쳐 가는가? 내가 네게 할 말을 주의 깊게 들어라. 인내는 모든 선의 어머니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것을, 죄의 일시적인 쾌락보다 더 기뻐한” 모세를 보라(히브리서 11:25).

6. 교활한 뱀들이 너를 훔쳐가지 못하게 하고, 그들의 독(분노)으로 너를 중독시키지 못하게 조심하라. 그것은 치명적이다. 아무도 악을 통해 선을 행할 수 없으니, 악에 의해 스스로 패배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선”으로 “악”을 고친다(롬 12:21). 너는 “수치스러운 무대” 위에 서 있다. 그러므로 에베소에서 짐승들과 싸웠던 사도(고린도전서 15, 32)처럼, 짐승들을 이기고 자랑했던 그 사도처럼, 너도 짐승들과 싸워야 한다. 너는 바다의 폭풍우 속에 내던져졌으니, 그러므로 수많은 위험을 견디고 거센 파도의 맹위를 이겨내야 한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그것들을 이겨내고 나면,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고요한 안식처로 들어갈 것이다.

7. 너를 괴롭히는 생각들이 있어, 다른 이들을 당황하게 하고 너 자신도 다른 이들로 인해 당황하게 만든다. 그러나 내 형제여, 누군가 행동이나 말로 다른 이를 모욕하면, 나중에 그 자신은 백 배나 더 큰 모욕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두라. 그러니 모든 일에 인내하며, 어떤 일에도 네 뜻을 섞지 않도록 조심하라. 네 생각이 네 마음을 치명적인 독(분노)으로 오염시키지 않도록, 또 모기를 낙타로, 작은 돌을 바위로 착각하게 유혹하지 않도록 주의 깊게 살피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마치 자기 눈에는 들보가 있으면서 남의 눈의 티만 보는 사람과 같아질 것이다.

8. 너는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자신을 죄인이며 많은 악의 원인으로 인정하는 사람은 누구와도 대립하지 않고, 누구와도 다투지 않으며, 누구에게도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모든 사람을 자신보다 더 훌륭하고 현명하다고 여긴다. 네가 죄인이라면, 왜 이웃을 책망하고, 마치 그를 통해 네게 슬픔이 찾아오는 것처럼 그를 비난하는가? – 보아하니 우리 둘 다 아직 스스로를 죄인으로 여길 단계에 이르지 못한 것 같다. – 보라, 형제여, 우리가 얼마나 모순된가: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지만, 행동은 정반대를 보여준다. – 왜 우리의 생각과 상반될 때, 그것을 물리칠 힘을 얻지 못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먼저 이웃을 정죄하기 때문에 우리의 영적 힘이 약해지고, 우리 자신이 잘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형제를 비난하기 때문이다. – “하나님께서는 유익한 것을 아신다”라고 말하며 모든 생각을 주님께 맡기라. 그러면 마음이 평안해질 것이며, 조금씩 인내할 힘을 얻게 될 것이다.

9. 모욕을 견디지 못하는 자는 영광도 보지 못할 것이며, 분노에서 깨끗해지지 않는 자는 달콤함도 맛보지 못할 것이다. 너는 형제들과 다양한 상황들 가운데 들어와 불타오르고 시험받기 위함이다. 금은 불로 시험받는 법이다. 결코 스스로 어떤 규칙도 정하지 마라. 그렇게 하면 비난과 근심에 시달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 시기에 합당한 것을 분별하고, 열정에 휩쓸려 아무것도 행하지 마라. 가능한 한 분노에서 멀리하고, 누구도 정죄하지 말며, 특히 너를 유혹하는 자들을 사랑하라. 깊이 생각해 보면, 바로 그들이 우리를 번영으로 이끄는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10. 고난 속에서 오래 참으라. 이는 “세상에서 너희는 환난을 당하리라. 그러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요한복음 16:33) 말씀하신 주님의 유언을 이룬 자처럼 하라. 그리하여 그것을 얻은 자들을 왕의 궁전으로 인도하고 그들을 그리스도의 형제로 삼아 주는, 이길 수 없는 사랑을 얻게 되리라.

11. 우유를 짜면 버터가 되겠지만, 젖꼭지를 손으로 꽉 쥐면 피가 나올 것이다(잠언 30:33). 누구든지 나무나 포도나무를 고리 모양으로 굽히고 싶다면, 서서히 굽혀야 하며, 그러면 부러지지 않는다. 그러나 갑자기 세게 굽히면 나무는 즉시 부러진다. (이는 원장들의 엄격한 조치와 수도사들의 과도한 수행에 관한 것이다).

12. 어찌하여 육신적인 사람처럼 슬픔 속에서 기진맥진하느냐? 아니면 네게 슬픔이 닥칠 것임을 듣지 못했느냐? “의인에게 많은 슬픔이 있다”(시 33:20)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 그들은 마치 도가니 속의 금처럼 그 슬픔을 통해 단련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롭다면, 기꺼이 슬픔의 시련에 순종할 것이며, 만일 죄인이라면, 그에 합당한 자로서 그 시련을 견뎌내야 한다. – 세상이 시작된 이래 모든 성도들을 떠올려 보자. – 그리고 그들이 선을 행하고, 선한 말을 하며, 진리 안에서 흔들림 없이 머물며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견뎌냈는지 기억해 보자. 그들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모욕을 당했으나, 구세주의 말씀대로 “원수들과 그들에게 해를 끼치는 자들을 위해 기도했다”(마태복음 5:44). 혹시 너도 순결한 요셉처럼 팔려 나갔던가? 모세처럼 어린 시절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악의적인 비난을 참아냈는가? 사울에게 쫓기던 다윗처럼 박해를 받았는가? 아니면 요나처럼 너도 바다에 던져졌던가? 그런데 왜 네 마음이 나태해지는가? 용기를 잃은 사람처럼 두려워하거나 겁내지 마라. 그래야 하나님의 약속을 잃지 않을 것이다. 불신자처럼 공포에 떨지 말고, 믿음이 약한 네 마음을 북돋워라. 모든 고난을 사랑하라. 그래야 네가 성도들의 능숙한 아들이 될 수 있다.

13. 도시를 도달하고자 하는 사람은 아무도 누워 있지 않으며, 일하고자 하는 사람은 해가 뜨는 것을 보고도 게으름에 빠지지 않으며, 자신의 밭을 비옥하게 하고자 하는 사람은 그 밭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도시에 도달하고자 하는 자는 해가 지기 전에 서둘러 그곳에 이르려 하고, (자신의 일을 마치고자 하는 자는) 떠오르는 해를 보고는 무엇에라도 지체될까 두려워하며 활기차게 일하러 서두르며, 자신의 밭을 비옥하게 만들고자 하는 자는 밭이 쓸모없게 되기 전에 이를 이루려고 애쓴다. –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14. 슬픔에서 벗어나고 그로 인해 괴로워하지 않기를 원하느냐? – 더 큰 슬픔을 기대하라. – 그러면 마음이 평안해질 것이다. 욥과 다른 성도들이 어떤 슬픔을 겪었는지 떠올려 보라. 그들의 인내를 본받으라. – 그러면 네 영혼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 용기를 내고, 힘을 내며 기도하라.

15. 울고, 통곡하라. 남들이 너를 대단한 사람으로 여기기를 바라지 말고, 어떤 면에서도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동등하게 여기지 말라. 세상을 버리고, 십자가에 오르며, 육신의 것을 벗어 던지고, 네 발에서 티끌을 털어내라. “수치를 두려워하지 말라”(히브리서 12:2), 칼데아인들과 함께 용광로를 지피지 말라. 그래야 하나님의 진노로 그들과 함께 불타지 않을 것이다. 모든 사람을 너보다 더 뛰어나다고 여기라. – 네 죽은 자를 위해 울라. – 네 거친 나무를 다듬어라. – 무너진 네 집을 다시 세우고, 외쳐라. “다윗의 아들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가 볼 수 있게 하소서” (누가복음 18:38, 41).

16. 우리에게 시간이 있는 동안,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침묵을 배우자. 만일 모든 일에 평온하기를 원한다면, 모든 사람에 대하여 죽은 자처럼 행동하라. 그러면 평안을 얻으리라. 나는 생각과 온갖 일, 사람들과의 관계, 그리고 근심에 관하여 이렇게 말한다.

17. 네가 이렇게 썼다. ‘나의 죄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나도 너에게 똑같이 말하리라. ‘너희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누가복음 6:31) 기록되어 있느니라. 비록 내가 저주받은 자요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자이지만, 지금까지는 “서로 위해 기도하여 치유받으라”(야고보서 5:16)는 계명에 따라 내 힘껏 그렇게 하고 있다.

18. 믿음에 대해 논할 수 없다면, 논하지 마라. 믿음이 굳건한 자는 이단자나 불신자들과 말다툼을 하더라도 결코 당황하지 않을 것이니, 이는 그 안에 평화와 고요의 주재자이신 예수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평화로운 논쟁 끝에, 많은 이단자와 불신자들을 사랑으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너는 다른 주제들에 대해 논하는 것이 네 능력 범위를 벗어날 것이니, 왕의 길, 즉 성부들의 신앙(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는 일곱 차례의 세계 공의회에서 확립된 신앙)을 고수하라. 네가 세례를 받을 때 고백했던 바로 그 신앙이다. 이 신앙은 온전히 이해하는 자들에게 모든 것을 정확하게 담고 있다. 자신의 죄와 하나님께서 너를 어떻게 대하실지를 생각하며, 더욱 스스로를 경계하라.

19. 네게 대한 칭찬을 들을 때, 성경의 말씀을 기억하라. “내 백성아, 너희를 기쁘게 하는 자들은 너희를 아첨하며, 너희 발의 길을 비틀게 하느니라”(이사야 3:12). 이러한 아첨은 우리가 우리 행위의 추악함을 보지 못하게 한다. 그것은 (영적 성취의) 적당한 수준에 이른 이들에게도 해를 끼치는 듯하며, “어찌 서로 영광을 받으면서 믿을 수 있겠느냐”(요한복음 5:44)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서 멀어지게 한다. 사도의 겸손을 받아들이는 자는 차라리 “미치광이가 되어 지혜로워지리라”(고린도전서 3:18)를 선택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영적인 사람이라기보다 현명한 사람으로 드러내는 자는, 오만함으로 인해 내려진 심판을 피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20. (밤에 대한 두려움에 관한 질문에). 시민들은 왕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한 적의 침공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그들의 도시에 군 사령관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지도자들이 그들을 돌보고 있음을 알기에 더 이상 걱정하지 않는다. 설령 적들이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더라도, 수호자가 있으니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악마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도움을 보내 주시기 때문이다.

21. 예배 시간과 찬송은 교회의 전통이며, 모든 사람이 (기도에서) 한마음으로 합일하도록 잘 정립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공동 생활에서도 많은 이들이 화합할 수 있도록 마련된 것이다. 반면 스키타인들은 예배 시간도, 찬송도 부르지 않고, 혼자서 수공예와 독서, 묵상에 전념하다가, 잠시 후 기도에 임한다. 기도할 때는 옛 사람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켜 달라고 기도해야 하며, “주님의 기도”를 외우거나, 둘 다 함께 한 뒤, 수공예에 착수해야 한다. 기도를 서 있을 때 얼마나 오래 계속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사도의 말씀대로(살전 5:17) “끊임없이 기도”한다면, 기도의 길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22. 밤잠에 관해서는, 해가 진 후부터 계산하여 저녁에 두 시간 동안 기도하고, 찬양을 마친 뒤 여섯 시간 동안 잠을 자고, 그 후 깨어 기도하며 나머지 네 시간 동안 깨어 있으라. 여름철에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밤이 짧아지는 만큼 찬양을 줄이고 시편을 덜 읽으라.

23.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겸손한 지혜를 얻는 법을 가르치시며 말씀하셨다. “나에게서 배우라. 나는 온유하고 마음이 겸손하니, 너희 영혼이 안식을 얻으리라”(마태복음 11,29). 너도 완전한 안식을 얻고 싶다면, 주님께서 겪으신 것을 깨닫고, 너도 그것을 견디며, 모든 일에서 네 뜻을 잘라내라. 구세주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왔으니,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 함이라” (요한복음 6:38). 완전한 겸손은 우리 스승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겪으신 책망과 모욕, 그리고 그 밖의 모든 고난을 참아내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완전한 기도에 도달했음을 나타내는 표징이기도 한데, 비록 온 세상이 그를 모욕한다 해도 더 이상 당황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24. 완전한 기도로 들어가는 첫걸음은, 생각이 산만해지는 것에서 벗어나, 주님에 대해 깨달음을 얻은 자신의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 차는 것을 볼 때이다. 완벽하게 기도하는 이는 세상과 그 안락함에 대해 자신을 죽이는 자이다. 그리고 누군가 하나님을 위해 부지런히 자신의 일을 행할 때, 이는 산만함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쁘시게 하는 세심함이다.

25. 음식과 음료에 대한 절제의 정도에 대해 성부들은, 둘 다 적정량보다 약간 적게 섭취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데, 즉 위를 완전히 채우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누구나 삶은 음식과 포도주 모두에 있어 스스로 절제의 정도를 정해야 한다. 그러나 절제의 정도는 음식과 음료에만 국한되지 않고, 대화와 수면, 옷차림, 그리고 모든 감각에까지 미치며, 이 모든 것에는 각자의 절제 기준이 있어야 한다.

26. 음식과 음료의 적정량을 어떻게 정해야, 그것이 적정량보다 약간 적게 될까? – 음식, 즉 빵과 다른 식사 전체 양에서 1온스를 조금 못 미치는 양을 떼어내야 하며, 포도주와 물의 경우 둘 다에서 잔의 절반 미만을 떼어내야 한다. 네가 스스로를 잘 다스리고 한 번만 마시는 것이 어렵지 않다면, 그것이 좋겠지만; 만약 그럴 수 없다면 두 번 마시되, 매번 적정량보다 적게 마시라. 그리고 마음이 혼란스럽거나 생각이 뒤얽힐 때는 평소의 음식과 음료 양도 약간 줄여야 한다. 즉, 음식은 1온스를 더 줄이고, 모든 음료는 한 잔을 더 줄여야 한다. – 이렇게 하여 전체적으로 음식은 2온스, 음료는 한 잔을 줄이는 것이다.

27. 그렇다면 적절한 분량을 어떻게 정해야 하며, 각자에게 필요한 음식과 음료의 양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 며칠 동안 빵, 다른 식사, 채소 등 모든 음식에 대해 스스로를 관찰함으로써, 사람은 경험적으로 자신의 몸에 필요한 음식과 음료의 양을 알 수 있다(부담 없이 배부르게 하기 위해). 이 기준에서 음식을 1온스, 음료를 반 그릇씩 덜어내도록 하라. 전쟁 중에는 음식과 음료를 각각 1온스와 반 그릇씩 더 덜어내도록 하라.

28. 자신의 능력에 따른 절제란 무엇인가? 자신의 능력에 따라 절제한다는 것은, 앞서 말한 대로 음식과 음료를 — 즉, 필요한 양보다 약간 적게 섭취하는 것 — 그리고 수면도 마찬가지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과 피로로 인해 이보다 약간 더 섭취하더라도, 이는 “자신의 능력에 따라”라는 규칙을 위반하는 것이 아니다. – “수면의 적정량은 얼마여야 합니까?”라고 묻는다면, 교부들은 이를 위해 밤의 절반을 정하고 있다. 음식에 관해서는, 조금 더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섭취를 멈추고,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항상 절제하며 섭취하라.

29. 변덕에 따라 음식을 섭취한다는 것과 본능에 따라 섭취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변덕에 따른다는 것은 신체의 필요에 따라가 아니라, 배(와 목구멍)를 만족시키기 위해 음식을 섭취하고자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만약 네 몸이 단맛 때문이 아니라 소화가 잘 된다는 이유로 다른 음식을 더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을 본다면, 그것을 섭취하는 것은 변덕이 아니다. 또 어떤 이들은 본성상 단 음식을, 다른 이들은 짠 음식을, 또 다른 이들은 신 음식을 원하는데, 이는 변덕이 아니다. 그러나 어떤 음식을 특히 좋아하고 탐욕스럽게 갈망하는 것은 변덕이며, 이는 배를 채우는 쾌락의 하녀이다. – 만일 네가 식탐에 사로잡혀 있는지 알고 싶다면, 다음과 같이 알 수 있다. 만약 음식이 네 생각을 지배한다면(그래서 네가 그것에 저항할 수 없다면), 너는 식탐에 빠진 자다. 그러나 그런 지배가 없고, 네가 신체의 필요에 맞춰 어떤 음식이든 자유롭게 섭취한다면, 너에게는 식탐이 없다. 식탐의 또 다른 징후는 제때가 되기 전에 먹고 싶어 하는 것인데, 이는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단, 정당한 이유가 있는 경우는 예외다.

30. 만약 (식탐이라는) 욕망이 미리 나를 사로잡지 않고, 식사 시간에야 비로소 나타난다면, 그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음식을 남겨두어야 할까요, 아니면 먹어야 할까요? – 다른 사람과 함께 식사할 때는 먹기를 중단하지 마라.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욕망을 물리치고, 조금만 먹어라. 이 음식이 곧 악취로 변할 것임을 스스로 상기하며. 그러나 혼자 있고 배가 고플 때는, 빵이나 다른 어떤 음식이라도, 거부감이 들지 않는 것을 먹어라.

31. 마음속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장로들에게 물어야 하는가? – 마음속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에 대해 물을 필요는 없다. 오직 오랫동안 마음속에 남아 사람을 괴롭히는 생각들에 대해서만 물어야 한다. 이 일은 마치 많은 사람이 그를 괴롭히더라도, 그 사람이 불쾌한 일들을 무시하고 신경 쓰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누군가 일어나 그를 공격한다면, 그때 그는 그 사람을 통치자에게 고발한다.

32. 우리와 싸우는 생각에 대항해야 할까요? – 대항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그 생각의 적들이 바로 그것을 원하며, (대항하는 모습을 보고) 공격을 멈추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주님 앞에 자신의 연약함을 엎드려 아뢰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는 그들을 쫓아내실 뿐만 아니라 완전히 없애실 수도 있습니다.

33. 밤의 환상과 더러움은 때로는 교만에서, 때로는 포만감에서, 때로는 마귀의 시기심에서 비롯된다. 마지막 점에 대해 말하자면, 우리 쪽에서 교만과 과식이 원수에게 힘을 실어주지 않는다면, 그는 이를 자주 반복할 수 없다. 집을 짓는 사람이 필요한 자재를 찾지 못하면 헛수고를 하는 것과 같으니, 마귀도 이와 같다.

34. 나는 배를 절제하고 음식의 양을 줄이고 싶지만, 할 수가 없다. 가끔 줄이더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예전대로 돌아가고, 마시는 것도 마찬가지인데, 이것이 왜일까? – “내 빵을 가져다 주는 것을 잊었도다. 내 탄식의 소리로 말미암아 내 뼈가 내 살에 달라붙었도다”(시 101:5-6)라고 말한 자, 즉 절제를 이룬 자 외에는 누구도 이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내 양식을 잊어버렸나니, 내 탄식의 소리로 말미암아 내 뼈가 내 살에 달라붙었도다”(시 101:5, 6). 그런 사람은 곧 음식과 음료를 줄이는 데 이르게 되는데, 눈물이 그에게 양식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성령으로 양육받는 경지에 이른다. 내 말을 믿어라, 형제여. 나는 그런 경지에 이른 사람을 알고 있다. 일주일 동안 한두 번, 때로는 그보다 더 자주 그는 영적인 양식에 흠뻑 빠져들며, 그 달콤함 때문에 육체적인 양식을 잊어버린다. 그런데 빵을 맛보러 올 때면, 마치 배부른 사람처럼 그것을 먹고 싶어 하지 않으며, 먹으면서 스스로를 책망하며 말한다. ‘왜 나는 항상 이런 상태에 있지 않은가?’ 하고. 그리고 그는 더욱 더 성장하기를 갈망한다.

35. 어떻게 하면 그런 경지에 이를 수 있는가? – 사람의 모든 생각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될 때, 그때 비로소 이 육신도 하나님을 향한 생각을 따르게 되며, – 마음속에 성령의 기쁨이 솟아나 영혼을 양육하고 몸을 풍요롭게 하며, 둘 모두를 굳건하게 한다. 그런 사람은 더 이상 쇠약해지지도, 낙담하지도 않는다. 이는 예수님께서 그때부터 그를 위해 중보자가 되시어, “거기서 모든 질병과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는” (사 51:11) – 그곳으로 그를 가까이 이끌어 주시며, 그에게 성경의 말씀이 이루어집니다. “너희의 보화가 있는 곳, 거기 너희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 사람을 이러한 경지에 이르게 하는 것은 바로 겸손입니다.

36. (절제로 인한) 육체의 자연스러운 쇠약과 악마가 일으키는 쇠약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으며, 음식을 얼마나 섭취해야 하는가? – 쇠약함에 대해 말하자면, 몸이 (평소 절제 수준에 맞춰) 매일 음식을 섭취할 때 기력이 쇠해지면, 이는 악마 때문이며, 그렇지 않은 경우(절제 수준을 지나치게 엄격하게 지킬 때)에는 자연스러운 쇠약함이다. 일반적인 절제의 정도란, 장로들이 초심자들에게 정한 대로 식사 후 약간 배가 고픈 상태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 나중에 사람이 이 정도, 혹은 그 이상의 절제 수준에 익숙해지면, 이미 습관을 익힌 사람으로서 자신이 얼마나 먹어야 하는지 모를 리가 없습니다.

37.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매우 슬픕니다.” – 인내와 슬픔으로 세상에 완전히 죽어가는 이들은 성숙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오, 사랑하는 형제여! –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견디셨으니, – 그 인내가 천국으로 인도하는 슬픔 속에서 너도 기뻐하지 않겠느냐? 슬퍼한다는 것은 좋은 징조다. 주님께서 누군가에게 자비를 베푸실 때 슬픔과 유혹이 배가된다는 것을 모르느냐? 그리고 주님께서 보내지 않으시면 육신의 안식을 찾지 마십시오. 육신의 안식은 주님 앞에서 가증스러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에서 너희는 환난을 당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복음 16:33).

38. 매일 먹을 음식을 어떻게 정해야 하겠는가? – 만약 네 방에서 매일 먹을 음식을 정해 둔다면, 그것은 너를 근심과 다툼으로 이끌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는 대로 만족하라. “정직하게 행하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걷느니라” (잠언 10:9).

39. 시편을 읽을 때, 각 시편을 읽은 후마다 “주님의 기도”를 외워야 합니까? – “주님의 기도”를 한 번만 읽으면 충분합니다.

40. 우리도 우리 선조들을 본받아 그들이 걸었던 그 길을 따라가십시오. 우리가 완전한 평안을 얻었을 때, 그 평안을 누린 적이 있었던 기억은 없습니다. 오히려 “네 배 속에서 네 좋은 것들을 누렸도다” (눅 16:25)라고 말씀하신 분을 두려워하며,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행 14:22)는 사실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많은 재물이 우리 손에 들어왔을 때도 우리는 그렇게 행했으며, 우리를 위해 가난해지신 분을 위해 우리가 얼마나 궁핍하게 살았는지는 하나님만이 아신다. – 모든 일에서 안식을 찾는 것은 좋지 않다. 이를 추구하는 자는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자신의 뜻을 끊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41. 주님께서는 네가 모든 사람을 너 자신보다 더 귀하게 여기기를 원하신다. 네 영적 스승에게 모든 일에 순종하고, 그가 네게 말하는 모든 것을 이행하라. 그것이 음식이든, 음료이든, 그 밖의 어떤 것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네가 비방당하더라도 기뻐하라. 이는 네게 매우 유익한 일이다. 모욕을 당하더라도 참아내라.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마태복음 10:22). 모든 일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라. 감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연약함을 대신하여 중보해 주기 때문이다. 모든 일에서 언제나 자신을 죄를 짓고 유혹에 빠진 자로 책망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너를 정죄하지 않으실 것이다. 모든 일에 겸손하라. 그리하면 은혜를 얻으리라.

42. 모든 경우에 겸손을 구하자. 겸손한 자는 땅에 엎드려 있으니, 땅에 엎드려 있는 자가 어디로 떨어질 수 있겠는가? 그러나 높은 곳에 있는 자는 떨어지기 쉽다. 만약 우리가 회개하고 바로잡았다면, 이는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 “주님께서는 엎드러진 자를 일으키시고 눈먼 자에게 지혜를 주시나니”(시 145:8).

43. 병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훈계이며,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한다면 번영에 이르게 한다. 욥은 하나님의 충실한 친구가 아니었는가?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축복하며 무엇을 겪지 않았는가? – 그리고 그 인내는 마침내 그를 비할 데 없는 영광으로 이끌었다. 너도 (병중에) 조금만 참아라,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복음 11:40). – (병중에) 금식할 수 없다고 해서 슬퍼하지 마라.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도 감당할 수 없는 수고를 요구하지 않으신다. 게다가 금식이란, 건강한 몸을 길들여 정욕에 굴복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육신을 징계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도의 말씀대로 “내가 약할 때에 비로소 강하도다”(고린도후서 12:10). 그리고 병은 이 징계보다 더 큰 것이며, 금식 대신 인정받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금식보다 더 높이 평가받습니다. 인내로 병을 견디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은 그 인내를 통해 구원의 열매를 얻습니다. 금식으로 육체의 힘을 약화시킬 필요 없이, 병으로 인해 이미 육체가 약해진 것입니다. 그러니 금식해야 하는 수고에서 해방되었음을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하루에 열 번을 먹는다 해도 슬퍼하지 마라. 네가 자신을 방종하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므로, 그 일로 인해 정죄받지 않을 것이다.

44. 악령들은 (믿음의 열매에 대한) 시기심에서 우리에게 불신을 심어주며,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그들의 종이자 공범자가 된다.

45. (매일 실천할 일). 시편을 부르는 데 조금은 힘쓰고, 입으로 기도하는 것(암송 기도)에도 조금은 힘써야 하며, 자신의 생각을 살피고 지키기 위한 시간도 필요하다. 시편 찬송과 입으로 드리는 기도에 얽매이지 말고, 주님께서 너를 얼마나 굳건하게 하시는지에 따라 행하라. 또한 성경 읽기와 내적 기도도 소홀히 하지 말라. 이것도 조금, 저것도 조금, 그렇게 하루를 보내며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라. 우리의 완전한 성부들은 정해진 규칙을 따르지 않았으나, 하루 종일 자신들의 규칙을 실천했습니다. 시편 찬송을 조금 하고, 입으로 기도문을 조금 외우며, 생각을 살피는 데 시간을 할애하고, 비록 적게나마 음식에도 신경을 썼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행했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린도전서 10:31)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46. 네 슬픔 속에서 원수가 너를 당황하게 하지 못하게 하라. 과연 유혹이나 슬픔이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누구에게도 닥치는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적 유익을 위해 이를 허락하시나, 마귀는 마치 옛날에 우리 조상들을 낙원에서 쫓아냈을 때와 마찬가지로 사물을 우리에게 달리 보여준다. – 그러나 우리는 이를 깊이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온갖 더러움에서 정결하게 하시려고 슬픔을 보내신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채, 당황하고 낙담합니다. – 구원받고자 한다면, 네 자신의 생각을 믿지 마라. 마귀들이 네 안에 악한 씨를 뿌리고, 한 가지를 다른 것으로 속여 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결코 누구도, 어떤 일로도 비난하지 말고, 모든 일에서 이웃을 기쁘게 하려고 힘쓰라. 그리고 누구에 대해서도 악한 생각을 품지 말라. 이는 그렇게 함으로써 네가 스스로 악해지기 때문이다. 악한 자는 악을 생각하고, 선한 자는 선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이것이 원수가 네게 속삭이는 것임을 알아라. 결코 그런 의심을 품지 마라. 모든 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참아내라. 참음에 대한 상은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악마들의 말을 믿지 마라. 그들이 네게 보여주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저 어떤 식으로든 너를 혼란스럽게 하려는 것뿐이다.

47. (“또다시 모욕”). 형제여, 네 순진함에 놀라울 따름이다. 설마 마귀가 누구를 유혹하는 것을 그만둔다고 생각하는가? – 게다가, 땅에 쓰러져 거품을 흘리는 귀신 들린 자들을 어떻게 비난할 수 있겠는가? – 마찬가지로, 마귀가 우리를 대적하고 모욕하도록 부추기는 자들을 비난해서도 안 된다. 그들을 비난할 것이 아니라, 정욕과 그 정욕을 부추기는 자를 비난해야 한다. 적에게 현혹된 너는 – 자신의 죄는 보지 않고 이웃의 죄만 예리하게 바라보며, 형제의 잘못은 끊임없이 지적하면서도 자신의 는 잊어버렸다. – 게다가 네가 도대체 누구이기에 남의 죄를 들여다보는가? – 나사로를 떠올려 보라. – 그는 하느님께 감사하며 얼마나 오랫동안 인내했는가?

48. “나는 (꿈속에서 부끄러운) 환상에 빠졌다.” – 환상이나 다른 정욕에 빠지게 하시는 것은, 우리가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우리의 소망과 기대를 우리 자신에게 두지 않고 오직 그분 한 분께만 두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다. –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뜻으로 인해 몽상에 빠지거나 다른 정욕에 빠진다고 생각하지 마라. 오히려 우리의 게으름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를 허락하시며, 그분의 인간 사랑으로 인해 (우리 안에 드러나는) 악을 통해 우리를 구원을 위한 겸손으로 이끄시는 것이다. 그러니 네가 어떤 존재인지 깨닫고, 하나님 앞뿐만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도 겸손해지며,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 많은 것을 행하실 수 있는 분께 모든 근심을 맡기라.

49. “유혹으로 인해 지쳐가고 있습니다.” – 지치지 마십시오, 형제여.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버리지 않으셨고, 앞으로도 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조상 아담에게 내리신 “네 얼굴의 땀으로 네 양식을 얻으리라”(창세기 3:19)는 판결이 변함없음을 아십시오. 도가니에서 단련된 금이 순수해져 왕관의 재료가 되듯이, 슬픔 속에서 단련되는 사람도 이를 감사함으로 견디면 왕국의 아들이 됩니다. 그러니 네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네 유익을 위해 작용하여, 너도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게 될 것임을 믿으라.

50. (낙담한 병자에게). 우리 구세주의 고난을 깊이 딴지르라. 마치 너도 그분과 함께 모욕과 상처, 굴욕, 침 뱉음으로 인한 모독, 붉은 옷의 비난, 가시관으로 인한 수치, 담즙이 섞인 식초, 못 박힘의 고통, 창에 찔림, 물과 피가 쏟아짐을 – 마치 네가 그분과 함께 견디는 것처럼, 그리고 이로부터 네 병에 대한 위로를 얻으라. 주님께서는 네 수고를 헛되이 내버려 두지 않으실 것이다. 그분은 네가 그 시간에 성도들이 슬픔을 인내한 열매를 맺고 영광을 받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들과 낯선 이가 되지 않고, 성도들과 함께 그들과 예수님의 동역자가 되어 그분 앞에서 담대함을 갖게 하려고, 네가 작은 병을 겪도록 허락하셨다. 그러니 슬퍼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잊으신 것이 아니라, ‘간음하는 자’가 아니라 진실한 당신의 아들로 여기시며 당신을 돌보시고 계십니다.

51. 그 위대한 우리 형제께서 우리 모두에게 도움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곧 우리를 그분의 형제들로 삼아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히브리서 2:11). 우리는 이미 그분의 형제가 되었으며, 천사들이 우리를 축복하고 있습니다. – 오, 우리가 누구를 형제로 모시고 있는가! 우리를 굳건하게 해 주실 강하신 분, – 이득을 나누어 주실 든든하신 분, – 전쟁 중에 우리를 공격하는 적들을 무찌르실 군대 지휘관, – 우리의 내적 존재와 외적 존재를 함께 치유하시고, 내적 존재를 외적 존재에 복종시키실 의사, – 우리를 영적인 양식으로 채워 주실 양식 주시는 분, – 우리를 살리실 생명의 주, – 우리를 용서해 주실 자비로운 분, – 우리를 베풀어 주실 관대한 분, – 우리도 왕이 되게 하실 왕, – 우리도 신이 되게 하실 신. – 그러므로 모든 것이 그분 안에 있음을 알고 그분께 기도하라. – 그러면 네가 스스로 그분을 방해하지 않는 한, 그분께서 네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실 것이다.

52.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라”(요한복음 16:24)고 말씀하신 주 예수님께서 네 모든 간구를 이루어 주시기를 바란다. 다만 하나님의 은사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네 집을 철저히 정화하여 준비하라. 그 은사들은 정화된 집 안에서만 온전히 보존되며, – 오직 부정이 없는 곳에서만 그 향기를 발한다. 그것을 맛보는 자는 낡은 사람을 떠나, 세상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자, 마치 세상이 그에게 그러하듯, 항상 주님 안에서 살아간다. 적의 파도가 아무리 세차게 몰아쳐도 그의 배는 부서지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원수들에게 두려운 존재가 되는데, 이는 그들이 그에게 찍힌 거룩한 인장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원수들에게 적대적이 될수록, 위대한 왕의 진실하고 친절한 친구가 됩니다.

53. 악마적인 정욕과 환상이 주는 불안에 흔들리지 마십시오. 악마들이 우리를 괴롭히고 유혹하지만, 우리가 조금의 인내심을 지키기 위해 부지런히 스스로를 살핀다면, 그들은 아무것도 해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덕을 더욱 키워줄 것임을 믿으십시오. 그러니 우리를 사랑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잃지 않도록 노력을 게을리하지 맙시다. 주님께서 주시는 것은 그분의 뜻에 달려 있고, 우리가 지켜내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또한 거룩한 약속과 회개할 줄 모르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후에도, 악마들이 다시 너에게 수치스러운 정욕을 일으켜 헤아릴 수 없는 부를 빼앗으려 한다는 사실에 놀라지 말고, 그러나 하나님께서 친히 성 요브에 대해 증언하신 후에도, 그 인내의 기둥을 무너뜨리기 위해 그와 같은 유혹과 시련을 일으켰을 때 그들이 얼마나 뻔뻔했는지 기억하라. 그러나 그들은 그를 이기지 못했고, 그의 밝은 믿음과 감사의 보물을 빼앗을 수도 없었다. 금은 불을 통과함으로써 더 순수해졌으니, 곧 의인은 수많은 유혹을 겪음으로써 더욱 순수해졌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에 대한 그분의 특별한 증언 이후에도, 주님의 더 큰 영광과 명예를 위해, 그리고 원수들의 무력함을 드러내기 위해 그분의 종이 유혹을 받도록 허락하시고 용납하셨다. 그러니 낙심하지 말라. 약속의 인장은 온전하니, “주님을 인내하라”(시 26:14);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마 24:13),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에 관하여.

54. (답변). – 네 마음에 혼란이 일어나는 것은 네 마음이 변덕스럽기 때문이다. – (포도)주는 아예 끊을 필요는 없으나, 조금씩 마시도록 하라. – 앉아서 자는 것은 나중에 겸손으로 이끈다. – 전반적으로 네 온 존재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분께 맡겨라.

55. 스스로를 잘 살피라. 악령들은 너를 별로 유익하지 않은 일, 예를 들어 앉아서 자거나 머리맡을 두지 않는 것—이는 곧 “회향과 고수풀과 깻잎”과 같은 것—으로 유혹하려 하며, “율법의 더 큰 계명들을 버리라” (마태복음 23,23), 즉 분노를 잠재우고, 짜증을 없애며, 모든 일에 순종을 얻으려는 것이다. 그들은 네 몸을 지치게 하여 병에 걸리게 하고, 어쩔 수 없이 부드러운 침대와 다양한 음식을 필요로 하게 만들기 위해 네 안에 이러한 생각을 심는 것이다. 차라리 머리받침 하나만으로도 만족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 위에 안식을 취하라. 네 항아리에 마음의 약인 겸손, 순종, 믿음, 소망, 사랑과 같은 양념을 담아라. 이를 지닌 자는 하늘의 왕 그리스도께 잔치를 베푸는 것이니라.

56. “나는 모독적인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 이미 꽤 오래전부터, 너를 대적하는 모독적인 악마가 너를 노리고 있다. 그는 자신을 받아들이는 영혼들을 파멸시키는 자이다. 그는 너를 죽이기 위해 너의 목에 걸린 사슬(정욕)을 붙잡았다. 오, 나의 하나님께서 그가 너에게서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하게 하시기를 바란다 (딤후 2:26). – 그러나 절망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회개를 받아주시는 하나님께서 당신 곁에 계십니다. 사로잡힘의 유혹에서 깨어나십시오. – 무엇보다도 분노와 짜증을 잠재우십시오. 그것들이 사람을 하나님을 모독하는 파멸적인 길로 이끈다는 것을 알면서; 마귀들을 태워버리는 겸손과,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 안에 들어오실 수 있게 하는 순종, 사람을 구원하는 믿음,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 소망,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떠나지 않게 하는 사랑을 얻으라. 너는 이 미덕들을 돌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인 분노와 짜증, 그리고 완전한 파멸인 앞서 언급한 신성모독을 선택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를 바라보고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가 얼마나 큰지 생각하며, 스스로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라. – 과거의 죄는 용서받았으니, 이제부터는 바로잡으라. – 40일 동안 하나님께 회개를 드리며, 매일 세 번 절을 하고 “나를 용서하소서, 주님을 모독한 나의 하나님이시여!”라고 말하라. 그리고 하루에 세 번, “영광이 주께 있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시여, 영원토록 찬송받으소서. 아멘!”이라고 말하며, 주님을 모독했던 네 입으로 주님을 고백하라. – 그리고 다시는 같은 잘못에 빠지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네게 더 나쁜 일이 닥칠 것이다. 마음의 무감각으로 인해 네가 분노에 빠졌고, 그 분노로 인해 성찬에서 멀어지게 되었으며, 완전히 사로잡혀 모독의 구렁텅이로 떨어지고 말았다. – 만일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손길과 성인들의 기도가 먼저 닿지 않았더라면, 네 영혼은 절망의 파멸에 빠졌을 것이다. 보라, 나 같은 하찮은 자를 통해 하느님께서 네게 말씀하신다: ‘너는 죄를 지었으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네 과거의 죄들에 대해서도 기도하라.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우시며, 우리가 (회개하고자) 원할 때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

57. (아브바가 다른 사람을 더 우대하는 것을 슬퍼하며). 형제여! 너는 스스로를 유혹하고 있다. “각 사람은 자기의 욕망에 이끌려 유혹을 받는다”(야고보서 1:14)는 것을 모르느냐? – 너 자신 외에는 누구의 말도 듣지 말고, 다른 사람에 대해 호기심을 품지 마라. 그것은 어떤 면에서도 너에게 유익하지 않기 때문이다. – 보라, 사탄이 얼마나 하찮은 일로 네 마음을 혼란스럽게 했는지. – 그러니 하나님의 손에 의지하여 일어서라. – 그리고 악마들이 네게 원하는 대로 보여 주는 생각들을 믿지 마라.

58. (존경을 표하는 어떤 행동을 하라는 제안을 받을 때). 무언가로 인해 존경받을 때 기뻐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지키고, 하나님과 그분을 사랑하는 이들이 미워하는 불순종을 몰아내는 순종을 보여라. 하늘로 이끄는 순종을 굳게 지키라. 그 순종을 얻은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과 같아지게 된다.

59. (회개를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가)? 회개를 시작하고자 한다면, 창녀가 한 일을 보라. “그녀는 눈물로 주님의 발을 씻었다”(누가복음 7:38). 눈물은 누구든지 죄에서 씻어 준다. 그러나 사람은 수고를 통해, 성경의 많은 가르침과 인내, 무서운 심판과 영원한 수치에 대한 묵상, 그리고 자기 부정을 통해 울음을 이룰 수 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따르려 하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마태복음 16:24).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모든 일에서 자신의 뜻을 잘라내고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는 것을 의미한다.

60. (육체의 연약함으로 인해 성부들처럼 수련할 수 없다). 네가 연약하여 많은 것을 감당할 수 없다면, 네 힘닿는 대로 행하며, 네게 필요한 양보다 조금 덜한 음식과 음료를 섭취하라. 하나님께서는 과부의 두 렙타를 받으시고, 그 밖의 모든 것보다 그것들을 더 기뻐하셨기 때문이다. – 다른 사람들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훈련하라. – 그러면 너는 구원받을 것이다.

61. 내 안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이 말하길, ‘다른 곳으로 가라, 거기서 구원을 얻을 것이다.’ – 이는 원수가 진리의 외피를 쓰고 네게 제안하는 것으로, 너를 조롱한 뒤 너를 많은 이들의 유혹의 대상으로 만들어, 네가 그들까지 대신하여 심판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 그러나 네가 이런 일을 겪는 것은 네 게으름과 허영 때문이다. 악마들은 네 영혼을 파멸시키기 위해 그 게으름과 허영에 자신들의 계략을 더한다. 그러니 네 자신을 세심하게 살피고, 게으름과 허영을 몰아내며 생각들과 싸워라. 네 뜻대로 아무것도 행하지 말고, 네 안에서 일어나는 생각들과 자기합리화를 받아들이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심하게 넘어지게 될 것이다. 굳건함을 얻으라. 그러면 그것이 네게서 이웃을 대하는 데 있어 자유로움을 제거해 줄 것이니, 이는 사람 안에 있는 모든 악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모든 근심을 버리라. 그리하면 네가 자유롭게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죽은 자가 되라. 그리하면 네가 나그네가 될 것이다. 네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라. 그러면 네 생각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네가 선한 일을 했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러면 네 상이 온전히 보존될 것이다. 게다가 네가 이 육신에 머무는 시간이 길지 않음을 기억하고, 그날 담대하게 “나는 준비되었고 흔들리지 않았노라”(시 118:60)라고 말할 수 있도록 힘쓰라. 형제여! 수고 없이 살 수는 없으며, 누구도 수고 없이 면류관을 얻지 못한다. 네 구원을 위해 수고하도록 스스로를 다그쳐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의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딤전 2:4) 하나님께서 너를 도우실 것이다.

62. 수도원에 사는 모든 사람이 수도사는 아니지만, 수도자의 소명을 실천하는 자야말로 진정한 수도사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주여, 주여’라고 부르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갈 것이니라” (마태복음 7:21). 형제여! 왜 네가 원수가 너를 조롱하고 타락의 위험에 빠뜨리게 내버려 두느냐? – 네가 묻기만 할 뿐, 네게 전해진 말씀을 실천하려 애쓰지 않는다. 또다시 묻고는 허영심에 사로잡혀 남의 눈치를 보며 다른 이들에게 전할 뿐, – 정작 네가 스스로 조속히 성공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자신의 정욕을 깨닫고 울며 통곡하며 그것을 치유하기 위해 노력하는 데 쓰여야 한다. 만약 수도실에 머물면서 생각이 딴 데로 흩어지면, 그 점을 스스로 책망하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라.

63. 수도사가 되고자 하는 자는 결코 어떤 일에서도 자기 뜻을 가져서는 안 된다. 주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이를 가르치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세상에 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요한복음 6:38). 만일 네가 어떤 것은 행하고 다른 것은 거절한다면, 그것은 네가 너에게 명령하는 자보다 더 분별력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며, 이는 곧 악령들에게 조롱당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러므로 네가 명령받은 일이 죄가 없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되더라도, 모든 일에 순종해야 한다. 그 일을 네게 맡기신 아바께서 네 죄를 짊어지실 것이며, 그분께서 너를 대신하여 책임을 지실 것이다. 만약 그 일이 너에게 지극히 불편하고 위험하거나, 네 힘을 넘어선 것이라면, 아바께 그 사실을 설명하고, 그분이 판단하시는 대로 행하라.

64. (대화에 끼어들면 흥분하여 자신을 잊어버리곤 하는데, 나중에 부끄러워하고 슬퍼한다.) 연약한 자가 이런 함정에 빠지거나 명예를 탐하는 일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장황한 말을 피하고, 무언가 핑계를 대며 대화하는 사람들 곁을 떠나 대화를 끊어야 한다. – 대화가 유익하고 더 중요한 일을 방해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이야기하는 동안 그 자리에 머물러라. 그러나 그 대화가 유익하지 않다면, “죄송합니다, 저는 연약합니다”라고 말하고 자리를 떠나라.

65. 다른 사람을 만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누군가를 만날 때는 인사만 하고, 그다음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저는 볼일이 있어서 가겠습니다.”라고 말한 뒤 떠나야 한다. 누군가 무언가를 물어보는데 네가 그 답을 알고 있다면, 대답하고 지나가라. 모를 때는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지나가라.

66. 만남을 끊고 싶다. 단번에 끊어야 할까, 아니면 서서히 끊어야 할까? – 한 번에 만남을 끊으면 마음이 평온해질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자신과 타인 모두에게 많은 혼란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67. (환자가 의학 서적을 읽어도 되는지 묻는다). 읽으라. 그러나 책을 읽거나 누군가에게 의술에 대해 물을 때, 하나님 없이는 그 누구도 치유를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의술에 전념하는 자는 자신을 하나님의 이름에 바쳐야 하며,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도움을 주실 것이다. 의술은 사람이 경건하게 사는 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형제들을 위해 수공예처럼 그 일을 하라.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행하면 성인들의 기도로 보호받을 것이다.

68. “하루 종일 일에 매달려 있어서, 하나님을 기억할 여유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어떤 도시에 대해 많이 들어봤지만, 막상 그곳에 들어가 보면 그것이 바로 자신이 들었던 그 도시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너도 마찬가지다, 형제여. 하루 종일 하느님을 기억하며 지내면서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계명을 지키고, 그것을 하느님의 계명으로서 지키려 노력하는 것, 바로 여기에 순종과 하느님을 기억하는 것이 담겨 있다.

69. 우리는 매일 음식이 필요하지만, 그것을 즐거움으로 먹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우리 자신을 합당하지 않은 자로 책망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음식이 우리에게 거룩함과 축복이 되도록 하십니다. 또한 어떤 물건이 필요하여 그것을 얻게 된다면, 너를 도우시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자신이 합당하지 않음을 자책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네게서 집착을 물리쳐 주실 것이다.

70. 각자는 자신의 분량대로 이웃을 사랑한다. 그러나 완전한 사랑의 기준은, 사람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만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데 있다. – 젊은이들은 서로에 대한 무분별한 사랑과 특별한 대화를 나누기 위해 모이는 일로 인해 타락에 빠지기 쉽다. – 서로에 대한 사랑의 기준은 다음과 같아야 한다: 서로 비방하지 말고, 서로 미워하지 말고, 서로 깎아내리지 말고, 오직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지 말고, 육체적 아름다움이나 어떤 육체적 활동을 위해 서로를 사랑하지 말며, 극히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서로 함께 앉아 있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만 모든 수도자의 열매를 망치고 그를 마른 나무와 같게 만드는 오만함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71. “구원받고 싶지만 구원의 길을 모르겠습니다.” – 형제여! 하나님께서는 신성한 성경과 교부들을 통해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알려 주셨으니, “네 아버지께 묻으라. 그러면 네 장로들이 네게 알려 주고 네게 말해 줄 것이다”(신명기 32: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그러므로 구원의 길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 영적 아버지들에게 묻지 않고는 아무것도 행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의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딤전 2:4)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길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72. “내 마음속의 생각이 말하길, 어디론가 떠나 홀로 살게 된다면 완전한 침묵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많은 괴로움과 모욕을 겪으셨고, 그 후에야 비로소 십자가에 오르셨다. 마찬가지로, 누구도 (형제들 가운데서 살며) 먼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겪고 그분의 모든 고통을 견디지 않고서는, 사도의 말씀, “우리가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으면 그분과 함께 영광을 받을 것” (롬 8,17). 착각하지 마십시오. 이 길 외에는 구원의 다른 길이 없습니다.

73. (병자에게). 이 병은 네가 열매 없이 하나님께로 떠나지 않도록 닥친 것이다. 만약 이를 견디고 하나님께 감사한다면, 네가 수도자의 삶을 오래 살지 못했으므로 이 병은 네게 공로 대신 인정될 것이다.

74. 명령 없이 어디로든 가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자신의 생각대로 행하는 것은 하나님께 기쁘시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령을 받고 갈 때는, 보낸 이의 명령을 이행하는 그 행위 속에 기도와 하나님께 드리는 기쁨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는 하늘에서 내려왔으니,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 함이라” (요한복음 6:38)고 말씀하셨습니다.

75. (순종하느라 너무 지치네요. 도우미를 청해야 할까요?) 형제여! 예수님께 나아와 구원의 길을 걷고자 하는 자는 매 순간 유혹과 슬픔을 예상해야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녀여, 주님을 섬기려 한다면, 유혹에 대비하여 네 영혼을 준비하라” (시라 2, 1). 그리고 주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 16, 24). 그러므로 그분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자는 죽을 때까지 순종을 다해야 한다. 다른 사람을 초대하는 것보다 혼자서 조금 더 수고를 감수하는 것이 너에게 더 유익하다. 형제가 단지 너를 돕는 경우보다, 그가 끊임없이 너와 함께 있을 때 관계의 자유가 더욱 강화된다.

76. (누구에게 마음속 생각을 물어야 하며, 한 사람에게 물은 후 같은 내용을 다른 사람에게도 물어야 하는가?) – 네가 믿음을 두고, 그가 그 생각을 감당할 수 있음을 알며, 그를 하나님처럼 신뢰하는 사람에게 물어야 한다. 그러나 같은 생각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묻는 것은 불신과 의심에서 비롯된 행위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도를 통해 말씀하신다고 믿는다면, 여기서 시험이 무슨 소용이 있겠으며, 같은 일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묻는 것으로 하나님을 시험할 필요가 무엇이겠는가?

77. “그 일에 대한 계시를 받기 위해 몇 번이나 기도해야 합니까?” – 스승님께 여쭤볼 수 없을 때는 어떤 일이든 세 번 기도해야 합니다. 그 후 마음이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는지, 비록 머리카락 한 올만큼이라도, 살피고 그대로 행하십시오. 계시는 마음속에 뚜렷이 드러나며 온갖 방식으로 이해되기 때문입니다.

78. “세 번 기도하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른 시간에 해야 합니까, 아니면 즉시 해야 합니까? 미룰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 여유 시간이 있다면 사흘 동안 세 번 기도하라. 그러나 구세주께서 고난을 당하셨을 때처럼 극심한 급한 일이 생기면, 그분이 기도를 위해 세 번 물러가시며, 세 번 기도하실 때마다 똑같은 말씀을 되풀이하셨던 것을 본보기로 삼으라(마태복음 26:44).

79. (지도에 관하여). 배가 파도에 휩쓸릴 때, 조타수가 있다면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지혜로 배를 구원하며, 그 배를 타고 있는 사람들은 배가 무사함을 보고 기뻐한다. 주로 병자는 의사에 대한 기억으로 꽤 큰 위로를 받으며, 의사의 솜씨로 인해 더욱 큰 위로를 받는다. 또한 강도들의 위협에 처한 여행자는 경비병들의 목소리에 용기를 얻으며, 그들의 존재 자체는 더욱 큰 위안이 된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아버지여, 용서해 주십시오( )”라는 아버지의 응답은 듣는 모든 이에게, 특히 “서로 위해 기도하여 치유받으라”(야고보서 5:16)고 말씀하신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가 더해질 때, 훨씬 더 큰 기쁨을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80.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자는 성경의 말씀대로 그 죄에서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 “네 죄를 먼저 고백하라, 그리하면 의롭다 함을 얻으리라”(사 43:26), 그리고 또: “내가 말하기를 ‘주님, 내 죄악을 고백하리이다’ 하였더니, 주께서 내 마음의 죄악을 사해 주셨나이다”(시 31:5). 앞으로는 스스로를 조심하며, 과거의 일들은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용서해 주셨으니.

81. 누구든지 금식을 지키면서 자기 뜻대로 무언가를 섞거나, 사람의 영광을 구하고 그로부터 이득을 얻으려고 금식한다면, 그 금식은 하나님께 가증한 것이 된다. 모든 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오직 하나님에 대한 사랑만으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이 섞여 있는 모든 선한 행위는 부정하며 하나님께 기쁘시지 않습니다. 이는 “네 밭에 섞인 씨를 뿌리지 말며, 양털과 삼으로 겉옷을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율법에서도 알 수 있다(신명기 22:9–11; 레위기 19:19).

82. 시편을 암기할 때, 자만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네가 쓸모없는 말로 공기를 채우는 꼴이 되어, 이것이 네게 정죄의 원인이 될까 두렵다. 하나님의 말씀은 선의 씨앗이다. 만일 그것이 네 안에서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너는 불려와 증식하라고 주어진 은을 땅에 묻어 둔 자와 함께 정죄를 받게 될 것이다.

83. 우리를 먼저 창조하시고, 그다음에 대적하는 자들에 맞서 도움을 주셨으며, 무엇보다도 우리의 회개를 위한 자리를 마련해 주시고, 죄 사함과 마음의 확신을 위해 당신의 몸과 피를 주셨던 그분께 어떤 입으로 감사를 드려야 하겠는가? – 우리는 그분께 마땅히 감사를 드릴 수 있는 경지에 결코 이르지 못할 것이나, 입과 마음으로 할 수 있는 한 감사를 드릴 것이며, 특히 그분을 위해 죽음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견뎌냄으로써 감사를 드릴 것이니, 그분은 그분의 자비로 이 모든 것을 복음서에 나오는 과부의 두 렙타와 같게 여기실 것이다.

84. 네게 하나님께 합당한 어떤 일이 떠오르는데, 그와 반대되는 생각이 이를 거스른다면, 바로 그 사실에서 그 일이 참으로 하나님께 합당한 것임을 알 수 있다. – 그러나 기도를 드려 보라. 그리고 살펴보라. 기도하는 동안 네 마음이 선한 일에 확고해지고 그 선함이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커진다면, 그때도 여전히 너를 괴롭히는 반대되는 생각이 남아 있는지 없는지를 보아라. 만약 남아 있지 않다면, 그 일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라; 왜냐하면 선한 일에는 반드시 마귀의 시기심에서 비롯된 고통스러운 저항이 따르지만, 기도에 의해 그 선한 일이 이를 이겨내기 때문이다. 만약 겉보기에는 선해 보이는 것이 마귀에 의해 심어졌고, 게다가 그로부터 비롯된 저항까지 있다면, 그때 기도를 통해 그 겉보기 선함도 줄어들고, 그와 함께 겉보기 저항도 사라진다. 이 경우, 원수가 자신이 심어 놓은 생각을 방해하는 것은 오직 이를 통해 우리를 현혹하여 그 생각을 선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려는 것임이 분명하다.

85. 마음이 너를 칭찬할 때, 그 해를 피할 수 없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도록 힘쓰고, 네 마음에 이렇게 말하라.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 백성아, 너희를 기쁘게 하는 자들은 너희를 미혹하며 너희 발걸음을 비틀게 한다”(이사야 3:12). 다른 사람들이 칭찬할 때도 마찬가지로 행하라. 또한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대로,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는 자들은 유익을 얻지 못한다(요한복음 5:44)는 사실을 기억하라. – 무엇보다도 “주님 안에서 자랑하라”는 말씀을 마음과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고린도후서 10:17). 왜냐하면 우리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있다 해도,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도움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사도는 위대한 경지에 이르렀음에도 스스로를 자랑하지 않고,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된 자니라”(고린도전서 15:10)라고 외쳤겠습니까?

86. 시편을 부를 때나, 기도할 때, 혹은 성경을 읽을 때, 나쁜 생각이 떠오르면; 그것을 무시하고 찬송, 기도, 또는 성경 읽기에 더 깊이 몰입하여 네가 말하는 말에서 힘을 얻도록 하라. 만약 그 생각이 계속된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도록 노력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너를 도우시고 원수들의 계략을 무력화시키실 것이다.

87. “기도와 성경 읽기, 시편 찬송 중에 어떻게 감동을 얻을 수 있는가?” – 기도 중의 감동은 자신의 죄를 회상할 때 찾아온다. 기도하는 자는 자신의 행실을 떠올리고, 이와 같은 일을 행하는 자들이 어떻게 심판받는지, 그리고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 영원한 불 속으로 가라”(마태복음 25:41)는 그 무서운 음성을 기억해야 한다. – 성경 읽기와 시편 찬송 시에는, 누군가 자신의 마음을 깨워 낭독되는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 안에 담긴 힘을 자신의 영혼으로 받아들일 때 감동이 찾아옵니다. 만약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무감각함이 남아 있다 해도, 낙심하지 말고 인내심을 가지고 계속 노력하십시오; 우리의 정성을 받아주시는 하나님께서는 자비로우시고, 관대하시며, 오래 참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시편 기자가 한 말을 항상 기억하라. “내가 주님을 오래 참으며 기다렸더니, 주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셨도다”(시 39:1). 이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며, 머지않아 하나님의 자비가 너를 찾아올 것이라고 믿으라.

88. 시편을 부를 때나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우연히 하나님을 부르게 된다면, 입으로 소리 내어 말하지 않으면 그분을 부르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분은 마음을 아시는 분이시며 마음을 살피신다는 것을 기억하고, 네 마음속으로 그분을 부르라. 이것이 바로 성경에 기록된 “네 문을 닫고 은밀히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마태복음 6:6)는 말씀이다. – 만일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입 밖으로 내지 않고 단지 하나님을 떠올리기만 한다 해도, 이는 오히려 부르짖음에 더 가깝고, 너에게 충분한 도움이 된다.

89. 진심 어린 눈물과 깊은 감회가 어우러지면, 과거의 죄를 씻어내고 더러움을 씻어내며, 이를 얻은 사람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끊임없이 보호하고, 웃음과 산만함을 쫓아내며, 끊임없는 탄식을 유지하게 한다; 그것은 마귀의 모든 불타는 화살을 막아내는 방패(엡 6:16)이며, 이를 지닌 자는 사람들 가운데 있거나 심지어 창녀들과 함께 있을지라도 결코 공격에 상처를 입지 않는다.

90. 미완성된 통회는 구원에 대한 생각(열심)이 번갈아 가며 뜨거워졌다가 식는 것에 따라, 사라졌다가 다시 찾아온다. 그러나 그 열정이 꾸준해지면, 그때 비로소 크고 지속적인 감동이 생기며, 그 뒤를 이어 참된 통곡이 따르는데, 이를 얻기 위해 스스로를 다그쳐야 한다.

91. 겸손이란 모든 일에서 자신의 의지를 잘라내고, 어떤 것에 대해서도 염려하지 않는 데 있다. 정욕(음욕, 미식, 탐욕)의 뿌리를 잘라낸다는 것은, 자신의 의지를 잘라내고, 가능한 한 스스로를 괴롭히며, 감각 기관들이 제 자리를 지키도록 강요하고 남용하지 않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이 정욕들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정욕의 뿌리도 잘라내게 된다.

92.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맡기는 것은 무슨 일이 일어나든 사람을 혼란으로부터 지켜준다. 그러나 혼란은 여전히 찾아와, 일어난 일을 감사와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방해할 수 있다. 그럴 때는 이 혼란과 싸워야 하며,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며,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모든 것은 우리에게 유익하다는 확신을 되살려, 하나님의 뜻에 대한 헌신을 새롭게 해야 한다. – 어떤 선한 일도 오로지 우리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뜻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그분의 뜻에 부합하는 노력을 요구하시며, 악한 자에게서 비롯된 어떤 교활함이나 거짓에 근거한 노력은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93. 침묵은 그 어떤 교훈적인 대화보다도 더 낫고 놀랍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침묵을 존중하고 숭배하였으며, 그로 인해 영광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연약함으로 인해 아직 완전한 자들의 길을 걷는 경지에 이르지 못했으니, 유익이 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합시다. 그리고 성경을 해설하는 데 빠지지 말고, 성부들의 말씀을 인용하며 이야기합시다. 이는 이 일이 무지한 자들에게 적지 않은 위험을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영적으로 기록되었으나, 육신에 속한 사람은 영적인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대화에서 교부들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 안에 담긴 유익을 찾아보는 것이 낫겠습니다. 그러나 “말이 많으면 죄를 피할 수 없다”(잠언 10:19)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며, 그 말씀들도 절제 있게 사용합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교만과 자만하는 생각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가 말하는 바를 행동으로 실천하지 못한다면, 그 말은 우리 자신을 정죄하는 것이 될 뿐임을 마음에 새기자.

94. 침묵이 유익한 대화보다 더 유익하다고 인정된다면, 하물며 도시, 마을, 무역, 평화와 전쟁, 그와 유사한 사안들에 대한 대화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침묵할 수 없어 그러한 주제들에 대한 대화에 휩쓸리게 된다면, 적어도 말이 많아져 적의 어떤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대화를 길게 끌지 말자.

95. 세속적인 일이나 영적인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과 어울릴 때, 해가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신중하게 한두 마디 말을 해도 좋다. 다만, 대담자들이 너를 침묵하는 사람이라고 칭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그러나 그렇게 행동할 때, 즉 말을 적게 할 때에도, 말을 많이 하는 사람들을 비난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96. 무언가를 하려고 생각할 때, 마음에 동요가 느껴지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 후에도 그 동요가 머리카락 한 올만큼이라도 여전히 남아 있다면, 이를 통해 네가 하려는 그 일이 악한 자에 의해 네게 주입된 것임을 깨닫고, 그것을 행하지 말라. 왜냐하면 동요 속에서 행해지는 어떤 일도 하나님께 기쁘시게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 그러나 누군가 그 망설임에 저항할 때(망설임을 거부하는 생각이 들 때), 그 일을 당장 해로운 것으로 단정해서는 안 되며,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 잘 살펴봐야 한다. 옳지 않다면 그만두고, 옳다면 망설임을 무시하고 행해야 한다.

97. 대화를 시작하다가 그것이 죄가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아니, 이 얘기는 하지 말자”라고 말하며 대화를 끊거나, 잠시 침묵한 뒤 “내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잊어버렸네”라고 말하고, 죄가 없는 다른 주제로 화제를 전환하라.

98. 자기합리화란 무엇인가? – 아담, 이브, 가인 및 그와 같은 자들에서 볼 수 있듯이, 죄를 지었으나 스스로를 정당화하고자 하여 그 죄를 부인하는 것을 말한다.

99.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모든 생각과 모든 행위는 그것이 선한지 아닌지를 살펴보고, 선한 것은 행하며, 선하지 않은 것은 버려야 한다. 그러나 선한 일이 당혹스러움과 얽히지 않도록 하려면, (그때) 지배적인 생각이 무엇인지, 어떤 목적으로 무언가를 행하는지 살펴봐야 한다. –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에게 묻는다면, 하나님께서는 네가 그릇된 길로 빠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다. –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잊지 말라.

100. (형제로부터 타격을 받고 그와 결별하고자 하는 자에게). 성급한 행동을 하지 않도록 분개하지 마라. 특히 시기심 많은 마귀의 생각에 혼란을 겪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해야 한다. 어떤 병자들은 심한 열병으로 인해 정신이 혼미해진 상태에서,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돌보는 건강한 사람들에게 괴롭힘을 주곤 하는데, 이는 병이 그들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유혹을 받는 자도 비록 자신의 영혼을 파멸시키고 있지만, 그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는 병의 열정에 취해 있기 때문이며, 이는 항상 그 앞에서 모든 것을 왜곡하여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으려는 대적의 작용 때문입니다. 그는 분노와 복수를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연민과 관용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통해 우리도 유혹을 받도록 허락하시는데, 이는 우리가 그분 앞에서 시험을 잘 견뎌내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니 이웃이 육체적·정신적 투쟁을 벌일 때 그를 너그럽게 대하자. “서로 짐을 지어 주어 그리스도의 율법을 성취하라”(갈 6:2)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 네 자리를 떠나 네 형제와 갈라서려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마귀의 뜻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네가 이를 결심한다면, 원수는 가만히 있지 않고 더 악한 일로 나아갈 것이다. 차라리 온 마음을 다해 형제를 위해 기도하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를 사랑하라.

101. (두려움에 시달리는 형제에게). 형제여! 하나님께서 “하나님은 신실하사 너희가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시험받지 않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성경의 말씀을 네게 성취해 주심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고전 10:13). 하나님께서는 네 힘에 따라 네가 영적 전쟁을 배우도록 허락하시며, 위대한 사람들은 그들의 힘에 따라 큰 유혹으로 시험하시는데, 그들은 이를 기뻐하느니라. 이는 유혹이 사람을 성공으로 이끄기 때문이라. 선한 일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전쟁도 따르기 마련이니라. 그러니 유혹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기뻐하십시오. 유혹은 성공으로 이끄기 때문입니다. 그 유혹을 무시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을 도우시고, 당신을 보호해 주십니다.

102. 겸손과 순종을 기르도록 힘쓰라. 어떤 경우에도 네 뜻대로 되기를 고집하지 말라. 이는 거기서 분노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누구도 판단하거나 깎아내리지 말라. 이는 마음이 지치고 정신이 흐려지게 하며, 거기서 게으름이 생기고 마음의 무감각이 싹트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깨어 있으라. 하나님의 율법을 배우며 지내라. 이는 이를 통해 마음이 하늘의 불로 따뜻해지기 때문이다. “내 교훈 속에서 불이 타오르리라”(시 38:4) 기록된 대로이다. 헛된 말과 빈말로부터 네 입을 지키고, 네 마음이 악한 말에 익숙해지지 않게 하라.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며 “하나님, 저 같은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눅 18:13)라고 말하라. 그러면 그분께서 너를 불쌍히 여기시고, 지켜 주시며, 모든 악으로부터 보호하셔서, 네가 어둠에서 참 빛으로, 미혹에서 진리로, 죽음에서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생명으로 옮겨가게 하실 것이다.

103. 몸에 필요한 만큼만 (음식을) 주라. 그러면 하루에 세 번을 먹는다 해도 해를 입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하루에 한 번만 먹더라도 무분별하게 먹는다면, 그것이 그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는가? – 과식은 음행의 씨앗이 되며, – 그 후 원수는 몸을 잠으로 짓누르며 더럽히려 한다.

104. 때때로 예배(기도)나 수공예 작업을 할 때 심한 기력 저하를 느낀다고 해도 놀라지 마라. 이 길이 원래 그런 법이다. 때로는 사람이 이렇게 느끼고, 때로는 다르게 느끼는데, 마치 여행자가 때로는 평탄한 길을 걷다가, 때로는 급류와 산을 만나고, 다시 평탄한 길로 나오는 것과 같다. 나약함을 바라보지 말고, 모든 일을 계속하며 자신의 일을 해 나가라.

105. (규정에 따르지 않고 음식을 섭취해야 하는 병자에게). 자신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육체의 연약함 때문에 먹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정죄하지 않으신다. 음식에 대한 금지는 우리가 포만감과 육체의 욕망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한 것이나, 연약함이 있는 곳에서는 그 규정이 무효화된다. 왜냐하면 연약함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기 때문이다.

106. (지쳐서 기도를 청한 병자에게). 낙담하고 불평하는 형제여! 왜 슬퍼하느냐? 왜 울부짖느냐? 네 곁에 서서 네가 그분을 도와달라고 부르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이 계시는데, 왜 멀리 (도움을 청하러) 보내느냐! – 그분께 “스승님!” 하고 부르짖으라. 그러면 그분이 네게 응답하실 것이다. 그분의 옷자락을 만져 보라. 그러면 그분은 이 한 가지 고통뿐만 아니라 네 모든 고통에서 너를 치유해 주실 것이다. 만일 네 마음이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있었다면, 독사와 전갈의 독침조차도 너를 그곳에서 끌어내려 육체의 병을 느끼게 수 없었을 것이다: “ ” “내 탄식의 소리로 인해 내 양식을 잊어버렸다”고 말씀하신다(시 101:5). 슬퍼하지 마라. 하나님의 자비가 네 곁에 있다.

107. 구더기가 먹어 치울 몸을 경멸하라. 그것이 썩어 없어질 때 너에게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사도는 말하기를, “육체의 욕망을 따라 행하지 말라” (롬 13, 14)고 한다.

108. (병자: 연약함 때문에 육신을 용납해도 될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성을 주셔서, 우리가 신성한 성경을 통해 바른 길로 인도받게 하셨다. 사도는 말하기를, “모든 것을 시험하여 선한 것을 붙잡으라” (살전 5:20)고 한다. 사람은 단지 정욕에 따라 무언가를 먹거나 행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뿐이며, 연약함이나 필요에 따라 행하는 것은 죄로도, 방종으로도 간주되지 않습니다. 건강할 때 육체에 안식을 구하는 것은 정욕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필요에 따라 육체를 돌보면 그것은 우리가 일을 수행할 때 우리를 돕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동물들을 돌본다면, 영혼의 도구인 몸을 더욱더 돌봐야 한다. 도구가 무뎌지면, 아무리 재치가 빠르고 박식한 예술가라도 일을 하기 어려워진다. 사도는 성 티모테오의 위장 질환과 허약함을 염두에 두고, 그에게 포도주를 마시라고 명하셨습니다(딤전 5:23). 비록 그에게 “고난을 겪으라”(고난을 인내하라)고 명령하시며 “복음 전도자의 사명”을 수행하라고 하셨지만 말입니다(딤후 4:5). 그리고 모든 일에서 사람은 분별력을 지켜야 하며, 그래야 쉽게 타락하지 않을 것이다.

109. “싸움이 점점 더 나를 향해 일어나고 있습니다.” – 형제여! 싸움이 있는 때는 일할 때입니다. 게을러지지 말고 일하십시오. 싸움을 벌이십시오. 그리고 싸움이 거세질 때, “주 예수 그리스도여!”라고 부르짖으며 당신도 힘을 내십시오. 주님은 나의 연약함과 슬픔을 보시니, “나를 쫓는 자들로부터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께로 왔나이다” (시 141:7; 142:9)라고 도와주시기를 구하라; 그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길 힘을 얻도록 기도하라.

110.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두 가지 은사를 주셨으니, 이를 통해 그들은 구원을 얻고 옛 사람의 모든 정욕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바로 겸손과 순종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추구하지도 않고, 그 안에 머물기를 원치 않으며, 그것에 따라 행동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 모든 일탈을 버리고, 네 마음을 겸손과 순종에 기울이면, 은혜를 받게 될 것입니다. 만약 네가 교부들로부터 듣는 바를 겸손과 순종으로 실천한다면, 주님께서는 네가 수련하는 그 일뿐만 아니라 네 모든 일이 성공하도록 도와주실 것이다. 이는 주님께서 그분을 경외하는 자들의 길을 지키시고 그들의 행보를 보호하시기 때문이다. 왜 분개하느냐? 왜 다투느냐? 네가 끊임없이 하나님의 인내 안에 머무른다면, 하나님의 자비가 너를 도울 것이다. 성급하고, 짜증 나며, 시기하는 마음을 버려라. 모든 사람에게 있어 죽은 자처럼 살아라. 마음속으로 스스로에게 말하라. ‘나는 누구인가?’ – “흙과 재”(창 18, 27) “개”(마태 15, 27). 다른 사람을 헐뜯거나 비하하고 조롱하지 마라. “이게 뭐지? 왜 그런가?”(시라 39, 22) “왜 나는 이 사람이나 저 사람과 동등하지 않은가?”라고 말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다스려라. 그러나 하나님의 경외심을 가지고 네 작은 수공예에 부지런히 힘쓰면, 그 대가로 적지 않은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111. 낙담으로 인해 졸음이 찾아와 해야 할 일을 방해할 때, 그때는 일어나 기도에 전념하고 기도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주님께서 기도로 그 졸음을 없애 주실 것이다.

112. (마지막이 되고자 하는 자, – 단지 수도원에 받아들여지기만을 바라는 자). – 마지막 자리에 서기 위해 – 그것을 추구하는 것은 네 몫이 아니다. – 그것은 네 아바에게 달려 있으며, 네 몫은 순종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113. 사람이 스스로 힘써 자신의 능력을 다하지 않고, 성인들의 기도에 자신의 수고를 더하지 않는다면, 성인들이 그를 위해 기도해 준다고 해도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들이 그를 위해 금식하고 기도할 때, 그가 쾌락을 좇으며 무질서하게 행동한다면, 그를 위한 그들의 기도가 무슨 유익을 가져다주겠는가? 이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 “한 사람은 세우고 다른 사람은 무너뜨리니, 더 많은 성과를 거두는 것은 오직 수고뿐이다”(시라 34,23)가 여기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사도는 “의인의 기도는 큰 힘을 발휘한다”(야고보서 5,16)고 말하는데, 즉 거룩하고 의로운 이가 죄인을 위해 기도할 때, 죄인 또한 자신의 힘으로 회개를 통해 성인들의 기도에 협력해야 한다는 뜻이다.

114.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달라고 청했으나, 그 사람이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청한 것을 주지 않았다고 해서 정죄받지는 않을 것이다. 사도 베드로도 절름발이가 그에게 자선을 청했을 때, 이렇게 말하였다: “내게 은이나 금은 없노라”(사도행전 3,6)라고 말하며, 그에게 주기 위해 빌리지도 않았습니다. 또한, 누군가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자선으로 낭비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야 나중에 자신에게 부족한 상황이 닥쳤을 때, 궁핍을 견디지 못해 슬퍼하는 일이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구걸하는 사람이 그를 귀찮게 할 때, 그가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드릴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이는 거짓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만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줄 것이 없기 때문이다. 구걸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라. “용서해 주십시오. 저는 제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만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이들이 등불에 쓸 기름을 달라고 청했을 때, “우리와 여러분 모두에게 부족함이 없기를 바랍니다”라고 대답했던 다섯 처녀를 떠올려 보라(마태복음 25,9). 또한 사도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편지하며 “너희의 풍족함이 그들의 부족함을 메우게 하라”(고린도후서 8, 14)고 말했고, “다른 이들에게는 기쁨이 되고, 너희에게는 슬픔이 되지 않도록”(고린도후서 8, 13)이라고도 했다.

115. 자선을 베풀고자 할 때, 마음속에서 베풀지 말아야겠다는 의심이 든다면, 그때는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아라. 만약 그것이 인색함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게 된다면, 베풀어야 한다는 생각에 반하여 오히려 조금 더 베풀어라.

116. “나눌 것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하면 복을 누릴 수 있겠는가?” – 복은 자선을 베푸는 자들에게만 약속된 것이 아니다. – “영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울고 있는 자는 복이 있나니” 등 (마태복음 5, 3 이하). 그러니 자선을 베풀 수 없다면, 영이 가난한 자가 되어 성도들과 함께 천국을 상속받으라. 이 세상에서 자신의 죄를 인해 울며, 슬퍼하는 자들과 함께 위로를 받으라. 땅을 상속받기 위해 온유함을 갖추라. 하나님의 영광을 뵙기 위해 마음이 청결하라. 주님을 위해 모욕과 박해, 거짓 비방을 참아내어, 하늘에서 큰 상을 받고 기쁨에 넘치게 되라.

117. 만일 주님의 율법이 한 가지를 명하고, 이 세상의 법이 그와 정반대를 규정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 하나님의 율법이 더 중요하다. 이는 하나님의 율법이 영혼의 구원에 대해 말하지만, 세상의 법은 육신적인 것이므로 육신적인 자들에게 말하기 때문이다.

118. 네 사랑이 나에게 묻기를, 네가 때때로 눈앞에 있는 이를 열정적으로 바라보며 영혼이 사로잡히는 일이 있다고 한다. 이는 분명히 마귀의 유혹과 관련된 것이다. 이때 너는 우리 본성의 썩어짐과 악취를 떠올려야 하며, 우리가 무덤에 누워 있을 때 어떻게 변하게 될지를 생각해야 한다. 또한 장차 닥칠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눈앞에 그려보라. 그렇게 행하는 자들의 운명이 어떠할지, 그리고 우리의 행실이 천사들과 대천사들, 모든 사람, 그리고 의로운 재판관 앞에서 드러날 때 그 큰 수치를 어떻게 견딜 수 있을지, 그때 그러한 행위를 저지른 자들의 입이 어떻게 막힐지를 생각하라. “자기를 속이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음란한 자나 남색하는 자나 남자와 동침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하리라”(고린도전서 6:9-10)고 말씀하신 분을 두려워합시다. 또한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태복음 5:28)라고 하신 말씀도 기억합시다. (마태복음 5:28). 너는 이 점을 명심하고, 네가 이러한 갈등을 느끼는 사람들 곁에 자주 머물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네가 왜 그들로부터 멀어지는지 드러내지 말아라. 그래야 그들이 온갖 추측을 할 빌미를 주지 않을 것이다. – 그리고 그들과 대화를 나눌 필요가 생기면,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부르며 도움을 청하라. “주 예수님! 저를 감싸 주시고, 제 연약함을 도와주소서.”라고 말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말라. 그분께서 원수들의 활을 꺾으실 것이니, 그분의 이름으로 인해 악은 무효가 되기 때문이다. 말을 많이 하기보다 적게 하고, 귀와 생각을 제멋대로 두지 말고, 아무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눈치채지 못하도록 품위 있게 그리고 당당하게 행동하라. 만약 이를 통해 힘을 얻게 된다면, 네 원수들을 대할 때 거만해지지 마라. 그들은 뻔뻔하여, 비록 수천 번 패배하더라도 다시 싸움을 걸어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승리자이신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위해 자신의 뜻대로 육신을 입으시기를 원하셨던 인간의 겸손을 도우신다.

119. “마음은 어떻게 음란한 생각에 사로잡히는가?” – 마음의 사로잡힘이나 산만함(그리고 포로됨)은 음란한 정욕뿐만 아니라 다른 경우에도 일어난다. 마음은 산만함으로 인해 이에 빠지게 되는데, – 그럴 때 사람은 스스로를 향해 이렇게 외쳐야 한다. “주님, 주의 거룩하신 이름을 위하여 저를 용서하소서. 제 게으름으로 인해 제가 이에 빠졌습니다. 저를 산만함으로부터, 그리고 모든 원수의 올가미로부터 건져 주소서.” – 그리고 그러한 휩쓸림을 알아볼 수 있는 징후는 다음과 같으니라: 누군가 다른 이와 대화를 나누는데, 그의 마음이 이리저리 흩어지면, 한 가지에 대해 말하고 있을 때 그의 생각이 다른 것으로 옮겨가는 일이 발생한다. 바로 이것이 휩쓸림이다. – 음란한 생각도 같은 방식으로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누군가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다가, 원수가 신을 기쁘시게 하는 절제에서 마음을 돌리도록 성공하면, 산만함의 결과로 마음에 음란한 욕망이 생겨납니다. – 이것 또한 휩쓸림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숙고나 회상 때문이 아니라, 사람이 망각 속에서 그에 휩쓸렸기 때문입니다. – 정신을 차린 그런 사람은 앞서 말한 대로 스스로를 일깨우고, 하느님의 자비에 의지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자비로우시니 그를 방탕한 아들과 같이 받아주실 것입니다. 만약 산만함 없이도 그러한 생각이 마음속에 떠오른다면, 정신을 차리고 그러한 생각에 빠져들지 말며, 그 생각에 머뭇거리지 말고, 서둘러 주 하나님께 의지해야 한다.

120. 여성들과의 모든 대화를 피하는 것이 가장 좋다. 필요에 의해 그들과 교제해야 한다면, 다른 사람을 통해 이를 해결하도록 노력하자. 만약 그것조차 불가능하다면, 그들과 교제할 때 불에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이 조심하듯이 스스로를 경계해야 한다. 그 사람은 불에 데이지 않도록 온갖 주의를 기울이듯이, 우리도 마치 불에 다가가는 것처럼 여성들을 대하며, 온전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굳건히 서자. 어떤 일이 있어도 여성들을 쳐다보지 말자. 우리의 눈을 방종하게 두지 말고, 그들과의 대화에 머뭇거리지 말자; 이는 그로부터 정욕의 불이 타오르기 때문이니, 오히려 곧바로 그들 곁을 떠나며, 하나님께서 이 어려운 시기에 우리 앞에 놓인 마귀의 올가미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를 기도하고, 끊임없이 하나님을 기억할 것이며, 그리하여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분의 위대한 능력이 우리의 연약함을 덮어 주실 것이다.

121. “수도원에 들어가려는 목적으로 아내를 떠나는 것이 유익한가?” – 너는 그녀를 제멋대로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사도의 계명을 어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는 “아내와 결합했다면, 이혼 허락을 구하지 말라”(고린도전서 7:27)고 말하였다. 만약 그녀가 (당신이 떠난 후) 죄를 짓고 타락한 삶을 살게 된다면, 그 죄는 당신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단, 그녀와 상의하여 합의하에, 그리고 유익을 위해 그녀를 떠나는 경우는 예외입니다. – 그러나 이 일은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그분의 자비에 따라 그분께서 원하시는 대로 이루실 것입니다.

122. 결코 이 세상의 일들로 인해 슬퍼해서는 안 되며, 오직 죄 한 가지만을 위해 슬퍼해야 한다. 또한 “기뻐하는 자들과 함께 기뻐하라”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덕을 쌓아가는 자들과 함께 기뻐하고, 장차 올 복을 바라며 즐거워하는 것을 뜻하며,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것은, 죄를 지은 자들이 죄를 회개할 때 그들과 함께 슬퍼하는 것을 뜻한다.

123.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에 대하여). 차라리 자신의 마음을 평온하게 하는 것이 낫다. 이는 누구에게나 마땅한 일이며, 이를 행하는 자는 복이 있다. 그러나 다투는 자들을 화해시키는 일은 모든 사람에게 어울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에게 아무런 해를 입히지 않고 이를 감당할 수 있는 자들에게만 어울린다. 연약한 자는 모든 이의 화해를 기뻐해야 하지만, 모든 사람을 화해시키기 위한 중재자가 되어서는 안 되며, 오직 하나님을 따라 사랑하는 자들에 대해서만 그러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도 자신에게 영적 해가 따르지 않을 때에만 말이다.

124. “어떤 사람에게 모욕을 당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 그에게 선을 베풀어라.

125. “어느 장로님이 저를 찾아오셨을 때, 그분께 드릴 만한 것이 없어 슬퍼합니다.” – 그런 생각은 마귀에게서 온 것이다. “있는 것으로 만족하라”(히브리서 13,5)는 말씀대로, 네가 가진 것을 대접해 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네 성심을 알려 주실 것이다. 너도 어딘가로 가게 될 때, 그곳에서 평안을 찾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마라. 그러면 당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평안을 찾으리라 꿈꾸었다가 찾지 못하면, 너를 맞아준 사람을 비방하게 될 것이니, 비방은 영혼의 죽음이다. – 모든 것에 감사하라. 이는 바로 여기에 영적이며 영혼에 유익한 양식과 평안이 있기 때문이다.

126. 스승들에게 묻는 자는 “자신을 낮추사 종의 형상을 취하신”(빌 2,7-8)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다. 조언 없이 사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적이다. 성경은 “모든 일을 조언을 구하며 행하라”(시르 32,21) 말하기 때문이다. 자기 뜻대로 행하는 것보다 겸손히 묻는 것이 더 유익하니, 이는 주님께서 묻는 이의 겸손과 마음의 바름을 위해, 질문받는 이의 입에 무엇을 말해야 할지를 넣어 주시기 때문이다.

127. 결코 믿음에 대해 논쟁하지 마라. 하나님께서는 네게 이를 요구하지 않으시며, 오직 세례를 받을 때 거룩한 교회로부터 받아들인 대로 바르게 믿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기만을 원하신다. 이것을 지키면, 구원받을 것이다. 만일 누군가 묻는다면, 이렇게 말하라. “용서해 주십시오, 거룩한 아버지들, 이는 제 능력을 넘어서는 일입니다.”

128. 하나님께서 네게 요구하지 않으시는 것은 무엇이든 탐구하지 말고, 앞서 말한 대로 바른 신앙을 고백하는 데 만족하며, 그 이상의 어떤 것에 대해서도 호기심을 품지 마라.

129. 네가 평신도들과 함께 있을 때 그들이 헛소리를 하기 시작하면, 특별한 필요가 없다면 자리를 떠라. 그러나 필요할 때는 그들을 비난하지 말고, 자신의 연약함을 깨달으며 마음으로 기도에 집중하라. – 그러나 그들이 너에게 호의적이며, 그들이 기꺼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을 안다면, 성인들의 행적 중 어떤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그 헛된 대화를 유익한 대화로 바꾸도록 노력하라.

130. 네 지인 중 누군가가 이단적인 사상을 고수하고 있다면, 그에게 올바른 믿음을 깨닫도록 권면하되, 그와 논쟁하지 말고, 그의 독에 감염되지 않도록 그가 지껄이는 말을 듣기를 원하지 마라. 만약 그가 신앙의 진리를 듣고자 한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그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성부들에게로 그를 인도하라. 그렇게 함으로써 너는 네게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도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를 도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첫 번째와 두 번째 권고에도 불구하고 그가 고쳐지지 않는다면, 사도의 말씀대로 그런 자를 “거부하라”(디도서 3,10).

131. “마음속에서 자주 집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말하지만, 일주일 동안 몇 번이나 교회 예배가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배에 참석해야 할까요, 아니면 집에서 (기도에) 전념하는 것이 더 나을까요?” – 집을 나설 때 만나는 사람들이 당신에게 해를 끼친다는 것을 안다면, 교회 예배를 위한 경우라 할지라도 자주 (집을) 나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가끔씩만 나가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침묵은 많은 악에서 벗어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132. “만약 내 개인적인 필요나 아버지들의 지시로 인해 집을 나서야 할 필요가 생긴다면, (그럴 때) 교회에 가지 않는 것이 양심에 가책을 주지 않을까?” – 만약 필요한 일이나 부모님의 명령으로 집을 나서야 할 필요가 있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 일을 처리하도록 노력하고, 예배에 참석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해 의심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집으로 돌아와 그곳에서 자신의 죄를 되새기십시오. 만약 게으름이나 산만함 때문에 집을 나선다면, 차라리 교회 모임에 가서 산만해지지 말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편이 더 유익하다.

133. “밤에 (기도회를 위해) 교회에 가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집에서 자신의 힘으로 기도회를 드리는 것이 좋은가?” – 집에서 기도회를 드리는 것이 좋다. 교회에서는 수다가 오가기 때문이다.

134. “생각이 내게 필요한 생계 수단의 부족을 떠올리게 하여, 가족을 부양할 수 없다는 생각을 심어주고, 이로 인해 슬픔이 나를 덮칩니다.” – 이것은 온갖 종류의 슬픔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소망을 가졌다면, 그분께서 친히 당신의 뜻대로 우리를 인도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 슬픔을 주께 맡기라”(시 54:23), 그러면 그분은 슬픔과 근심 없이 너와 네 가족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실 힘이 있으시다. 그분께 “주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말하라. 그러면 그분은 너를 슬픔과 근심 속에 내버려 두지 않으실 것이다.

135. “내가 부당한 일을 저질렀다가 나중에 바로잡을 때, 내 마음이 교만해져서 마치 내가 선한 일을 한 것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이 경우 그에게 무엇을 말해야 합니까?” – 그에게 이렇게 말하라. “하나님 없이는 우리가 선한 일을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듯이, ‘나 없이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요한복음 15:5). 또한 사도 바울은 ‘네가 가진 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받은 것이 아니냐? 만약 받았거든, 자랑하는 것을 마치 받지 않은 것처럼 여기라(고린도전서 4:7). 그러므로 우리가 선한 일을 행할 때조차 교만해져서는 안 되니, 하물며 악을 멀리하는 일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 것은 큰 어리석음이다.

136. “모든 음식에는 본래의 단맛이 있는데, 이것이 음식을 먹는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가?” – 주 하나님께서는 모든 종류의 음식에 단맛을 주셨으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것을 먹는 사람에게는 이로 인해 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집착은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 이는 영혼에 해를 끼치기 때문입니다.

137. “예를 들어, 내가 건물을 짓거나 다른 일을 할 때, 그 일이 깨끗하게 완성되도록 하는 것이 부적절한 일인가?” – 그 물건이 깨끗하고 아름답게 완성되도록 만드는 것은, 그 물건이 쓰이는 용도를 위해서라면 부적절하지 않습니다. 다만 집착 없이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모든 깨끗함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자신에게 사물에 대한 집착이 있음을 깨닫는다면, 그 사물이 결국 썩어 없어질 운명임을 떠올리면 마음이 평온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 가지 형태로 영원히 머무르는 사물은 단 하나도 없으며, 모든 것은 썩어 없어지고 변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성 아바 도로페이

 

그에 대한 간략한 소개

아바 도로테우스는 6세기 말과 7세기 초에 활약했다. 그는 젊은 시절을 세속 학문을 매우 성실하게 공부하며 보냈다. 학업을 마친 후 그는 고향에서, 아바 세리다의 수도원 근처, 아마도 아스칼론이나 가자에서 얼마 동안 살았다. 그의 재산은 넉넉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위대한 장로인 바르사누피우스와 요한과 교류를 시작했는데, 그들의 가르침에 감화되어 모든 것을 버리고 그들이 머물던 아바 세리다의 수도원에서 수도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들의 지도 아래에서 그는 수도자로서의 수련을 거쳤는데, 주로 요한 장로의 지도 하에 있었으며, 동시에 수도원의 아바가 그에게 맡긴 순명을 수행했다. 아바는 처음에 그에게 나그네 숙소를, 그 다음에는 병원을 맡겼다. 이 마지막 순명을 수행하는 동안 그는 성 도시페이의 지도자였다. 아바 세리다와 성 요한 장로가 세상을 떠난 후, 그들의 공동 지도자였던 위대한 바르사누피우스가 완전히 자신의 방에 틀어박히자, 도로페이 신부는 아바 세리다의 공동 생활에서 물러나 다른 어느 수도원의 원장직을 맡게 되었다. 아마도 이 시기에 그가 제자들에게 전한 가르침들이 속할 것이다. 이 가르침 21편과 몇 편의 서신이 바로 이 성자의 저술 중 우리에게 유산으로 남은 전부이며, 그의 가르침의 빛은 수도원뿐만 아니라 모든 기독교인들 사이로 퍼져 나갔습니다. 그의 서거 시기는 약 620년으로 추정됩니다. 그의 기념일은 6월 5일입니다.

 

수도 생활에 관한 가르침

(순서대로 발췌)

1. 하느님께서는 그 자비로 우리를 정화시켜 주는 계명을 주셨으니, 이는 우리가 원한다면 계명을 지키며 죄뿐만 아니라 정욕 그 자체로부터도 정화될 수 있게 하려 하심이다. 왜냐하면 정욕은 한 가지이고, 죄는 또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정욕이란 분노, 허영, 쾌락 추구, 증오, 악한 욕망 및 이와 유사한 것들입니다. 반면 죄란 정욕이 실제로 행동으로 나타날 때, 즉 정욕이 부추기는 대로 육체로 그 행위를 저지르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정욕을 가질 수는 있어도 그에 따라 행동하지는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구) 율법은 우리가 스스로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도록 가르치는 것을 목적으로 했으므로, 오직 악을 행하는 것만을 막아주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신약에서)는 악을 행하도록 부추기는 정욕 그 자체, 즉 증오 그 자체, 정욕 그 자체, 명예심 그 자체 및 그 밖의 정욕들을 몰아내야 합니다.

3.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들어보라. “나에게서 배우라. 나는 온유하고 마음이 겸손하니, 너희 영혼이 안식을 얻으리라”(마태복음 11:29). 여기서 주님께서는 모든 악의 근원과 원인, 그리고 그에 대한 치료법—모든 선의 원인을 보여주셨으며, 바로 교만이 우리를 타락시켰으며, 그와 정반대인 겸손을 통해서만이 용서를 얻을 수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 우리가 왜 모든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까? 교만 때문이 아닙니까? 인간은 온갖 즐거움 속에서 창조되어 낙원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단 한 가지 일을 하지 말라고 명령받았으나, 그는 그것을 저질렀습니다. 교만을 보십니까? 불순종(교만의 딸)을 보십니까? – 그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단 하나의 기쁨만으로는 만족할 줄 모른다. 만약 그가 불행을 겪지 않는다면, 더 멀리 나아가 완전히 파멸할 것이며, 슬픔과 수고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면, 기쁨과 평안이 무엇인지 또한 알지 못할 것이다.” – 그리하여 그를 낙원에서 쫓아내셨습니다. – 그때 그는 자신의 자만심과 자기 뜻에 내맡겨져, 그것들이 그의 뼈를 부수게 하고, 이를 통해 자기 자신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는 법을 배우게 되었으며, 불순종의 고통 그 자체가 순종의 행복을 가르쳐 주게 되었으니, 이는 선지자가 말한 바와 같다: “네 배반이 너를 ‘징계’(가르침)하리라”(예레미야 2:19). – 보라, 이제 하나님의 자비가 외치시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안식을 얻으리라”(마태복음 11:28). 마치 이렇습니다. 보라, 너희는 수고하고 고통받았으며, 불순종의 악한 결과를 겪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와서 회개하십시오. 너희를 죽게 했던 교만 대신, 온유함으로 너희 자신을 소생시키십시오. “나에게서 배우라. 나는 온유하고 마음이 겸손하니, 너희는 너희 영혼의 안식을 얻으리라” (마태복음 11, 29).

4. 아바 마르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음의 회개 없이는 악에서 벗어나 덕을 얻을 수 없다.’ 마음의 회개를 통해 사람은 계명에 순종하게 되고, 악에서 해방되며, 덕을 얻게 되며, 그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안식에 이르게 됩니다.

5. 어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성세례를 통해 정욕의 활동을 끊은 뒤, 정욕 그 자체를 이기고 무정욕의 경지에 이르기를 갈망하였으니, 성 안토니우스, 성 파코미우스 및 그 밖의 하나님을 닮은 성부들이 그러했다. 그들은 “육체와 영의 온갖 더러움에서 자신을 깨끗이 하리라”는 선한 뜻을 품었습니다(고린도후서 7,1). 그러나 세상에 머물러서는 이를 이루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그들은 자신들만의 특별한 삶의 방식과 행동 방식을 고안해 냈으니, 즉 세상과 단절된 은둔 생활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세상을 떠나 사막에서 살기 시작했고, 금식과 기도로 수련하며 맨땅에서 잠을 잤고, 그 밖의 온갖 고행을 감수하며, 조국과 친족, 재산과 소유물을 완전히 버렸다.

6. 그들은 계명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예물을 드렸습니다. 계명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것이며,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는 마치 세상에서 왕에게 바쳐야 할 조세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왕에게 조공을 바칠 뿐만 아니라 예물을 드리는 위대하고 귀한 사람들이 있어, 그 대가로 특별한 영예와 상, 지위를 누리듯이: 마찬가지로 성부들은 계명을 지키며 하나님께 조공을 바쳤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선물인 동정성과 무소유도 바쳤는데, 이는 계명이 아니라 자유 의지의 행위입니다. 왜냐하면 첫 번째에 대해서는 “받아들일 수 있는 자는 받아들이라”(마태복음 19:12) 말씀하셨고, 두 번째에 대해서는 “네가 온전하고자 하면…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마태복음 19,21).

7. 그들은 세속을 십자가에 못 박았고, 그 후 사도처럼 “세상은 내게 십자가에 못 박혔고, 나도 세상에 십자가에 못 박혔다”(갈 6,15)고 말한 사도를 본받아, 스스로를 세상에 십자가에 못 박기로 결심했다. 왜냐하면 사람이 세상을 등지고 수도사가 될 때, 즉 부모와 재물, 그리고 모든 세속적인 일과 근심을 버릴 때, 그때 그는 스스로에게 세상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후 외적인 것들로부터 해방되어, 가장 큰 쾌락이나 사물에 대한 갈망, 그리고 자신의 욕망에 맞서 힘쓰며 정욕 그 자체를 죽일 때, 비로소 그는 자신을 세상에 못 박는 것이며, 사도와 함께 담대하게 “세상은 내게 십자가에 못 박혔고, 나도 세상에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할 수 있다.

8. 우리 선조들은 세상을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고, 또한 자신을 세상에 십자가에 못 박으며, 수행에 전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겉보기에는 세상을 버리고 수도원에 들어옴으로써 세상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우리 자신을 세상에 못 박고 싶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전히 세상의 쾌락을 사랑하고, 세상에 대한 집착을 가지고 있으며, 세상의 영광에 동조하고, 음식과 옷, 그 밖의 헛된 것들에 대한 집착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되며, 세상과 세상의 것들을 버린 것처럼, 그 것들에 대한 집착 자체도 버려야 한다.

9. 우리는 세상을 버렸으니, 세상에 대한 집착도 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집착은 비록 사소하고 평범하며 아무 가치도 없는 것들에 관한 것이더라도, 우리를 다시 세상에 묶어두고 세상과 연결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완전히 변화하여 집착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아무리 사소한 것에 관한 것이더라도 자신의 욕망을 잘라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의지를 잘라내는 것만큼 사람들에게 큰 유익을 주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실로, 사람은 이로부터 다른 그 어떤 미덕보다도 더 큰 성취를 얻는다. 한편, 이러한 자신의 의지와 욕망을 끊어내는 일은 매 순간 일어날 수 있다. 예를 들어, 누군가 걷고 있다고 치자. 생각이 그에게 말한다. “저쪽과 이쪽을 둘러보라.” 그러나 그는 자신의 욕망을 끊어내고 쳐다보지 않는다. 그는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을 만났다. 마음이 그에게 “그들과 한두 마디 말을 걸어라”라고 말하지만, 그는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고 말을 걸지 않는다. 그는 부엌에 다다랐다. 마음이 “요리사가 무엇을 준비하는지 물어보러 들어가라”라고 말하지만, 그는 그 욕망을 억제하고 들어가지 않는다. 등등, 등등. – 이처럼 자신의 욕망을 끊어내다 보니, 그는 그것을 끊어내는 데 익숙해지고, 작은 일부터 시작하여 큰 일에서도 수월하고 평온하게 그것을 끊어내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자신의 의지를 전혀 갖지 않게 되고, 무슨 일이 일어나든 평온함을 유지하게 된다. 이처럼 자신의 의지를 끊어냄으로써 무편파성을 얻게 되고, 무편파성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완전한 무감정 상태에 이르게 된다.

10. 어떤 장로가 말하기를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겸손이다”라고 했다. 그는 왜 그렇게 말했을까? – 왜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절제가 필요하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사도 바울은 “경주하는 자는 모든 것을 절제한다”(고린도전서 9:25)고 말했기 때문이다. 아니면 왜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필요하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성경에 “지혜의 시작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잠언 1:7). 또한 왜 무엇보다도 자선이나 믿음이 필요하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자선과 믿음으로 죄가 씻겨진다”(잠언 15:27)고 기록되어 있고, 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히브리서 11:6)고도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그는 이토록 필요한 모든 것을 제쳐두고 오직 겸손함만을 강조하는 것일까? 장로는 이를 통해 우리에게, 경외심도, 자선도, 믿음도, 절제나 그 밖의 그 어떤 미덕도 겸손 없이는 완전해질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겸손으로 말미암아 원수와 대적의 모든 화살이 꺾입니다. 모든 성도들은 그 길과 수고를 따라 걸었습니다. “나의 겸손과 나의 수고를 보시고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소서”라고 시편 기자는 외치며, 또 “내가 겸손하니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셨도다”라고 말합니다(시 24:18; 114:6).

11. 그 같은 장로는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겸손은 누구에게도 화를 내지 않으며, 누구도 화나게 하지 않습니다. 겸손은 영혼에 하나님의 은총을 끌어당기며,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면 영혼을 이 두 가지 무거운 정욕에서 구원해 줍니다. 이웃에게 화를 내고 그를 화나게 하는 것보다 더 무거운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 하지만 내가 겸손이 단지 두 가지 정욕에서만 구원해 준다고 말하는 것일까? 겸손은 영혼을 온갖 정욕과 온갖 유혹으로부터도 구원해 준다.

12. 성 안토니우스가 마귀의 모든 올가미가 펼쳐져 있는 것을 보고 한숨을 쉬며 하느님께 “누가 이것들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자,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겸손이 그것들을 피한다”고 대답하셨고, 더욱 놀라운 것은 “그것들은 겸손한 자에게조차 닿지 않는다”고 덧붙이셨다. 이 미덕의 힘을 보십니까? 진실로 겸손보다 더 강한 것은 없으며, 그 어떤 것도 이를 이길 수 없습니다. 겸손한 사람에게 슬픈 일이 닥치면, 그는 즉시 자신이 그럴 만하다고 자책하며, 누구도 책망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않는다. 이처럼 그는 일어난 일을 당황함도, 슬픔도 없이, 온전한 평온함으로 견뎌낸다. 그러므로 그는 누구에게도 화를 내지 않으며, 누구도 화나게 하지 않는다.

13. 겸손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이는 교만에도 두 가지가 있는 것과 같다. “첫 번째 교만”이란, 누군가가 형제를 책망하고, 정죄하며, 무의미한 존재인 양 모욕하면서, 자신을 그보다 더 높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곧 정신을 차리고 고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서서히 “두 번째 교만”에 이르게 되는데, 이는 하나님 그분께 대항하여 교만해하며 자신의 업적과 미덕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고 자신에게 돌리는 것이다. 마치 자신이 하나님의 도움 없이 자신의 지식과 지혜로 스스로 이루어낸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이를 통해 두 가지 겸손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알 수 있다. ‘첫 번째’ 겸손은 형제를 자신보다 더 지혜롭고 모든 면에서 더 뛰어나다고 여기는 것, 혹은 자신을 모든 사람보다 낮게 여기는 것이다. ‘두 번째’ 겸손은 자신의 업적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인들의 완전한 겸손이다.

14. 완전한 겸손은 계명을 실천함에서 비롯된다. 나무에 열매가 많으면, 그 열매들 스스로가 가지를 아래로 굽혀 내리게 하지만, 열매가 없는 가지는 위로 뻗어 곧게 자란다. 한편, 가지가 위로 자라는 동안에는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레몬나무)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 돌을 가져다가 가지에 매달아 아래로 굽히면, 그때서야 열매를 맺습니다. 마찬가지로 영혼도 겸손해질 때 열매를 맺으며, 열매를 더 많이 맺을수록 더욱 겸손해집니다. 그 때문에 성도들은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갈수록 자신을 더욱 죄인으로 여깁니다. 아브라함이 주님을 뵈었을 때, 자신을 “흙과 재”라고 불렀던 것처럼(창 18, 27); 이사야는 높이 들리신 하느님을 보고 “나는 저주받은 자요, 부정한 자로다”라고 외쳤습니다(이사야 6, 5).

15. 누구도 경험으로 이를 깨닫지 못한다면, 겸손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영혼 안에서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말만으로는 아무도 이를 알 수 없다. 한때 아바 조시마가 겸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는데(누구일수록 거룩할수록 더 겸손해진다는 것), 그 자리에 있던 어떤 소피스트가 그에게 물었다. “당신이 미덕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당신은 계명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보시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어떻게 그렇게 행하면서 자신을 죄인이라고 여기십니까?” 장로는 그에게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으나, 다만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스스로를 죄인이라 여깁니다.” 그리고 소피스트가 여전히 “어떻게요?”라고 묻자, 장로는 단 한 마디만 말했습니다. “어떻게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진정으로 스스로를 그렇게 여깁니다. “나를 당황하게 하지 마십시오.” 마찬가지로 아바 아가폰이 임종을 앞두고 있을 때, 형제들이 그에게 “아버지, 당신도 두려워하십니까?”라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계명을 지키려고 애썼지만, 나는 사람일 뿐이니, 내 행실이 하나님께 기쁘시게 여겨질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은 사람의 심판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16. 무엇이 겸손으로 이끄는지, 이에 대해 어떤 장로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겸손으로 가는 길은 분별 있게 행하는 육체적 수고와, 자신을 모든 사람보다 낮게 여기는 것, 그리고 끊임없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 육체적 수고는 영혼을 겸손으로 이끕니다. 왜냐하면 영혼은 육체를 동정하며, 육체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동참하기 때문입니다. 육체적 수고가 육체를 겸손하게 하듯이, 영혼도 그와 함께 겸손해집니다. 자신을 모든 사람보다 낮게 여기는 것은 겸손의 두드러진 특징이며, 이를 습관화하고 실천하는 것은 그 자체로 겸손을 뿌리내리게 하고, 우리가 첫 번째로 언급한 교만을 뿌리 뽑는다. 왜냐하면 자신을 모든 사람보다 낮게 여기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 앞에서 교만해하거나, 비난하거나, 비하할 수 있겠는가? –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 또한 두 번째 교만과 명백히 대립한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어떤 미덕도 행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간구하며 끊임없이 기도하는 사람은 분명히 겸손으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기도하는 사람은, 설령 무언가를 이룰 자격을 얻는다 하더라도, 자신이 왜 그것을 이뤘는지 알고 있기에 교만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자신의 힘으로 돌릴 수 없으며, 모든 성공을 하나님께 돌리고, 항상 그분께 감사드리며, 마치 그러한 도움을 잃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떨며 그분을 부른다. 그러므로 그는 겸손하게 기도하며 기도를 통해 더욱 겸손해집니다. 그리고 덕행에서 더욱 성공할수록, 그는 더욱 겸손해집니다. 또한 겸손해질수록 도움을 받고 겸손함에서 더욱 성장합니다.

17.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면서 그 안에 신성한 무언가를 심어 주셨으니, 그것은 마치 불꽃과 같은 생각으로, 그 자체에 빛과 온기를 지니고 있으며, 마음을 깨우치고 선과 악을 분별하게 해주는 생각이다. 이를 양심이라 부르며, 이것이 곧 자연법이다. 이 법, 즉 양심에 따라, 족장들과 모든 성도들은 기록된 율법이 주어지기 전부터 하나님께 기쁨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타락을 통해 양심을 가리고 짓밟았을 때, 비로소 기록된 율법이 필요해졌고, 성스러운 예언자들이 필요해졌으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 자체가 필요해졌습니다. 이는 양심을 드러내고 세우기 위함이었으며, 그 덮여 있던 불꽃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그분의 거룩한 계명을 지키며 그 불꽃을 다시 타오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18. 이제 우리에게 그 양심을 다시 묻어버릴지, 아니면 순종한다면 그 양심이 우리 안에서 빛나며 우리를 비추게 할지 선택할 권한이 있습니다. 우리 양심이 무언가를 하라고 말할 때 우리가 이를 무시하고, 양심이 다시 말할 때도 우리가 행하지 않고 계속해서 짓밟는다면, 그때 우리는 양심을 묻어버리는 것이며, 양심은 그 위에 얹힌 무거운 짐 때문에 더 이상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할 수 없게 됩니다. 대신 양심 뒤에서 빛나는 등불처럼, 우리에게 점점 더 어두운 것들만을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많은 진흙으로 인해 탁해진 물 속에서 아무도 자신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것처럼, 우리도 죄를 지음으로써 양심이 우리에게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어, 마치 우리 안에 양심이 아예 없는 것처럼 느껴지게 된다.

19. 양심은 ‘적’이라 불리는 이유는, 항상 우리의 악한 의지에 저항하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을 때 그것을 상기시켜 주고, 해서는 안 될 일을 할 때는 우리를 책망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양심을 ‘적’이라 부르시고, 우리에게 “네가 그와 함께 가는 동안, 네 적과 화해하라”(마태복음 5,25)고 명하셨으니, 즉 성 바실리오 대교황이 말씀하신 대로 이 세상에서 그러하리라.

20. 그러니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우리의 양심을 지키고, 어떤 일로 인해 양심이 우리를 책망하지 못하게 하며,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 할지라도 양심을 짓밟지 맙시다. 이 사소하고 본질적으로 하찮은 것을 소홀히 하는 것에서 우리는 큰 것까지 소홀히 하는 단계로 넘어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누군가 “이 하찮은 것을 먹는다고 해서 뭐가 대수인가? 이 물건이나 저 물건을 본다고 해서 뭐가 대수인가?”라고 말하기 시작하면, “ “이건 뭐 대수롭지 않은데, 저건 뭐 대수롭겠어”라는 생각으로 악한 습관에 빠지게 되고, 크고 중요한 것까지 소홀히 여기며 자신의 양심을 짓밟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악에 깊이 빠져들면, 결국 완전히 무감각해질 위험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21. 양심은 하나님에 대하여, 이웃에 대하여, 그리고 사물에 대하여 모두 지켜야 한다. – 하나님에 대하여는 그분의 계명을 소홀히 하지 않는 자가 양심을 지키는 것이며, 심지어 사람들이 보지 못하고, 아무도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는 일에서도 그는 하나님에 대한 양심을 은밀히 지킨다. – 이웃에 대한 양심을 지키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듯이 행동이나 말, 또는 태도나 시선으로 이웃을 모욕하거나 유혹하는 어떤 일도 결코 하지 않는 것을 요구한다. – 사물에 대한 양심을 지키는 것은 어떤 사물도 함부로 다루지 않고, 상하게 하지 않으며, 불필요한 경우 버리지 않는 데 있다. – 이 모든 면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경고하신(마태복음 5,26) 재앙에 빠지지 않도록, 양심을 깨끗하고 흠 없이 지켜야 한다.

22. 성 요한은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는다”(1요한 4,18) 말합니다. 그런데 성 다윗 예언자는 “주님을 경외하라, 주님의 모든 거룩한 자들아”(시편 33, 10)라고 말합니다. 이는 두 가지 두려움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는 초보적인 두려움이고, 다른 하나는 완전한 두려움입니다. 하나는 초보자들에게 해당하고, 다른 하나는 완전한 사랑을 이룬 성자들에게 해당합니다. 고통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아직 초보자에 불과하지만, 하느님을 향한 사랑으로, 곧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이에게는 그 사랑이 완전한 두려움으로 이끕니다. 그로 인해 그는 하느님과 함께 머무는 달콤함을 맛보고, 그 관계에서 떨어져 나가거나 그것을 잃을까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사랑에서 솟아나는 완전한 경외심이, 초기의 경외심을 완전히 몰아내 버린다.

23. 누구든지 먼저 원초적인 경외심을 얻지 않고서는 완전한 경외심에 도달할 수 없다. 지혜로운 시라크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시작이자 끝이다”( – 1, 15, 18). 시작이라 불리는 것은 최초의 두려움이며, 그 뒤를 이어 성도들의 완전한 두려움이 따른다. 최초의 두려움은 영혼의 상태에 속한다. 그것은 영혼을 모든 타락으로부터 지켜준다. “주님을 경외하는 자는 누구나 악을 피한다”(잠언 15, 27)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벌을 두려워하여 악을 피하는 자, 마치 주인을 두려워하는 종과 같은 사람은 점차 자발적으로 선을 행하게 되는데, 처음에는 용병처럼 자신의 선한 행위에 대한 어떤 보상을 기대하며 그렇게 한다. 만약 그가 이런 식으로 종처럼 두려움 때문에 끊임없이 악을 피하고, 용병처럼 보상을 기대하며 선을 행한다면;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로 선한 일에 머물며, 이에 상응하여 하나님과 하나 됨으로써, 마침내 선을 맛보게 되고, 참으로 선한 것에 대한 어떤 감각에 이르게 되며, 더 이상 그것과 헤어지기를 원치 않게 된다. 그때 그는 아들의 지위에 이르러, 선 그 자체를 위해 선을 사랑하게 되며, 비록 두려워하더라도 그것은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위대하고 완전한 두려움이다.

24. 이러한 점진적인 과정을 성 다윗 예언자도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묘사하고 있다.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며, 평화를 구하고 그것을 좇으라”(시 33,15). “피하라”고 말하듯이, “악”으로부터, 즉 모든 악을 피하고, 죄로 이끄는 모든 일을 멀리하라. 그러나 이렇게 말한 뒤,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덧붙였습니다. “선한 일을 행하라.” 왜냐하면 어떤 사람은 악을 행하지는 않지만 선한 일도 행하지 않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남을 해치지는 않지만 자비도 베풀지 않거나, 미워하지는 않지만 사랑하지도 않는 경우입니다. 이 말을 한 뒤, 그는 논리적으로 이어가며 “평화를 추구하고, 그것을 좇아라”라고 말합니다. 단순히 “추구하라”고만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루기 위해 힘써 노력하라는 뜻입니다. – 여러분의 마음으로 이 말씀을 주의 깊게 살피고, 성자가 지적한 미묘한 점을 유심히 살펴보십시오. – 누군가 악에서 벗어나게 되고, 그 후 하나님의 도움으로 부지런히 선을 행하려 할 때, 즉시 원수의 공격이 그에게 닥칠 것이며, – 그는 분투하고, 수고하며, 괴로워하리니, 때로는 노예처럼 다시 악으로 돌아갈까 두려워하고, 때로는 용병처럼 선을 행한 대가를 기대하며. 그러나 원수의 공격을 견디며, 그와 싸우고 저항하는 동안, 이러한 동기로 인해 그는 선을 행하고는 있지만, 큰 슬픔과 엄청난 수고를 겪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도움을 받고 선을 행하는 데 어느 정도 숙달되면, 그때 비로소 그는 평안을 보게 되고, 평화를 느끼게 되며, 비통한 싸움이 무엇인지, 그리고 평화의 기쁨과 즐거움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 그리고 그 후로는 평화를 찾기 시작하며, 그것을 달성하고 온전히 얻어 자기 안에 정착시키기 위해 힘써 추구한다. 이 경지에 이른 자는 마침내 평화를 이루는 자들의 복을 맛보게 된다(마태복음 5:9). – 이쯤 되면, 그 선 자체를 누리는 것 외에 다른 어떤 이유로 이 영혼이 선을 행하도록 부추길 수 있는 자가 누가 있겠는가? 그때 비로소 그는 완전한 경외심을 깨닫게 된다.

25. 교부들은 사람이 죽음과 고통을 기억할 때, 즉 매일 저녁 그날을 어떻게 보냈는지, 매일 아침 밤을 어떻게 보냈는지 스스로를 돌아볼 때, 건방지지 않을 때,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과 친밀한 교제를 나눌 때, 비로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어떤 형제가 한 장로에게 “아버지, 제가 하나님을 경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더니, 장로가 그에게 대답하기를 “가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과 함께 살아라. 그러면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 자체로 너에게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가르쳐 줄 것이다”라고 했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 우리는 말씀하신 것과 정반대의 행동을 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스스로 쫓아내고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기억도, 고통에 대한 기억도 없으며, 우리 자신을 돌아보지도 않고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 스스로 점검하지도 않습니다. 대신 무책임하게 살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건방지게 행동합니다. 그리고 이 마지막 점이 가장 나쁘다. 이는 완전한 파멸이다. 왜냐하면 건방짐만큼 영혼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쫓아내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한때 아부 아가폰에게 이에 대해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건방짐은 강하고 타는 듯한 바람과 같아서, 그 바람이 불면 모두가 도망치고, 나무에 달린 모든 열매를 망가뜨립니다.” –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모든 것을 파괴하는 정욕, 즉 건방짐으로부터 구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26. 건방짐은 다양한 형태를 띤다. 말과 행동, 그리고 눈빛으로도 건방질 수 있다. 건방짐 때문에 어떤 이는 헛소리를 하고, 세속적인 이야기를 하며, 우스꽝스러운 짓을 하고, 다른 이들을 부적절한 웃음으로 부추기기도 한다. 건방짐은 또한 누군가가 필요 없이 다른 사람을 건드리거나, 웃고 있는 사람에게 손을 뻗거나, 누군가를 밀치거나, 그 사람의 손에서 무언가를 빼앗거나, 뻔뻔스럽게 누군가를 쳐다보는 것 등입니다. 이 모든 것이 건방짐이며, 이 모든 것은 마음속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사람은 조금씩 완전한 무관심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계명을 주실 때, “이스라엘 자손들아, 경건하게 행하라”(레위기 15:31)고 말씀하셨다. 경건함과 겸손한 수줍음(소심함)이 없으면 사람은 하나님 자신도 공경하지 않고, 그 어떤 계명도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건방짐보다 더 해로운 것은 없으니, 바로 그것이 모든 정욕의 어머니인 까닭이다. 건방짐은 경외심을 몰아내고, 영혼에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쫓아내며, 부주의를 낳기 때문이다.

27. 아바 바르소노피아의 제자인 아바 요한은 찾아온 형제들을 배웅할 때, 때로는 이 말을, 때로는 저 말을 반복하곤 했는데, 다음과 같은 네 가지 격언이었다. “이웃에 대한 양심을 지키는 데서 겸손한 지혜가 생겨나며; – 결코 자신의 뜻을 형제의 뜻보다 우선시해서는 안 된다; – 모든 세속적인 것을 피하면 구원을 얻을 것이다; – ‘서로 짐을 지어 주어 그리스도의 율법을 성취하라’(갈 6,2)“. – 그는 매번 이러한 격언을 말하기 전에 “형제여, 내가 한 번 말했듯이, – 하나님께서 사랑을 지켜 주시기를, – 스승님들이 말씀하셨듯이”라고 전제하곤 했으며, 그 후에 자신의 격언 중 하나를 덧붙이곤 했다.

28.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비록 그것이 지극히 필요하고 세심한 주의를 요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여러분이 다툼이나 당혹감 속에서 그 일을 처리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 크든 작든,은 목표의 8분의 1에 해당하며, 설령 그로 인해 일을 완수하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태도를 지키는 것이 그것은 7/8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수행하며 그것을 완벽하고 온전히 완수하고자 한다면, 제가 말했듯이 목표의 8분의 1에 해당하는 그 일 자체를 완수하는 것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신의 정신적 안정을 훼손되지 않게 보존하도록 노력하십시오. 이것이 7/8을 차지합니다. 만약 여러분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상대방과 다투며 자신이나 타인에게 해를 입혀야 할 필요가 생긴다면, 1/8을 지키기 위해 7/8을 잃을 필요는 없습니다.

29. 지혜로운 솔로몬은 잠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지도가 없는 자는 잎사귀처럼 쓰러지나, 많은 상담 속에 구원이 있느니라”(잠언 11,14). 보십시오, 성경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는지요? 성경은 우리에게 스스로를 의지하지 말고, 자신이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하지 말며,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다고 믿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도움이 필요하며, 하나님 안에서 우리를 인도해 줄 이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길에서 지도자를 두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불행하고 파멸에 가까운 사람은 없습니다. “지도가 없으면 나뭇잎처럼 떨어진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나뭇잎은 처음에는 항상 푸르고, 꽃이 피며, 아름답지만, 나중에는 서서히 시들고, 떨어지며, 마침내 발에 짓밟힙니다. 마찬가지로, 누구에게도 인도받지 못하는 사람은 처음에는 항상 금식, 기도, 침묵, 순종 및 다른 미덕들에 대한 열의를 가지고 있지만, 나중에는 그 열의가 조금씩 식어가며, 그를 지도하고 지지하며 그 열의를 다시 불태워 줄 사람이 없기에, 그는 눈치채지 못한 채 시들어 떨어지고, 마침내 원수들의 지배를 받는 노예가 되어, 원수들은 그를 마음대로 다루게 된다.

30.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드러내고 모든 일을 상의하며 행하는 자들에 대해, 지혜로우신 분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구원은 많은 상의 속에 있다.” “많은 이들의 조언 속에”라고 말씀하신 것은, 모든 사람과 상의하라는 뜻이 아니라, 모든 일에 대해 상의해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우리가 신뢰하는 사람과 상의해야 하며, 한 가지는 말하고 다른 가지는 숨기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드러내고 모든 일에 대해 상의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많은 조언 속에” 있는 진정한 구원이다.

31. 우리가 자신의 생각과 의도를 드러내지 않고 경험 많은 이들의 조언을 구하지 않을 때, 우리는 자신의 뜻에 매달리고 자신의 변명(즉,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것)을 따르게 된다. 그리고 그때, 겉보기에는 선한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스스로에게 올가미를 치고,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파멸에 이르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스스로를 믿고 자신의 뜻을 고집한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겠으며, 그 뜻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겠는가? – 바로 그 때문에 아바 피멘은 “우리의 뜻은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놋벽과 같다”고 말했던 것이다.

32. 자신의 이성을 믿고 자신의 뜻에 맡기는 자에게는 원수가 마음대로 함정을 놓는다. 그러나 조언을 따라 모든 일을 행하는 자에게는 원수가 접근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원수는 그에 관한 질문과 훈계 를 미워하며, 그러한 말의 목소리와 소리 자체를 미워한다. 그 이유를 말하자면? – 유익한 일에 대해 묻고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그의 악의가 즉시 드러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을 무엇보다도 두려워하는데, 그때는 더 이상 마음대로 교활한 짓을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 경험 많은 사람에게 조언을 구해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마라”거나 “지금은 이 일을 할 때가 아니다”, 때로는 “지금이 바로 때다”라는 말을 듣고, 그때 악마는 그를 해치거나 타락시킬 방법을 찾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항상 조언을 구하며 사방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구원은 많은 조언에 있다”는 말씀이 그에게 이루어집니다.

33. 원수는 자신의 이성에 의지하는 자들을 좋아한다. 그들은 원수를 돕고, 스스로 함정을 파기 때문이다. 나는 수도사가 자신의 마음을 믿을 때 외에는 다른 타락의 원인을 알지 못한다. 어떤 이들은 “이것 때문이거나 저것 때문에 사람이 넘어진다”고 말하지만, 나는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행동할 때를 제외하고는 다른 타락의 원인을 알지 못한다. 넘어진 사람을 보게 된다면, 그가 자기 마음대로 행동했음을 알아두라. 이보다 더 위험한 것도, 이보다 더 파멸적인 것도 없다.

34. 나는 항상 너희에게 말하노니, 사소한 방종에서 시작하여 우리는 결국 중대한 죄에 이르게 된다. 이웃을 정죄하는 것이 죄보다 더 무거운 일이겠는가? 하나님께서 그토록 미워하시고, 그토록 혐오하시는 것이 또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사람은 겉보기에는 하찮아 보이는 것, 즉 이웃의 사소한 결점을 눈감아 주는 것에서 비롯되어 이처럼 큰 악에 빠지게 된다. 왜냐하면 이를 허용하게 되면, 마음은 자신의 죄는 외면하고 이웃의 죄만 주목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로부터(이러한 습관으로부터) 험담, 비난, 비방이 생겨나고, 결국에는 파멸적인 정죄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이웃을 비난하고, 비방하며, 정죄하는 것만큼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고, 사람을(은총으로부터) 벗겨내며, 파멸로 이끄는 것은 없습니다.

35. 험담하는 것과 정죄하거나 깎아내리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험담한다는 것은 누군가에 대해 “누구는 거짓말을 했다, 또는 간음했다, 또는 화를 냈다, 혹은 다른 나쁜 일을 저질렀다”고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사람은 형제를 비방한 것이니, 즉 그의 죄에 대해 격정적으로 말한 것이다. 반면 정죄한다는 것은 “누구는 거짓말쟁이, 음행자, 성미가 급한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사람은 그의 영혼의 본성 자체를 정죄하고, 그가 어떤 사람이라고 말함으로써 그의 전 생애에 대한 판결을 내렸으며, 그런 사람으로서 그를 정죄한 것이다. 이는 중대한 죄악이다.

36. 바리새인은 기도하며 자신의 미덕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렸을 때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 진실을 말했을 뿐이며, 그 때문에 정죄받은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협력해 주셨기 때문에 그분께 감사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 일로 인해 정죄받은 것이 아니며,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은 아닙니다”라고 말한 것 때문도 아닙니다. 그러나 세리에게로 눈을 돌려 “혹시 이 세리처럼은 아니겠지”라고 말했을 때, 비로소 정죄를 받게 되었습니다(다른 사람을 정죄한 대가로). 왜냐하면 그는 그 사람의 인격 자체, 그의 마음가짐, 그의 온 삶을 정죄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리가 그보다 더 의롭다 함을 받고 돌아간 것이다(누가복음 18:11).

37. 의롭다 하든지 정죄하든지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일입니다. 그분은 각자의 마음가짐과 힘, 열망과 재능, 체격과 능력을 아시기 때문에, 이에 따라 각 사람을 의롭게 정죄하시거나 의롭다 하십니다. 모든 이를 창조하시고 전지하신 유일하신 분 외에 누가 이 모든 것을 정확히 알 수 있겠습니까?

38. 때때로 우리는 이웃을 정죄할 뿐만 아니라 비하하기도 한다. 정죄하는 것과 비하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비하란 사람이 단순히 정죄하는 것을 넘어 타인을 경멸하고, 마치 어떤 가증스러운 것인 양 그를 혐오하며 외면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정죄보다 더 나쁘고 훨씬 더 해롭다.

39. 구원을 얻고자 하는 자들은 이웃의 결점을 신경 쓰지 않고, 항상 자신의 결점만을 바라보며 성장한다. 형제가 죄를 지은 것을 보고 한숨을 쉬며 “화 있을진저! 그가 오늘 죄를 지었으니, 나도 내일 죄를 지을 것이다”라고 말한 사람이 바로 그러했다. 이것이야말로 지혜로운 마음가짐이 아니겠는가? 그가 어떻게 즉시 형제의 정죄를 피할 방법을 찾아냈는가? “나도 내일 그렇게 될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써, 그는 자신도 머지않아 죄를 지을 수 있다는 두려움과 경각심을 일깨웠고, 그렇게 하여 이웃의 정죄를 피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사람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겠지만, 나는 마땅히 회개하지 못할 것이며, 회개에 이르지 못할 것이고, 회개할 힘조차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자신을 그의 발 아래 엎드렸다. 신성한 영혼의 깨달음을 보느냐?

40. 때로는 정죄라는 독이 우리 영혼을 가득 채워 다른 이들에게도 쏟아져 나가려 할 때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이에게 평화로운 다른 형제를 만나면, 서둘러 그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고 전하며, 그의 마음에 정죄의 죄를 심어줌으로써 그에게 해를 끼친다. 우리는 “친구를 혼탁한 타락으로 유혹하는 자에게 화가 있을지어다”(아바카 2, 15)라는 말씀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도, 악마의 일을 저지르고도 이를 개의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남을 혼란스럽게 하고 해를 끼치는 일이 악마의 일이 아니라면 무엇이겠습니까?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과 이웃의 파멸을 위해 악마들의 조력자가 되어 버립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 안에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많은 죄를 덮어 주기” 때문입니다(베드로전서 4:8).

41. 성도들은 죄를 짓는 자를 정죄하지도 않고 그에게서 등을 돌리지도 않으며, 오히려 그를 동정하고, 그를 위해 슬퍼하며, 훈계하고, 위로하고, 병든 지체처럼 그를 치유하며, 그를 구원하기 위해 모든 것을 다합니다. – 형제들이 당황한 채 와서 “아버지, 저 형제의 방에 여자가 있으니 가서 확인해 주십시오”라고 말했을 때, 성 암몬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어떤 자비를 보였습니까? 그 형제가 여자를 통 아래에 숨겼음을 눈치채고, 그는 가서 그 통 위에 앉은 뒤, 그들에게 방 전체를 샅샅이 뒤지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아무것도 찾지 못하자, 그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시기를”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그는 그들을 부끄럽게 만들었고, 이웃에 대한 비난을 쉽게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줌으로써 그들에게 큰 유익을 주었습니다. 또한 그 형제를 바로잡았는데, 단지 하나님처럼 그를 감싸준 것뿐만 아니라, 적절한 시기가 되었을 때 그를 깨우쳐 주기도 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을 밖으로 내보낸 뒤, 그 형제의 손을 잡고 말했습니다. “네 영혼을 생각하라, 형제여!” 그러자 그 형제는 즉시 부끄러움을 느끼고 회개하여 죄를 끊었습니다. 이렇게 장로의 인간애와 연민이 그의 영혼에 유익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42. 원을 상상해 보라. 그 가운데를 ‘중심’이라 하고, 중심에서 뻗어 나가는 반지름을 ‘광선’이라 하자. 이 반지름들은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서로 더 벌어지고 멀어지지만, 반대로 중심에 가까워질수록 서로 더 가까워진다. 이제 이 원이 세상이고, 원의 가장 중심이 하느님이며, 중심에서 원주 쪽으로, 혹은 원주에서 중심 쪽으로 뻗어 나가는 직선(반지름)들이 바로 사람들의 삶의 길이라고 가정해 보십시오. 여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인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자 하여 원의 안쪽, 즉 중심부로 들어갈수록, 들어가는 만큼 그들은 하나님께도, 서로에게도 더 가까워집니다. 게다가 하나님께 가까워지는 만큼 서로에게도 가까워지고, 서로에게 가까워지는 만큼 하나님께도 가까워집니다. – 멀어짐에 대해서도 이와 같이 이해하십시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외적인 것에 마음을 돌릴 때, 그들이 중심에서 멀어지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만큼, 서로에게서도 그만큼 멀어지는 것은 명백합니다. 그리고 서로에게서 멀어지는 만큼, 하나님으로부터도 그만큼 멀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속성입니다. 우리가 밖에서 머물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만큼, 각자는 이웃으로부터도 그만큼 멀어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분을 향한 사랑으로 하나님께 가까워지는 만큼, 사랑으로 이웃과도 하나가 되며, 이웃과 하나가 되는 만큼, 하나님과도 하나가 됩니다.

43. 왜 때로는 누군가가 모욕적인 말을 듣고도 신경 쓰지 않고, 마치 전혀 듣지 못한 것처럼 당황하지 않고 넘기기도 하고, 때로는 듣자마자 즉시 당황하기도 하는가?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당황하지 않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어떤 사람은 기도나 선한 수행 후에 마음이 평온한 상태에 있어, 형제를 너그럽게 대하고 그의 말에 당황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은 누군가를 매우 좋아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가하는 모든 것을 괴로워하지 않고 받아들일 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을 모욕하려는 사람을 경멸하여, 그 모욕을 전혀 신경 쓰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 반면에 이와 정반대의 상황에서는 당황하게 되는데, 이는 마음이 평온하지 않거나, 모욕을 준 자에 대해 적대감을 품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다른 이유들 때문이기도 하다. – 그러나 모든 당황의 주된 원인은 우리가 스스로를 책망하지 않기 때문이다.

44. 아바 피멘이 말했다. “자신을 책망하는 사람은 어디로 가든, 어떤 해를 입든, 치욕을 당하든, 혹은 다른 어떤 슬픔을 겪든, 그는 이미 미리 자신이 모든 불쾌한 일을 당할 만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결코 당황하지 않는다. 이보다 더 평온한 상태가 어디 있겠는가?”...

45. 누군가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만약 형제가 나를 모욕했는데, 내가 스스로를 되돌아보아 그에게 그럴 만한 어떤 이유도 주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나를 책망할 수 있겠는가?” – 진실로, 누구든지 하나님의 두려움으로 자신을 성찰한다면, 행동이든, 말이든, 태도든 온갖 방식으로 그에게 빌미를 제공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만약 현재로서는 어떤 빌미도 제공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난다 해도, 분명 언젠가 다른 때에, 이 일에서든 다른 일에서든, 혹은 다른 형제를 모욕하여 그 대가를 치러야 했을 수도 있고, – 또는 종종 다른 어떤 죄로 인해 그러했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건대, 누구든지 하나님의 경외심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양심을 엄격히 살핀다면, 반드시 자신이 유죄임을 깨닫고 스스로를 책망하게 될 것이다.

46. 때로는 어떤 이가 고요하고 외로운 곳에 앉아 평온을 누리다가, 형제가 찾아와 대화 중에 불쾌한 말을 한 마디 하자마자 당황하게 되고, 나중에 이렇게 말하곤 한다. “그가 내게 오지 않고 나를 당황하게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죄를 짓지 않았을 텐데.” –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논리다! 그에게 말을 건 사람이 과연 그에게 정욕을 심어준 것일까? 그는 단지 이미 그 안에 있던 정욕을 밖으로 드러나게 했을 뿐이다. – 이제 그가 해야 할 일은 형제를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정욕을 뉘우치며 스스로를 책망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겉은 좋지만 속은 곰팡이가 핀 썩은 빵과 같아서, 누군가 그것을 쪼개면 썩은 것이 드러나고, 혹은 겉은 깨끗하지만 속은 악취와 악취로 가득 찬 그릇과 같아서, 누군가 그것을 열면 즉시 그 악취가 느껴지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이 사람도 세상에서 평온해 보였지만, 자신의 내면에 욕정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지내다가, 형제가 그에게 한 마디 말을 건네자 그 안에 숨겨져 있던 썩은 부분이 드러났다. 그러므로 그가 용서를 받고자 한다면, 스스로를 책망하며 회개해야 한다. 오직 이 길로만 그는 순결에 이르러 성공할 것이다. 또한 그에게 그런 유익을 안겨준 그 형제에게 감사를 표해야 한다.

47. 영혼은 죄를 지을수록 그 죄로 인해 지쳐 간다. 죄는 죄에 빠진 자를 나태하게 하고 지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그에게 짐이 된다. 그러나 사람이 선한 일에 성공하면, 성공하는 만큼 예전에는 무거웠던 일이 점점 더 가벼워진다.

48. 어떤 경우든 우리는 고통을 바라보아야 한다. 누군가 우리에게 선을 베풀든, 누군가에게서 악을 당하든, 우리는 모든 일을 신의 섭리로 바라보아야 하며,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항상 스스로를 책망하며, 우리에게 좋은 일이 생기면 이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로운 섭리 때문이며, 나쁜 일이 생기면 이는 우리의 죄 때문이라고 말해야 한다.

49. 우리는 매일 죄를 짓고 자신의 정욕을 채우는 비참한 자들이다! 우리는 선조들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바른 길, 즉 자기 책망의 길을 버리고, 이웃을 책망하는 굽은 길을 걷고 있다. – 그리고 우리 각자는 어떤 일에서든 형제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그에게 모든 짐을 지우려 애쓰며, 각자 게으름을 피우고 단 하나의 계명도 지키지 않으면서, 이웃에게는 모든 계명을 지키라고 요구한다.

50. “이 길에서 당신이 발견한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신부님?”이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모든 일에서 스스로를 책망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던 그 노인은 어디에 있는가? 아바 피멘도 신음하며 이렇게 말했었다. “모든 미덕이 이 집에 들어왔으나, 단 하나의 미덕 없이는 사람이 버티기 어렵다.” “그 미덕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사람이 스스로를 책망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성 안토니우스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스스로 짊어지고,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유혹을 기다리는 것은 위대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어디를 보아도, 우리 선조들이 모든 것, 심지어 가장 사소한 것까지 하느님께 맡기면서도, 항상 ‘모든 일에서 스스로를 책망하라’는 이 규칙을 지켰기 때문에 평안을 얻었음을 알 수 있다.

51. 성부들은 수도자들에게는 화를 내는 것도, 누군가를 모욕하는 것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으며, 또한 “성미를 이겨낸 자는 악마를 이긴 것이요, 이 정욕에 굴복하는 자는 수도 생활과는 전혀 거리가 먼 자이다”라고 하셨다. – 우리가 짜증과 분노에 빠질 뿐만 아니라 원한을 품고 지낼 때, 우리 자신에 대해 무엇을 말해야 하겠는가? – (우리 영혼의) 이처럼 비참하고 비인간적인 상태를 애도하지 않고서는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 그러나 형제들아,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도움으로 이 파멸적인 정욕의 쓴맛에서 벗어나도록 노력합시다.

52. 형제들 사이에서는 종종 혼란이 일어나고 불만이 생기기도 하지만, 그들은 대개 서둘러 이러한 불화를 해결하고 화해하곤 한다. 그러나 어떤 이는 절을 하고 화해한 후에도 계속해서 형제를 원망하며 그에 대한 적대적인 생각을 품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원한을 품는 마음이며, 이에 깊이 빠져 파멸에 이르지 않도록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화가 난 직후 화해한 사람은 분노를 치유했지만, 원한을 품는 마음과는 아직 싸우지 않았기에 형제를 향해 계속 원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원한 품기는 분노와 다르고, 짜증과도 다르며, 당황함과도 다르기 때문이다. 이를 더 잘 이해하도록 예를 들어 보겠다. 불을 피우는 사람은 먼저 작은 숯 한 조각을 집는다. 이것이 바로 모욕을 준 형제의 말이다. 만약 네가 그 말을 참아낸다면, 숯을 꺼버린 셈이다. 그러나 “왜 그가 그런 말을 했을까? 그렇다면 나도 그에게 이러저러하게 말해 주겠다. 그가 나를 모욕할 의도가 없었다면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텐데, 나도 반드시 그를 모욕해 주겠다”라고 생각한다면, 바로 그때 당신은 불을 피우는 사람처럼 장작이나 다른 것을 더 얹어 연기를 일으킨 것이며, 그 연기가 바로 혼란입니다. 혼란이란 바로 마음을 뒤흔들고 자극하는 생각의 움직임과 동요를 말한다. 그리고 자극이란 슬픔을 안겨준 이에게 대한 복수심에 찬 반항으로, 이는 오만함으로 변모하는데, 복자 아바 마르코가 말했듯이 “생각으로 키우는 악의는 마음을 자극하지만, 기도는 그것을 죽인다.” 만약 네가 형제의 사소한 말을 참아냈다면, 혼란이 일어나기 전에 그 작은 숯불을 꺼버렸을 것이다. – 그러나 원한다면, 그것이 아직 새것일 때 침묵과 기도, 그리고 진심 어린 한 번의 절로 그것을 쉽게 꺼버릴 수도 있다. – 만약 계속 연기를 피우듯이, 즉 “왜 그는… 나도 그렇게 해야지”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자극하고 흥분시킨다면, 이로 인해 네 마음이 불타오르고 짜증의 불길이 일어날 것이다. – 원한다면, 분노가 일어나기 전에 그것도 끄실 수 있다. 그러나 계속해서 스스로를 동요시키고 자극한다면, 불에 장작을 더하는 사람과 같아질 것이며, 그로 인해 불꽃이 일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분노이다. 그리고 분노가 굳어지면 원한으로 변하는데, 사람은 자신의 피(자신을 다스리기 위한 땀과 수고)를 흘리지 않고서는 그 원한에서 벗어날 수 없다.

53. 너희는 초기의 당혹감이 무엇인지, 짜증이 무엇인지, 분노가 무엇인지, 그리고 원한을 품는 것이 무엇인지 들어보았으리라. 한 마디 말에서 어떻게 이런 악에 이르게 되는지 보십니까? 만일 네가 처음부터 스스로를 책망하고, 형제의 말을 인내로 견디며, 그에게 복수하려 하지 않고, 한 마디 말에 두 마디나 다섯 마디로 맞대응하거나 악으로 악을 갚지 않았다면, 이 모든 악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정욕이 아직 싹이 틔운 단계일 때, 곧 그것이 너희 안에 뿌리를 내리고 굳어지며 너희를 짓누르기 전에 항상 잘라내라. 그때가 되면 너희는 그것들로 인해 많은 고통을 겪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작은 풀을 뽑는 것과 큰 나무를 뿌리째 뽑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54. 악으로 악을 갚는 것은 행동뿐만 아니라 말과 표정으로도 가능하다. 어떤 이는 실제로는 악으로 악을 갚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알고 보면 말이나 표정, 몸짓, 눈빛으로 갚고 있는 경우가 있다. 이 모든 것으로도 형제를 모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 또한 악으로 악을 갚는 것이다. 또 다른 사람은 행동이나 말, 표정, 몸짓으로 악에 대한 복수를 하려 하지 않지만, 마음속으로는 형제를 향해 불만을 품고 그를 원망한다. 또 다른 사람은 비록 형제를 향해 슬퍼하지는 않지만, 누군가가 그 형제를 어떤 일로 모욕했다거나, 꾸짖었다거나, 모욕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한다면, 그 역시 마음속으로 악으로 악을 갚는 것이 된다. 또 다른 사람은 마음속에 악의를 품지 않고, 자신을 모욕한 자가 모욕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기뻐하지 않으며, 심지어 그에게 모욕이 가해지면 슬퍼하기까지 하지만, 그 사람의 번영을 보고도 기뻐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그 사람이 칭송받고 호의를 받는 것을 보면 슬퍼하는 것이다. 이는 비록 가장 경미한 형태이긴 하지만, 역시 원한을 품는 태도이다.

55. 또 다른 사람은, 누군가 자신을 모욕했다가 그 모욕한 자와 서로 절을 하고 화해하면, 그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며 마음속에 그에 대한 악한 생각을 전혀 품지 않는다. 그러나 얼마 후 그 사람이 다시 자신에게 슬픈 말을 하면, 그는 이전 일을 떠올리기 시작하며 두 번째 일뿐만 아니라 이전 일까지 때문에 당황하게 된다. – 이는 상처를 입은 사람이 그 위에 반창고를 붙인 것과 같다. 비록 당장은 상처가 아물고 흉터가 생겼지만, 그 부위는 여전히 아프다. 만약 누군가 그에게 돌을 던진다면, 그 부위는 온몸 중에서 가장 심하게 손상되어 즉시 피를 흘리기 시작한다. 그 사람도 똑같은 일을 겪는다. 그에게 상처가 있었고, 그는 반창고를 붙였다. 즉, 절을 하고 화해로써 상처, 즉 분노를 치유한 것이다. 또한 원한을 품지 않으려 노력하며,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하나도 품지 않으려 애쓰기 시작했다. 이는 상처가 아물어 가고 있음을 의미하지만, 아직 완전히 치유된 것은 아니다. 여전히 원한을 품는 마음이 남아 있어, 사람이 아무리 가벼운 타박상이라도 입으면 그 상처가 다시 쉽게 재발할 수 있다.

56. 노력해야 한다. 즉, 아픈 부위가 완전히 아물고, 어떤 흉터도 남지 않아 그 자리에 상처가 있었다는 것을 전혀 알아볼 수 없게 하려면, 내면의 고름까지 완전히 깨끗이 씻어내야 한다. 어떻게 이를 이룰 수 있을까? – 모욕한 사람을 위해 온 마음을 다해 기도하며 “하나님, 그의 기도를 위하여 제 형제와 저를 도와주소서!”라고 말함으로써이다. – 이런 방식으로 형제를 위해 기도함으로써, 그는 연민과 사랑을 나타내며, 또한 그의 기도를 통해 자신에게 도움을 청함으로써 자신을 낮추게 된다. 연민과 사랑, 그리고 겸손이 있는 곳에, 어떻게 성급함이나 원한, 혹은 그 밖의 어떤 정욕이 자리 잡을 수 있겠는가? – 아바 조시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마귀가 모든 악마들과 함께 자신의 악의 모든 교활함을 동원한다 해도, 그리스도의 계명에 따른 겸손 앞에서 그 모든 간계는 무효화되고 산산조각 날 것입니다.” 또 다른 장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적을 위해 기도하는 자는 원한을 품지 않을 것입니다.”

57. 행동으로 장로들의 조언을 실천하십시오. 그러면 그들이 말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실천하지 않는다면, 말만으로는 결코 수행의 길을 배울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기술을 배우고자 할 때, 말만 듣고서 그 기술을 터득할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먼저 그는 작업하다가 망치고, 또 작업하다가 자신의 작품을 파괴합니다. 그렇게 조금씩, 수고와 인내를 통해, 그의 수고와 의지를 지켜보시는 하느님의 도움으로 그 기술을 익히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실천에 나서지 않고 말만 듣고 ‘모든 예술의 예술’을 배우고자 합니다. 이것이 가능하겠습니까?! – 그러니 아직 시간이 있을 때,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정성을 다해 수고합시다.

58. 거짓말에 속지 않도록 온갖 방법으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거짓말하는 자는 하나님과 연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거짓말은 하나님과 거리가 멀다. 성경에는 “거짓말은 마귀에게서 난 것”이며, 마귀는 “거짓말이며 거짓말의 아버지”라고 기록되어 있다(요한복음 8:44). 보라, 마귀는 거짓의 아버지로 불리며, 진리는 곧 하나님이시다. 그분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요한복음 14:6) 하셨기 때문이다. 보십시오, 우리가 누구로부터 멀어지고, 거짓을 통해 누구와 연합하고 있는지! – 그러므로 진정으로 구원을 받고자 한다면, 우리는 온 힘을 다하고 온 마음을 다해 진리를 사랑하며, 어떤 거짓도 우리를 진리와 생명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지 못하도록 스스로를 지켜야 합니다.

59. 거짓말에는 세 가지 다른 종류가 있다. 어떤 이는 생각으로 거짓말을 하고, 다른 이는 말로 거짓말을 하며, 또 다른 이는 자신의 삶 자체로 거짓말을 한다. – 생각으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추측, 즉 이웃에 대한 근거 없는 의심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자신의 형제와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 ”라고 추측하며, “저 사람이 나에 대해 무언가 말하고 있는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 – 그런 사람은 생각으로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그는 진실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의견만을 따를 뿐이며, 이로 인해 비방, 험담, 원한, 비난이 생겨난다. – 한마디로, 예를 들어 기도하러 일어나는 것을 게을리하고도 “미안해, 일어나기 귀찮았어”라고 말하지 않고, “열이 났어, 몸이 안 좋았어”라고 말하며, 단 한 번의 절도 하지 않고 겸손해지지 않기 위해 수십 가지의 거짓말을 지어내는 사람이 바로 거짓말하는 자이다. 또한 무언가를 원할 때, “내가 이것을 원한다”고 솔직히 말하지 않고, 병이나 궁핍을 핑계로 삼으며 말을 뒤틀어, 욕망이 충족될 때까지 거짓말을 이어간다. 결국 그런 사람은 진실을 말할 때조차 더 이상 믿음을 받지 못하게 된다. – 음탕한 자이면서 절제하는 척하거나, 탐욕스러운 자이면서 자비로운 척하거나, 오만한 자이면서 겸손한 척하는 자는 자신의 삶으로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60. 우리 자신을 돌보자. 우리가 이 시간을 헛되이 낭비한다면, 누가 우리에게 이 시간을 주겠는가? 진실로 이 날들을 찾으려 해도 찾지 못할 때가 올 것이다. 아바 아르세니우스는 항상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아르세니우스여, 너는 무엇을 위해 이 세상을 떠났느냐?”

61. 우리가 조금만 수련하고자 한다면, 그리 많이 슬퍼하지도 않고 어려움도 겪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누군가 스스로를 수련으로 몰아세운다면, 계속 수련해 나가며 조금씩 진전을 이루고 나중에는 평온하게 덕행을 실천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가 스스로를 몰아세우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도움을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도 스스로를 다그치자. 비록 우리가 아직 완전함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수련을 계속한다면 그 수련을 통해 도움을 받게 될 것이며, 그 도움으로 온갖 미덕을 얻게 될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어떤 교부께서 “피를 바치고 영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으니, 즉 수련에 힘쓰면 미덕에 대한 숙달을 얻게 된다는 뜻이다.

62. 목수 기술을 배우고자 하는 자가 다른 장인 일을 하지 않는 것처럼, 영적인 일을 배우고자 하는 자들도 다른 어떤 일에도 신경 쓰지 말고, 밤낮으로 그것을 어떻게 습득할지 배우는 데 전념해야 한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적당한 정도가 있어야 한다. 어떤 장로께서 말씀하셨다. “왕의 길을 걸으며 그 거리를 세어 보라.” 덕은 과잉과 부족 사이의 중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다. “오른편이나 왼편으로 치우치지 말고 왕의 길을 걸으라”(신명기 5:32; 17:11).

63. 악은 그 자체로 아무것도 아니니, 그것은 어떤 실체도 아니며 어떤 구성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혼이 덕에서 벗어나면 정욕에 사로잡혀 죄를 낳고, 그 후 그 안에서 자연스러운 안식을 찾지 못해 괴로워한다. 나무가 본성상 그 안에 벌레를 가지고 있겠는가? 그러나 나무 속에 작은 썩음이 생기고, 이 썩음에서 벌레가 싹트며, 바로 이 벌레가 나무를 갉아먹는다. 마찬가지로 영혼도 스스로 악을 만들어 내고, 다시 그 악으로 인해 스스로 고통받는다. 그레고리우스 신학자가 말했듯이, “불은 물질의 산물이며, 물질을 갉아먹는 것처럼 악은 악을 갉아먹는다.”

64. 육체의 질병에서도 똑같은 현상을 볼 수 있다. 누군가 무질서하게 살며 건강을 돌보지 않으면, 몸속에 무언가가 과다하거나 부족해지며, 이로 인해 사람은 병에 걸리게 된다. 그러나 그 이전에는 질병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고, 결코 어떤 것도 아니었으며, 또한 몸이 치유된 후에는 질병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악이란, 본래의 건강, 즉 미덕을 상실한 영혼의 병이다.

65. 사람에게는 세 가지 상태가 있다. 그는 정욕에 따라 행동하거나, 정욕에 저항하거나, 정욕을 근절한다. 정욕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은 그것을 실행에 옮기고, 정욕을 충족시키는 사람이다. 정욕에 저항하는 사람은 정욕에 따라 행동하지도 않고 그것을 끊어내지도 않지만, 마치 정욕을 현명하게 피하는 것처럼 행동하면서도 여전히 그 정욕을 내면에 품고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정욕을 뿌리 뽑는 사람은 정욕에 맞서 분투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다.

66. 정욕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은 마치 원수의 화살에 맞은 사람이 그 화살을 집어 자신의 손으로 직접 자신의 심장에 꽂는 사람과 같다. 정욕에 저항하는 사람은 원수의 화살이 쏟아지지만 갑옷을 입고 있어 상처를 입지 않는 사람과 같다. 그리고 정욕을 뿌리 뽑는 사람은, 원수의 화살이 쏟아져도 그 화살을 부수거나 원수의 심장으로 되돌려 보내는 사람과 같다. 시편에 기록된 대로 “그들의 무기가 그들의 심장에 꽂히고, 그들의 활이 부러지리라” 한 것과 같다.

67. 한 형제가 7일 동안 고열에 시달렸는데, 그 후 40일이 더 지났으나 그는 여전히 기력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 이 겸손한 이는 7일 동안 병들었으나, 얼마나 많은 날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회복되지 않았는가? 영혼도 마찬가지다. 어떤 이는 죄를 많이 짓지 않더라도, 그 후 자신의 피를 흘리며 회개할 때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을 보내는가?

68. 우리 형제들이 우리 가운데서 떠나가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 자신에게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정작 우리도 조금씩 죽음에 다가가고 있음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아직 시간이 있을 때 헛되이 낭비하지 맙시다. 우리는 그 노인의 말씀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그는 “누구든지 금이나 은을 잃어버리면 그 대신 다른 것을 찾을 수 있지만, 게으름과 나태함 속에서 시간을 잃어버리면 잃어버린 것을 대신할 다른 것을 찾을 수 없다”고 말했었다. 진실로 우리는 이 시간 중 단 한 시간이라도 찾으려 해도 찾지 못할 것이다.

69. 한 위대한 노승이 제자들과 함께 크고 작은 다양한 키파리스 나무들이 있는 어떤 곳을 거닐고 있었다. 노승은 제자 중 한 명에게 말했다. “이 키파리스를 뽑아라.” 키파리스는 작아서 그 형제는 즉시 한 손으로 뽑아냈다. 노승은 첫 번째 것보다 더 큰 다른 나무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것도 뽑아라.” 그 제자는 양손으로 나무를 흔들어 뽑아냈다. 스승은 또 다른, 더 큰 나무를 가리켰다. 그는 그것도 뽑아냈지만, 큰 고생을 했다. 그 후 스승은 또 다른, 더 큰 나무를 가리켰다. 그 제자는 엄청난 고생을 하며, 먼저 나무를 많이 흔들어 대고 애를 쓰며 땀을 흘린 끝에 마침내 이것도 뽑아냈다. 마침내 노승은 그에게 더 큰 측백나무를 가리켰다. 그러나 그 형제는 아무리 애를 쓰고 땀을 흘려도 그것을 뽑아낼 수 없었다. 노승은 그가 혼자서는 해낼 수 없음을 보고, 다른 형제에게 그를 도와주라고 지시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간신히 그것을 뽑아낼 수 있었다. – 그때 노인은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정욕도 바로 이와 같습니다. 아직 작을 때는 우리가 원하기만 하면 쉽게 뿌리 뽑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사소한 것으로 여긴다면, 정욕은 더욱 굳어지고, 굳어질수록 우리에게 더 큰 노력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깊이 뿌리내리면, 그때는 아무리 큰 노력을 기울여도, 하느님을 통해 우리를 돕는 몇몇 성인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우리 혼자서는 그것들을 우리 안에서 뽑아낼 수 없다."

70. 선지자는 바빌론의 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 젖먹이들을 돌에 부딪혀 으스러뜨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36:9). – 바빌론의 딸은 모든 죄악적이고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의 상징입니다. 그녀의 산물은 정욕적인 생각과 행위들입니다. 자신 안에서 생겨나는 악한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들이 자신 안에서 자라나 악을 행하게 할 여지를 주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들이 아직 작을 때, 뿌리를 내리고 자신을 대적하기 전에, 온갖 방법으로 흔들리지 않는 결의라는 돌에 부딪혀 부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것들을 근절하려고 애쓰는 자는 복이 있다.

71. 성부들은 사람이 어떻게 점차 자신을 정화해야 하는지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다. 매일 저녁에는 그날을 어떻게 보냈는지, 그리고 아침에는 밤을 어떻게 보냈는지 스스로를 점검하고, 죄를 지은 부분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죄를 많이 짓기 때문에, 우리의 건망증 탓에 6시간이 지날 때마다 우리가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어떤 죄를 지었는지 스스로를 점검해야 합니다.

72. 이런 방식으로 스스로를 점검하는 사람에게는 악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할 것이며, – 만약 그가 아홉 가지 잘못을 저질렀다면, 여덟 가지를 저지르게 될 것이며; – 이렇게 하나님의 도움으로 점차 발전해 나감으로써, 자신의 내면에 정욕이 뿌리내리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정욕에 습관적으로 빠지는 것은 큰 재앙이다.

73. 단 한 번 화를 냈다고 해서 이미 성미가 급한 사람이라 불리지 않으며, 단 한 번 음행에 빠졌다고 해서 이미 음탕한 사람이라 불리지 않으며, 단 한 번 자비를 베풀었다고 해서 자비로운 사람이라 불리지 않는다; 그러나 미덕이든 악덕이든, 그것들을 자주 실천함으로써 영혼은 습관을 얻게 되며, 그 후 이 습관은 영혼을 괴롭히거나 평온하게 한다. 미덕은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선한 일을 더 많이 할수록 미덕에 대한 습관을 더 많이 쌓게 되고, 이를 통해 본래의 성품을 되찾아 원래의 건전한 상태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반면 악덕은 마음을 괴롭힌다. 왜냐하면 악덕을 통해 우리는 우리 본성에 낯설고 적대적인 습관을 받아들이게 되며, 그 습관이 바로 본성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74. 독수리는 온몸이 그물 밖으로 나와 있어도 발톱 하나만 그물에 걸리면, 이 사소한 일로 인해 그 모든 힘이 꺾이게 되며, 사냥꾼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그것을 잡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영혼도, 단 하나의 정욕이라도 습관으로 굳어진다면, 원수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그 영혼을 무너뜨릴 수 있으니, 그 정욕 때문에 영혼이 원수의 손에 넘어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떤 정욕도 습관으로 굳어지지 않도록 주의하고,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밤낮으로 힘쓰며 하나님께 기도하라. 만약 우리가 인간으로서 패배하여 죄에 빠지게 된다면, 즉시 일어나 그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비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깨어 있고 힘써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선한 의지와 겸손, 그리고 통회를 보시고 우리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자비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75.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하나님께 드리며 이렇게 말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 없이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이 선하고 유익하다는 것을 아시기에, 그렇게 일어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 중에서 선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으며, “모든 것이 좋았고, 지극히 좋았다”(창세기 1:31)고 하셨다. 그러므로 누구도 일어나는 일로 인해 슬퍼해서는 안 되며, 그 일을 하느님께 맡기고 마음을 평온하게 해야 한다. 일부 사람들은 닥치는 슬픔에 너무나 지쳐서 생명 자체를 포기하고, 슬픔에서 벗어나기만 한다면 죽음이 달콤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이는 비겁함과 많은 무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들은 영혼이 육신을 떠날 때 우리를 맞이하는 그 끔찍한 곤경을 알지 못합니다.

76. 한 매우 열심인 형제가 어떤 장로에게 물었다. “왜 제 영혼은 죽음을 갈망합니까?” 장로는 그에게 대답했다. “네가 현재 겪고 있는 슬픔을 참아내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니, 앞으로 닥칠 슬픔이 이곳의 것보다 훨씬 더 무겁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 또 다른 형제도 장로에게 물었다. “왜 제가 제 기숙실에 머물면서 안일함에 빠지게 됩니까?” 그러자 그 노인은 그에게 말했습니다. “그것은 네가 아직 기대되는 평안도, 미래의 고통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일 네가 이것을 확실히 알았다면, 설령 네 기숙실이 구더기로 가득 차서 네가 목까지 잠길 지경이라 해도, 너는 게을러지지 않고 이를 참아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잠들어 있으면서 구원받기를 원하므로 슬픔 속에서 지쳐 버리니, 정작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이곳에서 조금의 슬픔을 겪음으로써 저편에서 지대한 평안을 얻게 될 것을 생각하며 스스로를 복된 자로 여겨야 마땅하다.

77. 에바그리우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욕에 사로잡혀 하나님께 빨리 죽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은, 마치 목수에게 자신의 침상(그 위에서 그는 고통 속에서도 어느 정도 위안을 얻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을 빨리 잘라 달라고 애원하는 병자와 같다.” 왜냐하면 이 육신 안에 있을 때, 영혼은 자신의 정욕으로부터 안도감을 얻고 어느 정도의 위로를 받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람은 먹고, 마시고, 자고, 대화를 나누며, 친구들과 어울린다. 그러나 영혼이 육신을 떠날 때면, 그제야 자신의 정욕과 홀로 남게 되며, 그로 인해 항상 그 정욕에 시달리게 된다. 정욕에 사로잡혀 그 불타는 고통에 휩싸이며, 심지어 하느님을 떠올릴 수조차 없을 정도로 괴로워한다. 이 하나님에 대한 기억은 시편에 기록된 대로 “내가 하나님을 기억하니 기뻐하리라”(시 76:4)고 한 것처럼 영혼을 위로해 줄 수 있겠지만, 정욕들이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78. 이 세상의 고통을 통해 저 세상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열병에 걸렸을 때, 무엇이 그를 태우는 것입니까? 어떤 불이 이 타는 듯한 통증을 일으키는가? 마찬가지로 정욕에 사로잡힌 영혼은 그곳에서 자신의 악한 습관으로 인해 끊임없이 고통받으며, 끊임없이 그 영혼을 태우고 불타오르게 하는 정욕들로부터 비롯된 쓰라린 기억과 괴로운 인상을 안고 있다.

79. 게다가 누가 공포심 없이 성경에 기록된 끔찍한 고통의 장소들, 불, 어둠, 무자비한 고문자들의 하인들, 그리고 다른 고뇌들을 떠올릴 수 있겠는가? 성경은 악마들과 함께 사는 것을 언급하며, 오직 그들을 위해 저곳의 불이 준비되어 있다고 한다(마태복음 25:41). – 게다가 심판의 수치 그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가슴을 찢고 치명적인가? 성 금구(Zlatoust)는 이렇게 말합니다. “설령 불의 강이 흐르지 않고 무서운 천사들이 서 있지 않더라도, 단지 모든 사람이 심판에 소환되어, 어떤 이들은 칭찬을 받으며 영광을 누리고, 다른 이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도록 수치스럽게 쫓겨난다면, 그들에게 닥칠 수치와 불명예라는 형벌, 그리고 그토록 많은 축복을 박탈당했다는 슬픔이 어떤 지옥보다도 더 끔찍하지 않겠는가?” –

80. 그러니 우리는 그러한 재앙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를 정화하도록 노력합시다. 물론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우리가 수고하면 은혜를 얻게 될 것입니다. 밭을 가진 사람이 그 밭을 방치해 둔다면, 밭이 잡초로 뒤덮이지 않겠습니까? – 그리고 그가 밭을 더 방치할수록 밭은 가시와 엉겅퀴로 더 가득 차지 않겠습니까? 나중에 그가 자신의 게으름으로 인해 자라게 내버려 둔 온갖 잡초를 밭에서 제거하려 할 때, 밭을 방치한 기간이 길수록 그의 손은 더 많이 피투성이가 되지 않겠는가? – 왜냐하면 그는 단순히 풀을 베어내는 것뿐만 아니라 뿌리째 뽑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베어내도 다시 자라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혼을 소홀히 하면 온갖 악한 정욕의 잡초로 뒤덮이게 됩니다.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영혼을 정화하려 할 때면 고통스러운 수고가 불가피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단순히 정욕적인 행위를 그만두는 데 그치지 않고, 정욕적인 습관 그 자체를 뿌리 뽑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욕적인 습관보다 더 나쁜 것은 없습니다. “악한 습관을 극복하는 것은 결코 작은 업적이 아니다.”라고 성 바실리오 대교황은 말합니다. “오랜 시간 동안 뿌리내린 습관은 종종 본성의 힘을 얻기 때문이다.”

81. 정욕을 잘라내는 것뿐만 아니라 그 원인까지 제거해야 하며, 그 후 회개와 눈물로 자신의 성품을 잘 가꿔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선한 씨앗, 즉 선한 행실을 뿌리기 시작할 수 있다. 마치 밭과 같은 이치입니다. 밭을 깨끗이 하고 비료를 주었음에도 그 위에 선한 씨앗을 뿌리지 않으면 잡초가 자라나, 정화되어 흙이 푹신하고 부드러워진 틈을 타 더 깊게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과거의 행실을 회개하고 성품을 바로잡았음에도 불구하고 미덕을 쌓는 데 신경을 쓰지 않는다면, 복음서에 기록된 대로 부정한 영이 다시 예전의 거처로 돌아와, 이제 깨끗해지고 쓸려 나간 그 곳에, 이미 일곱 다른 영들과 함께 돌아오게 되는데, 이로 인해 그 사람은 이전보다 더 나쁜 처지가 된다(마태복음 12,44).

82. 구원을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악을 행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시편에 기록된 대로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라”(시 33)는 말씀대로 선을 행할 의무가 있다. 예를 들어, 성미가 급했던 사람은 화를 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온유함을 길러야 하며; 교만했던 사람은 교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겸손해져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정욕에는 그와 반대되는 미덕이 있기 때문이다: 교만에는 겸손, 인색함에는 자비, 음행에는 정절, 비겁함에는 인내, 분노에는 온유, 증오에는 사랑이 있다.

83. 우리가 이전에 미덕을 내쫓고 그 대신 정욕을 받아들였던 것처럼, 이제 우리는 정욕을 내쫓을 뿐만 아니라 그 대신 미덕을 우리 안에 심어 놓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 안에는 본래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미덕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 그 안에 모든 미덕을 심어 주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형상과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창세기 1:26). ‘형상’이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영혼을 불멸하고 자유로운 것으로 창조하셨음을 뜻하며, ‘모양’은 미덕을 가리키는 것으로, 마치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가 거룩하니라” (베드로전서 1:16). 따라서 미덕은 본성상 우리에게 속한 것이나, 정욕은 우리 본성에 속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유입되는 것이다. 즉, 영혼이 자기 만족에 빠질 때, 비로소 미덕에서 벗어나 정욕을 품게 되는 것이다.

84. 아바 피멘이 잘 말했듯이, 수도사의 성장은 유혹 속에서 드러난다. 참으로 “주님을 섬기기 시작하는” 수도사는 “유혹을 대비하여 자신의 영혼을 준비해야” (시라 2, 1) – 그래야 자신에게 일어나는 어떤 일에도 결코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 없이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는 온전히 선하며, 영혼의 유익을 위해 작용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자비 베푸시는 마음으로 우리의 유익을 위해 행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사도가 말한 대로 “모든 일에 감사해야” 합니다(엡 5,20; 살전 5:18) 그분의 선하심에 대해 감사해야 하며, 우리에게 일어난 일로 인해 결코 슬퍼하거나 낙담하지 말고,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당황하지 않고 겸손한 지혜와 하나님을 향한 소망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시는 모든 일은 그분의 선하심에 따라,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유익을 주시기 위해 행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85. 누구든지 친구가 있고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확신한다면, 그 친구에게서 어떤 일, 심지어 힘든 일을 겪게 되더라도, 그 친구가 사랑으로 그렇게 했다고 생각하며, 결코 그 친구가 자신에게 해를 끼치려 했다고 믿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우리를 창조하시고, 무에서 유로 이끌어 내시며, 우리를 위해 육신을 입으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신 하나님에 대해서는, 그분이 당신의 자비로,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우리에게 모든 일을 행하신다고 더욱더 생각해야 합니다. 친구에 대해서는 누군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는 나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모든 일을 하며(언제나 그렇게 할 준비가 되어 있다); 하지만 그에게는 나와 관련된 모든 일을 항상 잘 처리할 만큼의 분별력이 부족하여, 때로는 의도치 않게 나에게 해를 끼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그분은 지혜의 근원이시며, 우리에게 유익한 모든 것을 아시고, 그에 따라 우리와 관련된 모든 일, 심지어 가장 사소한 일까지도 적절히 처리해 주시기 때문이다. 다시 친구에 대해 말하자면, 그는 비록 우리를 사랑하고 아끼며, 우리와 관련된 일을 잘 처리할 만큼 충분히 이성적이지만, 그가 우리에게 유익을 주려고 생각하는 일에서 우리를 도울 힘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해서는 이 말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분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며, 그분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비록 그것이 비통한 일이라 할지라도, 은혜의 주님이시며 선하신 주님께서 주신 것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86. 누구든지 인내와 겸손으로 유혹을 견뎌낸다면, 그 유혹은 그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지나갈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가 소심해지고 당황하며 모든 사람을 탓한다면, 그는 스스로에게만 짐을 지울 뿐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하고 오직 자신에게 해를 끼칠 뿐이다. 반면, 당황하지 않고 유혹을 견뎌내는 사람에게는 유혹이 오히려 큰 유익을 가져다준다.

87. 우리는 정열에 휩싸여 당황할 때조차도 당황해서는 안 된다. 정열에 사로잡힌 자여, 정열이 너를 괴롭힐 때 무엇을 놀랍게 여기며, 무엇을 당황해 하겠는가? – 네가 스스로 그 정욕을 마음속에 키워냈고, 기꺼이 품고 있으면서, – 왜 당황하느냐? – 그 정욕의 담보를 받아들여 놓고는, ‘도대체 왜 이 정욕이 나를 당황하게 하는가?’라고 말하느냐? – 차라리 참아내고, 수련하며, 하나님께서 너를 도와주시기를 기도하라. 정욕을 마음껏 누려온 자에게 정욕으로 인한 고통스러운 유혹이 없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바 시소이가 말했듯이, 그 정욕들의 그릇은 네 안에 있다. 그들에게 그 대가를 치르면, 그들은 너에게서 물러날 것이다. 우리가 그들을 사랑하고 행동으로 옮겼기 때문에, 우리를 강요하여 우리 의지와 반대로 정욕을 행하게 만드는 정욕적인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발적으로 우리 자신을 그들의 손에 넘겨주었기 때문이다.

88. 정욕적인 생각이 그를 덮치기 전에, 그가 정욕에 따라 행동하기 전에, 그는 아직 자신의 성에 머물러 있으며, 자유롭고, 하나님 안에서 도우미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가 이 상황에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조금만 싸우면, 하나님의 도움이 나타나 정욕의 공격으로부터 그를 해방시켜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싸우려 하지 않고, 스스로를 방종하여 육체의 쾌락에 빠진다면, 하나님의 도움은 그에게서 물러나고, 정욕은 그를 정욕적인 행위로 이끌며, 그 결과 그는 어쩔 수 없이 이미 그 정욕을 섬기게 될 것이다.

89.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어떤 위대한 장로의 제자 한 명이 육신의 유혹에 시달리자, 장로는 그의 고군분투를 보고 그에게 말했습니다. “원한다면,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그분이 네게 이 유혹을 덜어주시도록 해줄까?” 그러자 그 제자는 대답했습니다. “비록 저에게는 무겁고 힘들지만, 스승님, 제 안에서 수고의 열매를 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저에게 인내를 주시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그러자 그 노인은 그에게 말했습니다. “이제야 네가 잘 성장하고 나를 능가한다는 것을 알겠다.”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구원을 원하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겸손함으로 유혹의 멍에를 지는 것이란 뜻입니다!

90.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와 파라오의 노예 생활에서 구출하셨을 때, 파라오는 그들에게 더 무거운 노역을 부과했다. 마찬가지로 마귀도,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고 자비를 베풀어 정욕의 짐을 덜어 주시려 하심을 보게 되면, 오히려 정욕으로 그 영혼을 더욱 짓누르고 더 세게 싸워 댑니다. 그러나 성부들은 이를 아시고, 자신의 가르침으로 사람을 굳건하게 하여 두려움에 빠지지 않게 하십니다. “용기를 내고, 주님을 신뢰하는 모든 이여, 너희 마음을 굳게 하라”(시 30:25).

91.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영혼으로 하여금 계명을 지키게 하며, 계명을 통해 영혼의 집이 세워진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우리 자신을 위한 집을 지어, 겨울과 비, 번개와 천둥이 닥쳤을 때 피난처를 찾도록 하자. 집이 없는 자는 겨울에 큰 재앙을 겪기 때문이다.

92. 영혼의 집을 어떻게 지어야 하는지는, 세상의 집을 짓는 과정에서 배울 수 있다. 집을 짓는 사람은 네 면 모두에 벽을 세우지, 한쪽 벽만 신경 쓰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비용과 수고를 헛되이 낭비하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영혼의 집을 짓고자 하는 사람도 그 건물의 어느 한쪽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며, 균형 있게 조화롭게 지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아바 요한이 말한 “나는 사람이 매일 모든 미덕에서 조금씩 얻기를 원한다”는 뜻이며, 어떤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한 가지 미덕에만 매달려 그 안에 머물며 오직 그것만을 실천하고 다른 것들은 돌보지 않는 방식과는 다르다.

93. 영혼의 집은 모든 면에서 균형 잡히고 조화롭게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세워진다. – 먼저 기초를 놓아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믿음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히브리서 11:6)고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이 기초 위에 건물을 균일하게 지어야 한다. 즉, 순종의 기회가 생기면 순종의 돌을 놓아야 하고, 형제로부터 슬픔을 겪으면 인내의 돌을 놓아야 하며, 절제의 기회가 생기면 절제의 돌을 놓아야 한다. 이처럼 기회가 주어지는 모든 미덕에 대해 건물에 돌을 하나씩 놓아야 하며, 이런 방식으로 건물을 사방으로 세워 나가야 한다. 때로는 연민의 돌을, 때로는 자기 의지를 절제하는 돌을, 때로는 온유함의 돌 등을 건물에 놓아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내와 용기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이는 그것들이 모퉁이 돌이기 때문이며, 그것들로 인해 건물이 단단히 결합되고 벽과 벽이 서로 연결되어, 기울어지거나 서로 분리되는 것을 막아주기 때문이다. 인내와 용기가 없이는 그 누구도 단 하나의 미덕도 실천할 수 없다. 그러므로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구원하라”(누가복음 21:19)고 말씀하신 것이다.

94. 집을 짓는 사람은 각 돌 위에 석회를 바른다. 만일 석회 없이 돌을 돌 위에 쌓으면, 돌들이 떨어져 나가고 집이 무너질 것이기 때문이다. (영적 건축에서) 석회는 겸손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땅에서 얻어지며 모든 사람의 발 아래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겸손 없이 행해지는 어떤 미덕도 미덕이 아닙니다. 이에 대해 교부들의 글에도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못 없이는 배를 지을 수 없듯이, 겸손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다.” – 보통 집에는 지붕이 있다. 영적 집의 지붕은 사랑이며, 이는 미덕의 완성을 이루는 것과 같다. 마치 집의 지붕이 집의 마무리를 이루는 것과 같다. – 지붕 주위에는 난간이 둘러져 있는데, 이는 율법(신명기 22:8)이 말하듯, 아이들이 지붕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영적 집의 난간은 절제, 주의, 그리고 기도이며, 아이들은 마음속에 맴도는 생각들로, 이들은 절제와 기도를 지켜준다.

95. 그러나 이 건축 작업에는 또 한 가지가 필요한데, 바로 건축자가 숙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그가 숙련되지 않았다면 벽을 비뚤게 지을 수 있고, 언젠가 집이 무너질 것이기 때문이다. 숙련된 자란 덕행을 현명하게 실천하는 자이다. 어떤 이는 선행을 시작하기도 하지만, 그 일을 현명하게 수행하지 못하여 스스로 망치거나 끊임없이 일을 망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건축을 끝까지 완성하지 못하고, 단지 짓고 부수는 일만 반복하게 된다.

96. 여기 수많은 예 중 하나를 들겠다. 만일 누군가가 허영심 때문에, 혹은 스스로 어떤 특별한 미덕을 행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금식한다면, 그런 사람은 무분별하게 금식하는 것이며, 그로 인해 자신을 위대한 존재로 여기며 형제를 책망하기 시작한다; 결국 그는 돌 하나를 쌓고 두 개를 무너뜨린 것뿐만 아니라, 이웃을 비난함으로써 벽 전체를 무너뜨릴 위험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현명하게 금식하는 사람은 자신이 특별한 미덕을 행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금식자로 칭찬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절제를 통해 정절을 얻고, 이를 통해 겸손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부들이 말씀하시기를 “겸손으로 가는 길은 현명하게 행해지는 육체의 수고”라고 하셨듯이 말이다. – 등등. – 이러한 사람은 자신의 집을 견고하게 지을 수 있는 능숙한 건축가로 드러난다.

97. 덕행이 네 힘을 넘어선다거나 네게는 이룰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히지 마라. 그러나 믿음으로 용기를 내어 과감히 시작하고, 하나님 앞에서 선한 의지와 노력을 보여라. 그러면 네가 덕행을 완성하도록 그분께서 베풀어 주실 도움을 보게 될 것이다. – 두 개의 사다리를 상상해 보라. 하나는 하늘로 올라가고, 다른 하나는 지옥으로 내려가는데, 너는 땅 위에 서서 그 두 사다리 사이에 서 있다. ‘어떻게 내가 땅에서 날아올라 갑자기 하늘의 높은 곳, 즉 사다리 꼭대기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하거나 말해서는 안 된다. 오직 악을 행하며 아래로 내려가지 않도록 조심하고, 위로는 마주치는 선행을 하나씩 실천하며 조금씩 올라가려고 노력하라. 모든 행위가 한 걸음씩 올라가는 것이 될 것이다. 그렇게 하느님의 도움으로 한 계단에서 다른 계단으로 올라가다 보면, 마침내 사다리의 꼭대기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98. 우리가 찾으면 찾을 것이요, 구하면 받을 것이니, 복음서에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그리하면 열릴 것이니라”(마태복음 7,7)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구하라”는 말은 우리가 기도 중에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라는 뜻이며, “찾으라”는 말은 덕이 어떻게 다가오는지, 그리고 무엇이 그것을 가져오는지 보고, 그에 따라 덕을 얻기 위해 우리 자신의 노력을 기울이라는 뜻이다. “열라”는 것은 계명을 이행하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밀치는 사람은 누구나 손으로 밀기 마련이며, 손은 활동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지 구할 뿐만 아니라, 찾아야 하며 행동해야 합니다. 사도의 말씀대로 “모든 선한 일을 행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고린도후서 9:8; 디모데후서 3:17) – 즉,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그분께 기쁨이 되는 대로 하나님의 뜻을 지혜롭게 이행할 완전한 준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99. 사도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곧 선하고 기쁘시며 온전한 뜻을 분별하라”(롬 12:2)고 명하셨는데, 이는 나중에 그 뜻에 따라 행동하기 위함이다. – 과연 어떤 것이 선한 하나님의 뜻인가? – 서로 사랑하고, 자비롭게 대하며, 자선을 베푸는 것과 같은 것들이다. 이것이 바로 “선한 하나님의 뜻”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기쁘시게 하는 뜻”은 무엇인가? 선한 일을 한다고 해서 누구나 하나님께 기쁘시게 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가난하지만 아름다운 고아를 발견한다고 치자. 그는 그 아이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그 아이를 데려와 키우는데, 비록 가난한 고아로서이지만 동시에 아름다운 존재로서도 대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며 “선한” 것이지만, “하나님께 기쁘시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반면 “하나님께 기쁘시게 하는뜻이란, 어떤 인간적인 동기가 아니라 이를 명하신 하나님을 위하여, 선 그 자체를 위하여, 오로지 연민에서 비롯되어 자비의 일을 행할 때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 마지막으로 “완전한” 하나님의 뜻은, 누군가 자비의 일을 행할 때, 인색함도, 나태함도, 경멸도 없이 온 힘을 다하고 온 마음을 다해, 마치 자신이 받는 것처럼 자비를 베풀고, 마치 자신이 은혜를 받는 것처럼 선행을 행할 때이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의 완전한 뜻이 이루어진다. – 이것이 바로 사람이 선하고, 하나님께 기쁘시게 하며, 완전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방법이다.

100. 탐식은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사람이 맛있는 음식을 찾으며, 항상 많이 먹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니지만 맛있는 것을 원할 때이다; 둘째는 과식에 사로잡힌 경우로, 그는 좋은 음식을 원하지도 않고 맛에도 신경 쓰지 않으며, 음식이 무엇인지 가리지 않고 그저 배를 채우는 것만 생각하며 계속 먹기만 원한다. 첫 번째는 ‘입맛의 방종’이라 하고, 두 번째는 ‘배의 방종’이라 한다. –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해 금식을 실천하고자 하는 자는 이 두 가지 종류의 탐식을 모두 피해야 한다. 이는 그것들이 육체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정욕을 충족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며, 누구든지 이에 빠진다면 그것은 그에게 죄로 간주된다.

101. 그러나 금식할 때 앞서 언급된 음식에 관한 규칙만을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밖의 모든 죄에서도 자제해야 한다. 즉, 배로 금식하듯이 혀로도 금식하여, 비방과 거짓말, 헛소리, 형제들을 폄하하는 말, 분노, 그리고 혀로 저지르는 그 밖의 모든 죄를 삼가야 한다. 또한 눈으로도 금식해야 합니다. 즉, 헛된 것들을 바라보지 말고, 눈에 자유를 주지 말며, 누구에게도 뻔뻔하고 두려움 없이 쳐다보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손과 발도 모든 악한 행실에서 멀리해야 합니다.

102. 우리가 서로 방문할 때 어떤 목적을 가져야 하는가? – 첫째, 우리는 사랑으로 서로 방문해야 한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많은 형제들 가운데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모르는 것을 다른 사람이 알고 있으면, 첫 번째 사람이 그에게 물어봄으로써 그 또한 그것을 알게 된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내적 성향과 상태를 파악하기 위함이며, – 성 안토니우스가 그랬던 것처럼 다른 이들에게서 삶의 본보기를 배우기 위함이다. 한 사람에게는 온유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겸손을, 또 다른 사람에게는 침묵을 배우며, 이와 같이 방문한 각 사람의 미덕을 자신 안에 모아가는 것이다.

103.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무엇보다도 의심스러운 마음을 피해야 하는데, 그로부터 해로운 비난이 비롯되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성향에 따라 타인을 판단한다는 진리를 뒷받침하는 수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보겠다. 어떤 사람이 밤에 어떤 장소에 서 있었는데, 그 옆을 세 사람이 지나간다고 가정해 보자. 그를 본 사람 중 한 명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게 분명해, 가서 음행을 저지르려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다른 한 명은 ‘이 사람은 분명 도둑일 거야’라고 생각하며, 세 번째 사람은 ‘근처 집에 사는 누군가와 함께 어딘가로 기도하러 가기로 약속을 하고 그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게 분명해’라고 생각한다. 이 세 사람은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한 사람을 보았지만, 그에 대해 똑같은 생각을 품지는 않았다. 한 사람은 한 가지, 다른 사람은 다른 것, 세 번째 사람은 또 다른 생각을 가졌는데, 이는 분명히 각자의 마음 상태에 따른 것이었다. 체질이 흑담성이고 허약한 사람은 섭취하는 모든 음식을, 설령 그 음식이 유익하더라도 나쁜 체액으로 변환시키듯이, 성품이 나쁜 영혼도 만나는 모든 것에서 해를 입는데, 설령 그 일들이 좋은 것일지라도 마찬가지다. 반면 선한 성품을 가진 사람은 영양이 풍부한 체질을 가진 사람과 같아서, 설령 해로운 것을 먹더라도 그것이 그에게는 좋은 체액으로 변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선한 성품을 가지고 마음의 상태가 좋다면, 비록 그 사물이 유익하지 않더라도 모든 것에서 유익을 얻을 수 있다.

104. 어떤 형제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가 형제 중 한 사람을 찾아가서 그 사람의 방이 쓸어내지 않고 정리되지 않은 것을 보면, 스스로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이 형제는 참으로 복이 있구나. 세상의 모든 근심을 뒤로 미루고 온 마음을 하늘을 향하여 쏟은 나머지, 자기 방을 정리할 시간조차 찾지 못하는구나.” 또한 다른 형제의 방을 방문했을 때, 그 방이 정리되고 쓸려져 깨끗한 것을 보면, 다시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이 형제의 영혼이 얼마나 깨끗한지, 그의 방도 그만큼 깨끗하고, 방의 상태는 그의 영혼의 상태와 일치한다.” 그리고 그는 결코 누구에 대해서도 ‘이 사람은 소홀하다’거나 ‘오만하다’고 말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선한 마음가짐으로 모든 사람을 선한 사람으로 보았고, 모든 사람에게서 유익을 얻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같은 선한 마음가짐을 주시어, 우리도 모든 사람에게서 유익을 얻고 이웃의 결점을 결코 눈치채지 못하게 하소서.

105. “수도 생활을 배우는 이들을 위한 훈계”. 네가 순종 속에 머무르고 있다면, 결코 네 마음을 믿지 말라. 마음은 낡은 편견들로 인해 눈이 멀기 때문이다. 어떤 일에서도 네 판단을 따르지 말고, 묻거나 조언을 구하지 않고는 스스로 아무것도 정하지 말라. 네가 스승보다 더 낫고 의롭다고 생각하거나 짐작하지 말며, 그의 행실을 캐묻지 말라. 이렇게 행할 때, 너는 순종하며 평온하고 안전하게 우리 선조들의 길을 걸을 것이다. 모든 일에 스스로를 다스리고 네 뜻을 억제하라. 그리하면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가르침을 통해 네 뜻을 억제하는 습관을 기르게 될 것이며, 나중에는 강요나 고통 없이 이를 행하게 되어, 네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네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모든 일이 네 뜻대로 되기를 바라지 말고, 그저 있을 대로 되기를 바라라. 그러면 너는 모든 이와 화목하게 지낼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 아주 사소한 것까지도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일어난다는 것을 믿으라. 그러면 너는 당하는 모든 일을 당황함 없이 견뎌낼 수 있을 것이다. 모욕과 책망은 네 영혼의 교만을 치유하는 약임을 믿고, 너를 책망하는 이들을 네 영혼의 진정한 의사인 것처럼 위해 기도하라. 모욕을 미워하는 자는 겸손을 미워하며, 자신을 괴롭히는 이를 피하는 자는 온유함을 피하는 것임을 확신하라. 네 이웃의 악행을 알고자 하지 말고, 원수가 네게 심어주는 그에 대한 의심을 받아들이지 마라. 만일 우리의 타락함으로 인해 그런 생각이 네 마음속에 떠오른다면, 그것을 선한 생각으로 바꾸도록 노력하라. 모든 것에 감사하며, 선함과 거룩한 사랑을 얻으라. 무엇보다도 우리는 모든 일에서, 곧 하느님께 대한 것, 이웃에 대한 것, 그리고 사물에 대한 것에서 우리의 양심을 지키자. 그리고 무언가를 말하거나 행하기 전에, 그것이 하느님의 뜻에 부합하는지 시험해 보자. 그런 다음 기도한 뒤,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하느님 앞에 엎드려 그분의 도움을 청하며, 그 말을 하거나 그 일을 행하자.

106. 만일 믿음에 따른 거룩한 생각들이 적절한 때에 잘못된 움직임과 생각, 감정을 억제하는 데 위로가 되는 효과를 발휘하기를 원한다면, 항상 그 생각들을 마음속으로 되새기며 익혀라. – 그리고 나는 하나님께 맹세하건대, 네가 평안을 얻게 될 것이다. 또한 기도를 가르침으로 녹여내라. 이 일에 정진하여, 육체적이나 영적인 슬픔이 닥쳤을 때, 슬픔이나 부담 없이 인내로 이를 견딜 수 있도록 하라.

107. 네가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듣는다면, 이에 놀라거나 상심하지 말고, 즉시 겸손히 그 말을 한 사람에게 절하며 “용서해 주시고,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말하라. 그리고는 성부들이 말씀하신 대로 침묵을 지키라. 그리고 그가 “그게 사실인가, 아닌가”라고 묻는다면, 그때 겸손히 절을 한 뒤 사실대로 상황을 말하고, 말을 마친 후 다시 겸손히 절을 하며 “저를 용서해 주시고,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말하라.

108. 형제들을 만나거나 마주칠 때 변함없는 마음가짐을 유지할 수 없다면, 적어도 어떤 것에도 유혹되지 않도록 하고, 누구도 정죄하지 말고, 험담하지 말고, 형제의 말이나 행동, 몸짓을 샅샅이 파헤치지 않도록 노력하라. – 그것은 너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않을 것이니, 차라리 모든 일에서 교훈을 얻으려 노력하는 편이 낫다.

109. 어떤 생각에 사로잡히거나 그로 인해 괴로워하면서도 그것을 고백하지 않는 사람은, 스스로 그 생각을 자신에 대항하여 강화시키는 것이니, 즉 그 생각이 자신을 더 세게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할 힘을 주는 것이다. , 만약 그가 그 생각을 고백하고 자신의 생각과 싸우며 저항하고, 그 생각과 반대되는 행동을 한다면, 그 정욕은 약해져서 그를 괴롭히고 슬픔을 안겨줄 힘을 잃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는 조금씩 노력하며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그 정욕 자체를 극복하게 될 것이다.

110. 아바 피멘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 세 가지 주요 미덕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첫 번째로 꼽은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모든 미덕에 앞서기 때문이며, “지혜의 시작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시 110:10)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모든 악을 피한다”(잠 15:27)는 말씀에 근거한 것이다. 그 다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말한 것은, 사람이 스스로는 선한 일을 행할 수도 없고 미덕을 얻을 수도 없으며,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기울이는 자신의 모든 노력 속에서도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웃에게 자선을 베풀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것이 바로 기독교적 완전함의 정점인 사랑의 행위이기 때문이다(롬 13:10).

111. 영혼이 무감각해졌을 때에는 성경을 자주 읽고, 신성한 성부들의 감동을 주는 말씀을 묵상하며, 두려운 하나님의 심판과 영혼이 육신을 떠나는 일, 그리고 이 짧고 비참한 생애 동안 악을 행했던 그 영혼을 맞이할 끔찍하고 어두운 세력들에 대해 기억하는 것이 유익하다.

 

성 이삭 시리아인

 

그에 대한 간략한 소개

성 이삭은 니네베 출신이었다. 그의 부모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청춘의 한창일 때, 세상과 세속적인 모든 것에서 물러나 형과 함께 성 마티아 수도원에 입회하여 그곳에서 수도자의 삶과 규율을 따르기 시작했다. 이 수도원에서 수행을 완성하고 덕을 충분히 쌓은 후, 그는 침묵을 갈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수도원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황량한 은둔처에 정착하여, 누구와도 교제하지 않고 오직 자신과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완전히 고립된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친형제는 앞서 언급한 수도원의 운영권을 맡게 되자, 그에게 간곡히 설득하고 간청하며 사막을 떠나 예전 수도원으로 돌아오라고 했으나, 그는 사막에 너무나 깊이 애착을 품고 있어 잠시라도 그곳을 떠나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형제의 간청이 이루지 못한 것을 신성한 계시가 이루어 주었다. 친형제의 말을 듣지 않았던 성 이삭은, 니네베 교회를 다스리라고 하늘에서 부르시는 아버지께 순종했다. 그리하여 그는 은둔처를 떠나, 위대한 도시 니네베의 주교로 서품받았다. 왜냐하면 등불은 사막의 그늘 아래 숨어 있을 것이 아니라, 목양의 촛대에 놓여 빛나는 미덕의 밝은 광선을 멀리 퍼뜨려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이 빛이 막 비추기 시작하자마자 곧 다시 숨어버렸다. 성자는 다음과 같은 사정으로 주교좌를 떠났다. 두 사람, 즉 대부자와 채무자가 주교의 저택으로 찾아왔는데, 그중 첫 번째 사람은 두 번째 사람에게 빚을 지체 없이 갚을 것을 요구했고, 두 번째 사람은 빚을 인정하면서도 첫 번째 사람에게 약간의 유예 기간을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대부자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만약 그가 지금 당장 빚을 갚지 않으면, 즉시 그를 재판관에게 넘기겠다.” 성 이삭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복음의 계명에 따르면 네 것을 가져간 자에게서 빚을 전혀 받아내서는 안 된다면, 곧 빚을 갚겠다고 약속하는 사람에게 너는 얼마나 더 너그러워야 하겠느냐.” 그 잔인한 사람은 이에 대답했다. “복음의 계명은 이제 제쳐 두시오.” – 그리고 더 이상 듣기를 원치 않았다. 그때 하나님의 성인은 마음속으로 말했다. “그들이 주님의 복음 계명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내가 여기서 무엇을 더 할 수 있겠는가?” – 게다가 사막에서 익숙해졌던 침묵과 평온이, 불가피한 업무 처리로 인해 얼마나 많이 깨지는지를 보고는, 그는 보좌를 떠나 자신이 사랑하던 사막의 은둔처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죽을 때까지 이곳에 머무르며, 성 이삭이 악마와 육신과의 싸움에서 어떤 위업을 이루었는지, 활동적인 삶과 관조적인 삶 모두에서 요구되는 덕목에서 얼마나 큰 성과를 거두었는지, 어떤 영적 완성에 도달했는지, 그리고 이 세상에서 이미 어떤 은총을 누리게 되었는지 – 이에 대해 굳이 말할 필요는 없다. 그의 저술에서 이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성 이삭은 많은 글을 썼으며, 그가 쓴 모든 것은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는 나중에 글로 남긴 모든 것을 먼저 직접 실천으로 겪어 보았고, 자신의 실천을 통해 지도받는 이들을 가르쳤다. 그렇게 그는 사막에서도 순수하고 생명을 주는 물줄기를 끊임없이 뿜어내어 형제들의 영혼을 풍성하게 적셨다. 성 이삭의 저술은 시리아어와 아랍어로 우리에게 전해졌으며, 그중 절반 정도 가 그리스어로 번역되었고, 그리스어에서 러시아어로 번역되어 성부들의 저작 중 91번째로 수록되었다. 성 이삭은 6세기 말에 천상의 거처로 떠났다. 세르기 대주교의 달력에 따르면, 그의 기념일은 1월 28일이다.

 

수행에 관한 가르침

(짧은 글로 발췌)

1.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덕의 시작이다. 이는 믿음에서 비롯되며, 마음이 세속적인 산만함에서 벗어나, 맴도는 생각들을 모아 장차 올 회복에 대해 묵상할 때 마음에 심겨진다.

2. 덕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서는, 사람이 세속적인 일들로부터 자신을 멀리하고, 성령께서 시편 기자가 통해 지적하신 대로(시 22:3; 118:35), 의롭고 거룩한 길을 비추는 율법 안에 머무르는 것이 가장 좋다.

3. 삶의 여정의 시작은 항상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가난한 삶을 사는 것이다. 한 가지에 몰두하는 것은 다른 한 가지의 완성에 기여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데 몰두하면, 이는 가난한 삶에서 성공하는 데 도움이 되며, 소유욕을 버리는 데 성공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데 전념할 여유를 얻게 된다. 이 두 가지가 서로 돕고 조화를 이룸으로써 미덕이라는 건물을 속히 세우는 데 기여한다.

4. 세상에서 물러나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다. 여기서 ‘물러남’이란 육신의 이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인 일들로부터의 탈피를 의미한다. 세상에서 물러나는 미덕은 자신의 마음을 세상에 얽매이지 않게 하는 데 있다.

5. 사람 안에 은혜가 풍성해지면, 갈망하는 의로움으로 가는 길에서(혹은 그 길에 놓인 장애물 앞에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그에게 하찮은 것이 되며, 그는 자신의 영혼 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마땅히 감내해야 할 것으로 여기는 많은 이유를 찾아내어, 고통을 기꺼이 견디게 된다; 그때 육체에 불쾌하고 고통을 줄 수 있는 모든 것은, 그가 미래에 바라는 것에 비하면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사람 안에서 은혜의 결핍이 커지면, 그 사람 안에서 그리고 그에게 일어나는 일은 앞서 말한 것과 정반대가 된다. 그때 (오직 감각적인 것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탐구로 인한 지식이 그에게서 믿음보다 더 커지고,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이 사라지며,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다르게 이해하게 된다. 그런 사람은 끊임없이 두려움에 시달리는데, 이는 “어둠 속에서” 자신의 화살로 그를 “쓰러뜨리려” 매복해 있는 자들의 계략 때문이다(시 10:2).

6. 마음의 의심은 영혼에 두려움을 불러일으키지만, 믿음은 심지어 사지가 잘려나갈 때에도 의지를 굳건하게 할 수 있다. 네 안에서 육체에 대한 사랑이 어느 정도 우세하느냐에 따라, 네가 사랑하는 것을 둘러싼 수많은 대립 속에서 그만큼 대담하고 두려움 없이 설 수 없다.

7. 정결한 사람은 투쟁과 수고, 그리고 위업의 순간에 음란한 생각이 멈추는 사람이 아니라, 마음의 진실함으로 자신의 정신적 시선을 정결하게 지켜, 그것이 부도덕한 생각으로 뻗어 나가지 못하게 하는 사람이다. – 그리하여 양심의 정직함이 눈빛으로 그의 (순결의 법에 대한) 충실함을 증언할 때, 수치는 휘장처럼 생각의 은밀한 보금자리에 드리워지고, 그의 흠 없음은 순결한 처녀처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지켜진다.

8. 영혼이 이미 품고 있는 음란한 성향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신성한 성경을 연구하는 데 몰두하고 그 사상의 깊이를 깨달아가는 것만큼 도움이 되는 것은 없다. 생각이 말씀 속에 감춰진 지혜를 깨닫는 기쁨에 잠길 때, 그때 사람은 그로부터 깨달음을 얻는 만큼, 세상을 뒤로 하고 세상의 모든 것을 잊게 된다. – 그러나 마음이 신성한 성경의 바다 표면만을 맴돌며, 성경의 사상을 가장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볼 수 없을 때라도; 그때에도 성경을 이해하려는 열의에 몰두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그는 경건함에 대한 단 하나의 생각으로 자신의 사념을 단단히 묶어, 그것들이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것을 향하도록 치닫는 것을 막을 수 있다.

9. 성경에서 마주치는 모든 것에서, 그 말씀의 목적을 깊이 탐구하여 성인들의 사상의 심오함을 꿰뚫어 보고, 그것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도록 하라. 삶 속에서 신성한 은총의 인도하심을 받아 깨달음에 이르는 이들은, 마치 지적인 빛줄기가 기록된 구절들을 스쳐 지나가며, 단순한 단어들과 깊은 사상을 담아 영적 깨달음에 전해진 말씀들을 분별해 주는 것을 항상 느낀다.

10. 사람이 다의적인 구절을 깊이 파고들지 않고 읽으면, 그의 마음도 빈곤한 채로 남게 되며(아무것도 맛보지 못하고), 영혼의 놀라운 깨달음을 통해 마음에 가장 달콤한 기쁨을 선사하는 거룩한 힘이 그 안에서 사그라든다.

11. 모든 사물은 대개 자신과 닮은 것을 향하여 나아간다. 그리고 자신 안에 영의 몫을 지닌 영혼은, 그 안에 은밀한 영적 힘이 담긴 말을 들을 때, 그 말의 내용을 열렬히 자기 쪽으로 끌어당긴다. 영적으로 말해지고 그 안에 은밀한 위대한 영적 힘을 지닌 말이 모든 사람을 경이로움으로 깨우치는 것은 아니다. 덕에 관한 말은 세속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은 마음을 요구한다. 그러나 마음이 덧없는 것에 대한 걱정으로 무거운 사람에게는, 덕이 그것을 사랑하고 소유하고자 하는 생각을 일깨우지 못한다.

12. 존재 자체로 물질로부터의 초탈은 하나님과의 연합을 앞선다. 비록 은총의 섭리에 따라 종종 어떤 이들에게는 후자가 전자보다 앞서기도 하지만 말이다. 수도자들의 생활 방식은 일반 사람들에게 공통된 생활 방식과는 다르다. – 너는 일반적인 질서를 지키라. 만일 네 안에서 은혜가 앞서 간다면, 그것은 은혜의 일이며; 만일 앞서 가지 않는다면, 모든 사람이 걷는 길을 따라 너도 영적 기둥의 높이로 올라가라.

13. 미덕을 쌓는 데 있어 영혼의 끝없는 갈망은, 그와 결합된 육체의 가시적(감각적) 욕망 중 일부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전환시킨다. 모든 것은 절제가 아름다움을 더한다. 절제가 없으면 아름답게 여겨지는 것조차 해로워진다.

14. 네 마음으로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원하느냐? – 자선을 베풀어라. 보이지 않는 형상(하나님의 형상)을 자신 안에 새겨 넣는 영적 사랑으로 이르는 다른 길은 없다. 사람이 먼저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누가복음 6:36), 우리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만큼 너그럽고 자비로운 사람이 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15. 벽에 물을 그리는 화가가 그 물로 자신의 갈증을 해소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행동으로 뒷받침되지 않는 말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이 실제로 체험한 미덕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수고로 번 돈을 다른 사람에게 건네주듯이, 이를 듣는 이에게 전달한다. 그리고 자신의 노력으로 얻은 것으로 귀를 기울이는 이들에게 가르침을 심는 사람은, 담대하게 입을 열어 자신의 영적 자녀들에게, 노년의 야곱이 순결한 요셉에게 말했던 것처럼 말합니다: “나는 네 형제들보다 한 몫을 더 주리니, 이는 내가 아모리 족속을 내 칼과 내 활로 정복하였음이라” (창세기 48:22).

16. 어떤 이가 아주 잘 말했듯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양심에 찔리는 사람을 슬프게 하지만, 자기 안에 선한 증거를 가진 사람은 죽음을 삶만큼이나 갈망한다.

17. 만일 어떤 것이 네 영혼과 깊이 어우러졌다면, 그것을 단지 이 세상에서의 소유로만 여기지 말고, 그것이 너와 함께 미래의 세상으로도 이어질 것이라고 믿어라. 그리고 그것이 선한 것이라면, 기뻐하며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라. 만일 그것이 악한 것이라면, 슬퍼하고 탄식하며, 네가 육신에 있는 동안 그로부터 벗어나도록 힘쓰라.

18. 슬퍼하고 분노에 찬 이들의 가장 무거운 고통을 항상 마음에 간직하여, 네게 닥치는 작고 하찮은 고통들에 대해 마땅한 감사를 드리고, 기쁨으로 그것을 견딜 수 있도록 하라.

19. 냉담함과 나태함이 찾아올 때면, 마음속으로 과거에 네가 얼마나 부지런했는지, 사소한 일까지 얼마나 세심하게 돌보았는지, 어떤 위업을 보여주었는지, 네 행보를 가로막으려는 자들에게 얼마나 열정적으로 맞섰는지를 떠올려 보라. 이러한 회상을 통해 네 영혼은 마치 깊은 잠에서 깨어난 듯 다시 깨어날 것이며, 열정의 불꽃으로 다시 불타오를 것이며, 마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한 듯, 마귀와 죄에 대한 뜨거운 대항을 통해 예전의 위치로 돌아갈 것이다.

20. 십자가의 실천은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육신의 고통(정욕과의 투쟁에서 피할 수 없는 육체적 결핍)을 인내하는 것으로, 이를 ‘실천’이라 부른다. 다른 하나는 마음의 미묘한 활동, 신성한 묵상, 기도에 머무르는 것 등에 있으며, 이를 ‘관상’이라 부른다. 전자는 영혼의 정욕적인 부분을 정화하고, 후자는 영혼의 이성적인 부분을 밝게 비춘다. 첫 번째 부분에서 완전한 훈련을 마치기도 전에, 그 달콤함에 이끌려—게다가 게으름은 말할 것도 없이—이 두 번째 부분으로 넘어가는 모든 사람은, “땅에 있는 지체들” (골 3,5), 즉 십자가의 모욕을 감내하는 인내로운 수련을 통해 생각의 연약함을 치유하지 않은 채, 감히 마음속으로 십자가의 영광을 꿈꾸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고대 성인들이 말한 바, 만일 마음이 감각 기관들보다 먼저 십자가에 오르려 한다면, 감각 기관들이 연약함에서 치유되어 평온에 이르기 전에, 그 마음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닥친다는 뜻이다. 누구든지 마음이 수치스러운 정욕으로 더럽혀져 있고, 자신의 마음을 몽상적인 생각들로 서둘러 채우려는 자에게는, 먼저 슬픔으로 마음을 정화하지도 않고 육신의 욕망을 정복하지도 않은 채, 오직 귀로 들은 것과 잉크로 기록된 것에만 의지하여, 눈이 멀었음에도 어둠으로 가득 찬 길을 곧장 나아가려 했기 때문이다.

21. 미덕을 몸으로, 관조를 영혼으로, 그리고 이 둘을 감각적 부분과 이성적 부분이라는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 영에 의해 결합된 하나의 완전한 인간으로 상상해 보라. 영혼이 몸과 그 지체들을 형성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없는 것처럼, 미덕의 행위를 이루지 않고서는 영혼이 관상에 이르는 것도 불가능하다.

22. 세상에서 물러나야 하고, 세상을 버려야 하며, 세상에 있는 모든 것에서 정화되어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너는 먼저 평범한 개념이 아니라 순수한 이성의 개념으로 ‘세상’이라는 명칭 자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 이름이 어떤 차이들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이해하고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네 영혼이 세상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그리고 세상에 속한 것이 네 영혼에 얼마나 섞여 있는지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 ‘세상’은 ‘정욕’이라 불리는 것들을 포괄하는 총칭이다. 정욕들을 총체적으로 지칭하고자 할 때는 이를 ‘세상’이라 부르며, 각 정욕의 명칭에 따른 차이를 구분하고자 할 때는 이를 ‘정욕’이라 부른다.

23. 세상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그 아래에 포함되는 모든 것을 구별함으로써, 네가 세상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고, 또 어떻게 세상에서 벗어났는지도 알게 될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세상은 육신적인 삶과 육신의 계략이다. 사람이 이것에서 자신을 해방시켰다는 사실로 미루어, 그가 세상에서 벗어났음을 알 수 있다.

24. 사람들은 육체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나 강하여, 그로 인해 종종 훌륭하고 존경받을 만한 일을 행할 능력을 상실하곤 한다. 그러나 육체에 대한 두려움에 영혼에 대한 두려움이 더해지면, 육체적 두려움은 타오르는 불의 힘 앞에서 밀랍이 녹아내리듯 영혼의 두려움 앞에서 쇠약해진다.

25. 영혼은 본성상 무정하다. 정욕은 부수적인 것이며, 그 책임은 영혼 자신에게 있다. – 한때 영혼의 본성이 신성한 빛을 받아들임으로써 밝고 순수했다면, 그리고 원초적인 상태로 돌아갈 때 다시 그와 같이 된다면, 교회의 신도들이 주장하듯이, 영혼이 정욕적인 움직임에 빠지는 순간 자신의 본성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26. 영혼의 자연적 상태는 감각적·지적 피조물들을 아는 것이다. 초자연적 상태는 실재 그 자체인 신성을 관조하는 움직임(혹은 행위와 상태)이다. 반면 반자연적 상태는 정욕에 사로잡혀 정욕을 좇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영혼의 움직임이나 기질, 그리고 그러한 삶의 방식이다. 따라서 영혼의 정욕은 본질적으로 영혼에 속한 것이 아님이 명백하다.

27. 인간의 비밀을 알고자 하면서도 아직 영으로 분별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면, 각자의 말과 생활 방식, 성향을 통해 알아낼 수 있다. 마음이 청결하고 생활 방식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은 언제나 절제된 태도로 성령의 말씀을 전하며, 자신의 이해력에 따라 신성한 것과 자기 내면의 것에 대해 논한다. 그러나 마음이 정욕으로 가득 찬 사람은 그 정욕에 따라 혀도 움직이게 된다. 그가 영적인 것에 대해 말하게 되더라도, 정욕의 영향 아래서 논할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첫 만남에서 그런 사람을 알아보고, 순수한 사람은 그의 악취를 맡을 수 있다.

28. 수도자의 행실은 다음과 같다. 육체로부터의 해방, 기도 중의 육체적 수고, 그리고 끊임없이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다.

29. 기도와 기도 속의 관상은 별개의 일이나, 기도와 관상은 서로에게서 그 기원을 빌려온다. 기도는 파종이며, 관상은 수확이다. 이때 수확하는 자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환상을 보고 놀라게 되는데, 자신이 뿌린 작고 텅 빈 씨앗들에서 갑자기 눈앞에 그토록 아름다운 이삭들이 자라난 것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30. 구세주께서는 금식으로 우리 구원을 이루시는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기초 위에서 구세주를 따르는 모든 이들도 자신들의 수행의 시작을 확립합니다. 왜냐하면 금식은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 누가 이 사실을 되새긴다면, 이로 인해 뿌리내리지 않을 자가 누가 있겠는가? – 율법을 제정하신 분께서도 금식하신다면, 율법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자들 중 누가 금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바로 그 때문에 금식이 있기 전까지 인류는 승리를 알지 못했고, 마귀는 우리 본성 앞에서 단 한 번도 패배를 맛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 무기 앞에서 마귀는 진정으로 꺾이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는 이 승리의 지도자이자 선구자가 되셔서, 우리 본성의 정점에 첫 번째 승리의 면류관을 씌우셨습니다. 그리고 마귀가 사람 중 누군가에게서 이 무기를 보자마자, 이 적이자 고문자는 즉시 두려움에 사로잡히며, 구세주께서 광야에서 자신에게 안긴 패배를 생각하고 떠올리게 된다. 그리하여 그의 힘은 즉시 무너지고, 우리의 수장이신 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무기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는 타버린다. – 금식의 무기를 두른 자는 언제나 열정으로 불타오른다. – 그 안에 머무는 자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으며, 모든 사나운 정욕을 맞서 물리칠 준비가 되어 있다.

31. 그때야 비로소 일과 수고가 영혼에게 무정함을 가져다주고, “땅에 속한 지체들”을 죽이며, 우리가 침묵에 동참하고, 외부 감각의 인상들로 인해 영혼에 일어나는 혼란이 멈출 때, 생각에 안식을 선사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 일에서 성공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나무에 매일 물을 주면, 그 뿌리가 언젠가 마를 수 있겠는가? 매일 물을 보충하는 그릇에 물이 줄어들기라도 하는가? – 사람이 고요함에 이르면, 그때 비로소 영혼은 정욕들을 분별하기 쉬워지고, 내면의 사람은 영적인 일에 열정을 불태워 정욕들을 이겨내며, 날마다 영혼을 순결함으로 이끌어 올린다.

32. 누가 순결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 모든 사람을 선한 존재로 보고, 그 누구도 불결하거나 더럽혀진 존재로 보이지 않을 때, 비로소 그는 진정으로 마음이 순결한 것이다.

33. 침묵 속에서 자신의 방에 머무는 수행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 과연 신중하고 정신이 맑은 사람이 혼자 있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묻는 것이 필요할까? – 수도사가 자신의 방에서 울음 외에 또 어떤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보다 더 나은 일이 또 무엇이 있겠는가? 수도사의 그 자체의 존재와 고독은, 인간의 기쁨과는 거리가 먼 관 속에 머무는 것과 같아서, 그에게 울음이 곧 그의 활동임을 가르쳐 준다. 그리고 모든 성자들은 울음 속에서 이 세상을 떠났다. – 그러니 주님께서 우리에게 울음을 허락해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만일 우리가 다른 은사들보다 더 뛰어나고 탁월한 이 은총을 받게 된다면, 그 도움으로 우리는 순결에 이를 것이며, 일단 순결에 이르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떠날 때까지 그 순결은 우리에게서 결코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34. 마음이 청결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눈물의 달콤함을 누리지 않는 때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눈물 속에서 언제나 주님을 뵙는다. 아직 눈물에 젖어 있을 때, 그들은 기도의 절정에서 주님의 계시를 뵙는 은총을 얻으며, 눈물 없는 기도는 그들에게 없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울고 있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라”(마태복음 5:4)는 뜻이다. 왜냐하면 수도사가 눈물의 도움으로 정욕의 영역을 넘어 영적 순결의 평야에 들어섰을 때, 그때 비로소 울고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의 순결을 위해 주시는 위로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눈물을 흘리고 우는 것은 무정욕한 자들의 은사이다. 울고 탄식하는 이의 눈물이 일시적으로 그를 무정욕으로 인도할 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을 정욕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완전히 정화하고 해방시킬 수 있다면, 밤낮으로 이 일에 전념하는 이들은 또 얼마나 더할 것인가?

35. 어떤 성인은, 유혹을 두려워하여 극단에 이르지 않고 목숨을 잃지 않으려는 육신이 죄의 동맹자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그 육신이 죽도록 이끄십니다(수행자에게 스스로 죽음을 각오하도록 이끄십니다). 왜냐하면 죽지 않으면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누군가 주님께서 자기 안에 거하시기를 원한다면, 자신의 육신을 강제로 주님을 섬기게 하고, 사도에게 기록된 성령의 계명을 따라 일하며, 사도가 묘사한 육신의 행위들(갈 5,19)로부터 자신의 영혼을 지키게 한다. 그러나 죄에 물든 육체는 육신의 행실에서 안식을 얻지만, 하나님의 영은 그 열매 속에서 안식을 얻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육체가 금식과 겸손으로 지칠 때, 영혼은 기도로 굳건해지기 때문입니다.

36. 육신이 침묵의 슬픔으로 크게 짓눌리고, 결핍과 부족을 겪으며, 목숨을 잃을 지경에 다다를 때면, 대개 너에게 간청하며 말하곤 한다. “제발 조금만 자유를 주어 품위 있게 살게 해 주십시오. 저는 이제 올바르게 걷고 있습니다. 온갖 고통의 시련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연민으로 그 고통을 달래주고 약간의 안식을 주자마자, 육신은 조금씩 아첨 섞인 말로(그 아첨은 매우 강력합니다) 당신에게 속삭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라도 지금 우리가 따르는 것과 같은 규칙대로 잘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많은 시련을 겪었으니까요. 그저 나를 유혹해 보라. 내가 네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돌아갈 수 있다. 사막은 우리로부터 도망가지 않을 테니.” – 비록 그것이 간절히 애원하고 많은 약속을 한다 해도 믿지 마라. 그것은 말한 대로 이행하지 않을 것이다. 네가 그 요청에 굴복하면, 너를 다시는 일어나거나 빠져나올 수 없는 큰 타락 속으로 몰아넣을 것이다.

37. 유혹으로 인해 낙담에 빠지고 그것에 질렸을 때, 스스로에게 말하라. “너는 다시 불결하고 수치스러운 삶을 갈망하고 있구나.” – 그리고 만일 육신이 네게 “자신을 죽이는 것은 큰 죄다”라고 말한다면, 그에게 대답하라. “나는 불결하게 살 수 없기에 스스로를 죽이는 것이다. 내 영혼의 진정한 죽음, 즉 하나님을 향한 죽음을 보지 않기 위해 여기서 죽겠다. 순결을 위해 여기서 죽는 것이, 세상에서 비열한 삶을 사는 것보다 낫다. 나는 내 죄를 위해 이 죽음을 자발적으로 선택했다. 나는 스스로를 죽이는 것이니, 이는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다시는 그분을 노하게 하지 않겠다.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삶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늘의 소망에서 멀어지지 않기 위해 이 모든 모욕을 참아내겠다. 이 세상에서 내가 비열하게 살며 하나님을 노하게 한다면, 이 세상에서의 내 삶이 하나님께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38. 수도사에게 세상과 세속적인 것을 보는 것은 해롭다. 오랫동안 자기 자신과 침묵을 지키던 자가 갑자기 다시 세상의 소용돌이에 빠져,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들을 보고 듣게 되면, 그 마음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 – “우리가 무언가를 보고 듣는다고 해서 우리에게 아무런 해가 없으며, 은둔 중이든 세상 속에 있든 우리의 생각은 똑같고, 수도실 안이든 밖이든 우리의 겸손함이 흔들리지 않으며, 그로 인해 나쁜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사람이나 사물을 마주할 때 우리는 정욕의 동요를 느끼지 않는다고. 이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정신이 강인한 자들뿐이며, 그들은 상처를 입더라도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그런 건전함에 이르지 못했으며, 여전히 우리 몸에는 악취를 풍기는 상처들이 남아 있다. 이 상처들은 단 하루라도 돌보지 않고, 붕대를 감지 않고, 반창고를 붙이지 않고, 띠로 꽉 조이지 않으면 구더기가 우글거릴 것이다.

39. 한 번 믿음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고, 여러 번의 경험을 통해 그분의 도우심을 맛본 영혼은 더 이상 자신을 돌보지 않고, 경외심과 침묵으로 묶여 있으며, 다시 자신의 방식대로 행동하여 그것을 일에 활용할 기회를 갖지 못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혼을 은밀히 쉬지 않고 지켜보시며, 돌보시고, 끊임없이 살피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잃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런 경우 영혼은 마치 자신의 지식의 힘으로 스스로를 충분히 돌볼 수 있는 것처럼 자만하며 꿈꾸는 자로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40. 믿음의 빛이 비추는 이들은 더 이상 기도 속에서 하나님께 “이것을 우리에게 주십시오”라거나 “저것을 우리에게서 가져가 주십시오”라고 다시 청할 만큼 뻔뻔해지지 않으며, 스스로를 조금도 돌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믿음의 영적인 눈으로 매 순간 아버지의 섭리를 보기에, 그 참된 아버지께서 그들을 어떻게 보호해 주시는지 알기 때문이다. 그분은 헤아릴 수 없이 큰 사랑으로 모든 아버지의 사랑을 능가하시며, 무엇보다도 우리가 구하고, 생각하고,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하게 우리에게 도움을 주실 수 있고 그 능력을 지니고 계신다.

41. 믿음의 달콤함을 맛볼 자격을 얻고 다시 영적 지식으로 돌아간 자는, 값진 진주를 발견하고 그것을 놋쇠 그릇과 바꾸어 버린 사람과 같으며, 또한 완전한 자유를 버리고 두려움과 노예 상태로 가득 찬 빈곤의 처지로 되돌아간 사람과도 같다.

42. 지식이 상승하고 하강하는 데에는 세 가지 정신적 경로가 있다. 이 경로들은 곧 육체, 영혼, 영이다. 지성은 이성적인 피조물들에게 창조 초기에 주어진 신의 은총이며, 그 본성은 햇빛처럼 단순하고 나눌 수 없으나, 그 작용에 따라 변화와 분할을 겪게 된다. — 이 작용의 순서가 어떠한지 들어보라.

43. “지식의 첫 번째 단계”. 지식이 육체적 욕망에 따를 때, 그것은 다음과 같은 방식들을 하나로 통합한다: 부, 허영, 치장, 육체적 안락, 이 세상에서 통치하는 데 적합하고 발명, 예술, 과학 분야에서 혁신을 이끌어내는 언어적 지혜에 대한 추구, 그리고 이 가시적인 세상에서 육체를 빛나게 하는 그 밖의 모든 것들. – 이러한 구별되는 특징들로 인해 이 지식은 신앙에 반하게 된다. – 그리고 그것은 ‘순수한 지식’이라 불린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신성한 돌봄을 배제하며, 육체의 우세로 인해 마음에 이성적이지 못한 무력감을 심어주고, 그 모든 관심을 오로지 이 세상에만 완전히 집중시키기 때문이다. 이 사상의 자기 인식은 다음과 같다. 마치 그것이 사람을 은밀히 다스리는 정신적 힘이며, 그를 지켜보고 전적으로 그를 돌보는 신성한 섭리인 것처럼 여긴다. 그러므로 그것은 세상의 통치를 하나님의 섭리에 돌리지 않고, 사람 안의 모든 선한 것, 그에게 해로운 것들로부터의 구원, 그리고 우리 본성을 은밀히나 노골적으로 따라다니는 곤란과 수많은 역경으로부터의 자연스러운 경계조차도, 모두 자신의 근면함과 자신의 방법의 결과로 여긴다. 이것이 바로 자기 자신을 조롱하는 인식에 대한 개념이다. 그것은 모든 일이 자신의 계획에 따라 일어난다고 꿈꾸며, 이 점에서 이 세상에 통치자가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과 일치한다. 그러나 그것은 끊임없는 보살핌과 육체에 대한 두려움 없이는 존재할 수 없기에, 비겁함, 슬픔, 절망, 악마에 대한 공포, 사람에 대한 두려움, 강도에 대한 소문, 죽음에 대한 소문, 병에 대한 근심, 궁핍과 필요한 것의 부족에 대한 염려, 죽음에 대한 두려움, 고통과 사나운 짐승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이와 유사한 모든 것들이 있어, 이 지성은 마치 밤낮으로 파도가 끊임없이 요동치며 헤엄치는 이들을 덮치는 바다와도 같다. 이러한 삶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소망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그분께 맡기는 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과 관련된 모든 일에 대해 끊임없이 꾀를 부리고 방법을 고안하는 데 몰두하게 된다. 그런데 어떤 상황에서든 그가 고안한 방법이 효과가 없는 것으로 드러나면, – 그 속에서 신비로운 섭리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자신을 방해하고 반대하는 사람들과 다투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이 사고방식에는 사랑을 뿌리 뽑는 선악을 아는 나무가 심겨 있다. – 그 안에는 오만과 교만이 깃들어 있다. – 그것은 자만하지만, 정작 어둠 속을 헤매며, – 자신의 소유를 지상의 것들과 비교하여 평가할 뿐, 자신보다 더 나은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44. “두 번째 경지의 인식”. 사람이 첫 번째 경지를 떠나 영적인 생각과 소망에 몰두할 때, 그때 영혼 본성의 빛 안에서 다음과 같은 훌륭한 행실들을 실천한다: 금식, 기도, 자선, 신성한 경전 읽기, 덕스러운 삶, 정욕과의 투쟁 등. 왜냐하면 영혼 안에서 발견되는 모든 선한 행위와 모든 아름다운 특질, 그리고 그리스도의 궁정에서 섬기기 위해 사용되는 놀라운 방법들은, 이 두 번째 경지의 실천 단계에서, 그 힘을 발휘하여 성령께서 이루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마음에 믿음으로 이끄는 길을 제시하며, 그 안에서 참된 영생을 향한 지침을 모아 주신다. 회개 후에, 성령의 은총을 통해 마음을 정화하기 위한 선행과 수행의 노력이 이어진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깨달음은 여전히 육신적이며 복잡하다. 여기에는 오직 우리를 믿음으로 인도하고 이끄는 길만이 있을 뿐이다. 더 높은 차원의 인도가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성공한다면, 그리스도의 도움으로 그 차원으로 올라갈 기회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는 자신의 행위의 기초를 사람들과의 침묵 속의 은둔, 성경 읽기, 기도, 그리고 두 번째 인도와 관련된 모든 것을 완성하는 그 밖의 선한 일들에 두었을 때 가능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를 통해 모든 아름다운 일이 이루어지니, 이를 ‘행위의 인도’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감각적인 일들은 육체의 감각을 매개로 하여 외적인 단계에서 그 일을 이루기 때문이다.

45. 세 번째 단계의 수행은, 곧 완전함의 단계이다. 이제 사람이 어떻게 정제되어 영적인 것을 얻으며, 보이지 않는 힘들과 닮아가는지 들어보라. 그 힘들은 감각적으로 이루어지는 행위가 아니라, 마음의 세심한 배려로 수행되는 봉사를 통해 자신의 사명을 다한다. 지식이 세속적인 것과 세속적인 일에 대한 염려를 초월하여, 눈에는 보이지 않는 내면의 것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탐구하기 시작하고, 높은 곳으로 뻗어 나가며, 미래의 세상에 대한 염려와 우리에게 약속된 것을 갈망하며, 감춰진 신비를 탐구하는 믿음에 이르게 되면, 그때 믿음 그 자체가 이 지식을 흡수하고, 변모하여 다시 그것을 낳으므로, 그것이 온전히 영이 된다. 그때 비로소 그것은 날개를 펼치고 무형의 영역으로 비상하여, 만질 수 없는 바다의 심연을 더듬으며, 마음속으로 사고적·감각적 존재들의 본성 안에서 펼쳐지는 신성하고 경이로운 통치의 행적을 그려내고, 단순하고 미묘한 마음으로 깨달을 수 있는 영적 비밀들을 탐구한다. 그때 내면의 감각들은 불멸과 부패하지 않는 그 삶에서 있을 방식대로 영적 활동을 위해 깨어납니다. 왜냐하면 아직 이 세상에서, 마치 비밀리에라도 영적 부활을 미리 맛보게 되어, 만인의 부활에 대한 참된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46. 여기 세 가지 인식의 방식이 있다. – 사람이 선과 악을 구별하기 시작하는 때부터, 그가 이 세상에서 떠나기 전까지, 그의 영혼의 인식은 이 세 가지 차원에 머무른다. 그리고 온갖 거짓과 불의의 충만함, 진리의 충만함, 그리고 영의 모든 신비의 심연을 꿰뚫는 것은, 앞서 말한 세 가지 차원 안에서 하나의 인식이 이루어내며, 그 안에는 마음이 선으로, 악으로, 혹은 선과 악 사이의 중간으로 상승하거나 하강할 때의 온갖 움직임이 담겨 있다. 이 세 가지 차원은 교부들에 의해 ‘자연적’, ‘반자연적’, ‘초자연적’이라고 불린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이성적인 영혼의 기억이 상승하고 하강하는 세 가지 방향의 본질이다. 앞서 말한 대로, 누군가가 본성에 따라 진리를 행하거나, 본성을 초월하여 본성 밖에서 하나님을 관상하며 그 기억에 황홀해하거나, 혹은 자신의 분별력의 부를 낭비한 자처럼 수많은 악마들과 함께 일하며 돼지 떼를 먹이러 나가는 경우를 말한다.

47. 첫 번째 경지의 지식은 하나님을 따르는 여정을 위한 영혼의 열정을 식혀 준다. 두 번째 경지는 믿음의 단계에 있는 것으로 신속히 나아가기 위해 영혼을 달구어 준다. 세 번째 경지는 행함으로부터의 안식이며, 오직 마음의 수련을 통해 미래의 신비를 만끽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본성이 아직 죽어 있는 상태와 육체의 무거움 위로 완전히 승화될 수 없으므로, 사람이 육신에 거하는 동안에는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상태에 머무르게 된다. 마치 비참한 거지처럼, 그의 영혼은 미덕의 두 번째, 즉 중간 단계에서 봉사를 시작하며; 때로는 아들의 신분을 받은 자들처럼, 자유의 신비 안에서 그 은총을 베푸시는 분의 존엄에 걸맞게 영적 은총을 누리기도 하며; 다시금 육체의 도움을 받아 행하는 자신의 일들에 대한 겸손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이는 불완전한 세상에는 완전한 자유가 없기 때문이다.

48. 제2단계의 행위는 행함과 지속적인 실천에 있다. 반면 제3단계의 행위는 믿음의 실천으로, 이는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사고를 통해, 순전히 영적인 실천 속에서 이루어지며, 이는 감각을 초월한다. –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사람이 숭배받아야 할 신성한 위격들의 차이점과, 우리 본성을 받아들이신 성육신이라는 경이로운 신적 계획에 대해 이성으로 이해하는 그런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비록 그러한 믿음도 지극히 높기는 하지만; – 그러나 은혜의 빛으로 영혼 안에서 빛나며, 이성이 주는 증거로 마음을 굳건히 하여, 그 마음이 어떠한 의심도 없는 확고한 소망 속에서 흔들리지 않게 하는 바로 그 믿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귀로 듣는 것을 더하는 데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영혼 속에 감춰진 비밀과 육신의 아들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신성한 풍요로움을 보는 영적인 눈에서 드러나며, 이는 그리스도의 식탁에서 양식을 얻고 그리스도의 율법으로 가르침을 받는 자들에게 성령에 의해 계시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가 너희에게 위로자이신 성령, 곧 진리의 영을 보내리니, ‘세상은 그를 받아들일 수 없으나, 그분이 너희에게 모든 진리를 가르치실 것’이라” (요한복음 14:17, 26).

49. 또 다른 지식의 구분. 보이는 것을 다루거나, 감각을 통해 보이는 것에서 전달되는 것을 받아들이는 지식을 ‘자연적 지식’이라 한다. 반면, 사고의 힘과 내면 속의 무형 존재들의 본성을 다루는 지식은 ‘영적 지식’이라 불린다. 왜냐하면 그 인식은 감각이 아니라 영을 통해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인식(가시적 사물과 영적 사물에 대한 감각)으로 인해, 두 인식 모두 영혼에 외부로부터 들어온다. 반면 신성한 힘에 의해 주어지는 인식은 초자연적이라고 불리며, 이는 더욱 알 수 없고 인식 그 자체보다 더 높은 차원에 있다. 그리고 영혼은 이 지식을, 앞의 두 가지 지식에서와 같이 자신 외부의 물질로부터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비물질적이고, 미묘하며, 신속하고, 기대를 뛰어넘는 방식으로 드러나고 밝혀지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말씀, “천국은 너희 안에 있다” (누가복음 17, 21) – 형상의 모형으로 희망을 키우는 것도 아니고, “지키며” 오는 것도 아니라, 은밀한 마음에 새겨진 형상 안에서, 그것에 대한 생각 없이 저절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첫 번째 지식은 끊임없는 노력과 부지런한 배움의 결과이며, 두 번째는 선한 삶과 분별 있는 믿음의 결과이고, 세 번째는 오직 믿음에만 주어진 몫으로, 이를 통해 지식은 사라지고 모든 행위가 그 마무리를 맞이한다.

50. 기도나 매시간의 성경 읽기 중에 그 뒤를 이어 강한 감동과 끊임없는 회개가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 기도문의 힘을 의심하지 말라.

51. 경험에서 우러난 말은, 비록 그것을 말한 사람이 학식이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받아들여라. 왜냐하면 왕의 보물은 비록 세상에서 가장 많지만, 거지에게서 얻은 한 줌의 흙을 더 받아들이는 것을 소홀히 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 강이 되어 그 흐름 속에서 위대해지기 때문이다.

52. 선한 일에 대한 기억과 악한 일에 대한 기억은 마치 손가락처럼 우리에게, 우리 생각의 부끄러움을 가리키거나 우리 삶의 고귀함을 가리키며, 각각 그 본성에 따라 우리 안에서 선한 생각과 행동을 강화하거나 악한 생각과 행동을 강화한다. 우리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것들에 몰두하곤 한다. 그러나 이 마음속의 몰두 속에서 우리 삶의 몫이 그려지며, 그 안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볼 수 있다.

53. 기름으로 불을 밝히는 작은 등불과 같은 사랑이 있는데, 기름이 고갈되면 등불은 꺼지고, 빗물이 줄어들면 그 흐름이 멈추는 빗물과도 같다. 그러나 땅에서 솟아나는 샘과 같아서 결코 마르지 않는 사랑도 있다. 첫 번째는 인간의 사랑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을 근원으로 하는 신성한 사랑이다.

54. 예배 중에 시의 운율을 만끽하고, 네가 입으로 읊는 성령의 말씀이 지닌 의미를 깨닫고 싶으냐? – 시의 운율 수를 완전히 제쳐 두고, 시의 운율에 대한 지식을 고려하지 말며, 평소의 웅장한 낭송은 버려라. 대신 네 마음이 높은 깨달음으로 깨어날 때까지, 그리고 이를 통해 찬양이나 유익한 슬픔으로 이끌릴 때까지, 네 정신을 집중하여 성령의 말씀을 깊이 연구하라. – 그러나 노예처럼 (정해진 대로만 읽는) 행위에선 마음에 평화가 없으며, 혼란은 대개 의미와 이해력을 무디게 하고 생각을 흩어지게 한다. 혼란은 마귀의 전차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하다. 사탄은 마치 마부처럼 마음에 올라타, 수많은 정욕을 데리고 불행한 영혼 속으로 들어가, 그 영혼을 혼란에 빠뜨리는 습관이 있기 때문이다.

55. 원수가 네 마음에 심어 놓는 생각들에 반박하지 말고, 차라리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써 그 생각들과의 대화를 끊어라. 우리는 언제나 반대되는 생각들에 맞서 그들을 멈추게 할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경우, 종종 그로부터 오랫동안 치유되지 않는 상처를 입기도 한다. 네 모든 지혜와 분별력을 다하더라도 원수들은 너를 타격할 기회를 잡을 것이다. 그러나 네가 그들을 이긴다 해도, 그때에는 불결한 생각들이 네 마음을 더럽힐 것이며, 그들의 악취 가 오랫동안 네 코에 남을 것이다. 그러나 첫 번째 방법을 사용한다면, 너는 이 모든 것과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질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외에는 다른 도움이 없기 때문이다.

56. 네가 은둔처의 고요함 속에서 지내며 수공예에 몰두할 때, 아버지의 계명을 탐욕을 가리는 구실로 삼지 말라. 낙담함을 피하기 위해 마음을 동요시키지 않는 작은 일을 하되, 기도가 그 순서상 무엇보다 높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57. 네 수호자가 항상 너와 함께 계시며, 다른 피조물들과 함께 너도 단 한 분의 주님 아래 서 있다는 것을 확신하라. 그분은 단 한 번의 손짓으로 만물을 움직이시고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 그러니 용기를 내고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라. 악마도, 해로운 짐승도, 사악한 사람들도, 다스리시는 분의 뜻이 허락하지 않고 정해진 범위 내에서 자리를 내주지 않는 한, 너에게 해를 끼치거나 파멸을 초래하려는 그들의 뜻을 이룰 수 없다. 그러므로 네 영혼에게 말하라: “나를 지켜 주시는 수호자가 계시니, 하늘에서 명령이 내려지지 않는 한 어떤 피조물도 내 앞에 나타날 수 없다. 만일 나의 주님께서 악한 자들이 피조물을 지배하도록 허락하신다면, 나는 이를 슬퍼하지 않고 받아들일 것이니, 이는 나의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네가 유혹을 당할 때, 주님의 뜻이 너를 다스리고 주관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정확히 인식한 자로서 기쁨으로 충만해질 것이다. 그러니 주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네 마음을 굳건히 하라.

58. 말을 삼가는 것은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할 뿐만 아니라, 육체를 통해 행해지는 명백한 일들에 은밀히 큰 힘을 주어 이를 성취하게 하며, 또한 성부들이 말씀하셨듯이 은밀한 행실에도 빛을 비추어 줍니다. 왜냐하면 입을 다스리는 것이 양심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기 때문이며, 이는 오직 깨달음을 가지고 침묵을 지키는 자에게만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59. 선한 소망을 품은 모든 생각 뒤에는 “열심”이 따르는데, 그 열기는 불타는 숯과 같다. 그리고 이 열심은 대개 그 생각을 보호하며, 그 어떤 저항이나 방해, 장벽도 그 생각에 접근하지 못하게 막는다. 이것이 바로 선한 일을 이루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미덕이다. 그리스도를 입은 어떤 이는 이 열정을 하나님의 율법의 ‘개’이자 ‘수호자’라고 불렀다. 이 열정의 힘은 두 가지 방식으로 깨어나고, 굳건해지며, 불타오르며, 집(영혼)을 지키게 되는데, 또한 두 가지 방식으로 쇠약해지고, 졸음과 나태함에 빠지게 된다. 그것이 깨어나고 불타오르는 것은 (첫째로), 사람에게 어떤 ‘두려움’이 떠오를 때인데, 이는 그가 이미 얻은 선이나 얻고자 하는 선이 도둑맞거나 파괴되지 않도록 경계하게 만듭니다. 이 두려움이 자극되면, 질투는 밤낮으로 타오르는 화로처럼 불타오르며, 마치 케루빔처럼 끊임없이 주위를 살피고, 모든 적의 유혹으로부터, 외부와 내부 양쪽 모두에서 자신의 선을 온 힘을 다해 지킨다. 이 열정을 불태우는 또 다른 방법은, 영혼 속에서 미덕에 대한 갈망이 가장 크게 커질 때이다. 그리고 영혼 속에서 이 갈망이 어느 정도 커지느냐에 따라, 미덕에 대한 열정도 그만큼 불타오른다. 이 열정이 식게 되는 첫 번째 원인은, 영혼 속에서 선에 대한 갈망 자체가 줄어들거나 사라질 때이며; 두 번째 원인은, 어떤 확신과 대담함의 생각이 마음속에 들어와 굳어질 때이다. 그러면 사람은 어떤 힘으로부터 해를 입을 이유가 없다고 희망하고, 생각하며, 그 생각에 매달리게 된다; 그로 인해 경계의 무기를 내려놓고, 집은 파수꾼 없이 남게 되며, 개는 잠들어 오랫동안 경계를 소홀히 하게 된다. 이 모든 것은 영혼에 아주 미묘한 교만의 생각이 들어와 그곳에 둥지를 틀었기 때문이거나, 사람이 덧없는 일에 더 몰두하게 되었거나, 세속과 자주 교제하며 유혹에 빠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혹은 이는 모든 악의 근원인 ‘자만’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수행자가 세상과 교제할 때마다, 그의 영혼은 즉시 기력을 잃는다. 자만심 때문에 필연적으로 그의 영혼을 짓밟는 많은 사람들과 어울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과 교제하는 수행자의 마음은 마치 바다를 평온하게 항해하던 조타수가 갑자기 암초 한가운데로 빠져들어 난파당하는 것과 같습니다.

60. 선한 뜻을 선택하는 것은 원하는 자의 몫이지만, 그 선한 뜻을 완성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를 위해 사람은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우리 안에 솟아나는 선한 소망 뒤에는 잦은 기도가 따르도록 합시다. 그 기도는 우리에게 도움을 베풀어 달라는 것뿐만 아니라, 이 소망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지 아닌지를 보여 달라고 간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모든 선한 소망이 하나님께로부터 마음에 들어오는 것은 아니며, 오직 유익한 것만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61. 때로는 사람이 선한 것을 원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도우시지 않으실 때가 있다. 왜냐하면 때로는 이와 같은 소망이 마귀에게서 비롯되어 우리에게 유익이 아니라 해를 끼치기 때문이거나, 혹은 우리가 아직 그에 상응하는 삶을 살지 못해 원하는 일이 우리에게 과분하기 때문이거나, – 혹은 그것이 우리가 스스로 받아들인 삶의 방식과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거나, – 혹은 그것을 이행하거나 그 이행을 시작할 수 있는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거나, – 혹은 그것을 하기 위해 충분한 지식이나 육체적 힘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이거나, – 혹은 당시의 상황이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마귀는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그러한 일을 그럴듯하게 포장함으로써, 우리가 그 일에 끌려 마음의 평안을 잃거나 육체에 해를 입히도록 유혹한다. 그러므로 선한 소망조차도 신중히 검토해야 한다. 모든 일을 조언을 구하며 행하는 것이 더 낫다.

62. 덕은 슬픔의 어머니이며, 슬픔에서 겸손이 태어나고, 겸손에는 은혜가 주어진다. 그리고 그 보상은 더 이상 덕이나 덕을 위한 수고가 아니라, 그것들로부터 태어나는 겸손을 위한 것이다. 만일 겸손을 잃어버린다면, 처음의 것들은 헛된 것이 될 것이다.

63. 주님께서는 단순히 계명을 행하는 것만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계명을 제정하신 목적인 영혼의 개혁을 더 중요하게 여기신다. – 육신은 선한 일과 악한 일 모두에서 똑같이 작용하지만, 마음은 그 때 자신의 기분에 따라 의로워지거나 죄를 짓게 된다.

64. 유혹 없는 은사는 그것을 받는 자에게 파멸이다. 만일 네가 하나님 앞에서 선한 일을 행하여 그분께서 네게 은사를 주신다면, 그분께 간구하여 네게 합당한 만큼 겸손해질 수 있는 지혜를 주시거나, 그 은사를 지키는 수호자를 네 곁에 두시거나, 혹은 그것이 네게 파멸의 원인이 되지 않도록 그 은사를 거두어 주시기를 구하라. 부를 간직하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유익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65. 미덕은 고난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고난을 피하는 자는 의심할 여지 없이 미덕과도 헤어지게 된다. 미덕을 원한다면, 온갖 고난에 자신을 맡겨라. 고난은 겸손을 낳기 때문이다. 참된 깨달음에 도달할 때까지는, 시련을 통해 겸손에 한 걸음씩 다가갈 것이다. 고난 없이 자신의 미덕을 지키는 자에게는 교만의 문이 열려 있다.

66. 사람이 교만 속에 머물 때, 그 곁에 있어 그에게 의로움에 대한 염려를 일깨워 주던 섭리의 천사가 그에게서 멀어진다. 그러나 사람이 이 천사를 모욕하여 그가 그에게서 떠나면, 그때 낯선 자(어둠의 영)가 그에게 다가오며, 그 때부터 그는 더 이상 의로움에 대한 염려를 갖지 않게 된다.

67. 하나님께서는 종종 덕 있는 자들이 무언가로 시험받도록 내버려 두시며, 사방에서 그들에게 시험이 닥치도록 허락하시고, 욥처럼 그들의 육신을 치시며, 빈곤에 빠뜨리시고, 사람들이 그들을 외면하게 하시며, 그들이 얻은 것을 빼앗으시기도 하시나, 오직 그들의 영혼에는 해가 미치지 않게 하신다. – 우리가 진리의 길을 걸을 때 슬픔을 만나지 않거나, 병과 수고로 인해 육신이 지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며, – 우리가 덕을 실천하며 사는 것을 사랑하기만 한다면 변함없이 그 길을 걸을 수 있다. – 사람이 하나님을 따라 행진할 때, – 그와 유사한 어떤 일을 마주친다면; 그때 그는 자신의 길에서 벗어나서는 안 되며, 오히려 기쁨으로, 의심 없이 이를 받아들이고, 그에게 이 은혜를 보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또한 하나님을 위하여 유혹에 빠지게 되셨고, 이 길을 위해 슬픔을 겪은 선지자들과 사도들, 그리고 다른 성도들과 함께 고통에 동참하게 되셨음을 감사해야 한다. 사람에게서든, 악마에게서든, 육신에게서든 그에게 유혹이 닥치더라도, 이것이 그에게 감사의 계기가 되게 하라. 하나님과 함께 머물기를 원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진리를 위해 유혹을 보내시는 것 외에 다른 방식으로 은혜를 베풀지 않으실 리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이 이 위대함, 즉 유혹에 들어가 기뻐할 자격을 얻는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 일은 그토록 위대하여, 성 바오로는 사람이 하느님을 향한 소망을 위해 고난을 당할 자격을 얻는 것을 명백히 ‘은사’라고 부르며, 빌립보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은사는 그분을 믿는 것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해 고난을 당하는 것까지 포함합니다.”(빌립보서 1,29). 또한 성 베드로도 그의 서신에서 “의를 위하여 고난을 당할 때, 너희는 복이 있도다”(베드로전서 3,14)라고 썼는데, 이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너는 풍족하게 살 때 기뻐해서는 안 되며, 고난 중에 얼굴을 찡그리며 그것을 하나님의 길과 무관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길은 태초부터 대대로 십자가와 죽음을 통해 닦여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네게는 (하나님의 길을 무심하게 걷겠다는) 그런 생각이 어디서 나온 것인가? – 이를 통해 네가 하나님의 길 밖에 있고 그 길에서 멀어지고 있으며, 성인들의 발자취를 따르기를 원치 않거나, 스스로 다른 특별한 길을 만들어 그 길을 고통 없이 걷고자 한다는 것을 깨달아라. 하나님의 길은 매일 지는 십자가이다. 아무도 무심하게 살면서 하늘에 오른 사람은 없다. – 무심한 길이 어디로 끝나는지는 우리가 잘 알고 있다.

68. 참된 의인들은 항상 자신들이 하나님께 합당하지 않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하며, 그들이 참된 의인이라는 사실은 그들이 스스로를 저주받은 자요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로 인정하고, 이를 은밀히나 공개적으로 고백하며,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 생에 머무는 동안 수고와 고난 속에 머물러 있기를 원한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장차 올 세상에서 안식의 시간을 예비해 두셨다. 그리고 자신 안에 살아 계신 주님을 모신 자들은, 비록 때때로 영적인 위로가 신비롭게 주어지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안식에 머물거나 슬픔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지 않는다.

69. 성령의 뜻은 그분의 사랑하는 자들이 수고 가운데 머무르는 것이다. 안식에 머무르는 자들 안에는 하나님의 성령이 계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른 이들과 구별되는 점은 그들이 슬픔 가운데 산다는 것이며, 세상은 사치와 안식을 자랑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사랑하는 자들이 육신에 있는 동안 안식을 누리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셨으며, 오히려 그들이 세상에 있는 동안 슬픔과 괴로움, 수고, 궁핍, 벌거벗음, 궁핍, 굴욕, 모욕, 지친 몸, 슬픈 생각 속에 머물기를 원하셨으니, 이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 “세상에서 너희는 환난을 당하리라”(요한복음 16:33). 주님께서는 평안 가운데 사는 자들이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없음을 아시기에, 그들에게 평안과 기쁨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70. 성도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고난을 겪으며 하나님께 보여준 사랑으로 인해, 그들의 마음은 가리지 않은 얼굴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소망을 가지고 그분께 간구할 “담대함”을 얻게 된다. – 담대한 기도의 힘은 크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성도들이 온갖 슬픔으로 시험받게 하시고, 또한 그분의 도우심과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얼마나 돌보시는지를 체험으로 알게 하신다. 시련을 겪음으로써 그들은 지혜를 얻으며, 경험을 통해 모든 것에 대한 지식을 얻어 악마들에게 조롱당하지 않게 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오직 한 가지 선함으로만 단련하셨다면, 다른 부분에 대한 훈련이 부족하여 시련 속에서 눈먼 자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71. 사람이 먼저 악한 시련을 겪지 않는다면, 선한 것에 대한 미각을 갖지 못하여, 악한 상황 속에서 선한 것을 마주했을 때 그것을 자신의 소유인 양 지혜롭게 활용할 수 없다. 경험과 실천을 통해 직접 얻은 지식은 얼마나 기쁜지, 그리고 오랜 경험을 통해 스스로 그 지식을 체득한 이에게 그것이 얼마나 큰 힘을 주는지 — 이는 그 지식의 도움과 본성의 연약함, 그리고 신성한 힘의 도우심을 체험하고 이를 확신한 자들이 비로소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오직 그때에야 비로소 그들은 이를 깨닫게 되는데, 하나님께서 처음에는 그들에게 도움을 주시는 힘을 거두시고, 본성의 연약함과 유혹의 어려움, 원수의 교활함, 그리고 그들이 누구와 싸우고 있는지, 본성에 의해 어떤 모습으로 겉옷을 입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신성한 힘으로 보호받았는지, 얼마나 먼 길을 걸어왔는지, 하나님의 힘이 그들을 얼마나 높이 들어 올려 주셨는지, 그리고 이 하나님의 힘이 그들로부터 멀어지면 온갖 정욕과의 싸움에서 그들이 얼마나 무력해지는지를 깨닫게 될 때 비로소 이를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모든 것을 통해 그들은 겸손을 얻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며, 그분의 도움을 기다리고 기도 속에 머무르기 시작한다. 만약 사도의 말씀처럼, “많은 계시를 받았다고 자만하지 않도록, 내게 육체의 가시, 곧 사탄의 사자가 주어졌다”(고린도후서 12:7)는 대로, 하나님의 허락하심으로 이 악에 빠지지 않았다면, 그들이 이 모든 것을 어디서 얻었겠는가? 그러나 유혹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거듭 경험함으로써, 사람은 확고한 믿음도 얻게 되며, 이로 인해 두려움을 떨쳐내고 유혹 속에서도 평온함을 얻게 된다.

72. 유혹은 모든 사람에게 유익하다. 수행자들은 자신의 풍요로움에 무언가를 더하기 위해 유혹을 받으며, 나태한 자들은 해로운 것들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잠에 빠져 있는 자들은 깨어날 준비를 하기 위해,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는 자들은 그분께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하나님께 속한 자들은 담대함으로 기뻐하기 위함이다. – 훈련받지 못한 아들은 아버지의 집에서 얻은 재물을 자신에게 유익하게 쓰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먼저 시험하고 괴롭히시다가, 그 후에 은사를 베푸신다.

73. 사람은 무심할 때 죽음의 시간을 두려워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갈 때는 심판의 만남을 두려워하며, 온전히 하나님의 면전으로 나아갈 때는 그 두 두려움이 사랑에 삼켜진다. – 왜 그럴까? – 사람이 육신의 통제와 삶 속에 머물러 있을 때,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적인 깨달음과 선한 삶 속에 있을 때는, 그의 마음이 매 순간 미래의 심판을 기억하는 데 몰두하게 된다. 이는 그가 본성에 따라 바르게 서 있고, 영적인 차원으로 나아가며, 자신의 깨달음과 삶을 다지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 잘 준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의 그 깨달음에 이르게 되면, 그 안에 하나님의 비밀에 대한 깨달음이 일깨워지고 미래에 대한 소망이 확고해짐에 따라, 그때는 도살을 두려워하는 짐승과 같이 육신적인 사람도,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는 이성적인 사람도 사랑으로 삼켜지게 된다; 아들이 된 자는 사랑으로 단장되고, 두렵게 하는 징계 막대기로 훈계받지 않으며,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은 주님을 섬기겠나이다”라고 말하리라 (수 24, 15).

74. 항상 하나님을 생각하며, 오직 그분과만 자신의 깨달음의 대화 속에 머무는 자는 복이 있다. 하나님에 대한 기쁨은 이 세상의 삶보다 더 강하며, 이를 얻은 자는 고통을 눈여겨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신의 삶조차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삶보다 더 달콤하며, 사랑이 솟아나는 하나님에 대한 깨달음은 꿀과 벌집보다도 훨씬 더 달콤하다.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고통스러운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사랑에게 슬픔이 아니다. 사랑은 지식에서 비롯되며, 지식은 영혼의 건강에서 비롯되고, 영혼의 건강은 지속적인 인내에서 비롯된 힘이다.

75. 영생은 하나님 안에서 얻는 위로이며, 하나님 안에서 위로를 얻은 자는 세상의 위로를 쓸데없는 것으로 여긴다. 누구든지 성령으로부터 지혜를 받았다면, 그는 자신의 내면 깊은 곳과 감정을 통해 겸손한 품성을 가르쳐 주는 그 지혜 자체로부터 이를 깨닫게 된다. 누구든지 겸손에 이르렀다면, 세상과 교제하거나 말로 세상을 기쁘게 하는 것을 스스로 역겨워하는지, 그리고 이 세상의 영광이 그의 눈에 혐오스러운지 여부로 이를 알게 된다.

76. (행동으로 나타나는) 정욕은 이 세상의 사물들에 의해 유발되어, 삶의 필요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명분으로 사람을 휩쓸어 가는 유혹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유혹들은 이 세상이 존재하는 한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신성한 은총을 입은 사람은 이보다 더 높은 것을 맛보고 체험했으므로, 이러한 유혹이 자신의 마음에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대신에 그 안에서 다른, 그것들보다 더 나은 갈망이 우세해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욕망들 자체도, 그것들이 낳은 것들도 그의 마음에 접근하지 못하고, 밖에서 무력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이는 더 이상 욕망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그 욕망들에 대해서는 죽은 상태이며 다른 무엇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람이 분별력과 행실을 지켜 평온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마음속에 어떤 것에서도 오는 불안이 없고, 그의 의식이 다른 무언가를 만끽하여 충만해졌기 때문이다.

77. 만약 우리가 절제와 분별력을 꾸준히 실천한다면, 정열적인 유혹과의 싸움은 마음속에 전혀 스며들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혹이 마음속에 들어오는 것은 싸움 때문이 아니라, 영혼을 가득 채운 의식과 통찰력의 포만감, 그리고 영혼 속에 깃든 경이로운 관조의 갈망 때문이다. 사람이 살아 있는 한, 자신의 보물을 지키기 위해서는 절제와 신중함, 그리고 기민함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에게 정해진 한계(금식)를 벗어나면, 그는 쇠약해지고 약탈당하게 될 것이다. 열매를 볼 때까지만 수고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힘써야 한다. 왜냐하면 종종 익은 열매조차도 갑작스러운 우박에 맞아 꺾이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78. 우리가 선한 묵상(마음속의 교훈)에 익숙해지면, 정욕을 마주하는 즉시 그것을 부끄러워하게 될 것이다. 또한 정욕이 지닌 죄악성 때문에 정욕에 가까이 가는 것 자체를 부끄러워하게 될 것이다.

79.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어떤 일을 행하고자 할 때, 그 소망의 한계를 죽음으로 삼으라. 그리하면 실제로 모든 정욕과의 투쟁에서 순교의 경지에 오르게 될 것이며, 끝까지 견디고 게을러지지 않는다면, 그 한계 안에서 마주치는 어떤 해악도 입지 않을 것이다. 약한 이성의 생각은 인내의 힘마저 약하게 만들지만, 굳건한 마음은 그 생각을 따르는 이에게 본성에는 없는 힘을 부여한다.

80. 이 세상의 삶은 판에 글자를 새기는 것과 같다. 누구든지 원하고 바라면, 거기에 더하거나 뺄 수 있으며, 글자를 바꿀 수도 있다. 그러나 내세의 삶은 깨끗한 두루마리에 기록되고 왕의 인장으로 봉인된 필사본과 같아서, 더 이상 추가나 삭제가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변화의 한가운데에 있는 동안에는 스스로를 주의 깊게 살피고, 우리 손으로 직접 쓰는 삶의 원고에 대한 권한을 가진 동안에는 선한 삶으로 그 내용을 보충하고, 과거 삶의 결점을 지워 나가도록 노력합시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이 생을 떠나는 그 순간이 올 때까지 선한 일에도 악한 일에도 인장을 찍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81. 기도는 오랜 시간 기도에 머무르며 마음이 지혜로워질 수 있도록 연습이 필요하다. 기도는 은둔 생활(고독, 모든 외적인 것에서 생각을 돌리는 것)로 시작된다. 은둔 생활은 기도를 위해서 필요하며,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얻기 위함이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사랑할 이유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82. 우리는 비밀리에 이루어지는 하나님과의 모든 대화, 선한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모든 염려, 영적인 것에 대한 모든 묵상이 기도로 확립되며, 기도의 이름으로 불리고, 이 이름 아래 하나로 통합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다양한 성경 읽기를 이해하든, 하나님을 찬양하는 입의 음성을 이해하든, 주님을 향한 염려 어린 슬픔을 이해하든, 육신의 절을 이해하든, 시편 찬송을 이해하든, 또는 참된 기도의 전 과정을 구성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이해하든, 그로부터 하나님의 사랑이 솟아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기도에서 비롯되고, 기도는 은둔 속에서 머무름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더 편안하게 대화할 수 있도록 은둔이 필요하다.

83. 네 안에 선한 변화가 일어날 때 자만심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라. 이 자만심의 미묘함을 분별하는 데 있어 네 자신의 연약함과 무지함을 기도 중에 주님께 성실히 고백하여, 네가 버림받지 않고 부끄러운 일에 유혹받지 않도록 하라. 교만 뒤에는 음행이 따르고, 자만심 뒤에는 미혹이 따르기 때문이다.

84. 다른 모든 수행의 일들을 한쪽에 두고, 침묵을 다른 쪽에 올려놓으면, 침묵이 저울에서 더 무겁게 나간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람들에게는 많은 조언이 있지만, 누군가 침묵과 가까워지면 그 조언들을 지키는 일은 그에게 불필요해질 것이며, 이전의 행실들도 불필요하게 드러날 것이며, 그 자신은 그 모든 행실을 뛰어넘은 존재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완전함에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85. 자선이 항상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하라. 우리의 자비는 거울이 되어, 우리 자신 안에서 하나님의 본성과 실체에 있는 그 닮음과 참된 형상을 볼 수 있게 하라. 잔인하고 자비롭지 않은 마음은 결코 정화되지 않을 것이다. 자비로운 사람은 자기 영혼의 의사이다. 왜냐하면 마치 강한 바람처럼 자신의 내면에서 정욕의 어둠을 몰아내기 때문이다. 이는 복음의 생명의 말씀에 따라, 우리가 하느님께 빌려드린 선한 빚이다.

86. 네 침상에 다가갈 때, 침상에게 말하라. “오늘 밤, 어쩌면 너는 내게 관이 될지도 모르겠다, 침상아. 그리고 나는 오늘 밤, 일시적인 잠 대신 영원한 미래의 잠이 내게 닥쳐올지 모르겠다.” 그러므로 네게 다리가 있는 동안, 풀 수 없는 얽힘에 묶이기 전에 행함을 좇아 가라. 네게 손가락이 남아 있는 동안, 죽음이 오기 전에 기도로 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라. 네게 눈이 남아 있는 동안, 눈이 흙으로 덮이기 전에 눈물을 가득 채워라. 바람이 살짝 불기만 해도 시들어 버리는 장미처럼, 네 안의 구성 요소 중 하나에 숨이 멎는다면, 너는 죽을 것이다. 사람아, 네 마음속에 곧 떠날 때가 다가왔음을 새기고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말하라. “보라, 문 앞에 이미 나를 데리러 온 사자가 있다. 그런데 내가 왜 여기 앉아 있는가? – 나의 이주는 영원하며,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87. 그리스도와의 대화를 사랑하는 자는 고독을 사랑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과 함께 있기를 좋아하는 자는 이 세상의 친구이다. 회개를 사랑한다면, 침묵도 사랑하라. 침묵 없이는 회개가 완전함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침묵, 즉 회개의 어머니를 사랑한다면, 침묵 때문에 네게 쏟아질 사소한 육체적 고통과 책망, 모욕도 기꺼이 사랑하라. 침묵에 대한 헌신은 죽음을 끊임없이 기다리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가짐 없이 침묵의 길에 들어서는 자는, 이 삶의 방식과 불가피하게 수반되는 것을 감당할 수 없다.

88. 우리 마음속에서 세상이 죽어 없어질 때까지 침묵을 사랑합시다. 항상 죽음을 기억하며, 이 생각으로 우리 마음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면, 세상의 쾌락들은 우리에게 천한 것이 될 것입니다.

89. 한 침묵 수도자가 말하기를, “나는 독서와 기도 중에 시 구절들이 내게 달콤하게 다가오게 하기 위해 침묵 속에서 수련한다. 그리고 그 의미를 깨달음으로써 얻는 기쁨에 내 혀가 잠잠해질 때, 마치 어떤 꿈속에서처럼 내 감정과 생각이 수축되는 상태에 이른다. 그리고 이 침묵이 지속되면서 기억의 소용돌이에서 내 마음이 가라앉을 때, 내면의 생각들을 통해 기쁨의 파도가 끊임없이 내게 밀려오는데, 이는 기대 이상으로 갑자기 찾아와 내 마음을 달래준다.”

90. 또 다른 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침묵은 새로운 생각으로 이어지는 구실과 이유를 잘라내며, 그 벽 안에서 우리가 이전에 몰두했던 것에 대한 기억을 낡아지고 시들게 만듭니다. 그리고 생각 속에서 옛 것들이 낡아지면, 그때 비로소 마음은 그것들을 바로잡으며 본래의 질서로 돌아갑니다.”

91. 또 다른 이는 이렇게 말한다. “자신에게 기쁨을 주는 행위를 선택하라. 바로 밤마다 끊임없이 깨어 기도하는 것이다. 그 시간 동안 모든 성부들은 낡은 사람을 벗어 던지고, 마음의 갱신을 얻었다. 이 시간에 영혼은 그 불멸의 생명을 느끼며, 그 느낌을 통해 어둠의 옷을 벗어 던지고 성령을 받아들인다.”

92. 또 다른 이는 말한다. “이 (외적인) 감각들을 영혼의 권세 아래 두는 것은 침묵과 사람들과의 단절 없이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성적인 영혼이 본질적으로 이러한 감각들과 결합되어 있고 얽혀 있기 때문에, 사람이 은밀한 기도에 깨어 있지 않으면 그 감각들과 자신의 생각에 이끌려 무의식적으로 그 영향 아래 놓이게 되기 때문이다.”

93. 금식의 땀이라는 씨앗에서 절제의 이삭이 자라나듯이, 포만감에서는 음탕한 욕망이, 과식에서는 불결함이 솟아난다. 굶주리고 겸손한 배를 가진 자에게는 결코 부끄러운 생각이 영혼에 스며들지 않는다.

94. 네 아름다움, 곧 절제가 어떻게 빛나는가! 맨땅에 엎드려 있고, 잠을 앗아가는 굶주림의 수고와, 음식을 절제할 때 갈비뼈와 배 사이에서 깊은 해자처럼 변해 버리는 육체의 고통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몸속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음식과 육체의 모든 안식은 우리 안에 부끄러운 상상과 추한 환상을 만들어 내며, 그것들은 생겨나면서 우리를 자극하여 은밀히 부끄러운 행위로 기울게 한다. 반면, 빈 속과 우리의 생각은 사막과 같은 땅을 만들어, 생각에 의해 방해받지 않고 모든 반항적인 생각으로부터 침묵하게 한다.

95. 침묵을 지키는 이에게 필요한 몇 가지 지침: 만약 여러 예배 중에, 가능한 한 마음이 딴 데로 떠나는 것을 피하고 있는데, 갑자기 네 입에서 나오는 말이 끊기고, 네 자유의 의지와 상관없이 침묵의 족쇄가 네 영혼에 씌워지며, 이것이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는 데 이어진다면; 그때는 네가 침묵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온유함이 네 안에서 깊어지기 시작했음을 알아라. 단순한 침묵은 진실로 비난받을 만하기 때문이다. 만약 네 영혼 속에서, 그곳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과, 모든 기억, 그리고 네 침묵 속에서 일어나는 묵상 중에, 네 눈이 눈물로 가득 차고, 눈물이 강요받지 않고도 네 뺨을 따라 흐르는 것을 느낀다면; 그때는 네 앞에 장벽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여 대적하는 자들이 파멸당할 것임을 알라. 때때로 네가 미리 의도하지도 않았고 평소의 순서도 벗어나서, 네 생각이 네 내면으로 깊이 잠기곤 하며, 그 상태가 한 시간 정도나 어느 정도의 시간 동안 지속된 뒤, 네 생각 속에 평화가 깃들어 있음을 깨닫는다면—그리고 이런 일이 네게 항상 반복된다면; 그때는 구름이 네 성막을 덮기 시작했음을 알라. 만일 이 일에 착수했을 때, 너를 괴롭히는 정욕들로부터 평화를 얻지 못한다면, 놀라지 말라. 태양 빛이 멀어지면 평화의 심연이 오랫동안 어두운 채로 남아 있듯이, 공기 중에 퍼지는 약의 냄새와 향기도 흩어지고 사라지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리듯이; 하물며 정욕은 마치 정육점에서 피를 핥는 데 익숙해진 개들이 평소 먹이를 주지 않을 때, 그들의 옛 습관의 힘이 꺾일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짖어대는 것과 같다. 그러나 네가 앞으로 나아갈 때, 다음과 같은 분명한 징후들을 네 영혼 속에서 가까이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 모든 일에서 희망으로 굳건해지고 기도로 풍요로워질 것이며, – 사람들과 마주칠 때마다, 그리고 인간 본성의 연약함을 느낄 때마다 유익이 되는 생각이 네 마음에서 결코 고갈되지 않을 것이며(그런 모든 순간이 너를 교만으로부터 지켜줄 것이다), – 이웃의 결점은 네 눈에는 주목할 가치가 없는 것이 될 것이며, – 너는 장차 올 세상에 머물고 싶은 것과 같은 열망으로 이 육신을 떠나기를 갈망하게 될 것이며, – 명백히나 은밀히 네게 닥치는 모든 슬픈 시련에 대하여, 이 모든 것이 정의와 심판에 따라 네게 다가온 것임을 깨닫고, 그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것이다.

96. 정욕은 어떤 형상들을 통해서든, 형상 없는 감정을 통해서든, 그리고 처음에는 정욕적인 움직임이나 생각이 없는 기억을 통해서도 움직이게 되며, 그 기억은 나중에 자극을 일으킨다.

97. 끊임없이 경건하게 성경을 읽으며, 그 뒤를 이어 자주 절을 올리는 것은 마음의 평온한 상태를 성실하게 이룩하는 데 지체 없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를 얻은 자는 바로 이러한 수단을 통해 얻은 것이다. 이를 다시 얻고자 하는 자들은 침묵 속에 머물러야 할 뿐만 아니라, 앞서 말한 바를 실천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들은 자신의 생각으로 자신의 영혼 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하며, 내면의 실천에 힘쓰고, 또한 그 행위 자체에 대한 성찰, 특히 우리에게 친근하게 느껴지는 특정 감각을 통해 선한 기분을 확고히 해주는 바로 그 행위들에 대해 깊이 성찰해야 한다.

98. 모든 이성적인 본성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변화가 있으며, 모든 사람에게 매시간 변화가 일어난다. 분별력 있는 사람은 스스로를 시험해 보며 이를 깨달을 수 있다. 만약 정신을 차리고 마음속에서 자신을 관찰한다면, 자신의 생각이 언제 어떤 변화를 겪는지, 평화로운 상태에서 얼마나 갑작스럽게 혼란에 빠지는지, 그리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 쉽게 알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해 성 마카리우스는 형제들에게 주는 교훈에서, 상황이 반대로 변할 때 절망에 빠지지 말라고 썼다. 왜냐하면 순결의 단계에 서 있는 이들에게도, 마치 공기가 식듯이, 더 나은 상태에서 더 나쁜 상태로 떨어지는 일이 항상 일어나기 때문이다. 비록 그들에게 게으름이나 자기 방종이 없더라도 말이다; 오히려 그들이 자신의 규율을 지키고 있을 때조차도, 자신의 의지와는 정반대되는 이러한 타락이 그들에게 일어납니다. 복자 마르코도 “모든 사람에게 변화가 일어나니, 마치 공기처럼”이라고 말하며 이를 확인합니다. “모든 사람”이란, 즉 낮은 자나 나쁜 자뿐만 아니라 완전한 자에게도 해당된다는 뜻입니다. 자연에서 추위가 왔다가 곧이어 더위가 찾아오고, 우박이 내린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맑은 날씨가 찾아오듯이, 우리의 수행에서도 때로는 시련이, 때로는 은총의 도움이 찾아옵니다; 때로는 영혼이 격동 속에 빠져 잔혹한 파도가 밀려오기도 하지만, 다시 변화가 일어납니다. 은총이 찾아와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기쁨과 평화, 순결하고 온화한 생각으로 채워주기 때문입니다.

99. 그러므로 네가 시달릴 때에도 절망하지 말고, 평안이 깃들 때에도 교만해지지 말라. 오히려 그 반대로, 네 마음속의 불순한 생각들과, 시달림과 혼란, 그리고 생각들이 뒤죽박죽이던 순간에 네 마음에 자리 잡았던 부적절한 이미지들을 더 잘 살펴보아라; – 또한 네가 얼마나 빨리 정욕에 빠져들었는지, 그리고 정신이 흐려진 상태에서 그들과 대화를 나누었는지도 생각해 보라.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우리로 하여금 겸손해지도록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에게 이르게 한 것임을 알라. 그분은 우리 각자를 돌보시며, 누구에게나 유익한 것을 마련해 주신다.

100. 겸손은 별다른 공로 없이도 많은 죄를 용서받을 수 있게 해 주지만, 겸손이 없으면 공로도 무용지물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많은 해를 끼치기도 한다. 모든 음식에 소금이 필요한 것처럼, 모든 미덕에는 겸손이 필요하다. 겸손을 얻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책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낮추고 분별력 있게 아파하며 슬퍼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얻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101. 우리 주님께서는 기도 속에서 우리의 연약함을 지탱할 버팀목을 제시하시며 말씀하셨다. 깨어 있으라. ‘깨어 기도하여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하라’”(마태복음 26:41). 기도하고 게으르지 말며, 언제나 “깨어 기도하며”(골 4,2.3) 지내십시오. “구하라 그리하면 받을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그리하면 열릴 것이니라. 구하는 자는 다 받고, 찾는 자는 다 찾으며, 두드리는 자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마태복음 7:7, 8). 주님께서는 특히 이 말씀을 확증하시고, 한 친구가 한밤중에 다른 친구에게 가서 빵을 구했던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더 큰 근면함을 촉구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친구이기 때문에 주지 않을 것이 아니라, 그의 무례함 때문에 일어나서 그가 구하는 만큼 줄 것이다” (누가복음 11, 8). 그러니 너희도 기도하고, 게으르지 말라. 얼마나 말로 다 할 수 없는 담대함의 자극인가!

102. 주님께서는 우리가 죽기 전까지 타락할 가능성을 우리에게서 빼앗지 않으실 것임을 아십니다. 즉, 선덕에서 악덕으로의 전환과 같이 우리에게 매우 가까이 다가온 변화, 그리고 인간과 그 본성이 정반대의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다. 그렇기에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신중을 기하고 끊임없는 기도에 힘쓰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명하신 것은 단지 명백한 변화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항상 우리와 마주치는 것들이 미묘하고 헤아릴 수 없어, 우리가 종종 의도하지 않게 처하게 되는 그런 상황들 속에서 우리 이성의 이해로는 다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비록 우리의 생각이 매우 확고하고 선에 굳게 붙어 있더라도, 그분의 섭리는 수없이 우리를 유혹의 경계 안에 두시며, 그 유혹 속으로 내몰기도 하시는데, 이는 복된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내게 육체의 가시가 주어졌나니”(고린도후서 12:7–9)와 같습니다.

103. 이 세상은 경쟁이자 경주의 장이다. 이 시대는 투쟁의 시대이다. 그리고 투쟁의 시기, 즉 경합의 시기에는 법이 적용되지 않는다. 즉, 왕은 경합이 끝나고 모든 사람이 왕 중의 왕의 문 앞에 이끌려 가서, 경합에서 승리를 거두었는지 아니면 굴복했는지 시험을 받기 전까지는 자신의 군인들에게 제한을 두지 않는다. 여기에는 단 하나의 법칙이 있으니, 곧 깨어 있고 맞서 싸우는 것이다. – 그러니 기도를 소홀히 하지 말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는 데 게으름 피우지 말자. 주님 없이는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아무것도 행할 수 없으니 말이다. – 우리가 이 세상에 있고 육신에 머물러 있는 한, 설령 하늘의 궁창까지 올라간다 해도, 일과 수고 없이 지내거나 돌봄 없이 있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굳게 마음에 새기자.

104. 이 여정의 완성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회개, 순결, 그리고 자기 수양에 있다. (회개한 자는 정욕과 싸움을 시작하며, 마음이 정화될 때까지 싸운다. 마음의 정화는 싸움의 끝이자, 완전함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105. 어떤 이에게 “회개란 무엇인가?”라고 물었더니, 그는 “과거를 버리고 그것을 슬퍼하는 것”이라고 대답하였으며, 또한 “부서지고 겸손한 마음”이라고도 했다.

106. 또 누군가에게 “사람이 어떻게 겸손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죄와 죽음의 가까움을 기억하고, 초라한 옷을 입으며, 언제나 마지막 자리를 택하고, 어떤 경우에도 기꺼이 가장 하찮고 천한 일을 맡으며, 불순종하지 않고, – 침묵을 지키는 것, – 모임에 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남아 어떤 직책에도 선출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 – 어떤 물건도 전적으로 자신의 처분하에 두지 않는 것, – 많은 사람과의 대화를 싫어하는 것, – 이득을 탐하지 말고, 나아가 어떤 사람을 무턱대고 비난하거나 고발하는 마음이나 시기심보다 더 높은 정신을 갖되, – 모든 사람에게 손을 뻗는 사람도, 모든 사람의 손길이 닿는 사람도 되지 말고, 오직 혼자서 고독 속에서 자신의 일에 전념하며, 자기 자신 외에는 세상의 그 어떤 일에도 관여하지 말 것. 간단히 말해, 방랑의 삶과 빈곤, 그리고 고독 속에서 지내는 것—바로 이것에서 겸손이 솟아나고 마음이 정화된다."

107. 완전함에 이른 자들의 표징은 이러하다. 만일 그들이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하루에 열 번씩 화형에 처해진다고 해도, 모세(출 32, 32)와 복자 바울(롬 9, 3), 그리고 다른 사도들이 보여준 것처럼,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을 사랑하심으로써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의 죽음에 내어주셨다. 만일 그분께 더 귀중한 것이 있었다면, 그것마저 우리에게 주셔서 이를 통해 우리 인류를 당신께로 이끌어 주셨을 것이다. – 이를 본받아, 모든 성인들이 완전함을 추구하며, 이웃에 대한 사랑의 완전함으로 하나님과 닮아가고자 애쓴다.

108. 누구도 자신의 희망이 내면에 깃들어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면, 이 사랑의 경지에 오를 수 없다. 이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은 사람에 대한 사랑을 얻을 수 없다. 누군가 사랑을 얻게 되면, 그 사랑과 함께 하나님 자신으로 옷 입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을 얻은 자는 그분과 함께 다른 어떤 것도 얻으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육신을 벗어던져야 한다. 만일 세상에 대한 사랑으로 이 세상과 이 삶을 입는 자가 있다면, 그는 이를 버리기 전까지는 하나님을 입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이를 증언하시며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이를 버리지 않고 “자기 목숨을 미워하지 않는 자는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누가복음 14:26). 이를 버릴 뿐만 아니라 미워해야 한다.

109. 왜 희망은 그토록 달콤하며, 희망이 있을 때 모든 일이 쉬워지는가? – 바로 그 시간에 성인들의 영혼 속에 (행복에 대한) 자연스러운 소망이 깨어나기 때문이며, 희망은 그들에게 수도원에서 자신의 잔으로 이를 마시게 하여 그들을 황홀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그들은 더 이상 수고를 느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수고와 슬픔에 무감각해지며, 여정의 전 과정 동안 마치 공중을 걷는 것처럼, 인간의 발걸음으로 걷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게 길의 어려움은 보이지 않고, 그들 앞에는 언덕도 강물도 없으며, 길 위의 험한 곳도 매끄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이사야 40:4). 그들의 주의는 아버지의 품으로 향하고 있으며, 희망 그 자체가 마치 손가락처럼 매 순간 그들에게 멀리 있고 보이지 않는 것, 그러나 믿음의 은밀한 눈으로는 볼 수 있는 것을 가리키며, 이 먼 것을 향한 갈망이 마치 불처럼 영혼의 모든 부분을 불태웁니다. 그곳으로 그들의 모든 생각의 열망이 뻗어 나가며, 그들은 항상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 서둘러 나아갑니다. — 이처럼 희망은 마치 불처럼 그들을 달구어, 그들은 기쁨으로 이루어지는 이 급류와 같은 끊임없는 흐름 속에서 스스로에게 휴식을 줄 수 없습니다.

110. 무정(無情)은 단순히 정욕을 느끼지 않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기 안에 받아들이지 않는 데에도 있다. 성인들이 쌓아 올린 명백하고 은밀한 수많은 다양한 미덕 덕분에, 그들 안의 정욕은 쇠약해졌으며, 그들의 영혼과 마음을 쉽게 뒤흔들 수 없게 되었다. 또한 그들의 이성은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으니,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은 언제나 가장 탁월한 덕행에 대한 사색과 대화를 통해 의식 속에서 일깨워지는 생각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욕이 일기 시작하자마자, 이성은 그들과 가까워지면서 이성에 스며든 어떤 통찰에 의해 갑자기 사로잡히게 되며, 성 마르코가 말했듯이, 정욕은 그들 안에 마치 한가한 상태로 남아 있게 된다.

111. 하나님의 은총으로 덕행에 힘쓰며 깨달음에 가까워진 마음은, 영혼의 악하고 무지한 부분을 거의 느끼지 못한다. 깨달음이 그를 높은 곳으로 끌어올려 세상의 모든 것에서 멀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성인들의 흠 없음과, 그들의 지성이 지닌 섬세함과 유연함, 예리함, 그리고 그들의 수련 덕분에, 그들의 육신이 건조해짐에 따라 그들의 지성은 정화되고 깨달음을 얻게 된다. 또한 침묵을 수련하고 오랫동안 그 상태에 머무름으로써, 모든 내적 관상이 쉽고 빠르게 주어지며, 관상 대상들은 그들을 경이로움에 빠지게 한다. 이때 그들은 대개 관상으로 넘쳐나며, 그들의 마음은 결코 이해의 대상이 부족하지 않고, 그들 안에서 영의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 결여된 적이 결코 없다. 오랜 습관을 통해 마음속에서 정욕을 자극하는 기억들이 지워지고, 악마의 권세의 힘이 약화된다. 왜냐하면 영혼이 정욕에 대한 생각으로 정욕과 어울리지 않을 때, 영혼이 끊임없이 다른 염려에 몰두하고 있기에, 정욕의 힘은 그 발톱으로 영혼의 영적 감정을 붙잡아 둘 수 없기 때문이다.

112. 자만심이 영혼을 현실에서 뜯어내어 자신의 생각이라는 구름 위를 떠돌게 하고 온 피조물을 맴돌게 하는 것처럼, 겸손은 침묵으로 영혼을 하나로 모으고, 영혼은 자기 자신 안에 집중하게 된다. 영혼이 육체 안에 숨겨져 모든 사람의 시선과 교제에서 벗어나 있듯이,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은 사람들에게 보이고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신의 존재에서 벗어나 다시 자신 안으로 잠기어,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것처럼 무(無)가 되고자 하는 것이 그의 뜻이다. – 그리고 그런 사람이 숨겨져 있고, 자기 안에 갇혀 있으며, 세상과 단절되어 있는 동안, – 그는 온전히 자신의 주님 곁에 머무른다.

113. 겸손한 사람은 결코 멈춰 서서 모임이나 사람들의 몰려듦, 소동, 소음, 난장판에 발을 멈추지 않으며, 말과 대화, 외침, 그리고 산만한 감정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 그에게 바람직한 것은 많은 것을 소유하고 끊임없이 일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자유롭고 근심이 없으며, 그의 생각이 자기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많은 일에 휘말리게 되면, 생각이 흐트러지지 않고 머물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많은 일이 있으면 걱정도 많아지고, 복잡다단한 생각들이 뒤섞이기 마련이며, 이로 인해 정욕의 문이 열리고, 분별력의 고요함은 사라지며, 평화의 문은 닫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겸손한 사람은 모든 많은 일로부터 자신을 지키며, 이를 통해 언제나 고요함, 평온, 평화, 겸손, 경건함 속에 머무른다.

114. 겸손하고 지혜로운 사람에게는 결코 성급함, 서두름, 당황함, 격정적이고 경솔한 생각이 없으며, 그는 언제나 평온 속에 머무른다. 그를 놀라게 하거나, 당황하게 하거나, 공포에 빠뜨릴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슬픔 속에서도 그는 두려워하지도 변하지도 않으며, 기쁨 속에서도 놀라거나 들뜨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모든 기쁨과 즐거움은 오직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바에 있다.

115. 겸손한 지혜자는 감히 하나님께 기도하거나 무엇을 청하지도 못하며,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도 모른다. 다만 온전한 침묵으로 모든 감각을 가라앉히고, 경배받으실 위대하신 분의 면전에서 그에게 내려질 오직 한 가지 자비와 뜻만을 기다릴 뿐이다. – 그가 얼굴을 땅에 숙이고, 마음의 내적 시선이 지성소로 향할 때, 그곳은 어둠을 거처로 삼으시고 세라핌들의 눈조차 감겨지는 분께서 계신 곳이며, – 오직 이렇게 말하고 기도할 용기만 낼 뿐이다. “주님, 주의 뜻대로 내게 이루어지소서.”

116. 하나님의 앞에서 지혜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단순함으로 나아가라. 단순함 뒤에는 믿음이 따르고, 교묘하고 기민한 지혜 뒤에는 자만심이 따르며, 자만심 뒤에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멀어짐이 따른다.

117. 기도 중에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마음속으로 마치 말을 못하는 젖먹이 아기처럼 되어라. 하나님 앞에서 지식에 근거한 어떤 말도 하지 말고, 어린아이 같은 생각으로 그분께 가까이 나아가며 그분 앞에서 행하라. 그래야만 아버지들이 자신의 젖먹이 자녀들에 대해 품는 그 아버지의 돌보심을 네게도 받을 자격이 생길 것이다. “주께서 젖먹이들을 지키시나이다”(시 114:5)라고 기록되어 있듯이, 이는 육체적으로 어린 아이들뿐만 아니라, 세상의 지혜로운 자들 중에서도 자신의 지식을 버리고 자신의 뜻으로 젖먹이와 같이 되어, 책으로 배우는 노력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서적에 기반한) 노력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그 전지전능한 지혜를 배우기 시작한 자들, 곧 세상의 지혜로운 자들도 포함한다. 하나님께 간구하여, 그분께서 네게 이 믿음의 경지에 이르도록 허락해 주시기를 구하라. 이 일에 대해 게으름 피우지 말고, 열정을 다해 구하며, 얻게 될 때까지 큰 간절함으로 간청하라. 네가 먼저 믿음으로 스스로를 다잡아 네 돌봄을 하나님께 맡기고, 네 근심을 그분의 섭리로 대체한다면, 이를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네 안에서, 온전한 마음으로 네 자신보다 하나님 그분께 더 의지하고, 네 영혼보다 하나님을 더 신뢰하도록 스스로를 다잡은 그 뜻을 보실 때, 그때 그 헤아릴 수 없는 힘이 네 안에 깃들 것이며, 너는 의심할 여지 없이 네 곁에 힘이 있음을 뚜렷이 느낄 것이다. 바로 그 힘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불 속으로 들어가도 두려워하지 않고, 물 위를 걸어도 가라앉을까 봐 두려워하며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118. 이 영적인 깨달음을 어떤 식으로든 육신의 깨달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 육신의 깨달음으로는 그 영적인 깨달음을 받아들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육신의 깨달음을 열성적으로 실천하는 사람 중 그 누구도 감각으로 그것을 느낄 수조차 없다. 그리고 그들 중 누군가가 다른 영적 깨달음에 가까워지기를 원한다면, 이 정신적 깨달음과 그 미묘한 변주들, 그리고 복잡한 방법들을 모두 버리고, 자신의 사고방식을 갓난아기처럼 순수하게 만들지 않는 한, 영적 깨달음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질 수 없을 것이다. 반대로, 그들이 이 세속적 통찰의 습관과 개념을 조금씩 지워내지 않는 한, 그것들은 그들에게 큰 장애물이 된다. 그 영적 통찰은 단순하며, 세속적인 생각들 속에서는 빛을 발하지 않는다. 이성이 수많은 생각에서 해방되어 순수함의 단일한 단순함에 이르기 전까지는, 영적 인도를 느낄 수 없을 것이다.

119. 만일 네가 한 번 주님께, 곧 너를 보호하시고 돌보시는 전능하신 분께 네 자신을 맡겼다면, 다시는 그런 일로 걱정하지 말고 네 영혼에게 말하라. “모든 일에 있어, 내가 한 번 내 영혼을 맡긴 그분이 나를 돌보신다. 나는 여기 없다. 그분은 이를 아신다.” – 그러면 실제로 하나님의 기적을 보게 될 것이다. – 하나님께서 그분을 경외하는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언제나 가까이 계심을, 그리고 비록 보이지 않더라도 그분의 섭리가 어떻게 우리를 감싸고 계시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육신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너와 함께 계시는 보호자이시니, 마치 그분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그분에 대해 의심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분은 네가 기뻐할 수 있도록 종종 육신의 눈에도 나타나시기 때문이다.

120. 사람이 눈에 보이는 모든 도움과 인간의 희망을 스스로 떨쳐 버리고, 믿음과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따르기 시작하면, 곧바로 은혜가 그를 따르며, 다양한 도움 속에서 그분의 능력을 그에게 드러내신다. 먼저 이 눈에 보이는, 육신과 관련된 일에서 그분을 드러내시고, 그를 돌보시는 섭리로 도움을 주시니, 이를 통해 그가 하나님의 섭리의 능력을 더욱 깊이 실감할 수 있게 하심이라. 명백한 도움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 그는 은밀한 도움에 대해서도 확신을 얻게 되는데, 이를 분별하는 과정에서 은혜는 그 앞에 복잡하게 얽힌 어려운 생각과 마음의 속내를 드러내어, 그 결과 사람은 그 의미와 상호 연관성, 그리고 그 유혹을 쉽게 파악하게 되며, 그것들이 어떻게 서로에게서 비롯되어 영혼을 파멸시키는지 알게 된다. 동시에 은혜는 그의 눈앞에서 악마들의 온갖 교활함을 드러내며, 마치 손가락으로 가리키듯, 그가 이를 깨닫지 못했다면 어떤 고통을 겪었을지를 보여준다. 그때 그에게 모든 일, 작은 것이든 큰 것이든, 기도를 통해 자신의 창조주께 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싹튼다.

121. 하나님의 은총이 이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그의 생각을 확고히 해 줄 때, 그는 조금씩 유혹에 빠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은혜는 그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정도에 맞는 유혹이 그에게 보내지도록 허락하십니다. 이 유혹들 속에서 그에게 도움이 뚜렷이 다가오니, 그가 점차 배우고 지혜를 얻으며, 하나님을 의지하여 자신의 원수들을 경멸하게 될 때까지 인내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영적 싸움에서 지혜를 얻고, 자신의 섭리자를 알며, 자신의 하나님을 체감하고, 그분에 대한 믿음 안에서 은밀히 굳건해지는 것은, 그가 견뎌낸 시련의 힘을 통해서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122. 은혜는 사람의 마음속에 약간의 의심이 싹트기 시작하고, 그가 스스로를 과대평가하기 시작하는 것을 알아차리자마자, 그가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다시 겸손히 하나님께 의지할 때까지, 그에게 닥치는 유혹이 더욱 강해지고 굳어지도록 내버려 둔다.

123. 덕을 실천하려 할 때 사방에서 잔혹하고 강력한 고통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마라. 왜냐하면 실천하는 데 어려움이 따르지 않는 것은 덕으로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그 때문에 성 요한(콜로브 또는 예언자)은 이렇게 말했다. “덕은 대개 어려움을 겪게 마련이며, 그것이 평안과 결부될 때 비난받을 만하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복자 마르코는 “성령의 계명을 이행할 때, 모든 완전한 덕은 십자가라고 불린다”고 말합니다. “주님을 경외하며 살고자 하는 모든 자”와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박해를 받을 것”이라는 것은 사도들의 가르침입니다 (딤후 3,12). 주님께서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만이 그것을 얻으리라”(마태 16,25)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처음에 네게 십자가를 제시하시는데, 이는 네가 먼저 십자가를 택한 뒤, 비로소 네 영혼을 보내어 주님을 따르게 하려는 것이다.

124. 절망만큼 강력한 것은 없다. 절망은 누가 오른손으로든 왼손으로든 그것을 이길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사람이 마음속으로 자신의 삶에 대한 희망을 버릴 때, 그보다 더 대담한 것은 없다. 어떤 적도 그에게 맞설 수 없으며, 어떤 슬픔의 소식이든 그의 사색을 꺾을 수 없다. 왜냐하면 닥치는 모든 슬픔은 죽음보다 가볍지만, 그는 죽음을 받아들이기 위해 고개를 숙였기 때문이다.

125. 평안에 대한 희망은 언제나 사람들을 위대하고 선하며 덕스러운 것들을 잊게 만들었다. 우리 이전부터 지금까지, 다른 어떤 이유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 때문에 사람들은 지쳐버리며, 승리를 거두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가장 좋은 것마저 잃어버린다. 그러므로 간단히 말하자면, 사람이 천국을 소홀히 여긴다면, 그것은 이 세상의 하찮은 위안만을 바라는 희망 때문일 뿐이다. 새들이 안식을 염두에 두고 그물에 다가간다는 사실을 누가 모르겠는가?

126. 마음이 덕을 갈망할 때, 그때야말로 외적인 감각들도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스스로를 내주지 않는다. 마음이 영으로 불타오를 때, 그때 육신은 슬픔에 잠기지 않고, 두려움에 사로잡히지도 않으며, 공포로 인해 움츠러들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때 마음은 다이아몬드처럼 그 굳건함으로 그 안의 모든 유혹에 맞서기 때문이다. 그러니 열정을 품자. 그러면 나태함을 낳는 무관심이 우리에게서 물러날 것이다. 열정은 용기를 낳고 영혼에 승리의 힘을 부여한다. 영혼이 그 본연의 열정을 악마들에게 맞서 발휘할 때, 어떤 악마의 힘이 견뎌낼 수 있겠는가?

127. 우리 선조들은 우리의 마음이 언제나 한 가지에 집중하여 경계를 늦추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때로는 자신에게 해가 되는 것을 분간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무소유라는 무기를 두르고, 정욕의 원인이 되는 세속적인 일들이 없는 광야로 떠나, 분노와 욕망, 원한을 품을 빌미를 만들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들은 이 모든 것과 그와 유사한 것들로부터, 마치 무너뜨릴 수 없는 기둥처럼 스스로를 굳건히 지키고 보호했습니다.

128. 사람이 무소유에 머물 때, 이 세상에서의 이별이 끊임없이 마음에 떠오르며, – 그는 이를 위해 끊임없이 준비를 기울이고, – 모든 안식을 피하며, 세상을 경멸하려는 생각이 그의 마음속에서 생생하게 맴돌고, 두려움 없이 위험에 맞설 수 있도록 마음을 단단히 다지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매 순간 죽음을 응시하기 때문이다. 슬픔이 닥치면, 그것이 면류관을 안겨준다는 것을 알기에 기쁨과 환희로 받아들인다. 만약 그가 일시적인 것을 얻게 된다면, 바로 그 순간 그의 영혼 속에서 육체에 대한 사랑이 깨어나기 시작하고, 육체적 안락에 대한 생각과 이를 얻기 위한 수단들에 대한 생각이 생겨나며; 이로 인해 그는 소유에 연연하지 않아 세상보다 높았던 시절 가졌던 그 굳건한 마음의 결의를 잃게 되고, 그의 영혼은 생명을 위협하는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생각들로 뒤덮이기 시작하므로,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소망이 그에게서 멀어진다.

129. 여러 격언. – 머리가 물속에 잠긴 사람이 맑은 공기를 들이마실 수 없는 것처럼, 자신의 생각을 이 세상의 근심에 빠뜨리는 사람도 그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감각을 마음속에 받아들일 수 없다. 치명적인 악취가 육체의 구성을 해치는 것처럼, 부적절한 광경은 마음의 평화를 해친다. 유리가 근처에 있는 돌과 부딪히면 온전할 수 없는 것처럼, 성자도 아내와 오랫동안 함께 지내며 대화를 나누면 자신의 순결을 지키지 못하고 더럽혀질 수밖에 없다. 강하고 끊임없는 물의 유입으로 나무가 뿌리째 뽑히듯이, 육체를 겨냥한 유혹의 유입으로 마음속의 세상에 대한 사랑도 뿌리째 뽑힌다. 쓴 약이 몸속의 불순한 체액을 제거하듯이, 고통의 가혹함도 마음속의 사악한 정욕을 정화한다. 전장에서 적을 살려주는 자가 무사할 수 없는 것처럼, 수행자도 자신의 몸을 아끼면 영혼을 파멸에서 구할 수 없다. 무서운 광경을 보고 놀란 어린 처녀가 부모에게 달려가 그들의 옷자락을 붙잡고 도움을 청하듯이, 영혼도 유혹의 두려움에 짓눌리고 괴로워할수록, 끊임없는 기도로 주님을 부르며 그분께 더 급히 매달리게 된다. 그리고 유혹이 계속해서 하나씩 그녀를 덮쳐오는 동안, 그녀는 간구를 더하고, 해방되자마자 생각에 잠기곤 한다. 마치 어떤 이가 왕께 큰 선물을 바치고 그분으로부터 자애로운 시선을 상으로 받는 것처럼, 기도 속에 눈물을 품은 자에게도, 세상의 위대한 왕이시며 영원하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그에게 호의적인 시선을 상으로 주십니다. 마치 귀중한 진주를 지니고 강도들이 출몰하는 길을 지나는 사람이 끊임없이 습격을 당해 약탈당할까 봐 두려움에 떨듯이, 정결함의 구슬을 지니고 원수로 가득한 이 세상이라는 길을 걷는 자도, 무덤의 거처, 즉 안식의 땅에 이르기 전까지는 그 강도들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슬픔의 날에 포도주를 마시는 사람이 취해 자신의 곤경에 대한 모든 슬픔을 잊어버리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에 취한 자도 이 세상, 즉 울음의 집에서 자신의 모든 수고와 슬픔을 잊어버리고, 그 황홀함으로 인해 모든 죄악된 정욕에 무감각해지며, 그의 마음은 하나님에 대한 소망으로 굳건해지며, 그의 영혼은 깃털 달린 새처럼 가볍고, 그의 정신은 매 순간 땅에서 떠오르며, 모든 인간적인 것을 초월하여 생각으로 날아오르며 지극히 높으신 분 곁에서 불멸을 누린다.

130. 겸손은 신성의 옷이다. 성육신하신 말씀께서 그 옷을 입으셨고, 이를 통해 우리 육신 안에서 우리와 대화하셨으니, 피조물이 그분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인해 타격을 입지 않도록 그분의 위대함과 영광을 이 겸손으로 가리셨다. 그분이 피조물의 일부를 취하지 않으셨다면, 피조물은 그분을 바라볼 수 없었을 것이며, 그분은 그런 방식으로 피조물과 대화하게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겸손의 옷을 입는 모든 이는 그리스도 그분을 입는 것이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피조물에게 보이신 그 형상대로 그들과 함께 사셨고, 그도 자신의 내적 인성을 따라 그 옷을 입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131. 겸손은 일종의 신비로운 힘으로, 온전한 삶을 마친 후에야 비로소 완전한 성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이 힘은 오직 덕행에 있어 완전한 자에게만 은총의 힘으로 주어지는데, 이는 이 덕행이 그 자체로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132. 겸손하고, 침묵하며, 온유한 사람이라고 해서 누구나 이미 겸손의 경지에 도달한 것은 아니다. 또한 자신의 타락을 떠올리며 그로 인해 가슴 아파하는 자를, 비록 그것이 칭찬할 만한 일이긴 하지만, 겸손한 지혜를 갖춘 자라고 부르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아직 겸손을 소유하고 있지 않고, 교묘하게 그것을 자신에게 끌어당기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는 단지 겸손을 원할 뿐이지만, 아직 그에게는 겸손이 없다. 완전히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지혜로 겸손에 이르는 이유를 만들어낼 필요가 없으며, 모든 일에서 수고나 억지 없이 자연스럽게 겸손을 드러낸다.

133. 누군가 겸손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 묻는다면, 우리는 그에게 이렇게 대답하리라. “제자는 스승과 같아야 하며, 종은 주인과 같아야 한다”(마태복음 10,25). 보라, 겸손을 명하시고 이 은사를 주시는 그분이 어떻게 겸손을 나타내셨는지—그분을 본받으면 겸손을 얻게 될 것이다.

134. 우리 안에 악한 정욕을 자극하는 모든 것을 온갖 방법으로 피해야 하며, 특히 정욕의 원인과, 비록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정욕을 일으키는 요인들을 스스로 끊어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욕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것에 맞서 싸워야 한다. 이 두 가지 모두를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의 내면 깊은 곳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홀로 머물며 끊임없이 마음의 포도원을 가꾸는 것이다. 우리 마음이 그곳에서 홀로 은둔하며 머물 때, 더 이상 마음이 정욕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싸우게 된다.

135. 구세주께서 우리에게 생명의 계명을 주셨을 때, 즉 우리의 정욕에 사로잡힌 상태를 정화하기 위한 치료제로서 그 계명을 주셨을 때, 그 목적은 첫 번째 죄로 인해 발생한 손상을 영혼에서 씻어내고, 영혼을 본래의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병든 몸에 치료제가 있는 것처럼, 정욕에 사로잡힌 영혼에게는 계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계명들이 정욕에 대항하여, 죄를 지은 영혼을 치유하기 위해 제정된 것임이 분명하다.

136. 그 손상은 계명을 어긴 죄에서 비롯되었다. 이로부터 이미 계명을 지키는 것을 통해 건강이 다시 회복된다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그러나 계명을 실천하지 않고서는, 무엇보다 먼저 영혼의 순결로 이끄는 그 길을 걷지 않는 한, 우리는 영혼의 정화를 바라거나 희망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계명을 실천하지 않아도 은혜로 우리에게 영혼의 정화를 베풀어 주실 수 있다고 말하지 말라. 이는 주님의 심판이며, 교회는 우리에게 그런 것을 구하라고 명하지 않는다. 유대인들은 바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 자연적인 길을 걸었으나, 에스겔은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신성한 계시를 통해 미래의 갱신을 목격하게 되었다. 이와 유사한 일이 영적 순결에 관해서도 일어난다. 어떤 이들은 닳은 길을 따라, 고된 삶 속에서 계명을 지키며 자신의 피를 흘려 영적 순결에 이르고, 또 다른 이들은 은혜의 선물로 그 순결을 얻습니다. 놀라운 점은,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순결을 기도 중에 구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으며, 계명을 실천하며 사는 삶을 포기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 “무엇을 행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묻던 부자에게 주님께서는 분명히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눅 10:25). 그런데 그 부자가 더 자세히 알고자 하자,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온전하고자 하면, 가서 네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마태복음 19:21). 이는 곧, 네가 가진 모든 것에 대해 죽고, 그 후에 내 안에서 살아라; 정욕의 낡은 세상에서 나와, 그 후에 영의 새로운 세상에 들어가라. 주님께서 “네 십자가를 지라”(마태복음 16,24)고 말씀하심으로써, 사람에게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 죽는 법을 가르치신 것이다. 그리고 그가 자기 안에 있는 옛 사람, 즉 정욕을 죽였을 때, 주님께서는 그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옛 사람은 그리스도의 길을 걸을 수 없다.

137. 복자 바실리우스 대주교와 복자 그레고리우스들은 광야를 사랑하고 고요함을 찬양했던 이들로서, 침묵의 삶으로 들어선 것은 계명을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처음에는 세상에서 살며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지켜야 할 계명을 지켰고, 그 후에야 마음의 순결에 이르러 영적 관상의 은총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 후 그들은 서둘러 광야의 고요함 속으로 나갔으며, 그때부터 내면의 자아와 함께 머물렀다. 그리하여 그들은 관조자가 되었고, 그리스도의 교회의 목자가 되도록 은총을 받을 때까지 영적 관조 속에 머물렀다.

138. 광야는 정욕을 잠잠하게 한다. 그러나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은 단 한 가지, 곧 자신의 정욕을 잠잠하게 하는 것이며, 나아가 정욕이 우리에게 대항하여 완강하게 버티면 이를 뿌리 뽑아, 즉 극복하는 것이다. 그러나 잠잠해진 정욕도, 그것이 현실로 드러날 계기가 생기기만 하면 곧바로 다시 깨어난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막을 갈망하는 것은 단지 그것이 정욕을 잠들게 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감각적인 것들이 부족하고 모든 사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그곳에서 우리가 지혜를 얻어, 우리 안에 있는 내적이며 영적인,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 새롭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어야 한다; 언제나 우리 스스로를 지켜보는 자가 되고, 우리의 마음이 깨어 있어 매 순간 스스로를 지키며, 소망에 대한 기억이 우리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하기를 바랍니다.

139.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위대하심을 닮도록 자비를 우리에게 정하셨으나, 수도자들은 자비보다 침묵을 더 선호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닮도록 자비를 정하셨는데, 이는 자비가 자비로운 자들을 하나님께 가까이 이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수도자들은 자비를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가능한 한 헛된 염려와 동요에서 멀어지려고 노력함으로써 침묵을 소중히 여깁니다; – 우리는 (이웃에 대한) 의무를 저버리려는 의도가 아니라, (오히려 다른 더 높은 의무를 다하기 위해) 침묵을 지키며 하느님을 묵상하는 데 전념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그 무엇보다도 순수함을 되찾고 하느님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느 시점에 형제들에게 우리에 대한 필요한 요구가 생기면, 이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다그쳐, 언제나 내면적으로 모든 이성적인 존재에게 자비를 베풀도록 해야 한다. 이는 주님의 가르침이 우리에게 그렇게 일깨워 주시며, 바로 여기에, 헛된 어떤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침묵의 차별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이러한 내적 자비를 지키는 것뿐만 아니라, 상황이 요구할 때에는 우리의 사랑을 명백히 드러내는 일에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140. 생명의 주님은 계명의 전체를 다른 모든 계명을 포괄하는 두 가지 계명, 즉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에 대한 사랑에 담아 두셨다. 첫 번째 계명은 영적 관조의 목적을 충족시키고, 두 번째 계명은 관조와 실천의 목적을 충족시킨다. 이는 하나님의 본성이 단순하고 보이지 않으며, 본질적으로 그 무엇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며, 자각은 자기 내면으로 깊이 들어갈 때 본질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육체적 활동에서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때 그 활동은 단순하며, 육체적 감각을 초월하는 숭배받으실 만한 본성의 단순함에 따라 마음의 한 부분에서 드러난다. 그리고 두 번째 계명, 즉 이웃 사랑은 본성의 이중성에 따라, 우리가 의식 속에서 보이지 않게 행하는 바를, 이와 같은 방식으로 육체적으로도 행하기를 원하도록 요구한다. 활동은 어디에서나 관조를 선행하므로, 가장 낮은 것을 먼저 실천하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이 더 높은 영역으로 승화될 수 없다. 그리고 이웃에 대한 사랑에 관해, 힘닿는 대로, 시간과 장소에 맞춰 육체적으로 실천해야 할 부분을 소홀히 한 채, 자신의 영혼으로 그 사랑에 성공했다고 감히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오직 이러한 실천을 통해서만, 그 사람 안에 완전한 사랑이 있다는 것이 확실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 일에서 가능한 한 충실하고 진실할 때, 비로소 영혼은 단순하고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개념들을 통해 높고 신성한 관조의 위대한 영역까지 뻗어 나갈 힘을 얻게 된다. 그러나 육체적으로 보이는 행위로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할 수 없는 곳에서는, 오직 영혼으로만 이루어지는 우리의 이웃에 대한 사랑만으로도 하나님 앞에서 충분하다.

141.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자는 자신의 영혼의 순결을 돌보아야 한다. 영혼의 순결은 정욕을 이기고 근절함으로써 얻어진다. 정욕은 순결을 가로막는 닫힌 문과 같다. 누구든지 이 닫힌 문을 열지 않는다면, 흠 없고 순결한 마음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이 없이는 영혼이 기도할 때 담대함을 가질 수 없으니, 이 담대함은 순결의 열매이자 그것을 얻기 위한 수고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순서는 다음과 같다. 인내는 스스로를 다스리며 순결을 위해 정욕과 싸운다. 만일 영혼이 정욕을 이긴다면, 순결을 얻게 되며, 참된 순결은 마음이 기도할 때 담대함을 얻게 한다.

142. 우리는 하나님께 어떤 높은 것을 구하는 것을 버리고,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일에 대한 인내를 얻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것과 우리의 생각에 대해 깊은 겸손과 통회로, 우리 죄의 용서와 영혼의 평안을 간구해야 한다. 어떤 교부께서는 이렇게 기록하셨습니다.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지 않는 자의 기도는 주님께서 받아주지 않으신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는 관찰할 수 있는 방식(즉, 눈에 띄는 방식)으로 오지 않는다”(누가복음 17, 20)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로서는 회개의 행실과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삶을 통해 마음의 영역을 온전히 가꾸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할 것이며, 마음의 자리가 깨끗하고 더럽혀지지 않았다면 주님의 나라는 저절로 임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눈에 띄는 방식으로” 추구하는 것, 즉 하나님의 높은 은사를 말하는 것인데, 이는 하나님의 교회에서 인정받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를 받아들인 자들은 교만과 타락을 자초했습니다. 이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가 아니라, 영혼의 병입니다. 게다가 바울이 고난을 자랑하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하나님의 높은 은사로 여기는 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높은 은사를 갈망할 수 있겠는가?

143. 영혼이 정욕으로 병들어 있는 한, 그것은 자신의 감각으로 영적인 것을 느끼지 못하며, 그것을 갈망할 줄도 모른다. 오직 귀로 들은 것과 성경의 기록에 의해서만 그것을 갈망할 뿐이다. 이러한 병들로부터 영혼을 치유하는 것은 계명을 은밀히 실천하며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다. 원래 우리의 본성은 그리스도의 성육신 안에서 갱신을 받아들여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동참하였으며, 그 후 갱신을 통해 피의 흘림으로 거룩하게 되어 새롭고 완전한 계명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만약 이 계명들이 피를 흘리시기 전, 즉 우리 본성이 갱신되고 거룩하게 되기 전에 사람들에게 주어졌더라면, 아마도 가장 새로운 계명들조차도 고대의 계명들과 마찬가지로 영혼 속의 악덕만을 잘라낼 뿐, 영혼 속에 있는 악덕의 뿌리 자체를 근절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영혼이 간직하는 내면의 행실과 새롭고 영적인 계명들이 영혼을 새롭게 하고 거룩하게 하며, 그 모든 지체를 은밀히 치유합니다. 왜냐하면 각 계명이 영혼 속에서 어떤 정욕을 소리 없이 치유하는지는 모든 이에게 명백하며, 그 효력은 피를 흘리던 여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치유하는 자와 치유받는 자 모두에게 뚜렷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144. 영혼의 정욕적인 부분이 치유되는 일은, 복된 사도들에게서 그랬던 것처럼, 은혜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에 의한 일이며, 보통 영혼은 정당한 길을 통해 건강을 얻는다. 즉, 계명을 실천하고 참된 삶의 고된 수고를 통해 정욕을 이겨낸 자는 합법적이고 보편적인 길을 통해 영혼의 건강을 얻었으며, 이 세상의 물질적 속박을 벗어난 젖을 마시고, 자기 안의 옛 성품을 잘라내어, 마치 처음과 같이 영적인 차원에서, 또한 은혜로 내적 인간의 개념을 얻은 자로서 영의 영역에서 보이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복잡하지 않은 새로운 세상을 자기 안에 받아들였다.

145. 마음이 새롭게 되고 심장이 거룩해지면, 그때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개념은 그가 들어가는 그 세계의 본성에 따라 자극받는다. 먼저 그 안에서 신성에 대한 사랑이 솟아나며, 그는 천사들과의 교제와 영적 지식의 신비에 대한 계시를 갈망한다; 그의 마음은 피조물에 대한 영적 통찰로 정화되며, 그 안에서 성 삼위일체의 신비와 또한 우리를 위해 경배받으시는 가정의 신비를 관조하는 빛이 비추고, 그 후 온전히 미래의 소망에 대한 통찰과 일체감을 이룬다.

146. 만일 영혼이 정욕의 영역에 갇혀 있을 때 영적인 것을 진정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면, 영적 세계의 신비에 대해 묻고 알아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정욕이 있는 상태에서의 가르침과 지식은 아무 소용이 없으며, 순결의 면전 앞에 닫혀 있는 문을 열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러나 영혼에서 정욕이 제거되면, 그때 비로소 이성은 밝아지고 본성의 순수한 곳에 자리 잡게 되며, 질문할 필요가 없어진다. 왜냐하면 제자리에 있는 선들을 분명히 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외적인 감각들이 배움의 결과로 그들과 접촉하는 사물과 대상들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각 감각이 자연스럽게 마주치는 사물을 느끼듯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영적 관상에 대해 상상해 보라. 왜냐하면 영의 숨겨진 신비를 꿰뚫어 보는 마음은, 그 본연의 건전함을 유지하고 있다면, 그리스도의 영광을 온전히 관상하며, 묻지도 배우지도 않고, 오직 자유 의지를 초월한 새 세상의 신비들을,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소망의 열정에 비례하여 누리기 때문이다.

147. 만일 네 마음이 새 세상의 신비들이 머무는 거처가 되기를 원한다면, 먼저 육체적인 행실, 금식, 기도, 예배, 고행, 인내, 생각의 정화 등으로 자신을 단련하라. 성경을 읽고 깊이 묵상함으로써 마음을 다스리고, 눈앞에 계명을 적어 두며, 끊임없는 기도의 대화와 기도문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통해 네가 이전에 받아들였던 모든 형상과 모든 유사성을 네 마음에서 뿌리 뽑아라. 네 마음을 항상 구세주의 가정 경영의 신비에 깊이 잠기도록 훈련하라. 제때와 제자리에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지식과 관조를 구하는 것을 그만두고, 계명을 실천하며 순결을 얻기 위한 수고를 계속하고, 주님께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기를 구하라. 이 삶의 시작과 중간, 끝은 다음과 같다. 곧,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통해 모든 것을 잘라내는 것이다. 만일 신비의 관조를 갈망한다면, 단지 그에 대한 지식을 추구하는 것만이 아니라, 실제 행동으로 계명을 실천하라. 영적 관조는 우리 안에서 순결의 영역에서 작용한다.

148. 신앙의 신비를 가진 자들의 관상은 믿음과 결합되어 있으며, 성경의 초원에서 양을 치고 있다. 지식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말씀들은 믿음의 도움을 통해 우리에게 이해되기 시작하며, 그에 대한 지식은 정화 후에 이루어지는 관상을 통해 얻게 된다. 이성보다 높고 육체의 감각이나 이성의 힘으로도 감지할 수 없는 영적 신비들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으니, 이를 통해 우리는 오직 그 신비들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 믿음으로부터 우리 안에 그 신비들에 대한 소망(즉, 그 신비들을 깨달을 수 있다는 소망)이 솟아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만물의 주님이시며, 통치자이시며, 창조주이시며, 질서를 세우시는 분이심을 고백합니다. 이에 양심의 이끌림을 받아 우리는 그분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결심하며, 낡은 계명은 두려움이 지키게 하고, 생명을 주는 그리스도의 계명은 사랑이 지키게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리니,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시리라” (요한복음 14, 15, 16). 보혜사의 오심이라 함은 영적 비밀에 대한 계시의 은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영접한 성령을 영접하는 것, 바로 그 안에 영적 지식의 모든 완전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당신의 아버지께 간구하셔서 그들에게 위로자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계명을 지키고 스스로를 정화할 때, 그 위로자가 영원토록 그들과 함께 머물게 하려 하심입니다. 보십시오, 계명을 지키는 것을 통해 마음은 신비로운 관상과 영적 지식의 계시를 누릴 수 있는 은총에 이르게 됩니다.

149. 계명을 지키는 것은,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그 계명을 주신 분에 대한 사랑으로 행해질 때 비로소 그러한 힘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관상으로 이끄는 합법적인 문은 사랑입니다. 계시와 영적 통찰의 모든 여정에서, 신성한 사랑은 그것을 얻은 자들을 이끌고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먼저 사랑을 얻어야 하며, 그 후에 영적 관상은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입니다. 또한 복된 바울의 지혜를 깨달으라. 그가 은혜로 주어지는 모든 은사를 버리고, 가장 본질적인 것, 즉 은사를 받아들이고 간직하게 하는 것, 곧 사랑(고린도전서 13장)을 구했음을. 사랑은 계시의 자리이며, 이 자리에서 관상은 저절로 우리에게 드러난다. 영혼이 자연스러운 성장에 따라 세상에 존재하는 것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끊임없이 받아들이고, 날마다 이에 대해 점점 더 배워가듯이, 영적인 영역에서도 사람은 영적인 관상과 신성한 감각을 받아들이며, 이성적인 삶 속에서 마음이 성장하는 만큼 이에 대해 배워 나갑니다. 그가 사랑의 영역에 이르면, 그때 비로소 제자리에서 영적인 것을 관조하게 된다.

150. 사람이 영적인 것이 자신에게 내려오도록 애를 쓸 때, 그것은 순종하지 않는다. 만일 그가 감히 헛된 꿈을 꾸고, 시선을 영적인 것으로 향하며, 때가 아닌데도 이성으로 그곳에 다다르려 한다면, 곧 그의 시력은 무뎌지고, 실재 대신 유령과 형상들만 보게 된다. 네가 이 사실을 분별력 있는 마음으로 깨닫는 즉시, 때를 벗어난 관상을 추구하지 않게 될 것이다. 만약 지금(순결과 사랑의 영역에 들어가기 전)에도 관조를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관조는 환상의 그림자일 뿐 진정한 관조가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고의 대상에는 닮은 모습과 몽상적인 형상이 있을 수 있지만, 진정한 관조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자연의 질서 속에서 때로는 실재를 보기도 하고, 때로는 그와 정반대되는 것을 보기도 한다. 눈은 실재 대신 그림자를 보고, 물이 없는 곳에서 물을 보고, 땅 위에 서 있는 건물이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기도 한다. 이러한 육체적 현상과 마찬가지로, 사고의 영역에서도 같은 원리를 상상해 보라.

151. 만일 마음의 시야가 계명을 실천하고, 침묵의 삶을 살아감으로써 정화되지 않고, 사랑의 빛을 온전히 얻지 못하며, 그리스도의 갱신 안에서 성숙해지지 않는다면, 신성한 관조의 진정한 관찰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스스로 만들어내려고 하는 영적인 유사물들은 ‘유령’이라 불릴 뿐, 실재가 아니다. 그리고 마음이 한 가지를 다른 것으로 보는 것은, 마음이 정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외적인 철학자들에게서도 있었던 일로,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참된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영적인 것으로 여겼으며, 부적절한 자만심 속에서 이에 대해 떠들어댔고, 유일한 하나님을 다신교로 나누었으며, 서로 조롱하는 생각들을 나누고 동의했고, 이러한 광기 어린 생각의 환상을 ‘본성의 관념’이라고 불렀다.

152. 감각적 본성과 초감각적 본성, 그리고 성삼위일체 그 자체에 대한 진정한 관조는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 주어진다. 그리스도께서는 처음에 당신의 위격으로 인간의 본성을 새롭게 하시고, 인간에게 최초의 자유를 되돌려 주시고 부여하셨으며, 그분의 생명을 주는 계명들로 우리가 진리께로 올라갈 길을 직접 열어주셨을 때, 이를 사람들에게 가르치시고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본성은, 사람이 처음에 고통을 견디고, 행하고, 슬퍼함으로써, 마치 갓 태어난 아기가 어머니의 자궁에서 벗어날 때 옷을 벗어던지듯이, 정욕에 사로잡힌 낡은 사람을 벗어던질 때 비로소, 공상적인 관상이 아닌 진정한 관상의 관찰자가 될 수 있다. 그때 비로소 영적으로 다시 태어난 마음은 자신의 고향을 관조할 수 있게 된다.

153. 그리고 이 관상은 마음이 첫 번째 관상보다 더 높은 관상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에 이르기 전까지 마음의 양식이 된다. 왜냐하면 한 관상은 마음을 다른 관상으로 이끄는데, 이는 마음이 완전한 사랑의 영역으로 인도될 때까지 계속되기 때문이다. 사랑은 영적인 거처이며, 영혼의 순결 속에 자리 잡는다. 마음이 사랑의 영역에 들어서면, 그때 은혜가 작용하여 마음은 영적인 관조를 받아들이고, 은밀한 것을 꿰뚫어 보는 자가 된다.

154. 앞서 말했듯이, 지적인 관조의 계시라는 은사는 두 가지 방식으로 주어진다. 때로는 뜨거운 믿음에 대한 은혜로 주어지고, 때로는 계명을 실천하고 순결을 지키는 데 대한 보상으로 주어진다. 은혜로 주어지는 경우는, 계명을 실천함으로써가 아니라 뜨거운 믿음으로 마음을 정화한 복된 사도들에게 주어진 것과 같다. 그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믿었고, 의심 없이 불타는 마음으로 그분을 따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경배받으실 만한 당신의 집 짓기를 완성하셨을 때, 그분은 그들에게 위로자이신 성령을 보내셨는데, 그 성령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정화하고 온전하게 하셨으며, 그들 내면의 낡고 정욕에 사로잡힌 사람을 효과적으로 죽이시고, 그들 안에 새로운 영적인 사람을 효과적으로 소생시키셨습니다. – 이와 같이 복된 바울도 신비롭게 새롭게 되었으며, 그 후 계시의 신비를 관조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그와 공개적으로 어떤 대화를 나누셨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아나니아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울 형제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길에서 나타나셔서 나를 네게 보내셨으니, 네 눈이 뜨이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리라”(사도행전 9:17). – 그리고 그가 세례를 받았을 때, 그는 성령으로 충만해졌으며, 주 예수님께서 성도들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이 일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계시의 깊은 비밀을 깨달았습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할 수 없느니라. 그러나 성령이 오시면 그분께서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인도하시고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려 주시리라” (요한복음 16, 12. 13).

155. 그리고 복자 바울은 바로 그때, 성령을 영접하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됨으로써 계시의 비밀을 깨달을 자격을 얻었고, 계시의 영으로 관상하기 시작하였으며, 그 관상에 기쁨을 누리고, 형언할 수 없는 말씀을 들었으며, 본성 이상의 관상을 뵙고, 하늘의 권능들을 관상하며 감탄하며, 영적인 것에서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리고 이단자들(유크티티)이 그들의 광기 속에서 주장하는 바, 마치 그가 자신의 뜻대로 이 승천에 이르렀다는 말이 결코 사실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이성은 결코 그곳으로 올라갈 수 없다. 반대로 바울은 고린도후서(고후 12, 2. 4)에 직접 기록한 대로 계시의 영에 사로잡혔으니, 이는 스스로를 성스러운 사도들에 비유하고, 자신의 생각에서 우러난 환상을 영적 관상이라 칭하는 이 허황된 자들과는 정반대이다.

156. 정욕으로 가득 차 육체적·비육체적 법칙에 대한 연구에 몰두하여, 마치 건강 유지법을 가르치는 병자와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대해, 한 성인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복되도다. 바울은 계명을 소홀히 하고 정욕을 이기지 못하면서도, 오직 정욕을 정화한 후에야 비로소 가능한 신비의 관상 속에서 복을 갈망하던 제자들에 대해 알게 되자,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먼저 정욕으로 가득 찬 낡은 사람을 벗어 버리고, 그 후에야 비로소 신비를 아는 지식으로 창조주를 닮아 새롭게 된 새 사람을 입기를 갈망하라. 그리고 나와 다른 사도들이 은혜로 실질적으로 완성한 복을 갈망하지 말라.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원하시는 자를 완고하게 하신다’ (롬 9,18). 과연 누가 그분의 얼굴에 대항하거나 그분의 뜻에 거역하겠는가? –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은혜를 베푸시기도 하고, 때로는 행함과 정화를 요구하신 뒤 비로소 은사를 보내시며, 때로는 행함과 정화 후에도 이 세상에서는 주지 않으시고, 그분의 자리에서 관조를 베풀어 주시도록 간직해 두시기도 한다.”

157. 우리는 이보다 더 작은 은사, 즉 죄 사함에 있어서도 그분이 이와 같이 행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세례는 아무 대가 없이 베풀어 주시며, 믿음 외에는 전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시지만; 반면 세례 후 죄를 회개할 때는 무상으로 용서해 주시지 않고, 수고와 슬픔, 비통함, 통회, 눈물, 오랜 울음을 요구하신 뒤에야 비로소 용서해 주십니다. 강도는 십자가 위에서 한 마디 고백만으로 무상으로 용서해 주시고 그에게 천국을 약속하셨으나, 죄인에게는 믿음과 눈물도 요구하셨습니다.

158. 하나님을 사랑하는 영혼은 하나님 안에서, 오직 그분 안에서만 안식을 얻는다. 먼저 자신 안의 모든 외적인 유대를 끊어내라. 그러면 비로소 마음으로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과의 일치는 물질로부터의 초월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아기에게 빵은 젖으로 배불리 먹인 후에야 먹이로 주어진다. 마찬가지로, 신성한 영역에서 번영하고자 하는 사람은 마치 아기가 어머니의 품과 젖꼭지에서 벗어나듯이, 먼저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기를 원한다. 육체적인 행위는 영적인 행위보다 앞서는데, 이는 흙이 아담에게 불어넣어진 영혼보다 먼저 있었던 것과 같다. 육체적인 행위를 얻지 못한 자는 영적인 행위도 가질 수 없으니, 후자는 전자로부터 태어나기 때문이다. 마치 텅 빈 밀알에서 이삭이 돋아나듯이 말이다. 그리고 영적인 행위를 갖지 못한 자는 영적인 은사도 잃게 된다.

159. 눈물로 씨를 뿌린 뒤에 기쁨의 열매가 따르듯이, 하나님을 위하여 악을 참아내는 고난 뒤에는 기쁨이 뒤따를 것이다. 땀 흘려 얻은 빵은 농부에게 달게 느껴지듯,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마음에는 의의 행실이 달게 느껴진다.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기 위해, 기꺼이 모욕과 겸손을 참아내라. 지혜를 가진 사람은, 그 말을 한 사람에게 미리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온갖 가혹한 말을 참아내며, 비록 그 과정에서 자신의 머리에 가시관을 씌우게 되더라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썩지 않는 면류관을 쓰게 되므로 복이 있다.

160. 분별력을 가지고 헛된 영광을 피하는 자는 자신의 영혼 속에서 장차 올 세상을 맛보았다. 현세에서 평안을 추구하는 자의 마음은 이미 장차 올 세상을 엿보았다. 그러나 탐욕에 사로잡힌 자는 정욕의 노예이다. 금과 은을 얻는 것만이 탐욕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탐욕이란 네 의지가 얽매이는 무엇이든 얻는 것이다. 육체적 쾌락을 추구하면서도 감각, 즉 귀와 벌어진 입을 가리지 않고, 방황하는 눈을 제멋대로 내버려 두는 자를 칭찬하지 마라.

161. 죄를 지은 자들의 죄를 용서해 주는 것이 의의 일에 속한다는 것을 알아라. 그러면 네 마음 곳곳에서 고요함과 밝음을 보게 될 것이다. 자비로운 자가 자신의 의보다 높지 않다면, 그는 자비롭지 않은 것이다. 즉, 참으로 자비로운 자는 자신의 소유에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불의를 기꺼이 참아주고 그들을 용서한다. 형제를 위해 자신의 영혼을 바치는 자가 자비로운 자이지, 단지 구제만을 통해 형제에게 자비를 베푸는 자가 아니다. 또한 형제에게 모욕을 당하더라도, 그에게 대꾸하여 그의 마음을 상하게 할 만큼 뻔뻔하지 않은 자도 자비로운 자이다.

162. 기도하는 일을 사랑하여, 네 영혼에 가까운 곳에서 위로를 얻으라. 고요함 속에서 독서에 몰두하여, 네 마음이 항상 하나님의 기적들로 향하게 하라. 인내로써 가난을 사랑하라. 그래야 마음이 흩어지지 않고 하나로 모일 수 있다. 풍요로운 삶을 미워하라. 그래야 생각들을 평온하게 지킬 수 있다. 많은 것을 멀리하고 오직 네 영혼 하나만을 돌보아라. 그래야 내면의 고요함이 흩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163. 정절을 사랑하여, 하나님 앞에서 기도할 때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도록 하라. 네 행실에서 순결을 얻어, 기도 중에 네 영혼이 빛을 발하고, 죽음을 기억함으로써 네 마음에 기쁨이 타오르게 하라. 네 일에서 게으르지 말라. 그래야 친구들 가운데 섰을 때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쾌락을 위한 것들로 네 자유를 얽매지 말라. 그래야 네가 노예들의 노예가 되지 않을 것이다. 옷차림에 있어서는 초라한 옷을 사랑하라. 그래야 네 안에서 솟아나는 생각들, 즉 마음의 교만을 꺾을 수 있다. 화려함을 좋아하는 사람은 자유로운 생각을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마음은 내면적으로 외적인 형상의 본을 따라 형성되기 때문이다.

164. 겸손함 뒤에는 절제와 모든 면에서의 절제가 따른다. 겸손은 끊임없는 자기 절제 덕분에 관조에 이르게 하며, 영혼을 정결함으로 단장한다. 반면 허영은 끊임없는 반항과 생각의 혼란으로 인해 마주치는 모든 것에서 불결한 보물을 모으고, 마음을 더럽힌다. 허영은 사물의 본질을 음란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마음을 부끄러운 상상으로 채우지만, 겸손은 관상을 통해 영적으로 자신을 가꾸며, 이를 얻은 자를 찬양으로 이끈다.

165. 노예들을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키는 것보다, 네가 스스로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 더 낫다. 네 안에 있는 삼위일체, 즉 몸과 영혼과 영의 일치를 통해 네 영혼과 화해하는 것이, 네 가르침으로 생각이 다른 이들을 달래는 것보다 더 낫다. 그레고리우스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을 위해 신학을 하는 것도 좋지만, 사람으로서는 하나님을 위해 자신을 깨끗하게 만드는 것이 더 낫다.” 죽은 자를 부활시키는 것보다, 정욕으로 인해 네 영혼 속에서 타락한 것을 신성한 것에 대한 생각으로 일깨워 회복시키는 데 신경 쓰는 것이 너에게 더 유익하다.

166. 네 생애의 모든 날 동안, 네가 어디에 가든지, 너 자신을 나그네로 여기라. 그래야만 네가 대인관계에서 자유분방함으로 인해 생겨나는 해악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항상 입으로 축복하라. 그러면 아무도 너를 비방하지 않을 것이니, 비방은 비방을 낳고, 축복은 축복을 낳기 때문이다. 어떤 일에서든 스스로를 부족하다고 여기며 배우려 하라. 그러면 평생 지혜로운 사람이 될 것이다. 네가 직접 경험하지 않은 일은 남에게 말하지 마라. 그래야 네가 스스로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며, 네 삶을 되돌아보았을 때 네 거짓말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167. 이단적인 가르침을 읽는 것을 조심하라. 이는 오히려 네게 모독의 영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이다. 종종 만족할 줄 모르고,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스승들의 책을 읽으라. 그 책들은 마음이 하나님의 피조물과 일들 속에서 질서를 분별하도록 인도하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며, 그 섬세함으로 빛나는 생각을 얻도록 준비시키고, 순수함 속에서 하나님의 피조물을 올바르게 이해하도록 이끄기 때문이다. 온 우주를 알기 위해 하나님께서 유언으로 남기신 복음을 읽으라. 그리하여 네 마음이 하나님의 기적 속에 깊이 잠기게 하라. 네 독서는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고요함 속에서 이루어지도록 하라. 그리고 육체에 대한 지나친 염려와 세상의 소란으로부터 자유로워져, 달콤한 깨달음 속에서 네 영혼이 모든 감각을 초월하는 가장 달콤한 맛을 느끼고, 영혼이 그 안에 머무르며 이를 체험하게 하라.

168. 네 영혼을 정화하고, 네 본성 밖에 있는 것에 대한 근심을 떨쳐 버리며, 네 생각과 행동에 순결과 겸손의 장막을 드리우라. 그리하면 네 본성 안에서 그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니, 이는 겸손한 자에게 비밀의 계시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169. 만일 네 영혼을 마음을 정화하는 기도의 일과, 밝은 이성을 얻기 위한 밤의 깨어 있는 경지에 전념하고자 한다면, 세상의 시선에서 멀어지고, 사람들과의 만남을 중단하며, 평소처럼 친구들을 받아들이지 마라. 심지어 유익하다는 명목이라도, 너와 마음이 같고 생각이 일치하며 네 동료 신자들 외에는 말이다. 영적 대화의 혼란을 경계하고, 외적인 대화를 끊은 뒤, 기도와 함께 자선을 실천하라. 그러면 네 영혼은 진리의 빛을 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이 외적인 사물들로 인해 동요하는 것을 멈출수록, 마음은 신성한 생각과 행실을 깨닫는 데서 더 나아가 그 진리를 통찰하고 경탄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영혼은 우리가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한 대화를 다른 대화로 금방 대체하는 습관이 있기 때문이다.

170. 한 가지 대화를 다른 대화(헛된 것에서 영혼을 구원하는 것으로)로 바꾸기 위해, 성경과 성인들의 행적을 읽는 데 힘쓰라. 그리고 기도와 자신의 규칙을 실천할 때, 세상에서 보고 들은 것에 대한 묵상 대신, 읽은 신성한 성경에 대한 묵상을 마음속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며, 이 묵상을 통해 세속적인 것을 기억하던 것이 잊혀지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하여 마음은 맑아진다. 이것이 바로 기록된 바의 뜻이니, 곧 독서는 기도를 드릴 때 영혼을 돕는다는 것이며, 또한 영혼은 기도를 통해 독서에서 빛을 얻는다는 것이다. 또한 독서는 외부의 잡다한 요소 대신 다양한 형태의 기도에 양식을 제공하므로, 독서를 통해 영혼은 빛을 얻어 언제나 게으름 없이, 흔들림 없이 기도할 수 있게 된다.

171. 육체를 탐하는 자들과 배를 채우는 자들이 영적인 주제를 탐구하는 것은, 창녀가 정절에 대해 떠들어대는 것만큼이나 부적절하다. 지독히 병든 몸은 기름진 음식을 견디지 못하듯이, 세속적인 일에 몰두한 마음은 신성한 것을 탐구하는 데 다가갈 수 없다. 불은 젖은 장작에서는 타오르지 않듯이, 신성한 열정은 평온 을 사랑하는 마음속에서는 타오르지 않는다. 마치 자신의 눈으로 태양을 보지 못한 사람이, 단지 들은 말만 가지고 그 빛을 남에게 설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빛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영적인 일의 달콤함을 자신의 영혼으로 맛보지 못한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172. 하루에 필요한 것보다 남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담대하게 나아가 기도를 드려라. 즉, 아들이 아버지께 하듯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라. 자선만큼 마음을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가게 하는 것은 없으며, 자발적인 가난만큼 영혼에 깊은 평온을 주는 것도 없다. 베풀 때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얼굴에 온화함을 띠고, 요청한 것보다 더 많이 베풀어라. 합당한 자와 합당하지 않은 자를 가려내려 애쓰지 마라. 선행을 할 때는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대하라. 왜냐하면 이런 방식으로 합당하지 않은 자들조차 선으로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 영혼은 육체를 통해 곧바로 하느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이끌리기 때문이다.

173. 네 방을 사치스러운 것들로부터 깨끗이 비워라. 이는 네가 원치 않더라도 절제로 이끌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면에서 검소함은 사람에게 절제를 가르쳐 준다. 외적인 싸움, 즉 감각—청각, 시각 등—이 영혼을 향해 일으키는 싸움에서 승리한 자는 내적인 싸움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사람이 성문, 즉 감각을 닫아 버리면, 그때는 내면에서 싸우게 되며 성 밖의 악의를 품은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를 알고 수많은 일로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으며, 온몸의 활동을 기도하는 일에 쏟는 자는 복이 있다.

174. 하나님께서 내면적으로 네 마음을 감동시키실 때, 끊임없이 절하고 무릎을 꿇어라. 그 시간에 악마들이 다른 일에 몰두하라고 너를 설득하기 시작하더라도, 네 마음이 어떤 일에 신경 쓰게 두지 마라. 그러면 지켜보라. 그리고 그로 인해 네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놀라워하라. 영적 투쟁에서 그 어떤 것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엎드려 밤낮으로 기도하며 마치 양손이 등 뒤로 묶인 것처럼 행동하는 것만큼 중요하고 어렵지도 않으며, 악마들에게 그토록 큰 시기심을 불러일으키지도 않는다. 네 열정이 식지 않고 눈물로 인해 쇠약해지지 않기를 원한다면, 이 일에 전념하라. 그리고 네게 전해진 이 말씀을 밤낮으로 마음에 새기며 다른 어떤 것도 추구하지 않는다면, 너는 복이 있을 것이다. 수행하지 않으면 얻지 못할 것이며, 열정을 다해 문을 두드리며 끊임없이 그 앞에서 깨어 있지 않으면, 응답받지 못할 것이다.

175. 겉사람이 세상의 모든 것, 곧 죄뿐만 아니라 온갖 행위에 대하여 죽지 않고, 또한 속사람이 악한 생각에 대하여 죽지 않으며, 육체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이 마음속에 죄의 달콤함이 일지 않을 정도로 쇠약해지지 않는 한, 그때까지 하나님의 영의 달콤함도 사람 안에서 일지 않을 것이며, 그의 지체들은 이 생에서 순결함을 얻지 못할 것이며, 신성한 생각들은 그의 영혼에 들어오지 못하고 감지할 수도 볼 수도 없는 상태로 남을 것이다. – 그리고 사람이 마음속에서 본성의 필수적인 필요를 제외하고는 세속적인 일에 대한 염려를 무력화시키지 않고, 이를 하나님께 맡기지 않는 한, 그때까지 그 안에 영적인 황홀감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176. 모든 이의 공통된 종착점이 어떤 평등으로 이어지는지를 확신과 감정으로 마음에 새기는 자는, 세속적인 것을 버리기 위해 다른 스승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자발적으로 정욕의 원인을 멀리하지 않는 자는 어쩔 수 없이 죄로 빠져들게 된다. 죄의 원인은 다음과 같다: 술, 여자, 부, 육체의 건강; 그러나 이것이 본질적으로 죄이기 때문이 아니라, 본성이 이를 통해 죄악적인 정욕으로 쉽게 기울어지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사람은 이를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 사람들은 가난을 혐오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영혼과 거만하게 치솟는 마음을 훨씬 더 혐오하신다. 사람들에게는 부가 존경받지만,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영혼을 높이 여기신다.

177. 선한 행실을 시작하고자 한다면, 먼저 닥쳐올 유혹에 대비하라. 왜냐하면 원수는 누군가가 뜨거운 믿음으로 선한 삶을 시작하는 것을 보면, 그를 온갖 끔찍한 유혹으로 맞이하여, 그로 인해 두려움에 빠지게 하고 선한 의지를 식게 하여, 더 이상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행위에 열정적으로 다가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관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미덕을 향한 유혹이 닥칠 때 용감하게 맞설 준비를 하고, 그 후에야 비로소 그 실천을 시작하라.

178. 하나님의 계명은 세상의 모든 보물보다 높습니다. 이를 얻은 자는 자기 내면에서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항상 하나님의 돌보심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자는 하나님을 집의 관리자로 모시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를 갈망하는 자는 하늘의 천사들을 길잡이로 삼게 될 것입니다. 죄를 두려워하는 자는 험난한 여정을 흠 없이 헤쳐 나갈 것이며, 어둠이 닥쳤을 때 자신의 앞과 내면에서 빛을 발견할 것이다. 죄를 두려워하는 자의 발걸음을 주님께서 지키시며, 유혹이 닥칠 때 하나님의 자비가 그를 앞서 가신다. 자신의 죄를 사소한 것으로 여기는 자는 이전보다 더 나쁜 상황에 빠지게 되며, 일곱 배의 벌을 받게 된다.

179. 겸손함으로 자선을 베풀면, 심판의 날에 자비를 거두게 될 것이다. 네가 선한 것을 무엇으로 망쳤는지에 따라, 다시 그것을 얻어야 한다. 네가 정절을 망쳤다면, 음행 속에 머물러 있는 한 하나님께서는 네 자선을 받아들이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네 몸의 거룩함을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병은 그에 맞는 약으로 치료된다. 네가 시기심에 굴복했다면, 왜 (시기심이 아니라) 잠과 싸우려고 애쓰는가?

180. 잘못이 아직 작고 성숙하지 않았을 때, 그것이 가지가 넓게 뻗어 열매를 맺기 전에 뿌리째 뽑아 버려라. 결점이 사소해 보일 때 게으름에 빠지지 마라. 나중에 그 안에서 비인간적인 지배자를 발견하고, 노예나 죄수처럼 그 앞에서 도망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정욕에 맞서 싸우는 자는 곧 그 정욕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181. 손에 그것을 물리칠 수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모욕을 견뎌내는 자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분께로부터 위로를 받은 것이다. 그리고 겸손한 지혜로 자신에게 씌워지는 비난을 참아내는 자는 완전함에 이르렀으며, 성스러운 천사들도 그를 경탄한다. 왜냐하면 그 어떤 미덕도 이만큼 높고 실천하기 어려운 것은 없기 때문이다.

182. 유혹을 받기 전까지는 네가 강하다고 믿지 마라. 그래야만 네가 변함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네 힘에 의지하지 마라. 그래야 연약함으로 인해 넘어지는 일이 없으리라. 그리고 그때 네가 스스로 넘어짐으로써 네 연약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네 지식을 믿지 마라. 그래야 원수가 끼어들어 그의 교활함으로 너를 속이지 못할 것이다. 결코 말이나 행실로 자랑하지 마라. 그래야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무엇으로든 자랑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가 겸손해지고 온유함을 배우도록 변하게 내버려 두신다.

183. 끊임없이 네 눈을 하나님께 향하라. 하나님의 보호와 섭리는 모든 사람을 감싸고 있지만, 그분은 보이지 않으시며 오직 죄에서 자신을 정화하고, 항상 하나님, 그것도 오직 그분만을 생각하는 자들에게만 드러나시기 때문이다. 특히 그들이 하나님을 위해 유혹에 빠질 때, 하나님의 섭리가 그들에게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그때 그들은 마치 육신의 눈으로 그분을 빤히 바라보는 것처럼, 각자에게 닥친 유혹의 정도와 원인에 따라 하나님의 섭리를 체감하게 되는데, 이는 야곱, 여호수아, 세 소년, 베드로와 그 밖의 성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에게 섭리가 어떤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경건함 안에서 그들을 격려하고 확고하게 해 주었듯이 말이다.

184. 세상과 동떨어진 수행자들과 은둔자들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그들은 광야를 도시로 만들고, 천사들의 거처와 수도원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들의 경건한 삶을 보러 천사들이 항상 그들에게 찾아왔으며, 한 분 주님의 전사들로서 때때로 서로를 돕고 협력했습니다. 그들은 생애 내내 광야를 사랑했으며, 하느님을 향한 사랑으로 산과 동굴, 땅의 심연에 거처를 마련했습니다. 그들이 세속적인 것을 버리고 천상의 것을 사랑하며 천사들을 본받는 자가 되자, 가장 거룩한 천사들조차도 정당한 보답으로 그들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숨기지 않았으며, 그들의 모든 소원을 들어주고, 모든 일에서 그들에게 온갖 도움을 베풀어 주었다.

185. 한 번 영원히 자신을 하느님께 바친 사람은 마음의 평안 속에서 삶을 살아간다. 탐욕을 버리지 않으면 영혼은 생각의 동요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감정을 고요하게 하지 않고서는 생각 속에서 평화를 느낄 수 없다. 유혹에 빠지지 않고서는 누구도 영적 지혜를 얻을 수 없다. 부지런히 읽지 않고서는 생각의 미묘한 점을 알 수 없다. 생각이 고요하지 않고서는 마음이 깊은 신비로 나아갈 수 없다. 믿음에 대한 소망 없이는 영혼이 감히 유혹에 맞설 용기를 낼 수 없다. 하나님의 명백한 보호를 경험하지 않고서는, 마음이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다. 영혼이 깨달음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맛보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와 교제할 수 없을 것이다.

186.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하나님을 자신의 보호자로 삼는 것이며, 하나님을 위하여 가난해지는 자는 고갈되지 않는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으시나, 사람이 그분의 형상을 안식하게 하고 그분을 위하여 그 형상을 공경하는 것을 보실 때 기뻐하신다. 누군가 네게 네가 가진 것을 구할 때, 마음속으로 “이것은 내 영혼을 위해 남겨 두어 여기서 안식을 얻게 하고,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다른 곳에서 필요한 것을 주실 것이다”라고 말하지 말라. 그런 생각은 불의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나 어울리는 것이다. 의롭고 선한 사람은 자신의 영광을 타인에게 넘겨주지 않으며, 은혜의 시간이 헛되이 지나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공급을 받으니, 주님께서는 누구도 버리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네가 가난한 이를 쫓아내면, 하나님께서 네게 주신 영광을 저버리고 그분의 은혜를 네게서 멀어지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베풀 때 기뻐하며 말하라. “하나님이시여, 제가 위로해 줄 사람을 찾게 해 주심에 영광을 돌립니다.” 만일 네가 줄 것이 없다면, 더욱 기뻐하며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말하라. “나의 하나님이시여,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가난해지도록 이 은혜와 영광을 내게 주시고, 주님의 계명의 길에 놓인 고난을 병고와 궁핍 속에서 맛보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마치 이 길을 걸어가신 주님의 성인들이 맛보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187. 우리의 본성은 정욕을 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 세상에는 유혹이 많고, 악은 너에게서 멀지 않다. 그것은 네 안에서 솟아나며 네 발 아래에 있다. 눈앞에서 세기들이 서로 가까이 있는 것처럼, 유혹도 사람들에게 가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너를 위한 유익으로 지혜롭게 미리 마련하셨습니다. 이는 네가 끊임없이 그분의 문을 두드리게 하고, 슬픔의 두려움을 통해 그분에 대한 기억이 네 마음에 새겨지게 하며, 기도를 통해 그분께 가까이 나아가고, 그분에 대한 끊임없는 기억으로 네 마음이 거룩해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슬픔에 닿지 않는 존재로 창조하지 않으셨으니, 이는 네가 신이 되고자 갈망할 때, 처음에는 천사였으나 나중에는 교만함으로 인해 사탄이 된 자와 같은 운명을 따르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며, 또한 너를 변함없고 움직이지 않는 존재로 창조하지 않으셨으니, 이는 네가 무생물의 본성과 같아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188. 마음속에 하나님을 기억하며, 하나님 앞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정화하라. 그래야 오랫동안 그분을 기억하지 않은 채 지내다가, 그분께 나아갈 때 담대함을 잃지 않게 될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담대해지는 것은 그분과 자주 대화하고 많이 기도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사람들과의 교제는 육체를 통해 이루어지지만, 하나님과의 교제는 그분을 마음속으로 기억하고, 기도 중에 그분께 주의를 기울이며, 온전히 그분께 자신을 맡기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 오랫동안 하나님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다 보면, 영혼은 때때로 경이로움과 놀라움에 빠지게 된다. “주님을 찾는 자들의 마음이 기뻐하리라. 주님을 찾으라”, 죄인들아, “그리고 소망으로 굳건히 서라”; “그분의 얼굴을 찾으라” 회개를 통해 (시 104:3, 4), – 그리하여 그분의 거룩하심으로 거룩해지고 너희의 죄에서 정결해지라.

189. 불의한 자에게 시련이 닥칠 때, 그는 하나님을 부르며 그분께 구원을 기대할 소망이 없으니, 이는 그가 안식의 날들에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졌기 때문이다. 슬픔이 네게 닥치기 전에 하나님께 기도하라; 그러면 슬픔의 때에 그분을 찾게 될 것이며, 그분께서 네 기도를 들으실 것이다. 노아의 방주는 평화로운 시기에 준비되었으며, 그 목재는 백 년에 걸쳐 다듬어졌으나, 진노의 때에 불의한 자들은 멸망했고, 의인에게는 그것이 피난처가 되었다.

190. 마음속에 평화가 죽은 자는 기쁨으로 모욕을 참아내나, 마음속에 평화가 살아 있는 자는 모욕을 참지 못하고 허영심에 이끌려 분노하며, 무분별한 행동으로 인해 혼란에 빠지거나 슬픔에 잠기게 된다. 모욕을 참는 인내와 너그러움이라는 미덕에서 뛰어나고자 하는 자는, 친족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그네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고향에서는 이 미덕을 완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위대하고 강한 자들만이 친족들 가운데서 그러한 고통을 견딜 수 있는데, 이는 오직 이 세상이 이미 죽은 자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현세에서 어떠한 위안도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191. 은혜가 겸손함에 가까이 있듯이, 고통스러운 시련은 교만에 가까이 있다. 주님의 눈은 겸손한 자들에게 있어 그들을 기쁘게 하시며, 주님의 얼굴은 교만한 자들에게 맞서 그들을 낮추시느니라. 네 위대함 속에서 쉽게 무시당하는 자가 되라. 네 보잘것없음 속에서 자만하는 자가 되지 말라. 영예를 추구하는 자에게는 영예가 앞서 달아나고, 영예를 피하는 자에게는 영예가 뒤에서 쫓아온다. 하나님을 위해 갈망하고 목마르게 구하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선하심으로 만족하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을 위해 벌거벗음을 참는 자는 그분께서 썩지 않는 영광의 옷을 입혀 주실 것이다. 하나님을 위해 가난해지는 자는 그분의 참된 부요함으로 위로받는다. 평생 자신을 죄인으로 인정하라. 그래야 평생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다. 겸손한 자들과 어울리면 그들의 품성을 배우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고 공손하게 대하는 것이 항상 네 품성이 되게 하라.

192. 하나님께서는 영혼의 유익을 위해, 영혼이 정욕에 노출되도록 허락하셨으나, 두 번째 삶이 시작되기 전에 영혼을 정욕보다 더 높은 위치에 두는 것은 유익하지 않다고 보셨다. – 영혼이 정욕에 노출되는 것은 양심을 찔리게 하는 데 유익하지만, 정욕 속에 머무르는 것은 뻔뻔하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일이다. 식탐에서 생각의 동요가 생겨나듯이, 수다와 무분별한 대화에서는 무의미함과 마음이 제 자리를 벗어나는 일이 생겨난다. 세속적인 일들에 대한 염려는 영혼을 혼란에 빠뜨리고, 그로 인한 동요는 마음을 어지럽혀 평온을 빼앗는다. 하늘의 일에 자신을 바친 수도사는 언제나 세속적인 근심에서 벗어나, 자기 내면에 깊이 잠겨 현세와 관련된 그 어떤 것도 찾지 않아야 마땅하다. 이러한 모든 것에서 해방된 그는 이제 방해받지 않고 밤낮으로 주님의 율법을 배울 수 있다.

193. 마음의 청결함이 없는 육체적 수고는 열매 없는 자궁과 말라버린 젖꼭지와 다름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지식에 다가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몸을 지치게 할 뿐 마음속의 정욕을 뿌리 뽑는 데는 신경 쓰지 않으니, 그 때문에 아무것도 거두지 못한다. 가시덤불에 씨를 뿌린 자가 아무것도 거둘 수 없는 것처럼, 원한과 탐욕으로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자는 그 어떤 일에서도 성공할 수 없으며, 일을 걱정하는 무거운 짐 때문에 불면증에 시달리며 침상에서 신음할 뿐이다.

194. 만일 영혼이 하나님을 기억하고 밤낮으로 쉬지 않고 깨어 있음으로 빛나게 된다면, 주님께서는 그곳(내면)에 그 영혼을 보호하기 위한 구름을 마련하시어, 낮에는 그 구름으로 그 영혼을 덮어 주시고, 밤에는 불의 빛으로 비추시니, 그 어둠 속에서 빛이 비치게 된다.

195. 구름이 달빛을 가리는 것처럼, 가득 찬 배에서 뿜어져 나오는 증기는 영혼 속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쫓아낸다. 마른 장작 속의 불꽃이 그러하듯, 배가 가득 찬 몸도 그러하다. 한 가연성 물질이 다른 것에 닿으면 불꽃이 커지듯이, 다양한 음식물들은 몸속의 정욕적인 움직임을 증폭시킨다. 쾌락을 탐하는 몸에는 하나님의 지식이 거하지 않으며, 자기 몸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얻지 못한다. 출산의 고통 속에서 산모를 기쁘게 하는 열매가 세상에 태어나듯이, 목이 타는 듯한 고통 속에서 영혼 속에 하나님의 비밀을 아는 열매가 태어납니다. 아버지가 자녀를 돌보듯이, 그리스도께서도 그분을 위해 고난받는 몸을 돌보시며, 그 몸은 언제나 그분의 입가에 가까이 있습니다.

196. 생각으로 세상의 모든 것에서 벗어난 자가 바로 그 순례자이다. 세상 밖에서 머물며, 미래의 복을 얻게 해 달라고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가 바로 그 수도사이다. 수도사의 부는 울음 속에서 얻는 위안이며, 마음의 은밀한 곳에서 빛나는 믿음에서 오는 기쁨이다. 육체적 결합으로 몸을 더럽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사소한 암시조차 부끄러워하는 자가 바로 순결한 자이다. 정절을 사랑한다면, 독서와 지속적인 기도로 음란한 생각을 물리쳐라. 그러면 그런 충동에 대항할 무기를 갖게 될 것이며, 이것이 없이는 영혼의 순결을 볼 수 없다.

197. 네가 진정으로 자비롭다면, 네가 마땅히 가져야 할 것을 빼앗겼을 때 내적으로 슬퍼하지 말고, 그 손실에 대해 남들에게 말하지 마라. 너를 해친 자들이 입힌 손실이, 마치 포도주의 떫은 맛이 많은 물에 녹아들듯이, 네 자비로 삼켜지게 하라. 너를 해친 자들에게 베푸는 선행으로 네 자비의 풍성함을 증명하라. 마치 복된 엘리사가 자신을 포로로 잡으려 했던 원수들에게 행했던 것처럼(열왕기하 6:13–23).

198. 진정으로 겸손한 지혜를 가진 사람은, 자신이 옳다는 것이 입증되었을 때에도 분개하지 않으며, 자신이 옳은 일에 대해 자신을 변호하는 말을 하지 않고, 비방을 진리처럼 받아들이며, 사람들에게 자신이 비방당했다는 것을 확신시키려 애쓰지 않고 용서를 구한다. 어떤 이들은 실제로는 그렇지 않으면서도 자발적으로 부도덕한 자라는 오명을 자초했고, 또 다른 이들은 간음과는 거리가 먼데도 간음자라는 칭호를 참아내며, 눈물로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죄의 열매를 짊어지고 있음을 증언하고, 울며 자신들이 저지르지 않은 불법에 대해 상처를 준 이들에게 용서를 구했는데, 그 당시 그들의 영혼은 온갖 순결과 흠 없음으로 빛나고 있었다. 또 어떤 이들은 비밀리에 지키던 탁월한 삶의 규범으로 인해 칭송받지 않기 위해, 신성한 소금에 녹아든 듯 미친 사람처럼 행세하며, 자신의 고요함 속에서 흔들림 없이 굳건히 서 있었기에, 그 완전함의 높은 경지에 이르러 성스러운 천사들이 그들의 미덕을 선포하는 전령이 되게 하셨다.

199. 구세주께서는 아버지 곁에 있는 수많은 거처들을 통해, 그 나라에 거하는 자들의 다양한 지성 수준을, 즉 지성의 정도에 따라 누리는 영적 은사의 구별과 차이를 지칭하셨습니다. 이는 장소의 차이에 따른 것이 아니라, 은사의 정도에 따라 그 거처들을 ‘수많은’ 것으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각자가 시력의 순수함과 수용력에 따라 감각적인 태양을 누리는 것처럼, 또한 한 집안의 한 등불에서 비추는 빛이 각기 다르지만 빛 자체가 여러 개의 빛으로 나뉘지는 않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장차 올 세상에서는 모든 의인들이 분리되지 않고 한 나라에 거하게 되지만, 각자는 자신의 분량에 따라 하나의 영적 태양으로부터 빛을 받으며, 자신의 가치에 따라 마치 하나의 공기, 하나의 장소, 보좌, 광경, 형상에서 비롯된 것처럼 기쁨과 즐거움을 자신에게 끌어당긴다. – 그리고 누구도 자신의 친구가 더 높든 낮든 그 정도를 보지 못하므로, 만일 친구의 뛰어난 은총과 자신의 결핍을 보게 되더라도, 그것이 그에게 슬픔과 비탄의 원인이 되지 않는다. 그곳에서는 누구나 자신에게 주어진 은총에 따라, 각자의 분량대로 내면적으로 기뻐한다. 그러나 모든 이를 아우르는 하나의 광경과 나라가 있으니, 이 두 단계, 즉 하늘나라와 땅나라를 말하며, 그 사이에는 보상의 다양성에 따른 다채로움이 존재한다.

200. 악마가 음란한 기억으로 마음을 더럽히고자 할 때, 먼저 허영심에 대한 그들의 애정을 시험하며, 이 생각의 시작은 정욕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는 보통 자신의 마음을 잘 지키는 사람들, 즉 쉽게 부적절한 생각을 심어줄 수 없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행동한다. 그러나 악마가 사람을 그의 요새에서 끌어내어, 그가 첫 번째 생각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고 자신의 요새에서 멀어지기 시작하면, 그때 악마는 음행을 연상시키는 무언가로 그를 맞이하며, 마음을 부도덕한 대상들로 유혹한다. 마음은 처음에는 갑작스러운 유혹에 당황하지만, 나중에는 그것과 타협하게 되고, 결국 생각에서 행동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러나 마음이 뒤로 물러서서 처음 떠오르는 생각의 유혹을 미리 막아낸다면, 그때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정욕을 쉽게 이겨낼 수 있다.

201. 정욕을 물리치는 데는 저항하기보다는 미덕을 기억하는 것이 더 낫다. 왜냐하면 정욕이 자기 영역을 벗어나 싸움을 일으킬 때, 마음속에 그 형상과 모습을 각인시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싸움은 마음에 대한 막강한 지배력을 얻어, 생각을 심하게 동요시키고 혼란에 빠뜨린다. 그러나 우리가 앞서 말한 첫 번째 원칙에 따라 행동한다면, 정욕을 물리친 후 마음속에는 그 흔적조차 남지 않는다.

202. 사람이 위로자를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선한 것을 기억하는 것이 그의 생각에 각인되고, 끊임없는 독서를 통해 선을 향한 열망이 새롭게 되며, 죄의 미묘한 길로부터 그의 영혼을 지키기 위해 신성한 경전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는 아직 오류를 제거하고 영혼에 유익한 기억들을 사로잡는 성령의 능력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령의 능력이 사람 안에서 작용하는 영적 힘으로 내려올 때, 그때는 성경의 율법 대신 성령의 계명이 마음에 뿌리내리게 되며, 그때 그는 성령으로부터 은밀히 배우게 되어 감각적 대상의 도움에 의존할 필요가 없어진다. 왜냐하면 마음이 감각적 대상로부터 배우는 한, 가르침 뒤에는 곧바로 오해와 망각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르침이 성령에 의해 전해질 때, 그 기억은 흠 없이 보존된다.

203. 깃털이 아직 자라지 않은 새는, 회개할 때 막 정욕의 속박에서 벗어난 그 마음을 말하며, 기도 중에 세속적인 것 위로 높이 올라가려고 애쓰지만 그럴 수 없고, 오히려 날 힘도 없이 여전히 땅 위를 기어다니는 자이다. 그러나 독서와 실천, 경외심, 그리고 수많은 미덕에 대한 염려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하나로 모은다. 왜냐하면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알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잠시 동안 마음을 더럽히지 않게 보존해 주지만, 나중에 기억들이 되살아나 마음을 뒤흔들고 더럽히게 된다; 왜냐하면 사람은 아직 그 평온한 자유의 공기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직 오랜 시간이 지나 세속적인 것을 잊음으로써 비로소 마음을 그곳으로 이끌 수 있는데, 이는 그가 육체적인 날개, 즉 겉으로만 드러나는 미덕만을 얻었을 뿐, 관조적인 미덕은 아직 보지 못했고, 그것들을 체험할 자격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미덕들은 바로 사람이 천상의 것에 가까워지고, 세속적인 것에서 멀어지게 하는 마음의 날개들이다.

204. 사람이 감각적인 것으로 주님을 섬기는 한, 그 감각적인 것들의 형상이 그의 생각에 각인되며, 그는 신성한 것을 육체적인 형상으로 상상한다. 그러나 그가 내적인 체험을 얻게 되면, 그 체험의 정도에 따라 마음도 때때로 사물의 형상들 위로 높아질 것이다.

205. 네 영혼이 어둠에서 벗어나려는 시점에 다다르면, 다음이 너에게 표징이 될 것이다. 네 마음이 타오르고, 마치 불처럼 밤낮으로 불타오를 것이며; 그 때문에 온 세상을 잿더미로 여기게 되고, 심지어 음식조차 원하지 않게 되며, 네 영혼 속에서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새롭고 불타오르는 생각들의 달콤함에 휩싸이게 된다. 갑자기 너에게 눈물의 샘이 솟아나는데, 마치 억지로 흐르지 않는 시냇물처럼, 네 모든 일에 스며들게 될 것이다. 즉, 네가 책을 읽을 때, 기도할 때, 묵상할 때, 음식을 먹고 마실 때, 그리고 네 모든 일 속에서 말이다. 네 영혼 안에서 이를 보게 될 때, 용기를 내라. 네가 이미 바다를 건넜기 때문이다. 그리고 네 일에 그토록 부지런히 힘쓰며, 그토록 꼼꼼히 경계하여 은혜가 날마다 네 안에서 더해지게 하라. 그러나 네 안에서 이를 만나기 전까지는, 너는 아직 네 길을 완주하지 못했고, 하나님의 산에 오르지 못한 것이다. 만일 네가 눈물의 은혜를 얻고 받아들인 후에도, 그것들이 멈추고 네 열정이 식어버리는데, 다른 어떤 변화도 없이, 즉 육체의 쇠약함 없이 그렇게 된다면, 화가 있을지어다! 자만심이나 태만, 혹은 나태함에 빠져 무엇을 망쳐버린 것인가?! – 그러나 눈물 뒤에 무엇이 뒤따를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쓰기로 하겠다.

206. 할 일이 없다면, 덕행에 대해 말하지 마라. 그분을 위해, 그리고 그분을 위하여 품는 슬픔은 어떤 기도나 제물보다도 하나님 앞에서 귀중하며, 모든 향기로운 제물보다도 그 땀의 냄새가 더 귀하다. 육체적 수고 없이 이루어진 모든 미덕은 시기상조이며 생명이 없는 태의 열매로 여겨라. 의인들의 헌물은 그들의 눈물이며, 하나님께 기쁜 제물은 기도하는 동안 내뱉는 그들의 한숨이다. 의로운 자들과 육체의 무거움에 짓눌린 자들은 주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병중에도 하나님께 기도를 올릴 것이니, 그들의 절규하는 목소리에 성스러운 천사들이 그들을 돕기 위해 와서 희망으로 그들을 격려하고 위로할 것이다. 이는 거룩한 천사들이 성도들과 가까워 그들의 고통과 슬픔에 동참하기 때문이다.

207. 포도주는 몸을 따뜻하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열정으로 불타오르는 이들은 소망하는 바에 대한 묵상에 사로잡히며, 자신의 생각을 장래의 세상에 준비한다. 포도주에 취한 자들은 눈앞의 장애물을 보지 못하듯이, 희망에 취한 자들은 슬픔도,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알지 못한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위해 슬픔의 바다를 건너기 위해, 단순함과 꾸밈없는 성품으로 허리를 동이고, 뒤로 물러서지 않는 자들은 복이 있다. 소망을 품고 험난한 길에 들어선 이들은 뒤로 물러서지도 않고, 이에 대해 깊이 따져보려고 멈춰 서지도 않는다. 그러나 바다를 건너고 나면, 그때서야 그 길의 험난함을 돌아보며, 자신들도 알지 못했던 그 곤란과 급류, 그리고 험난한 길에서 그들을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린다. 소망은 항해를 시작하며, 처음의 열정으로 휩쓸려 가는데, 육체에 대한 걱정은 조금도 하지 않고, 시작하는 수고에서 어떤 성공이 있을지 없을지 스스로 고민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고자 할 때, 먼저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살지 않을 사람처럼, 죽음을 준비한 사람처럼, 현세에서 절망한 사람처럼, 자신의 기한이 다한 사람처럼 유언을 작성하라. 용기를 내어 모든 선한 일을 시작하고, 양면적인 마음으로 그러한 일에 착수하지 말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에 흔들리지 말라. 그래야 네 수고가 헛되지 않고, 네 행위가 부담이 되지 않을 것이다.

208. 하나님을 따라 사는 자들의 행실은 다음과 같다. 어떤 이는 하루 종일 머리를 땅에 부딪히며, 이를 예배, 즉 기도 시간을 대신한다. 또 다른 이는 끊임없이 오랫동안 무릎을 꿇은 채 기도의 횟수를 채운다. 또 다른 이는 수많은 눈물로 하나님의 예배를 대신하며 그것으로 만족한다. 또 다른 이는 읽는 글의 의미를 깊이 헤아리려 노력하며, 그것과 함께 정해진 규칙을 실천한다. 또 다른 이는 굶주림으로 영혼을 괴롭혀, 결국 예배를 드릴 수 없는 지경에 이릅니다. 어떤 이는 시편을 열렬히 묵상하며, 자신의 예배를 끊임없이 이어갑니다. 또 다른 이는 독서에 시간을 보내며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또 다른 이는 신성한 경전에서 신성한 의미를 헤아리며 그 의미에 사로잡힙니다. 또 어떤 이는 시편 구절들 속에서 자신을 놀라게 하는 기적들에 경탄하여 평소의 독서를 멈추고 침묵에 사로잡힌다. 또 다른 이는 이 모든 것을 맛보고 배부른 뒤, 뒤로 물러나 무기력해졌다. 또 어떤 이는 아주 조금만 맛보고 자만하여 미혹에 빠졌다. 또 어떤 이는 중병과 쇠약함으로 인해 자신의 규율을 지키는 데 방해를 받았고, 또 다른 이는 어떤 습관이나 욕망, 또는 제멋대로인 성향, 허영심, 탐욕, 혹은 물질적 재물을 모으는 것에 대한 집착이 지배하여 그러했다. 또 어떤 이는 넘어졌으나 다시 일어섰고, 귀중한 진주를 얻기 전까지는 자신의 척추를 굽히지 않았다.

209. 모든 것의 시작은 하나님 앞에서 선한 의도(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결심)이다. 그 다음으로 세속적인 일들로부터 멀어짐에 따라, 각자의 능력에 따라 금식, 성경 읽기, 밤샘 기도와 절제된 기도, 그리고 낮 시간대에 행하는 것이 유익하고 때로는 밤에도 행하는 수많은 절이 뒤따른다. 비록 아주 적은 수로 삼십 번의 절을 하는 것부터 시작하더라도, 그 후 존귀한 십자가에 절하고 그것으로 마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자신의 능력에 따라 이 절의 횟수를 늘리는 이들도 있다. 또 어떤 이들은 맑은 정신을 유지하며, 강요나 잡념 없이 얼굴을 땅에 대고 단 한 번의 기도에 세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즉, 어떤 이들은 자주 그러나 조금씩 기도하고, 다른 이들은 한 번 기도에 임하면 오랫동안 서 있다.)

210. 우리의 적 마귀에게는 수행에 나서는 자들을 상대로 교묘하게 싸움을 다양하게 꾸미는 오래된 관습이 있다. 그들에게 다양한 무기를 사용하며, 그 사람의 의도를 살피고 그에 따라 싸움 방식을 바꾼다. 적의 싸움에서 첫 번째 수법. – 의지가 나태하고 생각이 약한 자들에게는 처음부터 강력하게 공격하여, 그들에게 강한 유혹을 일으키고, 첫 번째 시련부터 두려움이 그들을 사로잡게 하여, 그들의 길이 가혹하고 험난하게 보이게 한다. 그리하여 그들이 말하게 한다: “길의 시작이 이토록 무겁고 힘들다면, 과연 누가 그 끝에 이르기까지 그 길에 닥칠 수많은 시련을 견뎌낼 수 있겠는가?” 그리고 마귀는 그들과 오래 싸우지 않고, 곧바로 그들을 도망치게 만든다. 이는 그들이 의심과 냉담함으로 주님의 대업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기꺼이 죽을 각오로 이 대업에 나설 것을 명하시며, 충실한 수고자에게 순교자의 영광을 씌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들이 처음부터 죽음을 각오하지 못했기에, 그토록 연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그 때문에 모든 전투에서 그들은 더 이상 견고하지 못하며, 자만심에 차 있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육신을 아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수는 그들 안에서 성도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영적 힘을 발견하지 못하고, 폭풍처럼 그들을 몰아낸다.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협력하시고 도우시며, 그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그에게 드러내신다. 그리고 사람이 마음을 돌리지 않거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마귀는 사람에게 접근하거나 그에게 유혹을 일으킬 수 없다.

211. 두 번째 방법. – 마귀가 보기에 용감하고, 죽음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며, 큰 열정으로 일에 나서는 자들에 대해서는, 마귀가 갑자기 맞서지 않으며, 그들의 첫 번째 돌진 때에도 그들과 싸움을 벌이지 않는다. 열정적인 전사들은 쉽게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귀는 그들이 그런 모습인 것을 보는 한, 그들이 열정에서 식어버렸고, 마음속으로 준비해 둔 무기를 신의 말씀과 기억을 배반함으로써 스스로 내려놓았음을 확인할 때까지는 감히 그들에게 손을 대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이 처음 품었던 생각에서 벗어나기 시작하고, 스스로를 정복하는 데 이바지하는 것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하면, 그들 스스로의 사색으로 인해 고갈되는 아첨으로 말미암아, 게으름에서 비롯된 생각의 뜸으로 인해 영혼에 파멸의 구덩이를 파기 시작할 때, 그로 인해 생각과 마음에 냉담함이 지배하게 되면, 그때 그는 무자비하게 그들에게 달려든다. 마귀가 지금까지 그들을 공격하지 않는 것은, 불타는 열정으로 하나님을 향하고, 그분을 의지하며, 그분을 믿는 자들을 둘러싼 어떤 힘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이유로 그들로부터 악마의 사악한 분노를 물리치시며, 그 분노는 그들에게 다가오지 못합니다. 원수는 항상 그들을 지키시는 수호자를 보고 자제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도움의 원천인 기도와 겸손의 수고를 스스로 버리지 않는 한, 중보자이자 도우미이신 분은 결코 그들 곁을 떠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212. 하느님을 따르는 자여, 네 수련 여정의 모든 순간마다, 이 길에 들어섰을 때의 시작과 초기의 열정, 그리고 네가 처음 집을 떠나 전사의 대열에 합류했을 때 품었던 그 불타오르는 마음가짐을 기억하라. 매일 스스로를 점검하여, 네가 입은 어떤 무장에서도, 그리고 네 수고의 시작에 네 안에서 타오르던 그 열정에서도 네 영혼의 불타는 열기가 식지 않도록 하라. 그리고 끊임없이 군영 한가운데서 목소리를 높여, 이 땅의 아들들에게 용기를 북돋우고 격려하며, 적진에게는 네가 정신이 맑음을 보여 주라. 동시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간구하며, 그분의 자비 앞에 울부짖고, 눈물을 흘리며 수고하라. 그분이 네게 도우미를 보내실 때까지. 그러면 너는 더 이상 패배하지 않을 것이다.

213. 적과의 싸움에서 세 번째 수법. – 원수가 사람이 자신의 열정과 믿음으로 하나님을 부르짖음으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힘을 보게 되면, 그때 그는 어떤 방법을 찾아내어 그에게 도움을 주는 천사를 멀리하려 애쓰는데, – 즉, 그 안에 교만의 생각을 일으키려 꾀하여, 마치 자신의 모든 견고함이 자신의 힘에 달려 있고, 스스로의 힘으로 적과 살인자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누구든지 원수가 심어 놓은 이러한 생각들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도움이 떠나가니, 그는 원수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유혹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을 돕는 분에 대한 기억을 굳게 지키며, 마음의 눈을 하늘을 향해 끊임없이 돌리는 자에 대해서는, 원수가 새로운 전투 방법을 고안해 낸다.

214. 원수의 싸움에서 네 번째 수법은, 그가 사람의 자연스러운 욕구(특히 아내에 대한 욕구와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는 것에 대한 욕구)를 이용해 사람을 억압하기 시작한다는 데 있다. (아내에 관하여). 비록 그가 사람을 강제로 그런 일을 저지르게 할 수는 없으니, 사람은 침묵으로 보호받고 있으며, 그의 거처는 죄를 유발하는 계기와 원인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수행자들의 마음이 이를 환영 속에서 보도록 만들려고 애쓰며, 진리의 가면을 쓰고 그들에게 거짓된 환상을 심어주려 한다. 이와 더불어, 그들이 꿈꾸던 것을 갈망하게 만들기 위해, 그들에게 간지러움을 일으키고, 수치스러운 생각에 마음을 머물게 하며, 그것에 동의하게 하고, 그로 인해 죄를 짓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원수는 수행자가 그를 이기고 정복하는 것이 자신의 생각에 의해 이루어지며, 짧은 순간에 완결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 단지 생각이 제자리에서 움직여 높은 곳에서 땅으로 내려오고, 의지가 한 순간만이라도 동의하는 모습을 보이면, – 마치 많은 이들이 여성의 아름다움을 몽상적으로 상상할 때 그랬던 것처럼. 만일 그들이 한두 단계 더 세상에 가까워졌다면, 원수는 종종 실제로 여성들을 그들에게 데려오는 수단을 동원하곤 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원수는 때때로 방심하고 마음이 굳건하지 못한 자들을 이겼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이러한 유혹보다 더 강해, 하나님의 은혜로 도우심을 받아 원수와 그의 망상을 이겨냈다. (두 번째 욕구에 관하여). 또한 원수는 종종 그들에게 환상 속에서 금과 보석, 그리고 다른 보물들을 보게 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실제로 그것들을 보여주기도 했는데, 이는 어쩌면 그러한 환상들로 그들 중 누군가를 그 길에서 멈추게 하고, 자신의 그물과 올가미 중 하나로 옭아매는 데 성공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허용되는 이유는, 은둔 생활 속에서 이러한 것들이 사라지고, 결핍과 궁핍에 처했을 때 그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마주했을 때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그것들을 무시하려 노력하며, 그것들에 현혹되어도 그들에게 승리를 내주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에 비하면 그것들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는지 알아보기 위함이다. 진정한 수행자들은 굴복하지 않으며, 시련을 겪은 후 도가니 속의 금처럼 정화되어 나타납니다. 반면 부주의하고 연약한 자들은 부족함이 닥쳤을 때 사소한 어려움에도 굴복하여 뒤로 물러나, 수행을 포기해 버립니다.

215. 누구든지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진정으로 그것을 체감하는 순간, 즉시 나태함에서 영혼을 일으켜 세우고 신중함을 갖추게 된다. 그러나 육체적이든 영적이든, 비록 사소한 유혹이라도 그에게 허용되지 않고 , 그로부터의 구원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아무도 자신의 연약함을 체감할 수 없다. 그때 비로소 그는 자신의 노력과 조치가 헛된 것임을 분명히 깨닫게 될 것이니, 곧 그가 안전을 찾으리라 기대했던 그 신중함과 절제, 그리고 영혼을 지키는 방벽이 아무런 소용이 없었으며, 구원은 이 모든 것을 거치지 않고 찾아왔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를 통해 그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도움만이 구원한다는 확신을 얻게 된다. 누구든지 자신이 하나님의 도움에 목말라 있음을 깨달은 자는 수많은 기도를 드린다. 그리고 기도를 얼마나 많이 드리는지에 따라 그의 마음은 그만큼 더 겸손해진다. 왜냐하면 기도하고 간구하는 사람은 누구나 겸손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꺾이고 겸손한 마음을 하나님은 멸하지 아니하시리라”(시 50:19). 사람이 겸손해지기만 하면, 즉시 자비가 그를 감싸 안는다. 그때 마음은 신성한 도움을 느끼고, 그 안에서 솟아나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의 힘을 얻는다.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의 도움이 진정으로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느낄 때, 비로소 그의 마음은 진정으로 믿음으로 가득 차게 된다. 이를 통해 그는 기도가 도움을 구하는 자들의 피난처요, 구원의 샘이요, 소망의 보물이요, 근심에서 구원하는 안식처요, 연약한 자들의 버팀목이요, 유혹의 때에 덮어주는 보호막이요, 싸움에서 구원을 주는 방패이며, 적들을 향한 날카로운 화살임을 깨닫게 되며, 기도를 통해 수많은 영적 은혜가 그에게 열려 있음을 알게 된다. 이때부터 그는 믿음의 기도로 기쁨을 누리기 시작하며, 더 이상 수고와 피로를 느끼며 기도하지 않고, 마음의 기쁨과 경이로움으로 끊임없이 감사의 마음을 쏟아내며, 셀 수 없이 무릎을 꿇게 된다.

216.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사람은 기도에 머물며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간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의지로 하나님께 얼마나 가까이 다가가는지에 따라, 하나님도 그분의 은사로 그에게 그만큼 가까이 다가오시며, 그의 큰 겸손을 보시고 그에게서 은혜를 거두어 가시지 않으신다. 그러나 때로는 관대한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총의 선물을 잠시 보류하시기도 하는데, 이는 그것이 그에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도록 하는 동기가 되게 하고, 사람이 자신의 필요를 위해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머물며 유익을 주는 일을 행할 준비를 갖추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간구들은 곧바로 들어주시는데, 바로 그것들은 없이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는 것들이다. 반면 다른 간구들은 들어주시기까지 시간을 두신다. 어떤 상황에서는 원수의 맹렬한 세력을 그에게서 물리치고 흩어지게 하시지만, 또 다른 상황에서는 유혹에 빠지게 내버려 두시기도 하는데, 이는 그 시련이 그에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계기가 되게 하시고, 유혹 속에서 분별력을 배우게 하시며, 자신의 연약함을 눈앞에서 확인함으로써 겸손함에 점점 더 굳건히 서게 하시기 위함이다.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지 못한 의인의 행실은 마치 면도날 위를 걷는 것과 같아서, 그는 넘어질 위험과 교만의 해로운 사자로부터 멀지 않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는 겸손이 부족하며, 겸손이 부족한 자는 아직 완전함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그에 이르지 못한 자는 항상 두려움 속에 머무르니, 이는 그의 성이 철 기둥과 놋 문지방, 즉 겸손 위에 굳게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겸손 없이는 사람의 일(추구하는 바)이 완성될 수 없으며, 그의 자유의 증서에는 아직 성령의 인장이 찍히지 않았으니, 그는 여전히 온전히 종이며, 그의 일은 두려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217.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분의 성도들에게 겸손과 마음이 찢어지는 기도를 할 수 있는 계기를 남겨 두시니, 이는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겸손을 통해 그분께 가까이 나아가게 하려 하심이다. 그리고 종종 그들의 본성에서 우러나는 정욕과 수치스럽고 불결한 생각들의 유혹으로 그들을 두렵게 하시며, 자주 사람들의 책망과 모욕, 조롱으로, 때로는 육체의 질병과 쇠약함으로, 또 다른 때에는 빈곤과 필수품의 부족, 때로는 극심한 두려움의 고통, 버림받음, 마귀의 노골적인 공격, 그리고 여러 가지 끔찍한 사건들로 시험하십니다. 이 모든 것은 그들에게 겸손할 이유를 주고, 게으름에 빠져 잠들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218. 만일 네 영혼이 내면적으로 어둠으로 가득 차게 되어, 마치 땅 위의 태양 광선이 구름의 안개에 가려지듯이, 영혼이 잠시 동안 영적인 위로를 잃고, 내면의 은총의 빛이 어두워질 때가 있다. 이는 영혼을 덮치는 정욕의 구름 때문이며, 네 안에 있던 기쁨을 주는 힘이 다소 약해지고, 마음에 평소와 다른 안개가 드리워졌기 때문이다; 그 생각에 당황하지 말고 인내하라. 스승들의 책을 읽고, 스스로 기도하도록 노력하며, 도움을 기다려라. 그 도움은 네가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에 곧 올 것이다. 왜냐하면 땅을 감싸고 있는 공기의 어둠 속에서 태양의 광선이 땅의 표면을 비추듯이, 기도 또한 영혼 속의 정욕이라는 구름을 없애고 흩어지게 하며, 마음을 기쁨과 위로의 빛으로 비출 수 있기 때문이다.

219. 네가 눈물의 경지에 이르기 전까지는, 네 내면의 비밀이 여전히 세상에 봉사하고 있는 것이다. 즉, 너는 아직 세속적인 삶을 살고 있으며, 겉사람으로 하나님의 일을 행하고 있을 뿐, 네 속사람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 열매는 눈물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눈물의 경지에 이르면, 그때 비로소 네 마음이 이 세상의 어둠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대의 길에 발을 디뎠으며, 경이로운 새로운 공기의 향기를 맡기 시작했음을 알라. 눈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것은, 영적 갓난아기의 탄생 이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모든 어머니의 총체이신 은총은, 신비롭게도 미래 시대의 빛 속에 신성한 형상을 낳기를 갈망하신다. 그러나 이 눈물의 단계는 침묵을 지키는 이들이 간헐적으로 겪는 것(때로는 관상 중에, 때로는 독서 중에, 때로는 기도 중에)과는 다르다. 내가 말하는 것은 이러한 눈물의 방식이 아니라, 밤낮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에 관한 것이다. 이 경지에 이른 이의 눈은 2년 이상 동안 샘물과 같아지다가, 그 후 생각의 평온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생각이 평온해지면, 본성이 부분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성 바오로가 말한 “그 안식”(히브리서 4,3)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이 평화로운 안식을 통해 마음은 신비를 관상하기 시작합니다. 그때 성령께서 그에게 하늘의 비밀을 드러내기 시작하시며, 하나님께서 그 안에 거하시고, 그 안에서 성령의 열매를 되살리십니다. 그러나 또 들어보십시오. 마음이 평온해지는 경지에 들어서면, 수많은 눈물이 사라지고, 적당한 양의 눈물이 적당한 때에 당신에게 찾아옵니다.

220. 사람이 성취하는 데에는 세 가지 단계가 있다. 초보자의 단계, 중급의 단계, 그리고 완성된 단계이다. 첫 번째 단계에 있는 사람은 사고방식이 선을 향하고 있지만, 마음의 움직임은 정욕에 휩쓸리곤 한다. 두 번째 단계는 정욕적인 상태와 무정욕적인 상태 사이의 중간 지점으로, 선한 생각과 악한 생각이 사람 안에서 똑같이 일어나며, 그는 빛과 어둠을 끊임없이 발산한다. 이때, 만약 그가 신성한 경전을 자주 읽는 것과 마음속으로 신성한 형상을 상상하는 것을 잠시라도 중단하고, 외적인 면에서 신중함을 잃는다면—그 신중함으로부터 내적인 수양이 비롯되는데—사람은 정욕에 휩쓸리게 된다. 그러나 그가 영적인 것에 대한 열정을 앞서 말한 방식대로 키운다면, – 찾고, 갈망하며, 경전을 읽음으로써 선한 생각을 키우고, 그것들이 헛된 길로 치우치지 않도록 막으며, 사랑으로 자신의 영혼을 지키고, 지칠 줄 모르는 기도 속에서 인내로 하나님께 매달린다면,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그에게 당신의 문을 열어 주실 것이며, 특히 그의 겸손함 때문에 그러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비의 계시는 겸손한 자에게 주어지기 때문이다(이것이 바로 세 번째 단계이다).

221. 하나님에 대한 소망은 하나님을 위한 수고와 그 일을 하며 흘린 땀이 앞서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옳은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은 행함을 요구하며, 하나님에 대한 소망은 덕을 위해 악을 견디는 데서 드러난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피조물들을 돌보시고 전능하시다고 믿는가? 그렇다면 네 믿음에 합당한 행실을 곁들여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네 기도를 들으실 것이다. 네 손바닥으로 바람을 붙잡으려 애쓰지 말라, 즉 행함 없는 믿음을 말하지 말라. 종종 어떤 이는 알지 못한 채 야생 짐승이나 살인자, 혹은 그와 비슷한 것이 있는 길을 걷기도 한다. 그때 하나님의 총의가 그를 해로부터 구해 주시거나, 야생 짐승이 옆으로 물러날 때까지 여행자의 발걸음을 무언가로 늦추시거나, 어떤 만남을 통해 그가 길에서 벗어나게 하심으로써 그를 보호하신다. 때로는 사악한 뱀이 길 위에 누워 있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그 유혹에 빠뜨리고 싶지 않으시기에, 뱀이 갑자기 쉭쉭 소리를 내며 제자리에서 움직여 여행자 앞을 기어가는 일이 일어나게 하십니다. 그러면 여행자는 그것을 보고 조심하여 위험에서 벗어납니다. 집이나 벽, 혹은 돌이 무너져 내리는 일이 드물지 않은데, 그곳에 누군가가 앉아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자비로우신 마음으로 천사에게 그곳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물러나거나 불러내어질 때까지 무너져 내리는 것을 붙잡아 두라고 명하시며, 그들이 막 물러나자마자 즉시 무너져 내리던 것이 떨어지게 하신다. 이 모든 것과 이와 유사한 일들은 하나님의 보편적이고 광범위한 섭리의 일이며, 의인은 자신 위에 특별하고 변함없는 섭리를 누린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을 분별 있게 처리하고,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자신의 지혜를 활용하도록 명하셨으나, 의인은 지혜 대신 믿음을 얻었기에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자처럼 담대히 걸어간다”(잠언 28:1)고 한다. 그의 끊임없는 돌봄이 하나님께 바쳐진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의 환난 중에 내가 그와 함께 하리니, 그를 시험하고 그를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그를 장수하게 하여 나의 구원을 그에게 보이리라”(시 90:15, 16). 나태하고 자신의 일에 게으른 사람은 그러한 소망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일에서 하나님과 함께 머무르며, 선한 행실로 그분께 가까이 나아가고, 마음의 눈을 그분의 은혜를 향해 끊임없이 향하는 자는, 신성한 다윗이 말한 것처럼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의 눈이 쇠퇴하였으니, 이는 내가 나의 하나님을 의지하였음이라” (시 68:4).

222. 우리가 세상에서 도피하기를 갈망할 때, 울음과 분별 있는 마음의 아픔만큼 우리를 세상에서 분리시키고, 우리 안의 정욕을 죽이며, 영적인 삶을 위해 우리를 소생시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우스갯소리와, 거침없는 태도로 생각에 뜬구름을 쫓는 것만큼 우리를 세상의 동조자로 만들고, 지혜의 보화와 하나님의 신비를 아는 데서 우리를 멀리 떨어뜨리는 것도 없습니다. – 이것이 바로 방탕한 악마의 짓이다. 사랑으로 간청하노니, 원수의 악의를 경계하여, 너를 위해 십자가 나무에서 쓴맛을 맛보신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의 열정이 헛된 말로 인해 네 영혼 속에서 식어버리지 않게 하라. 또한 원수가 그 달콤한 영적 수련과 하나님 앞에서의 담대함 대신, 네가 깨어 있을 때 네 영혼을 수많은 공상으로 채우지 못하게 하고, 네가 잠들었을 때 천사들도 참을 수 없는 악취를 풍기는 터무니없는 몽상들로 네 영혼을 사로잡지 못하게 하라. 그리스도의 겸손을 본받도록 스스로를 다그치라. 그리하여 그분께서 네 안에 심어 주신 불이 속히 타오르게 하라. 이 불로 말미암아 새로운 사람을 죽이고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주님의 성소를 더럽히는 세상의 모든 움직임이 뿌리 뽑히리라. 나는 성 바오로와 함께 감히 말하노니, 우리는 하느님의 성전이라 (1코린 3,16).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친히 거룩하신 것처럼, 그분의 성전을 정화하여 그분께서 그곳에 거하시기를 원하시게 합시다. 그리고 그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분의 성전을 거룩하게 하자. 온갖 선하고 정직한 행실로 그것을 아름답게 꾸미고, 하나님의 뜻이 주는 평안의 향기와 순수하고 진심 어린 기도로 그 성전을 향기롭게 하자. 그러면 그분의 영광의 구름이 영혼을 덮어 주실 것이며, 그분의 위대함의 빛이 마음속에서 비추게 될 것이다.

223. 염려가 많은 사람은 침묵할 수 없다. 수많은 일들이 그가 원치 않더라도 그의 고요함과 침묵을 흩어 버리기 때문이다. 수도자는 진정으로 자신의 마음을 지키고, 마음속에 스며드는 이질적인 움직임을 물리치며, 생각의 고요함 속에서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분별하고자 한다면, 자신을 하나님의 면전 앞에 두고 항상 눈을 하나님께 향해야 한다. 근심에서 해방되지 않은 채로는 자신의 영혼 속에서 빛을 찾지 말며, 감정이 방종한 상태에서는 고요함과 침묵을 찾지 말라. 끊임없는 기도 없이는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다. 또한 기도하는 수고를 마친 후 마음에 새로운 근심을 품는 것은 생각을 흩어지게 한다. 기도 중에 흘리는 눈물과 가슴을 치는 행동, 그리고 기도를 계속하려는 불타는 열정은 마음속에 눈물의 달콤함이 주는 열정을 일깨우며, 마음은 칭찬받을 만한 열광으로 하느님께 솟아오르며 이렇게 외친다: “내 영혼이 ‘강하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이신 주님을 갈망하나이다. 내가 언제 주님의 면전에 나아가 뵙겠나이까?” (시 41:3). – 이 포도주를 마셨다가 나중에 그것을 잃어버린 자만이,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는지, 그리고 자신의 나태함 때문에 무엇이 빼앗겼는지를 알고 있다.

224. 침묵 속에서 사는 이들에게 사람들과의 만남과 대화는 얼마나 해로운가! – 마치 강한 우박이 나무의 열매 위에 갑자기 쏟아져 내려 그것들을 두들겨 부수고 파괴하듯이, 사람들과의 만남은 비록 잠시일지라도, 방금 피어올라 회개의 물이 솟아나는 곳(시 1,3)에 심겨진 영혼의 줄기를 화려하게 장식하던 미덕의 꽃들을 두들겨 부순다. 마치 강렬한 서리가 땅에서 막 싹튼 초록을 덮어 태워버리듯이, 사람들과의 만남 또한 미덕의 열매를 맺기 시작한 마음의 뿌리를 태워버린다. 고귀하고 존경받는 사람이 술에 취하면 자신의 고귀함을 잊고, 술에서 비롯된 낯선 생각들로 인해 조롱을 받게 되는 것처럼, 영혼의 순결함도 사람들을 마주보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인해 동요하게 된다: – 사람은 자신의 신중함을 잊고, 마음속에서 의지의 결심이 흐려지며, 칭찬받을 만한 삶의 기초가 뿌리째 뽑혀 버린다.

225. 사람아, 수도 생활의 모든 것 중에서 밤샘 기도보다 더 중요한 행위가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이를 통해, 수행자가 육체적인 일이나 덧없는 것에 대한 염려로 산만해지지 않는다면, 그의 마음은 짧은 시간 안에 마치 날개 달린 듯 산 위로 치솟아, 하느님 안에서 기쁨을 누리는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다. 만약 수도사가 분별력을 가지고 마음의 깨어 있음에 머문다면, 그 안에서 마치 육신을 지니지 않은 자와 같은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평생을 이 수행에 바치는 이들이, 그들의 절제심과 마음의 명료함, 그리고 그분께 향한 사려 깊은 열망으로 인해, 하나님께로부터 어떠한 은사도 받지 못한 채 버려질 수는 없다. 깨어 있는 상태에 머무르기 위해 수고하는 영혼은, 끊임없이 시선을 들어 하늘의 광경을 관조할 수 있는 케루빔의 눈을 갖게 될 것이다.

226. 이 신성한 수고를 선택한 자는 낮 동안 모임의 소란과 세속적인 일들에 대한 걱정으로부터 온갖 방법으로 자신을 지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잠을 자지 않으려는 수고를 감당하되 그 열매는 얻지 못할 것이니, 그러한 경우 마음은 시편 찬송과 기도에 마땅히 참여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낮 동안의 근심 대신에 마음을 굳건하게 하고, 특히 기도에 활력을 불어넣으며, 기도와 밀접하게 연결된 깨어 있는 경건 생활을 돕는 신성한 경전을 읽는 데 힘쓰는 사람은, 그때 이 읽기를 통해 바른 길로 인도하는 지도자를 얻게 되며, 모든 것을 양육하는 기도적 관상의 씨앗을 얻게 되는데, 이는 생각이 딴 데로 샐 것을 막아주고, 영혼 속에 하나님에 대한 기억을 끊임없이 심어줍니다.

227. 항상 침묵을 지키며 독서를 하고, 식사를 절제하며 깨어 있는 생활은, 침묵을 깨는 어떤 이유가 없다면 곧 생각을 경이로움으로 이끌어 낸다. 침묵 중에 저절로, 의도적인 노력 없이 솟아나는 생각들은 양쪽 눈에서 흘러나와 그 풍성함으로 뺨을 적시는 눈물이 마치 세례반과 같아지게 한다.

228. 누군가 죄의 원인을 진정으로, 마음 깊이 미워하기 전까지는, 그는 죄의 효력이 만들어내는 그 쾌락에서 해방되지 못한다. 이것이야말로 (죄에 대한 동조와 함께) 가장 잔혹한 투쟁으로, 피를 흘릴 지경에 이르러도 사람이 결코 물러서지 않는 것이다. 이 투쟁 속에서, 미덕에 대한 그의 (독점적인) 사랑 안에서 그의 자유가 시험을 받는다. 이 투쟁 속에서 원수는 보통 죄의 힘을 이용해 순결한 이들의 영혼을 혼란에 빠뜨리며, 그들이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을 경험하도록 강요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투신의 시간인데, 이 싸움은 습관으로 인해 큰 힘을 얻게 되어, 자신의 생각에 순응함으로써 스스로 패배를 자초한 자들에게 극도로 무거운 부담이 된다.

229. 게으름을 경계하라. 그 안에는 확실한 죽음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게으름이 없다면 우리를 사로잡으려는 자들의 손에 빠지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 날에 하나님께서는 시편을 부르지 않았거나 기도를 소홀히 한 것 때문에 우리를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소홀함으로 인해 악마들에게 들어올 틈을 준 것 때문에 심판하실 것이다. 그리고 악마들이 자리를 잡고 들어와 우리 눈의 문을 닫아버리면, 그때 그들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괴롭히며, 하나님의 심판과 가장 가혹한 형벌을 받게 할 것이다. 이 일(시편 찬송과 기도의 예식)을 수도실 안에서 행하는 것은 지혜로운 이들이 계시의 영에 따라 우리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정한 것이나, 지혜롭지 못한 자들은 이를 소홀히 여깁니다. 이 후자(어리석은 자들)는 그로 인해 발생하는 해악을 고려하지 않으므로, 그들의 길의 시작과 중간은 무지한 자유이며, 이것이 바로 정욕의 어머니이다.

230. 우리는 우리 안에 정욕의 원인이 없도록 만들 수 없으므로, 원치 않더라도 유혹을 받게 된다. 우리는 죄를 원하지 않지만, 때로는 우리를 죄로 이끄는 원인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도 한다. 그러면 이러한 원인들이 죄를 짓게 하는 원인이 된다. 정욕의 계기를 좋아하는 자는 어쩔 수 없이 정욕의 노예가 된다. 자신의 죄를 미워하는 사람은 죄를 짓지 않게 될 것이며, 죄를 고백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먼저 죄에 대한 적대감을 품지 않는다면 죄악적인 습관을 버릴 수 없으며, 죄를 고백하기 전에는 용서를 받을 수 없다.

231. 사람이 자신의 죄로 인한 황홀함이라는 독을 품고 있는 한, 그가 무엇을 하든 모두 옳은 일로 보인다. 그리고 본성이 제 자리를 벗어나는 순간, 그것이 술에 취한 것이든 정욕에 사로잡힌 것이든 상관없다. 왜냐하면 둘 다 현재의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며, 둘 다 몸속에 똑같은 열기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비록 방식은 다르지만, 그 결과는 하나이다.

232. 만일 네 독방에 홀로 머물러 있으면서 아직 참된 관상의 힘을 얻지 못했다면, 항상 트로파리와 카피즘을 읽으며, 죽음을 생각하고, 미래를 희망하는 데 마음을 쏟으라. 이 모든 것은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참된 관상이 올 때까지 마음이 이리저리 흩어지지 않게 한다. 왜냐하면 영의 힘은 정욕보다 더 강력하기 때문이다. 미래에 대한 소망 속에서 하나님을 기억하는 데 마음을 쏟고, 트로파리의 뜻을 잘 헤아리려 노력하며, 너를 욕망으로 이끄는 모든 외적인 것을 경계하라. 또한 네 방에서 행하는 사소한 일들에도 신중을 기하라. 자신의 생각을 살피고, 모든 일에서 주님의 눈을 갖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 그러면 기쁨이 솟아나기 시작할 것이며, 그때 꿀보다 더 달콤한 슬픔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233.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미덕을 통해서만이 정욕을 이길 수 있으며, 영적 지식을 탐구함으로써만이 마음의 방황을 극복할 수 있다. 우리의 마음은 가볍기 때문에, 어떤 사색으로도 묶여 있지 않으면 방황을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앞서 말한 미덕들을 완성하지 않고서는 이러한 안정을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적들을 이기지 못하면 평화를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정욕은 영혼의 내재된 미덕을 가로막는 장벽이 되며, 만약 명백한 미덕들로 먼저 정욕을 제압하지 않는다면, 그 뒤에는 내면의 미덕들이 보이지 않게 된다.

234.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본성상 뜨겁고, 누군가에게 과도하게 닥칠 때 그 영혼을 황홀하게 만든다. 이 사랑을 느낀 사람에게는 비범한 변화가 드러난다. 그의 얼굴은 불타오르듯 환하고 기쁨으로 가득 차며, 몸은 따뜻해지고, 두려움과 수치는 그에게서 물러난다; 무서운 죽음조차 기쁨으로 여긴다. 그의 마음은 천상에 대한 묵상을 방해하는 어떤 것도 허용하지 않으며, 사물에 의해 자극받는 움직임을 느끼지 못한다. 왜냐하면 비록 무언가를 하고 있더라도 그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의 마음은 관상 속에 떠돌고 있으며, 그의 생각은 마치 항상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듯하기 때문이다. 한때 사도들과 순교자들은 이러한 영적 황홀감에 젖어 있었다. 어떤 이들은 세상을 두루 다니며 수고하고 모욕을 견뎌냈고, 다른 이들은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비겁해지지 않고 용감하게 견뎌냈다. – 또 어떤 이들은 광야와 산, 동굴을 떠돌았는데, – 그들에게는 불편함 속에서도 가장 풍요로운 삶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어리석은 자로 여겼으나, 그들은 지혜로운 자들 중에서도 가장 지혜로운 자들이었습니다.

235. 수행은 거룩함의 어머니이다. 그로부터 그리스도의 신비를 처음으로 체험하게 되는데, 이를 영적 인식의 첫 단계라고 한다. 더럽혀진 영혼은 깨끗한 왕국에 들어가지 못하며, 성인들의 영과 교감할 수 없다. 네 절제의 선함을 눈물과 금식, 그리고 고독한 침묵으로 다듬어라. 하나님을 위한 작은 슬픔은 슬픔 없이 행하는 위대한 일보다 낫다. 수고 없이 이루어지는 것, 즉 세속적인 사람들이 겉으로만 자선을 베풀며, 정작 자신 안 에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너는 네 안에서 스스로 수고하며,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함께 겪어, 그리스도의 영광을 맛볼 자격을 얻도록 하라. 육신이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지 않는다면, 마음은 예수님과 함께 영광을 얻지 못할 것이다.

236. 십자가에 오르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육체의 십자가에 못 박힘이고, 다른 하나는 관상(觀想)으로의 승천이다. 전자는 정욕으로부터의 해방의 결과이며, 후자는 영적 행위의 효과이다. 몸이 정신에 복종하지 않으면 정신도 복종하지 않는다. 정신의 왕국은 육체의 십자가이다. 자유가 이성에 복종하지 않으면 정신도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는다. 자신을 하나님께 복종시키는 자는 모든 것이 그에게 복종하게 될 날에 가까워진다.

237. 모든 선의 기초, 원수의 포로에서 영혼의 귀환, 빛과 생명으로 이끄는 길—이 모든 것은 다음 두 가지 방법에 담겨 있다. 즉, 자신을 하나로 모으고 항상 금식하는 것, 다시 말해 현명하고 분별 있게 배를 절제하는 것, 한 곳에 머무르는 것, 끊임없이 신에 대한 묵상에 몰두하는 것을 자신의 규칙으로 삼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감정의 복종, 정신의 명료함, 몸 속에서 솟아나는 사나운 정욕의 길들이기, 밝은 사고의 흐름, 덕행에 대한 성실함, 눈물과 죽음에 대한 기억, 온갖 몽상이나 유혹하는 생각에서 멀리 떨어진 순결한 정절, 한마디로 말해, 이로부터 참된 사람의 자유, 영적 기쁨, 그리고 천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부활이 비롯된다. 이 두 가지 방식에 대해 의문을 품는 자는, 앞서 말한 모든 면에서 자신에게 해를 끼칠 뿐만 아니라 모든 미덕의 근간마저 흔들게 될 것임을 알아야 하며, 결국 그와 정반대되는 다음 두 가지 악덕, 즉 육체적 방탕과 불명예스러운 탐식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이것이 앞서 말한 것과 정반대되는 시작의 본질이며, 그것들은 영혼 속에 온갖 정욕이 자리 잡게 한다.

238. 원수는 본성이 스스로를 만족시키도록 이끄는 우리의 자연스러운 욕구가 일어나는 시기를 알고, 눈의 방황과 배의 안식을 통해 마음이 혼란에 빠진다는 것을 알기에, 바로 그런 때에 우리가 본능적 욕구를 증폭시키도록 부추기고, 우리 안에 교활한 생각의 형상을 심어, 격화된 투쟁 속에서 정욕이 본성을 압도하게 하여 사람이 죄에 빠지게 하려 한다. 그러므로 원수가 그러한 때를 노리듯이, 우리도 바로 이 특별한 때에 지혜를 발휘하여, 불쑥 떠오르는 생각들의 뜻을 성급하게 따르지 않도록 하고, 탐욕에게 승리를 내주지 않으며, 더욱이 침묵의 자리에서 벗어나지 말고, 우리에게 편리하게 느껴지는 곳으로 가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만 그로 인해 사막을 완전히 떠나게 될 구실을 마련하지 않을 수 있다.

239. 원수는 밤낮으로 우리 눈앞에 서서, 우리의 감각에 어떤 틈이 있는지 살피고, 기다리며, 노려보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한 가지 일에서라도 부주의를 보일 때, 이 교활하고 뻔뻔한 개는 우리에게 화살을 쏘아댄다. 때로는 본성 자체가 저절로 평온과 자유, 웃음, 생각의 방황, 나태함을 갈망하기 시작하여, 정욕의 근원이 되고 반항의 심연이 되기도 하며, 때로는 원수가 이를 영혼에 주입하기도 한다. 사소한 일에서 자신에게 관대해지지 않도록 조심하라. 그래야 큰 일에서 관대해지지 않고, 큰 타락에 이르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가 말했듯이, 사소한 부주의가 종종 큰 위험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사소하고 하찮은 일에서도 항상 냉철함을 유지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지혜이다.

240. 네게 생명을 선사하는 일에 있어 낙담하지 말고, 이를 위해 죽는 것을 게을리하지 마라. 왜냐하면 비겁함은 낙담의 징후이며, 부주의는 그 둘 모두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겁 많은 사람은 두 가지 병, 즉 생명을 지나치게 아끼는 마음과 믿음이 부족한 마음을 앓고 있음을 드러낸다. 생명을 지나치게 아끼는 마음은 불신의 징후이다. 그러나 이를 무시하는 사람은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믿으며 미래를 기대함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다. 마음의 활기와 위험을 무시하는 태도는 다음 두 가지 이유 중 하나에서 비롯되는데,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큰 믿음이고, 다른 하나는 무정함이다. 무정함 뒤에는 교만이 따르고, 믿음 뒤에는 마음의 겸손함이 따른다.

241. 사람은 먼저 자신의 능력 범위 내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얻을 수 없다. 하나님에 대한 소망과 마음의 용기는 양심의 증거에서 비롯되며, 오직 우리 마음의 참된 증거가 있을 때에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갖게 된다. 마음의 증거란, 사람이 자신의 힘닿는 대로 해야 할 어떤 일에 소홀히 했다는 이유로 양심이 조금도 정죄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우리 마음이 우리를 정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가진다”(요한일서 3:21). 그러므로 담대함은 덕행과 선한 양심에서 비롯된 결과이다.

242. 사람이 늘 침묵하고 말을 아끼는 데에는 다음 세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세상의 영광을 위함이고, 다른 하나는 덕에 대한 뜨거운 열정 때문이며, 또 하나는 그 사람이 내면에서 어떤 신성한 대화를 나누고 있어 그의 마음이 그 대화에 이끌리기 때문이다. 미덕이란 육체적으로 행해지는 다양하고 많은 일들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품은 희망 속에서 가장 지혜로운 을 실천하는 것이다. 올바른 목표는 마음을 하느님께 묶어주기 때문이다. 육체적인 행위가 없는 마음도 선을 행할 수 있지만, 마음의 지혜가 없는 육체는 무언가를 행한다 해도 그로부터 유익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선한 일을 행할 기회가 생기면, 자신의 수고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증명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

243. 육신의 정욕과 싸울 때, 여성을 바라보는 것을 멀리하는 것을 네게 있어 강력한 무기로 삼으라. 왜냐하면 원수는 본성이 그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우리 안에서 일으킬 수 없기 때문이다. 자연이, 자녀를 낳고 이 고행에 머무는 자들을 시험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 안에 본능적으로 심어 놓으신 것을 잊어버린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욕망의 대상들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지체 안에서 정욕을 죽이고, 그것에 대한 망각을 일으키며, 그것을 근절시킵니다. 대상은 보이지 않을 때 가볍고 간신히 느껴질 정도의 움직임을 일으키지만, 보일 때는 근접함으로 인해 정욕을 자극하고, 등불의 불꽃을 기름이 지피듯 그것을 키우며, 이미 죽고 꺼져버린 정욕을 다시 불태운다. 외부로부터 어떤 것도 더해지지 않은 자연스러운 움직임은 의지의 순수함을 흐트러뜨리거나 정절을 해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연에게, 그분을 향하여 나아가는 선한 의지를 이겨낼 힘을 주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때때로 제멋대로 감각적인 것에 휩쓸려, 과도한 양의 음식과 음료를 섭취하거나, 여성들과의 친밀함, 그들을 바라보는 것, 그리고 그들에 대한 대화에 탐닉한다면, — 이로 인해 육체 속에서 정욕의 불길이 타오르고 빠르게 퍼지게 되는데; 이때 우리는 본성상 온화한 몸의 움직임을 사나운 것으로, 길들일 수 없는 것으로 바꿔버리는 것이다. 이는 우리 의지의 충동에 따라 본성에 덧붙인 것들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은 아름답고 조화롭게 창조되었다. 그리고 우리 안에 본성에 부합하는 균형이 올바르게 유지되는 한, 자연스러운 움직임들은 우리를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게 할 수 없다. 그러나 몸속에서는 조화로운 움직임들만이 일깨워지는데, 이는 우리 안에 자연스러운 정욕이 있음을 알려줄 뿐, 정절을 저해할 만큼의 간지러움이나 혼란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244. 때로는 우리의 자만심 때문에 하나님의 허락하심으로 사지에 움직임이 생기기도 한다. 이 투쟁에 대해 우리는, 오랫동안 자기 자신을 주의 깊게 살피고 제법 수고하며 심지어 스스로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여길 때, 겸손을 배우기 위해 그것을 견디도록 허락받음을 안다. 다른 시련들은 우리의 나태함과 육체의 과도한 안락함에서 비롯되는데, 이는 우리 삶의 규율에서 모든 괴로움과 수고를 버림으로써 발생하며, 특히 수도실에 계속 머무르는 것과 육체 노동의 고된 수고를 피하는 데서 비롯된다. 삶의 괴로움과 어려움, 비좁음은 육체의 쾌락을 묶어 죽이지만, 안락함과 만족, 육체의 평안은 그것을 풀어주고 키우며 되살립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천사들은 우리가 궁핍할 때 기뻐하시지만, 마귀와 그의 추종자들은 우리가 평안할 때 기뻐한다. 슬픔과 비좁음은 계명을 지키는 일을 넓히고 용이하게 하지만, 평안은 정욕에 자리를 내주어 계명을 지키는 일을 방해하고 막는다. 고통받는 육신 속에서는 생각이 위험한 방황에 빠질 수 없다. 누군가 기쁨으로 수고와 슬픔을 짊어질 때, 그는 생각을 쉽게 다스릴 수 있는데, 수고로 인해 생각이 무력화되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신의 과거 죄를 기억하며 스스로를 징계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호의적으로 바라보신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난 것에 대해 스스로 벌을 내렸다는 사실, 즉 그것이 회개의 표징이 된다는 점을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영혼에 더 많은 제약을 가할수록,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푸시는 호의는 더욱 커집니다. 그러나 미덕에서 비롯되지 않은 모든 기쁨은, 그것을 얻은 자에게 즉시 음탕한 욕망을 불러일으킵니다.

245. 미덕들은 서로 이어지도록 되어 있어, 미덕의 길이 어렵고 힘들지 않게 하며, 순서대로 그 미덕들을 실천해 나가며 그 속에서 위안을 얻을 수 있게 하고, 그리하여 미덕을 위해 견뎌야 하는 어려움들조차 선한 것인 양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 따라서 누구도 유혹을 기꺼이 견뎌낼 준비를 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무소유를 얻을 수 없다. 그리고 자신이 감내하기로 마음먹은 고통 뒤에 육체적 안락보다 더 큰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고 확신하는 자 외에는 누구도 유혹을 견딜 수 없다. 물질적인 것을 스스로 박탈하면서도 감각의 현실성, 즉 시각과 청각을 스스로 박탈하지 않은 사람은, 스스로에게 더 큰 고통을 자초한 것이며, 더 큰 궁핍과 슬픔을 겪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물 자체 없이 단지 사물에 대한 정신적 상상만으로도 사람에게 고통스러운 감정을 일으킨다면, 하물며 그 사물들이 우리 곁에, 우리 가까이 있을 때는 또 어떨까? 이 경우, 그 사물들이 일으키는 감각으로 인해 사람은 이전에 그 일을 행할 때 겪었던 것과 똑같은 고통을 겪게 되는데, 이는 그 사물들에 대한 습관을 떠올리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은둔 생활은 얼마나 훌륭한가! 그곳에서는 오직 생각만이 유혹자로 남을 뿐이며, 생각들을 다스리는 데에도 은둔 생활은 크고 강력한 도움을 준다.

246. 비록 그가 지극히 현명할지라도, 너와 같은 생활 방식을 따르지 않는 사람에게 조언을 구하려 하지 마라. 자신의 생각을, 학식은 없지만 실제로 그 일을 경험해 본 사람에게 맡기는 편이, 실제로 경험해 보지 않고 자신의 연구만을 바탕으로 논하는 학식 있는 철학자에게 맡기는 것보다 낫다. 경험을 쌓는다는 것은, 어떤 사물에 대해 단지 가까이 가서 바라보기만 하고 그에 대한 지식을 내면화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다루어 봄으로써 그 유용함과 해로움을 경험을 통해 명확히 체감하는 것을 의미한다. 종종 어떤 사물은 겉으로는 해로워 보이지만, 내면은 온통 유익으로 가득 차 있는 경우가 있다. 반대로, 겉으로는 유익해 보이지만 내면은 해로움으로 가득 찬 경우도 드물지 않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직접 경험해 보고, 인내심을 가지고 네 일에 필요한 논의를 할 줄 알며, 진정으로 네게 유익한 것을 정확히 알려줄 수 있는 조언자를 의지하라.

247. 네 길에서 변함없는 평화를 발견한다면, 두려워하라. 왜냐하면 너는 성인들의 고된 발자취로 닦아낸 바른 길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네가 아직 천국의 성으로 가는 길에 있을 때, 네가 하나님의 성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징표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강력한 유혹들이 너를 맞이할 것이며, – 네가 더 가까이 다가가고 성공할수록, 네 앞에 놓인 유혹들은 더욱 배가될 것이다. 그러므로 네 길에서 네 영혼 속에 가장 크고 강력한 유혹을 느끼게 된다면, 그때 네 영혼이 실제로 은밀히 새로운 더 높은 단계로 들어섰으며, 그 영혼이 놓인 상태에서 은총이 배가되었음을 알라. 왜냐하면 은총의 위대함에 상응하여, 하나님께서는 정확히 그와 같은 정도로 영혼을 시련의 고통 속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만약 영혼이 연약하여 큰 유혹을 견딜 충분한 힘이 없어, 그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고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신다면; 그때는 확실히 알아두라. 영혼이 큰 시련을 견딜 충분한 힘이 부족한 만큼, 큰 은사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큰 시련이 그에게 허용되지 않는 것처럼, 큰 은사도 그에게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큰 유혹 없이는 큰 은사를 주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유혹에 비례하여, 하나님께서 정하신 은사도 그분의 지혜에 따라 정해지는데, 그 지혜는 그분이 창조하신 피조물들이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248. 선한 삶을 시작할 때와 “그 삶이 성장할 때” 겪는 유혹은, 마음의 “교만을 깨우치기 위해” 허락되는 유혹과는 다릅니다. 영혼이 “성공”과 성장을 위해 영적인 채찍으로 겪는 유혹, 즉 이를 통해 영혼이 훈련받고, 시험을 겪으며, 수련으로 인도되는 유혹은 다음과 같습니다: 게으름, 육체의 무거움, 사지의 나태함, 낙담, 생각의 혼란, 육체의 쇠약으로 인한 의심, 일시적인 희망의 단절, 사유의 어두워짐, 인간적인 도움의 부족, 육체에 필요한 것의 부족, 그리고 이와 유사한 것들. 이러한 유혹들로 인해 영혼에는 고독감과 무방비 상태가 생기고, 마음이 어두워지며 겸손해진다. 그러나 섭리자께서는 유혹을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들의 힘과 필요에 맞춰 조정하십니다. 그 안에는 위로와 패배, 빛과 어둠, 책망과 도움, 한마디로 말해 비좁음과 넓음이 공존합니다. 그리고 이는 사람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번영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표징이 됩니다.

249. 하나님의 선하심을 앞세워 “자만”하며 자신의 “교만”으로 하나님을 모욕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허락으로 닥치는 유혹은 다음과 같다: 사람들이 가진 지혜의 힘을 빼앗는 것, 그들의 교만을 낮추기 위해 그들에게 허용된 방탕한 생각이 내면에서 평안을 주지 않는 느낌, 쉽게 짜증을 내는 성질,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하려는 욕망, 말다툼을 일삼고 꾸짖는 것, 모든 이를 경멸하는 마음, 온전한 정신의 오류,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 미친 사람처럼 보이는 것, 사람들이 이를 무시하는 듯한 우스꽝스러운 생각, 그들의 명예가 무로 돌아가는 것, 그리고 은밀히나 공개적으로, 다양한 방법으로 악령들로부터 수치와 모욕을 당하며, 마지막으로 세상과 교제하고 어울리고자 하는 욕망, 끊임없이 말하고 무분별하게 헛소리를 늘어놓는 것, 항상 새로운 소식과 심지어 거짓 예언까지 찾아다니는 것, 자신의 능력을 넘어선 많은 것을 약속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영적 유혹의 본질이다. 육체적 유혹의 종류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고통스럽고, 복잡하며, 오래 지속되고, 치료하기 어려운 발작들, 항상 악하고 불경한 사람들과의 만남, 모욕하는 자들의 손에 빠지는 일, 뜻밖의 걸림과 위험한 추락, 그들과 그들의 가족에게 파멸을 가져오는 사건들. 우리가 설명한 이 모든 것은 교만의 유혹에 속한다. 이러한 유혹의 시작은 사람이 자기 눈에는 스스로 지혜로워 보이기 시작할 때 나타난다. 그리고 그는 교만의 그런 생각들을 받아들일수록 이 모든 재앙을 겪게 된다. 그러한 생각이 얼마나 많으면, 그만큼 교만도 네 안에 스며든다.

250. 또 다른 종류의 유혹이 있는데, 그것은 인내심이 부족하여 생기는 비겁함이다. 어떤 곤경이나 슬픔이든, 인내심이 동반되지 않으면 극심한 고통으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인내심은 사람의 재앙을 막아주는 반면, 비겁함은 고통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인내심은 위로의 어머니이며, 대개 넓은 마음에서 비롯되는 일종의 힘이다. 사람은 끊임없는 기도와 눈물의 쏟아짐을 통해 얻어지는 신성한 은총 없이는 자신의 슬픔 속에서 그러한 힘을 찾기 어렵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큰 슬픔에 빠뜨리시기를 원하실 때, 그분은 그가 비겁함의 손아귀에 빠지도록 내버려 두신다. 그리고 그것은 그를 압도하는 낙담의 힘을 낳으며, 그 속에서 그는 영혼이 짓눌리는 것을 느낍니다. 이것이 바로 지옥의 맛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수천 가지의 유혹이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당황, 짜증, 모독, 운명에 대한 불평, 비뚤어진 생각,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이주하는 것 등등. 이 모든 것의 원인은 바로 당신의 태만입니다. 너 자신은 이로부터 치료법을 찾으려 애쓰지 않았다. 이 모든 것에 대한 치료법은 단 하나, 곧 마음의 겸손함이다. 그것 없이는 그 누구도 이러한 악의 장벽을 무너뜨릴 수 없다. 겸손함에 비례하여 환난 속에서 인내가 주어지고, 인내에 비례하여 슬픔의 무게가 가벼워지며 위로를 받게 된다; 위로가 커질수록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커지고, 사랑이 커질수록 성령에 대한 기쁨이 커진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들에게 유혹을 없애 주시지는 않으시지만, 그들의 믿음과 그분의 뜻에 자신을 맡기는 태도를 보답하여 유혹 속에서 인내할 힘을 주신다.

251. 하나님을 따르는 육신의 삶은 육신의 행위로 이루어지는데, 이는 덕을 행하는 활동 속에서 육신을 정욕으로부터 정화하기 위한 육신의 수고입니다. 영적인 삶은 마음의 일로, 심판에 대한 신중한 생각을 품고 끊임없이 지속되는 것이며, 또한 끊임없는 마음의 기도이자, 개인적 차원과 전체적 차원에서 온 세상에서 드러나는 것뿐만 아니라, 은밀하고 영적인 영역에서 어떤 정욕적인 것도 나타나지 않도록 자신을 은밀한 정욕으로부터 지키는 것이다.

252.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은혜 위에 은혜로 회개가 주어지니, 회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두 번째 중생이기 때문이다. 회개는 자비의 문이다. 이 문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 안으로 들어가며, 이 문 외에는 자비를 얻을 수 없다. 회개는 두 번째 은혜이며, 믿음과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두려움은 우리가 영적 낙원의 복을 얻기까지 우리를 다스리는 아버지의 채찍과 같으나, 그 복을 얻은 후에는 우리에게서 떠나간다. 낙원은 하나님의 사랑이며, 그 안에는 모든 복락의 기쁨이 있다. 생명나무는 하나님의 사랑이며, 아담은 그 사랑에서 떨어져 나갔고, 그 이후로 더 이상 기쁨을 누리지 못했으며, 가시밭 땅에서 수고하고 고생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잃은 자들은, 의롭게 행한다면, 타락한 후 원조에게 명해진 대로 자신의 일에서 땀 흘려 얻은 빵을 먹게 된다. 사랑 안에 사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맺으며, 이 세상에서 이미 부활의 공기를 맡는다. 사랑은 왕국이다. 주님께서는 사도들에게 그분의 왕국에서 그 사랑을 맛보게 될 것이라고 신비롭게 약속하셨다. “너희가 내 왕국의 잔치에서 먹고 마시리라”(눅 22:30)라고 하신 말씀은, 사랑 외에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 이것이 바로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시 103:15)이다. 이 포도주를 마시는 자는 복이 있도다!

253. 배나 소선 없이 큰 바다를 건널 수 없는 것처럼, 누구도 두려움 없이 사랑에 도달할 수는 없다. 우리와 마음속의 낙원 사이를 가로막은 악취 나는 바다를 건널 수 있는 것은 오직 두려움이라는 노 젓는 이들이 있는 회개의 배를 타고서뿐이다. 그러나 두려움의 노 젓는 이들이 이 세상의 바다를 건너 하나님께로 이끄는 회개의 배를 조종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악취 나는 바다에 빠져 죽게 될 것이다. 회개는 배요, 두려움은 그 배의 조타수이며, 사랑은 신성한 부두이다. 두려움은 우리를 회개의 배로 인도하고, 삶의 악취 나는 바다를 건너게 하며, 사랑인 신성한 부두로 안내한다. 이 부두에는 회개를 통해 모든 수고하는 자와 짐 진 자들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랑에 도달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께 도달한 것이며, 우리의 여정은 완성되고,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이 계신 저 세상의 섬에 도달한 것입니다.

254. 믿음에 앞서 오는 지식이 있고, 믿음에서 비롯되는 지식이 있다. 믿음에 앞서 오는 지식은 자연적인 지식이며, 믿음에서 비롯되는 지식은 영적인 지식이다. 자연적 지식은 선과 악을 구별하며, 이를 자연적 분별력이라 부르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학문 없이도 자연스럽게 선과 악을 분별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분별력을 이성적인 본성에 심어 주셨으며, 학문의 도움을 통해 그것은 더욱 성장하고 충만해진다. 이를 갖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는 이성적인 영혼 안에 있는 자연적 인식의 힘으로, 이 힘은 그 영혼 안에서 끊임없이 작용한다. 이성적인 본성의 영광은 선과 악을 구별하는 분별력이며, 이를 상실한 자들을 선지자는 옳게도 무지한 짐승에 비유하였다(시 48:13).

255. 믿음에 앞서 있는 자연스러운 통찰은 믿음과 하느님께 이르는 길이다. 하느님께서 우리 본성에 심어 놓으신 이 통찰은, 만물을 존재하게 하신 하느님을 믿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 스스로 확신하게 한다. 이 믿음은 우리 안에 경외심을 일으키며, 그 경외심은 우리를 회개와 행함으로 이끈다(즉, 행함으로 인해) 사람에게 영적 깨달음, 혹은 신비의 체험이 주어지는데, 이것이 참된 관조의 믿음을 낳는다. 단순히 믿음만으로는 영적 깨달음이 생겨나지 않는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낳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속에서 우리가 그 경외심에 따라 행동하기 시작할 때, 그 경외심의 작용으로부터 영적 깨달음이 생겨난다. 성 금구(Zlatoust)가 말했듯이: “누군가 하나님의 경외와 올바른 사고 방식에 부합하는 의지를 얻게 되면, 곧 그는 은밀한 계시를 받아들일 것이다.” 여기서 은밀한 계시란 바로 영적 깨달음을 가리킨다.

256. 그러나 이 영적 깨달음을 낳는 것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아니라, 이 깨달음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실천하는 이에게 선물로 주어진다. 하느님을 경외하는 마음의 실천은 회개이며, 회개는 그 모든 과정을 거치고 완성됨으로써 영적 깨달음이 주어지는 곳으로 이끈다. 영적 깨달음은 내재된 것을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 이 보이지 않는 것을 느낄 때, 그 느낌 속에서 첫 번째 믿음과 상충되지 않으면서도 그 믿음을 확고히 하는 또 다른 믿음이 생겨난다. 이를 관조적 믿음이라 부른다. 그전까지는 듣는 것이었으나, 이제는 관조이며, 관조는 듣는 것보다 더 확실하다.

257. 이 모든 것은 선과 악을 구별하는 그 자연스러운 인식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미덕의 좋은 씨앗이다. 이 자연스러운 인식에 이어 인간에게는 — 끊임없는 양심의 가책, — 죽음을 끊임없이 기억하는 일, 그리고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지속되는 일종의 고통스러운 근심이 따르며, — 그 후에는 슬픔, 낙담,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자연스러운 수줍음, – 과거의 죄에 대한 슬픔, 마땅한 신중함, 공동의 여정에 대한 기억, 그 여정을 향해 스스로를 인도하는 염려, – 모든 피조물이 반드시 통과해야 할 이 문으로 선하게 들어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 눈물로 간구하는 것, – 세상에 대한 무관심과 미덕을 위한 치열한 투쟁. 이 모든 것은 자연스러운 깨달음을 통해 얻어지며, – 각자는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행실을 점검해야 한다. 사람이 이를 얻었다는 것이 드러나면, 그것은 그가 자연스러운 길을 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를 뛰어넘어 사랑에 이르면, 그는 본성을 초월하게 되며, – 그에게는 모든 것에서의 투쟁과 두려움, 수고와 피로가 끝이 난다. 이것이 바로 자연스러운 깨달음의 결과이다. – 그리고 우리는 이 통찰을 우리 자신의 내면에서 발견하게 되는데, 이는 우리가 쾌락만을 좇는 자신의 의지로 이 통찰을 흐리지 않을 때이다. – 그리고 우리는 이 단계에 머물러 있다가, 우리를 이 모든 것에서 해방시켜 주는 사랑에 도달할 때까지 머무르게 된다. 우리 모두가 앞서 말한 모든 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행보가 어디에 있는지 스스로 비교하고 시험해 보라: 그것은 본성에 반하는 것일까, 본성에 따른 것일까, 아니면 본성을 초월한 것일까.

258. 선한 생각은 오직 신성한 은총을 통해서만 마음에 스며들며, 악한 생각은 오직 유혹과 시험을 위해 사람에게 다가온다. 자신의 연약함을 제대로 깨달은 사람은 온유함의 완성에 이른 것이다. 하나님의 은사는 끊임없이 감사하도록 자극받는 마음을 사로잡는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온갖 연약함을 참아 주시지만, 늘 불평하는 사람은 용납하지 않으시며 훈계 없이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은혜 앞에는 겸손이 선행하고, 징벌 앞에는 자만심이 선행합니다. 교만한 자는 모독에 빠지게 내버려 두시고, 행하는 덕을 자랑하는 자는 음행에 빠지게 내버려 두시며, 자신의 지혜를 자랑하는 자는 무지의 어두운 그물에 빠지게 내버려 두신다.

259. 하나님을 기억하며 모든 사람을 공경하는 자는, 하나님의 은밀한 인도하심으로 모든 사람에게서 도움을 얻게 된다. 억울한 이를 변호하는 자는 하나님을 자신의 옹호자로 얻으며, 이웃을 돕기 위해 손을 내미는 자는 하나님의 힘을 자신의 도움으로 받아들인다. 형제의 악행을 비난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비난하는 자를 얻는다. 자기 방 안에서 형제를 바로잡는 자는 자신의 악을 치유하는 것이며, 모임 앞에서 누군가를 비난하는 자는 자신의 상처를 더욱 악화시키는 것이다. 은밀히 책망하는 친구는 지혜로운 의사이지만, 많은 사람 앞에서 꾸짖는 자는 모욕하는 자이다.

260. 하나님께서는 사랑으로 깨우치시지, 보복하지 않으신다(절대 그러지 않으시리라)! 그분은 오직 자신의 형상을 치유하기만을 원하시며, 분노를 품지 않으신다. 보답을 바라고 선을 행하는 자는 곧 변해 버린다. 이 생에서 사람이 하나님을 향한 열망으로 아무리 완전해지더라도, 모든 것은 그분보다 뒤처진다. 그러나 장차 올 세상에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당신의 얼굴을 보여 주시나, 그것은 그분이 실제로 계신 모습과는 다르다. 의인들이 이곳에서 아무리 하나님을 관상하더라도, 거울에 비친 형상만을 바라볼 뿐이지만, 저곳에서는 진리의 현현을 뵙게 된다.

261. 마른 장작에 붙은 불은 쉽게 꺼지지 않는다. 세속을 버린 자의 마음에 하나님의 온기가 스며들면, 그 불꽃은 꺼지지 않으며, 그 힘은 불보다 더 맹렬하다. 죄의 힘이 지체에 스며들면, 마음은 모든 것에 대한 엄격함을 잊어버린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기억이 영혼의 초원을 지배하게 되면, 마음속에서 보이는 모든 것에 대한 기억을 말살해 버린다. 이 세상에서 미래의 시대를 느끼는 것은 마치 바다 속의 작은 섬과 같다. 그곳에 다가가는 자는 더 이상 이 세상의 환상이라는 파도 속에서 고생하지 않는다. 수도사는 아직 수고해야 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여길 때, 육체와의 이별을 슬퍼하지만, 자신의 영혼 속에서 시간을 다 채웠고 자신의 보증을 받았음을 느낄 때, 미래의 시대를 갈망한다. 상인이 바다에 있는 동안, 그는 파도가 자신을 덮쳐 그의 사업의 희망이 가라앉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몸서리친다. 마찬가지로 수도사가 세상에 있는 동안, 그 안에는 폭풍이 일어나 그가 젊은 시절부터 노년까지 수고해 온 일이 망가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그의 삶을 지배한다.

262. 항해자는 바다 한가운데를 항해하는 동안 별을 바라보며, 별을 따라 배의 방향을 바로잡아 항구에 도달할 때까지 나아간다. 반면 수도사는 기도를 응시하는데, 기도가 그 자신을 바로잡고, 매 순간의 기도 속에서 그의 삶이 향하는 그 항구로 그의 행보를 이끄기 때문이다. 옷을 벗은 수영꾼은 진주를 찾기 위해 바다에 뛰어든다. 마찬가지로 수도사는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자기 안에 있는 진주—예수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삶을 살아가며, 그분을 얻게 되면 그분 곁에서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더 이상 찾지 않는다.

263. 처녀에게는 대중 모임이나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 있는 것이 해롭고, 수도사의 마음에는 많은 이와 대화하는 것이 해롭다. 새는 어디에 있든 자신의 둥지로 돌아가 그곳에서 새끼를 키우려 한다. 마찬가지로 분별력 있는 수도사는 자신의 자리로 서둘러 돌아가, 자기 안에서 생명의 열매를 맺으려 한다. 구름은 태양을 가리지만, 수다스러움은 기도의 관상으로 밝아지기 시작한 영혼을 어둡게 한다. ‘시레나’라고 불리는 새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누구든지 그 새의 달콤한 목소리를 들으면 너무나 매료되어 사막을 가로질러 그 새를 쫓아가다가, 노래의 달콤함에 빠져 자신의 생명조차 잊고 쓰러져 죽는다고 한다. 이것이 영혼에 일어나는 일과 비슷하다. 하늘의 달콤함이 영혼에 스며들면,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속에 깊이 새겨지는 그 달콤한 울림에 이끌려 영혼은 온전히 그분을 좇아가게 되어, 자신의 육체적 삶을 잊어버리게 된다. 그리하여 육체는 욕망을 잃게 되고, 영혼은 이 세상에서 벗어나 하나님께로 승천한다.

264. 나무는 먼저 옛 잎을 떨쳐내지 않으면 새로운 가지를 틔우지 못하듯이, 수도사도 자신의 마음에서 과거 행적에 대한 기억을 지워내지 않는 한, 그리스도 예수에 관한 새로운 열매와 가지를 맺지 못한다. 진주가 싹트는 조개 껍질 속에서는, 사람들이 말하듯이, 번개에 의해 일종의 불꽃과 같은 것이 생겨나고, 공중에서 물질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진주가 되며, 그 전까지는 단순한 살덩어리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수도사의 마음도, 이성으로 하늘의 물질을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그의 행실은 평범한 것에 불과하며, 자신의 조개껍질 속에 위로의 열매를 담지 못한다. 자신의 콧구멍을 핥는 개는 자신의 피를 마시며, 피의 달콤함 때문에 자신에게 닥친 해를 느끼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허영에 취하기 쉬운 수도사는 자신의 생명을 마시며, 잠시 동안 느끼는 달콤함 때문에 자신에게 닥친 해를 깨닫지 못한다.

265. 신성한 경전에 담긴 성사의 말씀에 기도와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는 것 없이 다가가지 말고, 이렇게 말하라. “주님, 그 안에 담긴 힘을 느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기도를 신성한 경전에 기록된 말씀의 참된 의미를 깨닫는 열쇠로 여기라. 네 마음으로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가고자 할 때, 먼저 육체적인 수고를 통해 그분께 네 사랑을 증명하라. 그 안에 삶의 시작이 있다. –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를 완전함의 기초로 삼으셨다. 게으름을 영혼을 어둡게 하는 시작이라 여기고, 그 어둠을 더욱 깊게 하는 것은 수다를 나누는 모임이다. 유익한 말이라도 절제가 없으면 어둠을 낳는데, 하물며 헛된 말은 얼마나 더 그러하겠는가. 영혼은 길고 잦은 수다로 인해 하찮아진다.

266. 삶에서의 절제와 분명한 규칙은 마음을 밝게 하고 혼란에 빠지지 않게 한다. 무질서(일관된 규칙의 부재)로 인한 마음의 혼란은 영혼에 어둠을 낳고, 그 어둠은 다시 혼란을 낳는다. (영적) 평온은 올바른 질서의 결과이며, 평온에서 빛이 태어나고, 빛과 평온으로부터 마음속에 맑은 공기가 비친다.

267. 이기적인 영혼은 지혜를 잃게 되지만, 자비로운 영혼은 성령으로 지혜로워질 것이다. 이웃에 대한 사랑을 통해 마음은 신성한 은사를 얻을 수 있는 열쇠를 얻으며, 마음이 육체의 속박에서 점점 벗어나면 지식의 문도 그 앞에 열리게 된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아름답고 칭찬받을 만한지, 다만 그 사랑에 대한 돌봄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지게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268. 영적인 형제들과의 대화가 얼마나 즐거운지, 다만 그 와중에도 하나님과의 대화를 유지할 수만 있다면! 영적 형제들과의 대화를 잘 챙기는 것도 좋으나, 여기에는 적정선이 지켜져야 한다. 즉, 그 명목으로 인해 은밀한 경건한 행실과 삶, 그리고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교제를 잃지 않을 때에만 말이다. 후자는 전자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혼란을 초래한다. 왜냐하면 마음은 두 가지 대화를 동시에 이끌어갈 만큼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적 형제들과의 과도한 대화도 해로울 수 있으며, 세속적인 사람들을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해롭다. 심지어 보지 못하더라도 그들의 목소리 소리만으로도 마음의 평안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269. 영혼이 본성상 육체보다 낫듯이, 영적인 육체도 육체적인 육체보다 낫다. 그러나 처음에 육체의 창조가 그 안에 생명이 불어넣어지는 것보다 먼저 있었듯이, 육체적인 일들도 영적인 일보다 먼저 온다. 그리고 변함없이 지속되는 고상한 삶이 위대한 힘은 아니다. 약한 물방울도 끊임없이 떨어지면 단단한 돌을 뚫는다. 네 안에 영적인 사람이 부활할 때가 가까워지면, 그때 네 영혼에 기쁨이 솟아오르고, 네 생각은 네 마음속에 있는 그 달콤함으로 네 내면에 갇히게 된다. 그러나 세상이 다시 네 안에서 일어나려 할 때, 네 안에서 생각의 요동침이 배가된다. 내가 ‘세상’이라 부르는 것은 마음의 요동침에서 생겨나는 정욕들이다. 그것들이 생겨나 성숙에 이르면, 죄가 되어 사람을 죽게 만든다. 아이들이 어머니 없이 태어나지 않는 것처럼, 정욕도 생각의 요동 없이는 태어나지 않으며, 죄를 짓는 일도 정욕과의 교감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

270. 우리 영혼 안에서 인내가 자라난다면, 이는 우리가 은밀히 위로의 은총을 받아들였다는 징표이다. 영혼이 희망의 기쁨과 하나님의 즐거움에 취해 있을 때, 비록 육신이 연약하더라도 슬픔을 느끼지 않는다. 그때 육신은 힘의 고갈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두 배의 무거운 짐을 감당할 수 있게 된다. 영적인 기쁨에 들어갈 때면 이런 일이 일어난다. 네 혀를 삼가면, 하나님께서는 네게 마음의 감동을 주셔서, 그 안에서 네 영혼을 보게 하시고, 이를 통해 영적인 기쁨에 들어가게 하실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위하여 수련에 임한 정도만큼, 그의 마음은 기도 속에서 담대함을 얻게 되며, 사람이 여러 가지 일로 마음이 산만해지는 정도만큼, 하나님의 도우심을 잃게 된다.

271. 하나님의 인간 사랑으로 인해 사람의 마음에 들어와 영혼을 생명으로 이끄는 첫 번째 생각은, “이 육신의 종말에 대한 생각이 마음속에 스며드는 것”이다. 이 생각에 이어 자연스럽게 세상에 대한 무관심이 따르며, 이를 통해 사람을 생명으로 이끄는 온갖 선한 움직임이 시작된다. 바로 이 생각이, 사람 안에 생명을 드러내고자 할 때 그와 동행하는 신성한 힘이 기초로 삼는 것이다. – 그리고 만일 사람이 우리가 말한 이 생각을 세속적인 근심과 헛소리로 자신 안에서 꺼버리지 않고, 침묵 속에서 되새기며, 관조로 그 생각에 머물고, 그 생각에 몰두한다면, 그 생각은 그를 아무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관조로 이끌 것이다. 사탄은 이 생각을 미워하며, 사람 안에서 그것을 근절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공격한다. 만약 가능하다면, 온 세상의 왕국이라도 그에게 내어줄 것이니, 오직 오락으로 사람의 마음에서 그러한 생각을 지워버리기 위해서일 뿐이다. 왜냐하면 그 교활한 자는, 이 생각이 사람 안에 머무르면 그의 마음이 이미 이 유혹의 땅에 머물지 않게 되며, 그의 계략이 그 사람에게 닿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272. 그 다음에는 또 다른 일이 일어나는데, 사람이 선한 삶을 잘 살아가며, 그분의 관상과 행함을 맛보는 데 가까워질 때, 곧 위에서 “영적 지식의 달콤함을 맛보는 은혜”를 받을 때이다. 이 일의 시작은 다음과 같다. 먼저 사람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돌보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고, 창조주에 대한 사랑으로 깨달음을 얻으며, 동시에 이성적인 피조물들의 구조와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크신 돌보심에 경탄하게 된다. 이로부터 그 안에 신성한 달콤함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불꽃이 피어오르기 시작하며, 이는 마음속에서 타오르며 영적·육체적 정욕을 태워버린다. 이 사랑은 굳건한 절제와 선한 양심과 더불어, 그 후 갑자기 타오르기 시작하니, 사람은 마치 포도주를 마시듯 그 사랑에 취하게 되고, 그의 마음은 하나님께 사로잡히게 된다. 그 후 사람이 선한 삶을 살기 위해, 자신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독서와 기도에 시간을 보내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따라, 그 힘은 그 안에서 그만큼 확고해지고 굳건해진다.

273. 우리가 어둠에 빠졌을 때 당황하지 말자. 여기서 말하는 것은 때때로 영혼이 괴로워하며 마치 파도 한가운데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 특별한 어둠을 의미한다. 사람이 성경을 읽든 예배를 드리든, 어떤 일을 하든 간에, 그에게 어둠이 또 다른 어둠을 낳는다. 그 사람은 일을 그만두게 되며, 종종 그 일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이 시간은 절망과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다. 하나님에 대한 소망과 그분에 대한 믿음의 위로는 영혼 속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영혼 전체가 온통 의심과 두려움으로 가득 차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영혼을 오랫동안 그런 상태에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곧바로 구원을 베푸신다(고린도전서 10:13). 내가 너에게 말해 주고 조언을 해 주마. 만일 네 자신을 다스릴 힘이 없어 기도 중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릴 수 없다면, 머리에 망토를 두르고, 이 어둠의 시간이 지나갈 때까지 잠을 자되, 방에서 나가지 마십시오. 이 유혹은 특히 영적인 삶을 살기를 원하며, 그 여정 속에서 믿음의 위로를 찾는 이들에게 가장 많이 닥칩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은 마음의 동요로 인해 그들을 가장 심하게 괴롭히고 지치게 합니다; 그 뒤를 이어 종종 신성모독이 따르며, 때로는 부활에 대한 의심이나 우리가 말해서는 안 될 다른 무언가가 사람에게 닥치기도 한다. 육체적인 일에 종사하는 이들은 이러한 유혹에서 완전히 자유롭다. 그들에게는 누구나 아는 또 다른 낙담이 닥치는데, 그 작용 방식은 이러한 유혹이나 그와 유사한 것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문을 나서지 않고 이를 견뎌내는 자는 복이 있다. 그러나 이 투쟁은 한 시간 만에 끝나는 것이 아니며, 은혜도 갑자기 다시 찾아와 영혼에 스며드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찾아온다. 그리고 유혹이 오기도 하고 위로가 오기도 하며, 이 둘이 번갈아 찾아온다.

274. 이성에 어긋난 질투를 품은 사람은 결코 마음의 평온에 이르지 못하며, 마음의 평온과 동떨어진 자는 기쁨과도 동떨어져 있다. 마음의 평온을 완전한 건강이라 부르고, 이성에 어긋난 질투가 그 평온에 반한다면, 이는 이미 교활한 질투를 품은 자가 중병에 시달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육체적 행위의 명백한 무력함과 무기력에 대한 슬픔으로 가득 찬 마음 은 이 모든 육체적 행위를 대신한다. 마음의 슬픔이 없는 육체적 행위는 마치 영혼이 깃들지 않은 몸과 같다. 마음으로 슬퍼하며 자신의 감정에 자유를 주는 자는 육체적으로 고통받는 사람과 같으며, 그에게 해로운 모든 음식을 마구 삼키는 자와 같거나, 외아들을 둔 자이면서 서서히 자신의 손으로 그 아이를 죽여가는 자와 같다.

275. 정절과 여자와의 대화는 마치 한 집에 사자와 양이 함께 있는 것과 같다. 하나님 앞에서 자비가 없는 행위는 마치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아들을 죽이는 사람과 같다. 바다에 던져진 한 줌의 모래와 같이, 모든 육체의 죄악은 하나님의 섭리와 자비에 비하면 미미하다. 물이 풍부한 샘이 한 줌의 먼지로 막히지 않는 것처럼, 창조주의 자비는 피조물의 악행에 의해 이겨지지 않는다. 원한을 품고 기도하는 것은 마치 바다에 씨를 뿌리고 수확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 불꽃이 위로 치솟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자비로운 이들의 기도도 하늘로 올라간다. 경사진 곳의 물이 흐르는 것처럼, 성미가 우리 마음에 스며들 때 그 힘도 그러하다.

276. 겸손에는 하나님을 경외함에서 비롯된 것도 있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도 있으며, 기쁨에서 비롯된 것도 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겸손한 자에게는 언제나 온몸의 절제, 감정의 질서, 그리고 통회하는 마음이 따른다. 겸손한 자들의 모임은 세라핌들의 성회처럼 하나님께 사랑받는다. 순결한 몸은 깨끗한 제물보다 하나님 앞에서 더 귀중하다. 이 두 가지 미덕, 즉 겸손과 순결은 영혼 안에서 성 삼위일체를 위한 약혼의 보증을 마련해 준다.

277. 배를 잘 살피되, 시력을 살피는 것처럼 하지 마라. 왜냐하면 내면의 싸움은 의심할 여지 없이 외부의 싸움보다 더 가볍기 때문이다. 형제여, 몸을 선하고 질서 있는 상태로 이끌지 않고서는 내면의 생각을 멈출 수 있다고 믿지 마라. 적보다 습관을 더 두려워하라. 자신 안에 습관을 키우는 것은 마치 불에 먹이를 주는 사람과 같다. 만약 습관이 한 번 무언가를 요구했을 때 그 요구가 들어주지 않으면, 다음 번에는 그 습관이 약해진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한 번 그 뜻을 들어주면, 두 번째에는 훨씬 더 큰 힘으로 너를 공격해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278. 웃음을 좋아하고 사람들에게 자신을 과시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과는 친구가 되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그가 너에게 나태함에 빠지는 습관을 가르쳐 줄 것이다. 누군가 네 앞에서 형제를 험담하기 시작하면, 고개를 숙여라. 그렇게 하는 즉시, 하나님 앞에서도 그 사람 앞에서도 신중한 태도를 보이게 될 것이다. 궁핍한 자에게 무엇을 베풀 때, 네 얼굴의 환한 미소가 네 베풂보다 먼저 앞서게 하고, 선한 말로 그의 슬픔을 위로하라. 네가 이렇게 할 때, 네 친절함은 그의 마음속에 네가 베푼 것, 심지어 그의 필요를 뛰어넘는 그 베풂보다도 더 소중하게 여겨질 것이다. 네 모든 일에서 육체의 절제와 양심의 청결함이 너를 앞서게 하라. 그것들이 없이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일도 헛된 것이기 때문이다.

279. 네가 쫓김을 당하더라도 쫓지 말고, 네가 십자가에 못 박힘을 당하더라도 십자가에 못 박지 말고, 네가 모욕을 당하더라도 모욕하지 말고, 네게 중상모략을 당하더라도 중상모략하지 말라. 소송을 제기하는 것은 기독교인의 삶이 아니니, 그리스도의 가르침에는 이에 대한 암시조차 없다. 기뻐하는 자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이는 순결함의 표징이기 때문이다. 병든 자들과 함께 아파하고, 죄인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는 자들과 함께 기뻐하라. 모든 사람과 친하게 지내되, 마음속으로는 홀로 머물러라.

280. 누구도 비난하거나 헐뜯지 말라. 비록 삶이 지극히 악한 자라 할지라도 말이다. 넘어지는 자 위에 네 옷을 펴서 그를 덮어 주라. 우리가 인간의 악한 행실을 알지 않기 위해 수도실 문을 나가지 않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임을 알라. 그러면 무지의 상태에서 모든 사람을 거룩하고 선한 사람으로 보게 될 것이다. 육체로 수고할 수 없다면, 적어도 마음속으로라도 애도하라. 이틀 동안 금식할 수 없다면, 적어도 저녁까지는 금식하라. 만약 저녁까지도 금식할 수 없다면, 과식을 경계하라. 네가 화평을 이루는 자가 아니라면, 적어도 분쟁을 좋아하는 자가 되지 말라. 네가 친구를 비난하는 자의 입을 막을 수 없다면, 적어도 그와 교제하는 것을 경계하라.

281. 네게서 불이 나와 다른 이들을 태운다면, 하나님께서는 네 손을 통해 네 불에 타 죽는 영혼들의 몫을 네게 물으실 것임을 알아라. 그리고 네가 직접 불을 지르지는 않더라도, 불을 지르는 자와 동의하고 그 일을 기뻐한다면, 심판의 날에 너는 그의 공범자 중 한 명으로 여겨질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걷는 모든 길에서 그들은 평화를 찾지 못하리니, 하나님에 대한 소망에 가까이 다가가기 전까지는 말이다. 수고와 걸림돌로 인해 마음은 평온을 얻지 못하리니, 소망이 그 마음에 들어와 평안을 주고 기쁨을 쏟아부을 때까지는 말이다. 바로 그 희망에 대해 경배받으실 분의 입술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8). 마음의 빛은 믿음을 낳고, 믿음은 희망의 위로를 낳으며, 희망은 마음을 굳건하게 한다.

282. 하나님의 아들은 십자가를 견디셨으니, 그러므로 우리 죄인들은 담대히 회개에 의지합니다. 마음의 슬픔은 모든 육체적 행위를 대신하기에 충분합니다. 성 그레고리오는 말합니다. “하나님과 하나 된 자는 은혜의 성전이며, 항상 그분의 심판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복자 바실리우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끊임없는 기도는 영혼 속에 하느님에 대한 맑은 생각을 일으키며, 우리 안에 하느님을 기억하는 마음을 심는 것은 우리 안에 하느님을 모시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느님의 성전이 됩니다. 상한 마음은 하느님 안에서 안식을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283. 우리가 게을러질 때 얻은 것은, 기도할 때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정신을 차리는 것은 일보다 사람에게 더 큰 도움이 되며, 방종(생각의 해방)은 (육체적) 안식보다 그에게 더 큰 해를 끼친다. 안식 속에서 가정 내 다툼이 일어나 사람을 괴롭히지만, 그는 이를 멈출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사람이 안식을 버리고 일의 자리로 돌아가는 즉시, 이러한 다툼은 그에게서 떨어져 나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방종으로 인해 생겨나는 것은 안식으로 인해 생겨나는 것과 다르다. 사람이 안식 중에 자신의 자유 영역에 머무는 한, 그는 다시 돌아와 자신의 규칙에 따라 자신을 다스릴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여전히 자신의 자유 영역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즐거움을 주는 생각에 대해) 스스로에게 허락을 내리면, 그는 자신의 자유 영역을 벗어나게 된다. 만일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한 관찰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다면, 평안을 주지 않는 것에 강제로, 그리고 어쩔 수 없이 굴복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284. 사람아, 다시 자유로 돌아갈 수 없게 될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네 감각 중 어느 것에도 자유를 허락하지 마라. 안식은 오직 젊은이들에게만 해를 끼치지만, 방종은 노인과 완성된 이들에게도 해를 끼친다. 안식 덕분에 나쁜 생각에 빠졌던 자들은 다시 자기 성찰로 돌아와 고결한 삶을 확고히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일을 이루겠다는 희망 때문에 자기 성찰을 소홀히 한 자들은, 고결한 삶에서 벗어나 방탕한 삶으로 끌려가 포로가 된다.

285. 우리가 어떤 일에 유혹을 받을 때만 슬퍼할 것이 아니라, 특히 그 일에 굳어졌을 때 더욱 슬퍼해야 한다. 왜냐하면 유혹은 온전한 자들에게도 자주 찾아오지만, 그 일에 굳어지는 것은 완전한 어둠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유혹을 받을 때 느끼는 슬픔은, 순수한 행실 대신 은혜로 우리에게 인정된다. 회개를 기대하며 고의로 두 번째로 유혹에 빠지는 자는 하나님께 교활하게 행동하는 것이며, 알 수 없이 죽음이 그를 덮쳐 오고, 그가 미덕의 행위를 이루기를 희망했던 시점에 이르지 못한다.

286. 감각에 자유를 내어준 사람은 누구나 마음에도 자유를 내어준 것이다. 마음의 행위는 외적인 감각을 얽매는 족쇄가 되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분별력을 가지고 이 일에 임한다면, 이는 그에게서 나타나는 다음 세 가지 현상을 통해 분명해진다. 즉, 그는 육체적 쾌락에 얽매이지 않고, 탐식을 좋아하지 않으며, 결코 성급함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 세 가지가 있는 곳에는, 비록 겉모습이 흠잡을 데 없더라도 내면에는 진정한 질서가 없다. 신체를 현명하게 경시하는 태도는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마음, 안락함과 인간적 애착을 경시하는 마음을 낳는다. 누구든지 기꺼이, 기뻐하며 하나님을 위해 손해를 감수한다면, 그는 내면이 깨끗한 것이다. 자신에게 예의를 표한 사람을 기쁘게 여기지 않고, 자신을 모욕하는 사람에게 분노하지 않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이미 죽은 자나 다름없다.

287. 죄인을 미워하지 마라. 우리 모두는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위해 그에게 맞서 싸운다면, 그를 위해 울어라. 도대체 왜 그를 미워해야 하겠는가? 그의 죄를 미워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라. 죄인들에게 분노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신 그리스도를 닮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자비를 전하는 설교자가 되라. 하나님께서는 합당하지 않은 너를 다스리시니, 네가 그분께 빚진 것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징벌이 네게 보이지 않으며, 네가 행한 작은 일들에 대해 그분은 네게 큰 보상을 주시기 때문이다.

288. 그분께 주어진 위엄 있는 이름 때문이 아니라,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라. 마땅히 그분을 사랑해야 하듯이 그분을 사랑하라. 그분이 장차 네게 주실 것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현재 받은 것과 그분이 우리를 위해 창조하신 이 세상 하나 때문이라. 처음에 누가 그분을 설득하여 우리를 존재로 이끌어내셨는가? 우리가 그분을 기억하지 않을 때, 누가 우리를 위해 그분께 간구하는가? 우리가 아직 존재하지 않았을 때, 누가 이 우리 몸을 생명으로 깨우셨는가? 지식의 생각이 어떻게 흙 속에 스며드는가? 우리 같은 죄인들 안에서, 우리 본성을 다시 재창조로 이끄시는 그 무한한 자비는 과연 어떤 것인가! 이성 있는 자들아, 와서 경탄하라. 누가 지혜롭고 경이로운 마음을 가지고 우리 창조주의 자비를 마땅히 경탄할 수 있겠는가?

289. 사람이 이 세상을 어느 정도 소홀히 여기고 하나님의 경외심을 간절히 갈망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섭리가 그에게 그만큼 가까이 다가오며, 사람은 은밀히 섭리의 도우심을 느끼고, 그것을 깨닫도록 순수한 생각이 주어진다. 누구든지 자발적으로 세상의 복을 스스로 포기한다면, 그가 그것을 포기하는 만큼 하나님의 자비가 그를 따르며, 하나님의 인간 사랑이 그를 지탱해 준다. 그러나 자발적인 모든 것의 포기 없이 참된 생명을 얻기에는 힘이 부족한 자들의 영혼을, 하나님께서는 불가피한 고난을 통해 덕으로 이끄시니, 이는 가난한 나사로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고통 중에 그분께 부르짖는 자의 슬퍼하는 마음에 가까이 계십니다. 비록 때로는 육체적 결핍과 다른 고통들에 처하게 하시기도 하지만, 주님께서는 고통받는 자의 영혼에게 그 고통의 가혹함에 비례하여 큰 자비를 베푸십니다.

290.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갈망이 네 안에서 승리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기쁨으로 인해 네 모든 슬픔 속에서 무감각해질 정도에 이르지 못한다면, 세상이 그리스도보다 네 안에 더 많이 살아 있음을 알아라. 질병, 궁핍, 육체의 쇠약, 몸에 해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이 네 생각을 뒤흔들어, 너를 소망의 기쁨과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마음에서 멀어지게 한다면, 네 안에 사는 것은 그리스도이 아니라 육체임을 알아라. 간단히 말해, 네 안에서 무엇이 다른 모든 것보다 우세하게 자리 잡고 있느냐에 따라, 바로 그것이 네 안에 살아 있는 것이다. 네게 필요한 것이 부족하지 않고, 몸도 건강하며, 어떤 반대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도, “이 상태에서도 나는 그리스도께로 순수하게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면, 네가 정신적으로 병들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맛볼 수 없음을 알아라.

291. 네가 “유혹과 슬픔 속에서 육신이 무너질 때, 마음이 연약함을 완전히 초월한 사람은 없었으며,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마음의 슬픔을 이겨낸 사람도 없었다”고 말하지 않도록, – 나는 너에게 순교자들을 상기시켜 주겠으니, 그리스도의 사랑의 힘으로 뒷받침된 그들의 인내가 어떻게 큰 슬픔과 육체의 병을 이겨냈는지 보아라. 그리고 그런 굳건함을 보인 것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참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철학자들과 이방인들 중에서도 놀라운 용기의 힘을 보여준 이들이 있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은 침묵을 지키는 것을 스스로의 법칙으로 삼았으며, 명백한 죽음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그 결심에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본능적인 욕망을 완전히 짓밟았고, 어떤 이들은 비방을 가볍게 견뎌냈으며, 어떤 이들은 슬픔 없이 잔혹한 병을 견뎌냈고, 또 어떤 이들은 슬픔과 큰 재앙 속에서 인내를 보여주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헛된 영광과 희망을 위해 이를 참았다면,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 부름받은 우리 수도사들은 훨씬 더 많이 참아야 하지 않겠는가?

 

 

3

 

서문

러시아어판 『도브로톨리비예』 제3권을 소개합니다. 이 책에 수록된 거의 모든 글은 그리스어판 『도브로톨루비야』에서 인용한 것이다. 다만 성 마리아 이집트녀에게 조언을 해 주었던 아바 조시마의 대담과, 성 막시모스 고백자의 저서에서 발췌한 수행자의 말씀만이 추가되었다. 이 모든 내용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수록되어 있다:

1. 복자 디아도코스, 포티키 주교의 100장으로 구성된 수행자의 말씀과, 그 앞에 실린 10가지 주요 미덕의 최고 단계에 대한 정의.

2. 존경받는 요한 카르파파의 100개 장으로 구성된 위로와 권면의 글.

3. 아바 조시마의 대담록.

4. 성 막시모스 고백자의 – 가)  질문과 답변 형식의 수행에 관한 설교. 나)  사랑에 관한 4백 장. 다)  그의 7백 장 중에서 선별된 관상적 및 실천적 장들.

5. 존경받는 팔라시오의 400편 – 사랑, 절제, 영적 삶에 관한 것.

6. 성 테오도르, 에데스 주교 – 영혼에 유익한 100편.

7. 또 다른 테오도로스의 관상적 교훈.

8. 아브바 필리몬에 관한 매우 유익한 이야기.

9. 성 테오그노스토스의 저서 – 활동적인 삶과 관상적인 삶에 관한 75편.

10. 시나이 산의 성 필로페이 – 절제에 관한 40장.

11. 장로 일리아의 『꽃밭』. HTML 버전 편집자 주 (2005) 『도브로톨리비예』 제2~5권의 본문은 현대 러시아어의 표기법과 발음에 가깝게 편집되었습니다. 성경 인용문은 변경 없이 그대로 두었습니다. 필요 시 구약과 신약의 신러시아어 판본을 참고하여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мiр”(사회, 때로는 피조된 우주 전체), “мир”(평온, 조화, 화합, 조화) 및 “μνρο”(성스러운 기름 부음을 위한 향기로운 혼합물)라는 단어의 표기 차이도 변경 없이 그대로 두었습니다.

 

복자 디아도크, 일리리아 에피루스의 포티키 주교
일리리아 에피루스 지역

 

그에 대한 간략한 소개

성 디아도코의 출신과 주교가 되기 전의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전혀 없다. 그러나 주교가 된 후 그는 거룩한 삶과 지극히 지혜로운 가르침으로 명성을 떨쳤는데, 아프리카 우티카의 주교 빅토르는 자신이 약 490년에 쓴 『반달족의 박해사』(Migne Patrol. Lat. t. 58)의 서문에서, 자신을 그의 제자라고 칭하며, 자신을 기리기 위해 이러한 칭호를 붙이고, “이 복된 디아도코스는 교리와 기독교 생활에 관한 정통 교리의 유산을 매우 많이 남겼으므로, 모든 이로부터 찬사를 받아 마땅하다.”라고 덧붙였습니다." – 왜 그가 5세기 후반에 활약했으며, 어쩌면 그 세기가 끝나기 직전에 세상을 떠났을 것이라고 결론지어야 하는가 하면, 에피루스 주교들이 레오 황제(457–473)에게 보낸 서신에 그의 서명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생애에 관한 다른 사정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저작 중 현재까지 알려진 것은 다음과 같다: 가) 두 편의 설교문 – 하나는 주님의 승천을 기념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성육신에 관한 정통 교리를 설명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리우스파를 반박한 것; 나) 영적 삶에 관한 100편의 수도자적 장으로, 가장 중요한 미덕들의 궁극적 경지에 대한 10가지 사전 지침이 앞부분에 수록되어 있다. 이 저작들 중에서 예루살렘 총대주교 소프로니우스는 모노펠리파파를 비판하는 자신의 순회 서신(포티오스 문헌집 – 제231장)에서 이를 인용하고 있으며, 성 막시모스 고백자도 여러 차례 그를 인용했다. 우리가 이 선집에 수록한 그의 수행에 관한 장들에 대해, 복자 포티우스는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이 글(즉, 100장)은 수행자들에게 지극히 유익하며, 오랜 수련을 통해 완전함에 이르는 행위에 익숙해진 이들에게는 모호한 점이 전혀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경우,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이 이 글이 제시하는 가르침의 맥락을 쉽게 파악해 내기 때문이다.” 한편, 그리스어판 『자비』를 편집한 이들은 이 글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의 성부 디아도쿠스는 행위에 있어 지혜롭고 관조에 있어 명철한 분이셨는데, 이는 그가 오랜 경험과 신성한 마음의 고양에서 영적 지혜를 끌어내어 훌륭하게 집필한, 우리에게 온전히 전해진 이 글을 통해 원하는 누구나 알 수 있다. 이 글을 백 개의 장으로 나누어, 그는 그 안에서 갈망하는 미덕의 가장 깊은 비밀들을 세심하게 밝혀내며, 동시에 신성한 성경의 빈번한 증거들과 믿음으로 깨달은 이성의 관상들로 이를 가득 채웠습니다. 이 저서에서 그는 자신을 따르는 모든 절제 실천자들과 신을 모신 성부들에게, 모든 미덕과 함께 신성한 절제에 관한 모범적인 가르침을 남겼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들 중 매우 많은 이들이 이 장들을 진리의 가장 확실한 지침으로 삼아, 절제에 관한 자신의 저술에서 이 책의 구절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안드로니코스 팔레올로고스 시대에 열린 공의회 이후, 그레고리우스와 시메온 솔루니우스, 그레고리우스 시나이투스, 성 칼리스토스, 그리고 다른 많은 이들이 그렇게 행하며, 이를 통해 그의 가르침이 흠잡을 데 없음을 증언했습니다. 성 교회는 치즈 토요일에, 금욕적인 삶으로 빛을 발한 모든 성인과 함께 성 디아도코스를 기립니다. 이날 예배에서 제2 찬송에서는 “나는 유스타티오스와 유베날리우스라는 위대한 성부들과 함께 디아도코스를 찬양하노라”라고 노래합니다.

 

복자 디아도코스가 제시한 주요 미덕의 궁극적 한계, 즉 완전함의 정점

1. 믿음의 완성에 이르는 한계, 즉 정점은 마음이 하나님 안으로 무감정하게 몰입하는 것이다.

2. 소망의 한계는 마음이 기대하는 복을 향한 갈망이다.

3. 인내의 한계는 보이지 않는 것을 마치 보이는 것처럼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며, 흔들림 없이 인내하는 것이다.

4. 무소유의 한계는, 다른 이가 소유하기를 바라는 것처럼 소유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5. 이해의 극한은 하느님을 향한 열광(혹은 온전한 열망) 속에서 자기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6. 겸손의 극한은 자신의 선행을 단호히 잊어버리는 것이다.

7. 분노하지 않음의 극한은 – 화내지 않으려는 큰 소망이다.

8. 순결의 극한은 끊임없이 하느님께 붙어 있는 마음이다.

9. 사랑의 극한은, 자신을 모욕하고 비방하는 이들에게 우호적인 마음을 더하는 것이다.

10. 하나님을 달콤하게 맛보는 데 있어 완전한 변화의 극치는, 죽음의 비통함을 기쁨으로 여기는 것이다.

 

영적 지식과 사색으로 가득 찬, 실천적인 백 개의 장으로 나뉜 수행자의 말씀

1. 영적 관상 앞에 지도자처럼 앞서야 할 세 가지 미덕에 대하여.[78]

형제들아, 영적 관상에는 믿음, 소망, 사랑이 앞장서야 하며, 그중에서도 특히 사랑이 앞서야 한다. 왜냐하면 그 두 가지(믿음과 소망)는 보이는 복을 경멸하도록 가르칠 뿐이지만, 사랑은 미덕을 통해 영혼 자체를 하나님과 결합시키고, 지적인 감각으로 보이지 않는 분을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2. 사람이 언제, 어떻게 선해지는가.

본성상 선하신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뿐이시다. 그러나 사람도 선한 품성을 위해 부지런히 노력함으로써 선해질 수 있는데, 이는 본성상 그렇지 않은 존재가 본질적으로 선하신 분에 의해 변화되는 것이다. 즉, 영혼이 선을 위해 부지런히 노력함으로써, 자신의 힘으로 그것을 갈망하고 적극적으로 추구할 만큼 하나님 안에서 실재하게 될 때, 이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너희도 선하고 자비로우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눅 6:36; 마 5:48).

3. 죄가 언제, 어떻게 시작되는가.

본성에는 악이 없으며, 본성상 악한 사람도 없다. 이는 하나님께서 악한 것을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군가 마음속의 욕망으로 악의 형상을 자기 안에 들여놓을 때, 비록 그것이 본성상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행하는 자가 바라는 바로 그 형태로 악이 존재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 힘을 다해 끊임없이 하나님을 기억하며, 악으로 이끄는 일상적인 유혹에 귀를 기울이지 말아야 한다. 본성에 내재한 선은, 습관을 통해 외부에서 본성으로 유입되는 악보다 더 강력하기 때문이다. 즉, 선은 본래 존재하는 반면, 악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행해질 때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4. 우리가 언제,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되는가.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을 닮는 것은, 큰 사랑으로 자신의 자유를 하나님께 바친 자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주인이 되지 않고, 우리 자신을 부인할 때, 비로소 그분과 닮게 되기 때문이다. 그분은 그분의 사랑으로 우리를 그분과 화해시키셨다. – 그러나 자기만족적이고 자기 기호에 맞추는 삶의 유혹에 휩쓸리지 않도록 자신의 영혼을 설득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이를 이룰 수 없다.

5. 의지가 오직 선을 향하도록 항상 준비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주성은 이성적인 영혼의 자유의지로, 원하는 바를 기꺼이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항상 선한 생각으로 온갖 악한 생각을 근절해 나간다면, 그러한 자유의지를 오직 선을 향하도록 준비시킬 수 있을 것이다.

6. 참된 통찰의 빛이란 무엇이며,

그리고 무엇이 마음속에서 이 빛을 활용하게 하는가.

진정한 통찰의 빛이란 선과 악을 틀림없이 구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즉, 그러한 구별이 있고 그에 따라 삶 자체가 정리될 때) 바른 길은 마음을 진리의 태양이신 하나님께로 이끌어, 마침내 단 하나의 사랑을 대담함(믿음과 소망)으로 찾아낸 자처럼, 그 무한한 영적 깨달음 속으로 인도한다. 의로운 것은, 그것을 비방하고 짓밟는 자들의 손에서 분노 없는 열정으로 되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경건함에 대한 열정은 (분노에 찬) 증오가 아니라, (사랑에 찬) 책망과 설득을 통해 승리를 거두기 때문이다.

7. 영적인 말씀이 무엇을 낳는지에 대하여, 그리고

사랑의 움직임이 하나님에 대한 대화를 가볍고 풍성하게 만든다는 점에 대하여.

영적인 말씀은 이성적 감각에 만족스러운 확신을 심어준다. 왜냐하면 그 말씀은 사랑의 작용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 마음은 수고나 부담 없이 신학적인 사고의 파도 위를 유유히 흘러가며, 밝고 명료한 생각의 부족으로 인한 슬픔과 근심을 겪지 않는다. 이 상태에서 우리 마음은 사랑의 작용이 원하는 만큼, 광활한 관조 속을 자유롭게 떠돈다. 하나님에 대한 대화를 할 때, 항상 믿음으로 사랑이 주는 지적인 깨달음을 기대하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다. 왜냐하면 마음이 하나님 없이 하나님에 대해 현명하게 논하려 할 때, 그보다 더 빈약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8. 신성한 것들에 대한 담화를 시작할 때.

영적으로 깨달음을 얻지 못한 자가 영적 묵상에 관여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성령의 은총으로 풍성히 비추심을 받은 자도 그에 대한 담화를 시작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전자의 경우, 밝은 생각이 부족하여 마음이 무지의 어둠에 휩싸이게 되지만, 후자의 경우 그 생각이 풍성하여 말을 할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 때 영혼은 하나님의 사랑에 취해, 주님의 영광을 말없이 누리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에 관한 말(하나님에 대한 대화)은 영적 각성이 적당한 균형을 이룰 때 시작해야 마땅하니, 왜냐하면 그러한 절제는 영혼에게 (보이지 않는 영적 대상들을 정확하고 선명하게 묘사하는) 영광스러운 말씀들의 어떤 형상을 선사하는 반면, 동시에 갈망하던 영적 깨달음은 말하는 이의 믿음을 양육하여, 가르치는 자가 사랑에서 솟아나는 지식의 열매를 가장 먼저 맛보게 하기 때문이다. “수고하는 자는 먼저 그 열매를 맛보아야 한다”(딤후 2:6).

9. 지식의 은사와 지혜의 은사에 대하여,

각각이 어떻게 깨우치는지, 그리고 어떻게 얻어지는지에 대하여.

하나의 성령께서는 모든 신성한 은사와 마찬가지로 은사와 지혜와 지식을 주십니다. 그러나 이 은사들 각각은 다른 모든 은사와 마찬가지로 그 자체만의 특별한 작용(에너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도 어떤 이에게는 지혜가 주어지고, 어떤 이에게는 계시가 주어진다고 증언합니다(고린도전서 12:8). 환상은 체험적으로(가시적으로) 영혼을 하나님과 결합시키지만, 이 일이나 다른 영적인 것들에 대해 담론하도록 영혼을 이끄지는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롭게 은둔 생활을 하는 이들 중 일부는 영적 깨달음으로 마음이 밝아지기는 하지만, 신성한 것들에 대한 말에는 나서지 않습니다. 반면, 지혜는 만일 누구에게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에서 오는 깨달음과 함께 주어진다면(이는 드문 일이지만), 사랑으로 환상의 가장 내면적인 작용(에너지)을 드러냅니다. 왜냐하면 환상은 대개 내적인 작용으로 깨우쳐 주는 반면, 지혜는 말로 깨우쳐 주기 때문입니다. 이것들은 다음과 같이 얻어진다. 지식은 기도와 완전한 무심함 속의 깊은 침묵을 통해 얻어지며, 지혜는 영의 말씀을 허영 없이 연구하는 것, 무엇보다도 모든 것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 얻어진다.

10. 영혼이 투쟁 중에 있을 때는 침묵해야 하며;

마음이 평온해지면 그때 대화를 이어가되,

그러나 겸손한 지혜로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영혼이 분노로 정욕에 맞서 싸울 때, 그때는 침묵해야 할 때임을 알아야 한다. 이는 곧 전투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군가 기도가든 자선이든 그 동요가 가라앉았음을 보게 되면, 그때는 신성한 말씀을 전하고자 하는 사랑의 충동에 따라야 하되, 겸손의 밧줄로 마음의 날개를 묶어 두어야 한다; 누구든지 극도의 자학으로 자신을 낮추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위대함을 합당하게 선포할 수 없기 때문이다.

11. 영적인 말씀은 허영으로 이끌지 않으며,

그러나 세속적 지혜의 말은 자만심으로 이끈다.

왜 양쪽이 다른가? 영적인 말씀은 영혼이 허영에 빠지지 않게 지켜준다. 왜냐하면 영혼의 모든 부분을 영적 빛의 풍요로움으로 채워, 영혼이 인간의 명예에 전혀 필요를 느끼지 않게 만들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마음을 항상 공상하지 않게 지키며,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의 사랑에 잠기게 한다. 반면 세상의 지혜의 말씀은 언제나 사람을 명예 추구로 이끈다. 왜냐하면 그것은 감각으로 그 자체로부터 오는 선(마음을 채워 줄 만한)을 체험하게 할 능력이 없으며, 그 대신 자만심에 찬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인 만큼, 그 추종자들에게 사람들의 칭찬에 대한 사랑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말할 필요가 없는 시간을, 근심 없는 침묵 속에서 따뜻한 하나님의 기억 속에 머물며 보낸다면, 우리 스스로도 하나님의 영적인 말씀이 지닌 이러한 특성을 틀림없이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12. 자기 사랑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

그리고 자기애와 신애의 특징.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넘쳐흐르는 사랑의 풍성함으로 인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만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 그런 사람은 결코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추구한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자가 본성상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도 본성상 자신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고 사랑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영혼, 곧 하나님의 감정으로 충만한 영혼은, 자신이 행하는 모든 계명을 이행함에 있어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추구하며, 자신에 대해서는 겸손함으로 기쁨을 누리는 것이 본성이다. 이는 하나님의 위대하심 때문에 그분께는 영광이 마땅하고, 사람에게는 겸손이 마땅하기 때문이니, 이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기 위함이다. 즉, 우리도 행하고자 한다면, 세례자 요한의 본을 따라 주님의 영광을 기뻐하며 끊임없이 이렇게 말해야 한다. “그분은 커져야 하고, 우리는 작아져야 한다” (요한복음 3,30).

13. 언제, 그리고 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치 원하듯이 보이지만, 실은 그분을 매우 깊이 사랑하는 경우가 있는가.

나는 어떤 사람을 보았는데, 그는 하나님을 자신이 바라는 만큼 사랑하지 못한다고 늘 슬퍼하며 울고 있었지만, 실은 그분을 너무나 사랑하여 오직 하나님만이 그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고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불타는 열망을 끊임없이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지 못하며, 자신에게 쏟아지는 칭찬조차 달콤하게 여기지 않는다. 이는 깊은 겸손에 대한 갈망 속에서 자신의 존엄성을 깨닫지 못하고, 율법이 사제들에게 명하는 대로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을 향한 강한 애정으로 인해 자신의 존엄성에 대한 기억을 가리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깊은 곳 어딘가에 겸손의 정신으로 그에게 마땅한 칭찬을 감추어, 자신의 생각 속에서 항상 자신에게 요구되는 존엄성을 전혀 모르는, 해독할 수 없는 종처럼 보이게 하려 함이니, 이는 겸손에 대한 강렬한 갈망 때문이다. 이처럼 행하듯이, 우리도 우리를 그토록 사랑해 주신 주님을 향한 넘쳐흐르는 사랑의 풍요로움을 위해 모든 명예와 영광을 피해야 한다.

14.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 대하여,

그리고 그가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을 완전히 버림으로써,

하나님을 향한 황홀한 사랑에 이르게 되는지에 대하여.

마음속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분께로부터 인정받은 자이다. 왜냐하면 마음속 깊은 곳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받아들이는 만큼, 그 자신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어떤 강렬한 열망으로 이성의 깨달음을 갈망하는 것을 멈추지 않고, 때로는 자신의 뼈 속 힘마저 완전히 고갈되는 것을 느낄 정도로 그 깨달음을 향해 온 힘을 다해 나아가며, 이미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러 온전히 변모되어 하느님에 대한 사랑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사람이 이 육신 속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없는 자이다. 왜냐하면 아직 자신의 육신 속에서 방황하고 있지만, 사랑의 힘으로 인한 영혼의 움직임으로 끊임없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며, 하나님께서는 그를 기묘하게 받아들이시기 때문이다. 이는 마음속에서 마르지 않는 사랑의 불꽃으로 끊임없이 타오르므로, 그는 필연적으로 마음으로 하나님께 굳게 붙어 있으며, 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힘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완전히 버렸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놀라움을 준다면, 정결함을 지키는 것은 여러분을 위함이라” (고린도후서 5:13)라고 말하듯이.

15. 누군가 이웃을 사랑하기 시작할 때,

왜 육신의 사랑은 금세 식어버리는 반면,

영적인 사랑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지.

누군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풍성히 느끼기 시작하면, 그때 영적인 감정 속에서 이웃을 사랑하기 시작하며, 일단 시작하면 그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성서가 말하는 사랑입니다. 육체적인 사랑은 영적인 감정과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사소한 계기라도 생기면 매우 쉽게 사라집니다. 그러나 영적인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어떤 슬픔을 겪게 되더라도, 하나님의 영향력 아래 있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영혼 속에서는 사랑의 유대가 끊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온기로 자신을 달구면, 즉시 선한 마음가짐으로 돌아와 큰 기쁨으로 이웃에 대한 사랑을 받아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그 이웃으로부터 적지 않은 모욕을 당했거나 큰 피해를 입었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때는 하나님의 달콤함이 불화의 쓴맛을 완전히 삼켜 버리기 때문이다.

16.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그것이 어떻게 얻어지는지에 대하여; 또한 정화하는 하나님의 두려움과는

정화하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는 거리가 먼 완전한 사랑과,

정화하는 두려움과 결합된 미완성된 사랑에 대하여.

누구도 먼저 마음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품지 않고서는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영혼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의 작용으로 정화되고 부드러워진 후에야 비로소 실천적인 사랑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근심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누구도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그로 인한 열매에 이를 수 없다; 왜냐하면 오직 그때에야 비로소 마음이 완전한 고요와 염려 없음 속에서 평온을 얻었을 때, 하나님의 경외심이 그에게 구원을 주는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여, 강렬한 감정으로 그를 온갖 세속적인 무감각함으로부터 정화함으로써, 그로 하여금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사랑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외심은 아직 정화되고 있는 의인들에게 속한 것으로, 그들에게는 중간 단계의 사랑이 깃들어 있으나, 완전한 사랑은 이미 정화된 자들에게 속한 것으로, 그들에게는 두려움이 없으니,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기” (요일 4:18)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모두 오직 의인들에게서만 나타납니다. 그들은 성령의 역사로 덕을 닦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라, 그분의 모든 거룩한 자들아”(33, 10)라고 말하기도 하고, “주님을 사랑하라, 그분의 모든 경건한 자들아” (시 30:24), “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경외심이 아직 정화되고 있는 의인들에게만 해당되며, 앞서 말한 대로 중간 정도의 사랑을 지닌 의인들에게는 해당되고, 이미 정화된 의인들에게는 완전한 사랑이 해당됨을 분명히 깨닫게 해 줍니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어떤 두려운 생각도 없으며, 오직 성령의 역사로 인해 영혼이 하나님께 끊임없이 타오르고 매달리는 것만이 남아 있는데, 이는 선지자가 말한 바와 같다: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나이다.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들어 주소서” (시 62:9).

17. 병든 영혼이 어떻게 하나님의 경외함의 역사로 치유되기 시작하며,

그리고 사랑으로 어떻게 조금씩 완전한 건강에 이르게 되는지.

몸에 생긴 상처가 제대로 씻어내고 적절히 준비되지 않으면, 의사가 처방한 약의 효능을 느끼지 못하지만, 깨끗이 씻겨지면 약의 효능을 느끼게 되고 이를 통해 완전한 치유를 얻게 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영혼도, 게으름에 빠져 있고 정욕이라는 나병에 덮여 있는 한, 비록 누군가가 끊임없이 하나님의 무섭고 용서할 수 없는 심판에 대해 설명해 준다 해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느낄 수 없다; 그러나 온전히 자기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행위로 정화되기 시작하면, 그때 비로소 마치 생기를 주는 어떤 치료법처럼, 책망의 작용을 통해 마치 불 속에 있는 것처럼 그녀를 태워버리는 하나님의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하며, 이러한 방식으로 조금씩 정화되어 마침내 완전한 정화에 이르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그녀 안에 사랑이 더해질수록 두려움은 그만큼 줄어들며, 마침내 완전한 사랑에 이르게 되는데, 그곳에는 앞서 말한 대로 두려움이 없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완전한 무정함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큰 찬사가 되게 하소서. 먼저 하나님의 경외심, 그리고 마침내 사랑, 곧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함에 이르는 율법의 충만함이 되게 하소서.

18. 세상의 염려에 얽매인 영혼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으며

심지어 자신의 처지를 올바르게 판단할 수도 없다.

세속적인 근심에서 벗어나지 못한 영혼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지도 못하고, 마귀를 마땅히 해야 할 만큼 혐오하지도 못한다. 이 세상의 생계에 대한 근심이 무거운 덮개처럼 그 영혼을 짓누르고 있어, 그 마음은 이 문제에 대한 자신의 심판대를 세울 수 없으므로, 자기 안에서 (양심의) 오류 없는 판결을 뚜렷이 들을 수 없다. 그러므로 온갖 방법으로 세상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필요하다.

19. 깨끗한 영혼의 특징.

순수한 영혼에게는 시기심 없는 말, 악의 없는 열정, 그리고 주님의 영광을 향한 끊임없는 염원이 특징이다. 그때(영혼이 순수할 때) 마음은 저울의 접시들이 놓이듯 자신의 접시들을 올바르게 세우고, 가장 깨끗하고 부패하지 않은 재판정에서처럼 모든 것에 대한 판단을 냉철하게 유지한다.

20. 믿음과 행실을 결합해야 하며, 행실과 믿음을 결합해야 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과 믿음이 없는 행함은 똑같이 인정받을 수 없다. 믿는 자는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 주님께 행함을 드려야 한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도, 그가 그 열매인 자신의 아들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지 않았다면 의로 인정받지 못했을 것이다.

21. 행함이 없는 믿음은 어떤 것이며, 사랑으로 행하는 믿음은 어떤 것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진심으로 믿으며, 믿음의 행실을 경건하게 실천한다. 그러나 단지 믿음만 있을 뿐, 사랑 안에 머물지 않는 자는,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그 믿음조차 실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는 마음속으로 다소 가볍게 믿을 뿐, 그 안에서 그를 한결같이 굳건히 세우는 위대한 사랑의 기준줄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 오직 “사랑으로 행하는 믿음”(갈 5:6)만이 미덕들의 가장 위대한 정점이다.

22. 믿음의 깊이를 호기심 어린 마음으로 탐구해서는 안 된다.

믿음의 깊이를 탐구하는 자는 생각의 파도에 휩쓸리지만, 순수한 마음으로 그것을 관조하는 자는 달콤한 내면의 고요함을 누린다. 믿음의 깊이는 망각의 물과 같아서, 호기심 어린 생각으로 그 안을 들여다보거나 엿보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는 순수한 마음으로 이 물 위를 헤엄쳐, 그렇게 하여 하나님의 뜻이 닿는 항구에 도달하도록 합시다.

23. 영혼이 마음의 감각이나 미각으로

천상의 선한 것들의 향기를 느낄 수 없을 때, 비록 그것을 간절히 원한다 해도.

누구도 자신을 스스로 심판하는 자가 되지 않는 한, 진심으로 사랑하거나 믿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양심이 자신의 책망으로 인해 불안해할 때, 마음은 지극히 고귀한 선물의 향기를 느낄 여유가 없으며, 즉시 의심으로 갈라지기 때문이다: 이전의 신앙 경험으로 인해 따뜻한 감정으로 갈망하며 그분께로 향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책망하는 양심의 잦은 가책 때문에 더 이상 마음속으로 그분을 사랑스럽게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지극히 따뜻한 기도와 경건함으로 자신을 정화한다면, 다시금 이 갈망하던 은혜를 얻게 될 것이며, 하나님 안에서 얻은 더 깊은 체험을 통해 그 은혜를 더욱 풍성히 누리게 될 것이다.

24. 육체적 감정과 영적 감정의 두 가지에 대하여, 그리고 어떻게

영적 감각을 일깨워 천상의 은총을 맛보게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우리에게 보이는 선한 것들로 육체적 감각이 우리를 무의식적으로 이끌어 가듯이, 보이지 않는 선한 것들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은 대개 이성적 감각, 즉 영적 감각이며, 이는 신성한 선하심을 맛볼 때 나타납니다. 모든 것은 자신과 닮은 것을 갈망한다. 영혼은 무형체로서 하늘의 선을, 육체는 흙에서 나온 것처럼 땅의 쾌락을 갈망한다. 그러므로 수고를 통해 굳어진 우리 육체를 정제한다면, 우리는 실체가 없는 것을 체험적으로 맛볼 수 있는 경지에 틀림없이 도달할 것이다.

25. 영혼의 감성은 그 작용에 있어 본래

순수한 상태에서는 하나였으나, 타락으로 인해 둘로 나뉘었고,

성령의 은총은 그것을 다시 단순하고 하나된 상태로 되돌려 놓는다.

자연적인 감정이 하나라는 사실은, 바로 성스러운 지식(은총으로 깨달은 이성)의 작용 자체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바이다. 아담의 죄로 인해 그것은 두 가지 작용으로 나뉘었으나, 성령으로 인해 다시 하나되고 단순해집니다. 그러나 이를 자기 안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은, 장래의 복을 기대하며 기꺼이 이 세상의 복을 버리고, 절제를 통해 육체적 감각의 모든 욕망을 말려버리는 자들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그러한 자들 안에서만 마음이 온전한 평온함으로 인해 건전하고 활기차게 움직이며,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각으로 신성한 은총을 맛볼 수 있고, 동시에 자신의 성장에 따라 그 기쁨을 육체에도 전하며, 사랑 안에서 측량할 수 없는 어떤 말로 고백을 통해 기쁨을 드러내며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 그분을 의지하니, 그분이 나를 도우시리라. 내 육체가 번성하리니, 기쁜 마음으로 그분께 고백하리라” (시 27:7). 이 경우에 영혼과 육신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기쁨은 영원히 썩지 않는 생명에 대한 꾸밈없는 상기이다.

26. 마음을 흔들리지 않게 지켜야 하며,

생각들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인지 마귀에게서 온 것인지 올바르게 분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수행자들은 항상 자신의 생각이 흔들리지 않도록 지켜야 하며, 그래야만 마음이 밀려오는 생각들을 올바르게 분별할 수 있고, 분별한 뒤 선하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생각들은 기억의 보물창고에 간직하고, 부적절하고 악마적인 생각들은 본성의 그릇 밖으로 내쫓을 수 있다. 바다가 잔잔할 때는 어부들에게 그 가장 깊은 곳까지 훤히 보이므로, 그때는 그곳에서 움직이는 살아있는 생물 중 거의 하나도 그들로부터 숨을 수 없다. 그러나 바람에 일렁일 때는, 평온한 고요함 속에서 아낌없이 보여주던 것들을 뚫을 수 없는 탁한 물속으로 숨겨 버리니, 그로 인해 그 무렵 낚시 요령을 구사하는 이들의 솜씨는 무용지물이 된다. 이는 사색하는 마음에도 마찬가지로 일어나는 일이며, 특히 영혼의 깊은 곳이 부당한 분노로 요동칠 때 그러하다.

27. 왜 자신의 타락을 온전히 아는 이가 드문지,

그리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

자신의 모든 실수를 정확히 알고 있으며, 마음이 결코 하나님을 기억하는 일에서 멀어지지 않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우리 육신의 눈이 건강할 때는 공중을 날아다니는 아주 작은 모기나 파리까지 모두 선명하게 볼 수 있지만, 먼지가 끼거나 습기로 덮여 있을 때는 크고 항상 눈에 띄는 것은 비록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어도, 작은 것은 시력을 통해 전혀 감지하지 못하듯이: 마찬가지로 영혼도, 세속적 욕망으로 인해 닥치는 어둠을 자기 자신에 대한 주의로 몰아내면, 그때는 자신의 사소한 실수조차도 매우 큰 것으로 여기며, 큰 감사를 담아 눈물을 흘리고, 다음과 같이 기록된 대로 그 일로 인해 통회합니다. “의인들은 주의 이름을 고백하리이다” (시 139:14); 그러나 세속적인 성향에 사로잡힐 때는, 살인을 저지르거나 다른 처벌받을 만한 일을 저지르더라도 별다른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며, 다른 어떤 타락도 눈치채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종종 그것들을 미덕으로 여기며, 불쌍하게도 열정적으로 옹호하는 데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28. 성령께서 어떻게 영혼을 정화하시는지, 그리고 이를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마음을 정화하는 일은 오직 성령의 몫이다. 왜냐하면 이 더 강한 분이 오시지 않으시면, 그 포식자를 붙잡아 묶지 못하실 것이기 때문이다(누가복음 11:22). 그러면 그에게 빼앗긴 것은 결코 되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온갖 미덕, 특히 마음의 평안으로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을 위로해야 하며, 우리 안에 항상 빛나는 이성의 등불을 간직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빛이 영혼의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비추면, 그때는 심지어 사탄의 사소한 어두운 유혹들조차 마음속에 드러날 뿐만 아니라, 그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빛에 의해 폭로됨으로써 무력해지고 흔들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도 “성령을 끄지 말라”(살전 5:19) 말씀하신 것이니, 즉 악한 행실이나 생각으로 성령의 은혜를 “모욕하지 말라”(엡 4:30)는 뜻으로, 만물을 이기는 그 등불을 잃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원히 존재하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께서는 이로 인해 꺼지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슬프게 하거나, 더 정확히 말해 그분을 외면하게 함으로써 우리의 마음이 굳어지고 지식의 빛으로부터 멀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29. 죄 이전의 영혼의 일체성에 대하여

와 죄로 인한 그 분열에 대하여, 그리고

이성적이지 않은 욕망이

이성적인 욕망과 조화를 이룰 때에 대하여.

내가 말했듯이, 영혼 속에 있는 자연스러운 감정은 하나뿐이다 [왜냐하면 잘 알려진 다섯 가지 육체적 감각은 별개의 문제이며, 그것들은 전능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의 성령께서 가르쳐 주시듯 육체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감정은 이제 영혼의 움직임이 드러나는 과정에서, 불순종함으로써 이성에 스며든 악한 유혹으로 인해 둘로 나뉜다. 때로는 영혼의 정욕적인 부분에 이끌려, 우리가 세상의 선한 것들에 달콤하게 공감하게 되고; 때로는 영혼의 이성적이고 사색적인 움직임에 동조하여, 우리가 절제할 때 우리 마음이 갈망하며 하늘의 아름다움을 향해 쏠리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우리가 이 세상의 복을 경멸하는 습관을 기르게 된다면, 마침내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를 다스리시는 성령의 교제 덕분에, 영혼의 세속적 갈망도 그 이성적인 기질과 조화를 이룰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신성이 우리 마음의 깊은 곳을 효과적으로 비추지 않는다면, 우리는 온전한 감정, 즉 영혼의 온전한 태도로 하늘의 복을 맛볼 수 없기 때문이다.

30. 언제, 그리고 어떻게 이성의 감각으로 참된 위로와 거짓된 위로를 구별할 수 있는가.

이성의 감각은 영적인 것들을 올바르게 분별하는 그 이성의 미각이다. 마치 우리의 육체적 미각이 건강한 상태에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틀림없이 구별하여, 즐거운 것을 원하고(불쾌한 것은 기피하듯이), 우리 마음도 선한 기분 속에서 활동하기 시작하고 덧없는 것에 대한 걱정이 전혀 없을 때, 신성한 위로를 풍성하게 느낄 수 있으며, 그와 반대되는 어떤 것에도 조금도 휩쓸리지 않을 수 있다. 왜냐하면 육신이 세상의 달콤함을 맛보며 이 감각에 있어 실수 없는 경험을 쌓듯이, 마음도 육신의 사색을 초월할 때, “맛보고 보라, 주님께서 선하시다” (시 33:9), 그리고 사랑의 역사로 인해 이 맛을 잊지 못할 기억을 간직함으로써, 성 사도의 말씀대로 더 나은 것을 실수 없이 분별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것을 위해 기도하노니, 너희의 사랑이 지성과 모든 감정에서 더욱 풍성하여, 너희가 더 나은 것을 분별할 수 있게 하소서” (빌 1, 9).

31. 잠으로 쉬는 동안 사탄이 주는 거짓 위로에 대하여,

그리고 마음이 예수님의 이름을 따뜻하게 부르며 그 유혹을 물리치고

그 위로를 흩어내고 사탄 그 자체를 쫓아내는지에 대하여.

마음이 성령의 은혜로운 위로를 느끼기 시작할 때, 사탄도 밤의 안식 시간, 가장 미묘한 잠(혹은 잠들기 직전)의 순간에 겉보기에는 달콤한 감정으로 영혼에 위로를 심어놓는다. 만약 이때 마음이 주 예수님의 거룩한 이름을 가장 따뜻한 기억 속에 간직하고, 유혹에 대항하는 확실한 무기로 이 지극히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이름을 활용한다면, 그 사악한 유혹자는 즉시 물러나지만, 대신 마침내 자신의 얼굴(생각이 아니라)로 영혼을 향해 싸움을 일으킵니다. 이처럼 마음은 교활한 자의 기만적인 유혹을 정확히 분별함으로써 영적인 일들을 구별하는 데 점점 더 능숙해진다.

32. 영혼의 선한 위로에 대하여, 그것이 깨어 있는 상태에서

잠으로 인해 평온한 상태에 있을 때 영혼을 위로하는 것에 대하여, 그리고 사탄이

잠자는 동안 거짓 위로로 영혼을 유혹하려 드는지.

선한 위로는 몸이 깨어 있을 때나 잠에 빠져들 때, 누군가 하나님에 대한 따뜻한 기억 속에서 마치 그분께 대한 사랑에 매료된 것처럼 될 때 찾아오지만; 반면, 내가 말했듯이 기만적이고 유혹적인 위로는 항상 수행자가 미묘한 졸음이나 망각 상태에 빠지거나, 하나님에 대한 기억이 흐릿해질 때 찾아온다.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위로는 경건한 수행자들의 영혼을 하나님의 사랑 속으로 이끌며, 영혼의 감정이 강렬하게 쏟아지게 한다; 반면, 그것은 대개 영혼을 어떤 기만적인 유혹의 바람으로 감싸며, 육신의 잠이 드는 동안 무언가 즐거운 것을 맛보는 것으로 그 감정을 빼앗으려 시도하는데, 비록 마음이 하나님을 기억하는 데 있어 어느 정도는 맑게 깨어 있더라도 말이다. – 그러므로 내가 말한 대로, 그 때 마음이 주 예수님을 맑은 정신으로 기억하고 있다면, 즉시 적의 그 기만적으로 기분 좋게 보이는 숨결을 흩어 버리고, 은혜로 말미암아 자신의 탁월한 영적 경험 속에서 그를 대적할 무기를 갖추고 기쁨으로 그와 싸우러 나섭니다.

33. 성령에 대한 기쁨이 거짓된 마귀의 기쁨과 어떻게 구별되는지,

그리고 마귀가 거짓된 위로로 유혹을 시작할 때.

만약 영혼이 흔들림 없이, 공상하지 않는 움직임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불타오르며, 이 형언할 수 없는 사랑의 깊이로 심지어 육체까지 이끌려 간다면—그것이 깨어 있을 때이든, 혹은 앞서 말한 대로 성스러운 은혜의 영향을 받는 수행자가 잠에 빠져 있을 때이든, 그 동안 영혼은 자극받은 그 한 가지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전혀 생각하지 않을 때, — 이는 성령의 역사임을 알아야 한다. 그 신비로운 신성한 달콤함으로 인해 온전히 기쁜 감정으로 가득 차 있는 그녀는 그 순간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으며, 오직 고갈되지 않는 어떤 기쁨으로 기뻐하고 있을 뿐이다. 만약 그러한 흥분 상태에서 마음이 어떤 의심스러운 동요나 불순한 생각을 포착하고, 이때 악을 물리치기 위해 주님의 거룩한 이름을 사용하되, 오직 하나님에 대한 사랑 때문이 아니라면, 그 위로는 유혹자로부터 온 것이며, 단지 기쁨의 환영일 뿐임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기쁨은 외부에서 불어오는 것이며, 영혼의 본질적인 속성이나 지속적인 태도로 나타나지 않는다. 보아하니, 여기에서 원수는 영혼을 유혹하고자 하는 것이다. 마음이 자신의 감정에 대한 올바른 분별력을 보이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그는 겉보기에는 선해 보이는 어떤 위로들로 영혼을 위로하려 다가오며, 영혼이 이 허황되고 축축한 달콤함에 휩쓸려 유혹자와의 교합을 알아차리지 못하리라 기대하는 것이다. 이러한 징후들을 통해 우리는 “진리의 영과 아첨하는 영”을 분별할 수 있다 (요일 4,6). – 그러나 누구도 신성한 선함을 감각으로 맛보거나, 악마의 슬픔을 실감나게 체험할 수는 없다. 오직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 은혜가 거처를 마련했고, 악령들은 심장의 지체 주변에 둥지를 틀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확신하는 자만이 이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악령들은 사람들이 이를 어떤 식으로든 확인하는 것을 결코 원치 않으니, 마음이 이를 확실히 알게 되면 하나님에 대한 끊임없는 기억으로 그들에 대항하여 무장할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34. 두 가지 사랑, 즉 자연적인 사랑과 영적인(은총의) 사랑

그리고 각각의 차이점에 대하여.

영혼 속에는 자연적인 사랑이 있고, 성령께서 그 안에 부어 주시는 사랑이 있다. 전자는 우리가 원하면 우리 의지에 따라 적절한 움직임을 보이지만, 우리가 자신의 의지를 힘껏 다잡는 노력을 멈추는 순간 악령들에게 쉽게 빼앗기게 된다. 반면 이 사랑은 영혼을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오르게 하여, 영혼의 모든 부분이 헤아릴 수 없는 신성한 사랑의 달콤함에, 측량할 수 없는 어떤 단순한 마음가짐으로 달라붙게 한다. 이는 그때 마음이 마치 영적(은총의) 작용(에너지)으로 충만해진 듯, 풍성한 어떤 사랑과 기쁨의 흐름을 쏟아내기 때문이다.

35. 하나님의 은혜여, 오직 그 은혜만이 영혼의 요동치는 움직임을 진정시킵니다.

파도가 치는 바다에 기름을 부으면 대개 잔잔해지는데, 이는 기름의 무거움이 폭풍의 거센 파도를 이기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은총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우리 영혼도 달콤한 고요함으로 가득 차게 된다. 이는 선지자의 말씀대로, “오, 내 영혼아, 하나님께 순종하라”(시 61:6) – 그때 그 영혼을 기쁘게 하기 위해 그 안의 온갖 동요가 잦아들며, 그 영혼을 감싸는 성령의 은혜와 그로 인해 생겨나는 평온함에 자리를 내어줍니다. 그러므로 그 때 마귀들이 영혼에 어떤 동요를 일으키려 시도하더라도, 영혼은 그 안에서 평온을 유지하며 온전한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된다. 그러나 누구도 하나님의 경외심으로 끊임없이 자신의 영혼을 깨우치고 달래지 않는다면, 그러한 상태에 이르거나 그 안에 머물 수 없다;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수련하는 이들에게 일종의 흠 없음과 순결함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순결하니, 영원토록 지속되리라”고 선지자가 말하듯이 (시 18:10).

36. 영혼이 어떻게, 언제 하나님의 영광을 느낄 수 있는지;

때로는 빛이나

혹은 빛과 비슷한 무언가를 보여주는 것에 대하여.

누구도 ‘마음의 감각’에 대해 듣고서, 마치 하나님의 영광이 감각적으로 자신에게 나타나는 것처럼 상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영혼이 깨끗해질 때, 형언할 수 없는 어떤 맛보기로 신성한 위로를 느낀다고 말하지만, 그 과정에서 보이지 않는 것 중 무엇이든 감각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하노라”고 복된 바울이 말했듯이(고린도후서 5:7). 그러므로 수련하는 자 중 누구에게 빛이나 불꽃 같은 형상, 혹은 음성이 나타난다면, 어떤 형태로든 그러한 현상을 진실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이는 명백히 원수의 미혹이기 때문이다. – 그리고 이런 일을 겪은 많은 이들이 무지함으로 인해 참된 길에서 벗어나곤 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썩어질 육신 안에서 나그네처럼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과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압니다(고린도후서 5:6). 즉, 우리는 그분이나 그분의 하늘에 있는 놀라운 일들을 육안으로 볼 수 없습니다.

37.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꿈과 마귀가 부추기는 꿈, 그리고 그 차이점에 대하여.

하나님의 사랑으로 영혼에게 나타나는 꿈들은, 영혼의 건전함을 가리키는 거짓 없는 지표들이다. 그 꿈들은 한 형상에서 다른 형상으로 변하지 않으며, 두려움을 일으키지도 않고, 웃음을 유발하거나 갑작스러운 슬픔을 일으키지도 않으며, 온전한 평온함으로 영혼에 다가와 영적인 기쁨으로 가득 채웁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혼은 육신이 깨어난 후에도 온 마음을 다해 꿈에서 경험한 그 기쁨을 갈망합니다. 악마적인 환상들은 이와 정반대이다. 그들은 한 가지 모습으로 머물지 않으며, 오랫동안 혼란스럽지 않은 자에게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의 의지에는 없는 것, 오직 그들만의 거짓에서 빌려온 것만으로 오랫동안 만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때 그들은 말을 많이 하고 위대한 것을 약속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위협으로 공포를 조장하며 종종 전사의 모습을 취하기도 한다. 때로는 시끄러운 외침과 함께 영혼을 달래는 아첨하는 말을 곁들이기도 한다. 마음이 맑을 때면 곧바로 그들을 간파하고, 때로는 정신적 긴장으로 몸을 깨우기도 하고, 때로는 기꺼이 그 자세를 유지하며, 그들의 교활함을 간파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같은 꿈속에서 그들을 폭로함으로써 그들에게 자신에 대한 큰 분노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 그러나 때로는 좋은 꿈조차 영혼에게 기쁨을 가져다주지 않고, 일종의 달콤한 슬픔과 아프지 않은 눈물을 안겨주기도 한다. 이는 이미 위대한 겸손의 지혜에 이른 이들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38. 어떤 꿈도 믿지 않는 미덕에 대하여.

우리는 경험 많은 장로들로부터 직접 들은 바를 바탕으로, 좋은 꿈과 나쁜 꿈을 구별하는 방법을 설명하였다. 그러나 어떤 꿈의 환상도 결코 믿지 말아야 한다는 그 규칙이, 위대한 미덕으로서 우리에게 더욱 깊이 새겨지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꿈은 대부분 생각의 우상이나 상상력의 놀이에 지나지 않거나, 혹은 제가 이미 말했듯이, 악령들이 우리를 조롱하고 놀리는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원칙을 지키다가 때때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꿈을 받아들이지 못하더라도, 자비로우신 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악마의 계략을 두려워하여 그렇게 했다고 아시기 때문에, 이를 두고 우리에게 노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앞서 예언된 꿈 구별의 방법이 옳기는 하지만, 때로는 영혼이 어떤 원수의 유혹에 무감각해지고, 의도치 않게 더럽혀지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 내 생각에 누구도 이를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 그리하여 올바른 구별의 실마리를 잃고, 선하지 않은 꿈을 선한 꿈으로 믿게 되는 것이다.

39. 하나님께서 누구에게도

그분께서 보내신 꿈에 대해 불신한다고 누구에게도 책망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증명하는 예.

다음의 사례가 방금 말한 내용을 증명해 주리라: 한 주인이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다가 집으로 돌아와 밤에 대문 앞에 서서 하인에게 문을 열어달라고 부른다; 하인은 그것이 주인인지 정확히 알아차리지 못하고, 목소리의 유사성에 속아 악당을 들여보내 주인의 재산을 배신하게 될까 두려워 단호히 거절했다; 그리고 주인은 날이 밝자, 이 일로 그에게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큰 칭찬으로 그를 높이 치켜세웠다. 자신의 목소리조차 속임수로 여겼을 정도로, 자신의 재산 중 그 어떤 것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40. 영혼이 자신 안에 있는 영적인 빛을 보는 것에 대하여, 원수의 빛들에 대하여

그리고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에 얽매이지 않는 법에 대하여.

우리의 마음이 신성한 빛이 그 안에서 뚜렷이 작용하기 시작하면 온전히 밝아져서, 그 안에 존재하는 이 빛을 스스로 풍성하게 보게 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영혼이 정욕을 강력하게 지배하게 되는 순간, 항상 그러하다. 그러나 때로는 원수의 교활함으로 인해, 마치 빛처럼, 때로는 불처럼, 유령 같은 것이 마음속에 나타나기도 한다. 신성한 바울이 “사탄”도 때로는 “빛의 천사로 변장한다”(고린도후서 11, 14)고 가르친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즉, 자기 안에서 빛을 보겠다는 희망 속에서) 그러한 희망을 품고 수행자의 삶을 시작해서는 안 된다. 그래야 사탄이 이미 유혹에 빠질 준비가 된 영혼을 찾아내어 실제로 유혹에 빠뜨리지 못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때 한 가지를 명심해야 하는데, 그것은 온전한 감각과 마음의 확신을 가지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경지에 이르는 것, 즉 온 영혼과 온 마음과 온 생각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루카 10,27)이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 일이 이루어지는 사람은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과 거리를 두게 된다.

41. 순종에 대하여, – 그것은 미덕 중 가장 위대한 것이며,

사랑의 문이자 모든 미덕의 선구자이다.

순종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입문적(초보적) 미덕들 중에서 첫 번째 선한 것입니다. 이는 순종이 허세를 끊어내고 우리 안에 겸손을 낳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순종은 마음을 다해 이를 지키는 이들에게 그리스도, 곧 하나님께로 향하는 사랑의 입구가 됩니다. 아담은 이를 저버리고 지옥의 심연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를 사랑하셔서, 우리 구원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와 죽음에 이르기까지(빌 2:8) 아버지께 순종하셨으며, – 비록 그분께서 어떤 면에서도 그분의 위엄에 결코 뒤지지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 자신의 순종으로 인류의 불순종의 죄를 씻어내시고, 순종하며 사는 자들을 복되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마귀의 교만과 싸우기로 결심한 이들은 무엇보다 먼저 이 미덕을 간절히 추구해야 하며, 이 미덕이 앞서 나감으로써 그들에게 모든 미덕의 길을 틀림없이 보여 줄 것이다.

42. 절제는 모든 일에서 지켜져야 하며,

단순히 육체적인 미덕만을 얻는 데 그치지 않고,

내면의 사람을 정화하는 미덕들 또한 얻어야 한다는 점에 대하여.

절제는 모든 미덕의 필수 요소이다. 그러므로 “수고하는 자”는 모든 것에서 “절제”해야 한다(고린도전서 9:25). 마치 인간 몸의 아주 작은 한 부분이라도 빼앗기면, 그 부족함이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사람의 전체 모습이 흉해져 버리듯이, 한 가지 미덕만을 소홀히 여기는 사람은 자제심의 모든 아름다움을 해치게 되는데, 비록 스스로는 그것을 깨닫지 못할지라도 말이다. 왜냐하면 육체적인 덕목들뿐만 아니라, 우리 내면의 힘을 통해 사람을 정화시키는 덕목들도 어렵게 실천해야 하기 때문이다. 영혼이 불순종의 악마와 음행을 저지르는데, 몸을 순결하게 지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혹은 탐식과 온갖 육체적 정욕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되, 허영과 명예심에는 신경 쓰지 않고, 사소한 모욕조차 참지 못하는 사람은 어떻게 상을 받게 되겠는가? 진리의 빛이 오직 겸손의 영으로 행한 의로운 행실만을 바탕으로 (보상의) 저울을 균형 있게 맞추신다는 것을 알면서도?

43. 음식에 있어 절제를 지키는 것의 유익과 방법에 대하여.

수행자들은 모든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욕망을 그토록 혐오해야 하며, 그 혐오가 습관이 되도록 해야 한다. 음식에 대한 절제는, 누구도 어떤 음식이라도 혐오스러운 것으로 여기지 않도록 지켜야 한다. 이는 마귀의 짓이며, 맹세에 가까운 것이다. 우리가 어떤 음식을 삼가는 것은 그것이 본질적으로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결코 그렇지 않다! – 그러나 그것들을 절제함으로써, 불타오르는 육체의 욕망을 적절히 다스리기 위함이며, 또한 우리가 섭취한 음식 중 남은 것이 가난한 이들의 절실한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 쓰이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실한 사랑의 표징이다.

44. 음식의 달콤함과 다른 쾌락들을 쉽게 포기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

먹고 마실 것으로 제공되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먹고 마시는 것은, 비전의 법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피조물 속에는 모두 “매우 좋았다”(창세기 1:31)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식과 단 음식 섭취를 자발적으로 자제하는 것은 매우 현명하고 지혜로운 일이다. 다만, 실제 행동과 경험을 통해 온전한 감각으로 신성한 달콤함을 맛보지 않는다면, 우리 앞에 놓인 달콤한 것들을 그렇게 자발적으로 거절할 수는 없다.

45. 지나친 절제를 버려야 하는 이유,

영적 업적을 위해 육체가 튼튼하게 유지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다양한 음식으로 과부하가 걸리면 우리 몸은 마음을 다소 안일하고 둔하게 만드는데, 마찬가지로 과도한 절제로 인해 지쳐버리면 영혼의 관조적 부분은 침울해지고 사색하기를 꺼리게 된다(즉, 사고하기를 꺼리게 된다). 그러므로 육체의 영양 섭취 방식은 신체의 기력과 강건함의 상태에 맞춰야 마땅하다. 몸이 건강할 때는 필요한 만큼 절제하고, 쇠약할 때는 다소 완화해야 한다. 영적 수련을 하는 자는 몸을 나태하게 해서는 안 되며, 수련에 필요한 만큼의 기력을 유지해야 한다. 그래야 육체적 노동을 통해 영혼도 마땅히 정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46. 형제들이나 다른 순례자들이 방문할 때

형제들이나 다른 순례자들이 방문할 때.

어떤 형제들이나 나그네가 방문했을 때, 허영심이 이 기회를 틈타 움직이기 시작하여 그 독으로 우리를 부풀려, 음식에 관한 규율을 어기지 말라고 부추길 때, 그때야말로 평소의 식사 규율을 다소 완화하는 것이 가장 필요하다. 이는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가 마귀를 쫓아내어 그 유혹이 실패했음을 한탄하게 할 뿐만 아니라, 사랑의 법을 분별 있게 이행하며, 절제의 신비를 그 완화를 통해 드러나지 않게 보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47. 금식과 그 밖의 육체적 미덕에 대하여, –

그것들만으로는 마음의 선한 태도가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가치가 없다.

금식은, 비록 정절을 추구하는 이들을 단련시키는 도구로서 가치가 있기는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경건함을 추구하는 이들은 금식에 대해 자만해서는 안 되며, 오직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만 자신의 목표 달성을 기대해야 한다. 또한 어떤 예술 분야의 장인들은 자신의 숙련도 를 자신의 도구의 우수성으로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인내심을 가지고 작품을 완성함으로써, 그 작품 자체가 그들이 그 분야에서 얼마나 숙련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척도가 된다.

48. 영혼의 영적 결실을 위해 절제된 음주가 주는 이점에 대하여.

적당히 물을 공급받은 땅이 그 안에 뿌려진 깨끗한 씨앗을 풍성한 열매로 자라게 하듯이, 지나치게 많은 비를 받은 땅은 가시와 엉겅퀴만을 맺듯이: 마찬가지로 마음의 땅도, 우리가 포도주를 적당히 마실 때면 그 본연의 씨앗을 깨끗하게 드러내며, 성령께서 그 안에 심으신 씨앗을 잎이 무성하고 열매가 풍성한 것으로 자라게 하지만, 과음으로 그 땅을 지나치게 적실 때면 모든 생각에서 가시와 엉겅퀴만을 맺게 된다.

49. 과음의 무절제가 어떻게 수치스러운 욕망을 불러일으키는가에 대하여.

우리의 마음이 과음의 파도에 휩쓸릴 때, 악마들이 꿈속에서 보여주는 형상들을 열정적으로 바라볼 뿐만 아니라, 스스로 마음속에 어떤 아름다운 얼굴들을 그려내며, 그러한 환상들을 마치 살아있는 존재인 양 여겨 음탕한 쾌락에 빠져든다. 왜냐하면 육체의 정욕적인 부분이 술의 열기로 달아오르면, 마음에는 그러한 정욕의 그림자를 쾌락적으로 상상해야 한다는 어떤 충동이 닥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절제를 지키며, 지나친 음주로 인한 해를 피해야 한다. 그러면 마음은 죄를 묘사하도록 부추기는 쾌락이 없으므로, 몽상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쾌락에 물들지 않은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50. 식욕을 자극하는 음료,

인공적으로 제조된 음료의 섭취를 피하는 것에 대하여.

몸의 부풀어 오르는 욕망을 다스리고자 하는 자는 인위적으로 제조된 음료를 마셔서는 안 되는데, 이러한 발명을 고안한 교활한 자들은 이를 ‘전주주(前酒)’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이 음료들이 대개 수많은 음식이 배 속으로 들어가는 길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이는 그 음료의 성질이 수련하는 몸에 해를 끼칠 뿐만 아니라, 그 성분을 이루는 물질들의 무의미한 혼합 자체가 경건한 양심을 심히 상하게 하기 때문이다. 포도주 본래의 성질에 무엇이 부족하여, 그 도수를 약화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단맛을 첨가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51.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지팡이에 꽂은 스펀지에 적신 식초를 받으심으로써 무엇을 가르치려 하셨는가?

우리 주님이시며 이 거룩한(수행자의) 삶의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고난 중에 마귀의 명령을 따르던 자들에게서 식초를 드셨는데, 이는 우리에게, 제 생각에, 우리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거룩한 수행을 해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본보기를 남기시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이를 통해 그분은 마치 이렇게 말씀하신 듯합니다. “죄와 싸우는 자들은 달콤한 음식이나 음료를 취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싸움의 쓴맛을 인내로 견뎌내야 한다.” 또한 쑥과 스펀지의 의미를 대입하여, 이를 통해 우리의 정화 과정을 더욱 완벽하게 나타낼 수 있다. 쑥은 단단한 물체로서 수행의 특성을 나타내고, 스펀지는 씻는 데 사용되는 물체로서 정화의 완전한 완성을 상기시킨다.

52. 영적인 사람은 목욕탕에 가서는 안 되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목욕탕에 가는 것을 누구도 죄악이라거나 무모하다고 여기지 않겠지만, 절제를 위해 이를 멀리하는 것은 내가 보기에 용감하고 가장 순결한 행동이라 한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우리 육신은 그 달콤한 목욕으로 인해 방종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영혼 속에서도 아담의 불명예스러운 나체에 대한 기억이 일깨워지지 않아, 그와 같이 두 번째 수치인 나체를 가리기 위해 나뭇잎을 찾아 헤매는 일을 걱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특히 이는 얼마 전까지 이 세상의 해로운 타락에서 벗어나, 온갖 방법으로 순결의 아름다움과 우리 몸의 흠 없는 청결함과의 떼려야 뗄 수 없는 일치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우리에게 필수적이다.

53. 수도원에서는 왜 병을 치료하기 위해 의사를 불러야 하는가;

그리고 그러한 경우에 사막에서 은둔하며 사는 이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병이 났을 때 의사를 부르는 것을 막을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의술이 필요하게 될 것을 미리 아시고, 그것이 결국 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정립되도록 허락하셨으며, 이를 위해 창조물들 가운데 의술이 존재하도록 미리 마련해 두셨습니다. 그러나 치유의 희망을 의술에 두어서는 안 되며, 우리의 참된 의사이자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수도원이나 도시에서 수도 생활을 하는 이들에게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겪는 상황의 흐름으로 보아, 사랑에 둘러싸여 있을 때는 끊임없는 믿음의 실천을 항상 유지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 혹은 그들이 허영과 마귀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기도 한데, 그로 인해 그들 중 일부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의사가 필요 없다고 선언하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 황량한 곳에서 두세 명의 뜻을 같이하는 형제들과 함께 은둔 생활을 한다면, 어떤 질병에 시달리든 간에, 우리의 모든 병과 쇠약함을 치유하시는 유일한 주님 께 자신을 맡겨야 한다. 주님 덕분에 그는 황야 한가운데서도 병중의 충분한 위로를 얻습니다. 게다가, 그의 믿음의 행함이 결코 고갈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황야의 선한 장막에 가려져 있어 자신의 인내라는 미덕을 과시할 기회조차 없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주님께서는 뜻을 같이 하는 자들을 한 집에 모이게 하십니다(시 67:7).

54. 병중에서 비겁함이 무엇인지, 그리고 평온함이 무엇인지.

우리가 겪는 육체적 건강의 쇠퇴로 인해 극심한 고통을 느낄 때, 영혼이 여전히 육체적 쾌락에 사로잡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물질적인 쾌락을 갈망하듯, 세상의 복을 버리려 하지 않으면서도, 병으로 인해 육체적 삶에 즐거운 것들을 누릴 수 없는 것을 지대한 고통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 만약 영혼이 질병으로 인한 고통을 감사한 마음으로 견뎌낸다면, 이는 그 영혼이 무욕의 경지에 가까워졌다는 징표이다. 그렇기에 영혼은 진정한 삶으로 들어가는 통로인 죽음 자체를 기쁨으로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55. 영혼이 이 세상의 즐거움에 탐닉하지 않고,

오히려 육신에서 벗어나기를 갈망하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영혼은 이 세상(– 즉, 모든 세속적이고 현세적인 것)에 대해 완전히 무관심해지지 않는 한, 육체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 모든 육체적 감각은 믿음에 저항하는데, 감각은 오직 현재에 존재하는 것만을 추구하지만, 믿음은 미래의 풍성한 복을 약속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수련하는 자에게는 가지가 무성하고 그늘진 나무나, 물이 맑게 솟는 샘이나, 꽃이 만발한 초원이나, 웅장한 저택이나, 가족과의 즐거운 대화 등을 결코 생각해서는 안 되며, – 마찬가지로 풍성한 예물을 받은 적이 있다 해도 그것을 회상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필요한 것만을 누려야 하며, 이 삶을 온갖 육체적 위안과는 거리가 먼 일종의 순례의 길로 여겨야 한다. 오직 이러한 방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절제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 모든 생각을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는 길로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56. 육체적 감각을 평화롭지 않게 누리는 것이

하나님과 그분의 계명을 기억하는 것을 어렵게 하며,

그리고 이 악을 어떻게 피할 수 있는가.

시각, 미각 및 그 밖의 감각들이 우리가 이를 무분별하게 사용할 때 마음의 기억을 흐리게 한다는 사실을, 이브가 우리에게 가장 먼저 알려준다. 그녀가 금단의 나무를 탐욕스럽게 바라보기 전까지는, 그토록 오랫동안 하나님의 계명을 꼼꼼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마치 하나님의 사랑의 날개에 가려진 듯, 그녀는 자신의 나체조차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그 나무를 탐욕스럽게 바라보고, 큰 욕망으로 그것을 만지며, 마침내 억제할 수 없는 갈망으로 그 열매를 맛보았을 때, 그 순간 육체적 쾌락에 대한 성향을 품게 되었고, 마치 벌거벗은 채로 그 정욕과 하나가 되어, 자신의 모든 갈망을 현세적 쾌락을 추구하는 데 쏟아부었으며, 열매가 지닌 눈에 보이는 매력의 작용에 이끌려 자신과 아담의 타락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이나 그분의 계명을 기억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에 대한 끊임없는 기억을 품고 우리 마음의 깊은 곳을 들여다보며, 삶의 유혹에 눈이 멀어 넘어지기 쉬운 이 세상을 마치 눈먼 자처럼 헤쳐 나갈 것이다. 왜냐하면 참으로 영적인 지혜는 우리 안에 내재한 “아름다운 것을 보고자 하는” 충동을 억제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가장 경험이 풍부한 욥도 우리에게 가르치며 말하기를, “내 마음이 내 눈의 뒤를 따르더라도”(욥기 31:7)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극도의 절제를 나타내는 확실한 징표입니다.

57. 어떻게 영으로 행하는 자가 육신의 욕망을 알지 못하며,

마귀가 헛되이 그의 순결을 유혹하는가?

항상 자기 마음속에 머물러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며, 영으로 행하므로 육신의 정욕을 알 수 없다. 이처럼 그가 미덕으로 둘러싸인 채 자신의 여정을 이어가며, 바로 그 미덕들을 마치 순결이라는 성의 문지기처럼 삼고 있다면, 비록 때로는 모든 이에게 공통된 이 정욕의 화살이 본성의 창문까지 닿을지라도, 마귀들이 그를 향해 꾸미는 모든 계략은 실패로 돌아간다.

58. 육신의 정욕을 물리친 후 때때로 닥치는 낙담에 대하여 –

그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물리칠 것인가.

영혼이 더 이상 이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탐내지 않게 되면, 그때 대개 어떤 낙담한 영이 그 안으로 스며들어, 말씀의 사역에 기꺼이 힘쓰게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미래의 복에 대한 확고한 소망도 그 안에 남겨두지 않으며, 게다가 이 일시적인 삶을 미덕을 실천할 만한 가치 있는 일이 없는, 지극히 무의미한 것으로 묘사하며, 지식 자체를 다른 많은 이들에게도 주어진 것이거나 우리에게 특별한 것을 알려주지 않는 것으로 폄하한다. 이 미지근하고 나태하게 만드는 정욕을 피하려면, 우리의 생각을 지극히 좁은 경계 안에 가두고 오직 하나님에 대한 기억만을 마음에 간직해야 한다. 오직 그런 방식으로만 영이 본래의 열정으로 타오를 때, 그 무분별한 나태함을 스스로 떨쳐낼 수 있기 때문이다.

59. 영적 수련에서 끊임없이

마음 깊은 곳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따뜻하게 기억하는 것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가.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기억으로 그 모든 출구를 막아버릴 때, 그 끊임없이 움직이는 성향을 충족시키기 위해 자신에게 필수적인 어떤 일이 주어지기를 필요로 한다. 그에게는 오직 주 예수님의 거룩한 이름만을 주어야 하는데, 그 이름으로만 그는 정해진 목표를 달성하려는 자신의 열정을 온전히 충족시킬 수 있다. 그러나 사도가 말한 대로,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할 수 없다”(고린도전서 12:3)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 쪽에서는, 앞서 말한 기도문(주 예수 그리스도여, 등등)을 마음속 깊이 끊임없이 되뇌어야 하며, 이때 어떤 곁가지 생각으로도 치우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이름을 마음속 깊은 곳에 끊임없이 간직하는 자들은 자기 마음의 빛(생각의 명료함, 또는 모든 내적 움직임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볼 수 있다. 또한, 이 경이로운 이름을 긴장된 주의력으로 마음속에 간직할 때, 영혼에 나타나는 온갖 더러움을 매우 뚜렷하게 태워 없애줍니다. “우리 하나님은 모든 악을 삼키는 불이시니라”고 사도가 말하듯이(히브리서 12:29). 이로부터 마침내 주님께서는 영혼을 그분의 영광을 깊이 사랑하는 경지로 이끄십니다. 왜냐하면 그 지극히 영광스럽고 간절히 갈망되는 그 이름은, 그 이름을 기억함으로써 따뜻한 마음속의 정신을 깨우쳐, 우리 안에 그분의 선하심을 방해받지 않고 사랑하는 습관을 길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때에는 이미 그 사랑을 가로막을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 귀중한 진주로서, 사람들은 그 진주를 얻기 위해 모든 재산을 바치며, 그것을 얻음으로써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립니다.

60. 두 가지 기쁨, 즉 초기의 기쁨과 완전한 기쁨,

그리고 그 둘 사이의 눈물에 대하여.

기쁨에는 시작의 기쁨과 완성의 기쁨이 있는데, 전자는 (자신에 대한) 환상과 무관하지 않은 반면, 후자는 겸손한 지혜로 충만하다. 그 둘 사이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슬픔과 고통 없는 눈물이 있다. “지혜가 많으면 분별력도 많고, 분별력 있는 사람은 슬픔을 더할 것이니” (전도서 1, 18). 이 때문에 먼저 시작의 기쁨으로 영혼을 위업으로 이끌어야 하며, 그다음에는 성령의 진리로, 과거에 저지른 죄들뿐만 아니라 자기 망각 속에서 여전히 저지르고 있는 유혹들에 대해서도, 그 영혼을 책망과 시련에 맡겨야 한다. “주께서 그들의 죄악을 책망하시어 사람을 벌하셨고, 그의 영혼을 거미줄처럼 녹이셨나이다” (시편 38:12). 그리하여 하나님의 책망이 마치 도가니 속에서처럼 그녀를 시험한 후에, 그녀가 하나님에 대한 따뜻한 기억 속에서 꿈결 같은 기쁨의 작용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61. 하나님을 잊는 것과 그분에 대한 기억을 회복하는 것에 대하여,

전자의 원인과 후자를 위한 수단,

그리고 그 기억의 가장 높은 표현에 대하여.

영혼이 분노로 격앙되거나, 과식으로 무거워지거나, 심한 슬픔에 휩싸일 때, 그 때 마음은 비록 어떤 식으로든 그렇게 하도록 강요받는다 해도 하나님에 대한 기억을 간직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온전히 이러한 정욕의 격렬함으로 어둡게 가려져 있을 때, 마음은 자신의 본래 감성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소망은 자신의 인장을 찍을 곳을 찾지 못하여, 이를 통해 마음이 신에 대한 묵상을 잊히지 않고 변함없는 모습으로 간직할 수 없게 되는데, 이는 그때 정욕의 거칠음으로 인해 기억이 무뎌지기 때문이다. – 그러나 마음이 그러한 동요로부터 자유로울 때, 비록 때때로 망각이 잠시 동안 사랑하는 주님에 대한 생각을 훔쳐가더라도, 이성은 자신의 활력과 생기를 되찾고 즉시 다시 열정적으로 그 간절히 갈망하던 구원의 사냥감을 쫓아갑니다; 그때야말로 은총 그 자체가 영혼과 함께 생각하며 외치기 때문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여!” 마치 어머니가 자녀를 가르치며, 아이가 다른 어떤 말 대신 ‘아버지’라는 단어를 명확히 발음할 수 있을 때까지, 심지어 꿈속에서도 ‘아버지’라고 반복해서 말하게 하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기도해야 할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께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십니다”(롬 8:26). 왜냐하면 우리는 이 기도의 미덕에 있어 아직 미숙한 상태이므로, 그분의 도우심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그분의 형언할 수 없는 달콤함이 우리의 모든 생각을 감싸고 달콤하게 할 때,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과 우리 아버지를 기억하고 그분을 사랑하도록 움직일 수 있다. 그러므로 그 놀라운 바울이 말하듯이, “그분을 향해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는다”(롬 8:15)는 것은, 그분께서 우리를 선한 마음으로 이끄실 때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짖게 되므로 그러한 것이다.

62. 분노에 대하여 – 언제, 어떻게 그것을 허용할 수 있는가.

분노는 다른 어떤 정욕보다도 보통 영혼을 불안하게 하고 혼란에 빠뜨리지만, 때로는 영혼에게 지극히 유익한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불경건한 자들이나 다른 방식으로 뻔뻔하게 행동하는 자들에게 주저 없이 분노하여, 그들이 구원받거나 적어도 부끄러움을 느끼게 할 때, 우리는 우리 영혼에 온유함만큼이나 유익을 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경우 우리는 온갖 방법으로 하나님의 의와 선하심의 목적을 돕기 때문이다. 또한 영혼 속에서 여자를 탐하는 욕망이 솟아날 때, 그 죄에 대해 더욱 격렬하게 분노함으로써 종종 영혼을 정신 차리게 하고, 그 죄에 맞설 수 있는 용기를 불어넣어 줍니다. 그리고 극심한 정신적 혼란 속에 있을 때, 우리는 그 혼란을 일으키는 영 자체를 분노로 제지함으로써, 심지어 죽음이 우리를 짓누른다고 자랑하는 공포들 위로도 지혜로 높이 올라설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나사로를 부활시키실 때, 우리에게 이를 보여주기 위해 먼저 마음속으로 지옥을 물리치고 스스로를 다잡으신 뒤, 언제나 그러셨듯이 흔들림 없는 의지로 나사로의 육신에 영혼을 되돌려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 생각에, 절제된 분노는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본성에 주신, 진리를 위한 도구라고 봅니다. 만약 하와가 뱀을 대적하여 그 분노를 활용했다면, 그 정욕적인 욕망의 파멸적인 영향에 빠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나는 경건함에 대한 열정으로 절제된 분노를 사용하는 자가, 마음이 굳어 분노를 결코 일으키지 않는 자보다 의로운 보상의 저울에서 더 호의적인 평가를 받을 것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후자의 경우, 인간의 생각과 감정을 다스리는 통치자가 훈련받지 못한 채 남아 있기 때문이다. 반면, 미덕의 말에 올라탄 자는 항상 투쟁 속에 머물며, 악마의 무리들 사이를 누비며, 성서에서 “이스라엘의 병거”라고 칭한 절제의 네 마리 말을 하나님의 두려움 안에서 끊임없이 훈련시키고 있습니다. 이는 신성한 엘리야가 하늘로 승천한 묘사에서 볼 수 있듯이 (열왕기하 2, 12). 하나님께서는 초기 유대인들에게 네 가지 미덕을 다양한 방식으로 가르치셨다. 그렇기에 지혜(용기, 정의, 절제)의 제자인 그가 하늘로 승천하게 된 것이며, 내 생각에 그의 영혼이 불의 소용돌이 속에서 승천할 때, 이 미덕들을 말 삼아 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63. 영적 삶에서 온전한 사람은 다툼에 휘말려서는 안 된다.

거룩한 지식을 얻고 하나님의 달콤함을 맛본 자는 (누군가 그에 대해 고소를 제기하더라도) 결코 다투지 말아야 하며, 설령 누군가가 그가 입고 있는 옷까지 벗겨 간다 해도 스스로 누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서는 안 된다. 이는 이 세상의 권세자들의 정의가 하나님의 정의보다 낮기 때문이며,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의 정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하나님의 자녀들과 이 세상의 사람들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겠는가? 후자의 정의가 전자의 정의와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는 점 외에는 없다. 그렇기에 전자는 ‘인간의 정의’라 불리고, 후자는 ‘하나님의 정의’라 불리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께서는 “비난을 받으셨으나 반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셨으나 원망하지 아니하셨다”(베드로전서 2:23); 오히려 옷을 벗겨지는 것을 묵묵히 참으셨을 뿐만 아니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높은 차원에서, 자신에게 악랄하게 대했던 자들의 구원을 위해 아버지께 기도하셨다. 그러나 세상의 사람들은 다투는 상대방에게서 원하는 것을 넉넉히 얻기 전까지는 다투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이며, 특히 빚으로 이자를 얻으려 할 때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정의’는 종종 큰 불의의 시초가 되곤 합니다.

64. 참을 수 있는 불의를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고,

기도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지키는 것이, 소송을 벌이는 것보다 낫다.

나는 어떤 경건한 사람들이 말하기를, 우리 자신의 생계와 가난한 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가진 것을 누구에게도 빼앗기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한 악을 묵인함으로써, 우리를 해치는 자들의 죄에 동참하는 죄인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며, 특히 기독교인들에게서 이를 참아낼 때, – 그러나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보다 우리의 소유를 더 구하고자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기도와 내 마음의 성찰을 제쳐두고, 나를 해친 자들을 상대로 재판을 구하며 법정 현관에서 고생하기 시작한다면, 내가 추구하는 것이 내 자신의 구원, 아니 구원의 계명 그 자체보다 훨씬 더 소중하다는 것이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네 것을 빼앗는 자를 괴롭히지 말라 (눅 6:30)라고 명하는 복음의 계명을 따르는 자로서, 사도의 말씀대로 “재산의 약탈을 기쁨으로 받아들이지” (히 10:34) 않는다면, 그 계명이 재판을 통해 빼앗긴 것을 되찾은 자조차도 탐욕의 죄에서 면제해 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썩어질 것들(일시적인 것들, 혹은 썩어질 것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재판들)은 썩지 않는 하나님의 심판을 무효화할 수 없다. 그리고 유죄자는 자신의 사건이 속한 법에 따라 그 법에 부합해야 하며, 그 법에 따라 자신을 변호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를 부당하게 대하려는 자들의 폭력을 인내로 견디고, 그들이 우리에게서 빼앗아 간 것을 돌려주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의 회개를 위해 그들을 위해 기도하여, 강탈의 죄가 용서받게 하는 것이 선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우리가 강탈당한 물건 자체가 아니라, 강탈한 자 자신을 회개를 통해 죄에서 자유롭게 받아들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65.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 이를 위해 무엇보다도 겸손이 필요한 법이다.

참된 경건의 길을 깨달았을 때, 즉시 모든 것을 팔아 주님의 계명에 따라 그 수익금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가난한 자를 돕는) 계명을 언제나 이행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명목으로 이 구원의 명령(한 번에 모두 나누어 주는 것)을 무시하지 않는 것은 매우 적절하며 무엇보다도 영혼에 유익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우선 더 온전한 평온함을 얻게 될 것이며, 그 결과 비방받을 여지가 없는 가난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가난은 그 자체로 하늘의 지혜를 지니고 있어, 우리에게 더 이상 탐욕의 불씨를 지필 만한 것이 남아 있지 않을 때, 탐욕스러운 자들이 부당한 주장을 펼칠 빌미를 남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때 우리를 다른 모든 미덕보다 더 따뜻하게 감싸줄 것은 겸손한 지혜이며, 그것은 마치 벌거벗은 자들을 안아주듯 우리 내면을 평안하게 해 줄 것이다; 마치 어머니가 자기 아이를 품에 안아, 그 아이가 유아 특유의 순진함으로 옷을 벗어 멀리 내던질 때, 그 큰 순수함으로 인해 옷의 화려한 아름다움보다 알몸인 상태를 더 즐겁게 여길 때, 어머니가 품 안에서 아이를 위로하고 따뜻하게 감싸주듯이 말이다. 이는 “주님께서 어린아이들을 지키시니, 내가 겸손히 엎드렸더니 주께서 나를 구원하셨도다”(시 114,5)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66. 모든 것을 나누어 주는 것이 겸손으로 가는 길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선과 구제에 대한 보고를 요구하실 것이니, “있는 자에게서, 없는 자에게서가 아니라” (고린도전서 8, 12)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뜨거운 선의를 품고,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수년 동안 나누어 줄 수 있었던 모든 것을 짧은 시간에 나누어 준다면, 이미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때 또다시 책망받게 될 것인가? – 그러나 누군가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만약 모든 것을 나눠 준다면), 지금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베푸는 자선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가난한 사람들은 나중에 어디서 자선을 받게 되겠습니까? – 그런 사람에게 주어야 할 교훈은 이렇습니다. 자신의 탐욕을 감추기 위해 하나님께 책망받을 만한 일을 감히 꾸미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태초부터 그러하셨듯이, 자신의 피조물을 돌보고 잘 가꾸어 주실 방법이 결코 부족하지 않으시다. 그리고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 자선을 베풀도록 자극받기 전에도, 가난한 이들이 음식이나 옷 없이 지냈던 적이 있었는가? 그러니 확신하라. 진리를 깨닫자마자, 부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 무분별한 계략과 교만을 버리고, 자신의 욕망을 미워하며—이는 곧 자신의 영혼을 미워하는 것을 의미한다—가난한 이들을 섬기기 위해 모든 것을 기꺼이 바치는 것이 훨씬 낫다. 그리하여 나중에는 재산을 끊임없이 나누어 주는 것에 대해 자화자찬하며 기뻐할 이유가 없어진 뒤, 마치 아무런 선한 일도 하지 않는 것처럼 스스로를 낮추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부유함에 넘쳐날 때는, 마음이 내킬 때마다 그것을 나누어 주는 것을 크게 기뻐하며, 마치 신성한 명령을 기쁨으로 이행하는 것처럼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써버리면, 우리는 의로운 일을 아무것도 행하지 못하는 자들처럼 겸손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게 된다. 그 결과 영혼은 큰 겸손 속에서 자기 안으로 돌아와, 매일 자선을 베풀어 얻을 수 없는 것을 부지런한 기도와 인내, 그리고 겸손한 지혜로 얻고자 한다. 이는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이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리이다”(시편 73:21)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학에 대한 은사도, 하나님의 복음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미리 버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가난함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풍요로움을 전파하려는 자들 외에는,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도 주시지 않으십니다. 이는 “주님, 주님의 자비로 가난한 자를 준비하셨나이다”라고 말씀하신 분과, 이에 덧붙여 “주님께서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 큰 능력을 주실 것이라” (시편 77:11, 12)라고 하신 분의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다.

67. 신학 연구의 은사에 대하여 – 그로부터 얼마나 많은, 그리고 어떤 선한 것들이 비롯되는가.

우리 하나님의 모든 은사는 지극히 선하며 모든 복을 베푸시는 것이나, 그중 어느 것도 신학 연구만큼 마음을 불태워 그분의 선하심을 사랑하도록 이끄는 것은 없다. 이는 신학 탐구가 하나님의 선하심에서 비롯된 가장 첫 번째 산물이기에, 영혼에게 가장 먼저 은사를 베풀기 때문이다. 첫째로,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온갖 즐거운 위안을 기꺼이 경멸하게 하며, 그 안에서 우리는 덧없는 위안 대신에 말로 다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의 풍요로움을 누리게 한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불타는 듯한 변화로 우리의 마음을 비추어, 이를 통해 우리 마음을 섬기는 영들의 동참자로 만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마땅히 준비한 뒤, 이 미덕으로 나아가자. 이 미덕은 웅장하고 모든 것을 꿰뚫어 보며, 세상의 온갖 근심을 끊어 버리고, 형언할 수 없는 빛의 비추심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을 양육하며, – 장황하게 말하지 않으려니와, – 말로 표현되는 이성적인 영혼을, 성스러운 예언자들을 통해 하나님, 곧 말씀과 분리될 수 없는 교제로 이끌어 줍니다. 또한 사람들의 영혼 속에서도, – 오, 놀라운 기적이여! – 신성한 찬송가를 마련하여, 이 신성한 신부 인도자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큰 소리로 노래합니다.

68. 왜 우리의 마음은

신학적 관상에 비해 기도에 그리 열심이지 않은가:

그리고 그러한 관상 속에서 성공하기 위해 기도가 얼마나 필수적인가.

우리의 마음은 대개 기도에 별로 기울어지지 않는데, 이는 기도의 미덕이 마음을 억누르고 제한하기 때문이다. 반면 신학적 사색에는 더 기꺼이 빠져들게 되는데, 이는 신성한 관조의 광활함과 무한함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음속에서 마음대로 떠들어대는 것을 방치하지 않고, 끝없이 고상한 공상에 빠져들려는 욕구를 방종하지 않도록, 우리는 무엇보다도 기도와 시편 찬송과 성경 읽기에 가장 힘쓰되, 그와 동시에 참된 신앙의 지식으로 가득 찬 지혜로운 이들의 해석을 경시하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행함으로써, 우리는 그로 하여금 자신의 말을 은혜로운 말씀에 섞게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허영에 휩쓸려 자만과 말 많은 성향의 영향으로 공상 속에 흩어지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며, 또한 묵상하는 동안 마음을 공상에 빠지지 않게 지키고, 그의 거의 모든 생각을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으로 만들게 될 것이다. 침묵의 시간에 내면에서 평안을 찾고, 무엇보다 기도의 달콤함에 흠뻑 취할 때, 그는 앞서 언급된 정욕적인 움직임들로부터 자유로워질 뿐만 아니라, 오히려 새롭게 되어, 신성한 관상 속에 머무르는 힘을 쉽고 수월하게 얻으며, 동시에 큰 겸손으로 통찰력 있는 판단(실천적 지혜)에서도 번창하게 된다. 그러나 기도는 모든 관조의 폭을 뛰어넘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기도는 오직 모든 감각과 인식 속에서 거룩한 은총으로 충만해진 이들에게만 고유한 것이다.

69. 은총은 처음에는 영혼에 가장 뚜렷하게 작용하지만,

나중에는 그 작용을 줄이고 심지어 완전히 감추기도 한다.

이것이 영혼에게 얼마나 유익한가. 은총은 처음에는 대개 강한 감각과 함께 그 빛으로 영혼을 비추지만, 영적·기독교적 삶에서 진전이 이루어지면, 그때는 대부분 하나님을 사랑하는 영혼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 안에서 신비를 이루어 내며, 그 후(영혼이 평온해진 뒤) 기쁨 가운데 우리를 신성한 관상의 길로 인도하기 위함이며, 마치 우리가 방금 무지에서 지식으로 부름받은 것처럼, 또한 (정욕으로부터 영혼을 평온하게 하는) 수행의 과정에서는 우리의 생각이 허영에 빠지지 않도록 지키기 위함이다. 우리는 마치 은총에서 버림받은 것처럼 적당한 슬픔에 빠지는 것이 마땅하며, 더욱더 겸손해져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정하신 뜻에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나서 적절한 때에 기쁨에 들어가, 선한 소망에 힘입어 날개를 펼치도록 해야 한다: 왜냐하면 끝없는 슬픔이 영혼을 절망과 희망 없음으로 이끌듯이, 지나친 기쁨 또한 영혼을 자만과 허영으로 이끄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삶과 이성에서 어린아이와 같은 이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은혜의 깨달음과 버림받음 사이에는 유혹이 있고, 슬픔과 기쁨 사이에는 희망이 있다. 이는 “내가 주님을 오래 참으며 기다렸더니, 주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셨도다”(시 39:2)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내 많은 병들 가운데서도 주님의 위로가 내 영혼을 기쁘게 하셨도다”(시 93:19)라고도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70. 말이 많은 것은 영혼에 해롭고, 침묵은 유익하다.

사우나의 문이 자주 열리면 안의 열기가 금세 밖으로 빠져나가듯이, 많은 사람이 말을 할 때—비록 모두가 좋은 말만 한다 해도—영혼은 말이라는 문을 통해 자신의 기억(영적 사물들에 대한 의식적인 인식)을 내보내게 된다. 이로 인해 마음은 마침내 가장 순수한 생각들을 잃게 되고, 무질서하게 밀려드는 생각들로 인해 혼란에 빠진 채 주변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게 된다. 이럴 때 마음은 더 이상 우리의 생각을 공상으로부터 지켜주는 성령을 갖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성령은 모든 소동과 공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선하시며, 말의 과다함을 피하시기 때문이다. – 반면 침묵은 지혜로운 생각의 어머니로서 유익하다.

71. 하나님을 사랑하는 영혼이 진리의 감정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

지혜의 말씀 그 자체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듯이, 처음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영혼(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에 들어선)에게는 수많은 정욕, 특히 분노와 증오가 무리 지어 덤벼든다. 그러나 영혼이 이러한 시련을 겪는 것은 악령들의 작용 때문이라기보다는, 영적 삶에서 성장해 나가는 과정에 따른 것이다. 왜냐하면 영혼이 세속적인 사색에 휩싸여 있는 한, 비록 진리가 다른 이들에 의해 짓밟히는 것을 보더라도 이에 대해 무관심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온전히 자신의 욕망에 사로잡혀 있어,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가 자신의 정욕과 욕망을 초월하기 시작하면, 그때는 현세적인 것들로부터의 초탈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꿈속에서조차 하나님의 진리가 버려지는 것을 더 이상 무관심하게 지켜볼 수 없게 되며, 그 진리를 모독하는 자들에게 분노하고 분개하게 된다. 그러다가 경건한 생각의 작용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고 회개한 후). 이처럼 그녀는 자연스럽게 불의한 자들을 미워하고, 의로운 자들을 굳게 사랑한다. 왜냐하면 영혼의 눈은, 그 휘장인 육체가 극도의 절제로 정제되었을 때, (부당한 관점으로) 유혹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불의한 자들의 무감각함을 애도하는 것이 그들을 미워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비록 그들이 미움을 받을 만하더라도, 진리의 말씀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영혼이 미움으로 인해 동요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혼에 미움이 있을 때, 참된 지식은 무력해지기 때문이다.

72. 신학자의 마음과 통달자의 마음.

신학자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로 영혼 속에서 달콤함을 누리고 불타오르며, 충분한 폭으로 무정함의 경지에 이른다. 이는 “주님의 말씀”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순수한 말씀, 불에 단련된 은, 땅에서 정련된 것”이기 때문이다(시 11:7). 반면 통찰력 있는 마음은 은혜로운 영향력의 시험을 견뎌내며 정립됨으로써 정욕을 초월하게 된다. 신학자도 통찰력 있는 자의 경험을 맛볼 수 있는데, 이는 그가 자기 안에 가장 겸손한 태도를 심어 놓을 때이며, 통찰력 있는 자도 어느 정도 관조적 미덕에 참여하게 되는데, 이는 그의 영혼의 이성적 부분이 죄를 짓지 않을 때이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 은사를 누구나 완벽하게 얻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 중 하나를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신보다 뛰어난 점을 경탄하며, 의로운 삶을 향한 열정으로 겸손함 속에서 더욱 성장해야 한다. 그래서 사도도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지혜의 말씀이 주어지고, 다른 사람에게는 그 성령에 관한 분별의 말씀이 주어집니다”(고린도전서 12:8).

73. 소리 내어 드리는 기도와 마음속으로 드리는 기도에 대하여.

영혼이 본연의 열매로 풍성할 때, 그때는 시편 찬양을 더욱 큰 소리로 드리며, 특히 목소리로 기도하기를 좋아하게 된다. 그러나 성령의 감동을 받을 때는 온전한 기쁨과 달콤함으로 한 마음으로 노래하며 기도한다. 첫 번째 마음가짐 뒤에는 (자기만족에서 비롯된) 몽상적인 기쁨이 따르고, 두 번째 뒤에는 영적인 눈물이, 그 다음에는 침묵을 사랑하는 어떤 기쁨이 따른다. 이는 목소리를 억제하면서도 기억이 따뜻하게 유지됨으로써, 마음이 눈물을 자아내고 내면으로 깊이 파고드는 어떤 생각들을 일으키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이것에서 진실로 눈물과 함께, 그러나 기쁨으로 마음의 땅에 뿌려지는 기도의 씨앗을 볼 수 있으며, 풍성한 수확에 대한 굳건한 소망을 품고 있다(시 125:5). 그러나 더 큰 슬픔에 짓눌릴 때는, 희망의 기쁨으로 영혼의 비통한 울부짖음을 누르며, 시편 선율의 바람이 그 무거운 슬픔의 구름을 흩어 버릴 때까지, 시편 찬송을 조금 더 큰 소리로 불러야 한다.

74. 자연스럽고 은총으로 충만한 하나님 사랑에 대하여.

영혼이 자기 자신을 깨닫게 되면, 그때 비로소 그 자체로부터 어떤 온기와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뿜어내게 된다. 이는 세상의 근심에 휘둘리지 않으므로, 영혼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어떤 사랑을 발산하며, 세상의 하나님을 그에 상응하게 갈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찾아 헤매는 하나님에 대한) 이 기억은 곧 사라지는데, 이는 감각의 인상들이 이 기억을 흐리게 하기 때문이거나, 본성이 그 빈약함으로 인해 자신의 선함을 금세 소진해 버리기 때문이다. 왜 헬레니즘의 현자들이 절제를 통해 이루고자 했던 것을 마땅히 누리지 못했는가? 그것은 그들의 마음이 영원하고 온전한 진리의 지혜로부터 영향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면 성령께서 마음에 주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온기는, 첫째로 온전히 평화롭고 끊이지 않으며, 둘째로 영혼의 모든 부분을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이끌고, 마음 밖으로 솟아나지 않으면서도 그 자체로 온 사람을 헤아릴 수 없는 사랑과 기쁨으로 기쁘게 해줍니다. 이를 깨달은 자들은 바로 그것을 얻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연적인 사랑은 본성이 절제를 통해 결코 건전해질 수 없다는 징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영적인(은총의) 사랑이 그러하듯이, 마음을 무정함으로 이끌 수는 없다.

75. 영혼에 미치는 은총의 빛나는 영향에 대하여, –

그리고 어두운 세력의 작용으로 인해 영혼이 어둠에 휩싸이는 것에 대하여.

마치 우리를 둘러싼 공기가 북풍이 불 때, 그 바람의 미묘함과 상쾌한 작용으로 인해 맑아지듯이; 남풍이 불 때면, 마치 그 바람이 가져오는 무거움 때문에 공기가 응축되는 것처럼, 그 바람이 자신의 땅에서 마른 안개를 뿜어내어 온 우주에 퍼뜨리듯이; 마찬가지로 영혼도 참되고 거룩한 성령의 숨결을 받아들일 때면, 온전히 악마의 어둠에서 벗어나게 되나; 반면, 유혹의 영에 심하게 휘둘릴 때는 온전히 죄의 구름으로 뒤덮이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온 힘을 다해 우리의 열망을 정화시키고 생명을 주는 성령의 숨결, 즉 선지자 예레미야가 계시의 빛 속에서 북쪽에서 오는 것을 보았던 그 영(– 1, 4)을 향해 돌려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 영혼의 관상적인 부분이 무엇보다도 항상 깨끗하게 유지되고, 우리가 신성한 환상 속으로 헛되지 않게 들어가, 빛의 공기 속에서 빛 속에 있는 것을 맑게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지식의 빛입니다.

76. 세례 전과 세례 후에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이 영혼 안에서 어떻게 작용하는가.

어떤 이들은 은혜와 죄, 즉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이 세례를 받는 이들의 마음속에 함께 숨어 있다고 지어내었다. 그들은 한 쪽은 마음을 선으로 이끌고, 다른 쪽은 그와 정반대로 이끈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신성한 성경과 마음의 체험을 통해, 세례 전에는 은혜가 외부에서 영혼을 선으로 이끄는 반면, 사탄은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둥지를 틀고 마음의 모든 올바른 출구를 막으려 유혹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례를 통해 거듭나는 그 순간부터, 악마는 바깥에 있고 은혜는 안에 머무르게 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옛날에는 미혹이 영혼을 지배했 , 세례 후에는 진리가 영혼을 지배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후에도 사탄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때로는 그보다 더 심하게 영혼에 작용하지만, 은혜와 공존하는 존재로서가 아니라—절대 그렇지 않다!—마치 육체의 습기를 통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쾌락의 달콤함으로 마음 앞에 연기를 피우듯이 작용한다. 이는 하나님의 허락하심에 따라 일어나는 일로, 사람이 폭풍과 불과 유혹을 겪어야만 선에서 오는 기쁨에 도달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지났으나 주께서 우리를 안식처로 인도하셨나이다”(시 65:12)라고 기록되어 있듯이 말이다.

77. 영혼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작용하는 방식.

내가 말했듯이, 은혜는 우리가 세례를 받는 바로 그 순간부터 마음(영)의 가장 깊은 곳에 은밀히 머무르기 시작하며, 그 존재를 마음의 감각 자체로부터 숨깁니다. 그러나 누군가 온 마음(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기 시작하면, 그때 은혜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어떤 말로 마음의 감각을 통해 영혼에게 말하며, 그 은혜의 일부를 영혼에게 전해 줍니다. 그 결과, 이 얻은 것을 영원히 굳건히 간직하고자 하는 사람은, 큰 기쁨으로 모든 현세적 복을 버리고, 자신이 생명의 숨겨진 보물을 발견한 그 밭을 온전히 차지하고자 하는 소망을 갖게 된다(마태복음 12,44). 왜냐하면 누군가 세상의 모든 부를 버릴 때, 비로소 자기 안에서 하나님의 은총이 숨겨진 그 자리를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 후, 영혼이 성장함에 따라 신성한 은총의 선물도 마음속에서 그 선한 영향력을 드러내며; 그러나 그때 주님께서는 악령들이 영혼을 더 많이 괴롭히도록 허락하시는데, 이는 영혼이 선과 악을 분별하는 지혜를 배우게 하고, 더욱 겸손해지도록 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영혼이 그러한 유혹에 시달릴 때, 악령들의 사악한 생각들로 인한 수치심에 휩싸여 큰 부끄러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78. 세례를 통해 성령께서 마음에 거하시게 되고, 악한 영은 쫓겨나지만;

그러나 이것으로 죄에 대한 유혹이 완전히 끊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으며, 영혼의 지적인(영적인) 움직임을 지니고 있다; 몸은 마치 영혼의 집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죄로 인해 영혼의 고유한 특성만이 더럽혀진 것이 아니라, 우리 몸도 썩어짐에 빠지게 되었기에,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 말씀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하나님으로서 자신의 세례를 통해 우리에게 중생을 위한 구원의 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성령의 역사로 물 안에서 다시 태어나기 때문이며, 그 결과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간다면 즉시 영혼과 육체 모두 정화되기 때문이다. 이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죄(혹은 죄의 아버지)는 그분께 의해 쫓겨납니다. 왜냐하면 영혼의 특징인 일체성과 단순성 속에서, 어떤 이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이 두 존재가 함께 거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신성한 은총이 거룩한 세례를 통해 측량할 수 없는 어떤 사랑으로 하나님의 형상의 특징들과 결합하여 닮음을 보증할 때, 빛과 어둠이 결코 교제할 수 없듯이(고린도후서 6:14), 악한 자의 자리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수련의 길을 걷는 자로서, “다시 태어남의 목욕”(딤전 3:5)을 통해 추악한 뱀이 마음의 깊은 곳에서 쫓겨난다고 믿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 후에도 선한 생각과 함께 악한 생각을 다시 경험하게 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화의 세례는 비록 죄의 더러움을 씻어내지만, 우리 소망의 이중성을 없애지는 못하며, 악령들이 우리를 대적하여 싸우고 유혹하는 말을 하는 것을 막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본래의 자연적 상태에 머물러 있을 때, 진리의 무기를 받아들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지키게 하려는 것이다.

79. 은혜는 이성의 감각을 통해 작용하고, 사탄은 육신의 감각과 욕망을 통해 작용한다.

사탄은, 제가 말했듯이, 성세례를 통해 영혼에서 쫓겨나지만, 앞서 언급한 이유들로 인해 몸을 통해 영혼에 영향을 미치도록 방치됩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영혼의 가장 깊은 곳, 즉 마음에 스며듭니다. 이는 “왕의 딸의 모든 영광은 내면에 있다”고 말하듯이, 악령들에게는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시 44:14).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따뜻하게 떠올릴 때, 신성한 사랑이 마치 물줄기처럼 우리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것을 느낍니다. 반면 악령들은 육체의 감각을 공격하여 그 안에 둥지를 틀고, 자신들에게 편리한 육체를 통해 영적으로 아직 미숙한 이들에게 작용합니다. 이처럼, 신성한 사도의 말씀에 따르면,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성령의 법에 기쁨을 얻지만, 육신의 감각은 쾌락을 추구하는 성향에 기꺼이 휩쓸린다(로마서 7, 18). 그 때문에 지식에서 부지런히 성장하는 이들에게는, 은혜가 마음의 감각과 육체를 통해 형언할 수 없는 기쁨으로 기뻐하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주의하고 안일하게 경건의 길을 걷고 있을 때, 악령들은 우리를 그런 상태로 발견하고 육신의 감각을 통해 우리의 영혼을 사로잡아, 영혼이 원하지 않는 것으로 강제로 끌고 가는 살인자들입니다.

80. 세례받은 자들의 마음속에 은혜와 죄가 함께 거한다고 말하는 자들에 대하여.

두 인격, 즉 은혜의 영과 죄의 영이 신자들의 마음속에 함께 거한다고 말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해 복음서 저자의 말씀, “빛이 어둠 속에 비치나 어둠이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더라” (요 1:5)라는 말씀을 인용하여, 비록 신성한 빛이 악마의 어둠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진다 하더라도, 신성한 빛은 악한 자와 함께 머무르는 것으로 인해 조금도 더럽혀지지 않는다고 결론 짓는다. 그러나 “ ”라는 복음서의 말씀 또한, 그들이 성경에 따라 지혜롭게 행하지 않는다고 이러한 자들을 책망한다. 하나님이 곧 말씀이시며, 이 참 빛이신 분이 피조물들에게 나타나시기를 기뻐하사, 그 헤아릴 수 없는 인간 사랑으로 우리 안에 그분의 거룩한 지식의 빛을 밝히셨으나, 세상의 지혜는 이를 깨닫지 못하였으니, 즉 하나님의 이 뜻을 알지 못하였으니, “육신의 지혜는 하나님과 원수” (롬 8:7)라고 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이유로 신학자는 그러한 표현을 사용했으며, 이어 몇 마디 더 덧붙여 이 놀라운 분은 “진리의 빛은 세상에 오는 모든 사람을 비추는”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인도하고 생명을 주시는’ 대신에 사용된 표현이다. “세상에 계셨으나, 세상은 그분을 알지 못하였으니, 그분은 자기 백성에게 오셨으나 자기 백성이 그분을 영접하지 아니하였음이라. 그러나 그분을 영접한 자들에게는,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요한복음 1:9–12). 그리고 지혜로운 바울은 바로 이 “받아들이지 아니하였으니”(알지 못하였으니)라는 말씀에 대해 설명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미 도달하였거나 이미 완성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쫓아가며, 만일 따라잡는다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따라잡으신 그분을 따라잡으려 함이라” (빌 3:12). 그러므로 복음서 저자는 사탄이 참된 빛을 알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은 태초부터 그 빛과 거리가 멀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 말로,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에 대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어두워진 탓에 그분의 지식의 빛으로 나아오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을 마땅히 책망하고 있습니다.

81. 악령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영혼을 공격하는 가장 미묘한 종류이고,

그리고 가장 거친 종류는 육체에 더 크게 작용하는 것이다.

지식의 말씀은 우리에게 두 종류의 악령이 있음을 가르쳐 주는데, 어떤 것은 더 미묘하고, 다른 것은 더 거칠고 물질적이다. 가장 미묘한 악령들은 영혼을 공격하고, 가장 거친 악령들은 대개 수치스러운 어떤 쾌락적인 움직임을 통해 육체를 사로잡는다; 그렇기 때문에 영혼을 공격하는 영들과 육체를 공격하는 영들은 서로 대립하지만,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려는 열의는 똑같다. 은혜가 사람 안에 거하지 않을 때, 악령들은 뱀과 같이 마음 깊은 곳에 둥지를 틀고, 영혼이 선을 갈망하도록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 반면 은총이 마음속에 은밀히 거하게 되면, 그 악령들은 마치 어두운 구름처럼 마음의 각 부분을 스쳐 지나가며, 죄악된 정욕과 온갖 환상적인 몽상으로 변모하여, 추억을 통해 몽상으로 마음을 산만하게 함으로써, 은총과의 교제를 단절시키려 한다. 그러므로 영혼을 공격하는 영들 때문에 마음속의 정욕, 특히 모든 악의 어머니인 자만과 교만에 불타오를 때, 우리는 자신의 육신이 썩어가는 것을 떠올리며, 명예를 탐하는 자만심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마귀들이 육신을 공격하여 우리 마음을 수치스러운 정욕으로 들끓게 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해야 한다. 이는 오직 이 기억 하나만으로도 하나님의 기억과 연결되어 악령들의 온갖 유혹을 강력히 무력화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러한 기억을 계기로, 영적 악령들이 육체의 부패를 이유로 인간 본성이 아무런 가치도 없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하찮은 존재라는 생각을 심어주기 시작한다면(그들은 누군가가 그러한 생각으로 그들을 괴롭히기 시작할 때, 바로 그렇게 행동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 하늘 왕국의 영광과 위엄을 떠올리며, 동시에 하나님의 위엄 있는 심판의 엄중함도 마음에 새겨야 한다. 이를 통해 비겁한 절망을 막고, 욕망에 쉽게 휘둘리는 우리 마음에 맞서 싸울 수 있는 굳건함과 힘을 부여해야 한다.

82. 은혜 안에 있는 자들의 마음속에는 마귀가 있을 수 없으니,

그는 육체를 통해 그들과 싸운다.

주님께서는 성복음서에서 우리에게 가르치시기를, 사탄이 돌아와 자기 집이 쓸고 비워진 것을, 즉 마음이 열매 맺지 못하는 것을 발견하면, 그때 자신보다 더 사악한 다른 일곱 영을 데리고 들어와 그곳에 둥지를 틀며, 그 사람의 마지막 상태를 처음보다 더 나쁘게 만든다고 하셨습니다(누가복음 11, 25). 여기서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한, 사탄은 영혼의 깊은 곳까지 들어와 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또한 신성한 바울도 이 문제에 대한 동일한 관점을 가르치고 있는데, 영적 체험을 통해 이 일의 실체를(즉, 그것이 진정으로 어떤 것인지) 깨달았을 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율법을 기뻐하나, 내 육신 안에는 또 다른 율법이 있어 내 마음의 율법과 싸우며, 내 육신 안에 있는 죄의 율법에 사로잡혀 나를 노예로 삼고 있느니라”(롬 7:22, 23). 또한 성령으로 사는 데 성공한 자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 곧 육신을 따라 걷지 않고 성령을 따라 걷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영의 법이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켰기 때문입니다” (롬 8:1, 2). 또 다른 곳에서는, 육신을 통해 사탄이 성령의 참예자가 된 영혼을 대적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진리로 허리를 동이고, 의의 갑옷을 입고, 평안의 복음을 전할 준비를 하여 발에 신을 신으라. 또한 모든 것을 덮을 믿음의 방패를 들어, 그것으로 악한 자의 모든 불타는 화살을 끄실 수 있으리라. 구원의 투구를 쓰고, 하나님의 말씀인 영적인 칼을 잡으라” (엡 6,14–17). 그러나 포로가 되는 것과 싸우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전자는 강제로 자신의 권세 아래로 잡아두는 것을 의미하는 반면, 후자는 동등한 대립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께서도 마귀가 주 그리스도를 자기 안에 품고 있는 영혼들을 불화살로 공격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는 보통 그런 법이기에, 즉 손으로 적을 잡을 수 없는 자는 화살을 사용하여 멀리서 싸우는 적을 화살의 비행을 통해 상처 입히듯이, 사탄도 이전에처럼 수고하는 이들의 마음속에 둥지를 틀 수 없게 되었으니, 그 안에 은혜가 임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는 육신에 둥지를 틀고, 정욕의 습기를 노려 그 유혹으로 영혼을 미혹하려 한다. 그러므로 육체를 말려야 하는데, 이는 마음이 정욕의 습기에 이끌려 쾌락의 미끼에 미끄러지지 않고 넘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사도의 말씀 자체만으로도, 수련자들의 마음이 신성한 빛의 작용을 받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고 그와 함께 기쁨을 누린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반면 육체는 악에 대한 타락성 때문에 악한 영들에게 복종하므로, 그들의 사악한 속삭임에 굴복하게 된다. 이로부터 저절로 알 수 있듯이, 마음은 하나님과 마귀가 함께 거하는 어떤 공통의 거처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마치 내가 내 마음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섬기면서도 육신으로는 죄의 법에 복종하는 것이 될 텐데, 만약 내 이성이 온전한 자유로 악령들과 맞서 싸우지 않고, 은혜가 내게 미치는 선한 작용에 기꺼이 순종한다면, 반면에 육신은 내가 말했듯이 악한 영들이 그 안에 둥지를 틀도록 방치된 탓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쾌락의 달콤한 향기에 휩쓸리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도도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내 안, 곧 내 육신 안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롬 7:18). 이처럼, 수고를 통해 죄에 맞서는 자들(사도가 이 말을 자신에 대해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에게서, 악령들은 이성을 겨냥해 싸우며, 육체는 달콤하고 유혹적인 움직임으로 이완시키고 정욕으로 이끌려고 애쓴다; 이는 의로운 심판에 따라, 죄에 맞서 굳건히 투쟁하는 자들의 몸 깊은 곳에 숨어 지내도록 허용되기 때문이며, 인간의 지혜로운 판단은 언제나 유혹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 이 생에서 수행의 수고를 통해 죽을 수 있다면, 그는 마침내 온전히 성령의 거처가 된다. 왜냐하면 그는 죽기 전에 이미 부활한 것이기 때문이다. 복된 바울 자신도 그러했고, 죄에 맞서 완전한 수행으로 싸워온 모든 이들도 그러했으며, 지금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83. 사탄이 심어 놓은 생각들 역시 마음에서 나오는 것으로 여겨진다.

마음은 스스로 선한 생각과 선하지 않은 생각을 낳습니다. 그러나 선하지 않은 생각은 마음의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유혹으로 인해 선하지 않은 것에 대한 기억이 습관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며, 그중 대부분, 특히 가장 악한 것들은 악령들의 사악함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모든 것이 마치 마음에서 나오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우리 마음속에 은혜와 죄가 함께 존재한다고 생각했으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주님의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니, 이것이 사람을 더럽히느니라. “마음에서 악한 생각과 살인, 간음, 음행 등이 나오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5, 18. 20). 그러나 그들은 우리 마음이 어떤 지극히 미묘한 감각의 작용에 따라, 악한 영들이 그 안에 심어 놓은 그 악한 생각들을 자신의 것으로 삼게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육체의 작용으로 인해, 자기 만족에 빠지기 쉬운 몸은, 특히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이, 영혼과 하나가 되어 있는 탓에 영혼을 휩쓸어 가기 때문입니다; 이는 육신이 유혹의 달콤함을 지극히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악마들이 영혼에 심어 놓은 생각들은 마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처럼 보이며, 우리가 그 생각들을 함께 즐기기를 갈망할 때 우리는 그것들을 우리 것으로 받아들인다. 주님께서 이를 책망하시며, 말씀이 그 자체로 신성함을 드러내시어 앞서 인용된 말씀들을 선포하신 것이다. 누군가 사탄이 교묘하게 그 안에 심어 놓은 생각들을 함께 즐기며, 그 기억을 마치 자신의 마음에 새겨 놓는다면, 그 후 그가 자신의 마음에서 그 생각들을 싹틔운다는 것이 명백하지 않겠는가?

84. 성경의 예를 들어, 은혜와 마귀가

마음속에 함께 머물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는 성경의 예.

주님께서는 복음서에서, 강한 자가 자기 집에서 쫓겨날 수 없는데, 오직 그보다 더 강한 자가 그를 결박하고,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아, 그를 밖으로 내쫓을 때에만 가능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12,29). 그런 수치를 당한 후, 쫓겨난 자가 어떻게 다시 안으로 들어가, 참된 집주인과 함께, 자기 집에서 마음대로 쉴 수 있겠는가? 또 어떤 왕이 자신에게 반역한 폭군을 물리친 뒤, 그가 자신과 함께 왕궁에서 어울리기를 원하겠는가? 차라리 즉시 그를 찔러 죽이거나, 묶어서 자신의 군인들에게 넘겨 가장 혹독한 고문과 가장 비참한 죽음을 당하게 하지 않겠는가?

85. 영적 삶의 경험에서 이를 입증하는 바,

혹은 은혜와 죄가 번영하는 자 안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우리가 선과 악을 함께 생각한다는 이유로, 성령과 마귀가 마음속에 함께 거한다고 결론 짓는다면, 그런 사람은 이것이 우리가 아직 “주님께서 선하시다”(시 33:9)는 것을 맛보지도 보지도 못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임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처음에는, 앞서 말했듯이, 은혜가 세례를 받는 이들의 마음속에 자신의 임재를 감추고 영혼의 자유 의지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이 온전히 하나님께로 돌아설 때, 은혜는 형언할 수 없는 어떤 감정으로 마음에 자신의 임재를 드러내며, 다시 영혼의 움직임을 기다리며, 그동안 악마의 화살이 영혼의 가장 깊은 감정에 닿도록 내버려 둠으로써, 영혼이 가장 뜨거운 의지와 가장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게 하려 하십니다. 이로 인해 마침내 사람이 확고한 결심으로 계명을 지키며 앞으로 나아가고, 끊임없이 주 예수님을 부르기 시작하면; 그때 성스러운 은총의 불꽃이 마음의 외적인 감각들까지 퍼져 나가, 인간 땅의 가시덤불을 눈에 띄게 태워 버린다. 이로 인해 마귀의 속삭임과 유혹은 (은총이 깃든) 그곳에서 더 이상 머물 수 없게 되며, 단지 영혼의 정욕적인 부분만을 살짝 스칠 뿐이다. 반면 사람이 수련을 통해 모든 미덕, 특히 완전한 무소유로 무장하게 되면, 그때 은혜는 그의 온 존재를 지극히 깊은 어떤 감정으로 비추며, 그 안에서 하느님을 향한 가장 따뜻한 사랑을 불태우게 한다; 그때 마귀의 화살은 육체적 감각에 닿기도 전에 이미 사그라들게 되는데, 이는 성령의 숨결이 마음을 깊은 평안으로 채워 주기 때문이며, 마귀의 불타는 화살은 공중을 날아다니는 도중에도 이미 꺼져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경지에 이른 자에게도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악마들의 악한 작용을 겪게 하시며, 그때 그의 마음을 빛으로 비추지 않으시는데, 이는 우리의 자의가 은혜의 얽매임에 완전히 묶이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는 단지 죄가 수고로 이겨져야 하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사람이 영적 경험에서 계속해서 성장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배우는 자에게 완전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도, 성취를 간절히 바라는 사랑 안에서 가르치시는 하나님의 풍성함과 비교하면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비록 누군가가 그 성취를 위해 수고하여 야곱에게 보여진 사다리의 가장 꼭대기에 올랐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86. 하나님의 방조는 가르침을 위한 것이며, 하나님의 외면은 징벌을 위한 것이다.

주님께서 친히 “사탄이 하늘에서 쫓겨났다”(눅 10:18) 말씀하셨으니, 이는 그가 거룩한 천사들의 거처의 흉한 모습을 보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선한 종들과 교제할 자격조차 없는 그가, 어떻게 인간의 마음을 하나님과 공통된 거처로 삼을 수 있겠는가? 만약 이것이 방임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더라도, 그것으로 아무런 증명도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교훈을 위한 방조는 결코 영혼에게서 신성한 빛을 빼앗지 않으며, 이때 일어나는 유일한 일은, 내가 이미 말했듯이, 은총이 자신의 임재를 이성에게 숨기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이는 악마의 괴로움에 의해 영혼이 모든 두려움과 큰 겸손으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도록 이끌기 위함이며, 영혼은 자신 안에서 원수의 악한 작용을 체험하게 된다. 마치 어머니가 젖을 먹는 규칙을 따르기를 꺼려 난동을 부리는 자신의 아이를 잠시 동안 품에서 내려놓는 것처럼, 아이가 주변의 흉측한 낯선 사람들 또는 어떤 짐승들을 보고 두려워하여, 큰 공포와 눈물 속에서 다시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오려 애쓰게 하기 위함이다. 반면, 하나님의 혐오로 인해 일어나는 방임은, 자기 안에 하나님을 모시고자 하지 않는 영혼을 마치 묶인 것처럼 악마들에게 넘겨줍니다. 그러나 우리는 버려진 자녀들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의 참된 자녀들이며, 드문 방임과 잦은 위로로 그 은혜의 젖을 먹고 자라, 그 은혜가 우리에게 베푸시는 자비의 작용 아래 “그리스도의 온전한 사람, 곧 성숙한 나이에 이르러” (엡 4:13)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87. 영혼에 미치는 하나님의 교훈적인 허용과

그리고 하나님의 징벌적 방치;

그리고 그 두 가지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교훈적인 방임은 처음에 영혼을 큰 슬픔과 굴욕감, 그리고 어느 정도의 절망감으로 덮쳐, 그 안의 허영과 스스로를 과시하려는 욕망을 꺾고, 마땅한 겸손으로 이끌기 위함이다. 그러나 곧이어 그것은 마음에 감화받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눈물 어린 고백, 그리고 지극히 선한 침묵에 대한 큰 소망을 불러일으킵니다. 반면, 하나님의 외면하심으로 인해 일어나는 방치는 영혼을 스스로 내버려 두며, 영혼은 절망과 불신, 오만과 분노로 가득 차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두 가지, 즉 허락과 버림을 모두 알고, 그 상황이 닥칠 때 각각의 특성에 따라 하나님께 나아갈 필요가 있다. 전자의 경우, 우리는 그분께 감사와 서원을 드려야 한다. 이는 우리 성품의 제멋대로인 점을 위로의 박탈로 자비롭게 징계하심으로써, 아버지처럼 우리에게 선과 악을 올바르게 분별하도록 가르치시기 위함이다; 반면 이곳에서는 끊임없는 죄 고백과 눈물, 그리고 더 깊은 은둔을 통해, 그러한 수고를 기울임으로써 하나님께서 예전처럼 우리 마음을 돌보아 주시도록 간청하고 그 마음을 굽히게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은, 교화를 위한 방임 속에서 영혼이 사탄과 정면으로 맞서 싸울 때, 은혜는 비록 자신을 숨기지만 알 수 없는 도움으로 영혼을 돕고, 그 적들에게 그들에 대한 승리는 오직 영혼 혼자만의 일임을 보여주기 위함이라는 점입니다.

88.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은총이 있을 때 선과 악을 어떻게 분별하는지 설명해 줍니다.

그리고 누가 영적인 한 가지에 대해 생각할 자격을 얻는지. 마치 겨울철에 누군가 어딘가 열린 곳에 서서 하루가 시작될 때 동쪽을 향해 얼굴을 돌리면, 그의 앞부분은 모두 태양에 의해 따뜻해지지만, 뒷부분은 태양의 온기를 전혀 받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그때 태양이 그의 머리 위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영적 활동의 시작 단계에 있는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그들의 마음은 때때로 거룩한 은혜로 부분적으로 따뜻해지므로, 그들의 정신은 그때 영적인 사색의 열매를 맺기 시작하지만; 그러나 그들의 마음의 겉부분은 여전히 육신에 따라 생각하며, 이는 마음의 모든 부분이 깊은 감성 속에서 성스러운 은총의 빛으로 비춰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를 이해하지 못한 어떤 이들은, 영적 수련을 하는 이들의 마음속에 서로 대립하는 두 인격이 있다고 지어내기도 했다.) 바로 이 때문에 영혼이 동시에 선한 것과 악한 것을 모두 생각하게 되는 것이며, 이는 앞서 제시한 예에서 사람이 같은 순간에 차가움과 따뜻함을 동시에 느끼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은 이분법적 인식으로 빠져든 이후로, 원치 않더라도 같은 순간에 선과 악을 동시에 생각해야 할 어떤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사려 깊은 사고에 이른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아무리 선한 생각만 하려고 애써도, 곧바로 악한 생각도 떠오르는 것은, 아담의 죄로 인해 인간의 기억이 어쩔 수 없이 두 가지 생각으로 나뉘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뜨거운 열정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실천하기 시작하면, 그때 은혜가 깊은 어떤 느낌 속에서 우리의 모든 감각을 비추어 우리의 모든 죄된 기억을 태워 버릴 것이며, 우리 마음을 끊임없는 사랑의 평화로 달래 주며, 육신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을 생각하도록 우리를 훈련시킬 것입니다. 이는 온전함에 가까워지는 이들에게 매우 자주 일어나는 일로, 그들은 마음속에 주님에 대한 기억을 끊임없이 간직하고 있다.

89. 세례를 통해 은혜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며,

그 후 하나님의 형상을

그 후 인간의 덕을 쌓기 위한 노력과 함께 그려내는데,

그중에서도 사랑은 신성을 닮은 가장 높은 특성입니다.

거룩한 은총은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세례를 통해 두 가지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데, 그중 하나는 다른 하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뛰어납니다. 그러나 하나는 즉시 베풀어 주는데, 바로 물 그 자체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는 영혼의 모든 특징을 새롭게 하고 밝게 비추며, 우리에게서 모든 죄의 더러움을 씻어내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닮음을 이루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마음이 깊은 감동으로 지극히 거룩하신 성령의 은혜를 맛보기 시작할 때, 우리는 은혜가 마치 하나님의 형상의 특징 위에 신성을 닮은 모습을 그려내기 시작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마치 화가들이 처음에는 한 가지 색으로 사람의 형상을 스케치한 다음, 조금씩 색을 덧칠하며 그리는 대상의 모습을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닮게 표현하듯이,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거룩한 은총도 처음에는 세례를 통해 사람 안에 하나님의 형상의 특징을 회복시켜, 그가 창조되었을 때의 상태로 되돌려 놓으며; 그리고 우리가 온 마음의 의지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아름다움을 갈망하며, 그분의 작업실(아틀리에) 안에서 벌거벗은 채 두려움 없이 서 있는 것을 보시면, 그때 미덕이 미덕을 더하며 영혼 속에서 피어오르고, 영광에서 영광으로 그분의 형상을 높여가시며,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특징을 부여하십니다: 이때 감각은 우리 안에 신의 형상의 특징들이 어떻게 반영되는지를 보여주며, 신의 형상의 완전함은 은총의 깨달음을 통해 알게 된다. 이성은 일정한 절제와 형언할 수 없는 조화 속에서 성장하며, 감각을 통해 모든 미덕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계시를 온전히 체험하지 않는 한, 누구도 영적인 사랑을 얻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이성이 신성한 빛으로부터 완전한 신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비록 다른 모든 미덕을 갖출 수는 있더라도 완전한 사랑에 있어서는 여전히 참여하지 못한 채로 남게 되기 때문이다. 오직 사람이 하나님의 미덕에 완전히 닮았을 때(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하나님과 닮는 것을 말한다) 비로소 신성한 사랑의 닮음을 지니게 되기 때문이다. 마치 누군가의 초상화를 그릴 때, 가장 아름다운 색채와 가장 필수적인 특징이 그려진 얼굴에 더해지면, 심지어 미소까지 띠게 하여 그 초상화를 그리는 대상을 완전히 닮게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성한 은총이 누군가에게 신의 형상을 그려낼 때, 사랑의 밝은 특성이 더해지면, 하나님의 형상의 모든 특징이 신의 형상의 위엄으로 온전히 승화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무정(정화 및 정욕으로부터의 해방)은 오직 사랑 외에는 그 어떤 미덕도 영혼에게 줄 수 없다. 이는 “사랑의 율법을 성취함”(롬 13:10)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록 우리 내면의 사람이 매일 사랑을 맛봄으로써 새롭게 되지만, 완전함에 이르는 것은 오직 사랑의 완전한 성취와 함께할 때에만 가능하다.

90. 처음에는 은총의 위로를 온전히 맛보게 되지만,

그 후 그것들은 숨겨집니다. 첫 번째는

유지를 위함이고, 두 번째는 수고하는 자가 겸손해지도록 하기 위함이다.

사랑 안에서 드러나는 은혜의 온전한 모습....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성령께서는 우리가 경건한 삶을 시작할 때, 하나님의 덕을 뜨겁게 사랑한다면, 영혼이 하나님의 달콤함을 온전히 느끼고 확신하며 맛보게 하셔서, 마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수고의 열매가 얼마나 큰지를 정확하고 분명하게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 후에는 이 생명을 주는 은사의 풍요로움을 오랫동안 감추시니, 이는 우리가 비록 모든 덕목에서 번영할지라도, 거룩한 사랑이 우리 안에서 변함없는 성품으로 자리 잡은 것을 스스로 보지 못하므로, 우리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여기게 하려 하심이다. 왜냐하면 그 무렵에는, 미움의 악령이 때로 수련하는 이들의 영혼을 그토록 강하게 짓누르곤 하여, 그들이 자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조차 적대적으로 대하고, 심지어 인사하고 입을 맞출 때조차도 이 부패한 적대감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영혼은 크게 슬퍼하고 고통받는데, 영적 사랑을 기억 속에 간직하고 있음에도(사랑의 의무를 자각하고 있음에도) 마치 가장 완벽한 노력조차 부족하다고 여겨지는 탓에, 그 사랑을 감정으로 체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당분간 강제로라도 스스로를 다그쳐 사랑의 행위를 실천해야만, 그로써 사랑을 맛보고 완전한 감정과 확신에 찬 만족을 얻을 수 있다. 완전함 속에서 이 육신에 사는 자 중 누구도 그것을 얻을 수 없으니, 순교와 완전한 고백에 이른 성도들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이를 이룬 자는 완전히 변하여 심지어 음식에도 마지못해 손을 대게 된다. 신성한 사랑으로 양육받는 자에게 이 세상의 선을 갈망할 여지가 어디 있겠는가? 이 때문에 지극히 지혜로운 바울, 이 위대한 지식의 보고는, 의인들에게 주어질 장래의 위로에 대해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며, 그 일에 대한 자신의 확신을 바탕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천국은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의와 평화와 성령 안에서 누리는 기쁨이라” (롬 14, 17)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완전한 사랑의 열매입니다. 이처럼 영적 삶에서 번창하는 자들은 이곳에서 사랑의 효력을 자주 맛볼 수 있으나, 미리 “죽은 것을 온전히 삼켜 버리지” 않은 자(고후 5, 4)는 아무도 완전한 경지에 이르러 그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91. 하느님을 향한 은총의 사랑의 작용에 대하여.

하나님을 끝없이 사랑하는 사람 중 한 분이 내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실감하며 체험하기를 갈망했을 때, 선하신 주님께서 이를 온전한 감각과 만족감 속에서 내게 허락해 주셨다; 나는 그 작용을 너무나 강렬하게 느꼈기에, 그때 내 영혼은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열망으로 육신을 떠나 주님께로 나아가 이 일시적인 삶의 형식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의 작용을 경험한 사람은 누구든지, 비록 누군가에게서 수천 번의 모욕과 박탈을 당했다 하더라도 그에게 분노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모욕하고 해치는 사람에게 마음속으로 깊이 매여 있게 된다; 오직 가난한 자들을 공격하거나, 성경에 기록된 대로(시 73:6) “하나님에 대하여 거짓말을 하는” 자들, 혹은 그 밖의 방식으로 올바르지 않게 사는 자들에 대해서만 열정을 불태웁니다. 하나님을 자기 자신보다 훨씬 더 사랑하거나, 아예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자신의 명예를 변호하지 않으며, 오직 자신을 영원한 영광으로 존귀하게 하신 분의 진리가 존중받기를 원할 뿐이다. 그리고 그는 이를 가볍고 덧없는 소망으로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온전히 맛보았기 때문에 변함없는 성품으로서 그러한 마음을 품고 있다. 게다가 하나님에 의해 그러한 사랑으로 이끌리는 사람은, 그 사랑이 그 안에서 작용하는 동안 믿음 그 자체보다 더 높은 경지에 이르게 되며, 이미 마음속에서 완전한 사랑으로 존경받는 분을 믿음으로 간직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성 바오로 사도는 “이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중 가장 큰 것은 사랑입니다”(1코린 13,13)라고 말씀하시며 이를 분명히 지적해 주십니다. 왜냐하면, 제가 말한 대로 사랑을 풍성히 품고 하느님을 모시는 사람은, 온전히 사랑 안에 머무르는 자로서 그 순간 자신의 믿음보다 훨씬 더 큰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92. 신학 연구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타인과의 깨진 화해를 회복하는 것이 얼마나 필수적인가.

거룩한 지식의 작용은 그 본성상, 어떤 자극으로 인해 누군가를 화나게 하여 그를 우리의 적으로 만들 때, 우리에게 상당한 슬픔을 안겨줍니다. 이 때문에 그것은 우리가 설명과 사과를 통해 모욕받은 이가 우리에게 가졌던 예전의 호의를 되찾을 때까지, 결코 우리의 양심을 찔러대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특히 이 세상의 누군가가 우리에게 분노할 때, 비록 그것이 부당하더라도, 그러한 괴로움은 더욱 강하게 드러납니다. 이는 우리가 그에게 유혹과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를 지극히 괴롭히고 근심하게 만듭니다. 이로 인해 그때 우리의 마음은 신학적인 사고를 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온전히 사랑인 지식은, 우리가 먼저 우리에게 부당하게 분노하는 이를 다시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한, 우리의 생각이 신성한 관조를 낳는 방향으로 확장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그분이 이를 원치 않거나 우리 곁을 떠나셨다면, 우리는 그분의 모습을 우리 마음속의 호의로 받아들이고, 억제할 수 없는 영혼의 쏟아짐으로, 마음 깊은 곳에서 사랑의 법을 실천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고자 하는 자들은, 부당하게 분노하는 이들의 모습조차도 마음속에서 분노 없는 생각으로 그려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될 때, 마음은 신학의 영역에서만 무오하게 돌아갈 뿐만 아니라, 사랑의 일에서도 온전한 담대함으로 높아져, 마치 두 번째 단계에서 첫 번째 단계로 올라가는 것처럼 될 것이다.

93. 덕의 길은 처음에는 힘들고 쓰라리지만,

나중에는 편안하고 즐겁게 변한다.

경건을 사랑하기 시작한 이들에게 덕의 길은 가혹하고 두려운 것으로 보이지만, 그 길이 그 자체로 그러하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이 어머니의 태에서 나온 순간부터 쾌락 속에서 여유롭게 사는 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반면 그 길의 중반까지 이미 도달한 이들에게는 그 길이 온전히 선하고 기쁜 것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우리의 악한 욕망이 선한 습관에 의해 억눌릴 때, 그와 함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쾌락에 대한 기억조차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 결과 영혼은 이제 온전한 기쁨으로 모든 덕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며, 생명으로 이끄는 길은 좁고 괴로우며, 그 길을 걷는 자는 적다고 말씀하십니다(마태복음 7:14); 반면, 온 마음을 다해 그분의 거룩한 계명을 지키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복음 11,30)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여정의 시작에서, 어떤 의지에 억지로 이끌리듯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을 이행해야 하는데, 이는 자비로우신 주님께서 우리의 선한 의도와 수고를 보시고, 기꺼이 그분의 영광스러운 뜻에 순종할 준비와 자발적인 의지를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도록 하기 위함이다. “주님께서는 뜻을 준비하시나니” (잠언 8:35). 그 후 우리는 큰 기쁨으로 끊임없이 선한 일을 행하기 시작할 것이며, 그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분이시니, 원하시는 것도 행하시는 것도 그분의 기뻐하심에 따라 이루어지느니라” (빌립보서 2:13)는 사실을 진정으로 깨닫게 될 것이다.

94. 외적·내적 유혹은 수련하는 이들이

자신 안에 신성한 아름다움을 새길 수 있게 한다.

가열되지 않고 부드러워지지 않은 밀랍이 그 위에 찍히는 인장을 제대로 새길 수 없는 것처럼, 사람 또한 수고와 연약함으로 시험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미덕이라는 인장을 새길 수 없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신성한 바울에게 말씀하신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내 능력은 약함 속에서 온전해지느니라” (고린도후서 12, 9). 사도 자신도 이렇게 자랑하며 말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기꺼이 내 약함을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같은 곳). 마찬가지로 잠언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며, 받아들이시는 모든 아들을 채찍질하신다” (잠 3, 12). 사도는 ‘약함’이라 칭하는 것을, 그 당시 그 자신과 모든 성도들에게 자주 닥치던 십자가의 원수들의 반란을 가리키며, 그가 말하듯 계시의 과다함으로 인해 교만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린도후서 12:7); 그러나 오히려 겸손을 통해 완전함의 형상을 지키며, 잦은 굴욕을 통해 신성한 은사를 경건하게 보존하였다. 반면 우리는 ‘약함’이라는 말로 사악한 생각과 육체의 고난을 지칭합니다. 당시 죄에 맞서 싸우던 성도들의 육신은 치명적인 상처와 여러 가지 다른 고통에 시달렸음에도 불구하고, 죄로 인해 인간 본성에 스며든 정욕들보다 훨씬 더 높은 경지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주님 안에서 교회의 평화가 번성함에 따라, 경건함을 실천하는 이들의 육신은 잦은 고난으로, 영혼은 사악한 생각들로 시험받아야만 한다. 특히 그들 중에서도 모든 감각과 확신을 통해 지식이 강력하게 작용하는 자들은, 허영과 교만에 빠지지 않고, 위대한 겸손을 위해, 내가 말한 대로, 성스러운 예언자의 말씀대로 “주님, 주의 얼굴의 빛이 우리에게 비치시나이다” (시 4, 7).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를 품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러한 뜻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하며, 그러면 질병과 악마의 생각과의 투쟁이 우리에게 두 번째 순교로 여겨질 것입니다. 그 당시 불의한 통치자들의 입을 빌려 성스러운 순교자들에게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이 세상의 영광을 사랑하라”고 말했던 자가, 지금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종들에게 직접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 의인들의 육신을 고문하고, 마귀의 계략을 따르는 자들을 통해 정직한 스승들을 극도로 모욕했던 바로 그 자가, 지금도 경건함을 고백하는 이들에게 큰 모욕과 굴욕을 동반한 온갖 고통을 안겨주고 있으며, 특히 그들이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큰 힘으로 억압받는 가난한 자들을 도울 때 그러합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경계와 인내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 안에 다음과 같은 양심의 증거를 세워야 한다. “내가 주님을 인내하며 기다렸더니, 주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셨도다”(시 39:2).

95. 두 가지 겸손, 즉 보통의 겸손과 완전한 겸손에 대하여.

겸손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겸손이 높을수록 그것을 얻는 데 더 큰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겸손은 성스러운 지식을 얻은 이들에게 두 가지 방식으로 찾아옵니다. 경건함을 추구하는 수행자가 영적 성취의 한가운데에 있을 때, 그는 육신의 연약함 때문이든, 의로운 삶을 추구하는 이들을 시기하는 적대자들의 괴롭힘 때문이든, 혹은 교활한 생각들 때문이든, 자신에 대해 지극히 겸손한 성찰을 유지하게 됩니다. 반면 마음이 온전한 깨달음 속에 있고, 확실히 거룩한 은총으로 비춰질 때, 그때 영혼은 마치 본연의 성향인 양 겸손한 지혜를 갖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비로 신성한 은총을 마시고 채워질 때, 비록 끊임없이 하나님의 계명을 이행한다 할지라도 더 이상 명예욕에 부풀어 오를 수 없으며, 오히려 신성한 은총과의 교감 속에서, (즉, 하나님의 자비로 인해 그런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그 겸손은 대부분 슬픔과 낙담과 함께하며, 이는 지혜로운 수치심을 동반한 기쁨이다. 앞서 말했듯이, 이는 수행의 중간 단계에 있는 이들에게 찾아오며, 이는 이미 완전함에 가까워진 이들에게 내려진다. 왜냐하면 세속적인 번영으로 인해 종종 누군가는 짓눌리곤 하지만, 이 사람은 설령 누군가 그에게 세상의 모든 왕국을 제안한다 해도 흔들리지 않으며, 가장 무서운 죄의 화살을 두려워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전혀 느끼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온전히 영적인 상태에 있기 때문에, 이미 외적인 영광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마지막 단계에 이르는 수행자는 반드시 그 첫 번째 단계를 온갖 방식으로 통과한 후에야 비로소 도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은혜는 첫 번째 단계에서 시련을 통해, 그리고 교화를 위한 허락으로 정욕이 솟아오르게 함으로써 우리의 의지를 미리 부드럽게 하지 않는 한, 우리에게 두 번째 단계의 풍요로움을 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96. 헛되고 악한 생각과 말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것에 대하여.

이 세상의 쾌락을 탐하는 자들은 생각에서 시작해 타락으로 이어진다. 무분별한 열기에 휩쓸려, 그들은 거의 모든 욕망 어린 계획을 갈망하며 표현하는데, 이는 부적절한 말이나 불법적인 행동으로 나타난다. 반면, 수행자의 삶을 올바르게 살아가기로 결심한 이들은 타락에서 악한 생각이나 악하고 해로운 말로 넘어가곤 한다(나쁜 행위는 멀리했지만, 여전히 선하지 않은 생각과 말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악령들은, 험담과 비방에 빠지거나, 헛되고 부적절한 대화를 나누거나, 마땅치 않게 웃거나, 지나치게 분노하거나, 헛되고 공허한 명성을 갈망하는 자들을 보게 되면, 즉시 무리를 지어 그들을 덮쳐 온다. 자만심을 악행의 구실로 삼아, 마치 어두운 문처럼 그 안으로 뛰어들어 그들의 영혼을 약탈해 간다. 그러므로 덕을 쌓는 데 전념하는 이들은 명예를 탐하지도 말고, 많은 사람과의 대화를 추구하지도 말고, 잦은 외출과 산책을 즐기지 말며, 비록 비난받을 만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누구도 비방하지 말고, 비록 좋은 말 한 마디를 할 수 있다 하더라도 말을 많이 하지 말아야 한다; 말이 많으면 마음이 끝없이 흩어지게 되어 영적인 일을 할 수 없게 할 뿐만 아니라, 낙담의 악마에게 넘겨주게 되는데, 그 악마는 조금씩 마음을 느슨하게 한 뒤, 결국 끝없는 슬픔의 악마에게, 그리고 마지막에는 분노의 악마에게 넘겨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항상 마음을 훈련하여 거룩한 계명을 지키고 주님의 영광을 깊이 기억해야 한다. 성경은 계명을 지키는 자는 “악한 말을 따르지 아니하리라”(전도서 8:5)고 말하듯이, 즉 부적절한 생각이나 말로 치우치지 않을 것임을 뜻한다.

97. 주님을 끊임없이 기억하고, 마음을 깨어 있게 하는 기도는

마음을 깨어 있게 하는 것—이것이 마음을 정화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마음이 타는 듯한 고통으로 마귀의 공격을 받을 때, 싸우는 이가 마치 그 화살을 직접 짊어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이는 영혼이 정욕을 열렬히 미워하게 되었음을 나타내는 징조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영혼 정화의 시작이다. 왜냐하면 만일 영혼이 죄의 뻔뻔함으로 인한 큰 고통을 견디지 못한다면, 나중에 진리의 유익함에 대해 풍성하게 기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후, 자신의 마음을 정화하고자 하는 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끊임없이 기억함으로써 마음을 달구어야 하며, 이를 유일한 묵상의 대상으로 삼고 끊임없는 영적 실천으로 삼아야 한다. 자신의 부패함을 떨쳐내고자 하는 자는 때로는 기도하고 때로는 기도하지 않는 식으로 행동해서는 안 되며, 비록 기도처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산다 할지라도 항상 정신을 집중하여 기도에 힘써야 한다. 마치 금을 정제하려는 자가 비록 잠시라도 도가니에 불을 끄면, 정제 중인 광석이 다시 굳어지듯이, 때로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때로는 그렇지 않은 자도, 기도로 얻은 것을 다시 끊음으로써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덕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항상 하나님을 기억함으로써 마음의 세속성을 태워 없애는 것이 마땅하니, 그리하여 선한 기억이라는 불의 작용으로 악이 서서히 증발함에 따라, 영혼이 온전한 영광 속에서 본래의 빛나는 본성을 완전히 되찾게 되는 것이다.

98. 무정함, 즉 마음의 순결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무정함이란 악마들에게 시달리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사도의 말씀대로 우리는 “세상에서 떠나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고린도전서 5:10).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우리를 공격할 때에도 시달리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마치 갑옷을 입은 전사들이 적의 화살을 맞으며 날아오는 화살 소리를 듣고, 심지어 자신들을 향해 쏘아지는 화살 자체도 보지만, 군복의 견고함 덕분에 그 화살에 상처를 입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들은 철로 둘러싸여 있어 전투 중에 상처를 입지 않는 반면, 우리도 선한 행실을 통해 거룩한 빛의 전신 갑주와 구원의 투구를 두르고, 어둠의 악마 군단을 흩어 버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악을 행하지 않는 것만이 순결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을 향한 지극한 열정으로 우리 안의 악을 끝까지 소멸시키는 것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99. 가장 오랫동안 싸워온 두 악마,

과도한 질투와 육신의 정욕이라는 두 마리의 악마에 대하여.

그리고 그들과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하나님의 사람이 자기 안의 정욕을 거의 모두 이겨냈을 때에도, 두 마리의 악마가 여전히 그를 대적하며 싸우고 있는데, 그중 하나는 영혼을 괴롭히며, 큰 신애로 인해 그를 과도한 질투로 부추겨, 다른 누군가가 자신보다 더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게 하고, 다른 하나는 육체를 자극하여, 마치 불타는 듯한 어떤 움직임으로 육체적 정욕을 일으키게 한다. 이러한 일이 육체와 관련하여 일어나는 첫 번째 이유는, 그러한 정욕의 달콤함이 우리 본성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인데, 이는 자손을 낳기 위해 본성에 심겨진 것이므로, 이를 이기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허락 때문이기도 하다. 주님께서 어떤 수행자가 미덕을 쌓는 데 있어 지나치게 높이 올라가는 것을 보실 때, 그분이 때로는 그가 이 사악한 악마에게 흔들리게 내버려 두시어, 그가 스스로를 모든 살아 있는 사람 중에서 가장 하찮은 자로 여기게 하시기 위함이다. 이러한 정욕의 공격은 때로는 선행을 행한 후에 일어나기도 하고, 때로는 그 전에 일어나기도 하는데, 이는 그 정욕의 움직임이 선행에 앞서든 뒤따르든, 영혼으로 하여금 자신이 행한 선행이 아무리 위대하더라도 스스로를 가장 비천한 존재로 여기게 만들기 위함이다. – 그러나 첫 번째 (과도한 질투를 부추기는 악마)에 대해서는 겸손과 사랑을 더욱 깊이 함으로써 맞서고, 두 번째(육신의 정욕을 부추기는 악마)에 대해서는 절제와 분노를 버리는 마음, 그리고 죽음에 대한 깊은 묵상으로 맞서야 한다. 이를 통해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역사하시는 성령의 활동을 느끼며, 주님 안에서 이 정욕들보다 더 높은 존재가 되도록 해야 한다.

100. 하나님께 모든 무의식적이고 알지 못하는 죄들도 고백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음의 순간에 큰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우리 중 거룩한 지식을 얻은 자들은, 욥이 말한 대로 “내가 무의식중에 범한 죄도 주께서 다 아신다”(욥 14:17)는 것처럼, 무의식적인 마음의 동요에 대해서도 반드시 보고해야 하며, 이는 의로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항상 하나님을 기억하는 데 전념하고 그분의 거룩한 계명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무의식적인 죄에도, 의도적인 죄에도 빠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의식적인 실수에 대해서도 즉시 주님께 통회하는 고백을 드려야 하며, 이를 우리의 일상적인 기도 규칙 수행에 포함시켜야 한다. 사람은 인간의 실수에 빠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그러므로 항상 그에 대한 고백을 주님께 드려야 한다), 양심이 사랑의 눈물로 그 용서를 확신할 때까지 그러해야 한다. 성 요한이 말하듯이: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그분은 신실하시고 의로우셔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요일 1:9). 왜 끊임없이 통회하는 고백의 감정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가(이 감정을 키워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의 양심이 ‘이미 충분히 통회하고 하나님께 고백했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속이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우리 양심의 심판보다 훨씬 더 엄격하기 때문이다. 비록 누군가가 자신에 대해 나쁜 점을 전혀 모른다고 확신하더라도 말이다. 우리의 지혜로운 사도 바울이 가르치듯이, “그러나 나는 스스로를 변호하지 아니하노니, 내 안에 선한 것이 하나도 없음이요, 이에 대하여 내가 정당하다고 주장할 것도 없노라. 나를 변호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니라” (고린도전서 4:3, 4). 만일 우리가 이러한 (의도치 않았고 알지 못했던) 죄들에 대해서도 마땅히 고백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마음속에 모호한 두려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로서는 그 때에 어떠한 두려움에도 휩싸이지 않기를 바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때 두려움에 사로잡힌 자는 지옥의 군주들 곁을 자유롭게 지나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혼의 이러한 두려움을, 그들 자신에게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악에 가담하고 있다는 징후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하나님의 사랑으로 기쁨을 누리는 영혼은 육신을 떠나는 순간, 천사들과 함께 모든 어둠의 군대 위로 높이 날아오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영혼은 영적인 사랑으로 날개를 달고, 그 사랑 안에서 법이 결핍 없이 온전히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생을 떠나며 그러한 담대함을 지닌 자들은 주님의 재림 때에 모든 성도들과 함께 들림 받을 것이다. 반면 죽을 때 비록 조금이라도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자들은 그때 심판 아래 있는 자들로서 다른 모든 사람들의 무리 속에 남겨질 것이니, 심판의 불로 시험을 받은 후, 그들의 행실에 따라 마땅히 받아야 할 몫 을 우리 선하신 하나님과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받게 될 것입니다. 그분은 진리의 하나님이시며, 그분을 사랑하는 우리에게 그분의 왕국의 풍성한 복을 주시니, 영원히, 그리고 영원들의 영원토록 그러하시리라. 아멘.

 

성 막시모스가 어떤 이들이 제기한, 본 제100장의 다음 구절, “심판의 불로 시험을 받고……” 등에 대한 해설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사랑을 얻었고, 덕행을 통해 영혼의 날개를 가볍게 날 수 있게 한 자들은, 사도의 말에 따라 구름 위로 들려 올려지며 심판에 이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완전함에 이르지 못하고, 선한 일을 행하면서도 죄를 범하는 이들은 심판의 자리에 나아가, 그곳에서 그들의 선한 일과 악한 일을 조사받으며 마치 불로 시험받는 것과 같다. 만일 선한 일의 저울이 더 무거우면, 그들은 형벌에서 벗어난다.”

 

우리의 경건한 아버지 요한 카르파프스키

 

그분에 대한 간략한 소개

우리의 성 요한 카르파프스키 신부에 대해, 그가 누구였는지, 어느 시대에 활약했는지, 어디에서 수도 생활을 했는지, 그리고 그와 관련된 그 밖의 모든 사항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전혀 없습니다. 다만 복자 포티오스가 201번째 강독에서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을 뿐이다. “한 책을 읽었는데, 그 책에는 열 가지 주요 미덕에 대한 정의와 디아도코스의 100개 장, 에피루스의 포티키 주교와 성 니로스의 몇 가지 저술 뒤에 요한 카르파프스키의 저술이 수록되어 있는데, 저자는 이 책에 다음과 같은 목차를 붙였다. ‘인도에서 위로를 구하기 위해 그에게 찾아온 수도사들에게 전하는 위로의 말씀.’ 그리고 이 말씀 또한 10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 성 요한을 디아도코스와 닐로스와 비교한 이 대조를 통해 볼 때, 그는 그들과 동시대인으로 여겨졌으며 5세기에 살았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카르파스는 로도스와 크레타 사이에 있는 큰 섬이다. 성 요한은 그곳 출신이거나 그곳에서 수도 생활을 했다. – 이 말씀을 통해 성부는 독자들에게 슬픔을 견디고 당면한 유혹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아버지처럼 불어넣어 주신다.

 

인도에 머물며 그에게 편지를 보낸 수도사들에게 보낸 백 편의 권면

세상의 왕들에게 봄꽃을 바치면, 청원자들 중 어떤 이들은 거절당하기는커녕 때로는 특별한 선물을 받기도 했다. 나 또한 여러분의 소망에 따라, 어딘가에서 빌려온 백 편의 선한 말씀을 하늘에 거하시는 여러분께 바치며,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여러분으로부터 기도의 선물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만물의 왕께서는 시작도 끝도 없는 왕국을 지니시고 영원히 존재하시므로, 그분을 위하여, 그리고 그분께 기쁨을 드리는 미덕을 위하여 섬기기로 결심한 이들의 노력은 그만큼 더욱 진심 어린 것이 마땅합니다. 왜냐하면 현세의 영광은 아무리 눈부시더라도 현세와 함께 사라지지만, 하나님께서 합당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는 영광은 불멸과 함께 주어지므로 영원히 지속되기 때문입니다.

2. 복되신 다윗은 온 피조물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찬송을 지으며, 천사들과 모든 하늘의 군대를 기억하며, 심지어 땅까지 내려와 짐승이나 가축, 새, 기어다니는 생물들까지도 빠뜨리지 않고, 그들을 대신하여 창조주께 경배하는 찬송을 드렸으며, 마치 모든 피조물이 이 일에 자신에게 합당한 기여를 하기를 바라는 듯했습니다. 사파이어 금에 비유되는 수도사가 어떻게 시편 찬송에서 어느 때라도 기력을 잃거나 게을러질 수 있겠는가.

3. 불이 덤불을 감싸고도 태우지 않았던 것처럼, 무감정의 은사를 받은 자들에게는 몸의 열기가 비록 그들이 매우 무겁고 뜨거운 몸을 지녔다 하더라도 육체나 마음을 괴롭히거나 더럽히지 않는다. “주님의 음성이 불길을 꺾으시니”(시 28, 7) 본성을 끊으시니, 하나님의 뜻과 그분의 말씀은 본성에 따라 결합된 것을 갈라놓으시느니라.

4. 달은 때로는 커졌다가 때로는 작아지며, 때로는 선하게 행하고 때로는 죄를 짓다가, 다시 회개를 통해 덕의 길로 들어서는 사람의 상태를 나타낸다. 죄를 지은 자의 이성은 멸망하지 않았으니—여러분 중 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처럼—마찬가지로 달의 경우에도 이성의 몸이 줄어든 것이 아니라 빛이 줄어든 것이다. 이처럼 회개를 통해 사람은 자신에게 본래 있는 밝음을 되찾으며, 달이 빛이 줄어들었다가 다시 평소의 빛을 되찾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요” (요한복음 11, 25). “너희는 내가 주인 줄 알리라. 내가 말하였으니 반드시 이루리라” (에스겔 37, 14).

5. 마음속으로 원수의 상상이 떼를 지어 덤벼들 때, 네가 그들에게 굴복하여 패배하게 된다면, 네가 잠시 신성한 은총에서 떨어져 나갔음을 알아라. 그러므로 의로운 심판에 따라 네가 넘어질 운명에 내맡겨진 것이다. 그러니 네 게으름 때문에 은총이 단 한 순간이라도 너를 떠나지 않도록 힘써라. 그러나 유혹을 이겨내고, 정욕적인 생각들과 적의 악의에서 비롯된 사악한 유혹들이 줄지어 몰려오는 장벽을 넘어설 수 있게 되었을 때, 이 일이 위에서 네게 주어진 선물임을 인정하지 않고 배은망덕하게 굴지 말고, 오히려 사도와 함께 “나 자신이 아니라 나와 함께 계신 하나님의 은혜” (고린도전서 15:10), 이 승리를 내 안에서 이루시고, 나를 대적하는 불결한 생각들보다 더 높은 곳에 세우셨으며, “불의한 자”, 즉 마귀와 옛 사람으로부터 “나를 구원하셨다”(시편 17:49). 왜냐하면 성령의 날개에 실려 높이 올라가고, 마치 육신을 벗어난 듯하여, 나를 쫓는 악령들—보통 인간의 마음을 쾌락의 그물로 사로잡는 자들—보다 더 높이 날아오를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쾌락에서 벗어나기를 간구하여 얻은 자는 외친다: “나를 이집트 땅, 즉 영혼을 죽이는 세상에서 이끌어 내신 분, 이 비밀스러운 손으로 나를 위해 싸우시며 아말렉을 쳐부수시고, 주님께서 우리 앞에서 다른 방탕한 정욕에 사로잡힌 민족들도 멸망시키실 것이라고 나에게 희망을 주셨다(출 17, 14–16). 이 우리 하나님께서 지혜와 힘을 주실 것이니, 어떤 이들은 지혜를 얻었으나 원수들을 이길 성령의 힘은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분이 네 머리를 네 원수들 위에 높이 들어 올리시고, 네게 “비둘기 같은 날개를 주시리니, 네가 날아가 하나님 곁에서 쉴 것이라”(시 54:7). 주님께서 네 근육을 미디안인의 활처럼 단단하게 하사, 너를 대적하는 자를 대적할 때 굳건하고, 빠르며, 강인하게 보이게 하시고, 너를 대적하여 일어난 모든 자를 네 발 아래 엎드리게 하시리라 (시 17, 35–40). 주님께서 네 순결을 지켜 주셨으니, 주님께 감사를 드리라. 주님께서 너를 육신의 정욕과 피,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 작용하는 부정한 썩어가는 영들의 손아귀에 가두지 않으시고, 마치 성벽처럼 그 오른손으로 너를 보호해 주셨으니 말이다. 모세가 아말렉을 물리치고 도망친 후(출 17:15)처럼 그분께 제단을 쌓고, 그분께 노래하라. “이 때문에 주님, 내가 주님께 고백하고 찬양하리이다. 주님의 이름을 노래하며 주님의 능력을 찬양하리이다” (시 17:50), 주께서 내 생명을 썩어 없어질 것에서 구원하시고, 변덕스럽고 다양하며 교묘한 악의 그물과 올가미에서 나를 건져내셨나이다.

6. 악한 마귀들은 우리 안에 불결한 정욕을 불태우고, 이를 새롭게 하며, 부추기고, 번성하게 한다; 반면 신성한 말씀에 대한 묵상, 특히 눈물을 흘리며 드리는 묵상은, 비록 그 정욕이 뿌리 깊게 박혀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죽이고 근절시키며, 영혼과 육신의 해로운 죄악적 행위들을 조금씩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만들어 버립니다: 다만 기도와 소망으로, 게으르지 않고 끊임없이 주님께 매달리기만 한다면 말이다.

7. 그리스도께서는 왜 악의에 찬 신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양을 이루시는가? 물론 시편 찬송으로 무분별하게 폭군처럼 군림하는 원수와 복수자, 즉 미덕의 원수이자 악의에 찬 복수자인 마귀를 분쇄하기 위함입니다. “주의 영광의 위엄으로 대적하는 자들을 멸하셨나이다”(출 15:7)라고 기록된 바와 같이, 우리를 대적하는 원수들을 멸하셨기 때문입니다.

8. 모든 사람은 자기 행실의 열매를 맛보게 되는데, 절반은 지금, 나머지 절반은 내세에서 맛보게 된다.

9. 수도사는 항상 가장 선한 금식을 지키고, 정욕에 현혹되지 않으며, 깊은 침묵을 가꾸어야 한다.

10. 우리 영혼을 미워하는 마귀들은 어떤 이들에게 우리에게 하찮은 칭찬이라도 해 주도록 부추기고, 그 후 우리로 하여금 그 일에 기뻐하게 만듭니다. 만약 그 후 자만심에 빠져 허영심에 자리를 내어준다면, 우리의 원수들이 우리를 완전히 사로잡는 데는 그리 큰 수고가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11. 너를 칭찬하는 자보다 너를 비방하는 자를 더 기꺼이 받아들여라. 성경에 따르면, 칭찬하는 자는 저주하는 자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잠언 27:14).

12. 금식이라는 수행을 열성적으로 실천하다가, 연약함으로 인해 그 실천에 소홀해질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럴 때는 마음을 찢으며, 만물의 섭리자이시며 심판자이신 분께 감사를 드리며 돌아서라. 만일 주님 앞에서 항상 이렇게 겸손한 모습을 보인다면, 그 어떤 사람 앞에서도 결코 교만해지지 않을 것이다.

13. 원수는 기도가 우리에게 가장 강력한 무기이며, 그에게는 치명적인 무기임을 알고, 온갖 방법으로 우리를 기도에서 멀어지게 하려 애쓰며, 때로는 우리가 소홀히 했던 헬레니즘 문헌을 탐구하고자 하는 욕망을 우리 마음에 심어놓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유혹에 귀를 기울이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영적 수행에 관한 법과 질서에서 벗어나지 않고, 무화과와 포도송이 대신 가시와 엉겅퀴를 거두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 앞에서 미련한 것이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3:19).

14. “큰 기쁨을”이라고 천사가 말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임할 기쁜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누가복음 2:10), 어떤 일부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또한 “온 땅이 주께 경배하며 주를 찬양하리라”(시편 65:4), 땅의 일부만이 아니라 온 땅이 그러리라 했습니다. 노래하는 것은 무언가를 얻기 위해 눈물을 흘리며 간구하는 이들에게 어울리는 것이 아니라, 소원을 이루고 기뻐하는 이들에게 어울리는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절망하지 말고, 기쁨으로 이 삶을 살아가며, 앞서 말한 말씀에서 그러한 기쁨과 평온함에 대한 동기를 얻어야 한다. 그러나 다른 구절에서 말하듯이, “두려움으로 주님을 기뻐하라”(시 2,11)는 말씀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경외심으로 이 기쁨을 녹여내야 합니다. 마리아와 함께 있던 여인들 도 두려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에서 도망쳤습니다(마태 28,8). 어쩌면 우리도 언젠가 두려움과 기쁨을 품고 마음속으로 무덤을 향해 달려갈지 모릅니다. 두려움 없이 그렇게 한다면 놀라운 일이겠지요. 왜냐하면 모세라 할지라도, 사도 베드로라 할지라도 죄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이들에게 신성한 사랑이 승리하여, 떠나는 순간 두려움을 쫓아내십니다.

15. 열정적인 사람이 온 마음과 온전한 겸손으로 믿음을 갖게 되면 무정심의 은사를 받는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성경에 증거가 있다. 오늘 주님께서는 현명한 “강도”에게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며(눅 23:43); 혈루병을 앓던 여자에게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말씀하시며, 가장 복된 무정욕의 상태를 허락하셨다(막 5:34). 이와 유사한 구절이 적지 않은데, 예를 들어 “너희 믿음대로 되리라”(마 9:29)와 같은 말씀이 있다.

16. 정욕을 엄격히 다스리려 할 때, 악마들로부터 수치스러운 생각들로 더욱 심하게 괴롭힘을 당할 때가 있다. 그럴 때일수록 주님에 대한 믿음 안에서 더욱 굳건히 서야 하며, 약속된 영원한 복에 대한 가장 확고한 소망을 우리 안에 세워야 한다. 우리의 원수들은 시기심 때문에 우리가 그 복을 잃게 하고, 그로부터 멀어지게 하려고 애쓰고 있다. 만일 이 복들이 지극히 크지 않았다면, 악령들은 우리에게 그토록 큰 시기심을 품지 않았을 것이며, 비록 이것으로라도 자신의 악의를 충족시키려 하고, 이 반복적이고 견딜 수 없는 괴롭힘으로 우리를 절망에 빠뜨리려 하면서, 그렇게 자주 더러운 생각으로 우리를 공격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17. 어떤 이들은 가장 참된 지식이란 (진리로 깨달은 바에 따른) 실천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니 행실을 통해 믿음과 지식을 더욱 드러내도록 힘쓰라. 오직 지식만으로 자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본다고 고백하지만, 그 행실은 그분을 부인한다”(디도서 1:16)는 말을 듣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18. 대개 축일이나 성스러운 모임 때, 특히 누군가 성찬식에 참여하려 할 때, 악령들은 수치스러운 환상과 정액 유출로 수행자를 더럽히려 애쓴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모든 것을 인내롭고 용감하게 견디는 데 익숙해진 이를 꺾거나 흔들어 놓을 수는 없다. 그리고 (뱀처럼) 몸을 굽히면서도 마치 곧은 것처럼 보이는 자들이 우리를 두고 자랑하지 못하게 하라.

19. 끈기와 열심에 대해 원수들은 복수하며, 온갖 말로 다 할 수 없는 유혹들로 영혼을 괴롭히지만, 용기를 내라! 이 크고 셀 수 없는 고난들로 네게 면류관이 엮어지고 있다. 게다가 “약한 데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드러나기” (고린도후서 12:9) 때문이며, 가장 비통한 상황에서도 성령의 은혜가 번성하는 법이니, 이는 예언자의 말씀이 확증하듯이 “어둠 속에서 의인에게 빛이 비치리라” (시편 111:4) 말하듯이; 물론, “만약 우리가 담대함을 잃지 않고, 우리가 자랑하는 그 소망을 끝까지 굳게 지키기만 한다면”(히브리서 3:6).

20. 보통 좋은 기분을 그토록 망치는 것은 웃음과 농담, 헛소리만큼 큰 것이 없다. 또한 낡아빠진 영혼을 새롭게 하고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준비시키는 데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선한 주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끊임없는 교훈, 기도로 무장하는 것, 그리고 열매 맺는 경건한 깨어 있음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습니다.

21. 또한 모든 슬픔을 굳건히 견디는 것은 편리할 뿐만 아니라 영혼에도 유익한데, 그것이 사람에 의해든 악마에 의해든, 우리가 마땅히 모든 고난을 겪어야 함을 알고, 그 일로 인해 우리 자신 외에는 누구도 책망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의 비통함 속에서 타인을 책망하는 자는 올바르고 마땅한 판단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22. 때로는 사람이 부지런함에도 불구하고 올바른 자세에서 벗어나, 늘어날수록 더 심해지는 유혹들로 인해 자신의 본분을 벗어나기도 하는데,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러한 유혹들은 “그의 모든 지혜와 모든 솜씨를 삼켜 버린다”(시 106:27). 이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않게 하려 함”(고린도후서 1:9)이며, “이스라엘이 ‘내 손이 나를 구원했다’고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사사기 7:2)을 위함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으로, 모든 것을 열정적으로 보고 듣게 하며 죄로 이끌게 하는 악한 자가 너에게서 떨어져 나가고 쫓겨날 때, 네가 다시 예전의 아름다운 상태로 회복될 것임을 믿으라; 마치 짙은 구름처럼 마음을 어둡게 가리고, 육신으로 하여금 형언할 수 없는 무거움과 짐을 느끼게 하며; 본래 단순하고 교활하지 않은 타고난 생각조차, 마치 갓 태어난 아기들처럼, 온갖 죄에 있어 복잡하고 매우 교묘하게 만들어, 이리저리 기울어지게 하여 타락시키고 왜곡시키는 자이다.

23. 내면적으로 성장하며 덕행으로 인해 존경받는 사람은 참으로 위대한 존재이다. 그러나 이 위대한 자조차도 죄를 코끼리가 쥐를 두려워하듯 두려워하며,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설교하면서 정작 자신은 실수하지 않도록” (고린도전서 9, 27) 한다.

24. 다니엘서(7, 25)에 기록된 대로, 세상이 끝날 때만이 아니라 지금도 마귀는 “지극히 높으신 분을 대적하여 말을 내뱉는다.” 그는 우리의 생각을 통해 하늘을 향해 심한 모독을 퍼붓고, 지극히 높으신 분 자신과 그분의 피조물, 그리고 그리스도의 거룩한 성사들을 모독한다. 그러나 우리는 지식의 반석 위에 굳건히 서 있는 자들 로서, 이를 두려워하거나 이 불경한 자의 뻔뻔함에 놀라서는 안 되며, 믿음과 지극히 뜨거운 기도로 무장하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도우심을 구하여, 대담하게 원수에게 맞서야 한다.

25. 원수는 위협과 욕설로 방금 육신을 떠난 영혼을 뻔뻔스럽게 공격하며, 그 영혼의 타락에 대해 쓰라리고 무서운 고발자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때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실한 영혼이 비록 이전에 죄로 인해 여러 번 상처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원수의 공격과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주님 안에서 강해지며, 기쁨으로 날개를 달고, 용기를 얻어, 그녀를 따르는 천상의 세력과 마치 성벽처럼 그녀를 둘러싼 믿음의 빛을 보며, 큰 담대함으로 사악한 마귀를 향해 외친다. “하나님과 거리가 먼 자여, 너와 우리 사이에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늘에서 쫓겨나고 교활한 자의 종이 된 자여, 너와 우리 사이에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우리에게 권세가 없다. 우리와 만물을 다스리시는 권세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 있다. 우리는 그분께 죄를 지었으니, 그분께도 대답하리라. 우리에게 베푸신 그분의 자비와 그분 안에서 얻는 구원의 보증인 그분의 거룩한 십자가를 의지하며. 그러니 너는 우리에게서 더 멀리 도망가라, 저주받은 자여. 너는 그리스도의 종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다. – 이러한 대담한 말에 마침내 악마는 비명을 지르며,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맞서 버틸 힘이 없음을 깨닫고 영혼의 기둥이 꺾일 것이다. 그러나 영혼은 그보다 더 높은 존재로서 원수 위로 솟아오르며, 소위 ‘날개 빠른 까마귀’를 쫓아내듯 그를 물리칠 것이다. – 그 후, 그 영혼은 기쁨 가운데 신성한 천사들에 의해 자신의 상태에 따라 정해진 곳으로 옮겨진다.

26. 때로는 허락하심에 따라 사소한 유혹이 열심 있는 자의 성공에 장애물이 되기도 하는데, 이를 증명해 줄 것이 바로 에헤니스, 즉 아주 작은 물고기이다. 이 물고기는 단 한 번의 접촉만으로 온갖 짐을 실은 배를 멈추게 하여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 또한 “나는 바울이다. 한 번, 두 번 너희에게 가고자 했으나 사탄이 나를 막았다”(살전 2:18)라고 스스로 말하는 이를 떠올려 보라. 그러나 이로 인해 혼란에 빠지지 말고, 오히려 인내로 이에 맞서 싸우면 은혜를 얻게 될 것이다.

27. 덕이 풍부한 자가 나태함으로 인해 마땅히 해야 할 일에서 벗어나면, 그때 아말렉, 즉 미디안(사사기 6장)의 악한 동쪽 자손들이 그에게 대항하여 일어나며, – 음탕한 세력 – 이 그들의 낙타, 즉 셀 수 없이 많은 정욕적인 기억들과 함께 일어나 땅의 모든 열매, 즉 가장 선한 행실과 관습의 열매를 훼손한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마침내 빈곤해지고, 낙담에 빠지며, 주님께 부르짖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때 하늘로부터 선한 생각이 그에게 내려오니, 그는 큰 믿음과 겸손함으로 기드온을 본받는 자였다 [그는 “내 천 명은 마나세 지파의 한 명보다 못하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사사기 6, 15)]; 그는 삼백 명의 연약한 자들과 함께 그토록 많은 적들을 상대로 맞서 싸웠고, 은총의 도우심으로 원수들에게 승리를 거두어 영광스러운 전리품을 세웠다.

28. “독사와 바실리스크를 밟고, 사자와 뱀을 짓밟을”(시 90:13) 수는 없다. 오직 오랫동안 간구하여 하느님께 간청하고, 천사들을 동지로서 얻어 그들이 너를 두 팔로 들어 올려, 너를 모든 물질에 집착하는 현명함을 초월하게 해줄 때에만 가능하다.

29. 굳건히 수련하는 자 중 누군가 패배하더라도, 낙담하지 말고 태도를 흐트러뜨리지 말며, 이사야의 말씀에 힘입어 몸을 곧게 펴고 기쁜 마음으로 다음과 같은 찬송을 부르라. “강한 자들아, 굴복하라!, 오, 교활한 악령들아! “설령 다시 힘을 모을지라도, 다시 패배할 것이며, 너희가 어떤 모의를 하더라도 주님께서 무너뜨리시리니,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 때문이라”(사 8,9.10) – 하나님께서는 넘어진 자들을 일으키시고, 우리가 회개하는 즉시 우리의 원수들로 하여금 슬픔과 분통으로 찢어지게 하시는 분이시다.

30. 유혹을 통해 훈련받는 자에게는 슬픔을 피할 수 없으나, 그 후에는 그러한 이들에게 큰 기쁨과 달콤한 눈물, 그리고 신성한 생각이 주어지니, 이는 그들이 자기 마음속에 고통과 통회를 심었기 때문이다.

31. 소망하는 이삭도, 갈망하는 축복을 향해 달려가던 에서조차도 바라는 것을 얻지 못했듯이(롬 9:16) —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한 사람이 아니라, 창조 이전에 그분께서 스스로 자신을 섬기도록 예정하신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축복하시며, 성령으로 기름 부으시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우리가 비참하고 가장 뒤처진 형제들이 덕행에서 번창하는 것을 보더라도 결코 당황하거나 시기해서는 안 된다. 너는 분명 주님께서 비유에서 말씀하신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라”(눅 14:9)는 말씀도 들었을 것이다. 이는 너보다 높은 자가 그곳에 앉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 재판관 앞에서 더욱 경외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분은 지극히 지혜로우시고 형언할 수 없는 방식으로, 가장 작고 마지막인 자가 으뜸이 되어 이끌게 하시고, 우리는 비록 그보다 더 많은 공로와 세월을 쌓았음에도 마지막이 되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분량대로, 그 분량에 맞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성령으로 행할지어다”라고 기록된 대로(갈 5:25).

32. 네게 순종하는 자가 네게 “미덕을 위해 잠시 동안 내게 권세를 주어 이 일이나 저 일을 시도하고, 이렇게 저렇게 이루어 보게 해 달라”고 말할 때, 결코 동의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렇게 말하는 자는 분명히 자신의 뜻을 이루고자 하며, 가장 선한 순종의 서약을 저버리기 때문이다.

33. 육체적·영적 정욕은, 네가 보게 될 것처럼, 때가 되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말미암아, 아무리 많더라도 근절될 것이나, 그리스도의 자비는 결코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주님의 자비는 이 세상부터 오는 세상까지 주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미치나니”(시 102, 17).

34. 왕의 보물창고는 금으로 가득 차겠지만, 참된 수도자들의 마음은 지혜로 충만해질 것이다.

35. 때로는 스승이 불명예에 빠지기도 하고, 그로부터 영적인 유익을 얻은 자들 때문에 유혹에 시달리기도 한다. 이는 “우리는 불명예스럽다” – 육체의 해악자로서 불명예스러운 자들이니 – “그리고 연약하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스럽고 강하다” (고린도전서 4:10)고 말하기 때문이다.

36. 육신을 통해 타락하게 되는 근원과 버팀목은 정욕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넘어진 후 정신을 차린 자는 회개를 통해 그것을 영혼에서 쫓아낸다. “차라리 너희가 울며, 너희 가운데서 이 일을 하게 한 악하고 부도덕한 생각을 제거해 버리는 편이 낫겠다”(고린도전서 5:2)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눈물은 타락의 영에 대항한다.

37. 불명예와 미덕을 행할 힘의 부재로 인해 억눌린 자에게, 그가 미래뿐만 아니라 바로 이곳에서, 무정욕을 통해 그에게 다가올 큰 능력과 영광으로 예수님을 보게 될 것이라고 누가 선포하겠는가? 그러므로 사라와 같이, 불임으로 늙어가다가 약속에 따라 마침내 의의 아들을 낳은 그의 영혼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게 웃음을 주셨으니,” 즉, 수많은 정욕으로 인해 수년 동안 슬픔 속에 머물렀던 내게 큰 기쁨을 베풀어 주셨다는 뜻이다. 또는 다른 번역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내게 젊음을 주셨으니, ‘내 청춘이 독수리처럼 새로워졌도다’(시 102:5).” 이는 이전에 죄와 불경한 정욕들로 늙어 갔으나, 이제 다시 태어나 젊고 부드러워졌기 때문이며, 이전에는 육신의 무게로 인해 거칠어졌으나, 이제는 세속적인 것들을 가볍게 여기며, 본성상 내게 주어진 단순함과 무관심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로 내 마음이 온전해지고, 내 육신이 시리아 사람 나아만처럼 요단강에서 지식의 물로 씻김을 받아 갓난아기의 살과 같아진 후에; 이제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뱀의 간계와, 악에 능숙하고 감각적 쾌락에 깊이 빠져 있는(감각에 휩싸인) 수많은 악한 생각의 무리로부터 해방되어, 한결같은 마음을 갖게 되었다.

38. 주님께서 직접 당신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가정해 보라. “한때 내가 네게서 이러저러한 은사를 빼앗았으니, 그 은사들로 네가 지적으로 만족하고 안식을 얻었었거니와, 그 대신 그와 동등한 이러저러한 다른 은사를 네게 주었노라.” 그러나 너는 빼앗긴 것만 생각하며 그 대신 주어진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신음하며 병들고 슬픔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나 내게서 오는 슬픔을 받아들이며 나를 기쁘게 한다(고린도후서 2:2). 이는 내가 내 아들로 여기는 자를 돌보며, 멸망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 유익을 주는 슬픔을 주기 때문이다.”

39. 물고기를 먹지 말라는 계명을 스스로에게 정하고, 그 후 원수가 어떻게 끊임없이 너를 물고기를 탐하게 만들려 할지, 그리고 너 자신도 마찬가지로 미친 듯이 네가 원해서는 안 될 것을 맛보려고 달려들게 될지 지켜보아라. 그리하여 아담에게 일어난 일을 대략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도 “이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는 말을 듣고, 오직 그 한 가지 금지된 것에 온 정욕을 쏟아부었기 때문이다.

40. 어떤 이는 하나님께서 지혜로 구원하시고, 어떤 이는 순박함과 악의 없음으로 구원하시니, 이는 하나님께서 악의 없는 자를 물리치지 않으신다는 것을 네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41. 기도에 더 힘쓰는 자일수록 더 무섭고 사나운 유혹에 시달리게 된다.

42. 만일 무정함에 이르도록 선택받았다면, 방심하지 말고, 있는 힘껏 그것을 이루도록 노력하라. “우리는 하늘에 있는 우리 거처를 갈망하며 탄식하노니, 이 썩어질 몸을 벗어버리기를 원하노라”(고린도후서 5, 2. 4)라고 하셨으니, 이는 세상이 끝날 때 육체적으로뿐만 아니라, 이미 이곳에서 영적으로도 보증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죽음이 승리로 삼켜졌느니라”(고린도전서 15, 54)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늘에서 우리에게 보내진 힘의 파도에 의해, 우리를 쫓아오며 모욕하는 모든 이집트인들이 삼켜질 것이다.

43. “내가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을 내가 지키지 못할까 두렵다”(고린도전서 9:27)라고 말한 이와, “서 있는 자는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린도전서 10:12)라고 말한 이를 잊었다면, 또한: “너 자신을 지키라”(영적 지도자들에게 한 말씀), “너도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하라”(갈 6:1), – 만일 네가 그토록 큰 은혜를 받은 후에도 솔로몬이 바른 길에서 벗어나 저지른 불법을 잊었다면, 만일 위대한 베드로의 뜻밖의 부인 사건을 망각했다면: 그때는 네 이성을 의지하고, 네 삶의 방식을 자랑하며, 네 위대한 수행의 지속 기간을 자랑하고, 교만에 자리를 내어주어라. – 그러나, 오 형제여, – 결코 나태해지지 말고(등을 대고 뒹굴며), 방심에 빠지지 마라. – 오히려 네 콧구멍에 숨이 멎기 전까지는, 비록 네가 모세의 나이에 이르렀을지라도, 두려워하며 이렇게 기도하라: “주여, 나의 노년에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의 힘이 쇠할 때에, 나의 하나님, 나의 구원자여, 나를 떠나지 마소서! 주를 위하여 내가 노래하리이다”(시 70:9, 6).

44. 주님께서 마태에게 하신 말씀처럼, 너에게도 말씀하신다. “나를 따르라”(마태복음 9,9). – 만일 지금 네가, 간절히 사모하는 주님을 따라 삶의 길을 열심히 달려가다가, 정욕이라는 돌에 발이 걸려 갑자기 죄에 빠지거나, 진창이 많은 곳을 만나 자주, 원치 않음에도 미끄러져 넘어지게 된다면; 그때 네가 몇 번이나 넘어져 몸에 고통스러운 상처를 입게 되더라도, 그만큼 다시 일어나 예전의 열정으로 주님을 따라 달려가, 그분께 도달할 때까지 계속해야 한다. 그리하여 “거룩한” 생각 속에서 “주께서 내게 나타나시어, 나를 구원하시는 주의 능력과 영광을 보게 하시고,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내 손을 들며, 기름과 향유로 충만함을 얻고 내 입이 기뻐하며” 주께 찬송을 부를 것이다(시 62:3–6). 나에게 있어 가장 큰 영광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받았다는 데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사야의 입을 통해 내게 말씀하신 대로, “네가 내 종이라 불리는 것은 큰 영광이니라” (사 49,6)고 하셨습니다.

45. “아버지께서는 그분께 구하는 자들에게 좋은 것을 주실 것”이라고(마태복음 7,11) 기록된 곳과, “그분께 구하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실 것”이라고(누가복음 11,13) 기록된 곳이 있는데, 이러한 말씀들은 죄 사함뿐만 아니라 하늘의 은사들도 하나님의 기도하는 자들에게 주어짐을 일깨워 주며, 주님께서 의인이 아니라 죄인들에게 그러한 복을 약속하셨다는 생각으로 그들의 간구를 더욱 굳건하게 해 줍니다. 그러니 비록 네가 덕행에 있어 완전하지 못하고, 연약하며, 아무것도 받을 자격이 없다 하더라도, 끊임없이 그리고 확고한 마음으로 구하라. 그리하면 위대한 것을 얻게 될 것이다.

46. 믿음이 없거나 믿음이 약한 자는 개미가 날개를 달게 되는 것과, 어떤 벌레가 새가 되는 것, 그리고 피조물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그 밖의 수많은 기이한 현상들을 생각해 보라. 적어도 그런 방식으로 불신과 절망이라는 병을 떨쳐 버리고, 마침내 날개를 달아 나무처럼 영광스러운 지식을 싹틔우게 되기를 바란다. “나 곧 주 여호와가 말하노니, 나는 마른 나무를 살리고 마른 뼈에 생명을 불어넣는 자니라”(에스겔 17:24; 37:4, 9).

47. 결코 육신의 필요를 위해 근심에 빠져 시들어가서는 안 되나니,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믿으라. 한때 한 선한 사람이 말했듯이, “주님께 맡기라. 그러면 그분께서 너희를 맡아 주실 것이다.” 또한 복된 사도 베드로가 기록한 대로, “기도에 힘쓰며 절제하고 깨어 있으라” (베드로전서 4, 7), — 너희의 모든 근심을 하나님께 맡기라. 그분께서 너희를 돌보시기 때문이다 (베드로전서 5, 7). 만약 아직도 주님께서 당신을 돌보시고 생계를 책임져 주신다는 것을 의심하고 믿지 못한다면, 거미를 바라보며 사람이 거미와 얼마나 다른지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말하는 거미는 이 세상에서 그보다 더 약하고 무력한 것은 없는 존재입니다. 그 거미는 재물도 없고, 여기저기 돌아다니지도 않으며, 다투지도 않고 화내지도 않으며, 창고도 없습니다. 온전한 온유와 절제, 그리고 극도의 침묵 속에서 삶을 살아가며, 이웃에 대해서는 호기심을 품지 않고, 오직 자신의 일만 하며, 조용하고 평온하게 자신의 일에 몰두함으로써, 말하지 않으면서도 무위(無爲)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일하기를 원치 않는 자는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해 주는 셈이며, 그는 그토록 침묵을 지키기에, 헬레네인들이 모든 철학자 중에서 가장 경탄하는 피타고라스조차도 훨씬 뛰어넘었으니, 피타고라스는 말을 절제하는 위업으로 유명했고, 피타고라스는 모든 사람과 대화하지는 않았지만, 때때로 친구들과 몰래 이야기를 나누곤 했으며, 소와 독수리에게도 가끔 말을 걸어, 다소 우스꽝스럽고 무의미한 행동을 하곤 했다. 그는 포도주를 전혀 마시지 않고 오직 물만 마셨다. 이러한 피타고라스의 말 절제는 거미가 완벽한 침묵으로 뛰어넘었으며, 술을 마시지 않는 그의 절제는 물을 마시는 것조차 기피한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이토록 침묵하는 상태에 머무르는 거미는 연약하고 온유하여, 밖으로 나가 이리저리 방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과도한 노동과 피로에 몸을 맡기지도 않는다; 또한 높은 곳에 계신 분은 살아 계시며 겸손한 자들을 돌보시니(거미보다 더 겸손한 것은 없으니), 그분께서는 거미에게까지 돌보심을 베푸시어, 매일 거미의 거처 근처로 작은 곤충들을 보내시어, 거미의 필요를 위해 그 거미줄에 걸리게 하신다.

48. 어쩌면 식욕의 노예가 된 자 중 누군가가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나는 많이 먹고, 그 때문에 많은 비용을 쓰니, 여러 세속적인 번거로움과 거래에 휘말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사람 또한 대서양에서 방목되는 거대한 고래들을 보라.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풍성하게 양식을 공급받아 결코 굶주림을 겪지 않는데, 비록 이 짐승들 중 하나하나가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조차 하루에 소비할 수 없는 양의 물고기를 먹어치운다. “모든 이가 주님을 기다리니, 그들에게 적당한 때에 양식을 주시옵소서”라고 성 선지자가 노래합니다(시편 107, 27). 왜 많은 사람이 먹든, 적은 사람이 먹든, 하나님께서는 이쪽도 저쪽도 모두 먹이십니다. 이 말을 들은 너도, 넓고 텅 빈 배를 가진 자여, 온전히 하나님과 믿음에 의지하고, 세상의 모든 근심과 지나치게 염려하는 마음을 떨쳐 버리며, 불신하지 말고 신실하라.

49.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고 그분으로부터 지극히 복된 사랑을 받고자 한다면,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즉 기술도, 지식도, 소피스트적인 교묘한 사고도, 설령 우리가 세상의 모든 지혜를 배웠다고 해도, 우리 마음속에 지니지 않은 채, 텅 빈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만심에 차 있고 허영으로 가득 차며 오만한 태도로 나아오는 자를 외면하시기 때문이다. 어떤 주석가들은 헛된 자만심을 ‘자신을 스스로 양육하는 것’과 ‘거만함’이라고 불렀다.

50. 우리는 이미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죄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자기 절제(혹은 자신의 의지대로 욕망을 억누르는 것)가 필요하다. “사람은 수고로 스스로를 수고하게 하고, 자신의 파멸을 쫓아낸다 (강제로 쫓아낸다) “자신의 파멸을” (잠언 16, 26), 항상 자신의 생각을 거룩한 곳으로 향하게 하려 애쓴다. 폭력으로 폭력을 무너뜨리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지 않는다(즉, 죄의 폭력을 선한 열망의 폭력으로 무너뜨리는 것). 어떤 선한 노력에 대해 자기 강제를 가할 때(즉, 스스로를 강제로 선한 열망을 실천하도록 만들 때), 우리는 예루살렘에 계신 (눅 24:49), 즉 끊임없는 기도와 그 밖의 미덕 속에 머물며, 우리에게 이 위엄 있는 힘이 임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이 힘은 우리의 미약한 노력과는 달리, 육신의 입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강력하게 승리하고 정복하여 죄악된 성품과 악령들의 악의를 이겨내며, 우리 영혼의 악에 대한 경향을 이겨내고, 모든 부도덕한 육체의 움직임을 이겨내는 그 힘이다. “하늘에서 소리가 났으니, 마치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았다” (행 3:2), 이는 항상 우리를 악으로 유혹하는 악을 우리 안에서 강제로 쫓아내기 위함이었다.

51. 원수가 ‘자신의 울타리 안에 있는 사자처럼’ 매복해 있다”(시 9, 30)며, 우리에게 불결하고 불경건한 생각의 올가미와 그물을 숨기고 있다. 그러나 우리도 잠들지 않는다면, 그에게 훨씬 더 크고 위험한 올가미와 그물, 매복을 설치할 수 있다. 왜냐하면 기도와 시편, 깨어 있는 경건과 겸손, 이웃을 섬김과 자비, 감사와 신성한 말씀을 듣는 것—이것이 바로 원수에게 대한 매복이며, 올가미요, 구덩이요, 채찍이요, 그물이요, 목을 조르는 덫이기 때문이다.

52. 장수를 누린 신성한 다윗은, 자신을 택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고백을 마무리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주의 종이 이 기도로 주께 기도할 마음을 얻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마음의 평온한 상태를 이루기 위해—사도 바울이 “너희는 너희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 줄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한, 마음속의 또 다른 하늘과도 같은 그곳, 곧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는 곳에 이르기 위해서는—위대한 노력과 기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함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고린도후서 13:5)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리스도가 거하시는 그 ‘마음의 또 다른 하늘’인 평온한 마음의 기초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큰 수고와 오랜 시간의 기도가 필요함을 우리에게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53.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지혜가 되시며, 의와 거룩함과 구원이 되셨다”(고린도전서 1:30)면, 안식도 분명히 그러하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8)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인간을 위해 안식일, 즉 안식이 되셨다고 말할 수 있다. 인류는 오직 유일한 그리스도 안에서만 안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54. 타락의 잔과 진노의 잔이 있는 것처럼, 연약함의 잔도 있다. 주님께서는 이 잔을 우리에게서 받아 적당한 때에 우리 원수들의 손에 넘겨주시니, 이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마귀들이 연약해지고 넘어지게 하려 하심이다.

55. 겉으로 드러나는 일들에는 환전상, 직공, 새 사냥꾼, 군인, 건축업자가 있는 것처럼, 내면의 일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생각하라. 즉, 마음속에는 도박꾼, 독살자, 해적, 사냥꾼, 음행자, 살인자, 그리고 이와 유사한 자들이 있으니, 이러한 자들은 경건한 저항과 기도로 즉시 쫓아내야 하며, 특히 음란한 더럽히는 자들은 거룩한 곳을 더럽히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의 사람을 추악하게 만들지 못하게 해야 한다.

56. 주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그분께 부르짖던 강도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구원의 은사를 베푸실 때 말뿐만 아니라 마음의 생각으로도 응답하십니다. 그래서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마음속으로(즉, 믿음으로 생각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내가 그 옷자락만이라도 만지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복음 9,21); 또한 아브라함의 종은 리브가에 대해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말하였다”(창세기 24,15).

57. 저지른 죄는 회개하는 자가 죄의 악취와 무거움, 광기를 깨닫는 즉시, 그 자체로 그를 하나님께로 몰아간다. 그러나 회개하기를 원하지 않는 자를 죄는 하나님께로 몰아가지 않고, 오히려 자기 곁에 붙잡아 두며 풀 수 없는 밧줄로 묶어, 해로운 욕망을 더욱 강력하고 잔혹하게 만든다.

58. 이세벨의 마법(열왕기하 9:22)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라. 그중에서도 가장 사악한 것은 허영과 헛된 영광에 대한 생각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니, 네 영혼을 낮추고 폄하하며, 주님 앞에 자신을 엎드려 그분께 도움을 청하고, 네가 구하는 구원이 하늘에서 오는 선물임을 고백할 때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늘에서 주어지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요한복음 3:27)고 말씀하신 것이다.

59. 때로는 형제들의 모임이 있을 때, 제때가 아닌 말을 하고 싶은 허영심 어린 생각이 치밀어 오를 때가 있다. 그러나 천사의 생각은 네게 이 수다스럽고 때를 놓친 생각을 쫓아내라고 속삭인다. – 그러므로 네가 선한 침묵으로 그것을 쫓아내지 않고, 허세를 부리며 그 생각이 밖으로 드러나게 내버려 둔다면, 그로 인해 나쁜 결과를 감수해야 할 것이다. – 의롭게 더 큰 죄에 빠지거나, 외적인 어떤 비통함이나, 형제들로부터 오는 무거운 곤란, 혹은 미래 세상에서의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니, 이는 헛되고 허영심 어린 말, 혀가 훈련되지 않아 내뱉은 말조차도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혀를 신중히 지켜야 한다.

60. 감각적인 쾌락과 분노, 명예심 및 그 밖의 정욕에 유혹받는 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낮에는 태양에 타는 숯불 같고 밤에는 달과 같다고(시 120:6)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 기도하여, 원수의 불길에서 벗어나도록 신성한 이슬을 내리는 구름이 너를 덮어주기를 구하라.

61. 절대로 술을 좋아하는 자들과 방탕한 식탁의 노예들, 그리고 늙은 머리카락으로 흰 머리가 되어 있고 오랫동안 수도 생활을 해왔더라도 부끄러움 없는 말을 즐겨 하는 자들에게 대담하게 접근할 기회를 주지 마라. 그들의 부패함이 너를 덮치지 않게 하고, 네가 부정하고 마음이 할례받지 못한 자들 중 하나로 여겨지지 않도록 하라.

62. 베드로에게 먼저 열쇠가 맡겨졌으나, 그 후 그는 주 그리스도께 대한 부인(부정)에 빠지게 되었으니, 그러한 타락을 통해 그가 자신에 대한 자만심을 버리게 하려 함이었다. 마찬가지로, 너도 분별의 열쇠를 받았음에도 여러 유혹에 빠진다면, 이를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 오직 유일하신 지극히 지혜로우신 주님을 찬양하라. 그분은 신성한 인도하심을 따르는 자의 자만심을 넘어짐으로 길들여 주시니, 유혹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인간의 교만을 억제할 수 있는 고삐이기 때문이다.

63. 만일 주님께서 우리에게서 복을 자주 거두어가신다면, 예를 들어 욥에게서 부를 거두어가신 것처럼—주님께서 주셨으니 주님께서 거두셨다(욥기 1,21)—그렇다면 영원하신 분이 우리에게 내리신 재앙 또한 반드시 우리 손에서 거두어 가실 것이다. 왜냐하면 지혜로운 이가 말하듯이, “선과 악은 모두 주님께로부터 온다” (시라 11,14). 우리에게 악을 내리시는 그분께서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영원한 기쁨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실 것이다. “내가 너희를 파멸시키고 악을 행하려고 깨어 있었듯이, 다시 세우고 다시는 파멸시키지 않으며, 심고 다시는 뽑아내지 않겠다.”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일단 나빠지면 다시는 좋아지지 않는다”는 속담은 이제 그만 사라지기를 바란다. 우리의 일을 더 나쁘게 바꾸신 분께서, 분명 다시 예기치 않게 그것을 가장 밝은 상태로 바꾸실 수 있기 때문이다.

64. 절제나 기도, 혹은 다른 어떤 미덕으로 악마들을 공격하는 자는 더 강력하고 승리를 갈망하지만, 정작 그들로부터 가장 깊은 상처를 입어, 심지어 절망에 빠지게 될 지경에 이르러, 자신의 영혼에 영적 죽음에 대한 심판이 내려진 것은 아닌지 의심하며,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 주시겠는가” (롬 8,24); 왜냐하면 원수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를 강제로 자신의 법에 복종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65. 단순히 이전에 어떤 이들이 서로 말했던 것처럼 “일어나서, 소망을 품고 평안히 사는 백성에게로 가자” (사사기 18:9, 10); 또한 “유다로 올라가서 그들과 상의한 뒤” 교활한 말로 “그들을 진리에서 우리 쪽으로 돌리자” (이사야 7:5–6)라고도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대개 악한 귀신들은 평생 침묵을 지키며 지내는 자들에게 유혹의 칼을 갈며, 더욱 경건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더 큰 광기로 덤벼들어, 경건한 행위 자체를 빌미로 말로 다 할 수 없는 모욕을 퍼부으며 그들을 죄로 유인한다; 적어도 그런 방식으로 그들을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기도, 그리고 경건한 삶에서 벗어나게 하여, 그들을 정복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 우리는 다윗과 함께 말하노니(시 79:19), 주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를 삼키려는 자들이 우리에게서 물러날 때까지 주님을 떠나지 않겠나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유혹하는 자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시고, 우리가 인내와 확고한 냉정함으로 소생할 때까지 주님을 떠나지 않겠나이다. 왜냐하면 유혹은 인간의 삶 그 자체이며, 종종 정해진 때에, 바로 그 수련 지도자께서도 우리가 낯선 자들의 발 아래 넘어지도록 내버려 두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위대하고 용감한 영혼은 비통한 우연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는 것이 본성입니다.

66. 만일 악마가 그토록 강하여, 사람이 원하지 않을 때조차도 그를 굴복시키고 자신의 뜻대로 끌고 갈 수 있다면, 이는 그가 본성에 따라 정해진 참된 질서에서 벗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정해진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명령을 받아 사람의 모든 성향을 더 나은 쪽으로 바꾸는 천사는 얼마나 더 강하겠는가? 그리고 혹독한 북풍이 물의 가장 부드러운 본성을 돌처럼 단단하게 바꿀 만큼 강력하다면, 가장 따뜻한 남쪽이 무엇을 못 하겠는가? 극도로 차가워진 공기가 모든 것을 자신에게 복종시키고 그 추위로 가득 채운다면, “누가 서리가 뿜어내는 바람을 견딜 수 있겠는가”(시 147:6)라고 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열기가 어떻게 그 본성에 따라 모든 것을 변화시키지 못하겠는가? 과연 열기의 얼굴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우리 마음속의 차갑고 검은 숯도 언젠가, 혹은 더 빨리, 신성한 불의 접촉으로 뜨겁고 빛나는 것이 될 것이라고 믿자.

67. 현세에서도 확실한 증거와 징후를 통해, 우리 내면의 요셉 안에서 드러나는 무정(無情)의 상태가 있으니, 그 안에서 우리 마음은 이집트를 떠나 정욕적인 유혹과 은밀한 가장 수치스러운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 알지 못했던 언어를 듣게 되는데, 악마의 언어가 아니라, 불결하고 건전한 이성을 타락시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육체적인 것에서 비육체적인 것으로 변화시키는 천사들의 거룩한 언어, 곧 그것을 받아들이는 영혼을 깨우치는 언어이다.

68. 나는 육체적으로 심한 고통을 겪어 금식을 지킬 수 없는 몇몇 형제들이 나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는 것을 들었다. “금식 없이 어떻게 마귀와 정욕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 음식에 대한 절제뿐만 아니라,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하나님께 대한 부르짖음으로도 너희는 악한 움직임과 그것을 일으키는 자들을 근절하고 쫓아낼 수 있다. “그들이 곤경에 처했을 때 주님께 부르짖었더니, 주님께서 그들의 궁핍에서 그들을 건지셨다”(시편 106:6)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기록된 바와 같이: “지옥의 깊은 곳에서 내가 부르짖으니, 주께서 내 목소리를 들으셨도다. ‘내 생명이 썩어가는 곳에서 다시 일어나게 하소서’”(요나 2:3, 7). “불법이, 곧 죄의 무게가 ‘지나갈 때까지’”, “나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시 56:23), 그리하여 내게 가장 큰 은혜를 베푸시어, 그분의 권능으로 죄의 근원 자체를 근절하시고, 정욕에 사로잡힌 마음의 우상들을 지워 버리시며, 우상이 없는 자들에게 우리의 우상으로 가득 찬 연약함을 드러내실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네가 절제의 은사를 받지 못했다면, 주님께서 네 기도와 소망을 위하여 네가 그분께 부르짖을 때 네 말을 들으시려 하신다는 것을 알라. 이제 주님께서 너에 대해 내리신 이러한 판결을 알게 되었으니, 금식이라는 고행을 감당할 힘이 없다는 사실로 인해 슬퍼하지 말고, 오히려 기도와 온유한 인내로 원수로부터 벗어나도록 힘쓰라. 약함과 고통에 대한 생각이 너희를 금식의 성에서 쫓아낸다면, 다른 곳으로 도망치라(마태복음 10:23), 즉 기도와 감사의 성으로 가라.

69. 파라오는 기도하며 “하나님이 이 죽음을 내게서 거두어 주시기를”이라고 말했고, 그 기도가 들렸다. 마찬가지로 주님께 “심연으로 가라고 명하지 말아 주시기를” 간청한 악령들도 청한 바를 얻었다. 그렇다면 마음의 죽음에서 구원받기를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은 더욱더 그 기도가 들리지 않겠는가?

70. 어떤 사람은 한동안 신성한 은총으로 깨달음을 얻고 평안을 누리다가, 그 은총이 줄어들자 정신이 혼란스러워지고 부적절한 욕망에 사로잡혀 불평하거나, 무익한 낙담에 빠져들며, 기도로 용감하게 다시 자신 안에 구원의 마음을 회복하려 애쓰지 않는다면; 마치 왕의 궁전에서 자선을 받았으면서도, 왕의 식탁에 함께 앉지 못했다는 이유로 분개하는 가난한 사람과 같다.

71. “보지 않고도 믿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요한복음 20, 29), 또한 은혜의 역사가 약해져 자기 안에서 위로를 찾지 못하고, 오히려 슬픔과 깊은 어둠이 번갈아 닥쳐도 절망에 빠지지 않고, 믿음으로 굳건히 서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확신을 가지고 용감하게 인내하는 이들도 얼마나 복된가.

72. 하나님의 은혜로, 때가 되면 수많은 수고와 투쟁, 눈물을 겪은 뒤, 그것을 구하는 자들에게 위로부터 주어지는 겸손은, 덕을 저버린 자들에게 나타나는 겸손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 강하고 높습니다. 이를 얻은 자들은 참으로 온전한 사람들입니다.

73. 마귀가 주님을 떠났을 때, “천사들이 그분께 나아와 그분을 섬겼다”(마태복음 4:11). 주님께서 유혹을 받으실 때 천사들이 곁에 있었다는 기록이 없는 것처럼, 우리도 어느 때 유혹을 받을 때면 천사들은 멀지 않은 곳에 물러나 있다가, 유혹자들이 물러난 후에 우리에게 다가와 섬기며, 신성한 생각과 확신, 깨달음, 회개, 위로, 인내, 기쁨, 그리고 투쟁 속에서 수고한 영혼을 구원하고, 굳건하게 하며, 다시 세우는 모든 것을 베풀어 줍니다. 나다나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제부터 너희는 인자 위에 오르내리는 천사들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복음 1:51), 즉 이제부터 인류에게 천사들의 섬김과 도움이 풍성히 쏟아질 것이다.

74. 마귀가 그에게 대항하기 위해(스가랴 3:1) 그 대제사장의 우편에 섰던 일을 기억하라. 즉, 모든 의로운 생각과 말과 행위에 대항하기 위함이었으니, 이와 유사한 일이 일어날 때 놀라지 말라.

75. 수도자는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연약하나이다”(시 6:3)라는 말씀에 나오는 ‘연약함’이 무엇인지,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의 ‘이탈’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마귀와 그의 천사들이 앓는 병이다.

76. 불이 철을 관통하지 못하게 하는 것처럼, 잦은 기도는 마음을 원수와의 싸움에 있어 가장 강력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악령들은 기도가 그들에게 적대적이며, 싸움에서 마음을 강화시킨다는 것을 알기에, 온 힘을 다해 게으름으로 우리를 느슨하게 하여 기도에 인내하며 머무르는 것을 방해하려 한다.

77. 다윗은 세켈라그에서 그와 함께 이방인들을 대적하러 나갔던 자들의 열의를 높이 평가하였으니, 비록 그들이 기진맥진하여 보소로베 시내가에 머물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79] 왜냐하면 이방인들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두고 돌아왔을 때, 어떤 이들이 기진맥진하여 시내가에 앉아 있던 이들에게 전리품의 몫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그들이 할 말이 없어 부끄러워하는 것을 보자, 자비로우신 다윗은 그들을 변호하며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물건을 지키기 위해 그곳에 배치된 것이므로, 용감하고 기꺼이 싸운 전사들에게 준 것과 동등한 몫을 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사무엘상 30:21). 이제 생각해 보라. 만약 어떤 형제 가 처음에는 [금식, 철야 기도 등의] 수행에 대해 뜨거운 열의를 보이다가 나중에 그 열의가 조금 식었다고 해도, 그의 내면의 선한 마음가짐이 보존되었다고 가정한다면, – 믿음, 회개, 겸손, 눈물, 인내, 소망, 너그러움 등; 이 모든 것이 보존되었다고 가정한다면, 그 사람은 그 덕목들에 굳게 의지하여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기다리며 인내로 그 안에 머무르는 자로서, 비록 겉으로 드러나는 실천에서는 약할지라도, 마땅히 받아야 할 영원한 선물을 얻게 될 것이다.

78. 레위인과 제사장이라 불리는 이들은, 활동과 묵상을 통해 온전히 자신을 하나님께 바친 자들이다; 레위인의 가축(민수기 3장)이라 불리는 이들은, 비록 미덕의 길을 흔들림 없이 걷는 데는 힘이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미덕을 기뻐하며 끊임없이 그것을 갈망하고 힘닿는 대로 이를 위해 열심이며, 비록 그들을 약하게 만드는 악으로 인해 항상 성공하지는 못하더라도 그러합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그들도 — 희망할 수 있듯이 — 오로지 하느님의 자비 덕분에 무정심의 은총을 받게 될 것이다. “주님, 가난한 자들의 소원을 들으셨나이다”(시편 9,38)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79. 원수가 우리에게 가하는 타격, 명백한 것이든 은밀한 것이든, 우리는 종종 알아차리고 보게 됩니다; 반면 우리가 미덕을 실천하거나, 죄를 회개하거나, 모욕을 참아내거나, 불행 속에서도 평온을 유지하거나, 기도에 전념하거나, 그 밖의 경건한 행위를 행할 때, 원수가 우리로부터 겪는 고통과 괴로움은 — 그가 그로 인해 찢어지고, 고통받으며, 울며 가슴이 찢어지는 – 이 모든 것을 우리는, 교만해지지 않도록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시니,사도가 말하듯이, “너희를 모욕하는 자들에게 슬픔을 갚아 주시는 것이 옳습니다”(고전 1:6).

80. 땅이나 돌 위에 오래된 그루터기가 물기 때문에 새로 심은 나무처럼 싹을 틔운다면, 우리도 성령의 능력으로 소생할 때, 본성상 지닌 썩지 않는 것을 자라게 하고, 비록 우리가 낡은 사람으로 전락했더라도 새로 심은 나무가 열매를 맺듯이 열매를 맺을 수 있다.

81. 유혹이 넘치고 죄가 많아 절망에 빠진 영혼이 “소망은 사라졌고, 우리는 죽었다”라고 말할 때, 우리 구원을 위해 절망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 “너희는 살아나서,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에스겔 37, 6). 반면, 어떤 미덕의 힘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을지 의아해하는 영혼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리라”(누가복음 1:35). 성령께서 계신 곳에서는 자연의 법칙이나 일반적인 인과 관계와 행위의 순서를 찾지 말라. 전능하신 숭배받으시는 성령께서는 본성상 이루어질 수 없는 일도 그분의 능력으로 네 안에서 이루실 것이니, 네가 놀라게 될 것이다. 게다가, 그분은 이제 이전에는 패배당하던 네 마음을 승리의 주인으로 드러내실 것이다. 위로부터 우리에게 내려오시는 위로자께서는 모든 것 위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너를 모든 자연적 움직임과 악마적인 정욕들보다 더 높은 곳에 세우실 것이다.

82. 네 위엄 있는 마음의 빛나는 광채를 흠 없이 보존하기 위해 힘쓰라. 만일 네가 모든 것을 욕망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면, 이는 주님께서 너를 어둡게 하시고 네 얼굴에 베일을 씌우신 것이니, “네 눈의 빛이 너와 함께 있지 아니하도다”(시 37:11). 그러나 설령 네게 그런 상태가 있다 하더라도, 지치지 말고 약해지지 말며, 성 다윗과 함께 이렇게 기도하라. “주의 빛을 보내시며, 낙담으로 어두워진 내게 주의 진리를 보내소서,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여” (시 42:3, 5); “주의 영을 보내소서, 그리하면 그것들이 세워지리이다. 주께서 땅의 얼굴을 새롭게 하시리이다” (시 103:30).

83. 이곳에서 밤낮으로 기도와 시편을 끝없이 먹고 마시며, 성경의 영광스러운 말씀을 통해 자신을 굳건히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러한 영적 양식은 장차 올 세상에서 영혼에게 마르지 않는 기쁨을 가져다줄 것이기 때문이다.

84. 넘어지지 않도록 온 힘을 다해 굳건히 서라. 강한 전사는 넘어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만일 넘어지게 된다면, 서둘러 일어나 다시 선한 싸움에 임하라. 은혜가 떠나면서 첫 번째 일이 네게 몇 번이나 일어났더라도, 두 번째 일, 즉 다시 일어서는 일도 그만큼 네게 있기를 바란다. 네 생애가 끝날 때까지 그러하라. “의인이 일곱 번 넘어져도 일곱 번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느니라 (잠언 24:16). 성스러운 스키마의 무기(즉, 하느님을 섬기겠다는 결의)를 눈물과 간구로 하느님께 드리는 한, 비록 자주 넘어지더라도 너는 여전히 서 있는 자들의 대열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용맹한 전사처럼 수도사들과 함께 머무는 동안, 네가 정면에서 상처를 입는다면, 그 상처들 덕분에 네가 상처를 입어도 물러서지 않고 굴복하지 않으며 후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칭찬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수도사들로부터 물러난다면, 이제는 도망자이자 겁쟁이처럼, 혼란에 빠져 대열을 이탈한 자로서 뒤에서 상처를 입게 될 것이다.

85. 절망하는 것은 죄를 짓는 것보다 더 비참한 일이다. 배신자 유다는 소심했고 싸움에 능숙하지 않았기에 절망에 빠졌고, 적들이 달려들어 그에게 올가미를 씌웠다. 반면 베드로, 곧 그 견고한 반석은, 끔찍한 추락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싸움에 능숙한 자답게, 극심한 슬픔 속에서도 낙담하지도 절망하지도 않았으며, 벌떡 일어나 상하고 겸손한 마음에서 가장 쓰라린 눈물을 쏟아냈고; 우리 원수는 이를 보고, 마치 가장 맹렬한 불길에 얼굴을 태우는 듯하여, 즉시 뒤로 물러나 멀리 도망치며 사나운 비명을 지르었다.

86. 수도사는 다음 세 가지 정욕, 즉 탐식, 허영, 그리고 우상 숭배인 탐욕에 맞서 끝까지 타협하지 않는 싸움을 벌여야 한다.

87. 이스라엘의 한 왕은 시편과 찬송, 그리고 다윗의 악기로 연주된 영적인 노래와 그의 말씀으로 동굴에 사는 자들과 그들과 함께한 다른 야만인들을 물리쳤다(역대하 12:3; 20:22). 너에게도 동굴에 사는 야만인들, 곧 악령들이 있어, 네 감각과 지체를 억누르고, 육체를 불타오르게 하며, 너로 하여금 욕망에 사로잡혀 보고, 듣고, 냄새를 맡게 하고, 음란한 말을 하게 하며, 눈이 음탕으로 가득 차게 하고, 바빌론 사람들처럼 내면과 외면 모두 혼란에 빠지게 한다. 그러니 너도 위대한 믿음과 시편, 찬송, 영적인 노래로 네 안에 악행을 일삼는 이 동굴 거인들을 끝까지 근절하도록 힘쓰라.

88. 주님께서 사람이 사람을 통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것처럼, 마귀는 사람이 사람을 통해 파멸당하도록 애쓰고 있다. 그러므로 경솔하고, 악의적이며, 수다스러운 사람에게 달라붙어서는 안 되는데, 그와 함께 지옥에 빠지지 않기 위함이다. 의로운 사람과도 가까워지는 자는 간신히 구원을 얻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 교활한 자와 두려움 없이 어울린다면, 마치 전염병이나 나병처럼 파멸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누가 즐거운 표정으로 용에게 다가가는 자를 불쌍히 여길 수 있겠는가? 그러니 말을 함부로 하는 자들, 불화를 조장하는 자들, 그리고 내면과 외면 모두에서 동요하는 자들을 피하라.

89. 지혜롭고 분별력 있으며 하나님의 친구라 불리기를 원하는 자는, 주님께서 그에게 주신 그대로, 즉 깨끗하고 흠 없이 온전히 순결한 영혼을 주님께 바치기 위해 부지런히 힘써야 한다. 이를 위해 그는 하늘에서 면류관을 쓰고 천사들에게 축복을 받을 것이다.

90. 한 마디 선한 말이 한때 방탕했던 그 강도를 깨끗하고 거룩하게 만들어 천국으로 인도하였다. 그리고 한 마디 악한 말이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을 막았다. 그러니 우리가 혀의 병을 사소한 병으로 여기지 말자. 악한 말을 하고 헛소리를 늘어놓는 자들은 스스로 천국을 닫아버리기 때문이다. – 이방인은 비록 이곳에서는 아직 어떤 성공을 거둘지 몰라도, 저곳에서는 전혀 성공할 수 없으며, “악한 자들이 그를 멸망으로 이끌리라”(시 139,12). 어떤 현명한 사람이 말했듯이, 높은 곳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것보다 혀로 인해 넘어지는 것이 더 낫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 야고보의 말씀을 따라야 하는데, 그는 이렇게 썼다. “모든 사람은 듣는 데는 신속하고 말하는 데는 절제해야 한다”(야고보서 1,19).

91. 우리가 헛된 것에 현혹되어 뜬구름을 쫓거나 정신이 산만해지지 않도록, 선지자의 말씀을 잘 경청해야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 백성아, 너희 성소로 들어가라” – 모든 감각적 인상으로부터 숨겨진 너희 마음의 성소, 무정함과 거룩한 은총의 빛으로 비추어지는 그 형체 없는 거처로, – “너희 문을 닫아라” 모든 보이는 것들로부터, “조금만, 아주 조금만 숨어라” – 인간의 온 삶도 미미하기 때문이니 – 그리고 그 후에 이렇게 덧붙이시니: “주님의 진노가 지나갈 때까지” (이사야 26:20), 다른 누군가가 말했듯이: “불법이 지나갈 때까지”(시 56:2). 불법, 그리고 그에 따라 마귀와 정욕과 죄들은 모두 하나님의 진노이기 때문이다. 이사야가 하나님께 말하듯이: “주께서 진노하셨으니, 우리가 죄를 지었나이다”(64:5). 사람은 기도 중에 끊임없이 자신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내면, 즉 접근할 수 없는 내면의 성소 안에서 열심히 싸움으로써 이 진노를 피합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네 가장 깊은 곳에 지혜를 끌어들이라”(참조: 잠언 8:12; 시라크 45:31; 51, 18); “모든 영광은 왕의 딸의 내면에 있다”(시 44, 14)고 다른 이는 말하며, “이 수고는 내 앞에 있으니, 내가 하나님의 성소(‘시 72, 17)와 ‘유산의 산’( (시 67, 17), “준비된 거처”(시 32, 14), 주님, 주께서 “주의 손이 예비하신 성소”(시 77, 54)만드신 그곳으로.

92. 진정으로 세상을 버리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에 대한 불꽃처럼 타오르는 위대한 사랑으로 인해 자신의 소유물 중 단 한 가지도 가지고 가지 않았던 복된 예언자 엘리사를 본받아야 한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을 궁핍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이와 같이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영원한 왕국의 열쇠인 자발적인 죽음을 향해 기꺼이 나아가게 하라.

93. 아모리인이 너 안에서 참나무처럼 강해지는 것을 느낄 때, 주님께 부지런히 기도하여, 그분이 그 열매, 즉 행위로 저지르는 죄를 위에서 말리시고, 그 뿌리, 즉 불결한 생각을 아래에서 말리시게 하라. 그리고 주님께서 아모리인을 네 얼굴에서 쫓아내시기를!

94. 우리의 침묵을 비웃는 자들을 보더라도 놀라지 말라. 그들은 스스로 침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노래로 그들로부터 오는 나쁜 인상을 물리치되, 원한을 품지 말고, 너희 안에 하나님께 대한 더 큰 순종을 세우며, 노래로 외치라. “오, 내 영혼아, 하나님께 순종하라” (시 61:6); “그들이 나를 사랑하기는커녕 나를 비방하였으나, 나는 기도하였노라” (시 108:4)라고, 나와 그들 모두의 치유를 위해.

95. 바다에 강한 바람이 불지 않으면 파도가 일지 않듯이, 악마가 우리를 공격하지 않으면 영혼도 몸도 정욕으로 요동치지 않는다.

96. 네가 항상 기도와 신성한 은총으로 따뜻함을 느낀다면, 신성한 성경이 말하듯이, 너는 빛의 무기를 두르고 있는 것이다. 네 옷은 따뜻하지만, 네 원수들은 마치 두 겹의 옷을 입은 것처럼 수치와 추위로 인한 떨림에 휩싸여 있다.

97. 자신의 죄를 기억하며, 가슴을 치는 일을 게을리하지 마라. 그 타격으로 돌처럼 굳어진 마음을 부수고 부드럽게 하라. 마치 석공들이 금속이 함유된 흙을 부수는 것처럼; 그리하면 그 안에서 금맥을 발견하고, 숨겨진 보물을 기뻐하게 될 것이다.

98. 지극히 높은 선을 갈망하는 불꽃과 성령의 말씀에 대한 거룩한 경외심이 네 영혼의 제단 위에서 끊임없이 타오르게 하라.

99. 항상 “평화를 전파할 준비를 하고 발에 신을 신으라”(엡 6:15) 힘쓴다면, 틀림없이 네 집과 네 이웃의 집도 잘 꾸려 나갈 것이다. 그러나 (어려움을 만날 때) 소심해지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모욕을 당하게 될 것이며, “장화에서 발을 뺀 자”라는 이름을 물려받게 될 것이다(신명기 25, 9. 10).

100. 요한에 따르면,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신다. 사랑의 유대를 끊고 이웃을 미워하는 자는 분명히 사랑 대신 미움을 받아들인 것이다. 자신과 같은 존재를 미워하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니,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요한일서 4, 16). 그분께 영원토록 영광과 권능이 있기를. 아멘.

 

복자 아바 조시마
(팔레스타인)

 

그에 대한 간략한 소개

고대 라틴어 번역가는 존경받는 조시마의 대담집에 다음과 같은 서문을 붙였습니다: “나는 이 대담록들을 높이 평가하고 소중히 여긴다. 그 이유는 이 책들이 금욕적 수행의 참된 본질을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으며, 그 안에 풍성하게 스며든 영적 기름부음과, 이 책들이 풍기는 가장 달콤한 거룩함의 향기 때문이다. 그 어떤 것도 이토록 기꺼이 필사하지 않았고, 그 어떤 것도 이토록 마음의 기쁨을 느끼며 번역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글들의 저자가 누구이며, 어느 시대에 활약했는지 조사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두 가지 모두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대담록들은 모두 그리 많이 보존되지 않았다. 보아하니, 어떤 열성적인 청취자가 노년의 장로 입에서 들은 내용을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수년간 수도 생활을 하며 기독교적 완덕의 모든 단계를 거치고, 신성한 은총의 도움으로 필멸의 인류가 도달할 수 있는 성소의 가장 높은 경지에 오른 인물이었다. 이 대담의 저자는 복자 아바 조시마로 불린다. 기록자에 대해서는 그가 아바 조시마의 단골 청중 중 한 명이었으며, 아마도 요르단 강가에 위치한 아바 조시마가 살던 수도원의 수도사였을 것이라는 점만 암시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복자 아바 조시마는 도대체 누구인가? 이 문제에 대해 오랫동안 꼼꼼히 조사한 끝에, 마침내 내 견해는 다음과 같이 정리되었다. 즉, 이 대담의 저자는 바로 그 유명한 조시마로, 그는 하늘로부터 선택받아 성녀 회개자 이집트의 마리아가 직접 전하는 삶의 방식을 듣고, 이 경건한 어머니에게 마지막 조언을 전하며 장례를 치르기 위해 파견된 자이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견해를, 이 가르침을 전하는 아바 조시마의 생애 중 일부 상황이, 성녀 마리아 이집트인을 직접 만나 그녀에 대해 이야기했던 아바 조시마의 생애 상황과 유사하다는 점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1. 성녀 마리아 이집트인의 생애에 관한 전승에 따르면, 아바 조시마는 어린 나이에 어느 수도원에 입회하여 그곳에서 53년을 지냈으며, 그 후 하늘로부터 특별한 계시를 받고 요르단 강 인근의 수도원 중 한 곳으로 옮겨갔고, 그곳을 떠나던 중 성녀 마리아를 보았다고 한다. 또한 이 대화록들에서는 이를 전한 아바 조시마가 이전에 티레에 있는 어느 수도원에서 살았다고 언급되어 있다(24편); 그 후 이 대화록들은 그가 네아폴리스(사마리아, 14편)를 지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마지막으로 성 게라시모의 수도원(2편)에서에서 그를 볼 수 있게 해준다. 후자의 언급들은 명백히 전자를 해석해 준다.

2. 성 마리아에 관한 전설에서 아바 조시마에 대해, 그가 영적 경험이 풍부하여 자신의 수도원뿐만 아니라 가까운 곳과 먼 곳의 많은 이들이 그에게 조언을 구하러 찾아왔다고 기록되어 있다(2항 – 그리스어 원문). 그는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오직 말하기만 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성 마리아에 관한 전설도 그가 직접 쓴 것이 아니라, 성 소프로니우스가 이를 글로 기록하기 전까지 형제들 사이에서 전해지던 내용을 구두로 전한 것이다. 이 가르침들을 전한 이 역시 마찬가지였음을, 그 서술 방식 자체가 증명해 준다: 사람들이 그에게 묻자 그는 대답했을 뿐이다. 그의 스물아홉 번째 대담은 성 게라시모의 수도원에서 이루어졌다. 다른 모든 대담들도 바로 그곳에서 전해 듣고, 그의 가장 가까운 제자 중 한 명이 기록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3. 가르침을 전한 아바 조시마는 교부들의 말씀을 인용하는 것을 좋아했으며, 가장 오래된 장로들의 말을 모두 인용했는데, 게다가 그 당시 그들에 대한 기억이 아직 생생할 때였다. 이는 4세기 말과 5세기 초를 가리킨다. 마리아 이집트 여사는 약 430년에 선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바 조시마는 요단강 인근의 수도원으로 옮겨갔는데, 대략 70세 무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이 수도원에서 30년 정도를 지냈으며, 10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5세기 전반에 살았던 사람에게는 4세기의 장로들의 말씀이 생생하게 기억되었을 수 있다. 이러한 단서들은 대담의 저자를 규명하는 데 동의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대담이 작성된 시기와 작성 방식도 결정해 줍니다. 아바가 말했고, 영적 교훈을 갈망하는 제자가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대담은 “아바 조시마가 말하거나, 말하거나, 이야기했다”는 문구로 시작됩니다. 대화가 많이 이루어졌듯이, 그만큼 많이 기록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대화록들은 『영적 정원』(리모나리온)의 편찬자인 요한 모스크스가 보고 읽었던 발췌문으로 보인다. 존경받는 조시마의 기념일은 4월 4일이다. 미그네(Migne)가 편집한 『교부학』(Patrologia)에는 이 대담들이 제78권에 수록되어 있다. 또한 성 사바 팔레스타인 수도원의 필사본 『파테리콘』에도 포함되어 있으며, 제1장의 끝부분에 부록 형태로 실려 있다. 필사본에서는 대담들이 아무런 구분 없이 나열되어 있다. 인쇄본에서는 14개로 구분되어 있으나, 일부 단원에는 한 번 이상의 대화가 포함되어 있다. 번역 시에는 각 가르침과 각 이야기를 별도의 항목으로 구분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판단되었다. 인쇄본에 모든 대화가 수록되어 있지 않고, 수록된 것 중 일부도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조치가 더욱 필요했다. 그 결과 총 31개의 장으로 나뉘게 되었다.

 

복자 아바 조시마의 대담

1. 입에 십자 성호를 긋고, 복자 조시마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하였다. “하나님 말씀이 육신을 입으심으로, 그분을 믿고 신봉하는 이들에게 위대한 은총을 베풀어 주셨다.” 우리 시대에도 원하기만 한다면 지금부터 믿음을 갖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의지가 원하고 은총이 작용한다면,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온 세상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후 그는 손에 닿는 대로, 아마도 짚 한 올이나 나무 조각, 혹은 그 밖의 하찮은 것을 집어 들고는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이것 때문에 다투거나 논쟁하고, 원한을 품거나 슬픔에 잠기는 사람이 있다면, 과연 진정으로 이성을 잃은 자 외에 누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람, 즉 하나님 안에서 삶을 잘 살아가며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설령 실제로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다 해도, 이 짚 한 올과 마찬가지로 온 세상을 동등하게 여기지 않겠는가? 내가 늘 말하듯이, 소유하지 않는 것은 해롭지 않지만, 집착하며 소유하는 것은 해롭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 중에서 우리에게 몸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다는 것을 누가 모르겠는가? 그러니 때가 되면 심지어 몸조차도 소홀히 하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하물며 몸 외에 우리가 가진 다른 것들은 더더욱 그러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자신의 물건을 무분별하고 함부로 내팽개쳐서는 안 되며, 마찬가지로 자신을 가리지 않고 죽음에 내던져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정신을 잃은 자에게만 해당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가 요구할 때를 기다려, 그때 그런 일에 대비해야 한다. 이 말을 하면서 그는 채소를 가꾸던 한 형제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그가 씨를 뿌리지 않았는가? 수고하지 않았는가? 수확하지 않았는가? 거름을 주지 않았는가? 그러나 그는 무분별하게 뽑아내거나 버리지 않았으며, 마치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대했다.” 그래서 그를 시험해 보려는 의도로 한 노인이 찾아와 채소를 뽑아내기 시작했을 때, 그는 노인의 눈에도 띄지 않게 숨어 있었다. 그리고 단 하나의 뿌리만 남았을 때, 그에게 말했다. “원하신다면, 아버지, 이것만 남겨 주십시오. 그것으로 잔치를 차리겠습니다.” 이를 통해 그 성자는 그가 채소의 종이 아니라 참된 하나님의 종임을 깨닫고 그에게 말했다. “하나님의 영이 네 안에 머무르시도다, 형제여.” – 만일 그가 채소에 집착을 가지고 있었다면, 즉시 슬픔과 당혹감으로 이를 드러냈을 것이지만, 그는 마치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대했음을 보여주었다. 아바 조시마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악령들은 이러한 경우들을 눈치챈다. 누군가가 사물에 대해 무감각하게 대하며, 그것을 잃는다고 해도 동요하지 않는 것을 보면, 그들은 그가 이 땅을 걷고 있지만 그 안에는 세상의 지혜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2. 의지의 열망에 모든 힘이 있다. 한 시간 동안의 뜨거운 의지는, 그것이 없는 상태에서 오랫동안 수고한 것보다 하나님께 더 큰 기쁨을 드릴 수 있다. 나태하고 게으른 의지는 아무런 효과도 내지 못한다.

3. 악령들은 누군가가 모욕과 치욕, 손실 및 온갖 다른 불쾌한 일들을 당하면서도, 그런 일을 당했다는 사실 자체보다는, 당하고도 용감하게 견디지 못했다는 사실에 대해 슬퍼하는 것을 보면 두려워한다: 이는 그들이 이를 통해 그가 참된 길에 들어섰으며, 하나님의 계명을 온전히 따르려는 확고한 소망을 가지고 있음을 깨닫기 때문이다. – 이에 아바 조시마는 성 파코미우스가 어떻게 행동했는지 떠올렸다. 그의 형이 “허영에 휩쓸려 수도원을 확장하는 것을 그만두라”고 꾸짖었을 때, 성 파코미우스는 하늘에서 내려온 명령에 따라 그렇게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 말을 들었을 때, 마치 선한 일을 옹호하는 것처럼 분노가 치밀어 올랐으나, 그 당시에는 형에게 반박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밤이 되어 마음속의 불쾌한 감정이 가라앉자, 그는 자신의 작은 기도실로 들어가 울며 기도하기 시작하며 이렇게 말했다. “오 하나님! 내 안에는 여전히 육신의 생각이 가득하고, 나는 여전히 육신에 따라 살고 있습니다. 아, 불쌍한 나여! 성경(로마서 8:13)에 기록된 대로, 나는 ‘죽어야 할 자’입니다. 그런 고행과 마음의 준비 끝에, 비록 선한 일이라 할지라도 다시 분노에 휩쓸리고 맙니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기사 제가 끝까지 멸망하지 않게 하소서! 만일 주님께서 나를 선 안에서 온전히 굳건히 세워 주시지 않으시고, 원수가 내 안에서 비록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틈을 찾아낸다면, 나는 그의 포로가 될 것이니,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되 한 가지에 범하면 모든 것을 어긴 것이 되느니라”(야고보서 2:10). 그러나 주님께서 그 크신 자비로 저를 도와주신다면, 저는 마침내 주님의 성도들의 길을 걷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며, 항상 “앞을 향해 나아가며”(빌 3:13) 원수 그 자체를 마땅히 수치를 당하게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주님, 제가 먼저 제 자신과 원수를 이기지 못한다면, 주님께서 저와 함께 이 삶을 살아가도록 부르실 분들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그는 이런 기도로 밤새도록 지냈고, 날이 밝을 때까지 울며 이러한 말을 되풀이했습니다. 그리고 수확철이라 그곳이 매우 무더웠던 탓에, 그의 발밑에는 땀으로 인해 늪이 형성되었습니다. – “이것이 참으로 놀랍도다.”라고 복자 조시마가 말했습니다. “그의 눈물은 끝이 없었으니, 온 세상이 죽은 것과 다름없을 정도로 오직 이 일에만 전념하는 그처럼 뜨거운 의지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구하는 온갖 복을 주시지 않으시겠는가?”

4. 아바 조시마는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군가 자신을 모욕하거나, 해를 끼치거나, 비방하고 중상모략하거나, 그 밖의 어떤 악행을 저지른 사람을 떠올리며 그에 대한 음모를 꾸미면, 그는 마치 악마들처럼 스스로에게 중상을 가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때 그를 중상모략하기 위해서는 그 자신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가? ‘음모를 꾸민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 그를 은인이나 의사로서 기억하지 않는다면, 그에게 극히 부당하게 대하는 것이다. 그는 네가 앓고 있는 그 정욕을 밖으로 끌어내어 치유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는 그를 그리스도께서 네게 보내신 의사로서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는 그분의 이러한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모든 것을 참아내야 한다. 만일 네가 이를 마땅히 활용하지 못하고 네 악한 정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 책임은 주 하나님께 있지 않다. 네가 고통받는 바로 그 사실이 네 영혼이 병들었다는 증거이다. 네가 병들지 않았다면, 고통받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이를 통해 네 병의 경과를 알게 된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하며, 그로 인해 겪은 고통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보내신 치유의 약으로 사랑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네가 감사하기는커녕 모욕을 느끼고, 반항하며, 불평하고, 그에 대항하여 음모를 꾸민다면; 그것은 마치 주 예수님께 “주님께서 나를 고쳐 주시기를 원치 않습니다. 주님의 치료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습니다. 내 상처 속에서 썩어가고 싶고, 악마들에게 복종하고 싶습니다. 나는 주님을 알지 못합니다. 그분이 누구이기에 내가 그분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까(출 5:2)? 결국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실 것인가?” – 주님께서는 우리의 악함에 자비로우시어, 그것을 치유하기 위한 계명, 즉 소작과 정화 같은 것들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치유를 원하고 추구하는 사람은, 비록 고통스럽더라도 침묵을 지키며 의사가 자신에게 부과하는 것을 참아내야 합니다. 몸이 아픈 이도 절개나 소작을 견디거나 정화제를 복용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는 않지만, 이것 없이는 병을 낫게 할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이 작은 고통을 통해 강한 내적 혼란과 장기적인 질병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확신으로 의사의 손에 자신을 맡깁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소작자’는 바로 상처와 해를 입히는 자이다.

5. 그분은 또한 이렇게 말씀하셨다. “유혹과 악한 생각을 없애라. 그러면 성인은 단 한 명도 남지 않을 것이다.” 구원을 주는 유혹을 피하는 자는 영생을 피하는 것이다. 어떤 성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인 순교자들에게 그 관을 안겨준 이는, 그들을 고문한 자들 외에 누가 있겠는가? 성 스테파노에게 그를 둘러싼 그 영광을 베푼 이는, 그를 돌로 쳐 죽인 자들 외에 누가 있겠는가?” – 여기에 또 다른 성인의 말씀을 덧붙이며,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를 비방하는 자들을 책망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나의 은인으로 부르며 존경한다. 또한 내 허영심 많은 영혼에게 불명예의 치료를 베푸시는 영혼의 의사께서는, 언젠가 내 영혼에게도 ‘바빌론을 치료하였으나 낫지 못하였도다’ (예레미야 51, 9); 또 다시: ‘내가 너희 자녀들을 모으고자 얼마나 원하였는지, 마치 암탉이 날개 아래로 자기 둥지를 모으듯이, 그러나 너희는 원하지 않았느냐? 그러므로 너희 집은 텅 비게 될 것이다’ (누가복음 13, 34. 35).

6.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에바그리우스는 주님께서 그를 책망하시며 “너는 허영병에 걸렸으니, 내가 너를 정화시키기 위해 불명예라는 치료법을 내렸으나, 너는 낫지 않았다”라고 말씀하실까 두려워했습니다. – 그러니 우리를 책망하는 자 외에는 아무도 우리에 대해 솔직한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자. 마음과 속을 살피시는 주님께서는, 설령 모든 사람이 우리를 칭찬하고 아첨한다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모든 것이 책망과 비난, 모욕을 받을 만하다는 것을 아십니다. 만약 누군가 “너는 이런저런 일을 했다”고 말한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리라. “하지만 내 모든 것 중에서 과연 무엇이 선한가?” – 나를 칭찬하고 아첨하는 자들 외에는 아무도 나에 대해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나를 책망하고 깎아내리는 자들 외에는 아무도 나에 대해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나에 대한 진실을 아직 다 말하지도 않았다. 만약 그들이 내 악행의 온 바다를 다는 말할지라도, 단지 일부만을 알게 된다 해도, 그들은 내 영혼의 악취와 악취에 질려 등을 돌릴 것이다. 만일 인간의 모든 신체 부위가 우리를 책망하기 위한 혀로 변한다 해도, 나는 그들이 우리의 불명예를 온전히 표현할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모든 책망자는 단지 일부만을 책망할 뿐, 전부를 알 수는 없다. 욥이 “나는 수치를 가득 채웠도다”(욥기 10:15)라고 말하는데, 가득 찬 것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담을 수 없으니, 악의 심연에 있는 우리는 무엇을 말하겠는가? 마귀는 온갖 죄로 우리를 낮추었으니, 우리를 비하함으로 낮추는 이들에게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비하를 감사히 여기는 자들은 마귀의 머리를 꺾기 때문이다. 성부들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만약 겸손이 지옥까지 내려가더라도, 그것은 하늘까지 올라갈 것이며, 반대로 교만이 하늘까지 치솟더라도, 그것은 지옥까지 내려갈 것이다.” 누가 비천해진 자로 하여금 누군가를 향해 악한 생각을 꾸미게 하거나, 설령 누군가를 비방하게 하거나, 다른 이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게 하겠는가? 왜냐하면 겸손한 자가 무엇을 겪든, 무엇을 듣든, 그는 이를 계기로 삼아 스스로를 비방하고 낮추기 때문이다. 이때 복된 조시마는 아바 모세가 성직자들에게 제단에서 쫓겨나며 “물러가라, 에티오피아인아!”라는 말을 들었을 때, 스스로를 비하하며 “그들이 너에게 잘했다, 검은 피부야! 사람이 아니니 사람들 가운데서 다니지 마라. 그들이 잘했다.”라고 말했던 일을 떠올렸다.

7. 또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거룩하고 활동적인 스승 아바 암몬께서 말씀하신 바를 실천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것은, “네가 세상을 떠난 이유와 네가 이곳에 있는 목적을 세심하게 되새기라. 그리고 누군가 네게 슬픔을 안겨줄 때, 끊임없는 기도로 네 마음이 진정될 때까지 침묵을 지키고 단 한 마디도 내지 않도록 온갖 노력을 다하라. 그 후에야 비로소 형제에게 용서를 구하라.” 진실하고 바른 길을 사랑하는 사람은 무언가에 당황할 때면 언제나 스스로를 엄하게 책망하고 질책하며 이렇게 말하리라. “내 영혼아, 왜 미쳐 날뛰는가? 왜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동요하는가?” 바로 이것으로 네가 병들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만일 병들지 않았다면 고통받지 않았을 테니. 그러니 왜 스스로를 책망하는 것을 그만두고, 네 병을 지적해 준 형제를 책망하는가? “책망받으셨으나 책망하지 않으시고, 고난을 당하셨으나 저주하지 않으신(베드로전서 2:23) 주 그리스도의 계명을 행함과 진리로 배우라. 그분이 말씀하시고 행함으로 보여주시는 것을 들으라. “내 뺨을 상처 입은 자에게 내어주었고, 뺨을 때리는 자에게 내어주었으며, 침 뱉음을 받는 수모를 당할 때에도 내 얼굴을 돌리지 아니하였노라”(이사야 50:6). 그러나 너, 불쌍한 영혼아, 사소한 모욕과 무례, 약간의 경멸과 혐오, 비난과 중상모략 때문에, 셀 수 없이 많은 적대적인 생각을 엮어내며, 마치 악마들처럼 스스로에게 해를 끼치고 있다. 악마조차도 그런 영혼이 스스로에게 가하는 것보다 더 큰 해를 끼칠 수 있겠는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며, 그분이 우리를 위해 겪으신 고난에 대해 매일 읽지만, 정작 우리 자신은 단 한 번의 모욕도 참아내지 못한다. 진실로 우리는 바른 길에서 벗어났다.

8. 또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마푸살로만큼 오래 살더라도, 모든 성인들이 걸었던 그 바른 길을 걷지 않고, – 즉, 모욕과 부당한 손해를 당하면서도 용감하게 이를 견뎌내는 그 길을 말합니다 – 그 사람은 조금도 성공하지 못할 것이며, 계명에 감춰진 보물을 얻지 못하고, 오직 생애의 모든 세월을 헛되이 낭비할 뿐입니다. 이에 그는 덧붙여 말했다. 내가 복된 디오니시아 곁에 있었을 때, 한 형제가 그녀에게 축복으로 무언가를 청했고, 그녀는 할 수 있는 대로 무엇이든 주었다. 그러나 그가 기대했던 것만큼 많이 받지 못하자, 그는 그녀를 비방하기 시작했고, 그녀와 나에 대해 터무니없는 말을 늘어놓았다. 이 말을 들은 그녀는 화가 나서 그에게 무언가로 갚아주고 싶어 했다. 이를 눈치챈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무슨 짓을 하는 겁니까? 이렇게 하면 스스로에게 누명을 씌우고, 당신의 영혼에서 모든 미덕을 빼앗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위해 참아 주신 그 고통을, 당신은 과연 그에 걸맞게 참아내고 있습니까?” 부인, 당신이 모든 재산을 헛되이 탕진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온유함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마치 철 조각을 두들기지만 필요한 물건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대장장이와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이그나티우스 신의 사자’가 한 말을 들어보십시오. “온유함을 추구하라. 그 온유함으로 이 세상의 통치자의 모든 힘이 무너진다.” 세상을 완전히 버렸다는 증거는 어떤 일로도 동요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수많은 보물을 경멸하면서도 바늘에 집착하게 되는데, 이 집착이 그에게 혼란과 근심을 안겨줍니다. 그러면 바늘이 그에게 보물의 자리를 대신하게 됩니다. 이처럼 어떤 이는 바늘이나, 껍질이나, 망토나, 책의 노예가 되어, 더 이상 하나님의 종이 되지 못하게 된다. 지혜로운 이 중 한 사람이 잘 말했듯이, ‘마음속에 정욕이 몇 개나 있으면, 주인도 그만큼 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 마음도 있을 것이다’(마태복음 6,21). 사도 요한( )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구에게 정복당하든지, 그에게는 종이 된다”(베드로후서 2, 19). 이 말을 들은 그녀는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네가 갈망하는 하나님을 찾게 되기를 바란다.”

9. 복자께서는 또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영혼은 구원을 원하지만, 헛된 것들을 갈망하고 그것들에 신경 쓰느라 구원을 위한 수고를 피합니다. 사실 계명이 무거운 것이 아니라, 우리의 악한 욕망이 무거운 것입니다.” 가끔은 우리가 바다에서 익사하거나 강도들의 손에 잡힐까 두려워하여, 조금만 더 지나면 죽음이 닥칠 것을 알 때 모든 것을 경멸하고 기꺼이 우리 소유물을 버리곤 한다. 그러나 땅에서 조금 더 살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모든 것을 경멸하고, 모든 것을 잃더라도 강도나 바다로부터 우리 자신을 구하는 것을 행복으로 여깁니다. 게다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 푼 때문에 미쳐 날뛰던 자조차도 일시적인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서둘러 모든 것을 버리는데, 그렇다면 왜 우리는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도 그런 계산을 하지 않는 것입니까? 어째서 우리에게는 어떤 성인이 말했듯이, 바다에 대한 두려움만큼이나 강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것일까?

10.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아바는 어떤 이들에게서 들은 다음의 일화를 들려주었다. 옛날 한 보석 상인이 자녀들과 함께 배에 올랐는데, 그가 가지고 있던 수많은 보석과 진주들은 향하는 나라에서 좋은 가격에 팔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하나님의 섭리로 그는 배에서 자신을 섬기던 한 소년을 유난히 아끼게 되었는데, 그 소년을 위로해 주었고, 자신도 그 소년에게서 위로를 받으며, 자신이 먹는 것과 똑같은 음식을 그 소년에게도 주었다. 어느 날, 그 소년은 선원들이 서로 속삭이는 소리를 듣고 귀를 기울여 들으니, 그들이 그 상인의 보석들 때문에 그를 바다에 던져버리기로 결심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소식에 그는 매우 슬퍼했다. 그 후, 그는 슬픈 표정으로 그 보석 상인에게 다가와 평소처럼 그를 모시려 했더니, 상인이 물었다. “오늘은 왜 그렇게 슬퍼 보이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소년은 진실을 말할 용기가 없어 대답했다. 상인이 다시 물었다. “무슨 일이 있느냐? 솔직히 말해 보거라, 도대체 무슨 일이냐?” 소년은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선원들이 당신을 해치려고 이런저런 음모를 꾸몄습니다.” “정말인가?” 상인이 물었다. “네.” 소년이 대답했다. “그들이 서로 그렇게 합의했습니다.” 그때 상인은 자신의 아이들을 불러 말했다. “내가 뭐라고 하든 거역하지 말고 그대로 해라.” 그러고는 천을 펴 놓고 그들에게 말했다. “상자들을 여기로 가져와라.” 아이들이 가져오자, 그는 돌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꺼내 놓은 뒤 그는 말했다. “인생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이 물건들 때문에 나는 바다에 던져져, 얼마 지나지 않아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한 채 죽을 위험에 처해 있다.” 그러고는 아이들에게 명령했다. “이 모든 것을 바다에 던져버려라.” 아이들은 그의 말과 동시에 즉시 모든 것을 바다에 던져버렸다. 선원들은 깜짝 놀랐고, 그들의 사악한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이 이야기를 마친 후, 복자 아바 조시마는 덧붙였습니다. “보십시오, 그의 생각이 갑자기 어디로 향했는지, 그가 말과 행동 모두에서 어떻게 즉시 지혜로워졌는지? 그리고 이는 이 덧없는 삶을 보존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만일 죽게 된다면 이 돌들이 그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생각하며 올바르게 행동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한 계명을 지키기 위해 사소한 손실이나 결핍조차 무심코 감내하려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슬퍼해야 한다면, 우리에게 해를 끼친 자의 멸망에 대해 슬퍼해야지, 재산의 손실에 대해 슬퍼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불의한 자는 스스로 하나님 나라에서 추방되었기 때문입니다. “불의한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하리라” (고린도전서 6:9); 그러나 의롭지 못한 자인 너에게는 영생을 주셨으니, 주님께서 그러한 자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너희의 상이 하늘에서 크리라” (마태복음 5:12).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가 멸망하는 것에 대한 슬픔을 뒤로 한 채, 썩어 없어질 것들과 하찮은 것들, 멸망할 것들과 아무 가치도 없는 것들에 대한 생각을 엮어내고 있습니다. 실로 우리는 온갖 형벌을 받을 만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는 몸의 지체들로 세우셨으니, 사도가 말한 대로 “몸의 모든 지체는 많으나 하나이니라” (고린도전서 12:12)고 했습니다. 모든 것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에베소서 1:22). 그러므로 형제가 너에게 슬픔을 안겨줄 때, 그것은 마치 아픈 손이나 아픈 눈이 다른 지체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손이 우리에게 고통을 줄 때 그것을 잘라내거나 내버리지 않으며, 눈이 아플 때 그것을 파내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 지체 중 하나를 잃는 것이 우리에게 더 큰 해가 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위에 그리스도의 가장 거룩한 인장인 십자가 성호를 긋고, 성인들이 기도해 주시기를 청하며, 그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며, 이와 함께 콜루리(안약)와 반창고를 준비하여 그것들의 도움으로 아픈 지체를 치유하려 합니다. 그러니 네가 눈이나 손이 치유되어 더 이상 고통을 주지 않도록 기도하듯이, 네 형제를 위해서도 그렇게 기도하라.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그러한 영적 고통을 겪는 것을 보고도, 그들을 위해 슬퍼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을 대적하여 기도한다. 이는 참으로 자비로운 마음을 갖지 못한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이다.

11. 복된 분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자비의 보물을 쌓아 둔 자는, 사랑과 연민으로 먼저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고 유익을 얻으며, 그 다음에 이웃에게도 유익을 주지만, 반대로 악의는 그것을 품은 자 자신을 먼저 상처 입히고 해친다.” 비록 그가 이웃의 재산이나 명예, 심지어 육체 자체에 해를 끼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사실 그는 스스로 영원한 생명을 잃고 있는 것이다. 이에 아바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덧붙이셨다. “영혼에 해롭지 않은 것은 사람에게도 해롭지 않다.”

12. 그는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바, 우리에게 명해진 것이 너무 많아서,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지키지 않는지 따져보기 시작하면 마음이 흐려집니다.’” 내가 그에게 대답했다. “그로 인해 당황하지 마라. 다만 이것을 마음에 새겨 두어라. 만일 네가 사물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어떤 미덕이든 편안히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들 때문에 다투지 않으면 원한을 품지 않게 될 것이며, 그러면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네게 무슨 어려움이 되겠느냐? 땅을 파는 것과 같겠느냐?” – 그러니 인내의 길을 걸어가라. 재산의 부당한 손실을 기꺼이 감수하고, 모욕을 당한 것에 대해 감사하라. 그러면 너는 성 사도들의 제자가 되는 것이다. 그들은 재판소에서 매를 맞고 돌아오면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욕을 당할 자격을 얻게 된 것을 기뻐했다”(사도행전 5,41). 그들은 순결하고 거룩한 자들로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모욕을 받았으나,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로 인해 모욕을 당해야 한다. 비록 아무도 우리를 모욕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불명예스럽고, 저주받은 자들이다. “주의 계명을 저버리는 자는 저주받았나니”라고 선지자가 말하듯이 (시 118:21).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모욕을 참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며, 모든 사람이 아니라, 내가 말했듯이 오직 거룩하고 깨끗한 자들에게만 주어진 일입니다. 우리와 같은 사람들의 임무는, 우리의 악한 행실 때문에 당하는 것이 정당함을 고백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모욕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자신의 더러운 행실을 알면서도, 자신이 겪는 일이 마땅한 벌임을 알면서도, 앉아서 양심을 속이며 이런저런 생각을 꾸며내며 “그가 나에게 이런저런 말을 했고, 나를 모욕하고 비방했다”고 말하는 그 영혼은 가련한 자니, 스스로에게 누명을 씌우고 스스로를 위해 악마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화가들에게 일어나는 일이 영혼에게도 똑같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거기서 대가(大師)가 제자에게 기술을 가르친 뒤, 그를 혼자서 작업하게 내버려 두고 더 이상 곁에 앉아 있을 필요가 없어지며, 단지 때때로 그가 게을러지지 않았는지, 혹은 작품을 망치지 않았는지 살피기만 하듯이: 마찬가지로 악마들도, 순종적이고 악한 생각을 쉽게 받아들이는 영혼을 보게 되면, 그 영혼을 이 사탄의 기술에 내맡기고, 더 이상 그 곁에 앉아 있을 필요가 없다고 여깁니다. 그 영혼 스스로가 자신을 비방하기에 충분하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며, 단지 때때로 그 영혼이 방종에 빠지지 않았는지 확인하러 올 뿐입니다.

13. 아바는 또한 이렇게 말하였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더 편한가, 아니면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는 것이 더 기쁜가? 그리스도의 계명에 어떤 위안이 없겠는가? – 그러나 의지는 그 계명을 이행하는 데로 향하지 않는다. 만일 향했다면, 하나님의 은총의 도움으로 모든 것이 그에게 쉬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의지의 작은 선한 끌림만으로도 하느님의 도움을 이끌어낸다는 것을, 내가 자주 말했듯이, 신성한 안토니우스도 이렇게 말합니다. “덕을 쌓기 위해서는 오직 우리의 소망과 경험만 있으면 됩니다. 천국을 얻기 위해 먼 곳으로 떠날 필요도, 덕을 위해 바다를 건널 필요도 없습니다.” – 온유하고 겸손한 자는 얼마나 큰 평안을 누리는가! 진실로 “온유한 자들은 땅을 상속받고, 풍성한 평안을 누리리라”(시 36,11).

14. 복자께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번은 나, 한 형제, 그리고 평신도 몇 명이 (사마리아의) 나폴리 길을 따라 가다가 세관소가 있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관습상 여기서 세금을 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던 평신도들은 아무 말 없이 세금을 냈지만, 나와 함께 있던 형제는 그들에게 “감히 수도사들에게 세금을 요구하다니?!”라고 반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들은 나는 그에게 말했습니다. “형제여, 네가 무슨 짓을 하는 것이냐? 네가 그에게 마지못해라도 나를 성자로 대접하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 만약 그가 네 선한 뜻과 겸손함을 보고 부끄러워하며 “미안합니다, 받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다면 모를까. 그런데 네가 그렇게 행동한 것은 온유하고 겸손한 스승의 제자답지 않았다. 마땅히 내야 할 것을 내고, 평화롭게 지나가라.

15. 또 다른 날, 내가 거룩한 도시에 있을 때,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 중 한 명이 내게 와서 말하길, “저와 제 형제가 서로에 대해 약간의 불만을 품게 되었는데, 형제가 저와 화해하려 하지 않습니다. 부디 중재해 주시고, 그와 이야기해 주십시오.” 나는 기꺼이 그 요청을 받아들였고, 그 형제를 불러 사랑과 화해로 이끌 수 있는 말을 해 주었다. 그는 납득한 듯했으나, 곧이어 내게 이렇게 말했다. “아니요, 그와 화해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두고 화해하지 않겠다고 맹세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네 맹세의 뜻은 이렇다. ‘주님의 거룩한 십자가를 두고 맹세하노니, 주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고 주님의 원수인 마귀의 뜻을 행하리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어떤 악한 일을 하겠다고 한 말을 꼭 지켜야 할 의무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 그렇게 하기로 결심한 것에 대해 회개하고 통회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두십시오. – ‘하나님을 모신’ 바실리우스가 말했듯이; 만약 헤롯이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맹세를 지키지 않았더라면, 그리스도의 세례자 요한을 참수하는 큰 죄에 빠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나는 그에게 주님께서 성 베드로의 발을 씻어 주시려 하셨을 때, 성 베드로가 맹세하는 이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열의를 보이며 “절대 안 됩니다”라고 말했으나, 나중에는 이를 허락했을 뿐만 아니라 더 큰 것을 원하게 되었다는 성복음서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요한복음 13장).

16. 복된 분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분노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묻기에,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분노를 다스리는 첫걸음은 분노가 가라앉을 때까지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이에 대한 본보기를 아브바 모세에게서 볼 수 있는데, 그는 장로들이 그를 시험하고자 모임에서 서로 “이 에티오피아인이 왜 우리 모임에 들어오나?”라고 말할 때, 이를 듣고도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모임이 끝난 후 어떤 이들이 그에게 당황했는지 물었을 때, 그는 “당황하여 말하지 못했습니다”(시편 76:5)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것은 초창기의 일이었다. – 그 후 그가 성숙해져 – 집사로 서품받았을 때는, 침묵할 뿐만 아니라 당황하지도 않았다.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 대주교가 그를 시험해 보려고 성직자들에게 말했다. “아바 모세가 제단으로 들어오면 그를 밖으로 내보내고, 그를 따라가며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엿들어 보라.” 그가 제단에 들어오자 성직자들은 그에게 말했습니다. “나가거라, 검은 피부의 에티오피아인아.” 그러자 그는 나가며 스스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이 너에게 잘 대했다. 사람이 아닌데 왜 사람들의 모임에 들어가는가?” (아바 모세에 관한 전설, 3, 4항). 이제 그는 조롱을 받고도 침묵했을 뿐만 아니라 당황하지도 않았고, 당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를 책망하기까지 했다. 당황하고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은 미숙하고 초보적인 이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일이며, 당황하지 않는 것조차도 완성된 이들의 몫이다. 선지자가 말했듯이: “나는 준비되었고 당황하지 않았다”(시편 118:60).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위대한 미덕이다. –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 분노가 솟아날 때 자신을 이겨내고 침묵하도록 노력하지 않을 때, 즉 이 미덕이 우리에게 너무 높고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큰 태만 때문에, 가장 초보자들보다도 더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우리는 심지어 스스로를 다스리는 이 수고를 시작하여, 이를 통해 하나님의 은총을 도움으로 끌어들이고자 하는 소망조차 보이지 않거나, 겉으로는 소망을 보이는 듯해도 그것은 나태하고 확고하지 않으며,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은혜라도 받을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17. 이에 대해 복된 분은 다음과 같이 덧붙이셨습니다. 우리 삶의 일은 이렇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의지로 수고를 기울이면, 은혜로부터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얻게 됩니다. 농부가 비록 조금만 뿌리더라도, 하나님께서 그의 수고를 축복하시면 많은 것을 얻게 되는데, 이는 이삭에 대해 기록된 대로입니다. “이삭이 그 땅에 씨를 뿌리니, 그 해에 보리 열매를 백 배나 거두었으니, 여호와께서 그를 축복하셨음이라”(창 26:12):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우리 의지의 수고를 축복해 주신다면, 우리는 수고 없이, 억지로가 아니라 기쁨으로 모든 일을 행하게 될 것이며, 모든 것에서 유익을 얻게 될 것이다. 자기 강요와 인내로 드리는 기도는 가볍고, 순수하며, 달콤한 기도를 낳는다. 그리고 자기 절제를 동반하는 기도는 의지의 행위이며, 기쁨 속에서 이루어지는 기도는 은혜의 행위이다. 예술을 익히는 일에서도 이와 같은 것을 볼 수 있지 않은가? 예술을 배우려는 사람은 굳은 의지를 가지고 시작하더라도, 처음에는 힘들게 작업하며 한 부분을 다른 부분과 잘 조화시키지 못하고, 종종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그러나 낙담하지 않고 다시 일을 시작하며, 설령 또다시 망치더라도 그 일을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스승에게 자신의 의지의 확고함을 보여준다. 만약 그가 낙담하여 노력을 포기한다면,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겠지만, 반면, 자주 망쳐도 일을 포기하지 않고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히 노력하고 작업한다면, 마침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 기술을 익히게 되어 모든 작품을 조금씩 지치게 여기지 않고 즐거움으로 만들어 내기 시작하며, 그로 인해 얻는 것이 자신의 생계를 충분히 꾸려갈 수 있을 만큼의 성공을 거두게 된다. 마찬가지로 영적 삶의 일에서도 미덕을 실천하기로 결심한 사람은, 당장 그 미덕에서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비록 처음에는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을지라도, 시작한 일에서 물러서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성공을 거둘 수 없으니, 어떤 기술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그러하듯이 끊임없이 새로운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가 이처럼 낙담하지 않고 인내심을 가지고 수고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의지의 수고를 보시고, 강요 없이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이다. 바로 이것이 아바 모세가 말한 바의 뜻이다. 덕을 얻고자 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힘은, 실수하여 넘어질 때 낙담하지 않고, 다시금 그 일에 대한 열정과 노력을 되찾는 데 있다.

18. 그는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미덕에는 수고와 시간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진심으로 갈망하는 마음도 필요하며,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의지에 협력해 주시지 않으시면, 우리의 수고는 헛된 것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농부가 자신의 땅을 갈고 씨를 뿌렸으나, 하나님께서 그 씨앗을 자라게 하지 않으시면 헛수고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우리의 기도와 간구를 필요로 합니다. 오직 그것들을 통해서만 우리는 우리를 위해 중보해 주시는 하나님의 도움을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기도에 소홀히 한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의 수고를 돌보시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기도한다고 해도 게으르고 산만하게 하거나, 기도 중에 금방 지루해한다면, 내가 항상 여러분에게 말해 왔듯이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의지를 살피시고, 그에 따라 은사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아바 모세는 예전에 강도 두목이 아니었습니까? 그는 수많은 죄악을 저질러, 자신의 악한 성품 때문에 주인으로부터 숨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용감하게 그리고 그토록 뜨거운 의지 로 일에 착수했기에, 그가 어느 정도에 이르렀는지는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전기를 쓴 저자가 말하듯이, 그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 가운데에 포함되었습니다. 반면 우리는, 비록 세속을 버리는 초기에 열정적인 헌신을 보이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게으름으로 인해 그 열정을 잃어버리고,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 대신 마음을 식게 하고 헛되며 아무 가치도 없는 것들에 빠져들곤 한다; 게다가, 만약 우리가 선한 일을 하나라도 행하게 되면, 마치 자신의 힘으로 한 것처럼 그 공을 자신에게 돌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가진 것은 네 것이 아니니, 받은 것이다. 만일 네가 받은 것이라면, 무엇을 자랑하느냐? 마치 받지 않은 것처럼”(고린도전서 4:7).

19. 또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미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우리 자신의 유익과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사용한다는 것을 보셨더라면, 성스러운 족장들에게 베풀어 주셨던 것과 같은 은혜를 우리에게도 베풀어 주실 수 있도록 가난해지시거나 힘이 빠지신 적이 없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제멋대로인 탓에 주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적고 드문 은사들을 오히려 우리에게 해가 되도록 사용하고 있음을 보시니, 자비로우신 분으로서 우리가 결국 파멸에 이르지 않도록 더 큰 은사들을 우리에게 맡기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우리가 이미 주신 적은 것을 우리 유익을 위해 사용하고 있음을 보셨다면, 앞서 말한 대로 분명히 더 큰 것을 우리에게 베풀 수 없으셨을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가 늘 말하듯이, 선하신 분이시기에 우리에게 자유와 모든 것에서 유익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셨지만, 우리는 편애와 남용을 통해 하나님의 은사를 훼손하고 스스로 그 은사를 박탈하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선한 것들을 우리의 악한 마음과 악한 성품으로 인해 우리 자신에게 해가 되도록 돌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20. 복된 분은 또한 자주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무도 신실한 영혼에게 해를 끼칠 수 없으며, 그 영혼이 겪는 모든 고난은 오히려 그 영혼에게 유익이 될 것이다.” 일꾼은 비록 수고로 인해 지칠지라도, 수고 후에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기꺼이 일을 계속하지만, 불신자는 괴로운 일을 마주할 때 자신의 불신 때문에 마치 지옥에서 고통받는 것처럼 괴로워한다. 모든 고난 속에서도 신실함을 지키며, 인내에 대한 보상을 확신하며 기다리는 신실한 자는 거기서 큰 위로를 얻는다. 그러나 믿음이 없어 주님께로부터 무엇을 받을 수 있겠는가? 그런 자가 무슨 위로를 가질 수 있겠는가? 사소한 슬픔을 마주할 때조차 마음속에서 끙끙 앓으며, 속으로 “그가 나에게 말했지만, 나도 그에게 할 말이 있다”고 떠들어대며, 원한을 품고 실현할 수 없는 일들을 꾸미지만, 정작 그것을 실행에 옮길 힘은 전혀 없다. 사람들이 꾸미는 모든 일을 다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요. 오직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만이 이루어지는데, 그것조차도 오직 그분만이 운명을 통해 아십니다. 종종 어떤 이는 다른 이에게 해를 끼치려고 꾀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를 허락하지 않으시면 그의 노력은 헛되며, 이를 통해 오직 인간의 자유 의지만이 시험받을 뿐입니다. 성스러운 족장들에게 해를 끼치려고 얼마나 많은 음모를 꾸몄는지 모르나, 하나님께서 이를 허락하지 않으셨기에 아무도 그들에게 해를 입힐 수 없었습니다. 기록된 바와 같이: “사람이 그들을 해치게 내버려 두지 아니하시며, 왕들이 그들을 비난하지 못하게 하셨나니, 내 기름 부음 받은 자들을 건드리지 말며, 내 선지자들에게 악을 행하지 말라” (시 104, 14, 15).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의 풍성함을 나타내시기를 원하실 때, 그때는 가장 무자비한 자들의 마음조차 자비로 이끄시니, 다니엘서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환관장의 눈에 은혜와 호의를 얻게 하셨다”(단 1, 9)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갈망함으로써 그분의 은사를 받을 준비를 진정으로 갖춘 영혼은 복이 있나니, 이는 그분께서 그러한 영혼을 어떤 일에서도 버리지 않으시고, 무지함으로 인해 그분께 구하지 않은 일까지도 모든 면에서 보호해 주시기 때문이다. 지혜로우신 분이 잘 말씀하셨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그늘 아래 머무르느니라”(시 30:21). 사울이 복된 다윗을 죽이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습니까? 무엇을 하지 않았습니까? 어떻게든 해내지 못했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 다윗을 보호하셨기에 사울의 모든 계략은 헛된 것으로 남았고, 그뿐만 아니라 사울 자신도 종종 성자의 손에 넘겨졌으나, 성자는 그에게 맹렬하고 복수심에 찬 악의를 품지 않으시고 그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21. 어느 날 아바에게 물었다. “다른 사람들이 모욕하고 비방할 때 화를 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가 대답했다. “마음속으로 자신을 가장 하찮은 존재로 여기는 사람은 어떤 모욕에도 동요하지 않는다. 아바 피멘이 말했듯이, ‘자신을 낮추면 평안을 얻게 될 것이다.’”

22. 아바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와 함께 살며 나로부터 스키마를 받은 형제 중 한 명이 있었는데, 나는 그에게 온갖 미덕을 가르치려고 애썼고, 그가 연약한 체질이라 때로는 그의 연약함을 감안하여 너그럽게 대하기도 했다. 어느 날 그가 내게 말하였다. “나의 아바여! 저는 당신을 무척 사랑합니다.” 내가 그에게 대답했다. “나를 내가 그를 사랑하는 만큼 사랑하는 사람은 아직 만나본 적이 없다. 지금 네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니, 나는 그 말을 믿는다. 하지만 만약 나에게서 어떤 불쾌한 일을 겪게 된다면, 너는 여전히 같은 마음을 유지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네게서 어떤 고통을 겪더라도, 항상 너에게 변함없는 마음을 품을 것이며, 그 어떤 것도 내가 너를 사랑하는 마음을 꺾을 수는 없다. 그때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 그는 무슨 일이 생긴 건지 모르겠지만, 나에 대해 많은 말을 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수치스러운 말까지 했으며, 나는 그 모든 것을 들었다. 그때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는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며,[80] 내 허영심 많은 영혼을 치유하러 보내진 자다. 그러한 사람들을 통해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은, 자신을 기쁘게 하는 자들 때문에 잃어버린 것을 다시 얻을 수 있다. 그는 나의 진정한 은인이다. 그리고 나는 그를 항상 나의 의사이자 은인으로 기억했다. 그의 말을 나에게 전해 준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는 내 겉으로 드러난 결점들만 알았을 뿐, 그것도 전부가 아니라 일부일 뿐이다. 그러나 내 숨겨진 결점들은 셀 수 없이 많다.” 시간이 지나, 그는 (팔레스타인의) 가이사랴에서 나를 만났다. 다가와 평소처럼 나를 껴안고 입을 맞추었고, 나도 그를 껴안고 입을 맞췄으니, 마치 우리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 험담들 이후에도, 그가 나를 만나자마자 그렇게 나를 껴안은 것은, 내가 모든 것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어떤 의심도, 조금의 모욕감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임에 틀림없다. 그러자 그 자신이 내 발 앞에 엎드려 내 발을 껴안으며 말했다. “주님을 위하여, 나의 아버지여, 제가 당신에 대해 그토록 많은 나쁜 말을 한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나는 그를 다정하게 입맞추며 이렇게 말했다. “네가 나를 ‘정말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내가 ‘나를 내가 그를 사랑하는 만큼 사랑하는 사람은 아직 만나본 적이 없다’고 대답했던 것을 기억하느냐? 그리고 네게 불쾌한 일이 생기더라도, 네가 여전히 변함없이 나 역시 네게서 어떤 고통을 당하더라도, 항상 너에게 변함없이 대할 것이며, 그 어떤 것도 내가 너를 사랑하는 마음을 꺾을 수 없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느냐?” – 네 마음이 확신하거라. 네가 말한 것 중 내게 숨겨진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어디서 누구에게 말했든 나는 모두 들었으나,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한 적이 없으며, 그 누구도 나를 설득해 나쁜 말을 하게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또 이렇게 말했노라: ‘그가 말하는 것은 진실이며, 사랑에서 우러나온 말이다.’ 또한 너를 내 사람으로 여기며, 내 기도에서 너를 빠뜨린 적이 한 번도 없었고, 너에 대한 나의 사랑을 더욱 확실히 보여주기 위해, 한때 내 눈이 심하게 아팠을 때, 너를 떠올리며 그 위에 거룩한 십자가의 표식을 얹고 이렇게 말했던 사실을 네게 밝히겠다: “주 예수 그리스도여! 그의 기도를 위하여 나를 고쳐 주소서!” – 그러자 나는 즉시 치유되었습니다.

23. 또한 복자는 자주 이렇게 말하곤 했다. “우리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남들에게 사랑받고 존경받을 수 있는지 모르지만, 모든 이치를 잃어버렸다. 형제가 화를 내거나 슬퍼할 때, 누군가 조금만 참아 준다면, 그는 곧 정신을 차리고, 그 사람이 자신을 위해 얼마나 참아 주었는지 알게 되면, 자신의 영혼까지도 그를 위해 바칠 것이다.” 이 말을 하다가 한 번은 복자가 어떤 형제를 떠올리며, 그 형제가 자신에게 말했던 이야기를 전했다. 그 형제는 매우 온유한 아바를 모시고 있었는데, 그의 위대한 덕행과 행한 기적들 때문에 온 나라가 그를 하나님의 천사처럼 공경했다고 했다. 어느 날, 그 형제는 원수의 유혹에 이끌려 그에게 다가가 모든 사람 앞에서 극도로 그를 비방하기 시작했다. 노인은 그 자리에서 침착하게 서서 그의 입을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형제여, 네 입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구나!” 그러자 그 형제는 더욱 격분하여 소리쳤습니다. “알고 있다, 이 무의미하고 배가 부른 늙은이여, 네가 온유한 척하기 위해 그런 말을 하는 것임을!” 이에 장로는 대답했다. “참으로 그러하도다, 나의 형제여. 네가 말하는 바는 옳다.” – 그 후 어떤 이가 장로에게 물었다. “설마 당황하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의 장로님?” “아니오,” 그가 대답했다. “그러나 내 영혼이 마치 그리스도께 덮여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노라.” – 이에 복자는 덧붙여 말했습니다. “진실로, 자신의 영혼의 상처를 치료해 주는 의사들을 열정적으로 따르는 사람은 그들을 감사히 여기고 공경해야 하며, 냉정하게 행동하는 사람은 그에게 천국을 선사하는 은인들을 공경해야 합니다.”

24. 복자는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아직 티르스 수도원에 있을 때, 그곳을 떠나기 전에, 덕행으로 유명한 한 장로가 우리에게 찾아왔습니다.” 우리가 성스러운 장로들의 기억할 만한 이야기와 지혜로운 말씀이 담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복된 분은 그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셨고, 마치 그 말씀들을 숨 쉬듯 하며 모든 덕행에 대한 교훈을 그 안에서 얻으셨기 때문이다), 강도들이 그에게 와서 그의 방에 있는 모든 것을 가져가겠다고 말했을 때, 그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자네들아, 마음에 드는 건 뭐든지 가져가라.” 그들이 모든 것을 챙겨 떠나며 가방 하나만 남겨두자, 그는 그 가방을 집어 들고 뒤쫓아가며 외쳤다. “자네들아! “우리 방에 두고 간 것을 가져가라!” 그러자 강도들은 그 노인의 악의 없음에 놀라, 서로 회개하며 “진실로, 이분은 하나님의 사람이다”라고 말하며 그의 방에 있던 모든 것을 돌려주었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읽자마자, 그 노인이 내게 말했다. “아바여, 이 이야기가 제게 큰 유익을 주었습니다.” 내가 그에게 물었다. “어떻게 그렇습니까, 신부님?” 그분이 대답하셨다. “한때 내가 요르단 강 인근 지역에 머물던 중, 이 이야기를 읽고 그 노인을 경탄하며 말했었지. ‘주님, 주님께서 저에게 그분들의 모습(스키마)을 따를 수 있게 허락해 주신 것처럼, 저도 그분들의 발자취를 따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그 소망이 내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그러자 이틀 뒤, 강도들이 다가와 문을 두드렸다. 나는 즉시 그들이 강도들임을 알아차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제 내 소망의 결실을 보여줄 때입니다.’ 그러고 나서 문을 열고 그들을 따뜻하게 맞이한 뒤, 등불을 켜고 그들에게 물건을 보여주며 말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주님을 믿는 만큼, 여러분에게 아무것도 숨기지 않겠습니다.” 그들이 내게 물었다. “금화가 있습니까?” “있습니다.”라고 내가 대답하며, “여기 동전 세 개가 있습니다.”라고 말하고는 그들 앞에서 그릇을 열었다. 그들은 그것을 가져가고는 평화롭게 떠났다. – “나는,”라고 복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에게 물었다. ‘그들이 그 노인이었던 분에게로 돌아갔던 것처럼, 그들도 당신에게로 돌아왔습니까?’ ‘절대로 아니오.’라고 그가 즉시 대답했다. ‘그들이 돌아올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 이에 성자는 덧붙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노인의 열심이었고, 성인을 본받으려는 그의 마음가짐이 그에게 가져다준 것은, 슬퍼하기는커녕 오히려 어떤 특별한 은혜를 입은 것처럼 기뻐했다는 점입니다.”

25. 앞서 여러분과 대화를 나누며, 복자께서 말씀하셨듯이, 화를 내는 우리 형제를 조금만 참아 주면 그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이제 이에 대해, 제가 페디아드 수도원의 수도원장인 복자 세르기오스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전해 드리고자 합니다. 그분은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때 우리가 한 성스러운 장로와 함께 길을 가다가 길을 잃은 적이 있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씨를 뿌린 밭에 들어서게 되었고, 풀을 조금 밟아버렸습니다. 마침 그곳에서 일하고 있던 농부가 이를 보고는 우리를 심하게 꾸짖으며 분노에 차서 소리쳤습니다. ‘너희는 수도사들인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느냐? “만약 너희가 눈앞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이런 짓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 그 성스러운 장로는 즉시 우리에게 말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도 아무 말도 하지 마라.” 그리고 농부에게 온유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말이 옳다, 내 아들아.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이런 짓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자 그 농부는 다시 분노하며 꾸짖었습니다. 장로는 다시 그에게 말했습니다. “네 말이 옳다. 우리가 수도사였다면 이런 짓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위하여 우리를 용서해 주시오. 우리가 너에게 죄를 지은 것을 뉘우치고 있다.” 이 말에 농부는 크게 감동하여 다가와 장로의 발 앞에 엎드리며 말했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아버지. 저를 데리고 가 주십시오.” 그리고 실제로 그는 우리를 따라왔고, 복자 세르기우스가 말하길, 수도원에 도착하여 스키마를 입었다고 한다. 아바 조시마가 덧붙이기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도움으로 성스러운 장로의 온유함과 선함이 이룰 수 있었던 일이다.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영혼, 그 영혼은 세상의 어둠과 그 부유함보다 하나님께 더 소중히 여겨지는 존재이다.

26. 아바 조시마가 또 말하기를, 어느 날 내가 복자 세르기우스와 함께 있을 때, 그가 내게 말하기를 “성경 중에서 무언가 읽어 주시오.”라고 했다. 나는 잠언을 읽기 시작했고, “나무가 많으면 불이 번지나, 다툼이 없는 곳에서는 말다툼이 그친다” (잠언 26, 20)라고 적힌 구절에 이르렀을 때, 저는 그분께 “이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분은 대답하시기를 “나무가 불꽃의 (물질적) 원인이 되는 것처럼, 나무가 부족하면 불은 금세 꺼지듯이, 정욕에도 그 나름의 원인이 있다. 누군가 이 원인을 잘라내면 정욕은 활동을 멈춘다.”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그렇다. 아바 모세가 말했듯이, 음행의 원인은 무절제하게 먹고 마시는 것, 충분히 자는 것, 빈둥거리는 것, 놀고 즐기는 것, 헛소리를 하는 것, 그리고 꾸미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다. 누군가 이 모든 것을 끊어 버리면, 음행의 정욕은 힘을 잃게 될 것이다. 또한 분노의 원인은, 그가 말했듯이, 주고받는 것(번거로운 거래를 하는 것), 자기 뜻대로 행하는 것,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는 것, 자신을 현명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것들을 끊어내는 사람에게는 분노의 정욕이 힘을 잃을 것이다. 모든 정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바로 아바 시소아가 형제가 “왜 정욕들이 나를 떠나지 않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한 말의 의미이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것들의 그릇, 즉 원인이 네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담보를 내주면, 그들은 떠날 것이다.”

27. 또 다른 때 그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욕설이 그치지 않는 분노하는 사람은, 첫 번째 짜증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를 부추겨 두 번째 분노로 몰아가는 자이다.” 분노에 불타올랐다가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잘못을 깨달아 화를 냈던 형제에게 용서를 구하는 사람은 ‘두 번 화내는 사람’이라 불리지 않는다. 그에게는 욕설이 가라앉는다. 왜냐하면 그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형제와 화해하는 순간, 그 안에는 더 이상 욕설이 자리 잡을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가 난 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분노를 더욱 부추기며, 화를 낸 것 자체보다는 화가 난 나머지 더 심한 말을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사람은 ‘두 번 화내는 사람’이라 불린다; 그에게는 다툼이 가라앉지 않으니, 분노가 가라앉은 뒤에도 원한과 적대감, 악의가 그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러한 성품에서 건져 주시고, 온유하고 겸손한 성품을 갖게 해 주시기를 바란다.

28. 그는 또한 악마의 교활함에 맞서기 위해서는 큰 주의와 적지 않은 지혜가 필요하다고 자주 말하곤 했다. 왜냐하면 악마는 때때로 아무런 이유도 없이 불안과 불만을 일으키며, 마치 당면한 상황에서 분노하는 것이 정당하고 타당한 이유가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심지어 그럴듯한 구실까지 심어주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무엇을 속삭이든, 진정으로 성인들의 길을 걷고자 하는 수도사는 어떤 분노도, 아무리 정당해 보일지라도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마카리우스가 말했듯이, “수도사는 화를 내서는 안 된다.” 또한 “이웃에게 슬픔을 주어서는 안 된다.” 이와 관련해 그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한때 나는 한 숙련된 필사자에게 나를 위해 몇 권의 책을 베껴 쓰도록 의뢰한 적이 있다. 필사를 마친 그는 나를 찾아와 이렇게 전하게 했다. “이제 다 끝냈으니, 당신이 적절하다고 여기는 대가를 보내주시고 책을 가져가십시오.” 한 형제가 이 소식을 듣고 내 이름으로 그 필사자를 찾아가 정해진 대가를 주고 책을 받아왔다. 한편, 나는 그 일이 일어난 줄도 모르고, 우리 형제를 편지와 대가를 가지고 책을 가지러 보냈다. 필사자는 이를 통해 책을 가져간 형제에게 조롱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크게 화가 나서 말했다. “반드시 가서 그를 괴롭히겠다. 나를 조롱한 것도, 내 것이 아닌 것을 가져간 것도 모두 그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 나도 이 소식을 듣고 그에게 전갈을 보냈다. “내 형제여, 우리가 책을 구하는 것은 그 책들을 통해 사랑과 겸손, 온유함을 배우기 위함이라는 것을 너도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만일 책을 구하는 그 시작 가 다툼으로 이어진다면, 나는 다투지 않기 위해 차라리 책을 갖지 않겠다. “하나님의 종은 다투는 일이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라”(딤후 2:24). 이처럼 책을 거절함으로써, 나는 그 형제에게 고의적인 괴로움을 주지 않도록 했다.

29. 어느 날 우리와 함께 앉아 영혼을 구원하는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 복자는 성스러운 장로들의 말씀을 인용하기 시작했는데, 아바 피멘이 “자신을 책망하는 자는 어디서나 평안을 얻는다”고 한 말씀에 이르렀을 때, 아바 니트리아 산의 장로가 “이 길에서 가장 큰 것을 얻으셨습니까, 아버지?”라는 질문에 답한 말씀까지 이어졌습니다. – “항상 스스로를 비난하고 책망하는 것입니다.”라고 그가 대답하자, 질문자는 “이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라고 덧붙였습니다. 이 말씀들을 떠올리며 복자께서는 “성인들의 말씀에는 얼마나 큰 힘이 있는가! 진실로 그들이 말한 것은 무엇이든, 신성한 안토니우스가 증언하듯이, 경험과 진리에서 나온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의 말씀이 강력한 이유는 실천하는 자들이 말한 것이기 때문이며, 지혜로운 이 중 한 분이 모든 이에게 명령하신 대로 ‘네 삶이 네 말을 입증하게 하라’는 것과 같습니다. 이에 아바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일화를 들려주셨습니다. 제가 아바 게라시모의 라우라에 머문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어느 날 제가 사랑하는 형제와 함께 앉아 영혼을 구원하는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나는 앞서 아바 피멘과 그 다른 니트리아의 장로가 한 말을 떠올렸고, 형제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경험을 통해 이 말들의 진리를 알게 되었고, 그 말을 실천함으로써 얻는 평안을 맛보았습니다. 나는 이 라브라의 한 집사와 진심 어린 우정을 나누며 지내고 있었습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어떤 일로 나를 의심하게 되었고, 그 일로 기분이 상해 나를 음울한 눈빛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 음울한 기색을 눈치채고 나는 그 이유를 설명해 달라고 부탁했더니, 그가 내게 말했다. “네가 이런저런 일을 저질렀다.” 나는 그런 일을 한 기억이 없었기에 내 결백함을 증명하려 했으나, 그는 이에 대해 “미안하지만, 나는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내 방으로 물러나서, 내가 과연 그런 일을 한 적이 있는지 내 마음을 샅샅이 살피기 시작했으나, 그런 일은 찾을 수 없었다. 그 후 그가 성작을 들고 나누어 주었을 때, 나는 그에게 맹세하며 그 일을 한 기억이 없다고 말했으나, 그는 이번에도 이를 믿지 않았다. 그때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장로들의 그 말씀들을 떠올렸다. 그 말씀의 진리를 온전히 믿으며, 내 생각을 나 자신에게로 돌리고 이렇게 말했다. ‘이 집사는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 사랑에 이끌려 내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은 것이다. 내가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도록 정신을 차리고 스스로를 경계하라는 뜻이다.’ 그나저나, 네가 말하듯이, 내 가련한 영혼아, 그 일을 하지 않았단 말이냐? 네가 저지른 수천 가지의 악행이 있는데, 너는 그것들을 잊어버렸다. 어제, 혹은 열흘 전에 네가 한 일은 어디 있느냐? 그것을 기억하느냐? 그렇다면 네가 저 일을 저질렀던 것처럼 이 일도 저지르고, 이전 일을 잊어버렸던 것처럼 이것도 잊어버린 것이 아니냐? 그렇게 해서 나는 내 마음속으로, 내가 진실로 그 일을 행했다고 생각했으나, 예전을 잊어버린 것처럼 이것도 잊어버렸다. 그리고 나는 주님과 집사에게 감사하기 시작했는데, 주님께서 그를 통해 내게 내 죄를 깨닫고 회개할 기회를 주셨기 때문이다. 그 후 나는 일어나, 그런 생각을 품은 채 형제에게 가서 집사 앞에서 고백하고 그에게 감사를 표하려 했다. 그러나 내가 문을 두드리자마자, 그가 먼저 문을 열고 나에게 절을 하며 말하였다.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악령들에게 현혹되어 그 일로 당신을 의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진실로 당신이 그 일에 무죄함을 저에게 확신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내가 더 이상 그 사실을 확신시키려 하자,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막으셨다. 이 이야기를 전한 뒤, 복자 조시마는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진정한 겸손이 그를 사랑한 형제의 마음을 어떻게 이끈 것인지 보십시오. 그는 집사의 행동에 분노하지도 않았고, 그에게 모욕감을 느끼지도 않았습니다. 첫째, 집사가 자신을 의심했다는 점에 대해, 둘째, 자신의 결백에 대한 확신을 믿지 않았다는 점 때문이 아니라, 저지르지도 않은 죄를 스스로 짊어졌을 뿐만 아니라, 그뿐만 아니라 그 집사에게 감사를 표하기까지 했다. 보십시오, 이 미덕이 어떤 일을 행하는지? 이 미덕을 사랑하는 이들을 어떤 경지의 성취로 이끌어 주는가? 왜냐하면, 만일 그 형제가 원했다면, 집사를 통해 악마가 될 수 있는 수천 가지의 구실을 찾을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그가 미덕을 향해 나아가자, 그에게 화를 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에게 감사까지 드렸으니, 미덕이 그의 마음을 감싸 안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도 미리 우리 안에 온유와 겸손의 씨앗을 뿌리고 마음을 그들에게 기울였다면, 원수는 그 안에 자신의 악한 씨앗을 뿌릴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우리를 선한 생각이 없는 빈 껍데기로, 혹은 그보다 더 나아가 스스로 악을 부추기는 자들로 발견할 때, 그는 이를 빌미로 삼아 우리를 자신의 악으로 채운다. 반면 덕을 사랑할 때는 이와 정반대의 일이 일어난다. 그때 주님께서는 영혼이 구원을 갈망하고, 그 선한 의지를 위해 스스로 선한 씨앗을 부지런히 가꾸는 모습을 보시고, 그 영혼을 주님의 은총으로 채워 주시는 것이다.

30. 어느 날, 복된 아바는 이웃에 살던 한 형제가 훔쳐가던 한 장로를 떠올리며 — 그 장로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결코 그 형제를 꾸짖지 않고, 오히려 “어쩌면 그 형제가 궁핍할지도 모른다”며 더욱 열심히 일했던 — 성인들의 자비심에 놀라워하며,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일화를 들려주었다. 제가 페디아데에 머물던 시절, 한 이구멘이 제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우리 수도원 근처에 한 노인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지극히 선한 영혼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그와 이웃에 살던 한 형제가 어느 날, 노인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악마의 유혹에 이끌려 그의 방 문을 열고 들어가 그의 물건과 책들을 가져갔습니다. 그 노인이 돌아와 방 문을 열었을 때 자신의 물건을 찾지 못하자, 그 형제에게 가서 이 일을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방에 들어가 보니, 그 형제가 아직 물건을 치우지 못해 방 한가운데에 내 물건들이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 형제를 당황하게 하거나 책망하고 싶지 않았던 그는 마치 배가 아픈 척하며 밖으로 나갔고, 그 형제가 그동안 물건을 치울 수 있도록 마치 용변을 보는 것처럼 꽤 오랜 시간 밖에서 머물렀다. 그 후 그에게로 돌아와서는 다른 이야기를 꺼냈고, 그 형제를 지적하지 않았다. 며칠 뒤 그 형제에게서 장로의 물건들이 발견되었고, 그는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노인은 그 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형제가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왜 감옥에 갇혔는지 알지 못한 채 저에게 찾아왔습니다. — 이구멘이 말했습니다. 그는 자주 우리를 찾아오곤 했으니까요. — 그리고 청했습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달걀 몇 개와 깨끗한 빵 몇 조각만 주세요.” 제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지금 당신 곁에 누군가 있는 게 틀림없겠군요?” – “네,”라고 장로가 대답했다. 그는 감옥에 가서 형제를 위로하기 위해 그 물건을 가져간 것이었다. 그가 감옥에 들어서자마자, 형제는 그의 발 앞에 엎드려 말하였다. “아바, 제가 당신 때문에 여기 갇혔습니다. 제가 당신의 물건을 훔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책은 누구에게 있고, 옷은 또 다른 사람에게 있습니다.” 노인은 그에게 말했다. “내 아들아, 네 마음이 확신하거라. 내가 그런 이유로 여기 온 것이 아니니. 네가 나를 대신해 여기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노라. 그러나 네가 여기 있다는 소식을 듣고 슬퍼하여 너를 위로하러 온 것뿐이니라. 자, 보아라, 달걀과 깨끗한 빵이 여기 있구나. 이제 내가 가서 네가 여기서 나올 수 있도록 모든 일을 처리하리라.” 그는 가서 자신의 덕행을 알고 있던 몇몇 고위 인사들에게 부탁했고, 그들은 그 형제를 감옥에서 풀어주도록 지시했다.

31. 또 그 같은 노승에 대해 이런 이야기도 전해진다. 어느 날 그가 옷을 사러 시장에 갔다. 옷을 사고 금화 한 개를 건넸다. 잔돈을 몇 닢 더 내야 했다. 그는 옷을 집어 자기 밑에 두고, 작은 나무 판 위에 잔돈을 세기 시작했다. 그때 누군가 다가와 옷 밑에서 옷을 빼내려고 했다. 이를 눈치챈 노인은 그 의도를 알아차리고, 고생하는 사람을 불쌍히 여겨 마치 동전을 쭉 뻗는 듯 조금씩 몸을 일으키더니, 그 사람이 옷을 빼내어 떠날 때까지 기다렸고, 노인은 그를 꾸짖지 않았다. – 그 후, 복자 조시마는 이렇게 말했다. “그의 그 옷이나, 그에게서 훔쳐간 물건들이 무슨 가치가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의 자유 의지는 얼마나 귀중한가! 그는 그것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마치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행동했음을 보여주었다.” 그것들이 빼앗겼을 때, 그는 여전히 변함없이, 그 일로 슬퍼하지도 화내지도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늘 말하듯이, 소유하는 것 자체가 해로운 것이 아니라, 집착하며 소유하는 것이 해롭기 때문입니다. 이 노인은 설령 온 세상을 다 가졌더라도, 마치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행동했을 것입니다. 그가 행한 일로, 그는 모든 것에서 자유롭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형제들아, 우리도 성스러운 교부들의 본을 따라 열심을 내어 그들의 말씀을 부지런히 실천합시다. 그리하여 이곳에서 선한 열매를 맺음으로써,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원한 복을 누릴 자격을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분께는 아버지와 성령과 함께 영광과 권능이 지금과 항상, 세세토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

 

성 막심 고백자

 

그분에 대한 간략한 소개

성 막심, 차레그라데츠 출신으로 명문 가문 출신이었다. 신학, 철학은 물론 당시 요구되던 모든 분야의 교육을 완벽하게 이수한 그는 황제 헤라클레스의 궁정 신하로 발탁되어 제1비서관의 직무를 훌륭히 수행하며 칭송을 받았다. 모노펠리투스 이단이 일어났을 때—이 이단의 발생에는 황제와 총대주교도 책임이 있었으며—궁궐과 도시, 그리고 왕국의 다른 지역들에서 혼란이 시작되자, 성 막심은 이를 세속을 떠나 어느 수도원에 입회하고자 했던 자신의 오랜 소망을 이루는 축복받은 계기로 여겼다. 세속의 일을 그만두고, 그는 크리소폴 수도원(641년)에 입회하여, 엄격한 수도원 규율에 따라 온전한 열정으로 금욕적 수행에 전념하며, 모든 면에서 모든 이에게 본받을 만한 모범을 보여주었다. 그리하여 수도원에 새로운 원장이 필요해졌을 때, 그는 만장일치로 이 직분에 선출되었으며, 자신을 방종하지도 않고 사람에게 아부하지도 않으면서 그 직분을 마땅히 수행했다. 한편, 모노펠리투스 이단은 궁정과 총대주교의 지지를 받아 점점 더 거세져 갔고, 이에 따라 혼란도 커져만 갔다. 이러한 혼란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성 막심은 수도원을 떠나 로마로 향했다. 가는 길에 그는 아프리카의 카르타고에 잠시 머물렀는데, 그곳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당시 그곳에 머물고 있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피르(직무에서 물러난 상태)를 통해 모노펠리투스주의의 허구성을 폭로했다. 그 후 로마로 건너가, 그곳에서도 곧 성 마르틴 교황이 소집한 모노펠리트파 반대 공의회에 참여했다. 이 공의회는 황제의 명령에 따라 ‘티피크’, 즉 황제가 작성한 신앙 고백서(여기에는 모노펠리트파의 그릇된 교리도 포함되어 있었다)를 수락하고 서명하라는 지시에 따라 소집된 것이었다. 이 공의회에서 모노펠리투스주의와 황제의 티피크, 그리고 이 이단적 교리를 받아들이는 모든 이 를 단죄하고 저주했다. 그 후 이러한 공의회 결정은 서방과 동방 전역에 널리 전파되었다. 이에 분노한 황제는 성 마르틴 교황과 성 막시모를 체포하여 콘스탄티노플로 데려오라고 명령했다. 그들이 이곳에 도착하자, 성 마르티노는 믿기 힘든 고문을 당한 후 헤르소네스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655년). 반면 성 막시모는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시도가 시작되었는데, 이는 매우 집요하게 진행되었다. 처음에는 황제의 궁전에서, 그다음에는 콘스탄티노플의 감옥에서, 이어서 성인의 첫 유배지였던 프라키아의 작은 마을 비지에; 그 후, 그곳에서 소환되어 다시 콘스탄티노플의 성 테오도르 수도원으로 옮겨졌는데, 그곳은 훨씬 더 엄숙하고 위압적인 분위기였다. 심리는 상원 의원들이 주재했으며, 때로는 주교들도 이에 참석하였다. 그 목적은 성 막시모스가 그들의 교리에 동의하거나, 적어도 티피크에 서명하거나, 아니면 침묵이라도 지키도록 설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성공하지 못했다. 성 막시모의 입에서 나오는 정통 신앙의 진리는 매번 승리를 거두었으며, 적대자들을 침묵하게 할 뿐만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굴복하게 만들기도 했다. 진리의 수호자의 용기를 흔들어 보려고 약속과 위협,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고 진리를 회피하는 방법에 대한 지시, 마침내 마지막 회의에서는 구타까지 동원했다. 아무것도 소용이 없었고, 성 막시모스는 셀림브리아를 거쳐 페르베라, 즉 서쪽의 마르마라 해 연안으로 두 번째 유배지로 보내졌다. 그러나 진리의 적들은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 막심은 다시 콘스탄티노플로 소환되어 최종적인 설득을 받았는데, 이는 더 큰 집요함으로 진행되었으나 역시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설득은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황제의 궁전, 감옥, 그리고 다시 궁전에서 진행되었으며, 그곳에서 마지막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순교자를 살려두되, 그에게 죽음보다 더 혹독한 고문을 가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 목적을 위해 그를 도시의 주교에게 넘겼다. 이 비인간적인 고문자는 성자를 데려가 프레토르로 끌고 들어가, 옷을 벗기라고 명령한 뒤 땅에 눕혀 가장 날카로운 가죽 채찍으로 때리게 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장로를 너무나 비인간적으로 때려, 그의 몸에 온전한 곳이 하나도 남지 않았고, 그 아래 땅 전체가 피로 물들었다. – 그 후, 간신히 숨만 쉬고 있는 그를 감옥에 가두었다. 다음 날 아침, 성인을 다시 프레토르로 데려가 – 더욱 잔혹한 형벌을 가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이단을 폭로하던 그의 혀를 잘라내고, 가르침과 폭로하는 책을 썼다는 이유로 칼과 도끼로 오른손을 잘라냈다. 그 후, 법정에서 끌어내어 옷과 신발을 벗긴 채, 잘려 나간 혀와 오른손을 백성들에게 보여주며 모욕을 주기 위해 장터로 끌고 다녔다. 마침내 이러한 비인간적인 고문과 모욕을 겪은 후, 성인은 먼 곳인 밍그렐리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스케마르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곳에서 3년 동안 온갖 궁핍을 견디며 고통받던 성 막심은 죽기 전 어떤 예언적인 환상을 통해 위로를 받은 뒤 주님께로 돌아가셨습니다. 이는 662년의 일이었습니다. 성 막시모의 기념일은 1월 21일이다. 성 막시모는 많은 저술을 남았는데, 교리적인 것과 비판적인 것도 있지만, 그보다 더 많은 것은 도덕 교훈과 금욕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스도교 덕목집』에는 그중에서 사랑에 관한 400개의 장,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말씀의 성육신에 관한 700개의 장, 그리고 미덕과 정욕에 관한 내용들, 마지막으로 주님의 기도에 대한 해설이 수록되어 있다. 우리는 이 중에서 우리 선집에 다음과 같이 수록한다: — 기도에 관한 장은 모두 있는 그대로 수록하고, 700개의 장 중에서 더 이해하기 쉽고, 더 도덕적 교훈과 금욕적 내용이 담긴 장들을 선별하여 수록한다. — 여기에서 생략된 부분을 대신하여, Mignë의 판본에 따라 수도자의 말씀을 추가한다. 이처럼, 성 막시모의 저서 중에서 다음과 같이 제시된다:

1. 제자의 질문과 장로의 답변으로 이루어진 수행자의 말씀

2. 사랑에 관한 400편 (새 번역본)

3. 『그리스도교 자비』 700장 중에서 선별한 관상적 및 실천적 장들

 

1. 제자의 질문과 장로 의 답변으로 이루어진 수행자의 말씀

1. 한 형제가 장로에게 물었다: “부디 말씀해 주십시오, 신부님, 주님의 성육신의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 장로가 대답했다: “놀랍구나, 형제여. 매일 신조를 듣고 있으면서 어떻게 나에게 이런 것을 묻는 것이냐.” – “그럼에도 말해 주마. 주님의 성육신의 목적은 우리의 구원이었다.” 형제가 말했다. “신부님, 그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주십시오.” – 장로는 대답했다. “사람은 태초에 하나님께 의해 창조되어 낙원에 두어졌으나, 계명을 어김으로써 썩음과 죽음에 처하게 되었고; 그 후, 하나님의 다양하고도 기묘한 섭리로 온갖 방식과 형태를 통해 선으로 인도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더 나쁜 일만 저지르며 수많은 육신의 정욕에 이끌려 절망에 빠지게 되었기에: 그 때문에,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신 영원하신 말씀이시며, 생명과 불사의 근원이신 분이, 어둠과 죽음의 그늘 속에 앉아 있는 우리에게 나타나셨고(사 9:2. 마태복음 4,16), 성령과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녀를 통해 육신을 입으시고, 우리에게 하나님과 같은 삶의 본을 보이시며, 그 계명을 따라 사는 자들에게는 천국의 약속을, 계명을 어기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고통의 경고를 주셨습니다; 구원의 수난을 겪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과 영생의 소망을 주셨으며, 순종으로 원조 죄의 죄책을 씻어 주시고 죽음으로 죽음의 권세를 파멸시키셨으니,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 같이, 그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나게 될 것” (고린도전서 15, 22)이라 하셨으며; 마침내 하늘로 승천하사 성부 우편에 앉으시고, 생명의 보증으로 성령을 보내셨으니, 이는 우리 영혼을 깨우치고 거룩하게 하시며, 구원을 위해 힘쓰는 자들이 그분의 계명을 지키도록 돕기 위함입니다. 보십시오, 간단히 말해 주님의 성육신의 목적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2. 형제가 말했습니다. “신부님, 제가 구원받기 위해 어떤 계명을 지켜야 하는지 간략히 듣고 싶습니다.” – 장로는 대답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사도들에게 직접 말씀하셨다.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치라”(마태복음 28:19-20). 그러므로 생명의 근원이시며 신성하신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은 주님께서 명하신 모든 것을 지켜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올바른 믿음과 모든 계명의 준수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묶으셨는데, 이는 둘 중 하나를 다른 것에서 분리할 경우 사람이 구원받을 수 없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다윗도 바른 믿음을 가졌음에도(그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의 모든 계명을 따르나이다. 모든 불의의 길을 미워하나이다”(시 118:128). 모든 불의한 길에 대항하여 주님께서는 그와 정반대되는 계명들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 만일 누군가 그 계명 중 하나라도 지키지 않는다면, 동시에 그 계명과 정반대되는 불의의 길로 들어서는 것입니다.

3. 형제가 말했습니다. “아버지, 계명이 이토록 많은데, 도대체 누가 그 모든 계명을 다 지킬 수 있겠습니까?” – 장로는 이에 대답했다. “주님을 본받고, 그분을 한 걸음 한 걸음 따라가는 자이다.” 형제가 말했다. “그런데 누가 주님을 본받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하나님이셨으나 사람이 되셨고, 저는 셀 수 없이 많은 정욕에 사로잡힌 죄인입니다. 제가 어떻게 주님을 본받을 수 있겠습니까?” 장로는 대답했다. “세상과 그 헛된 것들에 사로잡힌 자들 중에는 누구도 주님을 본받을 수 없으나, ‘보라,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러 왔나이다’(마태복음 19:27)라고 말할 수 있는 자들은 주님을 본받고 그분의 모든 계명을 따라갈 힘을 얻는다.” 형제가 물었다. “어떤 힘을 말합니까?” – 장로는 대답했다. “그분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을 들어보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능력을 이길 권세를 주노니,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하리라’(눅 10,19).”

4. 이러한 힘과 권세를 받은 사도 바울은 “나를 본받으라. 나도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니라” (빌 3:17)라고 말했습니다. 또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정죄함이 없나니, 육신을 따라 행하지 않고 성령을 따라 행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라” (롬 8:1). 또한: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은 육체와 그 정욕과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라디아서 5:24). 또한: “세상은 내게 십자가에 못 박혔고, 나도 세상에 십자가에 못 박혔노라” (갈라디아서 6:14).

5. 다윗은 바로 이 권능과 도움에 대해 예언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도움을 받는 자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보호 아래 거하게 되리라. 주님께 이르기를 ‘주님은 나의 보호자시요 나의 피난처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분을 의지하리로다’라고 하리라(시 90:1-2). 그리고 조금 아래에는 “너는 독사와 바실리스크를 밟고, 사자와 뱀을 제압하리라... 그의 천사에게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11–13). 그러나 육신에 집착하고 세상의 헛된 것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들어보라: “나보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마태복음 10, 37). 또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는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눅 14,27). 또한: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자는 내 제자가 될 수 없다”(33). 그러므로 그분의 제자가 되고자 하며, 그분께 합당한 자로 드러나고, 악한 영들에 대항할 힘을 그분께로부터 얻고자 하는 자는, 육신을 만족시키는 모든 관습에서 벗어나 물질에 대한 모든 집착을 벗어던지고; 그리하여 주님의 계명을 위해 보이지 않는 원수들과 맞서 싸우게 되는데, 이는 주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본보기를 보여주신 바와 같이, 광야에서 그들의 우두머리에게 시험을 받으셨을 때와, 세상에 나타나셨을 때(모든 백성을 위한 사역 기간 중) 그들의 영향력 아래서 활동하던 자들에게 시험을 받으셨을 때와 같습니다.

6. 형제가 말하였다. “그러나 스승님, 주님의 계명은 많습니다. 누가 그 모든 것을 마음에 새겨 모든 계명을 위해 싸울 수 있겠습니까? 특히 저처럼 지혜가 부족한 사람은요? – 그래서 저는 간결한 말씀(간단한 규칙)을 듣고, 그것을 지켜 제 구원을 이루고 싶습니다.” 장로는 대답하였다. “비록 계명이 많지만, 형제여; 그 모든 것이 한 마디 말로 요약됩니다. 바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네 온 힘과 온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눅 10:27)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지키기 위해 힘쓰는 자는 모든 계명을 한 번에 다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물질에 대한 모든 집착을 버리지 않는 자는, 하나님도 이웃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다. 물질에 집착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주님께서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마태복음 6:24). 또한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누가복음 16:13)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이 세상의 사물에 집착하는 만큼, 그만큼 그것에 노예가 되어 하나님의 계명을 경멸하며, 두려움 없이 그것을 어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7. 형제가 물었다. “아버지, 어떤 것들에 대한 집착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장로께서 대답하셨다. “음식, 돈, 온갖 종류의 재산, 명예, 친족, 그리고 그와 유사한 것들 말이다.” – 형제가 말했다. “네,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사람들에게 사용하게 하신 것이 아닙니까, 아버지?” 그런데 어찌 지금 그분께서 이것에 손대지 말라고 명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장로는 대답했다. “맞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사람들이 사용하도록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모든 것은 좋았습니다(창세기 1:31) (그리고 그 후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우리가 그것들을 잘 활용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도록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연약하고 생각이 세속적이어서, 사랑의 계명보다 물질적인 것을 더 중시하게 되었고, 그것에 집착한 나머지 다른 사람들과 다툼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모든 보이는 것과 심지어 우리 몸 자체보다도 모든 사람을 향한 사랑을 우선시해야 하는데, 이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표징이 되나니, 주님께서 복음서에서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신 대로이다(요한복음 14:15). 그렇다면 어떤 계명을 지키면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는 것일까요?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신 것을 들어보십시오. “이것이 내 계명이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요한복음 15:12). 보라, 서로에 대한 상호 사랑이 바로 하느님을 향한 사랑을 이루며, 이것이야말로 모든 하느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로마서 13,10)이 아니겠는가? 바로 이 때문에 주님께서는 세상의 것들에 집착하지 말 뿐만 아니라, 진심으로 그분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자에게는 자신의 모든 소유물마저 버리라고 명하시는 것이다.

8. 형제가 말했습니다. “신부님, 신부님께서는 보이는 모든 것, 심지어 육신조차도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보다 뒤로 미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를 미워하고 저를 외면하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저를 시기하고, 험담을 퍼뜨리고, 음모를 꾸미며, 해를 입히려는 자를 – 제가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 본성적으로 판단해 보면, 아버지, 그것은 불가능한 일로 보입니다. 슬픔이라는 감정은 자연스럽게 그 슬픔을 안겨준 자에게서 등을 돌리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 장로는 대답했다. “본능에 따라 사는 기어다니는 동물들에게는, 그들에게 가해진 악의에 대해 가진 힘껏 복수하지 않는 것이 확실히 불가능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어 이성을 따르며, 하나님을 알 수 있는 특권을 누리고 그분으로부터 율법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욕하는 자들을 외면하지 않고 미워하는 자들을 사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라”고 말씀하신 것(마태복음 5:44)은, 물론 불가능한 일로서가 아니라 가능한 일로서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주님께서는 이 계명을 어기는 자에게 벌을 내리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런 사랑이 가능하다는 것을 주님과 그분의 제자들이 바로 몸소 보여주셨으니, 그들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죽기까지 수고하셨고, 심지어 그들을 죽이는 자들을 위해 따뜻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물질과 쾌락을 사랑하며, (물질과 쾌락)을 계명보다 우선시하기 때문에; 그 때문에 우리를 미워하는 자들을 사랑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뿐만 아니라 종종 그들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조차 외면하게 되어, 성품상 짐승이나 기어다니는 동물들보다 더 나쁘게 드러나고 맙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발자취를 따를 수 없으니, 우리는 그분의 목적을 깨달을 수도 없어, 거기서 우리에게 힘을 얻을 수 없습니다.

9. 한 형제가 말했습니다. “아버지, 보십시오. 저는 모든 것, 즉 친족과 재산, 세상의 쾌락과 영광을 버렸습니다. 그래서 제게는 이 몸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저를 미워하고 저를 외면하는 형제를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비록 실제로는 악으로 악을 갚지 않으려 애쓰고 있지만 말입니다.”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그런 사람, 아니 어떤 방식으로든 저를 모욕하고 헐뜯는 모든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 장로는 대답했다. “세상과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이라 할지라도, 주님의 뜻을 진정으로 깨닫지 못한다면 모욕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에게 그 목적을 깨닫게 하시고, 그가 그 지시에 따라 행하기를 갈망하게 될 때, 비로소 그는 그 목적을 아셨던 사도들이 사랑했던 것처럼, 자신을 미워하고 모욕하는 자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10. 형제가 말하였다. “그 주님의 목적이 무엇인지, 부디 저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신부님.” – 장로가 대답하였다. “주님의 목적을 알고자 한다면, 분별 있게 귀를 기울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본성상 하나님이시나, 인간을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여인에게서 태어나 사람이 되시기를 기꺼이 하시고, 신성한 사도들을 통해 율법 아래 계셨으니, 이는 사람으로서 계명을 지키심으로써 옛 아담의 저주를 없애기 위함이었습니다. 온 율법과 선지자들이 두 계명에 달려 있음을 아셨기에: – “네 마음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 – 이 두 계명에 달려 있음을 아시고, 그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 계명들을 인간적으로 그러나 온전히 지키기 위해 그렇게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태초에 인간을 유혹하여 죽음의 권세를 장악한 마귀는 세례 때 아버지께서 그분에 대해 증언하시는 것과, 그분이 하늘로부터 인간으로서 동질의 성령을 받으신 후 광야로 나가 마귀의 유혹을 받으신 것을 보고, 그분께서도 하나님의 사랑보다 세상의 선한 것들을 택하도록 만들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모든 공격을 그분께 집중시켰다. 모든 인간의 (욕망과 쾌락)이 맴도는 세 가지, 즉 음식, 돈, 명예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사탄은, 이를 통해 항상 사람들을 파멸의 심연으로 몰아넣곤 했기에, 이 세 가지를 이용해 주님마저 유혹하려 했으나, 주님께서는 이 모든 것 위에 계심을 드러내시며 엄중히 명령하셨다. “나를 따르라, 사탄아.”

11.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표징(즉, 그러한 것들보다 더 높은 곳에 서는 것)이며, 사탄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유혹하여 그 약속을 어기게 할 수 없었기에, 그가 약속했던 대로, 주님께서 모든 백성 앞에서 사역을 시작하셨을 때, 사탄은 불법적인 유대인들을 통해 그분을 이웃 사랑에 관한 계명을 어기게 하려고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시도했다. 이를 위해 주님께서 생명의 길을 가르치시고 행실로 하늘의 삶의 본을 보이시며, 죽은 자의 부활을 선포하시고 믿는 자들에게는 영생과 하늘나라를 약속하시며,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고통을 경고하셨을 때, 그 말씀의 진리를 확증하기 위해 놀라운 신성한 기적을 행하시며 백성들을 믿음으로 부르셨을 때, – 그는 불의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그분에 대해 온갖 중상을 퍼뜨리도록 부추겼으니, 그들이 기대했던 대로 그분이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중상하는 자들을 향한 증오에 휩싸이기를 바랐던 것이다. – 그리고 그 간사한 자는 그분을 이웃 사랑 계명을 어긴 자로 드러냄으로써, 이런 식으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 했던 것이다.

12. 그러나 주님께서는 하나님으로서 그의 계략을 아시고, 그분 때문에 선동된 바리새인들에게 미움을 품지 않으셨다(그분은 본성상 선하시니,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오히려 그들을 향한 사랑으로 그들을 선동한 그 자 자신을 정복하셨다. 그들이 적대적인 선동에 휘말려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었고, 설령 받아들였다 하더라도 그것은 제멋대로, 부주의와 안일함으로 인해 선동자의 유혹에 기울어졌기 때문이었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을 깨우치시고, 책망하시며, 질책하시고, 슬퍼하시면서도 동시에 그들에게 온갖 선행을 베푸시는 것을 멈추지 않으셨으며, 비방받는 것도 너그럽게 참아내시고, 고통 속에서도 인내하셨으니, 그들에 대한 온갖 사랑의 행실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그분에게 대항하도록 선동된 자들에 대한 이러한 인간애로, 그들을 선동한 자를 놀라게 하셨습니다. 놀라운 싸움이라! 미움 대신 사랑을 보이시며, 선하심으로 악의 아버지를 무너뜨리신다. 그들로부터, 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을 위해, 그토록 많은 악을 겪으시고, 인간으로서 사랑의 계명을 위해 죽을 때까지 수고하시며, 마귀에게 완전한 승리를 거두신 후, 마침내 우리를 위해 부활의 면류관을 받으셨으니; – 그리하여 새로운 아담이 옛 아담을 새롭게 하셨다. – 이것이 바로 신성한 사도가 말씀하신 “이 마음을 너희 안에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 계신 마음과 같이”라는 말씀의 뜻이다(빌립보서 2:5).

13. 주님의 목적은, 우리를 위해 사람으로서 사랑의 계명을 지키며, 마귀가 선동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통해 그로부터 고통을 당하면서도, 심지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아버지께 순종하고, 마귀를 무찌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마치 자신에게 승리를 내어주는 듯이 자유롭게, 그분을 이기려 했던 자를 이기시고, 그의 폭정에서 평화를 되찾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고린도후서 13:4), 그 연약함으로 죽음을 무력화시키시고 죽음의 권세를 가진 자를 폐하셨다(히브리서 2:14). 마찬가지로 바울도 자기 안에서 연약함을 겪었으며, “연약함 속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 자랑했습니다(고린도후서 12:9).

14. 이 승리의 본질을 깊이 살펴본 성 바오로는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을 상대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에페소서 6,12). 그리고 보이지 않는 적들과 싸우는 이들에게 진리의 갑옷과 소망의 투구, 믿음의 방패, 영적인 칼을 취하라고 명하셨으니, “그리하여 악한 자의 모든 불타는 화살을 끄게 하려 함이라”(– 11 – 14). 또한 이 싸움의 본보기를 행동으로 보여주며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헛되이 달리지 아니하며, 헛되이 싸우지 아니하노라. 오직 내 육체를 죽이고 복종시키노니, 다른 사람들에게는 다른 것을 전파하면서 나 자신은 실격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전서 9, 26, 27), 또 “지금 이 순간까지도 우리는 굶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고난을 겪고 있다”(고린도전서 4, 11), 그리고 “수고와 분투, 잦은 밤샘, 추위와 헐벗음”(고린도후서 11, 27)이라고도 말씀하셨다.

15. 그는 육신의 정욕을 부추기는 악마들과도 같은 방식으로 싸워, 자신의 몸을 지치게 함으로써 그들을 물리쳤다. 또한 우리에게, 실제 행동을 통해, 증오를 부추기는 그 악령들에 대한 승리의 본보기를 보여주며, 그들은 경건한 자들을 대적하도록 가장 무책임한 자들을 부추겨, 그들에게 유혹당하여 그들을 미워하게 하고, 그리하여 사랑의 계명을 어기게 하려 했기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책망받을 때면 축복하고, 쫓김을 당할 때면 참으며, 모욕을 당할 때면 위로받나니, 이는 우리가 세상의 버림받은 자로서 지금까지 모든 이에게 짓밟힘을 당해 왔기 때문이라.” (고린도전서 4:12, 13). 악마들은 사도를 책망하고, 비방하고, 박해하도록 부추겨, 그가 책망하는 자와 비방하는 자, 박해하는 자를 미워하게 만들려 했으니, 이는 그를 사랑의 계명을 어기게 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그들의 속셈을 알지 못한 채, 책망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참아 주었으며, 비방하는 자들에게는 이를 부추기는 악령들로부터 떠나 선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간청했습니다; 이처럼 악을 가르치는 악마들의 공격을, 구세주를 본받아 선으로 악을 이기며 항상 물리쳤습니다. 이와 같이 그와 다른 사도들은 온 세상을 악마들로부터 떼어내어 하나님께로 이끌었으며, 승리를 거두었다고 생각했던 자들을 자신들의 패배로 이겼습니다. 그러니 형제여, 당신도 그 목표를 굳게 지키면, 당신도 당신을 미워하는 자들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사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16. 형제가 말하였다. “참으로, 아버지, 그렇습니다. 다른 방식은 없습니다.” – 그래서 주님께서는 모욕을 당하시고, 뺨을 맞으시며, 유대인들에게서 온갖 고난을 겪으시면서도 모든 것을 참아내셨다. 무지함으로 인해 악을 행하는 자들 과 미혹된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십자가 위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아버지여, 그들을 용서하소서. 그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눅 23:34)라고 말씀하셨으며, 십자가 위에서 마귀와 그 수장들의 온갖 간사와 유혹에 대해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이는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주님께서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사랑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 그들에 맞서 용감히 싸우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이들에 대한 승리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으며, 죽음의 권세를 무너뜨리고, 당신의 부활을 온 세상에 생명으로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제가 주님과 그분의 사도들의 목적을 온전히 깨닫고, 유혹이 닥쳤을 때 마귀와 그의 악령들의 꾀를 분별하여 정신을 차릴 수 있도록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17. 이에 장로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항상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긴다면, (사탄의) 꾀를 분별하지 못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네가 유혹을 받을 때와 마찬가지로 네 형제도 유혹을 받고 있음을 깨닫게 되면, 유혹받는 형제에게는 용서하고, 유혹하는 마귀—그 마귀는 너로 하여금 유혹받는 형제를 미워하게 만들려는 자이니—에게는 그의 계략에 굴복하지 말고 맞서라. 바로 이것을 하나님의 형제 야고보도 서신에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희에게서 도망하리라”(4, 7)라고 말하며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앞서 말한 대로, 네가 항상 위에서 설명한 내용을 명료한 생각 속에 간직한다면, 주님과 그분의 사도들의 뜻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며, 사람들이 잘못 행동할 때 그들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사랑하며, 교활한 악마들에게는 항상 사랑을 통해 맞서 싸울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우리 둘이 방종하고, 부주의하며, 게으르며, 생각을 육신의 쾌락에 내맡긴다면, 우리는 악마들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과 형제들과 싸우게 될 것이며, 악마들을 기쁘게 해 주게 될 것이니, 그들을 위해 사람들과 싸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18. 형제가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신부님. 항상 제 게으름 때문에 악령들이 저를 대적할 기회를 잡습니다. 하지만 신부님, 제게 어떻게 절제를 얻어야 하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장로는 대답했다. “세상사에 대한 완전한 무관심과 신성한 성경에 대한 끊임없는 묵상은 영혼을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으로 이끄며,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은 정신의 명료함을 가져온다.” 그러면 영혼은 악마들이 생각을 통해 자신에게 대적하여 싸우는 것을 보게 되고, 그들을 물리치기 시작합니다. 다윗도 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눈이 나의 원수들을 바라보나이다”(시 53:9). 이러한 악마들과의 대항에 대해, 제자들을 격려하며 지극히 높은 사도 베드로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맑은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라. 너희의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으니, 너희는 굳건한 믿음으로 그에게 대항하라” (베드로전서 5:8). 그리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깨어 기도하라. 시험에 들지 않게 하라” (마태복음 26:41). 또한 전도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통치자의 영이 네게 임하면, 네 자리를 떠나지 말라” (10, 4). 마음의 자리는 덕과 지식,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입니다. 마지막으로, 매우 냉철하고 용감하게 사역을 펼치신 위대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육신 안에 살지만 육신에 따라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싸움의 무기는 육신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강력한 것으로, 우리는 이를 통해 견고히 서 있습니다. 우리는 생각들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지혜에 반하는 모든 교만을 꺾으며, 모든 생각을 그리스도의 순종에 사로잡아, 불순종하는 모든 것을 벌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0, 3–6). – 그러니 너도 성도들을 본받아,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에서 힘겹게라도 비워낸다면, 정신을 차리게 될 것이다.

19. 한 형제가 물었다. “아버지, 끊임없이 하나님과 함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장로는 대답했다. “사랑, 절제, 기도의 세 가지 덕을 갖추지 못한다면, 마음이 오직 한 분 하나님과 항상 함께 있을 수는 없다. 사랑은 분노를 누르고, 절제는 정욕을 말리며, 기도는 마음을 온갖 생각에서 해방시켜, 그 마음을 하나님 앞에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여 줍니다. 이 세 가지 미덕은 모든 진리를 담고 있으며, 그것 없이는 마음이 유일한 하나님과 함께 머물 수 없습니다.

20. 형제가 말했습니다. “부디, 신부님, 사랑이 어떻게 분노를 누르는지 저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장로는 대답했습니다. “사랑의 일은 이웃을 사랑하고 그에게 선을 베풀며, 그를 오래 참아 주고, 그가 가하는 모든 것을 견디는 것입니다. 이는 자주 말해져 온 바와 같습니다. 이러한 성품을 지닌 사랑은, 그것을 얻은 자 안에서 자연스럽게 분노를 누릅니다.” 형제가 말했습니다. “사랑의 일은 결코 사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저는 사실 사랑과는 거리가 멀지만, 아버지, 부디 저에게 오래 참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21. 장로는 대답했다. “불행 속에서도 정신을 굳건히 지키고, 온갖 악을 견디며, 시련의 끝을 기다리는 것이다. 분노에 휩쓸리거나, 무분별한 말을 하거나, 무언가를 의심하거나, 경건한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는 생각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인내하는 자는 때가 될 때까지 참아내고, 그 후에 기쁨을 얻으리라. ‘때가 될 때까지 자신의 말을 숨기고, 신실한 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고백을’ 그의 이성으로 감추리라”(시라크 1, 23. 24).

22. 이것이 바로 오래 참음의 특성이다! – 그것뿐만 아니라, 자신을 유혹의 원인으로 여기는 것 또한 오래 참음의 특성이다. 어쩌면 실제로 그럴지도 모른다(즉, 원인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 왜냐하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 중 많은 것이 우리를 가르치기 위함이며, 혹은 과거의 죄를 정화하기 위함이며, 혹은 현재의 태만함을 바로잡기 위함이며, 혹은 미래의 타락을 막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유혹이 앞서 언급된 것들 중 하나를 위해 자신에게 닥쳤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특히 그 과정에서 자신의 죄를 자각할 때, 채찍질을 당하더라도 분노하지 않을 것이며, 유혹을 가져온 자를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를 통해서든 다른 이를 통해서든, 그는 어쨌든 하나님의 심판의 잔을 마셔야 했기 때문이다. — 그러나 그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유혹을 허락하신 그분께 감사할 것이며, 오직 자신만을 책망하고 기꺼이 훈계를 받아들일 것이다. 다윗이 시므이에 대해, 욥이 아내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분별력이 없는 사람은 종종 하나님께 자비를 구하지만, 자비가 임했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자비가 자신이 원했던 방식이 아니라, 영혼의 의사께서 유익하다고 판단하신 방식으로 임했기 때문이다. 왜 그는 겁을 먹고 방황하며, 때로는 사람들에게 분노하고, 때로는 하나님을 향해 모독을 쏟아내는가? 그리하여 그는 배은망덕함을 드러내며, 깨우침을 주는 채찍으로부터 치유를 얻지 못한다.

23. 형제가 말했습니다. “신부님, 잘 설명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부탁드리건대, 절제가 어떻게 정욕을 말리는지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십시오.” 장로는 대답했다. “절제는 불필요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모든 것을 삼가게 하고, 오직 즐거움만을 주는 것에서 멀어지게 하며, 삶에 필수적인 것 외에는 아무것도 건드리지 못하게 하고, 쾌락을 좇지 못하게 하며, 오직 유익한 것만을 찾도록 이끕니다. 또한 음식과 음료를 필요에 맞게 조절하고, 몸에 과도한 습기가 쌓이지 않도록 하며, 오직 육체의 생명만을 유지하며, 정욕적인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절제가 정욕을 말리는 방식이다. – 반대로 쾌락과 과도한 음식과 음료는 배를 달아오르게 하고, 수치스러운 정욕의 가장 강한 충동을 불러일으키며, 사람을 이성 없는 짐승처럼 불법적인 교합으로 이끌고 만다. 그때 눈은 부끄러움을 모르고, 손은 제멋대로이며, 혀는 귀를 간지럽히는 말만 하고, 귀는 헛된 말만 기꺼이 듣는다. 마음은 하나님을 소홀히 여기며, 영혼은 생각으로만 음행을 저지르는 데 그치지 않고, 몸까지 부적절한 행위로 이끌게 된다.

24. 형제가 말하였다. “참으로 그러합니다, 스승님. 그러나 기도에 대해서도 가르쳐 주시기를 청합니다. 기도가 어떻게 마음을 온갖 생각에서 해방시키는지 말입니다.” 장로가 대답하였다. “우리의 생각이란 사물에 대한 사고인데, 그중에는 감각적인 것도 있고 지적인 것도 있습니다. 그것들에 사로잡혀 있을 때, 마음은 그 생각들을 품고 곱씹게 됩니다. 그러나 기도의 은총은 마음을 하나님과 하나 되게 하며, 하나님과 하나 됨으로써 모든 생각에서 해방시킵니다. 그러면 마음은 벌거벗은 채로 하나님과 대화하며, 신성해집니다. 그렇게 된 마음은 하나님께 신성한 것을 구하며, 그 간구에서 결코 실수하지 않습니다(항상 구하는 것을 얻습니다). 사도가 “끊임없이 기도하라”(살전 5:17) 명령한 것도, 우리가 마음을 하나님과 더 자주 하나 되게 함으로써, 조금씩 물질적인 것에 대한 집착을 떨쳐버리도록 하기 위함이다.

25. 형제가 물었다. “하지만 마음이 어떻게 끊임없이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노래를 부르거나 책을 읽을 때,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거나 누군가를 섬길 때는 자연스럽게 여러 가지 생각과 상상에 마음이 쏠리기 마련이니까요.” 장로는 대답했다. “성경은 불가능한 것을 명령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전하신 사도 자신도 노래하고, 읽고, 사도로서의 사역을 수행하면서도 끊임없이 기도하셨습니다. – 끊임없이 기도한다는 것은, 큰 경외심과 따뜻한 소망으로 마음을 하느님께 굳게 붙들어 두고, 그분을 의지하며, 모든 일과 사건 속에서 그분을 의지하여 담대하게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을 가진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는가? 환난인가, 곤고인가” – 그리고 그 밖의 것들(롬 8:35).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이미 알았습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38). 그리고 또 “모든 일에서 환난을 당하나 곤란에 빠지지 아니하며, 소망이 없으나 낙심하지 아니하며, 쫓기나 멸망하지 아니하며, 항상 우리 몸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지니고 다니니, 이는 우리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 4:8–10).

26. 이러한 마음가짐을 가진 사도는 끊임없이 기도했다. 왜냐하면 앞서 말한 대로, 모든 일과 사건 속에서 그는 하나님의 소망에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성도들은 항상 고난을 기뻐하였으니, 이를 통해 신성한 사랑을 체득하기를 소망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다. “기쁘게 자랑하리니, 내 약함 속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12:9). 그리고 그 바로 아래에 “내가 약할 때에, 그때에 나는 강하다”(–10)라고도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 가련한 자들에게는, 성부들의 길을 떠나 버렸기에 모든 영적 일에서 텅 비어 있다는 것이 비극이다.

27. 한 형제가 물었다. “신부님, 제가 왜 회개의 마음을 갖지 못하는 것입니까?” 장로는 대답했다. “그것은 우리 둘 다 눈앞에 하나님의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온갖 악의 피난처가 되어 버렸고, 하나님의 무서운 형벌을 헛된 상상처럼 경멸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예를 들어 모세가 하느님의 이름으로 죄인들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을 때: “내 분노로 불이 타오를 것이며”, “지옥 깊은 곳까지 타오를 것이니, 땅과 그 곡식을 휩쓸어 버리고 산의 기초를 태워 버리리라” (신명기 32, 22–23). 또한 “내 칼을 번개처럼 날카롭게 갈아, 내 손이 심판을 집행하며, 내 원수들에게 보복하고,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갚아 주리라”(41). 혹은 이사야가 외치는 것처럼: “시온의 불의한 자들이 물러가라. 악인들이 두려움을 당하리라. 너희 영의 굳건함은 헛될 것이며, 너희는 불을 띠게 될 것이다. 누가 너희에게 불이 타오른다고 알려 주겠느냐? 누가 너희에게 영원한 곳을 알려 주겠느냐” (사 33,14)? 또 다시: “그들이 나가서 나를 거역한 자들의 시체를 볼 것이니, 그들의 구더기는 죽지 아니하고 그들의 불은 꺼지지 아니하며, 그들은 모든 육체의 수치를 당할 것이라” (이사야 66:24). 또는 예레미야가 말하듯이: “해가 지기도 전에, 너희 발이 어두운 산에 걸리기 전에,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라. 너희는 빛을 기다리겠으나, 거기에는 죽음의 그늘이 있고, 너희는 어둠 속에 누워 있게 되리라” (예레미야 13:16). 또 다시: “이 말을 들으라, 어리석고 마음이 없는 백성들아!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자들아. 너희는 나를 두려워하지 않느냐?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앞에서 부끄러워하지 않느냐?” (예레미야 5:21-22). 그리고 또: “네 배반이 너를 벌할 것이요, 네 악이 너를 정죄하리라. 네가 깨닫고 보라, 나를 버린 것이 네게 얼마나 악하고 쓰디쓴 일인지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내가 너를 열매 맺는 포도나무, 온전히 참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어찌하여 네가 낯선 포도나무가 되어 쓰라린 열매를 맺게 되었느냐?(예레미야 2, 19–21)? 또 다시: “나는 그들의 즐거움의 모임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주의 손의 얼굴을 두려워하여 홀로 앉아, 슬픔으로 가득 찼도다” (예레미야 15,17).또한 에스겔이 말하는 이 말을 듣고 누가 소름 끼치지 않겠는가? “네게 끝이 왔으니, 내가 내 진노를 네게 쏟고, 네 행한 대로 네게 보복하며, 네 모든 가증한 것을 네게 내리리라. 내 눈은 아끼지 아니하며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리니… 네가 내가 치는 여호와인 줄 알게 되리라” (에스겔 7:3, 9). 다니엘이 심판의 날을 묘사하며 “내가 보니 보좌들이 놓여 있고, 나이가 지긋하신 분이 그 위에 앉아 계셨는데,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고, 머리카락은 깨끗한 물결 같았으며, 그분의 보좌는 불꽃 같고, 그 바퀴는 타오르는 불 같았다. 불의 강이 그분 앞에서 흘러나오고 있었으며, 천천의 천사들이 그분을 섬기고, 무수한 천사들이 그분 앞에 서 있었다. 심판의 자리가 마련되었고, 책들이 펼쳐졌다” (단 7,9.10), 즉 각자의 행실 말이다. 또 다시: “밤에 꿈에서 보니, 하늘의 구름을 타고 인자 같은 이가 오시더니, 옛날부터 계신 분께 나아가 그분 앞에 서시니, 그분께 권세와 영광과 왕국이 주어졌고, 모든 백성과 족속과 민족이 그분께 섬기게 되었으니, 그의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결코 사라지지 아니할 것이요, 그의 왕국은 무너지지 아니하리라. 나 다니엘은 내 몸의 상태가 불안하여 내 영혼이 떨었고, 내 머릿속에 떠오른 환상들이 나를 당황하게 하였도다” (단 7:13–15).

28. 다윗이 “하나님께서 한 말씀을 하셨으나, 나는 두 가지를 들었나니, 이는 하나님의 권능과 주님의 자비 때문이니, 주께서 각 사람에게 그의 행한 대로 갚으실 것임이라” (시 61:12, 13)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누가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 또한 전도서가 이렇게 말하는데, “말씀의 결론은 이러하니, 모든 것을 듣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계명을 지키라. 이는 모든 사람이 그러해야 할 것이니,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을 심판하사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모든 죄를 심판하실 것임이라” (전도서 12, 13. 14)?

29. 사도께서도 이와 같은 말씀을 하셨으니,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니, 각 사람이 육신으로 행한 선한 일이나 악한 일을 그대로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를 듣고 누가 떨지 않겠는가? (고린도후서 5:10; 로마서 14:10). 이 모든 것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고, 예레미야가 미리 예견했던 우리 자신의 그러한 태만과 안일함에 대해 쓰라린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면, 누가 우리의 불신과 우리 영혼의 눈먼 상태를 두고 울지 않겠는가? 예레미야는 이를 예견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하나님의 일을 소홀히 행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48, 10). 만일 우리가 우리 영혼의 구원을 염려했다면, 주님의 말씀에 전율하며 우리의 구원이 되는 그분의 계명을 온 힘을 다해 서둘러 이행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서 직접 “생명으로 이끄는 좁은 문을 들어가라”(마태복음 7, 13, 14)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파멸로 이끄는 넓고 넉넉한 길을 택했습니다. 그 때문에, 주님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때, 우리는 그분께로부터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해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마태복음 25:41)는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30. 그리고 우리는 악한 일을 저질렀을 때뿐만 아니라, 선한 일을 소홀히 하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때에도 이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만약 그와 더불어 악한 일까지 저지른다면, 영혼이 그토록 타락한 상태에서 그날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겠는가? 게다가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는 등, 모세를 통해 옛사람들에게 전해진 계명들을 지켜야 한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마태복음 5:28).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이 삶에서 완전함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것만 지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너희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그 말씀의 앞뒤로 항상 영혼의 완전한 거룩함을 요구하셨는데, 이를 위해 육체도 거룩하게 되며, 모든 사람에 대한 진실한 사랑을 법으로 정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주님 자신에 대한 사랑도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여러 번 말씀하신 바와 같이, 주님 자신과 제자들을 통해 우리에게 그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31. 우리 앞에 이러한 본보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무관심한 채로 남아 있다면, 그날에 우리가 무슨 변명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예레미야는 우리를 애도하며 이 백성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내 머리에 물을, 내 눈에 눈물의 샘을 주리이까? 내가 밤낮으로 울리라”(예레미야 9:1). 우리는 이러한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러한 무관심 속에 머물러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온갖 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모세도 우리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야곱이 먹고 배부르매, 사랑받던 자가 버림받았도다. 너희는 살이 쪄서 뚱뚱해졌고, 그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그의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떠났도다”(신명기 32:15). 미가도 우리에 대해 울며 이렇게 말합니다. “아, 내 영혼이여, 슬프도다. 경건한 자가 땅에서 사라지고, 사람 중에 의로운 자가 없도다. 각자가 이웃을 악의로 대하며, 악을 행하기 위해 손을 준비하도다” (미가 7, 2. 3). 마찬가지로 시편 기자가 우리에 대해 말하며 기도하기를,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경건한 자가 희귀해졌으니, 사람의 자손 중에서 진리가 줄어들었나이다”(시 11:2)라고 했습니다.

32. 우리를 애도하며 사도도 예언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모두가 길을 벗어나 함께 부도덕하게 행하였으며,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도 없으니,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들의 목구멍은 무덤과 같고, 혀로는 아첨하며, 입술 아래에는 독사의 독이 있습니다. 그들의 입은 저주와 비통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들의 길에는 파멸과 악의가 있으며,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한다. 그들의 눈앞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다” (롬 3:12–18). 그리고 다시 예언적인 통찰 속에서, 오늘날 우리의 악한 삶에 대해 디모데에게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니, 마지막 날에는 험악한 때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기만 생각하고, 돈을 사랑하며, 자만하고, 교만하며, 비방하고, 부모에게 불순종하고, 감사할 줄 모르고, 불의하고, 사랑이 없고, 화해할 줄 모르고, 비방하고, 절제하지 못하고, 온유하지 못하고, 자비롭지 못하며, 배신하고, 거만할 것" – 그 밖의 것들도 (딤후 3: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우리가 악의 극단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우리 중 누가 열거된 악행의 종류에 연루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 예언이 우리에게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우리 모두가 배를 채우는 데만 열중하는 자들이 아니겠는가? 우리 모두가 쾌락을 좇는 자들이 아니겠는가? 우리 모두가 광기 어린 정도로 재물을 탐하는 자들이 아니겠는가? 우리 모두가 성미가 급하지 않은가? 우리 모두가 원한을 품지 않는가? 우리 모두가 모든 미덕을 배반하지 않는가? 우리 모두가 비방하지 않는가? 우리 모두가 험담하지 않는가? 우리 모두가 예의를 지키지 않는가? 우리 모두가 형제를 미워하지 않는가? 우리 모두가 거만하지 않은가? 우리 모두가 오만하지 않은가? 우리 모두가 교만하지 않은가? 우리 모두가 허영심에 차 있지 않은가? 모두 위선자가 아닌가? 모두 교활한 자가 아닌가? 모두 시기심이 많은 자가 아닌가? 모두 불순종하는 자가 아닌가? 모두 게으른 자가 아닌가? 모두 속임수를 쓰는 자가 아닌가? 모두 부주의한 자가 아닌가? 모두 구세주의 계명을 소홀히 여기는 자가 아닌가? 모두 온갖 악으로 가득 찬 자가 아닌가?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 대신 우상의 신전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닌가? 성령 대신 악령들의 피난처가 된 것은 아닌가?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위선적인 것은 아닌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 대신 지옥의 아들들이 된 것은 아닌가? 지금 그리스도의 위대한 이름을 지니고 있는 우리가 유대인들보다 더 나빠진 것은 아닌가? 그런데도 아무도 이런 진리를 듣고 분노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유대인들)은 율법을 어기는 자들이었음에도 “우리는 오직 한 분 하나님 아버지만을 모신다”고 말했으나, 구세주께서는 그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버지인 마귀에게서 났으며, 너희 아버지의 욕망을 행하고자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복음 8:41, 44).

33. 그분의 계명을 어긴 우리 죄인들에게도 그분으로부터 이와 같은 말씀을 듣는 것이 부당하겠는가? 보라, 사도는 성령의 인도를 받는 자들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렀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고 있다(롬 8:14). 그런데 우리가 육신의 생각에 이끌리고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릴 수 있겠습니까? 성령의 인도를 받는 자들은, 사도가 말하듯이, 성령의 열매를 통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사도는 영의 열매가 사랑, 기쁨, 평화, 오래 참음, 친절, 자비, 믿음, 온유, 절제라고 말합니다(갈 5:22). 우리에게 이 중 어떤 것이 있습니까? 오히려 그와 정반대인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릴 자격이 없으며, 그와 정반대인 자들로 불려야 마땅합니다. 누구에게서 태어났든 그 사람은 낳은 자와 닮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성령에게서 태어난 자는 영이니라”(요 3:6)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을 탐하는 육신이 되어 버렸으므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심판이 정당하게 내려집니다. “내 영이 이 사람들에게 머물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육신임이라”(창 6:3).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감히 기독교인이라 불릴 수 있겠습니까?

34. 누군가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믿으니, 구원을 얻기 위해 그분에 대한 이 믿음 하나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도 야고보는 이에 반박하며 말합니다. “귀신들도 믿고 떨고 있느니라” (야고보서 2:19). 또한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로 죽은 것”이라고도 했습니다(17, 26). – 과연 우리가 그분을 믿고 있는 것일까요?! 일시적이고 현재적인 일에 대해서는 믿지 않으면서, 어떻게 미래에 대해서는 그분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물질적인 것에 집착하고, 육신적으로 살며, 성령을 대적하여 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곧 계명을 실천함으로써 그분을 자기 안에 모신 이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갈 2, 20). 왜냐하면 다른 이들의 구원을 위해 그분을 위해 고난을 당하며, 그분을 충실히 본받는 자들로서, 또한 그분의 계명을 진실로 실천하는 자들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비난을 받으면 축복하고, 쫓김을 당하면 참으며, 모욕을 당하면 위로받는다”(고린도전서 4:12). 그들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너희에게 해를 끼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마태복음 5:44) 명하신 그분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말과 행실을 통해 그들 안에 역사하시는 그리스도께서 드러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모든 계명에 반하는 행동을 하므로 온갖 부정한 것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 대신 장사의 집이 되었고, 기도의 집 대신 강도들의 소굴이 되었으며, 거룩한 족속 대신 죄 많은 족속이 되었고, 하나님의 백성 대신 죄로 가득 찬 백성이 되었으며, 거룩한 씨 대신 악한 씨가 되었고, 하나님의 아들들 대신 불법의 아들들 이 되었으니; 주님의 계명을 저버리고, 우리는 부정한 정욕을 통해 악한 영들을 섬기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을 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35. 그러므로 위대한 이사야는 우리를 애도하며, 동시에 우리의 타락 속에서 우리를 돕고자 하며, 이렇게 외치며 말합니다. “왜 아직도 불법을 행하며 스스로 상처를 입히느냐? 모든 머리는 병들었고, 모든 마음은 슬픔에 잠겨 있도다. 발끝에서부터 머리까지 온전한 곳이 없으니, 딱지도, 궤양도, 타는 듯한 상처도 없도다. 붙일 반창고도, 기름도, 붕대도 없도다?” (1, 5. 6). 그 다음에는 무엇이 따를까? “시온의 딸은 포도원 속의 덤불 같고, 과수원 속의 저장고 같으며, 전쟁 중인 성읍과 같으리라”(-8). 사도도 우리 영혼의 이러한 황폐함을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마음속에 두기를 기꺼이 하지 아니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타락한 마음에 내버려 두사, 온갖 불의와 방탕과 간사함과 탐욕과 악의로 가득 찬, 질투와 살인과 분쟁과 아첨과 악한 행실로 가득 찬, 중상모략자, 비방자, 하나님을 경멸하는 자, 괴롭히는 자, 거만한 자, 교만한 자, 악을 꾸미는 자,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자, 무지한 자, 화해하지 않는 자, 사랑이 없는 자, 맹세를 지키지 않는 자, 자비롭지 않은 자.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의를 깨달았으나, 그러한 행위를 하는 자들이 죽음을 당할 만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 행할 뿐만 아니라 행하는 자들을 방조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수치스러운 정욕에 내버려 두사, 그들 자신의 몸으로 스스로 더럽히게 하셨다” (롬 1:28–32, 26, 24). 그리고 그 뒤에는 무엇이 따르는가?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진노가 모든 불의와 불의한 사람들의 불의에 드러난다”고 말씀하신다 (-18).

36. 주님께서도 이러한 영혼의 황폐함을 가리키시며 말씀하셨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보내진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들을 모으고자 했는지, 마치 암탉이 새끼들을 날개 아래 모으듯이, 그러나 너희는 원치 않았도다. 너희 집은 황폐하게 남겨질 것이다” (마태복음 23, 37. 38). 이사야는 우리 수도사들이 단지 육체적으로만 예배를 드리고, 영적인 하나님 섬김에는 소홀히 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만하고 있는 모습을 다시금 꿰뚫어 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으라, 소돔의 방백들아, 하나님의 율법을 경청하라, 고모라의 백성들아. ‘너희의 수많은 제물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양의 번제물과 어린 양의 제물, 그리고 수송아지와 염소의 피를 더 이상 원치 않는다. 누가 너희 손에서 이 모든 것을 내 뜰에 가져오기를 원하느냐? 너희가 내게 일곱 눈의 밀을 바친다 해도 헛된 일이다: 향로, 그것은 내게 가증한 것이니라. 너희의 초하루와 안식일과 대절기도 내가 용납하지 아니하리라. 너희의 금식과 명절과 절기도 내 영혼이 미워하노라. 너희는 내게 포만감일 뿐이니, 너희의 죄를 더 이상 참지 못하리라. 너희가 내게 손을 뻗을 때, 나는 너희에게서 내 눈을 돌리리라. 너희가 기도를 많이 해도, 내가 너희를 듣지 아니하리라.” 왜 그럴까? “너희 손은”이라고 말씀하시기를, “피로 가득 차 있다” – (이사야 1:10–15),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자”이기 때문이다 (요한일서 3:15). 그러므로 사랑과 동떨어진 모든 수행의 수고는 하나님께 기쁘시게 여겨지지 않는다.

37.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위선을 멀리서부터 폭로하시며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은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으니, 헛되이 나를 공경하는도다”라고 하셨으며, 그 뒤를 이어 말씀하셨다(이사야 29:13). 게다가 우리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며 하신 말씀은, 그러한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보다 더 나쁜 성품을 드러내는 오늘날의 위선자인 우리에게도 매우 잘 적용됩니다. 우리도 무겁고 지기 힘든 짐을 묶어 사람들의 어깨에 지우면서도, 정작 우리 자신은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요(누가복음 11, 46)? – 우리도 모든 일을 남들이 보도록 하지 않는가(마태복음 6,5)? 우리도 저녁 식사에서 상석에 앉는 것과 모임에서 앞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더 좋아하지 않는가? 우리도 사람들에게 ‘선생님, 선생님’이라 불리기를 좋아하지 않는가? 그리고 우리에게 그런 존경을 충분히 표하지 않는 자들을 심지어 죽음까지 쫓아내지 않는가? 우리도 지혜의 열쇠를 받았으면서도 그것으로 문을 열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 앞에서 천국을 닫아버려, 우리 자신도 들어가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 지도자들도 눈먼 자들이 아니겠는가? 모기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삼키는 자들이 아니겠는가? – 우리도 겉으로는 잔과 접시를 깨끗이 닦아내지만, 속은 강탈과 탐욕, 절제하지 못함으로 가득 차 있지 않은가? 우리도 박하와 회향, 깻잎을 씻어내면서도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소홀히 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도 겉으로는 사람들에게 의로운 척하지만, 속으로는 위선과 불법, 온갖 더러움으로 가득 찬 닫힌 무덤과 같지 않은가? 우리도 순교자들의 무덤을 세우고 사도들의 관을 장식하면서도, 성품은 그들을 죽인 자들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마태복음 23, 3–32)? 이런 상태에 놓인 우리를 누가 눈물 흘리지 않겠는가? 우리의 이러한 포로 생활을 누가 안타까워하지 않겠는가? 이는 바로 이 때문에 우리, 하나님의 아들들인 의로운 자들이 진흙 그릇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우리의 금은 어두워졌고, 우리의 순은은 변질되었다(예레미야 애가 4, 1.2). 이 때문에 우리, 시온의 나사렛 사람들은 눈보다 더 빛나던 자들이, 우유보다 더 하얗던 자들이, 잉크보다 더 검게 변해 에티오피아 사람처럼 되었다. 이 때문에 우리의 모습은 그을음보다 더 검게 변했고, 우리의 죄악은 소돔의 죄악보다 더 커졌다; 이 때문에 우리, 낮과 빛의 아들들은 밤과 어둠의 아들들이 되었다(살전 5:5). 이 때문에 우리, 왕국의 아들들은 지옥의 아들들이 되었다. 이 때문에 우리,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들은 사람처럼 죽어가며, 방백들 중 한 사람처럼 쓰러진다(시 80:7). 이 때문에 우리는 불의한 원수들, 즉 사악하고 잔혹한 악령들의 손에 넘겨졌으며, 온 땅에서 가장 불의하고 교활한 왕, 곧 그들의 우두머리 사탄에게 넘겨졌으니, 이는 우리가 우리 주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죄를 짓고 불법을 행하였기 때문이다(단 3, 29–32),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언약의 피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10, 29). 그러나 주님,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끝까지 내버리지 마시고, 주의 언약을 파기하지 마시며, 주의 자비를 우리에게서 거두지 마소서”(단 3, 34, 35), 주님의 자비로 말미암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 주님의 독생자께서 베푸신 은혜와 주님의 성령께서 베푸신 자비로 말미암아. “우리의 처음 죄악을 기억하지 마소서. 주여, 주의 자비가 속히 우리에게 임하게 하소서. 우리가 심히 궁핍하였나이다. 하나님, 우리의 구주여, 주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도우소서. 주여,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의 죄를 씻어 주소서” (시 78, 8. 9),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가운데서 취하신 당신의 독생자께서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며, 우리에게 구원의 확고한 소망을 주셔서, 절망으로 인해 우리가 더 나빠지지 않게 하소서. 세상의 생명을 위해 흘리신 그분의 귀한 피를 위하여, 그분의 이름을 위해 피를 흘리신 성도인 사도들과 순교자들을 위하여, 주님의 거룩한 이름을 기쁘시게 하려고 수고한 성스러운 예언자들과 교부들, 그리고 족장들을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고 구원해 주소서. 주님, 우리의 기도를 외면하지 마시고, 끝까지 우리를 버리지 마소서. 이는 우리가 우리의 의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 민족을 돌보아 주시는 그 자비에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기도하며 주님의 은혜를 간구하오니, 주님의 독생자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마련해 주신 성사가 우리에게 정죄가 되지 않게 하소서. 주님의 면전에서 우리를 물리치지 마소서. 우리의 부적합함을 싫어하지 마시고, 주님의 크신 자비와 풍성한 은혜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우리의 죄악을 씻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정죄받지 않고 주님의 영광 앞에 나아갈 때, 주님의 독생자께서 베푸시는 보호를 누리게 하시고, 우리의 죄로 인해 교활하고 구원받지 못하는 노예가 되지 않게 하소서. 오, 전능하신 주님, 주여, 우리의 기도를 들으소서. 우리가 주 외에는 다른 신을 알지 못하오니, 주님의 이름을 부르나이다. 주님은 만물 안에서 모든 것을 행하시는 분이시니, 우리는 주님께 모든 도움을 구하나이다. 하늘에서 우리를 내려다보시고, 주님의 거룩한 영광의 거처에서 우리를 보아 주소서. “주님의 열심과 주님의 능력은 어디에 있나이까? 주님께서 우리를 참아 주셨으니, 주님의 자비와 주님의 관대함은 어디에 있나이까? 주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니, 아브라함이 우리를 인도하지 못하였고 이스라엘이 우리를 알지 못하였으나, 주님, 우리의 아버지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소서. 이는 태초부터 우리에게 주의 거룩한 이름이 임하였음이니이다” 그리고 주의 독생자이신 아들과 주의 성령을 위하여. “주님, 어찌하여 우리를 주님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주님을 경외하지 않도록 우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나이까?” 주님, 주님의 거룩한 교회와 태초부터 계신 주님의 모든 성도들을 위하여 주님의 종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소서. “적어도 주님의 거룩한 산들을 조금이라도 상속받게 하소서. 우리의 원수들이 주님의 성소를 짓밟았나이다.” “우리가 주께서 우리를 다스리지 않으셨을 때, 주님의 이름이 우리에게 붙지 않았을 때와 같이 되게 하소서” (이사야 63, 15–19).

38. “만일 하늘이 열리면, 산들이 주님 앞에서 떨며 녹아내리리니, 마치 불 앞에서 밀랍이 녹듯이, 불이 원수들을 태워 버릴 것이며, 주님의 이름은 주님을 대적하는 자들에게 두려움이 되리라. 주님께서 영광스러운 일을 행하실 때, 산들이 주님 앞에서 떨리라. 세상 시작부터 우리는 듣지 못하였고, 우리 눈도 본 적이 없나니, 오직 주님과 주님께서 자비를 기다리는 자들에게 행하실 일들뿐이니이다. 자비는 의를 행하는 자들에게 임할 것이요, 주님의 길들이 기억되리니, 주님께서 진노하셨고, 우리가 죄를 지었나이다.” –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것이 낫다: “우리가 죄를 지었고, 주님께서 진노하셨나이다.” “이 때문에 우리가 길을 잃었고, 우리 모두는 마치 부정한 자들처럼, 마치 부정한 항구처럼 되었으니, 우리의 모든 의는 그러하니라.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죄악 때문에 나뭇잎처럼 떨어져 나갔으니, 마치 바람이 우리를 휩쓸어가듯,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도 없고, 주를 붙잡을 자도 없나이다. 주께서 우리에게서 얼굴을 돌리시고, 우리의 죄악 때문에 우리를 내버리셨나이다. 이제 주여, 주님은 우리의 아버지시니, 우리는 주님의 작품이며, 주님의 손으로 지으신 모든 것입니다. 우리에게 크게 노하지 마시고, 우리의 죄악을 기억하지 마소서. 이제 우리가 모두 주님의 백성임을 보아 주십시오. 주님의 성소는 황폐해졌고, 시온은 광야가 되었으며, 예루살렘은 저주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거룩한 집과, 우리 조상들이 축복했던 영광이 불에 타버렸고, 우리의 모든 영광스러운 것들이 함께 무너졌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참으시고, 침묵하시며 우리를 크게 낮추셨습니다” (이사야 64,1–12).

39. 이 일은 주님의 옛 백성에게 예표로 일어났으나, 이제 우리 안에서 진실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이웃들”,악령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었고, 우리 주위에 있는 자들에게 비웃음과 모욕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시편 78:4). 그러나 하늘에서 내려다보시고, 우리를 구원하소서,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위하여. 우리에게 원수들의 계략을 알게 하시고, 그들의 꾀에서 우리를 건지소서. 주님의 도움을 우리에게서 거두지 마소서. 우리 스스로는 우리를 공격하는 자들을 이길 힘이 없으나, 주님께서는 모든 원수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실 능력이 있으시니이다. 주님, 주님의 자비로 이 세상의 모든 슬픔에서 우리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여 깨끗한 양심으로 생명의 바다를 건너, 순결하고 흠 없는 자로서 주님의 두려운 보좌 앞에 나아가 영생을 누리게 하소서.

40. 이 모든 말을 듣고 큰 회개에 빠진 형제는 눈물을 흘리며 장로에게 말했습니다. “제가 보기에, 아버지, 저에게는 구원의 희망이 없습니다. ‘내 죄악이 내 머리를 덮었나이다’(시 37:5).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말씀해 주십시오, 부디 부탁드립니다.” 장로는 그에게 대답하여 말하였다. “사람이 스스로 구원받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대로(마태복음 19,26),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그러니 ‘그분의 면전 앞에서 고백하며… 그분께 경배하고 엎드려, 우리를 지으신 주님 앞에서 울며 탄원합시다. 그분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시니’(시편 94, 2. 6), 이는 우리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선포된 그분의 말씀을 듣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돌아와 탄식할 때, 그때에 너희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 (사 30, 15). 또 다시 “주님의 손이 구원할 수 없단 말인가? 아니면 그분의 귀가 무거워 듣지 못하시는가? 그러나 너희의 죄가 너희와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고, 너희의 죄로 말미암아 그분께서 너희에게서 얼굴을 돌리사 긍휼을 베풀지 않으시는 것이다” (이사야 59:1, 2).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씻고 깨끗해져라. 내 눈앞에서 너희 영혼의 간사를 제거하고, 너희의 간사를 그치라. 선 행하는 법을 배우고, 공의를 구하며, 억울한 자를 구제하고, 고아를 변호하며, 과부를 변호하라. 그리하여 오라, 우리가 변론하리라.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처럼 희게 하리라. 비록 붉은 색 같을지라도 물결처럼 희게 하리라. “너희가 원하고 내 말을 들으면, 땅의 좋은 열매를 거두리라. 이는 주님의 입술이 이같이 말씀하셨음이니라” (이사야 1:16–20); 또한 요엘을 통해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온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금식하고, 울며, 통곡하며, 너희 옷을 찢지 말고 너희 마음을 찢으라. 자비로우시고 관대하시며, 악을 용서하시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요엘 2, 12, 13). 또한 에스겔에게 “사람아, 이스라엘 집에게 말하여 이르라. ‘우리의 죄와 불법을 우리가 지고 있으며,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쇠약해졌으니, 우리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겠느냐?’ 그들에게 이르라. ‘나 여호와가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죄인의 죽음을 원하지 아니하고, 오직 악인이 자기의 길에서 돌이켜 살기를 원하노라. 너희는 너희의 악한 길에서 돌이키라. 이스라엘 집안아, 너희는 왜 죽으려 하느냐?’” (에스겔 33, 10. 11). 제3열왕기는 하나님의 자비가 넘쳐흐르는 것을 보여 주며 이렇게 말합니다. 아합이 — 이세벨이 나부옷을 죽여 그 포도원을 상속받은 나부옷의 포도원에 있을 때 — 엘리야가 “ “주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니라. 네가 그를 죽이고 그 유산을 차지하였으니, 개들이 그의 피를 핥았던 바로 그 곳에서 네 피도 핥을 것이니라... 이세벨은 예스레엘 성문 앞에서 개들에게 뜯겨 죽으리라.” 아합이 이 말을 듣고는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울며 다니고, 옷을 찢고 몸에 자루옷을 두르고 금식하며, 밤낮으로 “자루옷을 두르고 지냈다.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합이 내 앞에서 얼굴을 가린 것을 보았느냐? 이 때문에 나는 그의 생애 동안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열왕기하 21:19, 23, 27, 29). 또한 선지자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죄악을 깨달았고, 나의 죄를 감추지 아니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기를 ‘주여, 내 죄악을 주께 고백하리이다’ 하였더니, 주께서 내 마음의 악을 용서해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모든 경건한 자가 필요한 때에 주께 기도하리이다” (시 31:5, 6). 복음서에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마태복음 4,17). 베드로가 그분께 “내 형제가 나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용서해야 합니까?”라고 묻자, 본성상 선하시고 자비로움에 한계가 없으신 주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하라”(마태복음 18:21, 22). 과연 무엇이 이러한 자비로움과 비교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인간애를 무엇에 비유할 수 있겠습니까?

41. 구약과 신약 모두에서 이와 같이 하나님의 경외심과 그분의 자비, 그리고 인간 사랑을 깨달았으니, 이제 온 마음을 다해 그분께로 돌아가자. 형제들아, 우리가 무슨 이유로 멸망해야 하겠는가? 우리의 죄 많은 손을 깨끗이 씻고, 이중적인 마음을 바로잡으며, 슬퍼하고, 통회하며, 우리의 죄를 위해 울자. 악한 행실을 그치고, 주님의 자비를 믿으며, 그분의 징벌을 두려워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기로 결심하자. 온 마음을 다해 서로 사랑합시다. “너희는 우리의 형제다”라고 말합시다. 우리를 미워하고 모욕하는 자들에게도 주님의 이름이 영광받게 하소서. 서로 유혹을 받을 때 서로 용서합시다. 우리 모두를 대적하는 공통의 원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악한 생각을 대적하며, 하나님을 우리의 동맹자로 부르시고, 이를 통해 우리 안에서 악하고 부정한 영들을 쫓아내자. 육신을 영에게 복종시키며, 육신을 죽이고 온갖 고통으로 굴복시키자. 육신과 영의 온갖 더러움에서 우리 자신을 정화하자. 서로 사랑과 선한 일을 격려하며 북돋아 줍시다. 남을 시기하지 말고, 우리를 시기하는 자들에게 화를 내지 맙시다. 서로 동정심을 베풀고, 겸손함으로 서로를 치유합시다. 우리는 서로의 지체이니, 서로를 정죄하거나 조롱하지 맙시다. 게으름과 안일함을 떨쳐 버리고, 악한 영들에 맞서 용감하게 싸우자. 우리에게는 아버지께 중보하시는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그분께서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는 분이시다. 그러니 우리가 깨끗한 마음과 온전한 영혼으로 그분께 기도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실 것이다. “주님께서는 진리로 그분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가까이 계시니라”(시 144:18). 왜 “주님께 찬양의 제물을 드리고 지극히 높으신 분께 네 기도를 드리라. 네가 환난 날에 나를 부르리니, 내가 너를 구원하고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시 49: 14. 15). 이사야는 또 무엇을 말합니까? “모든 불의의 멍에를 풀어 주고, 강압적인 규정의 멍에를 부수며, 상한 마음을 가진 자들을 자유롭게 하고, 모든 불의한 규정을 찢어 버리라. 굶주린 자들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고, 피 한 방울 없는 가난한 자들을 네 집으로 데려오라. 벌거벗은 자를 보거든, 네 친족을 멸시하지 말라. 그러면 네 빛이 새벽처럼 비치고, 네 치유가 속히 빛나며, 네 의가 네 앞에 나아가고, 하나님의 영광이 너를 감싸리라.” 그 다음에는 무엇이 있느냐? – “그때 네가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네 기도를 들으시며, 네가 아직 말을 마치기도 전에 ‘보라, 내가 왔노라’ 하실 것이다. 그때 네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칠 것이며, 네 어둠은 대낮과 같을 것이요, 네 하나님이 항상 너와 함께하실 것이며, 네 영혼이 원하는 대로 네가 만족하게 될 것이다” (이사야 58, 6–10). 보라, 우리가 모든 불의의 유대를 끊고 온 마음을 다해 이웃에게 선을 베풀기로 결심할 때, 그때 우리는 지식의 빛으로 둘러싸이고, 불의한 정욕에서 해방되며, 온갖 미덕으로 충만해지고, 하나님의 영광의 빛으로 비추어지며, 모든 무지에서 벗어날 것이다; – 그리스도께 기도하면 응답을 받게 될 것이며, 항상 하나님을 우리 곁에 모시고 신성한 소망들로 충만해질 것입니다.

42. 서로 사랑합시다. 그러면 하나님께 사랑받을 것입니다. 서로 오래 참읍시다. 그러면 그분께서도 우리의 죄를 오래 참아 주실 것입니다. 악으로 악을 갚지 말자. 그러면 그분께서도 우리의 죄에 따라 우리에게 갚지 않으실 것이다. 형제들을 용서함으로써 우리 죄의 사함을 얻게 될 것이니, 이는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자비가 이웃에 대한 우리의 자비 속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눅 6,37). 그리고: “너희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면, 너희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시리라” (마태복음 6:14). 또 다시: “자비로운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자비를 얻을 것임이라” (마태복음 5:7). 그리고: “너희가 남에게 대하는 대로 너희에게도 대할 것이다”(마태복음 7:2).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구원의 길을 마련해 주셨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요한복음 1:12). 이 후로 우리의 구원은 이미 우리 뜻에 달려 있다.

43. 그러니 우리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온전히 받아들여, 그분을 통해 신들이 되자. 이는 본성상 하나님이시며 주님이신 그분이 바로 그 목적을 위해 사람이 되셨기 때문이다. 온 마음을 다해 그분께 복종하면, 그분은 쉬지 않고 우리의 원수들을 물리치실 것이다. “내 백성이 내 말을 들었더라면,그분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아, 네가 내 길을 걸었더라면, 내가 네 원수들을 무력화시켰을 것이며, 너를 모욕하는 자들에게 내 손을 뻗쳤으리라” (시 80, 14. 15). 우리의 모든 소망을 오직 그분 한 분께 두며, 그분께 우리의 모든 슬픔을 맡기리니, 그분께서 우리를 모든 고통에서 건지시고 평생 우리를 양육해 주실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되, 어떤 사람에게도 우리의 소망을 두지 말자. 오직 주님께서 우리를 지키시는 만큼, 친구들은 우리에게 힘을 보태고 원수들은 우리 앞에서 무력해진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버리시면, 그때는 친구들조차 우리를 (무력한 상태로) 버리고, 원수들이 우리를 이겨 버린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게만 의지하는 자는 끔찍하게 넘어질 것이요, 주님을 경외하는 자는 높이 들려질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이 말하기를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하며, 내 칼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리니, 주께서 우리를 원수들로부터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들을 수치를 당하게 하셨나이다” (시 43:7, 8)라고 한 것이다.

44. 우리의 죄를 경시하고, 이미 용서받았다고 속여 믿게 하는 생각들을 받아들이지 말자. 주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것들로부터 우리를 경계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양가죽을 입고 너희에게 다가오되 속으로는 약탈하는 늑대인 살아 있는 선지자들을 조심하라”(마태복음 7,15). 우리의 마음이 죄로 인해 여전히 괴로워하는 한, 우리는 아직 그 죄의 용서를 얻지 못한 것임을 알라. 이는 우리가 아직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했기 때문이다. 회개의 열매는 영혼의 무정(無情)이며, 무정이야말로 죄의 소멸이다. 때로는 정욕으로 인해 마음이 얼어붙기도 하고 때로는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아직 완전한 무정욕을 얻지 못한 것이다. 즉, 우리는 완전한 죄의 용서도 얻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성세례를 통해 원죄에서 해방되었으나, 세례 후에 감히 저지른 죄들로부터는 회개를 통해서만이 해방될 수 있다.

45. 그러니 진심으로 회개하여, 정욕에서 해방됨으로써 죄의 사함을 얻도록 합시다. 일시적인 복을 경멸하여, 그것들로 인해 사람들과 다투다가 사랑의 계명을 어기거나 하나님의 사랑에서 떠나지 않도록 합시다. 성령을 따라 행하고 육체의 욕망을 따르지 맙시다(갈 5,16). 깨어 있고 정신을 차리며, 방심의 잠을 털어내자. 구세주의 거룩한 수도자들을 본받아 그들의 위업을 닮아가자. 뒤를 잊고 앞으로 나아가며, 그들의 지칠 줄 모르는 헌신, 뜨거운 열정, 절제에서의 끈기, 정결함의 거룩함, 인내의 굳건함, 흔들리지 않는 온화함, 진심 어린 연민, 동요하지 않는 온유함, 열정적인 열심, 거짓 없는 사랑, 높고 겸손한 지혜, 완전한 무소유, 용기, 자비, 온유함을 본받자. 우리는 쾌락에 대한 유혹을 방치하지 말고, 생각에 나태함이 스며들게 하지 말며, 양심을 더럽히지 말자. 우리 모두와 화평을 이루고 거룩함을 지키자. 이 두 가지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히브리서 12:14). 이 모든 것에 더해, 형제들아, 세상과 세상의 통치자로부터 도망치자. 육체와 육신적인 것을 버리자. 하늘로 나아가 그곳에 우리의 거처를 마련하며, 신성한 사도를 본받아 생명의 근원이신 분께 이르러 생명의 샘에서 마시게 되기를 바란다. 천사들과 대천사들과 함께 합창을 이루어, 아버지께와 성령께와 함께 영광과 권능이 있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합시다. 지금과 항상, 세세토록. 아멘.

 

2. 사랑에 관한 400개의 장

 

엘피디우스에게 보내는 서문

수행자의 삶에 관한 글과 더불어, 엘피디우스 신부님의 고결한 성품에 이 사랑에 관한 글을 보내드립니다. 이 글은 네 권의 복음서와 같은 수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어쩌면 신부님의 기대에 전혀 부응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 능력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그나저나 당신의 거룩하심께서 아시다시피, 이 또한 제 마음에서 나온 결실이 아닙니다. 다만 성부들의 저술을 읽고, 거기서 제 주제에 대한 관심을 끄는 내용을 추려내어, 격언이나 장의 형태로 많은 내용을 간결하게 담아, 기억하기 쉽고 마음속으로 훑어보기 편하도록, – 이를 귀하의 존경받는 분께 전달하며, 선한 마음으로 읽고 오직 유익만을 구하며, 문장의 미숙함은 신경 쓰지 말아 주시기를 청합니다. 또한 영적인 열매가 전혀 없는 저의 부족함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또한 이 글이 (마치 제가 양심에 무거운 짐을 지우는 것처럼) 부담으로 여겨지지 않도록 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는 제가 순종의 계명을 이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오늘날 가르치는 말로 양심을 무겁게 짓누르는 이들은 많으나, 행실로 가르치거나 행실을 통해 배우는 이들은 매우 적기 때문입니다. 각 장을 더 꼼꼼히 파고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제 생각에 모든 내용이 모든 사람에게 쉽게 이해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겉보기에는 매우 간단하게 표현되어 있더라도, 많은 내용은 많은 이들에게 깊은 탐구를 요구할 것입니다. 그 안에서 이런 식으로 발견된 것들이 영혼에 유익한 것으로 드러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물론, 누군가 호기심 어린 마음가짐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외심과 사랑으로 이 책을 읽는다면,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그렇게 될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이 책이나 다른 어떤 책을 영적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저자를 비난할 말을 찾아내어, 자신보다 저자가 더 많이 안다고 허영심에 차서 과시하기 위해 읽는다면, 그에게는 어디에서도, 언제라도, 유익한 것은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에 관한 첫 번째 백편

1. 사랑은 영혼의 선한 마음가짐으로, 이를 통해 영혼은 존재하는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우선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속적인 어떤 것에 집착하는 사람은 이러한 사랑의 마음가짐에 도달할 수 없다.

2. 사랑은 무욕에서 비롯되고, 무욕은 하나님에 대한 소망에서 비롯되며, 소망은 인내와 관대함에서 비롯되고, 이 둘은 모든 것에 대한 절제에서 비롯되며, 절제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에서 비롯되고, 경외심은 주님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다.

3. 주님을 믿는 자는 지옥의 고통을 두려워한다. 고통을 두려워하는 자는 정욕을 절제한다. 정욕을 절제하는 자는 인내로 슬픔을 견딘다. 슬픔을 견디는 자는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품게 된다. 하나님에 대한 소망은 마음을 온갖 세속적인 집착에서 해방시킨다. 이러한 것에서 해방된 마음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품게 된다.

4.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더 소중히 여기며, 끊임없이 갈망하며 그 일에 전념한다.

5. 만물이 하나님을 통해,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며,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통해 존재를 얻은 모든 것보다 더 뛰어나시다면, 하나님을 떠나 하찮은 것들에 몰두하는 자는, 그로 인해 하나님을 통해 존재하게 된 것을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6. 마음이 사랑으로 하나님께 매여 있는 사람은 모든 보이는 것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며, 심지어 자신의 몸조차 마치 남의 것인 양 여긴다.

7. 만일 영혼이 육체보다 낫고,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세상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 낫다면, 영혼보다 육체를, 하나님보다 그분으로부터 창조된 세상을 더 선호하는 자는 우상 숭배자들과 다를 바가 없다.

8.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그분의 임재 안에서 머무르는 것에서 떼어내고, 감각적인 어떤 것에 집착하는 자는 영혼보다 육체를, 하나님 창조주보다 그분으로부터 생겨난 것을 더 중시하는 것이다.

9. 만일 마음의 삶이 지식의 깨달음이며, 이 빛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다면, 신성한 사랑보다 더 높은 것은 없다는 말이 옳다.

10. 사랑의 이끌림에 따라 마음이 하나님께로 승천할 때, 그때 마음은 자기 자신도, 존재하는 그 어떤 것도 전혀 느끼지 못한다. 측량할 수 없는 신성한 빛에 비추어질 때, 마음은 모든 피조물에 대해 무감각해지는데, 이는 마치 태양이 빛나면 감각적인 눈이 별들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11. 모든 미덕은 마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도움을 주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것은 순수한 기도이다. 기도로 인해 하나님께로 날아오르는 마음은 모든 존재를 초월하게 된다.

12. 사랑으로 인해 마음이 신성한 지식에 황홀해져, 존재하는 모든 것 너머에 서서 신의 무한함을 깨닫게 될 때, 그때 신성한 이사야의 본을 따라 경이로움 속에서 자신의 무가치함을 깨닫고, 이 예언자의 말을 진심으로 외친다: “화 있을진저, 내가 망했다. 나는 입술이 부정하고, 입술이 부정된 백성 가운데 사는 사람이라. 그러나 내 눈으로 만군의 주 왕을 보았도다” (이사야 6:5).

13.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아직 정화되지 않은 자들의 정욕을 기뻐하지는 않더라도, 모든 사람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의 회개와 개선을 볼 때, 헤아릴 수 없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으로 기뻐한다.

14. 정욕과 증오의 생각으로 가득 찬, 불결하고 정욕에 사로잡힌 영혼이다.

15. 어떤 사람의 어떤 실수로 인해 자신의 마음속에 그 사람에 대한 증오의 흔적을 보는 자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는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사람에 대한 증오를 결코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16.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계명을 지키리라”(요한복음 14:15)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내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요한복음 15:12)고 하셨다. 그러므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이며,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주님을 사랑할 수도 없다.

17.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복이 있다.

18. 썩어질 것이나 일시적인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19. 모든 피조물을 넘어 끊임없이 신성한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마음이 복되도다.

20. 육체에 대한 돌봄을 정욕까지 확장하여, 일시적인 어떤 일로 인해 이웃에게 원한을 품는 자는,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더 섬기는 자이다.

21. 자신의 몸을 달콤한 유혹과 질병으로부터 지키는 사람은, 더 나은 사역을 위해 그 몸 안에서 동역자를 얻게 된다.

22. 모든 세속적인 정욕을 피하는 사람은 어떤 세속적인 슬픔보다도 자신을 더 높은 곳에 두게 된다.

23.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반드시 이웃도 사랑한다. 그런 사람은 재산을 아끼지 않고, 하나님처럼 그것을 잘 관리하여 구하는 모든 이에게 나누어 준다.

24. 하나님을 본받아 자선을 베푸는 자는 육신의 필요에 있어 악한 자와 선한 자,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를 차별하지 않는다. 그러나 필요에 따라 모두에게 공평하게 나누어 주되, 선한 뜻을 가진 덕스러운 사람을 악한 사람보다 우선시한다.

25. 본성상 선하시고 무정하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를 자신의 피조물로서 동등하게 사랑하시지만, 덕 있는 자를 그분과 성품이 닮은 자로서 찬양하시고, 악한 자를 그분의 자비로 용서하시며, 이 세상에서 징계하심으로써 그를 돌이키시듯이, 마찬가지로 선한 생각을 품고 정욕에 사로잡히지 않은 사람도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사랑하니, 본성상 덕이 있는 자는 선한 의지의 태도 때문에, 악한 자는 본성상 그럴 뿐만 아니라 연민을 품어, 무지하고 어둠 속을 헤매는 자로서 그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다.

26. 사랑의 마음은 단지 재산을 나누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육체적인 봉사를 통해 더욱 잘 드러난다.

27. 세속적인 것들을 진심으로 버리고, 위선 없이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는 사람은 모든 정욕에서 더 빨리 해방되어, 신성한 사랑과 신성한 지식에 참여하게 된다.

28. 신성한 사랑을 마음에 품은 자는 신성한 예레미야와 같이 “주 하나님을 따르는 데 지치지 않는다”(예레미야 17:16); 그러나 어떤 수고와 모욕, 비방도 용감하게 견디며, 누구에게도 전혀 악을 품지 않는다.

29. 누군가에게 모욕을 당하거나 어떤 일로 인해 굴욕을 겪을 때, 분노의 생각이 그 모욕을 빌미로 너를 사랑에서 멀어지게 하여 증오의 영역으로 옮겨 버리지 않도록 조심하라.

30. 책망이나 모욕으로 인해 괴로울 때, 네가 그로부터 큰 유익을 얻었음을 알라. 왜냐하면 모욕을 통해 네 안의 허영심이 섭리적으로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31. 불에 대한 기억이 몸을 따뜻하게 하지 못하는 것처럼, 사랑 없는 믿음은 영혼 속에 지식의 빛을 일으키지 못한다.

32. 건강한 눈이 태양의 빛을 향해 끌리듯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사랑을 통해 순수한 마음을 자연스럽게 자신에게로 이끌어 간다.

33. 무지에서 벗어나 신성한 빛으로 비추어지는 마음이야말로 맑은 마음이다.

34. 정결한 영혼은 정욕에서 해방되어 끊임없이 신성한 사랑으로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35. 정욕은 영혼의 비자연적인 움직임으로서 비난받을 만하다.

36. 무정(無情)은 영혼이 악으로 기울어지지 않는 평화로운 상태이다.

37. 자신의 노력으로 사랑의 열매를 얻은 자는, 비록 수천 가지의 악을 겪는다 할지라도 그 사랑에서 떠나지 않는다. 이 점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의 제자 스테판과 그와 같은 이들이, 그리고 자신의 살인자들을 위해 아버지께 기도하시고, 무지함으로 그 일을 저지른 그들에게 용서를 구하신 그리스도께서도(눅 23:34) 너에게 증언해 줄 것이다.

38. 만일 사랑의 본질이 오래 참음과 자비라면(고린도전서 13:4), 분노하고 악의를 품는 자는 사랑과 거리가 멀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사랑과 거리가 먼 자는 하나님과도 거리가 멀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요한일서 4:8)고 하셨기 때문이다.

39.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하지 말라”고 신성한 예레미야가 말합니다(7, 4). 너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으로도 내가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그분을 향한 사랑, 즉 행함으로 증거되는 사랑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저 믿음만으로는 “마귀들도 믿고 떨고 있다”(야고보서 2,19) 한다.

40. 사랑의 행위는 이웃을 향한 성실한 선행, 너그러움, 인내, 그리고 재물을 현명하게 사용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41.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도 슬프게 하지 않으며, 일시적인 일로 인해 누구에게도 슬퍼하지 않는다. 오직 구원에 이르는 슬픔으로만 슬퍼하고 남을 슬프게 하는데, 이는 복된 바울이 스스로도 슬퍼했고 고린도 사람들을 슬프게 했던 바로 그 슬픔이다(고린도후서 2:4).

42.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땅 위에서 천사 같은 삶을 살며, 금식하고 깨어 기도하며, 노래하고 기도하고, 모든 사람에 대해 항상 선한 생각을 품는다.

43. 누구나 무언가를 원하면 그것을 얻으려고 애쓰지만, 모든 복과 소망하는 것들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 선하고 갈망할 만한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렇다면 본성상 선하고 갈망할 만한 그분을 얻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열정을 보여야 하겠는가.

44. 부끄러운 행실로 네 육신을 타락시키지 말고, 악한 생각으로 영혼을 더럽히지 말라. 그러면 하나님의 평화가 사랑과 함께 네게 임할 것이다.

45. 금식과 기도로 육신을 고생시키라. 게으름 피우지 말고 시편 찬송과 기도에 힘쓰라. 그리하면 정결함의 거룩함이 사랑과 함께 네게 임하리라.

46. 신성한 지식을 얻게 되어 사랑으로 그 깨달음을 얻은 자는 결코 허영의 영에 사로잡히지 않으나, 이를 얻지 못한 자는 아주 쉽게 그 영에 휘둘리게 된다. 그러나 만일 그런 자가 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모든 것을 그분을 위하여 행한다면, 하나님과 함께 이 병을 쉽게 피할 수 있을 것이다.

47. 아직 신성한 지식을 얻지 못한 자는, 사랑에 의해 영감을 받아 자신이 하는 일이 모두 하느님에 의한 것이라고 많이 생각하지만, 마음속 깊이 그러한 지식을 얻은 자는 하느님의 현현을 받았을 때 조상 아브라함이 했던 말을 되뇌이곤 한다. “나는 흙과 재에 불과합니다” (창세기 18, 27).

48. 주님을 경외하는 자는 겸손한 지혜를 늘 곁에 두며, 그 지혜의 권면을 따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돌아간다. 그는 세속적인 정신으로 살았던 과거의 삶과, 젊은 시절부터 겪었던 유혹으로 인한 온갖 죄과들, 그리고 주님께서 그 모든 것에서 그를 구원하시고 정욕에 사로잡힌 삶에서 하나님을 따르는 삶으로 인도해 주신 것을 회상하며, 경외심과 사랑을 품고; 끊임없이 깊은 겸손과 지혜로 우리 삶의 은인이시자 통치자이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49. 정욕과 분노의 생각을 마음속에 품음으로써 네 마음을 더럽히지 말라. 그래야 순수한 기도에서 벗어나 낙담의 영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50. 마음은 악하고 불결한 생각들과 교감할 때, 하나님께 대한 담대함을 잃게 된다.

51. 무분별한 자는 정욕에 이끌려, 분노에 사로잡혀 동요할 때면 분별 없이 서둘러 형제들에게서 도망치려 한다. 그러나 정욕에 불타오를 때는 회개하며 다시 그들에게로 달려가 그들과 대화를 나눈다. 반면 분별 있는 자는 이 두 경우 모두에서 다르게 행동한다. 분노가 치밀 때, 동요의 원인을 끊어내어 형제들에 대한 원한에서 벗어나고; 정욕에 사로잡혔을 때는 말 없는 충동과 헛된 대화를 삼간다.

52. 유혹이 닥쳤을 때 자신의 수도원을 떠나지 말고, 특히 슬픔과 낙담을 불러일으키는 생각의 동요를 용감하게 견뎌내라.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슬픔을 통해 현명하게 시험을 받음으로써, 하느님에 대한 확고한 희망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곳을 떠난다면, 너는 능숙하지도, 용감하지도, 변함없지도 않은 자로 드러날 것이다.

53. 만약 신성한 사랑에서 떠나지 않기를 원한다면, 형제가 너에 대한 원망 속에서 잠들게 해서는 안 되며, 너 자신도 그에 대한 원망 속에서 잠들지 말라. “가서 네 형제와 화해하고, 돌아와서”(마태복음 5:24) 깨끗한 양심으로 부지런한 기도를 통해 그리스도께 사랑의 예물을 드리라.

54. 신성한 사도의 말씀에 따르면, 성령의 모든 은사를 가졌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도 얻지 못한다고 하니, 우리가 그 사랑을 얻기 위해 얼마나 부지런히 노력해야 하겠는가(고린도전서 13:3).

55. 사랑이 “진실한 자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롬 13:10)면, 형제를 시기하여 그의 좋은 명성에 슬퍼하고, 악한 말로 그의 이름을 더럽히거나, 악한 성품으로 그를 중상모략하는 자는 스스로 사랑을 저버리고 영원한 심판에 처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56. 사랑이 “율법의 성취”라면(롬 13:10), 형제를 원망하며 그에게 함정을 파고, 저주하며, 그의 타락을 기뻐하는 자는 율법을 어기는 자가 아니겠으며, 영원한 형벌을 받을 자격이 없는가?

57. “형제를 비방하고 정죄하는 자는 율법을 비방하고 정죄하는 것”(야고보서 4:11)이며, 그리스도의 율법은 사랑(요한복음 13:34)이라면, 비방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떠나지 않는가? 그리고 스스로 영원한 고통의 원인이 되지 않는가?

58. 비방하는 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악한 말을 즐기며 말하거나 이웃을 비방하는 말을 듣는 데 귀를 기울이지 말라. 그래야 하나님의 사랑에서 떠나지 않고, 영생에서 멀어지지 않을 것이다.

59. 네 아버지에 대한 비난을 받아들이지 말고, 그를 모욕하는 자를 부추기지 말라. 그리하면 주님께서 네 행실을 보시고 노하시지 않으시며, 너를 산 자들의 땅에서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이다.

60. 비방하는 자의 입을 막아라. 네 귀에 그 말이 들어오지 않게 하여, 그와 함께 두 배의 죄를 짓지 않도록 하라. 네가 그 해로운 악습에 물들지 않게 하고, 그가 이웃을 비방하는 것을 막지 못하게 하지 않도록 하라.

61.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며, 너희에게 해를 끼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마태복음 5:44). 주님께서 왜 이것을 명하셨는가? – 너를 증오와 근심, 분노, 원한에서 해방시키고, 온전한 사랑이라는 가장 위대한 축복을 누리게 하려 함이다; 하나님을 본받아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는 이 사랑을 가질 수 없으니,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원하시며” (딤전 2:4)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6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악에 맞서지 말라. 만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그에게 다른 쪽 뺨도 돌려주라. 또 너와 소송을 하려 하는 자에게, 네 겉옷을 빼앗으려 하는 자에게는 속옷까지 내어주라. 만일 누가 강제로 한 마일 가도록 너를 끌고 가려 하면, 그와 함께 두 마일을 가라” (마태복음 5, 39–41). 그 이유는 무엇인가? 너를 분노하지 않고, 근심하지 않으며, 슬퍼하지 않는 상태로 지키기 위함이며, 네 선량함으로 그를 가르치고, 주님께서 선하시듯 너희 둘을 사랑의 멍에 아래로 이끌기 위함이다.

63. 우리가 한때 어떤 사물에 집착했었는지, 그에 대해 우리는 여전히 열정적인 상상을 품고 있다. 그러므로 열정적인 상상을 이겨내는 자는 당연히 상상 속의 사물들도 경멸한다. 사물에 대한 기억과 싸우는 것은 사물 그 자체와 싸우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기 때문이다. 생각으로 죄를 짓는 것이 실제 행동으로 죄를 짓는 것보다 훨씬 더 쉽기 때문이다.

64. 정욕 중에는 육체적인 것도 있고 정신적인 것도 있다. 육체적인 것은 몸에서 기인하고, 정신적인 것은 외부의 대상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이 둘 모두를 사랑과 절제가 끊어내는데, 사랑은 정신적인 정욕을, 절제는 육체적인 정욕을 끊어낸다.

65. 어떤 정욕은 영혼의 자극하는 힘에 속하고, 어떤 정욕은 갈망하는 힘에 속한다. 이 둘 모두 감각에 의해 자극받는데, 영혼이 사랑과 절제에서 벗어났을 때 자극을 받는다.

66. 영혼의 자극적 힘에서 비롯된 정욕을 극복하는 것이 갈망적 힘에서 비롯된 정욕을 극복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바로 그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것들에 대항하여 가장 강력한 치료제, 즉 사랑에 대한 계명을 주셨다.

67. 그 밖의 모든 정욕은 영혼의 자극적인 부분이나, 갈망하는 부분, 혹은 사고하는 부분 중 하나에만 해당하는데, 예를 들어 망각과 무지 등이 그러하다. 그러나 낙담은 영혼의 모든 힘을 휩쓸며, 한순간에 거의 모든 정욕을 움직이게 하므로, 다른 어떤 정욕보다도 더 무겁다. 주님께서는 이에 대한 치료법을 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으니, 참으로 선하시도다.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구원하라”(루카 21,19).

68. 형제 중 누구도, 특히 죄 없는 사람을 결코 때리지 말라. 그래야 그가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떠나지 않을 것이니, 그렇지 않으면 너는 기도할 때마다 항상 너에게 슬픔을 안겨주고,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는 마음을 쫓아내는 양심의 책망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69. 어떤 사람에 대한 것이든, 너에게 유혹이 되는 의심을 품게 하는 자들을 용납하지 말라. 왜냐하면 의도적이든 아니든 우연히 일어나는 일들로 인해 어떤 식으로든 유혹을 받아들이는 자들은, 사랑을 통해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평화의 길”(롬 3,17)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70. 사람들의 성품에 따라 태도를 달리하며, 어떤 이유로 한 사람은 사랑하고 다른 사람은 미워하거나, 같은 사람을 때로는 사랑하고 때로는 같은 이유로 미워하는 자는 아직 완전한 사랑을 갖지 못한 자이다.

71. 완전한 사랑은 사람들의 단일한 본성을 그들의 다양한 성품에 따라 나누지 않는다; 오히려 항상 그 본질을 바라보며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사랑한다. 선한 사람은 친구처럼 사랑하고, 악한 사람은 원수처럼 사랑하며,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오래 참으며, 그들이 가하는 고통을 견디고, 결코 악으로 갚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상황이 요구할 때는 그들을 위해 고통을 감내하여, 가능하다면 그들도 자신의 친구로 삼고자 한다; 비록 그것이 불가능하더라도, 그분은 여전히 그들에 대한 호의를 저버리지 않으시며, 언제나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사랑의 열매를 베푸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이시며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향한 사랑을 나타내시며 온 인류를 위해 고난을 당하셨고, 모든 사람에게 부활의 소망을 똑같이 베풀어 주셨으나, 사실 각자는 스스로 영광을 받을 자격이 있거나 지옥의 고통을 받을 자격이 있는 자로 만들어 간다.

72. 영광과 치욕, 부와 가난, 기쁨과 슬픔을 모두 하찮게 여기는 자는 아직 완전한 사랑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완전한 사랑은 이 모든 것뿐만 아니라, 일시적인 삶과 죽음까지도 하찮게 여긴다.

73. 완전한 사랑에 이른 자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라. “누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는가?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굶주림이나 헐벗음이나 위험이나 칼인가? 기록된 바와 같이, ‘우리는 주를 위하여 하루 종일 죽임을 당하며, 도살당할 양처럼 여겨진다’고 하였으니.” 그러나 이 모든 일 속에서 우리를 사랑하신 분을 위하여 이겨 나갑니다. “내가 이미 알았나니,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들도, 현재 것도, 장래 것도, 높은 것도, 깊은 것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 (롬 8:35–39).

74. 이웃에 대한 사랑에 관해 그들이 말하는 바를 다시 들어보라: “나는 그리스도에 관하여 진실을 말하며, 거짓말하지 아니하노니,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 양심에 순종하는 바와 같이, 내게는 큰 슬픔과 끊이지 않는 마음의 고통이 있나니, 이는 내가 내 형제들, 곧 육신으로 내 친족인 이스라엘 자손들을 위하여, 나 자신이 그리스도로부터 끊어지기를 기도할 정도이니라” – 등등. (롬 9:1–4). 모세와 다른 성도들도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75. 교만과 쾌락 추구, 그리고 그것들을 되돌려 주는 것과 그로 인해 생겨나는 탐욕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는 자는, 분노를 일으키는 원인을 끊어낼 수 없다. 그리고 그것들을 끊어내지 못하는 자는 완전한 사랑에 이를 수 없다.

76. 겸손과 고행(육체적 절제)은 사람을 온갖 죄에서 해방시켜 준다. 왜냐하면 전자는 영혼의 정욕을 끊어내고, 후자는 육체의 정욕을 끊어내기 때문이다. 복자 다윗은 다음과 같은 하느님께 드린 기도에서 볼 수 있듯이 그렇게 행했습니다. “나의 겸손과 수고를 보시고,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소서”(시편 24, 18).

77. 주님께서는 계명을 지키는 자들을 계명을 통해 정욕에서 벗어나게 하시며, 신성한 교리를 통해 그들에게 지식의 빛을 주십니다.

78. 모든 교리는 하나님에 관하여, 혹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피조물에 관하여, 혹은 그 안에 드러난 섭리와 심판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79. 자선은 영혼의 성급한 부분을 치유하고, 금식은 정욕을 말리며, 기도는 마음을 정화하여 존재하는 것을 관조할 수 있도록 준비시킵니다. 이는 주님께서 영혼의 능력에 따라 우리에게 계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80. “나에게서 배우라,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온유하고 마음이 겸손하니라” (마태복음 11,29). 온유함은 성급함이 동요하는 것을 막아 주고, 겸손은 마음을 오만과 허영에서 해방시켜 준다.

81.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형벌에 대한 위협에서 비롯되는데, 이를 통해 우리 안에 절제, 인내, 하나님에 대한 소망, 그리고 무정함이 차례로 생겨나며, 이 무정함에서 사랑이 솟아난다. 다른 하나는 사랑 그 자체와 결합되어, 영혼에 경외심을 일으켜, 사랑의 과감함이 하나님을 경시하는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한다.

82. 첫 번째 두려움은 완전한 사랑이 “쫓아내어”(요한일서 4,18) 영혼에서 탐욕을 제거하고, 더 이상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게 한다. 반면 두 번째 두려움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사랑이 항상 그와 결부되어 있다. 첫 번째 두려움에는 다음 성경 구절이 어울린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모든 악을 피하느니라”(잠언 15:27); “지혜의 시작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니라”(잠언 1:7); 두 번째 유형에 대해서는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영원토록 깨끗하게 남아 있느니라”(시 18:10); “그분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결핍이 없느니라”(시 33:10).

83. “그러므로 땅에 있는 너희 지체, 곧 음행과 부정과 정욕과 악한 욕망과 탐욕 등을 죽이라.” (골로새서 3:5). 사도는 여기서 ‘땅’이라 하여 육신의 생각을 지칭하였으며; 음행은 행위로 저질러지는 죄를, 부정은 그것을 용인하는 것을, 정욕은 정욕적인 생각을, 악한 욕망은 정욕적인 생각을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을, 탐욕은 정욕을 낳고 다시 불러일으키는 물질을 가리킨다. 이 모든 것을 육신의 생각의 구성 요소로서, 신성한 사도는 죽이라고 명령하셨다.

84. 먼저 기억이 마음에 단순한 생각을 불러일으키는데, 만약 그 생각이 마음속에 머무르면, 이로 인해 정욕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정욕을 근절하지 않으면, 정욕은 마음을 굴복하게 만들고, 이 일이 일어나면 비로소 죄와 행위에 이르게 된다. 바로 이 때문에 지극히 지혜로운 사도는 이방인에서 회심한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쓰며, 우선 행위로 죄를 짓는 것을 그치라고 명하고, 그다음에는 이전의 순서로 거슬러 올라가 그 원인에까지 도달하도록 권면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정욕을 낳고 되살리는 원인은 탐욕인데, 제 생각에 여기서는 음탕의 어머니이자 양육자인 ‘과도한 탐욕’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탐욕은 재산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음식에 대해서도 악이며, 마찬가지로 절제는 음식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재산에 대해서도 선이기 때문이다.

85. 다리에 묶인 새가 위로 떠오르기 시작하다가 밧줄에 끌려 다시 땅으로 내려오듯이, 아직 무정(無情)에 이르지 못한 마음은 비록 천상의 것들을 깨닫기 위해 비상하더라도, 정욕에 이끌려 다시 땅으로 끌려 내려온다.

86. 마음이 정욕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때, 비로소 그것은 존재하는 바를 관조하는 길로 막힘없이 나아가며, 성삼위일체를 아는 길로 나아간다.

87. 마음이 맑을 때, 사물에 대한 개념을 얻으면 그것들에 대한 영적 관상에 이끌리지만, 나태함으로 인해 더러워지면 다른 사물에 대한 생각을 단순히 상상할 뿐이며, 어떤 인간적인 것을 받아들일 때면 그것을 수치스럽고 악한 생각으로 변질시킨다.

88. 기도 중에 세속적인 생각이 결코 네 마음을 사로잡지 않는다면, 네가 무정(無情)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았음을 알라.

89. 영혼이 스스로 건전함을 느끼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맑고 평온한 꿈을 꾸기 시작할 것이다.

90. 감각적인 눈이 보이는 사물의 아름다움에 끌리듯이, 맑은 마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아는 데 끌린다. 내가 ‘보이지 않는 것’이라 부르는 것은 무형의 것이다.

91. 사물에 집착하지 않는 것도 큰 일이지만, 그보다 훨씬 더 큰 일은 그 사물들에 대한 상상에도 무감각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악령들은 생각을 통해 우리와 싸우는데, 그 싸움은 사물 그 자체를 통한 싸움보다 훨씬 더 잔혹하기 때문이다.

92. 미덕에서 성공하고 지식으로 풍요로워진 사람은, 사물들이 본성상 어떤 모습인지 이미 보고 있기에, 항상 건전한 이성에 따라 모든 것을 행하고 말하며, 결코 그로부터 벗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에 따라 우리가 사물을 현명하게 또는 현명하지 못하게 사용하는지, 우리가 미덕을 갖추었는지 아니면 타락했는지를 판단하기 때문이다.

93. 완전한 무욕의 징표는, 깨어 있을 때나 잠들었을 때나 사물에 대한 인식이 언제나 단순한 형태로 마음에 떠오를 때이다.

94. 계명을 실천함으로써 마음은 정욕에서 벗어나며, 보이는 것을 영적으로 관조함으로써 사물에 대한 정욕적인 생각에서 벗어나고, 보이지 않는 것을 인식함으로써 보이는 사물을 관조하는 것에서 벗어나며, 마침내 삼위일체를 인식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사물을 아는 것 자체에서도 벗어나게 된다.

95. 해가 떠오르며 세상을 비추어, 스스로를 드러내고 비추는 대상들을 드러내듯이, 진리의 태양도 맑은 마음 속에서 빛나시며, 스스로를 드러내시고, 그분으로부터 비롯된 모든 것과 앞으로 존재할 모든 것에 대한 이해를 드러내신다.

96. 우리는 하나님의 본질이 아니라, 그분의 피조물의 위대함과 그 피조물에 대한 그분의 섭리를 통해 하나님을 안다. 우리는 그 피조물들을 마치 거울처럼 통해 그분의 무한한 자비와 지혜, 그리고 능력을 본다.

97. 맑은 마음은 인간의 사물에 대한 단순한 생각 속에 있거나, 보이는 것을 자연스럽게 관조하거나, 보이지 않는 것을 관조하거나, 또는 성삼위의 빛 속에 머무른다.

98. 보이는 사물을 관조할 때, 마음은 그 사물들의 자연적 속성을 탐구하거나, 그것들이 상징하는 바를 탐구하거나, 혹은 그 사물들의 근본 원인을 찾는다.

99. 보이지 않는 것들을 관조하는 데 힘쓸 때, 마음은 그것들의 자연적 속성과 존재의 원인, 그리고 그로부터 따르는 바, 또한 그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와 심판을 알아내려 한다.

100. 그러나 하나님 안에 있을 때는, 먼저 불타는 사랑으로 그분의 본질을 이해하고자 하지만, 이때 위로를 얻는 것은 그분 안에 있는 것을 아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다. 이는 모든 피조된 본성에게는 불가능하고 감당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분 주위에 있는 것, 즉 영원성, 무한성, 형언할 수 없음, 선하심, 지극한 지혜, 그리고 전능하심, 전지전능하심과 전심판하심. 오직 그분 안에서만 그분이 무한하시다는 사실이 모든 이에게 이해될 수 있으며, 그분의 불가지성(不可知性)에 대한 인식 그 자체가 지성을 초월하는 지식이다. 신학에 정통한 학자들인 그레고리우스와 디오니시우스가 말했듯이 말이다.

 

사랑에 관한 두 번째 백편

1.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어떤 산만함도 없이 기도하며, 마찬가지로 어떤 산만함도 없이 기도하는 자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 그러나 마음이 세상의 어떤 것에 얽매여 있는 자는 산만함 없이 기도할 수 없다. 따라서 마음이 세상의 어떤 것에 얽매여 있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2. 오랫동안 어떤 감각적인 대상에 대해 생각에 잠겨 있는 마음은 당연히 그에 대한 정욕, 즉 갈망이나 한탄, 분노, 또는 원한을 품게 되며, 만일 그 대상을 아무 가치도 없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그 정욕에서 벗어날 수 없다.

3. 정욕은 마음을 사로잡아 물질적인 대상들에 묶어 두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여 그 대상들에 몰두하게 만든다. 반대로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을 지배하면 그 속박을 풀어주며, 감각적인 대상들뿐만 아니라 일시적인 삶 그 자체도 소중히 여기지 않도록 설득한다.

4. 계명의 목적은 사물에 대한 생각을 단순하게 만드는 것이며, 독서와 관상의 목적은 마음을 비물질적이고 형상 없는 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산만함 없는 기도가 이루어진다.

5. 마음이 산만함 없이 기도할 수 있도록 정욕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려면, 다양한 영적 관상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활동적인 방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활동적인 방법은 마음을 절제하지 못함과 증오로부터 해방시키고, 영적 관상은 망각과 무지로부터 마음을 구해내어, 그로 하여금 마땅히 기도해야 할 방식으로 기도할 수 있게 한다.

6. 순수한 기도의 가장 높은 상태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활동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고, 다른 하나는 관조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난다. 하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선한 소망에서 비롯되며, 다른 하나는 신성한 사랑과 지극한 순결에서 비롯된다. 첫 번째 단계의 징표는, 모든 세속적인 생각에서 마음을 모아 산만함이나 혼란 없이 기도를 드릴 때, 마치 하나님께서 실제로 그 앞에 계시는 것처럼, 마치 하나님께서 그 앞에 계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두 번째 징표는, 기도에 전념하는 그 순간에 마음이 신성하고 헤아릴 수 없는 빛에 사로잡혀, 자신은 물론 ‘하나’ 외에는 존재하는 그 어떤 것도 전혀 느끼지 못하며, 오직 ‘하나’께서 사랑으로 그 안에 그러한 깨달음을 심어주시는 것만을 느낄 때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하나님에 관한 말씀들을 깨닫기 위해 노력하는 자는 그분에 대한 순수하고 밝은 지식을 얻게 된다.

7. 무엇을 사랑하는 사람은 바로 그것을 온갖 방법으로 품고 싶어 하며, 이를 방해하는 모든 것을 제거하여 그것을 잃지 않으려 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순수한 기도에 전념하며, 그 길에 장애물이 되는 모든 정욕을 자신 안에서 내쫓는다.

8. 정욕의 어머니인 자만심을 버리는 사람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분노, 슬픔, 원한, 그 밖의 모든 정욕을 쉽게 떨쳐낼 수 있다. 그러나 자만심에 사로잡힌 사람은, 원치 않더라도 나머지 정욕들에 상처받게 된다. 자만심이란 육체에 대한 정욕적인 사랑이다.

9. 사람들은 다음 다섯 가지 이유로 서로를 칭찬할 만하게 또는 비난받을 만하게 사랑한다. 첫째, 하나님을 위해서—덕 있는 자가 모든 이를 사랑하는 것처럼, 심지어 덕 없는 자도 덕 있는 자를 사랑하듯이; 혹은 본성에 따라 —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그러하듯이; 혹은 허영심 때문에 — 칭찬받는 자가 칭찬하는 자를 사랑하듯이; 혹은 이득을 위해 — 부자가 급여를 위해 사랑하듯이; 혹은 쾌락 추구 때문에 — 배를 채우기 위해 일하는 자와, 배 아래에 있는 것을 위해 연회를 차리는 자처럼. 이 중 첫 번째는 칭찬할 만하고, 두 번째는 상호적이며, 나머지는 욕정에 사로잡힌 것이다.

10. 어떤 이들은 미워하고, 어떤 이들은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않으며, 어떤 이들은 그저 그럭저럭 사랑하고, 또 어떤 이들은 지극히 강하게 사랑한다면, 이러한 불평등함에서 네가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사랑하도록 이끄는 완전한 사랑과는 아직 멀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11.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라”(시 36:27), 즉 정욕을 줄이기 위해 원수들과 싸우고, 그 후에는 정욕이 늘어나지 않도록 깨어 있으라. 그리고 다시 미덕을 얻기 위해 싸우고, 그 후에는 미덕을 지키기 위해 깨어 있으라. 이것이야말로 “가꾸고 지키라”는 것(창세기 2,15)일 것이다.

12. 하나님의 허락하심에 따라 우리를 유혹하는 자들은 영혼의 욕망하는 힘을 달아오르게 하거나, 자극하는 힘을 동요시키거나, 사고하는 힘을 어둡게 하거나, 육체에 고통을 가하거나, 육체적 욕구를 빼앗기도 한다.

13. 악령들은 직접 우리를 유혹하거나, 주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을 무장시켜 우리를 대적하게 한다. 직접 유혹할 때는 우리가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있을 때이며, 이는 주님께서 광야에서 유혹받으셨던 것과 같다. 사람들을 통해 유혹할 때는 우리가 사람들과 어울릴 때이며, 이는 다시금 바리새인들을 통해 주님께서 유혹받으셨던 것과 같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본보기가신 주님을 바라봄으로써, 어느 경우든 그들을 물리칠 수 있다.

14.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성장하기 시작할 때, 그때 비방하는 영이 그를 유혹하기 시작하며, 그 어떤 사람도 생각해 낼 수 없는, 오직 그들의 아버지인 마귀만이 지어낼 수 있는 그런 생각들을 그에게 불어넣는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를 시기하여, 그러한 생각을 꾸며낸 자가 절망에 빠져 더 이상 평소의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감히 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로 인해 그 간사자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유리한 것을 아무것도 얻지 못하며, 오히려 우리를 더욱 굳건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시련을 겪고 대적하며 싸울 때,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서 더 많은 경험을 쌓고 더 진실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칼이 그들의 마음에 꽂히고, 그들의 활이 부러지기를”(시 36:15).

15. 이성은 보이는 것에 주목할 때, 감각을 매개로 하여 사물을 자연스럽게 이해한다. 이성도, 사물을 자연스럽게 이해하는 능력도, 사물 자체도, 감각도 악이 아니다. 이는 모두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악한 것은 무엇인가? 분명히, 사물을 자연스럽게 이해하는 데 달라붙는 정욕이다. 그리고 이성은 깨어 있을 때, 사물에 대한 자연스러운 개념을 사용할 때, 그 정욕은 자리 잡을 수 없다.

16. 정욕이란 영혼의 비자연적인 움직임으로, 무분별한 사랑이나, 어떤 감각적인 대상에 대한 무모한 증오, 혹은 감각적인 것을 위한 것이다. 무분별한 사랑으로는, 음식이나, 아내나, 재산이나, 덧없는 명예, 또는 그 밖의 어떤 감각적인 대상에 대한 사랑, 혹은 이를 위한 것이다. – 이성적이지 않은 증오로,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성적 판단 없이 앞서 언급된 것들 중 어떤 것을, 혹은 그로 인해 누군가를 미워할 때이다.

17. 또는 다시 말해, 악이란 인식된 사물에 대한 잘못된 판단에 그 사물의 부적절한 사용이 수반되는 것이다. 사물에 관해 말하자면, 성관계에 대한 올바른 판단은 그 목적을 자녀 출산으로 삼는다. 그러나 이때 오직 정욕적인 쾌락만을 염두에 두는 자는 판단에 실수를 저지르며, 나쁜 것을 선한 것으로 여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아내와 성관계를 맺을 때 이를 남용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다른 사물들에 대한 이해와 사용에 대해서도 논해야 한다.

18. 악령들이 네 마음을 정절에서 멀어지게 하여 음란한 생각들로 둘러쌀 때, 눈물을 흘리며 주님께 부르짖으라. “나를 쫓아내는 자들이 이제 나를 에워쌌나이다. 나의 기쁨이시여, 나를 에워싼 자들로부터 나를 구원하소서” (시 16:11; 31:7). 그리하면 구원받을 것이다.

19. 음탕의 악마는 무겁고, 이 정욕에 맞서 싸우는 이들에게 심하게 압박을 가하는데, 특히 식사에 있어 절제를 소홀히 할 때와 여성들과 만나거나 대화를 나눌 때 더욱 그러하다. 그 악마는 처음에는 눈에 띄지 않게 음탕한 쾌락에 대한 유혹으로 마음을 사로잡고, 그다음에는 기억의 문을 통해 침묵하는 자에게 다가와, 몸을 달아오르게 하듯이 마음에도 온갖 음란한 형상들을 떠올리게 하며, 이를 통해 죄를 저지르도록 유혹합니다. 만약 이러한 일이 네 안에서 계속되기를 원치 않는다면, 금식, 수고, 기도, 그리고 부지런한 기도와 함께 선한 침묵을 실천하라.

20. 끊임없이 우리 영혼을 노리는 자들은, 정욕적인 생각을 통해 영혼을 마음속의 죄나 실제적인 죄로 빠뜨리려 한다. 그러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마음을 만나면, 그때 “부끄러워하고 수치를 당할” 것이며, 영적 묵상에 몰두한 마음을 발견하면, 그때 뒤로 물러나 “곧 크게 부끄러워할” 것이다(시 34:4; 6:11).

21. “집사”의 사명은 마음을 거룩한 업적에 집중시키고, 그로부터 정욕적인 생각을 몰아내는 자가 수행하며, “장로”의 사명은 마음을 실재에 대한 지식으로 깨우치고, 거짓된 지식을 소멸시키는 자가 수행한다; “주교”의 사명은, 경배받는 삼위일체에 대한 지식을 성스러운 기름 부음으로 완성하는 자에 의해 이루어진다.

22. 계명을 이행함으로써 우리 안의 정욕이 줄어들 때 악마들은 쇠약해지며, 영혼의 무정욕으로 인해 그들 안에서 의지하던 것과 영혼을 대적하여 싸우던 것을 더 이상 찾지 못하고 완전히 사라질 때 멸망한다. 이것이 바로 “그들은 주님의 면전에서 쇠약해지고 멸망하리라”(시편 9:4)는 뜻이다.

23. 어떤 사람들은 인간의 두려움 때문에 정욕을 절제하고, 어떤 사람들은 허영심 때문에, 또 어떤 사람들은 금욕을 위해 절제하며,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섭리로 인해 정욕에서 해방된다.

24. 주님의 모든 말씀에는 다음 네 가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계명, 교리, 경고, 그리고 약속입니다. 우리는 이를 위해 금식, 철야 기도, 맨땅에서 잠자기, 순종에 따른 결핍과 수고, 모욕, 치욕, 고문, 죽음 등과 같은 온갖 엄격한 삶을 견뎌냅니다. “주님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씀 때문에”라고 선지자가 말하듯이, “나는 험난한 길을 견뎌 냈나이다”(시 16:4).

25. 절제에는 무정욕이, 믿음에는 지식이 상으로 주어지니, 무정욕은 분별력을 낳고, 지식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낳는다.

26. 이성은 활동적인 삶을 올바르게 살아갈 때 분별력을 키우며, 관조적인 삶을 올바르게 살아갈 때는 지식을 얻는다. 전자는 그 길을 걷는 이를 미덕과 악덕을 구별하게 하며, 후자는 그 길을 걷는 이를 무형적·유형적 존재들의 속성을 깨닫게 한다. 의 신학적 은사는, 이성이 사랑의 날개를 타고 앞서 말한 모든 것을 넘어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경지에 이르러, 인간의 이성이 감당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그분의 속성을 영으로 관조할 때 비로소 얻게 된다.

27. 신학을 하고자 한다면, 하나님 안에 무엇이 있는지 찾지 말라. 이는 인간의 이성뿐만 아니라, 하나님 다음으로 존재하는 그 누구의 이성도 이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가능한 한 그분을 감싸고 있는 속성들, 즉 영원성, 무한성, 형언할 수 없음, 선하심, 지극한 지혜, 그리고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섭리하시며, 모든 존재를 심판하시는 능력을 살펴보라. 왜냐하면 사람들 중에서 이 하나님의 속성들을 조금이라도 밝혀내는 자가야말로 이미 위대한 신학자이기 때문이다.

28. 지식과 실천을 결합한 사람은 강하다. 왜냐하면 그때 그는 이를 통해 정욕을 말리고 분노를 다스리며, 그로 인해 마음을 고양시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29. 주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말씀하실 때는 본질의 일치를 의미하시며, 다시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시니라”고 말씀하실 때는 위격들의 불가분성을 나타내신다. 이와 같이 트리베이티(삼신론자들)는 아들을 아버지로부터 분리함으로써 양쪽 모두에서 심연으로 떨어지게 된다. 즉, 아들이 아버지와의 본질이 동일함을 인정하면서도 그분을 아버지로부터 분리할 경우, 그분이 아버지에게서 나지 않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게 되어, 결국 세 신과 세 근원을 인정하는 이단에 빠지게 된다. 아니면,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나셨음을 인정하면서도 그분을 아버지와 분리함으로써, 필연적으로 그분이 아버지와 본질적으로 동일하지 않다고 인정해야 하며, 시간의 주님을 시간 아래에 두게 된다. 위대한 그레고리우스의 가르침에 따르면, 유일한 하나님을 보존하고 각기 고유한 속성을 지닌 세 위격을 고백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의 가르침에 따르면, 삼위일체는 분리되어 있으나 분리될 수 없으며, 결합되어 있으나 개별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경이로운 분리와 연합이다! 그러나 만일 아버지와 아들이 사람과 사람이 결합하고 분리되는 것처럼, 그 이상도 아닌 그 수준으로만 결합하고 분리된다면, 과연 어떤 경이로움이 있겠는가?

30. 사랑에 온전하고 무정(無情)의 경지에 이른 자는 자기 것과 남의 것, 자기 것과 타인의 것,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종과 자유인, 심지어 남성과 여성 사이의 차이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정욕의 폭정에서 벗어나, 오직 하나의 인간 본성을 바라보며, 모든 이를 동등하게 대하고, 모든 이에게 동등한 마음을 품는다. 그에게는 유대인도 헬라인도 없고, 남성이나 여성도 없으며, 종이나 자유인도 없으니, 모든 것 안에서,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이시다(갈라디아서 3, 28).

31. 악령들은 영혼 속에 깃든 정욕들로부터 계기를 얻어 우리 안에 정욕적인 생각을 일으킨다. 그런 다음 그것들로 마음을 제압하여 죄를 용납하도록 강요하고, 이 점에서 마음을 이겨내면 마음속의 죄로 이끌며, 이를 저지른 후에는 포로처럼 죄의 행위 그 자체로 이끌어 간다. 그 후 마침내 생각들을 통해 영혼을 황폐하게 만든 뒤, 그 생각들과 함께 물러난다. 오직 마음속에는 죄의 우상(상상 속의 형상)만이 남는데, 주님께서 이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거룩한 곳에 서 있는 황폐의 가증한 것을 볼 때”(마태복음 24, 15)라고 하셨다. 이 글을 읽는 자는 거룩한 곳과 하나님의 성전이 곧 인간의 마음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곳에서 악마들은 정욕적인 생각으로 영혼을 황폐하게 만든 뒤, 죄의 우상을 세워 놓았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가 역사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요세푸스 플라비우스를 읽은 사람 중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때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말한다.

32. 세 가지 원리가 우리를 선으로 이끈다: 타고난 선의 씨앗, 거룩한 힘, 그리고 선한 의지이다. 본성의 씨앗이란, 예를 들어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서 받고 싶은 대로 그들을 대할 때, 혹은 곤경과 궁핍에 처한 사람을 보고 자연스럽게 그에게 자비를 베풀 때를 말합니다. 거룩한 힘이란, 선한 일을 하려는 충동을 느낄 때 (우리 안에서) 선한 조력을 얻어 그 일을 성공적으로 이룰 때를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선한 의지는, 선과 악을 분별하여 선을 선택할 때 나타납니다.

33. 마찬가지로 우리를 악으로 이끄는 세 가지 원리가 있다: 정욕, 악령, 그리고 악한 의지이다. 정욕은 무분별하게 무언가를 갈망할 때입니다. 예를 들어, 때를 벗어나거나 필요 없이 음식을 탐하거나, 자녀를 낳을 의도 없이 불법적인 관계를 맺는 경우입니다. 또한 화를 내거나 슬퍼할 때, 예를 들어 명예를 훼손한 자나 우리에게 해를 끼친 자와 같이, 화를 내서는 안 될 대상에게 분노하거나 슬퍼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악령: 우리가 방심하고 있을 때, 그들이 적절한 시기를 노려 갑자기 우리를 덮쳐와, 막대한 힘으로 앞서 말한 정욕들과 그와 유사한 것들을 자극할 때이다. 마지막으로 악한 의지: 선을 알면서도 악을 선택할 때이다.

34. 덕행에 대한 보상은 무정욕과 지식이다. 이는 그것들이 우리에게 천국을 얻게 하는 반면, 정욕과 무지는 영원한 고통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이 선하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영광을 위해 이를 추구하는 자는 성경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듣게 된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악한 것을 구하기 때문이라”(야고보서 4:3).

35. 인간의 행위 중에는 그 자체로는 선한 것이 많으나, 어떤 이유로 인해 선하지 않게 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금식과 철야 기도, 기도와 시편 찬송, 자선과 나그네 대접은 그 자체로는 선한 행위이지만, 허영심에서 행해질 때는 더 이상 선하지 않다.

36. 우리의 모든 행위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위해 행하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로 행하는지를 보십니다.

37. 성경의 말씀,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갚으시리라”(롬 2:6) 들을 때, 하나님께서는 올바른 의도 없이 행한 일, 비록 그것이 선해 보일지라도 선으로 갚아 주시지 않으시며, 오직 올바른 의도로 행한 일에 대해서만 선으로 갚아 주신다는 것을 기억하라. 하나님의 심판은 행해지는 행위 그 자체만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를 행하는 의도를 보시기 때문이다.

38. 교만의 악마는 두 가지 교활한 수법을 쓴다. 하나는 수도사가 자신의 올바른 행실을 선을 베푸시는 분이시며 올바름을 이루도록 도우시는 하나님께 돌리지 않고 자신에게 돌리도록 설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수도사가 이에 동의하지 않을 때 덜 완전한 형제들을 깎아내리도록 부추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행동을 할 때조차도 악마가 그를 부추겨 하나님의 도움을 거부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과 같이 올바르게 행할 수 없었던 자들을 깎아내림으로써, 그는 오히려 자신의 힘으로 특별한 올바름을 보여준 것처럼 자신을 내세우기 때문이다. 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나 없이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요한복음 15:5)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은 선을 원한다 해도, 선을 베푸시는 분 없이는 그것을 끝까지 이룰 수 없을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39. 인간 본성의 연약함을 깨달은 자는 하나님의 도우시는 능력에 대한 체험적 지식을 얻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은 그 힘의 도움으로 어떤 일은 이미 이루었고, 또 다른 일을 이루려고 노력하며, 결코 어떤 사람도 폄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힘은 자신에게 도움을 주어 수많은 정욕과 고통에서 구원해 주었듯이, 원하실 때면 누구에게나, 특히 그분을 위해 수고하는 이들에게도 강력하게 도우실 수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비록 어떤 운명에 따라 모든 이를 한꺼번에 정욕에서 해방시키지는 않지만, 선하고 인자한 의사처럼 그분께 달려오는 모든 이를 제때에 치유해 주신다.

40. 정욕이 잠잠해지면 교만이 찾아오는데, 이는 정욕의 원인이 숨겨지거나 악령들이 교묘하게 도망칠 때이다.

41. 거의 모든 죄는 자기 만족을 위한 쾌락 때문이며, 그러므로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회개의 행위나 어떤 재앙의 작용을 통해 —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섭리로 신중하게 이끌어 주시는 대로 — 고통과 슬픔으로 근절된다. “만일 우리가 스스로를 판단했다면”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는 정죄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셔서 징계하시는 것은, 우리가 세상과 함께 정죄받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고린도전서 11:31, 32).

42. 뜻밖의 유혹이 닥친다면, 그것을 가져온 이를 탓하지 말고, 왜 그것이 왔는지 그 이유를 찾으라. 그리하면 교정을 얻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을 통해서든 다른 누군가를 통해서든, 너는 하나님의 심판의 잔에서 쓴맛을 마셔야 했기 때문이다.

43. 네가 악한 성품일수록, 그 악한 고난을 더 적게 거부하라. 그리하여 그 고난으로 인해 겸손해짐으로써, 네 안의 교만을 토해내게 될 것이다.

44. 유혹은 사람들에게 오고, 어떤 즐거움은 슬픔을, 또 어떤 육체적 고통은 고통을 가져온다. 영혼의 의사이신 분께서는 그분의 뜻에 따라, 영혼 속에 자리 잡은 정욕의 원인을 살피시며 치료법을 적용하시기 때문이다.

45. 유혹은 어떤 이들에게는 과거의 죄를 씻기 위해, 어떤 이들에게는 현재 저지르고 있는 죄를 그치게 하기 위해, 또 다른 이들에게는 앞으로 저질러질 죄를 막기 위해 주어진다. 욥의 경우처럼 사람을 시험하기 위해 주어지는 유혹은 예외이다.

46. 분별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가 치유의 목적을 지닌다는 것을 생각하며, 그로 인해 자신에게 닥치는 재앙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견디고, 자신의 죄 외에는 그 누구도 그 재앙의 원인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분별력이 없는 자는 죄를 짓고 그로 인해 벌을 받을 때, 자신의 악행에 대한 원인을 하나님이나 사람으로 돌리며, 이에 대한 하나님의 지혜로운 섭리를 깨닫지 못한다.

47. 정욕의 움직임을 멈추게 하고 그것이 커지지 못하게 하는 수단이 있는 반면, 정욕을 약화시키고 소멸로 이끄는 다른 수단들도 있다. 예를 들어, 금식, 노동, 그리고 기도는 정욕이 커지는 것을 막아주고, 은둔, 관상, 기도,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정욕을 약화시켜 소멸로 이끈다. 성미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너그러움, 원한을 품지 않음, 온유함은 성미를 멈추게 하고 커지지 못하게 하며, 사랑, 자선, 선의, 그리고 이웃 사랑은 성미를 약화시킨다.

48. 마음을 끊임없이 하느님께 향하는 이의 갈망은 하느님을 향한 소망으로 더욱 커지며, 성미의 모든 것이 신성한 사랑으로 변모한다. 이는 오랜 기간 동안 신성한 빛에 닿음으로써, 마음이 온전히 빛을 뿜어내는 상태가 되고, 그 안의 갈망하는 부분을 억누르고 제압하여, 앞서 말한 대로 끊임없는 하느님에 대한 갈망과 그분께 대한 변함없는 사랑으로 변화시키며, 이를 온전히 세속적인 것에서 신성한 것으로 옮겨 놓기 때문이다.

49. 모든 사람이 – 시기하지 않고, 분노하지 않고, 모욕한 자를 원망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미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사랑하지 않더라도 계명에 따라 악으로 악을 갚지 않을 수는 있지만, 그러나 억지로 자신을 몰아세우지 않고 선으로 악을 갚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선을 행하려는 마음가짐은 오직 영적으로 완전한 사랑만이 지닐 수 있는 특성이기 때문이다.

50. 타인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를 미워하는 것은 아니며, 마찬가지로 미워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를 사랑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태도에서 중립적인 위치에 있을 수 있으니, 즉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않는 상태이다. 왜냐하면 마음속의 사랑의 마음은 대개 이 두 번째 백 개의 다섯 번째 조항에 제시된 다섯 가지 동기에 의해 생겨나기 때문이다: 하나는 칭찬할 만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상호적인 것이며, 세 가지는 책망할 만한 것이다.

51. 네 마음이 물질적인 대상들에 즐거움을 느끼며 그것들에 대한 생각에 기꺼이 머무르는 것을 알아차릴 때, 네가 하나님보다 그것들을 더 사랑하고 있음을 알라. “너희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 마음도 있을 것이니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마태복음 6:21).

52. 하나님께 매달리고, 기도와 사랑으로 그분 안에 머무는 마음은 지혜롭고, 선하며, 강하고, 사람을 사랑하며, 자비롭고, 너그러우며, 간단히 말해 거의 모든 신성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 반면 그분께로부터 멀어지고 물질적인 것들과 친해지며 쾌락에 탐닉하는 사람은 짐승 같거나 야수처럼 되어, 이로 인해 사람들과 다투게 된다.

53. 성경은 감각적인 것들을 ‘세상’이라 부르며, 그것들로 마음을 채우는 자들은 세속적인 사람들이다. 성경은 그들을 더욱 부끄럽게 하기 위해 이렇게 말한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세상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말라.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신의 정욕과 눈의 정욕과 이 세상의 자랑은 아버지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이 세상에서 난 것이라”(요일 2:15, 16).

54. 수도사란 자신의 마음을 감각적인 것들로부터 멀리하고, 절제와 사랑, 시편 찬송과 기도로 끊임없이 하나님 곁에 머무르는 자이다.

55. 영적인 의미에서 ‘가축을 기르는 자’라고 불리는 사람은 부지런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영적 삶에서 행해지는 도덕적으로 옳은 일들은 일하는 가축과 같은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가축을 기르는 자들은 네 종들이다”라고 말한다. 반면 양의 목자는 관조적인 사람인데, 이는 산 위에서 지성으로 목양하는 사색의 생각들이 양과 같은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집트인들에게, 즉 대적하는 세력들에게 ‘모든 양 치는 자’는 가증한 자”이다(창세기 46:34).

56. 타락한 마음은, 육체가 본성에 맞는 정욕과 쾌락에 대한 감각에 자극을 받을 때, 이를 따르며 그 환상과 욕망에 동조한다. 그러나 덕스러운 마음은 절제하며, 정욕적인 환상과 욕망에서 자신을 돌리고, 나아가 자신의 행동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지혜를 발휘한다.

57. 미덕 중에는 육체적인 것도 있고, 영적인 것도 있다. 육체적인 미덕은 금식, 기도, 맨땅에서 잠자기, 봉사, 수공예 등이며, 이는 타인에게 부담이 되지 않기 위함이나 자선을 베풀기 위함 등이다. 반면 영적인 미덕은 사랑, 관대함, 온유함, 절제, 기도 등이다. 따라서 어떤 필요나 육체적 상태, 예를 들어 질병이나 그와 유사한 다른 이유로 인해 앞서 언급한 육체적 미덕을 실천할 수 없게 된다면, 그 원인을 아시는 주님께서 관대하게 용서해 주실 것이다; 그러나 영적 미덕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어떠한 변명도 통하지 않을 것이니, 이는 그러한 미덕들이 그러한 장애물에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58. 하느님을 향한 사랑은 성체 성사를 받는 이로 하여금 모든 덧없는 쾌락과 모든 육체적 고통과 슬픔을 경멸하게 한다. 그리스도를 위해 그토록 많은 고난을 겪은 모든 성인들이 이 점을 네게 증언해 주리라.

59. 악의 근원인 자만심, 즉 육체에 대한 무분별한 사랑을 조심하라. 이는 자만심으로부터, 겉보기에는 축복처럼 보이는 세 가지 첫 번째이자 근원이 되는 격정적이고 광란적인 생각, 즉 식욕, 탐욕, 허영심이 육체의 필수적인 필요에서 구실을 빌려 생겨나기 때문이며, 이로부터 모든 정욕의 무리가 탄생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말한 대로 자만심을 극도로 경계하고, 큰 경각심을 가지고 이에 맞서 싸워야 한다. 왜냐하면 자만심을 근절함으로써 그로부터 비롯된 모든 것들도 함께 근절되기 때문이다.

60. 자만심이라는 정욕은 수도사에게 몸을 아끼게 하고, 건강 유지와 신체의 합리적인 관리라는 명목으로 음식에 대해 관대하게 대하도록 부추기며, 조금씩 그 쪽으로 치우치다 보면 쾌락 추구의 심연에 빠지게 한다. 반면 평신도는 평신도라는 이유만으로 “육체를 정욕 속에서 돌보게” (롬 13, 14).

61. 기도의 지극히 높은 경지는, 사람들이 말하길, 기도 중에 마음이 육체와 세상 밖에서 완전히 비물질적이고 보이지 않는 상태가 될 때라고 한다. 이러한 상태를 흔들림 없이 유지하는 자는 참으로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이다.

62. 죽어가는 육신이 모든 세속적인 것들로부터 완전히 분리되듯이, 가장 완전한 기도의 행위에 빠져 죽어가는 마음도 모든 세속적인 생각들로부터 떨어져 나간다. 만일 마음이 그러한 죽음으로 죽지 않는다면, 하나님과 함께 있거나 그분과 함께 살 수 없다.

63. 겸손한 수도사여, 누구도 너를 유혹하여, 쾌락과 허영을 좇으며 일함으로써 구원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빠지게 하지 말라.

64. 육신이 행위로 죄를 짓고, 자신을 다스리기 위해 육신의 미덕을 갖추어 절제하듯이, 마음도 정욕적인 생각으로 죄를 짓고, 자신을 다스리기 위해 영혼의 미덕을 갖추어 사물을 순수하고 편견 없이 바라보며 절제해야 한다.

65. 낮이 밤으로, 여름이 겨울로 이어지는 것처럼, 허영과 쾌락 추구도 슬픔과 고통스러운 고난으로 이어지니, 이는 현세에서든 내세에서든 마찬가지이다.

66. 죄를 지은 자는 이 생에서 자발적으로 고통스러운 수고를 감수하거나, 어쩔 수 없는 재앙으로 인한 고통을 겪지 않고서는 다가올 심판을 피할 수 없다.

67. 다섯 가지 이유로 인해, 하나님께서 우리가 악마들에게 시달리게 내버려 두신다고 한다. 첫 번째 이유는, 우리가 시달리고 대항함으로써 미덕과 죄를 구별하는 능력을 얻게 하기 위함이며; 두 번째 이유는, 우리가 투쟁과 수고를 통해 미덕을 얻어, 그것을 확고하고 변함없이 간직하게 하기 위함이며; 셋째, 덕을 쌓아가면서도 스스로를 과대평가하지 않고 겸손을 배우게 하기 위함이며; 네 번째는, 실천을 통해 죄가 얼마나 악한지 체험함으로써, 온전히 증오하는 마음으로 죄를 미워하게 하기 위함이며;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욕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 우리 자신의 연약함과 우리를 도우신 분의 능력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68. 굶주린 자의 마음이 빵을 갈망하고, 목마른 자의 마음이 물을 갈망하듯이, 식탐에 빠진 자의 마음은 다양한 진미를, 정욕에 사로잡힌 자의 마음은 여성의 얼굴을, 허영심에 찬 자의 마음은 사람들의 존경을, 탐욕스러운 자의 마음은 이익을, 원한을 품은 자는 자신을 모욕한 자에 대한 복수를, 시기하는 자는 자신이 시기하는 대상이 타락하기를 꿈꾼다. 다른 정욕들에서도 마찬가지다. 정욕에 사로잡힌 마음은 깨어 있을 때나 잠들었을 때나 정욕적인 생각을 품게 되기 때문이다.

69. 정욕이 커지면, 마음은 꿈속에서 즐거움을 주는 것들을 꿈꾸고, 분노가 커지면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을 보게 된다. 불결한 영들은 우리의 태만함을 조력자로 삼아 정욕을 부추김으로써 정욕을 강화시키며, 거룩한 천사들은 우리를 미덕을 실천하도록 이끄는 것으로 정욕을 약화시킨다.

70. 영혼의 욕망이 자주 자극되면, 영혼은 쾌락을 추구하는 일에 대한 극복할 수 없는 습관을 갖게 되며, 짜증이 자주 일면 마음은 소심해지고 용기를 잃게 된다. 전자는 지속적인 금식, 철야 기도, 그리고 기도로 치유되며, 후자는 자선, 이타심, 사랑, 그리고 자비로 치유된다.

71. 악령들은 사물을 통해서든, 사물에 대한 열정적인 생각을 통해서든 우리와 싸운다. 사물을 통해서는 그 사물들 속에 휩싸인 자들을, 생각을 통해서는 사물에서 멀어진 자들을 공격한다.

72. 행동으로 죄를 짓는 것보다 생각으로 죄를 짓는 것이 얼마나 더 쉬운가: 그만큼 생각으로 인한 싸움은 사물을 통한 싸움보다 더 무겁다.

73. 사물은 마음 밖에 있지만, 그것에 대한 생각은 마음 안에 있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선하게 또는 악하게 사용하는 것은 마음의 권한에 달려 있다. 왜냐하면 생각의 잘못된 사용 뒤에는 사물의 남용이 따르기 때문이다.

74. 마음은 다음 세 가지 경로를 통해 정욕적인 생각을 얻는다: 감각을 통해서, 육체의 상태를 통해서, 기억을 통해서. 감각을 통해서—감각에 인상을 주는 사물, 즉 우리가 정욕을 품고 있는 것들이 마음속에 정욕적인 생각을 불러일으킬 때; 신체의 상태를 통해서 – 식이 조절을 지키지 않거나, 악령의 작용, 혹은 어떤 질병으로 인해 변화된 신체 상태가 마음을 욕망적인 생각이나 섭리에 대한 반항으로 이끄는 경우; 기억을 통해서, – 기억이 우리가 집착하는 사물에 대한 생각을 되살려, 이로써 마음속에 정욕적인 생각을 불러일으킬 때;

75.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용하도록 주신 것들 중, 어떤 것은 영혼 안에, 어떤 것은 몸 안에, 또 어떤 것은 몸 주위에 있다. 영혼 안에는 영혼의 힘이 있고, 몸 안에는 감각과 그 밖의 지체들이 있으며, 몸 주변에는 음식, 재산, 돈 등이 있다. 이러한 사물들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우연들을 선하게 또는 나쁘게 사용하는 것은 우리를 덕스러운 사람으로 보이게 하거나 타락한 사람으로 보이게 한다.

76. 앞서 언급한 우연들 중 어떤 것은 영혼에 속하고, 어떤 것은 몸에 속하며, 또 어떤 것은 몸 주위에 속한다. 영혼에는 지식과 무지, 기억과 망각, 사랑과 증오, 두려움과 대담함, 기쁨과 슬픔 등이 있으며; 몸 안에서는 쾌락과 피로, 감각의 예민함과 무뎌짐, 건강과 질병, 삶과 죽음 등이 있으며; 몸 밖에서는 자손이 많은 것과 없는 것, 부와 가난, 명예와 불명예 등이 있다. 이 중에서 어떤 것은 사람들에게 선으로 여겨지고, 어떤 것은 악으로 여겨지지만, 본래의 의미에서 이 중 그 어떤 것도 악이 아니며, 사용 방식에 따라 선이 되기도 하고 악이 되기도 한다.

77. 지식은 본질상 선이며, 건강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에게는 그 반대가 더 큰 유익을 가져다주었는데, 이는 악한 자들에게 지식은 선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그것이 본질상,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선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는 건강과 부, 기쁨도 선이 되지 않는데, 이는 그들이 이를 자신에게 유익한 방식으로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이와 정반대되는 것이 더 유익하다. 따라서 이것(즉, 정반대되는 것) 또한 본질적인 의미에서 악은 아니지만, 겉보기에는 악으로 보인다.

78. 생각에 남용하지 말라. 그래야 필연적으로 사물에도 남용하지 않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먼저 생각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면, 결코 행동으로 죄를 짓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79. “지상의 형상”(아담)이란 무지, 비겁함, 절제력 부족, 거짓과 같은 주요한 악덕들을 말한다. “하늘의 형상”이란 분별력, 용기, 정절, 정의와 같은 주요한 미덕들을 말한다. “우리가 땅의 형상을 입었으니, 하늘의 형상도 입자”(고린도전서 15,49).

80. 생명으로 이끄는 길을 찾고자 한다면, “나는 길이요 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 (요한복음 14,6; 10,9)라고 말씀하신 그 길 안에서 찾으라. 그리하면 그곳에서 그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부지런히 찾으라. “그 길을 찾는 자가 적기 때문”(마태복음 7:14)이니, 그렇지 않으면 이 소수에 속하지 못하고 수많은 자들 가운데 휩쓸리게 될까 두렵다.

81. 영혼은 다음 다섯 가지 동기에 의해 죄를 피한다: 혹은 사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거나, 심판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거나, 장차 받을 상급을 위해서이거나, 하느님에 대한 사랑 때문이거나, 마지막으로 양심의 가책 때문이다.

82. 어떤 이들은 우리를 악으로 이끌어가는 외부의 어떤 힘이 없었다면 피조물들 속에 악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힘은 다름 아닌, 우리 마음의 본래적 활동에 대한 우리의 게으름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를 소중히 여기는 자들은 항상 선을 행하고, 결코 악을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너도 이를 원한다면, 게으름을 떨쳐내라. 그러면 동시에 악도 떨쳐낼 수 있을 것이다. 악이란 생각의 잘못된 사용이며, 남용과 사물들이 수반되는 것이다.

83. 우리 안의 이성적인 부분은 본성상 신성한 말씀에 순종하며, 우리 안의 비이성적인 부분을 지배해야 한다. 이 질서가 모든 면에서 지켜지기를 바란다. 그러면 피조물 속에 악도 없을 것이며, 악으로 이끌 만한 것도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84. 생각 중에는 단순한 것도 있고 복잡한 것도 있다. 단순한 생각은 무욕적이며, 복잡한 생각은 욕망에 찬 것으로, 마치 욕망과 사유가 결합된 것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생각 중 많은 것이 복잡한 생각을 뒤따르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생각으로 죄를 짓고자 움직이기 시작할 때이다. 금을 예로 들어 보자. 누군가에게 금에 대한 욕망 어린 생각이 떠올랐고, 그는 마음속으로 그것을 훔치려 했다. 그리하여 그는 이미 마음속에서 죄를 저질렀다. 금에 대한 기억 뒤에는 지갑, 상자, 창고 등에 대한 기억이 뒤따랐다. 여기서 금에 대한 기억은 욕망과 결합되어 있었기에 복잡한 것이었고, 지갑, 상자 등에 대한 기억은 마음이 그것들에 대한 욕망을 품지 않았기에 단순한 것이었다. 이는 다른 모든 생각, 즉 허영심에 찬 생각이나 아내에 대한 생각, 그 밖의 생각들에서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욕망에 찬 생각 뒤에 이어지는 모든 생각이 이 예에서 보듯이 반드시 욕망에 찬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어떤 생각이 욕망에 찬 것이고 어떤 생각이 그렇지 않은지를 알 수 있다.

85. 어떤 이들은 악마들이 잠자는 동안 우리 몸의 사타구니 부위를 만짐으로써 음행의 정욕을 자극한다고 말한다. 그러면 자극받은 정욕이 기억을 통해 여성의 형상을 마음에 떠올리게 한다. 반면 다른 이들은 악마들이 스스로 여성의 모습으로 마음에 나타나, 그 후 몸의 사타구니 부위를 만짐으로써 여성에 대한 욕망을 자극한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이러한 종류의 몽상이 일어난다. 또 다른 이들은 다가오는 악마에게 지배적인 정욕이 사람에게도 똑같은 정욕을 불러일으키며, 이로 인해 영혼이 욕망에 불타오르고 기억을 통해 이미지를 불러온다고 생각한다. 다른 정욕적인 꿈들에 대해서도 어떤 이들은 이런 식으로 일어난다고 말하고, 다른 이들은 저런 식으로 일어난다고 말한다. 그러나 영혼에 사랑과 절제가 깃들어 있다면, 악마들은 앞서 언급된 어떤 방식으로도 육체가 깨어 있을 때나 잠들었을 때를 막론하고 어떠한 정욕도 일으킬 수 없다.

86. 율법의 계명 중에는 육체적으로도 영적으로도 지켜야 할 것이 있고, 오직 영적으로만 지켜야 할 것도 있다. 예를 들어,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와 이와 유사한 계명들은 육체적으로도 영적으로도 지켜야 하며, 영적으로는 세 가지 방식으로 지켜야 한다. 반면 할례를 행하고, 안식일을 지키며, 어린 양을 제물로 바치고, 쓴 허브를 곁들인 무교병을 먹는 것과 같은 것들은 오직 영적으로만 지켜야 한다.

87. 수도자들에게는 세 가지 가장 중요한 도덕적 상태가 있다. 첫째는 어떤 행위로도 죄를 짓지 않는 경우이고, 둘째는 마음속에서 정욕적인 생각이 머무르지 못하게 하는 경우이며, 셋째는 생각 속에서 여성이나 자신을 모욕하는 이들의 모습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경우이다.

88. 탐욕이 없는 사람은 모든 소유를 버리고, 이 땅에 몸 외에는 아무것도 갖지 않은 자이며, 심지어 그 몸에 대한 애착마저 버리고, 자신에 대한 모든 돌봄을 하나님과 경건한 사람들에게 맡긴 사람이다.

89. 재산을 취득하는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은 무감정하게 그것을 얻는다. 그래서 재산을 잃어도 슬퍼하지 않는데, 이는 한때 자신의 재산이 약탈당하는 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였던 자들과 같다(히브리서 10:34). 반면 다른 이들은 집착하며 재산을 모은다. 그래서 재산을 잃게 될 상황이 닥치면, 복음서에 나오는 부자처럼 “슬퍼하며 돌아갔다”(마태복음 19:22)고, 실제로 재산을 잃게 되면 죽을 만큼 슬퍼한다. 이처럼 재산을 잃는 일은 무욕한 자와 욕심 많은 자의 성향을 드러낸다.

90. 고귀한 기도자들에게는 악마들이 덤벼들어, 그들의 마음에 감각적인 사물에 대한 단순한 생각들을 불어넣어 기도로부터 주의를 돌리게 하고; 지식에 정진하는 이들에게는 오랫동안 정욕적인 생각들을 머무르게 하며; 실천적인 삶을 사는 이들에게는 행동으로 죄를 짓도록 유혹한다. – 저주받은 자들은 사람들을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위해 온갖 방법으로 모든 이와 싸운다.

91.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이 생에서 경건함을 실천하는 이들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유혹을 겪게 된다. 하나는 건강, 아름다움, 많은 자식, 부, 명예 등과 같은 즐거운 것들의 유혹이거나, 건강, 미모, 많은 자식, 부, 명예, 그와 유사한 것들; 혹은 자녀, 재산, 명예를 잃는 것과 같은 슬픔의 시련; 혹은 질병, 고문 등과 같이 육체에 고통을 주는 것들입니다. 첫 번째 유혹에 대해 주님께서는 “자기 소유를 모두 버리지 않는 자는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누가복음 14:33) 말씀하셨고, 두 번째와 세 번째 유혹에 대해서는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구원하라”(누가복음 21:19) 말씀하셨다.

92. 육체의 상태를 변화시켜, 이를 통해 마음에 정욕적인 생각이나 무욕적인 생각을 일으키는 데에는 다음 네 가지 원인이 있다고 한다: 천사, 악마, 공기, 음식. 천사들은 말로, 악령들은 접촉으로, 공기는 그 변화로, 음식은 음식과 음료의 질, 그리고 그 과다나 부족으로 변화를 일으킨다고 한다. 이 외에도, 영혼이 슬픔이나 기쁨을 주는 상황의 영향을 미리 받게 될 때, 기억과 청각, 시각에 의해서도 변화가 일어나곤 한다. 이러한 영향을 받은 영혼은 신체 상태에 변화를 일으키며,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변화된 신체 상태는 마음에 그에 상응하는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93. 죽음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의 멀어짐이다. 죽음의 독은 죄인데, 아담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한순간에 생명나무와 낙원,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나게 되었고, 그 결과 필연적으로 육체의 죽음도 뒤따랐다. 반면 생명 그 자체는 “내가 곧 생명이다”(요한복음 14:6)라고 말씀하신 분이시다. 그분은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죽은 자를 다시 살리셨다.

94. 무언가를 기록할 때는, 자신을 위해 기억하기 위해서이거나, 타인을 위해 유익을 주기 위해서이거나, 둘 다를 위해서이거나, 어떤 이들에게는 해를 끼치기 위해서이거나, 과시하기 위해서이거나, 필요에 의해서이다.

95. “악의 구덩이”(시 22:2)는 실천적인 미덕이며, “고요한 물”은 피조물에 대한 지식이다.

96. “죽음의 그늘”은 인간의 삶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하며,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시는 자는 담대히 말할 수 있다. “비록 내가 죽음의 그늘 한가운데로 걸어가더라도, 악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주께서 나와 함께하시나이다”(시 22:4).

97. 맑은 마음은 사물을 올바르게 바라본다. 수련을 통해 다듬어진 말은, 본 것을 마치 다른 이들의 눈앞에 펼쳐진 것처럼 여긴다. 그리고 열린 귀는 그것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 세 가지를 결여한 자는 말한 이를 비난한다.

98. 성 삼위일체와 그분의 창조와 섭리를 아는 자, 그리고 영혼의 정욕을 품은 부분을 무정욕적으로 유지하는 자가 하나님과 함께하는 자이다.

99. 지팡이는 하나님의 심판을, “막대기”는 섭리를 의미한다고 한다. 이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자는 “주의 지팡이와 주의 막대기가 나를 위로하도다”(시 22:4)라고 말할 수 있다.

100. 마음이 정욕에서 벗어날 때, 그리고 존재하는 것을 관조함으로써 깨달음을 얻을 때, 비로소 그 마음은 하나님 안에 머물며 마땅히 기도할 수 있다.

 

사랑에 관한 세 번째 백편

1. 생각과 사물을 현명하게 다루면 절제, 사랑, 그리고 지혜를 얻게 되지만, 무분별하게 다루면 절제하지 못함과 증오, 무지를 초래한다.

2. “주께서 내 앞에 상을 차려 주셨나이다” 등. 여기서 “상”은 실천적인 덕을 의미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괴롭히는 자들에 대항하여 차려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을 기름지게 하는 “기름”은 피조물을 관조하는 것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잔”은 하나님을 아는 것을, 그분의 “은혜”는 그분의 말씀이자 하나님 자신이다. 이는 그분께서 성육신을 통해 매일 우리를 쫓아오시며, 바울처럼 구원받을 모든 이를 다 찾아내실 때까지 그러하시기 때문이다. “집”은 모든 성도들이 들어갈 왕국을 의미하며, 날들의 길이는 영생을 뜻한다(시 21:5, 6).

3. 죄는 우리가 영혼의 힘, 즉 욕망의 힘, 분노의 힘, 사고의 힘을 올바르지 않게 사용할 때 우리에게 찾아온다. 사고의 힘을 올바르지 않게 사용하는 것은 무지이며, 분노와 욕망의 힘을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것은 증오와 절제력 상실이다. 반면, 이 힘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은 지식, 분별력, 사랑, 그리고 절제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되어 존재를 얻은 것 중 그 어떤 것도 악이 아닙니다.

4. 음식 자체가 악이 아니라 탐식이며, 자녀를 낳는 것이 아니라 음행이며, 돈이 아니라 탐욕이며, 명예가 아니라 허영이다. 그렇다면 존재하는 것 중에는 악이 없으며, 오직 본성(영적 힘과 그 올바른 방향)을 가꾸는 데 마음을 소홀히 함으로 인해 발생하는 남용만이 악이다.

5. 복자 디오니시우스는 악마들의 악이 바로 무분별한 성급함, 미친 듯한 탐욕, 경솔한 공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성적인 존재들에게서 나타나는 무분별함, 광기, 경솔함은 이성과 지혜, 신중함을 상실한 상태이며, 이러한 상실은 무언가를 소유하거나 지녔을 때 비로소 발생한다. 따라서 한때는 그들에게 이성과 지혜, 경건한 신중함이 모두 있었던 시기가 있었다. 만약 그렇다면, 악마들도 본성상 악한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힘을 남용함으로써 악해졌다는 것이다.

6. 어떤 정욕은 절제력을 잃게 하고, 어떤 정욕은 증오를 낳으며, 또 어떤 정욕은 절제력 상실과 증오를 모두 낳는다.

7. 과식과 탐식은 정절하지 못함의 원인이 되며, 탐욕과 허영심은 이웃에 대한 증오의 원인이 된다. 이 둘의 근원인 자만심은 두 가지 모두의 원인이다.

8. 자만심은 육체를 열정적이고 무분별하게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과 절제는 그것과 정반대이다. 자만심을 가진 자는 모든 정욕을 품고 있음이 분명하다.

9. 사도는 “아무도 자기 육체를 미워한 적이 없다”(엡 5:29)고 말하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육신을 “죽이고” “복종시킨다”(고린도전서 9:27), “먹을 것과 입을 것”(디모데전서 6:8) 외에는 아무것도 주지 않으면서; 그것들조차도 오직 삶에 필수적이기 때문일 뿐이다. 그렇게 냉정하게 육신을 사랑하며, 신성한 분의 종으로서 “먹이고 따뜻하게 해 주되”, 오직 그 결핍을 채워주는 것만으로만 그렇게 한다.

10.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이를 위해 온갖 방법으로 기쁘게 해 주려고 애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당연히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려고 애쓰고, 육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육신을 만족시키는 일을 한다.

11.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은 사랑, 정결, 묵상, 기도이며, 육신에게 기쁨이 되는 것은 탐식, 방종, 그리고 그와 같은 모든 것들이다. 그러므로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롬 8:8);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은 육체와 그 정욕과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갈 5:24).

12. 마음이 하나님께로 기울어질 때, 그때는 몸을 종으로 삼아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육신 쪽으로 기울어질 때는 그 정욕에 노예가 되어, 육신을 돌보는 일이 항상 정욕 속에서 이루어진다(롬 13:14).

13. 만약 잡생각을 없애고 싶다면, 정욕을 치료하라. 그러면 마음에서 그것들을 쉽게 쫓아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음란한 정욕에 대해서는 금식하고, 기도하며, 수고하고, 은둔하라; 분노와 슬픔에 대해서는 영광과 치욕, 그리고 그 밖의 세속적인 것들을 전혀 중요하게 여기지 말고, 원한을 품는 것에 대해서는 모욕한 자를 위해 기도하라. 그러면 그로부터 벗어날 것이다.

14. 가장 연약한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지 말고, 차라리 사랑의 계명에 따라 자신을 넓혀 가라. 사람들과 비교하면 오만의 심연에 빠지게 되겠지만, 사랑의 계명에 따라 자신을 넓혀 가면 겸손의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다.

15. 네가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정확히 지키고 있다면, 도대체 왜 그에게 대한 원망의 쓴맛을 마음속에 품고 있는가? 네가 사랑보다 일시적인 것을 더 중시하며, 그것을 옹호하느라 형제에게 전쟁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 명백하지 않은가?

16. 금이 사람들에게 그토록 탐나는 것은 필요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것을 통해 많은 이들이 쾌락 추구를 충족시키기 때문이다.

17. 부를 사랑하는 세 가지 이유는 쾌락 추구, 허영심, 그리고 불신이며, 그중에서도 불신이 앞의 두 가지보다 더 강하다.

18. 쾌락을 추구하는 자는 은을 통해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은을 사랑하고, 허영심 많은 자는 명성을 얻기 위해, 불신자는 굶주림이나 노년, 질병, 추방을 두려워하여 은을 숨기고 간직하기 위해 은을 사랑하며, 심지어 가장 작고 하찮은 동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피조물의 창조주이자 섭리자이신 하나님보다 은을 더 의지한다.

19. 네 부류의 사람들이 재물을 모은다. 앞서 언급한 세 부류와, 네 번째로 가정을 잘 꾸리는 사람이다. 분명히 이 마지막 사람만이 올바르게 재물을 모아,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을 베풀 수 있는 그의 손이 결코 빈곤해지지 않도록 한다.

20. 모든 정욕적인 생각은 영혼의 탐욕을 자극하거나, 분노를 일으키거나, 사색을 어둡게 한다. 이로 인해 영적 관상과 기도의 승천을 위한 마음이 눈이 멀게 된다. 그러므로 수도사, 특히 침묵을 지키는 수도사는 생각들에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그 원인을 파악하여 끊어내야 한다. 파악하는 방법은 이렇다. 영혼의 욕망하는 힘을 자극하는 것은 여성에 대한 정욕적인 기억이며, 그 원인은 음식과 음료에 대한 절제 부족과 여성들과의 빈번하고 무분별한 교제이다. 이를 끊어내는 것은 굶주림, 갈증, 밤샘 기도, 그리고 은둔이다. – 분노의 힘은 우리를 괴롭힌 사람들에 대한 격정적인 기억에 의해 자극받는데, 그 원인은 쾌락 추구, 허영심, 그리고 사랑에 대한 집착이다. 이 때문에 열정적인 사람은 괴로워하는데, 그것은 그러한 것들을 잃었거나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를 근절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이러한 것들을 무가치하게 여기고 폄하하는 것이다.

21.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아시고 당신의 피조물들을 아시며, 거룩한 세력들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피조물들을 안다. 그러나 거룩한 세력들이 하나님과 그분의 피조물들을 아는 방식은,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과 당신의 피조물들을 아시는 방식과는 다르다.

22.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복된 본성으로부터 자신을 아시고, 자신의 지혜로 피조물을 아시는데, 그 지혜로 모든 것을 창조하셨으며 그 지혜 안에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 반면 거룩한 세력들은 모든 참여(참가)를 초월하여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그분의 지식이라는) 참여를 통해 알며, 그분의 피조물들은 그들 안에 존재하는 지적인 관조를 통해 안다.

23. 피조물들은 이성 밖에 있으나, 그들에 대한 관상은 이성이 자기 안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영원히 존재하시며, 무한하시고, 형언할 수 없으시며, 그분으로부터 존재하는 모든 것에게 존재와 번영, 그리고 영원한 존재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는 그렇지 않다.

24. 거룩하신 하나님, 즉 그분의 자비와 지혜에, 이성적이고 사고하는 본성은 존재 자체와, 번영할 능력, 그리고 영원한 존재의 은총을 통해 참여한다. 이 은총으로 인해 피조물은 하나님을 인식하며,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피조물 안에서 관조되는 모든 것을 질서 있게 다스리는 지혜를 지각함으로써 하나님의 피조물들을 인식하는데, 이 지혜는 미묘하며 마음속에서 사고적으로 구성된다.

25. 하나님께서는 지각 있는 존재를 그분의 지극한 선하심으로 존재하게 하시고, 이 피조물들에게 그들을 포함하고, 보호하며, 구원하는 네 가지 신성한 속성, 즉 존재, 영원한 존재, 선하심, 그리고 지혜를 부여하셨다. 그중 첫 두 가지는 존재에게, 나머지 두 가지는 도덕적 능력에게 부여하셨으니, 존재에게는 존재와 영원한 존재를, 도덕적 능력에게는 선함과 지혜를 주셨으니, 이는 피조물이 그분 자신이 본질적으로 지니신 바를 참여함으로써 그분과 같아지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에 따라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되었다고 말해진다: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존재하는 자로서 존재하는 자를, 영원히 존재하는 자로서 영원히 존재하는 자를 닮았음을 뜻한다. 비록 시작이 없지는 않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한하다; 닮음에 따라 창조되었다는 것은, 선하신 분의 선하심과 같고, 지극히 지혜로우신 분의 지혜와 같아서,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지니신 것과 같아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된 것은 모든 이성적인 피조물이며, 닮음에 따라 된 것은 오직 선하고 지혜로운 자들뿐이다.

26. 모든 이성적이고 지적인 존재는 둘로 나뉘어 있는데, 즉 천사의 본성과 인간의 본성으로 나뉜다; 그리고 모든 천사의 본성은 다시 두 가지 주요한 도덕적 연합과 공동체, 즉 거룩한 것과 저주받은 것, 다시 말해 거룩한 세력과 불경건한 악마들로 나뉘며; 온 인류는 오직 두 가지 연합, 즉 경건한 자들과 불경건한 자들로만 나뉜다.

27. 하나님은 자존이시며, 자선(自善)이시며, 자지혜(自智)이시며,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모든 것 위에 계시는 분이시므로, 그분께는 그분과 정반대되는 것이 전혀 없다. 그러나 피조물들은, 모든 것이 오직 참여와 은총을 통해 존재를 갖는 것처럼 — 이성적이고 지적인 존재들은 그뿐만 아니라 선함과 지혜의 능력까지 지니고 있지만 — 그와 반대되는 것을 가지고 있는데, 즉 존재에 대해서는 비존재, 선함과 지혜에 대한 능력에 대해서는 악과 무지이다. 그들의 영원한 존재 또는 비존재는 그들을 창조하신 분의 권능에 달려 있으며, 그분의 선함과 지혜에 대한 참여 또는 비참여는 이성적인 피조물들의 의지에 달려 있다.

28. 헬레네인들은 피조물의 본성이 영원부터 하나님과 함께 있었으며,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직 자신의 속성들만을 받았다고 믿기에, 그들의 본성에도 반대되는 것이 없으며, 반대성 은 오로지 그들의 속성들 속에만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하고 무한하며 다른 모든 본성에 영원을 부여하시는 유일한 신적 본성에는 대립되는 것이 없다고 단언한다. 반면 피조물의 본성에는 비존재가 대립되며, 그들의 영존 또는 비존재는 오직 ‘존재 그 자체’의 권능에 달려 있다. 그러나 그분의 은총은 변함이 없고 불변하므로, 피조물은 있는 그대로 항상 존재할 것이며, 전능하신 힘에 의해 지탱될 것이다. 비록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 자체에 반대되는 ‘비존재’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이는 비존재에서 존재로 이끌려 왔으며,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그 모든 것이 그분의 뜻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29. 악이 선의 결여이고, 무지가 지식의 결여인 것처럼, 비존재(비유) 역시 존재(유)의 결여이다. 이는 본래적으로 존재하는 자의 결여가 아니라—왜냐하면 본래적으로 존재하는 자에게는 반대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본래적으로 존재하는 자의 참여에 의해서만 존재하는 자의 결여이다. 앞의 두 가지의 상실은 피조물의 의지에 달려 있으나, 세 번째 상실은 창조주의 의지에 달려 있다. 그분은 자비로움으로 인해 항상 피조물들이 존재하기를 원하시며, 그들이 항상 그분으로부터 은혜를 입기를 원하신다.

30. 모든 피조물은 이성적이고 지적인 존재로서, 즉 미덕과 악덕, 지식과 무지 같은 대립적 속성을 내재하고 있거나, 또는 대립적 요소들로 구성된 다양한 신체, 예를 들어 흙, 공기, 불, 물로 이루어져 있다. 어떤 것들은 완전히 무형이며 비물질적이지만, 그중 일부는 신체와 결합되어 있기도 하고, 다른 것들은 오직 물질과 형태(형상)로만 이루어져 있다.

31. 모든 물질은 본질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영혼에 의해 움직이는데, 어떤 것은 이성적인 영혼에 의해, 어떤 것은 비이성적인 영혼에 의해, 또 어떤 것은 무감각한 영혼에 의해 움직인다.

32. 영혼의 힘 중에는 영양을 공급하고 생장을 돕는 힘이 있고, 상상력과 동기를 부여하는 힘이 있으며, 마지막으로 이성과 사고를 담당하는 힘이 있다. 첫 번째 힘은 식물에게 해당하고, 두 번째 힘은 첫 번째 힘과 함께 말 못하는 동물에게, 세 번째 힘은 앞의 두 힘과 함께 인간에게 해당한다. 처음 두 힘은 썩어 없어지지만, 세 번째 힘은 썩지 않고 불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33. 거룩한 힘들은 서로에게 깨달음을 전하며, 인간 본성에게도 그들 안에 존재하는 미덕과 지식을 전한다. 미덕이란 곧 하나님을 본받는 선함으로, 이를 통해 그들은 자신과 서로에게 선을 베풀며, 그들보다 낮은 존재들을 하나님과 닮게 만들어 준다; – 지식은, 말하자면, 하나님에 대한 가장 높은 진리이거나; 선지자가 말하듯이, “주님, 주님은 영원토록 지극히 높으시니이다”(시편 91:9); 혹은 육체적 존재들에 대한 가장 심오한 진리이거나, 비물질적 존재들에 대한 가장 정밀한 진리이거나, 섭리에 대한 가장 명료한 진리이거나, 심판에 대한 가장 확실한 진리이다.

34. 마음의 부정함은 첫째, 거짓된 지식에 있으며; 둘째, 보편적인 어떤 것에 대한 무지에 있으며; 나는 이를 인간의 마음에 대해 말하는 것이니, 천사에게는 사적인 것 중 어떤 것조차 모르는 것이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 정욕적인 생각에 있으며; 넷째, 죄를 용인하는 데 있다.

35. 영혼의 불순함은 그것이 본성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는 바로 그로 인해 마음속에 정욕적인 생각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영혼이 본성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사물과 그에 대한 생각이 영혼에 영향을 미칠 때, 영혼의 정욕적인 힘, 즉 자극을 받는 힘과 욕망하는 힘이 냉정함을 유지할 때이다.

36. 육체의 불결함은 행위로 저지른 죄이다.

37. 세속적인 것에 편향되지 않는 자가 고요함을 사랑하며, 인간적인 것을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 자가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 또한 누구에게도 유혹되지 않는 자, 즉 그 사람의 타락 때문이든 그에 대한 의심이 낳은 생각 때문이든, 그 누구에게도 유혹되지 않는 자가 하나님과 신성한 것에 대한 지식을 갖는다.

38. 사물에 집착하지 않는 것은 위대한 일이지만, 그것에 대한 생각에서도 무감각함을 유지하는 것은 훨씬 더 위대한 일이다.

39. 사랑과 절제는 마음을 사물에 대해서도, 사물에 대한 생각에 대해서도 무감각하게 유지해 준다.

40.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의 마음은 사물이나 그것에 대한 생각에 대항하여 무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생각과 결부된 정욕에 대항하여 무장한다. 즉, 그는 여성을 대적하지도, 자신을 모욕한 자를 대적하지도, 그들의 상상을 대적하지도 않으며, 오직 그러한 상상과 결부된 정욕에 대항할 뿐이다.

41. 수도사가 악마들과 벌이는 모든 싸움은 정욕을 생각에서 분리하는 데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사물을 냉정하게 바라볼 수 없기 때문이다.

42. 사물과 생각, 그리고 정욕은 서로 다른 것이다. 예를 들어 사물이란 남편, 아내, 금 등이며, 생각이란 앞서 언급된 것들에 대한 단순한 회상이고, 정욕이란 그것들에 대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이나 무분별한 증오를 말한다. – 수도사의 다툼은 바로 그런 열정에서 비롯된다.

43. 열정적인 생각은 열정과 생각이 결합된 것이다. 열정을 생각에서 분리하면 순수한 생각만 남는다. 원한다면 영적인 사랑과 절제를 통해 이를 분리할 수 있다.

44. 덕은 마음을 정욕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영적 관상은 단순한 생각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며, 순수한 기도는 마음을 하느님께로 이끈다.

45. 미덕은 피조물을 알기 위함이며, 지식은 아는 이를 위함이고, 아는 이는 알 수 없는 피지식 대상을 위하며, 지식 그 자체를 초월하는 이가 이끄는 바를 위한다.

46. 모든 것에 만족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무(無)에서 유(有)로 피조물을 창조하신 것이, 무엇이든 필요하셔서가 아니라, 그들이 각자의 수용 능력에 따라 그분의 복락에 참여하며 즐거워하게 하려 하심이었다. 그분께서는 그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시고, 항상 만족할 수 없는 것으로 만족하며 즐거워하는 것을 보시며, 그분의 행하심을 기뻐하셨다.

47. 세상에는 영적으로 가난한 이들이 많으나, 마땅한 의미에서 그러한 것은 아니며; 우는 이들이 많으나, 재산을 잃었거나 자녀를 잃은 것을 슬퍼하는 것뿐이며; 온유한 이들이 많으나, 불순한 정욕에 대한 온유함일 뿐이며; 굶주리고 목마른 이들이 많으나, 타인의 것을 부당하게 빼앗고 이득을 모으기만을 갈망하는 자들이며; 자비로운 이들도 많으나, 육체와 육신적인 것에 대한 자비일 뿐이며; 마음이 청결한 이들도 많으나, 허영심에서 비롯된 청결함일 뿐이며; 화평을 이루는 이들도 많으나, 영혼을 육신에 복종시키는 자들일 뿐이며; 쫓김을 당하는 이들도 많으나, 자신의 무질서 때문이며; 모욕을 당하는 이들도 많으나, 부끄러운 죄들 때문일 뿐이다. 그러나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고 그리스도에 관하여 행하고 고난받는 이들만이 복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하늘나라가 있으니”라고 했고,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다(마태복음 5:3, 8); 그 밖에도 여러 구절이 있다. 그들이 그렇게 행하고 고난을 당하기 때문에 복된 것이 아니라—앞서 언급된 이들도 그렇게 행하기 때문이다—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고 그리스도에 관하여 행하고 고난을 당하기 때문이다.

48.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여러 번 말했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일을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지, 아니면 다른 목적을 위해 하는지 그 목적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선한 일을 하고자 할 때,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그래야만 항상 그분을 바라보며 모든 것을 그분을 위해 행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수고만 하고 상을 잃게 될 것이다.

49. 기도하는 동안에는 세속적인 사물에 대한 단순한 생각이나 모든 피조물에 대한 사색을 마음에서 떨쳐내라. 하찮은 것에 마음을 두어, 존재하는 모든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 좋으신 분께로부터 멀어지지 않도록 하라.

50.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바로 그 사랑으로 정욕을 물리칠 것이다. 그분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분을 세상보다, 영혼을 육체보다 우선시하는 것이며, 모든 세속적인 것을 경멸하고, 절제, 사랑, 기도, 시편 찬양 등을 통해 끊임없이 그분께 자신을 바치는 것이다.

51. 오랫동안 하느님께 귀를 기울이며 영혼의 정욕적인 부분을 꼼꼼히 돌본다면, 우리는 더 이상 생각의 유혹으로 인해 바른 길에서 벗어나지 않게 될 것이며, 오히려 그 원인을 더 정확히 이해하고 이를 잘라냄으로써 예지력을 갖추게 되어,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내 눈이 나의 원수들과 나를 대적하는 자들을 바라보며, 내 귀는 나를 모함하는 자들의 말을 듣리라” (시편 91:12).

52. 네 마음이 경건하고 의롭게 세속적인 생각들 속에서 돌아가고 있음을 볼 때, 네 몸도 깨끗하고 죄 없이 머물러 있음을 알라. 그러나 네 마음이 생각 속에서 죄를 저지르고 있는데도 이를 막지 않는다면, 네 몸도 머지않아 그 죄에 빠질 것임을 알라.

53. 육체에게 세상의 사물들이 세상이 되는 것처럼, 마음에게도 생각들이 세상이 된다. 그리고 육체가 여자의 육체와 음행을 저지르듯이, 마음도 자신의 육체를 상상하며 여자에 대한 생각과 음행을 저지른다. 이는 마음이 자신의 육체 형상이 여자의 형상과 교합하는 모습을 마음속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생각 속에서 그는 자신의 몸의 형상으로 자신을 모욕한 자의 형상에 복수한다. 다른 죄들에서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육체가 사물의 세계에서 행위로 만들어내는 것을, 마음도 생각의 세계에서 마음속으로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54. 하나님께서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모든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셨다”(요한복음 5:22)고 하셨는데, – 그러나 아들은 “판단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도 판단받지 아니하리라”(마태복음 7:1),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도 정죄받지 아니하리라”(누가복음 6:37)라고 외치시며, 사도 역시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때를 앞당겨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 (고린도전서 6, 5): 또한 “네가 남을 심판하는 그 기준으로 네가 스스로를 정죄하고 있다”(로마서 2, 1); 내가 말하건대, 이것이 사실인데도,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것을 그만두고, 아들의 손에서 심판권을 빼앗아, 마치 죄가 없는 것처럼 서로를 심판하고 정죄하고 있는 것인가? 하늘은 이를 보고 경악하며 땅은 떨고 있는데, 그들은 무감각하여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55. 남의 죄에 대해 호기심을 품거나, 의심만으로 형제를 심판하는 자는 아직 회개의 첫걸음을 내디디지 않았으며, 참으로 여러 푸드의 납 무게만큼이나 무거운 자신의 죄를 알아내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고, 사람이 왜 “마음이 무겁고, 헛된 것을 사랑하며, 거짓을 찾는” (시 4:3); 그러므로 미친 사람처럼 어둠 속을 방황하며, 자신의 죄는 제쳐두고, 단지 의심 하나만으로 타인의 실재하거나 허구적인 죄에 대해 헛된 상상을 품는다.

56. 자만심은, 여러 번 언급되었듯이, 모든 정욕적인 생각의 원인이 된다. 왜냐하면 그것으로부터 영혼의 정욕적인 부분에서 세 가지 주요한 생각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식욕, 탐욕, 허영. 그 후, 식욕에서 음탕한 생각이 생겨나고, 재물 탐욕에서 탐욕스러운 생각이, 허영심에서 교만한 생각이 생겨난다. 그 외의 모든 생각은 이 세 가지 각각을 뒤따르는데, 예를 들어 분노, 슬픔, 원한, 낙담, 시기, 비방 등의 생각이 있다. 이러한 정욕들은 마음을 물질적인 대상들에 묶어두고, 마치 가장 무거운 돌처럼 마음을 짓누르며 땅으로 끌어내리는데, 마음은 본성상 불보다 더 가볍고 미묘한 존재이다.

57. 모든 정욕의 시작은 자기애이며, 끝은 교만이다. 자기애는 몸을 무분별하게 사랑하는 것이다. 이를 끊어내면, 그로부터 비롯된 모든 정욕도 함께 끊어지는 것이다.

58. 육신의 부모가 자신들에게서 태어난 자식들에게 편애를 보이는 것처럼, 마음도 본성상 자신의 생각에 매여 있다. 그리고 가장 편애가 심한 부모에게 자신의 자녀들은 비록 모든 면에서 누구보다 조롱받을 만하더라도, 누구보다 겸손하고 품위 있게 보인다. 마찬가지로 분별력 없는 마음에게는 자신의 생각이 가장 이성적으로 보이지만, 실은 그 어떤 것보다 터무니없을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생각이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설령 그 생각이 참되고 선하다는 확신을 얻었다 하더라도, 오히려 자신의 판단을 더 신뢰하지 않고, 다른 지혜로운 이들을 자신의 생각과 추론에 대한 심판자로 삼아, 헛되이 흘러가지 않게 한다(갈 2:2); 그리고 그들로부터 확증을 받아들인다.

59. 탐욕이나 음란, 분노, 탐심과 같은 가장 불명예스러운 정욕 중 하나를 이겨내면, 곧바로 허영심이라는 생각이 너를 덮칠 것이며, 그것을 이겨내면 이번에는 교만이라는 생각이 너를 사로잡을 것이다.

60. 모든 불명예스러운 정욕은 영혼을 지배하며, 그 안에서 허영의 생각을 몰아내지만, 일단 정복당하면 그 생각이 영혼에 들어올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61. 허영은 교만을 낳는데, 때로는 쫓겨나기도 하고 때로는 남아 있기도 한다. 그러나 쫓겨날 때는 자만심을, 남아 있을 때는 오만을 불러온다.

62. 허영은 은밀한 실천을 통해 근절되며, 교만은 올바르게 행한 일을 하나님께 돌림으로써 근절된다.

63. 하나님을 아는 은혜를 입어 그 달콤함을 진정으로 맛본 자는, 욕망의 힘에서 비롯되는 모든 쾌락을 경멸한다.

64. 세속적인 욕망에 이끌리는 자는 음식이나, 배고픔을 채우는 것, 인간의 명예, 부, 혹은 그 뒤를 따르는 다른 무엇인가를 갈망한다. 그리고 만일 마음이 이 것들보다 더 나은 대상을 찾아 자신의 욕망을 옮길 수 없다면, 평생 동안 그것들을 경멸하기로 결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를 훨씬 능가하는 것은 하나님과 신성한 것들을 아는 것이다.

65. 쾌락을 경멸하는 자들은 두려움이나 희망, 혹은 그 무의미함을 깨달았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렇게 한다.

66. 신성한 것들에 대한 지식은 그것들에 대한 집착 없이도 이성이 물질적인 것을 완전히 경멸하도록 설득하지는 못하며, 오히려 감각적인 사물에 대한 단순한 생각과 비슷하다. 그러므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육신의 정욕에 빠져, 마치 진창에 빠진 돼지처럼 굴러다니는 사람들을 많이 찾을 수 있다(베드로후서 2:22). 이는 선을 갈망하던 시절에 어느 정도 정화되어 이에 대한 지식을 어느 정도 얻었으나, 그 후 나태해져서 왕좌에 올랐으나 그에 합당하지 않게 살다가 끔찍한 진노로 그 자리에서 쫓겨난 사울과 같아졌기 때문이다.

67. 인간적인 것들에 대한 단순한 생각이 마음을 신성한 것을 경멸하게 만드는 것처럼, 신성한 것에 대한 단순한 지식만으로는 마음을 인간적인 것을 완전히 경멸하도록 설득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진리가 여전히 그림자와 추측 속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영적인 관상과 연결시키고, 물질적인 것보다 비물질적인 것을, 감각적인 것보다 사고적인 것과 신성한 것을 우선시하도록 설득하는 거룩한 사랑에 대한 복된 헌신에 의지해야 한다.

68. 정욕을 끊고 생각을 단순하게 만든 모든 사람이, 그 사실만으로 이미 그것들을 신성한 것으로 돌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인간적인 것에도, 신성한 것에도 전적으로 헌신하지 않을 수 있는데, 이는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한 활동적인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그들은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나 천국에 대한 희망 때문에 정욕을 절제할 뿐이다.

69. “우리는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우리의 지식은 아직 거울에 비친 것과 점치는 것과 같다(고린도후서 2:7). 그러므로 우리는 그 안에서 오랫동안 수련할 필요가 있는데, 이는 지속적인 가르침과 부지런한 노력을 통해 끊어지지 않는 관조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습관을 얻기 위함이다.

70. 만약 일시적으로 정욕의 원인을 차단하고 영적 관상에 몰두하더라도, 항상 그 일에 시간을 보내지 않고 오직 이것 하나만을 자신의 일로 삼는다면: 그러면 우리는 다른 어떤 결실도 얻지 못한 채, 단순히 자만심에 찬 지식만을 얻고, 결국 그 지식 자체가 서서히 흐려지며, 마음이 물질적 대상들로 완전히 치우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71. 비난받을 만한 사랑의 정욕은 마음을 물질적인 대상들에 사로잡게 하지만, 칭찬받을 만한 사랑의 정욕은 마음을 신성한 것에 매어 놓는다. 왜냐하면 마음은 보통 어떤 대상에 주의를 기울이는지에 따라 그쪽으로 기울어지기 마련이며, 마음이 기울어지는 대상에 따라 욕망과 사랑도 그쪽으로 향하게 되기 때문이다. 즉, 신성하고 마음의 본성에 부합하며 정신적인 대상 쪽으로 향하든, 육체적인 사물과 정욕 쪽으로 향하든 말이다.

72.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를 창조하셨으며, 영혼과 육체도 마찬가지로 창조하셨다. 만약 보이는 세계가 이토록 아름답다면, 보이지 않는 세계는 얼마나 더 아름다울까? 만약 그 세계가 이 세계보다 더 낫다면, 그 둘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이 둘보다 얼마나 더 높으시겠는가? 만일 모든 선의 창조주께서 가장 훌륭하게 창조된 것보다 더 뛰어나시다면, 도대체 어떤 이유로 이성은 가장 훌륭한 것을 제쳐두고, 가장 나쁜 것, 즉 육체적 정욕에 몰두하는 것일까? 그것은 태어날 때부터 그것에 익숙해져 그것과 어울려 왔기 때문이며, 가장 훌륭하고 높은 것은 아직 전혀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처럼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오랫동안 절제하고 신성한 것에 대한 가르침을 통해, 우리가 서서히 그를 그러한 습관에서 벗어나게 한다면, 그는 이 일에 조금씩 진전을 보이며 신성한 것에 마음을 기울이고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게 될 것이며, 마침내 자신의 모든 헌신을 하나님께로 옮기게 될 것이다.

73. 형제의 죄에 대해 냉정하게 말하는 사람은 두 가지 이유에서 그러합니다. 하나는 그를 바로잡기 위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그가 이러한 목적 없이 그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에게 말한다면, 그것은 형제를 정죄하거나 비방하는 것이며,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버림을 피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같은 죄나 다른 죄에 빠지게 될 것이며, 다른 이들에게 지적받고 비난받아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다.

74. 같은 죄를 지은 자들을 그 행위의 결과인 죄 자체로만 동일하게 판단해서는 안 되며, (죄를 지은 원인을 고려하여) 다르게 판단해야 한다. 왜냐하면 어떤 이는 습관적으로 죄를 짓는 반면, 어떤 이는 갑작스럽고 억제할 수 없는 충동에 의해 죄를 짓기 때문이다. 후자의 경우, 사람은 죄를 짓기 전에는 그에 대한 생각조차 없었고, 죄를 지은 후에도 그 죄에 대한 욕망이 없으며, 오히려 일어난 일에 대해 크게 슬퍼하고 괴로워한다. 습관적으로 죄를 짓는 사람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그는 죄를 짓기 전부터 마음속으로 죄를 짓는 것을 멈추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죄를 저지른 후에도 여전히 같은 마음가짐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75. 허영심에서 미덕을 행하는 자는 지식 또한 허영심에서 추구한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더 이상 교훈을 주기 위해 아무것도 행하거나 말하지 않으며, 오직 모든 일에서 자신의 행실을 보거나 말을 듣는 이들에게서 명성을 얻으려 한다. 이 정욕은 어떤 사람들이 그의 말이나 행위를 비방할 때, 그가 극도로 상심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것은 그들이 교훈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그는 애초에 그런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오히려 자신이 그들에 의해 모욕당하거나 깎아내려졌기 때문이다.

76. 탐욕의 정욕은 누군가가 항상 기쁜 마음으로 받으면서도 슬픈 마음으로 베풀 때 드러난다. 그런 사람은 진정으로 절약할 수 없다(19항 참조).

77. 고통을 겪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고통을 견딘다: – 하나님을 향한 사랑 때문이거나, 보상을 받을 희망 때문이거나, 형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거나,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하기 때문이거나, 타고난 인내심 때문이거나, 앞으로 올 기쁨을 기대하기 때문이거나, 이득을 얻기 위해서이거나, 허영심 때문이거나, 어쩔 수 없는 필요성 때문이다.

78. 어떤 것은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또 다른 것은 정욕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종종 정욕을 품었던 대상들이 눈앞에 보이지 않을 때 생각에서 벗어나곤 한다. 그러나 정욕은 그 사이에도 마음속에 숨어 있다가, 대상이 나타나면 드러나게 된다. 그러므로 그러한 대상들 앞에서 마음을 살피고, 마음이 어떤 것에 정욕을 품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79. 진실한 친구란, 이웃이 유혹을 받을 때 그와 함께, 당황하거나 불안해하지 않고, 마치 자신에게 닥친 슬픔, 궁핍, 불행, 재앙인 양 견뎌내는 사람이다.

80. 항상 네게 최선의 조언을 해주는 양심을 경멸하지 말라. 양심은 네게 신적이며 천사적인 조언을 제시하고, 마음속의 은밀한 더러움에서 너를 해방시키며, 이 세상을 떠날 때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주기 때문이다.

81. 지혜로우면서도 겸손하기를 원하고, 자만이라는 정욕의 노예가 되고 싶지 않다면, 항상 사물 속에서 네 이성으로 알 수 없는 것을 찾으라. 그리고 네게 알려지지 않은 것이 많고 다양하다는 것을 발견하면, 네 무지함에 놀라게 될 것이며, 네 지혜를 낮추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무가치함을 깨닫게 되면, 위대하고 경이로운 많은 것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지식에 대한 자만은 지식의 성취를 방해한다.

82. 치료약에 저항하지 않는 자야말로 진심으로 구원을 갈망하는 자이다. – 이 치료약이란 바로 여러 불행으로 인해 닥치는 슬픔과 비통함이다. 그러나 재앙에 저항하는 자는, 우리 이곳—이 땅에서 어떤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또 자신이 이곳을 떠날 때 어떤 이익을 얻게 될지 알지 못한다.

83. 허영과 탐욕은 서로를 낳는 관계이다. 어떤 이들은 허영 때문에 부자가 되고, 어떤 이들은 부자가 되어 허영을 부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은 원래 그런 법이다. 반면 수도사는 재물을 탐하지 않을 때 오히려 더 허영을 부리곤 한다. 그러나 은을 소유하게 되면, 자신의 지위에 어울리지 않는 물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부끄러워하며 그것을 숨긴다.

84. 수도사의 허영심은 미덕과 그 결과로 인해 자만하는 것이 특징이며, 그의 교만은 성공을 자랑하고, 타인을 깎아내리며, 그 공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고 자신에게 돌리는 것이 특징이다. 반면 평신도의 허영과 교만에는 아름다움, 부, 힘, 분별력, 혹은 세속적인 현명함을 자랑하고 거만해하는 것이 특징이다.

85. 세속 사람들의 성공은 수도자들에게는 타락이며, 수도자들의 성공은 세속 사람들에게는 타락이다. 세속 사람들의 성공은 부, 명성, 힘, 쾌락, 육체적 쾌락, 많은 자식, 그리고 이와 유사한 것들에 있으며, 수도자가 이에 빠지면 파멸에 이른다. 반면 수도자의 성공은 소유를 탐하지 않는 것, 명예를 추구하지 않는 것, 무력함, 절제, 고난, 결핍 및 이와 유사한 것들에 있다. 세속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러한 것들에 어쩔 수 없이 처하게 되면 이를 큰 불행으로 여기며, 종종 목에 올가미를 걸 위험이 가까워지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실제로 그렇게 하기도 했다.

86. 음식은 두 가지 이유, 즉 영양 공급과 치유를 위해 창조되었다. 그러므로 올바른 의도를 품지 않고, 하나님께서 유익을 위해 주신 것을 마땅히 사용해야 할 방식대로 사용하지 않는 자들은 쾌락주의자로 정죄받는다. 그리고 모든 사물에 있어서 그 잘못된 사용은 죄이다.

87. 겸손한 지혜는 눈물과 애통함을 동반한 순수한 기도에서 비롯된다. 이는 기도가 항상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므로, 자신의 힘과 지혜에 미친 듯이 의지하거나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자만하는 것—교만한 정욕의 두 가지 치명적인 병—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88. 단순한 생각이 정욕을 일으키지 않도록 그 생각과 싸우는 것과, 정욕적인 생각이 죄에 대한 우리의 동의를 이끌어내지 않도록 그 생각과 싸우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투쟁은 우리 안에서 생각이 머뭇거리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89. 원한을 품는 마음과 슬픔은 떼려야 뗄 수 없다. 따라서 마음이 괴로움 속에서 마치 거울을 보듯 자신 안에서 형제를 모욕한 자의 얼굴을 볼 때, 그가 원한을 품고 있음은 명백하다. “악의를 품은 자의 길은 죽음으로 이른다”(잠언 12:28); “악의를 품는 자는 불법을 행하는 자이니라”(잠언 21:24).

90. 누군가를 원망한다면, 그를 위해 기도하라. 그리고 기도를 통해 그가 너에게 끼친 악행에 대한 기억에서 슬픔을 분리함으로써, 그 정욕의 흐름을 멈출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친절하고 자비로운 태도를 취함으로써, 그 정욕을 영혼에서 완전히 몰아낼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다른 사람이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다면, 그에게 상냥하고 겸손하게 대하며 그와 화목하게 지내라. 그러면 그를 정욕에서 해방시켜 줄 것이다.

91. 시기하는 자의 슬픔은 멈추기 어렵다. 그는 네게서 시기하는 것을 스스로의 불행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그에게 숨기는 것 외에는 그를 달랠 방법이 없다. 만일 그것이 많은 이에게 유익하지만, 그에게 슬픔을 안겨준다면, 어느 쪽을 소홀히 해야 할까? 많은 이에게 유익한 편에 서야 하지만, 가능하면 그도 소홀히 하지 말고, 정욕의 교활함에 휩쓸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정욕 자체가 아니라 그로 인해 고통받는 이에게 도움을 주어야 하며, 겸손한 지혜로 그를 너보다 뛰어난 자로 여기고, 언제 어디서나 어떤 일에서든 그를 너보다 우선시해야 한다. 그리고 네 질투를 멈출 수 있는 방법은, 네가 질투하는 사람의 기쁨에 함께 기뻐하고, 그가 슬퍼하는 일에 그와 함께 슬퍼하는 것이다. 사도의 계명인 “기뻐하는 자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를 실천함으로써 말이다.

92. 우리의 마음은 두 존재 사이에 놓여 있는데, 각각은 자신에게 고유한 것을 심어준다. 하나는 미덕을, 다른 하나는 악덕을 심어준다. 즉, 천사와 악마 사이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자신이 원하는 쪽을 따르거나 거역할 권능과 힘을 가지고 있다.

93. 거룩한 세력들은 우리를 선으로 이끄시며, 선의 자연스러운 씨앗과 선한 의지가 우리를 돕습니다. 반면 악마의 유혹에는 정욕과 악한 의지가 힘을 실어줍니다.

94. 맑은 이성은 때로는 하나님께서 직접 그에게 내려오셔서 가르치시기도 하고, 때로는 거룩한 세력들이 선한 것을 심어주기도 하며, 때로는 그가 관조하는 사물의 본성이 가르치기도 한다.

95. 지식을 얻은 마음은 사물에 대해 무감각한 생각을, 실수 없는 관조를, 평온한 기도의 상태를 지켜야 한다. 그러나 육신의 움직임이 연기처럼 밀려와 악마들의 유혹으로 인해 마음이 흐려지기 때문에, 이를 항상 지킬 수는 없다.

96. 우리가 슬퍼하는 모든 것에 대해 분노하는 것은 아니다. 슬픔을 주는 사건은 분노를 일으키는 사건보다 더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물건이 부서지거나, 어떤 물건을 잃어버리거나, 어떤 사람이 죽는 경우 등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우리는 단지 슬퍼할 뿐이지만, 다른 경우에는 슬퍼하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하며, 평정심을 잃은 상태에 놓이게 된다.

97. 마음은 사물에 대한 생각을 받아들일 때, 보통 각 생각에 따라 그 모습을 새롭게 바꾸지만, 영적으로 그것들을 관조할 때는 각 한 관조에 따라 다양하게 변모한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 있을 때는 완전히 형체도 없고 형상도 없다. 왜냐하면 단일한 모습을 관조할 때, 그 자신도 단일한 모습이 되고 온전히 빛으로 가득 차게 되기 때문이다.

98. 완전한 영혼이란, 그 갈망하는 힘이 온전히 하나님께로 향하고 있는 영혼이다.

99. 완전한 마음이란, 참된 믿음으로 알 수 없는 분을 알 수 없는 채로 깨달아 그분의 모든 피조물을 통찰하고, 하나님으로부터 그 피조물들 안에 담긴 그분의 섭리와 심판에 대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포괄적인 지식을 얻은 것이다.

100. 시간은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믿음은 이 세 부분 모두에 미치고, 소망은 한 부분에, 사랑은 두 부분에 미친다. 믿음과 소망에는 한계가 있으나, 사랑은 무한하신 분과 결합하여 끊임없이 자라나며, 끝없는 영원토록 지속된다. 그러므로 “모든 것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사랑이다”(고린도전서 1:3, 13).

 

사랑에 관한 네 번째 백편

1. 첫째, 이성은 온전히 무한하신 하나님, 즉 헤아릴 수 없고 많은 이들이 갈망하는 그 심연을 생각할 때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둘째, 하나님께서 무에서 모든 존재를 창조하신 방식에 경탄한다. 그러나 “그분의 위대하심에는 끝이 없나니”(시 141:3), “그분의 지혜에도 한계가 없나니”(바르 3:18).

2. 그 누구라도 그 접근할 수 없고 경이로운 선의 원인을 관조하며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는 말과 이성의 본성과, 그로부터 육체가 생겨난 네 가지 원소가, 그것들의 생성 이전에 존재했던 어떤 물질도 없었는데 어떻게,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생각할 때, 어떻게 황홀경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것들이 존재하게 된 것은, 어떤 힘이 움직여 작용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입니까? 그러나 헬레네의 자손들은 전능하신 선하심과 그 생동감 넘치는 지혜, 그리고 이성을 초월하는 총명을 알지 못하므로 이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3. 영원부터 존재하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무한하신 자비로, 원하실 때면 당신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말씀과 성령으로 창조하십니다. “어떻게 항상 선하신 창조주께서 하필 지금에야 나타나셨는가?”라고 묻지 마라. 내가 네게 말하건대, 무한하신 존재의 헤아릴 수 없는 지혜는 인간의 이해 범위를 벗어났기 때문이다.

4. 창조주께서는 영원부터 그분 안에 미리 존재하시던 모든 피조물에 대한 지식을, 원하실 때 실현하시고 행하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그분이 원하실 때 무엇을 실현하실 수 있는지 의심하는 것은 부적절하기 때문입니다.

5. 하나님께서 무엇을 왜 창조하셨는지는 탐구하라. 이는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떻게, 왜 창조하셨는지는 탐구하지 말라. 이는 네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성한 것들 중에는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있고,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사색은, 그것을 절제하지 않으면 심연으로 떨어뜨릴 수 있으니, 이는 어떤 성인(그레고리우스 신학자)이 말한 바와 같다.

6. 어떤 이들은 피조물들이 영원부터 하나님과 함께 존재해 왔다고 말하지만, 이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온전히 유한한 존재들이 어떻게 영원부터 무한하신 분과 함께 존재할 수 있겠으며, 창조주와 동등한 존재라면 어떻게 그 자체로 피조물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는 헬레니스트들의 주장으로, 그들은 하나님을 본성이 아니라 오로지 속성만을 지닌 창조주로 여깁니다. 반면 우리는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으로 인정하며, 그분이 오로지 속성뿐만 아니라 속성을 지닌 본성들의 창조주이시라고 말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피조물들은 영원부터 하나님과 함께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7. 신성과 신성한 것은 어떤 면에서는 알 수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알 수 없다. 알 수 있는 것은 그분 주위에 있는 것들에 대한 관조를 통해서이며, 알 수 없는 것은 그분께서 그분 자신 안에 계신다는 점이다.

8. 성삼위일체의 단순하고 무한한 본성 안에서, 그분을 피조물처럼 복잡한 존재로 만들지 않도록 어떤 성향이나 능력도 찾지 말라. 이는 터무니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적용될 수 없는 일이다.

9. 단순하고, 단일하며, 속성이 없고, 평화롭고, 동요하지 않으며, 고요하다. – 무한하고, 전능하며,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의 본성이다. 반면 모든 피조물은 실체와 우연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변덕스러움에서 자유롭지 못하므로 언제나 하나님의 섭리에 의존해야 한다.

10. 모든 지적 본성과 감각적 본성은 존재로 이끌어졌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사물로부터 인상을 받아들일 힘을 얻었다. — 지적 본성은 사고할 힘을, 감각적 본성은 느낄 힘을 얻었다.

11. 하나님께서는 오직 전달하실 뿐이지만, 피조물은 받아들이기도 하고 전달하기도 한다. 즉, 존재와 안녕을 받아들이고, 오직 안녕만을 전달한다. 그러나 육체적 본성과 비육체적 본성은 서로 다르다.

12. 무형적 존재는 말하고, 행동하고, 관조될 때 행복을 가져다주지만, 유형적 존재는 오직 관조될 때만 행복을 가져다준다.

13. 이성적이고 사고하는 본성의 영원한 존재 또는 비존재는 “모든 선을 지극히” 창조하신 분의 뜻에 달려 있으나, 선하거나 악하게 존재하는 것은 이 피조물들의 자유 의지에 달려 있다.

14. 악은 피조물의 본성에서가 아니라, 그들의 잘못되고 이성적이지 않은 움직임에서 관찰된다.

15. 영혼은 그 갈망하는 힘이 절제로 다스려지고, 격정적인 힘이 사랑을 갈망하며 증오를 멀리하고, 사색하는 힘이 기도와 영적 관상을 통해 하나님 안에 머물 때 현명하게 움직인다.

16. 유혹을 받을 때 슬픈 시련 앞에서 너그러운 마음을 보이지 않고, 영적 형제들에 대한 사랑을 끊어버리는 자는 아직 완전한 사랑과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얻지 못한 자이다.

17. 하나님의 섭리의 목적은, 악으로 인해 다양하게 찢겨진 자들을 올바른 믿음과 영적 사랑을 통해 다시 하나로 모으는 것이다. 구세주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흩어진 자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요한복음 11:52)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힘든 우연을 감당하지 않으려 하고, 슬픈 일을 견디지 않으며, 고통스러운 일을 참아내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의 목적 밖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18. “사랑은 오래 참으며 자비롭다”(고린도전서 13:4): 그렇다면 슬픈 일을 당했을 때 소심해지고, 자신을 슬프게 한 이들에게 악의를 품으며, 그들에 대한 사랑을 끊어버리는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의 목적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19. 스스로를 돌아보아라. 형제와 너를 갈라놓는 악이 형제가 아니라 바로 너 자신 안에 숨어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사랑의 계명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서둘러 그와 화해하라.

20. 사랑의 계명을 소홀히 여기지 마라. 그 계명을 통해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겠지만, 그것을 어기면 지옥의 아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21. 친구들 사이의 사랑은 다음과 같은 일들로 인해 무너진다: 네가 시기하거나, 남의 시기를 사는 대상이 될 때; 네가 타인에게 해를 끼치거나, 타인에게서 해를 입을 때; 네가 타인을 모욕하거나, 모욕을 당할 때; 그리고 마지막으로, 형제에 대해 의심스러운 생각을 품고 고집할 때. 그러니 네가 그런 일을 저질렀거나, 그런 피해를 입었기에, 그 때문에 형제 간의 사랑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겠는가?

22. 형제로부터 유혹을 받고, 그 슬픔이 너를 증오로 이끌었다면, 증오에 굴복하지 말고 사랑으로 증오를 이겨내라. 그것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이렇다: 그를 위해 하나님께 진심으로 기도하고, 형제가 가져오는 사과를 받아들이거나, 스스로 그의 사과로 마음을 치유하며, 자신을 유혹의 주범으로 여기고 구름이 지나갈 때까지 인내하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23. 유혹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자가 참을성이 있는 자이며, 그 인내로 인해 칭찬을 받는다.

24. “인내하는 사람은 지혜가 많으니라”(잠언 14:29); 이는 일어나는 모든 일을 마지막 결말과 연관 지으며, 그 결말을 기다리는 동안 모든 슬픔을 견뎌내기 때문이다. 사도의 말씀에 따르면, “결말”이란 “영원한” 생명이다(로마서 6:22). “영생은 오직 유일한 참 하나님이신 주님을 알고, 주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복음 17:3).

25. 영적 사랑을 거부하는 일에 서두르지 말라. 이는 사람들에게 구원으로 가는 다른 길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26. 어제 영적인 형제이자 덕이 있는 사람으로 여겼던 이를, 오늘 악하고 사악한 사람으로 여기지 말라. 이는 악한 자의 유혹으로 인해 네 안에 생겨난 그에 대한 증오 때문이 아니라, 오래 참는 사랑으로 어제의 선함을 생각하며 오늘의 증오를 네 영혼에서 떨쳐내라.

27. 어제 선한 사람이라 칭찬하고 덕이 있는 사람이라 높이 세웠던 사람을, 이제 네 사랑이 증오로 변했다는 이유로 타락하고 악한 사람이라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것을, 네 안에 싹튼 그에 대한 악한 증오를 정당화하는 구실로 삼지 말고; 오히려 비록 여전히 너를 괴롭히는 슬픔이 남아 있다 하더라도, 그에 대한 칭찬을 그대로 유지하라. 그러면 구원의 사랑으로 다시 돌아오기 쉬울 것이다.

28. 네 안에 여전히 숨어 있는 형제에 대한 원망 때문에, 다른 형제들과 대화할 때 평소 그에게 보내던 칭찬을 바꾸어, 말 속에 눈에 띄지 않게 비난을 섞지 마라; 오히려 그와 관련된 대화에서는 순수한 마음으로 칭찬하며, 마치 자신에 대해 기도하듯 진심으로 그를 위해 기도하라. 그러면 머지않아 파멸로 이끄는 증오에서 벗어날 것이다.

29. “나는 형제를 미워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말라. 그를 떠올리는 것조차 싫어할 때, 모세가 말한 바를 경청하라. “네 마음속으로 네 형제를 미워하지 말지니, 네 이웃을 책망할 때는 그의 죄를 이유로 삼지 말라”(레위기 19,17).

30. 어떤 유혹으로 인해 형제가 오랫동안 너를 비방할지라도, 너는 사랑의 마음에서 벗어나지 말고, 그 악한 영이 네 생각을 뒤흔들게 내버려 두지 말라. 비방받고 모함당하는 자를 축복하고 선의를 베풀면, 너는 그 상태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지혜의 길이며, 이 길을 걷는 자는 그분과 하나가 될 것이다.

31. 비록 그들이 옳은 말을 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네게 짜증이나 형제에 대한 반감을 일으키는 말을 하는 자들을 선한 생각을 가진 자로 여기지 말라. 오히려 그들을 치명적인 뱀처럼 피하여, 그들의 비방을 막고 네 영혼을 악의에서 벗어나게 하라.

32. 형제를 암시로 상처 주지 말라. 그래야 그로부터도 같은 대우를 받지 않고, 그로 인해 양쪽 모두에게서 사랑의 정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 어린 담대함으로 나아가 그를 책망하라(마태복음 18:15). 그리하여 근심의 원인을 제거하고, 너와 그를 불안과 짜증에서 해방시키라.

33. 네 양심을 철저히 살펴보아, 형제가 너와 화해하지 못하는 것이 네 잘못 때문은 아닌지 확인하고, 거짓된 추측으로 그 책망을 외면하지 말라. 그 양심은 네 속을 꿰뚫어 보시며, 네가 이 세상을 떠날 때 너를 심판하실 분이시니, 기도할 때 너에게 걸림돌이 될 것이다.

34. 평화로운 때에는 형제가 화가 났을 때 했던 말을 떠올리지 마라. 네 얼굴을 보고 불쾌한 말을 했든, 네가 없는 곳에서 다른 사람에게 네에 대해 말했고 네가 나중에 그 말을 들었든 간에, 악의적인 생각을 품고 다시 형제를 해치는 증오로 돌아가지 않도록 하라.

35. 사람에게 증오를 품은 이성적인 영혼은, 우리에게 “사람의 죄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명령하신 하나님 앞에서 평화를 누릴 수 없다(마태복음 6:15). 형제가 화해를 원하지 않더라도, 너는 원한을 품지 말고 그를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며, 누구 앞에서도 그를 험담하지 마라.

36. 형언할 수 없는 거룩한 천사들의 평화는 다음 두 가지 태도에 기초하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서로에 대한 사랑; 마찬가지로 영원부터 존재해 온 모든 성인들의 평화도 그러하다. 우리 구세주께서도 이렇게 훌륭하게 말씀하셨다: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선지자들이 달려 있다”(마태복음 22:40).

37.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이 되지 마라. 그러면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이 되지 않을 것이다. 자기애에 빠지지 마라. 그러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38. 영적인 형제들과 함께 살고자 한다면, 그들의 문 앞에서 자신의 욕망을 버려라. 그렇지 않으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너는 하나님과도, 너와 함께 사는 이들과도 화목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39. 완전한 사랑을 얻고 평생 그 사랑을 따라 살아온 사람은 “성령”을 주님 “예수”라고 부른다(고린도전서 12:3). 이와 반대되는 것에서는 반대되는 결과가 나타난다.

40. 하느님을 향한 사랑은 언제나 마음을 열어 하느님과 신성한 것에 대해 대화하도록 이끄며, 이웃을 향한 사랑은 언제나 그분에 대해 선한 생각을 품게 한다.

41. 헛된 영광을 사랑하거나 어떤 물질적인 것에 집착하는 사람은 일시적인 일로 인해 사람들에게 화를 내거나, 그들에게 원한을 품거나, 그들을 미워하거나, 부끄러운 생각에 사로잡히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영혼에게는 이 모든 것이 낯설다.

42. 마음속으로 부끄러운 말을 하지 않고 부끄러운 행동을 하지 않을 때, 너에게 해를 끼치거나 너를 비방한 사람을 원망하지 않을 때, 그리고 기도할 때 마음이 끊임없이 물질과 형상에서 벗어나 있을 때, 너는 무정(無情)과 완전한 사랑의 경지에 도달했음을 알라.

43. 허영에서 벗어나는 것은 결코 작은 업적이 아니다. 그러나 덕을 은밀히 쌓고 자주 기도함으로써 그로부터 해방될 수 있으며, 해방의 징표는 자신을 비방한 자나 비방하고 있는 자를 원망하지 않는 것이다.

44. 의로운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네 안의 각 부분, 즉 영혼과 육신에 마땅한 것을 제공하라. 영혼의 사고하는 부분에는 독서, 영적 묵상, 기도를; 격정적인 부분에는 증오와 반대되는 영적 사랑을; 욕망하는 부분에는 정절과 절제를; 육체에는 오직 필수적인 음식과 의복만을 제공하라.

45. 이성은 그 본성에 따라 작용한다. – 정욕을 순종 속에 다스릴 때, 모든 존재의 의미를 관조하며, 하나님과 함께 머문다.

46. 동물의 몸에서 건강과 병이 드러나고, 바다에서 빛과 어둠이 드러나듯이, 영혼에서는 미덕과 악덕이, 이성에서는 지식과 무지가 드러난다.

47. 그리스도인은 이 세 가지 길, 즉 계명, 교리, 그리고 믿음을 통해 지혜를 얻는다. 계명은 마음을 정욕으로부터 해방시키고, 교리는 마음을 실재에 대한 인식으로 이끄며, 믿음은 마음을 성삼위일체의 관상으로 이끈다.

48. 수행자들 중에는 단지 정욕적인 생각만 떨쳐내는 이들도 있고, 정욕 그 자체를 끊어 버리는 이들도 있다. 정욕적인 생각은 시편을 읊거나, 기도하거나, 하느님을 묵상하거나, 그 밖의 적절한 활동으로 떨쳐낼 수 있으며, 정욕은 자신이 집착하는 대상들을 경멸함으로써 끊어낼 수 있다.

49. 우리는 여자, 재산, 명예 등에 집착하곤 한다. 세상에 대한 단절을 통해 마땅히 해야 할 대로 절제로 몸을 고갈시키려 애쓴다면, 여자에 대한 무관심과 경멸에 이를 수 있다; 재물에 대해서는, 자신이 가진 것으로 만족하도록 마음을 다스린다면; 명성에 대해서는, 오직 하나님 한 분께만 드러나는 덕행의 은밀한 결실을 사랑한다면. 다른 정욕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모든 것을 경멸하는 사람은 결코 어떤 적대감에도 이르지 않는다.

50. 아내, 재산 등과 같은 세속적인 것들을 버린 사람은 겉사람을 수도사로 만들었을 뿐이다. 그러나 속사람은 아직 아니다. 반면, 정욕적인 생각을 버린 사람은 속사람, 즉 마음을 수도사로 만들었다. 겉사람을 수도사로 만드는 것은 원하기만 하면 쉬운 일이지만, 속사람을 수도사로 만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51. 그렇다면 이 부류 중에서 정욕적인 생각에서 온전히 해방되어, 모든 것에서 벗어난 순수한 기도를 이룰 자격을 얻은 사람은 누구인가? 이것이야말로 내면의 수도자의 표징이 아니겠는가?

52. 우리 영혼 속에는 많은 정욕이 숨어 있으며, 그 대상들이 나타날 때 비로소 드러난다.

53. 어떤 이는 정욕의 대상이 없을 때 정욕에 동요하지 않고, 무정(無情)의 작은 부분을 이룰 수도 있겠지만, 대상이 나타나기만 하면 정욕은 즉시 마음을 유혹하기 시작한다.

54. 정욕의 대상이 없을 때, 네가 완전한 무정욕을 얻었다고 여기지 말라. 그러나 대상이 나타나도 그 대상이나 그에 대한 기억에 전혀 동요되지 않는다면, 그때 비로소 네가 무감정의 경지에 들어섰음을 알라. 그러나 그때에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 오랜 기간 쌓아온 덕이 정욕을 죽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소홀히 하면 정욕은 다시 불타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55.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는 의심할 여지 없이 가능한 한 그분을 본받는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것을 그치지 않으셨다. 감사의 말을 듣지 못하고 모욕을 당하셔도 오래 참으셨으며, 그들에게 매맞고 죽임을 당하셔도 그것을 참아내셨고, 결코 누구에게도 악을 돌리지 않으셨다. 이 세 가지 행위는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입니다. 이것들이 없이는,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말하거나 그분의 왕국을 얻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주여, 주여’라고 말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갈 것이니라”(마태복음 7:21). 또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계명을 지키리라” (요한복음 14:15, 21)라고 하셨으며, 그 밖에도 여러 말씀이 있다.

56. 구세주의 계명들이 지닌 모든 목적은, 마음을 절제하지 못함과 증오에서 해방시켜 그분을 향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이끌어 주는 데 있으며, 그 사랑으로부터 거룩하고 활동적인 지식의 빛이 솟아난다.

57.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깨달음을 얻었다면, 사랑과 절제에 대해 소홀히 여기지 말라. 이는 그것들이 영혼의 정욕적인 부분을 정화함으로써, 네가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순탄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58. 깨달음으로 가는 길은 무정(無情)과 겸손이다. “이것들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볼 수 없느니라”(히브리서 12:14).

59. “이성은 자랑하지만 사랑은 세우나니”(고린도전서 8,1) 하듯이, 이성과 사랑을 결합하라. 그리하면 교만을 멀리하고, 영적인 청지기(에코노모스)가 되어, 자신은 물론 네게 다가오는 모든 이를 세우는 자가 될 것이다.

60. 사랑이 세우는 이유는, 사랑이 시기하지 않고 시기하는 자들에게도 화내지 않으며, 시기할 만한 것을 대중 앞에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은) 이미 완전함에 이르렀다고 자만하지 않으며(빌 3,12),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처럼 사랑은 마음을 자만으로부터 지키며, 항상 지식이 깊어지도록 이끈다.

61. 보통 지식 뒤에는 자만과 시기심이 따르는데, 특히 초반에 그러하다. 자만은 내면에서만 드러나지만, 시기심은 내면과 외면 모두에서 드러난다. 내면에서는 (내가) 지식을 가진 자들을 향해, 외면에서는 (나를 향해) 무지한 자들이 품는 것이다. 사랑은 이 세 가지 불의, 즉 자만, “자만하지 않기” 때문에; 내면의 시기심은 “시기하지 않기” 때문이며, 외면의 시기심은 “오래 참으며 자비롭기” 때문이다(고린도전서 13:4). – 그러므로 지식을 가진 자는 사랑도 얻어야 하며, 그리하여 사랑이 모든 일에서 마음을 온전하게 보존하게 해야 한다.

62. 지식의 은사를 받았으나, 사람에게 대해 근심이나 악의, 또는 증오를 품고 있는 자는 마치 가시와 엉겅퀴로 자신의 눈을 찌르는 사람과 같다. 그러므로 지식은 반드시 사랑이 필요하다.

63. 온전히 육신에만 신경 쓰지 말고, 육신의 능력에 맞는 수행을 정한 뒤, 온 마음을 내면으로 돌리라. “육신의 훈련은 조금은 유익하나 경건은 모든 면에서 유익하니라”(딤전 4:8) 등.

64. 내면에 머무르며 끊임없이 내면을 돌보는 자는 절제하며, 오래 참으며, 자비를 베풀며, 겸손을 실천한다. 그뿐만 아니라, 묵상하고, 신학을 탐구하며, 기도한다. 이것이 바로 사도가 “성령으로 행하라”(갈라디아서 5:16)라고 말할 때 의미하는 바이며, 그 밖의 말씀들도 마찬가지이다.

65. 영적인 길을 걷는 법을 모르는 사람은 정욕적인 생각에는 신경 쓰지 않고 온전히 육신에만 신경을 쓰는데, 이는 방탕하게 먹고 마시거나, 음란한 행위를 하거나, 짜증을 내거나, 분노하거나, 원한을 품는 등, 이런 방식으로 마음을 어둡게 만들거나, 지나치게 고행에 몰두하여 생각을 억누르게 된다.

66.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용하도록 주신 어떤 것도 빼앗지 않으나, 절제하지 못함을 억제하고 무분별함을 바로잡는다. 즉, 성경은 먹는 것, 자녀를 낳는 것, 돈을 소유하고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탐식, 간음 등을 금지한다. 심지어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조차 금지하지 않으니, 그것이 바로 생각하기 위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열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금지한다.

67.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행하는 일 중에는 계명에 따라 행하는 것도 있고, 계명에 따르지 않고 말하자면 자발적인 헌사로 행하는 것도 있다. 계명에 따른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하며, 간음하지 않고, 살인하지 않는 등인 데, 이를 어길 경우 우리는 정죄를 받게 된다. 계명에 따르지 않는 행위는, 우리가 순결을 지키고 독신 생활을 하며, 모든 소유로부터 멀어지고, 은둔 생활을 하는 것 등입니다. 이러한 행위들은 선물과 같은 의미를 지니는데, 만일 연약함으로 인해 어떤 계명을 지키지 못할 때, 이 선물들로 우리 선하신 주님을 달래기 위함입니다.

68. 독신 생활이나 순결을 선택한 자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 놓아야” 한다(누가복음 12, 35): “허리에 띠를 띠는 것”은 절제를 의미하며, “등불을 켜 놓는 것”은 기도와 하나님에 대한 묵상, 그리고 영적인 사랑을 의미한다.

69. 형제들 중 어떤 이들은 자신들이 성령의 은사를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는 계명을 지키는 데 소홀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믿음을 가진 자는 자기 안에 하나님의 모든 은사가 요약되어 있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게으름으로 인해 그분께 대한 적극적인 사랑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우리 안에 있는 신성한 보물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마땅히 자신을 하나님의 은사와는 거리가 먼 존재로 여겨야 한다.

70. 신성한 사도의 말씀에 따르면, 우리 마음속에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고(엡 3:17), “그분 안에는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 (골로새서 2:3)라고 한다면, 우리 마음속에는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각 계명을 통해 마음이 정화될수록 마음속에 드러나게 된다.

71. “밭에 감추어진 보물”(마태복음 13:44)네 마음속에 있는데, 네가 게으름 때문에 아직 그것을 찾지 못한 것이다. 만일 찾았다면, 모든 것을 팔아 그 밭을 샀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는 그 밭을 내버려 둔 채, 가시와 엉겅퀴밖에 없는 그 주변에서 일하고 있다.

72. 그러므로 구세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라”(마태복음 5:8)고 하셨다. 그들은 사랑과 절제로 자신을 정화할 때, 그리고 더욱 정화될수록 그분과 그분 안에 있는 보물을 보게 될 것이다.

73. 그래서 또 말씀하시기를 “너희 소유를 팔아 자선을 베풀라” (누가복음 12, 33), “그러면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해질 것이다” (누가복음 11, 41)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더 이상 육체에 관련된 일들에 얽매이지 않고, 주님께서 “마음”이라 부르시는(마태복음 15, 19) 자신의 마음을 증오와 절제 부족으로부터 정화하려고 노력하는 자들을 향한 말씀이다. 왜냐하면 마음을 더럽히는 그 모든 것은, 성세례의 은총으로 그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를 보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74. 성경은 미덕들을 ‘길’이라 부릅니다. 그 중에서도 사랑이 모든 미덕 중 가장 뛰어나니, 사도가 “그보다 더 뛰어난 길(가장 뛰어난 )을 너희에게 보여 주리라”(고린도전서 12:31)라고 말한 것은, 모든 물질적인 것을 경멸하고, 영원한 것보다 일시적인 것을 결코 우선시하지 않도록 이끄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75. 하느님을 향한 사랑은 정욕과 대립한다. 이는 마음이 감각적 쾌락에서 절제하도록 이끄기 때문이다. 이웃을 향한 사랑은 분노와 대립하는데, 이는 명예와 부를 경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는 바로 구세주께서 여관 주인에게 주신 두 렙타(눅 10:35)와 같아서, 그가 너를 돌보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강도들에게 붙어 다시 상처를 입지 않도록, 그리고 간신히 살아 있는 상태가 아니라 죽은 채로 남지 않도록, 배은망덕한 자가 되지 말라.

76. 분노와 원한, 그리고 부끄러운 생각들로부터 네 마음을 정화하라. 그러면 네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를 알 수 있을 것이다.

77. 누가 너에게 거룩하고, 본질적으로 하나이며, 경배받는 삼위일체에 대한 믿음을 깨우쳐 주었느냐? 아니면 누가 너에게 삼위일체로부터 나오신 독생자의 성육신에 대해 알려 주었느냐? 누가 너에게 무형적인 존재들, 보이는 세상의 기원과 종말, 또는 죽은 자의 부활과 영생, 혹은 천국 왕국의 영광과 두려운 심판에 대한 지식을 가르쳐 주었는가? 네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은혜, 곧 성령의 보증이 아니겠는가? 이 은총보다 더 큰 것이 무엇이겠는가? 아니면 이러한 지혜와 지식보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이겠는가? 이러한 약속들보다 더 높은 것이 무엇이겠는가? 만일 이 모든 것 이후에도 우리가 여전히 게으르고 부주의하며, 우리 마음을 어둡게 하고 태양보다 더 밝은 이러한 진리를 분별하는 것을 방해하는 정욕들로부터 스스로를 정화하지 못 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책망해야 할 것이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은총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78. 네게 영원한 복을 약속하시고 네 마음에 성령의 보증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네가 자신의 삶을 돌보도록 명하셨으니, 이는 내면의 사람이 정욕에서 해방되어 이미 이 세상에서 그 복을 맛보기 시작하게 하려 하심이다.

79. 높은 신적 관상에 이르게 되었으니, 무엇보다도 사랑과 절제를 힘써 실천하여, 정욕적인 부분을 평온하게 보존함으로써 영혼 속에 끊이지 않는 빛을 간직하도록 하라.

80. 영혼의 성미 있는 힘을 사랑으로 다스리고, 욕망하는 마음을 절제로 죽이며, 사고하는 마음을 기도로 고양하라. 그리하면 네 안에서 지성의 빛이 결코 흐려지지 않을 것이다.

81. 사랑을 깨뜨리는 원인은 다음과 같다: 불명예, 가해진 피해, 신앙이나 생활 방식에 대한 비방, 구타, 타격, 상처 등; 게다가 이러한 일이 본인에게나, 그의 친척이나 친구 중 한 사람에게 일어날 때이다. 이러한 이유 중 어느 하나라도 있어 사랑을 끊어버리는 자는, 아직 그리스도의 계명이 어떤 목적을 지니는지 깨닫지 못한 것이다.

82. 네가 할 수 있는 한 모든 사람을 사랑하도록 힘쓰라. 만일 아직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적어도 누구도 미워하지 말라.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것을 경멸하지 않는다면, 이조차도 할 수 없을 것이다.

83. 어떤 사람이 너를 비방했다면, 그를 미워하지 말고 그 비방과, 그를 부추긴 악마를 미워하라. 만일 너를 비방한 사람을 미워한다면, 너는 그 사람을 미워한 것이요 계명을 어긴 것이며, 그가 말로 한 것을 너는 행동으로 행하는 것이다. 반면 계명을 지키고 있다면, 그에게 사랑의 행동을 보여주고, 네가 할 수 있는 한 그를 도와, 그를 악에서 돌이키게 하라.

84. 그리스도께서는 네가 어떤 사람에게든, 어떤 방식으로든, 일시적인 어떤 이유로든 미움이나 원망, 분노나 악의를 품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이는 네 개의 복음서가 모든 이에게 선포하는 바이다.

85. 말하는 사람은 많으나 실천하는 사람은 적다. 그러나 누구도 자신의 무책임함을 정당화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해서는 안 되며, 차라리 하나님의 진리를 숨기지 않고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는 것이 낫다. 그래야 계명을 어기는 죄와 더불어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해석하는 죄까지 짓지 않게 될 것이다.

86. 사랑과 절제는 영혼을 정욕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성경 읽기와 하나님에 대한 묵상은 마음을 무지에서 벗어나게 하며, 기도에 전념하는 것은 기도하는 이를 하나님 앞에 서게 한다.

87. 악령들이 우리가 이 세상의 것들을 경멸하면서도, 그것들 때문에 사람들을 미워하거나 사랑을 저버리지 않는 것을 보게 되면, 그때 그들은 우리가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비방하는 자들을 미워하게 하려고 우리에 대한 중상을 퍼뜨린다.

88. 영혼에게 중상모략보다 더 무거운 짐은 없다. 믿음이든 행실이든 중상모략을 당하더라도, 수산나처럼 유일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 외에는 아무도 이를 경멸할 수 없다. 그분은 수산나를 구해 주셨듯이 우리를 고난에서 구해 주시고, 사람들에게 진리를 확실하게 보여 주시며, 수산나에 대해 보여주신 것처럼 영혼을 소망으로 위로해 주신다.

89. 네가 비방한 자를 위해 기도하는 방식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너를 유혹한 자에 대한 진실을 확실히 드러내실 것이다.

90. 본질상 선하신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뿐이시나, 영혼의 태도 면에서는 오직 한 사람만이 하나님을 본받는 자이다. 이는 그의 주된 목적이 본질상 선한 것과 악한 것을 하나로 모아, 그들도 선해지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그는 모욕을 당하면서도 축복하고, 쫓김을 당하면서도 참으며, 비방을 당하면서도 위로하고, 죽임을 당하면서도 죽이는 자들을 위해 기도한다(고린도전서 4:12, 13). 그는 자신의 주된 목표인 ‘사랑’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행한다.

91. 주님의 계명들은 우리에게 중립적인 것들을 축복으로 누리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중립적인 것들을 축복으로 누리는 것은 영혼의 상태를 깨끗하게 하며, 깨끗한 영혼의 상태는 분별력을 낳고, 분별력은 무욕을 낳으며, 그 무욕으로부터 완전한 사랑이 태어납니다.

92. 유혹을 당했을 때, 친구의 잘못을—실제로 그가 잘못을 저질렀든, 단지 그렇게 보일 뿐이든—무시할 수 없는 사람은 아직 무정심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람의 영혼 속에 숨어 있는 정욕들이 자극을 받아 이성을 어둡게 하고, 진리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하며, 선과 악을 분별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몰아내는 완전한 사랑을 아직 얻지 못한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요일 4,18).

93. “친구에게는 배신(대체)이 없다”(시라 6,15): 그는 친구의 불행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 그와 함께 그 짐을 짊어지며, 심지어 죽을 때까지 고통을 감내한다.

94. 친구는 많으나, 그것은 평안할 때뿐이다. 시련의 때면 단 한 명도 찾기 어렵다.

95. 모든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해야 하지만, 소망은 오직 한 분 하나님께 두어야 하며, 온 힘을 다해 그분 한 분만을 섬겨야 한다. 왜냐하면 그분이 우리를 지켜 주시는 한, 모든 친구는 우리에게 호의를 베풀고, 모든 원수는 우리에게 해를 끼칠 힘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이 우리를 버리시면, 모든 친구는 우리에게서 등을 돌리고, 모든 원수는 우리 위에 힘을 행사하게 된다.

96. 하나님의 버리심에는 네 가지 주요한 종류가 있다. 하나는 섭리적인 버리심으로, 주님 자신에게서 보았듯이, 겉보기에는 버림받은 것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버림받은 자들을 구원하기 위함이다. 또 하나는 시험적인 버리심으로, 욥과 요셉에게서 보았듯이, 한 사람은 용기의 기둥으로, 다른 한 사람은 정절의 기둥으로 드러내기 위함이다. 또 다른 버림은 영적 양육을 위한 것으로, 사도 베드로에게 있었던 것처럼, 겸손과 지혜로 그 안에 넘치는 은혜를 보존하기 위함이다. 마지막으로 또 다른 버림은 외면하심에 의한 것으로, 유대인들에게 있었던 것처럼, 징벌을 통해 그들을 회개로 돌이키기 위함이다. 이 모든 버림의 형태는 구원을 주며, 하나님의 은혜와 인자하심으로 충만하다.

97. 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자들과 하나님의 섭리의 신비를 진정으로 아는 자들은, 하나님의 허락하심으로 시험을 받는 친구들을 버리지 않는다. 그러나 계명을 경시하는 자들과 하나님의 섭리의 신비를 알지 못하는 자들은, 친구가 형통할 때에는 그와 함께 기뻐하지만, 시험을 받는 자가 고통을 겪을 때에는 그를 버린다. 때로는 그들이 적의 편에 서기도 한다.

98. 그리스도의 친구들은 모든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는 것은 아니다. 반면 세속적인 친구들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지도 않고,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지도 않는다. 그리스도의 친구들은 끝까지 사랑의 유대를 지키지만, 세속적인 친구들은 세속적인 문제로 인해 서로 충돌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그 유대를 유지한다.

99. “친구는 신실하고, 혈연은 굳건하다”(시르 6,14). 이는 친구가 형통할 때에도 그는 좋은 조언자이자 한마음으로 협력하는 동반자가 되며, 고난을 겪을 때에는 가장 진실한 옹호자이자 가장 자비로운 수호자가 되기 때문이다.

100. 많은 이들이 사랑에 대해 많은 말을 했으나, 찾아보면 오직 그리스도의 제자들 중에서만 그 사랑을 발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오직 그들만이 사랑의 스승이신 참된 사랑을 가졌기 때문이며, 그에 대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내가 예언의 은사를 가지고 모든 비밀을 알고 모든 지식을 가졌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다” (고린도전서 13:2, 3). 사랑을 얻은 자는 곧 하나님 자신을 얻은 것이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한일서 4:8) 하셨으니, 그분께 영원토록 영광이 있기를. 아멘.

 

3. 『그리스도교 자비론』 700장 중에서 선별한 관념적 및 실천적 장들

1.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 시작이 없으시고, 헤아릴 수 없으시며, 온전히 존재하실 수 있는 능력을 지니시고, “언제”와 “어떻게” 존재하시는지에 대한 모든 생각을 완전히 배제하시며, 모든 이에게 접근할 수 없으시고 그 본성을 어떤 피조물도 알 수 없으시다.

2. 존재하는 모든 것은 추론 가능하고 인식 가능한 것으로 불리며, 이에 대한 인식에는 증명할 수 있는 근거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추론할 수 없는 분으로 불리나, 추론 가능하고 인식 가능한 것들을 통해 그분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믿게 된다.

3. 피조물에 대한 인식은 자연적인 과정을 통해 얻어지는 그 자체의 근거를 증거로 삼으며,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규정된다. 반면 하나님은 이러한 사물들에 내재된 근거들을 통해 그분이 존재하신다는 사실만을 믿게 되며, 경건한 이들에게 그분이 존재하신다는 고백과 믿음을 주시는데, 이는 그 어떤 증명보다도 확고합니다. 믿음은 증명할 수 없는 원리를 지닌 참된 인식으로, 이성과 언어를 초월하는 사물들에 대한 확신입니다.

4.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시작이자 중간이자 끝이시다: 시작은 창조주로서, 중간은 섭리자로서, 끝은 완성자이시다.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이,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그분을 통해, 그분 안에서 나기 때문”이다(롬 11:36).

5. 본성상 이성을 지닌 영혼보다 더 존귀한 영혼은 없다.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영혼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시어, 스스로 움직이는(자유로운) 존재로 존재하게 하신다. 그 후 각 영혼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영광을 선택하거나, 자신의 행위로 인해 스스로 불명예를 자초하기도 한다.

6.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은 진리의 태양(말라기 4, 2)이시며, 그분의 선하심의 광선으로 모든 이를 똑같이 비추신다. 반면 영혼은 그 성향에 따라 대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처럼 밀랍이 되기도 하고, 물질만을 사랑하는 자처럼 진흙이 되기도 한다. 진흙이 본성상 태양에 의해 말라버리고, 밀랍은 본성상 태양에 의해 부드러워지듯이, 모든 물질과 세상을 사랑하는 영혼은 하나님으로부터 깨달음을 주는 계시를 받아들이면서도 자신의 기분에 따라 이를 거부함으로써, 진흙처럼 굳어지고, 마치 파라오처럼 스스로를 파멸로 몰아넣는다; 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영혼은 이 과정에서 밀랍처럼 부드러워지며, 신성한 것들의 형상을 받아들여 영 안에서 하나님의 거처가 된다.

7. 신성한 깨달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비추고, 신성한 노래로 창조주를 끊임없이 찬양하도록 말을 훈련시키며, 모든 것을 바라보는 시선을 흠 없는 것으로 거룩하게 한 자는, 존재의 자연스러운 선에 그 형상을 닮게 하고, 자발적인 선한 마음가짐으로 번영을 닮게 한 자이다.

8. 자신의 마음을 유일한 하나님과 그분의 완전함에 대해 생각하도록 이끄는 자, 말을 그 완전함의 올바른 해석자이자 설명자로 삼는 자, 그리고 감정을 훈련시켜 보이는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경건하게 바라보게 하고, 그 안에 감추어진 이성의 위대함을 영혼에 알리는 자, 바로 그가 자신의 영혼을 더럽혀지지 않게 보존하는 자이다.

9.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폭군인 악마들의 쓰라린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키시고, 우리에게 인자한 경건의 멍에, 곧 모든 악마의 힘을 누그러뜨리고, 그 멍에를 받아들인 자에게 모든 선을 잘 다스려 주며, 도둑맞지 않게 보존해 주는 겸손을 베풀어 주셨다.

10. 믿는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겸손해지고, 겸손해지는 자는 온유해지며, 분노와 정욕과 같은 비정상적인 감정의 움직임에 휘둘리지 않는 마음가짐을 갖게 된다. 온유한 자는 계명을 지키며, 계명을 지키는 자는 정화되고, 정화된 자는 빛을 받게 되며, 빛을 받은 자는 신랑이신 말씀과 함께 비밀의 보물창고에서 함께 누울 자격을 얻는다.

11. 농부가 나무를 옮겨 심기에 적합한 밭을 둘러보다가 때때로 뜻밖의 보물을 발견하듯이: 마찬가지로 모든 수행자, 즉 겸손하고 위선 없으며, 마음의 기질이 평온하고 세속적 정욕의 덤불과는 거리가 먼 자는, 가장 복된 야곱처럼, 아버지가 성공의 비결에 대해 “이것이 무엇이냐, 네가 이토록 빨리 얻은 것이냐, 내 아들아?”라고 묻자, 이렇게 대답할 수 있다: “주 나의 하나님께서 내 앞에 주셨나이다”(창세기 27, 20).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쪽에서 아무런 노력도 없이, 그것을 기대하지 않았던 우리에게 그분의 지혜에 대한 지극히 지혜로운 통찰을 주실 때, 우리는 마치 갑자기 영적 보물을 얻은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 숙련되고 경험이 풍부한 수행자는 영적인 농부로서, 감각을 통해 가시적인 사물에서 자라나는 것을—마치 야생 나무처럼—영적인 밭으로 옮겨 심고, 이를 통해 보물을 얻는 자이다. 바로 피조물 안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지혜를 은총으로 꿰뚫어 보는 통찰이다.

12. 허세를 부리기 위해 지식을 추구하되 이를 얻지 못하는 자는 이웃을 시기하지 말고 슬픔에 잠기지 말아야 한다. 차라리 정해진 대로 지식에 이르는 준비 과정인, 즉 적극적인 덕행의 수고를 거치는 것이 낫다. 육신으로 이를 기꺼이 수고하며 실천함으로써, 그는 영혼이 지식을 받아들일 준비를 갖추게 될 것이다.

13. 경건한 의도로 사물을 올바르게 탐구하며, 다른 사람들 앞에서 과시하려는 어떤 생각도 품지 않는 자들은, 그것들에 대한 지극히 밝은 통찰을 얻게 될 것이며, 자기 자신을 더 정확히 아는 데 필요한 지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법률은 이러한 이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면, 너희가 만들지 않은 ‘크고 좋은 성읍들’, 너희가 짓지 않은 ‘온갖 좋은 것으로 가득 찬 집들’, 너희가 파내지 않은 ‘파낸 샘들’, 너희가 심지 않은 ‘포도원과 올리브 나무들’을 상속받게 될 것이다”(신명기 6, 10, 11). 이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사는 자는 신성한 은총으로 충만해지는데, 이러한 은총은 정욕의 위협적인 공격으로 인해 항상 명백하게 드러나지는 않기 때문이다.

14. 위선자는 자신이 들키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한 평온을 누리며 침묵을 지키며, 의로운 사람으로 보이는 것에서 얻는 명성에 만족한다. 그러나 정체가 드러나면, 타인을 비방함으로써 자신의 수치를 가리려 하며 독설을 내뱉는다. 성경은 그러한 자를 사악한 에키드나의 자손에 비유하며,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명한다. 즉,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 맞춰 마음속 깊은 곳의 태도도 바꾸라는 것이다.

15. 이웃을 해치기 위해 친구인 척하는 자는 늑대이며, 양의 옷을 입고 자신의 악행을 가리는 자이다. 그런 자는 순박한 성품이나, 기독교인답게 순수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한 것을 마주하면, 그것을 잡아 삼켜 버리고, 그 후 자신이 공격하는 말과 행실에 대해 “형제들의 자유를 엿보는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갈 2:4)라고 하며 셀 수 없이 많은 모욕을 퍼붓는다.

16. 악한 목적으로 침묵하는 척하며 이웃을 상대로 음모를 꾸미는 자는, 그 음모가 성공하지 못하면 마음의 고통을 안고 자신의 정욕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유익을 위해 침묵하는 자는 우정을 깊게 하고, 어둠을 몰아낸 빛을 받은 자처럼 기뻐하며 떠난다.

17. 형제들의 모임에서 대화를 듣기를 재빨리 막는 자는, 명성을 갈망하는 마음이 아파하고 있음을 숨기지 않고(즉 드러내며), 그 욕망에 사로잡혀 대화의 흐름을 방해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화제에 대해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인 여러 가지 생각을 제시한다.

18. 지혜로운 사람은 가르치면서도 배우며, 오직 유익한 것만을 배우고 가르치기를 원하지만, 겉으로만 지혜로운 척하는 사람은 질문하든 질문을 받든 오직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만을 제시한다.

19. 하나님의 은총으로 어떤 은혜의 선물을 누리게 된 자는, 주님의 말씀대로 “공짜로 받았으니 공짜로 주라”(마태복음 10:8)는 대로, 다른 이들이 시기하지 않도록 그 선물을 전해야 한다. 땅속에 은사를 숨기는 자는 은사를 주신 분을 마치 무자비한 분인 양 비방하며(마태복음 25,24), 육신을 아끼기 위해 덕을 저버리는 것이다. 진리를 원수들에게 팔아넘기는 자는 나중에 정죄를 받고, 명예를 탐하는 자로서 불명예를 견디지 못해 목을 매는 운명을 맞이한다.

20. 아직 정욕과의 싸움을 두려워하고 보이지 않는 원수들의 공격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침묵해야 한다. 즉, 덕을 위한 투쟁에서 대립의 방식을 사용해서는 안 되며, 기도에 의지하여 자기 자신에 대한 보살핌과 보호를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출애굽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으라”(출 14,14). 반면, 자신들을 쫓아오던 적들이 패배한 후, 감사의 마음으로 어떤 미덕의 길을 시작해야 할지 깨닫고자 하는 이들은 오직 마음의 귀를 열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를 경청해야 하며, 이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해진 대로 “이스라엘아, 들으라” (신명기 6,4)는 말씀과 같다! 그리고 마음이 정화된 후 신성한 지식을 간절히 갈망하는 이에게는 경건한 담대함이 어울리며, 그 결과 그에게 “왜 내게 부르짖느냐?(출 14:15)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두려움 때문에 침묵을 지켜야 하는 이에게는 오직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만이 마땅하며; 듣도록 명받은 자에게는 하나님의 계명을 듣고 이행할 준비가 마땅하며, 영적 깨달음에 이른 자에게는 악을 물리쳐 달라고 간구함과 동시에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를 표하는, 기도 속의 끊임없는 부르짖음이 적합하다.

21. 하나님께서 그 영혼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그 영혼을 만지시고 당신께로 끌어올리지 않으신다면, 그 영혼은 결코 하나님을 아는 데 이르지 못한다. 또한 인간의 이성은, 하나님께서 그 이성을 인간의 이성이 감당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고양시키시고 신성한 빛으로 비추어 주시지 않으신다면, 결코 그토록 높은 곳으로 올라가 신성한 계시를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22. 복음에 따르면, 믿는 자만이 선한 삶을 실천함으로써 죄라는 산(마태복음 17, 19)을 옮기며, 변덕스럽고 변하기 쉬운 감각적인 것들에 대한 예전의 집착을 자신 안에서 뿌리 뽑는다. 누구든지 제자가 될 수 있다면, 말씀으로부터 영적 깨달음의 빵 조각들을 받아, 그것으로 수천 명을 배불리 먹이며, 행함을 통해 말씀의 번식하는 능력을 보여 줄 것이다(마태복음 15:32 등). 그리고 사도가 될 수 있었던 자는 “모든 병과 모든 질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낸다”(마태복음 10:1)는 일을 행한다. “귀신을 쫓아낸다”는 것은 곧 정욕의 작용을 몰아내는 것을 뜻하며; “질병을 고친다”는 것은, 즉 소망을 잃은 자들을 소망으로 이끌어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되돌리는 것이며; 병을 치료한다는 것은, 즉 나태함으로 인해 나약해진 자들을 심판에 대한 말씀으로 일깨우고 굳건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뱀과 전갈을 밟을 권세”(루카 10,19) 받은 자는 죄의 시작과 끝을 근절한다.

23. 사도와 제자는 물론 믿는 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제자가 항상 사도는 아니지만, 항상 믿는 자이다. 다만 믿는 자라고 해서 반드시 제자나 사도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삶과 묵상을 통해, 이 세 번째 자(믿는 자)가 두 번째 자(제자)의 지위와 존엄에 오를 수도 있고, 이 두 번째 자가 첫 번째 자(사도)의 지위와 존엄에 오를 수도 있다.

24. 시간 속에서 일시적인 순서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은, 완전함에 도달하면 멈추게 되는데, 그때 그 자연스러운 성장이 중단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이 덕행의 삶에 따라 이루어내는 것은, 완전함에 도달하더라도 다시 성장으로 나아가게 된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한 것의 끝이 다른 것의 시작이 되는 법이기 때문이다. 자신 안에 깃든 썩어질 정욕을 적극적인 덕행으로 끊어낸 자는, 이와 함께 “영광에서 영광으로” (고린도후서 3:18)로 나아가는 다른 신성한 변혁을 시작하게 된다. 그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선을 행하시는 일을 멈추지 않으시며, 처음부터 그러하셨기 때문이다. 빛의 본성이 빛을 비추는 것인 것처럼, 하나님의 본성은 선을 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일시적이고 태어나고 죽는 사물의 상태에 부합하는 법에 따라 안식일은 일을 멈추는 것으로 지켜지지만, 반면 영적이고 정신적인 사물의 상태에 부합하는 복음에 따르면, 안식일은 선한 일을 행함으로써 기념되는데,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인자이신 주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시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은 이에 대해 분개합니다(막 2:27, 28).

25. 영적인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는, 계명을 이행함으로써 미덕을 쌓지 않는다면, 단지 정욕을 억제하는 것만으로는 영혼에 충분하지 않다. “기뻐하지 말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니, “귀신들이 너희에게 복종하기 때문이라” – 즉, 정욕의 작용 때문이라는 뜻이며, “오히려 기뻐하라.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었기 때문이라” – 즉, 아들의 신분을 부여받은 은혜로 인해 덕을 행함으로써 너희가 무정욕의 항목(목록)에 옮겨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26. 우리가 마음속으로 우리 본성과 하나님 다음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 순결에 이르기 전까지는, 미덕에 대한 변함없는 습관을 얻었다고 여길 수 없다. 왜냐하면 오직 사랑으로 우리 안에 그러한 마음가짐이 자리 잡았을 때, 우리는 신성한 약속의 힘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믿음에 따라, 합당한 자들의 완전한 불변성은 미리 마음이 그 사랑으로 힘을 뿌리내린 곳에 확고히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과 어떤 식으로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모든 생각을 초월하는 침묵(마음의 모든 움직임이 잠잠해지는 상태) 속에 확고히 자리 잡지 못한 자는 결코 변덕스러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27. 위대한 모세는 이미 자신의 성막을 진영 밖에 세운 후, 즉 자신의 마음과 정신을 모든 보이는 것 밖에서 확고히 정립한 후에, 하나님을 경배하기 시작하며; 그리고 어둠 속, 즉 보이지 않고 실체가 없는 인식의 영역에 들어간 후, 그곳에 머물며 가장 신성한 성사를 거행한다 (혹은 그에 헌신하며) (출 33:7; 20:21).

28. 성경에서는 마치 어떤 영적인 사람인 양, 육체와 영을 구별할 수 있다. 그리고 성경의 문자가 육체이고, 그 의미가 영이나 영혼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진리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분명히, 썩어 없어질 것인 육체를 버리고 썩지 않는 영에 온전히 매달리는 자가 지혜로운 자이다.

29. 삶과 행실로 율법을 실천하는 자는 정욕적인 행위들을 삼가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정욕의 활동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친다. 그리고 이는 그의 영적 어린 시절에 있어 구원에 충분하다.

30. 예언의 말씀에 의해 정욕적인 행위를 버리도록 양육받은 자는, 마음속에 생겨나는 그 행위에 대한 동정과 그들과의 교제를 버리는 데에도 힘쓰며, 죄로부터 절제하는 자로서 최악의 부분, 즉 육체를, 최선의 부분, 즉 영혼을 드러냄으로써, 억제할 수 없는 상태로 은밀히 죄를 짓지 않도록 한다.

31. 복음의 삶을 진심으로 받아들인 자는 죄의 시작과 끝을 자기 안에서 잘라내고, 모든 미덕을 행과 생각으로 실천하며, 정욕의 실질적인 공격에서 벗어나고, 그것들과의 마음속 싸움에서 자유로워진 자로서, 미래의 복에 대한 희망으로 영혼을 채워주는 끝없는 기쁨만을 누리며, 하나님께 찬양과 고백의 제물을 드린다.

32. 감각, 즉 감각적 인상에 대한 느낌은 “활동적인” 사람, 즉 미덕을 실천하기 위해 수고하는 이에게 수반된다. 반면 무감각, 즉 감각적 인상에 흔들리지 않는 태도는 “관조적인” 사람에게 고유한 것으로, 그는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 안에 집중시키며 육체와 세상으로부터 그것을 분리한다. 그 사람은 육체의 공감이라는 본성적 속박에서 영혼을 분리하기 위해 “활동적인” 이가 선한 길에서 수고하며, 종종 지쳐 있고 자신의 선한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느낀다; 반면, 관상적 수행과 명상에 머무름으로써 이러한 연민의 가시를 뽑아낸 사람은, 이제 더 이상 그 무엇에도 사로잡히거나 묶일 수 없게 되며, 자신을 지배하고자 했던 자들이 흔히 상처를 주고 붙잡아 두던 것들로부터 깨끗해진다.

33. 불순종의 열매가 죄인 것처럼, 순종의 열매는 미덕이며, 불순종 뒤에는 계명의 위반과 계명을 주신 분과의 연합이 깨지는 것이 따르는 것처럼, 순종 뒤에는 계명의 이행과 계명을 주신 분과의 가장 긴밀한 연합이 따른다. 그러므로 순종을 통해 계명을 지킨 자는 진리를 실천하였으며, 계명을 주신 분과의 사랑의 연합을 끊어지지 않게 보존하였다. 그러나 불순종을 통해 계명을 어긴 자는 죄를 지었으며, 계명을 주신 분과의 사랑의 연합에서 스스로를 단절시켰다.

34. 죄로 인해 맺어진 유대가 끊어진 후 다시 재결합을 추구하는 자는, 우선 정욕에서 멀어지고, 그다음 정욕적인 생각에서, 그다음 본성과 모든 자연적인 것(즉, 물질적 세계)에서, 그다음에는 사념적인 것들과 그에 대한 인식(즉, 영적인 세계)에서, 마침내 섭리의 다양한 계획(사건의 흐름)을 넘어, 알 수 없는 방식으로 ‘하나’ 그 자체에 가까워진다. 그 하나 안에서 자신의 불변성을 깨달은 자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으로 기뻐하며” (베드로전서 1:8), “모든 지성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평안을 얻은 자처럼”(빌립보서 4:7), 그리고 그분과 닮아가는 자를 타락으로부터 끊임없이 지켜 주신다.

35. 지옥에 대한 두려움은 그 길로 인도받는 자들(초심자들)로 하여금 죄를 피하게 하며, 선한 보상을 바라는 소망은 덕행을 실천하는 데 성공하는 이들에게 열의를 불어넣고, 사랑의 신비는 마음을 모든 피조물보다 더 높은 곳으로 끌어올려, 하나님 다음의 모든 것에 대해 눈이 멀게 한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 다음의 모든 것에 대해 눈이 멀어버린 자들만이 주님께서 그들에게 가장 신성한 것을 보여 주심으로 지혜를 얻게 하시기 때문이다(시 145:8).

36. 주님을 마치 믿음의 기초와 같이 삼아, 선의 높은 건물을 세우며, (이 기초 위에) “금과 은과 귀한 보석”, 즉 순수하고 변함없는 신학, 밝고 영광스러운 삶, 신성한 생각들, 그리고 진주 같은 관상들을 놓을 것이며; “나무와 짚과 갈대”(고린도전서 3:12), 즉 우상 숭배나 감각적인 것에 대한 집착, 무분별한 삶, 성숙한 이삭처럼 지혜로운 분별력이 결여된 정욕적인 생각들은 쌓지 말아야 한다.

37. 경건한 삶을 사는 자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는 여기서 나와 함께 서라”(출 33:2 이하) 하신 것처럼, 주님 앞에서 자신의 영혼의 발걸음을 굳건히 세워야 한다. 그러나 주님 앞에 서 있는 자들 사이에도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하는데, 지혜로운 이들이 다음 구절을 대충 지나치지 않고 읽을 때 이를 알 수 있다. “여기 서 있는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은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가 능력으로 임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마가복음 9:1). 주님께서는 그분 앞에 서 있는 모든 이에게 항상 영광 중에 나타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그분께로 향하는 길에 막 들어선 자들(초심자들)에게는 종의 모습으로 오시며, 그분의 변모의 높은 산으로 올라가는 여정에서 그분을 따를 힘이 있는 자들에게는,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지니셨던 하나님의 형상으로 나타나신다. 따라서 동일한 주님께서 그분께 나아오는 이들에게 각기 다르게 나타나실 수 있는데, 한 사람에게는 이러하게, 다른 사람에게는 저러하게 나타나시며, 각자의 믿음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 보이시는 것이다.

38. 활동적인 삶을 사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가 일시적으로 육신 속에 거주하며, 미덕을 실천함으로써 자신의 영혼에서 육신에 대한 동정을 끊어내고 물질적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멀리하려는 목적을 가진 나그네와 같다고 말해진다. 반면 관상적인 삶을 사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가 마치 거울과 점술을 통해 진리를 관상하듯이, 미덕 그 자체 안에서 나그네로 머문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아직 소망하는 복들의 참된 모습을, 마치 대면하여 맛보는 것처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든 성도는 장래의 복에 대하여 “모습대로 행하며” 외친다. “나는 나그네요, 이방인이니, 나의 모든 조상들처럼”(시 38:7, 13).

39. 모든 것에서 벗어나, 우리에게 명해진 대로 하나님을 찾는 것은 언제나 좋은 일이다(시 45:11; 104:4). 왜냐하면 현세의 삶이라는 특성상, 그분을 찾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깊이의 한계에 도달할 수는 없으나, 어쩌면 그 깊이의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깨달음으로써, 가장 거룩한 성스러운 것과 가장 영적인 영적인 것을 뵙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제사장이 성소(성막의 첫 번째 부분)에서, 즉 뜰보다 더 거룩한 곳에서, 지성소, 즉 성소보다 더 거룩한 곳으로 들어갈 때 비유적으로 보여주는 바입니다.

40. 만일 하나님과 아버지의 아들, 곧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을 신들과 하나님의 아들들로 만들기 위해 인자가 되고 사람이 되셨다면, 우리는 “온 몸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고린도전서 1:18)께서 계시며, 인성을 통해 우리를 위해 아버지께 “선구자”가 되신 바로 그곳에 우리가 있을 것임을 믿읍시다. 왜냐하면 신들의 무리, 즉 구원받은 자들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한가운데 서 계시며, 그곳의 복락에 대한 상(각자가 합당한 만큼)을 나누어 주실 것이나, 합당한 자들끼리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41. 아직도 육체의 정욕을 따르는 자는 칼데아 땅에서 우상의 섬기는 자이자 제작자로서 살고 있다. 그러나 분별력 있게 생각하여, 본성에 합당한 삶의 방식을 어느 정도 깨닫고(그에 대한 동감을 품게 되면); 그때, 칼데아 땅을 떠나 메소포타미아의 하란(창세기 11:28–31)으로 향하게 되는데, 즉 미덕과 죄가 인접해 있고, 아직 감각적 유혹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로 들어서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선에 대한 이 중간적인 감각적 이해의 경계를 넘어설 때, 비로소 그는 선한 땅, 즉 모든 죄와 무지에서 자유로운 상태에 들어서게 되는데, 이는 거짓 신이 아닌 참 하나님이 그분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미덕의 상으로 보여주시고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42. 경건한 정신으로 지혜를 얻고자 열망하며, 보이지 않는 세력들에 맞서 전투 태세를 갖춘 자는, 그와 함께 머물러 줄 (선과 악을) 자연스럽게 분별하는 능력—그 빛이 크지 않은—과 성령의 깨달음을 주는 은총을 간구할지어다; 이 중 첫 번째는 육신을 활동적인 덕행으로 이끄며, 두 번째는 마음이 모든 것보다 지혜와의 교제를 우선시하도록 비추는데(솔로몬의 지혜서 8, 2), “그 지혜로써 악의 요새와 하나님의 이성을 거스르는 모든 교만이 무너진다”(고린도후서 10, 4). 이는 여호수아도 기도에서 “해가 가바온 위에 머물게 하소서”라고 간구한 것에서 드러나는데, 즉 마음의 관상 산 위에서 하나님의 지식의 빛이 지는 일 없이 그 안에 보존되게 하소서, “달이 광야 위에 머물게 하소서” – (여호수아 10, 12), 즉 육신의 연약함 위에 놓인 선과 악에 대한 자연스러운 분별이 덕에 관해 변함없이 유지되기를.

43. “가바온”은 높은 지성을 의미하며, “수풀”은 죽음으로 인해 겸손해진 육체를 의미한다. “해”는 지성을 비추고, 관조할 힘을 주며, 모든 무지에서 지성을 구원하는 말씀을 의미하며; “달”은 육체가 계명의 멍에를 받아들이기 위해 합법적으로 영에 복종하도록 의무화하는 자연법이다. 본성 은 변덕스러움 때문에 달을 상징으로 삼는다. 그러나 성도들에게는 미덕에 대한 변함없는 훈련으로 인해 본성이 불변한다.

44. 주님을 찾는 이들은 주님을 자신들 밖에서 찾아서는 안 되며, 오히려 자신들 안에서 믿음으로 그분을 찾아야 한다. 사도는 “말씀이 네게 가까이 있다”고 말하며, “네 입과 네 마음에, 곧 믿음의 말씀이 있느니라”(롬 10,8); 이는 믿음의 말씀을 찾는 것이 곧 그리스도 그분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45. 하나님의 무한하심이라는 높이를 생각하지 말아, 그 높이로 인해 하나님의 인간 사랑이 우리에게 닿을 수 없을 것처럼 절망하지 말자. 또한 죄로 인해 우리가 빠진 헤아릴 수 없는 깊이를 떠올리지 말아, 우리 안에서 죽은 미덕이 다시 살아날 가능성을 의심하지 말자. 이 두 가지 모두 하나님께는 가능합니다. 곧 내려오셔서 지식으로 우리의 마음을 비추시는 것도, 의의 행실을 통해 우리 안에 덕을 다시 일으키시고 우리를 그분과 함께 높이시는 것도 모두 가능합니다. 사도는 “네 마음속으로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곧 그리스도를 데려오겠느냐? 또는 누가 심연에 내려가겠느냐? 곧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일으키겠느냐?’라고 말하지 말라”고 말합니다(롬 10:6-7).

46. 오로지 감각만을 위해 사는 동물들처럼, 그들은 정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피조물을 남용한다. 하나님의 피조물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찬양하며,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우리가 무엇인지, 어떤 목적을 위해, 그리고 무엇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보이는 피조물을 통해 창조되었는지를 깨달아야 한다는 지혜의 명백한 말씀을 전혀 귀담아듣지 않고, 그들은 평생 어둠 속에서 방황하며, 오직 하나님에 대한 무지만을 두 손으로 만지고 있을 뿐이다.

47. 성경의 한 글자만 주의를 기울이며, 율법에 따른 육체적 봉사로 영혼의 존엄성을 묶어두는 이들은, 말 없는 짐승들의 제물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육체와 그 외적인 정화에 많은 신경을 쓰지만, 정욕의 상처로 일그러진 영혼의 아름다움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 영혼을 위해 수많은 가시적인 것들이 창조되었고, 온전한 율법과 모든 신성한 말씀이 주어진 것이다.

48.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많은 이에게 넘어짐과 일어서게 하실 것”(루카 2,34)이라고 하신 말씀은, 이 두 가지를 모두 긍정적인 측면에서 해석한다면, 믿는 이들 각자에게는 정욕과 악한 생각이 넘어짐이 되고, 미덕과 온갖 하느님을 사랑하는 생각이 일어서게 됨을 의미한다.

49. “유대인들의 두려움 때문에 문이 잠긴 다락방에 앉아 있던 자들”(요한복음 20:19) – 즉, 악의 영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계시의 땅에서, 신성한 관조의 높은 경지에 확고히 자리 잡은 자들이, 문처럼 감각을 닫아버려, – 알 수 없이 오시는 하나님, 곧 말씀께서는 그들에게 나타나시되 감각적 현상의 방식이 아니라, 평화를 통해 여러분에게 무정심을 베푸시고, 숨결을 통해 성령의 성찬을 주시며, 악령에 대한 권세를 부여하시고, 자신의 성사의 상징들을 보여 주십니다.

50. “칼데아 땅”은 죄악된 우상들을 세우고 그들에게 경배하는 정욕에 사로잡힌 삶을 말한다. “메소포타미아”는 상반된 양쪽 중 한쪽으로, 또 다른 쪽으로 기울어지는 삶의 방식을 의미한다. 그리고 “약속의 땅”은 온갖 (영적) 복으로 충만한 (영적) 상태를 말한다. 고대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이 선한 마음가짐을 소홀히 여기는 자는 다시 정욕의 노예로 전락하여, 부여받은 자유를 상실하게 된다.

51. 성도들 중 그 누구도 자발적으로 바빌론으로 떠나지 않았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이 선한 것 대신 악한 것을 선택하는 것은 부적절하고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 중 일부가 백성과 함께 어쩔 수 없이 그곳으로 끌려갔다면, 우리는 그들을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라 특별한 사정으로, 인도함이 필요한 자들의 구원을 위해 높은 진리의 말씀을 뒤로하고 정욕에 관한 가르침으로 넘어간 자들로 이해한다: 바로 그러한 상황 때문에 위대한 사도도 제자들을 위해 육신에 머무는 것, 즉 도덕적 가르침을 계속 전하는 것을 더 필요하다고 여겼는데, 사실 그는 도덕적 가르침을 내려놓고, 숭고하고 단순한 영적 관상을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간절히 원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빌립보서 1:29).

52. 복된 다윗이 하프를 연주하며 악령에 시달리던 사울을 달래주었던 것처럼(사무엘상 16:23), 모든 영적인 말씀은 그 안에 스며든 사색을 통해 달콤함을 주며, 간질로 고통받는 마음을 달래주고, 그를 짓누르는 악한 양심에서 해방시켜 줍니다.

53. “눈이 선한 사람”은 위대한 다윗(사무엘상 16, 12)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따른 빛나는 삶을 살며, 그 삶과 마찬가지로 빛나는 지혜의 말씀을 지닌 자이다. 이러한 이들에게는 선한 행위가 관상과 조화를 이룬다. – 전자는 다양한 미덕의 모습으로 빛나고, 후자는 신성한 생각으로 빛난다.

54.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는 사람은, 물론 그 양식을 그 자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일 수 있는 대로 받아들인다. 모든 구하는 자에게 생명의 양식(요한복음 6:35)이신 그분께서, 자비로우신 로서,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주시는 것은 아니며, 의의 위대한 일을 행한 자에게는 더 많이, 그러한 일이 부족한 자에게는 적게 주시니, 이는 각 사람의 마음의 품격(혹은 선한 마음가짐)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 주시기 때문이다.

55. 삶을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이에게는 미덕을 통해 주님께서 함께하시나, 미덕을 아무 가치도 두지 않는 이에게는 주님께서 떠나 계신다. 또한, 관조적인 사람에게는 사물에 대한 참된 인식을 통해 주님께서 함께하시나, 이 점에서 어느 정도 결함이 있는 이에게는 주님께서 떠나 계신다.

56. 사람들을 경건함으로 가르치기 시작할 때, 그 일은 대개 마치 그것이 오직 육신에만 관련된 것처럼 진행된다. 그리고 우리는 경건함에 첫발을 내딛는 초기 단계에서 영보다는 글자 그대로의 의미에 더 중점을 두고 이야기한다. 그 후 조금씩 영에 더 가까이 다가가며, 육적인 말들을 영적인 묵상으로 정제해 나가면, 우리는 인간으로서 가능한 한 순수하게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다. 그리하여 사도의 말을 따라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전에는 육신으로 그리스도를 알았으나,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알지 아니하노라”(고린도후서 5:16). 이는 마음이 그분 위에 덮인 것 없이 말씀에 단순하게(혹은 순수하게) 다가갔기 때문인데, 우리는 이미 말씀에 대한 육적인 이해에서 벗어나 “아버지께로부터 나신 독생자의 영광”을 뵙는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요한복음 1:14).

57. 그리스도 안에서 삶을 시작한 자는 율법 아래의 진리와 자연적인 진리를 뛰어넘은 자이다. 신성한 사도가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이를 이해하게 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도 무할례도 아무것도 아니니라” (갈 6,15)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할례”라는 말은 율법적인 의를 가리키고, “무할례”라는 말은 본성에 따른 법에 따른 의를 암시하는 것입니다.

58. 하나님의 말씀은 길이다(요 14, 6)입니다. 이는 활동적인 삶을 살며, 허영심 때문에 오른쪽으로 치우치지도 않고, 정욕에 이끌려 왼쪽으로 치우치지도 않으며, 신실하고 굳건하게 덕의 길을 따라가며, 자신의 발걸음을 하나님께로 향하는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유대 왕 아사는 이를 끝까지 지키지 못하여 (열왕기상 15, 23)는, 기록된 바와 같이 노년에 다리에 병이 들어, 마치 쇠약해지고 기력을 잃은 사람처럼 더 이상 하나님을 따르는 삶의 길을 걸어갈 수 없게 되었다.

59. “나는 문이다”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요한복음 10,9). 이는 그분께서 덕행의 온 길을 온전히 완수한 자들을, 흠 없는 활동적인 삶의 흐름 속에서 지식의 영역으로 인도하시며, 빛과 같이 그들에게 지극히 빛나는 지혜의 보화를 보여주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길이자 문이자 열쇠이자 왕국이시니, 길은 길잡이로서, 열쇠는 합당한 자들에게 신성한 보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주는 자로서, 문은 인도자로서, 왕국은 상속받을 대상이자 성찬을 통해 모든 이 안에 계신 분으로서 그러하다.

60. 주님께서는 “빛, 생명, 부활, 진리: 빛”이라 불리시며, 영혼을 비추시는 분으로서, 무지의 어둠을 쫓아내시는 분으로서,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을 깨닫게 하시어 마음을 깨우치시는 분으로서, 오직 순수한 자들만이 접근할 수 있는 신비를 드러내시는 분으로서; “생명”으로, 그분을 사랑한 영혼들에게 신성한 영역에서 마땅한 움직임을 주시는 분으로서; “부활”로, 물질에 대한 죽은 집착에서 마음을 일깨우시고, 모든 썩음과 죽음을 깨끗이 씻어내시는 분으로서; “진리”는, 합당한 자들에게 선한 일에 대한 변함없는 기호를 부여하는 것이다.

61. 말로서만 경건하게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계명 때문에 인내로이 고통과 수고를 견디는 자가야말로 자기 안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이다. 그러한 자는 하나님 안에서 존재하는 영광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상호적으로 영화롭게 되며, 덕행에 대한 상으로 성찬을 통해 자기 안에 무정욕의 은총을 지니게 된다. 왜냐하면 활동적인 삶 속에서 덕을 위해 고통을 겪으며 자기 안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모든 사람은, 관상 상태에서 신성한 광선이 비추는 무정욕의 빛을 통해 하나님 안에서 스스로 영화롭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발적인 수난을 향해 나아가시는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이제 인자가 영화롭게 되고, 하나님도 그로 말미암아 영화롭게 되리라. 하나님께서 그분에 대하여 영광을 받으시면, 하나님께서 그분을 당신 안에서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며, 곧바로 그분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요한복음 13:31, 32). 이로부터 미덕을 위한 고난 뒤에는 신성한 은총의 선물이 뒤따를 것임이 분명하다.

62. 영혼이 힘에서 힘으로, 영광에서 영광으로 나아가는 여정, 즉 덕에서 더 큰 덕으로의 발전과 지식에서 더 높은 지식으로의 상승을 이루는 동안, 그 영혼은 여전히 나그네의 신분을 벗어나지 못하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말씀에 따른 것이다: “내 영혼이 많이 방황하였도다” (시 119:6). 이는 거리가 멀고, “기쁨과 찬양의 소리, 축제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경이로운 거처 곧 하나님의 집으로 들어가기까지” (시 41:5) – 영적 관상 속에서 번영하며, 지혜로 깨달은 것들에 대한 기쁨과 그에 걸맞은 감사를 품고, 항상 소리에는 소리를, 영적인 소리에는 영적인 소리를 더하며 나아갈 때까지, 영혼은 이방인의 신분을 벗어날 수 없다. 이러한 축제는 “그들의 마음속에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는 성령”의 은혜를 받은 모든 이들이 행합니다 (갈라디아서 4:6).

63. “기이한 거처”란 미덕에 대한 냉정하고 흔들림 없는 선한 마음가짐을 말하며, 이를 통해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오셔서 성막처럼 영혼을 미덕의 다양한 아름다움으로 단장해 주신다. 하나님의 집은 수많은 다양한 관조로 이루어진 깨달음으로,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혼을 방문하셔서 수많은 지혜로 채워 주십니다. “기쁨의 소리”는 수많은 미덕을 바라볼 때 영혼이 벅차오르는 기쁨입니다. 고백은 영광스러운 충만함, 즉 지혜로 충만해진 것에 대한 감사이다. “소음”은 기쁨과 고백, 이 둘이 어우러져 만들어지는 끊임없는 신비로운 찬양이다.

64. 육신의 정욕을 용감하게 이겨내고, 더러운 영들에 대해 충분한 승리를 거두며, 그들의 생각을 자신의 영혼 영역에서 쫓아낸 자는, 그가 기도하기를, 자신에게 깨끗한 마음이 주어지고 의로운 영이 그의 내면에서 새롭게 되기를, 즉 하나님의 은혜로 악한 생각에서 완전히 정화되고 신성한 생각으로 충만해지기를.

65. 자신의 마음을 깨끗하게 한 자는 하찮은 것들과 하나님 다음으로 존재하는 것들의 의미와 중요성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모두 넘어선 뒤에는 마치 하나님 그분을 직접 바라보는 것과 같다. 이것이야말로 선의 궁극적인 경지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마음을 찾아오셔서, “자라나고 번성하라”(창세기 35:11)고 신비롭게 명하시는 계명에 따라, 선한 행실과 묵상으로 스스로를 성장시킨 만큼, 모세의 돌판에 그러했듯이 성령으로 그 마음에 당신의 말씀을 새기시어 영광을 주십니다.

66. 성도들이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의 마음은,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린도전서 2:16) 말씀하신 바와 같이, – 이는 우리 자신의 지적 능력을 박탈함으로써 오는 것도 아니며, 본질적으로나 인격적으로 우리 마음속으로(그 자리를 대신하여) 들어오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 고유한 속성으로 우리 마음의 능력을 비추고, 그 활동을 자신과 하나 되게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이는 모든 것을 그분의 영 안에서 생각하며, 모든 것을 통해 그분에 대한 생각으로 이끄는 사람입니다.

67. 우리는 사도의 말씀에 따라 ‘그리스도의 몸’이라 불립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각 사람은 그 일부이다” (고린도전서 12:27) –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 됨으로써 우리 육신을 잃어버리기 때문도 아니고, 그분이 친히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거나 지체들마다 나누어지시기 때문도 아니며, 그리스도의 육신과 마찬가지로 우리 육신도 죄의 썩어질 것에서 해방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본성상 육체와 영혼 모두에서 사람으로서 죄가 없으셨듯이, 그분을 믿고 성령으로 그분을 입은 우리도 의지로 그분 안에서 죄 없이 살 수 있기 때문이다.

68. 누구든지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에는, 아무리 이 세상의 상태에서 활동과 사색에 있어 완전하더라도, 지식과 예언, 그리고 성령의 보증을 부분적으로만 가질 뿐, 온전한 충만함으로는 가지지 못한다. 이는 언젠가 완전한 상태에 이르러, 그 상태에 합당한 자들에게 진리가 그 자체 그대로의 모습으로 대면하여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충만함의 일부만을 가질 뿐만 아니라, 성찬을 통해 그 충만함 전체를 자신 안에 지니게 될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때 모든 사람(즉, 구원받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온전한 나이에 이르러” (엡 4:13) “그분 안에는 모든 지혜와 총명의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골 2,3); “그것이 드러나면” “지금은 부분적으로만 알려진 것들이 없어질 것”(1코린 13,10)이라고 한다.

69.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완전함에 이르는 자들의 상태가 어떠할지 궁금해한다. 그곳에는 (더 나은 쪽으로) 발전과 진전이 있을지, 아니면 변함없이 고정된 상태가 될지? 그때 육체와 영혼은 어떻게 될 것이며, 이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이에 대해 생각해 본 누군가는, 육체적 삶과 관련하여 음식이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음식은 때로는 성장에 기여하고, 때로는 영양을 공급받는 자의 유지를 돕습니다. 바로, – 육체의 성장이 완전한 경지에 이를 때까지는 성장을 위해 영양을 섭취하지만, 육체가 더 이상 커지지 않게 되면 그때부터는 성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유지를 위해 영양을 섭취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혼에 있어서도 양식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번영할 때 미덕과 사색으로 양분을 얻으며, 모든 존재를 초월하여 그리스도의 성취에 이르는 경지에 도달할 때까지 그러하다: 그러나 이에 도달하면, 정해진 수단을 통해 더 이상 발전하거나 성장하지 않게 되며, 썩지 않는 양식으로 직접 양육받게 되는데, 이는 이성을 초월하는 방식이자 어쩌면 그 자체로 가장 높은 성장의 단계일 수도 있다. 이제 그 양식을 받아들이는 것은 오직 자신에게 주어진 신과 같은 완전함을 보존하고, 그 양식에서 오는 헤아릴 수 없는 기쁨을 드러내기 위함일 뿐이며, 이를 통해 항상 동일하게 깃드는 복을 누릴 때, 그녀는 신성한 은총에 참여함으로써 신이 되며, 지성과 감각에 따른 모든 행동을 스스로 멈추고, 자신과 함께 신성화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결합된 육체의 자연스러운 행동마저 멈추게 하여, 영혼과 육체를 통해 오직 한 분의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광의 풍성함으로 그들의 자연스러운 속성을 이겨내시며 빛나시게 된다.

70. 사랑하는 이들 중 어떤 이들은 영원한 거처와 약속된 유산의 차이가 무엇으로 결정되는지, 즉 장소에 의해 결정되는 것인지, 아니면 각자의 영적 완전함의 양과 질에 의해 결정되는 것인지에 대해 끝까지 파헤치려 한다. 어떤 이들은 전자를, 다른 이들은 후자를 옳다고 여긴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누가복음 17, 21)는 것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가 많으니”(요한복음 14, 2)라는 사실을 깨달은 자는 후자의 편에 설 것이다.

71. 하나님이시며 아버지이신 분의 나라는 전능하심으로 모든 신자 안에 계시나, 은혜로 말미암아 육체적·영적 자연스러운 삶에 대한 모든 성향을 온전히 버리고 영적인 삶을 얻은 자들 안에 계시니, 그들은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이라”(갈라디아서 2:20)고 말할 수 있다.

72. 선행을 통해 “땅에 있는 지체들을 죽일”(골 3,5) 수 있게 된 자는, 말씀의 계명을 이행함으로써 그 안에 있는 세상을 이길 것이며, 이미 세상을 버리고 정욕의 세상과 온갖 세상의 주인이신 그리스도 안에 거하기 시작한 자로서, 어떠한 슬픔도 겪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물질적인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 자는, 본성상 변하기 쉬운 것들의 변화와 함께 감정도 변하므로 당연히 슬픔을 겪게 될 것이지만, 그리스도 안에 거하기 시작한 자는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어떤 형태로도 더 이상 물질적인 것의 변화를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말을 너희에게 한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도록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슬픔이 있으리라. 그러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요한복음 16:33)고 하셨습니다. 즉, 나, 곧 말씀 안에서 너희는 세속적인 사물과 정욕의 변덕과 혼란에서 해방되어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나, 세상, 즉 물질적 것에 대한 집착 속에서는 끊임없이 한 것에서 다른 것으로 변하는 탓에 슬픔을 겪게 될 것이다. 슬픔은 두 사람 모두에게 있을 것이니, 선하게 행하는 자는 그와 동반되는 수고 때문에, 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물질적인 것에서의 상실과 결핍 때문에 겪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구원을 주는 것이지만, 다른 한 사람에게는 파멸적이고 해로운 것이다. 이 두 사람 모두에게 주님은 안식이 되시니, 첫 번째 사람에게는 선행을 행한 수고 끝에 관조(觀照)의 상태에서 무정(無情)의 안식을 주시고, 두 번째 사람에게는 회개를 통해 썩어 없어질 것에 대한 습관적인 집착을 제거해 주시기 때문이다.

73. 우리는 육체의 정욕을 죽이는 자일 뿐만 아니라, 영혼의 정욕적인 생각들을 근절하는 자가 되어야 하며, “새벽에 내가 온 땅의 죄인들을 쳐 죽이리니, 주님의 성에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모두 멸하리라”(시 100:8)라고 말씀하신 그 거룩하신 분을 본받아야 한다; 즉, 육체의 정욕은 마음속의 불법을 저지르는 생각들이다.

74. 경건하고 바른 지식으로 덕의 길을 그 반대편으로 치우치지 않고 흠 없이 지키는 자는, 무정심을 위해 자신에게 닥치는 하나님의 방문을 깨달을 것이니, 바로 그 성스러운 선지자가 “내가 노래하며, 흠 없는 길에서 주께서 내게 오실 때를 깨닫나이다” (시 100:2).

75. 경건의 길로 인도받는 자는 계명을 이행하려는 선의만으로 이끌려서는 안 되며, 신성한 진리의 심판이 엄격함을 기억함으로써 더 자주 용기를 내어 선행을 실천해야 한다. 그리하여 사랑으로 신성한 것을 갈망하는 동시에, 두려움으로 악을 멀리해야 한다. 왜 “주님, 나는 주님의 자비와 심판을 노래하리이다” (시편 100:1)라고 말하는가? 이는 사랑으로 기쁨을 누리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과 대화하듯이, 두려움으로 굳건해져 그분께 찬송을 드린다는 것을 증언하는 것이다.

76. 오직 하나뿐인, 시작도 없고 본질 그 자체인 선한 존재, 삼위일체이신 아버지, 아들, 성령, 이 세 무한한 분을 무한히 품고 계신 분이 계시니, 그분의 존재, 즉 그분이 어떤 분이시고, 무엇이시며, 어떤 모습인지에 대해서는 피조된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사색하는 자들의 모든 이해로부터 도망치나, 결코 그 본연의 내적 은밀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며, 모든 지식의 한계를 헤아릴 수 없이 뛰어넘는 지식이시다.

77. 오직 한 분 하나님 아버지, 유일한 아들의 부모이시며, 유일한 성령의 근원이시니;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시며, 나뉘지 않는 삼위일체이시니; 시작이 없는 지성이시며, 본질적으로 시작이 없는 말씀과 영원히 존재하는 생명, 즉 성령의 유일한 근원이시니.

78. 오직 한 분의 하나님, 시작이 없고 본질적으로 내재하는 단일체이시며, 부분도 없고 분리될 수도 없으시니, 단일체이시며 삼위일체이시니, 둘이 아니시며 하나이시다.

79. 그리스도 하나님께서 태어나시며, 이성을 지닌 영혼을 가진 육신을 취하심으로써 사람이 되셨으니, 그분은 존재의 근원이신 분으로부터 모든 피조물에게 존재를 베푸신 분이시며, 동정녀가 초자연적으로 그분을 낳았으나 동정녀의 표징을 조금도 잃지 아니하셨다. 그분께서 본성을 바꾸지 않고 능력을 변질시키지 않은 채 사람이 되신 것처럼, 그분을 낳으신 분을 어머니로 삼으시면서도 동정녀로 보존하시며, 기적 속에서 또 다른 기적을 드러내시며, 각각을 통해 서로를 감추어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분 스스로, 그분의 본성에 따라, ‘ ’ 언제나 신비롭게 감추어져 계시며, 때로 그분의 본래적인 은밀함에서 벗어나시더라도, 그 은밀함을 드러내심으로써 오히려 그것을 더욱 심오하게 만드십니다. 그리하여(사람으로 태어나실 때에도) 그분은 동정녀를 아이를 낳는 어머니로 만드셨는데, 그 탄생 자체가 동정성의 풀 수 없는 결속을 이루게 하셨다.

80. 우리는 믿음으로 신성한 성육신의 신비를 바라보며, 우리를 위해 이를 기꺼이 이루신 분을 호기심 없이 오직 찬양하기만 하자. 왜냐하면 누가 자신의 이성의 탐구력을 의지하여, 하나님 말씀이 어떻게 잉태되시는지 말할 수 있겠는가? 씨앗 없이 어떻게 그분을 위한 육신이 형성되는가? 썩음 없이 어떻게 태어나시는가? 어떻게 그 어머니는 낳은 후에도 동정녀로 남아 계셨는가? 어떻게 모든 완전함을 초월하신 분이 나이를 먹어가시는가(눅 2,52)? 어떻게 순결하신 분이 세례를 받으셨는가? 어떻게 굶주리신 분이 스스로 배불리셨는가? 어떻게 수고하시는 그분께서 힘을 주셨는가? 어떻게 고통받으시는 그분께서 치유를 베푸셨는가? 어떻게 죽어 가시는 그분께서 생명을 주셨는가? 그리고 – 첫 번째 것을 마지막에 말하자면 – 어떻게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는가, 그리고 – 더욱 신비로운 것은, 어떻게 말씀이 위격에 있어 본질적으로 육신 안에 계시면서, 본성상 위격적으로 온전히 아버지 안에 머무르시는가? 어떻게 본질상 하나님이시면서도, 어떤 본질도, 즉 하나님이신 그 신성함도, 사람이 되신 그 인간성도 결코 저버리지 않으시고, 자연스럽게 사람이 되실 수 있었는가? – 이 모든 신비는 말과 이성을 초월하는 실재들을 고백하는 하나의 믿음 속에 담겨 있습니다(히브리서 11:1).

81. 아담은 계명을 어김으로써, 우리 본성의 탄생이 감각적 쾌락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이 쾌락을 본성에서 몰아내시며, 정자로부터 잉태되는 것을 당신께 합당하지 않다고 여기셨다. 계명을 어긴 아내는 우리 본성의 탄생이 고통으로 시작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것들을 본성에서 분리하시고, 태어나신 후 출산한 자가 쇠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자발적인 쾌락과 그로 인한 비자발적인 고통을 본성에서 제거하시고, 창조주가 아니신 것을 소멸시키는 자가 되시며, 또한 영 안에서 신비롭게 시작되어야 할 또 다른 삶이—어쩌면 고통과 질병으로 시작되겠지만, 온갖 신성한 기쁨과 끝없는 환희로 끝나는 또 다른 삶이 영 안에서 신비롭게 시작되어야 함을 가르치기 위함이다. 이를 위해 사람을 창조하신 분이 사람으로 되어 사람으로서 태어나시어, 사람을 구원하시고, 정욕을 정욕으로 치유하시며, 우리 정욕을 죽이시는 분으로 나타나시며, 더 나아가 육신의 결핍을 통해 당신의 본성을 인간애로 새롭게 하여 우리의 영적 선한 성향을 갱신해 주시는 것이다.

82. 덕을 위해 고통스러운 수고 속에서 힘써 노력하는 것은 유익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럴 때 덕은 모든 것을 기꺼이 견디는 이들에게 보상으로 영혼의 무정함을 가져다주며, 이를 통해 영혼은 사랑으로 하나님과 연합하여 육체와 세상에 대한 애착을 떨쳐 버리기 때문이다. 육체의 고갈은 영혼의 강화이다.

83. 감각적 쾌락의 유혹에 사로잡혀, 우리는 참된 삶보다 죽음을 택했다. 그러니 이 쾌락을 죽이는 육체의 수고를 감사히 감당하자. 그래야 그 쾌락이 죽음으로 소멸될 때, 그 쾌락으로 인해 초래된 죽음도 함께 사라지고, 한때 쾌락을 위해 팔아넘겼으나 이제 육체의 적은 수고로 다시 사들인, 우리에게 돌아오는 생명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84. 육신이 건강하고 풍요로울 때 죄의 힘이 보통 커진다면, 육신이 궁핍할 때 미덕의 힘이 커져야 함은 분명하다. 그러니 우리는 육체의 고난을 용감하게 견뎌내자. 이 고난은 영혼의 더러움을 씻어주는 정화자이자, 장차 올 영광의 원천이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롬 8:18).

85. 의사가 몸을 치료할 때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약을 처방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도 영혼의 병을 치료하실 때 모든 사람에게 통용되는 단 하나의 치료법을 아시는 것이 아니라, 각 영혼에게 필요한 것을 주심으로 치유를 이루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치유받고 있는 동안, 비록 우리에게 고통이 따르더라도 그분께 감사드리자. 그 끝은 복되니까.

86. 지친 육신의 반란만큼 영혼의 상태를 여실히 드러내는 것은 없다. 만일 영혼이 그 유혹에 굴복한다면, 육신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요, 만일 그러한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버틴다면, 육신보다 덕을 더 존중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니, 그로 인해 우리 본성으로 고통받기를 기꺼이 하신 하나님을 자기 안에 동거자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며, 옛날 제자들에게 “용기를 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복음 16, 33) 외치시는 분을 모시게 될 것이다.

87. 만일 모든 성인들이 교화를 위한 징계를 겪었다면, 우리도 그들과 함께 교화를 위한 징계를 받을 때 감사해야 하며, 그리하여 그들의 영광에 동참할 자격을 얻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며, 받아들이시는 모든 아들을 채찍질하시느니라”(잠언 3:12; 히브리서 12:6).

88. 아담은 그에게 달콤함을 제안한 갈비뼈(갈비뼈에서 나온 아내)를 받아들임으로써 인류를 낙원에서 쫓아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갈비뼈에 창을 찔리시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시고, 강도를 낙원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육신의 고통스러운 수고를 사랑하고 그 달콤함을 미워합시다. 왜냐하면 전자는 우리를 낙원으로 인도하여 그 복을 누리게 하지만, 후자는 우리를 그곳에서 쫓아내고 그 복을 박탈하기 때문입니다.

89.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육신의 고통을 겪으셨다면, 누가 하나님을 고통의 동역자로 모시고 고통받을 때 기뻐하지 않겠는가? 그분과 함께 고통받는 것은 왕국을 얻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으면 그분과 함께 영광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분은 참되시다(롬 8:17).

90. 우리 본성에 원조 부모가 섞어 놓은 정욕 때문에 병들어야만 한다면, 우리 안의 정욕의 독을 무디게 하고, 그로 인한 영원한 고통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는 일시적인 고통을 용감하게 견뎌내자.

91. 모든 선의 궁극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그 안에서 걷는 모든 이를 인도하고, 이끌어, 모든 선의 근원이시며 최고의 선이신 하나님께 가까이 데려가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신실하며, 결코 떠나지 않고, 변함없이 지속됩니다. 믿음은 진리를 확고히 세우는 기초로서, 그 뒤를 따르는 소망과 사랑의 토대가 된다. 소망은 그 양쪽, 즉 오른쪽과 왼쪽에 서 있는 사랑과 믿음의 요새로서, 그 자체로 이 둘에게 (믿음의 대상인) 신실함과 (사랑의 대상인) 사랑스러움을 보여주고, 이를 이루는 길을 스스로 가르쳐 준다. 사랑은 그 모든 것의 완성이다. 마치 모든 마지막 소망을 포용하고, 그 안에서 안식을 주는 것처럼, ‘있는 그대로’에 대한 믿음과 ‘될 것’에 대한 희망 대신, 이를 현재로 소유하고, 본래 속한 것으로 누리는 것을 스스로(그리고 자기 안에서) 이끌어낸다.

92. 세 가지 악이 있는데, 이는 가장 크고 악의 근원이 되며, 간단히 말해 모든 악의 근원이다. 바로 무지, 자만, 그리고 증오로, 이들은 서로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으며 상호간에 서로를 지탱해 준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에서 자만이 비롯되고, 이로부터 동질적인 존재에 대한 증오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탄이 우리 안에서 이 악들을 일으키고 부추기며, 우리에게 이성, 욕망, 에너지와 같은 자신의 힘을 남용하도록 가르친다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93. 무지 대신 이성을 통해, 갈망으로 하나님을 탐구하며 그분을 알아감으로써 하나님께로 올라가야 한다. 즉, 자아애의 정욕에서 이성을 정화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향한 모든 갈망으로, — 에너지로, 이를 증오로부터 해방시켜, 유일한 하나님을 닿고자 힘쓰며, 우리 안에 신성하고 복된 사랑을 창조해야 한다. 이 사랑은 하나님과 연합하게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를 하나님으로 드러내는 사랑, 즉 그 사랑(즉,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하나님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되며, 이를 위해 존재하는 사랑이다.

94. 우리가 자만심을 버릴 때—이는 내가 말했듯이 모든 악의 시작이자 어머니이다—그와 함께 그로부터 비롯된 모든 것도 함께 버려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라지면, 그 어떤 형태의 악이나 그 흔적도 더 이상 우리 안에 버틸 수 없기 때문이다.

95. 우리 스스로와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해야 하는데, 이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를 위해 기꺼이 고난을 당하시며 먼저 본보기를 보여주신 대로이다.

96. 하느님에 대한 완전한 사랑의 실천과 증거는 이웃에 대한 진실하고 선의 어린 마음가짐이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느냐?”라고 신성한 요한이 말했기 때문이다(1요한 4,20).

97. 보라, 이 문으로 들어가는 자는 지성소에 들어서며, 거룩하고 위엄 있는 삼위일체의 접근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바라볼 자격이 있는 자로 인정받게 된다.

98. 정욕으로 하나님께 반항하며, 죄의 조공을 기꺼이 악한 폭군이자 영혼의 파멸자인 마귀에게 바치는 우리로서는, 먼저 이 교활한 자에 맞서 단호한 전쟁을 벌이지 않는 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비록 ‘신실한 자’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 하더라도, 불의한 정욕에 자발적으로 노예가 되어 있는 한, 우리는 여전히 하느님의 원수이자 대적자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영혼이 그 성향상 타락하여 창조주를 거역하고 그분의 왕권 아래 있기를 원치 않을 때, 세속적인 세상으로부터는 아무런 유익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사이, 영혼은 자신을 죄로 몰아넣는 셀 수 없이 많은 악한 주인들에게 팔아넘기며, 구원의 길 대신 파멸로 이끄는 길을 더 선호하도록 아첨하며 유혹하고 있다.

99.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신성한 본성에 참여하게(베드로후서 1:4) 하고, 그분의 영원한 존재에 동참하며, 은혜로운 신성화를 통해 그분과 닮은 자들이 되게(요한일서 3:2) 하려고 우리를 창조하셨으니, 바로 그 신성화를 위해 모든 존재하는 것이 마련되고 유지되며,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도 존재로 이끌려 생겨나고 창조되는 것이다.

100.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 불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자 한다면, 유다처럼 말씀을 정욕에 내어주지 않거나, 베드로처럼 그분을 부인하지 않는 고행을 실천해야 한다. 반면 말씀을 부인한다는 것은 어떤 두려움 때문에 선을 행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며, 배반은 행위로 인한 고의적인 죄와 죄를 짓고자 하는 자발적인 충동이다.

101. 자만심과 사람들의 육신적인 교만은 그들을 서로 갈라놓고, 율법을 왜곡하여 해석함으로써 (본성이 하나인) 단일한 본성을 여러 조각으로 쪼개 버렸으며, 오늘날 모든 이를 사로잡고 있는 무자비함을 조장함으로써, 그러한 심리로 본성 그 자체를 스스로를 대적하게 만들었다(즉, 사람들을 서로 대적하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건전한 이성과 고귀한 지혜로 자연의 이러한 기질을 없애는 데 성공한 사람은, 다른 누구보다 먼저 자기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며, 자신의 마음을 본성에 따라 바르게 다잡고,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스스로 보여줌으로써, 그리고 하나님께서 태초에 우리 본성을 그분과 닮게, 그분의 본래 선하심을 그 안에서 맑고 환하게 드러내도록 창조하셨을 때, 모든 면에서 그분과 동등하고, 거칠지 않으며, 평화롭고, 동요하지 않으며, 하나님과 그리고 자기 자신과 사랑으로 밀접하게 연결된, – 바로 그러한 본성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갈망하며(즉, 갈망하는 선으로서) 껴안고, 서로를 공감하며(같은 본성을 지닌 존재로서) 껴안게 된다.

102. 인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본성(즉, 모든 사람)을 당신께로 모으고, 악으로 타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 사람이 되셨으며; 그로 인해 인간 본성은 스스로 분열되고, 스스로 자신에게 반기를 들며, 타인에 대한 태도의 변덕스러움(변화무쌍함)으로 인해 아무런 제지 없이 그 길을 걷게 된다.

103. 우리는 이 세상의 쾌락과 그로 인한 슬픔에 대한 두려움에서, 할 수 있는 한 멀리 떨어져, 모든 정욕적인 생각과 악마의 온갖 간계를 확실히 떨쳐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쾌락을 위해 정욕을 사랑하고, 슬픔을 피하기 위해 덕을 외면하기 때문이다.

104. 죄의 유혹과 달콤함은 대개 그것이 행해지는 방식이 실행됨과 동시에 사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경험 자체를 통해 모든 죄의 달콤함 뒤에는 항상 슬픔과 불만이 뒤따른다는 사실을 깨닫고, 달콤함에는 온전한 열망을 품고, 불만과 슬픔에는 온전한 혐오감을 갖게 되어, 전자를 온 힘을 다해 추구하며, 후자는 온갖 방법으로 막으려 애쓰게 되는데, – 비록 전혀 불가능하다고 여기며, 이런 방식으로 둘을 서로 분리하고 오직 쾌락만으로 자신의 사악한 자만심을 달래며, 그 어떤 비통함도 전혀 참지 않고, 열정에 눈이 멀어 흔히 그러하듯, 죄악의 달콤함이 결코 불만의 쓴맛 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일까. 왜냐하면 죄의 달콤함에는 자연스럽게 슬픔의 쓰라림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것을 맛보는 자들이 열정적인 달콤함에 사로잡혀 이 사실을 잊어버리기는 하지만, 이미 소유한 것은 언제나 주의를 너무나 사로잡아, 그 뒤에 닥칠 일을 전혀 감지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만심에 사로잡혀 쾌락을 쫓으면서, 같은 이유로 온갖 괴로움을 온갖 수단을 동원해 피하려 애쓰는 우리는, 우리 내면에 무수히 많은 타락한 정욕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105. 누구도 모든 육체적 욕망에서 해방되어, 진정으로 사랑스럽고, 가장 소중하며, 지극히 높으신 선이신 하느님께 마음으로 결합하거나, 더 나아가 그분께 깊이 매달릴 때, 그러한 달콤함과 쓰라림의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

106. 아무도 영혼을 완전히 정화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순수하게 섬길 수 없는 것처럼, 피조물도 육신을 자기 만족적으로 아끼지 않고서는 섬길 수 없다. 이 타락한 육체적 봉사를 행함으로써, 그리고 그 자체로 쾌락을 사랑하는 존재인 인간은 끊임없이 달콤함과 쓰라림을 힘과 행위로 지니고 있었으며, 선과 악에 대한 인식이 동시에 녹아들어 있고 실제로 감각으로 체험되는 불순종의 나무 열매를 항상 맛보았다.

107. 이성이 지배하지 않는 곳에는 대개 감각적 권세가 내재하는데, 그 권세에는 죄의 힘이 어쩔 수 없이 얽혀 있어, 쾌락을 통해 영혼을 본성상 육체와 친화적인 욕망으로 이끌어 간다: 그 결과 영혼은 마치 자신에게 자연스러운 일인 양, 육체에 대한 열정적이고 쾌락을 추구하는 보살핌을 스스로 받아들이게 되며, 이는 인간을 진정한 자연스러운 삶에서 멀어지게 하고, 스스로 독립적인 존재를 갖지 못한 악의 주체가 되도록 유혹한다.

108. 이성적인 영혼에게 있어 악이란, 육체와 세상에 대한 열정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자신의 본래적 복에 대한 망각이다. 이 태도는 이성이 지도자가 되어 영적 질서에 대한 자신의 통찰에 따라 이를 소멸시키며, 세상과 육체의 기원과 본질을 올바르게 해석하고, 영혼을 그 본성에 맞는 영적 영역으로 이끌어 가는데, 그곳에는 죄의 법칙이 결코 침범할 수 없으며, 죄를 이성으로(혹은 이성적인 영적 영역으로) 인도하는 다리 역할을 할 수 있는 감각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이 감각이 영혼과 맺었던 이전의 관계가 이미 파괴되었고, 모든 감각적 광경들이 지나가 버렸기 때문이며, 이로 인해 이성은 그것들을 넘어선 후 더 이상 전혀 느끼지 못하게 되어, 기질적으로나 본성적으로나 그것들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109. 이성이 정욕을 자신의 지배하에 두어 감각을 미덕의 도구로 삼는 것처럼, 정욕 또한 이성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을 때 감각을 죄로 이끄는 방향으로 이끌어 간다. 그리고 영혼이 마땅히 지켜야 할 선한 행동 방식을 어떻게 유지해야 하는지, 즉 이전에 죄를 범할 때 이용했던 것과 동일한 수단을 미덕을 낳고 확립하는 데 활용해야 하는지를 냉철하게 살펴보고 논의해야 한다.

110. 거룩한 복음은 육신의 삶을 버리고 영적인 삶을 받아들이도록 이끈다. 나는 인간으로서, 즉 이 세상에서 육신으로 사는 삶(고린도전서 15:31)에 있어서는 항상 죽어가지만, 하나님의 사도(사도행전)에 따라 오직 성령으로 하나님만을 위해 사는 자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 자들이다(갈라디아서 2:20).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이 세상에서 큰 슬픔과 고통, 박해를 겪으면서도 기쁨으로 박해와 온갖 유혹을 견디는 이들도 육신으로는 죽은 자로 여겨집니다.

111. 모든 정욕은 감각적인 대상과 감정이 결합되고, 자연적인 활동력—즉, 자극이나 욕망, 또는 이성—이 올바른 자연적 작용 방식에서 벗어나면서 생겨난다. 이제 마음이 이 세 가지—즉 감각적 대상, 감정, 그리고 이에 관여하는 자연적 활동력—가 서로 결합하는 목적을 파악하고, 자신의 추론을 통해 이들 각각을 본성에 따라 마땅한 위치로 되돌려 놓고, 각각을 그 자체로 관조할 수 있다면, 즉 감각적 대상은 감각과 무관하게, 감각은 감각적 대상과 무관하게, 그리고 여기에 관여하는 활동적 힘, 예를 들어 욕망이나 그 밖의 어떤 것이든, 감각적 대상과 감각에 대한 정서가 없는 상태로, 정서가 그 사색을 이끌게 하지 않고 — 만약, 내가 말하건대, 이성이 이를 해낼 수 있다면; 그때 이성은 마치 옛날 이스라엘이 녹여 만든 송아지상(출애굽기 32:20)처럼, 그 어떤 형태의 정욕이든 간에, 그 정욕의 집합체를 분쇄하고 흩어뜨려 지식의 물 위에 흩어 버릴 것이며, 정욕을 일으키는 사물들을 본성에 맞는 본래의 질서로 되돌림으로써 정욕에 대한 가장 미묘한 생각조차 완전히 소멸시킬 것이다.

112. 육신의 정욕으로 인한 수많은 죄로 얼룩진 삶은 “더럽혀진 옷”이다(유다서 23절). 왜냐하면 삶의 방식은 마치 어떤 옷과 같아서, 모든 사람은 보통 자신이 의로운지 불의한지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깨끗한 옷, 즉 덕스러운 삶을 가지고 있는 반면, 다른 사람의 삶은 온통 악한 행실로 더러워져 있다. – 혹은 더 정확히 말해 “육신으로 인해 더럽혀진 옷”이란, 육신에서 비롯된 나쁜 충동과 행동에 대한 기억으로 인해 양심 앞에서(혹은 양심에 비추어) 영혼이 어떤 모습인지 보여주는 내면의 마음가짐과 태도를 뜻한다. 영혼은 자신에게 끊임없이 걸친 그러한 옷을 보며, 그(영혼)는 정욕의 악취에 휩싸이게 된다. 왜냐하면 영으로부터 덕목들이 서로 합리적으로 결합됨으로써 영혼 속에 썩지 않는 옷이 만들어지는데, – 이를 입음으로써 영혼은 선하고 영광스러운 존재가 되는 반면: 마찬가지로 육체로부터는 서로 다른 정욕들이 서로 친화성을 바탕으로 얽혀, 그녀를 위해 불결하고 더럽혀진 일종의 옷이 만들어지는데, 이는 영혼이 어떤 존재인지를 드러내며, 신성한 형상과 유사성 대신 다른 형상과 유사성을 씌워주는 것이다.

113. 인간 본성에 대한 신성화에 대한 확고하고 확실한 희망의 기초는 하나님의 성육신에 있으며, 이는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이 되신 만큼 사람을 신으로 만드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 없이 사람이 되신 분은, 그 본성을 신성으로 변형시키지 않고도, 그분을 인간을 위해 스스로 낮추신 만큼 그 본성을 자신께로 높이 들어 올려 신성하게 하실 수 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 이를 신비롭게 가르치며, 위대한 사도는 “다가올 세대에 하나님의 선하심의 지극한 풍성함이 우리에게 나타날 것”이라고 말합니다(엡 2,7).

114. 쾌락의 불결함이 마치 녹처럼 덮인 영혼은 고통스러운 수고를 통해 정화되며, 물질에 대한 모든 경향을 완전히 근절하게 되는데, 이는 영혼이 실천을 통해 그것을 탐하는 것의 해로움을 깨닫게 될 때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심판에 따라 마귀가 고통스러운 슬픔으로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을 허용하신다.

115. 기쁨과 슬픔,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욕망과 두려움은 원래 인간의 본성과 함께 창조된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것들은 이 본성을 규정하는 특성 중 하나에 속했을 것이다; 그러나 위대한 그레고리우스 니스쿠스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것들은 우리 본성에 고유한 완전함을 상실한 후에 도입되어, 우리 본성의 가장 이성적이지 못한 부분에 접목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 계명을 어긴 직후, 우리는 하나님의 복된 형상 대신 말 없는 짐승과 닮은 모습이 분명하고 명백하게 드러났다. 이는 이성의 존엄성이 흐려짐에 따라, 인간 본성이 바로 그 이성을 상실한 것으로 인해 벌을 의롭게 감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이를 통해 이성의 우월성을 깨닫게 되도록 지극히 지혜롭게 마련하셨다.

116. 선하고 구원받는 삶을 열망하는 이들의 손에 있는 정욕도, 육신적인 것에서 지혜롭게 분리하여 하늘의 것을 얻기 위해 사용할 때 선한 것이 된다. 즉, 갈망을 신성한 선을 향한 영적 열망의 격렬한 움직임으로 만들 때; 쾌락 추구 – 신성한 은사에 대한 마음의 경탄이 주는 생기를 주는 기쁨으로; 두려움 – 죄로 인해 미래의 고통을 겪지 않도록 경계하는 세심한 주의로; 슬픔 – 현재의 악을 바로잡기 위한 회개로; 간단히 말해, 이러한 정욕들을 현재나 예상되는 악을 소멸하거나 예방하는 데, 또한 미덕과 지식을 얻고 보존하는 데 활용할 때, 마치 현명한 의사들이 독으로 인해 이미 신체에 발생한 손상을 소멸하거나 예방하거나, 독을 가진 작은 짐승인 에히드나가 신체에 나타날 것을 미리 막는 것과 같다.

117. 구약의 율법은 적극적인 지혜로 우리의 본성을 온갖 더러움으로부터 정화하며, 신약의 율법은 관조적인 은밀한 인도함으로 마음을 육체적인 것에서 그와 친화적인 정신적 사물의 광경으로 정신적으로 끌어올린다.

118. 성경은 막 입문한 자들과 아직 신성한 덕의 전당 입구에 머물러 있는 자들을 “두려워하는 자들”(두려움에 이끌리는 자들)이라 부른다; 반면, 미덕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데 있어 적절한 숙달을 이룬 자들은 보통 “성취하는 자들”이라 부르며, 영적인 통찰력으로 미덕에 대한 참된 지식의 정점에 오른 자들을 “완전한 자들”이라 부른다. 따라서 옛날의 정욕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두려움의 작용에 따라 자신의 모든 성향을 신성한 계명에 맡긴 사람은, 비록 아직 미덕에 대한 숙련을 쌓지 못했고 “완전한 자들 가운데서 말해지는” 지혜에 참여하지는 못했더라도, 초보자에게 마땅한 어떤 혜택도 박탈당하지 않는다 (고린도전서 2, 6). 마찬가지로, 성장하고 있는 자도 자신의 단계에 속한 어떤 혜택도 박탈당하지 않는데, 비록 아직 완전한 자들에게 고유한 신성한 사물에 대한 그와 같은 극한의 지식을 얻지는 못했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이미 관상적 신학을 신비롭게 깨달아 모든 물질적 환상에서 마음을 정화한 완전한 자들은, 신성한 아름다움의 형상을 아무런 결함 없이 온전히 닮은 신성한 사랑을 자신 안에 깊이 새긴 자들이다.

119. 두려움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순수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불순한 것이다. 죄를 지은 후 고통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생겨나는 두려움은 불순한 것이다. 이는 자신이 지은 죄를 자각하기 때문이며, 회개를 통해 죄가 사해지면 함께 사라지기 때문에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반면, 죄로 인한 이러한 두려운 불안감 없이도 항상 영혼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그 두려움은 깨끗하며,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는 마치 피조물들이 바치는 헌사처럼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결합되어 있으며, 모든 왕국과 권능을 초월하신 그분의 위대함 앞에서 모든 이에게 자연스러운 경외심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120. 성령께서는 모든 사람 안에 일반적으로 계시며, 모든 이를 포용하시고 모든 이를 돌보시며, 모든 사람 안에서 (선한) 본성의 씨앗을 움직이게 하신다. 그러나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계명을 어기는 죄를 지적하시고 그리스도에 관해 예언된 약속을 밝히시는 분으로서 분명히 계신다. 반면,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모든 이들에게는 앞서 말한 것 외에도, 그분은 아들을 주시는 분, 즉 양자 삼으시는 분으로서도 계십니다. 또한 지혜를 주시는 분으로서, 앞서 언급된 사람들 중 그 누구에게도 그분은 단순히 또는 무조건적으로 계시지 않으며, 오직 그분의 뜻을 깨닫고 신과 같은 삶을 통해 그분의 신성한 내주하심을 받을 자격을 갖춘 자들에게만 계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는 자는, 비록 신실할지라도, 악한 생각의 온상인 어리석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죄에 굴복한(즉, 죄에 유죄인) 육신을 지니고 있어, 언제나 불결하고 정욕적인 욕망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121.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고 그들의 신격화를 갈망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허세와 허영을 마치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처럼 저주로 말리시며(마태복음 21:19), 그들이 단지 의로운 척하는 것보다 진정한 의로움을 우선시하고, 위선적인 ‘선량한 척하는’ 외투를 벗어던지고, 신성한 말씀이 원하시는 대로 진정으로 덕을 실천하며, 경건하게 나머지 삶을 살아가게 하시기 위함이다. 즉, 사람들 앞에서 겉으로만 선량한 척하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서 마음의 선한 태도를 지키는 데 더 힘쓰게 하시기 위함이다.

122. 마귀는 하나님의 원수이자 복수자이다. 적이란, 그분을 향한 증오에서 비롯되어 우리 인간에게 위선적이면서도 해로운 사랑을 가장하고, 온갖 정욕을 부추기며, 그로부터 기대되는 달콤함으로 유혹하여 우리의 의지를 영원한 선보다 일시적인 것을 선호하게 만들고, 이를 통해 영혼의 모든 태도를 빼앗아, 우리를 신성한 사랑으로부터 완전히 멀어지게 하며, 우리를 창조하신 분의 적들로 만들어 버리는 자이다. 복수자, – 우리에게 품은 모든 증오를 쏟아내며, 죄로 인해 마치 그에게 복종하게 된 우리를 처벌하기 위해 형벌을 요구할 때이다. 왜냐하면 악마에게 있어, 사람이 형벌받는 것을 보는 것만큼 기쁜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이 그에게 허용될 때면, 그는 폭풍우처럼 하나님의 허락으로 권세를 얻은 자들에게 들이닥쳐, (자발적인 정욕에 대한 대가로) 그들에게 자발적이지 않은 고통들을 잇달아 꾸며내며, 하나님의 명령을 이행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자신의 격렬한 증오를 채우려 한다; 그리하여 영혼이 슬픔과 고통의 무게 아래 지쳐 신의 도움에 대한 모든 희망을 버리게 하고, 교훈이 되어야 할 비참한 우연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대한 믿음을 잃게 하는 원인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123.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악마들조차 어떤 일에서도 마귀를 섬길 수 없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범한 죄에 대해 마귀가 그 종들을 통해 다양한 형벌을 내리도록, 인간을 사랑하시고 선하신 섭리로 어떻게 허락하셔야 할지 아시기 때문이다. 성경은 욥에 관한 기록에서 이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데, 거기에는 마귀가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욥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24.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악의 씨앗, 즉 신성한 사랑을 마음에서 앗아가는 쾌락에 대한 욕망을 완전히 뿌리 뽑고자 하시며, 사탄이 우리에게 슬픔과 고통을 안겨주도록 허락하십니다. 이는 슬픔을 통해 영혼을 이전에 품었던 정욕의 독에서 정화하고, 오직 감각적 쾌락만을 좇는 현재의 정욕에 대한 증오와 완전한 혐오를 심어주기 위함이며, – 이는 과거에 그러한 욕망을 충족시켰을 때 고통스러운 결과 외에는 아무런 유익도 가져다주지 않았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며, 또한 이러한 방식으로 적의 가장 고통스럽고 인간을 증오하는 힘을, 자발적으로 미덕을 거스른 자들이 미덕으로 돌아오게 하는 직접적인 원인으로 삼기 위함이다.

125. 하나님의 은혜가 짓밟힌 것으로 인해 고통받는 자가, 자신을 치유하시는 신성한 섭리의 목적을 깨닫게 된다면, 일어난 비통한 일도 감사함으로 기뻐 받아들이며, 그로 인해 벌을 받는 죄를 기꺼이 고치려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치유하는 의도에 무감각한 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은혜를 의롭게 상실하고, 정욕의 혼란에 빠지게 되며, 내면적으로 가졌던 성향과 열망을 실천에 옮기는 일을 방치당하게 된다.

126. 하나님의 허락하심으로, 자신을 바로잡기 위해 닥친 불가피한 유혹을 통해 닥친 슬픈 재앙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기는 자만심 때문에 회개를 미루는 자는; 그 사람은 마치 신성한 정의의 심판에 저항하고, 신의 명령에 따라 바빌론 왕의 멍에 아래에 있는 것을 제멋대로 거부하는 자처럼, 포로가 되어 쇠사슬과 족쇄, 굶주림, 죽음, 칼날을 겪으며, 마침내 자신의 땅에서 완전히 쫓겨나게 된다. 이 모든 것과 그 밖의 많은 유사한 일들을 겪는 이는, 자신의 땅에서 덕과 지식의 정신에 대한 선한 마음가짐과 습관을 잃어버린 자로서, 자신의 불기꺼움과 교만,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헛된 생각으로 인해 죄를 씻기 위해, 신성한 사도의 말씀대로, “고난과 궁핍과 곤경” (고린도후서 12:10; 6:4) 속에 기꺼이 머무르려 하는 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위대한 사도는 고통스러운 육체적 상황을 통한 외적인 굴욕이 영혼 속에 신성한 보화를 보존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꺼이 그 고난을 견뎌내셨으니, 이는 자신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자신에게서 믿음과 덕행의 본을 보여야 할 사람들을 위해서도 그러하셨습니다. 그들이 비록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어떤 고통을 겪게 되더라도, 마치 그 벌을 받은 자처럼, 고린도 사람(고린도전서 5:5)처럼, 자신들을 위로하고 그의 인내를 본받을 수 있도록 무고하게 고통받는 이를 눈앞에 두게 하려 하셨습니다.

127. 신성한 사도는 성령의 다양한 활동을 서로 다른 은사라고 부르며, 그것들은 모두 동일한 성령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라고 한다(고린도전서 12:4). 이러한 성령의 현현은 각 신자 안에 있는 믿음의 정도에 따라, 주어진 은사를 누리는 데에 맞춰 주어집니다. 즉, 각 신자는 자신의 믿음과 내면의 태도에 따라, 이러저러한 계명을 이행하는 데 충분한 마음가짐과 힘을 주는 성령의 역사를 그에 상응하는 분량만큼 받아들입니다.

128. 어떤 이는 지혜의 말씀을, 다른 이는 분별의 말씀을, 또 다른 이는 믿음을, 그리고 또 다른 이는 위대한 사도가 열거한 은사들 중 다른 어떤 것을 받는 것처럼(고린도전서 12:8–12), 어떤 이는 믿음의 정도에 따라 성령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완전하고 직접적이며 어떤 물질적 요소도 포함하지 않는 사랑의 은사를 받으며; 또 다른 이는 같은 성령을 통해 이웃에 대한 완전한 사랑의 은사를 받으며, 또 다른 이는 내가 말한 대로 같은 성령에 따라 다른 어떤 은사를 받는다. 이는 각자가 자신 안에서 작용하는 고유한 은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사도는 계명을 이행하는 데 있어 모든 효과적이고 강력한 성향을 성령의 은사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129. 믿음은 내면의 모든 것을 선한 마음가짐으로 품어 주는 힘이며, 혹은 믿는 자와 그가 믿는 하나님 사이의 초자연적이고 직접적이며 완전한 일치를 가져다주는 그 선한 마음가짐 그 자체이다.

130. 사람은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두 법, 즉 육체의 법과 영의 법의 작용을 받는데, 이 중 육체의 법은 감각적인 작용을 하고, 영의 법은 사고적 또는 영적인 작용을 한다; 이때 육체의 법은 감각적으로 작용하여 대개 물질과 연결되지만, 영의 법은 사고적 또는 영적으로 작용하여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일치를 일으키므로, “마음속으로 생각하지 않는” (눅 11:23) — 즉, 믿음을 통해 이루어진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연합을 끊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무정함으로, 더 나아가 믿음을 통한 하나님과의 연합으로 인해 신이 된 자로서,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가라’ 하면 옮겨갈 것” (마태복음 17, 20): 이 말씀은 마치 손가락으로 가리키듯, 육신의 계명과 계략이 실로 무겁고 움직이기 힘들며, 우리의 자연적인 힘으로는 전혀 움직일 수도 흔들릴 수도 없음을 보여준다.

131. 인간의 본성 속에는 감각을 통해 이성적이지 않은 생명 사랑, 즉 동물적 본능이 깊이 뿌리내려 있어, 많은 이들이 인간을 오직 현세적 삶을 향락할 능력만을 지닌 육체로만 여긴다.

132. 주님께서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마태복음 6:33), 즉 무엇보다 먼저 진리를 깨닫고, 그 다음에 경건한 품성을 기르기 위해 적극적으로 실천하라는 말씀을 통해, 신자들은 오직 하나님의 지식과 그것을 행실로 빛내는 덕을 추구해야 함을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133. 신자들이 하나님을 알고 덕을 기르기 위해 추구해야 할 것이 많으니, 그것들은 다음과 같다. 즉, 정욕으로부터의 해방, 유혹에 대한 인내, 덕과 그에 상응하는 행위의 종류에 대한 이해, 육체에 대한 영혼의 집착을 몰아내는 것, 감각적인 것에 대한 정서의 소외, 모든 피조물로부터의 완전한 정신적 분리 등 — 총체적으로 말하자면 — 죄와 무지에서 벗어나 지식과 덕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기도로 구하는 모든 것을 믿는 자들은 받을 것이라” (마태복음 21:22)라고 말씀하셨으니, 이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덕을 증진시키는 모든 것을, 게다가 경건한 자들이 이성と 믿음으로 이를 추구하고 구해야 함을 나타내신 것이다. 이는 우리 영혼을 구원하는 모든 것이며, 주님께서는 이를 구하는 자들에게 언제나 베풀어 주시기 때문이다.

134. 사도는 “생명의 향기”(고린도후서 2:16)와 같았으니, 자신의 모범을 통해 신자들이 덕행의 향기를 얻기 위해 적극적으로 힘쓰도록 이끄는 자였으며, 또는 설교자로서 은혜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을 육신의 삶에서 영적인 삶으로 인도하는 자였습니다. “죽음의 냄새로 죽음에 이르는존재는, 무지의 죽음에서 불신의 죽음으로 추락한 자들에게, 그들에게 기다리고 있는 심판을 실감하게 해 주었습니다.

135. 영혼에는 세 가지 힘이 있으니, 이성적인 힘, 충동적인(활기찬) 힘, 그리고 정욕적인 힘이다. 이성적인 힘으로 우리는 선이 무엇인지 알고자 하며, 정욕적인 힘으로 우리는 알게 된 선을 갈망하고, 충동적인 힘으로 우리는 그 선을 위해 분투하고 싸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이 세 가지 힘을 통해 신성한 미덕과 지식을 추구하며, 하나는 찾고, 다른 하나는 갈망하며, 세 번째 힘으로 분투함으로써 썩지 않는 양식과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신성한 사물에 대한 지식을 얻는다.

136. 인간의 본성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뜻에 따라 인간에게 존재를 부여함과 동시에, 마땅히 행해야 할 일을 수행할 수 있는 힘도 함께 부여하셨다. 여기서 말하는 힘이란, 우리 본성에 본질적으로 내재된 미덕을 실천하려는 움직임(끌림)을 의미하며, 이는 그것을 지닌 자의 의지에 따라 의식적으로 행동으로 드러난다.

137. 사람이 오직 감각적이며 육체에 속한, 사물을 쾌적함과 불쾌함으로만 구분하는 방식에만 매달린다면; 그것은 신성한 계명을 어기고 선악을 아는 나무, 즉 감각적인 무지나 비이성에서 열매를 맛보는 것이니, 오직 신체의 온전함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만을 잘 구별하여, 그 결과로 즐거운 것을 선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불쾌한 것을 악한 것으로 피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 그가 일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잘 구별해 내는 이성적인 추론만을 온전히 고수한다면, 신의 계명을 지키며 생명나무, 즉 마음속에 형성되는 지혜를 맛보게 되며, 또한 무엇이 영혼의 구원에 이바지하는지 잘 분별할 줄 알며, 그 결과 영원한 복의 영광을 선으로 받아들이고, 일시적인 복의 덧없음을 악으로 배척하게 된다.

138. 이성에 있어 선은 영적인 것에 대한 무욕한 성향이며, 악은 감각적인 것에 대한 욕망에 찬 성향이다. 감각에 있어 선은 쾌락을 탐하는 정욕을 맛보는 데서 오는 육체에 대한 열정적인 움직임이며, 악은 이를 박탈당함으로써 생기는 불쾌한 상태이다.

139. 포도는 포도주를 낳고, 포도주는 취기를 일으키며, 취기는 광란(악한 것, 일시적인 이성의 상실)을 초래한다. 활기 넘치는 마음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 포도에 비유할 수 있는 이 마음 — 덕으로 가꾸어질 때 지식을 낳고, 지식은 감각의 속박에서 마음을 해방시키는 선한 황홀경을 낳는다.

140. 감각적 대상에 대한 생각과 함께, 교활한 자는 그 대상들의 외형과 형태에 대한 상상까지 교묘히 심어놓는데, 이를 통해 보통은 우리의 이성적 활동이 감각적 대상의 외관만을 통해 사고적·영적 영역으로 나아가는 도중에 멈춰 설 때, 그 대상들에 대한 열정적인 갈망이 일게 된다. (혹은 관통하여) 존재하는 감각의 한가운데에 머무르게 된다. 바로 이때 원수는 영혼을 타락시켜, 그것을 욕망의 동요 속으로 빠뜨리는 데 성공한다.

141. 하나님의 말씀은 빛이자 불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생각을 비추고, 비자연적인 생각을 태워버리기 때문입니다. 또한 계명을 이행함으로써 소망하는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감각적 삶의 어둠을 몰아내지만, 육신을 사랑하여 자발적으로 이 어두운 (감각적) 삶의 밤에 머무르는 자들에게는 심판과 정죄의 불로 벌을 내리기 때문입니다.

142. 우리 마음의 힘은 본성상 육체적 존재와 비육체적 존재를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거룩한 삼위일체에 대해서는 오직 은혜로만 그 존재를 받아들일 뿐, 단지 그분이 존재하신다는 것만을 믿을 뿐, 결코 악마의 마음이 그러하듯 그분의 본질이 무엇인지 탐구하려 들지 않는다.

143. 믿음의 맑은 눈으로 장차 올 복의 아름다움을 뵌 자는 기꺼이 자신의 땅과 친족, 그리고 조상의 집을 떠나라는 명령에 순종하며, 육체에 대한 모든 동정과 애착, 감정과 모든 감각적인 것을 버리고, 만일 이 세상에서 어떤 유혹이 닥치더라도 본성보다 더 높은 차원에 서서, 본성보다 그 이유를 우선시하는 자, 마치 이삭보다 하나님을 더 소중히 여긴 위대한 아브라함처럼(창 22:1 이하).

144. 누구든지 영광을 위해서도, 탐욕을 위해서도, 아첨이나 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마음에서나, 허세를 부리기 위해서도(살전 2:3–5)가 아니라, 덕을 실천하고 신성한 경전을 연구하려 노력하며, 모든 것을 오직 하나님을 위해 행하고, 말하고, 생각하는 자는, 이성이 있는 자로서 진리의 길을 걷는 것이다.

145. 금식하고 모든 정욕을 자극하는 음식을 삼가며, 영혼을 죄악된 욕망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다른 많은 일을 행하는 자는, (누가복음 3, 4)에 기록된 대로 “주님의 길을 준비하라”는길을 마련하는 것이다. 그러나 허영이나 탐욕, 아첨이나 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마음, 혹은 다른 어떤 이유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러한 생활 방식을 택하는 자는 “하나님의 바른 길을 걷지 않는” 자이다. 길을 준비하기 위한 수고는 감당하지만, 그 길을 걷는 자로서 하나님을 모실 자격은 얻지 못한다.

146. 참된 삶에 자신을 바친 자는, 모든 슬픔이—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죽음을 낳는 정욕”(야고보서 1:15)에 대한 죽음임을 알고, 어떤 날카로운 불가피한 유혹을 마주하더라도 기쁨과 즐거움으로 받아들이며, 인내로써 이러한 고통을 편하고 평탄한 길로 만들어, — 높은 소명(빌 3:14)을 영화롭게 하며, 그 길을 따라 실수 없이 나아가며 경건하게 신성한 여정을 완수하는 자이다. 이는 정욕이 죽음의 어머니이며, 정욕의 죽음은 자발적이거나 의지와 무관하게 닥치는 고통이기 때문이다.

147. 누구든지 구불구불하고 복잡하며, 모든 감각적 요소와 다양하게 얽혀 있는 정욕을 절제로 억누른 자는, “험난한 길을 바른 길로 만들었으며”, 마주친 견딜 수 없고 가혹한 고통들을 인내로 이겨냄으로써, 험한 길을 평탄하게 만들었습니다. 그가 미덕과 이를 위한 수고에 대한 보상으로, 이를 선하고 정당하게 감당하고, 미덕에 대한 갈망으로 정욕을 이겨내며, 진리에 대한 사랑으로 슬픔의 고통을 누르고, 이 모든 것을 통해 신성한 위업을 용감하게 이루어 냈기에,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될 것” (사 40, 5).

148. 자발적인 정욕, 즉 욕망의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굽은 길과 굴곡을 절제로 곧게 펴고, 비자발적인 유혹, 즉 온갖 종류의 슬픔이 가져오는 날카로운 우연들을 인내로 다듬어 길을 평탄하게 만든 자, 바로 이 사람이 진실로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될 것이다 . 마음이 깨끗해진 자로서, 덕행과 경건한 묵상의 힘으로 투쟁과 수고의 끝에 하나님을 뵙게 되는 자, 곧 주님의 말씀대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라” (마태복음 5,3)라고 하신 말씀대로, 덕행을 실천하는 수고로 인해 무정욕의 은총을 얻으며, 이 은총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을 볼 수 없다.

149. 마음은 그 안에 하나님에 대한 기억이 살아 있는 한, 묵상을 통해 주님을 찾습니다(시 26,4.8). 그러나 이는 쉬운 일이 아니라 “주님을 경외함으로”(역대하 26,5), 즉 계명을 이행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이는 이 이행 없이 주님을 찾는 자는 그분을 찾지 못하기 때문인데, 주님을 주님의 경외함 속에서 찾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그에게 형통하게 하실 것이라”(같은 구절); 이는 모든 일을 분별하여 마땅히 행하는 자 에게 주님께서 형통하게 하시며, 그에게 다양한 미덕을 가르치시고, 피조물의 참된 의미를 드러내 주시기 때문이다.

150.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없으면, 악한 것에서 아무것도 끝까지 근절되지 않는 것처럼, 선한 것에서도 우리 안에 아무것도 온전히 확립되지 않는다. 믿음은 시달리는 마음을 하나님께 의지하도록 설득하고, 그를 위해 온갖 영적 무기가 준비되어 있다는 확신으로 대담함을 불러일으킨다; 소망은 그에게 신성한 도움을 보장하는 거짓 없는 보증인이 되어, 적대적인 세력의 근절을 약속하며, 사랑은 그를 신성한 존재와의 친밀한 결합에서 쉽게 떼어낼 수 없게, 더 나아가 심지어 가장 치열한 전투 중에도 전혀 떼어낼 수 없게 만들며, 그의 모든 의지력을 신성한 존재에 대한 갈망에 굳게 붙들어 둡니다.

151. 믿음은 투쟁하는 마음을 위로하며, 도움에 대한 의심의 여지가 없음을 일깨워 용기를 북돋아 준다; 소망은 눈앞에 확실한 도움을 그려 보여줌으로써 적대자들의 공격을 물리친다; 그리고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게 있어 적들의 위협을 무력화(혹은 무의미하게) 시켜, 하나님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 찬 열망으로 적들을 완전히 무력화시킨다.

152.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은 그 자체로 신성한 소망을 마음 깊이 온전히 받아들였음을 분명히 증언하는 바이며, 이 소망 없이는 결코, 누구에게도, 어떤 이유로도 하나님을 향한 열망이 생기지 않는다: 이는 희망이 미래를 현재처럼 눈앞에 펼쳐 보이게 하고, 원수의 세력과 싸우는 이들에게 그들을 보호하시는 하나님께서 결코 그들 곁을 떠나지 않으심을 확신시켜 주기 때문이며, 바로 그분과 그분을 위하여 성도들은 싸움을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기대도 없이, 그것이 어렵든 쉬우든, 결코 누구에게도 선을 향한 회심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153. 신성한 힘으로 무장된 모든 마음은 마치 어떤 장로들과 지도자들을 가진 것과 같으니, – “사고의 힘”이 있는데, 여기에서 이성적인 믿음이 생겨나며, 이는 항상 말로 다 할 수 없이 내재하신 하나님을 관조하고, 미래의 복을 마치 현재의 것인 양 희망으로 누리도록 가르친다. – “갈망하는 힘”은 신성한 사랑을 확립하여, 의지를 가장 순수한 신성에 대한 갈망에 결속시키고, 갈망하는 대상에 대한 호감을 결코 떨쳐버릴 수 없게 하며; – 그리고 “자극하는 힘”은 신성한 평화를 강력하게 자리 잡게 하여, 모든 갈망의 움직임을 신성을 사랑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간다. 이 두 힘은 모든 이성이 악을 근절하고 미덕을 심어 지키는데 있어 조력자로 작용한다.

154. 먼저 정욕에서 정화되지 않은 자는 자연적 사물을 관찰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감각적 사물의 형상들은 정욕에서 완전히 해방되지 않은 지성을 정욕 속으로 끌어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감각적 쾌락에 빠져 오랫동안 감각적 사물의 외형에 대한 몽상에 머무르는 마음은 불순한 정욕을 낳게 되며, 관상을 통해 자신과 친화적인 정신적 사물로 넘어갈 힘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155. 정욕이 거세게 일어날 때, 용기 있게 감각을 억제하고, 감각적 대상에 대한 몽상과 기억을 완전히 몰아내며, 마음 밖의 것을 탐구하려는 마음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완전히 억누르는 자는, 신의 은총을 통해 자신에게 덤벼든 악하고 폭압적인 정욕과 악마의 억압을 승리로 물리치고 수치를 안겨줄 것이다.

156. 마음이 미쳐 있고, 분노가 억제할 수 없으며, 정욕이 짐승 같을 때, 그 결과로 무지, 제멋대로인 태도, 그리고 수치스러운 움직임이 영혼을 지배하게 되면, 그때 죄악된 습관이 다양한 감각적 쾌락과 얽혀 힘차게 드러난다.

157. 보이지 않는 적들과의 보이지 않는 싸움이나 충돌을 현명하게 피하는 법을 배운 마음은, 악한 세력의 공격이 닥쳤을 때 자연스러운 추론에 착수하거나 다른 어떤 행동도 해서는 안 되며, 오직 기도하고, 수고로 몸을 지치게 하며, 물질적인 사색을 철저히 근절하고, 성벽을 지켜야 한다. 즉, 영혼을 지키는 미덕들, 혹은 미덕을 보존하는 방법, 즉 절제와 인내를 말한다. 이는 적들이 어떤 식으로든 오른손으로 영혼을 유혹하여 그 마음을 자기 편으로 끌어당기고, “혼탁한 타락” (아바카 2, 15)로 영혼을 타락시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지 않도록, 그리고 더 나은 것을 추구하는 마음을 허상의 선으로 유혹하여 더 나쁜 쪽으로 이끌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158. 분별력 있고 포괄적인 절제와 인내로 용감하게 감각을 억제하고, 영혼의 힘을 통해 감각적 형상들이 마음에 들어오는 길을 막은 자는, 마귀의 모든 악한 계략을 손쉽게 무너뜨리며, 그를 수치심에 휩싸이게 하여 “온 길을 되돌아가게” (열왕기하 19, 33).

159. 유혹이 솟아날 때 사물에 대한 생각을 절제하고, 마음을 온전히 모아 자기 자신과 하느님께 집중하며 기도에 전념하는 자는 죄악적인 성향을 죽이며, 그로 수치심을 안고 그 성향을 부추기는 마귀를 되돌려 보냅니다. 마귀는 바로 그 성향을 기대하며 평소의 뻔뻔함으로 영혼에 접근하여, 진리에 대항하는 교만한 생각들로 반기를 들었습니다. 이를 알고, 고통을 겪으며, 위대한 다윗이 — 모든 마음의 전쟁의 순서를 경험으로 아주 잘 알고 있던 — 이렇게 말했습니다: “죄인이 내 앞에서 일어설 때, 나는 벙어리가 되어 겸손해졌으며, 복된 일들에 대해 침묵하였다” (시 38, 2. 3):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신성한 예레미야는 백성에게 “밭에 나가지 말고 길에 다니지 말라. 원수의 칼이 주위에 도사리고 있느니라” (예레미야 6, 25)라고 명령했다.

160. 자연스러운 욕구와 쾌락은 그것을 경험하는 이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으니, 그것들은 우리 본성의 구조에서 필연적으로 따르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자연스러운 것들은 우리의 의지와는 별개로 우리에게 쾌락을 주기 때문이다. – 앞서 느꼈던 배고픔을 채워주는 음식, – 갈증을 해소해 주는 음료, – 깨어 있는 동안 소진된 기력을 회복시켜 주는 잠, – 그리고 우리의 본성에 필요한 자연스러운 욕구로 인해 우리에게 일어나는, 우리 본성의 안녕에 필수적이며, 이를 열망하는 이들에게 미덕을 쌓는 데 유익한 그 밖의 모든 것들. 이러한 모든 것은, 죄악적인 유혹을 피하면서도 합리적인 한도 내에서 적절하며, 그로 인해 우리 안에 자의적으로 형성되는, 비난받을 만하고 비자연적인 정욕의 노예가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타당하다. 이러한 정욕은 우리 안에서 다른 기원을 갖지 않으며, 통제할 수 없는 이성의 움직임에 의한 자연적 욕구와 소망 외에는 다른 기원이 없으며,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불멸하고 영원한 삶으로 나아가도록 타고난 것이 아닙니다.

161. 지극히 높으신 자비의 업적은, 신성하고 무형의 지적 피조물들을 말로 다 할 수 없는 신성한 영광의 형상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각자의 수용 능력에 따라 접근할 수 없는 아름다움의 모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위엄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한 것뿐만 아니라; 뿐만 아니라, 지각적 피조물들—이는 지적인 피조물들에 비해 많은 면에서 부족하지만—속에도 그 위대함의 뚜렷한 흔적을 새겨 두셨으니, 이는 그 안에 깊이 몰입하는 인간의 마음을 곧바로 하느님께로 이끄며, 보이는 모든 것 위로 그 마음을 고양시켜 마치 지극한 행복의 영역으로 인도하는 것과 같다.

162. 행위자의 능동적인 지혜는 그를 정욕들보다 더 높은 존재로 만들고, 통찰자의 관조적 지혜는 그를 보이는 모든 것 위에 두어, 그의 마음을 그와 친화적인 대상들로 이끌어 올린다(4, 100).

163. 행함과 지식을 결합하고, 지식과 행함을 결합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보좌이자 그분의 발판이다. 지식에 따른 보좌, 행함에 따른 발판이다. 만약 누군가가 물질에 대한 온갖 몽상으로부터 정화되고 항상 바쁘게 움직이거나, 더 나아가 신성에 대한 초월적인 사색으로 단장된 그러한 인간의 마음을 ‘하늘’이라 부른다면, 내 생각에 그는 진리의 경계를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164. 모든 정욕의 움직임은 대개 그와 친화적인 감각적 대상이 그 시초가 된다. 왜냐하면 어떤 감각을 매개로 하여 영혼의 힘을 자신에게 끌어당기는 그러한 대상이 없다면, 정욕적인 움직임은 결코 생겨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감각적 대상이 없는 정욕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내가 없으면 음행이 없을 것이고, 음식이 없으면 탐식이 없을 것이며, 금전이 없으면 금전 탐욕이 없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 자연적 힘의 모든 정욕적 움직임의 시작은 감각적 대상, 즉 그것을 통해 영혼을 죄로 부추기는 악마이다.

165.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감각적 대상과 지적으로 관조되는 대상들이 자리 잡고 있다. 인간의 이성은 하나님께 이르고자 할 때, 활동적인 삶에서 감각적 대상에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되며, 관조적인 삶에서 지적인 대상들에 의해 결코 지체되어서는 안 된다.

166. 하나님의 진노는 가르침을 받는 자들에게 느껴지는 고통스러운 감정이다; 이 고통스러운 감정은 삶 속에서 불가피한 역경들이 닥쳐옴으로써 유발되는데, 하나님께서는 이를 통해 미덕과 지식으로 교만해진 마음을 종종 겸손과 온유함으로 이끄시며, 이를 통해 그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깨닫고 자신의 연약함을 자각하게 하십니다. 그 연약함을 체감함으로써 그는 마음속의 헛된 교만을 버리게 됩니다.

167. 주님의 진노는 신성한 은총의 베풂을 줄이거나 끊는 것이며, 이러한 ‘끊음’은 자신을 높고 위대하게 여기며,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마치 자신의 미덕의 결실인 양 자랑하는 모든 이에게 유익이 된다.

168. 참으로 신성한 섭리의 한계와 법칙은, 사건의 흐름 속에서 더 나은 처지에 있으면서도 감사하지 않았던 자들에게 불행을 통해 감사의 마음을 가르치도록 벌을 내리는 것이며, 현재의 고통을 통해 이전의 번영 속에서 작용했던 신성한 능력을 인정하게 하는 길로 삼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만일 섭리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안에 있는 선한 점을 가지고 방해받지 않고 자만하도록 내버려 두었다면, 우리는 덕과 지식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타고난 힘으로 이루어진다고 망상하며, 하나님에 대적하는 교만에 빠지지 않았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169. 자신이 이미 미덕의 정점에 도달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선의 근원적인 원인을 찾으려 하지 않을 것이며, 선을 행하는 능력을 오로지 자신에게만 돌리고, 그로 인해 구원의 확증과 보호, 즉 하나님을 스스로 박탈하게 될 것이다. 반면, 자신 안에 선을 행할 힘이 본래 부족함을 느끼는 사람은,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채워 주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께 끊임없이 서둘러 나아가기를 멈추지 않는다.

170. 의로운 분노는 스스로를 지나치게 현명하다고 여기는 마음을 찾아오는데, 즉 그 마음을 내버려 두거나, 활동과 사고에서 악마들의 공격을 받도록 방치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 통해 자신의 본래적인 연약함을 깨닫고, 자신을 감싸며 그 안의 모든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인식하게 하여, 자신에게 부자연스럽고 낯선 교만을 멀리 떨쳐내고 자신을 낮추게 함은, 그렇지 않으면 그에게 또 다른 분노, 즉 이전에 내려주신 은사를 빼앗는 분노가 닥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171. 첫 번째 진노의 형태, 즉 버림받음으로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그것을 감사의 좋은 스승으로 인정하며 자신을 낮추지 않은 자는, 그에게 닥치는 또 다른 진노를 맞이하게 되는데, 이 진노는 이전 은사들의 효력을 빼앗고, 지금까지 그를 지켜주던 힘을 박탈해 버린다. 하나님께서 감사하지 않는 이스라엘을 포도나무에 비유하여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 울타리를 제거하리니, 약탈당할 것이며, 그 성벽을 허물리니, 짓밟힐 것이며, 내 포도나무를 내버려 두리니, 그 누구도 그것을 가지치거나 흙을 파주지 않을 것이며, 마치 황무지의 가시덤불처럼 자라날 것이요, 구름에게 명령하여 그에게 비가 내리지 않게 하리라” (이사야 5:5, 6).

172. 또 다른 악으로 이끄는 길이 있는데, 바로 미덕을 잃는 것에 무감각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계명을 어김으로써)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데 익숙해진 자는, 어떤 상황이 닥쳐(계명을 충실히 지키면 죽음을 당할 것이라고 위협할 때) 하나님 자신을 부인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육신의 삶을 하나님보다 더 선호하며, 마음속으로 느끼는 육신의 쾌락을 그 어떤 하나님의 명령보다도 더 낫게 여기기 때문이다.

173. 하나님을 사랑하고 덕이 있는 사람은, 마치 악마들에 맞서 지혜롭게 힘을 두른 히스기야와 같이, 만일 마음속에서 보이지 않게 그와 싸움을 벌이는 악령들의 유혹을 겪게 된다면,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내신 천사, 즉 더 큰 지혜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이 모든 악마의 군단을 분쇄하여 흩어 버릴지라도,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승리와 구원의 원인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돌린다면, – 그러면 그는 하나님께 그분의 보답에 합당한 보답을 드리지 않는 자(역대하 32:25)가 되니, 구원의 위대함에 비해 감사의 마음을 충분히 표하지 않았고, 구원하신 분의 은혜에 비추어 그분께 대한 자신의 호의를 적절히 맞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174. 신성한 통찰로 마음을 밝히고, 이 통찰에 걸맞은 태도의 모습으로 몸을 아름답게 단장하여, 정욕을 버림으로써 몸을 덕의 이성적인 그릇으로 만들자. 왜냐하면 몸에 타고난 정욕은 이성으로 통제될 때 비난받을 것이 없으나, 이러한 제한 없이 그 움직임이 방치될 때 비로소 비난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움직임이 본성적이지만, 이성에 의해 통제되지 않아 종종 본성에 어긋나게 사용되는 정욕들을 버려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175. 자신이 받은 은사들로 인해 마음이 교만해져 “나는 받지 않는다” (고린도전서 4:7)라고 말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마귀가 그와 마음속으로 얽히도록 내버려 두실 때, 그의 적극적인 미덕의 질서를 흔들어 놓을 뿐만 아니라 그의 밝은 정신적 통찰력을 어둡게 하여, 그가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오직 우리 안에서 정욕을 이기는 그 힘이 어디에 있는지 깨닫고, 회개하여 겸손해지며 자만심을 버림으로써, 하나님께서 회개하지 않은 자들에게 보통 내리시는 진노—영혼을 지키는 은혜를 빼앗고 배은망덕한 마음을 텅 비게 만드는 그 진노—를 그에게서 돌이키시도록 하나님을 달래게 되는 것이다.

176. 누구도 몸을 미덕으로 거룩하게 하지 않고, 영혼을 참된 지식으로 밝히지 않는다면, 진정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다. 미덕에 대한 호의는 참된 지식의 높이로 치솟는, 하늘을 바라보는 사색하는 마음의 얼굴과 같다.

177.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마치 기관들 안에 계시듯이, 모든 행위와 관조, 덕과 지식, 승리와 지혜, 선함과 진리를 이루신다는 것을 진정으로 깨달은 자는 복이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선을 바라는 마음가짐 하나를 제외하고는, 이에 대해 우리 스스로 아무것도 기여하지 않는다. 이러한 마음을 품고 위대한 소로바벨은 하나님께 말씀드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시여, 저에게 지혜를 주셨으니 찬양받으소서. 주님께 고백하오니, 승리는 주님께로부터 오고, 지혜도 주님께로부터 오며, 영광도 주님의 것이니,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에스드라 2서 4, 60–59). 진정으로 감사하는 종으로서 그는 모든 것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 돌렸으니, 그분으로부터 받아 지혜를 얻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백 속에서 주어진 모든 은혜의 힘을 그분께 돌렸으니, 이 은혜들은 앞서 말한 대로 승리와 지혜, 덕과 지식, 행위 와 관조, 선함과 진리의 결합입니다. 이는 그것들이 서로 어우러져 하나님의 단일한 영광과 광채의 광선을 발산하기 때문입니다.

178. 성인들의 모든 완전함은 명백히 하나님의 은사였으므로, 누구도 하나님께서 주신 은총 외에는 전혀 아무것도 갖지 못하며, 그 은총은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받아들이는 이의 감사와 호의의 정도에 따라 측정되시며, 그 사람은 오직 하나님께 바치는 것만을 소유하게 된다.

179. 우리 각자는 자신 안에 있는 믿음의 정도에 따라 성령의 분명한 역사를 얻으므로, 누구나 스스로를 위해 은혜의 분배자가 된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 중 그 누구도 은혜가 풍성한 다른 이를 결코 시기하지 않을 것이니, 신성한 은총을 받는 데 필요한 호의를 얻는 것은 그 자신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180. 신성한 은총의 분배에 차이가 나는 이유는 각자의 믿음의 정도 때문이다(롬 12:6); 우리가 믿는 방식에 따라, 우리는 믿음의 정신으로 행동하려는 열정적인 준비 태세를 갖게 된다. 따라서 (믿음의 정신으로) 행하는 자는 자신의 행위의 정도를 통해 믿음의 정도를 드러내며, 믿은 만큼 은혜를 받는다. 반면 그렇게 행하지 않는 자는 자신의 무행위의 정도를 통해 불신의 정도를 드러내며, 불신에 빠진 만큼 은혜의 상실을 겪게 된다. 왜 선을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는 자가 옳지 않은 일을 하는가? 믿음과 행실의 증진, 그리고 믿음(과 그에 상응하는 행실)의 정도에 따라 주어지는 은혜의 수용이 분명히 타인의 손이 아니라 그 자신의 손에 달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181. 이사야는 “그에게 하나님의 영, 지혜와 총명의 영, 모략과 용기의 영, 지식과 경건의 영이 쉼을 얻으리니, 하나님의 경외의 영이 그를 채우리라”고 말합니다(사 11:3–4). 이러한 영적 은사들에는 다음과 같은 특성이 있다: – “경외”는 악한 행위를 삼가는 것; “강인함”은 선한 일을 행하는 것; “모략”은 의무에 반하는 것을 분별하는 것; “경건”은 마땅한 것을 오류 없이 보는 것; “지혜” – 선행 속에 감춰진 이성을 그 행위 자체를 통해 깨닫는 것; “명철” – 깨달은 바에 대한 영혼의 완전한 경향(그것을 맛보는 것); “총명” – 하나님과의 불가사의한 연합으로, 이를 체험하는 자를 신과 같은 존재로 만드는 것.

182. “하나님을 경외하는 영”은 악한 행위를 삼가는 것이며; “강인함의 영”은 계명을 힘차게 이행하려는 열렬한 열망과 움직임이며; “모략의 영”은 (선과 악을) 분별하는 습관으로, 이를 통해 더 나은 것을 더 나쁜 것에서 가려내며 계명을 현명하게 이행하는 것이며; “경건의 영”은 미덕의 형상을 오류 없이 꿰뚫어 보는 통찰력으로, 이를 따라 행동할 때 결코 이성의 건전한 판단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 “지식의 영”은 계명과 그 합리적인 근거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으로, 미덕의 형상들도 바로 이 근거 위에 서 있는 것; “이성의 영”이란 미덕의 형상과 근거들과의 조화(전자를 이행하고 후자에 따라 행동하려는 결단) 또는 더 정확히 말해, (그것들에 따라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으로, 이를 통해 자연적 힘들이 계명의 형상과 근거들과 융합되는 것이 이루어진다; "지혜의 영"이란 계명 속에 존재하는 가장 신성한 이성의 근원에 대한 열광이며, 그분과의 결합을 의미한다. 그 힘으로 인해, 어떻게 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사람들에게 가능한 한도 내에서 하나님 안에 존재하는 사물에 대한 이성에 참여하게 됨으로써, 우리는 마치 어떤 샘에서 솟아나듯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로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한다.

183. 믿음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맹목적인 믿음을 가진 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명이 빛이라면(잠언 6:23),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신성한 빛 없이 남아 있으며, 참된 신성한 칭호가 아니라 헛된 칭호만을 지니고 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184. 죄를 짓는 누구도 육신의 연약함을 죄의 변명으로 내세울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 말씀과의 연합은 맹세의 해제를 통해 온 본성을 다시 강하게 회복시켰으며, 이로써 우리로 하여금 정욕에 기울어지는 것을 변명의 여지가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말씀의 신성은 항상 은혜로 그분을 믿는 자들과 함께 계시므로, 육신 안에 있는 죄의 법을 무력화시키신다(롬 8:2).

185. 신성한 경외심으로 제지되지 않는 지식은 교만을 낳아, 그로 인해 교만해진 자로 하여금 주어진 것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게 한다. 그러나 신성한 사랑과 함께 늘어나는 활동은,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지식 이상을 얻지 않음으로써, 행하는 이를 겸손하게 만든다.

186. 하늘의 거처란 정욕을 초월한 덕스러운 습관이며, 생각을 혼란스럽게 할 수 있는 그 어떤 오류도 없는 지식이다.

187. 첫 번째 무욕은 악한 행실을 완벽하게 절제하는 것으로, 신앙의 초보자들에게서 볼 수 있다. 두 번째는 악을 마음속으로 꾸미는 생각을 완벽하게 배척하는 것으로, 이성을 통해 미덕의 길을 걷는 이들에게서 나타난다. 세 번째는 열정적인 욕망의 완전한 불변함으로, 이는 가시적인 사물에서 정신적 관상으로 올라가는 이들에게서 나타나는 것이며; 네 번째 무정(無情)은 가장 단순하고 순수한 몽상조차도 완전히 정화하는 것으로, 지식과 관상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맑고 투명한 하나님의 거울로 만든 이들에게서 형성된다. 따라서 정욕적인 행위로부터 자신을 정화하고, 그것들에 대한 마음속의 집착에서 해방되며, 그것들에 대한 욕망의 움직임을 끊고, 심지어 그것들에 대한 단순한 생각조차도 마음에서 깨끗이 제거한 자는, 이 네 가지 주요한 무정욕을 갖추고 물질적 피조물의 영역을 벗어나 신성하고 평화로운 정신적 존재의 경지에 들어선다.

188. 첫 번째 무정(無情)은 실제적인 죄를 향한 육체의 움직임이 제자리에서 멈추는 것을 말한다(충동은 있으나, 그것을 실행에 옮기지 않는 것); 두 번째는 영혼의 정욕적인 생각을 완전히 배척하는 것으로, 이를 통해 첫 번째 무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움직임이 억제되며, 행동으로 이끄는 정욕적인 생각이 사라진다; 셋째는 정욕에 대한 욕망의 완전한 정지이며, 이를 위해 두 번째 무정욕, 즉 생각의 순결함이 이루어진다; 넷째 무정욕은 모든 감각적 환상을 생각에서 완전히 떨쳐내는 것을 말하며, 이를 통해 감각적 환상이 없어져 정욕의 그림을 그려내는 일이 없으므로 셋째 무정욕이 시작된다.

189. 각 사람의 구원의 시작과 끝은 지혜이며, 이 지혜는 처음에는 두려움을 일으키다가, 마지막에 이르러 완성됨으로써 사랑을 낳는다. 아니면 더 정확히 말해, 처음에는 그 지혜 자체가 사랑하는 이를 악에서 지키기 위해 경계심 어린 두려움으로 나타나지만, 나중에는 저절로 자연스럽게 사랑이 되어, 그 지혜와 함께하며 모든 눈에 보이는 복을 소유하는 것을 포기한 이들에게 영적인 기쁨을 채워준다.

190. 모든 고백은 영혼을 겸손하게 하는데, 때로는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았음을 인정하도록 가르치고, 때로는 자신의 게으름으로 인해 범한 죄에 대해 스스로가 유죄임을 시인하게 한다.

191. 고백은 그 내용에 따라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주어진 은혜에 대한 감사의 마음에서 비롯되고, 다른 하나는 자책과 자신이 저지른 악행에 대한 자각에서 비롯된다. 왜냐하면 고백이란, 깊이 감사하며 되새기는 하나님의 은혜를 뜻하기도 하고, 자신이 저지른 악한 행위에 대해 솔직히 인정하는 것을 뜻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모두 겸손의 원천이 된다. 왜냐하면 보통 은혜에 대해 감사하는 자도, 죄를 자책하는 자도 모두 겸손해지기 때문이다. 전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여기고, 후자는 죄의 용서를 간구하기 때문이다.

192. 교만의 정욕은 두 가지 무지, 즉 인식 부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둘이 하나로 합쳐져 하나의 융합된 (교만한) 사고방식을 만들어 낸다. 왜냐하면 신의 도움도, 인간의 연약함도 인정하지 않는 자만이 교만한 자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교만은 신에 대한 지식과 인간에 대한 지식의 상실이다.

193. 허영은 하느님께 따른 목적에서 벗어나, 하느님께 따르지 않는 다른 목적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미덕을 추구하며, 자신의 수고를 통해 오직 변덕스러운 인간의 칭찬만을 얻고자 하는 자가 바로 허영심에 찬 자이기 때문이다.

194. 사람에게 아첨하는 자는 오직 한 가지, 즉 자신의 겉모습이 화려하게 보이도록 하고, 아첨꾼의 칭찬을 얻기 위해 애쓴다. 그는 눈에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에만 즐거움을 느끼거나 놀라움을 받는 사람들, 즉 감각이 보여주는 것만으로 미덕을 판단하는 이들의 시선과 귀를 자기 편으로 사로잡으려 한다. 이처럼 남의 눈치를 보는 것은 사람들 앞에서, 그리고 사람들을 위해 선한 품성과 말을 겉으로만 보여주는 것이다.

195. 위선은 우정을 가장하는 것이거나, 우정의 외관으로 가려진 증오, 또는 호의의 가면 아래서 작용하는 적대감, 혹은 사랑의 성격을 흉내 내는 시기심, 또는 실제 미덕이 아닌 미덕의 허울로 포장된 화려한 삶, 혹은 의로움을 가장하여 마치 그것이 지켜지는 것처럼 겉으로만 보여주는 것, 지키고 있는 척하는 것, 혹은 진리의 외관을 띤 기만이다. – 이 모든 것은 뱀을 닮은 도덕적 타락 속에서 사람들이 교묘히 꾸미는 것이다.

196. 모든 피조물과 그 안에 있는 모든 선의 근원은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덕이나 지식으로 자만하며, 덕의 정도, 즉 은혜의 도움으로 그 덕에서 성취를 이룬 자로서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지 않는 자는, 분명히 교만의 악한 영을 피하지 못한 것이다; 자기 영광을 위해 선을 행하는 자는 허영의 가시에 찔려 자신을 하나님보다 우선시하였으며; “사람들이 보게 하려” (마태복음 23:5)고만 하며 덕을 행하거나 그에 대해 말하는 자는, 사람의 칭찬을 하나님의 칭찬보다 더 높이 여겼으니, 이는 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열정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단지 미덕의 정직한 외관으로 자신의 행동을 치장한 자는, 속임수를 위해 악의적으로, 경건함의 겉모습으로 마음속의 악한 기질을 가리며, 위선 의 교활함으로 미덕을 거래한다. 이 모든 자들이 각기 다른 무언가를 향해, 즉 만물의 근원이신 분을 향하지 않고 자신의 목표를 세웠다는 것이 명백하지 않은가?

197. 악마들은 정절을 미워하지도 않고, 금식을 싫어하지도 않으며, 마찬가지로 재산을 나누는 일이나 나그네를 환대하는 일, 시편을 부르는 일, 독서에 전념하는 일, 은둔 생활, 고상한 사색, 맨땅에서 자는 일, 밤샘 기도, 그리고 하나님께 합당한 삶을 특징짓는 그 밖의 모든 것들도 – 그러한 행위의 목적이 그들에게 유리한 무언가로 설정되는 한 말이다.

198. 덕이 부족한 상태에서 싸우는 악마들은 음행과 술주정, 탐욕과 시기심을 부추기는 자들이며, 덕이 있는 상태에서 싸우는 악마들은 자만과 허영, 교만을 부추기는 자들이니, 이처럼 교묘하고 은밀하게 우리 안에 악을 심어 놓는다.

199. 오, 우리도 이 악의의 영들에게, 즉 영적 우정의 가면을 쓰고 보이지 않게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에게 “선한” 의도로 죄의 “죽음”을 “가해”하려는(롬 7:3) 자들에게, “우리도 여러분과 함께 건축하겠습니다” (에스드라 2서 5, 65)라고 말하는 악의의 영들에게, “우리 주 하나님께 성전을 짓는 일은 너희와 우리 사이에 있을 수 없다. 우리 혼자서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께 그 집을 지을 것이다” (에스드라 2서 5:68)라고 대답해야 한다. “혼자서”라고 한 것은, 덕이 부족하여 싸우는 영들로부터 이미 벗어났기에, 다시는 그들에게 유혹당하고 싶지 않으며, 덕이 넘쳐서 너희로부터도 높아졌다가 첫 번째 유혹보다 훨씬 더 치명적인 타락에 빠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첫 번째 유혹에서는 다시 일어설 희망이 더 쉬웠으니, 그때 우리는 연약함으로 인해 관대하게 용서받는 자들 중 하나였으나, 이번에는 연약함이 아예 없거나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는 교만함으로 인해 미움받을 처지에 놓일 것이기 때문이다. – 그리고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선한 일에서 우리를 돕는 거룩한 천사들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의의 행위로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시고, 우리를 온갖 정욕에서 자유로운 거룩한 성전으로 지으시는 하나님 자신께서 계시기 때문이다.

200. “의인의 기도는 힘을 얻으면 큰 능력을 발휘한다”고 기록되어 있듯이(야고보서 5:16). 기도가 힘을 얻는 방식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기도하는 이 자신이 의로울 때), 계명에 따른 행실을 곁들여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때, 이는 단지 말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헛된 목소리로 발화되는 것도 아니고, 텅 비어 그 밑바탕에 확고한 것이 없는 것도 아니라, 계명에 따른 행실로 활기를 얻어 실효성이 있고 생생한 기도입니다. 기도의 힘과 실효성은 미덕을 실천함으로써 계명을 이행하는 데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의인은 계명이 뒷받침하는 강력하고 막강한 기도를 갖게 된다. 둘째, 의인에게 기도를 청하는 자가 스스로 기도의 행위를 실천하며, 과거의 삶을 고치겠다고 약속하고 실제로 고치며, 이러한 선한 태도로 인해 의인의 기도를 강력하고 전능하게 만드는 경우이다.

201. 죄를 짓는 일을 미덕보다 더 즐기는 자에게는 의인의 기도가 아무런 유익이 없다. 한때 위대한 사무엘도 죄를 짓는 사울을 위해 애도했으나, 자신의 통곡에 걸맞은 죄인의 회개를 동반하지 않았기에 그를 위해 하나님을 달래는 데는 힘이 미치지 못했다. 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이 헛된 통곡을 멈추게 하시며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사울을 언제까지 울겠느냐? 내가 그를 폄하하여 이스라엘에서 다스리지 못하게 하리라” (사무엘상 16:1)라고 하셨을까.

202. 또한 지극히 자비로운 예레미야가, 악마의 유혹에 미친 듯이 사로잡힌 유대 백성을 위해 기도했으나, 그의 기도는 들리지 않았으니, 이는 그의 기도가 경건하지 않은 유대인들이 그 유혹에서 돌이키는 것으로 뒷받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헛된 끊임없는 간구를 멈추게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며,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청하지 말며, 그들을 위하여 나에게 나아오지도 말라. 내가 네 기도를 듣지 아니하리라” (예레미야 7, 16).

203. 마음속으로 파멸을 초래하는 행위에 탐닉하는 자를 위해 성인들의 기도로 구원을 구하고, 자만심에 차서 동시에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실제로 더럽히는 바로 그 일로 용서를 구하는 것은, 큰 무지, 아니 광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의인의 기도를 청하는 자는, 진정으로 악을 미워한다면 그 기도가 헛되고 무효하게 되지 않도록 스스로 방치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자신의 미덕으로 그 기도에 힘을 실어, 죄를 용서해 주실 전능자께 닿을 수 있도록 효과적이고 강력하게 만들어야 한다.

204. “의인의 기도는 큰 힘을 발휘한다”는 말은, 그 기도를 드리는 의인 자신이나, 의인에게 기도를 드려 달라고 청하는 이 중 한 쪽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의인의 경우, 그 기도는 의인의 간구를 들어주실 수 있는 분 앞에서 담대함을 얻게 함으로써 효력을 발휘하며, 의인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사람의 경우, 그가 과거의 악한 행실을 버리고 온 마음을 다해 미덕을 추구할 때 효력을 발휘한다.

205. 진리의 말씀은 두 가지 슬픔을 알고 있는데, 그중 첫 번째는 영혼 속에서 보이지 않게 형성되고, 두 번째는 감각적 차원에서 눈에 띄게 나타난다. 전자는 양심의 채찍 에 의해 유발되어 영혼의 깊은 곳까지 감싸며, 후자는 비통한 재앙의 무게로 영혼을 짓누르며, 영혼이 본성적으로 뿜어져 나가려는 것을 막는다.

206. 진리의 말씀은 두 가지 슬픔을 아는 것처럼, 두 가지 종류의 유혹도 알고 있는데, 그중 하나는 내면의 의지 영역에서 악한 욕망의 자극으로 형성되고, 다른 하나는 의지를 벗어나 외부에서 자발적이지 않은 불행, 슬픔, 재앙의 형태로 찾아온다. 전자는 영적 슬픔의 원인이 되고, 후자는 감각적 슬픔의 원인이 된다(5, 90).

207. 의지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유혹은 영혼에 슬픔을 안겨주지만, 감각에는 쾌락을 준다. 반대로 자발적이지 않은 유혹은 (이성을 가지고 이를 맞이하는) 영혼을 위로하지만, 육신에는 슬픔을 안겨준다.

208. 나는 우리 주님이시며 하나님이신 분이 제자들에게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가르치실 때,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마태복음 6:13)라는 말씀을 통해, 의지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유혹, 즉 선한 마음가짐과 의도를 흔들게 하는 정욕의 자극으로부터 기도함으로써 피하도록 권고하셨다고 생각한다; 반면 주님의 형제로 불리는 위대한 야고보는 진리를 위해 수고하는 이들이 당하는 유혹에 놀라지 말라고 가르치면서, “형제들아, 여러 가지 시험에 빠질 때 기뻐하라” (야고보서 1:2), 즉 우리 의지와 무관하게 닥쳐와 슬픔과 고통을 야기하는 유혹들을 가리킨 것이다. – 이는 그 전후 문맥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덧붙이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한 자로부터 우리를 구하소서”라고 덧붙이셨고, 여기서는 위대한 야고보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 믿음의 시험이 인내를 낳는 줄을 아라. 인내는 온전한 일을 이루게 하여, 너희가 온전하고 부족함이 없는 자가 되게 하리라” (야고보서 1:3, 4).

209. 자제심으로 자발적인 유혹과 싸우고, 비자발적인 유혹은 인내로 견뎌내는 자가 온전한 자이며, “온전”한 자는 행실을 분별하여 행하고, 사색을 방치하지 않는 자이다.

210. 이성과 감각은 서로 정반대이면서도, 그 대상의 극단적인 상이함과 차이 때문에 자연스러운 작용을 한다. 이성은 사고적이고 무형적인 실체를 대상으로 하며, 이를 무형적으로 지각하고; 감각은 감각적이고 육체적인 본질을 대상으로 하며, 이를 감각적으로 지각한다.

211. 이성이 감각을 자신의 고유한 자연적 힘으로 여기기 시작하면, 감각적 사물의 외형에 얽매여 육체적 쾌락의 창시자가 되며, 감각에 대한 편향된 성향 때문에 가시적 사물의 본성을 초월할 힘을 갖지 못하게 된다.

212. 구원의 기쁨이라 함은 미덕으로 인해 영혼이 기뻐하는 것을 말하며, 영혼에 유익한 고통이라 함은 미덕 때문에 육체가 슬퍼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감각적 쾌락에 열중하는 자는 자신의 열망을 마땅한 곳으로 돌리지 못하며, 이러한 쾌락을 박탈하는 우연한 상황들을 피하려는 자는 도망쳐서는 안 될 것에서 도망치는 것이다.

213. 햇빛 없이는 눈이 감각적 대상을 인식할 수 없는 것처럼, 영적 빛 없이는 인간의 이성이 결코 영적 관조를 인식할 수 없다. 감각적 빛은 본성상 감각을 비추어 감각적 사물을 시각적으로 인식하게 하지만, 영적 빛은 이성을 비추어 초감각적 실체를 관조적으로 파악하게 하기 때문이다.

214. 임의적인 어려움을 꾸며내거나 불가피한 어려움을 초래하는 것은, 비록 욕망을 꺾어 그 활동적인 움직임을 저지할 수는 있겠지만, 우리 본성에 법칙처럼 내재해 있는 탄생에 대한 힘이나 능력을 소멸시키지는 못한다. – 왜냐하면 덕을 갖춘 지혜는 대개 본성이 아니라 의지의 무정함을 낳기 때문이며, 바로 그러한 의지의 무정함을 통해 신성한 기쁨의 은총이 마음에 임하기 때문이다.

215. 본성상 지혜롭고 의로우시며 전능하신 주님께서, – 지혜로우신 분으로서 (죄로 병든 우리의 본성을) 치유할 방법을 알지 못하셨거나, 의로우신 분으로서 죄의 멍에(와 죄책) 아래 놓인 인간의 구원을 독단적으로 이루고자 하셨거나, 전능하신 분으로서 우리의 치유에 필요한 일을 행하실 힘이 없으셨을 리가 없다.

216. 하나님의 지극한 지혜는 그분이 진정으로 본질적으로 사람이 되신 데서 드러나며, 진리는 그분이 탄생을 통해 우리와 마찬가지로 고통받을 수 있는 본성을 취하신 데에 있으며, 전능하심은 그분이 고난과 죽음을 통해 우리 본성을 위해 끊임없는 생명과 변함없는 무정(無情)을 마련하신 데에 있다.

217. 하나님과 우리를 시기한 마귀는, 마치 하나님이 사람을 시기하는 것처럼 속임수로 인간에게 주입하여, 그로 하여금 계명을 어기게 만들었습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진정으로 찬양받을 만한 능력, 즉 사람을 신성하게 만드는 그 능력이 명백히 드러나지 않기를 바라며 하나님을 시기하고, 사람은 덕행으로 인해 눈에 띄게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자가 되지 않기를 바라며 사람을 시기합니다. 이처럼 이 가장 사악한 자는 우리의 덕행으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누리는 영광 때문에 우리만을 시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찬양받을 만한 사랑 때문에 하나님까지도 시기한다.

218.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선하심에 대한 유일하고 무한히 강력한 뜻에 따라, 천사들과 사람들, 선한 자들과 악한 자들을 모두 포용하시고 붙드신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모든 이를 거침없이 지나가시는 하나님과 동등하게 참여하지는 않으며, 각자의 마음가짐에 따라 다르게 참여하게 된다.

219.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인격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데, 이는 삼위일체가 삼위일체로 남아 계셨고, 말씀이 성육신하신 후에도 이 성육신을 통해 성삼위일체에 새로운 인격이 추가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 안에서 본성의 차이를 인정하는데, 이는 본성상 말씀과 동일한 육체를 고백하지 않기 위함이다.

220. 맹세를 어기는 자, 즉 주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를 하는 자는, 하나님께 덕스럽게 살겠다고 약속하고는, 나중에 자신의 모든 관심을 서약과 무관한 다른 데로 돌리며, 자신의 입으로 직접 한 서약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경건한 삶에 대한 성약의 서약을 어기는 자이다. 간단히 말해, 하나님께 합당한 삶을 선택했으나 현세에서 완전히 죽은 자가 되지 못한 자는 거짓말쟁이이자 맹세 위반자이다. 마치 하나님께 맹세, 즉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행실을 통해 흠 없이 살겠다고 약속하고도 이를 이행하지 않은 자와 같다.

221. 누구든지 불가피한 유혹의 시련을, 복된 욥과 용맹한 순교자들처럼 흔들림 없는 지혜로 견뎌내는 자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힘으로 꺼지지 않는 구원의 빛을 스스로 간직하는 강력한 등불이다. 또한 악한 자의 계략을 알고, 보이지 않는 전쟁에서의 싸움(충돌, 격전)을 꿰뚫어 보는 자, 곧 지식의 빛으로 비추어지는 이 또한 다른 이들에게 등불이 되어, 위대한 사도처럼 당당히 “우리는 그의 생각을 알지 못하노라”(고린도후서 2:11)라고 말할 수 있다.

222. 기름 없이는 등불이 꺼지지 않게 유지될 수 없는 것처럼, 내면의 선함을 그에 걸맞은 말과 행동, 품성, 그리고 그와 조화를 이루는 감정과 생각으로 키우는 선한 마음가짐이 습관이 되지 않으면, 영적 은사의 빛을 보존할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영적 은사는 그 은사에 상응하는, 마치 기름처럼 끊임없이 어떤 정신적 물질을 부어주는 습관(혹은 마음가짐)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며, 이를 통해 그 은사를 받은 자의 선한 마음가짐에 따라 온전히 보존될 수 있기 때문이다.

223. 하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영 안에서 은혜로 태어난 것을 덕스러운 품성으로 증언하는 자들에게만 은혜로 ‘아버지’라 불리시며, 그들에게 아버지가 되신다. 이러한 품성 속에서 마치 영혼의 얼굴이 드러나는데, 이는 덕행 속에서 그 영혼을 낳으신 하나님의 뚜렷한 형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품성을 지닌 자들은, 자신의 삶을 가장 훌륭한 덕행의 본보기로 제시함으로써, 그들을 바라보는 이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이끈다. 이는 대개 하나님은 텅 빈 말만으로는 찬양받지 않으시며, 오히려 하나님의 위대함을 선포하는 말보다 훨씬 더 큰 의의 행위로 찬양받으시기 때문이다.

224. 자기 안에서 지식은 실천을 통해 드러내고, 실천은 지식에 의해 활기를 얻는 사람은, 우리 안에 있는 참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실현하는 정확한 방법을 찾은 것이다. 반면, 이 두 가지 특성 중 어느 하나를 다른 것과 분리하여 가진 자는, 지식을 공허한 환상(확립되지 않고 방황하는)으로 만들었거나, 활동을 영혼 없는 우상으로 변질시킨 것이다. 왜냐하면 실천이 따르지 않는 지식은 그것을 뒷받침할 활동이 없기에 공상적인 꿈과 다를 바 없으며, 의미를 담지 못한 활동은 그것을 살리는 지식이 없기에 우상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225. 참으로 저주받을 만한 정욕은 오만인데, 이는 자만과 허영이라는 두 가지 악이 결합된 것이다. 그중 자만은 미덕과 자연의 창조주를 부인하는 것이며, 허영은 자연은 물론 미덕 그 자체까지도 훼손한다; 왜냐하면 교만한 자에게는 하나님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무것도 없고, 허영심 많은 자에게는 본성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226. 기록된 율법은 두려움으로 불의를 막아줌으로써 진리에 익숙해지게 한다. 시간이 지나면 이에 대한 습관이 진리를 사랑하는 성향을 낳고, 그로 인해 선을 향한 확고한 마음가짐이 유지되어, 이전의 타락을 잊게 한다.

227. 할례는 영적인 의미에서 육신의 정욕에 대한 성향을 완전히 잘라내는 것이다.

228. 안식일은 정욕의 움직임이 쉼을 얻는 것, 즉 정욕이 완전히 멈춰 있는 상태이다.

229. 하나님께서 안식일과 초하루, 절기를 지키라고 명하신 것은, 단순히 날짜 그 자체를 사람들이 존중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마치 피조물을 창조주보다 더 숭배하는 것을 합법화하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롬 1:25). 마치 날짜 자체가 본질적으로 존경받을 만하고, 따라서 숭배받을 자격이 있는 것처럼 여기는 생각에서 말이죠. 그러나 날들을 거룩히 지키라는 명령을 통해, 그분은 상징적으로 그분 자신을 거룩히 지키라고 명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 자신이 바로 안식일( )이시며, 이는 세상의 땀과 근심, 그리고 의의 일을 위한 수고로부터의 안식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분 자신이 바로 유월절( )이시며, 이는 죄의 쓰라린 노예 상태에서 갇힌 자들을 해방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순절( ) 또한 그분 자신이시니, 이는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이시기 때문이다.

230. 우리는 “영의 칼, 곧 하나님의 말씀”(엡 6,17)으로 단련된 정욕을 죽이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자연적인 힘을 하느님께 봉헌하고 성령의 은총의 불로 이를 하느님께 번제물로 바치는 것 또한 영적 제물로 인정한다.

231. 죄의 권세, 즉 육신의 계략은 거룩한 세례의 은혜로 끊어지며, 신성한 계명에 대한 적극적인 순종은 성령의 칼로 그것을 완전히 죽여 버린다.

232. 식욕의 정욕은 쾌락을 추구하는 생각으로, 마치 칼처럼 많은 미덕을 무참히 훼손하였다: 그것은 절제하지 못함으로 순결의 씨앗을 죽이고, 정의를 훼손하는 동등한 법칙을 탐욕으로 타락시키며, 인애의 자연스러운 유대를 자만심으로 갈라놓으며; 한마디로 말해, 식욕의 정욕은 모든 미덕의 결실을 말살하는 존재이다.

233. 구원을 갈망하는 모든 이는 덕행과 거룩한 생각에 힘써야 한다. 왜냐하면 덕행과 지식 없이는 그 누구도 구원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덕행의 임무는 건전한 판단으로 육체의 움직임을 질서 있게 이끌며, 고삐를 능숙하게 다루듯 부적절한 충동을 억제하는 것이다; 반면 지식의 역할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깊이 숙고하고 이성적으로 논의한 뒤, 이를 실행에 옮기도록 마음을 다잡는 것이다.

234. “땅에 있는 지체들”(골로새서 3:5)을 죽이고, 자신의 모든 육신적인 생각을 소멸시키며, 그것에 대한 모든 동조심을 끊어버린 자, 그리하여 복된 사도 바울과 함께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있겠는가” (롬 8:32)라고 말할 수 있게 된 자, 바로 그런 사람은 위대한 멜기세덱(히 7:3)과 같이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는 자가 되었으니, 그 안에서 영과 완전히 연합되었기 때문에 육체와 본성이 그를 붙잡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235. 이 생의 끝을 죽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며, 차라리 죽음으로부터의 해방, 썩어가는 영역에서의 탈출, 속박으로부터의 해방, 근심의 종식, 싸움의 종식, 어둠에서의 탈출, 수고로부터의 안식, 격동의 진정, 수치로부터의 피난처, 정욕으로부터의 도피이며, 총체적으로 말해 모든 악의 종착점이라 할 수 있다. 성도들은 자발적인 자기 희생으로 자신을 바로잡음으로써, 이 생에서 이방인이자 나그네가 되었다. 이는 세상과 육체, 그리고 그로부터 비롯되는 반란들과 용감하게 싸워, 감각적인 것과 감정이 공감하는 데서 생겨나는 유혹을 양쪽 모두에서 억누름으로써, 그들은 노예가 되지 않고 자신 안에 영혼의 존엄성을 보존했기 때문이다.

236. 성도들은 선하고 인자하며, 자비롭고 자애로웠으며, 온 인류에 대해 똑같이 사랑의 마음을 품고 있었으니, 그 힘으로 일생 동안 모든 선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 즉 겸손을, 이 선의 수호자이자 그와 반대되는 악을 파괴하는 자를 통해, 그들은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유혹—우리에게서 비롯된 자발적인 것과 우리에게서 비롯되지 않은 비자발적인 것 모두—으로부터 벗어나 있었으며, 전자의 반란은 절제로 진압하고, 후자의 유혹은 인내로 물리쳤다.

 

복자 아바 팔라시우스

 

그분에 대한 간략한 소개

우리의 경건한 아버지 팔라시우스는 7세기 전반에 활약했으며, 리비아 사막에 있는 한 수도원의 장로이자 원장이었다. 경건함에 대한 사랑과 더불어 이 복된 아바는 영적 계몽에 대한 사랑도 겸비하고 있었으며, 성경 연구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는 성 막시모 고백자와 동시대인이었으며, 그와 영적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성 막시모가 그에게 보낸 편지가 몇 통 남아 있으며, 성서 중 난해한 구절들을 해설한 책 한 권 전체가 그에게 헌정되어 있습니다. 성 막시모스는 이 아바를 지극히 존경했으며, 한 편지에서는 그를 자신의 스승이라고까지 칭했습니다. 그의 복된 서거는 아마도 660년 이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사랑, 절제, 영적 삶에 관한 그의 400여 가지 명언은 교훈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말들은 대부분 도덕적·금욕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만, 성 다마스쿠스가 신앙 고백을 서술할 때 인용했던 교리적 사상을 담은 것들도 있다. 원본에 따라 각 격언의 첫 글자만을 연속해서 읽으면, 각 백 개 단위의 시작 부분에 배치된 명확한 사상이 드러난다.

 

아바 팔라시아가 장로 파블로에게 보낸 사랑, 절제, 영적 삶에 관한 글

 

제101편

이 백 편의 머리글은 다음과 같다: 영적 형제이자 사랑하는 파울루스 팔라시우스 신부께, 겉으로는 침묵을 지키는 자 같으나 실상은 허영심 많은 장사꾼이다.

1. 온전히 하느님께 향하는 사랑은 사랑하는 이들을 하느님과, 그리고 서로와 하나로 묶어 준다.

2. 영적인 사랑을 얻은 마음은 이웃에 대해 사랑에 어울리지 않는 어떤 생각도 하지 않는다.

3. 입으로는 축복하지만 마음속으로는 폄하하는 자는 사랑의 외피 아래 위선을 숨기고 있다.

4. 사랑을 얻은 자는 원수들이 그에게 가하는 모든 슬픔과 고통을 평온하게 견뎌낸다.

5. 오직 사랑만이 피조물들을 하나님과, 그리고 서로를 한마음으로 결합시킵니다.

6. 이웃에 대해 어떤 의심도, 어떤 말도 허용하지 않는 자가 참된 사랑을 얻은 자이다.

7. 사랑을 깨뜨릴 만한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존경받을 만하다.

8. 위선 없는 사랑에는 “양심에서 우러나오는 선한” (딤전 1:5) 진실한 말이 따릅니다.

9. 호의라는 외피 아래 시기심을 숨기고,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책망의 말을 형제에게 전하는 사람은 시기심을 품고 있는 것이다.

10. 육신의 미덕이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얻는 것처럼, 영적인 미덕은 하나님께로부터 영광을 얻는다.

11. 사랑과 절제는 영혼을 정화시키고, 순수한 기도는 마음(영)을 비춘다.

12. 행함과 이성으로 악을 물리치는 자가 참으로 강한 사람이다.

13. 무욕과 영적인 분별력을 얻은 자는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다.

14. 정욕적인 생각을 떨쳐버리고 싶다면, 절제와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라.

15. 절제하지 못함과 증오로부터 자신을 지키면, 기도 중에 걸림돌을 만나지 않을 것이다.

16. 쓰레기 구덩이에서 향기를 찾을 수 없는 것처럼, 원한에 찬 영혼 속에서는 사랑의 향기를 찾을 수 없다.

17. 분노와 정욕을 용감하게 다스리면, 곧 나쁜 생각에서 벗어날 것이다.

18. 허영은 선행을 감추는 것을 없애고, 교만은 누구에게도 굴하지 않는 마음을 쫓아낸다.

19. 허영에는 위선과 거짓이 따르고, 교만에는 자만과 시기심이 따른다.

20. 자기 자신을 다스리고, 영혼과 육체를 이성(영)에 복종시킨 자가 진정한 주인이다.

21. 친구의 진실함은 시련 속에서 드러나는데, 바로 우리가 곤경에 처했을 때 그가 우리 곁에 있어 줄 때이다.

22. 침묵 속의 고독을 통해 감정을 가다듬고,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생각들을 엄격히 심판하라.

23. 슬픈 모욕에 대해서는 원한을 품지 말고, 탐욕스러운 생각에는 적대적으로 대하라.

24. 침묵 속의 고독, 기도, 사랑, 절제—이 네 가지가 마음을 하늘로 끌어올리는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이다.

25. 금식과 기도로 육신을 쇠약하게 하면, 고통스러운 정욕적인 생각을 쫓아낼 수 있다.

26. “불 앞에서 밀랍이 녹듯이”(시 67:3), 불경건한 생각도 하나님의 두려움 앞에서 녹아내린다.

27. 이성 있는 영혼에게 있어 수치스러운 정욕에 오랫동안 머무르는 것은 큰 악이다.

28. 슬프고 가슴 아픈 우연의 타격을 인내로 견뎌라. 이는 하나님의 섭리가 그러한 일들을 통해 너를 정화하고자 하시기 때문이다.

29. 재산을 버리고 세상을 등진 것처럼, 마침내 악한 생각들까지도 버려라.

30. 지혜로운 이에게 마땅한 일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서 교훈을 얻는 것이다.

31.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인 것처럼, 영혼이 육신을 다스리는 것이 영혼의 일이다.

32. 육신의 쾌락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는 우리가, 과연 어떤 소망으로 그리스도를 맞이할 수 있겠는가?

33. 정욕은 고통과 슬픔을 근절시키는데, 그것이 자의적인 것이든 섭리에 의해 보내진 것이든 상관없다.

34. 탐욕은 정욕의 양식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것을 아우르는 자기만족적인 정욕을 유지하고 키우기 때문이다.

35. 슬픔은 쾌락(혹은 쾌락 추구)의 결핍을 낳으며, 쾌락은 온갖 정욕과 얽혀 있다.

36. 네가 네 몸에 어떤 잣대로 재는지, 그에 상응하여 하나님께서도 너에게 잣대를 대실 것이다(마태복음 7:2).

37. 신성한 심판의 일들은 육체를 통해 행해진 행위에 대한 보응이다.

38. 덕과 지식은 불멸을 낳으나, 그것들의 결핍은 죽음의 어머니가 되었다.

39. 하느님을 향한 슬픔은 정욕을 앗아간다. 정욕이 사라지는 것이야말로 영혼의 부활이다.

40. 무정(無情)은 악에 대한 영혼의 흔들림 없음이지만, 그리스도의 은총 없이는 이를 이룰 수 없다.

41. 그리스도는 영혼과 육체의 구세주이시며,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는 자는 모든 악에서 해방된다.

42. 구원을 얻고자 한다면, 육신의 쾌락을 버리고 절제, 사랑, 기도를 실천하라.

43. 무욕에는 참된 분별력이 따르며, 이를 통해 모든 일이 올바른 척도로 이루어진다.

44. 우리 주님이시며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니, 그분을 따르는 마음은 어둠 속에 머물지 않을 것이다.

45. 네 마음을 가다듬고 생각을 살피며, 정욕에 사로잡힌 생각을 발견하면 그것과 싸워라.

46. 생각이 생겨나는 세 가지 근원이 있으니, 감각과 기억, 그리고 육체의 충만함이다. 그중에서도 기억에서 비롯된 생각이 가장 성가신 것이다.

47. 지혜를 받은 자는 영적 존재들의 깨달음에 참여하게 되며, 세상의 시작이 무엇이고 그 끝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48. 마땅한 행실을 소홀히 하지 말라. 그리하면 네 마음이 밝아질 것이니, 이는 그들에게 “은밀하고 보이지 않는 보화를 네게 열어 보이리라”(사 45:3)고 약속되었기 때문이다.

49. 정욕에서 해방된 자는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으며, 지식을 얻은 자는 큰 자비를 누리게 된다.

50. 정욕에서 해방된 마음은 모든 존재에 대한 관조로 끊임없이 비추어짐으로써 빛을 띠게 된다.

51. 영혼의 빛은 지식이며, 이를 잃은 어리석은 자는 어둠 속을 헤매게 된다.

52. 무지한 자는 어둠 속에서 삶을 보내며, 무지의 어둠에 휩싸인다.

53. 예수를 사랑하는 자는 악에서 벗어나며, 그분을 따르는 자는 참된 빛을 보게 될 것이다.

54. 정욕에서 해방된 마음은 미묘한 생각들을 꿰뚫어 보며, 육신이 깨어 있을 때나 잠에 빠져 있을 때나 마찬가지이다.

55. 지극한 순결에 이른 마음은 피조물들에게 얽매여 있음을 느끼며, 모든 피조물 너머에 있기를 원한다.

56. 무한한 무한함에 이른 자는 복이 있다. 그러나 이를 이룰 수 있는 자는 오직 모든 한계를 넘어선 자뿐이다.

57.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그분의 말씀을 깊이 음미하며, 그 진리의 의미를 사랑하는 자는 그 진리를 깨닫는다.

58. 의로움에 이끌리는 마음은 진리를 찾으나, 어떤 정욕에 이끌리는 마음은 그것을 얻지 못한다.

59. 하나님은 그 본질상 알 수 없으시듯이, 그 위대하심 또한 측량할 수 없다.

60. 시작도 끝도 없는 존재는 그 지혜 또한 헤아릴 수 없다.

61. 모든 피조물의 구원은, 그들을 창조하신 분의 그들에 대한 온전한 섭리에 있다.

62. 주님께서는 그분의 자비로 넘어지는 모든 이를 붙들어 주시고, 땅에 쓰러진 모든 이를 일으키신다.

63. 그리스도는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이시며, 모든 행위에 대해 의로운 보응을 주시는 분이시다(행 10:42; 시 61:13).

64. 만일 네 영혼과 몸을 다스리고자 한다면, 정욕의 원인을 미리 끊어내라.

65. 영혼의 힘을 미덕과 결합시키면, 모든 정욕의 욕망이 그로부터 떨어져 나갈 것이다.

66. 정욕의 욕망을 절제로 다스리고, 분노의 욕망을 영적인 사랑으로 다스려라.

67. 침묵 속의 은둔과 기도는 미덕을 위한 가장 강력한 도구이다. 이는 그것들이 마음을 정화하여 통찰력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68. 대화는 오직 영적인 것만이 유익하며, 그 외의 모든 것보다는 침묵이 더 낫다.

69. 다섯 가지 대화 중 세 가지는 유지하고, 네 번째는 자주 하지 말며, 다섯 번째는 삼가라.

70. 침묵은 세속적인 것에 대한 편견이 없는 이를 사랑하며, 인간적인 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

71. 참된 스승은 양심이며, 이를 따르는 자는 흠잡을 데 없이 지낸다.

72. 양심이 해치지 않는 사람은 오직 덕의 정점에 도달한 자나, 악의 가장 깊은 곳으로 떨어진 자뿐이다.

73. 완전한 무욕은 순수한 생각을 낳고, 완전한 깨달음은 우리를 헤아릴 수 없는 분의 면전으로 이끈다.

74. 육신의 쾌락을 얻지 못한 자는 칭찬받을 만한 슬픔에 잠기나, 이를 경멸한 자는 근심 없이 머문다.

75. 슬픔이란 일반적으로 바라는 쾌락의 상실을 말하는데,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든, 세상의 정신에서 오는 것이든 마찬가지이다.

76. 하나님의 나라는 선함과 지혜이며, 이를 얻은 자는 하늘에서 거한다.

77. 영혼은 육신이며, 하나님보다 세상의 일을 더 중히 여긴 사람은 비참하다.

78. 선을 행하는 자를 시기하지 않고, 선을 행하지 않는 자를 안타까워하는 자는 모든 이에게 동등한 사랑을 얻었다.

79. 영혼과 육신을 위해 덕행의 요구를 법으로 정한 자가 마땅히 통치해야 한다.

80. 영적인 현명한 상인은, 미래를 위해 이 세상의 기쁨과 슬픔 모두를 동등하게 버린 자이다.

81. 영혼은 사랑과 절제로 굳건해지며, 마음(영)은 순수한 기도와 영적 묵상으로 굳건해진다.

82. 유익한 말씀을 들을 때, 말하는 이를 판단하지 말라. 그래야만 영혼을 구원하는 교훈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

83. 악한 마음은 악한 생각을 품으며, 이웃의 올바른 행실을 그 행실을 비뚤게 해석함으로써 잘못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84. 이웃을 정죄하는 생각을 믿지 말라. 악한 보물을 가진 자는 악한 생각도 하기 때문이다.

85. 선한 마음은 선한 생각을 낳는다. 그의 마음속에 간직한 보물에 따라 그의 생각도 결정되기 때문이다.

86. 생각을 조심하고 악을 피하라. 그래야 네 마음이 어두워지지 않고 사물을 왜곡하여 보지 않게 될 것이다.

87. 유대인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라. 그들은 시기심에 눈이 멀어, 주님이시며 하나님이신 분을 벨제불이라 모독하였다.

88. 악한 의심은 마음을 어둡게 하여, 그로 하여금 잘못된 것을 옳은 것으로 보게 만든다.

89. 모든 미덕의 곁에는 정욕도 솟아나기 마련이니, 그렇기에 정욕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미덕을 정욕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90. 마음이 오랫동안 기쁨이나 슬픔에 머물러 있으면, 곧 절망이라는 정열에 빠지게 된다.

91. 깨끗한 양심은 영혼을 고양시키지만, 불순한 생각은 영혼을 지옥 깊은 곳으로 떨어뜨린다.

92. 움직이기 시작한 정욕은 허영을 쫓아내지만, 정욕이 사라지면 허영은 다시 돌아온다.

93. 모든 정욕을 한꺼번에 떨쳐버리고 싶다면, 절제와 사랑, 기도를 실천하라.

94. 기도로 하나님 안에 머무는 마음은 영혼의 정욕적인 부분마저 정욕에서 해방시킨다.

95. 하나님께서는 피조물들에게 존재를 주셨으며, 그분의 섭리로 그들을 모두 포용하십니다.

96. 만물의 주님이시면서도, 기꺼이 종이 되시기를 원하셨으며, 이를 통해 피조물에 대한 그분의 섭리의 지극한 높이를 보여주셨다(빌립보서 2:7).

97. 하나님 말씀께서는 변함없이 성육신하셔서, 육신을 통해 온 피조물과 하나가 되셨습니다.

98. 하늘과 땅에서 놀라운 기적은, 하나님이 땅에 계시고 사람이 하늘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사람들을 천사들과 결합시켜, 온 피조물과 함께 신성화를 베풀기 위함입니다.

99. 천사들과 사람들의 성화와 신성화는 거룩하시고 동일 본질하신 삼위일체를 아는 것이다.

100. 죄의 용서는 정욕으로부터의 해방이며, 은총으로 그 정욕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는 아직 용서를 얻지 못한 것이다.

 

제102편

이 시의 아크로스티크는 다음과 같다: “나를 위해 기도해 주오, 가장 정직한 형제여; 나는 내 제멋대로인 행실대로 마땅히 큰 재앙을 맞이할 것이니, 곧 영혼의 슬픔과 육체의 고통을.”

1. 한 번에 정욕에서 벗어나고 싶습니까? – 정욕의 어머니인 자만심을 버리십시오.

2. 영혼의 건강은 무정욕과 지혜이며, 육체의 쾌락에 사로잡힌 자에게는 이를 얻을 수 없다.

3. 육체적, 영적 쾌락 추구를 말리는 것은 인내를 동반한 절제와 너그러움을 지닌 사랑이다.

4. 영혼에 있어 악한 정욕의 시작은 자만심이며, 자만심은 곧 육체를 사랑하는 마음(혹은 자기 연민)이다.

5. 이성의 특징은 자신을 이성에 복종시키는 동시에, 육체를 자신에게 복종시키고 지배하는 것이다.

6. 이성적인 존재가 이성적이지 않은 것에 복종하고, 수치스러운 욕망의 충족만을 꾀하는 것은 비난받을 일이다.

7. 이성적인 영혼에게 있어 자신을 창조하신 분을 떠나 육신을 숭배하는 것은 파멸을 초래한다.

8. 너는 육체를 노예로 삼으라는 명령을 받았으니, 그 육체의 쾌락에 사로잡히는 것은 본성에 어긋나는 일이다.

9. 육체와의 유대 관계를 끊고, 이 종에게 꼭 필요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주지 마라.

10. 감각들을 침묵의 은둔이라는 요새에 가두어, 그것들이 마음을 그들에게 고유한 정욕으로 이끌지 못하게 하라.

11. 인내하며 침묵을 지키는 이에게 가장 강력한 무기는 절제, 사랑, 기도, 그리고 독서이다.

12. 마음은 육체의 쾌락이라는 대상들을 맴돌기를 멈추지 않으니, 육체를 정복하고 관상에 몰두할 때까지는 그러할 것이다.

13. 우리는 정욕에서 벗어나기 위해 계명을 지키기 위해 힘쓰고, 하나님의 교리를 지키기 위해 지혜를 얻기 위해 힘쓴다.

14. 영혼의 평온은 무정(無情)과 깨달음에서 비롯되며, 육체적 쾌락에 사로잡힌 자에게는 이를 얻을 수 없다.

15. 육체의 쾌락을 갈망하는 욕망을 잘라내어 육체를 정복하라. 그러면 육체가 그 욕망에 얽매인 무거운 속박에서 해방될 것이다.

16. 자유로이 창조되었고, 자유를 향해 부름받은 자로서, 불결한 정욕에 아부하지 않도록 하라.

17. 슬픔과 기쁨, 욕망과 두려움으로 악마들은 마음을 감각적인 것에 묶어 둔다.

18.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정욕을 억제하고, 하나님을 향한 그리움은 쾌락 추구를 물리친다.

19. 지혜에 대한 갈망은 두려움을 경멸하고, 지식의 달콤함은 슬픔을 쫓아낸다.

20. 성경에는 다음 네 가지 주제가 담겨 있다: 계명, 교리, 경고, 그리고 약속.

21. 절제와 수고는 정욕을 멈추게 하고, 침묵 속의 은둔과 신성한 사랑은 정욕을 말려버린다.

22. 수수께끼 같고 의심스러운 말로 형제를 상처 입히지 말라. 만일 네게 그런 일이 생긴다면, 너 자신도 그것을 견디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23. 분노를 멈추게 하는 것은 너그러움과 악의를 품지 않는 마음이며, 그것을 없애는 것은 사랑과 연민(관용)이다.

24. 지식을 받은 자에게는 지혜의 빛이 주어지나, 그것을 받고도 훼손하는 자는 어둠을 보게 될 것이다.

25. 계명을 지키는 것은 무욕을 낳고, 무욕은 지혜가 지키는 것이다.

26. 감각적인 것을 지적인 관조로 전환하면, 감각을 감각 이상의 차원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

27. 여인은 금욕 수행에 몰두하는 영혼을 상징하며, 그녀와의 결합을 통해 이성은 덕을 낳는다.

28.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것은, 이를 진실하고 경건하며 열정적으로 추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가르쳐 준다.

29. 보는 자와 보이는 것에게 빛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자와 생각되는 것에게는 하나님이 계신다.

30. 감각적인 천지는 믿음의 천지를 의미하며, 그 위에서는 모든 성인들이 천체들처럼 빛나고 있다.

31. 예루살렘은 초천상의 도시, 즉 무형의 세계에 대한 지식이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세상의 비전이 관조되기 때문이다.

32. 활동적인 삶을 소홀히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지식도 줄어들 것이며, 그때 그로 인해 닥친 기근 때문에 이집트로 내려가게 될 것이다(창세기 26:1, 2).

33. 영적 자유는 정욕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은총 없이는 아무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34. 약속의 땅은 천국이며, 무정욕과 지식이 우리를 그곳에 합당한 자로 만들어 준다.

35. 영적인 이집트는 정욕에 의한 어둠인데, 누구도 먼저 기근을 겪지 않고서는 그곳으로 내려가지 않는다.

36. 네 귀를 영적인 말씀으로 채우라. 그리하면 네 마음을 불결한 생각에서 멀어지게 할 것이다.

37. 본성상 선하시고 지극히 지혜로우신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뿐이시나, 마음도 이를 갈망한다면 성찬을 통해 그러한 존재가 될 수 있다.

38. 배와 잠과 분노와 혀를 절제하라. – “그리하면 네 발이 돌에 걸리지 아니하리라”(시 90:12).

39.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기 위해 힘쓰라. 그러면 한 번에 모든 정욕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40. 감각적인 시각은 이성과 감각이 공유하지만, 지적인(영적인) 인식은 오직 이성만의 고유한 영역이다.

41. 미리 감각과 감각적인 것에 대한 성향을 끊어내지 않고서는, 이성이 영적인 대상에 몰두할 수 없다.

42. 자연적인 감정은 감각적인 것에 치우쳐 있으며, 그것에 의해 산만해지면 이성도 함께 산만해진다.

43. 감각을 이성의 종으로 삼고, 감각이 이성을 산만하게 할 시간을 주지 마라.

44. 마음이 감각적인 것에 몰두하려 할 때, 감각으로 인한 산만함을 미리 막고, 눈앞에 놓인 영적 깨달음으로 마음을 이끌어라.

45. 마음이 영적인 일에 몰두하고 있다는 징표는 감각을 즐겁게 하는 모든 것을 경멸하는 것이다.

46. 영적인 대상들을 관조하고자 하는 마음은 그로부터 끊이지 않는 달콤함을 얻는다.

47. 마음이 ‘하나’에 대한 지식으로 풍요로워지면, 그때야말로 감각마저도 확실히 자신에게 복종하게 된다.

48. 네 마음이 감각적인 것들에 휩쓸리지 않도록 하라. 그래야만 그 것들에 따르는 기쁨과 슬픔을 겪지 않을 것이다.

49. 마음이 항상 영적인 대상에 몰두하는 이들에게는, 영혼의 소망스러운 부분마저 신성한 무기가 된다.

50. 먼저 영혼의 소망스러운 부분이 그 본성에 맞는 미덕으로 단장되지 않는다면, 마음이 깨달음으로 충만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51. 이성은 감각적인 것에 대한 모든 감정을 완전히 끊어낼 때 비로소 세상과 거리를 두게 된다.

52. 영혼의 이성적인 부분의 특징은 하나님을 아는 데 힘쓰는 것이어야 하며, 욕망적인 부분의 특징은 사랑과 절제여야 한다.

53. 이성은 그에 대한 어떤 편애도 없다면, 항상 감각적인 것에 몰두할 수는 없다.

54. 지식이 충만한 마음이야말로 완전한 마음이며, 미덕에 확고히 뿌리내린 영혼이야말로 완전한 영혼이다.

55. 지성이 감각적인 것에 기울어지면, 그것은 육체의 쾌락에 노예가 된다.

56. 바람직한 부분이 자신의 미덕에서 멀어지면, 이성도 지식의 자리에서 벗어나게 된다.

57.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권세”를 받았으나(요한복음 1:12), 정욕을 떨쳐내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

58. 아직 자신 안에 신성한 성품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누구도 자신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59. 선한 품성이나 악한 품성을 받아들이는 것은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거나 사탄의 아들이 되게 한다.

60. 현명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잘 살피고, 온갖 더러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두르는 사람이다.

61. 완고해진 영혼은 채찍질당해도 느끼지 못하며, 선행을 베푸는 이에게서도 아무런 감정도 받아들일 수 없다.

62. 부정한 옷을 입은 자는 신성한 혼인 잔치에서 쫓겨나, 칠흑 같은 어둠의 동참자가 된다(마태복음 22:12, 13).

63.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자신의 영혼을 돌보며, 악한 운명에서 스스로를 구원한다.

64. 하나님을 떠나 육신의 쾌락에 아부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비를 얻을 수 없다.

65.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마태복음 6:24)고 말씀하셨으나, 우리는 이를 믿고 싶지 않아 한다.

66. 더럽혀진 영혼은 정욕으로 인해 완고해지며, 절단과 소작 없이는 믿음을 가질 수 없다.

67. 거칠어진 자들에게는 끔찍한 시련이 필요하다. 강한 고통 없이는 그들이 부드러워질 수 없기 때문이다.

68. 분별 있는 사람은 자신의 영혼을 돌보며, 자발적인 고행을 통해 비자발적인 고통을 피한다.

69. 영혼을 돌보는 것은 자학(자신을 죽이는 행위)과 겸손이며,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를 용서하신다.

70. 정욕과 분노가 죄를 불어나게 하듯이, 절제와 겸손은 죄를 지워 버린다.

71. 하느님을 향한 슬픔은 마음을 찢어 놓으며, 지옥의 고통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바로 그 슬픔을 낳는다.

72. 하느님을 향한 슬픔은 마음을 정화시키고, 불결한 쾌락으로부터 마음을 멀어지게 한다.

73. 인내는 영혼의 근면함(영혼을 지치게 하려는 소망)이다. 그러한 근면함이 있는 곳에는 쾌락 추구가 쫓겨난다.

74. 모든 죄는 쾌락을 위해 저질러지나, 모든 용서는 고통과 슬픔을 위해 주어진다.

75. 자발적인 고통을 동반한 회개를 실천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비자발적인 고통을 겪게 된다.

76. 그리스도는 온 세상의 구세주이시며, 그분은 사람들에게 구원을 위한 회개를 베풀어 주셨다(마태복음 4,17).

77. 회개는 계명을 지키는 것을 낳고, 계명을 지키는 것은 영혼을 정화한다.

78. 영혼의 정화는 정욕으로부터의 해방이며, 정욕으로부터의 해방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낳는다.

79. 하나님을 사랑하는 영혼은 깨끗하며, 무지에서 해방된 마음은 깨끗하다.

80. 하나님의 계명을 위해 죽을 때까지 힘쓰라. 그 계명을 통해 정화되면, 너는 생명에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81. 몸을 계명의 종으로 삼아, 가능한 한 쾌락을 탐하지 않고 고통 없이(건강하게) 유지하라.

82. 육체의 반란은 기도와 절제, 침묵을 소홀히 할 때 일어난다.

83. 선한 침묵은 선한 열매, 즉 사랑과 절제, 그리고 순수한 기도를 낳는다.

84. 독서와 기도는 마음을 정화시키고, 사랑과 절제는 영혼의 갈망하는 부분을 정화시킨다.

85. 항상 일관된 절제를 지키라. 불규칙함으로 인해 그와 정반대의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하라.

86. 스스로에게 법을 정했다면, 나중에 그 법을 소피스트처럼 비뚤게 해석하여 자신을 배반하지 말라. 왜냐하면 이런 식으로 법에서 벗어나는 자는 스스로를 현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자신이 곧 악마인 것이다).

87. 정욕에 사로잡힌 영혼들은 마음의 황혼과 같다. 왜냐하면 그런 영혼들 속에는 진리의 해가 지었기 때문이다.

88. 자비, 지혜, 힘, 그리고 진리에서 하나님과 닮은 자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89. 영혼의 병은 악한 성향이며, 그 죽음은 행위로 인해 저지른 죄이다(롬 5:12).

90. 영적인 무소유는 완전한 무욕이며, 이를 통해 마음은 이 세상의 모든 것에서 멀어진다.

91. 모든 것을 덕에 따라 행하라. 왜냐하면 그로부터 의의 열매가 맺히기 때문이다.

92. 사고의 대상에 대한 관조는, 사람들이 말하듯이, 물질과 형상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비물질적인 것이다.

93. 네 가지 원소가 물질과 형상으로부터 낯설지 않은 것처럼, 그것들로 이루어진 육체도 마찬가지로 낯설지 않다.

94. 사람을 사랑하심으로써 육신이 되신 말씀(요한복음 1:14)은, 본래의 모습을 변질시키지도 않았고, 육신이 되신 후의 모습도 바꾸지 않으셨다.

95. 우리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 즉 그분이 신성과 인성을 지니시고, 신성과 인성 안에 계시며, 또한 두 본성을 지니시고 두 본성 안에 계신 분에 대해 말합니다.

96. 우리는 분리될 수 없이 결합된 두 본성을 지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인격을 고백합니다.

9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고 분리될 수 없는 인격을 찬양하며, 그분 안에 있는 두 본성의 혼합되지 않은 일치를 고백합니다.

98. 우리는 삼위일체이시며 하나이신 신성의 본성에 경배하며, 동일 본질인 성삼위를 찬양합니다.

99. 세 위격 각각에게 고유한 것은 아버지됨, 아들됨, 발출이며, 세 위격에게 공통된 것은 실체, 본성, 신성, 선하심이다.

 

백세 번째

이 장의 아크로스티크는 다음과 같다: “ ” 악이란 본래 육신을 괴롭히되 영혼을 정화하는 것이 아니라, 양심을 모욕하되 육신을 달래주는 것을 말해야 한다.

1. 본성상 선하신 분에 대해서는 선한 생각을 품고, 모든 사람에 대해서는 선한 마음을 품으라.

2. 심판의 날에 우리는 말과 행실, 그리고 생각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3. 선한 것 또는 악한 것에 대한 습관은 우리로 하여금 선한 것 또는 악한 것을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게 한다.

4. 정욕에 사로잡힌 마음은 부적절한 생각을 품게 되며, 그 생각은 말과 행동으로 드러난다.

5. 나쁜 생각 앞에는 정욕이 있고, 정욕의 원인은 감정이며, 이를 나쁘게 사용하는 원인은 분명히 마음이다.

6. 감정을 억제하고, 생각을 다스리며, 계명의 무기로 자신의 정욕을 정복하라.

7. 악은 오래된 것이며, 이를 극복하는 데는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뿌리 깊은 습관은 쉽게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8. 인내와 침묵을 동반한 절제와 사랑의 지속적인 노력은 쌓여 있는 정욕을 소멸시킨다.

9. 자주 마음을 기도에 집중하면, 마음속을 맴도는 생각들을 쫓아낼 수 있다.

10. 수행은 인내와 용기를 요구한다. 왜냐하면 쾌락 추구는 오직 오랫동안 기꺼이 스스로를 고생시키는 것 외에는 쫓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11. 모든 일을 적당히 그리고 규칙에 따라 행한다면, 수행의 업적을 순조롭게 이룰 수 있을 것이다.

12. 수행에 있어 항상 일정한 절제를 지키고, 극도의 필요 없이는 정해진 규칙을 어기지 마라.

13. 사랑과 절제가 생각을 정화하듯이, 묵상과 기도는 “모든 것을 높이 들어 올리는 것”(고린도후서 10,5)이다.

14. 금식, 철야 기도, 인내, 너그러움과 같은 수행의 수고가 양심을 깨끗하게 한다.

15. 자의하지 않은 유혹의 시련을 기꺼이 견뎌내는 사람은 겸손하고 지혜로우며, (영적으로) 능숙하고 신뢰할 만한 사람이 된다.

16. 인내는 스스로 수고하고자 하는 마음의 소망에 기초하며, 이는 파생된 수고와 불가피한 유혹을 이겨내는 데에 있다.

17. 끔찍한 모함을 기꺼이 견뎌내면 악의를 품지 않는 마음이 생겨나며, 끝까지 인내하면 영혼 속의 모든 악을 뿌리 뽑는다.

18. 닥친 중대한 시련의 타격은 마음을 찢어 놓으며, 그로 인해 생겨나는 슬픔은 쾌락 추구를 몰아낸다.

19. 네 가지 주요한 정욕이 있는데, 섭리는 이 중 하나를 다른 하나에 대항하여 지혜롭게 이용한다.

20. 왜냐하면 쾌락 추구는 슬픔을 불러옴으로써 소멸되고, 정욕은 지옥의 고통에 대한 두려움에 의해 시들게 되기 때문이다.

21. 분별력 있는 마음은 영혼에게 영적인 행실을 가르치고, 육체에게는 온갖 육체적인 수련을 익히게 한다.

22. 수도사로서 겉모습뿐만 아니라 내면의 모습도 드러내도록 힘쓰라. 즉, 정욕으로부터 정화함으로써 말이다.

23. 첫 번째 포기란 재물로부터의 해방이며,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정욕과 무지로부터의 해방이다.

24. 원하는 사람은 물건으로부터 쉽게 벗어날 수 있으나, 물건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노력이 필요하다.

25. 정욕을 손에 쥐고 있는 자는 분노도 다스릴 수 있다. 왜냐하면 정욕 속에 분노를 일으키는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26. 그렇다면, 우리는 정욕적인 생각에서 정화되었는가? 그리고 그 결과로 순수하고 비물질적인 기도를 맛보았는가, 아니면 아직 아닌가?

27. 마음이 정욕에서 해방되고, 모든 피조물을 버리며, 하나님 안에 거한다면 그 마음은 위대한 것이다.

28. 성공하는 자는 다음 세 가지 주제, 즉 계명의 이행, 교리의 인식, 그리고 성삼위일체에 대한 믿음에 대해 깊이 사색한다.

29. 정욕에서 해방된 마음은 바로 다음과 같은 것들에 집중한다. 즉, 미묘한 사색, 피조물의 관조, 그리고 영원한 빛이다.

30. 우리 영혼 속에는 가장 사악한 정욕들이 숨어 있으나, 그들의 행적이 드러날 때 비로소 명백해진다.

31. 때로는 마음이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며, 어느 정도의 무감정을 얻기도 하지만, (실천적인 수련을 위한) 대상들이 부족하기 때문에 여전히 숙달되지 못한 채로 남는다.

32. 정욕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 대상에 대한 기억, 육체의 만족과 안락, 그리고 감각이라는 세 가지에서 비롯된다.

33. 감각을 잘 다스리고 육체를 질서 있게 정립한 마음은 오직 하나의 싸움, 즉 기억과의 싸움만을 갖게 된다.

34. 절제와 영적 사랑이 없을 때, 감각을 통해 정욕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35. 절제된 금식, 기도, 그리고 시편 찬송은 대개 신체의 상태를 질서 있게 정돈해 준다.

36. 다음 세 가지가 몸의 상태를 명백히 악화시킨다. 즉, 무질서한 식단, 기후 변화, 그리고 악령의 유혹이다.

37. 격렬한 생각은 기도, 독서, 절제, 그리고 사랑으로 누그러뜨릴 수 있다.

38. 먼저 침묵으로 감각을 가두고, 그다음 미덕이라는 무기로 기억을 물리쳐라.

39. 마음의 죄는 악한 생각을 악용하는 것이며, 행위의 죄는 사물을 악용하는 것이다.

40. 생각과 사물을 악용하는 것은 불경건한 것이며, 둘 다 악을 위해 사용하는 것은 불의한 것이다.

41. 비난받을 만한 정욕은 마음을 감각적 욕망에 묶어두는 족쇄이다.

42. 어떤 일이나 사물, 혹은 그것들에 대한 기억에도 편애가 없는 자야말로 완전한 무정심을 지닌 자이다.

43. 선한 영혼은 이웃에게 자선을 베풀며, 배은망덕함을 마주하더라도 그에게 너그러운 태도를 보이고, 그로 인해 피해를 입더라도 인내하며 견딘다.

44. 악한 생각은 그 자체로 악이며, 그것으로부터 정화되지 않은 자는 참된 지혜를 배우지 못한다.

45.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자는 스스로를 빛으로 이끄며, 그분을 본받는 자는 스스로를 바로잡는다.

46. 원한을 품는 것은 영혼의 나병과 같으며, 이는 모욕이나 손실, 혹은 의심스러운 생각 때문에 발생한다.

47. 주님께서는 시기하는 자의 마음을 어둡게 하시니, 이는 그가 이웃의 복을 의롭게 슬퍼하지 않기 때문이다.

48. 비방하는 영혼은 세 갈래 혀를 가졌으니, 이는 자신과 듣는 자를 상처 입힐 뿐만 아니라, 때로는 비방받는 자까지도 상처 입히기 때문이다.

49. 모욕한 자를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는 자는 악의를 품지 않는 자이며, 그에게 베풂을 아끼지 않는 자는 원한을 품지 않는 자이다.

50. 이웃에 대한 증오는 영혼의 죽음이다. 이것이 바로 비방하는 자의 영혼이 가진 것이며, 스스로에게 초래하는 것이다.

51. 나태함은 영혼의 쇠퇴에서 비롯되며, 쾌락에 빠져 있는 영혼은 근면하지 못한다.

52. 주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는 수행의 수고에 전념하며, 이러한 수고에서의 끈기는 나태함을 몰아낸다.

53. 영혼은 수행의 수고를 통해 강해지며, 모든 것을 적당히 행함으로써 나태함을 물리친다.

54. 배를 다스리는 자는 정욕을 말리고, 그의 마음은 음란한 생각에 굴복하지 않는다.

55. 절제하는 자의 마음은 성령의 성전이며, 배를 채우는 자의 마음은 까마귀의 보금자리이다(이사야 34:11).

56. 포만감은 온갖 음식에 대한 탐욕을 낳지만, 단 것을 굶주림은 빵 한 조각조차 달콤하게 만든다.

57. 남이 시기하는 대상을 은밀히 기뻐하는 자는 시기심에서 벗어나며, 시기할 만한 것을 감추는 자는 남의 시기심을 없애준다.

58. 비록 많은 이에게 명성이 높더라도, 게으르게 사는 자에게는 멀리하라.

59. 근면한 사람을 친구로 삼으라. 그러면 그에게서 네 죄를 덮어줄 것을 발견하리라.

60. 게으른 자는 자신을 많은 주인에게 팔아넘겼으니, 그들이 그를 이끄는 대로 그는 살아간다.

61. 게으름은 친구처럼 평화로운 때에는 너에게 호의를 베풀지만, 유혹이 닥칠 때에는 원수처럼 너에게 대적한다.

62. 그것은 정욕이 일어나기 전에는 네 영혼을 대신해 주지만, 정욕이 일어나면 네 영혼을 자기 것으로 삼는다.

63. 방치된 땅은 가시덤불로 뒤덮이고, 게으른 영혼은 불결한 정욕으로 가득 차게 된다.

64. 분별 있는 마음은 자신의 영혼을 다스리고, 몸을 고갈시키며, 정욕을 자신에게 복종시킨다.

65. 눈에 보이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 내면의 움직임을 나타내는 지표와 같으니, 마치 맺은 열매가 어떤 나무에서 나온 것인지 알려주듯이 말이다.

66. 말과 행실은 위선자를 드러내듯이, 은밀한 거짓 선지자도 마찬가지로 드러낸다.

67. 미쳐버린 마음은 자신의 영혼을 가르치지 못하며, 영혼을 사랑과 절제에서 멀어지게 한다.

68. 부도덕한 생각의 원인은 허영, 교만, 오만함으로 지탱되는 나쁜 성품이다.

69. 앞서 언급한 정욕에 사로잡힌 자에게는 위선과 교활함은 물론, 악의적인 간계, 조롱, 그리고 가장 추잡한 거짓말이 특징이다.

70. 이러한 사람들은 또한 시기심과 과잉 열정, 분노와 격분, 슬픔과 원한에 굴복한다.

71. 이것이 게으름 속에 사는 자들의 길이며, 이것이 내 안에 감춰진 보물들이다.

72. 고행(엄격한 육체적 수행)과 겸손은 영혼을 구원하며, 앞서 언급한 정욕들로부터 영혼을 해방시킨다.

73. 현명한 마음의 표징은 유익한 말이며, 선한 영혼의 표징은 선한 행실이다.

74. 깨달은 마음은 지혜로운 말을 내뱉고, 순수한 영혼은 신성한 생각을 가꾸어 나간다.

75. 열심 있는 자의 생각은 지혜를 배우며, 그의 말은 듣는 이들에게 깨달음을 준다.

76. 영혼에 선한 성향이 깃들어 있으면, 선한 생각을 키우게 되고, 악한 성향이 깃들어 있으면, 부도덕한 생각을 낳게 된다.

77. 정욕에 사로잡힌 영혼은 악한 생각의 온상이며, 그 보물창고에서 악한 것을 꺼내어 내보낸다(마태복음 12,35).

78. 선한 보물은 덕스러운 습관이며, 선한 마음은 그 보물에서 선한 것을 꺼낸다.

79. 신성한 사랑에 이끌리는 마음은 하나님에 대한 선한 생각을 가꾸지만, 자만심에 이끌리는 마음은 그와 정반대의 생각을 낳는다.

80. 이웃에 대한 사랑에 이끌리는 마음은 끊임없이 그에 대해 선한 것을 생각한다(고린도전서 13, 5); 그러나 그와 반대되는 것에 이끌리는 마음은 그에게서 악한 것을 가정한다.

81. 선한 생각의 원인은 덕이며, 덕의 원인은 계명이고, 계명을 실천하는 것은 선한 의지이다.

82. 미덕과 악덕은 영혼 안에 머물거나 영혼을 떠날 때, 영혼을 선하거나 악하게 이끌며, 서로 적대적인 생각들로 영혼을 부추긴다.

83. 악한 생각의 원인은 정욕이며, 정욕의 원인은 계명을 무시하는 것이고, 계명을 무시하는 것의 원인은 감각에 현혹되는 것이며, 감각에 현혹되는 것의 원인은 감각을 다스리는 데 있어 이성의 소홀함이다.

84. 성장 중인 자들에게는 선한 성향이 여전히 반대쪽으로 쉽게 뒤바뀔 수 있으나, 완성된 자들에게는 이러한 성향이 쉽게 뒤바뀌지 않는다.

85. 영혼의 힘은 덕행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습관이며, 이를 이룬 이는 “누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는가?”(롬 8:35)라고 말했습니다.

86. 모든 정욕의 앞에는 자애심이 있으며, 모든 정욕의 뒤에는 교만이 따른다.

87. 세 가지 주요한 정욕은 자기애라는 정욕에서 비롯된다.

88. 이 세 가지는 탐식, 허영, 탐욕이며, 이로부터 다른 모든 정욕이 비롯된다.

89. 식욕 방종 뒤에는 음행이 따르고, 허영 뒤에는 교만이 따르며, 그 밖의 정욕들은 이 세 가지 모두 뒤를 따른다.

90. 이 세 가지 뒤에는 슬픔, 분노, 원한, 시기, 나태 및 그 밖의 것들이 뒤따릅니다....

 

기도

1. 만물의 주님이신 그리스도여! 이 모든 것에서 우리를 구원하소서. 해로운 정욕으로부터뿐만 아니라, 그것들이 낳는 생각들로부터도 우리를 구원하소서.

2.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창조되었으니, 주님께서 심으신 낙원에 거하며 주님 안에서 복을 누리게 하소서.

3. 그러나 지금의 불명예는 우리가 스스로 초래한 것이니, 복된 기쁨 대신 파멸을 선택하였기 때문입니다.

4. 그로 인해 우리는 스스로 그 대가를 치렀으니, 영생 대신 죽음을 상속받았습니다.

5. 이제 주님,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를 돌보아 주셨으니, 끝까지 우리의 보호자가 되어 주시옵소서. 우리를 위해 육신을 입으시기를 기꺼이 하신 것처럼, 우리 모두를 구원해 주시옵소서.

6. 주님은 멸망한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으니, 구원받는 자들의 무리에 우리를 배제하지 마소서.

7. 우리의 영혼을 부활시키시고, 육신을 구원하시며, 온갖 더러움에서 우리를 정화해 주소서.

8. 우리를 옭아매는 정욕의 멍에를 부수소서, 마치 더러운 악마들의 무리를 부수신 것처럼.

9. 그리고 그들의 폭정에서 우리를 건져내시어, 우리가 오직 한 분이신 영원한 빛이신 주님을 섬기게 하소서.

10.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여 천사들과 함께 하나 되고, 복되고 영원히 끊어지지 않는 합창단을 이룰 때를 위하여.

 

제104편

이 찬송의 머리글자 시는 다음과 같습니다: “ ”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 부지런히 기도하여, 실제적인 악과 실제적이지 않으나 그렇게 여겨지는 악 모두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1. 육체의 욕망과 유혹에서 마음을 끊은 자는, 생명을 주시는 성령으로 “육신의 행실을 죽인” 자이다(롬 8:13).

2. 네 마음이 여전히 육신에 속한 일에 몰두하고 있다면, 육신에 대한 성향을 떨쳐내려 하지 마라.

3. 육체에는 감각과 감각적인 것이 본성인 것처럼, 영혼에게는 이성과 사고적인 것이 본성이다!

4. 영혼을 감각과 감각적인 것에서 돌이키면, 네 마음은 하나님 안에 머물며 영적인 것들에 몰두하게 될 것이다.

5. 지적인 본성은 오직 이성으로만 인식될 수 있으며, 신성과 친화적이다. 반면 감각과 감각적인 것들은 이성을 섬기도록 창조되었다.

6. 감각과 감각적인 것들이 육체의 정욕을 충족시키는 데 쓰이지 말고, 영적인 관상에 도움이 되도록 하라.

7. 너에게 “육신의 행실을 죽이라”는 명령이 내려졌으니, 이는 육신의 쾌락으로 죽어버린 영혼을 고된 수고를 통해 다시 살리기 위함이다.

8. 하나님으로부터 주권을 받으라. 그리고 감각을 다스리며, 더 나은 존재로서 너보다 못한 것이 너를 지배하게 하지 말라.

9.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무한하시며, 제한이 없으시며, 그분을 따르는 자들에게 영원하고 무한하며 형언할 수 없는 복을 약속하셨다.

10. 이성은 하나님 안에 거하며, 그분에 대해 사색하는 것이 본성이니, 이는 그분의 섭리와 그분의 무서운 심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11. 이쪽이나 저쪽으로 기울어질 권능이 있겠지만, 더 나은 편에 서면 더 나쁜 것을 네 뜻대로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다.

12. 감성과 감각적인 것들은 선하신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훌륭하지만, 결코 이성과 지적인 것과는 비교될 수 없다.

13. 하나님께서는 이성적이고 사고하는 본성을 모든 것과 그분 자신을 인식할 수 있도록 창조하셨으며, 감각과 감각적인 것은 이를 유용하게 활용하기 위해 만드셨다.

14. 순종할 줄 모르는 노예가 선한 주인을 지배하는 것이 부적절하듯이, 이성적인 마음이 썩어 없어질 육신을 지배하는 것도 부적절하다.

15. 감각을 다스리지 못하는 이성은 감각을 통해 죄에 빠지게 된다. 감각적 쾌락에 현혹되어, 대개 방탕함을 낳기 때문이다.

16. 감각을 자신의 지배 아래 두되, 기억도 단단히 잠가 두라. 왜냐하면 먼저 감각을 통해 얻은 인상들이, 나중에는 그에 대한 회상을 통해 다시 정욕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17. 몸을 혹사하고 더 자주 기도하라. 그러면 곧 편견 어린 생각에서 벗어날 것이다.

18.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라. 이 일에 부지런히 힘쓰는 것이 정욕을 근절하기 때문이다.

19. 독서, 철야 기도, 기도, 그리고 시편 찬송은 마음이 정욕적인 것들에 휩쓸리는 것을 막아준다.

20. 봄이 식물을 깨워 생기를 불어넣듯이, 무정욕은 마음을 움직여 존재하시는 분을 깨닫게 한다.

21. 계명을 지키면 평안을 얻으리라; 하나님을 사랑하면 지식을 얻으리라.

22. 고통스러운 수고와 이마의 땀 속에서, 너는 지식의 빵을 먹어야 할 운명에 처해 있다.

23. 게으름이 우리 조상을 타락하게 했으며, 낙원의 위로 대신 죽음에 처하게 했다.

24. 너도 네 이브에게 뱀을 경계하라고 명하라. 뱀에게 유혹당하여, 그녀가 네게 금단의 열매를 건네지 않도록 하라.

25. 본성상 영혼이 육체에 생명을 불어넣듯이, 미덕과 지혜가 영혼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26.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마음은 물기 없는 구름과 같아서, 허영과 교만의 바람에 휩쓸린다.

27. 허영을 멀리하되, 음란함도 경계하여, 영예를 피하려다 불명예에 빠지지 않도록 하라.

28. 허영을 피하며 하나님을 바라보라. 그렇지 않으면 자만이나 방탕에 빠질 수 있으니.

29. 허영은 남에게 과시하기 위해 행동하는 것이 특징이며, 교만은 남을 깎아내리고 분노하는 것이 특징이다.

30. 탐식을 피하며, 사람에게 아첨하는 것을 경계하고, 겉으로만 흉내 내어 얼굴에 가식적인 미소를 짓는 것을 삼가라.

31. 적은 양의 음식을 기뻐하고, 검소한 식사에 만족하며, 동시에 남의 눈치를 보는 것을 피하는 금식은 참으로 훌륭하다.

32. 저녁까지 금식할 때, 배불리 먹지 말라. 그래야 방금 파괴한 것을 다시 만들어내는 일이 없게 될 것이다.

33. 포도주를 삼가되 물도 많이 마시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결국 음행의 빌미를 제공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34. 교만은 신의 도움을 외면하게 하고, 자기 자신에게만 의지하게 하며, 사람들 위에 우뚝 서게 만든다.

35. 교만을 이겨낼 두 가지 치료법이 있는데, 이를 이용하지 않는 자는 원치 않더라도 세 번째로 매우 가혹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36. 교만을 쫓아내는 것은 눈물을 흘리며 드리는 기도, 누구도 깎아내리지 않는 태도, 그리고 자발적이지 않은 슬픔이다.

37. 유혹을 통한 깨달음은 영적인 채찍으로,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자만하는 자에게 겸손을 가르쳐 줍니다.

38. 현명한 일은 이웃을 은밀히 헐뜯는 자의 생각에 굴복하지 않는 것이다.

39. 잡초를 뽑지 않는 채소 농부가 그 잡초들로 인해 채소의 생장을 방해하듯이, 생각을 정화하지 않는 마음은 수행의 수고를 헛되게 만든다.

40. 조언을 듣는 사람은 현명한 사람이며, 특히 그 조언이 영적 아버지로부터 하나님에 따라 제시될 때 더욱 그러하다.

41. 정욕에 사로잡힌 자는 조언을 이해할 수도 없고, 영적 지도에 순종할 능력도 전혀 없다.

42.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바른 길을 걷지 못하고, 항상 급류와 심연 속을 헤매게 된다.

43. 수도사는 감각적인 것에서 벗어난 마음이며, 쾌락을 좇는 생각은 보기도 용납하지 않는 자이다.

44. 의사는 스스로를 치유한 마음이며, 자신이 치유받은 것으로 다른 이들을 치료하는 자이다.

45. 덕을 추구하고, 그 후에는 그것을 잃지 않도록 부지런히 노력하여, 수치스럽게 살지 않고 자비 없이 죽지 않도록 하라.

4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이에게 빛을 주셨으나, 그분을 믿지 않는 자들은 스스로를 어둠 속에 가두고 있다.

47. 덕을 잃는 것을 사소한 일로 여기지 말라. 이를 통해 죽음이 세상에 들어왔다.

48. 계명을 순종하며 지키는 것이 곧 죽은 자의 부활이니, 생명은 덕의 자연스러운 결과이기 때문이다.

49. 계명을 어김으로써 마음이 죽임을 당하면, 필연적으로 육체의 죽음도 뒤따른다.

50. 아담이 계명을 어기고 죽음에 빠진 것처럼, 구세주께서는 순종하심으로 죽음을 무력화시키셨다.

51. 죄를 죽여라. 그래야 죽은 자로 다시 살아나지 않고, 작은 죽음에서 큰 죽음으로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52. 아담의 죄로 인해 구세주께서는 육신을 입으셨으니, 맹세를 이행하여 모든 이를 부활시키기 위함이다.

53. 정욕을 죽이고 무지에서 벗어난 자는 이 세상에서 영생으로 넘어간다.

54. 성경을 깊이 연구하면 계명을 발견하게 될 것이며, 그 말씀대로 행하면 정욕에서 해방될 것이다.

55. 계명을 실천하면 영혼이 정화되고, 영혼이 정화되면 빛에 참여하게 된다.

56. 생명의 나무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그분과 교제함으로써 정결해진 자는 불멸의 존재로 머무르게 된다.

57. 활동적인 삶의 시작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며, 그 끝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다.

58.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주님이시며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분은 우리에게 영생을 얻게 하려고 그분에 대한 믿음을 주셨다.

59. 그분은 신성을 영혼과 육신과 결합하여 우리에게 나타나셨으니, 이는 하나님으로서 영혼과 육신을 죽음에서 구원하시기 위함이다.

60. 우리는 지식의 빛이 솟아나는 사랑에 이르기 위해 믿음을 쌓아간다.

61. 믿음을 얻는 데 이어 다음과 같은 것들이 뒤따른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쾌락에 대한 절제, 수고에 대한 인내, 하나님에 대한 소망, 무욕, 사랑.

62. 진실한 사랑에서 본성에 대한 깨달음이 태어나며, 그 뒤에는 소망의 정점, 즉 신학의 은총이 이루어진다.

63. 정욕을 다스리는 마음은, 하나님과 그분이 경고하신 것과 약속하신 것을 믿음으로써, 오직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의 힘으로 정욕을 다스린다.

64. 믿음을 받은 자에게는 절제가 요구되며, 이 절제가 확고해지면 근면한 습관을 지탱해 주는 인내를 낳는다.

65. 인내의 표징은 수고에 대한 사랑이며, 이를 바탕으로 이성은 약속된 것을 얻게 되고 경고받은 것을 피하게 될 것이라는 소망을 품게 된다.

66. 장래의 복에 대한 기대는 마음을 소망하는 대상과 하나로 묶어 주며, 이 결합 속에 머무르는 동안 그는 현재의 복을 잊게 된다.

67. 소망하는 것을 맛본 자는 현재를 버린다. 그때 그는 자신의 모든 욕망을 그 소망하는 것에 바치기 때문이다.

68. 미래의 복은 하나님께서 친히 약속하신 것이니, 그분을 믿는 자는 미래를 마치 현재인 양 갈망한다.

69. 마음이 바라는 복들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표징은, 이 세상의 것들을 완전히 잊어버리려 애쓰며 미래의 복에 대한 인식을 넓혀가는 데 있다.

70. 진리의 하나님께서 가르치시는 선한 진리는, 그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영혼을 사방에서 확증해 주시는 것이다.

71. 약속의 상속자들에게 예비된 복은 영원하며, 모든 세기보다 앞서 있고, 심지어 이성과 언어보다도 앞선다.

72. 우리가 경건의 규범에 따라 살아가도록 합시다. 그래야 정욕에 휩쓸려도 소망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73. 예수 그리스도는 성삼위일체의 유일한 분이시며, 바로 그분의 공동 상속자가 될 것이 바로 너이다.

74. 하나님께로부터 존재하는 바에 대한 지식을 배운 자는, 성경에 예언된 바를 믿는 데 있어 어려움을 겪지 않을 것이다.

75. 성령께서는 정욕에서 벗어난 마음을 만나시면, 그에 따라 은밀히 그 마음을 소망하는 바를 깨닫게 이끄신다.

76. 마음의 정화에 따라,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으로 인도된다.

77. 자신의 몸을 마땅한 질서 속에 두며, 신성한 깨달음 안에서 수련하는 자는 바로 그 깨달음으로 인해 점점 더 정화된다.

78. 신성한 것들에 대해 지혜를 구하기 시작하는 마음은 믿음에서 출발하여, 그 후 이러한 것들 가운데서 맴돌고 나아가다가, 다시 믿음에 도달하지만, 그것은 더 높은 차원의 믿음이다.

79. 이 지혜의 시작 뒤에는 경외심이 따르고, 그 끝 앞에는 사랑이 선행한다는 것이 관찰된다.

80. 경청하는 믿음(혹은 무엇을 믿어야 할지 이해하는 믿음)에서 지혜를 구하기 시작한 마음은, 모든 이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신학에 이르게 되는데, 이는 잊혀지지 않는 믿음(항상 의식에 내재하며 그 안에서 흔들림 없이 머무르는)과 은밀한 것의 관상으로 정의된다.

81. 성스럽고 복된 우리 교부들이 하나님에 대해 말씀하신 바는, 그 말씀이 그분과 같아서(그분의 본질과 위엄에 부합하여)가 아니라, 그분에 관한 것(그분에 대해 우리 이성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우리에게 밝혀 주는 것)으로 관조된다.

82. 그분, 즉 하나님에 대한 모든 말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당연히 그분을 가리키는 것이다.

83. 예를 들어, ‘존재’, ‘신성’, ‘은총’ 및 이와 유사한 것들은 긍정적으로 말해지며, ‘시작이 없는’, ‘한계가 없는’, ‘보이지 않는’ 및 이와 유사한 것들은 부정적으로 말해진다.

84. 본성은 하나이며, 이는 모든 이성과 언어를 초월하는 것이며, 성삼위의 신성도 하나이므로, 그분에 대해 말해지고 관조되는 모든 것은 일반적으로 말해지고 관조된다.

85. 성삼위일체의 신성이 하나임을 믿는 것처럼, 그 하나의 신성을 이루는 세 위격도 고백된다.

86. 위에서 언급된 긍정적 및 부정적 속성들은 전체 성삼위일체와 동일 본질인 삼위일체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나, 인격적 속성들은 예외이며, 이 중 일부는 긍정적이고 일부는 부정적이다.

87. 신적 위격들의 인격적 속성은 아버지됨, 아들됨, 발출됨이며, 그 밖에도 위격들에게 고유하게 귀속되는 것들이다.

88. 위격은 본성과 개인적 속성으로 정의되므로, 각 위격은 본성에 공통된 것과 위격 고유의 것을 모두 지니고 있다.

89. 온 성삼위일체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속성 중에서 부정적 속성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나, 개인적 속성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앞서 언급했듯이, 그 속성들 중에서도 어떤 것은 긍정적이고, 어떤 것은 부정적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태어나지 않음’과 ‘태어남’, 그리고 이와 유사한 것들이 그러하다. ‘태어나지 않음’은 ‘태어남’과 그 의미에서 구별된다. 왜냐하면 ‘태어나지 않음’은 성부를, ‘태어남’은 성자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90. 명제와 명칭은 (제81장 참조) 성삼위의 본성에 관해 관조되는 바를 명확히 하기 위해 사용되나, 본성의 실체 자체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본성의 실체와 관련된 것은 이성으로 알 수 없고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오직 성삼위만이 아시기 때문이다.

91. 신성의 단일 본질이 삼위일체라고 불리듯이, 성삼위일체는 동일 본질로 고백된다.

92. 성부는 시작이 없으시면서도 시작이신 분으로 관상된다. 시작이 없으신 것은 태어나지 않으신 분이기 때문이며, 시작이신 것은 아들의 아버지이시며 성령을 발출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성령은 영원히 성부로부터 나오시며 성부 안에 계신다.

93. 하나이신 분은 삼위일체로 나아갈 때에도 여전히 하나로 남아 계시며, 삼위일체는 하나로 귀결될 때에도 여전히 삼위일체로 남아 계십니다. 이것이 참으로 경이로운 일입니다!

94. 아들과 성령은 무시초적(無始的)이 아니나, 영원한 분들로 고백된다. 무시초적이 아니라는 것은, 그분들이 시작과 근원인 아버지께 귀속되기 때문이며, 영원하다는 것은, 한 분은 영원부터 태어나셨고 다른 한 분은 발출되셨으며, 둘 다 아버지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95. 삼위일체의 분리될 수 없는 단일한 신성은 언제나 올바르게 관조되며, 단일한 신성의 혼합되지 않은 세 위격은 언제나 올바르게 고백된다.

96. 인격적 속성은 다음과 같다. 아버지의 경우 ‘태어나지 않음’, 아들의 경우 ‘태어남’, 성령의 경우 ‘발출됨’이다. 아들과 성령의 기원은 시간을 초월한 것으로 고백된다. 이는 마치 태양으로부터 그리고 태양 안에서 빛이 그러하듯이, 그분들도 영원한 분으로부터 그리고 영원한 분 안에서 영원한 존재를 가지시기 때문이다.

97. 위격들의 개인적 속성은 변함없고 불변하는 것으로 항상 관조되며, 공통된 본성 또는 신성은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관조된다.

98. 우리는 삼위일체 안의 하나와 하나 안의 삼위일체를, 분리될 수 없으면서도 분리될 수 있고,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결합될 수 있는 것으로 고백한다.

99. 신성 안에서 하나의 근원, 곧 아버지께서 관조되는데, 그분은 아들과 성령의 근원이시며, 그들의 영원한 근원이시자 무한하신 분의 근원이시니, 이 세 분은 본질적으로 하나이시며 분리될 수 없으시다. 모든 피조물의 창조주이시며, 섭리자이자 심판자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은, 성자 안에서 성령을 통해 아버지이시다. 이는 “그분으로부터, 그분을 통해, 그분 안에서 모든 것이 나옴”이라고 기록되어 있기에, 그분께 영원토록 영광이 있기를. 아멘 (롬 11:36).

100. 우리는 아들과 성령을 아버지와 동등한 분으로 고백하며, 그분들이 영원하고 시작이 없으시며, 그분으로부터 그리고 그분 안에서 자신의 존재와 기원을 가지신 분들로 고백합니다. 그분들은 영원히 아버지와 함께 계시고 아버지 안에 계시며, 아버지도 영원히 그분들과 함께 계십니다. 성부가 그들 없이 계셨던 순간도, 그들이 성부 없이 계셨던 순간도 결코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본질은 하나이시나 인격으로는 삼위일체이신 하나님, 그분께 영원토록 영광과 권능이 있나이다. 아멘.

 

성 테오도르, 에데스 주교

 

그에 대한 간략한 소개

에데사 주민인 부모의 기도와 환상의 결실인 테오도르는 학업을 시작했을 때 학문적 재능을 보이지 않았으나, 그 의미를 깨닫게 해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였다. 어느 날 그는 성찬식 중에 성찬대 아래로 숨어들었고, 어떤 청년이 그에게 꿀을 먹여 주며 고독의 달콤함을 일깨워 주었다. 예배를 집전하던 주교는 이 사실을 알게 되자 테오도르를 독서자로 서품했고, 그는 수도원에 머물며 공동 지도자 소프로니오스에게서 당시의 학문 분야를 쉽고 자유롭게 배웠다. 18세가 되어 부모를 잃자, 그는 재산을 나누어 주며 오직 일부만을 누이에게 남겼고, 20세가 되자 예루살렘 근처에 있는 성 사바 수도원으로 은둔하여, 그곳에서 12년 동안 공동 생활에 참여하고 24년 동안 은둔 생활을 했다. 안티오키아와 예루살렘 총대주교들의 결정에 따라 그는 이 은둔처에서 나와 예데스 주교로 서품받았으며( ), 그곳으로 향했다. 예데스에 도착한 그는 모든 힘을 교회와 신자들의 복지를 위해 쏟았으나, 그의 노력은 무슬림들과 도시의 통치자들, 그리고 그곳을 가득 메운 이단자들로부터 큰 방해를 받았다. 자신의 노력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위협받는 상황을 목격한 성 테오도르는 바그다드로 가서 칼리프 마비예에게 자비를 구했다. 칼리프의 병을 고쳐 준 그는, 칼리프가 킬리키아, 시리아, 메소포타미아의 통치자들에게 에데사 교회에 그 재산을 반환하고, 정교회로 개종하는 것을 방해하지 말라고 명령하도록 설득했다. 예데스로 돌아온 그는 정통 신도들에게 기쁨으로 환영받았으며, 이후 이단자들의 개종으로 신도 수가 늘어났고, 하늘의 인도하심을 받는 이 열정적인 목자의 지도 아래 선한 방향으로 이끌려 갔다. 죽음이 다가옴을 예감하고, 예전의 은둔처인 자신의 작은 방에서 안식을 취하고자 했던 성 테오도르는 팔레스타인으로 향했으며, 그곳에서 자신이 수도 생활을 했던 장소에서 7월 9일에 곧 세상을 떠났고, 이날이 그의 기념일로 정해졌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에서는 미하일 황제가 어머니 테오도라와 함께 통치하고 있었다. – 9세기. 여기에 제시된 영혼을 구원하는 백 편의 장은 그가 아직 은둔 생활 중이었을 때, 수도원의 장로들의 요청에 따라 그가 직접 집필한 것이다. 『그리스도교 자비서』의 편집자들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성 테오도르가 다른 저술을 남겼는지 여부는 확실히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정성껏 집필한 이 백 편의 장들은 절제에 관한 다른 교부들의 저술들과 함께 수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 글들이 신성한 절제의 본질을 잘 묘사하고 있으며, 이를 마땅한 주의를 기울여 읽는 이들에게 풍성한 영적 유익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성자 테오도르 예데스키의 영혼에 지극히 유익한 백 장

1. 우리가 선하신 하나님의 은총으로 사탄과 그의 행실을 버리고, 처음에 재탄생의 세례탕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제 다시 수도 서원을 통해 그리스도와 결합되었으니, 그분의 계명을 지키자. 이는 단지 우리의 엄숙한 서약뿐만 아니라, 타고난 의무로서도 우리에게 요구되는 바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처음부터 하나님에 의해 “매우 선하게” 창조되었으므로, 그대로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의 부주의에서 비롯된 죄가 우리 안에 본성에 어긋나는 것을 낳았지만, 그러나 우리 위대한 하느님의 풍성한 자비로 인해, 우리는 다시 부르심을 받았고, 무정하신 분의 열정으로 새롭게 되었으며, 주 그리스도의 피의 대가로 속량되어, 이처럼 옛 조상들의 죄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이에 비추어 볼 때, 우리가 의로워진다면 그 자체로는 대단한 일이 아니겠지만, 반대로 진리에서 떠나게 된다면 더욱더 가련하고 비난받을 만한 일이 될 것입니다.

2. 올바른 믿음 없이 행해지는 선한 행위는 온전히 죽은 것이며 무력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마찬가지로 의로운 행함이 없는 믿음만으로는 우리를 영원한 불에서 구원해 주지 못한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계명을 지키리라”(요한복음 14:23)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믿는다면, 영생을 얻기 위해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이를 증거해야 합니다. 반면, 온 피조물이 순종하는 그분의 명령을 우리가 경멸하며 지키지 않는다면, 온 피조물보다 더 존귀한 우리, 곧 창조주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은혜를 베푸신 분께 배은망덕한 자들인 우리가 어떻게 스스로를 신실한 자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3.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면서, 우리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으시고 모든 선의 주이신 그분께 아무것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 영생과 형언할 수 없는 복의 기쁨을 얻게 되는 것이다.

4. 하나님의 계명을 이행하는 데 있어 우리에게 대적하는 자, 그것이 아버지이든 어머니이든 누구든지, 우리에게 역겹고 미움받을 만한 자이니, 이는 우리가 “나보다 아버지나 어머니나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태복음 10:37)는 말씀을 듣지 않기 위함이다.

5.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데 온 힘을 다하여, 악한 정욕과 육체의 쾌락이라는 풀 수 없는 얽힘에 얽매이지 않도록 합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에 대한 심판이 내려져, “그것을 베어라. 땅을 비우게 하라”(눅 13:7)는 말이 적용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한 열매를 맺지 않는 자는 모두 베어내어 불에 던져질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누가복음 3,9).

6. 정욕과 유혹에 굴복하여 세속을 좇는 자는 곧 죄의 올가미에 빠지게 될 것이며, 한 번 저지른 죄는 마치 갈대밭의 불이나, 산에서 굴러 떨어지는 돌, 지류가 더해질수록 넓어지는 물줄기와 같다. 이것이 바로 현실이며, 모든 죄는 그것을 범하는 자를 파멸시킨다.

7. 영혼은 죄를 통해 본래의 질서에서 벗어나, 이로 인해 야생화되고 죄의 달콤함이라는 가시들로 가득 차게 되어, “거기에는 온케타우로스가 쉬고, 거기에는 고슴도치가 둥지를 틀며, 악마들이 온케타우로스와 만날 것이라”(사 34, 14. 15) – 이들은 바로 다양한 죄악의 정욕들이다. 그러나 영혼이 자신의 본래 질서로 돌아가기를 갈망할 때(육신에 묶여 있는 동안에도 원하기만 하면 가능하기 때문이다), 부지런히 자신을 다스리는 수고를 통해 자신을 길들여 하나님의 법에 따라 살게 되면; 그때 비로소 이전에 그녀 안에 둥지를 틀었던 짐승들은 도망치고, 우리 생명의 수호자인 천사들이 찾아와, 그녀의 회개의 날을 기쁨과 환희의 날로 만들어 줄 것이며, 그때 성령의 은총이 그녀에게 임하여, 선함 안에서 자신을 지키는 것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더욱 번영하는 법을 가르쳐 줄 것이다.

8. 성부들은 기도를 영적 요새라고 부르시니, 이것이 없이는 우리가 전투에 나설 수 없어, 원수의 창에 찔려 그들의 땅으로 끌려가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누구도 마음이 바르게 하나님 앞에 엎드리지 않는다면, 효과적이고 순수한 기도를 얻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자에게 기도를 주시고, 사람에게 지혜를 가르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9. 정욕이 영혼을 괴롭히고 공격해 오는 것은 우리의 통제 범위를 벗어난 일이지만, 우리 안에서 정욕적인 생각이 싹트고 정욕이 움직이게 되는 것은 우리의 통제 범위 안에 있다. 첫 번째는 우리 통제 범위를 벗어난 것이므로 죄가 되지 않지만, 두 번째는 용감하게 맞서 이겨내면 면류관을 얻게 되고, 만약 방심하여 패배하면 고통을 겪게 된다.

10. 세 가지 가장 큰 정욕이 있다: 쾌락욕, 재물욕, 명예욕이다. 그 뒤를 이어 다른 다섯 가지 악의 영이 따르며, 이로부터 마침내 수많은 정욕과 온갖 종류의 다양한 죄악적 성향이 생겨난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 세 가지 정욕의 수장과 지도자들을 이겨낸 자는, 그와 동시에 그 뒤를 따르는 다섯 가지 정욕도 무너뜨리고, 그 후 모든 정욕을 정복하게 된다.

11. 우리가 정욕에 이끌려 행한 일에 대해서는, 그에 대한 기억들이 정욕을 일으켜 영혼을 뒤흔든다. 그러나 정욕적인 기억들이 마음에서 완전히 지워져, 심지어 마음 가까이에조차 다가오지 않게 될 때, 그때야말로 과거의 죄들이 사해졌다는 징표가 된다. 왜냐하면 영혼이 어떤 죄악적인 것에 대해 정욕적으로 집착하는 한, 그때까지 그 안에 죄의 지배가 존재한다고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12. 육체적이며 물질에 집착하는 정욕은 대개 육체적 고난(자발적인 결핍과 육체적 수련)을 통해 약화되고 시들어 가며, 영적이며 눈에 보이지 않는 정욕은 겸손과 온유, 그리고 사랑으로 소멸된다.

13. 격렬한 정욕은 절제와 겸손함으로 시들어가며, 타오르는 분노는 사랑으로 누그러지고, 방황하는 생각은 하나님을 기억하며 부지런히 기도함으로써 집중된다. 이처럼 영혼의 세 부분 모두가 정화된다. 바로 이 부분들을 바로잡기를 원하시며, 신성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평화와 거룩함을 추구하라. 이 두 가지를 갖추지 않고서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이니라”(히브리서 12:14).

14. 어떤 이들은, 어떻게 말해야 할지 망설이곤 한다. 즉, 생각이 정욕을 일으키는 것인지, 아니면 정욕이 생각을 일으키는 것인지에 대해 말이다. 어떤 이들은 전자를, 또 다른 이들은 후자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생각이 정욕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만일 영혼 속에 정욕이 없다면, 정욕적인 생각들이 영혼을 괴롭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15. 항상 우리와 싸우는 악령들은, 우리에게 가능하고 실천하기 쉬운 미덕 앞에는 장벽을 세우고, 감당하기 어렵거나 시기상조인(아직 우리가 다루기에는 이르다) 미덕에 대해서는 강한 열망을 불어넣는 습관이 있다. 즉, 공동체 생활의 순종에 능한 자들에게는 침묵 수도자들의 삶을 살도록 강요하고, 반면 침묵 수도자와 은둔자들에게는 공동체 생활의 규칙을 따르도록 부추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그들은 모든 미덕에 대해서도 똑같이 행동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꾀를 꿰뚫어 보아야 한다”(고린도후서 2:11), 모든 것이 제때에 그리고 적당한 분량으로 행해지는 것은 좋으나, 지나치거나 시기상조인 것은 해롭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16. 세상 속에서 돌아다니며 정욕의 대상들을 마주하는 자들은 악령들이 그들을 정욕적인 행위로 유인하여 싸우게 하지만, 그러한 대상이 없는 광야에서 사는 자들은 정욕적인 생각들로 교란시킨다. 이 두 번째 형태의 싸움에서는 첫 번째보다 승리를 거두기가 훨씬 더 어렵다. 그곳에서는 일을 수행하기 위해 시간, 장소 및 기타 편의가 필요하지만, 마음은 생각 속에서 쉽게 움직이며 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보이지 않는 싸움에 맞서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순수한 기도이며, 주님께서는 우리가 끊임없이 그 기도에 머물러 있으라고 명하셨다. 기도는 몸의 참여 없이도 행해질 수 있으므로, 마음을 싸움에서 강하게 하고 언제나 준비되게 한다.

17. 사도께서는 정욕을 완전히 죽이는 것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은 육체와 그 정욕과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우리가 정욕을 죽이고, 욕망을 없애며, 육체의 계산을 영에게 복종시킬 때 비로소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으로부터의 분리란 바로 이 정욕의 죽임과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진 생명의 드러남에 다름 아니다.

18. 이 죽을 몸의 반란으로 고통받고, 거의 매시간 그 몸과의 전쟁으로 지쳐 있는 자들은, 이를 두고 육체를 탓하지 말고 스스로를 탓해야 한다. 만일 그들이 육체에 힘을 주지 않고, 정욕에 이르기까지 육체를 돌보는 데 신경을 쓰지 않았다면, 육체로 인해 이토록 큰 고통을 겪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혹시 그들은 정욕과 욕망으로 자신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고, 죽은 육체 안에 예수님의 죽음을 지니고 있는 자들 을 보지 못하는가? 그들은 육체를 선한 일에 더 큰 조력자로 삼고 있는데, 대적하지 않고 순종하며 하나님의 법에 이끌리는 육체를 말이다. 그들도 그렇게 행한다면, 그때 비로소 같은 평안을 맛보게 될 것이다.

19. 어떤 금지된 정욕과 생각이 결합되거나, 정욕적인 쾌락에 기울어지는 것은 수도자에게 죄가 된다. 왜냐하면 처음에는 생각이 탐욕스러운 부분으로 마음을 어둡게 하기 시작하고, 그다음에는 영혼이 싸움을 견디지 못하고 죄악된 쾌락에 기울어지며, 마침내 앞서 말한 대로 죄인 결합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 상태가 지속되면, 여기서 정욕적인 끌림이 생겨나며, 이는 조금씩 죄악된 행위 자체로 이어지게 된다. 바로 이 때문에 선지자는 바빌론의 젖먹이들을 돌에 쳐 죽이는 자들을 찬양한다(시 136:9). 이 말의 의미는 지혜롭고 분별 있는 이들에게는 분명하다.

20. 천사들은 사랑과 평화의 종으로서, 우리의 회개와 덕행의 성취를 기뻐하며, 그렇기에 우리를 영적인 묵상으로 채워 주려 애쓰고 모든 선한 일에 우리를 돕는다. 반면, 분노와 악의의 종인 악령들은 덕이 쇠퇴할 때 기뻐하며, 온 힘을 다해 우리의 영혼을 수치스러운 환상 속으로 유인하려 한다.

21. 믿음은 마음을 선하게 가다듬어 주는 선한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 안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낳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계명을 지키거나 선하고 활동적인 삶을 영위하도록 가르칩니다. 활동적인 삶에서 정직한 절제가 자라나며, 절제에서 솟아나는 것은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모든 계명을 성취하는 것이며, 모든 계명을 하나로 묶어 붙들어 줍니다.

22. 건강한 몸이 어떤 병이 자신을 사로잡는지 느끼는 것처럼,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은 무감각함으로 고통받는다. 마찬가지로 마음도, 그 본연의 활동을 온전히 보존하고 있는 한, 그만큼 자신의 힘을 자각하고, 더 폭압적인 정욕이 어디서 자신에게 닥치는지 보며, 그 부분에 더 강력한 저항을 기울인다. 그러나 그가 무감각한 상태로 나날을 보내며, 마치 밤중에 적과 싸우면서도 적의 속셈을 보지 못하는 사람과 같다면, 그의 처지는 비참하다.

23. 우리의 사고력이 미덕을 관조하는 데 끊임없이 전념하고, 갈망하는 힘이 오직 그 미덕과 그 미덕을 베푸시는 그리스도 주님께로 향하며, 분노하는 힘이 악마들을 대적하여 무장할 때, 그때 비로소 우리의 힘들은 본성에 따라 작용한다.

24. 성 그레고리우스 신학자에 따르면, 이성적인 영혼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그는 사고력의 미덕을 분별력, 식견, 지혜라고 불렀고, 격정력의 미덕을 용기와 인내라고 불렀으며, 욕망력의 미덕을 사랑, 정절, 절제라고 불렀다; 사실 이 모든 것에는 진리가 각자의 몫을 차지하며, 올바르게 행동하도록 가르친다. 진리는 분별력으로 적대적인 천사들과 싸워 미덕을 지키고, 정절로 사물을 냉정하게 바라보며,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자신처럼 사랑하게 하며, 절제로 온갖 쾌락을 끊어내고, 용기와 인내로 보이지 않는 전쟁에 대비한다. 이것이 바로 영혼이라는 악기의 아름다운 조화이다.

25. 정절을 지키고, 누구도 무감정이라고 부르며 실수하지 않을 만한 복된 순결을 갈망하는 자는, 육체를 가차 없이 징벌하고 굴복시키며, 겸손한 마음으로 신성한 은총을 청하면, 소원을 이룰 것이다. 반면, 먹고 마시는 데 절제 없이 몸을 살찌우는 자는 음탕한 영에 시달릴 것이다. 물이 많이 부으면 불길을 끄는 것처럼, 배고픔과 갈증, 또는 마음의 겸손을 동반한 모든 절제는 육체의 불타오름과 부끄러운 환상을 없애기 때문이다.

26. 원한이라는 정욕이 네 영혼에서 완전히 물러가게 하라. 그리고 결코 네 안에 원한을 품을 자리를 주지 말라. 짚더미 속에 숨겨진 불이 무엇이냐? 바로 마음에 둥지를 튼 원한이다. 오히려 너를 모욕한 자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네가 할 수 있는 한, 어떤 방법으로든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라. 그래야 네 영혼을 죽음에서 구원하고, 기도할 때 담대함을 잃지 않을 수 있다.

27. 주님께서는 겸손한 자의 영혼에 안식하시나, 교만한 자의 마음에는 불경스러운 정욕이 깃든다. 왜냐하면 그 어떤 것도 교만한 생각만큼 우리를 대적하여 그들을 강하게 만들지 못하며, 반대로 그 어떤 것도 이 악한 것들을 영혼에서 뿌리째 뽑아내는 데, ‘정욕을 죽이는 자’라고 불릴 만큼 의로운 복된 겸손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기 때문이다.

28. 네 영혼이 악한 기억들로부터 점점 더 정화되고, 가장 선한 생각들로 밝아지기를 바란다. 항상 이 말을 마음에 새기라. 즉, 이 세상에서 떠날 때, 쾌락을 좇는 마음은 감옥이자 족쇄이지만, 수고를 아끼지 않는 마음은 활짝 열린 문이라는 것을. 실로 깨끗한 영혼들은 육신을 떠날 때 천사들이 곁에서 동행하며 그들을 복된 삶으로 인도하지만, 더럽혀지고 회개로 정화되지 않은 영혼들은 — 아아, 나여! — 악령들에게 가로채이기 때문이다.

29. 인도산 보석과 진주로 빛나는 귀중한 왕관으로 장식된 머리는 아름답지만,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풍요롭고, 빛나는 관상으로 빛나며, 그 안에 지극히 거룩하신 성령이 거하시는 영혼은 그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 아름답다. 그리고 누가 말로 이러한 복된 영혼을 합당하게 묘사할 수 있겠는가!

30. 분노와 격노가 네 영혼에 자리 잡게 하지 말라. “성미 급한 사람은 품위가 없다”(잠언 11:25) 했으며, “온유한 자의 마음에는 지혜가 깃들어 있다”(잠언 14:33)고 했기 때문이다. 만약 분노의 정욕이 네 영혼을 지배한다면, 세속에서 사는 자들이 너보다 더 낫다고 여겨질 것이며, 너는 부적합한 수도사임이 드러나 수치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31. 모든 유혹과 모든 싸움에서 기도를 무적의 무기로 삼으라. 그리하면 그리스도의 은혜로 승리하리라. 그러나 우리의 지극히 지혜로운 스승께서 “남자들이 모든 곳에서 분노나 다툼 없이 경건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딤전 2:8) 명하신 대로, 그 기도는 순수해야 한다. – 이러한 기도에 소홀한 자는 유혹과 정욕에 사로잡힐 것이다.

32. “포도주는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시 103:15). 그러나 울고 통곡하겠다고 서원한 너는, 그러한 즐거움을 멀리하라. 그리하면 영적인 은사로 기쁨을 얻으리라. 그러나 포도주로 즐거워하면, 부끄러운 생각들과 함께 삶을 보내게 될 것이며, 많은 슬픔을 겪게 될 것이다.

33. 명절을 술에 취해 보내지 말고, 마음의 갱신과 영혼의 순결함 속에서 보내라. 배를 음식과 술로 채운다면, 그 명절이 바쳐지는 분을 더욱 화나게 할 것이다.

34. 시편을 부르고, 기도하며, 성경을 읽는 데 깨어 있으라는 것은 우리에게 항상 명해진 바이나, 특히 명절에는 더욱 그러하다. 깨어 있는 수도사는 영혼에 유익한 묵상을 위해 마음을 정제하지만, 잠을 많이 자면 마음이 무뎌진다. 그러나 주의하라. 깨어 있는 동안 헛된 추억이나 죄악된 생각에 빠져서는 안 된다. 그런 헛된 일들과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행위로 인해 자신을 더럽히기 위해 깨어 있는 것보다 차라리 자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35. 자신의 품에 뱀을 품고 있는 자와 마음에 간사한 생각을 품은 자는 둘 다 죽임을 당할 것이다. 전자는 독침에 찔려 육신이 상할 것이며, 후자는 영혼에 치명적인 독(생각)을 심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에히드나의 새끼들을 재빨리 죽이듯이, 악한 생각들이 마음속에 생겨나지 못하게 하여, 나중에 그로 인해 쓰라린 고통을 겪지 않도록 해야 한다.

36. 깨끗한 영혼은 선택받은 그릇으로서, 마땅히 “과수원에 갇힌, 샘물에 새겨진 것”(아가 4, 12)이자 “감각의 보좌”(잠언 12, 23)라고도 불릴 수 있다. 그러나 불결한 정욕으로 더럽혀진 영혼은 죄의 악취로 가득 차 있다.

37. 나는 경험이 풍부하고 활동적인 장로들로부터, 영혼 속의 죄악된 생각은 옷차림에 대한 허영, 배를 채우는 과식, 그리고 해로운 대화에서 비롯된다는 말을 들었다.

38. 재물에 대한 탐욕이 수행자들의 영혼에 자리 잡지 않도록 하라. 재물을 탐하는 수도사는 누수가 난 배와 같아서, 수많은 근심의 파도에 휩쓸려 슬픔의 심연으로 가라앉는다. 수많은 정욕을 탐하는 병은 모든 악의 어머니이며, 마땅히 모든 악의 뿌리라고 불린다(딤전 6:10).

39. 소유에 대한 탐욕이 없고 침묵하는 것은 수도 생활의 밭에 숨겨진 보물이다. 가서 네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 그리하여 그 돈으로 밭을 사서, 그 밭을 파헤쳐 보물을 발견하면, 도둑맞지 않도록 그 보물을 네 안에 정성껏 간직하여, 훔쳐갈 수 없는 부로 풍요로워지라.

40. 영적 아버지와의 동거를 시작하고 그분으로부터 유익을 느끼게 되었다면, 그 누구도 너를 그분에 대한 사랑과 그분과의 동거에서 멀어지게 하지 않도록 하라. 그분을 어떤 일로도 비난하지 말고, 비록 그분께 책망받거나 심지어 매를 맞더라도 그분에 대해 나쁘게 말하지 말라. 다른 누군가가 그를 비방할 때 귀를 기울이지 마라; 또한 주님께서 너에게 진노하셔서 생명의 책에서 너를 지워 버리지 않도록, 그를 모욕하는 자와는 결코 친하게 지내지 마라.

41. 순종의 수련은 우리 자신이 경험했듯이, 자기 자신과 모든 것을 버리는 데서 확고해진다. 이를 실천하는 자는 믿음, 소망, 그리고 온전하고 신성한 사랑이라는 세 가지 요새로 자신을 지키라. 그리하여 이들로 보호받으며 선한 수련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의의 면류관을 얻게 될 것이다.

42. 네 아버지의 행실을 심판하는 자가 되지 말고, 그분의 계명을 실천하는 자가 되라. 악마들은 늘 그렇듯이, 네게 아버지의 결점을 지적하기 시작할 것이다. 이는 네가 아버지의 가르침을 듣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며, 이를 통해 너를 전투에서 무력하고 겁 많은 전사로 만들거나, 불신의 생각만으로 너를 나태하게 하여 모든 종류의 미덕을 소홀히 하게 하려는 것이다.

43. 아버지의 계명을 듣지 않는 자는 자신의 서원 중 가장 중요한 조항들을 어기는 죄인이 된다. 그러나 순종을 마음속에 깊이 새기고, 순종의 칼로 자신의 뜻을 잘라낸 자는, 많은 증인 앞에서 그리스도 주님께 약속한 바를 마땅히 이행한 것이다.

44. 수도자들을 지켜보며, 우리는 순종에 힘쓰는 아버지들에게 우리 삶의 원수인 마귀들이 심하게 악의를 품고, 그들을 향해 이를 갈며 온갖 악의적인 계략을 꾸미고 있음을 분명히 보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들이 그들을 아버지의 품에서 떼어 놓기 위해 무엇을 하지 않는가, 무엇을 주입하지 않는가? 그들은 마치 축복받은 것처럼 불순종의 구실을 내세우고, 불만을 조장하며, 아버지에 대한 반감을 부추기고, 아버지의 가르침을 비난으로 포장하며, 그 비난을 날카로운 화살처럼 심장에 꽂아 넣는다. 그리고 “너는 자유로운 몸이었으면서도 왜 노예가 되었느냐, 그것도 무정한 독재자의 노예가 되었느냐?”라고 말한다. 언제까지 자유의 빛을 보지 못한 채 노예의 멍에를 짊어지고 있을 것인가? – 그 후 그들은 이렇게 속삭인다. 차라리 나그네를 환대하고, 병자들을 돌보며,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는 일에 힘쓰는 편이 낫다고. 그 다음에는 완전한 은둔과 침묵의 수행을 칭송하며, 온갖 악한 잡초를 경건한 수행자의 마음에 뿌려, 그를 아버지의 영적 울타리 밖으로 내쫓고, 평온한 안식처에서 끌어내어, 영혼을 뒤흔드는 광란의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로 내던지려 한다. 만약 마침내 그들이 이 일에 성공한다면, 그를 포로처럼 자신의 권세 아래로 끌어들여, 그들의 사악한 뜻대로 행동하도록 강요한다.

45. 그러므로 네 영적 아버지의 가르침에 순종하며, 네 원수들과 대적자들의 이러한 악랄한 계략을 결코 잊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네 소명에 대한 서원을 잊지 말라: 욕설에 굴복하지 말고, 비난과 모욕, 조롱을 두려워하지 말며, 죄악된 생각의 유혹에 휩쓸리지 말고, 아버지의 엄한 훈계를 피하지 말며, 건방진 자기만족과 제멋대로 함으로 겸손의 선한 멍에를 더럽히지 말라; 오히려 마음속에 주님의 말씀을 새기라.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마태복음 10:22). “믿음의 창시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인내로 네 앞에 놓인 경주를 달려라”(히브리서 12:1-2).

46. 금세공인이 금을 도가니에 넣어 가장 순수하게 만드는 것처럼, 수도 생활을 막 시작한 수도사는 스승들의 뜻에 순종하는 수련에 자신을 바치고, 하느님을 따르는 삶의 모든 고난 속에서 단련되며, 수고와 큰 인내로 순종을 배워, 자신 안의 모든 나쁜 성품을 녹여내어 겸손으로 가득 차게 되며, 온전히 빛나게 되며, 하늘의 보화와 슬픔 없는 삶, 그리고 슬픔과 한숨이 사라지고 끊임없는 기쁨과 즐거움이 깃든 복된 거처에 합당한 자가 된다.

47. 바르고 깊이 뿌리내린 믿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낳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우리에게 계명을 지키도록 가르친다. “경외함이 있는 곳에 계명을 지키는 일이 있다”고 말하듯이, 계명을 지키는 데에는 활동적인 미덕이 있으며, 이것이 관조의 시작이다; 이 모든 것의 열매는 무정(無情)이며, 무정을 통해 우리 안에 사랑이 자리 잡는다. 사랑에 대해 사랑하는 제자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니,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신다”(요일 4:16).

48. 참으로 수도 생활은 얼마나 아름답고 선한가! 성령의 가르침을 받은 그 지도자들과 선구자들이 정한 경계와 법칙 안에서 흘러갈 때, 그 삶은 참으로 아름답고 선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군사는 소유가 없어야 하며(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아야 하며), 세상의 어떤 계획이나 일에도 얽매이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도가 말하듯이: “군사로서 세상의 장사에 얽매이지 아니하여 지휘관에게 기쁨이 되리라” (디모데후서 2:4).

49. 그러므로 수도사는 소유가 없고, 정욕이 없으며, 온갖 죄악된 욕망과 거리가 멀어야 하며, 탐식하지 않고, 술을 마시지 않으며, 인색하지 않고, 게으르지 않고, 돈을 탐하지 않으며, 쾌락을 좇지 않고, 명예를 탐하지 않아야 한다. 만일 누군가 이러한 모든 것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는 이 천사 같은 삶을 올바르게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게 행하는 이들에게는 그것이 선한 멍에요 가벼운 짐이니, 그러한 경우 신성한 소망이 그들에게 모든 것을 가볍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이 삶은 즐겁고, 그 행위는 기쁨을 주며, 그것을 얻은 영혼에게서 결코 빼앗기지 않을 복된 몫이다.

50. 세속적인 근심을 버리고 수도자의 삶을 받아들였다면,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 부를 탐내지 말라. 이는 또한 교활한 자의 유혹 중 하나로서, 허영으로 이끌어 마음을 번거로운 일들로 몰아넣기 때문이다. 그저 빵과 물만 있어도, 그것들만으로 환대의 상을 얻을 수 있다. 설령 그것조차 없더라도, 선한 마음 하나만으로 나그네를 맞아들이고 그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면, 그로도써 환대의 상을 받을 수 있다. 이에 대한 본보기는 가난한 과부에게서 찾을 수 있는데, 주님께서는 복음서에서 그녀가 자신의 선한 뜻으로 두 렙타를 바침으로써 부자들의 구제보다 더 큰 선행을 했다고 증언하셨다.

51. 이는 침묵 속에서 사는 이들에게 주어진 말씀이다. 반면 아버지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은 오직 한 가지만 마음에 새겨야 하니, 곧 아버지의 계명에서 어떤 점에서도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를 마땅히 이행함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에게 요구되는 모든 것을 다 이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 의무를 정확히 이행하는 데서 벗어나는 자들은 모든 종류의 미덕과 영적 삶에서 미숙한 상태로 남게 될 것이다.

52. 자, 그리스도 사랑하는 이여, 내가 너에게 주는 또 다른 조언은 이러하니, 방랑의 삶을 사랑하라. 즉, 마치 나그네처럼, 자기 나라의 일들에 낯선 이가 되어라. 부모에 대한 걱정이나 친족에 대한 애정에 휩쓸리지 말고, 도시 생활을 피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막에 머물며, 선지자의 말을 따라 “나는 도망쳐 사막에 거처를 삼았노라”(시 54:8)라고 말하라.

53. 세상에서 멀리 떨어진 한적한 곳을 찾으라. 비록 그곳에서 필수품이 부족하여 곤란을 겪더라도 두려워하지 말라; 설령 원수들이 벌이나 사나운 말벌처럼 너를 둘러싸고 온갖 종류의 싸움을 일으키며 온갖 생각으로 너를 동요시키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지 말며, 경주의 장에서 도망치지 말고, 오히려 용감하게 모든 것을 견디며 스스로 노래하며 말하라: “내가 주님을 인내하며 기다렸더니, 주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내 기도를 들어주셨도다”(시 39:2). 그리하면 너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하나님의 보호와 돌보심, 그리고 너를 향한 모든 구원의 섭리를 보게 될 것이다.

54. 너는 너에게 교훈이 되고 생활 방식이 너와 일치하는 사람들을 친구로 삼아야 한다. 성경은 말하기를, “평화를 사랑하는 자들을 네 친구로 삼으라. 영적인 형제들, 거룩한 아버지들, 곧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로 그분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들이 바로 내 어머니요, 내 형제들이다” (마태복음 12:49).

55. 다양하고 값비싼 음식에 집착하지 말고, 그것으로 배불리 먹지 말라. 성경에 “배불리 먹는 자는 살아 있으면서도 죽은 자와 같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딤전 5:6). 그리고 가능하다면 값비싼 음식이 아니더라도 배부르게 먹는 것을 피하라. 성경에 “배가 부른 것에 미혹되지 말라”(잠언 24, 15)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56. 침묵의 삶을 택했다면, 셀 밖을 자주 드나들지 않도록 하라. 이는 매우 해롭기 때문이다. 은총을 빼앗고, 생각을 어둡게 하며, 열정을 약화시킨다. 그러므로 “정욕의 불꽃은 온유한 마음을 변질시킨다”(솔로몬의 지혜서 4, 12)라고도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 외부 사람들과의 교제를 끊어라. 그래야 네 마음이 정욕에 휩싸이지 않고, 네 침묵의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을 것이다.

57. 수도실에 앉아 있을 때 무의미하게 일을 하지 말고, 시간을 게으름으로 허비하지 마라. 목적 없이 여행하는 자는 헛되이 수고할 뿐이라고들 말하느니라. 그러나 선한 일을 행하고, 마음을 가다듬으라. 항상 눈앞에 죽음의 마지막 순간을 두고, 세상의 허무함이 얼마나 유혹적이며, 동시에 얼마나 불안정하고 하찮은지 기억하라. 심판의 날에 있을 끔찍한 시련의 상황을 생각하라. 그때 우리의 쓰라린 고발자들이 우리가 행한 일과 말, 그리고 그들이 심어 놓은 생각들을 우리가 받아들였던 것들, 지옥의 고통과 그곳에 갇힐 영혼들의 모습을 마음에 새기라. 또한 그 위대하고도 두려운 날, 즉 만인의 부활의 날, 하나님 앞에 서는 날, 그리고 거짓이 없으신 심판자의 최종 판결을 상상하라. 죄인들을 휩쓸게 될 고통과 수치, 양심의 가책을 상상하고,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께 버림받고 영원한 불길 속으로, 잠들지 않는 벌레가 있는 곳, 뚫을 수 없는 어둠 속으로 던져질지—그곳에서는 울음과 이를 갈음이 있을 것임을—상상하라. 그리고 다른 모든 고통의 장소를 둘러보며, 신음하며 자신의 얼굴과 옷, 그리고 앉아 있는 자리를 눈물로 적시는 것을 멈추지 말라. 내가 보기에, 이러한 묵상으로 많은 이들이 눈물을 풍성히 흘렸으며, 영혼의 모든 힘을 놀랍게 정화했다.

58. 또한 의인들에게 예비된 복, 곧 그리스도의 우편에 놓인 것들, 주님이시며 주권자이신 분의 음성이 ‘복된 자들’이라 칭하시는 것, 천국 유산, 그들의 이해를 초월하는 은사들, 그 지극히 달콤한 빛, 끝이 없고 어떤 슬픔으로도 끊어지지 않는 기쁨, 천상의 거처와 천사들과의 동거, 그리고 주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약속된 그 밖의 모든 것들을 생각하라.

59. 이러한 생각들이 식탁에서 너와 함께 머물게 하고, 잠들 때 너를 동반하며, 네가 일어날 때 함께 일어나게 하라. 보라, 결코 이를 잊지 말고, 네가 어디에 있든지 네 마음을 이를 기억하는 데서 돌리지 말라. 그래야 악한 생각들이 너에게서 도망가고, 신성한 위로가 네 영혼을 가득 채우리라. 이러한 생각들로 보호받고 무장되지 않은 영혼은 침묵을 제대로 지킬 수 없으니, 물이 없는 샘은 헛되이 그 이름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60. 그러므로 침묵을 지키는 자들이 따라야 할 삶의 방식은 다음과 같다. 미래의 안식을 위해, 힘이 닿는 대로 금식하고, 밤을 새우며, 맨땅에서 잠을 자고, 그 밖의 온갖 자발적인 고행을 실천하는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이,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니라”(롬 8:18); 특히 순수하고, 끊임없이, 쉬지 않고 드리는 기도는 견고한 성벽이자, 안식처이며, 미덕의 수호자, 정욕의 근절, 영혼의 정돈, 마음의 정화, 고통받는 자의 안식, 울고 있는 자의 위로이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이며, 보이지 않는 것들을 관조하는 것이며, 그 진리를 확인하고자 갈망하는 이들에게, 천사들과의 교감이며, 선한 일에서의 성취이며, 소망하는 바를 확증하는 것이다. 이 미덕의 여왕을 받아들여라, 수행자여, 그리고 온 힘을 다해 그분을 마음속에 간직하려 힘쓰라. 밤낮으로, 기분이 좋을 때나 괴로울 때나, 경외심과 떨림으로, 깨어 있고 맑은 정신으로 기도하라. 그리하여 네 기도가 주님께 기쁘게 받아들여지도록 하라. 성경은 이렇게 말하느니라: “주님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분의 귀는 그들의 기도에 기울여지시나니”(시 33:16).

61. 옛 선지자 중 한 분이 매우 정확하고 사실에 부합하게 말씀하셨으니, 우리와 대적하는 악마들 중에서 가장 먼저 싸움에 나서는 자들은 탐욕스러운 욕망을 맡은 자들이며, 이들은 탐욕을 부추기고 허영으로 이끌고, 나머지 모든 자들은 그들 뒤를 따라가며 그들이 상처 입힌 자들을 챙겨 간다고 하셨다.

62. 그리고 진실로, 자세히 살펴보아 우리는 사람이 이 세 가지 중 무엇에 먼저 상처받지 않고서는 어떤 죄나 어떤 정욕에 빠지는 일이 결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마귀는 당시 구세주께도 이 세 가지 생각을 불러일으켰으나,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접근할 수 없음을 드러내시고, 악마에게 자신 뒤로 물러가라고 명하셨으며, 우리에게도 그에 대한 승리를 허락하셨습니다. 이는 죄를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으시고, 우리에게 죄를 짓지 않는 올바른 길을 보여주신 선하시고 인자하신 주님이시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 길을 따라가며, 우리는 우리 안에 “그를 지으신 분의 형상대로 새롭게 된” “그를 지으신 분의 형상대로 새롭게 되어 가는”(골 3,10) 사람입니다.

63. 다윗의 말씀은 우리에게 구원의 적들인 악마들을 온전한 증오로 미워하라고 가르친다. 이는 덕을 닦는 일에 매우 유익하다. 그러나 구원의 원수들을 완전한 증오로 미워하는 이는 과연 누구겠는가? 행동뿐만 아니라 생각으로도 죄를 짓지 않는 자이다. 만일 그들의 사랑, 즉 정욕의 원인이 우리 안에 있다면, 어떻게 그들에 대한 증오가 우리 안에 자리 잡을 수 있겠는가? 쾌락을 탐하는 마음은 그들に対する 증오를 품을 힘이 없기 때문이다.

64. 혼인 예복은 세속적인 쾌락에서 멀어지고, 모든 부도덕한 정욕을 버리며, 온전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생각과 가장 순수한 관상에 자신을 바치는 이성적인 영혼의 무정함이다. 그러나 그녀가 불의의 정욕을 방종하고 그 속에 굳어지면, 이 순결의 옷을 벗어 던지고 찢기고 더럽혀진 누더기를 입게 되는데, 이는 복음서에서 손과 발이 묶여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던져진 자(마태복음 22, 13)과 같이, 그러한 생각과 행실로 엮어진 옷을 입고 있었으며, 그 옷은 주님의 말씀에 의해 신성하고 썩지 않는 신부의 궁전에 합당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졌다.

65. 모든 이를 미워하는 자만심에 대해, 어떤 현명한 이가 다음과 같이 올바르게 말했습니다. “자만심의 사나운 싸움은 마치 어떤 폭군처럼, 그 세 가지와 다섯 가지가 우리 마음을 사로잡는 모든 생각의 선두에 서 있습니다.”

66. 항상 음식으로 배불리 먹으면서도 무정심을 얻을 수 있다면 참으로 놀라운 일일 것이다. 내가 무정심이라 부르는 것은 행위로 죄를 멀리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절제일 뿐이다. 그러나 마음에서 정욕적인 생각 자체의 솟아남을 완전히 끊어버린 것을 말하며, 이를 마음의 순결이라 한다.

67. 더러운 영혼을 정화하는 것이, 이미 정화되었다가 다시 정욕의 상처를 입고 다시 건강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보다 더 쉽다. 왜냐하면 세속의 속박에서 막 벗어난 자들은, 어떤 죄에 빠지게 되더라도 무정심을 달성하기가 더 수월하지만,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맛보고” (히브리서 6:5) 이미 구원의 길을 걷다가 다시 죄로 돌아선 이들에게는, 무정함에 이르는 길이 극복하기 힘든 장애물들로 막혀 있다. 이는 굳어진 죄의 습관과 뿌리 깊은 죄에 대한 성향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당시 익숙한 죄의 유혹이 마음의 눈앞에서 맴돌며 끊임없이 그 죄의 형상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열심 있고 부지런한 영혼은, 우리를 향한 자비롭고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도우심으로 이 가장 어려운 일도 수월하게 해낼 수 있다. 그 은혜는 우리를 회개로 부르시며, 돌아오는 자들을 형언할 수 없는 자비의 품으로 받아들이시니, 이는 우리가 복음서에서 탕자의 비유를 통해 배우는 바와 같다.

68. 우리 중 그 누구도 자신의 힘으로는 악마의 유혹과 계략을 피할 수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의 무적의 힘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제거될 수 있는 죄를, 자신이 행하는 위업과 의지의 힘으로 없애고자 꿈꾸는 자들은 위험하게도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등불이신 요한 크리소스톰은, 위로부터의 도움이 따르지 않는다면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또한, 자신의 노력이 없다면 위로부터의 도움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덧붙입니다. 이 두 가지는 유다와 베드로가 스스로 보여준 사례입니다. 유다는 은혜를 그토록 많이 받았음에도, 자신의 의지를 기울이지 않고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했습니다. 반면 베드로는 열정적인 의지를 보였으나, 위로부터의 도움을 받지 못하자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미덕은 이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루어 만들어지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간청하건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되 스스로도 게을리하지 말고, 또한 열심을 다하되 모든 것을 자신의 노력만으로 바로잡으려 하지 마십시오.

69.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지 않으시기에, 모든 것을 직접 행하시지 않으시며, 또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기에, 모든 것을 우리의 뜻과 노력에 맡기시지도 않으셨다. 그러나 양쪽 모두에서 해로운 것은 제거하시고 유익한 것만 남겨 두셨다. 시편 기자가 “주께서 성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건축하는 자들의 수고가 헛되리라”(시 126:1)라고 말하며 우리에게 잘 가르쳐 주고 있다. 또한 “독사와 바실리스크를 밟고, 사자와 뱀을 짓밟을” (시 90:13) 수는 없습니다. 이는 사람이 먼저 인간의 힘으로 가능한 한 자신을 정화하더라도, 사도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능력을 이길 권세를 주노라” (눅 10, 19). 그렇기에 우리는 기도 중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한 자로부터 구하소서” (마 6, 13)라고 간구하도록 명령받은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능력과 도움으로 악한 자의 불타는 화살을 피하지 못하고, 무욕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면, 우리는 헛되이 수고하며, 자신의 힘이나 열정으로 마땅히 고쳐야 할 것을 바로잡으려 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마귀의 유혹을 이겨내고 이를 무력화시키며,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고자 하는 자는 눈물과 탄식, 끝없는 갈망과 불타는 영혼으로 밤낮으로 하나님의 도움과 신성한 중보를 구해야 한다. 이러한 것을 얻고자 하는 자는 자신의 영혼을 세상의 모든 쾌락과 모든 정욕과 욕망으로부터 깨끗하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영혼들에 대해 “내가 그들 안에 거하고 그들 가운데 다니리라” (고린도후서 6, 16), 또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계명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며, 우리가 그에게로 가서 그와 함께 거처를 삼으리라” (요한복음 14, 23).

70. 고대의 어떤 이가 생각에 관해 매우 현명하고 유익한 말씀을 남겼으니, 말하기를: “마음의 문턱(마음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생각들을 시험하여 보라. 그것이 우리 자신의 것인지, 아니면 원수에게서 온 것인지; 우리에게 친숙하고 선한 것들은 영혼의 가장 깊은 보물창고로 들여보내어, 마치 도둑이 들지 않는 보물창고처럼 그곳에 간직하고, 반면 적대적인 생각들은 이성적인 판단이라는 채찍으로 괴롭힌 뒤, 즉시 쫓아내어 영혼의 주변부조차도 그들에게 안식처나 자리를 주지 말고, 더 나아가 기도의 칼과 지극히 신성한 가르침으로 완전히 베어내어, 그러한 박멸로 인해 도둑들의 두려움이 그들의 우두머리에게도 미치게 하라. 알아두라, 누가 이처럼 꼼꼼히 생각을 단련하는 자는 계명을 지키는 데 있어서도 참된 열심 있는 자가 되는 것이다.

71. 자신을 괴롭히고 혼란스럽게 하는 생각과 움직임을 끊어내려는 자는, 동지들과 동료들을 더 많이 모아 그들을 자신에게 가까이 데려와 함께 맞서 싸우게 하라. – 그것들은 곧 마음의 겸손, 육체의 수고,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수행적 자기 절제이며, 특히 다윗이 노래한 것처럼 눈물을 흘리며 찢어진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이다: “나의 겸손과 나의 수고를 보시고, 나의 모든 죄를 사해 주소서” (시 24:18) 그리고 “주여, 나의 눈물을 묵과하지 마소서” (시 38:13), 또 “나의 눈물이 낮과 밤으로 나의 양식이 되었나이다” (시 41:4). 또 “내 음료를 울음으로 희석하였나이다” (시 101:10).

72. 우리 삶의 대적인 마귀는 온갖 생각으로 우리의 죄를 경시하고, 종종 망각으로 덮어버리니, 이는 우리가 수고하는 데 게을러지고 더 이상 자신의 실족을 애도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형제들아, 비록 우리의 회개를 통해 이미 용서받은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는 자신의 실족을 잊지 않도록 하겠으며, 언제나 자신의 죄를 기억하고 그 죄를 슬퍼하는 것을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겸손을 선한 동반자처럼 삼아, 허영과 교만의 올가미를 피할 수 있도록 하십시오.

73. 누구도 자신의 힘으로 수고를 감당하고 덕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모든 선한 일의 원인은 하나님이시며, 모든 악한 일의 원인은 우리 영혼을 유혹하는 마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한 일을 행할 때는 그 선한 일의 원인을 주신 분께 감사를 드리고, 악한 일이 닥칠 때는 그러한 일들의 주인에게 돌리라.

74. 지식과 그에 상응하는 실천을 조화롭게 결합하는 이는 칭찬받을 만한 영적 경작자로, 두 가지 가장 기쁜 샘에서 영혼의 밭에 물을 주는 자이다. 이때 지식은 최상의 것을 관조함으로써 마음에 날개를 달아주고, 그에 상응하는 실천은 “땅에 속한 지체들, 곧 음행, 부정, 정욕, 악한 욕망” (골 3,5)를 죽여 버린다. 이 것들이 죽임을 당하면, 그때 비로소 아름다운 미덕의 꽃들이 피어나 풍성한 영적 열매, 곧 “사랑, 기쁨, 평화, 오래 참음, 친절, 자비, 믿음, 온유, 절제” (갈 5,22-23) 맺는다. 그때 비로소 이 절제하는 행자는 “정욕과 욕망을 품은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을 모신 설교자와 함께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제 나는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니,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갈 2:20).

75. 그리고 그리스도 사랑하는 자여, 또 한 가지 네게 숨기지 말아야 할 것은, 단 하나의 정욕이 네 안에서 자리를 잡고 습관처럼 뿌리내리면, 그 집으로 다른 정욕들도 이끌어 온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정욕들 은 서로 경쟁하고, 그 원흉인 악령들도 마찬가지로 서로 경쟁하지만, 우리 모두의 파멸을 향해 한마음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76. 수련을 통해 육체의 꽃을 시들게 하고 그 모든 의지를 잘라내는 자, 바로 그가 “주 그리스도의 상처를 자기 죽을 육체에 지고 있는 자”이다(갈 6,17).

77. 수행의 수고 끝에 오는 것은 무정(無情)의 평안이며, 육체의 온갖 위안은 불의의 정욕이다.

78. 수도 생활의 오랜 세월을 가치 있는 일로 여기지 말고, 광야에서 오랫동안 머물며 그곳에서 가혹한 수행을 인내로 감당했다는 이유로 자만함에 빠지지 말라.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라. 너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종이며, 주님의 계명을 아직 다 이행하지 못했음을. 실제로, 우리가 이 현세에 머무는 한, 우리는 아직 유배에서 소환되지 않은 자들이며, 여전히 바빌론의 강가에 앉아 있고, 이집트의 노예 생활 아래에서 고통받고 있으며, 아직 약속의 땅을 보지 못한 것이다: 이는 우리가 아직 유혹적인 정욕 속에서 타들어 가는 낡은 사람을 벗어던지지 못했고, 아직 하늘의 형상을 입지 못했으며, 여전히 육신의 형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자만할 여지가 없으며, 오직 울며 전능하신 분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쓰라린 파라오의 노예 생활에서 구원하시고, 그의 잔혹한 폭정에서 건져내시며, 약속의 복된 땅으로 인도하사, 마침내 하나님의 성소에서 안식을 얻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우편에 서게 해 주시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이 모든 복은, 위대한 지혜보다도 더 큰 것이니, 우리가 진리 안에서 행한 일들로 말미암아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자비로 말미암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분을 본받아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는 것을 그치지 맙시다: “내 탄식으로 지쳤고, 밤마다 내 침상을 씻으며, 내 눈물로 내 침대를 적시노라”(시 6,7).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라(시 125,5).

79. 수다스러운 영을 멀리 쫓아내라. 그 안에는 온갖 악한 정욕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거짓이 나오고, 그로부터 건방짐이 나오며, 그로부터 조롱과 음란한 말, 허튼소리 등이 나온다. 그러므로 “수다스러움에서 죄를 피할 수 없다” (잠언 10, 19). – “침묵하는 사람은 이성의 보좌이다”(잠언 12, 23). 그러나 주님께서도 우리가 모든 헛된 말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마태복음 12, 36).

80. 우리를 비방하고 책망하거나, 다른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를 공격하는 자들에게, 우리는 그들과 똑같이 대응하라는 계명을 받은 것이 아니다. 즉, 악담으로 맞대응하거나 책망으로 맞서지 말고, 오히려 그들에 대해 선한 말을 하고 그들을 축복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평화롭지 않은 사람들과 화해할 때, 우리는 전쟁이나 싸움 속에서 악마들과 대적하게 되며, 형제들과 원수 지내고 싸울 때, 우리는 악마들과 화해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악마들을 온전히 미워하고, 그들과 끊임없이 싸워야 한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81. 교활한 말로 이웃에게 걸림돌을 놓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래야만 온통 교활한 마귀에게 스스로 걸려 넘어지지 않을 것이다. 보라, 선지자가 외치는 말을 들어보라. “주님께서는 피를 흘리는 자와 아첨하는 자를 미워하시나니” (시 5:7) 또한 “주님께서는 아첨하는 입술과 궤변을 일삼는 혀를 멸하시리라” (시 11:4)고 하셨다. 마찬가지로 형제가 넘어졌을 때 그를 정죄하는 일도 피하라. 그래야 선함과 사랑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다. 형제에 대한 선함과 사랑을 갖지 못한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 자이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니, 천둥의 아들이자 그리스도의 사랑하는 제자인 요한이 외친 대로이다(요일 4:8). – 만일 모든 이의 그리스도이시며 구주이신 분이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셨다면,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요일 3:16).

82. 사랑은 ‘미덕의 어머니’, ‘율법과 선지자들의 머리’라고 불릴 만하다. 그러니 우리 모두, 경건한 사랑을 얻기까지 모든 수고를 감수하고, 이를 통해 정욕의 폭정에서 벗어나, 미덕의 날개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 인간의 본성이 감당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하나님을 뵙자.

83. 만일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사랑을 가진 자는 자기 안에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 없다면, 우리에게는 전혀 아무런 유익도 없으며,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성 요한은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면, 거짓말하는 자이다”(1요한 4,20), 그리고 또 이렇게 말한다. “아무도 하나님을 본 적이 없고,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며, 그분의 사랑은 우리 안에서 완전해진다”(1요한 4,12). 이로부터 사랑이 성경에 기록된 모든 선 중에서 가장 높은 선임이 분명하며; – 또한 하나님과 함께 거하며 그분과 결합되는 인간의 미덕 중 사랑과 관련되지 않거나 사랑에서 비롯되지 않은 것은 단 하나도 없으며, 그 미덕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사랑에 감싸여 보호받고 있다.

84. 우리에게 찾아오는 형제들을 맞이할 때, – 사랑의 규율을 어기지 않기 위해 이를 부담으로 여기거나 침묵을 깨는 것으로 간주하지 말며, 또한 그들에게 선을 베푸는 자로서 그들을 초대하지 말고, 오히려 그들로부터 선을 받는 자로서, 그들에게 빚진 자로서 ‘ ’의 간구와 기쁜 얼굴로 그들을 환대합시다. 이는 우리 조상 아브라함 총대주교가 보여준 본보기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신학자도 이렇게 가르칩니다. “내 자녀들아, 말이나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리로 사랑하라. 그리하여 우리가 진리 안에서 있음을 알게 되리라” (요한일서 3:18, 19).

85. 총대주교께서는 나그네를 환대하는 일을 자신의 끊임없는 사명으로 삼으시고, 자신의 천막 앞에 앉아 지나가는 이들을 모두 차별 없이, 불경한 자와 이방인들에게도 주저 없이 식사를 대접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천사들과 주님 모두를 환대함으로써 그 놀라운 동석의 은총을 누리셨습니다. 우리도 온전한 열정과 기꺼운 마음으로 나그네를 환대하는 일에 힘써, 천사들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신까지 맞이할 수 있도록 합시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이 내 작은 형제 중 한 사람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태복음 25:40) 하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선행을 베푸는 것은 좋으나, 특히 갚을 것이 없는 이들에게 베푸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누가복음 14:14).

86. 누구든지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거나, 소홀히 여기거나, 원수의 생각을 품는 일이 없다면, 그 사람은 마음이 깨끗하여 “마음이 깨끗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라”(마태복음 5:8)는 말씀을 들을 자격이 있다.

87. 우리는 감각, 특히 시각, 청각, 혀를 현명하게 다스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며, 정욕적으로 보거나 듣거나 말하지 않고, 모든 것을 우리 영혼의 유익을 위해 행하는 것을 스스로의 법칙으로 삼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감각 기관들이 이성에 의해 통제되지 않을 때, 그 어떤 것도 죄로 이끌기 이보다 더 유혹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성이 이 감각 기관들을 다스리고, 질서 있게 유지하며, 마땅한 곳과 원하는 곳으로 이끌 때, 그 어떤 것도 구원의 일에 이보다 더 유리한 것은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제멋대로 날뛰면, 후각은 나약해지고, 촉각은 광란처럼 마땅치 않은 곳으로 뻗어 나가며, 셀 수 없이 많은 정욕이 밀려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이성에 의해 제자리에 머물러 있을 때, 우리 안 곳곳에서 위대한 평화와 흔들리지 않는 고요함이 드러난다.

88. 마치 귀중한 향유가 그릇에 담겨 있더라도, 거처의 공기를 향기로 가득 채움으로써 그 근처에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기분 좋은 감각을 선사하듯이, 마찬가지로, 덕이 있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영혼의 향기는 육체의 모든 감각을 통해 발산되어, 이를 보는 모든 이에게 내면에 감춰진 덕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누가 보기에, 혀가 부적절하고 품위 없는 말은 전혀 하지 않고 듣는 이에게 유익한 말만 하며, 눈은 겸손하게 바라보고, 귀는 부적절한 멜로디나 말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으며, 발걸음은 단정하고, 얼굴은 웃음으로 일그러지지 않고 오히려 곧 쏟아질 눈물과 울음을 암시하고 있다면, – 이 모든 것을 보고도, 그 내면에 얼마나 풍성한 미덕의 향기가 깃들어 있는지 깨닫지 못하는 이가 누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구세주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너희 빛을 사람 앞에서 그렇게 비추게 하여, 그들이 너희의 선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태복음 5:16) 하셨다.

89.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복음서에서 “좁고 괴로운” 길이라고 부르셨던 그 길을, 나중에는 “선한 멍에와 가벼운 짐”이라고 부르셨습니다(마태복음 7,13.14; 11,30). 이처럼 서로 상반된 것처럼 보이는 두 가지가 어떻게 같은 것으로 보일 수 있는가? – 바로 이렇다. 그 본성상 이 길은 가혹하고 힘들지만, 이를 걷는 이들의 의지와 선한 소망에 따라, 선을 사랑하는 영혼들에게는 고통스럽기보다 오히려 갈망하고 사랑하며 달콤한 길로 여겨진다. 바로 그 때문에 이 좁고 고통스러운 길을 선택한 이들이, 넓고 넉넉한 길보다 더 큰 기꺼움으로 그 길을 걷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복자 루카가 사도들에 대해, 그들이 채찍으로 맞은 후에도 기쁨을 품고 공의회 앞에서 돌아왔다고 말한 것을 들어보라(사도행전 5, 40. 41). 그러나 채찍의 본성은 그런 것이 아니니, 달콤함이나 기쁨이 아니라 슬픔과 고통을 초래합니다. 만일 채찍질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달콤했다면, 그분을 위하여 다른 종류의 고통과 육체의 괴로움도 마찬가지로 달콤해진다는 것이 무엇이 놀랍겠습니까?

90. 고통받으며 정욕에 사로잡힌 우리는 종종 당혹스러워하며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도대체 왜 우리가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가?” – 이러한 속박이 우리에게 닥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묵상하는 일에서 멀어졌기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 만약 누군가 자신의 마음을 우리 주님이시며 주인이신 하느님께 굳게 붙인다면, – 하느님께서 참되시니 – 구세주께서 친히 그러한 영혼을 온갖 속박에서 건져내실 것이니, 선지자가 말한 대로 “내가 주님을 내 앞에 뵙고, 그분이 내 오른쪽에 계시니 내가 흔들리지 않으리라”(시편 15,8)고 한 대로이다. 주님께서 항상 내 오른편에 계셔서 나를 감싸시고 보호하시며, 흔들리지 않게 하시는 것보다 더 달콤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이를 누릴 수 있는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91. 성부들은 사람이 오직 세상에는 오직 하나님만이 계시다는 가장 내면적인 마음가짐을 얻고 확고히 다질 때에만 평안을 찾을 수 있다고, 옳고 의심의 여지 없이 진실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그 어떤 것에도 두지 않고 오직 그분만을 갈망하며, 오직 그분께만 굳게 붙어 있는 자입니다. 그런 사람은 진실로 평안을 얻고 정욕의 폭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다. 시편 기자는 “내 영혼이 주님을 사모하나이다. 주의 오른손이 내게 기쁨이 되나이다”(시 62:9)라고 말한다.

92. 자만심, 쾌락 추구, 명예 추구는 영혼에서 하느님을 향한 기억을 몰아낸다. 하느님을 향한 기억이 끊어지면, 그때야말로 정욕의 반란이 우리 안에 자리 잡는다.

93. 자만심은 셀 수 없이 많은 정욕의 근원이 된다. 그러므로 누군가 자신의 마음에서 자만심을 뿌리 뽑을 때, 주님의 도우심으로 다른 정욕들까지도 쉽게 이겨낼 수 있다. 이는 자만심에서 대개 분노, 슬픔, 원한, 쾌락 추구, 그리고 제멋대로인 오만함이 생겨나기 때문이며, 자만심에 굴복한 자는 필연적으로 다른 정욕들에게도 굴복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만심이라 부르는 것은 육체에 대한 열정적인 애착과 육체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사랑을 말한다.

94. 무엇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대상과 끊임없이 함께 있기를 원하며, 사랑하는 대상과 교감하고 조화를 이루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멀리한다. 분명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도 항상 그분과 함께 머물며 대화하기를 갈망하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순수한 기도를 통해 이룰 수 있다. 우리는 온 힘을 다해 이 기도에 전념해야 한다. 왜냐하면 기도는 우리를 우리 주님께 바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시여, 나의 하나님이시여, 내가 주를 향하여 아침을 기다리나이다.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나이다”(시 62:2)라고 말씀하신 분이 바로 그러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악한 것에서 마음을 멀리하고 끊임없이 신성한 사랑에 찔리는 자가야말로 하나님을 향하여 아침을 기다리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95. 우리가 배운 바와 같이, 절제와 겸손으로부터 무정함이 태어나고, 믿음으로부터 지식이 태어납니다. 이를 통해 영혼은 분별력과 사랑에서 성장합니다. 신성한 사랑을 자신의 깊은 곳에 품은 이들은, 순수한 기도의 날개를 타고 끊임없이 그 사랑의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 “하나님의 아들을 온전히 알고, 그리스도의 충만함에 이르는 데까지 자라나” (엡 4,13)게 된다.

96. 실천적인 덕은 정욕을 굴복시키고 분노를 억제하며, 통찰과 관상은 마음에 날개를 달아 주어, 모든 물질적 존재를 초월하여 하나님께로 옮겨가게 하고, 그분 안에서 참된 행복을 누리게 한다.

97. 우리의 첫 번째 과업은 정욕을 누그러뜨리고 힘껏 이를 이기는 것이며, 두 번째 과업은 덕을 쌓아 우리 영혼을 텅 비고 무기력한 상태로 내버려 두지 않는 것이며, 세 번째 과업은 우리 덕과 수고의 열매를 냉철하게 지키는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부지런히 일할 뿐만 아니라, 깨어 있는 마음으로 그것을 지키라고 명령받았기 때문이다.

98. “너희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 두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누가복음 12:35). 우리가 일을 잘 감당하고 기꺼이 행할 수 있게 해주는 올바른 허리 띠는, 겸손한 마음을 바탕으로 한 절제이며, 여기서 절제란 모든 정욕을 끊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영적인 등불의 빛의 원천은 순수한 기도와 완전한 사랑이다. 이와 같이 진리에 따라 올바른 마음가짐을 가진 자들은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과 같으니, 주님께서 오셔서 문을 두드리실 때 즉시 그분께 문을 열어 드릴 것이며, 주님께서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오셔서 그들의 집에 거처를 마련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오셔서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발견하시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라” (누가복음 12:36, 37).

99. 수도자는 아들과 같이 온 마음과 온 생각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며, 종과 같이 그분 앞에서 경외심을 가지고 그분께 순종하며, 두려움과 떨림으로 그분의 계명을 이행해야 한다. 영으로 불타오르며, 성령의 온전한 무장을 갖추고, 영생을 얻으리라는 소망에 안식을 얻으며, 명령받은 모든 것을 빠짐없이 행하며, 절제하고, 자신의 마음을 악한 생각으로부터 지키며, 선한 생각 속에서 끊임없이 거룩한 신적 묵상을 실천하고, 매일 자신의 생각과 행위에 대해 스스로 심판하며, 부족한 점을 보충하고, 이룬 일로 자만하지 말며, 자신을 ‘열쇠를 받지 못한 종’이라 칭하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자로 여기며, 모든 일에 대해 전능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자신의 삶에서 바른 모든 것을 그분께 돌리며, 허영이나 사람의 호감을 얻기 위해 어떤 일도 하지 말고, 오직 유일한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바라며 모든 일을 은밀히 행하며; 무엇보다도 먼저,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엇보다도 자신의 영혼이 사도인 하나님의 전도자들과 성부들로부터 전수된 보편 교회의 모든 교리에 대한 정통 신앙으로 굳건히 지켜져야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사는 자들에게는 큰 보상이 주어지니, 곧 끝없는 생명과 무너지지 않는 거처,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 본질은 하나이시나 삼위일체이신 하나님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100. “말씀의 끝이니, 모두 들으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라.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라고 전도서가 말합니다( – 12, 13). “내가 너에게 간결한 말로 하나님의 길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라.” 여기서 말하는 경외심은 당연히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계명을 주신 분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우리가 가져야 할, 완전하고 완전함을 이룩하는 경외심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형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죄를 짓지 않는다면, 분명 그 끔찍한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된다면, 죄를 좋아하는 성향을 가진 우리는 주저 없이 죄를 저지르며 멈추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죄 그 자체에 대한 혐오로 인해 죄를 삼가는 것이라면, 우리는 우리 주님 께 대한 사랑으로 행동하며, 그분을 화나게 할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계명 중 어떤 것도 소홀히 하지 않으려 두려워할 때, 그러한 두려움은 선 그 자체에서 비롯되므로 순수하며, 우리 영혼을 정화시키고 완전한 사랑과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 이 두려움을 가지고 그에 따라 계명을 지키는 자, 바로 그 사람이야말로 참된 사람, 즉 마땅히 그래야 할 사람입니다. 이를 알기에, 우리는 그러한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며, “우리가 온전하고 온통 완전하여, 덕행에서 아무것도 결핍되지 않도록” (야고보서 1:4), 겸손한 지혜와 상한 마음을 품고, 끊임없이 주님께 위대한 아르세니오 성인의 기도를 드리며: “나의 하나님! 나를 버리지 마소서;

주님 앞에서 선한 일을 한 것이 하나도 없사오니,

그러나 주의 은혜로 그 시작을 할 수 있게 하소서.” 이는 우리의 모든 구원이 하나님의 자비와 인자하심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께 영광과 권능과 경배가 아버지께와 아들에게와 성령께, 지금과 항상 그리고 세세토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

 

성 테오도르 에데스

 

그에 대한 간략한 소개

이 철학적 설교는 우리 영적 삶 속의 내적 현상들을 지혜롭게 해석하고, 이를 통해 수련자들에게 마땅한 교훈을 도출해 냈다는 점에서 다른 금욕적 저작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합니다. 이 설교의 저자가 누구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제목에서는 그를 성 테오도르라고 칭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누구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리스의 선행집』을 편집한 이들은 이 글에서 성 테오도르 에데스키의 100개 장에 담긴 사상과 유사한 내용을 발견하고, 이를 후자에게 귀속시켜 그의 100개 장 뒤에 수록하였다. 그러나 체르니히프의 필라렛 대주교는(『교부들』 §277, 각주 10) 성 테오도르 에데스에게 이 글을 귀속시킬 수 있는 것은 단지 추측에 불과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실제로 이 글 자체는 그에 대한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말씀이 성 테오도르 에데스스에게 속하는지 여부를 인정할지 말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기되, 이 글을 읽는 것이 독서를 통해 유익을 구하는 모든 이에게 유익하다고 여겨, 『그리스도교 자비서』의 본을 따라 성 테오도르 에데스스의 100개 장 뒤에 수록한다.

 

우리의 성부 테오도르의 관념론적 설교

1. 이 견고한 물질애의 속박을 끊고, 그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 선행을 실천하는 습관을 기르는 일이 얼마나 위대한 업적인가! 진실로 모든 물질적인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용감하고 기개 있는 영혼이 필요하다.

2. 그 다음에 추구해야 할 것은 단지 정욕으로부터의 정화만이 아니다. 이는 그 자체로 미덕이 아니라 미덕을 위한 준비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쁜 습관을 정화하는 데에는 미덕을 함양하는 일도 함께 곁들여야 한다.

3. 영혼의 정화는 다음과 같다. “사고의 측면”에서는, 세속적이고 유혹적인 습관, 즉 일상적인 근심과 걱정, 나쁜 성향, 부적절한 추측과 예상을 변화시키고 완전히 버리는 것이다; “욕망의 측면”에서는 어떤 물질적인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감정에 휩쓸리지 않으며 이성에 순종하는 것이며, “감정의 측면”에서는 일어나는 어떤 일에도 동요하지 않는 것이다.

4. 그리고 이러한 정화와, 우리의 힘을 순수하지 못하게 만드는 모든 것을 제거하고 이를 바로잡은 후에는, 영적 완전함과 신성화에 이르는 여정이 요구된다. 이는 악에서 벗어난 자는 선을 행해야 하기 때문이다(시 33:15). 이때 무엇보다 먼저 자신을 부인해야 하며, 이렇게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름으로써, 가장 높은 신성화의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

5. 그렇다면 이 완전함과 신성화에 이르는 상승은 어떤 것일까? “이성의 측면에서” 이는 인간 본성이 감당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과 모든 존재 위에 계신 분에 대한 가장 완전한 인식이며, “갈망의 측면에서”는 최상의 선을 향한 끝없이 지속되고 끊임없는 갈망과 열망이며, “감정의 측면에서”는 갈망하는 대상을 향한 가장 활기차고 적극적인 움직임으로, 멈추지 않고 약해지지 않으며, 마주치는 어떤 고통으로도 그 전진을 가로막히지 않고; 그러나 거침없이, 뒤로 물러서지 않고 나아가는 것이다.

6. 선을 향한 영혼의 움직임은 악을 향한 움직임보다, 정신적 아름다움이 감각적 아름다움을 능가하는 만큼 더 강해야 한다. 따라서 육체에 대한 영혼의 보살핌은 오직 그 필요를 충족시키고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만큼만 허용되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우리 동물적 유기체가 강제로 무너지는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이를 스스로 깨닫는 것은 쉽지만, 실제로 실천에 옮기는 것은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영혼의 오래된 습관을 수고 없이 뿌리 뽑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7. 어떤 예술을 배우는 데 땀 흘림 없이는 성취할 수 없는 것처럼, 행복의 본질인 하느님께 대한 집중된 관조와 주의력의 확장 또한 많은 수고와 오랜 시간을 거쳐야만 이루어진다. 이는 갈망하는 힘이 그러한 열망의 결과를 받아들이고 그 열매를 맛볼 때까지 지속된다. 이 과정에서 우리의 마음은 세속적인 것으로 이끌어가는 감각적 욕망에 대해 많은 저항을 보여야 하며, 이로 인해 우리 안에서는 죽음까지 끊이지 않는 내적 투쟁과 육체와의 싸움이 벌어진다. 비록 때로는 분노와 정욕이 누그러지고, 감각이 경험적 통찰과 마음의 싸움에 능숙해진 기술로 무장하여 감각을 통제함으로써 그 싸움이 약해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말이다.

8. 그러나 깨달음을 얻지 못한 영혼은 보통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못하므로, 진정으로 정화될 수도 없고 신성한 빛으로 승천할 수도 없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 말은 신실한 자들에 대해 언급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를 더욱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인식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간략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이 땅의 인식 중 하나는 본성에 속하고, 다른 하나는 본성을 초월한다. 이 두 번째 것이 무엇인지 첫 번째 것을 통해 분명해질 것이다.

9. 우리가 ‘자연적 지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영혼이 자연적인 방법과 힘을 활용하여 탐구하고 연구함으로써, 창조와 창조주에 대해 얻을 수 있는 지식이다. 물론, 이는 물질과 결부된 영혼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해당된다. 왜냐하면 지성의 에너지는 육체와의 접촉과 융합으로 인해 약화되며, 이로 인해 지성은 관념적 대상들과 직접적으로 접촉할 수 없고, 대신 환상 속에서 그것들을 사유해야 할 필요가 있는데, 환상의 본성은 길고 굵은 형상을 만들어내는 데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육신 안에 있는 마음은 사물을 판단하고 이해하기 위해 그에 상응하는 사물의 형상을 필요로 한다. 이제 마음, 즉 실재하는 존재가 이러한 자연적인 방식으로 얻는 인식이 바로 우리가 ‘자연적 인식’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10. 초자연적 지식이란, 이성의 자연적 방식과 능력을 초월하는 경로를 통해 이성에 도달하는 것이거나, 인식 대상이 육체에 묶인 이성을 상대적으로 능가하는 것으로, 그러한 인식은 명백히 무형적인 이성에게 고유한 것이다. 그것은 유일한 하나님께서, 모든 물질적 집착에서 정화되고 신성한 사랑으로 가득 찬 마음을 발견하실 때 비로소 주어진다.

11. 그러나 지식뿐만 아니라 미덕도 이와 같이 구분된다. 어떤 미덕은 본성을 초월하지 않아 ‘자연적’이라 불릴 만하며, 또 다른 미덕은 선의 근원으로부터 비롯되어 우리의 자연적 힘과 상태를 초월하므로 ‘초자연적’이라 칭하는 것이 마땅하다.

12. 이를 설명한 후, 우리는 계몽받지 못한 자도 자연적 인식과 자연적 미덕을 가질 수 있지만, 초자연적인 것은 결코 가질 수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곳에서 활동하시는 지고하신 원인의 참여자이신 분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그가 어떻게 그것들을 얻을 수 있겠는가? 반면 계몽받은 자는 이 둘을 모두 가질 수 있다.

13. 여기에 한 가지 차이점을 더 덧붙이겠다. 초자연적 미덕은 먼저 자연적 미덕을 얻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으나, 초자연적 지식을 얻는 데에는 자연적 지식이 없어도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다음 사실을 알아야 한다. 동물도 감각과 상상력을 가지고 있듯이, 인간도 이를 가지고 있으나, 인간에게 있어 이 능력들은 훨씬 더 뛰어나고 고상하다: 마찬가지로 자연적 미덕과 지식에 관해서도, 교양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모두 이를 지니고 있지만, 교양 있는 사람의 경우 그것들이 교양 없는 사람보다 훨씬 더 뛰어나고 높은 상태에 있다.

14. 또 한 가지를 덧붙이자면, ‘자연적’이라고 불리는 지식 중에서도 미덕과 그와 반대되는 성향에 관한 지식은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순수한 지식으로, 철학자가 그러한 성향에 대해 이론적으로 고찰할 뿐 실제로 경험해 보지 않은 경우인데, 이러한 지식은 때때로 의심에 흔들리기도 한다; 다른 하나는 실천적인, 말하자면 진심 어린 것으로, 그러한 성향을 실제로 시험해 봄으로써 지식이 확증되는 경우인데, 이러한 지식은 명백하고 정확하며 결코 흔들리지 않고 의심을 허용하지 않는다.

15. 한편,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가운데, 덕을 함양하는 데 있어 이성에 대립하는 네 가지 요소가 있음을 알게 된다. “첫 번째”는 덕에 반하는 습관에 대한 성향으로, 오랜 습관의 힘으로 인해 세속적인 것에 치우치게 만든다; “둘째”는 감각의 작용으로, 감각적인 아름다움에 휩쓸리면서 이성과 함께 마음을 끌고 가는 것; “셋째”는 이성의 활력 이 약화되는 것으로, 이는 이성이 육체와 얽혀 있기 때문에 겪는 현상이다. 왜냐하면 시각과 보이는 대상, 그리고 일반적으로 감각과 감각적 대상의 관계는 이성과 사고 대상의 관계와 같지 않기 때문이다. – 나는 아직 육체에 존재하는 영혼의 지성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 왜냐하면 비물질적인 지성은 시각이 보이는 대상과 접촉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으로 사고 가능한 대상과 접촉하기 때문이다. – 그러나 시야가 흐려졌을 때, 그것이 보는 사물의 형태를 명확하지도, 정확하지도 않고 오히려 뒤섞인 채로 반영하듯이, 우리 이성도 비록 사고 대상을 인식하지만, 사고 대상의 아름다움을 실효성 있게 바라볼 수는 없으며;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어떤 것도 갈망할 수 없으니, 갈망의 정도는 인식의 정도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 그리하여 그는 즉시 다시, 자신에게 더 선명하게 나타나는 감각적인 아름다움으로 끌려 내려가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필연적으로 자신의 눈앞에 선한 것으로 나타나는 것, 그것이 참이든 거짓이든,을 향해 달려가기 때문이다. – 이 모든 것 외에도 (네 번째로) 비인간적이고 부정한 영들의 공격이 있다. 아아, 그들이 영혼을 사로잡기 위해 얼마나 많은, 또 어떤 덫을 놓아두는지 말로 다 할 수 없다! – 길 곳곳에서 다양한 형태와 방식으로, 감각 속에서, 말 속에서, 마음 속에서, 사실상 존재하는 모든 것 속에서 – 길을 잃은 양을 자신의 어깨에 메신 분이, 그분을 바라보는 이들의 영혼을 그분의 헤아릴 수 없는 보살핌으로 더 높은 존재로 만들어 주시지 않으셨다면, 그 어떤 영혼도 결코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16. 이 모든 것을 피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세 가지 수단이 있는데, 그중 “첫 번째”이자 가장 위대한 것은 온 마음을 다해 눈을 하나님께 돌리고 그분께 도움의 손길을 구하며, 모든 소망을 그분께 두는 것이다. 이는 만약 그분이 우리를 변호해 주지 않으신다면, 우리를 자신들에게로 끌어당기는 자들의 포로가 될 수밖에 없다는 진실한 확신에 근거한 것이다. “두 번째”는, 제 생각에 첫 번째의 원인이 되는 것으로, 지성을 지식으로 끊임없이 양육하는 것입니다. 이 ‘지식’이란, 감각적·사고적 모든 존재가 그 자체로 어떤 모습인지, 그리고 첫 번째 원인으로부터 비롯되고 그 원인을 위해 존재하는 존재로서 첫 번째 원인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아는 것,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비롯된 것들을 통해 모든 존재의 근원이신 분을 우리가 관조할 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피조물의 본성을 탐구하는 것은 그들에 대한 욕망에서 마음을 정화시키고, 그들에 의한 유혹에서 벗어나게 하며, 그들의 근원으로 이끌어 주어, 마치 거울을 통해 아름답고, 경이롭고, 위대한 것 속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경이롭고, 가장 위대한 것, 더 정확히 말하면 모든 아름다움과 경이로움, 위대함을 초월하는 것을 보게 하기 때문이다. 항상 이러한 생각 속에 머무르는 마음이, 실재하는 선을 갈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마음이 때때로 자신에게 낯선 것을 향해 달려간다면, 하물며 자신의 것을 향해 더더욱 달려가지 않겠는가? 이것에 사로잡힌 영혼이, 이 세상의 어떤 실재에 집착할 수 있겠는가? 그것들은 대개 영혼을 그녀를 사랑하시는 분과 그녀가 사랑하는 분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아니, 그녀는 육신의 삶조차도 진정한 선을 얻고 누리는 데 방해가 된다고 여겨 불만족스러워할 것이다. 왜냐하면 앞서 말한 대로, 마음이 물질 속에서 정신적인 아름다움을 꿰뚫어 보는 것이 분명하지 않더라도, 정신적인 선들은 그 자체로 그 아름다움의 바다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물줄기나 그 빛이 희미하게 비치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설득하여 모든 비정신적인 것을 넘어, 오직 그 유일한 선들만을 향해 돌진하게 하며, 설령 그로 인해 어떤 쓰라린 일에 빠지게 된다 하더라도 결코 그 달콤함에서 물러서지 않게 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반드시 수반되어야 할 “세 번째”는 우리 육신의 아내를 죽이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앞서 말한 천상의 선함들이 나타나는 모습을 분명하고 뚜렷하게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육신은 금식, 기도, 맨땅에서 잠자기, 필요한 거친 옷차림, 그리고 고된 노동을 통해 죽임을 당한다. 이처럼 육신은 죽임을 당하거나, 더 정확히 말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된다. 이렇게 하여 정제되고 정화되며, 가볍고 질서 정연해진 육신은 저항 없이 마음의 움직임을 편안히 따르며, 마음과 함께 높은 곳으로 올라간다. – 이것이 없으면, 그에 대한 우리의 모든 노력은 헛된 것으로 드러난다.

17. 이 고귀한 삼위일체는 그 자체 내에서 조화를 이룰 때, 영혼 속에 복된 미덕들의 모습을 낳는다. 그리고 이 삼위일체로 단장된 자에게서는 어떤 죄의 흔적도 나타나지 않을 것이며, 어떤 미덕도 결여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자들에게는 이미 버려진 것처럼 여기는 재물 추구도, 이미 경멸받은 것처럼 여기는 명예도 더 이상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는데, 영혼이 그들에게 매여 있는 동안에는 수많은 정욕에 상처를 입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와 명성에 집착하는 영혼이 고귀한 경지에 오를 수 없다고 단언하듯이, 앞서 말한 세 가지 영적 수행에 꽤 오랫동안 전념하여 그 일에 능숙해진 영혼이 그것들을 염려할 수 있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 영혼이 그러한 마음가짐 속에서, 지극히 높으신 분의 선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참된 선으로 여기지 않고, 다른 선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자신이 확신하듯이, 첫 번째 선에 더 가까운 것이라고 여긴다면, 어떻게 그 영혼이 금과 은, 혹은 이 세상의 다른 어떤 것을 사랑하고 호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 이 말은 명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18. 심지어 이 가장 만족할 줄 모르는 것, 즉 ‘걱정’이라 하는 것조차도, 그때는 반대편에서 이성을 공격하지 않는다. – 왜냐하면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에도 편향되지 않고, 그 어떤 것에도 몰두하지 않는 사람이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걱정의 구름은 가장 큰 정욕들, 즉 쾌락욕, 재물욕, 명예욕에서 뿜어져 나오는 증기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이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걱정과도 거리가 멀다.

19. 앞서 말한 사람들, 즉 그 세 가지 영적 수행에 익숙해진 이들에게는, 또 다른 지혜로 여겨지는 분별력도 부족함이 없으며, 이는 슬픔을 이끄는 수단 중 가장 강력한 것이다. 왜냐하면 미덕을 배우는 데에는 선과 그 반대되는 것을 정확히 분별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분별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의 인도 아래, 경험과 육신과의 투쟁은 선을 행하고 악에 대항하는 최선의 방법을 가르쳐 준다.

20. 그리고 그들에게는 두려움이 내재되어 있다. 사랑이 커질수록 두려움도 커지기 때문이다. 선을 얻으리라는 희망이 클수록, 얻지 못할까 하는 두려움도 그만큼 커진다. 그리고 이는 무수한 고문으로 위협받는 것보다 사랑에 상처받은 영혼을 훨씬 더 괴롭힌다. 왜냐하면 선을 얻는 것이 가장 복된 일인 만큼, 얻지 못하는 것은 가장 비참한 일이기 때문이다.

21. 이 길을 따라 말씀이 우리에게 다른 방식으로 앞서 나아가게 하려면, 끝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모든 일은 그 끝에서 비롯되어 부분들의 구별과 그 질서 정연한 관계를 얻기 때문이다. 우리 삶의 끝은 행복, 즉 천국이나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가장 위엄 있는 삼위일체를 뵙는 것뿐만 아니라, 동시에 신성한 이끌림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마치 신성화를 체험하는 것과 같고, 이 이끌림을 통해 우리 안에 부족한 것을 채우고 불완전한 것을 완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영적 존재들의 양식이 되는데, 곧 신성한 그 은총을 통해 부족한 것을 채워주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일종의 순환이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같은 곳에서 시작되어 같은 곳에서 끝납니다. 왜냐하면 누군가 더 많이 이해할수록 더 많이 갈망하고, 더 많이 갈망할수록 더 많이 맛보며, 더 많이 맛볼수록 다시 더 큰 이해로 향하는 자극을 받기 때문이다. 그리고 즉시 이 변함없는 운동, 혹은 어쩌면 변함없는 고요함이 시작된다.

22. 그러므로 우리 삶의 끝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이와 같다. 이제 그 끝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살펴볼 차례이다. 이성적인 영혼들—그들은 지적인 실체들이며 천사의 지성과 거의 차이가 없는 존재들이다—에게 있어 이 세상의 삶은 투쟁이며, 육신 속의 삶은 그들에게 주어진 시련이다. 그리고 그 업적과 투쟁에 대한 보상은 앞서 말한 상태, 즉 신성한 자비와 신성한 정의 모두에 걸맞은 선물이다. 정의라고 하는 것은, 그 선들이 자신의 수고와 땀 없이는 얻어질 수 없기 때문이며; 자비이기는, 그 선물이 어떤 자신의 수고보다도 헤아릴 수 없이 뛰어나기 때문이며, 또한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 그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23. 그러나 이곳의 위업은 도대체 무엇일까? – 이성적인 영혼이, 흙으로 만들어져 존재하며 아래로 끌리는 육체와 결합되어 있다. 그 영혼은 이 육체와 결합되어, 서로 완전히 대립하는 이 둘—영혼과 육체—로부터 변형이나 혼합 없이—절대 그렇지 않기를!—오직 이 둘이 각자의 본성에 따라 지닌 특성을 유지한 채, 두 가지 완전한 본성을 지닌 하나의 인격체가 이루어졌다. 이처럼 이중적인 본성을 지닌 복합적 존재인 인간은, 각 본성에 고유한 특성을 드러내고 행동으로 나타낸다. – 그리고 육체에게는 그와 유사한 것, 즉 육체적인 것을 갈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러한 유사한 것에 대한 갈망은 모든 존재에게 자연스러운 것이니, 그들의 존재 자체는 자신과 유사한 것을 자신 안에 실현함으로써 조건지어지기 때문이다. 육체에게는 감각적으로 유사한 것을 즐기는 것도 자연스럽고, 피로할 때 휴식을 취하는 것도 그에게 달콤하다. 이것이 바로 우리 동물적 본성에 있어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것이다. – 이성적인 영혼에게는, 지적인 본성으로서, 마찬가지로 지적인 것을 갈망하고 그것으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자연스럽고 바람직하다.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그 안에 자연스럽게 뿌리내려 있다. 그리고 영혼은 자연스럽게 하나님과 다른 정신적인 것들로 즐거움을 누리고자 하지만, 이를 방해받지 않고 할 수는 없다.

24. 첫 번째 인간은 감각을 통해 감각적인 것을, 이성을 통해 지적인 것을 방해받지 않고 지각하고 그로부터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주로 더 나쁜 것이 아니라 더 나은 것에 몰두해야 했다. 비록 그 자체로는 이성을 통해 지적인 것과, 감각을 통해 감각적인 것과 교감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 나는 아담이 감각을 이용해서는 안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헛되이 육신을 부여받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그가 주로 감각적인 것에, 그리고 감각적인 것을 위해 즐거움을 느껴서는 안 되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감각적 인상을 통해 피조물의 아름다움을 꿰뚫어 보며, 그 아름다움의 근원이신 분께로 마음을 기울여 그분으로 인해 경이로움을 느끼며 즐거워해야 했으며, 창조주께 경탄할 더 큰 이유를 가지고 있었지, 감각적인 것에 집착하여 그것에 경탄함으로써 창조주의 정신적 아름다움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었다. 아담은 그렇게 행동했어야 했다.

25. 그러나 그는 감각을 잘못 사용하여 감각적인 아름다움에 경탄하게 되었고, 보기에도 아름답고 먹기에도 좋은 열매를 보고는, 정신적인 것들로 얻는 기쁨을 저버리고 그것을 맛보았다; 그러자 의로운 재판관은 그를 하나님과 모든 피조물을 관조할 자격이 없는 자로 여기시고 — 그가 경멸했던 것들인 — “어둠을 자신의 피난처로 삼게 하심”과 모든 비물질적 대상들로부터 그를 쫓아내셨다(시 17:12). 왜냐하면 부정한 자에게 거룩한 것을 허락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그것을 사랑했기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 즐거움을 허락하시고, 지적인 삶의 미약한 흔적만을 남긴 채 감각으로만 살게 하셨다.

26. 바로 이 때문에 사색적인 것들과의 교감을 이루려는 수련이 우리에게 가장 힘든 일이 되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감각으로 감각적인 것을 누리는 것처럼, 이성으로 사색적인 것을 누리는 것은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록 세례를 통해 정화되고 고양됨으로써 그에 대한 큰 도움을 받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우리에게 가능한 한도 내에서 우리는 감각적인 것이 아니라 지적인 것에 정진해야 하며, 지적인 것에 경탄하고 그것을 갈망해야 한다. 반면 감각적인 것에는 아무것도 경탄하지 말고, 그 자체로(감각적인 것으로서, 그리고 감각의 만족을 위해) 즐거움을 얻고자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진실로 감각적인 것은 지적인 것과 비교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실체의 실체와 마찬가지로, 아름다움의 아름다움도 더 경이롭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이 본래 어떤 모습인지에 따라, 우리도 그에 맞게 대해야 한다. 가장 훌륭한 것보다 추한 것을, 가장 존경할 만한 것보다 천한 것을 더 사랑하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도 더 큰 광기가 아니겠는가? 게다가 이는 피조물, 즉 정신적인 것이든 감각적인 것이든,에 대해 그렇게 대할 때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모든 것 위에 계신 분께도 그렇게 대하며, 그분보다 형체도 없고 하찮은 물질을 더 선호한다면, 도대체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

27. 이제 우리의 과업은 바로 이것이다. 즉, 정신적인 것을 항상 누릴 수 있도록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마음과 욕망을 그쪽으로 향하게 하며, 결코 감각적인 것에 의해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감각적인 것에 휩쓸려, 그 자체를 위해 놀라울 정도로 그것에 매료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감각을 사용해야 한다면, 창조주의 피조물들을 통해 그분을 알아가기 위해, 마치 물속에서 태양을 보는 것처럼 그분께서 그 안에 계시음을 보며 사용해야 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모든 것의 첫 번째 원인이 그 안에 담길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28.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그러나 이를 어떻게 이행할지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미 말했듯이, 육체는 감각을 통해 자신에게 고유한 것들을 향락하고자 하며, 만족을 얻을수록 더 많은 것을 갈망하기 때문이다. 이는 영혼의 지향과 정반대이다. 그러므로 영혼의 첫 번째 관심사는, 앞서 말한 대로 감각적인 것에서 즐거움을 얻지 못하도록 모든 감각을 억제하는 것이어야 한다. 몸은 강해질수록 자기 본성에 더 강하게 끌리기 마련이며, 그것에 대한 갈망이 강해질수록 더 억제할 수 없게 되므로, 영혼은 금식, 기도, 장시간 서 있기, 맨땅에서 잠자기, 그리고 온갖 다른 절제를 통해 육체를 죽이도록 힘써야 한다. 이는 육체의 힘을 고갈시켜, 영적 행위에 임할 때 육체가 겸손하고 순종적으로 있게 하기 위함이다: 이것이야말로 영혼이 이행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이를 바라는 것은 쉬워도 실천하는 것은 어렵고, 온전한 주의력을 기울일 때조차 감정에 휩쓸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소홀히 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세 번째로 현명하게 고안된 치료법이 바로 기도와 눈물이다. 기도는 주어진 은혜에 감사하며, 죄의 용서와 앞으로의 성공을 위한 힘의 하강을 간구한다. 앞서 말했듯이, 신의 도움 없이는 영혼이 혼자서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기도는 영혼이 갈망하는 분과의 일치를 가져다주고, 그분으로 인한 기쁨을 주며, 그분께 온전히 향하는 갈망을 북돋아 줍니다. 이것이 바로 경건한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즉, 의지를 기울여 이를 가능한 한 더 강하게 갈망하는 것입니다. – 또한 눈물은 큰 힘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죄에 대해 주님을 달래 주며, 감각적 쾌락으로 인해 우리에게 초래된 더러움을 씻어내고, 천상의 것을 갈망하는 마음을 북돋아 준다.

29. 바로 여기에 모든 핵심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속의, 즉 영적인 선을 관조하고 이를 온전히 갈망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육체의 굴복을 이룰 수 있는데, 그 구성 요소인 금식, 정절 등은 서로를 뒷받침하며, 이를 위해, 그리고 이와 함께 기도가 필요하다. 이 행실들 각각은 여러 부분으로 나뉘지만, 그 모든 부분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 하나는 다른 하나를 필요로 하며, 하나는 다른 하나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30. 누구도 명예를 탐하는 마음과 재물을 탐하는 마음이 육체적 정욕에 속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육체적 정욕이란 오직 쾌락을 탐하는 것뿐이며, 이는 육체를 죽이는 데서 적절한 치료법을 찾는다. 그러나 앞서 말한 두 가지 정욕은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진정한 선, 즉 정신적 또는 영적인 선을 경험하거나 깨닫지 못한 채, 영혼은 영적 선이 부족함을 부로 위로받으려 하며 거짓된 선을 만들어 냈다. 영혼은 부에 대해 염려할 뿐만 아니라, 쾌락 추구와 명예 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부 그 자체를 일종의 선으로 여기며 부를 좇는다. 이 모든 것이 참된 선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명예를 갈망하는 것은 육체적 욕구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왜냐하면 육체적인 것으로는 그 갈망을 결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첫 번째 선과 참된 영광을 경험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31. 그리고 명예심뿐만 아니라, 한마디로 말해 모든 악의 뿌리는 무지이다. 왜냐하면 사물의 본성과 각 사물이 어디서 비롯되었으며 어떤 목적을 지니는지 마땅히 깨달은 자가, 나중에 자신의 궁극적인 종말을 잊고 세속적인 것에 매몰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영혼은 단지 선처럼 보일 뿐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는 그런 선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설령 습관이 폭군처럼 영혼을 무언가로 끌고 간다 해도, 영혼은 사물에 대한 정확하고 명확한 인식을 바탕으로 그 습관 자체를 이겨낼 수 있다. 그러나 습관이 생기기 전에도 영혼은 무지 때문에 유혹당하곤 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그리고 가능한 한 빨리 모든 존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그 후에 그에 따라 자신의 의지를 ‘최고의 선’을 향한 열망으로 고양시켜야 한다. 모든 현세적 선들이 완전히 헛된 것임을 올바르게 깨달은 이에게는, 그 모든 것을 경멸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성자 아바 필리몬

 

그분에 대한 간략한 소개

우리의 가장 경건한 아버지 필리몬, 곧 우리 신성한 선조들 중에서도 가장 절제력이 뛰어나고 눈물로 회개하던 분이 언제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선조들의 기록이 우리에게 전해 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지극히 경건하고 경험이 풍부하며, 위대한 아르세니우스의 가장 충실한 본보기로서 다른 어떤 장로들보다도 침묵을 사랑했다는 사실은, 이를 알고자 하는 이들이 이 글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기도와 간구 속에서 밤낮으로 인내하며 자신의 황량한 동굴에 머물러,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과 가장 달콤한 통곡의 샘으로 자신을 씻어내며, 모든 감각적·정신적 것을 초월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며 높이 올라, 마치 귀머거리이자 벙어리인 것처럼 항상 하나님 앞에 서 있었으며, 그분의 신성한 은총으로부터 놀라운 계시를 받았으니, 이 계시는 마치 태양의 광채와 같아서, 이 영원히 기억될 인물은 극도의 침묵과 고요함 속에서 단지 논하고 사려할 뿐만 아니라, 꿰뚫어 보고 예견하는 은사까지 얻게 되었다. 이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여기에 실린 그에 관한 이야기이며, 이 이야기에서는 오랜 기간에 걸친 그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활동적인 측면과 관조적인 측면 모두에서 성스러운 절제에 관한 그의 가장 분별력 있는 가르침이 제시되어 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추하고 역겨운 정욕의 옷을 벗어 던지기를 원하거나, 낡은 사람을 벗어 버리고, 무정욕과 은혜의 밝은 옷,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사람을 입기를 원한다면, 이 장로의 가르침을 자주 배우고 그 힘을 깨달아 실천으로 옮김으로써, 소원을 쉽게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아바 필리몬에 관한 매우 유익한 이야기

1. 은둔자 아바 필리몬에 대해, 그가 라브라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로미예바’라고 불리는 어떤 동굴에 스스로를 가두고, 수행의 수고에 전념하며,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위대한 아르세니우스가 스스로에게 말했던 것과 같은 말을 마음속으로 되뇌었다고 한다. “필리몬아, 네가 왜 이곳으로 나왔느냐?” 그는 꽤 오랫동안 그 동굴에 머물렀다. 그의 일은 기도용 끈을 엮고 바구니를 짜는 것이었는데, 이를 경제 담당자에게 건네주면 그로부터 작은 빵 몇 조각을 받아 그것으로 연명했다. 그는 소금을 뿌린 빵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으며, 그것도 매일 먹는 것은 아니었다. 보아하니 그는 육체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으나, 관상 수행에 힘쓰며 신성한 깨달음의 빛을 받았고, 그곳에서 형언할 수 없는 신비로운 인도를 받아 영적인 기쁨 속에 머물렀다. 토요일과 일요일에 교회로 갈 때면, 그는 항상 혼자서 깊은 명상에 잠긴 채 걸었으며, 마음이 자신의 수행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누구도 자신에게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다. 교회에서는 구석에 서서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쏟아내며 끊임없이 탄식했고, 마음속으로는 죽음에 대한 기억과 성부들의 모습, 특히 아르세니우스 대성인의 모습을 되새기며,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 걷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2. 알렉산드리아와 그 주변 지역에 이단이 나타나자, 그는 그곳을 떠나 니카노르 수도원으로 향했다. 그를 맞이한, 하느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파블린은 그에게 자신의 은둔처를 내어주며 완벽한 고요함을 마련해 주었다. 일 년 내내 그는 누구도 그와 만나게 하지 않았고, 필요한 빵을 건네줄 때를 제외하고는 스스로도 그에게 조금도 방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거룩한 부활절이 다가왔다. 만나서 대화를 나누던 중, 화제가 은둔 생활에 미쳤을 때, 필리몬은 이 경건한 형제 파블린 역시 (은둔 생활을 하려는) 훌륭한 뜻을 품고 있음을 깨닫고, 성서 와 교부들의 가르침에서 나온 수행에 관한 말씀을 풍성히 그에게 심어주며, – 완벽한 은둔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음을 모두에게 보여주며, 마치 하나님께 계시를 받은 아버지 모세가 가르친 대로, 침묵이 수행을 낳고, 수행이 통곡을 낳으며, 통곡이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겸손을, 겸손은 깨달음을, 깨달음은 사랑을 낳으며, 사랑은 영혼을 건전하고 무욕하게 만드니, 그때 비로소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과 멀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3. 그(빌레몬)는 그에게 말하였다. “너는 침묵을 통해 마음을 온전히 정화하고, 그 마음에 끊임없는 영적 활동을 불어넣어야 한다.” 눈이 감각적인 대상에 향하여 보이는 것을 유심히 들여다보듯이, 맑은 마음도 사고적인 대상에 향하여 영적으로 관조되는 것에 매료되어, 결코 그곳에서 떼어낼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침묵을 통해 정욕에서 벗어날수록, 정화될수록, 그만큼 (그 영적인 것들에 대한) 깨달음에 가까워진다. 그러나 마음이 완전해지는 것은, 실재적 깨달음의 영역에 들어서서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이다. 그때 그 마음은 왕과 같은 위엄을 지니게 되어, 비록 네가 그에게 모든 왕국을 제안한다 해도 더 이상 궁핍함을 느끼지 않으며 거짓된 욕망에 휩쓸리지 않는다. 그러니, 만일 네가 이러한 미덕을 이루고자 한다면, 서둘러 세상에서 도망치고 성인들의 길을 부지런히 달려가라. 겉모습에 대한 걱정은 버리고, 소박한 옷을 입고 겸손한 차림을 하라. 성품은 소박하게, 말은 꾸밈없이, 걸음걸이는 허영 없이, 목소리는 거짓 없이 하라. 가난하게 살며 누구에게도 신경 쓰이지 않는 삶을 사랑하라. 무엇보다도 마음을 지키고 정신을 맑게 하는 데 힘쓰며,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인내하고, 이미 얻은 영적 선물을 온전히 보존하여 변함없이 지켜내라. 자신을 세심하게 살피고, 은밀히 스며드는 유혹 중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마라. 왜냐하면, 침묵이 영혼의 정욕을 누그러뜨리기는 하지만, 만약 그것들이 타오르고 날카로워지게 내버려 둔다면, 보통은 오히려 더욱 사나워지며, 이를 방치하는 자들을 더 큰 힘으로 죄로 이끌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육체의 상처도 문지르고 찢어지면 치유될 수 없게 된다. 악마들이 그렇게 부추기고 감정이 그들과 뜻을 같이할 때, 단 한 마디만으로도 마음이 하나님의 기억에서 멀어질 수 있다. 영혼을 지키는 것은 위대한 업적이자 두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너는 세상에서 완전히 물러나, 영혼을 떼어내고 육체에 대한 모든 연민을 버려, 고향도, 집도 없는, 재산 없는 자, 돈 없는 자, 탐욕 없는 자, 근심 없는 자, 교제 없는 자, 세상의 일에 무지한 자, 겸손한 자, 자비로운 자, 선한 자, 온유한 자, 온화한 성품의 자, 신성한 인도하심으로부터 마음에 깨달음을 주는 인상을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된 자가 되어야 한다. 위대한 바실리오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듯이, 밀랍 위에서도 미리 새겨진 글자들을 지우지 않고서는 글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세상의 모든 관습에서 완전히 물러나, 자신 안에 흔들리지 않는 하늘의 지혜를 간직하며, 신성한 법칙으로 깨달음을 얻고 경건한 행실과 말로 빛을 발한 성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땅에 속한 지체를 죽였으며”(골 3, 5) 절제와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사랑으로 “땅에 속한 지체를 죽인” 성도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는 끊임없는 기도와 신성한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마음의 영적인 눈이 열려 만군의 왕을 바라보게 되기 때문이며, 이로써 큰 기쁨이 솟아나고, 영혼 속에서 억제할 수 없는 신성한 소망이 맹렬히 타오르며, 성령의 역사로 육체마저 그곳으로 이끌려 가므로, 사람은 온전히 영적인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복된 침묵과 가장 엄격한 수행의 삶을 실천하는 이들이 누리는 바입니다. 그들은 모든 인간적인 위로를 멀리하고, 하늘에 계신 유일한 주님과 홀로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는 자들입니다!

4. 이 말을 들은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형제는 영혼 속에 신성한 사랑에 찔려, (자신의 자리를 떠나) 그(필리몬)와 함께 가장 위대한 교부들이 경건의 길을 완수한 은수원에 이르렀다. 그들은 성 요한 콜로바의 라브라에 정착하여, 침묵 속에서 지내고자 했기에 자신들의 돌봄을 라브라의 경제 담당자에게 맡겼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곳에서 완전한 침묵 속에 머물렀으며, 토요일과 주일에는 교회에 나가 공동 예배에 참여하고, 그 외의 날에는 자신의 방에 머물렀다. 이때 각자는 따로 기도와 예배를 드렸다.

5. 성 필리몬 장로께서는 다음과 같은 예배 규칙을 지키셨다. 밤에는 시편 전체와 찬송가(시편집에 수록된 9곡)를 서두르지 않고, 분주함 없이 다 부르셨으며, 복음서 한 단락을 읽은 뒤, 앉아서 마음속으로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되뇌이시며 온전한 집중을 기울이며 꽤 오랫동안, 더 이상 이 호소를 외칠 수 없을 때까지; 그리고 마침내 잠을 청했다. 그 후 다시 새벽이 되면 첫 번째 시간을 노래로 바치고, 동쪽을 향해 자리에 앉아, 기분에 따라 사도서와 복음서를 번갈아 가며 때로는 (시편을) 노래하고 때로는 읽었다. 그렇게 그는 하루 종일 쉬지 않고 노래하며 기도하고, 천상의 경이로움을 묵상하며 기쁨을 누렸다. 그의 마음은 종종 그토록 깊이 묵상에 빠져, 자신이 땅 위에 있는지조차 알지 못할 정도였다.

6. 한 형제가 그가 그토록 전심전력으로 기도 봉사에 전념하며 때로는 신성한 묵상에 완전히 빠져드는 것을 보고 그에게 말하였다. “신부님, 이 나이에 몸을 죽이고 굴복시키는 것이 어렵지 않으십니까?” 그가 대답했다. “저를 믿으십시오. 하나님께서 기도 사역에 대한 이러한 열정과 사랑 을 제 영혼에 심어주셨기에, 저는 그 갈망을 온전히 충족시킬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육체의 연약함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장래의 복에 대한 소망이 이겨냅니다.” 그리하여 그의 모든 소망은 하늘로 지혜롭게 날아올랐는데, 이는 식사 시간에도 그러했지, 다른 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7. 어느 날, 그와 함께 살던 한 형제가 그에게 물었다. “관상의 신비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그러자 그는 그 형제의 끈질긴 태도와 진심으로 교훈을 구하는 모습을 보고 그에게 말하였다. “자네에게 말하노니, 자녀여, 마음이 완전히 정화된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가장 중요한 사역의 힘과 천사들의 계급에 대한 환상을 열어 보이신다.”

8. 그가 또 다음과 같이 물었다. “아버지, 왜 다른 모든 신성한 경전보다 시편을 더 기뻐하시며, 왜 조용히 노래하실 때 마치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처럼 보이십니까?” 이에 그는 그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다윗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시편의 힘을 제 영혼에 깊이 새겨 주셨기에, 저는 그 안에 감춰진 온갖 묵상의 기쁨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시편은 온전한 신성한 경전을 모두 아우르기 때문입니다.” 그는 유익을 위해, 그리고 오랫동안 끈질기게 간청한 끝에, 질문한 이에게 큰 겸손으로 이를 고백했다.

9. 요한이라는 이름의 한 형제가 해안가에서 서둘러 이 거룩하고 위대한 필리몬 신부님께 찾아와, 그의 발을 껴안고 말했습니다. “아버지, 제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제 마음이 마땅치 않은 곳으로 이리저리 맴돌고 떠돌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그분은 잠시 침묵하신 후 말씀하셨다. “이 (영적) 병은 겉만 흉내 내는 자들에게 속한 것이며, 그들 안에 머무르는 것이다. 너에게도 그것이 있는 것은, 네가 아직 하느님께 대한 완전한 사랑을 품지 못했고, 그분을 사랑하고 아는 데서 오는 온기가 네게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형제가 그에게 물었다. “그러면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스승님?” 스승은 그에게 말했다. “가서 네 마음속에 은밀한 가르침을 간직하라. 그러면 그것이 네 마음을 이 병에서 깨끗하게 해 줄 것이다.” 그 형제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여 장로에게 물었다. “스승님, 그 은밀한 가르침이란 무엇입니까?” 그러자 장로는 그에게 말했습니다. “가서 네 마음속에서 정신을 차리고, 생각 속에서 경외심과 떨림으로 차분히 말하라. ‘주 예수 그리스도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복된 디아도코스도 초심자들에게 이와 같이 가르칩니다.

10. 그 형제는 가서, 아버지의 기도에 힘입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마음이 평온해지자, 그 가르침으로 잠시 기쁨을 누렸다. 그러나 그 후 그 기쁨이 그에게서 떠나버려, 그는 더 이상 정신을 차리고 그런 행위를 실천하며 기도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 장로에게 가서 일어난 일을 이야기했다. 장로는 그에게 말했습니다. “이제 너는 침묵과 현명한 행위의 길을 알게 되었고, 그로부터 오는 달콤함을 맛보았구나. 그러니 이것을 항상 네 마음에 간직하라. – 먹든지, 마시든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든지, 길을 가든지, 또는 수도실에 앉아 있든지, 맑은 생각과 흩어지지 않는 마음으로 끊임없이 기도하고, 찬송하며, 기도와 시편을 통해 가르침을 받으라; 심지어 가장 필수적인 필요를 해결하는 중에도 네 마음이 한가해지지 않도록 하고, 오히려 그로 하여금 은밀히 배우고 기도하게 하라. 그리하여 너는 신성한 성경의 심오함과 그 안에 감추어진 능력을 깨달을 수 있으며, 마음에 끊임없는 활동을 부여하여, “끊임없이 기도하라”(살전 5:17)고 명하신 사도의 말씀을 실천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세심하게 살피고, 악한 생각이나 헛되고 무익한 어떤 생각도 마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 그러나 항상, 잠잘 때나 일어날 때나, 먹을 때나 마실 때나, 대화를 나눌 때나, 네 마음이 은밀히 마음속으로 때로는 시편을 묵상하고, 때로는 기도하게 하라: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또한 입으로 시편을 부를 때, 입으로는 한 말을 하면서 마음은 다른 곳에 딴생각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11. 한 형제가 그에게 또 물었다. “저는 잠자는 동안 헛된 환상을 많이 봅니다.” 장로는 그에게 말했다. “게으르지 말고 소심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잠들기 전에 마음속으로 기도를 많이 드리고, 마귀가 자기 뜻대로 당신을 이끌려는 유혹에 생각으로 맞서 싸우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받아 주실 것입니다.” 힘이 닿는 한, 입에는 시편을, 마음에는 지혜로운 교훈을 품고 잠들도록 힘쓰라. 결코 부주의함으로 인해 네 마음이 낯선 생각을 받아들이게 해서는 안 된다. 네가 어떤 생각으로 기도했든, 그 생각에서 교훈을 얻으며 침상에 누워, 잠을 자는 동안에도 그 생각들이 네 안에 머물러 있고, 깨어났을 때 그 생각들이 너와 대화를 나누게 하라. 또한 잠들기 전에 정통 신앙의 성스러운 신조도 읊어라. 하나님에 대한 정통 신앙은 모든 복의 근원이자 보호자이기 때문이다.

12. 그의 형제가 또 물었다. “사랑을 베푸소서, 스승님,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스승님의 마음은 어떤 일을 하고 계십니까? 저 또한 구원받을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십시오.” 스승이 그에게 말했다. “왜 그렇게 알고 싶어 하는가?” 그 사람은 일어나 성자의 발을 껴안고, 그 발에 입을 맞추며 그에게 말해 달라고 간청했다. 노인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말했다. “너는 아직 이것을 감당할 수 없다.” 각 감각에 적합한 일을 부여하는 것은 진리의 선함 속에서 거하는 이에게 본래 주어진 특성이니, 세상의 헛된 생각에서 완전히 깨끗해지지 않은 자에게는 이 은사를 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네가 진정으로 이를 원한다면, 이 비밀스러운 가르침을 깨끗한 마음에 간직하라. 만일 네 안에 끊임없는 기도와 성경의 가르침이 머문다면, 네 영혼의 눈이 열리고 그 안에 큰 기쁨이 있을 것이며, 성령과 육신이 따뜻해지면서 말로 다 할 수 없고 뜨겁고 열정적인 어떤 감정이 생겨, 온 사람이 영적인 존재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밤이든 낮이든, 하나님께서 네가 산만하지 않고 맑은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게 허락하시면, 평소의 기도 규칙은 잠시 접어두고, 힘을 다해 마음과 영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려 애쓰라. 그러면 그분께서 네가 시작한 영적 수행 속에서 네 마음을 비추어 주실 것이다. 이에 그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습니다. “한때 한 노인이 내게 찾아왔는데, 내가 그에게 마음의 상태를 물었더니, 그가 내게 말했습니다. “저는 두 해 동안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며, 온 마음을 다해 그분께 간절히 간구했습니다. 그분께서 제자들에게 전하신 기도가 제 마음에 끊임없이, 산만함 없이 새겨지도록 허락해 주시기를 말입니다. 그러자 은혜가 풍성하신 주님께서 제 수고와 인내를 보시고 제가 구한 것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에게 한 또 다른 말은 이러했습니다. “마음속에 드는 헛된 생각들은 게으름을 좋아하고 태만함에 빠진 영혼의 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따라 온갖 경계로 마음을 지키고, 산만함 없이 분별 있게 찬양하며, 맑은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니 형제여,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먼저 (수행과 선행이라는) 수고로, 그다음에는 사랑과 끊임없는 기도로 그분께 우리의 열심을 나타내기를 원하시며, 그리하면 그분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분명히 하늘로 이끄는 다른 길은, 모든 악을 완전히 멀리하고, 모든 선을 얻으며, 하느님을 향한 완전한 사랑을 품고, 경건함과 진리 안에서 그분과 함께 머무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그러니 누구에게나 이것이 있다면, 그는 곧 하늘의 무리에 합류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더불어 높이로 올라가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은 지상에 속한 육신의 욕망을 지체 없이 죽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영혼이 참된 선을 관조하며 기쁨을 누리게 되면, 더 이상 죄의 달콤함으로 자극되는 어떤 정욕으로도 돌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육체의 쾌락에서 등을 돌리고, 순결하고 흠 없는 생각으로 하나님의 현현을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를 굳게 지키고, 육체의 수고를 많이 하며, 영혼을 정화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고, 그분의 신성한 계명을 죄 없이 이행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친히 성령의 은총을 통해 우리에게 내리시는 영향을 태양의 광선처럼 비추시어, 그분의 율법을 굳건히 지키도록 가르쳐 주실 것이다. 수고와 유혹을 통해 우리는 이성을 지니고 온갖 지식을 받아들일 수 있으며, 하나님을 닮도록 창조된 본성을 정화해야 한다. 유혹의 대상들을 통해 감각을 어떤 식으로든 정련함으로써, 온갖 더러움에서 깨끗해진 감각을 지니고, 왕의 품격으로 거듭나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본성을 모든 선에 참여하게 하시고, 영광과 주권과 능력과 권세와 권능의 천사들이 기뻐하는 모습, 접근할 수 없는 빛, 지극히 밝은 영광을 마음으로 관조할 수 있게 하셨다. 그러나 네가 어떤 미덕을 실천하게 될 때, 네 생각이 형제보다 우월해지지 않도록 주의하라. 네가 그것을 실천한 반면 그는 소홀히 했기 때문인데, 이것이 바로 교만의 시작이다. 어떤 정욕과 싸울 때, 싸움이 끈질기다고 해서 낙담하거나 소심해지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러나 일어나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엎드리고, 온 마음을 다해 선지자와 함께 말하라. “주여, 나를 해치는 자들을 심판하소서”(시 34:1), 이는 내가 그들에 맞서기에는 힘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네가 겸손한 모습을 보시면 곧 네게 도움을 보내실 것이다. 누군가와 함께 길을 갈 때, 헛된 대화를 나누지 말고, 그 마음속에 주님께서 가지셨던 영적인 수행을 심어주어, 그 안에 이 선한 습관과 세속적인 쾌락에 대한 망각이 머물게 하고, 그가 무정(無情)의 안식처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라. 이와 같은 말과 그 밖의 많은 가르침으로 형제를 훈계한 후, 장로는 그를 보내주었다.

13.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다시 찾아와 말을 꺼내며 물었다. “아버지,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밤에 기도할 때 졸음이 저를 짓누르니,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며 더 오래 깨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찬송을 부를 때 손을 움직여 일을 하고 싶어집니다.” 이에 장로는 말씀하셨다. “맑은 정신으로 기도할 수 있을 때는 수공예에 손을 대지 마라. 그러나 졸음이 몰려올 때는, 그 생각에 맞서 조금만 힘을 내어 저항한 뒤, 수공예를 하라.” 그 형제가 다시 물었다. “스승님, 스승님께서는 예배 중에 졸음에 시달리시지 않으십니까?” 장로는 말씀하셨다.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가끔 졸음이 몰려올 때면, 나는 조금 마음을 다잡는다. 그리고 요한 복음서를 처음부터 읽기 시작하며, 마음의 눈을 하느님께 향하면, 졸음은 즉시 사라진다.” 저도 생각에 대해서는 이와 비슷하게 대처합니다. 바로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눈물을 흘리며 불을 마주하듯 그 생각을 맞이하면, 그 생각은 사라집니다. 너는 아직 그들에 맞서 그렇게 무장할 수는 없으니, 차라리 이 비밀스러운 가르침을 간직하고, 성부들이 정한 일과 기도, 즉 제3시, 제6시, 제9시, 저녁 기도와 같은 시간 기도와 밤 예배를 성실히 드리는 데 힘쓰라. 그리고 온 힘을 다해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아무것도 하지 않도록 노력하며, 형제 중 누구와도 원수를 맺지 않도록 조심하여, 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지 않도록 하라. 또한 네 생각이 산만해지지 않도록 지키고, 온 마음을 다해 내면의 생각에 귀를 기울이도록 노력하라. 교회에 있을 때, 그리스도의 거룩한 성찬을 받을 의도가 있다면, 완전한 평화를 얻기 전까지는 교회를 떠나지 마라. 한 자리에 서서, 예배가 끝날 때까지 그곳에서 물러나지 말고, 마음속으로는 마치 천국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며,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 서서 그분을 마음속에 모실 준비를 하라; 두려움과 경외심으로 이에 대비하여, 거룩한 힘의 성찬에 합당하지 못한 자로 남지 않도록 하라. 이렇게 형제를 잘 무장시키고, 주님과 그분의 은혜의 성령께 맡긴 후, 장로는 그를 보내주었다.

14. 이에 대해 그와 함께 살던 형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더 들려주었다. 어느 날 그 곁에 앉아 있던 나는 그에게 물었다. 광야에서 지낼 때 악마의 중상모략으로 유혹을 받았는지. 그러자 그가 말하였다. “용서해 주시오, 형제여. 만일 하나님께서 내가 겪었던 것과 같은 마귀의 유혹이 당신에게 닥치도록 허락하신다면, 당신이 그 괴로움을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나는 이제 일흔 살이 넘었는데, 여러 사막에서 완전한 침묵 속에서 지내며 수많은 유혹을 견뎌냈다. 내가 이 악마들로부터 무엇을 겪었고 어떻게 견뎌냈는지에 대한 그 괴로움을, 아직 침묵의 유혹을 겪어보지 못한 이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유익하지 않다. 그런 유혹 속에서 나는 항상 이렇게 행동했다. 나의 모든 소망을 하나님께 두었고, 그분께 단념의 서원도 드렸더니, 그분은 곧바로 나를 온갖 궁핍에서 구해 주셨다. 그렇기에 형제여, 나는 이제 더 이상 나 자신에 대해 아무런 염려도 하지 않는다. 그분께서 나를 돌보신다는 것을 알기에, 내게 닥치는 유혹들을 아주 쉽게 견뎌낸다. 오직 그분께 드리는 것은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뿐입니다. 이때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슬픔과 재앙이 클수록 그것을 견디는 자에게 더 큰 면류관을 준비해 주신다는 희망입니다. 의로운 재판관께서는 이 두 가지를 서로 균형을 맞추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형제여, 소심함에 굴복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싸우기 위해 전쟁의 한가운데로 들어섰으니,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원수와 맞서 싸우는 이들이 원수의 군대보다 훨씬 더 많다는 사실에 용기를 얻어 싸우십시오. 게다가 말씀이신 하나님의 강력한 오른손이 우리를 감싸 안고, 보호하며, 덮어 주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어떻게 우리 종족의 그토록 무서운 대적에 맞설 용기를 낼 수 있었겠는가? 인간의 본성이 어떻게 그의 모략을 견뎌낼 수 있었겠는가? 욥이 말했듯이, “누가 그의 가면을 벗길 수 있겠는가? 누가 그의 가슴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겠는가? 그의 입에서는 타오르는 횃불처럼 나오고, 불꽃처럼 흩어진다. 그의 콧구멍에서는 숯불로 타오르는 용광로의 연기가 나온다. 그의 영혼은 숯과 같고, 그의 입에서는 불꽃이 뿜어져 나온다. 그의 입술에는 힘이 깃들어 있고, 그 앞에는 파멸이 흐른다. 그의 마음은 돌처럼 굳어 있으며, 모루처럼 흔들림 없이 서 있다. 그는 심연을 구리 용광로처럼 달구며, 바다를 향유 짜는 곳처럼 여기고, 심연의 타르타르를 포로처럼 여긴다. “모든 높은 것을 내려다보며, 물 속에 있는 모든 것의 왕이 되느니라” (욥기 41:4–25). 형제여, 바로 이 자를 상대로 우리가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폭군의 모습을 말씀이 묘사한 방식이자 그 실체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의 승리는 마땅히 은둔 생활을 영위하는 이들에게는 수월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 안에 그에게 속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며, 세속을 버렸기 때문이며, 그들의 높은 덕행 때문이며, 또한 우리를 위해 싸워 주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누가, 내게 말해 보라, 주님께 나아와 그분의 경외심을 마음에 품고, 본성을 변화시키지 않고 신성한 법과 행실로 자신을 비추지 않았으며, 자신의 영혼을 밝게 하여 신성한 깨달음과 생각으로 빛날 수 있게 하지 않았겠는가?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그는 결코 영혼이 헛되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시니, 그분께서는 마음이 빛을 향해 끝없이 갈망하도록 자극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영향을 받는 영혼에게, 영은 정욕에 빠져 방종하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마치 어떤 왕이 무서운 분노와 형벌을 내뿜으며 무자비하게 그것들을 베어내듯이 말이다. 그런 사람은 결코 다시 뒤로 물러서지 않으며, (미덕을) 실천하고 두 손을 하늘로 들어 올리며 지적인 기도로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다.

15. 그 형제는 아바 필리몬이 다른 미덕들 외에도 다음과 같은 미덕을 지녔다고 또 이야기했다. 그는 헛된 말을 듣는 것을 참을 수 없었고, 누군가 정신을 잃고 영혼에 유익하지 않은 이야기를 하면, 그는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또한 내가 무슨 일로 떠나갈 때면, 그는 “무슨 일로 가는가?”라고 묻지 않았고, 돌아왔을 때도 “어디에 있었느냐?”거나 “무엇을 어떻게 했느냐?”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필요한 일로 알렉산드리아로 배를 타고 갔다가, 거기서 한 가지 교회 관련 일을 처리하기 위해 하나님의 종에게 알리지 않고 콘스탄티노플로 향했다. 그 후, 그곳에서 꽤 오랜 시간을 머물며 그곳의 경건한 형제들을 방문한 뒤, 마침내 그의 은둔처로 돌아왔다. 나를 보자 장로는 기뻐하며, 평소처럼 인사를 나누고 기도를 드린 뒤 자리에 앉았으나, 내게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평소처럼 자신의 영적인 수행에 몰두했다.

16. 한때, 그를 시험해 보고자 나는 며칠 동안 그에게 먹을 빵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빵을 달라고 하지도 않았고, 이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나는 절을 올리고 물었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스승님. 제가 평소처럼 먹을 것을 드리지 않은 것에 대해 기분 나쁘게 여기지 않으셨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그가 말했다. “용서해 주십시오, 형제여! “이십 일 동안 나에게 빵을 주지 않더라도, 나는 당신에게 달라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영혼이 견딜 수 있는 한, 내 몸도 견딜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토록 참된 선을 관조하는 데 몰두해 있었다.

17. 그가 말하길, “이 은둔처에 온 이래로, 나는 내 생각이 방의 벽을 넘어가지 못하도록 막아왔으며;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장차 올 세상의 심판 외에는 그 어떤 생각도 내 마음에 품지 않았으니, 죄인들에게 닥칠 심판과 영원한 불, 그리고 칠흑 같은 어둠을 기억하며, 죄인과 의인의 영혼이 어떻게 사는지, 의인들에게는 어떤 복이 준비되어 있는지, 그리고 각자가 자신의 수고에 따라 상을 받는 방식을 생각했다: 한 사람은 금욕적 수련의 수고로, 다른 사람은 자선과 위선 없는 사랑으로, 또 다른 사람은 탐욕 없음과 세상에 대한 완전한 포기, 또 다른 사람은 겸손한 지혜와 완전한 침묵으로, 저 사람은 극도의 순종으로, 이 사람은 방랑 생활로. 이 모든 것을 마음에 간직하며, 나는 다른 생각이 내 안에서 작용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며, 더 이상 사람들과 함께 있거나 그들로 인해 내 마음을 빼앗기지 않으려 한다. 그래야만 신성한 생각에서 멀어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18. 이에 그는 어떤 은둔자에 대한 이야기도 덧붙이며, 그가 이미 무정(無情)의 경지에 이르러 천사의 손에서 빵을 받아 먹었으나, 나태함(주의력 약화)으로 인해 그러한 영광을 잃게 되었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영혼이 마음의 분별력 있고 집중된 주의를 느슨하게 할 때, 그 영혼은 어둠에 휩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비추지 않는 곳에서는 모든 것이 어둠 속에서처럼 흐릿해지며, 그때 영혼은 유일한 하나님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그분의 말씀에 떨지도 못한다. “나는 가까이 계신 하나님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멀리 계신 하나님이 아니니라. 사람이 은밀한 곳에 숨어 있어도 내가 그를 보지 못하겠느냐? 하늘과 땅을 채우시는 이가 내가 아니냐?(예레미야 23, 23. 24). 그리고 그는 이와 같이 고통받은 다른 많은 이들에 대해서도 떠올렸다. 그는 솔로몬의 타락도 예로 들었는데, 솔로몬은 그토록 큰 지혜를 얻었고 모든 이에게 칭송받았으나—마치 아침에 떠오르는 여명처럼 지혜의 빛으로 모든 이를 비추었음에도—사소한 쾌락 때문에 그 영광을 잃어버렸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나태함을 방치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그러나 다른 어떤 생각이 우리를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지 않도록, 그리고 그분 대신에 우리 마음에 다른 무엇이 자리 잡지 않도록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오직 깨끗한 마음만이 성령의 거처가 되어, 마치 거울을 보듯 자기 안에서 만물의 하나님 그분을 맑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19. 이를 듣고, 아브와와 함께 살던 필리몬 형제가 말하기를, “그의 행실을 지켜보니, 나는 그 안에서 육신의 정욕이 이미 완전히 사라졌음을 깨달았으며, 그가 온갖 완전함을 열렬히 추구하는 자여서, 항상 신성한 영에 의해 변화되어 가는 모습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모되어 가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탄식을 내뱉으며, 자기 내면에서 스스로를 성찰하고 저울에 달듯이 균형을 잡으며, 어떤 일이 닥쳐도 그의 마음의 순결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어떤 더러움도 은밀히 그에게 달라붙지 않도록 온갖 방법으로 노력하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말하길, 이를 보고 그러한 삶의 방식에 대한 열망에 불타올라, 나는 간절히 그에게 간청하며 물었다. “나도 당신처럼 마음의 순결을 얻을 수 있을까요?” 그러자 그는 말했다. “가서 수고하라. 이를 위해서는 수고와 마음의 고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열심히 찾고 수고해야만 얻을 수 있는 영적인 복은, 우리가 침상에 누워 잠만 자고 있다면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복도 수고 없이는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는다. 성공을 원하는 자는 무엇보다 먼저 자신의 욕망을 버리고, 끊임없는 통회와 탐욕 없음을 얻어야 하며, 타인의 죄는 돌보지 말고 오직 자신의 죄만을 돌보며, 그것들만을 위해 밤낮으로 통회해야 하며, 사람 중 누구와도 헛된 우정을 맺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슬퍼하고 과거의 죄악에 대한 기억에 상처받는 영혼은 세상에 대해 죽은 것이 되며, 세상 또한 그 영혼에게 있어 죽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즉, 그때는 육신의 정욕이 효력을 잃고, 사람은 그 정욕에 휘둘리지 않게 된다. 게다가 세상을 버리고 그리스도와 연합하며 침묵 속에 머무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형상을 지키며 그분과 닮아 풍성해진다. 이는 위로부터 그분께로부터 성령의 은사를 받아 하나님의 거처가 되고, 악마의 거처가 되지 않으며, 의로운 행실을 하나님께 드리기 때문이다. 이처럼 영혼은 삶에서 깨끗해지고, 육체의 더러움에서 벗어나며, 흠이나 악덕이 없게 됨으로써, 마침내 의의 면류관을 쓰고 미덕의 아름다움으로 빛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회개의 시작에 마음속에 통곡도, 영적인 눈물도, 끝없는 고통에 대한 기억도, 참된 침묵도, 끊임없는 기도도, 시편 찬양과 신성한 성경의 가르침도 자리 잡지 않는 자, 이것이 습관이 되지 않은 자, 그 결과, 끊임없이 이에 머무르는 탓에 마지못해 이성을 따라 그렇게 행하게 되는 것, – 그리고 하나님의 경외심이 그의 영혼을 지배하지 않는다면, 그는 여전히 세상과 교제하며 쉬고 있는 것이니, 기도 중에 맑은 마음을 가질 수 없다; 오직 경건함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만이 영혼을 정욕으로부터 정화시키고, 마음을 자유롭게 하여 본래의 관상 상태로 인도하며, 그가 복락의 형태로 받아들이는 신학을 접하게 하므로(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라), – 이는 이를 닮아가는 이들에게 이미 이 세상에서 (미래의) 보증으로 작용하며, (그들의 영적 상태)를 흔들림 없이 지켜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 힘을 다해 (미덕과 위업의) 실천에 힘쓰자. 이를 통해 우리는 경건함, 즉 (영적인) 순결함으로 승화되며, 그 열매는 (마음에) 자연스러운 신학적 관상이다. 왜냐하면 행위는 관상에 이르는 상승이기 때문이며, 이는 (그리고리 신학자가) 말했듯이 통찰력 있고 가장 신학적인 지성이 지적한 바와 같다. 만약 우리가 그러한 행위에 소홀히 한다면, 우리는 모든 지혜로부터 멀어지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설령 누군가가 미덕의 정점에 도달했다 하더라도, 육체의 무분별한 욕망을 억제하는 수행의 수고와 생각을 엄격히 지키는 것이 그에게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으로야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의 내주하심을 얻을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의로움이 더욱 커질수록 영적 성숙도 그만큼 더 커지기 때문이다. 마침내 마음이 완전함에 이르러 온전히 하느님께 붙어 신성한 빛으로 비추어지면, 그에게 성사의 형언할 수 없는 신비가 드러나게 된다. 그때 비로소 그는 지혜가 어디에 있는지, 힘이 어디에 있는지, 만물을 아는 이성이 어디에 있는지, 장수와 생명이 어디에 있는지, 눈의 빛과 평화가 어디에 있는지 진정으로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그가 정욕과의 투쟁에 몰두해 있는 한, 그 동안은 이를 누릴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덕과 악덕 모두 마음을 눈멀게 하기 때문이다. 덕은 그가 덕을 보지 못하게 하고, 악덕은 그가 악덕을 보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그가 투쟁에서 평안을 얻고 영적인 은사를 받게 되면, 그때부터 끊임없이 은혜의 영향을 받으며 온전히 빛을 보는 자가 되어, 영적인 것들을 관조하는 데서 벗어나지 않게 된다. 그런 사람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에도 매여 있지 않으며, 죽음에서 생명으로 넘어간 것이다. 본받을 만한 삶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자는 흠 없는 마음과 깨끗한 입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깨끗한 입에서 나오는 말이 깨끗하여 하나님을 합당하게 찬양할 수 있으니, 하나님께 붙어 있는 영혼은 끊임없이 그분과 대화를 나누기 때문이다. 그러니 형제들아, 우리가 이러한 덕의 경지에 이르기를 소망하며, 정욕에 매달려 땅 위를 기어다니는 것을 그만두자. 수고하며 하나님과 가까워진 자, 그분의 거룩한 빛을 누리고 그분에 대한 사랑으로 찔린 자는, 신성한 시편이 말하듯이, 주님의 어떤 말로 다할 수 없는 영적 기쁨을 누립니다. “주님을 기뻐하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라. 그분께서 네 의를 빛처럼 비추시고, 네 운명을 정오의 햇살처럼 밝히시리라”(시편 36:4, 6). 그리고 어떤 사랑이, 온갖 악에서 정화된 영혼에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그 사랑만큼 강하고 거침없이 넘쳐흐를 수 있겠는가? 그런 영혼은 진실한 마음의 움직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사랑에 찔렸도다” (아가 2,5). 신성한 아름다움의 광채는 말로 다 할 수 없고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말로는 그 광채를 묘사할 수 없고, 귀로도 다 담을 수 없다. 새벽의 광채를 가리키든, 달의 밝음을 가리키든, 해의 빛을 가리키든, 이 모든 것은 그 영광에 비하면 미미하며, 참된 빛 앞에서는 가장 깊은 밤이나 가장 짙은 안개가 가장 맑은 정오 앞에 비칠 때보다 더 초라하다. 우리의 바실리우스, 스승들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분께서도 이를 체험으로 깨닫고 배워 전해주셨습니다.

20. 아바와 함께 살았던 형제는 이 일과 그보다 더 큰 일들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누가 그의 위대한 겸손을 증명하는 다음 사실에 대해 놀라지 않겠는가? 오래전 장로직에 임명되어 삶과 이성으로 하늘의 경지에 지극히 진실하게 다가갔음에도, 그는 신성한 성사를 마치 짐처럼 온갖 방법으로 피하였기에, 수년간의 수도 생활 동안 (성사를 집전하기 위한) 거룩한 식탁에 앉는 것을 매우 드물게 허락했다. 그러나 그런 끊임없이 경계하는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우연히 사람들과 교제하며 대화를 나누게 될 때조차 신성한 성찬을 영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그때 그들에게 세속적인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고, 오직 그와 대화를 나누고자 하는 이들에게 영혼에 유익한 말만 전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신성한 성찬을 영접하려 할 때면, 그 전에 오랫동안 하느님께 간청하며 기도와 시편 찬송, 고해로 그분을 달래곤 했다. 그는 이때 “거룩한 자들에게 거룩한 것”이라고 선포하는 사제의 목소리에 두려움을 느꼈다. 왜냐하면 그 순간, 그가 말하길, 온 교회는 거룩한 천사들로 가득 차게 되며, 만군의 왕께서 신비롭게 성사를 집전하시고, 빵과 포도주를 그분의 몸과 피로 변화시키신 뒤, 거룩한 성찬을 통해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시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그가 덧붙이기를, 우리는 오직 흠 없고 순결하게, 마치 육신을 벗어난 듯이, 그 어떤 의심이나 망설임도 없이, 지극히 순결한 그리스도의 성사들에 감히 참여하여, 그로부터 오는 깨달음에 동참해야 한다고 했다. 성부들 중 많은 이들이 (모든 부적절한 것들로부터) 그들을 경계해 주던 성스러운 천사들을 보았기에, 그들 자신도 누구와도 말하지 않고 깊은 침묵 속에 머물렀습니다.

21. 그리고 (그 형제는)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장로께서 직접 자신의 수공예품을 팔아야 할 필요가 있을 때, 대화나 흥정을 하다 보면 거짓말이나 맹세, 불필요한 말, 혹은 다른 어떤 형태의 죄가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는 겉으로는 미친 사람인 척하며 서 있었고, 그의 수공예품을 사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에게서 물건을 받아 가고, 원하는 대가를 지불했다. 그는 작은 바구니를 엮었는데, 이 지혜로운 분은 그 대가를 감사히 받으며, 결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성자 테오그노스트

 

그에 대한 간략한 소개

이 장들의 주인공인 성자 테오그노스트가, 포티오스가 106번째 강독에서 언급한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주해자인지, 아니면 다른 인물인지, 또 어느 시대에 살았는지는 확실히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열매로 나무를 알 수 있듯이, 그분 또한 “행실”과 “지혜”로 선하게 살아가셨으며, 순결한 삶으로 인해 자신 안에 성령을 모시게 된 이들 중 한 분이셨다. 그분은 성령의 계시로 마음이 밝아지고, 생명의 숨결로 영감을 받아 마치 어떤 성스러운 노래를 읊조리듯, 이 현명한 장들을 읊었으니, 그 안에 감춰진 은총과 영적 관상 덕분에 이를 읽는 이들의 귀와 마음을 즐겁게 해 주며, 그 가르침에 따라 삶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열정을 불러일으키고, 이 글들에는 활동적인 삶의 모범이 충실히 묘사되어 있고, 관상적인 삶으로 향하는 올바른 길이 분명히 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원하는 자는 이 글들을 통해 성직의 존엄을 지닌 자가 어떠해야 하며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이 글들을 부지런히 읽어 나가는 이들에게 이 글들은 풍성한 도덕적 교훈과 구원에 이르는 절제된 삶을 향한 올바른 지침을 제공할 것이다.

 

활동적인 삶과 관조적인 삶, 그리고 사제직에 관한 장들

에 대한 아크로스티크는 다음과 같다: 가장 경건하신 아버지들, 라자루스와 바르라암께, 모든 이에게 보잘것없는 테오그노스트가,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자격이 없는 자로서.

1. 땅 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완전히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길 때, 비로소 참된 덕을 갖추었다고 생각하라. 항상 마음속에 맑은 양심을 품고 주님께로 옮겨갈 준비를 갖추어라. 만일 하나님께 인정받고자 한다면, 가능한 한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하라.

2. 지나친 육체적 쾌락을 경계하고, 그것들이 네 수고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도록 삼가라. 감각적 쾌락을 누리지 못하는 것을 손실로 여기지 말고, 그것을 맛봄으로써 더 나은 것을 잃어버리는 것을 손실로 여기라.

3. 온 마음으로 자신을 개미와 벌레로 여기라. 그래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일이 먼저 이루어지지 않으면, 이 일도 뒤따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에서 얼마나 낮게 내려가느냐에 따라, 현실에서 그만큼 높이 올라갈 것이다. 주님 앞에서 시편 기자(38, 6)처럼 자신을 무가치한 존재로 여길 때, 그때 비로소 작은 것 속에서 은밀히 위대해진다. 그리고 자신이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고 자각할 때, 그때 비로소 주님께서 칭찬하시는 행실과 지혜로 부유해진다.

4. 죄인과 간사한 자의 등뼈, 즉 모든 악이 생겨나는 근원인 정욕과 간사함을 씻어내라. 절제와 겸손한 선의로 이를 씻어내라. 그래야 심판의 때에 네 안에서 죄가 엄격히 조사된다 하더라도, 네가 행한 일 가운데 그런 것이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을 것이니, 왜냐하면 우리가 죄를 짓게 한 원인을 미워하고 그것들과 싸우기 시작하며, 첫 번째 패배를 마지막 승리로 보상할 때, 죄는 지워지기 때문이다.

5. 모든 미덕—현명함과 온유함, 사랑과 절제, 그리고 눈물을 통해 하늘에서 내려오는 중보와 위로—가 샘물처럼 솟아나는 순수한 기도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그 기도에 담긴 선함은, 혀로 말하는 것과 그와 동시에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에 정신을 집중하는 것과, 마음이 존재하시는 분을 관조함으로써 주님을 쫓아가며, 불타는 사랑으로 보이지 않는 분을 간절히 찾다가, 그분을 가리는 어둠을 마주하면 다시 자기 안으로 돌아와, 지극히 경건한 겸손으로 현재 관조를 통해 유익하게 드러나는 것에 만족하며, 그것으로 위로를 받고; 그러나 “거울을 통해 어렴풋이 보는 것”과 같은 환상이 끝나고, 그분의 끊임없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는” 맑은 시선이 닥칠 때, 반드시 소원을 이룰 것이라는 선한 소망을 품고 머무르며(고린도전서 13:12).

6. 아직 극도의 무정함에 이르지 못했다면, 더 높은 관상들을 삼가라.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을 쫓지 말고, 네 힘보다 높은 것을 찾지 말라. 어떤 이는 말하길, “만약 신학자가 되고 관상가가 되고자 한다면, 삶의 길을 통해 이 지경에 이르러 순결함으로 순결한 것(신학)을 얻으라”고 한다. 신학에 대해 언급한 김에, 너에게 상기시켜 주마, – 그 높이를 무한한 지경까지 뻗어 나가지 않도록 주의하고, 아직 미덕의 젖을 먹고 있는 우리에게 그곳으로 날아오르려 시도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두라. 그래야 어린 새들이 그러하듯 헛되이 깃털을 잃지 않을 수 있으니, 비록 지식의 달콤함이 우리의 욕망을 강하게 끌어당기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정결함과 눈물로 정화된 후, 엘리야나 아바쿰처럼 땅에서 벗어나, 언젠가 구름 위에서 누리게 될 황홀함을 미리 맛보거나 예표하며, 관조적이고 순수하며 초월적인 기도로 감각을 초월하여 하나님을 찾게 될 때, 그때야말로 어쩌면 신학에 조금이나마 닿을 수 있을 것이다.

7. 마찬가지로 신성한 환상과 마음의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면, 먼저 평화롭고 고요한 삶을 사랑하고, 모든 것에서 벗어나 자신과 하나님을 알아가라. 만약 이것이 이루어진다면, 더 이상 그대를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며, 마치 미묘한 바람의 숨결(시원한 소리의 미묘함)처럼, 그대의 내면이 맑고 어떤 정욕에도 흔들리지 않는 상태에서, 그분을 가장 깊이 깨닫는 인식을 통해 모든 이에게 보이지 않으시나 그대에게 구원을 선포하시는 분을 지혜롭게 뵙게 될 것이다.

8. 번개가 번쩍인 후 곧바로 천둥이 울리듯이, 신성한 정화가 빛나는 곳에서는 정욕의 폭풍이 가라앉는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이를 얻은 자에게 미래의 행복에 대한 보증이 함께 자리 잡는다. 그러나 창조주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고, 보이는 것에 집착하며, 온갖 욕망으로 육체적 쾌락과 향락을 갈망하는 영혼 속에는 신성한 자비의 느낌도, 무정욕에 대한 희망도 생기지 않는다.

9. 신성이 무엇인지, 어디에 있는지를 이성으로 찾지 말라. 이는 그것이 초자연적이며, 모든 존재를 초월하므로 어떤 장소로도 포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성육신을 통해) 묘사될 수 있는 하나님-말씀을, 가능한 한 거울처럼 네 자신 안에서 드러내라. 이 경우, 그분은 신성한 본성으로 밝은 광선을 발산하시며, 신성의 형언할 수 없음으로 인해 어디에나 계시는 동시에, 마음속으로 특정 장소에 위치해 계신다. 그나저나, 네가 정화될수록 그만큼 신성한 계시의 은총을 받게 될 것이다.

10. 참된 지식과 의심할 여지 없는 구원의 확증을 갈망한다면, 먼저 영혼과 육체 사이의 정욕적인 유대를 끊어내고, 물질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겸손의 심연으로 내려가라. 그러면 마치 조개 껍질 속에 신성한 지식 속에 감추어져 있으며, 하나님의 왕국의 광채를 네게 미리 약속해 주는 그 진주를 얻게 될 것이다.

11. 육체를 영에 복종시켜 영적 순종을 잘 이룬 자에게는 인간의 순종이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러한 자는 감사하는 종으로서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에 순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육신이 영혼을 상대로 투쟁과 전쟁을 벌이는 이들에게는 지도자와 통치자가 필요하며, 그를 따라야 한다. 그는 지식을 바탕으로 우리 삶의 키를 잘 조종하고, 필요한 때에 적절한 무기로 우리를 무장시켜, 보이지 않는 원수들에게 사로잡히지 않게 하며, 우리의 미숙함으로 인해 정욕에 휩쓸리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12. 어떤 정욕도 너를 동요시키지 않게 될 때, 신성한 소망은 네 내면, 곧 네 마음속에서 자라날 것이며; 그때에 죽음을 잠으로 여기며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육신과의 이별을 갈망하게 될 때, 비로소 너는 마땅히 받아야 할 구원의 보증을 얻게 되며,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으로 천국을 마음속에 품게 될 것이다.

 

사제직에 대하여

1. 신성하고 고귀한 사제직에 부름받은 자로서, 무엇보다 먼저 너 자신은 육신의 정욕과 쾌락을 죽임으로써 항상 제물로 바쳐져야 하며, 그렇게 하여 생명을 주는 동시에 두려운 제단에 감히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치 쉽게 타버리는 물질처럼 신성한 불에 타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세라핌조차 집게 없이 숯에 손을 대지 못했으니(이사야 6, 6), 네가 어떻게 무감정 없이 그것을 만질 수 있겠느냐? 그를 통해 너는 거룩하게 된 혀와 정화된 입술, 그리고 몸과 함께 흠 없는 영혼을 갖게 될 것이며, 초자연적인 불과 제물의 종들처럼 모든 악보다 더 빛나는 손을 갖게 될 것이다.

2. 이 말씀의 힘을 깊이 깨달아라. 왜냐하면 너는 매일 그 구원의 신비로운 하나님의 성사를 목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때 시메온 노인이 이를 보고 놀라 죽기를 간청했던 바로 그 성사이다; 만약 성령으로부터 네가 천사와 동등한 자로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은혜로운 중재자라는 계시를 받지 못했다면, 네 자신의 파멸을 초래할까 두려워하여, 천사들이 경외하며 숭배하고, 많은 성인들이 그 앞에서 경건하게 거리를 두었던, 신성한 신비의 지극히 거룩하고 두려운 성사 앞에 감히 나서지 말라. 천사들도 그 앞에서 경외하며, 많은 성인들이 지극한 경외심으로 이를 삼가했던 바로 그 성사 앞에서, 마치 자나처럼 지극히 높으신 분의 심판으로 인해 산 자의 무리에서 제외되지 않도록 하라.

3. “자신을 삼가라”고 사도가 말했듯이(딤전 7:16). 자신을 삼가고 항상 자신의 과거 죄들에 대한 속죄 제사를 드려, 만일 네 안에 약함으로 인해 불결한 것이 있었거나, 어쩌면 아직 남아 있다면, 그것이 신성한 불로 소멸되게 하라. 그리하여 너는 마치 선택받고, 유용하며, 깨끗하고, 그러한 제사에 합당한 그릇처럼, 비록 나무나 진흙으로 된 그릇이라 할지라도, 네 대담한 소망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너에게 자비를 베푸시기를 원하신다면, 은이나 심지어 금으로 된 그릇으로 자신을 바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들으실 준비가 되어 계신 곳에는, 한 것을 다른 것으로 바치는 데 아무런 장애가 없기 때문이다.

4. 네가 천사와 동등한 영광을 누리게 되었음을 명심하고, 모든 미덕과 순결함으로 네가 부름받은 이 지위에서 흠 없이 머물도록 힘쓰라. 교만함으로 인해 타락한 루시퍼가 어떤 처지가 되었는지 보라. 너도 자신에 대해 위대한 꿈을 꾸다가 같은 운명을 맞지 않도록 하라. 오히려 자신을 흙과 재, 수치로 여기며,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인간 사랑과 형언할 수 없는 자비로 인해, 네가 어떤 상태이더라도 신성한 성찬과 거룩한 성사의 엄숙한 집전에 참여할 수 있게 허락받았음을 항상 감사하며 울어야 한다.

5. 사제직을 받은 자는 모든 정욕으로부터, 특히 음행과 원한으로부터 깨끗해야 하며, 이에 대해서는 사소한 생각조차 가져서는 안 된다. 만일 네가 나병 환자나 그을음으로 더러워진 자가 감히 왕의 몸을 건드렸을 때처럼, 분노와 저주를 받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6. 눈보다 더 하얗게 눈물을 흘리며, 순결하고 맑은 양심을 지니고, 성스러운 성사에 참여하라. 마치 성자처럼, 겉으로는 천사 같은 아름다운 용모로 내면의 영혼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라. 그러나 보라, 신성한 성사를 거행할 때, 단지 인간의 전승에만 만족하지 말고, 은밀하고 신비롭게 이 과정에서 더 높은 진리를 깨닫게 해주는 은총이 너와 함께 하기를 바란다.

7. 썩지 않음과 불멸을 갈망하며, 경건하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생명을 주는 썩지 않는 성사를 거행하라. 또한 믿음을 통해 온전해진 자로서 이곳을 떠나는 것을 함께 소망하라. 만약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너는 아직 사랑으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지 못한 것이다. 그분은 네가 친히 뜯어 먹을 자격을 얻은 분이시며, 그분의 육체로 네가 배부름을 얻는 분이시다. 만일 그렇다면, 너는 네가 사랑하는 분이 계신 곳으로 서둘러 떠나려 했을 것이며, 삶과 육체를 아무것도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8. 성찬을 통해 하나님의 육체의 제사장이자 동참자가 된 너는, 그분의 죽음의 형상을 닮아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너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신 분을 위해 살아야 할 의무가 있다(고린도후서 5:15). 만약 네가 육신과 세상을 향해 정욕적으로 산다면, 죽음이 지난 후 영원한 고통을 자초하는 것이니, 죽기 전에 자발적으로 피 흘리지 않는 제사를 드리는 것을 그치지 않는다면 말이다. 부적합하게 성직을 수행하던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여 곧바로 저쪽의 고통의 장소로 보내졌다는 사실을 누가 모르겠는가.

9. 한 사제이자 수도사였던 이는 경건함으로 명성이 높았고 겉모습만으로는 많은 이에게 존경받는 인물로 여겨졌으나, 내면적으로는 은밀히 방탕한 마음을 품고 더러워진 자였다. 그가 신성하고 거룩한 성찬식을 집전하던 중, 케루빔 찬송에 이르러 평소처럼 성찬대 앞에 몸을 숙이고, “아무도 합당하지 않나니”라고 읽기 시작했을 때, 갑자기 숨을 거두었는데, 이는 그의 영혼이 그 자세 그대로 그를 떠나버렸기 때문이었다.

10. 올바른 이성과 통찰보다 더 바람직한 것은 없다. 이는 여기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솟아나기 때문이다. 전자는 경건함과 절제를 통해 마음을 정화시키고, 후자는 밝은 마음가짐과 분별력을 통해 마음을 완성시키며, 이 두 가지는 마음을 높은 관조와 신성한 경지로 자유롭게 날아오르게 한다. 그러나 경외심 없이는 신성한 사랑으로 곧바로 나아갈 수 없으며, 사랑을 거치지 않고 소망하는 곳에 날아올라 그 안에서 안식할 수도 없다.

11. 그러니 구원을 갈망하는 자여, 열정을 품고 지칠 줄 모르고 달려가라. 도달할 때까지 힘겹게 찾고, 끊임없이 구하며, 인내심을 가지고 두드리라. 확고한 믿음과 겸손을 깃발처럼 사다리 꼭대기에 내걸고, 마침내 얻게 될 때까지. 소원을 이룬 자라 여길 때는 죄 사함을 받았을 때가 아니라, 온갖 정욕의 반란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육신을 떠날 준비가 되었을 때이다.

12. 많은 눈물을 흘리며 구원의 확증을 얻기를 간구하되, 네가 겸손하고 지혜로운 자라면 죽기 전에는 그러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근심이 사라져 구원의 일을 소홀히 할까 염려되니; 그러나 임종을 앞두고 그것을 얻게 되기를 기도하라. – 물론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이지만 – 감히 스스로를 조롱하듯 이미 그것을 얻었다고 상상했다가, 마침내 기다리던 때가 왔을 때 꿈꾸던 곳에 도달하지 못하게 될까 봐. 그때, 성령께서 주시는 보증과 의심할 여지 없는 구원의 확증 없이, 너 이 저주받은 자여, 도대체 어디로 가겠느냐?!

13. 신성(神性)의 무정(無情)을 갈망한다면, 먼저 순종과 겸손으로 이 소원을 구하라. 그래야 다른 길로 그에게 나아가 헛된 수고를 자초하지 않을 것이다. 무정함을 얻은 자들은 때로는 정욕에 시달리기도 하고 때로는 그로부터 평화롭고 평온해지기도 하는 이를 존경해서는 안 되며, 끊임없이 무정함을 누리며, 정욕의 원인이 닥쳐도 그로부터 흔들리지 않고, 정욕에 대한 생각이 떠오를 때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이를 존경해야 한다.

14. 원수는 몸에서 떠난 영혼에게, 그 영혼의 타락을 신랄하고 무섭게 폭로하는 고발자처럼, 욕설과 질책으로 거침없이 다가온다. 그러나 그때 우리는, 비록 이전에는 죄로 인해 자주 상처를 입곤 했으나, 그 적의 공격과 위협에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주님 안에서 굳건히 서서 기쁨으로 날개를 펼치며, 그녀를 호위하는 거룩한 세력을 보며 담대함으로 충만해지며, 믿음의 빛으로 보호받으며, 큰 두려움 없이 그 악한 자에게 외친다: “하늘에서 쫓겨난 자이자 사탄의 종인 너와 나 사이에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우리에게 권세가 없다. 우리 위에, 모든 것 위에 권세를 가지신 분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는 그분께 죄를 지었으니, 그분께도 책임을 다할 것이며, 그분의 거룩한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고, 그분 안에서 우리의 구원을 보장해 주시는 중보자로 삼 . “그러니 너는 우리에게서 더 멀리 도망가라, 저주받은 자여. 너는 그리스도의 종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다.” 영혼이 내뱉는 이러한 대담한 말들 앞에서, 마침내 악마는 비명을 지르며 무너져 내리고,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게 된다. 그 후 그 영혼은 공중의 권세자들의 영역을 지나, 기쁨에 차서 신성한 천사들에 의해 자신의 본성에 따라 정해진 곳으로 인도된다.

15. 덧없는 것들에 대한 사랑이 너를 땅으로 끌어들여서는 안 되니, 너는 하늘의 지혜를 가진 자라. 만일 세상의 복에 대한 어떤 집착이 너를 묶고 있다면, 너는 발톱이 그물에 걸려 높이 날아오를 수 없는 독수리와 같으니라. 그러니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기고(빌 3:8) 더 나은 것을 바라며, 때가 되면 육신을 벗어던지고 너를 인도하는 천사를 자유롭게 따르라.

16. 왕의 인장이 찍히지 않은 동전을 평범한 동전들과 함께 왕의 보물창고에 넣을 수 없는 것처럼, 올바른 통찰과 무욕 없이는 저편 행복의 보증을 받아들일 수 없으며, 담대함과 확신으로 이곳을 떠나 소망하는 곳으로 나아가 선택받은 자들과 합일할 수도 없다. 여기서 ‘이해’라고 할 때, 나는 지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신성한 것에 대한 오류 없는 인식을 뜻한다. 이를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세속의 정욕에 이끌리지 않고, 성령의 은총으로 신성함에 이르게 된다.

17. 설령 네가 활동적인 삶과 관련된 모든 것을 다 겪었다 하더라도, 스스로를 신뢰하지 말고, 마치 이미 무정(無情)에 도달하여 세상에서 걱정 없이 돌아다닐 수 있는 것처럼 여기지 말라. 그래야만, 그런 상황에서 정욕적인 유혹에 휩쓸려 본래의 자아로 돌아오기 전까지, 네 삶의 질서에 불리한 어떤 것도 마주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두려움의 보호 아래, 변덕스럽고 변하기 쉬운 자신의 본성을 부지런히 경계하며, 정욕의 원인들로부터 현명하게 멀어지라. 왜냐하면 무정(無情)은 지극히 불변한 것이나, 오직 완전한 사랑을 이루고 끊임없는 관상으로 모든 감각적 대상보다 더 높은 곳에 머물며 겸손의 정점에 오른 자들에게서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이미 주님의 음성으로 진압된 정욕의 불꽃이 닿지 않으니, 이는 그들(완전한 자들)을 썩지 않는 상태로 옮기기 위함이다.

18. 때이르게 무정함을 갈망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미성숙한 상태에서 지식의 나무를 맛보았던 원초적 존재가 겪었던 것과 같은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니; 오히려 인내로써 전방위적인 절제와 끊임없는 기도에 힘쓰며, 자기 경멸과 지극한 겸손으로 활동적인 습관과 규율을 지키다 보면, 그 후에 적절한 시기에, 폭풍과 불안이 지나간 뒤의 이 안식의 피난처인 무정욕의 은총을 얻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의롭게 행하는 자들을 위해 마땅한 때에 무정함의 문을 열어 주시는 데 결코 인색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19.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배우라”(잠언 6:6) – 그리고 그로부터 부지런히 일하는 법을 배우라. 그러나 이 때, 결핍이 없으시고 모든 것으로 충만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선한 행실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오히려 그분께서 풍성하고 너그럽게 은혜를 베푸시며, 지혜롭고 그분께 충성하며 감사하는 자들을 은혜로 구원하시나니, 비록 그들의 힘닿는 대로 행하는 일을 자비롭게 받아들이시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네가 그분께서 이전에 네게 베풀어 주신 은혜에 대한 빚을 갚는 마음으로 수고하며 선을 행한다면, 하나님의 자비가 네게 가까이 있을 것이니; 반면, 네가 겉보기에 선한 일을 행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빚진 자로 여긴다면, 너는 바른 길에서 벗어나 길을 잃은 것이다. 왜냐하면 은인이 어떻게 빚진 자가 될 수 있겠는가? – 어쨌든, 고용인처럼 일하라. 그리고 조금씩 성공해 나가다 보면, 하나님의 자비로 네가 추구하는 바를 이룰 것이다.

20. 원한다면, 내가 너에게 구원으로, 아니 더 정확히 말해 무정(無情)으로 이르는 또 다른 길을 보여 주마. 네가 가진 모든 힘을 다해 기도로 네 창조주께 간청하여, 네 앞에 놓인 목표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라. 그분 앞에서 항상 온 천상의 세력과 모든 성인들, 그리고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 마리아를 중보자로 삼아 기도하라; 그리고 무정함을 추구하지 마라. 너는 그런 은총을 받을 자격이 없으니, 오히려 구원을 간절히 구하라. 그러면 구원과 함께 무정함도 얻게 될 것이니, 이 둘 중 하나는 은과 같고 다른 하나는 순금과 같으니라; 또한 이 하나님의 종에게 가장 은밀한 행실과, 하나님께 드리는 말씀의 몇 가지 은밀한 비밀을 간직하라. 그것들로 인해 그분은 기뻐하시며 경배하시니, 그 비밀들은 그분을 숭배하는 자들이라.

21. 구원의 보증금을 네 마음속 깊이, 의심의 여지 없는 확신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힘쓰라. 그렇지 않으면 떠날 때 뜻밖의 두려움과 떨림을 마주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네 마음이 어떤 죄에도 얽매이지 않고, 양심이 분노로 인해 가책받지 않을 때; 야수 같은 정욕의 거침이 하나님의 은혜로 네게 복종했을 때; 위로의 눈물이 저절로 흘러나오고, 마음이 맑고 공상 없이 기도할 때; 그리고 많은 이에게 두려운, 그들이 피하고 싶어 하는 죽음을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기다릴 때 말이다.

22. 사도 베드로가 증언한 바와 같이(요한복음 6:68), 하나님-말씀께서 가지신 “영생의 말씀”이란, 그분께서 이루신 일에 관한 말씀이며, 이를 통해 그분께 은밀히 인도받는 자는 이미 이 세상에서 영생과 성령의 보증, 그리고 부끄러움 없는 구원의 소망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영혼보다 육신을 더 중히 여기고, 세상의 재물에 집착하며 그것들로 즐거움을 찾는 자는 이를 누릴 자격이 없다.

23. 이성적인(logikoz – 이성 있는) 사람은 발음 가능한 말을 할 줄 아는 사람(명료하게 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그렇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성적인 힘으로 하나님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 찾고 탐구하는 사람이 바로 이성적인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본성상 초자연적인 존재를 결코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이는 그 어떤 본성에게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모든 존재에 대한 지극히 지혜로운 질서, 그에 대한 섭리, 보존, 인도 및 통치 속에서, 마치 이 “교묘한 창조주”이자 “시조”의 “아름다움”이 관조되고 체감되는 것처럼 (지혜서 13, 1. 4, 5)가 마치 집을 짓는 이가 자신의 손으로 한 일에서 드러나듯이, 그분의 “아름다움”이 관조되고 실감된다.

24. 무욕은 무욕심 없이는 마땅히 얻을 수 없고, 무욕심은 사랑 없이는, 사랑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순수한 기도 없이는, 이 모든 것은 믿음과 염려 없이는 얻을 수 없으니, 이 믿음과 염려로 날개를 얻은 마음은 헛된 사색을 버리고, 높은 곳으로 날아올라 그곳을 둘러보며, 자신의 주님을 찾는다.

25. 순결을 네 눈동자처럼 소중히 여기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고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집이 될 것이다. 정결함이 없이는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 세상에 대한 무관심과 세상으로부터의 멀어짐을 낳으며, 겸손한 지혜, 절제, 끊임없는 기도, 영적 묵상(하나님을 생각하는 것), 눈물과 분별력을 지켜주는데, 무욕 없이는 이러한 선함을 얻을 수 없다.

26. 아무도 너를 오도하여, 사도의 말씀(히브리서 12:14)과 달리 “거룩함”(순결) 없이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전능하시고 모든 순결을 초월하신 주님께서는 내면이 부정한 자에게 나타나시기를 기뻐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분을 사랑하는 자가 아버지나 어머니, 혹은 딸이나 아들을 그분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이 그분께 합당하지 않은 것처럼, 그분을 향한 사랑보다 일시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더 나아가 이 가증스럽고 악취 나는 죄를 우선시하는 자도 그분께 합당하지 않다. 이 부정한 것을 멀리하지 않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멀리하시니, “썩을 것이 썩지 않을 것을 상속받지 못하기” 때문이라 (고린도전서 15:50).

27. 지식 없이는 신성한 사랑을 얻을 수 없고, 믿음 없이는 지식을 얻을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단순히 겉치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덕행을 실천함으로써 생겨나는 것을 의미한다. 참된 회개는 절제와 깨어 있음, 기도, 그리고 겸손으로 육신과 얽혀 있는 정욕의 달콤함을 말려버리고, 주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될 때 비로소 진정한 통회를 얻게 될 것이며, 더 이상 정욕에 사로잡혀 살지 않고, “높은 소명과 선택”(베드로후서 1:10)에 대한 소망에 따라 성령으로 살기 시작할 것이다.

28. “이로써 내가 주께서 나를 기뻐하신 줄을 알았나이다”라고 선지자가 하나님께 외치며, “나의 원수가 나를 두고 기뻐하지 못하리이다”(시편 40:12)라고 합니다. 원수는 끝까지 정욕으로 나를 괴롭히고 모욕할 것입니다. 그러나 끝이 오기 전에 나를 그의 손에서 구원해 주시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영적으로 살게 하신 뒤, 복된 죽음을 맞이한 후 구원받은 자로서 나를 주님의 보좌 앞에 모시게 하소서. 그리하여 이곳에서 구원의 보증과 그 안에 대한 의심할 여지 없는 확신을 주님의 자비로 지니게 하소서; 왜냐하면 죽음을 맞이할 때 준비되지 못하고 떨고 있는 상태로 발견되는 것은, 내가 견딜 수 없는 재앙이며, 죽음과 지옥 그 자체보다 더 쓰라리고 더 악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29. 믿음과 소망은 결코 단순하거나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믿음은 굳건한 영혼을 요구하고, 소망은 바른 성품과 마음을 필요로 합니다. 게다가 은혜 없이는 누가 보이지 않는 것을 쉽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주님께서 주신 은사들에 대한 올바른 체험이 없다면, 누가 미래에 대해 희망을 품을 수 있겠는가? 그 체험을 통해 미래에 대해서도 현재와 마찬가지로 확신을 얻을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이 두 미덕 모두에는 우리 의지의 힘과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움이 필요하며, 그것들이 없으면 우리의 수고는 헛된 것이다.

30. 참된 미덕은 지식이나 무욕, 혹은 그 둘이 함께 어우러질 때 생겨난다. 그러므로 만일 누군가가 우리 안에서 이를 헛되이 찾으려 한다면, 우리의 미덕은 참된 것이 아니라 겉으로만 보이는 미덕일 뿐이라는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만약 그것이 그렇지 않다면, 잎사귀뿐만 아니라 열매도 풍성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선을 행하도록 부추기는 동기가, 타인의 환심을 사려는 것이든, 자기 만족이든, 혹은 하나님께 거슬리는 다른 무엇이든, 그것은 거짓이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동기를 바로잡는다면, 의심할 여지 없이 참된 덕의 완전함에 이르러, 때가 되면 마땅한 분량대로 전능하신 우리 하나님의 은혜로 지식과 무정욕을 얻게 될 것이다.

31. “원수의 꾀를 분별하라”(고린도후서 2:11)는 은혜의 깨달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엎드려, 비록 우리의 유혹자가 우리가 무언가라고 생각하도록 속이려 할지라도, 스스로를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며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라. 구원에 도움이 되지 않고 겸손을 지키지 못하게 하는 은사는 구하지 마라.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원천이 되는 교만하지 않게 하는 지혜를 구하고, 끝까지 정욕이라는 폭군에게 억압당하지 않도록 하며, 무정함 속에서, 혹은 적어도 죄에 대한 회개의 아픔 속에서 육신으로부터 해방되기를 구하라.

32. 날개 없이 하늘 높이 날아오를 수 없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확실한 확증을 얻지 않고서는 소망하는 바를 이룰 수도 없다; 이 확신은 겸손에서 비롯되거나, 하나님께 온전히 기쁨을 드린 자들에게 임하는 성령의 은총에서 비롯되는데, 그들에게는 당연히 무정심이 내재하며, 이는 그들이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고 정화된 정도에 따라 부분적으로나 온전히 나타난다. 반면, 다른 형태로 육신을 떠나는 자들, 즉 ‘정욕의 겨울’이나 ‘안식일’(즉, 덕행이 없는 상태)에 떠나는 자들(마태복음 24:20)은 심판과 고문을 받게 될 것이며, 이는 보응의 때에 이루어질 것이다.

33. 구원받는 자여, 구세주이신 하느님께 감사하라. 만일 그분께 예물을 드리고자 한다면, 과부처럼 홀로 남은 네 영혼으로부터 두 렙타, 즉 겸손과 사랑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치라. 그리고 그분은 그것들을 받아 주실 것이니, 내가 잘 알고 있노라. 많은 이들이 구원의 보물창고에 쌓아 두는 수많은 선행의 부보다 더 귀하게 여기실 것이다. 만약 네가 나사로처럼 정욕으로 인해 죽은 자로서 소생할 필요가 있다면, 바로 이 미덕들을 친자매처럼 그분 앞에 중재자로 내세우라. 그러면 반드시 네가 구하는 것을 얻게 될 것이다.

34. 덕행의 삶을 올바르게 실천한다고 해도, 이것만으로는 무정(無情)의 안식처에 도달하여 순수하고 흔들림 없이 기도할 수는 없다; 만약 동시에 네 마음이 계몽적인 통찰과 실재에 대한 인식이라는 영적 관조로 감싸이지 않는다면, 그것들로 날개를 달고 깨달음을 얻어, 참되고 온전히 사랑으로 숨 쉬는 기도를 통해, 그와 친근한 높은 비물질적 계급의 빛들로 급속히 상승하고, 거기서부터 가능한 한 위대한 빛, 즉 삼위일체의 신성한 삼위일체로 향할 수 있을 것이다.

35. 우리는 미래의 세상에서 죄를 지었다는 이유로 벌을 받지도 않을 것이며, 변덕스럽고 변하기 쉬운 본성을 받았다는 이유로 정죄받지도 않을 것이나, 죄를 지었음에도 회개하지 않았고, 회개할 능력과 시간을 가졌음에도 악한 길에서 돌아서 주님께로 향하지 않았기 때문에 벌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자들에게 선하시고 자비로우시나, 비록 위협하시고 진노하시는 모습으로 나타나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악과 죄를 향한 것이지, 우리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얼굴에 통회의 눈물을 보시는 즉시 언제나 기꺼이 우리를 받아들이실 준비가 되어 계십니다. 게다가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실과 마음가짐에 따라 우리에게 대하시며, 각자에게 그 삶의 가치에 따라 갚아 주십니다.

36. 우연히 선한 믿음의 길에서 비틀거릴 때, 두려워하지 말고, 곧바로 몸을 바로 세우고 서둘러 이전의 바른 길로 돌아가라. 슬픔과 후회, 자기 책망, 그리고 깊은 회개의 눈물을 넉넉히 흘리며, 이러한 힘으로 인해, 일어난 넘어짐에서 벗어나 구원의 기쁨의 품으로 들어가, 앞으로는 굳건히 서서 다시는 심판자를 노엽게 하여 정화를 위한 눈물과 통회를 할 필요가 없도록 마음속에 다짐하라. 왜냐하면 여기서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장차 우리에게 마땅한 고통을 피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제직에 대하여

1. 다시금 우리는 지극히 존귀한 사제직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이 사제직은 천사와 같은 품성과 어떤 순결을 요구하며, 이를 받아들인 후에는 이전보다 훨씬 더 큰 확고함과 절제를 요구합니다. 왜냐하면, 부정한 것은 어느 정도 정화해야 한다면, 정결한 것을 어떻게 더럽혀지게 내버려 둘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빛이 어두워지도록 내버려 두고, 향기로운 향유에 악취 나는 것을 섞는다면, 아아, 우리는 아나니아와 사프이라와 같은 신성모독자들처럼 파멸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2. 비록 네가 멸망할 운명이고 쓸모없는 그릇에서, 사도 말씀대로 주님께 호의적인 선택받은 그릇이 되어, 약간의 순결함 덕분에 천사적이고 신성한 사제직에 합당하게 들어섰다고 생각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누리게 된 흠 없는 영광을 온 힘을 다해 지키라. 하나님의 선물을 눈동자처럼 소중히 간직하여, 마땅한 주의 없이 성찬에 참여함으로써 높은 곳에서 심연으로 내던져져, 그곳에서 빠져나오기 어려워지지 않도록 하라.

3. 지혜로운 사람으로서 “하나님이 의롭다 하셨으니 누가 정죄하리요”(롬 8:34)라는 말씀을 깨달으라. 그리고 부름을 받아 신성한 사제직이라는 은혜로운 지위에 들어섰다면, 비록 과거에 실수를 저질렀더라도 지나간 삶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으며, 즉시 하나님의 도움으로 정화되고 바로잡으면 된다. 그러나 그 후에는 이 은혜를 더럽히지 않는 것이 네 첫 번째 관심사가 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신중하고 냉철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래야만 누군가 네 과거의 행실을 이유로 네 사제 서품을 무분별하게 비난하더라도, 그는 경고를 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이니, 그 음성은 이렇게 외치리라: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더럽히지 말라”(사도행전 10:15).

4. 사제직은 가볍고 그 멍에는 선한 것이나, 오직 그것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마땅히 바로잡기 시작하고, 하나님의 성령의 은총을 돈으로 사려 하지 않은 자에게만 그러하다. 만일 인간의 탐욕과 썩어질 선물로, 팔 수도 없고 살 수도 없는 것을 산 것으로 여긴다면; 그때 이 직분은 위에서 온 것이 아니었으므로, 이 짐은 매우 무거울 것이며, 그 자격에 미치지 못하고 힘을 넘어 지고 있는 것이기에, 이 멍에는 그를 갉아먹고 그를 이끄는 힘을 꺾어, 그가 포기하지 않는 한 그를 끝까지 고갈시키고 지치게 할 것이다.

5. 감히 사제직의 멍에 아래로 다가갔다면, 네 길을 바르게 걷고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다스리며, 두려움과 떨림으로 이를 통해 네 구원을 이루라. 우리 하나님은 삼키는 불이시니, 만일 네가 금이나 은처럼 그분께 닿는다면, 바빌론의 소년들이 용광로에서 불에 타는 것처럼 불에 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풀과 갈대처럼, 쉽게 타는 물질로 된, 세속적인 지혜를 가진 자라면, 롯처럼 끔찍한 신비로부터 절제함으로써 진노를 피하지 않거나, 회개의 눈물로 서둘러 씻지 않는다면, 하늘의 불에 타버릴까 두려워하라. 오직 눈물의 물로 젖어 있을 때만, 너는 한때 덤불 속의 연약한 식물처럼 진리의 불에 타지 않고 상처받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런 경우, 우리가 연약함으로 인해 쉽게 저지르는 죄 중에서, 완전한 순결함으로 행해지는 예배나 효과적인 정화를 통해 신성한 불로 지워지지 않을 죄가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6. 오랫동안 이어져 온 습관 때문에 정욕적인 성향에서 벗어나 정화되지 못했으면서도, 어떻게 감히, 이 저주받은 자여, 천사들에게조차 건드릴 수 없는 것을 건드리는가? 그러니 이제 정신을 차리고 신성한 성례에서 물러나, 그것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달래든지, 아니면 무감각하고 고칠 수 없는 자로서, 너를 자비롭게 용서하지 않으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스스로를 내맡기든지, 오히려 네가 왕의 혼인 잔치에 몹시 더럽혀진 영혼과 누더기 옷을 입고 뻔뻔스럽게 감히 다가서는 죄로 인해, 왕의 궁전에 들어갈 자격조차 없는데 하물며 그 잔치에 참석할 자격은 더더욱 없음에도 불구하고, 무자비하게 벌하실 것이다.

7. 나는 한 성직자를 알았는데, 그는 자신을 지배하던 음탕한 정욕 때문에 합당하지 않은 채로 신성한 성례에 감히 참여하려 했다. 그는 이로 인해 중하고 치료할 수 없는 병에 걸려 이미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다. 그렇게 병을 치료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병은 계속될 뿐만 아니라 더욱 심해졌습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자신이 합당하지 않은 성찬 예식을 거행한 탓에 죽어가고 있음을 깨달은 그는, 다시는 성찬 예식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며 서원했습니다. 이 말이 끝나자마자 병이 즉시 치유되어, 병의 흔적조차 전혀 남지 않았다.

8. 사제직의 품위와 성의는 눈부시나, 이는 성직자가 내면에서도 순결함으로 빛나는 영혼을 지녔을 때에만 그러하다. 그러나 그가 부주의로 인해 더러워지고, 이 수치를 증언하는 양심을 경멸한다면, 그때 빛은 어둠이 되어, 영원한 어둠과 불의 원인이 되리니, 양쪽이 험준한 이 길을 버리고, 겸손을 바탕으로 한 덕행의 삶, 곧 하나님의 나라로 무사히 이끄는 다른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9. 구원은 높은 지위의 성직이 아니라, 천사와 같은 삶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낮은 처지에서도 덕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니 천사처럼 무욕하여, 마치 세상과 육신을 초월한 지혜로 존재하는 것처럼, 그 방식으로 이 천상의 사다리에 오르거나,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준비되지 않은 자들에게는 큰 추락을 위협하는 그 높이를 두려워하며, 대다수가 누리는 삶, 즉 하나님께로 인도하고 그분을 우리 것으로 삼게 하는 그 특별한 삶만큼이나 소중한 삶을 붙잡으라. 그 삶 속에서 설령 넘어지게 되더라도, 회개와 자비로우신 우리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일어서기가 더 쉬울 것이다.

10. “하나님의 나라는 혈과 육으로 상속받지 못한다”(고린도전서 15,50). 그러나 너는 하나님의 살과 피를 성찬으로 받아, 그분과 한 몸이 되고 그분의 피와 하나가 되니, 이미 네 안에 천국을 품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너는 살과 피의 정욕에 사로잡혀 있는가? 두려운 것은, “육신적인 자”(창세기 6, 3)처럼 네 안에 하나님의 영이 머무르지 않을 것이며, 심판의 시간에 네가 반으로 갈라질 것이라는 점이다. 그때 그들은 너에게서 그토록 존귀한 사제직을, 그러한 은총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서 빼앗듯이 빼앗아 가고, 너를 지옥의 영원한 고통으로 보내버릴 것이다.

11. 마치 네 눈앞에 하나님의 두려움이 없는 것처럼, 너는 합당하지 않은 사제직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는 듯하며, 신성이 선하다고 속삭이는 자만심에 현혹되어 있다. 다판과 아비론도 한때는 이와 같이 안주하다가, 마침내 땅에 삼켜졌다. – 너도 이를 두려워하고, 두려움이 있는 곳(시 13, 5), 성직 수행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 마음에 새기라. 그리고 합당하고 순수하게, 아니 천사와 동등한 수준으로 신성한 사제의 권세를 행사하든지, 아니면 이 무서운 사역을 현명한 사람답게 멀리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지금 이 일에 소홀히 하고, 너를 책망하는 양심을 속이며, 궤변으로 얼버무렸다가, 모든 것이 올바르게 판단되고 심판받을 때, 신음하며 외치지 않도록 하라: “내가 두려워하던 그 두려움이 내게 닥쳤고, 내가 무서워하던 그 공포가 나를 덮쳤다” (욥기 3, 25)!

12. 먼저, 냉철하고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너 자신에 대해 통회와 눈물로 세상을 구원하는 거룩한 제사를 드려 정화받으라. 왜냐하면 네가 죽었을 때, 누가 너처럼 너를 위해 애통하며 너를 위해 제사를 드릴 것이겠느냐? 왜 앞으로 닥칠 일을 내다보며, 마치 이미 장사된 것처럼 자신을 기억하고, 네 구원을 위한 중보 기도로 이 성찬상의 거룩한 예물을 하나님께 드리며, 이곳에서 그분의 자발적이고 인자하신 희생 제사를 떠올려라.

13. 영혼이 구원을 확신하며 육신을 마치 옷처럼 벗어 던지고 떠날 때, 그 얼마나 말로 다 할 수 없고 표현할 수 없는 위로인가! 이는 마치 바라는 복을 이미 소유한 것처럼, 영혼은 걱정 없이 육신을 떠나, 기쁨과 즐거움으로 위에서 내려오는 천사에게 평안히 나아가며, 그와 함께 아무런 방해 없이 공중을 가로지르며, 악의 영들의 어떤 공격도 받지 않은 채, 기쁨 속에서 담대함과 감사의 환호성을 지르며 상승하여, 마침내 창조주를 경배하는 곳에 도달하고, 그곳에서 공동 부활이 올 때까지 자신과 같고 덕행이 동등한 자들의 무리에 속하게 될 것을 결정받게 된다.

14. 무서운 말을 하겠지만, 놀라지 마라. – 설령 폭군 같은 기질 탓에 무정함에 이르지 못한다 할지라도, 떠나는 순간 깊은 겸손의 감정에 휩싸여, 무정함에 결코 뒤지지 않는 상태로 구름 위를 타고 승천할 것이다. 무엇인가, 무감정자들의 보물은 온갖 덕으로 이루어져 있을지라도, 겸손이라는 보석은 그 모든 것보다 더 귀하고 높으며, 이를 얻은 자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용서를 얻을 뿐만 아니라, 선택받은 자들과 함께 그분의 왕국의 혼인 잔치장에 들어갈 수 있는 특권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15. 하나님께로부터 죄의 용서를 받으면, 그분의 악을 기억하지 않으시고 그에 대해 보복하지 않으시는 그분을 찬양하며, 자의적인 타락으로부터 온 힘을 다해 스스로를 지키라. 비록 그런 상황에서도 죽는 날까지 매일 용서를 받을 수는 있겠지만, 알고서도 그렇게 쉽게 죄를 짓는다면 너는 배은망덕한 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희망의 돌로 절망의 개를 쫓아내고, 끊임없이 인내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간구한다면, 장차 올 세상에서 너도 자비로우시고 지극히 선하신 분을 사랑하게 되도록, 네 많은 죄가 용서받을 것이다.

16. 신성한 은총의 역사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땅에 엎드려 십자가 모양으로 몸을 뻗고, 머리를 땅에 부딪히며, 썩어 없어질 몸에서 해방되고 유혹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의 용서를 구하라; 그러나 네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때와 장소에 따라 떠나기를 소망하며, 심지어 깊은 겸손 속에서 이 눈물과 함께 주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사랑을 기꺼이 나타내어, 네 갈망과 탐구의 불길을 잠재우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더 나은 것을 계획하고 계시다면, 당분간은 지체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라. 오직 한 가지만 간절하고 끈질기게 구하라, 곧 하나님께로부터 떠나지 않는 것; 이를 위해 무엇을 하지 않고, 무엇을 말하지 않고, 무엇을 의도하지 않고, 무엇을 시도하지 않는 것이다.

17. 육신을 지닌 자로서, 비록 네 영혼의 지성이 깨끗할 때 이를 추구하도록 이끌더라도, 정신적·영적인 것을 있는 그대로 탐구하려 하지 마라. 왜냐하면 육체와 피의 속박에 갇힌 비물질적인 영혼이 이 무거움에서 벗어나지 않고, 지적인 힘들과 함께하지 않는 한, 마땅히 그래야 할 대로 그것들을 생각하고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치 두 번째로 어두운 어머니의 자궁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물질적인 속박에서 벗어나 비물질적이고 빛나는 존재로 나아가기 위해 준비하면서, 우리를 죽음을 통해 우리가 갈망하는 더 나은 삶으로 인도하시는 은인을 찬양하며 기쁜 마음을 품으라. – 끊임없이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라, 우리 주위를 배회하며 언제나 우리의 안녕을 해치려 하고,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교묘히 우리의 발뒤꿈치를 노리는 불결한 악령들 때문이니라. 또한 미래가 알 수 없기에, 자기 마음대로 변덕스럽고 변하기 쉬운 존재로 창조된 자로서,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스스로를 위해 떨며 경계하라.

18. 원수는 영혼이 덕의 최고 경지에 들어섰음을 감지할 때, 잔혹하고 무서운 유혹으로 우리를 맞이한다. 이는 기도의 말과, 기도가 육체와 감각이라는 물질적 이원성을 초월함으로써 증명된다. 그때 인간을 증오하는 자는 너무나 악랄하게 유혹하여, 우리가 삶 속에서조차 절망에 빠지게 만든다. 그러나 그 허영심 많은 자는, 인내를 통해 우리를 더욱 경험 많고 밝은 존재로 만들고, 우리에게 영광의 면류관을 엮어줌으로써, 우리에게 어떤 축복을 가져다주는지 알지 못한다.

19. 정절과 동정심만큼 위대한 위업은 없다. 정직하게 독신을 지키는 이는 천사들에게도 경이의 대상이 되며, 순교자 못지않게 영광을 얻는다. 육신과 피로 묶여 있으면서도 항상 순결을 통해 무형의 존재들을 본받으려 애쓰는 이에게, 얼마나 많은 수고와 땀이 요구되겠는가? 그리고 진실로, 이 일은 너무나 위대하고 고귀하여, 만일 하나님께서 위에서 당신의 중보를 베풀어 약하고 덧없는 본성을 굳건히 하고 확고히 하시며, 신성한 사랑과 약속된 보상에 대한 소망으로 어떤 방식으로든 그를 땅에서 일으켜 세우지 않으셨다면, 초자연적인 일로서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20. 과도한 식사와 잠으로 나태해진 육체는 절제에 있어 큰 장애물이다. 그러나 참된 절제는 잠든 꿈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잠자는 동안 마음이 그 꿈들로 인해 즐거워한다면, 이는 그 마음 깊은 곳에 이 정욕의 병이 자리 잡고 있다는 징후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은혜로 잠자는 동안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게 된다면, 그는 분명히 이 정욕에 물들지 않은 상태임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언제나 영혼과 육체의 깨어 있는 파수꾼이 되어, 둘 사이를 평화롭게 조화롭게 유지하며, 마치 사악한 늑대들을 경계하며 그들을 지키는 개처럼, 이를 통해 포식당하는 것을 피하게 된다.

21. 너에게 기이한 말을 하겠지만, 놀라지 마라. 하나님과 영혼 사이에 이루어지는 어떤 은밀한 신비가 있다. 이는 완전한 순결과 사랑, 믿음의 지극한 경지에 이른 자들에게 일어나는 일로, 사람이 완전히 변화되어 끊임없는 기도와 묵상을 통해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 그분과 하나 되는 때이다. 이 경지에 이른 엘리야는 가뭄을 위해 하늘을 닫고, 하늘의 불로 제물을 태우며; 모세는 바다를 갈라놓고 손의 움직임으로 아말렉 족속을 도망치게 하며; 요나는 고래와 바다 깊은 곳에서 구원받는다. 이는 가장 인자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에 있어 일정한 필요를 두시나, 이는 오직 그분의 뜻에 부합하는 범위 내에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를 누리게 된 자는 비록 육신을 입고 있더라도 썩어 없어짐과 죽음의 한계를 뛰어넘어, 마치 평범한 잠을 자듯 죽음을 맞이하며, 그 죽음이 그를 위로하여 그가 항상 갈망하던 곳으로 인도해 준다.

 

사제직에 대하여

1. 주님의 수난과, 우리를 위해 자신을 비우신 말씀이신 하나님, 그리고 우리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신성한 몸과 피의 희생과 연합을 경외하며—우리는 이를 단순히 성찬으로만 받는 것이 아니라 성사 집전 자체에 참여하게 되었으니—도살될 양처럼 자신을 낮추고, 모든 이를 진정으로 자신보다 뛰어나다고 여기며, 그리고 어떤 사람의 양심도 상하게 하지 않도록 온갖 면에서 조심하라. 자신을 정화하지 않고는 감히 성사(聖事)에 손을 대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신성한 불에 짚처럼 타버리거나, 밀랍처럼 녹아 흐르지 않도록 하라.

2. 진실로, 네가 마땅히 이 신성하고, 지극히 거룩하며, 경외스러운 성사를 거행하고, 양심이 어떤 점에서도 너를 책망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것에서도 이 성사만큼 확실한 구원의 소망을 얻지 못할 것이다. 이는 그 성사로부터 네가 얻는 유익이 그 어떤 다른 행위나 묵상보다도 더 크기 때문이다. –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스스로 생각해 보라. – 그리고 자신의 연약함을 자각하고 높은 사제직을 포기하는 것이, 자신의 부적합함과 불결함을 알면서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많은 이에게 높은 자로 보이지만 실상은 부적합함으로 인해 눈물을 흘릴 만한 시체와 같은 존재가 되는 것보다 훨씬 낫다.

3. 의로운 사제직의 봉사와 그로 인한 하나님의 화해, 그리고 그분 앞에서 모든 이를 위해 끊임없이 드리는 중보 기도는, 마치 태양이 별들보다 훨씬 더 뛰어난 것처럼, 그 어떤 시편 찬양이나 기도보다도 훨씬 뛰어납니다. 이는 우리가 독생자 그분 자신을 제물로 바치기 때문입니다. – 인간을 사랑하심으로써 죄인들을 위해 스스로를 내어주신 그분을, 우리는 죄의 용서뿐만 아니라 우리가 필요로 하고 기도하는 모든 것을 베풀어 주시기를 간구하며, 신성과 결합된 그분의 육신은 마치 숯불처럼 모든 불의를 태워 없애고 믿음으로 나아오는 이들의 마음을 비추시며; 마찬가지로 신성하고 지극히 거룩하신 피는 그 어떤 쑥보다도 더 강력하여, 온갖 통회와 소망에 찬 겸손으로 성찬에 감히 나아오는 이들의 모든 부정함과 더러움을 씻어내고 정화하십니다. 도대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4. 어떤 성인이 말했듯이, 하늘로 승천하지 않은 하나님 말씀의 몸은 하늘에서 내려와 먹히시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두려움, 사랑, 그리고 신성한 성사의 경외심을 품은 존경받는 사제직에 의해 거행될 때, 이 성사 안에서 지극히 거룩하신 성령의 작용과 감화로 하나가 다른 것으로 변화되는 이 변형이 이루어집니다. 신성한 몸을 다루는 사제에게 요구되는 순결과 거룩함은 얼마나 큰 것이며, 그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가 되어야 할 때, 성모 마리아와 천상의 천사 군단, 그리고 태초부터의 모든 성인을 자신의 중보자로 모시고 있을 때, 그에게는 얼마나 큰 담대함이 필요한가? 제 생각에는 천사나 대천사급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직분에 따라 자질도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5. 형제여, 네가 주목해야 할 점은, 성화되어야 할 성찬물이 신앙고백문 후에 덮이지 않은 채 놓여 있는 것은, 그것들이 어떤 면에서 마치 바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듯하며, 하늘에 계신 분께 형언할 수 없는 목소리로 부르짖어, 그들을 멸시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돌보시며, 죄인들을 위해 자발적으로 자신을 비우신 그분의 아들의 희생과, 그분의 형언할 수 없는 강림, 그리고 인류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치르신 희생을 기억하시기를. 이는 그분께서 의로운 자들에게만 그분의 고난을 통해 속죄와 구원을 베푸신 것이 아니라, 타락한 우리를 자비롭게 여기시고 일으켜 세우셨기 때문이니, 그분은 선하시고 악의를 품지 않으시는 분이시니라.

6. 비록 하나님과 비물질적으로 결합하는 순수한 비물질적 마음의 기도에 힘쓰며, 이미 이 세상의 생명이 끝난 후 너를 맞이할 운명을 마치 거울에 비친 것처럼 볼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고, 성령의 보증을 받았으며 온전한 확신으로 온 감각을 통해 내면에서 천국을 얻었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미리 알지 못한 채 육신을 떠나게 두어서는 안 되며, 이 일에 대해 부지런히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당신에게 유익하다면,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이를 얻게 될 것이라는 내면의 확신을 가져야 하며, – 이를 위해 밤낮으로 자신을 준비하며, 모든 두려움을 떨쳐내어 마치 공중을 가로질러 악의 영들을 피한 것처럼, 대담하고 두려움 없이 이미 하늘의 영역에 있는 것처럼, 천사들의 계급과 나란히 서며 태초부터 택함 받은 의인들과 함께 계수되기를, 그리고 가능한 한 하나님을 훤히 바라보며,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해 주신 온갖 선한 것들을 온전히 바라보고, 그분의 빛으로 하늘 너머의 모든 것을 비추시는 하나님-말씀을 관상하며, 그분의 지극히 순결한 육신과 함께, 아버지께서와 성령과 더불어, 모든 천상의 세력과 모든 성도들이 드리는 경배로 경배받으시는 분을 훤히 바라보기를. 아멘.

 

시나이의 성 필로페이

 

그분에 대한 간략한 소개

우리의 존경받는 아버지 필로테우스는 시나이 산에 있는 수도 공동체의 원장(이구멘)이었으며, 그로 인해 ‘시나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그가 언제 살았는지,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현재 40장으로 나뉘어 있는 그의 저서는 훌륭하게 집필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영적 지혜와 영혼을 구원하는 힘이 얼마나 큰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렇기에 이 저서를 다른 교부들의 절제에 관한 저작들과 분리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여겨진다. – 이 저작은 더 큰 주목을 받을 만합니다. 왜냐하면 누군가 이를 절제, 정신의 명료함, 마음의 순결에 대한 정확한 해석이자 올바른 규칙이라고 칭한다 해도, 진리에 어긋나는 말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성 필로페이 시나이스의 『절제에 관한 40장』

1. 우리 안에는 감각적인 싸움보다 더 무거운 정신적인 싸움이 있다. 경건함을 실천하는 자는 마음을 다해 다음과 같은 목표를 추구해야 하는데, 마치 진주나 귀중한 보석처럼, 하나님에 대한 기억을 마음속에 온전히 간직하기 위함이다. 오직 한 분 하나님을 마음속에 얻기 위해서는 모든 것, 심지어 육체까지도 버리고 현세적인 삶 자체를 경멸해야 한다. 성 요한 크리소스톰은 지적인 하나님 뵙기만으로도 악한 자들을 근절하기에 충분하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2. 마음속의 싸움을 치르는 이들은 온 힘을 다해 신성한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영적인 실천들을 선택하고, 이를 치유하는 반창고처럼 마음에 붙여야 한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아침부터 용감하고 끈질기게 마음의 문 앞에 서서, 하느님을 굳게 기억하고 영혼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를 끊임없이 드리며, 이 영적 경계를 통해 땅의 모든 죄인들을 죽여야 한다고 한다. 즉, 신실하고 강렬하며 심금을 울리는 하나님에 대한 기억으로, 주님을 위하여 강자들의 머리와 싸움을 일으키는 생각들의 근원을 베어내야 한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마음속의 수행적 수고에도 나름의 신성한 질서와 작용 방식이 있기 때문이다. – (천국을 위해) 자신을 고행하는 자들은 정해진 식사 시간이 올 때까지 이렇게 해야 한다. 그 후, 영적 음식과 육체적 음식이라는 두 가지 양식으로 우리를 양육해 주시는 주님께 감사를 드린 뒤, 죽음에 대한 기억과 묵상으로 자신을 단련해야 한다. 그리고 다음 날에는 다시 스스로 결심하여 아침 일을 시작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매일의 생활 방식 속에서야 비로소 우리는 주님 안에서 마음의 원수의 올가미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실천이 우리 안에 확고히 자리 잡으면,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세 가지 미덕이 생겨납니다. 이 중 믿음은 우리를 참된 하나님 경외심으로 이끄며, 소망은 노예 같은 두려움을 극복하고 사람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도합니다. 소망이 수치를 주지 않고, 대개 율법과 선지자들이 의존하는 두 가지 사랑을 낳는다면, 사랑 또한 그 자체로 이 세상에서는 결코 사라지지 않으니, 이는 사랑이 그 참여자에게 신성한 율법의 규정을 이행하게 하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며, 미래에도 마찬가지이다.

3. 마음으로 침묵을 지키는 이들을 찾기는 매우 드물다. 이는 오직 신성한 은총을 자신에게 끌어당기고, 그로부터 흘러나오는 영적 위로로 충만해지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자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이다. –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그들과 마찬가지로, 마음을 지키고 절제하는 가운데 이 그리스도의 철학인 ‘지적인 수행’을 실천하고자 한다면, 많은 음식물을 절제하는 것으로 이 길을 시작하여, 가능한 한 적은 양으로 음식과 음료를 섭취하기로 결심해야 한다. 절제는 정당하게도 ‘길’이라 불린다. 왜냐하면 그것은 왕국으로 이끄기 때문이다. — 우리 내면의 왕국과 미래의 왕국 모두로 — 또한 ‘지적인 작업장(생각의 공방)’이라 불리는데, 이는 절제가 마음의 성품을 다듬고 닦아내며, 정욕적인 것을 무정욕적인 것으로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마치 작은 빛나는 창과 같아서, 그 창을 통해 하나님께서 가까이 다가오셔서 마음에 나타나십니다.

4. 겸손과, 절제와 주의력을 동반한 하나님에 대한 기억, 그리고 원수들을 향해 끊임없이 드리는 기도가 있는 곳, 바로 그곳이 하나님의 장소, 즉 마음의 하늘이며, 그곳에는 하나님께서 거하시기 때문에 악마의 무리가 서 있기조차 두려워한다.

5. 수다보다 더 파멸적인 것은 없고, 절제되지 않은 혀보다 더 해로운 것은 없다. 또한 그 어떤 것도 영혼의 풍요로움을 이토록 심하게 무너뜨리고 갉아먹는 것은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매일 우리 안에서 쌓아 올리는 것을 수다가 다시 무너뜨리고, 수고로 모은 것을 혀의 병으로 인해 영혼이 다시 탕진해 버리기 때문이다. 이것(절제되지 않은 혀)보다 더 나쁜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억제할 수 없는 악이다. 그것에 한계를 정하고, 길들여 제압하며, 말하자면 오직 필요에 따라만 쓰이도록 해야 한다. – 그리고 누가 (절제되지 않은) 혀에서 비롯되는 영혼의 모든 해악을 다 말할 수 있겠는가?

6. 마음의 예루살렘으로 이끄는 첫 번째 문, 즉 마음의 주의력은 입의 이성적인 침묵이다. 비록 마음이 아직 침묵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두 번째는 음식과 음료에 대한 절제(적당한 분량으로 정해진)이며, 세 번째는 마음과 몸을 정화하는, 죽음에 대한 끊임없는 기억과 묵상이다. 한 번 이 마지막 것의 아름다움을 뵙고, 눈이 아닌 영으로 그 아름다움에 찔리고 달콤함을 느끼며, 나는 그 고상함과 위엄을 사랑하게 되어, 평생의 동반자로 삼고자 갈망하게 되었다. 그녀는 얼마나 겸손하고,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며, 사색에 잠겨 있는지, 미래의 의로운 형벌을 얼마나 두려워하며, 삶의 연장(우연)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그녀는 보통 감각적인 눈에서 치유하는 생수를 흘려보내고, 마음의 눈에서는 풍성한 지혜로운 생각의 샘을 뿜어내어, 그 물이 흐르고 솟아오르며 이성을 즐겁게 한다. 바로 이 아담의 딸, 즉 죽음에 대한 기억을, 내가 말했듯이, 나는 항상 나의 동거인으로 삼고, 그녀와 함께 잠들고, 그녀와 대화를 나누며, 이 육신을 벗어던진 후 내게 닥칠 일을 그녀와 함께 탐구하고 싶었다; 그러나 종종 이 해로운 망각, 즉 어둠에 휩싸인 악마의 딸이 나를 그렇게 하지 못하게 막았다.

7. 악의 영들이 생각을 통해 영혼과 은밀히 싸우는 전쟁이 있다. 영혼은 보이지 않으므로, 그 악의적인 세력들은 영혼의 본성에 맞춰 보이지 않는 전쟁으로 그녀를 공격한다. 그리고 양측 모두에게서 무기와 작전(군대 배치와 전투 수행), 기만적인 계략과 위협적인 공격(공포를 주기 위한 맹렬한 돌격), 그리고 양측 간의 백병전과 승패가 오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가 묘사하는 이 상상의 전투에서, 감각적인 전투와 비교했을 때 단 한 가지만 결여되어 있는데, 바로 전쟁 선포의 명확한 시점이다. 실제 전쟁의 경우 보통 시기가 정해지며 그에 따른 규율이 지켜지지만, 이 (상상 속의) 전쟁은 아무런 예고 없이 마음 깊은 곳 바로 주변에서 갑자기 닥쳐와, 제비뽑기(선택적; 달리 말하면, 마음속에서 주입된 것에 동의함으로써 우위를 점한)를 통해 죄를 매개로 영혼을 죽인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어떤 목적으로 이 전쟁과 투쟁이 우리를 상대로 벌어지는가? 그것은 우리가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눅 11:2)라고 기도하며 구하는 하나님의 , 즉 하나님의 계명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만일 누군가 자신의 마음을 굳게 다잡고, 주님 안에서 완전한 정신을 차린 채 방황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적들의) (마음 속으로의) 침입과, 환상 속에서 일어나는 (정신 차린 마음과의) 격돌을 세심하게 관찰한다면, 그는 경험을 통해 이를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도 악한 악마들을 향해 당신의 뜻을 향하시며, 하나님께서 그들의 계략을 미리 아시고, 그들의 목적과 정반대로 당신의 계명을 정하시고, 이를 어기는 자들에게 경고하셨다.

8. 오감으로 인해 발생하는 눈에 보이는 악을 절제하고 멀리하는 데 어느 정도 숙달되면, 그 후에는 예수님과 함께 우리 마음을 지키고 그분 안에서 그분으로부터 빛을 받을 수 있으며, 따뜻한 마음으로 그분의 선하심을 영으로 맛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가 마음을 정화하라는 율법을 받아들인 것은, 악한 생각의 구름들이 마음의 대기에서 쫓겨나고 끊임없는 주의력으로 흩어졌을 때, 마치 맑은 날처럼 진리의 태양이신 예수님을 선명하게 볼 수 있고, 그분의 위엄 어린 말씀으로 마음속에서 어느 정도 빛을 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는 보통 그 말씀들이 모든 사람에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마음을 정화하는 자들에게만 드러나기 때문이다.

9. 우리는 매일 하나님 앞에 서야 할 마땅한 마음가짐을 유지해야 한다. 선지자 호세아는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자비와 심판을 지키고, 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라”(호세아 12, 6). 또한 선지자 말라기 역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씀하시기를, “아들은 아버지를 공경하고 종은 주인을 경외하거니와, 만일 내가 아버지라면 내 영광은 어디에 있으며, 만일 내가 주라면 내 경외함은 어디에 있느냐?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느니라” (1, 6)라고 하셨다. 사도도 마찬가지로 기록합니다. “육체와 영의 모든 더러움을 우리에게서 깨끗이 씻어 내자”(고린도후서 7:11). 지혜의 말씀도 이렇게 가르칩니다. “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거기에서 나오기 때문이다”(잠언 4:23).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렇게 명하십니다. “그릇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해지리라”(마태복음 23:26).

10. 부적절하고 헛된 대화의 열매는 때로는 듣는 자들로부터 우리를 향한 증오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그들이 우리 말의 무분별함을 알아차렸을 때 책망과 조롱이 되기도 하며, 때로는 양심의 더러움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하나님께로부터의 정죄와 성령의 슬픔이 되기도 하는데, 이는 그 무엇보다도 끔찍한 일이다.

11. 자신의 마음을 정화하고 그 안에서 주님에 대한 죄를 뿌리째 뽑아내며, 신성한 지식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많은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을 마음으로 꿰뚫어 보는 자는, 그 때문에 누구보다 우월하다고 자만해서는 안 된다. 피조물 중에서 무형의 존재보다 더 순수한 것이 무엇이겠으며, 지식이 풍부한 천사보다 더 뛰어난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그 역시 교만해져 번개처럼 하늘에서 쫓겨났다. 그의 교만은 하나님께 의해 부정함으로 간주되었다. – 땅에서 금을 캐내는 자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잘 알려져 있다(즉, 지식의 금을 얻기 위해 그들이 땅속에 있는 것처럼 모든 이보다 낮게 있으라).

12. 사도는 말하기를 “경주하는 자는 모든 것을 절제한다”(고린도전서 9:25)고 한다. 왜냐하면 음식으로 배가 부른 상태에서는 원리들, 즉 보이지 않는 악의적인 세력들, 이 무겁고 항상 영을 탐하는 육신에 묶여 있는 자들에 대항하여 싸울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니라”(롬 14:1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복종할 수도 없기 때문이라”(롬 8:7). 분명히 그럴 수 없는 것은, 육신이 세속적이며 체액과 피와 점액으로 이루어져 있어 항상 세속적인 것에 치우치고, 이 세상의 파멸적인 쾌락에 탐닉하기 때문이다. “육신의 생각은 곧 사망이니,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롬 8:8).

13. 우리가 주님 안에서 마음을 지키고자 진심으로 염려한다면, 첫째로 하나님에 대하여, 둘째로 사람들에 대하여 큰 겸손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항상 온갖 방법으로 마음을 찢으며, 마음을 겸손하게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찾아내어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세속에서 살던 과거의 삶을 마땅히 회상할 때,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찢고 겸손하게 만듭니다. 또한 젊은 시절부터 저지른 모든 죄를 하나하나 마음속으로 되짚어 볼 때, 그것은 대개 마음을 겸손하게 하고 눈물을 흘리게 하며, 또한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 감사드리도록 우리를 이끕니다. 이는 죽음에 대한 늘 효과적이고(감각에까지 닿는) 기억과 마찬가지로, 그 기억은 달콤한 기쁨의 울음과 정신의 명료함을 동시에 불러일으킵니다. 특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기억은, 누군가 그것을 마음속으로 되새기며 모든 것을 상세히 떠올릴 때, 우리의 교만을 꺾고 눈을 땅으로 내리깔게 한다. 이는 또한 눈물을 흘리게 한다. 게다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위대한 은혜들을 누군가 자세히 열거하고 되새길 때, 그것들은 진실로 영혼을 겸손하게 만듭니다. 이는 우리가 교만한(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 악령들과 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14. 만일 네가 그것들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자만심 때문에 이 영혼을 구원하는 치료법들을 외면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제자도, 바울을 본받는 자도 아니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신에 대해 “사도라 불릴 자격이 없다”(고린도전서 15:9) 말했고, 또 다른 곳에서는 자신이 이전에 모독자요, 박해자요, 괴롭히는 자였음을 고백했다(디모데전서 1:13). – 보라, 교만한 자여, 보라, 성자이시면서도 자신의 과거 삶을 잊지 않으셨는가? 게다가 창세부터 오늘날까지 모든 성도들은 이 지극히 거룩한 하나님의 옷(즉, 겸손)을 입으셨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헤아릴 수 없고, 알 수 없으며, 말로 다 할 수 없는 하나님이시면서도, 육신으로 사신 전 생애 동안 겸손을 입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겸손은 의롭게도 신성한 미덕이자, 주님의 계명이자, 옷으로 불려야 마땅합니다. 또한 천사들과 그 모든 빛나는 신성한 세력들도, 교만해진 사탄이 어떤 타락을 겪었는지, 그리고 그가 (이 죄에) 빠지는 것을 얼마나 두려워해야 하는지에 대한 본보기가 되어 (이 죄로) 천사들과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주어야 할 본보기가 되어, 그 교만함으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그 어떤 피조물보다도 더 불명예스럽게 드러난 사탄이 심연에 누워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아담이 교만 때문에 어떤 타락을 겪었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우리 눈앞에 이러한 교만을 낳는 미덕의 본보기가 있으니, 앞서 언급된 치료법을 활용하여, 우리가 가진 모든 힘을 다해 항상 온갖 방법으로 스스로를 낮추도록 합시다. 영혼과 육체, 지혜와 욕망, 말과 생각, 겉모습, 그리고 겉과 속 모두에서 스스로를 낮추어야 합니다. 특히 신경 써야 할 점은, 우리를 위해 계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께서 우리와 대적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주께서는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나,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잠 3:34). “주 앞에서 교만한 자는 아무도 깨끗하지 못하니라” (잠언 16:5);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질 것이라” (누가복음 18:14). “나에게서 배우라. 나는 온유하고 마음이 겸손하니라”라고 구세주께서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11:29). – 이를 유념해야 한다.

15.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마음이 과식으로 무거워지지 않도록 하라” (누가복음 21, 34). “경주하는 자는 모든 것을 절제한다”는 사도의 말씀대로 (고린도전서 9, 25). 신성한 성경에 기록된 이러한 모든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며, 우리는 절제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무엇보다 먼저, 다양한 음식들을 멀리하고, 몸에 적당한 양의 음식만을 주며, 덕스러운 습관과 규율에 몸을 익숙하게 합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정욕의 격한 움직임이 쉽게 다스려지고 이성에 복종하게 되며, 솔직히 말해 분노의 움직임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과정에서 다른 죄악들로부터도 절제하기가 더 수월해지는데, 이는 실천과 경험을 통해 덕을 닦아가는 이들에게 있어 모든 면에서의 절제, 즉 온갖 종류의 악에서 멀어지는 것이 바로 덕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모든 선의 근원이자 베푸시는 분이신 하느님 다음으로, 순결의 원인은 매일 일정하고 정해진 분량만큼 과식을 삼가는 데 있다.

16. 사탄은 하나님께 대항하여, 하나님의 뜻, 즉 계명이 이루어지지 않기를 바라며, 우리를 통해 그 뜻의 성취를 방해하려 함으로써 하나님과 싸우고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거룩한 뜻, 즉 앞서 말한 대로 신성하고 생명을 주는 계명들을 이행하기를 원하시므로, 우리를 통해 그분의 뜻대로 악한 자의 해로운 의도를 무너뜨리십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도록 유혹함으로써 하나님께 대항하려는 원수의 미친 욕망은,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의 연약함을 통해 무너뜨리십니다. 그리고 보십시오, 과연 그렇지 않습니까? – 모든 신성한 계명은 영혼의 삼중성을 위한 법칙을 정하며, 그 명령을 통해 영혼을 건전하게 만듭니다. 그 계명을 엄격히 따르는 자에게는 이 삼분된 영혼이 진정으로 건전해집니다. 그러나 마귀는 바로 이 영혼의 삼분법에 맞서 밤낮으로 전쟁을 벌이고 있다. 사탄이 삼분법에 대항하여 전쟁을 벌인다면, 그가 그리스도의 계명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리스도는 계명을 통해 영혼의 삼분법, 즉 영혼의 감정적, 욕망적, 사고적 힘을 법으로 규율하시기 때문이다. – 보라, 형제를 헛되이 노하는 자는 심판에 처해질 것이라는 경고(마태복음 5:22)와 그 뒤를 잇는 그분의 계명들, 이것이 바로 분노하는 부분을 치유하는 것이다. 이 계명과 그와 함께 주어진 다른 계명들을 원수는 시기, 원한, 질투와 같은 생각들을 통해 내면에서 타락시키려 꾀한다. 이 대적(우리와 하나님의)은 분노하는 부분의 지배자가 바로 사고의 힘임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앞서 말한 대로 의심, 시기, 다툼, 말다툼, 교활함, 허영심과 같은 생각들을 통해 먼저 그곳에 화살을 쏘아, 정신적 힘이 본래 가진 권세를 내려놓도록 유혹하고, 통제권을 분노 그 자체에게 넘겨주어 아무런 통제 없이 방치되도록 만든다. 그러면 분노는 자신의 지배자를 떨쳐내고, 아무런 제지 없이 입을 통해 말로 쏟아내며, 이전에 마음에 담겨 있었고, 마음이 게을러진 틈을 타 적대적인 생각들에 의해 그곳에 간직되어 있던 모든 것을 드러내 버린다. 그때 마음은 하나님의 영이나 신성한 생각이 아니라 (억누를 수 없는) 악의로 가득 차게 된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입은 마음의 넘침에서 말하기 때문이다(눅 6:45). 이처럼 악한 자가 사람을 유혹하여, 이전에 마음속 깊이 숨겨 두었던 것을 말로 토해내게 할 때, 이 (적의) 포로가 형제에게 “미치광이”나 “바보”라고만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가장 모욕적인 말을 퍼부으며, 나아가 살인까지 저지르게 된다. – 이것이 바로 교활한 자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헛되이 분노하지 말라’는 계명에 대해 사용하는 계략입니다. – 하지만 분노가 솟아오르는 즉시, 기도와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주의를 통해 마음속에서 (그것을 부추기는 생각들)을 쫓아냈더라면, 짜증 나는 말까지 이르지 않았을 것이고, 그 뒤를 따르는 일들까지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17. 그리고 신성한 주님의 계명이 권고하는 부분은 무엇인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는 이미 마음속으로 그와 간음한 것이다”(마태복음 5:24). – 그렇다면 악인은 이러한 계명이 주어졌음을 보고, 이 계명에 대항하여 마음속에 어떤 그물을 엮어 놓는가? 욕망을 자극할 수 있는 대상들이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그는 내면으로 파고들어 그곳에서 앞서 말한 계명에 대항하여 음탕한 싸움을 일으킨다. – 그는 음탕한 이미지를 마음속에 그려내고 각인시킴으로써 이를 행합니다. 때로는 정욕을 자극하는 말들이 들리기도 하고, 마음속의 싸움에 빠진 자들이 아는 다른 많은 일들도 일어납니다.

18. 마침내 어떤 계명이 정신적 힘에 대한 지침이 되는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어떤 맹세도 하지 말라. 너희 말은 ‘예’면 ‘예’, ‘아니오’면 ‘아니오’라 하라” (마태복음 5:34). 또한: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자는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눅 14,33). 그리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태 7,13). 이것이 바로 정신적 부분에 대한 계명인가? – 우리의 대적은 이 정신적 힘마저 마치 용맹한 장군처럼 자기 편으로 만들고자 하여, 먼저 탐식과 게으름에 대한 생각을 통해 그 힘의 건전한 판단력을 빼앗는다; 이렇게 하여 다른 힘들에 대한 본래의 지배권을 박탈하고, 마치 취한 지도자를 비웃듯 조롱한 뒤, 성급함과 정욕을 자신의 조력자로 삼아 자신의 속삭임과 욕망을 따르게 만듭니다. 이러한 힘들, 즉 정욕적이고 성급한 힘들은 정신적 힘으로 남겨진 채, 우리의 오감을 모두 복종하는 하인처럼 명백한 죄를 짓는 도구로 돌리기 시작한다. 그 결과 어떤 죄와 타락이 일어나는지 보라! 마음이 내면에서 감각들을 제어하고 묶어 두지 않을 때, 눈은 호기심에 사방으로 흩어지고, 귀는 헛된 말을 듣는 것을 좋아하며, 후각은 나약해지고, 입은 자제력을 잃으며, 손은 만져서는 안 될 것을 만지려고 뻗어 나간다. 그 결과 진리 대신 거짓이, 지혜 대신 무지함이, 정절 대신 음행이, 용기 대신 겁쟁이 기질이 뒤따르게 된다. 그리고 이 네 가지 주요 미덕, 즉 진리, 지혜, 정절, 용기는 그 본질이, 만일 그것들이 영혼 안에서 건전하고 강력하다면 영혼의 세 부분을 잘 다스리며, 잘 다스려지는 영혼의 세 부분은 감각들을 모든 부적절한 것들로부터 억제한다. 그때 이성은 고요함 속에 머물며, 다른 힘들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다스려지고 그들에게 순종할 때, 마음속의 싸움에서 손쉽게 우위를 차지한다. 그러나 부주의로 인해 다른 힘들이 혼란에 빠지게 내버려 둔다면, 그때 사탄의 유혹에 굴복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게 된다. 계명을 어기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회개나, 미래 세상에서의 고통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항상 깨어 있는 것은 매우 선한 일이다. 이는 이를 통해 본성에 따라 마땅히 서야 할 자리에 굳건히 서게 됨으로써, 마음이 신성한 계명의 진정한 수호자가 되기 때문이다.

19. (죄를 사랑하는) 영혼은 마치 성벽으로 둘러싸인 것처럼 악의 영들에게 포위되어 어둠의 얽매임에 사로잡히게 되는데, – 이 영혼을 둘러싼 어둠 때문에 마땅히 해야 할 대로 기도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 어둠에 은밀히(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혹은 스스로도 모르게) 얽매여 내면의 눈은 눈이 멀어 있다. 그러나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하느님께 기도하며 의지하기 시작하고, 힘껏 기도에 전념할 때, 그때서야 비로소 기도의 힘으로 어둠에서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둠에서 벗어날 방법이 전혀 없다. 이때 그녀는 마음속에서 또 다른 투쟁, 또 다른 은밀한 대립, 또 다른 생각 속의 전쟁이 있음을 깨닫게 되는데, 이는 악의 영들에 의해 자극되는 것이며, 성경에서도 “만약 지배하는 영이 너를 덮친다면, 네 자리를 떠나지 말라”(전도서 10,4)고 증언하고 있다. 마음의 자리는 덕과 절제 속에서 굳건히 서 있는 것이다. – 덕스러운 삶과 죄 많은 삶 모두에 굳건히 서는 것이 있다. 성경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악인의 의자에 앉지 아니하는 사람은 복이 있도다”(시 1:1)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사도는 “진리로 허리를 동여매라”(엡 6:14) 가르친다.

20. 우리가 그리스도를 굳건히, 아주 굳건히 붙잡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온갖 방법으로 그분을 우리 영혼에서 쫓아내려고 시도하는 자들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 스스로도 예수님께서 “영혼의 자리”에 있는 “생각의 무리(요한복음 5:13)에게로 치우치시는 것을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영적 수고 없이는 그분을 붙잡아 둘 수 없습니다. 우리가 겸손하게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육신으로 사신 그분의 발자취를 깊이 음미하기 위해 힘쓰십시오. 그분의 수난을 마음속 깊이 새겨, 그분과 함께 경쟁하듯 모든 슬픔을 인내로 견뎌내도록 합시다. 그분이 우리를 향한 말로 다 할 수 없는 자비로운 관용을 맛보아, 이 달콤한 맛을 영혼으로 음미함으로써 주님께서 얼마나 선하신지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모든 것 위에, 혹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분이 말씀하시는 모든 것을 의심 없이 믿고, 매일 우리를 향한 그분의 섭리를 기다리며, 무슨 일이 일어나든, 무엇을 마주하든, 감사와 사랑, 그리고 기쁜 만족으로 받아들이며, 신성한 지혜의 법칙에 따라 만물을 다스리시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법을 배우자. 이 모든 것을 행할 때, 우리는 하나님과 멀지 않게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경건함은 끝이 없는 완전함이라는 점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모시고 영적으로 온전한 이들 중 한 사람이 말한 바와 같습니다.

21. 자신의 생애를 잘 활용하며, 끊임없이 죽음에 대한 생각과 기억에 몰두하고, 이를 통해 지혜롭게 마음을 정욕에서 벗어나게 하는 사람은; 그 사람은 대개 죽음에 대한 기억 없이 삶을 보내며, 오직 이성의 작용만으로 마음을 정화할 수 있다고 희망하고, 항상 슬프고 비통한 생각을 간직하지 않는 사람보다, 악마의 유혹이 곳곳에서 엿보이는 것을 더 예리하게 간파한다. 그러한 사람은 자신의 재치로 모든 해로운 정욕을 손에 쥐고 있다고 자만하지만, 그중 가장 나쁜 하나의 정욕에 어떻게 얽매이는지 알지 못한 채, 하나님 없이(무언가에서 성공하기를 바라는 자처럼) 교만에 빠진다. 그는 오만함으로 인해 이성을 잃지 않도록 깊이 정신을 차려야 한다. 사도 바울이 말했듯이(고린도전서 8:1), 여기저기서 지식을 쌓는 영혼들은 대개 자신보다 지식이 부족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 앞에서 거만해지는데, 그 이유는 내 생각에 그들 안에 덕을 세우는 사랑의 불꽃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죽음을 끊임없이 생각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안목이 더 예리하여, 악마들의 유혹을 알아차리고 적절히 쫓아내며 짓밟는다.

22. 하나님, 즉 예수님을 향한 달콤한 기억은, 마음속의 분노와 구원을 주는 슬픔을 동반하여, 대개 모든 유혹적인 생각, 온갖 속삭임, 말, 환상, 어두운 상상, 그리고 한마디로 말해, 우리의 영혼을 삼키려 하는 파멸의 원수가 무장하고 뻔뻔스럽게 나서는 모든 것을 무너뜨립니다. 예수님께 부르짖으면, 그분은 모든 것을 쉽게 태워버리십니다. 그리스도 예수 외에는 우리에게 구원이 없기 때문입니다. 구세주께서도 “나 없이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요한복음 15:5)고 말씀하셨습니다.

23. 그러므로 매 순간, 매 찰나마다 우리는 온갖 경계로써 우리 마음을 지키며, 영혼의 거울을 흐릿하게 하는 생각들로부터 보호해야 합니다. 그 거울에는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지혜와 능력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이 새겨지고 빛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하늘나라를 찾읍시다. 그러면 우리가 마음의 눈을 깨끗이 씻어낸다면, 우리 내면에서 씨앗과 진주, 누룩, 그리고 그 밖의 모든 것을 신비롭게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를 위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누가복음 17:21)고 말씀하셨으니, 이는 마음속에 거하시는 신성을 뜻하는 것입니다.

24. 빛날 때까지의 절제는 양심을 정화한다. 이렇게 정화된 양심은 마치 덮여 있던 베일이 걷히자마자 갑자기 빛이 비추는 것처럼, 내면의 온갖 어둠을 몰아낸다. 그리고 어둠이 쫓겨나면, 양심은 끊임없이 지속되는 진정한 명료함 속에서, 잊혀졌거나 의식하지 못해 숨겨져 있던 것들을 다시 드러낸다. 동시에, 양심은 바로 그 명료함을 통해, 이성으로 인식되는 적들과의 보이지 않는 경쟁과 마음속의 전쟁을 가르치며, – 이 일대일 대결에서 창을 던지는 법, 선한 생각의 화살을 (적들에게) 능숙하게 쏘는 법을 가르치며, 그들의 화살이 마음을 맞히지 못하게 막고, 마치 화살처럼 마음을 그리스도께로 피하게 하여, 해로운 어둠 대신 소망의 빛을 찾게 한다. 이 빛을 맛본 사람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한다. 이 빛을 갈망하는 마음은 그 빛으로 양육되지만 결코 포만감을 얻지 못하며, 더 많이 맛볼수록 더 갈망하게 된다. 이 빛은 마치 태양이 눈을 끌어당기듯 마음을 자신에게로 이끄는, 그 자체로는 설명할 수 없는 빛이지만, 말로가 아니라 그 영향을 받아들이는 자, 더 정확히 말해 그 빛에 찔리는 자의 경험을 통해서만 해석될 수 있게 되는 빛은, 비록 내 마음이 여전히 지금 논의되고 있는 주제에 대한 대화를 즐기고 싶어 할지라도, 내게 침묵하라고 명한다.

25. “평화를 누리고 거룩함을 지키라. 이 두 가지를 갖추지 않은 자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하리라”(히브리서 12:14), 이는 사랑과 순결을 얻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바로 그것들이 평화이자 거룩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노는 오직 우리를 마음속으로 적대시하며 맹렬히 헐뜯는 악마들에 대해서만 무장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안에서 매 순간 벌어지는 이 싸움을 어떻게 치러야 하는지 들어보고, 그렇게 행하라: 절제와 기도를 결합하라. 그러면 절제가 기도를 강화하고, 기도가 절제를 강화할 것이다. 맑은 정신은 끊임없이 내면의 모든 것을 살피며, 원수들이 그곳으로 들어오려 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자신의 힘으로 그들의 진입을 막는 동시에, 주 예수 그리스도께 도움을 청하여 그분께서 이 교활한 전사들을 쫓아내시도록 한다. 이때 주의력은 대립을 통해 그 입구를 막아내고, 부르심을 받은 예수님께서는 악마들과 그들의 망상을 쫓아내신다.

26. 지극한 주의력으로 네 마음을 지키라. (적의) 생각을 발견하는 즉시, 그 생각에 반박하되, 동시에 주 그리스도를 불러 보복해 주시도록 서둘러야 한다. 가장 달콤하신 예수님께서는 네가 말을 하는 동안에 이미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변호해 주리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는, 네 기도에 따라 이 모든 원수들이 제압된 후에도, 다시 부지런히 마음에 주의를 기울여라. 보라, 다시 (생각의) 파도들이,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이, 하나씩 차례로 너를 향해 밀려올 것이니, 그로 인해 마치 영혼이 심연에 빠지듯 가라앉아 망할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도 제자의 요청에 따라, 마치 하나님께서 악한 바람(생각들)을 꾸짖으시어 그것들이 잠잠해지듯이, 다시 한 번 개입하실 것이다. 너는 원수의 공격으로부터 한 시간이나 한 순간이라도 자유를 얻었을 때, 너를 구원하신 분을 찬양하고, 죽음에 대한 묵상에 깊이 잠겨라.

27. 온 마음을 다해 영적인 감정으로 우리의 길을 걸어가자. 매일 함께 어우러지는 주의와 기도는 마치 엘리야의 불타는 병거와 같은 것을 이루어, 그 안에 참여하는 이를 하늘의 높이로 들어 올린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가? 절제 속에 안주하거나 그 속에 안주하려고 노력하는 이에게, 깨끗한 마음은 마음속의 하늘이 되어, 그만의 태양과 달, 별들을 지니게 되며, 신비로운 환상과 승천(마음의 승화)을 통해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을 품는 그릇이 된다. 신성한 미덕을 사랑하는 자는 매 순간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온 힘을 다해 말을 행동으로 옮기도록 노력해야 한다. 보통 영혼을 해치는 다섯 가지 감각을 어느 정도 억지로 억제하는 자는, 온갖 방법으로 마음에 가장 가벼운 영적 수련과 투쟁을 만들어 낸다. 그리하여 모든 외적인 것들(영혼에 해로운 유혹과 인상)을 미리 막아내고, 그것들로부터 내면에서 생겨나는 생각들과는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인 수단과 기술을 따라 싸우라: 기도의 수고를 통해 감각적 쾌락에 대한 충동을 억제하고, 음식과 음료에 절제하며, 미리 마음의 싸움을 가볍게 할 수 있도록 몸을 충분히 쇠약하게 하라. 이 모든 것으로 네 자신에게 유익을 줄 것이지, 다른 이에게 주는 것이 아니다. 죽음에 대한 묵상으로 네 영혼을 괴롭히고,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기억으로 흩어진 네 마음을 모으라. 특히 밤에는 마음이 보통 더 맑고 밝으므로, 하나님과 모든 신성한 것을 분명히 관조하라.

28. 육체적 수행의 수고도 외면하지 말자. 땅에서 밀이 싹트듯, 그 수고로부터 영적인 기쁨과 선에 대한 체험이 자라나기 때문이다. 거짓된 추론으로 양심의 요구를 외면하지 말자. 양심은 우리에게 구원과 실천을 일깨워 주며, 특히 마음이 생생하고 활동적이며 섬세한 명료함으로 정화될 때, 우리의 의무가 무엇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항상 말해 주기 때문이다. 이 경우 양심은 그 순수함으로 인해 대개 (마주하는 모든 것에 대해 – 정당하고 단호한) 분명한 판단을 내리며, 이는 어떠한 망설임도 배제한다. 이 모든 것을 위해 거짓된 추론으로 인해 길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성은 내면에서 우리에게 하나님께 기뻐하시는 삶을 선포하며, 영혼이 죄로 인해 이성을 더럽혔을 때 엄하게 책망하고, 과오를 바로잡는 방법을 보여주며, 타락한 마음에 회개하도록 일깨우고, 달콤한 확신으로 치유의 길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29. 장작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눈에 거슬리곤 하지만, 나중에는 빛을 비추어 주어, 이전에 불쾌감을 주었던 이들에게 기쁨을 선사한다. 또한 지적인 눈을 끊임없이 긴장 상태로 유지하는 주의력은 머리를 지치게 하고 무겁게 만든다. 그러나 기도 속에서 부르짖는 예수님께서는 오셔서 마음을 밝혀 주신다. 그분에 대한 기억은 (우리 내면의) 빛과 함께 가장 높은 축복(즉, 주님 자신)을 선사한다.

30. 원수는 우리의 마음을 뒤흔드는 데 능숙해져서, 우리가 그와 함께 흙을 먹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자로서 뱃속을 의지하며 살도록 유혹하려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와 그 사이를 원수로 삼으리라”고 말씀하셨다(창 3:15).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간구해야 하며, 이를 통해 매일 마귀의 불타는 화살에 상처받지 않고 지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내가 덮어 주리라”고 (시편 기자가 전하는 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며, “내 이름을 아는 자를”(시 90:14). 또한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그의 구원이 가까이 있도다”(시 84:10).

31. 복된 사도, 선택받은 그릇,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하시는 분은, 우리 내면에서 일어나는 보이지 않는 영적 전쟁에 대해 많은 경험을 바탕으로 에베소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이 세상의 어둠의 세력들, 하늘 아래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하는 것입니다” (엡 6:12). 사도 베드로도 이렇게 말합니다: ““깨어 있고 경계하라. 우리의 원수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으니, 너희는 굳건한 믿음으로 그에게 대항하라” (베드로전서 5: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의 말씀을 듣는 마음가짐의 차이에 대해 말씀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에 마귀가 와서 마음에서 말씀을 빼앗아 가니” – 그는 악한 망각을 불러일으켜 “믿지 않는 자들이 구원을 받지 못하게” 하는 도둑질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눅 8,12). – 그리고 사도(바울)는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율법을 기뻐하나, 내 지체들 속에는 내 마음의 법과 대적하며 나를 사로잡는 다른 법이 있음을 보노라”(롬 7:22, 23). – 그들은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며, 우리에게 숨겨진 진리를 알려 주기 위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32. 이성은 자책과 겸손을 잃게 되면, 대개 자만하며 자신이 많은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곤 한다.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자 한다면, “형제들아, 나는 스스로 이미 도달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 그 사람이 지혜롭게 행했던 것처럼 지혜롭게 행하자: “오직 한 가지,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해 뻗어가며, 그리스도의 높은 소명에 이르는 영광을 향해 부지런히 달려가노라” (빌 3,13-14). 또다시: ““나는 헛되이 달리지 아니하며, 헛되이 싸우지 아니하노라. 오직 내 육체를 죽이고 복종시키노니,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설교하면서 나 자신은 실격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전서 9, 26-27). 보라, 이것이야말로 겸손이며, 동시에 덕을 향한 열망이 아니겠는가? 보라, 성 바오로, 그토록 위대하고 한 인물의 겸손이 어떠한지! (그러나 그가 또 무엇을 말하는지 들어보라). –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함이며, 그들 중에서도 내가 첫 번째이다”라고 말씀하신다 (1티모테오 1,15). – 게다가 우리 본성이 이토록 나쁘다면, 우리가 어떻게 겸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흙보다 더 나쁜 것이 무엇이겠는가? 또한 우리는 하느님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바로 그 목적을 위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 더 쉬워지도록, 절제의 수련에 우리 자신을 단련해야 한다.

33. 악한 생각을 품는 사람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서 죄로부터 깨끗할 수 없다. 마음속에서 악한 생각을 뿌리 뽑지 않는 자들은, 그에 상응하는 악한 행위로 그 생각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사람이 음란한 시선을 보내는 이유는, 먼저 내면의 눈이 음란해지고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또한 부끄러운 말을 듣고자 하는 욕망의 원인은, 우리를 파멸로 이끌기 위해 내면에서 더러운 악령들이 속삭이는 모든 것을 영혼의 귀로 기꺼이 듣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내면과 외면을 모두 정화해야 하며, 우리 각자는 자신의 감정을 지키고 매일 정욕적인 유혹과 죄악으로부터 자신을 정화해야 한다. 예전 우리가 무지했던 시절, 세상의 헛된 생각 속에서 맴돌며 온 마음과 모든 감각으로 죄의 유혹에 빠져 있었듯이, 이제 하나님께로 돌아와 삶을 새롭게 한 우리는 온 마음과 모든 감각으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진리 및 뜻에 힘써야 합니다.

34. 먼저 “접근”(προσβολή – 접근, 던져진 물체가 목표물을 맞히는 행위)이 일어나고, 그다음 “결합”(συνδυασμόζ – 결합, 주의가 대상에 사로잡혀 영혼이 오직 그 대상과 결합하고 그에 몰두하게 되는 상태)이 이어지며; 이어서 “합성”(충돌하여 주의를 사로잡은 대상이 욕망을 불러일으켰고, 영혼이 이에 동의함으로써 결합이 이루어짐); 그 뒤를 이어 “포로화”(대상이 자신을 갈망하며 노예처럼 묶인 영혼을 사로잡아 행동으로 이끄는 것); 마지막으로 “정욕”(πάθοζ – 영혼의 병)은, 빈번한 반복(동일한 욕망의 충족)과 습관(그 욕망을 충족시키는 행위에 대한)을 통해 영혼에 뿌리내려(성격의 한 특징이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안에서 벌어지는 전투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는 무대이다! 성부들도 이와 같이 정의하고 있다.

35. 그리고 – 부사로서, ‘이’는 순수한 생각, 즉 마음속에 막 생겨나 정신에 떠오른 어떤 사물의 형상이라고 한다; ‘결합’은 떠오른 것(대상이나 형상)과의 열정적이거나 냉정한 대화이며; ‘합성’은 마음이 정신의 눈으로 보이는 대상에 향하며 즐거움을 느끼는 경향을 말한다; ‘포로됨’이란 강압적이고 무의식적으로 마음이 (포로로) 끌려가 그곳에 갇혀, 마음을 사로잡은 대상과 마치 하나의 생명(sunousia)처럼 융합되는 것을 말하며, 이러한 융합으로 인해 우리의 선한 상태(평온)가 사라진다; 한편, ‘정욕’은 일반적으로 (어떤 대상에 대한) 장기적인 집착을 통해 영혼에 스며든다고 한다. 이 모든 (행동이나 상태) 중에서 “첫 번째”는 죄가 없으며, “두 번째”는 전적으로 그렇지 않다; “세 번째”는 수련자의 상태에 따라(아마도 수련과 대항의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 “투쟁”은 (견뎌낼 때) 면류관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무너질 때) 고통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36. 사로잡힘은 기도 중에는 다르게 나타나고, 기도 중이 아닐 때는 또 다르게 나타난다. 정욕은 의심할 여지 없이 그에 상응하는(상쇄되는) 회개나, 혹은 장래의 고통을 피할 수 없다. 첫 번째, 즉 집착에 맞서거나 무감정하게 대하는 자는 단 한 번에 모든 수치스러운 것을 잘라내 버린다. – 이것이 바로 수도사와 비수도사를 향한 악한 악마들의 공격이며, 앞서 말한 대로 이 싸움에는 승리와 패배가 공존한다. 승리하는 자에게는 면류관이 기다리고, 넘어지고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는 고통이 기다린다. 그러니 우리가 마음속으로 그들과 맞서 싸워, 그들의 악한 유혹이 눈에 보이는 죄악된 행위로 이어지지 않도록 합시다. 마음속에서 하늘나라를 얻기 위해 열망하며, 마음에서 온갖 죄를 잘라내 봅시다. 이러한 아름다운 실천을 통해 우리는 마음의 순결함과 하나님 앞에서 끊임없이 뉘우치는 마음을 지키게 될 것입니다.

37. 많은 수도사들은 악마들로부터 마음이 겪는 유혹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마음을 돌보지 않고 행실만 바르게 하려고 애쓰며, 단순하고 순진한 삶을 살아갑니다. 내 생각에, 그들은 마음의 순결을 맛보지 못했기 때문에 내적 정욕의 어둠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성 바오로가 말하는 싸움을 알지 못하는 이들은, 아마도 경험적으로 선함으로 단련되지 않았을 것이며, 오직 행위로 저지르는 죄만을 실족으로 여기고, 감각적인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마음속의 승리와 승리들은 고려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은밀하여 오직 유일한 수고자이신 하나님과 수고하는 이의 양심만이 알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다음 말씀은 바로 그러한 이들을 향한 것으로 보인다. “평안, 평안이라 하나 평안이 없도다”(예레미야 13:10). 순진함으로 인해 그러한 상태에 있는 형제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며, 가능한 한 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즉, 눈에 보이는 악한 행위뿐만 아니라 마음속에서 작용하는 악에서도 멀어지도록 말이다. 반면, 영혼의 눈(즉, 영혼의 시각)을 깨끗이 하려는 신성한 소망을 가진 이들에게는, 또 다른 그리스도의 사역이 있고, 또 다른 성사가 있다.

38. 죽음에 대한 깊은 묵상은 참으로 많은 미덕을 그 안에 담고 있다. 그것은 통곡의 어머니이자, 모든 면에서의 절제를 이끄는 인도자이며, 지옥을 상기시키는 자이자, 기도와 눈물의 어머니이며, 마음의 수호자이자, 자기 성찰과 분별력의 원천입니다. 이러한 것들의 결실로 생겨나는 깊은 경외심과 정욕적인 생각으로부터의 마음의 정화는, 주님의 수많은 계명을 포용합니다. 그런 마음속에서는 극심한 고뇌 속에서 견뎌내는 투쟁과 위업이 드러난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의 많은 투사들의 온전한 염원이다.

39. 뜻밖의 어떤 사건이나 재앙은 대개 마음의 집중을 흐트러뜨리고, 구원을 주는 선한 마음가짐에서 정신을 뺏어, 더 나은 것을 향한 소망을 꺾어버리며, 죄악된 다툼과 분쟁으로 이끌곤 한다. 우리에게 해로운 이러한 재앙의 원인은, (어느 쪽에서 닥칠지 모를 유혹이 매 순간 우리를 덮칠 준비가 되어 있음에도) 우리가 유혹에 대해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40. 매 순간 우리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 어떤 슬픔도, 우리가 그 불가피함을 깨닫고 항상 마음에 새긴다면, 우리를 흔들거나 슬프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신성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약함과 괴로움과 궁핍을 기뻐하노라”(고린도후서 12:10). 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기를 원하는 자들은 모두 박해를 받을 것이라”(디모데후서 3:12)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께 영원토록 영광이 있기를. 아멘.

 

일리아 장로 겸 성가대장

 

그에 대한 간략한 소개

이 일리아 장로, 일명 에크딕은 성 그레고리우스 신학자의 신학적 저술을 해설한 일리아 크리트인인지, 아니면 다른 인물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앞선 장들을 보면, 그가 외적인 지혜는 물론, 특히 우리의 영적 지혜에 있어서도 지극히 지혜로운 인물이었음이 분명하며, 그의 말은 비록 때로는 다소 난해하긴 하지만, 표현력이 풍부하고 강력합니다. 그러므로 현명한 일리아의 장들처럼, 이 글 모음집을 ‘영적 정원’이라 부르는 것이 과장된 표현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이곳은 꽃만 피는 곡식뿐만 아니라 과일 나무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또한 영적 위로를 찾는 이들을 이 낙원으로 초대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맙시다. 그들의 모든 영적 감각—시각, 후각, 미각—이 이곳에서 풍성한 만족을 얻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말입니다(요약 – 그레치 도브로토의 서문에서). 엘리아 장로의 장 제목인 ‘안폴로기온’(꽃의 말, 또는 꽃 모음)은 이 글들이 성부들의 저서를 읽으면서 집필되었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키는데, 하나님의 장로는 그들의 사상을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하고 이를 간직하고자 기록하면서, 때로는 성부들의 말로, 때로는 자신의 말로 표현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이를 읽는 이들은 그 안에서 때로는 이 교부, 때로는 저 교부의 반영을 볼 수 있었고, 심지어 서방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 내용을 그들 중 누군가에게 귀속시키기도 했다. 그곳, 즉 성 막시모의 저작을 수록한 바티칸 사본에서는 이 글들이 그 성부에게 귀속되어 있으며, 최근 성부들의 저작을 편집한 미그네(Migne)는 이를 성 막시모의 저작 목록에, 그의 700개 장에 달하는 관상적·실천적 저작들 뒤에 다음과 같은 제목으로 수록했다. 바티칸의 성 막시모 저작집(Patrologia graecae t. XС)에서 발췌한 다른 장들. 우리는 『그리스도교 선행집』의 편집자들이 이 장들을 누구의 작품으로 분류해야 할지 파악하는 것이 더 편리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 장들을 일리아 장로의 저작으로 인정하여 그들의 견해를 따릅니다. 참고로, 『그리스도교 선행집』에서는 이 장들이 두 부분(109–140)으로 나뉘어 있음을 밝힙니다. 미그네(Migne)의 판본에서는 장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번호 체계를 따릅니다. 우리는 이 점에 있어 후자의 방식을 따릅니다. 독자는 우리 번역에서 장 번호가 연속되지 않고 일부가 생략되어 있음을 알아차릴 것입니다. 이러한 생략은 해당 장들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생략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다만 그러한 경우는 매우 적습니다.

 

일리아, 최연소 장로이자 에크디크가 정성껏 엮은 꽃모음집

1. 하나님을 바르게 믿는 그리스도인은 무심코 안일함에 빠져서는 안 되며, 항상 유혹을 예상하고 이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 그래야 유혹이 닥쳤을 때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고, 시편에서 선지자와 함께 말하듯이, 슬픔의 무거운 짐을 감사히 견뎌낼 수 있다: “주여, 나를 시험하시고 나를 검증하소서”(시 25:2), 또한 다른 시편에서 선지자가 “주의 징계가 나를 타락시킬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끝까지 나를 바로잡으시리라”(시 17:36) 말한 사실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2. 선의 시작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며, 끝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모든 선의 시작은 활동적인 이성과 의미 있는 행동이다. 그러므로 이성 없는 행동은 선이 아니며, 행동 없는 이성은 성공할 수 없다(발전할 수 없다).

3. 몸의 행위는 금식과 깨어 있는 것이며, 입의 행위는 시편을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기도는 시편을 부르는 것보다 낫고, 침묵은 말보다 더 귀중하다. 손의 행위는 그 손으로 불평 없이 행하는 것이며, 발의 행위는 첫 번째 신호에 따라 즉시 이행하는 것이다. 영혼의 행위는 순수함을 동반한 절제이며, 절제롭게 작용하는 순수함이다. 그리고 지성의 행위는 관상 속의 기도이며, 기도 속의 하나님 관상이다.

4. 모든 미덕을 이끄는 것은 자비와 진리이며, 이 둘의 산물은 겸손이고, 성부들에 따르면 겸손에서 비롯되는 분별력이다. 이 분별력이 없이는 (앞서 언급된 미덕들 중) 그 어떤 것도 자신의 완성을 볼 수(또는 달성할 수) 없다.

5. 행위는 이성의 멍에를 경멸하므로, 마치 어미 소처럼 이리저리 헛되이 방황하는 것과 같다. 반면, 이성은 행위의 정직한 히톤을 벗어던지므로, 비록 온갖 수단을 동원해 그럴듯하게 보이려 애쓰더라도, 품위 있게 보이지 않는다.

6. 용기 있는 영혼은 마치 두 개의 타오르는 등불—행동하는 등불과 관조하는 등불—을 들고 있는 아내와 같아서, 평생 동안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다한다. 쾌락에 젖어 나약해진 영혼에게는 이와 정반대의 일이 일어난다.

7. 영혼이 죄로부터 완전히 해방되기 위해서는 자발적인 고난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그 외에도 자발적이지 않은 고난의 달궈진 용광로 속에서 다시 단련되어야 한다.

8. 영혼이 죄로부터 완전히 정화되기 위해 칼처럼 불과 물, 즉 자발적 및 비자발적 수고와 고난을 통과하지 않는다면, 불쾌한 우발적 사건을 마주했을 때 상처받지 않고 남아 있을 수 없다.

9. 자발적인 유혹에는 건강, 부, 명예라는 세 가지 주요 원인이 있는 것처럼, 비자발적인 유혹에도 손실, 질병, 비방이라는 세 가지 원인이 있다. 이 모든 것은 어떤 이에게는 건설을, 또 다른 이에게는 파멸을 가져온다.

10. 진정으로 덕이 있는 사람은 내면에 선함이 뿌리내려 있지만, 허영심 많은 사람에게는 그것이 단지 생각 속에만 있을 뿐이다. 반면, 덕을 시기하는 사람은 겉으로만 선함을 드러내고, 자기만족에 빠진 쾌락주의자는 마음 깊은 곳에 악을 품고 있다.

11. 악을 미워하는 사람이 선한 태도를 잃는 일은 드물고 의도적인 것도 아니다. 그러나 여전히 악의 원인을 품고 있는 사람에게는 이런 일이 자주, 그리고 자발적으로 일어난다.

12. 회개할 마음이 없는 자들은 더 자주 죄를 짓는다. 그러나 마음에서 우러나지 않게 죄를 짓는 자들에게는 회개가 더 쉽게 이루어지며, 게다가 회개가 필요한 경우도 드물다.

13. 감성과 양심이 발화되는 말에 함께 하기를 바라나니, “그들이 모인 곳에는 내가 그 가운데 있겠다”(마태복음 18,20)고 말씀하신 신성한 말씀이, 말하거나 행하는 것의 무례함이나 난폭함 때문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도록 하라.

14. 행실로 자신의 영혼을 더럽히지 않는다고 해서, 그가 말로 그 영혼을 더럽히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또한 말로 그 영혼을 깨끗하게 지키는 사람이라 해도, 그가 생각으로 그 영혼을 더럽히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죄를 짓는 자는 세 가지 방식(즉, 행실, 말, 생각)으로 죄를 짓기 때문이다.

15. 네가 여전히 죄의 모습을 즐거움으로 떠올리고 있는 한, 덕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다. 네가 먼저 덕을 맛보고자 갈망하며, 그러한 죄의 모습으로부터 네 얼굴을 돌릴 때 비로소 죄가 너에게 혐오스럽게 보일 것이다.

16. 악령들은 처음에는 행위가 아니라 생각으로 영혼을 공격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들이 주로 노리는 것은 행위이다. 행위의 원인은 청각과 시각이며, 생각의 원인은 습관과 악령들이다.

17. 영혼의 죄를 짓는 부분은 세 가지로 나뉘어 행동, 말, 생각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죄를 짓지 않는 선은 여섯 가지로 나뉜다. 왜냐하면 이를 위해서는 오감을 실수 없이 지키고, 입에서 나오는 말을 조심해야 하기 때문이다. “말에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라, 온 몸을 잘 다스릴 수 있다”고 성 야고보가 말합니다(야고보서 3:2). 이는 오감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18. 영혼의 비언어적 부분은 여섯 부분으로 나뉜다: 다섯 가지 감각과 말하는 말씀으로, 이 말씀은 무정할 때 다른 모든 부분을 깨우며 그들과 분리되지 않고 하나 되어 퍼지지만, 정에 사로잡힐 때는 그 모든 것을 스스로 더럽힌다.

19. 육체는 금식과 깨어 있음 없이는 정화될 수 없고, 영혼은 자비와 진리 없이는 정화될 수 없으며, 또한 마음은 하나님에 대한 관상과 교제(즉, 기도) 없이는 정화될 수 없다. 이 둘 중에서 이 마지막 것이 가장 중요하다.

20. 앞서 말한 미덕들의 고리 안에서 맴돌며, 영혼은 인내라는 요새를 세워 유혹의 화살이 닿지 못하게 한다.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구원하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눅 21,19). 만약 영혼이 다른 처지에 있다면, 성벽으로 둘러싸이지 않은 성처럼, 멀리서 들리는 쾅쾅거리는 소리와 굉음만으로도 두려움의 충격에 심하게 흔들리게 된다.

21. 말에 있어서 현명한 자들이 모두 영적인 일에도 현명한 것은 아니지만, 영적인 일에 현명한 자들은 모두 외적인 일에도 현명하다. 왜냐하면 이 외적인 것(몸, 감각, 처지)은 비록 모든 사람을 세금으로 묶어두지만(– 모든 사람에게서 세금을 걷는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똑같이 세금을 내는 것은 아니며, 어떤 이들은 이를 아예 거부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22. 본성상 나눌 수 없는 이성은, 그러나 여러 부분으로 나뉜다. 한 사람에게는 더 큰 몫이 주어지고 다른 사람에게는 더 작은 몫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활동적인 미덕이 증식하고 확장되어, 본질적인 미덕들의 도움을 받아 각 미덕에 있어 가능한 모든 선을 이루어낼 때까지 말이다. 왜냐하면 활동적인 삶의 부족에 비례하여 이성도 더 적은 분량을 얻게 되는 것이 항상 그렇기 때문이다.

23. 현명한 침묵의 동반자는 시간과 절제이며, 그의 식사는 진리이다. 그 진리 덕분에 거짓의 아버지는 (모든 것에서 멀어진) 방랑하는 영혼에게 다가와도, 평소 찾던 것 중 아무것도 그곳에서 발견하지 못한다.

24. 진정으로 자비로운 사람은 마음대로 남는 것을 나눠주는 자가 아니라, 필요한 것을 기꺼이 빼앗는 자들에게 내어주는 자이다.

25. 어떤 이들은 물질적 부를 통해 자선을 꾸준히 베풀며 비물질적인 것을 얻지만, 다른 이들은 비물질적인 것을 통해 물질적인 것에서 멀어지는데, 이는 고갈되지 않는 선을 느끼며(혹은 맛보며) 머무르기 때문이다.

26. 누구에게나 선한 것으로 풍요로워지는 것은 기쁜 일이지만,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부를 얻은 자가 그 부를 더 오래 누리지 못하게 된다면 슬픈 일이다.

27. 네 뜻에 반하여 너를 수술한 자(즉, 책망으로 네 안에 숨어 있던 악을 드러낸 자)를 원망하지 말고, 내쫓긴 더러움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책망하고, 너에 대해 그러한 섭리를 베푸신 하나님을 찬양하라.

28. 네 (영적) 병의 어려움을 바라보며 낙심하지 말고, 그 병에 가장 효과적인 치료법인 고된 수행을 통해, 네 영혼의 건강을 진심으로 염려한다면 그 병에서 스스로를 멀리하라.

29. 자신의 영적 병을 더 깊이 느낄수록, 그 병을 지적해 준 이에게 더욱 감사하라. 이는 그가 너에게 완전한 정화를 이룰 수 있게 한 장본인이 되었기 때문이며, 그 정화 없이는 마음이 기도의 깨끗한 영역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30. 책망을 받을 때는, 침묵해야 하거나, 그 책망이 중상모략일 경우 온유하게 변호해야 한다. 이는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함이 아니라, 어쩌면 무지 때문에 유혹에 빠진 책망자의 오류를 바로잡기 위함이다.

31. 지혜로운 자가 자신의 결점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겸손한 자도 자신의 미덕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전자의 경우 자신을 책망하는 모든 무지가 숨겨져 있고, 후자의 경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32. 질책은 영혼에 활력을 불어넣지만, 칭찬은 영혼을 나태하게 하여 선을 행하는 데 게으르게 만든다.

33. 부의 버팀목은 금이고, 덕의 버팀목은 겸손함이다. 금이 늘지 않는 사람은 겉보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아 보일지라도 가난한 법이다. 마찬가지로 겸손함이 없으면 덕을 갖춘 사람도 결실을 맺지 못한다.

34. 금이 없으면 상인이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상인이 될 수 없는 것처럼, 겸손함이 없으면 아무리 자신의 분별력을 의지하더라도 수고하는 자는 미덕의 좋은 열매를 볼 수 없다.

35. 모든 계명을 지키는 데 힘써야 하듯이, 혼인 잔치에 참석한 자들 가운데서 소외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사람은 겸손과 지혜 속에 점점 더 깊이 빠져들어야 한다.

36. 단순함과 절제를 조화시키고, 겸손한 지혜와 진리를 결합하라. 그러면 너는 진리의 동석자가 될 것이며, 진리를 따르는 모든 다른 미덕은 마치 잔치에 초대받듯이 기꺼이 그 곁에 모이게 될 것이다.

37. 선한 품성은 미덕의 아름다움을 증언하고, 신체의 단정함은 영혼의 평화를 나타낸다.

38. 첫 번째 미덕은 어떤 죄도 짓지 않는 것이며, 두 번째는 자신의 죄를 드러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 죄를 뻔뻔하게 여기지 말고, 오히려 겸손해져야 하며, 책망받을 때 스스로를 책망하고 기꺼이 참회를 받아들여야 한다. 만약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것은 가치가 없다.

39. 자발적인 고난(자해 행위)이 있을 때, 비방과 손실, 질병과 같은 비자발적인 고난도 순종하며 받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후자의 고난을 순종하며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불만을 품고 원망하는 자는 마치 항상 소금 없이 빵을 먹고 싶어 하는 사람과 같다.

40. 주인이면서도 종의 모습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이는, 신성한 말씀으로 이웃의 (영혼이라는) 더러워진 옷을 씻어 주고, 찢어진 곳은 헝겊을 덧대어 수선해 주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를 행하는 자는 마치 허영심 때문인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며, 그가 그렇게 행하는 이유와 그에 대한 상과 더불어, 그에게 주어진 권위의 존엄성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41. “주님께서 네 들어감과 나감을 지키시리라”(시 120:8) – 이는 음식과 말에 대한 절제를 통해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들어오는 음식과 나가는 말, 즉 말을 삼가는 자는 눈의 정욕을 피하고 무분별한 분노를 다스리기 때문인데, 수련하는 자는 무엇보다도 이것들이 터져 나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를 통해 활동은 힘을 얻고, 관조는 확고해진다.

42.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음식의 섭취에 대해서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만, 말의 발화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는다. 이러한 사람들은 전도서(전 11, 10)에 따르면, 마음에서 분노를, 육체에서 정욕을 뿌리 뽑는 법을 알지 못한다. 그래야만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성령으로 인해 마음이 깨끗하게 만들어진다.

43. 네 배가 음식의 부족으로 타들어가고, 네 마음이 혀를 절제함으로 괴로워하더라도, 네 힘—즉 욕망과 성급함—은 언제나 선을 위해 네게 봉사할 것이다.

44. 수행자는 몸을 언제, 어떤 음식으로 적처럼 대해야 할지, 또 언제 지친 친구처럼 위로하고 보충해 주어야 할지 알아야 한다. 실수로 적일 때 우호적인 음식을, 친구일 때 적대적인 음식을 제공하지 않도록, 그리고 이 둘로 인해 그를 자극하여 유혹의 순간에 싸우는 적들의 편에 서게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45. 음식을 섭취할 때, 목을 즐겁게 하는 것보다 양식을 더 중시하면, 그때 눈물의 은총이 그를 찾아와 그토록 강력한 힘으로 그를 위로하기 시작하여, 그는 이 눈물의 비할 데 없는 달콤함으로 온전히 채워져 다른 어떤 달콤함도 잊게 된다.

46. 자신의 길을 넓히는 자에게는 눈물이 마르지만, 좁은 길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눈물이 솟아난다.

47. 죄인도 의인도 슬픔 없이 사는 법은 없다. 그러나 전자는 아직 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을 슬퍼하고, 후자는 아직 모든 선을 온전히 얻지 못한 것을 슬퍼한다.

48. 기도와 침묵은 우리가 스스로 다스릴 수 있는 미덕에 속하지만, 금식과 기도는 우리가 완전히 다스릴 수 없는 미덕에 속한다. 이는 그것들이 육체의 체질에도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자신에게 가장 실천 가능하고 유익한 것을 선택해야 한다.

49. 기도의 집은 인내이다. 인내로 인해 기도가 지탱되기 때문이다. 기도의 양식은 겸손이다. 겸손으로 인해 기도가 자라나기 때문이다.

50. 사소한 일에 얽매이지 말라. 그러면 큰 일에도 노예가 되지 않을 것이다. 더 큰 악이 더 작은 악보다 먼저 생겨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51. 자비와 진리가 다스리는 사람 안에는 모든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이 깃들어 있다. 자비는 자비 없이는 누구도 심판하지 않으며, 진리는 진리에 어긋나게 누구에게도 편애하지 않기 때문이다.

52. 절제를 단순함으로 녹여낸 자는 저곳의 복락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53. 너를 괴롭히는 정욕들을 미리 그 근원이 되는 땅을 경작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면, 결코 끊어낼 수 없다.

54. 어떤 이들은 오직 몸만을 정화하려 하고, 다른 이들은 영혼까지 정화하려 한다. 왜냐하면 어떤 이들은 죄악된 행위로부터만 절제할 힘을 얻었고, 다른 이들은 정욕으로부터도 절제할 힘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욕망 자체로부터도 절제할 힘을 얻은 이들은 극히 드물다.

55. 죄에 대한 끌림이 생각보다 더 강한 사람은, 비록 아직 죄를 짓지는 않았더라도, 정욕에 사로잡힌 자이다. 죄의 행위(에너지)가 생각보다 약하지만 내면에서 정욕에 사로잡힌 사람은, 쾌락에 사로잡힌 자이다. 이쪽과 저쪽 모두에 자유롭게, 혹은 더 정확히 말해 노예처럼 매여 있는 사람은, 편향된 자이다; 이러한 다양한 죄악적인 움직임과 상태를 알지 못하는 자(그것을 경험하지 않는 자)야말로 무정할 것이다.

56. 정욕은 금식과 기도로, 육욕은 깨어 있음과 침묵으로, 편중은 침묵과 주의력으로 영혼에서 쫓겨난다. 무정욕은 하나님의 기억으로 확립된다.

57. 무정함의 입술에서는 마치 꿀벌집처럼 영생의 말씀이 흘러나온다. 과연 누가 그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대고, 그 젖꼭지 사이에 머물며, 그 옷의 달콤한 향기에 흠뻑 젖을 수 있겠는가? – 즉, 감각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진 그 어떤 향기보다도 더 향기로운 미덕의 열매를 만끽하는 것(아가 4, 10. 11)을 말하는가?!

58. 모든 영혼은 보이는 것에서 벗어날 것이나, 죄의 몸에서 벗어나는 이는 이 세상 삶의 달콤함을 만끽한 이들 중에서도 많지 않다.

59. 살아 있는 자들 중 육체적으로는 모두 죽은 자들이 되지만, 죄에 대하여 죽은 자들은 오직 온 마음을 다해 죄를 미워한 자들뿐이다.

60. 이성적인 영혼은 감각적 빛과 사색적 빛이 접해 있는 곳에 위치하여, 하나는 육체적인 것을 보고 행할 수 있게 해 주고, 다른 하나는 영적인 것을 행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나 처음부터 형성된 습관으로 인해 그 안에서 사색적 빛은 흐려지고 감각적 빛은 더욱 선명해졌기 때문에, 기도 중에 온전히 사색적 빛과 하나가 되지 않는다면, 영혼은 신성한 것들에 대한 시야를 온전히 펼칠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어둠과 빛 사이의 중간 지점에 머물게 되는데, (감각적인) 어둠 속에서는 습관과 성향에 따라 맴돌고, (사상적인) 빛 속에서는 단지 공상에만 빠져 있게 된다.

61. 기도가 태양 속의 광선처럼 마음과 함께 하기를 바란다. 기도가 없으면 감각적인 염려들이 마치 물기 없는 구름처럼 주위를 맴돌며, 마음의 본래적인 밝음을 빼앗아 버린다.

62. 정욕에 사로잡힌 마음은 먼저 감각적인 것에 대한 쾌락 추구적 집착을 버리지 않는 한, 좁은 기도의 문으로 들어갈 수 없으며, 오직 그(집착)의 그림자 속에서 맴돌며 헛되이 고통받을 뿐이다.

63. 마음이 감각적인 것에 대한 모든 과도한 집착을 버리지 않는다면, 쉽게 슬픔을 초월할 수 없으며, 자신의 위치를 깨달을 수도 없다.

64. 눈물로 뒷받침되는 기도는 영혼에게 적대적인 모든 생각을 밖으로 내뱉게 하지만, 헛소리로 인해 더욱 심해지는 마음의 방황이 그것들을 다시 되돌려 놓는다. 헛소리를 내쫓은 자는 동시에 모든 것을 파괴하는 악인, 즉 건방짐(시선과 말, 행동에서의 자제력 부족)도 함께 내쫓는다.

65. 금식은 그 명백함으로 인해 낮을 상징하고, 기도는 그 모호함과 은밀함으로 인해 밤을 상징한다. 누구든지 이 둘을 마땅히 실천하며, 각각을 서로 조화롭게 결합한다면, 그는 “병과 슬픔과 탄식이 물러날”(이사야 54:11) 그 목적지에 도달할 것이다.

66. 영적인 행위는 그에 상응하는 육체적인 행위 없이도 이루어지고 지속될 수 있다. 그리고 물질적인 행위(즉, 육체적인 것)보다 더 나은, 비물질적인(즉, 영적인) 행위를 선택한 자는 복이 있다. 이를 가진 자는, 타인에게는 숨겨져 있으나 하나님께는 분명한 기도의 삶을 살며, 외적인 행위의 부재마저 이를 통해 채워 나간다.

67. 사도는 우리에게 믿음으로 인내하고, 소망으로 기뻐하며, 기도에 힘쓰라고 권면합니다. 그래야 우리 안에 기쁨의 선한 열매가 맺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인내하지 못하는 자는 믿음도 없고, 기뻐하지 않는 자는 소망도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는 기쁨의 원인인 기도를 저버리고 그 안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롬 12:12; 골 4:2; 히 12:1).

68. 옛날에 마음이 자신의 영역에서 떨어져 나와 그 영역의 찬란한 광채를 잊어버렸던 것처럼, 이제 이곳의 모든 것을 잊고 다시 기도를 통해 그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69. 아이에게 있어 어머니의 마른 젖가슴이 무엇인지, 그것은 마음에게 위로가 되지 않는 기도와 같다. 그러나 기도가 다르게 작용할 때(즉, 마음을 위로로 채워줄 때), 그때 마음은 기쁨에 취해 어머니의 품에서 잠드는 아이와 같아진다.

70. 음식과 옷 외에는 모든 물질적인 것을 버리지 않은 사람은 기도와 교감할 수 없다(딤전 6:8). 온전한 마음으로 기도하기를 원한다면, 다른 모든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

71. 모든 사람이 기도에서 똑같은 목적을 갖는 것은 아니며, 어떤 이들은 한 가지 목적을, 다른 이들은 또 다른 목적을 가진다. 어떤 이는 가능하다면 자신의 마음이 항상 기도와 함께 하기를, 그리고 기도 안에서 점점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를 기도하고, 또 다른 이는 기도 중에 생각에 방해받지 않는 법을 익히기를 기도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이는 선함 속에 머물기를, 혹은 악에 휩쓸리지 않기를 기도한다.

72. 기도에서 누구도 겸손하지 않은 채 떠나지 않는다면—모든 사람은 기도할 때 겸손함으로 마음을 찢기 마련이니까—겉으로 교만한 오만함을 드러내는 사람은 분명히 겸손함으로 기도하지 않는 것이다.

73. 기도 중에, 무자비한 재판관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정의를 베풀게 한 과부를 바라본다면, 기도로 구하는 은혜가 늦게 이루어진다 해도 “실망하지 않을”(루카 18,3) 것이다.

74. 내면에서는 헛된 생각에, 밖에서는 헛된 대화에 얽매여 있다면 기도가 너와 함께하지 않을 것이나, 기도를 위해 자기 안에서 많은 것을 잘라내는 사람에게는 기도가 곧 돌아오는 것이 보인다.

75. 기도의 말씀이 영혼의 품속으로 들어오지 않는다면, 눈물은 영혼의 뺨을 씻어주지 못할 것이다.

76. 천국으로 들어가는 열쇠는 기도이다. 기도를 마땅히 지키는 자는 친구들에게 약속된 복을 보게 된다. 오직 현재만을 보는 자는 아직 기도에 대한 담대함을 얻지 못한 자이다.

77. 기도 중에 마음이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서 “주께서 나의 멍에를 찢어 주셨으니, 주께 찬양의 제물을 드리리이다”(시 115:7)라고 말할 수는 없다; 만약 그가 더 나은 것을 갈망함으로써 (육체의 속박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두려움)과 나태함, 과도한 수면과 과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그것들로부터 타락하게 될 것이다.

78. 기도 중에 생각이 이리저리 맴도는 자는 첫 번째 휘장 밖(성막 뜰 안)에 서 있는 자이며, 이 휘장 너머 성막 안(‘성소’라 불리는 앞부분)에는 산만하지 않은 기도로 기도하는 자가 있다; 지성소에는 오직 자연적인 생각과 움직임이 평온해진 후, 모든 피조물을 초월하신 그분과 하나 되어 그분으로부터 필요한 깨달음을 얻는 자만이 들어갈 수 있다.

79. 영혼이 모든 외적인 것에서 벗어나 기도와 하나가 될 때, 마치 어떤 불꽃이 그 영혼을 둘러싸고, 온 몸을 마치 불에 휩싸인 철처럼 만들어 버린다. 그때 영혼은 여전히 그 영혼이지만, 달궈진 철과 같이 모든 외부의 것들로부터 건드릴 수 없는 상태가 된다.

80. 활동적인 삶을 잘 살아가는 이들에게 기도는 때로는 구름처럼 그들을 덮어, 그들을 태우는 생각들을 누그러뜨리고, 때로는 마치 빗방울처럼 그들을 적시며, 그들에게 영적인 관상을 보여준다.

81. 마음이 위를 향하여 나아가더라도, 즉시 그곳으로 쏠리지는 않으며, 세속적인 모든 것을 완전히 경멸하고 신성한 일에 전념한 후에야 비로소 그곳으로 향한다.

82. 네가 육체와 음식, 돈에 대한 온갖 집착에서 마음을 해방시킬 때, 그때 네가 무엇을 하든지 그 모든 것이 네가 하나님께 드리는 순수한 선물로 여겨질 것이다. 그 대가로 네 마음의 눈이 열리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법칙을 분명히 배우게 될 것이며, 그 법칙들은 내뿜는 달콤함으로 인해 네 지혜로운 목구멍에 꿀과 벌집보다 더 달게 느껴질 것이다.

83. 네 마음을 육체와 돈, 그리고 음식에 대한 욕망보다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릴 수는 없다. 오직 의인들의 순수한 땅으로 네 마음을 인도할 때만 가능하다. 그곳에서(혹은 그곳의 영향 아래에서), 죽음과 하나님에 대한 기억이 네 마음에 깊이 스며들어, 세속적인 욕망들이 일으키는 온갖 반란을 그 안에서 소멸시킬 것이다.

84. 죽음에 대한 기억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고, 하느님에 대한 기억보다 더 경이로운 것도 없다. 전자는 구원을 주는 슬픔을 심어주고, 후자는 영적인 기쁨으로 채워준다. 이는 선지자 다윗이 “하나님을 기억하니 기뻐하리라”(시 76:4) 노래했고, 지혜로운 분께서 “네 마지막을 기억하라. 그리하면 영원토록 죄를 짓지 아니하리라”(시르 7:39)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85. 마음이 “하나님의 영광을 분명한 얼굴로” (고린도후서 3:18) 바라보지 못하는 한, 그 때까지 영혼은 자신의 감정 속에서 “나는 주님을 기뻐하리라” (시 103, 34), “그의 구원을 기뻐하리라”(시 19, 6)라고 외칠 수 없다. 왜냐하면 자만심의 장막이 그녀의 마음에 덮여 있어,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슬픔과 결핍 없이는 그 장막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장막이 남아 있는 한, 그녀는 모든 것이 실제로 어떻게 존재하고 일어나는지를 볼 수 없다.

86. 이집트에서 탈출한 후가 아니라, 즉 행위로 죄를 끊어낸 후가 아니며, 바다를 건넌 후가 아니라, 즉 죄에 대한 동조와 경향을 끊어낸 후가 아니라; 오히려 광야에서 머문 후, 즉 온갖 고난과 결핍, 슬픔을 겪은 후에야 이스라엘의 지도자는 약속의 땅, 즉 지적인 통찰력이 강한 무정(無情)을 엿볼 수 있게 된다(신명기 34, 1).

87. 광야를 행진하는 자들, 즉 죄가 활동하지 않는 자들은, 소문만으로도 그 복된 땅의 선함을 알고; 직접 눈으로 보는 자들은, 즉 덕행과 순종의 수고에 머무르는 자들은 소망을 품고 그것을 포용하며; 그곳에 들어갈 자격을 얻은 자들은 온전한 감각으로 그곳의 풍요로움을 마치 꿀과 젖처럼 만끽한다.

88. 육신의 본능적 움직임을 가진 자는 아직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았으며, 육신의 생각과 동정을 품은 자는 아직 그분과 함께 무덤에 묻히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런 자가 어떻게 그분과 함께 일어나 “새 생명으로 행할”(롬 6:4) 있겠는가?

89. 옛적부터 성전에 “타작마당과 맷돌에서 나온 첫 열매”를 바치라는 계명이 있었다(출 22:29).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활동적인 덕의 첫 열매로서 절제와 진리를, 관조적인 덕의 첫 열매로서 사랑과 기도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전자로는 정욕과 분노의 욕망을 잘라내고, 후자로는 헛된 생각과 그로 인해 생겨나는 죄악을 잘라내야 합니다.

90. 실천적 덕의 시작은 절제와 겸손, 진리와 정절이며, 그 끝은 마음의 평화와 몸의 거룩한 순결이다.

91. 진정으로 선한 행위는 단순히 선하게(즉, 선한 마음으로) 선을 행하는 것뿐만 아니라, 마땅히 행해야 할 대로, 즉 행하는 자가 행하는 일에 대해 시간과 정도를 지켜야 함을 요구한다.

92. 관조 없는 행위가 확고할 수 없는 것처럼, 그에 상응하는 행위 없는 관조는 참될 수 없다. 행동은 관조로 스며들어야 하듯이, 관조 또한 행동에 의해 확고해져야 한다. 이는 한편으로는 악을 무력화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선의와 자비로운 의도를 실천함으로써 미덕을 강력하게 드러내기 위함이다.

93. 활동적인 삶의 목적은 정욕을 죽이는 것이며, 관조적인 삶의 목적은 미덕을 뵙는 것이다.

94. 실천적 덕의 길에서 많은 이들이 “달리지만, 오직 한 사람만이 상을 받는다”(고린도전서 9, 24) – 바로 관조를 곁들여 그 끝을 이루고자 노력하는 자이다.

95. 활동적인 사람은 오랫동안 관상 속에 머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관상에 있어 마치 누군가의 집에 손님으로 받아들여진 나그네와 같으나, 곧 그곳을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96. 활동적인 이들은 하나님의 계명의 문을 통해 기도로 들어가고, 관상자들은 미덕의 뜰에 머물며 영적인 찬송과 노래를 부른다. 전자는 멍에에서 해방된 것을 감사하고, 후자는 자신들을 향해 무기로 반항하던 자들을 사로잡은 것을 감사한다.

97. 생각의 배를 저어가는 노 젓는 자로 마음가짐을 여기고, 노로 영혼의 생명력인 자극(에너지)과 욕망, 의지와 선택(결정, 결단력)을 여기라. 활동가는 이 모든 것을 항상 필요로 하지만, 관조자는 항상 그렇지는 않다.

98. 활동가는 감각적 대상들에 대한 수많은 상상이 있기 때문에, 기도할 때 마음에 덮개가 씌워져 있어, 그 대상들에 대한 공감으로 인해 마음을 열 수 없다. 그런 공감이 없는 관조자만이 솔직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부분적으로 볼 수 있다.

99. 이성적인 영혼의 뜰은 감정이요, 성전은 이성이며, 대제사장은 지성이다. 그리하여 뜰에는 시의적절하지 않은 생각에 빠져 있는 지성이 서 있고, 성전에는 시의적절한 추론에 몰두하는 지성이 있으며, 신성한 성소에 들어갈 자격을 얻은 자는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다.

100. 활동적인 영혼의 집에는 수고의 무거움으로 인해 “울음과 애통과 슬픔”(에스겔 2:10)이 머물러 있으나, 관조적인 영혼의 집에서는 지식의 기쁨으로 인해 “기쁨과 고백의 소리”(시편 41:5)가 들린다.

101. 사념의 대상들을 관조하는 것은 천국이다. 영적인 사람은 기도 중에 마치 집으로 들어가듯 그곳에 들어간다. 그러나 활동적인 사람은 그곳에 대하여 마치 들여다보고 싶지만, 그 집의 담장이 자신의 영적 성장보다 높아서 들어갈 수 없는 행인처럼 보인다.

102. 실천가는, 족장 아브라함처럼, “자기 집” 즉 자연법에서, 그리고 “자기 친족” 즉 그와 동등해진 자기만족적인 삶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완전한 도덕적 아름다움으로 단장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오직 그런 방식으로만 그도 인장처럼 육신의 정욕에 대한 할례를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창 17:11; 롬 4:11). 그 정욕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우리 위에 덮여 있는 장막은 우리가 완전한 자유를 누리지 못하게 한다.

103. 활동적인 삶을 위해서는 금식과 깨어 있음이 “허리를 동인 것”이며, 관조적인 삶을 위해서는 침묵과 기도가 “타오르는 등불”이다(눅 12,35).

104. 미성숙한 마음은 열매를 맺는 기도의 포도원에 들어갈 수 없으며, 가난한 자에게 주어지는 “포도 수확 후 남은 찌꺼기”(신명기 24, 21)와 같이, 오직 시편 찬송만을 얻게 된다.

105. 왕과 대화할 자격을 얻은 자 모두가 그분의 식탁에 초대되는 것은 아니듯이, 하나님과의 기도적 대화에 나서는 자들 중에서도 모두가 기도적 관조의 경지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106. 분노를 다스리는 것은 때를 잘 맞춘 침묵이며, 말로 표현되지 않는 욕망에는 절제된 식사가, 그리고 억제할 수 없는 생각에는 한 마디의 기도가 있다.

107. 감각적인 진주를 얻기 위해 깊은 곳으로 내려가려는 자도, 영적인 진주를 얻기 위해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는 자도, 전자는 옷을 벗어 던지지 않고, 후자는 모든 감각적인 것을 버리지 않는다면, 그들이 바라고 찾는 것을 얻지 못할 것이다.

108. 기도 중에 마음속으로 집중하는 정신은 신부와 대화를 나누는 신랑과 같으나, 자기 내면으로 들어가지 않는 자는 마치 혼인 잔치장 밖에 서서 신음하며 “누가 나를 요새로 인도하리요?”(시 59:11)라고 외치는 자와 같다. “누가 나를 성벽 안으로 인도하리요?(시 59:11)라고 외치는 것과 같을까? 아니면 누가 나의 인도자가 되어, 기도할 때 “헛된 일과 거짓된 광란을 바라보지 않게”(시 39:5) 해 줄 것인가?

109. 목구멍에 소금이 없는 음식이 어떤지, 마음에도 회개하는 마음 없이 드리는 기도가 바로 그런 것이다.

110. 아직 기도를 찾고 있는 영혼은 해산 고통에 시달리는 여인과 같고, 기도를 찾은 영혼은 아이를 낳은 여인과 같으며, 출산으로 인해 기쁨으로 가득 찬 여인과 같다(요한복음 16, 21).

111. 옛날 산에 살던 아모리인은 “산 꼭대기로 올라가려 했던 자들”을 쳐부수었다(민수기 14, 44. 45; 신명기 1, 44). 그러나 오늘날에는 악한 망각이, 마음의 순결에 이르기도 전에 순수한 기도의 가장 높은 곳에 오르려 시도하는 자들을 쫓아낸다.

112. 기도는 그 자체로서 초심자들을 굳건하게 하는 양식이 되기도 하고; 어떤 관상과 결합된 기도는 기름처럼 마음을 윤택하게 하며, 형상이 없는(상상 없는) 기도는 향기로운 포도주와 같아서, 이를 끝없이 마시는 자들은 황홀경에 이르게 된다(시 103, 15).

113. 수련하는 자는 자신의 몸을 한 가지 음식으로 제한해야 하며, 마음은 한 마디의 기도로 제한해야 한다. 그러면 정욕에 휩쓸리지 않게 되어, 기도 중에 주님을 향한 황홀함에 휩싸일 수 있을 것이다.

114. 막대기로 개들을 위협하면 개들은 자신을 향해 화를 내지만, 악마들은 순수하게 기도하려고 애쓰는 사람을 향해 화를 낸다.

115. 끊임없는 기도 수련을 통해 기도하는 이의 마음에 시편의 말씀이 새겨지면, 그때 그는 비옥한 땅처럼 스스로 자라나기 시작하여, 때로는 영적 영역에서의 관조의 장미들을, 때로는 물질적 세계의 아름다움과 조화를 깨닫는 백합들을, 때로는 눈에 잘 띄지 않는 다양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통찰의 제비꽃들을 피워낸다.

116. 자기 자신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온전히 기도에 헌신한 영혼은, 피조물들 위로 맴도는 영역에서 아래로 내려오는데, 이는 자신이 원할 때가 아니라, 우리의 모든 것을 척도와 무게로 주관하시는 분께서 기뻐하실 때이다.

117. 전사는 전투가 끝나면 무기를 내려놓지만, 관상자는 마음이 초월하여 주님께로 승천할 때 생각을 내려놓는다.

118. 장군은 전쟁에서 전리품을 얻지 못하면 슬퍼하지만, 활동적인 삶을 사는 이는 기도 중에 영적 관상을 누리지 못할 때 슬퍼한다.

119. 사슴은 짐승에게 상처를 입은 것처럼 물의 샘으로 달려가나니(시 41:2), 기도의 가장 달콤한 화살에 찔린 영혼은 영적인 깨달음을 향해 달려간다.

120. 별들은 해가 뜨면 사라지나, 생각들은 마음이 제 왕국으로 돌아오면 그치나니.

121. 그리고 관조하는 마음도, 본성의 욕구에 이끌려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올 때, “신성한 아름다움보다 더 경이로운 것이 있겠는가? 신성한 위엄에 대한 생각보다 더 기쁜 생각이 어디 있겠는가?”라고 외친 자와 같은 말을 외칠 수 있다. 그리고 어떤 감정이, 모든 악에서 정화된 영혼 속에 하느님께서 불을 지피신 사랑만큼이나 생생하고 억누를 수 없겠는가? 그 영혼은 그때 마음의 충만함으로 “나는 사랑에 찔렸다”고 말하리라(아가 2, 5; 5, 8).

122. “내 마음이 내 안에서 뜨거워지고, 나의 가르침 속에서 불이 타오르리라”(시 38:4)라고 말하는 것은,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하나님을 따라 기도하며 “사람의 날”을 보기를 원치 않았던 자(예레미야 17:16)에게 어울리는 말이다.

123. ‘아가서’의 신부처럼, 모든 악한 것들, 곧 사악한 악령들과 간사한 생각들을 벗어던진 후, 그것들이 그녀를 “다시 헛된 것과 거짓된 광란을 바라보게 하려” 할 때(시 39:5), 활동적인 영혼도 이렇게 말해야 한다: “내 옷을 벗었으니, 어떻게 다시 입을 수 있으리요? 내 발을 씻었으니, 어떻게 다시 더럽힐 수 있으리요?”(아가 5, 3)?

124. 오, 하나님을 사랑하는 영혼아, 네가 담대하게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있다면 얼마나 복된가: “나에게 알려 주소서”, 선한 목자여, “어디서 당신의 양들을 치시는지”, 그리고 “정오에 당신의 어린 양들에게 안식을 주시는 곳이 어디인지”, “그들을 따라가며, 당신의 다른 양 떼들 사이를 헤매지 않도록” (아가 1, 6)?

125. 기도의 말씀을 붙잡고자 애쓰나 이를 이기지 못하는 부지런한 영혼은, 노래 속의 신부처럼 이렇게 외친다. “밤마다 내 침상에서, 내 영혼이 사랑하는 그분을 찾았으나, 찾았으나 찾지 못했고, 그분을 부르나 그분은 내 말을 듣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내가 일어나” 가장 고된 기도로, “성읍과 광장과 곡식 더미를 두루 다니며, 내 영혼이 사랑하는 그분을 찾으리라” (아가 3, 1, 2). 어쩌면 나는 모든 것 안에서,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것 밖에서 그분을 찾을지도 모른다. “그분의 영광이 나타날 때, 나는 만족하리라” (시편 16:15).

126. 만일 자기 집에 왕을 모신 자가, 바로 그 일로 인해 지극히 영광스러워지고, 이로써 그 어떤 기쁨보다도 더 큰 기쁨으로 충만해진다면, 자기의 정화를 통해, 그분의 거짓 없는 약속(요한복음 14:23)에 따라 만왕의 왕을 자기 안에 모신 영혼은 무엇을 느껴야 하겠는가? 그리고 그 영혼은, 그분께 봉사하는 자들의 안식을 방해할 만한 것을 내쫓지 않고 마음속에 남겨두겠는가? 아니면 그분께서 분명히 기뻐하실 만한 것을 자기 안에 받아들이는 데 신경을 쓰지 않겠는가?

127. 아침에 왕 앞에 불려 나갈 것을 기다리는 자가, 왕께 기쁨이 될 말을 생각해 내는 것 외에 무엇을 더 염려하겠는가? – 그리고 하나님에 대하여 이를 지키는 모든 영혼은 저곳의 심판대에 서기에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128. 지금 주님께서 오실 것을 기대하며, 하루 종일—그리고 밤새도록—수고한 일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는 영혼은 복이 있다. 아침이 밝자마자 주님께서 즉시 그에게 나타나실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29.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보시나, 기도할 때 하나님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않는 자들만이 하나님을 봅니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보는 자들은 그분께 응답을 받으며, 응답을 받지 못하는 자들은 그분을 보지 못한다. 보는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믿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그러한 자가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길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시 15:8).

130.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왕국의 복은, 평화로운 눈으로는 보지 못했고, 교만한 귀로는 듣지 못했으며, 성령이 없는 마음에는 떠오르지 않았으니, 그것들은 장차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의인들에게 주어질 복들의 보증이다. 이곳에서 이러한 성령의 열매를 누리지 못하는 자는, 저곳에서도 그 열매를 누릴 자격을 얻을 수 없다.

131. 활동적인 사람들의 생각은 사슴과 같다. 왜냐하면 사슴들이 사냥꾼을 두려워하여 산꼭대기에서 맴돌다가, 그곳에 있는 것을 누리고자 하는 욕망에 따라 계곡으로 내려오듯이, 마찬가지로 이들도, 영적 관상에 항상 머물 수는 없으니, 그럴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며, 또한 세속적인 일들의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 항상 머물 수도 없으니, 그 일들로부터 휴식을 취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인데, 그 일들은 휴식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132. 강이 아래로 흘러내리지 못하도록 그 길을 막는 것만큼이나, 마음이 보이는 사물들에 휩쓸리지 않고 기도에 집중하며 그 본성에 맞는 높은 곳으로 향하도록 그 열망을 멈추는 것도 어렵지 않다. 비록 후자가 그 본성에 맞는 것이지만, 전자는 본성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133. 오랜 포로 생활 끝에 해방된 포로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속도보다, 물질적 집착에서 벗어나 기쁜 발걸음으로 자신에게 어울리는 하늘의 것들로 향하는 마음의 속도가 훨씬 빠르다.

134. 주의 깊게 기도하지 않고 기도 중에 정신이 산만해지는 사람에게는 시편이 낯선 언어로 들리며, 그 자신도 시편에 있어서는 마치 낯선 언어를 쓰는 사람과 같다(고린도전서 14:17). 악령들은 이런 사람을 조롱거리로 삼는다.

135.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힌 자와, 스스로를 세상에 못 박는 자는 같은 것이 아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금식과 기도가 못이 되고, 다른 이들에게는 탐욕을 버림과 자학이 못이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후자가 없다면, 전자의 수고는 무익하다.

136. 아름다움을 좇는 욕망과 명예심에 사로잡힌 자는 순수하게 기도할 수 없다. 이러한 것들에 대한 집착과 헛된 생각들이 그를 마치 밧줄처럼 얽어매고, 기도 중에 그를 땅으로 끌어내리니, 마치 묶인 새가 하늘로 날아오르려 할 때 일어나는 일과 같다.

137. 절제와 사랑과의 교제를 미리 얻지 못한다면, 기도 중에 마음이 평온해질 수 없다. 이 중 첫 번째는 육신이 영혼을 대적하는 원한을 없애기 위해 힘쓰는 것이며, 두 번째는 하나님을 위하여 영혼이 이웃을 대적하는 원한을 없애기 위해 힘쓰는 것이다. 이를 통해 마침내 “모든 지성을 초월하는 평화”(빌 4,7)가 찾아오고, 그렇게 평화를 얻은 자의 마음에 거처를 마련한다(요 14,23).

138.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힘쓰는 이의 의로운 행실에는 선한 일들이 넘쳐나야 한다. 즉, “자신의 부족함에서” 베푸는 자선(막 12,44; 눅 21:4); 그리고 평화를 위해 감내하는 수고, 곧 주님을 위한 고생과 인내를 통해.

139. 어떤 정욕은 육신에서 비롯되고, 어떤 정욕은 영혼에서 비롯된다. 전자를 끊어내면서도 후자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자는, 짐승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높고 견고한 울타리를 쌓아 놓고는, 새들이 마음껏 마음속 포도송이를 쪼아 먹도록 내버려 두는 사람과 같다.

140. 도시의 성문을 닫아두지 않는 것처럼, 감각을 닫아두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감각이 필요한 목적으로 열릴 때, 우리의 적에게 유리한 것이 그 틈을 통해 들어오지 않도록, 또한 분쟁의 원인이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141. 많은 이들이 고의적인 육체적 고행이라는 십자가에 오르지만, 그 못을 받아들이는(자신을 영원히 그 위에 못 박는) 이는 드물다. 많은 이들이 자의적인 순종의 노예가 되지만, 오직 명예심을 버린 자들만이 스스로를 수치스럽게 내어주며 자의적으로 자신을 내맡긴다.

142. 모든 일에 하나님의 경외심이 앞서지 않는 자들의 생각은 목자 없는 양들처럼 혼란에 빠지나, 하나님의 경외심이 그들에게 임하거나 앞서가는 자들의 생각은 양 우리에 있는 양들처럼 온유함과 질서 속에 머무른다.

143.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믿음의 아들이다. 또한 그것은 계명을 지키게 하는 수호자니, 마치 목자가 양들을 비옥한 목초지에 두는 것과 같다. 그 어머니를 얻지 못한 자는 주님의 양 떼에 속한 양으로 인정받지 못할 것이다.

 

 

4

 

성 테오도르 스투디트

 

수도자들에게 전하는 『 』의 가르침

 

서문

『자비』 제4권은 전적으로 성 테오도르 스투디토스가 수도자들에게 준 가르침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처음에는 그 성스러운 아버지의 수도자 교훈을, 당시까지 알려진 그의 짧은 『교리문답』에서만 발췌하여 엮을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작업을 시작하기도 전에, 아토스 산 판텔레이모노프 수도원의 러시아 장로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파트모스 섬에 있는 성 요한 신학자 수도원에서 그의 『대교리서』 3권을 발견하고 이를 필사하게 되었습니다. – 그러자 수도사들에게 성 테오도르의 가르침을 작은 교리문답뿐만 아니라 큰 교리문답에서도 발췌하여 제공하자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이는 실행에 옮겨졌습니다. 이 수도자 교훈들의 양이 워낙 방대하여, 이를 위해 우리 『자비』의 한 권 전체를 할애해야 했으나, 이는 우리 선집에 아무런 손해도 되지 않는다. 이는 수도 생활에 관한 교훈에서 큰 공백, 즉 일상적이고 눈에 보이는 수도 생활의 체계를 어떻게 수도 생활의 주된 목적을 돕는 수단으로 전환할지에 대한 지침의 부족을 메워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전 세 권과 마지막 다섯 번째 권에 실린 모든 금욕적 저작들은 내적 삶을 염두에 두고 있으며, 그 삶은 그 책들에서 다방면으로 다루어졌다. 그러나 수도 생활의 목표와 관련하여 수도원 체제를 고려한 사람은 성 테오도르 스투디트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역시 내적 삶에 대한 가르침을 다루고 있지만, 그것은 단지 지침적인 원리로서일 뿐이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언제나 수도원적인 무엇이며, 특히 그것이 수도 생활의 주된 목표에 어떻게 기여해야 하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에게는 가장 사소한 순종조차도, 마땅한 정신으로 행해진다면 가장 고귀한 순종 못지않게 하나님 앞에서 귀중하게 여겨진다. 그리고 그는 모든 이들의 수고가 천국으로 향하는 한 걸음이며, 순교자의 면류관을 향한 길이라는 확신으로 끊임없이 그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습니다. 수도원 형제들에게 이 책은 그 가치를 헤아릴 수 없는 보물입니다. 그러나 평신도들에게도 여기서 유익한 내용을 적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 테오도르의 가르침 중 죽음, 심판, 지옥, 천국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언급하지 않는 경우는 드뭅니다. 이를 주의 깊게 읽는 이에게는 이러한 사건들의 모습이 마음속에 지울 수 없이 각인될 것이며, 누구에게나 회개를 촉구하는 원동력이자 올바른 삶을 살아가도록 고무하는 힘이 될 것입니다. – 바로 이 때문에, 『그리스의 자비』가 성 테오도로스의 가르침을 전혀 인용하지 않은 반면, 우리는 수도 생활에 종사하는 형제들에게 교훈이 되도록 그의 가르침을 전할 의무를 느꼈습니다. 발췌 번호는 권별로 나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연속적으로 매겨져 있습니다. 어떤 권에서 발췌된 가르침인지, 그리고 해당 권의 번호에 따라 어떤 순서로 분류되었는지는 발췌된 가르침의 목차 끝에 명시되어 있다. 이와 더불어 ‘소교리문답’의 가르침들은 제4권의 명칭 아래에 수록되어 있다. 성 테오도르의 가르침은 항상 하나의 주제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여러 주제를 다루며, 때로는 수도 생활의 당면한 필요에 따라 관련 없는 사안들도 다룬다. 한편, 필사본에 수록된 설교 목차들은 하나의 더 두드러진 주제를 나타내고 있어, 목차만으로는 설교의 내용을 모두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이로 인해 더 상세한 새로운 목차를 작성하게 되었으며, 이를 제시합니다. 아토스 산에 있는 러시아 성 판텔레이몬 수도원 도서관에 소장된 성 테오도르의 설교 필사본과, 러시아에 부분적으로 소장된 필사본들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덧붙이는 것이 불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토스 산의 성 판텔레이몬 수도원에는:

1. 최근에 필사된 『대교리문답』은 간단한 필체로 평범한 종이에 기록되었으며, 3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제1권에는 87편의 설교가, 제2권에는 124편, 제3권에는 60편이 수록되어 있다. 총 271개의 교훈이 수록되어 있다. 이 중에는 현존하지 않는 『 』도 포함되어 있다. 이 사본은 11세기에 양피지에 작성된 원고를 바탕으로 필사된 것이다. 필사 작업은 은퇴한 전 펠루시오스 대주교 암필로키오스가 맡아 수행했다.

2. 11세기 양피지 필사본으로 된 1권 분량의 『소교리문답』. 여기에는 134개의 교훈이 수록되어 있다. 주석

3. 상트페테르부르크 신학 아카데미 도서관에는 11세기 이전, 어쩌면 9세기일 수도 있는 양피지 원고본의 『소교리문답』이 소장되어 있다. 이는 예루살렘 근교에 위치한 성 사바 수도원에서, 그곳의 원장인 고(故) 아키만드리트 요아사프가 기증한 것이다.

4. 모스크바 시노달 도서관에는 10세기, 11세기, 12세기의 성 테오도르 설교집 고대 양피지 필사본 세 점이 소장되어 있다. 첫 번째에는 126편의 설교가, 두 번째에는 123편이, 세 번째에는 76편이 수록되어 있다. 그 목차에서 알 수 있듯이, 존경받는 시노달 성물실장 아르히만드리트 블라디미르 신부님께서 반드시 알려주신 바와 같이, 이 설교들은 소교리문답에 포함된 내용에서 발췌된 것이다. 이 교리문답서들 중에서, 예로부터 수도원에서 교회 용도로 사용하기 위한 설교 선집들이 편찬되어 왔습니다. 현재 성 판텔레이몬 수도원에서 사용 중인 선집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5. 하나는 소교리문답에서만 발췌한 105편의 설교로 구성되어 있다.

6. 다른 하나는 95편의 설교로, ‘대교리문답’ 제1권과 제2권, 그리고 ‘소교리문답’에서 거의 같은 비율로 발췌한 것이다. 다만 이 후자의 경우, 옵틴 수도원에서 번역하여 출판한 판본만이 우리에게 있다. 이 자료들은 그리스인들 사이에서도 인쇄본으로만 존재한다. 서양의 성부들 저작집, 즉 과거의 판본과 최근 미그네(Migne) 수도원장의 판본에는 소교리문답만 수록되어 있으며, 그것도 라틴어 번역본으로만 나와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왜 완전한 교리문답이 아니라 발췌본을 제시하는 것일까요? – 이에 대한 답변은, 우리의 목적이 단순히 책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교훈적인 내용을 전하는 데 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목적에는 발췌문이 더 잘 부합합니다. 그나저나 이 발췌문들은, 쉽게 알 수 있듯이, 때로는 서두에서, 때로는 끝부분에서, 또 때로는 중간에서 약간의 생략이 있을 뿐 거의 완전한 설교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제시된 모든 내용은 성부의 직접적인 말씀입니다. 게다가 일부 설교는 완전히 보존되지 않았고, 어떤 것은 아예 남아 있지 않으며, 또 다른 것들은 내용이 불분명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생략되었다. – 따라서 어딘가에서 온전한 필사본이 발견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때가 되면 한 번에 모든 가르침을 완전한 형태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HTML 버전 편집자 주 (2006)

『도브로톨리비예』 제2~5권의 본문은 현대 러시아어의 표기법과 발음에 가깝게 편집되었습니다. 성경 인용문은 변경 없이 그대로 두었습니다. 필요에 따라 구약과 신약의 신러시아어 판본을 참고하여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мiр”(사회, 때로는 피조된 우주 전체), “мир”(평온, 조화, 화합, 조화) 및 “μνρο”(성스러운 기름 부음을 위한 향기로운 혼합물)라는 단어의 표기 차이도 변경 없이 그대로 두었습니다.

 

성 테오도르 스투디토스의 생애 개요[81]

성 테오도르는 고귀하고 지위 높은 부모(그의 아버지는 왕실 세금 징수를 담당했다)의 아들로, 건전한 기독교적 훈육을 받으며 자랐고, 헬레니즘의 모든 지혜를 익혀 훌륭한 웅변가이자 유능한 철학자였으며, 동시에 교양 있는 신학자이기도 했다. 콘스탄티노스 코프로니모스 치세에 이콘 파괴 운동이 특히 심해지자, 그의 부모는 세속 생활을 버리고 수도자의 삶을 택했으나, 성 테오도르는 콘스탄티노플에 남아 학업을 마쳤다. 코프로니모스 이후에는 그의 아들 레오가 왕위에 올랐는데, 그 역시 이단자였으며, 그 뒤를 이어 그의 아내 이리나가 아들 콘스탄티노스와 함께 통치했다. 이리나는 아들처럼 정통 신앙을 지켰으며, 성 타라시우스 총대주교와 함께 제7차 세계 공의회인 성부들의 공의회를 소집하여, 그 자리에서 성상파괴 이단을 단죄하고 저주했다. 이 공의회에는 플라톤이 참석했는데, 성 테오도르의 외삼촌이 참석했는데, 그는 공의회가 끝난 후 성 테오도르와 수도 생활을 결심한 그의 형제 요셉과 유프티미오스를 데리고 사막으로 가서, 숲으로 둘러싸여 물이 풍부하고 높은 곳에 위치한 아름다운 곳인 사쿠디온에 그들과 함께 정착했다. 그곳은 한적한 곳이었고, 들어가는 길은 오솔길 하나뿐이었다. 그들은 그곳을 마음에 들어 하여, 성 요한 신학자의 이름을 딴 수도원과 성당을 세웠다. 형제들이 그들에게 모여들기 시작했고, 현명한 플라톤의 지도 아래 수도 생활은 순조롭게 이어졌다.

학식과 재능 면에서 누구보다 뛰어났던 성 테오도르는 수도 서원을 한 후, 금식, 철야 기도, 그리고 수도원 내 가장 낮고 힘든 일들 을 통해 육신을 혹사시키며 수행에 있어 누구보다도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나무를 패고, 물을 길어 오며, 정원과 텃밭을 갈고 흙을 고르는 등, 스스로 겸손을 배우며 가장 낮고 힘든 일들을 수행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경건하고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품성을 가꾸는 데 힘썼다. 이를 위해 그는 매일 자신의 스승인 플라톤에게 마음속의 모든 생각과 움직임을 고백하는 것을 규칙으로 삼았으며, 승인받은 것은 더욱 완성하려 애쓰고, 승인받지 못한 것은 바로잡으려 노력했다. 또한 매일 일정 시간을 하나님에 대한 묵상과 깊은 기도에 할애하여, 평온한 마음으로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뵙고, 은밀한 예배를 드렸다. 그는 구약과 신약의 성경, 그리고 성부들의 저서, 특히 성 바실리오 대주교의 저서를 읽는 것을 좋아했으며, 그중에서도 수도 생활의 규칙과 규율을 매우 높이 숭배하고 필수적이라고 여겼기에, 이를 지키지 않는 사람은 수도사로 인정하지 않았다.

복자 플라톤 장로는 성 테오도르의 수행 생활에서 이러한 뛰어난 성취를 보고, 그를 사제 서품시키기로 결정하였으며, 이는 성 타라시우스 총대주교가 그의 추천과 청원에 따라 집행하였다. 성 테오도르는 이처럼 성직 서품을 자신의 의지라기보다는 필요에 의해 받아들였으나, 어떤 점에서도 스스로를 느슨하게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큰 수행에 매진하였으며, 모든 이에게 선한 수도 생활의 본보기가 되어 자신의 수도원과 다른 곳에서도 많은 추종자를 얻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복자 플라톤 장로는 노년의 쇠약함이 점점 심해지는 것을 느끼고, 일에서 물러나 마지막 몇 년을 침묵 속에서 보내고자 했으며, 성 테오도르를 자신의 후계자로 남겼다. 마침 그가 병에 걸리게 되자, 형제들을 불러 자신이 아프다고 말하며, 이 병이 어떻게 끝날지 누가 알겠느냐고 했다. 그래서 후계자를 직접 뽑고 싶다고 말하며, 형제들이 누구를 원하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한목소리로 “테오도르”라고 대답했다. 이에 복자 플라톤은 그에게 권위와 수도원 운영의 모든 책임을 넘겨주고, 자신은 은퇴하여 안식을 취했다.

이 직책을 맡은 첫날부터 성 테오도르는 자신의 수행을 더욱 강화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이에게 수도 생활 규율을 엄격히 준수할 것을 요구했다. 특히 그는 안일함이나 겉으로만 옳은 척하는 태도, 그리고 탐욕에 맞서 싸웠다. 일부 수도자들은 불평했지만, 점차 고쳐져 갔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볼 때, 수도원 내의 수행 정신이 고조되었다.

성 테오도르가 수도원 내에서 일을 아주 잘 처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외부에서는 곧 슬픔과 박해가 시작되었다. 그 첫 번째 계기는 성 테오도로스가 가차 없이 비난했던 젊은 콘스탄티노스 황제의 불법적인 결혼이었다. 그는 자비로운 필라레토스의 딸 마리아와 결혼해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다른 여인을 사랑하게 되어 첫 번째 아내를 버리고 그녀와 결혼했다. 이 결혼식은 타라시우스 총대주교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교회 재무관인 요셉이라는 자가 주례했다. 타라시우스 총대주교는 그 후 온갖 방법을 동원해 이 결혼을 파기하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게다가 황제가 성상파괴 운동을 일으키겠다고 위협하는 등 더 큰 재앙을 우려하여, 더 이상 이 문제로 그를 괴롭히지 않았다.

그러나 복자 테오도르는 침묵하지 않았다. 특히 귀족들과 고위 성직자들도 같은 행동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불법이 법으로 굳어지는 것을 두려워한 성 테오도르는 모든 수도사들에게 편지를 보내, 왕을 교회에서 파문당한 자, 혹은 스스로 파문당한 자로 여겨야 한다고 했다. 왕이 자신의 행실로 인해 파문의 처벌을 자초했기 때문이다. 이 소식이 퍼져 황제에게도 전해졌다. 황제는 처음에 이를 안타까워했다. 그의 새 아내 테오도티아가 어머니 쪽으로 성 테오도르의 친척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첨으로 그와 화해할 수 있기를 바라며, 왕은 간통한 아내에게 성 테오도르에게 더 많은 선물을 보내고, 자신과 가문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청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성 테오도르는 선물은 물론, 선물을 전하러 온 사자들조차 만나주지 않았다. – 왕은 어떻게든 직접 성인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로 마음먹었다. 이를 위해 마치 공무를 보러 가는 척하며 성자의 수도원 앞을 지나가도록 길을 마련했는데, 성 테오도르가 수도원 형제들과 함께 나와 왕을 환영하고 수도원으로 초대해 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인은 그 사실을 알게 되자, 아무리 두드려도 문을 열지 말라고 명령했다. – 그들은 문을 두드리고 또 두드렸으나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돌아갔다. 이에 왕은 성자에게 분노하여 그를 구타하고 유배 보내라고 명령했다. – 사람들이 와서 그를 구타하여 상처로 살점이 찢어지고 땅이 피로 물들 정도가 되자, 그를 솔룬으로 유배 보냈다. 동시에 수도원의 모든 주요 장로들, 총 열한 명을 유배지로 보냈다. 성 테오도르는 모든 것을 온유하게 참아냈으며, 고통받는 형제들에게 편지를 보내 그들을 위로하고, 닥친 슬픔을 순종적으로 견디도록 설득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원하시는 바이며,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은 우리가 겸손히 순종한다면 모두 우리에게 유익합니다.” – 그는 교황에게도 편지를 보냈고, 그로부터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흔들리지 않는 용기를 칭찬하는 위로의 답장을 받았다.

한편 왕은 방탕하게 살았고, 왕국을 다스리는 방식은 더욱 엉망이었다. 그로 인해 왕좌에서 축출되었고 곧 사망했다. 왕국은 다시 그의 어머니 이리나의 손에 넘어갔는데, 그녀는 성상 숭배를 복원했다. 그녀는 즉시 아들이 유배시킨 모든 이들을 원래 자리로 돌려보냈다. 성 테오도르는 흩어졌던 제자들을 다시 모았고, 수도 생활은 다시 질서 정연하게 흘러갔다. 그러나 몇 년 후 또 다른 비극이 닥쳤는데, 그다지 무겁지는 않았지만 골치 아픈 일이었다. 아가리아인들이 차르그라드로 접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손에 의해 재앙을 당하고 싶지 않았던 성 테오도르는 자신의 사쿠디온을 떠나 차르그라드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황후와 성 총대주교는 그에게 스투디온 수도원을 내주었는데, 그곳의 수도사들은 성상파괴론자 코프로니에 의해 쫓겨난 상태였고, 새로운 수도사들은 아직 채워지지 않은 상태였다: 당시 그곳에는 고작 열두 명뿐이었다.

이 수도원을 인수한 성 테오도르는 수리가 필요한 곳을 보수하고, 부족한 부분을 증축한 뒤 형제들을 배치했으며, 수도 생활은 그곳에서 평소와 같은 순서로 이어졌다. 수도자 수는 점점 늘어 곧 천 명에 이르렀다. 모든 것을 직접 살필 수 없었던 성인은 이 일을 다른 가장 훌륭한 장로들과 나누어 맡겼으며, 그들에게 수도원 내 각 부문의 질서를 지키도록 맡기고, 각 부문마다 적절한 규칙을 작성해 주었다. 특히 성인은 형제들이 어떤 용무로든 도시로 나갈 필요가 없도록 각별히 신경을 썼다. 이를 위해 수도원 내에 온갖 종류의 직업을 마련했는데, 재단사, 구두장인, 목수, 유리공, 대장장이, 석공 등이 있었고, 그 밖에도 여러 가지가 더 있었다. 수도사들은 각자의 능력과 성향에 따라 이러한 업무에 배정되었으며, 각 분야마다 별도의 관리자와 감독자가 있었다. 모든 일은 세속 사회와 마찬가지로 이루어졌으나, 세속적인 방식은 아니었다. 곳곳에 경건함과 경외심이 깃들어 있었으니, 손은 일에 힘쓰고 입술에는 언제나 예수님의 기도와 다윗의 시편이 쉼 없이 이어졌다. – 크고 작은 모든 규율 위반은 정해진 참회로 처벌받았다. 이러한 처벌이 필요해지는 일이 드물도록, 존경받는 스승은 항상 자신의 가르침에서 일반적인 기독교 및 수도자 규율을 설명할 때, 수도원 내 생활 질서를 규정하는 규칙들도 함께 다루었다. 이를 통해 마땅히 지켜야 할 일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났고, 모든 이에게 사소한 일이라도 모든 면에서 모범을 보이려는 열정이 불타올랐다. 한편 폭군 니키포르는 이리나 황후를 왕좌에서 몰아냈고,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성당의 규정을 어기고 자신의 권력으로 요시프를 복직시켜 교회를 혼란에 빠뜨리는 것이었다. 요시프는 콘스탄티노스와 테오도티아의 결혼식을 주례했다가 그 이유로 성직에서 파면된 궁정 사제였다. 성 타라시아에 이어 총대주교가 된 니키포르는 지극히 고결한 인물이었기에, 할 수 있는 한 이에 저항했으나, 나중에는 황제의 격노를 목격하고 교회에 닥칠 최악의 사태를 우려하여 요셉을 다시 교회의 교제 안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성 테오도르는 물러서지 않았고, 황제의 부당함을 공개적으로 규탄했다. 이에 분노한 황제는 성 테오도르를 유배지로 보냈다. 그는 테오도르의 형제 요셉과 장로 플라톤, 그리고 스투디오스의 다른 많은 수도사들에게도 똑같이 처우했다.

그 무렵 이웃 야만인들이 프라키아를 침공했고, 왕은 그들을 맞서 싸우러 나가야만 했다. 출정하기 전, 그는 성 테오도르에게 사자를 보내 달래기도 하고 위협하기도 하며 자신과 뜻을 같이하도록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에 이끌린 성 테오도르는 그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왕이시여, 전쟁에 나설 때 회개하고, 당신이 하나님의 교회에서 황폐하게 만든 것들을 바로잡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네가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 이제 분명히 알라. 너는 전쟁에서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너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다.” 그리고 과연 황제는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스타브리키가 왕위를 계승했으나, 그 역시 전쟁 중 입은 부상으로 곧 사망했다. 왕위에는 미하일 키로팔라트라는 이가 선출되었는데, 그는 참으로 왕의 권위에 걸맞은, 선하고 정통한 신자였다. – 그는 성 테오도르와 그와 함께 박해를 받던 모든 이들을 유배지에서 돌아오게 하고, 그들에게 존경을 표하며 교회의 분열을 없애 버렸다. 요셉은 부적절한 구성원으로서 다시 교회에서 제명되었다. 이 무렵, 그 거룩하고 칭송받을 만한 장로 플라톤이 주님께로 돌아가셨고, 스투디온 수도원에서 총대주교 친히 정중히 장례를 치러 주었다. 영적 스승인 플라톤이 세상을 떠난 후, 성 테오도르와 수도자들은 단 2년 동안만 평화와 안정을 누렸다. 그 후 다시 성상파괴 운동의 폭풍이 일어나 온 교회를 뒤흔들었다.

이 소동을 일으킨 이는 새로운 황제 레오 아르메니아인이었다. 그는 동방 지방의 군사 지휘관이었는데, 내전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황제의 자색 옷을 벗고 수도자의 털옷을 입은 신실한 황제 미하일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리하여 반란을 일으킨 폭군에게 왕국을 넘겨주었다. 이 레우는 처음에는 경건하고 온유한 모습을 보였으나, 왕위에 굳건히 자리 잡자 성화를 모독하고 성화 숭배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성 니키포로스 총대주교는 왕 앞에서 성상 숭배의 참된 의미를 밝히며, 이 문제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에 반대함으로써 교회의 평화를 깨뜨리지 말 것을 설득했다. 그러나 왕은 아무 말도 귀담아듣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왕권으로 모든 이가 자신의 헛된 주장에 복종하도록 강요하려 했다. 이를 위해 그는 악명 높은 사제들과 수도사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성 총대주교와 성 테오도르까지 모두 소집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노골적으로 자신의 미신을 드러내며, 성화를 숭배하지 않는 자들을 칭찬하고 숭배하는 자들을 질책했다.

그는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주로 “너는 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지니,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는 제2계명 등을 내세웠다. 또한 다음과 같은 논리를 덧붙이기도 했다. 묘사할 수 없는 분을 어떻게 묘사할 수 있겠으며 , 담을 수 없는 분을 어떻게 팔꿈치 크기의 성화에 담을 수 있겠는가? 물감으로 그려진 것을 어떻게 신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영적 지도자들은 왕에게 정중하게 설명하였다. 구약의 율법 조항들이 기독교인들에게 무조건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며, 성화는 하나님을 묘사할 수 없고 담을 수 없는 존재로서가 아니라, 그분이 성도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시기를 기뻐하신 모습, 특히 성육신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신 모습으로 묘사하는 것이며, 그들이 신이라 부르는 것은 캔버스나 물감이 아니라, 그분께로 마음속으로 올라가며 그분의 형상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러한 생각들을 제시했고, 성 테오도르는 마치 그들의 모든 생각을 하나로 통합하듯, 왕을 깨우치기 위해 장황한 연설을 했다. “오 왕이시여, 성스러운 교회에 이단적인 명령을 내리고, 하늘의 은총과 사도들과 교부들의 가르침으로 짜여진 그 교회의 웅장한 예복을 찢어버리려는 그 악한 생각이 어디서 비롯된 것입니까? – 구약의 율법에서 지혜를 얻으려 하십니까? 현명하게 지혜를 구하십시오.

구약성경에서 형상과 모형을 만들고 숭배하는 것을 금지하는 모든 구절을 살펴보십시오. 그 구절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 어떤 형상이나 모형을 만들었다고 해서 그것을 신으로 숭배하거나 신성한 경배를 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 형상이나 모형을 만들거나 소유하고 숭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교회는 사람의 손으로 만든 형상과 모형을 신격화하지 않고, 단지 존경받을 만한 대상의 형상으로서만 숭배할 뿐입니다. 따라서 제2계명뿐만 아니라 이 계명과 유사한 구약 성경의 수많은 구절들도 성교회의 성화상과는 무관합니다. 여기에는, 예를 들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케루빔의 형상을 만들어 성막의 가장 존경받는 자리인 성소 위에 두라는 것과, 뱀 형상을 만들어 뱀의 독에 물리지 않도록 경건하게 바라보라는 명령, 그리고 이와 유사한 것들이 포함됩니다.

따라서 구약의 율법은 이콘의 제작과 숭배가 이성적으로 이루어질 때 이를 배제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신약의 은혜에서는 무엇을 볼 수 있습니까? 우리 주님이시자 구세주께서 친히 수건에 자신의 형상을 그리셔서 아바르에게 보내셨고, 아바르는 그 수건에 손을 대자 치유를 받았습니다; 성 루카는 팔에 영원하신 아기 예수를 안고 계신 성모 마리아의 초상을 그렸고, 그 그림을 성모님께 바쳤을 때, 성모님께서는 그 그림에 당신의 아들이시며 하느님이신 분의 축복을 내리셨습니다. 그 후로 하느님의 교회에는 성화들이 끊임없이 존재해 왔으며, 그중 많은 것들이 기적을 행하는 것으로 드러났고 지금까지도 그러합니다. 이 모든 것이 성화 제작과 성화 숭배가 인간의 것이 아니라 신성한 기원을 가진 것임을 태양보다 더 밝게 보여주지 않는가? – “보이지 않고 형용할 수 없는 신성을 물감으로 묘사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말하십니까? 우리 또한 신성이 보이지 않고 형용할 수 없음을 믿습니다. 다만 우리는 성화에서 신성을 그 본질의 모습 그대로가 아니라, 성육신이라는 특별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시기를 기뻐하신 모습대로 묘사할 뿐입니다.

구세주 그리스도의 성화를 비난하는 자는 주님의 성육신 그 자체를 비난하는 것이다.” 이 모든 말을 들은 왕은 분노하여 성 테오도로스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네가 얼마나 다툼을 좋아하고 교만하며, 자신보다 더 똑똑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는지 오래전부터 알고 있다. 그리고 지금 네가 나를 마치 평범한 사람 대하듯 이렇게 뻔뻔하게 말하니, 당장 너를 처벌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우리 사려의 옳음이 더 명확히 드러나고 인정될 때까지는 너를 용서하겠노라. 그때도 순종하지 않는다면, 자비를 기대하지 마라.” 그 후, 당시 황제의 전각에 있던 주교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훈계를 구하지 않고, 오히려 군주처럼 신앙을 강제로 억누르려는 자에게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러나 복자 테오도르는 말했다. “이해하십시오, 오 황제여, 그리고 귀를 기울이소서! 거룩한 교회의 신앙 문제를 따지고 바로잡는 것은 당신의 일이 아닙니다. 당신의 임무는 세상의 질서를 지키는 것입니다.

반면 신앙과 거룩한 교회를 마땅한 질서 속에 유지하는 것은 목자들과 교회의 교사들의 임무입니다. 사도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먼저 사도들을, 둘째로 예언자들을, 셋째로 교사들을 세우셨다’고 했습니다(고린도전서 12:28). 보이시나요? – 교사들이지, 왕들이 아닙니다. – 성경의 다른 구절들도 교회 일을 다스리는 것은 목자와 교회 교사들의 몫이지, 왕들의 몫이 아니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왕이 말했습니다. “설마 당신이 나를 교회에서 쫓아내려는 건가?” – 성자가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제가 아닙니다. 신성한 사도들과 성부들의 법이 교회에서 쫓아내는 것입니다. 그 법을 따르며, 우리도 다음과 같이 확언합니다. 설령 하늘에서 천사가 와서 신앙에 반하는 어떤 것을 전한다 해도,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성화를 숭배하는 우리와 함께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머물고자 한다면, 모든 면에서 총대주교와 그와 함께하는 거룩한 공의회를 따르십시오.” 이 말을 듣고 왕은 격노하여 모두를 쫓아내었다. – 그 후, 그리스인 주교를 통해 도시 전역에 황제의 칙령이 선포되기 시작했는데, 그 내용은 누구도 감히 신앙에 대해 해석하거나 논쟁을 벌이지 말고, 모두가 황제의 뜻을 따르라는 것이었다. 이 소식이 성 테오도로스에게도 전해졌다. 그는 이를 전한 이들에게 말했다. “하나님보다 너희 말을 듣는 것이 옳은지, 너희가 판단하라”(사도행전 4,19). 진정한 신앙을 왜곡하려는 시도가 있을 때, 침묵하며 그것을 지키지 않는 것보다 차라리 혀를 잘리는 편이 낫다. – 그 이후로 그는 두려움 없이 모든 사람을 가르치며, 교부들이 전한 올바른 신앙을 굳게 지키도록 설득하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자기에게 불러모았고, 다른 이들에게는 직접 찾아갔으며, 또 다른 이들에게는 편지를 썼다; 종종 총대주교를 찾아가기도 했는데, 이는 공동의 신앙으로 서로 위로를 나누기 위함이었으며, 다가올 슬픔과 박해를 너그럽게 견뎌내도록 그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함이기도 했다.

이러한 박해와 비탄은 곧 닥쳐왔습니다. 총대주교는 폐위되어 차리아그라드에서 추방되었고, 그 밖의 모든 정교회 주교들은 유배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성상들은 모욕을 당하고 땅에 내동댕이쳐져 발로 짓밟히거나 불에 태워졌으며, 도시 전체에 대혼란이 일었습니다. 이 광경을 목격한 성 테오도르 신부는 영혼 깊이 아파하며, 성화상들에 대한 노골적인 모독에 맞서 노골적인 숭배를 보여주기로 결심하고, 다가온 바아이 축일에 수도원 주변을 돌며 성화 행렬을 치르기로 했다. 그 행렬에서 수도사들은 성화상을 들고 높이 치켜들며 행진하는 동안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주님의 지극히 순결하신 형상을 경배하나이다, 자비로우신 분이시여”와 그와 유사한 다른 찬송가들을 불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황제는 그에게 엄중한 경고를 보내, 만약 성화 숭배를 옹호하는 것을 멈추지 않으면 유배와 상처, 그리고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성인은 말과 글로 이를 옹호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기에; 그는 유배형을 선고받고 아폴로니아(아시아의 아폴로니아 또는 비티니아의 아폴로니아)로 보내져 메토파라고 불리는 요새의 감옥에 갇혔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도 사방으로 편지를 보내며, 교회가 지키는 성상 숭배를 엄격히 고수할 것을 설득했다. 그의 편지가 왕에게까지 전해지자, 왕은 즉시 알렉세예프의 아들인 니키타를 보내어 그 성자를 그곳에서 더 멀리 떨어진, 보니타라고 불리는 곳으로 이송하여 감옥에 가두게 하고, 성상 숭배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글을 쓰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도록 명령했다! 사자가 그에게 차르의 뜻을 전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장소 변경은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말하지도, 쓰지도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곳으로 옮겨진 후, 그는 실제로 말하고 글을 썼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왕은 분노하여 다시 그 니키타를 성자에게 보내, 그에게 심한 상처를 입히라고 명령했다.

사자가 이 사실을 성 테오도로스께 전하자, 그는 기쁜 마음으로 스스로 예복을 벗고 자신의 몸을 매질당할 수 있도록 내어주었다. 그러나 니키타는 성자의 육신이 얼마나 지쳐 있는지를 보자, 손을 들어 그를 해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는 성자를 건드리지 않은 채 돌아갔다. 한편 성인은 그곳에 남아, 다시금 두려움 없이 성상에 관한 진리를 전파하며, 자신을 찾아오는 이들과 길게 대화를 나누고, 곳곳에 편지를 썼다. 그는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로마의 총대주교들에게도 편지를 보내, 콘스탄티노플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설명하고, 기도와 행동으로 정교회를 도와달라고 간청했다. 어느 날 아시아 교회의 한 성직자가 그를 찾아왔는데, 그는 성인의 말씀을 듣고 성상파괴 이단을 버리고 정교회로 개종하였으며, 자신의 지역으로 돌아가서는 다른 성직자도 개종시켰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주교는 성자에게 대해 황제에게 고발했고, 황제는 아시아 총독에게 성 테오도르에게 혹독한 채찍질을 가하라고 명령했다. 총독은 부하 한 명을 보내 성자에게 50대의 채찍질을 하도록 했다. 그러나 그 사자 역시 성자의 벌거벗은 몸을 보고는 손을 들기가 부끄러워져, 그에게 절을 한 뒤 왕의 사악한 뜻을 이행하지 못한 채 돌아갔다. 그 사자가 자신을 보낸 이에게 돌아오기도 전에, 성 테오도르에게 왕이 직접 보낸 새로운 사자, 이름은 아나스타시우스인 잔혹하고 무정한 자가 나타났는데, 그는 자신의 손으로 성인을 구타하여 100군데나 상처를 입혔고; 그의 제자 니콜라이에게도 똑같이 행했다. 그리고 그 후 두 사람을 어둡고 비좁은 곳에 가두고, 온갖 궁핍 속에서 그들을 단단히 붙잡아 두라고 명령한 뒤, 자리를 떠났다.

이 잔혹한 명령은 엄격히 집행되었다. 그곳은 어둡고 악취가 나며 습기 차 있었다. 작은 창문으로 한 사람에게도 부족한 작은 빵 조각을 던져주었고, 물 한 잔을 건네주었는데, 때로는 하루 이상 간격으로 주어지는 등 마치 굶겨 죽이려는 듯했다. 상처로 인한 병과 하인들의 거친 대우는 이 비좁은 공간의 고통을 더욱 가중시켰다. 이러한 궁핍 속에서 성 테오도르는 신앙에 힘입어, 자신이 지참한 비축 식량 중에서 오직 주님의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만을 섭취하기로 결심했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제자에게 양보했다.

한참 후, 어떤 왕실 고관이 그곳을 지나가다가 성자와 제자의 처지를 알게 되자,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라고 명령했다. 음식과 음료를 더 많이 주고, 그들을 더 자비롭게 대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그렇게 3년 이상이 지났다. 그때 성 테오도르가 쓴 편지 중 하나가 왕의 손에 들어갔는데, 그 편지에는 왕의 불경함을 규탄하고, 정통 신앙을 굳게 지키며 이를 위해 박해와 고문을 용감하게 견뎌내라고 권면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왕은 분노하여 짐승 같은 성품의 어떤 고관을 보내, 그 성자에게 편지를 보여주게 하고, 그것이 그의 것임을 확인한 뒤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구타하도록 했다. 성자는 그 편지가 자신의 것임을 인정했고, 무자비하게 구타당해 간신히 숨만 쉬는 상태로 내버려졌다. 그의 제자도 마찬가지로 대우받았다. 사악한 성질을 마음껏 발산한 사자는 보낸 이에게 돌아갔고, 진리를 위해 기꺼이 고난을 겪은 두 사람은 서로를 돌보기 시작했다.

성 테오도르는 몸을 움직일 수 없었고, 기진맥진한 채 간신히 숨만 쉬며 누워 있었으며, 음식도 물도 입에 대지 못했다. 제자는 조금 더 체력이 좋았기에, 자신을 잊고 모든 보살핌을 성자에게 쏟았으며, 보리와 어떤 풀을 끓인 국물을 먹이고 마시게 해주었다. 성인이 다소 기운을 차리자, 이번에는 성인이 제자를 돌보았는데, 특히 상처 치료에 힘썼다. 그들은 서로의 상처를 씻어내고, 찢어진 살점을 잘라내며, 고름이 찬 부위를 씻어내고, 할 수 있는 대로 궤양 부위에 연고를 발라주었다. 그들은 90일 동안 그렇게 고초를 겪었고, 아직 완전히 회복되기도 전에 왕으로부터 또 다른 사자가 도착했는데, 그는 잔혹하고 비인간적인 자로, 순교자들을 스미르나로 데려가라는 명령을 받고 온 것이었다. 이 여정은 가혹한 감시와 박탈, 모욕, 궁핍, 그리고 온갖 고된 고통 속에서 이루어졌다.

오직 하느님의 특별한 도우심이 있었기에 순교자들은 지정된 장소까지 걸어갈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사악한 사람이며 미신에 빠진 지도자인 주교의 손에 넘겨졌고, 낮고 비좁고 어두운 오두막에 갇혀 온갖 박탈과 궁핍을 견뎌내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왕으로부터 예전에 무자비했던 아나스타시우스가 도착하여, 성자에게 백 대의 채찍질을 가한 뒤 다시 돌아갔다. 성자는 이 모든 것을 기꺼이 참아내며 하느님께 감사드렸다. 당시 스미르나 지방은 왕의 조카이자 동지인 인물이 다스리고 있었다. 그는 병에 걸려 임종을 앞두고 있었다. 그를 모시던 신실한 시종 중 한 사람이 병을 고치는 은사를 지닌 성 테오도르에 대해 그에게 언급했다. 병자는 기도를 청하며 성자에게 사자를 보냈다. 성자는 그가 정통 신자들에게 저지른 온갖 잔혹한 행적들을 열거하며, 그로 인해 영원한 고통을 피할 수 없을 것임을 지적하고, 비록 생의 마지막 순간이라도 회개할 것을 권했다. 군수는 자신에게 닥칠 운명에 공포를 느끼고 성자에게 용서를 구하며, 치유만 된다면 정교회를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했다. 성 테오도르는 그에게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 마리아의 성화를 보내며, 생의 마지막까지 그 성화를 공경하라고 명했다. 성화를 받은 총독은 즉시 안도감을 느끼고 회복되기 시작했다. 그의 회복이 거의 끝날 무렵, 그는 스미르나 주교이자 이단자인 자에게 현혹되어 다시 예전의 미신으로 돌아갔다. 그 후 환자는 그 주교로부터 축복의 기름을 받았다. 그러나 기름을 바르자마자 예전의 병에 다시 시달리게 되었고, 비참하게 영혼을 내던졌다. 성자는 스미르나에서 1년 반 넘게 고통받았다.

계속 고통받았을 테지만, 악명 높은 왕이 살해당했고, 그 자리를 이어받은 미하일(트라블리우스 또는 발보스)은 신앙에 무관심하여 누구나 원하는 대로 믿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의 통치 아래에서 이전 왕조 시절에 추방되거나 투옥되었던 모든 이들이 자유를 되찾았다. 성 테오도르와 그의 제자들도 석방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성 테오도르는 레오 아르메니아인 치하에서 약 7년 동안 유배 생활을 했으며, 그 이전 콘스탄티누스 치하에서는 부당한 결혼을 고발했다는 이유로 5년 동안 유배 생활을 했다). 그때 추방되었던 그의 제자들이 모두 성자에게 모여들었고, 그는 그들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정을 시작했는데, 가는 곳마다 사랑과 기쁨으로 환영받았다. 온 교회가 그의 귀환을 기뻐했기 때문이다. 칼키돈에 도착하자, 그는 성

니키포로스 총대주교와 만났으며, 둘은 하나의 올바른 신앙을 위해 함께 고난을 겪은 동지로서 서로 위로를 나누었다. 그들은 그와 함께 황제에게 나아가 정통 신앙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했다. 그러나 황제는 “나는 성상에 경배하고 싶지 않으며, 콘스탄티노플에서 그것들이 보이는 것도 원치 않는다. 원하시는 곳에 두시고, 아시는 대로 숭배하라.”라고 말했다. 이에 성 테오도르는 제자들과 함께 크리스켄티우스의 지역으로 건너가 그곳에 정착하여 마침내 평안을 얻기를 바랐다. 그러나 황제의 왕위를 찬탈하려던 토마스라는 자의 반란으로 인해, 그는 반란이 가라앉을 때까지 잠시 차르그라드로 피신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는 이단적인 성상파괴주의로 가득 찬 그 도시에서 영원히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소동이 가라앉자, 그는 크리스켄티우스의 땅이 아니라 아크리토스의 헤로니스로 가서 성 트리폰 성당 근처에 머물렀으며, 그곳에서 제자들에게 둘러싸인 채 수행에 전념하며 생의 마지막을 보냈다. 마침내 그가 태어난 지 67년째 되는 해, 복된 임종의 때가 다가왔다. 이 소식이 퍼지자, 사방에서 온갖 신분과 직책을 가진 사람들, 가까운 곳과 먼 곳의 사람들이 성자에게 몰려들기 시작했다. 모두가 그의 말씀을 듣고 싶어 했고, 성자는 말씀하셨으나, 기진맥진하여 목소리가 너무 약해 가까이 서 있는 사람들조차 간신히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성인의 말씀을 듣지 못한 이들에게도 교훈을 잃지 않도록 속기사를 배치했다. 원하는 사람은 성인의 설교 모음집에서 그 내용을 읽을 수 있다. 그런데 병세가 조금 호전되어 성인은 걸을 수 있게 되었고, 교회에 나가 다음 주 일요일에도 미사를 집전하며 형제들에게 설교를 전하고, 그들과 함께 식사도 나누었다. 또한 그 다음 날인 11월 6일, 성 바오로 고백자의 기념일에 신성한 성찬식을 집전하고 형제들에게 가르침을 전했으며, 같은 날 저녁 기도 시간에도 찬송을 위해 참석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방으로 돌아오자 다시 침상에 누워 병이 재발했습니다. 사흘 동안 병을 앓다가, 다섯째 날 주님께로 떠나 고통 없는 삶으로 들어갔다.

그의 임종 시간이 다가오자, 형제들이 그 곁에 모여 마치 자신의 아버지이자 스승을 잃은 듯 울었습니다. 그들을 바라보시며 그분도 눈물을 조금 흘리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자, 아버지들과 형제들아, 내 삶의 끝 이 다가왔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 잔을 마셔야 합니다. 어떤 이는 일찍, 어떤 이는 늦게 마시겠지만, 누구도 이를 피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우리 조상들이 걸어간 그 길을 따라 떠나가노라. 영생이 있는 곳, 나의 영혼이 사랑하고, 내 마음이 갈망하며, 내가 종이라 자칭했으나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다 이루지는 못한 우리 하나님이자 주님께서 계신 곳으로 떠나가노라. – 사랑하는 형제들과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해 준 내 말씀 안에 머물며, 바른 믿음과 경건한 삶을 지키라. 너희도 아시다시피, 나는 교회에서도, 사적으로도 너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선포해 왔다. 이제 나는 간절히 너희에게 부탁하노니, 이를 마음에 새기고 지키라. 여러분 때문에 제 마음에 슬픔이 짙습니다. 곧 여러분에 대해 증언해야 할 때가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주님 앞에 흠 없이 서도록, 이곳을 떠날 때 신중히 행동하십시오.” 이렇게 말하고 작별 인사를 한 뒤, 그는 제자들에게 촛불을 가져와 켜고 송별 찬송을 부르라고 지시했다. 제자들은 주위를 둘러싸고 서서 “흠 없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시편 118편)라고 노래하기 시작하였고, 차례대로 노래하며 “주님의 의로움을 영원히 잊지 않으리니, 주께서 그것으로 나를 살리셨음이니라”(93절)라고 부를 때, – 성자는 이 말을 남기고 영혼을 주님께 바쳤다(826년).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 영혼을 받아들여 하나님의 보좌로 모셔 갔는데, 이를 환상 속에서 목격한 달마티아의 성 일라리온이 거짓 없이 증언한 바와 같다.

이 날, 11월 11일, 성 미나를 기념하는 날, 그는 자신의 정원에서 홀로 거닐며 시편을 노래하던 중, 기이한 어떤 음성을 듣고 형언할 수 없는 향기를 맡았습니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하고 놀라 하늘을 바라보니, 밝고 기쁜 얼굴을 한 수많은 흰 옷을 입은 수도자들이 노래를 부르며 높은 곳에서 내려와 어떤 존경받는 분을 맞이하는 것을 보았다. 이 광경을 본 복자는 공포에 질려 땅에 엎드렸고, 누군가가 이렇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이것은 스투디오스 수도원의 원장 테오도르의 영혼이다. 성화를 위해 피를 흘리며 고난을 겪다가 방금 세상을 떠난 그가, 지금 엄숙하게 산 위로 올라가고 있으며, 그를 맞이하기 위해 하늘의 세력들이 내려오고 있다.” – 이 환상을 복자 일라리온은 다른 덕망 있는 수도사들에게 전했고, 그들은 이 사건이 일어난 날짜와 시간을 기록해 두었다가, 그 시기를 통해 바로 그때 존경받는 테오도르 스투디우스가 세상을 떠났음을 알게 되었다. 성 테오도르의 서거에는 수많은 기적이 수반되었는데, 이는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뿐만 아니라, 서거 후에도 관과 그의 성유해로부터 적지 않게 일어났다.

 

1. 수도 생활이 얼마나 고귀한가

1. 1) 수도 생활의 봉사가 얼마나 고귀한가. – 2) 하느님께 순종하여 행하는 모든 순종은 비록 매우 단순하더라도 천국으로 이끈다. – 3) 천국으로 이끄는 덕목들의 목록. [1, 2][82]

1.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선한 행실로 그분께 기쁨을 드려 천국의 상속자가 되게 하시려고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셨다. 우리 수도자들에게는 이 세상에 보내신 데 이어, 특히 위대한 은총을 베풀어 주셨는데, 그것은 바로 모든 사람 중에서 우리를 선택하셔서 그분의 면전 앞에 세워 그분의 권능을 섬기게 하신 데 있다. 그러니 이제 각자는 자신이 부름받은 소명에 따라 올바르게 행하고 있는지, 오직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일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염려하지 않는지 꼼꼼히 살펴보아야 한다.

2. 순종을 실천할 때, 우리는 마치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그 명령을 받은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살아 있는 자들에게 힘닿는 대로 행할 것을 요구하신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허영심으로, 또 스스로를 대할 때 마치 위대한 일을 하는 양 자만심으로 스스로를 속이지 않도록 온갖 방법을 다해 피하며 행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수고하는 모든 이에게 각자의 상을 준비해 두셨다. 식당 담당자는 첫 순교자 스데반과 함께 기쁨을 누릴 것이며, 빵 굽는 이는 주님을 위해 정결한 빵이 될 것이며, 채소 관리인은 낙원의 풍성한 열매를 누리며 그곳의 거주민이 될 자격을 얻게 될 것이며; 포도원을 돌보는 자, 목수, 서기관, 문지기 등 그 어떤 직무를 맡은 자라도, 주님을 위한 일로 여긴다면 합당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보시며, 그분께 숨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일에 대해 신성한 방식으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3. “믿음에 굳게 서고, 용기를 내며, 굳건히 서십시오. 여러분 모두 사랑으로 충만하기를 바랍니다”(고린도전서 16:13, 14); 영원히 살기 위해 매일 죽으십시오; 악한 생각은 실제 행위만큼이나 피하십시오; 말이 많음을 많은 죄로, 웃음을 음행으로, 과식과 포만감을 정욕의 노예 상태로 여기라; 생각을 낮추고, 눈을 땅에 두라; 몸과 영혼을 깨끗하게 하라; 선한 소망으로 용기를 내라; 땅의 그 어떤 것에도 매이지 말고, 오직 한 분 하나님을 경외하라. 만약 우리가 이렇게 행동하고, 이렇게 선한 마음을 품는다면, 천사들과 함께 기뻐하며 모든 성도들과 영원토록 즐거워할 것이다.

 

2. 스스로를 높이 여기지 말라

2. 1) 스스로를 높이 여기지 말라. – 2) 모든 형제를 위해 살아라. 마치 몸의 각 지체가 온 몸을 위해 그러하듯이. – 3) 우리의 순종은 무겁지 않으나, 자기 뜻을 버림으로써 순교자의 면류관을 받을 자격이 있다. [1, 3]

4. 하느님께서 부르신 여러분, 세상을 떠나 하느님을 향해 마음의 눈을 고정시킨 것은 지혜로운 일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기쁨이 되는 삶을 살도록 힘쓰십시오. 그리고 그렇게 살면서 “자기를 높이 여기지 말라”(로마서 12,16)는 말씀을 명심하십시오. 영적 미덕이든 육체적 우월함이든, “네가 가진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지 않은 것이 있느냐? 설령 받았다고 해도, 무엇을 자랑하느냐? 마치 받지 않은 것처럼?”(고린도전서 4:7)라고 듣지 않도록 하라. 많은 일을 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는 것이며, 하나님께로부터 위에서 받은 능력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웃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5. 너희는 모두 서로를 섬기는 자들이요, 서로를 돕는 자들이니, 마치 한 몸의 살아 있는 지체들처럼. 만일 눈이 손을 인도하지 않고, 한 손이 다른 손을 지지하지 않으며, 발이 온 몸의 유익을 위해 요구되는 대로 걷지 않고, 아예 각 지체가 자기 뜻대로 행동하기 시작한다면; 그들은 자신의 견고함을 지키지 못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무너뜨림으로써 온 몸도 무너뜨릴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다른 이들을 위해 추위와 비와 더위를 견디며 더 많은 수고를 해야 할 때 기뻐할 것이며, 일 없이 앉아 있는 자는 쓸모없는 지체처럼, 몸 안에 있으면서도 몸을 위해 살지 않고 잘려 나가야 마땅한 자로서 울며 통회할 것이다.

6. 이 말을 듣고 너희 귀가 무거워지지 말라. 오히려 우리가 얼마나 작고 적은 수고로 천국을 얻을 수 있는지 깊이 생각해 보라. 우리는 순교자들처럼 피를 흘리지 않으며; 우리의 지체가 잘리지도 않고, 뼈가 부러지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볍고 적은 수고의 길에 자기 뜻을 버리는 마음을 더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형제들에게 사랑으로 섬기려는 소망을 품는다면, 이를 통해 우리는 많은 고난을 겪은 순교자들과, 심지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신 주님 자신과도 닮아 가게 됩니다. 그러니 수고하며 기쁜 마음으로 나아가십시오! 여러분을 기다리는 것은 순교자의 면류관입니다.

 

3. 깨어 있으라: 원수가 잠들지 않으니, – 목자에게 위로가 되게 하라

3. 1) 깨어 있으라: 원수가 잠들지 않으니, – 목자에게 위로가 되리라. – 2) 수고하는 데 뒤처지지 말라. 모든 수고에 대한 보상이 하늘에 즉시 쌓여 있기 때문이다. – 3) 훈계: 성가대장에게; – 4) 등불지기에게; – 5) 병자 돌보는 이에게; – 6) 병자들에게. [1, 4]

7. 나는 성부들로부터, 특히 나의 의로운 스승님으로부터, 마귀가 결코 잠들지 않고 우리 영혼을 파멸시키려는 수고에서 결코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항상 깨어 있으며, “잠자는 사람”(마태복음 13,25)을 통해 자신의 가라지를 뿌리기에 분주하다. 그러니 너희도, 하느님께서 부르신 나의 자녀들아, 깨어 있으라. 그리고 정신을 차려, 너희 중 누구도 마귀의 올가미에 걸리지 않도록 하라. 나는 너희 각자가 잘 지낸다는 소식을 듣는 것을 좋아하며, 한 사람의 순종, 다른 사람의 겸손한 지혜, 또 다른 사람의 근면함에서 위로를 얻는다. 그러나 순종하지 않고, 불평하며 교만한 자, 게으름뱅이와 나태한 자, 속삭이는 자와 수다쟁이는 내 영혼이 미워합니다. –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나는 누구인가? – 나는 비록 합당하지 못하지만 너희의 목자이며, 너희는 나를 통해 그들을 맡기신 주님께 내가 책임을 져야 할 나의 양들입니다.

8. 그러니 너희 모두, 잘 먹이를 찾아 다니고, 한마음으로, 함께 먹이를 찾아 다니라. 아무도 뒤처지지 말라. 뒤처진 자는 원수가 꾀어내어 헷갈리게 하고 파멸시킬 것이니, 마치 뒤처진 양을 늑대가 잡아 숲이나 산으로 끌고 가듯이 말이다. 구원의 길은 쉽지 않다; 그 길은 험난하고 지치게 하며, 고된 수고와 깨어 있음, 적은 것으로 만족하는 마음—적은 음식, 적은 휴식, 초라한 옷차림—을 요구하며, 무엇보다도 자기 뜻을 버리는 것을 요구한다. 주님께서는 각자의 수고에 상응하는 보상을 주시며, 수고하는 자들 각자에게 매일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다.

9. 우리는 교회 예배를 온전한 질서와 경건함, 그리고 따뜻한 마음으로 수행해야 한다. 그리고 너, 내 자녀여, 카노나르크(예식 담당자)여, 이 우리의 첫 번째이자 위대한 일을 감독하도록 임명된 자로서, 깨어 있으라. 성가대원들을 깨우치고, 각 찬송을 위한 정해진 시간을 정확히 지켜보며, 시편과 스티히르에 관해 네게 명령받은 대로, 깨끗한 양심에 따라 그 밖의 모든 일도 수행하라. 노래할 수 있는 자는 노래하게 하고, 낭독에 더 적당한 자는 낭독하도록 배정하라. 게을리하지 말고 주의 깊게 행동하며, 형제들 각자에게 어느 날은 누가 읽을지, 누가 노래할지, 또 다른 날은 누가 읽을지, 평일에는 누가, 축일에는 누가 할지, 목소리와 발음, 읽는 속도를 고려하여 의롭게 배분하여, 혹시 우연히 찾아온 외부인들도 유익을 얻게 하라. 네가 모든 일을 품위 있게, 질서 있게(고린도전서 14:40) 행하여, 주님께서 “잘했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라”(마태복음 25:21)라고 말씀하시는 은혜를 입으며, 하늘에서 성도들의 무리에 합류하게 되기를 바란다.

10. 그리고 너, 등불을 밝히는 자여, 네게 맡겨진 이 사명을 수행하는 데 있어 경외심과 세심함을 가져라. 이는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며 신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성전의 등불을 네 두 눈처럼 소중히 지키라. 이는 그것이 하나님의 면전 앞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만약 왕 앞에서 촛불을 밝히는 자가 그의 눈앞에서 호감을 얻기 위해 온전히 주의를 기울인다면, 하물며 내 자녀여, 너는 두려움과 사랑으로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등불을 밝히고, 등불을 닦고, 등대를 정비하며, 적절한 빛을 유지해야 하지 않겠느냐. 또한 교회의 청결을 잘 챙기라. 적어도 일주일에 두 번은 청소하고, 성화가 손상되지 않도록 그 위에도 먼지를 털어내며, 그 밖의 모든 것도 질서 있게 정리하고 치우되, 교회 소유물을 손상시키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라.

11. 세 번째로 내 마음에 두는 이는 바로 너, 병원의 자녀여. 네게 명해진 대로 나아가라. 이 지극히 힘들고, 쉼을 알지 못하는, 순교와도 같은, 그러나 그만큼 높고 높은 보상을 받을 만한 이 사역에서 너는 작지 않은 면류관을 받을 자격이 있다. 저기서 평안을 얻기 위해 여기서 평안을 기대하거나 찾지 마라. 여기서 성실히 수고한다면, 의심할 여지 없이 저기서 평안을 얻게 될 것이다. 어떤 이들은 성경을 읽고, 어떤 이들은 기도하며, 또 어떤 이들은 침묵을 지키고, 다른 이들은 칭찬받을 만한 다른 일들을 행한다. 그러나 너도 그들과 동등하게 나아가며, 심지어 그들을 앞서가기도 한다. – 날이 밝자마자 병자들을 하나씩 돌보며, 각자의 병세를 파악하고 누구에게 무엇이 필요하고 유익한지 지시하라. 이러한 수고에 매진한다면, 면류관을 쓰고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12. 내 자녀들아, 병든 이들이여, 너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너희에게 주어지는 것에 만족하라. 만일 너희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저 그것을 언급하기만 하라. 그리고 나중에 너희에게 배정된 형제가 너희를 위해 무엇을 해 주든지, 사랑으로 감사하라. 불평하지 마십시오. 형제가 하느님을 향한 사랑으로 종처럼 여러분을 섬기며, 수도원의 여력 범위 내에서 각자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만일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면, 큰 고통을 당할 자격이 있을 것입니다.

 

4. 죽음을 기억하고 심판을 생각하며 서원을 지키기 위해 힘쓰라

4. 1) 죽음을 기억하고 심판을 생각하며 서원을 굳게 지키십시오. – 2) 입을 삼가십시오. – 3) 형제들은 원장에게 손과 눈과 발과 같습니다. – 4) 우리에게 육체적 노동도 영적인 것입니다. 서로 격려하며 수고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 5) 요리사에게 주는 교훈과 격려. [1, 5]

13. 하늘의 높이와 땅의 깊이를 바라보며, 우리 인간의 본성을 생각해보라. 우리는 사람으로서 죽음을 맞이하고, 이곳에서 이 세상 너머의 영역으로 옮겨지게 된다. 그때 우리는 아무런 가림도 없이 의로운 재판관의 면전 앞에 서서 우리 행실에 대해 보고하게 될 것이며, 그 후 우리가 선하게 행했다면 천국을, 죄 가운데 머물렀다면 꺼지지 않는 불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수도원에 들어왔을 때 가졌던, 하느님께 기쁨을 드리는 삶에 대한 그 열정을 끊임없이 불태우자. 그때 우리가 어떤 말을 했고 어떤 서원을 했는지 되새기며, 항상 그 서원에 충실해야 할 의무를 자각하자. 왜냐하면 우리는 바로 그 말들로 심판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14. 입을 깨끗하게 지키며, 항상 오직 하느님께 기쁨이 되는 말만 하십시오. 아첨도, 부당한 비난도 용납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썩은 말이 너희 입에서 나오지 않게 하라”(에페소서 4,29).

15. 너희 중 수고하는 자들은 나의 손이다. 그러니 나의 손들아,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향해 힘써 수고하되 지치지 말라. “주님의 팔이 너희를 굳건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시 88:22). 너희는 다른 이들을 돌보도록 지정된 나의 눈들이다. 그러니 올바르게 살피며, 넘어질 위험이 있는 자들을 미리 알아차리고 경고하여, 너희 자신도 신성한 자비를 받을 자격이 있게 하라. 나에게는 다리도 있다. 나의 다리여, 하나님의 계명이 이끄는 바른 길 위에 서라. 이들은 다른 형제들의 짐을 용감하고 기꺼이 짊어지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이 선한 마음을 굳게 지키면, 영원한 안식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 말로 저는 낙담한 자들을 일으키고, 나태해진 자들을 열정으로 북돋우며, 소심함에 빠진 자들에게 용기를 불어넣고자 합니다.

16. 기뻐하고, 위로받으며, 열정으로 힘을 얻으십시오. 어떤 것도 피하지 마십시오. 영적인 수고도, 육체적인 수고도 피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우리의 육체도 하나님께 바쳐졌으므로 영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육체적인 일에 성실한 사람은 영적인 일에도 성실하기 마련입니다. 서로 격려하고 독려하며, 기도와 순종과 겸손 안에서 서로를 북돋아 주십시오. 모든 선한 일에 서로를 자극하며, 모든 일에서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행하십시오. 서로를 따르고 서로 도우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자녀요, 부분적으로 그분의 몸”이 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 27). 나는 너희의 머리가 그리스도이심을 굳게 믿는다. 그분을 머리로 모시고 있으니, 너희가 누구를 두려워하겠느냐? 그분과 함께라면 무엇을 얻지 못하겠느냐? 너희는 하늘과 땅의 주인이 되어, 약속된 모든 것을 상속받으리라.

17. 그리고 내 아들아, 요리사여, 너에게도 한 마디 하노니, 매일 불 속에서 싸우며, 나무를 패고, 음식을 끓이고, 물을 나르고, 채소를 씻고 닦으며, 얼굴에 그을음을 입히고, 옷을 더럽히며, 땀을 흘리고 더위를 견디며, 형제들에게 필요한 음식을 제때 대접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는 너—너는 성도들과 함께 영광을 누릴 것이며, 아브라함의 품이 너를 따뜻하게 안아 줄 것이다. 오직 인내하며 기쁨으로 하루를 보내되, 네 일에 그토록 부지런하고 성실하여 네 봉사가 꿈속에서도 네게 나타나게 하라. 이른 아침부터 불처럼 네 임무에 매진하라. 그리하면 네 일을 훌륭히 완수하고 승자로 나설 것이다.

 

5. 선한 일에서는 서로 경쟁하되, 악한 일에서는 경쟁하지 말라

5. 1) 선한 일에서는 서로 경쟁하되, 악한 일에서는 경쟁하지 말라. – 2) 우리는 마치 바다를 항해하듯 살아간다; 항해 중의 모든 우연은 우리에게 영적인 징표이다. – 3) 모범적인 형제는 형제애에 선한 영향을 미치고, 악한 형제는 해로운 영향을 미친다. – 4) 보상은 헤아릴 수 없이 크니, 헛되이 흘러가지 않으니, 기뻐하라. [1, 6]

18. 지금이 바로 선한 날들이요, 행할 때이며, 하나님께서 죄를 심판하시는 때이다. 그러니 우리가 이 때뿐만 아니라 하루조차 헛되이 보내지 않도록 하자. 우리 안에 구원을 향한 꺾이지 않는 투지와 열심이 있기를, 선한 상호 경쟁이 있기를, 그리고 서로의 미덕을 본받으려는 올바른 열정이 있기를 바란다. 누군가에게서 두드러진 미덕—예를 들어 온유함, 경건함, 순종, 겸손, 혹은 그 밖의 칭찬할 만한 것—을 보게 된다면, 그와 함께 그 미덕을 실천하고자 하는 선한 소망이 우리 마음에 솟아나도록 합시다. 이를 통해 우리 사이에 평화의 유대와 사랑스러운 정이 싹트게 될 것이다. 이와 정반대되는 것들은 경쟁을 통해 배우지 말자. 즉, 부주의한 사람을 보고는 우리도 부주의해지지 말고, 식탐에 빠진 사람을 보고는 우리도 식탐에 빠지지 말고, 말이 많은 사람을 보고는 우리도 말이 많아지지 말자. 그러나 지혜롭고 하나님께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자들로서, “모든 것을 분별하여 선한 것을 붙잡자”(살전 5:21).

19. 우리 믿음의 닻을 굳게 잡고, 소망의 돛을 올리며, 온 힘을 다해 이 세상의 삶이라는 거대한 바다를 건너가자. 왜냐하면 이 항해 중에 필연적으로 우리에게 불어닥칠 바람들, 즉 육체의 반란과 – 육신의 정욕으로 인한 동요가 일고,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소용돌이, 즉 사악한 생각들과 그 밖의 많은 것들이 닥칠 것이니, 이는 마치 바다를 항해할 때 일어나는 일들과 비슷합니다. 해적은 온갖 악을 품은 악마들이고, 얕은 여울은 무지에서 비롯된 눈멀음이며, 수중 암초는 우리 영혼을 향한 예기치 못한 계략이며, 선창에 물이 차는 위험한 상황은 죄와 죄악된 생각의 은폐로, 이를 통해 영혼은 마치 선창에 물이 차는 것을 신경 쓰지 않고 배와 함께 잠든 채 바다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 항해자들이 파멸하듯 파멸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가장 정직한 형제들이여, 이러한 모든 것에서 스스로를 지키고 경계하며 하나님의 길을 걸어가자. 무엇보다도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드러내어, 악한 생각의 물이 우리 영혼을 넘치게 하지 않게 하고, 어떤 예언자의 말씀(요나 2:6)처럼 “마지막 심연이 우리를 삼키지” 않도록 하자.

20. 형제애 안에서 영적 수련과 육체적 수고에 있어 모든 일에 기꺼이 준비된 그는, 마치 하늘의 별이 빛나듯 많은 이들을 비추고 인도합니다. 경건한 일에 부지런하고, 하늘에 합당하며 위선 없이, 조롱받지 않고 침묵을 지키는 이는 땅 위에서 마치 케루빔의 보좌 앞에서 하나님과 만물의 주님께 섬기는 천사와 같습니다. 자신의 미덕으로 타인에게 유익을 주고, 그들 안에 영적 행위에 대한 열의를 불러일으키는 이는, 형제단의 온전한 공동체를 비추고 따뜻하게 데워주는, 빛나는 황금빛 태양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어둡고 음침하며 밤과 같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는 자신 아래 있는 자들을 어둡게 하고, 그들을 자신과 같은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자입니까? 누가, 교만과 쾌락 추구, 조롱, 무위, 부끄러운 행위, 중상모략, 건방짐, 그리고 악한 생각들과 결탁하여 더럽혀진 자로, 하늘에서 떨어진 사탄과 닮은 자인가? 우리는 그러한 자들의 영향력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

21. 너희의 수고는 짧으나 그 보상은 영원하며, 고통은 잠시일 뿐 기쁨은 영원하고, 괴로움은 일시적이지만 안식은 끝이 없다. 그곳에서 여러분은 “기뻐하는 모든 이의 거처”(시 86:7)에서, “병과 슬픔과 탄식이 사라진”(사 35:10) 곳에서, 울음이 없고 오직 기쁨만이 있는 곳에서 기뻐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헛되이 수고하고 있는 것입니까? 헛되이 수고하고 계십니까?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이 일은 이성적이고, 고상하며, 경이롭고, 복되며, 사도적이고, 순교자적이며, 아버지 같고, 천사 같고, 천상적이며, 하나님께 기쁘게 여겨지는 일로, 여러분은 (세상에서) 나와 (우리에게) 오셨으며, 우리 안에서 영적인 탄생을 통해 태어나고, 자라나 전사가 되어 영적인 무기로 무장하고, 아말렉족과 아모리족, 가나안족을 비롯한 다른 정욕의 부족들을 무찌르고 계십니다. 너희는 (세상을 등짐으로써) 세상의 바다를 뒤로 남기고, 스키마를 받아들임으로써(이는 실효성 있는 회개이기 때문이니) 계몽과 정화를 주는 두 번째 세례를 통해 요단강을 건넜으며, 이제부터 너희는 너희의 기업인 땅, 곧 거짓이 없으신 우리 하나님께서 그분의 약속을 통해 너희에게 보여주신 땅, 즉 불멸 과 영생의 꿀과 젖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가기 시작하느니라. 이것을 기뻐하고, 환호하며 즐거워하라. 하나님의 이러한 인간 사랑을 보라. 우리 눈앞에는 생명이, 얼굴 앞에는 기쁨이, 발 아래에는 복이 있다. 문이 조금 열렸으니, “달려가서 이를 얻으라”(고린도전서 9:24). 이럴 때 누가 망설이며 서 있을 수 있겠는가? 누가 앞다투어 달려가지 않겠으며, 다가올 보화를 다른 이들보다 먼저 얻기 위해 점점 더 큰 열정으로 힘쓰지 않겠는가?

 

6. 정욕에 대항하라. 이 불로 인해 영원한 불이 타오르기 때문이며, 죽음은 그 행위가 한창일 때 닥칠 수 있다

6. 1) 정욕을 멀리하라. 이 불로 인해 영원한 불이 타오르기 때문이며, 죽음은 그 행실 중에 닥칠 수 있다. – 2) 넘어졌다면, 죄를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다시 일어서라. – 3) 사소한 죄, 특히 헛소리를 피하라. 대화 주제로 삼을 내용들이 제시되어 있다. [1, 7]

22. 용기를 내고 마귀의 꾀에 맞서 용감하게 서라. 우리의 싸움이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우리의 쓰라린 박해자인 사탄과 그 아래 있는 배교적인 세력들과 하는 것임을 알라. 그러므로 누구에게든 음탕한 생각이 닥치면, 당황하거나 혼란스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기도와 탄식, 눈물을 흘리며 그 생각을 되돌리고 물리쳐야 하며, 그(영원한) 불을 떠올리고, 지금 우리 안에서 타오르는 이 불이 바로 그(영원한) 불꽃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루에 몇 번이나 그런 생각이 밀려오더라도, 그것을 끝까지 근절하라. 그리하면 우리에게 심판이 없을 것이다. 만일 이 음란한 생각과 함께 생각이 어두워지고, 수행의 무거움을 느낀다면, 슬픔을 품고 마음의 눈을 들어, 매 순간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이 마귀의 그물을 끊어 버리라. 끝없는 생명 속에서의 안식을 생각하며 수고하는 모든 이가 힘을 얻기를 바랍니다.

23. 우리 주님의 은혜가 여러분을 덮어 주시기를, 그리고 현재의 고난을 견뎌낼 수 있는 굳건함을 베풀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투쟁과 싸움 속에서 힘쓰고, 미끄러지지 않고 길을 완주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십시오. 만일 그런 일이 생긴다면—비록 여러분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지는 않지만—서둘러 일어나십시오. 눈에 보이는 것을 보라. “하늘은 높고”, 기록된 바와 같이, “땅은 깊다”(잠언 25:3). 죄에 빠진 자들 중 누가 그곳에 올라갈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죄를 혐오하고, 미워하며, 멀리하라. 선을 좇고,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일을 행하라.

24. 간청하건대, 큰 죄를 피하듯이 소위 ‘작은’ 죄, 즉 헛소리와 우스꽝스러운 말도 피합시다. – 모든 사람에게 온유하고 온화하게 대하십시오. 그리고 단지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대화를 나눌 때에도, 그 대화가 선한 것이 되게 하십시오. 여러분의 대화가 앞으로 할 수공예에 관한 것이든, 성경의 어떤 구절에 대한 의문을 풀기 위한 것이든, 규례에 따른 성경 읽기든, 어떤 성인의 생애에 관한 것이든, 혹은 육신을 떠나는 일, 천사들이 우리에게 찾아오는 일, 그리고 주님이자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육신적 삶 전체에 대해 우리가 드릴 답변에 관한 것이든, 성인들이 어떻게 형언할 수 없는 기쁨으로 떠나고, 죄인들은 어떻게 위로받지 못할 고통으로 가게 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 열정(헛된 말)을 피하고 그와 정반대되는 미덕(지혜로운 말)을 얻을 수 있는지 서로 물어보십시오; 눈물은 어떻게 터져 나오고 흘러내리며, 무엇 때문에 마르는가? 그리고 진실한 순종과 겸손, 입의 침묵을 통해 영혼의 싹이 적셔져 생명나무처럼 낙원 한가운데서 피어나는가; 반면, 수다, 웃음, 부적절하고 때를 놓친 시선, 불평, 거친 말투, 늦잠, 과식, 그리고 우리가 제멋대로 빠져드는 온갖 다른 정욕들로 인해 시들어 버립니다.

 

7. 지위가 높음; 서약을 지키는 것으로 감사함

7. 1) 높은 지위; 서원을 지키며 감사드리기. – 2)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얻는 것이다. – 3) 그 지위에 대한 충실함이 우리를 하늘의 시민으로 만드니, 이 충실함을 실천하라. – 4) 주현절에 드리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 – 5) 약속된 축복의 위대함에 관한 성경의 말씀. [1, 8]

25. 보라, 우리 주님이시며 하나님이신 분께서 모든 사람을 당신께로 이끌기 위해 자비의 광선을 비추시며 사람들에게 당신의 은혜를 나타내시니, 우리 수도사들을 특히 어둠에서 빛으로 이끌어 내셨다.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신 하나님께 어떤 감사를 드려야 하겠는가? – 바로, 정욕과 쾌락에 젖은 삶을 버리고 경건함에서 번영하는 것을 목표로 살아가는 것이다. – 형제들아, 우리 자신의 소명을 자각하고, 수도 생활이 요구하는 바와 천사들 앞에서 우리가 맹세한 서원을 마음에 새기며,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대로 기꺼이 이곳을 떠나, 마치 나그네 생활처럼 여기에서 벗어나 우리 자신의 거처로 넘어갈 준비가 된 자처럼 살아가자.

26. 이 세상의 삶이 얼마나 하찮은지 보십니까? 인간의 삶이 얼마나 변덕스럽고 덧없는지 보십니까? – 오직 한 가지의 복된 몫, 오직 한 가지의 복된 삶, 그리고 끝없이 풍성한 은혜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하나님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수고와 자신을 강인하게 다스리는 노력을 요구합니다.

27. 여러분은 예루살렘의 시민이며, 낙원의 주민이며, 거룩한 천사들의 무리에 동참하는 자들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자신의 지위에 굳게 서서, 그 지위에 충실하며, 온 마음으로 그것을 사랑하고, 그 일을 위해 스스로를 다잡고, 그것에 반하는 모든 것을 삼가며, 온갖 방법으로 스스로를 절제한다면 말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기뻐하며, 온갖 불결한 마음가짐에서 스스로를 정화하십시오. 빛의 자녀들처럼 순결해지고 빛나십시오. 연장자들에게 존경과 순종, 그리고 온유함을 보이십시오. 서로에 대한 사랑이 여러분 안에서 풍성하게 넘치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성향을 따르는 것과 자기 합리화는 여러분에게 혐오스러운 것이 되게 하십시오.

28. 보라, 주님의 현현의 날이 이르렀도다! 하늘에서 오시는 주님을 깨끗한 마음으로 맞이합시다. 거룩한 마음을 준비하고, 온 피조물의 선물로서 도리노시모께 새롭게 된 삶과, 하느님을 닮은 묵상, 그리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의 불타는 열정을 바치자; 누구는 침묵에 대한 사랑을, 누구는 쉼 없는 경계를, 누구는 많은 기도와 절제, 온유함과 불평 없는 마음을 바치자. 모든 것을 다 바쳐, 여러분에게 어떤 부족함도 없도록 하자.

29.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성인들을 통해 장차 우리를 기다리는 영광이 어떠한지 알려 주십니다. 성 바오로는 “우리에게 드러날 영광을 갈망하는 데는 우리가 합당하지 못합니다”(로마서 8,18)라고 외치며, 성 다윗은 “주님의 궁정에서 보내는 하루가 천 날보다 낫나이다” (시편 83, 11), – 그리고 “주의 영광이 나타날 때 내가 만족하리이다” (시편 16, 15); 또 다른 선지자 중 한 사람은 그곳에서 “병과 슬픔과 탄식이 사라질 것”이라고 외칩니다 (이사야 35, 10). 그리고 원하는 사람은 성경에서 이와 같은 증거들을 얼마나 더 많이 찾을 수 있겠는가? 이 증거들은 우리에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기쁨과, 한계가 없는 즐거움,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형언할 수 없는 복들을 보여준다. 그러니 우리 주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히 서서, 확고히 다지고, 성장하며, 온전해지자.

 

8. 낙심하지 마십시오: 수고는 적고, 상은 헤아릴 수 없이 큽니다

8. 1) 낙심하지 마십시오: 수고는 적고, 상은 헤아릴 수 없이 큽니다. – 2) 마치 이미 죽음의 길을 걷고 있는 것처럼 상상하며 육신을 방종하지 마십시오. – 3) 계명을 위해 어떤 희생이라도...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고 감수하십시오. [1, 9]

30.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멈추지 말고 게으름에 빠지지 마십시오. 또한 현재의 어려움을 보고 장차 올 세상의 기쁨을 스스로 박탈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모든 것, 즉 말과 행동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서로를 포용하며, 어려운 일에서 서로 돕도록 삶을 꾸려가라. 여러분이 온 세기를 고행하며 살아간다 해도, 그것은 영원한 불멸의 무한한 충만함 한 시간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그것은 복된 일일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관점에서 말하자면 매우 유익한 일입니다. 마치 꿈속에서처럼 잠시만 고난을 겪고, 그 대가로 끝없이 복된 삶을 얻는 것이니까요.

31. 성인들이 원수로 여기고 절제를 통해 온갖 방법으로 굴복시켰던 육신을 방종하지 맙시다. 육신을 만족시키는 것은 영적 삶과 상반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떠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 형제들이 하나둘씩 무덤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면 그 본보기를 알 수 있습니다. – 그런데 우리가 과연 여기에 남을 수 있겠습니까? 물론 아닙니다. – 오! 오, 형제들아! 죽음이란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우리는 마치 위에서 영감을 받은 듯, 끊임없이 관조의 상태를 유지하며, 마치 이미 죽어가는 것처럼, 곧 영혼이 육신으로부터 분리되고 천사들이 올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악마들도 몰려올 것이라고 말하게 하지 마라; 왜냐하면 그것은 정욕에 사로잡힌 자들에게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때가 되었다, 영혼아, 나오라!”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그때 그 결합이 끊어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며,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가! – 그때 선행과 양심의 가책 없음은 떠나는 자들을 위한 큰 도움과 위로, 그리고 중보가 될 것이다. 그때 순종은 담대함을 얻게 되고, 겸손은 호의를 불러일으키며, 눈물은 자비를 이끌어내고, 풍성한 행실은 악마들을 제압할 힘을 얻으며, 모든 일에 대한 인내는 변호자가 되어 줄 것이니, – 그러면 원수들은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물러가고, 영혼은 천사들과 함께 큰 기쁨으로 구세주께로 갈 것이다. 그때, 만약 어떤 영혼이 정욕의 습관에 빠져 죄에 사로잡혀 있다면 두려움이 닥칠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 악마들이 우위를 점하여, 그 불쌍한 영혼을 자신들과 함께 지옥의 심연, 어둠과 고통스러운 타르타로 내던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정욕을 방치함으로써) 그 영혼에게 돌아오는 이득이다!

32. 그러니 우리가 아직 이곳에 있을 때 스스로를 정화합시다. 용맹한 행위로 피를 흘리며, 하나님의 계명에서 우리를 멀어지게 할 어떤 것도 우리 안에 없게 하자: 수고도, 병도, 쾌락도, 안식도, 그 어떤 만족도. 설령 매일 죽어야 한다 해도, 세속적인 지혜를 초월하여 살기 위해 노력하며 기쁨으로 그것을 견뎌내자. 두려운 심판자이신 하나님 외에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자: 사람도, 짐승도, 불도, 칼도, 바다도, 그리고 무섭게 보이는 그 어떤 것도; 이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이 땅의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자 통치자이기 때문이다.

 

9. 영혼의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물을 주어 영적인 열매를 맺게 하라

9. 1) 영혼의 밭을 깨끗이 하고, 씨를 뿌리고, 물을 주어 영적인 열매를 맺게 하라. – 2) 음식과 수면에 절제하고, 그 결실을 얻으라. – 3) 옷과 신발이 부족함을 참아내라. – 4) 미래를 위해 기꺼이 고난을 견디라. [1, 10]

33.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한 성령의 흐름에서 내리는 비를 받아 풍요로운 땅이 열매를 맺고, 생명이 가득한 이삭처럼 덕행을 키워내듯이 하라. 너희가 밭을 갈아엎듯이, 하나님의 경외심의 불과 진리의 칼로 너희 영혼의 땅을 생각의 가시덤불로부터 깨끗이 정화하라. 그러므로 사도들의 계명에 따라, 육체에 씨를 뿌리지 말고, 육체로부터 썩어짐을 거두지 않도록 하라; 오히려 영에 뿌려, 성령으로부터 영적인 열매를 거두게 하라 [갈 6,8] – 인내와 끈기, 너그러움, 겸손한 지혜, 서로에 대한 사랑을 배우되, 시기, 간사함, 기만, 모욕, 비방을 미워하라.

34. 또한 절제를 실천하라. 절제란 육체에 필요한 만큼만 음식을 공급하여, 육체에 지나친 부담을 주지도 않고 지나치게 가볍게 하지도 않는 것을 말한다. 이는 배에 화물을 싣는 방식과 같다. 배가 너무 가득 차면 가라앉을 수 있고, 너무 가벼우면 뒤집힐 위험에 처하기 때문이다. 수면도 마찬가지입니다. 유익한 만큼만 취해야 합니다. 적당한 식단 뒤에는 편안한 잠이 따르고, 그 후에는 시편을 부를 때의 명료함, 성경 낭독을 주의 깊게 듣는 태도, 신성한 찬송가 가사의 각 단어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지혜가 따라옵니다. 이 모든 것으로 영혼이 기쁨을 얻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따뜻해지며, 밝아져서 모든 면에서 절제의 열매를 맛보게 된다. 그러나 과식은 무거운 꿈을 불러오고, 이 두 가지 모두로 인해 생각이 흐려지고, 찬송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며, 입이 굳어지고, 눈과 영혼과 몸이 어두워집니다. 왜냐하면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과 조화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그때 영혼의 도둑이 달려들어 원하는 것을 훔쳐 갑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깨어 있으라”(마태복음 26:41) 말씀하신 것입니다.

35. 하나님께서는 진심 어린 말과 온유한 대답, 선한 것—즉, 괴로워하지 않는 얼굴, 온화한 성품, 겸손한 대화를 사랑하신다. – 다른 이들보다 더 큰 고난을 기꺼이 견디는 자, 필요한 옷이나 신발, 머리띠가 부족할 때 감사하는 자, 바로 그 사람이 진정한 하나님의 일꾼으로, 일시적이고 하찮은 것들을 장차 올 위대한 복으로 바꾸는 자이다. 나는 모든 사람이 만족할 수 있도록 신경 쓰고 있으며, 어떤 물건이 부족하더라도 아무도 속상해하거나 화를 내거나 불평하지 않도록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올라 스스로 무언가를 자제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 무엇이 주어지든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나 분명히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36. 하늘나라가 눈앞에 있으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복된 생명의 상이 기다리고 있다. 누가 그곳으로 향하지 않겠는가? 누가 이런 선물로 주어진 보물을 얻기 위해 서두르지 않겠는가? 누가 기꺼이 고통을 감수하고, 벌거벗은 채로 지내며, 추위와 서리를 견디고, 그토록 큰 복을 얻기 위해 고행으로 자신을 죽이기로 결심하지 않겠는가? – 그러나 여러분은 그러한 수고와 고행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욕망을 잘라내고, 모든 것을 버리며, 온갖 종류의 인내를 통해, 여러분은 매일 죽어가면서도, 그와 동시에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여러분의 생명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명인 그리스도 주님께서 나타나실 때, 그때 비로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원히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골 3:4). 그러니 이곳에서 안식을 찾지 말고, 저쪽의 영원한 안식을 보장받는 증거로 이곳의 고난을 여기십시오.

 

10. 주님께서 임하시니, 인내하십시오. 그리고 무엇으로 힘을 얻으시겠습니까?

10. 1) 주님께서 임하시니, 인내하라; 무엇을 먹으며 버틸 것인가. – 2) 보라, 이것이 너희의 끝이며, 천국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모든 고생을 잊을 것이다. – 3) 그곳, 주님의 궁전에서는 고난을 겪은 자들을 위한 환호가 울려 퍼지니, 누가 기꺼이 그것을 선택하지 않겠는가? – 4) 곤란과 궁핍 속에서 사는 것을 기뻐하라: 이것이 수도자의 삶이다. – 5) 모든 일에 서로 도우라, – 주님께서 가까이 계시니. [1, 11]

1. 하나님의 길을 걸어가라. 그분의 약속대로 매일 주님께서 너희에게 임하심을 믿으며. 그분께서는 사도들을 통해 “그분의 언약과 증거를 찾는 자들”(시 24:10)에게, “세상이 끝날 때까지”(마 28:20) 그들과 함께 계시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의 길과 궤적은 알 수 없습니다. 그분은 마음의 눈앞에 보이지 않게 함께 계시며, 마음이 청결한 이들과 소리 없이 대화하십니다. 시기심 많은 마귀의 계략을 피하며, 바른 길을 굳게 지키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의 날개를 펼치어, 모든 세상의 올가미를 뛰어넘어 구름과 나란히 날아오르십시오. 기쁨의 기름과 순결의 기름으로 너희 발을 바르고, 주님의 슬픔의 길을 걷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비겁함으로 목마르다면 인내의 물을 마시고, 영혼의 쇠약함으로 굶주린다면 사람의 마음을 양육하고 굳건하게 하는 빵, 곧 선한 힘과 용기를 주는 지혜의 말씀을 맛보라. 여러분은 잘 무장하고 기가 충만합니다. 그러나 슬픔을 마주할 때, 감당하기 힘든 짐을 스스로 짊어지지 마십시오. 즉, 원수의 악한 소원을 말합니다. 땅에서 하늘로 이끄는 길을 걷는 이에게는, 비겁함 없이 이 길을 걸으며 아무런 짐도 짊어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2. 여러분은 현명하게 판단하고 지혜롭게 행동하여 이 세상을 떠났으며, 이제 경건하게 하나님의 집으로 나아가 주님을 위해 일하고 매일 그분께 봉사하며, 모든 일시적인 것, 혈육, 조국, 그리고 온갖 육신의 욕망을 멀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일은 천사들의 일입니다. 이제 조금만 더 인내하고, 조금만 더 고난을 견뎌내면 됩니다. 우리 삶의 끝과 한계가 이미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거룩한 천사들에게 데려가질 것이며, 모든 성도들과 함께 약속된 복의 상속자가 되어 영원히 기뻐할 것입니다. 그때에는 우리에게 아무런 후회도 없을 것입니다. — 승리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수행하며 지쳐버렸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금식했거나 잠을 자지 못했거나, 추위와 한파를 견뎌냈거나, 혹은 다른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말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세상에서 도망쳐 수도자의 옷을 입도록 허락해 주신 그 날과 그 시간을 축복하고 기뻐할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각자에게 이곳에서 겪은 모든 고난에 대해 백 배의 보상이 주어질 것이며, 슬픔 대신에 온전한 기쁨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중 누구도 현재 겪고 있는 고난을 참는 것을 거절하지 말자. 이는 그 대가로 형언할 수 없고 영원한 기쁨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중 누구에게도 “기억하라. 네가 태중에 있을 때 네가 받은 복을”이라는 말을 듣지 않게 하라; 그리고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있다”는 말을 듣지 않도록 합시다(눅 18:26). 이는 죄인과 의인을 갈라놓는 무서운 목소리이며, 생각만 해도 두려운 것입니다. 하물며 그 소리를 직접 듣게 된다면 얼마나 무서울까요!

3. 하늘이 땅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와 같이, 죄 가운데 사는 자들은 우리 주 하나님으로부터 그만큼 멀리 떨어져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의 친구들과 참된 종들은 그분께로, 그분의 하늘나라로, 높은 예루살렘, 즉 헤아릴 수 없는 보물과 무한한 영광, 영원한 기쁨이 있는 위대한 성으로 들어갈 것이다. 거기서 우리는 서로를 뵙고 서로를 알아볼 것이며, 내가 믿는 바는,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면, 거기서 함께 끝없는 기쁨을 누릴 것이라는 점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기꺼이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고난을 감내하지 않겠습니까? 조롱과 모욕을 마치 젖처럼 기쁨으로 마시지 않겠습니까? 마지막 자리에 서기를, 심지어 누구보다 더 짓밟히기를 원하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온순한 어린 양들처럼 매일 기꺼이 죽음을 선택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나의 형제들아! 나의 아버지들이여! 성도들은 바로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하나님께 기쁨을 드렸습니다.

4. 우리는 이곳에서 어떤 불쾌함이나 고단함도 없는,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삶을 추구하지 말자. 오히려 우리가 궁핍할 때 기뻐하고, 어려운 처지에 놓였을 때, 모욕을 당하거나 억압을 받거나, 필요한 물건이나 주거, 음식과 음료, 신발과 옷, 혹은 그 밖의 어떤 필요 사항에서 부족함을 겪을 때 기뻐합시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증거이며, 이를 통해 수도사는 끊임없이 투쟁과 고행 속에 머무는 자로서 축복을 받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렇지 않다면, 비록 거짓되고, 위선적이며, 위장된 방식으로 수도사라고 칭하고 있을지라도, 여러분이 수도자의 길에 서 있지 않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 대해, 여러분이 수도 규칙에 진심으로 순종하며, 그 길을 능숙하게 걷고, 천사처럼 살아가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을 지탱해 주시는 하나님의 오른손과, 여러분을 굳건하게 해 주시는 성령의 위로, 그리고 여러분을 돕는 거룩한 천사들과 모든 하느님께서 축복하신 순교자들과 성인들이 함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5. “하나님의 산과 그분의 거룩한 성에 올라가라”는, 가장 위대한 예언자 이사야의 말씀대로(시 2:3). 누구도 뒤처지지 말고, 누구도 주저앉지 말고, 서로 돕고, 서로 굳건한 사랑을 나누며, 서로 격려하고, 서로 경쟁하며, 서로 본받으십시오. – 너희 가운데는 부적절한 웃음도, 정신을 흩뜨리고 나태하게 만드는 오락도, 길고 쓸데없는 수다도 없어야 한다. 분열과 불순종은 너희 가운데서 더 이상 언급되지도 말아야 한다. 너희가 품위 있고 정직하게 말하며, 서로에게 친절한 마음을 품고, 조용하고 다정하게 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모든 것을 시험하여 선한 것은 붙들고, 온갖 악한 것은 멀리하라”(살전 5:21, 22). 평화의 주님께서 너희 영혼에 힘과 굳건함을 주시며, 친히 너희를 돌보시고, 친히 “평온한 물가에서 너희를 먹이시며” (시 22:2), 여러분을 진리의 길로 돌아오게 하시고, 온갖 악을 품은 뱀의 궤계로부터 지켜 주시며, 기쁨과 달콤함, 위로를 주시고, 하늘나라의 영광을 누리게 하소서.

 

11. 원수가 정욕을 일으키나, 저항하면 이길 것이니, 주님께서 도우시는 분이시니라

11. 1) 원수가 정욕을 부추기나, 저항하면 이길 것이니, 주님께서 도우시는 분이시니라. – 2) 일과 예배에서 흠 없이 수고하라; 이를 헛되이 하지 말라. – 3) 수고하고 준비하여, 죽음의 순간과 그 이후에 공포를 마주치지 않고, 오직 기쁨만을 보게 하라. [1, 12]

6. 오십시오. 우리 모두 함께 하나님께 더욱더 섬기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려는 준비와 열정을 다시금 다지도록 합시다. 그리고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하고, 우리를 그 길에서 막지 못하게 하십시오; 오히려 세상을 더욱 철저히 버리고, 육신을 이겨내며, 혈연 관계를 멀리하고, 쾌락을 경멸하며, 수고를 택하고, 그 밖의 모든 덕행들을 실천하고 계속 실천하여, 우리 소명에 흠잡을 데 없이 충실함으로써 천국을 상속받도록 합시다. 무서운 뱀, 온통 악의로 가득 찬 마귀는 우리의 파멸을 바라며 끊임없이 우리 주위를 기어다니고, 몰래 스며들어 우리 마음속에 들어와 각자에게 악의 씨앗을 뿌린다. 어떤 이에게는 죄의 달콤함을 주어, 그 쾌락과 순간적인 즐거움 때문에 영원한 복을 누릴 기회를 박탈하고 꺼지지 않는 불 속으로 보내며; 누구에게는 살인과 다름없는 시기심을 심어, 형제의 선한 명성을 시기하여 그 마음을 어둡게 하고, 마치 밤의 어둠 속을 걷는 자처럼 그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게 하여, 그 안에 파멸을 부르는 새로운 가인을 드러내게 하려 하며; 누군가를 식욕의 유혹으로 이끌어, 육체의 쾌락으로 그를 정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자; 누군가에게 낙담을 불러일으키는 자;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소명이나 동료들, 혹은 수도원에 대한 혐오감을 일으키며, 누군가에게는 시편 찬양과 성경 읽기, 그리고 은둔 생활을 지루하게 여기게 만들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격렬한 정욕과 욕망의 소용돌이를 일으켜 그를 바른 길에서 벗어나게 하고 파멸시키려 한다. 그러나 “용기를 내고, 너희 마음을 굳게 하라”(시 30,25): 우리는 죽음의 권세를 꺾으시고, “우리에게 뱀과 전갈과 모든 원수의 세력을 밟을 힘을 주신”(루카 10,19) 주님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 안토니우스 대성인의 모범에서 이를 볼 수 있는데, 그는 원수의 세력을 그토록 분쇄하고 소멸시켜, 원수가 그의 성소의 그림자조차 견딜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모든 신성한 성부들은 그를 이겼으며, 오늘날에도 온 마음을 다해 하느님을 섬기는 모든 이들이 그를 이기고 있습니다.

7. 여러분이 열심히 수고하며, 그 수고를 하느님께 제물로 바치고 있음을 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수고가 모든 면에서 흠이 없고 보답받을 만하기를 바랍니다. – 어떻게 해야 합니까? – 조용하고 묵묵히 일하십시오. 때 아닌 말은 입에서 나오지 않게 하십시오. 자만심을 피하십시오; 건방짐을 혐오하라; 겸손을 입으라; 모든 순종을 위해 스스로를 단련하라. 보라, 어떤 죄로 인해 죽음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고, 정욕이 치밀 때 서로 가까이하지 말라; 둘이서 단둘이 있는 것을 감히 시도하지 말라. 거기에는 죄의 불이 있으니; 어떤 부위든, 특히 한 부위를 만지지 마라. 그곳에는 진노와 불과 죽음이 있으니. 성경 읽기에 귀를 기울이고, 깨어 있어 시편을 노래하라. 하나님 앞에 서 있을 때 졸지 말고, 그분께로부터 선물을 받으라. 그분은 항상 깨어 있는 자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주시기 때문이다. 왕의 면전에서 어떤 이들은 선물을 받고 떠나는 반면, 다른 이들은 빈손으로 돌려보내지는 모습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비록 양쪽 모두 같은 일을 했으나, 어떤 이들은 게으르고 졸린 마음으로 일했고, 다른 이들은 진실하고 온 힘을 다해 일했기에, 그들의 운명은 이토록 달라진 것이다.

8. 서둘러라, 힘써라, 달려가라, 도달하라. 우리를 위한 문이 닫히지 않게 하고, 우리 생명의 시간이 끊어지지 않게 하며, 준비되지 않은 채 무덤으로 내려가지 않게 하고, 죄인으로서 육체와의 유대를 끊지 않게 하며, 영혼이 육신을 떠날 때 거룩한 천사들을 대할 용기를 잃지 않게 하라. 하늘까지 닿을 만큼 긴, 안토니우스 대성인에게 나타났던 그 에티오피아인이 우리의 죄로 인해 우리를 붙잡지 않게 하시고, 혼돈과 지하세계, 타르타로스, 끝없이 요동치는 불길, 혹은 울음과 이를 갈음이 있는 다른 형벌의 장소들이 우리를 삼키지 않게 하소서. 오히려 그곳에서 평화롭고 복된 장수를 누리며, 우리의 주님이시며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 안기어, 그 헤아릴 수 없는 아름다움과 그 접근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얼굴을 뵙게 하소서. 거룩한 천사들과 모든 성도들과 함께 춤추며, “병과 슬픔과 탄식이 사라진” 그곳에서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이사야 35:10).

 

12. 여기서 떠나자... 즉, 정욕의 영역에서, 배와 눈과 혀와 귀와 손과 발을 절제함으로써

12. 1) 여기서 떠나자… 즉, 정욕의 영역에서, 배와 눈, 혀, 귀, 손, 발을 절제함으로써. – 2) 경제 담당자, 작업 감독자, 식량 관리인, 채소 재배자 및 정원사, 마구간 관리인, 제분업자를 위한 교훈. [1, 13]

9.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그 어느 때보다도 분명히 선언하신 것처럼, “일어나자, 여기서 떠나자”(요한복음 14:31)라고 여러분에게 선포합니다.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우리의 덕을 시험하기 위해 우리를 육신에 매어 두신 하나님께서 부르시기 전에 육신에서 벗어나자는 뜻이 아니라, 육신에 있으면서도 육신보다 높은 것을 지혜롭게 분별하고, – 신성한 바울이 자신에 대해 기록한 대로(갈 6,14), – 세상을 향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 왜냐하면 그분께서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은 육체와 그 정욕과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갈 5,24) 외치셨기 때문이다. 그러니 모든 무겁고 슬픈 일을 용감하게 견디고, 모든 일에 절제하라. 만일 우리 조상이 이 점에 있어 하느님께 바친 계명에 순종했더라면, 절제하지 못함으로 인해 생명 대신 죽음을 맛보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금식하고, 가능하다면 생각조차 하지 말고, 그토록 쓰라린 죄의 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 그러나 행동으로 온갖 방법으로 그 나무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라. 탐욕스러운 눈으로 정욕적인 시선을 보내지 말고, 스스로 매혹에 빠지지 마십시오. 어리석은 말과 무익한 이야기를 듣지 않도록 귀를 막으십시오. 입은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말만 하도록 훈련하고, 헛소리를 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손과 발, 그리고 여러분의 모든 지체가 모든 정욕으로부터 보호받게 하십시오.

10. “경제”에 관한 직무를 맡은 너는, 형제들 가운데서 흠잡을 데 없이, 거침없이 행하며, 모든 일을 겸손한 지혜로 처리하도록 힘쓰라. “밭일”을 감독하도록 맡겨진 너는, 네게 본래 있는 지혜와 확고함으로 이 일에 주의를 기울여, 이에 합당한 모든 것을 올바르게 수행하고 모든 것을 질서 있게 유지하라. 지친 자들, 특히 신입 수도자들에게는 너그럽게 대하고 인내하라. “너희 말은 소금으로 간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주게 하라”(골 4,6; 엡 4,29). 너희는 품위 있고, 말씨가 온화하며, 위로가 되고, 가르침이 되며, 품행이 바르고, 각자의 일에서 지도자가 되라. 너는 경리(아마도 궁정 경리나 지출 담당자일 것)이니,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능력과 권능으로 강해지라”(엡 1,19). 형제들을 돌보는 일에 앞장서라. 그들을 돌보는 것은 곧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네가 먹이는 것은 사람들이 아니라, 원한다면 하나님의 사도들이기 때문입니다. 네가 가진 것 중에서 가장 좋은 음식과 음료를 준비하여 그들에게 주되, 양념이나 과자, 그리고 배를 채우기 위해 사는 자들이 먹는 어떤 것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는 경건한 이들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채소와 빵, 물, 이것이 바로 그들을 위한 모든 규정이다. 우리 선조들은 이 안에서 큰 위로를 찾았다. 그리고 너, 나의 자녀여, “선한 요리사”여, 형제들을 돌보며 그들에게 위안이 되는 음식을 준비하라. 그리하여 하늘나라에서 태양처럼 빛나리라. 너희는 “텃밭 가꾸는 자와 정원사”들이니, 일하며 형제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온갖 종류의 채소를 공급하도록 힘쓰라. 그들에게 기쁨을 주면 하나님께도 기쁨을 드리는 것이니, 영원한 평안을 누릴 자격을 얻으리라. “식량 창고 담당자”인 여러분은 온전한 열정과 선한 뜻으로, 피를 흘릴 지경까지 자신의 일에 전력을 다하고, 여러분이 그에게 의존하고 있으니 수석 창고 관리자에게 친절하게 대하십시오. “마구간”에서 일을 관리하는 여러분은, 하나님과 우리에게 유익한 순종을 실천하며, 다른 이들보다 두 배로 형제들에게 봉사하고 있으니, 두 가지 면류관으로 장식되리라. 여러분 중 누구든지 다른 이들을 더 많이 돌보고, 그들을 위해 일하며 수고하는 자는 의심할 여지 없이 더 큰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제분소”에 배정된 여러분도 내게로 오십시오. 여러분에게도 자신의 업무에 대해 큰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규정된 것 외에 음식이나 음료, 그 밖의 어떤 것에서도 불필요한 일은 절대 허용하지 마십시오. 한편, 규칙적인 예배와 시편 찬양 및 기타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에 대해서는, 우리도 그렇게 되기를 원치 않지만, 극심한 필요로 인해 달리 처리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비록 우리가 죄인일지라도, 여러분을 대신하여 이 부분에서 부족한 점을 채워 드리겠습니다. 오직 스스로를 경건하게 살피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세속적인 대화를 피하십시오.

 

13. 기상; 아침 기도; 첫 번째 시간; 일

13. 1) 기상; 아침 기도; 첫 번째 시간; 일. – 2) 대화 주제; 경쟁; 안식을 싫어함; 하느님에 대한 열정과 수고에 대한 인내. – 3) 주님께서 하신 것처럼 인내하며... 그분의 자비를 맞이합시다. – 4) 자기 만족을 위한 일과 형제들에 대한 미움을 좇는 것. – 5) 원장의 지시에 만족하는 이는 존경받을 만하며, 이러한 지시를 헐뜯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질서 없는 자들을 바로잡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1, 14]

11. 우리를 위해 정해진 규칙과 질서에 따라 살며, 크고 작은 모든 일에 있어 올바르게 행동하도록 스스로를 다잡자. 종소리가 울리자마자, 마치 천사가 부르는 것처럼 모두 기쁜 마음으로 서둘러 교회에 모여, 하나님과 대화하고 찬송으로 그분께 섬기며, 그 대가로 일시적이고 덧없는 것이 아니라, 영혼에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선물을 받도록 합시다. 성전에 도착하면, 한마음으로 주 하느님께 찬양을 높이 외치고, 그 후 시편 찬송에 귀를 기울이며 경건하게 성경 봉독을 따라가라. 그리하여 이 두 가지로 깨달음을 얻어, 기쁨 가운데 예배에 열매 맺는 시간을 보내며 마귀를 부끄럽게 하라. 그러나 이 과정에서 내면적으로 정신을 차리고 기도를 드리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래야만 맑고 깨끗한 모습으로, 더 나아가 빛을 받은 모습으로, 어둠에 가려지지 않은 채 성전에서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예배 순서가 끝났습니다. 조용하고 평화롭게 기도처에서 나가십시오. 그 후, 한 사람은 공부에 매진하되, 이때 시편 찬송을 통해 모은 보물을 헛된 말로 헛되이 하지 않도록 주의하고, 오히려 지금 배우게 될 내용을 그 선함에 더해야 합니다. 다른 이는 원하고 필요를 느낀다면 침상에 누워 휴식을 취할 수 있다. 다만 이때에도 십자 성호를 긋고 , 경건하게 누운 뒤, 유혹자인 원수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묵상하며 어떤 시편을 마음속으로 읽어야 한다. 왜냐하면 악마들은 예배가 끝난 후, 성전에서 주의 깊고 경건하게 지내며 그들에게 가한 패배를 갚기 위해, 우리의 영혼을 불선한 생각으로 교란시키기를 좋아하며, 우리가 교회 찬송과 성경 봉독을 통해 선하게 모은 것을 악하게 낭비하게 만들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그들은 우리의 생각을 어둡게 하고, 시편 찬송으로 인해 지친 몸을 순종하지 않게 만들며, 부적절한 감정과 환상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물론, 잠을 자지 않고 시편에 대한 사색에 몰두하거나 다른 어떤 일에 전념하는 사람이, 견딜 수 없는 잠의 유혹에 이끌리지 않는 한 즉시 침대로 달려가지 않는 것이 더 낫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경우 그는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시간을 보낸 후, 우리 모두는 서둘러 서로 뒤처지지 않고 첫 번째 시간의 예배를 드리러 나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왜 우리의 상을 잃고 양심을 무겁게 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 후, 하나님께 “우리 손의 일이 잘 이루어지게 하소서”(시 89:17)라고 기도하고, 하루 종일 선한 일을 행하며, 할 일이 배정된 대로 각자가 따로 자신의 일을 하든지, 필요할 때는 모두 함께 한 가지 일을 하든지, 정해진 대로 일에 착수하십시오. 그러니 여러분의 수고와 일은 시편 낭송과 기도, 선한 마음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밭일이나 포도원 일, 부엌일, 혹은 정해진 시간에 관례대로 행해지는 다른 어떤 일이든 간에, 이 모든 것이 시편 낭송과 함께 성실하게 수행되기를 바랍니다.

12. 너희의 말은 언제나 마땅한 주제에 관한 것이 되게 하라. 그것이 육신의 삶에 관한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예를 들어 어떤 트로파리이든, 혹은 어떤 행위가든 간에 말이다. – 서로 선한 일에 경쟁하라. 너희 각자는 저마다의 미덕을 지니고 있으나, 한 사람에게 부족한 것은 다른 사람이 갖추고 있으니, 그는 마치 꽃에서 부지런히 꿀을 모으는 착한 벌처럼 그것을 빌려 쓰라. – 안일함은 우리에게서 멀리 떠나게 하고, 나태함은 쫓아내라. – 하나님께는 따뜻한 마음을 품고, 신앙의 수련에는 인내합시다. 그리고 금식이나 밤샘 기도, 추위나 더위, 모욕, 생필품의 부족 등 그 어떤 것도 우리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 사이에 장벽이 되지 않게 합시다. 모든 것을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고, 우리의 구원을 무엇보다 우선시합시다.

13.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얼마나 끔찍한 고난을 겪으셨는지 기억하며, 모든 것을 기꺼이 견뎌내자. – 종과 주님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는가? –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견디든,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자비로우신 주님께서는 그분의 자비로 우리의 작은 순종도 받아 주시며, 시편 144편 18절에 기록된 대로 그분을 견디는 자들에게 가까이 계시고, 그분을 찾는 자들에게 나타나시며; 만약 주님께서 우리에게 문을 열어 주신다면, 우리가 끈질기게 구하면, 우리를 받아 주시고 하늘 너머의 기쁨과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닌 천국 왕국의 혼인 잔치장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14. 하늘과 땅과 거룩한 천사들을 증인으로 삼아 여러분에게 외칩니다. – 여러분의 구원을 소홀히 여기지 말고, 단 하나의 계명도 경시하지 말며, (생각의) 계시가 없는 어둠 속을 걷지 마십시오. 은밀한 음식을 피하고, 달콤한 것들에 탐닉하지 말며, 너희 영혼을 칼로 찌르지 말라. 즉, 너희 자신의 지체들에 대해서조차도, 그것들이 그리스도의 것이며 그러므로 존귀하다는 것을 기억하며, 그 안에 건방진 불을 지피지 말라, 비방하지 말고 서로에게 분노를 품지 말며, 시기심을 품지 말고, 악으로 악을 갚지 말며, 권세를 추구하지 말고, 때이르게 성직의 지위를 탐내지 말고, 마음속으로 그런 생각에 탐닉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영적 지도자들에게) 기꺼이 모든 것을 털어놓음으로써 치유를 받고, 이를 통해 건강을 유지하며, 모든 일에 진심으로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사제직이며, 성사이며, 신성함입니다!

15. 내 겸손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순수한 마음으로 털어놓고, 자신에 대해 겸손한 생각을 품으며, 모든 피조물 중에서 가장 낮은 자로 여기고, 내 겸손으로부터 받은 것보다 더 높은 것을 추구하지 않는 자, 바로 그 사람이 내 생각에 높고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다! 그러나 나의 지시를 훑어보며 제멋대로 논평하거나, 왜 한 사람에게는 이런 임무를 주고 다른 사람에게는 다른 임무를 주었는지, 왜 한 사람은 성직자 반열에 올리고 다른 사람은 다른 자리에 배치했는지 따지는 것은 여러분에게 유익하지도 않고 품위에도 어긋나는 일입니다. – 우리 주님이시며 하나님이시여, 합당한 자를 합당하지 않은 자로부터 구별하시고 “거름더미에서 가난한 자를 높이시는”(시 112:7) 분이시며,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와 지혜를 주시고 연약한 자들을 힘으로 띠어 주시는(시 17: 33), 그분께서 여러분을 바로잡아 주시고, 마음을 평온하게 하시며, 그분의 몫으로 받아들이시고, 복된 삶을 주시며, 모든 일에서 여러분을 굳건히 하여 완전한 일을 이루게 하시고, 계명을 지키게 하시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천사들을 본받아 천국을 상속받게 하소서.

 

14. 하느님께로 향하고, 그 밖의 모든 것은 아무것도 여기지 마십시오

14. 1) 하느님께로 향하고, 그 밖의 모든 것은 아무것도 여기지 마라. – 2) 수도원에서 온갖 수고를 다하는 이는 복을 누리기 위해 하늘나라로 잘 나아가고 있다. – 3) 너희의 겉모습은 훌륭하나, 너희 가운데 내면의 태도 면에서 유다나 히에세아, 또는 그와 같은 자들이 없는지 살펴보라. – 4) “이것저것을 하겠다, 저것을 이루겠다”고 말하지 말고, 모든 후속 일을 주님께 맡기고 수고하라. [1, 16]

16. 오라, 자녀들아, 내 말을 들으라.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내 겸손한 말씀을 마음에 새기라! 나는 모든 이에게 내 외침을 전하며, 모든 이에게 선포하노니, 하나님께로 올라가라. 정욕을 버리라. 이것이 너희에게 외치는 예언의 말씀이니, “오라, 우리가 주님의 산으로, 야곱의 하나님의 집으로 올라가자”(사 2, 3) – 무욕의 집으로, 그리하여 우리의 지혜로운 눈으로 우리를 위해 마련된 기쁨과 하늘의 복에 대한 약속을 보리라. 열정을 품고, 비둘기처럼 불타는 날개를 펼치고 날아올라, 이곳에서 덕의 오른편이 있는 곳으로 치솟으십시오. 하나님을 갈망하는 기쁨과 영적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가장 달콤한 사랑을 맛보십시오. 그리고 그 안에서 다른 모든 것을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며, 헛된 영광과 육신의 정욕, 야수 같은 분노를 버리십시오; 그리고 이곳에서 위로가 되는 것처럼 보이는 그 어떤 것도 너희를 사로잡을 수 없을 것이니, 마치 단단히 허리를 동여맨 자들처럼, 우리는 가볍고, 예리하며, 천국으로 이끄는 길을 따라 빠르게 나아갈 것이다.

17. 여행하는 자는 필연적으로 고난과 궁핍을 겪게 마련이며,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시다시피, 우리의 일은 수고와 헌신, 그리고 피로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일하고, 지치고, 땀을 흘리며, 굶주림과 갈증을 견뎌냅니다. 어떤 이는 밭에서, 어떤 이는 포도밭에서, 어떤 이는 기름 짜는 돌절구 옆에서, 어떤 이는 부엌에서, 어떤 이는 건축 현장에서, 어떤 이는 저장고에서, 그리고 단순히 각자 맡은 일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이들은 하나님의 길을 걷고 있으며, 위대한 도시에 가까워지고, 죽음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예비된 선한 것들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18. 우리가 선하게 행하는 자들을 분명히 보고는 위로를 받지만, 질서를 어기는 자들을 보면 분개하고 슬퍼하며, 가능한 한 그들을 바로잡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내면은 오직 여러분 자신과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 그러나 너희 가운데는 마치 어둠 속에 있는 것처럼 은밀히 부적절한 일을 행하는 자가 아무도 없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전지전능하신 분의 눈앞에서는 아무것도 빠져나가지 못하지만, 우리의 눈앞에서는 빠져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항상 여러분에 대해 가장 좋은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알겠습니까? 여러분 열두 제자 가운데 유다와 같은 자가 있지 않을까요? 선한 스승 기에세아 곁에, 마음속에 영원한 나병을 품고 있는 악한 자가 있지 않을까요? 여러분 가운데서도 제사장 엘리야의 아들들처럼, 몰래 음식을 먹으며 하나님을 노하게 하는 자들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들의 비참한 결말은 죄인인 엘리야보다 나에게 더 큰 재앙이 될 것입니다. – 우리도 어떤 해를 입지 않게 하소서,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 사도들에게 거짓말을 하려다 쓰라린 파멸을 맞이한 아나니아와 사프이라와 같은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가운데서도 마음속에 거짓을 품고, 질문에 대답하거나 우연한 대화 중에 진실하지 않게 말하는 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또한 시몬 마술사의 타락을 두려워합니다. 그는 사도들의 수장인 성 베드로와 함께, 겉으로는 그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척하면서도, 실은 인간의 명예와 영광을 위해 그러했던 자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중 누구도 뒤를 돌아보지 말고, 처음 가졌던 결심을 저버리지 마십시오!

19. 아무도 “이것저것을 하겠다”, “몇 살이 되면 이것저것을 성취하겠다”라고 말하지 말라. 이런 말을 하면서도 오늘 하루를 살 수 있을지조차 모르는 너는,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네게서 빼앗을 것이니, 네가 준비한 것은 누구에게로 가겠느냐” (눅 12:20). 사도들이 스승이시며 만물의 주님이신 하나님과 맺은 끊을 수 없는 일치를 본받아, 주님의 눈앞에 항상 서 있는 것처럼 우리의 구원을 향해 서둘러 나아가자. 앞으로 닥칠 모든 일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이곳에서 약간의 고난과 슬픔을 기꺼이 감내하여 영원히 기뻐할 수 있도록 하자. 하나님께서 이를 부르시고, 성령께서 이를 도우시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를 굳건히 세우십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마귀는 이미 쫓겨났고,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셨으며, 죽음은 더 이상 다스리지 않습니다.

 

15. 세상에서 도망쳤으나, 원수들이 일으키는 정욕의 파도에서는 도망치지 못했습니다. 이를 주의 깊게 살피고 맞서야 합니다.

15. 1) 세상에서 도망쳤으나, 원수들이 일으키는 정욕의 파도에서는 도망치지 못했습니다. 이를 주의 깊게 살피고 맞서야 합니다. – 2) 믿음으로 순종의 기적을 보여준 본보기들: 도시페이, 아나니아, 사가리아 등. – 3) 계명의 길을 걷고, 불평 없이 순종하며, 구원을 얻으라. [1, 17]

20. 비록 우리가 세상의 모든 것에서 도망쳐, 마치 안식처에 들어선 듯 우리 신성한 수도복을 입었으나, 그럼에도 우리는 마치 바다 위에 있는 것처럼 이 세상에 머물러 있으며, 언제 악마의 거센 바람이 우리를 향해 불어와 우리 영혼의 배를 심연으로 가라앉히려 할지, – 어디서, 어떻게 마음속의 해적들을 마주하게 될지, – 어떤 정욕이라는 수중 암초에 눈치채지 못한 채 부딪히게 될지, 그리고 어떻게 평생 동안 파선 없이 땅에서 하늘로 향하는 항해를 완수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 자녀들아, 귀를 기울이고 경계하며, 깨어 있고 주시하며, 마귀의 온갖 교활한 속임수를 꿰뚫어 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 준비되지 않은 채로 정욕의 유혹에 맞서지 못하고, 그 공격을 물리치지 못하며, 믿음의 키를 잡고 무사히 항해를 계속할 수 있을 것이다.

21. 수도자의 삶을 배우는 이들은 선조들의 훌륭한 본보기를 통해 깨달음을 얻으며,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자신의 수련을 굳건히 이어간다. – 성 도시페이는 믿음으로 순종의 여정을 완수하였으니, 따져 묻지 않고 지도자의 모든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며, 때로는 뺨을 맞기도 하고 때로는 조롱을 당하기도 하면서도 불평 없이 견뎌 냈습니다. 믿음으로 복자 아바 키르는 15년 동안 용감하고 청년다운 기개로 구타와 조롱, 박해를 견뎌냈는데, 마치 고난의 무게를 느끼지 않는 듯했으며, 불평은커녕 성스러운 스승께서 그에게 묻으실 때 공격자들을 강력히 변호하고 옹호하기까지 했다. 믿음으로 거룩하게 된 테오도르는 수장직에 대한 생각 때문에, 대 파코미우스로부터 3년 동안 파문당했으나, 저항이나 불평 없이 이를 견뎌 냈다. 믿음으로 순종의 성숙한 열매를 맺은 이는, 3년 동안 인내와 열정으로 아버지의 지팡이를 가꾸어 온 자이다. 믿음으로 아카키, 영원히 살아계신 분은, 때로는 눈 밑에 멍이 들기도 하고, 때로는 뺨에 맞은 자국이 남기도 하며, 때로는 이리저리 신체의 일부가 상처 입기도 했으나, 모든 것을 겸손히 참아내고 불평 없이 견뎌냈으며, 그로 인해 불멸의 영광을 얻었습니다. 믿음으로 영원히 기억될 자카리아는 비록 신성한 성령으로 충만했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상처를 참아냈으나 아버지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 경이로운 어떤 이는 악어에게 실려 강을 건넜습니다. 그리고 존경받는 모든 성부와 완전한 신자들은 믿음의 무기로 사탄의 유혹이라는 불과 물을 뚫고 지나가 영원한 안식의 영역에 이르렀습니다.

22. 구원받고자 한다면, 그에 대한 어떤 장애물이나 장벽도 없습니다. 구원받은 자들과 구원받고 있는 자들의 거짓 없는 본보기가 눈앞에 있습니다. 나를 쳐다보지 말고, 내 말을 들으십시오. 비록 내가 죄인일지라도, 여러분에게 진리를 말하며 바른 길을 보여 드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내 자녀들아, 불순종을 버리고 불신을 떨쳐 버리며 힘써라. 주님의 계명의 길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걸어가라.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그리하면 열릴 것이니라”(마태복음 7:7). 나는 이것을 확실히 알고 있으며, 이에 대해 완전히 확신한다. 불평 없이 순종을 실천하라. 게으름 피우지 말고 너희에게 맡겨진 일을 성실히 수행하라. 불만스러워하지 말고, 반박과 보복에 급급하지 말며, 영혼의 파멸과 멸망을 초래할 만큼 무모하지 말라. 영광을 추구하지 말라. 그러면 미래의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바로 이곳에서, 당장 눈부시게 영광을 얻게 될 것이다. 서로 다투지 말고, 한 사람에게는 더 고귀한 임무를, 다른 사람에게는 더 낮은 임무를 맡긴다는 이유로 날카롭고 모욕적인 말로 서로를 자극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가장 먼저 인정받게 될 것이며, 영원한 신의 거처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가르침에 반하여 행한다면, 그 반대의 결과를 맞이하게 될 것이며, 악을 행하는 모든 영혼에게는 분노와 진노, 그리고 수치가 닥칠 것입니다(롬 2:8, 9). 지금 이 순간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말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십시오!

 

16. 여러분의 번영을 보고 기쁩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여 멈추지 않도록, 부디 그 흐름을 끊지 말고, 모든 부적절한 것을 피하며, 마땅히 해야 할 모든 일에 열심을 내어 주십시오.

16. 1) 여러분의 번영을 보며 기쁩니다. 그러나 멈춰 서지 않을까 두려워하오니, 간청하건대 그 흐름을 끊지 마시고, 모든 부적절한 것을 피하며, 마땅한 모든 일에 열심을 내십시오. – 2) 눈앞에 죽음이 다가옴을 보며, 마음의 태도를 바로잡읍시다. 큰 육체적 고행을 감당하기는 우리에게 부담스럽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선한 태도를 간직한다면, 규율과 지침에 따라 모든 면에서 절제하며 살아가더라도 위대한 성인들의 뒤를 따를 수 있을 것입니다. – 3) 공동체적 형제애는 그 구성과 기적 모두에서 놀랍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정욕을 이기는 것은 악마를 쫓아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 18]

23. 나의 겸손한 영혼은 갈망하며, 여러분이 참된 길을 걷고 매일 성공을 향해 전진함으로써 구원받기를 간절히 바라며 그 소망 속에 녹아들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모든 것을 버리고 세상에 대한 헌신적인 은둔을 실천하며, 가족과의 돌이킬 수 없는 단절을 선택하고, 모든 재산을 흩어 버리며, 심지어 자신의 의지마저 십자가에 못 박는 모습, 그리고 여러분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을 보며, 나는 위로를 얻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중 누군가가 어떤 식으로든 바라는 복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저를 사로잡습니다. 그러므로 간청하고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여러분의 흐름을 막지 마시고, 오히려 점점 더 열정을 다해 선을 행하여 스스로를 세우고 이웃을 교화하며, 매일 하나님과 형제들 앞에서 흠 없고 헛되지 않은 모습을 보이되, 또한 시기심에 찬 열정이나 해로운 불평, 하나님을 거스르는 교만, 노예 같은 집착에 굴복하지 말고, 순종하며 온유하고 평화롭게 행동하며, – 허영과 출세욕 없이, 현명하고 성실하게, 선 그 자체를 위하여, 우리 거룩한 공동체를 위하여, 하나님의 계명과 우리 원장님의 명령을 위하여, 그리고 총체적으로 말해 우리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날마다 오직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한 가지를 찾고 그 한 가지만을 향해 힘쓰며, 이 현세의 삶이 끝날 때까지.

24. 마지막 때가 아직 오지는 않았지만, 빠르게 다가오고 있으며, 어떤 이들에게는 이미 문 앞에 와 있습니다. 왜, 마치 우리 눈앞과 발치에 서 있는 것처럼, 우리를 두렵게 하고, 겸손하게 하며, 정화시키고, 어떤 악행이나 바른 길에서 벗어난 실수에 대한 죄책감에서 벗어나게 하여, 경건과 평온, 선한 일치를 바탕으로 서로를 돌보는 삶을 살도록 가르치며, 또한 신성한 성경을 연구하고, 순수한 기도를 드리며, 감당할 수 있는 일을 하도록 이끕니다. 금식은 비록 육체적인 것이지만, 거룩한 겸손이 이를 이끈다면 영적 삶을 위한 도구입니다. 성부들의 위대한 업적에 우리로서는 감히 닿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우리에게 유익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앞서 언급된 것들(즉, 성인의 기념, 경건함, 평온함, 한마음, 성경 공부, 순수한 기도, 수고, 그리고 감당할 수 있는 금식)을 지키며, 우리가 처한 종속된 신분에서 우리에게 합당한 것을 선택하고, 법에 따라 공동체 규율을 엄격히 준수해야 합니다. 즉, 음식과 음료에 있어, – 빵과 채소뿐만 아니라 포도주와 올리브 기름, 때로는 생선과 치즈도 적당한 절제를 지키며 섭취하되, 우리 자신의 판단에 따르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부적절하며, 우리가 정한 대로 행해야 합니다. 또한 그 밖의 모든 일에서도 지혜롭고 분별 있게 행동하며, – 잠을 잘 때나 쉴 때, 걸을 때나 앉을 때, 함께 모여 대화할 때나 축제를 즐길 때, – 마찬가지로 나무를 심고, 씨를 뿌리고, 건축하고, 목공일을 할 때에도 – 그렇게 행동할 것이며, 여러분께 장담하건대, 그 선조들의 위대함에 조금도 뒤처지지 않을 것입니다.

25. 위대한 광경과 기적 중 하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서로 다른 나라와 가문, 서로 다른 연령과 삶의 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의 몸으로 모여 조화를 이루고, 한마음으로 행동하며 함께 섬기도록 지향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모임은 다중의 영혼을 지니면서도, 마음도 다양하고 지혜도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악한 목적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영광을 위해 일하기 위해 한마음 한뜻으로 머물러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모임(형제단)은 그 자체로 위대하고 존경받을 만하여, 위대한 기적들과 맞먹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땅히 살아갈 때, 그 안에서 실제로 기적들이 이루어집니다. 왜냐하면 여기서도 악령들이 쫓겨나지 않습니까? – 쫓겨납니다. 특정 날짜가 아니라 매일, 심지어 매시간마다 쫓겨나고 불타버립니다. 우리 각자는 정욕을 이김으로써, 그 정욕의 악마를 불태우고 쫓아냅니다: 음행을 이기는 자는 음행의 악마를 쫓아내고, 나태함을 이기는 자는 나태함의 악마를 쫓아내며, 분노와 원한을 이기는 자는 분노와 원한의 악마를 쫓아내고, 비난과 불평을 이기는 자는 비난과 불평의 악마를 쫓아냅니다. 다른 정욕들을 이기는 것에 대해서도 이와 같이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니 원하신다면, 여러분은 기적을 행하는 자들이 아니겠습니까? – 그리고 주님께서는 여러분이 삶 속에서 보여주는 이러한 태도를, 그토록 놀라운 기적을 행했던 은둔자들과 기둥 수련자들의 위업처럼 받아들이십니다.

 

17. 무엇을 위해 세상을 떠났습니까? 정화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이 삶의 정신, 특히 수도원장님에 대한 믿음 안에서 사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17. 1) 무엇을 위해 세상을 떠났습니까? 정화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이 삶의 정신, 특히 확고한 믿음 안에서 사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 2) 구원을 얻기 위해 우리 수도원에 들어옵니다. 그러니 수도자의 삶과 수도원의 규율에 대한 모범을 보여주십시오. [1, 19]

26. 우리 자신을 살피고, 절제하며, 깨어 있으며,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께로 높이 올려야 합니다. 위대한 아르세니우스의 그 잊을 수 없는 호소를 자주 되새기며 우리 자신에게도 되물어 봅시다. “아르세니우스여, 너는 무엇을 위해 이곳에 나왔느냐?” 우리도 세상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 그럼 무엇을 위해서인가? – 육체의 안식을 위해서도, 쾌락을 누리기 위해서도 아니며, 단지 문해력과 서예를 배우거나 지식을 습득하거나 훌륭한 낭독자가 되기 위해서도 아니며, 또한 자기 마음대로 자신을 섬기며 자기만족에 빠지거나, 명성을 추구하거나, 자만하거나, 다른 사람보다 우월함을 내세우거나, 권력을 탐하기 위해서도 – 그런 것들, 혹은 이와 유사한 어떤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 죄에서 정화되고, 신성한 경외심을 입으며, 심지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낮추기 위해서이며, 십자가의 죽음, 즉 자신의 내적 욕망을 버리고 육신의 정욕을 죽이는 것까지, 자신의 적 마귀와 싸우고, “이 세상의 어둠의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세력들과” (엡 6,12)와 싸우고, 육체의 다양한 유혹에 굴복하지 않으며, 마지막으로 자신의 지도자인 이구멘의 중보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얻어, 진정으로 마귀가 쏘아대는 모든 불타는 화살을 끄게 하려 함입니다(엡 6,16). 자, 이제 여러분은 이 일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말해 보십시오. – 살펴보고, 분별하고, 조사해 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가운데, 계명을 지키고, 죄를 파는 자들에게 자신을 넘겨주지 않으며, 순종에 정통하고, 완전한 고백을 통해 깨달음을 얻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겸손한 지혜와 황금처럼 빛나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순종으로 빛나는 자, 또한 마치 포르피르 망토를 입은 듯, 자신의 지도자인 이구멘에 대한 의심할 여지 없는 믿음으로 무장하여, 그가 지시한 일에서 흔들리지 않고, 그의 결정 이전에 아무것도 미리 단정하지 않으며, 그가 자신을 위해 구원의 길로 여기는 것 외에는 이 땅에서 그 어떤 것도 로 여기지 않는 자. 여기서 내가 말하는 것은 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엄격히 지키는 이들을 가리킨다는 점을 밝히겠다.

27. 참으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영혼들이 우리 수도원에 구원을 얻으러 찾아옵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운데서 계명을 지키는 일은 가장 완전하고 엄격해야 합니다. 그들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온 것이지, 어둠에 빠지기 위해 온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형제들아, 비록 내가 어두울지라도 빛나십시오. 비록 내가 부패로 가득 차 있을지라도 은혜로운 미덕으로 자신을 단련하십시오. – 너희의 칭찬은 무엇에 있어야 하겠느냐? 형제에게 말에서 양보하고, 결코 반박하지 않으며, 어떤 일에도 불평하지 않고, 악의 없는 어린 양이 되며, 가시 돋치지 않고, 우리 목자이신 그리스도께 온유하게 순종하며, 부적절한 웃음과 부끄러운 대화를 피하고, 시편을 노래하며 깨어 있고 기도에 전념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니 내 자녀들아, 더욱더 지혜를 쌓고, 정결하게 되며, 순결을 지키고, 온전해지며 거룩해지라. 비록 이 말이 대담하게 들릴지라도, 시편 기자를 통해 구주께서 약속하신 대로 “너희는 신들이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라” (시 81:6; 요 10:34).

 

18. 공동체 생활은 지극히 훌륭하니, 그 영 안에서 사는 자는 복이 있도다

18. 1) 공동체 생활은 참으로 훌륭하며, 그 정신으로 사는 자는 복이 있다. – 2) 헛되이 날들을 보내지 말고, 더욱더 번영해야 한다. – 3) 조상들에게 영광을! 그들은 진리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수도자의 삶을 본보기로 살았다: 그들을 본받으라. [1, 20]

28. 게으름 피우지 않고 여러분에게 간곡히 권합니다. 여러분의 고결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 열심을 내십시오. 왜냐하면, 우리의 고결한 삶에 대해 상기시켜 드리는 것만큼 여러분에게 유익한 다른 무엇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가 늘 같은 이야기만 반복한다고 해서 지루해하지 마십시오. – 우리가 또 무엇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 우리가 시작한 삶의 방식을 바꾼 것도 아닌데, 대화의 주제를 다른 것으로 바꿀 이유가 있겠습니까? – 아닙니다. 우리는 같은 말을 여러 번, 같은 주제를 수없이 반복해서 말해야 하며, 우리는 결코 선을 칭송하고 악을 꾸짖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이며, –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물러나 형제들이 한마음으로 함께 사는 삶이 얼마나 선하고 복된 것인지 선포하며; 또한 이 공동체에 들어와 겸손을 띠고, 순종을 입으며, “아론의 수염에 닿는 미로” (시 132:2)임을 확증하리라. 만일 누군가 이 공동체에 들어와 겸손의 지혜를 입고, 순종의 옷을 입으며 자신의 뜻을 끊어내고, 하느님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받아들여, 영 안에서 힘에서 힘으로 성장하며, 모든 것을 사랑하며 공동체의 규율에 요구되는 모든 것을 인내로이 이행하고, 어떤 일에서도 교활하게 굴지 않으며, 겸손한 수련자를 하느님과 원장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의심스러운 생각과 계략을 품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러니 형제들아, 공동체에 존재하는 모든 것과 일어나는 모든 일을, 비록 어떤 것은 불쾌해 보일지라도, 거룩하고 구원을 주는 것으로 사랑으로 받아들이자. 이는 이를 통해 우리의 거친 모서리가 다듬어지고, 우리가 매끄러워져 우리의 목표를 향해 더 수월하게 나아갈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29. 서로에게 유익을 주도록 힘쓰고,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지 말고, 온갖 면에서 공동체에 유익한 것을 추구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모두, 영혼 안에서 점점 더 굳건해지고 정돈되어 가며, 끊임없이 순종하는 자세를 유지하고, 매일 새롭게 되며, 날과 달과 해가 지남에 따라 점점 더 나은 쪽으로 나아가십시오. 성공하고 풍요로워질 시간이 있는 동안 말입니다. 게으름 피우지 말고, 잠과 안일함에 빠지지 말며, 이 생의 날들을 헛되이 보내지 마십시오. 결산의 때가 오면, 그때 우리는 수고의 열매와 게으름의 무익함을 분명히 보게 될 것이며, 자신과 자신의 일에 주의를 기울여 열매를 맺은 것과, 이를 소홀히 하여 파멸에 이른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30. 참으로 지혜롭고 분별력 있는 우리 성스러운 성인과 경건한 선조들의 영혼들에게 영광을 돌리세! 그들은 진리의 말씀을 헛되이 듣지 않았고, 그것을 땅에 내던지지도 않았으며, 발로 짓밟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땀 흘리며 성실히 수고하고, 자신을 낮추며, 자기 뜻을 억제하고, 마지막이 되는 것을 기뻐하며, 모든 면에서 검소함과 가난을 사랑하고, 분쟁을 피하였으며, 모든 것을 인내로 기꺼이 견디며, 아버지의 명령에 기꺼이 순종하고, 신앙으로 불타올랐으며, 침묵을 사랑하고, 연약한 자들의 연약함을 짊어졌으며, 순교자들처럼 그들을 위해 자신의 피까지 흘릴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더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여러분 스스로도 여러분의 선조들과 지도자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을 본받고, 그들의 발자취를 따르며, 그들의 영광을 누릴 자격을 얻으십시오.

 

19. 각자는 자신의 덕목에서 더욱더 발전하라. 순종하는 자는 순종에, 겸손한 자는 겸손에, 근면한 자는 수고에

19. 1) 각자는 자신의 덕목에서 더욱더 발전하라. 순종하는 자는 순종에, 겸손한 자는 겸손에, 근면한 자는 수고에. – 2) 어떤 순종의 임무를 맡았든지, 그 일에서 성실하라. – 3) 너희가 이렇게 행하면,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도, 그리고 내세에서도 너희를 위로하실 것이다. [1, 21]

31. 처음 시작했던 대로 계속해 나가며, 선행을 멈추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욱더 힘써 실천하고, 영적으로 점점 더 불타오르며 하늘의 삶이 이끄는 높은 곳으로 서둘러 나아가라. “순종하는 자”는 순종의 열매를 거두기 위해, 권세 있는 자뿐만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소란이나 저항 없이, 무엇이든 명령하는 대로 순종하며, 더욱더 순종하라. “겸손한 자”는 더욱더 자신을 낮추어, 모든 일에 양보하고, 모든 것에 동의하며, 자신을 낮추는 마음가짐으로, 소박한 외모와 온화한 말투, 그리고 말을 아끼는 태도를 유지하라. 과거에 귀족 출신이었을지도 모른다거나, 이미 오랫동안 수도복을 입고 지내왔거나, 높은 직위를 맡고 많은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생각을 마음에 품지 말고, – 여기에 덧붙이자면, – 똑똑하고, 당당하며, 말솜씨가 좋고, 무엇이든 잘 해낼 수 있거나, 다른 어떤 칭찬받을 만한 자질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눈을 치켜뜨거나 엄한 눈빛을 보내거나 특이한 걸음걸이를 취하지 말라. “근면한” 이며, 주어진 순종을 수행하는 데 성실하여, 마치 주님을 섬기듯 사람에게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 일하며, 점점 더 부끄러움 없는 일꾼으로 드러나, 가장 힘든 일을 스스로 맡아 이웃을 위해 과로하는 것을 기뻐하며, 이를 통해 하늘에 큰 상이 쌓여 있음을 확신하는 자.

32. 우리 모두, 즉 창고지기, 병동 간호사, 서예가, 정원사, 채소 재배자, 구두 수선공, 요리사, 관리인, 교사, 경비원, 기상 알림 담당자, 규정 준수 담당자, 등불 관리인, 제빵사, 목수, 그리고 크든 작든 어떤 일에든 크든 작든, 맡겨진 일을 수행하며, 영원한 복에 대한 꺼지지 않는 갈망으로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며, 용기 있게 자신의 수고를 감당하고, 모든 것을 기꺼이 참아내며, 모든 일을 하나님께 기쁘시게 하도록 행하고, 스스로에게 유익을 주며, 서로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여, 각자가 형제를 위해 자신의 영혼까지 바칠 준비가 되어 있도록 합시다.

33. 만일 여러분이 이렇게 행한다면,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기 위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겸손의 극한까지 자신을 비우시어, 만물의 주님이시면서도 종이 되시고, 십자가의 죽음을 맛보신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여러분을 위로해 주실 것이니, – 나 같은 죄인에게도, 계명을 지키는 여러분에게도, 이곳에서 여러분의 행실을 보는 모든 이에게 찬양받을 뿐만 아니라, 적과의 투쟁과 그 공격과 기만을 물리치는 모습을 보는 이들에게만 찬양받는 것이 아니라, 장차 올 세상에서 천사들의 합창단과 함께 그리스도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기뻐할 이들에게도 그러하리니, 그곳은 “기뻐하는 모든 이의 거처”인 곳이니라.

 

20. 여러분의 성공이 저를 기쁘게 합니다... 어떤 이에게는 겸손이, 어떤 이에게는

20.

1) 여러분의 성공이 저를 기쁘게 합니다... 어떤 이에게는 겸손이, 어떤 이에게는... (수도자의 미덕을 열거함). – 2) 같은 맥락에서 – “아직 오래 살아야 한다, … 할 시간이 있다”는 생각을 점점 더 멀리, 더 높이 떨쳐내야 한다. – 3) 타고난 재능이나 얻은 것으로 자만하지 말라. 그러면 하느님께서 더 큰 것을 주실 것이요, 반대로 자만하면 손해를 보게 될 것이다. [1, 22]

1. 농부는 열매가 풍성한 밭을 기뻐하지만, 수도원장들은 자신들의 지도 아래 맡겨진 영혼들의 영적 결실을 더욱 기뻐합니다. 여러분도 저를 기쁘게 해줍니다, 나의 자녀들아, 나의 심은 나무여, 하나님의 열매입니다 (고린도전서 3, 6). 구원에 필요한 모든 일에 대한 여러분의 노력과 열심, 그리고 열정을 보며 기쁩니다. 나를 기쁘게 하는 이들은, 어떤 이에게는 온유함이, 어떤 이에게는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이, 어떤 이에게는 수줍음과 공손함이, 어떤 이에게는 원수의 유혹을 물리치고 이겨내는 모습이, 어떤 이에게는 자신에게 맡겨진 순종을 불평 없이 이행하는 태도가, 어떤 이에게는 마음의 평화와 온유함이, 어떤 이에게는 소박한 성품이, 누구에게서는 나의 위엄보다 나의 겸손을 더 믿는 신앙이, 누구에게서는 무정함과 평화주의적이지 않은 성품이 있더라도, – 그러나 여러분 모두의 영적 성취와 완성과, 하나님의 위로부터의 인도하심과 나의 아버지이자 여러분의 아버지의 기도로 말미암아 한 몸으로 사랑으로 연합하고 조화를 이루는 것을. 이 일을 기뻐하며 놀라워하노니, 이는 참으로 놀라울 만한 일이기 때문이다.

2. 주님께서 나의 부주의와 그분의 죄로 인한 깊은 슬픔 때문에, 우리 위에 뻗어 계신 그분의 섭리의 오른손을 거두어 버리시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가운데, 말할 뿐만 아니라 생각조차 해서는 안 될 어떤 것—어떤 영혼의 나태함과 혼란, 혹은 은밀하거나 명백한 타락—이 들어오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스스로를 잘 살피고, 여러분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서 벗어나지 말고, 그 길을 계속 걸어가며, 빛에서 빛으로, 경건함에서 경건함으로 변화되어 가십시오. 흔들리지 말고, 하나님과 천사들, 그리고 나의 겸손 앞에서 약속한 일들의 범위를 벗어나지 마십시오. 오히려 수고에 수고를 더하십시오. 장수에 대한 생각이 여러분을 흔들지 않도록 조심하고, 자기 저항과 자기 절제 속에서 살아가겠다는 굳은 결심이 약해지지 않도록 하십시오. 이 생각은 거짓이다. 우리의 삶이 무엇이겠는가? 꿈과 그림자일 뿐이다. 이 생각은 거짓이지만 유혹적이다. 왜냐하면 겸손에 겸손을, 순종에 순종을 더해야 할 때, 오히려 자신에게 한 번 또 한 번의 타협을 허용하게 만들기 때문이며, 이는 종종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3. 경계하라. 너희 안에서 완전함으로 보이는 것이 죄의 가시가 되지 않도록 하라. – 무엇이든, 여러분이 모든 것을 빨리 배우는 능력도, 지식도, 영적 삶에서의 어느 정도의 경험도, 때때로 보이는 양심도, 근면함도, 수공예의 솜씨도, 조화로운 노래도, 듣기 좋은 목소리도, 당당한 기품도, 그 밖의 이와 유사한 그 어떤 것도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물로서, 이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 앞에서 경외심과 겸손을 더욱 키우는 데 쓰여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더욱 자비로우시고 더 풍성하게 베푸시게 할 것이며, 온갖 선함으로 풍요로워져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될 것이며, 선물 위에 선물을 더해가며 아름답게 단장될 것입니다. 반대로, 만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고개를 치켜들고, 형제들 앞에서 교만해져 눈썹을 치켜올리고, 어깨를 으쓱이며, 거만한 걸음걸이를 하고, ‘이건 왜 이러는지, 저건 왜 저런지, 왜 이렇게 했는지, 저건 왜 다르게 했는지, 왜 나에게 이런 순종의 감독이 맡겨지지 않았는지’라고 험담하며, 또는 저 사람은 왜 이런 일을 주관하는지, 저쪽 일은 완전히 쓸모없어서 수고와 시간만 헛되이 낭비된다고 헐뜯는다면, –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결실의 시기를 흉작의 시기로 바꾸고, 이익을 얻는 시기를 손실을 입는 시기로, 선한 수고의 시기를 해로운 무위와 악행의 시기로 바꿔버릴 것이며, – 덕의 산을 오르는 대신, 죄의 심연으로 점점 더 깊이 빠져들게 될 것이다.

 

21. 선을 행하라. – 그리고 원수가 네 곁에 다가오지 못하게 하여, 그가 “모두가 악해졌다”고 외치게 하지 말라.

21. 선을 행하라. – 그리고 원수가 “모두가 악해졌다”고 외치게 하지 않도록 그를 가까이 두지 마라. [1, 28] 너희 영혼의 눈앞에서 계명의 길을 깨끗하게 지키며, 모든 걸림돌을 겸손히 깨닫고 바로잡으라. 그것이 비난받을 만한 불순종이든, 수치로 덮인 모순이든 간에, 바른 길로 나아가면 너희 영혼은 평안을 얻으리라. 우리의 원수는 온갖 구실을 이용해 우리 형제애 속으로 침투하여 그것을 뒤흔들려 한다. 그를 받아들이지 말고, 믿음의 방패로 스스로를 지키며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칼로 그를 물리쳐라. 그러면 이 파멸자는 결코 너희 안에서 자리를 잡지 못할 것이며, 너희를 미끄러지게 만들었다고 자랑하지 못할 것이다. 여러분은 그에게 뚫을 수 없는 하나님의 군대 한 부대임을 보여주십시오. 그리하면 그가 자랑하는 대신, 옛날 성 마카리오에게 그랬던 것처럼 “모든 악이 나를 대적한다”고 탄식하게 하십시오. 여러분에게는 그리스도 주님께서 지휘관이시며, 천사들이 도우미이자 보호자이십니다. “너희 발이 흔들리지 않게 하소서.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분은 졸지도 않으시며 잠들지도 않으시니”(시 120:3).

 

22.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지만, 지켜내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노력도 필요합니다

22. 1)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지만, 지켜 나가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노력도 필요합니다. – 2) 지금까지 주님께서 여러분을 잘 지켜 주셨고, 여러분은 번영했습니다. 기도와 침묵 등 그 길을 계속 걸어가십시오. – 3) 힘들고 슬픈 일을 인내하십시오. 온 생애는 단 하루에 불과하지만, 그 하루로 영원한 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1, 24]

4. 우리의 모든 번영에 대해 주님께 감사드리라. 사람의 모든 선함은 그분의 풍성한 은혜에서 비롯된 것이니,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그분을 통해, 그분 안에서” (롬 11,36)이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 감히 자신이 무언가라고 자랑하려 한다면, 사도의 말씀을 듣게 될 것이다. “네가 가진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은 것이 아니냐? 만일 네가 받았다면, 무엇을 자랑하느냐? 마치 받지 않은 것처럼?” (고린도전서 4, 7). – 그럼에도 불구하고, 겸손을 바탕으로 한 끊임없는 노력과 부단한 수고가 요구되며, 우리의 마음을 경건하고 신성한 삶 속에 굳건히 세우고, 보호하며, 집중시켜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선한 시작에서 물러서지 않고, 앞선 수고를 뒤따르는 나태함으로 인해 수치를 당하지 않으며, 또한 덕스러운 삶에서 악한 삶으로 되돌아가지 않고, 선한 변화로 점점 더 정화되고, 밝아지며, 매일 산을 오르는 것처럼, 빛나는 자들 중에서 가장 빛나는 자가 되고, 별에서 태양으로 변모하며, 힘에서 가장 용맹한 힘을 입어야 합니다. 그러니 간청하건대, 온갖 육신적인 꾀와 덕행의 가장 큰 걸림돌인 세속적인 명성을 버리고, 영적인 칼로 온갖 편애와 육신의 정욕을 잘라내며, 하나님께 굳게 붙어 영적인 사다리를 타고 그분께 올라가며, 매일 신성한 원리를 세우고 영적인 기초를 깊이 다지며, 욕망을 잘라냄으로써 육신의 오만함을 물리치고, 타오르는 열기를 눈물의 제물로 끄며, 음식과 음료에 대한 지루한 욕망이나 그 밖의 어떤 헛된 것들도 장차 올 복을 묵상함으로써 몰아내십시오.

5. 지금까지 나의 아버지이자 여러분의 아버지의 기도로, 주님께서 여러분을 잘 지켜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덕의 왕의 길을 걸으며 번영했고, 무욕의 아름다움으로 빛났으며, 정욕에서 벗어나 그 위에 서서 모든 세속적인 것을 왕처럼 다스리고, 마치 하나님과 함께 통치하는 것만큼 선하고 사랑스러운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고, 여러분에게 맡겨지고 여러분이 잘 걸어온 삶을 중단하지 말고, 오히려 점점 더 “고백하며 그 문으로 들어가고, 찬송하며 그 뜰로 들어가라”(시 99:4); 순종의 열매로 풍성해지고, 그 열매 속에서 너희의 거룩한 마음을 기쁘게 하는 회개의 포도주로 마음을 적시라; 그 밖의 다른 경건한 행실들도 멈추지 말고, 입을 다물고, 어떤 음식에 대한 거짓되고 제멋대로인 금식을 과시함으로써 형제의 양심을 상하게 하지 말고, 엄한 표정을 짓지 말고, 말을 많이 하거나 헛소리를 하지 말고, 이웃을 돕는 일보다 자신의 안식을 우선시하지 말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두 한 영혼, 한 마음, 한 뜻이 되십시오. 그분을 여러분의 머리로 삼으십시오.

6. “주 안에서, 그리고 그분의 능력의 힘으로 강해지라”(엡 6:10), 그리고 우리 죽음의 신비를 마음의 눈앞에 두고, 우리 삶의 모든 지속을 짧은 것으로 여기며, 모든 불쾌하고 슬프고 힘든 일을 용감하게 견뎌내라. 그리고 성 그레고리우스 신학자에 따르면, 구원의 주된 일에 열심인 이들에게 있어 온 생애는 단 하루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하루, 이 덧없이 지나가고 꿈처럼 스쳐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끝없는 기쁨과 환희의 왕국인 천국을 얻을 수 있다.

 

23. 원수, 곧 정욕을 일으키는 자에게 맞서라

23. 1) 원수, 곧 정욕을 일으키는 자에게 맞서라. – 2) 연장자들은 후배들을 도와주라. – 3) 몇 번이나... 정욕이 솟아올라도, 기도로 맞서면 모든 것이 가라앉을 것이다. – 4) 그러니 낙심하지 말라: 주님께서 가까이 계신다. [1, 25]

7. 힘내라, 나의 사랑하는 자녀들아, 힘내라, 나의 주님이자 주권자이신 분들아, 마귀의 꾀와, 매일 여러분을 향해 쏟아지는 그의 공격과, 정욕의 불길과, 낙담으로 인한 어둠과, 이곳저곳을 전전하는 비참한 삶과, 시기라는 뱀과, 제때가 아닌 말과 조롱을 자제하지 못하는 방종과, 여러분을 대적하고 맞서는 온갖 정욕에 맞서 힘써 싸우십시오.

8. 먼저 온 자들은 뒤늦게 온 자들을, 강한 자들은 약한 자들을, 유혹을 이겨낸 자들은 유혹받은 자들을, 영적 열매로 풍성해진 자들은 그 열매가 부족한 가난한 자들을, 성공한 자들은 초보자들을, 오래된 신자들은 최근에 믿음을 가진 자들을 도와주며, 손을 내밀고, 말로 깨우치며, 더 나은 길을 가르쳐 주고, 유익한 일에 용기를 북돋아 주십시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9. 여러분이 수련해 온 세월이 얼마나 되었는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그리고 어떤 유혹들을 겪어왔는지 되새겨 보십시오! 각자 몇 번이나 유혹에 휩싸였고, 지쳐 쓰러졌으며, 소심해졌는지 되새겨 보십시오. 그러다가 갑자기 권면의 말씀이나 형제적 기도를 통해 힘과 긍정적인 마음가짐, 굳건함, 생명의 기운, 그리고 고무감을 얻곤 했습니다. 그 후 다시 수련을 이어갔고, 또다시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으로 굳건해졌습니다. 여러분의 수행자적 삶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그러할 것이며, 심지어 그 이상일 것입니다. “우리는 불과 물을 지나 평온함”의 무정(無情)에 들어갈 것입니다(시 65:12).

10. 그러므로 누구도 낙심하지 말고, 누구도 기운을 잃지 말라! 서로 돕고, 서로 위로하며, 사랑과 인내, 그리고 하나님의 계명을 이행하려는 열정을 북돋아 주자.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참 하나님이시며, 의지할 곳 없는 자들의 소망이시며, 넘어지는 자들을 붙들어 주시는 분이시며, 병든 자들의 의사이시며, 행하는 자들과 함께 걸어가시며 그들의 수고를 덜어 주시는 분이시며, 한마디로 말해 땅 끝과 먼 바다에 있는 모든 이들의 소망이신 그분께서, 여러분의 길을 평탄하게 하시고 곧게 하시고, 또한 온전한 구원과 그분의 거처인 성읍에 이르는 바른 여정에서, 여러분의 모든 행실과 움직임에 번영을 주시기를.

 

24. 격한 정욕에 맞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감각, 특히 시선을 지키는 것, 육신에 안식을 주지 않는 것이다. 조심하라. 세례 후에 넘어졌으니, 스키마 서원 후에도 넘어지지 말라.

24. 정욕의 불타오름을 막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감각, 특히 시선을 경계하며, 육신에 안식을 주지 말아야 한다. 조심하라. 세례 후에 넘어졌으니, 스키마 서원 후에도 넘어지지 말라. [1, 27] 이곳의 날씨는 무더우며 불타는 듯하다. – 자연의 불이 아니라, 죄의 숯더미에서 뿜어져 나오는, 원수의 영들이 우리 마음에 정욕의 불꽃을 던져 넣음으로써 타오르는, 보이지 않으나 영혼을 태우는 불을 말한다. 그러나 여러분은 신성한 입술에서 강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성령의 부어주심(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으로 그 불을 끄고, 불타는 용광로 속의 세 소년처럼 그 불에 타지 않고 흠 없이 머물러야 합니다. 이와 더불어 감각을 잘 지키어야 하며, 특히 시력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합니다. 시력은 무분별하게 사용될 때, 우리의 원수가 영혼에 정욕의 불을 던져 넣는 데 가장 흔히 이용하는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육신으로부터 오는 다른 유혹들로부터도 스스로를 지켜야 하는데, 이는 음식, 음주, 수면 및 그 밖의 모든 육체적 안식에서의 절제 부족이 그 빌미를 제공합니다. 왜냐하면 전방위적인 절제에서 덕을 지키는 굳건함이 생겨나듯이, 이 점에 대한 부주의에서 온갖 죄의 폭정이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주의하십시오. 마땅한 서원을 통해 현재의 지위에 들어섬으로써 그 속박에서 해방되었으니, 다시는 그 노예 상태로 돌아가지 말고, 세례 후와 스키마(수도복)를 입은 후의 타락으로 인해 두 가지 고통을 자초하지 마십시오.

 

25. 정욕을 이기는 자에게는 면류관이, 정욕에 굴복하는 자에게는 고통이 따릅니다. 여러분이 전자의 부류에 속한다면 좋고, 후자의 부류에 속한다면 서둘러 바로잡으십시오.

25. 1) 정욕을 이기는 자에게는 면류관이, 정욕에 굴복하는 자에게는 고통이 따릅니다. 여러분이 첫 번째 부류에 속한다면 좋고, 두 번째 부류에 속한다면 서둘러 바로잡으십시오. 2) 계명을 향해 힘써라. 누구도 게으르거나, 마음이 두 갈래이거나, 자만하지 말라. – 3) 각자가 자신의 순종을 통해 자신의 몫을 다하라. 주님께서는 그것이 아무리 작더라도 받아 주실 것이다. – 4) 어려움 앞에서 멈추지 말고, 서로 돕고 나아가라. 5) 겉과 속의 고난은 변덕스럽다; 인내하라, 곧 편안함이 올 것이다. – 6) 수고 없이 면류관을 쓴 자가 누구인가? – 그러나 곧 죽음이 닥치고 수고는 끝날 것이며, 너는 성인들의 대열에 들어설 것이다. [1, 28]

11. 이것이야말로 경쟁의 장이다! 이것이야말로 투쟁이다! – 부지런히 투쟁하고, 잘 달리고, 자신의 마음을 모든 감각적이고 정욕적인 것에서 초연하게 유지하는 자는 진정한 승리를 거두고, 불멸의 영광의 면류관을 쓰며,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고, 이미 이 세상에서 영원한 복의 상속자가 된다. 그러나 죄의 달콤함에 휩쓸려 스스로 마귀의 그물에 빠지는 자는 참된 패배를 당하며, 죄로 인한 수치로 뒤덮이고, 마귀의 아들이 되어 게헨나의 불과 그 밖의 여러 영원한 고통의 상속자가 된다. 그러니 스스로를 돌아보고, 너희의 믿음을 시험하며, 너희의 서 있는 위치와 행보가 어떠한지, 어디에 있는지 깨달아라. 만약 올바른 길에 서 있고 왕의 길을 걷고 있다면, 참으로 좋고 지극히 좋은 일입니다! – 그러나 만일 걷는 도중 죄를 지어 죄의 급류에 빠졌다면, 이 일곱 번째 세기가 저물고 심판과 보응을 동반한 여덟 번째 세기가 오기 전에 서둘러 돌아오십시오.

12. 하나님의 계명을 향해 힘쓰고, 너희 마음에 미덕의 씨앗을 뿌려, 때가 되면 의의 열매를 거두게 하라. 누구도 게으름을 피우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라. 부지런한 벌에게로 가라’(잠언 6:6, 8)는 말씀을 듣게 될 것이니. 누구도 교활하거나 두 마음을 품지 마십시오. 마음속으로는 한 가지를 생각하면서 입으로는 다른 말을 하여, 성가사 다윗이 “주님께서 아첨하는 입술과 궤휼한 혀를 다 멸하시리라” (시편 11:4)라고 한 무서운 심판을 받지 않도록 하십시오. 누구도 일을 하지 않고 게으르게 지내지 말라. 그래야만 “일하기를 원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데살로니가후서 3:10) 말씀하신 성 바오로의 책망을 받지 않을 것이다. 누구도 지나치게 현명해지지 말라. 그래야만 성 야고보가 경고한 “주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나,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신다”(야고보서 4,6)는 말씀을 겪지 않을 것이다.

13. 모두 주 안에서 활기차게 나아가며, 그분의 계명을 실천하고, 우리 삶의 공동체, 곧 우리의 보물 창고(막 12, 43) 각자가 감당할 수 있고 손에 닿는 대로 — 어떤 이는 재정 관리, 어떤 이는 성직 수행, 어떤 이는 병자 돌봄, 어떤 이는 찬송, 어떤 이는 성경 낭독, 어떤 이는 정원 가꾸기, 어떤 이는 서예 —를 우리 삶의 공동체에 바치십시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무도 아무것도 바치지 않는 자가 되지 말고, 주님 앞에 빈손으로 서지 않도록 하십시오. 주님께서는 위대한 헌물뿐만 아니라 가장 작은 헌물도 받아 주시며, 설령 다른 어떤 일도 할 힘이 없다 하더라도 죽음을 상기시키는 구절 하나를 읊는 사람조차, 마치 과부의 두 레프타처럼 받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행하는 이의 뜻을 보시고 그 행위의 가치를 정하십니다. 자비로우시고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을 모시고, 우리 자신보다도 더 우리가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그분을 따라, 그분의 바른 길로 걸어가며 우리 영혼의 평안을 얻으리라.

14. 복음의 길에서 마주치는 우연한 어려움 중 그 어떤 것도 누구의 행보를 막지 못하게 하소서; 비록 길이 험하고 힘들지라도, 속히 나아가며, 기쁜 마음으로, 용기를 내어, 언덕에서 언덕으로, 작은 구릉에서 작은 구릉으로 지나가며, 주님의 산에 올라 그분의 거룩한 무정(無情)의 장소에 서게 될 때까지 나아가자. 함께 행하는 이들은 서로의 길을 가볍게 해 줍니다. 사도의 말씀대로, “서로 짐을 지어 주라”(갈 6,2).

15. 항상 그렇듯이, 오늘은 비겁함이 있고 내일은 용기가 있으며, 지금은 슬픈 심정이지만 갑자기 열정이 솟아오르고, 이 순간에는 정욕이 들끓지만 다음 순간에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 정욕이 꺾이게 될 것이다; 어제와는 다른 모습으로 모레가 되면 나타나실 것이며, 사랑하는 이여, 영원히 변함없이 머물러 계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당신에게 임하고 주님께서 당신을 위해 승리하실 것입니다. 그때 당신은 말하겠지요. “주님, 지금까지 어디 계셨나이까?” 그러면 주님께서는 이에 대답하시기를 “네가 어떻게 싸우는지 지켜보며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인내하며, 조금만 너그러운 마음을 갖자. 우리 자신을 절제하고 육신을 억누르며, 그것을 복종시키고 정욕을 우리로부터 멀리 떨쳐내자.

16. 수고하지 않고는 누가 면류관을 얻겠느냐? 고난을 겪지 않고는 누가 안식을 얻겠느냐? 자신의 영혼에 미덕을 심지도 키우지도 않고는 누가 생명의 열매를 거두겠느냐? 심고, 접붙이고, 수고하고, 땀 흘리라, 나의 자녀들아, 하나님의 일꾼들이여, 천사들을 본받는 자들이여, 무형의 존재들과 경쟁하는 자들이여! 과연 수고의 끝을 보지 못하는가? 형제들이 죽는 일이 드문가? 매일같이 잠든 이들을 위해 묘비 찬송을 부르지 않는가? 그런데도 왜 너는 비겁한 자여, 슬픔에 잠겨 괴로워하는가? 죽음은 너에게도 찾아올 것이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내일 죽을 것이다. 얼마나 큰 기쁨으로 이 세상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께로, 접근할 수 없는 빛 속으로,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 속으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영광 속으로, 천사들의 장막으로, 주님의 궁정으로, 맏아들들의 교회로, 아브라함의 품으로 들어갈 것인가? 그리고 그곳에서 누구를 보게 되겠는가? 우리 주 하나님 구세주, 하나님의 어머니, 세상의 여왕, 무형의 천사들, 케루빔과 세라핌, 그리고 모든 성직자들과 사도들, 선지자들, 순교자들, 경건한 이들과 모든 성인들의 무리를 보게 될 것이다. 그 수는 셀 수 없이 많다. 이것이 과연 너를 감동시키지 않고, 고무시키지 않으며, 모든 수고와 모든 슬픔과 불행을 초월하게 하지 않는가?

 

26. 수도 생활의 높은 곳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면, 요동치는 헛된 일들의 바다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로부터 벗어났음을 기뻐하십시오.

26. 1) 수도 생활의 높은 곳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면, 헛된 일들의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를 보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이로부터 벗어났음을 기뻐하라. – 2) 그다음, 시선을 자신 안으로 돌리면, 같은 대상들(부모, 친척, 재산 등)을 보되, 오직 신성하고 기쁨을 주는 모습으로만 보게 될 것이다; 그러니 힘차게 달려가 이를 이루라. – 3) 위로 이끄는 미덕들과 아래로 끌어내리는 악행들의 목록. – 4) 수도 생활의 결점에 대한 탄식. [1, 29]

17. 이제 사도적 선포로 여러분에게 주는 나의 가르침을 시작하겠노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빌 4,4). 여러분이, 미리 아시고 예정하신 부르심으로, 그분의 모든 지혜로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으로부터 이 복음적 수도 생활에 받아들여질 자격을 얻으셨고, 이제 높은 거처의 어떤 높은 전망대에 앉아 계시면서, 하찮고 아래로 굽은 인간의 헛된 일들을 바라보고 계시니, 그것들은 마치 바다 위처럼 요동치며, 변덕스러운 사물의 움직임에 휩쓸려 이리저리 옮겨지고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그곳에는 단단한 것이 하나도 없고, 어떤 것도 한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왕들도 변하고, 공작들도 쓰러지며, 땅의 통치자들도 사람처럼 죽고, 결혼한 이들은 금세 이혼하여 서로를 떠나고 버림받으며; 아름다움은 시들고, 청춘은 순식간에 지나가며, 즐거움은 금세 사라지고, 온갖 소유물은 그림자와 꿈처럼 사라집니다. 죽은 이와의 이별에 따른 울음과 가슴을 치는 슬픔,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에 따른 낙담과 절망, 원하는 것, 결혼, 지위, 재물, 위안과 쾌락을 추구하는 데 실패했을 때의 견딜 수 없는 고통, 질투와 시기심, 우발적인 굴욕과 수치심에서 오는 괴로움 등등.

18.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으며, 주님의 산에 올라서면 무엇을 보십니까? – 바로 이것이 여러분 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땅 대신 하늘, 부모 대신 참되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아버지, 친족 대신 동지들과 영적으로 한 마음인 형제들, 친구 대신 육신이 없고 신성한 모습을 띤 천사들, 보물 대신 미덕의 풍요, 높은 지위 대신 형언할 수 없이 위대하고 끝없는 천국, 음탕한 쾌락 대신 달콤하고 끝없이 갈망되는 무욕, 모든 만족 대신 상상조차 할 수 없고 형언할 수 없는 축복이 있습니다. 이것을 알기에, 유일한 살아 계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영적으로 스스로를 지키며, 계명으로 갑옷과 온전한 무장을 갖추고, 하나님의 말씀인 영적인 칼을 들어 이 세상의 어둠의 통치자들과 악의 영들을 아래로 내쫓아, 여러분이 신성한 바울과 함께 이렇게 외칠 수 있도록 하십시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웠고, 경주를 마쳤으며, 믿음을 지켰나니, 이제 의의 면류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으니,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그날에 우리에게 주실 것이라” (딤후 4,7).

19. “하늘로 올라가기도 하고 심연으로 내려가기도 한다”고 성 다윗이 노래합니다. 이를 영적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습니다. 마땅한 일을 조금씩 올바른 방식으로 바로잡는 자는 덕의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가고, 게으름에 빠지는 자는 파멸의 심연으로 내려갑니다. 이제 무엇이 우리를 높이 올리고, 무엇이 우리를 낮게 내리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를 높이 올리는 것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순종,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겸손, 자기 과시로부터의 단절, 온갖 야망으로부터의 단절, 우월감으로부터의 단절, 자신을 과시하려는 욕망, 교활함, 남의 불행을 기뻐하는 마음, 출세욕, 조롱과 비웃음, 과거의 삶에서 어떤 것을 자랑하고 교만해하는 것(어떤 이는 이렇게 말하곤 한다. ‘나는 예전에 누구였고, 무엇을 가졌으며, 이런저런 일을 했다.’ – 오, 부끄러운 일이다! 숨겨야 할 것을 오히려 자랑하며, 하나님을 본받는 자신의 본분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여기에 덧붙이자면: 침착함, 형제들과의 친근함, 신속한 사과, 머리와 이마, 눈과 눈썹을 땅으로 숙이는 것, 손과 발을 겸손하게 가지는 것, 무엇을 어떻게 입었는지에 신경 쓰지 않는 것, 무엇보다도 무엇보다도 – 모든 마음의 움직임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 – 그리고 말을 더 길게 끌지 않기 위해, – 앞서 언급된 것들과 동등한 모든 다른 선한 감정, 마음가짐, 그리고 행동. – 반면 다음은 타락으로 이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는 곳,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곳에는 온갖 슬픔과 분노, 모독이 있다(엡 4:31), 사도의 말씀에 따르면, 그리고 그 결과인 교만한 생각, 거만한 표정, 비뚤어진 눈빛(혹은 치켜뜬 눈), 콧구멍을 벌리는 것, 눈꺼풀을 찡그리는 것,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것(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것).

20. 나의 죄로 인해 나는 형제들 가운데서 타락하여 하나님과의 언약과 엄중한 서약을 잊어버린 자들을 보게 되며, 장차 우리가 두려운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임을 깨닫는다. 아, 무지하고 마음이 둔한 자들아(눅 24:25), 우리가 처음에 동의하고 결심했던 것을 마음에 새기라! 우리가 갈망하고, 굶주리며, 준비하며, 조롱과 욕설, 상처, 심지어 죽음까지 견디겠다고 서약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지금 우리 중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누군가에게 사소한 불쾌한 일이 조금만 생겨도 그는 완전히 낙담해 버리는데? – 그러니 모두 스스로를 성찰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품으라. 우리 중 누구도 버렸던 길로 다시 돌아가려 감히 하지 말라. 평신도들이 헛된 삶을 살게 된 것을 안타까워하다가, 우리 자신의 죄악으로 인해 이 세상과 내세에서 그들로부터 쓰라린 통곡을 듣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하자. 사람들이 너에게 “거룩하신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들이 우리에게 축복을 구한다고 해도, 우리 자신이 축복받지 못하고 길들여지지 않은 야수처럼 방종한 채로 남아 있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그분의 길을 걷는 자들을 지켜 주시며, 미끄러진 자들을 다시 그분의 계명의 길로 인도하시기를!

 

27. 매일의 교회 예배, 빈약한 생활비, 공동체 생활 규칙의 준수, 벌금과 참회는 많은 수고와 인내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구원에 이르게 하며, 이를 통해 면류관을 얻게 되니, 용기를 내십시오

27. 1) 매일의 교회 예배, 빈약한 생활, 공동체 생활 규칙의 준수, 벌금과 참회는 많은 수고와 인내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구원에 이르게 하며, 이를 통해 면류관을 받게 되니, 용기를 내십시오. – 2) 선한 일에는 지혜롭고 악한 일에는 어리석지 않도록 힘쓰십시오. 특히 여러분의 말이 질서 정연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1, 31]

21. 기도하며 주님께 간구하소서. 주님께서 내 겸손한 입술이 열릴 때, 너희 영혼을 위로하고 격려할 말씀을 내게 주시기를. 형제들아, 내가 보기에 너희가 매일 얼마나 큰 수고를 겪고 있는지—기도를 드리고 기도 규율을 지키기 위해 한밤중과 한밤중 이전에, 그리고 정해진 시간에 잠을 깨어, 하루에 일곱 번씩 무릎을 꿇고 수없이 절하며, 주님께 그분의 의의 뜻에 대해 고백하고, 악한 생각을 물리치고 이를 영성 지도자들에게 고백하며, 그로 인한 수치를 감내하고, 악마의 불타는 화살을 물리치는 데 필요한 참회를 이행하고, 여기에 졸음을 이겨내는 것, 육신이 그토록 갈망하는 음식과 음료, 휴식과 산책을 단절하는 절제, 형제들과의 교제, 때로는 불결하고 단정하지 못하며 낡고 구멍 난 옷을 순종적으로 입는 것을 더하리라; 그리고 또: 그것은 말하지 말고, 그것을 보지 말고, 그것을 만지지 말고, 그곳에는 가지 말고, 그 일에서는 자신을 절제하고, 그 일에서는 겁내지 말고, 그 일에는 항상 준비되어 있으며, 그 일에서 벗어나지 말라... 이 모든 것과 이와 유사한 것들은 어렵고, 무겁고, 쓰라립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우리 영혼의 구원을 향하고 있으니, 그것은 우리에게 달콤하고, 쉽고, 편안해야 하며, 그리하여 우리가 사도와 함께 우리 자신에 대해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이자 하나님을 위해 “이 모든 것에서 이기는 자”라고 말할 수 있게 하리라 (롬 8:37). 하늘의 면류관, 즉 순교의 면류관과 형언할 수 없는 기쁨, 그리고 영원한 복을 누리는 즐거움이 우리를 위해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용기를 내고, 주님을 신뢰하는 모든 이여, 너희 마음을 굳게 하라”(시 30:35).

22. 또한 여러분의 금욕적이고 복된 삶을 끊임없이 수련하여, 그 안에서 오랫동안 머무르며 덕의 풍요로움을 얻고, 육체적으로 성장함과 동시에 영적으로도 성숙하여, 겸손과 순종, 그리고 자기 의지의 절제에서 지혜롭고 능숙해지며, 반면 교만과 반항, 간사함에서는 어리석고 분별력이 없는 자가 되지 않도록 하라. “간사하게 행하는 자들은 멸망하리라. 그러나 주님을 인내하는 자들은 땅을 상속하리라”(시 36:9). 제멋대로 행하는 사역으로 서로에게 걸림돌이 되는 일에 빠지지 말고, 이웃에게 해가 되지 않는 것을 항상 선택하고 행하도록 힘쓰라. “내 자녀들아, 너희의 말이 항상 은혜의 소금으로 간을 맞추어지도록 하라” (골 4,5) – 허세 부리지 말고, 무례하지 말고, 교만하지 말고, 무겁지 말고, 고통스럽지 말고, 악의나 허영의 열기를 뿜어내지 말고, 부끄럽지 말고, 모순되지 말고, 논쟁적이지 말고, 말이 많지 말고, 우스꽝스럽지 말고, 부주의하지 말고, 게으르지 말며; 오히려 공경하며, 온유하며, 호의적이며, 순수하고, 평화로우며, 양보하며, 통회와 겸손한 지혜로 가득 차고, 순종하며, 조용하고, 절제되며, 품위 있게, 이를 통해 우리가 서로의 구원과 상호 교화를 위해 섬기게 하소서. – 마귀의 정욕이 솟아오르는 것을 억제하고, 원수의 생각들이 몰려오는 것을 쫓아내십시오. 이는 바로 이것에서 우리의 영적 건강과 안녕, 우리의 번영과 삶의 선한 흐름, 그리고 모든 선한 일에 대한 우리의 준비와 적격성이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28. 여러분은 마치 비옥한 땅과 같아서, 누구에게나 미덕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28. 1) 여러분은 마치 비옥한 땅과 같아서, 어떤 이는 이러하고 어떤 이는 저러하며 덕의 열매를 맺습니다. – 그 점으로 위안을 얻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중 어떤 이들은 풍요롭고 명망 있는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빈곤하고 무명인 삶을 받아들인 점과, 또한 여러분 모두가 혈연적 유대나 그 밖의 편애라는 폭정에서 벗어난 점에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참으로, 이는 순교와도 같은 일입니다. – 2) 그 보상은 큽니다; 바로 그 보상을 위해 피를 흘릴 지경에 가까운 우리 삶의 고통도 견딜 만합니다. [1, 32]

23. 여러분은 마치 비옥하고 좋은 땅과 같이, 나의 겸손의 말씀을 받아들여, 항상 선한 열매를 맺고 맺어내며, 마치 다양한 미덕의 아름다움으로 더욱 빛나는 낙원처럼 됩니다. 나는 여러분 안에서 일어나는 일과 여러분이 무엇에 열정을 쏟는지 보고 분별하며, 한 사람의 온유한 성품, 다른 사람의 열정적인 헌신, 저 사람의 침묵, 이 사람의 시 읊음, 또 다른 사람의 근면함,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의 깨어 있음, 또 다른 이들은 다른 점들로, 그리고 모두는 우리 공동체의 질서 안에서 변함없이, 꺾이지 않고, 흔들림 없이 굳건히 머무르는 불굴의 끈기로 인해 위로를 받습니다. 또한, 예전에는 행복하고 풍요롭게 살았던 여러분 중 일부가 주님을 위해 살기 시작하면서, 점차 그 삶을 잊어버리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현재의 불편함과 결핍을 용감하게 견디며, 그것으로 과거의 죄를 상쇄하고 갚아가고 있는지에 대해 경탄합니다. 그러나 진실로 그리스도의 사랑은 모든 것을 할 수 있어, 교만한 자들을 낮추고 이끌며, 풍족하게 살던 자들로 하여금 적은 것으로 만족하게 하고, 재물을 많이 모으던 자들로 하여금 가난하고 궁핍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저는 이 사람들뿐만 아니라, 주님의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 모든 이들에게도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부모, 형제, 아내, 친척, 조국, 집, 관습. 누구에게나 소중히 여겼던 것을 버린 것이 하나씩은 있다. 그리고 겉보기에는 사소한 것을 희생한 사람, 위대한 이들 중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이, 실은 가장 많고 큰 수고를 감당한 것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왜냐하면 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그가 친족에 대한 애정이나 임의적인 편애의 지배에서 벗어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에게 순교자의 칭호를 부여하고, 사도들 중 가장 위대한 이처럼 주 그리스도께 감히 외칠 용기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나이다. 그러면 우리에게 무엇이 있겠나이까?”라고 외칠 수 있는 담대함을 부여받았으며, “부활 때에…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는 응답을 듣는 영광을 누릴 자격이 있다(마태복음 19, 27. 28).

24. 우리에게 이와 같은, 그토록 큰 상이 예비되어 있다면, 우리 모두가 어떻게 더욱더 스스로를 다그쳐 경건한 삶을 실천하고 완성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주님을 따라 삶에서 겪는 모든 슬픔과 무거운 짐을 어떻게 견디지 않겠습니까? 절제, 기도, 자책, 순종, 교훈, 고백,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수고들 말입니다. 바로 그 때문에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예언자의 말씀이 적용됩니다. “주님을 위하여 우리는 온종일 죽임을 당하오니, 마치 도살당할 양과 같으니이다.” (시 43:23). 진실로, 여러분은 이로부터 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도 자신의 욕망을 잘라내는 일, 책망의 상처, 그리고 서로에게 순종하는 삶의 방식으로 인해 희생당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피는 비록 육체적으로는 아니지만 영적으로는, 그러한 경우 여러분의 마음에서 흘러나오지 않습니까? 그러나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은 헛되이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사도가 말한 대로(베드로전서 5,4) “시들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을 스스로 준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짓이 없는 지식의 빛과, 세상을 떠나게 하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 그리고 정욕을 죽이는 영생에 대한 갈망이 여러분 안에서 빛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인도하시고, 우리 경건의 목표인 마음의 굳건함과 흔들리지 않는 생각의 확고함으로 모두를 가장 높은 단계로 이끌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29.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이곳을 떠날 것이니, 그러나 우리가 좋은 축복을 받으며 떠나게 하소서

29. 1) 이제 얼마 남지 않아 이곳을 떠날 때가 되었으나, 우리에게 좋은 축복이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 2) 하루 종일 순종의 수고와 기도에 힘쓰되, 게을러지지 마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의 구원입니다. – 3) 수도원에서 결핍과 자기 의지와 욕망의 절제, 겸손과 그 밖의 육체적으로 고통스러운 일들 가운데 인내하며 살아가라… 이것이 바로 순교이다. – 4) 끝까지 인내해야 하며, 모든 성도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게 될 것을 기대하며, 성모 마리아와 주님 자신을 뵙게 될 것을 바라보아야 한다. [1, 33]

25. 내 생각에, 내가 여러분에게 나의 겸손의 말씀을 전하며 헛되이 수고하는 것도 아니요, 여러분이 그 말씀을 듣는 데 시간을 헛되이 낭비하는 것도 아닙니다. –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분명히 완전한 침묵의 때가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살 수는 없으며,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로, 나나 여러분 중 누군가는 머지않아 이 세상에서 떠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는 바는, 이곳을 떠날 때 선한 조언을 받고, 계명을 이행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기쁨을 드리는 것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26. 여러분이 언제나 자신의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는 모습을 봅니다. 어떤 분들은 빵을 준비하고 굽는 일에, 어떤 분들은 포도원을 가꾸는 일에, 어떤 분들은 심부름을 하는 일에, 또 어떤 분들은 수공예—바느질, 편지 쓰기, 빨래, 빵 굽기, 요리, 식사 준비, 대장간, 식료품 창고, 병원 등에서— – 그 와중에도 모든 교회 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계십니다: 제1, 제3, 제6, 제9 시간 기도, 저녁 기도와 밤 기도에 모여 경건하게 서서 노래하고 기도하시며, – 이 모든 것을 게으름이나 소홀함 없이 행하고 계십니다. 이 모든 여러분의 수고와 비좁은 공간, 그리고 고된 노고를 나는 항상 마음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낙담하지 마십시오. 사도가 말하듯이, “이 모든 일에서 우리가 이기는 것은” (로마서 8:37)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 덕분입니다: 그러므로 이 수고가 비록 매우 크지만, 이를 통해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과 헤아릴 수 없는 기쁨이 비추어지므로, 우리는 이를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하며, 더욱 큰 위업에 매진하여, 공동 생활 규율에 따라 우리 순교자 같은 삶 속에서 투쟁하며 굳건히 서서, 어떤 무거운 짐 앞에서도 넘어지지 않고, 뒤로 물러서지 않으며, 슬픔과 고난 앞에서도 결코 물러서지 말아야 합니다.

27. 여러분께 간청합니다. 굳건히 서서 모든 선과 모든 덕을 힘써 실천하며, 주님의 말씀대로 인내로써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하십시오. 죽음을 앞둔 이 시간을 바라보며 매일 새롭게 되십시오. 모든 것을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고, 경건함과 분별력, 영적인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해로운 오만함으로부터 온갖 방법으로 멀리하여, 서로에게 순종하고, 불평하지 않으며, 경쟁하지 않고, 시기하지 않으며, 거만하지 않게 하십시오. 각 이웃의 선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며, 때로는 어떤 이유로든 형제가 자신에게 보이는 무관심을 참아내고, 닥치는 책망과 모욕을 영혼의 치유제로 현명하게 받아들이며, 모든 것을 온유하고 진실하게, 모든 것을 솔직하게, 교활함이나 혼란 없이 행하고 실천하며, 언제나 살아 계신 우리 주님 앞에서. 이것이 바로 우리의 순교입니다! – 그런데도 어떤 열성적인 신자들은 왜 종종 외부의 박해자들로부터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당하려 하는 것입니까? – 이곳(즉, 키노비아)에서 용감하고 합법적으로 고난과 수고, 신앙 고백을 견뎌내라. 바알 앞에 무릎을 꿇지 말고, 영혼을 정욕의 제물로 바치지 말고, 약속한 것을 부인하지 말고, 달리고 있는 경주장에서 끝까지 물러서지 말고, 서 있는 자리에서 흔들리지 말라: 그리하면 성부들이 분명히 증언하듯이, 순교 중에 피를 흘린 이들과 동등한 가치를 얻게 될 것이다.

28. 단 한 번이나 몇 번만 어떤 고난을 겪었다고 해서 이미 구원받았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러나 무슨 일이 일어나든 기꺼이 견디고 끝까지 견뎌낼 자, 그만이 구원받을 것이다. 그러나 도중에나 마지막에 힘이 쇠해져 복된 순종을 저버리는 자는, 한탄과 통곡이 따르는 가장 비참한 파멸을 겪게 될 것이며, 그로 인해 이전의 모든 수고를 헛되게 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의 날에 피할 수 없이 정죄를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너희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그리고 하늘에 계신 우리 조상들과 함께 누릴 복된 몫을 위하여, 너희 생애의 모든 날 동안 모든 일에서 너희 자신을 깨끗하고 흠 없이 지키라; 그리하여 안토니우스 대성인이 이 빛을 비추었던 곳, 유프티미우스 신의 운반자와 파코미우스 그리스도의 운반자가 계신 곳, 사바 다성가와 테오도시우스 전복된 자, 도로페이우스 신의 계시를 받은 자가 계신 곳, 도메티아누스 천사와 동등한 자, 아카키우스 전성자, 도시페이우스 하느님을 기쁘게 한 이, 바실리오스 영원히 살아 계신 이—즉 순종하는 자[83] —자카리아 성령으로 옷 입은 이, 그리고 아프레—하느님의 종이 계신 곳; 그 밖의 이들에 대해서는 무엇을 더 말하리요? – 사도 열두 명의 수장인 베드로와 바울이 계신 곳, 주교들과 사제들, 그리고 성스러운 순교자들의 성소가 있는 곳. 비록 우리가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준에 이르지는 못하더라도, 그들의 모습을 뵙고,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중보를 받는 것만큼은 결코 박탈당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한 우리 주님의 아내이시며 만왕의 여왕이자 주권자이신 성모 마리아의 현존을 뵙고 그분의 발 앞에 엎드릴 것을 소망합니다. 또한 만물의 주님이시며 우리 주님이신 분을 뵙기를 고대하나니, 비록 이것이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히 감 그러니 우리에게 이러한 영광과 기쁨, 그리고 이러한 삶이 기다리고 있다면, 누가 기뻐하지 않겠으며, 누가 부러워하지 않겠으며, 누가 불타오르지 않고 하느님을 향한 사랑으로 날개를 펼치지 않겠으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마땅히 해야 할 모든 일을 하려는 열정을 품지 않겠는가?

 

30. 변덕스러움을 피하기 위해, 형제들 사이에서 어떠한 고립도 배제하고, 모든 이를 행실에서 동등하게 대하며, 이를 통해 타락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주는 공동체 규율을 따를 것

30.

1) 변덕스러움을 피하기 위해, 형제들 간의 어떠한 고립도 배제하고, 모든 이를 활동에서 균등하게 유지하며, 이를 통해 타락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주는 공동체 규율을 따를 것. – 2) 이전에도 여러분에게 유혹이 있었지만, 주님께서 도우셔서 여러분은 이를 극복했습니다. 지금도 굴복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지나갈 것입니다. – 3) 마치 주님 앞에서 심판받는 것처럼, 수도자의 덕행을 지키며, 그 덕행에서 점점 더 큰 진전을 이루십시오. [1, 341]

1. 여러분의 성장을 보며, 저는 하느님을 찬미하고 주님 안에서 기뻐합니다. 그러나 의지의 연약함과 경솔함으로 인해 인간의 결심이 변덕스럽고 일관성이 없을까 두렵습니다. 왜냐하면 선한 일을 시작하기만 한 사람이 복된 것이 아니라, 그 일에 익숙해져 숙달되고 그 안에서 완전함에 이른 사람이야말로 복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같은 마음가짐을 유지하고 온갖 악의에 찬 죄의 변덕에 휘둘리지 않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러므로 간청하고 기도하노니, 우리가 하나님의 참된 길, 곧 왕의 길인 중도의 길을 걷도록 합시다.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치우치지 말고, 공동체 생활의 규율과 계명, 법에 따라 삶의 매 순간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항상 실천합시다. 공동 생활은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을 똑같이 바라보고,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을 똑같이 원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곳에는 특별한 욕망이나 개별적인 열망이 없으며, 자만이나 편파적인 선택이 없고, 은밀한 계략이나 교활함이 없으며, 호기심 어린 엿보기나 모든 것을 캐내는 행위가 없고, 지치고 힘을 소진하게 만드는 수많은 것에 대한 집착이나 다양한 열망이 없습니다; 그것은 절제와 기도, 회개, 맨땅에서 잠자는 것 및 그 밖의 행실들을 사랑하지만, 모든 일에서 복된 순종의 한 가지 규칙을 지키며, 그 규칙으로 모든 것을 포용하고 모든 일에서 지침으로 삼아, 성부들이 명하신 대로 행한다.

2. 여러분, 믿음의 반석 위에 굳건히 서서 덕의 길을 흠 없이 걸어가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내 눈으로 여러분 중 누구라도 어떤 죄로 인해, 육체의 정욕이든, 독단적인 성향이든, 교만의 오만함이든, 허영심이든, 혹은 그 밖의 어떤 정욕이든, 마귀의 먹잇감이 되는 것을 보지 않게 하소서. 여러분은 수고하여 여러분의 영혼의 보물창고에 미덕의 풍요를 쌓아 두었습니다. 여러분 각자는 수도 생활에 들어온 이래 어떤 유혹에, 또 얼마나 많은 유혹에 시달렸는지, 사탄의 생각이나 공동체 생활의 어려움과 고충에 사로잡혀 상처 입으며, 기진맥진하고 낙담하여 살아남을 희망조차 잃었던 때를 기억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연이어 닥쳐오는 여러 시련을 통해 여러분을 이 모든 것을 헤쳐 나가게 하시고, 여러분을 위협하던 파멸에서 구해 주시며, 인내에 걸맞은 보상을 얻게 해 주셨음을; 그러한 위업들, 그리고 견뎌내고 얻은 모든 것을 바라보며, 우리가 현재 앞에 놓인 일과 미래에 기대하는 일에도 시선을 돌리는 것을 잊지 맙시다. 그리고 사람으로부터든, 사악한 악마들로부터든, 어떤 슬픈 우연도 우리를 선한 의도에서 멀어지게 하지 못하게 하소서.

3. 간청하노니,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며 마치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에 천사들의 무리를 보고, 전지전능하신 심판자께 보고를 드리며, 선과 악에 대한 마땅한 보상을 받는 것처럼 스스로를 여기십시오. 선하게 힘쓰고, 유혹을 이겨내며, 여러분의 길에서 온갖 돌과 걸림돌을 치워 버리고, 기다리던 날이 올 때까지 하늘의 생명의 산을 힘차게 오르십시오. 솔직함, 겸손, 상호 존중, 한마음, 봉사와 수공예, 시편 찬송, 기도회, 그리고 모든 선하고 경건한 일에 대한 열심을 기르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이것을 가지고 있지만, 내가 이것을 말하는 것은 여러분이 이를 더욱더 부유하게 쌓아가도록 열심을 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미 얻었지만, 내가 이것을 상기시키는 것은 여러분이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더 크고 더 큰 것을 얻기 위해 힘쓰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31. 우리가 여기서 어떤 고난을 겪더라도, 저기서는 형언할 수 없는 보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었던, 그 길을 먼저 걸어간 성도들의 발자취를 따라, 게으름 피우지 말고 우리의 험난한 길을 꾸준히 걸어가 봅시다.

31. 1) 우리가 이곳에서 어떤 고난을 겪더라도, 저편에서는 형언할 수 없는 보상이 있을 것이니,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던 성도들이 걸었던 그 길을 따라, 게으름 피우지 말고 우리의 험난한 길을 걸어가자. – 2) 수도원에서 각기 다른 봉사를 수행하는 모든 이들을 상세히 열거하며, 모두에게 다음과 같은 계명을 내린다. “너희의 일을 마치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일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하라.” [1, 35]

4. 여러분이 제 겸손한 말씀을 그토록 부지런하고 주의 깊게 경청해 주시니, 저 또한 여러분을 가르치는 일에 열의를 다하며, 마치 만족할 줄 모르는 듯, 제 겸손한 입술에서 나오는 말씀을 여러분의 거룩한 영혼에 뿌려 드리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는 둘 다 이 고된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저는 말하며, 여러분은 들으며, 말해진 것과 들은 것을 실천에 옮기고 이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수확의 때가 되어 열매를 거둘 때가 오면, 그때 우리는 기쁨과 즐거움 속에서, 우리가 수고하고, 탄식하고, 고난을 겪고, 지치고, 슬퍼하며, 평안을 모르고, 고개를 숙이고, 낙담하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더 말하자면, – 갈망하고 목말라 하며, 부모와 친구, 형제, 친척, 조국, 그리고 이 세상의 온갖 세속적인 복을 버렸던 그 모든 일들 때문에 – 우리는 의로운 보상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보상을 받으며 기쁨에 차 있을 것이니, 영원토록. – 과연 어떤 보상인가?! – 시들지 않고 영원한 영광과 존귀, 설명할 수 없고 꺼지지 않는 기쁨과 즐거움과 생명, 만족할 줄 모르는 충만함, 그리고 그 어떤 것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전례가 없고, 들어본 적도 없으며, 말로 다 할 수 없는 그 복들을 누리는 즐거움, 천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참 하나님이시며 세상의 왕이신 분의 아들로서의 지위와 유산입니다. 이것을 바라보며, 우리 일과 수고 속에서 (여기서) 어떤 슬픔이 닥치더라도, 이 일 저 일을 하도록 강요받을 때나, 순종과 복종 중에 마음속에 가시를 겪어야 할 때라도, 게으름 피우거나 소심해지지 맙시다; 그러나 사도의 말씀대로 “뒤는 잊어버리고 앞으로 뻗어가며”, “더 높은 소명의 영광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며”(빌 3,13), 순교나 순결한 삶을 통해 완성된 성도들과 신성한 사랑으로 경쟁합시다. 그렇다면? –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 아니었으며, 우리와 마찬가지로 정욕에 사로잡히지 않았던가? – 그러나 그들이 갈망하고 지극히 사랑하였기에, 우리도 갈망하기만 한다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고귀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5. 여러분, 여러분의 직무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 일들에 부지런히 힘써 주십시오. 서기관은 사랑과 인내로 일관되고 정돈된 글씨를 쓰며; 식량 담당자는 식량 관리에, 육체적 필요를 지치지 않고 충족시키는 데, 주고받는 일에 어리석음이 없도록, 마땅한 온유함과 품위, 그리고 필요할 때 사과하는 태도로 임해야 하며; 밭일꾼은 포도밭을 갈아엎는 일에; 그리고 다른 누구든지 농사, 무거운 짐 나르기 등과 같은 일을 할 때, 불평하지 말고, 시편 구절을 되뇌는 것을 잊지 말며, 침묵을 지키고 헛소리를 피하라. 정원사와 채소밭 가꾸는 이는 정원과 채소밭을 가꾸고, 형제들에게 채소와 과일을 넉넉히 공급하는 일에 힘쓰라; 요리사는 음식을 준비하는 일에서, 불의 열기와 온갖 수고를 자신의 일에 따라 불평 없이 견뎌내라; 간병인은 병든 형제들이 안식을 얻도록 온 힘을 다해 돌보며, 누구에게는 더 적합한 음식을, 누구에게는 위로와 평안을 주는 말을 전해 주어, 영적·육체적 질병을 치유해야 한다; 성가대장은 조화롭고 질서 정연한 찬송과 명료한 낭독을 조직하고 지켜야 한다. 마찬가지로 등불 점화사, 양피지 제작자, 제빵사, 칼 깎는 사람, 식당 담당자, 금세공인, 구리 세공인, 지붕 수리공, 재단사, 그리고 문지기, 기상 알리는 사람, 경비원, 관리인, 교사, 마지막으로 경제 담당자와 그 보좌관까지, 모두 각자의 일을 마치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일처럼 행하라.

 

32. 왕의 길은 모든 일을 규율에 따라 행하는 것이다. 규율을 어기는 자는 지나침이나 부족함으로 치우치게 된다. 규율에서 벗어나는 것도 허용되나, 반드시 수도원장의 허락을 받아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좋은 결과로 끝나지 않는다

32. 1) 왕의 길은 모든 일을 규율에 따라 행하는 것이다. 이를 어기는 자는 지나침이나 부족함 중 하나로 치우치게 된다. 규율에서 벗어나는 것도 허용되나, 반드시 수도원장의 허락을 받아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좋은 결과로 끝나지 않는다. – 2) 초심자의 수련은 — 영적·육체적 욕망에서 벗어나 영적인 것에 익숙해지는 것; 그러나 그가 영적인 달콤함을 맛보게 되면, 마귀들로부터 가장 견디기 힘든 다른 어려움들이 닥쳐온다; 이구멘의 지도에 자신을 맡기는 자는 여기서도 안전하다. [1, 36]

6. 어떤 여행을 할 때와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그런 수고에 익숙하지 않아서 행진이 힘들고 버거우나, 계속하다 보면 근육이 풀리고 육신이 유연해지면서 덜 힘들고 덜 무거워지며 더 수월해진다. 우리가 주님의 길을 걸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시련과 유혹을 겪게 하심으로써, 어떤 길이 바른 길이고 어떤 길이 그릇된 길인지, 그리고 어떻게 조금씩 그 끝을 도달할 수 있는지를 깨닫고 보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성부들이 말씀하신 대로 그 길의 거리를 재어가며, 양쪽의 험류를 피하여 왕의 길을 걸어가자. 즉, 부족함이나 과잉과 같은 것들, 이는 누군가 규정된 규칙이나 정해진 계명에 따라 행동하지 않을 때 발생하는 것으로, 음식과 음료, 깨어 기도, 시편 낭송, 암송(시편과 기도문), 기도, 침묵, 그리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행하는 일에서 나타납니다. 이 모든 일에서 평소의 질서에서 벗어나는 것도 허용되나, 반드시 조언과 승인을 받아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건대, 비록 제가 죄인이긴 하지만, 제 허락을 받고 행해지는 모든 일과 제게 드러나는 모든 것은 빛입니다. 그러나 저를 피하여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자는 어둠 속을 헤매며, 자신이 파멸의 급류로 휩쓸려 가는 것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다 오히려 그분을 노하게 하며, 다른 이들에게도 걸림돌이 됩니다. 그러니, 나의 자녀들아, 순종의 법이 너희에게 지키라고 권하는 그 길 을 걸어가라. 너희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을 이해하려 애쓰지 말고, 탐구로 풀 수 없는 순종의 일들과 나의 다양한 수도원장으로서의 지시들을 파헤치려 하지 마라.

7. 초심자에게 주어진 수행은 세속적인 관습과 풍속을 버리고, 이전에 형성된 마음의 욕망을 내려놓으며, 마치 폭풍과 동요, 변덕스러운 근심과 정욕적인 일들로부터 벗어나 평온과 신에 대한 사랑의 안식처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은, 아니 오히려 훨씬 더 크고 어려운 수행이 하나 있으니, 세속의 소란을 피해 평안을 맛본 후에도 스스로를 흠 없이 지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우리 안에서 어떤 생각들이 반기를 들고, 이 삶의 바다에서는 해적들처럼 우리에게 달려드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우리 영혼의 배와 그 배가 실은 온갖 선한 것들을 침몰시키려 드는 악마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겸손의 유리한 바람을 부지런히 이용하고, 제멋대로 (배의 방향을 바꾸려는) 동의로 인해 우리 조타수의 존엄성을 훼손하지 않는다면, 의심할 여지 없이 천국이라는 선착장에 도달할 것입니다. 그러니 내 자녀들아,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 (마태복음 10,16)처럼, 선하고 경건한 일을 행하며 각자 자신의 일에 부지런히 힘쓰자. 인내하고 자신을 낮추는 이들은 복이 있나니, 구름처럼 이리저리 맴돌며 헛되이 시간마다, 날마다 허비하는 자들은 우리에게도 주님께도 기쁘시지 않으니.

 

33. 하나님의 말씀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지침을 얻을 때, 하나님의 경외심으로 시작하여 깊은 겸손으로 끝맺으며, 이를 행함으로 실천한 성인들의 생애를 되새겨야 한다

33. 1) 하나님의 말씀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가르침을 받을 때, 우리는 그것을 행함으로 실천한 성인들의 생애를 떠올려야 한다. 즉,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으로 시작하여 깊은 겸손으로 끝나는 삶을 말이다. – 2) 목소리, 노래 등과 같은 타고난 재능을 자랑해서는 안 되며, 모든 선의 근원이자 모든 은총의 선물이 되는 겸손한 지혜로 자신을 단장해야 한다. – 3) 겸손한 지혜로 모든 미덕에서 번영하라. 특히 정욕과의 싸움에서, 첫 번째 유혹을 물리치고 심지어 그것들로부터도 스스로를 지키라. [1, 37]

8. 여러분에게 드리는 나의 겸손한 말은, 내 생각에, 법적인 것도, 권위적인 것도, 헛소리도 아니며, 오히려 권면하고 위로하는 말로, 우리 신성한 선조들의 가르침과 삶을 상기시켜 주는 것입니다. 신성한 은총은 이미 우리에게 무엇이 경건하고 의로우며 경건한 삶인지 밝혀 주셨으며, 여러분은 천국을 얻기 위해 어디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를 정확히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날마다 하나님의 구원이 무엇이며, 경건한 성부들의 신성한 행적이 어떠했는지를 되새기고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들의 본을 따라 경건함의 색채로 자신의 영혼을 생생하게 물들이며, 그들의 삶을 본받는 모습을 마음속에 그려보십시오. 그들은 자신의 수도 생활의 시작과 끝을 주님을 향한 깊은 경외심으로 삼았습니다. 이로 인해 그들 안에는 하나님 앞에서 높은 겸손이 빛났으며, 그 힘으로 그들은 사탄의 모든 올가미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길 뿐만 아니라, 그 올가미를 엮은 자 자신을 묶어 복음서의 말씀(누가복음 10:19)대로 자신의 발 아래에 두어 짓밟히고 조롱받게 하였습니다. 수많은 성인들 중에서, 어제 아침 성경 봉독에서 다뤄졌던 분을 본보기로 들어보겠습니다. 성 실바노에 대한 내용이 읽혔고, 여러분의 귀는 그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분이 서원을 맹세한 후 얼마나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셨는지, 그리고 겸손이라는 무기로 마귀를 어떻게 무찌르고 눈물의 바다에 가라앉혔는지, 또한 우리 가장 선한 거처의 높은 곳에 오르셔서 홀로 우리 위대한 아버지 파코미우스의 완전한 모범을 보여주셨는지 아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비록 오래 살지는 못했지만, 천사들의 찬송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이곳에서 하늘로 옮겨져, 성 테오도르, 삼중 축복받은 페트로니우스, 찬송받는 오르시시우스, 그리고 그 모든 성스러운 형제단에게 가장 사랑받는 이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9. 겸손이라는 신성한 은사는 참으로 위대합니다! 성자들 중에서도 이 덕목으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지 않은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도 이 덕목을 입으십시오. 그리고 아름다운 노래, 선율, 즐거운 독서, 그 밖의 자연적인 은사와 재능에 대한 관심을 잠시 접어두고, 모든 노력을 이 목표를 달성하는 데 집중합시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앞서 언급한 훌륭한 자질들을 아예 버려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고, 미덕이라는 여사님 뒤를 따르도록 배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앞서 말한 선한 자질들 때문에, 음정이 서툰 자들 앞에서 거만해하거나, 배움이 부족한 자들 앞에서 자만하거나, 읽기를 서툴고 배움이 부족한 자들 앞에서 우쭐대거나, 목소리가 없거나 노래를 못 부르는 자들 앞에서 코를 치켜들게 된다면; 그러면 우리의 모든 수고는 헛된 것이며, 우리는 화살을 목표에 맞추지 못하고 오히려 우리 자신을 향해 쏘는 것이나 다름없으며, 그러한 실수로 인해 우리 스스로를 심연의 짐승인 마귀의 먹잇감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지 말자, 내 자녀들아, 그렇지 말자. 그러나 겸손함으로 대화하고, 겸손함으로 일하며, 겸손함으로 읽고, 겸손함으로 노래하고, 겸손함으로 걸으며, 겸손함으로 음식을 맛보고, 겸손함으로 대답하며, 모든 것을 겸손함으로 행하자; 그러면 이 미덕의 열매가 얼마나 달콤하고, 얼마나 사랑스럽고, 얼마나 빛나는지 보게 될 것이며, 이 열매는 우리를 “나에게서 배우라. 나는 온유하고 마음이 겸손하니, 너희 영혼이 안식을 얻으리라”(마태복음 11,29) 말씀하시는 하느님을 본받는 자들로 만들어 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안에 참으로 평안이 거하며, 그 덕분에 영혼 속에 은혜의 파도가 일고, 그것을 통해 마음의 순결이 빛나며, 그것으로부터 눈물이 풍성히 쏟아지고, 그로부터 통회함이 샘물처럼 솟아나며, 그 안에 지혜와 이성과 경건과 절제와 침묵,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선함이 존재하고, 드러나며, 찬양받습니다.

10. 이것이 바로 경건한 겸손에 관한 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요, 나의 겸손의 자녀들이여, 이를 씨앗처럼 받아들여, 좋은 땅처럼 열매를 맺으라. 어떤 이는 서른 배, 어떤 이는 육십 배, 어떤 이는 백 배를, 하나님의 은사에 상응하는 선행으로 맺으라. 그리고 온갖 악하고 간사한 일을 피하며, 건방짐을 멀리하고, 형제 사랑을 구하며, 악한 계략을 멀리하고 평온함을 사랑하십시오. “나는 선함과 정의를 사랑하노라”(시 24:21)라고 기록되어 있듯이 말입니다. 누구도 다른 이들보다 한 사람을 더 사랑하지 말며, 수염이 없는 자끼리 거침없이 어울리지 말며, 그들이 숨겨지고 보이지 않는 곳에 머물지 않게 하십시오. 그러나 모두 마귀의 유혹에 맞서 무너지지 말고, 신성한 기도와 간구로 정욕의 불길을 꺼내라. 정욕이 찾아오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우리의 의무는 그것이 처음 나타날 때부터 물리치는 것이다. 원수가 와서 화살을 쏘고는 도망쳤다. 유혹자가 부도덕한 상상을 불러일으킬 때, 네 영혼의 눈을 감아라. 쓰라린 사냥꾼이 죄로 이끌 미끼를 네 마음에 던질 때, 그 달콤함의 낚싯대를 멀리 내던져 버려라. 하와의 귀에 죽음을 속삭였던 자가 너에게 아첨하는 말을 퍼붓기 시작할 때, 네 귀를 막아라. “만지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먹지도 말라”(골 2,21), 죄의 달콤함을 준비하고 내미는 자가 네게 다가올 때, 네가 앉아 있든 걷든(집에 있든, 길을 가든) 상관없이. 받아들이지 말고, 사방으로 자신을 단단히 닫아라; 성벽처럼 견고해져라. 놋벽과 흔들리지 않는 바위처럼 되어, 아무리 강한 바람이 너를 향해 몰아쳐도 흔들리지 않도록 하라. 용감하게 악마들을 물리쳐, 주님의 선한 전사, 그리스도의 상처를 지닌 자, 은혜의 순교자로 드러나며, 사도와 함께 이렇게 말할 담력을 얻으라: “나는 선한 싸움을 싸웠고, 경주를 마쳤으며,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의의 면류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딤후 4,8).

 

34. 규율에 대한 반란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음모와 파업을 감지하는 즉시 원장에게 알리도록 하라

34. 1) 규율에 반하는 소동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누군가 음모나 파업을 발견하는 즉시 원장에게 알리도록 하라. – 2) 평소에는 각자 자신의 일을 하며, 정욕과 욕망에 맞서 인내하고 싸워라. [1, 38]

11.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일에 충실히 머물며, 우리의 한계를 넘어서는 어떤 계획도 세우지 말아야 하며, 만일 그런 일이 생기더라도 그 일에 고집을 부리지 말아야 한다. 자녀여! 잦은 모임이나 파벌을 보게 되면, 그것들로부터 등을 돌리라. 그리고 누군가 너에게 그런 제안을 해오면, 그에게서 물러서고, 심지어 그의 말을 들어주지도 말라. 네가 수도원장님에 대한 믿음을 흔들고 그분에 대한 사랑을 약화시킬 수 있는 말을 듣게 되면, 마치 불을 피하듯 도망쳐라. 이는 그 해악이 조금씩 마음에 스며들어 구원의 근간까지 침투할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나의 진정한 수련자가 되고자 한다면, 나 외에는 어떤 고해 신부나 영적 지도자도 두지 말며, 악한 말을 하찮은 것으로 여겨 “그게 뭐 대수라고 신경 쓸 필요가 있겠느냐”라고 말하며 경시하지 말라. 그렇지 않다, 내 자녀들아, 그렇지 않다. 그러나 누군가 불신으로 치우쳐 모두에게 해를 끼칠 때, 달려와서 모든 것을 다 말해라. 어쩌면 어떤 이는 무지하고 무분별하게 반박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형제들이 나를 비난하고 미워할 텐데!”라고.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들이 나의 참된 자녀들이 아니라면, 그들의 칭찬이 너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진정한 자들은 반드시 너를 따르고 너를 칭찬할 것이다. 한마디로, 간청하며 상기시켜 주노니, 온전히 그리고 모든 일에서 나를 의지하라. 그리고 누구도 나에게 숨기거나 드러내지 않은 것이 없도록 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잔인한 상처로 변할 것이다.

12. 너희가 이전에 행하던 선한 일들을 계속하며, 힘써 주 안에서 너희의 경주를 한마음으로 끝까지 완주하고, 모든 것을 용감하게 견뎌내라. 모욕과 수고와 괴로움과 육체의 욕망과 생각의 어두움, 게으름과 낙담의 물결, 그 밖의 우리에게 흔히 닥치는 모든 일들을, 하나님을 향한 부끄러움 없는 소망과 주님의 계명을 엄격히 지키며, 죽음을 기억하고 자신의 욕망을 끊어내는 데서 오는 온전한 도움을 바탕으로 용감하게 견뎌내십시오. 그리하여 여러분은 순교자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이며, 천국에서 천사들과 함께 기뻐할 것입니다.

 

35. 우리 안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과 속이는 영의 작용에 대하여, 이를 알게 됨으로써 전자를 열망하고 후자를 멀리하도록 지시함

35. 우리 안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과 유혹하는 영의 작용에 대한 설명으로, 이를 알고 전자를 열망하며 후자를 멀리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1, 39] 적은 언제나 광란적으로 우리를 향해 달려들지만, 신성한 힘과 내 아버지이자 너희 아버지의 기도로 인해 항상 물러납니다. 그리고 오직 누군가가 그에게 자리를 내어주어, 하나님의 영을 자신으로부터 쫓아내고 낯선 영을 받아들일 때에만 그는 먹잇감을 얻게 되며, 그 낯선 영은 그가 좋아하는 대로 행하고 말하도록 가르칩니다. 우리가 이 두 가지 영향을 분별하는 법을 배우도록, 나는 여러분에게 그 둘의 구별되는 특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성령을 가진 자는 기쁨과 평화, 오래 참음, 사랑을 나타내며, 꿀과 벌집보다 더 달콤한 말을 합니다; 이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 말들이 마음의 풍성함에서 흘러나와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깨달음과 위로를 주기 때문입니다. 그들 입에서는 끊임없이 “용서해 주십시오, 혹은 축복해 주십시오, 아버지. 저는 어리석고, 그저 죄인일 뿐이며, 형제들의 무리에 속할 자격이 없고, 모든 피조물보다도 더 낮습니다.”라는 말이 들려옵니다. 그렇게 말하고 느끼는 것은 우리가 성령을 모시고 있다는 표징이다. 반대되는 영의 표징이 무엇인지 듣고 싶으십니까? 보라: 그것을 가진 자의 마음은 분노, 노여움, 정죄, 비방, 불신, 혐오, 증오, 건방짐, 불순종, 반항, 고집을 토해낸다. 그런 영혼からは 빛과 거룩함과 경건함이 도망쳤고, 겸손과 통회와 인내가 물러났으며, 눈물과 울음, 그리고 마음의 아픔이 마르고, 천상의 묵상과 죽음에 대한 기억과 죽음 후에 그녀를 동반할 천사들에 대한 기억도 사라졌으며, 그리스도의 무서운 심판대 앞에서 전 인류가 맞이할 심판, 엄중한 심판, 그리고 출생 당시부터—수도 생활에 들어선 시점만이 아니라—생각하고 말하고 행한 모든 것에 대한 자신의 책임 회피에 대한 생각은 망각의 어둠 속에 숨어버렸다. 이 모든 것을 여러분에게 설명하는 것은, 무엇을 붙들어야 하고 무엇을 피해야 할지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제게는 단 하나의 소망과 기도가 있으니, 바로 여러분 모두가 빛과 낮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며, 그리스도의 공동 상속자가 되고, 선택받고 거룩하게 된 그릇이 되어, 한 성령으로 하나가 되어, 성 다윗이 말한 바를 행함으로 깨닫고 마음으로 체험하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선한 것과 아름다운 것은, 형제들이 함께 화목하고 한마음으로 사는 것뿐이라”(시편 132:1).

 

36. 수고는 필수적이지만, 모든 일에는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있으므로, 수고가 지혜로운 자들의 번영을 방해하지는 않는다

36. 1) 위업은 필수적이지만, 모든 일에는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따르므로, 위업이 현명한 이들이 번영하는 것을 막지는 못합니다. – 2) 나의 지도에 더해, 선한 것을 분별하는 여러분의 지혜와 서로를 격려하는 마음을 더하십시오. 우리에게는 공동의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 3) 선한 일에 머물러 있으십시오. 열정을 지키고, 말을 삼가며, 도구와 물건을 소중히 여기고, 기도하십시오. [1, 40]

13.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수고와 영적 땀, 신성한 업적, 의로운 열정, 영혼의 흐름이니, 이는 경주의 장에 들어서 그 끝을 잘 이룩하고, 경건한 죽음을 맞이한 후 승리의 면류관을 쓰기 위함이다. 여러분 스스로도 아시다시피, 수고는 안식을 가져오고, 슬픔은 기쁨으로 보상받으며, 신음은 영혼의 위로로 채워지고, 비좁음은 넓음을 얻으며, 굶주림과 금식은 불멸의 환희를 맺어 주고, 갈망과 목마름은 주님께서 말씀하신(요한복음 4:14) “생명에 이르는 물”을 솟아나게 한다는 것을, 여러분 스스로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시편 기자인 성 다윗이 확신하듯이,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라” (시 125, 5)라고 시편 기자 성 다윗이 확신하듯이. “이것을 알라”, 그러나 “이를 행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기록되어 있듯이 (요한복음 3, 17). “어리석은 자는 이를 알지 못하고, 무지한 자는 이를 깨닫지 못하리라” (시 91, 7). 그러나 여러분은 지혜롭고, 선한 마음을 지녔으며, 분별력이 있고, 세심하며, 사려 깊습니다. 왜 어떤 미덕은 이미 이루었고, 어떤 미덕은 이루고 있는지요. – 덧붙이자면, 앞으로도 계속 이루어 나갈 것입니다. 계명에는 한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더 깊이 알수록, 계명에서 자신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더 깊이 깨닫게 됩니다.

14. 나는 너희에게 율법을 주며, 너희를 인도하여 어떤 것은 금하고, 어떤 것은 확립하며, 너희가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를 지시한다. 너희는 모든 일에서 나를 믿으며, 대장장이의 손에 잡힌 쇠처럼, 내가 계명으로 너희에게 요구하는 바를 순종한다. – 이로 인해 너희의 항해는 평온하고, 너희의 삶은 풍요롭다. 그러나 너희 스스로도 서로之间, 무엇이 선하고 유익한지 깨달았을 때, 그것을 행하고 서로 상기시켜 주라. 우리 모두는 마치 바다를 항해하는 배에 타고 있는 것처럼, 선장과 선원들이 공동의 일에 전념하듯이, 모두에게 유익한 단 한 가지만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나와 너희는 바로 그런 관계에 있다. 나의 임무는 키를 잡고 기민하게 배를 이끌며, 하늘을 바라보며 진리의 별들을 유심히 살피고, 그 별들을 따라 항로를 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깨어 있어야 하며, 각자 자신의 일을 수행하고, 사방으로 주위를 살피며 배를 침몰시킬 만한 것, 즉 얕은 여울이나 수중 암초에 부딪히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며, 돛과 밧줄을 제대로 관리하여, 어디를 느슨하게 하고 어디를 조여야 할지, 우리 배가 우리 영혼의 구원의 항구에 무사히 도달할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일을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세상을, 세상의 관습과 모든 육신의 쾌락과 즐거움을 버렸습니다.

15. 형제들아, 우리는 수련에 힘쓰며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인내로이 실천합시다. 그러면 우리가 면류관을 받고, 하늘의 시민이 되어 “모든 질병과 슬픔과 탄식이 사라진”(이사야 35:10) 그곳에서 복을 누릴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굳건히 서서 힘을 얻으십시오. 여러분의 열심의 등불이 끊임없는 부지런함의 기름으로 타오르게 하여, 꺼지지 않게 하고, 우리가 원치 않는 ‘미친 처녀들’의 운명을 겪지 않도록 하십시오. 존경하는 아버지들아, 침묵을 지키십시오. 전혀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삶과 양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부적절한 이야기를 하지 말고, (그로 인해) 웃음을 유발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말이 많으면 죄를 피할 수 없다”고 지혜가 확신하듯이, “입을 삼가면 지혜로워질 것이다”(잠언 10, 19). 여러분의 의무를 수행할 때 주의 깊게 행동하고, 부주의하게 행동하여 수레나 쟁기, 도끼, 그릇이나 접시, 혹은 그 밖의 필요한 물건들을 망가뜨리지 마십시오. 그러면 일이 중단되고, 영적인 일에 사용할 수 있었던 시간이 하찮은 일들로 낭비될 것입니다. 또한 항상 기도하여,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보이지 않는 적과 보이는 적에 대항하여 하늘로부터 도움이 내려오게 하십시오.

 

37. 나를 향한 믿음과 사랑 안에서 부지런히 일하십시오. 일을 주관하는 자들은 현명하게 관리하고, 부하들은 성실하게 수행하십시오.

37. 1) 나에 대한 믿음과 사랑 안에서 부지런히 일하십시오. 일을 주관하는 자들은 현명하게 관리하고, 부하들은 성실하게 수행하십시오. – 2) 조롱과 상호간의 상처를 피하십시오. 서로에게 친절하고 공손하며, 모든 비난받을 만한 것과 유혹을 피하십시오. [1, 41]

16. 하나님께 간구하노니, 여러분의 믿음이 약해지지 말고, 나 같은 겸손한 자에 대한 여러분의 영적 사랑이 식지 않게 하소서. 그러나 우리 모두가 같은 생각(고린도전서 1,10)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을 이행하는 데 있어 동일한 열심을 품게 하소서. 여러분이 고난을 겪고, 궁핍을 겪으며, 무거운 수고를 감당하고, 땀을 흘리고 있음을 압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한 사랑으로 인해, 부디 낙심하지 마시고, 인내하며 선한 일을 계속하여 하늘에서 기쁨으로 상을 받으시기를 간청합니다. 나도 다리의 병만 아니었다면 여러분과 함께 수고하고 싶었고, 여러분과 함께 일터로 나가 노동을 통해 내 몸을 낮추고 싶었습니다. 형제들과 힘을 합쳐 수고하는 것은 복된 일이며, 그들의 밭일에도 참여하는 것은 경건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수고를 통해 자신의 몸을 거룩하게 하고, 영혼을 가장 무욕하게 만드니, 이는 참으로 주님의 일꾼들입니다. 단, 명령받은 바를 올바른 분별력으로 지킬 때에만 그러합니다. 즉, 지도자들과 관리자들이 하나님의 경외심과 형제들에 대한 연민을 가지고 지시를 내리고, 부하들은 지도자들에 대한 순종과 복종을 지킬 때에만 그러합니다. – 그러니 관리자 여러분, 수고에 수고를 더하지 말고, 무정하거나 무책임하게 관리하지 말고, 의롭게, 자비롭게, 형제애를 가지고, 분별력 있게 관리하십시오. 모든 형제가 성품과 나이, 힘이 같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오직 이 조건 하에 여러분은 형제들을 다스리는 권위를 부여받았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그렇게 행한다면 복이 있을 것이니, 이는 위대한 은사와 복이 영원토록 여러분의 몫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여러분, 순종하는 자들도 겸손히 지도자들의 지시를 받아들이고, 진심으로 순종하며 행동하라.

17. 주님을 슬프게 하는 조롱이 너희 가운데 없기를,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헛된 말이 없기를, 너희 사이에 서로 원수처럼 대하는 쓴맛이 없기를 바란다. 사도가 말하기를 “모든 쓴맛과 분노와 노여움과 모든 악의를 너희에게서 제거하라”(엡 4,31); 또 “썩은 말이 너희 입에서 나오지 않게 하고 오직 선한 말만 하여 듣는 자들에게 유익을 주라” (엡 4:29)고 하셨으며, “서로 친절히 대하라” (엡 4:32), 온유하고 형제 사랑을 품으며,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엡 4:2), “서로의 짐을 지어 주며”(갈 6:2), 너그럽고, 용서하며, 서로 존중하고 양보하며, 경외심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십시오. 여러분이 이렇게 행하고, 이러한 삶을 산다면, 여러분은 나의 성도들이며, 오히려 하나님의 성도들이시며, 땅 위의 하나님의 천사들이시며, 그분의 권능을 경배하는 자들이요 그분의 영광을 섬기는 자들이며, 천국 왕국의 상속자들이시며, 성도들과 함께 거하는 자들이요 낙원의 주민들이시니, 그들에게는 그들을 위해 예비된 헤아릴 수 없는 복을 누릴 특권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이를 위해 기도하고, 간청하며, 간곡히 청하노니, 여러분의 발걸음이 언제나 하나님을 따라가게 하시고, 그분의 권능 안에서 강해지시며, 여러분 가운데 유혹이나 걸림돌, 치명적인 불순종, 재앙을 부르는 불평, 생명을 앗아가는 건방진 태도, 책망받을 만한 악한 욕망, 그 밖의 금지되고 죄악된 어떤 것도 없게 하소서. 하나님의 이성의 빛이 여러분의 모든 움직임과 행위에 앞서가게 하시고, 평화로운 질서가 여러분을 인도하며, 형제애의 고요함이 여러분 안에 지배하게 하소서. – 주 하나님 께서 평화의 천사, 충실한 지도자, 여러분의 영혼과 육신을 지키는 수호자를 여러분 곁에 두시어, 밤낮으로 악한 악마들을 여러분에게서 쫓아내고, 선한 삶을 살도록 인도하시기를!

 

38. 순종의 삶은 그 무엇보다 뛰어나니, 주님께서도 이를 택하셨다

38. 1) 순종의 삶은 그 무엇보다 뛰어나니, 주님께서도 이를 택하셨다. – 2) 그러니 이 길을 잘 걸어가며, 인내하고 지치지 말라. 보라, 죽음이 다가오고 모든 것이 끝날 것이니; 그러나 이와 더불어 다른 미덕들, 특히 사랑을 잊지 말라. [1, 42]

18. 간청하고 간곡히 부탁하노니, 굳건히 서서 용감하게 인내하며, 너그러운 마음을 품고, 용기를 내십시오. 삼중으로 복된 성스러운 수련자들이 어떤 영광을 누리게 될지 생각하십시오. 물론, 각자가 어떤 삶의 방식에서 하나님께 기쁨을 드렸는지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복을 장래의 세상에서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방식이 더 나을까요? – 잘 들어보십시오! – “산과 동굴과 땅의 깊은 곳”(히브리서 11:38)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이들, 즉 은둔자, 기둥 위 기도자, 은둔 수도자, 그리고 다른 어떤 삶의 방식으로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이들은 위대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베푸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광야 생활이나 기둥 위 생활, 혹은 그 밖의 어떤 삶의 방식을 사랑하지 않으시고, 순종하는 삶을 택하셨습니다. 그분께서 친히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 함이라” (요한복음 6:38).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나 자신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내가 말하고 선포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14:10; 12:49). 또한 그분은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종의 모습을 취하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수건으로 닦아 주시며, 이에 대해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서 섬기는 자와 같이 있노라” (누가복음 22:27). 보시다시피, 만물의 주인이신 그분께서 다른 누구보다도 우리 수도자의 삶을 기꺼이 받아들이셨다면, 여러분이 주님과 같이 살아간다는 사실에 어떻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어떻게 환호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어떻게 감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보다 더 기뻐할 만한 일이 여러분에게 또 있겠습니까? 다른 삶의 방식에 더 큰 호감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여러분이 순종하는 삶을 잘 살아가고 있다면, 그 어떤 삶의 방식도 여러분의 삶보다 더 낫다고 여기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게론디카나, 세 명의 수고자 중 한 분인 성스러운 장로들에 관한 전설에서도, 계시를 통해 드러난 더 영광스러운 인물은 은둔자나 병자보다도, 병을 기꺼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견디는 수련자였기 때문입니다. 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우리의 삶의 방식은 위대하고 온전히 거룩하니, 너희도 너희의 여정을 잘 마쳐 아브라함과 함께 영광을 얻고, 순교자들과 함께 기뻐하며, 의인들과 함께 거하게 될 것이다.

19. 그러니 멈추지 말고 잘 달려가라. 마귀의 시기 어린 눈길이 너희를 넘어뜨리지 못하게 하라. 인내의 기름으로 너희 발을 바르라. 그리하여 영혼의 열망으로 불타오르며, 너희가 자신의 길을 완주하는 데 만족하게 되리라. 의와 기쁨의 옷을 입고, 순결과 절제의 물을 마시며, “언제까지?”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이는 게으른 자들의 말입니다. 우리는 천 년을 살지 않습니다. 오늘은 내일이면 죽음이 닥칩니다. 매일 이 사실을 마음속에 새기며, 우리는 아버지의 율법을 따라 행하며 선을 행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세상의 짧은 생애 동안 이 법에 따라 살았습니다. 그러니 내 아버지의 거룩한 기도에 따라, 여러분 안에 자비와 평화, 사랑, 시기하지 않음, 질투하지 않음, 절제, 선한 순종, 선한 말, 협력, 상호 공감, 겸손한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살고, 그렇게 행하십시오!

 

39. 주님을 눈앞에 두어, 어떤 악한 일에도 흔들리지 말라. 마지막 날을, 더 나아가 무서운 심판과 그 결론을 기억하며 선을 행하기 위해 스스로를 다잡으라.

39. 주님을 너희 앞에 두어, 어떤 악한 일에도 휩쓸리지 않도록 하라. 출애굽을, 더 나아가 두려운 심판과 그 결론을 기억하며 선을 행하도록 스스로를 다잡으라. [1, 43] 평화의 유대 안에서 서로 사랑을 지키며, 주님을 너희 오른편에 계신 분으로 삼아, 정욕이나 분노, 시기, 조롱, 헛된 말, 또는 지옥의 올가미에 빠지게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에도 이끌리지 않도록 하라. 그 올가미는 아무리 작아도 너희를 지옥의 권세 안에 가두어 둘 것이다. 성 도로테우스가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시오! 독수리는 온몸이 자유로워도 발톱 하나만 그물에 걸려도 여전히 그물에 갇힌 것이나 다름없으며, 사냥꾼은 수월하게 그를 잡거나 쏘아 죽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스스로를 경계하고 절제하십시오. 절제하는 자들에게는 천국이 있습니다. – 우리가 삶을 소홀히 살아간다면, 특히 대천사의 나팔 소리가 모든 사람, 곧 모든 민족과 모든 족속과 모든 언어를 깨울 그 무서운 날에, 우리가 마지막 순간을 맞이할 때 어떤 두려움과 떨림을 겪게 될까요?!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늘이 찢어지고, 자연의 요소들이 불타버리며, 모든 피조물이 변할 것입니다. 만물의 심판자께서 심판의 보좌에 앉으실 것이며, 셀 수 없이 많은 성천사들이 그분 주위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 후 모든 사람 앞에서 각자의 행실과 말과 생각을 그 종류와 얼굴, 장소, 시간, 그리고 행해진 방식에 따라 폭로하실 것이며, 이 모든 것이 단 한 순간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마침내 성경에 기록된 대로, 선을 행한 자들은 영생으로 들어가고, 악을 행한 자들은 영원한 형벌로 가게 될 것이니, 그곳에는 울부짖음과 이를 갈음, 꺼지지 않는 불과 쉬지 않는 구더기, 그리고 끔찍하고 추악하며 온통 악의에 찬 악마들의 무리가 있을 것이다. –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 생의 끝까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간직한다면, 영생으로 가서 주님과 영원히 함께 머물게 될 것이다. 바로 우리 마음속에서 “누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는가?”(롬 8:35)라고 외쳐 나올 정도의 사랑 말이다.

 

40.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원수의 칼을 물리친다

40. 1)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우리의 원수의 칼을 물리친다. – 2) 모욕을 참아내라. – 3) 겉으로 드러나는 우월함을 자랑하지 말고, 겸손하고 온유하게 행동하라. – 4) 그리하면 너희는 순교자들과 함께하게 될 것이다. [1, 44]

1. 오랜 경험을 통해 너희는 수도 생활에서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의 방식을 충분히 깨달았다. 그러니 결코 흔들리지 말고, 너희의 올바른 분별력을 저버리지 마라. 너희에게 명해진 것을 사랑하고 모든 일에서 그것을 지키라. 또한 내가 이 세상 그 무엇보다 너희를 사랑하는 것처럼, 너희도 나를 사랑하라. 그러나 원수는 많은 우회로를 가지고 있으며, 우리 사이와 우리 안에 악을 교묘히 뿌립니다.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충만한 자들만이, 성스러운 말을 남긴 다윗(시 75, 4; 88, 44)처럼, 완전히 약해진 그 칼을 멀리 물리치고, 경건한 행위에 힘차게 매진하며 온 마음을 다해 하늘의 묵상과 행위에 전념합니다.

2. 보라, 마치 여러분과 함께 있는 것처럼, 나는 형제 중 누군가를 향한 잔인한 말—비난, 모욕, 혹은 그 밖의 다른 것—이 터져 나오는 것을 보고 듣는다. 그러나 형제여, 그런 모욕을 당하더라도 사나운 짐승처럼 변하지 말고, 겁먹지 말라. 굳건하고 흔들리지 말라. 왜냐하면 모욕과 수치는 그것을 내뱉는 자에게 돌아가고, 냉정하게 받아들이는 자에게 승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며, 저자는 그 순간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구제할 수 없는 노예이다.

3. 간곡히 부탁하노니, 서로 다투지 말고, 모욕하지 말고, 눈썹을 치켜올리지 말고, 거만하게 말하지 말고, 노래하는 데 더 뛰어나다거나, 수고하는 데 더 부지런하다거나, 경건함에 더 뛰어나다거나, 때로는 세속적으로 더 고귀하거나, 얼굴이 더 단정하다고 자랑하지 말라. 이런 것에 대해 생각하거나 말하지 말라. 오직 모든 일에 겸손을 입으십시오. 복종과 순종을 통해 주님 앞에서, 그리고 수도원의 지도자들 앞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4. 이 길을 걸어가라. 그러면 너희의 수고가 헛되지 않을 것이며, 너희의 수고도 헛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우리 주 하느님과 그분의 거룩한 천사들, 그리고 모든 피조물 앞에서 여러분에게 이 복음을 전하노니, 여러분이 자신의 삶을 선하게 마쳤을 때, 순교자들과 함께 기뻐할 것이며, 아브라함의 품이 영원토록 여러분을 보살필 것이며, 의인들의 무리가 여러분을 그들 가운데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41. 경제관을 독립된 권력으로 여김으로써, 여러분은 이중 통치와 분열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권력이 분열되면 왕국은 서지 못할 것입니다.

41. 1) 경제관을 독립된 권력으로 여김으로써, 여러분은 이중 통치와 분열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권력이 분열되면 왕국은 존속할 수 없습니다. – 2) 저는 온전히 형제단에 속해 있습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3) 유일하신 주님께서는 인간 사회에도 유일 통치가 이루어지기를 기뻐하셨습니다. [1, 45]

5. 무지 때문인지, 부주의 때문인지, 아니면 악의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여러분은 나를 불명예스럽게 만들며 경제관을 칭송하고, 내 수치를 드러내려고 그의 얼굴을 내세우며 자주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경제관이 여기 있었다면, 이런 일은 그렇게 처리되지 않았을 것이고, 훨씬 더 잘 처리되었을 것이다. 그 경제관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가 이 일을 어떻게 보겠습니까?”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말은 제 귀에 직접 들려옵니다. 어떤 이들은 또 덧붙입니다. “기다려 보세요! 경제관이 이 모든 것을 바로잡고 해결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마땅한 일입니까? 그리고 이것이 그와 저, 그리고 여러분에게 좋은 일입니까? 여러분은 불순종의 산물로 드러났고, 그는 자신의 직분과 권위를 넘어설 수 있는 자로, 저는 하나님의 뜻대로가 아니라 육신의 욕망, 즉 편애와 형제에 대한 지나친 호의에 따라 행동한 자로 비쳤습니다. 이러면 두 주인, 두 통치자, 두 원리를 들여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스스로 분열된 왕국은 서지 못하리라”(마태복음 12:25)고 하셨습니다. 이중 통치는 이미 다중 통치와 같습니다. 다중 통치는 파벌을 낳고, 파벌은 분열과 부패의 원인이 됩니다. 어찌하여 마땅히 지켜야 할 분수와 지위를 지키지 않고, 마땅한 바를 저버리며 스스로 재앙을 자초하는 것입니까?

6. 나는 죄인이요 어리석은 자이지만, 모든 것을 버리고 벌거벗은 채, 담대하게 이 거룩한 자리에 머물고 있습니다. – 내 어리석음 속에서 감히 이렇게 말하노니 – 형제나 삼촌, 아버지나 어머니, 친족 관계나 그 어떤 육적인 것을 위해서라도 마땅한 길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을 것이며, 설령 내 몸을 바치거나 내 피를 흘려야 한다 해도, 하나님의 도우심과 내 아버지의 기도를 의지하여 이를 거절하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으니, 오직 여러분과 나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7. 주님이시며 율법을 제정하신 분은 오직 한 분이시니, 기록된 바와 같이 만물 위에 단 하나의 권세와 단 하나의 신적 근원이 계십니다. 이 유일한 근원은 모든 지혜와 선함, 그리고 질서의 원천으로서, 하나님의 선하심으로부터 기원을 얻은 모든 피조물 위에 미치고 있으며, 피조물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오직 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자신의 삶의 질서를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습니다. 이는 신성한 모세가 세상의 기원을 설명하며,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인용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형상과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창세기 1:26). 여기서 비롯되어 사람들 사이에 온갖 지도권과 권세가 세워졌으니, 특히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총대주교구에는 한 명의 총대주교, 대교구에는 한 명의 대주교, 주교구에는 한 명의 주교, 수도원에는 한 명의 원장, 그리고 세속 생활에서도, 듣고자 한다면 한 명의 왕, 한 명의 장군, 배에는 한 명의 선장이 있다. 만약 이 모든 것에서 한 사람의 뜻이 모든 것을 다스리지 않는다면, 그 어디에도 질서와 규율이 없을 것이며, 이는 결코 좋은 일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제각각의 뜻은 모든 것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42. 사순절은 육체적인 절제뿐만 아니라 영적인 절제도 요구한다

42. 1) 사순절은 육체적인 절제뿐만 아니라 영적인 절제도 요구한다. – 2) 공동체 생활을 위한 금식의 정도는 적당해야 하며, 매일 조금씩 실천해야 한다. – 3) 무서운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경외하자. 그리고 죽음이 우리를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덮치지 않도록 하자. – 4) 나는 죽음과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을 지극히 두려워한다. – 5) 일어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매진하자. [1, 46]

8. 모든 것을 그 지혜로 다스리시며, 때와 해를 지극히 선하고 지혜롭게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일 년 동안 우리에게 구원과 영혼에 유익한 몇 가지 금식일을 정하셨으니, 이는 그 날들을 오로지 그분께만 바치고, 우리에게 닥치는 죄로 인한 더러움을 씻어내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날들을 정하시고, 우리가 지금 그 날들을 맞이할 수 있게 해 주신 분께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언제나 깨끗하고 흠 없이 살며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지켜야 하며, 특히 지금은 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지금은 정화의 때이니, 우리 자신을 정화합시다. 지금은 절제의 때이니, 절제를 지키도록 합시다. – 단지 먹고 마시는 것에만 국한되지 말고, 이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마음속의 정욕, 부끄러운 상상, 형제의 좋은 명성에 대한 시기, 이웃에 대한 분노와 불만, 입의 제멋대로인 말을 억제하여, 혀가 제 마음대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마땅한 이야기만을 할 수 있도록 한계와 시간, 분량을 정해 주며, 눈의 음란한 시선과, 악하고 하나님께 기쁨이 되지 않는 말을 듣는 것에서도 절제합시다. 그렇다, 나의 자녀들아, 그렇다. – 간청하노니, 너희 자신을 성령의 악기와 달콤한 시편처럼 조율하라. 너희 손이 무분별한 움직임과 정욕적인 접촉으로부터 벗어나 방탕해지지 않도록 지키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

9. 지극히 거룩한 사순절이 육신에 다소 부담스럽더라도, 그로 인해 낙심하지 마십시오. 조금만 참아 보십시오. 익숙해지면, 특히 첫 주가 지나면 그 부담을 더 이상 느끼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빵과 물, 그리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약간의 음식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아시다시피, 우리의 세 분의 복된 성부들은 거의 음식을 먹지 않고 지내셨는데, 어떤 분들은 사순절 내내, 어떤 분들은 일주일씩, 어떤 분들은 사흘씩 금식하셨고, 또 어떤 분들은 매일 조금씩 드셨습니다. 우리는 매일 다양한 음식을 섭취하지만, “우리의 겸손함 속에서 주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시기를” (시편 135:23), 이 우리의 작은 것을 위대한 안토니우스의 행적처럼 받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공동 생활을 하며, 성부들이 무엇보다도 우선시했던 왕의 길을 걷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영혼의 은밀한 보금자리에서 항상 자신을 깨끗하게 지키고, 여러분의 영혼에 해로운 어떤 일도 저지르지 않도록 하십시오.

10. “어둠의 비밀을 밝히시고 마음속의 생각을 드러내시는”(고린도후서 4:5) 하나님을 경외합시다. 그분은 “각 사람에게” 단지 “행실”에 따라만이 아니라, 말과 생각에 따라(로마서 2:6), 심지어 더 무서운 것은 무지한 죄에 대해서도 심판하실 것입니다. 누가 그분의 맹렬한 진노 앞에 설 수 있겠는가? 누가 그분 면전에서 죄 없는 자로 드러나는 것에 만족하겠는가? – 이 말을 듣고도 누가 의로운 길을 따르기를 열망하지 않겠는가? 누가 자신의 안일함과 나른한 나태함을 떨쳐버리려고 애쓰지 않겠는가? – 일어나라, 비통한 자들아! 밤은 지나갔고, 장차 닥칠 보응의 날이 이미 밝아왔다. 죽음이 우리를 준비되지 않은 채로 덮치지 않게 하시고, 우리에게 치유할 수 없고 영원한 상처를 남기지 않게 하소서.

11. 나는 가난하고 모든 사람보다 더 비참하며, 차라리 말하자면 온갖 고문을 받을 만한 자이다. 육신을 떠나는 일, 거룩한 천사들이 내 영혼을 데리러 오는 일, 그리고 성 안토니우스의 행적에 기록된 대로 내가 공중을 지나가며 세상의 주인에게 말을 건네는 모습을 생각할 때면, 나는 두려워하고, 공포에 떨며, 전율한다. 오, 나의 연약함이여!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매일 어떻게 방탕하게 지내며, 내 죄 가운데 졸음과 잠에 빠져 있는가? 모든 이의 재판장이시며 주님이신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내 모습은 어떠하겠는가! 심연을 말리고 엄중한 말씀으로 산을 무너뜨리시는 그분을, 나는 어떤 눈으로 바라보겠는가? 그곳에서 나는 내 변명을 무엇으로 하겠는가? 어떤 변호자를 찾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 이미 무자비하신 분을 간청할 수 있겠는가? 어떤 쓰라린 눈물과, 어떤 화해의 말과 진심 어린 탄식으로, 그분의 진리대로 접근하기 어려운 분의 자비를 구할 수 있겠는가?! – 아아, 나여, 아아, 나여, 나의 형제들이여! 나는 이미 여기서 내 운명을 보고 있다. 내게 남은 유일한 희망은 우리 거룩한 아버지의 기도와 여러분의 복된 중보뿐이다.

12. 그러나 우리는 다시, 또 다시 일어나서 온갖 하느님께 기쁨을 드리는 일에 힘쓰며, 현재를 용감하게 견디고 미래의 희망으로 위안을 얻어야 합니다. 육신을 경멸하고, 수고나 슬픔, 모욕, 굶주림, 그 밖의 그 어떤 것도 보지 말고 오직 우리의 일에만 전념합시다. – 우리가 이렇게 산다면, 의심할 여지 없이 구원을 얻을 것이며, 하늘에서 성인들의 무리에 받아들여져, 태초부터 주 그리스도께 기쁨을 드린 모든 성도들과 함께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43. 공동체 생활을 하며 수고하는 이들은 복이 있나니, 기뻐하라!

43. 1) 공동체 생활을 하는 수고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기뻐하라! – 2) 비좁게 살고 있지만, 옛날의 수행자들도 그렇게 살았고, 오늘날의 사람들도 그렇게 살고 있으니, 낙심하지 마십시오. – 3) 계명과 규율을 지키고, 서로 돕고, 성경 읽기에 귀를 기울이며, 경외심으로 구원을 이루고, 여성들과의 사교는 피하십시오. [1, 47]

13. 자비로우시고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풍성하심에 따라, 그분의 미리 정하신 뜻에 따라, 이 거룩한 수도 생활 속에서 그분께 온전히 헌신하고, 그분과 천사들을 본받아 그분을 찬양하는 가장 가깝고 진실한 봉사에 온전히 자신을 바치도록, 우리를 거룩한 소명으로 부르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 또한 우리 마음을 움직여 부모와 친족, 조국, 그리고 그 밖의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의 선하고 구원하는 멍에를 지게 하셨으며, – 우리의 겸손함으로 여러분과 함께 생활하고 동거할 수 있게 하셨으니, 물론 여러분을 인도하고 돌보기 위함이 아니라, 비록 그렇게 되었을지라도 나는 감히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자녀들아,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하늘의 시민들이여, 땅의 추방자들이여, 위로부터 온 예루살렘의 주민들이여, 이곳을 떠난 나그네들이여, 천국의 상속자들이여, 땅의 복을 상속받지 못한 자들이여, 기뻐하라. 하나님의 계명을 위해 추방과 나그네 생활의 고난의 길을 걷는 이여, 기뻐하십시오. 세속적으로는 마지막에 속하지만, 지혜의 선물을 더 많이 소유한 이들이여, 기뻐하십시오. 기뻐하라, 선하고 하느님께서 모으신 공동체여, 한마음 한뜻으로, 아버지를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성회여, 땅 위의 또 다른 천사들의 모습이며, 우리 모든 경건한 선조들의 옛 거처를 새롭게 하는 이들이여. 기뻐하라, 하나님의 일꾼들이여, 수고하는 자들이여, 누구에게도 짐이 되지 않기 위해 밤낮으로 자신의 손으로 일하며, 단지 자신들만을 만족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형제들 중 가장 연약한 자들과 외부에서 궁핍한 자들까지 돌보는 자들이여. 기뻐하라, 끊을 수 없는 굳건한 유대여, 하나님께서 정하신 형상이여, 왕의 위협도, 방백들의 두려움도, 다가올 죽음도 그대를 흔들지 못하였도다. 기뻐하라, 서로를 기쁘게 하는 이들이여, 그들 중 누구도 형제에게 유익한 것을 귀히 여기며, 그들 사이에는 시기나 질투, 경쟁이 없고 오직 평화와 사랑, 그리고 하나됨이 지배하는 이들이여.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우리가 시련을 겪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왜냐하면 누가 면류관을 쓰겠는가? 정복할 수 없고 대적하며, 화살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을 던지는 자를 상하게 하는 자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탄의 공격 아래 쓰러지지 않기 때문이다. 진실로, 나의 하나님께서 모으신 자녀들아! 너희는 성령의 은사로 양식을 얻고, 주님께서 주시는 물을 마시니, 그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토록 목마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물이 그에게 “영생으로 흐르는 샘물”이 될 것이다(요한복음 4:14, 15).

14. 겨울이 찾아왔으나, 우리에게 거처는 적고, 그것마저도 열악하고 비좁습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여러분은 덕행에 있어 너그러우며 이 점에서 칭찬받을 만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슬픈 일이더라도 그것을 슬픈 일로 여기지 않고, 오직 언제나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일을 행하는 것만을 염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옛 성부들을 떠올려 보거나, 심지어 지금도 수련하고 계신 분들을 생각해보면, 우리가 궁전처럼 살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보십시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종들 중 어떤 이들은 야외에서 살고, 어떤 이들은 동굴과 무덤에 틀어박혀 지내며, 또 어떤 이들은 쇠사슬을 차고 아주 적게 먹으며, 빵 한 조각으로 만족하거나 심지어 그것조차 삼가며, 이틀에 한 번씩 나무 열매로 그 필요를 채우고 있지 않습니까? 참으로 지금도 그러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슬퍼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결코 그들보다 뒤처지지 않을 것이며, 성부들이 확신하듯이 그들과 동등하거나 심지어 그들보다 더 높은 자로 인정받을 것입니다. 다만 언제나 게으르지 말고 모든 일에 기꺼이 임하십시오. 열정을 더욱 불태우고, 더욱 굳건히 버티며 용기를 내십시오. 적들을 땅에 쓰러뜨리고, 여러분의 겸손과 고백의 칼, 순종의 칼로 그들을 짓밟으십시오. 진리의 태양이 항상 여러분의 마음속에 비추어 정욕의 어둠을 몰아내게 하십시오. 왜냐하면 그 태양이 떠오르면 짐승들은 제 자리로 물러가 “자기 침상에 누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영적으로 이해하십시오. 우리는 생명의 아침부터 죽음의 저녁까지 주님의 일에 나서서, 우리의 사명을 다할 것입니다(시 103:22, 23). 조금만 더 있으면 승리할 것입니다.

15. 규칙과 계명, 규정을 지키십시오. 넘어진 자는 일으켜 세우고, 기력이 쇠한 자는 힘을 북돋아 주며, 모든 일에 서로 도우십시오. 그리하여 지혜로우신 분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서도 이루어지도록 하십시오. “형제는 형제를 돕나니, 이는 성벽이 견고하고 높음과 같으니라”(잠언 18:19). 읽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누구에게 더 유익한 말씀인지 분별하십시오. 각자는 자신의 일을 하나님의 일처럼 정성껏 행하십시오. 그리고 모두 “두려움과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립보서 2:12)는 말씀을 실천하십시오. 자신의 마음에 칼을 꽂지 말고, 영혼의 일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형제 여러분, 몇몇 형제들을 통해 여러분이 어떤 상황에서 올바르게 행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제게 알려졌습니다. 곧, 여인들을 빤히 쳐다보고, 우리를 낙원에서 쫓아낸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와가 아담에게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듣지 못했습니까? 그러니 도망치십시오, 위대한 마르티니아노처럼 그들로부터 도망치십시오. 육신으로는 아니더라도, 온갖 방법으로 영으로라도 말입니다. – “왜 저 사람은, 혹은 저 여자는 부활절에 여기 오지 않았는가?!”라는 말은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하지만 다음 번에는 반드시 잊지 않고 올 것입니다. – 간청하고 기도합니다. 여러분의 회개에 대한 좋은 소식을 제가 항상 듣게 해 주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자 아버지이신 분께서, 성스러운 나의 아버지의 중보와 여러분의 기도를 통해 매일 그분의 강력한 능력으로 저를 죄의 깊은 구렁에서 건져내시듯이, 여러분에게도 “지혜롭게 행하며 같은 규범에 따라 살아가게” (빌 3,16), 여러분 안에 한 영과 한 마음과 한 뜻이 있게 하시며, 경건하고 의롭게 살아가시어, 태초부터 하나님께 기쁨을 드린 모든 성도들과 함께 약속된 복을 누릴 자격을 얻게 하소서!

 

44. 원장직에 대한 자기 자신에 대한 두려움

44. 1) 영적 지도에 대한 자기 자신에 대한 두려움. – 2) 심판을 기억하며 모든 것에서 초연해지는 데 힘쓰자. 선을 행하도록 스스로를 다그치면, – 쉬워질 것이다. – 3)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것과, 타인이나 자신의 신체 부위에 대한 정욕적인 접촉을 피하라. [1, 48]

16. 나는 여러분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가능한 한 자주 말하고 격려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겠습니다. 이는 무지나 부주의로 인해 여러분 중 누구라도 죽음의 독침, 즉 죄에 찔려 상처를 입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계명을 어기고 부적절한 일을 저지르는 것, – 내가 이렇게 할 때면, 교활한 사탄이 여러분 중 일부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들에 대해서는 내가 크게 울며 가슴 아파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어떤 방식으로든 범한 모든 죄에 대해, 나 이 무능한 자는 의로운 심판의 날과 사람들이 행한 모든 것이 주 하나님 앞에서 드러나는 날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미리 여러분에게 알리지 않고, 미리 여러분을 굳건하게 세우지 않고 가르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화가 있을지어다!” (고린도전서 9:16). 특히 나는 양이라 불릴 자격조차 없으면서 목자의 직분을 맡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비통합니다! 내가 어둠 그 자체인데 어떻게 다른 이들을 깨우칠 수 있겠으며, 정욕에 시달리는 이들을 치유할 수 있겠는가? 나 자신도 그 정욕에 사로잡혀 휘둘리고 있는데 말이다! 그러나 여러분을 향한 사랑과 아버지의 명령에 대한 순종으로, 차라리 지옥 불의 먹이가 되는 편이 여러분에게 해를 끼치는 것보다 낫다고 여기노라. 저는 매일 하나님의 심판이 어떠한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특히 말씀의 지도자인 자에게 모든 면에서 온전하고 온갖 미덕으로 충만할 것을 얼마나 엄격히 요구하시는지를 되새기며 깊이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저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어디로 의지해야 할까요? 누구를 동역자로 삼아야 할까요? 남은 길은 하나뿐입니다. 바로 여러분의 기도와 제 아버지의 기도에 의지하여, 그 기도로 굳건히 서게 되어 여러분을 잘 인도하고, 제 자신의 정욕과 싸우며, 모든 일에서 주님의 뜻을 따를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17. 하늘나라가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실천함으로써 그곳을 차지합시다. 쾌락을 탐하지 말고, 나태해지지 맙시다. 오히려 세상과 세상에 있는 모든 것에서 점점 더 깊이 떨어져 나가며, 교활한 영들을 이겨내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흔들리지 않는 영생의 피난처에 안식할 때까지 노력합시다. 부주의한 자들을 기다리는 고통은 얼마나 쓰라린가! “악을 행하는 모든 사람의 영혼에 대한 분노와 진노”가—모든 그리스도인의 영혼, 더 나아가 수도사의 영혼에 닥칠 것입니다! (롬 2:8-9). 우리가 더 큰 존경을 받을수록, 우리에게 요구되는 삶의 순결함도 더 커지기 때문이다. 자기 절제로 인한 괴로움은 일시적이지만, 이 짧은 절제를 통해 모든 선을 행하는 데 있어 꾸준한 선한 마음을 얻게 된다면, 여기서 흘러나오는 기쁨은 영원할 것이다: 이는 음식에 관해서도, 잠에 관해서도, 성급함에 관해서도, 악한 생각에 관해서도, 그리고 그 밖의 모든 것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 왜냐하면 우리가 선을 사랑하고 그것을 위해 스스로를 단련한다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행할 힘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에게 미덕의 길은 쉽고 평탄해질 것이다. 그러나 죄는 그 죄에 빠진 자들에게 어려움과 험류, 슬픔, 어둠, 가증한 일들, 그리고 파멸로 가득 차 있다. 그러니 오라, 나의 자녀들아, 슬픔이 있으면서도 슬픔이 없는, 좁으면서도 넓은 하나님의 길을 함께 걷자. 기도할 때 굳건한 선한 마음을 품고, 아름답게 노래하며, 열심히 기도하고, 형제들에게 사랑을 베풀며, 어느 정도 겸손한 태도를 유지하라.

18. 대담함은 큰 악이자 치명적인 것입니다. 교활한 마귀는, 누군가 스스로를 경계하지 않으면 재빨리 그 틈을 타서 도둑처럼 몰래 침투하여, 자신의 악의 화살로 우리 영혼을 찔러, 젊은이들의 아름다운 얼굴로 시선을 사로잡고, 달콤한 미소로 이쪽저쪽 모두에게 정욕의 불길을 일으킵니다. 마침내 그가 한 사람을 유혹하여 불결한 사랑으로 이끌면, 그때는 그가 정을 품은 상대에게도 접근하여 그를 매료시키고 정욕적으로 이끌려고 시도한다. 그러면 시선과 응시를 주고받는 상호 교감, 마음의 토로, 그리고 관능적인 열정이 이어지게 된다; 결국, 하나님의 특별한 도우심과 아버지의 보호, 그리고 유혹을 당한 당사자들의 자각이 없다면, 그곳에는 파멸, 즉 소돔의 화염과 고모라의 파멸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이것으로부터 도망쳐야 한다! 나는 먼저 유혹을 겪은 자로서, 유혹을 받고 있는 여러분에게 손을 내민다. 이에 대항하는 위대한 버팀목과 방어책은 눈을 지키고 진실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 그러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부주의한 대담함을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도 죽음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인데, 이를 모르는 이들에게는 차라리 밝히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고통을 겪은 분들은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시겠지만, 그럼에도 모든 이가 경계해야 마땅합니다. 만지지도 말고, 앉지도 말며, – 자신의 나체를 바라보지도 말라. 그래야 가나안의 저주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안토니우스 대성인이 말했던 그 광야의 기둥이 무너진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으니, 비록 지혜로운 신부께서 이를 직접 말씀하시지는 않으셨지만 말이다. 그러니 너희가 얼마나 위험하게 걷고 있는지 조심하여, 죽음에 휩싸이지 않도록 하라. 불쌍한 사람아! 사도가 이렇게 말한 것을 아느냐? “누가 나를 이 죽음의 몸에서 건져 주겠느냐?” (롬 7:24). 너는 마치 야수나 사자와 같이 이 육신과 함께 살고 있다. 네가 그에게 칼을 들이대지 않으면, 그가 너를 납치하고, 짓밟고, 죽일 것이다.

 

45. 악마들은 정욕을 자극하여 유혹하고 파멸시키니, 싸워야 한다

45. 1) 악마들은 정욕을 자극하여 유혹하고 파멸시키니, 맞서 싸워야 한다. – 2) 넘어졌는가? 슬퍼하며 회개하고 일어나라. 주님께서 치유해 주실 것이다. – 3) 그분의 음성을 듣자. 겁내지 말고 무장하자. – 4) 공동체 생활에서 책망받을 만한 일은 모두 피하고, 요구되는 모든 일에서 성공하라. [1, 49]

19.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길을 바로잡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의로운 판결을 지키는 것 외에 무엇이 있겠는가(시 118:9). 그러나 그 외에도 우리는 참으로 이 세상의 어둠의 통치자들과 끊임없이 싸우고 있으며, 『사다리』에 기록된 대로(4, 35; 26, 126)에 기록된 대로, 그들은 공격하고, 선동하며, 정욕으로 괴롭히고, 하복부의 움직임으로 자극하며, 정욕의 불을 지피고, 악을 증식시키고 다양화시키니, 그들의 유혹은 치명적이다. 가련한 사람이 스스로를 경계하지 않으면 이 중 무엇에든 사로잡히게 된다: 살인과 다름없는 시기심에, 허영심에, 은밀한 죄에, 혹은 악한 생각을 품은 자들과의 교제에. 왜냐하면 이 중 단 하나만으로도 이 고통받는 영혼은 지옥으로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들 중 무엇이든 누군가가 걸려들게 되면, 그는 이미 하나님을 잃었고, 천국도 없으며, 영생을 박탈당하고, 끝없는 기쁨을 잃게 되며, 꺼지지 않는 불과 잠들지 않는 구더기, 칠흑 같은 어둠, 그리고 악마들과의 동거를 상속받게 된다. – 우리 형제들아, 우리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자; 적의 올가미를 피하도록 힘쓰고, 굳건히 싸우며, 정욕의 불길을 견뎌내자. 그러면 그 불길은 반드시 꺼질 것이다. 우리가 싸운다면,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길은 우리가 이 불길 속에서 타버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니, 우리는 순결의 이슬로 시원함을 얻으며, 성스러운 소년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이다. 질투가 닥쳐오더라도, 이 정욕에 맞서 무장하자. 그러면 그것은 잠시 머물다 사라질 것이다. 한 시간이나 세 시간, 어쩌면 하루 종일 지속될지 모르나, 우리의 침상에서는 사라진다. 그리고 너는 이처럼 싸워 이겨, 고난이 아니라 면류관을 받을 그리스도의 전사들 대열에 합류하게 될 것이다.

20. 너는 상처를 입었지만, 너 자신도 타인을 상처 입혔다. 너는 넘어졌으나—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서둘러 일어서라. 너는 말로 인해 마땅치 않은 일에 휩쓸렸고, 눈으로 보는 것에 유혹당했으며, 마음의 무기력으로 인해 환상에 사로잡혀, 웃음을 터뜨렸는가? 다시 마땅한 길로 돌아와라, 다시 네 본래의 자리로 회복하라, 회개하는 자가 되어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고백하라, 네 영혼 깊은 곳에서 따뜻한 눈물을 흘리고, 네 마음 깊은 곳에서 탄식을 내뱉고, 신음하며, 고개를 숙이고, 통회하며, 겸손하게 지혜를 구하라. 이것이 바로 영혼의 치유이다! 기록된 바와 같이: “돌이켜 탄식할 때, 그때에 구원을 얻고 네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깨달으리라”(사 30:15); 그리고: “내가 네게 말할 때, 네가 ‘내가 왔나이다’라고 말하리라”(사 58:9); 또 “슬퍼하며 늙은이가 오면, 내가 그의 길을 고치리라” (이사야 57:17)고도 기록되어 있다. 보라, 우리가 얼마나 선하시고, 얼마나 자비로우시며, 얼마나 위로해 주시고, 얼마나 기꺼이 귀를 기울여 주시는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지! “그분은 우리 죄를 씻어 주시는 분이시니라” (요한일서 2:2); 우리를 위해 가난해지시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소진하시며, 상처와 모욕, 비방, 조롱을 받으시고, 지극히 거룩한 피를 흘리셨으니, “그의 상처로 말미암아 우리가 나음을 얻었도다”라고 기록된 대로입니다(이사야 53:5). 그러니 와서 그분께 나아가 “그분께 엎드려 그분 앞에서 울자. 그분은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분의 목초지를 뜯는 백성이요, 그분의 손안의 양들이기 때문이라” (시 94,7).

21. 오늘 그분의 음성을 듣고, 더 이상 그분을 슬프게 하지 말며, 옛 사람들(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불신으로 인해 불평에 빠지지 말고, 좁고 고통스러운 길을 통해 이르는 약속의 땅으로 게으름 피우지 않고 나아가자. 만약 그 당시 사람들이 그들의 지도자 여호수아와 여호수아의 아들 할렙의 말을 들었더라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상속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무적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그 험난한 길을 가는 것을 지루해하고 겁을 내며, 마주치는 민족들의 저항을 두려워했기에, 멸망당하고 말았으며, 그들의 기억은 소란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만일 너희가 우리 같은 합당치 못한 자들의 말을 듣고 용기를 내지 않으며, 이집트에서의 노예 생활과 이 세상의 정욕에 대한 노예 생활을 생각하며 육신의 쾌락을 좇아 솥 앞에 앉아만 있다면,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와 호의로 이미 해방된 그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니, 오히려 우리와 함께 용기를 내어 활기차게 일어나, 열정으로 타오르는 마음을 품고, 평안의 복음을 전할 준비를 하여 발에 신을 신고, 의심할 여지 없는 믿음의 갑옷을 입고, 모든 기도로 모든 때에 성령으로 기도한다면(엡 6, 14–18): 그러면 우리와 여러분은 영적인 여정을 성공적으로 완수하며, 마주치는 이질적이고 야만적인 정욕들을 짓밟고 이겨내며, 눈물을 통해 마음속으로 요단을 건너, 불멸의 생명과 지성을 초월하는 풍요로운 은혜가 자라나는 그 땅을 상속받게 될 것입니다.

22. 나는 지금도 언제나 그랬듯이, 여러분의 영혼을 단련하기 위해, 많지 않고 보잘것없는 말들로 여러분에게 씨를 뿌리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이 빈약한 말도 받아들이시고, 여러분의 선행으로 이 작은 말을 서른, 예순, 백 배로 불려 주십시오. 부디, 간청하건대, 여러분 삶의 어려움을 기꺼이 견디시고, 여러분에게 맡겨진 순종을 온 힘을 다해 이행하십시오. 모두 기뻐하고 저와 함께 기뻐하며, 모두 번영하기를 바랍니다. 아무도 불평하지 말고, 아무도 다른 (순종)을 탐내지 말고, 아무도 이웃 앞에서 교만해하지 마십시오. – 이는 그러한 것이 주님과 사람들에게 가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 아무도 영혼이나 몸으로 부끄러운 일을 행하지 말고, 아무도 몰래 먹지 말고, 아무도 거짓말하지 말고, 아무도 정죄하지 말고, 누구도 책망하지 말고, 게으르지 말고, 죄에 대한 변명을 꾸며내지 말고, 누구도 이중적인 말을 하거나, 쉿쉿거리고, 허세를 부리고, 말만 많고, 위선적이며, 형제를 미워하고, 게으르고, 고집스러운 자가 되지 말라; 오히려 모두 하나님의 길로 선을 행하고 선하게 움직이며, 평온하고(눈에 띄지 말고), 절제하며, 지치지 말고, 겸손하며, 순종하고, 친절하며, 건방진 대담함을 미워하고, 서로 사랑하며, 간사함이 없으라; 그렇게 생활하고 행동함으로써, 우리 앞에 놓인 사명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하나님께 기쁨을 드려 약속된 복을 얻게 하려 함이라.

 

46. 우리는 고귀한 삶을 살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스스로 다짐한 대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기대하는 대로 살고 있을까요?

46. 1) 우리는 고귀한 삶으로 부름받았습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스스로 다짐한 대로, 그리고 다른 이들이 기대하는 대로 살고 있을까요? – 2) 선한 일에 변함없이 매진하고, 행동뿐만 아니라 꿈속에서도 정욕에 휩쓸리지 맙시다. – 3) 우리가 왜 세상을 떠났습니까? 고난 속에서, 그러나 희망을 품고 살기 위해서입니다. [1, 50]

23.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셨으니,경이로운 바울의 말씀대로, “모든 이에게 구원을 주시는 것이니, 세상의 정욕을 버리고,특히 수도 생활을 사랑하게 된 우리들은 “절제하며, 경건하고 “의롭게 살며, 복된 소망과 우리 위대한 하나님이자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자” (디도서 2, 11. 12), 그분은 어떤 이들에게는 “선한 행실의 인내”에 따라 천국을 주실 것이요, 다른 이들에게는 “열심”과 육신의 욕망으로 선한 결심과 행실을 저버린 자들에게는 “진노”와 영원한 불 속에서 끊이지 않는 고통을 주실 것입니다 (로마서 2, 7. 8). – 보십시오, 우리가 과연 그렇게 살고 있습니까? 처음에 우리 안에 있던 그 뜻대로 살고 있습니까? 그러므로 ‘ 성도, 수도자라는 이름과 칭호를 받았으니, 훗날의 행실로 처음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말며, 처음에는 향기를 풍기다가 마지막에는 그을음으로 코를 찌르는 향이나, 처음에는 밝게 타올라 집 안을 모두 비추다가 나중에는 숨겨지거나 꺼져 버리는 등불과 같지 말자.

24. 참된 미덕의 두드러진 특징은 언제나 자신의 성품을 지키는 데 있으며, 이것이 바로 우리의 과제이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쉽게 미혹되고 부적절한 일로 쉽게 타락하기 마련이니, 이는 어디선가 신성한 음성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사람의 생각은 어릴 때부터 악에 치우쳐 있다” (창세기 8:21). 그러니 세상을 버리고, 다시는 그 세상의 동조자나 정욕에 사로잡힌 자가 되지 맙시다. 영광을 버렸으니, 악한 마음으로 다시 그것을 탐하지 맙시다; 이곳에서 우리 자신이 모든 것에서 벗어났음을 고백했으니, 우리에게 낯선 욕망과 혜택에 다시 다가가지 맙시다. 도대체 왜, 천사들과 사람들의 증인 앞에서 한 서약을 잊고, 누가 우두머리가 될지, 누가 가르치는 자리가 될지, 누가 안식을 누릴지를 찾고 있는 것입니까? 또 어떤 이들은 어떤 일에서 그들에게 약간의 무관심을 보이거나, 그들을 지극히 경건한 분들로 존중하지 않으면 극도의 불만을 드러내는데, 마치 눈앞에 죽음도, 무서운 심판도, 그들의 생각 과 행위에 대한 정죄도, 그리고 그들을 짓누르는 죄의 짐도 없는 것처럼, 오히려 마음이 이끌리고 갈망하는 것, 그리고 아래로 기울어진 생각이 그려내는 것, 즉 꿈속에서 한 사람은 성직자로, 다른 사람은 원장으로 승격시키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지혜의 말을 입히며, 이 사람에게는 수도원의 건축과 필요 사항을 맡기는 것. 이것이야말로 사탄의 유혹과 속임수가 아니겠는가?! 이 점에 대해 모든 이를 책망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이들이 일부 있다. 그러나 우리의 말은 선한 생각과 감정을 굳건히 하도록 모든 이에게 일반적으로 전해진다.

25. 모든 명예를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고 세상의 모든 것과 작별을 고한 우리는, 그 대신 무엇을 시작했는지, 바로 그 일에 힘쓸 것이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이 세상을 떠났는가? – 우리는 구걸하고, 울고, 굶주리고, 목마르며, 마음이 청결하고 화평을 이루는 자가 되기 위해, 모욕당하고, 박해받고, 만일 그런 일이 생긴다면 비방받기 위해, 세상의 버림받은 자가 되기 위해, 그리고 마침내 박해의 때가 오면 우리를 위해 죽으신 분을 위해 스스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나왔습니다: 이는 그렇게 결심하고 언제나 그에 준비된 자들은, 진정으로 그 고난을 겪은 자들에게 속하며, 그들과 함께 영광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며, 우리 유일한 하나님이시며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할 것이기 때문이다.

 

47. 선택한 삶에서 굳건히 서고, 네 앞에 놓인 기쁨들을 스스로 박탈하지 말라

47. 1) 선택한 삶에서 굳건히 서고, 네 앞에 놓인 기쁨을 스스로 박탈하지 말라. – 2) 주님께서 너를 위해 너보다 먼저 겪지 않으신 고난이 무엇이 있겠느냐. – 3) 수도원을 탈출한 자에 대한 슬픔과 장로들에게 주는 권면. – 4) 탈출한 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권유. [1, 51]

26. 우리 죄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간청하노니, 주님의 거룩하고 생명을 주는 계명을 신실하게 이행하는 데 있어 굳건하고 흔들리지 말라. 누구도 죄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졸지 마십시오. 누구도 우리를 유혹하는 마귀의 유혹에 굴복하지 마십시오. 누구도 악의적으로 죄를 우리에게 숨기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한 가지 말을 하면서, 사람들의 길을 지켜보시고 은밀한 곳까지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다른 모습을 보이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영생에서 여러분을 기다리는 기쁨을 스스로 박탈하지 마십시오. 이 완고하고 타락한 세대에서 구원받으십시오. 세상을 미워하고,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온갖 집착, 달콤한 쾌락, 자기 뜻과 자기 만족을 미워하십시오. 이제 우리는 세상과 결별하였고, 주님을 경외하는 길로 들어섰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으니, 우리가 버린 어떤 것도 다시 그 뒤를 쫓거나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네가 세상과 세속적인 것들로부터 도망쳐 이곳에 왔으니, 순종의 종이 되기로 한 선하고 놀라운 결심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심지어 피를 흘릴 지경까지 기꺼이 모든 것을 견뎌내라. 이는 네가 이미 하나님과 그분의 천사들 앞에서 서약할 때 약속한 바이다. 네가 과연 그런 사람인지는 네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라, 사람아, “하나님은 조롱을 받지 않으신다”(갈 6:7). “모세의 율법을 저버린 자는, 두세 증인이 있으면 자비 없이 죽임을 당한다.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 서약을 어기며, 언약의 피를 더럽혔다고 여기는 자들은 얼마나 더 심한 형벌을 받을지 상상해 보라” (히브리서 10:28, 29).

27.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셨는데, 너는 종으로서 어떻게 네 주님과 동등하게 고난을 당할 수 있겠느냐? 그런데도 너, 사랑하는 자여, 왜 화를 내느냐? 왜 분을 터뜨리느냐? 왜 분개하느냐? 왜? – 너를 욕했느냐? 주님께서도 그것을 참으셨다. 뺨을 때렸는가? 그분께서도 때리는 자에게 얼굴을 내밀지 않으셨는가? 너를 조롱했는가? 네 주님께도 똑같은 일이 있었다. 그분은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다. “주님을 모욕하는 자들의 모욕이 내게 닥쳤나이다”(시 68:10);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 손과 발을 뚫었나니, 내 모든 뼈가 흩어졌도다”(시 21,17-18). 주 그리스도의 생명을 주는 고난과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분의 죽음을 생각할 때, 어떤 돌 같은 마음이라도 녹지 않겠는가! 그러나 여러분은 매일 그분을 위해 자발적으로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기로 결심하지 않았습니까? 사실 실제로도 그렇고, 제가 보기에 여러분은 앞서 말한 것에 대해 열의를 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구세주를 본받아 그분과 함께 고난을 겪고자 하며, 천국에서 그분과 함께 영광을 누릴 자들로서 그렇게 하고자 합니다. 물론, 여러분 중 한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고, 그에게 내재한 미덕에 따라 그를 능가합니다. 그러나 주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그리스도의 성숙함에 이르는 데 필요한 힘과 굳건함을 베풀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28. 내가 무언가에 기뻐할 때, 여러분도 함께 기뻐하기를 원하며, 내가 슬퍼할 때, 여러분도 나와 함께 슬퍼하기를 원합니다. – 지금 오르시시우스 형제 때문에 제 슬픔이 적지 않습니다. 그는 어제 우리 눈앞에서 사라졌습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나약한 자를 미리 예상하지 못하고, 경고하지도, 돌보지도 못한 나쁜 목자인 저의 죄 때문입니다. 아아, 불행한 나여! 나는 마땅히 심판과 정죄를 받고, 고통과 고문에 처해져야 마땅합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그러나 여러분 스스로도 조심하십시오. 제가 여러분을 지도하는 일이 제 영원한 파멸의 원인이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여러분 각자는 마땅한 규율을 굳게 지키고, 고해성사 때 반드시 모든 것을 저에게 털어놓으십시오. 각자 자신이 부름받은 소명에 충실하라. 너희, 고위 성직자들아, 다른 이들보다 먼저 세상을 버린 자들로서, 너희의 무분별함으로 인해 또다시 이와 유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하라. 너희는 마땅히 지켜야 할 경계를 넘어서는 행동을 허용하고, 내가 원하고 바라는 대로 모든 일에 질서를 지키지 않고 있으니, 이는 모든 부하들에게 적용되어야 할 사항이다. 내가 듣기로는 여러분이 때린다고 하는데, 나는 이를 신성한 경전에 의해 금지된 일이라 명령한 적이 없다. 비록 성부들이 필요에 따라 어떤 경우에는, 그리고 어떤 이들에게는 이를 허용하긴 했으나, 소란을 피우지 않고 다른 이를 통해,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함이 아닌 방식으로 행했었다. 여러분은 욕설을 퍼붓는데, 그것도 부적절하게 하고 있으며, 어떤 이들에게는 이것이 습관이 되어버렸다. – 설득과 온유함, 그리고 덕을 보여줌으로써 형제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폭압적인 권세가 아니라, 자유를 존중하고 자발적인 복종을 이끌어내는 권세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갈라디아인들”, “바보들”, “에히드나의 자식들”과 같은 모욕적인 말들은 우리 가운데서 들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비록 엄한 말이라 할지라도, 당황하거나 격앙된 감정이 아닌, 자비롭고 사랑 어린 마음으로 전해진다면, 그것은 구원의 약이 될 수 있다. 의사도 당면한 병을 치료하는 데 적합할 때면 메스와 소작기를 사용하듯이 말이다. 우리에게도 우리만의 메스와 소작기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참회와 책망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를 사용해야 하며, 오직 한 가지만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바로 타락한 자가 다시 일어나 자신의 길을 되찾도록 하는 것이며, 특히 미숙한 자들에 대해서는 너그러운 마음을 베풀어야 합니다. 수면이나 음식, 휴식 및 그 밖의 어떤 면에서도 이미 익숙해진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을 동등하게 취급해서는 안 된다. 그렇기에 나는 초보자들에게는 적응할 때까지, 그리고 그들이 스스로 모든 일을 열성적으로 수행하기 시작할 때까지 관용을 베풀기를 바란다. 설마 우리가 형제들을 단지 일이나 포도나무, 올리브나무를 돌보기 위해서만 두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구원을 이루도록 돕기 위해서입니다. 이 일에 대해 지도자들은 무엇보다 먼저 신경 써야 하며, 그 다음으로 비로소 물질적인 문제를 돌봐야 합니다. 복음에 따르면, 모든 겸손하고 통회하는 영혼은 마음의 선한 보화에서 선한 말을 쏟아내며, 그러한 영혼의 책망과 훈계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에게 달콤한 음료보다 더 달콤하게 느껴집니다. 반면 교만한 자의 마음은 욕설과 쓰라리고 거친 말들을 맺어내며, 이는 격한 눈빛과 벌어진 콧구멍, 짐승 같은 얼굴 표정과 함께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죄를 지은 형제는 어떻게 이로부터 치유받을 수 있겠습니까?

29. 기도하여 주님께서 마음을 누그러뜨리시고, 그 형제가 어디에 있는지 우리에게 밝혀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는 내게 무거운 슬픔을 안겨 주었고, 쓰라린 눈물의 원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르시시오가 도망친 것이 별것 아니라고, 그가 최하위 자 중 하나이니 사소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나에게는 이것이 큰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48. 죽음이 코앞에 다가왔습니다. 정욕에서 자신을 정화하며 준비하십시오

48. 1) 죽음이 코앞에 다가왔습니다. 정욕을 떨쳐내고 스스로를 정화하며 준비하십시오. – 2) 번영해야 합니다. 3) 헛된 말과 웃음을 피하고, 침묵을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말해야 할 때는 여러분에게 유익한 이야기를 하십시오. [1, 52]

30. 날들이 하루하루 서둘러 지나가며, 앞을 향해 빠르게 흘러가며 멈추지 않는 강물처럼 흐른다. 그리고 그곳에는 죽음이 있다. “누가 죽음을 보지 않고 살 수 있겠는가?” (시 88:49). “사람은 밭의 꽃과 같고, 그의 날들은 그늘처럼 지나가느니라” (시 101, 12; 102, 15). 그러니 거룩한 천사들이 우리를 데리러 올 때 준비되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나 조롱거리가 되지 않도록 합시다; 오히려 매 순간 이 세상에서 데려가실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모든 행동과 움직임, 말에 더욱 주의를 기울이며, 하나님과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데려가시라는 신호를 받기를 간절히 기다리며, 잘 준비된 자세로 서 있자. 만약 우리가 이렇게 행동한다면, 그 어떤 악도 우리를 이기지 못할 것이며, 망각이 하나님의 심판을 우리로부터 가리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서로 싸우거나 다툼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며; 서로 앞에서 더 큰 영광을 추구하지도 않을 것이며, 이러저러한 것을 배우지 못했거나, 이것저것을 외우지 못했거나, 이 일 저 일에서 성공하지 못했다고 슬퍼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오직 이 모든 것을 “손해로 여기고 버릴 줄 아는 것”(빌 3:8)을 통해, 오직 한 가지만을 추구하리니, 곧 영혼을 정욕에서 깨끗이 씻어내고 하나님의 것이 되는 것이다. –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여러분에게 배우지 말라고 명령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나는 이것도 요구하며, 무엇을 어떻게 배워야 할지에 대한 상세한 규칙을 직접 여러분에게 주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무엇이 우선되어야 하고 무엇이 그 다음이어야 하는지, 무엇이 본업으로 여겨져야 하고 무엇이 부수적인 것으로 여겨져야 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우리 주 하나님, 연약한 자들에게 힘을 주시고, “거름더미에서 가난한 자를 일으키시는” (시 12:7) 우리를 경건함 안에서 날마다 “완전한 사람”으로 변화시키시는 주님, 우리에게 그에 걸맞은 용기를 충만히 채워 주시고, 우리의 자격을 뛰어넘는 완전함으로 우리를 드러내 주시기를 바랍니다.

31. 사도는 우리에게 점점 더 큰 온전함을 추구하라고 가르치십니다(골로새서 3, 1). 그러니 우리에게 아직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찾는 것을 그치지 말고, 오히려 점점 더 번창하고 온갖 선함으로 풍성해지도록 힘쓰자. 네가 별이라면, 해가 되도록 노력하라; 네가 이미 하나님의 뜰 안에 있고 구원받을 자들 가운데 포함되어 있다면, 다섯이나 열 도시 위에 세워지도록 노력하라. 많은 이 위에 서기 위해 네 재능을 배가하라; 많이 사랑하라, 그리하면 네게도 많이 주어질 것이니; 주님의 충실한 종이 되어, 그 집안의 모든 사람 위에 으뜸이 되라. 이것이 바로 신성한 의 음성이니, 두려운 소리라. 이를 들을 때나 이를 생각할 때나, 영광 중의 영광을 우리에게 미리 알려 주는 것이다.

32. 마귀를 대적하여 이기고, 그가 너희에게 덤비는 시도를 물리쳐라. 나는 너희 중 많은 이들이 헛소리를 일삼고, 저녁 모임에서 거리낌 없이 우스꽝스러운 짓에 빠져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는 이를 행하는 자에게도, 이에 동참하는 자에게도 해로운 일이다. 너희 중 누군가가 우스꽝스러운 말을 꺼내면, 말없이 터져 나오는 웃음이 한 사람에게서 시작되어 곧바로 모두에게 퍼진다. 그리고 마귀는 기뻐합니다. 그는 그곳에서 지배자이며, 그런 일로 즐거움을 얻기 때문입니다. 반면 주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여러분의 이러한 추악한 행실을 보시고 부끄러워하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정신을 차리십시오. 만약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제가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증명해 주십시오. 그러면 저는 입을 다물겠습니다. 그러나 사실이라면, 이제부터 이를 경계하기 시작하십시오. 왜 말 많은 성향을 억제하지 않고, 누군가 묻기 전까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지 않는가? 침묵의 달콤함을 분명히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침묵은 침묵하는 이의 영혼을 그 어떤 기쁨보다도 더 큰 기쁨으로 채워 주니, 이는 그가 성령을 대화 상대로 삼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이것이 사소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여기에 온갖 악이 얽혀 있다는 것을 모르십니다. 신성한 야고보가 말했듯이, 혀는 “억제할 수 없는 악, 치명적인 독으로 가득 찬 것”이며, 그것을 다스리는 자는 “완전한 사람”입니다(야고보서 3:2, 8). 그러니 비록 제가 여러분을 슬프게 하더라도 저를 원망하지 마십시오. 저는 여러분의 아버지입니다. 그리고 성 바오로의 말씀을 빌려 말씀드리겠습니다. “누가 나를 기쁘게 하겠느냐? 오히려 내게서 슬픔을 받아들이는 자일 뿐이다.”(2코린 2,2). 대화를 시작하셨습니까? – 좋습니다. 하지만 트로파리와 스티히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성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유익한 일들과 여러분 앞에 놓인 일들에 대해 논하십시오. 그런데 무슨 밭이나 텃밭, 황소나 외양간, 혹은 다른 쓸데없는 이야기들을 왜 하십니까? 누가 그런 것을 물어봐야 하며, 누가 그에 대해 제대로 된 대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 – 그런데 한 사람은 별 이유도 없이 물었고, 다른 사람은 그 질문을 되풀이했으니, 멈출 수 없이 헛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군요. 차라리 방에 앉아 침묵하는 편이 낫습니다. 다시 말하건대, 침묵하는 자는 하나님의 성령을 동거자로 모시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명백합니다.

 

49.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신 구세주의 모습: 그분께 영광과 감사를 드립니다!

49. 1)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신 구세주의 모습: 그분께 영광과 감사를! – 2) 봉사 배정 변경을 계기로, 이에 대해 불평하고 순종하지 않는 이들에게 전하는 말씀. – 3) 말로는 모두 다 할 준비가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이들에 대한 – 책망. [1, 53]

33. 이제 우리는 다시금 그리스도의 수난을 실감나게 기념하는 거룩하고 위대하신 성주간으로 들어서며, 영광의 주님이시며 우리의 하나님이시자 창조주이신 분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얼마나, 그리고 어떤 이유로 기꺼이 참아 주셨는지를 다시금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배신당하시고, 불의한 자들의 손에 넘겨지시며, 군인들의 손에 묶여 재판소로 끌려가시고, 진리이신 그분이 “아첨꾼이자 악당”이라는 비난을 들으시는 모습을 떠올리며, 어떤 돌처럼 굳어진 영혼이라도 가슴이 찢어지고 전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모든 이의 구세주께서는 뺨을 맞으시고 참아내시며, 침을 뱉으셔도 저항하지 않으시고, 가시관으로 고통스럽게 씌워지셔도 건방진 자들을 꾸짖지 않으시며, 왕처럼 붉은 옷을 입으시고 악당처럼 지팡이로 맞으시며,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창으로 찔리시어, 모든 이의 생명을 위해 죽음을 맛보시나, 그러나 곧이어 부활하시어, 우리도 우리의 타락에서 일으키시고 끊어지지 않는 불멸의 상태로 이끄시나이다. 오, 우리 주 하나님이시며 창조주이신 분이시여! 우리, 흙과 재에 불과한 자들이 주님께 무엇을 드릴 수 있겠나이까?! 주님께서는 헤아릴 수 없이 풍성한 자비로, 멸망해 가는 주님의 피조물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지극하고 형언할 수 없는 겸손의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허락하신 구원과 힘의 감동을 느끼며, 죄 많은 입술과 합당치 못한 우리로 하여금 주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리오니, 이것이 우리를 가득 채우나이다.

34. 우리 가운데서 직무 배정이 변경되었습니다. 어떤 이는 한 직무에서 다른 직무로, 또 다른 이는 그에게 새로운 직무로 옮겨졌습니다. 이는 선조들이 전해 내려온 규칙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방식으로 형제애와 한마음, 한 뜻이 가장 잘 보존되고 굳건해지기 때문입니다. – 그러나 여러분 중 어떤 이들은 이를 부담 없이 받아들였으나, 다른 이들에게는 이것이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왜냐하면 전자는 자신의 의지를 억제하는 데 익숙했던 반면, 후자는 이에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자는 어떤 직무에 배정되든 상관하지 않고 순종하는 데 익숙했으나, 후자는 어떤 직무는 마음에 들고 다른 직무는 마음에 들지 않으며, 어떤 직무는 명예로 여기고 다른 직무는 굴욕적으로 여긴다. 그런데 이 후자 중에서도 어떤 이들은 잠시 괴로워하다가 스스로를 이겨내고 자신들에게 새로운 임무와 화해했으나, 다른 이들은 여전히 고집을 부리며 새로운 질서에 복종하기를 꺼리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 여러분 모두에게 제 겸손한 말씀을 전합니다! 우리의 지시를 마치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처럼 받아들이고, 자신의 뜻을 꺾은 뒤 기꺼이 각자에게 정해진 일에 착수한 이들은 복이 있으며, 우리와 주님께도 호의적이며, 참된 순교자들과 동등합니다. 처음에는 불만과 슬픔으로 이를 받아들였으나, 곧이어 겸손히 더 나은 길로 돌아선 이들도 있으며, 이들은 하나님께 피를 흘린 선한 투사들임을 드러냈다. 그러나 여전히 불복종에 머물러 있으며, 자신의 정욕이 부추기는 변명들 을 꾸며내는 자들은 배교한 자들이니, 그들에 대해서는 ‘그들은 우리 중의 사람이 아니며, 우리와 함께 있었던 적도 없다’고 의롭게 말할 수 있다.

35.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나에게 ‘주여, 주여’라고 말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갈 것이다”(마태복음 7:21). 또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라” (요한복음 14, 15). 이에 비추어 나도 너희에게 말하노니, 내게 ‘아버지, 아버지’라고 말하는 자마다 다 내 제자가 아니요, 오직 내 명령을 지키는 자만이 나를 사랑하는 자라. 말로는 지혜롭게 굴다가, 막상 행동에 이르렀을 때 우리가 말하는 것과 동떨어진 모습을 보이지 말자. 여러분에게서 몇 번이나 이런 말을 들어야 했는지 모릅니다. “당신을 위해 피를 흘리고, 죽을 테니, 원하시면 바다에 뛰어들고, 원하시면 알몸으로 다니고, 원하시면 돌을 먹고, 원하시면 우리 지체를 잘라내겠습니다.” 이 말을 들을 때면 나는 기뻐하며 하나님께 감사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찾아가 보니 여러분이 말과 달리 행동하는 것을 보고는 울며 통곡하며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이 사람들은 입으로는 나를 축복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 여러분 모두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이들이 마치 하나님의 천사들처럼 온유함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다만 다른 이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지만, 그들 중에서도 모두가 항상 자신의 욕망에 고집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모든 일에서 옳은 길을 걷도록 미리 경고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조상들이 하나님 앞에서 항상 신실하게 지켰던 경계를 따르십시오. 그들을 본받으십시오. 그렇게 행하지 않는다면, 죽을 때 거룩한 천사들의 인도를 받지 못할 것이며, 너희 조상들 가운데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어떤 사람인지는 저 세상에서도 그대로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구원을 원하며 구원받을 자들 가운데 있음을 압니다. 그러니 굳건히 버티고, 유혹에 빠지더라도 넘어지지 맙시다. 만일 비틀거린다면 재빨리 일어나고, 잠이 든다면 깨어나십시오. 저는 여러분을 정죄하지 않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종들로 여기고 제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50. 죽은 자를 보며 얻는 교훈: 육신이 아니라 천국을 염려하라

50. 죽은 이를 보며 얻는 교훈: 육신이 아니라 천국을 염려하라. [1, 54] 이것이 곧 우리에 관한 신비인가? 모든 이를 기다리는 거처는 어떤 곳인가? 세 랴슈의 관. 땅에서 취해졌으니, 다시 땅으로 돌아갈 것이다: 육신은 여기에 남고, 영혼은 하늘로 날아오른다. 우리가 이전에는 무엇이었고, 계명을 어긴 죄로 인해 지금은 무엇이 되었는가? 그것이 죽음을 낳았고, 그로 인해 우리는 썩어질 존재가 되었다. 우리도 바로 그런 모습으로 우리 자신을 보게 될 것이니, 우리도 마찬가지로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가? 어디로 갈 것인가? 무엇을 마주하게 될 것인가? – 도대체 무엇을 위해 우리가 이 육신을 이토록 아끼는 것일까? 우리 것이기도 하고 우리 것이 아니기도 한, 친구이자 적이며, 비방자이자 보호자, 파멸의 원인이자 구원의 수단인 이 육신을 말이다. 아무리 먹이고, 아무리 쉬게 하고, 아무리 달래도, 결국 이 육신은 구더기와 악취 나는 진흙으로 변해 버리지 않겠는가? 내가 재를 돌보고 흙을 두고 다투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육과 피는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다”고 성경은 말한다(고린도전서 15:50). 그러니 우리 자신을 잘 돌보고, 짐승처럼 살지 않도록 하자. 이성을 갖지 못한 동물들은 육체를 사랑하고, 배를 채우며, 육체적 욕망을 키우고, 피가 끓어오르게 하고, 몸을 부풀리며 모든 감각을 만족시키는 것이 본성이다. 그러나 진실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귀하게 지음받고, 창조된 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이 중 그 어떤 것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의 소명은 천사의 소명과 같으니, 곧 하늘의 복을 관조하고, 창조의 광경을 바라보며, 참 하나님께 사랑으로 불타오르고, 악마들을 미워하며, 육신에 대해서는 조금만 신경을 쓰고, 가장 필요한 것만 적당히 조금씩 공급해 주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 부디 올바르게 지혜를 구합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이렇게 행한 것이 죄가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장차 모든 이가 그들의 행실과 행위에 따라 보응을 받을 그 세상에서, 의로운 자에게는 영생을, 죄인에게는 꺼지지 않는 불을 받게 될 때 말입니다.

 

51. 수도원의 모든 이가 일하며 각자의 헌신을 공동체에 바치는데, 왜 수도원에서 생산된 것이 각자에게 귀속되는가

51. 1) 수도원의 모든 이가 수고하며 각자의 헌신을 공동체에 바치는데, 왜 수도원에서 생산된 것이 각자에게 귀속되는가. – 2) 음식, 음료, 포도주는 모두에게 공동으로 제공되지만, 누구나 이를 삼갈 자유가 있다. – 3) 어떤 의미에서 형제들의 수를 늘리는 것이 좋은지; 원장님은 어떤 마음으로 그들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그리고 형제들도 이에 일조해야 하는지; 노인과 장애인을 받아들이는 것은 의무이다. [1, 55]

1. 사도의 말씀대로 “너희 지체를 진리의 종으로 거룩한 곳에 드리라”(롬 6,19). 신성한 지혜를 더욱 풍성히 받아들이고, 너희의 고결한 삶의 방식이 지닌 천사 같은 고귀함을 진정으로 깨달아라. 그나저나 여러분은 이미 이를 깨달아 온전한 겸손으로 자신을 하느님께 바쳤으며, 매일 영적·육체적 활동에서 고된 수고를 기꺼이 감당하고 있습니다. 이는 둘 다 똑같이 유익하며 서로를 보완하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은 독서에 몰두하고, 다른 사람은 기도하며, 저 사람은 집에 앉아 수공예를 하고, 이 사람은 어딘가 야외에서 일하며, 어떤 사람은 포도밭을 갈고, 다른 사람은 밭고랑을 만들고, 저 사람은 집안일을 챙기며, 이 사람은 목공일을 합니다. 그리고 아무도 한가히 지내지 않으며, 아무도 팔짱을 끼고 앉아 있지 않고, 모두 각자의 힘껏 수고를 기울입니다. 제 생각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문지기나 새를 쫓아내는 텃밭 파수꾼도 경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 각자도 다리나 손가락처럼 미미한 자리를 차지하면서도 온몸에 기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우리 모두는 하나의 영혼, 하나의 의지입니다. 그러니 항상 그렇게 행동합시다; 그리고 누구도 형제단과의 협력과 공동의 고난에서 스스로를 배제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손은 거룩해지며, 여러분의 수고로 하나님께 제물과 헌물이 바쳐집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틀렸습니까? 여러분은 노인을 부양하고 있지 않습니까? 나그네들에게 빵과 채소, “차가운 물” 한 잔이나 포도주, 그리고 수도원에 있는 그 밖의 모든 것으로 배불리 먹이지 않습니까? 찾아오는 친구들을 대접하지 않습니까? 스스로 생계를 꾸리지 않습니까? 우리도 먹여 주지 않습니까? – 이 모든 것이 하느님께 드리는 헌물이 아니라면 무엇이겠습니까? 기록된 바와 같이,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는 원치 않는다”(마태복음 9:13)고 했습니다. 수도원에서 무언가를 나누어 줄 때, 바로 그때 여러분은 자비로운 자들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할 때, 나 혼자만 베푸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돈이든 옷이든 그 밖의 무엇이든 베푸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나의 자녀들이며, 영적인 것이든 육체적인 것이든 내 모든 것에 동참하는 동역자들입니다. 내 마음은 여러분을 향해 타오르고 있으며, “내 속이 여러분을 다 담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고린도후서 6:12). 나는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영적인 사랑으로 감싸 안으며, 각자에게 동정심을 품고, 모두를 따뜻하게 위로하고 평안을 주려고 노력합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누군가를 대적하면 곧 나를 대적하는 것이니, 그 사람은 곧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 사이에 평화가 있고, 영적인 사랑과 서로를 존중하며, 서로 돕는 마음이 있기를 바란다. 지위가 낮은 자들을 나 자신처럼 가장 높고 중요한 자로 여기며, 모든 일에 두려움과 사랑으로 그들의 말을 따르라. 누구든지 순종하지 않는 자는 나의 자녀가 아니다.

2. 먼저 영적인 양식으로 자신을 충만하게 하라. 절제되고 명료한 마음으로 정해진 예배와 거룩한 기도를 드린 다음, 일의 고단함 때문에 육체적인 양식, 즉 빵과 삶은 채소, 그리고 정해진 분량의 포도주로 보충하라. 이는 건강이 약한 자들을 위한 것이다. 만약 자제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이가 있다면 – 주님께 감사드리며! – 자제하도록 하라. 그러나 마시는 자는 마치 넘어지는 사람인 양 부끄러워하지 말 것이며, 마시지 않는 자도 마치 위대한 일을 하는 사람인 양 교만해하지 말지니, “음식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서게 하지 못함이라”(고린도전서 8:8) 말대로, 특히 그로 인해 자만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젊은이들에게 포도주 마시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을 누가 반박하겠습니까? 그러나 포도주를 마시지 않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유익하며, 특히 체력이 튼튼한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저는 일부 사람들에게는 규정에 따라 그들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포도주를 마시도록 허용하고 있습니다. 영구적인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조치입니다.

3.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거의 매일 우리 수도원에 입회하고자 하는 이들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저는 모든 사람을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여러분이 다른 수도원들보다 여기서 숫자가 더 많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며, 비록 제가 허영심이 있더라도 이를 자랑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늘어나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그분의 뜻에 따라 늘어나기를 원합니다. 수많은 이들을 하나로 모은 것은 물론 하나님께 큰 찬양을 드리는 일이지만, 그들이 그분의 이름으로 모였을 때 비로소 그러합니다.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단 한 명의 죄인을 기뻐하신다면, 그런 사람들이 많을 때는 더욱더 기뻐하시지 않겠는가 하는 사실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그분의 이름으로 모인 두세 사람 가운데 그분이 함께 계신다면(마태복음 18:20), 수많은 사람 가운데서는 더욱더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스스로가 연약하고 정욕에 사로잡혀 있음을 알기에, 나 자신조차 다스리지 못하면서 많은 사람을 다스리기를 원치 않습니다. 오직 “나에게 오는 자를 쫓아내지 말라(요한복음 6:37)는 계명과,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은 바로 이런 자들의 것이다” (누가복음 18:16)라는 계명을 위해, 나는 몸을 낮추어 어린아이들과 청년들, 노년층, 기혼자와 미혼자, 온전한 몸의 사람들과 불구자, 한쪽 팔이 없는 자, 절름발이까지 모두 받아들입니다. 나는 이것을 내 마음대로, 마치 위대한 일을 하는 것처럼 하는 것이 아니라, 신성한 교부들의 가르침에 따라 그렇게 해야 할 의무가 있는 종으로서 행하는 것이니, 만일 내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계명을 어긴 죄인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와 동의하시며, 여러분 스스로도 이에 동참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 그렇습니까, 아니면 아니오입니까? – 여러분 각자가 저에게 대답해 주십시오. 그래야 제가 이 일에 더욱 열심을 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수고의 열매야말로 그들을 먹이고 부양하는 데 쓰이기 때문입니다. 혹은 “모든 생물의 선한 뜻을 이루시는”(시 144:17), “그를 부르는 가금과 까마귀 새끼에게 먹이를 주시는”(시 146:9) 하나님의 선물, (시 146:9), 그리고 “하늘의 새들을 보라.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는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들을 먹이시느니라”(마 6:26)라고 말씀하신 분이시니. 어쨌든, 저는 여러분의 선의를 믿으며, 우리가 함께 항상 모든 계명을 성실히 이행하고 어떤 점에서도 비난받을 만한 일이 없기를 희망합니다. 왜냐하면, 만일 제가 노인을 받아들이지 않고 불구자를 위로하지 않는다면, 단 하나의 계명뿐만 아니라 여러 계명을 어긴 죄인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계명들은 끊을 수 없는 사슬을 이루며 서로 연결되어 있고, 이를 지키는 것과 어기는 것 또한 서로 맞물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단 하나의 계명이라도 어기면, 우리는 천국에서 ‘작은 자’로 불릴 것입니다(마태복음 5:19); 성 요한 크리소스톰에 따르면, ‘작은 자’로 불린다는 것은 곧 영원한 고통에 빠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그러니 우리는 아이들과 노인들, 그리고 불구자들을 받아들이자. 선하신 하나님 께서 우리를 멸시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첫날부터 지금까지 그분께로부터 받아온 것처럼, 영혼과 육신에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실 것이다.

 

52. 형제 사랑을 지키십시오. 모두 스스로를 정화하며 구원을 얻으십시오. 수다와 웃음을 피하십시오. 여러분 가운데 옳지 않은 일이 있을 때 듣는 것이 제게는 고통스럽습니다.

52. 1) 형제 사랑을 지키라. 모두 스스로를 정화하며 구원을 얻으라. 수다와 웃음을 피하라. 너희 가운데 무언가 올바르지 않은 일이 있을 때 듣는 것이 내게는 고통스럽다. – 2) 장로들의 허락 없이 서로 음식을 나누어 주지 마십시오. 이는 유혹입니다. 이를 지키지 않는 자에게는, 분노가 아니라 사랑으로 인한 참회가 주어질 것입니다. – 3) 항상 모든 일에서 올바르고 싶습니까? 죽음을 기억하십시오. [1, 56]

4. 서로에게 악의를 품지 말고, 서로之间에 선한 경쟁과 마땅한 형제애를 보여 주십시오. 이 말을 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구원받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누구도 멸망하기를 원치 않으시나니” (마태복음 18, 14)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니 모두 구원받으라. 이를 위해 모두 힘쓰고 서로 경쟁하여, 태초에 창조되었을 때와 같이 신성한 형상을 닮은 채로, 깨끗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도록 하라. 건방지게 굴지 말고 산만하고 수다스러운 말에 빠지지 마십시오. 저녁에 함께 모일 때 웃음을 일으키지 말고, 함께 일할 때도 서로를 타락으로 이끌며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내 배가 아파하고 내 마음의 감정이” 억누를 수 없이 요동친다고, 가장 목소리가 큰 예레미야가(4, 19) 신성한 가르침이 담긴 말씀 중 한 구절에서 말하고 있다. 여기서 나, 부정한 자요 저주받은 자인 나는 여러분에게 외칩니다. 여러분이 잘못 행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면, 치명적인 병이 나를 감싸고, 생각의 화살들이 나를 찔러옵니다. 나의 자녀들아, 두려운 하나님을 경외하고, 여러분의 오랜 수고와 복된 노고를 어떤 태만으로도 망치지 마십시오. 우리는 긴 항해를 마쳤습니다. 설마 부두에서 난파당하겠습니까? 우리는 먼 길을 걸어왔습니다. 설마 신성한 거처의 문턱에서 졸고 있겠습니까? 내가 하는 말을 깨달으십시오. 너희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분별력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용기를 내고 너희 마음을 굳게 하라”(시 30, 25). 분발하십시오. 그리고 겸손한 지혜를 입으십시오. 자신의 뜻에 굴복하지 말고, 그로 인해 내 지시를 기쁨 없이 이행하는 자가 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누구든지 자신의 뜻을 죽인다면, 그에게 주어진 것이 아무리 무겁더라도 거절하지 않고, 소홀히 여기지 않으며, 싫어하지 않고, 기꺼이 복종하고 순종하며, 동의하고 반박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성경 말씀(시 72:22)에 나오는 대로, 이성을 갖지 못한 짐승이 자신을 묶는 자에게 복종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각자는 순종에 있어 자신이 어떤지 스스로 살펴보십시오. 또한 나 역시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통해 내면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성 도로테오에 따르면, 자기 뜻이 없는 사람은 수도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모두 자신의 일로 여기며, 그런 사람은 언제나 평온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지치고 괴로워 보이며, 자신의 욕망에 이끌려 이리저리 흔들리고, 이것저것에 현혹되어 때로는 이런 모습, 때로는 저런 모습을 띱니다. 우리 가운데 그런 사람이 단 한 명도 없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한 마음으로, 순수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봉사합시다. 만약 내가 한 가지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여러분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바로 그곳에 전쟁과 분열이 생깁니다. 그러나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는 것이 옳다면, 왜 나를 반대하십니까? 왜 나에게 수고와 근심을 안겨주십니까?

5. 형제 여러분, 여러분께 상기시켜 드릴 것이 있습니다. 왜 다른 계명들처럼 제 계명 중 하나를 지키지 않으십니까? 비록 그것이 사소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을 어기는 것은 여러분의 모든 훌륭한 행실을 무너뜨립니다. 그리고 우리가 왜 “이 작은 계명이 위대하다”고 말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모든 계명은 지켜져야 하며, 모든 불순종에는 마땅한 벌이 따릅니다. 저는 여러 번 엄중한 경고와 함께, 여러분 각자가 다른 사람에게 음식이나 음료를 건네주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고 말해 왔습니다. 이는 오직 나, 경제관, 부경제관, 또는 식량 관리인, 혹은 이 문제에 대해 내가 지시를 내렸고 지금도 내리고 있는 다른 고위 관리들에게만 속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오늘부터 누구도 이를 행해서는 안 됩니다. 이를 어길 경우, 몰래 음식을 먹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참회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니 부주의함으로 인해 이 죄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여러분은 서로를 부끄러워하는 것이 결코 선한 일이 아니며,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형제를 모욕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지만, 정작 하나님과 저 같은 천한 자를 모욕하고 있습니다. 아아, 여러분의 그런 양심이라니! 이는 마음이 가볍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며, 제멋대로 행동하고, 육신적인 우정을 중시한다는 징표입니다. 감히 말씀드리건대, 설령 천사라 할지라도 그로부터 아무것도 받아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종종 축복받은 채소를 받곤 합니다. 그 채소는 누구나 먹어도 좋습니다. 만일 누군가 먹을 수 없다면, 그 사람은 그것을 식량 관리인에게 돌려주거나,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싶다면 그에게 그렇게 말해야 합니다.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은 비난받을 일이 없습니다. 아니면, 이것이 부적절한 우정을 낳는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어쩌면 여러분은 불순한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에게 전달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설령 그런 의도가 없다 하더라도, 그 행위 자체가 유혹적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한 사람이 받고 다른 사람은 그저 지켜보기만 할 때, 그것이 수군거림과 속상함을 낳지 않겠습니까? 후자는 온갖 방식으로 자신이 사랑받지 못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만약 다른 사람 앞에서 주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를 위해 특별한 시간과 장소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여러분은 은밀한 결사체와 모임을 조성하게 됩니다. – 그런데 성 바실리우스 대교황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나요? – 눈짓이나 귀에 대고 속삭이는 행위는 이웃으로 하여금 여기서 어떤 불미스러운 일이 꾸며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빌미를 제공한다고 하십니다.[84]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를 담당하도록 지정된 사람들의 허락 없이, 또한 그들에게 알리지 않고 이런 일(즉, 먹을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을 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누구든지 이에 대해 유죄로 판명될 경우, 그는 참회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분노나 짜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아니요, 저는 여러분에 대한 사랑에 이끌려 지금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할 것입니다. 저는 이 일에서 주님을 본받으려 애쓰고 있는데, 사도는 주님에 대해 이렇게 증언합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며, 받아들이시는 아들을 때리시나니” (히브리서 12:6), – 그리고 바로 이 사도께서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나를 기쁘게 하겠느냐? 오직 내게서 슬픔을 받는 자뿐이겠느냐?” (고린도후서 2:2).

6. 언제나 모든 일에서 흠 없이 지내고 싶으십니까? – 죽음을, 영혼이 육신에서 떠나는 것을, (죽음의 순간에) 천사들 앞에 서는 것을, 그 긴 여정과 방랑(고난의 길), 우리 주 하나님이자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일, 우리 모든 행위에 대한 두려운 심판, 영원한 형벌, 천국과 그곳에서 약속된 형언할 수 없는 복들을 기억하십시오.

 

53. 나는 떠나가지만, 내 영혼은 여러분 곁에 남깁니다. 내가 없을 때도, 내가 곁에 있을 때와 같이 지내십시오

53. 1) 잠시 떠나지만, 내 영혼은 여러분 곁에 남깁니다. 내가 없을 때도, 내가 있을 때와 같이 지내십시오. – 2) 집사에게 주는 훈계. – 3) 이 일을 계기로 형제들에게 주는 교훈. [1, 57]

7. 잠시 여러분 곁을 떠나지만, 제 영혼은 여러분 곁에 남겨두고, 여러분을 제 아버지이자 여러분의 아버지이신 분의 기도에 맡깁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영원히 굳건하고 흔들리지 않게 지켜 주실 수 있으십니다. 여러분은 주님이자 우리 하나님의 계명과, 성스러운 우리 조상들의 전승, 그리고 제 겸손한 권면과 가르침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걷는지 주의하라. 어리석은 자처럼 하지 말고 지혜로운 자처럼 하라”(엡 5,45), 마치 내가 여러분 곁을 떠나지 않고 함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스승의 부재는 거짓 제자들에게는 기쁨을 주지만, 참된 제자들에게는 슬픔을 줍니다. 하나님께 합당한 여러분은 경건하고 의롭게 살고 있으니, 앞으로도 그러하소서. 주님께서는 복음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인이 돌아와 그가 명령한 대로 행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는 그 종은 복이 있도다”(마태복음 24,46). 우리는 여러분께 이러한 말씀을 드릴 자격이 없으나, 여러분이 선한 삶을 굳건히 지키도록 돕기 위해 우리보다 더 높은 말씀을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여전히 하나님을 찾고, 한마음과 한 생각, 한 마음으로 연합되어 있기를 바랍니다.

8. 사탄의 유혹이 많다는 것을 아시다시피, 지금은 봄철이라 날씨가 쾌적합니다. 죄의 화살이 여러분 중 누구에게도 꽂히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무엇보다도, 내 아들아, 나를 대신하여 형제들을 이끌게 된 너는 그들에게 모든 면에서 유익이 되도록 하라. 그들을 너그럽게 대하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의 영적 필요를 채워 주며, 시편 찬송과 기도에 관한 규율을 엄격히 지키되, 가능한 때는 허락하고, 필요한 때는 금하라; 너무 관대하지도, 지나치게 엄격하지도 말고, 두 가지를 모든 일에 적절히 조화시켜 양쪽 모두를 선한 방향으로 이끌어라. 아픈 이에게는 함께 아파하고, 슬퍼하는 이에게는 함께 슬퍼하며, 수고하는 이에게는 힘을 보태어 주라. 우주 만물의 위대한 스승인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는가? “누가 약해지면, 내가 약해지지 않겠는가? 누가 유혹을 받으면, 내가 분노하지 않겠는가?” (고린도후서 11, 29).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하느냐? 주님께서 모든 일에 지혜를 주시기를 바란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공통된 아버지가 계시니, 그분의 거룩한 조언과 명령을 모든 일에 따르라. “내 입의 말씀대로, 합당하지 않은 것에서 합당한 것을 이끌어 내라”고 주님께서 신성한 말씀 속에서 말씀하신다. 형제들을 다스리는 자는, 그에게 복종하는 자들을 합당하게 다스린다면 하늘에서 위대하다고 불릴 것이다. 주님께서 거룩하고 위대한 베드로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면, 내 양들을 먹이라” (요한복음 21:15, 9).

9.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양들이요, 나의 자녀들이며 형제들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청하노니, 우리 죄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그분께서, 여러분 위에 있는 장로에게 순종하십시오. 아무도 그의 명령에 거역하지 마십시오. 그를 거역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거역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함께 부관도 있을 것이니, 그도 순종하고, 누구도 그가 젊다는 이유로 그를 멸시하지 말라. 신성한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이, 늙음은 나이의 많음에 달려 있지 않기 때문이다(지혜서 4,8). 그러나 장로의 지혜를 얻은 자야말로 참으로 장로이다. 그러므로 너희 모두 지혜로워라. 모두 분별력이 있는 장로들이 되라. 지식 면에서 어린아이가 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 선하고, 기쁘시며, 온전한 것인지 분별하라”(롬 12:2)고 하신 대로, 그 지시에 따라 살아가라.

 

54.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라. 서로를 돌보되,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지 말라. 자기 지혜를 자랑하지 말고, 한마음으로 화합하라

54. 1)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라. 서로를 돌보되,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지 말라.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지 말고, 한마음으로 화합하라. – 2) 수도 생활은 수고를 요구하며, 특히 겸손을 필요로 한다. 장래에는 안식이 있겠지만, 여기에서도 수고의 열매가 있다. 모든 수도원은 수고로 살아간다; 이것에 겸손히 순종하며 어디로 가든지 평화롭게 살아가십시오. – 3) 파호미우스 형제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미덕인 겸손, 절제, 미소만 지을 정도의 웃음(그것도 가끔뿐인...), 절제 등을 기억하고 그를 본받으십시오. 우리 가운데 합당한 사람들을 보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1, 59]

10.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아실 것입니다. 곧 우리가 그분께 기쁘시게 살기 위해, 영생을 얻기를 바라며 이 세상에서 금욕적인 자기 절제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심판에 있어 유일하시고 두려우신 분을 경외하며, 서로에게 선하게 행하십시오. 육신의 욕망을 모든 것 위에 두지 말고, 서로를 자신의 정욕으로 끌어들여서는 안 됩니다. – 내가 알기로는, 여러분이 서로 대화할 때 다툼이 많으며, 모두에게 유익한 것을 논하거나 탐구하지 않고, 각자 자기 만족을 향한 성향에 이끌려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로써 여러분은 한 몸의 지체들처럼 서로를 돌보라는 사도의 계명을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고린도전서 12, 25, 26). 만일 여러분 모두가 선한 일에 동의한다면, 여러분의 일은 순조로울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생각이 제각각이고, 그 결과 자만하며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긴다면, 여러분은 예언자의 “화 있을진저!”라는 저주에 해당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위대한 이사야가 말하기를, “화 있을진저,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며 자기 앞에서 슬기롭다고 여기는 자들아” (사 5, 21). 어떤 일에도 고집을 부리지 않고, 자신의 개인적인 생각이나 결정에 따라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으며, 당면한 필요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 잘 사는 사람이다. 너희가 그렇게 된다면, 서로 싸우지 않을 것이며, 서로 간의 충돌이나 교만, 조롱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예루살렘에는 초기에 믿는 이들이 많았으나, 기록된 바와 같이 그들 모두는 한 마음이었으며, 누구도 자신의 소유나 욕망, 재물을 가진 자가 없었습니다.

11. 내 자녀들아! 수도자의 삶은 다방면에 걸쳐 있으며 고된 일로, 땀과 인내를 요구하지만 무엇보다도 겸손을 필요로 한다. 이 미덕으로 구별되는 자는 성부들의 말씀에 따라 타락으로부터 안전하며, 정제된 금처럼 모든 일에 적합하여 귀중한 존재가 된다. 여러분은 자신의 일에 지칠 때까지 수고하고 계십니다.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의 삶을 마친 후, 다른 세상에서 여러분에게 자비와 평안한 삶을 허락하시기를 빕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우리는 육신의 위안과 안식을 위한 수고의 열매를 얻습니다. 또한 우리가 수고를 통해 삶에 필요한 것을 얻는 것이 우리뿐이 아니라는 점을 확신하십시오. 모든 수도원도 수고와 땀으로 자신의 삶을 유지합니다. 거짓이 없으신 우리 하나님께서 조상에게 “네 얼굴의 땀으로 네 양식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신 말씀을 우리가 거짓으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창세기 3:19).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이 삶의 법칙에 겸손히 순종하는 자는 하나님의 길을 잘 걷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위로와 힘이 되는 우리 아버지의 축복이 있습니다. 또한 제 겸손한 간절한 기도도 있습니다. 비록 제가 그럴 자격이 없지만, 매일 자비로우신 하나님께 간구하노니, 여러분이 상호 평화와 서로를 용서하며, 자비와 사랑 속에서 지켜지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 각자가 육신을 떠날 때가 되었을 때, 양심의 가책 없이, 선한 소망을 품고 이 생에서 저 생으로 넘어가, 그곳에서 영원히 복된 보상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12. 어제 우리 형제 파코미우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분의 덕행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가 얼마나 겸손했고, 얼마나 절제했는지: 우리 아버지는 그가 정원사였을 때, 식사 때 제공된 것 외에는 아무리 하찮은 열매라도 손대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다른 이들에게서 들은 바에 따르면, 그는 식사 시간 외에 먹으라고 주어진 것조차 정원에서 먹지 않았는데, 이는 누군가가 그가 탐욕을 품고 있다고 의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우리 모두는 그가 결코 웃지 않았고 미소를 넘어서지 않았으며, 항상 자신에게 엄격한 경각심과 절제된 마음가짐을 유지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참으로 지칠 줄 모르는 하나님의 일꾼이었으며,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밤낮으로 수고하다가 복된 자로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를 가장 온전한 경의로 기리는 것을 멈추지 마십시오. 또한 그의 미덕을 본받기 위해 서로 경쟁하십시오. 그래야 여러분 각자가 이곳을 떠날 때, 좋은 추억과 모든 형제들에게 교훈이 되는 모범을 남길 수 있을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각자가 세상을 떠난 후 어떤 존재로 인정받고 싶은지는 전적으로 여러분 자신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복자이든, 성인이든, 존경받는 이든, 혹은 다른 어떤 이름으로 존경받기를 원하든, 이곳에서 이미 그에 맞춰 마음을 다잡는다면 그것은 그에게 가능합니다. 그리고 이를 갈망하고 스스로 그런 존재로 드러낸 이들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그에 대한 극복할 수 없는 장애도, 불가능함도 없습니다. 여러분도 복자, 천사와 같은 자, 하느님께 기쁨을 드리는 자로 불리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고, 모든 선을 행하도록 스스로를 다그치며, 모든 일에서 겸손하게 처신하기로 선택한다면, 이는 우리에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본래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임을 확신합니다. 또한 여러분 중 많은 이들이 우리 수도원에, 하나님께 드리는 정직한 제물처럼 바쳐지고 있음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제 지극한 부적합함에도 불구하고 저에게 이러한 형제들을 허락해 주셨다는 사실에 감탄하며 온갖 위로로 가득 차 있습니다. – 감히 말하건대 – 옛 선조들로부터 조금도 뒤처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과 동등한 정도로 세속을 버리고, 순종에 자신을 복종시키며,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심지어 죽음까지 기꺼이 감수한 형제들을 저에게 허락해 주셨다는 사실에 감탄하며 온갖 위로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러한 선택받은 자들을 부르시고 나타내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왜냐하면 온 땅 곳곳에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며 섬기고, 떨림으로 그분을 기뻐하라”(시 2:11). 그분을 찾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천국을 주실 그분을 알게 될 것이다.

 

55. 열심 있는 수고자들에게 호의를 표하며, 영적 일과 수도원 내 순종에 대해서도 열심을 내어 줄 것을 요청한다

55. 1) 열심 있는 수련자들에게 호의를 표하며, 영적 수행과 수도원 내 순종에 모두 열심을 내라고 당부한다. – 2) 서로 격려하며 다른 부름을 기다리지 말고 서둘러 일에 임하십시오. 정욕을 이겨내십시오. 비록 그로 인해 상처를 입는다 해도 선한 전사들의 상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 3) 사람뿐만 아니라 가축에게도 자비를 베푸십시오. – 4) 물건을 소중히 여기라. – 낡은 옷이나 뭉툭한 나무토막이라도 말이다. – 5) 항상 죽음을 기다리라. 돛을 올리고 항해하며, 물이 새는 곳이 없는지 주의 깊게 살피라... 이것이 감각을 통한 유혹이다. [1, 63]

13. 성 바실리우스 대주교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선하심을 지니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의 은사를 주신 것은, 우리가 서로의 마음속 생각과 조언을 나누게 하려 함입니다.” 그리고 이제 나는 내 겸손한 마음속에 있는 바를 여러분에게 털어놓습니다. 비록 나 자신은 수많은 죄로 인해 저주받은 자이지만, 내 연약함과 처지의 위험을 제쳐두고, 나의 모든 염려를 여러분에게 쏟으며, 여러분을 위해 두려워하고 떨며, 여러분을 위해 모든 일에서 힘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중 누구든지 자신의 구원을 무엇보다도 더 염려하는 사람은 나의 자녀가 아니라 주인이요, 주권자요, 아버지이시니, 나는 마음속으로 그분의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합니다. 자신의 일을 슬픔과 열정으로 행하는 사람은 나의 힘이자 요새이며, 침묵하며 겸손하고 지혜로우며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는 이는 나의 영혼이요, 나의 마음이요, 나의 생각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 심지어 신성한 바울이 말한 대로 “먹을 자격조차 없는 자(살후 3:10)에게는 화가 난다. 또한 게으른 자, 나태한 자, 불평하는 자, 졸린 자, 그리고 일을 제쳐두고 졸고 있는 자에게도 화가 난다. 그러니 간청하노니, 일어나소서—나의 자녀들이여, 형제들이여, 하늘로 이끄는 이 길에서 나와 동행하는 동지들이여. 우선, 영적인 일에 뜨겁고 굳건히 힘쓰며, 불처럼 타오르며 밤의 시편 찬송과 낮의 기도에 서둘러 나아가십시오; 그 다음에는 여러분이 맡아 처리해야 할 육체적인 일에도 전념하십시오. 가능한 한 일찍 일어나서, 바실리우스 대교황이 명하신 대로 해가 뜰 때 누군가 침대에 누워 있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더운 낮 시간에는 잠을 자도 되지만, 한 시간으로 충분하니, 서둘러 일어나십시오. – 신성한 복음서에 기록된 말씀을 들으시오: “새벽이 깊어갈 무렵 여인들이 무덤에 이르렀더니”(눅 24:1); “베드로와 요한이 아주 일찍 일어났더니”(요 20:24);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를 위해 일어났으니(행 16:25), 시편(118:62)에 노래된 바를 본받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바울은 자신에 대해 또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 “밤낮으로 일하여 여러분 중 누구에게도 부담이 되지 않도록 하였습니다”(살전 2:9). 보십니까? – 바로 이 사도, 복음의 전도자, 온 세상을 사로잡은 이가, 그와 같은 말씀의 사역 후에 수작업과 육체노동에 매진하며, 우리에게 하나님께 합당한 삶의 본을 보여주었습니다.

14. “말씀을 듣고만 잊어버리는 자들”(야고보서 1:25)이 되지 말고, 신성한 뜻에 따라 우리에게 선포된 율법의 실천자이자 이행자가 되십시오. – 서로 경쟁하며, 서로 격려하십시오. 누가 다른 이들보다 더 빨리 순종하는가? 명령하는 이의 두 번째 말을 기다리지 않는 자이다. 누가 더 큰 겸손을 보이는가? 첫 번째 말을 듣자마자 엎드려 용서를 구하며, 온갖 비방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이다. 여러분이 그러하다면, 나는 여러분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희망으로 무감정함에 이르러, 소망으로 하늘의 복락에 이르고, 영혼이 깨끗하고 시기하지 않으며 정욕에 굴복하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비록 정욕의 찌름과 간지럼을 받더라도, 그러한 영적 미덕으로 무장하여 여러분을 괴롭히는 악마들을 물리치기 때문입니다. 그나저나, 싸우는 자 중 누가 승리를 거두면서도 상처를 입지 않는 자가 있겠는가? 설령 온몸이 상처투성이일지라도, 죄로 인해 죽지 않았다면, 하늘의 왕께서 그런 자에게 면류관을 씌우지 않으시겠는가?

15. “너희는 자비로우라. 너희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자비로우시니라”(마태복음 6:36). “악인의 배는 자비롭지 아니하나, 의인은 자기 가축의 영혼을 불쌍히 여긴다”(잠언 12:10). 먼저 서로에게 자비를 베풀고, 그다음에야 동물들에게도 자비를 베풀되, 그들을 굶주리거나 목마르게 내버려 두지 말고, 제때에 먹이를 주고 물 마시게 하라. 그것이 바로 가축들이 잘 먹여져 튼튼할 때, 그 가축들이 수도사들의 소유임을 보여주는 가장 분명한 증거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수도원의 것이 아니라 평신도나 악한 자, 혹은 무지한 자들의 것입니다.

16. 여러분은 생활 규칙을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철저히 준수하는 사람임을 보여주십시오. 다른 일에서 이 규칙들을 충실히 지키려고 애쓰는 것처럼, 물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지키십시오. 채소를 함부로 버리지도 말고, 과일이 썩게 내버려 두지도 마십시오; 낡은 헝겊 조각이나 1 피아덴 크기의 자투리조차 경멸하지 말고, 하물며 옷은 더더욱 그러해야 한다. 왜냐하면 수도사는 『게론디카』에 기록된 대로,[85] “문 밖에 사흘 동안 내버려 두어도 아무도 주워가지 않을” 그런 옷을 입어야 한다면, 어깨에 걸치고 있는 한 어떤 옷을 경멸할 수 있겠는가? 이것뿐만 아니라, 어떤 장작이라도 소홀히 여기지 말고 헛되이 태우지 마십시오. 또한 어쩌면 다른 용도로 쓸 수 있을지도 모르는 판자 조각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포도주를 쏟아 버리거나 기름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아이고! 이것이 도대체 무엇과 일치하는 것입니까?

17. 매일 육신으로부터의 해방을 기다리라. – 그러면 우리는 주님의 두려운 얼굴을 뵙게 될 것이다. – 이를 위해 너희에게 “눈물이 밤낮으로 양식이 되리라”(시 41:4) 하리니, 이를 기억하며 그분 앞에서 너희 마음을 쏟아내라. 그리고 나는 여러분이 “기쁨의 소리 속에서, 하늘에서 축제하는 자들의 영적인 메아리와 함께, 경이로운 거처, 곧 하나님의 집으로 나아가시리라”고 믿습니다(시 41:5). 그러니 비록 정욕이 여러분을 심하게 뒤흔들지라도 슬픔에 빠지지 말고 당황하지 마십시오. 대신 영혼의 돛을 올리고 평온한 마음으로 항해를 계속하며, 우리 아버지의 기도에 이끌려 이 위대하고 고난이 많은 삶의 바다를 건너가도록 힘쓰십시오. 이 과정에서 악한 물이, 마치 작은 균열을 통해, 감각을 통해, 시력을 통해—비록 의도치 않았더라도 열정적으로 바라볼 때—혹은 청각을 통해, 즐거운 말이나 선율을 받아들일 때, 혹은 후각을 통해 기름을 바른 몸에서 나는 향기나 향기로운 향유에서, – 혹은 미각을 통해 어떤 음식으로 달콤함을 느낄 때, 혹은 감각을 사로잡는 촉감을 통해 자신의 몸을 만지거나 이웃의 몸을 만질 때, 의도적이든 우발적이든 간에 –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고해와 눈물을 통해 이를 서둘러 밖으로 내보내라. 정욕이 너무 거세게 불어닥치면 돛을 내리고, 즉 참된 겸손을 받아들여야 한다. 밧줄, 즉 인내의 견고함이 끊어진다면, 지체 없이 마음의 힘을 회복함으로써 이를 바로잡으라. 이렇게 행하면, 덕행이라는 짐을 짊어지고 파도 없는 영생의 안식처로 안전하게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56. 신앙 생활을 막 시작한 이들에게는 죄악된 욕망과 습관의 잔재로 인해 유혹이 강하다

56. 1) 신앙 생활을 막 시작한 이들에게는 죄악된 집착과 습관의 잔재로 인해 유혹이 강하다. – 2) 우리의 삶의 모습은 위대하니, 이는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것과 앞으로 바라는 것을 세속적인 삶과 비교할 때 그러하기 때문이다. – 3) 외부에서, 혹은 육체와 정욕으로부터 유혹이 닥칠 때, 이겨낼 때까지 굳건히 서서 싸우십시오. – 4) 선한 생각과 악한 생각이 열거되며, 후자에 맞서고 전자에 굳게 매달릴 것을 권고합니다. [1, 64]

18. 여러분 중 어떤 이들은 미끄러지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우리 곁을 완전히 떠나기도 하는데, 특히 최근에 수도원에 들어와 아직 시험 기간을 거치고 있는 이들 중에서 그러니 놀라지 마십시오. 그들은 자신 안에 남아 있는 악한 성향과 기질—게으름, 세속적 욕망, 그리고 죄악된 습관들—때문에 그리스도의 선한 멍에를 견디지 못하며, 그로 인해 “개들이 자기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것처럼”(베드로전서 2:22) 뒤로 물러서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은 거짓이 아니니, 곧 그분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양 떼는 적으며(눅 12:32), 좁은 문과 고난의 길을 통해 천국으로 들어가는 자들은 적으며(마 7:13, 14), 또한... “누구든지 자기 아버지, 어머니, 아내, 자녀, 형제,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누가복음 14:25).

19. 우리 천사 같은 삶의 모습은 위대하고 경이롭습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의 하찮은 존재 중에서 이를 위해 택하신 자, 그리고 주님의 음성에 따라 달려와 이 지극히 높은 삶의 경지에 이르러, 이제부터는 마음의 관조로 천국을 뵙기를 바라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이는 이 땅의 세상에는 어둠과 암흑이 있으며, 영원하고 썩지 않는, 말로 다 할 수 없고 생각할 수 없는 복 대신에, 헛되고 썩어 없어지며 금세 지나가고 오직 이 세상의 삶만을 달콤하게 하는 것을 선택하는 모든 사람은, 마치 밤의 전투에서처럼, 어디서 어떻게 타격을 받는지, 무엇 때문에 어떻게 불리한 상황들이 몰려와 파도처럼 자신을 치는지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합니다. 이를 꿰뚫어 보고 깨달은 자는, 마귀의 그물에 사로잡힌 이 무리에서 벗어나, 마치 새처럼 높이 날아올라 경건한 삶의 정신적 산으로 올라갈 것이며, 발아래에는 사냥꾼인 사탄이 주님의 말씀대로 조롱받고 짓밟히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을 권세를 주었으니, 원수의 모든 힘을 밟아 부수라” (누가복음 10, 19). 그러니 전진하여, 온전한 무장 을 입고 그의 다양한 머리와 그의 모든 교만한 싸움의 힘을 짓밟으라. 이것이 바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며, 너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는 것이다.

20. 너희에게 닥치는 어떤 일로도, 너희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시험하는 일로 인해 결코 흔들리지 말라. 내적이든 외적이든 싸움이 일어날 때 낙심하지 말고, 피를 흘릴 때까지 너희의 자리를 지키며, 인내를 통해 의심할 여지 없이 면류관을 받을 것을 확신하라. 용기를 내어, 여러분을 대적하는 교활한 뱀과 맞서 싸우십시오. 육체의 반란을 아십시오; 거룩한 집, 즉 여러분의 정직한 영혼을 대적하는 이 내면의 불타오름을 아십시오; 두려움을 아십시오. 이 아라비아의 늑대들은 겉으로는 양의 옷을 입고 있지만, 속은 사악한 모든 것을 파괴하는 자들입니다. 성복음서에 따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분별하고, 굳건히 자리를 지키십시오.

21. 너희 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정결함, 경건함, 회개, 인내, 죽음과 죽음 이후의 세계, 천사들을 만나는 일, 주님 앞에 서는 일, 그분의 심판 앞에서 대답해야 할 일에 대한 생각이 일어날 때, – 여기에 덧붙이자면, 첫 번째를 마지막 자리에 두어 – 그리고 순종, 겸손, 자기 의지의 절제, 조롱을 참아내는 것과 이와 유사한 생각들이 솟아날 때, 이것이 오른편에 속한 생각들, 곧 천국의 생각들이며, 천국으로 향하는 길을 닦고 그 길을 동반하는 것임을 알아차리라. 이와 정반대되는 생각들은, – 세속을 사랑하는 마음, 죄를 사랑하는 마음, 쾌락을 사랑하는 마음, 건방짐, 헛소리, 잠을 많이 자는 것, 허영심, 불순종, 불신, 제멋대로 섬기는 것, – 이 모든 정욕을 일일이 열거할 필요가 있겠는가? – “내가 그것들을 셀지라도 모래보다 더 많아지리라”(시편 138:18). 이처럼 무엇이 옳은 것이고 무엇이 그른 것인지 알았으니, 후자에서 멀리 도망치고 그것을 쫓아내십시오. 성 야고보 사도가 가르치신 대로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희에게서 도망하리라”(야고보서 4:7)는 말씀에 따라 저항하십시오; 반면 첫 번째 것과는 연합하고, 뜻을 합하며, 함께 행하십시오. 그러면 같은 사도가 약속한 바를 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너희에게 가까이 오실 것이다” (야고보서 4,8). 결코 자만, 자의적 판단, 자기 중심성을 용납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아버지의 말씀은 이러한 모든 것을 수련자에게 닥치는 온갖 유혹의 근원으로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항상 형제 사랑, 단순함, 거짓 없음, 세상을 미워함, 꾸밈없음, 양보, 순종, 신에 대한 분별력, 경건함,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헌신을 지키십시오.

 

57. 우리는 전쟁 중에 있습니다. 나, 군대 지휘관으로서, 말로 여러분을 격려합니다. 버티십시오.

57. 1) 우리는 전쟁 중에 있습니다. 나, 군대 지휘관으로서 말로 여러분을 격려합니다. 견고히 서십시오. – 2) 우리의 위업은 작지 않다. 그러나 보이는 것을 보지 말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며 기뻐하라. 보상이 크기 때문이다. – 3)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셨으니, 우리도 그분을 위해 우리 자신을 내어주며, 각자의 위치에 굳건히 서자. [1, 65]

22. 우리는 전쟁 중에 있으며, 어렵고 승리가 쉽지 않은 전쟁 중에 있습니다. 신성한 사도가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을 향한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이 세상의 어둠의 지배자들과 하늘 아래 있는 악의 영들을 향한 것입니다” (엡 6, 12). 마치 군대 지휘관이 적과 맞서기 전, 부하 병사들에게 격려의 말을 건네 용기를 북돋우고, 용감하게 적을 물리치도록 독려하듯이: 나 또한 비록 나 자신이 연약하지만, 주님의 군대인 여러분을 한 번뿐 아니라 언제나 격려하고 북돋아, 악마의 무리와 온갖 불경건한 정욕을 물리치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그렇게 하고자 합니다.

23. 여러분의 영적 투신에는 적지 않은 수고와 땀이 따르지만, 그것은 지극히 치열하고, 전투적이며, 투쟁적이며, 경이롭고 초자연적인 것입니다. 이는 여러분이 매일 피를 흘리듯 자신의 욕망을 잘라내고, 깊은 상처처럼 책망과 모욕을 견디며, 마치 경기 훈련처럼 순종의 짐을 짊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중 누구도 마땅히 해야 할 일과 명령받은 범위를 벗어나서는 안 되지만, 오히려 모두 함께 싸움에 뛰어들어 기진맥진할 때까지 고난을 견디며, 수고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모든 것—굶주림과 목마름, 추위와 벌거벗음, 영광과 치욕, 그리고 사도께서 자랑하신 그 밖의 모든 것(고린도후서 6:4–8; 11, 27). 그러나 기뻐하라, 나의 자녀들아, 기뻐하라. 보이는 것을 생각하지 말고 보이지 않는 것을 생각하라. 보이는 것은 일시적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이다(고린도후서 4:18). 또한 “너희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너희의 생명도 드러날 것”이며, “그때 너희도 드러날 것” (골 3:4), 너희가 어떤 모습인지를 드러내며, 영원히 기뻐하게 될 것이니, 이는 너희의 주님이시자 수고하신 분이 육신 안에서 행한 너희의 수고에 대해 영원하고 끝없는 상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24. 나의 주님들, 나의 주인들아,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소서!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해 죽음, 곧 십자가의 죽음에 자신을 내어주신 것처럼, 우리도 그분을 위해 우리 자신을 내어주며, 우리를 그토록 합당하게 여기신 자비로우신 주님께 감사를 드릴 것입니다. 곧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세상의 모든 일과 활동, 모든 육체의 쾌락과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게 하셨으니, 이를 위해 우리를 이 일에 굳건하게 하신 하나님께 우리는 어떤 보답을 드려야 하겠습니까? 다른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미 이루어진 일 을 부주의와 무감각으로 다시 망치지 않고, 현재의 상황 앞에서 소심해하지 않으며, 미래를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 것, 심지어 피를 흘려야 한다 해도 그것이 우리에게 기쁜 일이며 지극히 바람직한 일이 되게 하는 것 외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굳건히 서서, 이제부터 영원토록 더욱더, 점점 더 확고히 자리를 잡으십시오. 더 열성적으로, 더 활기차게, 하나님처럼, 그리고 서로를 더 사랑하며 행동하십시오.

 

58. 나는 죽음과 그때 일어날 모든 일을 생각하며, 내게 정화될 기회가 주어지고 불의 시련을 겪지 않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은 비록 현재가 슬픔으로 가득하더라도, 장차 받을 상을 바라보며 기뻐하십시오.

58. 1) 나는 죽음과 그때 일어나는 모든 일을 생각하며, 내게 정화될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지고 불의 시련을 겪지 않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은 비록 현재의 삶이 슬픔으로 가득하더라도, 장차 받을 상을 바라보며 기뻐하십시오. – 2) 사순절이 다가왔습니다. 이를 정화와 마음의 평안을 얻는 시간으로 기뻐하며 맞이합시다. 또한 이것이 영적 파종의 시기임을 잊지 말고, 이 유익한 파종에 힘쓰십시오. 그러나 모든 일에 절제의 왕도(王道)를 걷되, 특히 겸손함에서 더욱 성장하는 데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1, 66]

25. 존경받는 형제 중 한 분의 죽음을 떠올리며, 나는 탄식하고 내 영혼으로 슬퍼하며, 이 이별과 영혼과 육체의 분리, 이 다른 땅으로의 이송, 이 또 다른 어떤 길로의 진입, 이 낯설고, 경험해 보지 못했으며, 알 수 없고, 설명할 수 없으며, 말로 다 할 수 없는 다른 세계로의 이동이 과연 어떤 것일지 생각했다. 과연 누가 그곳에서 우리가 어떤 만남을 겪게 될지, 어떤 사건들이 일어날지, 어떤 광경과 일들이 펼쳐질지 말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곳에서 천국으로 데려가기 위해 어떤 종들을 보내실지 누가 알겠는가? 혹시 그 사절단이 악한 천사들로 이루어지지 않을까? 그러한 상황을 두려워하자! 누가 우리에게 내려와 그 나라로 우리를 인도하고 동행해 줄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어디로 들어갈 것인가? 안식의 땅으로 들어갈 것인가, “기쁨과 찬양의 소리, 그리고 축제하는 자들의 환호 속에서, 하나님의 집인 그 경이로운 거처로 들어갈 것인가?”(시 41:5). 아니면 반대로 불과 어둠, 구더기들, 그리고 그 밖의 셀 수 없이 많은 고문장으로 들어갈 것인가? 이를 생각하며 나는 놀라움과 공포에 휩싸여 떨며 기도하노니, 그 모든 것을 삼켜 버리는 끝없는 불을 겪기 전에, 이곳에서 눈물로 내 셀 수 없는 죄를 씻어내고 조금이나마 스스로를 정화할 수 있게 해 주시기를. 여러분은 덕을 위해 분투하고 투쟁하는 중에 계시니, 이를 듣고 생각하며 기뻐하고, 아침을 맞이하며, 활짝 피어나십시오. 그리고 주님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비록 여러분을 둘러싼 상황이 비통할지라도, 영원한 보상을 바라보며 게으름과 소심함 없이 끝까지 자신의 여정을 완수하기 위해 열심을 내십시오.

26. 이제 성대한 사순절, 경건한 날들의 계몽과 정화의 시기가 다가왔습니다! 누구도 두려워하지 말고, 누구도 나태해지지 말라. 이 시기에 감동과 거룩한 생각의 깨달음, 천상의 묵상을 떠올리는 것, 마음과 몸의 정화, 정욕의 더러움을 떨쳐내는 것, 하나님 앞에서 통회하며 눈물로 씻는 것은 참으로 달콤하다. 그러니 이 날들을 육체와 영혼의 안식과 위로의 시간으로, 특히 전자와 비교할 때 후자가 더 큰 위로가 되는 시간으로 받아들이도록 합시다. – 이 시간은 또한 파종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육체에 아무리 많이 뿌려도, 그 모든 것은 썩어 없어집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남는 것은 오직 혈기를 끓어오르게 하는, 동물적이고 말 없는 정욕의 불길뿐입니다. 우리 인간은 어떻게 이토록 현세적인 것에 신경 쓰고 변덕스러운 것에 매달리며 길을 잃고 있는 것입니까! 그러나 영적인 파종에서는 받아들인 것 중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고, 아무것도 헛되이 낭비되지 않으며, 아무것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것이 온전히 보존되어, 참으로 불멸의 양식으로 여러분의 고결한 영혼을 기릅니다: 여기에는 기쁨, 평화, 믿음, 소망, 사랑, 깨달음, 정화, 성화, 그리고 마침내 신성화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육체에 관해 지나치게 치우치거나 정해진 규율을 벗어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며, 왕의 길을 따라 걸어가야 합니다. 이는 음식과 음료를 섭취할 때, 기도할 때, 은둔할 때, 맨땅에서 잠을 잘 때,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신성한 겸손으로 자신을 낮추는 일에 더욱 힘쓰자. 이를 위해 위선 없이 순종하고, 여러분이 그러하듯 자신의 교활한 뜻을 뿌리째 잘라내야 한다. 이렇게 행함으로써, 여러분은 온유와 사랑 가운데, 또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그리스도의 거룩한 부활의 빛나는 날들에 들어갈 것입니다. 빚진 자로서, 나는 이 점을 여러분에게 상기시켰고 앞으로도 상기시킬 것입니다. 그러니 이 계명과 나의 겸손한 말씀을 실천하십시오. – 그리고 성령께서 여러분을 그분의 인장으로 인치시기를 바랍니다!

 

59. 세상의 헛된 일들 가운데 머물렀다가, 우리가 그곳에서 도망쳐 나왔음을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59. 1) 세상의 헛된 일들 가운데 머물렀다가, 우리가 여러분과 함께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 2) 우리의 상태보다 더 복된 것은 없습니다. 목표가 분명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즉시 주어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 3) 하나님을 사랑합시다. 누가 사랑받을 자격이 더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 사랑보다 더 복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은 이 일에 착수하여 시작했지만, 끝은 아직 멀었습니다. – 4) 육신을 죽여야 하며, 특히 그 정욕을, 그것을 자극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피함으로써 죽여야 합니다. [1, 67]

27. 그저께, 우리 주교님의 명에 따라 나는 수도원을 나와 총대주교좌로 올라갔고, 거기서 황제의 미사에 참석했다. 나는 그곳에서 하루 종일 머물렀는데, 온갖 광경과 얼굴들, 세속적인 일들의 소용돌이와 사람들을 이리저리 쫓아다니게 하는 분주함, 그들의 수다와 수많은 걱정거리, 그리고 세속적인 음모들을 목격했다. 게다가 이는 경건한 날이자 성대한 사순절 기간 중이었다. 이 모든 것이 나를 평소의 마음가짐에서 멀어지게 했고, 내 귀에는 낯선 말들이 울려 퍼졌으며, 내 눈은 다양하고 수많은 환상들로 가득 찼다. 그리고 지금도 내 안에서 그 느낌이 남아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좋은 기회를 빌어 여러분께 이를 털어놓고자 한다. 마치 짙게 낀 구름에서 빗방울이 쏟아지듯; 마음이 답답할 때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듯, 저도 마음 깊은 곳에서 한숨을 내쉬고 생각의 동요를 가라앉힌 뒤, 기도의 슬픔 어린 간구로 주님께 감사드리고, 여러분이 그런 자들 가운데서 나와 그들과 거리를 두었으며, 심지어 세상의 부정한 것에 손대기조차 거부하고, 순종의 길에 머물며 매일 인내의 유혹과 싸우며, 신령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선한 마음가짐과 행실로 미덕의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28. 여러분의 처지와 상태보다 더 복되고, 더 갈망되며, 더 훌륭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 여러분은 참으로 그리스도의 자녀요, 하나님과 아버지의 종으로서, 육신과 피를 버린 자들입니다. 세속적인 사람들의 목표는 이 땅에 있고, 여러분의 목표는 하늘에 있습니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세상이며, 여러분에게는 하늘입니다. 그들에게는 이 세상의 것을 기쁨 없이 기뻐하고, 이 세상의 것으로 부유해지되 부유함을 느끼지 못하며, 이 세상의 것을 향락하되 향락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지 못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들에 대해 달리 말할 수 없습니다. – 그러나 여러분에게는 희망에서 솟아나는 기쁨이 있습니다. – 장차 올 세상에 약속된 것에 대한 기쁨, – 일시적인 가난 속에서도 영원한 풍요로움, – 슬픔을 동반한 절제 속에서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달콤한 영적 복을 맛보는 것입니다. – 그러니 우리가 하늘의 운명에 따라 우리에게 주어진 것과 성령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흠모하지 말고, 그 어떤 것에도 시선과 주의를 돌리지 말며, 그 어떤 것도 갈망하지 맙시다.

29. 오라, 우리를 부르신 분께 영광을 돌리자. 오라, 우리를 그토록 사랑해 주신 분을 사랑하자. 오라, 그분께 종처럼 섬기며, 만물을 다스릴 자격을 얻자. 오라, 그분을 경외하자. 그리하면 세상이 우리를 경외하고 천사들의 무리가 우리를 사랑하리라. 오라, 악한 행실과 생각에서 우리 자신을 정화하자. 그리하면 참으로 접근할 수 없는 빛이신 그분께서 성령의 번개로 우리를 비추시고, 신성한 거처의 높은 산으로 우리를 이끌어 올리시며, 우리를 사람들에게 신성한 성읍으로 보이시리라. 게론디케의 성부들 중 한 분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들었습니까? “만약 우리가 유일하신 분, 즉 하나님을 공경하면 모든 이가 우리를 공경하게 될 것이요, 만약 우리가 우리의 죄로 그분을 모독하면 그와 정반대의 결과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과연, 누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누가 이 위대하고 끊이지 않는 빛에 매달리지 않겠습니까? 누가 이 위대한 공로자이자 면류관을 주시는 분께로 달려가지 않겠는가? 누가 이 세상의 모든 왕 중의 왕과 함께 다스리기를 원하지 않겠는가? 누가 하늘과 땅의 모든 아버지이시며, 모든 것의 주인이신 그분으로부터 오는 모든 아들의 신분을 그 무엇보다도 우선시하지 않겠는가? 누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아버지의 그 교제를 상속받기를 갈망하지 않겠는가? 그 교제는 말로 다할 수 없고, 귀로 담을 수 없으며,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너희는 이것을 선택하고 사랑하였으며, 부르심에 응답하여 왔고, 행하기를 시작하여 지금도 행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위업(경기장에서의 경쟁)은 끝나지 않았고, 달리기의 끝도 아직 멀었습니다. 여전히 힘과 힘을 다해 노력해야 하며, 성령의 위대하고 금 같은 입술이 말씀하신 대로 경쟁의 시간이 아직 다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의 빛이신 바울이, 보편 사도 바울이 “나는 목표 없이 달리는 것이 아니요, 공중에 주먹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내 육체를 죽이고 복종시키노니,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설교하면서 나 자신은 믿지 못하는 자가 되지 않으려 함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듣지 못합니까? (고린도전서 9:26, 27).

30. 보라, 하나님의 사람이 무엇을 말씀하셨는가? 이 길들일 수 없는 육신의 말을 죽이고 단호하게 굴복시켜야 한다. 그러니 그를 억누르고 고삐를 조이자. 이 점에 대해, 저는 정욕이 많고 죄가 많은 자로서 여러분께 간청합니다. 이 말이 고삐를 깨물거나, 기수인 우리 마음을 떨쳐버리거나, 우리를 원수들의 조롱거리가 되지 않도록 말입니다. 더 안전하게 가기 위해 험한 곳은 피합시다. –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당연히 아시겠죠. – 교활한 시선에 화가 있나니, 그것이 영혼에 죄의 독을 들여보내기 때문입니다! 저주받은 건방짐에 화가 있나니, 그것이 미덕의 집을 순식간에 태워버리기 때문입니다! 수염이 나지 않은 젊은이들이나 수염이 난 젊은이들이 서로에게 보내는 미소여, 화가 있을지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순식간에 우리를 정욕의 깊은 나락으로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배를 채우는 것과 충분한 잠이여, 화가 있을지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음탕한 씨앗을 낳고 번식시키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둘씩 짝을 지어 비밀리에 함께 앉아 대화를 나누고, 특히 마치 상호 유익과 이익을 위한 것처럼 서로에게 부끄러운 생각을 드러내는 자들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왜냐하면 그들 가운데에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사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외심으로 스스로를 지키고, 하늘로 향하는 여정에서 점점 더 높이 올라가라.

 

60. 일어나서 만병의 의사이신 주님께 치유를 구하십시오

60. 1) 일어나서 만병의 의사이신 주님께 치유를 구하십시오. – 2) 우리의 삶은 고귀합니다. – 천사적이며, 우리는 육신적이고 세속적입니다. 그러므로 삶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큰 노력이 요구됩니다. [1,69]

1. 일어나서, 자세를 바로 잡고, 너희의 길을 선하게 걸어가라. 게으름 속에서 졸고 있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깨어나라. 손이 축 처지고 양발이 절뚝거리는 자는, 주님의 계명의 길로 바르게 걷기 시작하라. 정욕적인 생각에 눈이 멀어 있는 자는, 눈물을 세례반에 담가 눈을 씻고, 무정함으로 시력을 되찾아 주님을 찬양하라. 나병 환자처럼 죄의 딱지로 뒤덮인 자는, 주님께 따뜻하게 나아가면 “내가 원하노니 깨끗해져라” (마태복음 8:3)라는 말씀을 듣게 될 것이며, 깨끗해진 후에는 다시는 그 나병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라. 영혼이 귀머거리이고 마음이 눈먼 자는, 듣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을 구하라. 그리하면 얻게 될 것이니, 내면의 사람이 병든 모든 이를 신성한 말씀이 치유하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 중 연약한 이들을 위해 이러한 말을 전하노니, “건강한 사람은 의사를 찾지 않고, 병든 사람만이 찾는다”(마태복음 9,12)는 말대로이다.

2.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우리 삶의 길은 그저 대충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땀과 수고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높고 신성하며 천사들을 닮았는지에 비례하여 그만큼의 수고와 노력이 요구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육신을 가진 자로서 무형적인 존재를 닮고자 하며, 이 세상에 있으면서도 하늘에서와 같은 삶을 살기를 열망하며, 육신과 피에 묶여 있으면서도 무형적이고 피 없는 삶을 살기 위해 스스로를 고군분투하기 때문입니다: 사도의 말씀에 따르면, “육과 피는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으며, 썩을 것이 썩지 않을 것을 상속받지 못하느니라”(고린도전서 15:50). 그러므로 우리는 많은 굳건함과 세심한 주의, 그리고 더욱 부단한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 “육신은 영을 거스르고, 영은 육신을 거스르나니, 이 둘은 서로 대적하느니라”라고 사도께서 말씀하셨으니(갈 5,17). 그러니 보라, 우리 안의 더 나은 것이 더 나쁜 것에 복종하게 하지 말고, 우리 안에서 주인이 되어야 할 것을 육신의 비굴한 정욕에 노예로 삼지 말자. 그래야만 머리에 서서 발을 위로 향하게 걷는 자들이 되지 않을 것이다.

 

61. 대사순절의 반환점; 수고한 끝에 그 열매를 봅니다: 하나님의 자비; 감사를 드리며 앞으로 나아가겠습니다

61. 1) 대사순절의 반환점; 수고한 끝에 결실을 보게 되었으니, 이는 하느님의 자비라. 감사를 드리며 앞으로 나아가자. – 2) 하느님과 천사들, 그리고 모든 성인들이 우리의 여정을 지켜보고 계시니, 장애물을 극복하고 헛된 슬픔을 이겨내며 힘내자. [1, 69]

3. 성령의 은총이 우리를 큰 굳건함과 용기를 가지고 성대한 사순절의 한가운데까지 잘 인도해 주셨습니다. 저는 그 은총이 앞으로도 우리와 함께하여, 죄를 용서받고 여러분의 선한 행실이 더욱 향상되는 가운데, 생명을 주고 빛을 비추는 부활의 날까지 우리를 이끌어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뒤를 돌아보십시오. 한때 여러분의 상태가 어떠했는지, 그리고 지금 어느 지경까지 이르렀는지 살펴보십시오. 영혼은 일단 구원에 대한 열망을 품게 되면, 이 일에서 무감각할 정도로 앞으로 나아가며 미덕의 높은 경지에 오르고, 하늘로 날아오릅니다. 우리 형제들도 마찬가지로, 열정을 품고 함께 이 시대로 들어섰으며, 모든 어려움과 장애물을 제쳐두고, 지금까지 선하고 바르게 나아가며, 경건함과 계명의 정확한 준수를 사랑함으로써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전에 얻은 것을 하나도 잃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것으로 풍성해졌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신성한 사역의 열매가 배가되었고, 여러분의 거룩한 열정이 더 나은 결실을 맺게 되어 제 마음은 기뻐하고 제 영은 즐거워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사도적 표현을 빌리자면, “원하는 자나 달리는 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자비로우신 하나님께 달려 있다” (롬 9:16). 그분으로 말미암아 연약한 자들이 강해지고, 무력한 자들이 “힘으로 띠를 띠게” 됩니다(시 17:33). 그러나 이미 이룬 것만으로 만족하지 말고, 청년처럼 전방으로 나아가, “우리의 젊음이 독수리처럼 새로워지기를” (시편 102:5), 죽음의 문을 통해 일시적인 세상에서 영원한 세상으로 넘어갈 때까지, 우리가 얻은 선과 도달한 단계에 안주하지 말고 항상 앞으로 나아가며 번영합시다. 그러면 형제들아, 우리는 참으로 복을 받을 것이며, 복된 천사들의 몫을 얻게 될 것입니다.

4. 우리가 마땅히 살아야 할 삶의 방식대로 살아갈 때, 그 얼마나 큰 영광과 영광인가. 우리를 바라보시는 만물의 주님께서는 기뻐하시며, 모든 성인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의 눈으로 경기장에 뛰어드는 이들을 바라보듯이, 하나님과 모든 천사들, 그리고 모든 성인들의 모임도 우리를 바라보시며 우리가 행하는 일의 가치를 판단하십니다. 그러니 내 형제들아, 땅에서 하늘로 향하는 이 위대한 경주에서 힘내자. 우리의 대적자를 이겨내고, 그가 우리와 싸우려 할 때 타격을 가하며, 그에 대항하는 우리의 용감한 투지로 그를 멀리 물리치자. 그는 겁쟁이요, 무력하며, 경멸받을 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제 야고보는 이렇게 외친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희에게서 도망하리라. 하나님께 가까이 가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너희에게 가까이 오시리라”(야고보서 4:7, 8). 어떤 일 에서도 뒤로 물러서지 맙시다. 이는 힘차게 달리는 자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나태하게 나아가지 맙시다. 이는 승리를 서두르는 자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과 욕망에서 벗어나 하늘을 향해 시선을 높이 들어, 우리가 바울과 함께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우리의 경주를 완주합시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웠고, 경주를 마쳤으며,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의의 면류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딤후 4:7).

 

62. 너희의 질서는 잘 정립되어 있으니, 이를 지키라

62. 1) 너희의 처지는 잘 정비되어 있으니, 이를 지키라. – 2) 각자는 자기의 일을 다하라. – 특히 너, 경제관아, 그리고 너 다음의 모든 이들도 그러하라. 윗사람들은 잘 다스리고, 부하들은 기꺼이 순종하라. – 3) 참회와 직무 교체를 기꺼이 받아들여라. 허가에 관한 성 테오도르의 권고. [1, 70]

5. 우리를 한자리에 모으시고 한마음 한뜻으로 잘 다스려 주신 주님께 영광과 감사를 드립니다. 감히 말하건대, 우리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시니, 우리는 그분을 모든 것의 시작이자 지도자로 삼아 모든 것을 그분께 돌리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 바칠 것입니다. 만약 끝까지 이러한 선한 마음가짐에서 떠나지 않는다면, 누가 여러분보다 더 복되겠습니까? – 주님께서 여러분이 언제나 서로 잘 협의하고, 점점 더 정화되고 깨달음을 얻으며, 비록 작은 선행의 실천일지라도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상태는 잘 정립되어 있으니, 이를 지켜 나가십시오.

6. 각자는 명령받은 대로 순종하라. 각자는 자기 자신을 살피고, 서로를 우월하게 여기지 말며, 이 점에서도 온갖 면에서 질서를 지키라. – 특히 너, 집사 아들이여, 네게 맡겨진 책임을 유념하고, “온유함으로 거역하는 자들(즉, 불순종하는 자들)을 훈계하며” (딤후 2:25), 편견이나 분노에 따라 행동하지 말라. 사도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딤후 4:2)라고 말한다. “때를 못 얻든지”는 ‘언제든지’라는 뜻으로 이해하라. 언제든지 끈기 있고 경계하라. – 어쨌든, 비록 내가 모든 면에서 부족하지만, 나를 보는 대로 너도 그렇게 하라. 내가 허용하는 만큼 너도 허용하고, 내가 내버려 두는 것은 너도 내버려 두라. 내가 때리면 너도 때리고, 내가 용서하면 너도 용서하고, 내가 자비를 베풀면 너도 자비를 베풀고, 내가 용서하면 너도 용서하라; 사랑하면, 사랑하라. 그리하면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라. 네 주인의 기쁨에 들어가라”(마태복음 25:21)는 말을 듣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너를 따르는 자도 행해야 하며, 그 뒤를 잇는 자들도 그러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훌륭한 법이니, 즉 부하들이 지도자들을 본받아 성장하게 하고, 지도자들에게 모든 이를 향한 현명한 배려가 넘쳐날수록, 부하들에게는 온순함, 반항하지 않음, 겸손한 순종, 그리고 명령받은 바를 신속히 이행하는 태도가 넘쳐나게 하는 것이다.

7. 참회와 순종의 변화, 그리고 수공업을 사랑하십시오. 이를 주관하시는 분들이 여러분의 유익을 염두에 두고 계심을 확신하십시오. – 그러나 제 무모함과 제 죄로 인해 실수를 저지르게 되더라도, 제게 시기상조인 허락을 구하지 마십시오; 나는 – 비록 죄인이긴 하지만 – 위대하고 지극히 높은 사도 베드로를 통해 나에게도 말씀하신 주님 앞에서 이 결박들을 지키는 자이니, “네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여 있을 것이요, 네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려 있을 것이라” (마태복음 16, 19). 그러니 내가 –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나의 자녀들아 – 어떻게 함부로 풀 수 없는 것을 풀고, 묶인 것을 풀어버릴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결속과 해제를 행할 때, 항상 나에게 협력해 주시는 신성한 용서를 얻기 위해 내가 얼마나 큰 두려움 속에서 이를 행해야 하는지 보지 못하십니까? 어디서야말로 우리가 그 분별의 빛을 볼 수 있겠습니까? 그리하여 우리의 제재(참회 부과)와 심판이 마치 하느님과 함께 이루어지는 것처럼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비록 이렇게 말하는 것이 대담한 일일지라도, 그러나 본질적으로 볼 때, 진실로 그래야 하며 실제로도 그러합니다. 이렇게 말하니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수치심으로 뒤덮이며, 땅이 갈라져 나를 삼키지 않게 하시고, 산들이 움직여 나를 덮지 않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아, 나여! 아아, 나여! 내가 어떤 일에 배정되었는가! 이를 아시는 주님, 저를 괴롭히지 마소서. 왜냐하면 제가 허락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실 수도 있으니, 그분께서 제 기도를 거절하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순결하신 본성은 제 무분별한 충동과 결정에 복종하지 않으실 것이며, 오히려 제 행동을 승인하지 않으시고 엘리야처럼 저를 생명의 세계에서 데려가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나의 형제자매들에게 증언해 주시기를, 여러분을 슬프게 하려는 뜻이 아니라, 또한 여러분을 억압하거나 강압적으로 구속하기 위해서도 아니며, “강요와 억지로 그리스도의 양 떼를 치는 것”(베드로전서 5:2)을 원해서도 아니라는 것을. 주님, 제게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내게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나의 모든 염려는 그리스도의 어린 양들이요 하나님의 양들인 여러분을 온갖 방법으로 구원하는 데 있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신성한 베드로에게 물으실 때(요한복음 21:15 이하), 그분을 향한 사랑의 첫 번째이자 가장 큰 표징으로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마음속에 새기고, 여러분의 삶을 통해 이를 충실히 지키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기뻐하며 잘 나아가십시오.

 

63. 유월절을 지낸 후, 사순절의 정신으로 나아가, 그 기간 동안 얻은 것을 낭비하지 않고 오히려 배가시키도록 합시다.

63. 1) 부활절을 지낸 후, 사순절의 정신으로 나아가, 그 기간 동안 얻은 것을 낭비하지 않고 오히려 더 불려 나가도록 합시다. – 2) 우리가 어디로 향하고 무엇을 성취할지 생각하며, 쾌락에 탐닉하거나 육체의 아름다움에 집착하지 맙시다. – 3) 우리는 부활절과 그 이전에 많은 것을 얻었으니, 이제 그와 정반대되는 길로 뛰어들어서는 안 됩니다. – 4) 형제들이 하나둘씩 떠나가고 있으니, 우리도 뒤처지지 맙시다. 그러니 우리의 사명에 전념합시다. [1, 71]

8. 이제 우리는 날들의 여왕인 성대한 부활절을 기념하였고, 신성한 성사로 빛을 받았으며, 평화와 영적 사랑의 유대 안에서 성령의 성화를 받아들였습니다. 이제 다시 한 해의 다른 날들로 들어가는 시작을 맞이합니다. 그러니 그 날들 속에서도 선한 변화로 거듭나, 이전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 그리고 어떤 일에서도 뒤로 물러서지 말고, 지난 사순절 기간 동안의 영적 수고와 노력을 헛되게 하지 말며, 오히려 한 단계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가 이전의 미덕 위에 새로운 미덕을 더 쌓아 나가도록 합시다; 그리고 우리가 경건함 속에서든 침묵 속에서든, 정절 속에서든 순수한 마음 속에서든, 금식 속에서든 그 밖의 어떤 수행을 통해든 잘 얻어내고 쌓아온 것들을, 매일같이 온전함을 유지할 뿐만 아니라 선한 덕목들로 더욱 풍성해지고 완성되어 나가도록 합시다.

9. 우리는 하느님께로 흘러가며, 천국으로 나아가고, 빛과 생명과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 그 달콤하고 복된 낙원, 영원한 거처, 경이로운 영광의 장소, 천사들의 찬양, 성인들의 환호,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영원한 유산으로 향합니다. 그러니 우리 앞에 놓인 목표를 잊지 말자. 그 여정에서 긴장을 늦추거나 부적절한 생각에 휩쓸리지 않도록 하자. 쾌락을 탐하지도, 세속을 사랑하지도, 육체를 탐하지도 말고, 얼굴의 아름다움이나 걸음걸이, 미소에 사로잡히지도 말자. 신학자 그레고리우스가 호소하듯이,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자. 죄악된 열매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혀 이브가 어떻게 고통을 겪었는지 보십니까? 우리로 하여금 그와 비슷한 고통을 겪지 않게 하소서! – 게다가 정욕과 열정적인 욕망에 눈감아 주는 것으로 우리가 얻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아무것도 없다면 다행이겠지만, 내면의 혼란은 물론이고,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느끼는 수치와 부끄러움까지 짊어지게 될 것입니다.

10. 하나님께서는 긴 사순절을 지나 성대한 부활절로 너를 인도하시며, 그분의 거룩한 몸과 피의 성찬으로 너에게 생명을 불어넣으셨는데, 어찌하여 너, 저주받은 자여, 감히 주님께 거역하는 일을 감히 행하느냐? 어찌하여 스스로를 제멋대로 방종하여 부적절한 일들로 되돌아가게 하느냐? 하나님께서 네게 분별력을 주지 않으셨느냐? 그분께서 너를 이성 있는 존재로 창조하지 않으셨느냐? 너에게는 마음의 눈이 없는가? 도대체 왜 벙어리처럼 침묵하고 있는가? 왜 주님의 헤아릴 수 없는 아름다움을 우편에서 바라보지 않고, 네 영혼을 그분께로 향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들, 죄의 수치, 더러운 정욕의 불결함으로 시선을 돌리는가? 그러니 정신을 차리고, 영원한 행복으로 이끄는 일에 마음을 쏟으며, 우리의 의지와 노력을 그쪽으로 향하게 하자.

11. 내가 끊임없이 여러분에게 말씀을 전하는 것은 여러분의 귀를 즐겁게 하려는 것도, 단지 전도의 의무를 다하려는 것도, 칭찬의 소리를 듣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오직 나의 간곡한 권면으로 인해 두려움에 사로잡혀, 여러분의 구원을 위해 애타게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며, 씻을 수 없고 뇌물을 받지 않는 심판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고, 끝없는 보응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거기서는 불이 꺼지지 않고 구더기가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막 9:44).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외치며, 마치 여러분의 신음 소리에 몸을 엎드리는 듯이 간청합니다. 마지막 시간이 우리를 준비되지 않은 채로 덮치게 하지 말고, 우리 생명의 끝이 태만함으로 끝나지 않도록 합시다. 우리는 끊임없이 죽음의 신비를 목격하며, 여러분이 보시는 바와 같이 우리 형제들이 우리 눈앞에서 떠나가고 있습니다. 이를 보며 마음속으로 스스로에게 말하십시오. “우리는 어떨까? 우리에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우리가 아직 남아 있을 것인가? 그리고 남아 있다 해도 얼마나 오래 살 것인가? 무덤이 우리도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우리의 관, 즉 벌레와 견딜 수 없는 악취로 가득 찬 우리의 마지막 침상과 안식처가 보이지 않는가?” “누가 죽음을 보지 않고 살 수 있겠는가?”(시 88,49)라고 했기 때문이다.

 

64. 우리는 높은 소명을 받았으니, 기뻐하고 감사하며, 그 소명을 위해 온갖 수고를 감수하고 모든 것을 견디며 행동합시다.

64. 1) 우리는 높은 소명을 받았습니다. 기뻐하고, 감사하며, 그 소명을 위해 모든 수고를 감당하고 모든 것을 견디며 행동합시다. – 2) 결핍이 많을지라도, 우리 앞에는 영생과 천국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결핍들을 사랑하고, 용기를 내어 견뎌 냅시다. – 3) 성스러운 지도자 성부들의 모범을 보라. – 4) 순종으로 명성을 떨친 이들의 모범을 보라. – 5) 그리고 그들에게 본받아, 그들과 같은 몫을 얻도록 하라. [1, 72]

12. 우리는 하느님께 부르심을 받고 이러한 거룩한 삶을 살도록 선택받았다는 사실에 기뻐해야 하며, 미래의 기쁨을 기대하며 수도 생활의 수고를 잊고, 덕행의 길에서 마주치는 모든 고난을 가볍게 여길 만큼 기뻐해야 한다. 우리는 군대 계급도, 시민의 지위도, 군 지휘관의 위엄도, 많은 이들이 그토록 갈망하는 왕의 통치권도 얻지 못했고 가지고 있지도 않지만, 이 모든 것보다 훨씬 더 크고 높은 천상의 거처를 얻었으니, 이는 말뿐이 아니라 실제 행실로 드러나는 참된 것이다. 우리가 그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 그와 함께 왕이 될 것”이라고 사도가 말하듯이(롬 8:14; 딤후 2:12). 이처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이 특권을,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은혜로 받았으니, 우리가 이를 보존하고 우리를 대적하는 지옥의 통치자가 퍼뜨리는 온갖 중상모략으로부터 훔쳐가지 못하게 지키기 위해, 얼마나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감사하고 기도하며, 모든 일과 말을 해야 하겠는가?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를 이행하는 일에서 모든 고난이 기쁘고 모든 수고가 달콤하며 바람직하게 여겨지도록 합시다. 이를 위해 우리가 겪는 모든 금욕적인 결핍을 즐거움으로 받아들이고, – 세상으로부터의 멀어짐을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으로, – 쾌락으로부터의 단절을 하늘의 은혜를 누리는 것으로, – 절제의 고통을 풍성한 양식으로 여기게 하소서.

13. 우리가 물을 마시고 마른 빵으로 배를 채우며, 손으로 일하며 지치고, 생각에 지쳐 쓰러지고, 육체의 유혹에 시달리며, 욕망에 찢기고, 결핍으로 죽임을 당하며, 친구도 동료도 없이, 친족도 없이, 아버지와 어머니 없이 이 생을 살아간다 해도, 그게 무슨 상관이랴? 우리 앞에는 영생이 기다리고 있으며, 천국이 준비되어 있고, 수많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축복들, 온전한 행복을 누리는 불멸, 영광과 명예의 풍요, 그리고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다른 위대한 축복들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 우리는 기운을 내고 힘차게 나아가자. 자기 희생의 위업과 선행을 위한 수고를 사랑하여, 눈으로 보지 못했고, 귀로 듣지 못했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르지 않았던 면류관과 보화를 얻자(고린도전서 2:9).

14. 우리는 옛 선조들의 삶을 본받아, 그들의 덕행의 발자취를 따르고, 그들의 행실을 사랑하며, 그들 삶의 모습을 우리 안에 구현해야 합니다. 바로 우리의 위대한 지도자 안토니우스 대성인이 그러하십니다. 그는 우리의 대적자를 최초로 물리치고, 우리에게 수행의 승리로 가는 길을 열어주신 분입니다. 그와 같은 분이 바로 복되고 천사와 같은 아르세니오스 성인으로, 수행의 덕을 지극히 높이 이룩하고 우리의 영광을 위해 앞서 가신 분입니다. 그와 같은 분이 바로 거룩하고 신성한 파코미오스 성인으로, 우리의 조상이라 불리는 분입니다. 바로 덕행으로 빛나시며, 매일 아침 번쩍이는 번개와 같이 찬란하게 빛나신 지극히 신성한 일라리온이십니다. 바로 축복받은 전성(全聖) 유프티미오스, 그 이름 그대로 축복받은 분이며, 그와 함께 존경받는 사바 성자, 지극히 거룩하고 천사와 동등하신 테오도시오스, 그리고 우주를 밝히는 그 밖의 빛나는 별들입니다.

15. 그러나 이제 말씀으로, 가장 완벽한 순종의 모범을 보인 이들에게로 넘어가자. 앞서 언급된 분들도 순종의 은총으로 미리 준비되어 영광을 얻었기 때문이다. 빛의 아들, 하느님께서 주신 우리 아버지 도시페이(Dosifey)께서 우리에게 주저함 없는 순종을 권면하시며; 하느님께서 계몽하신 우리 아버지 도메티안(Dometian)[86] 께서 지도자이신 아버지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굳건히 하시고;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우리 아버지 아바키르(Avvakir)[87] 께서 모욕과 불공정한 대우를 참아내는 데 우리를 확고히 하시며; 자카리아[88] , 우리의 지극히 경건한 아버지는 우리를 겸손한 지혜로 이끄시며; 실반[89] , 우리의 눈물 많고 겸손한 아버지는 우리를 선한 변화로 변화시키시며; 이오나[90] , 근면하고 주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본보기가 되신 분은 우리를 수공예에 대한 열정으로 북돋우십니다. 경쟁심 없이 복된 페트로니우스[91] 의 신에 대한 사랑, 신성한 아프레[92] 의 순종, 성 마르코[93] 의 겸손, 바울[94] 의 단순함, 그리고 그와 같은 모든 겸손한 미덕을 어떻게 기억할 수 있겠습니까?

16. 그러나 그들을 모두 열거하기에는 한 시간도 모자랄 것입니다. 이 정도만으로도 우리가 그들과 경쟁하고 그들의 행실을 본받도록 자극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니 우리도 그들이 행했던 대로 행하고, 마치 그들과 나란히 일하며 그들의 도움을 받는 것처럼 수고합시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들과 같이 경건하고 의로운 행실로 풍성해질 것이며, 그 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천국에서 그들의 영광과 면류관에 동참할 자격을 얻게 될 것입니다.

 

65. 천국을 위해 선지자들과 사도들, 그리고 다른 성인들이 겪은 고난을 생각하며, 그들에게 본받아 열심을 내자

65. 1) 선지자들과 사도들, 그리고 다른 성인들이 천국을 위해 겪은 고난을 생각하며, 그들에게 본받자. – 2) 육신의 사랑을 위해 다른 이들이 감내하지 못하는 것이 무엇이랴? 우리로서는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감내하지 못하겠는가? [1, 73]

17. 천국을 얻는 일이 그리 큰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 나라를 위해 모든 성도들은 “양가죽과 염소 가죽을 입고, 궁핍과 고통과 모욕을 겪으며,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의 깊은 구덩이에서 방황하였으니, 온 세상이 그들을 감당할 자격이 없었다”(히브리서 11, 37. 38): 이사야는 톱으로 잘렸고, 예레미야는 진흙 구덩이에 던져졌으며, 요나는 바다에 빠졌다가 고래에게 삼켜졌고, 다니엘은 사자들에게 먹이로 던져졌으며, 세 소년은 불타는 용광로에 던져졌고,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는 칼에 맞아 죽었으며, 세례 요한 자신도 역시 칼로 참수당했다. 그리고 신성한 바울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시간이 모자랄 지경인데, 그는 자신에 대해 굶주림과 목마름, 추위와 벌거벗음, 수고와 고난(고린도후서 11, 27) 그리고 그 밖의 셀 수 없이 많은 고난을 겪었다고 말씀하신 신성한 바울에 대해, 돌에 맞아 죽은 성 스테파노에 대해, 성전 앞에서 살해된 하나님의 형제 야고보에 대해 이야기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할 것입니다. 다른 사도들의 수난과 성 순교자들의 고통, 경건한 성부들의 위업을 어떻게 일일이 열거할 수 있겠습니까? 그 수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끝없는 영원토록 약속된 말로 다할 수 없는 복을 누리게 된 방식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겸손한 마음으로 그들과 같이 힘써 싸웁시다. 신성한 대 바실리오의 말씀에 따르면, 그들에게 주어진 영예와 수고, 그리고 면류관은 승리자들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투사가 되어, 언제나 경쟁할 준비가 된 자처럼 마음을 드러내고, 대적과 맞서 싸우며; 어려움 앞에서 물러서지 말고, 타격에 굴복하지도 않으며, 뒤로 물러서지도 맙시다. 열심이 불처럼 우리 속 깊은 곳에서 타오르게 하소서. 그리하면 아무것도 우리 눈앞에서 견디지 못하고, 심지어 악마들조차 도망칠 것입니다. 기록된 바와 같이, 그들은 이 영적인 불의 얼굴 앞에서 밀랍처럼 녹아내리기 때문입니다(시 67:3); 사람들도 두려워하거나, 적어도 부끄러워할 것이며; 우리는 모든 것을 이겨내고, 우리의 생명과 형언할 수 없는 안식이 있는 그곳으로 올라갈 것이다.

18. 우리는 종종 어떤 이가 육신의 사랑에 사로잡혀, 모든 것을 견디고 온갖 수고를 감수하면서도, 오직 악하게 갈망하는 그 대상과 가까워지는 것만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는 음식으로도 배부르지 않고, 음료로도 만족하지 않으며, 잠으로도 평안을 얻지 못하고, 그 밖의 어떤 즐겁고 위로가 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불쌍한 자는 다른 모든 수고와 결핍, 심지어 피를 흘리는 일까지 기꺼이 감수하려 한다. 과연 무엇을 얻으려 하고 무엇을 보물로 삼으려는 것인가? – 끝없는 불의 지옥에서 자신의 영혼을 파멸시키기 위함이다. 선하고, 아름답고, 형언할 수 없으며, 천상보다 뛰어난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따뜻한 사랑을 위해, 우리의 하나님께, 이 복되고 거룩한 순종의 멍에 아래서 노년에 이르기까지 순종하며 머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온갖 슬픔과 온갖 화살—생각이든, 정욕이든, 모욕이든, 공격이든, 유혹이든, 결핍이든, 비방이든, 경멸이든, 굴욕이든, 비방이든, 혹은 그 밖의 어떤 것이든—을 견디면서 말이다. – 우리 이성 있는 존재들은 무지한 짐승들에게 휩쓸리거나 그들과 같아져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시작하여 지금까지 성공적으로 나아가 어느 정도 성과를 이룬 것처럼, 앞으로도 기운을 내어 주님 안에서 우리의 여정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도록 힘쓰겠습니다.

 

66.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내게 맡기셨으니, 내가 왜 여러분을 가르치는 데 열심을 내겠습니까?

66. 1)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내게 맡기셨으니, 내가 왜 여러분을 가르치는 데 열심을 내겠습니까? – 2) 간청합니다. 여러분 스스로를 구원하고, 스스로를 구원함으로써 나를 구원해 주십시오. [1, 74]

19. 죄인인 나에게, 내 양 떼요, 내 몫이요, 내 유산인 여러분을 잘 돌보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왜냐하면, 만일 세속의 왕이 통치나 군 지휘권을 맡긴 사람이, 왕의 뜻에 어긋나는 일을 저지르면 벌금이나 처벌을 받게 될까 봐 매일같이 온 마음을 다해 이를 염려한다면, 하물며 나, 이 비천한 자가, 참으로 그리스도의 군대인 여러분을 다스리는 직분을 맡았는데, 1년이나 1개월은 말할 것도 없고, 하루나 한 시간이라도 방심에 빠져, 비록 말과 행동이 모두 부족하더라도 여러분을 향한 온전한 보살핌을 보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에 저는 비록 합당하지 못하고 미약하긴 하지만, 여러분—제 마음이자, 제 빛이며, 제 자랑이신 여러분—이 여러분의 직분에 합당하게 행하도록 상기시키고, 선포하고, 권면하고, 강조하며, 간청합니다.

20. 여러분 모두의 구원과 그에 대한 위대한 상급을 생각할 때 얼마나 큰 기쁨을 느끼는지, 그만큼이나 큰 두려움과 떨림에 사로잡히며, 여러분 각자에 대해 내가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를 떠올립니다. 그러니 내 자녀들아, 나를 도와주십시오. 지도자의 연약함과 눈먼 점을 돌보지 말고, 여러분 스스로 구원받아 이 불쌍한 나까지 함께 구원해 주십시오. 여러분에게 명령된 모든 것과 여러분에게 주어진 책임을 정확히 이행하고자 열심을 내며 구원받으십시오. 분별하지 않는 순종을 지키고, 하느님을 본받는 겸손, 굳건한 믿음, 깨달음을 주는 계시, 일에 대한 꾸준한 성실, 시편 찬송에 대한 경건한 집중, 부담스럽지 않은 절제, 소박한 차림새, 건방짐을 버림, 웃음과 다툼을 멀리함, 허영을 싫어함, 그리고 서로에 대한 사랑을 지켜라.

 

67. 여러분을 사랑하기에, 여러분이 잘될 때는 기뻐하고, 어떤 마음가짐을 보일 때는 슬퍼합니다

67. 1) 여러분을 사랑하므로, 여러분이 번창할 때는 기뻐하고, 어떤 마음가짐을 보이는지 볼 때는 슬퍼합니다. – 2) 여러분은 위대한 칭호를 얻었으며, 이를 위해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각자는 이 말을 들어야 합니다. ‘기쁨에 들어가라.’ – 3) 여러분처럼 되고 싶어 하면서도 그럴 수 없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러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르게 행하십시오. [1, 75]

21. 언젠가는 나는 완전한 침묵 속에 잠들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내 콧구멍에 숨결이 남아 있는 한, 나의 의무에 따라 여러분에게 마땅히 지켜야 할 것을 상기시키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이며, 동시에 여러분을 향한 따뜻한 사랑을 담아 말하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과 은혜로 나의 자녀들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경건함과 품위, 그리고 구원에 이르는 삶을 볼 때면, 얼마나 큰 기쁨이 나를 감싸는지 모릅니다. 그때 나는 선한 희망에 날개를 달고 마치 어떤 왕처럼 하나님을 찬양하며 걷게 되며, 그 순간에는 그 어떤 것도 나를 기쁘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불화가 있는 것을 볼 때면, 마치 산이 내 영혼을 짓누르는 듯하고, 나는 죽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인 채 슬퍼하며, 여러분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것을 자책하며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나사렛 사람에 대해 예전에 말했던 것처럼, 이런 지도자에게서 무슨 선한 일이 나올 수 있겠는가?’ 그러니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나의 자녀들아. 그리하여 내가 항상 너희와 너희의 번영, 그리고 너희에게 주어진 복된 몫을 위해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22. 너희는 참으로 거룩한 소명에 들어섰고, 경건한 삶을 입었으며, 천사의 계급에 속하게 되었으니, 바로 그 신성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따랐기 때문이다. “네가 온전하고자 하면, 가서 네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고 나를 따르라(마태복음 19, 21). 그리하여 여러분은 세상에 대해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이미 “세상에서 벗어났다.” 만일 여러분이 세상에 속해 있었다면, 세상도 여러분을 “사랑했을것이지만, 여러분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으므로, 주님의 말씀대로(요한복음 15, 19) “이 때문에” 세상이 여러분을 “미워할”지도 모릅니다. 그 날에 여러분은 거룩한 사도들과 함께 주님께 이렇게 말하며 자랑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나이다”(마태복음 19:27); 더 나아가 주님을 위해 아버지도, 어머니도, 형제도, 자매도 사랑하지 않았으며, “모든 것을 헛된 것으로 여겼나이다” (빌 3:8), 오직 주님 한 분만을 얻는 것을 가장 큰 부로 여겼습니다. –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까? 내가 옳지 않은 말을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실제로 그렇게 행하지 않았습니까? – 그러므로 여러분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내 아버지의 복을 받은 자들아, 창세부터 너희를 위해 준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마태복음 25, 34); 또는 “잘했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라. 네 주인의 기쁨에 들어가라” (마태복음 25, 21), 혹은 이와 유사한 말씀들입니다.

23. 이처럼 위대한 은혜를 누리고, 이토록 경이롭고 천상의 삶을 살게 되었으니, 기뻐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환호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다윗과 함께 “주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 대해 내가 주님께 무엇을 갚으리이까?”(시 115,3)라고 노래하지 않으시겠습니까? – 그렇습니다. 하지만 다음 구절도 덧붙이십시오. “구원의 잔을 받겠나이다”(같은 시편); 이는 필요할 때 순교자의 피를 흘릴 준비가 되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 진실로, 진실로, 여러분이 보는 것을 보고, 여러분이 듣는 것을 듣고, 여러분이 얻은 것을 얻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러나 아내와의 결합을 위해서든, 자녀를 위해서든, 육신적인 우정을 위해서든, 세상의 명예를 위해서든, 부를 위해서든, 세속적인 관습을 위해서든, 혹은 그 밖의 여러 가지 확립된 외적인 삶의 질서를 위해서든, 세속적인 것에서 벗어나 하늘의 것을 향해 나아갈 힘을 갖지 못하고, – 겉으로는 겉으로 보기에는 마치 행복한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수많은 슬픔에 짓눌려 있다. 그러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선한 것에 선한 것을,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에 기쁨이 되는 것을 더하는 데 항상 힘쓰자. 그리하여 이러한 방식으로 번영하고 온전해짐으로써, 우리는 상호 평화와 화합 속에서, 사소한 말 한 마디, 가벼운 몸짓, 눈빛, 걸음걸이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선한 질서를 유지하며, 죽음의 문을 통해 하늘에 있는 우리의 복된 유산으로 들어가는 복된 결말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기를 바랍니다.

 

68. 헛된 일들 속의 평화는 하찮으나, 우리의 목표는 높고, 수고는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

68. 1) 헛된 허영 속의 평화; 그러나 우리의 목표는 높고, 수고는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 – 2) 누가 우리에게 세속을 버릴 힘을 주었는가? 우리의 소망을 축복해 주신 하나님이다. 그러니 우리가 선택한 길에 충실하자. [1, 77]

24. 우리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이 거룩한 소명으로 우리를 택하시고, 수도 생활의 경이롭고 복된 높이로 부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우리에게는 – 비록 감히 이렇게 말하는 것이지만, 수도 생활의 목적과 어긋나지는 않는다 – 진실로 세속에 사는 사람들보다 천국 왕국의 신비를 더 깊이 깨달을 수 있는 은총이 주어졌다. 그들 중 많은 이는 눈으로 보면서도 보지 못하며, 마음을 가리는 세속적인 일들에 사로잡혀 눈이 멀어 있다. 과연 그들에게는 무엇이 있는가? 그들은 부와 덧없는 명성을 좇으며, 쾌락과 즐거움에 기뻐하고, 향료와 향기로운 향에 취하며, 술자리, 부드러운 옷, 아름다운 말, 수많은 노예, 호화로운 집, 보석의 광채, 그리고 그 밖의 온갖 헛된 것들에 빠져 있으며, 염소와 염소 암컷처럼 웃고 춤추고 뛰어다니며, 도살당할 양처럼 배불리 먹고 살이 쪄 간다. 그들의 수많은 다른 죄악적인 관습들과, 그로 인해 생겨나는 것들과 그것이 초래하는 결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으니, 우리 말은 여기까지 하리라. 그들에게는 이것이 자랑거리이자 자부심이며 위안이 되지만, 정욕과 욕망으로 자신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우리도 사도(갈 5:24)의 말씀대로 “그리스도의 것”이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자 자녀이다. 우리에게는 다른 소망이 있고, 다른 것들에 대한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원래 에덴 동산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위로와 달콤함을 찾고 있는데, 이는 옛날 무분별함으로 인해 우리에게서 빼앗긴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양털과 염소 가죽을 입고 다녔으며, 온 세상이 감당할 수 없었던” (히브리서 11, 37), 유혹이 가득한 세상에서 멀어지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그곳으로 향하여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그러나 모든 것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모든 것 위에 군림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소명의 위대함입니다!

25. 과연 누가 우리를 육신과 피, 부모와 친척, 지인들, 고향과 도시와 마을, 그리고 어린 시절부터 친숙해졌던 모든 것에서 떼어 놓았는가? 누가 우리를 영적 아버지들과 수도원장들에게 자신을 종으로 바치게 하고, 절제와 기도, 맨땅 위에서 잠드는 등 매일 수행해야 하는 고행의 길로 들어서게 했는가? 누가 우리를 깨우쳐 주어 금과 은, 호화로움과 화려함, 심지어 왕의 왕관과 자줏빛 비단조차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게 하고, 반짝이는 망토보다 이 누더기 같고 수선 자국이 많은 옷을 입는 것을 더 가치 있고 더 고결한 일로 여기게 했는가? 누가 우리에게 모든 감각적이고 육체적인 것에서 벗어나, 순결을 통해 하늘의 존재들과 조화를 이루기 시작하고, 천사들처럼 순결하고 타락하지 않은 상태로 머물 수 있는 힘을 주었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오직 그분만을 사랑하고, 장래의 복과 영원한 영광, 형언할 수 없는 기쁨, 끊이지 않는 즐거움, 고갈되지 않는 부, 그리고 태초부터 우리 복된 조상들에게 약속되고, 오직 하나님 한 분을 기쁘시게 하기를 열망하는 모든 이를 위해 예비된 모든 것을 갈망했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를 결심하고, 선택하며, 이에 전념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어떤 식으로든 뒤로 물러서지 않고 정해진 날에 평신도들보다 뒤처지지 않도록 스스로를 엄격히 경계하며, 온 힘을 다해 이 길을 굳건히 지키도록 합시다. 우리가 깨끗함을 지키고, 처녀성을 더욱 굳건히 다지며, 마음이나 눈이나 마음이나 몸으로 타락하지 않도록 주의합시다.

 

69. 마주치게 되는 모든 불쾌한 일을 참아야 하며, 순교자들의 무리에 합류할 자격을 갖추도록 합시다.

69. 1) 마주치게 되는 모든 불쾌한 일을 참아야 하며, 순교자들의 무리에 합류할 자격을 갖추도록 합시다. – 2) 구세주와 같이 땅에서 겸손한 처지에 만족하며,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1, 78]

26. 나는 여러분의 영혼을 위해 깨어 있어야 하며, 밤낮으로 여러분을 돌보며, 말과 행실로 여러분을 훈계하여 여러분을 마땅한 완전함의 경지에 이르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게을리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여러분의 스승이라 불리기에도 부끄러운 제가 여러분을 위해 어떤 고난이라도 견디고 있다면, 여러분도 저를 위해, 그리고 서로를 위해 참아내야 하며, 함께 고통을 나누고 서로를 도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닥친 고난 앞에서 이를 낯선 것으로 여기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도망치지도, 낙담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아직 피를 흘릴 정도로 죄와 맞서 싸우지 못했고”(히브리서 12:4), “아직 불과 물을 통과하지 못했으며”(시편 65:12), 성스러운 순교자들처럼, 또한 각 경건하고 의로운 이들처럼 상처 입거나 시련을 겪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마주치는 사소한 곤란들조차도 용감하고 기꺼이 견디지 못한다면, 장차 오는 세상에서 우리도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겪었다고 어떻게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책망, 수치, 모욕, 폄하, 경멸, – 여기에 더 덧붙이자면 – 굶주림, 물 부족, 누더기 옷, 순종의 수고, 예배를 위해 일찍 일어나는 것, 시편 찬송을 위해 서 있는 것, 부과된 참회를 이행하는 것. – 자, 나의 자녀들아, 우리가 모든 어렵고 불쾌한 일을 기꺼이 견뎌내어, 다윗과 함께 진실로 노래할 수 있도록 합시다: “주님을 인내하며 기다렸나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자비로 “그가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내 간구를 들어주셨나이다” (시 39:2)라고 할 자격을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미래의 세상에서는 다른 이들이 각기 다른 열매를 바칠 것입니다. 삼중 복을 받은 순교자들은 피를, 경건한 성부들은 그들의 가장 위대한 업적과 덕행을, 그리고 우리는 앞서 말한 것을 겸손히 견뎌낸 것을 바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우리가 그 몫에서 제외되지 않을 것임을 확실히 압니다. 신성한 안토니우스가 이를 증언하듯이 말입니다.

27.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찾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시 68:33). “그분의 얼굴을 찾으라,” 그리하여 그것이 너희의 깨끗한 마음에 비치도록 하라(시 104:4). “그가 행하신 기적들을 기억하라”(시 104:5), 지난 세월 동안 우리 안에서 행하셨고 지금도 행하시며, 우리의 형제애를 더하고, 양육하시며, 현세 생활에 필요한 것을 하나도 부족함 없이 채워 주시는 그 기적들을 말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위해 행하시는 모든 일에 대해, 그분께 마땅한 찬양을 드립시다. 그분은 우리에게 다른 무엇을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을 경외하고 온 마음과 온 생각으로 그분을 사랑하며, 힘닿는 대로 그분의 성육신하신 삶을 본받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늘에서 내려오신 그분은 땅에서 나그네로 사셨으니, 우리도 자신의 욕망에서 생각을 멀리하기 위함입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말씀을 순종하셨으니, 여러분도 불평 없이 저 같은 부적합한 자의 말을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은 심지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낮추셨으니, 여러분도 생각과 말과 행동과 움직임에서 스스로를 낮추고 겸손히 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하나님을 위하여 사람들 가운데서 명예를 잃는 것 외에, 참되고 신성한 영광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위하여 모욕을 당하고 불명예스러운 자들과 한 부류로 여겨지는 것 외에, 수도사의 명예와 선한 이름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의 구세주이시며 하나님이신 분도 육신을 입으시고, 사람들 가운데서 영광스럽고 부유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겸손하고 비천한 것을 택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마구간에서 태어나시고, 구유에 누우시며, 목수의 아들로 불리시고, 나사렛 사람이라 칭해지시며, 소박한 겉옷을 두른 히톤을 입으시고, 걸어서 다니시며, 수고를 겪으시고, 유대인들에게 돌로 쳐 죽이겠다는 위협을 받으시며, 모욕을 당하시고, 붙잡히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창으로 찔리시고, 관에 안치되셨다가 – 그 후 부활하셨으니 – 이는 우리로 하여금 그분과 같이 그분의 천사들 앞에서 모든 것을 견디게 하시고, 그 후 천국에서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70.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나요? 자신의 뜻을 버리고 수도원장님의 유일한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에서도, 심지어 선한 일이라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과 차별을 두려고 감히 나서지 마십시오.

70.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무엇을 요구하십니까? 자신의 뜻을 버리고 수도원장님의 유일한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에서도, 심지어 선한 일이라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과 차별을 두려고 감히 시도하지 마십시오. [1, 79] 내가 무엇을 구하는가, 혹은 더 나아가 만물의 주님이시며 우리 하나님이신 분께서 여러분에게 무엇을 구하시고 무엇을 요구하시는가? 다른 것은 아무것도 아니며, 오직 여러분이 잘 순종하고, 피를 흘릴 지경에 이르더라도 주저 없이 복종하며, 성스러운 천사들 앞에서 약속하고 결심한 대로 살고 행동하는 데 결코 벗어나지 않는 것뿐이다. 여러분 스스로도 잘 아시다시피, 제가 여러분 각자를 수계시키고 기쁨과 환희의 옷을 입혀 드리며, 미해결로 남아 있던 여러분의 과오들을 용서해 드렸을 때, 여러분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왔고 어떤 서원을 했는지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저는 이곳, 이 땅에서 제가 겸손하게 용서해 드림으로써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도 그 과오들을 용서해 주실 것이라는 의심할 여지 없는 희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여러분에게서 무의미한 생각과 무모한 판단, 헛된 말,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의 아버지이자 여러분의 아버지이신 분을 통해, 여러분의 선배들의 동의 하에 명하고 정해진 것 이외의 부적절한 소망들이 생겨나는 것입니까? – 어떤 이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금식하기를 원하고, 다른 이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침묵하기를 원하며, 이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배우기를 원하고, 저 사람은 자기가 탐내는 직분을 맡기를 원합니다. 그러니 이 계획들은 제멋대로이고, 이 시도들은 제각각이며, 이것이 바로 전반적인 타락의 원인이 됩니까? 이 때문에 여러분이 함께 모인 것입니까? – “그리스도를 나누어 먹었습니까? 아니면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까?” (고린도전서 1:13). – 이 말씀은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에 휩쓸려, 제가 사안을 철저히 검토한 끝에 드러낸 그 유일한 진리에 눈길도 주지 않고 신경도 쓰지 않는 이들에게 아주 잘 들어맞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서 위대하거나 놀라운 것을 찾으시거나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한 가지, 곧 그분께서 여러분을 부르신 공동체 생활을 지키시기를 – 제 부적합함과 많은 죄로 인해 감히 말하긴 어렵지만 – 그리고 그분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목자의 뜻과 인도에 따라, 그분의 경배받는 이름을 영화롭게 하며 살아가고 행동하시기를 원하실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의 특별한 위대함과 경이로움, 아니, 차라리 여러분의 고결한 영혼이 보여주는 순교적 위업을 드러낼 수 있는 무대입니다! 유혹에 빠진다면, 그게 무엇이 경이롭겠습니까? 그러나 결코 그것이 마귀를 기쁘게 하기 위해 여러분을 지배하게 두지 말고, 여러분과 하나님의 이 원수의 교활하고 악한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오직 끝까지 모든 것을 인내하며, 겸손으로 풍성해지고 사랑 안에서 번영하며, 허세를 부리지 말고, 눈살을 찌푸리지 말고, 우월감을 드러내지 말고, 엄격하지 말고, 듣는 자들을 파멸로 이끄는 다툼과 말다툼을 일으키지 말라. “그러므로 진리로 허리를 동이고, 의의 갑옷을 입고, 평안의 복음을 전할 준비를 하여 발에 신을 신으라” (엡 6:14, 15). – 주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도우시고 구원하시기를 기원합니다!

 

71. 죄의 원인은 교만과 불순종이며, 이로부터 온갖 고통이 비롯됩니다. 반대로 겸손과 순종으로부터는

71. 1) 죄의 원인은 교만과 불순종이며, 그것들로부터 온갖 고통이 비롯됩니다. 반대로 겸손과 순종으로부터는 온갖 선함이 나옵니다. – 2) 귀족과 부유한 자들 중에서 우리에게 온 여러분은 교만해지지 말고, 오히려 겸손해지며, 우리를 위해 스스로를 낮추신 주님을 본받으십시오. – 3)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본받는 삶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칩니다. [1, 80]

1. 우리는 영혼이 병들지 않도록 조심하며, 이러한 병을 일으키는 원인을 멀리하고, 그로 인해 따르는 악을 피해야 한다. 영적 병의 첫 번째 원인은 교만이며, 그로 인해 새벽을 밝히던 여명별이 떨어졌습니다. 두 번째는 불순종이며, 그로 인해 원조 아담이 달콤한 낙원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에서 온갖 종류와 형태의 혐오스러운 죄의 어둠이 비롯되었습니다. 누구든지 그 때문에 행복을 누리고자 하는가? 교만을 멀리하고, 분별 없이 순종하는 겸손을 입으라. 그러면 기쁨과 즐거움이 네 머리에 머물 것이다. 이 선한 옷이 얼마나 많은 복을 끌어당길까? – 평화, 온유, 공경, 신뢰, 거역하지 않는 유순함 – 그리고 참된 하나님의 사람이 지닌 모든 선하고, 기쁘고, 갈망하는 것들.

2. 교만한 삶에서 우리에게 온 여러분은, 하나님 안에서 겸손한 삶을 살게 되었으니 스스로를 높이 여기지 말고, 귀한 가문에서 우리에게로 왔다고 자랑하지도 말고, 예전에 이러저러한 것을 가졌다고 자만하지도 마십시오. 왜냐하면 여러분은 어쩌면 신성한 은혜가 부족하고 빈약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시며 모든 것의 주인이신, 참으로 풍요로우신 하나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분의 행하심을 본받아(롬 12:16) 생각과 감정에서 겸손하게 행하십시오: 그분은 겉보기에는 가난하셨고, 부모님께 순종하셨으며, 걸어서 다니셨고, 자주 피곤해하셨으며, “징계를 받으실 때 저항하지 않으시고, 고난을 당하실 때 불평하지 않으셨으며” (베드로전서 2:23), 뺨을 맞으셨으며, 옷차림으로 남들과 구별되지 않으시고, 히톤 한 벌과 겉옷 하나로 만족하셨으며, 풀밭이나 맨땅에서 주무셨고, 빵 한 조각과 흐르는 물로 식사를 해결하셨습니다. 만약 지금 우리, 이 모든 것을 훨씬 더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지치고 기진맥진한다면, 우리가 도대체 주님을 본받는 자들이란 말입니까?

3. 내가 간청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본받는 삶을 용기 있게 추구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세상 기준으로) 천하고 부유하지 않은 처지에 있는 우리들이, 음식이나 옷, 혹은 다른 필요 사항들로 인해 괴로워하고 슬퍼한다면, 이 모든 것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충족되고 있는데, 과연 어떤 변명이 있을 수 있겠는가? – 그러한 처지에 있는 각자는 자신이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고, 지금은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 되새겨 보라. – 그런데 이 말을 하면서도, 나는 첫 번째 부류나 두 번째 부류를 구분하거나 차별하고 싶지 않다. 너희 모두는 본질적으로 하나이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이 말을 하는 이유는, 모두가 명령받은 바를 기꺼이 이행하고, 내 지시 사항이 어떻게, 무엇 때문에, 어떤 목적으로 내려지는지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72. 참회와 그 밖의 교정 조치들은 얼마나 구원에 도움이 되는가? 그것들은 천국으로 가는 길이다

72. 1) 참회와 그 밖의 교정 조치들은 어떻게 구원을 주는가? 그것들은 천국으로 가는 길이다. – 2) 사실 우리 공동 생활 속의 순종적인 삶이야말로 무엇보다도 구원을 주는 것이다. [1, 81]

4. 여기서 잠시 슬퍼하고 저기서 기뻐하며, 여기서 징계를 받고 저기서 즐거움을 누리며, 여기서 비좁게 살다가 저기서 널찍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더 낫겠는가?! 우리는 기꺼이 징계를 받아들이고 우리를 바로잡아 주는 이들을 사랑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날 때, 그로 인해 초래된 악으로부터 구원의 치료법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바로 이러한 이유로, 제 생각에 거룩하고 자비로운 우리 선조들은 신성한 연민에 이끌려 제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때로는 이런, 때로는 저런 엄격한 조치를 취하셨습니다. 참회, 파문, 심지어 육체적 징계까지 내리셨는데, 그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그 고통을 겪은 자들뿐만 아니라, 이를 목격한 자들, 동시대인들과 후세까지 모두를 구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이들이 인간적인 두려움 때문에라도 더 나은 길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여러분이 나의 무거운 짐을 견뎌낸다면,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이 천국에서 구원받을 것임을 장담하노니, 그곳에서는 질병과 슬픔, 한숨이 사라질 것이며; 복종의 멍에를 지신다면, 죄악된 정욕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로 나아가게 될 것이며, – 정욕의 불길을 꺼버리고 영원한 생명나무에서 시원하고 생명을 주는 물을 마실 자격을 얻게 될 것이며, – 순종의 길을 잘 완수하여 위대한 왕으로부터 승리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입니다.

5. 우리 공동생활은 이토록 위대하고 영광스럽다. 그 멍에는 무겁기도 하고 가볍기도 한데, 이는 그리스도의 멍에와 같으니, 그분의 말씀대로 그러하다. 이 사실은 그 행위 자체가 증언하며, 진리 그 자체가 이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누구도 기둥 위에 서 있는 자나 은둔자, 사막의 은수자를 칭찬하거나 참된 순종자로 칭해서는 안 된다. 내가 ‘진정한’이라고 말한 것은, 진정한 순종자는 오직 자신의 영혼을 원장에게 맡기고 피를 흘릴 지경에 이르더라도 그의 뜻 안에 머무르는 자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은혜를 얻었으니, 우리는 기뻐하고 환호해야 한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기 때문이다. – 따로 사는 자에 대해서는, 비록 그가 바르게 산다 할지라도 놀랄 것이 없다. 그러니 우리의 삶을 존중하고 죽을 때까지 진실한 순종을 지키자.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칭찬하든 비방하든 신경 쓰지 말자.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며 그들의 공격에 굴복하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의 높은 목표를 마음에 새기고 주님의 길로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가자.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의 행로를 인도해 주실 것이다.

 

73. 그 길은 힘들고 슬프나, 그 대가로 헤아릴 수 없는 위로가 기다리고 있으니, 인내합시다.

73. 1) 이 길은 힘들고 슬프지만, 그 대가로 헤아릴 수 없는 위로가 기다리고 있으니, 인내합시다. – 2) 모든 성부들이 그렇게 인내하셨고, 이제 그 일을 잊고 위로를 받고 계시니, 우리도 그들을 본받자. – 3) 가혹한 말씀을 들었는가? 참아내라. 주님께서도 자신을 최하위로 여기시며 참아내셨으니, 이것과 그 밖의 모든 슬픔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1, 82]

6. 투쟁 속에서, 순종의 고행 속에서, 그리고 순교적인 복종 속에서 굳건히 서십시오. 그리고 날마다 이 세상의 삶을 살아가며, 천국 왕국의 담보로서 여러분의 영혼을 미덕으로 풍요롭게 하고, 우리에게 약속된 형언할 수 없는 복을 보물로 간직하십시오. 하나님의 길은 좁고 고통스럽지만, 우리를 기다리는 안식은 넓고 광대합니다. 악마가 쏘아대는 불타는 화살들이 하나씩 우리 영혼의 집에 떨어지지만, 성령의 이슬이 그것들을 꺼뜨리며 우리에게 영생으로 흐르는 물을 이끌어 줍니다. 비좁음과 슬픔, 낙담과 소심함, 수고와 땀, 피로와 기진, 그리고 그와 함께 종종 따르는 책망과 질책. – 이것이 우리의 몫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 뒤에 우리에게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과 헤아릴 수 없는 즐거움이 보물로 간직되어 있습니다. – 그러니 오십시오. 이 몇 안 되는 우리의 투쟁의 날들을 용감하게 견뎌내고, 그 대가로 의의 면류관을 쓰게 됩시다.

7. 우리의 복되신 선조들은 금식, 철야 기도, 눈물, 기도, 그리고 온갖 고난 속에서 날들을 보내며 어떤 수고를 감내하셨는가? 이제 그들에게는 과거에 대한 슬픔이 더 이상 없다. 그들은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지극히 복된 안식을 누리고 있다. 우리도 때때로 우리에게 닥치는 슬픔을 현명하게 바라보며, 그것들을 하찮은 것으로, 혹은 꿈과 그림자처럼 덧없는 것으로 여기고, 그것들로 인해 낙담하지 않도록 하며, 오히려 그것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청년 같은 활력으로 주님의 계명을 이행합시다. 비난이 여러분을 슬프게 하지 않게 하고, 모욕이 부끄럽게 하지 않게 하며, 책망이 동요시키지 않게 하고, 근심이 무너뜨리지 않게 하며, 교만이 부풀게 하지 않게 하십시오. 그러나 눈을 아래로 내리고, 마음을 하늘로 향하며, 서로에게 선하고, 온유하며, 인내하고, 양보하십시오.

8. 누군가 거친 말을 했다고 치자. 그게 무슨 대수인가? 왜 그 모욕 때문에 괴로워하는가? 그리스도이시며 우리 하나님이신 분은 “네게 귀신이 들렸다”(요한복음 7:20)는 말을 들으시고도 침묵하셨으며, “벨제불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낸다”(마태복음 12:24)는 비난을 받으셨을 때도 당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본성상 하찮을 뿐만 아니라, 삶에서도 온갖 비난을 받을 만함에도 불구하고, 조금만 모욕적인 말이 들려도 고슴도치처럼 삐죽거립니다. 왜 우리는 겸손의 달콤함을 더 맛보지 않는 것입니까? 왜 선한 복종의 교훈을 배우지 않는 것입니까? 왜 이때 참된 수도사들의 무기를 들지 않는 것입니까? 이 무기란 – 아름다운 필체도, 달콤한 노래도, 흰 옷차림도, 키가 큰 것도, 화려한 차림새도, 나약함도, 세속적인 위엄 있는 태도도, 장황한 말솜씨도, 대담한 말과 반박도, 또는 이와 유사한 다른 어떤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스스로를 가장 하찮은 자로 여기고, 모든 이를 자신보다 더 높은 자로 존중하며, 특히 거친 말을 함부로 내뱉지 않고, 경솔하지 않고 신중하며, 이른바 ‘겸손함’을 좇고, 겸손하게 따르며, 화합하고, 사랑이 넘치며, 무엇보다도 시기하지 않는 것이니라. –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이미 모두 알고 계시며, 항상 하나님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그대로 머무르십시오. 모든 것에 만족하고, 언제나 진심으로 기뻐하며, 우리 소명의 유일한 소망에 힘입어 용기를 내십시오.

 

74. 왕이 저녁 식사에 부르시면, 모두가 서둘러 갑니다. 하늘의 왕께서 우리를 부르셨으니, 모든 것을 견디며 어떻게 서두르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낙담하지 말고, 모든 것과 용감하게 싸웁시다

74. 1) 왕이 저녁 식사에 부르시면, 모두 서둘러 갑니다. 하늘의 왕께서 우리를 부르셨으니, 모든 것을 견디며 어떻게 서두르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낙담하지 말고, 모든 것과 용기 있게 싸웁시다. – 2) 주님께서 이 땅에서 사시며 겪으신 모든 것을 기억하고, 만일 너도 비슷한 일을 겪게 된다면 기뻐하라. [1, 83]

9. 만일 사람들이 왕에게서 영광과 번영, 부와 위안, 쾌락을 누리라고 부름을 받아 이를 게으름 없이, 온 힘을 다해, 기쁨으로 추구한다면, 하물며 만물의 주님이시며 왕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앞서 언급된 썩어 없어질 하찮은 것들이 아니라, 하늘나라와, 꺼지지 않는 빛과, 끝없는 생명과, 형언할 수 없는 행복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과, 영원한 복의 상속권 으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가, 기쁨과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매일 매시간 이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지시에 따라 모든 장애물을 극복하며,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어떤 것 앞에서도 멈추지 말아야 하며, 슬픔과 궁핍 앞에서도, 굶주림과 갈증 앞에서도, 죽음의 위험과 칼 앞에서도 멈추지 말고, 용감하고 기백 넘치며 온 마음을 다해 수행자의 길을 걸어가며, 우리 앞에 놓인 지극히 복된 소망을 위해 모든 것을 가벼운 짐처럼 견뎌내야 합니다. 위업 앞에서 낙담하고 소심해지는 것은 영혼이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 일을 완수할 그 끝을 바라보며, 인내심을 가지고 너희가 처한 고된 처지를 견뎌내며 그 가운데서 다음과 같은 미덕을 드러내기를 간곡히 부탁한다: 자신의 욕망을 버리는 것, 순종적인 행동, 수많은 형제들 사이에서 겪는 슬픈 마찰을 묵묵히 견디는 것, 때로는 하급자들의 모욕과 상급자들의 질책을 참아내는 것—그리하여 사도들의 말씀이 여러분에게도 진실로 적용될 수 있도록 하십시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우리는 굶주리고, 목마르고, 헐벗으며,” 안식을 알지 못하고 지쳐 가지만, “그러나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위하여 승리합니다” (고린도전서 4:11; 로마서 8:34 참조).

10. “그러므로 주 안에서, 그분의 능력의 권세로 힘을 내십시오” (엡 6:10), 그리고 과거의 여러분의 위업과 유혹을 견뎌낸 경험에 현재와 미래의 것들도 더하십시오. 그리스도 구세주를 위해 기꺼이 이를 참아내고 그분의 고난을 본받는 자가 될 수 있게 된 것을 큰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이를 이해하는 이들은 바로 이 일에서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보상을 보아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으셨는지 기억하십니까? 육신으로는 어린아이처럼 지내지 않으셨습니까? 헤롯의 살인적인 간계를 피해 도망치지 않으셨습니까? 부모님께 순종하지 않으셨습니까? 열두 살 때, 배운 적도 없으면서 성전에 모인 자들을 꾸짖지 않으셨습니까? – 이는 학문을 배우지 못한 이들이 슬퍼하지 않도록 그분이 하신 일이었습니다. 걸어서 다니지 않으셨습니까? 지치지 않으셨습니까? 무화과나무에서 먹을 것을 찾지 않으셨습니까? 유대인들에게 모욕을 당하지 않으셨습니까? “네게 귀신이 들렸다”는 말과 “벨제불, 귀신의 왕이 귀신을 쫓아낸다”는 말을 듣지 않으셨습니까? 사람들이 그분을 돌로 치려 했을 때, 그분은 그들로부터 피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리고 그보다 앞서 40일간의 금식 기간 동안, 그분은 사람으로서 마귀의 유혹을 받지 않으셨는가? 그 후에도, 섬기는 자로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지 않으셨는가? 배신자에게 배신당하지 않으셨는가? 유대인들에게 붙잡히지 않으셨는가? 안나와 카야파에게 조롱받지 않으셨는가? 종에게 뺨을 맞지 않으셨습니까? 그분이 창조하신 자들의 손에 채찍질을 당하지 않으셨습니까? 조롱을 당하기 위해 가시관을 쓰시지 않으셨습니까? 십자가에 오르지 않으셨습니까? 그분의 거룩한 손과 발이 못으로 박히지 않았습니까? 십자가 위에서 수많은 모욕적인 말을 듣지 않으셨습니까? 그분의 갈비뼈는 창에 찔리지 않았는가? 목마름을 달래기 위해 담즙을 마시지 않았는가? 묻히지 않았으며, 하나님으로서 사흘 만에 부활하지 않았는가? – 그런데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이와 비슷한 고통을 겪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형제여, 네 등뼈가 네 그리스도처럼 채찍으로 맞았는지 내게 보여 다오. 네 뺨에 맞은 자국이 보이는가? 네 귀는 셀 수 없는 조롱과 모욕, 비방으로 상처 입었는가? 네 온 몸이 고난으로 거룩하게 되었는가? – 물론, 너에게는 그런 것이 전혀 없다. 그러니 적어도 네가 기꺼이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작은 슬픔들조차 기꺼이 받아들여라. 그러면 사람을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그 무한한 자비로 인해, 다음 생에서 너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네 수도 생활을 위해 그렇게 하라. 수도 생활이란 주님을 위해 십자가와 죽음을 견디겠다는 서약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75. 우리 방식대로 선한 삶의 열매를 보게 되면, 그 길을 더욱 엄격히 지키라. 그리하면 너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거처가 될 것이다.

75. 1) 우리 방식에 따른 선한 삶의 열매를 보고, 그 길을 더욱 엄격히 지키라. 그리하면 너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거처가 될 것이다. – 2) 성경의 말씀에 따라 인도받으며, 모든 일에서 올바르고 하나님께 기쁨이 되도록 하라. 모든 비난받을 만한 것에서 멀리하라. [1. 84]

11. 보십시오, 여러분의 한마음 한뜻과, 온갖 선한 일을 위해 조금씩 스스로를 단련해 온 것이 여러분을 어떤 상태로 이끌었는지? 그리고 이것이 여러분에게 어떤 열매를 맺지 않았습니까? – 여기에서 평화와 고요함이, 여기에서 서로에 대한 진실한 신뢰와 끊을 수 없는 일치가, 여기에서 구원을 주는 슬픔과 유익한 고백이, 여기에서 깊은 회개와 그에 걸맞은 겸손이, 여기에서 형제적 사랑과 아버지를 닮은 마음이 나옵니다. 사도의 말씀대로 “모든 일에서” 너희는 “마땅한 일들” 안에서 “깨끗함을 나타내라” (고린도후서 7:11). “주님을 찬양하노니,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고 구원을 베푸셨나이다”(눅 1:68): “너희는 그분의 백성이요, 택함 받은 자들이니, 그분께서 너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높이셨나이다”(눅 1:69), 너희가 새로 얻은 선한 마음가짐을 통해. 그것에 너희를 위한 기쁨과 즐거움, 영광과 좋은 명성, 지극한 지혜, 분별력, 그리고 완전한 지식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 앞에서 칭찬받을 만하고 깨끗한 삶을 살기 위함이라. 이에 대해 외부 사람들 중 누구도 (그들의 판단이 때로는 우리의 생활 방식에 적용되기도 하므로)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나는 글자를 모르거나, 그리스인들이 즐겨 다루는 주제 에 대해 논할 줄 몰라도, 흠 없고 흠잡을 데 없는 삶을 사는 사람을 지혜로운 자라 부른다.” – 말하기와 듣기만 하는 데 모든 관심을 두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보일지 모르나, 우리가 성인들이 정한 것 외에 다른 것을 만들어 낼 수 있겠는가? 그러니 주 하나님을 경외하고 떨며 그분의 계명을 지키도록 지혜를 얻으십시오. 그러면 은혜가 여러분을 “모든 선한 일을 위해 준비된, 그분의 택하신 그릇들”로 드러내실 것입니다(딤후 2:21).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곳, 곧 영혼의 순결을 위한 곳에는, 어떤 선함이 없고, 어떤 지혜가 없고, 어떤 영의 불타는 열정이 없고, 어떤 깨우침과 교훈과 인도함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없는 곳에는 차가운 말들만 있고, 허세와 자기 과시뿐이며, 종종 미혹과 오류, 그리고 언제나 무익함만 있을 뿐입니다.

12. 말씀을 경청하고, 성경의 말씀이 너희 안에서 사라지지 않게 하라(잊혀지지 않게 하라). 너희 혀를 악에서 지키라. 특히, 이 변덕스럽고 치명적인 독으로 가득 찬 혀를 다스리는 데 익숙하지 않은 가장 어린 너희들은 더욱 그러해야 한다. 우리는 이 혀 때문에 항상 수많은 죄에 빠지기 때문이다. 너희 가운데 간사한 모임이 없기를; 너희 중 두 사람이 간사하고 유대인 식으로 한 가지 일에 결탁하는 일이 없기를; 아나니아와 사프이라처럼 거짓말과 은폐가 없기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처럼 은밀한 계략과 악한 음모가 없기를; 성 골로티우스(Zlatoust)가 외치듯이, “내 것, 네 것”이라 하며 무수한 악으로 가득 찬 태도가 너희 가운데 없기를 바란다. “옛 것은 지나갔으니, 모든 것이 새로워졌도다”(고린도후서 5:17). 왜 우리가 옛날(과거의 삶)을 스스로 회상하는가 하면, 오직 그와 같은 정욕을 피하기 위함이지, 서로에게 악한 생각의 불을 지피기 위함이 아닙니다. “나는 여러분이 더 나은 사람이 되어 구원을 굳게 붙잡기를 바랍니다”(히브리서 6,9). 어쩌면 우리가 예전의 상태로 되돌아간 것은, 마치 심연과 폭풍, 그리고 수많은 동요에서 벗어나 우리의 평화롭고 고요한 안식처로 달려가, 더 이상 파도 속의 위험한 항해를 감행하지 않고, 오히려 이 겸손한 안식처에서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해 파도 없이 고요히 묵상하기를 원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76. 거룩하게 사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축제가 있습니다. 이것을 원하십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열심을 내고, 그분을 위해 모든 것을 참아내십시오.

76. 1) 거룩하게 사는 자에게는 언제나 축제가 있다. 이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열심을 내고, 그분을 위해 모든 것을 참으십시오. – 2) 우리가 왜 이 세상을 떠났는지 기억하고, 그것을 목표로 삼으십시오. 특히 순결을 지키며, 이를 어기는 자와의 교제를 멀리하십시오. [1, 85]

13. 거룩하게 사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축제가 있으며, 그는 항상 빛을 받고, 정화되고, 위로받으며, 언제나 하나님을 모시고 신성하게 여겨지므로, 결코 축제처럼 나날을 보내는 것을 멈추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그러하고자 한다면, – 부디, 간청하오니, 모든 선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스스로 움직이고, 기꺼이 나서며, 스스로 열정을 불태우십시오. 영원한 복을 바라보며 눈을 들어, 이를 위해 마주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견디고, 이겨내십시오: 슬픔, 궁핍, 폭력, 궁핍, 괴로움, 비방, 수고, 땀,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유사한 것들을, 우리가 바라는 것을 얻고, 이 세상을 떠난 목적을 이루기 위해 받아들이고, 들어 올리고, 견뎌내십시오. 오,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나의 아버지들아, 바르고, 합당하며, 확신에 차서 사는 것이! 그리고 회개와 겸손, 경건함 속에서 날들을 보내며, 이 세상을 떠날 날과 모든 이의 두려운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뵙고 그분 앞에서 대답할 날을 준비하는 것이 얼마나 경건한 일인가!

14. “아르세니오여, 무엇을 위해 네가 이 세상을 떠났느냐?” 이 경건한 분은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한 상기 차원에서 늘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우리도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난 목적을 깨닫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노력하며, 미덕의 아름다움으로 우리 삶을 꾸미고, 지극히 빛나는 동정심의 아름다움을 지키고, 우리 자신을 깨끗하고 흠 없고 더럽혀지지 않게 함으로써 주님, 곧 하느님의 신부로 우리 영혼을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라 불리우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훼손하면, 하나님께서도 그를 훼손하실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고린도전서 3:17). 바로 이 때문에 나는 어떤 이들을 위해 울고 통곡합니다. 그들은 “마음속에 하나님을 두기를 기꺼이 하지 않았으니”, 구원을 주시는 분을 “마음으로 알지 못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부정한 마음을 품게 하사 자연의 법칙에 어긋나는 일을 행하게 하셨다”(롬 1:28). 또한 “너희도 교만해져서, 이 일을 행한 자를 너희 가운데서 내쫓지 않고 오히려 울지 않았다”(고전 5:2)고 말하고 싶다. 이로 인해 부주의가 생기고, 나아가 무관심까지 이어집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마땅히 그래야 할 것처럼 그로부터 등을 돌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그와 어울리고 함께 웃으며, 선지자가 다음과 같이 질책하며 말한 자와 같아지고 있습니다. “네가 도둑을 보았으면 그와 함께 달아났고, 간음하는 자와도 네 몫을 나누었도다” (시 49:18). 그러나 이러한 책망 때문에 나를 원망하지 마십시오. 내가 여러분을 책망하지 않고 의로운 행실을 위해 여러분 앞에 서지 않는다면, 나에게 화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여러분이 악하게 사는 자들로부터 멀어지지 않는다면, 여러분에게도 화가 있을 것입니다.

 

77. 인생은 파도가 치는 바다와 같으나, 우선 너희의 조타수가 깨어 있고 지혜로울 수 있도록 기도하라. 그다음에는 선한 결말을 이룰 것이라는 소망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라

77. 1) 삶은 파도가 거세다. 그러나 무엇보다 먼저, 너희의 선장이 깨어 있고 지혜로워지기를 기도하라. 그다음, 선한 결말을 이룰 것이라는 소망으로 마음을 기쁘게 하라. – 2) 너희 가운데 사소한 일로 말다툼이 자주 일어난다고 들었다. 이는 겸손함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 3) 성 도로페이, 도시페이, 아카키우스 및 다른 성인들은 침묵하며 겸손하게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평온함을 유지했습니다. – 4)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우리 자신의 욕망이며, 그 욕망이 충족되지 않을 때 우리는 불안해합니다. 이는 욕망을 버림으로써 얻게 될 보상에 대해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 5) 우리 가운데 병에 걸리는 이들이 많습니다: 병든 이들을 참아 주시고, 간병인들은 겸손하게 수고하십시오. 의사를 맞이할 때 소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그리고 회복된 후에도 게으름 피우지 말고, – 제멋대로 굴지 마십시오. [1, 86]

15. 계속해서 온유함을 지키고, 인내하며, 용기를 내어, 악마와 사람들로부터 오는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모든 시련을 견뎌내라. 누가 너희의 삶이 얼마나 많은 투쟁으로 가득 차 있는지 보지 못하겠느냐? 누가 너희의 길이 얼마나 슬픔으로 가득 차 있는지 증언하지 않겠느냐? 이 때문에 매일같이 너희에게 싸움이 일어나고, 저쪽에서는 고통스러운 재앙이 덮치고, 때로는 형제들과의 충돌이, 때로는 순종을 다하는 과정에서 오는 곤란과 끊임없는 흔들림, 사방에서 밀려오는 압박 속에서, 마치 심연에 휩쓸리듯 이 크고 재앙이 많은 세상의 바다를 건너가며, 희망의 돛을 올리고 하늘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먼저, 당신의 선장인 신성한 힘과 아버지의 기도로 인해, 항상 마음의 눈을 활짝 뜨고, 보며 또 깨어 있어, 여러분의 배를 어떻게 잘 조종하고 믿음으로 생명의 안식처로 인도할지 알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그런 다음, 이러한 수고를 겪으며 이 삶의 바다를 헤쳐 나가, 영생을 상속받게 될 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십시오. 어떤 이유로도 망설이거나 멈추거나 무엇에 의해 지체되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기쁜 마음으로, 활기차게, 힘차게 나아가며, 고대의 뱀인 마귀를 짓밟고 주님의 계명을 이행할 수 있는 모든 일을 감당하고 실천하십시오. 당신은 젊고 신앙 생활의 초보 단계에 있습니까? 겸손과 순종을 받아들이고 이를 굳게 지키라. 그래야 좋은 시작을 바탕으로 조금씩 성장하여 완전함에 이르리라. 이미 오랫동안 수도복을 입고 있느냐? 나이를 기준으로 삼지 말고, 덕행의 탁월함을 기준으로 스스로를 수도자로 인정하라.

16.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비록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여러분 가운데 헛된 수다와 논쟁, 혼란, 짜증과 광란, 욕설, 비방, 분열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형제 여러분, 이것이 어디서 비롯된 것입니까? 어떤 이유로 생겨난 것입니까? 제 생각에는 겸손의 부족 외에는 다른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사도의 말씀으로 여러분께 간청합니다. “마음은 어린아이처럼 되지 말고, 악을 미워하는 데는 어린아이처럼 되라”(고린도전서 14:20). 아무 유익도 없는 헛소리를 하지 말고, 자기 주장을 관철시키려 할 때 웅변을 떨거나 허튼소리를 하며 이것저것 샅샅이 짚어보고 온갖 이유를 대지 마십시오. ““누가”라고 선지자가 묻습니다. “생명을 원하며, 좋은 날들을 보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그리고 스스로 대답합니다. “네 혀를 악에서 금하고, 네 입술이 아첨하는 말을 하지 않게 하라.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며, 평화를 구하고 그것을 좇으라” (시 33, 13–15).

17. 성 도로테우스는 무엇 덕분에 복된 날들을 누리고 평온한 삶을 살았는가? 또한 경이로운 도시페우스, 영원히 기억될 아카키우스, 그리고 그와 같은 모든 성인들이 무엇 덕분에 그 기쁨을 누렸는가? 혹은, – 이것이 건방진 말로 여겨지지 않기를 바라지만 – 우리 형제단 중 일부, 즉 지금도 살아 계신 분들과 이미 세상을 떠난 분들 중 일부가 이곳에서 혼란과 근심 없이 복되게 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과연 이것이 그 이유일까요? – 그들 각자가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여기고, 누구에게나, 어떤 일에서도 기꺼이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18. 나에게는 – ‘여러분’이라고 말하지 않으려니와 – 허영심과 제멋대로인 마음, 그리고 쾌락 추구가 평온하게 살지도, 화목하게 지내지도, 단순함과 악의 없이 이 세상의 짧은 나날을 보내지도 못하게 한다. 그러니 누가 불안해하고 괴로워하거든, 이웃을 탓하지 말고 스스로를 책망하라. 바르게 행하고 평화롭게 지내고자 하는 자는 자신의 욕망을 고집하지 말라. 그러면 슬픔이 그치고, 다툼이 잠잠해지며, 욥의 말처럼 야생 짐승들도 그와 화목해질 것이다. 게다가, 우리가 원치 않는 옷을 입는 것, 수선된 신발, 원치 않는 망토, 순종의 변화, 모욕을 견디는 것, 비방을 참아내는 것, 이 모든 사소한 일들 때문에 천국이 여러분에게 주어질 것임을 알고 믿으십시오. 그러니 우리가 가진 힘을 다해 힘쓰자,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힘쓰자! 그리고 마치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켜보시는 것처럼 자신의 사역을 지키고, 행하며, 완수하는 자는 복이 있다.

19. 지금은 우리에게 고통스러운 시기이며, 형제들 중 많은 이들이 병들었습니다. 병자여, 용기를 내라. 너를 위한 행위의 때가 왔다. 병든 자들의 안식을 위해, 금이나 귀중한 보석보다 더 많은 상을 쌓을 기회를 놓치지 말라. 병든 자들은 인내의 열매를 거두라. 주어진 것 이상을 요구하지 말라. 그래야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병들지 않을 것이다. – 도대체 왜 아직도 그렇게 예의가 없습니까? 의사가 오면 모두 그에게 달려가서, 모두 묻고, 모두 자신의 신체 부위를 보여주고, 병명을 말하십니까? – 세속적인 사람 앞에서 부끄럽지 않습니까? 다음 번부터는 그가 아예 이곳에 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특히 제가 이 점을 지적하고 여러분을 바로잡아야만 합니다. 왜 질서를 지키지 않습니까? 차례대로 자신과 자신의 병에 대해 모두 말할 수 있고, 필요한 경우에는 간호사나 그 조수를 통해 전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무질서는 오직 해로울 뿐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내 아이들아;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 또한, 병을 핑계로 게으름을 피우지 말고, 회복된 후에도 헛되이 이리저리 돌아다니지 마십시오. 자제력을 잃지 말고, 다시 병들지 않도록 하여 건강한 이들에게 부담을 주지 마십시오. 그러나 건강한 여러분도 주님을 위하고 형제애를 위해 인내심을 가지고 섬기며, 연약한 이들의 연약함을 짊어지십시오.

 

78. 아랍인들이 다가올 때 그들에게 잡히지 않도록 온갖 방법을 다해 신경 쓰듯이, 영적인 무기를 차고 마음속의 원수들로부터도 그렇게 경계합시다.

78. 1) 아랍인들이 다가올 때 그들의 손에 잡히지 않으려고 온갖 방법을 다하는 것처럼, 영적인 무기를 차고 마음의 적들로부터 경계합시다. – 2) 굴복하지 말고 용감하게 싸워 무욕의 평화를 이루도록 합시다. [1, 87]

20. 요즘 아랍인들이 우리에게 공포를 안겨주고 있다. 그들은 갑작스럽게 습격하여 재물만 약탈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까지 포로로 잡아간다. 데려가지 않는 사람들은 무자비하게 학살하여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죽인다. 그러나 주위를 주의 깊게 둘러보면, 우리 역시 못지않게 무서운 공격과 폭정에 시달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그 가해자가 사람이 아니라 악마일 뿐이다. 그들은 우리와 끊임없이, 휴식도 정해진 시간도 모르는 치열한 전쟁을 벌이고 있다. 어떤 이는 죄의 화살로 찔리고, 또 다른 이는 정욕의 밧줄에 묶여 마음속의 이집트로 포로로 끌려간다; 어떤 이에게는 영혼과 육체의 모든 지체를 죄악된 정욕의 독으로 채우고, 또 다른 이에게는 구원의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을 빼앗아 굶주림으로 괴롭히며, 이 약탈자들과 폭군들은 우리에게 온갖 모욕과 고문을 가합니다. – 여러분 가운데 믿음이라는 영적 칼로 무장하여, 타격을 가할 뿐 당하지 않고, 상처를 입힐 뿐 입지 않으며, 승리할 뿐 포로로 잡히지 않는 그런 그리스도의 전사는 복이 있도다. 그러나 우리 모두 용기를 내어, 육신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우리의 싸움 무기를 들어, 대열을 지키며 서로 돕고, 우리를 대적하는 자들을 물리치자. 사도의 말씀에 따라 ‘선한 믿음’이 곧 갑옷이니, 갑옷 없이 남아 있는 자가 없도록 하라. ‘겸손’이 곧 방패이니, 방패 없이 남아 있는 자가 없도록 하라; 누구도 신성한 기도인 칼을 갖추지 않은 자가 없어야 하며, 누구도 순종인 투구를 갖추지 않은 자가 없어야 하며, 누구도 모든 선한 일에 대한 생생한 준비인 영혼의 말을 갖추지 않은 자가 없어야 하며, 누구도 우리 내면의 사람을 지키는 그 밖의 무기를 갖추지 않은 자가 없어야 한다. 적들이 우리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우리를 타격하거나, 자기 발 아래 쓰러뜨리는 것을 용납하지 맙시다. 전투에서 강하신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무기로 이 세상의 통치자의 권세와 세력을 무찌르시고, “우리에게 뱀과 전갈, 그리고 모든 원수의 세력을 밟을 권세를 주셨습니다”(눅 10:19).

21. 그러니 주의하여 건방지지 말라. 건방짐에 빠지는 자들은 창에 찔린 것처럼 상처를 입고 죽게 되기 때문이다. 조심하십시오. 정욕에 따라 행동하지 마십시오. 정욕에 따라 행동하는 자들은 영원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또한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지 마십시오. 그런 자들은 포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불순종에 빠지지 마십시오. 불순종하는 자들은 원수의 화살에 자신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교만해지지 마십시오. 교만을 통해 여러분은 죄의 칼 아래 놓이게 됩니다. 게으르지 말고 시편 찬양과 수공예 노동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함으로써 여러분은 자신을 마귀의 손에 넘겨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내면에서는 악하게 은밀히 행동하면서 겉으로는 내면의 모습과는 다른 사람인 척할 때 더욱 그러합니다. 사도는 이러한 모든 것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걸어야 할지 주의하라. 어리석은 자처럼 하지 말고 지혜로운 자처럼 하여, 이 악한 세대를 헤쳐 나가며 시간을 아끼라.”(엡 5:16) 우리는 이미 나이가 들었으므로 충분한 군사적 경험도 갖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싸우는 법을 배운 자는 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의로운 군대여, 그분의 거룩한 백성이여, 그분이 택하신 전사들이여, 제가 여러분께 간청하고 간구하노니, 두려워하거나 굴복하지 맙시다. 그러나 상처를 입었다면 회개로 치유하고, 죽임을 당했다면 눈물과 참회를 통해 다시 살아나며, 마음속의 바빌론으로 끌려갔다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성체를 영함으로써 해방되리라. 이처럼 인내하며 싸움을 견뎌낸다면, 전쟁은 서서히 물러가고, 원수들은 도망치며, 무욕의 평화가 우리 안에 빛날 것이며,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로 불릴 것입니다. “화 있을진저, 평화를 이루는 자들아,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들로 불릴 것이니라”(마태복음 5,9)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79. 시간은 흘러갑니다. 여러분이 지금 하고 계신 것처럼, 특히 겸손과 온유함을 중히 여기며 그리스도를 본받아 주의 깊게 살아가야 합니다.

79. 1) 시간은 흘러갑니다. 여러분이 지금 하고 계신 것처럼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특히 그리스도를 본받아 겸손과 온유함을 실천해야 합니다. – 2) 천사들과 성인들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마땅히 살아야 할 대로 살지 않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비록 어렵지만, 위대한 보상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 3) 천국과 지옥이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누가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것을 받게 될 것입니다. – 4) 정욕에 따라 행동하는 자의 행위는 장작과 짚과 같으니, 그는 타지 않으면서도 영원히 불타게 될 것입니다. [2, 1]

22. 시간은 흘러가며 우리를 현세의 끝으로 이끌고 있다. 그러나 이를 깨닫고 추구하는 자는, 마귀의 교활한 계략에 휘말려 구원의 일에 무관심한 삶을 살며 시간을 허비하지 않을 것이다. 누가 자기 내면을 깊이 살피며, 안일함에 굴복하지 않고, 매일 죽음을 준비하며, 영적인 것이든 육체적인 것이든 자신의 모든 일을 전능하신 하나님의 면전 앞에 내어놓으며 걸어가는가? 누가 영혼의 눈을 하늘로 들어 올려 그곳의 아름다운 환상을 바라보며, 온 사랑을 그곳을 갈망하는 데로 옮기고, 하늘의 세력들과 함께 맴돌며, 온갖 무거운 고난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고, 모욕과 굴욕, 고통은 물론 굶주림과 갈증, 추위와 더위를 견디며, 기록된 대로 형제애의 한가운데서 정직한 돌처럼 돌고 있는 자—여러분 중에서 나는 한두 명이 아니라, 진실한 믿음과 열정으로 마땅히 추구해야 할 것을 찾고, 게다가 권고에 귀를 기울이며, 순종적이고, 인내심이 있고, 솔직하며, 신뢰할 수 있고, 충실합니다. 비록 학문적 교육을 받지 못했고, 그 부족함을 독서나 사색, 암기 등으로 메우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가장 필요하고, 그들이 그리스도를 닮게 하는 바로 그 한 가지만을 가지고 있으니, 곧 겸손과 온유함입니다. 이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 때문입니다. “나에게서 배우라. 나는 온유하고 마음이 겸손하니라”(마태복음 11:29). 그러니 여러분의 주의를 빛과 진리, 의로움과 온유함, 겸손과 선함에 기울이십시오. 부디 어떤 분노나 분개도 삼가 주십시오. “인자여,” 성 다윗이 외칩니다, “언제까지 마음이 완고하겠느냐? 어째서 헛된 것을 사랑하고 거짓을 찾느냐?”(시 4,3). “적들이 언제까지 모욕하고, 대적들이 언제까지 분노하게 하겠느냐?”(시 73,10).

23.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저는 거룩한 천사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그들은 우리의 수호자로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저는 성인과 경건한 선조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우리는 그들의 삶의 본을 따라 그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형제 여러분, 경건한 일은 경건하게, 거룩한 일은 거룩하게 행합시다. 부디, 여러분, 무정하거나 불순종하거나 모순된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말에 거칠거나 성급하거나 수다스럽지 마십시오. 조롱하거나 비방하거나 모욕하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말이 많거나 우스꽝스럽거나 건방지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음행을 좋아하지 말며, 침묵을 지키고 헛소리를 하지 마십시오. 초라한 옷차림에 만족하고, 허세를 부리지 마십시오. 눈은 땅을 향하고, 마음은 하늘을 향하십시오. 주위를 잘 살피어, 부주의로 인해 죄의 화살에 맞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그 결과로 무엇이 따를까요? – 수고 대신 안식이, 위업 대신 면류관이, 모욕 대신 명예와 영광이, 모욕 대신 칭찬, 찔림 대신 기쁜 환영, 노예 생활 대신 열 도시를 다스리는 권세, 부모와 친족을 잃는 대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유산과 공동 상속, 자기 뜻을 끊어버린 대가로 첫 순교자 스데반과 함께 거하게 될 것입니다; 저것은 일시적이고, 덧없으며 그림자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이지만, 이것은 영원하고, 불멸하며 끝이 없습니다.

24. 만약 천국을 얻고자 한다면, 영생을 맛보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자 한다면, 낙원의 주민이 되고자 한다면, 아브라함의 품에서 안식을 누리고자 한다면,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닌 신부방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혹은 이와 유사한 다른 것을 얻고자 한다면, 이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가능하며, 접근 가능하고, 손쉽게 얻을 수 있으며, 준비되어 있습니다. – 그러나 이와 정반대되는 것, 즉 꺼지지 않는 불, 잠들지 않는 벌레, 지옥의 불길, 이를 갈음, 염소의 뿔, 저주받은 자들의 운명을 원하신다면, 이 모든 것을 마주하게 될 것이니, 부디 여러분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가 선하게 살지 않고, 선한 마음을 얻지 못하며, 자신의 본분에 충실하지 않는다면, 그런 일은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영혼도 얻고, 형제들도 얻으며, 나 같은 가난한 자도 얻게 됩니다. 선하게 행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걷는 자는 주님 앞에서 정직하며, 그의 말과 얼굴도 정직합니다. 그는 복이 있으며, 복된 기억을 남길 것입니다.

25. 잔인한 자에게 잔인함이, 불복종하는 자에게 불복종이, 순종하지 않는 자에게 불순종이, 교만한 자에게 교만이 무슨 유익이 되겠는가? 그는 진노의 날과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드러나는 날을 위해 스스로 진노를 쌓아 두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의 행실이 마치 장작과 건초, 갈대와 같지 않겠으며, 그에게 “그의 행실은 불타 버리고 사라지리니, 그 자신은 마치 불에서 나온 것처럼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고린도전서 3:12, 15). 즉, 장차 올 세상에서 그는 육체적으로는 지옥의 불로 타게 될 것이며, 영혼은 성도들의 영광을 바라보며, 그것을 갈망하면서도 영원토록 그 영광에서 배제된 자신을 보며, 끝없이, 무한히 고통받고 마음이 찢어질 것이다. 여러분 중 누구에게도 이러한 운명과 상태가 닥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니 우리가 아직 이곳에 있는 동안, 장차 닥칠 불길을 겪지 않도록 하나님의 두려움의 불로 우리 자신을 정화해야 한다.

 

80. 나는 너희의 순종을 칭찬하노니, 계속 그렇게 하라. 그리고 필요와 순종을 분배하는 자들과, 그것을 받는 자들 모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행하라.

80. 1) 너희의 순종을 칭찬하노니, 계속 그렇게 하라. 필요와 순종을 베푸는 자들과, 그것을 받는 자들 모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행하라. – 2) 자비의 행실로 풍성해지라. 하나님을 본받아, 무엇을 해낼 수 있다면 교만해하지 말고, 해내지 못하더라도 낙심하지 말라. [2, 2]

1. 보라, 너희가 어떻게 성장하고, 어떻게 높아지며, 어떻게 온전해지고, 하나님과 우리에게 어떤 열매를 맺는지, 그리고 선한 생활 속에서 어떻게 잘 정돈되어 순종으로 너희 영혼을 얻는지. 너희는 겸손함으로 너희 삶의 위상을 높였으며, 순종함으로 너희 양심의 증거를 보여주었으니, 곧 교활함이나 위선 없이 순종을 실천하고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러하길 바란다. – 예를 들어, 한 사람은 이 일을, 다른 사람은 저 일을 맡게 될 때, 이 일이 이루어질 때, 부디 편파적이거나 적대적이거나 소홀하지 않게 하라; 오직 모든 것을 보시는 하나님의 면전 앞에서, 한 사람은 배정을 하고 다른 사람은 분별력 있게, 성실하게, 그리고 칭찬받을 만하게 받아들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여 그날에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라. 네 주인의 기쁨에 들어가라” (마태복음 25:21). 용서해 주시기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없이 편파적으로 형제들에게 필요한 것—옷이나 신발—을 주거나, 임무를 분배하는 자들은 그러한 말씀을 들을 자격이 없습니다. 오히려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소홀히 행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예레미야 48, 10). 이는 여기서 얼마나 많은 악이 생겨나는가? 한편으로는 아첨이, 다른 한편으로는 불평과 평화로운 관계의 파탄이 있다.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받는 자들이 나누어 주는 자들에게 반항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 나누어 주는 자들이 하나님의 경외심과 형제적 사랑 안에서, 너희에게 맡겨진 관리 업무에서 최선의 방식으로 행동하기를 위함이다. 너희가 그렇게 행동한다면, 우리 사랑스러운 형제 공동체 안에서 질서와 평화와 고요함이 점점 더 굳건해지고 뿌리내릴 것이다.

2. 여러분께 간곡히 부탁드리건대, 여러분의 마음을 온갖 선한 일로 채우고, 서로를 향한 사랑에 전념하며, 서로의 성공을 기뻐하고 이웃의 실족을 안타까워하십시오. “지상의 야곱이 그러하듯, 지상의 반지들도 그러하며, 하늘의 야곱이 그러하듯, 하늘의 반지들도 그러하다”고 사도가 말합니다(고린도전서 15:48).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자비와 공의를 사랑하시며”(시 32:5), “온 땅이 그 자비로 가득 차 있도다”(118:64)라고 성 다윗이 노래합니다. 우리도 그분을 본받아, 오늘은 이를 실천하고 내일은 또 다른 일에 도전하되, 실패한다고 해서 낙담하지도 말고, 성공했다고 해서 자만하지도 말자. 그러나 성공에 대해서는 주님께 감사드리자. 이는 “원하는 자나 달리는 자에 달려 있지 않고,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께 달려 있기” (롬 9:16); 첫 번째 일에서는 인내하면 우리에게 이루어질 것이니, 주님께서 “구하는 자는 누구나 얻고, 두드리는 자에게는 열릴 것”이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마태복음 7,8). 이처럼 날마다 너희는 너희 영혼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며, 점점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것이다. 지금은 멸망하지 않는 참된 것을 얻는 때요, 영적인 경주(경쟁)의 때요, 영원한 복으로 풍요로워지는 때입니다. 달리는 자는 복이 있고, 인내하는 자는 세 배로 복이 있으며, 하나님을 갈망하는 불꽃과 그분에 대한 사랑으로 매일 자기 안에서 불을 지피는 자는 지극히 복이 있습니다.

 

81. 칼보다 더 무서운 정욕의 반란을 경계하며, 계명으로 스스로를 보호하고 죄에 대한 혐오로 무장하자

81. 1) 칼보다 더 무서운 정욕의 반란을 경계하며, 계명으로 스스로를 보호하고 죄에 대한 혐오로 무장하자. – 2) 오늘은 이 악마가, 내일은 저 악마가 반란을 일으키니, 주님의 이름과 선을 향한 자기 수양으로 모두 물리쳐야 한다. 그리고 참회를 부과받을 때 비겁해하지 말라. [2, 4]

3. 칼을 갈아 나를 겨누고, 상처를 입히고, 쫓아내고, 죽음으로 위협하더라도; 나는 이를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으나, 내 겸손한 영혼 속에서 솟아오르는 악마의 공격을 두려워하노니, 내 육신에 군림하는 죄가 마치 무장한 군대처럼 미덕을 대적하여 수많은 광란의 정욕을 쏟아낼 때이다. 그때 내게 두려운 것은 육체가 아니라 마음을 찔러 상처 입히는 죄의 달콤함이라는 화살이니; 그때 나는 땅에 쏟아지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칼에 의해 영혼에 쏟아지는 피가 두렵다. 이것이 바로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내가 떨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형제들아, 우리 자신을 잘 살피고, 어떤 중상모략자나 교만한 생각, 혹은 죄의 유혹, – 약탈자, 혹은 소란스러운 불순종, 혹은 파멸을 부르는 자만, 혹은 회개하지 않는 완고함, 혹은 굽히지 않는 고집, 혹은 설득력 없는 자기합리화, 혹은 영혼을 뒤흔들 수 있는 그 밖의 어떤 것이든. 그러나 마치 참호처럼 신성한 계명으로 우리 자신을 보호합시다. 그리하면 우리는 언제나 온전하고 안전할 것입니다. 만일 어떤 포식자가 침입하게 된다면, 우리가 그를 발견하는 즉시 재빨리 붙잡아 묶은 뒤, 우리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 내던져 버립시다. 특히 정욕에 대항하여 무장하고, 마음의 접근 불가능함과 영의 굳건함을 받아들여, 싸울 때 넘어지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하는 보이지 않는 적들을 물리치고 멀리 내던지도록 하자.

4. 오늘은 이런 악마가 싸움을 걸어오고, 내일은 다른 악마가 공격해 올 것이며, 그 다음에는 또 다른 악마가 나타날 것이다. 예를 들어, 음행, 탐식, 교만, 자만, 건방짐, 독단 등 셀 수 없이 많은 정욕들이 그러하다. 우리는 이 모든 것에 맞서 싸우고, 모두와 전쟁을 벌이며, 심판의 날에 우리에게 승리의 면류관을 씌워 주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들을 모두 물리쳐야 합니다. 형제여, 이 말을 듣고 이해하며 지키는 자, 더 나아가 매일 마음속의 싸움에 자신을 단련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구원의 일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며, 하늘 나라는 오직 스스로를 단련하는 자들만이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유혹에 빠지게 될 때 놀라지 마십시오. 그것은 여러분을 시험하고 싸움의 기술을 가르치기 위해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훈계받고, 책망받고, 참회를 부과받고, 필요하다면 파문당할 때에도 낙담하지 말고, 오히려 기쁜 마음으로, 기운을 내며, 큰 열정으로 일에 임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의 구원이며, 이것이 성공이며, 이것이 순교이며, 이를 통해 면류관을 얻게 될 것입니다.

 

82. 형제가 떠났다. 왜인가?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고 유혹적인 생각에 굴복했기 때문이다. 만약 자기 자신을 돌보았다면, 시편의 권면이 그를 깨우쳐 주었을 것이며, 그의 의지가 확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82. 1) 형제가 떠났다. 왜일까? 자기 자신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고 유혹적인 생각에 굴복했기 때문이다. 만약 자기 자신에게 귀를 기울였다면, 시편의 가르침이 그를 깨우쳐 주었을 터인데, 그의 의지가 확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2) 세상의 왕의 군인들은 세속적인 이익을 위해 그에게 충성합니다. 우리야말로 하늘나라를 위해 하늘의 왕께 충성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 조상들을 본받아 그렇게 합시다. [2, 5]

5. 나는 여러분에게 원수의 중상모략에 맞서 스스로를 경계하라고 권면해 왔습니다. 이제 스스로를 경계하지 않은 것이 초래한 나쁜 결과를 지적하겠습니다. 불쌍한 형제 아바쿰이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물론, 이는 그가 스스로를 경계하지 않았고 마음속으로 자신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위해 싸울 수 있었던 신실하고 경건한 생각을 품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과 그분의 진리를 영혼으로부터 가리는 유혹적인 생각들을 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통을 겪게 되었고, 결국 스스로 우리 가운데서 떠나 마귀의 뒤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지금 어디서, 길잡이도 목자 없는 포식자의 먹잇감이 된 양처럼 방황하고 있는가? – 어떻게 그가 이제 자신의 서약을 어김으로써 떠나버린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그가 “악인들의 모임을 따르지 아니하는 사람은 복이 있도다”라고 노래할 수 있겠는가, 그런 길을 택한 채로? 혹은 어떻게 “이것이 나의 영원한 안식처니, 내가 원한 대로 여기에 거하리라”(시 131:14)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또한 “내가 주님을 오래 참았더니, 주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셨도다”(시 39:2)라는 말씀도 그에게는 멀기만 하다. 그는 오히려 다음과 같은 시편의 말씀이 자신에게 더 어울린다고 여길 것이다. “주의 계명을 저버리는 자들은 저주를 받을지어다”(시 118:21). 주 하나님께서, 내 아버지와 여러분의 기도를 통해, 그리고 여러분의 협력으로 그를 회심시키지 않으신다면, 그는 이미 저주받았으며 앞으로도 계속 저주받을 것이다. 그러나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왜 사탄은 우리를 자신의 도구로 삼아 빼앗아 가는 것일까? 왜 우리는 하나님의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고, 우리 주 그리스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갑옷을 입지 않은 채로 있는 것을 허용하는 것입니까? 왜 우리는 자신의 정욕에 굴복하여, 그 결과 냉담하고, 간음하며, 흔들리고, 솔직히 말해 열매 맺지 못하는 자들이 되는 것을 방치하는 것입니까? 선조들에 대한 믿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형제들에 대한 사랑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고 육체적, 정신적 유혹으로부터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사소한 슬픔만 닿아도 여러분은 완전히 기진맥진해져서, 아직 경쟁의 장에 들어서기도 전에 뒤로 물러서고 있으니 말입니다?

6. 이 땅의 왕을 섬기는 군인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어떻게 왕에게 충성을 지키며, 그를 위해 싸우고 피를 흘리는지 보십니까? 이것이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 어떤 영예나 지위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업적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유일하고 영원하며 보이지 않는 만물의 왕이신 하나님을 위한 것이며, 세상의 어떤 것 때문이 아니라 천국을 얻기 위함입니다. 곧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공동 상속자가 되어,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르지 않았던 것을 누리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그리고 언제나 그분께 충실하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유혹당하고, 미혹당하며, 휩쓸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신을 차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굳건히 서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피 흘릴 때까지 버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탄생은 위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빛의 자녀들이 아닙니까? 어떻게 우리가 순종의 자녀들임을 드러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우리가 거룩한 씨앗임을 보여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모든 생각을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사로잡지 않겠는가? 어떻게 세속적인 지혜를 뛰어넘지 않겠는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위해 죽지 않겠는가, 비록 하루에 한 번이라도 그분을 위해 죽어야 한다면? – 오, 나의 자녀들아! 우리의 성스러운 조상들과 그들의 인도 아래 살았던 그 복된 이들의 본을 따라, 힘의 아들들, 그리스도의 전사들, 참으로 하나님의 백성, 천사들의 합창단, 흔들리지 않는 군대가 되어, 사탄을 우리 발 아래 짓밟고 모욕받게 하소서. 마치 성 실반, 도시페이 성자, 영원히 기억될 자카리아, 그리고 모든 성자들의 제자들처럼 사탄을 우리 발 아래 짓밟고 모욕받게 합시다. 왜냐하면 도시페이 한 사람만이, 실반 한 사람만이, 자카리아 한 사람만이 영광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모든 충실한 제자들과 추종자들도 그들의 영광에 동참하기 때문입니다. 부디 우리도 그들과 같이 되기를 간청합니다. 원수의 중상모략에 굴복하지 말고, 그들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말며, 죄로 인한 죽음으로 우리 자신을 죽게 내버려 두지 맙시다. 그러나 우리 생명의 남은 모든 날과 시간을 주 우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살아갑시다.

 

83. 그 어떤 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지게 하지 않게 하소서.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온전함에 이를 때까지, 우리는 수련과 덕행 속에 머물게 하소서.

83. 1) 그 어떤 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지게 하지 말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를 때까지 수련과 덕행 속에 머물자. – 2) 세상을 버림으로써 우리는 위대한 일을 이루었다. 그러니 조상들을 본받아, 게으름과 자기 만족으로 이 시작을 헛되게 하지 말자. [2, 6]

7. 백성에게 어떤 재앙이 닥쳐 모두 혼란에 빠졌을 때, 우리는 밤낮으로 하나님께 엎드려 눈물과 탄식으로 그분의 진노를 자비로 바꾸시고 세상에 평화를 회복해 주시기를 간구해야 하며, 그분의 헤아릴 수 없는 지혜가 운명을 통해 드러나듯이, – 그러나 이 와중에도 우리의 영적 수양을 소홀히 하지 말고, 오히려 공동의 재앙이 우리에게 미치는 것조차도 그 수양을 위해 활용해야 한다. 왜냐하면 사도가 말했듯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롬 8:28) 때문이니, 따라서 현재의 재앙도, 그보다 더 무서운 다른 어떤 재앙도, 혹은 사도의 말로 표현하자면, “죽음도, 생명도, 천사도, 권세도, 능력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높은 것도, 깊은 것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롬 8:38, 39). 그러므로 하나님께로 올라가 그곳에 예비된 복을 바라보며, 우리 앞에 놓인 사명을 기쁨과 확고함, 열정으로 완수해 나가자. 낙담하여 기력을 잃지도 말고, 금식으로 기진맥진하지도 말고, 깨어 있는 것으로 지치지 말고, 기도하는 데 지루해하지도 말고, 다른 계명들을 이행하는 수고로 인해 무기력해지지 말자; 오히려 이 모든 것을 향해 달려가고 서두르며, 마치 어떤 축제나 즐거움에 가는 것처럼, 아니 더 나아가 빛으로, 하나님 자신께로 향하듯이; 그리하여 계명을 이행함에 있어 힘에서 힘으로, 덕으로 자신을 단장함에 있어 영광에서 영광으로 나아가며, 신성한 완전함으로 점점 더 풍성해져서, “우리 모두가 믿음의 하나됨에 이르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숙한 몫에 이르도록” (엡 4,13), 그분을 위하여 우리는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고, 세상도 우리에게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갈 6,14), 그분을 위하여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것을 손실로 여겼으니, 오직 그분 한 분만을 얻기 위함이라 (빌 3,8).

8. 보라, 내 자녀들아, 우리가 세상에서 도망치고 세속적인 모든 것, 친족과 고향, 부모와 형제자매, 도시와 집, 그리고 육신과 피를 위로하는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어떤 일을, 얼마나 큰 일을 이루었는가? – 게으름과 부주의, 무관심으로 우리 자신의 이러한 업적을 헛되게 만들지 맙시다. 만일 우리가 육체의 욕망을 따르고 마음의 정욕에 따라 행동하기 시작한다면,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의 성인과 경건한 선조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본받는 겸손, 이성을 따르지 않는 순종, 진실한 믿음, 세상에 대한 혐오, 하느님에 대한 사랑, 놀라운 위업과 경건한 행실의 모범을 남기셨습니다. 우리도 그들을 본받아,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도록 스스로를 다잡아, 그들의 은총을 조금이라도 누릴 수 있게 합시다.

 

84. 누가 이러한 불경건함에 해당하지 않겠는가? 잘못 사는 모든 사람, 특히 서원에 어긋나게 수도원의 빈약한 생활에 불만을 품는 자들이다.

84. 1) 누가 이보다 더 불경한 자가 있겠는가? 모두, 잘못 살아가는 자들이다. 특히 수도원의 빈약한 생활에 불만을 품고 서원을 어기는 자들이다. – 2) 식탁에 차려진 음식에 만족해야 하며, 모든 위안을 영원한 위안을 훼손하는 것으로 여겨야 한다. 나 자신도 항상 그렇게 느끼고 있다. – 3) 우리 식사는 나쁘지 않다. 병원의 경우 식사는 물론 그 밖의 모든 것이 매우 훌륭하다. – 4) 덧붙이자면, 너희는 수도원에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으면서도 이것저것 달라고 요구한다. 그런데 정작 너희는 거의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데, 너희보다 훨씬 나은 다른 이들은 온갖 방법으로 수고하며 인내하고 있다. 하나님의 의로운 진노가 너희에게 임할 것이다. [2, 7]

9. “멸망에 이르는 빵을 만들지 말고,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영생에 이르는 빵을 만들라” (요 6, 27), 즉 계명을 지키고, “주님의 율법을 밤낮으로 배우며”, 신성한 다윗의 말씀대로 “물 솟는 곳 곁에 심겨진 나무”와 같이 되게 하라; 그리고 너희의 “열매”가 “제때에 맺히게” 되며, 너희 구원의 “잎사귀”가 “미래의 세상에서 떨어지지” 않게 하라. “악한 자들처럼 되지 말라. 그들과 같지 말고, 바람이 땅 위에서 쓸어가는 티끌과 같지 말라” (시 1:3, 4). “악인”이란 우리 가운데서 그릇된 믿음을 가진 자들뿐만 아니라, 주님의 계명을 어기는 모든 이를 가리키나니; 우리 공동체에 적용해 보면, 불순종하는 자, 교만한 자, 교묘한 말을 하는 자, 허영심 많은 자, 건방진 자, 또한 몰래 음식을 먹는 자, 불평하는 자, 꾸미는 것을 좋아하는 자, 호기심 많은 자(모든 것을 엿보고 캐묻는 자), 게으름뱅이, 부주의한 자, 수군거리는 자, 제멋대로인 자, 비방하는 자, 무엇보다도 배은망덕하고 마땅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자들일 것입니다? –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즉, 수도원에서 모든 이에게 제공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영혼에 대한 돌봄은 제쳐두고 육신을 방종시키며, 자신들이 받을 자격이 없는 음식과 음료를 찾고 요구하며, 이를 두고 다투기도 하는데, 자신의 체질과 습관, 그리고 연약함을 핑계로 내세운다. 그들이 진정으로 병에 걸렸다면 오히려 좋았을 것이다. 어쩌면 이를 통해 그들은 가장 큰 병인 ‘배은망덕함’에서 벗어날 수도 있었을 테니. – 저 저주받은 자들은 마치 우리에게 들어올 때 하나님께 무엇을 약속했는지, 그리고 보이지 않는 증인과 보이는 증인들 앞에서 무엇을 고백했는지 잊어버린 것 같구나! 배고픔과 목마름 속에 머물며, 온갖 슬픔과 궁핍, 굶주림, 박해, 고통, 심지어 죽음까지 견디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제 와서는 포도주와 음식 때문에 싸움을 벌이고 있다니! – 그러나 그들이 서약을 모독한 만큼, 그들 자신도 모독을 당할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들의 서약을 지켜보시고 들으시는 분임을 기억하려 하지 않았으니, “그분께서 그들을 부적절한 일을 행하는 어리석은 마음에 내버려 두시지 않을까” 두렵습니다(롬 1:28).

10. 그러니 그런 자들은 정신을 차리라. 무엇보다도 너희 영혼을 잠에서 깨우고, 신성한 것에 대한 무관심과 세속적인 것에 대한 집착, “미지근함”에서 벗어나게 하라. 신성한 사랑과 경외심으로 불타오르라. 징계를 받아들이고 의의 무기를 두르라. 떨며 두려워하고, 식탁에 차려진 음식 때문에 다투지 마십시오. 고기 요리나 생선, 치즈가 있을 때뿐만 아니라, 기름에 볶은 채소와 함께 빵 한 조각, 삶은 콩, 혹은 그와 비슷한 것이 제공될 때에도 이를 큰 위로로 여기십시오. 그리고 겸손한 이들 중 누가 이 상황에서, 이런 위로 때문에라도 영원한 복을 잃게 될까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나 자신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모든 음식과 음료를 지옥으로 가는 길의 여비라고 여기며, 특히 내가 쇠약할 때 주어졌던 것들을 더욱 그러하다. 저를 믿어 주십시오. 비록 미친 소리로 들릴지라도, 만일 우리 모두의 아버지께 불순종할까 봐 큰 두려움이 나를 사로잡지 않았고, 여러분의 분별 있는 말씀이 나를 설득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죽을 때까지 평소의 식사량을 결코 바꾸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직 이 이유 때문에 나는 다양한 것을 먹고 마셨을 뿐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미친 듯이 말하건대, 나는 마음의 아픔과 신음, 그리고 슬픔을 안고 이를 행했습니다. 한편으로는 내 자신의 부적합함 때문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연약한 여러분을 염려하는 마음과 수도원의 궁핍함 때문이었습니다.

11. 그러나 주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에게는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감사하지 않는 자들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포도주도 마시고, 기름과 생선도 맛보며, 병원에서 안식을 취하고 치료를 받습니다. 그리고 이는 한두 번이 아니라 매일 일어나는 일입니다. – 질병 치료에 경험이 풍부한 선택받은 형제가 우리 수녀원의 주치의이며, 그에게는 세 명, 네 명, 때로는 다섯 명의 조수가 있습니다. 전담 요리사, 전담 물품 관리자, 연고와 반창고, 붕대, 거즈 등을 전담으로 준비하는 사람이 있으며, 그곳의 업무는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출도 적지 않습니다. 매일 생선이 제공되는데, 이는 사형 선고를 받은 세 명에서 네 명의 어부들에게서 얻거나 시장에서 구입한 것입니다. 포도주도 얼마나, 어떤 종류가 소비되었는지, 그리고 지금도 소비되고 있습니다. 올리브, 꿀, 순수한 빵 등 그 밖에도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 이 모든 것에 대해 우리, 이 배은망덕한 자들이 어떻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 그분을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12.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우리 스스로는 수도원에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고, 우리의 노동으로 얻는 이득도 전혀 없는데, 이것저것 달라고만 요구합니다. – 그런데 정작 우리는 문지기나 식당 봉사 같은 어떤 일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감각하고 무의미한 나머지, 어쩌면 우리가 마지막 세대일지도 모르고, 우리보다 훨씬 더 정직한 형제들과 신부님들—어떤 이들은 수도원 밖에서, 어떤 이들은 안에서, 때로는 추위와 바람 속에서, 때로는 더위와 폭염 속에서 마치 노예처럼 땅을 파고, 밭을 갈고, 포도나무를 가지치기 하고, 빨래하고, 바느질하며, 철을 단련하고, 걸어서 도시와 들판, 산으로 심부름을 다니며 – 지칠 대로 지치고 피로에 시달리지만, 모두 침착하게 참아내고 있다. – 참으로 그런 이들에게 천국이 있다! 그러나 너, 오 눈먼 자여, 오 무정한 자여, 오 간사한 자여, 오 절망한 자여! 보라, 그날에 네가 “그의 손과 발을 묶어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던져라”(마태복음 22:13)라는 말을 듣지 않도록 조심하라. 화가 있을지어다! 너희는 하나님께서 즉시 벌하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그분의 진노를 소홀히 여긴다. 참으로 너희에 대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미련한 자가 자기 마음속으로 말하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시 52:2). 왜인가? 너희가 “너희의 행실에서 타락하고 가증스러워졌으며, 선을 행하는 자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하늘에서 “매일” 내려다보시며, “누가 분별력이 있어 그분을 찾는가”를 살피십니다(시 13:1, 2). 그리고 그런 자들을 생명의 책에 기록하시고, 나머지는 지나치십니다. 두려운 것은, 성 다윗이 오지 않았더라면, 여러분에 대해 노래하지 않았더라면, – “그들의 배 속에서 그들을 갈라놓으소서” (시 16:14)라는 노래가 여러분에게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누구를 말합니까? – 선을 행하는 자들로부터 이 악한 자들을 말입니다. – 그러나 “하나님을 잊은 자들아, 이것을 깨달아라. 어느 때라도 빼앗길 것이며, 구원해 줄 이가 없을 것이다”(시 49:22). 그리고 나 같은 어리석은 자를 용서해 주십시오, 나의 사랑하는 자녀들아. 내가 너희를 아끼는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이 말을 한 것은, 지금 말로 너희를 채찍질하는 것이 나중에 영원한 채찍질을 당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그 채찍질에서 벗어나기를 빕니다.

 

85. 또 두 사람이 떠났다는 것이 참으로 쓰라립니다

85. 1) 또 두 사람이 떠났으니 참으로 쓰라리다. – 2) 그러니 자신도, 타인도 의지해서는 안 된다. – 3) 우리는 아주 사소한 일만 해도 – 어느새 자만하게 되어 – 결국 넘어지고 만다. – 4) 그러니 스스로를 잘 살피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 [2, 8]

13. 또다시 유혹, 또다시 유혹; 또다시 나, 이 불쌍한 자는, 사랑하는 이들이 떠나버렸다는 것(두 형제가 도망쳤다는 것), 높이 살던 자들이 땅으로 추락했다는 것, “자칭 지혜로운 자들”이 어두워졌으며, 위대하고 오랜 세월 동안 경건함을 위해 헌신하고 땀 흘렸던 이들이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잃어버렸고, 나에게 포도 대신 가시덤불이 되고, 기쁨 대신 슬픔이 되며, 기대했던 행복 대신 불행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나는 우리 형제들의 타락과 파멸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외쳐야 할지 모르겠다. 다만 앉아서 울며 이렇게 말할 뿐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주여, ‘누가 구원받을 수 있겠는가’.”

14. 사람의 생애가 끝날 때까지 그를 칭찬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구원의 길은 그만큼 완수하기 어렵습니다. 누가 마귀의 그토록 많은 유혹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자신의 생애가 끝날 때까지 자기 자신에 대해 염려하지 않겠습니까? 이 사실을 잘 알고 계셨던 그 성스러운 신부님은, 이미 죽음의 문턱에 서 계셨을 때, 마귀가 그에게 “너는 나를 피했다”라고 말하자,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는 자신을 그토록 경계하셨기에, 자신의 경건한 수고가 얼마나 컸는지를 불문하고, 심지어 이 마지막 순간에도 자신의 구원에 대해 확고한 확신을 갖지 못하신 듯했습니다.

15. 그러나 우리는 수도원에서 5년이나 10년을 살며 수도 생활에 익숙해지거나, 성경 구절 몇 가지를 외우거나, 정해진 횟수만큼 무릎을 꿇거나, 기도를 더 오래 하고 금식까지 한다면, 이미 모든 것을 다 이룬 것처럼 여기며 자만하기 시작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낙엽처럼 떨어지며”(잠언 11:14), “지옥 앞에서” 우리의 “뼈가 부서지며”(시편 140:7),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시들어 버린다”(시편 128:6). 우리는 무식한 자이면서도 스스로를 지혜롭다고 여기고, 말만 앞세우는 자이면서도 말 없는 자인 채, 스스로를 스승으로, 경건의 열심 있는 수호자로, 그리고 그 경건의 충실한 대변자로 자처하며, 오직 우리 안에만 진리가 남아 있다고 믿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며, 그 때문에 우리는 어둠을 빛으로 착각하고, 마치 낙원에서 쫓겨난 자들처럼 그리스도의 궁정과 그분의 양 떼에서 추방된 자들이 되어 버린 것이다.

16. 형제들아, 부디 스스로를 잘 살피고, 너희의 덕과 신앙을 조금씩 소홀히 하지 말라. 그래야 완전히 고갈되지 않고 타락의 덫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이미 길을 잃고 떠난 자들을 위해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해 기도하리라. 주님께서 그들을 깨우쳐 주시고 우리 곁으로 돌아오게 하시기를.

 

86. 나는 너희의 굳건함과 변함없는 믿음으로 위로를 받노라. 계속해서 힘쓰고, 스스로를 다잡아 나아가라. 그리하면 하나님의 축복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그러나 그렇지 않은 자들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니라

86. 1) 나는 여러분의 확고함과 끈기에 위로를 받습니다. 계속해서 스스로를 다잡으며 더욱 힘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에게 임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자들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 2) 우리는 세례와 회개, 그리고 우리의 서원을 통해 완전히 변화되어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파괴한 것을 다시 세우지 말고, 우리가 떠난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지 맙시다. 마치 이집트를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그리워하며 탄식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내 말이 여러분을 이 일로 격려하길 바라며, 주님께서 여러분을 도우시기를 빕니다. [2, 9]

17. 나는 매일, 여러분이 수도자의 순종 안에서 굳건히 서도록 힘과 굳건함을 주시는 나의 하나님 아버지께 찬양을 드리며, 겸손히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점점 더 열어 주셔서, 그분의 모든 길을 보게 하시고, 그분을 향한 신성한 사랑의 갈망을 깨닫게 하시며, 모든 육신의 정욕을 잠재우고 정욕의 권세 위에 높이 서게 하셔서, 여러분이 “모든 일에서 선으로 충만하고 온전하게 되게 하소서”(골 4,12). – 아시다시피, 이는 힘든 노력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으며, 고난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고,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큰 수고와 자기 고갈을 감수하며, 밤낮으로 우리 본성을 억누르고 억지로 다스리며, 공동체 생활 속에서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슬픔—사람에게서 오든, 악마에게서 오든—을 참아낼 때에만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이 무거운 짐 아래서 지치지 않고, 하나님의 도움으로 모든 것을 견디고 이겨내는 자는 “주님께로부터 축복을, 구세주 하나님께로부터 자비를 받을 것”(시 23:5)이며, 천국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고통을 짊어지고, 그리스도의 수난을 닮은 자가 되어, 분노와 욕설, 건방짐과 오만, 모순과 원한, 불복종과 논쟁, 근심과 모욕, 비방, 거짓말과 조롱에 빠지는 것이다. 이런 자들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사람이라 불릴 수 있겠는가? 그들은 오히려 대적의 아들들이요, 진노의 자식들이며, 영원한 복이 아니라 끝없는 고통의 상속자들이 아니겠는가.

18. 형제들아, 너희의 지위가 천사 같지 않은가? 너희의 삶이 거룩하지 않은가? 너희의 행보가 하나님께 택함 받은 것이 아니겠는가? – 그러나 사도는 무엇이라고 말하느냐? – “내가 허물어 놓은 것을 다시 세우고, 스스로 죄인이 되는 것” (갈 2:18). 우리는 온갖 뱀의 유혹으로 인해 썩어가는 옛 사람을 벗어 던졌고, 첫 번째 쓰라린 맛보기와 추방당할 만한 불순종의 열매였던 것, 그리고 그로 인해 세상에 고통스러운 죽음이 들어온 것을 버렸으며;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지닌 죄를, 먼저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다음에는 하나님의 크신 인류애로 말미암아 회개와 세상에 대한 단절의 두 번째 세례를 통해 씻어냈으며, 여러분의 서원은 성스러운 천사들의 증언에 따라 하나님 앞에 기록되었고, 이 가난한 나에게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 그리하여 여러분은 씻김을 받고, 거룩하게 되며, 죄의 속박에서 풀려나, 하나님의 형상과 진리 안에서 지음받은 새 사람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왜 다시 뒤로 물러서려는 것입니까? 왜 다시 너희의 토사물 위로 돌아가는가? 주님의 말씀대로, 쟁기에 손을 얹고 뒤를 돌아보는 자들이여, 어찌하여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없는 자들이 되는가? (누가복음 9:62). – 주님께서 증인이시니, 내가 여러분을 사랑하고, 아껴 주며, 고통스럽게 괴로워하며 이 말을 하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그들이 이집트의 파, 고기, 솥과 그곳에서의 가난한 삶을 떠올리며 마음으로 이집트로 돌아섰다고 합니다(출 16,3). 우리도 마찬가지로 세상에, 그리고 세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돌렸으며, 예전에 그곳에서 하던 일을 지금 이곳에서 하고 있습니다. – 아아, 나여! 천사들과 동등해야 할 우리가, 게으름으로 인해 조금씩 이러한 타락에 이르렀으니, 어떻게 경건한 평신도들과도 동등하지 못한가? – 그러니 간청하건대, 여러분에게 드리는 나의 이 겸손한 가르침이, 타락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확신이 되고, 타락한 이들에게는 치유가 되며, 게으른 이들에게는 경각심이 되고, 열심 있는 이들에게는 격려가 되고, 낙심한 이들에게는 활력이 되며, 시련을 겪는 이들에게는 도움이 되고, 나아가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되어, 여러분 모두가 구원받게 하려 함이라”(고린도전서 9:22). 이는 여러분을 위하여 말씀도 숨결도 있기 때문이니, 나 자신은 그 자체로는 말도 없고 심지어 사람도 아닙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잘못을 바로잡아 주시고, 바른 것을 굳건히 세우시며, 부족한 것을 채워 주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그분께서 우리를 세상의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시고 죄의 광야를 지나게 하신 것처럼, 악한 정욕의 바다를 갈라 말리고, 우리를 위해 덕의 길을 뚫어 주셔서, 그 바다를 지나가게 하시기를; 또한 우리를 ‘선택된 족속’과 ‘거룩한 민족’이라 부르셨으니(베드로전서 2:9), 그리고 우리를 미덕의 복된 땅에, 더 나아가 죽음을 통해 온유한 자들의 나라에 거하게 하시기를.

 

87. 세상을 등졌다가 다시 그쪽을 바라보는 것은, 어리석고 해로운 짓입니다. 제발 정신 차리십시오

87. 세상을 등지고도 다시 그쪽을 바라보는 것은, 어리석고 해로운 일입니다. 제발 정신을 차리십시오. [2, 10] 분별 있는 사람들로서,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친족과 형제들, 세상과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가벼운 멍에를 짊어졌으면서도, 어찌하여 헛된 일을 하고, 세속적으로 변하며, 더 나아가 너희의 행실로 인해 사탄처럼 변해 가는가? “모세의 율법을 저버린 자는 자비 없이 두세 증인 앞에서 죽임을 당하리니, 너희는 그보다 더 심한 형벌을 받을 것이라”(히브리서 10, 28. 29), 성령의 언약을 찢어버린 자들(성 바실리오에 따르면, 순종을 어김으로써)이며, 원수와 세상으로부터 떠나 그리스도와 연합하던 날에 바르셨던 “언약의 피”를 “더럽혔다고 생각하는가?” 이것이 마땅한 일인가? 이 한 시간의 삶(– 끝없는 세기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하찮은 것이지만 – )을 주님과 함께 깨어 지내지 못했단 말입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천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 여러분의 서약입니까? 주님의 손에서 온 것처럼, 여러분의 손으로 제게 건네준 이 작은 가위가 바로 그런 뜻이었습니까? 그것이 바로 그 당시 여러분을 사로잡았던 유혹에 따라, 눈물 어린, 겸손하고 비천한 몸짓과 시선이었던 것입니까? 오, 자녀들아, 자녀들아! 어떻게 이토록 잊어버리고 예전의 결심에서 물러서고 있는 것입니까? 그러나 간청하고 간곡히 부탁하노니, 나의 자녀들아, 나의 태중의 자식들아, 나의 지체들아, 모두 정신을 차리고, 모두 영으로 새롭게 되며, 모두 한 마음, 한 소망, 한 마음으로 연합하라. 너희는 나와 함께, 나는 너희와 함께, 주님 면전에서, 천국을 얻기 위해 그렇게 살고 그렇게 나아가자.

 

88. 여러분이 잘 정착하신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는 나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내가 기뻐하는 것은 우리가 여러분과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지키시고, 여러분이 번영하도록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88. 1) 여러분이 잘 정착하신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는 제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제가 기뻐하는 것은 우리가 여러분과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지켜 주시고, 여러분이 번영하도록 도와주시기를 빕니다. – 2) 우리는 나쁘고 하찮은 것보다 더 좋고 귀중한 것을 택하였으니, 낙심하지 맙시다. – 3) 순교의 면류관이 우리 앞에 있으니, 용기를 내어 훗날의 영광스러운 지위를 바라보며 순종의 멍에와 육체의 고난을 견뎌 냅시다. [2, 11]

19. 하나님의 은혜를 숨기지 않고, 때가 되면 그것을 선포하는 것이 선한 일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 사역에 더욱 열심하게 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서 그러한 은혜를 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의 그 일에 대해 끊임없이 가르침과 권면을 받고, 말하자면 매일같이 권유받음으로써, 선한 마음가짐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정으로 영적 성장의 길에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제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은, 여러분 스스로도 증언하고 계시며, 저도 여러분을 위해 겪었던 힘든 병고에서 해방되고, 수많은 근심 끝에 마치 고요한 안식처처럼 여러분의 평온한 신앙 생활 속으로 들어서며 마음속으로 기뻐하고 있는 것으로 증언합니다. “모든 징계는 당장은 기쁨으로 여겨지지 않고 슬픔으로 보이지만, 그 열매는 평화를 주는 의를 맺는다”(히브리서 12:11)는 말씀은, 그러한 훈련을 받은 이들에게는 참으로 거짓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열매는 나의 행함이나 나의 보살핌과 수고가 아니라, 여러분의 열정과 아버지 같은 도움 속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어찌 남의 수고에 끼어들어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온전히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내 안에 계시고, 나는 여러분 안에 있으며, 우리 각자의 행위는 서로에게 귀속되기 때문입니다. 힘이 두려우시고 권능이 강하신 주님께서, 이제부터 앞으로도, 저로 하여금 거룩한 계명들을 마땅히 연구하고 탐구하며 설명하는 일에 열심 있고 강건하게 하시고, 또한 여러분을 끊어지지 않는 복종과 위선 없는 순종, 흔들림 없는 믿음 안에 지켜 주시기를, 여러분을 점점 더 덕이 넘치고, 점점 더 열성적이며, 모든 영적 업적—슬픔과 궁핍, 굶주림과 갈증을 견디며, 온갖 수고를 감당하고 모든 괴로움과 슬픔을 참아내어, 무적의 모습으로 의로운 심판자의 심판의 날에 인내의 면류관을 받게 하시기를.

20. 진실로 너희의 선택은 훌륭하니, 썩어질 것을 버리고 썩지 않을 것을 얻었으며, 부모를 잃고 주님을 아버지로 삼았으며, 형제들과는 멀어지고 성도들을 동거자로 삼았기 때문이다. 너희는 “택함 받은 족속, 왕 같은 제사장”(베드로전서 2:9)이며, 여러분을 낳고 양육한 조국 대신, “그 설계자이자 건축자는 하나님이신” (히브리서 11:10) 하늘의 성이 여러분의 조국이 되었으며, 견고하지 않고 무너질 집 대신 – 이제 여러분에게는 경건하고 의로운 이들의 장막이 있고, 헛된 영광과 사라질 명예 대신 – 신성하고 천사와 동등한 존엄이, 물질적인 만족과 행복 대신 – 영원한 복을 누리는 기쁨이, 자신의 욕망에 대한 복종과 절제 대신 – 순교자들과 함께하는 환희가, 고립과 고아 같은 방랑 대신 – 모든 성도들과의 가장 가까운 친족 관계가 주어졌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왜 낙담하겠는가? 왜 기운을 잃고 슬퍼하겠는가? 모두 신성한 다윗과 함께 외치라. “내 영혼아, 네가 왜 슬퍼하며, 왜 나를 괴롭히느냐? 하나님을 의지하라. 우리가 그분께 고백하리라” (시 41:12). “만일 우리가 그분과 함께 고난을 당하면” 수행의 길에서, “그분과 함께 왕이 될 것이니라” (롬 8,17; 2티모 2,12).

21. 순교의 면류관은 이곳에서도 얻어지며, 수도원의 생활 방식은 마땅히 ‘투쟁의 장’이라 불린다. 그러므로 순종하는 자가 어찌 복된가? 모든 것을 드러내는 고백자가 어찌 경이로운가? 인내하는 자가 어찌 경건한가? 계명을 지키는 데 있어 신실하고 변함없는 자가 어찌 하나님께 복된 자인가? 그러니 우리가 시작한 일을 외면하거나 회피하지 말고, 정해진 질서 속에서 낙담하지 말며, 뒤로 물러서거나 멈추지 말자. 우리의 등뼈를 원수들에게 내주지 말자, 오 형제들이여, 동행자들이여, 함께 싸우는 동료들이여! 육신을 아끼지 맙시다: 시간은 짧고, 삶은 덧없습니다. 설령 일흔이나 여든까지 삶이 이어진다 해도, 이는 끝없는 세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한 푼을 먼저 내면, 수많은 금을 얻으리라; 한 순간을 먼저 내면, 끝없는 영원을 얻으리라; 한 시간의 수고를 견디면, 끝없는 안식을 얻으리라; 눈물을 흘려, 영원한 기쁨으로 기뻐하리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위해 통곡하여, 끝없는 환희 속에서 기뻐하리라. 그러므로 높은 지위의 영광을 바라보며, 기쁜 마음으로 선한 일을 행하며 힘쓰십시오. 여러분이 생을 마감할 때가 되어 이 세상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넘어갈 때까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렇게 하십시오.

 

89.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아브라함처럼 모든 것을 버렸으니, 슬퍼하지 말고 소망으로 용기를 내어 모든 것을 견뎌내십시오. 앞에는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89. 1)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아브라함처럼 모든 것을 버렸으니, 슬퍼하지 말고 소망으로 용기를 내어 모든 것을 견뎌내십시오. 앞에는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 2) 부적절한 일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도둑질도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어떤 것과도 어울리지 않으며, 벌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 3) 사순절: 배를 신으로 삼지 말고, 오히려 미덕으로 가득 차십시오. [2, 12]

22. 복음의 말씀에 순종하고 온 세상을 버리며, 이 위대하고 복되며 천국에 이르는 순종의 사명을 스스로 짊어진 하나님의 자녀 여러분에게, 제가 무슨 말을 해야 마땅하겠습니까? – 그러나 겸손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께서 성령의 임재로 여러분을 위로하시고, 그분의 계명의 길로 여러분을 올바르게 인도하시며, 그분의 왕국의 상속자로 삼아 주시기를 빕니다. 오, 나의 형제들이여! 하나님께서 부르셨을 때, 조상 아브라함의 본을 따라 너희의 땅과 친족, 아버지의 집을 떠나, 주님께서 친히 너희에게 보여 주시고 그곳에 이르도록 인도하신 이 수도의 장소로 왔을 때, 너희는 얼마나 선한 일을 행하였고, 얼마나 지혜로운 결정을 내렸는가? 여러분은 육신의 속된 생각들을 이겨내고 그보다 더 높은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혈연의 정이 여러분을 붙잡게도 하지 않았고, 익숙한 삶이 멈추게 하지도 않았으며, 조상의 유산에 얽매이게 하지도 않았고, 그 밖의 그 어떤 것도 여러분에게 걸림돌이 되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복이 있고 지극히 복된 자들입니다. 그러니 낙심하지 말고, 슬퍼하지도 말고, 기운을 잃지 마십시오. 오히려 여러분에게 약속된 복을 소망하며, 현재의 슬픔과 수행의 고단함을 초월하여, 기쁨과 즐거움으로 여러분의 길을 걸어가십시오. 그리고 인내로 용감하고 활기차게 날마다, 주마다, 달마다, 해마다를 견뎌내십시오. – 그럼 결국 어떻게 되겠습니까? – 주님께서 하늘과 땅을 불러내어 당신의 백성을 심판하실 때, 여러분은 썩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으로 장식되실 것입니다.

23. 나태함에 빠지지 말고, 졸지 말고, 미지근하지 말고, 다투지 말고, 싸우지 말고, 비방하지 말고, 헛소리를 하지 말고, 탐식하지 말고, – 듣기 거북한 말을 덧붙이자면, – 그리고 오직 어떤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지만, – 도둑질하지 마십시오. – 견과류를 훔치기 시작한 자는 더 큰 일까지 저지르게 되고, 깃펜을 훔치는 데 익숙해진 자는 옷까지 손대게 된다. – 우리 가운데서도 옷, 허리띠, 신발, 그리고 그 밖의 이것저것을 훔치는 일이 있다. 이것이 옳은 일입니까? 이것이 그리스도의 종들입니까? 이것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들입니까? 이것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 하늘의 유업을 찾는 자들입니까? 이것이 성도와 복된 자라 불리며, 사람들로부터 경의를 받는 자들입니까? 이것이 바로 여러분의 노력이고, 여러분의 성취이며, 여러분의 완성이란 말입니까? – 그러나 이것은 결코 일반적인 죄가 아닙니다. 제가 칭찬에서 질책으로 넘어간다 해도 놀라지 마십시오. 어떤 이들에게는 한 가지 말이, 다른 이들에게는 또 다른 말이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 설령 그런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제부터는 결코 없기를 – 청하며, 간청하며, 명령하며, 경고합니다. 이 권고 이후에도 누군가 그런 일을 저지른다면, 회개와 고백으로 하느님을 달래지 않는 한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배제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전에도 훔친 자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드러내는 것 외에는 치유될 수 없습니다. 예전에 어떤 물건들을 훔쳐 숨긴 것이 아하르를 돌로 쳐 죽이는 결과로 이어졌던 것처럼(여호수아 7, 21. 25), 이 정욕에 사로잡혀 죄를 인정하지 않는 자도 보이지 않는 돌들에 맞아 죽을 것이니, 그러므로 넘어진 자는 일어나 주님을 의지하여 살아가라.

24. 이제 사순절이 시작되었다. 그러니 때때로 헛된 일에 몰두했던 일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마치 제사 날처럼 배를 채우는 자들을 본받지 말라. 배에 노예가 된 자에게는 “배가 신이요, 그 배를 자랑하는 것이 영광”이다(빌 3,19).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을 골라 그의 마음과 몸이 어떤지 살펴보라. – 이것이 바람직한가, 내게 말해 보라. 이것이 본받을 만한가? – 물론 아니다. 오히려 온갖 혐오와 경멸을 받을 만하다. 너는 고기와 포도주 없이, 소박한 식사로 배를 채우는 데 만족하라. 몸을 채우는 데 신경 쓰지 말고, 성령의 열매—평화, 사랑, 소망, 믿음, 기도, 시편 찬양, 시 낭송, 순종, 겸손, 기도, 이른 기상, 악의를 품지 않음, 단순함, 순수한 생각, 회개, 정화하는 눈물 – 이것이 네게 항상 금식하는 태도가 되게 하라.

 

90. 나에게 주어진 의무는 여러분을 항상 싸움에 나서도록 격려하는 것이니, 여러분에게도 주어진 의무는 항상 영적인 무장을 갖추고 싸우는 것입니다

90. 1) 내가 여러분을 싸움에 항상 격려하는 것이 나의 의무인 것처럼, 여러분도 항상 영적인 무장을 갖추고 싸워야 합니다. – 2) 싸움이 오래 지속된다고 불평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투사들의 예를 들며 용기를 내라고 권고합니다. – 3) 유령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두려움 없는 마음과 기도가 유령을 물리치는 최선의 수단입니다. [2, 13]

1. 하나님의 일을 위해 지칠 줄 모르고 수고하며, 복되지만 고된 순종을 실천하는 여러분에게, 제가 항상 위로와 권면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시급한 일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위업과 원수의 계략에 맞서는 투쟁이 어느 특정 시점에 중단된다면, 제가 여러분에게 드리는 위로와 권면도 중단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들이 결코 멈추지 않고 밤낮으로 쉼을 주지 않으니, 공정하게 볼 때 저에게도 그에 상응하여 여러분의 영혼에 위로와 격려, 그리고 희망을 불어넣어, 보이지 않는 적군들을 소탕할 힘과 기백, 열정을 북돋아 드릴 의무가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전사는 언제나 전사답게 행동해야 하며, 그 칭호에 요구되는 모든 것을 엄격히 지켜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참된 전사인 여러분도 항상 여러분의 무기가 제자리에 있는지, 여러분 각자가 순종의 칼, 믿음의 갑옷, 구원의 소망의 투구, 겸손의 방패, 기도의 활, 그리고 우리의 영적 전쟁에 필요한 그 밖의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육신의 전사가 온전한 무장을 한 모습을 보는 것만큼이나, 앞서 말한 모든 것을 갖춘 그리스도의 전사를 보는 것은 참으로 아름답고 경이로울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자녀들아, 무장하고, 방어하고, 질서를 갖추고, 싸우며, 너희와 싸우는 마귀를 이기라. 그리고 너희에게 일어나는 어떤 일에도, 타격과 공격을 받는 일에도, 미끄러져 넘어지는 일에도 놀라지 말고, 다만 재빨리 일어나라.

2. 어떤 이들은 수치스러운 정욕이나 분노, 모독, 시기, 변덕, 혹은 그와 유사한 것들에 시달린다는 사실에 분개하거나 놀라거나 심지어 절망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그들 자신에게 놀라움을 느낀다. 말해 보시오, 형제여, 과연 그토록 수고와 고난 없이, 투쟁과 승리 없이 면류관을 얻을 수 있다고 기대하십니까? – 그러나 그는 말합니다: “저는 벌써 몇 년이나 되었고, 몇 번이나 금식하고, 고해성사를 보고, 성체를 모셨으며, 이것저것을 실천했고, 눈물과 한숨으로 넘쳐흘렀으며, 저와 함께 살던 형제들이 연약할 때 그들에게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아아, 이것이 무슨 지혜란 말인가?! 말해 보시오, 그대는 이 싸움에서 몇 년을 보냈습니까? 세 살, 다섯 살, 열 살? 그러나 복된 암마 사라는 사십 년 동안 음행의 악마와 용감하게 싸웠고, 이를 용기 있게 견뎌 냈습니다. 감히 아바 파호메에 대해, 그리고 그가 교회에서 스스로 옷을 벗은 일, 또 아바 아폴로스가 힘을 실어준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언급하고자 합니다. 게다가 왜 내가 셀 수 없이 많은 예들을 들겠는가? 어떤 위업과 투쟁을 통해 진실한 투사들이 승자로 나섰는지, 어떤 이는 이렇고 어떤 이는 저렇지만, 어디에도 낙담함이 없고, 어디에도 비겁함이 없으며, 어디에도 용기를 잃은 적이 없었다. 그들이 자신의 연약함 속에서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까지, 하늘의 손길로 원수의 공격을 물리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비겁한 자들답게 비겁하고, 부주의하며, 훈련받지 못한 채 말하고 행동합니다. – 내가 이것을 상기시키는 것은, 우리가 낙담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운차고 흔들림 없이 서기 위함이며, 각자가 마음속으로 “만일 군대가 나를 치려 해도 내 마음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만일 전쟁이 나를 대적하더라도 나는 그분을 의지하리라”(시 26:3)라고 고백하게 하려는 것이다.

3. 때때로 악마가 밤에 몽상 속에서 만들어 내는 공포와 흉상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악마는 마음대로 변신하고 모양을 바꾸며 이것저것을 보여줍니다. 때로는 소리를 내거나 이름을 부르기도 하고, 사자의 모습을 취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두려움 없는 마음으로 과감히 그를 공격하십시오. 그러면 그가 먼지처럼 흩어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만약 그가 지붕 높이만큼이나 크고 위압적으로 보인다면, 기도에 의지하라. 그러면 위대한 안토니우스처럼 그가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가 너에게 다가와 공격하는 것처럼 보이거나, 네 거처를 뒤흔들어 너를 덮치는 것처럼 보여도 두려워하지 마라. 모든 것은 마치 꿈처럼 지나갈 것이다. 이런 일은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자들에게 일어나는 법이니(시편 13:5). 그러니 주의를 기울이고, 전혀 두렵지 않은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자가, 너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께 기도하는 힘으로 인해 너희를 두려워하게 하라.

 

91. 봄이 왔으니, 조심하십시오. 포도주를 삼가고, 배불리 먹지 말며, 성에 갈 때는 조심하고, 거기서 세속적인 것들을 수도원으로 가져오지 말 것을 권고합니다.

91. 1) 봄이 왔으니, 조심하십시오. 포도주를 삼가고, 배불리 먹지 말며, 마을에 갈 때는 주의하고, 거기서 세속적인 것들을 수도원으로 가져오지 말 것을 권고합니다. – 2) 덧붙여, 규정을 어기고 채소밭에 가서 채소를 요구하는 사람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2, 14]

4. 하나님을 의지하여 굳건하고 흔들림 없이 서며, 마귀의 복잡하게 얽힌 계략을 깨뜨리고, 정욕을 초월하여 육체의 쾌락과 욕망을 짓밟으며,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순결과 정결을 지키십시오. 보십시오, 지금은 봄철이라 모든 생명체가 생명을 낳기 위해 움직이는 때입니다. 이에 맞춰 우리는 수면과 식사를 조절해야 합니다. 사도는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좋고, 포도주를 마시지 않는 것이 좋으며, 형제가 그로 인해 유혹을 받지 않도록 하라”고 말합니다(롬 14,21). 형제 여러분, 저도 권고하는 차원에서, 법으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순수한 영혼을 위해, 게다가 병든 자들이 아니라 건강한 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포도주를 마시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젊은 여러분은 더욱 그러합니다. 왜냐하면 포도주는 정욕을 불태우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본성에 내재된 쾌락으로 인해 내면이 요동치고 있는데, 굳이 포도주가 주는 자극까지 우리 안에 들여보낼 필요가 있겠습니까? 직접 체험해 보시면 포도주를 절제하는 것이 얼마나 유익한지 알게 될 것입니다. 포도주를 절제하는 사람은 생각이 휘둘리지 않고, 마음이 달아오르지 않으며, 항상 하나님에 대한 사랑 안에서 정신을 차리고, 모든 선한 일과 구원에 기여하는 일에 열심인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포도주를 삼가는 자는 성령을 품고 있으며, 물을 마시는 자는 겸손의 옷을 입는다. – 음식에 관해서도 너희에게 권고하노라, 자녀들아. 말할 수 없는 포만감과 끊임없는 배부름을 피하십시오. 그것들은 음행과 소돔의 씨앗이 됩니다. 그러나 다른 모든 주의 사항을 지키면서 음식과 음료를 섭취할 때는, 달콤함에 지배당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지배하며, 육체에 지배당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다스리도록 하십시오. 영혼 과 육체 간의 관계에서 가장 바람직한 질서는, 낮은 것이 높은 것을 억압하지 않는 것이다. 수도원을 나가는 일에 관해서는, 형제들을 혼란스럽게 할 수 있는 세속적인 대화를 수도원 안으로 들여오지 말라는 규칙을 굳게 지키라.

5. 너희 중 어떤 이들은 텃밭에 들어가 채소 재배자에게 채소를 요구하고, 규정에 따라 받지 못하면 그와 다투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는 사탄의 짓이며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런 자들은 참회를 부과받을 것이다. 제공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채소 한 조각에 굴복하는 네가 어떻게 정욕을 이겨낼 수 있겠느냐? 내 겸손한 형제여, 절제로 마음을 굳건히 다지지 않는다면 깃털보다도 가벼워질 것이다. 절제하지 못하던 자들이 절제하는 자로, 정욕에 사로잡힌 자들이 무욕한 자로 변해 왔듯이, 우리도 모든 일에 엄격히 스스로를 다스리는 데 게으르지 않는다면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주님께서 너희를 굳건히 하시고 확고하게 하시기를 바란다.

 

92. 자기 의지를 끊어내는 것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미덕이다

92. 1) 자기 의지를 끊어내는 것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미덕이다. – 2) 시간은 흐르고 있다; – 곧 죽음이 닥칠 것이며, 그곳에는 오직 선한 자들만이 인정받을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 모든 악을 피하며 그런 사람이 되자. – 3) 아이들이 수도원에서 양육된다는 것에 대한 불평은 어리석은 일이다. [2,15]

6. 천국으로 가는 길은 많으면서도 단 하나뿐이다. 단 하나인 이유는, 본질은 하나이기에 미덕은 다양한 선행을 통해 실현되고 실천되기 때문이다. 이 유일하고 전능한 미덕을 받아들이자. 한 사람은 하느님을 본받는 순종의 길, 즉 방해받지 않고 끊어지지 않는 길을 걷게 하라; 다른 이는 그리스도를 닮은 겸손의 길, 곧 매끄럽고 가장 짧은 길을 걸어가게 하소서; 이쪽이든 저쪽이든 모두 자신의 뜻을 잘라내는 것을 흠 없는 제물로 바치게 하소서. “누가 생명을 원하며, 좋은 날들을 보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겠는가?”라고 나도 선지자와 함께 묻겠고, 이렇게 대답하리라: “자신의 뜻을 진실로 잘라내는 자이다.” “이 사람은 살 것이며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시 88:49) 타락에서 벗어나, 자신의 영혼을 음부의 손아귀에서 구원하는 자이다. 이 사람은 빛의 아들이며, 온갖 정욕에서 정화된 영혼을 가진 자이다. 그는 모든 정욕을 뿌리째 뽑아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슬픔과 불행, 다툼과 논쟁, 시기심이 어디서 오는가? 우리가 고집을 부리고, 자신의 결정과 소망을 옹호하려 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렇다, 진실로 그러하다. 그리고 이 자기 의지를 잘라내는 것 외에는, 우리를 마귀의 계략에서 구원할 다른 방법이 없다.

7. 날들이 하루하루 흘러가고, 오고 가며; 강물처럼 우리 삶은 앞을 향해 서둘러 나아가며 죽음에 가까워집니다. 하찮고 일시적인 것으로 영원한 하늘의 것을 얻는 여러분은 복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성스러운 천사들이 모인 가운데 영광의 보좌에 앉으실 날이 올 것이며, 그분께서 여러분을 부르셔서 의인들의 거처에 모시게 하실 것입니다. – 그러나 어떤 자들인가? 순종하고, 복종하며, 경건하고, 선을 사랑하며, 마음이 청결하고, 통회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을 좋아하고, 근면하며, 아버지를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며, 침묵을 사랑하고, 기도를 사랑하는 자들,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신성한 일을 부지런히 실천하는 자들이다. 여러분 가운데는 한 가지가 아니라 많은 미덕으로 아름답게 단장된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많은 은혜로운 은사들로 빛나며, 인간 자녀들보다 더 큰 선함으로 빛납니다. 그러니 우리가 추하고 타락시키는 죄의 수치에 가까이 가지 않도록 합시다. 오히려 해로운 건방짐, 서로를 악의적으로 훑어보는 시선, 제멋대로인 미소, 사탄적인 불평, 악의적인 원한으로부터 멀리 도망치자. 그리고 음식, 음료, 옷, 순종 등 무엇이든 간에 모든 것을 선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자. 이것이 바로 여러분을 위한 선한 업적이며, 이것이 바로 여러분의 성실함을 증명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영적 전쟁에서 여러분의 성공이며, 이것이 마침내 여러분이 받게 될 면류관입니다.

8. 어떤 무지한 자들이 우리 수도원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을 보고는 “이것이 바로 우리가 멸망할 이유다! 이것이 바로 수도원이 황폐해질 이유다!”라고 말한다고 들었습니다. –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이는 다름 아닌 주님을 정죄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이런 자들에게 있다” (마가복음 10,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갓난아기가 아니셨습니까? 젖을 먹지 않으셨습니까? 어린아이가 아니셨습니까? “열두 살”의 소년이 아니셨습니까? (누가복음 2:42). 기적을 행하기 시작하신 “서른 살 무렵”의 완전한 성인이 아니셨습니까? (누가복음 3:23). 그런데 왜 이 사람은 침묵하고, 자신의 파멸이 바로 자신에게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스스로 더 깊이 탄식하지 않는가? – 이런 사람들은 수도원장보다 훨씬 더 현명하고 이성적이며, 옳은 길보다 더 옳은 길을 걷고, 정해진 규칙을 벗어나 방황하면서도 하나님을 마땅히 사랑해야 할 정도 이상으로 사랑한다고 주장한다. – 다만 덧붙이자면: 만일 그렇게 말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이 말이 바람 한 줄기처럼 지나가게 두겠고, 나는 누구도 책망하지 않겠다; 만일 있다면, 스스로를 바로잡아 마귀의 올가미에 빠지지 않도록 하라. 그 성스러운 장로는 무엇을 말했는가? “아이가 내게 명령하는 것은, 마치 내 주님의 아들이 내게 명령하신 것처럼 받아들이리라.” – 아니면 여러분은 읽고 있는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가요?! –

 

93. 모든 일에 선을 행하며 힘쓰라. 수고는 크나 상은 더 크니, 더욱더 힘내어 전진하라

93. 1) 모든 일에서 선을 위해 힘쓰라. 수고는 크나 상은 더 크니, 더욱더 번창하라. – 2) 너희에게 유혹이 많으나, 낙심하지 말라. 주님께서 가까이 계시니라. 또한 장차 올 안식을 마음에 새기면, 결코 용기를 잃지 않을 것이다. [2, 16]

9. 주님의 말씀대로: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구원하라”(눅 21,19); 너희는 수련자의 삶에서 겪는 수고와 고된 시련을 낙담하지 말고 견뎌내며, “주님의 율법을 밤낮으로 배우라” 하여 “물 솟는 곳 곁에 심긴 나무” (시 1, 3). 여러분에게는 수고가 많으나 하나님의 은사가 더 크고, 땀을 많이 흘리나 영원한 상을 얻으리라. 여러분이 수고하며 온갖 방법으로 자신을 단련하고, 순교자처럼 살며, 창에 찔리기도 하고, 자신의 욕망을 잘라내어 십자가에 못 박히기도 한다는 것을 알고 있노라; 그러나 기뻐하십시오. 하늘나라가 여러분을 위해 준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 복된 불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자가 되는 것, 복된 삶, 행복, 기쁨, 끝이 없는 평안. 이토록 크고 많은 복이 기다리고 있는데, 누가 낙담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죽음으로 인해 소망하는 바에 이르기 전까지, 어떤 고난과 수고 앞에서도 멈춰 설 수 있겠는가? – “현재의 고난이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롬 8:18)을 알면서, 여러분도 정욕의 불볕과 낙담의 무거움, 수고의 피로, 절제의 굶주림, 그리고 그 밖의 모든 면에서의 궁핍과 부족함을 겪지 않았습니까? 그리하여 사도와 함께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하루 종일 죽임을 당하며, 마치 도살당할 양들처럼 여겨지나이다.” (롬 8:36). 여러분은 악마의 망상과 정욕의 반란을 두려워하지 않고, 덕의 높은 곳으로 나아가며 번영하고 계십니다. – 그러나 이 말씀은 게으름 피우고, 흔들리며, 방탕하게 사는 이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굳건히 세우고 기름 부어 주어서, 경건의 길을 잘 완주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두 오십시오. 두려움에 두려움을 더하여, 서로에게 선하고, 온유하며, 사랑이 넘치고, 순종하며, 친절하고, 시기하지 않으며, 욕심 부리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허영심에 빠지지 않고, 혼란을 일으키지 않으며, 불평하지 맙시다. 여러분의 선한 삶의 기초는 인내입니다.

10. 매일 여러분에게 많은 슬픔이 닥치는 것은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여러분의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영원한 복을 상속받기 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이 모든 수고와 피로, 노력과 고군분투, 땀과 굶주림, 비좁음과 신음, 혼란스러운 생각과 유혹의 파도, 이 삶의 바다에서 보이지 않는 적들이 우리에게 몰아치는 것들이 바로 이를 위한 것이라면, 우리는 결코 낙담하거나 두려워하거나 절망에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니, 그분은 손을 뻗어 이 바다에게 “잠잠하라, 그치라”(막 4:39)고 말씀하실 것이며, 큰 고요가 찾아올 것입니다. 우리도 그저 더욱 힘내고, 더욱 서두르고, 더욱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나는 우리가 항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재앙에서 구원받아 무사히 천국이라는 항구에 들어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병과 슬픔과 신음 소리가 사라질 것”입니다(이사야 35:10). – 빛과 생명, 기쁨, 평화, 위로,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안식이 비추는 이 일과 이토록 큰 수고보다 더 복된 것이 무엇이겠는가? 누구든지 이러한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덕의 길을 걷는 자는, 이미 짊어지고 있는 고난과 슬픔 때문이든, 혹은 앞으로 닥칠 일—그것이 죽음이든, 갈비뼈가 찢어지든, 피가 쏟아지든—때문이라도 결코 지치지 않고, 멈추지 않으며, 뒤로 물러서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순교자들은 스스로 고문을 자처하고 온갖 종류의 고통을 견뎌냈으며, 이 때문에 성자들은 경건함을 추구하며 모든 수행의 수고를 감당했습니다. 이 때문에 저도 여러분을 초대하고 설득하여, 여러분의 복된 복종과 순교적인 순종을 통해 영광의 면류관을 쓰게 될 수 있도록 이 고귀한 길에 나서기를 권합니다. 아, 간청하오니, 우리가 그 형언할 수 없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복, 곧 천국 왕국의 아들들과 상속자라는 칭호,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기쁨, 모든 성인들이 헤아릴 수 없는 기쁨 속에서 기뻐하며 환호하고, 형언할 수 없는 그 신성한 축복을 만끽하고 있는 바로 그 자리, 주님의 우편에 서는 영광을 누리는 그 자리를 말입니다.

 

94. 우리가 수도원에 온 이유가 무엇인지 아시다시피, 그에 반하는 어떤 일도 용납하지 마십시오.

94. 1) 우리가 왜 이 수도원에 왔는지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목적에 반하는 어떤 것도 용납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그렇게 하고 있지만, 여러분의 수고가 헛되이 사라지지 않도록 하십시오. – 2) 저는 여러분을 염려하며 더 나은 길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왜 여러분은 제멋대로 고행, 쇠사슬, 광야 생활 같은 것들을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입니까? 그것은 유익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공동 생활 자체가 수행에 가장 적합합니다. – 3) 다른 이들보다 더 높이 서고자 하는 자는, 수행의 미덕, 즉 육체적·영적 미덕에서 모두를 능가하도록 힘쓰십시오. 이러한 미덕을 함양하는 데는 공동 생활만큼 편리한 곳이 없습니다. – 4) 수도원에서 어떤 덕목에서 뛰어난 이들이 있는지 열거하며, 열성적인 이들은 그들을 본받도록 권고한다. [2, 17]

11. 우리가 세속을 떠나 부모, 친척, 혈육의 친구들, 도시, 고향, 마을, 집을 뒤로하고 이곳에 온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 영혼을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겠는가? 이전에 저지른 죄의 용서를 받기 위함이 아니겠는가? 하느님께 기쁨을 드리기 위함이 아니겠는가? 영원한 복을 얻기 위함이 아니겠는가? 육신을 벗은 영들, 거룩하고 삼중으로 복된 우리 선조들과 겨루며 천사처럼 살기 위함이 아니겠는가? – 그렇다면 이제 와서 우리가 그와 정반대되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되겠지요. 울음 대신 웃고, 회개 대신 즐거워하며, 경건함 대신 신성모독을 일삼고, 기도 대신 헛된 일에 분주해하며, 평안 대신 정신없이 맴돌고, 침묵 대신 소란을 피우며, 정화 대신 더럽혀지고, 온유함 대신 건방지게 굴고, 금식 대신 절제 없이 방종에 빠지고, 시편 찬양 대신 험담을 일삼고, 순종 대신 제멋대로 행동하고, 겸손 대신 자만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의 대적은 보통 자신의 서원을 잊은 자들을 그 서원과 어울리지 않는 일들로 유혹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왜 이곳에 모였는지, 그리고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얼마나 열정적으로 노력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죄를 씻어내고 거룩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자녀들아, 간청하노니, 여러분의 수고가 헛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 여러분은 얼마나, 그리고 어떤 고난을 견디고 계십니까? 얼마나 금식해 왔으며 지금도 금식하고 계십니까? 기도에 얼마나 열심을 썼고 지금도 쓰고 계십니까? 모욕과 모독, 박탈을 얼마나 견뎌냈고 지금도 견디고 계십니까? 그리고 전반적으로 여러분의 삶을 바로잡기 위해 이미 얼마나 많은 일을 이루었고 지금도 이루고 계십니까? – 그러니 냉담함이나 어떤 순간적인 쾌락이 이 풍성하고 간절히 바랐던 여러분의 행실을 망치게 두지 마십시오. 오히려 이전의 수고에 새로운 수고를 더하여, 이 짧은 생의 여정을 잘 마쳐, 끝없는 생명의 고요한 안식처에 믿음으로 들어서게 하십시오.

12. 주님, 제가 여러분 한 분 한 분의 안식을 얼마나 염려하는지 아십니다. 저는 제 마음을 여러분의 상황에 맞춰 다잡습니다. 슬퍼하는 자와 함께 슬퍼하고, 지친 자와 함께 지치며, 마치 영혼이 연약한 자처럼, 소심한 자와 함께 소심해지며, 싸우는 자와 함께 싸우고, 궁핍한 자와 함께 궁핍해지며, 유혹받는 자와 함께 격앙됩니다. 그렇다면, 왜 여러분은 제가 이렇게 하는 것을 방해하며, 여러분에게 명령된 바에 따르지 않고, 오히려 반대하며 자신의 욕망, 아니, 더 정확히 말해 해로운 정욕과 교만한 의지를 내세워, 순종의 법과 공동체적 삶의 질서에 정면으로 반하여, 제멋대로 어떤 새로운 규칙들을 만들어 내고, 그것들이야말로 가장 거룩하고 신성한 것이라고 주장하는가? –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불경건과 불법이 아닌가? 어떤 이들은 제멋대로, 혹은 더 나아가 마귀의 명령에 따라, 은밀히, 내 모르게 쇠사슬을 채우고 다른 이들도 그렇게 하도록 유도하며, 이 마귀의 죄에 동참하게 합니다; 또 다른 이들은 마귀가 그들을 텅 빈 존재로 만들려는 뜻에 순종하며 은둔 생활을 찬양하고, 또 다른 이들은 이러저러한 것을 꾸며내어 제안하는데, 물론 이는 우리 영혼을 파멸시키는 원수의 속삭임에 따른 것이며, 나는 이를 드러내고 싶지도 않습니다. 왜 자신의 현재 삶, 즉 타당하고 하느님께 기쁘시며 구원을 주는 삶을 돌보지 않고 이런 일을 하는가? – 성스러운 분들 중 누가 그렇게 했는가? 설령 누군가 그렇게 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위로부터의 어떤 지시에 따라, 혹은 자신의 영적 지도자의 축복을 받아 결심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러분은 아직 과거의 죄에서 정화되지 않았거나, 설령 정화되었다 하더라도 내면이 아직 평온하지 않고 사물을 분별하는 달콤함을 맛보지 못한 채, 무지함과 제멋대로인 태도로 눈멀어, 뱀의 유혹에 밀려 급류 속의 공처럼 그곳으로 내달리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나의 자녀들아, 결코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믿으십시오. 여러분에게 있어 가장 지혜로운 자들 중에서도 가장 지혜롭고, 가장 거룩한 자들 중에서도 가장 거룩하며, 가장 유익한 일들 중에서도 가장 유익한 일은, 주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신 그 소명에 머무르는 것, 즉 아버지의 지도 아래 형제들과 교제하며, 이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영적 양육의 장에서 함께 사는 것입니다. 이곳을 떠나는 자는 짐승에게 잡히게 되나, 이곳에 머무는 자는 이곳의 뚜렷한 특성들—일치, 한마음, 동역, 협력, 함께 겪는 고난, 하나님을 함께 찬양하는 것—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다른 이들과 구별되기 위해 어떤 것도 꾸며내서는 안 됩니다.

13. 덕행에서 다른 이들을 능가하고자 하는 자는, 마음속으로 자신을 모든 사람보다 낮게 여기며, 누구와도 다투지 말고, 입에서 아첨이나 불평이 나오지 않게 하라; 분노에는 “미지근”하고, 순종에는 신속하며, 말다툼이 있을 때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데에는 더욱 신속해야 한다. 내면의 평온함과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로 인해 얼굴은 밝고 기쁜 표정을 지으며, 눈은 아래로 숙이고 마음은 하나님을 향해야 한다; 항상 웃음을 자제하고, 온화한 미소 이상으로 넘치지 않게 하라; 말에서도 절제하여, 부패한 말은 단 한 마디도 허용하지 말고, 교훈이 되지 않는 말도 하지 않게 하라; 공동 식탁에 차려진 것으로 만족하며, 그것도 배부르게 먹지 않게 하라; 정해진 수면 시간으로 만족하고, 예배 때는 정신을 차리고 명료한 상태로 서서, 단 한 구절도 놓치지 않도록 노력할 것이며; 매일 죽음을 준비하며, 심지어 저녁까지 삶의 한계를 넘기지 말고, 영혼이 육신을 떠날 준비가 항상 되어 있을 것이며; 매일 눈물의 강을 흘리며, 특히 저녁에는 신음하며 뺨을 적시되, 소홀히 한 일들 에서 저지른 일들과, 죽음의 순간에 영혼이 육신과 분리될 때, 천사들이 어떻게 그 영혼을 데려갈지, 어떻게 악마들의 시련을 겪을지, 그리고 생전에 행한 모든 일, 즉 행함과 생각으로, 그 후 그 가련한 영혼이 어디에 머물게 될지, 즉 주님의 오른편에 서게 될지, 아브라함의 품에서 안식을 누리고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복을 누리게 될지, 아니면 염소 떼에게로 떠나 그들과 함께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 마귀와 그의 사자들에게 예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마태복음 25,41). – 바로 이 점에서 다른 이들을 능가하기 위해 여러분 각자는 게으름 피우지 말고 열심을 내야 합니다. 그러나 이를 성취할 수 있는 곳은 어디에서도 공동체 생활만큼 좋은 곳이 없습니다. 성 바실리오 대교부에 따르면, 공동체는 온갖 미덕이 자라나는 밭이기 때문입니다.

14. 나는 여러분 중 일부의 미덕을, 이름을 밝히지 않고 알리고자 합니다. 이는 마땅히 살아가지 않는 이들에게 경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어떤 날,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과 불타는 사랑으로 인해 잠을 전혀 자지 않는 이들이 있습니다; 뜨거운 눈물 없이 하루도 보내지 않는 ‘눈물의 사람들’도 있고; 미리 눈물로 흠뻑 적시지 않으면 성찬식에 참여조차 하지 않는 이들도 있으며; 순결을 지킬 목적으로 타인의 얼굴을 아예 쳐다보지 않는 이들도 있고; 앉은 채로 수면을 취하는 이들도 있으며; 식사 시간 외에는 아무것도 마시거나 먹지 않는 이들도 있고; 옷이나 신발, 혹은 그 밖의 어떤 것도 청한 적이 없으며, 오직 구원을 위해 금식이나 기도, 혹은 그 밖의 어떤 고행을 정해주기를 청하는 이들도 있다. – 이것이 바로 마음이 바른 자들이며, 진심으로 하늘의 것을 구하는 자들이다; 바로 자신의 구원을 열정적으로 염려하며 이웃에게 해가 되지 않도록 애쓰는 이들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온갖 방법으로 이웃을 돕고자 하며, 자신의 행실로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를 상기시켜 게으른 자들을 부지런히 일하도록, 넘어진 자들을 다시 일어서게 하는 이들입니다. 원하시는 분은 이러한 이들을 본받으십시오. 만약 그런 소망이 없다면, 일반적으로 정해진 선한 행실들로 만족하십시오. 절제는 구원을 가져다주며, 이를 성실하게 지키는 자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자비로우시고 관대한 하나님으로부터 면류관을 받을 것입니다.

 

95. 우리는 그리스도의 군대입니다. 보십시오, 여러분의 모든 무기가 준비되어 있는지; 원수는 잠들지 않으니, 싸우십시오

95. 1) 우리는 그리스도의 군대입니다. 보십시오, 여러분의 모든 무기가 준비되어 있는지; 원수는 잠들지 않으니, 싸우십시오. – 2) 모든 일에 순종하십시오. 우리의 삶은 한순간이지만, 우리는 이 한순간 안에 영원한 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게으름 피우지 말고 힘써 일하십시오. [2, 18]

15. 우리, 곧 그리스도의 군대, 온 세상에서 주님께 선택된 예물, 하나님께 바쳐진 제물은, 피와 살로 된 원수들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어둠의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세력들, 악의 영들과 싸우는 것입니다(엡 6, 12). 왜냐하면 우리에게 필수적인 일인, 한데 모여 의논하고 토론하는 일은 일 년에 한 번, 두 번, 세 번이 아니라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원수들 사이의 싸움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우리는 끊임없이 유혹에 시달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보라, 그리스도의 전사들아, 너희 영혼이 참호로 둘러싸여 있는지, 믿음의 갑옷을 입고 있는지, 겸손의 방패를 가지고 있는지, 순종의 창을 준비해 두고 있는지, 구원의 소망의 투구가 너희를 덮고 있는지, 너희 손에 용기의 칼이 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너희의 고귀한 몸이 온순하고 온화하며, 훈련되어 있고 다루기 쉬운지, 그렇지 않으면 재갈을 물고도 기수인 마음을 적들 앞에서 떨쳐버리지 않을지? – 그렇다, 여러분은 이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 내가 직접 여러분을 위해 보증하리라. 그러나 계속해서 무장하십시오. 왜냐하면 “높은 곳에서” 우리를 “싸우는 자들이 많기”(시 55:3) 때문이며, 또한 악한 자의 화살이 불타오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단 한 순간도 뒤처지지 않고, 먹지도 마시지도 자지도 않으며, 낮과 밤으로 싸우고 있습니다. 마치 그가 어딘가에서 한 성부에게 말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의 생명이 생명이 아니며, 그 행위가 해로운 것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꺾고, 마음이 의로운 자를 죽이려” (시 36:14)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그의 “칼”이 그의 “심장에 꽂히게” 하고, 그의 “화살”이 “부서지게” 하라 (시 36:15). 어떻게? 바로 그 무기들로 그를 물리쳐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파괴하는 자 자신이 자백했듯이, 겸손한 지혜가 그를 꺾고, 순종이 그를 무찌르며, 기도가 그를 도망치게 하고, 금식이 그를 굶주리게 하며, 형제 사랑과 그 밖의 모든 미덕의 실천이 그를 무너뜨립니다.

16. 죄의 포로인 제가 여러분께 간청하오니, 우리가 부름받은 소명에 합당하게 행합시다. 인내를 굳게 지키며, 손으로 하는 모든 일—밭을 일구고, 텃밭을 갈고, 옷을 짓고, 책을 베껴 쓰고, 목공을 하고, 빵을 굽는 일, 그리고 그 밖의 모든 기술과 순종—에 힘쓰십시오. 이 모든 것에 대해 하늘에서 여러분을 위한 큰 상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보라, 우리 삶은 마치 빠른 달리기 선수처럼 달려가고, 새들이 날아오르듯 날아갑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우리는, 형제들아, 좋은 거래를 성사시킬 수 있습니다. 단 한 순간 만에 우리는 모든 세대의 복을 상속받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진실로 우리 삶의 전 과정은 끝없는 영원에 비하면 단 한 순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일곱 가지를 하나로 합쳐 필요한 것을 마련한 자들은 복이 있으며, 세상을 미워한 자들은 세 배로 복이 있으며, 주님을 위하여 부모와 친척, 친구, 형제, 그리고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버린 자들은 지극히 복이 있습니다. – 여러분이 이를 행하였으니, 어찌 여러분이 영광을 받지 않겠습니까?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나를 영화롭게 하는 자를 내가 영화롭게 하겠고, 나를 멸시하는 자는 수치를 당하리라.” – 너희는 참으로 너희 지체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리스도의 지체는 거룩하게 되었으니, 너희 자신을 제물로 바치고 순종을 통해 끊임없이 열매를 맺으라. 그러므로 아무도 자신의 선한 행보를 멈추지 말고, 누구도 낙담하거나 게으름 피우지 말며, 누구도 졸거나 잠에 빠지지 말라. 너희 모두는 서로 협력하고, 사랑의 유대로 결속되며, 뜻을 하나로 모으고, 마음을 하나로 합하라. 하나님을 따라 선한 길을 걷는 자들이 되고, 선한 일을 행하며 끊임없이 전진하는 자들이 되라.

 

96. 우리가 이전에 어떤 존재였는지, 어떻게 부르심을 받았는지, 그리고 지금 어떤 모습인지를 기억합시다. –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드리되, 말로만 그치지 말고 무엇보다도 바른 생활로 감사합시다.

96. 1) 우리가 부르심을 받기 전에는 어떤 사람이었고, 지금은 어떤 사람인지 기억합시다. 그리고 하나님께 말로 감사드리되, 무엇보다도 바른 삶으로 감사드리십시오. – 2) 세상의 이집트를 떠나,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 아래 이 생의 광야를 인내로이 지나가며, 약속의 땅에 들어갈 것을 소망합시다. [2, 19]

17. 우리 안에 주님을 향한 불타는 마음과 영원한 복에 대한 갈망을 등불로 간직하고 있으므로, 이 등불이 꺼지지 않고 우리를 어둠 속에 내버려 두지 않도록 끊임없이 기름을 부어야 한다. 그래야만 어둠 속에서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파멸로 이끄는 정욕의 구덩이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기름이란 무엇인가? 과거에 있었던 일, 현재 있는 일, 그리고 미래에 있을 일에 대한 회상, 묵상, 그리고 성찰이다. – 그러니 우리 청춘의 그 날들을 떠올려 봅시다. 그때 우리는 마치 어둠 속을 걷듯 무지 속에 방황하거나, 마치 바다의 파도처럼 헛된 일들의 흐름에 휩쓸리거나, 마치 물의 심연에 빠지듯 육체적 쾌락에 빠져들곤 했습니다; 그 다음,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곳에서 불러내시고, 손을 뻗어 건져내시며, 평화로운 길을 보여주시고, 이 밝고 거룩한 삶의 본보기를 따르도록 우리에게 영감을 주셨음을 기억합시다; 또한 그 동안 수많은 친척과 지인, 친구 및 동료들이 여전히 그 쓰라린 처지에 머물러 있는 반면, 우리만이 마치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된 것처럼 그곳에서 벗어나 이 높은 산의 거처로 올려졌으며, 이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사람들이 마치 가장 깊은 구덩이 속에서 맴돌듯이 헛되이 허둥대며, 서로 밀치고, 서로 넘어뜨리며, 땀 흘리며 마치 무언가 위대한 것인 양, 변덕스럽고 곧 사라지며 썩어 없어질 세상의 복을 쫓고 있음을 봅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 대가로 지옥에 떨어져 영원한 고통을 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한 가지 큰 구원만으로도, 우리가 얼마나 큰 감사를 느끼고 우리 하나님께 드려야 할까요? – 그러니 끊임없이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을 드립시다. 이스라엘의 노래보다 더 큰 소리로 노래하며: “주님을 찬양하리니, 그분은 영광스럽게 높임을 받으셨도다. 말과 기수를 바다에 던지셨도다” (출 15:1). 그러나 우리가 그 은혜를 마땅히 누리지 않는다면, 즉 세상을 멀리하고, 자기 사람들을 멀리하며, 세상의 복을 아무것도 여기지 않고, 우리 삶의 규율에 기쁘게 순종함으로써 자신을 엄격히 다스리지 않는다면, 그러한 감사는 불완전할 것입니다.

18. 세상과 그 유혹과 정욕에서 벗어나, 이 생의 광야를 잘 헤쳐 나가야 한다. 즉, 온유하고, 순종적이며, 인내심 있고, 너그러우며, 청결함과 주님의 계명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그러나 결코 옛날 그 백성처럼 불평하지 말고, 고집스럽지 말고, 육신을 탐하지 말고, 쾌락을 좇지 말고, 건방지지 말고, 모순되지 말고, 율법을 주신 분께 반역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벗어나고 배척한 이집트의 가마솥들을 떠올리며 말입니다. 그러지 않도록,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우리는 순종하며, 위에서 내려오는 인도하심이 이끄는 곳과 때로 기꺼이 옮겨가며, 항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 여정 중의 고충—식량의 부족, 음료의 결핍 및 그와 유사한 모든 것—을 기꺼이 견뎌내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온유하게 순종한다면, 하나님의 천사가 우리 앞에 앞서 가실 것이며,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방 민족들처럼 정욕을 물리쳐 주실 것이니, 우리는 아모리 족속의 땅이나 가나안 족속, 페레제 족속, 에벳 족속의 땅이 아니라, 온유하고 의로운 자들의 땅, 거룩한 꿀과 젖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가, 주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왕국에서 함께 통치하며 약속된 모든 복을 상속받게 될 것입니다. 형제들아, 우리 앞에 놓인 상을 보십시오. 우리를 위해 마련된 위로를 아시다시피, 그와 정반대로 부주의하게 사는 자들을 기다리는 형벌과 고통도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앞에 놓인 길을 온전한 기쁨과 열정,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인내로 나아가자. 각자가 자신에게 주어진 순종의 의무를 마치 성스러운 일처럼 부지런히 이행하며, 마치 카아프와 메라리아의 아들들(민수기 4, 15)이 한때 성스러운 기구들을 세웠던 것처럼 하자. 누구도 불순종하지 말고, 누구도 불평하지 말고, 누구도 건방지지 말고, 거짓말을 하는 자도, 조롱하는 자도, 시기하는 자도, 비방하는 자도, 소홀한 자도, 게으른 자도, 어떤 일에서도 우리의 거룩한 삶을 욕되게 하지 말고, 모두 온 힘을 다해 오직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일만을 행하도록 힘쓰십시오. 그리하여 우리의 선한 사역을 잘 마치고, 마침내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의의 면류관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97. 여러분은 이 세상을 버린 것과, 순교적인 순종, 그리고 정욕과 보이지 않는 적들과의 투쟁으로 인해 의심할 여지 없이 영원한 복을 상속받으실 것입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십시오

97. 여러분은 이 세상을 버린 것과, 순교자 같은 순종, 그리고 정욕과 보이지 않는 적들과의 투쟁으로 인해 의심할 여지 없이 영원한 복을 상속받으실 것입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십시오. [2, 20] 죽음의 문이 여러분 모두를 천상의 영역과 천상 너머의 영역으로 높이 날아오르게 하기를 바랍니다. 바로 그곳은 “병과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는” 곳입니다(시 35, 10). 나 같은 합당치 못한 자는, 여러분이 그곳으로 떠나, 모든 이가 기뻐하는 거처가 있는 곳, 기뻐하는 이들의 얼굴과 축제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있는 곳에서, 세상의 혈육과의 단절, 육신의 혈연으로부터의 단절, 자신의 욕망을 잘라낸 것, 매일의 투쟁 속에서 견디고 순교적인 순종을 견뎌낸 것, 그 안에서 여러분은 진실로 주님을 고백하고 악의 근원인 마귀를 부인하며, 육신의 정욕에서 비롯된 것, 악마의 중상모략, 형제들과의 충돌, 경제 담당자들의 질책과 훈계, 작업장 책임자들, 그리고 관리자들이 내리는 온갖 다른 순종 명령들—그 어떤 일에서도 주님 앞에서 한 서원을 결코 어기지 않고, 담대하고 용감하게 구원의 길을 걸어가며, 여러분을 대적하는 악마의 무리를 수치를 당하게 하고 물러서게 만듭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의 위업이니, 여러분은 사도와 함께 이렇게 외칠 수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는가? 환난인가, 곤고인가, 박해인가, 굶주림인가, 헐벗음인가, 위험인가, 칼인가? 기록된 바와 같이, ‘우리는 주를 위하여 하루 종일 죽임을 당하며, 도살당할 양처럼 여겨지느니라’ (롬 8:35, 36). 그러므로 여러분은 복이 있고 삼중으로 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끝까지 하나님의 면전에서 변함없이 그와 같은 위업을 지켜낸다면 말입니다. 매일 여러분 앞에 싸움이 놓여 있지만, 동시에 매일의 면류관도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98. 우리는 가난하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먹이시니 그분께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우리도 게으름 피워서는 안 되며, 각자가 자신의 소명에 따라 일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작은 것을 더해 주실 것입니다

98. 1) 우리는 가난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먹여 주십니다. 그분께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우리도 게으름 피워서는 안 됩니다. 각자가 자신의 소명에 따라 일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작은 것을 불려 주실 것입니다. – 2)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공동 소유이며, 한 사람의 수고가 모두에게 미치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수고와 열심에 따라 하나님으로부터 보상을 받게 될 것이며, 밖에서 육체적으로 일하는 자들도 안에서 영적으로 일하는 자들 못지않게 받을 것입니다. – 병든 자들은 온유하고 불평하지 않는 태도로 인해 상을 받을 것입니다. [2, 21]

19. 나의 가장 큰 염려와 기도의 대상은, 여러분이 거룩하고 덕스러운 삶 속에서 순결하고, 부지런하며, 흠잡을 데 없는 자로 보존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무도 마귀의 중상모략에 미끄러지지 않고, 여러분 모두가 경건하고 기쁜 마음으로 복된 순종의 합당하고 존경받을 만한 일을 행하며 깨어 있고 활기차게 지내시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마땅한 모습으로 이루어질 때, 다른 모든 것에 대해서는 내가 슬퍼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비록 평소에는 슬퍼하곤 하지만—지금까지 이어져 온 육신의 삶의 비좁음을 말하는 것이지만, 나는 이 비좁음을 넓은 공간으로, 가난을 부로, 부족함을 만족으로 여기며, 주님께서 의로운 자들의 영혼을 굶주리게 하지 않으시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늘의 섭리로 양육되고, 물을 마시며, 덮음을 받고, 따뜻함을 누리는 여러분과 같은 경건한 자들을 버리지 않으실 것이라는 확신을 주는 소망의 인도하심을 따르고 있습니다. 이는 영적으로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손길이 돕지 않는다면, 대부분 가난하고 인간의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하는 이 수많은 사람들을 누가 마땅히 먹여 살리고,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할 수 있겠습니까? – 눈을 들어 보십시오. 이 왕성한 성에 들어온 우리 중, 우리 사이에 얼마나 많은 노인들과 쇠약한 이들, 병자들, 소년들과 아이들이 있는지 보십시오. 주님께서 그들 모두의 필요를 채워 주십니다. 이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찬양받을 만한 일이 아닙니까? 오, 나의 형제들과 자녀들이여. – 그러나 우리도 가만히 누워만 있어서는 안 되며, 우리 나름대로 형제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수고와 땀을 쏟아부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분의 계명이 모든 형제들 사이에서 서로 이행되는 것을 보실 때 자비를 베푸시며, 보이지 않는 원천으로부터 풍요를 누릴 수 있는 방법을 보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간청하며, 또 상기시키며 말하노니, 누구든지 어떤 일에 배정되었든지 간에, 온 힘을 다해 일하고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힘써야 하리니, 이는 여기서 하나가 다른 하나를 통해 드러나기 때문이며, 육체적인 일에 정성을 다하는 자는 영적인 일에도 마찬가지로 정성을 다하는 반면, 반대로 열매 맺지 못하는 자는 영적인 일뿐만 아니라 외적인 일에도 소홀하기 때문입니다.

20.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공동의 것입니다.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것뿐만 아니라 영적이고 정신적인 것까지 말입니다. 한 사람의 미덕과 선행이 다른 모든 사람에게 공유되듯이,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며, 수고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성 바울 사도의 가르침에 따라 육체를 예로 들어 볼 수 있습니다: “몸은 하나요 지체는 많으니, 모든 지체가 한 몸의 지체라. 지체가 많으나 몸은 하나이니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하느니라” (고린도전서 12, 12. 27). 마치 몸에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오른쪽과 왼쪽의 각 지체에서 일어나는 욕구와 그 충족을 느낄 수 있듯이, 영혼에 대해서도 이와 같이 이해하라. 나의 아버지이자 너희의 아버지이신 분은 첫 번째 지체이시고, 나는 두 번째 지체이며, 그 다음은 순서대로 마지막 지체까지 모두, 심판의 날에 우리 모두는 함께 칭찬을 받거나 책망을 받게 될 것이다. 이 사실을 아는 내 자녀들아, 우리 모두 힘내자. 우리 모두 분투하며, 각자가 공동의 일에 자신의 몫을 기여하고, 누구도 다른 사람보다 자신의 사역과 능력의 범위에서 뒤처지지 않도록 하라. 하지만 물론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우리가 여기서 미리 순위를 정하는 방식과는 달리, 하나님께서는 그날에 그 순위를 정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의 심판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분은 300번째 사람을 셋째나 넷째로 두시고, 열 번째 사람을 중간으로 내리시며, 마지막 사람을 첫 번째 자리에 올리실지도 모릅니다. 각 사람의 노력과 덕행에 따라 말이죠. 말하기는 두렵지만, 어쩌면 그분은 어떤 이를 우리 공동체에서 완전히 배제하고 지옥으로 보내실지도 모릅니다. 물론 여기에서도 다른 정신과 다른 사고방식, 다른 태도를 보였던 자를 말입니다. 그러나 감히 여러분께 확신시켜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 가운데 수고하는 사람 중 누구도 헛되이 수고하지 않으며, – 밭을 가는 이도 헛되이 가는 것이 아니며, 밭고랑을 파는 이도 헛되이 파는 것이 아니며, 요리사도 헛되이 요리하는 것이 아니며, 제빵사도 헛되이 빵을 굽는 것이 아니며, 식료품 관리인도 헛되이 관리하는 것이 아니며, 그 밖에도 수많은 이들이 그러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이들은, 다른 이들보다 덜 은둔하며 시편 찬송과 시 작성을 연습하지만, 자신의 일을 위해 방에 앉아 있는 이들 못지않게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다만 그들이 더 적은 열의를 가지고 일하지 않는다면, 게다가 주님을 위해 일한다면 말입니다. 각자가 형제애를 위해 자신의 노동과 열의를 얼마나 바치느냐에 따라, 그만큼 그에게도 돌아갈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내부의 일꾼들은 외부의 일꾼들을 얕보지 말고, 외부의 일꾼들은 마치 무시당하는 것처럼 낙심하지 말라. 각자에게 주어진 몫은 수고와 열심이다. 그런데 병든 자에게는 어떤 몫이 있느냐고 누군가 물을지 모르겠다. 그는 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에게 주어진 몫은 감사, 불평하지 않는 마음, 그리고 인내이다.

 

99. 가르침은 헛되지 않다. 그것은 잠든 자들을 깨우고, 깨어 있는 자들을 굳건하게 하며 인도한다.

99. 1) 교훈은 헛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잠든 자들을 깨우고, 깨어 있는 자들을 굳건하게 하며 인도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는 조금씩 앞으로 나아갑니다. – 2)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자비를 고백합니다. 우리 가운데 있는 악은 줄어들고, 선은 굳건해집니다. 넘어지는 이들도 있지만, 그들은 다시 일어나 바로잡는다. 그러니 너희의 선한 마음가짐과 열정을 지키라. [2, 22]

21. 어떤 이들은 말하리라, 우리가 그 가르침에 담긴 내용을 실천에 옮기지 않는다면 그 가르침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왜냐하면 웃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자주 듣지만, 우리는 그 점에서 고쳐지지 않고; 헛소리를 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자주 받지만, 여전히 헛소리를 하며; 자주 이웃을 시기해서는 안 된다는 권면을 받으면서도 여전히 그 정욕에 사로잡히곤 하며; 낮과 밤의 시편 찬송과 기도 시간에 부주의하고 졸린 태도로 서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자주 듣지만, 여전히 생각에 딴청을 피우거나 졸고 있다. 한마디로, 우리는 거의 어떤 점에서도 고쳐지지 않는다. –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이들은 부당하게 말하는 것이다. 첫째, 아무도 어떤 면에서도 개선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모든 사람이 모든 면에서 한꺼번에 개선되는 것도 불가능하지만, 오늘은 이 사람, 내일은 저 사람이 자기 수양에 착수하여 꾸준히 노력한다; 둘째, 계단을 오를 때처럼 첫 번째 계단에서 마지막 계단으로 단번에 뛰어넘을 수는 없고, 한 계단씩 차례대로 밟으며 위로 올라갑니다. 미덕을 실천하는 일도 마찬가지로, 조금씩 발전하며 그 경지에 이릅니다. 이 두 가지 모두에서 교리 교육의 권면은 큰 유익을 주는데, 성공을 향한 열정을 불러일으키고 지탱해 주며, 이를 위한 방법과 수단을 제시함으로써, 여러분의 정직한 영혼들이 조금씩 더 큰 힘으로,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도록 돕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무엇이 마땅한지, 무엇이 고쳐져야 하는지에 대해 그토록 자주 말하고 듣는데도 정욕이 억제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면, 만일 우리 가운데 침묵이 지배하고 마땅히 지적되고 설명되어야 할 것들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이며 우리는 얼마나 더 나빠질까요? 나는 선조들로부터, 말이 행동으로 이어지는 길이며, 선한 말은 선한 행동으로, 악한 말은 악한 행동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사실임을 잘 알고 있다. 더 나은 삶의 방식에 대해 말하는 것은 언제나 더 나은 쪽으로 이끈다는 것을. 나는 너희, 나의 자녀들아, 너희 자신에 대해 증언하노니,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인 성경을 읽는 것, 그리고 내 겸손한 가르침을 듣는 것에서 비록 조금이나마 너희 모두가 성장하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정열에 사로잡힌 이들은 잠에서 깨어나 스스로를 바로잡기 시작하고, 이미 잘 나아가고 있는 이들은 더 크고 더 큰 성취를 향해 용기를 얻습니다.

22. 우리는 이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며 그분의 자비를 숨기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우리 가운데는 다툼은 물론, 비방, 비난, 모욕, 불순종, 은밀한 식사 등이 거의 없습니다. 만일 그런 일이 발생하더라도, 우리는 악을 향하는 육신을 지니고 있기에, 죄를 지은 자들은 즉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며 정해진 참회 의식을 통해 바로잡습니다; 식사 배제와 단식, 서 있기, 절하기 등, 허용된 약점을 치유하는 데 적합한 방법에 따라 행합니다. 그러니 누구도 가르침에 유익이 없다고 말하지 말라. 우리는 그 가르침을 통해 유익을 얻고 번영하며, 그리스도의 은총과 나와 여러분의 아버지의 기도의 도움으로, 덕행의 산을 향해 선한 등반을 거듭하며, 깨달음을 얻고 거룩해지며 신성하게 여겨지는데, 이는 사실 큰 수고와 땀을 흘려야만 이룰 수 있는 일이다. 그러니 여러분께 간청하고 간구하노니, 우리의 선한 의지와 선한 마음가짐을 지키며, 온갖 양면성을 끊어내고, 소심함을 영원히 몰아내며, 선한 소망과 장차 받을 상급과 영원한 복에 대한 기대로 스스로를 고무합시다. – 이것이 우리 코에 숨이 멎기 전까지, 현재의 슬픔과 고난을 겪은 후, 죽은 뒤에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천국의 상속자가 될 자격을 얻게 하소서.

 

100. 다스리는 일은 힘드나, 주님을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의 죽음까지 고난을 당하신 분을 위하여, 내가 참아내니, 여러분도 참아내십시오

100. 1) 다스리는 일이 힘겹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하여,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죽음까지 겪으신 주님을 위하여, 저는 인내합니다. 여러분도 인내하십시오. – 2) 옛 성도들이 어떻게 인내했는지 마음속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3) 그러니 우리도 그들을 본받읍시다. [2, 23]

1. 만일 내가 육신의 눈으로 거의 매일 우리에게 닥치는 슬프고 불쾌한 일들을 바라보았다면, 진작 지쳐서 다른 이에게 지도자의 임무를 넘겨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상황 속에서, 여러분도 이곳으로 부르심을 받았고, 나 또한 여러분에게 내 자신을 맡긴 바로 그분을 위해, 나의 겸손한 마음이 하나님을 바라볼 때, 나는 포기하지도 절망하지도 않으며, 나의 아버지이자 여러분의 아버지이신 분의 기도를 통해, 나의 사랑하는 여러분을 위해, 그리고 나의 주님이시며 주권자이신 분을 위해, 그리스도 주님께서 나를 굳건하게 하심으로써 모든 것을 참아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만물을 창조하신 그분께서, 성육신이라는 신비의 가정을 세우시는 일로 인해, 나를 위하여 기꺼이 유혹을 당하시고, 모욕을 당하시고, 비하되시고, 조롱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창에 찔리시고, 매장되셨다면, 내가 무엇을 견디지 못하겠는가? 아니면 더 나아가, 우리와 여러분이 기꺼이 겪지 않을 일이 무엇이겠는가? 슬픔과 곤란, 상처와 결핍, 심지어 죽음이 닥쳐오더라도, 우리가 선하게 싸우고, 굳건히 서서 용감하게 맞서면 영원한 복을 상으로 얻게 될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다면, 이 모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연약한 육신이 지쳐 갈 때, 우리는 육신을 방종하게 내버려 두면, 진노의 날과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드러나는 날에 우리 자신에게 진노를 쌓아두게 될 것임을 상기하고, 용기를 내어 용맹하게 일어서야 합니다.

2. 오, 그 옛 성도들의 영혼들은 이제 어디에 있는가! 그들을 고무시키던 그 열정이 이제 얼마나 희박해졌는가! 그들에게는 육체의 고통이 기쁨과 즐거움이었고, 영광과 위대함은 극도의 자멸이었다. 그들은 주님을 향한 불타는 사랑으로 충만했고, 자신의 뜻을 행하려는 것이 아니라 결코 행하지 않으려는 끝없는 갈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지배하기를 원한 것이 아니라, 노년에 이르기까지 복종하며 남의 지휘 아래 있기를 원했습니다. 그 복된 노년의 수장은 어디에 있는가? 식사 끝날 때까지 겸손히 서 계셨던 그분은? 30년 동안 순종의 진주를 갈고닦았던 그분은 어디에 있는가? 저 사람은 어디에, 이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 – 보라, 마치 별들의 합창단처럼, 온갖 미덕으로 빛나는 그 모든 거룩한 성인들의 모임이 내 마음 앞에 서 있다. – 마음속으로 그들의 성소를 거닐어 보자. 이곳은 위대한 파코미우스의 수도원이다. – 그곳에서 영원히 기억될 이오나, 찬란한 페트로니우스, 성화된 테오도르를 바라보자. 그다음 위대한 테오도시우스의 수도원으로 넘어가, 그곳에서 영원히 살아계신 바실리우스, 경이로운 아에티우스, – 이 사람과 저 사람을 바라보자. 여기서부터 우리는 복된 테오크티스토스, 위대한 유프티미오스, 거룩하게 된 사바의 성스러운 수련처로 이동합시다. 말을 줄여 말하자면, 고대, 중세, 그리고 후대의 모든 수도원에서 일어난 일들을 마음속으로 훑어보며, 각자가 그곳에서 자신의 삶을 선하게 살아가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수련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3.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도 참된 생명과 빛을 얻고자 한다면, 모든 것을 견디고 참아내며, “어떤 일에서도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하여, 우리의 사역이 흠 없이 이루어지도록”(고린도후서 6:3) 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들고, 그것으로 악한 자의 모든 불타는 화살을 끄실 수 있으리라”(엡 6:16), 무적의 상태를 유지하며, 호의 속에서 서로 기뻐하고 함께 즐거워하며, 성령의 한 숨결로 조화를 이루어 그리스도의 한 몸처럼 살아가야 한다.

 

101. 우리는 수고와 결핍, 그리고 슬픔을 통해 죄에서 정화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101. 우리는 수고와 결핍, 그리고 슬픔을 통해 죄에서 정화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어렵지만, 그 대가로 영원한 복된 생명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러한 모든 것을 기뻐합시다. [2, 24] 우리가 부름받은 경건한 삶에 대해 간략히 상기시켜 드리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과거의 죄를 씻어내며, 그로 인해 매일 고통을 겪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우리의 길은 참으로 좁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그 길에는 영생의 약속이 있으니, 기뻐하며 그 길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기 위해 열심을 내고, 선한 열정으로 서로 경쟁하며, 마치 경주장에서 달리듯 달려가 우리의 적을 이겨, 심판의 날에 의의 면류관을 얻도록 합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무거운 것은 가벼운 것으로, 불리한 것은 유리한 것으로, 슬픈 것은 기쁜 것으로, 결핍을 동반하는 것은 유익한 것으로, 치욕은 영광으로, 모욕은 칭찬으로, 필요의 부족은 만족으로, 물 마시는 것은 포도주 마시는 것으로, 늦게 먹는 것은 일찍 먹는 것으로 여기도록 합시다. 이것이 바로 우리 삶의 순교적인 특성이며, 이를 통해 장차 올 복에 대한 소망과 기대가 확고해집니다. 부디, 우리 삶이 슬픔을 주고 마음을 괴롭힌다고 해서 울거나 소심해지지 맙시다. 오히려, 그 삶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됨과 천국, 그리고 복된 불멸을 보물로 간직하고 있음을 바라보며, – 더욱 열정적으로 그것을 붙잡고, 그 안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되기를 바랍니다. 수고에 수고를, 위업에 위업을, 정성에 정성을, 순종에 순종을, 자기 의지의 절제에 절제를, 기도에 기도를, 깨어 있는 기도에 깨어 있는 기도를, 하나님을 향한 묵상에 묵상을, 눈물에 눈물을, 사랑에 사랑을 더합시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삶이며, 덧없이 지나가는 세상과 구별되고 그보다 더 높은, 세속의 지혜를 자랑하는 자들에게는 낯설고 이질적인 삶입니다. 그들은 육신에 이끌려 현재를 미래보다 더 소중히 여깁니다.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 즉 부모와 형제, 자녀, 그리고 모든 세속적인 것을 버리고,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언제나 궁핍과 고통, 모욕과 고문, 심지어 죽음을 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 여러분이 바로 그러합니다. 그 대가로 하늘에서는 여러분을 위한 위대하고 귀한 상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로 옮겨질 것이며, 일시적인 삶을 뒤로하고 영원한 생명으로 넘어갈 것입니다. 단, 끝까지 신실한 순종의 증거를 보여준다면 말입니다.

 

102. 공동 생활의 수련을 진실하고 성공적으로 실천한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102. 1) 공동 생활의 수련에 진심 어린 태도로 성공적으로 임한 너희를 축복하노라. – 2) 어디에나 그런 이들이 적지 않다고 속삭이는 자들의 말을 믿지 말라. – 3) 우리의 가장 중요한 무기는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는 것이다. – 4) 그것으로 우리의 모든 수련 활동이 풍요로워진다. [2, 25]

4. 이 시대에, 이 날들에 주님을 끊임없이 찾고, 자신의 마음을 깨어 지키며, 여러분의 영이 하나님과 함께 있다고 믿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또한 여러분이 삶을 위선 없이 순수하게 살아가며, 진정으로 세상을 버리고 거짓 없이 세상에서 벗어나, 실제로 사람들이 여러분을 부르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 대해 찬사를 보냅니다. 이는 여러분이 모든 것에서 진정으로 분리되어, 유일한 하나님과 함께 거하며 그분만을 섬기며 아름다운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로부터 여러분의 공동체 생활이 비롯되며, 그로 인해 여러분 사이에서는 그 어떤 것도 누구의 소유라고 불리지 않습니다. 이로부터 여러분이 육신의 부모와 친척들로부터 돌이킬 수 없이 멀어진 것이며, 이로부터 여러분이 내게 숨겨 두었던 마음속 깊은 소망을 드러냄으로써 내 겸손에 대한 거짓 없는 믿음이 드러납니다; 이로부터 여러분은 비좁은 곳에서도 넉넉함을, 가난 속에서도 만족을, 육체적 욕구가 결핍된 상황에서도 위안과 기쁨을 누립니다. 더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 이로부터 여러분의 삶의 영광이 비롯되며, 여러분이 모든 이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5. 내가 이 말을 아첨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굳건하고 강인하게 서 있도록 상기시키기 위함이며, 또한 어떻게 하면 이러한 높은 자리에서 떨어지지 않을지, 어떻게 하면 선한 결심을 약화시키지 않을지 온갖 방법으로 신경 써야 합니다. 즉, 순종해야 할 투쟁을 회피하거나, 타락한 소피즘과 사람들의 헛소리에 흔들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들은 ‘여기저기 하나님을 경외하고 우리보다 더 잘 섬기는 사람들이 많다’고 확신시키려 합니다. – 이것이 바로 유혹들이니, – 그 목적이 무엇이겠는가? 너희 안에서 너희의 능력이 드러나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전서 11:19). 그러므로 너희 의지의 선한 결심을 굳게 지키며, 주님을 사랑하는 데 소홀하지 말고 선한 행실로 이를 나타내며, – 우리 구원에 필요한 것을 찾아내라; 왜냐하면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 많아서, 우리는 어떻게 넘어지는지 모른 채, 혹은 다윗의 말씀이 “누가 죄를 범하는 것을 알겠느냐?”(시 18:13)라고 확신하듯이, 그 사실조차 모른 채 넘어지기 때문입니다.

6.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이 구원에 있어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치료법은 없다는 것을 아기를 바랍니다. 이는 여러분 스스로도 경험하고 있는 바입니다. – 그런데 왜 여러분 중 어떤 이들은, 주님께서 이 은사를 주셨고, 그러한 치유의 수단이 바로 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백과 드러냄에 나서는 것을 미루며 침묵으로 스스로를 짓누르고, 미처 드러내지 못한 생각들에 사로잡혀 마치 벌레로 가득 찬 것처럼 되는 것입니까? 여러분이 누구이든 간에, 저는 여러분을 안타깝게 여기며 여러분의 연약함에 애도를 표합니다. 왜, 여러분에게 건강을 되찾고, 깨달음을 얻고,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수단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정반대의 상황에 스스로를 내맡기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보십니다. “그분 앞에 드러나지 않은 피조물은 하나도 없 , 모든 것이 그분의 눈앞에 벌거벗은 채 드러나 있습니다”(히브리서 4:13). – 게다가, 나는 여러분을 드러내야 합니다. 내가 내 자녀들을 알고, 그들이 나를 알기 위해서는 그들의 솔직함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7. 바로 이것이 진정한 영적 유대이며, 변함없는 순종, 근심 없는 행보, 달콤한 기도, 끊임없는 발전과 완전함을 향한 상승이다. 눈에서 흘러내리는 회개의 눈물은 선하며, 밤낮으로 드리는 순수한 기도는 선하며, 밤낮을 가리지 않는 기도, 슬픔을 참는 인내, 수공예에 몰두하는 일, 경건하게 말씀을 경청하는 것, 말을 서두르지 않고 웃음 없는 대화, 절제된 절제, 죽음을 기억하고 성인들의 삶을 힘닿는 대로 본받는 것, 정욕적인 방종을 피하고 신성한 겸손을 지키는 것;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더 선한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무자비한 자각과 마음속 생각을 고백하는 것이다. – “모든 것을 시험하여 선한 것을 붙잡으라” (살전 5:21).

 

103. 세상의 생각과 감정, 말과 행동은 우리와 완전히 다르다. 우리는 마치 낙원에 있는 것처럼 이 모든 것을 대한다.

103. 1) 세상의 생각과 감정, 말과 행동은 우리와 완전히 다르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마치 낙원에 있는 것처럼 여긴다. – 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덕분에, 우리의 내면과 외면은 세상의 것과는 모두 다릅니다. – 3) 그러나 우리가 세상의 평신도들보다 더 나쁘게 되지 않도록 조심합시다. [2, 26]

8. 우리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이 거룩한 지위에 우리를 택해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우리를 복되고 경이로운 수도 생활의 길로 부르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 우리에게 – 비록 이렇게 말하는 것이 다소 대담할지 모르나, 진실에서 멀지 않은 말입니다 – 참으로 천국 왕국의 신비를 세상의 사람들보다 더 깊이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들 중 많은 이는 보면서도 실상을 보지 못합니다. 보십시오, 그들의 사고방식과 열망이 어떠한지: 그들은 부와 덧없는 명성을 찬양하고, 쾌락과 향락에 기뻐하며, 향기로운 향유와 부드러운 옷, 보석, 아름다운 집, 정원과 숲, 그리고 온갖 다른 헛된 것들에 매료됩니다; 웃고, 춤추고, 도살을 앞둔 짐승처럼 살이 찌며, 말하기조차 꺼려지는 수많은 일들을 저지르는데, 그로 인해 발생하는 결과들—선하지는 않지만 그들이 오히려 자랑하는 것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칭송하고, 자랑하며, 기뻐하는 것들입니다! –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정욕과 욕망을 따라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갈 5:24) 자들의 눈에는 하찮고 경멸받을 만한 것입니다; – 성 사도 바울의 말씀대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도 바로 그런 자들로서, 여러분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입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갈망이 있고, 다른 것들에 대한 성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쫓겨난 달콤한 낙원에서 누리던 그런 행복을 찾고 추구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원초적인 삶에 가까운 생활 방식을 받아들이고, 유혹이 가득한 세상에서 멀어져 하나님께로 나아갑니다. 세속의 어둠을 벗어던지고 영적인 빛을 입으며,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모든 것 위에 주인이 됩니다.

9. 오, 얼마나 놀랍고 위대한 지위인가! 누가 우리를 육신과 피, 부모와 친척, 고향, 세속적인 관습, 그리고 모든 세속적인 것들로부터 떼어 놓았는가? 누가 우리를 설득하여 수도원장들과 영적 아버지들에게 노예처럼 자신을 바치고, 절제와 기, 맨땅 위에서의 잠이라는 금욕적 수행을 받아들이게 했는가? 누가 우리에게 사물을 바라볼 때 산만해지거나 휩쓸리지 말고, 금, 은, 아름다움, 세속적인 화려함, 심지어 왕의 왕관과 보라색 예복조차도 위대한 것으로 여기지 말고, 오히려 이 누더기 같고 보풀이 많은 옷을 입는 것을 더 존귀하고 위대한 것으로 여기며, 반짝이는 망토보다 그 옷으로 자신을 높이는 것을 더 귀하게 여기도록 가르쳐 주었는가? 누가 우리에게 모든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것에서 벗어나, 천사들처럼 동정심을 통해 순결하고 타락하지 않은 채로 지내며, 더 높은 삶의 질서와 하나 될 힘을 주었는가? 이것이 바로 우리의 찬양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사랑하고 장래의 복—접근할 수 없는 빛, 영원한 영광, 형언할 수 없는 기쁨, 끊이지 않는 즐거움, 영원한 유산, 천국, 고갈되지 않는 부, 그리고 천사들과 성부들을 통해 선포된 모든 약속—을 갈망하는 우리에게 이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10. 이것이 사실인 만큼, 우리가 다시는 정반대로 돌아서지 않고, 훗날 세속적으로 사는 자들보다 뒤처지지 않도록 잘 살피고 경청합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정화하고, 처녀성을 더욱 굳건히 지키며, 마음과 정신으로 악마에게 결코 틈을 주지 않도록 주의합시다. 말은 말로 불러오고, 시선은 시선으로 끌리며, 태만은 태만으로 조장되니, 조금씩 이에 익숙해지고 적응해 가다 보면 우리는 밤의 까마귀와 같은 처지가 되어 죄로 인한 죽음을 낳게 됩니다. 그러지 마십시오, 자녀들아, 그러지 마십시오. 간청하고 간곡히 부탁합니다. 서로에게서 스스로를 지키라. 이웃에게서 생명이요, 죽음도 나기 때문이다. 사소한 태만과 방심은 우리를 죄의 심연으로 몰아넣는다. 귀 기울이고 지켜보라, 어린 자와 늙은 자, 앞서가는 자와 뒤따르는 자, 지도하는 자와 지도받는 자여. 우리는 위에서는 복을 누렸으나, 이곳에서는 수치를 당하고 있다; 위에서는 천사들 과 같이 사는 자들로 여겨졌으나, 이곳에서는 사탄과 닮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나았을 것이라고 말해졌습니다(마태복음 26,24). 이 사람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 하지만 이 이야기는 이만 하기로 합시다. – 그리고 제가 이 말을 한 것은 여러분을 슬프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미리 경고함으로써 다가올 죄의 칼을 물리치기 위함입니다.

 

104. 내게는 말할 의무가 있고, 여러분에게는 들을 의무가 있다

104. 1) 내가 말하는 것이 의무라면, 여러분은 듣는 것이 의무입니다. – 2) 여러분은 입으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마음은 거기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생계상의 어려움을 말하고 그 원인을 지적했을 때, 여러분은 우리의 처지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불평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왜 많은 사람을 받아들이는지 불평했습니다. – 3) 바로 이 점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양육하시며 도우실 것입니다. – 4) 불평하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광야에서 불평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그 때문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던 것처럼, 여러분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 5) 우리 조상들에게서 이런 일이 언제 있었습니까? 오히려 모두 궁핍을 참아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결코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 6) 여러분 스스로도 아무것도 없이 이곳에 와서 부양받았는데, 어찌하여 지금은 다른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기를 원치 않습니까? 굶어 죽어가는 개들조차 쫓아내지 않는데, 여러분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바로 그 사람들을 쫓아내려 합니까? – 7) 여러분은 모두 나와 함께 고난을 겪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혹시 고난을 겪는 것이 우리의 몫이라는 사실을 잊으셨습니까? – 8) 회개하십시오. 나는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게다가 여러분도 이 일들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 9) 하나님께서 우리를 곤경에서 몇 번이나 구해 주셨는지 떠올려 보십시오. 계명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2, 30]

11. 나의 사명과 지칠 줄 모르는 노력은, 언제나 여러분에게 말씀을 전하고, 마땅히 지켜야 할 것을 상기시키며, 하나님을 따라 사는 여러분의 선한 삶을 인내로 견디도록 위로하는 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말 없는 양 떼의 목자들이 필요에 따라 잠을 자지 않고, 그들에게 맡겨진 양들을 돌보는 수고를 감당하며, 그들을 목초지로 데려가고 그곳을 거닐게 한다면,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양인 여러분을 다스리는 직분을 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인 나에게, 얼마나 더 큰 의무가 있겠습니까? 영혼을 지켜보는 눈을 끊임없이 뜨고, 마치 피리 소리와 같이 말씀을 선포하여, 마땅하고 유익한 것을 가르치고, 부적절하고 해로운 것에서 경계하도록 여러분을 일깨워야 합니다. 그러나 나에게 이러한 의무가 주어졌으니, 여러분도 내 말을 대충 넘겨서는 안 되며, 내 목자의 목소리에 주의 깊게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내 양들은”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목소리를 듣고 나를 따라온다. 낯선 이의 목소리에는 따르지 않고, 오히려 그로부터 도망치니, 낯선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요한복음 10,27.5). 이는 나와 여러분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12. 그런데 내가 왜 여러분에게 이런 서문을 제시했겠습니까? – 미리 말씀드리건대, –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무겁게 느껴지지 않도록 – 여러분 중 어떤 이들은 입으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이제 그 이유를 설명하겠습니다. – 지난 몇 해 동안의 흉작으로 인해 육체적 필요에 대한 궁핍이 우리에게 닥쳤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의 심연에서 구원을 얻기 위해 우리 수도원의 안식처로 보내신 사람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며, 또한 우리가 이 왕실의 도시에 위치해 있어 여인숙과 다른 보호소들이 늘어난 탓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 사실을 모두에게 알리고, 깊은 슬픔과 올해의 필요를 충족시킬 방안에 대한 저를 짓누르는 근심을 표하며, 우리 수공예품의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열의를 다해 주실 것을 간청하고 애원했습니다. 정해진 양보다 더 많이 생산해 줄 것을 간청하며, 천국을 추구하는 우리에게는 모든 면에서 비좁고 고통스러운 길을 통해, 그 슬픔과 비좁음, 굶주림과 목마름, 수고와 땀, 벌거벗음과 가난, 그리고 그 밖의 유사한 것들로 시련을 겪는 것이 마땅하다고 상기시키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종종 우리가 그분께 대한 사랑이 어떠한지, 그리고 그분을 위해 닥치는 슬픔을 기꺼이 견디는지 시험하기 위해 사소한 유혹에 빠지게 하신다는 점을 덧붙이셨습니다. – 그때 여러분은 마땅히 그래야 할 모습을 보여주었고, 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마음을 품지 못하고 그 당시 입술로만 그분께 감사드렸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난 일들을 견디기 힘들어하며 불평하기 시작했고, 어떤 모세가 아니라 죄인인 나를 향해 반기를 들며 이렇게 말했지요. “먹여 살릴 수도 없으면서 왜 이 사람들을 이렇게 많이 모으는 거지? 도대체 그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리고 누가 그에게 그렇게 많은 사람을 모으라고 강요하는가?

13. 바로 이 말들을 내가 분명히 밝히고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며, 그러한 자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칼을 지적해야 하니, 그들의 멸망의 피가 내 죄 많은 손에서 요구받지 않도록 하리라. – 첫째로, 그들은 내 진정한 아들들이 아니기에, 나와 뜻을 같이하지 않고 “왜 우리가 받아들이는가?”라고 말했고, 오히려 남의 자식들이자 악한 자들처럼, ‘왜 그가 받아들이는가’라고 말하며, 그로 인해 나와의 교제에서 스스로를 배제해 버렸다. – 그 후, 비록 그들이 그렇게 말했더라도, 그들은 여전히 죄가 있으며 정죄받을 만하다. 시편에 노래된 대로, “그들은 하나님을 비방하며, ‘하나님이 이 사람들에게 식탁을 차려 주실 수 있겠느냐’고 말하였으니” (시 77, 19. 20), – 그런 수많은 사람들에게? 내가 과연 음식을 공급하는 자인가, 아니면 열매를 맺는 자인가, 혹은 곡창을 채우는 자인가? 또 다시, 내가 제멋대로 그리고 독단적으로 찾아오는 이들을 받아들이고 형제애를 증진시키는가? – 주님이시며 세상의 양식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손을 펴시어 모든 선한 것을 채워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까? (시 144:16). 그분께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더해지리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십니까? (마태복음 6:33). 그분께서 “하늘의 새들을 보라.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 두지도 않는데, 너희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시니, 믿음이 적은 너희는 얼마나 더 하겠느냐?”라고 말씀하시며 소심한 자들을 격려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태복음 6:26; 눅 12,28). 또한 어떤 지혜자를 통해 그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주님을 믿는 자가 부끄러움을 당한 적이 있느냐? 그분의 두려움 가운데 머무는 자가 버림받은 적이 있느냐? 그분을 부르는 자가 그분께서 무시하신 적이 있느냐?” (시라 2,10). 또한 복음을 통해 그분께서 약속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나에게 오는 자를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6, 37). 그리고 그분께서 명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이런 자들의 것이니라.” (누가복음 13, 16). 이와 일치하는 성경 구절은 그 밖에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왜 나 같은 가난한 자를 향해 반발하며, 혀가 꼬인 채 헛소리를 내뱉는 것입니까?

14. 보아하니, 여러분은 마치 보이지 않는 파라오의 손길과, 정욕의 노예로서 겪는 쓰라린 고역, 그리고 세속적 허영이라는 어두운 이집트에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과 같습니다. – 그러나 그 후, 고행자의 슬픈 삶을 살며 광야를 건너가던 중, 무거운 고난을 마주했을 때,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지도 않았습니다. 그 선한 마음가짐 덕분에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필요한 것이 주어지기를 바랐어야 했으나, 오히려 하나님께 불평하며 마치 이렇게 말했습니다: “차라리 이집트에서 죽는 편이 낫겠다”라고, 이집트의 솥을 떠올리며 각자 세상에서 가장 즐거웠던 것을 그 솥에 비유했던 것이다. – 그러나 너희도 알다시피, 그때 그런 불평자들은 벌을 받았다. 그들 중 누구도 약속의 땅에 들어갈 자격을 얻지 못했고, 그들의 뼈는 모두 광야에 흩어졌다. 자녀들아, 우리도 그들과 똑같은 일을 저지르고는 같은 벌을 받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성막과 율법의 어린 시절이었으나, 지금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진리의 완전한 시기입니다. 그리고 이를 저지른 자들은 평신도들이 아니라, 천사 같은 삶의 높이에 오른 우리 중 일부였습니다.

15. 우리 존경하는 선조들 곁에서 과연 그런 불평이 드러난 적이 있었는가? 아니면 그들의 수도원에서 구원을 얻고자 하는 이들 중, 육신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없다는 이유로 받아들이기를 거절한 사람이 있었는가? 세속을 버리고자 하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도움이 필요한 모든 가난한 이들을 위해 그들의 문은 언제나 활짝 열려 있지 않았던가? 그들은 이 문제에 관해 자신의 죽음 후에 따를 특별한 유언을 남기지 않았는가? 우리 위대한 스승 유피미우스가 이에 대해 어떤 지시를 남겼는지 너희도 알고 있을 것이다. 또한 영원히 기억될 우리 아버지 사바와 위대한 테오도시우스, 그리고 지극히 복된 파코미우스의 사례도 읽어보았으리라. 그들에게 궁핍한 적이 있었습니까? – 한 번이 아니었고, 게다가 적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한 분은 부활절에 성찬식을 거행하는 데 필요한 것조차 없었고, 다른 분들에게는 또 다른 방식으로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때로는 풍족하게 넘쳐흐르기도 하고, 때로는 궁핍해지기도 했지만, 어느 경우든 그들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기꺼이 참아냈습니다. 그들의 참된 자녀들도 기쁨과 즐거움 속에서 그들과 함께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그들과 같지 않은 자들은 저주에 걸려 멸망합니다. 그러므로 내 자녀들과 형제들아, 이 말을 귀담아들어야 합니다.

16. 불평하는 너희 자신들도 기억하라. 너희가 자신의 수고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며, 이곳에 왔을 때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다는 것을. 그때 너희는 되돌아가지 않아도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하나님과 우리를 감사하고 찬양했었다. 어찌하여,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는 지금 그때 너희가 받았던 것을 다른 이들에게 베풀기를 원치 않으며, 너희가 받은 선물을 아껴서 다른 이들에게 전하기를 꺼리는가? 비우호적이고, 동정심 없고, 무자비한 자들아! 말 못하는 개들이 굶주려 죽어가고 있다면, 우리가 그들을 받아들였다 해도 칭찬받을 만했을 것이다. “의인은 자기 가축의 목숨을 아끼느니라”(잠언 12:10)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성을 가진 사람들, 우리와 같은 본성을 가진 동료들, 우리 형제들이 배가 난파된 후 우리 항구로 데려가 달라고 간청하며,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바로 그 사람들을 극심한 궁핍에서 구해 달라고 애원하는데,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그러나 무지한 자들은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17.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나와 함께 죽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고된 수고와 궁핍 속에서 사소한 어려움만 닥치자, 저버리고 뒤로 물러서고 있습니다. 왜 오는 가난한 이들 중 누구도 배불리 먹지 못하고, 마실 것을 얻지 못하고, 필요한 도움을 받지 못한 채 떠나지 않도록 저를 더 강하게 독려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러분은 오직 스스로 배불리 먹고 심지어 과식하기만 좋아하며, 생선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데, 두세 잔의 크라수울리뿐만 아니라 성부들이 금하신 양보다 더 많이 마십니다. 그리하여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말이 여러분에게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즉, 배를 채우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이 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오, 무지하고 마음이 굳은 자들아, 성부들이 명하신 모든 것과, 나 같은 죄인이 끊임없이 상기시켜 드리는 바와 같이, 우리가 이렇게 고난을 겪고 수많은 슬픔을 통해 천국에 들어가야 마땅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지 않겠는가?

18. 그러니 주님 앞에서 많이, 너무나 많이 죄를 지었음을 회개하라. – 그러나 나는 거절하지도, 변하지도 않을 것이다. 처음 시작했던 대로, 온 정성과 뜨거운 마음으로 찾아오는 모든 이를 계속 맞이할 것이다. 이는 나뿐만 아니라, 이를 명하신 하나님, 그리고 나와의 함께 하는 너희 자신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내가 벌거벗은 자에게 옷을 입혀 주고, 추위에 떨고 있는 이를 따뜻하게 해 주고, 맨발인 이에게 신발을 신겨 주고, 피를 흘린 이를 집으로 데려오고,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이에게 마실 것을 줄 때, 여러분은 모두 나와 함께 행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 죄를 속량하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우리 참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이며, “의로운 영혼을 굶주리게 하지 않으시리라” (잠언 10:3): 불평하지 않은 여러분의 영혼은 어떠합니까? – 내가 모든 이를 비난하는 것은 아닙니다 – 하나님의 계명이 성취되고 형제애가 커지는 것을 기뻐하며, 하나님의 시험 앞에서 인내하고, 모든 것을 버리고 심지어 죽기까지 하나님의 일을 위해 서 있을 준비가 된 분들입니다.

19. 보십시오, – 벌을 받지 않은 여러분께 다시 말씀드립니다 – 하나님께서 단 한 번이라도 우리를 극심한 궁핍에서 구해 주신 적이 없습니까? 그리고 저의 아버지이자 여러분의 아버지의 기도에 따라 어떤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까? – 그분은 흉년 때 우리에게 곡식과 포도주를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분께서 선한 사람들을 움직여 우리의 생계를 위해 그들의 곡식 창고를 열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지금까지도 마을과 섬, 도시에서 우리에게 꿀과 올리브, 치즈, 이불, 옷, 주교들과 관리들, 심지어 보라색 옷을 입은 자들로부터 온 금이 보내지지 않고 있습니까? –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시고, 앞으로 더 강건하게 하셔서, 다른 형제들과 함께 모든 것을 견디고 참아내며, 그들과 함께 의의 면류관을 받을 자격을 얻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105. 지금은 유혹이 많은 시기(봄)이니, 몸을 잘 다스리십시오

105. 1) 지금은 유혹이 많은 때(봄)이니, 육신을 잘 다스리십시오. – 2) 술과 음식의 절제. – 3) 절제를 통해 얻는 천상의 복은, 이 세상의 복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 4) 여러분을 둘러싼 미덕의 무리를 바라보고, 하늘을 우러러보십시오. 그러면 모든 것이 견딜 만해질 것입니다. [2, 31]

20. 선은 수고로 얻어지지만, 부주의한 자에게는 쉽게 빼앗기며, 오랜 시간에 걸쳐 쌓아온 것도 순간적인 부주의로 인해 잃을 수 있다. 그러므로 특히 지금과 같은 봄철에는 더욱 스스로를 경계하라. 이때는 몸이 활기차고, 육신이 곧 땅과 같아서 세속적인 일을 추구하려 하기 때문이다. 비료와 거름을 받아 비옥해진 땅은 그 본성에 따라 열매를 맺듯이, 다양한 음식과 음료로 살이 찐 육체도 그 안에 숨겨진 정욕으로 저절로 들끓게 된다. 그러니 그것을 손에 잡고 억제하며, 사도의 말씀대로 “정욕을 따라 그 욕망을 충족시키지 말라”(롬 13:14)고 하듯이, 합리적인 범위 내에서 필요한 것을 공급하되, 영으로 살아가도록 하십시오.

21. 음식과 포도주에도 절제가 있어야 한다. 포도주는 약간의 위안을 위해 마셔야 하며, 그것도 명절이나 지독히 힘든 노동 중, 병들었을 때, 그리고 가야 할 곳이 멀 때에만 마셔야 한다; 그 외의 시간에는 한 잔으로 만족하고, 많아야 두 잔을 마셔야 한다. 이는 게론디케에서 이에 대해 언급된 바를 너희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빵에 관해서는 사도의 다음 말씀을 전한다. “빵을 없애라”(고린도전서 16:13). 이 말을 하는 것은 여러분을 그것들로부터 완전히 멀어지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품위 있고 경건하며, 영혼에 구원을 주고 몸을 강건하게 하여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완수할 수 있도록 먹고 마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22. 세속적인 쾌락, 고기 섭취, 술 마시기, 목욕탕, 온실 및 그 밖의 온갖 것들로부터의 절제와 자제 덕분에, 생명나무와 불사의 물, 성령의 기쁨, 그리고 영원한 복의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지닌 그 신성한 낙원이 여러분을 위해 준비되고 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그곳에는 여러분을 위한 안식과 온갖 위로가 보물로 간직되어 있습니다. 머지않아 죽음의 문을 통해 그곳에 도달하여, 그 모든 것을 끝없이, 영원히 맛보고 마시게 될 것입니다. 반면 이곳에서는, 설령 왕궁에 있는 것과 같은 복을 누린다 해도, 그것들은 달콤함(τρυφη)이 아니라 구더기의 양식(τροφη)일 뿐이며, 그것을 맛보는 것은 풍요로운 삶이 아니라 생명이 없는 상태이고, 그것으로 얻는 기쁨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이며, – 그것으로 인한 기쁨은 소유가 아니라 상실이며, – 그것의 유산은 참으로 헛된 것 중의 헛된 것이니, 세상의 즐거움을 온전히 누렸던 가장 지혜로운 솔로몬이 말한 대로이다.

23. 여러분은 친구에게는 절제를, 아내에게는 순종을, 딸들에게는 순결과 동정, 자선을, 성스러운 처녀들에게는 통회와 겸손을 갖추어야 합니다. 산들의 하늘을 바라보라. 거기서 우리의 거처가 어디인지, 우리의 머리이시며 모든 이의 아버지이신 그리스도 주님께서 계신 곳이 어디인지, 우리의 성읍인 하늘의 예루살렘이 어디인지 보게 될 것이다. 진실로, 모든 것을 인내하면 승리할 것이며, 모든 것에 만족하면 면류관을 쓰게 될 것이며, 그렇게 생을 마치면 천국 문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106. 성 바오로의 말씀과 본보기에 따라, 영원한 복을 바라며 모든 것을 인내합시다.

106. 1) 성 바오로의 말씀과 본보기에 따라, 영원한 복을 바라며 모든 것을 인내합시다. – 2) 우리도 그와 마찬가지로 매 순간 인내해야 할 일들을 마주하기 때문입니다. 3) 우리가 이를 인내한다면,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에게 임할 것입니다. [2, 32]

24. 수고하고 분투하며,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삶 속에서 여러분에게 닥치는 고난들을 낯선 것, 즉 이상하고 예상치 못하게 여러분에게 일어나는 일로 여기지 마십시오. 세상에서 이곳으로 온 여러분은, 하나님과 그분의 택하신 천사들 앞에서, 천국을 위해 기꺼이 모든 슬픔과 궁핍, 굶주림과 목마름, 추위와 벌거벗음, 모욕과 비방, 그리고 그 밖의 금욕적인 고난들을 참아내겠다고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차라리 그런 것들은 아예 신경 쓰지 말고, 오직 그 끝의 복된 결실을 바라보며 인내하고 또 인내하십시오. 그 끝이란 무엇입니까? – 천국의 상속, 영원한 복의 기쁨, 불멸의 맛보기, 끊이지 않는 생명의 복락,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지위, 낙원의 달콤함,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위로입니다. 진실로 위대하신 사도께서 이에 대해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마땅하고 의로운 일이었습니다(롬 8:18). 그분은 당시 온 우주를 마치 사자와 호랑이 사이를 걷는 것처럼 누비시며, 불신자들에게 끌려다니고 찢기며, 굶주림과 갈증 속에서 밤낮으로 수고하시며, 자신의 손으로 일하셨습니다. 이는 누구에게도 짐이 되지 않기 위함이었으며, 자신의 수고로 자신과 함께 있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스스로 마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25. 만일 우리도 지금 처한 상황에서 모든 것을 감사하고 인내하며 견뎌낸다면, – 우리에게 복이 있으리라 – 우리는 그분의 몫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소심하고 불평하며 원망한다면, 피를 흘릴 지경까지 죄와 싸운 이들과 우리가 무슨 교제를 나눌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날에, 우리는 사소한 일조차 평온하고 마땅히 해야 할 대로 이행하지 못한다면, 온갖 수치를 당할 자격이 있는 자들이 되지 않겠는가? – 즉, 모순 없는 순종, 불평 없는 수고, 교만하지 않은 섬김, 때를 잘 맞춘 침묵, 분별 있는 말, 상황에 따른 다른 임무로의 전환, 일에 걸맞은 주의와 노력, 자기 의지의 절제, 부과된 참회의 기꺼운 감당, 밤낮으로 시편 찬송과 기도에 지치지 않고 서 있는 것, 그리고 그날 정해진 시편을 인내심 있게 암송하는 것.

26. 이 모든 것과 열거할 수조차 없는 많은 다른 것들을 우리가 온유하고, 기꺼이,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견디며, 실천한다면, 우리의 삶은 아름다워질 것이며, 이를 기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호의적으로 바라보시고 축복해 주실 것이다. – 그러니 우리가 이러한 삶의 방식에서 물러서지 않도록 합시다. 설령 매일 죽어야 한다 해도,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며, “어떤 일에서도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하여, 우리의 사역이 흠 없이 이루어지게 하리라”(고린도후서 6:3)고 하십시오.

 

107. 지금은 사순절이니, 각자가 이 시기가 요구하는 대로 자신을 단련하라

107. 1) 지금은 사순절이니, 각자가 이 시기가 요구하는 대로 자신을 단정히 가다듬으라. – 2) 단지 겉으로 드러나는 육체의 절제나 육체적인 수련만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악과 자기 의지를 잘라내는 것, 즉 겸손과 순종이 더 요구된다. [2, 33]

27. 지금, 아시다시피, 거룩한 사순절은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은 영적 수행을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즉, 모든 선한 일에 대한 지극히 열심 있는 준비, 온유함, 용기, 근면, 인내, 하늘을 향한 기도, 눈물을 흘리는 감회, 마음이 찢어지는 겸손, 음식과 음료뿐만 아니라 시기, 증오, 분노, 성급함, 불평, 교만, 선을 미워하는 가장 악한 정욕으로부터도 적절히 절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스스로를 더 주의 깊게 살펴보고, 앞서 말한 바에 따라 자신을 정화하며, 성령께 이끌리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전하는 도구이자 선택받은 그릇으로 자신을 가다듬으라. 때가 이를 요구하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금식이다.

28. 아무도 나에게 이렇게 말하지 말라: ‘나는 이만큼 노래하고 시편을 읊으며, 이만큼 기도하고, 아주 적게 먹고, 적게 마시며, 앉아 있을 때 잠을 조금만 자고, 이만큼 무릎을 꿇으며, 오랜 시간 동안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들어 올린다.’ 물론 이 모든 것도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네가 내게 말해 보라. 네 생각은 겸손해졌는가, 영은 꺾였는가, 자신의 뜻은 잘라내어 언제나 순종하고, 결코 반박하지 않으며, 결코 불평하지 않고, 전혀 다투지 않으며, 형제를 시기하지 않고, 헛된 생각을 품지 않으며, 헛소리를 하지 않고, ‘왜 저건가, 왜 이건가?’ 하고 묻지 않는가? 왜 저 사람은 저런 처지에 있고, 이 사람은 이런 처지에 있는가? – 그리고 이로 인해 마음이 변하고, 얼굴에 사나운 기색이 드러나며, 선한 것이 아니라 악한 마음의 보물에서 나온 불신의 말, 무모함, 그리고 혼란을 쏟아내는데, 이것들은 그 자신뿐만 아니라 듣는 자들까지 타락의 구렁텅이로 빠뜨릴 수 있다. 금식의 행위는 이와 같지 않으며, 절제의 실천도 이와 같지 않다. 그러나 만일 누군가 자기 안에 겸손과 순종의 행실을 지니고 있다면, 이 두 가지 미덕을 마치 두 날개처럼 삼아 하늘로 날아오르며,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는 자가 될 것이다.

 

108. 우리가 하나님께 일하고 있음을 기억하며 나태함을 용납하지 말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열심과 정성에 따라 갚아 주실 것이다.

108. 1)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일하고 있음을 기억하며 나태함을 용납하지 말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열심과 정성에 따라 갚아 주실 것이다. – 2) 이와 더불어 내면과 외면을 막론하고 삶의 모든 질서를 완벽하게 지키자. – 3) 용기를 내라: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 마리아, 그리고 하나님의 성인들이, 특히 우리 수도원의 수호성인인 세례 요한과 신학자 요한이 도우미로 계시다. – 4) 부적절한 대화는 삼가고 오직 영혼에 유익한 이야기만 나누자. [2, 84]

29. 주의하십시오. 낙담과 나태, 그리고 부적절한 생각들로 인해 우리 마음이 무거워지지 않도록 하여, 이로 인해 영혼 안에서 내적 타락이라는 재앙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십시오. 오히려 청년다운 활기와 열정으로, 짧고 끊임없이 줄어드는 우리 삶의 남은 시간을 함께 살아가도록 힘쓰자. 그리하여 선한 업적과 거룩한 수행, 그리고 존경받을 만한 미덕을 완성한 뒤, 이 생을 떠나 미래의 세상으로 넘어가, 상을 주시는 하나님께로부터 썩지 않는 의의 면류관을 받을 자격을 얻게 되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각자는 자신의 사역을 어떻게 수행하고 있는지 살피고, 노년에 이르기까지 마치 현존하시는 주님을 섬기는 것처럼, 소홀히 하지 않고, 나태하지 않고, 게으르지 않고, 위선적으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를 통해 모욕받는 분은 사람이 아니라, 그 사역이 바쳐지는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들은 여기서 주님의 계명을 상기시켜 주는 종들일 뿐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계명을 지키는 자나 어기는 자 모두 우리 앞에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며, 우리에게 호의를 보이는 것도 아니라, 계명을 주신 선하신 주님이시며 하나님이신 분께 호의를 보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가 책을 베껴 쓰든지, 예배를 드리든지, 밭을 갈든지, 밭고랑을 파든지, 혹은 다른 일을 하든지, 각자는 마치 사람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처럼 자기 일을 행해야 한다. 그리하면 그 일은 하나님, 곧 마음을 아시는 분께서 그 일에 쏟은 힘과 열심을 따라 평가하실 때 깨끗하게 될 것이다.

30. 혀는 헛된 말을 삼가야 하며, 눈은 부적절한 광경으로부터 보호해야 하고, 마음은 불결한 생각으로부터 지키며, 모든 감각을 하나님의 경외심으로 절제해야 한다. 서로에게 겸손하고 지혜롭게 대해야 하며, 건방지지 않은 사랑으로 서로 대하고, 품위 있는 대화를 나누며, 유익한 것을 보고, 마땅한 말을 듣고, 겸손함으로 서로 대하며, 신성한 일들을 생각해야 한다. 그리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나님의 계명을 이행하고, 영혼을 구원하는 삶을 살며 이 땅에서의 삶을 마쳐야 한다.

31. 용기를 내십시오. 우리는 이러한 삶의 여정에서 하나님을 도우미이자 옹호자로 모시고 있으며,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 마리아의 중보와 우리 주님들, 위대한 성인인 세례자 요한과 신학자 요한의 기도가 든든한 보호막이 되어 줍니다. 우리는 바로 그분들의 이름을 딴 수도원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 “주님께서 우리 생명의 보호자이시니, 우리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시편 26, 1). 만약 우리가 성모 마리아와 성인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누가 우리를 이길 수 있겠습니까? 결코 아무도 없습니다. 또한 악마들도 우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 것이며, 사람들은 우리를 칭송할 것이고, 원수들은 놀라워할 것이며, 아무도 우리 앞에 맞서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살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모든 일이 정반대로 일어날 것입니다.

32. 특히 이런 도시에 살면서, 우리는 왜 마땅한 품위를 지켜야 하는가? 우리에게 낯선 주제에 대한 대화는 삼가야 한다. 왕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지도자들에 대해 수다를 떠는 것도, 이러저러한 일을 캐묻는 것도 우리에게는 낯선 일이다. “이 명령을 명심하라”(시라 3,22)고 지혜로운 이가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염려가 있고, 다른 대화도 있습니다. 세속적인 사람들은 세속적인 일에 대해, 일상적인 사람들은 일상적인 일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구세주 하느님과 영혼에 유익한 것들, 즉 미덕과 우리 경건한 선조들의 생애, 죽음과 천국으로의 귀환, 거룩한 천사들의 맞이, 그리스도의 보좌 앞에서의 심판, 의로운 보응, 천국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대화를 나누면, 우리는 천사처럼 깨달음을 얻고, 만일 기회가 된다면 평신도들에게도 깨달음을 전하게 됩니다. 그러나 헛된 대화에 빠진다면, 우리 스스로에게 해를 끼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조롱과 비난을 받게 됩니다. – 그러니 이제부터 스스로 경청하고, 부적절한 대화로부터 입을 지키며, 우리의 선한 행실을 널리 알리십시오. 그리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열정을 더욱 뜨겁게 불태우고, 그분의 진리를 위해 죽음을 택하기까지 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그러한 결심을 하나님께서 행위로 받아들이시어, 그날에 순교자의 면류관으로 여러분을 장식해 주실 것입니다.

 

109. 열정적이고 온 힘을 다해 세상의 것을 추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것입니다

109. 1) 열정적으로 그리고 온 힘을 다해 세상의 것을 추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지내신다면 번영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성부들이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 2) 다시 한 번 재물을 탐내는 자들에 대한 훈계. [2, 35]

33. 어떤 이들은 한 가지를, 다른 이들은 또 다른 것을 추구하는 대상으로 삼습니다. 어떤 이는 권세를, 어떤 이는 겉으로 드러나는 관직에서 오는 명예를, 또 어떤 이는 집과 하인, 밭에서 오는 풍요와 많은 재산을 추구합니다. 세상의 욕망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영적으로 다른 세상으로 옮겨가, 이 세상 너머의 하늘의 것을 갈망하고 추구하며, 마음으로 그곳에 머물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모든 관심과 수고는 오직 이 한 가지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정욕을 온전히 정화하고, 으스레하고 겸손한 마음을 얻으며, 게으름 없이 기도하고, 끊임없이 힘쓰며, 눈물로 회개하고, 온전히 염려하지 않는 것 외에는, 친구나 지인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부모님이나 온갖 헛된 일들까지도 여러분을 걱정시키거나 마음을 차지하지 않습니다. – 아, 이것이 바로 여러분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이군요! 그리고 저는 여러분 각자가 어떻게 끈질기게 버티며, 고군분투하고, 자신을 괴롭히는 정욕에서 벗어나 오직 한 분 하나님과 함께 머물기 위해 스스로를 다그치는지를 봅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러한 순교적인 수련을 계속하신다면,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힘을 주시고 굳건함을 주셔서, 여러분을 향한 모든 정욕적이고 사탄적인 저항을 물리치고, 과거에 살았던 성스러운 분들과 하나님을 닮은 교부들처럼, 여러분 앞에 놓인 삼중의 복된 수련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들이 육신을 입고 우리와 같은 본성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수고와 고행 없이 삶을 마쳤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온갖 고난을 다양하게 겪고 극복하며, 온전한 순종과 겸손, 절제 및 그 밖의 모든 미덕을 통해 육신을 영에 복종시킴으로써 거룩한 삶의 높은 경지에 이르렀고, 그들이 얻은 것과 그로 인해 영광을 얻은 것을 얻었습니다. 우리 영혼의 교훈이 되도록, 지극히 경건하신 우리 아버지 사바[95] 의 덕행을 떠올려 봅시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그는 수련생 시절에 지극히 순종적이고, 겸손하며, 봉사 정신이 투철했으며, 가장 하찮은 일조차 기꺼이 맡아 마치 영광스러운 일을 행하는 것처럼 기뻐했습니다. 그는 밤낮으로 수고하며 물을 나르고 장작을 운반했으며, 시편 찬송 시간에 가장 먼저 도착하고 가장 늦게 떠났습니다. 그에 대해 기록된 다른 많은 일들도 있지만, 지금은 일일이 열거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그를 본받읍시다, 자녀들아. 이는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한 사람은 이 부분에서, 다른 사람은 저 부분에서, 서로 돕고 서로 경쟁하되, 무엇보다도 마땅한 문의 없이 자신의 뜻대로 아무것도 행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심지어 좋은 것처럼 보이는 일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34. 한 가지 일에 대해 침묵할 수 없는데, 두 번째는,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여러분 가운데 어떤 무지한 자들, 모든 질서를 경멸하는 자들에 의해 자행되고 있는 일입니다. 비록 이것이 매우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지만—제 말은—우리 가운데 빈번하게 발생하는 분실, 혹은 더 정확히 말해 도난 사건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잠시 외출하거나 용무로 오래 자리를 비울 때, 자신의 방에 샌들이나 붓, 혹은 다른 수공예 도구를 두고 나갔다가 돌아와 보면 남겨둔 물건을 찾을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완전히 악마적인 일이며, 형제 공동체 내에서 유감스럽고 분개할 만한 일입니다. 그리하여 의심과 험담, 슬픔, 심지어 적대감이 생겨날 것이며, 아마도 유죄자보다 무고한 이들에게 더 큰 피해가 갈 것입니다. – 자, 도둑들아, 복된 사도 바울의 엄중한 말씀을 들어보라: “도둑…과 강도”는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하리라”(고린도전서 6, 10). “약탈자들”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은이나 금, 혹은 귀한 옷 등을 구체적으로 덧붙이시지 않으시고, 포괄적인 선언을 내리셨습니다. – 약탈이 무엇이든,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약탈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 도둑들과 약탈자들아, 이 말을 듣고 있느냐? – 그러니 부탁하노니, 더 이상 훔치고 빼앗는 것을 그만두라. 실, 바늘, 송곳, 붓, 작은 주전자, 그릇, 작은 칼, 허리띠, – 그리고 이와 유사한 것들까지: 왜냐하면 이런 모든 일을 행하는 자들은, 다시 말하건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 사도들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으십니까? 하필 이 가난한 제가 이런 위협을 내뱉는 것입니까? – 그러므로 다시 한 번 간청하노니, 우리가 부름받은 소명에 합당하게, 깨끗하고 경건하며 의롭게 행하며, 앞서 말한 악을 멀리하여 영원한 복의 상속자가 되게 하소서.

 

110. 여러분의 교제를 통해 각자의 선함이 모두에게 전해지고, 모두의 선함이 각자에게 전해집니다

110. 1) 여러분의 교제를 통해 각자의 선은 모두에게 전해지고, 모두의 선은 각자에게 전해집니다. – 2) 그러니 게으름 피우지도 말고, 제멋대로 행동하지도 맙시다. 대신 공동의 삶을 살아가며, 악을 멀리하고 선한 일을 열정적으로 추구하도록 노력합시다. – 3) 우리가 행하고 경험하는 일은 일어나고 지나가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지만, 내면에는 남아 있으며 심판의 날에 의로움이나 정죄를 입증하기 위해 드러날 것이다. [2, 87]

1. 각자에게는 자신의 은사가 있으니, 기록된 바와 같이 한 사람은 이런 은사를, 다른 사람은 저런 은사를 받았다. 그러나 형제들아, 사랑의 유대로 맺어진 너희는 이 사랑의 힘으로 서로의 수고와 덕행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라. 예를 들어, 어떤 이는 모욕을 너그럽게 참아내고, 다른 이는 근면함으로 두각을 나타내며, 또 다른 이는 침묵으로, 또 다른 이는 온유함으로 구별됩니다. 그리고 교제를 통해 여러분 각자는 자신만의 것 외에도 다른 이들이 가진 것을 갖게 됩니다. 여러분의 선함은 한 사람으로부터 모두에게, 그리고 다시 그 반대로 상호 교환됩니다. 그러므로 기뻐하고 서로를 위해 기뻐해 주십시오. 그리고 각자가 가진 은사가 무엇이든, 그 분야에서 번창하며 허영을 피하고, 형제의 미덕을 더 높게 여기십시오. 만약 우리가 이와 같고, 서로 이렇게 하나로 녹아들어 사랑의 연합으로 결합되어 있다면, 우리는 더욱더 발전하기 위해 힘쓸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일에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고, 우주의 더 넓은 곳에서 우리 삶의 모범이 널리 알려지게 될 것입니다.

2. 그러나 누구도 제멋대로 행동하거나 자기 방식대로 하지 말라. “자기를 지혜롭다 여기며 자기 앞에서 슬기롭다 여기는 자들에게 화가 있을지어다”(사 5:21). 누구도 부주의하거나 게으르지 말라.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라”는 말을 듣지 않도록 하라(잠언 6:6). 또한 누구도 판단에 있어 양면성을 보이지 말라. “마음이 두 갈래인 사람은 자기의 모든 길에서 정립되지 못한다”는 말을 듣지 않도록 하라(야고보서 1:8). 그러나 언제나 기민하고 계명을 행하는 데 신속하며, 진실하고, 자신의 속마음을 고백함으로 인해 흠이 없으며, 허영에 사로잡히지 말고 , 자신의 정욕에 휩쓸리지 말라. 이는 그러한 자가 “바람에 휘몰아치고 이리저리 휩쓸리는 바다의 파도” (야고보서 1:6)과 같으니, 이는 마음이 흔들리고 마음속에 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이 너희 모두에게서 멀리 떠나게 하라. “정직하고 칭찬받을 만한 것”은 힘써 얻으려 하고, 그것으로 부유해지며, 너희 영혼의 보물창고에 간직하여 천국을 얻도록 하라.

3. 여러분 중 누구든지 매일 행하는 일, 그것이 칭찬받을 만한 것이든 책망받을 만한 것이든, 그 모든 것은 물줄기처럼 지나가고 사라져 버리니, 어제와 오늘 사이에는 심지어 마음속에도 거의 아무것도 남지 않을 정도입니다. 누군가 계명을 지키느라 고통받고, 수고하고, 울고, 인내하고, 땀 흘리고, 마음이 찢어지고, 억압받고, 기진맥진하고, 모욕을 당하거나, 그 밖의 다른 고통을 겪더라도, 그 순간에는 느껴지지만 곧바로 지나가 버립니다; 그러나 그것을 겪은 자에게는 모든 것이 남아 영원토록 보존되어 보상을 받게 된다. 반대로, 위로를 구하거나, 웃거나, 쾌락을 누리거나, 난동을 부리거나, 놀거나, 게으름에 빠지거나, 누구의 말도 듣지 않거나, 경솔하게 행동하거나, 시기하거나, 분노하고, 광란하며, 계략을 꾸미고, 자만하며, 그와 유사한 자들은, 지금 당장 그로부터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심판의 날과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의 날에 정당화될 수 없는 정죄를 스스로 쌓아두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을 깊이 생각해 봅시다, 형제 여러분. 우리는 덕을 닦고, 죄는 재앙적이고 모든 것을 파멸시키는 악이므로 온갖 방법으로 피하도록 힘쓰며,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삶을 살다가, 하나님께 기쁨을 드린 모든 이들과 함께 약속된 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합시다.

 

111. 교훈은 여러분이 이를 듣고 바로잡히도록 하기 위해 전해지는 것이나, 여러분은 여전히 변함없이 그대로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그렇게 무관심하고 소극적으로 굴지 마십시오.

111. 교훈은 여러분이 듣고 고쳐 나가도록 하기 위해 전해지는 것이지만, 여러분은 여전히 변함없이 그대로입니다. 그러니 그토록 무관심하고 소극적인 태도를 그만두십시오. [2, 38] 묻겠습니다. 교훈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전해지는 것입니까? 단지 정해진 시간에 읽어내려가며 귀를 간지럽히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여러분이 나를 칭찬하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그저 뚜렷한 목적 없이 하는 것인가? 그런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직 여러분이 말씀의 의미를 깊이 새기고, 온 마음을 다해 말씀의 힘을 받아들여, 나의 아버지이자 여러분의 아버지의 도우심과 기도가 함께할 때 그리스도의 은혜로 열매를 맺게 하려는 것입니다. – 이것이 바로 나의 의도와 의무입니다. 그러나 내가 보는 것은 무엇입니까? – 설교가 끝나자마자, 마치 아무 말도 없었던 것처럼 여러분의 기억에서 모든 것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예배가 끝나고 밖으로 나가자마자, 우리는 곧바로 평소와 같은 죄악에 빠집니다. 한 사람은 때 아닌 말을 시작하고, 다른 사람은 불평하며, 또 다른 사람은 험담을 지어내고, 이 사람은 구석에 숨어 잠을 자다가 수공예 시간을 놓치고, 돌아왔을 때 그의 “손은 무력하고 무릎은 풀려 있다”(시라크 25,26). 다른 이야기는 차치하고. 내 자녀들아, 그렇지 않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이런 말을 듣게 될 것이다. ‘이 사람들은 입으로는 나를 축복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나 구원의 말씀을 듣게 될 때, 그것이 나의 가르침에서든, 읽혀진 신성한 성경에서든, 어떤 경우든 간에, 너희 마음속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그분을 향한 사랑의 불꽃, 번영에 대한 소망, 그분의 거룩한 계명을 충실히 지키려는 결심이 솟아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분의 왕국에 들어갈 자격을 얻게 되기를 바란다.

 

112. 우리의 영적 경주: 관중은 누구인가? 달리는 자들은 무엇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가? 누가 모범적으로 달리는가?

112. 1) 우리의 영적 경주: 관중은 누구인가? 달리는 이들은 무엇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가? 누가 모범적으로 달리는가? – 2) 수도원의 일반적인 특권에 대해 시기해서는 안 된다. 그런 경우에 불만을 품은 자들이 하는 말은 모두 어리석은 것이다. 그러니 바로 고쳐라. 누가 그런 짓을 하는지 보라. [2, 39]

4. 여러분은 하느님의 주님의 빠른 달리기 선수들이며, 여러분의 경주는 땅 위가 아니라 땅에서 하늘까지 이어집니다. 관중은 사람이 아니라 천사들과 성인들의 무리이며, 면류관을 수여하시는 분은 주님 자신이시며, 그 면류관은 시들지 않습니다. 스키마를 입고 이 경주장에 들어선 여러분은 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여러분이 단지 시작에 불과합니다. – 면류관은 경주를 완주한 자에게만 주어집니다. 그러니 여러분 각자는 자신이 어떻게 달리고 있는지 잘 살피고, 경주장에서 경주의 성공, 즉 덕행에서의 성취를 결정짓는 표지들을 알아차리십시오; 장애물을 예리하게 살피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힘을 쏟으십시오. 즉, 육체와 세상, 마귀의 유혹을 이겨내기 위해 성령께로부터 힘을 얻으십시오. 누구도 주위를 둘러보지 말고, 경주의 끝이 있는 한 지점을 응시하며, 그곳으로 모든 힘을 집중하십시오. 경주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너희는 잘 달려왔다; 이제부터도 그 열정과 노력을 줄이지 말고, 서로 경쟁하며 서로 돕고 협력하여 달려가라. 누가 앞서 나갈 수 있겠는가? 누구보다도 더 겸손한 자가 될 것이다. 누가 모범적으로 달리는가? 누가 가장 순종적이고, 가장 경건하며, 가장 불평 없이, 시편을 가장 잘 부르는 자, 가장 침묵하는 자, 가장 근면한 자, 가장 기도를 많이 드리는 자, 가장 솔직한 자, 가장 거만하지 않은 자, 가장 악의를 품지 않는 자, 가장 시기하지 않는 자, 가장 충실한 자, 가장 아버지를 사랑하는 자, 그리고 영혼과 육신 모두에서 완전한 미덕의 행실이 드러나는 그 밖의 모든 자. 이것이 바로 여러분의 삶의 길이며, 이를 통해 우리는 힘에서 힘으로, 세상에서 하늘로 올라갑니다.

5. 사랑이 주님의 제자들로서 여러분을 특징짓는 뚜렷한 표징이 되게 하십시오. 사랑 안에 거하면서, 형제들의 모든 차이점과 그들이 사역, 수공예, 직분, 그리고 서 있는 위치에서 받는 우대와 승진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십시오. 시기심과 과격함, 분노가 물러가게 하십시오. 형제들에게 유익한 일은 누구나 자신에게 유익한 일처럼 받아들이고, 그들의 성공을 기뻐하십시오. 그래야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모든 것 위에 완전한 승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랑은 미덕의 면류관입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든, 어떤 사역에서든 누군가가 자신보다 우선시된다는 사실에 속상해하는 것은 썩고 해로운 일이며, 반대편에 서 있다는 징표입니다. 그렇지 않다, 내 자녀들아, 그렇지 않다. “나를 그 사람보다 더 위로해 주어야 한다”거나 “나는 그 사람보다 나이가 많으니, 나에게 더 높은 자리가 마땅하다”고 말하는 것은 불공평하다. 부디, 그런 마귀의 올가미를 피하라. 그러나 선한 것, 정직한 것, 성도들에게 합당한 것, 형제 사랑을 실천하는 것, 겸손과 지혜를 갖춘 것, 가장 낮은 자리를 택하는 것, 바로 이것들을 생각하고, 이를 추구하며, 이를 얻기 위해 힘쓰십시오. 모든 일에서 어린아이처럼, 악의 없이, 진실하게, 주님의 택하신 백성으로서, 명하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허용하지 말고 행동하십시오. 만약 어떤 실수가 생기더라도, 서둘러 그것을 바로잡고 참회를 통해 속죄하십시오. 그리하여 심판의 날에 다음과 같은 하늘에서 들려오는 음성을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내 아버지의 복을 받은 자들아, 창세부터 너희를 위해 준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마태복음 25:34).

 

113. 여러분은 선한 결심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이 현재 겪고 있는 원수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113. 1) 여러분은 선한 결심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여러분을 원수의 유혹에서 벗어나게 하지는 못하며, 여러분은 지금도 그 유혹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서약을 지키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견디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 2) 그러니 어둠의 일을 버리고 빛의 일에서 번창하십시오. 전자는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오지만, 후자는 축복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 3) 지금 우리 가운데 병든 이들이 많습니다. 건강한 이들은 병든 이들을 섬기십시오. 병든 이들은 인내하며 모든 것에 만족하십시오. 우리에게는 하인이 없습니다. 형제들이 사랑과 순종으로 섬깁니다. 수고하는 이들이여, 용기를 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보십니다. [2, 40]

6. 하나님의 뜻에 따라, 여러분 모두는 구원받을 자들 가운데 있으며, 모두 구원의 길에 들어섰고, 여러분 모두에게는 구원을 얻는 것 외에는 다른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선을 대적하는 마귀가 있기에, 우리 중 많은 이들이 그로부터 원치 않는 유혹을 받습니다. 어떤 이들은 정욕적인 쾌락으로 부추기며, 청년기의 욕망을 자신의 도구로 삼고, – 어떤 이들은 그가 하늘에서 추락하게 된 원인이기도 한 독단적인 태도로 무너뜨리고, 또 다른 이들은 게으름으로 나태하게 만들고, 낙담으로 묶어두며, 자기가 원하는 대로, 원하는 곳으로 이끌고, 불신으로 혼란스럽게 하며, 제멋대로인 성향으로 사로잡아 부적절한 일들을 가르칩니다. 그가 매일같이 우리를 찌르려고 시도하는 모든 것을 하나하나 열거할 필요가 있겠는가? 단지 우리가 방심하고 방탕에 빠질 때만을 기다리며 이 한 가지에만 매달리고 있는 것뿐인데? 그러나 바다에게 “잠잠하라, 그치라”(마가복음 4:39) 말씀하신 주 하나님께서 그를 금하시어, 그를 우리로부터 멀리 쫓아내시기를 바랍니다. 이는 우리가 우리 자신 안에 집중하고, 수도원에 입회한 우리의 첫 번째 목적을 끊임없이 마음에 새길 때 이루어집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증인이 되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모든 슬픔과 고난을 견디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7. 그러므로 구원을 추구하는 데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버리십시오: 소심한 자의 소심함, 권력을 탐하는 자의 권세욕, 게으른 자의 나태함, 쾌락을 탐하는 자의 쾌락 추구, 교만한 자의 교만, 허영심 많은 자의 허영, 건방진 자의 건방짐, 무질서한 자의 무질서, 수다스러운 자의 수다, 세속을 사랑하는 자의 세속 사랑, 육체를 사랑하는 자의 육체 사랑, 무분별한 슬픔에 빠진 자의 무분별한 슬픔; 시기하는 자의 시기, 도발하는 자의 도발, 다투는 자의 다툼, 게으름을 좋아하는 자의 게으름. 이것이 바로 어둠의 일들과 악의 모습들, 곧 악마가 고안하고 심어 놓은 것들이다! 그러나 선하신 하나님께는 평화, 온유, 겸손, 순종, 시기하지 않음, 근면, 성실, 경각심, 사랑, 소망, 경건, 기도가 기쁘시게 여겨진다. 이것이 바로 빛의 일이며, 의와 성도들의 용맹을 위한 무기입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간청하노니, 정욕에 잠든 자들아 깨어나라. 원수의 유혹에 매료되어 졸고 있는 자들아, 깨어 있으라. 우리가 선한 삶을 살고자 하고, 복된 날들을 보고자 한다면,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의 말씀을 따르자: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며, 평화를 구하고 그것을 좇으라”(시 33:15). 주님의 자비로운 눈길은 어디에 있느냐? “주님의 눈은 의인과 주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있나니”(시 32:18). 그렇다면 주님의 진노하신 얼굴은 어디에 있습니까? “주님의 얼굴은” “ 에서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그들의 기억을 땅에서 없애기 위함이라” (시 33:14). 그리고 이 시편의 이어지는 모든 말씀은 우리가 깊이 새기려 한다면 아름다운 교훈을 전해 줍니다.

8. 요즘 우리 가운데 병든 형제들이 많습니다. 이토록 건강하지 못한 시기입니다. 건강한 이들은 병든 이들을 돕자. 병든 이들은 이 주님의 징계를 구원의 수단으로 받아들이고, 기꺼이 병을 견디며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하자. 병에서 회복되면 헛되이 이리저리 돌아다니지 말고, 다시 우리 일에 매진하자.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세속 사람들처럼 오로지 시중을 들기 위해 정해진 고용된 종들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스로가 종이자 주인이자, 섬기는 자이자 섬김을 받는 자이다. 이때 각자는 때이르게 섬김을 받는 것보다 더 많이 섬기도록 유의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과 그분의 일, 그리고 섬김을 보십니다.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지금은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수도원에서 어떻게 사는지, 어떻게 자신을 절제하며 모든 것을 참아내는지, 무엇을 입고 신는지, 그리고 자신의 일을 수행하며 어떤 수고를 감당하는지 보십니다. 때가 되면 각자에게 그 행한 대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낙담하지 말라. 우리는 하나님 앞에 드러나 있으며, 살아온 삶에 대해 보고를 드린 후 마땅한 보상을 받을 때, 그분의 두려운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다.

 

114. 농부가 자신의 밭을 가꾸듯이, 영적인 의미에서 농부가 하는 모든 일을 행하며 우리 영혼을 가꾸어 나가자.

114. 1) 농부가 자신의 밭을 가꾸는 것처럼, 영적인 의미에서 그가 하는 모든 일을 행하며 우리 영혼을 가꾸어 나갑시다. – 2) 전사들이 스스로를 다스리고 싸우듯이, 우리도 그렇게 싸우고 스스로를 다스리자; 전사들이 전쟁에서 상을 바라며 모든 것을 참아내듯이, 우리도 천국을 위해 순종하며 모든 것을 참아내자. [2, 41]

9. 농부는 자신의 밭을 일구며 노동의 고단함을 개의치 않고, 손을 놓지 않으며 게으름 피우지 않고, 장차 얻을 이익을 염두에 두고 이를 위해 수고와 땀, 그리고 지치게 하는 고난을 기꺼이 감수한다. 우리 각자도 마치 밭과 같이, 이 세상에서 가꾸기 위해 영혼을 받았으니, 우리도 그 안에서 영적인 일을 가꾸어야 합니다. 심판의 날에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이에 대해 우리에게 보고를 요구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께 간청하고 간곡히 부탁드리건대, 우리 모두가 함께 힘써 우리 영혼의 밭을 가꾸고, 경건의 법칙에 따라 그 밭을 새롭게 하여, 정욕이라는 가시덤불 속에 씨를 뿌리지 않도록 합시다. 그러나 먼저 우리 밭에서 온갖 죄의 잡초를 깨끗이 제거한 뒤, 그 안에 씨앗을 뿌리고, 그 후 하나님을 향한 눈물로 영적인 비를 내려 적시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굳건한 울타리로 둘러싸서, 마음속의 짐승들이 싹을 뜯어먹지 못하게 하고, 사랑의 햇살로 그곳을 비추고 따뜻하게 하여, 나중에 우리의 지혜로운 손을 수확물로 가득 채우고 그리스도의 계명에 따라 거룩한 행실의 풍성한 곡식을 거두게 하소서. 이를 위해 주 하나님께서는 모든 영혼을 이 생으로 부르셨으며, 특히 우리를 천사 같은 삶의 방식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니 부디 여러분 각자가 선한 행실로, 주님께 기쁜 향기를 풍기는 꽃피고 열매 맺는 자신의 밭을 보여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육신의 성품과 관계를 온전히 변화시키고, 온유한 순종과 그리스도를 본받는 겸손을 통해, 날마다 온전해지며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화되어, 선한 행실로 빛나는 옷을 입고, 모든 불순종을 뿌리 뽑고, 마음의 모든 생각을 그리스도의 순종에 사로잡아, 형제단의 공동 규율에 부합하며, 항상 자기 책망을 품음으로써, 이를 통해 교만과 제멋대로인 성품이라는 여러 머리를 가진 용을 쉽게 짓밟고 죽일 수 있게 하라.

10. 형제들아, 우리는 어떤 일에 특히 부르심을 받았는가? 전쟁과 싸움, 즉 그저 가볍고 하찮은 자들과의 싸움이 아니라, 신성한 사도가 말씀하신 대로, 보이지 않는 영들의 무서운 세력들과의 치열한 싸움이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이 세상의 어둠의 지배자, 하늘 아래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하는 것입니다”(엡 6:12).그러므로 누구도 싸움에 대비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지 말고, 누구도 무장하지 않은 채 나가지 말며, 군인의 표식을 멀리하지 말라. 그러나 상처와 타격을 입거나 충돌을 겪을 때 놀라지 말라. 이 모든 것은 싸우는 자들에게 불가피한 일이다. 이 과정에서 죽는 사람은 한 번 상처를 입거나 타격으로 쓰러진 자가 아니며, 심지어 여러 번 혹은 셀 수 없이 많은 횟수 동안 이를 겪은 자도 아니라, 스스로 기꺼이 적들에게 넘겨져 희생당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형제들과 아버지들아, 우리가 그리스도의 군인들로서 경청하고 전투에서 굳건히 서자. 아시다시피, 모든 전사는 전쟁에 나설 때, 뜨거운 햇볕이나 비, 때로는 추위 등으로 인해 수많은 불편과 고생, 그리고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안락한 삶을 살지 못하며, 때로는 빵 한 조각을 먹거나 찬물 한 잔을 마시고 싶어도 그럴 수 없습니다. 하루 종일, 때로는 밤새도록 그는 이동하며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고, 먼지와 진흙 속에서, 피로와 기진맥진한 상태로 지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를 군대에 등록시킨 지휘관을 기쁘게 하고, 탈영병 명단에 오르지 않으며, 상을 나눠줄 때 아무런 이의 없이 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인정받기 위해서입니다. –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있습니다. 다만 다른 형태로 말입니다. 그들에게는 일시적이고 금세 사라지는 상이 주어지지만, 우리에게는 영원하고 썩지 않는 상이 주어지며,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집니다. – 그러니 우리는 계속해서 인내하며, 각자 맡은 사명에 따라 주님을 위해 순결하고 흠 없이 일하며 끊임없이 수고합시다. 관리하는 자는 현명하고 신중한 판단으로, 섬기는 자는 불평 없이 성실하게 섬기도록 합시다. 우리도 굶주림과 목마름, 모욕과 굴욕, 충돌과 모독을 견뎌내자; 특히 밤의 시편 찬송과 기도 시간 동안의 지치고 나태해지는 순간들, 그리고 수공예와 다른 순종들을 수행하는 동안 매일 우리를 덮쳐와 짓누르는 온갖 종류의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어려움들을 견뎌내자; 그리하여 우리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로, 선한 수고를 다하고 그 여정을 완수하여, 그 날에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의의 면류관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115. 모든 정욕과 분노를 버리고, 주님께 굳게 매달려, 우리 수도자의 소명에 걸맞게 진실하게 그분을 섬기며 일합시다.

115. 모든 정욕과 분노를 버리고, 주님께 굳게 의지하며, 수도자의 소명에 걸맞게 진실하게 그분을 섬기자. [2, 42] 귀를 기울여 듣고, 마음을 열어 성부들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명하시는 바를 깨달으십시오. 이는 바로 제가, 비록 합당하지는 않으나, 제 가르침을 통해 여러분께 전하고자 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정확히 무엇을 말씀하시고 우리 영혼에 심어주시는지, 이번에는 다음 두 구절의 하나님의 말씀에 담아보겠습니다. 하나는 다음과 같이 경고합니다: “자기를 속이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자나 간음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남색하는 자나 남자와 동침하는 자나 강도나 도둑이나 술 취하는 자나 비방하는 자나 탐욕스러운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하리라” (고린도전서 6:9), – 그리고 또 다른 구절에서는: “모든 분노와 노여움과 격분과 고함, 모욕을 너희에게서 없애고, 모든 악의를 버리라. 서로 친절하고 자비로우며, 서로 용서하라. 마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처럼” (엡 4:31, 32); 또 다른 구절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오라, 우리가 그분께 경배하고 엎드려, 우리를 지으신 주님 앞에서 울자” (시 94:6), 그리고 또: “고백하며 그분의 문으로 들어가고, 찬송하며 그분의 뜰로 들어가라” (시 99:4). 그러므로 경고로 확신을 얻고, 이 부르심을 마음에 새기며, 모두 함께 와서 경배하며 주님께 경배하고, 지나온 우리 삶과, 알면서나 모르고 저지른 매일의 죄, 말과 말과 생각으로, 노래와 찬양으로 그분의 뜰에 들어가자. 그러나 욕설과 광란, 불순종과 교만함으로는 들어가지 말자. 누구든지 불평하면, 그에게는 죄가 있다: 그러니 우리는 불평하지도 말고, 화를 내지도 말고, 제멋대로 굴지도 말고, 헛된 지혜를 내세우지도 말자. 우리는 흙과 재, 먼지와 티끌일 뿐이니, 특히 육체적이나 영적인 행실로 인해 자신이 영광스럽다고 어리석게 생각하는 자들은 더욱 그러하다. 나는 “세상의 형상이 우리에게서 지나갔다”(고린도전서 7:31)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세속 사람들과는 다른 존재로서, 어떤 낯선 옷을 입고, 낯선 방식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결혼하지 않은 자, 이름 없는 자, 상속자가 없는 자, 잡히지 않는 자, 더 나아가 육신이 없는 자입니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롬 8:8)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선택한 삶이 이러하니, 우리는 그 삶의 뚜렷한 표징을 몸에 지니고, 이름만 빌린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우리가 자칭한 그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순종하고, 신속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선하고, 경건하며, 서로 사랑하고, 근면하고, 인내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함으로써, 선하게 살아가서 우리가 갈망하고 찾는 천국의 상속자가 되자.

 

116. 어떤 이들이 도망친 사건을 계기로: 굳건히 서서 온전해지라. 선한 일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뜻대로 행동하는 것을 온갖 방법으로 경계하라.

116. 어떤 이들이 도망친 사건에 대하여: 굳건히 서서 온전해지라. 심지어 선한 일일지라도 자기 뜻대로 행동하는 것을 온갖 방법으로 경계하라. [2, 43] (어떤 이들이 수도원에서 도망쳤다: 이에 대한 유감을 표명한 후, 성스러운 아버지는 덧붙이시기를...) 여러분은 그들의 본보기를 통해 절제하며,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베푸신 자비가 얼마나 놀라운지 깨달으십시오. 여러분은 마귀의 꾀에 휩쓸리지 않았고, 굳건한 믿음으로 흔들림 없이 버텨냈으며, 여러분에게 맡겨진 거룩한 순종의 계명에서 물러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부디 그들과 같아지지 마십시오. 빛의 자녀로서 어둠과 불순종의 자식이 되지 말고, 여러분의 수많은 복된 수고를 헛되이 낭비하여, 동시에 여러분의 영혼을 영원한 심판에 내맡기지 마십시오. “모세의 율법을 거역한 자는 두세 증인이 있으면 자비 없이 죽임을 당하리니, 하물며 더 큰 죄를 범한 자들은 얼마나 더 심한 형벌을 받을 것이겠느냐”(히브리서 10, 28, 29) – 우리의 거룩한 소명에 대한 서약과 고백, 그리고 언약을 어기고, 우리의 완전함을 상징하는 성사를 조롱한 자들입니다. 그러니 부디 스스로를 돌아보고, 하나님의 길을 바르게 걸어가며, 기도하여 그들도 마귀의 영혼을 갉아먹고 죽음을 부르는 유혹( )에서 벗어나 돌아올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그나저나, 여러분 각자가 내면의 성향으로 보아, 선택받은 그릇인지, 아니면 멸망할 그릇인지,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공동 규율에 따르지 않고, 공동의 유익을 위하지도 않으며, 원장의 명령에 따르지도 않은 채, 여러분 가운데서 일어나는 일들—독서나 시편 찬송, 절제, 기도, 혹은 선하고 마땅해 보이는 다른 어떤 일에서—가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자에 의해 이루어질 때, – 이로 인해 형제단 전체에 혼란이 일곤 하는데 – 그러한 자는 분명히 악한 원수의 도구로서, 복종과 순종의 유대를 끊고 어둠 속에서 자신의 정욕을 좇아 걷는 자임이 명백하다. 또한 의로운 심판으로 불경건한 자들이 경건한 자들로부터, 가짜들이 참된 자들로부터, 위선적인 자들이 진실한 자들로부터, 교활한 자들이 진심으로 경건한 자들로부터, 악한 성품의 자들이 선한 성품의 자들로부터 분리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빛과 어둠이 어떻게 함께할 수 있겠느냐?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를 이룰 수 있겠느냐?”(고린도후서 6:14, 15). – 그러므로 우리가 관용과 회개를 기대하며 그런 자들을 배제하지 않을 때, 그들은 스스로 도망침으로써 자신을 배제하고 단절하게 됩니다. 원한다면, 『헤론디카』에 기록된 “그 장소 자체가 그 장소의 일을 행하지 않는 자들을 쫓아낸다”는 말도 떠올려 보십시오.

 

117. 다시 도망친 자들. – 어떻게 하면 이러한 타락을 피할 수 있을까?

117. 1) 다시 도망친 자들. – 어떻게 하면 이러한 타락을 피할 수 있을까? 원수의 유혹과 그에게 유혹당한 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아야 한다. – 2) 어떤 이들은 저녁에 소란을 피우며 빵과 포도주를 요구한다: 이에 대해 전반적인 지시를 내리겠다;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을 그만두어라. – 3) 어떤 이들은 제멋대로 한 순종에서 다른 순종으로 옮겨가니, 이런 일이 없도록 하라. 자기 뜻은 파멸이다. [2, 44]

11. (다시 도망친 자들에 관하여). 이러한 타락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겠는가? – 뱀의 조언을 받아들여서는 안 되며, 뱀 그 자체를 마음속에 숨겨 두어서는 안 되고, 서둘러 그를 폭로해야 한다. – 그러면 그는 불을 피하듯 도망칠 것이다. 만일 우리 도망자들이 이 규칙들을 지켰더라면, 피해를 입는 지경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 나의 자녀들아, 조심하고 이를 지켜라. 그리스도의 양 떼로서, 마귀의 먹잇감이 되려고 스스로 내어주지 말라. 그리스도의 계명이라는 낙원에 들어간 자로서, 어떤 형태로든 악한 뱀의 미끼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그래야만 죄의 암흑 속으로 추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천사처럼 살아가며, 제멋대로 도망치는 어둠에 덮이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인내할 때는 인내하고, 계명을 이행할 때는 충실히 이행하십시오. 누구도 교활한 자들의 무리와 어울리지 말고, 불경건한 자들과 함께 앉지 말라(시 25:5). 누구와 결탁하여 도피하거나 다른 어떤 정욕을 충족시키기로 모의하는 자는, 자신과 그를 따르기로 동의한 자 모두에게 파멸을 초래하는 불경건하고 교활한 자이다. 그러므로 그런 자가 너를 다른 이들에게서 떼어 놓고, 자신의 혀로 악의 독을 네게 주입하기 시작하면, 재빨리 물러나 그로부터 멀리 떨어져라. 너 자신과 그를 구원하기 위해 귀를 막아라. 설령 그가 일어난 유혹으로 인해 네가 슬퍼하는 모습을 보더라도, 의롭게 슬퍼하고 분개하는 너에게 다시 교묘하게 접근하는 그를 받아들이지 마라. 이는 너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뱀이기 때문이다. 그가 네 낙원, 즉 공동체를 비난하기 시작하거나, 너와 함께 사는 자들, 곧 네 형제들을 고발하며, “저 사람은 이렇고, 이 사람은 저렇다”거나 “우리에게는 이런 점이 좋지 않고, 저 점은 나쁘다”고 말할 때, 그를 밀쳐내고 마땅히 꾸짖어, 그를 절제하게 하고 너 자신도 구원하라. –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뭐라고 말하나요? – “이곳 사람들과는 헤어지자. 수도원장은 까다롭고, 공방 책임자는 무자비하며, 서예가는 무모하다. 일은 많은데 보수는 미미하고, 모두가 명령만 내린다. 힘든 노동을 견딜 힘이 없고, 여기서 구원받을 가능성도 없다. 여기서 도망치자.” – 어디로? 눈이 닿는 곳 어디든; 그저 빠져나가기만 하면 된다.” – 그리고 만일 제정신인 사람 중 누군가가 그런 자들의 내면을 엿볼 수 있었다면, – 그들을 어둡고, 끔찍하며, 악마 같고, 건전한 것이 전혀 없는 존재로 보았을 것이다. 의지도, 이성도 없이, 길을 잃은 양처럼 이리저리 헤매는 자들로 말이다. – 제가 단지 그들을 망신주려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아니요, 아니요: 오히려 그들에게는 훨씬 더 많은 악이 있습니다. –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그나저나 기도하십시오, 온 마음을 다해 기도하십시오. 그들이 발견되어 돌아오게 하소서. 스스로 돌아오든, 우리의 손을 통해 돌아오든 말입니다. – 우리와 여러분의 임무는, – 굳건히 서서 그러한 타락의 원인을 피하고, 하늘의 상을 얻기 위해 선한 행실로 힘쓰는 것입니다. – 그러나 제게 전해 들은 바에 따르면, 여러분 중 일부는 도망친 자들을 경솔하게 옹호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옹호는커녕, 단순히 그들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조차 합당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그저 유감을 담아 그들의 이름을 간단히 언급하는 것뿐입니다. 보십시오, 사도들조차 배신자를 더 이상 사도라고 부르지 않고, 오직 유다, 배신자, 도둑이라고만 부릅니다.

12. 저녁 시간에 여러분 가운데 다시 소동이 일어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떤 이는 빵을, 어떤 이는 포도주를 요구하고 있는데, 그것도 사순절 기간 중에 말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우리가 이 도시에 들어온 후, 도시 밖에서 지내던 생활 방식에서 이미 약간 변화를 주었습니다. 사순절( ) 기간은 물론 수요일과 금요일에도 기름, 포도주, 요리를 섭취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 그러나 여러분을 깊이 동정하며, 제 자신의 연약함과 도시에서 절제를 지키기 어려운 점을 고려하여, 이제부터 앞서 언급한 날들의 저녁에, 원하는 모든 이가 포도주 한 잔과 빵 한 조각을 받을 수 있도록 정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떤 소동이나 다툼도 없기를 바랍니다. 또한 다음과 같은 터무니없는 말도 없기를 바랍니다: “나는 이것저것을 받아야 마땅하다. 나는 다른 이들보다 더 수고했다.” 질서를 어기는 자들은 마땅한 참회와 파문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각 분야의 장인들을 감독하는 자들, 질서 유지자들, 주택 관리자들 및 기타 부서 책임자들도 다시는 같은 피해를 입지 않도록 예방 조치를 취하라.

13. 또 한 가지 더 상기시키겠다. – 어떤 이들은 배정받은 직무에 머물지 않고, 경솔함과 변덕스러움으로 이 일에서 저 일로 무분별하게 옮겨 다니는데, 이로 인해 그들 자신은 물론 질서를 지키는 이들에게도 해가 되며; 게다가 작업장과 수공방 감독관들에게도 불필요한 번거로움과 수고를 안겨준다. –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라. – 그러나 누구나 자신이 배정된 업무에 인내심을 갖고, 정해진 대로 일해야 한다. 왜냐하면 스스로 할 일을 지어내거나 자신의 변덕을 채우려 드는 것은 무질서함과 무지, 불순종의 징후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러한 악행이 지적되고 금지되었으니, 누구도 더 이상 그렇게 행하지 말아라. 무질서함으로 인해 참회를 받게 되지 않도록 하라. 성 도로테우스가 말씀하신 것을 모르십니까? 자신의 의지를 끊어낸 자는 내적 평온의 완전한 경지에 도달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적 평온을 누리고자 하는 자는 이를 달성하기 위해 이 길, 즉 자신의 의지를 끊어내는 길을 따라야 하며, 그리하면 이 땅에 머무는 동안에도, 그리고 장차 올 영원한 세월에도 평온을 얻게 될 것입니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지혜를 주시고, 한 마음으로 서로 화합하게 하시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영생으로 나아가는 길과 천국의 상속을 위해 온갖 수행의 투쟁을 인내로 견뎌내기를 바랍니다.

 

118. 수고는 짧으나 그로 인한 복은 영원하고, 죄의 쾌락은 덧없으나 그로 인한 고통은 끝이 없으니, 부주의한 자들은 이를 피할 수 없으리라.

118. 위업은 짧지만 그로 인한 복은 영원하며, 죄의 쾌락은 덧없지만 그로 인한 고통은 끝이 없으니, 부주의한 자들은 이를 피할 수 없다. [2, 45] 이 현세 삶은 위업의 시간이며, 슬픔과 수고의 시간이다. – 누군가가 일시적이고 전반적으로 짧은 것이라고 부를 만한 그런 위업, 슬픔, 수고가 아니라, 밤낮으로 이어지고, 오랫동안 지속되며, 생의 끝까지 그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치르는 이 싸움이 어떤 하찮고, 사소하며, 인간적인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신성한 목적과 천상의 복을 위한 것임을 잊지 말자. 왜냐하면 우리가 끊임없는 인내와 온 힘을 다해 거룩한 계명을 지키며 이 싸움에서 성공한다면, 천국을 상속받고, 끝없는 복락과 말로 다 할 수 없고, 듣지도 못했으며,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영원한 복을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결코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부주의와 나태함, 그리고 이 세상의 썩어 없어질 쾌락에 대한 집착과 사랑으로 인해 이 싸움에서 성공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영원한 고통과 헤아릴 수 없는 수치를 당하며, 그 끔찍한 음성을 들으며 어둠 속에 서 있게 될 것입니다: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해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마태복음 25:41). 그러나 우리가 이 무서운 음성을 듣지 않고, 성도들과 의인들로부터 가장 비참한 분리를 겪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들이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말로 다 할 수 없는 빛, 그리고 끝없이 누리는 즐거움 속으로 데려가실 때, 반면 우리는 악마들과 함께 영원한 불길 속으로, 쉬지 않는 구더기 속으로, 이를 갈며 고통받는 곳으로, 가장 어두운 지옥으로, 풀 수 없는 쇠사슬 속으로 끌려갈 때 말입니다. 그리고 이는 짧은 시간도, 몇 년도, 수백, 수천, 수만 년도 아닌, 주님의 정하심에 따라 영원히, 변함없이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면 성인들이 말하듯이, 형제나 아버지나 어머니는 어디에 있어 우리를 구원하고 보호해 줄 것인가? – 그러나 “형제도 구원하지 못하리니, 사람이 어찌 구원하리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해 배반을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 영혼을 구원할 대가를 치르지 아니하리라”(시 48:8). 나는 다른 방식으로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무심한 자들의 무심함과 게으른 자들의 게으름은 어디에 있는가? 모순된 자들의 모순과 불순종하는 자들의 불순종은 어디에 있는가? 교만한 자들의 교만과 제멋대로인 자들의 건방짐은 어디에 있는가? 식탐하는 자들의 탐욕은 어디에 있으며, 거짓말쟁이들의 변명은 어디에 있으며, 하나님 앞에서 한 서약을 저버린 자들의 배신은 어디에 있는가? –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언약의 피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겼으며, 죽음도 부활도 없다고 생각하여, – 심판도, 보응도 없다고 생각하며, 성령 안에서 누리던 형제적 교제를 저버리고, 성령 그 자체를 상실한 채, 쾌락을 좇는 정욕의 급류와 심연 속에서 이리저리 방황하는 자들.

 

119. 우리는 세상에서 나왔으니, 세상에서 고난을 겪는 것이 무슨 놀라운 일인가? 그러나 이는 우리에게 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도움이 되는 것이다

119. 우리는 세상에서 나왔으니, 세상에서 고난을 겪는 것이 무엇이 이상하겠는가? 그러나 이는 우리에게 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도움이 된다. 그러니 인내하자.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곧 모든 것이 끝날 것이니;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보시고, 모든 것에 대해 갚아 주실 것이다. [2, 46] 육신으로 보아 너희는 족속도 없고 고향도 없게 되었다. 너희에게는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나님 한 분만이 계시고, 너희의 고향은 오직 하늘의 예루살렘 하나뿐이며, 동포들은 창세로부터의 모든 성도들이다. 우리가 이곳에서 수행자의 고행과 궁핍 속에서 악을 겪으며, 때로는 모욕과 비방을 당한다고 해서 무엇이 놀랄 일이랴? 당황하지 말라; 이는 방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진리와 풍성한 평화, 빛, 생명, 형언할 수 없는 기쁨, 그리고 천사들의 환희가 빛나도록 돕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간청하고 기도하노니, 인내로 너희 영혼을 굳건히 하고, 주님 안에서 너희의 생각을 확고히 하며, 모든 것을 너그럽게 견디고 이겨내며, 기대하는 위대한 복을 얻으리라는 소망을 품으라.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우리는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아니, 죽음이라기보다는 늙지 않는 생명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세속을 버림으로써 자발적으로 미리 죽음을 맞이했다면, 죽음은 여러분에게 더 이상 권세를 행사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전한 정성을 다해 각자의 일을 수행하며, 각자가 맡은 순종의 의무를 깨끗하고 경건하게 이행하기 위해 힘쓰고, 선한 양심으로 그 일을 상을 주시는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각 사람을 보시며, 그 사람의 행실과 열심, 혹은 게으름과 미루는 태도까지 모두 지켜보시고, 하늘나라에서 그 공로에 따라 모두에게 갚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120. 우리의 영적 삶에서 우리는 육신을 입고 땅에서 사셨던 주님의 삶의 모습을 반영할 것입니다

120. 우리의 영적 삶에서 우리는 육신을 입고 이 땅에 계셨던 주님의 삶의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2, 47]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것에 대해 주님께 어떻게 보답하리이까”(시 115:3), 그것을 기억하고 감사드리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있겠습니까? 보십시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우리를 위해 그분은 얼마나 높은 곳에서, 얼마나 큰 굴욕을 감수하시며 스스로 낮추셨습니까? 만물의 주님이시며 하나님이신 그분은 종의 형상을 취하시고,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 마리아의 태중에 계셨으며, 태어나시자 갓난아기처럼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계셨습니다; 아이처럼 젖을 먹으시고, 조금씩 자라 어린아이에서 소년이 되고, 그다음 청년이 되며, 마침내 세례를 받으시어 우리에게 중생의 목욕을 베풀어 주셨을 때 완전한 남자가 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배반과 생명을 주는 고난, 십자가 처형, 죽음, 사일 만에 부활을 겪으시며 그분의 사역을 완성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를 위해 이루어진 것으로, 우리도 영적으로 그와 같은 길을 걷게 하려 함이다. 그분은 세상이 시작되기 전부터 아버지께로부터 육체 없이 태어나셨으나, 우리를 위해 나중에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녀에게서 육신을 입고 태어나셨으니, 우리도 처음에는 육신으로 태어났으나 나중에는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니, 모두 성세례 안에서 그러하되, 특히 수도자들은 성 스키마를 통해 그러하지 않겠는가? 왜 우리는, 특히 최근에 스키마를 받은 이들은, 어린아이처럼 순수해야 하며, 누군가 모욕하거나 상처를 주어도 야수처럼 화를 내지 않고, 마치 아이들이 그러하듯 눈치채지 못하는 척해야 하는가? 주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일에서 부모님께 순종하셨으니, 우리도 우리의 영적 부모이신 아버지들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주 그리스도께서는 사역을 시작하셨을 때, 광기 어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로부터 “네게 귀신이 들렸다” (요 8:48), “벨제불, 곧 귀신의 왕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낸다”(마 9:34), “이 사람이 바로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마 13:55)는 등 그와 유사한 비난의 말들을 들으셨으며, 그 후 침 뱉음과 귀를 때림, 채찍질을 참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이에 대해 한 마디도 반박하지 않으시고, 오직 감사드리며 기도하셨다. “아버지여, 그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23:34). 구원을 받고 성도들과 함께 상속자가 되고자 하는 자들은 이를 본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첫 사람부터 마지막 사람까지 모두 스스로를 잘 살피라; 열심이나 제멋대로인 마음, 혹은 불순종으로 인해 어떤 잘못도 없도록 하라. 그러나 모든 일에서 신성하고 온유하게 너희의 일을 행하여,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시게 하라. 주님께서 너희에게 힘과 굳건함을 주사, 점점 더 정화되고, 온전해지며, 깨달음을 얻어, 세상에서 빛나는 별들처럼 빛나게 하시기를 바란다.

 

121. 누구도 따로 나서는 자 없이, 자기 아버지에 대한 믿음을 잃지 말라. 그리고 악을 교묘히 꾸미는 원수의 말은 듣지 말라

121. 1) 누구도 따로 떨어져 있지 말고, 아버지에 대한 믿음을 잃지 말라. 그리고 악을 교묘히 꾸미는 원수의 말을 듣지 말라. – 2) 이를 너희는 마음을 열어 깨달음으로써 이룰 수 있으니, 너희의 구원을 위해 이를 간곡히 부탁한다. [2, 49]

1. 나는 여러분의 번영을 보며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그러나 기뻐하는 만큼,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혼란이 일어나 여러분이 많은 수고와 땀으로 이룬 모든 것을 무너뜨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떨림이 나를 사로잡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에게 한 마디 전합니다. 조심하고, 깨어 있으며, 기도하십시오! 누구도 따로 떨어져 스스로를 돌보려 하지 말고, 누구도 영적 아버지께 대한 믿음이라는 견고한 반석 위에서 발 을 떼지 말며, 수행의 수고에서 게을러지지 말고, 어떤 방식으로든 죄로 유혹하는 다머리 뱀을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죄로 유혹하는 데 있어 온통 교활하고 간교한 자를, 어떤 식으로든, 어떤 방법으로든, 어떤 그럴듯한 구실로든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그는 죄의 교묘한 발명가이자 악의 파종자로, 하늘에서 쫓겨나 땅으로 떨어졌으며, 번개처럼 내려와 도둑처럼 낙원에 침입하여 우리 조상 아담을 유혹했고, 그 때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온갖 불경함과 죄를 가르치고 있다. 그는 기독교인들에게도 이단과 부도덕한 행실을 가르쳤으며, 우리를 죄의 화살로 찔러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2. 그러므로 간청하고 간곡히 부탁하노니, 온전한 무장을 갖추고 여러분의 길을 굳건히 걸어가며, 그에게 결코 들어올 틈도, 심지어 가까이 다가올 기회조차 주지 마십시오. 이것은 내가 말했듯이, 아버지께 대한 선한 믿음과, 그분께 대한 흔들림 없는 고백, 그리고 자신의 속마음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 그 다음에는 위선 없는 겸손과 순종, 그리고 너그러운 인내를 통해 이룰 수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저는 여러분에게 간청하고 부탁합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보상을 위하여, 영생과 그 기쁨을 위하여, 그리고 그와 정반대인 소멸되지 않는 불과 그 밖의 헤아릴 수 없는 고통에 대한 두려움을 위하여, 우리는 계속해서 힘쓰며, 기운차게 나아가며, 바르게 나아가며, 싸우고 힘써 이 위대한 삶의 바다를 무사히 건너, 죽은 후에 의의 면류관과 복된 불멸을 얻도록 합시다.

 

122. 여행자들은 여정의 끝을 바라보며 길에서 마주치는 모든 어려움을 기꺼이 견뎌냅니다. 우리도 하늘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참아야 합니다.

122. 1) 여행자들은 여정의 끝을 바라보며 길에서 마주치는 모든 어려움을 기꺼이 견뎌냅니다. 우리도 하늘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참아야 합니다. – 2) 그리고 모든 영광스러운 성인들이 참아냈습니다. 달리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50]

3. 긴 여정을 떠나는 이들이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때로는 평탄하고 다져진 길을, 때로는 계곡이 가로지르거나 비로 인해 질퍽거리는 길을 걷듯이, 우리도 이 현세에서 하루하루, 해를 거듭하며 살아가며, 때로는 불쾌하고 힘든 일을, 때로는 즐겁고 기쁜 일을 마주한다. 그들이 여정의 길이로 인해 지치지 않고, 그 길에서 마주치는 어려움 때문에 멈추지 않으며, 오직 여정의 끝만을 바라보듯이: 마찬가지로, 수도 생활과 금식 생활이라는 선한 수행을 실천하며, 천국으로 이끄는 선한 길을 걷는 우리도 낙심하거나 뒤로 물러서거나, 마주치는 불쾌함, 장애물, 그리고 슬픔들로 인해 지쳐서는 안 되며, 이 모든 것은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우리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 허락된 것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일시적인 삶의 사소하고 하찮은 이득을 위해 자신들 앞에 놓인 여정의 고된 노고를 마다하지 않는다면; 하물며 우리로서는 영원하고 헤아릴 수 없이 큰 복을 위해, 바라는 바를 얻기만 한다면 모든 것을 참아내고, 모든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견뎌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자, 나의 형제들과 자녀들아,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과 우리 삶의 방식과 뗄 수 없이 연결된 모든 것—수고와 고단함, 금식, 밤샘 기도, 무릎 꿇기, 맨땅에서 잠자기, 더위와 추위, 굶주림과 갈증, 옷과 신발의 부족, 수고로 인한 다소의 단정하지 못함, 순종과 기도문의 시급함, 그리고 우리 수행 생활에서 이와 관련된 그 밖의 모든 것들. 여러분은 복이 있으며 지극히 복이 있습니다. 영적 수련에 힘쓰며, 마음과 육신에 닥치는 유혹을 사랑으로 맞이하기 때문입니다.

4. 게다가 예로부터 빛을 발해 온 성인들이 가운데, 땀과 수고, 유혹과 슬픔 없이 진정한 삶을 살아간 이가 과연 있었겠는가? 조상들 중 위대한 아브라함을 비롯해 그 뒤를 이은 조상들, 예언자들과 스승들, 혹은 사도들, 바울과 다른 사도들, 또는 그 후 명성을 떨친 교부들—첫 순교자 스테파노와 그와 함께, 그리고 그 뒤를 이어 그리스도를 위해 순교당한 모든 이들, – 위대한 안토니우스와 그와 함께,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수고한 모든 경건한 이들을 꼽을 수 있겠는가? 그들 모두에게서 헤아릴 수 없는 수고와 땀, 투쟁과 피로, 슬픔과 박해, 공격, 비방, 그리고 온갖 유혹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이라고 성 바오로가 말하듯이, “양가죽과 염소 가죽을 입고, 박탈당하고, 슬퍼하며, 모욕을 당했는데, 온 세상이 그들을 감당할 수 없었으니,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의 깊은 구덩이에서 방황하며 지냈다” (히브리서 11, 37. 38). 그들 모두는 그랬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하느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으며, 수고 없이 구원의 길을 완주할 수도 없고, 위업 없이 소망하는 승리를 거둘 수도 없습니다. 우리도 그들과 똑같은 일을 맡았으니, 그들이 살았고 덧없는 생을 마쳐 온 것과 같은 삶의 방식을 따르지 않고서는 어떻게 그 일에서 성공할 수 있겠습니까?

 

123. 서로 어떤 점에서 열심을 내야 하며, 어떤 점에서 서로를 능가해야 하며, 어떤 점에서 서로 뜻을 맞춰야 하는가

123. 서로 어떤 점에서 경쟁해야 하며, 어떤 점에서 서로를 능가해야 하며, 어떤 점에서 서로 뜻을 맞춰야 하는가. [2, 51] 자, 와서 낙담과 나태함을 떨쳐 버리고, 주님의 모든 계명을 이행하기 위한 부지런함과 열정을 품읍시다. 자, 서로를 뛰어넘기 위해 힘쓰자.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자기 주장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이는 우리에게 적대적인 편이 하는 일이니—양보하고, 모욕과 비난, 조롱을 참아내는 것으로 말이다. – 오십시오, 서로 경쟁합시다. – 서로를 분노하게 하거나 분노하는 데서, 하급자 앞에서 눈살을 찌푸리거나 상급자 앞에서 거만하게 고개를 치켜드는 데서가 아니라. 이는 전능하신 하느님을 거스르는 교만, 하늘의 높이에서 땅으로 내던져진 교만이기 때문입니다; – 그러나 평화로워하고 화해하며, 온유하고 다스리며, 겸손한 자들의 옳음과 낮춘 지혜를 갖는 데에 있습니다. 이는 순종과 겸손으로 육신을 입으시고, 십자가와 죽음으로 인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그러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본받자. 게으름을 피우고 하나님의 낮 예배와 밤의 시편 찬양을 소홀히 하는 데서가 아니라—이는 게으른 자들과 미성숙한 자들의 특성이기 때문이다—오히려 하나님의 일에 신속히 나서며, 시편 찬양이 시작되기 전에 다른 이들보다 먼저 하나님의 성전에 나아가는 데서 본받자: 이는 경건과 덕을 열정적으로 추구하는 자들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하나 모두 열거하지 않기 위해, 한 마디로 말하겠으니: 우리 모두 선한 일에서 서로 본받으며, 거만하지 않은 사랑과 평화로운 마음가짐, 그리고 경건한 겸손함으로 연합합시다; 교활함과 상호 의심을 피하고, 영적 교제를 통해 상호 신뢰로 영혼을 굳건히 합시다. 누구도 유다 같은 배신자가 되지 말고, 이중적이고 변덕스러운 자도, 절제하지 못하고 음란을 좋아하는 자도, 거칠고 잔인한 자도 되지 맙시다; 누구도 결코 그렇게 행하거나 행동하지 말고, 오히려 각자가 경건하고 의로우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하는 한 가지 일에 전념하여, 날마다 자신의 죽음을 맞이할 때를 기다리며, 모든 것이 새롭게 변하고 변화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을 소망하며, 우리는 모든 무형의 천사들의 면전에서 두려운 심판자의 보좌 앞에 서서, 모든 행실과 말과 생각에 대해 보고하게 될 것이다.

 

124. 모든 일에, 내면과 외면 모두에서 바르게 행하라

124. 1) 모든 일에, 내면과 외면 모두에서 올바르게 행하십시오. – 2) 수도원에는 도시 사람들뿐만 아니라 시골 사람들도 받아들이십시오. [2, 52]

5. (감금 중에 쓴 편지). 주 그리스도의 참된 종들로서 기뻐하십시오. 그분은 여러분이 마음의 선한 태도를 지키고, 세속 생활 속에서 정해진 규율을 준수하며, 흠 없고 깨끗하며, 온유하고 겸손하며, 수공예에 부지런히 힘쓰고, 시편 찬양과 시 낭송에 힘쓰며, 마음을 열어 보이고, 여러분에게 주어진 그 밖의 모든 일을 성실히 수행한다면 말입니다.

6. 새로운 형제들을 받아들이는 문제에 관해서는, 우리 형제회가 도시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 공동체에서 정해진 수고와 일에 더 적합하고 익숙한 시골 사람들로 채워지기를 바랍니다. 도시 사람들의 증가는, 제 생각에, 육체적 측면과 영적 측면 모두에서 우리에게 유익하거나 긍정적이지 않을 것입니다.

 

125. 옛 선조들을 본받아 하나님의 계명과 우리의 규율을 지키되,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125. 옛 선조들을 본받아, 하나님의 계명과 우리의 규율을 지키십시오. 모두 한마음으로. [2, 53] (또한). 하나님께서, 나의 가장 정직한 형제들아, 너희 손의 일과 너희 영혼의 수고 속에서 너희를 굳건하게 하시고, 모든 일에서 너희를 흠 없고 흠집 없이 보존하시며, 성령의 능력으로 너희에게 주어지신 대로, 그분의 모든 계명을 이행하고 온갖 종류의 순종에 준비된 자들로 삼으시기를, 주님의 재림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예비된 복을 눈앞에 두고, 이 세상의 모든 것—영광, 쾌락, 즐거움, 육체의 안식—을 아무것도 여기지 않으며, 세상을 향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마음을 하늘의 경배에 집중하며. 우리의 모든 고대 성부들도 이와 같이 살았으니, 세상을 그리고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우리의 거룩하고 천사 같은 직분 안에서 주님을 섬기며 살았습니다. 그러니 내 자녀들아, 너희가 받아들인 전통을 굳게 지키고, 정욕의 불길을 절제와 순결의 이슬로 끄며, 욕망의 유혹을 순종의 칼로 잘라내라. 또한 주님의 계명과, 지금 너희를 다스리는 이가 지시하는 너희 손의 일을 능숙하게 행하는 자들이 되라. – 너희 모든 형제들은 마치 한 영혼처럼, 마치 한 사람처럼, 기운차고 온화하며 한마음으로, 영적인 일과 육체적인 일을 가리지 않고 모든 일을 주님 면전 앞에서 행하듯이 하라.

 

126. 세상의 것을 버리고 하늘의 것을 향하여 나아가며, 특히 분노와 정욕과 싸우라

126. 1) 세상의 것을 버리고 하늘의 것을 향하여 나아가며, 특히 분노와 정욕에 맞서 싸우십시오. – 2) 부하들과 상급자들에게 주는 교훈. [2, 54]

7. (동일). 너희는 세상에 대해 십자가에 못 박혔으니, 세상이 너희에게 평화를 주리라. 그러니 세속적인 것을 버리고 하늘의 거처로 높이 올라가며, 다른 모든 것에 대해 죽은 자로서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을 위해 살아가라. 너희의 믿음이 있는 곳에 너희의 눈도 향하게 하라. 너희가 무엇에 사로잡혀 있느냐, 그곳에 너희의 마음도 깨어 있게 하라.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너희의 보화가 있는 곳에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마태복음 6,21). 보라, 너희가 어떤 은혜를 입었으며, 어떤 거처에 합당하게 되었는가? 천사의 거처이다. 천사들처럼 행하며, 우연의 영향에 굴복하지 말라: 분노에는 온유함으로 맞서고, 정욕에는 순결함으로 맞서라. 매일 매시간 당신을 괴롭히는 사소한 유혹에 결코 굴복하지 마십시오. 그 유혹에 대항할 무기를 “내가 주님을 오래 참으며 기다렸더니, 주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셨도다”(시 39:2)라고 말씀하신 분이 지시해 주셨으며, 비록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였지만 정욕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8. 복종하는 자들아, 너희에게는 순종의 법칙이 알려져 있고, 지도자 여러분에게는 우위의 법칙이 알려져 있으니, 바로 너희가 첫 번째이기에 자발적으로 마지막이 되는 것, 즉 연민과 사랑으로 그 자세를 갖추는 것이다. 관대하게 대할 때도 있어야 하고, 다시 엄하게 대할 때도 있어야 하며, 말을 나눌 때도 있어야 하고, 침묵을 지킬 때도 있어야 한다. 영적인 위로를 위해 즐겁고 친절하게 미소 지을 때도 있고, 다시 엄한 표정을 지을 때도 있어야 하며, 어느 한쪽에서도 지나침이 없도록 분별 있게 행동해야 한다. 너희의 눈은 규칙을 지키는 데 있어 경계를 늦추지 말고, 대답할 때는 친절하게 하라; 콧구멍이 분노로 벌어지지 않게 하고, 눈썹이 교만하게 치켜올라가지 않게 하며, 혀가 허영으로 뒤틀리지 않게 하고, 모든 감정이 겸손하게 유지되며, 모든 지체가 조화롭게 기능하게 하라. 입은 찬송을 부르는 기관이 되게 하고, 마음은 오직 하늘의 일만을 생각하며, 손은 오직 경건과 사랑의 일만을 행하게 하라. 누구도 말을 듣지 않는 자가 되지 말고, 누구도 제멋대로 행동하지 말고, 누구도 마음이 무겁지 말며, 모두 한마음으로 서로 화합하고, 거만함 없이 서로 사랑하며, 주님께서 구원해 주시는 여러분의 삶을 위해 서로 오른손을 내밀어 주십시오.

 

127. 여러분이 흩어졌던 곳에서 다시 모여 마땅히 그래야 할 대로 질서를 잡은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127. 1) 흩어졌던 여러분이 다시 모여 마땅히 그래야 할 대로 질서를 바로잡은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러니 내면과 외면 모두에서 여러분의 직분에 충실하십시오. – 2) 소프로니우스 대리인에게 주는 훈계 – 특별히; 그리고 다른 모든 지도자와 피지도자들에게 – 일반적으로. [2, 55]

9. (동일). 이곳에 온 관리자가 나에게 알리기를, – 여러분 모두가 다시 한자리에 모였으며, 지도자와 피지도자 모두가 평소의 질서를 회복했다고 합니다. 지도자들은 마땅히 해야 할 대로 통솔하기 시작했고, 각자에게 합당한 지시를 내렸으며, 부하들은 이를 순종하고 겸손하게 받아들여 업무에 착수했다고 한다. 또한 이 과정에서 여러분 모두가 사랑으로 하나 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애로 서로 사랑하고 있어, 평화롭고 질서 정연한 삶을 통해 여러분 모두에게 한 마음, 한 생각, 한 소망이 있다고 한다. 이 일에 내 겸손한 영혼이 얼마나 기뻐했고, 주님께 얼마나 감사드렸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늘 아래에서 여러분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여러분의 천사 계급의 규율을 충실히 따르며 잘 살아가는 것만큼 저에게 기쁘고 위로가 되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이러한 모든 것이 회복되었으니, 간청하고 기도하건대, 각자가 온화한 인내를 지키며, 날마다 위선 없는 순종으로 영혼을 구원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가운데 분열이나 제멋대로인 태도, 고집, 자기 뜻에 대한 숭배, 불평이나 뒷담화, 그리고 은둔자 같은 태도, 나약함이나 건방짐, 조롱, 게으름이나 비겁함, 교만, 그리고 주님께 거슬리는 그 어떤 것도 없기를 바랍니다. 이는 우리가 바로 그 목적을 위해 세상과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부모, 형제, 친구, 지인, 마을, 도시, 장터, 구경거리,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정욕적이고 쾌락을 좇는 것들을 버린 것은, 그리스도를 얻어서 하늘에서 살며, 정욕을 근절하고 덕으로 풍요로워지며, 현세에서 경건하고 의롭게 살아, 우리의 경건한 선조들을 본받아 우리에게 약속된 복을 받을 자격을 얻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소명과 소망이 그러하듯이, 여러분의 행실과 태도, 그리고 행동 또한 그러해야 하며, 여러분의 이름과 삶이 선한 행실로 빛나, 여러분과 같은 계급의 사람들과 평신도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우리 아버지께서 하늘에 계신 분의 이름이 영화롭게 되기를, 그리하여 우리 겸손한 자들도 그것을 보거나 알게 되어 기뻐하기를 바랍니다.

10. 내 아들 소프로니에여! 많은 사람 중에서 내가 너를 택하여 내 대신 형제들을 다스리게 하였노라. 보라, 미숙함으로 인해 나를 수치스럽게 하고 부끄럽게 하지 말라. 그러나 네 미덕의 빛이 그렇게 밝게 비추어, 네 이름이 형제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밖에서도 찬양받게 하라. 왜냐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을 이행함으로써 자기 안에 하나님을 모신 자 는 하늘과 땅에서 모두 명성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형제들에게 세심하게 신경 쓰며, 선하고, 가르침이 되며, 마땅한 일을 현명하게 상기시키고, 잘못을 저지르는 자들을 친절하게 책망하며, 죄를 범한 자들에게 의롭게 참회를 부과하고, 연약한 자들을 아버지처럼 돌보며, 무지한 자들을 깨우치고, 모든 일을 형제단의 유익을 위해 행하라: 이는 내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나 자신도 겸손히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권세를 너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 그리고 다른 모든 이들, – 지도자들과 피지도자들 모두, – 하나님의 경외심 안에서 자신의 일을 성실히 행하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너희를 기뻐하시리라. 부지런히 수고하고, 악의를 품지 말고, 서로 간에 순수하게 대하라. 내면의 생각과 소망을 털어놓는 것을 멈추지 말라. 이는 바로 영혼의 구원과 정욕으로부터의 해방이기 때문이다. 시편 찬송, 시 낭송, 철야 기도, 성경 읽기를 규정에 따라 지켜라. 또한 영적 지도자들의 지시에 따라 시편과 트로파리를 암기하여 공부하라. – 마지막으로, 나의 겸손을 위해 기도해 주라. 주님께서 내게 위로를 주시고, 앞으로 닥칠 슬픔을 견뎌낼 힘을 주시기를 바란다.

 

128. 여러분은 선하게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품행이 나쁜 자가 한 명도 없기를 바랍니다.

128. 여러분은 선하게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품행이 나쁜 자가 단 한 명도 없기를 바랍니다. 포도원 일꾼들처럼 주인으로부터 품삯을 받기 위해 수고하고, 전사들처럼 용사로부터 면류관을 받을 자격을 얻기 위해 싸우십시오. [2, 56] (동일). 여러분 모두 주님을 위해 살며, 온갖 간사와 불경함에 대한 유혹을 멀리함으로써 구원의 풍성한 열매를 쌓아가십시오. – 그리고 여러분 가운데 재앙을 초래할 만큼 건방지고, 게으르며, 쾌락을 탐하고, 죄를 사랑하며, 육신을 좇고, 영혼이 부끄럽고, 증오심에 차 있으며, 비록 하찮은 것이라도 탐내는 자, 시기심 많은 자, 다툼을 좋아하는 자, 성급한 자, 불평하는 자, 게으른 자, 무위도식하는 자, 불순종하는 자, 교만한 자, 무례한 자, 거짓말쟁이, 분열을 조장하는 자, 말 많은 자, 잠만 자는 자, 육체와 세상의 노예, 유다처럼, 자신의 영혼을 배반하고 형제 중 누군가를 형제 공동체에서 배제하려는 자. 이들은 스스로를 하나님께로부터 빼앗아 가고, 그분께로부터 도망치며, 죄의 험로에서 방황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낮의 수고를 견디려 하지 않으므로, 포도원 주인으로부터 상을 받지 못한다. 아니면 전능하신 하나님의 군인으로서, 용맹하게 싸워 주님께 기쁨을 드리기 위해 전투의 수고를 감당하기를 원치 않으니, 그 때문에 상을 받지 못하고 탈영병 명단에 올라, 잡힐 때 그 대가로 형벌을 받게 된다. – 그러니 선한 전사들, 동지들, 동료들, 함께 달리는 자들아! 달리자, 추격하자, 모든 것을 밀어붙이고 견뎌내자. 주님께서 가까이 계시니, 우리에게 면류관을 씌워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 친히 하늘에서 달리는 모든 이를 바라보시며, 끝까지 견뎌내는 이들에게 면류관을 엮어 주신다. 그러므로 모두 고백을 통해 깨끗해지고, 겸손을 통해 평온을 얻으며, 활동에 대한 사랑으로 모두 열정적으로 나아가라. 지도자는 지도자답게 각 구성원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살피고, 누가 무엇을 할지 정한 뒤, 모든 것과 모든 이를 움직이게 하라.

 

129. 모든 이에게 감옥에서 구출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라고 권면한다

129. 1) 모든 이에게, 감옥에서 구출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라고 권한다. – 2) 우리의 유혹이, 참된 형제들과 거짓된 형제들을 가려냈다고 말한다. – 3) 그는 후자들을 안타까워하며 그들이 회개하기를 바라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앞선 이들에게는 굳건히 서도록 권면하며, 이미 이룬 일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하고 부족한 부분에서는 더욱 발전하도록 노력하라고 당부한다. [2, 57]

11. (동일). 자비로우시고 관대하심에 풍성하신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 여주인이신 성모 마리아의 중보와 우리의 수호자이신 성 요한 세례자와 성 요한 신학자의 기도, 그리고 여러분의 간구를 들으시고, 유혹을 물리치시며 우리를 감옥의 갇힘에서 구출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시고, 우리를 향해 꾸민 악마의 계략을 무너뜨리신 은혜로우신 하느님께 감사의 찬미를 드립시다. 그나저나, 제가 고난을 겪은 것은 다른 어떤 이유 때문이 아니라 제 죄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제가 겪은 이 고난이 제 죄를 씻어주는 정화 과정이 될 것이라고 믿으며, 이 생각에 위안을 얻습니다.

12. 우리의 시련 속에서 우리 모두는 이미 도가니 속의 금처럼 단련되었으며, 특히 이곳에 있는 이들은 그러합니다. 이전에 성령 안에서 살고 의심 없는 믿음을 가졌던 이들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닥친 재앙을 통해 더욱 굳건해지고 확고해졌습니다. 반면 마음이 차갑고, 양면성을 지니며, 육신을 탐하고 게으름을 피우던 자들은, 악의 타격이 닿자마자 나뭇잎처럼 떨어져 나갔고, 체에서 걸러진 껍질처럼 스스로 수도원을 뛰쳐나갔으니, 이는 누가 깨끗한 밀과 같은 자들인지 드러나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이를 깨달은 신성한 다윗은 시편에서 “그들의 배 속에서 그들을 갈라 놓으소서”(시 16:14)라고 말하였으니, 즉 죄인과 게으른 자들을 덕이 있고 경건한 자들로부터 분리하라는 뜻이다. 그러나 – 오, 타락이여! 어떻게 그들 자신의 부주의로 인해 “그들의 뼈가 지옥의 파멸 속에서 흩어지게 되었는가”(시 140:7).

13. 그러나 나는 그들을 위해 가슴 아파하며 울고, 내 안에 숨이 멎을 때까지 그들의 회개를 간구하는 것을 멈추지 않겠다. 어쩌면 그들 중 누군가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작은 불꽃에 불타올라 회개로 돌아서,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 길 잃은 양들처럼 악한 자의 길에서 돌아올지도 모른다. 여러분은 그들의 타락 때문에 겁먹지 말고, 오히려 더욱 큰 담대함으로 경건의 수련과 금욕적 수행, 수공예의 수고, 투쟁의 땀, 매일 일어나는 슬픔과 유혹을 용감하게 맞서는 일에 매진하십시오. 심지어 피를 흘릴 지경에 이르거나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라도 말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우리가 거룩한 스키마를 받을 때 그렇게 서약했기 때문이다. 이제 각자가 스스로를 돌아보고, 서약한 것 중에서 무엇을 이행했고 무엇을 아직 이행하지 못했는지 되새겨 보라. 그리고 첫 번째에 대해서는, 그 모든 것을 감당할 힘을 주신 분께 감사를 드리고; 둘째로, 아직 이루지 못한 것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그에 상응하는 노력을 기울이십시오. 그리하여 여러분이 순교의 면류관을 합당하게 쓰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에게 ‘주여, 주여!’라고만 말하지 말고, 내 뜻을 행하는 자, 그가 바로 나의 충실한 종이다”(마태복음 7,21; 루카복음 6,46)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130.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130. 1)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께 기쁨을 드리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우리는 성인들의 모범을 따라 왕의 길을 걸어가며, 그 길 위에서 모든 미덕이 자라나고 모든 정욕은 물리쳐질 것입니다. – 2) 여러분이 그러하다면, 하느님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며, 그분과 함께 모든 선과 모든 도움과 보호가 있습니다. [2, 58]

1. (동일). 주님 안에서 평안하시기를 빕니다. 주님의 계명을 지키고 그분의 의를 따라 행하며, 다른 어떤 것도 염두에 두지 않고, 정욕을 죽이고 덕을 함양함으로써 오직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것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바라지 않으면서, 평소와 같이 선한 삶을 계속 이어가십시오. 그리하여 우리는 세속의 모든 허영과 온갖 집착, 모든 우정과 사랑—부모, 형제, 자식, 친족 간의 사랑은 물론, 온갖 육체적 쾌락과 세속적 명예, 그리고 그 밖의 모든 덧없고 헛된 것들을 버리고 세상을 떠나 수도원에 들어갔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결심하고 이렇게 살기를 원했으니, 우리는 그러한 목표와 소망에 따라 행동해야 하며, 성인들의 삶을 본받아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고 그들의 모범에 부합해야 합니다. 이리저리 둘러보지 말고, 왕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 길에는 분별 없는 순종, 하나님을 본받는 겸손, 천상의 공평함, 신성한 순결, 천사와 같은 무정욕, 온유함, 의로움, 사랑, 평화, 열심, 인내, 근면함, 그리고 그 밖의 모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마음가짐과 행실이 깃들어 있는 왕의 길을 따라가야 한다; 반면 불순종, 불평, 교만, 허영, 게으름, 건방짐, 편파성, 육욕 및 그 밖의 모든 악한 행위는 그러한 미덕들과 정반대되는 것이다.

2. 미덕은 하나님께서 낳으시고, 정욕과 죄는 사탄이 낳는다. 빛과 어둠 사이에는 아무런 교제가 없으며, 그리스도와 벨리알 사이에는 아무런 화합도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 곧 온유와 순종의 자녀들이 되십시오. 분노와 반항과 파멸의 자녀들이 되지 마십시오. – 누구도 욕망과 생각으로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지 말고, 누구도 게으름을 좋아하지 말고, 누구도 불평하지 말고, 누구도 위선적이지 마십시오; 오히려 모두 선을 행하기를 서두르고, 모두 감사하며, 선한 마음을 품고, 겸손하며, 친절하고, 기쁨을 나누며, 우호적이며, 시기하지 말고, 다투지 말라. 그리하면 주님께서 너희 가운데 계심을 인정받으실 것이다. 두세 사람이 그분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그분이 계시기 때문이다(마태복음 18:23); 그토록 많은 여러분 가운데, 여러분이 끊임없이 그분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 열심을 내신다면, 그분이 어떻게 여러분 가운데 계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면, 무엇이 여러분을 슬프게 하거나, 억압하거나, 낙담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비록 힘들지라도, 그것이 영적인 것이든 육체적인 것이든 모든 것이 견딜 만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계시다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롬 8:31) – 그리고 그분께서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해 내어주셨다면, 어찌 그분과 함께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롬 8:32) ? 그러니 주저하지 말고 확신을 가지고 굳건히 서십시오. 여러분이 선한 삶을 변함없이 지켜 나간다면, 의심할 여지 없이 천국의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 – 자, 자녀들아, 간절히 부탁하고 간구하노니, 너희 안에 신성한 사랑의 불을 지피고, 열정적으로 힘을 내며, 용기를 굳건히 하고, 순결과 흠 없음에 굳게 서며, 기도와 간구, 시편 찬송, 철야 기도, 회개, 고백, 눈물, 탄식으로 너희 자신을 비추라.

 

131. 수도원으로 가는 길에 자신을 위해 기도하며, 그들에게 그들의 수고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노니, 이는 수확이

131. 1) 수도원으로 가는 길에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의 수고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기를 기원하라. 이는 수확이 있기 때문이다. – 2) 아파나시우스와 에프렘에게 각 사람의 성품과 연약함을 고려하여 형제들을 잘 다스리라고 상기시킨다. 3) 모든 이에게 자신의 목표를 충실히 추구하도록 권면한다. – 4) 우리는 선조들의 계명을 지키자, 심판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스스로를 다잡으며: 이때 어떤 로고페트가 어떻게 죽어갔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지며, 그로부터 교훈을 얻는다. [2, 59]

3. (또한). 우리는 성소로 서둘러 여러분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우선, 여러분의 기도를 청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여정, 육지와 바다에서 우리를 축복해 주시기를, 그리고 우리가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주님 앞에 합당한 자로 드러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간구합니다; 둘째로, 우리가 여러분을 소홀히 여기거나 여러분의 처지에 무관심했던 것이 아니라,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여러분을 생각하며 선의를 품고 있었음을 상기시켜 드립니다. 특히 지금처럼 수확철을 맞아 여러분이 큰 번거로움과 수고에 시달리고 있는 이 시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주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내적·외적으로 굳건히 세우시고, 외적·내적 고난을 용감하게 견뎌낼 힘을 주시기를 빕니다. 게다가 누가 마귀의 계략과 그 올가미, 유혹을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4. 그러니 내 자녀들아, 아파나시우스와 에프레무스여, 형제들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다스리며, 모든 이에게 필요한 것을 –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 제공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들을 대할 때 각자의 성격과 성품에 맞춰 주십시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것이 필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채찍이, 다른 이에게는 고삐가, 또 다른 이에게는 참회가, 또 다른 이에게는 용서가, 세 번째 이에게는 책망과 권면이 필요합니다. 각자 나름의 정욕과 습관이 있으니, 치료 방법도 이에 맞춰야 한다.

5. 그러나 여러분, 다른 형제들아,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분을 위하여 여러분은 세상을 떠나 이곳에 왔으며, 그분을 위하여 육신과 혈육과의 모든 교제를 끊었고, 그분을 위하여 그분의 십자가를 어깨에 짊어졌으며, 그분을 향한 사랑으로 모든 것을 헛된 것으로 여겼고, 미래 세대에 그분께서 약속하신 복을 위해 이 세상의 어떤 일시적인 것에도 우선순위를 두지 않았습니다. 나그네와 이방인으로서, 여러분은 이 수도원에 들어와 수도 생활의 방식을 받아들였습니다. 여러분의 선택은 복되오며, 여러분의 결심은 거룩합니다. 그러나 형제 여러분, 간청하고 간곡히 부탁하건대, 이 위대한 계급에 걸맞은 삶을 살아가십시오. 세속을 떠나 있으면서도 세속적인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도록, 그리고 육신을 피했음에도 육신에 따라 살지 않도록 하십시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제가 말하지 않더라도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곤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쾌락을 좇고, 정욕에 사로잡히고, 자신의 욕망을 고집하며, 우위를 차지하려 하고, 망토나 다른 옷차림, 서 있는 자리, 필기구나 그 밖의 하찮은 것들에 대해 다투는다면, 우리가 육신에 속한 자들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다툼이 세속적인 것이 아니겠습니까? 형제들아, 우리의 지극히 거룩한 지위가 우스꽝스러운 어린아이들의 다툼 수준으로 전락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맙시다. 수도사의 영광은, 하나님을 위하여 비난과 모욕을 받을 만한 어떤 일도 하지 않으면서도, 비천하게 여겨지고, 모욕당하며, 비방받는 데 있습니다. 수도사의 장식은 가장 못생긴 옷을 입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장황하게 말하지 않겠다.

6. 스승의 계명을 지키고, 성인들의 말씀을 거역하지 말며, 순간적인 쾌락 때문에 영원한 복락을 경멸하지 마십시오. 마침내, 반드시 오실 분이 오실 것이며, 모든 이를 심판하실 분이 지체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아마도 그분의 재림 이전에, 영혼을 육신에서 분리할 무서운 천사가 올지도 모릅니다. 바로 그 지치고 마지막 숨을 거두는 때가 올 것입니다. 이 또한 무섭고 너무나도 충격적이어서,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합니다. 영혼이 떠난 후, 천사들이 그 영혼을 데리러 올 때 과연 어떻게 될까요? 어느 편이 승리하여 우리를 데려갈까요? – 이에 대해, 비록 우리 계급의 사람이 아닌 이에게 일어난 일이지만 매우 유익한 작은 일화를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 유명한 로고페트 스타브리키우스가 죽을 때가 되었을 때, 그는 마지막 숨을 헐떡이며 땀을 흘리고 몸을 떨며 이를 갈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고 합니다: “도와주십시오, 구해 주십시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얼마나 많은 검고 흉측한 악마들이 바다에서 나와 저에게로 다가오는지.” – 그는 해안가에 살고 있었습니다. – 비록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아무것도 보지 못했지만, 많은 이들에게 무자비했던 그 로고페트는 그것을 보고 쓰라린 심정으로 호소했습니다. – 그렇다면 우리 모두가 죽을 때, 천사들의 합창단이 이길 것인가, 아니면 악마들이 이길 것인가? 그때 우리가 이곳에서 사랑했던 이들이 우리를 즉시 핥아줄 것이다. 만약 우리가 순결과 순종, 겸손 및 다른 미덕들을 사랑했다면 천사들이겠고, 만약 허영과 불복종, 다툼, 사치, 웃음, 구경거리를 사랑했다면 악마들이겠지요. 왜냐하면 정욕은 악마들이고, 미덕은 천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이길까요? 누가 내 영혼을 데려갈 것인가? –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형제들이여! – 그러나 우리 모두가 미덕을 사랑하여 천사들이 승리하고 우리를 데려가게 하자. 그리고 정욕을 사랑하여 악마들이 승리하고 우리를 데려가지 않게 하자. 아아! 차라리 그때 우리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강한 자들은 더 강한 자들에게 고난을 당할 것이니” (잠언 6, 6), 특히 우리 수도복을 입은 이들, 사제들, 수도원장들, 그리고 우리 가운데 지도자 역할을 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이런 말 때문에 나를 꾸짖지 마라.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여러분을 부당하게 위협하려는 것이 아니라, 내 의무를 다하며 여러분을 사랑하고, 여러분에게 선을 바라는 마음으로 마땅히 전해야 할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132. 소프로니우스에게 권고하노니, 선조들의 규율이 이행되는지 살피라. 이는 그것에서 모든 선이 나오고, 그 반대에서 모든 악이 나오기 때문이다

132. 1) 소프로니우스에게 권고하노니, 선조들의 규율이 이행되는지 살피라. 이는 그것에서 모든 선이 나오고, 그 반대에서 모든 악이 나오기 때문이다. – 2) 영적 및 육체적 수고의 정도에 있어 중도를 지키라. – 3) 어떤 잘못도 처벌 없이 지나치지 말 것. – 4) 이러한 엄격함은 분노가 아니라 사랑의 표현이다. [2, 60]

7. (같은 편지). 내 아들이자 형제인 소프로니오여! 네 사역을 소홀히 하지 말고, 온갖 정성과 노력을 다해 임하라. – 네 열정을 북돋우기 위해 항상 같은 내용을 네게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 그러니 기운을 내어 경청하고, 모든 일에서 형제들을 이끌며, 아부 아카키아를 네 조력자이자 조언자로 삼아라, 내 아들아. 각자의 행실을 살피고 지켜보아라. 그들이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처신하며, 어떻게 지내는지, 그리하여 너희 가운데 모든 일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이어지고, 너희의 삶이 우리 성스러운 선조들의 규율과 법칙, 그리고 나의 겸손의 계명에 따라 굳건히 서게 하라. 왜냐하면 그렇게 살고 행동하는 곳에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그곳에 빛이 비추고, 평화가 지배하며, 사탄이 설 자리가 없고, 정욕은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소홀히 여기고 이러한 정신으로 행하지 않는 곳에는, 이와 정반대되는 모든 것이 둥지를 틀게 되니, 선 대신 악이, 빛 대신 어둠이, 그리스도 대신 벨리알이 자리 잡는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고해성사를 통해 형제들의 마음을 살피고, 그들을 모든 선한 일로 인도하라.

8. 중도를 지키라. 침묵과 기도, 성경 읽기가 육신의 삶을 위한 일들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듯이, 마찬가지로 이 후자의 부분에 대한 과도한 수고로 인해 마음이 하나님을 기억하는 일과 신성한 것들을 묵상하는 데서 벗어나 물질적인 것에 빠져들게 하지 말라. 이것이 참된 경건의 법이다. 만약 네가 스스로 그렇게 산다면, 형제들도 너를 본받아 그것을 받아들이고 실천하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떠난 것은 여기서 평온하게 먹고, 마시고, 옷을 입기 위함이 아니니, – 과연 이것이 우리의 구원인가? – 또한 우리가 이 수도복을 입은 것도, 일이나 움직임 없이, 음식이나 옷 없이 가만히 앉아 있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이 두 가지 모두를, 각기 제때에, 지혜롭게 행하기 위함입니다. 사도의 말씀대로 “모든 것이 품위 있게, 질서 있게 이루어져야 한다”(고린도전서 14:40)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위대한 사도는 자신에 대해, 결코 헛되이 빵을 먹은 적이 없으며, 자신과 함께 사는 이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자신의 거룩한 손으로 일하여 얻은 것으로 충분했다고 말합니다(살후 3:8; 행 20:34). 이 일을 행하고, 이 가운데 머물러라. “누구도 네 젊은 나이를 얕보지 못하게 하라” (딤전 4:12).

9. 징계가 필요한 일을 소홀히 하지 말라. 겉으로 보기에는 선한 일처럼 보이는 사소한 소홀함이 방치될 경우, 형제들을 큰 잘못으로 이끌지 않도록 하라. 누가 몰래 음식을 먹는가? 그의 참회 기간 중에. 축복 없이 따로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 비록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그를 참회 처분에 처하라. 권한 없이 먹을 것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거나, 누군가와 물건을 교환하거나, 그와 유사한 다른 행동을 하는가? 그를 참회 처분에 처하라. 불평하는가? 마찬가지로. 불순종했는가? 참회 처분에 처하라. 일하기를 원치 않는가? “그보다 더 낮은 자리가 있으리라”(고린도후서 3:10). 도둑질을 하거나 훔치는가? 파문당할 것이다. 그 밖의 것들도… 우리 교회에서 정한 참회에 관한 규정에 따라.

10. 이 말을 듣는 내 자녀들과 형제들아, 내 말을 무겁게 여기지 말고, 이 모든 규정이 무자비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이는 아버지 같은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며,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할 여러분의 영혼을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여러분에게 마땅한 것을 가르치지 않고, 악한 것을 멀리하게 하며, 선한 것을 굳건히 세우지 않는다면, 심판이 우리 머리에 무겁게 내려질 것입니다. 게다가 선한 아버지의 역할은 자녀들을 벌하지 않고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가벼운 경고와 벌을 통해 그들에게 영생을 얻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율법을 어겼을 때 그들을 책망하거나 벌하지 않았던 엘리라는 아버지는 비난과 질책을 받아 마땅한 자로서, 바로 그 이유 하나만으로 그 자녀들과 함께 목숨을 잃었습니다.

 

133. 우리의 수고는 크지 않으나, 상은 헤아릴 수 없이 크다

133. 우리의 수고는 크지 않으나, 상은 헤아릴 수 없이 크다. 그러니 죽음과 그와 함께 닥치는 모든 일을 기억하며 스스로를 격려하여 열심을 내자. [2, 61] (동일). 자녀들아, 우리가 선하게 행하고 선하게 살며, 수도 생활에서 겪는 작고 하찮은 고난을 통해 천국의 위로를 얻는 우리는 복되도다. 왜냐하면 수도자의 모든 수고는 가볍고, 성부들이 말씀하시듯, 끝없는 복된 기쁨 앞에서는 기억할 가치조차 없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수고를 인내로 견뎌낸다면, 기뻐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크리라. 그러나 우리가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옮겨가야 하는지,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순간, 천사들의 맞이, 하나님 앞에서의 출두, 심판자의 판결, 그리고 그 결과로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보내지는 일이 우리에게 어떻게 될지에 대해 주의 깊게 생각하고 끊임없이 마음속으로 묵상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에 대해 아침마다 묵상하고, 이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며, 이것에 마음을 쏟으십시오. 나는 하나님 과 그분의 선택받은 천사들 앞에서 여러분에게 증언하노니, 여러분이 자신의 칭호에 합당하게 행하며, 왼쪽으로 치우치지 말고, 죄에 휩쓸리지 말고, 건방짐의 올가미에 걸리지 않도록 하라. 이에 대해 나는 외치며, 그 외침을 멈추지 않으리라. 그러니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불태우며, 내가 말하는 바를 깨달아, 자신을 흠 없이 지키십시오. 그리하여 하나님의 포도원 일꾼으로서, 크고 헤아릴 수 없는 상을 받으십시오.

 

134. 모든 일에 온전하여, 여러분 뒤를 이어 수도원에 들어올 이들에게 선한 누룩이 되게 하십시오. 눈앞에 하나님과 죽음,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의 결정을 두십시오. 떠나든지, 오든지

134. 모든 일에 모범이 되어, 여러분 뒤를 이어 수도원에 들어올 이들에게 선한 본보기가 되십시오. 하나님과 죽음,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떠나든가 오든가—을 항상 마음에 새기십시오. 이 모든 것 앞에서는 그 밖의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닙니다. [2, 64] (동일). 수도 생활에 입문하며 살아 있는 동안 이를 지키겠다고 서약하고 나에게서 받아들인 나의 계명을 엄격히 이행하라. 그리고 수도원장님의 지도 아래 너희의 삶을 올바르게 가꾸는 데 온 힘을 다하여, 그렇게 잘 가꾸어진 삶으로 너희에게 들어올 형제들에게 선한 누룩이 되어, 여러분의 삶과 태도로 그들을 발효시키고, 사랑의 불로 굽어, 그들을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하늘의 식탁에 올릴 빵으로 만들어 주십시오. 육체의 안식과 자신의 뜻을 이루는 데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하늘의 위로와 영혼의 안식을 구하라. 그 후에야 적당한 육체적 위로를 누리는 것이 마땅하니, 영적 위로가 그러한 육체적 위로에 앞서야만 비로소 흠잡을 데가 없기 때문이다. 경건과 진리 안에서 행하며, 서로 화목하게 지내되, 항상 하나님을 눈앞에 두고, 죽음을 끊임없이 기억하며, 육신의 옷을 벗는 일, 이 세상에서 떠나는 일, 하나님 앞에 서는 일, 그리고 여러분 앞에 놓인 그분의 최종 심판에 대한 선고를 듣는 일을 기억하십시오. 그 심판은 반드시 다음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입니다. – 즉: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해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가라”; 또는 “내 아버지의 복을 받은 자들아, 세상이 시작된 이래 너희를 위해 준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마태복음 25장). 이것에 비하면 세상도, 세상의 재물도, 인간의 영광도, 화려한 옷차림도, 향기로운 향료도, 연회도, 축제나 유흥도, 모든 즐거움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 여러분은 하나님과 신성한 것들로 배부르게 하시고, 성령의 은혜에 취하며, 꿀과 벌집보다 더 달콤한 성경의 말씀으로 기쁨을 누리고, 정결함으로 단장하며, 의와 절제로 자신을 단장하고, 선한 행실로 부유해지며, 겸손한 지혜로 명성을 얻고, 무정심으로 하늘에 오르며,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두려움과 너희의 거룩한 기도로 대적을 물리치라. 점점 더 깨달음을 얻고, 점점 더 정화되며, 점점 더 하늘의 사람이 되어, 주님의 입에서 나온 것처럼 여러분에게도 “너희는 이 세상에서 나온 자들이 아니니라”(요한복음 15:19)라고 말씀하시게 하소서.

 

135. 출애굽과 심판을 기억하며 힘쓰라. 여기에는 유익한 행실들이 제시되며, 특히 육신의 정욕과 싸우기 위해 필요한 것이 강조된다.

135. 출애굽과 심판을 기억하며 힘써라. 여기에는 선한 행실들이 제시되며, 특히 육신의 정욕과 싸우는 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설명되어 있다. [2, 65] (동일). 힘내라, 내 자녀들아, 그리고 영적인 길을 따라 달려가라. 마음의 눈을 높이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영원한 것을 응시하고, 언제 어떻게 올지 – 겨울에나 수확철에, 낮에나 밤에, 지금이나 노년에, 올해나 내년에, 오늘이나 이 시간에, – 나의 마지막 숨이 끊어질 때가 올 것이다. 죽음은 반드시 찾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영혼을 헤아릴 줄 아는 자들이 올 것이며, 적이자 원수가 올 것이며, 모든 것의 승패가 결정될 것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스스로를 일깨우면, 너희는 죄를 쉽게 짓지 않을 것이며, 악의 심연에 빠지지 않을 것이요, 마침내 위로부터 오는 예루살렘의 복을 보게 될 것이며, 너희의 영원한 생명의 모든 날 동안 그것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시 127:6). 육신의 일들도 행하고, 이쪽과 저쪽 모두를 돌보며, 입으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혀로는 진리를 말하며, 손으로는 힘닿는 대로 일하고, 발로는 평화의 길을 걸어가십시오. 너희 온 몸은 거룩하며, 너희 모든 지체는 그리스도의 지체이다. “누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취하여 음란한 지체를 만들겠느냐?라고 사도가 말하느니라(고린도전서 6:15). 건방진 행동을 피하고, 아무도 누구를 상처 입히지 말며, 아무도 누구에 대해 험담하지 말라.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으니, “주님의 눈은 어둠 속에서도 해보다 더 밝으시며, 사람의 모든 길을 꿰뚫어 보시고 은밀한 곳까지 살피시느니라”(시라 23, 27. 28). 함부로 웃지 마십시오. 대화할 때 서로 가까이 앉지 마십시오. 배가 부르면 피가 달아오르지 않도록 하라.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 – 이는 건강한 이들에게 드리는 선한 조언이다. 우리 안의 파도와 자연스러운 불길만으로도 충분하니, 여기에 포도주의 불을 더하면 재앙적인 화재를 일으킬 것이다. 육신은 이를 견디지 못하고 끓어오르며 자신의 욕구를 요구할 것이다. 이 점을 경고하며 해로운 결과를 미리 알려 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날을 정하셨으니, 그러한 일을 행하는 자들을 심판하시고 악마들과 함께 상상할 수 없는 고통에 내어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심판하시기 전에 고백하여, 마귀가 심어 놓은 유혹을 드러내십시오. 모든 일을 품위 있게 행하고, 적당히 잠을 자며, 가능한 한 빨리 깨어나 정해진 기도 순서를 지키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이 그렇게 행하는 것을 보신다면, 여러분은 복을 받을 것입니다.

 

136. 그들에게 마땅한 위치가 어디인지, 그리고 누군가 마땅하지 않은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지에 대한 질문을 통해, 의무적인 삶의 전체 체계를 상기시켜 주라

136. 1) 그들에게 마땅한 자세가 어떤 것인지, 그리고 누군가 마땅하지 않은 쪽으로 치우치고 있지는 않은지에 대한 질문을 통해, 의무적인 삶의 전체 체계를 상기시켜 주라. – 2) 그 후 다음과 같이 격려한다: 수고해 왔으니, 앞으로도 계속 수고하라; 싸워 왔으니, 앞으로도 계속 싸워라; 너희의 수고가 헛되이 사라지지 않도록 하라. 심판의 날에 열매 맺음과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으로 그들을 고무한다. [2, 66]

11. (마찬가지로). 여전히 편지로 여러분을 인사드리며, 여러분의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묻습니다.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을 어떻게 보호하고 있습니까?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어떻게 여러분을 정화하고 있습니까? 그분의 의로움이 어떻게 여러분의 마음을 기쁘게 합니까? 경건한 생활의 질서가 어떻게 여러분을 하나로 묶어 줍니까? 진실한 믿음이 어떻게 여러분을 굳건하게 합니까? 확고히 다져진 순종의 서약이 어떻게 여러분을 하나로 묶어 줍니까? 위선 없는 순종이 어떻게 여러분을 고양시키고 있습니까? 그리스도를 본받는 여러분의 겸손한 지혜는 어떠한가요? 여러분의 출입은 어떠합니까? 그리고 내면의 비밀을 고백하는 일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 그 다음으로, 여러분의 손으로 하는 일들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수확이 시작되었습니까?... 이 모든 것과 그 밖의 일들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고, 우리를 기쁘게 해 주십시오. – 우리는 여러분을 신뢰하지만, 동시에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불안한 마음으로, 혹시 그곳에서 누군가 제멋대로 행동하지는 않는지, 불평하지는 않는지, 육신의 욕망을 좇지는 않는지, 건방진 태도를 보이지는 않는지 생각하곤 합니다. 혹시 어떤 이들은 마귀와 결탁하여, 주님과 그분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들과 함께 음모를 꾸미며, “그들의 멍에를 끊어 버리고, 우리에게서 그들의 멍에를 떨쳐 버리자”라고 말하지는 않는가? 그러나 하늘에 계신 분은 그들을 비웃으실 것이며, 주님께서는 그들을 조롱하실 것이다. 그때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진노하사 말씀하시며, 그 분노로 그들을 휩쓸어 버리실 것이다”(시 2편). 이는 내가 너희의 자유로운 동의에 따라 너희 위에 세워졌으며, 너희 스스로 기꺼이 나에게 순종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주님의 명령을 너희에게 선포하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12. 너희는 수고하였고 지금도 수고하며, 싸웠고 지금도 싸우고 있다. 너희의 고행과 순종, 너희의 뜻을 꺾고 욕망을 억누르는 일 속에서 주님을 견디고 있다. 그러니 여러분이 이전에 이룬 것을 헛되이 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눈물과 탄식, 온갖 궁핍 속에서 씨를 뿌렸고 지금도 뿌리고 있듯이, 만물의 심판자께서 각 사람에게 그의 행위에 따라 갚아 주실 때 기쁨 가운데 거두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늘아, 들으라. 땅아, 주께서 말씀하셨음을 알리라.” – 오, 형제들아, 우리에게는 “내가 자녀들을 낳고 키웠으나 그들이 나를 배반하였도다. 나, 주님의 구유에 누워 있던 나귀는 나를 알아보았거늘, 이스라엘은 나를 알지 못하였고, 내 백성은 깨닫지 못하였도다!”(사 1:2, 3)라는 말씀이 적용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말씀이 되기를 바랍니다. “네 아들들은 네 식탁 주위에 심은 새 올리브 나무와 같으니라,” – 영적으로 이해되는 대로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은 이렇게 복을 받을 것이니라” (시 127:4, 5). – 그러니 부디 귀를 기울이십시오. 지혜롭게 행하며, 여러분의 수도원장님의 인도를 따라 모두 한마음으로 화합하십시오. 매일 죽는 자처럼 살아가십시오. 음식과 음료 때문에 번민하지 말고, 지나치게 근심하지도 말고, 불평하지도 마십시오. 사도는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 “만일 밀가루 한 줌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노니,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하지 않으려 함이라” (고린도전서 8:13). 그러니 여러분은 반역의 자녀도, 음행의 자녀도, 분노와 죄의 자식도 되지 마십시오. 부끄러운 행실로 하나님을 노하게 하지 마십시오. – 화 있을진저, 여러분의 마음아! 화 있을진저, 여러분의 영의 눈아! – “하나님은 보복하시는 주님이시니라!” (시 93:1). “그분 앞에 드러나지 않은 피조물은 하나도 없으며, 모든 것이 그분의 눈앞에 벌거벗은 채 드러나 있습니다” (히브리서 4:13). 누가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누가 떨지 않겠습니까? 누가 “피를 흘릴 지경까지”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기 위해 자신을 바치지 않겠습니까?

 

137. 수확철에 예배를 드리고, 음식을 섭취하며 휴식을 취하고, 밤을 보내며, 전반적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

137. 수확철에 의식을 거행하고, 음식을 섭취하며 휴식을 취하는 방법, 밤을 보내는 방법, 그리고 전반적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 [2, 67] (동일). 나는 너희가 지금 수확과 포도 수확으로 인해 햇볕에 타기도 하고 땀에 흠뻑 젖기도 하며 큰 수고를 겪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바로 이 너희의 수고에 대해 마땅히 말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 주님의 축복이 너희에게 임하기를, 나의 자녀들아.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거룩한 높이에서 너희를 축복하시어, 너희에게 생명을 불어넣으시고 너희의 영혼과 육신을 굳건하게 하사, 영적인 봉사와 육체적인 일 모두에 충분한 힘을 갖게 하시고, 어느 쪽도 지나친 피로 없이 수행할 수 있게 하시기를. 나는 수확철의 여름날들이 얼마나 뜨겁고 지치게 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큰 피로를 안겨주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일꾼들의 특별한 열정이 힘을 불어넣어 주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 누구도 그 날들을 견뎌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사랑을 위하여, 여러분께 간청하노니, 이 두 가지 수고 모두에 꾸준히 임해 주십시오. 이른 아침에 품위 있고 기쁜 마음으로 평소의 시편 찬송과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마친 후, 주어진 일에 착수하여 일하십시오. 마음속으로 시편을 읽으며, 제3시가 될 때까지 일하십시오. 그때 일을 멈추고, 주님께 경건하게 제3시를 노래하며, 성신의 은총을 구하며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들어 올려, 여러분의 영혼과 육신이 굳건해지기를 기도하십시오. 그 후, 세 번, 네 번, 혹은 그 이상의 무릎 꿇기를 주의 깊은 기도와 함께 마친 뒤, 우리 관례대로 수요일과 금요일을 제외하고 주님께서 주신 음식을 드십시오. – 그러나 이 식사 시간 동안 소란이나 혼잡이 없도록 주의하십시오. – 또한 수확 작업 중에는 다툼이나 제멋대로 행동으로 인한 욕설과 고함, 또한 대화나 웃음, 비아냥거림 등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 여러분 사이에서 그러한 일이나 그와 유사한 일이 결코 없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의 면전에서 행해지는 너희의 일이 축복받기를 바란다. 그리고 서로 도와야 한다. 네 곁에서 일하는 이가 기력이 쇠하거나 어떤 어려움으로 뒤처지면, 너도 멈춰서 그를 도와라. 그래야 수확이 고르게 진행되고, 모두에게 동등한 경쟁심이 유지될 것이다. 일을 감독하는 자들의 지시에 따라 정오에 휴식을 취하거나, 밤에 나무 아래나 차양 아래에서 잠을 잘 때는, 여러분의 몸이 서로 가까이 있지 않도록, 더구나 서로 닿지 않도록 주의하고, 어떤 두 사람이 다른 이들과 떨어져 은밀한 곳으로 가지 않도록 하라. 이를 감독자들은 주의 깊게 지켜보아야 한다. 여기에는 보이지 않는 악의 씨 뿌리는 자가 있으니, 그가 은밀히 다가와 누구에게든 해로운 독을 주입하지 않도록, 그리고 우리가 그로 인해 우리 주 하나님을 거스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를 위해 깨어 있으라. 예배 중에는 시편 찬송이 많지 않으니, 이를 서두르거나 어수선하게 부르지 말고, 주의 깊게 부를 수 있도록 하여 우리가 모든 선한 일에 마음을 다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모두 예배에 참석하여, 누구도 빠지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런 사람은 비록 나중에 열 사람의 몫을 혼자서 일하더라도, 그날 성찬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나는 여러분의 구원을 염려하며, 누구도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상기시키기 위해 이 말을 합니다. 누구에게든 슬픔이 있다면, 그것을 숨기지 말고 장로들에게 알리십시오. 그들이 판단하여 치유가 필요한 것을 치유해 줄 것입니다. 아무도 게으름을 피워서는 안 됩니다. 그런 사람은 형제들과 함께할 자격이 없으며, 주님을 찾는 자들의 수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 나무를 베는 데 힘이 없거나, 잘 못 하나, 형제여? 손잡이를 잡아라. 손잡이도 잡을 수 없느냐? 포도를 따거나, 물을 나르거나, 그 밖의 필요한 일을 하라. 야외에서든 집 안에서든 상관없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네 열심을 보시고, 과부의 두 렙타처럼 그것을 받아 주실 것이다.

 

138. 형제들에 대한 좋은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지도자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그리고 모든 형제들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 주며 더욱 번창하도록 격려한다.

138. 형제들에 관한 좋은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지도자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그리고 모든 형제들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줌으로써 더욱 번창하도록 격려한다. [2, 68] (동일). 형제들이 와서 너희의 사정이 어떠하냐고 말했고, 그로 인해 나는 형언할 수 없을 만큼 기뻤다. 왜냐하면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고, 선한 마음을 지키며, 하나님의 계명을 이행함으로써 그 계명으로 깨달음을 얻어 빛의 자녀들이 되고 천국의 상속자가 된다는 소식을 듣는 것은 나에게 작은 기쁨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 나의 자녀들아! 그렇게 지혜롭게 행하고, 그렇게 스스로를 지키며, 그렇게 날마다 지내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으로 따뜻함을 얻고, 여러분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새롭게 되며, 타락한 육체의 온갖 쾌락과 정욕을 죽이고, 그 자리에 하나님의 낙원처럼 영원히 살아있는 미덕을 심고 가꾸며,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참아 내며, 복종과 순종, 선행, 사랑, 연민 속에서 서로에게 선하게 대하고, 서로를 기뻐하며, 서로의 짐을 지어 주라. 무엇보다도, 나의 자녀 바르사누피여, 내가 네게 맡긴 사역을 흠잡을 데 없이 지키고, 모든 것을 소생시키시는 하나님 앞에서, 편견이나 오만, 분노, 무분별한 겸손, 또는 정신의 동요에 따라 행동하지 말고, 마치 젖먹이 어머니가 자신의 자녀를 따뜻하게 품어주듯 지혜롭고 온화하게 행하며, 기꺼이 네 영혼을 네 형제들과 나의 자녀들을 위해 바치라. 그리스도의 양 떼를 돌보는 것은 위대한 일입니다. 주님께서 사도 베드로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가 나를 사랑하면 내 양을 먹이라.” 그러니 너도, 내 자녀여, 주 그리스도님과 죄인인 나를 사랑한다면, 내 자녀들, 아니 그리스도의 어린 양들을 잘 돌보아 주십시오. 만약 그들 중 어떤 이들이 어린 염소처럼 뛰어다닌다면 – 그런 이야기도 들었으니 – 그들의 성급함을 다스리고, 그들에게 설명해 주라. 그들이 계속 어린 염소처럼 남아 있다면, 심판의 날에 주 그리스도의 양 떼에서 제외되어 멸망하는 자들의 편, 사탄의 편에 서게 될 것이라고. 이 말로 그들의 마음을 두렵게 하고, 이 엄중한 말씀으로 그들을 타격하여 그들도 어린 양이 되게 하라. 어린 양은 온유하고, 악의를 품지 않으며, 겸손하고, 순종적이며, 소란스럽지 않은 반면, 염소 새끼들은 날쌔고, 제멋대로이며, 고집스럽고, 성질이 나쁘기 때문이다. 그런 자들에게는 화가 있을지어다. 그들에게는 영원한 불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으니. 내 자녀들아, 너희 중 누구도 그러하지 말아라, 누구도 그러하지 말아 달라고 간청하노라. 그렇지 않으면 목자는 그들을 굶주리게 하거나, 자신의 양 떼에서 추방해야 할 처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바를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라. – 내 아들 다니엘아, 너도 네 형제들 가운데서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잘 살펴보아라. 그들을 가르치고, 소금으로 간을 맞추며, 훈계하라. 무질서와 혁신, 떠들썩한 행동을 용납하지 말고; 품행이 바르고 경건한 얼굴을 가진 자, 건방지지 않은 자, 품위 있고 근면하며 순종적이고 겸손하며 불평하지 않고 조롱하지 않는 자들을 사랑하라. 그들과 반대되는 자들은 미움 없이 용납하지 말고, 더 나은 본보기를 보여 주며 바로잡아라. 그리하여 너희 가운데 누구도 하나님을 멀리하거나 그분께 기쁨을 드리지 못하는 자가 없게 하라. 하나님과 멀어지고 그분께 기쁨을 드리지 못하는 자는 무질서한 자, 험담하는 자, 불평하는 자, 조롱하는 자, 몰래 먹는 자이다. 너희 가운데 그런 자가 아무도 없도록 하라. 그러나 너희 모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닮으며, 하나님을 따르는 자가 되라. 주님께서 너희를 지켜 주시기를, 나의 자녀들아!

 

139.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사랑은 열정을 불태우고 선한 길로 인도하나, 이를 갖지 못한 자들은 게으름에 빠지고 넘어진다

139. 1)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사랑은 열정을 불태우고 선한 길로 인도하나, 이를 갖지 못한 자들은 게으름에 빠지고 넘어진다. – 2) 그러한 자들이 바른 길로 돌아오도록 돌보고 기도해야 하며, 그동안 우리 자신은 더욱 엄격하게 자제해야 한다. [2, 69]

13. (동일). 여러분에게 은혜와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 여러분이 선한 생활 태도를 갖추고, 순종과 겸손, 경건, 온유함, 그리고 밤낮으로 드리는 찬송과 시편을 통해 그러하기를 바랍니다. 이 모든 것이 여러분 가운데서 끊임없이 지속되도록 주의하십시오. 이는 오직 여러분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분의 사랑의 불꽃이 꺼지지 않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그 불꽃이 어떤 영혼에서 꺼지면, 그 영혼에는 소심함과 나태함, 그리고 다른 가시와 덫 같은 정욕들, 육체의 나태함과 방종, 게으름과 낙담, 지나친 수면, 끝없는 식욕, 그리고 그 밖의 온갖 죄, 특히 타오르는 정욕, 마음을 어둡게 하는 생각, 파멸적인 삶의 성향과 행위가 나타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 거룩하고 비물질적인 불이 꺼지지 않았다는 징표는, 영혼이 항상 선을 갈망하며 모든 마땅한 일을 부지런히 행하고, 나태해지거나 소심해지지 않으면서 순종, 노동, 시 읊기, 고해, 수공예, 기도, 정결함 등, 복된 순종에 포함되는 모든 일을 게을리하지 않고 성실히 행하는 데 있다. 그러한 사람은 복이 있으며,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모든 이에게 사랑받는다. 그는 마음속의 선한 보물에서 꽃처럼 신성한 은총의 표현을 피워내며, 이는 그의 경건한 얼굴과 모든 행동과 말에도 드러난다. 그러나 부적절한 생각을 품은 자들은 조금씩 마땅한 길에서 벗어나다가, 결국에는 자신의 신앙 고백(서약)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가 마귀의 먹이가 된다.

14. 그러나 올바른 길에서 벗어난 모든 이를 매일 부르시는 주님께서 그들도 다시 그분의 양 떼로 돌아오게 하시기를 기도합시다. 죄가 그들을 끝까지 갉아먹지 않도록 하되, 잃어버린 자를 찾아내는 데 있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여러분 스스로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어리석은 짐승 중 하나를 잃어버린 자들도 그 손실을 쉽게 견디지 못하는데, 하물며 이성 있는 양들의 돌봄을 맡은 자들은, 그들 중에서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내는 일에 온 힘을 다해 신경 써야 하지 않겠는가? – 이 자들이 넘어졌으니, 나머지 자들은 그만큼 더 굳건히 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를 지키게 하라. 기록된 바와 같이, “의인들은 악인들이 넘어질 때 두려움을 느낀다” (잠언 29, 16). 그러니 경외심을 품고 더욱 조심스럽게 나아가십시오. 마귀가 양쪽에서 여러분을 위해 함정을 파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고백하지 않은 생각을 품고 있거나 자기 뜻대로 행동하지 마십시오. 누구도 쾌락을 탐하거나 자만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그러한 악한 성향을 품은 자들은 파멸의 구덩이에 미끄러져 빠져나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비참한 처지에서 길을 잃은 양처럼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습니다. 기도가 그들 곁을 떠났다.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 달아났으니, 도대체 누구에게 손을 들어 기도하겠는가? 시편과 찬송이 그들의 입에서 사라졌다. 비겁함으로 스스로를 파멸시킨 그들이, 도대체 누구에게 “주님을 오래 참았다”고 노래하겠는가?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이 돌아오도록 그들을 위해 기도하되, 동시에 너희 자신의 굳건함을 위해 기도하며 이렇게 말하라. “비록 전쟁이 나를 대적할지라도, 나는 그분을 의지하리라”(시 26:3). “젊은 시절부터 많은 이들이 나를 대적했으나, 나를 이기지 못하였도다”(시 128:2). “이것이 내 영원한 안식처니, 내가 원한 대로 여기에 거하리라”(시 131:14) –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군사들로서 싸우되 넘어지지 않고, 인내로 말미암아 의의 면류관을 받을 자격을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140. 서원을 어기고 수도원을 떠나는 이들을 위해 슬퍼하며, 온갖 방법으로 그들에게 올바른 길로 돌아와 수도 생활에 굳건히 머물도록 설득한다.

140. 서원을 어기고 수도원을 떠나는 이들을 안타까워하며, 온갖 방법으로 그들에게 올바른 길로 돌아와 수도 생활에 굳건히 머물도록 설득한다. [2, 70] 이제 여러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게 되어, 나는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했다. 여러분의 부원장님들의 건강과 안녕, 그리고 경건한 순종과 선한 인내, 하느님께 기쁨을 드리는 삶 속에서 바르게 행하고 있는 형제들과 이미 바르게 행했던 형제들을 보고 기뻐했으며; 길에서 벗어나 도망친 이들에 대해서는, 비록 그들이 다시 소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슬퍼했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더욱더 보호하시고, 여러분의 참된 삶의 여정을 완성하도록 굳건히 세워 주시기를 빕니다. 길에서 벗어난 이들에게는 선지자의 다음 말씀을 전합니다. “인자여! 어찌하여 헛된 것을 사랑하고 거짓을 찾느냐?” (시 4:3), – 너희의 정욕에 이끌려 자기 뜻대로 행하려 하며, 눈앞에 하나님의 두려움도, 씻을 수 없는 심판도, 꺼지지 않는 불도, 칠흑 같은 어둠도, 이를 갈며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한 지옥도 두지 않고, 그토록 두려움 없이 뻔뻔하게, 그토록 거짓되고 경솔하게 하나님을 판단하며 방탕한 행실을 일삼고 있느냐. 언제까지 그분의 심판을 잊고 있을 것인가? 언제까지 회개의 마음을 갖지 않을 것인가? 언제까지 마음속에 간사한 계책을 품고, 죄에 대한 변명을 꾸며내며 헛된 희망에 빠져 있을 것인가? – 이제라도 타락에서 일어나, 너희를 둘러싼 어둠을 쫓아내고, 너희의 미친 욕망을 끊어 버리라. 너희는 누구로부터 도망치는가? 누구를 부인하는가? 구원의 날에 받아들였던 성령님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 하지만 이제 그만두라. – 더 이상 방치하지 마십시오. 마귀가 여러분을 두고 기뻐하게 두지 마십시오. 원수에게 아첨하는 것을 그만두십시오.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을 사랑하고, 선하신 주님을 마음속에 모시십시오. 그리고 그분은 전지전능하신 분으로서, 여러분의 겸손을 위해 과거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간청하오니, 너희 영혼의 결함을 바로잡고, 너희 마음의 기초를 굳건히 세우며, 흩어진 생각을 모아라. 너희의 서원을 기억하라. 그 서원들 앞에서, 설령 불과 칼이 너희를 위협하고, 설령 고문과 고통이 기다리고 있다 해도, 너희는 결코 그 서원들로부터 벗어나서는 안 되었노라; 그러나 여러분은 하찮은 악한 욕망 때문에, 신성한 언약과 거룩한 서약을 저버리고, 독에 쏘인 송아지처럼 벌떡 일어나 물도 없고 통행할 수 없는 곳으로 달려가, 마을에 정착하여 세속적인 남녀들과 어울리며, 마치 제물을 바치듯 먹고 마셨습니다. – 그런 씨앗에서 어떤 열매가 맺히겠는가?! 아아, 불행한 나여! 차라리 땅이 나를 삼켜 버렸더라면 좋았을 것을. – 이제 나는 선지자와 함께 이렇게 말해야 할 때다. “산들아, 내 위에 무너져 내리고, 언덕들아, 나를 덮어라”, 이 불의하고 죄 많은 자를 (호세아 10, 8). 왜냐하면 내가 낳은 자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저버리고, 자신의 육신을 더럽히며, 순결을 배반하고, 순종을 거부하여 악마들의 조롱거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탄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자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죄의 입으로 그들을 삼키지 않는가? – 그러나 이제라도 이곳에서 정신을 차리고, 깨어나며, 주위를 둘러보고, 원수의 유혹과 우리의 무분별함을 꿰뚫어 보며, 스스로를 책망하고, 겸손해지며, 통회하고, 고백하며 엎드려, 조금씩 예전의 아름다운 삶을 되찾아 갑시다. 아아! 주님의 집과 우리 하나님의 뜰에 서 계신 여러분 모두에게 간청합니다! 용감하게 서서, 흔들림 없이 나아가며, 여러분의 지도자와 다른 지도자들에게 순종하십시오. 그들을 배척하는 자는 나를 배척하는 것이요, 그들을 받아들이는 자는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니, 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있는 그대로 있게 하시고 여러분을 있는 그대로 있게 하신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141. 마땅한 삶에서 지속적인 번영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지혜와 뜻을 버리고 믿음으로 인도하심에 순종할 것을 권면한다

141. 마땅한 삶에서 지속적인 번영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교만과 뜻을 버리고 믿음으로 인도하심에 순종할 것을 권면한다. [2, 71] 여기저기서 우리를 향해 쏟아지는 비난을 바라보며, 나는 사도의 말씀대로 말할 수 있다: “진실로 우리에게 ‘육체의 해로운 자, 사탄의 천사’가 주어졌으니, 우리가 교만해지지 말고, 오히려 징계를 받으며 겸손해져야 하며, 달리 구원받을 수 없는 자로서 하나님의 굳건한 손길에 의지해야 한다.” 우리가 온 힘을 다해 불순종하는 우리의 생각을 굴복시키고, 우리 자신이 온전히 저주받은 자들이며, 우리를 인도하는 이가 누구이든 간에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될 때, 그때 비로소 천사가 우리 정욕의 구덩이로 내려오시리니, 마치 바빌론의 구덩이에 내려오신 적 없으셨던 것처럼, 마음속에서 정욕의 불길을 뽑아내시고 영혼 속에 – 마치 이슬 같은 바람이 불어오듯 – 순결의 선물을 베풀어 주시리라. 그러니 우리가 겸손해지자. 우리의 교만을 버리고, 우리의 눈도 낮추자. 이성이 그 고개를 숙이게 하라; 그리하면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자비가 가까이 올 것이다. – 입으로는 축복하면서도 마음은 멀리 떨어져 있는, 즉 오직 자신의 성품과 이성만을 따르는 자처럼, 불신하거나, 교활하거나, 위선적인 사람이 아무도 없기를 바란다. “아무도 자기 것을 구하지 말고, 오직 이웃의 것을 구하라” (고린도전서 10, 24). 온전히 빛이 되고, 온전히 진실하며, 온전히 참된 아들들이 되십시오. 자녀로서, 형제로서, 공동 상속인으로서 걸어가 봅시다. 서로에게 해가 될 만한 것은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말고, 어떤 새로운 무질서도 용납하지 맙시다.

 

142. 모든 세속적인 것을 버리고, 고행의 수고를 통해 결핍과 슬픔으로 가득 찬 빈곤한 삶을 살아가도록 기뻐하라고 권면합니다. 이는 천국 유산을 상속받기 위한 확실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142. 모든 세속적인 것을 버리고, 고행의 수고를 통해 결핍과 슬픔으로 가득 찬 빈곤한 삶을 살아간다는 사실에 기뻐하라고 권면한다. 이는 천국( )의 유산을 상속받기 위한 확실한 길이기 때문이다. [2, 72] 다소 대담한 말일지 모르겠지만, 사도들의 말씀으로 여러분에게 말하겠노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 4, 4). 무엇을 위해? 바로 여러분이 하나님의 일을 행하고, 수도자의 복장을 입었으며, 순종의 법 아래에 서서 매일 그것을 실천하고, 슬퍼하며, 궁핍을 견디고, 고난을 겪으며, 애통해하기 때문입니다. 금식, 기도, 맨땅에서 잠을 자는 것, 수고와 피로, 순종의 임무를 수행하는 일, 자기 의지의 절제, 예기치 못한 명령, 몸을 씻지 않는 것, 누더기 옷과 단정하지 않은 옷과 신발을 신는 것; 덧붙이자면, – 참회와 파문, 그리고 더욱이, – 끊임없이 가해지는 고통, 밀침, 찌름, 마치 찔림과 화살에 맞은 듯한 것들,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게 우리를 괴롭히는 악마들로부터 오는 것들—때로는 음란, 때로는 나태, 때로는 과식, 때로는 변덕스러운 생각과 욕망, 그리고 그 밖의 셀 수 없이 많은 정욕들. – 그러니 여러분 스스로 판단해 보십시오. 제가 “항상 기뻐하라”고 말한 것이 옳지 않습니까? 오, 나의 형제들아! 여러분은 하나님을 위해 이 모든 것을 견디며, 이를 선택하고 이를 사랑하므로 복이 있고 삼중으로 복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무엇이 따를까요? – 장차 오는 세대에 여러분의 마음속에 진리와 풍성한 평화, 생명, 기쁨, 영원한 안식,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와 천국의 상속권이 빛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토록 현명하고, 이토록 칭찬받을 만하며, 이토록 하나님께 복된 것을 추구해 왔고 지금도 찾고 있는 것입니다. – 세상을 미워하고 세상에 있는 모든 것, 부모, 형제, 친척, 친구, 지인들을 멀리하고, 도시와 마을, 들판, 집, 그리고 고향을 떠나, 유일하신 하나님이자 주님이시며 영광의 왕이신 분, 선하시고 지극히 선하신 주님께 굳게 매달려, 그분을 섬기며, 그분 앞에 서며, 그분을 섬기며, 그분께 끊임없이 찬양하며; 여러분에게는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말도, 아내와 자녀에 대한 걱정도, 남종과 여종에 대한 돌봄도, 재물과 재산에 대한 근심도, 지위와 명예에 대한 다툼도, 진수성찬과 반짝이는 포도주, 그리고 다른 육체적 쾌락에 대한 수고도 없으며, – 이 땅의 썩어 없어질 어떤 것도 아닌, 오직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삶과 하늘에서 약속된 영원한 복을 상속받는 일뿐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너희를 사랑하시지 않으시겠느냐? 너희를 자녀라 부르시지 않으시겠느냐? 그 날에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오라, 내 아버지의 복을 받은 자들아, 창세부터 너희를 위해 예비된 것을 상속받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여러분의 수련이며, 여러분의 추구이며, 여러분의 소망입니다! – 그러므로 다시 한 번 말하노니, “항상 기뻐하라.”

 

143. 수행자의 삶을 경기장에서의 경주에 비유하며, 이 경주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상을 받는 방법에 대해 상세히 가르친다

143. 수도 생활을 경기장에서의 달리기와 비교하며, 이 경주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상을 받는 방법에 대해 상세히 가르친다. [2, 76] 우리의 수련은 성 바오로가 지적한 대로(1코린 9,24) 경기장에서의 달리기와 비슷합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달리기를 위한 공간이 좁고 시간도 짧게 정해져 있습니다. 반면 우리의 수련에서 그 길은 땅에서 하늘까지 뻗어 있으며, 시간은 일생 전체로 정해져 있고, 그 후 승자들에게 면류관이 수여됩니다. 우리의 경주를 지켜보는 관중은 수천, 수만 명의 거룩한 천사들이며, 이 경주의 주재자는 모든 것의 주님이시며, 접근할 수 없는 영광의 보좌에 앉아 계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적들은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우리에게 장애물을 놓아 넘어뜨리고 파멸시키려 하는 사악한 악마들입니다. – 이를 통해 보시다시피, 우리가 경주를 잘 시작할 뿐만 아니라 완주하기 위해서도 얼마나 주의 깊고 신중하며, 성실하고 지칠 줄 모르는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스스로 아실 것입니다. 단순히 시작하는 것만으로는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할 것입니다. 청년의 활기와 남자의 끈기로 전방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삶이 아무리 길게 이어진다 해도, 그와 같은 열정과 집중력을 가지고 죽을 때까지 계속하지 않는다면, 그것만으로는 아직 승리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형제들과 아버지 여러분, 계속해서 힘내어 앞으로 더 멀리 나아가도록 합시다. 자비로우신 하나님께 위로부터 도움과 힘을 구하며, 잘 견뎌내고 정해진 결승선이나 목표를 성공적으로 달성하도록 합시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가장 험난한 과업을 지시하셨으니, 잘 달려가 승리하는 자들에게는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영광을 약속하시고, 게으르고 부주의한 자들, 즉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거나 장애물 앞에서 멈추고 제멋대로 길에서 벗어나는 자들에게는 가장 비참하고 끔찍한 운명을 경고하십니다. –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이 말을 들으라, 자녀들아, 그리고 귀를 기울이라: 기운차게 달려가며 주위를 예리하게 살피라. 교활한 악마들이 언제나 우리 길을 가로막고 걸림돌을 놓을 준비가 되어 있음을 알라. 아시라, 누구도 모든 얽매이는 것에서 벗어날 수 없으면, 오직 믿음의 흉갑만을 간직하고는, – 즉 모든 외적인 재산을 버리는 것뿐만 아니라, 내면의 다양한 생각과 세속적인 욕망까지도 제거해야만, 진정으로 잘 살 수 있음을. 우리의 경주에서 누구도 성공할 수 없으니, 육신이 적은 음식과 음료로 만족하도록 훈련시키지 않는다면; 기름 대신 굳건함과 지칠 줄 모르는 인내로 자신을 기름지지 않는다면; 스키마를 받기 전, 마치 체조 과정처럼 시험적인 훈련을 거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 여정 동안, 누구도 다른 동지들을 방해해서는 안 되며, 그들을 시기하거나 험담해서도 안 된다; 오히려 마음과 눈을 에 고정하여, 수련 과정의 종착점에 성공적으로 도달하는 데만 전념해야 하며, 노력에 노력을 더하고, 열정에 열정을 더하며, 의욕에 의욕을 더해, 좌우를 돌아보지 말고, 칭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며, 허영에 휩쓸리지 말고, 피로와 장애물, 충돌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걸림돌로 인해 낙담하지 않음으로써, 이 모든 것을 경건하고, 겸손하며, 형제애를 품고, 진실하게 완수하여, 수련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우리 주님께서 약속하신 상을 받을 자격을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144. 우리는 모든 미덕을 열망하고, 모든 악을 경계하되, 특히 선해 보이는 악을 특히 경계해야 한다

144. 1) 모든 미덕을 열망하고, 모든 악한 것, 특히 선해 보이는 악한 것들로부터 경계하자. – 2) 원수에게는 많은 함정이 있다. 그것들을 선택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생각을 드러내는 것이다. – 3) 모든 정욕에 맞서기 위해서는 그에 대항하는 투쟁으로 무장해야 한다. 질투와 싸우는 방법이 본보기로 제시된다. – 4) 모든 일에서 질서를 지키도록 권고한다. [2, 77]

1. 모두에게 유익한 것을 바라는 마음으로 모여, 구원에 대한 가장 뜨거운 열정을 품고, 작은 자와 큰 자, 초심자와 장로들 모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행하며, 마땅히 바라는 것을 갈망하고, 유익한 것을 추구합시다; 육체와 영의 온갖 더러움에서 우리 자신을 정화하고, 우리 자신을 선택받은 그릇으로 만들어 영 안에서 거룩함을 이루며, 죄로 이끄는 유혹을 피하고, 교만과 불순종, 쾌락 추구, 육욕을 피하고, 덕행—즉 겸손, 순종, 순결, 형제 사랑—으로 풍성해지기를 갈망합시다; 육신적이고 쾌락을 좇는 성향을 우리 마음에서 멀리 떨쳐내고, 이를 방종하게 하는 관계를 끊어내자. 이는 외적인 것뿐만 아니라 내적인 것, 즉 한 형제에게 다른 형제보다 더 큰 사랑을 품지 않도록 하자는 뜻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랑은 교활하고 하나님께 미움받는 것이기 때문인데, 겉보기에는 형제애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사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2. 여러분은 마귀의 매복이 얼마나 많은지, 그의 그물이 얼마나 교묘하게 엮여 있는지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도 자신의 생각과 욕망을 고백하고, 지도자를 향한 믿음과 겸손 및 순종을 동반함으로써만이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 길을 걷지 않는 자들은 넘어지니, 우리가 읽은 바와 같이 예전에도 넘어졌으며; 그러나 이 법을 따르는 자들은 죄와 마귀의 어둠을 피하고, 자신의 욕망을 죽임으로써 세상에서 빛나는 등불이 되었습니다.

3.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간청하노니, 너희는 너희의 구원을 위해 지혜를 얻으라. 누구든지 어떤 정욕에 시달린다면, 그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예를 들어, 시기심에 맞서는 것은 바로 이 세상의 덧없는 영광에 대한 증오입니다. 왜냐하면 이 정욕은 이웃보다 어떤 면에서든 더 낫게 보이려는 욕망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혹은 명석한 지성, 혹은 선율 있는 찬송, 혹은 즐거운 독서, 혹은 그 밖의 어떤 영적 또는 육체적 능력으로 말미암아, 일단 싹트면 느린 불길로 태워버리고, 기력을 소진시키며 갉아먹는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지체로서, 우리 모두가 한 몸인 만큼, 다른 이들이 가진 모든 것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여기며 서로 기뻐해 주자; 왜냐하면 한 사람은 이 점으로, 다른 사람은 저 점으로, 또 다른 사람은 또 다른 점으로 구별되지만, 모두 형제애라는 하나의 몸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으로 인해 형제애는 더욱 돋보이며 온전해지는데, 그 영광은 각자에게로 이어진다: 어떤 이는 멜로디가 아름답고, 너는 목소리가 쩌렁쩌렁하며; 어떤 이는 명확하게 읽지만, 너는 읽은 내용을 금방 이해하고; 어떤 이는 지성이 더 명석하고, 너는 일을 처리하는 데 더 능숙하며; 어떤 이는 일을 지휘하는 데 더 유능하고, 너는 순종하는 데 더 기꺼이 나서며; 그리고 후자가 전자보다 훨씬 낫다. 왜냐하면 실제로 있는 그대로인 것보다 무언가인 척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선율이나 조화로운 소리, 낭독이나 신속함, 서예나 음악이, 복되고 지극히 사랑스러운 겸손과 순종, 선함과 소박함, 온유함과 고요함, 악의를 품지 않음과 불평하지 않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실천적인 기도, 그리고 다른 미덕들 앞에서, 비록 누군가가 목소리가 없거나, 노래를 못하거나, 읽기를 서툴거나, 말더듬이거나, 사시이거나, 얼굴이 못생겼거나, 절름발이일지라도, 그 미덕들을 얻는 것은 의지와 추구로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 선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위해 미덕이라는 선을 쉽게 이룰 수 있고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하셨으니, 이를 육체적 우월성에 의존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씨앗이 뿌려지고 자라나며 완전함에 이르는 영적 성향에 의존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4. 우리 안에 있는 것에 만족하고, 형제들 각자가 가진 것에도 기뻐하며, 서로 하나가 되어 온갖 질서를 갖추어 하나님 안에서 삶을 살아가자. 보십시오, 형제 여러분, 우리가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의 모든 것이 질서 정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소한 것 하나라도 제자리를 벗어나면, 형제단의 전체 구성이 흔들리고 동요하여 덕의 아름다움을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에서나 다른 모든 공동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 되어 모였고 천사들의 거처와 같은 질서 속에 있는 우리에게는, 모든 면에서 완전한 질서가 시급히 필수적입니다. 즉, 소란이나 혼란 없이 노래하고 기도하며, 서 있다가 자리를 옮기고, 앉았다가 일어나며, 잠들고 깨어나며, 내려가고 올라가며, 침묵하고 말하며, 먹고 마시며, 들어가고 나오며, 묻고 대답하며, 모이고 흩어지며, 구하고 베풀며, 섬기고 섬김을 받으며, 얹고 붙들며, 옷을 입고 벗으며, 신발을 신고 벗는 것, 이 모든 것이 우리 가운데서 매일 눈에 띄게 이루어집니다. 이 모든 일에서 질서가 지켜질 때, 우리 형제애 전체는 마치 고요한 바다와 같이, 비록 움직이고는 있지만 성령께서 일으키시는 온화한 파도처럼 보인다. 그러나 부주의로 인해 어떤 혼란이 스며들면, 마치 거센 바람과 허리케인에 휩쓸리듯 요동치며 파도가 거세게 일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가운데서, 여러분 사이에 소란과 고함, 웃음과 수다가 일어날 때 보이는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 마치 최근 성수를 나누어 줄 때와 식사 자리에서 나올 때, 네 명의 질서 담당자들이 간신히 여러분 사이의 마땅한 질서를 회복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 그렇지 않습니다, 나의 자녀들이여, 형제들이여,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하나님의 뜻에 대해 “선한” 것뿐만 아니라 “완전한” 것이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하는” 것(롬 12:2)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많은 이들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 그러나 제가 이 말을 한 것은 여러분을 책망하기 위함이 아니라, 과거에 있었던 일을 상기시켜 앞으로는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세상의 주님이시며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요,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질서 있게 다스리시는 분이시니, 그분께서 여러분에게 모든 선한 일과 행보, 모든 평화와 한마음, 모든 질서와 온유함, 그리고 서로에 대한 진실한 사랑 안에서 힘과 굳건함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분의 계시 날에 성도들의 모습과 거룩하게 된 자들의 무리와 함께, 태초부터 그분께 기쁨을 드린 모든 성도들과 함께 모이게 하시기를.

 

145. 공동 생활의 수련에서 인내하는 삶;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순교이다

145. 공동 생활 속의 수련 생활에서 인내하는 삶;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순교이다. [2, 78] 악한 결탁과, 자만심에 찬 독단, 그리고 수도원 규율을 해치는 파기를 경계하며, 우리에게 전해진 성부들의 규율에 모든 면에서 순종하라; 왜냐하면 우리에게 정해진 것은 무작위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옛날부터 많은 수고와 땀을 흘리며 모든 것을 시험해 본 끝에 정해진 것이며, 정해진 것은 우리 천사 같은 삶의 방식이 요구하는 바와 본질에 따라 정해진 것이며, 주님의 계명에 대해 달리 현명하다고 자처하는 자들을 책망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여러분의 선한 싸움을 계속하고, 주님 안에서 여러분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십시오. 온유와 인내의 기름으로 자신을 바르고, 온갖 종류의 수도적 고난을 견뎌내십시오. 그 고난을 통해 영원한 복의 풍성한 기쁨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과연 어떤 고난들입니까? 바로 여러분이 매일 실제로 겪고 있는 것들입니다: 밤샘 기도와 시편 찬송, 수작업, 적은 음식과 음료, 차례대로 이어지는 순종, 교회에서의 서 있는 자세와 행진 순서, 걸음걸이, 옷차림, 신발, 두건에서의 규율, – 결핍과 차별, 경멸 및 그와 유사한 모든 것에서 오는 슬픔입니다. 그리고 많은 성부들이, 무엇보다도 성 바실리오 대교부가 증언하듯이, 순종의 상태야말로 진정한 순교임을 정당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 그러나 보십시오, 이것이 우리에게 어떤 유익이 됩니까? 그리고 그에 대한 보상은 무엇입니까? – 시들지 않는 의의 면류관, 천국 상속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썩지 않음, 불멸, 그리고 그 밖의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온갖 복락입니다. 이러한 약속을 가진 우리 형제들아, 하나님을 닮은 삶을 위해 닥쳐오는 수행의 수고를 계속해서 견뎌내라. 때때로 일어나는 어떤 실수에 겁먹지도 말고, 마주치는 어려움과 슬픔으로 인해 낙담하지도 말라: 왜냐하면 여기서 슬퍼하지 않는다면, 그날에도 기뻐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궁핍을 견디지 않고 금식하지 않는다면, 장차 올 세상에서도 넉넉함과 기쁨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슬퍼하고 애통하며, 승리하고 억눌릴수록, 저기서는 더 큰 위로를 만날 것입니다: 슬픔 대신 기쁨을, 가난 대신 부를; 세상의 작은 소유 대신 하늘 보화의 많은 소유를, 육체의 질병 대신 영혼의 평안을, 세상을 떠나는 대신 주님께서 친히 부르시는 소명을 받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복된 음성을 듣고, 다음과 같이 부르시고 말씀하시는 그 음성을 들을 때, 우리에게 어떤 일이, 얼마나 큰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라, 내 아버지의 복을 받은 자들아, 창세부터 너희를 위해 예비된 것을 상속받으라”(마태복음 25,25).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위해 매일 죽어야 한다면, 우리는 이를 기꺼이 선택하고, 성스러운 순교자들이 견뎌냈던 것처럼, 매맞고, 불태워지고, 잘리고, 온갖 고문을 견디는 데 우리 자신을 바칠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사랑하고 숭배해야 할 대상이 하나였으나, 우리에게는 다른 대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나의 수련과 하나의 열망이 있습니다. 본성상 우리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오직 한 가지 목적—그분의 거룩한 계명을 이행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을 위해 이 세상에 보내졌습니다. 반면에 사지를 잘라내는 것, 피를 흘리는 것, 폭군들의 고문은 언제나 어디서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순종 안에서 높은 삶의 진정한 위업을 행할 자격을 얻었으며, 다른 방식으로 순교를 실천합니다: 사지를 잘라내는 대신 우리 자신의 의지를 잘라내고, 피를 흘리는 대신 죄악된 생각과 욕망을 토해내며, 폭군의 고문 대신 마귀들의 공격과 세상의 적대감을 견뎌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헛된 소망이 아니라, 장차 올 세상에서 성스러운 순교자들과 함께 몫을 얻으리라는 확신을 품습니다.

 

146. 지진을 계기로 마지막 날 하늘과 땅이 뒤흔들릴 것을 상기시키며, 이에 상응하는 교훈을 주십니다

146. 지진이 발생한 것을 계기로, 마지막 날 하늘과 땅이 뒤흔들릴 것을 상기시키며 이에 상응하는 교훈을 전한다. [2, 79] 어제 우리 지역에서 발생한 지진 이후, 이 지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보다 더 적절한 주제는 없다. 즉, 지진은 무엇 때문에, 그리고 어떤 목적으로 일어나는 것인가? 헬레네인들 중에는 어떤 이들은 이러쿵저러쿵 말하고, 또 어떤 이들은 달리 말하지만, 우리에게는 신성한 다윗이 하나님에 대해 “땅을 내려다보사 흔들리게 하시며, 산들을 만지시니 연기가 피어오르도다”(시 103:32)라고 말씀하시며 이를 설명해 주십니다. 마치 주인이 노여운 시선을 종에게 돌리면 종이 떨게 되는 것처럼, 만물의 참된 주인이시며 창조주이신 분, 그분 앞에 모든 피조물이 종과 여종처럼 서 있을 때, 그분이 우리의 죄로 인해 우리에게 의로운 진노를 보이시기를 원하실 때, 전지전능하신 눈으로 피조물을 엄중히 바라보시며 “그들을 떨게 하시고”, 우리가 분노를 자초한 종들처럼 두려움에 떨며 경외하여, 절제하며 그분의 계명을 지키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 보라, 형제들아, 그분의 권능이 얼마나 무서운가! 그분의 분노의 발현과 그분의 진노의 격렬함이 이토록 큰데! 만약 현재가 이렇고 이 정도라면, 만물이 끝나는 때의 미래는 과연 어떠하겠는가? 그분께서 친히 위협하시며 말씀하시기를 “내가 하늘과 땅을 한 번 더 뒤흔들리라”(학개 2:7)고 하시며, 그 일이 얼마나 비범한지를 보여주셨다. 땅이 태초부터 죽은 자들을 모두 내어줄 때, 하늘이 두루마리처럼 말리고, 별들이 떨어지며, 천체들이 변하고, 대천사의 나팔 소리가 땅에 사는 모든 사람 위에 울려 퍼질 때, 우리 하나님께서 친히 명백히 오실 때, 수천 수만, 무수한 천사들과 대천사들, 그리고 그분 앞에서 행진하는 지극히 높은 권세들과 함께 오실 때, 보좌들이 세워지고 심판의 자리가 마련되며, 부패할 수 없는 재판장이시자 주님께서 우리가 겪어 온 모든 숨겨진 일들을 드러내실 때, 이 모든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이루어진 후, 의로운 자들을 천국과 영생으로 부르시고, 죄인들을 영원한 불길과 칠흑 같은 어둠, 끔찍한 지옥의 심연, 우울한 타르타로, 잠들지 않는 벌레들에게, 이를 갈며 겪는 고통과 그 밖의 모든 끔찍한 고문으로 보내질 때, 형제들아, 누가 이 모든 것을 견딜 수 있겠는가? 누가 그런 공포와 공포를 참아낼 수 있겠는가! 누가 이 압도적이고 광란에 빠지게 하는 사건 앞에서 버틸 수 있겠는가! 하늘이 찢어지고, 땅이 흔들리며, 수많은 천사들과 구름 위를 타고 온 온 땅을 심판하러 오시는 주님, 곧 하나님께서 오시는 것을 보는 것!!! – 그러나 이 기다려온 일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있습니다: 심판자가 문 앞에 계십니다! – 바로 신랑이십니다! 나가서 맞이하십시오! – 그러나 우리가 순결의 밝은 등불과 자비와 사랑의 기름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면, 우리에게는 복이 있도다; 우리는 신랑을 기쁘게 맞이하고 그분의 궁전에 들어갈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그 문 앞에서 쫓겨날 것이니, 그 문은 우리의 노크에도 열리지 않을 것이며, 우리는 악하게 행하고, 졸고, 잠들며, 준비되지 않은 자들로 드러날 것입니다. – 그러니, 이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무심함의 잠에 빠져 있는 자들은 깨어나고, 낙담으로 기진맥진한 자들은 일어나며, 부끄러운 생각에 취한 자들은 정신을 차리고, 부적절한 욕망으로 더럽혀진 영혼을 정화하며, 양면성과 변덕, 육욕으로 흔들리는 마음을 굳건한 믿음으로 굳건히 세우자. 그러니 우리는 선한 삶을 살아가고, 이미 밝은 자들은 더욱 밝게 빛나며, 이미 깨끗한 자들은 더욱 깨끗해지고, 이미 열심인 자들은 더욱 열정을 불태우며, 이미 덕이 있는 자들은 선행을 더욱 사랑하고, 이미 겸손하고 지혜로운 자들은 더욱 겸손하고 지혜로워지며, 이미 순종하는 자들은 더욱 순종하게 되리라; 모든 선한 일을 행하고 모든 계명을 지키며, 우리 영혼의 신랑이 계신 궁전에 들어갈 자격이 되어 끝없는 기쁨을 누리도록 합시다.

 

147. 우리는 모든 덕행에서 더욱더 번창할 것이며, 열심을 내고 모든 악을 피하며, 성... 선조들의 본을 따라 천사들의 공동생활의 위업으로 자신을 단장하고, 위대한 약속을 바라며

147. 우리는 모든 덕행에서 점점 더 큰 성과를 거두며, 열심을 다하고 모든 악을 피하며, 천사들의 공동체 생활의 위업으로 자신을 단장하고, 성스러운 선조들의 본을 따르며 위대한 약속을 기대하며 나아가리라. [2, 80] 우리가 이미 이룬 위업을 현재의 행실로 인해 부끄럽게 만들지 말자; 마치 이제 막 시작에 불과한 것처럼, 모든 의무와 모든 덕을 열성적으로 이행하며, 빛을 빛으로 받아들이고 영광에서 영광으로 올라가자. 이는 여러분이 모든 면에서 선한 행실을 보일 때, 곧 겸손의 옷을 입고, 순종으로 단장하며, 실천적인 사랑과 온유함을 나타내고, 제멋대로와 자기만족을 피할 때, 그것들로부터 죽음과 교활함, 우월욕, 그리고 허영심이 비롯되며, 그 안에는 신속한 파멸이 도사리고 있고, 그로 인해 태초부터 지금까지 이 순종의 전장에서 넘어진 모든 이들이 쓰러졌습니다. 이제, 이미 온갖 가시와 쭉정이, 가짜 씨앗으로부터 정화된 자들로서, 열매를 풍성히 맺고 새로운 삶을 보여 주십시오. 넘어진 자들의 헛된 생각에서 비롯된 어떤 것도 그 삶에 끼워 넣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도 똑같은 고통을 겪게 될 것입니다. 모두 진실하고 순수하십시오. 모욕과 굴욕, 욕설을 기꺼이 참아내십시오. 모두 선을 위한 투쟁에서 굳건함과 절제, 그리고 끈기를 보여 주십시오. 이는 순종 속에서의 삶의 순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를 견뎌낸 모든 이는 의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오르며 시련과 재난을 겪은 자들로서, 매일 일어나는 모든 일을 용감하게 견디고, 매일 일어나는 일들을 용감하게 견뎌내고, 우리 조상들이 살았던 그 참으로 황금 같은 삶을 따라가십시오. 그곳에서는 불순종, 교만, 반항, 건방짐, 모욕, 혼란을 만나지 않을 것이며,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 평온을 누리는 평화로운 천사의 상태가 지배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제가 말하는 것이 참된 선이라는 것을 아십니다. 선이라면 분명 사랑스러운 것이며, 사랑스러운 것이라면, 우리도 그것을 사랑하고, 갈망하며, 얻기 위해 노력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148. 선은 우리에게 뿌리내리기 어렵지만, 악은 더 쉽게 받아들여진다

148. 1) 선은 우리에게 뿌리내리기 어렵지만, 악은 더 쉽게 받아들여진다. – 2) 선한 길은 산을 오르는 것과 같고, 죄악의 길은 산에서 내려오는 것과 같다. – 3) 우리는 높은 곳을 바라보아야 하며, 세속적인 생각으로 내려가서는 안 된다. – 4) 우리에게는 각기 다른 은사가 있고, 생각도 제각각이지만, 우리는 열심과 수고에 따라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 5) 온유한 마음으로 온갖 결핍과 불편, 고생과 슬픔을 견뎌내자. 우리가 바로 이를 위해 나섰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구원으로 이끄는 확실한 길이다. [2, 31]

5. 보통은 누군가 죄에 대해 말할 때, 한두 번만 언급해도 듣는 이들을 악한 쪽으로 이끌게 마련이다. 반면 선에 관해서는, 구원에 이르는 말을 여러 번 해도 겨우 누군가의 관심과 호감을 끌 수 있을 뿐이다. 선한 것이 인간의 본성에 스며들기는 이토록 어렵지만, 반대로 악한 것은 인간에게 매우 쉽게 받아들여진다.

6. 선한 길을 걷는 것은 마치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 여기에는 얼마나 많은 수고와 불편, 그리고 어려움이 따르는가? 반대로 죄악의 길은 마치 산에서 내려오는 것과 같다. 쉽고, 걸음이 빨라 장애물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선한 길에서는 특별한 세심함과 지도, 그리고 주의가 필요하다.

7. 우리가 내려가지 않고 올라가기를 원한다면, 여기서는 세속적이고 썩어 없어질 것은 아무것도 염두에 두어서는 안 되며, 오직 하늘에 속하고 영원한 것만을 생각해야 한다.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자가 아래를 내려다보면 일종의 어둠이 짙어지듯이, 덕의 길을 따라 올라가면서 세상의 쾌락에 주의를 기울이는 자의 영혼의 눈도 어두워집니다. 우리는 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주님께서 계시고, 그곳에 우리의 보화와 영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르는 도중 기력을 잃지 말고, 오르는 길이 험준함을 보고 낙담하지 맙시다. 우리 스스로는 끝까지 도달할 힘이 없으나, 하나님의 도움과 그분의 중보가 가까이 있습니다.

8. 우리는 이 길에 들어섰고 성공하였으며, 우리 각자는 자신의 열정과 수고에 따라 이제 이러저러한 덕의 단계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육체의 외모보다 마음의 성향에서 서로 더 많이 다릅니다. 어떤 이는 겸손과 순종을 더 뜨겁게 사랑하고, 어떤 이는 덜 뜨겁게 사랑하며; 혹은 어떤 이는 이웃을 사랑하는 은사로 두드러지고, 다른 이는 많은 이들을 정성껏 돌보는 일, 혹은 수공예적인 순종, 밭일이나 집안일, 또는 필요를 충족시키는 일—예를 들어, 재무 담당자, 식량 관리인, 식당 담당자, 구두 수선공, 재단사 등—에서 두각을 나타냅니다. 우리 가운데 누구든지 주님의 길을 걷고 있으며, 이 길은 누구에게나 썩지 않는 면류관으로 이끕니다.

9. 우리는 인내와 겸손으로 수고와 땀, 일의 고단함, 금식 중의 깨어 있음, 시편 찬양은 물론 추위와 허술한 옷과 신발, 그 밖의 불편함까지 모두 견뎌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증인이시니, 제가 이 일에 무관심하지 않고, 여러분을 안타까워하며, 여러분과 함께 아파하며, 제게 있는 모든 힘을 다해 여러분 모두에게 평안을 드리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토록 많은 사람을 입히고, 신발을 신기고, 안식을 주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 어쨌든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위해 굶주리고, 목마르고, 벌거벗고, 가난하게 살기 위함이니, 바로 그 사랑으로 인해 신성한 사도도 굶주림과 목마름, 추위와 벌거벗음, 그리고 그 밖의 결핍 속에서 살았습니다(고린도후서 11:27); 그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도 “양가죽과 염소 가죽을 입고, 궁핍하고, 슬픔에 잠기고, 학대받으며…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속의 깊은 곳에서 방황했다”(히브리서 11:37, 38). 그들이 그와 같았는데, 우리가 그들과 달리 살면서 그들과 같은 영광을 누릴 수 있겠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그러나 누구든지 열거된 고난 중 어느 하나에 처해 있음을 깨닫는다면, 성도의 몫에 동참하게 된 것을 기뻐해야 한다. 모든 사람은 모든 것을 이렇게 바라보아야 하며, 불평이나 비난 없이, 하나님께서 관리자들을 통해 주신 것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행한다면, 형제들아, 우리는 복이 있을 것이니, 이는 그로 인해 질병과 수고, 결핍과 슬픔이 없는 곳에서 안식을 누릴 자격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149. 원수의 유혹에 굴복하거나 넘어지는 자들을 질책하고, 주님의 도움을 약속하며 그들에게 맞서 싸우도록 설득한다.

149. 원수의 유혹에 굴복하고 넘어지는 자들을 질책하며, 주님의 도움을 약속함으로써 그들에게 맞서도록 설득한다. [2, 82] 게으름이 싹트면, 이를 방치하는 자를 서서히 파멸의 구렁텅이로 끌어들인다. 누군가 자신의 일을 시작하는 데 게을러지기 시작하여, 순종해야 할 때 이를 거역하고 그 수행을 회피할 때, 그때 원수는 그에게 범죄를 저지르도록 부추기는 속삭임과 유혹을 주며, 그는 이에 굴복하여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같은 길로 빠지게 만든다. 아아! 이게 무슨 일인가? – 악마는 어떻게 승리하는가? 우리는 우리의 수호자인 거룩한 천사들을 어떻게 부끄럽게 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대적의 편으로 넘어가, 십자가와 죽음으로 우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신 위대하신 우리 하나님, 선하신 목자를 수치스럽게 하는가? 어떻게 우리가 그분의 얼굴을 뵙겠습니까? 어떻게 그분의 진노를 견딜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불경함에 상응하는 형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 다른 이들은 천국을 차지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앗아가는 자에게 사로잡힙니다. 다른 이들은 순교자의 굳건함을 드러내는데, 우리는 버림받은 자들의 타락에 빠집니다. 다른 이들은 하늘로 높이 올라가는데, 우리는 땅의 깊은 곳으로 내려갑니다. 다른 이들은 마음속에 미덕의 계단을 오르는 것을 품는데, 우리는 파멸의 계단을 내려가는 길을 스스로 마련합니다. 과연 우리는 언제쯤 정신을 차릴 수 없을까? 과연 우리는 깨달음을 얻지 못할까? 아, 간청하노니, 서둘러 일에 매진하고, 위업을 실천하며, 타락으로 이끄는 원인을 피하고 모든 경건하고 고결한 일을 행하며 하나님의 길을 따르자: 생각 없이 순종하고, 수공예에 지칠 줄 모르는 수고를 기울이며, 겸손한 믿음을 가지고, 행하는 것과 생각하는 모든 것을 고해성사에서 털어놓으며, 부도덕한 생각을 즉시 물리치고, 악마가 공격해 올 때 바로 그 순간에 이렇게 말합시다: “내 눈앞에서 물러가라, 사탄아”라고 말해야 한다. 그가 음탕한 쾌락으로 유혹하든, 배교로 부추기든, 나태함으로 이끌든, 조급함을 불러일으키든, 신앙에 대항하여 선동하든 말이다. 그는 언제나 어디서나 매복을 준비하고, 올가미를 치며, 구덩이를 파기 때문이다; 잠들지도 않고, 한가히 지내지도 않으며, 먹을 것도 마실 것도 그 밖의 다른 것도 찾지 않는다. 그에게 단 한 가지 일만 있을 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우리의 영혼을 파멸시키는 것이다. 그에 대항하는 우리의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무기는 하나님의 도움과 중보로 생각을 분별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게을러지지 말고 스스로 타락에 빠지지 않도록 하자. 그가 죄의 힘으로 아무리 강하고, 악으로 유인하는 수단이 아무리 교활하며, 본성이 악랄하고 우리의 파멸을 고안하고 실행하는 자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자.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육신을 취하시고 성육신하신 후, 그는 힘을 잃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렇게 노래한다: “원수의 무기는 끝까지 고갈되었도다”(시 9:7), 왜냐하면 그를 이기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의 머리를 밟을 권세를 주셨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담대히, 그를 힘없는 참새나, 발로 짓밟히는 하찮은 기어다니는 짐승과 동등한 존재로 여길 것이다.

 

150. 우리가 누구이며, 왜 존재하며,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갈 것인지를 명확히 함으로써, 마지막 심판의 판결과 오른편에 선 자들과 왼편에 선 자들의 운명을 묘사하며, 교훈을 이끌어 낸다.

150. 우리가 누구이며, 왜 존재하며,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갈 것인지를 분명히 함으로써, 마지막 심판의 판결과 오른편에 선 자들과 왼편에 선 자들의 운명을 묘사하며, 교훈적인 교훈을 이끌어 낸다. [2, 83] 여러분께 상기시켜 드립니다. 우리가 누구이며, 왜 존재하며,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갈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고, 논하며, 깊이 살펴보도록 합시다. –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그분의 손으로 지으신 작품으로, 그분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되었고, 하늘 아래 존재하는 모든 것 위에 권세를 가진 자들입니다. 기록된 바와 같이, 그분은 “모든 것을 우리 발 아래 복종시키셨다”(시 8:7)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성상 천사들이 첫 번째인 것처럼, 그 다음 두 번째입니다. – 우리가 왜 존재하는가? –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며, 천사들처럼 그분의 모든 계명을 충실히 이행함으로써 그분의 권능을 영화롭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천사들보다 조금 못 미치게” (시 8:6) 지어졌으며, 썩어질 몸을 벗고 썩지 않을 몸을 입을 때에는 더욱 그러할 것이기 때문이다. –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 조상의 무분별함과 불순종, 그리고 우리 후손들에게까지 이어진 쾌락 추구로 인해 추방된 곳에 있다: 이에 대해 우리는 울고 통곡하며, 슬퍼하고 신음해야 마땅하니, 우리가 얼마나 웅장한 거처에서, 얼마나 천사 같은 거처에서, 얼마나 천국적인 복된 위안에서 쫓겨났는지를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 저 세상, 삼중으로 복된 천사의 거처, 빛나는 나라, 해가 지지 않는 생명으로 갈 것이다. 이는 두려운 마지막 심판의 날, 만물의 재판장이시며 하나님이신 분이 영광의 보좌에 앉아 눈 깜짝할 사이에 모든 것을 심판하시고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계명을 지킨 자들에게는 우편에 서게 하시고,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영원한 복을 누리게 하시며, 천국을 주시겠고, 그의 말씀을 듣지 않고 부주의와 쾌락 추구로 인해 악을 행한 자들—음행, 간음, 도둑질, 시기, 살인, 방탕, 부정한 행위, 배교, 교만, 허영 및 그 밖의 온갖 악을 저지른 자들에게는 영원한 고통, 즉 칠흑 같은 불길, 독이 있는 구더기, 어둠을 가리는 암흑, 끝없는 타르타로스로 내던지실 것이니, 각자에게는 그 자신의 죄에 따라 심판이 내려질 것이다. 누구든지 지혜로 본성을 잘 다스려, 모든 을 용감하게 견디고, 필요하다면 선을 위해 죽기까지 한다면, 그 사람은 그날 해처럼 빛나며, 성도들의 무리에 속하고, 천사들의 환호 속에, 순교자들의 기쁨 속에,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즐거움 속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순간적인 육체의 쾌락과 온화한 성품, 덧없고 하찮은 즐거움을 좇아 그곳에서 비참한 처지에 빠지게 되어, 무자비한 배척과 돌이킬 수 없는 끝없는 고통으로 내몰려, 풀 수 없는 족쇄 속에서, 그곳에서는 오직 “아아, 비통하도다!”라는 소리만 들릴 뿐, 구원도, 변화도, 자비도 없으니, 하나님께로부터도, 천사들에게서도, 성자들에게서도 영원토록 없을 것이다! 이 일에 대하여, 나의 자녀들아, 모든 이가 깊이 생각하기를 바라노니: 잘 나아가는 자와 비틀거리는 자, 영이 강한 자와 소심한 자, 선두에 선 자와 뒤따르는 자, 미지근한 자와 차가운 자, 덕이 풍성한 자와 부족한 자, 그리고 모든 사람, 모든 족속, 모든 언어를 가진 자들. 우리도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올바른 결심을 세우며, 모든 정욕을 전염병처럼 물리치고, 활기차고 긴장감 있게 하나님의 길을 걸어가자.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우리 손을 들어 올리며, 매일 다음과 같은 고난을 기꺼이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나타내자: 피를 흘리고, 사지를 잘리고, 살을 깎이고, 뼈가 부서지는 것, 단지 어떤 음식이나 달콤한 음료, 고운 옷, 잘 만들어진 신발, 존귀한 지위, 그리고 말하기조차 우스운 그 밖의 많은 것들을 박탈당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곳에서 우리 지위에 걸맞게 겸손과 순종 속에서 선하게 살며, 서원한 것을 충실히 지키고, 기쁨으로 이 세상의 감옥을 떠나 담대히 하나님의 면전 앞에 나아가,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사는 자들에게 약속된 복을 받을 것이라는 아름다운 소망을 품기 위함이다.

 

151. 세속적인 경기장에서 경기에 대비하는 방식에서 영적이며 보이지 않는 전쟁에서 싸우는 이들을 위한 교훈을 도출하기

151. 세속적인 경기장에서 경기에 대비하는 방식에서, 영적이고 보이지 않는 전쟁에서 싸우는 이들에게도 교훈을 이끌어 내자. [2, 84] 세속적인 경기장에서 경기에 대비하는 모습을 살펴보자. 그들의 본보기를 통해 우리도 우리의 영적 투쟁을 위해 무언가를 배울 수 있지 않을까? 대중이 모이는 경기 시즌이 다가오면, 대개는 그보다 훨씬 전부터 경기에 출전할 선수들은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고, 경기장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미리 연습하며, 앞으로 있을 모든 상황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하고, 성공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음식은 피하는 적절한 식단을 유지하며, 이 시기에는 다가올 경기에 대해, 어떻게 등장하고 첫 발을 내디딜지, 그 후 어디로 향할지, 누가 누구를 공격할지에 대한 이야기 외에는 다른 대화가 오가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이토록 많은 일과 걱정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승리를 통해 덧없는 월계관을 얻고 정해진 상을 받기 위해서이며, 이와 더불어 패배자들을 망신시키며 관중과 친구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만약 이들이 사전에 이토록 많은 수고와 논의를 거친다면, 여러분과 우리가 어떤 위업을 이루어야 하며, 어떤 세심함과 신중함, 그리고 이것저것에 대한 끊임없는 걱정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왜냐하면 우리의 원수이자 적이며 대적은 경험이 부족하지도, 무지하지도, 부주의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 맞은편에 서서, 그 역시 우리를 상대로 어떤 함정을 놓을지, 어떻게 접근할지, 어떻게 공격할지, 어떻게 막아낼지, 어떻게 쏴서 가련한 수도사를 땅에 쓰러뜨릴지 꽤나 깊이 고민하는 듯합니다. 그러니 우리 앞에 놓인 과업이 얼마나 큰 것입니까? 우리가 얼마나 큰 염려와 정성을 기울여야 하겠는가? 우리가 두 손을 들어 하늘을 향해 “주님, 당신의 거룩한 거처에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시 32:14)라고 부르짖어야 하지 않겠는가? “당신의 능력을 일으키소서”,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소서”(시 79:3)라고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참으로 그러합니다. 그리고 이는 겸손과 상한 마음, 소망과 용기, 진실한 믿음과 검증된 순종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덕을 실천하는 이를 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가 “내 마음이 주님을 의지하니, 주님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내 육체가 번영하리라” (시 27:7). 주님께서 도우실 때, 누가 대적할 수 있겠는가? 누가 그를 무너뜨릴 힘이 있겠는가? 아무도 없다. 수천, 수만 명의 원수가 있다 해도, 그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주님의 이름으로 그들을 물리치고 쫓아낼 것이다. “그러므로 용기를 내라.”

 

152. 농부, 수영가, 상인, 여행자의 예를 들어 영적 복을 얻기 위해 열심을 내도록 격려한다

152. 농부, 수영꾼, 상인, 여행자의 예를 들어 영적 복을 얻기 위해 열심을 내도록 독려하며, 원수로부터 오는 방해들을 상기시킨 뒤, 우리가 그분의 도우심을 받을 자격이 있음을 증명한다면, 우리의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마련하시고 지금도 마련해 주시는 주 구세주의 도움으로 성공할 것이라는 희망을 심어준다. [2, 85] 농부, 항해사, 상인, 여행자, 이들은 모두 밤낮으로 수고하고, 염려하며, 지치고 기진맥진해지며, 간절히 소망을 품고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며, 결국 이를 이룬다. 그러나 우리의 경작, 우리의 항해, 우리의 무역, 우리의 여행은 동쪽과 서쪽이 다른 것처럼, 또는 차라리 하늘과 땅이 다른 것처럼 그것들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니 우리의 수고와 업적, 땀은 그보다 얼마나 더 뛰어나고, 더 열성적이며, 더 쉬지 않고 이어져야 하겠는가? – 이를 위해 성 다윗도 놀라움에 찬 목소리로 외칩니다.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것이며, 누가 그분의 거룩한 곳에 설 것인가?”(시 23,3). 그리고 또 “누가 내게 비둘기 같은 날개를 주리이까? 그리하면 나는 날아가 쉬리라”(시 54,7). 우리도 수고하며, 음식은 적게 먹고, 잠도 적게 자며, 예배에 참석하고, 방에서 기도문을 외우고, 읽고, 듣고, 노래하고, 수공예를 하며, 겸손히 순종하고, 모든 것을 참아냅니다. 그런데도 왜 우리가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고 성공을 보지 못하는 것일까요? – 바로 우리의 구원을 가로막는, 우리의 원수인 마귀가 놓은 장애물 때문이요. 그는 세상이 시작된 날부터 지금까지 우리 민족을 대적하여, 자만심 때문에 쫓겨난 바로 그 하늘에 우리가 들어가지 못하게 막고 있습니다. 그러나 형제들아, 낙심하지 말고 우리 삶의 어려움 앞에서 기운을 잃지 맙시다. – 우리는 하나님을 도우미이자 중보자로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를 땅에서 일으키시고, 비천한 자를 진창에서 높이시는”(시 112:7) 분이시며, 우리 본성의 연약함을 “힘으로 띠를 띠우시는”(시 17:33) 분이시며, 우리의 원수인 유혹자를 이기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적은지를 보고도 낙담하지 맙시다. 신랑이 신부를 사랑하는 것보다도, 부모가 자녀를 아끼는 것보다도, 만물의 주님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돌보시는 마음이 훨씬 더 큽니다. 그분은 우리의 구원을 돌보시고, 우리의 선한 행실을 기뻐하시며, 우리 마음의 눈을 열어 주시고, 그분 자신의 빛나는 아름다움과 갈망하는 영광을 보여 주시며, 천사들의 인도하심 아래 우리 마음을 하늘과 하늘에 있는 모든 것을 관조하도록 높이 들어 올리시며, 신성한 섭리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보이지 않는 원수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더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 그분은 우리 죄인들을 향한 사랑이 그토록 크셔서, 아버지의 품을 떠나지 않으시면서도 하늘을 낮추시고, 겸손히 우리에게 내려오시어 만물의 주님이시면서도 사람이 되셨습니다. 모든 것을 말씀으로 지탱하시며, 지극히 찬양받고 높이 들리신 그분은 모든 것을 풍요롭게 하시면서도 가난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아기가 되셨습니다. 이 신비의 정점은, 그분께서 끔찍한 수난 끝에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우리를 뱀의 손아귀에서 구원해 내시고, 기어다니는 벌레처럼 그를 짓밟을 힘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어떤 아버지가 아들을, 어머니가 딸을, 남편이 아내를, 친구가 서로를 그분처럼 이토록 사랑했을까요?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그토록 많은 고통을 견디시고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우리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은혜는 말로 다 표현할 수도, 이성으로 헤아릴 수도 없습니다.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 그토록 많은 고통을 겪으셨는데, 어떻게 그분이 매일 매시간 우리의 도우미가 되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가 자신의 정욕에 휩쓸려 그분에게서 떠나지 않는다면, 그분은 우리의 중보자이자 피난처가 되실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주님께 충실하도록 힘쓰며, 온갖 고행을 감수하고, 모든 슬픔을 용감하게 견디며, 그분이 명하신 모든 것을 실천합시다. 그러면 그분은 우리가 원수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게 하시고, 우리가 소망하는 결말을 방해받지 않고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

 

153. 주님을 위해 일하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를 가르치며, 형제들도 이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수도원에 들어왔음을 상기시키며, 주님의 말씀으로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준다: “구하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153. 주님을 위해 일하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를 가르쳐 주며, 형제들도 이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수도원에 들어왔음을 상기시키며, 주님의 말씀으로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준다: “구하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겉보기에는 세속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정신은 영적인 수도원의 순명 안에서 겸손히 수고하며. [2, 85] 살아 계신 하느님을 경건함과 진리 안에서 섬기며, 영혼과 몸을 정화하고, 온갖 죄로부터 지키며, 장래의 복을 갈망하고, 항상 세상에서 하늘로 옮겨가며, 어떤 정욕에도 사로잡히지 않은 영혼을 지니는 것, 마치 마귀의 모든 그물을 피해 날아다니며 지극히 높은 곳에서 맴도는 새와 같은 것보다 더 아름답고 복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 사람은 언제나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달콤함을 느끼고 감탄하며, 이미 이곳에서 미래의 온전한 행복의 첫맛을 맛보기 시작합니다. – 여러분도 바로 이를 위해 세상에서 나와 이곳에 왔고, 이를 위해 세상과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버렸으며, 이를 위해 나그네와 이방인이 되어 고향과 가문, 친족으로부터 멀어졌고, 이를 위해 외모와 생활 방식이 달라졌으며, 세상의 모든 근심과 걱정과 작별을 고했으니: 그러니 이 선한 과업을 기꺼이 받아들여, 너희 영혼이 갈망하는 것을 찾고 얻으며, 추구하고 성취하라.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구하는 자는 얻고, 두드리는 자에게는 열릴 것이라”(마태복음 7,8) 하셨기 때문이다. 다른 어떤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른 어떤 일에도 신경 쓰지 말고 찾으라. 비록 여러분이 평소의 순종에 종사하고 있지만, 여러분에게 있어 이는 세속적이거나 일상적인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정욕이나 자신의 뜻, 육신의 욕망을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과 계명에 따라 거룩한 영적 형제애를 위해, 무엇보다도 온전히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여러분의 수고를 제물과 번제물로 받아 주십니다. 형제 여러분, 하늘의 예루살렘으로 이끄는 이 천사 같은 삶의 방식을 택하신 여러분은 복되십니다. 그곳의 공동 창조자이자 건축자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은혜로 굳건히 서며, 통회, 순종, 겸손, 모든 일에 대한 준비, 불평 없음, 깨어 있음, 절제, 그리고 기도로 미덕을 뽐내며 잘 나아가십시오.

 

154. 원장직의 짐이 얼마나 무거운지, 특히 각자에 대한 책임을 생각할 때 그 무게가 얼마나 큰지를 떠올리며, 도움을 청합니다. 무엇으로? 수도 생활에서의 성공을 통해

154. 1) 원장직의 짐이 얼마나 무거운지, 특히 각자에 대한 책임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함을 떠올리며, 그에게 도움을 청한다. 무엇으로? 수도 생활에서의 성공을 통해. – 2) 그 후, 무엇을 ‘성공’으로 여겨야 하는지 정의한다. – 3) 마지막으로, 그들이 성공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권하며, 성공하는 이들과 성공하지 못하는 이들의 징후를 지적한다. [2, 87]

1. 여러분은 제 겸손한 영혼이 여러분을 향한 제 원장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어쩌면 여러분은 제가 여러분에게 주는 소소한 가르침으로 자만하고, 그것 하나만으로 원장으로서의 의무를 충분히 다했다고 희망한다고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실로 말씀드리건대, 저는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불안 속에서 제 비참한 삶의 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마땅한 삶에 대해 말로만 전해주는 것에 안주하지 않고, 여러분 안에서 삶의 진정한 본질을 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가운데로 들어설 때면, 매일 여러분의 행동, 서로를 대하는 방식, 태도, 질문하고 대답하는 모습을 유심히 살핍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과 눈빛, 표정을 통해 각자의 마음가짐이 어떠한지 알아차립니다. 누구에게서 올바른 마음을 발견하면 기뻐하고 위로를 받으며, 희망으로 용기를 얻습니다. 반면 누구에게서 그 반대의 모습을 발견하면 슬퍼하고 애통해하며 한숨을 쉬는데, 이는 분명 그곳에 정욕이 힘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달리 할 수 없습니다. 과연 제가 여러분 각자에 대해 보고를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 이런 생각을 하면, 누가 무심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눈물을 흘리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으며, 떨지 않겠습니까? – 사람이 하나님, 곧 씻을 수 없는 심판자 앞에 서서 온 양떼에 대해 보고를 드리는 것은 위대하고도 두려운 일입니다. 그 양떼가 순결함과 흠 없음 속에서 지켜졌는지, 하나님의 모든 의에 따라, 그리고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모든 마땅한 일들을 올바르게 행했는지 말입니다. – 내가 이 말을 한 것은, 너희가 내 영혼의 슬픔을 알고 나를 불쌍히 여기며 도와주기를 바라기 위함이다. 어떻게 도와줄 것인가? – 너희가 천사와 같은 삶을 더욱더 열심히 추구함으로써이다.

2. 우리는 평신도들과 다르다는 사실에 만족해서는 안 되며, 삶에서 조상들의 발자취를 온전히 따라야 합니다. 또한 우리와 같은 계급에 있는 어떤 이들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에도 만족해서는 안 되며, 가장 온전한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려고 열심이어야 합니다. “부름 받은 자는 많으나 택함 받은 자는 적다”(마태복음 22,14)고 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수도 생활을 한 지 벌써 몇 년이나 되었다’고 생각하며 시간의 길이로 자신의 성취를 측정해서는 안 되며, 그 시간의 길이에 비해 우리의 미덕의 수와 수준이 그에 상응하는지 살펴야 한다. – 또한 또다시 ‘어느새 하루가 지났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여서는 안 되며, 이날에도 영혼이 내세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늘의 보물창고에 어떤 선한 행실을 쌓아 두었는지, 그리고 영혼을 정화하고 우리를 괴롭히는 정욕을 이겨내는 데 조금이라도 더 기여했는지를 살펴야 한다. 이처럼 수도사는 진정한 수도사가 되는 경지에 이르게 되는데, 바로 정욕의 어둠과 악한 습관의 속박에서 벗어나, 이를 통해 영혼과 마음이 주님께 자유롭게 나아가게 하고, 오직 그분만을 향한 사랑으로 그분께 날아오르며, 오직 그분과의 교제를 갈망하게 하는 것이다.

3. 그러니 여러분 각자는 스스로를 살펴보아, 자신 안에 이 추구하는 바가 있는지, 아니면 여전히 정욕의 노예이자 죄의 포로, 생각의 사로잡힌 자로 남아 있는지, – 그로 인해 말과 행실, 그리고 생각에서 올바르지 못한 모습을 보이며, 불순종과 교만, 불평, 다툼, 자기합리화, 제멋대로인 태도, 그리고 모든 악 중에서 가장 큰 불신으로 드러나는지 살펴보라. 그러나 그가 이와 같은 반면, 추구하는 바를 향해 나아가며 정욕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자에게는 온갖 선한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드러나니, 온유, 평화, 사랑, 연민, 불평 없음, 겸손, 시기하지 않음, 감사, 인내, 기도, 찬송, 기도, 회개, 눈물 흘림,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칭찬받을 만한 행실과 마음가짐; 그는 우두머리 자리를 추구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피하며, – 자기 마음에 드는 일을 원하지 않고, 아버지가 정하신 대로 자신의 뜻을 꺾고, 부엌일이든, 텃밭 일이든, 밭일이든, 그 밖의 유사한 일이든, – 옷, 신발, 음식, 음료 때문에 다투지 않고, 비록 누더기를 입고 추위에 떨며 굶주리더라도 모든 것을 인내로 견디며, 오직 한 가지, 곧 저 세상에서의 안식을 얻기만을 바라봅니다.

 

155. 용맹한 시민이 왕에게 상을 받으러 부름을 받아 기뻐하듯이, 우리 형제 하리톤도 이곳에서 주님께 부르심을 받아, 수녀원에서 이룬 공로와 수고에 대한 보상으로 이제 형언할 수 없는 천상의 복을 누리며 기뻐하고 있다.

155. 1) 용맹한 시민이 왕에게 상을 받으러 부름을 받아 기뻐하듯이, 우리 형제 하리톤도 이곳에서 주님께 부르심을 받아, 이제 그가 겪은 수고와 수도원에서의 노고에 대한 형언할 수 없는 하늘의 복을 누리며 기뻐하고 있다 . – 2) 이 일곱 가지를 생각하며, 우리 중 누가 이와 같은 일에 용기를 얻지 않겠는가? 마귀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지 말자. 마귀는 대개 자신의 유혹으로 우리를 선한 일에서 멀어지게 하거나, 우리가 행하는 선행을 선하지 않은 생각과 감정으로 어둡게 만들곤 하니, 우리가 어떤 순종의 길을 걷든 간에 말이다. – 3) 또한 미덕은 이 현세에서도 보상을 받으며, 때로는 눈에 보이는 형태로, 언제나 보이지 않는 형태로 주어지는데, 이는 미래의 영광과 행복에 대한 예고이자 미리 맛보는 것임을 잊지 말자. [2, 88]

4. 마치 일상생활에서 중대한 범죄로 기소되어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이 “때가 되었다. 나가라”는 말을 들을 때 두려움과 전율에 사로잡히듯이, 죄인에게도 이 세상에서 다른 삶으로 옮겨간다는 소식은 대개 두렵고 전율스러운 일이다. 반대로, 자신이 행한 용맹한 공로로 왕에게서 상과 면류관을 기대하던 사람이, 그것을 받도록 부르는 목소리를 들을 때 기쁨으로 환호하듯이, 의인은 죽음의 천사가 이곳에서 떠나게 될 것을 알릴 때, 선한 보상을 받기 위해 떠난다는 확신을 가지고 기뻐합니다. –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우리 형제 카리톤에 대해 감히 말할 수 있는 바입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에 걸맞게 기쁨과 즐거움으로 육신을 떠나 안식의 장소로 갔습니다. – 형제들아, 이것이야말로 올바르게 수련하는 길이며, 본성을 이겨내는 데 열매를 맺는 길이며, 인내로 수련 생활을 견디는 데 유익한 길이며,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순종하며 싸움을 이어가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가. 왜냐하면 불과 몇 년, 아니 차라리 거의 하루(무한한 삶에 비하면 이 세상의 삶이 무엇이겠는가?) 만에 우리 형제에게 예상치 못한 부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영광, 비할 데 없는 기쁨, 끝없는 왕국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그는 기뻐하며 환호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복을 얻기 위해 이곳에서 겪은 수고에 대해 슬픔을 전혀 느끼지 않고, 경건한 이들의 합창단 속, 의인들의 장막 속, 순교자들의 궁정 속, 모든 성도의 어머니이신 하늘의 예루살렘에 들어가, 형언할 수 없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복들을 관조하고 있습니다: 끊임없는 빛, 불멸의 생명, 형언할 수 없는 행복.

5. 이를 생각하며, 아직 경주의 장에 있는 우리가 어떻게 용기를 내지 않을 수 있겠으며, 대담한 희망으로 용기를 내지 않고, 열정을 품지 않고, 마음이 불타오르지 않고, 정신이 고양되지 않고, 마음가짐을 세상에서 하늘로 돌리지 않고,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모든 것을 행하고 모든 것을 견디겠다고 서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단순히 금식과 기도가 아니라, 맨땅에서 자는 것만이 아니라, 추위와 더위만이 아니라, 수고와 피로가 아니라, 굴욕과 모욕만이 아니라; 필요하다면 피를 흘리고, 사지를 잘라내고, 살을 긁어내고, 뼈를 부수는 것까지 – 오직 추구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 형제들아, 그렇게 지혜롭게 생각하고, 지혜롭게 행동하려는 마음가짐은 참으로 훌륭합니다. 마귀는 포식자라, 언제나 우리 주변을 맴돌며, 우리 마음속의 아름다운 생각을 빼앗고, 헛된 세속적인 생각으로 유혹하려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에게 현혹되지 않도록 하고, 오히려 매일 갈망하며, 찬송으로 찬양하고, 기도로 표현되는 하나님의 약속들을 마음에 간직하며, 하루하루, 일주일씩, 한 달씩, 해마다 지내면서, 우리의 모든 행실을 하나님께 온전히 깨끗하고, 모두 평화롭고, 모두 사랑이 넘치며, 교만이나 허영, 또는 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마음으로 더럽혀지지 않도록 합시다. 밭을 갈든, 땅을 파든, 요리를 하든, 목공을 하든, 경비를 서든, 지하실 일을 하든, 정원 가꾸기를 하든, 필사하든, 혹은 바느질, 바구니 짜기 등 어떤 수공예에 종사하든, 또는 다른 어떤 일을 하든, 우리의 일이 하나님 친히 완전하다고 인정하시고 영원한 상을 받기 위해 하늘의 보물창고에 간직되도록 노력합시다. 그러나 불평과 건방짐, 허영, 혼란, 그리고 반목으로 자신의 일을 망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심지어 인간답지 않은, 즉 참된 인간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참된 사람은 영원히 기억될 욥과 같이 위대한 존재이며, 그는 “진실하고 경건하며, 모든 악한 일을 멀리하는 자”이기 때문이다(욥기 1:8).

6. 또한 모든 사람은 세심하고 덕이 있는 사람이 어떻게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고, 모든 이에게 존경과 명예를 얻는지, 단지 형제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그에 대해 듣는 외부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러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덕은 비록 은밀한 곳에 머물러 있고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 행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 본성상 반드시 드러나게 마련이며, 그에 대한 소문은 주님의 말씀대로 “산 위에 있는 성은 숨겨질 수 없다”(마태복음 5:14)고 하신 대로 온 세상에 퍼지고 전파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한 일들에 있어 조금만 인내하고, 조금만 힘쓰면, 죽음의 순간뿐만 아니라 그 이전, 곧 우리 안에 무욕이 확고해질 때 안식의 때가 올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순종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죽인 영혼은, 성부들의 말씀에 따라 안식을 얻었으며, 이미 이 세상에서부터 장차 누릴 복을 맛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156. 달마트 수도원에서는 다른 어떤 이유도 아닌, 오직 겸손 하나만을 이유로 새로운 원장을 선출했다.

156. 달마트 수도원에 새로운 원장이 선출되었는데, 다른 어떤 이유 때문이 아니라 오직 겸손함 하나 때문이었다. 이것이 바로 겸손의 가치이다. 겸손은 모든 선을 그 안에 담고 간직하며, 명성을 추구하지 않음에도 저절로 알려지고 칭송받게 된다. [2, 89] 지금 여러분께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해 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주교님의 명에 따라, 저는 달마트 수도원으로 가서 그곳의 새로운 수도원장을 선출해야 했습니다. 그곳에서 수도원의 형제들과 그곳에 모인 수도원장들이 누구를 원하는지 물어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한목소리로 아바 일라리온을 지목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의 어떤 뛰어난 점 때문일까요? 그가 박식해서도, 말솜씨가 뛰어나서도, 생활 방식으로 유명해서도 아닙니다. 오직 그가 겸손하고 지혜로우며, 하느님을 사랑하고, 세상의 명예를 추구하지 않으며, 순종으로 자신의 미덕을 감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나이가 더 많은 다른 이가 있었지만, 그가 앞서 언급한 미덕들에서 더 부족했기 때문에 아바 일라리온이 하느님께 더 기쁘시게 여겨지고 형제들을 현명하게 이끌 수 있는 자로 인정받았습니다. – 보십시오, 형제 여러분, 겸손의 선물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요. 이것은 모든 것을 아우르는 미덕으로, 이를 통해 내면의 모든 교만이 꺾이고, 자만심이 쫓겨나며, 명예를 탐하는 마음이 짓밟히고, 제멋대로인 성품이 무너지고, 쾌락을 탐하는 마음이 죽임을 당하며, – 이 모든 것 대신 온유함, 평화, 사랑, 연민, 인내, 지혜가 자리 잡습니다; – 더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온갖 선을 뿜어내는 미덕의 원천이요, 혹은 더 정확히 말해, 불멸의 풍요로움을 맺어내는 하느님께서 심으신 낙원입니다. 그러나 “산 꼭대기에 있는 등불은 숨길 수 없다”(마태복음 5:14)는 주님의 말씀처럼, 이 미덕을 얻은 자도 영원히 은밀함에 머물 수 없다. 비록 그가 세속적인 순서상 마지막에 있을지라도, 비록 땅속에 숨어 있을지라도, 비록 어떤 이들이 시기심에 그를 비방할지라도: 왜냐하면 그곳에서 그는 산 위에서 빛나며 모든 보는 이들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돌리는 빛처럼 더욱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현재의 선택받은 자에게 일어난 일인데, 많은 이들이 겉으로 드러내어 형제들에게 그 선택에 대한 찬성을 표했기 때문이다.

 

157. 사순절이 찾아왔고,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을 모두 질서 있게 정리하였다

157. 1) 금식 기간이 다가왔고, 그는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을 모두 질서 있게 정리했다. 이를 보며 나는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삶의 방식을 꾸준한 습관으로 삼으라. 그렇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 2) 원수는 끊임없이 우리를 파멸시키려 애쓰고 있으니, 우리도 끊임없이 그에게 대항해야 하며, 이를 위한 힘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다. – 3) 원수를 이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주님께서 우리를 초대하시는 바, “나는 온유하고 마음이 겸손하니라”는 말씀을 본받는 것이다. 그분의 모든 지상 생애는 우리를 위한 그분의 겸손의 현장이다. [2, 90]

7. 절제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리고 이를 통해 드러나는 신성한 계명에 따른 행실의 경건함이 얼마나 훌륭한지. 우리는 지난 날들의 소란을 피해, 마치 고요한 정박지처럼 이 거룩한 사순절의 경건한 날들에 들어섰으며, 이제 우리는 성전에서 고요히 지내며, 침묵하고, 평온을 유지하며, 정결을 철저히 지키고, 시편 찬송에서 경건함을 실천하며, 기도에 전념하고, 식탁에서는 다양한 음식이나 과식을 삼가며, 영혼의 구원을 위해 그 밖의 모든 일도 행하고 있습니다: 이제 세속적인 사람들이 우리에게 들어올 수 없고, 우리도 그들에게 나갈 수 없습니다. – 여기서 저는 여러분이 선에 대한 건전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러한 삶의 방식을 영원한 습관으로 삼아, 앞으로도 죄로 이끄는 모든 길에서 멀어지기를 바랍니다. 5일이나 10일 동안만 선한 삶을 살다가, 그 후 선함에 싫증을 내어 사도께서 말씀하신 대로(갈 2,18) 이전에 세운 것을 다시 무너뜨리는 삶을 살지 마십시오. – 형제 여러분, 여러분에게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유혹자의 속삭임에 그렇게 쉽게 휘둘리지 않도록 경계합시다. 그러나 우리가 얻은 덕을 굳건히 지키고자 하며, 선한 행실 속에서 선한 일을 점점 더 많이 실천해 나가기를 원합시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잠시 동안만 선하게 사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평생에 걸쳐 구원의 길을 부단히 지켜나가야 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8. 유혹자도 바로 그러하니, 그는 낮이나 밤이나 우리를 자신의 습격과 우리를 파멸로 이끄는 교활한 매복에서 벗어나게 내버려 두지 않으며, 곳곳에 수많은 그물을 치고, 우리 영혼에 셀 수 없이 많은 화살을 쏘아댑니다: 달콤함의 간지러움, 정욕의 불타오름, 생각과 소망의 동요와 역풍이 마치 어떤 바다 위처럼 우리 마음의 침상을 뒤흔들어, 누구나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게 만듭니다. “주님께서 나를 도우시지 않으셨더라면, 내 영혼이 곧 지옥에 빠졌으리라”(시 93:17); 그러고는 잠시 잠잠해졌다가, 정욕의 고통을 숨기고 허영의 독을 주입하거나, 한편으로는 격한 열정을 누그러뜨린 뒤 다른 한편으로는 시기라는 화살로 찔러대기도 하며, 때로는 사방에서 우리의 겸손을 뒤흔드는 먼지를 일으키기도 한다. 이는 그에게 우리를 파멸시키려는 끝없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 주 하나님을 대적하며, 자기가 교만 때문에 떨어진 바로 그 하늘의 높이로 우리가 올라가는 것을 보고 광란한다. – 그러한 을 이기기 위해서는 얼마나 큰 근심과 끈기, 얼마나 세심한 주의와 얼마나 힘겨운 노력이 필요한가? – “그러나 담대하라,”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요 16:33); 그리고 그분의 승리 이후, 우리는 거룩한 성육신의 힘으로 원수에 대항할 능력을 받았으니, 주님께서 다시 이렇게 외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을 권세와 모든 원수의 세력을 이길 권세를 주노라” (루카 10, 19): 그리하여 우리는 그가 우리에게 쏠아대는 모든 공격과, 온갖 다양한 죄의 유혹을 짓밟을 수 있다.

9.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그를 이기신 분을 본받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분처럼 겸손과 온유함을 입을 때 비로소 그분의 제자가 되는 것이다. 그분께서 친히 말씀하셨듯이, “나에게서 배우라. 나는 온유하고 마음이 겸손하니라”(마태복음 11,29). 그분이 만물의 왕이시며 주님이시며, 본성상 유일하시고 지극히 영광스러우시며 온전하신 분이시면서도 “하나님이시며 아버지이신 분께 순종하사 죽기까지, 곧 십자가의 죽음까지” (피데 2, 8) 겸손을 취하셨다면, 우리 같은 본성상 가난하고 하찮은 자들은 얼마나 더 겸손해져야 그분을 닮을 수 있겠는가? 그분이 하늘을 떠나 땅으로 내려오셨다면, 우리가 그분을 조금이라도 닮기 위해 우리 소유의 모든 것에서 얼마나 멀어져야 하겠는가? 그분이 갓난아기가 되어 젖을 먹으셨고, 기록된 대로 부모에게 순종하며 율법의 모든 것을 지키셨다면, 우리가 그분과 조금이라도 닮은 듯 보이기 위해 악을 버리고 갓난아이처럼 순종하며 수도원장들에게 복종해야 할 정도는 얼마나 될까? 그분이 배고프고 목마르셨으며, 걸어서 다니시며 지치셨다면, 우리가 그분과 동등한 것을 겪고 있다고 여겨지려면, 우리도 얼마나 비슷한 고통을 견뎌야 할까요? 마지막으로, 그분이 모욕과 조롱, 비웃음과 경멸, 배신과 재판, 채찍질과 십자가 처형, 모독과 갈비뼈를 찔림을 당하셨다면, 우리가 그분을 본받는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이와 유사한 일을 얼마나, 어떤 것을 견뎌내야 합니까? 형제들아, 우리는 이 사실을 항상 마음에 새겨야 하며, 그분을 바라보며 끝없이 겸손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을 본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만나면 감사히 받아들이고, 만나지 못하면 바로 그것—굶주림, 목마름, 조롱, 모욕, 굴욕, 궁핍, 옷과 신발, 그리고 그 밖의 모든 면에서 가난함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상승하며, 성장하고 교화되며, 높아지고 초월하여, “그리스도의 충만함에 이르는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158. 수도사들을 칭찬하며, 그들이 세상을 버림으로써 고기 먹는 절기와 같은 쾌락과 위안에서 멀어졌고, 경건함과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름받았음을 말하였다. 그 안에야말로 참된 기쁨과 끊임없는 축제가 있다

158. 1) 수도사들을 칭찬하며, 그들이 세상을 등짐으로써 고기 금식 기간과 같은 쾌락과 위안에서 멀어졌고, 경건함과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름받았으며, 그 안에 진정한 기쁨과 끊임없는 축제가 있다고 했다. – 2) 그들에게 더 이상 생각과 소망으로 그 이집트의 솥들로 돌아가지 말라고 권하며, 우리의 몫이 가장 복된 것임을 확신시켜 준다. – 3) 그 몫을 가진 우리에게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으니, 오직 단 한 가지,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모든 슬픔과 무거운 짐을 기꺼이 견딜 수 있게 해 주시기를 바랄 뿐이다, [2, 91]

10. 지금은 고기 금식 기간으로, 세속적인 날에는 먹고 마시고, 유흥과 놀이, 온갖 즐거움이 있는 때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그런 것이 없다고 해서 스스로를 비탄에 빠뜨려야 할까? 아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우리를 진흙탕과 심연에서처럼 그런 삶에서 건져내시고, 현재의 거룩한 소명으로 인도해 주셨음을 감사드리자. – 경건함과 진리 안에서 그분을 섬기게 하셨으니, 그런 자들을 비웃거나, 차라리 그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자. 그들은 이 하찮은 위안들에 휩쓸려, 말로 다 할 수 없는 하늘의 기쁨을 스스로 박탈하고 있으니 말이다. – “오라” 형제들아, “주님을 기뻐하며, 우리의 구주이신 하나님께 환호하자. 그분 앞에 나아가 고백하며, 시편으로 그분께 찬양하자” (시 94:1-2). 이것이야말로 선한 잔치요, 칭찬받을 만한 즐거움이요, 기쁜 축제입니다! 우리도 한두 번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의 집에서 이렇게 축제하며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기쁨은 저 세상에서 누릴 가장 복된 몫의 선구자이자 그 예고자입니다. “나야말로”라고 신성한 다윗이 말합니다. “주의 면전에 의로움을 나타내리니, 주의 영광을 뵈는 그날에 내가 만족하리이다” (시 16:15).

11. 그러니 부디, 여러분, 우리의 마음을 마치 이집트처럼 공동 생활의 관습으로 되돌리지 말고, 그곳의 고기와 솥을 떠올리지도 맙시다. 대신 우리 스스로에게 시선을 돌려, 우리가 살아가고 완성해 나가는 아름다운 삶을 바라봅시다. 왜냐하면 바로 이곳에서 “주님께서 복과 생명을 명하셨기” (시 132, 3), 참된 기쁨, 거짓 없는 소망, 구원을 주는 축제를 주셨습니다. 만일 번영에 관한 문제라면, 우리는 더욱 번영하고 있습니다; 만일 몫에 관한 문제라면, 우리는 좋은 몫을 선택했습니다; 만일 복에 관한 문제라면, 우리는 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세상과 세상에 있는 모든 것에서 도망치고, 모든 부끄럽고 헛된 쾌락을 버리며, 결혼과 자녀 양육, 재물 축적을 포기하고, 우리는 동정, 무소유, 자기 의지의 포기를 받아들였으며, 그 안에서 매일 매일 자신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세상과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십자가에 못 박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가 말한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은 육신과 정욕과 욕망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갈 5:24)는 말씀을 우리 자신에게 정당하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12. 이제 누가 우리보다 더 복된 자가 있겠는가? 아니면 이보다 더 기쁘고 더 위로가 되는 것을 우리가 인생에서 또 무엇을 더 찾겠는가? 오직 한 가지, 곧 우리가 이 땅에 머무는 남은 날들 동안 모든 어려움과 불쾌한 일을 인내와 용기로 견디며, 보이는 유혹과 보이지 않는 유혹을 만날 때 넘어지지 않도록 스스로를 지키고, 우리에게 약속된 것을 확신에 차서 얻기 위함뿐입니다. 이를 위해 용기를 내고, 굳건해지며, 확고히 서십시오. 모든 일을 품위 있게, 규율에 따라 행하십시오. 우리 스키마의 신비가 무엇이며 어느 정도인지, 그것이 어떤 삶을 요구하는지, 그리고 영원히 기억될 우리 성스러운 선조들이 어떻게 그 길을 걸어왔는지를 깨달으십시오. 그들의 본보기를 본받아, 그들을 따라 자신을 다듬고 변화시켜, 진정으로 그들의 아들이라 불리며 그들의 기쁨의 후손이 되게 하십시오.

 

159. 스스로를 경계하라. 원수가 갑자기 닥쳐와 너희를 파멸시킬 수 있으니

159. 1) 스스로를 경계하라. 원수가 갑자기 쳐들어와 너희를 파멸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 2) 그런데 너희 중 어떤 이들은 방탕하게 지내고 있다. – 3) 앞으로 이런 일이 없도록 하라. 스승들이여, 이를 가르쳐 주라... 지도자가 아니라 타락의 주범이 되지 않도록 하라. [2, 92]

13. 각자는 스스로를 살펴보고 확인하라, 믿음의 반석 위에 굳건하고 흔들림 없이 서 있는지, 자신의 서원을 이행하며, 공동생활이라는 순교의 길에서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왕의 길을 걸어가며, 영혼이 졸지 않도록 하여, 넘어짐의 돌에 발이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하고, 자기 만족이나 편견에 따라 아무것도 행하지 않도록 하라. 나는 너희를 보지만, 항상이나 어디서나 보는 것은 아니다. 이는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너희 중 누가 자신의 뜻대로, 혹은 더 정확히 말해 정욕에 이끌려 은밀히 행동하다가, 영혼을 파멸로 이끄는 죄의 구렁텅이로 뛰어들었는지 알지 못한다. 이것을 두려워하고 경계하십시오. 그리고 아직 순풍을 타고 항해하고 있을 때, 속담처럼 난파를 염두에 두십시오. 한 순간에 바람, 폭풍, 허리케인, 재앙, 파멸, 죽음이 닥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평화와 안정이 찾아온 듯 보이지만, 갑자기 불안과 다툼, 전쟁, 육체가 아닌 영혼의 학살이 닥치는데, 이것이 가장 쓰라린 일이다. 교활한 자는 잠시 잠잠해져 사람들을 안일함에 빠뜨린 다음, 예기치 않게 덮쳐 생각을 뒤바꾸고 파멸로 이끈다. 우리에게는 안일함이 깃들 곳도, 평온을 누릴 시간도 없다. 구원의 안식처에 거의 다다랐던 많은 이들을, 교활한 원수가 물속으로 가라앉혔다. 하늘의 궁창까지 올라갔던 어떤 이들은, 사소한 부주의로 인해 그가 죄의 땅으로 끌어내렸다. 그는 수많은 미덕의 보물고를 텅 비게 했고, 많은 영적 업적을 빼앗아, 그것을 이룬 이들을 빈털터리로 만들었습니다. 이를 알기에 깨어 있으십시오. 그리고 마음의 눈이 졸지 않도록 하십시오.

14. 그러나 너희 중 어떤 이들은 자만심에 빠져 무심하게 행동한다고 들었노라. 그들은 뻔뻔스럽게 서로를 쳐다보며, 헛소리를 하고 웃으며, 어떤 이들은 손을 맞잡고 입술을 맞대고 뺨을 비비기도 한다. 이는 눈물을 흘릴 만한 일이다. “누가 불을 품에 감추면 옷이 타지 않겠느냐? 누가 불타는 숯 위를 걸으면 발이 타지 않겠느냐?” (잠언 6:27). 마찬가지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도 넘어지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또한 어떤 이들은 얼굴을 꾸미고, 허세를 부리며, 눈꺼풀과 눈썹을 화장하고 창녀처럼 꾸미는 것도 나쁘다. 그들은 수놓은 허리띠를 차고, 옷을 화려하게 꾸미며, 걸음걸이에는 유행하는 동작을 흉내 내고, 말투도 우아하게 꾸민다.

15. 나는 이러한 모든 이들에게 앞으로는 그런 일을 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렇지 않으면 “재갈과 고삐로 그들의 턱을 묶으시리라”는 말씀(시 31:9)이 이루어질 것이니,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사람들을 파멸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세우기 위해 세우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키라. 선생님들아, 제자들에게 마땅한 것을 가르치고 그들을 바로잡으십시오.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여러분 중 누군가가 의사 대신 독살자가 되고, 계몽자 대신 어둠을 퍼뜨리는 자가 되고, 길잡이 대신 바른 길에서 벗어나게 하는 자가 되고, 구원자 대신 파멸자가 될까 봐 의심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교사들은 제자들에게 경건의 본보기요, 구원의 모범이며, 모든 선행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교사들에게 맡겨지는 것은, 그들이 교사들의 선한 본보기를 본받게 하기 위함이다. 만일 정반대의 일이 일어난다면, 그런 자들은 스스로 부끄러워하여 물러나야 한다. 그래야만 그들이 자신의 부패함을 건강한 이들에게 전염시키지 않을 것이다. – 이 모든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합니다. – 한 가지만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바른 길을 걷기를,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선한 삶을 기뻐하시기를 바랍니다.

 

160. 형제들의 질서 정연함과, 그들이 모든 일을 규율에 따라 수행하며 수도원 생활에 모두 만족하고 있는 것을 기뻐하며, – 그는 덧붙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죽은 후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수 있도록 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그 방향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160. 형제들의 질서 정연함과, 그들이 규율을 잘 따르고 수도원 생활에 모두 만족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그는 덧붙인다. 그러나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죽은 후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수 있도록 사는 것이며, 모든 것을 그 목표를 향해 이끌어 가야 한다. [2, 93] 농부가 자신의 수고로 가꾸고 씨를 뿌려 푸르러지는 밭을 보고 기뻐하며 즐거워하듯이: 나도 비록 내 수고의 열매에 대한 것은 아니지만, 여러분의 영적 결실을 보고 기뻐하며 즐거워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로 점점 더 번창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을 보며, 진리를 고백하는 것이 옳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스스로도 이를 증언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질서와 평화와 고요함이 있는지 보지 못하십니까? 여러분 모두가 굳건한 믿음과 끊을 수 없는 유대감으로, 한 영혼과 한 마음처럼 하나로 뭉쳐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주는 계명을 점점 더 온전히 이행하는 데 열심을 내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가운데는 원수인 마귀를 기쁘게 하려고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단일한 형제애를 깨뜨리는 사적인 파벌이 없으며, 각자가 원하는 대로 살고 행동하는 자기만족과 제멋대로인 행동도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합당한 일관된 삶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각자가 무관심하게 이리저리 떠돌며 형제애라는 온 몸체를 파멸시키고 혼란에 빠뜨리는 일도 없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여러분은 모든 일에서 규율에 따라 행합니다. 먹고 마시는 일, 깨어 있는 것과 잠자는 것, 일과 휴식, 출입, 대화와 침묵, 성경 읽기와 시편 찬송, 기도와 침묵, 옷차림과 신발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똑같이, 균등하게 나누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나이와 교육, 신분, 능력, 미덕, 건강 상태에 따라 모두가 평등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각자에게 마땅한 배려가 주어지고 필요한 것이 충족됩니다. 여러분은 모두 한 몸의 지체들이지만, 모두가 똑같은 영광을 누리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12, 23, 24).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땅에서의 땀과 수고 끝에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과 형언할 수 없는 영원한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소망하며, 우리는 더욱더 힘써 성장하고, 스스로를 삼가며, 절제하며, 깨어 있으려 합니다. 이는 이 세상에서 품위 있게 행하고, 소망으로 기뻐하며, 슬픔을 인내하고, 모든 선한 일에 스스로를 독려하며, 육신을 영에 복종시키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수치를 영광으로 여기며, 마지막이 되는 것을 첫 번째로 여기고, 주님을 위하여 낮아짐을 기뻐하여, 그리하여 이 길을 완수하고 순교자들과 함께 거하며, 경건한 이들과 함께 끝없는 세월 동안 기쁨을 누릴 자격을 얻게 되리라.

 

161. 우리는 노래하노니: “구원의 잔을 받으리이다”. 이 잔은 순교를 받아들이는 것이니, 이는 우리를 위해 정욕과의 고통스러운 투쟁으로 이루어져 있느니라

161. 우리는 노래합니다. “구원의 잔을 받겠노라.” 이 잔은 순교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우리에게 있어 그것은 정욕과의 고통스러운 투쟁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이 길 위에 서 있습니다. – 그러니 잘 싸워, 우리도 이와 같은 면류관을 받을 자격을 얻도록 하십시오. [2, 94]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에 대해 주님께 무엇을 보답하리요?” 다윗의 찬송가처럼 진실한 결의를 담아, 그 안에 노래된 바와 같이 “구원의 잔을 받으며, 주님의 이름을 부르리라” (시 115, 3. 4)라고 노래하는 것 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이 잔은 순교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순교는 피를 흘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양심적인 투쟁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바알 앞에 무릎을 꿇지 않는 것, 즉 육신의 정욕에 굴복하지 않고, 우리에게 닥치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유혹, 생각의 동요, 정욕과 욕망의 불타는 갈망, 박탈과 궁핍, 비참함, 모욕의 고통을 이겨내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선한 순교자들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전사들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천국을 갈망하고 천국을 누릴 자들입니다! 기뻐하고, 선한 마음을 품으며, 용기를 내어 선한 길을 달려가라. 힘에서 힘으로 나아가며, 미덕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서고, 지극히 높은 관상 속에 머물며, 너희 생명의 끝이 오고, 세상이 창조된 이래 너희를 위해 마련된 기쁨과 환희의 자리로 인도할 때까지 끊임없이 그렇게 행하라. 이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실천에 옮기며, 마음속에서 불에 불을 더해 하늘로 치솟는 신성한 사랑의 불꽃을 스스로 지피는 자는 복되고 지극히 복된 자라. 그러나 헛된 것을 사랑하고 육신의 덧없는 쾌락을 추구하며 귀를 막는 자는 저주받은 자라. 그러나 누구도 “오직 자기 것만 찾지 말고“그것”뿐만 아니라 “이웃을 돌보라”고, 이를 자신의 것으로 여기라. 우리는 서로에 대하여 지체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모든 이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며, 스스로를 더 낫고 온전한 존재로 만든다.

 

162. 고인의 모습을 묘사하고, 묘실에서 보이는 바를 언급하며, 고인의 선한 삶에 대한 간략한 개요를 싣고 나서, 그리스도의 합당한 신부가 되기 위해 몸과 영혼의 순결을 지키는 것에 대한 교훈을 이끌어낸다.

162. 1) 고인의 모습을 묘사하고 묘실에서 보이는 것들을 언급하며, 2) 고인의 선한 삶에 대한 간략한 개요를 싣고, 3) 그리스도의 합당한 신부가 되기 위해 몸과 영혼의 순결을 지키는 교훈을 이끌어낸다. [2, 95]

1. 죽음에 대한 기억은 언제나 구원의 힘을 발휘하며, 특히 이번 경우처럼 죽은 형제의 면전 앞에 서 있을 때는 더욱 그러하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기이한 신비를 목격합니다! 불과 한 순간 전만 해도 우리와 함께 있던 그가, 이제는 영으로 우리 곁에 더 이상 없습니다; 자신의 입으로 우리와 대화하던 그가, 그의 목소리가 아직 우리 귀에 울려 퍼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침묵 속에 잠들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광경입니까! 우리는 그를 보면서도 보지 못합니다: 육신으로는 그가 여기 보이지만, 영으로는 이미 우리 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움직이지도 활동하지도 않은 채 누워 있으며, 숨도 없고, 시선도 없고, 말도 없으며, 모든 감각 기관이 드러나 있지만, 그 어느 것에서도 생명의 움직임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마치 돌이나, 그 밖의 어떤 생명이 없는 사물과 같습니다. –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이 잠든 곳을 바라봅시다. 형제들아, 거기서 무엇을 보게 될까요? 잘 보고 교훈을 얻으십시오. 이것이 흙과 재가 아니겠는가? 썩어 없어진 시신이 아니겠는가? 말라비틀어진 두개골이 아니겠는가? 드러난 뼈들이 아니겠는가? –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불쾌한 흉물이며, 가련하고 역겨운 더미일 뿐이다. – 여기서 형제를 형제로, 잘생긴 이를 못생긴 이와, 젊은이를 노인과 구별할 수 있겠는가? 결코 불가능하다. 모든 것이 썩어 없어졌고, 모든 것이 본래의 모습을 잃었다. 이제 원하는 사람은 잘 살펴보라. 여기에서 정욕의 쾌락은 어디에 있고, 음식의 향연은 어디에 있으며, 잠으로 얻는 안식은 어디에 있고, 육체를 만족시키기 위해 행해지는 그 밖의 모든 것은 어디에 있는가? – 악수와 포옹, 입맞춤은 어디에 있는가? – 모든 것이 이곳을 떠나, 마치 부유한 자처럼 지옥에 먼저 보내어 스스로를 위한 꺼지지 않는 불을 지피게 한 자에 의해 가져가 버렸다.

2. 우리 형제들 중 그 누구도 해를 입지 않기를! 특히 이제 경건하게 세상을 떠나 끝없는 생명으로 넘어간, 이곳에서의 삶을 흠잡을 데 없는 순종과 복종으로 훌륭히 살아낸 – 나이는 어리나 지혜로 백발이 된, – 어린 나이이지만 그러나 영으로는 위대했던 그분, 그분의 내면의 선한 마음가짐은 내가 알고 있으며, 외적인 행실은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그 안에는 온통 선함으로 가득 차 있고 모든 칭찬을 받을 만하니, 바로 라파엘—선하고 참으로 고귀한 분으로, 하느님을 닮은 형상을 보존하셨으며, 감히 말하건대 천사들의 수장 중 한 분과 그 이름이 어울릴 만큼 합당한 분입니다. – 나는 이 내 아들에 대해 그런 확신을 가지고 있으니, 여러분도 그러하십시오. 그는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요. – 자, 이제 시작했던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3. 우리도 머지않아 이곳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죽고, 시신을 정돈하고, 장례 미사를 드린 뒤, 장사 지낼 것입니다. – 이것이 사실이며, “살아 있으면서 죽음을 보지 않을 사람”은 없으니(시 88:49), 그러니 여러분께 간청하고 청하건대, 우리가 경건하고 흠 없이 살며, 흠잡을 데 없이 올바르게 행합시다.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도 깨끗하게 지키며: 첫째는 육신을 영에게 복종시켜, 육신이 거칠어지거나 본능적인 충동으로 반항하지 않도록 하고, 하나님의 두려움으로 다스려, 규율과 특별한 명령에 따라 정해진 음식, 음료, 수면, 휴식의 분량에 순종하고 겸손하게 만족하게 하며; 둘째는 더러운 생각과 움직임과 얽히지 않도록 지켜보며, 온전히 하느님께로 솟아올라 그분의 아름다움만을 관조하게 하라. 왜냐하면 오직 그분만이 진정으로 아름답고 사랑스러우시며, 그 외의 모든 아름다움은 환상일 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기도와 시편 찬송으로 그녀를 감싸 안아, 이 두 가지를 통해 그녀를 자비로우신 신랑이신 그리스도 하나님께 기쁘게 받아들여지도록 하라. 만약 우리가 이렇게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죽지 않고 살아남아, 위로가 되는 환송의 노래를 따라갈 것이다. “오늘 너희가 가는 길은 복되도다. 너희를 위하여 안식의 처소가 예비되었음이니라.”

 

163. 악의 영들과 그들의 우두머리인 마귀를 향한 우리의 싸움

163. 1) 우리의 싸움은 악의 영들과 그들의 우두머리인 마귀를 향한 것이다. – 2) 그들은 끊임없이 우리를 파멸시키기 위해 계략을 꾸미고 있으니, 우리도 주님과 그분의 천사들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지키고 그들에게 대항해야 한다. – 3) 무정심을 이루고 그 투쟁을 통해 순교자의 면류관을 얻고자 한다면,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 4) 이 일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겸손과 순종, 끊임없는 기도, 자기 성찰, 모든 자기 부정의 실천, 그리고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는 것이 필요하다. [2, 96]

4.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을 향한 것이 아니라, 원수들과 권세들과 이 세상의 어둠의 통치자를 향한 것이며” (엡 6, 12), – 그리고 우리 원수인 악의 근원인 마귀를 향한 것입니다. 그는 세계가 창조된 바로 그 초기에 낙원에 몰래 침입하여, 우리 조상을 유혹하여 금단의 열매를 죄악적으로 맛보게 하였고, 그로 인해 조상이 낙원의 달콤함에서 이 땅으로 쫓겨나게 된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그는 대대로 인류를 쫓아다니며 온갖 악을 가르쳐 왔습니다. 그는 지금도 우리에게 온갖 방법으로 험담을 퍼뜨리고, 쉭쉭거리며 기어 다니며, 꼬리를 흔들며 아첨하여 더 쉽게 유혹하려 하고, 도둑처럼 들어왔다 나갔다 하며, 굳건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는 영혼들을 유혹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에게 맞서기 위해서는, 그가 우리를 공격하거나 해치지 못하도록 큰 절제, 큰 경계심, 큰 신중함, 그리고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5. 그의 계략과 음모를 알고 있으니, 온갖 방법으로 무장하여 게으름 피우지 않고 우리 자신이나 그에게도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맞서 싸우고 그를 물리치자. 마치 그가 우리의 파멸을 꾀하며 물러서지도, 양보하지도 않는 것처럼 말이다. 비록 그가 하루에 여러 번 공격하여 실패하더라도, 그는 마치 아직 싸움을 시작하지 않은 것처럼 제자리에 머물다가, 다른 악령들을 데리고 와서 더욱 강력하게 다시 공격해 옵니다. 그러니 우리도 매일, 매시간 우리를 향한 이러한 공격 앞에서 물러서거나 스스로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비록 우리가 이미 많은 관심과 치열한 노력을 기울여 성공을 거두었다 하더라도, 이를 변치 말고 항상 그에 맞서는 동일한 열정과 의욕, 저항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이러한 강력한 적에 대한 대항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시며, 그분의 감동과 지시에 따라 우리를 돕는 성스러운 천사들도 기뻐할 것입니다.

6. 우리는 아직 무욕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고, 그와 함께 다툼으로부터의 해방도 얻지 못하여, 우리 마음이 내면에서 고요히 머물며 갈등에 휘말리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지칠 줄 모르는 열성자들이 수많은 수고와 땀, 그리고 고행을 통해 이룩해 왔고, 지금도 이룩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정욕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에게는, 자신의 변덕스러움과 적의 전술 변화로 인해 매일 매시간 마치 다시 시작하는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낙담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수련과 끊임없는 고된 노력 속에 머물러야 한다. 이것이 진심으로 수고하는 이들의 길이다. 그렇다면 그 대가는 무엇인가? – 성스러운 것은 무욕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며, 두 번째로 복된 것은 전투에서 패배하지 않고, 그 경지를 향해 점차 나아가며 스스로를 완성해 나가면서 언제나 맞서 싸우는 것이다. 순교자의 면류관은, 마치 전장에서 돌아와 왕에게 자신의 상처와 궤양을 보여주는 전사처럼, 경멸받거나 비난받지 않고 오히려 칭찬과 선물, 그리고 영예를 받는 자에게도 주어질 것이다.

7. 그러니 우리도 그리스도의 전사들처럼 힘써 싸우며, 우리의 시간을 오직 원수들과의 전투 시간으로 여기자. 그때는 화살이 윙윙거리는 소리와 칼부림 소리만이 들릴 뿐이다. “높은 곳에서” (시 55:3)라고 기록된 대로, 하루 종일 공격을 가하고 싸움을 벌이며, 올가미를 치고, 구덩이를 파고, 매복을 준비하며 온갖 다른 계략을 꾸미고 있다. 과연 누가 그들을 피할 수 있겠으며, 누가 그들로부터 숨을 수 있겠으며, 누가 발을 헛디디지 않고 그들의 올가미에 걸리지 않겠는가? 순종과 조화를 이루는 겸손한 지혜, 게으르지 않은 기도, 일에 대한 열심, 모순 없는 복종, 불평 없는 헌신, 부끄러운 생각을 물리치고 선한 묵상을 받아들이기 위한 끊임없이 깨어 있는 주의, 기도, 시편 찬양, 경배, 그리고 이 모든 것 위에, 혹은 이 모든 것과 함께 자신의 내밀한 마음을 고백하고, 건방짐을 피하며, 말을 절제하는 것? 이 모든 것과 이와 유사한 것들로 인해 우리의 내적 사람은 마치 요새에 갇힌 것처럼 보호받으며, 원수는 그에게 대항할 힘을 잃고 물러난다.

 

164. 하나님의 사람, 참된 수도자의 외모에 대한 묘사

164. 하나님의 사람, 참된 수도사의 외모에 대한 묘사. [2, 97] 형제들아, 우리 자신을 잘 살피고, 우리의 날들과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맙시다. 보라, 오늘 하루는 이미 지나갔고, 우리는 다시는 그날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날 동안 우리가 행한 일들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일들이 선하다면 우리에게 복이 되겠고, 그렇지 않다면, 아아! 우리의 감각이 훔쳐지지 않도록 지키며, 머리를 대부분 숙이고 있자. 눈은 주의 깊고, 산만하지 않으며, 이리저리 끌려다니지 않도록 하자. 눈으로 보는 것은 영혼에도 비치기 때문이니, 겉사람이 그것을 영혼을 위해 그려내기 때문이다; 얼굴은 침울하지도, 딴생각에 빠지지도 말고, 단정하고 온화하며, 대부분 슬픔에 잠겨 회한의 눈물로 적셔져 있어야 한다. 걸음걸이는 겸손하고, 꾸밈없으며, 교만하지 않아야 하며, 어깨를 치켜올리거나 눈썹을 찌푸리거나, 시끄럽게 발을 구르거나 온몸을 흔들지 말아야 한다; 말투 또한 듣기 좋고, 너무 크지도 않고 너무 작지도 않으며, 눈과 다른 신체 부위에 품위를 갖추고, 콧구멍을 벌리거나 손을 휘두르거나 얼굴을 이리저리 돌리지 말아야 한다. 이는 하나님의 사람은 모든 면에서 질서 정연하며, 그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도구로서, 말씀하실 때나 바라보실 때나 먹을 때나 마실 때를 막론하고 그분을 인도받기 때문이다. 우리도 모든 일에서, 즉 옷차림과 신발 착용에 있어서도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행동해야 하며, 우리와 함께 계시고 모든 상황과 모든 일에서 우리 주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165. 사도의 말씀인 “보라, 지금이 유리한 때라”를 인용하며, 사도가 이를 통해 우리가 구원을 이루도록 열심을 불태우게 한다고 말한다.

165. 1) 사도의 말씀인 “지금이 바로 유익한 때”를 인용하며, 사도가 이를 통해 우리가 구원을 이루는 일에 대한 열정을 불러일으킨다고 말합니다. – 2) 그 후 “너희가 그렇게 행하고 있으니, 복이 있도다”라고 덧붙입니다. [2, 98]

8. 성 바오로 사도는 “지금이 바로 유익한 때요,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이다”(2코린 6,2)라고 말할 때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일깨워 주는가? “그러므로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무기를 입자”(로마 13,12). – 이는 그가 선한 아버지이자 스승으로서, 우리를 나태함에서 깨우고 우리 마음의 눈에서 영적 졸음을 쫓아내며, 우리의 발걸음을 하나님을 향해 올바르게 인도하여 선행의 길로 이끄시는 것입니다. 그분의 신성한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활기차게 일어나 정신을 차리며, 더욱더 부지런히 나아가자. 우리 각자의 삶의 날이 이미 저물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준비에 힘쓰자. 그리하여 우리에게 복이 임하고, 영원한 세월을 살아가며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리자. 만일 우리가 준비되지 않은 채, 영혼이 온전하지 못한 상태로 생의 마지막을 맞이한다면, – 아아! 참으로, 아아! 진실로 그러하리라. 과연 누가 우리를 영혼을 앗아가는 뱀의 손아귀에서 구해 줄 것인가? – 혹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게으름으로 인해 악하게 살아온 대가로 고통을 받을 때, 어디서 위안을 찾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 우리를 떠나는 자들은 떠나게 하고, 불법을 행하는 자들은 불법을 행하게 하라. – 나는 우리에게서 멀어진 자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 아니면 차라리,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도록 노력하자.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죽음을 원치 않으시며, 그가 회개하여 살아가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예레미야 33:11).

9. 그러나 그리스도의 은혜로 순종의 길에 머물며,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자신의 서약을 거짓 없이 지키는 여러분은 기뻐하고 즐거워하십시오. 하늘에 너희를 위한 많은 상이 쌓여 있으니, 너희가 끝까지 스스로를 삼가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에 관하여 너희에게 명령된 모든 것을 그분의 군사로써 그분께서 부르신 대로 충실히 이행한다면 그러하리라. 너희는 그분께 군인이 되어 그분을 섬기며 밤낮으로 그분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으니, “나에게 ‘주여, 주여’라고 말하지 말고, ‘주여, 주여’라고 말하지 않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내 사람이라”는 말씀과 사도의 권면, “당신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으려 합니까? 선을 행하십시오. 그러면 그분께 칭찬을 받으실 것입니다(롬 13:3).”

 

166. 삶에서 굳건히 서서 모든 것을 참아내라. 너희가 누리게 될 그 영원한 복을 생각하면, 더 많이 참지 못한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166. 1) 삶에서 굳건히 서서 모든 것을 참아내라. 너희가 누리게 될 그 영원한 복락 때문에, 그때가 되면 더 많이 참지 못한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2) 심판과 보응의 날을 기억하고 마음에 새겨 두라. – 그리하면 결코 나태함과 불평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 3) 그렇지 않은 사람은 정욕에 사로잡혀 짐승과 다름없으나, 그런 사람은 천사이다. [2, 99]

10. 이제 여러분에게 옛 선지자들이 말했던 것처럼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귀로 듣고도 깨닫지 못하며, 눈으로 보고도 보지 못하리라. 이 사람들의 마음이 둔해졌고, 귀는 듣기 힘들며, 눈은 감겨 있기 때문이다”(사 6,9-10). 여러분은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며, 주님의 영광을 맑은 얼굴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3, 18). 여러분은 순종하는 거룩한 삶을 통해 영혼의 눈에서 세상에 대한 집착이라는 진흙을 털어내고, 사물을 맑게 보게 되었으니, 즉, 세상의 허영과 인간 사안이 여러 방향으로 끊임없이 요동치는 것을 맑게 보게 되었고, 오직 하나만이 확고하고, 사랑스럽고, 지극히 뛰어난 선, 곧 하나님이며, 덕스러운 삶으로 그분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로 하여금 이 은총에 참여하게 하시고, 이러한 지혜로운 삶을 살게 하신 주님이자 조상들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을 바라보며, 어떤 썩어 없어지고 금세 지나가는 것들이 아니라, 하늘의 아름다움과 하늘 너머의 아름다움, 그리고 그곳의 형언할 수 없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복을 누리고 위로를 받는 것을 마음속으로 그려보아야 합니다. 그것들은 그 누구의 마음도 생각해 본 적 없고, 귀로 들어본 적도 없으며, 마음속으로 꿈꿔본 적도 없는 것들입니다. 그것들의 헤아릴 수 없는 탁월함 때문인데,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끝까지 인내하며 닥친 시련을 견뎌낼 힘을 주시면, 여러분도 반드시 그곳에 도달하여 병도, 슬픔도, 한숨도 없는 곳에서 안식을 누리게 될 것임을 제가 확신합니다. 그때 여러분은 이 거룩한 삶의 방식으로 여러분을 부르신 주님께 큰 소리로 감사를 드릴 것이며, 겪었던 고난들에 대해서는 전혀 기억조차 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여러분이 겪은 것보다 훨씬 더 큰 고난과 슬픔, 그리고 궁핍을 겪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게 될 것입니다.

1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두려운 재림의 날에 우리가 무엇을 보게 될까요? 그분께서 셀 수 없이 많은 천사들과 대천사들을 거느리고 명백히 오셔서 두려운 심판의 보좌에 앉으시고, 땅의 네 끝에서 모든 민족과 모든 숨 쉬는 자들을 모아, 어둠의 행실을 드러내시고 마음속의 생각을 밝히실 때, 그 결과 어떤 이들은 주님의 우편에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요, 다른 이들은 수치 속에서 좌편으로 물러나게 될 것이며, 전자는 빛나는 거처, 달콤한 낙원인 천국으로 인도될 것이며, 이쪽은 꺼지지 않는 불 속으로, 벌레들의 먹이가 되도록, 이를 갈며,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타르타로스의 심연으로, 풀 수 없는 족쇄와 온갖 고문 속으로, 각자의 죄에 따라 보내질 것이다. 그때 그들은 해처럼 빛나며, 온 마음을 다해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끊이지 않는 노래로 주님을 찬양할 것이니, 주님께 얼마나 큰 선을 위해 봉사했는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 이들은 그분을 고백하기 위해 피를 흘린 순교자들, 사도들, 선지자들, 고백자들, 경건한 자들과 의로운 자들입니다. 그 뒤를 이어 영적 고난을 보여준 주교들, 사제들, 수도사들, 그리고 평신도들—모두 선한 행실과 노력, 그리고 위업 속에서 삶을 마친 이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신음하며 울부짖기 시작할 것입니다. 아아! 아아! 자신의 무분별함에 저주를 거듭 불러들이며, 묶이고, 맞고, 버림받은 영들에게 모욕당하며, 더 나아가 스스로를 정죄하고 낙인찍으며, 절망에 시달리며, 영원한 세월 동안 정해진 견딜 수 없는 고통에 끝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리니, 이는 그들의 귀에 들려진 말씀대로: “이들은 영원한 형벌로,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가리라”(마태복음 25:46). 이 모든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우리가 수고와 땀 속에서 나태해질 수 있겠는가? 현재 삶의 어려움 때문에 소심해질 수 있겠는가? 오히려 마음을 다잡고 불보다 더 뜨겁게 열정을 불태워,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끝까지 우리 헌신적인 수도 생활의 규율을 충실히 지키지 않겠는가?

12. 그러니 이 모든 것을 마음에 새기고 그 안에 머물며, 이것이 우리를 이끌어 주는 모든 일을 부지런히 행합시다. 왜냐하면 이것에 무관심한 사람은, 확신하건대, 정욕에 사로잡혀 있고, 안일함 속에서 졸고 있으며, 마음이 무겁고, 쾌락을 좇으며, 시기하고, 경솔하며, 게으르며, 곰처럼 발톱 속에 파묻혀 먹을 것과 마실 것만 찾고, 사자처럼 자신의 사악한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해 포효하며, 표범처럼 한 쾌락에서 다른 쾌락으로 뛰어다니고, 여우처럼 마음속으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며, 낙타처럼 우연한 슬픔에 대한 이웃에 대한 복수에서, 말처럼 울부짖으며, 인간과 가축의 몸을 탐하고, 늑대처럼 뻔뻔하게 자신의 영혼과 형제의 영혼을 파멸로 몰아넣는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다양한 정욕으로 인해 짐승과 비슷할 뿐만 아니라, 짐승 같은 본성에서 그들을 훨씬 능가하기도 하는데, 이에 대해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 그러나 선한 생각의 편에 서 있는 자는, 천사처럼 빛나고, 케루빔처럼 번개처럼 빠르며, 세라핌처럼 수많은 눈을 가진 자로서, 어떤 기회를 틈타 영혼을 파멸시키는 용이 그에게 덮치지 못하도록, 전사처럼 용감하며, 죄를 향해 파괴적인 생각의 불타는 칼을 휘두르며, 선한 생각의 불길로 악마들을 태워버리고, 끊임없이 흐르는 샘처럼 회개의 맑은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의 성전이 미덕이라는 황금 돌로 지어지듯, 꾸밈없는 어린 양처럼, 그의 주님을 본받아, 반박하지도 않고 울부짖지도 않으며, 설령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해도 아버지와 형제들에게 순종하며 나아간다. 그러나 여기 너희에게 삶과 죽음이 보여졌으니, 각자가 원하는 것을 선택하라.

 

167. 악한 영들과의 싸움

167. 1) 우리의 싸움은 악한 영들과의 싸움이다. 왜 사도가 지시한 미덕이라는 전신 갑주를 입고 경계해야 하는가? 그 미덕들에는 원수들을 물리치고 타격할 힘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 2) 이 싸움은 정신적인 것이며, 주님께 드리는 기도와 함께 반대되는 생각들로 맞서 싸워야 한다. – 3) 이 싸움은 갑작스럽게 일어나 우리의 내적 상태를 공기의 상태처럼 변덕스럽게 만듭니다. 그러나 자신을 경청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미덕으로 단장하는 이들에게는 두렵지 않습니다. [2, 100]

13.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을 향한 것이 아니라, 원리들과 권세들과 이 세상의 어둠의 통치자들을 향한 것이니, 사도의 말씀대로이다(엡 6,12). 그러므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며,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온 힘을 다해 노력하며, 영적인 무기로 스스로를 방어해야 한다. 즉, 의심의 여지가 없는 믿음은 투구처럼, 거짓 없는 순종과 위선 없는 겸손은 방패처럼, 그리고 그 밖의 모든 미덕은 각각의 상황에서 우리를 유혹하는 자들에 대항하는 무기가 될 수 있으며, 보이지 않는 원수들을 물리칠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14. 아시다시피 이 위대하고도 무서운 싸움은 항상 진행 중이며, 기도와 성찬식 중에도 멈추지 않습니다. 이 싸움은 때로 입에 담기도, 말하기도 힘든 그런 생각들을 일으키고 부추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겸손한 영혼은 유혹하는 생각들에 상처를 입더라도, 이를 증오로 물리치고 거룩한 생각으로 맞서며, 동시에 기도로 주님께 의지합니다. 주님의 도움이 즉시 임하며, 동쪽에서 높은 곳에서 용을 쳐서 쫓아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공격 앞에서 겁을 먹거나 물러서서는 안 됩니다. 마음의 두려움이 없으면, 정신은 그러한 공격의 유혹에 휩쓸리지 않게 되며, 이는 성체성사 시간뿐만 아니라 그 밖의 모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15. 원수들은 언제나, 우리가 예상치 못한 순간에 공격해 오지만, 그러나 우리가 영적으로 선하고 평화로운 상태에 있을 때, 즉 우리를 사로잡은 슬픔 때문이든, 순수한 기도 때문이든, 성경 읽기나 그 밖의 어떤 경건한 행위 때문이든, 원수는 마음을 동요시키고 흔들어, 마치 안전한 정박지에서 파도 속으로 내던지듯이, 혹은 대낮의 빛에서 밤의 어둠 속으로 몰아넣듯이 공격합니다. 이 점에 있어 우리도 낮 동안의 대기 상태와 마찬가지입니다. 때로는 태양이 빛나면 맑아지고, 때로는 구름이 몰려오면 어두워지다가, 다시 맑아졌다가 또 어두워지곤 하는데, 이는 공기 속의 다양한 변화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때로는 선한 생각들로 인해 밝은 낮처럼 환하게 빛나기도 하고, 때로는 악한 생각들로 인해 어두워지기도 하며, 기도나 다른 선한 수행에 몰두함으로써 다시 빛의 영역으로 돌아오기도 하지 않는가? 그리고 이는 하루에도 한 번이 아니다. 그러나 공기 속의 변화는 우리와 다르게 일어납니다. 공기 속에서는 이것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며,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지혜가 정하신 법칙에 따르는 것이지만, 우리에게는 이것이 자발적이며, 부분적으로는 우리 의지의 작용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비록 마귀가 유혹을 통해 우리에게서 선한 상태의 빛을 빼앗으려 시도하더라도, 우리는 그 을 물리칠 힘을 가지고 있으며, 성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선하게 사는 모든 이들이 그러하듯이, 언제나 진리의 태양이 우리의 마음을 비추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도 많은 성인들이, 마치 귀한 보석처럼 이 땅을 누비며, 표적이나 기적을 행하는 것으로 구별되지 않기 때문이다. 성스러움은 오직 그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른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의 계명을 정확히 이행하며, 형제들에 대한 진실한 사랑과 시기심 없는 마음, 이웃의 행복을 함께 기뻐하는 마음, 인간의 영광을 초월하는 태도, 그리고 그 밖의 모든 미덕을 통해 드러납니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사람에게서 드러나는 거룩함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떠나 세상에 대해 십자가에 못 박힌 여러분은, 그 이상으로 탐욕 없음과 순결, 자기 의지의 포기, 그리고 우리 삶의 방식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모든 결핍과 슬픔을 기꺼이 견뎌내는 것으로 구별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면, 여러분은 거룩해질 것이며 성도들과 함께 묶일 것이며, 경건한 이들의 무리가 여러분을 그들 가운데로 받아들일 것이니, 여러분은 순교자들의 장막에서 영원히 기뻐할 것입니다.

 

168. 우리 각자의 길을 걸어가며, 세속적이고 덧없는 것들을 바라보지 말고, 하늘에 속하고 영원한 것들에 시선을 고정합시다. 왜냐하면 전자는 우리를 나태하게 하지만, 후자는 우리에게 용기를 주기 때문입니다.

168. 1) 우리 각자의 길을 걸어가며, 세속적이고 덧없는 것들을 바라보지 말고, 하늘에 속한 것과 영원한 것에 시선을 고정합시다. 왜냐하면 전자는 우리를 나태하게 하지만, 후자는 용기를 북돋아 주기 때문입니다. – 2) 모든 성부들이 그렇게 걸어왔으니, 우리도 모든 선함으로 자신을 단장하고, 모든 악을 멀리하며 정화함으로써 그 길을 따라야 한다. 우리의 이름에 걸맞게 우리의 삶을 살아가자. [2, 102]

16. 우리 삶은 일종의 여정이며, 이 여정은 하루나 이틀, 혹은 며칠 만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 세상에서 내세로 옮겨갈 때까지 우리 삶의 전 기간에 걸쳐 이어지는 것이다. 그토록 먼 거리를 바라보며, 게다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우리의 발걸음을 방해하고 걸림돌을 놓는 원수를 적으로 두고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이 길을 걷는 것을 포기하지 않으려면, 얼마나 큰 노력과 힘, 주의와 열정이 필요한가? 그러나 걱정할 것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한편으로 우리에게는 옹호자이자, 위업의 인도자이자, 그 길을 함께 걷는 동행자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그저 어떤 분이 아니라 만물의 주님이시며, 우리를 지키는 수호자이자 돌보시는 분은 거룩한 천사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분은 졸지도 않으시며, 잠들지도 않으시리라”(시 120:4). 왜 우리는 우리 길에 대한 열정을 품고, 긴장된 열의와 불타는 소망으로, 아래를 보지 않고 위를 향해 눈을 고정하는가? 만약 우리가 아래를 바라본다면, 우리의 생각이 이리저리 흩어지고, 마음이 이 세상의 헛된 것들과 쾌락에 집착하게 되어, 반드시 나태와 소심함, 그리고 나태함에 빠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음행, 탐식, 탐욕, 구경거리, 축제, 장식, 환상, 그리고 그 밖의 모든 덧없고 사라질 것들에 마음이 쏠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을 하늘의 영원한 것에 고정할 때, 비록 우리의 현재가 슬프고 고통스럽고, 여기에는 수고와 피로가 따르더라도, 금식과 기도가 있고, 의지의 절제와 결핍이 있으며, 이 모든 것이 우리 수도자의 삶과 금욕적인 순종의 본질상 피할 수 없는 것일지라도, 우리는 낙담하지 않을 것이며, 소심해지지 않을 것이며, 닥친 슬픔의 무게 아래 지치지 않을 것이며, 솟아오르는 정욕에 굴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담대한 지혜와 기백으로 나아가며, 하늘을 바라보고, 하느님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며, 천국을 향하여, 낙원의 위로를 향하여, 썩지 않는 영광의 달콤함을 향하여, 지치지 않는 빛을 향하여, 천사들의 복락을 향해 나아갈 것입니다.

17. 이처럼 모든 성부들은 그렇게 걸어가시며, 이겨내어 승리하셨으니, 순교자들, 경건한 이들, 의로운 이들, 경건한 이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 수도사들, 평신도들, 남자들, 여자들, 청년들, 노인들,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일종의 교훈으로 여기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들의 영광과 복락을 원한다면, 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우리의 삶의 방식 속에서 기꺼이 고난을 겪어야 합니다. 그러니 형제들아, 이를 사랑하며, 모든 것을 용감하고 지혜롭게, 그리고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견디고 이겨내기로 결심합시다. 지극히 지혜로우신 분께서 명하신 대로(전도서 2:14), 눈을 머리에 두고 발에 두지 맙시다. 천상의 것을 생각하고 그것에 몰두하는 자들은 진실로 눈을 머리에 두고 있는 것이나, 헛된 것에 쏠리고 그것에 몰두하는 자들은 눈을 발로 내리는 것이다. 어떤 사람의 발이 위에 있고 머리가 아래에 있다면 얼마나 불쌍하고 끔찍한 일인가? 그러나 영적으로 이와 같은 고통을 겪는 것은 훨씬 더 불쌍하고 비인간적인 일이다. 그러니 지혜로운 자들답게, 머리에 눈을 둔 자들답게, 하나님과 신성한 것들에 대해 생각하며 그에 따라 행동합시다. 머리에 있는 눈은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이로부터 굳건한 인내, 순결, 형제애, 평화, 온유, 겸손, 용기, 번영, 절제, 온갖 선한 일, 온갖 미덕의 꽃과 열매가 피어납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과 반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자들에게는 정반대의 결과가 따릅니다: 불신, 절망, 증오, 그리고 그로부터 비롯된 조급함, 비겁함, 음행과 간음, 건방짐, 쾌락 추구, 탐식, 경솔함, 외모 꾸미기, 조롱, 욕설, 시기, 살인, 그리고 그 밖의 온갖 사탄적인 행위와 행동.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것을, 순결한 자들은 거룩한 것을, 흠 없는 자들은 동정적인 것을, 경건한 자들은 성스러운 것을, 평화로운 자들은 형제애를, 허영심 없는 자들은 하늘의 것을, 세상을 버린 자들은 최상의 것을 추구할 것이다. 질서가 무질서로 변하지 않게 하소서. 빛에서 태어난 우리가 어둠을 좇고, 순결에서 태어난 우리가 음란한 것을 좇고, 경건함에서 태어난 우리가 무질서한 것을 좇고, 허영을 미워하는 자들이 허영을 좇는 일이 없게 하소서; 이는 비참하고, 교활하며,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이며, 비이성적이고, 지옥의 불길로 이끄는 방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로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의 칭호대로 불리며, 하나님을 찾자. 우리는 수도사, 순례자, 은둔자, 순결한 자, 하나님의 종이자 천사라고 불리며, 모든 이가 우리가 실제로 그러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니 우리 중 누구도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거나, 세상에 속한 자이거나, 순결하지 않은 자가 되지 말자. 누구도 불평하는 자, 음란한 자, 다투는 자, 낙담하는 자, 소심한 자가 되지 말자. 하나님의 큰 진노가 가까이 왔으며, 그분은 갚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속적인 삶 속에서 마음가짐이 나쁘게 되는 자들에게도 분노하시기는 하지만, 그분께 온전히 속해야 할 우리에게 더 크게 분노하십니다. 마치 주인이 자신의 눈앞에서 어떤 잘못을 저지르는 종들에게,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종들보다 더 크게 노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 모두에게 똑같이 미치지는 않으며,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끊임없이 악에 머무르는 자들에게는 한 가지 방식으로, 때로는 고치려 했다가 다시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또 다른 방식으로; 방금 수도 서원을 한 이들에게는 다르게, 오랫동안 수도 생활을 해 온 이들에게는 또 다르게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누군가 수도 생활을 오래 할수록 그 삶의 차별성이 더욱 분명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노년이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정죄의 원인이 되고 조롱거리가 됩니다. 마치 백발의 노인이 아이들과 함께 학교에서 공부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우스꽝스러운 것과 같습니다.

 

169. 너희는 그리스도의 군인들이다. 너희는 끊임없이 온전한 무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바로 다음과 같이 말이다.

169. 1)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전사들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끊임없이 온전한 무장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런 식입니다. – 2) 모든 악의 뿌리는 교만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을 괴롭히는 것과 싸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항상 똑같은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 3–16) 영적 전쟁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 [2, 103]

18. 너희는 그리스도의 군사들이다. 군사는 싸움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고, 언제든지 적과 맞서 싸울 준비가 되어 있도록 자신의 모든 무기를 잘 정비해야 한다. – 그러니 너희가 준비되어 있는지, 그리고 너희의 영적 무기가 어떤 상태인지 살펴보라. – 날카롭게 갈아졌는지, 깨끗이 닦였는지, 광이 났는지? – 바로 순종의 칼, 믿음의 갑옷, 구원의 소망의 투구, 겸손의 방패, 선한 생각의 화살통, 그리고 마지막으로 병거, 즉 여러분의 정직한 몸입니다. 이 몸은 말의 역할도 겸하고 있어, 모든 일에 잘 훈련되어 있어야 하며, – 너무 뚱뚱해서 달리기에 부적합하지도, 너무 마르서 필요한 움직임을 감당하지 못하지도 않아야 하며, 하나님의 두려움이라는 고삐를 잘 견뎌내어, 그것이 사용될 때 정해진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제멋대로 뛰는 것으로 인해 기수를 떨어뜨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분이 항상 이와 같기를 원하십니다. – 왜냐하면 여러분에게는 끊임없는 전쟁이 있고, 매시간 전투가 있으며, 매 순간 총성이 울리기 때문입니다.

19. 과연 너희 중에 누가 용감하며, 누가 힘센 자이며, 누가 전사인가? – 수천 수만 개의 반항적인 생각을 베어 버리고, 교만한 마음을 미리 무너뜨리는 자, 마치 신성한 다윗이 골리앗을 무너뜨렸던 것처럼? – 이는 결국 어떤 결과를 낳는가? – 악의 영들, 즉 수많고 다양한 죄악된 정욕들이 도망치는 것이다. 마음의 교만은 모든 악 중에서 첫 번째이자 마지막이다. 그로 인해 천상의 높이와 천사의 광채에서 추락하여, 지금 우리 모두를 유혹하는 용이 나타났으며, 또한 그 뿌리에서처럼 수많은 죄의 덩굴이 자라났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우리를 공격하는 것에 맞서 분투하고 싸워야 한다. 매 순간 어떤 이는 한 가지 정욕과 싸우고, 다른 이는 또 다른 정욕과 싸우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음탕한 정욕으로, 저 사람은 탐식으로, 이 사람은 나태함으로, 저 사람은 시기심으로, 이 사람은 분노로, 저 사람은 불신으로, 이 사람은 불복종으로, 저 사람은 자만심으로, 이 사람은 무기력함으로, 저 사람은 광기로 고통받는다. 이 모든 것은 바로 그 동일한 사탄의 영이 작용하는 것이다.

20. 우리의 사명은 크고 다양하다. 사방에 눈을 두어야 하며, 모든 면을 감시하고, 주위를 방어해야 한다. 그래야만 적이 침입하여 상처를 입히거나 포로로 잡아가지 못하며, 손을 뻗어 때리거나 죽이지 못하게 할 수 있다.

21. 또한 미리 대비해야 하며, 우리 쪽에서 먼저 싸움을 걸어 맞서 싸워야 한다. 때로는 한 번의 타격을 받고 열 번을 되갚기도 하고, 작은 상처를 입고도 죽음에 이르는 패배를 안겨주기도 한다.

22. 몸이 상한 사람은 치료를 구하듯이, 영혼이 상한 사람도 영혼에 맞는 적절한 치료를 구해야 한다. 이 치료란 고백과 참회이다. 이를 행한 뒤, 다시 싸움터로 나가야 한다.

23. 육신의 싸움에서 이긴 자는 하나의 상을 받지만, 영적인 싸움에서 이긴 자는 수많은 면류관을 받는다. 그러니 매일 싸움이 있고, 매일 면류관이 있으며, 매일 상이 있다.

24. 너희가 이기고 굴복하지 않으며, 힘을 내고 소심해지지 않는다면, 너희는 복이 있도다. 이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겨감으로써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러하라.

25. 그러니 용기를 내라, 나의 사랑하는 자녀들과 형제들아, 용기를 내라. 너희에게는 하나님을 도우미로, 너희 생명을 돌보시는 수호천사를, 중보자로는 너희가 그 이름을 부르는 성도들을, 그리고 무적의 무기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표징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26. 우리 주변에서 악한 생각으로 우리를 공격하는 보이지 않는 적들을 두려워하지 말자; 육체의 쾌락이라는 바알 앞에 무릎을 꿇지 말며, 그리스도께서 성소에서 당신께 신부로 삼으신 우리의 정결함을 원수들에게 넘겨주지 말며, 지극히 순결하고 불멸의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지체인 우리 몸을 음행의 도구와 부정한 그릇으로 만들지 말자.

27. 우리를 낙원의 동산에서 쫓아내려는 뱀을 조언자로 삼지 말며, 도둑인 악마들에게 문을 열어주지 말고, 그들에게 우리 영혼의 보물을 훔치게 하지 말자.

28. 우리 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온갖 미덕으로 지으신 성읍에 머무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가! 죄에 노예가 되지 않고 우리 영혼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가! 정욕에 노예가 되지 않은 영혼은 온전히 자유롭고, 온전히 하느님을 닮았으며, 온전히 주권적이며, 온전히 빛을 닮았고, 온전히 교양 있고, 하느님께서 모으시고,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천상의 존재이다.

29. 정욕이라는 폭군들에게 노예가 되어 지배당하는 영혼은 그렇지 않다. 그 영혼은 각 정욕과 모든 죄악된 행위의 부름에 따라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끔찍하고도 많은 고통을 겪는 것으로 보인다. 악마의 행동을 받아들여, 명령받은 대로 순종하며 따를 뿐이다. 그 영혼을 지배하는 것은 육체의 정욕의 악마, 시기심, 증오, 성급함, 탐식, 나태, 불신, 비방, 분노, 교만, 거짓, 도둑질의 악마,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정욕의 악마들인데, 누가 그 이름을 다 열거할 수 있겠는가?

30. 어떤 악마에게 현혹되었는지에 따라, 그 악마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 가련한 영혼은 그들의 멍에 아래에서 시달리며, 그 삶은 비참하다. 그 영혼은 온통 가난하고, 초라하며, 어둡고, 빛이 없으며, 신을 믿지 않고, 추하며, 모든 선한 마음을 가진 이들에게 보기 흉하다.

31. 자녀들아, 우리의 존엄을 훼손하지 말고, 우리의 자유를 팔지 맙시다. 주인이 된 우리는 종이 되지 맙시다(고린도전서 7:22, 23). 우리의 빛을 어둠으로 바꾸지 말자, 우리의 아름다움을 추함으로 바꾸지 말자, 너희의 얼굴을 하나님께로부터 돌리지 말자. 죄의 수치스러운 형상을 향하게 하지 말자. 덕의 밝은 옷을 벗어 던지지 말자. 불법의 음침한 누더기를 입지 말자.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 자신을 마귀의 자식으로 변모시키지 말자.

32. 제정신인 사람이 주인임에도 불구하고 감히 스스로를 노예로 팔아넘기겠는가? – 하나님의 양자로 인정받은 자가 감히 자신을 마귀의 자식이라 칭하겠는가? 누가 미언할 수 없는 미덕의 고귀함을 버리고, 천하고 정욕에 사로잡힌 삶을 택하겠는가? 누가 영적인 풍요로움에서 벗어나 영혼의 가난과 궁핍을 택하겠는가? 누가 천국을 잃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불과 어둠, 그리고 그 밖의 끔찍한 영원한 고통을 얻으려 하겠는가? 이는 제정신인 자의 행위가 아니며, 이성을 잃은 자의 발걸음도 아니다. 오직 어떤 미친 자들과 무감각한 자들만이, 영원한 복을 상속받기 위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받은 존재로서, 말도 안 되는 쾌락 추구를 통해 자의적으로 지옥의 심연으로 내려가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33. 잠든 자들아, 깨어나라. 눈을 감은 자들아, 눈을 떠라. 듣지 못하는 자들아, 귀를 기울여라. 기력을 잃은 자들아, 힘을 내라. 용기를 내어 일어서라. 마음을 다잡고 구원의 길로 들어서라. 주님께 부르짖자, 그러면 주님께서 이루실 것이다. “주님께서는 진리로 그분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가까이 계시며, 성령으로 겸손한 자들을 구원하시리라”(시 144:18; 33:19).

 

170. 영혼을 돌보는 일을 포도나무를 가꾸는 일과 비교한다

170. 1) 영혼을 돌보는 일을 포도나무를 가꾸는 일에 비유한다. – 2) 우리 주님이신 포도원지주께 기쁨을 드리기 위해 그러한 돌봄에 참여하도록 초대한다. – 3) 이미 이 일에 꽤 수고해 온 것을 칭찬하지만, 수도원의 규율과 수행자의 수고 속에서 흠 없이 행하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수고할 것이라고 말한다. [2, 104]

1. 어제 포도를 수확하시면서, 열매가 풍성한 포도나무를 축복하시고, 송이가 없는 포도나무를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 그것은 여러분도 주님의 포도가 되어 영적인 열매를 맺고 마치 송이가 많은 포도나무처럼 될 때, 우리 영혼을 가꾸시는 분께 경이로움을 드릴 만해지며, 그렇지 않을 때는 저주와 잘림을 받을 만하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 ‘열매를 맺지 않는 모든 가지가 잘려 나가 불에 던져진다’ (요한복음 15,6)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포도나무는 우연히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많은 수고를 들여 심고 가꾸어 성숙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열매를 맺기 시작합니다; 열매를 맺게 되면, 그때 가지치기를 하고, 흙을 덮어주고, 울타리를 치고, 마른 가지를 제거하며, 열매 맺음을 방해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깨끗이 치워내는데, 이는 포도 재배자들이 경험으로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 그리하여 다시 열매를 맺게 됩니다. – 우리에게도 똑같은 모습을 볼 수 있지 않겠는가? 왜냐하면 누가 이와 같은 과정을 겪지 않고, 즉 심겨지고 자라나지 않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영적 성숙에 이르지 못하고, 그 때문에 그리스도의 계명으로 흙을 덮고, 가지를 다듬고, 보호받지 않은 채 열매를 맺을 수 있겠는가? – 이 모든 과정을 거치지 않는 자는 언제나 미성숙하고 열매 맺지 못하는 자로 드러나며, 길을 지나가는 모든 자, 곧 모든 것을 파괴하는 악령들에게 갉아먹히게 됩니다.

2. 그러니 부디, 영혼을 가꾸고 정성껏 돌보는 일에 착수합시다; 즉, 수행자의 행실과 금욕적 삶의 일상적인 규율, 곧 절제의 무게, 깨어 있는 수고의 고단함, 내면의 악을 고백하는 수치심, 참회의 상처, 입을 다스리는 것, 몽상하지 않는 마음, 흔들리지 않는 믿음, 동요하지 않는 생각의 정립에 힘쓰자. 이 모든 것을 행하지 않는 자는 열매를 맺을 수 없으며, 그런 자는 그리스도의 채찍이라 불릴 자격이 없다. – 형제들아, 우리가 이곳에 온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많은 열매를 맺고, 우리의 영적 결실로 주님을 기르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선하신 주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간절히 원하시며, 우리가 구원받는 모습을 보시면 그 열매를 맛보시며 기뻐하시지만, 그렇지 않다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처럼 저주를 내리십니다. 주님께서는 매일 이곳에 오셔서 우리가 어떤 모습인지 살피십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 필요합니다: 수고, 정성, 뜨거운 마음, 돌봄, 겸손, 순종, 주의, 찬양, 온유, 분별력, 일 사랑, 형제 사랑, 인내, 굳건함, 소망, 그리하여 우리가 성령 안에서 온전하게 다듬어진 선택받은 그릇이 되도록 스스로를 준비합시다.

3. 여러분이 수고하셨음을 인정합니다. 과거에 승리하셨고, 많은 고난을 견뎌내셨으며, 상당한 여정을 완수하셨고, 악한 자를 부끄럽게 하셨으며, 싸움을 물리치셨고, 정욕을 버리셨으며, 세상과 단절하셨고, 정욕에 못 박히셨으며, 계명을 지키셨고, 조상 대대로 전해 내려온 믿음을 보존하셨으며, 인간의 두려움을 두려워하지 않으셨고, 주님을 향한 사랑의 죽음을 위해 마음속 깊이 준비하셨습니다. 여러분의 모든 행실은 하나님께 기쁘시게 하며 칭찬받을 만하고, 모두 거룩하고 천상적입니다. – 그러나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참아 주십시오.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가장 존경하는 형제 여러분, 믿음 안에서 흔들림 없이 굳건히 서고, 보이지 않는 유혹과 보이는 유혹이 닥쳐올 때에도 두려움 없이 견디며, 매일 벌어지는 싸움에서 악마에게 굴복하지 맙시다. 다음과 같이 노래합시다: “주님께서 나의 도움이시니, 내가 나의 원수들을 바라보리라” (시편 117:7). “주님은 나의 생명의 보호자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나를 해치려 다가오는 자들, 내 육신을 갉아먹는 자들, 나를 모욕하는 자들과 나의 원수들이 다가올 때, 그들은 기진하여 쓰러지리라” (시편 26:1-2). “그러나 우리는 일어나 다시 일어섰도다” (시편 19:9). 그리하여 마음속으로 노래하고, 영적으로 용기를 내자. 부지런히 우리의 순종을 실천하며, 모든 일에서 경건함을 지키고, 썩은 말, 불평하는 말, 욕설, 비난, 반항, 건방진 말을 하지 말며, 기꺼이 일과 기도, 시편 찬송에 참여하고, 서로 온유와 겸손, 선한 마음, 세상으로부터의 분리, 하늘을 향한 열망, 말수를 줄임, 유머를 피함, ‘용서해 주십시오’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양보로 이기는 것—이는 마귀에 대항하는 위대한 무기이니—악의를 품지 않음과 평화 사랑 속에서 조화를 이루자.

 

171. 원수가 온갖 방법으로 우리를 밀어내려고 애쓰는 계명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를 성공적으로 이루기 위해 우리는 다음 사항들을 지켜야 한다

171. 1) 원수가 온갖 수단을 동원해 우리를 밀어내려고 하는 계명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를 성공적으로 이루기 위해 우리는 감정을 잘 다스려야 한다. – 2) 우리가 이렇게 스스로를 지키면, 원수는 패배하여 물러날 것이며, 괴로워할 것이고, 영혼은 기뻐할 것이다. 반대로, 그렇지 않을 경우 그 반대의 결과가 뒤따를 것이다. – 3) 그러나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자. 만일 그런 일이 생긴다면, 회개를 통해 서둘러 스스로를 치유하고, 그 후에는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2, 105]

4. 항상 자기 자신을 살피고,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율법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계명에서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치우치지 말고, 구원과 올바른 길, 그리고 번영이 있는 왕의 중도(中道)를 걸어야 한다. 이 점을 명심하고, 이에 주의를 기울이며, 이를 깨달아야 한다. 왜냐하면 교묘한 뱀이자 영혼을 훔치는 자인 마귀는 언제나 경계하며, 우리를 이 길에서 벗어나게 하여 어떤 정욕의 급류로 내던진 뒤, 가장 비참한 전리품으로 삼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깨어 있고 정신을 차리며, 자신의 감각을 잘 지키면 그를 이기고 길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눈은 봐서는 안 될 것을 보지 않도록, 귀는 용 의 유혹적인 말과 속삭임을 듣지 않도록, 손은 정욕이나 욕망의 충동에 따라 자신의 신체 부위나 타인의 신체 부위를 만지는 것을, 발은 육체적으로나 은밀한 장소로, 또는 정신적·감각적으로 그 길을 밟는 것을.

5. 우리가 이처럼 행하고, 마땅한 고백과 필요한 겸손, 그리고 마땅한 선한 마음가짐으로 스스로를 지키면, 용은 패배하고, 간사한 자는 마음에서 쫓겨날 것이며, 멀리 서서 이를 갈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온통 악의로 가득 찬 자는 아무리 많이 패배하고 쫓겨나더라도 결코 낙담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영혼은 기뻐하고 용기를 얻으며, 빛 가운데서 가장 높고 지극히 숭고한 관상 속에 머물며, 신성하게 숭배받고 천상의 존재가 되어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올라갑니다. 만약 영혼이 앞서 말한 것과 반대로 행동한다면, 그에 상반된 결과를 겪게 되는데, 즉 패배당한 그 정욕에 사로잡혀 노예가 되고, 악한 생각들로 어두워지며, 고통받고 괴로워하며 악의 심연으로 내려가게 되고, 어디에서도, 무엇에서도 평안을 찾지 못하며, 이미 이 세상에서 미래의 세기에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슬픔의 열매를 맛보게 된다.

6. 그러나 우리가 결코 그런 일을 겪지 않도록 합시다. 우리가 죄의 유혹에 휩쓸리지 않도록 하고, 만일 그런 일이 생기면 지체 없이 그것을 잘라내어, 상처를 입힌 화살처럼 내던져 버리고, 상처 입은 곳은 회개의 약으로 치료해야 한다. 눈이 죄를 지었든, 귀가 죄를 지었든, 손이 죄를 지었든 간에, 그 후에는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성 없는 동물들조차 어떤 곳에서 한두 번 미끄러진 후에는, 같은 재앙에 빠지지 않기 위해 그곳을 피하거나 조심스럽게 우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귀하게 지음받고 지혜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은 자로서, 과연 이성 없는 피조물보다 더 나쁘게 되어, 죄를 일으킨 바로 그 정욕을 사랑하고, 넘어졌던 바로 그 벼랑과 그 구덩이를 다시 찾게 될 것인가? 그것은 끔찍하고 비참한 일이 될 것이다. 아니요, 우리는 지혜로운 자들답게 지혜롭게 행하고, 순결한 자들답게 동정처럼 살며, 외부의 유혹 앞에서도 더 강하고 굳건하게 서도록 합시다. 온갖 방법으로 스스로를 지키며, 그로 인해 정욕의 공격 앞에서 무적의 상태를 유지하는 영혼은 불도, 칼도, 짐승도, 왕들도, 권세자들도, 슬픔도, 궁핍도, 박해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언제나 이렇게 외칠 준비가 되어 있다: “땅이 흔들리고 산들이 바다 한가운데로 무너져 내려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시 45:3). 내면의 유혹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면, 외부의 유혹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172. 우리의 일상은 수도 생활의 규칙과 수도원 순종의 규율에 따라 살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어야 한다.

172. 1) 우리의 임무는 수도 생활의 규칙과 수도원의 순종 질서에 따라 살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어야 한다. – 2) 원수는 너희의 이러한 품행과 고요함을 보고, 너희에게 접근할 길을 찾지 못해 분통을 터뜨린다. – 3) 그러니 용기를 내어 원수에게 맞서고, 그의 속삭임을 듣지 마십시오. 오히려 여러분의 수호천사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2, 107]

7.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이루는 것이다” (요한복음 4, 34). 형제들아! 그분은 우리에게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권세를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 우리의 양식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확히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 너희는 이미 너희가 한 서원을 지키며 살아온 이전의 삶으로 이를 보여주었으니,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대답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살아가십시오. 기꺼운 인내로 절제의 수고와 순종의 무거움, 기도로 인한 지침, 눈에 보이지 않는 생각의 화살, 정욕의 불길, 낙담으로 인한 어둠, 시기심에서 오는 상처, 그리고 우리 영혼을 파멸시키는 마귀가 우리를 지옥의 심연으로 떨어뜨리려고 시도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계속 견뎌내십시오.

8. 담대하십시오. 마귀는 공격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여러분 안에서 물리쳐질 뿐, 여러분을 쓰러뜨리지는 못합니다. 그가 여러분이 얼마나 평화롭고 변함없이 삶을 살아가는지를 보고 이를 갈지만, 여러분에게 해를 끼칠 수는 없습니다. 그는 여러분 안으로 침입하여 여러분의 영혼을 파멸로 끌고 가려고 애쓰지만, 여러분이 주님의 율법으로 성벽처럼 둘러싸여 있음을 보고 들어올 틈을 찾지 못합니다; 그물은 치고 짐승 사냥용 매복을 설치하며, 여러분을 그곳으로 유인하려 애쓰지만, 이를 이루지 못하고는 여러분이 고백을 통해 그의 모든 계략을 무력화시키는 것을 보며 악의에 찬 분노로 몸부림칩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강하고, 계명을 지키는 데 힘쓰며, 우리 삶의 모든 관례가 실천되고, 참회가 기꺼이 받아들여지고 이행되는 곳에는 그에게 설 자리가 없습니다.

9. 그러므로 기뻐하고 용기를 내며,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고 담대해지며, 굳건히 서서 힘을 내십시오. 결코 광란하는 악마에게 들어올 틈을 주지 말고, 결코 이 교활한 뱀이 여러분의 영혼 귀에 속삭이는 것을 허용하지 마십시오. 만일 그가 다가온다면, 그를 쫓아내고 물리치십시오. 그가 첫 번째 인간을 어떻게 유혹했는지, 그리고 지금도 그의 유혹에 넘어가는 자들을 어떻게 유혹하고 있는지 아실 것입니다. 그는 아무리 겉으로 보기 좋게 위장되어 있더라도 오직 악한 것만을 심어줍니다. 그것은 오만이나 시기, 육신의 정욕, 절제하지 못함, 그리고 영혼을 더럽히는 모든 것으로 이끄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여러분의 생명의 수호자가 여러분에게 선하게 상기시켜 주시는 말씀에 더욱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분은 순결하고, 용감하며, 모두가 본받을 만한 생각들, 죽음에 대한 생각, 다른 삶으로의 넘어감에 대한 생각, 미래의 영원한 복에 대한 생각, 그리고 그와 정반대인 끝없는 고통에 대한 생각, 또한 어떻게 하면 전자를 얻을 수 있는지, 후자는 어떻게 피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이를 끊임없이 묵상함으로써 여러분이 선행에 점점 더 확고해지고, 우리에게 정해진 생의 끝이 올 때까지 우리 주 하느님의 길을 더욱 열성적으로 걸어가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우리가 기쁘게 섬기는 주님께서 우리를 이곳에서 영원한 안식으로 인도하시기를 바랍니다.

 

173. 영혼을 가꾸는 일은 땅을 경작하는 것처럼 특별한 시간이나 준비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언제든지 편리하며, 필요한 모든 준비는 악을 모두 억누르고 선을 모두 돕고자 하는 소망과 결심에 달려 있습니다.

173. 1) 영혼을 가꾸는 일은 땅을 경작하는 것처럼 특별한 시간이나 준비가 필요하지 않다. 그것은 언제든지 할 수 있으며, 필요한 모든 준비는 모든 악을 억누르고 모든 선을 돕고자 하는 소망과 결의에 달려 있다. – 2) 그러니 우리도 이를 실천합시다. 찾고 얻어내며, 밀고 나아가자 열렸던 길을 닦았던 선조들을 본받아 봅시다. [2, 110]

10. 영혼을 가꾸는 데는 땅을 경작하는 것과는 달리 언제든지 적합하다. 여기에는 소도, 쟁기도, 그 밖의 농기구도 필요하지 않다. 오직 하나의 의지와 전심전력의 소망만이 필요할 뿐이며, 이를 통해 선한 씨앗이 뿌려지고, 영원한 기쁨과 안식을 위한 좋은 열매가 거두어진다; 이는 낮뿐만 아니라 밤에도, 아침과 정오에도, 먹고 마실 때와 앉고 일어설 때, 대화할 때와 침묵할 때, 걸을 때와 서 있을 때, 무언가를 할 때와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에도, 우리가 마땅히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다면 가능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가 자신의 생각에 휩쓸려 방황하거나 유혹받지 말고, 마음이나 몸으로 이리저리 휩쓸리지 말아야 하며, 육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려 하지 말고, 그로 인해 서로 다투거나 싸우지 말아야 하며, 불순종과 불평에 빠지지 말아야 하고, 허영과 교만, 그리고 무모하게 자신의 뜻을 관철하고 우위를 차지하려는 유혹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이 주님과 함께 머물며, 마땅한 것을 생각하고, 겸손하고 통회하며, 마주치는 모든 슬픈 일을 순순히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11. 형제들아, 우리 구원의 날들이 무위, 나태, 그리고 게으름 속에서 지나가게 내버려 두지 말고, 우리 삶의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맙시다. 오히려 미덕을 쌓는 일에 힘쓰고, 하늘의 축복이라는 부를 얻으며, 우리의 성스러운 선조들이 행했던 지혜로 지혜를 얻어, 하루도 한 시간도 헛되이 낭비하지 않고, 확고하고 열심히 영혼의 정화와 정욕을 몰아내며 선한 성품을 받아들이는 데 전념하며, 수고와 땀을 아끼지 않고 온 마음을 다해 유일한 하나님을 찾았던 그 지혜로 말입니다. 그들은 찾고 얻었으며, 두드리니 그들에게 열렸습니다. 사랑의 문, 진리의 문, 그리고 무정욕의 길로 그리스도께 이르는 입구가 그들에게 열렸고, 그들은 들어가 시들지 않고 영원한 기쁨과 즐거움을 얻었습니다. – 그러니 구원을 받을 자들아, 오라. 우리 조상들의 길을 따르자. 그들이 우리에게 남긴 유언을 지키고, 우리 마음을 깨끗하고 흠 없이 보존하자. “교활한 자들을 시기하지 말며,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부러워하지 말지니, 그들은 풀처럼 금세 시들고, 풀의 꽃처럼 금세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시 36:1-2). 수가 많으나 부주의하게 사는 자들을 바라보지 말고, 수는 적으나 구원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열심을 내는 자들을 바라보자. 그런 이들을 본받아, 그들의 덕행의 발자취를 따르고, 그들의 눈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며, 그들의 마음으로 모든 것을 분별하고, 그들의 입으로 말하며, 나아가 그들의 몫인 복되고 기쁨이 넘치는 삶을 누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174. 세상을 떠나 서원을 하고 수도원에 들어와 하느님께 기쁨을 드리는 삶을 살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여러분을 이 길로 부르신 주님께 감사드리되, 말로만이 아니라 여러분이 선택한 삶의 실천으로 감사드리십시오. 이것이야말로 세상에 대한 승리입니다.

174. 1) 세상을 떠나 서원을 하고 수도원에 입회함으로써, 하느님께 기쁨을 드리는 삶을 살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여러분을 이 길로 부르신 주님께 감사드리되, 말로만이 아니라 여러분이 선택한 삶의 실천으로 감사드리십시오. 이것이야말로 세상에 대한 승리입니다. – 2) 주님께서는 고난과 십자가와 죽음을 통해 승리하셨으며, 우리에게 완전한 승리로 가는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분을 따르며 사도들이, 그다음 순교자들이, 그다음 성인들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세상에 승리했습니다. – 3) 이것이야말로 하느님께 이르는 길이며, 이 길을 걷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 4) 고난을 당한다고 해서 놀라지 말고, 오히려 기뻐하며 용기를 내십시오. [2, 111]

12. 여러분이 경건하게 행하고 하나님을 닮은 삶을 살며, 주님의 모든 계명을 이행하고, 위선 없이 수도 생활을 지키는 것을 듣고 보는 것보다 나에게 더 바람직하고 기쁜 일은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 수도 생활을 통해 영으로 다시 태어났고, 그로 인해 과거의 죄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보이는 적과 보이지 않는 적에 맞설 힘의 영을 받았으며,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의 거룩한 계명을 지키는 데 있어 마주치는 모든 일을 두려움 없이 맞설 수 있게 되었으니; 그러니 여러분을 부르신 주님을 감사하고, 찬양하며, 노래하십시오. 그분께 드릴 보답은 다름 아닌, 여러분의 수도 생활에 인내하며 머무는 것과, 지금까지 잘 수련해 온 것처럼 앞으로도 더욱 굳건히 서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불태우는 것뿐입니다. 주님께서는 매일 여러분을 위해 면류관을 엮어 주시니, 선한 뜻으로 우리에게 명하신 것 중 그 어떤 것도 바꾸기보다는 차라리 모든 것을 기꺼이 견뎌내겠다는 굳은 결심을 품으십시오. 주님의 계명은 영생이며, 이를 어기는 것은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를 고백하고, 진리에 반대하는 자들과는 타협하지 말아야 하며, 이를 위해 세상의 온갖 이득과 왕들, 주교들,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서 얻는 영광과 명예를 기꺼이 희생해야 합니다. “누가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자기 영혼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마태복음 16:26)라고 기록된 대로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굳건함과 우리의 투신이다.

13. 그러나 “용기를 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니,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요한복음 16:33). 그분은 우리도 그분을 따라가며 세상을 이기게 하려고 이기신 것입니다. 하나님으로서 그분은 언제나 세상의 승리자이시나, 지금 특별히 말씀하시기를, 사람으로서 이겼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곧바로 그분을 따라 사도들이 세상을 이겼고, 그 뒤를 이어 순교자들이, 그다음에는 성인들이, 그리고 경건하고 하나님을 닮은 삶을 살았던 모든 이들이 세상을 이겼습니다. 그러나 이 승리는 주님 자신과 그분의 성도들에 의해 어떻게 얻어졌는가? — 투쟁 없이? 고난 없이? 피 흘림 없이? 추방 없이? — 아니다. 그런 것들 없이는커녕, 오히려 십자가와 죽음을 통해 얻어졌다. 주님께서 받으신 모욕과 비방, 조롱에 대해 아실 것입니다. 그분은 배반당하고, 정죄받고, 귀를 뚫리고, 침을 맞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부활하셔서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도들도 고난을 겪었습니다. 순교자들의 고통과 고난을 누가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경건한 이들의 위업과 희생은 또 어찌하겠습니까?

14. 하나님의 말씀은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들은 모두 박해를 받을 것이나, 악한 자들은 더욱 번성하여 남을 미혹하고 또 미혹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딤후 3:12). 천국으로 이끄는 길은 좁고 고된 반면, 멸망으로 이끄는 길은 넓고 평탄하다(마태복음 7, 14). 이 후자의 길에는 세상의 기쁨과 육신의 쾌락과 달콤함, 하나님의 율법을 경멸하는 태도, 죽음에 대한 무관심, 인간적인 두려움이 따르며; 전자의 길에는 세상으로부터 오는 고난과 자발적인 수고, 온갖 종류의 결핍이 따르는데, 사도가 그 길을 걷는 자들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듯이: “핍박을 받고, 슬픔에 잠기고, 모욕을 당하며,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의 깊은 구덩이에서 방황하는 자들”(히브리서 11:37). 그리고 그 길을 고통 없이 걸어간 성도는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15. 그러므로 슬픔을 마주할 때 놀라지 말고, 오히려 그 슬픔이 여러분을 비껴가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점점 더 뜨겁게 타오르게 하여, 이를 통해 정욕을 죽이고 악마들을 쫓아내십시오. 오직 한 분만을 사랑하는 자는 다른 모든 것을 뒤로 미루며, 오직 한 분만을 경외하는 자는 그 누구도 두려워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모신 자는 모든 이보다 높습니다. 건전한 지혜를 갖추고, 경건함을 지키며, 모든 이를 위해 기도하고 간구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가운데 계십니다.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 그분이 계시다면,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여러분이 이토록 많은데, 어떻게 그분이 여러분 가운데 계시지 않으시겠습니까?

 

175. 잠시 자리를 비우며, 상사와 부하들에게 규율에 따라 행동하고 생활할 것을 요청하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지시한다

175. 1) 잠시 자리를 비울 때, 상사와 부하 직원들에게 규정에 따라 행동하고 생활할 것을 요청하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지시한다. – 2) 이를 독려하기 위해 특히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보시고, 모든 것에 대해 심판하실 것임을 강조한다. [2, 112]

16. 잠시 자리를 비울 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여러분께 부탁드립니다. 제가 없는 며칠 동안 순종과 겸손으로 평소의 공동체 규율을 지켜 주십시오. 지도자들은 독단적으로, 거만하게, 상인처럼, 혹은 그 어떤 다른 인간적인 방식으로도 행하지 말고, 하나님을 닮은 방식으로, 유익하게, 구원을 주는 방식으로, 마치 하나님께서 보시고 심판하실 분들로서, 말과 행동의 모든 면에서 그분께 답변해야 할 자들처럼 행하십시오. 부하들과 수련생들은, 제 대리인이나 다른 지도자들로부터 지시받은 바를 순종하며 불평 없이 이행하십시오.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니, 빛의 자녀들로서 행하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어린 양들이니, 그분의 어린 양들처럼 온유하고 겸손하게 먹이를 먹으라. 아무도 난동을 부리거나, 정욕의 가시덤불을 먹으며 염소 새끼처럼 뛰어다니지 말라; 누구도 유다처럼 행하지 말라. 형제들 앞에서는 마치 형제인 양 지내다가, 뒤에서는 자기 영혼을 파멸로 이끄는 배반을 꾀하는 자처럼; 누구도 에서처럼 되지 말라. 자신의 구원을 경멸하고 그 특권을 도둑질한 음식과 음료 한 끼에 팔아넘기는 자처럼. 아무도 이리저리 어슬렁거리며 빈둥거리지 말고, 다른 형제들이 낮의 무더위와 밤의 추위를 견디며 열심히 일할 때, 문지기나 병원, 구두 수선소, 목공소, 혹은 다른 어떤 봉사에 종사하든, 헛되이 하루를 낭비하지 말라. 사도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러한 자들은 “먹을 자격조차 없는 자들”(살후 3:10)이니, 이는 끔찍한 죄악이다.

17. 모두 하나님의 길로 걸어가라. 그러나 악한 모의와 헛된 계략을 꾸미기 위해 은밀한 곳에는 너희 발이 닿지 않게 하라. 이는 “주님의 눈은 어둠 속에서도 해보다 더 밝게 너희의 모든 길을 꿰뚫어 보시며”, “은밀한 곳에서도 살피시기” 때문이니라(시라 23, 27). 그러므로 비록 네가 숨겨진 곳에 있다 할지라도, 그곳에서도 쉬지 않는 눈이 너를 보고 있으니, 누구와 함께 서 있는지,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는지, 무엇을 하는지 모두 꿰뚫어 보고 있다. 그러니 주의하라. 그 눈이 네가 사탄과 대화하거나, 악한 일을 꾀하거나, 부끄러운 일을 행하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비록 주님께서 당장 네게 마땅한 보응을 내리시지는 않으시더라도, 온갖 방법으로 네 죄를 기록하고 네 타락을 명명하도록 명하실 것이니, 분명하고도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네게 이렇게 선포하실 것이다: “네가 이를 행하였으나 내가 잠잠하였으니, 네가 불법을 자행하였도다. 마치 내가 너와 같을 것처럼, 내가 너를 책망하고 네 죄를 네 눈앞에 드러내리라” (시 49:21). 이것이 심판의 날이다. – 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의 손에서 우리가 어디로 도망칠 수 있겠는가? 우리가 행한 악한 일 중 드러나지 않을 것이 있겠는가? 그러니 그런 생각조차 하지 마십시오. 모든 일에서 구원을 이루고 하나님께 기쁘시게 하는 일을 행하십시오. 그리하여 주님께서 여러분을 보시고 기뻐하시며 즐거워하시고, 생명의 책에 여러분의 선한 행실을 기록하시며, 만물이 드러나는 날에는 시들지 않는 영원한 의의 면류관으로 여러분을 관冕하시기를 바랍니다.

 

176. 산을 바라보며 용감하게 서서, 신성한 묵상을 화살처럼 삼아 구원의 적들을 물리치라

176. 1)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며 용감하게 서서, 신성한 묵상을 화살처럼 삼아 구원의 적들을 물리치라. – 2) 정욕에 사로잡힌 자는, 그에 굴복했을 때 겪게 될 수치와, 악을 선으로 포장하여 너를 유혹하는 적에 대해 생각하며, 결코 굴복하지 마라. – 3) 그리고 일반적으로 내면의 움직임으로 네 곁에 있는 영이 선한지 악한지를 분별하고, 선한 영의 말만 듣고 악한 영은 물리쳐라. [2, 114]

18. “진리로 허리를 동이고, 평안의 복음을 전할 준비를 하여 발에 신을 신은 채”(엡 6, 14.15) 허리를 진리로 띠고, 발에 평안의 복음을 전할 준비를 하고, 위를 바라보며, 하늘을 향해 나아가고, 하늘의 것을 찾으며, 마음을 하늘에 두고, 육신을 떠나는 일과 훗날 심판자께 뵙게 될 일, 그리고 그분 앞에서 할 대답을 염두에 두라. – 하나님의 성경과 성인들의 생애를 연구하며, 발견한 영혼에 유익하고 구원에 이르는 것들을 화살처럼 원수를 향해 쏘아라.

19. 정욕에 시달리는 자는 낙심하지 말고 그 정욕에 굴복하지 말라. 이는 “주님께 부르짖는 모든 이에게 주님께서 가까이 계시니”(시 144:18), 찾고 있는 영혼은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시라 6:16에 비유됨); 오직 굳건히 서서 탄식하고 신음하며,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들어 올리며 눈물을 흘리고, 가슴을 치며, 죄악된 행위가 덮고 있는 수치를 생각하라. 이는 두려운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사람들 앞에서도 그러하니, 이를 통해 죄에서 멀어지고 선을 굳건히 지키라. 무엇이 기록되어 있느냐? “아들아, 주님의 징계를 경홀히 여기지 말라. 그로 말미암아 약해진 자도 책망받지 아니하리라.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며, 받아들이시는 모든 아들을 채찍질하시느니라” (잠언 3:11, 12). 또 다른 곳에서는? “재앙이 닥칠 때 슬퍼하지 말라” (시라 2, 2). 이는 주님께서 우리의 사랑을 시험하시는 것이니, 우리가 그 사랑 안에서 굳건한지, 주님의 사랑을 수치스럽고 재앙을 불러오며 치명적인 달콤함—맛은 달콤하나 삼키면 끔찍하게 쓴—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지, 우리 영혼을 파멸시키는 자가 보여주는 것과는 달리: 빛인 척하지만 실은 어둠이며, 겉보기에는 영적인 사랑을 가장하지만, 실상은 가장 극악한 증오이다. 그러니 너, 그리스도의 전사여, 그의 속셈이나 악랄한 계략을 알지 말라. 생명을 원한다면 빛을 구하라. 하나님과 그분의 계명이 곧 빛이기 때문이다.

20. 네 영혼의 상태에 따라, 누가 네게 다가왔는지 분별하라. 우리 편인가, 아니면 원수 편인가? 만약 네 영혼이 평온하고 흔들림 없이, 하늘의 묵상을 소홀히 하지 않으며 우리에게 예비된 복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 차 있다면, 좋으니 그에게 마음의 문을 열고, 그를 받아들이며 그와 함께 저녁을 보내라. 그리하여 그가 너를 더욱 하나님과 신성한 것들을 사랑하도록 채워 주게 하라. 그러나 그의 가까움이 네 영혼을 혼란스럽게 하고, 온갖 생각들로 가득 채우며, 네 눈을 육신과 피, 세속적인 유대와 집착, 그리고 눈앞의 쾌락으로 돌리게 하여, 네 영혼을 광란에 빠지게 하고 마치 정욕의 달콤함으로 끓어오르게 한다면, 아아! – 멀리 물러서서 이 용을 쫓아내라. 그는 단 한 순간에 네 오랜 수고와 수행자의 노력, 수많은 눈물, 기도와 용맹한 투쟁, 그리고 원수들을 이겨낸 승리를 순식간에 없애버리려고 왔다. 그리스도의 전사 인 너를, 정욕의 순간적인 쾌락의 전리품으로 만들려고 왔으며, 그토록 용맹한 남자를 죄의 쾌락으로 흠뻑 젖은 독이 든 잔을 마시게 하여 영원히 죽이려고 왔다. – 나는 이 글을 냉정한 사람이 아니라, 유혹을 겪은 사람으로서, 더 나아가 정욕에 사로잡힌 사람으로서 쓴다. 어떤 것은 읽은 것에서, 어떤 것은 아버지의 가르침과 다른 많은 이들에게서 들은 것에서 알게 되었다.

 

177. 원수의 작동으로 인해 많은 정욕이 우리를 공격한다. 영적 전신 갑주를 입은 채로 싸워야 한다.

177. 1) 원수의 작용으로 인해 많은 정욕이 우리를 공격합니다. 영적인 전신 갑주를 두르고 싸워야 합니다. 2) 이러한 무기들 중에서 신성한 진리를 아는 것은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며, 이는 가르침을 듣는 것을 통해 얻게 되는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를 너무나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3) 이 때문에 우리는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악한 것에 매달리지만, 단지 원하기만 하면 하루 종일 단 한 가지 마땅한 일만 할 수 있습니다. 4) 그러니 이제부터 그렇게 행하십시오. [2, 115]

21. 여러분의 고된 삶 속에서 용감하게 버티십시오. 낮의 폭염과 밤의 추위를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견뎌내십시오. 그러나 정신적으로 더 많이 견뎌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는 칼데아의 용광로보다 더 뜨겁게 타오르는 정욕의 불이, 보이지 않는 나부코도노소르에 의해 지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정욕들도 우리를 공격하며, 서로 맞서 가련한 영혼을 휩쓸어 갑니다: 분노, 격노, 원한, 교만, 나태, 방종, 집착, 자만, 그리고 모든 악 중에서 가장 큰 것인 불신. 우리에게는 많은 용기와 너그러움, 게으르지 않은 굳건함과 힘, 인내, 온화함, 맑은 정신과 기민함이 많이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를 향해 솟아오르는 유혹과 마귀의 교활함을 물리치고, 정욕이라는 바알 앞에 무릎을 꿇지 않으며, 정욕의 형상을 숭배하지 않고, 정성껏 모은 것을 망치지 않으며, 하나님의 도움으로 이룬 것을 파멸시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앞서 말한 정욕들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온 마음을 다해 주님께 의지하고, 우리에게 적대적인 세력을 물리치기 위한 모든 영적 무기를 갖추지 않고서는 어떻게 피할 수 있겠습니까?

22. 이 영적인 무기들은 곧 기도와 소망, 겸손과 순종, 사랑과 믿음, 편견 없음과 세속적인 모든 것에서 벗어난 온전한 마음의 전환, 구원에 대한 끊임없는 가르침과 대화, 모든 것을 무관심하거나 무분별하게 바라보거나 듣지 않는 태도, 입과 손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 하나님의 경외심과 하나님에 대한 묵상으로 끊임없이 스스로를 지키며, 장차 올 복에 대한 억제할 수 없는 갈망: 만일 우리 안에 이것이 없다면, 어떻게 우리가 죄의 파멸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 우리를 미워하는 원수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아아! 우리가 얼마나 많이 듣는가? 성경은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일깨워 주는가? 신성한 성부들은 얼마나 많이 가르치는가? 그러나 우리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그것에 대해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 농부가 땅 위에 뿌린 씨앗이 쟁기가 그것을 땅속으로 가리기 전에 새들에게 훔쳐가는 것처럼, 교활한 원수의 새들이 마치 우리 입에서 훔쳐가듯 신성한 말씀을 빼앗아 가니, 영적인 씨앗들은 우리 안에서 무용지물이 되고, 우리 또한 덕의 열매를 맺지 못한 채 불모의 상태로 남게 된다. 성부들이 우리에게 정절과 용기, 진리, 혹은 다른 어떤 미덕에 대해 장황하게 설교할 때, 우리는 듣자마자 마치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그와 정반대의 행동을 보인다면, 이것 외에 무엇을 더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우리에게 심판과 눈물에 대해 설교하지만, 우리는 밖으로 나가자마자 웃고 떠들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순결에 관한 엄한 말로 우리의 영혼을 다스리려 하지만, 우리는 그 말을 듣자마자 음탕한 욕망에 사로잡혀 서로를 음란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가장 뻔뻔한 말들을 내뱉고 받아들입니다. 우리에게 겸손과 순종을 권면하지만, 우리는 그에 대한 대화가 끝나자마자 거만해지고, 난폭하게 굴며, 불순종한다. 절제를 권면하지만, 우리는 과식하고; 기도를 권면하지만, 우리는 곧바로 잠에 빠져들고; 온유함을 권면하지만, 우리는 곧바로 격분하며; 침묵을 권하면 우리는 헛소리를 늘어놓고, 노동을 더 하라고 하면 우리는 회피한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마치 일부러라도 가르침이 지시한 길과 정반대의 길로 향하는 듯하다. 그리고 내가 말하는 것은 초보자들뿐만 아니라, 스스로 무언가 된 듯이 여기는 자들과, 어떤 분야에서든 지도자로 부름받은 자들, 그리고 성직자로 임명된 자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 아아! 우리는 유혹자 사탄에게서 무엇을 고통받고 있는가?

23. 우리는 왜 살아 계신 하나님, 그 지극히 높고 닿을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부터 얼굴을 돌리고, 헛되고 금세 사라질 것들에로 향하는가? 왜 가장 달콤하고 영원한 것을 버리고, 쓰라리고 일시적인 것을 사랑하며 흠모하는가? 분명 우리 영혼의 눈과 귀가 정화되지 않았기에, 참된 선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그 선을 누릴 기회를 스스로 박탈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오라, 비록 이미 완전히 기력이 쇠약해졌더라도 다시 일에 착수하자. 비록 이미 완전히 죽어버렸더라도 다시 살아나자. 비록 이미 거의 잠들어 버렸더라도 다시 깨어 있자. 우리가 단지 소망하기만 한다면,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 바로 그날, 우리가 선한 결심을 굳게 다지는 순간, 우리는 구원의 경지에 도달할 것입니다. 우리는 세속적인 일들에 얽매여 선한 행위에 착수하기 어려운 처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기만 한다면, 하루 종일 구원의 일에 전념하는 것이 우리에게 편리합니다. 아침에는 다윗의 찬송을 지혜롭게 부를 수 있습니다. “내일 아침에 내 목소리를 들으소서, 내일 아침에 내가 주 앞에 나아가리니 주께서 나를 보시리라” (시 5:6); 제3시에는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시 50:13); 여섯 시에는 “정오의 악마의 공격과 낮에 날아오는 화살로부터 나를 구원하소서” (시 90:5); 아홉 시에는 “주여, 귀를 기울여 나를 들으소서” (시 85:1); 저녁에는: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라...” 그리고 그 뒤를 잇는 구절들(시편 103, 1). 우리가 매일 이렇게 행하고, 서로를 격려하며, 선한 말과 행실로 깨우쳐 주고, 무심한 무관심과 헛소리로 느슨해지거나 어둡게 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니, 아침부터 저녁까지 마땅히 해야 할 한 가지 일을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매우 주의 깊게 듣는 말이라도 무분별한 말이나, 부적절한 소망, 혹은 그 밖의 어떤 정열적인 충동에 휘둘리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 드리는 통곡하는 기도를 통해 그 죄를 씻어낼 수 있다. 이처럼 날마다 지내며, 우리는 하나님의 길을 걸어가며, 육신으로부터 해방될 때를 기다릴 것이니, 그 뒤에는 주님을 위해 수고하고 자신을 단련하는 모든 이에게 면류관과 기쁨, 그리고 즐거움이 따를 것이다.

24. 그러므로 너희의 수고와 노력, 그리고 투쟁에 주의를 기울이라. 안일함을 떨쳐내고 부지런한 열정을 품으라. 원하는 자라면 누구나 선한 삶을 살며, 완전함에 이르러 온갖 미덕으로 단장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이 빛이시며, 생명이시며, 진리이시라면, 어떻게 그분을 간절히 사모하며 그분과의 살아있는 교제를 구하고 이를 이루지 않겠는가? 그리고 사탄이 진실로 죽음이며, 거짓이며, 파멸이라면, 그의 유혹에 기울어지는 것이 어찌 죽음과 어둠, 파멸이 아니겠는가? 이처럼 우리 각자에게는 생명과 죽음이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생명을, 빛을, 불멸을 갈망하며, 어둠과 암흑, 파멸로부터 물러나,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천국을 누릴 자격을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178. 여러분은 이제 성 대사순절을 잘 지내셨고 영적인 열매로 풍성해졌습니다... 그러니 스스로를 엄격히 살피며 그 열매를 간직하십시오

178. 1) 여러분은 이제 성 대사순절을 훌륭히 마쳤으며 영적인 열매로 풍성해졌습니다. 2) 그러니 특히 부활절 기간 동안, 규정에 따라 일정한 위안이 허용되는 때에도 스스로를 엄격히 경계하며 그 열매를 간직하십시오. [2, 116]

25. 여러분은 성 사순절 기간 동안 선한 행실로 힘써 왔습니다: 힘닿는 대로, 나아가 그 이상을 다해 금식하셨고, 경건한 기도를 마땅히 드렸으며, 절제 있게 교훈을 받았고, 게으름 없이 일했으며, 마음을 순결하게 지키고, 혀는 비난에서, 입은 헛된 말에서, 그리고 온몸의 모든 지체를 온갖 죄에서 지켜, 그것들을 의의 도구로, 경건하고 하느님께 기쁨을 드리는 삶의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훌륭하고 유익하게 금식 기간을 보내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여러분이 자신과 삶의 일에 대해 엄격히 주의를 기울였기 때문이며, 무엇보다도 그로 인해 이끌어낸 하나님의 특별한 자비 덕분입니다. 그 자비로부터 “모든 선한 선물과 모든 완전한 선물”이 비롯된다고 기록되어 있듯이(야고보서 1:17). 이처럼 여러분은 삶에서 성공을 거두었고 영적인 열매로 풍성해졌습니다.

26. 그러니 여러분의 부가 안전하게 보존되고, 영적 복의 보물창고가 원수의 탐욕스러운 중상모략에 닿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생애가 끝날 때까지 은혜 위에 은혜, 풍요 위에 풍요가 여러분에게 주어지기를 빕니다. – 그러하리라, – 그러나 어떻게? – 앞으로의 시간 동안, 특히 규정에 따라 시편 찬송, 평소 기도 시간, 무릎 꿇고 드리는 기도, 강화된 야간 기도 등이 중단되고, 식사 시에는 포도주, 올리브유, 삶은 음식 등이 허용되며, 낮잠, 하루 두 번의 식사, 산책 및 그 밖의 것들이 허용되는 시기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깨어 있지 않고 모든 일을 규율에 따라 엄격한 주의를 기울여 행하지 않는다면, 그는 힘들게 이룬 선한 것을 망치고, 부유한 사람을 가난하게 만들며, 영광의 높은 곳에서 불명예스러운 몰락의 구렁텅이로 내던져질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간청하고 간곡히 부탁하노니, 이곳의 적들과 미끄러운 우연들로부터 벗어나, 타락과 도둑질로부터 안전한 곳으로 옮겨갈 때까지 마치 갇힌 것처럼 스스로를 엄격히 다스리십시오.

 

179. 원수의 유혹에 귀를 기울이지 맙시다: 우리 조상은 그 유혹에 귀를 기울였고, 낙원에서 쫓겨났습니다

179. 1) 원수의 유혹에 귀를 기울이지 맙시다. 우리 조상은 그 유혹에 귀를 기울였다가 낙원에서 쫓겨났습니다. – 2) 원수는 어떤 경우든 우리에게 자신의 유혹을 내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를 물리칠 준비를 합시다. [2, 117]

27. “자신을 비우고 깨달으라, 내가 곧 하나님이니라”(시 45,11).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모든 것을 비우고 오직 한 가지에 전념하는 훈련이 요구된다. 우리 삶의 여정에서 필요한 것은: 끝없이 선을 갈망하는 마음, 꺾이지 않는 절제, 굳건한 인내, 그리고 우리의 원수이자 대적들에 대한 끊임없는 대항이다. 이는 언제나 우리 곁에 마음속의 야수들, 곧 우리 영혼을 빼앗는 악마들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며, 그들로부터 죄와 불의, 온갖 부도덕함이 비롯된다. 그러므로 누구도 게으름으로 인해 수고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되며, 누구도 쾌락과 자만심에 이끌려 제멋대로 이리저리 방황해서는 안 되고, 모든 일에서 주님의 계명에 순종해야 하며, 낯선 유혹에 따르지 말아야 한다.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듣는다. 낯선 이의 목소리는 따르지 아니하니, 낯선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0:27, 5).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는 마귀가 설 자리가 없다. 그분의 목소리가 양들을 부르는 곳에서는 뱀의 쉿쉿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우리의 조상 아담도, 영혼의 귀를 맑게 간직하고 있을 때만큼은 신성한 음성을 들으며 낙원 안에 머물며 높은 경지의 관조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뱀의 속삭임을 받아들이고 죄의 나무 열매를 맛보자마자, 즉시 벌거벗은 수치를 느끼고 하나님 앞에서 숨었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당신의 음성을 듣고 숨었습니다. 제가 벌거벗었기 때문입니다.” 오 아담아, 누가 네게 이 두려움을 심어주었느냐? 그리고 누가 네가 벌거벗었다고 알려주었느냐? – 교활한 귀와 하나님의 계명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 후 그는 그 복된 곳에서 쫓겨났고, 이 세상에서 수고와 슬픔, 결핍을 겪게 되었다. – 그러니 앞으로는 뱀의 유혹을 멀리하자.

28. 그 악의적인 계략으로 준비된 정욕의 유혹을 받아들이지 맙시다. 각기 다른 약을 담은 그릇들을 준비한 이 모든 불법의 역겨운 주동자는, 어떤 성자(성 마카리오스 대성인)가 보았듯이, 우리 각자가 어떤 정욕에 더 취약한지 살피고, 그에 상응하는 약을 각자에게 내밀어 먹게 한다; 그것을 맛본 자는 정욕에 불타오르게 됩니다. 어떤 이에게는 음행의 독약을, 다른 이에게는 시기심, 또 다른 이에게는 탐식, 또 다른 이에게는 독선, 또 다른 이에게는 금욕주의를 주며, 한마디로 말해, 저에게는 이것, 이에게는 저것, 각자에게 맞는 것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언제나 이 광란의 원수가 가하는 이러한 공격을 물리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변함없이 영적으로 무장하여, 믿음의 갑옷과 겸손의 방패, 순종의 투구, 그리고 그 밖의 모든 미덕으로 이루어진 전신 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각자는 자신의 위치를 알고, 깨끗한 양심으로 그 위치에 맞게 행동합시다. 육체가 아니라 영으로 서로 사랑합시다. 눈은 아래로, 마음은 위로.

 

180. 금식은 우리가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절제할 때 하나님께 기쁘시게 여겨지나, 오직 육체적으로만 절제한다면 그분께는 기쁘시지 않다.

180. 금식은 우리가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절제할 때 하나님께 기쁘시게 여겨지나, 오직 육체적으로만 절제한다면 그분께는 기쁘시지 않다. 이 점에서 올바르게 행하도록 힘쓰라. [2, 120] 금식 기간이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으니, 스스로를 돌아보아 마땅히 행해야 할 모든 것을 다 이행했는지 살펴보십시오. 우리 모두가 거역하지 않는 순종과, 위선 없는 겸손, 통회하는 경건함, 끊임없는 기도,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눈물, 깊은 탄식, 흔들림 없는 믿음, 부끄러움 없는 소망, 온화한 순종, 모든 면에서의 절제—반항적인 말과 모욕적인 말, 거만함, 욕설, 그리고 자만심으로부터의 절제까지. – 절제는 이 모든 것을 요구하며, 이를 절제함으로써 우리는 진정으로 경건의 길을 걷고, 선한 행실로 분투하며 영원하고 형언할 수 없는 복을 소망한다. 만약 이에 반하는 것, 즉 불순종, 교만, 불평, 험담, 독단, 방종, 다툼, 잔인함, 증오, 분노 및 기타 추악한 정욕과 방탕함이 있다면, 비록 우리가 육체적으로는 금식할지라도 하나님께 기쁜 금식을 드리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부정하여 하나님께 기쁘시게 하지 못하고, 그분께 버림받는 것이 됩니다. 이를 깨달았으니, 주님의 모든 계명을 흠 없이 지키기 위해 힘쓰고, 모든 책망받을 만한 것, 부끄러운 것, 수치스러운 것을 버리며, 모든 일을 품위 있게 질서 있게 행하십시오. 선한 일도 말과 행동이 올바르지 않으면 선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지 말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십시오”(엡 5:17) – “선하고, 기쁘시게 하시고, 온전한”(롬 12:2) 뜻입니다.

 

181. 하나님의 계명과 공동체 서원을 이행하는 데 힘쓰라. 그리하면 주님께서 주시는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181. 1) 하나님의 계명과 공동체 서원을 이행하는 데 힘쓰라. 그리하면 주님께서 주시는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 2) 이것이 바로 우리 소명의 본질이자 그 소망이니, 순종을 이행하는 데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 3) 이 순종은 헛된 것이 아니니, 우리 가운데 누구도 사람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이를 받아들이시고 보답해 주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정신으로 힘쓰며, 너희 소명의 사명을 온전히 이루십시오. – 4) 그리하여 우리 조상들과 주님 자신을 본받는 자가 됩시다. – 5) 주님께서 너희를 이 일에 굳건히 세우시고 지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2, 123]

1. 간청하고 간구하노니,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소명에 굳건하고 흔들림 없이 서서, 하나님의 계명과 그분의 의를 실천하며; 항상 주님을 향한 가장 열렬하고 따뜻한 사랑 안에 머물며, 여러분의 마음에서 온갖 이질적인 정욕을 몰아내고, 여러분의 경건한 삶의 굳건함 속에서 힘을 얻어, 매일 더욱 부지런하고 절제 있게 지내며, 기도와 시편 찬양, 순종과 겸손, 섬김과 경건함,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일에서, 여러분의 구원을 이루는 데 있어 성공의 증거로, 수고와 투쟁 속의 이 끈기와 여러분의 삶이 땀으로 가득 찬 것을 받아들이십시오. 용기를 내십시오. 마침내 현재의 고통 대신 영원한 평화가, 현재의 슬픔 대신 끊임없는 기쁨이 여러분에게 비칠 것입니다. 사도도 바로 이 점을 통해 우리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시며, 현재는 일시적이고 썩어 없어질 것이므로 그것을 바라보지 말고, 미래는 영원하고 복되므로 그것을 바라보라고 권면하십니다(고린도후서 4:18).

2. 그러므로 우리가 천사 같은 수도복이라는 이 은총을 받았고, 영원한 생명과 썩지 않는 면류관을 갈망하며, 아들의 신분과 하늘나라를 간절히 사랑했으니, 이제 여러분 손에는 시간과 활동의 무대가 주어졌습니다. – 주저하지 말고, 힘을 아끼지 말자. 오히려 금과 은, 귀중한 보석과 그 밖의 썩어 없어질 보물을 찾는 이들보다 더 열정적으로, 온 마음을 다해 하늘나라와 하늘의 복을 얻기 위해 힘차게 나아가자. 이 일에서 성공하려면, 끊임없이 스스로를 성찰하고, 끊임없이 신성한 가르침을 배우며, 우리에게 주어진 순명을 최선의 방법으로 완수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순명은 육신적이나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훌륭하게 이행될 때 거룩하고 구원을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우리 가운데 누구도 육신과 피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주 하나님을 섬기며, 그분께서는 이를 기쁘게 받으시는 제물로 여기시고, 장차 올 세상에서 합당한 보상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누구도, 비록 가장 하찮은 순종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사람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형제들을 통해 자신을 받아들이시는 주님께 직접 섬기는 것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둠 속의 비밀을 보시고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시는”(고린도전서 4:5) 그분 자신을 감독자로 삼고, 경외와 떨림으로 그것을 이행하십시오. 우리 각자가 진정으로 그러하듯이 그렇게 생각하고, 서로를 위한 일을 신성한 섬김으로 행한다면, 우리는 우리 소명의 모든 사명을 온전히 이행하게 될 것이다.

4. 그러면 우리 안에서 모든 미덕의 빛—사랑, 평화, 온유, 온화함, 순종—이 비추게 될 것이며, 그때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 성스러운 선조들의 발자취를 따르며, 그들의 삶을 본받는 경쟁자가 되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그 복된 생애들, 그들이 순종과 복종의 길을 걸어간 모습, 그들의 겸손과 복종에서 드러난 탁월함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들이 주님을 얼마나 열정적으로 닮으려 애썼는지 기억하십시오. 주님께서는 친히 “나에게서 배우라. 나는 온유하고 마음이 겸손하니” (마태복음 11:29)라고 말씀하신 주님을 얼마나 열정적으로 닮아 나갔는지 기억하십시오. 사도의 말에 따르면, “하나님과 동등함을 취하려 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신을 낮추사 죽기까지,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빌립보서 2:6, 8)고 했습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자들, 즉 복된 자들 가운데 누가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오직 그분을 본받은 자, 곧 자신을 낮추고 순종하며 복종한 자, 모든 슬픔과 모욕, 조롱, 비웃음, 심지어 박해와 추방, 감옥의 고통을 견뎌낸 자들뿐입니다. 여러분 중 일부나 심지어 모두가 그러하듯이 말입니다. 왜냐하면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온 몸이 영광을 받고, 한 지체가 수치를 당하면 온 몸이 수치를 당하기 때문입니다.

5. 주님께서 여러분을 그분의 용맹한 전사들, 그분의 충실한 종들, 소망을 품은 자들, 택함 받은 백성, 거룩한 회중으로서 점점 더 지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 참으로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부끄러움 없이 행하는 자들이 되어, 하늘나라에서 주 그리스도와의 공동 상속자가 될 자격을 얻게 하소서.

 

182. 내 가르침도, 아버지의 훈계도, 하나님의 말씀도 듣지 않고, 여전히 고쳐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습니다. 그 원인은 육신의 욕망을 따르고 구원에 대해 소홀히 하기 때문입니다.

182. 1) 나의 가르침도, 아버지의 훈계도, 하나님의 말씀도 듣지 않고,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원인은 육신을 따르는 것과 구원에 대한 무관심 때문입니다. – 2) 우리 모두는 모든 선한 일에 열심이어야 마땅한데, 우리는 어떤 모습입니까? – 3) 어째서 우리는 소홀히 하여 이 지경까지 타락해 버린 것일까? 적어도 지금부터는 바로잡자. [2, 124]

6. 농부가 씨를 뿌리는 것이, 나중에 거두기 위함이 아니라면 또 무엇이겠습니까? 상인이 수고하는 것이, 이익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면 또 무엇이겠습니까? 마찬가지로, 가르침의 말씀을 전하는 자가 다른 목적을 위해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면, 듣는 자들의 번영과 성숙을 바라는 희망에서가 아니라면 무엇이겠습니까? – 그러나 여러분에 대해서는, 제 죄로 인해, 제 말씀이 전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많이 뿌리고 많이 수고하지만, 아무런 열매도 보이지 않습니다. 말하고, 선포하고, 상기시켜 주지만 – 때로는 잠시 동안 제 말씀의 힘이 여러분의 마음의 귀에 닿기도 하지만, 여러분은 곧바로 그 모든 것을 다시 잊어버리고, 여전히 같은 죄악 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 일로 인해 나는 울부짖으며 가슴이 찢어지지만, 여러분의 무질서를 막을 힘이 없습니다. 물론, 이러한 무성과는 제 겸손한 말의 무력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어쨌든 이 점에 있어서는 제 쪽에 잘못이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신성한 성경의 말씀을 듣지 못하십니까? 그 말씀들이 매일 여러분의 귀에 구원을 주는 교리들을 전하고 있지 않습니까? – 게다가 성부들은 무엇을 외치고 계십니까? 무엇을 선포하십니까? 무엇에 대해 증언하십니까? 무엇으로 경고하십니까? – 그들이 여러분의 눈앞에 그 무시무시하고 씻을 수 없는 심판대, 그 충격적인 하나님의 최종 판결, 그 경악스러운 배척과 끝없는 고통, 꺼지지 않는 불, 죽지 않는 독벌레, 칠흑 같은 어둠, 타르타로스의 지옥, 그리고 이와 관련해 떠오르는 그 밖의 모든 것들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 반대로 그들은 천국을 보여주지 않는가? – 끝없는 생명, 닿을 수 없는 영광, 형언할 수 없는 빛,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낙원의 아름다움, 아브라함의 품, 성도들의 장막, 의인들의 궁전, 천사들의 서열,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말이다. – 그런데도 당신들에게는 아무런 개선의 기미도, 심지어 회개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 그런데 우리가 무슨 말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오직 육신의 정욕과 집착을 충족시킬 방법만 찾고, 완전히 타락하여 오직 무엇을 먹고 마실지, 내 영혼과 듣는 이의 영혼을 파멸시킬 만한 우스꽝스러운 말을 어떻게 내뱉을지, 내 죄를 덮거나 다른 사람에게 뒤집어씌울 방법을 고안하는 것만 머릿속에 담고 있을 때, – 그리고 전반적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우리 영혼을 경건함과 진리의 싹이 틔우는 밭이 아니라 온갖 불법과 불의의 온상으로 만들었을 때, 과연 어떤 말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7. 우리는 슬픔을 깊이 성찰하고, 하늘의 지혜를 구하며, 높은 곳을 찾고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가 어떤 지위에, 얼마나 높은 지위에 입었는지, 이를 통해 누구에게 무엇으로 의무를 지게 되었는지, 과거 삶의 얼마나 많은 어떤 죄들에 대해 용서를 받았는지, 그리고 스키마를 받은 후 어떤 태만함의 죄에 대해 용서를 받았는지 말이다. – 우리는 떨며, 신음하며, 겸손히 엎드려 통회해야 하며, 무거운 마음과 고개를 숙인 눈빛으로 걸으며, 언제나 닥칠 준비가 되어 있는 죽음을, 육신을 떠난 후 심판자 앞에 서게 될 일과 무서운 천사들을 마주하게 될 일을 기억해야 한다. – 우리는 성스러운 선조들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들은 사소한 말 한마디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자신에게 지극히 엄격했으며, 모든 일에 신중하고, 진실하며, 질서 정연하고, 악의를 품지 않았으며, 온유하고, 평화로우며, 성급하지 않고, 육욕에 빠지지 않고, 세속을 탐하지 않으며, 침묵을 지키고, 찬송을 드리며, 감사하고, 순종하며, 겸손하고 지혜로웠으며, 참으로 선택받은 그릇으로서 모든 선한 일을 위해 준비된 분들이었습니다. – 그들 안에는 성령께서 거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8. 그런데도 우리는, 이 불쌍한 자들아, 왜 소홀히 하는가? 왜 게으름을 피우는가? 왜 이토록 타락해 버렸는가? 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영혼에 닿지 않는가? 왜 눈물을 흘리지 않는가? 왜 굳어진 우리 마음을 부드럽게 하지 않는가? 어째서 우리는 완전한 변화를 이루지 못하는가? 어째서 매일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도망쳐 나와, 인간의 평범한 지혜를 모두 초월했음을 드러내지 않는가? – 두려움과 전율을 불러일으키는 죽음의 날과 시간이 곧, 머지않아 닥칠 것이다. 그때 우리는 쓰라리고, 고통스럽고, 위로받을 수 없이 신음하며, “나의 마음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마음이 준비되었나이다”(사 107:2)라고 말할 용기조차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 말을 듣는다면, 와서 우리 왕이신 그리스도께 경배하고 엎드려라; 그분 앞에서 온 마음을 다해 탄식하고 아파합시다. – 진정으로 그분을 부르는 모든 이 곁에 계시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도움과 힘을 주셔서 죄악된 습관을 버리고, 어떤 희생도 아끼지 않고 덕행의 길로 들어서게 하실 것입니다. “먹지 말라, 마시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워 쉬지 말라”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위로받지 말거나 형제들과 모여 대화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품위 있게, 절제 있게, 적절한 때와 마땅한 장소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덕을 덕에 더하고 성취를 성취에 더해, 우리가 평화롭고 천사 같은 삶을 살기를 요구합니다.

 

183. 여러분 중 많은 이들이 마땅히 그래야 할 모습입니다. 그런데 왜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습니까?

183. 여러분 중 많은 이들이 마땅히 그래야 할 모습입니다. 그런데 왜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닐까요? 하지만 어서 오십시오. 시간이 있을 때 우리 모두 힘을 내어 일어납시다. [3 1, 2][96] 여러분 중 일부는 하나님의 말씀이 요구하는 대로 살고 있지만, 그 수는 많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가 일어나, 방심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 지식의 빛을 향해 나아가며 영원한 행복을 갈망하지 않을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땅에 속한 지체들, 곧 음행과 모든 더러움, 정욕과 악한 욕망”을 죽이지 않는가(골 3,5), 그리하여 성부, 성자, 성령께서 기꺼이 거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이 되도록? 왜 수도자의 규율을 말과 행동으로, 모든 엄격한 주의를 기울여 지키지 않는가? 결코 이웃 앞에서 조롱이나 교활함, 불평, 교만, 혹은 “나는 이런 사람이었고, 저 ; 나에게는 이것저것이 있었다”라고 말하는 허세 부리는 말을 감히 하지 않도록 말이다. – 헛소리의 악마가 언제까지 우리를 지배할 것인가? 언제까지 우리가 아첨하는 불순종의 영의 도구가 될 것인가? 언제까지 우리의 마음이 사소하고 하찮은 것들로 허영을 부리며, 그런 것을 갖지 못한 형제들을 비난하며 부풀어 오를 것인가? – 그러나 오라, 자녀들아, 내 말을 들어라. 우리가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품고, 서로 오른손을 맞잡아 힘을 합쳐 구원을 이루어 나가자. 우리가 아직 육신에 있는 동안, 우리의 이방인으로서의 시간이 아직 계속되는 동안, 기도와 간구, 눈물과 회개가 아직 필요한 동안, 서둘러서 온 세상을 경멸하고 온갖 육신의 지혜를 버리며, 온갖 세속적인 욕망을 죽여, 우리의 모든 마음을 거룩하고 선하며 신성한 것으로 옮겨가도록 합시다.

 

184. 공동 생활 속의 수련 생활에서 보여주는 수행의 모범은 그 어떤 것보다 뛰어나니, 이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184. 공동 생활 속의 수련 생활에서 나타나는 수행의 모습은 그 어떤 것보다도 뛰어나니, 이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길을 잘 따라가라. [31, 9] 용감하게 서서, 용기를 내고, 너희 삶의 모든 과정을 인내로 견뎌내라. 생각으로 높은 곳으로 올라가 하늘의 것을 신성하게 관조하라. 거기서 이사야와 함께, 높고 숭고한 보좌에 앉아 계신 주님을 뵙게 될 것이니, 그분 주위에는 그분 앞에 서 있는 케루빔과 세라핌, 그리고 모든 천사 무리가 둘러싸고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분의 재림이라는 두려운 날에 그분을 뵙게 될 것이다. – 그때 육신의 쾌락을 버리고 이 세상의 유혹에 사로잡히지 않음으로써 자신 앞에 놓인 고행을 잘 완수한 자들은 그분의 지극히 복된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때 의인들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 속에서 태양처럼 빛나게 될 것이니, 바로 우리의 주님이시며 하나님이신 분께서 각자에게 마땅한 대로 선물을 나누어 주실 때입니다. 오, 형제들아, 모든 성도들이 이곳에서 주님을 기쁘시게 한 만큼 그곳의 복을 받아 누리게 될 그 복락이 얼마나 클까요! 물론, 하느님을 위해 산과 동굴, 땅의 심연에 숨어 지낸 이들—기둥 위 수도자, 동굴 수도자, 은둔자들—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 (저는 여기서 성 사도들, 우주의 심판자들, 또한 지극히 복된 순교자들, 신성한 예언자들, 그리고 그 밖의 몇몇 의인들의 높은 지위에 대해서는 언급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지위도 그들보다 결코 뒤지지 않습니다. –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은사를 베푸시는 분께서 친히 땅에 내려오셨을 때, 광야 생활이나 기둥 위 생활, 혹은 그 밖의 어떤 생활 방식을 택하지 않으시고, 순종하며 사시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그분께서 복음서에서 말씀하신 대로 말입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 함이라” (요한복음 6:38). 또 “내가 말하는 것은 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말하고 행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14:10; 12:49)라고도 하셨습니다. 그 후 비밀 만찬에서, 띠를 띠고 섬기는 일을 맡아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잠시 후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 가운데서 섬기는 자와 같이 있노라” (누가복음 22, 28). 이처럼 주님께서는 육신을 입으시고,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순종적인 삶의 방식을 기꺼이 받아들이셨다. 우리가 그분을 본받아 삶을 살아간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고 기쁜 일인가?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 삶의 방식보다 다른 형태의 수도 생활을 더 높이 평가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아니, 여러분이 마땅히 이 삶을 정확히 살아간다면, 다른 어떤 삶도 높이 평가하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왜 『게론티카』에도 계시에 따라 순종하는 세 수도자 중 한 명이, 병을 기쁨으로 견디는 은둔자와 병자보다 더 높이 평가받았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까? 형제 여러분, 참으로 우리의 삶은 위대하며, 이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아브라함과 순교자들, 의인들과 함께 영광을 누릴 것입니다. 그러니 잘 수련하십시오. 여러분을 시기하는 마귀가 여러분을 막지 못하게 하시고, 여러분 스스로도 나태함으로 인해 멈추지 마십시오. 인내의 기름으로 발을 바르고, 기쁨의 헐옷을 입으며, 순결과 절제의 물을 마시십시오. 아무도 “언제까지?”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이는 나태한 자의 말입니다.

 

185. 수고하는 이들을 열매가 풍성한 포도나무에 비유함으로써, 덕행의 결실을 맺고자 하는 열정을 불러일으키고

185. 1) 수고하는 이들을 열매가 풍성한 포도나무에 비유함으로써, 덕의 열매를 맺고자 하는 열정을 불러일으키고, 결론을 내린다. – 2) 나는 이를 통해 어떤 이들에게는 기쁨을 주고, 다른 이들에게는 깨달음을 주고자 한다. [31, 13]

9. 포도 재배자는 포도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는 것을 보고 기뻐한다. 나도 너희 중 누군가가 영적인 열매를 맺는 것을 볼 때 기뻐한다. 회개의 포도주를 내어 주며 하나님과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영적인 포도송이가 풍성한 가지는 복이 있다. 그러나 우리 중 누구에 대해서도, 모세 선지자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어떤 자들에 대해 말한 바와 같이 “그들의 막대기는 소돔에서 온 것이요, 그들의 포도송이는 담즙의 포도송이요, 그들의 슬픔의 포도송이”라고 말해지지 않도록 하라 (신명기 32, 32). 이는 복음서에서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모든 가지가 잘려 나가 불에 던져진다”(요한복음 15:2–6)는 무서운 경고가 선포되고 있기 때문이며, 그 불은 분명 끝이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은혜 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심기신 포도나무에는 다양한 가지들이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이는 행위의 달콤함과 더불어 성령의 소금으로 간을 맞춘 말씀을 지니고 있으며, 또 다른 이는 깊은 겸손으로 단장되어 있다. 또 어떤 이는 풍성한 열매로 가지가 뻗어나간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영적으로 강해지고 자라나며, 수련을 거듭하는 이를 의미한다. 또 다른 이는 깊고 많은 뿌리로 땅에 단단히 박혀, 가지가 많고 높으며 무성하여, 그로부터 다른 포도나무들의 묘목이 나옵니다. 이는 선한 길에 확고히 서서, 누군가 넘어지거나 원수의 공격으로 슬퍼하는 것을 볼 때 다른 형제들에게도 유익을 주는 자입니다. 그러나 포도나무 가지들은 감각이 없어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생명이 깃들어 있고 하나님께서 심으신 자로서 서로 경쟁하며, 함께 자라고 함께 열매를 맺어, 여러분 중 누구도 열매 맺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모두 신성한 가꾸심에서 나온 열매로 충만해지며, 여러분 위에 맺힌 수많은 영적인 포도송이, 즉 미덕들로 인해 사랑받기를 바랍니다.

10. 이러한 비유를 통해 어떤 이들에게는 기쁨을 주고, 다른 이들에게는 깨달음을 주고자 합니다. 모든 이를 위해, 나의 겸손한 말씀으로 땅에서 하늘까지 이어지는 사다리를 세우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더 높은 관조로 올라가기도 하고, 마음의 깊은 곳으로 내려가기도 하여, 인간 삶의 변덕스러움과 덧없음, 인간 행위의 허무함과 덧없음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한마디로, 여러분을 저 세상으로 데려가 그곳의 형언할 수 없고 셀 수 없는 축복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 만물의 창조주이자 주님 앞에 여러분을 모시고, 그곳이 어떤 곳인지, 그곳의 영원한 안식이 어떤지,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 어떤지, 끝없이 넘치는 기쁨, 천사들과 모든 성도들과 함께하는 지극히 복된 동거가 어떤 것인지, 여러분이 그 모든 것에 매료되고 깨달음을 얻어, 모든 헛된 것을 멀리하고 오직 여러분을 위해 예비된 영원한 선만을 참된 것으로 여기며, 이 세상에서 얻는 모든 것, 즉 그 순간에 사라져 버리는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게 되기를 바랍니다.

 

186. 우리가 왜 세상을 떠나 수도원에 들어왔는지를 기억하며, 경험으로 드러난 걸림돌들을 피하여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열심을 내자.

186. 우리가 왜 세상을 떠나 이곳 수도원에 들어왔는지를 기억하며, 경험으로 드러난 걸림돌들을 피하여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열심을 내자. [31, 15] 이제 복자 아르세니우스의 말씀을 선포하노니: “아르세니우스여, 네가 왜 이곳에 나왔느냐?” 그리고 여러분도 저와 함께 스스로에게 물어보시기를 권합니다. 우리가 왜 세상을 떠나 이곳에 왔습니까? – 모두를 대신해 대답하겠소: 물론 하나님을 얻기 위함이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을 상속받기 위함이고,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는 육과 피”가 되는 것을 그만두기 위함입니다 (고린도전서 15, 50). 주님께서는 우리를 거룩한 소명으로 이 곳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위선 없이 그분을 따르십시오. 그분과 세상 사이에서 마음을 갈라놓지 말고, 온전히 그분 한 분께만 자신을 바치고 헌신하십시오. 선한 싸움을 싸우며, 여러분의 길을 완주하고 성취하십시오. 마주치는 모든 어려움과 슬픔을 용감하게 견디며, 약속된 복을 통해 상속받을 유산에 대한 소망에서 위로를 얻으십시오. 수많은 악령들이 우리를 공격하며, 안팎에서 우리를 괴롭힙니다. “내면에서, 곧 마음에서”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악한 생각과 간음, 음행, 살인, 도둑질” 등이 나온다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 21). 이 영들의 바람에 맞서 영혼의 돛을 올리고, 조심스럽게 우리 길을 항해하여, 모래톱이나 암초에 부딪혀 즉시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 모래톱과 암초란 바로 무지, 특히 생각을 털어놓지 않고 자신을 감추는 것입니다. 경험을 통해 미리 경고된 위험한 곳들은 그곳에 빠지면 목숨을 잃지 않도록 온 힘을 다해 경계해야 한다.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치우치지 말고, 왕의 길인 중도를 따라야 한다. 그러므로 선한 일에 대해 마치 마비된 듯 주저하지도 말고, 혈기 왕성한 열기에 휩쓸려 중도에서 벗어나 마치 오른손보다 더 오른쪽으로 치우치듯 옆으로 달아나지도 말아야 한다. 다른 사람보다 더 나아 보이려 하고, 자만심에 불타오르며, 그로 인해 예언자가 말한, 아아! 비통하도다! “자기 안의 지혜와 자기 앞의 분별력을” (이사야 5:21) 따르게 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187. 우리 모두는 조화롭게 행하며, 각자 자신의 미덕에서 번영하되,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 어떤 수고도 마다하지 말자. 이를 통해 우리는 의심할 여지 없이 천국을 얻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187. 우리 모두는 한데 모여 질서 정연하게 행하며, 각자 자신의 미덕에서 두각을 나타내되,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 어떤 수고도 마다하지 말자. 이를 통해 우리가 의심할 여지 없이 천국을 얻게 될 것임을 확신하며 [31, 15] 오라, 함께 나아가자. 다음과 같이 나아가자: 누구는 분별 있는 순종으로, 누구는 흔들림 없는 인내로, 누구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겸손으로, 누구는 생각을 다스림으로, 누구는 고통스러운 회개로, 누구는 정화하는 눈물로, 누구는 질투 없는 형제 사랑으로, 누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의 선물로, 가르치는 말씀이나 교훈적인 시편 찬양, 혹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보여주는 모범으로. 각자 할 수 있는 대로 행하라: 배울 수 있는 자는 배우고, 시를 읊을 수 있는 자는 읊고, 기도할 수 있는 자는 기도하고, 절을 할 수 있는 자는 하되, 오직 모든 것을 경건하게 그리고 인내심을 가지고 행하라. 아무도 오직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거나 자신의 기분에만 따르지 말라. 그렇게 하면 가장 선한 순종에서 멀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가운데서 “할 수 없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건강이 좋지 않다”는 말이 들리지 않게 하라. 비록 누군가가 진심으로 그렇게 말할 수 있다 해도 말이다. 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그분의 선택받은 천사들 앞에서 너희에게 진실된 약속을 한다. 주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나라는 힘쓰는 자에게 주어진다”는 대로, – 스스로를 괴롭히고 모든 면에서 스스로를 억누르며, 여러분이 여러분의 좁고 고통스러운 길 때문에 스스로를 억누르듯이, 여러분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썩어짐에서 썩지 않음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노예 상태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으로, 눈물의 골짜기에서 빛나고 기쁨이 넘치는 천국으로 넘어갈 것입니다.

 

188. 원조께서 원수에게 속으셨던 것처럼, 우리도 속고 있습니다. 원수는 악을 선인 양 속임수로 포장하여

188. 원수(사탄)가 우리 조상을 유혹했던 것처럼, 우리도 악을 선으로 속여 포장하여 유혹하고 있습니다. 조상은 그 말을 듣고 속아 넘어갔으니, 우리도 그 말을 듣는다면 속아 넘어갈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 말을 듣지 말고, 그의 모든 유혹에 대해 귀를 막아야 합니다. [31, 16] 우리가 처음에 낙원에 머물렀던 일과 그곳에서 쫓겨난 일을 떠올릴지, 아니면 미래의 세상에서 모든 것이 재건될 일을 떠올릴지, 이 두 가지 모두 우리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지식의 대상이다. 우리의 조상 아담이 어떻게 쫓겨났는지는 여러분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그에게 존재와 생명을 주신 하나님 앞에서 보인 교만과 뻔뻔한 불순종이었다. 그는 주어진 계명을 지키지 못했는데, 육체적 쾌락을 갈망하는 눈으로 마음이 유혹당하고, 그 열매가 먹기에 좋고 보기에도 아름답다는 생각만 하며, 아내의 부추김과 더 나아가 뱀의 유혹에 이끌려 금단의 열매를 맛보았고, 그로 인해 빛에서 어둠으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겉보기에는 달콤해 보였던 그 과일을 쓴맛으로 맛보는 경험은 그를 낙원에서 쫓아내고, 수고와 슬픔으로 가득 찬 삶으로 내몰았다. 그러나 그가 겪은 고통을 우리는 피하도록 주의해야 하며, 같은 덫에 걸리지 않도록 경청해야 한다. – 우리는 감각적 쾌락으로 이끄는 유혹과 아름다움, 내면의 상상이든 외부의 우연한 신체적·감각적 자극이든, 그 어떤 것에도 휩쓸리지 않도록 합시다. 비록 때로는 보이는 것이 아름답고 선해 보일지라도, 실상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것을 맛본다면, 아담 안에서 일으킨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안에서도 죽음과 썩음, 심판을 낳게 될 것이다. 아담은 그에게 속삭이던 뱀의 말을 믿었다. “그 날에 너희가 선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너희 눈이 밝아져 너희가 마치 신과 같이 될 것이다”(창세기 3,5). 우리에게도 용이 똑같이 속삭입니다. “만약 이런저런 욕망을 충족시킨다면, 헤아릴 수 없는 기쁨을 얻고 모든 짐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말을 듣고 기대했던 것에서 속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마저 완전히 잃어버리고 비참하게도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과연 그 말을 들어야 할까요? – 아니면 “그의 꾀를 알지 못하며”(고린도후서 2:11) 그 속임수의 미끼를 간파해야 할까요? 그러므로 그가 아무리 우리를 유혹하고, 아무리 부르고, 아무리 우리 영혼 속에서 파문을 일으키더라도, 그를 우리로부터 멀리 밀어내야 합니다. 그는 우리에게 주어진 신성하고 가장 복된 순결을 빼앗고, 주님의 계명이 있는 낙원에서 쫓아내며, 하나님께서 주신 천사의 옷을 벗겨낸 뒤, 결국 땅의 지옥으로 내몰려고 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 생각의 문을 굳게 닫고, 그들에게 문을 잠그며, 그들과 대화를 나누지 말자. 그러나 “죄 많은 마귀가 우리 앞에 일어설 때면, 우리는 침묵하고 겸손해지리라” (시 38:2. 3) 하나님 앞에서, 원수가 다가왔다는 생각조차 하지 말고, 정복할 수 없는 십자가의 무기로 우리 자신을 인치며, 성령으로 감동받은 성경의 말씀으로 우리 구원을 이루는 일에 굳건히 서자. 매일 매일 더 나아지도록 힘쓰며, 선행과 수행에 있어 만족을 모르고, 우리가 해낸 일에 안주하지 않으며, 그것을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고, 어떤 면에서 누구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지도 말자. 그러나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온전히, 모든 면에서 다 이행하기 위해 경쟁하리라. 이것이 바로 우리의 선한 업적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복된 상승이며, 칭찬받을 만한 획득이자, 썩지 않는 보물이며, 장차 영원한 복을 상속받을 보증이다.

 

189. 자기 만족을 위한 욕망을 충족시켰을 때 발생하는 나쁜 결과에 대한 경험들이 우리에게 이를 삼가도록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189. 1) 자기 만족을 위한 욕망을 충족시켰을 때 닥치는 나쁜 결과에 대한 경험들이 우리에게 이를 절제하도록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 2) 그렇다면 언제나 닥칠 준비가 되어 있는 죽음에 대한 기억이 우리를 가르쳐 주기를: 그 기억은 순교자들을 고무시키고, 경건한 성부들을 자제라는 엄격함 속에서 굳건하게 지탱해 주었으니. [31, 17]

11.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선하게 달려가며, 세상의 기만적인 유혹보다 더 높은 곳에 서서, 하늘을 향하여 뻗어 나가는 생각과 그곳의 말로 다 할 수 없는 영광을 붙잡으라.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우리의 모든 수행의 수고는 천국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며, 이곳의 슬픔과 궁핍은 영원한 안식에 비하면 불쾌한 잠의 꿈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현명하게 판단했고, 우리를 그분의 천국으로 부르신 분의 힘으로 이 세상을 떠난 것은 옳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도 선하게 살아가며, 조금씩 선행을 쌓아가고, 우리가 겪는 일들을 통해 헛된 일들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배우도록 합시다. – 우리가 몇 번이나 쾌락에 빠져들었는가? – 그런데 그로부터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우리가 몇 번이나 배를 채웠는가? – 그러나 배의 욕구만 충족시켰을 뿐, 배부름에서 얻은 것을 몸의 무거움 외에는 아무것도 비축해 두지 못했으니. 부끄러운 생각에 눈감아 주었다면, 나중에 스스로를 저주하며 기쁨 대신 슬픔을 거두었고; 잠에 빠져 지냈다면, 나중에 말 못하는 자처럼 스스로를 비탄했으며; 무례하게 굴었다면, 나중에 스스로를 책망했고; 웃음에 빠져 지냈다면, 나중에 그것을 애도했으며; 그리고 대체로 감각적인 쾌락은 사람에게 아무런 유익도 주지 않는다. 항상 위로와 기쁨을 누리고자 한다면, 계명을 지키자. 이것이 우리에게 고갈되지 않는 기쁨이 되어, 양심의 증거와 함께 의의 풍성한 열매를 맺어 줄 것이다.

12. 형제들아, 들어라. – 잠과 나태에 빠지지 말고, 우리의 시간을 헛되이 낭비하지 말자. 죽을 때가 다가오고 있다. 아니면 이미 오지 않았는가? –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데리러 천사를 보내시리니, 그 천사는 즉시 우리의 영혼을 데려가실 것이다. – 그러나 어디로? – 이 말을 듣고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는가? 이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떨지 않는가? 이를 기억하며, 성스러운 순교자들은 기뻐하며 자신의 몸을 고문과 사지 절단, 뼈가 부서지는 고통에 내맡겼으니, 참으로 “세상과 천사들과 사람들에게 수치를 당한 자” (고린도전서 4,9)였으나, 그 대가로 후에 면류관을 받았도다. 반면 우리의 경건한 선조들이자 거룩한 수도사들은 마치 육신이 그들의 원수인 양 수련에 힘썼으니, 굶주림 속에서도 기쁨을 누렸고, 추위를 견디면서도 마치 따뜻함 속에 있는 듯했으며, 궁핍을 겪으면서도 모든 것을 넉넉히 가진 자들처럼 지냈습니다. 부모에 대한 사랑이 그들을 옭아매지 않았고, 자녀들에 대한 애정이 그들의 뜻을 꺾지 않았으며, 형제들의 호의가 그들의 마음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금이나 은도 탐내지 않았고, 좋은 옷이나 몸을 달아오르게 하는 음식도 탐내지 않았으며, 단지 살아가기 위해 먹고 입었을 뿐, 온갖 궁핍을 마치 육신이 없는 자처럼 견뎌 냈습니다. 우리도 그들을 본받기 위해 기꺼이 온갖 고난을 겪으며, 굶주림과 추위, 모욕과 조롱, 그리고 그 밖의 온갖 슬픔을 견뎌내되, 오직 우리가 천국을 잃지 않기 위해서만 그러하리라.

 

190. 우리에게 힘든 일입니다. 원수는 우리를 유혹하기 위해 곳곳에서 계략을 꾸미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알고 있으니, 우리 자신을 경계하며 맞서 싸우겠습니다.

190. 1) 우리에게 힘든 일입니다. 원수가 곳곳에서 우리를 유혹하기 위해 계략을 꾸미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알고 있으니 우리 자신을 경계하며 맞서 싸울 것입니다. – 2) ‘조금만 더 견디면’이라는 생각에 용기를 얻어, – 안식에 들어갈 것입니다. – 3) 또한 하나님의 말씀과 교부들의 저술에서 교훈을 얻어 실천할 것입니다. [31, 19]

1. 우리의 사명은 위대하고, 우리의 원수는 극복하기 어렵으며, 그가 우리를 향한 악의는 강하다. 그는 밤에도 잠들지 않고 낮에도 졸지 않으며, 그 어떤 세속적인 걱정거리로도 주의를 돌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모으신 우리 양떼 주위를 맴돌며, 부주의하고 굳건하지 못한 영혼을 납치하여 삼키기만 한다. 여러분은 그의 계략을 잘 알고 있으니, 부디 조심하십시오. – 그는 죄를 부추기는 자입니다. 달콤한 미끼로 위장한 낚싯대처럼 유혹하는 생각을 던져 넣습니다. 여러분은 어리석지 마십시오. – 사도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의 꾀를 분별하지 못하는” (고린도후서 2:11) 물고기처럼 되지 말고, 겉모습에 현혹되지 말고, 그의 교활함을 폭로하여 그를 쫓아내십시오. 그러면 그는 성공하지 못하고, 쓰라린 마음으로 자기 자리로 돌아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유혹적인 속삭임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질투를, 또 다른 이에게는 나태함을 심어주고, 어떤 이에게는 다른 곳으로의 이주를, 또 다른 이에게는 교만을, 혹은 한 사람에게 이 두 가지를 모두 심어, 온갖 방법으로 죽음의 그물로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스스로를 경계하며, 영혼의 우편에 계신 주님, 유일하신 사랑받으시고 갈망하시는 분을 의지하여 그의 올가미에서 벗어나도록 합시다. 오직 원수인 뱀을 대적하기 위해 주어진 분노가 여러분을 지배하지 않게 하시고, 정욕의 불이 여러분의 마음을 불태워 수치스럽고 부적절한 행위로 이끌 자유를 갖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러나 온유함으로 단장하고 아름다운 무욕을 입으시어, 서로 사랑하십시오.

2. 조금만 더 스스로를 다잡으십시오. 그러면 복된 자라 불릴 것입니다. 조금만 더 – 조금만 더 힘내어 곧 그 길을 걸어가십시오 – 그리하면 그 천상의, 지극히 빛나고 아름답게 단장된 성읍에 도달할 것입니다. 그곳은 형언할 수 없는 동정된 영혼들의 혼인 잔치가 열리는 곳이며, 아브라함의 품이자 신성한 낙원, 곧 하늘나라입니다. 이 성을 마음에 새기며, 수고와 피로를 돌보지 않고 그곳으로 향하는 길을 서둘러 나아가도록 스스로를 격려합시다.

3. 복음서와 사도들, 예언자들의 성령으로 감동받은 말씀과, 영혼을 구원하는 교부들의 저술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으로 너희 영혼을 양육하고 채워라. 또한 각자에게 주어진 일과 수고 에 있어서는, 인내와 형제 사랑, 상호 도움, 그리고 연민을 가지고 기쁜 마음으로 임하여, 모든 사람과 모든 일에서 우리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받게 하라. 우리는 그분께 섬기고 경배하노라.

 

191. 인내로써 원수를 이기고, 순교자들이 고문을 자처하고, 경건한 이들이 온갖 엄격한 금욕을 감내했던 바로 그 말로 다할 수 없는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191. 1) 인내로써 원수를 이기고, 순교자들이 고문을 자처하고 경건한 이들이 온갖 엄격한 금욕을 감내했던 바로 그 말로 다할 수 없는 축복을 얻게 될 것이다. – 2) 그들에게 본을 따라 모든 악을 멀리하고 모든 선을 열망하며, 이를 통해 완전함에 이르자. [31, 24]

4. 끊임없는 투쟁 속에서 여러분은 순종의 전장에 서 있으며, 결핍 속에서 타격을 받고, 슬픔의 채찍질 속에서 고통을 견디며, 자신의 의지를 꺾는 과정에서 피를 흘리고 있습니다. – 그러나 용기를 내십시오. 이를 통해 여러분은 선한 승리를 위한 면류관과 영예, 상을 스스로 준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희에게서 도망하리라. 하나님께 가까이 가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너희에게 가까이 오시리라” (야고보서 4, 7. 8); “입으라,” 위대한 만물의 스승 바울이 명하듯이, “성령의 전신 갑주를,” “마귀의 궤계에 맞서 굳건히 설 수 있도록” (엡 6,11). 여러분의 인내로 인해 그는 물리치고, 정복당하며, 무력한 자처럼 땅에 쓰러지고, 여러분의 발에 짓밟힙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에게 “뱀과 전갈, 그리고 원수의 모든 세력을 밟을 것”이라는 약속이 이루어집니다. 아, 아, 나의 자녀들아! 우리가 조금만 더 수고한다면, 어떤 복을 얻고, 어떤 영광을 누리며, 어떤 기쁨을 누리게 될까? – 입으로는 이를 다 말할 수 없고, 마음으로도 다 헤아릴 수 없도다. 이를 위해 순교자들은 마치 양처럼 스스로를 제물로 바쳤고, 이를 위해 성자들은 가장 엄격한 수행을 짊어지고 이를 완수하였도다.

5. 우리도 그들을 본받아, 서로를 격려하고 서로 돕자. 부디 우리 가운데, 겸손히 간청하건대, 아담을 낙원에서 쫓아낸 불순종이 없기를,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교만함이 없기를, 아침에 빛나는 여명을 하늘에서 쫓아내신 분 앞에서 교만함이 없기를, 에서의 장자권을 팔게 한 탐식이 없기를, 교활한 달릴라로 인해 무적의 삼손을 이방인들 앞에서 조롱거리가 되게 한 것, 카인을 형제 살해자로 만든 시기심도 없기를 바랍니다. 그러니 우리는 미덕을 더욱 받아들이자. 한 사람에게는 온유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열정을, 또 다른 사람에게는 인내를, 이 사람에게는 무적의 기질을, 또 다른 사람에게는 형제 사랑을, 또 다른 사람에게는 겸손과 순종,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본받아, 그리하여 빛과 낮의 자녀가 되고, 그 삶을 본받아 경쟁했던 이들의 공동 상속자가 되십시오. 올라가십시오, 나의 형제들아, 미덕의 높은 산으로 올라가십시오. 마음속에 성령의 인도를 새기십시오, 하늘의 사다리가 되어라. 레바논의 삼나무처럼 높이 솟아올라, 위를 찾으며, 하늘의 지혜를 구하고 그곳에 마음을 모아라. 그리하여 여러분이 그러한 마음가짐을 품고 있을 때, 이 세상의 생명이 끝나는 순간, 곧바로 끝없는 생명을 누리는 복된 낙원으로 인도받게 하라.

 

192. 우리가 부르짖으면 주님께서 우리를 죄와 원수들의 속박에서 구원해 주실 것이다

192. 1) 우리가 부르짖으면 주님께서 우리를 죄와 원수들의 속박에서 구원해 주실 것이다. – 2) 그러나 구원받은 후에는 굳건히 버티라; – 그렇지 않으면 다시 노예 상태에 빠질 것이다. 그런 고통을 겪지 않으려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주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 창조, 섭리, 그리고 속죄를 묵상함으로써 그 마음을 지탱하라. – 3)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마음에 새긴다면, 그 어떤 슬픔이나 궁핍도 너를 흔들지 못할 것이며, 너를 하느님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지 못할 것이다. [31, 25]

6. 계속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찾으면 우리 영혼이 살리라” (이사야 68, 33). 부지런히 그분께 부르짖으면, 그분은 옛 이스라엘을 대하듯 우리를 돌보시고, 슬퍼하는 우리 영혼의 울부짖음과 신음을 들으실 것이다. 비록 모세를 보내시지는 않으시겠지만, 그분께서 친히 우리를 마음속의 파라오의 손아귀와 그의 정욕에 대한 쓰라린 노역에서 반드시 건져내실 것이다. 우리가 죄악의 이집트 아래에 있는 한, 그곳을 섬기는 생각들이 우리를 쫓아내고 괴롭히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선하신 하나님께서 표적과 기적을 통해 우리 안에 임재하심을 보여 주시며 우리의 인내를 보살펴 주실 때, 그분은 우리에게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시어 우리를 정욕이 없는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며, 우리는 온전한 기쁨 속에서 그분께 우리의 해방을 기리는 승리의 찬송을 부르게 될 것입니다.

7. 그러나 또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어떤 이는 회심 당시와 그 이후에 그 안에 지배적이었던 첫 번째 선한 마음가짐을 다시 되살리지 못하고 굳건히 지키지 못하면, 다시 원수들에게 넘어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중 누구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 내면의 선한 변화와 그 안의 확고함의 시작이자 원천은, 하나님의 놀라운 행적과 섭리를 알고 묵상함으로써 마음에 하나님의 경외심이 깃드는 데 있다. 즉, 그분이 존재하지 않던 모든 것을 존재로 이끌어내셨고, 그것도 단 한 마디 말씀으로, 빛을 창조하시고, 하늘을 펴시며, 마치 돔처럼, 기록된 바와 같이(시 32:7) “바다의 물을 가죽 부대처럼 모으신” 것처럼, 모든 생물이 숨 쉴 수 있도록 공기를 퍼뜨리신 것, 태양과 달을 마치 두 개의 밝은 눈처럼 수많은 다양한 별들 과 함께 하늘의 궁창에 세우신 것, 땅에서 온갖 열매 맺는 나무와 온갖 풀과 꽃을 내시고, 땅에서는 모든 짐승이, 바다에서는 모든 물고기와 새가 나타나게 하셨으며, 친손으로 우리 조상 아담을 창조하사 그분을 낙원의 달콤함 속에 두셨고, 해가 뜨고 지도록 정하셨으니, – 이로 인해 우리에게 낮과 밤이 생겨, 그것으로 우리 삶의 흐름이 측정되는데 – 특히 그분의 위대하심과 그분의 지혜의 심연이 어떠한지를 묵상할 때! 오직 그분만을 경외하고 오직 그분 앞에서만 떨자. 그러나 또한 우리를 위해 사람이 되시고 죄를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아지셨으며, 우리를 위해 배반당하고 재판소로 끌려가셨고, 우리를 위해 귀를 뚫림과 침 뱉음, 조롱, 채찍질,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죽음을 겪으신 그분을 사랑하자. 그분은 이 모든 것을 사람으로서 참아내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서 부활하셔서 영혼을 죽이는 자인 마귀를 이기시고, 그분이 사랑하시는 피조물을 구원하셨습니다.

8. 이 모든 것을 보고, 하나님께서 모욕을 당하셨다고 생각하며, 누가 어떤 모욕이라도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기쁨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주님께서 어떻게 모욕과 비방을 당하셨는지를 기억하며, 누가 기꺼이 모든 악담을 참아내지 않겠는가? 주님께서 뺨을 맞으시는 것을 보고, 자신도 기꺼이 같은 고통을 기쁜 마음으로 견디고자 하지 않을 자가 누구이며, 오른쪽 뺨을 맞은 뒤 왼쪽 뺨도 내밀지 않을 자가 누구이겠는가? 마음이 찔리시는 하나님, 창에 찔리시는 하나님, 담즙과 식초를 맛보시는 하나님을 마음속으로 그려보며, 어떤 죽음에도 대비하지 않을 자가 누구이겠는가? – 자, 내 자녀들아! 자, 간청하노니, 우리 자신을 세상과 정욕에 못 박아 버리고, 필요하다면 매질당할 준비도 하며, 그렇지 않다면 비난과 모함으로 인한 말의 상처와, 우리 뜻을 꺾음으로 인한 피 흘림이라도 온유하게 견뎌내자;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인해 그분처럼 고난을 겪은 자들이 되자. 모두 어리석어 보일지라도 자신의 봉사를 성실히 수행하도록 힘내라. 기도에 힘입어 성령의 불로 타오르며, 눈물을 흘리고 겸손의 신음과 함께 기도에 매진하라.

 

193. 우리 생명이 어떻게 끝날지 기억하며, 우리 조상들을 본받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열심을 내자

193. 1) 우리 생명이 어떻게 끝날지 기억하며, 우리 조상들을 본받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열심을 내자. – 2) 비록 실제로는 이를 실천하는 이가 거의 보이지 않겠지만, 우리는 공동의 협의와 상호 협력으로, 비록 온전하지는 않더라도 그들보다 뒤처지지 않을 것이다. – 3) 원하신다면, 이를 이루는 데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은 없으니, 이는 우리의 의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3 1, 28]

9. 자녀들아, 우리의 삶이 무엇인지, 이 육신 안에서 누구를 섬기는지, 그리고 육신과의 결별이라는 성사가 우리를 어디로 이끄는지 깨달읍시다. 이를 마음에 새기며,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데 부지런하고,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는 데 지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무심한 세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열정적으로 추구하는 자들로 드러내야 한다. 마치 옛날 우리 조상들이 이곳에서 들판의 백합처럼, 하나님께서 심으신 낙원처럼 꽃피우며, 성령의 물로 적셔져 온갖 미덕의 열매를 맺고, 주님의 친구라 불릴 자격을 얻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기쁨을 드렸으며, 삶에서 순결함을 지키고 높은 경지의 묵상으로 양육받으며 천국을 얻었고, 땅에서의 삶을 지혜롭게 활용하여 천사들과 함께 하나의 합창단을 이루고 하나님과 함께 거하게 되었습니다. 2) 오늘날 누가 이와 같이 행하는가?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르는가”라고 기록된 대로(시 23:3). 누가 “비둘기 날개처럼” 성령으로 “날아올라” 완전함의 산에서 “안식”하는가(시 54:7)? 누가 “그의 생애에 의가 빛나는” 자인가? (시 71:7). – 그러나 우리는 공동의 의논과 상호 격려를 통해 수고를 감당하고 그들 뒤처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도 “반항적이고 괴로움을 주는 족속” (시 77:8), 곧 자기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족속이라 불리지 않도록 하겠으며, 오히려 “복된 의인들의 족속”(시 101:2) 되겠습니다. 우리 안에 보답받을 만한 미덕을 드러내고, 우리 조상들의 거룩한 길을 따르며,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 걸어가며, 그들의 여정을 헤아리고 그들의 삶을 탐구하며, 그들의 행적을 본받고 그들의 행동 방식을 닮아가자. 비록 미약하고 서툴며 닮은 바가 적더라도, 제자가 스승을 본받는 모습을 보여주기에 충분한 만큼은 닮아가자. 그들은 하나님과 닮은 형상의 화가들이요, 미덕의 예술가들이니, 우리도 비록 그들의 그림자라도 비춰 보자; 그들은 나그네이니, 우리도 나그네가 되리라; 그들의 조국은 하늘이니, – 하늘의 예루살렘이 우리의 조국이 되게 하소서; 그들의 소망은 주님의 계명이니, 우리도 그것을 추구하리라; 그들은 육신과 혈육(친족)에 대한 사랑에 얽매이지 않았고, 이 세상의 달콤함에 탐닉하지 않았으니, 우리도 그것을 갈망하리라. 그들은 노력하여 그렇게 되었으니, 우리도 수고를 기울여 그들과 같이 되리라; 옛날에 이러저러한 일들이 곳곳에 널리 알려졌듯이, 그들의 경이로운 삶 덕분에 그 소식이 우리에게까지 전해져 우리를 같은 길로 이끌었듯이, 우리 이름도 후세에 알려져 선한 경쟁을 불러일으키게 하리라. 이보다 더 복되고 더 위로가 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10. 원하신다면, 그에 대한 어떤 장애물도 없습니다. 그 당시의 하나님은 지금도 변함없이 동일하시며, 복음은 낡지 않았고, 계명도 변하지 않았으며, 시간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모든 것을 돌보셨던 분 께서 지금도 모든 이를 돌보십니다. 밤과 낮, 파종과 수확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같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 이 우리 하나님께서는 변함없고 흔들림이 없으시며, 태초부터 지금까지 항상 동일하신 분으로, 그분의 피조물을 지키시며, 동일한 사랑의 광선으로 모든 사람을 비추시고, 죄인이 영원히 죽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 변함없음과 변덕스러움은 우리의 자유 의지가 원인이 되는 것이니, 즉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는 선한 쪽으로든 그렇지 않은 쪽으로든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조상들을 본받고자 하는 열정으로 그들의 위업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삶처럼 빛나기를 갈망하는 우리에게 무엇이 방해가 되겠습니까? 우리도 공동체 생활을 하는 자로서, 다른 이들과 함께 우리 삶을 선조들의 삶과 동일하게 드러낸다면, 이와 같이 빛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무엇보다도 온갖 경계로 우리 마음을 주님의 계명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지 않도록 지키도록 스스로를 다잡을 때 이루어질 것입니다.

 

194. 여러분은 마치 좋은 정원처럼 다양한 미덕의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그러니 스스로 시들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194. 1) 여러분은 좋은 정원처럼 다양한 미덕의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그러니 스스로 시들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 2) 지금은 성스러운 날들(금식 기간)이며, 절제와 예배, 성경 읽기, 그리고 경건한 경쟁 등 모든 것이 여러분의 영적 소생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 3) 이 모든 것을 활용하십시오. 무엇보다도 평화를 지키십시오. [31, 29]

11. 비옥한 땅에는 제때 내리는 비가 매우 유익하여, 살아있는 생물들의 양식에 필요한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해 줍니다. 우리 주간의 가르침이 제 겸손한 입에서 흘러나올 때, 거기서 비가 영양가 있는 열매를 자라게 하듯이, 여러분의 정직한 영혼을 지키는 미덕을 증진시키고 회복시키는 데에도 유익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실로 제게 다양한 식물로 가득 찬 낙원과도 같습니다. 한 사람은 겸손과 순종으로 저를 기쁘게 하고, 다른 사람은 자신의 일에 부지런히 임함으로써 저를 양육하며; 저 사람은 경건한 품성으로 향기를 풍기고, 이 사람은 높은 덕목으로 감탄을 자아내니, 마치 키파리스 나무가 가지를 높이 치켜세우듯; 한마디로, 여러분 각자는 어떤 덕목으로 두각을 나타내며, 그에 걸맞은 행실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보라, 자녀들아, 아무도 아무것도 자라내지 못하는 채로 남아 있지 말고, 정욕의 불길에 휩싸여 시들지 않게 하라. 또한 모든 열매를 갉아먹는 교만으로 인해 불모의 상태가 되지 말라. 서로 경쟁하며 서로를 따뜻하게 감싸주어, 한마음으로 땅에서 하늘까지 닿는 기둥을 세우거나, 하늘에 닿을 만한 미덕을 쌓아 올리자.

12. 이제 거룩한 날들이니, 너희도 거룩해지며; 금식과 절제니, 너희는 영혼과 육체 모두 정화되며; 조화로운 시편 찬송과 성경 봉독이니, 너희는 성령에 의해 울려 퍼지는 아름다운 리라가 되며; 서둘러 예배에 모이니, 너희는 천사들의 합창단을 이루며; 사랑으로 서로를 감싸 안으며, 시기심을 내쫓고, 하늘에 기록되기를 한마음으로 함께 갈망하며 나아갑니다. 서로 다투지 않고 진심으로 화목하게 지내며, 여러분은 육체를 벗은 이들의 한마음에 본을 따릅니다; 여러분에게는 오직 한 가지 염려가 있으며, 명령받은 바를 가장 잘 이행하기 위해 다른 이들과 함께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분투하니, 이로써 자연스럽게 순종의 자녀들이 되나니; 물질적 재물을 탐하지 않고, 모든 것을 가지면서도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채, 이 세상과 천국의 상속자들로서 부유해지나니.

13.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너희가 행동으로 예언자의 말씀을 충실히 실천하고 있다는 점이다. “무엇이 선하고 아름다운가? 형제들이 함께 사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내가 너희를 “향기로운 제물”, “아론의 수염에 내리는 향기, 시온 산에 내리는 헤르몬의 이슬”(시 132:1, 2, 3)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보라, 너희가 어떤 이름으로 장식되고 어떤 찬사로 관을 씌워지는지. 그러니 보라, 너희가 남의 이름을 지니고 있지 않음을 보여주고, 칭찬받을 자격이 없는 삶을 살지 않도록 하라. 지금 너희는 나로부터 말로 이 말을 듣고 있지만, 그때—미래의 세상에서—의로운 재판장이시며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베푸시는 보응자께로부터 행실로 의로운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195. 너희는 너희 영적 아버지들의 이름으로 불려야 하며, 정해진 규칙에 따라 하나의 수도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

195. 1) 너희는 너희 영적 아버지들의 이름을 따라 불려야 하며, 정해진 규칙에 따라 하나된 수도자의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 – 2) 수계식 때 한 서원을 기억하라. 그리고 겉과 속 모두 그렇게 되라. 이것이 바로 너희가 세속 사람들과 구별되는 표징이 되리라. – 3) 이를 위해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분의 경이로운 거처에 안식하게 하실 것이다. [31, 30]

14. 부모와 형제, 친척, 그리고 온 세상을 떠나 이곳에 온 너희는,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삶을 따라 스스로를 변화시키며 내 영적 자녀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너희를 낳은 이러저러한 자의 이름으로 너희를 부르지 말고, 우리의 영적 아버지들과 조상들의 이름으로 불러야 한다. 이는 너희가 본성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자발적으로 다른 탄생, 즉 영적인 탄생을 받아들였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여기서는 그 누구도 자신의 뜻대로, 자기 나름대로의 지혜를 행사하지 않으며, 우리 모두가 한마음으로 지혜를 모으고, 모두 한마음으로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에 기록된 바, “믿는 백성의 마음과 영혼이 하나였으며,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유하였다”(행 4:32)는 말씀이 지금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듣고 계신 이 말씀을 이해하십니까? – 그러니 스스로를 시험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굳건하고 흔들리지 않는지”(고린도전서 15,58). 제가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수도 생활의 규율에서 어떤 면에서도 벗어나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일깨워 드리기 위함입니다. 그것은 원수의 속삭임입니다. 또 한 가지를 상기시켜 드리겠습니다. “누구든지 경주하더라도, 정해진 규칙을 따르지 않고 경주한다면 면류관을 얻지 못하리라”(딤후 2:5). 수도사도 정해진 규칙에 따라 경주를 하지 않는다면 완전함에 이르지 못하고 면류관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15. 여러분은 스키마를 받는 형제들이 어떻게 서약하는지 자주 알고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의 요지는, 여기서 서약이 이루어지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언약이 맺어진다는 것입니다. 곧 굶주리고, 목마름을 견디며, 헐벗음을 감수하고, 헛된 비난과 모욕, 모독을 참아내며, 필요하다면 그리스도를 위해 피를 흘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슷한 일을 겪게 되더라도 주저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여러분은 단지 참아내겠다고 서원한 것만을 겪고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말했던 것이 과연 어린아이들의 장난이었겠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증인이 되시고 그분의 선택받은 천사들이 증언하는 거룩한 말씀들이다. 오히려 우리는 그런 일을 마주할 때, 약속한 것의 일부를 이행할 기회가 주어졌음을 기뻐해야 한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칭찬과 즐거움, 만족이 아름답게 보이지만, 우리에게는 그와 정반대인 것이 바람직하고 기쁜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스키마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바입니다. 그들은 세속적인 것을 기뻐하지만, 우리는 신성한 것을 기뻐합니다; 그들은 육체적인 것을 기뻐하지만, 우리는 영적인 것을 기뻐합니다; 그들은 쾌락을 기뻐하지만, 우리는 절제를 기뻐합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들과 구분하고 차별화시키는 것입니까? 설마 검은 수도복과 긴 수염이 수도사를 만든다고 생각하십니까? – 결코 아닙니다. – 그러나 진정한 수도사란, 외모와 내면의 마음가짐과 태도가 일치하여 “나는 바로 이것이며, 변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자, 자, 여러분, 부디 이렇게 지혜롭게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절제, 침묵, 시 읊기,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 고백, 근면함,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칭찬할 만한 덕목을 받아들이십시오. 이러한 특성들을 우리 안에 더욱 키워 나간다면, 우리는 좋은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선한 일로 형제와 경쟁하며, 시기심 없이 그를 본받으라. 그리고 “내가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라,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찬양하는 자들을 내가 영화롭게 하리라. 그들에게 안식의 처소, 산 자들의 땅, ‘기이한 거처’를 예비하리라”(시 41:5). 여러분이 이 말씀을 듣고 세상의 빛을 보며, 진리의 태양을 뵙고 그분의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그분은 온전히 달콤함과 갈망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기도로 기도하며, 열심에 열심을 더해, 기쁨으로 그 밝은 날에 이르도록 합시다. 선한 삶으로 주님을 얻었고, 그분 안에서 자비로운 은인을 얻은 영혼은 복되도다. 그분께서 그 영혼을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실 것이기 때문이다.

 

196. 가르침은 가장 중요한 일, 즉 영혼의 구원에 대해 말하므로, 온전한 주의와 열망을 다해 들어야 한다

196. 1) 가르침은 가장 중요한 일, 즉 영혼의 구원에 대해 말합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주의와 열망을 가지고 들어야 합니다. – 2) 그렇지 않으면 그 가르침이 영혼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며, 설령 영향을 미친다 해도 잠시뿐이고, 나중에는 완전히 사라져 버릴 것이다. – 3) 그러니 우리는 듣고, 지키고, 실천하자. 그러면 이 세상에서도, 더 나아가 내세에서 더 큰 선한 열매를 거두게 될 것이다. [3 1, 32]

16.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은, 정신이 맑고 구원을 위해 깨어 있는 영혼에 들어가면 즉시 그 영혼을 따뜻하게 하고, 계명을 실천하기 위해 더 크고 온전한 노력을 기울이도록 자극한다; 반면, 저처럼 잠들어 있고 방심하여 악 속에 머무르는 영혼에 들어간다면, 그것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공중에 흩어지며 아무런 효과도 내지 못합니다. 부디, 저 같은 하찮은 사람을 보지 마시고, 교회 가르침의 존귀함을 바라보아 주십시오. 왜냐하면 그 가르침은 사소한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일, 즉 우리의 구원이라는 일에 대해 모두에게 유익한 권면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나님의 길을 걸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원수의 올가미를 피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정욕에서 자신을 정화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미덕을 쌓아 그로써 완전함의 정점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천국을 얻기 위해 어떤 선행을, 또 얼마나 많이 행해야 할까요? – 이러한 주제들을 다루는 우리의 가르침은 여러분에게 소중히 여겨지고 존중받아야 마땅합니다.

17. 게다가, 그에게 그런 태도를 보인다면, 여러분은 우리와의 이러한 대화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유익을 어떻게든 찾아내어 얻기 어려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선한 것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그의 악한 속삭임에 귀를 기울인다면, 모든 일에서 우리를 방해하고 마땅히 해야 할 일에서 우리를 멀어지게 하는 대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부적절한 것에 이끌린 우리 본성은 가르침을 처음과 같은 마음가짐이나 소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간직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교훈적인 이야기를 듣거나, 죽음의 문을 통해 이 세상에서 다른 삶으로 넘어가는 것에 대한 묵상, 혹은 심판 앞에 서는 일, 또는 평생의 행실에 대한 보상으로 영원한 운명에 대한 최종 판결을 듣는 것에 대해 생각할 때, 그 즉시 회개하는 마음에 사로잡혀 한숨을 쉬고, 울며 신음하지만, 잠시 시간이 지나기만 하면 다시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회개 대신에 마음이 굳어지며, 눈물을 흘리는 대신 웃음을 터뜨리고, 신음 대신에 얼굴과 눈을 이리저리 돌리며 흩어집니다. 그리하여 사도와 함께 외칠 수밖에 없다. “나는 비참한 사람이라.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내겠는가?” (롬 7:24).

18. 오, 그렇지 않습니다, 형제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경청할 것이며, 회개할 것이며, 더 나은 것을 향해 나아갈 것이며, 불에 불을 더해 우리 영혼을 하느님과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불태우고, 서로를 격려하며 순종과 겸손, 근면, 그리고 우리 천사 같은 삶의 모든 선한 행실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단지 씨를 뿌리고 있을 뿐이며, 그로 인해 수고하고, 지치고, 울고 있습니다. 그러나 머지않아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눈물로 뿌린 것을 기쁨으로 거두어, 만물의 주님이시며 하나님이신 분의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단, 우리가 이 자기 희생적인 순종의 길에서 부지런히 견뎌낸다면 말입니다. – 왜 내가 여러분에게 끊임없이 호소하지 않겠습니까? 시간이 있을 때 힘써 노력합시다. 조금만 더 수고하고, 이 잠과 같은 삶이 지나갈 때까지 조금만 더 인내합시다. 그리고 저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여러분께 단언하건대, 여러분은 영광을 얻으실 것이며, 하늘의 천사들의 무리에 합류하여 그곳에서 끝없는 세월 동안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197. 전쟁 중에는 군인들이 싸우느라 평안을 누리지 못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면 비로소 안정을 찾는다.

197. 1) 전쟁 중에는 전사들이 싸우느라 평안을 누리지 못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면 비로소 안정을 찾는다. 우리에게도 영적인 전쟁, 일생 동안 이어지는 전쟁이 있는데, 그로부터의 평안은 다른 세상에서 찾아온다. – 2) 그러니 우리가 기운을 내어 싸우자. 어떤 점에서도 적에게 뒤처지지 말고, 적의 허황된 위협을 두려워하지 말자. [31, 33]

19.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끊임없이 싸우는 이들에게는 크고 작은 적들과의 교전을 제외하고는 거의 휴식이 없다. 그들은 때로는 무기를 전투에 대비해 준비하고, 때로는 초소를 서고, 때로는 정찰을 떠나며, 그 사이 잠도 거의 자지 못하고 식사도 거의 하지 못한 채 항상 경계 태세를 유지하며, 언제든 갑작스러운 공격을 받을까 두려워한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비로소 그들에게 평안과 평화, 기쁨의 시간이 찾아오며, 그때야 비로소 그들의 군사적 공로에 대한 상과 왕의 선물이 수여된다. 우리도 마찬가지임을 볼 수 있다. 우리가 끊임없는 전쟁 상태에 있지 않은가, 그리고 군사적 규율을 지키고 있지 않은가? – 아니, 제가 말씀드리건대, 그들보다 훨씬 더 심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특별하기 때문입니다. 무기도 특별하고, “육신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강한 것으로, 우리는 견고히 서서 적을 무너뜨립니다”(고린도후서 10:4); 그리고 적도 특별합니다. 타락한 영인 마귀, 그와 함께, 그를 통해 타락한 모든 자들과 하늘에서 쫓겨난 세력들이 그의 군대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시기는 평온과 무심한 안일함을 누릴 때가 아니라, 투쟁의 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인 전신 갑주로 무장하고, 영적인 칼을 들어 싸워야 합니다. 그 후, 다소 성공적이든 아니든 일정 기간의 투쟁이 지나면, 그때 우리의 수호자이신 하나님께서 전쟁을 끝내시고, 우리를 이 세상의 방랑과 나그네 생활에서 불러내어 참된 거처와 고향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에 대해 율법도, 선지자들도, 사도들과 스승들도 기록하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20. 형제들아, 이제 너희는 경주할 길도 알고, 싸움도 알고 있다. 그러니 용감하게 서서 용맹하게 싸우자. 우리는 모든 불의, 곧 우리 자신의 불의와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낙담과의 전쟁, 탐식과의 전쟁, 과도한 수면과의 전쟁, 불결한 정욕과의 전쟁, 헛된 말, 경솔함, 웃음, 건방짐, 그리고 그 밖의 모든 불결한 정욕과의 전쟁입니다. 누구든지 물러서지 않고 굳건히 서서 싸우고 맞서 싸우며—반격과 끊임없는 기도와 계시를 통해—마침내 원수를 이기고 승리하는 자는, 주님의 전사로서 천국에서 시들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형제들아, 나의 영적 동지들아, 용기를 잃지 말고, 속임수에 넘어가지 말며, 대적들을 무너뜨리는 데 지치지 말고, 그 무력한 허수아비와 공포의 대상들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때로는 그가 무언가 위대하고 끔찍한 일을 저지르려는 듯 보이지만, 귀를 기울이는 이들에게는 그것들이 공중의 유령과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한때 위대한 안토니우스에게 반기를 들었던 자도, 때로는 뱀처럼 기어 다니고, 때로는 사자나 늑대, 혹은 다른 어떤 위험한 짐승처럼 보였던 그 자가 바로 그런 존재가 아니었습니까? 그는 이 용감한 청년 앞에서 어둠과 유혹으로 드러났으나, 그의 기도에 의해 멀리 쫓겨났습니다. 훗날 원수가 우리에게도 이와 비슷한 것을 보내고, 생각의 산을 쌓아 올리며 정욕의 급류를 내밀 때에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평화로운 마음가짐으로 생명을 주는 십자가의 표징으로 우리 자신을 감싸면, 그는 물러날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지금 이 시기는 인내가 필요한 때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인내하며 힘써 나아갑시다. 여러분 각자는 자신의 발걸음을 어떻게, 어디로 이끌어야 할지 잘 살펴보십시오. 만약 누군가 내 겸손한 계명이나 공동체 규율에 따라, 게다가 자신의 뜻을 단호히 버리고 행한다면, 그에게 복이 있을 것입니다; 그는 먹으면서도 먹지 않고, 마시면서도 마시지 않으며, 자면서도 자지 않고, 세상에 있으면서도 세상 위에 있으며, 도시에 있으면서도 마치 광야에 있는 것처럼 지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이만 하기로 합시다.

 

198. 우리는 경기장에서 경쟁하고 있다: 힘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198. 1) 우리는 경기장에서 경쟁 중이니, 힘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 2) 졸지 말라. 보라, 하나둘씩 떠나가고 있다. 저 세상에서 필요한 것을 서둘러 준비하라. – 3) 위대한 일을 찾고 있는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다. 그러면 찾을 것이다. 어떻게? 서약에 충실함으로써. – 4) 광야에서는 쉬웠지만, 이제 여러분은 도시로 들어왔으니 시련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부끄러움을 당하지 마십시오. – 5)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제 말씀입니다. [31, 34]

21. 우리에게 값을 매길 수 없는 보상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기에 – 곧 천국의 상속과 끝없는 생명 –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게으름 피우지 말고, 나태함의 잠에 빠져들지 맙시다. 경기장이 열렸고, 경기 코스는 정돈되고 측량되었으며, 상은 준비되었고, 심사위원들은 제자리에 있습니다. – 경기에 나설 선수들아, 앞으로 나서라. – 부지런하고 열정으로 가득 찬 자가 승리하여 월계관을 쓰게 된다. 그러나 게으른 자는 월계관을 잃을 뿐만 아니라, 그 귀중한 영혼마저 망치고,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채 떠나 영원한 고통 속으로 보내진다.

22. 매일 이 곳에서 누군가는 떠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떠나며, 이 생에서 제 몫을 다한 뒤 주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십니까? – 늙은이와 젊은이, – 왕과 종, – 대주교와 사제, – 수도원장님과 수련자까지? 이곳에서 찾던 자는 저곳에서 얻으며, 이곳에서 보물을 미리 보내 둔 자는 저곳에서 그것을 맞이하고, 이곳의 모든 것을 버린 자는 저곳에서 풍성히 받게 됩니다. – 여러분에게는 세상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홀로 지낼 수 있는 은혜가 주어졌습니다.

23. 여러분 앞에는 하나님과의 친밀함과 기쁨과 즐거움 가운데 그분을 향한 가장 진실한 섬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사명이자 업적은 자신의 서약에 충실하게 머무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어떤 계급에 속해 있고 어떤 덕행을 실천하고 있든, 그 자리에서 물러서지 말고, 영혼을 주님이시며 만왕의 왕이신 하느님의 성전으로 바치십시오.

24.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선한 마음을 기뻐하신다는 것은, 여러분이 (산속의) 고요한 곳에서 (콘스탄티노플의) 시끌벅적하고 인구가 많은 곳으로, 사막에서 도시로 이주했음에도 여전히 그 모습을 변함없이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미덕을 하느님께 제물로 바치는 이는 어디서나 금처럼 존경받으며, 그로부터 그리고 그 미덕을 위해 영광이 하느님께 올라갑니다. 그 영광은 이곳에서도 올라갔습니다. – 어떤 이들은 – 선의에서든 악의에서든 – 똑같이 말하곤 했습니다. “자, 그들이 그 마음을 계속 간직할 수 있을지 두고 보자.” – 그러나 저는 여러분이 그 마음을 지키고 견뎌내시리라 희망합니다. – 그리고 도시 한가운데에 있으면서도 사막에 있는 것처럼 행동하며, 도시의 소음 속에서도 영혼의 평화와 평온을 간직하시리라 믿습니다. 바로 여기에 진정한 시련이 있습니다. 이를 견뎌내신다면, 여러분은 참으로 경탄받을 만할 것입니다. 성 신학자는 어딘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겨울이 추위를 주고 태양이 빛을 비추는 것이 무엇이 놀랍겠는가? 그것들은 저절로 그렇게 할 뿐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광야에서 침묵을 지키고, 고독 속에서 평온을 유지하는 것은 그리 큰 칭찬거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도시에서 은둔하는 것처럼 살고, 시끌벅적한 군중 속에서도 마치 광야에 있는 것처럼 지내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의 아버지이자 여러분의 아버지이신 분의 기도로 인해, 여러분을 흠 없이 보존하시고 여러분의 소명에 굳건히 머물게 해 주셨습니다.

25. 여러분의 영광과 칭찬은 여러분 자신에게 있습니다. – 그러니 수도원의 일을 보러 나갈 때,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그 일을 수행하며, 걸음걸이와 태도, 눈빛, 처신, 대화, 그리고 모든 면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을 보이도록 힘쓰십시오. 자, 내 자녀들아, 자, 부탁한다. 너희에 대해 비난받을 만한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하라. 많은 눈이 우리를 지켜보고, 많은 입이 우리에 대해, 그리고 우리를 반대하며 말한다.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시 78, 10) 그들의 덕은 어디에 있느냐? 그리고 누가 그들을 이끌고 있는가? – 그들이 어떻게 뻔뻔스럽게 행동하며, 이리저리 눈을 굴리고 마치 어떤 창녀라도 된 듯이 웃음을 터뜨리는가?” 보라, 온 형제단에 재앙을 초래하지 않도록 하라. 불멸의 하나님을 경외하라! 그러나 어떤 말을 하든지 마치 주님께서 직접 들으시는 것처럼 말하고, 어떤 일을 하든지 마치 여러분을 지켜보시는 그분의 눈앞에서 행하는 것처럼 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의 처지도 충분할 것이며, 여러분 자신도 마치 빛나는 별들처럼 왕의 성읍 한가운데에 서게 될 것입니다.

 

199. 이 격언들은 수도자의 미덕과 위업을 지적하며, 그 안에서 번창하도록 독려하고 있다.

199. 이 격언들은 수도자의 미덕과 위업을 지적하며, 그 안에서 성공하도록 독려한다. [31, 35] 수도자에게 있어 가장 위대한 무기는 절제이다. 절제는 다른 모든 미덕으로 통하는 문이다. 그러나 순종을 실천하는 자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이며, 겸손한 자는 천사와 같고, 자신의 모든 것을 영적 아버지께 드러내는 자는 태양처럼 맑다. 그러니 누구도 치유할 수 없는 상태가 되지 않도록 비밀을 간직하지 말라. 유익한 것과 너희를 겸손하게 이끄는 것을 추구하라. 이와 반대되는 것은 무엇이든 용납하지 말라.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조금 뒤에는 어디로 옮겨갈지, 그리고 육신을 떠난 후에는 어떻게 될지 알고 있다. 그러니 경청하고 정신을 차리자. 우리의 마음이 항상 하나님께로 향하여, 그곳에서 영원한 복과 그 복을 누리는 자들의 복된 기쁨을 묵상하며, 동시에 끔찍하고 끝없는 고통이 있는 지옥에 떨어진 자들의 쓰라린 운명도 함께 묵상하자. 주님은 살아 계시고 하나님은 찬송받으시니, 우리가 이 거룩한 수도복을 입고 세속적인 모든 것을 버리며, 마치 칼처럼 육신의 모든 것을 잘라내었으니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선한 수련을 계속한다면, 영원한 세월 동안 승리를 축하하며 기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수련은 금식, 밤샘 기도, 금욕적인 삶이 요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용감한 각오이며, 여기에 더해 하나님의 사랑을 위해 겪는 모든 슬픔과 억울한 비난, 모욕, 조롱, 추방, 배신을 기꺼이 참아내는 인내를 더하리라. 크든 작든, 새로 온 이든 오래된 이든, 모두 힘내십시오. 모두 잘 달려가며, 언제나 기꺼이 기도와 순종, 그리고 일에 나서십시오. 게으름과 분노, 성급함, 시기, 다툼, 의심,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정욕이 여러분에게서 쫓겨나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서로에 대한 사랑에서 더욱 뛰어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영으로 불타며 주님을 섬기고, 소망으로 기뻐하며, 환난을 인내하고, 기도에 힘쓰라”(롬 12:11, 12).

 

200. 형제들이 엄격한 수도 생활을 잘 실천하고 있음을 칭찬하고, 그 속에서 순교의 특징을 지적한 뒤, 장차 순교자들과 함께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주며 계속 그렇게 하도록 설득한다.

200. 1) 형제들이 엄격한 수도 생활을 실천하는 것을 칭찬하고, 그 속에서 순교의 특징을 지적한 뒤, 장차 순교자들과 함께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주며 계속 그렇게 하도록 설득한다. – 2) 미래에 우리가 이곳에서 자발적으로 스스로에게서 박탈한 모든 것을 가장 완전한 형태로 받게 될 것이라고 확신시키며, 모든 결핍을 기뻐하고 자신의 길을 굳건히 지키도록 설득한다. – 3) 죽음을 상기시키며, 죽음을 준비할 것을 권하고, 탐욕에서 양심을 정화하지 못한(그의 방에서 은화 두 닢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죽은 형제를 위해 기도해 줄 것을 요청하며, 절을 하도록 지시한다. [31, 36]

1. 자녀들아, 하나님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날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서 더욱 성장하며, 끊임없이 경건함을 지키고, 선의를 베풀며, 수련에 힘쓰고, 절제하며,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적당한 양의 빵과 소량의 포도주로 만족하며, 그와 동시에 일할 때의 수고를 게을리하지 않고, 규율을 지키며, 일찍 일어나 모임에 참석하고, 예배가 끝날 때까지 인내하며 서 있는 데 있어 다른 이들에게 뒤처지지 않고, 온유함과 악의를 품지 않음, 불평하지 않음을 드러내고 있으니, 이는 누구든지 불평하면 죄가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뜻을 꺾으며 수련자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위업이다. 그들의 순교에서, 불 대신에, 수지 가마솥, 화살, 발톱, 칼, 십자가 대신에 앞서 언급된 위업들과 더불어 다음과 같은 것들이 그 역할을 한다: 모욕, 치욕, 단식, 절제를 통한 육체의 고갈, 자기 절제, 의복과 신발, 거처 및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에서 부족함을 인내하는 것. 슬픔과 고통을 견뎌낸 대가로 우리에게 면류관이 주어질 것이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용감하게 순교의 길을 걸어가자. 그리하여 그곳에서 성스러운 순교자들과 한 줄기에 서게 될 것이며, 그곳에서는 이 세상의 슬픔과 결핍, 신음 대신에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보상이 주어질 것이다: 영생과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 형언할 수 없는 즐거움으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2. 우리는 조국을 버린 탓에 이곳에 고향이 없으나, 저곳에서는 하늘 예루살렘의 시민이 될 것입니다. 육신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는 없으나, 그 대신 저 세상에서 하나님 안에서 아버지를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상속받을 것이 없으나, 저기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을 받게 될 것이며; 육신의 위안인 음식과 음료, 그리고 그 밖의 모든 감각적 쾌락을 스스로 거절하지만,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저기서는 눈으로 보지 못한 것, 귀로 듣지 못한 것, 사람의 마음에 떠오르지 않은 것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뻐하십시오. 그리고 이 사실을 바라보며 낙심하지 말고, 나태해지지 말고, 현재의 어려움이나 미래의 어려움, 설령 그것이 더 무겁다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 그러나 내가 무슨 말을 하는가? 불이든, 칼이든, 죽음이든, 이 모든 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고, 여러분의 길을 굳건히 지켜 나가십시오.

3. 우리 형제들이 세상을 떠난 것을 보아, 우리도 매 순간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제는 한 사람이 떠났고, 며칠 전에는 또 다른 사람이 떠났습니다. 문 앞에는 이미 또 다른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다음은 누가 될까요? “어쩌면 나일지도 모른다”고 누구나 말할 수 있으니, 지금부터 준비하기 시작하십시오. – 세상을 떠난 바실리 형제에 대해 제 영혼의 슬픔을 여러분께 전하고 싶습니다. 그는 양심을 깨끗이 하지 못한 채 떠났는데, 그에게서 은화 두 닢이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아아! 얼마나 큰 눈먼 것이냔 말인가! 악마가 그를 무엇으로 붙잡아 두었는가? 두 은전을 천국보다 더 귀하게 여겼으니 말이다. 나는 그에게 한 번도 아닌 여러 번 말했었다. 털 한 올이든, 바늘이든, 붓이든, 혹은 다른 무엇이든 누군가가 가져가 자기에게 숨겨 둔다면, 그것 하나만으로도 죄의 온 공간을 가득 채운다고. 여러분도 분명 성 카시아노의 저서 『 』에서 이 내용을 보셨을 텐데, 그는 성 마르코에 의거하여 단 하나의 죄가 열한 개의 자리를 채운다고 말합니다(죄의 충만함을 열두 개로 측정할 때). 무언가를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 소유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영혼과 마음을 그곳에 쏟아부은 것입니다. 보물이 있는 곳에 영혼도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어디에 포기함이 있겠습니까? – 그러니 그를 위해 기도합시다. 일주일 동안 매일 그를 위해 세 번 절하고 서른 번 기도하여, 주님께서 그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빕시다.

 

201. 형제들을 모든 수도 생활의 수련에서 온전한 자들로 묘사하며,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우리는 영원히 그와 같이, 각자가 정해진 때에 자신의 일을 행하며 살자.”

201. 모든 수도 생활의 수련에서 형제들이 온전함을 보인 것을 묘사하며, 다음과 같이 덧붙입니다. “우리도 영원히 그와 같이, 각자가 정해진 때에 자신의 일을 행합시다.” [3 1, 37] 하나님께서 너희의 심은 포도나무를 자비롭게 돌보시며, 이 참된 포도원을 심으신 그분께서 친히 성령의 물로 너희를 적시시고, 온전한 수준에 이르러 모든 참된 열매를 맺게 하시기를 바란다. 나에게는 이 일이 내 연약함을 넘어서는 도전입니다. “주님, 제가 누구이기에”라고 외치는 것이 마땅하며, “내 아버지의 집”이라니, 주님께서 이토록 더럽고 부정하며 양 떼 속에 있을 자격조차 없는 나를 높이 들어 올리셨단 말입니까? – 그러나 그분은 나를 받아들이시고, 오래 참으시며 나의 회개와 개선을 찾으시고 기다리십니다. 누가 그분 앞에 서서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청하겠습니까? 누가 요새 안에서 그분의 양 떼를 돌보겠습니까? 누가 하나님과 그토록 가까워서 다른 이들도 그분께로 인도하겠습니까? – 나는 하늘과 땅이 떨어진 만큼이나 그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 그러나 여러분이 바른 길을 걷고,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행하며, 선한 일에서 서로 본받아 모두 함께 온전함으로 높아지고 있음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진실로 여러분 안에는 여러분이 축복하고 섬기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며, 성령께서 여러분의 모임 위에 머무르십니다. 여러분의 찬송은 천사들의 찬송과 같고, 시편 찬송은 육체를 벗은 자들의 노래이며, 여러분의 모든 행실은 참으로 천상의 행실로, 그 안에는 육체와 피의 그림자도 없고, 제멋대로인 욕망도, 멸망하는 자에 대한 염려도, 헛된 근심도, 버림받은 자에 대한 위로도, 유혹하는 것도, 유혹당하는 자도 없습니다; 오직 모든 것이 고요와 평화로 가득 차 있으며, 여러분에게는 단 하나의 소망, 단 하나의 의지, 단 하나의 영혼과 마음, 단 하나의 흐름, 단 하나의 열망—하나님을 닿는 것, 단 하나의 삶이 있습니다. 진실로 여러분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형제단이며, 천사와 같은 존재로서, 육신 안에 있으면서도 육신 위에 있으며, 세상에 있으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은, 무정(無情)의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여러분은 선한 경지에 이르렀으며, 왕의 중도(中道)를 걸어가며 양쪽의 급류를 피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수행과 절제, 잠과 깨어 있음, 침묵과 말, 수고와 안식, 기도와 간구는 하나님께 기쁘시게 여겨집니다. 가끔은 자신의 연약함에 대해 조금 더 절제하고 관대하게 행동하더라도, 곧 다시 엄격함을 되찾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우리를 조금 흔들더라도, 다음 순간이 다시 모든 것을 바로잡아 줄 것입니다. 아침 기도가 시작되고, 이어서 성찬식이 거행되며, 성인의 생애를 읽은 뒤, 설교가 이어지고, 그로부터 조금 벗어나 있던 이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도움이 되고, 서로에게 방패가 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우리 아버지의 기도로 인해, 우리 가운데는 마귀가 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오십시오, 우리 각자가 자신의 사명을 다합시다. 누구도 주님의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며, 소홀히 하는 자와 불평하는 자에게 내리신 벌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모두 각자의 일에 적절한 때를 분별하며 행하십시오. 일할 때는 일하고, 쉴 때는 쉬십시오; 잠잘 때가 되면 자고, 기도할 때가 되면 순수하게 기도하며, 울고, 눈물을 흘리십시오. 우리는 울도록 부름받았기 때문입니다. 음식을 먹을 때가 되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대접받은 것을 드시고, 말할 때가 되면 분별 있게 말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든 일에는 제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나날을 보내는 자는 올바른 걸음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러한 행실과 마음가짐 안에서 우리 주 하나님께서 그분의 거룩하신 이름을 영화롭게 하시며, 너희를 굳건히 세우시고, 강화하시며, 지켜 주시기를 바란다.

 

202. 자신의 뜻을 꺾음으로써 자신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라. 항상 모든 일에서 그러하되, 그리하면 하나님의 자비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202. 1) 자신의 뜻을 끊어 하나님께 자신을 제물로 바치십시오. 항상 모든 일에서 그러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의 자비가 반드시 여러분과 함께할 것입니다. – 2) 다만 모든 일을 깨끗하고, 겸손하며, 품위 있게 행하십시오. – 3) 각자가 받은 은사에 따라 덕을 쌓으십시오.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모두는 한 몸이므로 모든 일의 열매를 함께 누리게 됩니다. [31, 38]

4. 여러분이 소망하는 복을 얻으시기를 바라며, 여러분의 순종을 통해 하나님께 열매 맺고 기쁜 제물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뜻을 끊어내어 항상 자신을 제물로 바치고, 영적인 제단 위에서 주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로 드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신성한 열정으로 간절히 바라는 바는, 여러분의 제물과 봉사가 흠이 없고, 하나님의 은혜로운 호의를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 기도와 겸손, 통회, 신에 대한 묵상, 절제, 대적하는 자들과의 싸움과 그들을 이기는 일에서 열심과 인내, 그리고 꾸준함을 유지한다면, 반드시 그렇게 될 것입니다. – 그러니 여러분, 부디 그러하되 인내하며, 덕의 길을 따라 달려가고 걸어가며, 싸워 이겨내십시오. 그리하면 하늘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입니다.

5. 헛되이 달려가지 말고 헛되이 수고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조심하여 넘어지지 말고, 사소한 게으름이나 작은 실수로 인해 여러분의 소망을 높은 곳에서 떨어뜨리지 말고, 결국 여러분의 덕행이라는 영적 집을 무너뜨리지 마십시오. 그러므로 깨끗하신 주님을 위하여 모든 일을 깨끗하게 행하십시오. 교만하여 대적하는 주님께 모든 것을 겸손히 바치십시오. 모든 순결하고 흠 없는 것을 신랑이신 그리스도께 봉헌하십시오. "“너희 말은 언제나 은혜로 가득하고 소금으로 간을 맞춘 것처럼,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줄 알라”(골 4,6); 너희의 품성은 선행으로 단장되어, 다가오는 이들에게 은혜를 베풀게 하라; 너희의 행동과 걸음과 대화는 마치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것처럼, 보는 이들에게 본보기가 되게 하라. 여러분 모두가 저와 같지 않기를 바랍니다. 저는 부정하고 어리석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 성스러운 선조들, 아카키오스, 도시페이오스, 아바 키르, 안티오코스, 페트로니오스, 그리고 유프티미오스와 사바—여기 덧붙이자면—위대한 안토니오스처럼 되기를 바랍니다.

6. 그러므로 덕을 쌓아 부유해지고, 너희에게 주어진 은혜로 눈물과 통회, 인내, 수고, 슬픔으로 너희의 보물 창고를 채우라. 이는 한 사람은 이 것을, 다른 사람은 저 것을 본성적으로나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네가 어떤 면에서는 이웃보다 뛰어나고, 다른 면에서는 뒤처진다 해도 슬퍼하거나 시기하지 말라.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믿음의 분량을 나누어 주셨으니” 바로 그러하다. 그나저나 아무도 무엇 하나 결핍당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하나이면서도 수많은 지체로 이루어진 한 몸이며, 여러분의 미덕은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자비로 인해 서로에게서 다른 이에게로, 또 다시 되돌아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모두로 여기시고, 모두를 각자로 여기십니다.

 

203. 모든 것을 버리고 기꺼이 좁은 길을 따라가는 여러분을 칭찬합니다

203. 1) 모든 것을 버리고 기꺼이 좁은 길을 걷는 여러분을 칭찬합니다. – 2) 이를 기뻐하십시오. 보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 3) 이를 알기에, 우리 삶의 규칙에 따라 견뎌야 할 모든 일을 겸손히 인내하십시오. [31, 39]

7. 나는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여러분이 우리의 규율을 충실히 지키고, 우리 선조들의 발자취를 인내로이 따르고 있는 점을 칭찬합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우리 아버지의 기도의 도우심으로, 여러분은 가장 훌륭한 삶을 받아들일 수 있었으며, 하나가 되어 모든 것과 모든 사람으로부터 떨어져 살며, 육신과 피를 버리고 위로부터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셨습니다. – 그렇습니다. 아직 살아 계시면서도 마음으로는 이미 죽으셨고, 육신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육신보다 더 높은 것을 추구하십니다. 부모에 대한 사랑이 여러분을 붙잡지 못했고 지금도 붙잡지 않으며, 집과 고향도 더 이상 여러분을 사로잡지 못합니다. 사도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나니”(빌립보서 3:20). 또한 다시 말하건대, – 너희는 슬픔을 견디고, 밤낮으로 고난을 겪으며, 금식하고, 기도를 드리며, 자신을 깨끗하게 지키고, 육신을 쇠약하게 하며, 자신의 욕망을 끊어내려고 싸우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생명으로 이끄는 좁은 길이며, 이 길을 걷는 이는 적으나, 파멸로 이끄는 넓고 넓은 길로는 매우 많은 이들이 달려가고 있습니다.

8. 그러니 기뻐하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십시오. 하늘에 여러분을 위한 위대한 상이 간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인내하며 순종한다면, 형언할 수 없는 빛을 얻게 될 텐데, 이보다 더 갈망할 만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만약 천사들과 함께 거할 자격을 얻게 된다면, 이보다 더 복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썩지 않고 영원한 복이 풍성하며, 끝없이 솟아나는 생수가 흐르는 낙원의 주민이 된다면, 이보다 더 경이롭고 기적 같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만약 모든 의인들과 함께 태양처럼 빛나며 그리스도의 공동 상속자가 된다면, 이보다 더 웅장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만일 우리 하나님 그리스도의 두려운 보좌 앞에 모든 피조물이 모일 때, 그분이 영광 중에 명백히 오시고 셀 수 없는 천사 군대를 거느리실 때, 어떤 이들은 “ “오라, 복 받은 자들아,” 하고 다른 이들은 “물러가라, 저주받은 자들아”라는 말을 듣게 될 때, 여러분이 앞선 자들 가운데 서게 된다면, 그때 여러분의 기쁨과 경이로움에 찬 환희와 비교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9. 이를 위해 여러분께 간청합니다. 현재의 모든 슬픔을 용감하게 견뎌 냅시다. 육신의 유혹에 용기 있게 맞서고, 우리 지체에서 타오르는 정욕의 불길을 꺼버립시다. 깨어 기도와 금식, 순종, 그리고 육체 노동을 인내로 감당합시다. 기꺼이 우리 자신의 욕망을 잘라내고, 형제들의 모욕을 겸손히 견뎌 냅시다. 교회 모임에서 찬송과 기도를 경건하게 지켜 냅시다. 거지 같은 옷과 신발을 참아 냅시다. 사람의 영광을 사랑하지 맙시다; 분노를 잠재우고, 낙담과 나태함을 몰아내며, 영혼의 충동을 절제하고, 말이 많은 입을 다스려 오직 필요하고 유익한 말만 하도록 훈련하며, – 그 밖의 모든 일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행해야 할 대로 행합시다. – 이 모든 것 위에, 우리 주 이신 우리 하나님, 강하시고 권능이 있으시며 그분의 성도들 안에서 경이로우신 분이, 우리 아버지의 기도를 통해, 우리에게 한 마음과 한 뜻을 주시어, 한 성령으로 우리를 그분 앞에서 흠 없이 지켜 주시기를.

 

204. 불결한 정욕을 자극할 수 있는 모든 것에서 멀리하고, 모든 불쾌한 일을 참아내라. 그러면 그 보상이 크리라

204. 1) 불결한 정욕을 자극할 수 있는 모든 것에서 멀리하고, 모든 불쾌한 일을 참아내라. 그러면 그 보상이 크리라. – 2) 세속의 사람들이 헛된 일에 봉사하며 얼마나 많은 것을 참아내는가? 우리는 하나님께 왕국을 위해 봉사하니, 이 길에서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일을 어찌 참지 않을 수 있겠는가. [32, 1]

10. 나는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직접 뵙고, 가능하면 모두와 대화를 나누며, 여러분의 구원을 염려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박해로 인해 그렇게 할 수 없으니, 편지를 통해 여러분 모두—여기에 계신 분들도, 특히 흩어져 계신 분들도—자신을 더욱 삼가시어, 명해진 것 외에는 아무것도 허용하지 말고, 특히 상호 관계에서 건방진 행동을 삼가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아이들과는 말을 많이 하지 말고, 더구나 여성들과는 더욱 그러하십시오. 만일 그들을 만나거나 그들과 이야기해야 할 필요가 있다면, 가능한 한 모든 주의를 기울여 행하십시오: 마음을 가다듬고, 눈을 아래로 내리십시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처녀를 쳐다보지 말라. 노래하는 자와 어울리지 말라”(시라 9,5.4). 그러나 하나님을, 너희의 모든 움직임과 행동—육체적이든 영적이든—을 지켜보시는 분으로 인식하는 자들로서, 어디로 향하든지 그렇게 스스로를 다스리고 행하라. 박해로 인한 모든 고통을 감사히 견디며, 인내로 인해 너희에게 예비된 상을 기대하라.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그분의 이름으로 보여준 행실과 사랑의 수고를 잊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6,10). 여러분이 세속과 모든 세속적인 것—부모, 자녀, 형제, 친족, 조국—을 버리고, 순종의 무거운 짐을 지기 위해 심지어 육신까지 바쳤던, 그 첫날부터 그러하셨습니다. – 당신의 지위가 얼마나 위대한지요! 그보다 훨씬 더 큰 보상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11.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무너지고 궁핍에 시달리는지 보지 못하십니까? 어떤 이들은 농사를 짓다가 민간의 세금과 요구에 시달려, 자신들이 살아갈 만큼의 생계비조차 간신히 남을 뿐입니다. 또 다른 이들은 육군이나 해군에 입대하여, 그곳에서 공격하고 공격당하며, 상대를 쓰러뜨리기도 하고 쓰러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 유일하고 살아 계시는 참 하나님께 섬길 자격을 얻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우리에게 위로와 감사와 기쁨이 충분하지 않겠는가? – 왜냐하면, 우리가 주의 깊게 살며 모든 일을 품위 있게 그리고 질서 있게 행하고, 영혼을 공격하는 육신의 욕망을 절제하며, 그 유혹을 즉시 물리치고 영혼의 순결을 지키면, 의심할 여지 없이 영원한 복을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05. 고기 금식 기간에는 절제하지 못하는 데 빠져서는 안 되며, 읽는 복음서에 깊이 몰입하고, 그에 따라 더 거룩하게 살겠다는 결심을 세워야만, 우리가 천국을 상속받을 수 있다.

205. 고기 금식 기간에는 절제하지 못하고 방종에 빠지지 말고, 읽는 복음서에 깊이 몰입하며, 그에 따라 더 거룩하게 살겠다는 결심을 세워야만, 우리가 천국을 상속받을 수 있다. [32, 2] 신자들에게 공통된 법에 따르면, 오늘(고기 금식 기간) 세속적인 사람들은 고기 섭취를 자제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을 보느냐? 우리는 그들이 지금 절제할 수 없을 정도로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며, 게다가 “말할 수도, 들은 적도 없는” 온갖 놀이와 오락에 빠져 있음을 본다. 주님께 감사하며 제공되는 음식을 절제 있게 맛보며, 곧 닥칠 모든 면에서의 더 엄격한 절제를 준비해야 마땅한데, 그들은 마귀의 유혹에 굴복하여 그와 정반대의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 저는 여러분께 말씀드리건대, 우리 수도사들은 마음속으로조차 그곳에 발을 들여놓아서는 안 되며, 그들이 탐내는 것을 갈망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갈망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온갖 비난과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오히려, 우리는 지금 읽고 있는 복음서,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위대하고도 두려운 날에 대해 더욱 주의를 기울이고 깊이 묵상합시다. 그때 주님께서는 가장 의로운 재판관으로서 양들을 당신 우편에, 염소들을 좌편에 세우실 것이며, 그리고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그 복되고 소망스러운 부르심을 선포하시며: “내 아버지의 복을 받은 자들아, 창세부터 너희를 위해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반면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는 그 쓰라리고 충격적인 판결을 내리시리라: “나에게서 떠나가라, 저주받은 자들아,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해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마태복음 25:34, 41). 두려움과 떨림, 그리고 경악으로 가득 찬 이 판결을 생각하며, 우리와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자비로우신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실제로 들은 바를 체험해야 할 시간이 오기 전에 말입니다. – 왜, 저들은 저대로 이 날들을 보내고 있는 반면, 우리는 복음 설교를 듣고 정신을 차린 자로서, 큰 두려움과 떨림으로 우리 주님을 섬기기로 마음속에 다짐하며, 영혼 속의 모든 악을 몰아내고, 그 대신 관대함, 선함, 겸손, 온유, 오래 참음,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선하고 칭찬받을 만한 것, 관대함,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선하고 칭찬받을 만한 것들, 나아가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천국의 상속자가 될 자격을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206. 비록 우리가 항상 금식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은 다가오는 금식 기간 동안에도 무언가를 더 실천하도록 하라.

206. 비록 우리는 항상 금식 중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이가 다가올 금식 기간을 위해 무언가를 더 준비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믿음의 방패와 구원의 투구를 모두 착용하라. [32, 3] 원수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대로, “오늘이 무엇을 낳을지 알 수 없으니” (잠언 3, 28). – 이제 성 대림절의 가장 소망스러운 날들이 문 앞에 다가왔으니, 이는 금식의 선물을 가져다주는 날들이다. – 우리 주님께서는 그 기간 동안 금식하시며, 이 무기로 그분을 유혹하던 유혹자를 이기셨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삶의 모든 날을 금식하며 보낸다: 우리에게는 호화로운 고기 요리가 없고, 아침에 시케르를 마시려고 서두르지도 않으며, 연회가 열리는 곳을 찾지도 않고, 코끼리 가죽 침대에서 자지도 않으며, 젖을 갓 뗀 새끼 염소를 먹지도 않고, 반짝이는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기 때문이다. – 이것이 바로 큰 소리로 외치던 이사야가 세상의 지혜자들에게 돌린 말이다. 이러한 것들은 경건한 이들에게는 거리가 멀며, 하물며 우리의 정직한 공동체 수도 생활과는 더욱 거리가 멀다. 우리에게는 소박한 음식조차 얼마 없으며, 그마저도 영혼을 미치도록 짜증 나게 하는 다른 것은 전혀 없다: 오직 빵, 그것도 적당량, 그리고 몇 가지 채소 요리, 그것도 조금씩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경건한 사순절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 기간의 식단이 다른 날들의 식단과 거의 같기 때문입니다. 그나저나 우리 각자는 금식 기간의 미덕 중 이러저러한 것에 작은 것을 더해야 합니다. 경건함에는 수공예와 함께하는 고독을, 순종에는 당당함을, 침묵에는 유순함을, 시편 찬송에는 조용한 조화를 더해야 합니다. 누군가는 더 큰 열정으로 일에 매진하고, 누군가는 침묵을 적절한 타이밍으로 아름답게 꾸미며, 또 다른 이는 슬픔에 잠긴 형제들에게 기쁨과 위안이 되어 주십시오. 형제의 마음속 슬픔을 달래 준다면, 말하는 이에게 큰 칭찬이 따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이는 절이나 섬김, 혹은 필요한 준비를 더욱 늘리도록 하라. 그리고 누구도 게으르거나 무위도식하지 말라. 비록 누군가가 작은 일이라도 힘쓰면, 과부의 두 렙타가 보여주었듯이, 그것이 열심으로 행해진다면 하나님께 기쁘게 여겨질 것이다. 또한 기도와 찬송, 그리고 모든 경건한 생활에 힘쓰라. 이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들어, 마귀의 궤계를 이겨내고 모든 악한 자의 불타는 화살을 끄도록 하라. 그리고 구원의 투구를 머리에 쓰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굳건히 서라.

 

207. 어떤 이는 이것에, 다른 이는 저것에 힘쓰되, 규례에 따라 모두에게 공통된 원칙은 이러하니, 자기 뜻대로 아무것도 행하지 말고, 생각으로 인해 원수가 자기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주의하며, 모든 선한 일에서 방해받지 않고 번창하도록 하라.

207. 어떤 이는 이것을, 다른 이는 저것을 실천하되, 규율에 따라 모두에게 공통된 원칙은 이러하니, 자기 뜻대로 아무것도 행하지 말고, 생각으로 인해 원수가 마음속에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경계하며, 모든 선한 일에서 방해받지 않고 번창할 수 있도록 하라. [32, 4]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해마다 이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우리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비로 우리를 현재의 금식 기간으로 이끌어 주셨으니, 이 기간 동안 열심 있는 자들은 말씀하신 대로 각자 자신의 뜻에 따라 자신의 수행을 더하고 있습니다. 절제를 열망하는 자는 이틀, 사흘씩 금식하고, 기도에 열심인 이는 그만큼의 시간을 기도에 바치고, 무릎 꿇기에 힘쓰는 이는 이제 그 횟수를 더 늘리며, 다른 이들은 각자의 수행을 통해 마찬가지로 실천하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이 기간 동안 모든 이에게서 수행에 대한 큰 열정과 성실함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순종자는 언제나 순종의 법칙에 따라 행동하며, 특정 시기에만 국한되지 않고 항상 일관된 수행 방식을 유지한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자신의 뜻대로 행하지 않고, 자신의 지도자가 정한 지침에 따라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열심 있는 수행 중에서 가장 높은 것이며, 이를 통해 순교자의 면류관을 얻게 됩니다. 열심 있는 이들은 이렇게 행합니다. 그나저나, 원초적인 전승에 따라 이 금식 기간에는 규율에 의해 모든 이의 식사가 바뀌고, 절 횟수가 늘어나며, 시편 찬송이 증가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부디 금식의 선물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찡그리지 말고 즐거운 얼굴로 이를 지내도록 합시다. 악의를 품지 않고, 정죄하지 않고, 분노하지 않고, 교활하지 않고, 시기하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서로에 대한 평화와 사랑, 온유함, 순종, 자비와 선한 열매를 더하는 가운데서 말입니다. 무엇보다도, 성경이 가르치듯이 “만약 지배하는 영이 네게 닥친다면, 네 자리를 떠나지 말라”(전도서 10:4)고 말씀하신 대로, 정욕의 문을 열어주지 않고 마귀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 생각의 움직임에 경각심을 가지고 주의를 기울입시다. 원수는 생각을 심어줄 권세는 있으나, 들어올 권세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주인이다. 문을 열지 않으면, 그는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우리 는 그리스도의 신부인 우리 영혼을 지키고, 생각의 화살에 상처받지 않도록 보존합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성령의 거처가 될 수 있으며,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라”(마태복음 5:8)는 말씀을 들을 자격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진실하고, 고상하고, 의롭고, 흠 없고, 사랑스럽고, 칭찬할 만한 것, 어떤 미덕이든, 어떤 찬사든”, – 사도의 말씀대로 말하노니 – “그것을 생각하고 행하라. 그리하면 세상의 평화의 하나님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빌 4,8-9).

 

208. 금식 수련은 습관을 통해,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행할 때 수월해지며, 무엇보다도 경건한 묵상을 통해 그 대상이 제시된다

208. 금식 수련은 습관과 인내, 그리고 끈기를 통해 수월해지며, 무엇보다도 경건한 묵상을 통해 그 대상들이 제시된다. [32, 5] 모든 시작이 어려운 것처럼, 금식의 시작도 식단의 변화와 우리의 행동 대상에 따른 변화로 인해 어느 정도의 불편함과 어려움을 겪게 되지만, 그러나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이를 지켜 나감으로써 그것들은 완화되고 부드러워지는데, 이는 “모든 징계(훈련)는 당장은 기쁨으로 여겨지지 않고 슬픔으로 여겨지나, 후에 그 훈련을 받은 자들에게 의의 평안한 열매를 맺게 하리라”(히브리서 12,11) 기록된 대로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일주일간의 금식을 완수할 자격을 얻었으니, 이미 그 안에서 어느 정도의 경험을 쌓은 자로서, 이를 계속해 나가는 데 더욱 열심이어야 합니다. 이 열심이 영혼과 몸을 모두 강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나태함은 가벼운 것을 무겁게, 편한 것을 어렵게 만듭니다. 그러나 영적 수행과 육체적 건강을 모두 성공적으로 지키기 위해, 우리의 노력에 지나치게 무리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처음에는 빠르게 달렸다가 나중에 완전히 기력을 잃고 멈춰 서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끝까지 갈 거리를 염두에 두고, 계산과 절제를 가지고 힘쓰는 편이 낫다. 하루 종일 노동과 집중에 힘을 쏟으면 대개 약간의 휴식이 필요해지기 마련이므로; 그러니 (일하는 도중에도, 일이 끝난 후에도) 선한 신앙과 영적인 묵상으로 영혼을 양육합시다. 세속적이고 헛된 것들—혼란스럽고 쓰라린 것들—이 아니라, 하늘의 것들, 즉 달콤하고 기쁨을 주는 것들에 대해 생각합시다. 시편에 “내가 하나님을 기억하니 기뻐하였도다”(시 76:4)라고 노래하고 있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께, 하늘의 관상, 낙원의 아름다움, 영원한 거처, 천사들의 환호, 그리고 우리가 그곳으로 옮겨갈 곳—지금 의인과 죄인의 영혼들이 있는 곳—으로 향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루어질 때,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늘이 지나가고, 천체들이 무너지고, 땅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이 불타버릴 때, — 영혼이 다시 자신의 몸을 어떻게 되찾을지, — 아담부터 세상의 끝까지 모일 그 사람들의 모임은 어떠할지, 태양보다 더 찬란하고, 위엄 넘치며 두려운 주 그리스도의 얼굴은 어떠할지, – 우리가 그분의 어떤 음성을 듣게 될지, – 마지막으로, 의인들을 천국으로 부르시고 죄인들을 영원한 고통으로 보내시는 최종 심판이 어떠할지. – 이것이 바로 우리가 깊이 생각하고 염려해야 할 바이며, 그리고 이 세상 밖에 있는 자로서 육신에 따라 사는 자들과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는 우리가 마음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 그리고 이러한 묵상에서 회개와 눈물로 나아가며, 장차 올 영원한 복을 누릴 수 있기를 바라며 이 세상의 삶을 평화롭고 평온하게 살아가는 법을 배우며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209.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한다. 존재에 대해, 성... 세례를 통한 하나님의 자녀 됨에 대해, 수도 생활에 대해, 성상 파괴자들 앞에서 고백한 신앙에 대해

209. 1)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께 감사해야 한다. 존재에 대해, 성세례를 통한 자녀됨에 대해, 수도 생활에 대해, 성상파괴주의자들 앞에서 신앙을 고백한 것에 대해. – 2) 또한 모든 것의 근원이자, 각기 다른 수준으로 나타나지만, 비천함과 무지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이에게 열려 있는 신앙에 대해서도 감사해야 한다. [32, 6]

12.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에 도움이 되는 많은 미덕을 가르쳐 주셨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감사함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의 하나님께 여러분 모두를 위하여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온 세상에 널리 알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롬 1:8). 그는 어디서나 모든 일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모든 일에 대해 감사했듯이, 모든 사람에게도 “모든 일에 감사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누군가 이것이 단지 그 자신의 선한 조언일 뿐이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니라”라고 덧붙이셨습니다(살전 5:18). 『사다리』에서도 기도에서는 모든 것에 감사가 앞서야 한다고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의 기도 문서에 하나님께 드리는 진심 어린 감사를 적어 두라.” 기도에서 그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한 후, 성 사다리꾼은 이렇게 결론지었습니다. “이 기도 방식은 한 형제에게 주님의 천사가 보여주신 것이다” (28편, 7장). 그러니 먼저, 우리를 무(無)에서 유(有)로 이끌어 주시고, “우리가 그분이 미리 예비하신 선한 일을 행하도록 우리를 창조하사,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셨다”(엡 2:10)는 사실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리자. 또한 복음서에 기록된 대로, 주님께서 성세례를 통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음을 감사드리자: “그를 받아들인 자들에게는,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이나 육신의 정욕이나 남편의 정욕 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요한복음 1, 12. 13). 또한 우리에게 수도 생활이라는 가장 완전한 삶으로 들어갈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에 감사드리며, 주님께서 어떤 청년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길을 미리 제시해 주셨음을 기억합시다: “네가 완전하고자 하면, 가서 네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와서 나를 따르라.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 (마태복음 19, 21; 마가복음 10, 21). 또한 (성상파괴 운동 당시) 다가올 순교자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시어, 우리가 미혹되어 이단적 오류에 빠지지 않게 해 주신 것에 대해서도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육신을 취하심으로써 육신으로 묘사될 수 있고 형상을 지니시며, 그 형상 안에서 경배를 받으신다는 것을 알고 고백하였기 때문이다. 복음 밖에서 미혹과 불신 속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 중에서도, 그리스도가 육신에 따라 묘사될 수 있고 형상을 지니시며, 그분의 형상을 경배해야 한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는 성상파괴자들처럼, 믿음에서 길을 잃고 파멸에 이른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리하여 그들은 성육신하신 그분의 구원 사업을 스스로 포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 이를 생각하며, 우리는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릴 이유가 있으며, 감사함 속에서 통회하고, 통회하며 눈물을 흘리며, 눈물 속에서 깨달음을 얻고, 그 깨달음 속에서 우리의 구원 사업에 더욱 힘써 나가야 합니다.

13. 믿음과 우리가 가진 그 믿음의 정도를 위해 하나님께 감사드리자. 믿음은 그 자체로 하나이지만,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정도에 따라 때로는 크고 때로는 작아지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믿음이 적은 자여, 어찌하여 의심하였느냐?” (마태복음 14:31). 또 다른 곳에서는 “여인아,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마태복음 15,28)라고 하셨고, 또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찾아보지 못하였다”(마태복음 8,10)라고도 하셨습니다. 이처럼 믿음은 때로는 크고, 때로는 작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아무도 “나는 단순한 사람인데, 어떻게 믿음을 깨달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선하심을 지니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에게 그분의 선하심의 빛을 비추십니다. – 사도는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형제들아, 너희의 소명을 보라. 육신으로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고, 강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귀한 자가 많지 아니하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천한 자들과 약한 자들을 택하사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이 세상의 보잘것없는 자들과 천대받는 자들을 택하사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며, 이 세상의 없는 자들을 택하사 있는 자들을 무효로 만드시려 하셨느니라” (고린도전서 1:27, 28).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을 보지 못하십니까? 다른 사람들은 차치하고라도, 우리의 복된 형제 팍데오를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그는 스키프인이 아니었습니까? 사람들의 노예로 섬기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수도원에 입문한 것도 노예 생활에서 해방된 후에 wasn’t it? – 그런데 그는 과거와 현재의 신앙 고백에서 어떤 모습을 보였습니까? – 그는 자신의 믿음을 받아들이고 그 믿음에 휩싸였으며, 그 믿음을 마땅히 품어 완벽한 사람으로 드러났기에, 고난을 겪은 지 사흘 만에 이 세상에서 다른 생으로 옮겨가며 순교의 면류관을 쓰게 되었습니다. – 우리도 그와 같이 되자. 무지를 핑계로 삼지 말고, 우리의 믿음을 알아가고 키워 나가자. 선한 삶이 믿음과 함께할 때 비로소 그렇게 될 것이다. 사랑이 동반하는 믿음이야말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기 때문이다. 이 둘 모두로부터 영혼의 구원이 나옵니다. 믿음만으로는, 사랑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오직 둘이 함께 지켜지고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우리도 그렇게 마음을 다잡아, 그리스도의 충만함에 이르는 성숙한 경지에 도달하고, 모든 성도들과 함께 약속된 영원한 복을 누릴 자격을 얻게 하소서.

 

210. 금식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도록 격려해 줄 것은, 금식이 주는 유익함—물론 평화롭고 사랑이 넘치는 마음가짐을 유지하면서—과, 그 수고를 감당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위대한 약속들입니다.

210. 금식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도록 격려해 주는 것은, 금식이 주는 유익함—물론 평화롭고 사랑이 넘치는 마음가짐을 유지하면서—과, 그 수고를 감당하는 이들에게 주어진 위대한 약속들이다. [32, 7] 금식이 좋은 것은, 그 과정에서 평화롭고 온유하며, 선량하고 순종적이며, 겸손하고 자비로운,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선한 마음가짐이 유지될 때이다. 그러나 마귀는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금식하는 자들에게 그와 정반대의 마음을 심어, 그들을 건방지고, 성급하며, 격분하고, 거만하게 보이게 하여, 금식이 그들에게 유익보다 해를 더 많이 끼치게 하려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꾀를 알지 못함”(고린도후서 2:11)에도 불구하고, 평화롭고, 온유하며, 온화하고, 질서 정연하게 행동하며,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에베소서 4:2), 이것이 하나님께 기쁘시게 하는 일임을 알 것입니다. 만약 네 안에 그러한 마음가짐이 없다면, 설령 네가 활을 굽히고, 자루옷을 입고, 머리에 재를 뿌린다 해도, 그분께 기쁨이 되지 못할 것이다. 금식은 물론 육신을 괴롭히고 말라버리게 하지만, 영혼을 넓히고 자라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쇠퇴해 가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느니라. 이는 우리의 현재 슬픔이 잠시인 것이, 그 열매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영원한 영광의 무게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라” (고린도후서 4:16, 17): 그러므로 그 보상을 바라보며, 우리는 덕행의 어려움을 기쁜 마음으로 견딜 수 있습니다. “빛 가운데서 성도들의 유업을 함께 누리도록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드리나니, 그분께서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건져내시고, 자기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 주셨느니라” (골로새서 1, 12. 13). – 우리가 그분의 지극히 거룩하신 몸과 피를 자주 성찬하지 않는가? 그리고 이보다 더 기쁘고 달콤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성찬에 참여하는 이들에게 깨끗한 양심으로 영생을 얻게 해 주시는 이 일이 있는데 말이다. 우리는 매일 성경 봉독을 통해 신성한 다윗과 다른 성스러운 교부들과 대화를 나누지 않는가? 이보다 영혼에 더 큰 위안이 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우리는 세상과 육신의 친족들과의 모든 관계를 끊지 않았는가? 이보다 더 복되고 고귀한 것이 또 무엇이겠는가? “우리의 삶은 하늘에 있으니, 거기서 구주이시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나니, 그분은 우리 겸손한 몸을 변형시키사, 그분의 영광스러운 몸과 일치하게 하실 것이니, 이는 그분께서 모든 것을 자신에게 복종시킬 수 있는 능력으로 행하시는 바와 같으니라” (빌립보서 3:20-21).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육신의 쾌락을 경멸하며 기뻐하고 즐거워합시다. “모든 육신은 풀과 같고, 모든 사람의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그 꽃은 시들지만, 덕행의 열매는 영원히 남습니다.” “너희 중에 괴로움을 당하는 자가 있느냐? 기도하라,” 하나님의 형제가 말하듯이: “기쁜 마음이 있느냐? 노래하라” (야고보서 5:13). 악한 정욕에 유혹받는 자가 있느냐? – (유혹자는 결코 우리를 유혹하는 것을 그치지 않으므로 –) 참아내라.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분의 말씀을 따르라: “시험을 견뎌내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시험을 견뎌낸 자는 하나님께서 그분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야고보서 1,12). “너희가 이것을 알면 복이 있나니, 이를 행하면 더욱 복이 있느니라”(요한복음 13,17).

 

211. 평화와 화합에 관한 교훈;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에 관하여; 구원을 이루기 위한 부지런한 수고에 관하여; 그리고 전반적으로 수도자의 삶에 합당한 삶에 관하여

211. 평화와 화합에 관한 가르침;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에 관한 가르침; 구원을 이루기 위한 열심 있는 수고에 관한 가르침; 그리고 전반적으로 수도자의 삶에 걸맞은 생활에 관한 가르침. [32, 8] 여러분이 한마음으로 나아가며, 평화롭게 지내고, 금식 기간을 인내로 이겨내고 있음을 보고 기쁩니다. 이는 여러분의 구원이 되며, 여러분의 소망을 굳건히 하는 것입니다. 형제애 속의 평화와 한마음은 얼마나 큰 복인가? – 이러한 것들은 악인 무질서와 변덕, 모순과 비난, 불순종과 교만, 그리고 그 밖의 온갖 간사함을 멀리함으로써, 우선 자신들에게 복을 주고, 그다음에는 다른 이들에게 덕행의 본보기를 보여줌으로써 그들에게도 복을 주며, 이를 통해 더욱 큰 복을 얻게 된다: 왜냐하면 유혹의 주범들이 “아아”라는 탄식을 상속받듯이, 덕을 권면하는 자들은 축복을 상속받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결코 이러한 선한 마음가짐과 그토록 칭찬받을 만한 행실에서 벗어나거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그치지 않게 하소서. 기록된 바와 같이, “네 마음을 다하고, 네 영혼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눅 10:27)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랑하는 자는 포만감도, 피로함도, 지침도 알지 못하며, 오히려 불에 불을 더하고, 열정에 열정을 불태우며, 미덕에서 미덕으로 나아가는 것을 마음속에 새기고, 영적인 힘에서 힘으로 나아가니, 이는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육신으로 수고하는 자들이, 지나가고 썩어 없어질 것을 위해 어떻게 수고하는지 보지 못하십니까? 바로 눈앞에서 배를 짓는 자들이, 이를 위해 온 하루를 보내며 조금도 쉬지 않는 모습을 보지 못하십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약간의 돈을 벌어 가족들에게 필요한 것을 마련해 주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야말로, 신성한 것으로 부유해지고, 천국을 얻으며, 영원한 복을 누리고, 영원한 고통을 피하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우리야말로 이를 위해 모든 것을 기꺼이 그리고 열정적으로 바치고, 주님을 위해 피를 흘려야만 한다면 기꺼이 피까지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겠습니까? 자, 형제들아, 우리가 “소망으로 기뻐하며, 환난을 참으며, 기도에 힘쓰며” 정신을 차리고 서자. 우리의 수공예와 시편 찬송, 시 낭송, 성경 읽기에 전념하여, 이러한 활동으로 마음이 헛된 것들에 휩쓸리지 않도록 하자. 무위(無爲)는 악의 어머니요, 행함은 마음의 수호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순종과 경건, 이웃의 안식, 그리고 우리의 구원에 기여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우선시하며, 우리 자신의 선한 마음가짐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합시다. 또한 이곳에 머무는 형제들과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우리 형제들을 위해 항상 기도합시다. 왜냐하면 나는 그들 각자가 어떻게 구원받고 있는지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해, 그들에 대한 마음의 아픔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212. 나는 의무에 따라 가르침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열매가 맺히도록, 가르침에 힘입어 여러분이 잘 성장함으로써 저를 도와주십시오.

212. 나는 의무에 따라 가르침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열매가 맺히게 하려면, 가르침에 힘입어 여러분의 성장이 저를 도와주십시오. – 여러분의 성장은 곧 나의 성장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 여러분은 성상파괴자들 앞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그들에게서 고통을 견뎌냄으로써 이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니 이 여러분의 용기를 헛되게 하지 마십시오. [32, 9] 육신을 부양하는 데는 다른 것이 필요하고, 영을 부양하는 데는 또 다른 것이 필요합니다. 전자는 집사에게 맡겨져 음식, 음료, 의복으로 이루어지지만, 후자는 겸손한 저에게 맡겨져 말씀과 가르침으로 이루어집니다. 저것이 임의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듯, 이것도 의무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제가 여러분에게 이 간결하고 빈약한 가르침을 전한다고 해서 제가 무슨 위대한 일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두렵고 떨립니다. 여러분의 영혼에 대해 왕이나 총독, 아콘에게가 아니라, 모든 심판자이신 하나님께 보고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분 앞에서는 하늘의 모든 무릎이 꿇고, 땅과 음부의 모든 혀가 고백할 것입니다. 그러나 형제애를 품은 자들로서, 부디 여러분 자신과 저를 도와주십시오. 여러분은 모든 덕행에서 번영함으로써, 저는 여러분의 기도를 통해 도움을 받기를 바랍니다. 어쨌든 여러분의 번영은 곧 나의 번영이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모두 한 몸의 지체요, 각자는 그 일부이기 때문”(고린도전서 12:27)이며,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하느니라”(고린도전서 12:26). 내가 여러분을 위해 염려하듯이, 여러분도 나를 위해 염려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 상호 간의 사랑의 힘으로, 내가 여러분 안에 있고 여러분이 내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참된 형제애를 세우는 법칙입니다. 나에 대한 여러분의 선한 순종을, 위선적이거나 거짓된 것이 아닌, 여러분이 이 새로운 삶을 위해 태어나고, 자라나며, 온전해지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그분을 고백하는 만큼에 이르렀던 바로 그 순종으로 지켜 주십시오. (– 이는 성상파괴 운동을 계기로 한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왕들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고위 관리들을 겁내지 않았으며, 고난과 상처, 추방, 감옥, 죽음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고, 그로 인해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덕을 저버리지 말고, 여러분의 칭찬을 헛되게 하지 마십시오. 좋은 이름이 나쁜 별명으로 바뀌지 않게 하시고, 이전의 칭찬에 이어 다음 칭찬도 더하십시오. 항상 내면과 외면을 지키며, 계명을 준수함으로써 스스로를 보호하고, 모든 유혹을 이겨내며, 모든 슬픔을 인내로 견뎌내십시오. 또한 우리가 여전히 고난과 박해 속에 있으며, 다가올 날이 무엇을 가져올지 알지 못한다는 사실도 명심하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주신 분이, 어찌 그와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습니까?” (롬 8:31, 32). 그러니 이렇게 소망을 품고, 확신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이 소망과 확신 가운데 살아가면, 내가 장담하건대, 모든 성도들과 함께 유업과 몫을 받게 될 것입니다.

 

213. 죽음이 가까웠으니 준비해야 합니다. 어떻게? 모든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하십시오

213. 죽음이 가까웠으니 준비해야 한다. 어떻게? 모든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하고, 한마음으로 서로 존중하며, 감정을 절제하고, 생각을 다스리며, 무욕을 바라며 모든 선한 일에 열심을 내야 한다. [32, 10] 날이 갈수록 우리의 삶은 짧아지고, 우리는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 형제들과 우리 조상들에게로 나아가야 할 운명에 놓여 있으니,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절제심과 주의력, 그리고 마음의 준비가 요구된다.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대홍수 이야기를 듣고, 주님께서 그 당시의 일을 그분의 재림 때의 상황에 비유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듣습니다. “노아의 시대에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사고 팔고 있었는데, 갑자기 홍수가 닥쳤듯이, 인자의 재림 때도 그러할 것이다”(마태복음 24, 37–39; 루카 17, 26–28). 우리는 당시 사람들이 다가오는 대홍수에 대해 그토록 무관심하고 태평하게 대했던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오히려 두려움과 경외심을 가져야 마땅했을 텐데 말입니다. 그러나 잘 살펴보자. 우리가 바로 그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과 똑같은 무심함에 빠져 있지는 않은지. 우리에게는 백 년 동안 지어진 방주가 준비되어 있지는 않지만, 우리는 매일 우리를 묻게 될 무덤이 채워지는 것을 목격한다. 거의 매일 죽음이 우리 형제 중 누군가를 데려가고, 그는 떠나간다. 그러나 이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은 (대홍수 당시) 그 때의 일보다 훨씬 더 무섭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깊어야 합니다. 그리고 제가 말하는 것은 “먹지 말라, 마시지 말라, 입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이것이 아니라,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하나님의 교회 앞에서 흠이 없게 되리라”라고 사도가 가르치듯이(고린도전서 10:31, 32). 형제 여러분, – 간청하고 청하노니, “나의 기쁨을 채워 주십시오”, 다시 말해 복된 바울이 말씀하신 대로, “같은 마음을 품고, 같은 사랑을 가지고, 한마음 한뜻이 되어, 열심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지혜로 서로를 자신보다 더 귀하게 여기며” (빌립보서 2:2, 3). 우리의 감각들—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경계로 지키자. 이 감각들을 통해 죽음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마음을 다스려, 마땅치 않은 곳으로 쏠리지 않게 하고, 부적절한 곳에 빠지지 않게 하며, 마음속에 나쁜 형상을 그려내지 않게 하고, 유익도 즐거움도 없는 죄악된 욕망을 품지 않게 하자. 반대로, 우리는 더욱 깊이 근심하고 회개하며, 오직 한 가지만을 마음에 두고 오직 그 한 가지에서 위안과 기쁨을 찾아, 영혼을 정화하고 무욕의 경지에 이르도록 노력합시다. 무욕을 맛보고 그것을 얻음으로 인한 기쁨을 누릴 희망을 품고 낙심하지 말며, 서둘러 힘차고 끊임없이 무욕을 좇아갑시다; 열심은 부족한 점을 바로잡고 채워 주며, 하나님께서는 그 열심의 도우미가 되시기 때문이다. “주님을 인내하는 자에게 주님은 가까이 계시며, 주님을 찾는 영혼은 주님을 얻으리라.” – 이렇게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의심할 여지 없이 천국을 얻게 될 것이다.

 

214. 하나님을 기억할 때, 죽음도 기억하라

214. 하나님을 기억할 때, 죽음도 기억하라. – 이 세상에, 그리고 이 세상에서 소중히 여겨지는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말라. 이는 세상과 단절한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요구되는 바이다. [32, 11] 이 가르침은 유익한 것으로, 구원을 주는 상기시켜 주는 말씀이라, 우리가 우리에게 의무인 일을 행할 때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게 하며, 이를 결코 그치지 않게 하고, 하나님에 대한 묵상이나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 혹은 육신을 떠날 날을 기억하는 일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게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곧 이 육신을 벗어던지고, 우리 모든 조상들처럼 죽어 다른 세상으로 옮겨가, 끝이 없는 또 다른 삶을 시작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삶은 그림자와 꿈과 같으며, 몇 년으로 제한되어 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세상의 끝까지의 시간이 아니라, 각 사람의 삶입니다. 오늘날 그 삶은 다윗의 수명조차 채우지 못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으며, 그 한계를 넘어서는 일은 더욱 드물어, 마치 비범한 일처럼 여겨집니다:모든 성도들은 평생 이 일을 생각했습니다. 사도가 증언하듯이, “믿음으로 죽은 이들은 약속을 받지 못하고, 다만 멀리서 그것을 바라보며 입맞추고, 자신들이 이 땅에서 나그네요 이방인임을 고백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말하는 이들은 고향을 찾고 있음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들이 떠난 고향을 기억했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것이나, 이제는 더 나은 곳, 곧 하늘의 고향을 사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자신의 자녀라고 부르시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니, 그들에게 도시를 예비해 두셨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13–16). 이것이 바로 우리의 도시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조국입니다! 그곳에는 육신으로나 영으로나 우리의 조상들과 형제들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이 세상의 일시적인 삶을 여전히 숭배할 만한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까? 왜 그 관습에 매여 있는 것입니까? 왜 그곳에서 벗어나는 것을 원치 않는 것입니까? – 이방 땅에서 고향으로 돌아오기를 원치 않거나, 전쟁에서 평화로 돌아서기를 원치 않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랑하는 형제들아, 분별 있는 자로서, 바로 이를 위해 세상과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그것들로부터 도망친 자로서, 평생 죽음을 마음에 새기며, 이 생각으로 온갖 욕망과 온갖 게으름, 온갖 나태함, 온갖 낙담, 온갖 악을 물리쳐, 이처럼 주님께 기쁘시게 함으로써 우리가 하늘의 복을 상속받게 되리라.

 

215.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평화를 주셨으니, 이는 겉으로는 모든 사람과 화목하게 지내되, 속으로는 정욕과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스스로 평화를 누리도록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다.

215.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평화를 주셨는데, 이는 우리가 겉으로는 모든 사람과 화목하게 지내며, 속으로는 정욕과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벗어나 평화를 누리도록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32 12] 주일은 평화의 날입니다. 그날 주님께서는 원수를 이기시고 제자들에게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요한복음 20, 20)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하심으로써, 주님께서는 그들에게만 평화를 유산으로 주신 것이 아니며, 단 하루만을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우리와 같이 겸손한 자들에게 주신 것과 같은 평화를 모든 이에게 언제나 선포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우리 내면에서도 평화를 지키자. – 겉사람에 있어서는 형제 중 누구에게도 원한을 품지 말고, 모든 일에 사랑으로 대하자.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임을 알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 13, 35) 하셨기 때문이다; 내면의 사람에 있어서는, 해로운 정욕으로부터 평화와 안식을 지키자. 그러면 우리도 사도와 함께 말할 수 있으리라: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린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 은혜에 들어갔으며, 그 은혜 안에 서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소망을 자랑한다” (롬 5, 1, 2). 그러나 우리는 변덕스러운 본성을 지녔기 때문에, 때로 재앙과 슬픔을 초래하는 동요와 불안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즉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던 예전의 상태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분은 곧 우리의 화평이시니, 두 가지를 하나로 만드시고, 장벽인 분리를 허물어 버리셨으니, 곧 육신으로 인한 원수를 없애시고, 계명의 율법을 폐하심으로써, 두 가지를 하나로 합쳐 새 사람을 창조하시고 화평을 이루시며, 십자가로 그 원수를 죽이심으로써 두 가지를 한 몸 안에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셨느니라” (엡 2, 14–15). 사도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주님께서 이루신 일입니다. 주님께서 아버지께 말씀하신 대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일을 내가 이루었나이다” (요한복음 17, 4). 즉, 주님께서는 땅의 것과 하늘의 것을 화해시키셨으며, 우리를 평화와 사랑의 자녀로 만드셨습니다. 누군가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끊임없이 전쟁 중이 아닌가요? 사도가 말씀하신 대로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정사와 권세와 이 세상의 어둠의 통치자, 하늘 아래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하는 것입니다” (엡 5:12). 그런 이에게 우리는 이 말씀들이 그 싸움이 무엇이며 어떤 성질인지를 가리킬 뿐, 우리가 그 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사도는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군대의 무기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강력하여, 굳은 요새를 무너뜨리고, 생각을 무너뜨리며, 하나님의 지혜를 거스르는 모든 교만을 꺾고, 모든 생각을 그리스도의 순종에 사로잡아, 불순종하는 자들을 벌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 (고린도후서 10:4-5). 이와 같은 마음가짐을 가진 사람은 분명히 다툼을 잠재우고 평화를 이끕니다.

 

216. 가르침을 경청하고, 그것을 믿은 뒤, 그 가르침이 일깨워 주는 바를 실천해야 한다

216. 가르침을 경청하고, 그것을 믿은 뒤, 그 가르침이 일깨워 주는 바를 실천해야 한다. [32, 13] 나에게 의무인 말씀의 분량을 지금도 여러분에게 전하노니, 간결하고 부족하긴 하나 미룰 수 없는 것이다. 이는 나로 하여금 침묵으로 인해 정죄받지 않게 하고, 여러분이 어떤 교훈도 놓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대부분 성부들의 저서를 읽음으로써 교훈을 얻곤 하지만, 그럼에도 제 겸손한 가르침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감히 말하건대, 그 가르침이 성부들의 저서보다 더 낫다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성부들의 저서에는 일반적인 논증이 담겨 있는 반면, 여기 에서는 여러분 개개인에게 직접적으로 관련된, 책망하고 바로잡아 주는 말씀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를 책망하고 네 죄를 네 눈앞에 드러내리라” (시 49:2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죄가 없었을 것이나, 이제 그들은 자기 죄에 대하여 변명할 수 없게 되었다” (요 15:22)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이 여러분에게도 적용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내가 여러분과 대화하는 것은 불순종하고 죄를 지은 자들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아들들로서, 사랑하는 자녀들로서, 한마음으로 함께하는 동역자이자 동지로서 하는 것이니, 기쁜 마음으로 잘 지내며, “그리스도의 날에 깨끗하고 흠이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양을 받게 되기를” (빌립보서 1:10, 11). 그리고 나의 말은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옛날 이스라엘을 위해 돌에서 물을 솟아나게 하셨던 분이, 제 돌 같은 마음에서도 짧은 말씀을 솟아나게 하심을 믿습니다. 그 말씀으로 적셔지며, 마치 광야와 같은 이 현세에서 우리의 삶을 양육하시고, 물을 주시며, 인도하시는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고대의 역사가 우리 마음에 떠오르니, 사도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 중 대다수를 기뻐하지 않으셨으니, 그들이 광야에서 쓰러졌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일은 우리에게 본보기가 되었으니, 우리가 그들처럼 악을 탐하지 않도록 하라. 우상 숭배자가 되지 말라. 그들 중 어떤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기록된 바와 같이, ‘사람들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 놀았다.’ 또한 음행을 저지르지 말라. 그들 중 어떤 이들이 음행을 저지르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으니. 그들 중 어떤 이들이 시험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를 시험하지 말라. 그들은 뱀에게 물려 죽었느니라. 그들 중 어떤 이들이 불평했던 것처럼, 우리도 불평하지 말라. 그들은 멸망의 천사에게 당해 죽었느니라” (고린도전서 10:5–10). 이 점을 생각하며, 형제들아,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키는 원인을 피하고, 악한 정욕을 피하며, 불평을 피하고, 그리스도를 시험하는 일을 경계합시다. – 그러나 어떻게 그분을 시험할 수 있겠습니까? – 불신의 생각에 빠지고 말하기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충분할까?’ – ‘적의 공격을 견뎌낼 수 있을까?’ 이것저것을 견뎌낼 수 있을까? – 아닙니다, 형제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불신과 의심에 찬 말들로, 그런 말들에 자리를 내어주어서는 안 됩니다. 굳건한 믿음으로 믿기만 한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견딜 수 있습니다. 노아도 그렇게 믿었기에 대홍수의 멸망을 피했고, 아브라함도 그렇게 하여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었으며; 그렇게 모세는 홍해를 마치 마른 땅을 걷듯이 건넜고, 그렇게 세 소년과 다니엘 선지자는 무사히 살아남았으며,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렇게 모든 성도들이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우리도 믿음으로 모든 것을 견뎌내고 그리스도와 함께 승리하며, 의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입니다.

 

217. 세속적이고, 세상적이며, 죄악된 속박에서 해방되었으니, 다시는 그것들로 돌아가지 않도록 하자

217. 1) 세속적이고, 세간적이며, 죄악적인 속박에서 해방되었으니,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합시다. – 2) 그리고 누구도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죄와 정욕의 노예 상태를 병행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31, 14]

1. 우리의 나태함을 떨쳐내고 열심을 북돋우며,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가까이 계십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감사함으로 너희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라” (빌 4, 5. 6). 그러므로 게으르지 말고,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그 일을 행하는 데 힘을 내고 용기를 내자. 이는 주님께서 우리를 세속의 삶에서 수도 생활로 부르셨고, 구원의 옷을 입히시고 기쁨의 옷으로 입히셨으며, 우리를 위해 스스로 맹세가 되심으로써 율법의 맹세에서 우리를 속량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 그 자유 안에서, 우리가 굳건히 서서 다시는 멍에를 메지 말자”(갈 5:1). 우리가 다시는 정욕의 자발적인 노예가 되는 것을 용납하지 맙시다. 금으로 속량받은 노예는 결코 다시 노예가 되기를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노예 생활하던 곳에서 멀리 떠나, 노예의 폭정에서 해방될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할 것이다. 비록 노예 생활이 더 이상 특별히 악한 것은 아니더라도 말이다. 사도가 말하기를, “네가 종으로 부르심을 받았느냐? 슬퍼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차라리 자유인이 되는 편이 낫다. 주 안에서 부름 받은 종은 주의 자유인이며, 마찬가지로 자유인으로 부름 받은 자도 그리스도의 종이다” (고린도전서 7:21, 22). 그러나 해방된 자가 다시 노예의 멍에 아래서 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사실은 여전히 옳다. – 하물며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었으니, 가능한 한 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아니면 죄가 우리에게 무슨 해를 끼쳤는지 모르는가? 죄가 우리를 낙원에서 쫓아내지 않았는가? 죄가 우리를 불멸의 존재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만들지 않았는가? 죄가 우리를 이 눈물 어린 삶으로 이끌지 않았는가? 모든 악이 죄를 통해 생겨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그를 가장 사악한 원수처럼 피하고, 미움받을 만한 자로서 그를 증오합시다. 또한 사람들을 천사로, 나아가 신으로 만들어 주는 미덕을 더욱 사랑합시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내가 말하노니, 너희는 신들이요, 너희는 모두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들이라”(시 81:6)고 했습니다.

2. 그러나 미덕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 세상을 멀리하고 하나님께 매달리는 데 있습니다. “아무도,”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너희는 하나님과 마몬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마태복음 6:24). 우리는 덕과 죄를 동시에 붙들 수 없으니, “빛과 어둠이 어떻게 함께할 수 있겠느냐?” (고린도후서 6:14). 게다가 그리스도의 계명은 가볍고 마음을 가볍게 해 주지만, 죄는 무겁고 마음을 짓누른다. 더욱 힘든 것은, 우리가 상반된 것들을 조화시키려 애쓰며, 육신의 정욕을 따르는 것과 영적인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동시에 가능하다고 여긴다는 점이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돌아보자. 만일 우리가 어느 정도 완전함에 이르렀다면, “모든 선한 선물과 모든 완전한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굳건히 서기 위해 노력하며, 하나님의 경외심으로 우리 자신을 지켜 변함없고 흔들림 없이 가장 선한 마음가짐을 유지한다면; 만약 그렇지 못하고 여러모로 부족하다면, 행할 시간이 아직 남아 있는 동안 서둘러 온전함에 이르기 위해 애쓰자. – 믿음으로 굳건히 서고, 소망으로 날개를 달며, 사랑으로 하나 되고, 겸손으로 단장하며, 순종으로 기쁨을 얻고, 인내로 시험을 견디며, 고백으로 깨달음을 얻고, 그 밖의 모든 행실로 우리가 참된 수도사요, 거짓 없는 수련자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능숙한 주님의 종들임을 스스로 증언합시다.

 

218.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들어야 한다. 이는 여기서 모든 영적 태도가 비롯되기 때문이다.

218. 1)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들어야 한다. 이는 모든 영적 태도가 여기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 2) 모든 성도들이 그렇게 행하였으며, 그로 인한 선한 열매를 증언하였다. – 3) 우리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그렇게 행하자. [32, 15]

3. 모든 사람은 눈과 귀를 가지고 있지만, 모든 사람이 보고 듣는 것은 아니며, 오직 듣는 귀와 보는 눈을 가진 자들만이 그렇게 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다(마태복음 11, 15). 귀가 둔한 자들에 대해 선지자도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회개의 영을 주셨으나, 보지 못하는 눈과 듣지 못하는 귀를 주셨다”(사 6,9; 롬 11,8). 그러므로 우리가 듣는 말씀을 대충이 아니라 주의 깊게 경청하여, 위험에 빠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주님의 징계가 내 귀를 열어 주셨다”(사 50,5)고 말할 수 있도록 합시다. 그렇게 듣는 자는 경청하고, 회개하며, 정화되고, 깨달음을 얻으며, 기뻐하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그림자처럼 여기며,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때 그분을 얻게 될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한복음 14:18). 그리고 또: “너희가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것을 행하면, 너희는 내 친구라” (요한복음 15:14). 그리고 또: “조금 있으면 세상이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하겠으나, 너희는 나를 보리라.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 것이기 때문이라” (요한복음 14:19). 또 다시: “너희는 나의 고난 중에 나와 함께 있었으니, 내가 너희에게 약속하노니, 내 아버지께서 내게 나라를 유산으로 주셨듯이, 너희도 내 나라에서 내 상에서 먹고 마시게 하리라” (누가복음 22, 28–30). 이와 같은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매일 기꺼이 그리스도를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4. 모든 성도들은 이렇게 살았으며, 그러한 결단력으로 주님께 대한 사랑을 엄숙히 드러냈습니다. 예레미야는 말합니다. “내가 주님을 따르는 데 지치지 않았고, 사람의 삶을 탐내지 않았습니다” (예레미야 17, 16). 성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 대해 내가 주님께 무엇을 갚으리이까?(시편 115, 3). 사도는 말합니다. “그리스도에 관하여, 너희에게 주어진 것은 그분을 믿는 것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해 고난을 받는 것까지 포함된다” (빌립보서 1, 29). 이와 같이 모든 사도들도 “주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모욕을 당할 자격을 얻었다”고 사도행전에 기록된 대로 기뻐했습니다(행 5,41). 요컨대, 성인들이 모두 이러한 고백을 통해 그리스도 주님께 대한 지극한 사랑을 드러냈습니다.

5. 그러니 우리도, 형제들아, 읽어지는 말씀을 주의 깊게 듣고, 사랑으로 우리 사랑하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분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모든 은혜에 항상 감사합시다. – 그분은 태초부터 우리를 구원하사 이 거룩한 소명에 이르게 하셨고, – 정통 신앙 안에서 그분을 섬기게 하셨으며, – 성도들의 가르침을 마치 풍성한 잔치와 같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사도들의 말을 인용하여 말하기에 참으로 적절한 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계시다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주신 분이시니, 어찌 그분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습니까? 누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하나님이 의롭다 하셨으니, 누가 정죄하리요? 그리스도 예수께서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부활하셨으며, 지금 하나님의 우편에 계셔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고 계신다” (롬 8:31–34). 하나님이자 아버지이신 분 앞에서 중보하시며, 그분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왕국을 주시는 분이시다.

 

219. 우리는 기념 예식을 겉으로만 행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도 행합시다. – 이때 우리도 언젠가 세상을 떠날 것임을 기억하며; 그리고 – 그 사실에 힘입어 떠날 날을 준비합시다.

219. 1) 우리는 기념 예식을 겉으로만 행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도 행합시다; – 2) 이때 우리도 언젠가 세상을 떠날 것임을 기억하며; 그리고 – 3) 그 사실에 힘입어 떠날 날을 준비합시다. [32, 16]

6. 어제 우리는 우리 아버지를 기리는 예식을 거행하였으며, 마땅히 해야 할 대로 행하였다. 영적인 자녀들은 자기 아버지께 마땅한 경의를 표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리는 일에 있어 추모 예배를 드리고 육체적으로 위로를 받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며, 영적인 위로 도 낳아야 한다. 육체적인 위로는 잠시 감정을 일깨워 주지만 곧 사라져 버리는 반면, 영적인 위로는 끝이 없고 영원히 남습니다. 여러분 중 누군가 눈물을 흘렸거나, 마음이 뭉클해졌거나, 가슴이 아파했다면, 그 사람은 아버지나 형제를 기리는 일을 잘 수행한 것입니다. 예전, 아버지가 우리 곁에 계셔서 우리와 대화를 나누고 뜻을 나누시던 날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리고 이제 그가 어디에 계시고, 누구와 함께 계시며, 누구와 뜻을 나누고 계신지 상상해 봅시다. – 그분은 물론, 우리 가운데 세상을 떠난 모든 형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 바로 이것이, 생각으로도 듣고도 느낄 수 있는 바가, 언제나 우리 영혼을 경탄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7. 그 다음에는 우리 자신에게도 마음을 돌려 생각해 봅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도 이곳을 떠나게 될 것이며, 지금 우리가 선조들을 추모하듯이 다른 이들에게도 추모받게 되지 않을까? 아,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운명입니다. 우리는 죽을 운명의 인간이며, 내일이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합니다. 과연 우리의 삶이란 무엇입니까? –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안개요,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이면 시들어 버리는 봄꽃이다. “사람은 풀과 같고, 그의 날은 들꽃과 같으니, 그 꽃이 시들듯이 시들리라”(시 102:15). “사람은 헛된 것과 같으니, 그의 날은 그늘처럼 지나가느니라” (시 143:4).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사람의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라” (사 40:6); “해가 뜨거움으로 빛을 내어 풀을 말리면, 그 꽃이 떨어지고 그 아름다운 모습이 사라지리라” (야고보서 1, 11). 성인들이 말한 대로, 우리는 그렇게 시들고, 그렇게 이곳을 떠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앞서 언급된 그들의 비유들이다.

8. “그러나 깨달음을 얻은 자는 복이 있으며, 하나님을 찾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 13, 2). 매일 순종의 수고와 땀을 흘리며 자신을 단련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반항하지 않고, 불평하지 않으며, 온유하고, 일에 신속하며, 섬김에 소홀하지 않고, 마음이 찢어진 자로서, 언제나 죽음을 준비하며 사는 자이다. 끝이 올 것이니, 반드시 올 것이며 지체되지 않을 것이다. 두려운 죽음의 날이 올 것이며, 하늘에서 내려온 왕의 전령도 올 것이니, 그가 영혼에게 말하리라: “자, 이제 나가라. 만물의 왕이시며 하나님이신 분이 너를 부르신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께서 드리는 기도를 통해, 그 시간에 우리가 준비된 자로 드러나, 두려움 없이 이곳을 떠나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220. 사순절의 끝은 우리를 부활절의 면전 앞에 서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 삶의 전 과정 또한 부활절의 면전 앞에 서 있습니다.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헤아릴 수 없이 더 나은 부활절입니다.

220. 1) 사순절의 끝은 우리를 부활절의 면전으로 이끕니다. 그러나 우리 삶의 전 과정 또한 부활절의 면전에 서 있습니다.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며, 헤아릴 수 없이 더 나은 것입니다. – 2) 주님께서 그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떠올리며, 성도들을 본받아 수행의 수고에 힘내도록 용기를 얻어, 부활절을 바라보십시오. – 3) 그러나 속임수로 우리를 육신에 달콤하고 유혹적인 것으로 유인하려는 교활한 뱀에게는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32, 17]

1. 사순절이 끝나가며, 영혼은 부활절이 다가옴을 기뻐합니다. 이는 안식의 시간이자, 기울인 수고의 열매를 맛보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왜 내가 이런 말씀을 전하는가? – 그것은 우리 삶의 전부가 영원한 부활절을 향해 있으며, 그 도래를 기다리고 있음을 상기시키기 위함이다. 이 세상의 부활절은 비록 위대하고 존경받을 만하지만, 우리 교부들이 말씀하시듯, 그것은 단지 그 부활절의 모형일 뿐이다. 이 세상의 부활절은 하루만 머물다 지나가지만, 그러나 그 끊임없는 부활절은 질병과 슬픔, 한숨이 사라진 곳이며, 기쁨과 즐거움, 영원한 위로가 있는 곳, 축제하는 자들의 목소리와 환호하는 자들의 얼굴, 그리고 영원히 비추는 빛을 볼 수 있는 곳, 그리스도의 복된 잔치와 영원한 복으로 가득 찬 식탁,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새로운 음료가 있는 곳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내가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너희와 함께 새 포도주를 마실 그 날까지, 이 포도나무의 열매로 만든 포도주를 다시는 마시지 아니하리라” (마태복음 26, 29).

2. 이 왕국에 관해, 하늘로 올라가실 때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가노라.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데려가리니,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려 함이라. 내가 가는 것을 너희가 알고, 그 길을 너희가 알고 있다” (요한복음 14:2–4). 또 다른 곳에서는 다시 말씀하시기를 “그 날에 너희는 내가 내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 14:20)라고 하셨다. 또 다른 곳에서는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이 내가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게 하소서. 아버지께서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나를 사랑하셔서 내게 주신 내 영광을 그들이 보게 하소서” (요한복음 17:24). 그리고 이 말씀이 사도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한 것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 그분은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사람들만을 위하여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말을 통해 나를 믿는 모든 이를 위하여 구하노니, 다 하나가 되게 하소서. 아버지여, 주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주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우리 안에 하나가 되게 하소서” (요한복음 17, 20. 21). 이 말씀보다 더 위로가 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더 설득력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 말씀이 어떤 영혼을 부드럽게 하지 못하겠습니까? 어떤 마음을 찢어 놓지 않겠습니까? 어떤 이는 그런 마음을 인간의 마음이 아니라 돌 같은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 이를 생각하며, 성도들은 모든 고난을 기꺼이 견뎌냈으니, 슬픔을 기쁨으로, 비좁음을 넓음으로, 고통을 즐거움으로, 수행의 수고를 위로로, 죽음을 생명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들과 같은 목표를 지향하고, 부활절 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니, 마주치는 모든 불쾌한 일을 용감하게 견뎌내되, 그 무게에 짓눌려 주저하거나 비겁해하지 말고, 오히려 더욱 뜨거운 열정으로 불타오르도록 하자.

3. 교활한 뱀, 곧 우리의 정욕을 이용해 우리를 상대로 온갖 계략을 꾸미고, 빛의 천사로 변장하며 사물을 본래의 모습이 아닌 것으로 변형시켜 어둠을 빛으로, 쓴 것을 달콤함으로 보이게 하는 자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그가 바로 우리 첫 조상을 유혹하여, 그의 시선을 현혹시키고 아름답지 않은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보이게 한 뒤, 먹음으로써 그를 낙원에서 쫓아낸 자이다. 그러나 우리는 경험으로 그가 아첨하는 속임수의 대가임을 알고 있으므로, 계명의 낙원에서 스스로 벗어나지 않을 것이며, 그가 우리에게 아름다운 열매를 보여줄 때에도 우리 영혼과 육체의 시선을 그 위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온갖 방법으로 그것을 바라보는 것을 피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붉게 보이는 이 열매는 무엇일까요? 육체적 사랑, 모든 파멸적인 정욕 중의 악한 욕망입니다. 이를 피함으로써 우리는 구원을 얻고, 모든 성인과 함께 영원한 유월절을 기념할 자격을 얻게 될 것입니다.

 

221. 겨울이 지나고 식물 왕국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듯이, 영혼도 결핍과 슬픔, 고난을 겪은 후 영적으로 꽃을 피우고 영적인 열매를 맺으며, 주님께서는 그 열매로 기쁨을 얻으시고 양식을 얻으십니다.

221. 1) 겨울이 지나면 식물계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듯이, 영혼도 결핍과 슬픔, 고난을 겪은 후 영적으로 꽃을 피우고 영적인 열매를 맺으며, 주님께서는 그 열매로 기쁨을 얻으시고 양식을 얻으십니다. – 2) 그러니 우리 수도자의 삶에서 겪는 모든 슬픔과 고난을 인내하며 견뎌내어 열매를 맺고, 주님을 그 열매로 기쁘게 해 드리며 그분께 양식을 드리자. 이는 그 무엇보다도 더 큰 행복이기 때문이다. – 3) 그리고 이것이 사실임을 주님께서 친히 증언하셨으니, 어찌 우리 삶의 온갖 슬픔을 온전한 기쁨으로 견디지 않을 수 있겠는가 [32, 18]

4.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찾아왔으니,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이 살아나는 것을 봅니다. 식물들이 꽃을 피우고, 땅은 푸르름으로 덮이며, 새들은 노래를 부르고, 그 밖의 모든 것이 새로워집니다. – 우리는 이를 누리며 만물의 지극히 지혜로운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매 여름마다 마치 자신의 피조물을 재창조하고 변모시키시는 분을 찬양하며, 이를 통해 “창조 이래로 보이지 않던 하나님의 속성, 곧 그분의 지성, 능력과 신성이 피조물을 통해 분명히 드러나 보이게 되었다”는 사실을 확증합니다 (롬 1:20). 그러나 우리는 이 한 가지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며, 더 나아가 마음의 시선을 넓혀 우리 자신 안에서 피조물들에게 일어나는 일의 반영을 보아야 한다. – 어떻게? 다음과 같은 비유를 통해: 이 보이는 피조물의 갱신이 겨울을 원인으로 삼듯이, 그 겨울 동안 땅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은 눈과 비, 폭풍의 불쾌한 영향을 받듯이;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영혼이 먼저 슬픔과 결핍, 재앙이라는 겨울을 견뎌내지 못한다면 꽃도 피우지 못하고 열매도 맺지 못하겠지만, 만일 그 모든 것을 견뎌낸다면 기대했던 열매를 맺고, 그 대가로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게 됩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비 오는 땅이 그 위에 쏟아지는 많은 비를 마시고, 그 비로 말미암아 좋은 열매를 맺으며, 그 열매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축복을 받는다”(히브리서 6,7).

5. 그러므로 우리도 이 사순절 기간 동안, 굶주림과 목마름, 그리고 그 밖의 모든 고난 속에서 우리에게 닥치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슬픔과 결핍, 모든 유혹을 견뎌내어, 열매를 맺는 자가 되어 하나님께로부터 축복을 받도록 합시다; 그뿐만 아니라, 주 예수님을 영적으로 양육하고 환대하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푸르러지고 꽃피며 열매를 맺는 피조물을 바라보며 기쁨을 얻듯이, 그분께서는 영적으로 꽃피고 열매를 맺는 우리 영혼을 바라보시며 기쁨을 얻으시기 때문입니다. – 과연 어떤 열매들인가? “사랑, 기쁨, 평화, 오래 참음, 친절, 자비, 믿음, 온유, 절제”(갈 5:22-23). 이것이 바로 그분이 양육받으시고 기쁨을 얻으시는 것이다. 그분을 이렇게 양육하는 자는 복이 있으니, 그로 인해 그분께서도 그에게 영원한 복으로 양육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분을 이방인처럼 환대하는 자도 복이 있으니, 그도 하늘나라에서 그분께 환대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왕을 자기 집에 맞아들이는 사람이 얼마나 기뻐하고 즐거워하겠는가? – 하물며 왕 중의 왕이시며 주 중의 주이신 분을 자기 곁으로 맞아들이는 사람은 더욱 그러하지 않겠는가?

6. 그리고 그분이 참으로 받아들여지신다는 사실은 그분께서 친히 하신 말씀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며, 우리가 그에게로 가서 그와 함께 거처를 삼으리라”(요한복음 14:23).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 그가 바로 나를 사랑하는 자니라.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내 자신을 그에게 나타내리라” (요한복음 14:21). – 이러한 약속들이 있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단지 참아내는 데 그치지 않고 기쁨으로 이를 행해야 합니다. 사도가 “이제 나는 너희를 위하여 내 고난 중에 기뻐하노니, 이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부족함을 내 육신으로 채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하노라” (골로새서 1,24)라고 말한 것을 듣고, 또한 성 야고보가 말씀하신 바와 같이: “내 형제들아, 여러 가지 시험에 빠질 때 기쁨으로 여기라. 너희 믿음의 시험 이 인내를 낳는 줄을 알라. 인내는 온전한 일을 이루게 하여, 너희가 온전하고 부족함이 없는 자가 되게 하리라” (야고보서 1, 2–4). 보라, 시험 속에는 기쁨이 있고, 슬픔 속에는 즐거움이 있다는 것을! – 성인들이 그렇게 살았으니, 우리도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도록 스스로를 다잡아, 그들과 함께 천국을 상속받도록 하자.

 

222. 금식 기간 동안 누군가가 특히 탁월했던 수행자의 미덕들을 열거한 뒤, 다음과 같이 덧붙입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변함없이 영원히 그와 같은 모습을 유지하십시오.”

222. 금식 기간 동안 누군가가 특히 탁월했던 수행의 미덕들을 열거한 뒤, 다음과 같이 덧붙입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변함없이 영원히 그와 같은 모습을 유지하십시오.” [3 2, 19] 이제 우리는 사순절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보시다시피, 사순절이 끝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대부터 우리에게 전해 내려온 기록들은 이 시기에 성 예루살렘 성내에서, 사막에서 성 사순절을 지내며, 각자가 특히 이러한 사막의 고행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둔 고귀한 미덕들을, 이제 첫 열매로서 관대한 주님이시자 하느님께 바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각자의 능력에 따라 적지 않고 합당한 것을 바치십시오: 한 사람은 모든 미덕의 여주인인 사랑을, 다른 이는 하느님의 빛이 비치는 겸손한 지혜를, 또 다른 이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순종을, 또 다른 이는 밤샘 기도와 시편 찬송에서 쉬지 않는 절제를, 또 다른 이는 수공예 작업을 수행하는 데 특별한 열의를 바칩니다; 산만함을 끊어내고, 부적절한 시선을 억제하며, 걸음걸이에 겸손을 지키고, 대답과 상호 교류에 분별을 보이는 것 또한 칭찬받을 만합니다; 건방짐을 억제하는 것, 장황한 말을 삼가는 것, 음식에 절제하는 것, 과도한 수면을 피하는 것, 시편 낭송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우선시되어야 할, 자신의 의지를 복되고 순교적인 마음으로 끊어내는 것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이는 유일한 참된 제물로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요구하시는 것이다. 열거된 각 덕목은 선하고 경건한 제물입니다. 감히 말씀드리건대, 여러분 중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빈손으로 서지 않을 것이며, 각자가 자신의 선한 열매를 바칠 것입니다. 이처럼 여러분은 자신의 수행을 바탕으로 “금과 은과 귀한 보석”을 쌓아 두었습니다. 이는 장차 닥칠 시련의 불길 속에서도 타지 않는 것들로서, 사도가 “짚과 나무와 갈대”에 비유한 것들 (고린도전서 3:12)에 비유한 것들, 즉 죄를 사랑하는 마음, 정욕에 사로잡힌 노예 상태, 음란한 말, 음란한 생각, 은밀한 식사, 거짓말, 원한을 품는 마음, 그리고 이와 유사한 모든 것과는 다릅니다. 여러분은 짧은 금식 기간 동안 이러한 영적 보물을 얻었으니, 이를 훼손하지 않도록 하고, 시대의 변화나 변덕으로 인해 우리의 대적과 원수에게 굴복하지 맙시다. 비록 시간이 변하고 날들이 달라지더라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과 그분을 향한 사랑 안에서 변함없이 머물러 주십시오. 아니면, 차라리 변하되 오직 선한 변화로만 변하십시오. 작은 완전함을 더 큰 완전함으로 바꾸고, 불꽃에서 타오르는 등불이 되며, 별에서 달로, 달에서 해로 변모하십시오. 다만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도 말고, 꿈처럼 덧없으나 불 속에서 영원한 고통을 겪게 하는 세상의 위안으로 되돌아가지도 마십시오. 그러니 간청하건대, 지금까지 여러분이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한 마음가짐을 지켜왔듯이, 이번 바아이 축제도 함께 지내며, 수도원 문을 열어 우리에게 들어오기를 원하는 이들을 받아들이고, 만남과 대화를 마련하여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이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여러분을 보는 이들이, 신성한 사도(고린도전서 3:16)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 마치 자신의 성전 안에 계신 것처럼 계시다고 말하게 하십시오. – 이렇게 행함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수난에 부합하고 부활의 빛으로 비추어지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거룩하고 위대한 부활절을 기념할 것입니다.

 

223. 모든 이에게 시련이 되었던 어떤 사건을 상기시키며, 모두가 잘 견뎌낸 일

223. 1) 모든 이에게 시련이 되었던, 그러나 모두가 잘 이겨낸 어떤 사건을 상기시킨다. – 2) 죄의 유혹이 어떻게 다가오는지, 그리고 그에 따라 어떻게 죄에 맞서야 하는지—유혹을 물리치는 등—를 지적한다. – 3) 유혹이 생기지 않도록, 심지어 생각으로도 예전으로 돌아가서는 안 되며, 겉으로는 선한 행실의 규율을 엄격히 지켜야 한다. – 4) 무엇보다도 수도원을 떠나는 것을 조심하라. – 5) 전반적으로, 여러분의 모든 일이 품위 있고 질서 있게 이루어지도록 하십시오. – 모든 일을 주님 앞에서 하는 것처럼 행하십시오. – 6) 금식이 끝났습니다. 주님께 감사드리되, 계속해서 더 나아지려는 노력을 멈추지 맙시다.

7. 주님께서 복음서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사탄이 너희를 밀처럼 체로 쳐내기를 청하였으나, 나는 네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누가복음 22:31, 32). 이와 같은 일이 우리 겸손한 자들에게도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모든 선하심을 지니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슬퍼하게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대로 시험과 함께 넘침도 주셨다” (고린도전서 10,13). 여러분은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실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형제애에 찬 동정심을, 하나님께 기쁘시게 하는, 구원을 주는 것이며 칭찬할 만한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사도가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책망하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 안에서 열심이 생겼습니까? 그러나 반박, 분노, 두려움, 갈망, 열심, 보복이 있었습니다. 모든 일에서 여러분은 자신들이 옳다고 여겼습니다”(고린도후서 7:11). 여러분의 이러한 태도는 진리의 말씀이 요구하는 바와 같이 참으로 형제애적인 것입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한다”(고린도전서 12:26)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8. 그러니 당신은 마귀가 얼마나 교묘하고 교활한지 살펴보십시오. 그는 “으르렁거리며 돌아다니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다니는”(베드로전서 5:8) 자로서, 누군가를 사냥감처럼 부분적으로나 온전히 붙잡으려 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누군가를 부분적으로 붙잡으면,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더 나쁜 쪽으로 계속 나아가, 죄로 인한 죽음을 초래할 때까지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즉, 우선 그는 우리가 죄를 범하도록 유혹하고, 그다음에는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게 하려 한다; 이처럼 영혼을 더럽히고 오염시킨 뒤, 그는 영혼을 유혹하여 본성의 경계를 벗어나게 하고, 미쳐 말도 못하고 눈도 멀게 하여 마땅하지 않은 것을 추구하게 만듭니다. 곧 빛 대신 어둠을, 달콤함 대신 슬픔을, 생명 대신 죽음을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혹자로부터 오는 재앙입니다. – 형제들아, 우리도 온갖 경계로 우리 영혼을 지키며,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고, 가장 작은 유혹조차 즉시 물리치자. 만일 이 일에서 패배하더라도, 적어도 동조함으로 인해 더럽혀지지는 말자. 설령 여기서도 실패하더라도, 죄에 기울어지지 않도록 그 기분에 오래 머물지 말자.

9. 이러한 일은 우리에게 과거의 집착과 추억 때문에 일어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집착을 피하고, 젊은 시절의 추억을 피합시다. 왜냐하면 그곳으로 들어가 상상 속에서 머무르는 것은, 마음이 이집트로 되돌아가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면의 사람으로서 이를 경계해야 합니다; 반면 외적인 면에 있어서는 사도가 가르치는 대로 행합시다. “너희 입에서 썩은 말이 하나도 나오지 않게 하고, 오직 믿음을 세우는 데 유익한 말만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주게 하라. 또한 하나님의 성령을 거스르지 말라. 너희는 구원의 날에 그 성령으로 인침을 받았느니라. 모든 쓴맛과 분노와 격분과 고함, 모욕을 온갖 악의와 함께 너희에게서 제거하라. 서로 친절하고 자비로우며, 서로 용서하라. 마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처럼”(엡 4:29–32).

10. 이와 함께 타락의 원인이 되는 수도원 이탈을 피합시다. 아아! 네 형제들은 뜰 안에 있는데, 너는 밖에 있는가? 네 형제들은 침묵 속에 있는데, 너는 헛소리를 하고 있는가? 너의 형제들은 안식을 누리고 있는데, 너는 이곳저곳, 이리저리 옮겨 다니고 있는가? 여기에서 유혹이 생기고, 여기에서 타락이 비롯된다. 양 떼에서 떨어져 나간 양은 어떤 처지에 놓이게 되는가? 짐승들의 먹이가 되지 않는가? 형제애에서 도망치는 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형제들아, 이런 일이 결코 없기를, 절대로 없기를 바란다.

11.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 가운데서는 모든 일이 품위 있고 질서 있게 이루어져야 하며, 모든 일이 주의와 신중함을 가지고, 모든 것이 주님 앞에서 행하는 것처럼, 주님께서는 우리의 숨은 것과 드러난 것, 낮과 밤의 모든 일, 그리고 우리 몸과 마음의 모든 움직임을 다 보시는 분이시니,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하나님의 교회 앞에서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합시다. – 이 이야기는 이만 하기로 합시다.

12. 사순절이 끝나가는 이 시점에, 우리가 이를 완수할 수 있게 하시고 그 기간 동안의 관례적인 수행을 감당할 힘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이 수고는 지나갔으나 상은 남아 있습니다. 육체는 가늘어졌으나 영은 풍성해졌습니다. 더욱 풍성해지고 거룩해지십시오. “너희의 온전한 영과 흠 없는 혼과 육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 때까지 보존되기를” (살전 5:23).

 

224. 정욕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주님의 수난과 부활을 끊임없이 기억합시다

224. 1) 우리가 정욕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주님의 수난과 부활을 끊임없이 기억합시다. – 2) 지금은 모든 육체적인 것을 소생시키는 봄입니다. 그러니 우리 몸에 대해 조심하고 엄격합시다. – 3) 금식 기간 동안 수고했습니다. 그러나 금식이 끝났다고 해서 수고가 끝난 것은 아닙니다. 평생 동안 자기 수양에 힘써야 합니다. – 4) 그러니 그렇게 합시다. [4, 1]

13.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성대한 부활절을 지낼 수 있게 되었으니, 다시 우리 각자의 일에 매진하되, 일하면서도 동시에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주는 수난과 그분의 영광스러운 부활을 함께 기억하도록 합시다. 왜냐하면 부활절이 지나가면서 이에 대한 기억마저 함께 사라지게 해서는 결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주님의 구원의 수난, 그분의 십자가 처형과 매장, 그리고 부활을 마음의 눈앞에 떠올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끊임없이 이러한 주제들로 마음을 채움으로써, 우리는 정욕의 유혹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부주의로 인해 유혹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면, 지체 없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영광의 주님을 바라보아야 하며, 그러면 즉시 우리 영혼에 치유가 비칠 것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도 뱀에게 물렸을 때, 놋뱀을 바라보았고 즉시 치유되었습니다 (민수기 21, 11–19).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악한 생각은 뱀처럼 물어서 영혼에 독을 주입하는데, 이런 일이 일어나자마자 지체 없이 그 독을 철저히 제거해야만, 지체함으로 인해 치료하기 어려운 상처를 남기지 않을 수 있습니다.

14. 보라, 지금은 봄이다. 봄은 피의 어머니이며(피는 육체의 근원이다). “육체는 영을 거스르고, 영도 육체를 거스른다”(갈 5, 17); 그러므로 육체가 강해지면 영은 약해지고, 영이 강해지면 육체는 약해진다. – 그러니 우리는 신중을 기하고, 음식과 음료, 수면 및 그 밖의 모든 일에 있어 엄격한 절제를 지키도록 합시다. 그래야만 육신이 영혼을 지배하지 못하고, 오히려 영혼이 육신을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15. 경기장에 나선 달리기 선수는 한두 구간을 달렸다고 해서 승자로 선포되는 것이 아니라, 전 구간을 다 달리고(가장 먼저 정해진 결승선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승자로 선포된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사순절이나 오순절을 (제대로 지낸다고 해서 이미 승리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건대, 우리 일생을 경계하며 경건하게 보내지 않는다면, 마귀의 올가미를 피할 수 없으며 승리의 상도 받지 못할 것입니다.

16. 왜 우리는 계속해서 선한 수고를 기울이고, 계속해서 미덕을 얻기 위해 땀을 흘리며, 계속해서 육신을 억누르고, 계속해서 몸을 굴복시키고, 계속해서 정욕을 몰아내며, 항상 “우리 몸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지고” (고린도후서 4:10), “항상 우리 안에 죽음의 정죄를 지니고”(고린도후서 3:7) 있는 것입니까? 왜냐하면, 물론 우리도 우리 조상들과 형제들처럼 죽을 것이며, 이곳을 떠나 낯선 곳으로 가고, 우리가 보지 못했던 광경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관한 말씀은 두렵기도 하고, 분별 있는 자를 황홀경에 빠지게 하기도 한다. – 그러므로 두려움과 떨림 가운데 머물며, 우리의 감정을 엄격한 질서 속에 다스리고, 헛된 소리와 해로운 광경, 감각을 마비시키는 향기, 그리고 모든 위험한 발걸음으로부터 온갖 방법으로 스스로를 지키며, 온전히 거룩하신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바쳐 그분께 기쁨을 드림으로써, 영원한 복의 상속자가 되게 하소서.

 

225. 부활절이 지났고, 수난절도 지났으나, 부활절의 기쁨과 주님의 수난에 대한 기억은 우리 안에 살아 있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살아갈 때, 우리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위해 살게 될 것이다.

225. 1) 부활절이 지났고, 수난절도 지났습니다. 그러나 부활절의 기쁨과 주님의 수난에 대한 기억은 우리 안에 살아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살아갈 때, 우리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위해 살게 될 것입니다. – 2) 그러므로 부활절이 지난 후에도 영적 수련에 전념해야 하며, 그로부터 벗어나는 어떤 변명도 만들어내지 말아야 한다. – 3) 그들에게 비밀스러운 장소에서 따로 모이지 말라고 말했으나, 어떤 이들은 여전히 그렇게 했다는 점을 꾸짖으며, 공개적으로 모여 대화를 나눌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 외의 모든 시간에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지시한다. – 4) 이미 세상을 떠난 선한 형제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본받도록 권면하며, 도메티아노 형제[4, 2]를 본보기로 제시한다.

17. 부활절이 지나가고 축제는 끝났지만, 기쁨이나, 말하자면 축제 분위기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사도의 말씀대로, 우리는 영적으로 항상 기뻐하고 축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립보서 4:4). 그리고 수난 주간도 지났지만, 우리 구주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기억이 우리 안에 항상 새롭고 생생하기를 바랍니다. 즉, 영광의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묻히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셨으며, 우리도 그분과 함께 부활시키고 생명을 주셨으니, “우리가 살아도 우리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요,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분을 위해 사는 것” (고린도후서 5:15)이라, 그리하여 담대히 사도의 말씀대로 말할 수 있게 하소서: ““이제 나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 (갈 2:20, 21). 그리고 이 성사로부터 도출되는 결론은 이러하니, 우리는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들이 되어 오직 한 분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

18. 그러므로 부활절이 지난 후에도 우리는 절제하고 깨어 있으며, 기도하고 회개하며, 눈물을 흘리고 깨달음을 얻어야 하며, 항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몸에 지고, 매일 의지로 죽어가며, 육신의 헛된 생각에서 멀어짐으로써 마음속으로 육신과 끊임없이 분리되어 주님께로 나아가야 한다. – “지금은 사순절이 아니다”라고 말하지 마라. 절제하는 자에게는 언제나 사순절이다. “나는 이미 오랫동안 수련해 왔으니 이제 안식이 필요하다”고 말하지 마라. 이 땅에는 안식이 없다. “나는 덕행에 있어 노련해졌으니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마라. 변화와 타락에 대한 두려움은 결코 사라져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사탄은 덕행에 노련해진 많은 이들을 순식간에 죄의 구덩이로 떨어뜨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 있다고 생각하되,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린도전서 10:12)고 하듯이, 스스로가 잘 보호받고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 채 방치되지 않았는지 조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항상 경계와 주의, 엄격한 절제가 있어야 하며, 잠을 잘 때나 음식을 먹을 때, 마실 때,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일에서 육신이 항상 의 굴레와 속박 아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육신이 마치 어린 망아지처럼 뛰놀다가 우리를 죄의 급류로 떨어뜨릴까 두렵기 때문이다.

19. 나는 최근의 가르침에서 여러분에게 따로 떨어져 숨은 곳에 홀로 머물지 말라고 훈계했으나, 여러분 중 일부는 여전히 그곳에 다시 머물렀습니다. “어떻게 하기를 원하십니까? 채찍을 들고 여러분에게 갈까요, 아니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갈까요?” (고린도전서 4:21). 내가 온갖 방법으로 말했으나 너희는 듣지 않았고, 너희 형제가 그 일로 인해 징계를 받은 것을 분명히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너희는 자제하지 못했다. 누구도 같은 종류의 죄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라. 교훈이 헛되이, 또는 아무 데서나 전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무질서가 아니라 질서의 하나님이시니라”(고린도전서 14:33). “모든 것이 품위 있게 질서 있게 이루어져야 하리라”(고린도전서 14:40), 그리하여 모든 일에서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소서. 저곳과 이곳에서 모인 형제들아, 어디에 어떻게 앉을지, 어떻게 서로 조화를 이룰지 스스로 주의하라.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허락을 받은 자들처럼 행하지 말고, 성령으로 하나 된 자들처럼 행하라.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지 말고, 너희의 모든 움직임과 모든 행동을 보시는 주님께서 지켜보시는 것처럼 행동하라;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것처럼 어지럽게 움직이지 말고, 마치 여정 중에 쉬는 자들처럼 하십시오. 여러분의 수공예와 기도, 찬송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이곳에서 탐욕스럽게 아무것도 쌓아 두지 말고, 있는 그대로에 만족하십시오.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며 경멸하지도 아니하리라”(수 1:5); 그러므로 우리 중 누구든지 담대히 말할 수 있다. “주께서 나의 도움이시니 사람이 내게 무엇을 하리요,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라”(시 117:6).

20. 너희 형제들을 기억하라. “그들이 이 땅에서의 삶을 마칠 때를 바라보며,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히브리서 13:7). 우리가 찬양한 복된 도메티아누스가 바로 그러하며, 그의 기억은 성도들과 함께 있다. 그는 어떤 대가를 치렀는가? 어떤 삶을 살았는가? – 그는 얼마나 많은 수고와 고행으로 영원한 유산을 얻었는가? 그는 육신으로는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이었으나, 덕을 택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말씀대로 그를 높이셨으니, “나를 영화롭게 하는 자를 내가 영화롭게 하겠고, 나를 멸시하는 자는 치욕을 당하리라” (사무엘상 2:30). 이러한 형제들을 위해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일에 우리 나름대로 무언가를 더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 힘닿는 대로 기여함으로써,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도들과 함께 몫을 얻게 될 것입니다.

 

226. 우리가 세상에 살 때, 우리의 생활 방식을 비방하려는 자들의 입을 막을 수 있도록 스스로를 다스리자

226. 1) 우리가 세상에 살 때, 우리의 생활 방식을 비방하려는 자들의 입을 막을 수 있도록 스스로를 다스리자. – 2) 이를 위한 원동력은 모든 성도들을 고무했던 주님에 대한 사랑이 되게 하라. – 3) 우리가 때때로 유혹에 빠진다면, 그것은 주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식었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우리는 그 사랑을 새롭게 하고 더욱 굳건히 해야 한다. [4, 3]

21. 우리 겸손한 자들은 매년 이곳을 찾아오시는 여러분을 보며 기쁨을 누리며, 마치 두 번째 부활절처럼 여러분의 방문을 축하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각자 자신의 손으로 얻은 육적인 것을 우리에게 가져오듯이, 우리도 마치 일종의 교환처럼 영적인 것을 여러분께 드리겠습니다. –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께 간청하노니, 수도자의 명성에 걸맞게, 우리가 고백한 신앙에 걸맞게, 주님을 위해 견뎌낸 박해에 걸맞게 행하십시오. “세상에서 너희의 선한 행실로” “너희를 악인인 양 비방하는 자들”이 너희의 선한 행실을 보고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라 (베드로전서 2:12). 우리 자신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진리를 거스르는 자들을 위해서도, 우리의 삶을 확고하고 질서 정연하게 꾸려 나가도록 노력합시다. 서로를 대할 때 선한 행실을 지키고, 선한 일들을 행할 때 선한 원칙을 따르도록 합시다. 교회에 모였을 때는 사도들의 규율을 지키도록 합시다. 사도는 “너희 중 누구든지”라고 말하며, “시편을 읊거나, 가르침을 전하거나, 말을 하거나… 모든 것이 건축을 위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고린도전서 14:26); 혹은 필요에 따라 어딘가를 지나갈 때는, 경건하게 걸어가서 우리 얼굴에 마치 어떤 은혜가 비치는 듯하여 보는 이들에게 교훈이 되게 하자; 혹은 여인과 대화를 나누게 된다면, 온전히 주의를 기울여 그녀와 이야기하며, 시선을 겸손히 거두어 마음에 가시와 화살을 맞지 않도록 하자.

22. 한마디로, “모든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행해야 한다(갈 2:20). 그분의 사랑은 사랑하는 이를 황홀경에 빠지게 하여, 자신이 자신의 주인이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오직 그가 사랑하는 분의 것만이 되게 한다. 이는 자신을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사랑하는 이들에게서도 볼 수 있는 바이다. – 남편이 아내를 사랑할 때, 그는 온전히 사랑하는 이에게 자신을 바치며, 마치 그녀만으로 숨 쉬는 듯하고, 끊임없이 그녀를 꿈꾼다. 비록 태양을 가리켜 보여도 그는 그것을 바라보려 하지 않고 오직 자신이 갈망하는 그녀만을 바라볼 것이며, 비록 식사를 권해도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있고 싶은 욕망 때문에 그 식사에 참여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 그러나 주 그리스도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분의 복된 사랑보다 더 달콤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분은 “인자하심으로 아름다우시니, 사람의 아들들보다 더하시다”(시 44:3) 분이 아니신가? 그분은 “달콤함이시며, 온전한 소망이시” (아가 5:16)는 분이 아니신가? 이를, 즉 그분께 대한 자신의 뜨거운 사랑을 드러내며, 성도들은 이렇게 외칩니다. 어떤 이는 “사슴이 시냇물을 갈망하듯 , 내 영혼도 주님을 갈망하오니, 하나님이시여” (시 41:2); 또 다른 이들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사로잡았나니, 이는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으니,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요,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으니, 살아 있는 자들이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그들을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후서 5, 14. 15)라고 외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 그리고 성도들은 그분을 그토록 강렬하고 거침없이 사랑했다!

23. 그러나 우리는 그분을 뜨겁게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악한 생각과 육신의 욕망에 사로잡히게 되어, 결국 즐거움 대신 슬픔을, 달콤함 대신 쓴맛을, 평화 대신 근심을 맞이하게 됩니다. – 그러나 형제들아, 우리는 깨어나 정신을 차리고, 그러한 해로운 욕망들로부터 영혼을 정화하여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거하게 해야 합니다. 청결한 곳에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되고 갈망하는 삶이며, 이렇게 살아감으로써 우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천국을 상속받게 됩니다.

 

227. 금식을 통해 여러분은 영적인 은혜를 모았습니다. 이제 그 은혜를 지키기 위해 힘쓰십시오

227. 1) 금식을 통해 여러분은 영적인 은혜를 모았습니다. 이제 그 은혜를 지키기 위해 힘쓰십시오. – 2) 이를 위해 방심해서는 안 되며, 스스로를 엄격히 경계하고, 경각심을 가지고 신중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 3) 죄를 유발하는 상황을 피하고, 감정을 다스리며, 특히 생각을 아름답게 가꾸어야 합니다. – 4)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죄에 빠지게 될 것이며, 죄는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해를 끼쳤고, 또 얼마나 많은 해를 끼치고 있는가? [4, 4]

24. 명절이 끝난 후, 시대는 우리를 다시 면담과 평소의 가르침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이 일을 위해 부름받았음을, 그리고 제 모든 힘을 다해 여러분에게 진리의 말씀을 전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비통할지를 알기에, 열의를 다해 이에 착수합니다. – 그렇다면 지금 이 시점에 제가 여러분께 무엇을 말씀드려야 할까요? 이전에 성 사순절 동안, 여러분 각자가 영적 풍요를 마치 어떤 안식처처럼 모아 성 부활절을 맞이했고, 금식, 철야 기도, 기도, 근면함 및 그 밖의 유사한 경건한 실천과 같은 수많은 선한 미덕을 얻었듯이, 이제 여러분의 관심과 보살핌의 대상은 – 일부가 아니라 – 바로 그 모든 것을 보존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25.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감각적인 안식처에서 일어나는 일이 영적인 안식처에서도 똑같이 일어난다고 가정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는 누군가 안식처에 들어서 자리를 잡자마자, 바다의 파도나 다른 재난적인 우발 사태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안일함과 무심함에 빠져들게 된다. 반면 이곳에서는 육체의 안식이 오히려 정욕을 더욱 격하게 부추기고, 악의의 영들이 마치 폭풍우처럼 더욱 거세게 덮쳐옵니다: 음탕의 영, 탐식의 영, 탐욕의 영, 나태의 영, 슬픔의 영, 교만의 영. 그리고 이때는 마치 정박지에 있어도 침몰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매우 적절합니다. 한때 성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를 부주의하게 쳐다보았더니, 그가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는 읽는 이들이 잘 알고 있다(사무엘하 11, 1 및 4); “야곱이 먹고 배부르매, 그가 사랑하던 이를 버렸도다”라고 성경(신명기 32, 15)은 말합니다; 어떤 이는 무모하게 손을 댔고, 정욕에 불타올라, 불법을 낳았습니다.

26. 이를 듣고 주의하라. 죄를 부추기는 위험한 장소와 상황을 피하라. 눈과 귀, 후각, 미각, 촉각, 음식과 음료, 그리고 잠까지 엄격한 규칙으로 다스려, 정욕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도록 하라. 또한 감각의 바다를 항해하는 자는 어쩔 수 없이 폭풍과 파도에 시달리게 되지만, 생각의 바다를 건너는 자는 폭풍과 고요함 모두의 주인임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가 부적절한 생각들을 용감하게 물리친다면, 성 아르세니우스에 대한 이야기에서처럼 성령을 동행자로 삼아 고요함으로 충만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각이 방종하고, 파도처럼 솟아오르는 정욕을 제지하지 않는 자는 스스로에게 가장 사나운 폭풍을 일으키는 것이니, 만약 그가 요동치는 생각을 속히 다스리지 못한다면, 결국 애처로운 목소리로 “바다 깊은 곳으로 나를 던져 주시고, 폭풍이 나를 삼키게 하소서” (시 64:3). 나는 이를 통해 말하고자 한다. 선한 생각이 지배하게 하고, 더 나은 것이 더 나쁜 것에 이기지 못하게 하라. 영이 다스리게 하고, 그 영이 더 나은 쪽으로 이끌게 하라.

27. 죄가 무엇을 저질렀는지 모르십니까? 죄가 세상을 죽음으로 이끌지 않았습니까? 땅을 타락시키지 않았습니까? 창세부터 지금까지 온 우주를 무덤으로 채우지 않았습니까? – 사람은 계명을 어기기 전까지는 썩지 않는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원초적 존재가 그에게 주어진 계명을 변함없이 지키고 있을 때까지만 해도, 앞서 말한 일들은 아직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영원한 고통의 원인이요, 꺼지지 않는 지옥의 불을 지핀 자이며, 끝없는 구더기의 먹이입니다. 그는 존귀하게 지음받은 인간을 무지한 짐승과 같게 만들었습니다. 그가 이토록 재앙을 많이 일으키고 치명적이므로, 우리는 온 힘을 다해 그를 피해야 하며, 사람들을 천사로 드러내고, 악마에 저항하며, 모든 정욕을 쫓아내고, 마침내 상으로 천국을 얻는 덕을 선택해야 한다. 우리 모두가 우리 주님의 은혜와 인류애로 그곳에 도달하기를 바란다.

 

228. 방심하지 마십시오. 죽음은 언제나 가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죽음 뒤에는 심판과 보응이 따릅니다.

228. 1) 방심하지 마십시오. 죽음은 언제나 가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죽음 뒤에는 심판과 보응이 따릅니다. – 2) 세상의 왕을 섬기는 자들이 두려움으로 크고 작은 모든 일을 성실히 수행하려 애쓴다면, 하늘의 왕을 섬기는 자들은 더욱더 그렇게 행해야 하지 않겠는가? – 3) 그러니 우리는 예배와 순종에 있어 모든 일을 부지런히 수행합시다. 특히 서로 화목하게 지내며, 진심으로 그렇게 하십시오. [4, 5]

28. 이 세상의 삶이 길다고 해서 우리 안에 권태나 나태함, 게으름을 낳아서는 안 되며, 오히려 열정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지극한 정성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죽음에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종도 주인에게 다가갈 때나, 사자가 자신을 보낸 이에게 보고하러 갈 때 무심하게 행동하지 않고, 마치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일 정도로 심히 염려한다. –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까? 우리도 우리 주님께 다가가는 것이요, 더 정확히 말하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두려운 심판대 앞에서 우리는 모두 벌거벗고 드러난 채 서서, 우리가 살아온 삶에 대해 보고하고, 그 대가로 영원한 왕국이나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며, 누가 안일함에 빠질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 종처럼 손과 발이 묶인 채 혼인 잔치장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주님의 뜻을 행하려는 열정으로 누구라도 불보다 더 뜨겁게 타오르지 않겠는가? (마태복음 22,13).

29. 만약 이러한 예들이 우리를 두렵게 하지 않는다면, 미래를 현재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비교함으로써 더 생생하게 상상해 보자. 왕의 원수들 중 어떤 이들은 감옥에서 고통받고, 어떤 이들은 채찍으로 고문당하며, 어떤 이들은 유배지로 쫓겨나고, 어떤 이들은 눈을 잃으며, 또 어떤 이들은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을 보지 못하는가? – 그러나 아무런 죄도 짓지 않은 자들조차도, 얼마나 큰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임하고 섬기며, 이리저리 전쟁터나 다른 고된 일터로 보내지고 있는가? 이에 반대하는 자도, 순종하지 않는 자도 없다. 만약 필멸의 왕에게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하물며 불멸의 유일하신 왕, 곧 모든 왕의 왕이시며 모든 주인의 주님이신 분 앞에서는 더욱더 두려움과 떨림으로 이 일을 행해야 하며, 명령받은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라고 하시는지 들으십니까? – “혹시 그분의 풍성한 은혜와 온유와 오래 참으심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너를 회개로 이끄신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가? 그러나 네 완고함과 회개하지 않는 마음으로 말미암아, 진노의 날과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드러나는 날에 네게 진노를 쌓고 있는 것이다. 그분은 각 사람에게 그의 행한 대로 갚아 주실 것이다” (롬 2:4–6).

30. 이 말씀이 우리에게 경각심을 주게 하소서; 매일 아침 일찍, 신호가 울리자마자 재빨리 일어나 잠을 떨쳐내고, 독방과 공동 모임에서 절제된 기도를 드린 뒤, 각자가 자신의 일에 매진하도록 하자. – 식당 담당자는 식당에서, 요리사는 주방에서, 그 외 모든 이는 각자의 자리에서: 어디에서도 불평이 없고, 어디에서도 불복종이 없으며, 어디에서도 고함이 없고, 어디에서도 다툼이 없어야 한다. — 겉으로는 평화로운 척하면서 속으로는 악의를 품고, 기회가 닿는 대로 뱀처럼 독을 뿜거나, 복수심에 불타는 낙타처럼 복수하려는 은밀한 악의조차도 없어야 한다. – 모욕이 있었지만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회개하거나 용서했습니까? 다시 생각에 불타오르지 말고, “악으로 악을 갚거나, 괴로움으로 괴로움을 갚으려”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축복하십시오. 여러분이 이를 위해 부르심을 받았음을 알며, 축복을 상속받으십시오. 생명을 사랑하고 복된 날을 보기를 원하는 자는, 자신의 혀를 악에서 금하고, 입술로 아첨하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며, 평화를 구하고 그것을 지키라. 주님의 눈은 의인을 향하고, 그분의 귀는 그들의 기도에 기울여 계시나니, 주님의 얼굴은 악을 행하는 자들을 향하고 계시니라” (베드로전서 3, 9–12).

 

229. 온 피조물이 꽃으로 뒤덮이고 향기를 풍기며 그리스도의 부활을 축하하듯이, 우리도 온갖 미덕을 조화롭게 결합하여 우리 안에서 영적인 향기를 준비함으로써, 이 모든 명절 중의 명절을 축하해야 한다.

229. 1) 온 피조물은 꽃으로 뒤덮이고 향기를 풍기며 그리스도의 부활을 축하합니다. 우리도 온갖 미덕을 조화롭게 결합하여 우리 안에 준비해 둔 영적인 향기를 스스로 발산함으로써, 이 모든 명절 중의 명절을 축하해야 합니다. – 2) 그러나 이 시기에는 주님께서 친히 꾸짖으신 성상파괴 운동을 계기로, 우리는 정통 신앙으로 더욱 향기롭게 빛나야 한다. – 3) 그러니 올바른 믿음을 지키며 덕스러운 삶으로 향기롭게 빛나자. [4, 6]

31. 그리스도의 부활 축일을 맞아 온 피조물도 마치 일종의 죽음과도 같은, 겨울의 슬픈 덮개를 벗어던지고 다시 꽃을 피우며 마치 살아나는 듯하다. 땅은 푸르름으로, 나무는 잎사귀로 덮이고, 동물들은 뛰놀며, 바다는 잔잔해졌으며, 모든 것이 더 나은 상태로 변모하였다. – 그런데 왜 이 이야기가 내 입에서 나왔을까? – 바로 이 때문이다. 무감각하고 말 없는 피조물들조차 그토록 빛나는 부활을 기뻐하며 축제 같은 모습을 띠는데, 이성과 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존귀하게 여겨진 우리가, 선한 삶으로 스스로를 아름답게 단장하고 영으로 향기롭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 참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는 덕으로 단장된 자이기 때문입니다. 사도께서 “우리는 구원받는 자들에게나 멸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께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이들에게는 죽음으로 이끄는 죽음의 냄새요, 저들에게는 생명으로 이끄는 생명의 냄새입니다”(고린도후서 2, 15.16). 이와 더불어, 계명을 어기기 전의 아담도 불멸과 썩지 않음으로 단장되고 하늘의 관상(觀想)에 휩싸여 있었기에, 하나님께 향기로운 존재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꽃이 피고 향기로운 나무도 그 가치에 걸맞게 에덴 동산에 심겨져 덕행의 향기를 풍기던 것처럼 말입니다. 여기서 이삭 족장께서 아들 야곱에게서 기분 좋은 향기를 느끼시고, “이것은 내 아들의 향기니, 주님께서 축복하신 풍요로운 밭의 향기와 같다” (창세기 27, 24)라고 말씀하신 사실도 언급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는 이 향기를 영적으로 이해하셨던 것입니다. – 그러니 형제들아, 우리도 영적인 향기를 풍기도록 합시다. 마치 숙련된 향료 제조자처럼, 온갖 미덕을 조화롭게 결합하여 우리 안에 그 향기를 준비합시다. 이러한 향유는 축복받은 것이며, 하나님께 기쁨이 되며, 천사들을 끌어당기고 악마들을 쫓아냅니다. 이 향유에 이끌린 순수한 영혼들은 ‘노래 중의 노래’(1, 2, 3)에 노래된 대로 주 그리스도님을 따랐습니다. 항상 그래야 합니다.

32.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성상파괴주의라는 불경스러운 사상이 만연한 상황에서, 무엇보다도 정통 신앙의 향기를 풍겨야 합니다. 성상파괴주의자들은 “하나님은 무형하시니, 그분을 형상화할 수 없다”고 외칩니다. – 그리고 그들은 자신이 얼마나 깊은 지혜를 말하고 있는지조차 모른 채 그렇게 생각합니다. – 오, 어리석은 자들아!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고백하십니까? 아마도 ‘그렇다’고 대답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 그러니 부활하신 후 성도인 사도들에게 나타나시어, 말씀할 수 없는 자비로 구원의 믿음에 관한 가장 신비롭고 경이로운 성사를 그들에게 전수하시며, 그분의 성스러운 육신이 부활 후에도 그럴 필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부활이 진실임을 증명하기 위해, 비록 부활하신 그분의 거룩한 육신은 그럴 필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 먹고 마시며 만져질 수 있는 존재가 되셨고, 그분이 영이라고 생각했던 이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손과 발을 보라. 내가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나, 너희가 보는 바와 같이 나에게는 있다”(눅 24,39). – 이에 대해 성상파괴주의자인 그리스도 반대자는 무엇을 말하겠는가? – 주님께는 살과 뼈가 있는가? 그렇다면 이콘에 묘사될 수 있는가? – 만약 후자가 불가능하다면, 전자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육체를 가지고 계시다고 말씀하신 그분은 – 침묵으로든 암시적으로든 – 이콘에 묘사될 수 있음을 스스로 증언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 특징은 서로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왜 이 성화 반대론자들은 마니교도들과 마찬가지로 “고통을 받고 영원한 멸망을 당할” 것인가, 성경에 기록된 대로(살후 1:9).

33. 그러나 우리 형제들은 정통적인 사고방식에 따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성상에서 볼 수 있고 그분께 경배할 수 있다고 믿으며, 이에 안주하여, 우리 신앙에 걸맞은 순결하고 흠 없고 흠잡을 데 없는 삶을 보여주기 위해 온 힘을 쏟을 것이며, 어느 한쪽이나 다른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양쪽을 모두 능숙하게 밟아 나가며, 우리가 천국에 이르도록 할 것입니다.

 

230. 승천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본성을 얼마나 높이 들어 올리셨는지 깊이 생각하며, 합당하지 않은 삶으로 그 본성을 어둡게 하지 않도록 하자

230. 승천하신 주님께서 우리 본성을 얼마나 높이 들어 올리셨는지 깊이 생각하며, 합당하지 않은 삶으로 그 본성을 더럽히지 않도록 합시다. [4, 7] 우리에게 있어 모든 축제의 정점이며, 문턱에 다가온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은 위대하고 초자연적인 신비입니다. 이는 우리의 본성이 보이는 하늘의 경계를 넘어 승천할 것이기 때문인데,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듯이: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 “죄로 인해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리시고… 그분과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늘에 앉히셨느니라”(엡 2,4–6), “하늘에서 자기 우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이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장차 올 세상에서도 이름 지어지는 모든 것보다 더 높으시게 하셨으며, 모든 것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셨고, 그분을 모든 것 위에 머리가 되게 하사, 곧 그분의 몸인 교회를 다스리시며,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으로 삼으셨느니라” (엡 1:20–23). 보십시오,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높은 영광의 지위로 들어 올려졌습니까? 땅에서 하늘로, 썩어질 것에서 썩지 않을 것으로 옮겨진 것이 아닙니까? 세상의 왕이자 죽을 운명의 왕과 친구가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애쓰고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게다가 “한때는 마음과 행실이 악하여 원수였으나” (골로새서 1:21)인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 무료로 화목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아들의 지위에 이르기까지 높여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의 본성은 하늘에 있으며, 보이는 모든 피조물과 보이지 않는 모든 피조물로부터 경배를 받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선하신 하나님의 형언할 수 없는 인간 사랑이 지닌 위대함입니다! 그분을 묵상하며, 우리 이성으로 그분을 다 헤아릴 수 없음을 아신 복된 바울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그분을 아는 지혜의 영을 주시기를.... 이는 그분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들 안에서 그분의 유업인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분의 능력의 역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대로 우리 믿는 자들 안에서 드러나는 그분의 권능의 위엄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알게 하시려 함이라” (엡 1:17–21). – 하지만 그게 바로 일어난 일이 아니겠습니까! – 그분은 동정녀 탄생으로 우리에게 오신 전능하신 이시며, 자연의 법칙에 순종하시고, 십자가에 오르셔서 “그 위에 우리를 위한 죄의 증서를 못 박으시고” (골 2,14), 땅의 깊은 곳으로 내려가 죽을 병을 치유하시고, 부활하셔서 인간 본성을 당신 안에서 온전하게 회복시키셨으며, 마침내 영광 중에 승천하셔서 하나님 아버지께 우리를 위한 중보자로 나타나셨으니, – 이것이 바로 이 성대한 축제의 의미를 간략히 말한 것입니다! – 이를 묵상하며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임을 깨닫고, 경건하게 그 은사를 공경하며, 우리의 고귀함을 지키고, 은혜를 저버리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지체를 음행의 도구로 삼지 말자” (고린도전서 6:15), 그뿐만 아니라 생각과 행동에서 더욱 우리 자신을 정화하고, 영혼을 공격하는 육신의 정욕을 더욱 단절하며, 우리 자신 안에서 “우리의 삶이 가진 선한 것” (베드로전서 2:12), 평화롭고, 온유하며, 순종적이고, 겸손하며, 질서 정연한 삶을 살아야 한다. 바로 그러한 삶이 복된 삶이다. 그러나 쾌락과 오락, 웃음과 방종은 육신을 좇는 자들과 생명을 좇는 자들에게 맡겨야 합니다. 그들은 보면서도 보지 못하고, 듣면서도 듣지 못하며, 마음이 굳어지고 귀가 무거워져 선과 악, 빛과 어둠, 생명과 죽음을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형제들은 “우리가 서 있는 그 고백을 굳게 지키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소망을 자랑하리라” (롬 5:2)라는 고백을 굳게 지키며, 성인들이 – 그중에는 지금도 찬송받는 복자 파코미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 힘써 실천했던 수행의 노고를 본받아, 올바르게 보고, 올바르게 듣고, 올바르게 느끼며, 온몸의 모든 지체를 올바르게 사용하여, 약속된 영생을 상속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231. 주님의 승천으로 우리 본성도 승천하였으니, 이 은총의 위대함을 공경하고 온갖 미덕으로 우리 자신을 아름답게 단장합시다

231. 1) 주님의 승천으로 우리 본성도 승천하였으니, 이 은사의 위대함을 공경하고 온갖 미덕으로 우리 자신을 아름답게 단장합시다. – 2) 이와 같지 않은 자는 그리스도의 지체가 아니다: 그러므로 어떤 정욕에 사로잡힌 자는 회개하고 그분을 닮아가라; 때때로 정욕의 움직임에 시달리는 자는 서둘러 항상 영적인 평온함을 회복하라. – 3) 서둘러라; 죽음은 언제나 가까우니, 죽은 후에는 회개하지 않은 자에게 심판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4, 8]

1. 우리는 주님의 승천을 기념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된 구원 사역의 마무리를 기립니다.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신 그분은 영광 중에 승천하셨고, 우리도 함께 부활시켜 하늘에 계신 그분의 거룩한 육신 곁에 앉히셨습니다. “그분의 영광의 풍성함과 그분의 능력의 지극히 높으신 위엄”(엡 1:18, 19)은 과연 얼마나 큰가! 우리의 겸손하고 하찮은 본성을 신성한 왕좌에 올리셨고, 모든 하늘의 권세가 그분께 경배하고 있으니. 이것을 생각하며 우리는 경외와 떨림으로 가득 차, 이 위대한 은사의 위대함을 경건히 공경하고, 우리 머리이신 분께 합당하게,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그분의 동역자이자 공동 상속인으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순결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선함과 성령과 거짓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고린도후서 6, 6. 7), 온갖 순종과 겸손한 지혜로, 온갖 정성과 주의로, 부적절한 말은 하지 않고, 계명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말자.

2. 그러므로 몸을 더럽히는 자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지체가 아니요, 원한을 품는 자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지체가 아니요, 다른 어떤 정욕에 사로잡힌 자도 더 이상 그리스도의 지체가 아니니, 그러므로 성찬에 참여할 자격이 없다. 사도가 말하기를 “사람은 스스로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떡을 먹고 잔을 마실지니라. 먹거나 마시는 자가 합당하지 못하면, 주님의 몸을 분별하지 못함으로 스스로 심판하는 것이니라. 이 때문에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든 자도 적지 아니하니라. 만일 우리가 스스로 분별했더라면 심판을 받지 않았을 것이나, 주님께 심판받아 징계를 받는 것은, 우리가 세상과 함께 정죄받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라” (고린도전서 11, 28–32).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단련하고 정화하여,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합당한 자로 인정받고, 거룩한 성사를 합당하게 영할 수 있도록 합시다. – 만일 우리가 부주의로 인해 악한 정욕이나 분노, 시기, 증오, 혹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다른 무엇에 사로잡히게 된다 해도 놀라지 맙시다. 오히려 서둘러 예전의 선한 마음가짐으로 되돌아가 정신을 차리고, 이 악에 머무르지 말자. 왜냐하면 이를 고의로 미루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심판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3. 게다가 죽음이 뜻밖에도 닥쳐올 수 있지 않겠는가? – 바로 어제 우리는 병든 주교를 방문했는데, 그가 큰 고통 속에 있는 것을 보았다. 열병으로 온몸이 쇠약해진 채,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면서도 어디에서도 도움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도 곧바로 같은 처지에 빠질 수 있지 않겠는가? – 그런데 이 고통들이 장차 닥칠 고통들에 비하면 무엇이겠는가? 꿈과 그림자일 뿐이다. 그 불은 꺼지지 않고, 그 벌레는 죽지 않으며, 어둠은 사라지지 않고, 족쇄는 풀리지 않으며, 이를 갈음은 그치지 않고, 그 밖의 모든 고통은 영원하다. 이 점을 깊이 생각하며, 형제들아, 우리는 정욕을 좇는 일, 시기, 분노, 비난, 비방 등을 그치고, 그 밖의 어떤 악한 일도 행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온유해지고, 선한 마음을 품으며, 회개하고, 자선을 베풀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고, 명하신 모든 것을 부지런히 기꺼이 행하여 영원한 고통을 피하고 영생을 얻도록 합시다.

 

232. 주님께서는 또 다른 위로자를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이것이 오순절에 이루어졌으니, 이는 참으로 위대한 일입니다

232. 1) 주님께서는 다른 위로자를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이는 오순절에 이루어졌으니, 이는 참으로 위대한 일입니다. – 2)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바칠 것인가? 왕의 위대하심을 고백하며, 모든 선한 일에 힘쓰고, 모든 정욕과 육신의 유혹에 맞서자. 그 안에는 오직 괴로움만 있을 뿐, 모든 위로는 오직 한 분 하나님께만 있다. – 3) 그러니 우리와 닮지 않은 모든 것을 멀리하자. [4, 9]

4. 우리는 오순절을 기념하며 성령의 강림을 축하합니다. 주님께서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떠나가야 하므로 너희에게 성령을 보내리라. 내가 가지 아니하면 위로자가 너희에게 오지 아니하겠고, 내가 가면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라. 그분이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인도하시리라” (요한복음 16,7.13). 이 얼마나 놀라운 약속인가! 이 얼마나 큰 영광인가! 천사도, 사람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바로 본질이 동일한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이리하여 독생자이신 하나님의 아들은 아버지의 사명을 다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시며, 성령께서는 내려오시니, – 다른 하나님이 아니시며, – 결코 그렇지 않으시니! – 기록된 대로 다른 위로자이십니다. 그리고, – 오, 형언할 수 없는 인류 사랑이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위로자가 되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슬픔에 잠기고 고통받는 영혼이 어려운 처지에서 낙심하지 않도록 위로해 주시는데, 성 사도 바울이 “겉으로는 싸움이요, 속으로는 두려움이 있으나, 겸손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로하시나니.... (고린도후서 7, 5). 그분은 악마의 위협에 겁에 질린 마음을 위로하시며, 담대한 소망을 통해 무적의 용기로 이끌어 주시니, 이는 성 다윗이 증언하듯이 “주님, 주께서 나를 도우시고 위로해 주셨나이다” (시편 85, 17)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 그분은 혼란에 빠진 마음을 북돋아 주시며, 하나님과 화해하고 평안을 누릴 수 있게 하십니다. 사도가 증언하듯이,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간구하시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통해 간구하노니, 하나님과 화해하라” (고린도후서 5, 20)고 말합니다. – 헤아릴 수 없는 자비를 보십니까? 비할 데 없는 선물을 보십니까? 독생자께서 우리를 위해 아버지 앞에서 중보하고 계시니,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분이시요,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분이시니라” (롬 8:34)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성령께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위로하십니다.

5. 그렇다면 우리는 이 일에 대해 주님께 무엇을 보답할 것인가? – 우리에게 남은 것은 시편의 노래를 받아들여 이렇게 외치는 것뿐이다. “나의 모든 뼈가 말하노라. 주여, 주여, 누가 주와 같으리이까? 가난한 자를 그를 압제하는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며,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그를 약탈하는 자들로부터 구원하시는 이시여” (시 34:10). 그리고 다시: “나의 도움은 하늘과 땅을 지으신 주님께로부터 오나이다” (시 123, 8). 또: “주님께서 나를 도우시지 않으셨더라면, 내 영혼이 곧 음부에 내려갔으리라” (시 93, 7). 그리고: “주님께서 나의 도움이시니, 사람이 내게 무엇을 하리라고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시 117:6). 이처럼 위로자이신 성령과, 무적의 힘, 위대한 수호자이신 하나님, 그리고 동역자를 모시고 있으니, 우리는 원수의 두려움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며 대적하는 세력을 무서워하지 않을 것이나, 오히려 그분을 우리의 도우미와 동역자로 모신 자로서, 용감하고 굳건히 수도와 신앙 고백의 투쟁으로 나아가며, 그 속에서 날마다 견디고, 뱀의 유혹에 속지 않으며, 그 끊임없는 공격 아래 지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영혼의 집을 불로 가득 채우는 육신의 정욕을 꺼버릴 것입니다. 확실히 말씀드리건대, 이는 즐거움이 아니라 위험한 병이며, 달콤함이 아니라 정신의 광기와 사악한 어둠입니다. 육체의 광기를 다스리고, 그 더러움을 씻어내며, 온 마음을 다해 유일하신 하느님께 매달린 이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분보다 더 달콤하고, 더 갈망할 만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 이를 얻은 자는 육신 안에 있으면서도 육신을 초월하고, 세상에 있으면서도 세상을 초월하여, 이곳에 머물면서도 보이는 것 너머에서 살아갑니다. 그 안에서 은혜의 파도는 성령의 잔잔한 숨결에 의해 일렁이며, 가능한 한 영혼을 고요함으로 채워줍니다.

6. 그런데도 우리는 왜 쾌락에 사로잡혀, 그것이 우리를 이겨내어 우리를 그토록 왜곡하고 변화시켜, 우리가 땅과 육신과 피를 향해 고개를 숙인 채, 전적으로 선하신 우리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멀어지게 내버려 두는 것입니까? – 그러니 모든 정욕을 피합시다: 배신의 근원인 탐욕을 피합시다; 우리를 주님과의 교제에서 멀어지게 하는 불신으로부터 도망치자; 분노, 시기, 증오, 자만, 오만, 고립 등 우리 영혼을 어떤 형태로든 갉아먹는 그 어떤 다른 정욕으로부터도 도망치자. 그래야 죽음이 우리를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덮치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지 않을 것이니;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는 곧 천국으로부터의 소외이기도 하다. 하나님께 기쁘시게 하는 일을 행하지 않는 자 중 누구도 이를 피할 수 없다. 그러니 우리가 아들들에게 닥칠 진노를 피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하나님께 기쁘시게 하는 일을 시작하고, 우리 자신을 정화하며 영혼을 새롭게 하자. 용기를 내라! 주님께 부르짖는 모든 이에게 주님은 가까이 계신다.

 

233. 모든 성인의 축일. – 그들은 누구인가? 모든 순교자들이다: 어떤 이들은 피의 순교자이고, 다른 이들은 자기 희생의 순교자들이다

233. 1) 모든 성인의 축일. – 그들은 누구인가? 모든 순교자들이다: 어떤 이들은 피의 순교자이고, 다른 이들은 자기 희생의 위업을 이룬 자들이다. – 2) 우리도 이들에 속합니다: 우리의 폭군들(– 정욕, 정욕에 사로잡힌 사람들, 그리고 악마들 –)은 우리가 하느님을 떠나 그들의 편으로 넘어가기를 요구합니다; 우리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니, 우리는 외적인 결핍과 내적인 투쟁으로 인한 고통을 겪습니다. – 3) 그러나 끝까지 굳건히 버티자; 그리하여 순교자들의 몫을 얻게 될 것입니다. [4, 10]

7. 모든 축제의 정점인 성령강림절을 우리가 기념하게 되었으니, 이제 우리 앞에는 모든 성인의 축제도 기다리고 있다. – 지금 얼마나 많은 성인들이 기념되고 있는가? 누가 하늘의 별들과 바다 가장자리의 모래를 셀 수 있겠는가? – 하나님의 성도들, 곧 하나님의 진리를 증언한 증인들과 순교자들은 그토록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대적하는 폭군들의 세력에 굳건히 맞서고, 불, 칼, 야수, 수레바퀴, 쇠발톱, 그리고 악의가 생각해 낼 수 있는 온갖 고문을 용감하고 기쁘게 견뎌냈습니다. 고통을 위로로, 피 흘림을 기쁨으로 여기며, – 이러한 확신 속에서 달궈진 숯불 위를 걸으며, 피를 흘려 타오르는 모닥불을 끄고, 자신의 본성을 초월하는 수많은 일을 행하며, 그것으로 폭군들과 왕들을 경악하게 하였으니, – 무엇을 증거하기 위함인가? –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기록된 바와 같이 그분의 이름으로 영생이 주어진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피를 흘린 자들만이 진리의 증인인가? – 아니다; 신성한 삶을 살아간 모든 이들도 그러하며, 성 사도는 그들에 대해 그들은 양털 옷을 입고 염소 가죽을 두르고, 고난을 당하며 모욕을 받았으나, 온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자들이었으니,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의 깊은 곳에서 방황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조금 아래에는: “우리 주위를 둘러싼 증인들의 구름을 바라보며, 모든 교만과 얽매이는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달려가자. 믿음의 창시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며”(히브리서 11, 37–38; 12, 1. 2). 보라, 그가 경건함을 사랑하는 모든 이, 즉 슬픔을 자의적으로 인내하며 살아가는 이들을 어떻게 순교자라고 부르는가?

8.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도 순교자들의 무리에 속합니다. 우리도 십자가를 지고 사는 고통스러운 길을 사랑하며 인내로 걸어가며, 동정 서원을 지키고 우리 앞에 놓인 순종을 위해 수많은 투쟁을 마다하지 않음으로써,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언하고, 심판과 보상이 있음을 증언하며, 그리스도의 두려운 심판대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보고해야 함을 증언합니다. 우리는 악한 생각과 치명적인 정욕의 유혹으로 우리를 괴롭히고 채찍질하며, 하나님을 부인하도록 강요하는 그리스도의 원수인 마귀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진실로, 불법적인 생각과 감정으로 타락하여 대적에게 복종하고 따르는 자들은, 그들의 행실과 마음가짐을 통해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니, 이는 성 다윗이 “미련한 자가 자기 마음속으로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느니라”(시 52:2)고 말한 것과 같다. 왜냐하면 원수는 먼저 사람들의 영혼 속에서 하나님을 잊게 하고, 마치 그분을 부인하게 하지 않는다면, 육체의 정욕과 죄를 용인하는 것, 술 취함, 방탕함, 향연, 탐욕, 우상 숭배 및 그 밖의 온갖 부적절한 일들로 마음을 이끌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일에 성공하면 영혼을 장악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떼어내어, 자신과 함께 영원한 고통을 주는 꺼지지 않는 불길 속으로 내던집니다. 이러한 유혹이 얼마나 비참한지, 그리고 그 결말이 얼마나 무서운지!

9.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여전히 선한 증언을 할 것이며, 선한 고백을 계속할 것이며, 모든 성도들과 함께 그리스도에 대해 증언할 자격을 얻었음을 기뻐하며, 바알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을 것이니, 즉 육체의 정욕과 다른 죄악적인 유혹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며; 적군이 우리에게 순종을 저버리라는 생각을 심어줄 때, 우리는 그를 믿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용감하게 맞서 싸울 것입니다. 비록 타격을 입더라도 결코 패배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 그러한 순교적 증언의 열매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리스도를 모든 이에게 증거하고, 참된 증언을 위해 믿을 수 없는 고난을 겪은 그리스도의 증인들은, 장차 오는 세상에서 그분의 공동 상속자로 선포될 것임을 아십시오. 사도가 말하듯이: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그분과 함께 너희도 영광 중에 나타날 것이라” (골 3,4). 그들과 함께 우리도 생의 마지막까지 우리의 증언을 이어가며, 영원한 상을 받을 자격을 얻고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토록 기쁨과 즐거움 속에 머물 수 있기를 바랍니다.

 

234. 주일에는 주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기억하는 것이 우리에게 교훈이 되게 하소서

234. 1) 주일마다 주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기억하는 것이 우리에게 교훈이 되게 하소서. – 2) 이를 기억하며, 우리를 그토록 사랑해 주신 주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을 품지 않을 수 없으며, 이는 그분의 계명을 실천하고 그분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모든 것에서 멀어짐으로 나타납니다. – 3) 이러한 마음을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해, 우리는 죽음에 대한 기억을 더할 것입니다. 지금 유도키모 형제의 죽음이 우리에게 그 계기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4, 12]

10.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바로 이 주일은, 우리가 귀를 기울인다면 우리에게 충분한 교훈(카테케시스)을 준다. 이는 바로 이 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로 인해 땅에 쓰러진 우리를 다시 일으키셨고, 이 날 그분은 죄와 우리 육체의 할례 받지 않은 상태 로 인해 죽은 우리를 다시 살리셨으며;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나무의 열매를 맛보게 하시려고 다시 천국을 열어 주셨으니, 그 열매는 곧 그분의 생명을 주는 몸과 피입니다. 오늘, 우리는 죽음에서 부활한 자로서 예언자의 말씀을 따라 외칠 수 있습니다. “죽음아, 네 독침은 어디 있느냐? 음부여, 네 승리는 어디 있느냐?”(고린도전서 15:55). “용기를 내라. 내가 이미 이겼다” (요한복음 16, 33)라고 말씀하신 분에 의해 너는 패배했다; 오늘, 사도의 말씀을 빌리자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살리시고 하늘에 앉히사, 장차 올 세대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의 풍성함을 그 선하심으로 나타내시려 하심이라” (엡 2:6-7). 오, 형언할 수 없는 선물이라! 그분은 우리를 무엇에서 무엇으로 인도하셨는가? 죽음에서 생명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노예 상태에서 자유로, 원수 관계에서 진실한 교제로, 나아가 우리를 “그분의 아들의 형상을 닮게” 하실 만큼 자비를 베푸셨다 (롬 8:29). 이 얼마나 형언할 수 없는 은혜입니까!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넘쳐흐르는 위대함입니까! 그분은 우리 모두를 속량하기 위해 독생자까지 내어주셨습니다. 이럴 때 우리가 어떻게 “주님의 위대하심을 누가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분의 모든 찬양을 누가 다 전할 수 있겠습니까?”(시 105:2)라고 외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11. 그러니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신 분을 사랑합시다. 우리를 위해 죽으신 분을 위해 죽읍시다. 육신과 피로 돌아가지 말고, 뱀의 유혹에 속지 말고, 세상의 달콤함에 휩쓸리지 말고, 죽음으로 이끄는 죄의 열매를 맛보지 맙시다. 기록된 바와 같이: “진리의 이성을 얻은 후에 고의로 죄를 짓는 자들에게는 죄를 위한 제사가 더 이상 없나니, 심판에 대한 두려운 기대와, 대적하는 자들을 삼키려는 불의 맹렬함이 있느니라” (히브리서 10:26, 27). 그러므로 우리는 경외심과 경건함으로 주님을 섬기고, 분별력과 올바른 태도로 삶을 영위하며, 현명한 인내로 우리에게 맡겨진 사역을 수행할 것이며, 영적인 일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일, 심지어 장작을 피우고 물을 붓는 일까지 정확히 명령받은 대로 지킬 것입니다.

12. 이 모든 것 위에, 우리에게 피할 수 없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음을 기억합시다. – 보라, 지금 우리 형제 유도킴이 주님께로 돌아갔습니다. – 형제의 죽음이 우리를 깨우치지 못한다면, 도대체 무엇이 우리를 돌이키게 하겠는가? 죽음의 신비가 우리를 설득하지 못한다면, 무엇이 우리를 파멸로 이끄는 정욕으로부터 막아줄 수 있겠는가? 우리가 이러저러한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의논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도, 갑작스럽게 끔찍한 죽음의 시간이 우리를 덮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겠는가? – 죄에 사로잡힌 자들, 회개로 정화되지 않은 타락을 지닌 자들, 무질서하게 살고, 방종하며 제멋대로인 자들에게는 끔찍하고 견딜 수 없는 시간이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경건하고 덕이 있는 자들, 온유하고 겸손한 자들에게는 달콤하고 간절히 바라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이러한 생각을 마음에 새기며,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정욕에서 멀어지고,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껴안으며 덕을 쌓아가도록 간청하고 상기시켜 드립니다. 그리하여 삶의 전 과정을 그렇게 완수함으로써,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천국을 상속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235. 어떤 사람이 죽어가며 “나는 뜻밖의 순간에 당했다”라고 외치고, 말을 다 마치지 못한 채 숨을 거두었던 일을 떠올리며, 다음과 같은 교훈을 이끌어 냅니다. 즉, 언제든지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도록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235. 1) 어떤 사람이 죽어가며 “나는 뜻밖의 순간에 당했다”라고 외쳤으나, 말을 다 마치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던 일을 상기시키며, 항상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도록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도출한다. – 2) 그런 다음, 공동 생활 속에서 이를 달성하기가 가장 편리하다는 점을 암시하며, 혼자 사는 사람들을 안타까워하고, 둘이나 셋이 함께 사는 사람들을 칭찬하지만, 무엇보다도 공동 생활 속에서 사는 사람들을 더 높이 평가한다. [4, 13]

13. 오늘은 주일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죽음에 대해 말씀드려야 합니다. 보십시오, 형제들과 신부님들이 얼마나 자주, 한 분씩 차례로 우리 곁을 떠나시는지. 우리에게 이는 곧 우리도 머지않아 이곳을 떠나게 될 것이라는 상기일 뿐이며, 우리가 갈 곳은 어떤 세속적이고 썩어 없어질 곳이 아니라, 비물질적이고 영원한 거처로, 한 번 그곳에 들어간 자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입니다. – 진실로 죽음은 그에 대해 들을 때 무섭지만, 6일 전 할키트 수도원의 원장님이 임종하실 때 우리가 직접 목격했듯이, 눈으로 직접 볼 때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무섭습니다. 우리는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을 목격했고, 그가 우리 곁에 있다가 죽음에 내맡겨진 채 순식간에 우리 곁을 떠난 일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참으로 두려운 소식이요, 전율하게 하는 광경이었습니다! 아직 숨을 쉬고 계실 때, 그 복된 분은 “내가 당했다”(갑작스럽게 덮쳤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남기시며 머리와 손을 살짝 흔들고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기도 전에 숨을 거두셨습니다. – 그러나 우리는 이 놀라운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직감했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여러분께 한 것은 고인에게 어떤 오명을 씌우려는 것이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 다만 우리 자신을 경계하고, 여러분에게 용기를 불어넣기 위함입니다. 즉, 마지막 순간이 우리를 허를 찌르지 않도록, 그리고 우리가 세상을 떠나는 순간 목구멍에서 같은 외침이 터져 나오지 않도록 주의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항상 그 순간을 준비하여 당황하지 않고 맞이할 수 있도록 합시다. 기록된 바와 같이: “나는 준비하였으니 당황하지 아니하리라” (시 118:60). 그러나 우리가 항상 스스로를 경계하지 않고, 선한 일을 굳게 지키지 않으며, 죄를 지은 것을 회개로 바로잡지 않는다면, 이를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마치 당장 하늘로 데려가실 것처럼 항상 스스로를 단정히 가다듬어야 합니다. – 왜냐하면 우리가 그곳에서 누구 앞에 서야 하겠는가? 모든 이의 재판장이시며 하나님이신 분, “하늘과 땅과 음부의 모든 무릎이 그분께 꿇고, 모든 혀가 그분을 고백할 것”이신 분(빌 2,10)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우리는 무엇에 대해 대답해야 하는가? 우리가 생애 동안 행함과 말과 생각으로 이루어낸 모든 것에 대해 대답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14. 나에게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공포를 불러일으키며, 거의 감각을 잃을 지경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여러분은 두려움 없이 이 일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순종하는 자들이며, 모든 돌봄을 순종의 힘에 맡긴 여러분에게 말이다. 참된 순종 속의 삶이 바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종을 외면하고 홀로 살며,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발을 단단히 디딜 곳을 찾지 못하는 자들은, 두려운 그리스도의 보좌 앞에서 어떤 변명을 준비할 수 있겠습니까? 아아,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악은 얼마나 매혹적인지요! 수도 생활의 길을 바르게 걷던 이들이 어떻게 뒤로 물러서게 되었습니까? “의의 길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알았다가 그들에게 맡겨진 거룩한 계명에서 뒤로 물러나는 것보다 낫다. 그들은 마치 개가 자기 토한 것을 다시 먹으러 돌아가고, 돼지가 씻은 뒤에 다시 진흙 구덩이로 돌아가는 것과 같은 참된 비유가 되었기 때문이다”(베드로후서 2:21, 22). 무슨 말이냐, 친구여, 무슨 말이냐? 네가 종의 멍에를 메고 있단 말이냐?! 수도원을 떠나 홀로 살려는 자들은 수도원이 노예 생활이라고 말하며 그렇게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세상의 멍에를 벗어던지고, 세상에서 도망쳐 나와, 모든 육신의 관습에서 해방된 네가 말이냐? 설마 네가 아내까지 맞이하려는 건 아니겠지!! 왜냐하면 이 두 가지는 세상의 속성과 세상에 속한 것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 그러나 십자가의 삶을 사는 이들에게는 그 어느 것도 낯설다. – 그러나 그 이유는, 늘 그렇듯이, 죄 때문이다. 우리가 정욕을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도 우리에게 따라붙는다. 은밀히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증인과 고발자가 없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형제를 동거자로 삼기를 원치 않고, 고독을 선택하거나, 더 직설적으로 말해, 탐욕의 노예가 되기를 선택한다. 마치 이미 완전히 자신을 죄에 팔아넘기고 육체와 피의 노예가 된 자들처럼 말이다. 여기서 내적 질서의 붕괴가 비롯되고, 여기서 유혹이 비롯되며, 여기서 타락이 비롯된다. 나로서는 이에 대해 울부짖고 탄식할 수밖에 없다. 나는 이를 고발하고 금하지만, 그들은 듣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자들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귀담아들어야 한다.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죄가 없었을 것이나, 이제 그들은 자기들의 죄에 대하여 변명할 수 없다”(요한복음 15:22). 나는 그런 자들의 피에 대해 무죄하다. “너는 이방인처럼 되라”는 계명에 따라 그들을 우리 공동체에서 완전히 배제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박해의 시기이므로 미루겠다. “혹시 마귀의 올가미에서 벗어나, 그 올가미에 걸려 그의 뜻대로 사로잡힌 자들이 다시 일어날지 모르니”(딤후 2:26). 그러나 여러분은 주님께 축복받은 자들입니다. 둘이나 셋이서 서로 함께 사는 분들, 그리고 더욱 칭찬받을 만한 것은, 키노이 규칙에 따라 생활하며, 집에 머물러 극히 필요한 경우, 특히 장터나 축제 때를 제외하고는 부적절한 외출을 하지 않으며, 서로를 섬기며, 그로써 세상을 다스리는 분들, 모든 일을 하나님을 사랑하며 품위 있게 행하는 여러분에게, 은혜와 평화가 더욱 풍성해지기를 바라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늘의 예루살렘의 복된 모습을 보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236. 우리는 깨어 있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깨어 있음을 북돋우고, 주님의 갑작스러운 재림을 기다리자. 그때 깨어 있는 자들은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들림받을 것이니

236. 1)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어 있는 마음을 북돋우고, 주님의 갑작스러운 재림을 기대하며 깨어 있자. 그때 깨어 있는 자들은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들림받을 것이다. – 2) 그들은 누구인가? 주님께서 복에 관한 말씀에서 언급하신 미덕들로 단장된 자들이다. 그러니 다가올 박해가 어떤 형태로 닥치든 두려워하지 말고,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의 구원을 부지런히 이루어 나가자. [4, 14]

15. 우리는 반드시 말해야 하며, 결코 오랫동안 침묵해서는 안 된다. 침묵은 영혼에 잠을 불러오기 때문이며, 그러한 잠은 죽음의 원인이 되니, 이를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며 성 다윗은 이렇게 말한다. “내 눈을 밝히사, 내가 잠들어 죽지 않게 하소서”(시 12편).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말씀은 영생으로 흐르는 물의 샘과 같습니다. 이보다 더 유익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를 아신 복된 사도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너희 속에 거하게 하여, 모든 지혜로 서로 가르치고 권면하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골로새서 3, 16). 보라, 그가 우리에게 서로 가르치고 깨우치라고 명하고, 단지 자신의 권면만으로 만족하지 말라고 하신다. 저는 겸손히 고백하건대, 여러분과 대화를 나눌 때마다 그로부터 큰 유익을 얻습니다. 이 세상의 소란에서 스스로를 일깨우고, 더욱 절제하게 되며, 제 죄과를 깨닫게 됩니다. 실로 이 세상의 삶은 매우 소란스럽기 때문입니다. 매일 악한 말과 헛된 소문이 귀에 들어오며, 게다가 마귀는 선한 생각에 반하는 생각들로 공격해 옵니다. 이 모든 것을 말씀으로 물리치고, 우리가 무엇을 위해 누워 있는지 귀 기울이며 양심을 깨끗하게 지켜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누워 있는 것입니까? –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께 섬기며”(히 9:14), “그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장차 올 진노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늘로부터 기다리는 (살전 1:10)입니다. 그러나 어떤 종도 주인을 기다리며, 그분의 심판을 받아야 할 자로서 졸거나 쉬거나 잠들지 않고,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며, 주인을 맞이할 일과 에 대해 염려합니다. 이에 대해 사도는 다시 분명히 말합니다: “주님께서 친히 명령과 대천사의 목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내려오실 것이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부활할 것이며, 그 후에 살아남은 우리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져 공중에서 주님을 맞이하게 될 것이니, 그리하여 우리는 항상 주님과 함께 있을 것이라” (살전 4:16-17).

16. 그러나 이들은 누구인가? 영적으로 가난한 자, 슬퍼하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온유한 자, 화평을 이루는 자, 자비로운 자, 순종의 멍에를 메고, 신앙 고백을 흔들림 없이 지킨 자들—이들은 그분과 함께 있을 것이며; 그러나 악한 일을 행한 자들, 불순종하는 자들, 반항하는 자들, 신앙 고백에서 배반한 자들, 순종을 거부하는 자들, 그리고 온갖 다른 악을 행하는 자들 – 이들은 구름 속으로 들려 올려지지도 않을 것이며, 주님과 함께 있지도 않을 것이요, 오히려 – 이것이 가장 비참한 일인데 – “고통을 당하며, 주님의 면전과 그분의 영광스러운 성소로부터 영원한 멸망을 받을 것” (살후 1:9)이라. 우리에 대해 이런 일이 생각조차 나지 않게, 입에 오르내리지도 않게 하소서! – 그러므로 우리 앞에는 박해가 기다리고 있고 유혹들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음을 알기에, 우리는 온갖 방법으로 우리의 구원 일을 돌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닥치는 유혹들 앞에서 두려워하거나 겁먹지 맙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계시다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롬 8:31). 지난 박해들 속에서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셨다면, 왜 지금 이 박해 속에서도 겸손한 우리와 함께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주님의 약속대로 우리에게 모든 일에 대한 굳건함과 힘을 주실 것입니다. 게다가 우리의 대적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 또 쫓아낼까요? 그러나 “땅과 그 안에 가득 찬 것은 모두 주님의 것”입니다(시 23:1). 다시 감옥에 가둘 것인가? 그러나 그리스도를 위해 그곳에 갇힌다면 감옥보다 더 달콤한 곳은 없다. 다시 채찍질할 것인가? 그러나 그만큼 우리에게 더 많은 면류관을 안겨줄 것이다. 설령 죽인다고 해도 어찌 되겠는가? 우리 주님도 죽임을 당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께서도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이요, 우리가 참으면 그분과 함께 왕이 되리라”(딤후 2:11, 12)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오늘 그 기념일을 지내는, 그리스도의 가장 위대한 증인인 복자 테오도르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분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기쁨으로 견뎌내셨습니다. 우리도 같은 믿음으로 주님을 섬기며, 같은 소망으로 닥치는 모든 슬픔과 고난을 견뎌내어, 순종과 고백을 통해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천국의 상속자가 될 자격을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237. 흩어짐. 이에 대해 기뻐할 것을 권면한다

237. 1) 흩어짐. 이에 대해 기뻐할 것을 권면한다. – 2) 성상파괴주의적 판단의 터무니없음을 폭로한다. – 3) 그들에 반대하는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한다. – 4) 또한 말뿐만 아니라 행동, 즉 합당한 삶으로 진리를 섬기도록 권유한다. [4, 15]

17. 어제 우리는 주님의 세례자 성 요한을 기념하며, 그와 함께 우리의 수도 생활을 되새겼습니다. 그러나 그때 우리는 모두 함께 있었고, “하나님의 집에서 한마음으로 행하였도다”(시 54:5). 지금은 우리가 각자 다른 곳, 즉 여러 지역과 마을로 흩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흩어짐이 하느님을 위한 것이므로, 주어진 계명에 따라 기뻐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너희의 상이 하늘에 많으니라” (마태 5,12). 게다가 이를 통해 우리는 “사람들이 나를 쫓아내면 너희도 쫓아낼 것이요, 내 말을 지키면 너희 말도 지킬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행하는 것은 내 이름 때문이니, 나를 보내신 분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신 주님을 닮게 됩니다(요한복음 15:20, 21).

18. 진실로, 유대인들이 아들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아버지를 알지 못함을 드러냈듯이, 성상 반대자들도 그리스도의 성상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그리스도를 알지 못함을 드러냅니다. 진리는 명백하나, 천 명 중 한 명만이 이를 압니다. 보라, 그들의 악한 궤계가 어떻게 이중적인지: 때로는 그리스도의 성화를 결코 세울 수 없다고 말하고, 때로는 – 세울 수는 있지만 – 전쟁이나 사냥에서 사용되는 표식과 동등한 의미로만 세울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경배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마치 말, 황소, 사자, 호랑이, 뱀, 물고기, 새의 형상에게 절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말을 듣고 누가 탄식하지 않겠으며, 누가 눈물을 흘리지 않겠는가? 천사들이 경외하고 악마들이 떨며 두려워하는 그리스도의 성화를, 네 발 달린 동물, 기어 다니는 동물, 물고기, 새의 형상과 비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들과 마찬가지로 숭배할 의무가 없다고 여기는 것을 말이다. – 얼마나 끔찍한 날조이며, 또 얼마나 더 끔찍한 뻔뻔함인가! – 그 다음에는 또 무엇이 있나? – 사람의 형상은 사람이라 부르고, 황소는 황소라 부르고, 낙타는 낙타라 부르며, 일반적으로 묘사된 대상의 이름으로 그 형상을 부른다. 그러나 주 그리스도의 성화, 성모 마리아, 혹은 성인들의 어느 누구에 대한 것이든, 비유적인 의미에서조차 그들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고, 단순히 ‘성화’라고만 말하며, 누구의 것인지 덧붙이지 않음으로써, 자신들이 생각하는 대로 죄를 짓지 않으려 한다. 그들은 이러한 무지와 모독으로 가득 차 있다! 형제 여러분, 우리 성부들이 전하신 말씀을 귀담아듣고,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장소가 거룩하고 숭배의 대상이 되어 그 이름이 불리며, 누구든지 그곳에서 모래 한 줌이든 돌 한 조각이든 가져오면 그것을 신성한 보물처럼 받아들이고 간직하며 공경한다는 사실을 아십시오. 그보다 훨씬 더 경배와 숭배를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성상이 아니겠습니까? 그 성상 위에서 그분은 마치 거울처럼 뚜렷이 보이시며, 마치 그분이 실제로 계신 것처럼 그분께 마땅한 감정을 불러일으키시니, 이는 형상이 묘사된 대상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형상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19. 그러므로 저는 겸손한 자로서, 성상 숭배 반대론자들의 그릇된 생각에 대해 마음으로 슬퍼하며, 침묵에 대한 벌을 두려워하여, 부득이하게 비록 적고 간결하더라도 이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단자들이 사적으로나 공개적으로, 서면으로나 구두로 그리스도를 모독하는 말을 멈추지 않는다면, 어찌하여 우리만 집에 앉아, 이 현 상황에서 마땅한 바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는가? – 만일 우리가 달리 행동한다면, 어떻게 주님의 진노를 견딜 수 있겠는가? 또한 우리 조상들은 이와 같은 경우에 침묵하고 숨는 것을 정당하게 ‘진리에 대한 배신’이라 불렀는데, 우리가 그분들을 어떻게 본받을 수 있겠는가?

20.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를 섬기며 말과 행동으로 진리를 실천하며, 말하고 들어야 합니다. 거룩한 사도들도 오직 신성한 설교뿐만 아니라 흠 없는 삶으로 온 세상을 정복하여, 어둠에 휩싸인 자들을 깨우치고, 지혜의 소금으로 타락한 자들을 정화했으며, 오직 잔과 지팡이만을 지니고 다녔습니다. 형제들아, 그들을 본받아 우리도 칭찬을 받을 자격을 얻어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에 만족하고, 돈을 탐하지 않으며, 탐욕스럽지 않게 행동하고, 때 아닌 외출을 하지 않으며, 죽음의 원인이 되는 여자들과 어울리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렇게 행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실 것이며, 다가올 고백이 높여질 것이고, 우리의 적들은 비록 조금이라도 부끄러움을 느끼고 회개할 마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마치 축복 대신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만물을 변화시키시고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끄시는 세상의 하나님께서 친히 그분의 교회를 화해시키시며, 우리를 진리에 충실하게 지켜 주시고, 그분의 하늘나라로 인도해 주시기를 빕니다.

 

238. 지금은 추수의 때입니다. 우리의 영적 수확도 이와 비슷합니다.

238. 1) 지금은 추수의 때이다. 우리의 영적 추수도 이와 비슷하다. – 2) 우리의 열매는 덕목들이다. – 3) 곡창은 겸손이다. – 4) 때는 온 생애이다. – 5) 방법은 우리의 모든 수고와 순종이다. [4, 16]

21. 현재는 추수의 때이자 수고와 땀의 때로, 시편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때입니다. “사람은 저녁까지 자기의 일과 자기의 수고를 하러 나간다” (시 103, 23)라는 말씀이 이루어지는 때로, 수확을 끝내고, 베어 모은 것을 타작하며, 얻은 씨앗을 곡창에 넣을 때까지 스스로에게 쉼을 주지 않는 때이다. – 이에 대해 무엇을 말하겠는가? – 육신의 이득을 얻기 위해 이러한 수고가 필요하다면, 영적인 것을 위해서는 더욱더 필요하지 않겠는가? 우리에게도 수확이 기다리고 있으니, 사도가 말한 대로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두리라” (고린도후서 9:6)고 했습니다. 또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아직 네 달이 남았으니 추수가 올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느냐? –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이미 추수할 때가 되었다. 수확하는 자는 삯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위한 열매를 거두나니, 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기뻐하리라” (요한복음 4:35, 36).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수확입니다.

22. 그러니 온전한 열정을 다해 수확을 하러 나가자. 육신적이고 덧없는 열매가 아니라, 영적이며 영생에 이르는 열매, 곧 거룩함과 평화, 사랑과 기쁨, 온유함과 인내, 자비와 온유, 그리고 그 밖의 모든 미덕을 거두자. 이것들이 바로 분별력을 가지고 거두어야 할 영적인 열매들입니다. 즉, 선한 것에 악한 것이 섞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즉, 사랑하되 편파적이지 않게, 선을 위해 경쟁하되 시기하지 않게, 형제에 대해 말하되 적대적이지 않게, 그리고 전반적으로 진심으로 “선하고, 기쁘시며, 완전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롬 12:2)이어야 한다.

23. 곡식 창고에 열매를 거두어 넣는 것은, 주님께서 친히 “너희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행하였을 때, ‘우리는 쓸모없는 종들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말하라” (눅 17,10); 또한 사도께서도 이와 같이 가르치시며 말씀하시기를: “네가 가진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은 것이 무엇이냐? 만일 네가 받았다면, 무엇을 자랑하느냐? 마치 받지 않은 것처럼 말하느냐?” (고전 4,7).

24. 이것이 바로 우리의 수확이며, 우리의 수고입니다. 이 수고는 두세 달 동안만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생애의 마지막까지 이어지지만, 장차 올 세상과 비교하면 단 하루에 불과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끝이 없으며, 그곳에서 각자는 영원토록 자신의 수고의 열매로 양육을 받고, 이를 영원히 기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25. 오직 “땅에 속한 지체들, 곧 음행과 부정과 정욕과 악한 욕망과 탐욕을 죽일 것”(골 3:5)이며, 오직 겸손히 순종의 멍에를 지고, 서로 지지하며, “서로의 짐을 지어 주며,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율법을 성취하라”고 기록된 대로(갈 6,2) 행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일에 경건하게 머리를 숙이는 자는 복이 있으며, 가장 수고한 자는 복이 있다. 수고가 클수록 상도 크기 때문이다. 또한 마지막에 섬김을 자처하는 자는 첫 번째로 존경받을 것이니,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너희 중에서 맏이가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보다 더 작은 자가 되고,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려 하심이라” (마가복음 9:35; 10:44, 45). 형제들아, 이 점을 깊이 생각하고, 그렇게 행하도록 힘써서, “잘했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라. 네 주인의 기쁨에 들어가라” (마태복음 25, 21)라는 그 음성을 들을 자격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239. 수확. 모두 지칠 줄 모르고 수고합니다. 우리도 마땅히 그러해야 합니다. – 각자가 자신의 일에 힘써야 합니다

239. 1) 수확. 모두 지칠 줄 모르고 수고합니다. 우리도 마땅히 그러해야 합니다. 각자가 자신의 일에 힘써야 합니다. – 2) 그들은 연약함을 핑계로 삼을 수 있지만,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오직 ‘원하고 추구하라’는 것만이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 3) 선조들은 그렇게 행하였고, 이제 그 열매를 누리고 있습니다. [4, 17]

26. 보시다시피 수확의 계절이 되어, 모든 농부가 씨앗을 거두러 나섭니다. 고된 노동도, 뜨거운 태양도 일꾼을 지치게 하지 못하며, 그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몸을 굽혔다가 펴기를 반복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다 마칠 때까지 일합니다. –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의 종이라 자칭하며 수도자의 삶을 사는 자들도 마찬가지로 수확이 있는가? – 그렇다, 있다. –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며 지시하신 바로 그 수확이다. “너희는 ‘아직 네 달이 남았으니 수확이 올 것이다’라고 말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이미 추수할 때가 되었느니라. 추수하는 자는 삯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거두나니, 심는 자와 추수하는 자가 함께 기뻐하리라” (요한복음 4:35, 36). 이로부터 분명히 알 수 있듯이, 우리에게는 씨 뿌리는 일과 추수하는 일이 모두 있으며, 게다가 정해진 기간 동안만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우리 앞에 놓여 있고 영원히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형제들아, 부지런히 거두자. 곧, 가르치는 자는 가르침을, 돌보는 자는 모든 것을 돌보는 일을, 관리자는 재정을, 섬기는 자는 섬김을, 순종하는 자는 순종을, 침묵하는 자는 침묵을, 기도하는 자는 인내하며 기도에 머무르는 것을, 모든 이가 모든 일에서, 가진 힘을 다해 행하자. 육체적인 일을 하는 이들이 그 일에 그토록 부지런히 매진하는 데 비해, 우리가 영적인 일에 게으르고 소홀히 임하는 것은 도저히 어울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땀을 흘리며 수고에서 물러서지 않는 데 비해, 우리가 금욕적인 수행을 기피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 앞에 놓인 것이 하늘나라가 아니겠는가? 영생이 아니겠는가?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 아니겠는가? – 게다가 나태함에 빠져서 위대하고 갈망하는 것을 얻을 수 있겠는가? 결코 아니다. 그러니 나태와 게으름의 잠에서 깨어나, 온 힘을 다해 일에 매진해야 한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썩어 없어지고 금세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썩지 않고 영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야 우리에 대해서도 “네 손의 수고를 거두라, 네가 복이 있고 네게 복이 있으리라”(시 127:2)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7. 아무도 “나는 연약하니, 수확할 수 없다”고 말하지 말라. 육신이 연약한 자는 육체적인 수고를 감당할 수 없으나, 영적인 일에는 열망을 품으라. 그리하면 선한 일을 행할 힘이 생길 것이다. 네게는 눈물이 있고, 통회가 있으며, 정신의 절제가 있고, 평화와 거룩함이 있으니, 이 모든 것이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사랑받는 것이다(히브리서 12:14). 누구도 “나는 넘어져 부러졌으니, 일어설 수도 없고 바르게 걸을 수도 없다”고 말하지 말라. 그저 갈망하고 구하기만 하면, “가난한 자를 땅에서 일으키시고, 비천한 자를 진창에서 높이시는 분”(시 112:7)께서 너를 일으키실 것이다. “넘어진 자가 일어나지 않겠느냐? 돌아서지 않는 자가 회개하지 않겠느냐?”(예레미야 8:4). “내가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라,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죄인의 죽음을 원하지 아니하고, 오직 악인이 자기 길에서 돌이켜 살기를 원하노라”(에스겔 33:11). 그렇다면 우리가 약속된 복을 얻기 위해 계명을 실천하는 일에 온전한 열의를 다하지 않는다는 데, 과연 어떤 축복받은 핑계나 타당한 변명을 댈 수 있겠는가?

28. 보라, 성부들이 얼마나 수고하셨는지, 씨를 뿌리고, 추수하고, 곡식 창고에 모아 두셨으며, 이제 마지막 날의 도래를 기다리며 기뻐하고 계시니, 그날에 그들은 해처럼 빛날 것이다. 형제들아, 우리가 그 복된 이들과 단절되지 않도록 하고, 몇 가지 하찮고 일시적인 쾌락을 위해 우리의 구원을 팔아넘겨, 그 대가로 불멸의 고통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 오히려, 힘이 닿는 한 그들을 본받아 모든 것을 견디고 참아내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늘나라를 상속받도록 합시다.

 

240. 평신도들은 죽을 때 유언을 남기는데, 수도자들에게도 유언이 있다. 어떤 유언인가?

240. 1) 평신도들은 죽을 때 유언을 남기는데, 수도자들에게도 유언이 있다. 어떤 유언인가? – 우리가 이곳에서 나그네요 이방인이며, 이 세상의 것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2) 이 유언을 듣고 이를 실천하도록 하자, – 3) 모든 성인들이 그러했듯이 그분들을 본받아. [4, 18]

1. 수확철은 몸을 나태하게 하고, 깨어 있는 것을 힘들게 하며, 때로는 교훈을 듣는 일에도 게으르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의 가르침에 따라 매일 죽는 자들처럼 살아야 하므로, 죽어가는 사람은 대개 자신의 마지막 말, 즉 묘비명이나 유언을 남기며, 이를 통해 듣는 이들을 경청하게 만든다; 그러니 우리도 듣는 데 게으르지 말고, 마치 유언장 낭독 현장에 있는 것처럼 말해지는 바에 귀를 기울이자. – 육신적으로 사는 자들의 유언은, 육신적인 것이며, 육신적인 것, 즉 아내와 자녀, 형제, 친척들에게 어떤 유산을 남기는지와, 통상적으로 이루어지는 대로 어떤 처분이 더 이루어지는지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서 유언은 그런 내용을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말할까요? – 바로 우리가 이 땅에서 나그네이자 이방인이며,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니, 떠날 때도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음이 분명하다” (딤전 6:7), 썩어질 것에서 썩지 않을 것으로, 수치에서 영광으로, 죽을 것에서 죽지 않을 것으로 옮겨가고 있으니, 누군가 이러한 유언을 복음이라고 부른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사도도 “이 세상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낫다” (빌립보서 1, 23)라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또 다른 곳에서는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미 제물로 바쳐졌으며, 떠날 때가 다가왔습니다. 선한 싸움을 싸웠고, 경주를 마쳤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 의의 면류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으니,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그날에 그것을 내게 주실 것입니다. 이는 나뿐만 아니라 그분의 나타나심을 사랑하는 모든 이에게도 그러할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4, 6–8).

2. 보십시오, 그가 마치 복음을 전파하듯이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는 일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유언이 복음인 만큼, 그 안에 담긴 말씀과 그 힘으로 말미암아 기쁨으로 귀 기울이고, 세속적인 것, 부모, 형제, 친척이나 그 어떤 피조물에도 마음을 두지 말고, 어떤 성부 중 한 분을 본받읍시다. 그분은 수도실을 나설 때 태양의 빛을 보지 않기 위해 머리에 수건을 두르곤 했는데, 그 이유를 묻자 “내가 왜 이 일시적인 빛을 보고 싶어 하겠는가?”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모든 피조물의 경계를 벗어나, 오직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신성한 것들을 관조하는 데 전념한다. 그는 하늘 아래의 피조물을 바라보며, 지극히 높으신 예술가이신 하느님을 경탄하고 찬양하지만, 곧 모든 감각적인 것을 지나쳐 보이지 않는 것들을 관조하는 데 몰두하며, 그로부터 가장 황홀한 영적 기쁨과 즐거움을 얻습니다.

3. 아브라함 조상도 그러하셨으니, 기록된 바와 같이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약속의 땅에 이르러, 마치 나그네처럼 천막에 거하며, 그 약속의 상속자인 이삭과 야곱과 함께 살았으니, 이는 그가 건축자이시며 창조자이신 하나님께서 세우실 영원한 성읍을 기다렸기 때문이라” (히브리서 11:9, 10). 위대한 모세도 그러하였으니, 그는 “믿음으로 이집트를 떠났으니, 왕의 분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도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처럼 견디었음이라” (히브리서 11:27)고 기록되어 있다. 모든 성도들도 이와 같으니, 보이는 것을 바라보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며, 일시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고 영원한 것을 추구함으로써, 가능한 한 신성한 본을 따라 자신을 단련한 이들입니다. – 우리도 그러한 열망을 품고, 결코 이 세상의 화려한 것을 탐내거나 육신적으로 사는 자들을 부러워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그들이 약속된 복의 유산에 대한 복음을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금과 은을 모으는 일과 썩어 없어질 쾌락에 분주해하는 것을 보고 그들을 위해 금식하며 기도할 것입니다. 그러나 형제들아, 사도의 말을 빌리자면, “거울을 보듯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며”(고린도후서 3:18), 우리는 높은 것을 추구하며,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골로새서 3: 1:2), 그리하여 우리에 대해서도 “너희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니” (요한복음 15:19), “너희의 생명은 하늘에 있다”(빌립보서 3:20)라고 말해질 수 있도록, 그곳에서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의 보응의 날, 두려운 그리스도의 보좌 앞에서 정죄받지 않고 서게 되며, 천국 유업을 향한 소망의 부르심을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241. 인내 – 가장 위대한 미덕이며, 그것은 성인들의 길이다. 우리도 그 안에서 번창하자

241. 1) 인내는 가장 위대한 미덕이며, 성인들의 길이다. 우리도 그 안에서 번창하자. – 2) 번창하고 싶으냐? – 네 의지를 잘라내라. – 그러면 모든 것을 쉽게 견뎌낼 것이며, 또한 – 인내에 있어 부러움을 사도록 하라; 왜냐하면 더 많이 참을수록, 더 훌륭하고 더 높은 사람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 3) 그는, 비록 그들이 유배 중이지만 수도원 생활처럼 살고 있으며, 그들과 함께 하고자 하는 이들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알리며, – 덧붙여 말한다: 연장자들과 가장 높은 자들은 모든 일에서 후배들에게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 [4, 19]

4. 우리는 보상을 바라며, 하나님을 위하여 모든 어려움과 슬픔을 기쁘게 견뎌내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니”라고 사도가 말하듯이: “누가 보는 것을 소망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소망하며, 인내로 기다린다” (롬 8, 24. 25). 이처럼 인내는 모든 미덕 중에서 가장 위대한 미덕입니다. 순교자들은 인내로 인해 하늘의 면류관을 받았으며, 성자들은 인내로 의의 면류관을 얻었습니다. 우리도 순종과 겸손, 분노하지 않음, 봉사를 실천하는 일, 인내의 수고가 필요한 모든 일에서 인내를 나타내자. 그러면 그들과 동등한 상을 받게 될 것이다.

5. 나는 순종의 멍에를 알고, 의지를 잘라내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안다. 그러나 동시에 그러한 삶의 달콤함도 알고 있다. 왜냐하면 자신의 의지가 잘려나갈 때, 그 길은 쉬워지고 구원은 수월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의지를 잘라내기만 하면, 그와 함께 평온하고 복된 삶이 나타날 것이다. 공동 생활에는 수고가 따르지만, 위로도 있습니다. 형제보다 더 수고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 그러나 그에게는 더 큰 보상이 있을 것입니다. “각 사람은 자기의 수고를 따라 자기의 상을 받을 것이라”고 사도가 말합니다(고린도전서 3:8). 사랑으로 다른 이에게 복종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그러나 그도 때가 되면 으뜸으로 존경받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너희 중에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태복음 20:27). 너무 무거운 일을 감당할 힘이 없는 사람이 있는가? 그 사람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 모든 일에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고, 형제애에 유익한 어떤 일에도 부적합한 사람이 없도록 하라. 이 말은 비록 자주 언급되었지만, 지금도 필요 없이 상기시키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놓인 과업이 결코 작지 않기 때문이다. “보라, 내가 네 앞에 생명과 죽음을 두었노라”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신명기 30:19). 우리가 생명을 붙잡고 영원한 죽음을 피하기 위함, 바로 이를 위해 우리의 말씀과 위로, 우리의 가르침과 권면이 있다. 그리고 나는 이 말이 나 같은 겸손한 자에게도, 듣는 여러분에게도 결코 헛되지 않음을 알고 확신한다.

6. 또한 여러분이 이 사실을 모르시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 유배 생활을 하고 있지만, 마치 수도원에 있는 것처럼 살고 있습니다. 세상을 등지고자 하는 열망을 품고 찾아오는 이들을 우리는 돌려보내지 않습니다. 우리는 곳곳에 흩어져 있는 우리 형제들을 통해 이를 실천하고 있는데, 그들에게는 가능한 한 그러한 이들을 받아들이고 형제단에 포함시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사실, 많은 이들이 우리를 떠났지만, 많은 이들이 우리에게 합류하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형제단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며, 약속하신 대로 그분 안에서 우리도 영광을 받으리라. 그러나 지도자가 어떤지 따라 부하들도 그러하듯이, 다른 이들에게 본보기가 되어야 할 지도자 여러분, 경건하고 의로우며 경건하게 살아가서, 우리 자신의 삶으로 다른 이들을 말과 행실 모두에서 의로움으로 인도합시다. 그러므로 우리 가운데는 부적절한 고함도, 다툼을 일으키는 말도 없어야 합니다. 또한 “부패한 말이 너희 입에서 나오지 않게 하고 오직 믿음을 세우는 데 유익한 말만 하라” (엡 4,29), 그리하여 그들로 말미암아 너희의 행실이 더럽혀지지 않게 하고, 모든 일에서 우리 주님이시며 선하신 하나님께 기쁨을 드려, 약속된 복을 받을 자격을 얻게 하소서.

 

242. 변모는 미래 세상의 모습이다... 우리는 처음에 창조되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러한 광채와 아름다움을 향해 예정되어 있다

242. 1) 변모는 미래 세상의 형상이다. 우리는 처음에 창조되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러한 광채와 아름다움을 향해 예정되어 있다. – 2) 그러하므로, 우리는 이 광채와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모든 추하고, 정욕적이며, 부정한 것들로부터 멀어지자. – 3)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서둘러 정화되도록 하자; – 그리고 누구도 ‘할 수 없다’고 말하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이를 구하는 자들을 위해 이루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우리는 수많은 본보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4) 그러므로, 만약 누군가 이것과 동떨어져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자의적인 무관심과 부주의 때문일 뿐이다. [4, 20]

7. 이제 신성한 변모 대축일을 앞두고, 우리는 이를 기념하며 교훈을 마련하였으니, 긴 말을 늘어놓지 않고 우리의 의무를 다하고자 한다. 주님의 모든 축일은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관한 신비를 상기시켜 주는데, 즉 그분이 태어나시고, 세례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장사되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영광 중에 승천하신 사실을 말합니다. 반면 변모 축일은 미래 세상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냅니다. 왜냐하면 변모 때 주님의 얼굴이 해처럼 빛나시고, 그분의 옷이 빛처럼 하얗게 변했던 것처럼, 그분께서는 하늘에서 번개처럼 다시 오셔서 큰 능력과 영광으로 모든 이를 심판하실 것이며, 산 위에서 그분과 함께 있었던 성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그분과 함께 있었던 것처럼, 그때에도 하늘나라에서 선택받은 자들이 그분과 함께하여 말로 다 할 수 없는 하나님의 현현과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 그 위대함에 누가 만족할 수 있겠는가? 누가 그 기쁨에 참여할 자격이 있겠는가? 깨끗하고 흠 없는 삶을 살지 않는 자 외에는 누가 있겠는가. 우리 하나님께서는 가장 밝은 빛처럼 깨끗하시므로, 오직 깨끗한 자들만을 당신께 받아들이시며, 우리 안에 깨끗한 영혼을 심어 주셨으니, 우리에게서도 깨끗한 영혼을 요구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 영혼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되었다면, 신적 근원의 아름다움을 반영하는 존재로서 그 아름다움에 참여하고 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를 알고 있는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주여, 주의 뜻대로 내 선함에 힘을 주소서”(시 29:8), 즉 영혼의 아름다움에 힘을 주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그렇지 않으면 추악한 죄의 정욕에 기울어져 추악해져도, 영혼이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나가지 않고 신성한 상을 잃지 않게 될 것입니다.

8. 이처럼 우리는 아름답고 선한 영혼을 가지고 있음을 고백하며, 마지막 부활의 날에 그 영혼을 보증과 같이 하나님께 바쳐야 할 것이므로; 그러므로 간청하고 기도하노니, 이 영혼의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그 선함을 지키며, 이 세상의 아름다움이나 육체와 피의 선함에 주의와 마음을 두지 맙시다. 이는 진정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아름다움의 우상일 뿐이며, 차라리 썩어 없어질 것과 흙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눈앞에서 목격하는 바와 같습니다. 지금 가장 훌륭하고 아름다운 이도 내일이면 관에 누워 악취를 풍기며 모든 이를 스스로에게서 멀어지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우리가 무엇보다도 추구해야 할 그 한 가지 경이로운 미덕 외에는 훌륭하고 사랑스러운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9. 만일, 고백하건대 자주 일어나는 일처럼, 굳건하지 못한 영혼이 불경한 생각으로 더럽혀진다면—“누가 자기 마음이 깨끗하다고 자랑하겠는가?” (잠언 20:9), – 그렇다면 서둘러 그 마음을 정화하고 예전의 선한 상태로 되돌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악에 머무르다 죽음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리고 누구도 “많은 죄로 인해 무거워져서 정화될 수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되며,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들어야 한다: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처럼 희게 하리라. 붉은 색 같을지라도 물결처럼 희게 하리라” (이사야 1:18). 회개하는 자를 깨끗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고상한 아름다움의 경지로 높이 올려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보이십니까? – 이에 대한 예들이 우리 눈앞에 있습니다. 다윗은 선지자였으나 음행과 살인의 죄에 빠졌으나, 절망하지 않고 곧바로 회개하여 다시 선지자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 마나세 왕은 55년 동안 이스라엘을 참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했으나, 회개하여 구원을 얻었습니다. 사도들 중 으뜸이신 분은 주님을 배반한 후, 눈물의 치유를 통해 다시 사도직의 짐을 짊어지셨습니다. 이집트의 마리아는 – 다른 셀 수 없이 많은 사례들은 생략하겠지만 – 음탕함의 최악의 지경에 이르렀으나, 마땅히 회개했기에 그 후 덕행의 정점에 올랐습니다.

10. 그러므로 진심으로 구원을 갈망하고 열정을 가지고 이 일에 착수하려는 사람이라면, 무력함이나 불가능함을 핑계로 삼을 여지가 전혀 없다. 오직 완전히 무감각하여 고의로 자신을 죽음의 손에 내맡기는 자에게만 이것이 불가능할 뿐이다. – 왜 “이스라엘 집아, 너희는 모두 죽으리라, 주께서 말씀하시니라”(에스겔 18:31)라는 말씀을 듣게 되는가? 우리 앞에 불멸의 생명이 놓여 있는데, 도대체 왜 우리는 영원한 죽음을 선택하는 것입니까? 우리의 선하신 주님께서는 매일같이 외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8). 그러나 우리는 우리 죄의 짐을 벗어던지려 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외치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 속을 걷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가질 것이라” (요한복음 8:12). 그러나 우리는 정반대 방향으로 돌아서며, 행동으로 모독하는 말을 내뱉습니다. “우리에게서 물러가라; 주의 길을 보고 싶지 않다” (욥기 21:14). – 그 후 우리에게 남은 것은 정죄와 배척의 선고를 듣는 것뿐이다: “너희는 너희 불의 빛과 너희가 지핀 불꽃 가운데서 걸으라” (이사야 50:11). 그러나 사도가 말한 대로 “이런 일을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하리라”(갈 5:21)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 –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 대해서도 정당하게 말해질 수 있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 “너희가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행하면, 너희는 내 친구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요한복음 15:14). 그러니 우리가 명받은 모든 것을 행하여, 주님의 친구가 되고 천국을 상속받을 자격을 얻도록 합시다.

 

243. 시나드 대주교인 복자 미하일이 주님 곁으로 돌아가셨으니, 그를 기리며 추모합시다. 그는 여전히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243. 1) 시나드 대주교인 복자 미하일이 주님 곁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의 기념일을 기리자. 그는 지금도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 2) 또한 그의 서거에서 교훈을 얻자. 곧 언제나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수많은 사례에서 보듯이, 죽음은 갑자기 닥칠 수 있기 때문이다. – 3) 누구도 “할 수 없다”고 말하지 말라. 이는 우리 뜻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4, 21]

11. 우리의 영적 아버지이신 시나드 대주교 미하일 성하께서 주님께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의 생애는 칭송받을 만했고, 말씀은 강력했습니다. 우리는 다가올 심판의 날에, 다른 성부들과 고백자들과 함께 그분께서도 주님 앞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해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악명 높은 성상파괴론자들이 스스로를 높이면서, 그리스도의 고백자들이 (성 미하일의 죽음으로 인해) 슬퍼한다고 말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오히려 그러한 분들의 별세가 하나님의 교회에게는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요새이며, 우리 남은 자들에게는 진리의 확증이고, 그들의 어두운 미혹에 대한 조롱임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12. 그러나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사랑으로 함께 하는 믿음”(갈 5,6)이므로, 지금도 언제나 그랬듯이 하나님의 계명을 충실히 이행하며, 죽음의 시간이 언제 올지 알 수 없으므로 언제나 떠날 준비가 되어 있기를 여러분께 부탁드립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앞서 언급된 우리 아버지도 갑작스레 심한 통증과 타는 듯한 열병에 시달리시다가, 다음 날에는 말을 잃으셨고, 사흘째 되는 날 주님께 영혼을 바치셨습니다. 그보다 앞서 유명한 파블로-페트르스키 수도원장 아파나시우스도 병상에 하루도 누워 있지 못하고, 거의 즉시 사람들 가운데서 데려가심을 받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번개에 맞고 죽는다고 들었고, 다른 이들은 바다에서 익사한다고 한다. 요컨대, 예기치 못한 사고들이 많기에, 우리는 스스로를 경계하고 두려워해야 한다. 마치 마귀가 날마다 죽음에 대한 망각을 심어주며 우리를 속이다가, 갑자기 극도의 당혹감 속에서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게 하여, 우리가 회개의 일을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 방금 든 예들이 우리를 두렵게 하지 않는가? 그 순간 혀가 묶여 소리조차 낼 수 없다는 사실과, 육체에서 분리된 영혼이 어떻게 떠나게 될지를 생각할 때, 우리 마음이 떨리지 않는가? 그 자리에는 많은 이들이 울고 있을지 모르나, 선한 양심 외에는 도와줄 이가 아무도 없을 텐데 말이다. 그러므로 간청하고 간절히 부탁하건대, 우리가 항상 고백과 눈물, 기도와 순종, 겸손과 더욱 힘쓴 순종, 그리고 모든 선한 행실 속에 머물도록 힘쓰자. 그래야 마지막 순간에 게으름과 안일함 속에서 그 순간을 맞이하더라도, 우리가 영원한 “죽음의 잠”에 빠지지 않도록 합시다. 성 다윗은 바로 그 죽음에서 구원받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시 12:4).

13. 그러나 어쩌면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원하기는 원하지만, 할 수는 없다.” – 무슨 말입니까? – 만약 그것이 자연의 질서를 벗어난 일에 관한 것이라면, 저도 동의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공중을 날거나 바다 위를 걸을 수는 없고, 코로 말하거나 혀로 냄새를 맡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불가능하며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자연스럽고 의지에 달려 있는 일에 관한 것이라면, 그런 말은 거짓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산만하게 행동하며 웃을 수 있는 것처럼, 단정하게 행동하며 눈물을 흘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죄악된 욕망과 부적절한 생각들로 스스로를 더럽힐 수 있는 것처럼, 정결하고 정욕으로부터 깨끗하게 지킬 수도 있다. 또한 우리가 악에 대해 완고해지고 고집을 부릴 수 있는 것처럼, 감동받아 회개할 수도 있다. 악한 정욕이 우리 안에서 습관이 되어 선을 행할 힘은 잃게 하고 악을 행할 힘은 강하게 만들었더라도; 그러나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결코 그러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기꺼이 일에 매진하여, 하루는 물론 한 시간도 방심하지 않고, 항상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며, 흠 없고 깨끗하며, 하나님께 굳게 붙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의지하나이다. 주의 오른손이 나를 기쁘게 하나이다”(시 62:9); 그리고 이처럼 이 땅에서의 삶을 선하게 마치고, 선한 소망을 품고 이곳을 떠나, 저기서 천국을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244. 1) 칼키돈의 성 요한 성인의 장례식에서 돌아온 후, 형제들이 평소와 같이 질서 정연하고 선한 모습을 보이고 있음을 칭찬하며, 그들이 항상 그러하기를 바란다. – 2) 그 후, 그가 들은 어떤 말들의 무분별함을 질책한다. 첫 번째 소문: 성인은 신앙과 삶 모두에서 거룩한 분이었는데, 어떻게 그런 식으로 죽을 수 있느냐? (설사병으로). 두 번째 소문은, 마치 우리가 부활 후에 서로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는 것: 이 육신은 썩어 없어지고 어디로 흩어지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 3) 마지막에는 권면이 덧붙여져 있다: 믿음을 지키라. 보라, 얼마나 많은 일탈이 일어나는지, – 또한 거룩하게 살라. 너희도 아시다시피, 원수가 우리에게 어떤 바람을, 얼마나 많은 바람을 불어대는지. [4, 22]

14. 지난 며칠 동안 잠시 여러분 곁을 떠났다가 이제 다시 돌아와 보니, 여러분이 서로 화목하게 지내며 좋은 기분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 여러분의 질서 정연한 모습에 대해 주님께 감사드렸습니다. – 이는 능숙하고 선함 안에서 굳건해진 수도자들에게 마땅한 바이며, 그 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더욱더 굳건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제가 겸손하게 함께 있을 때나 자리를 비웠을 때나, 여러분이 언제나 건전하고 흠 없이 보존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제가 이곳을 떠나게 된 이유는 복된 칼키돈 대주교 요한의 죽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선한 수행을 통해 생을 마감하고, 신앙을 지키며 주님께로 떠나, 앞서 가신 성스러운 교부들과 우리 형제들과 함께 신앙 고백의 면류관을 받았습니다.

15. 그러나 그가 극심한 설사로 세상을 떠났기에, 어떤 이들은 이를 보고 놀라 말하길, “그가 선한 사람이라면, 어찌 그렇게 불행하게 생을 마감할 수 있느냐?”라고 합니다. – 그런 이들은 무지에서 비롯된 오해로 고통받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한 죽음인지 나쁜 죽음인지는 누군가가 어떻게 죽었는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정통 신앙을 지키고 흠잡을 데 없는 삶을 살았는지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인은 바로 그런 분이셨다. 물병으로 죽든, 설사로 죽든, 혹은 다른 치명적인 병으로 죽든 – 육지에서든 바다에서든, 이는 결코 비난받을 일이 아닙니다. 이는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밀한 섭리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 무엇이 더 유익한지 아시며, 생명의 연장이든 죽음의 도래든 그에 따라 정하십니다. 다른 이들은 듣는 자들을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또 다른 주장을 펼치는데, 바로 마지막 날, 하나님의 아들이 모든 이를 심판하러 오실 때 우리는 서로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말하길, 우리가 지금과 같이 썩어질 존재에서 썩지 않고 불멸하는 존재가 될 때, 그리고 헬라인, 유대인, 야만인, 스키타이인, 종, 자유인, 남자와 여자의 구분이 없어지고 모두가 천사와 같은 모습이 될 때, 어떻게 서로를 알아볼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 그러나 나는 우리가 서로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라고 단언하며, 우선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하나님께는 가능하다”(눅 18:27)는 말씀을 상기하십시오. 우리는 부활 그 자체를 고백할 때에도 인간의 추론에 근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추론으로는, 썩어 없어지고 사방으로 흩어졌으며, 짐승에게 먹히거나 새에게 쪼아 먹히거나 물고기에게 삼켜진 육체가 마지막 날에 어떻게 하나로 모여 부활할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각 육체는 하나로 모아져 부활할 것이며, 모든 영혼은 땅에서 함께 살았던 자신의 육체를 알아볼 것이다. 만약 자신의 육체를 알아본다면, 형제의 육체도 알아볼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게다가, 이러한 추론은 장차 올 심판을 부정하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심판은 알려진 자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자신을 알지 못하고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을 재판에 세우지 않으며, 오직 알려진 자들만을 심판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내가 너를 책망하고 네 죄를 네 눈앞에 드러내리라”(시 49:21)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서로를 알지 못한다면 심판받지도 않을 것이며, 심판받지 않는다면 우리 행위에 대한 마땅한 보상을 받지도 못할 것이다. 게다가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신 “너희는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마태복음 19:28)는 말씀이, 그들이 심판할 대상들을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이루어지겠습니까? 이처럼 모든 면에서 그러한 가정이 얼마나 부적절한지, 그리고 불경스러움과 오리겐의 허황된 주장과 다름없음이 입증됩니다. 그러나 우리 형제들아, 우리는 부활할 것이며, 지금과 같이 썩어 없어질 육신의 모습이 아니라, 썩지 않는 아름다움 속에서,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마치 에덴 동산에서 우리 조상들이 죄를 짓기 전 썩지 않는 몸으로 서로를 알았듯이, 죄를 짓고 썩게 된 후에도 여전히 서로를 알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왜 우리가 미래의 세상에서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녀를, 아내가 남편을, 서로를 알아볼 것이라고 믿어야 하는지—여기에 더 덧붙이자면, – 수행자는 수행자를, 고해 신부는 고해 신부를, 순교자는 동지인 순교자를, 사도는 동료 사도를 – 모두가 서로를 알아볼 것이며, 모든 이를 기쁘게 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다른 모든 은혜와 더불어 서로를 알아보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16. 그러니 여러분, 우리가 거룩한 믿음을 굳건히 지키도록 합시다. 여러분도 보시다시피, 그 믿음에서 벗어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우리가 어떤 오류에도 빠지지 않고 정통 신앙을 얻어 지키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해야 하는지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도 흠 없이 살아갑시다. 마귀가 밤낮으로 어떤 바람을 불어대는지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항상 보호받고 있음을 알기에, 마귀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 아직도 주저하겠습니까? 그러면 이 용은 우리에게서 도망칠 것입니다. 울며 타오르는 정욕의 화살을 꺼버립시다. 하나님의 굳건한 손 아래 겸손히 엎드리면, 그분께서 우리를 높이실 것입니다. – 완전한 인내 속에 머물면, 마귀는 사라지고 우리는 구원받은 자로서 천국에 들어갈 것입니다.

 

244. 칼키돈의 성 요한 성인의 장례식에서 돌아온 후, 형제들이 평소와 같이 질서 정연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고 칭찬하며, 그들이 항상 그러하기를 바란다
 
245. 평소의 축제는 영적인 축제이기도 하며, 평소의 장사도 영적인 장사이다

245. 1) 축제는 평범하면서도 영적이며, 장사도 평범하면서도 영적이다. – 2) 우리도 상인이다. 우리에게 진주는 미덕이며, 귀중한 구슬은 주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니 우리 각자가 현명한 상인이 되기를 바란다. – 3) 우리의 장터는 순종이며, 이는 곧 진주이자, 구매이자, 대가이다. [4, 23]

17. 저곳과 이곳에서는 때때로 축제가 열리는데, 지금 니코미디아에서와 같다. 이 축제에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사고팔기를 한다. 그러나 이는 오래가지 않는다. 곧 모두 흩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혼의 축제는 오직 하나뿐이며 끊임없이 이어지며, 각자의 일생 전체에 걸쳐 펼쳐지는 것으로, 그곳에서 매매의 대상은 금도, 은도, 옷도, 그 밖의 덧없고 썩어 없어질 물건들도 아니라, 영혼의 구원, 영생, 천국, 이 모든 것에 대해 사람들은 온 힘을 다해 신경 써야 마땅하지만, 정작 이를 염려하는 이는 적고, 오히려 모든 관심과 노력을 헛되고 덧없는 것들에 쏟고 있다.

18. 그러나 우리 형제들아, 우리는 우리의 주된 목표와 선한 거래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겠으며, 주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눅 17:21)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매일 온 마음을 다해 그분을 얻기 위해 힘쓸 것이며, 금이나 은을 보물로 삼지 않고, 바른 믿음과 흠 없는 삶, 순종, 인내, 겸손, 너그러움, 그리고 “완전함의 결속인 사랑” (골 3,14). 주님께서도 복음서에서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 그는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고는 가진 모든 것을 팔아 그것을 샀다” (마 13, 45, 46). 여러분은 모든 것을 버리고, 그 모든 것을 대신하여 선하고, 지극히 선하며, 지극히 귀한 진주, 곧 그리스도를 사신 훌륭한 상인들입니다. 여러분이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라 경건과 진리 안에서 걸어가기로 결심했을 때 말입니다. – 그러나 축제는 기쁨과 잠들지 않는 깨어 있음의 시간이니, 우리도 이 땅의 축제에서 우리의 구원을 얻으며 기쁨과 활기를 되찾읍시다. 모든 일에 경건한 주의로 임하며 결코 화를 내지 않는 상인은 선한 자요, 모욕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구매자는 선한 자요, 피를 바치고 성령을 받는 환전상은 선한 자니, 이는 그가 인내로 순종을 이행하기 때문이다.

19. 그러나 우리의 말이 순종에 대해 언급했으니, 부엌에서 각자의 순번을 수행하는 이들을 더 수고하는 자로서, 서로의 짐을 지며 사랑으로 그리스도의 율법을 이행하는 자들로 존중합시다. 또한 형제들의 필수적인 필요를 챙기는 이들을 주님을 섬기는 선하고 노련한 청지기들로 존중합시다. 시편 찬양 때 기꺼이 경건하게 노래하는 이들도 더 큰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 자들로서 존중합시다. 그리고 보라, 우리의 삶이 어떠한지, 행함이 어떠한지, 우리 성스러운 선조들이 온전한 열정으로 이루어낸 그 복된 수확이 어떠한지, 우리도 이를 잘 수행하고 성공적으로 마친 뒤, 성 다윗이 말한 대로 기쁨으로 집으로 돌아갈 것이니: “내 영혼아, 주께서 네게 은혜를 베푸셨으니, 네 안식으로 돌아가라”(시 114,7). 그리고 우리 모두가 죽음을 맞이할 때, 마지막 기도로서 그러한 목소리를 내며, 그로 인해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생을 얻게 하소서.

 

246.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독생자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의 모든 영적·육체적 병을 고치시고 모든 복을 주시는 분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분은 땅에 계셨을 때에도 그러하셨고, 지금도 그러하시니, 이는 누구나 스스로 알고 있는 바와 같습니다.

246. 1) 하나님께서는 독생자이신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의 모든 영적·육체적 병을 고치시는 분이자 모든 은혜를 베푸시는 분으로 삼으셨으니, 그분이 땅에 계셨을 때 행하셨던 일을 지금도 행하고 계시며, 이는 누구나 스스로 알고 있는 바와 같다. – 2) 이토록 큰 은인을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반면, 우리를 해치고 파멸시키는 원수를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4, 24]

20. 새로운 여름이 시작되었는데, 이날 복음서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영이 내게 임하셨으니, 주님께서 나를 기름 부으사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마음이 상한 자들을 고치게 하시며, 포로 된 자들에게 해방을, 눈먼 자들에게 시력을 회복시켜 주시며, 상한 마음을 가진 자들을 위로하고,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눅 4,18-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아버지께로부터 치유자로서 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으셨으니, 우리도 그분께 눈먼 자처럼 눈의 깨달음을, 포로처럼 해방을, 마음이 상한 자처럼 위로를 구합시다. – 그러나 누가 눈먼 자인가? 누가 편견으로 인해 눈이 멀어지는가? 누가 포로인가? 누가 부적절한 생각에 이끌려 가는가? 누가 상한 자인가? 누가 죄의 짐을 지고 있는가? – 주님께서는 이러한 모든 이를 치유하십니다. 그분은 육신의 의사일 뿐만 아니라 영혼의 의사이시며, 과거에 육신으로 살아계셨을 때뿐만 아니라 지금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모든 이와 함께 계시며, 복음을 전파하시고 세상의 죄를 짊어지시며, 모든 병과 모든 고통을 치유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치유받지 못한 채 남아 있지 말라. 그러나 믿음으로 나아와 “주님께로부터 축복을 받고, 구주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자비를 받으리라”(시 23:5) 하라. 오, 형언할 수 없는 인간 사랑이여! 그분은 우리를 무에서 존재로 이끌어 내시고, 타락한 우리를 다시 일으키셨으며, 세 번째로 우리에게 은총, 즉 수도자의 완전함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전히 죄를 짓더라도, 그분은 외면하지 않으시고 다가오는 자들을 받아들이십니다. 우리가 상심할 때 위로를 주시고, 울 때 위로해 주시며, 상처 입었을 때 기름을 바르시고, 기진맥진할 때 힘을 주십니다. 상처를 입었을 때 치유해 주시며, 우리가 지옥의 가장 깊은 곳으로 떨어질 준비가 되었을 때, 손을 뻗어 자비롭게 그러한 고통에서 건져내십니다. 그러므로 정의에 따라 누구나 이렇게 말할 만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도우시지 않으셨더라면, 내 영혼은 곧 지옥에 들어갔으리라”(시 93, 17). “내가 버림받은 자처럼 되었으나, 주님께서 나를 받아 주셨도다”(시 117, 13). 그리고 누구나 자신이 어떤 유혹에 빠졌는지, 그리고 슬픔 속에서 어떻게 즉시 하나님을 자신의 도우미로 삼았는지를 알고 있다. 게다가, 주님께서는 굶주린 우리를 매년 풍성한 열매로 육체적으로, 지극히 순결한 성사로 영적으로 양육하시며, 어머니와 젖어머니보다 더 우리를 사랑으로 품어 주시고 아껴 주십니다. 어머니는 때가 될 때까지 젖으로 자녀를 기르시지만, 우리의 참된 주님이시며 아버지이신 분께서는 당신 자신의 몸을 우리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으로 주시니, 이는 언제나 오, 헤아릴 수 없는 은혜로움이시여! 오,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선물이시여!

21. 이토록 위대한 은인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 갈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어떻게 그분께 떼어낼 수 없을 만큼 굳게 매달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진실로, 우리가 그분께 그런 마음을 품지 않는다면, 하늘이 우리를 향해 울부짖고 땅이 신음할 것이며, 돌들조차 우리의 무감각함을 고발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는 그분을 사랑하는 데 굳게 매달리며, 마귀를 지극히 미워하고 그에게서 등을 돌리자. 왜냐하면 은인을 그분의 은혜에 비례하여 사랑하고 갈망해야 하듯이, 악행에 비례하여 사악한 자를 미워하고 그에게서 등을 돌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 생명의 파멸자이며, 주님의 말씀(요한복음 8:44)에 따르면 “태초부터 사람을 죽이는 자”입니다. 그는 수많은 이단으로 우리 민족을 분열시켰고, 그들의 교묘한 계략으로 수많은 죄의 화살로 우리를 찔러 상처를 입히며, 우리를 완전히 삼켜버리려 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대로 우리를 괴롭힐 고통은 없을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우리 영혼을 죽이는 원수에게 굴복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형제들아, 그에게서 도망치자, 온 힘을 다해 도망치자. 이 도피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악한 행실과 생각에서 절제하는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께 굳게 매달리고, 선한 일에 자신을 바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온전한 겸손과 온유함, 그리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며 선을 추구합니다. 모든 선은 겸손으로 둘러싸이지 않으면 미성숙하고 견고하지 못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말입니다. 만약 스스로를 교만하게 여기는 이들이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굳건한 손 아래서 겸손해져야 하며, 헛되이 흘러가지 말고, 하늘나라의 유업을 받을 자격을 얻도록 합시다.

 

247. 지금은 포도 수확의 때입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우리도 포도이기 때문입니다.

247. 1) 지금은 포도 수확의 때입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우리도 포도이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의 포도송이처럼, 온전히 주님께 헌신하며 미덕의 송이를 맺어야 합니다. – 2) 뒤로 물러서지도 말고, 두 갈래 길을 걷지도 맙시다. – 3) 원수가 유혹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싸움을 시작하여 그를 물리칠 것입니다. [4, 25]

22. 이제 우리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대해 잠시 언급해 보겠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포도 수확의 때가 왔습니다. 우리는 포도송이로 무거운 가지가 있는 곳에는 기쁨과 축복이 있고, 포도송이가 적은 곳에는 슬픔과 비탄이 있음을 봅니다. –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나요?”라고 듣는 이들 중 누군가가 말할지도 모릅니다. – 매우 큰 관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비유적으로 우리도 주님의 포도원이라 불리기 때문입니다. 수도 서원을 할 때 어떤 찬송을 부르는지 모르십니까? 그리고 우리 모두가 그 찬송을 따라 부르지 않습니까? – “주여, 주여! 하늘에서 내려다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보시고 돌보소서. 주님의 오른손이 심으신 이 포도나무를” (시 79, 15. 16). 그리고 주님께서 복음서에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안에 있는 자는 많은 열매를 맺으리니, 나 없이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15, 5). 그러니 우리 주님 안에서, 그분께 심겨진 포도나무와 같이 되어, 그분께 미덕의 포도송이를 바치고, 그분으로부터 축복을 받을 자격을 얻도록 합시다. 그리고 우리에게 정욕이라는 가시와 엉겅퀴를 가져다주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하여,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모든 나무는 찍혀 불에 던져질 것이라” (누가복음 3:9)는 그러한 정죄의 판결을 받지 않게 하소서. 우리에게 있어 이는 죽음을 통해 “베어지고”, “불에 던져진다”는 것은, 물론 영원한 불을 의미하며, 그곳에는 악한 일을 행하고, 신앙 고백에서 물러나며, 자신의 몸을 악덕으로 썩게 하는 모든 자들이 던져질 것입니다. “물 없는 구름, 바람에 휩쓸리는 것들: 가을 나무, 열매가 없고, 두 번 죽은, 뿌리 뽑힌 나무: 거친 바다의 파도, 자신의 수치를 휘몰아치는 것: 아름다운 별들, 그들에게는 어둠의 흑암이 영원히 지켜지고 있는 자들” (유다서 12, 13절). 왜 사도 바울은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모든 죄는 몸 밖에서 일어나나,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 안에서 죄를 짓느니라. 혹시 모르시겠습니까? 너희 몸은 너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성전이며,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니,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너희는 값으로 사신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6:18–20).

23. 그리스도의 귀한 피로 사신 우리가, 어찌 하늘과 땅 앞에서 부끄러워하지 않고 다시 뒤로 물러설 수 있겠는가? 겉으로는 거룩한 척하면서 속으로는 온갖 더러움으로 가득 차 있는데, 어찌 우리 자신 앞에서 얼굴이 붉어지지 않겠는가? 언제까지 양쪽 발을 절뚝거리며 걸을 것인가? 언제쯤 비로소 한 길에 굳게 설 수 있겠는가? 지혜로운 이가 말하기를, “두 길을 걷는 죄인은 화가 있을지어다”(시라 2, 12)라고 하였으니, 여기서 ‘두 길’이란 죄와 덕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이 둘은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때로는 주인을 섬기고, 때로는 그 적을 섬기는 집안 사람을 현명하다고 할 수 없다. 우리는 온전히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바쳐야 한다. 오직 그런 방식으로만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삶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왜 말 없는 짐승들처럼 감각적인 것에 머물러 있지 말고, 영혼의 힘으로 하늘의 경지에 이르러, 감각을 썩어 없어질 것에서 썩지 않을 것으로, 금세 사라질 것에서 영원히 남을 것으로 돌리지 않겠는가.

24. 또한 우리의 마음을 교묘하게 얽어매는 악이 악한 생각의 독으로 우리 마음을 타락시키도록 내버려 두지 말자. 그가 정욕의 달콤함이나 그 밖의 어떤 악을 뿌리는 즉시, 우리는 서둘러 그 교활한 아첨꾼을 우리 곁에서 밀어내야 한다. 어떻게? 기도와 간구, 눈물과 탄식, 그리고 마음의 통회로 말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보이지 않는 싸움이며, 드러나지 않는 투쟁이자 위업이다. 그러니 육신의 전사들을 본받아, 불타는 열정으로 우리의 보이지 않는 적들을 물리치자. 그들이 보상을 바라며 상처를 입어도 물러서지 않는 것처럼, 우리도 비록 셀 수 없이 많은 상처로 뒤덮인다 해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하나님의 도움으로 굳건히 서서 계속 싸우고 또 싸울 것이다. 이 점에 대해 여러분께 간청합니다. 바로 이를 위해 제가 여러분에게 간결한 권면을 전하며 수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또한 선한 길을 걷는 이들을 기뻐하며, 미끄러지는 자들을 위해 탄식합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바른 길을 걷고, 선을 행하며, 겸손히 인내하며, 시편 찬양과 기도, 예배, 순종, 겸손 속에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평화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실 것입니다.

 

248. 성화의 은사를 받았으니, 이를 지키며 무엇보다도 육신의 정욕을 피합시다. 이는 은혜의 상태에 반하며, 노예의 상태로 전락시키고, 두려움으로 가득 채우기 때문입니다.

248. 성화의 은사를 받았으니, 이를 지키며 무엇보다도 육신의 정욕을 피합시다. 이는 그것이 은혜의 상태에 반하며, 노예 상태로 전락시키고, 두려움으로 가득 채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죽이는 것은 이와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옵니다. [4, 26]

25. 주님의 어떤 축일이 오면 우리는 기쁨으로 기뻐한다. 이는 옳은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를 통해 그 축일이 제정된 성사의 관상에 들어가 깨달음을 얻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 존귀하고 생명을 주는 십자가의 승천일에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이 닿았던 나무,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채 생명을 주는 피를 흘리셨던 바로 그 나무를, 우리가 단지 보는 것뿐만 아니라 입맞추고 껴안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큰 기쁨이며,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얼마나 많은 이들이 헛된 금을 더 많이 모으려고 애쓰는가? 그러나 우리에게는 즉시 은총이 주어진다. 우리가 십자가를 입맞추는 순간, 우리는 깨달음과 거룩함, 그리고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은총은 이토록 신속하고, 은사는 이토록 수고 없이 주어진다! – 그러나 이러한 은혜를 지키기 위해서는 기도의 수고와 깨어 있는 주의가 시급히 필요합니다. 특히 쉽게 얻은 것은 대개 가볍게 여기고, 마땅히 지켜야 할 만큼 소중히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때문에 여러분께 호소합니다. 그러한 실수를 경계하고, 이 선물을 정성껏 지키도록 합시다. 우리의 거룩하게 된 입을 거짓말과 헛된 말로 더럽히지 말자. 우리의 거룩하게 된 눈을 음란한 시선으로 어둡게 하지 말자. 우리의 정화된 마음을 추악한 기억으로 더럽히지 말자. 그리고 사도가 외치듯이, “죄가 너희 죽은 몸에서 왕노릇 하지 못하게 하라. 곧 그 정욕을 따라 순종하지 말라. 또한 너희 지체를 죄를 위한 불의의 무기로 내주지 말고, 너희 자신을 하나님께 산 자로서,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라. 너희는 율법 아래에 있지 않고 은혜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롬 6:12–14). 보라, 율법 아래에서는 죄가 지배했으나, 은혜 아래에서는 의가 왕으로 다스리며 우리를 모든 죄에서 구원해 주는 것이 아니냐? – 기록된 바와 같이: “그러나 주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으로 씻음을 받고 거룩하게 되며 의롭게 되었느니라” (고린도전서 6:11). 청하건대, 이 정화를 소중히 여기고 거룩함을 지키자. 우리가 존귀한 자가 되었으면서도 스스로를 불명예로 전락시키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조만간 무덤에 남겨둘 육신을 위해 이보다 더 마땅한 일을 걱정하고 있는 것입니까? 정욕의 쾌락이 실로 치명적인 질병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즐거운 것으로 여깁니까? 정욕의 쾌락은 마귀의 낚싯바늘이며, 꺼지지 않는 불을 지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마치 스스로 포로가 된 노예들처럼 그 쾌락에 이끌리고 있습니다. 나는 이 정욕에 사로잡힌 어떤 사람이, 이 죄에 아부하는 것보다 차라리 목에 올가미를 매는 편이 낫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왜냐하면 그 죄는 잔인한 독재자처럼 자신의 종에게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며, “이것을 하라” 하면 하고;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이 죄는 자신의 부하에게 훨씬 더 끔찍한 것을 명령한다. 즉, “부끄러운 말을 하라” 하면 하고, “나쁜 일을 하라” 하면 한다. 대개 카인처럼 그런 사람은 신음하며 떨곤 한다. 바다를 항해하면 난파될까 두려워하고; 사막을 지나가면 강도들에게 잡힐까 두려워하고; 천둥이 치면, 마치 바로 자신을 위해 일어난 일인 양 생각하며; 번개가 번쩍이면, 번개에 타버릴까 봐 두려워한다; 그는 보면서도 보지 못하고, 듣면서도 듣지 못하며, 감각이 흐트러져 있다. 이런 삶보다 더 끔찍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내 생각에 해로운 정욕에 사로잡히는 것보다 차라리 짐승에게 잡아먹히는 편이 낫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는 오직 육체만 망가질 뿐이지만, 여기서는 영혼과 육체 모두 망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덕을 갖춘 사람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다. 죄에서 자유로워진 그는(이 말은 음탕한 쾌락뿐만 아니라 그 밖의 모든 정욕에 대해서도 하는 말이다) 기뻐하며 스스로 안에서 즐거움을 누린다. 그는 의로움으로 다스리며; 바다에서든 육지에서든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자신 안에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며, 위험한 상황에서는 그분께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내가 악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라”(시 22:4); “나를 에워싸고 공격하는 그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시 3:7); “땅이 흔들리고 산들이 바다 심연으로 기울어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으리” (시 45:3). 보라, 선한 삶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로 그것이 진정한 복된 삶이다. 우리도 하나님의 자비로 그 삶을 받아들였으니, 이제 그에 대한 것이 우리의 모든 관심과 돌봄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 안에서 더욱더 번영하기를 갈망하며, 모든 것에 경건하게 순종하고, 모든 순종과 모든 겸손, 모든 영혼의 순결을 행함으로 나타내야 합니다.

 

249. 밭에 씨를 뿌리는 모습을 보며, 우리 자신을 영적인 마음가짐의 씨앗으로 가꾸는 교훈을 얻자

249. 1) 밭에 씨를 뿌리는 모습을 보며, 우리 자신 안에 영적인 마음가짐의 씨앗을 뿌리는 교훈을 얻읍시다. – 2) 밤이 길어졌습니다. 과도한 수면을 삼가야 할 뿐만 아니라, 다른 육체적 욕구들을 지나치게 충족시키는 일에서도 자제하도록 주의하십시오. – 3) 왕이 원정에서 돌아오셨으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슬픔을 주님께 맡깁시다. [4, 27]

26. 지금은 우리가 밀과 그 밖의 곡물 같은 물질적인 씨앗을 뿌리는 시기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이른 아침부터 이 일을 서둘러 시작하여 밤이 될 때까지 지칠 줄 모르고 일하며, 온갖 방법을 동원해 씨앗을 잘 뿌리고 일 년 동안의 육체적 필요를 충분히 채우려고 애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영적인 씨를 뿌리는 자들은 왜 잠만 자고 마땅히 뿌려야 할 것을 뿌리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가? 그러면 나중에 어떻게 영원한 굶주림을 견딜 수 있겠는가? 그리고 우리의 무위(無爲)에 대해 어떤 변명을 할 수 있겠는가? – 차라리 잠에서 깨어나, 물질적인 것을 뿌리는 사람들보다 더 부지런히 일하기 시작하자. “왜냐하면 적게 뿌리는 자는 적게 거두고, 풍성하게 뿌리는 자는 풍성하게 거두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9:3). – 그러나 우리는 무엇을 뿌려야 할까요? – 기도와 간구, 청원, 감사와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이것이 경건의 씨앗이며, 이것이 바로 영혼이 양분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질적인 파종에서는 농부가 비가 올 때까지, 아침이든 저녁이든, 오랫동안 인내하며 기다립니다. 반면 우리의 영적인 파종에서는 우리가 비를 내리게 하고 물을 주는 주인이니, 즉 원할 때 언제든지, 원하는 만큼 울고 통회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 일이 우리 손에 달려 있다면, 부디 가능한 한 더 많이 씨를 뿌리고 더 풍성하게 물을 주며, 우리 의의 열매를 배가시켜, 영적인 수확의 때가 왔을 때 우리가 손과 품을 영적인 열매로 가득 채우고, “주님의 축복이 너희에게 있기를” (시 128:8). “우리는 주님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노라”(시 117:26). “네 손의 수고를 거두어라, 너는 복이 있도다, 네게 복이 있으리라”(시 127:2). – 이에 대한 우리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27. 그러나 형제 여러분, 날이 점점 짧아짐에 따라 밤이 길어지고 있음을 상기시켜 드리고자 합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밤샘 기도가 몸을 쇠약하게 하듯이, 과도한 수면은 육체를 비만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육체가 비만해지면 정욕도 함께 자라납니다. – 이에 대해 여러분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하면, “너희 중 누구든지 시를 부를 것이나, 가르침을 전할 것이나, 기도를 할 것이나” 모두 적당한 분량으로 행하여, “모든 것이 영혼의 세움을 위해” (고린도전서 14:26), 영의 온전함을 위해 “사탄이 절제하지 못함으로 너희를 유혹하지 못하게 하라” (고린도전서 7:5). 이 말은 단지 잠에 대해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음식과 음료, 그리고 그 밖의 모든 것에 대해서도 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적당히 이루어질 때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이쪽이나 저쪽으로 치우치거나 걸림돌에 걸리지 않도록 안전하게 지켜주기 때문이다.

28. 이제 한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군주(왕)께서 원정에서 돌아오셨으니, 어쩌면 여러분의 마음속에 앞으로 교회의 일, 특히 우리 일들이 어떻게 진행될지에 대한 생각이 떠오를지도 모릅니다. – 이에 대해 우리는 성경에서 지침을 얻습니다. “네 근심을 주께 맡기라” (시 54:23), 그분께서 해결해 주실 것이며,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계시다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라고 하셨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그분께서 우리를 온갖 유혹과 슬픔에서 건져내시며 우리의 생명을 지켜 주셨듯이, 앞으로도 우리를 지켜 주실 것이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오직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가며, 이 땅에서는 나그네와 이방인처럼 지내되 하늘에 있는 삶을 품고 살아가자. 왜냐하면 태초부터 이 세상의 삶에 들어온 자들 중, 누가 그곳에 영원히 머물렀는가? 온 자들 모두가 마치 낯선 나라에서처럼 다시 떠나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이 땅에서의 체류는 우리에게 있어 일시적인 방문일 뿐이며, 우리의 참된 거처와 유산은 다른 세상에 있습니다. 그곳으로 옮겨가서, 모든 거룩한 상속자들과 함께 하늘나라의 상속자가 될 자격을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250.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보여준다

250. 1)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가 얼마나 큰지, 즉 삶의 갱신을 지적한다. – 2) 세 가지 영적 힘의 소명이 무엇이며, 타락으로 인해 그것들이 어떻게 왜곡되었는지를 설명한다. – 3) 주님 안에서 우리가 고귀하게 된 그 고귀함을 지키며, 모든 힘을 다해 바르게 행동할 것을 권면한다. – 4) 결론: 선조들이 그렇게 행했으니, 우리도 그렇게 행하자. [4, 30]

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에 대한 사랑은 크고 형언할 수 없으니, 그분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엡 2, 17) “우리의 평화를 멀리 있는 자와 가까이 있는 자에게 전하러 오셨을” 뿐만 아니라, 하늘로 승천하신 후에도 거룩한 사도들에게 우리에게 똑같은 복음을 전하도록 맡기셨으니, 복된 바울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듯이: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간구하노니, 우리를 통해 하나님께 기도하시는 분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기를 간구하노라. 죄를 알지 못하신 분이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셨으니, 이는 우리가 그분에 대하여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후서 5, 20. 21). 우리를 향한 이 얼마나 헤아릴 수 없는 보살핌인가! 이 얼마나 형언할 수 없는 사랑인가! “죄를 알지 못하신 분이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셨다.” 어떻게,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 그분은 정당하게 정죄받아야 할 불법적인 행위로서의 죄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 왜냐하면 “그분은 죄를 짓지 않으셨으니, 그분의 입에는 아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베드로전서 2:22). 오히려 그분은 죄로 인해 상한 우리의 본성을 입으셨고, “우리의 병을 짊어지시고 우리의 고통을 담당하셨다”(마태복음 8:17)는 사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가장 치욕스러운 죽음을 당하셨다는 사실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위해 그분의 죄를 지으셨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우리가 그분에 대하여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함이라.” 어떻게? 죄와 정당한 심판 에서 벗어나, 그분 안에서 살고 행함으로써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함께 일하며 간구하노니, 너희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도록 하라”(고린도후서 6:1)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얼마나 설득하고 확신시키시는지요? –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도록 하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뒤로 물러서지 말고, 이미 버렸던 그 정욕들에 다시 굴복하지 않으며, 하나님과 성스러운 천사들 앞에서 한 서약을 어기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 그러나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새 생명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합시다”(롬 6:4) – 깨끗하고 흠 없으며, 덕이 넘치는 하늘의 삶으로 말입니다.

2. 여기까지 왔으니, 여러분께 말씀의 가장 은밀한 힘을 하나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그것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 인간의 영혼에는 세 가지 힘이 있습니다. 바로 사고하는 힘, 분노하는 힘, 그리고 갈망하는 힘입니다. 사고력의 역할은 성삼위를 믿는 것이며, 분노력의 역할은 유혹하는 뱀에게 분노하여 결코 그를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며, 욕망력의 역할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갈망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이 영혼의 힘들을 변질시키고 왜곡하여, 이를 통해 우리에게 파멸을 초래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 우리 조상 아담의 갈망하는 힘을 유혹하여 금단의 열매를 맛보게 하고, 가인의 분노하는 힘을 자극하여 그의 형 아벨을 살해하게 하며, 사고하는 힘을 이용해 인류를 우상 숭배로 이끌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 대한 시기심 많은 원수의 작용 방식입니다!

3. 그러나 우리는 창조된 목적대로, 세 가지 힘을 모두 사용하여 선에 굳게 서고 성령으로 단장함으로써, 주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이자 아버지께 입양하심으로 고귀하게 하신 그 고귀함을 스스로 망가뜨리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 복음서는 “그를 받아들인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요한복음 1:12).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진노의 자녀가 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의 상속자로 불렸으니, 꺼지지 않는 불의 상속자가 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며, 그리스도의 지체로 인정받았으니, 음탕한 자들이 되지 않도록 하리라;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돌아보지 말자. 헛되고 금세 사라질 이 세상의 삶의 화려함에 눈을 돌리지 말자. 가정을 해 보자면, 우리가 육체와 피 정욕을 충족시키는 데 만족한다고 치자. “피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가 썩어 없어질 터인데?”(시 29, 10). 무덤을 들여다보면, 정욕의 달콤함이 어떻게 끝나는지 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재물과 돈으로 둘러싸여 있다 해도, 그게 무슨 소용이랴? 우리가 이 세상에 알몸으로 들어왔지 않았는가? – 알몸으로 이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이며, 옳은 일이나 그른 일 외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성 다윗은 이렇게 외칩니다. “주님께 한 가지만 구하리니, 그것을 구하리이다. 곧 내 생애의 모든 날 동안 주님의 집에 거하며, 주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그분의 거룩한 성전을 방문하는 것이로다”(시 26,4).

4. 이것이야말로 복된 삶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성스러운 선조들이 선택한 복된 몫이니, 지금 우리가 기념하는 복된 고백자 바울처럼, 그의 투쟁과 고행이 어떠했는지 우리는 조금이나마 들었으며, 그분을 본받아 우리는 열성적으로 우리 수행의 수고를 계속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박해의 무거움을 견디며, 평소의 행실에서도 물러서지 않을 것이며; 지치지 않고 우리 길을 걸어가며, 만일 넘어지더라도 재빨리 일어나 우리의 원수인 마귀를 이겨내어,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님 안에서 모든 성도들과 함께 의의 면류관을 받게 되기를 빕니다.

 

251. 자신의 병에서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 그리고 병으로 인한 고통에서 영원한 고통으로 넘어간다

251. 1) 자신의 병에서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 병중의 고통에서 영원한 고통으로 넘어간다. – 2) 당시의 박해 속에서 어떤 이들은 영광을 얻었고, 다른 이들은 수치를 당하며 완전히 길을 잃게 되었다고 말한다. – 3) 후자들에 대해서는 유감과 질책의 말,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한 경고를 전한다. [4, 31]

5. 나는 병들었으나, 여러분의 기도로 다시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건강을 되찾아야 할까요? – 반드시 죽을 때가 올 것이며, 그때는 더 이상 건강을 되찾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 때가 오면 나를 여러분 곁에서 떠나게 하고, 이곳에서 다른 곳으로 보내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이 고아가 될 것을 염려해서는 안 됩니다. “너희를 고아로 남겨두지 않겠다”(요한복음 14, 18)고 말씀하신 분은 거짓말하지 않으셨으며,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복음 28, 20)고도 하셨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날에 우리는 서로를 다시 보게 될 것입니다. 다만,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과 끝없는 생명 속에서”라고 말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제가 병들었을 때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는지 여러분도 아실 것입니다. 오한에 사로잡혀 견딜 수 없는 떨림을 겪은 뒤, 곧바로 하루 종일 타는 듯한 열기에 휩싸였던 것처럼 말입니다. – 그렇게 고통받으며 나는 그때 속으로 생각했다. ‘미래의 세상에서도 타르타로스의 고통에서 불타는 지옥으로 옮겨져, 가련한 사람이 두 가지, 혹은 그 이상의 고통을 겪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곳에서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은 한 가지나 두 가지의 고통만을 겪을 것이다. 이 세상의 고통을 통해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견딜 수 없는지 알 수 있으며, 이에 두려움과 떨림에 사로잡혀 그 견딜 수 없는 고통에 빠지지 않도록 온갖 방법을 다해 조심하기로 결심해야 한다.

6. 보라, “어떤 이들에게” 닥친 이 박해야말로 덕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들은 “세상에서 빛처럼 빛나며,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키고, 나를 찬양하게 하리라”,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날”에 그러했으니 (빌립보서 2:15, 16). 그들은 얼마나 많은 선행을 행했는가? 그리고 어떤 완성에 이르렀는가? 그들은 시련을 이겨내며 경험을 쌓고, 슬픔과 고통의 불길 속에서 정련되어 도가니 속의 금처럼 정화됨으로써 스스로를 구원했고 지금도 구원하고 있으며, 다른 이들도 같은 길로 이끌고 있어, 이처럼 많은 이들과 자기 자신, 그리고 타인을 구원하는 자들이 되었다. 반면 “다른 이들”, 즉 극소수에게는 박해가 악한 행위의 계기가 되었으니, 이는 순종의 법에 얽매이지 않고 제멋대로 사는 삶으로 인해, 자신들이 부끄러운 일을 저지를 자유를 누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에 대해 성경의 말씀, “그들의 얼굴이 그을음보다 더 어두워졌도다”(예레미야 애가 4, 8)라고 말하는 것이 매우 적절하다.

7. 나는 바로 그런 자들에게 외치리라. 불의한 자들아, 너희는 주님을 버리고 수도 생활의 법칙을 어겼으며, 바르게 걷는 법도 모르고 마치 절름발이처럼 이리저리 비틀거린다. 너희는 동료들로부터 뒤처져 여자를 탐하는 자가 되었고; 여러분 중 어떤 이들은 홀로 살고, 또 어떤 이들은 종을 고용하며, 심지어 돈에 눈이 멀어 장사까지 벌이고 있습니다. 예언자의 징벌도, 사도의 경고도, 나의 겸손한 권면도 여러분을 두렵게 하지 못합니다. 그중 한 사람은 아름다움에 사로잡혀 도둑질을 저지르고, 심지어 하나님을 배반하기까지 했습니다. – “너 이 불행한 멸망의 아들아,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냐? –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겠으며, 주의 얼굴을 피해 어디로 도망하리요?’(시 138:7)라고 몇 번이나 노래했느냐?” 아니면 완전히 휩쓸려, 하와를 유혹하고 그녀와 함께 우리 조상 아담을 낙원에서 쫓아낸 뱀과 친구가 되고 싶은가? 동정 서약을 통해 결합했던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죽음이 세상에 들어온 죄와 결합하려는 생각은 없는가? 복음서가 이런 식으로 행하는 자들에 대해 “그들의 구더기는 죽지 아니하며 불은 꺼지지 아니하리라” (마가복음 9:44)라고 외치는 것을 듣지 못하느냐? 사도가 “하나님께서 음행하는 자와 간음하는 자를 심판하신다” (히브리서 13:4) 사도를 통해 전하는 그 말씀을 듣지 못하느냐? 죄를 범함으로써 네가 얻는 것이 무엇이냐? 어둠과 칼처럼 심장을 꿰뚫는 고통이 아니겠느냐? 절망의 심연으로 추락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너를 유혹한 바로 그 사탄이, 마치 옛날 유다처럼 너로 하여금 목매달릴 밧줄을 잡게 강요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정신 차려라, 어둠에 휩싸인 자여; 파멸로 이끄는 죽음의 그물에서 도망쳐라; 지옥의 올가미에 얽매이지 않도록 하라. 그래야 나중에 이곳에서 카인의 삶을 살지 않을 것이며, 신음하며 떨고 모든 아는 얼굴을 피하며, 장차 오는 세상에서 불타는 지옥에 정죄받지 않을 것이다. 주님께서 “오셔서” “그분의 성도들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사람 앞에서 경이롭게 되실” (살후 1:10), 주님의 계명을 충실히 따랐던 자들에게는 합당한 상을 주시고, 그들과 반대되는 자들은 그들을 위해 준비된 끝없는 고통 속으로 보내실 때이다.

 

252. 주현절은 주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심으로써 주어진 은혜의 위대함을 떠올리게 한다

252. 1) 주님의 현현은 주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심으로써 주어진 은총의 위대함을 떠올리게 한다. – 2) 우리가 무엇을 바칠 것인가? –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고군분투하는 삶과, 성상파괴자들 앞에서 보여주는 현재의 신앙 고백을 바친다: 오직 이 두 가지 모두에서 굳건히 서기만 하면 된다. [4, 32]

8. 주현절이 다가오고 있다. – 기쁨의 날이 문 앞에 다가왔으니, 이는 참으로 위대한 기쁨으로, 창세 이래로 없던 일이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에게 오시는데, 구약의 조상들에게 보이셨던 것처럼 예언이나 상징을 통해서가 아니라,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시어 친히 우리에게 나타나시기 때문이니, 이는 모든 세대 중에서 그보다 더 복된 일은 없었고,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행하신 모든 기적 중에서 그보다 더 놀라운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사들은 이루어진 신비를 기쁜 소식으로 전하고, 별은 하늘을 초월하신 분이 땅에 태어나셨음을 가리키며, 목자들은 그들에게 예고된 구원을 보려고 서둘러 가고, 동방박사들은 왕다운 선물을 바치고, 하나님의 놀랍도록 새로운 일에 대해 비범한 새 노래가 불려지니, 이로써 하늘에서는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땅에서는 평화가 임하느니라. 사도도 다음과 같이 증언하듯이: “그분은 곧 우리의 평화이시니, 두 가지를 하나로 만드시고, 장벽인 원한을 허물어 버리셨으니, 곧 그분의 육체로 원한을 없애시고, 계명의 율법을 폐지하사, 두 가지를 하나로 합쳐 새 사람을 만드시고, 평화를 이루시며, 십자가로 두 가지를 한 몸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고, 그 십자가에서 원한을 없애셨느니라” (엡 2, 14–16). 이는 예로부터 선지자들과 의인들이 보고자 했으나, 오직 믿음으로만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록된 바와 같이 “그분을 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보았으며”, 생명의 말씀에 대하여 보고 전하노니, 생명이 나타나셨다”고 하며,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요일 1, 1. 2).

9.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에 대해 주님께 무엇을 갚아 드릴 것인가?” 이에 대한 답으로 성 다윗은 이미 앞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는 구원의 잔을 받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리라”(시 115:3). 그러나 형제들아, 기뻐합시다. 우리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에 대해 주님께 보답할 자격을 얻었으니 말입니다. – 과연 어떤 보답일까요? 우리가 받아들인 십자가를 지는 삶과 “우리가 서 있는 이 고백, 곧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소망을 자랑하는 것”(롬 5:2). – 그리고 우리는 이를 하루만 기념할 것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기념해야 합니다. 육신에 이끌리고 정욕의 포로가 된 자들은, 비록 겉으로는 축하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정욕의 노예로서 죄에 팔려 자유로울 수도 없습니다.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죄를 범하는 자는 모두 죄의 종입니다. “종은 영원히 집에 머물지 못하나, 아들은 영원히 머무느니라”(요한복음 8:34). 우리도 은혜로 아들의 칭호를 얻었으니, “시작할 때의 굳건함을 끝까지 굳게 지키면”(히브리서 3:14) 영원히 그 집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굳건히 세워져, 우리 수도 생활의 질서 안에서 “서로 격려하여 사랑과 선한 일을 실천하도록” (히브리서 10:24), 즉 순종과 겸손, 온유함,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아름다운 덕목들 안에서, 우리의 선한 결심을 약화시키지 않고 오히려 노력을 더하며, 주님의 날이 가까워질수록 더욱더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는 모든 이의 심판자께서 공개적으로 나타나시며, 사도들이 신성한 변모 때 보았던 그 영광 속에서 보이실, 그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날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니, 그분은 각 사람에게 그의 행위에 따라 갚아 주실 것입니다. – 우리도 모든 성도들과 함께, 우리를 자비로운 눈으로 바라보시며 하늘나라로 맞아주시는 그분의 얼굴을 뵙게 하소서.

 

253. 광야를 방황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안식이 약속되었으나, 모두가 그곳에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253. 1) 광야를 방황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안식이 약속되었으나, 모두가 그곳에 들어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안식이 약속되었으나, 우리 모두가 그곳에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 2) 어떻게 해야 그곳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 그들이 행했던 방식대로 행해서는 안 됩니다. [4, 34]

10. 우리는 해를 거듭하고, 한 계절에서 다른 계절로, 한 명절에서 다른 명절로 넘어가며, 이 생애 동안 잠시도 멈출 틈이 없다. –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그 끝을 향해 나아가 우리의 안식에 들어가야 합니다. “누구든지 그분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일을 마치신 것처럼, 자기의 일에서 쉬게 되나니”(히브리서 4:10)라고 기록되어 있듯이 말입니다. 그 안식은 과연 무엇일까요? – 바로 천국입니다. 사도는 우리를 그곳으로 이끌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안식에 들어가도록 힘쓰자. 누구도 저 반역의 비유에 빠지지 않도록 하라”(히브리서 4:11). – 그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겠다고 하셨으나, 그들이 나중에 불순종하고 그분을 크게 슬프게 했기 때문에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것처럼, 우리도 그분의 계명에 불순종한다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십 년 동안 내가 그들로 인해 분노하였고, 말하기를 “그들은 마음으로 항상 그릇 행하며, 내 길을 알지 못하도다. 그러므로 내 진노 중에 맹세하노니,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셨다”(시 94, 10. 11). 그들에게는 그랬지만, 우리에게는 40년이 아니라 각자의 일생 동안 순종이 요구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지키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분께서는 우리에 대해서도 “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 자들의 뼈는 광야에 흩어졌고, 만일 우리가 들어가지 못한다면, 우리의 몸과 영혼은 불타는 지옥에 던져질 것입니다. 그리고 이 형벌은 그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무겁습니다. 기록된 바와 같이, “모세의 율법을 저버린 자는, 두세 증인 앞에서 자비 없이 죽을 것이요,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언약의 피를 더럽게 여기며, 그 피로 거룩하게 될 수 있다고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모욕한 자는 얼마나 더 심한 형벌을 받을 것인가” (히브리서 10:28, 29).

11. 과연 무엇이 그들의 길을 막았는가? 불신, 불평, 모독, 반항, 완고함, 교만, 음행이다. 이것이 바로 그들을 파멸로 이끈 것입니다. –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말고, 그분이 약속하신 것을 이루실 능력이 있으심을 믿으며, 마치 불의 얼굴에서 도망치듯 이 정욕들로부터 도망치자. 또한 원망하지 말며(고린도전서 10, 10), 모독하지도, 완고해지지도, 반항하지도 말자. “그러므로 서로 친절하고 자비하며, 서로 용서합시다. 마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엡 4:32), “항상 우리 몸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지고 다니며”(고후 4:10), 언제나 그리스도를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으며, 기도와 간구와 눈물, 하늘의 환상을 묵상함으로 항상 새롭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감으로써, 우리는 옛사람들처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라, 온유한 자들의 땅, 곧 생명과 불사의 샘이 있는 곳, 하늘 예루살렘의 아름다움이 있는 곳,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곳, 복되시고 생명의 근원이신 삼위일체의 광채가 비치는 곳으로 들어갈 것이다!..

 

254. 동정은 결혼 생활보다 높다

254. 1) 동정은 결혼 생활보다 높다. – 2) 우리에게 이 칭호를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넘어지지 않도록 주의하자. – 3) 이를 위한 방법은 무엇인가? 낮은 것을 높은 것으로 이겨내는 투쟁과 극복, 이것이 바로 우리 모든 노력의 목표이다. – 4) 한 마디 더 덧붙이겠다. 멤논 형제가 돌아왔다. 비유에서 아버지가 자신을 떠났던 아들을 받아들인 것처럼, 형제애로 그를 맞아주라. [4, 35]

12. 경기장에서 경주를 벌이는 이들은 일 년에 한 번, 그것도 아주 짧은 시간 동안만 그렇게 할 뿐입니다. 그 후 경기는 끝나고, 승자와 패자, 관중들은 흩어집니다. 그러나 순결의 경주를 달리는 이들은 하루가 아니라 평생 동안 달린다. 그들의 길과 그 길을 따라가는 과정 은 보이지 않으니, 마치 그들이 보이지 않는 적들과 벌이는 싸움도 보이지 않는 것과 같다. 순결은 하늘의 가장 높은 곳에 이르는 가장 위대한 미덕이다. – 사람들은 삶의 방식에 따라 두 부류로 나뉜다: 어떤 이들은 결혼 생활을 하고, 다른 이들은 독신으로 산다. 결혼 생활을 하는 이들은 가장 낮은 세계를 이루고, 독신자들은 가장 높은 세계를 채운다. 전자는 썩어 없어질 운명에 처해 있는 반면, 후자는 썩지 않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마치 날개를 단 사람을 본 사람이 그가 때로는 사람의 모습, 때로는 천사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당연히 놀라듯이, 순결을 수련하며 지키는 사람도 천사들과 사람들에게 기이한 광경을 보여준다. 그는 육신에 있으면서도 육신보다 높고, 세상에 있으면서도 세상보다 높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 세상을 등지면, 그가 탁월한 삶의 방식을 선택했다고 말하곤 한다. 주님께서 복음서에서 말씀하시기를: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그렇게 태어난 자들이 거세된 자들이요, 사람들로 말미암아 거세된 자들이요, 하늘 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거세된 자들이니라”라고 말씀하신 후, “받아들일 수 있는 자는 받아들이라”고 덧붙이셨습니다(마태복음 19,12). 보시다시피, 많은 이에게 이 은사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며, 오직 자신의 삶의 방식으로 스스로를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에게만 예비되어 있습니다.

13. 그러니 우리는 기뻐하고 서로를 위해 기뻐합시다. 하나님의 인간 사랑으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사람들이 경탄하는 이 고귀한 지위에 부르심을 받았음을, 끝없이 감사합시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가능한 한 가장 신중하게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옛날이나 지금이나 많은 이들이 그러한 높은 곳에서 추락해 왔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교만으로 인해, 다른 이들은 부주의와 태만으로 인해 넘어졌는데, 이 두 가지 모두 영혼에 파멸을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14. 그렇다면 이로부터 벗어날 방법은 무엇인가? – 날아가는 새는 재난에서 벗어날 방법을 가지고 있다. 사냥꾼이 가까이 온 것을 감지하면 날개를 펴고 다른 곳으로 날아가서, 포획당하는 것을 피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 영혼을 노리는 사냥꾼인 마귀가 다가올 때, 마치 영으로 날개를 달고 높은 곳을 바라보며 “위엣 것을 구하며 위엣 것을 생각하리라”(골 3,1-2)고 해야 한다. 그가 음탕한 유혹을 던져오면? 우리는 영혼의 고귀한 감정을 일으킬 것이다. 죄의 행위를 내세우면?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해 심판의 엄격함을 붙들 것이다. 이처럼 서로 대립시키고, 생각으로 생각을 물리치며, 우리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자로부터 구원받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투쟁의 결말은 무엇일까요? 육신의 투사들에게는 썩어질 면류관이 있지만, 우리에게는 썩지 않을 면류관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일시적인 기쁨이 있지만, 우리에게는 영원한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끝까지 담대함과 소망의 찬양을 굳게 지키면” (히브리서 3:6), 우리는 복이 있습니다. 그러니 부디 기도와 간구, 통회와 눈물, 겸손과 순종, 고백, 그리고 그 밖의 경건한 행실 속에 머물며, 하나님의 도움으로 원수에게 승리를 거두도록 합시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이쯤에서 그만두겠습니다.

15. 이제 멤논 형제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가 비록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고 돌아왔으니, 우리는 그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와 같은 자가 큰 슬픔에 삼켜지지 않도록”(고린도후서 2:7). – 그러나 이 자리에서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주님의 말씀대로 “죄를 짓는 자는 죄의 종일 뿐만 아니라”(요한복음 8:34) 덕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혐오스러운 존재이며, 어쩌면 어떤 이는 그의 죄에 물들지 않기 위해 그를 껴안는 것조차 부끄러워할지도 모른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모든 재산을 창녀들과 탕진한 탕자를 그가 돌아왔을 때 버리지 않으셨으니, 우리도 그를 밀어내지 말고 친절하게 이 형제를 받아들이며, 그의 귀환을 감사함으로 기뻐하고 그의 구원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 이처럼 우리 구세주 주님의 제자들로서 계명을 실천함으로써, 우리는 천국을 상속받을 자격이 있을 것입니다.

 

255. 성상 숭배와 고문으로 인해 유배지에서 얼마나 많은 형제들이 세상을 떠났는가? 이들은 정통 신앙의 진리를 증언하는 증인들이다.

255. 1) 성상 숭배로 인해 유배지에서, 또 고문으로 인해 우리 가운데 얼마나 많은 형제들이 세상을 떠났는가? 이들은 정통 신앙의 진리를 증언하는 증인들이다. 이단자들은 이와 같은 것을 전혀 제시하지 못한다. 이는 그들의 기초가 얼마나 허약한지 스스로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졌습니다. – 2) 구원을 위해 우리에게 남은 것은 오직 이 기초 위에 금과 은과 귀한 보석, 즉 거룩하고 흠 없는 삶을 쌓아 올리는 것뿐이며, 만일 어떤 죄를 짓게 된다면 회개를 통해 그것을 정화하는 것입니다. [4, 36]

16. 우리 형제 테오도르가 주님 곁으로 갔으니, 그는 가장 훌륭한 이들 중 한 명이었으며, 순종에 능숙하고 신앙 고백에 신실한 자로서, 그리스도를 위해 상처를 입고, 감옥과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이보다 더 기쁜 일이 무엇이겠는가? 그토록 많은 우리 형제들(그 수가 백 명을 훌쩍 넘는다)이 온갖 곳으로 흩어졌으나, 그곳에서 별처럼 빛나며, 현재 살아 있는 자들과 후손들에게 정통 신앙의 증거로 자신의 거룩한 육신을 남겼다. 저는 우리 형제들뿐만 아니라, 다른 수도원의 형제들 중에서도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한 이들에 대해서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교회를 가장 위대하게 입증하는 증거입니다! 교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지극히 순결하신 성모 마리아, 그리고 그분의 모든 성인들의 성상에 대한 숭배를 증언하는 이처럼 수많은 증인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설령 우리가 손에 다른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이 한 가지만으로도 건전한 이성을 가진 이들에게 진리를 증명하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정통 신앙의 반대자들은 부끄러워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 중 누가 자신의 신앙을 위해 싸우며, 언제라도 이와 같은 고난을 겪은 적이 있겠는가? 아무도, 결코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마치 밤의 짐승들처럼, 이단의 어둠 속에서 맴돌며 대담해지지만, 낮의 빛이 비치고 정통교리가 새벽별처럼 빛나면, 그들은 자신의 사악한 계략이라는 굴속으로 숨어버린다. – 그들이 스스로 지핀 불빛 속에서 헤매게 내버려 두라.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서 사도들과 선지자들, 그리고 신을 모신 우리 조상들의 기초 위에 세우신 자로서, 앞으로도 인간의 위협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뿌리내리고 서 있을 것이다.

17. 구원을 얻기 위해 우리에게 남은 일은, 사도의 명령에 따라, 올바른 믿음을 바탕으로 금과 은과 귀한 보석을 쌓아 올리는 것뿐이며, 장작과 짚과 짚단(고린도전서 3:12) — 곧 불의 먹이가 될 것들 —을 쌓아 올려서는 안 된다. 이렇게 확고히 서 있는 자를 아무것도 주님에 대한 믿음에서 흔들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으니,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셨음이라”고 기록된 바와 같다(갈 3:13). 그러니 우리가 다시 저주의 권세 아래로 떨어지지 않도록 하자.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피로, 다시 태어남의 목욕과 성령의 갱신을 통해 우리를 씻어 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미 버린 부끄러운 일들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도록 합시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분이 자신을 드러내시는 날에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실지도 모릅니다. “나는 너희를 나의 기둥으로 삼았으나, 너희는 나의 지체를 음행하는 지체로 만들었도다. 나는 너희의 죄를 씻어 주어 너희가 ‘더러움이나 흠이나 그와 같은 것이 없게’ (엡 5:27), – 그러나 너희는 다시 정욕의 악취로 스스로를 뒤덮고 죄의 더러움으로 스스로를 더럽혔도다. 내가 성령을 통해 너희에게 풍성한 지혜의 빛을 채워 주었으나, 너희는 너희 마음을 광란하는 정욕의 거처로 만들었도다; 나는 너희를 영원한 복의 공동 상속자로 삼았으나, 너희는 차라리 나의 대적의 공동 상속자가 되기를 택하였다: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 마귀와 그의 사자들을 위해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가라” (마태복음 25,41). 그러나 우리가 결코 그런 무서운 음성을 듣거나 그런 견딜 수 없는 진노를 겪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갖 열정으로 순결과 눈물, 마음의 통회를 얻고자 애쓰며, 불평 없이 순종을 다하고, 밤낮으로 하나님의 일에 깨어 있어, 원수가 몰래 스며들어 부주의한 영혼을 삼키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깨어 기도할 때라도 뱀의 계략을 피할 수 있다면! 그러나 졸고 있을 때 어떻게 이를 이룰 수 있겠는가! 그러나 누군가는 말하겠지요. “우리의 본성은 연약하고 유혹에 쉽게 빠집니다.” 나도 그 말에 동의합니다. 나 역시 같은 본성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자마자 즉시 회개와 고백, 마음의 통회, 그리고 예전의 선한 상태로 회복하고자 하는 생생한 열망이 솟아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매일 이렇게 실천한다면, 우리가 추구하는 바를 이룰 것이며, 이를 이룸으로써 “오라”는 그 소망의 음성을 듣게 될 것이며, 천국의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

 

256. 명절을 영적인 위로 속에서 지내야 한다

256. 1) 명절을 영적인 위로 속에서 지내야 한다. – 2) 명절은 지나가고 인생 전체도 지나갈 것이다: 이를 잊지 말고, 언제나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 – 3) 이를 위해 외적인 면은 물론, 더 나아가 내적인 사람에 있어서도 자신의 삶을 잘 가다듬어야 한다. – 4) 이를 위해 필요한 어떤 것에서도 물러서지 말아야 한다. [4, 37]

18. 성탄절과 주님의 세례절과 같은 명절들이 지났습니다. 우리는 주 우리 하나님을 기리며, 또한 우리 처지가 이토록 극심한 와중에도 이 명절들을 지킬 수 있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일로 인해 슬퍼하지 않고, 우리를 위해 “자기를 비워 종의 형상을 취하신”(빌 2,7) 분을 위해 우리가 추방을 견디며 이방 땅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에 크게 기뻐합니다. 그리고 축제를 지낸다는 것이, 물질적인 것에서 멀어지고 세상과 세속적인 모든 것에 대한 무관심을 통해 하느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 외에 또 무엇이겠습니까? 사막과 산, 그리고 땅의 심연에서 사는 이들에 대해 우리가 무엇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 그들은 명절을 지키지 않는가? – 아니, 그들은 침묵 속에서 다른 이들보다 더 훌륭하게, 더 고귀하고 신성하게 명절을 지킨다. 이는 즐거움과 연회, 음식과 술로 명절을 보내며 스스로를 현혹하고 있음을 잊어버리는 자들보다 훨씬 낫다. 성경은 바로 그런 자들을 비난하며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땅에서 즐거워하며 방탕하게 지내며, 도살하는 날처럼 너희 마음을 배불리 먹었도다”(약 5,5). 이는 그들이 도살될 준비가 된 돼지와 같아졌기 때문이며, “그들의 배와 영광은 그들의 부패함 속에 있느니라”(빌 3:19); 그러므로 우리가 스스로를 경계하고, 우리의 지위와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데 합당한 삶을 살아갈 때, 명절을 더 잘 지낼 수 있습니다.

19. 그러나 우리의 날들이 마치 말을 타고 달리는 것처럼 빠르게 지나가고, 시간이 마치 빙글빙글 도는 바퀴처럼, 어떤 이는 출생을 통해 삶으로 이끌고, 또 다른 이는 죽음을 통해 이곳에서 떠나게 하는데, 이는 한 가지 나이나 동일한 시기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노인이 젊은이보다 먼저, 젊은이가 노인보다 먼저, 아버지가 자녀보다 먼저, 자녀가 아버지보다 먼저 떠나기도 하며, 때로는 모든 연령대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떠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죽음의 시간을 알 수 없기에 매 순간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도록 이렇게 정하셨습니다. 그러니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십시오. 죽음은 예기치 않게 닥쳐오니, 우리가 준비되지 않은 채로 당하지 않도록 합시다. 그때 회개하더라도 소용없고 열매도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제가 얼마 전 뜻밖에도 병에 걸렸던 일을 모르십니까? 제 영혼이 거의 지옥으로 떨어질 뻔하지 않았습니까? 비록 지금은 회복되었지만, 이것이 영원할 수는 없습니다. 이미 늙어버린 나는 마침내 여러분 곁을 떠나 나의 조상들과 형제들에게로 옮겨가야 할 것입니다. 다만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정신을 차린 채, 그리고 내 평생에 걸친 양심의 완전한 정화를 이루고 이루어지기를 기도해 주십시오. 그때 병으로 인한 고통에 시달리며, 나는 생각했고 스스로에게 말했습니다. ‘이 고통이 이 정도라면, 장차 올 세상에서는 얼마나 더 심하겠는가? 이 사흘이나 나흘 동안의 고통도 견딜 수 없다면, 어떻게 영원한 고통을 견뎌낼 수 있겠는가?’

20. 이에 대하여 여러분도 깊이 묵상하시기를 권하며, 항상 이를 마음에 새기며 – 겉사람으로는 – 온전한 경건과 겸손, 근면과 인내로 주의 깊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속사람으로는, – 마음을 온전히 지키며, 크고 교활하며 사악한 뱀이 우리에게 속삭이거나 공격하지 못하게 막고, 하나님의 성전을 정욕의 거처로 삼지 말고, 온갖 방법으로 주님 앞에 깨끗한 모습으로 나아가며, 미래의 세상이 오기 전인 지금 이곳에서 이미 복된 삶을 살아가기 시작하십시오. 왜냐하면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사는 것보다 더 복된 일이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수고와 기도, 눈물, 통회, 열심, 영의 불타는 열정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비록 그것들이 있더라도 원수는 끊임없이 우리를 공격하며, 예고 없이, 뜻밖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내적 전쟁을 우리 안에서 일으키고 있다. 그는 우리가 하늘로 올라가 그곳에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리기를 갈망하는 것을 보기에 이렇게 행하는 것이다. – 그러나 진실로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니”(롬 8:18); 그러므로 우리는 온 힘을 다해, 믿음과 소망의 온전한 힘으로 싸움을 치르며, 모든 악마의 계략을 무너뜨려야 한다. 마치 경기장에서 경주하는 이들이 달리기에 전력을 다해, 경주가 끝날 무렵 숨이 차고 기절할 지경에 이르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들의 경주는 한 시간 동안일 뿐이고 면류관은 썩어질 것이나, 우리의 싸움은 평생에 걸친 것이므로 면류관도 썩지 않을 것이며, 그 밖의 모든 상도 영원한 것이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인자하심으로 우리가 이를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257. 성... 교부들을 본받아야 한다. 그러나 너와 같은 삶의 방식을 가진 이들을 본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해가 될 것이다

257. 1) 성스러운 교부들을 본받아야 한다. 그러나 너와 같은 삶의 방식을 가진 이들을 본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해가 될 것이다. – 2) 다음은 제시된 예시들이다. – 3) 네 것이 아닌 일을 맡지 마라. 네가 키노비트 수도자인가? – 키노비트 수도자들을 본받으라... 구체적인 인물들이 지목된다. – 4) 사막은 은둔자들에게 맡겨두고, 너는 나처럼 공동체 생활의 고단함을 견뎌라. [4, 38]

21. 우리 성부들의 행적을 읽고 그들을 살펴볼 때, 우리는 그들에게 경탄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참으로 우리 성부들은 경이롭기 그지없으니, 이 육신 안에서 천사처럼 온전히 무욕의 삶을 살며 주님을 기쁘시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만 경탄할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본받아야 한다. 그리고 분별력을 가지고 본받아야 한다. 즉, 키노비트는 키노비트를, 침묵자는 침묵자를, 은둔자는 은둔자를, 수도원장은 수도원장을 본받아야 한다. 우리와 같은 생활 방식을 따르지 않고 다른 삶을 사는 사람을 본받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렇게 하면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명백한 해를 입게 될 것이다. 많은 이들이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자신의 생활 방식을 버리고 다른 것을 추구하다가, 본래의 것을 잃어버리고, 원하던 것조차 얻지 못했다.

22. 이를 증명하기 위해, 이 주제에 관한 고대의 전설을 제쳐두고, 우리 민족에게 일어난 일을 떠올려 보자. 소위 ‘시편 낭송자’에게 기둥에 올라간 것이 무슨 유익을 주었는가? 사람들이 광란에 빠져 그를 거기서 끌어내리지 않았는가? – 그리고 지금 그는 키노비트도, 기둥 수련자도 아니다. 그 기둥이 어떤 사프리트에게 무슨 유익을 주었는가? 그는 정통 신앙을 위해 기둥에서 내려왔지만, 그 후 이단에 빠지고 배신자가 되어, 지금은 박해자들 중에서도 가장 잔인한 자가 되지 않았는가? – 그러나 우리 형제단도 살펴보자. 우리 중의 베드로는 수련 생활에 오랫동안 헌신하며 그 안에서 훌륭히 성장했으나, 경건함에 이끌려 광야로 떠나지 않았는가? 그러나 그가 거기서 어떻게 돌아왔고, 어떤 최후를 맞이했는지는 여러분도 직접 눈으로 보았으니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또한 지금도 살아 있는 암필로키오도, 처음에는 기둥 수도자가 되었다가 나중에는 은둔자가 되었으나, 지금은 이리저리 비틀거리며 수치스러운 짓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23. 이 모든 일은 마귀의 유혹으로 인해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데, 마귀는 남의 것을 차지하도록 부추겨 결국 자기 것까지 잃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도는 “형제들아, 누구든지 주 안에서 부름받은 그대로 하나님 앞에서 그대로 머물러 있으라”(고린도전서 7:24)고 외치는 것입니다. 침묵자로 부르심을 받았는가? – 공동 생활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다. 키노회 수도자로 부르심을 받았는가? 침묵 생활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다. 각자는 자신의 지위에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라. 각자는 자신의 지위에서, 자신의 삶을 바르게 꾸려나가야 할 본보기를 가지고 있다. 너는 공동 생활에서 빛을 발한 이들을 본받으라. 그것이 어떤 것인가? 단지 옛 성자들뿐만 아니라, 우리 형제단 안에 있었고 지금도 있는 이들도 포함된다. 불타는 믿음을 지닌 복자 도미티아누스를 본받으라. 위선 없는 순종을 보인 복자 조시모를 본받으라. 모욕과 치욕을 마치 큰 영광인 양 받아들이며, 자신의 신념을 흔들림 없이 지켜낸 복자 마르쿠스를 본받으라. 테렌티우스를 본받으라. 그는 수년 동안 부엌에서 병자들을 섬기며 결코 비겁함에 굴복하지 않았고 수고를 회피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봉사로 옮기라는 제안을 받았을 때조차도 평소의 봉사에서 고난을 겪는 것을 더 원하여 거절했다. 또한 각자의 직무에서 두각을 나타낸, 생명의 책에 이름이 기록된 수많은 다른 형제들에게도 본받으라. 바로 그들을 본받아야지, 은둔자들을 본받아서는 안 된다.

24. 사막과 산은 아바 요안니키오스와 그와 같은 이들에게 맡겨 두라. 너는 순종과 자기 뜻을 꺾는 것을 사랑하라. 그는 현재 박해를 받지 않지만, 너는 진리를 위해 박해를 받고 있다. 그 사람은 감옥에 갇히지 않았으나, 너는 주님을 위해 감옥에 머물고 있다. 그 사람은 매를 맞지 않았으나, 너는 그리스도를 위해 매질을 당했다. 네가 겪은 이 모든 것은 평온한 사막 생활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 고귀하다. – 나, 이 겸손한 자도 나 자신에 대해 한 마디 하겠다. – 제가 여러분을 이끄는 지도자로 부임한 것이 합당치 않으므로, 이 직분을 내려놓고 광야로 물러나야 할지, 아니면 다른 어떤 삶의 방식을 시작해야 할지 고민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지도자에게도, 자신의 목숨을 양들을 위해 바쳐야 할 목자에게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또한 여러분도 지금과 다른 삶을 계획하거나 실천해서는 안 됩니다. 이는 그러한 행동에서 장차 올 삶의 무익함과 혼란이 비롯되지만, 정해진 수도 생활의 질서 안에서 인내하며 머무르는 데서 모든 영적 결실이 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각자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푸신 은혜와 주님께서 부르신 방식대로 행하고, 그렇게 살며, 주님을 기쁘시게 하여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들을 자격을 얻게 하십시오. “잘했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라. 네 주인의 기쁨에 들어가라” (마태복음 25,21).

 

258. 수도사가 무엇인지 밝힌 뒤, 오늘날의 수도사들이 옛 수도사들에 비해 어떤 점에서 뒤처졌는지를 묘사한다

258. 1) 수도사가 무엇인지 밝힌 뒤, – 2) 오늘날의 수도사들이 옛 수도사들에 비해 어떤 점에서 뒤처졌는지를 묘사하고, – 3)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난다는 점을 상기시키며, – 4) 이 점에서 올바르게 행하는 것이 얼마나 유익한지, – 그에 대한 권면을 덧붙인다. [4, 39]

25. 우리 삶보다 더 복된 것은 없으며, 우리 거처보다 더 고귀한 것은 없다. 단, 우리가 자칭하는 대로 살고, 그 이름에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산다면 말이다. 수도사란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을 갈망하며, 오직 한 분 하나님께만 의지하고, 오직 한 분 하나님께만 기쁨을 드리기 위해 노력하며,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도 화해의 매개자가 되는 자이다. 그러나 이런 것이 없고, 오히려 열심과 시기, 분열이 있는 자는 “눈이 멀고(눈을 감은), “옛 죄들의 정화를 잊어버린” 자이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다(베드로후서 1:9).

26. 내가 왜 이런 말을 했는지, 여러분은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이 말을 한 것은 여러분을 다시 슬프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여러분을 굳건히 세우기 위함입니다. 우리 선조들 시대에는 비방이 용납되지 않았으나, 비방을 들은 사람은 귀를 막거나, 그 비방을 선한 방향으로 돌리곤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비방하는 자의 말에 쉽게 귀를 기울이며, 교회에서 낭독되는 성경 구절을 들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열망에 차서 그 말을 듣습니다. 우리 선조들 시대에는 어떤 말도 경건하지 않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항상 조용하고 질서 정연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분노와 고함, 일그러진 표정으로 말합니다. 이보다 더 추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선조들 시대에는 불평이 없었으나, 각자는 주어진 것을 감사히 받아들였기에 쓴 것도 달게, 불쾌한 것도 기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이것저것을 비난하며 불평하는데, 단지 우리 마음속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 앞에서 그렇게 함으로써 불평하는 자들을 더 많이 만들고, 하나님을 더욱 슬프게 하고 있습니다.

27. 형제들아,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안 됩니다. 이것은 수도자의 행실이 아니며, 비난과 원망이라는 작은 죄가 아닙니다. “원망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하리라” (고린도전서 6:9)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평하는 것 또한 작은 죄가 아닙니다. “그들 중 어떤 자들(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이 불평하다가 전멸자(하나님)의 손에 죽었으니, 너희도 불평하지 말라”(고린도전서 10:10) 기록되어 있듯이 말입니다. 또한 욕설은 결코 사소한 악이 아닙니다. 기록된 바와 같이, “너희 입에서 썩은 말이 나오지 않게 하고 오직 믿음을 세우는 데 유익한 말만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주게 하라. 또한 너희가 구원의 날에 표징으로 삼은 하나님의 성령을 모독하지 말라”(엡 4:29-30). 사도가 무엇을 경고하고 있는지 보지 못하십니까? 바로 헛된 말을 함으로써 우리가 성령을 노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아니면 심판의 날에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대로, 모든 헛된 말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28. 그런데도 왜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는가? 우리에게 닥칠 일을 앞두고 왜 올바른 태도를 갖추지 않는가? 누군가 너를 꾸짖었느냐? 성 다윗이 그랬던 것처럼, 속으로 분함을 누르고 너그럽게 그 모욕을 견뎌내라. “내가 침묵하였고”라고 말하며 “말하지 아니하였노라”(시 76:5). 모욕은 그렇게 지나가겠지만, 네 미덕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 마음에 드는 음식이 나오지 않았나요? – 있는 그대로의 음식에도 감사하십시오. 당신이 나쁘다고 비난하는 그 음식조차도, 다른 이들은 맛이라도 보고 싶어 할 테니까요. 게다가 우리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떻게 순종을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을 자랑할 필요가 있겠는가? 금욕이나 기도로, 맨땅에서 잠을 자는 것으로, 혹은 그 밖의 어떤 고행으로도 우리는 자신의 의지를 절제하는 것, 즉 키노이 수도 생활과 뗄 수 없는 이 순교만큼 삶에서 그토록 훌륭한 덕을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악의와 모든 아첨과 위선과 시기심과 모든 비방을 버리라”고 성 베드로 사도가 명령한 대로, “갓 태어난 젖먹이들처럼, 순수하고 거짓 없는 영적 젖을 사랑하여, 그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나자” (베드로전서 2, 1–3), 만일 우리가 주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맛보았다면, 만일 우리가 영생을 원한다면, 만일 선한 권고를 따르는 것을 거부하지 않는다면, 만일 지치지 않고 낙심하지 않으며, 항상 죄와 실족에서 스스로를 돌이킨다면. 왜냐하면 이러한 방식으로 경건한 삶을 살아감으로써, 우리는 의심할 여지 없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생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59. 성육신하신 분의 가정을 세우신 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기억하며, 그분의 영에 따라 새롭게 된 삶 속에서 살아가며, 낡은 것을 벗어나자.

259. 1) 성육신하신 분의 구원 사역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기억하며, – 2) 그분의 영에 따라 새롭게 된 삶 속에서 살아가며, – 3) 낡은 것, 즉 모든 악의 근원인 정욕의 유혹과 시기심을 피하고, – 4) 모든 선을 열망하며, 그것을 사랑하고 이를 위해 애통해합시다. [4, 40]

29. 목마른 자가 마시기를 원하고 굶주린 자가 먹기를 원하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갈망해야 한다. 그 말씀을 듣는 것을 통해 우리는 지극히 많은 것을 얻기 때문이다. 무심한 자들은 열심 있는 자로, 열심 있는 자들은 더욱 열심 있는 자로 변모하게 된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들려오는 말씀은 무엇인가?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3, 16)라고 말씀하신다. 그저 “주셨다”는 것뿐만 아니라, “심지어 죽기까지, 그것도 십자가의 죽음까지”(빌 2,8) 주셨습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우리는 아담의 불순종으로 마귀에게 노예가 되어 죽음의 지배를 받고, 죄에 팔려 썩어 없어질 운명에 처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오셔서 모든 이를 위해 자신을 속죄 제물로 내어주셨으며, 우리를 죽음의 권세에서 구원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피로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고(계 1:5), 기록된 바와 같이 우리를 자신의 왕국의 상속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분의 굳건하고 강력한 사랑을 보십니까? 그분의 인간을 향한 헤아릴 수 없는 자비를 보십니까? 그분의 자비는 얼마나 헤아릴 수 없고, 그분의 관대함은 얼마나 측량할 수 없는지요! 그분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셨습니다!

30. 그렇다면 우리 가련한 자들은 이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다시 죄로 돌아갈 것입니까? 노예의 삶을 갈망할 것입니까? 불명예와 썩어짐과 심판을 선택할 것입니까? – 결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은 자라면, 어찌 다시 그 가운데서 살겠습니까? 혹시 모르시겠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세례를 받았으니, 곧 그분의 죽음에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그분과 함께 죽음에 묻혔으니,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새 생명으로 살아가기 시작할 것입니다” (롬 6:2–4). – 그러니 형제들아, 우리가 다시 약속한 대로, 그리고 수도 서원을 받을 때 약속한 대로, “의와 경건함으로, 성도들에게 마땅한 대로” (엡 5:3), 화목과 한마음, 정직, 고귀함과 경건함, 거룩함과 절제 속에서, “무지하던 시절의 옛 욕망들” (베드로전서 1:14)에 휩쓸리지 않고, 마치 불을 피하듯 예전의 욕망에서 벗어나, 우리 믿음의 반석 위에 굳건히 서겠습니다.

31. 이것이 바로 갱신입니다! 그렇다면 낡은 것은 무엇일까요? – 우리 조상 아담이 그 유혹에 사로잡혀 낙원에서 쫓겨나, 이 눈물 어린 현세의 삶이라는 멍에를 짊어지게 된 죄의 유혹, – 카인이 자신의 제물보다 아벨의 제물이 더 높이 평가되자 교만하여 형제 아벨을 죽인 후, 평생 신음하며 떨며 살아가게 된 그 시기심이다. 이 두 가지 정욕으로 인해 셀 수 없이 많은 악이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이로 인해 땅 위의 모든 생물을 멸망시킨 대홍수가 일어났고, 이로 인해 소돔과 고모라는 불과 유황으로 재가 되어 그들의 불경건을 드러내는 쓰라린 운명을 맞이했습니다. 보십시오, 죄와 눈의 정욕, 그리고 세속적인 교만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32. 그러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아 자유를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지위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 그 자유 안에서 굳건히 서며, 그분께서 우리를 영화롭게 하신 그 영광 안에서, 모든 헛된 것을 멀리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며, – 치욕을 영광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상처를 즐거움으로, 박해를 복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여기며, 마치 지금 기념하는 우리 성부들과 형제들이 그러했듯이,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처럼. 그렇게 살아감으로써, 우리도 이곳에서 “세상에서 빛나는 별들처럼,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키며”(빌 2,15) 살아가게 될 것이며, 장차 올 세기에는 하나님의 왕국의 상속자가 될 자격을 얻게 될 것입니다.

 

260. 성부들의 생애를 살펴보는 것이 우리 안에 모든 선한 것을 되살리고, 모든 악한 것에서 우리를 멀어지게 한다는 점을 지적한 뒤, 각자의 순종의 본성에 따라 그분들을 본받도록 모든 이를 권면한다.

260. 1) 성부들의 생애를 살펴보는 것이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선한 것을 되살리고, 모든 악한 것에서 우리를 멀어지게 한다는 점을 지적한 뒤, – 2) 각자가 자신의 순종의 방식에 따라 그들을 본받도록 권면하며, – 3) 우리 안에 불순종과 나태함, 불평이 없기를 바란다. [4, 41]

1. 이 시대에 우리 성부들의 행적을 읽을 때, 우리가 거기서 얼마나 큰 유익을 얻고, 어떤 기쁨을 누리는지 말로 다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내게 말해 보라, 그들의 불멸의 업적과 기적, 그리고 악마들에 대한 승리를 되새기는 것보다 더 달콤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내 생각에 이 유익은 이성적인 사람뿐만 아니라 돌조차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이를 통해 사람의 마음은 밝아져 육신의 어둠을 드리우는 사색을 떨쳐내고, 영혼은 감동하여 신성한 사랑으로 날아오릅니다. 진실로 말할 수 있듯이, 이(즉, 성인들의 모임) 하나님의 에덴 동산이며, 물질적인 식물이 아니라 영적인 다양한 열매로 가득 차 있고 아름답게 물들어 있는 곳, 생명의 숨결이 향기롭게 퍼지는 곳, 뱀이 상처를 입히지 않고 오히려 상처를 입으며, 쫓아내지 않고 쫓겨나는 곳, 마땅히 그래야 할 대로 말이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있다면, 성도들을 천국이라 부르는 사람은 잘못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분들 위에 머무르시며, 마치 관대한 왕처럼 당신의 종들에게 선물을 베풀어 주십니다. 이 나라가 있는데 내게 이 땅의 것들이 무엇이겠습니까? 헛된 명성과 소멸될 운명에 처한 육신이 무엇이겠습니까? 금과 은, 화려한 옷, 그리고 그 밖의 온갖 헛된 것들이 무엇이겠는가? – 이 모든 것은 빛과 어둠, 생명과 죽음, 진리와 꿈을 비교하는 것만큼이나 비교할 가치조차 없다.

2. 만일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말로 다 할 수 없고 영광스러운 기쁨”(베드로전서 1:8)으로 기뻐합시다. 우리가 더 나은 몫을 얻었고, 하늘의 고귀함으로 빛나는 택함 받은 백성에 속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에 기뻐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힘이 닿는 한 그들의 미덕을 본받기 위해 분발하여, 우리가 “경건의 겉모습만 있고 그 힘은 저버린”(디모데후서 3:5) 헛된 이름을 지니고 있지 않음이 분명해지도록 해야 한다. 약국에 가서 각자가 자신의 병에 맞는 약을 고르듯이, 우리도 성도들을 잘 본받고자 할 때, 각자의 삶에 맞는 본보기를 선택하여 그들의 생애에서 유익을 얻어야 합니다. 저는 합당하지 않은 자로서 합당하게 목회한 이들을, 경제 담당자는 신실하고 현명하게 재정을 관리한 이들을, 식량 담당자는 분별력 있고 성실하게 식량 관리를 한 이들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카노나르크, 접대 담당자, 요리사, 식사 담당자, 그리고 어떤 직무에 배정되었든 모든 이들도 마찬가지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보고 본받고자만 한다면, 누구에게나 좋은 본보기가 있을 것입니다.

3. 누구에게도 불순종이 없기를 바란다. 부름을 받자마자 즉시 나타나라.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가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 특히 경제 담당자에게는, 죄가 없지도 않고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다. 또한 누구도 자신의 임무를 거부하지 말고, 설령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기꺼이 수행하라.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수도자의 완덕이다. 또한 누구도 불평하며, 우리 공동체가 이것저것이 부족하다고 비난해서는 안 된다. 그런 자는 광야에서 불평했던 자들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며, 그들의 파멸은 놀라울 정도이다(민수기 16장). – 그런데 그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 무지하고, 참을성이 없으며, 정신이 어린아이 같은 자들, – 그토록 많은 위로를 받는 것은 고사하고, 공기를 마실 자격조차 없는 자들이다. – 그러나 전지전능하신 우리 하나님께서 무지한 자들을 깨우치시고, 지혜로운 자들을 더욱 지혜롭게 하시며,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님 안에서 그분의 왕국으로 모두를 구원하시기를 바란다.

 

261. 세상의 정신에 따라 바라는 모든 것은 덧없으나, 오직 미덕만이 영원히 복되다

261. 1) 세상의 정신에 따라 바라는 모든 것은 덧없으나, 오직 미덕만이 영원히 복되다. – 2) 그것은 우리가 교회에서 매일 성도들을 기리며 기억하는 바와 같이, 이곳에서도 이미 복을 누린다. – 3) 그렇다면 저곳에서는 어떨까? 그곳에서 성도들은 해와 같을 것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이다. – 4) 우리는 이를 얻기 위해 경쟁하되, 이와 정반대되는 것을 피해야 한다. [4, 42]

4. 사람들 중에는 어떤 이들은 부를, 어떤 이들은 권력을, 또 어떤 이들은 성공을, 또 다른 이들은 쾌락을 행복으로 여긴다. 그러나 이 중 그 어떤 것도 행복할 만한 가치가 없으니, 아무것도 영원히 지속되지 않고 이 세상과 함께 사라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세상에서도 그것들은 많은 이들에게 오래도록 위안이 되지 못하며, 마치 꿈처럼 잠시 나타났다 곧 사라져 버린다. 오직 한 가지 미덕만이 기쁨의 대상이 될 만하니, 그것은 영원히 지속되는 소유로서, 그 소유자들을 행복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 예로부터 얼마나 많은 통치자와 위로자들이 있었는지 떠올려 보자. 그들 중 단 한 명도 칭찬받을 만한 기억으로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덕을 갖춘 이들의 명성은 꺼지지 않는다.

5. 그리고 이는 우리가 행하는 일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어제는 성 금입(Zlatooust)을 기렸고, 오늘은 영원히 기억되는 에프라임을 기리며, 내일은 또 다른 성인을 기릴 것입니다. 이처럼 그들은 마치 별들처럼 일 년 내내 차례로 교회의 하늘에서 빛나며, 그들에 대한 기억 속에서 우리의 입을 열어 그들을 찬양하게 하고,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발걸음을 비추어 줍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거룩한 말씀이 참으로 옳습니다: “그가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닮게 하려고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 아들이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또 그가 미리 정하신 자들을 부르셨고, 부르신 자들을 의롭다 하셨으며, 의롭다 하신 자들을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9-30). 이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우리도 과연 그러한 부르심과 영광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물론 참여합니다. 우리 겸손한 자들에게도 십자가를 지는 삶과 복된 삶의 가치가 낯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까지 박해를 견디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도 선한 신앙 고백을 위한 수고를 해왔기 때문입니다. 오, 덕의 힘이 얼마나 놀라운지요! 그리고 그것을 굳게 지키는 이들에게 그것이 무엇을 베풀어 주는지요!

6. 그러나 이것은 현세에 관한 것이며, 장래의 세상에서는 어떨까? 오, 누가 그 복락과 그 영광을 묘사할 수 있겠는가! 주님께서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때 의인들은 해처럼 빛날 것이다”(마태복음 13,43). 그분께서 친히 진리의 해이시므로, 의인들도 그분과 일치하는 자로서 해처럼 빛날 것이라고 약속하셨으니, 사도가 말한 대로 “우리가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으면 그분과 함께 영광을 받을 것” (롬 8,17)이라 했습니다. 또한 주님께서 친히 아버지께 간구하신 바와 같이: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이, 내가 있는 곳에 그들도 나와 함께 있게 하소서. 아버지께서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나를 사랑하사 내게 주신 내 영광을 그들이 보게 하소서” (요한복음 17:24). 보십시오, 우리가 어디로 갈 것입니까? –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 (골 3,1), 그곳은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는 곳, 천사들의 찬송이 울려 퍼지는 곳, 하늘에 기록된 맏아들들의 교회인 곳, – 우리와 같은 품위에 계신 형제들과 아버지들이 계신 그곳으로, 우리는 머지않아 그곳으로 갈 것이며, 거기서 “그분과 함께 기뻐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분의 통치로 세대를 다스리시는 분’과 함께 기뻐하기 시작할 것입니다.”라고 복된 다윗이 노래한 대로(시 65:7) – 천 년이나 만 년의 세대가 아니라, 늙지 않고 끝이 없는 세대를 다스리시는 분과 함께 말입니다.

7. 이 모든 것에 만족하는 이는 누구인가? – 온종일, 매 순간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어 영혼이 졸지 않도록 그토록 열심인 자이다. 왜냐하면, 그런 졸음 속에서 정욕은 짐승처럼 우리를 덮쳐 영혼을 장악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경계를 늦추지 않고 스스로를 지켜보는 한, 포식자가 훔쳐가지도 않고 뱀이 납치하지도 않을 것이다. – 그러므로 깨어 있어야 하며, 앞서 말한 내용과 그 반대되는 것, 즉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는 자들에게 닥칠 고통들을 마음으로 샅샅이 살펴야 한다: 꺼지지 않는 불, 칠흑 같은 어둠, 잠들지 않는 구더기, 그리고 그 밖의 모든 것들; 이러한 생각들로 가득 차고 감싸여, 우리가 원수의 올가미를 피하고, 흠 없이 이곳을 떠나 천국을 얻게 되기를 바란다.

 

262. 우리가 광야에서 이곳으로 넘어올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가 많으니, 말로만 감사할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도 감사해야 한다.

262. 1) 우리가 광야에서 이곳으로 건너올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가 많으니, 말로만 감사할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도 감사해야 합니다. – 2)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보답할까요? –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자, –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 산 위로 올라가게 하여 사람들이 보게 하자. – 3) 이를 위해 세상의 것을 버리고 하늘의 것으로 우리를 아름답게 단장하자. – 4) 그것은 우리에게서 멀지 않으니,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4, 43]

8.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언제나 따뜻한 마음으로 간절한 기도를 통해 그분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보십시오, 지금도 어떤 은혜가 임하고 있는지! 우리가 아가르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도망쳐야만 했을 때, 주님께서 마치 광야에서처럼 우리가 내몰린 그곳에서, 그것도 여러 날 동안 우리를 먹여 주지 않으셨습니까? 그 후 주님께서 이곳에서, 아름다운 성전과 품위 있는 거처가 있는 이곳에서, 우리를 받아준 바로 그분—우리와 한마음인 형제—를 통해 우리에게 안식의 문을 열어 주지 않으셨습니까? –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시는 사랑이 얼마나 큰지요! 마땅히 하셔야 할 일 중 그분이 하지 않으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 우리가 도망치는 내내 그분은 우리에게 빵과 포도주, 생선, 그리고 그 밖의 필요한 것들을 필요한 만큼, 심지어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공급해 주셨기에, 이를 목격한 이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이 모든 것에 대해 단순히 감사할 뿐만 아니라, 우리 가난한 자들은 목숨까지 바쳐야 마땅합니다. 그러니 부디 우리 안에 그분에 대한 가장 굳건한 사랑을 불태우고, 온전히 그분께 의지하며, 그분께 가장 기쁜 보답을 드리도록 합시다.

9. 그렇다면 우리는 그분께 어떤 보답을 드려야 할까요? – 우리가 이곳에서도 그분의 찬양받는 이름을 영화롭게 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이 말씀하신 바,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에서 빛나게 하여, 그들이 너희의 선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태복음 5:16)는 말씀이 우리에게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사도도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항상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우리가 모든 곳에서 그분의 지혜의 향기를 풍기게 하심이라. 우리는 구원받는 자들에게나 멸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께 그리스도의 향기로운 향기이니라.” (고린도후서 14, 15). 보라, 덕을 행하는 이는 어디에 살든지 그리스도의 향기임을 알 수 있지 않은가? 덕은 그 본성상 숨겨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것을 실천하는 이는 모든 이에게 드러나게 된다. “산 위에 있는 성은 숨겨질 수 없느니라”(마태복음 5,14)라고 기록된 대로이다. 별은 인간의 영혼을, 산은 덕의 높이를 상징하는데, 그곳에 오른 자들은 “세상에서 빛나는 별들처럼 빛나며, 그리스도의 날에” 스스로를 “찬양할 만한 생명의 말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빌립보서 2:15). 그러니 형제들아, 우리도 이 거룩한 산에 올라가자.

10. 그러나 우리가 먼저 세속적인 것, 즉 육신의 욕망과 생각, 그리고 이 세상 삶의 파멸을 부르는 쾌락들을 버리지 않는다면 그곳에 오를 수 없습니다. 그것들로부터 멀어지는 것이야말로 덕을 향한 등반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더러운 생각에서 정화되고, 눈이 올바르게 보도록 절제되며, 귀는 악한 소리를 듣지 않도록 닫히고, 혀는 헛된 말을 하지 않도록 금하며, 손은 부적절한 접촉을 삼가고, 발은 평화의 길로 나아가며, 모든 지체가 마땅한 선을 행하도록 훈련받고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형상으로 거룩하게 되기를. 세상의 왕은 육체적으로 아름답고 단정한 이를 호의적으로 맞이하지만, 하늘의 왕은 겉보기에는 가난하고, 눈이 멀고, 절름발이이며, 사람들이 경멸하는 다른 겉모습상의 결점을 가지고 있더라도, 영적으로 아름답게 단장된 이를 기뻐하십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비천한 자들은 고귀해지고, 무명인 자들은 영광스러워지며, 가난한 자들은 부유해집니다. 바로 이 이유로 복된 사도들은 어부 출신임에도 온 땅의 지도자로 나타났습니다. 여기서 성 안토니우스는 학문을 배우지 않았음에도 현자들보다 더 지혜로웠습니다; 이 때문에 – 우리와 더 가까운 예를 들자면 – 우리 타대오, 스키프족 출신의 노예가, 아시다시피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높은 경지에 이르러 세상에서 영광스러운 인물이 되었습니다.

11. 오, 우리에게 베푸신 우리 선하신 하느님의 형언할 수 없는 인간 사랑이여! 그분은 우리에게 그분께 나아갈 수 있는 얼마나 편리한 길을 허락해 주셨는가! 이는 중재자도, 돈도, 어떤 유리한 기회를 기다릴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다만 원하기만 하면 –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 그러니 하늘에서 위대해지고자 하느냐? 여기서는 마지막이 되기를 선택하라.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기를 원하느냐? 정욕으로부터 영혼을 평온하게 하라. 하나님의 눈으로 보임을 원하느냐? 진리를 위해 싸워라. – 그러나 누가 이에 만족하겠는가? – 기꺼이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진리를 행하기를 사랑하며, 하늘의 복으로 풍성해지기를 갈망하는 자이다. – 우리도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생명을 주는 계명을 실천하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든 성도들과 함께 하늘나라를 얻게 하소서.

 

263.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와 같이 전심으로 자신의 의무를 다하라

263. 1) 각자는 하나님 앞에서와 같이 온 마음을 다해 자신의 의무를 다하라. – 2) 나는 나의 의무를, 너희는 너희의 의무를 다하라. 그리하여 우리는 서로의 도움이 되어, 공동의 번영을 이룩하자. [4, 44]

12. 순종을 이행하는 자와 순종을 지휘하는 자 모두 온전한 주의와 열심을 다하여, – 수도자처럼 – 각자의 일을 바로잡아야 한다. – 경제 담당자와 부경제 담당자, 식량 관리인, 요리사, 식사 담당자, 그리고 그 밖의 어떤 일을 하는 자라도 – “주님의 일을 소홀히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선포하는 무서운 맹세에 걸리지 않도록 (예레미야 48, 10); 오히려 “누가 충성스럽고 지혜로운 종인가? 주인이 그를 자기 집의 청지기로 세우지 않겠느냐? 주인이 돌아와 그가 그렇게 일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은 복이 있도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은 그를 자기 모든 재산을 관리하게 하리라” (마태복음 24, 45–47). 보라, 주님께서 잘 섬기는 자에게 어떤, 그리고 얼마나 큰 영광을 주시는가? 분명히, 잘 섬기지 않는 자에게는 이와 정반대의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므로 여러분, 각자가 맡은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자신의 구원을 얻으십시오. 관리자는 관리자답게 육신의 필요를 충족시키되, 누구에게나 마땅한 것을 주되 편애나 사심 없이, 오직 선의와 형제애로 모든 일을 행하십시오. 식량 담당자는 형제들에게 음식을 어떻게 제공할지 살피되, 그들을 편안하게 해 주고자 하는 한 가지 소망으로 진심을 다해 일을 수행하며, 식량 창고에는 상한 것을 아무것도 보관하지 말라. 요리사는 음식을 조리하고 양념할 때 양심을 지키되, 마치 하나님께 직접 섬기는 것처럼 하라. 식당 담당자는 식탁과 그곳에 필요한 모든 그릇을 깨끗하게 유지하며, 형제들에게 주님께 섬기듯 봉사하라. 다른 이들도 각자의 소임에서 이와 같이 행하도록 하라.

13.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 중 일부를 다른 이들에게 대립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부름받은 바에 따라 다른 이들을 섬기는 자신의 의무를 다하도록 노력하게 하려는 것이다. 모든 보상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올 것임을 명심하며, 그분의 지혜로운 눈앞에서 행해야 한다. – 나, 이 겸손한 자에게도 내 집안을 세우는 일이 맡겨지지 않았습니까? – 그렇습니다. 게다가 가장 큰 일입니다. – 그러므로 내가 여러분의 영혼을 돌보고 깨어 있으며, 각 사람을 간청하고 훈계하며, 개인적으로나 모두와 함께 하나님의 진리와 다가올 심판을 선포해야 하는 것처럼, 여러분도 게으름 피우지 말고 각자의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 그리하여 우리는 한 몸과 한 영이 되리니, 이는 우리가 우리 소명의 한 가지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라. 서로를 지체들처럼 사랑하며, 서로를 참아 주고, 서로를 돌보며, 서로의 짐을 지어 주자. 그리하여 마지막 때가 왔을 때, 게으름으로 헛되이 보낸 시간을 뒤늦게 후회하지 않도록 하라; 오히려 우리가 항상 그 마지막 날을 위해 잘 준비되어 있고, 진심으로 확신을 가지고, 이곳에서 선한 양심을 가지고 떠나 하늘나라를 얻도록 합시다.

 

264. 싸웠다: 비난한다

264. 1) 싸웠다: 책망한다. – 2) 교만에서 그 원인을 지적하며, 이는 미리 “한 번 건드려 봐, 내가 그에게 한 방 먹여 주마”라고 가르치다가, 나중에 실제로 그렇게 행동으로 드러나게 한다. – 3) 이에 대한 해결책은 마음에 선한 의도를 깊이 뿌리내리는 것이다. [4, 45]

14. 내가 여러분 곁을 잠시 떠났을 뿐이지만, 돌아와 보니 여러분 가운데 무질서가 벌어지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무질서는 모든 사람에게 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며, 어떤 이들은 손을 뻗어 서로를 미친 듯이 붙잡고 분노와 고함 소리를 지르며 싸웠습니다. – 그들 중 한 사람에 관해서는, 그가 아직 평신도이며 형제단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에 관해서는, 이미 세상에 대해 십자가에 못 박힌 자로서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혀 있어야 할 수도사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행동을 했기 때문에 지극히 이상한 일입니다. 어찌하여 형제여, 네가 십자가에서 내려와 마치 못에서 풀려난 것처럼, 유대인의 방식대로 그리스도 예수님께 손을 얹었느냐? 그분께서 친히 말씀하셨으니, “이 내 작은 형제들 중 한 사람에게 한 것을 곧 내게 한 것이라” (마태복음 25:40). 그런데도 너는 이 말씀을 하신 분의 얼굴을 두려워하지 않았느냐? 네 생명의 수호자인 천사 앞에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느냐? 너를 바라보는 형제들과 주변 사람들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았느냐?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추게 하여, 그들이 너희의 선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주님께서 명하셨다(마태복음 5:16). 그러나 네 악한 행실은 오히려 너를 어둠으로 뒤덮어, 너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당하게 만들었다. 아아, 죄인인 나여! 우리는 얼마나 높은 삶의 경지로 부르심을 받았는데, 어디로 추락하여 악한 세속인들처럼 수치를 당하고 있는가. 너는 그가 먼저 싸움을 걸었다고 말하지만, 주님께서 뺨을 때린 종에게 얼마나 온유하게 말씀하셨는지 듣지 못했느냐? “내가 악하게 말했으면 그 악을 증언하라. 선하게 말했으면,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요한복음 18:23). 그리고 다시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그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23:34). 이를 알면서, 너는 책망받을 때에도 축복하고, 맞을 때에도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모욕받을 때에도 침묵해야 했다 (고린도전서 4:12, 13). 그런데 너는 선한 이를 본받지 않고, 도대체 누구를 본보기로 삼은 것이냐? – 보라, 사도가 명령한 계명이 어떠한가? “모든 분노와 진노와 격분과 고함, 그리고 모욕을 모든 악의와 함께 너희에게서 제거하라”(엡 4:31); 그런데 너희는 주먹다짐까지 하며,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고, 서로 목을 조르기까지 했느냐? – 이토록 하나님의 율법이 경멸당했구나. “대장장이가 헛되이 은을 단다”는 예언의 말씀처럼(예레미야 6,29). 나 또한 겸손히 지칠 때까지 수고하지만 헛된 일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나는 내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니, 때로는 주의 깊게 귀 기울이는 청중들이 많기 때문이다.

15. 그러나 이러한 불경건의 원인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죄를 지적하는 것뿐만 아니라 치료법도 제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악한 양심이 이 악한 소식을 꾸며냈으니, 이는 자만심에 찬 자기 자랑이자 악한 마음의 계략이다. “만약 그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한다면,” 마음속으로 건방진 자가 말하길, “나는 그에게 이렇게 대답하리라; 만약 그가 나를 이렇게 공격한다면, 나는 그에게 똑같이 갚아주리라.” – 그러다가 어떤 이유로든 화가 치밀어 오르면, 그때 우리는 마음속 깊이 품고 있던 생각을 밖으로 드러내 버립니다. “‘마음의 넘침이 입으로 나오느니라. 선한 사람은 선한 보물에서 선한 것을 꺼내고, 악한 사람은 악한 보물에서 악한 것을 꺼낸다’(마태복음 12,34-35)라고 말씀하신 분의 말씀은 틀림없기 때문이다.

16. 그러니 우리 마음을 선한 의도의 보물창고로 삼읍시다. 그러면 우리는 악한 것을 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투지도 않을 것이며, 설령 누군가 너희의 오른쪽 뺨을 치더라도 다른 쪽 뺨도 그에게 내어줄 것이며(마태복음 5,39), 그 밖의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복음의 계명에 따라 행동할 것이다. – “이스라엘 집아, 너희는 왜 죽어 가는가?”(예레미야 33, 11). 여기에서 우리도 이 말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왜 날마다 헛되고 무의미하게 삶을 허비하며, 음식과 술을 즐기는 데는 전문가인 척하면서도, 하느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일에는 무지한 채로 지내는가? 앞으로 우리 스스로를 굳건히 다지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슬퍼하지 말고, 화내지 말고, 격분하지 말고, 소리치지 말자. 그런 감정들에서 마치 화살처럼 모욕적인 말들이 튀어나오거나, 심지어 그보다 더 나쁜 것들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 “모든 것을 살리시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본디오 빌라도 앞에서 선한 고백을 증언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여러분에게 “유언”하노니, “더럽히지 않고 흠 없는 계명”을 지키십시오 (딤전 6, 13. 14), 그리하여 내가 여러분을 가장 무거운 참회 처분에 처하게 하지 않도록 하고, 오히려 여러분이 언제나 모든 일에서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행함으로써, 나 같은 죄인을 위로하고,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며, 영원한 복을 누릴 수 있게 하려 함이라.

 

265. 또한 다투는 자들을 책망하고, 성찬식에서 그 동기를 빌려와 모든 이에게 화해를 권유한다.

265. 1) 또한 다투는 자들을 질책하고, 2) 성체성사에서 그 동기를 빌려와 모든 이에게 화해를 권유합니다. – 3) 이에 눈에 띄지 않게 동정함에 대한 말씀을 덧붙이며, 이를 칭송하고, 4) 이를 위한 수단으로 하느님을 경외하는 마음의 불 속에서 회개하고 눈물로 속죄하는 것을 제시한다. [4, 46]

17. 나도 구원을 주는 대화에 포만감을 느껴서는 안 되며, 여러분도 영혼에 유익한 경청에 포만감을 느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 둘 다 물을 퍼 마시고자 갈망하는 자들처럼, 그 어느 쪽에도 만족할 줄 모르는 갈망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번영의 징표이자, 구원의 조건이자 행위이다. 말씀은 행실로 이끄기 때문이다. 선한 말씀은 선한 행실로, 그와 반대되는 말씀은 반대되는 행실로 이끈다. 우리가 선을 행하기를 원하므로, 마땅히 선한 가르침과 유익한 대화를 통해 마땅히 해야 할 일에서 실수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바로 이 점을 가르치며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희 입에서 썩은 말이 결코 나오지 않게 하라. 오직 믿음을 세우는 데 유익한 말만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주게 하라. 또한 구원의 날에 너희에게 표징이 되신 하나님의 성령을 거스르지 말라.” 그리고 이어서: “모든 분노와 노여움과 격분과 고함, 그리고 모욕을 모든 악의와 함께 너희에게서 제거하라. 서로 친절하고 자비로우며, 서로 용서하라. 마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처럼”(엡 4:29–32). 보십시오, 주님께서 무엇을 명하고 계십니까? 이 계명의 정의가 얼마나 정확한지요? – 다른 곳에서는 더 엄격하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은 육체와 그 정욕과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갈 5:24), 즉 죄악된 행위에 대해 마치 흔들림 없이 굳건히 서 있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싸움을 벌인 우리들이 어떤 정죄를 받아 마땅한지 생각해 보라. 그들은 단지 말다툼을 한 것뿐만 아니라 서로에게 손을 댔다. 그리고 너, 아직 평신도이면서 우리 무리에 막 편입된 자여, 수도자에게 손을 뻗는가? – 그리고 너, 수도사여, 서원을 준비 중인 자를 지팡이로 때리려 감히 시도하는가? – 아니, 너는 이미 수도사가 아니라 모노마크(단독 투사)이며, 금욕자가 아니라 강도이며, 평화의 아들이 아니라 분노의 자식이다. 욕설에서 폭력이 시작되지 않았는가? 그리고 폭력 뒤에는 때로 살인이 뒤따르지 않는가? – 왜 이렇게 행동한 자들은 더 나쁜 결과로 이어지지 않도록 마땅한 참회를 받게 될 것인가.

18. 사랑하는 여러분, 온유하고 평화를 이루시는 주님의 제자들로서, 서로 온유하고 평화롭게 지내십시오. – “평화를 누리고 모든 사람과 거룩함을 지키라.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이니라”(히브리서 12:14). 우리가 성찬으로 모시게 되는 주님의 몸과 피를 생각하며 부끄러워하십시오. 지극히 깨끗한 성물을 받아들이는 영혼은 자신 안에 혼란과 광란, 그리고 부적절한 욕망을 품어서는 안 됩니다. 불멸의 샘에서 물을 떠 마시는 입은, 더럽고 악취 나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거룩한 피로 성화된 눈은, 짐승 같은 시선을 보내거나 음란한 광경이 마음에 새겨지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신성한 보물을 받아들인 손은, 부적절한 어떤 것에도 닿아서는 안 됩니다.

19. 또한 모든 지체는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순결함을 유지하고 지켜져야 한다. 물론 모든 미덕은 위대하고 소망스러운 것이지만, 동정심만큼은 아닙니다. 동정심은 뱀이 그 속임수로 첫 조상들을 속이기 전에 이미 낙원에서 가장 먼저 빛을 발했습니다. 동정심은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는 영광을 누렸으며, 동정심은 사람을 천사로 만들고, 동정심은 세상을 썩지 않는 상태로 이끌어 올립니다.

20. 이에 누군가 묻기를,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얻을 수 있겠느냐? – 무수한 수고와 땀을 흘리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있겠는가? – 왜냐하면 위대한 일이 기다리고 있는 곳에는, 그에 걸맞은 큰 노력과 적지 않은 수고가 따르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날카로운 칼이 공격자들을 잘 베어내듯이, 하나님의 경외심 속에 있는 영혼도 마치 불 속에서 단련되고 눈물의 물로 단련된 것처럼, 악마의 생각을 사냥감처럼 잡아내어 베어내야 한다. 만약 무뎌지면, 다시 갈아내어 다윗에 대해 노래된 것처럼 수천이 아니라 수만 명을 무찌를 수 있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높은 곳에서 우리를 대적하는 자들이 많으니” (시 55:3)이며, 우리를 대적하여 싸우는 악의 영들은 셀 수 없이 많으니, 그들에게 끝까지 저항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그리스도의 전사임을 드러내고 그를 면류관을 쓴 자로 만듭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자비로 죄를 지은 자들에게는 용서가, 선하게 행하는 여러분에게는 열심의 강화가 있기를, 그리하여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거듭거듭 성취하고, 그로 인해 천국을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266. 열심 있는 사람은 악한 행위뿐만 아니라 악한 생각에서도 자제하며, 이를 통해 하나님의 평안을 얻어 신성한 관상 속에서 황홀함에 빠진다.

266. 1) 열심 있는 사람은 악한 행위뿐만 아니라 생각에서도 자제하며, 이를 통해 하나님의 평화를 얻어 신성한 관상으로 황홀함에 빠집니다. – 2) 그러니 우리 스스로를 경계하여, 생각들이 우리 영혼에 머무르지 못하게 합시다. 특히 음탕한 생각과 분노 어린 생각은 더욱 그러합니다. [4, 47]

21. 부주의하고 안일한 자들은 간음, 음행, 수간, 부정함, 그리고 그 밖의 온갖 악한 행위와 같이 불법적인 행위를 저지르는 것 자체를 죄로 여긴다. 이러한 행위들에 대해서는 율법 도 엄하게 다루고 있다. 그러나 열심 있고 계명을 온전히 따르기를 원하는 사람은, 육신에 부도덕한 움직임을 일으키는 부적절한 마음속의 환상들조차 죄가 아니라고 여기지 않으며, 온갖 방법으로 자신 안에서 이 모든 것을 없애고, 해로운 정욕으로부터 평온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이것이 바로 사도가 말한 대로(롬 5: 1)에서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이며, 그 안에 안주하게 된 영혼은 큰 기쁨으로 기뻐하며, 만족할 줄 모르는 달콤함을 누리며, 하나님에 대한 묵상에 빠져들고 그분의 형언할 수 없는 위대하심을 깊이 관조하는 것을 사랑하여,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 잊어버릴 지경에 이릅니다. 그러나 만일 영혼이 그러한 상태에서 벗어나 말로 다 할 수 없는 욕망에 흔들리게 되면, 그때 영혼은 거친 바다에 휩쓸린 난파선처럼 동요하고 요동치게 된다. 그리고 주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시면, 난파당할 위험에 처하게 된다.

22. 그러므로 우리는 악한 생각이 우리 안에 머무르지 못하게 하고, 즉시 그 뿌리째 뽑아내야 한다. 뱀이 안으로 침투할 틈을 찾아 조금씩 그곳으로 밀고 들어간다면, 죽음을 낳을 때까지 결코 물러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왜 성경은 뱀이 사람의 발뒤꿈치, 즉 행위의 끝을 노릴 것이며, 사람은 뱀의 머리를 노릴 것이라고 말하는가? 즉, 영혼에 죄악된 생각이 처음 스며드는 순간을 노린다는 뜻이다(창 3:15). 그러니 우리는 사악한 생각들의 침입에 용감하게 맞서, 그것들로 인해 정욕이 타오르기 전에 미리 그것들을 소멸시키고, 그리하여 죄의 거센 파도를 막아내어, 우리도 성 다윗과 함께 “우리는 불과 물을 지났으나 주께서 우리를 안식처로 인도하셨나이다”(65,12)라고 말할 수 있게 합시다. – 그러나 영혼을 뒤흔들고 타락시키는 것은 이 한 가지 정욕(즉, 음욕)뿐만이 아니라, 분노가 더욱 그러합니다. “분노로 인해 내 눈이 흐려졌나이다”(시 6:8)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그들의 분노는 뱀과 같나이다”(시 57:5)라고도 하며, 또 “미친 자의 가슴속에는 분노가 깃들어 있다”(전도서 7,10); 마지막으로 “분노에 사로잡힌 자는 파멸을 맞이한다”(시라 1,22). 과연 이러한 격정은 무엇에서 비롯되는가? 스스로를 교만하게 여기고 타인을 경멸하는 사고방식에서 비롯되는데, 이는 자기를 무언가 특별한 존재로 여기며(갈 6,3) 낮은 자들 위에 우뚝 서려는 태도이다. 마음이 겸손한 자는 주님을 본받아 온유하고 온화하며, 다투지 않고 소리치지 않기 때문이다. 설령 그런 일이 생기더라도 남에게 상처를 주는 것보다 차라리 모욕을 참으며, 타격을 받아도 타격으로 갚지 않는다.

 

267. 순종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서로 도와야 하며, 언제나 거절하거나 지체하지 말고, 지시하는 이들의 말에 순종해야 한다.

267. 1) 순종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도와야 하며, 언제나 거절하거나 지체하지 말고, 지시하는 이들의 말에 순종해야 한다. – 2) 분개하는 생각에 굴복하지 말라. 그것은 악한 자에게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 3) 이를 위해 모든 일에 필요한 인내를 갖추라. [4, 48]

23. 오늘은 무엇에 대해 이야기할까요? 우리 삶의 겉모습, 즉 규율에 따른 삶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비록 우리가 유배 중이지만, 한두 명이 아니라 많은 이들이 함께 수도원처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수도원의 풍요로움은 누리지 못하지만, 필요한 것은 비록 힘들게라도 마련하고 있습니다. – 그것도 우리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해서도 말입니다. 끊임없이 형제들과 신부님들, 그리고 나그네와 가난한 이들이 우리를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를 받아들이고 만족시켜 주려면 상당한 정신력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경제 담당자는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분별력 있고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경제 담당자에게 그와 뜻을 같이하며 그와 마찬가지로 경각심 있는 부경제 담당자가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또한 부경제 담당자 역시 모든 일에 그를 따르는 식량 관리자가 없다면 아무것도 제대로 해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식량 관리자에게도 요리사라는 훌륭한 조력자가 없다면 일이 원하는 대로 진행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요리사에게도, 그 뒤를 잇는 다른 이들에게도, 그리고 이 다른 이들을 포함한 나머지 모든 이들에게도, 각자가 서로를 돕는 동료가 없다면 일이 순조롭게 풀리지 않을 것이다. 마치 하나의 몸에 많은 지체가 있듯이; 모든 지체가 서로를 돌보듯이,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하듯이, 형제회에서도 이와 같은 질서가 지켜지지 않는다면, 그곳에는 공동생활도, 평화도, 한마음도 없을 것이며, 오히려 소외된 자들과 분열, 그리고 부패만이 있을 것이다. –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누가 감히 자신의 사적인 욕망대로 무언가를 행하거나, 이미 자신의 사적인 일이나 수공예에 몰두해야 할 때, 공동의 일과 모두에게 유익한 일에 참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는 어떤 일에 부름을 받았을 때, 누가 감히 거절하고 자신 위에 권위를 가진 자들에게 복종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 사람은 더 이상 순종하는 자가 아니라 불순종하는 자이며, 형제가 아니라 낯선 사람이다. 그러나 만일 그런 일이 있었다면, 앞으로 이를 경계하여, 그러한 죄에 빠진 자가 그 무질서에 대한 정해진 참회를 짊어지지 않도록 하라. – 사도가 명령하는 것을 듣지 못했느냐? “서로 친절하고 자비로우며,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말입니다”(엡 4,32). 우리도 서로 그렇게 행하며, 서로의 짐을 지고,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의 율법을 이행합시다(갈 6,2).

24. 내가 전에 여러분에게 부탁했듯이, 지금도 부탁합니다. 생각의 무거운 짐 아래 지쳐 쓰러지지 말고, 성령의 기쁨으로 우리 앞에 놓인 싸움의 과업을 완수합시다. 믿음의 창시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자에게 기도를 주시고 이기기를 원하는 자에게 승리를 주시는 그분을 바라봅시다. 얼마 전 갑자기 악천후가 몰아쳤다가 곧바로 공기가 맑아졌던 것을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잠시 우리를 괴롭히다가 곧 다시 사라집니다. 아, 그들이 우리를 전혀 괴롭히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왜 우리 영혼 속에 항상 평화를 누리지 못할까?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변덕스러워서 하루조차도 똑같은 모습을 유지하지 못하니, 하물며 항상 그러할 수는 더욱더 없다. 그러나 보라, 악마의 악의가 얼마나 완고한지, 쫓겨나도 다시 달라붙고, 어둠이 천사의 빛으로 변모하여 우리를 속임수로 유혹하려 한다. 그러나 뱀이 우리에게서 물러가게 하시고, 우리가 항상 이렇게 고백하게 하소서: “그리스도여, 우리는 주님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의 고백을 거짓으로 만들지 않겠습니다.” 혹시 우리가 어떤 상태에서 어떤 상태로 넘어왔는지 모르십니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이는 곳으로, 무지에서 지식으로, 불명예에서 영광으로 넘어온 것이 아닙니까? 우리에게는 말씀도 있고, 지식도 있고, 찬양도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참으로 존귀한 아들들이니, 여러분의 금 같은 순종에 따라 금으로 단장된 자들입니다.

25. 그럼 무엇이 더 부족한가? – 인내이다. 사도가 말하기를, “인내가 필요하니,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히브리서 10:36) 했다. 그 약속이 무엇이겠습니까? –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데려가리니,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려 함이라. 내가 가는 곳을 너희가 알고,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요한복음 14:2–4). “너희의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하리라” (요한복음 16:22). 이를 생각하며, 성도들 안에서 드러날 말로 다 할 수 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영광을 바라보며, 우리는 모든 것을 너그럽게 견뎌내자. 굶어야 한다면 굶을 것이며, 모든 것을 넉넉히 갖게 된다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할 것이며; 죽게 된다면,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영생을 상속받기 위해 반드시 죽을 것입니다.

 

268. 사순절 전의 사순절 기간 동안 감각적 쾌락에 빠지는 것은 기독교 정신에 어긋난다

268. 1) 사순절 전의 사순절 기간 동안 감각적 쾌락에 빠지는 것은 기독교 정신에 어긋납니다. – 2) 우리를 세상에서 이끌어내시고, 우리가 본받는 수많은 성인들이 빛난 그 고요한 삶으로 인도해 주신 주님께 감사드리자. – 3) 그러니 그분께 충실하며, 앞으로 닥칠 신앙 고백의 시련을 준비하자. [4, 49]

26. 다가오는 날들(사순절 전의 축일)은 보통 사람들이 이곳에서 열리는 연회와 축제로 인해 일종의 축제 기간으로 여기지만, 이 날들이 고기를 먹지 않는 절제를 통해 일반적인 절제를 알리는 것이지, 과식과 술주정을 알리는 것이 아님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는 헬레니즘 축제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반면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모든 것을 마음껏 누릴 수 있더라도, 사도께서 가르치신 대로(롬 13:14) 육신을 탐욕스럽게 돌보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악은 세속의 법칙으로 스며들어 세상을 자기 뜻대로 이끌고 있습니다. 우리는 절제가 죄의 어머니임을 알기에, 우리에게 허용된 것조차도 절제하지 못하는 일을 피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조상 아담은 금기된 것을 맛보는 것을 자제하던 동안, 낙원에서 신성한 깨달음과 영감으로 충만해지며 기쁨과 즐거움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자제를 깨고 불순종의 나무 열매를 맛보자마자, 즉시 달콤한 낙원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리하여 그에게 자제하지 못함은 죽음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소돔 사람들은 빵에 배부른 나머지 수치스러운 정욕에 휩싸여 하나님의 진노를 자초했고, 불과 유황에 휩싸여 소멸되었다. 또한 미움받는 에서 역시 탐욕에 사로잡힌 눈으로 단 한 끼의 음식 때문에 장자의 권리를 내어주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들도 “백성들이 먹고 마시며 일어나 춤추기 시작하였다”(출 32,6)고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연회와 술취함, 비명과 악마적인 춤이 낮뿐만 아니라 늦은 밤까지 이어진다. 절제하지 못함은 그토록 악한 것이며, 이를 통해 죽음도 세상에 들어왔다.

27.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러한 헛된 일들로부터 건져내시고, 절제가 아닌 절제, 술주정이 아닌 절제, 난동이 아닌 평화, 소란이 아닌 고요, 욕설이 아닌 감사, 음란이 아닌 순결, 거룩함과 정결함이 있는 삶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삶 속에서 우리의 모든 신성한 성부들이 빛을 발하셨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정욕을 밟아 밟아 버리고, 악마들을 쫓아내며, 천사와 같은 존재가 되어 기적을 행하고, 천상의 영광을 얻으시고, 세상에서 경탄의 대상이 되셨습니다. 그중 한 분이 바로 복자 안토니우스이시니, 우리는 오늘 그의 생애를 읽으며 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서 그를 어떻게 영광스럽게 하셨는지 보았습니다. 그로 인해 세상의 왕들조차 그에게 편지를 쓰고, 그가 쓴 글을 읽는 것을 큰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우리 겸손한 자들도 이 복된 이들의 삶을 따르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행위로 그들과 경쟁하고 있음을, 우리 수도사들의 완전함, 세상에 대한 포기, 고향과 친족, 그리고 모든 지인들에 대한 단절, 복종과 순종이 증명해 줍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앞에 놓인 신앙 고백이며, 이를 위해 우리는 박해 속에서도 굳건히 서 있습니다.

28. 그러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을 베풀어 주셨고, 우리가 영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즉 우리가 원한다면 매일 축제처럼 지내며 시들지 않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에 서로 기뻐하고 함께 기뻐합시다. 그러므로 간청하노니, 우리의 투신과 앞으로 닥칠 고백을 더욱 굳게 붙잡읍시다. 이미 통치자가 우리의 사건을 검토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으며, 조만간 왕의 사절이 나타날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떠도는 소문들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계시다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 그분께서 이전의 상황에서도 우리를 도우셨다면, 앞으로 또한 분명히 도우실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용기 있게 굳건히 서고, 오직 우리 자신에게만 귀를 기울인다면,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일에 힘을 주셔서,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끝까지 살아가며 천국을 얻게 하실 것입니다.

 

269. 문 앞에서의 박해: 하나님의 도움을 의지하고, 박해를 견뎌낸 대가로서 – 곧 믿음으로 인해 – 주어지는 약속들에 용기를 얻어, 이를 기꺼이 맞이합시다.

269. 1) 문 앞에서의 박해: 하나님의 도움을 의지하고, 박해를 견뎌낸 대가로 주실 약속들—즉, 믿음에 대한 약속들—에서 용기를 얻어, 이를 기꺼이 맞이합시다. – 2) 이단자들과는 교제해서는 안 되며, 특히 겉으로는 신실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이단자인 자들을 피해야 한다. – 3) 성상파괴주의는 하나님의 말씀의 성육신에 관한 교리와, 하나님을 공경하고 경배하라는 계명에 대항하여 싸운다. [4, 51]

29. 이제 우리는 절제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때입니다. 성대한 사순절이 코앞에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방에 퍼지는 소문들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게 되었고, 우리의 생각과 말마저 다른 주제로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미 이전에 여러분에게 통치자가 우리의 사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소문에 따르면 그는 니코미디우스 총독을 통해 위협을 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만약 우리가 신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이에 대응한다면, 그는 이를 참지 못하고 서둘러 자신이 계획한 일을 실행에 옮길 것입니다. 이에 대해 할 말은 없으나, 새로운 박해에 대비해야 합니다. 사도가 말한 대로,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 안에서 넘치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위로도 넘치나니”와 같이, 고난이 늘어나는 곳에는 성령의 위로도 늘어난다는 확신을 가지고 말입니다. “만일 우리가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해 슬퍼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겪는 것과 같은 고난을 인내로 견디는 너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니, 우리에 대한 소망은 너희에 대한 것임을 아노라. 만일 우리가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해 기뻐한다면, 너희가 우리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처럼 위로에도 동참함을 알기 때문이라” (고린도후서 1:5–7). 이 말씀에서 사도는 우리가 마치 한 몸과 한 영인 것처럼, “하나의 소망으로 부르심을 받은(에베소서 4:4) 자들로서 서로 고통과 위로 안에서 교제하고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도 말고 소심해하지도 말고, 그리스도의 선한 군사들로서 각자의 무기를 차고, “육신의 무기가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강한 무기로, 원수를 무너뜨리기 위해 굳건히 서서” (고린도후서 10:4), 즉 분별력, 용기, 절제, 진리를 지니고, 이를 통해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실천합시다: “이 도시에서 쫓김을 당하면 다른 도시로 도망가라” (마태복음 10,23) – 그리고 그곳으로 떠나면서,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을 염려하지 말자(마태복음 6,31).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며, 너를 경멸하지 아니하리라”(여호수아 1,5). 그러니 주님께서는 그곳에서도 우리에게 자비의 문을 열어 주실 것이며, 모든 일에서 우리의 도우미가 되어 주실 것이다. 이런 약속을 받았는데 어떻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주님의 제자로 서 있다는 사실에 어떻게 즐거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성도들과 사도들도 박해를 받았는데,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모욕하고 쫓아내며, 나를 위해 거짓으로 온갖 악한 말을 할 때, 너희는 복이 있도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크니라” (마태복음 5,11.12). 그러므로 현재는 기쁘고 즐거운 때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과 영원한 생명, 그리고 끝없는 왕국을 주기 때문입니다.

30. “이방인의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성읍에도 들어가지 말라” (마태복음 10,5). 우리는 이것을 이단자들에 대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교회에도, 그들의 집에도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평화의 아들’, 경건한 자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그곳에 머물며, 지난 몇 해 동안 그랬던 것처럼 그곳에서 음식을 받을 것이다. 진리를 지키는 척하는 자들, 즉 자신들이 올바른 지도자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고, “미혹하며 미혹당하는” (딤후 3:13), “그들의 심판은 의롭다”(롬 3:8). 우리는 흔들림 없는 믿음과 흠 없는 삶을 지키며, 어느 한쪽도 폄하하거나 모욕하지 말고, 양쪽 모두에서 온전하고 완전하게 머물자.

31. 이번 고백의 주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관한 교리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그림으로 묘사할 수 있다고 고백하지 않는 자는, 그분이 육신으로 보이셨음을 고백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육신으로 보이신 것과 성화 묘사의 대상이 되신 것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또한, 주님의 거룩한 성화를 경배하지 않는 자는 주님 자신도 경배하지 않는 것이다. 성화에 묘사된 것에는 원형이 있으며, 성화를 바라보는 자는 눈앞에 원형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화상 묘사를 공경하느냐 하지 않느냐, 그 형상을 숭배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것은 원형에게도 영향을 미치며, 만일 성화상에 주님께서 묘사되어 있다면, 주님의 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이처럼 주님의 성화를 공경하고 그 형상을 숭배하는 자는 주님을 공경하고 그분께 숭배하는 것이며, 이 성화를 공경하지 않고 그 형상에게 절하지 않는 자는 주님을 공경하지 않고 그분께 숭배하지 않는 것이다. – 성화 반대론자들은 비록 주님을 숭배한다고 말하지만, 거짓말을 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성경의 말씀이 적용된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옳으나, 그 행실은 그분께 심판받을 것이다”(딤전 1:16).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성화를 숭배하며, 성모 마리아와 그분의 성화를 숭배하며, 성인과 그들의 성화를 숭배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성스러운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사도적 가르침입니다. 자녀들이자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통해 이 믿음의 보증을 온전하고 흠 없이 보존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 그러니 우리 겸손한 자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우리 입을 열어” (엡 6,19) “말씀”을 주시어, 담대히 진리를 말할 수 있게 하시고, 우리의 소망을 부끄럽게 하지 않게 하시며, 여러분과 함께 우리 앞에 놓인 사명을 흠 없이 완수하고, 우리 모두가 천국을 얻게 하소서.

 

270. 다시금 사순절 기간의 방종과, 더 나아가 세속적인 삶에 대한 훈계, 그리고 하나님께서 수도자들을 이로부터 건져 주심에 대한 감사

270. 1) 다시금 올리브 축제 기간의 방탕함과, 더 넓게는 세속적인 삶에 대한 질책, 그리고 하나님께서 수도자들을 이로부터 건져 주심에 대한 감사. – 2) 사도들과 선지자들, 그리고 모든 성도들을 본받아, 세속적인 정신으로 살아가는 평신도들을 위해 슬퍼해야 한다. [4, 52]

1. 나는 종종 여러분의 삶을 칭찬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는 아첨에서가 아니라 진실로, 세속적으로 사는 이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하고자 하며, 여러분을 더욱 열성적으로 만들려는 뜻을 품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연회와 술자리, 노래와 춤, 그리고 세상에서 적들이 꾸민 그 밖의 온갖 행태들—“그들의 심판은 의로우니”라고 기록된 대로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부들이 우리에게 전한 규례에 따라 밤낮으로 주님을 찬양하며, 시편 찬송이 이어지고, 성경 봉독이 이어지며, 기도가 이어집니다. 그 후에는 생각 속에서 마음의 동향을 살피는 경건한 묵상, 마음속에서 신성한 말씀으로의 교훈, 또한 적절한 침묵과 품위 있는 대화가 이어집니다; 또한 서로를 섬기며,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정해진 분량과 기준에 따라 이루어지나, 명절에는 대개 어떤 위안이 제공되기도 한다. 보라, 주님께서 유다에게 하신 말씀을 들어보라. “네가 하는 일을 속히 마치라. 그러나 누워 있는 자들 중 누구도 이 말을 깨닫지 못하였으니,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바와 같다.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주머니를 가지고 있었기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절기에 필요한 것을 사라. 아니면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고 말씀하신 것을 두고 의아해했다.” 보라, 그들이 절기와 가난한 자들에 대해서도 염려했음을 알 수 있지 않은가? 우리도 겸손한 자로서, 보시다시피 이를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를 이러한 삶에 참여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가 행한 의로운 행실 때문이 아니라” – 우리가 이 땅에서 선한 일을 아무것도 행하지 못했으니 – “오직 그분의 자비로 말미암아”(디도서 3:5), 그분께서 우리를 그 삶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는 통회하는 마음으로 항상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주님, 주님, 제가 무엇이기에, 제 아버지의 집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저를 이토록 사랑해 주셨나이까.”

2.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삶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이런 것을 좀처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는 밤이 지나면 낮이 이어지며, 이 세상의 근심과 일들, 부에 대한 자만, 그리고 그 밖의 온갖 번잡함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숨 쉴 틈조차 없습니다. 때로는 서로 얽히고설키기도 하고, 때로는 적대적으로 부딪치기도 하며; “맹세와 거짓말, 살인과 도둑질, 음행이 온 땅에 퍼져 있다”는 예언자의 말씀(호세아 4:2)처럼, 그 밖에도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든 일들이 많습니다. 이 모든 것을 상기시키며, 복자 크리소스톰은 이 세상에서 구원받을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무서운 말씀이지만, 진실입니다.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에 대해 슬퍼하지 않고 애통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서로의 형제가 아니겠습니까? 우리 모두 같은 피를 나누지 않았는가? 같은 흙에서 나지 않았는가? – 가축이 급류에 휩쓸려 심연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면 누구나 저절로 연민을 느끼는데, 형제들과 같은 믿음을 가진 이들의 파멸을 보는 것이 그보다 더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이유로 복된 사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들을 위해 끊임없이 가슴 아파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롬 9:2, 3). 예언자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을 위해 울었고, 그 울음을 성경에 상세히 기록해 두었습니다. 위대한 모세는 하나님께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이제, 만일 그들에게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겠다면 용서하시고, 그렇지 않다면 나를 주의 책에서 지워 주십시오”(출 32:32); 또한 성도들 각자도 같은 연민에 사로잡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 우리도 그들의 발자취를 따르고자 한다면, “각자 자기의 일만 생각하지 말고, 형제의 일도 돌보라” (빌 2,4) 뿐만 아니라, 방탕한 삶을 사는 이들, 이단에 사로잡힌 이들, 이교주의에 물든 이들을 불쌍히 여기고 마음으로 아파하며 세상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와 간구를 드리라”는 사도의 가르침(딤전 2:1)대로 행해야 한다. 이렇게 행함으로써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우리 자신에게 유익을 얻게 될 것이며, 정욕적인 습관을 뉘우치고 정화함으로써, 그것에서 벗어나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생을 얻게 될 것이다.

 

271. 사순절은 소란과 헛소문을 잠재우고, 평신도들을 경건한 생활로 이끌었다.

271. 1) 사순절은 소란과 소문을 잠재우고, 평신도들을 경건한 생활로 이끌었다. – 2) 금식은 영혼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거처로 만드니, 이를 기쁨으로 맞이하고 지켜야 한다. – 3) 그러나 육체적으로 금식할 때, 영혼으로도 금식해야 하며, 원수가 겉으로는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지만 실상은 추하고 쓰라린 정욕과 욕망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 4) 또한 교회 안팎의 금식 규율을 성실히 지켜 나가자. [4, 54]

3. 사순절 기간은 일 년 중 다른 시기와 비교할 때, 파도가 일지 않는 안전한 피난처와 같아서, 그곳으로 모여드는 모든 사람이 영적인 평안을 얻는다. 이는 수도자들뿐만 아니라 평신도들, 어린이와 어른, 상사와 부하, 왕과 사제, 모든 계층과 모든 연령층에게 구원을 주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도시와 마을은 소음과 소문에서 벗어나 평온을 되찾고; 대신 곳곳에서 시편 찬송과 찬양, 기도와 간구가 울려 퍼지니, 이를 통해 우리 선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평안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진실한 마음으로 경외와 떨림을 품고 그분 앞에 엎드려 울며, 앞으로는 잘못을 고치고 더 나아지겠다고 약속할 때 말입니다. – 그러나 평신도들에게는 교회 지도자들이 말씀을 전하게 하십시오. 저는 여러분을 섬기는 가장 존경받는 수장으로서, 마땅히 전해야 할 바를 간결하게 말씀드리기 위해 여러분께 말을 걸겠습니다.

4. 금식은 영혼의 갱신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듯이, “우리의 겉사람은 쇠퇴해 가지만”,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집니다”(고린도후서 4:16). 만약 갱신된다면, 원초적인 아름다움의 본을 따라 아름다운 모습을 갖추게 될 것이며, 아름다워짐으로써 나와 아버지가 그에게 와서 거처를 삼으리라”(요한복음 14:23) 말씀하신 분을 사랑스럽게 끌어당기게 됩니다. 금식이 우리를 하나님의 거처로 만드는 것과 같은 유익한 효과가 있다면, 우리는 금식의 단순함과 자비로움에 부담을 느끼지 말고 기쁨으로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 주님께서는 다양하고 풍성한 음식을 제공하실 수 있으시면서도, 광야에서 빵과 물 하나로 수천 명의 사람들을 배불리 하셨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게다가 열정으로 무장한 채 이러한 식단에 익숙해지면, 더 이상 불쾌하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5. 그러나 금식은 단순히 음식의 부족에만 국한되지 않고, 우리 성부들이 말씀하신 대로 모든 악한 것들로부터도 절제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낙담과 부주의, 나태, 시기, 과도한 열정, 악한 성품, 자기 만족, 제멋대로인 태도를 삼가자. 또한 육신의 정욕도 삼가야 한다. 금식하는 자들에게도 이 다양한 뱀이 덤비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듣듯이, 나를 죽게 한 그 열매는 보기에도 아름답고 맛보기에 좋았다. 그러나 그것이 본질이 아니라 겉모습 때문에 ‘붉은’이라고 불린다는 점에 유의하라. 마치 겉으로는 보기 좋은 붉은 색의 석류를 집어 들었다가 속이 썩어 있는 것을 발견한 것과 같이, 정욕의 달콤함도 이와 같다: 겉으로는 전례 없는 달콤함을 약속하지만, 일단 만족하고 나면 가장 쓴 담즙으로 드러나는데, 이는 양날의 칼보다 더 날카로워 사로잡힌 영혼을 집어삼키는 것이다. 뱀에게 유혹당한 우리 조상 아담이 바로 그런 고통을 겪었으니, 그는 금단의 열매를 맛봄으로써 생명 대신 죽음을 맞이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같은 방식으로 유혹당한 모든 이들도 똑같은 고통을 겪었다. 왜냐하면 그 자신, 곧 어둠 그 자체가 빛의 천사로 변장하듯이, 악을 선으로, 쓴 것을 달콤한 것으로, 추한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치명적인 것을 생명을 주는 것으로 변모시키는 법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 그리고 이러한 방식으로 온통 악의에 찬 그는 끊임없이 세상을 유혹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이러한 미끼에 현혹되지 않을 것이며, 눈에 보이는 먹이를 탐내며 달려들었다가 사냥꾼의 그물에 걸려드는 새들이 겪는 것과 같은 고통을 결코 겪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이성을 통해 악의 매혹적인 가면을 벗겨내고, 악을 있는 그대로 훤히 들여다봄으로써 이를 쉽게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6. 또한 시편을 부를 때 기운을 내고, 찬송에 열심을 내며, 성경 읽기에 주의를 기울이자. 매 시간 정해진 대로 무릎을 꿇고, 우리 손으로 일하자. 일하는 것은 선한 일이기 때문이며, 일하지 않는 자는 음식을 먹을 자격이 없는 자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서로의 짐을 지어 주며, 무엇보다도 “서로 친절하고, 자비롭고, 온유하며, 겸손하고, 자비와 선한 열매로 충만하게” 되도록 힘쓰자 (엡 4,32; 야고보서 3,17). “모든 지성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를” (빌 4,7); 그리고 여기서 너희가 흠 없이 주님의 부활의 밝은 날에 이르도록 허락받기를, 장차 오는 세상에서, 죽은 자들의 부활 후에, 하늘나라를 얻기를 바란다.

 

272. 영혼의 집은 세속적인 집보다 더 큰 정성을 다해 지어야 한다

272. 1) 영혼의 집은 세속적인 집보다 더 큰 정성을 다해 지어야 한다. – 2) 영혼의 집을 짓는 재료는 덕목들,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등이며, 그중에서도 절제는 매우 중요하다. – 3) 매일 금식하며 음식을 섭취하는 것이 이틀이나 사흘 동안 금식하는 것보다 낫다. 이는 신의 가르침과 성부들의 모범이 증명하듯이 말이다. [4, 55]

7. 세속적인 사람들은 값비싼 집을 지을 때, 원하는 일을 끝마칠 때까지 낮이나 밤이나 쉴 새 없이 일하고, 고민하고, 신경 쓰며, 그들의 열의는 그토록 강렬하여, 온 마음이 온전히 그곳(건축 현장)에 머물러 있으며, 천장과 지붕을 어떻게 하면 더 잘 꾸밀지, 바닥을 다양한 대리석으로 어떻게 장식할지, 그리고 그 밖의 모든 것에 어울리는 화려함을 어떻게 더할지 끊임없이 고민하여, 그러한 것들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모든 것이 보기 좋은 모습을 보여주려 한다; 만약 누군가 그들이 그런 수고와 일에서 벗어나게 하려 한다면, 그들은 마치 큰 모욕이라도 당한 것처럼 불쾌해할 것이다. – 우리는 썩어 없어질 집이 아니라 썩지 않는 집을 짓고, 돌과 나무로 지은 것이 아니라 영적인 완전함과 은혜를 정교하게 조화시켜 세우는 자들인데, 과연 게으름을 피우고 이 일에 대한 열정에서 그들보다 훨씬 뒤처지게 될 것인가? 이것이 모든 불의 중에서 가장 큰 불의가 되지 않겠는가? 그 건물은 수많은 육욕에 빠진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수많은 주인들이 바뀌는 과정을 거친 끝에, 결국 버려져 황폐해지고 무너져 내릴 것이지만, 반면 우리 안은 성령을 모시는 성전입니다. 신성한 사도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느니라”(고린도전서 3:16; 고린도후서 6:16)에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을 모신 이들이 이곳을 떠날 때, 그분은 그들에게 내려오셔서 영원토록 그들과 떼어 놓을 수 없이 함께 머무르실 것이다.

8. 그러나 그러한 건물은 어떤 재료로 지어지는가? – 마음에 받아들여지고 심겨지는 미덕들로 지어진다. – 먼저, “지혜의 시작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시 110:10)이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어떤 기초처럼 놓아 주라; 그다음에는 분별력, 용기, 정절, 그리고 진리를 가져다 주시오. 이 미덕들은 서로 의지하며 사랑의 유대로 “제대로 세워지고 온전하게 되어”(엡 4:16) “주 안에서 거룩한 교회로 자라나”(엡 2:21)게것이니, 성경에 기록된 대로입니다. 형제들아, 우리 안에서 항상 이러한 성전을 세워 나가며, 온갖 미덕의 아름다움으로 그것을 꾸미는 일을 그치지 말자. 그리하여 그 성전의 거처가 되실 성령님을 모실 자격을 얻고, 삶의 매력적인 아름다움으로 천사들과 성인들의 시선을 우리에게로 돌리게 하자. – 그러나 미덕 중 하나로 절제가 있으며, 우리는 지금 다른 어떤 미덕보다도 이를 더 열심히 실천하고 있으니, 이 한 가지 과업을 이미 완수했음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이로 인해 우리의 얼굴이 예전과는 달라졌을지라도, 이는 절제로 인해 뿜어내는 창백함으로 빛나는 선한 변화입니다. 늦게 음식을 섭취한 탓에 우리 입이 담즙으로 인한 쓴맛으로 가득 찼을지라도, 그 대신 우리의 영혼은 소망으로 날개를 달아 풍성히 달콤해졌습니다. 그러니 더 나은 것을 선택하고 그에 마음을 두며 기뻐합시다.

9. 어쩌면 누군가는 매일 음식을 섭취하는 것이 금식의 완전함을 해친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 결코 그렇지 않다. 만일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매일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명하지 않으셨을 것이며, 선지자 엘리야는 광야에서 매일 까마귀에게 먹이를 받지 않았을 것이며, 성 안토니우스보다 먼저 광야에서 살기 시작한 성 바오로는 매일 하늘에서 내려오는 양식을 받지 않았을 것이며, 그렇다면 위대한 안토니우스 자신도 하루나 일주일 이상의 금식보다 매일 음식을 섭취하는 것을 더 선호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내 생각에 그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다. – 우리 몸은 하루 종일 수고하며 지치고 기진맥진해져, 휴식과 기력을 보충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창조주께서는 육체가 매일 음식을 섭취함으로써 기력을 보충하고, 다시 더 많은 노동을 감당할 수 있도록 마련하셨습니다. – 이틀, 사흘, 혹은 그 이상 음식을 섭취하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것처럼 쇠약해지고 기력이 꺾인 상태가 되지 않도록 말입니다. – 그로 인해 그들은 다른 이들과 나란히 절을 할 힘도 없고, 마땅히 해야 할 대로 큰 소리로 노래할 수도 없으며, 다른 순종의 일들을 수행할 수도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매일 음식을 섭취하는 것은 연약한 자들에게만 허용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전해진 조상들의 규칙에 따라 완전한 이들에게도 주어집니다. 이제 보시다시피,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선조들의 전통에 따라 정해져 있습니다. 그리고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마지막 날을 기다리며, 그날에 여러분이 모든 성도들과 함께 태양처럼 빛나고 천국을 상속받게 되기를 바라며, 우리에게 육체의 건강과 영의 강인함이 계속해서 주어지기를 빕니다.

 

273. 사순절이 지났습니다. 육신을 굴복시키고 영혼에 덕을 더하여, 신랑이신 그리스도께 기쁨이 되기를 바랍니다.

273. 1) 사순절이 지났습니다. 육신을 굴복시키고 영혼에 선함을 더하여, 신랑이신 그리스도께 기쁨이 되게 하소서. – 2) 영혼은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그러니 그 신부를 위해 신랑을 위해 깨끗하게 지키도록 합시다. – 3) 이를 위해 육신을 절제해야 한다. – 4) 이는 슬픈 일이지만, 그 보상은 크다. [4, 57]

10. 첫 주간을 금식한 후, 우리는 이제 서로에게 예전과는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살이 빠지고 얼굴이 창백해졌습니다. 그러나 사도가 말했듯이, “비록 우리의 겉사람은 쇠퇴하더라도,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집니다”(고린도후서 4,16). 왜냐하면 풍족하게 영양을 공급받는 육체는 대개 활기차고 풍만해 보이기 마련인데, 절제를 통해 영혼도 영적으로 그렇게 변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육체를 다스림으로써 우리는 영혼에 아름다움을 더하게 되었으니, 바로 그 아름다움을 갈망하며 성 다윗이 기도했던 바로 그 아름다움이다: “주여, 주의 뜻대로 내 선함에 힘을 주소서”(시편 29:8). 바로 이 아름다움으로 인해 복된 바울은 우리를 그리스도께 약혼시켰다고 단언합니다: “내가 너희를 한 분 남편께 약혼시켜, 순결한 처녀로서 그리스도께 바쳤노라.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유혹한 것처럼, 너희의 마음이 그리스도에 대한 순수함에서 벗어나 썩어버릴까 하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11, 2. 3). 우리가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모시게 된 이 은총의 위대함을 보십니까? 우리를 약혼시킨 분이 우리의 굳건함을 얼마나 염려하시는지 보십니까?

11. 그러므로 우리 영혼은 약혼한 처녀와 같습니다. 그 처녀가 결혼식이 있을 때까지 남자를 만나지 않고, 온 힘을 다해 자신을 순결하게 지키듯이, 마찬가지로 영혼도 모든 정성을 다해, 자신의 최후가 올 때까지 죄의 타락시키는 정욕으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지켜야 한다. 그 최후의 순간에, 영혼은 신부로서의 성전인 자신의 몸을 떠나, 아름답게 단장되어 선한 행실로 빛나면, 거룩한 천사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반면 죄로 인해 흉측해졌다면, 그리스도를 모욕하는 데에 악마들을 기쁘게 할 것이니, 이는 생각하기도, 말하기도 참으로 슬픈 일이다.

12.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우리 몸을 괴롭히고, 심지어 잔인할 정도로 엄격하게 대하며, 마치 고삐처럼 육체의 충동을 억제하여, 그것이 조타수인 이성을 땅으로 끌어내리지 못하게 한다. 이는 단지 현재의 사순절 기간뿐만 아니라 평생에 걸쳐서 그러해야 한다. 왜냐하면 수도자의 삶이란, 정욕을 억제하고, 생각을 다스리며, 보이지 않는 적들과 끊임없이 싸우는 것 외에 무엇이겠는가.

13. 이는 육신에게는 슬픈 일이지만, “지금 우리가 겪는 가벼운 고난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바라보는 우리에게, 보이는 것들을 따르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들을 따름으로써, 영원한 영광의 무거운 짐을 우리에게 만들어 줍니다”(고린도후서 4:17-18).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선을 위하여, “천사들도 그 안에 엿보기를 갈망하는”(베드로전서 1, 12), 우리가 약혼한 신랑 그리스도 때문에, 간청하고 기도하노니,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를 더럽히는 악한 행실과 불결한 생각으로부터 우리의 영혼을 깨끗하게 지키며, 결코 나쁜 것을 생각하지 말자. 왜냐하면 생각은 불처럼 정욕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정욕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며, 정욕이 싹트기 시작할 때 바로 유혹자를 물리치고, 선한 행실로 영혼을 비추며, 우리 앞에 놓인 절제를 온 마음을 다해 실천하여, 이 세상에서 깨끗하게 떠나, 형언할 수 없는 기쁨 속에서 하늘로 올라가, 그곳에서 그리스도의 천상 혼인 잔치의 기쁨을 누릴 자격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274. 성상파괴주의자들의 공세가 있었다. 견뎌냈다

274. 1) 성상파괴주의자들의 공세가 있었다. 견뎌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참아내는 이 각오를 그 행위 그 자체로 받아주실 것이라고 확신시키며 용기를 북돋아 준다. – 2) 금식에 관하여. 기꺼이 계속하되, 우리 자신의 뜻대로는 아니리라. – 3) 금식하는 수고를 칭찬하며, – 4) 모든 일을 제때에 행하도록 권한다. [4, 61]

14. 어제는 격동이었으나 오늘은 고요함, 어제는 동요였으나 오늘은 평온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찬양을 드린다. 유혹을 물리치시고, 우리에게 닥칠 위협을 기다리는 와중에도 우리가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서도록 우리를 굳건히 하신 분이시니. 이것이야말로 참된 그리스도인들이다! 이것이야말로 거짓 없는 수도사들이다! 그들은 덕을 위해 닥칠 재앙에 언제나 준비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계명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여기지 않는다. 그 적들(박해자들)은 와서 할 말을 하고는 떠났는데, 우리를 두려움에 떨게 한 것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의 행실을 부끄러워한 듯했다. 주님께서는 여러분이 그분을 위해 박해를 받기로 선택했다는 이유로, 충만한 상을 주실 것입니다. 자비가 풍성하신 주님께서는 선한 것을 선택한 자에게, 단 하나의 확고한 결심만으로도 보통 면류관을 씌워 주시기 때문입니다. 유혹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위협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곳곳에서 권력자들의 명령이 내려져, 누구도 이단적인 사상에 가담하지 않도록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가 말하는 바를 들어 봅시다. “지혜로이 세상의 사람들을 대하며, 시간을 아껴라. 너희 말은 항상 은혜로워야 하며, 소금으로 간을 하여, 각 사람에게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를 알도록 하라” (골 4,5-6). 여기서 그는 우리에게 함부로 유혹에 빠지지 말라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침묵하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일 누가 물러선다면, 내 영혼은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히브리서 10, 38)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이쯤에서 그만두겠습니다.

15. 금식 기간이 이미 상당히 지나갔으므로, 우리로 하여금 각자 원하는 대로 더욱더 열심을 내어 앞으로 나아가도록 독려합니다. “슬픔이나 곤란함에서가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금식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나니” (고린도후서 9:7). 그러나 공동체 생활의 법칙은 누구나 마음대로 행동하도록 허용하지 않습니다. 순종하는 이들에게 주어진 절제의 공통된 한계는 바로 자신의 의지를 억제하는 것입니다.

16. 금식은 좋으니, 정욕을 다스리고 육체를 영에 복종시키기 때문이며; 눈물은 좋으니, 죄로 더러워진 마음을 씻어내어 하나님 앞에 깨끗하게 드리기 때문이며; 기도는 좋으니, 마음을 고양시켜 하나님과 대화하게 만들기 때문이며; 사랑은 좋으니, 이웃을 위해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내어주는 ; 열심은 수고를 덜어주고 영혼을 젊게 하며, 노인이도 청년 같은 민첩함으로 행동하게 하므로 선하다.

17. 그러니 우리는 온유하고 열심 있게 행동합시다. 시편을 부를 때는 부지런히 서둘러 참여하고, 일할 때는 힘써 일하며, 침묵할 때는 분별 있게 침묵하고, 대화할 때는 적당히 이야기합시다; 한마디로, 우리에게 명령된 대로 모든 일을 품위 있게 그리고 질서 있게 행하며, 온갖 혼란과 과열로부터 스스로를 절제합시다. 절은 힘이 허락하는 대로, 그리고 평소의 성가 낭송은 신체 건강을 유지하면서 그 수와 방식대로 행합시다. – 그리고 평화의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날들의 여왕이신 그리스도의 빛나는 부활의 날까지 인도하시고, “음식과 음료가 아니라, 의와 평화와 성령에 대한 기쁨”(롬 14:17)이 있는 천국을 누리게 하시기를 빕니다.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으로 우리를 풍성하게 하시기를 빕니다.

 

275. 이단자들과 교제해서는 안 된다

275. 1) 이단자들과 교제해서는 안 된다. 비록 그 때문에 우리가 박해를 받더라도, 하나님의 도움으로 견뎌내자. – 2)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게 되는 것은 복된 일이다. – 3) 그러니 용기를 내자. [4, 62]

18. 수도원 밖에서 지내며, 우리는 이곳에서 할 수 있는 대로, 그리고 상황이 허락하는 대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제 박해자들이 더 이상 그리스도를 위해 박해를 계속하지 않으니, 우리는 예언자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그들 가운데서 나와서 분리되라, 주님께서 말씀하시니라” (사 52,11; 고린도후서 6, 17). 만일 다른 이들이 이 점에 있어 달리 행동한다면, 그들은 심판의 날에 주님 앞에서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그들과 함께 가는 것은 이단자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무관심하게 대하는 것과 다름없다. 보십시오, 그들을 따르지 않는 것이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슬픔과 궁핍, 굶주림, 감옥, 죽음으로 이끕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깁니다”(롬 8:37), 그분은 자신을 갈망하는 영혼을 보시면, 그 영혼이 그분을 위해 고난을 견딜 수 있도록 힘을 주시니, 이는 우리가 오늘 기념하는 사십 명의 순교자들을 비롯한 다른 이들이 증언하는 바와 같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다른 본성을 가졌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직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였기에, 그들의 연약한 육신에 보이지 않는 원수를 이길 힘을 입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찬양하는 바로 그 위대한 위업을 이루어 냈습니다.

19. 참으로, 그리스도의 수난에 조금이라도 동참할 자격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 그분께서 박해를 받으신 것처럼 박해를 받고, 그분께서 매를 맞으신 것처럼 매를 맞으며, 그분께서 채찍질을 당하신 것처럼 채찍질을 당하고, 그분께서 모욕을 당하신 것처럼 모욕을 당하며, 그분께서 감옥에 갇히신 것처럼 감옥에 갇힌 자이다. 이제 왜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는지 보라. “만일 우리가 그와 함께 죽었으면, 그와 함께 살 것이요, 만일 우리가 참으면, 그와 함께 왕이 될 것이요, 만일 우리가 부인하면, 그분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믿지 아니하면, 그분은 신실하시니, 그분은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으시니라” (딤후 2:11–13). 보라, 약속과 경고가 어떠한지, 그 수가 얼마나 많은지.

20. 그러니 용기를 내어 힘내자.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의 은혜로 겪어 온 것들—추방과 감옥, 채찍질—을 헛되게 하지 않도록 하자. 더 말할 것도 없지 않은가? 우리 모두가 감옥에 갇혀 있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러한 삶의 교제는 고통의 교제이기도 하다.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하기” 때문이다(고린도전서 12:26). 그러므로 우리도 영원히 “한 몸과 한 영이 되자. 이는 우리가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엡 4:4)라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아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고 천국을 얻도록 합시다.

 

276. 이 이야기는 불가리아에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성

276. 전설에 따르면, 불가리아의 신실한 기독교인들은 사순절 기간에 고기를 먹는 것보다 차라리 죽음을 감수하겠다고 더 기꺼이 동의했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죽을 때까지 성상 파괴주의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교훈을 얻는다. [4, 63] 이번 설교에서 나는 어떤 전설을 통해 여러분에게 위로를 드리고자 한다. 그 전설은 다음과 같다. 불가리아에서, 그 사정을 잘 아는 이들이 전하길, 그곳의 통치자로부터 포로로 잡혀 있는 기독교인들과 우리 형제들이 성대한 사순절 기간에 고기를 먹도록 하는 사악한 명령이 내려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명령에 복종하는 자들은 살려두고, 복종하지 않는 자들은 죽이기로 했습니다. 불경한 자의 말이 힘을 얻자, 백성들이 아내와 자녀들을 데리고 모였습니다. 울음과 비명이 가득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기독교 법을 지키기 위해, 어떤 이들은 육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여 울부짖었습니다. 마침내 – 아아! 비통한 소식입니다! – 그들은 패배하고 말았으며, 불경한 명령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열네 명은 무리를 떠나 그들 맞은편에 서서, 물러서거나 복종하지 말라고 설득하기 시작했으며, 기독교 법에 어긋나게 고기를 먹는 것에 동의하지 말라고 했다. 이 말을 듣자 백성들 사이에서 절박한 상황에 굴복하고 나중에 회개로 이 죄를 씻어내되, 그렇게 쉽게 죽음을 맞이해서는 안 된다는 외침과 설득이 쏟아졌다. 그러나 그 말은 그들을 조금도 설득하지 못했고 마음을 누그러뜨리지도 못했다. 그들은 하나님과 약속된 복락을 바라보며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스키프인은 이 용사들의 흔들림 없는 굳건함을 보고, 한 사람을 통해 다른 이들을 동요시켜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그래서 한 사람을 죽이고, 그의 아내와 자녀들을 스키프족에게 노예로 넘겨주며, 다른 이들이 이를 보고 흔들려 굴복하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더욱 단호해지며 외쳤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며, 죽은 형제의 곁을 지키고 있다.” 이 고백 속에서 그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고, 주님 안에서 숨을 거두었다. 보십시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왕국의 복음이 얼마나 강력한지! –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며,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몸은 죽일 수 있으나 영혼은 죽일 수 없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영혼과 몸을 지옥에서 멸할 수 있는 분을 더 두려워하라”(마태복음 10:37, 38, 28). 그들은 복음의 계명을 따르고 주님께 순종하며, 성 마카베오 형제들을 본받아 순교의 면류관을 얻었으니, 그 수는 그들을 두 배나 더 많았으니, 성 마카베오 형제들은 일곱 명이었고 이들은 열네 명이었기 때문이다; 저들은 돼지고기를 먹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고난을 당했고, 이들은 기독교 법에 어긋나 금식 중에 어떤 고기라도 맛보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고난을 당했다. – 오, 복된 사람들아! 오, 복된 대가여! 한 순간에 영원한 안식을 얻다니! 이단자들과의 교제를 배교로 여기지 않는 자들은 이에 대해 무엇을 말하겠는가. 만약 저기서 금식 기간에 일반 고기를 먹는 데 동의했다는 이유로 백성이 배교를 저질렀다면, 하물며 여기서 불경스럽게 바쳐진 제물에 동참하는 것은 더더욱 그러하겠지. 그리스도의 성화를 위해 고통받는 것이 순교가 아니라고 말하는 자들은 어디에 있는가? 만약 저기서 그리스도의 교회 법을 어기는 데 동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통받은 이들이 순교의 위업을 이룩했다면, 그리스도께서 친히 나타나신 성화상 앞에서 그리스도 자신으로부터 등을 돌리기를 거부할 때,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순교적 위업이 그보다 더 빛나지 않겠는가? – 그러나 이는 자신의 이단적 궤변으로 인해 이성이 흐려진 어리석은 자들이 하는 말일 뿐이며, 그들은 자신의 타락을 통해 다른 이들도 정통 신앙과 올바른 행실을 저버리게 하려 한다. – 우리는 그분을 찬양하는 자들을 찬양하시는 우리 선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리니, 그분은 이 세대에서도 순교자들을 일으키시나니, – 겉보기에는 가난하고 학식이 부족하며 아내와 자녀를 둔 사람들이라도,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모든 것을 버렸다면, 하물며 우리처럼 결혼하지 않고 세상을 떠난 자들은 때가 되면 성스러운 신앙과 경건의 수호자들과 같은 모습을 보여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는 그리스도께서 요구하실 때가 되면 이루어질 일이다. 지금은 양심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순교의 시련 속에서 굳건히 서자. 바알 앞에 무릎을 꿇지 말자; 생각에 시달릴 때에도 물러서지 말고, 눈물과 기도와 통회와 육신의 분노를 마땅히 다스려 악한 자의 불타는 화살을 끄도록 합시다. 그래야 우리도 사도와 함께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날마다 죽나니, 이것이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에 대하여 가진 너희의 자랑이니라” (고린도전서 15:31); 또한 성 다윗과 함께 “주님을 위하여 우리는 하루 종일 죽임을 당하며, 도살당할 양처럼 여겨집니다”(시편 43:22)라고 말할 수 있게 하소서. 이들과 함께 우리가 하늘나라의 상속자가 될 자격을 얻게 하소서.

 

277. 성모 영보 대축일은 성육신하신 구원의 역사의 시작이므로, 우리가 영적으로 이를 기념할 의무를 지게 한다

277. 1) 성모 영보 대축일은 성육신하신 구원의 역사의 시작이므로, 우리는 영적으로 이를 기념해야 할 의무가 있다; – 2) 또한 이를 기념하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애도해야 한다; – 3) 성 바오로 사도와 모세 예언자를 본받아. [4, 64]

21. 성모 영보 대축일이 도래하였으니, 이는 주님의 축일들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단순히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를 기념하고 경건히 숭배하는 이유인 신비의 의미를 깊이 이해하며 이 날을 기념해야 합니다. 이 신비는 무엇인가? –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시어, 이를 위한 중재자로 지극히 거룩한 동정녀를 택하시고, 그분 안에 거하시며 그분을 통해 당신을 위한 성전을 세우시고, 완전한 사람이 되신 것이다. – 무엇을 위해서인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가 양자의 신분을 얻게 하려 함이라” (갈 4,5)라고 기록된 대로; 우리가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유인이 되고, 더 이상 정욕에 사로잡히지 않고 무정욕하며, 더 이상 세상을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고, 더 이상 육신을 따라 걷지 않고 성령을 따라 걷게 하려 함이다. “육신을 따라 걷는 자들은 육신적인 것을 생각하지만, 성령을 따라 사는 자들은 영적인 것을 생각한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이니,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순종할 수도 없음이니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롬 8:5–8). 이것이, 간단히 말해, 성사의 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를 기리기 위해 영적으로 축제를 지내야 하며, 이를 이어가며 영적으로 행해야 한다. 곧 진리와 경건함, 사랑, 온유, 평화, 오래 참음, 선함, 성령 안에서 행해야만, 우리를 위해 성육신하신 우리 주님의 가정 세우심이 우리에게 있어 헛되고 무익한 것으로 드러나지 않게 할 수 있다.

22.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또한 세상을 위해 기도하고 통회해야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셨으나, 세상이 그분을 배척하기 때문이다. 여러 민족과 언어 집단이 그분을 배척하고, 야만적인 민족들이 그분을 배척하며, 그분을 부르고 그분의 거룩한 이름을 부르는 자들조차도, 어떤 이들은 잘못된 믿음으로, 다른 이들은 불량한 생활로 그분을 배척합니다. – 그분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 이 하나님은 사람이 되셨고, 자신을 낮추사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며,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우리에게 그분의 몸을 먹게 하시고 그분의 피를 마시게 하셨으며, 우리가 그분을 ‘우리 아버지’, ‘형제’, ‘머리’, ‘스승’, ‘신랑’, ‘공동 상속자’라고 부를 자격을 주셨으며, 그 밖에도 많은 일을 하셨으나, 여기서는 자세히 언급할 필요가 없다. – 그러나 그분은 배척당하고 계신다; 배척당하시면서도 이를 참아내시며,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신다 (요한복음 12:47). – 그렇다면 우리는 이에 대해 무엇을 말해야 할까요? 참된 제자들은 동료 제자들의 배반을 슬퍼하며, 이를 통해 스승과 제자 모두에 대한 사랑을 드러냅니다. 이와 같이 참된 종들도 동료들의 불신앙을 보며 마음속으로 고통을 느낍니다.

23. 그러므로 위대한 사도는 “모든 사람, 왕, 그리고 권세를 가진 모든 이를 위하여 기도와 간구와 탄원과 감사를 드리라”고 명한다(딤전 2:1, 2). 그는 또 다른 곳에서 자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그리스도에 관하여 진실을 말하며, 거짓말하지 아니하노니,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 양심에 순종하는 대로 말하노라. 내게는 큰 슬픔이 있고, 내 마음에 끊임없는 고통이 있나니, 이는 내 형제들, 곧 내 육신의 친족들을 위하여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기를 기도할 정도이니라” (롬 9:1–3). 사랑의 힘을 보십니까? 인애의 높이를 보십니까? – 모세도 하나님께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겠다면 용서하시고, 그렇지 않다면 나를 주께서 기록하신 그 책에서 지워 주십시오” (출 32:32). – 우리도 거짓 제자가 아니라 참된 제자로서, 오직 우리 자신만을 돌보는 데 그치지 말고 형제들과 온 세상을 위해 애틋한 마음을 품고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이 주님께 기쁨을 드림으로써 우리는 영생의 상속자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278. 성모 영보 대축일에 동정성을 찬양하며

278. 1) 성모 영보 대축일에 동정을 찬양하며, 2) 원수가 이를 어떻게 적대하는지 상기시키며, 이를 힘써 지키도록 권고한다. [4, 65]

24. 성모 영보 대축일에, 저는 여러분께 성모 영보에 관해 몇 마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바로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게 된 동정 서원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보여드리려는 것입니다. 대천사 가브리엘이 누구에게 “기뻐하라, 은총을 받은 자여,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고 말했습니까? (루카 1,28). –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 마리아가 아니겠습니까? – 그리고 누구에게서 성육신하셔서, 하나님 자신이자 말씀이 사람이 되셨습니까? – 바로 이 복되신 동정녀에게서 아니겠습니까? – 그러므로 이 동정 생활은 모든 이의 생명을 자라게 하였습니다. 이 동정성은 미덕의 여왕이시다. 이 동정성은 그리스도의 신부이자 신부 지도자이시다. 원하신다면, 복되신 바울이 말씀하신 것을 들어보자. “미혼자는 주님의 일을 생각하며, 어떻게 주님을 기쁘시게 할지를 고민하지만, 기혼자는 세상의 일을 생각하며, 어떻게 아내를 기쁘게 할지를 고민한다. 아내와 처녀는 구별됩니다. 결혼하지 않은 자는 주님의 일에 마음을 두어 주님을 기쁘시게 할 방법을 찾으며, 몸과 영이 모두 거룩해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결혼한 자는 세상의 일에 마음을 두어 남편을 기쁘게 할 방법을 찾습니다” (고린도전서 7, 32–34). 이 말씀의 힘을 보십니까? 결혼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신경 쓸 시간을 주지 않고, 세속적인 일에만 신경 쓰게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처럼 동정 생활은 유산으로서 복된 몫을 맡게 됩니다. – 그러나 천국에서도 동정 생활은 우선권을 부여받습니다. 성 요한의 묵시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여자와 함께 더럽혀지지 않은 자들이니, 곧 동정녀들이라. 이들은 어린 양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를 것이라” (계 14,4).

25. 이것이 바로 동정을 선택하고 지켜온 이들이 누리는 특권입니다! –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며 그분과 함께 기뻐할 것입니다. – 그러나 이 일이 높고 초자연적일수록, 우리 생명의 적인 마귀가 다른 정욕들보다 더 강하게, 그와 정반대되는 정욕으로 우리를 타락시키려 애쓴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그리고 세상이 시작된 이래 그가 얼마나 많은 이들을 타락시켰는지, 누가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 이보다 더 비참한 일이 또 무엇이겠습니까? – 우리야말로 눈동자처럼 우리 영혼을 깨끗하게 지켜,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위해, 우리에게 맡겨진 순결이라는 보물을 배반하지 않을 것이며, 미끼에 속아 낚싯바늘을 삼키고 죽음을 맞이하는 물고기들이 겪는 고통과 같은 고통을 우리 자신에게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육신의 달콤함은 낚싯바늘과 같아서, 양육하지 않고 타락시키며, –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부르는 것이니,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를 떨쳐 버리고, 앞으로 숨이 콧구멍에 있는 한 깨끗하고 흠 없이 머물러, 이곳에서 승리를 거두고 떠나,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늘나라를 얻게 하소서.

 

279. 부활절은 모두가 갈망하는 축제이지만, 영적인 부활절은

279. 1) 부활절은 모두가 갈망하는 명절이지만, 영적인 부활절, 즉 죄와 정욕으로부터의 정화는 더욱 갈망할 만한 것입니다. – 2) 이것을 갖지 못한 자는 부활절을 지킬 수도 없습니다. – 3) 그러나 여러분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느님께로 이끄는 올바른 규율이 있습니다. – 4) 그러니 영적인 유월절을 간절히 갈망하여, 장차 올 세상에서도 그 유월절을 누릴 자격을 얻도록 합시다. [4, 67]

26.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금식의 중반을 넘기니 유월절이 다가오는 것을 봅니다. – 그러나 우리는 왜 오고 지나가는 이 유월절을 그토록 간절히 갈망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이미 수년 동안 그렇게 해 오지 않았습니까? 이번 유월절도 지나갈 것이다. 이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날들은 그림자처럼 지나가고(욥 8,9) “우리의 삶은 급류보다 더 빠르게 흘러간다”(욥 9,25), 마침내 그 끝을 맞이할 때까지. 그렇다면, 이 부활절이 그리워지지 않는가? 물론 그리워지죠, 그것도 매우; 어떻게 그렇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매일매일 이루어질 수 있는 부활절은 더욱 그리워집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죄의 정화, 마음의 회개, 감동의 눈물, 양심의 순결, 이 땅에 존재하는 음행, 부정한 것, 정욕, 악한 욕망 및 온갖 죄의 뿌리를 행함으로 죽이는 것이다. 이러한 선한 마음가짐을 갖게 된 자는 일 년에 한 번이 아니라 매일 주님께 부활절, 그토록 간절히 바라는 축제를 거행한다.

27. 그런데 앞서 말한 것들을 갖추지 못하고 정욕에 사로잡힌 사람은 어떻게 유월절을 지킬 수 있겠는가? 배를 신으로 삼은 자나, 육체의 정욕에 타오르는 자나, 시기심에 갉아먹히는 자나, 탐욕에 빠진 자나, 허영에 노예가 된 자나, 그 밖의 다른 정욕에 사로잡힌 자가 어떻게 유월절을 지킬 수 있겠는가? 불에 타는 사람에 대해 그가 평온히 쉬고 있다고, 또는 난파당한 사람에 대해 그가 무사히 항해하고 있다고 누가 감히 주장하겠는가? 그런 말은 용납될 수 없다. 어둠 속에 있는 자가 빛 속에 있지 않은 것처럼, 죄악된 행실 속에 머무는 자는 유월절을 지킬 수 없다.

28.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이 더 나은 상태에 있으며 구원을 굳게 지키고 계시리라 믿습니다”(히브리서 6:9). 우리의 삶은 곧 축제를 준비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보라,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 시편을 부르고, 성경을 읽고, 가르침을 듣고, 기도를 드리는 것이 마치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끌고 그분과 하나 되게 하는 순환과도 같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삶의 방식입니까! 얼마나 복되고 삼중으로 복된 삶입니까!

29. 그러므로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소망의 유월절을 향해 나아가며, 힘을 다해 매일 그 유월절을 기념하도록 힘쓰자. 곧, 주님을 본받아 정욕을 죽이고 덕을 되살리는 것이다; “그분께서도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시며, 우리가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도록 본을 남기셨기” 때문입니다(베드로전서 2:21).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심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각자 자기 짐을 져야 하리라”(갈라디아서 6:5);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깨닫는 자로서, 베풀어 주신 분께 감사를 드리고, 은인을 찬양합시다. 그분은 현재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실 뿐만 아니라, 끝까지 부지런히 일하는 자들에게 약속된 모든 복과 하늘에서 누릴 그 영원한 유월절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자비로 우리 모두에게 허락해 주시기를.

 

280.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받는 것은 복된 일입니다. 그러니 용기를 내어 고난을 준비합시다.

280.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겪는 것은 복된 일입니다. 그러니 용기를 내어 고난을 맞이할 준비를 합시다. [4, 70] 사순절이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화관처럼, 그리스도의 생명을 주는 수난을 기념하는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수난에서 지극히 큰 위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이시며 우리 하나님이신 분이 우리의 죄를 위해 채찍질을 당하셨다면, 우리 같은 쓸모없는 종들이 그분을 위해 채찍질을 당하는 것이 무엇이 대수이겠습니까? 그분이 묶이시고, 묶인 채 끌려가 감옥에 갇히셨다면, 우리도 주님이시며 주인이신 분을 위해 고난을 겪는 것이 무엇이 놀랄 일입니까? 그러나 설령 우리가 채찍질을 당하더라도 그 채찍질을 견뎌낼 것이며, 귀를 뚫리는 고통을 겪어야 한다면 참아낼 것이며, 침을 뱉음을 당해야 한다면 그 침을 견뎌낼 것이며, 마침내 죽어야 한다면 그 영원히 복된 죽음에 우리 자신을 바칠 것입니다. 그리고 앞서 말한 것들 중 어느 하나라도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할 자격을 얻은 자에게는 복이 있도다! 이것이야말로 복이요, 이것이야말로 불멸이다! 사도가 “그 밖의 수고는 아무도 내게 주지 말라.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상처를 내 몸에 지니고 있으니”(갈 6,17)라고 말하는 것을 듣지 못했는가? (갈 6,17), –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아무도 나를 멸시하지 말라. 나는 내 몸에 만왕의 그리스도께서 주신 장식을 지니고 있으니.” 성 이그나티우스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몸에 지니고 있었기에 스스로를 ‘하나님을 모시는 자’라고 칭했습니다. 바로 그런 분이 성 유스트라티오스였습니다. 그는 가장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이제야 비로소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심을 깨달았다”고 외쳤습니다. 오, 복된 외침이여! 오, 삼중으로 복된 영혼들이여! – 우리가 누구를 기리고 있는가? 누구의 탄생일과 서거일을 기념하는가? 누구를 기리기 위해 성스러운 성전을 세우는가? 누구의 유해를 경배하는가? – 순교자들이 아니겠는가? 신앙 고백자들이 아니겠는가? 경건한 이들이 아니겠는가? – 그리고 만약 그들이 이곳에서 주님으로부터 이러한 영광을 누렸다면, 장차 올 세상에서 그들은 얼마나 눈부신 영광을 받게 되겠는가? 이는 상상조차 할 수 없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일이다. – 이것이야말로 좋은 거래다! 이것이야말로 복된 교환이다! – 작은 수고와 공로로 영원하고 끝없는 복을 얻는 것. 우리도 그들을 본받자. 우리의 피를 주님의 지극히 거룩한 피와 섞자. 이는 지금도 가능한 일이라, 본성이 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 변하지 아니하노라” (말라기 3, 6). 그분은 모든 이를 똑같이 사랑하시며, 모든 이를 위해 죽으셨고, 모든 이에게 다다르시며, 마치 고갈되지 않는 달콤함처럼, 모든 이가 구원받기를 원하시니, 이것이 그분께는 부요함입니다. 사도가 말하듯, 그분은 “그분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풍성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0, 12). 그러니 이 어려운 상황에서 그분을 부르자. 그러면 그분께서 우리 영혼에 힘과 굳건함을 주실 것이며, 그분을 의지하자. 그러면 그분께서 우리의 보이는 적과 보이지 않는 적을 꺾어 주실 것이며, 그분을 인내하며 기다리면, 그분은 죽은 자의 부활의 날, 그분이 영광 중에 나타나시는 그 날에 우리에게 면류관을 씌워 주실 것이며, 그날에 우리도 정죄받지 않고 그분의 보좌 앞에 서게 되며, 선한 대답을 드려 천국을 얻게 될 것입니다!

 

281. 주님의 고난을 되새기며, 함께 고난받는 일에 힘내자

281. 1) 주님의 수난을 바라보며, 우리도 함께 고난을 겪도록 마음을 다잡읍시다. – 2) 여러분은 이미 함께 고난을 겪었으나, 앞으로도 계속하여 고난을 견디고 다른 모든 미덕을 실천하십시오. – 3) 그분과 함께 영광을 누릴 것이라는 희망에 힘입어: 그때 함께 고난을 겪은 자들에게는 어떤 기쁨이 있을 것이며, 이를 피한 자들에게는 어떤 슬픔이 있겠는가?! – 4) 이를 생각하며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지키고 모든 선한 일에서 번창하자. [4, 72]

1. 오늘(성수요일)은 거룩한 날이니, 우리가 경배하노라. 이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고난을 겪기 시작하신 날이기 때문이니, 다윗이 말한 대로 “어찌하여 이방인들이 소란을 피우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꾀하는가? 땅의 왕들이 일어나고 방백들이 주와 그분의 그리스도를 대적하여 한데 모였도다” (시 2:1, 2). 그들은 자신들의 주님을 대적하여 악한 음모를 꾸미며 모였는데, 그 자리에서 사악한 유다는 자신의 스승을 부인하고 그분을 팔아넘겼습니다. 그 뒤를 이어 배신적인 입맞춤, 주님을 묶어 모든 이의 원수들에게 재판을 받기 위해 데려가는 일이 벌어졌고, 그 재판에 서신 만물의 재판장이신 주님께서는 질문을 받으시고 대답하시며, 대답하신 후 – 듣기조차 끔찍한 일이지만 – 종의 뺨을 치시고 오래 참으시며 이를 견디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악한 말을 했다면, 그 악한 점을 증언하라. 그러나 선한 말을 했다면, 어찌하여 나를 때리느냐?” (요한복음 18:23); 그 후 모함을 당하고 유죄 판결을 받으며; 그 후 모욕과 조롱, 비아냥, 침 뱉음, 귀를 뜯는 행위, 머리에 지팡이로 때리는 것, 채찍질, 십자가에 못 박힘을 당하시며, 십자가에 오르신 후 자신의 살해자들을 위해 기도하시기를: “아버지, 그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23:34); 마지막으로, 식초가 섞인 담즙을 마시고, 불멸의 분이신 그분은 자신의 영을 하나님이자 아버지께 맡기시고 숨을 거두시며, 죽은 후 갈비뼈가 찔리셨습니다. 이것이 간략히 요약한 주님의 수난입니다! – 그리고 복음서에 기록된 이 이야기들을 분별력 있게 듣는 사람은 더 이상 분노하지도, 슬퍼하지도, 광란하지도, 교만하지도, 형제 위에 우뚝 서려 하지도, 시기하지도, 명예를 탐하지도 않을 것이며; 오히려 온갖 방법으로 자신을 낮추고, 통회하며, 자신을 흙과 재로 여기며,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기를 갈망하고, 그분의 죽음에 합당하게 되어, 그분의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기를 원할 것입니다.

2. 용기를 내십시오, 여러분에게도 말하노니, 여러분은 이미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였고 그분과의 교제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보십시오,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주님의 말씀과 그분의 증언을 위해 추방과 박해를 받고 있지 않습니까? 그 이전에도 감옥에 갇히는 시련을 겪지 않았습니까? 모욕과 모독 속에서 피를 흘리지 않았습니까? 우리 형제들 중 어떤 이들은 고난 속에서 용감하게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습니까? – 이것이 바로 주님 안에서 우리의 자랑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선물입니다! – 그러나 우리의 변덕스러움 때문에 우리의 굳건함은 믿을 수 없으며, 오늘이 무엇을 가져올지 확신할 수 없으니, 그러므로 여러분께 간청하노니, 주님 안에서 굽히지 않고 흔들림 없이 굳건히 서서, 한마음 한뜻으로 복음의 믿음을 위해 힘쓰며, “대적하는 자들 앞에서 조금도 흔들리지 말고” (빌 1:28), “어떤 일에서도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고린도후서 6:3), “오히려 모든 일에 하나님의 종들로서 스스로를 나타내십시오”(고린도후서 6:4) 순종과 겸손과 온유와 너그러움, “큰 인내로: 인내가 필요하니,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약속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올 것이 조금만 더 있으면, 그 일이 이루어질 것이니, 조금만 더 견디면 된다” (히브리서 10:36, 37).

3. 만일 그분이 오셔서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신다면, 우리가 “고난 중에 낙심하지 말아야”(엡 3:13) 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매일 주님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 기록된 바와 같이: “만일 우리가 그와 함께 죽었으면, 그와 함께 살 것이요, 만일 우리가 참으면, 그와 함께 왕이 될 것이요, 만일 우리가 부인하면, 그분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믿지 아니하면, 그분은 신실하시니, 너희는 스스로를 부인할 수 없느니라” (디모데후서 2:11–13). 성도들은 주님께서 하늘에서 그분의 권능의 천사들과 함께 오시어, 그들을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으로 부르시고, 면류관을 씌우시며, 그들과 함께 영원토록 함께 다스리실 때, 얼마나 큰 기쁨을 누리게 될까요? 반대로, 복음을 믿지 않고 그분의 계명을 어긴 자들은 그때 어떤 고통을 겪게 될까요 ?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분께서 자신의 성도들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 안에서 경이롭게 되실 때, 그들은 그분의 면전에서, 그분의 위엄의 영광 앞에서,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게 될 것” (데살로니가후서 1:9, 10).

4. 이를 마음으로 묵상하고 이에 대해 깊이 생각하며, “육체와 영의 모든 더러움을 깨끗이 씻어 내고, 하나님의 두려움 가운데 거룩함을 이루자”(고린도후서 7:1), 더 나은 것을 추구하며, 가장 완전한 경지에 이르자(히브리서 11:16; 6, 1),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형제 사랑을 가지고 서로 친절히 대하며, 서로를 존중하며, 부지런히 게으르지 않고, 열정적인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며, 소망을 가지고 기뻐하며, 환난을 인내하며, 기도에 힘쓰자” (로마서 12, 9–12); 이러한 흠 없는 삶을 진심으로 지키며, 다가오는 부활절을 우리에게 합당한 방식으로 기념하고, 영원히 하늘의 복을 누릴 자격을 얻게 하소서.

 

282. 주님께서 그와 같은 분이시면서, 어떻게 그토록 고통받으시는가?

282. 1) 주님께서 그와 같은 분이시면서, 어떻게 그토록 고통받으시는가? – 2) 온 피조물이 떨었는데, 우리만 무관심하게 남아 있을 수 있겠는가? – 3) 우리를 향한 그토록 큰 사랑에, 우리는 사랑으로 보답하고, 우리 삶의 모든 상황과 박해 속에서도 모든 것을 기꺼이 견뎌내야 한다. [4, 73]

5. 그리고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떠올리면 영혼은 통회와 감동에 휩싸이게 되는데, 특히 그 고난들이 하나하나 이루어졌던 바로 이 시기(성주간 – 금요일)에는 더욱 그러하다. 그 고통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 주님을 죽이려는 음모, 유대인들에 의한 체포, 죽음으로의 인도, 빌라도의 재판에 회부, 심판, 심문, 귀를 자르는 행위, 침 뱉기, 모욕, 조롱, 십자가에 매달림, 손과 발을 못 박힘, 쓸개를 맛보는 것, 갈비뼈를 찌르심, 그리고 그 사이에 일어난 그 밖의 온갖 일들, 이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언어뿐만 아니라 모든 천사의 언어로도 제대로 묘사할 수 없는 것들이다. 이 신비가 얼마나 위대하고 형언할 수 없는 것인지 우리 스스로 상상해 보자! – 마음의 생각을 꿰뚫어 보시는 주님, 모든 인간의 생각을 아시는 분 – 바로 이분이 그분을 사형에 처하는 의회에 끌려가시니, “그분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지탱하시는”(히브리서 1:3) 바로 그분이 죄인인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시며, 구름 속에 물을 모아 제때에 땅에 비를 내리시는 바로 그분이 묶인 채로 끌려가시며, “손바닥으로 하늘을 재시고, 주먹으로 온 땅을 헤아리시며, 자로 산들을 정하신”(사 40:12) 바로 그분이 종의 손에 맞으시며, 땅을 온갖 꽃으로 아름답게 꾸미신 바로 그분이, 수치를 당하시며 가시관으로 머리를 씌우심을 당하시고; 낙원 한가운데 생명나무를 심으신 바로 그분이, 모욕을 당하시며 나무에 못 박히심을 당하셨다. 오, 이 환상들이 얼마나 끔찍하고 초자연적인가.

6. 해가 이를 보고 어두워졌으며, 달이 보고는 어두워졌고, 땅이 이를 느끼고 흔들렸으며, 돌들이 이를 느끼고 부서졌다. 온 피조물이 주님의 모욕을 보고 전율하였다. – 이처럼 영혼도 없고 감각도 없는 자연의 요소들이 마치 생명이 깃들어 있고 감정을 가진 것처럼, 하나님의 두려움과 이 환상들을 목격하여 본래의 질서에서 벗어나 변해 버렸는데, 이성을 갖춘 우리, 곧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으신 우리들이, 이 날들에 마음이 찢어지지 않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이 일 이후로, 말 없는 자들보다 더 말 없고, 돌들보다 더 무감각한 존재가 되지 않겠는가? 우리에게 그런 일이 없기를, 결코 없기를; 오히려 경외심에 사로잡혀 경이로움에 휩싸이고, 선한 변화로 새롭게 변모하여, 눈물을 흘리며, 정욕을 제물로 바치고, 주님의 모욕에 대해서는 인내로 갚으며, 그분의 상처에 대해서는 우리의 상처를 견뎌내자. 어떤 것은 순종의 행위로, 또 어떤 것은 앞으로 있을 고백으로 말이다.

7. 이 모든 것 속에서 신성한 사랑을 향한 동기가 얼마나 많은지 우리가 보지 못하는가? 누가 감옥에 갇혀 수감된 적이 있는가? 누가 사랑하는 이를 위해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쳤습니까? 그러나 전능하신 우리 하나님께서는 단 한 번이나 두 번이 아니라, 셀 수 없이 많은 고난을 우리 죄인들을 위해 짊어지셨습니다. 그러므로 의로운 복된 사도는 이를 생각하며 하나님에 대한 강한 사랑을 품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확신하노니,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들도, 현재도, 장래도, 높은 곳도,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38-39). 이는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향한 이러한 사랑을 품으셨기 때문이니, “그가 독생자까지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 17). 그러한 사랑에 보답할 만한 자신의 행실을 드릴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성도들은 자신과 자신의 몸과 피를 바쳤으며, 고행의 수고와 고난 속에서 복된 다윗과 함께 이 찬송을 불렀으니, “주께서 내게 베푸신 모든 은혜에 대하여 내가 주께 무엇을 갚으리이까?” (시 115:12). – 우리도 이러한 목소리로 항상 주님께 부르짖으며, 그분을 향한 영혼의 끝없는 열정으로 끊임없이 그분을 섬기고, 점점 더 나은 것을 추구하여, 모든 성도들과 함께 영원한 복의 상속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283. 여러분의 선한 일에서의 성취를 기뻐합니다

283. 1) 여러분이 선한 일에서 이룬 성과를 기쁘게 생각합니다. – 2)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말고, 성도들을 본받아 약속의 말씀에 힘입어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4, 81]

8. 내가 원해서 여러분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지,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비록 여러분에게 말을 해야 할 의무가 저에게 있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나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열정으로 여러분을 위해 열심을 내며, 여러분이 잘 되어 가는 것을 보고 큰 기쁨을 느낍니다. 비록 제가 종종 여러분을 책망하기도 하는데, 얼마 전에도 그랬듯이, 그 또한 제가 여러분을 지극히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녀를 정성껏 양육하며 징계도 소홀히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들이면,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히브리서 12, 7)], – “너희가 온전하고 온전하며,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야고보서 1, 4). 나는 여러분이 순종적이고 온유하며, 이 수도 공동체에 속한 누구보다도 더 엄격하게 아버지의 계명을 이행하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이 말은 아첨이 아니라 진실 그대로입니다. 주님의 계명에 따라, 아버지께 그토록 한마음으로 순종하고 모든 일에서 수도원장님을 따르는 이가, 여러분처럼 이 두 가지 모두에 능숙한 사람이 또 누가 있겠습니까? 이를 증명하는 것은 박해와 추방, 감옥, 원한, “죄에 대항하는” 수련에서 “피 흘릴 지경까지” 견디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4). – 그리고 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분께로부터 여러분에게 찬양이 있기를 바랍니다. 다른 이들은 돈과 재물, 수도원과 그 밖의 안락함을 가질지라도, 저에게는 여러분만을 가지고 여러분으로 인해 영광을 얻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여러분은 제 기쁨이자 영광의 면류관, 생명이며 그 밖의 모든 선함이기 때문입니다.

9. 다만, 여러분의 선한 결심을 저버리지 말고, 선과 완전함의 단계로 나아가는 데 한계를 두지 말아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마치 물질적 소유를 쫓는 자들이 부의 증가에서 만족을 찾지 못하는 것처럼, 여러분도 영적 덕목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기를 멈추지 마십시오. “이는 현세의 정욕이 우리 안에 나타나고자 하는 영광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롬 8,8). 성인들의 생애에서 그들이 얼마나 큰 수고와 땀을 흘리며 생의 여정을 마쳤는지 보지 못하십니까? 성 순교자들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며, 어떤 고통 속에서 생을 마감했는지 보지 못하십니까? 무엇을 위해서였습니까? 바로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보이는 것은 일시적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니라”(고린도후서 4,18). 해가 좋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도 결국 어두워질 것입니다. 달이 좋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도 빛을 내지 못할 것입니다. 별들이 좋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들도 떨어질 것입니다. 하늘은 좋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도 옷처럼 낡아질 것이며, 모든 것이 변할 것입니다. – 기록된 대로 새 하늘과 새 땅이 될 것이며 –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형언할 수 없이 복된 삶이 시작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약속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기들을 통해 우리 스스로가 초감각적인 것으로 감각적인 것을 이기고, 신성한 사랑으로 육신의 사랑을 제압하며, 사도가 가르치신 대로 “위엣 것을 구하라. 곧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 곳을 구하고, 위엣 지혜를 구하며, 땅의 지혜를 구하지 말라” (골 3:1)처럼, 정욕의 진창에 뒹굴지 않고, 정욕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의 끝은 멸망이니라. 우리의 삶은 하늘에 있으니, 거기서 우리 구주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라” (빌 3:19-20).

 

284. 상처를 입은 후, 나는 치료를 받았고, 보시다시피 지금 여러분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284. 1) 상처를 입자 나는 치료에 의지하였고, 보라, 지금 여러분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 여기서 교훈을 얻습니다: 누구든지 죄의 상처를 입는 즉시, 회개의 치료로 서둘러 나아가십시오. – 2) 미루지 마십시오. 죽음이 닥칠 수 있으며, 정화되지 않은 채 죽어 심판대에 서는 것은 끔찍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 3) 스스로를 경계하고, 미루라고 가르치는 원수의 말을 듣지 마십시오. [4, 82]

10. 내 발의 상처가 여러분을 슬프게 하였으니, 이는 마땅한 일입니다. 여러분은 기쁨과 슬픔 속에서 형제를 사랑하고 아버지를 사랑하는 자들로서 나와 함께 아파해 주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일에서 여러분을 가르칠 교훈을 얻습니다. 그것이 어떤 방식일까요? 내 죄로 인해 상처를 입었을 때, 즉시 치료와 적절한 안정이 필요했기 때문에, 사흘 동안 여러분과 교제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자비로 병이 나았으니, 나는 다시 여러분과 함께 있으며, 보십시오, 여러분에게 말을 건네고 있습니다. – 영적인 상처를 입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 누가 보거나 들은 것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입었습니까? 아니면 마귀의 생각에 휩쓸려 악한 정욕, 분노, 격노, 증오, 시기, 다툼, 불순종, 혹은 그 밖의 어떤 해로운 정열에 불타올랐습니까? – 즉시 치료, 즉 회개와 통회, 울음, 탄식, 마음의 아픔, 그리고 회개의 다른 치료법들에 착수해야 하며, 제대로 치유된 후 다시 예전의 선한 마음가짐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죄가 죄를 낳고 상처가 상처를 낳게 될 것이며, 정욕은 치료할 수 없게 되어, 우리는 죽음에 이르는 죄로 병들게 될 것입니다.

11. 그러나 우리 형제 여러분, 우리에게는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먼저, 죄를 짓지 않도록 스스로를 경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영혼을 깨끗하게 유지하고, 마음이 정욕으로 상처받지 않는 것보다 더 달콤하고 더 복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만약 우리 본성의 경향성 때문에 죄를 짓게 된다면, 단 한 시간이라도 치유되지 않은 채로 내면에 남겨두지 말고, 지체 없이 바로 고쳐야 합니다. 죽음은 도둑과 같아서, 그 도둑이 한밤중에 올지, 새벽 종소리가 울릴 때 올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준비되지 않은 채 육신을 떠나는 것은 매우 비참한 일이며, 그렇게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는 것은 지극히 두려운 일이다. 사도가 말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으며, 어떤 양날의 칼보다도 날카로워서, 심지어 영과 혼, 관절과 골수를 쪼개어 분별하며, 마음의 생각과 뜻을 심판하느니라. 그분 앞에는 감추어진 피조물이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그분의 눈앞에 드러나 있느니라. 우리에게는 그분께로 향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4:12, 13). “의인조차 간신히 구원을 받는다면, 불의하고 죄 많은 자는 어디에 설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전서 4:18). 선지자 다니엘이 환상 속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보고도 공포와 경악에 빠졌는데, 우리가 실제로 그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면 우리는 얼마나 큰 고통을 겪게 될까? “불의 강이 그분 앞에서 흘러나오고, 수천 수만이 그분을 섬기며, 무수한 천사들이 그분 앞에 서 있었다. 심판석이 놓여 있고, 책들이 펼쳐졌다”(단 7,10). 이 일이 일어날 때, 누가 견딜 수 있으며 누가 담대함을 지킬 수 있겠는가? 올바른 믿음과 선한 행실을 가진 자, 그리고 용기와 진리, 정결함을 얻은 순종의 아들 외에는 아무도 없다.

12. 그러므로 우리는 온갖 경계로 스스로를 삼가야 하며, 매 순간 두려움으로 결말을 기다려야 한다. 우리를 훔쳐가는 살인적인 원수는 결코 숨을 수 없으니, 그는 항상 우리가 현재를 방심과 태만으로 보내도록 부추기고, 계명에 따른 행동을 미래로 미루게 한다. 이것이 바로 죄의 유혹적인 모습으로 우리를 유혹하는 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를 물리치고 되돌려 보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나 또한 지금 이 순간 겸손히 여러분께 말씀을 전합니다. 내 입에서 나오는 단 다섯 마디의 말이라도 듣고, 여러분이 위로받으며 서로에게 제시된 이 권면으로 함께 위로를 나누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권면은 영혼을 항상 새롭게 해 준다는 점에서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조상들을 본받아 이를 행함으로써, 저는 우리가 구원을 이루는 일에 성공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그분의 나라를 얻게 될 것임을 알고 확신합니다.

 

285. 낯선 땅에서도 그들에게 온갖 풍요로움을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리도록 권면한다

285. 1) 낯선 땅에서도 그들에게 온갖 풍요로움을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리라고 권면한다. – 2) 그리고 그러한 자비를 잃지 않도록, 믿음과 소망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열심도 게을리하지 말라고 권면한다. [4, 83]

13.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베풀어 주신 은혜, 특히 우리가 타지에 머무는 동안, 즉 유배 중에 있음에도 수도원처럼 삶을 영위하며, 우리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킬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찾아오는 이들에게도 풍족함을 베풀어 주시는 것에 대해 주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보십시오, 저쪽과 이쪽에서 끊임없이 얼마나 많은 우리 형제들이 우리에게 오는지? – 그들이 하나님과 우리의 겸손함 외에 어디로 더 의지하겠습니까? 또한 모든 면에서 가난과 결핍을 견디며 방랑하는 다른 수도사들과 형제들이 얼마나 많이 우리에게 찾아오는지 보십시오. – 거의 하루도 누군가를 맞이하지 않는 날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필요한 것이 부족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것이 넉넉하고 넘쳐났습니다. 이 상황에서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해 주시리라”고 약속하신 분의 말씀이 참으로 거짓이 아님을 말할 수밖에 있겠습니까? (마태복음 6:33). – 그리고 실제로 우리에게 “밀과 포도주와 기름의 열매”(시편 4:8)와 그 밖의 필요한 것들이 모두 기대 이상으로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감사를 드릴 만한 목소리를 낼 힘조차 없을 정도입니다. 비록 그러한 관행들로 인해 조금은 제약을 받고 부담을 느끼기도 하지만, 보라, 그 대가가 어떠한가? – 그리고 그로 인해 하나님께 드려지는 찬양이 어떠한가? – 수도원을 관장하는 이들조차도, 자신들이 할 힘이 부족했던 일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루게 하셨다는 사실에 놀라워한다. 왜일까요? 바로 우리의 믿음과 소망에 따라, 이 일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는,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머물렀을 때의 상황과 매우 닮아 있습니다. 올해로 벌써 네 해째, 우리는 씨를 뿌리지도, 수확하지도 않았으나,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기간 동안 우리에게 부족함 없이 육신의 양식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그분은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신 것이 아니라, 굶주린 자들을 먹일 만큼 풍족한 곡식 창고를 우리를 위해 열어주셨습니다. 돌에서 물을 솟아나게 하신 것이 아니라, 경건한 이들의 손으로 포도주 항아리를 비워 우리를 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에게 많은 다른 은혜를 베푸셨는데, 지금 말하기에는 다소 민감한 일들입니다. 이것이 놀랍지 않은가, 경이롭지 않은가, 찬양할 만하지 않은가? – 사도의 말씀으로 또 한 가지를 말하겠으니, 우리는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이를 부유하게 하며, 소유한 것이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고린도후서 6:10)는 것이다.

14. 이것이 바로 우리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이며, 그분의 은혜가 이토록 크십니다! 그분이 이토록 우리를 존중해 주셨음을 깨닫지 못하고, 우리가 은인을 모욕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그러니 형제 여러분, 우리 자신을 깊이 성찰합시다. – 모두 함께: 여기 계신 분들도, 멀리 떨어져 계신 분들도 –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의 계명을 지키며, “사랑과 선한 일을 격려하며 서로를 이해하자” (히브리서 10:24), 무심하게 살지 말고, 육신의 욕망과 생각대로 행하지 말고, 옛날 불평하던 자들처럼 불평에 빠지지 말고, 그 당시의 유혹자들처럼 주님을 시험하지 맙시다. – 주님께서 장차 우리를 위해 이것저것을 행하실 수 있으실까요? “믿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가복음 9,22)고 기록되어 있듯이. 왜냐하면 우리가 진심으로 믿는다면, 주님께서는 우리의 간구대로 우리 구원과 육신의 삶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진리의 빛으로 비추심을 받아 이 생의 광야를 무사히 건너갈 것이며, 강력한 영적 무기로 무장하여 보이지 않는 아말렉을 쫓아내고, 약속의 땅이 아니라 – 우리가 일시적이고 덧없는 것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 – 하늘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의를 위하여 쫓김을 당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태복음 5:10)라고 약속하신 분은 신실하시기 때문이다.

 

286. 인간의 외적인 유혹은 본질적으로 가볍다

286. 1) 외적인 유혹은 인간적인 것이며, 가볍다. – 2) 악마의 유혹은 더 무겁지만, 그들에 맞서 싸우는 열심이 식지 않는다면 주님의 도움으로 이겨낼 수 있다. – 3) 이것이 끊임없는 싸움이자 순교이다. [4, 84]

15. 우리를 덮친 비통한 일들 앞에서, 우리는 사도와 함께 제때에 이렇게 말해야 한다. “우리가 당하는 유혹은 오직 인간적인 것뿐이다”(고린도전서 10, 13). 우리는 모든 면에서 우리의 스승이신 선한 장로 테오크티스토스를 위해 이 말을 하는 것이다. 어떤 유혹이냐? 그가 할키트라는 섬에 유배되어 있고, 그의 장로는 부하들에게서 ‘권세자들을 기억하지 않는다’는 모함을 받아 가장 잔혹한 매질을 당했다는 것이다. 유혹이 거세지고 있으며, 대개 우리들이 그러한 유혹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수도원 운영을 맡은 자가 스스로 통치자들을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또는 감금에서 벗어난 형제들과 신부들이 도시에 머물면서 이단자들을 혼란스럽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 “그들 가운데서 나와서 분리되라,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들의 부정한 것에 손을 대지 말라” (고린도후서 6, 17). 이에 반하는 자들은 슬픈 역경을 겪게 됩니다. 우리가 겸손히 도시 안에 사는 자들로부터 물러나 그 주변에서 사는 것은, “비난할 기회를 찾는 자들에게 비난할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함”(고린도후서 11:12)이며, 주님께서 지금까지 우리를 해치지 않게 지켜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를 경계하여, 무분별하게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않고, 헛되고 비난받을 만한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계속 지켜주실 것입니다. 사도가 말하기를, “너희 말은 은혜로 소금에 절인 것처럼 하여, 각 사람에게 마땅히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를 알라”(골 4:6)고 했습니다. – 또한 하나님의 형제가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법으로 자유를 얻은 자로서 심판을 받을 줄 알면서,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행하느냐?” (야고보서 2,12). 그러므로 우리는 때 아닌 유혹에 빠지지 않을 것이며, 마치 그물에서 벗어나듯 진정한 악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16. 이것이 바로 인간의 유혹, 즉 가벼운 유혹입니다. 반면 악마의 유혹은!! – 매우 무겁고 은밀합니다. 원수는 매일, 매시간, 매분마다 우리를 유혹하기 위해 엿보고 있으며, 그로 인해 그와 맞서는 일이 매우 힘들고, 승리를 거두기 어렵게 만듭니다. 그러나 부지런함과 열심이 마땅히 해야 할 일과 추구하는 바를 모두 이루게 하므로, 우리는 열심을 다해 맞서 싸우고 그리스도의 도움으로 승리할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와 함께 유혹을 견디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 없이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요한복음 15:5)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이 유혹에 빠지지 않고 마귀의 손아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힘쓰자. 이곳 섬에서의 유배 생활, 게다가 짧은 기간의 유배는 사실 진정한 유배가 아니다. 진정한 유배란 하나님께 버림받고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내던져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곳에서의 채찍질, 몇 대, 몇 대의 타격이 무슨 채찍질인가? – 진정한 채찍질은 타격이 셀 수 없이 많고 그로 인한 고통이 끝없는 곳에 있다. 그리고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선한 일을 행한 자들은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들은 심판의 부활로 나가리라” (요 5:29). 이를 두려워하고 떨며,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능력으로 온 힘을 다해, “생각을 무너뜨리고”,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지혜를 거스르는 모든 교만을 꺾으며, 모든 생각을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사로잡아, 또한 모든 불순종을 벌할 준비가 되어 있다” (고린도후서 10, 4–6); 그리고 이를 끊임없이 실천해야 한다.

17. 보라, 끊이지 않는 싸움이라! 보라, 고통이 많은 순교라! 왜냐하면, 항상 생각들로 인해 시달리면서도 그들에게 굴복하지 않고 바알 앞에 무릎을 꿇지 않으며, 정욕, 분노, 격노, 두려움과 같은 정욕들에 맞서 싸워 이겨내는 자는 매일 고통을 겪으며 사도 와 함께 이렇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날마다 죽노니, 이것이 곧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자랑하는 바니라” (고린도전서 15:31); 그리고 수고의 끝에서 이에 대담하게 덧붙일 수 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웠고, 경주를 마쳤으며, 믿음을 지켰나니, 이제 의의 면류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으니,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라” (딤후 4,7-8). – 그러니 우리 모두도 의롭게 살아가며 이와 같이 말할 수 있도록 하고, 그 후 실제 행실로 의의 면류관을 씌워 받아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하소서.

 

287. 우리의 본성은 졸리고 게으르다. 약속에 관한 말씀이 이를 일깨운다

287. 1) 우리의 본성은 졸리고 게으르다. 약속에 관한 말씀이 그것을 일깨운다. – 2) 실제로 이를 보여준 이들은 경건한 이들과 순교자들이었다. – 3) 그런데 우리는 왜 자고 있는가? 일어나서 정욕과 정열로부터 자유로워지자 – 4) 그리하여 낙원의 기쁨과 달콤함을 맛보자. [4, 85]

18. 스승이 제자들에 대해 어떤 헌신을 가져야 하는지는, 사도가 디모데에게 말하며 다음과 같이 보여줍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책망하고, 금하고, 권면하라. 모든 인내와 교훈으로 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이 건전한 교훈을 듣지 아니하리라” (딤후 4, 2. 3). 왜냐하면 우리의 본성은 교리에 대해 혼란스럽고, 세속적이며, 잊기 쉬우므로, 마치 가시 같은 말씀의 타격으로 항상 자극을 받아야만, 마치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그 앞에 놓인 기쁨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무엇이 우리에게 약속되었는가? 하늘나라가 아니겠는가? 불멸의 생명이 아니겠는가?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 아니겠는가? 낙원의 달콤함이 아니겠는가? 천사와 동등한 영광이 아니겠는가? 영원한 안식이 아니겠는가?

19. 밧줄과 감옥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추방과 원한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고문과 죽음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약속된 복을 얻고, 끔찍한 고통을 피하기 위함이 아니겠는가? 보라, 순교자들이 얼마나 기쁜 마음으로 피를 흘리고, 얼마나 기꺼이 칼날 아래로, 불 속으로, 야수들에게로, 그리고 온갖 종류의 다른 고통 속으로 나아가는가. 또한 경건한 이들이 어떻게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육신을 죽이고 굴복시키는지 보라. 그들은 덕행보다 더 갈망하는 것을 아무것도 여기지 않는다.

20. 그런데 우리는 왜 졸고 있는가? 왜 마음을 찔러 상처 입히는 화살의 날카로운 끝과 같은 해롭고 타락시키는 정욕에 빠져 있는가? “그들 가운데서 나와서 분리되라, 주님께서 말씀하시니라”(고린도후서 6:17). 그러니 불과 유황 속에서 타버린 소돔과 고모라에서 벗어나듯, 그들로부터 떠나자. 육신의 교만을 버리자. 그것은 영을 거스르고 대적하는 것이니, 노예로 만드는 집착에서 벗어나자. 그리하여 우리 영혼에 평안을 얻자. 정욕에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과 화목한 영혼보다 더 평온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21. 이것이야말로 기쁨과 즐거움인가? 이것이야말로 복된 위로와 달콤함인가? 이 달콤함을 맛보고자 하는가? – 썩음과 죽음을 낳는 육신의 쾌락에서 도망치자. 사도가 말하기를, “자기가 육신에 심으면 육신으로부터 썩음을 거두고, 영에 심으면 영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갈 6,8) 하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영광스럽게 나타나기를 원하느냐? – 헛된 인간의 영광을 경멸하고, 겸손의 지혜를 입으며 온갖 선행으로 단장하자. 이처럼 우리는 현재의 삶을 선하게 살아갈 뿐만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장차 올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288. 현재의 박해는 덜하지만, 그래도 참아야 하며, 이 세대는 이 일로 인해 칭찬을 받습니다.

288. 1) 현재의 박해는 덜 심하지만, 그래도 인내해야 하며, 오늘날의 세대는 이 점에서 칭찬받을 만하다. – 2)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정통 신앙을 위해 닥쳐오는 공격을 두려움 없이 맞설 준비를 해야 한다. – 3) 우리의 보이지 않는 박해자와는 끊임없이 싸워 나가자. – 4)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에 굳건히 서자. 그러면 그분께서 우리에게 힘을 주실 것이다. [4, 26]

22. 지난 3년 동안 우리는 어떤 새로운 삶을 살아왔습니다. 우리는 완전히 박해받는 것도 아니며, 박해받지 않는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만나기도 하고, 서로의 집을 방문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비로운 섭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전의 박해를 견디느라 지쳐가는 것을 보셨기에, 이제는 감옥 문을 닫으셨지만, 정통 신앙을 위한 박해는 그분의 알 수 없는 뜻에 따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 그리고 이는 사실입니다. – 그러나 전반적으로 상황을 살펴보면, 주님을 위해 박해받는 이들이 그리 많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매일 얼마나 많은 우리 형제들이 이곳으로 오는지 보며, 바알 앞에 무릎을 꿇지 않고 주님께 자신을 지켜낸 이들이, 주님의 통치가 미치는 모든 곳에서 밝은 별들처럼 존재한다는 사실에 마음 한구석이 다소 편안해집니다. – 그러므로 이 진정한 혈통은 후손들에게도 칭찬받을 만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우리 안에 계시며, 주님의 거짓 없는 약속에 따라 교회는 그 힘을 잃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로부터 교회를 공격하던 자들은 모두 바다의 거품처럼 흩어졌으나, 교회는 부서지지 않는 돌처럼 여전히 같은 믿음과 같은 고백 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23. 우리는 이를 기뻐하고 환호해야 하지만, 동시에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며, 마치 다시 갑자기 유혹이 닥칠지 모른다는 듯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단 한 번, 두 번, 심지어 여러 번의 유혹 속에서만 고백을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평생 동안 – 악한 소문을 두려워하지 않고, 마치 몸을 찢어 버릴 듯한 채찍이나 육신을 짓누르는 감옥, 그 밖의 그 어떤 인간의 공격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오직 모든 것이 그분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유일한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며, 그 시련이 형언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영원한 고통만을 두려워해야 한다; 현재의 모든 것, 즉 기쁜 일도 슬픈 일도 곧 꿈과 같이 덧없이 지나가니, 그러므로 “그들의 화살은 어린아이와 같도다”(시 63:8)라고 기록된 바와 같다.

24.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모든 것과 싸워야 하며, 특히 매일 우리를 공격하는 보이지 않는 박해자와는 더욱더 싸워야 한다. 그는 감각적인 채찍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생각으로 끊임없이 우리를 치고, 물질적인 불이 아니라 악한 정욕과 온갖 다른 정욕으로 우리 영혼을 유혹하고 포위한다. – “그러므로 진리로 허리를 동이고, 의의 갑옷을 입고, 평안의 복음을 전할 준비가 된 신발을 신으라. 또한 모든 것을 위해 믿음의 방패를 들어, 그것으로 악한 자의 모든 불타는 화살을 끄실 수 있으리라. 구원의 투구를 쓰고, 하나님의 말씀인 영적인 칼을 잡으라” (엡 6,14–17). 이것이 바로 사도들의 계명입니다! 우리도 겸손히 이 말씀을 전하며, 환난 중에 소심해지지 말고 유혹 속에서 지치지 말 것을 간구합니다. 유혹을 더 많이 견딜수록 더 많은 면류관을 받게 될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25.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힘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분은 약속하신 것을 이루실 수 있을 만큼 강하시며, 우리가 상처뿐만 아니라 불과 칼, 짐승, 그리고 그 밖의 모든 것을 견딜 수 있도록 우리를 굳건히 하실 수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이를 확신하며 사도는 말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분을 위하여 이 모든 것에서 승리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높은 것도, 깊은 것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 (롬 8:37–39). 만약 우리가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행동한다면, 우리는 끊임없는 순교의 업적 속에 서게 될 것이며, 순교자들과 함께 우리의 몫을 얻게 될 것이다.

 

289. 박해는 선물이다: 이 선물에 합당하게 박해 속에서 살아야 한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제시된다

289. 1) 박해는 선물이다: 박해 속에서 이 선물에 걸맞게 살아야 하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제시된다. – 2) 이와 반대되는 것으로, 특히 고립된 삶을 살면 안 된다고 질책받는데, 그로 인한 나쁜 결과들—자기만족, 태만, 타락—때문이다. – 3) 모든 이가 절제 있고 신중한 삶을 살도록 설득된다. [4, 87]

26. 하나님께서는 이 박해 속에서 우리에게 가장 위대한 은사를 주셨으니, 주님께서 복음서에서 직접 말씀하신 바와 같다. “의를 위하여 쫓김을 당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태복음 5,10). 그러니 우리가 이 같은 복에 합당하지 않게 살아서, 이 박해를 스스로에 대한 정죄로 돌리지 않도록 주의하자. 박해를 받는 자는 무엇보다도 은둔 생활을 해서는 안 되며, 다른 형제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가운데 있느니라” (마태복음 18, 20) 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꼭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외출을 삼가야 하며, 나그네로서 받아들여진 곳에 머물며, 기도와 간구, 성경 읽기, 시편 찬송, 수공예 및 우리에게 익숙한 다른 선한 일들에 전념해야 합니다. 여성을 마주치는 것을 피하고, “무질서하게 행하는 형제라면 누구든지 멀리하라”(살후 3,11)는 말씀을 지키며, 온유하고, 감사하며, 낙관적이며, 있는 그대로에 만족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박해가 있는 곳에는 대개 고난도 따르기 때문이다.

27. 홀로 사는 자들은 슬픔을 유산으로 삼는다. 지혜로운 이가 말하기를 “홀로 사는 자에게는 화가 있도다!” 하였으니, “그가 넘어지면 그를 일으켜 줄 이가 없기” 때문이다(전도서 4:10); 그들 중 하인을 둔 자들은 수도자의 자유를 망치고, 밭과 포도원, 소와 노새를 사는 자들은 기에세이의 벌을 자초한다. 이로부터 은욕, 탐욕, 변덕, 다른 형제들과 함께 살기를 원치 않는 마음,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기 뜻대로 행동하는 습관, “우리로 말미암아 이방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받는 것, 기록된 바와 같이” (롬 2:24), 그리고 영적 타락이 생겨납니다. 무책임하게 사는 자가 어떻게 타락하지 않겠습니까? 사도는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신다. 만일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훼손하면, 하나님께서도 그를 훼손하실 것이다”라고 말합니다(고린도전서 3:16, 17). 그리고 다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를 속이지 마십시오.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자나 간음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남색하는 자나 남자와 동침하는 자나 강도나 탐욕스러운 자나 사기꾼이나 술 취하는 자나 비방하는 자나 탐욕스러운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고린도전서 6, 9, 10).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은 육체와 그 정욕과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갈 5, 24)고, 또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다”(요 15, 19)고, 그리고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빌 3, 20).

28. 도대체 우리는 왜 우리의 복락을 망치고 있는 것입니까? 도대체 왜 우리 지위의 고귀함을 이토록 훼손하고 있는 것입니까? 도대체 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영광스럽고 칭찬받을 만한 삶을 사는 우리 형제들을 본받지 않는 것입니까? 이제야말로 우리가 정신을 차려야 할 때가 아닌가? 이제야말로 우리 본분에 충실해야 할 때가 아닌가? 이제야말로 우리의 구원을 염려하며, 눈앞에 우리의 최후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어떻게 서게 될지를 떠올려야 할 때가 아닌가? 헛된 말 한 마디에 대해서도 대답해야 하는데, 크고 무거운 죄들에 대해서는 어떤 대답을 할 수 있겠는가? – 그러나 비록 우리 삶의 저녁 무렵이 되었더라도 정신을 차리고, 정욕을 버리며, “어두운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무기를 입자”(롬 13:12)고, 온갖 경계로 우리 마음을 지키며, 온갖 방법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 힘쓰자. 그리하여 이런 방식으로 구원받아 영원한 복의 상속자가 되자.

 

290. 내가 본 그 죽어가는 이가 떠났으니, 우리에게도 똑같은 일이 닥칠 텐데, 도대체 왜 육신을 아끼는 것입니까?

290. 1) 내가 본 죽어가는 이가 떠났으니, 우리에게도 똑같은 일이 닥칠 텐데, 도대체 왜 육신을 아끼는 것일까? – 2) 그는 임종 침상에서 불안에 떨고 있었다. 그때에는 각자가 사랑했던 생각들이 몰려오기 때문이다. 선한 생각은 위로해 주고, 악한 생각은 괴롭힌다. – 3) 그러니 우리는 정욕이나 정욕적인 생각들로 스스로를 얽매지 말자. [4, 88]

1. 죽음에 대한 기억만큼 영혼에 유익하고 구원을 주는 것이 또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제가 여러분께 이 이야기를 꺼내게 된 것은, 에네이 주교님의 죽음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그분이 임종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셨지만, 우리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많은 유익을 얻었고, 그분 안에 있던 것을 우리 자신 안에서도 발견하며 마음이 깊이 감동받았습니다. – 그리하여 그는 떠나갔고, 이제 다시는 이 생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더 이상 하늘도, 땅도, 바다도, 태양도, 달도, 별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이 공기를 마시지도, 목구멍에서 소리를 내지도, 눈으로 보지도, 귀로 듣지도, 콧구멍으로 냄새를 맡지도, 손으로 만지지도, 발로 걷지도, 이 생에 속한 그 어떤 일도—크든 작든—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에게 이 세상의 문은 영원히 닫혔으며, 그는 이제 심판과 보응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보응은 아직 보물 창고에 있으며, 보물로 간직되어 있다. 기록된 바와 같이: “이 모든 사람들은 믿음으로 순종하였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하여 더 나은 것을 미리 보시고, 우리 없이 완전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히브리서 11:39, 40). –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 다른 길은 없다. 우리도 똑같은 운명을 겪지 않겠는가? 우리가 나온 흙으로 돌아가는 것도 같은 방식이 아니겠는가? 같은 방식으로 죽어 흙과 재가 되지 않겠는가? 관 속으로 들어가서, 지금 살아 있는 우리 육신이 어떻게 끝나는지 살펴보자. – 그런데도 우리는 왜 이 보잘것없는 몸을 그토록 아끼는 것일까? 머지않아 땅과 벌레들에게 넘겨줄 이 몸을 말이다. 왜 우리는 죽음을 맞이할 때 마주하게 될 정욕들에 사로잡혀 있는 것일까?

2. 죽어가는 사람은 아직 숨을 쉬고 있을 때, 어떤 여자와 남자 두 사람이 나타나 무자비하게 그를 질책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로 인해 그는 신음하며 도움을 청하고, 육신을 떠나는 것을 두려워하며 떨었습니다. 보십시오, 죽음의 심판이 어떤지? – 악마들이 우리의 고발자이자 심판자로 나섭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생각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실천에 옮기면, 바로 그 생각들을 죽을 때에도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내 앞에 뵙고” (시 15:8), 우리 생명의 수호자인 천사를 가까이 계신 분으로 상상하거나, 이러저러한 성도들을 떠올린다면, 마지막 숨을 거둘 때 그들을 보게 될 것이며; 반대로 우리 마음속에 죄악된 형상을 그려내고 악마 같은 생각을 간직한다면, 그때 바로 그것들을 마주하게 될 것이며, 이는 비참하고 파멸적인 일이다.

3.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맞이할 때 그러한 우상들에게 사로잡히지 않고, 깨끗한 마음으로 그 순간을 맞이하여 담대하게 나는 평안히 잠들고 쉼을 얻으리라”(시 4:9)라고 말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덕을 갖춘 자에게 죽음은 잠과 같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 친구 나사로는 이미 잠들었으나, 내가 가서 그를 깨우리라”(요한복음 11:11). 만일 죽음이 잠이라면, 그것은 그에게 안식의 원천이 되며, 영생의 시작이 됨이 분명합니다. 성 사도 바울이 말했듯이: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죽은 자들에게 첫 열매가 되셨느니라”; 그리고 조금 더 아래에서 다시 말하듯이: “죽음이 승리로 삼켜졌다. 죽음아, 네 독침은 어디 있느냐? 음부여, 네 승리는 어디 있느냐? – 죽음의 독침은 죄요, 죄의 힘은 율법이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고린도전서 15, 20. 54–57). – 보라, 죽음이 삼켜졌다! 보라, 승리가 주어졌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기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낙원 한가운데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게 하리라” (계 2,7) 하셨다. 보라, 천국의 경주가 열렸다! 보라, 삼중의 복을 누릴 수 있는 위업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이기는 자에게는 면류관과 영생의 열매가 주어진다. 우리도 마귀를 이기고, 정욕을 짓밟으며, 온갖 악에서 완전히 정화되고, 덕을 쌓아 낙원의 주민이 되어 생명나무의 열매를 맛볼 자격을 얻도록 힘쓰자.

 

291. 구원은 끊임없이 그리고 기꺼운 열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291. 1) 구원을 이루는 일은 끊임없이 그리고 기꺼운 열정으로 해야 한다. – 2) 전사들은 세상의 것을 위해 세상의 왕을 섬기기에 힘쓰는데, 우리가 하늘의 것을 위해 하늘의 왕을 섬기는 일에 게으름을 피울 수 있겠는가? – 3) 성도들을 보라: 그들 가운데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있지만, 게으르고 소홀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그들 가운데 타락한 자들도 있지만, 회개한 뒤 열성적이고 부지런히 하느님을 기쁘시게 한 자들이다. – 4) 그러니 게으른 자여, 일어나 사도의 말을 경청하고 열정을 불태우라. [4, 89]

4. “하늘 아래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고 지혜로운 이가 말합니다(전도서 3, 1). 우리 구원을 이루는 데에도 언제나, 어디서나 때가 있습니다. 사도가 말하기를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모든 일에 감사하라”고 했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5, 16). 이 세 가지 미덕으로 우리의 구원이 결정된다. 기쁨은 모든 의의 성취를 나타내는 표징이며, 쉬지 않는 기도는 마귀가 우리를 공격할 틈을 주지 않을 것이며, 은혜의 베풂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사방에서 이 행실들로 스스로를 지키며, 어떤 경우에도 소심해지지 않고, 순종을 실천하는 일이나 시편을 부르는 일, 수공예에 있어서도 게으름으로 느슨해지지 말고, 기꺼운 마음으로 모든 것을 행하여, “하나님의 다양한 은혜를 받는 훌륭한 건축자들” (베드로전서 4:1)처럼.

5. 군인들이 왕과 함께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얼마나 열성적으로 서두르는지 보지 못합니까? 그리고 그것이 어떤 임무입니까?! 전쟁, 학살, 죽음입니다. 그들은 덧없는 영광과 금세 사라질 부를 위해 기꺼이 모든 일에 뛰어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나라로 부르심을 받아,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과 영원한 생명을 향해 나아가는데, 과연 게으르고 소홀하게, 온전한 열정과 활기 없이 그리스도의 훌륭한 전사로서 자신을 드러낼 수 있겠는가?

6. 제가 손에 들고 있는 이 책을 읽어 보십시오. 그러면 그 안에 묘사된 성부들의 용맹함을 보고 알게 될 것입니다. 그들 안에 얼마나 큰 열정이 깃들어 있는지! 얼마나 강렬한 영적 열정인가! 얼마나 위대한 위업들인가! 그리고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행한 표징과 기적을 통해 그들을 마치 신과도 같은 존재로 드러내시며, 그들을 얼마나 영광스럽게 하셨는가! 여기서는 태생부터 선하여 죄를 알지 못했던 이들뿐만 아니라, 바른 길에서 벗어나 중대한 죄에 빠졌다가도 지극히 진실한 회개로 바로잡은 이들도 빛을 발하였으니, 이로써 구원에 대한 안일함과 태만함에 대해 그 누구도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무감각하고 굳어진 마음, 즉 그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회개하지 않은 삶에서 비롯된 것 외에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7. 사도는 이러한 자들에게 이렇게 외친다. “잠자는 자여, 깨어나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라. 그리하면 그리스도께서 너를 비추시리라”(엡 5:14). “혹시 그분의 풍성하심과 선하심과 온유하심과 오래 참으심을 소홀히 여기는가? 하나님의 선하심이 너를 회개로 이끄신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가? 오히려 네 완고함과 회개하지 않는 마음으로, 진노의 날과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드러나는 날에 네게 닥칠 진노를 스스로 쌓아 두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의 행위에 따라 갚아 주실 것이다” (롬 2:4–6). 이 무심한 자여, 이를 보고 위협을 두려워하며, 무심함의 잠에서 깨어나라! – 존경받는 형제 칸디드도 이제 떠났고, 그보다 앞서 다른 이도 그렇게 되었으며, 그 뒤를 이어 또 누군가가 따를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 영원히 남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 모두는 떠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선하게 살아온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는 자신의 거래를 성공적으로 성사시켜 영원한 이익을 얻었으며, 열심과 정성을 다해 더 나은 것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터는 아직 열려 있고, 천국의 거래는 아직 남아 있으니, 부디 형제들과 아버지 여러분, 모두 깨어 있고, 모두 정신을 차리며, 신성하고 썩지 않는 선물을 얻기 위해 서둘러 나아가, 우리 모든 형제들과 함께 천국의 상속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292. 모든 이에게 구원에 대해 끊임없이 열심을 내라고 명한다

292. 1) 모든 이에게 구원을 위해 끊임없이 열심을 내라고 명한다. – 2) 또한 겉모습만으로 타인을 판단하는 것을 삼가야 한다. 왜냐하면 가장 중요한 것은 내면의 질서이기 때문이다. – 3) 모든 이가 이 내면의 일에 열심을 내되, 악한 생각을 품지 말고, 정욕의 움직임을 방종하지 말라. 이는 내면의 모든 것을 어지럽히기 때문이다. [4, 90]

8. 구원에 대해 열심인 이들에게는 더욱더 열심을 내어 달라고 부탁하며, 소홀한 이들에게는 소홀함과 안일함에서 벗어나기를 간청한다. “지금이 바로”(이 생명이) “유리한 때요,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이기 때문이다(고린도후서 6, 2).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 게으름과 안일함 속에서 단 하루도 지나가지 않게 하시고, 온갖 방법으로 그 시간을 영원한 보물 중 하나인 기도, 간구, 탄원, 감사, 눈물, 회개, 마음의 깨달음, 하늘을 향한 묵상을 쌓아가는 데 힘쓰게 하소서.

9. 또한, 우리 안에 있는 것으로 형제들이 가진 것을 판단하지 말고, 겉으로는 다르게 보일지라도 각자가 자기 안에서 은밀히 구원을 이루어 가고 있다고 더 좋게 생각합시다. 우리 선조들 시대에도, 겉보기에는 별것 아닌 듯했던 많은 이들이, 겉으로 드러난 이들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밝게 빛난 적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우리 형제회에서도, 특히 순교 시절에, 보잘것없고 명성 없는 이들 중 다른 이들보다 더 크게 빛난 경우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제 생각에는, 겉으로 드러나는 노력이나 열정 때문이라기보다는 내면의 성품 때문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평화로운 마음가짐과 마음의 순결함, 온유함과 침묵이 있는 곳에는 미덕의 왕국이 있기 때문이며, 주님께서는 바로 그곳을 바라보시니, “내가 누구를 바라보겠느냐? 오직 온유하고 침묵하며 내 말을 경외하는 자를 바라보리라.”(이사야 66:2)라고 기록되어 있듯이 말입니다.

10.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양심에 따라 자신을 깨끗하게 주님 앞에 내어놓아야 하며, 죄악된 생각을 품음으로써 마귀에게 문을 열어주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런 생각들을 받아들일 때, 우리가 얼마나 고통받고, 얼마나 야수처럼 변하며, 즐거움이라는 가면 아래 어떤 쓰라림을 쌓아가는지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다시 마땅한 길로 돌아올 때, 우리는 다시 어떤 평화를 맛보게 되며, 마치 폭풍우가 지나간 후 항구에 피신한 것처럼 가장 달콤한 꿀 같은 고요함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미덕이 그토록 달콤하고 사랑스럽고 갈망되는 반면, 죄는 그토록 쓰라리고 해롭고 혐오스러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왜 죄에 사로잡히는지, 오히려 미덕에 더 깊이 매달리지 않는지는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대부분 이는 우리 본성의 연약함 때문이며, “사람의 생각이 어릴 때부터 악을 꾀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창세기 8:21). 그러나 우리는 지체하지 말고, 선한 길로 되돌아가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말자. 주님께서는 우리의 수고를 보시고 우리를 위해 보복해 주실 것이며, 우리의 고된 노력에 대해 영원한 상을 주실 것이며, 이 과정에서 겪은 고난을 인내한 것에 대해 의의 면류관으로 관을 씌우시고, 성도들과 함께하게 하시며, 그분의 왕국에 참여하게 하실 것입니다.

 

293. 경청하고 기를 차려 싸우자. 원수들이 많고, 쉬지 않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293. 1) 우리는 경청하고 기를 차려 싸우자. 원수는 많고, 쉬지 않고 쫓아오기 때문이다. – 그러나 그들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우리에게는 강력한 도우미들과 승리를 거머쥘 무기가 있기 때문이다. – 2) 눈에 보이는 전쟁에서는 승리의 면류관이 주어지나, 우리의 보이지 않는 전쟁에서는 원수에게 굴복하지 않는 자가 이미 승리자이며 면류관을 받는다. – 3) 그러니 대적하는 싸움에서 용맹을 보여 주자. 그리하면 우리는 복을 받을 것이다. [4, 91]

11. 우리는 끊임없이, 그리고 쉼 없이 스스로를 경계합시다. 우리를 대적하여 전쟁을 벌이는 자들은 밤낮으로 물러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과연 누구입니까? 악의 영들, 이 세상의 어둠을 지배하는 자들로서, 그 수는 헤아릴 수 없고 우리를 향한 광기는 형언할 수 없습니다. –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두려워하거나 공포에 떨지 맙시다. 우리에게도 동역자이자 중보자가 있으니, 곧 성령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라. 그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짊어지시고, 우리의 병을 짊어지셨으며” (마태복음 8, 17), “자기도 유혹을 받으사 고난을 당하셨으므로, 유혹을 받는 자들을 도우실 수 있으시며” (히브리서 2:18) “감히” 그분께 부르짖습니다. “주여, 나를 해치는 자들을 심판하소서. 나를 대적하는 자들을 물리치소서. 무기와 방패를 취하시고 나를 도우시러 일어나소서. 칼을 뽑으시고 나를 쫓는 자들을 막아 주소서” (시편 34:1–3). – 참으로 우리의 원수들은 우리를 쫓아오고 우리의 파멸을 갈망하며, 우리의 길에 유혹을 놓아두고 온갖 방법으로 우리를 죄의 구덩이로 밀어넣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도 전사로서 그들과 맞서 싸우며, “믿음과 사랑의 갑옷을 입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고”(살전 5,8) 있습니다. 이 무기들로 인해 원수는 물러서게 됩니다.

12. 그리고 놀라운 점은, 바로 이 싸움 그 자체 속에 우리의 면류관이 있다는 것이다. 경기장에서 벌어지는 육체적 격투에서, 싸우는 자가 상대를 쓰러뜨리지 못하면 면류관을 받지 못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싸움을 당하는 자가 상대방에게 쓰러지지 않는다면, 그 자체로 이미 면류관을 받은 것이 됩니다. 이는 우리 성부들 중 한 분께 계시된 바, 어떤 제자가 장로의 축복 없이 은퇴하려다 일곱 번이나 유혹을 받았으나, 일곱 번 모두 그 유혹을 이겨냈고, 그러한 인내로 일곱 개의 면류관을 얻었다는 사실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 그러니, 투쟁 그 자체에 이미 면류관이 있다면, 부디 여러분, 투쟁하는 자들에게 용감하게 맞서며, 투쟁이 길어지는 것에 지치지 맙시다. 성녀 사라는 40년 동안 음행의 악마와 치열하게 싸우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녀는 지치지도 않았고, 낙담하지도 않았습니다. 또한, 똑같은 방식으로 시련을 겪던 한 수련자가, 그의 수도원장이 “원한다면 이 싸움이 그치도록 기도해 주겠다”고 물었을 때, 그러한 시련을 견뎌냄으로써 승리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음을 알고 이를 거절했던 이야기도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까?

13. 이 싸움을 이겨내는 데는 기도와 눈물, 그리고 마음의 통회만큼 강력한 것은 없다. 그러므로 원수가 덮쳐오거나, 우리의 부주의로 인해 정욕의 화살을 마음에 꽂아 상처를 입혔을 때, 즉시 기도로 그에 맞서면, 그는 지체 없이 도망칠 것이며; 눈물을 흘리면, 유혹의 달콤한 불씨가 꺼질 것이며, 우리가 겸손해지면 주님께서 우리를 일으키실 것이다. – 그리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일을 위해 자신을 수고시키며, 순종의 고통을 견디고 자신의 순결을 흠 없이 지키는 자는 복이 있다. 수고의 끝을 맞이하여, 충만한 기쁨과 형언할 수 없는 만족을 안고, 그는 이곳을 떠나, “악한 소문을 듣고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라고 성 다윗이 노래한 대로(시 111:7) 될 것이다. 전쟁에서 용맹을 떨친 전사들이, 투쟁과 승리의 흔적을 드러내며 승리와 기쁨으로 고향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보지 않는가? – 우리는 보이지 않는 전쟁에서 자신의 용맹을 드러내고 선한 공로로 그 안에서 분투한 이들에 대해서도, 그가 하나님께서 직접 설계하시고 지으신 위대한 성에서 영광스럽게 찬양받을 것이며, 천사들에게 칭송받고, 주님께 관을 쓰시며, 영원한 위로를 상속받으리라고 믿습니다. 우리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이를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294. 하나님께서는 시험을 위해 슬픔과 박해를 보내시나, 시험이 끝나면 이를 끊어내신다

294. 하나님께서는 시험을 위해 슬픔과 박해를 보내시나, 시험이 끝나면 그것들을 끊어내신다. 우리의 박해가 계속되는 것은 우리가 아직 피난처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4, 92] 우리 마음의 소망과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의 교회의 평화를 위한 것이다. 평화보다 더 유익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우리 수도원에서 조용하고 평온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자. – 그러나 박해가 계속되는 것도, 믿음 안에서 가장 능숙한 자로 드러날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무익하지 않을 수 있다. 왜 사도는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함과 괴로움과 환난과 쫓김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함이니라” (고린도후서 12, 10)라고 말합니까? 그러니 “언제까지, 어디까지?”라는 질문은 제쳐두고, 이 모든 근심을 하나님께 맡기자. 하나님께서는 어떤 상황의 지속 기간을 어떻게 유익하게 정하실지 아시는 분이시다. 성경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창 22:1). 누군가 말하겠지요: 시험하셨다고는 하지만, 그 정도는 아니지 않나? 아닙니다. 오히려 수년에 걸쳐, 수많은 시험으로 시험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믿음에서 온전해졌음을 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야 내가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알았으니, 나를 위하여 네가 사랑하는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창 22:12). 그분은 욥에게도 훨씬 더 큰 시련을,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인내에 있어 온전해졌음을 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다른 목적으로 창조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오직 네가 의로운 자로 드러나기 위함이 아니었겠느냐?(욥기 40, 3). 이와 같은 방식으로 다른 선지자들과 거룩한 사도들, 복된 순교자들, 그리고 모든 경건하고 의로운 이들도 수많은 고난과 오랜 세월 동안 시험하시고, 그들에 대해 증언하시며, 그들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우리에 대해서도 똑같이 가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죄와 싸우며 피의 장막 앞에 서 있지 않았습니다”(히브리서 12:4); 우리는 아직 슬픔의 불길 속에서 충분히 타지 않았고, 우리 믿음의 진실함을 증명할 시련을 충분히 겪지 않았습니다. – 바로 그 때문에 박해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295. 아무리 죄가 많은 사람이라도 회개할 수 있다: 예시

295. 1) 아무리 죄가 많은 사람이라도 회개할 수 있다: 예시 – 강도 다윗, 이집트의 마리아 등. – 2) 그들이 지금 여기서 죄를 만끽했으니, 장차 천국의 복을 누릴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죄인들에게는 기쁨이 없다: 오직 미덕만이 기쁨을 낳는다. [4, 93]

14. 진심으로 구원을 갈망하는 이에게 구원을 얻는 데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은 없으며, 심지어 악의 극한에 이른 자라 할지라도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말씀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는 수많은 증거들이 있다. 그러한 증거 중 하나는 강도 두목 다윗의 회개인데, 그에 관한 이야기는 최근 교회 성경 봉독에서 읽혔다. 여기서 우리는 한때 온갖 악으로 가득 차 있던 이 살인자가, 어떻게 회개하고 하나님께 나아간 후, 심지어 귀신 들린 자들까지 고칠 수 있을 정도의 완전함에 이르렀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천사가 그에게 말하기를:

이 일에서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인간 사랑이 드러나는데, 그분은 그의 살인죄를 용서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를 기적의 도구로 삼으셨기 때문이다. – 또 다른 증거를 보고 싶으십니까? 마나세아를 보라. 그는 52년 동안 이스라엘을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그들을 무생물 우상에게 섬기게 했으나, 그 역시 진심으로 회개하여 구원을 얻었고, 영적인 기쁨 속에서 하나님께 찬송을 불렀는데, 그 찬송은 오늘날까지 하나님의 교회에서 불리고 있다. – 육신의 정욕에 빠져 있다가 나중에 회개한 사람들에 관해 말하자면, 그 수가 너무 많아 셀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들 중에는 간음과 살인을 저지른 후 다시 예언의 은사를 받은 신성한 다윗도 있고, 그와 같은 종류의 죄를 끝없이 저지르다가 천사와 같은 경지에 이르러 예지력의 은사를 받은 이집트의 마리아도 있으며, 그 밖에도 수많은 사례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죄를 지은 사람 중 누구라도 회개를 통해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고 생각하거나 말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15. 이러한 본보기를 마음에 새기며, 우리도 구원에 대해 더욱 큰 열정을 품고, 그것을 성취할 수 있다는 더 큰 희망을 가지자. 하나님께서 그토록 깊은 악의 나락에 빠진 자들을 그분의 형언할 수 없는 자비로 부르시고 구원하셨다면, 하물며 밤낮으로 그분을 섬기는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겠는가. – 그런데 죄인의 회심에 대해 들을 때, 아무도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

? – 죄에 사로잡힌 자는 이 세상의 달콤함도 저 세상의 달콤함도 맛보지 못한다. 어떤 달콤함이냐, 내게 말해 보라. – 음행하고, 탐식하고, 재물을 탐내고, 도둑질하며, 다른 정욕에 노예가 되는 것이? 그런 음탕한 자들은 마치 열병에 걸린 환자처럼 불 속에 있는 것처럼 타오르지 않는가? 그러니 차라리 그들이 이곳에서 벌을 받고 있으며, 장차 오는 세상에서는 이곳에서의 해롭고 타락한 쾌락들 때문에 영원한 고통에 내맡겨질 것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신음하며 몸부림칠 뿐, 달콤함을 맛보지 못하는 것이 바로 죄 짓고 타락한 자들의 운명이다. 반면 미덕을 사랑하고 미덕 있게 사는 자는 언제나 그와 다른 복들을 누리며, 모든 성도들처럼 무욕을 통해 형언할 수 없는 달콤함을 맛보고, 주님을 항상 기뻐하며,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비하면 모든 것을 부차적인 것으로 여깁니다. – 우리도 그들을 본받아 기뻐하며 서로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우리 자신의 구원을 위해 열심을 내며, 이를 위해 인내, 순종, 자기 의지의 절제 및 그 밖의 수련에 부지런히 힘쓰자.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을 완성함으로써 영생의 상속자가 되자.

 

296. 세속적인 사람들은 하찮은 이익을 위해 많은 것을 참아내는데, 우리야말로 영원한 이익을 위해 참지 않을 수 있겠는가?

296. 1) 세속의 사람들은 하찮은 이익을 위해 많은 고난을 견딘다. 우리야말로 영원한 복을 위해 견디지 않을 수 있겠는가. – 2) 게다가 우리에게 무슨 슬픔이 있겠는가?!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 3) 그러니 거짓 없는 소망을 품고 모든 것을 기꺼이 견뎌내자. [4, 94]

16. 수도 생활이 답답하고 슬프다는 것은, 주님께서 “나를 따르려 하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마태복음 16, 24) 말씀하신 것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세속적인 삶이 고통스럽다는 것은, 우리가 그 안에서 보는 것들이 명백히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세속적인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슬픔을 스스로 처리하게 내버려 두고, 우리는 우리 자신의 슬픔을 마땅히 바라보아야 한다. – 우리의 슬픔은 성령의 기쁨과 함께 하므로, 우리에게 슬픔으로 보이는 것조차도 하늘에서 우리에게 예비된 소망에 따라 기쁨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니 어떤 하찮은 명예나 상을 위해 그토록 많은 고통을 견디는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가 그토록 위대한 하늘의 복을 위해 닥치는 사소한 슬픔들을 기꺼이 견디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17. 게다가 우리에게 어떤 슬픔이 있겠는가? – 우리 뜻에 반하여 정해진 어떤 일, 마음에 들지 않는 어떤 명령, 음식이나 음료, 옷이나 신발, 순종의 장소나 방식에서 오는 불쾌한 일, 그리고 그 밖의 우리를 괴롭히는 유사한 것들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은 비록 슬픔을 주기도 하지만, 우리를 마땅히 해야 할 일에서 벗어나게 할 정도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기” (롬 8:18)라고 하셨으니, 그 영광을 위해서라면 설령 우리가 매일 불에 타는 형벌을 당한다 해도 모든 것을 참아내야 할 것이지, 단지 이처럼 가볍고 견딜 만한 유혹들만 참는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슬픔에 잠긴 마음을 자극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세속의 삶에서 건져내어 이 거룩하고 천상의 지위에 세우신 우리 선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우리가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은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으시며, 모든 것에 풍성하신 분이시나, 오직 우리 자신을 위하여, 그 은혜를 입음으로써 우리가 구원받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18. 그러므로 모든 양면성을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영혼을 얻으며, 닥치는 모든 유혹보다 더 높은 곳에 서서, 우리를 시험하고 가르치기 위해 슬픔을 주는 어떤 일이 우리에게 닥쳐와 우리의 삶을 슬프게 할 때에도, 어떤 생각도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라; 그리하여 우리도 사도와 함께 담대히 말할 수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는 모든 일에서 환난을 당하나 곤란에 빠지지 아니하며, 기대하지 않으나 낙심하지 아니하며, 쫓기나 버림받지 아니하며, 쓰러지나 멸망하지 아니하며, 항상 우리 몸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니노라” (고린도후서 4:8–10); 그리고 그러한 선한 마음가짐과 잘 정돈된 삶으로 하나님께 기쁨을 드려,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천국의 상속자가 되기를.

 

297. 여행자들은 모두 안식을 바라며 모든 것을 참아냅니다. 우리도 영원한 안식을 바라며 모든 것을 참아내어,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합시다

297. 1) 모든 여행자는 안식을 바라며 모든 것을 참아냅니다. 우리도 영원한 안식을 바라며 모든 것을 참아내어,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합시다. – 2) 그러나 우리가 언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까? – 우리의 선한 행실을 볼 때입니다. – 그러니 우리도 그렇게 합시다. – 3) 이를 위해 우리는 성부들과 사도들, 그리고 주님 자신을 본받자. – 4)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참으셨으니, 우리도 참자.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 구원이 없다. – 5) 내가 참았으니, 너희도 하나님의 굳건한 손 아래서 겸손해져라. [4, 95]

19. 길고 힘든 여정을 떠나는 사람은 누구나, 수고하며 수고하고, 인내하며 인내하며, 여행 중 겪는 온갖 곤란을 겪지만, 평온한 안식처를 바라며 슬픔을 견디고 어려움을 극복하며, 온갖 열정과 노력을 다해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 그렇다면 이 비유는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는가? 바로 우리도 이 생에서 좁고 슬프며, 길고 힘든 여정을 걷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여정이 달리 될 수는 없으니, 우리로서는 평생 동안 순결과 정절을 지키며, 복종과 순종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생각을 꺾고, 하나님의 마음을 거스르는 모든 것을 제압하며, 모든 생각을 그리스도의 순종에 사로잡아야” (고린도후서 10, 4. 5) 해야 하며, 이와 뗄 수 없이 연결된 모든 다른 일들을 수도 생활의 규율에 따라 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선한 결말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그분의 시련 을 견디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영생입니다. 그러니 이 영생을 위하여, 감사와 인내로 이 현세의 모든 고통을 견디며, 우리 몸과 영으로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20.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지에 대해서는, 한 가지 사례를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틀 전, 평신도들이 우리를 보러 이곳에 왔는데, 우리가 한마음으로 지내며 손으로는 순종의 일을 행하고 입으로는 다윗의 찬송을 읊조리는 모습을 보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감사를 드렸고, 교훈을 얻었습니다. – 이렇게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가 우리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비치게 하여, 그들이 너희의 선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태복음 5:16). – 보라, 여러분은 이번 일을 통해 몸과 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셨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도 언제나, 모든 상황에서 그분을 찬양하기 위해 힘쓰십시오. 거룩하게 행하고 부적절한 것을 멀리하며, 성 다윗이 권면한 대로: “궤휼을 행하는 자를 시기하지 말며, 불법을 행하는 자를 부러워하지 말라; 그들은 풀처럼 금세 시들고, 곡식 이삭처럼 금세 떨어질 것이니라” (시편 36, 1. 2). 그러나 선을 행하고 덕을 쌓는 자들을 부러워하라.

21. 일상생활에서 어떤 예술에 전념하는 이들은, 최악의 장인이 아니라 최고의 장인들로부터 자신이 사랑하는 예술의 규칙을 배우고자 열망한다: 목수는 솜씨 좋은 목수에게서, 화가는 가장 뛰어난 화가에게서 배우며, 일반적으로 누구도 어떤 일에서든 서툰 자나 무지한 자를 본받지 않고, 본받으려 한다면 가장 숙련된 장인과 전문가들을 본받는다. 만약 물질적이고 썩어 없어질 것에 대해 이러한 규칙과 법칙이 적용된다면, 예술 중의 예술이자 과학 중의 과학인 영성 생활에서는 더욱더 성인들의 모범을 따라 우리 삶을 바로잡아야 하며, 그들과 정반대되는 것들에 이끌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니 청년 시절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순종 속에 머무른 이들을 본받자. 고대의 성인들이 아니라도, 우리 형제단 안에서 빛을 발한 이들조차도 말이다. 단순함으로 마귀의 온갖 교활함을 무너뜨린 이들을 본받자; 분별하지 않는 순종으로 자신의 수행의 길을 올바르게 이끌어 간 이들을 본받읍시다. 원하신다면,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것 같이”(고린도전서 11:1)라고 명하신 분을 본받읍시다; 또 다른 곳에서는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녀들아, 하나님을 본받으라. 또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 제물로 드리신 것처럼, 사랑 안에서 행하라” (엡 5:1, 2)고 하신 분을 본받읍시다.

22.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하나님께 제물과 희생 제물로 드리셨으니, 우리가 그분을 위하여 사소한 슬픔을 감사함으로 견디지 못하겠는가?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모욕하는 자들의 모욕이 내게 닥쳤도다”(시 68:10)라고 하신 말씀대로 모든 모욕을 참으셨으니, 우리로서는 사소한 책망이나 모욕적인 말 한 마디라도 견디지 못하겠는가? 우리가 성도들의 발자취를 따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들과 함께 거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본받고 그분의 지극히 순결한 고난에 동참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릴 수 있겠는가? – “의인조차 간신히 구원을 얻는데, 불의하고 죄 많은 자는 어디에 서겠는가?” (베드로전서 4:18). – 보십시오, “의인조차 간신히 구원을 얻는다”고 얼마나 분명히 말하고 있는지. 그리고 참을성이 없고, 인내심이 없으며, 옛날의 모욕을 기억하여 그로 인해 분노하고 동요하며,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한 사람은 의인이라 불릴 수도 없습니다. – 그런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겠는가? – 그러니 우리처럼 행동하는 자들은 필연적으로 키노이노스 공동체의 교제에서 배제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이곳을 떠난 후, 필연적으로 영원한 심판에 처하게 되지 않겠는가?

23. 미친 듯이 말하건대, 나 또한 수련승이 아니었는가? 수도원장, 재무 담당자, 영적 및 육신의 아버지가 없었는가? 영적 및 육신의 형제들이 없었는가? 나는 그들 가운데서 마치 불길 속에 있는 것처럼 이리저리 내팽개쳐지며, 두 가지 상반된 삶 사이에서 투쟁하며 지냈다. 그러나 인내와 마땅한 고백, 그리고 모든 죄를 스스로에게 돌리는 것 외에는 구원받을 길이 없었다. – 그렇지 않고서는 슬픔 속에서도 평온한 영혼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너희도 ‘하나님의 굳건한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베드로전서 5:6); 그리하면 평안과 끝없는 안식을 얻으리라. 기록된 바와 같이 “지금이 바로 은혜의 때요,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이라”(고린도후서 6:2). 그러니 우리 영혼에서 간사함을 떨쳐 버리고, 선을 행하는 법을 배우며,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 분 앞에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드러내자. 그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그날에는 우리가 모든 헛된 말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므로, 가능한 한 선한 양심을 가지고 이 생을 떠나 영생의 유업을 받을 자격이 있는 자로 드러나도록 하자.

 

298. 아무리 설명해도, 여러분 중 일부에게는 여전히 세속적인 마음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298. 1) 아무리 설명해도, 여러분 중 일부에게는 여전히 불화가 드러납니다. – 2) 이는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겠습니까? – 3) 그러니 선한 열심을 품고 평화를 추구합시다. [4, 96]

24. 제가 여러분과 자주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더 이상 여러분을 가르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마땅히 해야 할 행동에 충분히 마음을 다잡고 있어, 그 점에 대해 다시 상기시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보니 이것이 여전히 지극히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여러분에게 자주 권면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분 중 일부에게는 여전히 불화함과 고집이 사라지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시기에 비추어 볼 때 이미 스승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 여전히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며, 무의미한 짓을 하고 헛되이 미친 듯이 굴고 있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25. 그 원인은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사도의 말씀에 따르면, “사랑은 오래 참으며, 자비롭고, 시기하지 않으며,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으며, 무례하게 굴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화내지 않고, 악을 생각하지 않으며,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를 기뻐하며,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딘다”(고린도전서 13:4–7)고 하셨으니, 사랑이 없을 때 우리 안에는 그와 정반대되는 것들—불신, 절망, 조급함, 불화, 건방짐—이 힘을 얻는다는 것이 분명하다. – 그러나 그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을 때, 주님께서 친히 단호한 말씀으로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임을 알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 13, 35)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가 어떻게 주님의 제자라고 당당히 자칭할 수 있겠는가; 또 다른 곳에서는 “너희가 내 말씀 안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될 것이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한복음 8:31, 3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된 사랑을 품지 않고 원한과 다툼, 분열을 일으킨다면, 비록 이 말이 듣기 힘들지라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원수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가련한 자들이 왜 살아야 합니까?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지 않는다면, 왜 이 공기를 마셔야 합니까?

26. “너희를 실족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죄를 지을 것이니라” (갈 5:10). 그러니 부디 “모든 사람과 화목”을 구하고, “거룩함”을 지키라. 이를 지키지 않는 자는 주님을 뵙지 못할 것이니라. “누구도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라. 슬픔의 뿌리가 싹트어 자라나 악을 행하여 많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도록 하라” (히브리서 12:14, 15). 이것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 교활한 자들에 대해 선한 열심을 보여 주기를 권합니다. 악을 미워하고 그것을 멀리하며, 그들을 “원수로 여기지 말고 형제처럼 훈계하라” (데살로니가후서 3, 15), 그리하여 사도의 칭찬을 받을 자격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 칭찬은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너희가 스스로를 깨끗하게 하라” (고린도후서 7, 11). – 나는 너희를 사랑하고 아끼며, 동시에 엘리야의 운명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이 말을 하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이 혀가 여러분에게서 빼앗기는 날이 올 것이며, 그때 비로소 제가 겸손하게 여러분에게 말한 것이 진실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평화의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그분의 계명의 길 위에서 평안히 지키시고, 그분의 영원한 왕국으로 인도하시기를 빕니다.

 

299. 성 테오도르는 성상파괴 이단에서 회개했다가 다시 타락한 자들이 수도원에 보낸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299. 성 테오도르는 성상파괴 이단에서 회개했다가 다시 타락한 자들이 수도원에 보낸 물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부 정교회 신자들은 그가 이로 인해 정교회에 대한 반감과 박해를 부추긴다고 비난했다. 성 테오도르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4, 97] 다시 말하건대, 전쟁이 일어났으니, 바로 성상파괴를 둘러싼 내전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를 학살할 때보다 더 비참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세속적인 면에서든 신앙적인 면에서든, 항상 하나님께서 우리 동포들을 화해시키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이곳에 앉아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아무렇게나 앉아 있어서는 안 되며, 큰 주의와 목표에 대한 충실함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설교하면서도 정작 우리 자신이 믿을 수 없는 자들이 되어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9, 27). 우리는 회개를 치렀음에도 다시 이단자들의 편으로 돌아선 자들을 염두에 두고 이 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최근 그들이 보낸 것을 영혼에 해롭고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수령을 거부했습니다. 이를 알게 된 우리와 함께 계신 몇몇 장로들은 마치 이로 인해 분란이 일어난 것처럼 분노했습니다. 우리는 소동을 일으키는 것을 부인하지만, 어떤 이들이 동요한다고 해서 진리에서 조금이라도 물러서거나 그리스도의 고백을 더럽힐 수는 없습니다. 이는 믿음에 대한 무관심의 죄를 두려워하기 때문인데, 한 선지자가 다음과 같이 책망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것과 더러운 것을 구분하지 아니하였고, 정결한 것과 부정결한 것을 분별하지 아니하였도다”(에스겔 22:26). 이에 따라 성 사도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의와 불의가 어떻게 함께하겠으며, 빛과 어둠이 어떻게 교제하겠느냐? 그리스도의 화합이 어떻게 벨리아르와 있을 수 있겠으며, 신실한 자와 불신실한 자가 어떻게 한 몫을 나눌 수 있겠으며, 하나님의 교회가 우상과 어떻게 결합하겠느냐?” (고린도후서 6, 14–16).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명하노니, 우리로부터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않고 방탕하게 행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너희는 떠나야 한다.” (데살로니가후서 3, 6). 그리고 또: “만일 어떤 형제가 음행자나 탐욕자나 우상 숭배자나 분쟁을 일으키는 자나 술주정뱅이나 강도라고 알려지면, 그런 자와는 함께 식사조차 하지 말라” (살전 5:11). 이 모든 것이 우리 마음을 두렵게 하고 괴롭게 하므로, 우리는 우리의 신실함과 구원을 저버리기보다는 차라리 온갖 슬픔과 고난을 감내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한다” (고린도전서 12, 26)라고 기록되어 있듯이, 여러분은 우리의 진실한 지체요 마음의 깊은 곳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러분에게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을 알릴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를 통해 여러분이 상황을 파악하고,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생각하며 함께 아파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스스로도 이 말에 대해 판단해 보십시오. 진리를 위해 자신의 수도원에서 쫓겨난 자들과, 진리를 배반함으로써 수도원을 장악한 자들을 동등하게 여기고, 양쪽 모두와 동등하게 교제하는 것이 옳은 일입니까? – 그렇다면 쫓겨난 자들은 헛되이 추방을 견디고 있는 것입니까?! 과거에 우리가 진리를 위해 수고한 것도 헛된 것이었단 말입니까?! 게다가 우리는 한쪽에는 이 말을, 다른 쪽에는 저 말을 하며 사기꾼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신앙 고백을 굳게 지키는 이들이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를 유혹했던 자들과 교제하는 것을 본다면, 우리를 향해 의롭게 탄식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에게 현혹되어 그들과 함께 스스로를 파멸시키지 않도록 합시다. 예전에는 시대가 요구하는 대로 굳건히 버텼으니, 지금도 변함없이 그렇게 버텨야 합니다. 사도가 말하기를, “만약 (의인이) 비뚤어진다면, 내 영혼은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우리는 파멸로 이끄는 타락을 따르지 않고, 구원을 주는 믿음을 따릅니다”(히브리서 10:38, 39). 보라, 그가 타락을 파멸이라 불렀음을 알겠는가? – 왜 다른 곳에서는 “나는 하나님의 뜻을 다 전하는 데 있어 아무런 죄책감이 없으니, 너희에게 하나님의 뜻을 모두 전하였기 때문이다”(사도행전 20: 26, 27). 우리도 마찬가지로 사도들의 가르침과, 사도들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우리 성부들의 가르침에 굳게 서서, 이단자들과 그들에게 이끌린 배교자들과의 교제를 피하며, “우리가 그 안에 서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소망을 자랑하는” (롬 5:2)라고 고백하며, 바르게 행하고 다른 모든 미덕을 실천하여 “우리가 온전하고 부족함이 없게 되기를” (야고보서 1:4), “모든 지성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를” (빌립보서 4:7).

 

300. 우리는 모든 슬픔을,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우리가 늘 사용해 온 방법들, 특히 의심 없는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를 통해 견뎌 내자

300. 1) 우리는 외부와 내부의 모든 고난을, 우리가 늘 사용해 온 방법들, 특히 의심 없는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를 통해 견뎌 내자. – 2) 우리의 생계가 궁핍해졌으나, 주님께서 곧 도와주셨다. 앞으로도 야고보와 엘리야 등에게 하셨던 것처럼 도와주실 것을 희망하자. [4, 98]

1. 고난을 겪지 않고는 누구도 순교자가 될 수 없으며, 마땅한 방식으로 싸움을 성공적으로 이겨내지 않고는 누구도 면류관을 받을 수 없다(딤후 2, 5). 그러니 지치지 말고 모든 것을 기꺼이 견뎌 냅시다: 꾸지람과 질책은 마치 채찍질과 같고, 자신의 욕망을 잘라내는 것은 마치 피를 흘리는 것과 같으며, 마음속으로 밀려드는 생각들은 마치 마귀가 지핀 불길과 같습니다. 불은 물을 부으면 꺼지고, 정욕의 불길은 눈물을 흘리면 사그라듭니다. 수고로 인한 피로는 침상에 편안히 누워 쉬면 사라지고, 생각들로 인한 마음의 무거움은 그것을 믿음으로 고백함으로써 치유됩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치료법입니다. 이를 지혜롭게 활용하여 주님 안에서 점점 더 건강해지십시오. “혹시 너희 중에 지혜가 부족한 자가 있다면, 하나님의 형제께서 권면하시듯, ‘모든 사람에게 편파 없이 주시고 꾸짖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라.’ 믿음을 가지고 구하되,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바람에 휩쓸리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바다의 물결과 같으니라.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마음이 두 가지로 나뉜 사람은 모든 행실에서 정립되지 못한 자니라” (야고보서 1:5–8). 그러니 우리가 마음이 두 가지로 나뉘지 말고, 간구할 때 의심으로 흔들리지 맙시다. 오히려 감사와 진실한 믿음으로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립시다(빌 4,6). 그러면 반드시 구한 것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질적인 불길은 꺼지고, 광란하는 생각들은 사라지며,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우리 앞에 놓인 순종의 과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할 것입니다.

2. 이와 함께, 우리 헌금통에 모인 돈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러분께서 아셨으면 합니다(요한복음 12:6). 그런데 지출은 늘어나는 반면 수입은 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은 포도주마저 부족하여, 가장 연약한 이들이 당연히 슬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용기를 내십시오. 주님께서 곧 밀과 포도주, 그리고 다른 필수품들을 통해 은혜를 베푸실 것이며, 우리가 온전히 그분께 소망을 두고, 그분 안에서 가진 확신을 저버리지 않고 항상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한다면, 앞으로도 계속해서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그분께서 친히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며, 너를 경멸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수아 1:5); 또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6:33)라고도 하셨습니다. 설령 때때로 부족함이 있다 해도 놀랄 일은 아닙니다. 이는 시험이자 덕을 검증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야곱 조상은 의인이 아니었습니까? 그러나 굶주림에 시달리자, 우리 조상들을 이집트로 보내 밀을 사 오게 했습니다. 선지자 엘리야는 의롭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도 시돈의 사렙타에 이르러 과부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지금 물 조금만 가져다 주시오, 내가 마시겠고, 빵 부스러기도 조금 주시오, 내가 먹겠소” (열왕기상 17, 10, 11). 다른 무엇을 요청한 것이 아니라, 가장 손쉽게 구할 수 있고 필수적인 음식만을 청한 것이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 엘리야는 하늘을 향해 비를 내리지 말라고 선언했고, 다시 기도로 이 시련의 기간을 끝낸 바로 그 사람이다. – 우리처럼 겉모습이나 내면의 상태 모두 미천한 자들이라도, 설령 그런 고난을 겪는다 해도 부적절한 일은 없을 것이며, 우리는 그로 인해 괴로워해서는 안 되고, 모든 것이 풍족할 때 나 부족할 때나 항상 감사해야 합니다; 이는 바로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표징이며,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우리는 현세의 슬픔을 쉽게 견뎌낼 뿐만 아니라, 장차 올 복을 누릴 자격을 얻게 될 것입니다.

 

301. 원수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언제 어디서나 예기치 않게 공격해 오니,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

301. 1) 원수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며, 언제 어디서나 예기치 않게 공격해 오니,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 – 2)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을 의지하며, 눈물을 흘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교훈을 얻으며, 마음을 지키고 생각을 되돌아보는 것입니다. – 3) 어제 여러분은 무질서하게 노래했습니다. 이는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며, 유익 대신 영혼에 해를 끼칩니다. 앞으로는 품위 있게 노래하십시오. [4, 99]

3. 최근 아가르인들의 습격이 있었을 때, 우리 모두는 이 불경건한 자들의 살인적인 손에 잡히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그리고 이는 결코 헛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향한 악마들의 습격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전혀 생각하지도 않고, 우리의 부주의로 인해 악의의 영들에게 사로잡히지 않을까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비록 눈에 보이는 적들의 공격은 특정 시기에 일어나며, 그에 대한 소문이 미리 퍼져 자유를 원하는 이들이 어딘가로 도망칠 기회를 준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반면 보이지 않는 적들에 대해서는 그런 것이 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매 순간 오직 우리를 공격하는 데만 몰두하며, 숨 쉴 틈조차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에는 더 큰 두려움이 따르며, 이 적들의 먹이가 되지 않고 영혼을 파멸로 이끄는 그들의 유혹을 피하기 위해 더 큰 자기 방어가 요구됩니다.

4. 그렇다면 어디로 도망쳐야 할까? 물론 하나님께로 가야 한다. 성 다윗이 노래한 대로: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시며 힘이시니, 우리를 심히 괴롭히는 자들 앞에서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시라”(시 45:2); 그리고: “주님을 경외하는 자들 주위에 주의 천사가 진을 치고 그들을 구원하시리라”(시 33, 8); 또: “주님을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과 같으니, 예루살렘에서 영원토록 흔들리지 아니하리라”(시 124, 1).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을 신뢰한다면, 원수들의 얼굴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요새가 원수들에게 함락되는 것은 대부분 양식과 물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 안에는 무엇이 있겠는가? – 눈물과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를 통해 영혼은 양육받고 구원받지만, 이것이 부족해지면 타락하여 포로가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히 우리 안에 거하게 하소서”라고 기록된 대로(골로새서 3:16), 눈물이 마르지 않게 하라. 그러나 사람들이 말하듯이 내면의 배신도 있습니다. 이것이 또 무엇일까요? – 우리 안에 살아 있는 정욕과, 육신의 교묘한 계략에 의해 자극받는 생각들인데, 이것들은 배신적으로 적대적인 악마들에게 문을 열어줍니다. 이것들은 즉시 쫓아내야 하며, 온갖 경계로 우리 성읍, 즉 영혼이 함락되지 않도록, 우리가 죄에 휩쓸리지 않고, 파멸적인 정욕의 포로가 되지 않도록, 오히려 우리가 창조되었던 그 덕행 안에 머물러, 우리를 창조하신 분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나 같은 죄인에게도 칭찬이 되도록 지켜야 합니다.

5. 어제 여러분은 시편 찬송으로 나를 화나게 했습니다. 그러니 부디 품위 있게, 규례에 따라 노래해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함부로, 어수선하게 노래하여 죄인인 나를 모욕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을 모욕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이는 “이성 있게 노래하라”(시 46:8)는 그분의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이전 구절의 노래가 끝나기도 전에 합창으로 새로운 구절을 시작하지 않도록 하는 질서를 지키지 않는다면, 이성적으로 노래할 수 없습니다. 찬송이 큰 소리로 하든 조용히 하든, 느리게 하든 빠르게 하든, 무엇보다도 질서를 지켜야 합니다; 모든 일에서 질서를 지키는 것이 가장 훌륭한 덕목이라면, 하물며 하나님과의 대화에서는 더욱 그러하지 않겠는가? 질서가 무너지면 터무니없는 상상과 정신의 산만함이 생기지만, 질서가 지켜질 때 주의력과 냉철함, 그리고 달콤함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성 다윗은 이를 증언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주의 말씀이 내 목에 얼마나 달콤한지, 내 입술의 꿀보다 더 달콤하도다”(시 118, 103). 그러므로 간청하건대, 우리가 온 힘을 다해 이 미덕을 실천하며, 찬양할 때 서로 경계하고 서로 바로잡아 주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현명하게 찬양함으로써 우리는 영혼의 평안을 얻고, 서로에게 선한 본보기가 되며, 다른 모든 것과 더불어 이로써 하느님께 기쁨을 드림으로써, 천국 유산을 받을 자격이 있는 자들이 되겠습니다.

 

302. 마음이 헛되이 흐트러지거나 죄악된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하려면, 그것을 하나님에 대한 묵상—즉 하나님의 속성과 행적, 천사들의 계급, 성인들의 거처, 그리고 이 가시적인 세상을 관조하는 일—안에 머물게 해야 한다. 이를 통해 영혼의 아름다움이 보존된다.

302. 1) 마음이 헛되이 흐트러지거나 죄악된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마음을 하느님을 묵상하는 데 두어야 한다. 즉, 하느님의 속성과 행적, 천사들의 계급, 성인들의 거처, 그리고 이 가시적인 세상을 관조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영혼의 아름다움이 보존된다. – 2) 영혼이 창조될 때 지녔던 아름다움은 타락으로 인해 상실되었으나, 세례를 통해, 회개를 통해, 그리고 수도 생활을 통해 회복된다. [4, 100]

6. 바로 그곳이 마음이 항상 머물러야 할 곳이며, 마음이 머무르어야 할 곳이다! – 하나님의 일에 대한 깨어 있는 주의 속에서, 수행의 전장에서, 결코 포로처럼 이리저리 끌려다니지 않도록 해야 한다. 바다의 물이 고갈되거나, 숨 쉬는 이에게 공기가 부족해지겠는가? — 그러니 하물며 우리 안에서는 선한 생각이 결여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 마음의 눈이 하나님의 경이로운 일들이 펼쳐진 끝없는 바다 로 향할 때, 그 깊이에 빠져들면 마음은 세속적인 일로 헛되이 시간을 보내거나 악한 생각에 얽매일 여유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은 끊임없이 움직이기 때문에 가만히 있을 수 없으며, 우리가 어디로 향하게 하든,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거기로 멈출 수 없이 달려가기 때문이다. 만약 오른쪽으로 향한다면, 다윗과 함께 “주여, 주의 뜻대로 내 선함에 힘을 주소서”(시 29:8)라고 외쳐야 할 것이며, 만약 왼쪽으로 향한다면, 그 다음 구절인 “주께서 주의 얼굴을 돌리시니 내가 당황하였나이다”(–9)라고 외쳐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얼굴이 돌이켜지는 것은 마음이 헛된 일에 몰두할 때이며, 영혼에 해로운 당황은 마음이 죄악된 계획에 빠져 있을 때이다. 그러니 우리는 항상 마음을 주님의 오른편으로 인도하고, 선한 환상을 보게 하도록 노력합시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 천상의 천사 군대, 그곳의 형언할 수 없는 복, 성 사도들과 예언자들, 순교자들, 그리고 모든 의인들의 빛나는 거처; 마찬가지로 이 하늘의 돔, 눈부신 태양, 밝은 달, 별 무리, 그리고 감각으로 인지할 수 있는 그 밖의 모든 것들입니다. 그것들에 머무르기 위함이 아니라, 그것들을 통해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께로 승천하여, 자신의 아름다움을 훼손되지 않게 보존하기 위함입니다.

7. 하나님께서는 아름다움으로 우리를 자비롭게 여기사, 처음에 우리를 그분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가 불순종으로 인해 스스로를 어둡게 하고 수치를 당했지만, 그분은 다시 은혜 안에서 우리를 아름다움으로 입히시니, “중생의 목욕과 성령의 갱신, 곧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주신 성령” (디도서 3, 5); 그 후 우리가 여기서도 부적합한 자로 드러났을 때, 하나님께서는 동정 서원을 통한 회개를 통해 아름다움을 되찾을 수 있는 세 번째 길을 마련해 주셨으니,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향한 채무 증서를 찢어 버리셨다”(골로새서 2, 13, 14) 십자가를 지고 사는 삶, 마치 세례와 같이. – 그러니 우리 영혼이 그 아름다움 안에 머물러, “너는 온전히 아름답도다, 나의 이웃아, 네게는 흠이 없도다” (아가 4, 7)라는 말씀을 들을 자격을 얻게 하소서. 만약 다시 죄로 더럽혀지게 된다면 [우리는 변덕스럽고 “더러움에서 깨끗한 사람은 아무도 없나니”(욥 14,4), “마음이 깨끗하다고 자랑할 사람은 아무도 없나니”(잠 20,9) ], 서둘러 회개의 눈물로 우리 자신을 정화합시다. “주께서 나를 씻어 주시면, 눈보다 더 희어지리이다”라고 성 다윗이 기도합니다(시편 50, 9); “씻고 깨끗해지며, 너희 영혼에서 간사를 제거하라”고 하느님께서는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 촉구하십니다(이사야 1, 16). 그리고 항상 스스로를 정화하며, 온갖 악한 성향을 버리고,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갈망하며, 매일 기쁜 마음으로 죽음을 기다리는 영혼은 복되도다. – 죽음은 반드시 우리에게도 찾아올 것이며, 우리도 이 모든 이에게 공통된 빚을 갚아야 할 것이다. – 그러나 오, 우리가 경건하고 의롭게 살아가다가, 장례식 때 우리 각자의 유해가 형제들의 마지막 입맞춤을 받기 위해 놓여 있을 때, 우리 영혼이 하나님의 천사들에게 받아들여져 하늘에서 영원히 복된 삶을 누리도록 데려가 주시기를, 과연 그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03. 수도원을 떠난 뒤 이단에 빠지고 타락한 자들을 언급하며

303. 1) 수도원을 떠나 나중에 이단에 빠지고 타락한 자들을 상기하며. – 2) 원수가 수도사를 길에서 벗어나게 하고 파멸시키는 것만큼이나 간절히 바라는 것이 없음을 지적하며, 경계할 것을 권고한다. [4, 101]

8. 몇몇 형제들이 떠난 탓에 요즘 듣는 이들이 적다. 그러나 듣는 이가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가르침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멸시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은 너희를 통해 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얼굴을 보느니라.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함이니라” (마태복음 18, 10. 11). 오, 하나님의 인간 사랑이 얼마나 형언할 수 없이 큰가! 주님께서는 도망친 종을 찾아, 그를 마귀의 속박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참 빛이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아내어, 그를 죄의 어둠에서 이끌어 내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온유한 마음으로, 모든 선하심을 지니신 주님을 본받아,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애틋해하고, 그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심지어 그 사람을 위해 우리 영혼까지 바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 내가 날개가 있다면, 날아가 각 형제 공동체에 머물며 – 그들을 살펴보고 마땅한 말을 전하고 – 그들뿐만 아니라 “가인의 길을 따르고 발람의 헛된 보수를 좇은 들”(유다서 11)에게도 그러하겠노라. 내가 누구를 그런 자들이라고 부르는가? – 레온티오스, 에르미아스, 네크타리오스, 그들은 우리로부터도, 믿음으로부터도 배교했고, 배교의 대가로 지도자 자리를 차지한 자들이다. 만약 나, 이 겸손한 자가 그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면, 비록 다른 어떤 일도 하지 않더라도, 내 영혼을 그들을 위해 바칠 것이다. 또한 내 죄로 인해 거룩한 수도복을 벗어 던지고 불의와 죄의 옷을 입은 자들도 만나보고 싶다. 그들을 위해 다시 한 번 눈물을 흘리고 싶기 때문이다. 그들 중 한 명인 그 피가시우스라는 자는, 사람들이 말하길, 그토록 악에 빠져 왕의 승인을 받아 백성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전쟁을 일으켜 살인을 저지른 끝에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참으로 비극이여! 이 비통한 자가 어떤 심연으로 추락했는가! 처음에는 형제단에서 멀어졌고, 그 후 자신의 욕망의 길을 따라가며, 이쪽 저쪽으로 타락해 말 못하는 짐승처럼 변해갔으며, 그 후 수도자 신분을 벗어던지고, 마침내 우리가 들은 바로 그 비극으로 생을 마감했다.

9. 이를 떠올리며, 그분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를 청하며, 우리 자신은 자신의 길을 굳건히 지키고, 수행자의 불굴의 의지를 조금도 꺾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소한 방종과 나태함으로 인해 영혼은 파멸로 치닫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때문에 나는 홀로 사는 이들을 안타까워하며, 마치 마귀에게 바쳐질 준비가 된 먹잇감처럼 그들을 애도합니다. 양 떼가 있는 우리에서 늑대가 양 한 마리를 훔쳐가더라도, 무리 밖에서 발견한 양을 잡아먹는 것이 훨씬 더 쉽지 않겠습니까? – 악마가 우리를 향해 어떤 광기로 숨 쉬는지 모르십니까? 그는 겸손한 수도사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공격합니다. 그는 많은 이들의 파멸을 기뻐하지만, 한 명의 수도사를 파멸시키는 것만큼은 그 어떤 것보다도 더 큰 기쁨을 느낍니다. 왜 그는 지칠 줄 모르고 싸우고, 엎드려 버티며, 마치 순종하는 이를 순종에서, 침묵하는 이를 침묵에서, 기둥 위에 선 이를 기둥에서, 은둔자를 은둔처에서 떼어내려는 듯이 투쟁하는가? 그러한 동요를 일으킨 뒤, 그들을 자기 뜻대로 이끌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규율과 자리에서 흔들림 없이 머물며 덕을 쌓는 이들은 마귀에게 잡히지 않고, 그의 그물 위로 높이 들려 올라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마귀에 대항하는 힘을 활용하여, 신성한 경외심으로 스스로를 보호하고 하늘의 생각으로 그를 물리치며, 그의 생각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이와 같은 방식으로 그에게 승리를 거두고, 우리의 수훈자이신 그리스도 주님으로부터 의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이다.

 

304. 특히 박해로 인해 깨어 있자. 이는 이때 원수가 더욱 맹렬히 덤벼들기 때문이다

304. 1) 박해 때문에 특히 깨어 있자. 왜냐하면 이때 원수가 더 세게 덤벼들기 때문이다. 세상이 시작된 이래로 그가 이미 얼마나 많은 사람을 파멸시켰는가?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고 있다. – 2) 어떻게 그의 올가미를 피할 수 있는가? 겸손과 순종으로 계명을 충실히 따르는 것이다. 여기에는 겉과 속 모두에서 마땅히 살아야 할 삶이 묘사되어 있으며, 격려를 위해 그 보상이 명시되어 있다. [4, 102]

10. 우리는 “모든 경건과 순결함” (딤전 2:2)으로, “순종의 자녀로서, 너희가 전에 무지하던 때의 욕망에 따라 변하지 않고” (벧전 1:14) 그리스도를 위해 박해를 받을 만한 삶을 살아가며, 수도자로서의 노력에 대한 열정을 결코 느슨하게 하지 말자. 보십시오,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다”(베드로전서 5:8); 그리고 지금 그가 박해로 인해 고통받는 우리를 보고, 이제 영혼을 더 쉽게 빼앗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며 훨씬 더 맹렬하게 덤벼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어디서나 신의 계명으로 보호받으며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는 우리 안에서 틈을 찾지 못하고 수치를 당하며 물러갈 것입니다. 만약 그가 틈을 발견한다면, 점점 더 거세게 공격해 올 것이며, 우리를 타격하고 파멸시킬 때까지는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아니면 우리가 그가 창세 이래로 이미 얼마나 많은 이를 파멸시켰는지 모르는가? 그가 죄의 달콤함으로 첫 사람을 사로잡아 낙원에서 쫓아내지 않았는가? 가인을 무장시켜 형제를 살해하게 하지 않았는가? 사도들의 무리에서 유다를 배척하여, 그를 만물의 생명의 배신자로 만들지 않았는가? 셀 수 없이 많은 다른 이들도 죽음으로 몰아넣지 않았는가? – 그는 지금도 유혹하고, 부추기며, 온갖 악을 저지르도록 강요하고, 거의 온 우주를 집어삼키고 있다; 그를 피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극도의 주의가 필요하다. 그는 방탕하고 비열한 삶뿐만 아니라, 극심한 수행을 통해서도 우리를 바른 길에서 벗어나게 하고 반대편으로 이끌려고 시도하며, 다양한 모습으로 변신하고 온갖 계략과 유혹을 꾸미며, 온 땅 곳곳에 우리를 잡기 위해 수많은 그물을 치고 있는데, 이는 복자 안토니우스가 환상에서 보았고, 이때 하늘로부터 받은 지시에 따르면 오직 겸손함만이 이를 피할 수 있다고 한다.

11. 그러므로 겸손을 입음으로써, 바른 길에서 벗어나거나 그 길을 넘어서는 일을 피하고, 왕의 길을 걸으며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치우치지 말고, 우리에게 맡겨진 거룩한 계명의 규칙에 정확히 부합하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앞선 성부들의 발자취를 따르자. 우리의 마음이 악한 생각을 멀리하고, 마음이 신성한 말씀으로 교훈을 얻으며, 입은 오직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열리고, 눈은 의를 보며, 귀는 헛된 소문을 듣지 않고, 손은 해야 할 일에 뻗으며, 발은 질서 있게 걸으며, 음식과 음료는 절제되고, 잠은 정해진 규칙에 따르며, 마땅한 일 외에는 어떤 외출도 허용되지 않고, 죽음을 초래하는 무모함이나 그 밖의 부적절한 어떤 것도 우리 안에서 행해지지 않으며, 모든 것이 경건하고 지혜롭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길은 길지 않고, 수행의 끝은 가깝다. 그러나 그 수고에 대한 보상은 무엇인가? – 천국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수련하고 투쟁할 것입니다. 비틀거린다면 서둘러 일어서고, 잠이 든다면 깨어나 다시 정신을 차리며, 본성을 억제하고 땅에 속한 지체를 죽이며, 덕을 쌓아갈 것입니다. 이 모든 말을 나 자신에게도 하는 것이니, 나 또한 여러분과 같은 육신을 가진 자로서 연약함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진심으로 수고하고 흠 없이 살아가며, 이곳에서 소망을 품고 떠나 복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자격을 얻게 해 주시기를 바란다.

 

305. 율법과 복음의 계명을 그 차이점을 설명하며 제시하고, 그 어느 것도 지키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다고 말한 뒤

305. 1) 율법과 복음의 계명과 그 차이점을 지적하고, 어느 쪽도 지키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다고 말하였다. – 2) 죽음과 심판, 그리고 정죄 시에 그들을 기다리는 끔찍한 운명을 상기시키고, – 3) 그 후, 주님의 자비의 문이 닫히기 전에 회개하며 주님께로 돌아오라고 권면한다. [4, 103]

12. 우리를 창조하시고 무에서 존재로 이끌어내신 하나님께서는, 마치 어떤 학교와 같이 우리를 이 삶 속으로 인도하셔서, 우리가 그분의 왕국에 관한 복음의 계명을 배우게 하셨다. 그래서 그분은 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내시며 그들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치라.” (마태복음 28, 19. 20) 그분이 우리에게 명하신 계명들은 과연 무엇일까요? – 구약성경에 따르면,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고 명해졌습니다(출애굽기 20장; 신명기 5장); 그러나 신약에서는 이보다 더 높고 완전한 계명들을 주셨으니, 이는 “옛 사람들에게는 ‘살인하지 말라’고 하였으나, 살인하는 자는 심판받을 것이라.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를 향해 헛되이 분노하는 자는 모두 심판받을 것이니, 이는 형제에게 ‘바보’라고 말하는 자는 공회 앞에 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또 “옛사람들에게 이르기를, 간음하지 말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는 이미 마음으로 그와 간음하였느니라.” “옛사람들에게 이르기를, 거짓으로 맹세하지 말고, 네 맹세를 주께 지키라 하였으나,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어떤 맹세도 하지 말라.” “말씀하시기를,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셨으나,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에게 선을 행하라” (마태복음 5,21–44). 보라, 두 언약의 차이가 어떠한가? 하나는 행위를 금하고, 다른 하나는 마음의 태도 자체를 금하니, 그 태도에서 비롯된 행위로 인해 죄가 이곳에 뿌리내리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 이제, 만일 우리가 율법적으로도, 복음적으로도 살지 않고, – 어떻게 말해야 할까 – 이교도처럼 산다면, 그날 우리는 무엇을 겪게 될까? – “자기를 속이지 말라”고 사도는 말합니다.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자나 간음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남색하는 자나 남자와 동침하는 자나 강도나 도둑이나 술 취하는 자나 비방하는 자나 탐욕스러운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하리라” (고린도전서 6, 9. 10).

13. 내가 예전에도 여러분에게 자주 말했듯이, 지금도 단호하게 선언하노니, 누구도 자기 뜻대로 살지 말라. 누구도 구원의 일에 무관심하지 말라. 누구도 금을 쌓아 두지 말고, 노예를 사지 말고, 말과 소를 기르지 말고, 그 밖의 어떤 재물 축적으로도 스스로를 괴롭히지 말라. 이는 그것들로부터 가장 크고 치명적인 죄들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너희 가운데에는 여전히 진리를 완고하게 거부하고, 저항하며 맞서는 자들이 남아 있다. 그러나 나는 겸손하며, 너희의 피에 대해 깨끗하다. 이는 내가 너희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끊임없이 선포해 왔고, 반역하는 자들의 아들들에게 닥칠 칼에 대해 쉬지 않고 경고해 왔기 때문이다. “혹시 우리가 주님을 화나게 하는가? 우리가 그분의 가장 강한 음식인가?” (고린도전서 10:22).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여 있나니,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모든 나무는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마태복음 3:10). 이 본보기를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이 위협 앞에서 떨지 않습니까? 머지않아 피할 수 없이 맞이하게 될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보통 우리를 육신에서 데려가기 위해 오는 무서운 천사들을 어떻게 맞이할 것입니까? 필요한 준비도 갖추지 못한 채 그 길지 않은 여정을 어떻게 헤쳐 나갈 것입니까? 어떻게 양심이 더럽혀진 채로, 모든 무릎이 꿇고 모든 혀가 고백하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그곳에서 그런 모습으로 드러난다면, 불이 꺼지지 않고 구더기가 죽지 않는 곳, 울부짖음과 이를 갈음이 있는 곳으로 피할 수 없이 쫓겨날 것입니다.

14. 그러나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 함께 와서 경배하고, 엎드려 울며, 우리의 선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고백과 간구와 통회와 눈물과 기도와 금식과 순결과 선한 행실로 그분의 얼굴을 미리 맞이합시다. 그분은 우리 죄를 씻어 주시는 분이시며, 아직 우리 앞에서 그분의 자비의 문을 닫지 않으셨고, 그분께 돌아오는 자를 외면하지 않으시며, 창녀와 강도, 방탕한 자를 자비롭게 받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자, 여러분, 일어나고, 깨어나고, 힘내어, 마치 학교에서 방과 후 집으로 기쁘게 달려가는 모범적인 학생들처럼, 우리도 복음의 진실한 제자로서 이 세상을 떠나 기쁨으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가도록 합시다.

 

306. 순종을 가장 풍성한 열매를 맺는 위업으로 칭찬하고, 순종하지 않는 삶을 사는 자들을 책망하며

306. 1) 순종을 가장 풍성한 열매를 맺는 위업으로 칭찬하고, 순종하지 않는 삶을 사는 자들을 책망한다. – 2) 곧 오실 분이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아 주실 것임을 상기시키며, 제자들에게 순종에 있어 더욱더 힘내어 성장하도록 권면한다. [4, 104]

15. 전능하신 하느님의 은총으로 여러분은 믿고 제 겸손에 순종하며, 여러분에게 명해진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이는 기쁨이자 면류관으로, 저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저보다 먼저 덕을 삶의 목표로 삼았던 여러분에게도 해당됩니다. 왜냐하면 순종하는 자에게 계명에 따라 살고 자신의 뜻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더 달콤하고, 더 갈망되며, 더 기쁜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여기에 진정한 순종이 있으며, 이것이 바로 복된 삶입니다. 이는 슬픔이 많으면서도 근심 없는 수련입니다. 슬픔이 많은 것은 아직 자신의 욕망에 사로잡혀 있을 때이며, 걱정이 없는 것은, 누군가 자신의 의지를 완전히 끊어내고, 그로 인해 사도처럼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 (갈 2,20)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게 되었을 때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뜻대로 살지 않고, 수도원장님을 통해 하나님께 따라 살며, “주님의 영광을 낯을 들어 바라보아, 주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영광에서 영광으로 그 형상을 닮아가기” (고린도후서 3:18)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세상을 염려하지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아무 걱정 없이, 어떤 부담도 없이 삶을 살아가며, 온전히 자신을 하느님께 맡깁니다. 그러나 자신의 욕망에 의지하고 순종의 법칙을 뒷전으로 밀어내며, 자신의 뜻과 자기 만족에 굴복하는 자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게 되는데, “마귀에게 사로잡혀 그 뜻대로 이끌려 다니는 자” (딤후 2:26), – 비록 때로는 금식하는 것처럼 보이거나, 기도하거나, 다른 선한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모든 것은 옳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에서 나지 않은 모든 것은 죄” (롬 14:23); 그리고 공통된 규율에 따르지 않는 것은 행하는 자 자신의 일일 뿐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경건함과는 거리가 멀다.

16. 그러므로 나는 그런 자들을 정당하게 책망하며, 여러분을 칭찬하고 간청하노니, 더욱더 가장 선한 순종과 인내, 자기 의지의 절제, 믿음과 소망과 사랑, 그리고 자신의 구원과 온 형제단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기 위한 그 밖의 모든 수도자의 노력 속에 머물러 주시기를 바랍니다. 부디, 여러분께 간청합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오실 분이 오셔서 결코 실패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10:37). 마지막 날이 올 것이며, 그날에는 “어둠의 행위가 드러나고 마음속의 생각들이 밝혀질 것”입니다(고린도전서 4:5). 두렵고 거짓 없는 심판자가 오실 것이니, 그분은 수련자를 수련자 곁으로, 수도원장을 수도원장 곁으로, 주교를 주교 곁으로, 귀족을 귀족 곁으로, 왕을 왕 곁으로 데려가시어, 한 사람을 다른 사람을 통해 책망하거나 정당하게 하실 것이며, “각 사람에게 그의 행위에 따라 갚아 주실 것”이니, 선한 일을 인내로 좇아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할 것을 구하는 자들에게는 영생을 주실 것이요, 진리를 거역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분노와 진노를 내리실 것이다. 슬픔과 곤란은 악을 행하는 모든 사람의 영혼에게 임하리라” (롬 2:7–9). 우리는 죽음을 맞이할 때 선한 행실이 빈약한 상태로 잡히지 않고, 선한 행실의 풍성한 열매를 맺은 상태로 맞이할 수 있도록, 이를 지극히 두려워하며 온 힘을 다해 준비해야 한다. 적들이 우리가 선을 행하는 것을 방해하더라도 [—그것이 바로 그 본성이다. “그는 태초부터 사람을 죽이는 자요, 진리 안에 서 있지 아니하니, 그에게는 진리가 없음이니라”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요한복음 8:44)]; 그러나 우리는 그에게 대항하여 용기와 너그러움을 발휘하고, 수고와 땀, 기도와 간구, 눈물로 맞서 싸울 것이며, – 그리하면 우리의 투쟁과 우리의 연약함을 보살펴 주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승리를 주시는 주님의 도우심으로 인해, 그는 우리를 상대로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307. 가르침의 유익함을 상기시키며, 모든 이가 서로 협력하여 하나님의 거처 안에서 함께 세워지도록 초대한다

307. 1) 가르침이 맺는 열매에 대해 언급하며, 모든 이에게 서로 협력하여 하나님의 거처를 세우도록 권면한다. – 2) 그 후,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으니, 그분이 우리 안에서 타락하지 않도록 막아야 한다고 설득하며, 이를 위한 방법들도 제시한다. [4, 105]

17. 누구도 우리의 가르침이 헛된 수고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아니요, 우리는 그로부터 큰 유익을 얻습니다. 땅에 대한 쟁기, 목마른 자에게 물이 그러하듯, 열린 마음으로 듣는 이에게 우리의 가르침은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영혼을 대개 더 나쁘게 만듭니까? 형제들 사이에 불화와 다툼, 분열이 생기는 원인은 무엇입니까? 가르침과 권면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까? 교훈과 권면이 있는 곳에는 평화와 번영이 있으며, 평화와 번영이 있는 곳에는 성령께서 머무르십니다. 바로 그 이유로 나, 이 겸손한 자도 두려움과 사랑으로 여러분에게 말을 건네고, 권면하며, 위로하고, 상기시키려 애쓰는 것입니다. 이는 나 자신뿐만 아니라 여러분도 마귀의 온갖 유혹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도록 돕기 위함입니다. – 저는 여러분, 특히 형제단에서 가장 앞선 분들이 저에게 큰 도움을 주고 계심을 고백합니다. 여러분 모두는 저에게 선을 이루는 데 협력자이십니다. 성 바오로 사도는 “내가 심었고, 아폴로가 물을 주었으며, 하느님께서 자라게 하셨다”(1코린 3,6)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는 오로지 제 것만이 아니라 여러분의 선한 일이며,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의 선한 것이 비롯되는 하느님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각자에게 주어진 순종에 따라, 모든 것을 공동의 유익을 위해 이끄시고, 성령 안에서 하느님의 거처에서 서로를 세우며 화목하게 지내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사도가 말하듯이: “다른 누구도 이미 놓여 있는 기초, 곧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습니다. 만일 누가 이 기초 위에 금, 은, 귀한 돌, 나무, 건초, 짚을 쌓아 올린다면, 각 사람의 일이 드러날 것이니, 그 날에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로 시험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각 사람의 일이 어떤 것이든, 불이 시험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 11–13). 보십시오, 그가 어떻게 덕을 금과 은, 귀한 보석에 비유하고, 악을 나무와 건초, 갈대에 비유하는지; 이 중 심판의 불 시험을 받게 될 때, 타버리는 것들은 타버리고, 견고한 것들은 보존될 것입니다.

18. 이에 더해, 그는 더욱 무서운 말을 사용하여 다음과 같이 덧붙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줄, 또 하나님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만일 누가 하나님의 성전을 훼손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훼손하실 것이니,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한 것이요, 너희가 바로 그 성전이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3:16, 17).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 불리고 그 성전이 될 자격을 얻는다는 것은 얼마나 큰 은혜인가!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을 훼손하면 하나님께 의해 훼손당할 것이라는 위협 또한 얼마나 큰가! 그러니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을 훼손하지 말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모시게 된 자로서, 우리 자신을 정욕의 거처로 만들지 말자; 마찬가지로 죄에서 해방되었으니, 다시는 마귀에게 노예가 되지 맙시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의의 열매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양을 위해 깨끗하고 흠이 없게 되기를” (빌 1, 10. 11). 그러므로 우리 마음이 깨어 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며, 죽음에 대한 끊임없는 묵상으로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경외심과 묵상이 있는 곳에는 죄가 들어설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이에 무감각해지고 굳어지면, 그때는 정욕이 우리 안에 쉽게 스며들어 우리를 자극하고 혼란스럽게 하며, 우리가 다시 예전의 선한 마음가짐으로 돌아갈 때까지 떠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을 행하는 데 힘쓰는 수고를 감내하여, 그 후 끊이지 않는 평안을 얻고자 하며, 울음을 감내하여 주님 안에서 기쁨을 얻고자 하며, 좁고 고통스러운 현세의 길을 감내하여, 그로부터 솟아나는 시원한 생명을 얻고자 한다. – 보라, 이것이 모든 거래 중에서 가장 위대한 거래이다. 보라, 이것이 모든 행복 중에서 가장 위대한 행복이다. 미덕을 쌓기 위한 약간의 수고와 노력으로, 헤아릴 수 없고 영원한 복을 얻는 것—우리 모두가 그 복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308. 우리의 삶은 바다를 항해하는 것과 같다

308. 1) 우리의 삶은 바다를 항해하는 것과 같다. – 2) 조타수인 마음은 침몰을 피하기 위해 삶의 배를 어떻게 조종해야 하는가? – 3) 이 교훈들은 어린이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노인들에게도 해당된다. 그들에게도 위험이 멀지 않기 때문이다. – 4) 그러니 오랜 수고로 쌓아온 것을 망치지 않도록 주의합시다. [4, 106]

19. 또 다른 어떤 바다가 바로 인간의 삶인데, 우리는 마치 배에 탄 것처럼 이 육신에 들어와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항해하고 있다. 그리고 그 항해는 때때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치 평범한 배를 타고 바다를 항해하는 사람들이 때로는 항해하고 때로는 부두에 정박하듯이 하는 것이 아니라, 밤낮으로 끊임없이, 악천후와 폭풍 속에서도 그러합니다. 이 바다는 위험할 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길이에 비례하여 끝없이 길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는 악의의 영들이 일으키는 끔찍한 격랑이 너무나 많이 치솟고, 우리를 침몰시키려 공격해 오는 해적들—즉 악마들이 너무나 많이 나타나니,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왜 성 다윗은 이를 보고 기도로 외치는가? “나를 미워하는 자들과 깊은 물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물의 폭풍이 나를 잠기게 하지 말며, 심연이 나를 삼키지 않게 하시고, 내 원수가 나를 비방하지 않게 하소서”(시 68, 15-16). – 그토록 위대하고 훌륭한 인물인 다윗조차도 물에 잠기지 않게 해 달라고 두려워하며 기도했는데, – 비록 한때 방심하여 고통을 겪기는 했지만 – 우리 같은 겸손한 자들은 무엇을 말하겠으며, 같은 고통을 겪지 않으려면 얼마나 더 두려워하고 기도해야 하겠는가?

20. 우리의 마음은 마치 조타수처럼, 깨어 있고 경계를 늦추지 않을 때면 정욕의 폭풍을 물리치지만, 공격해 오는 생각들의 물보라에 조금이라도 휩쓸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나태와 부주의에 빠지면, 광란의 물결처럼 밀려오는 정욕을 받아들이게 되고, 그로 인해 넘쳐흐르다가 마침내 죄로 인한 거대한 난파를 겪게 되는데, 이는 듣기만 해도 비참한 일이지만 직접 겪는 것은 더욱 비참한 일이다. 이처럼 우리 삶의 항해는 무섭고 비참하니,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깊고 경각심을 가지고 그 키를 잡고, 정욕을 멀리 물리치며 침입해 오는 부적절한 생각들을 즉시 내쫓아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가 그 생각들에 주저하는 사이에 그 생각들이 우리를 침몰시키지 않을 것이다.

21.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오직 젊은이들만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수행의 길을 걸어온 노인들도 포함한다. 마귀는 그들조차 건드리지 않고 지나가지 않으며, 종종 비참한 타락으로 몰아넣기 때문이다. 위대하고 신성한 바실리우스가 어떤 곳에서 말했듯이: “실로 가장 비참한 광경이라. 금식 후, 엄격한 생활 후, 오랜 기도 후, 넘치는 눈물 후, 20년 혹은 심지어 30년에 걸친 절제 생활 후, 부주의와 영혼의 태만 때문에 갑자기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제4권, 222쪽, – 러시아어 번역본). – 바로 이 겸손한 제가 듣고 보고, 슬퍼하며 지금도 슬퍼하고 있습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쌓아온 미덕의 풍요로움이, 한 순간에 교활한 악마에게 약탈당해 경건한 수행자를 텅 빈, 쓸모없는 존재로 남겨두는 것을 생각하며 말입니다. – 우리 구원의 신비는 이토록 위대하며, 마귀가 우리를 향해 보이는 광란도 이토록 거세다. 마귀는 우리가 자신이 떨어진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참지 못하기 때문이다.

22. 그러나 그가 아무리 그러하고, 그토록 맹렬한 분노로 우리를 대적하더라도; 우리 모두, 어린이와 어른, 젊은이와 늙은이, 모두가 한마음으로 굳은 결심을 세우고, 하나님의 도움으로, 우리가 수많은 수고와 노력으로 쌓아 올린 것—즉, 세상에 대한 단절, 순종, 정결, 눈물, 첫 고백과 마지막 고백—을 부주의로 인해 망가뜨리지 않도록 하겠으며; 그뿐만 아니라, 우리의 희망이라는 돛을 높이 치고 성령의 바람에 이끌려 끊임없이 깨어 경계하며, 생의 끝을 맞이하여 불멸의 항구에 들어섰을 때, 덕행의 풍요로움으로 천국을 얻도록 하리라.

 

309. 어제 왕이 보낸 사자가 왔는데, 우리는 왕이 우리를 호의적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모두 흉한 예감을 품었다

309. 1) 어제 왕이 보낸 사자가 왔는데, 우리는 왕이 우리를 호의적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모두 흉한 예감을 품었다. 만일 왕이 우리를 호의적으로 여긴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너희는 그 사자를 다르게 맞이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영혼도 죽음의 전령을 맞이할 것이다: 하느님의 은총을 확신한다면 기쁨으로, 확신하지 못한다면 공포로 맞이할 것이다. – 2) 그러니 하느님과 화해하고, 천사들과 친구가 되자. 이를 위해 회개의 눈물, 자기 성찰, 상호 기도, 무엇보다도 성체 성사를 받아야 한다. – 3) 여기서는 성찬에 어떻게 임해야 하는지, 그것이 얼마나 구원에 도움이 되는지, 그리고 성찬을 드리는 일이 드문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지 설명하며, 앞으로는 더 자주 성찬을 받도록 권고하고 있다. [4, 107]

23. 어제, 왕의 사자가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그의 갑작스러운 도착에 놀라 즉시 극도로 불안해했다. 그러나 그가 우리를 위해 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두려움은 더욱 빨리 사라졌다. 이제 묻건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겁을 먹었던 것일까? 혹시 왕이 우리에게 불만을 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우리를 미워하고 경멸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은 아닐까? 반대로, 만약 우리가 왕의 총애를 받고 그와 가까운 사람 중 하나였다면, 왕이 항상 우리에게 호의적으로 대했다는 것을 알기에, 왕이 보낸 사람의 도착을 기뻐하지 않았겠는가? – 하지만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가? –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선한 삶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호의적이시도록 자격을 갖춘 영혼은, 육신을 떠날 때 만왕의 천사가 그녀를 데리러 오면 두려워하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며 기쁨으로 자신의 주님께로 떠날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혼란과 공포에 빠지게 될 것이며, 내면에 확고함이 없고, 어디에서도 도움과 위로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형제나 친구가 영혼을 위로하고 두려움을 떨쳐낼 수 있지만, 저곳에서는 그런 것이 전혀 통하지 않으며, 천사가 무자비하고 잔혹하게 그 불쌍한 영혼을 데려갈 것이기 때문이다. – 이 말씀을 듣고, 우리 마음속에 두려움이 일지 않는가? 만약 이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이 일어난다면, 우리가 실제로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될 때 우리는 어떤 고통을 겪게 될 것인가? – 그때 영혼은 어떻게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까요? – 선지자 다니엘의 말에 따르면, “불의 강”이 “그분 앞에서 흘러나오고, 수천 수만이 그분을 섬기며, 무수한 천사들이 그분 앞에 서 있다” (단 7:10), – 그리고 심판자는 무섭고 무자비하시며, 복음서에 기록된 대로(마 12:36) 헛된 말 한 마디까지도 심판받게 됩니다. 그때 영혼이 이 모든 것을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 – 참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떨어지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히 10,31). 그리고 영혼이 자신을 끝없는 고통에 내모는 가장 공정한 판결을 듣게 될 때는 더욱 두려운 일이다.

24. 그러므로 간청하고 기도하노니, 죽기 전에 하나님과 화해하고 그분의 호의를 얻자. 우리를 데리러 올 천사들을 우리의 친구로 삼자. – 우리의 마음의 눈을 깨어 있게 하고, 정욕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도록 마음을 무너지지 않게 하자. 만일 실족하더라도, 속히 일어나자; 수많은 눈물로 악마의 불타는 화살을 끄고, 그 대신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높이 세웁시다. – “의인의 기도는 큰 힘을 발휘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야고보서 5,16);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를 위한 기도와 서로를 기억하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눈물과 통회도 큰 힘을 발휘하며, 무엇보다도 성찬 예식에 참여하는 것이 가장 큰 힘을 발휘합니다. – 여러분이 이 성찬 예식에, 왜인지 모르겠지만, 소홀히 대하는 모습을 보니 저는 지극히 놀랍습니다. 일요일에는 성사에 참여하는 이들이 아직도 있지만, 다른 날에 전례가 있을 때는 아무도 다가오지 않습니다. 심지어 수도원에서도 예전에는 매일 원하는 이들이 성체를 영하곤 했는데, 지금은 아주 드물게만 일어나며, 심지어 어디에서도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25.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제가 여러분이 그저 무심코 성사에 참여하기를 바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사람은 스스로 시험하여, 그 빵을 먹고 그 잔을 마셔야 한다.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님의 몸을 분별하지 못함으로 스스로 심판을 받는 것이다”(고린도전서 11,28-29)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니, 내가 원하는 것은 이것이 아니다. 결코 그러지 않기를 바란다! 오히려 우리가 성찬에 참여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능한 한 스스로를 정화하여, 그로써 이 은사에 합당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앞에 놓인 이 떡은 생명의 성찬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니,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내가 줄 그 떡은 곧 내 살이니, 내가 이를 세상의 생명을 위하여 주리라” (요한복음 6:51); 또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리라” (요한복음 6:56)고 하셨습니다. 이 형언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는 선물을 보십니까?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 양식으로 당신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이보다 더 주님께서 우리를 향한 위대하신 사랑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우리 영혼에게 이보다 더 구원을 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 만일 지금 누구도 매일 먹는 평범한 음식을 스스로 거절하지 않고, 그것을 맛보지 못하면 극도로 괴로워한다면, 모든 사람에게 평범한 빵이 아니라 생명의 빵이, 평범한 잔이 아니라 불사의 잔이 제공될 때, 누가 그것을 맛보았는지 무관심하게 대하며 이 일을 필수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큰 무지와 무의미함을 보여주는 증거입니까! 비록 지금까지 그런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제부터는 이 하나님의 은사의 힘을 깨닫고 더 이상 그런 일이 없도록 굳게 결심합시다. 그리고 항상 우리가 가진 힘을 다해 자신을 정화하며, 거룩하고 성화시키는 성사에 참여합시다. – 그리고 이것이, 제 생각에, 그리고 진실로 그러하듯이, 성찬을 위한 준비와 그 기대감에 이끌려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지키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반면 성찬에 무관심할 때, 정욕들은 우리를 사로잡을 자유와 여지를 더 많이 얻게 됩니다. – 이것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향한 끊임없는 지침이 될 것이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자비로 우리 모두가 그 생명을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310. 앞으로, 앞으로 – 덕의 길을 따라

310. 1) 앞으로 – 앞으로 – 덕의 길을 따라. – 2) 어떻게? 매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실천하며: 이를 위한 대략적인 계획이 제시된다. – 3) 동기: 덕의 아름다움과 달콤함, 그리고 죄의 해로움. – 4) 무엇이 성공을 가로막는가? 진심 어린 소망이 없을 때이다. [4, 108]

1. 덕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행보를 결코 멈추지 않고, 항상 그 참여자들을 가장 완전한 경지로 이끌어 간다. 이를 보여주며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미 도달했거나 이미 완성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쫓아가고 있습니다. 만일 내가 이를 붙잡는다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붙잡으신 그분을 붙잡을 것입니다”; – 그리고 이어서 “뒤는 잊어버리고, 앞을 향해 뻗어가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높은 소명의 영광을 향해 달려가노라” (빌 3,12–14)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선행에 있어서는 어떤 멈춤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멈춤은 악으로 치우치는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덕행의 길에서 멈춰 서지 말고, 항상 전진하며, 늘 새롭게 힘에서 힘으로 성장하여,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충만한 키에 이르는 온전한 사람에 이르도록” (엡 4,13) 합시다.

2.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는가? 매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열성적으로 행하며 지낸다면 가능할 것이다. 예를 들어 이렇게 해 보자. 잠에서 깨어나면 서둘러 기도하러 가고, 기도에서 돌아오면 열심히 일에 매진하되, 우리 마음속으로 주님께 찬양과 노래를 드리며, 동시에 손으로 일한다. 하루가 지났는가? 감사와 회개의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자. 그리하여 이러한 일의 연속을 통해 우리 안에서도 성 다윗이 말한 바, “낮은 낮의 말씀을 토해 내고, 밤은 밤의 지혜를 선포하느니라”(시 18,3)는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우리에게 일에 대한 무관심과 마음과 생각의 속박 속에서 하루도 지나가지 않게 하소서. 또한 육체의 안락함과 부끄러운 일들에 빠져 밤을 보내지 않게 하소서. 행동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 결코 그러지 않게 하소서! — 생각 속에서도 그러하지 않게 하소서. 진리의 말씀은 우리에게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도 깨끗해야 한다고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3. 우리가 무엇을 갈망하고자 한다면, 그 맛은 달콤하고 끝없이 만족스러운 미덕을 갈망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아름다움으로 즐거움을 누리고자 한다면, 만물이 그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주님보다 더 사랑스러운 분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악한 정욕은 영혼을 광란하게 만들어, 어떤 짐승보다도 더 잔인하게 영혼을 갉아먹는다. 그리하여 그것으로부터 오는 것은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삶이다. 사도는 “육과 피는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으며, 썩을 것이 썩지 않을 것을 상속받지 못한다”(고린도전서 15,50) 말한다. 그리고 말해 보라, 죄에 사로잡힌 자 중 누가 수치를 당하지 않았으며, 비하되지 않았으며, 죽음에 내맡겨지지 않았는가? 또 미덕이 드러난 자 중 누가 세상에 경이로움으로 높이 들어 올려지지 않았는가? 많은 사람 중에서 두 사람을 들어 보자. 암논과 요셉이다. 전자는 음행으로 인해 치명적인 수치를 당하지 않았는가? 반면 후자는 이집트 여인 앞에서 정절을 지킨 덕분에 왕이 되지 않았는가? – 이처럼 덕은 참으로 사랑스럽고, 갈망할 만하며, 구원을 주는 것이다! 반면 죄는 역겹고, 혐오스럽고, 파멸적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큰 착각에 빠져, 생명 대신 죽음을, 빛 대신 어둠을, 썩지 않음 대신 썩어짐을 사랑한다. 이보다 더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4. 선을 사랑하는 자가 되고자 하면서도, 어찌하여 우리는 그렇게 될 수 없는가? – 우리가 이를 진실한 소망이 아니라 겉으로만 드러내는 소망으로 원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자기 뜻대로 행동하는 존재로서, 온갖 것을 원하고 원하는 대로 선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 진정으로 선을 원했다면, 선을 선택했을 것이다. – 젊은 시절부터 올바르지 못한 삶을 살아온 탓에 우리에게 버릴 수 없는 강렬한 습관이 자리 잡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 “사람의 말로 하노니, 너희 육체의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 지체를 불결함과 불법에 종으로 내어주어 불법에 빠지게 하였으니, 이제 너희 지체를 의의 종으로 내어주어 거룩함에 이르게 하라” (롬 6:19). 즉, 죄에 대한 성향에 대항하여 우리는 덕을 향한 열정을 보여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계속해서 힘써 나아가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에게 문을 열어 주실 것이며, 우리 안에서 그분께 기뻐하시는 일을 이루시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실 것입니다.

 

311. 칭찬을 받으며 세상을 떠난 사람이 있다: 그를 본받으라는 교훈이 주어진다

311. 1) 어떤 이가 칭송을 받으며 세상을 떠났다: 그를 본받아야 할 교훈이 주어진다. – 2) 모든 성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최후의 순간을 기억함으로써 열정을 불태우도록 고무한다. – 3) 그렇게 행하는 자는 복을 받으며,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우리도 그와 같이 되자. [4, 109]

5. 이제 우리는 우리 형제 테오소스트가 세상을 떠났음을 완전히 확인하게 되었으니, 그에 대해 몇 마디 말해야 할 필요가 있는데, 그는 덕이 뛰어난 사람으로서 수도사와 평신도 모두에게 칭송을 받았으며, 스스로 순종할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순종하도록 이끌었고, 고난을 겪음으로써 시험을 이겨내어, 사도들의 말처럼 시험받는 이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하나님 안에서 선한 많은 자녀들을 얻었으나, 그 후 진리를 위해 적지 않고 결코 쉽지 않은 슬픔과 고난, 박해와 유혹을 겪었고, 그 가운데서 세상을 떠나 주님께로 갔습니다. – 그런데 내가 이 모든 말을 왜 하는가? – 바로 이 우리 형제를 통해 우리 자신의 미래를 엿보기 위함이다. 즉, 우리가 선하고 경건하게 산다면, 그와 마찬가지로 죽은 후 다른 이들에게 칭찬을 받게 될 것이며, 후세 사람들에게 선한 열심을 불러일으키는 본보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가 올바르게 살지 않는다면, 칭찬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의롭게 끝없는 고통을 겪게 될 것입니다. 이는 말하기는커녕 생각만 해도 두려운 일입니다.

6. 자, 너는 이 점을 잘 살펴보아라. 우리가 하나씩 이곳을 떠나 어디로 향하는지, 그리고 이곳에서 불과 며칠 동안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 어떤 것인지—그것은 단지 미덕을 시험하고 검증하는 데 필요한 만큼만 살다가, 그 후 우리가 영원히 머물 곳으로 넘어가기 위함이다. 이것을 깊이 생각하는 것은 현명한 자들의 일이다. 그리고 이를 깊이 생각하는 자는 항상 두려워하고 떨며, 매일 의지로 죽음을 맞이하고, 매일 자신의 육신으로부터 해방을 기다리며, 그로 인해 자신에게 맡겨진 순종에 따라 앞으로 닥칠 일들에 대한 열의를 불러일으키고, 끊임없이 수고를 더한다. 과연 성인들의 자연스러운 위업은 어디서 비롯된 것입니까? 죽음의 순간까지 이어진 그들의 순종은 어디서 비롯된 것입니까? – 사지가 잘리고 피가 쏟아지는 와중에도 순교자들이 보여준 무적의 인내는 어디서 비롯된 것입니까? – 바로 여기에서, 즉 삶의 덧없음과 갑작스러운 죽음, 두려운 심판대 앞에 서는 일, 그리고 끝없는 영원한 고통에 대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겠는가? – 그들의 모든 것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며, 마치 타인의 몸인 양 가장 잔혹한 고통을 견뎌내는 것도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7. 그리고 밤낮으로 이를 생각하며, 이 땅에 나그네처럼 머무르며, 사도 바울이 말한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의 계시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는 그 복되고 끝없는 생명을 소망하는 영혼은 복되도다. “피조물은 헛된 것에 굴복하여 자신의 뜻대로 하지 못하나, 이를 굴복시킨 분을 신뢰하며, 피조물 자신도 썩어짐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로 들어갈 것을 소망하고 있다”(롬 8:19–21). 보라, 무엇이 약속되어 있는가? 모든 것이 썩지 않는 것으로 변하고, 피조물이 노예 상태에서 자유로 옮겨질 것이라는 것인가? – 성 다윗이 “주의 궁정에서 보내는 하루가 천 년보다 낫다”(시 83,11) 말한 그 날은 과연 어떤 날일까요? 또한 사도 성 베드로가 “하루가… 천 년과 같다”(베드로후서 3,8) 말한 날은요? 우리도 그곳으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뻗어 나가며, 그곳으로 우리의 갈망을 옮기고, 그곳으로 우리의 생각과 소망을 옮겨, 그러한 일들에 몰두함으로써, 우리를 유혹할 권세는 있으나 우리가 수행의 무기로 무장되어 있을 때 우리를 무너뜨릴 힘은 없는 이 세상의 통치자로부터 피할 수 있도록 하리라. – 저는 여러분이 그 자를 피할 뿐만 아니라 이길 수 있기를, 그리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으로부터 의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12. 오직 참된 수도자들만이 기뻐할 수 있으니, 이는 세속적인 일에 대한 염려가 없고 오직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일에만 전념하며, 동정 생활을 지키기 때문이라

312. 1) 오직 참된 수도자들만이 기뻐할 수 있으니, 이는 세속적인 일에 대한 염려가 없고 오직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일에만 전념하며, 동정 생활을 지키기 때문이다. – 2) 그들에게는 슬퍼할 일도 없다. 죄는 용서받았으며, 생각과 정욕으로 인한 상처는 면류관을 준비하는 투쟁을 통해 근절되니, 용감하게 싸워 원수를 물리치기만 하면 된다. – 3) 용기를 내자. 곧 오실 분이 오실 것이다. [4, 110]

8. 사도는 모든 이에게 “항상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명한다(빌 4,4). 보통 기뻐하는 이들은 오직 참된 수도사들뿐인데, 그들은 아내나 자녀, 종이나 돈, 재산, 그리고 육욕을 좇는 자들이 신경 쓰는 그 어떤 것에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오직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만이 염려이며, 바로 이 일에 전념하는 것이 곧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결혼과 종들, 그리고 이로부터 생겨나는 모든 근심은, 솔로몬이 말한 바와 같이(전도서 1–2장), 하나님께서 인류의 아들들에게 그 안에서 꺾이게 하시려고 주신 ‘영의 꺾임’이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것들이 마음을 하나님에 대한 경건한 기억에서 멀어지게 할 때, 주님 안에서 기뻐하기는 어렵습니다. 오직 그 기억 안에서만 기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기뻐하는 자들의 무리에 속해 있는 우리는, 항상 서로 기뻐하고 함께 기뻐하며, 우리의 순결과 무소유에 대해 상을 주실 것을 약속하신 하나님께 보상을 기대합시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위대하고 초자연적인 행위는 물론, 차가운 물 한 잔을 주는 것조차도 상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실로 순결의 길은 위대하고 초자연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천사들의 거처와 접하며, 결혼도 노예제도도 없었고, 오직 부족함도 걱정도 없는 삶이 흘러가던 낙원의 원래 상태로 사람을 인도한다.

9. 만일 누군가 자신이 기뻐하지 않고 슬퍼한다고 말한다면, 그 슬픔의 원인이 무엇인지 말해 주십시오. – 예전에 많은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까? – 그러나 그 죄들은 이미 고백과 세상에 대한 단절, 그리고 순종의 멍에를 받아들인 덕분에 용서받았습니다. – 매일 생각들로 인해 상처를 입기 때문입니까? – 그러나 그 생각들을 떨쳐낸다면, 그 안에 바로 당신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라는 예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결코 싸움에 나서지 않은 자에게 면류관을 씌워 주지 않고, 싸운 자에게만 씌워 주며, 싸우지 않은 자에게 상을 주지 않고, 용감하게 경쟁하여 승리한 자에게만 상을 주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우리가 슬픔의 원인으로 지목할 수 있는 바로 그곳에, 우리를 위한 기쁨의 샘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영적인 기쁨으로 기뻐합시다. 일어나 마귀의 계략에 가장 용감하게 맞서고, 기도와 간구로 그의 유혹을 물리치며, 겸손과 순종으로 그의 올가미를 끊어 버리고, 눈물과 통회로 그를 파라오처럼 물에 잠기게 하고, 자기 반성과 고백으로 그를 우리 곁에서 멀리 쫓아내며, 그 밖의 모든 선한 행실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그를 무너뜨립시다. 그러므로 그가 아무리 다양한 계략을 꾸미고, 악의에 있어 아무리 교묘하며, 우리를 죽이려고 할 때를 잘 알고, 패배한 척하여 준비되지 않은 영혼을 뜻밖의 순간에 덮쳐 마음대로 하려 한다 해도,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파수꾼으로서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을 것이며, 마음의 눈을 쉼 없이 뜨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불타는 마음을 간직함으로써, 그 결과로 누구도 이길 수 없고 흔들리지 않는 존재로 남을 것입니다.

10. 자, 부디 싸움에서 겁을 내지 말고, 적과의 투쟁에서 기를 꺾지 맙시다. 투쟁과 위업의 끝이 가까웠으니, 앞으로 올 일이 아주 조금 남았을 뿐이며, 그것은 지체되지 않을 것이니, 곧 각 사람의 죽음을 맞이할 때이든, 세상의 종말이 닥쳐 그분이 천사들의 군대와 함께 불타는 불길 속에서, 형언할 수 없는 영광으로 하늘에서 나타나실 때이든, “모든 눈이 그분을 볼 것이며”, 그리고 “그분을 찔렀던 자들도, 땅의 모든 족속이 그분을 위하여 통곡하리라”(계시록 1:7). 그 광경이 얼마나 무섭고 형언할 수 없는가! – 그때 선한 업적을 위해 수고한 자들, 유혹 속에서 굳건히 버틴 자들, 경건함을 사랑한 자들, 순종을 온전히 실천한 자들, 그리고 모든 일에서 주님을 기쁘시게 한 모든 이들이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도 그들과 함께 묶여, 그들과 함께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원한 복을 누리게 하소서.

 

313. 이 땅의 삶은 변덕스럽다. 첫 불순종부터 그렇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313. 1) 이 땅의 삶은 변덕스럽습니다. 첫 번째 불순종에서부터 그렇게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 2) 우리는 세상을 버리고 순종에 전념함으로써 그러한 변덕스러움에서 벗어나게 되나, 이를 위해서는 신실한 신앙 생활이 요구된다. – 3) 그러니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면서,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지키자. 만일 죄를 짓게 된다면, 회개하고 바로잡자. [4, 111]

11. 사도가 말하는 바를 들어 보자.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때가 짧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내를 둔 자들은 아내 없는 자처럼, 슬퍼하는 자들은 슬퍼하지 않는 자처럼, 기뻐하는 자들은 기뻐하지 않는 자처럼, 사는 자들은 소유하지 않는 자처럼, 이 세상을 구하는 자들은 구하지 않는 자처럼 행하라. “이 세상의 모양이 지나가고 있기 때문이다”(고린도전서 7:29–31). “이 세상의 모양이 지나간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즉, 지나가고, 흘러가며, 하루도 변함없이 머무르지 않는다는 뜻이다. 어제는 맑았으나 오늘은 흐리고; 어제는 날씨가 좋았으나 오늘은 궂고; 한 사람은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다른 사람은 자신의 위엄의 높이에서 떨어지며; 저 사람은 부자에서 가난한 자가 되고, 이 사람은 가난한 자에서 부자가 되며; 우리 가난한 삶은 셀 수 없이 많은 변화와 변덕에 시달리며, 그 어떤 것에서도 결코 확고한 자리를 잡지 못합니다. –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것은 우리의 옛날부터 이어진 무지 때문이다. 우리가 낙원에서 주어진 거룩한 계명을 아무것도로 여기고, 뱀의 달콤한 아첨에 속아 넘어갔기 때문에, 이 고통 많고 변덕스러운 삶에 의롭게 내맡겨졌으니, – 바로 그 이유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구원 사역이 이루어졌으니, 이는 우리를 원초적인 상태로 되돌려 놓고, 슬픔과 근심 없는 그 삶을 회복시켜 주기 위함입니다. 변덕스러운 세상 속에서 변함없이 굳건히 서고, 변천하는 세상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것이야말로 지혜롭고 분별 있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정확히 누구에게 이것이 가능한가? – 세상에 못 박혀 죽고 주님을 따르기로 한 자들 외에는 아무도 없다.

12.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세상에 대한 선한 단절을 통해 세상을 버리고, 아름다운 순종에 자신을 바쳤으며, 이를 통해 우리 안에서 옛 상태로 돌아가는 일이 이루어지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불순종과 반항으로 인해 낙원에서 쫓겨났으므로, 전능하신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순종과 온유함을 통해 다시 그분을 되찾을 수 있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순종 속에 서 있음을 기뻐하자. 순종은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수련에 대한 끈기와 고난에 대한 인내가 필요합니다. 육신의 승리가 많은 수고와 땀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라면, 하물며 우리와 같은 삶의 경주에서 승리를 거두며 달려나갈 수 있는 이는 용감하고 용맹한 자들 외에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13. 그러니 부디 용감하게 서서, 끊임없이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며, 우리의 소망을 오직 한 분 하나님께로 향하고, 그분을 묵상하며 끊임없이 마음을 다스리며, 눈물과 통회로 씻김을 받고, 기도와 간구로 정화되며, 이를 통해 성령의 은혜를 이끌어내도록 합시다. 하나님께서는 정욕에서 깨끗해진 영혼만큼 기뻐하시는 것이 없으시며, 어떤 다채로운 초원도 미덕으로 향기로운 영혼만큼 아름다운 향기를 풍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잠깐 졸게 된다면, 서둘러 깨어나야 합니다; 하루에 일곱 번 죄를 짓게 되더라도 일곱 번 회개하면, 우리는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씩 이 고통을 겪게 되더라도 그만큼 회개하면,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용서의 희망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부디 우리가 꾸준히 견디고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서기를 게을리하지 맙시다. 수고의 끝이 이미 가까웠고, 기쁨과 즐거움, 그리고 의의 면류관도 이미 가까웠으니, 우리 모두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자비로 이를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314. 형제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를 계기로, 우리가 떠날 날을 준비하고, 항상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힘쓰라는 격려의 말씀을 전합니다.

314. 한 형제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를 계기로, 우리는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항상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전념하라는 격려를 받습니다. [4, 112] 오라, 마지막 날에 관한 구원의 언약을 맺자. 오라,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시간이 닥치기 전에 하나님과 화해하자. “죽음에는 주를 기억할 자가 없고, 음부에서는 누가 주께 고백하리요?”(시 6:6)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 형제들이 매일 어떻게 데려가지는지 보지 못하는가? 우리가 마치 도살당할 운명의 양들처럼, 오늘은 살아 있지만 내일은 우리도 없을 것임을 보지 못하는가? 리베리우스 형제도 데려가셨으니, 그의 죽음을 기리는 일이 나의 겸손한 영혼을 산산조각 냈다. 사람들이 말하길, 그가 수도실에서 갑자기 죽은 채로 발견되었는데, 마치 잠든 사람처럼 옆으로 누워 있었다고 한다. – 이것이 그의 최후였다! – 우리의 끝이 어떠할지는 알 수 없고, 어떤 죽음으로 죽을지도 알 수 없습니다. 갑작스럽게 닥칠지, 아니면 어떤 예감이라도 있을지는요? 육지에서일까요, 바다에서일까요? – 우리가 홀로 있을 때일까요, 아니면 형제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일까요? 누가 주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으며, 누가 그분의 조언자가 되어 우리의 죽음의 날과 시간, 장소와 방식을 알 수 있겠습니까? – 죽음의 운명은 참으로 두렵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맡겨지는 것도 두렵습니다. 그러므로 간청하건대, 우리가 항상 경건하게, 항상 경계하며, 항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행합시다. 어떤 이는 높은 지위를 얻었다고 하고, 또 다른 이는 부자가 되었으며, 또 다른 이는 왕이 되었다고 합니다. – 그게 다 무엇이겠습니까? – 모든 것이 꿈처럼 지나가나니, “그들은 자기들의 잠에 빠져, 모든 사람이 자기 손에 가진 부를 아무것도 얻지 못하였도다”(시 74:6). “사람의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라”(사 40:6). 그러나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은 훌륭한 거래를 성사시켰으니, 빼앗길 수 없는 지위를 얻었습니다. 어떤 지위인가요? 어떤 이는 사도의 지위, 어떤 이는 예언자의 지위, 어떤 이는 순교자의 지위, 어떤 이는 성인의 지위, 또 어떤 이는 이 중 가장 낮은 지위일지라도 여전히 구원을 주는 지위입니다. 그들의 이름은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으며, 시들지 않는 영광과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립니다. 우리도 그들을 본받아, 반드시 이 직분들 중 하나를 받게 될 것입니다. 은혜는 시기할 것이 없으며, 소망하는 모든 이에게, 작은 자와 큰 자, 지혜로운 자와 지혜롭지 못한 자, 노인이나 청년에게나 각자에게 합당한 선한 선물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본받지 않는다면, 집주인께서 우리를 천상의 혼인 잔치장에 들여보내지 않으실 것이며, 그 문을 우리 앞에서 닫아 버리실 것이다. “화 있을진저,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배반당하는 그 사람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차라리 그 사람이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그에게 더 나았을 것이다” (마태복음 26:24). 이 말씀이 배반자를 가리킨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하지만, 자신의 구원을 저버리는 모든 사람에게도 이 말씀을 정당하게 적용할 수 있다. 우리는 위대하신 하나님이자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생각하지 않는가? 부패할 수 없는 재판장이 심판대에 선 모든 자에게 내리실 무서운 판결을 생각하지 않는가? 꺼지지 않는 불과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영원한 고통을 상상하지 않는가? 누가 이것을 깨달을 수 있겠는가? 누가 현명한 선장으로서 자신을 잘 다스리고, 악의 영들에 의해 침몰하는 것에서 자신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겠는가? 우리야말로 그리스도의 은혜로 평온하고 고요한 삶을 선택했으니, 앞으로도 계속해서 우리의 항해를 잘 이어가고, 마주치는 모든 것을 기꺼이 견디며, 하나님의 경외심으로 우리 몸의 모든 지체를 지키리라. 눈이 호기심 어린 시선을 던지는 것을 금하고, 귀가 헛된 말을 듣지 않게 하며, 혀가 비난하는 것을 허락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형제가 말하기를, “형제를 비방하거나 형제를 정죄하는 자는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정죄하는 자”라고 했기 때문이다(야고보서 4:11); 손은 일하게 하라. 사도의 가르침대로 “일하기를 원치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살후 3:10) 하였으니; 발은 평화의 길을 바르게 걷게 하라; 마음은 “궤휼한 말에 치우치지 말고, 죄에 대한 비난을 피하지 말라”(시 140:4); 그러나 “모든 것이 너희에게 품위 있고 질서 있게 이루어지도록”(고전 14:40) 하여, 선하게 살아서 우리가 영원한 복을 누릴 수 있게 하라.

 

315. 믿음을 지키며 선한 삶에서도 번영해야 한다. 특히 정절에서 그러해야 하는데, 원수는 우리 가운데서 무엇보다도 정절을 대적하여 싸우고 있다.

315. 1) 믿음을 지키면서 선한 삶에서도 번창해야 하며, 특히 정절에 있어서 그러해야 하는데, 원수는 우리 가운데서 무엇보다도 정절을 대적하여 싸우고 있다. – 2) 원수는 부끄러운 생각으로 시작하여, 그다음 정욕을 부추겨 행동으로 이르게 하고, 나아가 정욕에 사로잡힌 자를 마치 옴에 걸린 사람처럼 만든다. – 3)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 – 생각이 싹트기 시작할 때 즉시 기도에 의지하여 그 생각에 맞서라. – 4) 은혜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죄를 범함으로써 마귀의 종이 된다는 생각으로 저항할 용기를 내라. – 그리고 이 정욕뿐만 아니라 모든 정욕에 맞서라. [4, 113]

14. 사람의 구원을 이루는 두 가지 미덕, 곧 믿음과 사랑이 있습니다. 만일 제가 여러분이 믿음에 관해 어떤 점에서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면, 그 믿음에 대해 여러분에게 한마디라도 했을 것이며,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여러분을 정통적인 사고방식으로 인도하려 애썼을 것입니다. –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에게는 믿음이 마땅하며, 그분을 찾는 자에게는 상 주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이라”(히브리서 11:6). 그러나 그리스도의 은혜로 여러분의 믿음이 건전하므로, 믿음에 대한 이야기는 잠시 미루고, 사랑이 원동력이 되어야 할 실천적인 삶에 대해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 그러므로 여러분께 부탁드립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지금도 수행을 소홀히 하지 마시고, 생각에 대한 주권,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로 우리가 기꺼이 받아들인 귀중한 보물인 순결에 대해 소홀히 하지 말아 주십시오. 원수는 바로 이 순결을 노리고 온갖 열의를 다해 계략을 꾸미며, 그것을 빼앗음으로써 우리의 구원을 빼앗으려 합니다. 그는 우리가 이 미덕을 통해 하느님을 닮게 되지만, 반대로 이를 잃을 때면 이성을 잃은 짐승과 같아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영광을 누리는 사람은 이성을 잃고, 이성을 잃은 짐승과 같아지며, 그들과 같아지리라”(시편 48,13)고 했습니다.

15. 오, 창세 이래로 우리의 유혹자가 육신의 정욕으로 얼마나 많은 이들을 사로잡았는가! 그러나 지금까지도 그는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노인들, 부주의한 자들뿐만 아니라 가장 신중한 자들까지도 유혹하는 것을 멈추지 않으며, 거의 모든 영혼을 상대로 이 무기를 사용하고 있다. 그는 부적절한 생각을 심어줌으로써 이 독을 준비하기 시작하고, 그다음 육체와 피의 정욕으로 마음을 달아오르게 하여 금지된 말을 하게 만든 뒤, 성기를 만질 대담함을 불어넣는다; 이것이 곧 죽음을 초래하는 것입니다. 사도가 말했듯이, “정욕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이루어지면 죽음을 낳는다”(야고보서 1:15). 그러니 우리 이 죽음, 곧 영원한 죽음을 피합시다. 이 수많은 재앙을 초래하는 영혼의 병을 피합시다. 제 생각에 이 병은 옴과 비슷합니다. 가려움증 환자가 손톱으로 몸을 긁을 때, 겉보기에는 즐거움을 얻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즐거움을 얻는 것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상처를 입게 되며, 긁을수록 그 상처는 더 커집니다. 마찬가지로 정욕에 사로잡힌 자도 즐거움을 얻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만족을 얻는 것이 아니라 공허함을, 평온함을 얻는 것이 아니라 무감각함을 얻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은 가엾을 만하다. 그는 절망적이고, 겁에 질려 있으며, 미래의 심판뿐만 아니라 그림자조차도 두려워한다.

16. 그러나 이 악을 어떻게 피할 수 있겠는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이 정욕이 솟아날 때마다 온 힘을 다해, 결코 게을리하지 않고 유혹에 맞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솟아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지만, 그 힘은 선한 생각으로 채워지지 않은 마음의 부주의에서 비롯되거나, 원수의 시기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이것이 어떻게 일어나든, 상처 입은 자는 서둘러 일어나 기도하고,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고, 단호한 로 그 정욕을 물리쳐야 한다. 그러면 정욕은 곧 가라앉을 것이며, 너는 주님 안에서 평안을 얻게 될 것이다. 그때 비로소 영혼에게 정욕에 시달리지 않고 정욕에 노예가 되지 않는 것만큼 달콤한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17.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듣지 못했느냐? “죄를 짓는 자는 모두 죄의 종이니, 종은 영원히 집에 머물지 못하나 아들은 영원히 머무느니라” (요한복음 8:34). 죄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는데, 다시 죄의 종이 되겠느냐? 하나님의 든든한 손길 아래 서면서, 우리가 마귀의 노예가 되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허물어 놓은 것을 다시 세우면, 나는 스스로를 범죄자로 만드는 것이니라” (갈 2,18)라고 사도는 어느 곳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미 마귀에게서 자유를 얻은 후, 다시 마귀의 노예가 되어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자들이 되지 않도록 합시다. 그렇지 않으면 “진노의 날과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드러나는 날에 스스로 진노를 쌓아 두는” 것이 될 것입니다(롬 2:5). 왜냐하면 그러한 자들에 대해 “그들의 구더기는 죽지 아니하며 불은 꺼지지 아니하리라”(막 9:44)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 그 자유로 서자” (갈 5:1), 뱀의 가증스러운 망상을 혐오하며, 매일 이 정욕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정욕에도 맞서 싸우고, 시기심을 누르고, 간사를 다스리며, 형제 간의 증오와 그 밖의 모든 악의를 억제하여, 영원한 고통을 피하고 천국을 얻도록 하라.

 

316. 수도사들을 ‘선택받은 족속’이자 ‘그리스도의 군대’라고 칭하며 높이 평가한다

316. 1) 수도사들을 ‘선택받은 족속’이자 ‘그리스도의 군대’라고 칭하며 높이 평가한다. – 2) 과거와 현재를 막론하고 모든 이단 박해 속에서 누가 신앙을 수호하는가? – 바로 모든 수도사들이다. – 3) 그러나 우리가 그러하듯이, 스스로를 깨끗하게 지키고 모든 정욕보다 더 높은 곳에 머물자. – 4) 수도원이 황폐해진다고 해서, 또 우리가 필요한 만큼 빨리 복구하지 못한다고 해서 당황하지 말라. 믿음을 수호하는 데 힘쓰면 나머지는 저절로 해결될 것이다. [4, 114]

18. 형제들과 아버지들아! – 여러분을 ‘형제’와 ‘아버지’라는 이 선한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그치지 않겠노라. 여러분에 대하여 이 호칭이 진실로 적합하며, 이 칭호가 거짓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참된 아버지들과 형제들은, 부모보다도, 형제들보다도, 자신의 혈통보다도, 자신의 조국보다도, 보이는 모든 것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여, 한 마음과 한 영혼, 한 분 아버지이신 하나님, 그리고 한 조국인 하늘의 예루살렘을 가진 공동체 안에서 삶을 받아들인 자들이기 때문이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나의 형제들아, 여러분도 바로 그런 분들입니다. 성경의 말씀으로 여러분을 부르겠습니다. “택함 받은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민족, 새 창조된 백성, 이는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그 놀라운 빛으로 이끄신 분의 덕행을 선포하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전서 2:9). 참으로 경이로운 빛은 수도 생활이니, 우리는 그 생활로 부르심을 받았으며, 그 안에서 자신의 덕으로 하늘을 덮어 주시는 분께 찬양을 드리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지혜와 정결, 용기와 의가 자리 잡고 있으며, 여기에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악한 자에 대한 승리의 전리품이 있습니다. “우리는 육신에 속한 자로서 살지만, 육신에 따라 싸우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싸움의 무기는 육신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강력한 것으로, 우리는 그 힘으로 견고한 요새를 무너뜨립니다. 곧, 생각들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지혜를 거스르는 모든 교만을 꺾으며,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합니다”(고린도후서 10, 3–5).

19. 눈에 보이는 적들을 고려해 본다면, 하나님의 교회에 얼마나 많은, 그리고 어떤 박해가 가해졌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 세상에 대해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 외에, 누가 가장 심하게 박해받고, 매맞고, 살해당했겠는가? 오래전 일은 제쳐두고, 현재와 지금 계속되고 있는 이단의 흐름 속에서, 누가 “피 흘릴 때까지 죄와 싸우며 견뎌 냈는가?”(히브리서 12, 4). 우리 수도원과 다른 곳의 성부들과 형제들이 복된 자들이 아니겠습니까? 참으로 그러한 일들과 위업은 주로 수도사들의 몫이며, 수도사들은 교회의 신경이자 버팀목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비로 우리에게 주어진 존엄의 모습이자 그 크기입니다.

20. 그러나 보물이 있는 곳에는 도둑들도 엎드려 기다리니, – 영혼의 보물은 바로 미덕이니, 그러므로 상기시키고 간청하노니,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어, 죄의 달콤함에 휩쓸리지도, 분노로 야수처럼 변하지도, 불신으로 어두워지지도, 고백하지 않음으로 완고해지지도, 그 밖의 어떤 정욕의 지배에도 굴복하지 않도록 합시다; 오히려 재앙 같은 정욕들보다 더 높은 곳에 서서, 생의 끝을 맞이할 때까지 앞을 향해 부지런히 나아가자.

21. 어쩌면 우리 수도원들이 주님의 원수들에 의해 파괴되고 있다는 소문에 슬퍼하는 이들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를 두고 무엇을 슬퍼하겠습니까? 우리는 바로 하나님의 성전이자 수도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헐면, 하나님께서도 그를 헐어 버리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고린도전서 3:17). 이 성전들이 종종 우리를 박해하는 자들에 의해 파괴되었던 사실은 유감스럽고 슬픈 일이지만, 대부분은 하나님의 섭리로 다시 재건되었습니다. 박해를 겪은 이들의 수만큼 수도원을 재건하고 보수할 시간이 부족하다는 사실이 누군가에게는 당혹스러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의 박해가 신앙을 얼마나 동요시키고 있는지, 우리 모든 노력은 신앙을 수호하고 다시 굳건히 세우는 데 집중되어야 합니다. – 그리고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여전히 우리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당하고 성스러운 교부들이 파문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을 재건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 누가 경기장에서 경주의 절반을 달리고 나서 승리의 상을 받은 적이 있느냐? – “누구든지 합법적으로 경주하지 않으면 면류관을 받을 수 없다”(딤후 2:5)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러한 생각을 버리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33)는 거짓 없는 약속을 믿으며, 마음과 말로 신앙 고백을 굳게 지키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자비로 이 모든 것을 누릴 수 있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317. 한 형제는 죽었고, 다른 한 형제는 임종에 이르렀다. 우리도 과연 불멸의 존재인가? – 그러니 이 순간을 명심하자

317. 한 형제는 죽었고, 다른 형제는 임종에 이르렀다. 우리도 과연 불멸의 존재인가? – 그러니 이 순간을 기억하자. 죽음에 대한 기억이 있는 곳에는 모든 것이 거룩하지만, 그곳이 없는 곳에는 오직 정욕만이 있을 뿐이다. – 그러나 우리는 정욕에 사로잡혀 있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니, 내일로 미루지 말고 지금 회개하라. 모세가 아말렉을 대적했던 것처럼, 일어나 정욕을 향해 기도하라. [4, 115] 보라, 우리 형제 중 두 사람, 야곱과 바시안—한 사람은 이미 주님께로 돌아갔고, 다른 한 사람은 죽음의 문턱에 서 있다. – 우리도 여러분과 함께 불멸의 존재인가? – 우리도 우리보다 먼저 떠난 이들이 마셨던 바로 그 잔을 마시게 되지 않겠는가? 이 일로 자신의 영혼을 채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죽음에 대한 기억을 자신의 생명의 영혼으로 삼는 자라. 왜냐하면 죽음에 대한 기억이 있는 곳에는 회개의 마음, 통회, 눈물,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냉담함, 하늘의 기쁨, 깨달음, 더 나은 것과 하늘의 것을 갈망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이 없는 곳에는, 주님께서 복음서(마태복음 15:19)에서 정죄하신 악한 생각들이 생겨나며, 이를 통해 생명을 사랑하는 자들은 얽매이고 사로잡히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도 죽음을 기억해야 하며, “부적절한 정욕에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육신에 머무는 남은 시간을 살아가도록” 온갖 방법으로 힘써야 한다. “우리에게는” “지나간 삶의 시간 동안 육신의 욕망과 생각의 뜻을 따르며 살았던” (베드로전서 4:2, 3) 시간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악마가 꾸미는 유혹에 현혹되어서는 안 됩니다. 악마는 우리를 선한 마음가짐과 시작에서 멀어지게 하고, 악한 생각들로 마음을 뒤흔들며, 그로부터 우리는 결코 어떤 유익도 얻지 못하고 오직 불쾌함과 굴욕만을 겪어 왔습니다. “보라, 지금이 은혜의 때요, 지금이 구원의 날이라”(고린도후서 6:2). “오늘 그분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성령께서 외치시느니라” (히브리서 3:7). 그분은 우리 본성이 죄를 짓고자 하는 유혹에 사로잡혀 단 하루도 쉼이 없음을 보셨기에, 누구도 회개에서 벗어나는 핑계를 대지 못하도록 자비롭게 “오늘, 바로 오늘”을 회개의 날로 정하셨습니다; 오히려 누구든지—죄를 많이 지었든 적게 지었든, 오래전부터 죄를 지어 왔든 이제 막 시작했든—이 구원의 부르심을 듣고 온 마음을 다해 매일 회개를 통해 자신을 새롭게 하고 정화하기를 원하셨다. 보라, 우리에게 죄에 대한 신속하고 쉬운 치유를 베푸시는 우리 선하신 하느님의 자비가 얼마나 큰지. 육체에 입은 상처도 치유되지만, 이를 위해서는 더 많거나 적은 치료 시간이 필요하여, 그 후에야 비로소 다시 적들을 상대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상처를 입자마자 즉시 치유될 수 있으니, 지체하지 않고 다시 적들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매일 회개하고 영으로 새롭게 되는 것을 소홀히 하지 말며, 생각이나 말이나 행실로 인해 일어난 실수가 나태함과 방종의 구실이 되지 않도록 합시다. 아무리 많은 타격을 입더라도 그만큼 다시 일어서고,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며 온 힘을 다해 다시 정욕에 맞서 무장합시다. 하나님의 종 모세가 산 위에서 기도하며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뻗고 있을 때, 아말렉은 패배했고, 손을 내릴 때면 아말렉은 힘을 얻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정욕에 짓눌린 마음이 기도의 산으로 올라가 손처럼 자신의 생각을 하느님께 뻗을 때, 보이지 않는 아말렉을 무찌르게 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을 때는 우리 자신이 패배하게 됩니다. – 이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겠는가? 적들이 공격해 올 때, 마음과 손을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느님께 드리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적들은 도망칠 것이며, 우리는 승리의 면류관을 얻고 천국을 상속받게 될 것이다.

 

318. 신앙을 이유로 새로운 박해가 준비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모든 것을 견뎌내겠다는 의욕 넘치는 각오를 표명한다

318. 1) 신앙을 이유로 새로운 박해가 준비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모든 것을 견뎌내겠다는 의욕 넘치는 각오를 표한다. – 2) 그 후 내적 투쟁으로 화제를 전환하며, 진리의 무기를 차고 하늘에서 올 도움에 힘입어 용감하게 싸울 것을 권한다. [4, 116]

22. 다시금 우리를 기다리는 유혹과 슬픔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상기하기에 적절한 사도의 말씀을 빌리자면, “나는 오직 한 가지 일만 염려하며, 내 영혼을 소중히 여기지 않으니, 오직 기쁨으로 나의 경주를 마치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맡기신 사명인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뿐이다” (사도행전 20:24). 우리도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행하고 말하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을 기뻐하고, 그분을 위하여 더 기꺼이 고통받기를 원하며, 이미 여러 번 박해를 받았기 때문에 다시 박해를 감당하는 것을 거부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는 말씀(행 14:22)을 듣고, 우리는 점점 더 많이 고통받고, 점점 더 많이 인내하기를 원하며, 그리하여 그 복된 입성을 더욱 확신하며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자비로 인해 우리에게 원치 않는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고통이 닥치기 전에 고통에 걸맞은 마음가짐을 갖추어, 고통이 닥쳤을 때 마땅히 맞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미리 준비하지 않은 영혼은, 마음가짐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갑자기 시련에 빠지게 되면 쉽게 굴복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23. 그러나 내가 투쟁에 대해 마치 우연한 일인 양 말하는가? 우리에게는 매일의 투쟁이 있고, 매일의 전쟁이 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이지만, 육체가 아닌 영혼에 상처를 입히고, 영혼을 파멸시키려 한다. 그러므로 우리 생각의 허리를 동이고,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의의 무기를 차고, 부지런히 그리고 잠들지 않고 싸워야 한다. 누구도 잠자는 동안 전리품을 얻을 수 없고, 옆으로 누워서는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모두에 큰 수고와 땀이 요구된다. 만약 이 일이 그러하다면, 화살이 번개처럼 쏜살같이 날아드는 우리의 싸움에서, 이쪽에서는 악한 정욕이, 저쪽에서는 명성에 대한 집착이, 또 다른 곳에서는 시기심이, 또 다른 방향에서는 비방이 우리를 포위하는 이 싸움에서, 이것이 더욱더 불가피하지 않겠는가? 마귀에게는 그 밖에도 수많은 계략이 있어, 온갖 방법으로 영혼을 흔들어 놓으려 하고 마치 삼켜 버리려는 듯이 노리고 있으니, 누구나 경악하며 이렇게 외치는 것이 마땅하다. “주님께서 나를 도우시지 않으셨더라면, 내 영혼이 곧 지옥에 빠졌으리라”(시 93:17). “그러나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신 분으로 말미암아 이기는 자들이 되리라” (롬 8:37); 다윗의 말을 빌리자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힘을 얻으리니, 그분께서 우리의 원수들을 꺾으시리라” (시 107:14). ““그분은 곧 우리의 평화이시니, 두 가지를 하나로 만드시고, 육신의 원수인 장벽을 허물어 버리셨느니라” (엡 2,14); 즉, 마귀를 이기고 꺾으셨으며, 우리에게 그를 이길 힘을 주시고, 그 대가로 우리 모두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게 될 영생을 약속해 주신 분이시다.

 

319. 비피니아에 두 마리의 표범이 나타나 사람들을 납치하고 있다. 이를 계기로, 우리를 삼키기 위해 곳곳을 배회하는 보이지 않는 짐승들에 대해 여러분께 상기시켜 드리고자 한다.

319. 1) 비피니아에 두 마리의 표범이 나타나 사람들을 납치하고 있습니다. 이를 계기로, 우리를 삼키기 위해 곳곳을 배회하는 보이지 않는 짐승들에 대해 여러분께 상기시켜 드리고자 합니다. – 2)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그늘 아래 거처하며, 마음을 다스리며 그 안에 숨어야 합니다. – 3) 보라, 멤논이 납치되었으니, 나는 그를 죽은 자처럼 애도한다. 이것이 왜 일어난 것인가? 그가 모든 사람과 거리를 두고 홀로 살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에 대해 끊임없이 외칠 것이다. – 4) 형제들이 얼마 전 그가 했던 말(아마도 이단과 박해에 관한 것)을 밖으로 퍼뜨린 것을 꾸짖는다. [4, 117]

24. 나는 언제나 여러분에게 위로와 교훈의 말씀을 전하고자 간절히 바라며, 이를 위해 모든 기회를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비피니아에서 비범한 일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바탕으로 여러분을 위한 말씀의 주제를 삼겠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그곳에 한 마리가 아니라 두세 마리의 표범이 갑자기 나타났다고 하는데, 소나 양, 혹은 다른 동물들이 아니라 오직 사람만을 잡아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곳 주민들은 큰 공포에 사로잡혀 새벽이 밝아올 때까지 밤새 집 안에 틀어박혀 지낸다고 합니다. 이러한 재앙은 하나님의 진노를 분명히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 하지만 제가 왜 이 소식에 특히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많은 짐승들, 사나운 짐승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악의 영들입니다. 사나운 짐승은 분노이며; 사악한 짐승은 정욕이며, 사악한 짐승은 시기이며, 사악한 짐승은 허영이며, 사악한 짐승들은 밤뿐만 아니라 낮에도 뻔뻔스럽게 덮쳐와 영혼을 잡아먹으려 덤비는 그 밖의 모든 정욕들입니다. 왜 복된 사도 베드로가 “맑은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라. 너희의 대적 마귀가 마치 포효하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으니”(베드로전서 5:8)라고 명하는가? 그리고 성 다윗은 이렇게 기도한다: “사자가 내 영혼을 빼앗아 갈 때, 나를 구원할 자도 없고, 구해 줄 자도 없나이다” (시편 7:3).

25.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그늘 아래 거하며”(시 90:1), 감각의 방황에 휩쓸리지 않고 내면을 다스리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왜냐하면 눈이 이리저리 맴돌고, 귀가 해로운 소문을 듣고, 입이 부적절한 말을 내뱉으며, 마음이 부적절한 생각에 빠질 때, 영혼은 마치 황량한 곳을 헤매는 것처럼 되어 쉽게 짐승들의 먹이가 되기 때문이다.

26. 이제 이 비참한 멤논도 같은 고통을 겪었으니, 그는 마귀에게 사로잡혀, 내가 보는 것은 피 묻은 옷이 아니라—옛날 족장 야곱이 그의 아들 요셉의 옷을 보았던 것처럼—죄의 칼에 의해 죽임을 당한 그의 영혼 그 자체이다. 죄는 곧 죽음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은혜로 인해 불멸이었던 우리 조상 아담의 죄가 그를 죽을 존재로 만들었고, 죄는 물로 온 세상에 파멸을 불러왔으며, 죄는 소돔과 고모라와 그 주변 도시들을 불태웠고, 죄는 지금도 그것을 범하는 모든 이를 영원한 죽음에 넘겨준다. 그러니 우리 는 마치 불을 피하듯 죄에서 도망치자. 칼날에 베이는 것, 짐승의 이빨에 물리는 것, 불길에 빠지는 것이라도 해로운 정욕의 손아귀에 빠지는 것보다는 낫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그 불쌍한 우리 형제는 무엇 때문에 타락했는가? – 다른 이유가 아니라, 모든 사람과 격리되어 지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 “화 있을진저”라고 말하는 진리의 말씀은 거짓이 아니니, 그가 “한 번 넘어지면” “그를 일으켜 줄 이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전도서 4, 10); 이를 두려워하여, 저는 겸손히 그에게도 다른 이들에게도 끊임없이 강조해 왔고, 지금도 강조합니다. 아무도 혼자 있지 말고, 아무도 혼자 거닐기를 좋아하지 말고, 아무도 할 일 없이 이리저리 방황하지 말고, 아무도 여자와 단둘이 있지 마십시오. 그런 상황에서 불길한 정욕이 불처럼 타오르기 때문입니다. 순종하는 아들은 이 말을 귀담아듣고 순종하며 주님 안에서 구원을 얻으나, 불순종하는 아들은 살아 있는 채로 마귀에게 사로잡혀 죽음에 넘겨진다. 이 불쌍한 이의 피에 대해, 비록 내가 침묵하지 않고 그에게 닥칠 칼을 예언했기에 무죄하다고 자처하지만, 그럼에도 마치 내 자신의 지체처럼 울고 통곡한다.

27.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도 책망할 말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 사도행전에 기록된 바와 같이, “아나니아가 죽어 장사된 지 약 세 시간이 지났을 , “그의 아내” 사프이라가 “그 일이 일어난 것을 알지 못하고”(– 5, 7) 그녀는 알지 못했습니다. 비록 그 일이 명백하게 일어났고, 그 자리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곳에서는 모든 일에 질서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지배했고, 모두가 신중한 경계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이곳에서는 며칠 전, 제가 비밀리에 어떤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 말이 즉시 이곳에서 콘스탄티노플로, 거기서 다시 브루스로 퍼져 나갔습니다. 그래서 나는 말할 때나 말하지 않을 때나 모두 답답합니다. 말할 때는 밖으로 새어 나가서는 안 될 말이 새어 나가기 때문이고, 말하지 않을 때는 다른 이들의 조언을 구하지 않고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더 나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왜 우리는 말을 그렇게 자제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왜 때를 앞당겨 스스로를 곤경에 빠뜨리는 것입니까? 이는 진실한 제자들의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적대적인 자들의 모습이다. 그러니 여러분, 더 이상 스스로를 그런 수치에 빠뜨리지 말아 주기를 부탁한다. 이제부터는 우리 입술을 절제하고, 품위를 지키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모든 일에 질서를 갖추어, 하나님의 뜻대로 살며 온갖 방법으로 그분을 기쁘시게 하여, 영원한 복의 상속자가 되자.

 

320. 세속적인 사람들은 세속적인 일에 몰두하지만, 우리는 그 모든 것보다 더 높은 우리 자신의 일에 몰두합니다

320. 1) 세속적인 사람들은 각자의 일에 몰두하지만, 우리는 그 무엇보다 높은 우리 자신의 일에 몰두합니다. – 2) 그러니 우리 자신의 소명에 충실하며, 그와 반대되는 모든 것과 싸우자. – 3) 이를 위해 각자는 제때에 제 일을 하라. [4, 118]

1. 어떤 이들은 각자의 이야기로 즐거움을 얻고 자랑한다. 군인들은 군사적 일들을, 선원들은 바다 이야기를, 농부들은 농사일을, 그 밖의 기술과 예술에 종사하는 이들은 자신과 관련된 이야기를 한다. 일반적으로 말해, 자신의 신분에 속한 일로 즐거움을 얻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러한 것들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이야기들이 기쁨이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것은 육신적인 것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 이 세상에서의 이별, 그리고 그곳에서의 정착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도가 말하듯이, “진실한 것, 고상한 것, 의로운 것, 순결한 것, 사랑스러운 것, 칭찬받을 만한 것, 그리고 어떤 미덕이든, 어떤 칭찬이든”(빌립보서 4:8), 이것이 바로 우리의 대화 주제이자, 또한 염려와 돌봄의 대상입니다. 이보다 더 기쁘고 더 복된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 이는 그 모든 일들의 결말이 어떠한지를 보면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그 일들의 시작과 끝은 이 세상의 경계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우리 일들의 시작은 다른 더 높은 세계에서 비롯되었고, 그 끝은 그 경계를 넘어 무한하고 영원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의 본질은 덕이기에, 이를 행하는 자들을 신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 “내가 말하노니, 너희는 다 신들이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들이라” (시 81:6). 오, 우리가 얼마나 큰 자비를 입었는가! – “그러므로 주님을 기뻐하며, 우리의 구주이신 하나님께 환호하자. 그분 앞에 나아가 고백하며, 시편으로 그분께 찬양하자” (시 94, 1. 2); “그분은 태초부터 우리를 구원하사 성령과 진리의 믿음의 거룩함으로 택하셨으니, 그 안에서 우리를 부르셨나니”, 우리의 수도 서원을 통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살후 2, 13. 14).

2. 그러니 우리가 믿음 안에서 흔들림 없이 굳건히 서며, 거짓 없는 순종을 받아들이고, 흠 없는 정결함을 지키자. 우리에게 사랑할 대상은 오직 한 분, “인자함으로 인자한 자들보다 더 아름다운” 신랑 그리스도뿐이며, 상속받을 유산은 오직 하늘나라와 하늘 예루살렘의 복된 것들뿐이다. 육신과 피, 부와 영광, 그리고 모든 헛된 것들이 우리에게서 멀리 물러가게 하소서. – 그러나 우리가 아직 육신에 있는 동안에는 싸움이 따르기 마련이니, 싸움이 없다면 덕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낯선 생각들에 사로잡히게 된다면, 지체 없이 정신을 차리고, 무엇보다도 죄의 행위를 치명적인 독처럼,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뜨리는 발걸음처럼 두려워해야 한다. 생각으로는 생각을 물리치고, 욕망에는 욕망으로 맞서자. 그리고 이를 게으름이나 나태함 없이 행해야 한다. 싸우는 악마의 목적은 끊임없는 투쟁을 통해 우리를 낙담과 나태함으로 몰아넣어, 우리가 그에게 맞서는 것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마귀와의 대립에서 꿋꿋하게 버티며, 그로 인해 고통받지 않도록 그에게 맞서 싸운다면, 의심할 여지 없이 그에게 승리를 거두고,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준비된 승리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제가 말하기를, “시험을 견디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시험을 견뎌낸 자는 하나님께서 그분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라” (야고보서 1:12)고 했습니다.

3. 그러므로 주 안에서 기뻐하라. – 각기 다른 사명을 감당하는 여러분은, 그 안에 여러분을 위한 큰 상이 있음을 알고 있다. 공부에 힘쓰는 여러분은, 그 일로 인해 하나님을 노엽게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일할 시간이 되었는가? 일에 착수하자. 공부할 시간이 되었는가? 공부에 매진하자. 그러나 네 형제가 일에 착수할 때 네가 공부를 시작한다면, 이는 사랑의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형제애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사도가 “만약 형제가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하지 않기 위해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라고 말한 것을 듣지 못했느냐? (고린도전서 8:13). 그런데 너는 형제를 유혹할 뿐만 아니라, 부름을 받았을 때도 나타나지 않고, 스스로 변명을 꾸며내며, 그렇게 행동함으로써 “진노의 날과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드러나는 날에 네게 진노를 쌓아 두는 것” (롬 2:5). 그러나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모든 것이 품위 있게 질서 있게 이루어지도록” (고전 14:40) 말씀하신 사도의 가르침을 따릅시다. 먼저 행함이 있고, 그 다음에 가르침이 있어야 합니다. 성도들에게 마땅한 대로 서로 돕고, 진실한 형제들로서 서로를 위해 목숨을 바치며,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위해 행함으로써 영생의 상속자가 되게 하소서.

 

321. 마지막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게으름 피우지 맙시다

321. 1) 마지막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게으름 피우지 맙시다. – 2) 계명을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을 찾읍시다: 그때에는 미덕 외에는 다른 보호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 3) 그러니 우리가 죽을 때를 기억하고, 그곳에서 땅에 속한 지체들, 곧 육체와 모든 육체적인 것을 죽여 버리자. 육체와 모든 육체적인 것은 썩어 없어지나, 오직 덕만 영원히 남는다. – 4) 참된 표징과 겉보기만 기이한 현상을 구별하는 징후가 제시된다. [4, 119]

4. 우리에게 죽음이 의심할 여지 없이 닥쳐올 때, 즉 모든 이에게 공통된 이 속죄의 시간이 다가올 때, 한편으로는 천국을 얻을 희망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불타는 지옥이 위협하고 있는데, 내가 말하고 여러분이 듣는 데 게으름을 피우는 것이 타당하겠는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가 항상 이 두 가지를 다 행해야 하며, 그 날이 다가오는 것을 더 분명히 볼수록 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각 사람의 마지막 날은 매 시간과 매 순간 끊임없이 다가오고 있으며, “심판에 대한 두려운 기대와 불의 열기가 반역자를 삼키려 한다” (히브리서 10, 27)라고 성 사도께서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그러니 게으름 피우지 말고, 단 하루도 헛되이, 무분별하게 보내지 맙시다. 대신 항상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읍시다.

5. 시편의 말씀대로 “우리가 하나님을 찾으면, 우리 영혼이 살리라”(시 68:33).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찾으리요? – 복음의 복된 가르침에 따라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 즉 겸손, 눈물, 온유, 마음의 순결, “평화와 거룩함”(히브리서 12, 14)을 통해, 이를 이룬 자는 하나님을 찾게 되며, 하나님을 찾은 자는 죽음의 순간에도 두려움이 없어 악마를 두려워하지 않고, 천사들의 임재에 당황하지 않으며, 그들을 마치 자신의 가족처럼 대하고, 선한 양심을 좋은 동반자로 삼아 기쁨으로 주님께로 나아간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준비되지 않은 자는 피할 수 없는 극한 상황에 빠지게 되며, 누구에게 시선을 돌릴지, 누구에게 도움을 청할지 모르게 된다. 예를 들어, 누군가 악한 자들의 손에 떨어지거나, 바다의 파도에 휩쓸리거나, 지진으로 인한 재난에 처하거나, 그 밖의 어떤 극한 상황에 빠지더라도, 그 상황에서 벗어날 희망을 잃지 않는다; 그러나 저쪽에서는 구원의 희망이 온전히 사라지고, 구원해 주고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 천사도, 사람도, 아버지도, 어머니도, 형제도, 친구도, 정말 아무도 없다; 그리하여 가련한 영혼은 끔찍한 공포와 위로할 수 없는 가슴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 이곳을 떠나, 그곳에서 어떤 비유로도 그 실체를 표현할 수 없는 참된 진리를 마주하게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복이 그러하듯이, 반역하는 자들의 아들들을 위해 예비된 그 반대되는 것 또한 그러하여, 눈으로 본 적도 없고, 귀로 들은 적도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 떠오른 적도 없는 것들이다.

6.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이 죽음을 잊지 말고, 그것으로 “땅에 있는 지체들을 죽이되”(골 3:5) 영혼에서 정욕을 뿌리 뽑으라고 간청합니다. 우리에게 이 육신에 대한 집착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하고, 오직 고통스러운 고문만을 겪을 뿐인데 말입니다. – 원하신다면 관을 들여다보고, 그 안에 어떤 악취가 나는지 직접 확인해 봅시다. 모든 육체는 이와 같습니다. 썩음으로 시작되어 썩음으로 끝납니다. 그리고 모든 인간의 영광은 풀꽃과 같습니다. 오직 미덕만이 파괴될 수 없고 빼앗길 수 없습니다. 그 덕을 사랑한 성도들은 하나님께 기쁨을 드렸고, 그 덕분에 그들의 영혼은 하늘에서 영광 속에 있으며, 그들의 육신은 땅 위에서 우리에게 피난처가 되어 표적과 기적과 능력을 베풀고 있습니다.

7. 내 말이 표적에 대해 언급했으니, 우리가 듣는 바와 같이 오늘날에도 표적이 일어난다는 점을 상기하겠다. 이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성령의 은혜가 그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풍성하게 역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문으로 퍼지는 모든 것을 무분별하게 믿어서는 안 됩니다. 기록된 바와 같이, “모든 영을 다 믿지 말고, 그 영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시험해 보라. 거짓 선지자들이 세상에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요일 4:1). – 그리고 많은 이단자들과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자들에게, 옛날이나 지금이나, 겉보기에는 마치 하나님의 섭리인 것처럼, 기적과 유사한 신비로운 일들을 행하도록 허용되었고 지금도 허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에 휩쓸려서는 안 되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신 징표들을 통해 그들이 참으로 주님의 제자인지 시험해야 합니다. 그 징표들은 무엇일까요? –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으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임을 알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 13, 35). 이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은 사도는 그 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놋쇠나 울리는 심벌즈와 같을 뿐입니다. 또 내가 예언의 은사를 가지고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산을 옮길 만한 온전한 믿음을 가졌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또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어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린도전서 13:1–3). 보라, 사랑의 높이가 어떠한가? 그것은 마치 여왕과 같아서, 성령의 모든 은사보다 더 높으며, 결코 사라질 수 없다. 그러나 기적을 행하는 자들은 때로 사라지기도 한다. 주님께서 복음서에서 말씀하시기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내게 말하리라. ‘주여, 주여!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않았습니까?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지 않았습니까?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내가 그들에게 말하리라. ‘내가 너희를 결코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태복음 7,22–23). 얼마나 무서운 대답입니까! 그리고 얼마나 비참한 판결입니까! – 그러니 우리는 사랑과 그 동반자인 믿음과 소망을 얻는 데 힘쓰자. 기적의 은사보다 더 중요한 이 것들 안에서 올바르게 살아가, 주님의 참된 제자로 인정받아 천국을 상속받게 되리라.

 

322. 시간은 흐르고, 죽음이 다가오는데, 우리가 헛되이 허둥대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322. 시간은 흐르고, 죽음은 다가오는데, 우리가 헛되이 허둥대고 있는 것일까? – 수도자들 사이에서 탐욕을 꾸짖는 말씀이 이어진다. [4, 120] 우리의 날들은 시계 바늘처럼 지나가고, 주간은 날처럼, 달은 주간처럼, 해는 달처럼 흘러간다. 그리하여 시간은 흘러가며, 우리 모두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마지막 날로 몰아갑니다. 그날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하시듯 “모든 것이 그분의 눈앞에서 드러나고 밝혀질 것”입니다(히브리서 4, 13). 그런데 사람이 헛되이 허둥대는가? 왕이 금과 자신의 군대를 의지하는가? 어찌하여 통치자는 재물과 목초지를 자랑하는가? 어찌하여 부자는 변덕스러운 부에 희망을 두는가? 어찌하여 쾌락을 좇는 자는 죄의 진창에 빠져 있는가? – 죽음의 심판이 닥치기 전에, 반역하는 자들에게 닥칠 진노를 피하기 위해 매일 울고 슬퍼하며, 힘이 닿는 대로 자신을 정화해야 한다. “이 사람들은” 성경의 말로 표현하자면, “보지 못하는 것은 비방하고, 본성상 말 없는 짐승처럼 보이는 것은 보고는 그것에 탐닉한다. 화가 그들에게 있나니, 그들은 가인의 길을 따르고, 발람의 헛된 보수를 좇으며, 고레오의 다툼 속에서 멸망하였기 때문이다” (유다서 10, 1). 이 말씀이 그들을 비난하는 가운데, “무언가 되는 척하는” (갈라디아서 2, 6) 여러분에게도 미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이는 아버지의 유산을 걱정하며 먼 곳으로 떠나고, 또 다른 이는 “수입”을 늘리고자 하여 고민하며 수고를 감수하고 큰 노력을 기울이는 반면, 또 다른 이는 이것저것을 얻기 위해 탐욕스럽게, 수도자답지 않게 행동한다면, 그들도 저들과 같은 심판을 받아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저들은 아내와 자녀를 돌봐야 할 책임이 있으므로, 비록 미약하더라도 자신의 행동에 대한 변명을 내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대해 십자가에 못 박힌 여러분, 오직 십자가 하나에 모든 보물을 둔 여러분에게는 도대체 어떤 변명이 남아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여러분은 가장 혹독한 고통을 받을 자격이 있지 않습니까? 기록된 바와 같이: “강한 자들은 더 심하게 고난을 당할 것이라” (지혜서 6, 6): 또한 “가장 가혹한 심판은 가진 자에게 임한다”(지혜서 6, 5); 그리고 또 “그에게 많이 맡긴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며,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빼앗을 것이다”(루카 12, 48). “인자의 아들들아, 언제까지 마음이 완고하겠느냐? 어찌하여 헛된 것을 사랑하고 거짓을 좇느냐” (시 4,3), 자신의 정욕을 옹호할 변명을 꾸며내면서? “옛 세대를 돌아보아라. 주님을 믿은 자 중에 부끄러움을 당한 자가 누구인가? 주님을 경외하며 버림받은 자가 누구인가? 주님을 부르짖었으나 멸시당한 자가 누구인가?” (시라 2, 10). 족장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자기 땅을 떠난 이방인이 아니었는가? 그러나 그는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었다. 족장 야곱은 지팡이 하나만 가지고 메소포타미아로 내려가지 않았는가? –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부자로 돌아왔다. 요셉은 팔려 이집트로 끌려가지 않았는가?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왕과 동등한 지위에 올랐다. 예지벨에게 쫓기던 엘리야 선지자는 심지어 자루 하나 없이 도망치지 않았는가? 그러나 까마귀가 그를 먹여 주었다. 복된 사도들은 아무것도 없이, 무기 하나 없이 전도하러 나가지 않았는가? 그러나 그들은 온 세상을 정복하지 않았는가? 우리 자신도 지난 몇 해 동안 박해와 약탈을 겪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우리에 대해서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약속이 거짓이 아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악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입니까? 그리고 이런 헛된 생각은 무엇입니까? 보아하니 우리는 옛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렸고, 그들 중 일부가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 대해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 “사십 년 동안 나는 그 세대를 향하여 노여워하며 말하기를, ‘그들은 항상 마음으로 그릇 행하며, 내 길을 알지 못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분노 중에 맹세하여,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리라’ 하였노라” (시 94:10, 11). 보라, 마치 우리에게도 똑같은 말이 전해진 것처럼, 우리가 은혜를 베푼 이에게 배은망덕하게 굴며, 우리에게 주어진 것에 만족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우리의 발은 이곳에서 안식을 찾지 못하고, 우리는 이리저리 방황한다. 이로 인해 우리 사이에는 세속 사람들처럼 분쟁과 다툼이 생기고, 이 때문에 우리는 형제와 함께하기보다 혼자 사는 것을 좋아하며, 설령 형제와 함께한다 해도 겉으로만 그럴 뿐입니다. 왜냐하면 탐욕을 동반자로 삼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형제와 진실한 일치를 이루며 살 수 있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런 어리석은 자들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이 말은 여러분에 대한 것이 아니오, 나의 형제들이여, 또한 여기저기서 경건하게 사는 이들에 대한 것도 아니오. 오직 주어진 계명을 따르지 않고 잘못 살아가는 자들에 대한 것이니, 그들에게 마침내 바른 길을 걷기 시작하여 더 나은 사람이 되어, 우리 중 누구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가 떼어놓을 수 없이 구원받기를 간청하노라.

 

323. 고결한 삶을 살던 장로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고행과 성상파괴자들로부터 겪은 고난을 인내한 점을 칭찬하며... – 형제들에게 교훈을 주며 – 죽음을 기억함으로써 세속적인 모든 것에서 자신을 멀리하고 모든 미덕을 얻기 위해 열정을 불태우라고 권면한다

323. 1) 고결한 삶을 살던 장로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고행과 성상파괴자들로부터 겪은 고난을 인내한 점을 칭찬하며, – 2) 형제들에게 교훈을 주었다. 죽음을 기억함으로써 세속적인 모든 것에서 자신을 멀리하고, 모든 미덕을 얻고자 하는 열망을 불러일으키라고. – 3) 그러한 행위의 선한 열매와 그 반대의 행위가 초래하는 나쁜 결과를 들어 이를 독려한다. – 4) 예루살렘에서 돌아온 형제가 다시 그곳으로 파견되어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있음을 언급한다. [4, 121]

8. 비록 영혼을 감동시키고 회개하게 만드는 유익한 이야기들이 많이 있지만, 그중 어느 것도 죽음에 대한 소식만큼 큰 교훈을 주는 것은 없다. 죽음은 우리에게 두려운 신비이기 때문이며, 우리가 그에 대해 듣거나 생각할 때면 언제나 그러하다. 지금도 한 존경받는 노장로께서 세상을 떠나셨으니, 모두에게 교훈이 되도록 비록 간략하게나마 몇 마디를 전해야겠습니다. – 그가 청년 시절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수도 생활 속에서 주님을 섬기셨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노장로를 칭송하기에 충분합니다; 또한 그가 용감한 신앙의 증인 중 한 분으로서, 불경한 레오에게 붙잡혀 상당한 고문을 당했다는 점도 그러합니다. 서른 번의 채찍질로 그의 등과 가슴을 찢어 놓았고, 주먹질과 귀를 잡아당기는 고문으로 그의 얼굴을 때려 두 개의 이빨을 부러뜨렸습니다. 그 후 몇 년이 지나 감옥에서 풀려나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는 다시 예전의 생활 방식, 즉 기둥 수행으로 돌아가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그곳에서 생의 마지막까지 큰 궁핍과 비좁은 환경 속에서 지내다가, 평안히 주님께 영혼을 바쳤다. 경건하지 못한 박해자는 헛되이 불법을 저질렀으나, 용감한 투사는 순교자의 면류관을 쓰고 하늘로 올라갔다.

9. 형제들아, 우리는 무엇을 행하고 무엇을 생각해야 하겠는가? 우리가 앞으로 얼마나 더 살게 될까? – 많을까요, 적을까요? – 그리고 누가 내일이 무엇을 가져올지 알겠습니까? – 그러나 당분간은 그 노인의 죽음이 주는 교훈을 받아들이도록 합시다. 우리가 그에게서 본 바와 같이, 머지않아 우리에게도 같은 일이 닥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자신에게 정해진 죽음의 한계를 넘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영원한 죽음이 우리를 사로잡지 않도록, 죽음을 결코 잊지 맙시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지 않도록 이 세대를 사랑하지 맙시다. 기록된 바와 같이, “세상과 친구가 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야고보서 4:4)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대한 사랑이 영혼으로 하여금 육신을 떠나는 것을 갈망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를 갈망했던 것처럼, 우리도 이 육신 안에서 썩어가는 일에서 벗어나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신 가장 안쪽 휘장 안”(히브리서 6, 19, 20), 즉 하늘 예루살렘의 복된 보물창고로 들어가야 합니다. – 그러니 세상의 헛됨을 미워하고, 덕을 탁월하게 쌓으며, 기도와 눈물, 정화, 깨달음, 무욕과 같은 신성한 보물들로 부유해지자. 이것들은 영생으로 이끄는 길잡이이다. 먹고 마시는 일, 옷차림, 그리고 육체에 필요한 그 밖의 모든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계명에 따라 살고 일하기에 필요한 만큼만 신경 쓰자.

10. 우리가 이렇게 시간을 보낸다면, 우리에게는 매일이 축제일이고, 매일이 환희의 날이 될 것이다. 비록 셀 수 없이 많은 슬픔이 우리를 덮친다 해도, 그 무엇도 우리의 선한 양심을 어둡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반대로 악의와 시기, 무정함과 온갖 간사함 속에서 산다면, 아아! 우리에게는 매일 죽음이 찾아올 것이며, 심판 이전에 먼저 심판과 정죄가 있을 것이다. 그 후 죽음이 포효하는 사자처럼 닥쳐올 텐데, 가련한 영혼이 어떻게 그 영원한 고통을 견뎌낼 수 있겠는가? – 기록된 바와 같이: “심판이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시작되리니, 만일 우리에게서 먼저 시작된다면, 하나님의 복음 에 대적하는 자들에게는 어떤 결말이 있겠는가? 의인조차 간신히 구원을 받는다면, 불의하고 죄 많은 자는 어디에 서겠는가?” (베드로전서 4:17, 18).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경계하며 깨어 있고, 항상 용감하고 흔들림 없이, “주님의 일에 항상 힘쓰며, 우리의 수고가 주님 앞에서 헛되지 않음을 알라” (고린도전서 15:58).

11. 소크라테스 형제에 대해서는, 그가 동쪽에서 와서 자신의 사명을 다하고 지체된 일에 대해 사과했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를 유능한 형제로 여기고 이곳에 머물게 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시온에 씨를 두고 예루살렘에 친족을 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기록되어 있기에, 우리는 그를 다시 그곳으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하였으며, 그를 통해 은혜를 얻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 형제 중 한 명이 거룩한 시온, 곧 모든 교회의 어머니인 그곳에서 현지의 지극히 거룩하신 총대주교에 의해 사제로 서임되었다는 사실에 기뻐해야 합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그와 우리를 지켜 주시며, “모든 선한 뜻을 선하심으로 이루시고, 믿음의 일을 능력으로 완성하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영화롭게 되게 하소서”(살후 1:11-12).

 

324. 보이지 않는 원수들의 공격이 닥칠 때,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께 의지합시다. 그러면 그분께서 우리를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324. 1) 보이지 않는 원수들이 공격해 올 때,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께 의지합시다. 그러면 그분께서 우리를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다만 그분을 섬기는 일에 변함없이 충실합시다. – 2) 악한 생각과 정욕이 차가워지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이는 아담의 타락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는 새롭게 되지만, 방심하면 옛 것이 다시 고개를 든다. – 3) 그러나 하나님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온갖 죄의 반역을 이겨냈다. 우리도 그들을 본받자. [4, 122]

12. “주 안에서, 또 그분의 능력의 권세 안에서 강해지십시오. 하나님의 모든 무기를 착용하십시오. 그래야 마귀의 궤계에 대항할 수 있습니다” (엡 6, 10. 11); 왜냐하면 그는 잠들지 않고 항상 깨어 우리를 대적하며, 자신에게 맞서 용감하게 싸우는 영혼들을 볼 때면 더욱 집요하게 공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우리를 공격할 때—그는 밤낮으로 공격하느니라—우리를 죄의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께 의지하여, 부지런한 기도와 뜨거운 눈물로 깨어 그를 맞서면, 원수는 곧 도망칠 것이다. 시편에 기록된 바와 같이, “네가 환난 날에 나를 부르리니, 내가 너를 구원하고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시 49:15)고 하셨기 때문이다. 적에게 상처를 입었는가? 그러나 주님께서 치유해 주실 것이다. 그가 혼란스럽게 했는가? 그러나 바다에게 “잠잠하라, 그치라… 그러자 큰 고요가 임했다”(누가복음 4:39)고 말씀하신 분이, 우리 안에서 요동치는 생각들도 가라앉혀 주실 것이다. – 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 우리가 그분을 부르기도 전에, 선하신 그분은 이미 자비와 관대하심으로 가까이 계셔서, 기도하는 자에게 기도를 들어주시고, 슬픔의 구름을 흩어지게 하시며, 선한 생각으로 마음을 빛으로 채워 주십니다. – 그분이 우리를 위해 하지 않으시는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어쨌든 이보다 더할 수는 없습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심지어 죽음, 그것도 십자가의 죽음까지 감내하셨다면, 그 후에 어떻게 우리에게 모든 것을 베풀어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해 그분을 섬기는 일에 변함없이 매진하고, 우발적인 넘어짐에서 재빨리 일어나며, 수련자의 길에서 부지런히 힘쓰자. 수련의 끝에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고해성사를 적극 활용합시다. 고해성사는 죄에 빠지는 것을 막아주는 고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겸손을 지키십시오. 겸손으로 말미암아 악마가 쏘아대는 모든 불타는 화살이 꺾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지키십시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11:6).

13. 어쩌면 어떤 이는 우리가 이토록 열심히 수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적절한 생각에 사로잡히는 것을 보고 놀라거나 의아해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아담 안에서 범한 죄로 인해 겪는 고통입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타락하였고, 우리의 본성은 정욕으로 인해 극도로 병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 성육신을 통해 오신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성령의 재생과 갱신의 세례 안에서 힘을 얻어, 그것은 다시 본래의 상태로 회복된다. 하지만 한 번 병들었던 본성은 병드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방심하면 쉽게 죄의 유혹으로 미끄러지게 된다.

14. 그러나 성도들은 하나님의 경외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스스로를 굳건히 다져, 자신들만 흔들림 없이 굳건히 서는 데 만족하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 악령을 쫓아내고 수많은 기적을 행하였습니다. – 비록 우리가 그들의 거처에서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우리의 힘껏 그들을 본받으려 노력하겠으며, 자비로우신 우리 하나님께서 그들의 위대한 선행을 받아주시는 것처럼 이 우리의 작은 헌신을 받아주시고, 그들과 함께 우리를 그분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325. 평범한 여행자들과 마찬가지로, 이 땅의 나그네로서 하늘의 고향으로 향하는 우리도,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에도 매여서는 안 되며, 그 어떤 짐도 지어서는 안 되고, 그곳의 형언할 수 없는 복과, 만약 그곳에 이르지 못한다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끔찍한 공포에 고무되어, 목표한 바를 향해 곧장 나아가야 한다.

325. 평범한 여행자들과 마찬가지로, 이 땅의 나그네로서 하늘의 고향으로 향하는 우리도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해서는 안 되며, 그 어떤 짐도 지어서는 안 되고, 그곳의 형언할 수 없는 축복과, 그곳에 도달하지 못할 경우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끔찍한 공포에 고무되어, 목표한 바를 향해 곧장 나아가야 한다. [4, 123] 보통 여행자들은 서로를 격려하고 여정을 계속하도록 독려하며,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왕의 길을 따라 나아가야 한다. 뿐만 아니라, 적당히 먹고 마시고 자서, 식단의 균형을 통해 여행의 어려움을 스스로에게 가장 가볍게 만들어야 한다. – 이 비유가 무엇을 시사하는지 여러분도 분명 아실 것입니다. 바로 우리 역시 이 생의 여행자로서, 셀 수 없이 많은 어려움으로 가득 찬 여정을 헤쳐 나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도 서로를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며, 길을 잃지 않고 나아가야 하며, 음식과 음주와 수면에 절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그것들에 짓눌려 앞으로의 여정에 게을러지거나, 이 세상의 쾌락으로 되돌아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평범한 여행자들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이리저리 샛길로 빠지지 않으며, 오직 한 방향만을 고수하며 휴식을 위해 정해진 장소에 도달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오, 우리의 안식처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리고 그곳에 머무는 것이 얼마나 복된가!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며, 썩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썩지 않는 복으로 가득 차 있어, 기쁨과 평화, 그리고 끊임없는 축제가 있는 곳이다. 주님께서는 복음서에서 이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할 곳이 많으니, 그렇지 않다면 내가 너희에게 말했을 것이요,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가리라.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데려가리니,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가는 곳을 너희가 알며, 그 길을 너희가 안다”(요한복음 14:2–4). 보라, 이 얼마나 형언할 수 없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약속인가! 누가 일어나지 않겠으며, 누가 달려가지 않겠으며, 누가 그 영원한 거처에 이르기를 갈망하지 않겠는가? – 복된 다윗도 그곳을 갈망하며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거처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주님의 뜰을 갈망하며 그곳을 사모합니다” (시 83, 2. 3). 보라, 참으로 갈망되는 거처들입니다. 여기서는 마치 유배지처럼 지내고 있으며, 우리의 체류는 오래가지 않을 것입니다. 게다가 이 현세 전체가 미래와 비교하면 하루와도 같습니다. 우리가 어찌 세상과 친하게 지낼 수 있겠습니까? 현재에 무엇을 놀라워하겠습니까? 눈을 돌릴 대상이라니, 이러저러한 사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과 바다, 해와 달과 별들, 그리고 그 밖의 모든 보이는 것들을 말하는 것입니까? 왜냐하면 잠시 후면 우리가 남기고 떠날 것인데, 헛되이 집착할 필요가 무엇이겠는가? – “오직 한 가지만 구하오니”라고 성 다윗이 주님께 말씀하시며, “내 평생 주님의 집에 거하며, 주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그분의 거룩한 성전을 방문하게 하소서” (시 26:4), 그곳에 들어갈 자격을 얻은 자는, 어떤 선지자가 말한 그 무거운 날에서 벗어난 자니, “너희에게 이 주님의 날이 무엇이냐? 이는 어둠이지 빛이 아니니라” (아모스 5:18)라고 한 바로 그 날이다. 또한 복된 사도도 그날을 진노의 날이라 부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진노의 날과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드러나는 날을 위해 네게 진노를 쌓고 있다. 그분은 각 사람에게 그의 행위에 따라 갚아 주실 것이다” (로마서 2, 5-6).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 중 어떤 예를 들어 그 날의 고통스러움을 조금이라도 엿볼 수 있도록, 원하신다면 얼마 전 이곳을 찾아왔던 한 남자를 떠올려 봅시다. 그는 악령에 사로잡혀 영혼이 짓눌리고 온몸이 타는 듯한 고통을 겪으며, 밤낮으로 울부짖었으나 그 어떤 것에서도 위안이나 안식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 남자의 그런 고통이 가볍다고 생각하십니까? – 물론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은 미래에 닥칠 고통에 비하면 꿈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마지막 고통, 즉 꺼지지 않는 불과 잠들지 않는 벌레, 그리고 셀 수 없이 많은 다른 영원한 고문들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의 자비와 주님의 성도들, 그리고 복되신 우리 아버지의 기도를 통해, 우리가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나 신자들에게 약속된 복을 얻게 하소서.

 

326. 원수의 올가미로부터 피할 피난처는 어디에 있습니까? 모든 죄악과, 타락한 생각과 욕망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있습니다.

326. 원수의 함정으로부터 피할 피난처는 어디에 있습니까? 모든 죄악과, 타락한 생각과 욕망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데에 있습니다. – 우리는 마음의 평안이 주는 행복과, 정열적인 동요가 초래하는 파멸을 마음에 새기며 그렇게 행할 것입니다. [4, 124] 아가르 사람들의 손에 잡히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우리는 예전 살던 곳을 떠나 지금 이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적들의 손에 잡히지 않도록 우리는 얼마나 더 큰 두려움을 느껴야 합니까? 그리고 그 때문에 얼마나 더 멀리, 얼마나 더 안전한 곳으로 그들로부터 도망쳐야 합니까? 이 도피는 무엇에 있는 것일까? – 바로 죄로부터 멀어지는 데 있다. 죄는 마치 칼처럼, 마귀가 온갖 수단을 동원해 영혼을 죽이려 드는 것이다. – 그러니 우리는 이를 가장 철저히 피해야 하며, 심지어 생각의 단계에서부터 피해야 한다. 죄는 생각에서 시작되어, 생각에서 말로, 말에서 행동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부적절한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은 어렵습니다. 어느새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조차 눈치채지 못할 것입니다. – 그러나 우리가 그 생각에 휩쓸렸음을 깨닫는 즉시, 기도와 눈물, 진심 어린 회개,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으로 인해 생겨나는 두려움으로 서둘러 그 생각들을 떨쳐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 생각들이 우리 안에 머무르게 내버려 둔다면, 그것들은 영혼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리고 이는 매 순간마다 일어날 수 있다. 우리 안에서는 끊임없이 전쟁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이다. 그리고 우리는 하늘의 도움을 받아 마음의 죄에 대해 끊임없이, 그리고 항상 맞서 싸우는 것 외에는 패배를 피할 수 없다. 지난 사흘 동안 바다에서 어떤 파도가 거세게 몰아쳤는지 보지 못했는가? 정욕의 동요도 이와 같으나, 영혼의 난파가 훨씬 더 치명적이기에 그 파장은 훨씬 더 재앙적이다. 그러나 바다의 파도는 유익을 위해 적절한 때에 바람을 보내시는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것이지만, 영혼의 동요는 우리 스스로가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마치 어떤 정박지에 머무르듯 평온을 유지하며, 정욕의 문을 열어주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왜냐하면 문을 열자마자, 거센 바람처럼 악의의 영들이 휘몰아치며 우리 안에 큰 파도가 일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서둘러 이 소동을 가라앉히지 않는다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도대체 왜 우리가 스스로 그런 소동에 휘말리고, 그런 동요에 시달리며, 마치 난파당하지 않을까 두려워해야 할 필요가 있겠는가? – 스스로 자초한 불행을 불러오지 않고, 평화와 고요한 정적을 즐기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 우리는 바다에 파도가 치는 동안 부두를 떠나 파도에 휩쓸려 익사할 위험에 처하는 사람들을 어리석다고 꾸짖지 않는가? 그러나 우리가 정욕의 소용돌이에 스스로를 내던질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훨씬 더 어리석은 자로 여겨야 한다. 악한 정욕이 우리 마음에 불어닥쳐 우리 안에 끔찍한 소용돌이를 일으키지 않는가? 마치 완전히 가라앉혀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것처럼 이리저리 휩쓸지 않는가? 질투는 마음과 몸을 모두 상처 입히며,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이성을 잃게 하지 않는가? 불신 또한 영혼을 어둡게 하여 나태하고 무기력하게 만들지 않는가?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정욕은 사람을 본래의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고, 그를 가장 어리석은 존재로 만들지 않는가? 그러니 우리는 해로운 정욕들을 피합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대홍수 이전의 사람들에 대해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에 대해서도 “내 영이 이 사람들에게 영원히 머물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육신이라” (창 6:3)라고 말씀하시지 않도록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육신’이라 부르신 것은 그들이 육체적인 몸을 가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도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요한복음 1:14)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들의 육신적인 사고방식 때문이었으니, 이는 부도덕한 정욕에 빠져 하나님께로 올라갈 힘도, 마음가짐도 없었기 때문이다. –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바쳤으니, “우리의 삶은 하늘에 있다”(빌 3:20)는 말씀대로, 더 나아가 이들은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니, 나 또한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니라”(요 17:14)는 말씀을 듣게 하소서. 미래의 세상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현재의 세상에 있어서도, 부도덕한 정욕과 거리를 두고 육신에 지배당하지 않으며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보다 더 복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복락이며, 달콤함이며, 행복이며, 천사 같은 삶이다. 그런 사람은 겉으로는 세상의 모든 사람과 같이 살지만, 영적으로는 왕관을 쓴 자들보다 더 고귀하며, 세상의 주인이요, 하늘의 영광으로 장식된 자로서, 언제나 떠날 준비가 되어 있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이다. 우리도 힘을 다해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힘쓰자. 온전히 원하기만 한다면 이는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비록 어떤 외적인 슬픔을 마주하게 되더라도 이 세상에서 평생 기쁜 마음의 상태를 누릴 것이며, 장차 오는 세상에서는 모든 성도들과 함께 천국을 상속받게 될 것이다.

 

327. 무조건적인 순종을 권면하며: 순종이 얼마나 유익한지, 불순종이 얼마나 해로운지를 예시를 들어 증명한다

327. 조건 없는 순종을 권면한다: 1) 순종이 얼마나 유익하고 불순종이 얼마나 해로운지를 예로 들어 증명하며; – 2) 형제애를 몸에 비유하여, 그 몸의 각 지체가 각자의 역할을 다함으로써 몸이 살아가듯이; 그리고 이를 근거로 “너희도 그렇게 하라, 그러면 복이 있을 것이다”라고 권면한다. [4, 125]

15. 자신의 재능을 땅에 묻어 둔 자에 대한 심판을 두려워하며,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바, “악하고 게으른 종아, … 내 은을 은행에 맡겼어야 했는데, 내가 와서 이자와 함께 내 것을 되찾았을 텐데”라고 하신 말씀을 떠올리며, 나는 필요에 따라 여러분에게 간략한 교훈을 전합니다. 여러분은 선한 청지기들로서, 하나님의 은혜로 이미 실천하고 계신 것처럼, 여러분의 선한 순종을 통해 이 말씀을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 그런데 여러분 중에는 주어진 것을 불려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것마저 거의 망쳐버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 도대체 그들이 누구인가? – 바로 순종을 거부하고, 그에 대한 변명으로 오직 “용서해 달라”는 말만 내세우는 자들이다. –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형제여? 죽을 때까지 순종하겠다고 약속해 놓고, 이제 와서 하나님의 은혜로 할 수 있는 일을 거부하고 있느냐. 그러나 네가 “바다를 건너는 것이 두려웠다”고 말하는 것은 불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거기서는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네가 두려워했다”(시 13:5). 만일 네가 순종에 충실했다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넜을 뿐만 아니라, 옷을 벗어 던지고 알몸으로 물 위를 헤엄쳐 건넜을 것이며, 아버지의 계명을 의지하여 거친 강을 건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건너고 나서 아무것도 다치지 않은 채로, 지켜보던 이들의 경탄을 자아냈던 그 영원히 기억될 수도승의 모범을 따랐을 것이다. 순종은 짐승들까지도 길들입니다. 그 증거로, 는 자신의 스승의 명령에 따라 지옥을 묶어 두었습니다. 순종은 죽은 자들 속에서도 기적을 일으킵니다. 이는 무덤에서 외친 아카키우스가 증명해 줍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다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독생자께서도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으며,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셨다”고 하시며, 세상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순종의 놀라운 행적과 열매입니다. 이제 불순종의 파멸적인 결과를 알고 싶으십니까? – 하나님을 거역하여 금단의 열매를 맛봄으로써 세상에 죽음을 불러온 아담을 기억하십시오; 성자 사무엘의 말을 거역하여 헬부이 산에서 왕위뿐만 아니라 목숨까지 잃은 사울을 기억하십시오; 거짓 선지자에게 속아 계명을 어긴 그 하나님의 사람 또한 기억하라. 그는 그 대가로 사자의 먹이가 되었다. 그리고 복된 사도 베드로는 경건함으로 주님께서 자신의 발을 씻어 주시는 것을 거절했을 때,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할 몫이 없느니라”는 말씀을 듣지 않았는가? (요한복음 13, 8). 또한 성 유피미우스의 이야기에서, 순종을 거부한 목동은, 자신에게는 축복받은 것처럼 보였던 이유들로 인해, 곧바로 악마, 즉 ‘거품’을 낳는 시어머니를 닮지 않았는가? 이것이 바로 자신에게 주어진 순종을 거부하고, “모든 악한 자는 반역을 일으키나니”라고 말한 순종하지 않는 자에 대한 심판이며, “주님께서는 그에게 자비 없는 천사를 보내시리라”(잠언 17, 11)고 하신 말씀입니다.

16. 일반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서로 다른 지체들”이다(롬 12:5): 한 사람은 눈의 자리를 차지하고, 다른 사람은 귀의 자리를 차지하며, 저 사람은 코의 자리를, 이 사람은 혀의 자리를, 또 다른 사람은 손의 자리를, 또 다른 사람은 발의 자리를 차지한다. 만약 모든 지체가 각자 자신의 역할을 다하지 않고, 눈이 ‘듣기를’, 귀가 ‘냄새를 맡기를’, 코가 ‘말하기를’, 혀가 ‘만지기를’, 손이 ‘걷기를’ 요구하며 다투기 시작한다면, 온 몸이 무너지고 썩어 버리지 않겠는가? 만약 그렇다면, 각자는 자기의 소임을 다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사를 통해 공동의 유익을 위해 봉사하며, 우리의 운명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누군가 바다를 항해한다고 해서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는 것도 아니며, 또 누군가 육지에 머문다고 해서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선하신 우리 하나님께서 창세 때부터 각자에게 죽음의 때와 장소, 방식을 정해 두셨으니, 그렇게 각자의 끝이 찾아올 것이다. 내가 이 말을 한 것은 주로 그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나는 이미 그들의 순종을 받아들였으니—듣는 모든 이를 위한 것이다. 그러니 우리 스스로를 삼가 경계하며, 하나님과 그분의 선택받은 천사들 앞에서 한 서원을, 명령받은 일이 어떤 치명적인 위험을 수반하더라도 주저하지 않고 성실히 이행하자. 이것이 바로 교부들, 그 중에서도 무엇보다 위대한 바실리오가 가르친 바입니다. 이렇게 살아간다면 우리는 죄로 인한 죽음에 빠지지 않고, 진리 안에서 살아가며 천국을 누릴 자격을 얻게 될 것입니다.

 

328. 성육신하신 주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은 그들이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면 기쁜 일입니다.

328. 1) 성육신하신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은 그들이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면 기쁜 일입니다. – 2) 그러니 우리도 마땅히 스스로를 준비합시다. [4, 126]

17. 요즘 제가 조금 아팠습니다. 심장이 두근거려, 제가 여러분 곁을 떠나게 될 것 같았습니다. – 이 겸손한 제가 앞으로 얼마나 더 살아야 할까요? 보시다시피 제 노년기도 다가왔고, 동년배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습니다. 순리에 따라 저에게도 끝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 그렇다면? 이 일로 슬퍼해야 할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육신에 따라 사는 자들이 원한다면 슬퍼하게 두십시오. 그들은 아내와 자녀, 하인, 재산,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쾌락—그들이 사로잡혀 있는 것들—과 헤어지게 될 테니까요. 그러나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오직 십자가만이 우리를 둘러싼 우리에게는, 세상을 버리고 순종에 헌신한 힘으로 인해, 잠들음의 성사는 슬픈 일이 아니라 기쁨을 주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우리’라고 말하지만, 모든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자신의 죽음을 기쁨으로 맞이해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시기 전에는, 아담의 죄로 인해 우리 인류를 지배하던 죽음이 심지어 성도들에게조차 무섭고 끔찍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이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모든 이를 위해 죽음을 맛보시고” (히브리서 2:9), 우리에게 “생명의 새로운 길”을 “그분의 육신, 곧 휘장”으로 열어 주시고 “새롭게 하셨으며”(히브리서 10:20), 기록된 바와 같이 “죽음이 승리로 삼켜졌다”(고린도전서 15:54)고 하니, – 죽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지옥의 왕국으로 내려가지 않고, 천국으로 올라가며,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놓이지” (시 87,7) 않고, 하나님께서 그분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접근할 수 없는 빛과 끊이지 않는 생명으로 올라갑니다. 그러므로 이제 죽음 그 자체는 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기꺼이 환영해야 할 대상이 되었으니, 물론 우리가 마음의 준비를 갖추고 있을 때에만 그러하다. – 왜냐하면 그러한 준비 없이는, 죽음을 맞이할 때 지나간 세월을 회상하며 선한 행실을 쌓기 위해 남은 생의 날들을 애타게 갈구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는 무섭고도 비참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상태에서 붙잡힌 자는 마음이 동요하여 극도로 비참해질 것이며, 선한 행위에 대한 상이 아니라 죄에 대한 보응으로 넘어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 그가 마주하게 될 광경은 얼마나 끔찍한 것입니까!

18. 우리도 같은 고통을 겪지 않도록, 상기시키며 간청하노니, 성 안토니우스가 가르쳐 주신 대로 매일 매일을 우리 생애의 마지막 날로 여기며, 언제나 복된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도록 합시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행하기로 마음먹는다면, 결코 방종하거나, 부주의하거나, 게으르거나, 나태하거나, 불평하거나, 불순종하거나, 제멋대로이거나, 우스꽝스러운 사람이 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우리는 온유하고, 절제하며, 회개하는 마음으로, 선한 태도를 지니고, 온화하고, 평화로우며, 진실하고, 흠이 없으리니, 성도들을 본받아 모든 선한 일에 준비될 것입니다. 그 성도들은 그렇게 살아가다가 약속된 천상의 복을 누릴 자격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 이 모든 것을 내가 설명한 것은, 여러분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선함 안에서 굳건히 서기 위함입니다. 그리하여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며 삶을 살아가다가, 죽음을 맞이할 때 두려움과 떨림에 휩싸이지 않고, 기쁨 가운데 다윗과 함께 외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내 영혼아, 주께서 네게 은혜를 베푸셨으니 네 안식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나는 산 자들의 땅에서 주님 앞에서 기쁨을 누리리라”(시편 114:6, 8). 이 모든 것이 우리 모두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329. 자기 의지를 끊어 버리는 것은 그리스도를 본받고 사도적인 가장 위대한 업적이지만, 오늘날 모든 사람이 그 높이를 깨닫지는 못한다.

329. 자신의 의지를 절제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본받고 사도적인 가장 위대한 업적이지만, 오늘날 모든 사람이 그 위대함을 깨닫지는 못한다. [4, 128] 슬퍼하라는 교훈은 덕이 부족한 이들을 깨우치게 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신의 연약함을 치유하는 법도 가르쳐 준다. 왜냐하면 덕의 부족에 대한 바로 이 슬픔이, 눈에 띄지 않게 영혼을 자기 수양에 전념하도록 이끄기 때문이다. 사도가 말하듯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슬픔은” “구원에 이르는 참된 회개를 낳는다”(고린도후서 7, 10). 그러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혹시 우리 안에서 부도덕한 생각들이 일어나, 마치 적군처럼 우리 영혼을 포위하기 때문인가? – 그러나 기록된 바와 같이: “군대가 나를 치려 해도 내 마음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전쟁이 나를 대적하더라도 나는 그분을 의지하리라” (시편 26:3). 아니면 순종의 멍에가 무겁기 때문인가? – 그러나 다시 기록되어 있기를: “사람이 젊을 때 멍에를 메면 복이 있도다”(예레미야 애가 3, 27); 또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복음 11, 30)고도 했다. 아니면, 이 순종의 멍에 아래서의 삶이 자신의 것을 아무것도 가질 수 없게 한다는 점 때문인가? 그러나 사도의 말씀은 이렇다.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나이다. 그러면 우리에게 무엇이 있겠나이까?” (마태복음 19, 27). – 그리고 그들에게는 무섭기도 하고, 그만큼 영광스럽기도 한 약속이 주어졌다. – 우리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지 않았는가? 저 사람은 부모를 버리지 않았는가? 이 사람은 형제자매를 버리지 않았는가? 한 사람은 아내와 자녀를, 다른 사람은 집과 밭을 버리지 않았는가? 그리고 모두 – 가장 소중한 것, 즉 자신의 의지와 욕망을 버렸는데, 이것이야말로 인간에게 있어 가장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엄격한 금식이나 밤샘 기도, 맨땅에서 자는 것, 목욕을 하지 않는 것, 황량한 곳에서의 생활, 혹은 우리의 신성한 수행 중 다른 어떤 것을 꼽아 보라. 이 모든 것은 행하는 이의 자신의 의지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다. 자신의 의지에 따라 이루어지는 일은, 그 자체로는 힘들지라도, 원하기만 하면 쉽게 이루어진다. 반면 자신의 의지를 끊어내고 행하는 일은, 그 자체로는 쉬울지라도 큰 수고를 들여야만 이루어집니다. 성부들은 이러한 행위를 ‘피 흘림’이라 불렀으며, 이는 참으로 순종하는 자, 즉 사도와 함께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 (갈 2,20)라고 말할 수 있는 자 외에는 누구에게도 해당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뜻대로 살지 않으므로, 그만큼 수도원장님의 뜻을 통해 하느님께 살며,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 함이라” (요한 11,38)고 말씀하신 분을 본받는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의 높이를 보십니까? 이것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 아닙니까? – 사도적인 것이 아닙니까? 아니면 제가 여러분을 아첨하려고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까? – 아닙니다. 진리 그 자체가 제 말의 진실함을 증언합니다. 사람들이 이러한 삶의 방식을 끝맺는 이들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고 해도, 그로 인해 그들의 영광이 조금도 훼손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보는 방식대로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사람의 심판과 다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귀하게 보이는 자들 중에서도 심판의 날에 가장 영광스러운 자로 드러날 미천한 이들이 얼마나 많을지 모릅니다. 기록된 바와 같이: “많은 첫째가 마지막이 되고, 마지막이 첫째가 되리라”(마태복음 19:30). – 그러므로 기뻐하고 떨라. 전자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고, 후자는 마음의 변덕 때문이니, 우리가 영원히 똑같은 모습으로 머무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과 선한 일을 격려하며 서로 이해하자” (히브리서 10:24)라고 했는가? 이는 우리 자신의 뜻을 억제하는 것을 부담으로 여기지 말고 – 이것이 바로 말씀의 핵심이다 – 순종을 실천하는 데 게으르지 말고, 오히려 열정으로 고무되어 서로를 지지하며, 형제처럼, 한마음으로, 한 몸처럼 서로의 짐을 지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날마다 힘쓰며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면, 여러분은 제가 잘 알고 있듯이 의심할 여지 없이 시들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입니다.

 

330. 영적이며 보이지 않는 전쟁에서, 두려움 없이 희망에 차고 열정적으로 적과 맞서는 자들은 언제나 승리를 거둔다. 적들은 바로 그런 자들을 피한다.

330. 1) 영적이며 보이지 않는 전투에서, 두려움 없이 희망에 차고 열정적으로 적과 맞서는 자들은 언제나 승리를 거둔다. 적들은 바로 그런 자들로부터 도망친다. – 2) 이단과의 싸움에서는 이단자들과 교제하거나 그들을 기억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바로 내가 금지한 바이다. [4, 129]

1. 비록 내가 말로도, 행동으로도 미약하지만, 내 힘닿는 대로 여러분을 위로하고 영적으로 격려할 의무가 있다. 왜냐하면 적들과 전쟁을 치르는 이들이 동료들의 격려를 필요로 한다면, 보이지 않는 적들과 싸우는 여러분은 더욱더 권면하는 말로 힘을 얻고 영적으로 격려받을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의 싸움은 하루만의 일이 아니라 평생에 걸친 것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승리하면 형언할 수 없는 썩지 않는 면류관을 얻게 되겠지만, 패배하면 헤아릴 수 없는 수치의 영원한 짐을 짊어지게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이런 고통을 겪거나 우리의 소망에서 수치를 당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도움으로 우리 자신을 끊임없이 경계하고 원수에게 끊임없이 맞서 싸움으로써 마귀에게 승리를 거둘 것임을 의심하지 맙시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평범한 전사들조차 전투에 임할 때 극도의 흥분 상태에 빠져 얼굴빛이 변하고,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 순간 그들에게는 아내도, 자녀도, 부모도, 형제도, 그 누구도 더 이상 떠오르지 않으며, 그들의 마음과 정신, 그리고 온몸이 온전히 싸움으로 향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내면의 사람에 따라, 적들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훌륭한 전사들처럼 열정과 불타는 기개로 그들에게 달려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원수들은 우리가 그런 모습을 보일 때, 감히 공격하지 못하고 물러선다. 그러나 우리 안에서 용기가 꺾이고, 힘과 주의력이 약해지는 것을 보게 되면, 그때 그들은 활을 당겨 화살, 즉 부적절한 생각들로 우리의 영혼을 찔러 상처를 입힌다. – 그러나 우리로서는 그런 경우에도 절망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실수를 깨닫고 회개한 뒤, 다시 힘을 다해 쉬지 않는 투쟁에 나서야 합니다. – 항상 그렇습니다.

2. 그러나 오늘날 또 다른 이단적인 전쟁이 온 우주에 퍼져 있다. 원하신다면, 마음의 눈을 들어 보라. 그러면 이 전쟁에서 상처 입은 자들로 가득 찬 온 천하를 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뱀은 불신자나 이단자들뿐만 아니라, 음행하는 자와 간음하는 자, 그리고 이와 유사한 부도덕한 행위를 저지르는 자들만을 자신의 지배 아래로 끌어들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자들에게 무관심하게 대하며 그들과 교제하는 자들까지도 사로잡고 있습니다. “역청에 손을 대면 검게 물들고, 교만한 자와 교제하면 그와 같이 될 것”이라는 말씀이 참으로 옳기 때문입니다(시라 13,1). 이러한 이유로, 비록 제가 정교회 신자가 성스러운 추모 예배와 신성한 전례에서, 정교회 신자인 척하면서 이단자들과 이단 사상과 끊임없이 교제를 이어가던 어떤 자를 기억하는 것을 금지했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고 있지만, 만약 그가 비록 죽음의 순간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성찬에 참여했다 하더라도; 그때라면 정교회 신자가 그를 위해 제사를 드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단과 교제하며 떠났으니, 어떻게 그런 자를 정교회의 교제 안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 성 사도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축복하는 이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와의 교제가 아니겠는가? 우리가 떼는 이 떡은 그리스도의 몸과의 교제가 아니겠는가? 한 덩어리의 떡이니, 우리 많은 자가 한 몸이니라. 우리 모두가 한 덩어리의 떡에서 성찬을 나누기 때문이라” (고린도전서 10, 16-17). 이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이단적인 떡과 잔을 성찬하는 자는 정통 교회에 반대되는 편에 속하게 되며, 그러한 모든 성찬자들은 그리스도와 동떨어진 하나의 몸을 이룬다. – “의와 불의가 어떻게 함께할 수 있겠느냐? 빛과 어둠이 어떻게 교제하겠느냐? 신실한 자와 불신실한 자가 어떻게 한 편이 되겠느냐? 혹은 하나님의 교회가 우상과 어떻게 합쳐질 수 있겠느냐?”(고린도후서 6, 14–16), 같은 사도가 다른 곳에서 외친 바와 같다. – 그러나 그러한 자들을 위해 슬퍼해야 하며, 그들 중 아직 살아 있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여, 그들이 마귀의 올가미에서 벗어나게 해 주시기를 구해야 한다. 또한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령의 거룩함과 진리의 믿음 안에서 구원에 이르게 하셨다” (데살로니가후서 2, 13)라고 하셨으니, 정통 신앙 안에서 그분께 섬기며 이 현재의 신앙 고백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를 흠 없이, 흠잡을 데 없이 완수한다면, 그분께서 우리를 그분의 천국으로 인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331. 다른 일들에는 제때가 있으나, 구원의 일은 언제나 우선되어야 한다

331. 1) 다른 일들에는 제때가 있으나, 구원의 일은 언제나 이루어져야 한다. – 2) 죽음이 모든 이를 거두어 가는 것을 보고, 이 때 지혜로운 처녀들과 어리석은 처녀들을 생각하며, 더 이상 미루지 말자. – 3) 그러니 일어나서 신랑을 맞이할 모든 준비를 서둘러 하자. [4, 130]

3. 다른 일들에는 각기 정해진 때가 있다. 씨를 뿌릴 때가 있고, 수확할 때가 있으며, 평화의 때가 있고, 전쟁의 때가 있으며, 장사할 때가 있고, 장사를 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러나 영혼의 구원을 이루는 일에는 우리가 원하기만 한다면, 어떤 때라도 적합하고, 어떤 날이라도 유리한 때이다. – 그러니 우리는 선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며, 선한 마음을 품고,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고자 하는 청년 같은 열정으로 가득 차야 한다. “ , 법의 청취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 아니하나, 이 법의 실천자들은 의롭다 하심을 받으리라”(롬 2, 13). –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전쟁이 닥치더라도, 기쁜 마음으로 싸워야 하며, 하나님의 도움으로 우리에게 반항하는 악마적인 생각들을 쫓아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생각들이 우리 안에 머무르며 영적 죽음을 초래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면 영적인 수확의 때가 다가왔다면, 영원한 생명을 위해 영적인 곡창에 충분한 양식을 모아 그곳에서 영원히 굶주려 죽지 않도록 부지런히 수확해야 합니다. 언제나 기도의 시간이 있고, 눈물의 시간이 있으며, 넘어짐을 씻어내는 시간이 있고, 천국을 갈망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4. 도대체 무엇을 망설이는가? 왜 주저하는가? 왜 날마다 우리 자신을 바로잡는 일을 미루고 있는가? “이 세상의 모양이 지나가고 있지 않은가?” (고린도전서 7:31). 매일 우리 곁을 떠나는 이들이 셀 수 없이 많지 않은가? 끊임없이 열리고 있는 관들이 우리의 비천한 본성에 대한 승리를 자축하고 있지 않은가? – 땅도 우리 몸을 받아들이며 똑같은 일을 하고 있지 않은가? – 그런데 우리가 과연 끝까지 이곳에 남아 있을 수 있겠는가? – 우리 형제들 중 이미 얼마나 많은 이들이 떠났는지 보지 못하는가? 우리의 복된 선조들은 어디에 있는가? 영적 형제들과 육신의 형제들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의 친구들과 수고와 수공예, 시편 찬송을 함께하던 동료들은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얼마나 건망증이 심한가? – 어떤 형제나 아버지의 죽음이 닥치면, 우리는 즉시 정신을 차리고 슬퍼하며 앞으로 바르게 살겠다고 서약하지만, 그 시간이 조금 지나면 슬픔도, 우리의 선한 의도도 잊어버린다. – 그러나 하나님의 성도들은 그렇게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평생 죽음을 생각하며, 매일 죽고, 매일 세상에 못 박히며, 매일 자신의 뜻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곳에서 복되고 끝이 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 열 처녀의 본보기가 두렵지 않으십니까? – “신랑이 오시니 나가서 맞이하라.” 지혜로운 이들은 그분을 맞이하여 “그분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갔다.” 그러나 어리석은 이들은 선한 행실이 부족하여 늦었고, “ “주여, 주여, 우리에게 문을 열어 주소서”라고 외쳤을 때, “아멘,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밖에 남겨졌습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날과 그 시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니라”고 덧붙이셨습니다(마태복음 25,6.10–13).

5. 그러므로 깨어 있어야 하며, 잠든 영혼을 깨우고, 정신을 차리며, 회개하고, 자신을 흠 없고 깨끗하게 지키며, 빛 가운데 행해야 한다. 그래야 갑작스럽게 죽음이 우리를 덮치지 않고, 자비의 문이 우리 앞에서 닫히지 않을 것이니, 그때는 열어 줄 자도, 도와줄 자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서둘러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일을 준비합시다. 게으른 자여, 일하러 일어나라; 순종하지 않는 자여, 순종하기 시작하라; 교만한 자여, 겸손해져라; 무정한 자여, 마음을 누그러뜨려라; 회개하지 않는 자여, 통회하라; 고백하지 않는 자여, 고백하기 시작하라; 게으른 자여, 수고하기 시작하라; 모두, 모두 바로잡으라 – 그리고 선한 일을 위해 힘쓰라. 한 가지 더 덧붙이겠노라: 여자를 좋아하는 자여, 절제하라. 여자들과 자주 어울리지 말고, 그들과 오래 지내지 말라. 이는 그로 인해 죄의 불이 타오르기 때문이니, 성경에 기록된 대로 “누가 불을 품에 묶어 두면, 옷이 타지 않겠느냐? 혹은 누가 불타는 숯불 위를 걸으면, 발이 타지 않겠느냐? 이와 같이 남의 아내에게 들어가는 자도 그러하니라” (잠언 6:27–29). 그러나 처녀라도 수도 생활에 들어갔거나 수도 서원을 한 자라면, 그 역시 남의 아내와 다름없으니, 그들의 신랑은 영광의 주님이시다. – 나는 여기저기로 흩어져 제멋대로 살며, 자신의 죄에 대해 변명을 지어내고, 주님께서 유혹하는 눈조차 뽑아내라고 명하셨다는 사실(마태복음 5,29)을 잊고 있는 이들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이다. – 여러분에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약한 자들의 약함을 짊어져야 합니다”(롬 15:1), 그리고 미성숙한 이들에게 선행의 본보기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미 그리스도의 은혜로 그러하십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그러하십시오. 그리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으실 것입니다.

 

332. 수도 생활의 목적과 활동이 다른 모든 신분과 직분보다 높으며, – 비록 고통스러운 점이 있더라도 모든 사람을 자신에게로 이끌어 온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 수도 생활을 허락받은 자들은 기뻐하고 주님께 감사하며, 진정한 수도사가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을 권면한다

332. 1) 수도 생활의 목적과 활동이 다른 모든 신분과 지위보다 높으며, 2) 비록 괴로움이 따르더라도 모든 사람을 그쪽으로 끌어당긴다는 점을 지적하며, 3) 이를 허락하신 주님께 기뻐하며 감사하고, 진정한 수도사가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을 권고한다. [4, 131]

6. “선한 몫을 택”하게 해 주시고, 마치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는” (누가복음 10, 39) 것처럼 해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다른 이들은 아내와 자녀, 재물과 돈 등 여러 가지 일에 신경 쓰며 떠들지만, 우리에게는 오직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만이 유일한 관심사이다. 어떤 이들은 세상의 카이사르와 카이사르의 명령에 맞서 싸우며, 심지어 피를 흘릴 지경에 이르기까지 온갖 방법으로 굴복하도록 강요받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자발적인 투쟁이 있으며, 그 안에서 우리는 끝없는 천국을 얻으리라는 소망을 품고, 온 만물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계명을 온전한 자유로이 이행합니다. 어떤 이들은 하찮고 덧없는 이득을 얻기 위해 길고 힘든 여정을 떠납니다. 그러나 우리 앞에는 낮이나 밤이나 오직 하나님의 성전으로만 달려가, 그곳에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며, 이를 통해 썩어 없어질 금이 아니라, 도둑맞지 않고 영원한 영적 보화를 얻어야 할 임무가 놓여 있습니다.

7. 비록 우리가 때때로 외적인 처지나 내적인 상태 때문에 슬프고 괴로운 일을 마주치기도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의 소망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면, 슬픔 속에서도 기뻐하고 곤란 속에서도 답답함을 느끼지 않는 우리에게는 기꺼이 견딜 수 있는 일이다. 우리의 삶은 바로 그 슬픔들로 인해 분별 있는 자들을 매료시키는 법이다. – 누가 부모를 사랑하지 않고 그들에게 호감을 갖지 않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그들을 떠나, 인류의 아들들이 이곳으로 몰려온다. 주님의 말씀대로 두 사람이 한 몸이 되는 결혼보다 더 긴밀한 유대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복음의 칼은 그런 자들마저 베어내어 이곳으로 보내옵니다. 이곳에서 통치자는 자신의 권세를 내려놓고, 지혜로운 부자는 부를 잊으며, 가난한 자는 자신의 가난을 잊고, 고아는 더 이상 고아가 아니게 됩니다. 덧붙이자면, 왕은 왕의 옷을 벗고 다른 이들과 동등하게 여겨집니다. 이는 우리의 형제애가 그리스도의 동등한 몸이기 때문이며, 우리의 거처는 모두에게 똑같이 구원을 주는 공동의 피난처이기 때문이다. –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다르며, 세속적이지 않다. 그러니 죽음이 닥쳤을 때, 이곳에서는 생명을 사랑하는 자들처럼 울부짖거나 통곡하는 일이 없으며, 고인의 장례는 고요함 속에서 치러진다: 여기서는 아내도 통곡하지 않고, 자녀들도 울부짖지 않으며, 친척들도 이것저것을 떠올리며 애가를 부르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떠남은 기쁨으로, 장례는 선한 소망으로 이루어진다; 비록 떠난 이에 대한 영적인 사랑으로 눈물이 흐르기도 하지만, 여기에는 부적절한 점이 전혀 없다. 주님께서도 우리 본성의 특성상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울으셨기 때문이다(요한복음 11:35). 예로부터 이보다 더 복된 삶이 또 있었는가? – 사람들을 하나님께 더 가까이 이끄는 다른 삶의 방식이 또 있었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다윗처럼 제때에 이렇게 외쳐야 한다. “여기서 주님께서 복과 영원한 생명을 명하셨도다”(시 132:3).

8. 그러니 우리가 기뻐하고 서로를 위해 기뻐하며, 끊임없이 감사하고 또 감사하며, 전능하신 우리 하나님을 무한히 사랑합시다. 그분께서 우리를 어둠에서 빛으로, 비천함에서 영광으로, 무명에서 명성으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각자는 자신이 누구에게서 태어났는지, 어디에서 이곳으로 향했는지, 그 후 누구와 교제를 나누게 되었는지, 누구를 형제라 부르며 누구와 함께 살고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특권들은 장차 주어질 약속들의 서막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앞에 놓인 사명을 선하게 완수하고,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질서와 규례에 따라 온갖 수고를 견디며 순종의 열매를 맺기 위해 힘쓰면, 결국 눈으로 보지 못했고, 귀로 듣지 못했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르지 않았던, 하나님께서 그분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예비하신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 9). 우리 모두가 이를 얻기를 바랍니다.

 

333. 죽음을 자주 묵상하는 이들은 죽음에 대한 기억을 굳건히 하며, 죽음과 그와 관련된 것들에 대한 기억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심어줍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마음속의 정욕을 정화합니다

333. 1) 죽음을 자주 묵상하는 자들은 죽음에 대한 기억을 굳건히 하며, 죽음과 그와 관련된 것들에 대한 기억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심어주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마음속의 정욕을 정화한다. – 2) 이 길을 따라 무정(無情)의 복된 경지에 이르자. [4, 132]

9. 사망 소식이 잦아지고 있는데, 현재 멀리서나 가까이서나 들려오는 소식이 많으며, 특히 우리의 영적 형제들과 아버지들의 죽음에 관한 소식이 그렇습니다. 다른 분들 외에도 그레고리 형제가 우리를 떠났는데, 그의 삶은 칭송받을 만하고, 죽음을 맞이한 방식도 복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유배 중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 그렇다면? – 물론 우리도,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노인과 젊은이까지 모두 이곳을 떠나야 할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속죄는 모두에게 똑같으며, 어떤 이는 먼저, 어떤 이는 나중에 이 생을 떠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죽음과, 영혼이 육신을 떠난 후 마주하게 될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빛의 무기를 갖추지 않고서는 어떻게 천사들의 면전에 설 수 있겠습니까? – 영생의 지침을 지니지 않고서는 어떻게 그 길을 갈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이 세상의 왕이 오나니, 내게는 그에게서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요한복음 14:30)고 말씀하신 이 세상의 왕을, 어떻게 피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죄를 낳는 정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면 말입니다. “그 종은 복이 있도다”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니, “그 주인이 와서 그를 그렇게 일하는 것을 발견할 때이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를 모든 재산을 다스리는 자로 삼으리라.” 이것이야말로 감동을 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악한 종이 마음속으로 ‘내 주인이 오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겠다’고 생각하며, 자기의 소를 때리기 시작하고, 술꾼들과 함께 먹고 마시기 시작하면, 그 종의 주인이 그가 예상치 못한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와서 그의 몫을 찢어 버리고, 그를 불신자들과 함께 두리니, 거기서 울음과 이를 갈음이 있으리라” (마태복음 24,46–51). 과연 이 비유가 우리를 두렵게 하지 않는가? 과연 이 위협이 우리의 육신을 지치게 하지 않는가? 이는 우화도 아니고 헛된 말도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말은 그때 일어날 일을 정확히 표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곳의 울음은 이 세상의 울음과 같지 않고, 그곳의 이를 갈음은 이 세상의 이를 갈음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둘 사이에는 꿈과 현실 사이의 차이만큼이나 큰 차이가 있다. 게다가 저곳의 불은 꺼지지 않으나 이곳의 불은 꺼지고, 저곳의 벌레는 죽지 않으나 이곳의 벌레는 죽는다. 그러나 누가 이것을 생각하고 숙고하는가? 누가 이를 보고 듣는가? 영혼이 굳어지고 마음이 정욕에 사로잡혀, 보면서도 보지 못하고 듣면서도 듣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누가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눈물을 가지고, 매일 그곳과 이곳에서 닥치는 더러움으로부터 자신을 정화하며, 이 정화를 내일로 미루지 않는가? “오늘의 악은 오늘로 족하니라” (마태복음 6:34)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을 품고, 이 세상의 온갖 집착을 떨쳐내어, 다윗과 함께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나이다.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나이다” (시 62:9). 오, 복된 무정욕이여! 형제들아, 우리가 바로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마음을 다잡을 것을 요구하십니다! 우리가 영으로 불타오르며, 믿음의 갑옷을 입고, 소망으로 날개를 달고, 떠날 준비가 완전히 되어 있기를 바랍니다.

10. 그러므로 나는 매일 죽는 자들처럼 간청하고 기도하노니, 우리가 가진 모든 힘을 다해 마땅히 해야 할 모든 일에 스스로를 다그치자. 덕은 본질상 고된 것이지만, 그로 인해 슬픔을 낳는 반면, 자기 만족의 죄는 지옥으로 떨어뜨린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부서진 마음과 겸손한 묵상이 낳는 정화의 눈물을 흘리자. 무욕의 삶으로 거룩한 천사들을 우리의 친구로 삼아, 그들도 마지막 순간에 우호적으로 우리를 주님께로 올려 보내게 하자. –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마치 선한 일을 이미 행한 자로서가 아니라, 여러분과 함께 그것을 행하고자 하는 자로서, 침묵하지 않고 말해야 할 자로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여러분을 사랑하는 자로서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선한 일을 행함으로써 영생의 상속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334. 마음을 드러내지 않게 된 것을 책망함

334. 1) 마음을 털어놓는 것을 그만둔 것을 책망한다. – 2) 그 후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무서운 형벌의 사례들을 들어, 고백하도록 독려한다. [4, 133]

11. 나는 요즘 여러분 때문에 참을 수 없는 슬픔에 잠겨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삶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구원을 주는 일인 평소의 고백이 여러분에게서 멈춰버렸기 때문입니다. – 만일 여러분이 더 나아지고 온전해졌음을 보았다면, 일에서 해방된 것처럼 기뻐했을 것입니다. 타인의 병을 치료하는 데는 적지 않은 수고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그와 정반대의 모습을 보니, 그 원인이 무엇인지 짐작이 갑니다. 말해보십시오, 여러분의 건방진 태도와 그로 인해 생겨나는 혼란은 어디서 비롯된 것입니까? 고해성사를 하지 않고, 오히려 해로운 생각들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왜냐하면 우리 죄의 시작이자 뿌리는 부적절한 생각인데, 이것이 드러나면 하나님의 자비로 쫓겨나지만, 숨겨지면 조금씩 어둠의 행위로 변해 가기 때문이다. 여기서 영적 죽음이 비롯되고, 여기서 서로 간의 분열이 생기며, 여기서 무지와 오해에서 비롯된 자기합리화의 말들이 나온다.

12. 그러나, 오 사람아! 이성을 갖지 못한 동물들조차도,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이, 어떤 음식이 자신들에게 해로운지 스스로 알고 그것을 피한다. 하물며 세례를 통해 선에 관한 온갖 지식을 얻은 사람이라면, 더욱더 이를 기대해야 하지 않겠는가?! –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들어보지 못했단 말인가? 하나님께서는 “첫 세대를 용서하지 않으시고, 의의 전파자 노아를 구원하시며, 불경건한 자들에게 대홍수를 내리셨다”(베드로후서 2:5)고 하셨다. 주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의 도시들을 불태워 멸망시키시고, 불경건하게 행하려는 자들에게 본보기를 보이셨다”는 말씀(베드로후서 2:6)을 읽지 않았습니까? 사도가 자주 외치는 이 말을 듣지 못했습니까? “자기를 속이지 마십시오.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자나 간음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남색하는 자나 남자와 동침하는 여자나 강도나 도둑이나 술 취하는 자나 비방하는 자나 탐욕스러운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9-10). 그런데 너는 이 말을 듣고도 무엇이 악한지 모른다고 말하느냐? – 이는 위선이며 회피하는 태도다. – 그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느냐? 온 피조물이 떨고 있는 그분을 두려워하지 않느냐? – 그러니 누구도 고백하는 것을 회피하지 말라!

 

335. 형제들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그들도 자신을 사랑한다고 확신하며, 그러한 유대 관계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리자고 권하며, 때로 그들을 엄하게 책망해야 할 때 인내하라고 권한다

335. 1) 형제들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그들도 자신을 사랑한다고 확신하며, 그러한 연합을 위해 하나님께 감사드리자고 권면하고, 자신이 그들을 엄하게 책망해야 할 때 인내하라고 한다. – 2) 그 후, 구원을 이루는 과정에서 수고와 슬픔을 기꺼이 감내하도록 설득한다. 왜냐하면 달리 할 수 없기 때문이며, 게다가 이와 연결된 위대한 약속들 때문에, 이는 성도들에게 본래 있는 기쁨을 크게 해치지 않을 것이다. – 3)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의 길을 충실히 따르자. 그리고 혹시 넘어지게 되더라도 서둘러 일어나자. [4, 134]

13. 신성한 성경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를 내가 사랑하며, 나를 찾는 자는 은혜를 얻으리라”(잠언 8, 17). 또 다른 곳에서는 사랑의 표징을 지적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을 부지런히 훈계하리라”(잠언 13, 25). 제가 겸손한 마음으로 여러분을 돌보도록 임명되었으므로, 앞서 한 훈계에서 부득이하게 여러분을 책망하고 꾸짖었으나, 여러분이 기분 나쁘게 여기지 않도록 사도의 말씀으로 감히 여러분에게 말하노니, “오직 제가 여러분에게 풍성히 품고 있는 사랑을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고린도후서 2:4), 여러분이 슬퍼할 때 함께 슬퍼하고, 기뻐할 때 함께 기뻐합니다. 내가 또 누구를 바라보겠습니까? 여러분 외에 누구를 위해 슬퍼하고 기뻐하겠습니까? 여러분은 나의 형제요, 자녀요, 아버지요, 친구요, 친족요, 사랑하는 이들이요, 그리워하는 이들이요, 기쁨이요, 면류관이요, 그리고 나와 여러분 사이의 진실한 교제를 표현할 수 있는 그 밖의 모든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도 저에게 있어 이와 같다는 확신을 증언합니다. 여러분은 부모에게도, 형제에게도, 친족에게도, 조국에게도, 그 밖의 어떤 보이는 것에도 매여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그리고 하나님을 통해 저의 겸손에만 매여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이렇게 하나로 묶어 주신 성령 안의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서로 사랑하고 사랑받는 자가 되어 “한 몸과 한 영”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는 “우리의 소명에 따라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엡 4:4). 그러므로 기뻐하며 서로를 위해 기뻐합시다. 때때로 여러분에게 책망하는 말을 하게 되더라도, 서로 멀어지지 말고, 사랑과 공동의 유익을 위해 그 징계를 인내로이 견뎌 냅시다. 기록된 바와 같이 “아들아, 주님의 징계를 경홀히 여기지 말며, 그분께 책망받을 때 낙심하지 말라.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며, 받아들이시는 모든 아들을 채찍질하시기 때문이다”(잠언 3:11, 12). 사도도 이에 덧붙여 말합니다. “너희가 징계를 참으면, 너희는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징계를 받지 않는다면, 너희는 모두 간음하는 자들이요, 아들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12:7, 8).

14. 게다가, 부와 권력, 그리고 사람들이 갈망하는 그 밖의 것들은 공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큰 수고와 땀을 요구한다. 하물며 하느님과 신성한 보상을 얻는 일이 쉽고 편한 일일 뿐, 헤아릴 수 없는 수고와 땀이 따르지 않는다고 가정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러한 가정은 지극한 단순함과 안일함의 증거가 되지 않겠는가? – 왜 우리는 “많은 고난을 겪어야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사도행전 14,22)는 말과, “영생으로 이끄는 길은 좁고 괴롭다”(마태복음 7,14)는 말을 듣게 되는가.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 그것은 우리 스스로가 태초에 에덴 동산에서 주어진 근심 없는 삶과 헤아릴 수 없는 기쁨 속에 머물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오히려 무분별함으로 인해 현재의 욕망과 슬픔이 가득한 삶으로 떨어지는 것을 더 선호했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슬픔의 학교를 거친 후에야 비로소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분은 앞에 놓인 기쁨을 위해 십자가를 참으시고, 수치를 아랑곳하지 않으셨다”(히브리서 12:2).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겪는 고난은 영원한 복에 대한 소망으로 인해 우리에게 덜 무겁게 느껴지므로, 대개 그리 슬프지 않은 법이다. 그렇기에 성도들에게 현재 이 시간은 축제라고 불린다. 성 다윗은 “의인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시 32:1)라고 말하며, 변함없는 기쁨을 가리킴으로써 이를 증언합니다. 또한 복된 사도도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라고 확증합니다. 이 말씀은 슬퍼하고 울며, 수고하며 투쟁 속에 머물고, 여러 가지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경건한 이들에게 있어 하나님을 향한 슬픔은 기쁨의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15. 그러니 우리도 매일 매일을 축제처럼 보내며, 하나님을 위하여 슬픔을 기꺼이 견디고, 마귀의 계략과 공격에 흔들리지 맙시다. 만일 우연히 잠깐 정신을 잃고 부적절한 것에 휩쓸리게 된다면,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으로,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이전의 선한 마음가짐으로 돌아가며, 다시 따뜻한 열정으로 주님을 위해 일하기 시작합시다. 싸우고 맞서 싸우는 전사만이 왕들로부터 영예를 얻는 것이지, 전장에서 도망치는 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도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보이지 않는 전쟁에 머물며, 하나님의 자비로 영원한 상을 받게 되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천국을 얻게 될 것입니다.


[1] 그 전까지는 차양 아래나 현관에서 일했는데, 이곳을 때로는 ‘외부 수도실’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2] 성 사바 수도원에서는 아침 기도 한 시간 전에 종을 치면, 모든 이들이 각자의 방에서 예수 기도와 함께 정해진 대로 허리 굽혀 절 1,500번과 땅에 엎드려 절 150번을 올립니다.

[3] 즉, 누군가가 모든 은둔자들을 모아 교회 앞에서 대접해 주곤 했다는 뜻이다.

[4] 이는 독방이 아니라 공동 식사 자리에서 이루어집니다. 포도주는 대개 집에서 만든 것으로, 알코올 도수가 낮은 편입니다.

[5] 이를 통해 옷이 요구하는 대로 살아가도록 마음이 이끕니다.

[6] 은둔자들은 사막 곳곳에 흩어져 살았으며, 그들이 차지한 공간 한가운데에는 공동 기도를 위해 모이는 교회가 있었다. 교회는 한 명 또는 여러 명의 선택된 이에게 맡겨졌다. 마카리오스 대성인은 한 번은 성 안토니우스를 방문하고 스키트로 돌아와, 형제들이 위대한 아바께서 무엇을 명하셨는지 묻자, “우리에게 제사, 즉 성찬식이 없다는 것은 좋지 않다”고 말했다. 그제야 그들은 서둘러 교회를 마련했다. 이것이 바로 성 안토니우스가 은둔자들의 삶을 어떻게 꾸려나갔는지를 보여주는 본보기이다.

[7] 은둔자들은 각자 서로 떨어져 살았지만, 흩어져 있는 그들의 공동체는 하나의 통합된 체계를 이루고 있었으며, 예를 들어 두 마카리우스와 암몬처럼 스키트와 수도실, 니트리아에서 한 명의 수장을 두고 있었다.

[8] 또 다른 이에게는: 집안에 죽은 자가 있는 사람이 우는 것과 같다.

[9] 확실히, 격언이나 규칙 전반에 대해서는... 언급된 책은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10] 우리의 『프롤로그』 2월 편 – 27일 항목에 실려 있다.

[11] Patr. Lat. t. CIII

[12] Eis ten parafysin – 초자연적 상태로.

[13] Ten ten hatafysin

[14] Balien eis stoma – 동방에서 지금까지 이어져 온 관습: 식탁에서 음식 한 조각을 집어 다른 사람의 입에 넣어주는 것으로, 특별한 호의를 나타내는 표시입니다.

[15] 파이시우스의 저서에서: “~의 이름으로.”

[16] 혹은 이렇게: 손수 만든 작품을 완성했을 때, 소홀히 하지 말고 그것이 헛되이 사라지지 않도록 잘 보살펴라 – 등등.

[17] 그리스어 “peri syneideseos” – 내용상 “peri synodeyseos”로 읽어야 할 것 같다. 라틴어 원문은 정확히 “Quid in itinere observandum est”라는 제목으로 읽혔다. 그러나 끝부분에 양심에 대한 내용도 있기 때문에 이 부분이 추가된 것이다.

[18] Ekkoptomen. 파이시우스의 글에서: 바로 그 부분에서 우리는 걸려 넘어진다.

[19] ktatai ehthran. – 성 이사야에게서 “ehthra”는 원수의 세력, 즉 악마 무리를 의미한다. 이를 얻는다는 것은 – 모은다, – 끌어당긴다는 뜻이다.

[20] 밀어내지 않는다 – 어쩌면 하나님의 자비의 문으로, 기도로부터 열매가 맺히도록 하기 위함일 것이다.

[21] Melotarion – 밀로트 – 수도복(허리띠)으로, 성 파코미우스의 규칙에 따르면 염소 가죽으로 만들어진다.

[22] 말의 맥락상, ‘원하는, 의도하는, 착수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파이시우스의 글에서는 ‘원하지 않는’ 것으로도 나옵니다.

[23] 이 말씀에 묘사된 바를 주 예수님을 세례 주신 요한이 받아들입니다. 왜냐하면 세례를 받는 자는 (세례를 베푸는 이에게)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고백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24] 다소 모호한 문장이다. 라틴어 본문은 이 부분을 생략했다. 파이시우스는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그와 함께 자비를 베푸는 자들에게는 자비가 있다. 슬픔으로 인해 그들의 취향을 알 수 없으니, 온갖 방식으로 죄를 짓는다.”

[25] 파이시의 번역: “너희 마음속에.”

[26] Fages – 그리스어에 따름; 그러나 문맥상 “fyges”가 필요하다. 라틴어 번역본은 생략했고, 파이시우스의 번역에는 “참지 못하면”이라고 되어 있다.

[27] 파이시의 본문에는 법에 대조되는 여백에 “두려움”이라고 적혀 있는데, 이는 다음 문장의 내용에 부합한다.

[28] 파이시우스의 본문에는 여기 “자신을 돌보지 않는 자는 울며 비탄에 빠지게 된다”라고 되어 있다. 그리스어 필사본에는 이 내용이 없다. 라틴어 본문에는 “자신의 정욕을 미워하는 자는 울음과 눈물 속에 머문다”라고 되어 있다.

[29] 파이시우스의 본문에는 “공중의”라고 되어 있다.

[30] 파이시우스의 본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두 가지 사물이 영혼을 차지하고 있다” – 두 가지 대상이 영혼을 차지하거나, 두 가지 근심이 있다는 뜻이다.

[31] 이 부분은 파이시우스의 본문에 따라 수정되었다.

[32] Patr. Lat. t. CIII, p. 427, 434.

[33] 『도스토프 스카자니야』에 수록된 내용에 대한 보충 자료로 인용된다.

[34] 성 다마스쿠스가 인용함. Patr. graec., t. 40, p. 1212.

[35] 여기는 『알파베트 파테리카』에서 인용한 것이다.

[36] 『도브로톨. 그리스』, 33쪽에서 인용.

[37] Patr. graec., t. 40, 다음 문구 뒤.

[38] ‘슬라네’는 ‘서리’를 뜻한다. 서리에 노출된 가죽은 수축하여 딱딱하고 단단해진다.

[39] 물론 인간의 선행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말합니다.

[40] 동방의 기둥은 돌무더기가 아니라, 악한 사람들로부터 안전을 지키기 위한 높은 주거용 건물입니다.

[41] ‘모놀로기스토스(Monologistos)’는 ‘한 마디’라는 뜻이며, 한마디로 말해 ‘단호한’ 사람입니다. 많은 장로들은 의문이 생길 때 기도하고 해답을 얻곤 했습니다.

[42] 물론 이는 자기 희생적인 결단력을 의미한다.

[43] 스스로 헛되이 괴로워하든, 영적 아버지에게 꾸지람을 듣든, 마음은 오직 상처만 입을 뿐이다. 때리면 아프기만 할 뿐, 아무 소용이 없다. 마치 환자에게 잘못된 약을 주는 것과 같다.

[44] 용액은 물과 포도주 등 서로 다른 원소들이 섞인 것이다. 앞서 말한 세 가지 미덕은 항상 서로 어우러져야 한다. 자기애는 그 결합을 깨뜨린다.

[45] 그때서야 무심코 잘못을 저질렀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46] 자비롭지 못한 마음이 아니라, 아예 돌처럼 굳어져 무감각으로 고통받는 마음이다. 여기서는 성 베드로 앞에서 닫혀 있던 문이 열린 사건이 영적으로 해석된다. 악한 고통은 외적인 결핍으로 인해 스스로를 원망하는 것이며, 통회는 참으로 가슴을 찢는 진리의 인식으로 마음을 닦아내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마음의 돌을 치워낸다.

[47] 여기서는 ‘예기치 못한 기쁨’이라 불리는 것과 같은 어떤 실제 사건을 의미한다.

[48] 미그네(Migne) 판본의 사브(Savv.) 필사본에 수록된 71장은 다음과 같다: 목적과 질서 없이 무분별하게 수고하는 자는 모든 면에서 가난하지만, 희망을 품고 나아가는 자는 두 배로 부유하다.

[49] 어쩌면 이 두 사람 중 이를 이해하는 자가 더 뛰어나다는 생각뿐일지도 모른다.

[50] 파벨 프레프로스티.

[51] 그리스어 문구가 간결하기 때문에 의역한 것이다.

[52] 이는 ‘생각을 받아들여야 할까?’라는 질문에 대한 장로의 말씀과 비슷하다. “받아들이라”고 그는 말했고, “그다음에 싸우고 쫓아내라”고 했다.

[53] 물론, 이것은 속담이지만 그 속의 사상이 엿보인다. 라틴어 의역: pravarum enim rerum avditor, pravus evadit nuntius. 나쁜 일의 청취자는 나쁜 사람이 되며, 전령 또한 나쁘다.

[54] 이에 대립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행위의 원천이 되는 마음의 태도이다.

[55] 그리스어 표현이 그 의미를 잘 보여준다: 마치 거울 속의 자신의 단정한 차림을 넋을 잃고 바라보는 것처럼.

[56] 당나귀는 채찍으로 몰아가지 않고, 막대기에 꽂은 송곳으로 허벅지를 찌른다.

[57] 카시안은 그들의 소매가 팔꿈치까지만 내려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58] 이 장은 성 요한 클리마코스, 『사다리』 14권 12장에서 인용하고 있다.

[59] 슬픔을 이겨내면서도,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살면서 우리의 짜증과 분노를 무디게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60] 어쩌면 모든 악마들이 쫓겨나고 패배당한 후, 패배한 자들의 시체 위에 서게 되는 등일지도 모릅니다.

[61] 『도스트. 스카즈』에 따르면: 우리는 하느님에 대한 기억을 잃게 된다.

[62] 팔라디우스에 따르면 – 에바그리우스 본인이다. 그러나 에우가리우스는 여기서 자신의 말이 아니라 옛 장로들의 격언을 인용하고 있다.

[63] ‘주고 받기’는 세상의 모든 거래와 타인과의 모든 관계를 표현하는 문구이다. 베풂과 받음은 타인과의 교류와 거래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다.

[64] 이 글은 닐 성자의 저술에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장들 사이에 에바그리우스의 다른 글들에 나오는 장들과 단어 하나하나가 똑같은 장들이 있는 것을 보면, 이 글 역시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실수로 닐의 저술에 포함된 것이라고 믿을 수 있다. 『도브로톨리비예』의 편집자들은 이 글을 분명히 에바그리우스의 전집에서 발췌한 것으로 보인다.

[65] 『기억할 만한 이야기들』, 『성 이그나티우스의 선집』, 『알파벳 순 파테리콘』에서 발췌.

[66] 학자 에바그리우스에게 이는 결코 작은 업적이 아니었다.

[67] 비유에서: 모든 것을 가진 자는 마귀이다.

[68] 성 니코디모스 스비아토고르츠가 편찬한 그리스어판 『도브로톨루비예』와 성 파이시(벨리치코프스키)의 슬라브어 번역본에서 각 장의 저자가 “이시히오스 사제”로 명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 테오판 은둔자는 러시아어판 『자비에 대한 책』을 편찬할 때 이를 실수로 다른 저자인 성 이시히오 예루살렘에게 귀속시켰다. 실제로 이 글은 이구멘 이시히오 시나이투스의 작품이다.

[69] 성 니일 시나이.

[70] 절제, 용기, 지혜, 진리.

[71] 『도브로톨루비예』의 그리스어 및 슬라브어판: “계명의 이행”.

[72] 슬라브어판: “아무것도 사이에 두지 말라” – 이 표현이 더 나을 수도 있다.

[73] 여기서부터 성 니로스의 다른 저술에서 발췌한 “기도에 관하여”라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74] 이 장과 다음 장은 유크히트파를 비판하는 내용이다.

[75] 이로써 그리스 정교회 교부들의 권면 장들이 끝난다. 모스크바 아카데미 번역본은 참고한 필사본에서 다음 장들을 추가로 수록하고 있다.

[76] 안키르의 디아코네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 Migne, 제2권, 97쪽.

[77] 옵틴 번역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추가되어 있습니다. “물질적 요소가 뿌리 뽑히고 영혼이 정화됨에 따라, 사람이 물질적인 삶과 나태함으로 인해 스스로 다시 그 정욕들을 불러들이지 않는 한, 정욕들도 사라지게 된다.”

[78] 이러한 목차는 그리스어 원본에는 없다. 라틴어 번역가가 지어낸 것이다. 이 목차들이 성 디아도코스의 지극히 지혜로운 가르침을 이해하고 기억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여겨, 우리는 그로부터 이를 차용한다(Patrologia Graeca, Migne, t. 65).

[79] 세케라그에서 출발한 전군은 600명이었습니다. 그중 200명은 바소로바 개울에 이르러 더 이상 나아갈 힘이 없었습니다. 다윗은 그들에게 그곳에서 물품을 지키라고 지시하고, 400명과 함께 더 나아갔습니다. – 그들이 보여준 열의는 말할 필요도 없이 대단했습니다.

[80] 동방에는 화상으로 치료하는 관습이 있다.

[81] 이 전기는 수도사 미하일이 저술한 것이다. Patrologiae Graecae Migne 제99권을 참조하라. 여기에는 발췌문이 실려 있다.

[82] 목차 위의 숫자는 발췌된 교훈의 번호를 나타내며, 목차 뒤에 [ ] 괄호 안에 있는 숫자는 첫 번째는 권을, 두 번째는 해당 권의 교훈을 나타냅니다. – 목차의 각 항목은 그 뒤에 나오는 절과 대응되며, 각 항목마다 별도의 절이 있습니다.

[83] 테오도시우스 대성인의 행전 1월 11일 및 사순절 일요일 캐논 제2곡을 참조하십시오.

[84] 제5부. 3절, 수행에 관하여, 82쪽.

[85] 『성인 전』 1846년, 272쪽.

[86] 성 사바의 제자이자 스승. 시르나 주일 예배.

[87] 이집트의 성자, 6세기. 유순절 토요일.

[88] 이집트 성자, 12월 5일.

[89] 성자 팔레스타인, 유제품 금식 토요일.

[90] 아마도 테오도르와 테오판의 아버지, 9월 22일.

[91] 위대한 안토니우스의 제자. 유제품 금식 토요일.

[92] 니트라의 성자. 토요일, 유제품 금식일.

[93] 이집트 3월 5일.

[94] 10월 4일.

[95] 이 가르침은 그의 기념일에 해당한다.

[96] 세 번째 권의 가르침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으며, 각 부분마다 가르침의 수가 따로 매겨져 있습니다. 인용문에서 31은 앞부분을, 32는 뒷부분을 의미합니다. 그 뒤에 나오는 숫자는 해당 가르침의 번호를 나타냅니다.)